친 구
(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친구를 주심은 (잠27:17) (2004. 4. 25 주일오후) 1
2. 흐르는 강물처럼 살자 (잠19:6) (2004. 5. 2 주일오후) 12
3. 친구와 함께 하나님을 알아감 (잠27:9) (2004. 5. 9 주일오후) 23
4. 재물로 더해지는 친구 (잠19:4) (2004. 5. 23 주일오후) 33
5. 친구없이 사람의 완성은 없다 (잠17:17上) (2004. 5. 30 주일오후) 43
6. 자기 사랑과 온전한 사랑 (잠17:9上) (2004. 6. 6 주일오후) 53
7. 친구의 영혼을 사랑함 (잠27:6) (2004. 6. 13 주일오후) 65
8. 친구를 떠나게 하실 때 (시88:18) (2004. 6. 20 주일오후) 71
9. 인내 없이 친구는 없다 (잠27:10上) (2004. 6. 27 주일오후) 76
10. 친구가 배신할 때 (욥16:20) (2004. 7. 4 주일오후) 88
11. 은혜 받은 친구의 도리 (아5:1) (2004. 7. 11 주일오후) 96
1. 친구를 주심은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27:17)
한 1-2년 되었나요 친구라는 영화가 나와서 1150만 명이라든가 영화를 봐서 그래서 저도 할 수 없이 가서 봤는데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친구가 뭘 그렇게 사람을 죽이는지, 그리고 그 친구가 친구의 손에 의해서 죽는 게 영화의 끝입니다. 그러고 나서 거기서 친구를 정의하기를 오래 살아온 벗, 그것을 가리켜서 친구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히브리말에서는 이 “친구”라고 하는 말과 그리고 “목자”라는 말이 어근이 같습니다. 거기다 또 글자 하나만 바꾸면 “악함”이 됩니다. 우리 “님” 그러면 이렇게 사랑하고 그리는 사입니다. 점 하나 딱 찍으면 “남”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춤을 가리키는 어떤 강사가 신문에 인터뷰를 했는데 그랬습니다. 님 하고 추어야 할 추어야 할 춤을 남하고 추니까 문제가 된다고 했습니다. 점 하나에 왔다 갔다 하듯이 히브리어에서도 이렇게 친구라는 단어가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친구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사실 이 시리즈를 오래전부터 설교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급히 해야 할 시리즈들이 많아서 밀리다, 밀리다 2004년까지 오게 되었는데 친구가 소리치더군요. 더 이상 미루지 말라고 그래서 이제 하기로 했습니다. 지금 계획에는 그저 한 7명의 친구들을 사귀다가 끝을 낼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일곱 번째 했으면 좋겠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든 시리즈가 그러하듯이 가봐야 압니다. 조금 주시면 조금하고 끝내고 많이 주시면 많이 해보고 끝내고 싶습니다.
왜 이렇게 친구라는 주제를 가지고 오늘 설교할 수밖에 없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사람의 친구를 사귀고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고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이 모두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세월이 좀 많이 흐르기는 했습니다만 한 10년 전에 어느 잡지를 봤더니 거기에 처녀들에게 자기의 미래의 결혼상대에 관해서 설명하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다 세상 사람들이 답하는 것이니까 뭐 그저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학벌, 수입, 가문 그런 상식적인 순서대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을 배우자로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 대다수의 많은 여성들이 15% 정도의 비율을 할애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 사람의 친구 관계였습니다. 1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까 지금은 또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때 저는 아주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 이게 친구를 보고 그 사람을 일생을 같이 살 사람인가 아닌가를 평가한다는 것을 100분율 가운데 15%나 준다고 하니까 참 아직까지는 생각이 있는 여성들이 이 땅에 많이 살아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더라도 친구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친구를 꼴 같지 않은 친구를 사귀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사실 망치게 됩니다. 그래서 친구를 사귈 때는 정말 친구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을 친구로 사귀어야 합니다. 이렇게 설교를 하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의 마음 가운데 은근한 반감이 솟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미성숙한 사람도 있고, 그야 꼴 같지 않은 사람도 많이 교인으로 등록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교인들이 전부다 다 자기보다 나은 사람과 친구로만 하려고 하고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사람만 친구를 사귀겠다고 그러면 마지막에 찌꺼기같이 터지는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사실 그런 사람의 은밀한 반감을 내가 아주 노골적으로 해소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 간단한 언급으로서 그런 어리석은 모두 접고 그리고 마음을 열고 이 시리즈로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무슨 뜻인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교회 밖에서 변화되고 나서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랬더라면 밖에서 놀면 되지 교회 안에는 왜 들어옵니까? 교회 안에는 많은 주님을 만나고 깨트려져서 정말 뛰어날 정도로 온전한 모습을 갖춘 성도다운 성도로부터 시작을 해서 그 성도들에게 항시 괴로움을 주는 성도답지 않은 성도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사람들이 다 교회에 속해있고 심지어 교회에 아직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한 지체가 되지 않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교회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성경은 너희 교회 안에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지 족집게처럼 뽑아내서 밖으로 집어던져라. 그렇게 얘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들을 마치 구원받고 한 형제가 된 사람인 것처럼 회심이 의심이 되어도 그렇게 대하고 그리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의 이런 가르침은 예수님의 마태복음 13장에 나와 있는 천국비유에도 나옵니다. 교회는 마치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바다가 그물을 던지면 먹는 고기, 못 먹는 고기 별의별게 다 잡힙니다. 그러면 어부가 그것을 바다가로 끌어올려서 거기에서 하나씩하나씩 쓸 수 있는 고기와 못 쓰는 고기를 다시 가르게 되듯이 그런 것들을 최종적으로 가르는 것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정하신 일들이라는 내용입니다. 이런 것들을 두고 교회사 안에서 심심치 않게 논쟁이 되어 왔습니다.
교부 종에 터틀리니아스라고 하는 교부가 있었습니다.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교부들이 그러하듯이 신학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교회의 이런 성격을 설명할 때 소위 이야기하는 홀 크라이스트라고 하는 계명을 가지고 설명을 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진실로 회심하고 신자가 된 사람들이 머리이신 예수님께 붙어있는 몸이고 그들이 지체가 되지만 그러나 교회 안에 회심이 의심되는 사람, 혹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배교의 길을 걷지 않는 한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대하는 것이 몸이신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는 것이라는 신학적인 계명을 내세운 것입니다.
실제 교회가 작았을 때는 예수를 믿어야 되겠다는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열린 교회를 많이 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목회하기가 좀 쉬웠습니다. 왜냐하면 반쯤은 다 깨트려져서 그래서 온 사람들이고 심지어는 테입을 통해서 책을 통해서 회심을 집에서 다 하고 그리고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처럼 교회 마당이 예뻐서 등록했다고 하는 분도, 빨간색이 마음에 들어서 등록카드를 썼다는 등 뭐 이런 사람이 거의 없었고 그때는 예쁜 마당도 없었고, 빨간 종탑도 없고, 그냥 화장실 지나서 지하실로 겸손하게 내려가야지만 물 나오는 지하실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으니까 와야 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 이외에는 절대로 오지를 않았습니다. 이제 집에서 자기 혼자 진짜 회심하고 그래서 목회할 게 별로 없게끔 그렇게 해서 오고 그래서 새가족반에서 30명씩 모아놓고 전도사님이 가르쳐도 눈물을 펑펑 은혜를 받고 참 신자의 길을 가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교회가 커지면서 그냥 다른 이유에 의해서 온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런 현실을 굉장히 슬퍼하고 과거를 추억하면서 상실감 같은 것을 느끼는데 이런 홀 크라이스트의 계명에서 보면 모두 어리석은 행동이고 미성숙한 생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 안에는 지금도 진짜 회심이 믿어지지 않은 사람들도 있고 많이 주님을 만나고 깨트려져서 변화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차하다가 동네 사람과 대판거리 싸우는 집사도 있고, 그리고 또 빚 받으러 교회까지 오는 그런 빚쟁이를 거느리고 있는 교인들도 있고 별 총천연색의 사람들이 아롱다롱 모여서 살아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렇게 미성숙하고 성도라고 불리기는 아직까지도 먼 지성적으로 어둡고 그리고 정서적으로도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별로 없고 의지적으로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결심이 없는 그런 많은 사람들이 아직 교회에 남아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큰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교회에 남아 있는 한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집어치우고 선술집에서 대판 퍼마시면 그들이 인생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주님을 믿고 거룩한 길을 걸어가려는 성도들이 그들과 함께 교제를 가지고 그렇게 함께 친구해주고 그렇게 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기까지 하니까 이제 반감이 어느 정도 풀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친구는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섬겨서 거의 일방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영향력으로 그를 섬겨서 그를 하나님 앞에 내가 기대하는 주님의 사람으로 세우기 위한 섬기는 일이지 그것이 친구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또 여러분들이 두 번째로 마음에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것도 또 이해가 안 되는데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너희는 나의 친구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배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성도들을 가리켜서 친구라고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좀 다른 것입니다. 왜 다른가 하면 성경이 어떤 비유를 빌릴 때 항상 통째로 빌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어떤 관계된 특성 하나를 사용하면서 비유를 빌리는 것입니다. 얘기가 나왔으니까 성경 해석을 하는데 조금만 더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사실 이것을 가지고 어떤 분이 오래전에 설교를 하는 것을 제가 들었는데 그 해석학적인 그 실수가 정말 감탄할 정도입니다. 소금, 그러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그러면서 소금이 그 맛을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밖에 버려져 밟힐 뿐이라 사실 신약성경에서 이 구절 가운데 난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분의 해석이 참 재미있습니다. 소금, 예수님이 우리를 보고 소금이라고 그러셨습니다. 소금이 무엇입니까? 그러면서 상상이 소금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소금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능을 요리학적으로 제시하면서 그러면서 그것을 다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난센스입니다. 심지어 무슨 이야기나 나왔는가 하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소금이 들어가지 않으면 간이 안 맞아서 못 먹습니다. 고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간만 맞추는 것입니다. 사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아직까지도 애매모호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가서 어떻게 간을 맞추어야 하는지 알 수없습니다.
사실은 그 뜻이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할 때는 예수님께서 어두움을 염두에 두신 것이고 소금이라고 그랬을 때는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 하나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맞추어 그것을 해석을 해야지 소금 전체를 가지고 간도 내고 그렇게 따지면 상처를 소독할 때도 바르지, 그렇게 따지면 소금을 농축하면 자살 약으로도 개발이 되는데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은 오묘한 소금의 섭리가 더 많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그런 게 아니고 그 당시에 쓰는 소금은 이런 천일염이 아니라 암일염이었습니다. 그래서 광물질 속에 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바위처럼 깨트려서 부패를 방지하는데도 쓰고 조리하는데도 쓰고 했는데 그것을 공기 중에 제대로 관리를 안 하고 내버려두면 습기를 먹으면서 소금이 액체로 다 녹아내리고 마지막에 남으면 흙과 같이 광물질만 남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에 쓰겠습니까? 흙만도 못하지 않은가. 그래서 밖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히면 그 흙처럼 도외시되는 것이다. 그것을 사실 말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 반감도 사라졌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친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친구는 지적 수준이 똑같다든지, 아니면 또 경제수준이 비슷하다든지, 배가 비슷한 사이즈로 나왔다든지 그래서 서로 등가관계를 이루는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고 어느 한쪽에서 주도적으로 일방적으로 영향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 그 영향을 주고받는 전문적인 면에서의 상호작용이 있는 관계, 그것을 염두에 둘 때 우리들이 그것을 친구관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 아닙니까? 내가 그렇게 나보다도 지성도 떨어지고 희망도 없고 도덕적인 수준도 떨어지는 교회의 사람과 함께 교제를 갖고 친구가 되어준다고 할 때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거기서 예수님이 사용하시고 싶으셨던 것은 intimacy 친밀함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그런 친밀함을 가지고 그렇게 사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호작용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경우에도 또 어떻게 되는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그렇게 그런 의미에서 넓은 의미의 친구를 사귀려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성적인 준비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지성적으로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 함께 교제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흘려보내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그와 함께 교제하는 방법이고 영어로 말하자면 partake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동질성을 상실하고 그와 완전히 하나 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involve라고 할까요? 그런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을 사귀는데 있어서 어떻게 해야 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내려가서 너 머리에 아무 것도 든 것이 없니? 나도 지성을 파버리지 뭐, 그리고 머리 뚜껑을 열고 빼버리고 네 마음에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니? 너는 없고 나는 가지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니. 나도 빼버릴게. 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의지가 없구나. 그렇다면 두개를 버렸으니까 나는 그래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조금 남아 있는데 이렇게 가지고우리가 어떻게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겠니 그것도 마저 버리지. 그리고 둘이 사귀면 이것은 친구가 아니고 패거리입니다. 반대로 그래, 그래도 내가 너의 영혼에 유익을 주기 위해서는 네가 모르니까 나는 알고 있어야 하고 네가 하나님을 사랑할 줄 모르니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야지 되겠지. 네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나는 하나님께 순종해야지 되겠지. 동질성을 가지고 가서 그 사람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하면서 그와 사귀는 그것을 그게 어떻게 친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멘톨, 멘토리의 관계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스승과 그리고 가르침을 받는 그런 제자와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또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나이가 똑같은데, 그거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80이 넘은 할아버지도 17세 된 애에게 멘토리가 될 수가 있고 그리고 10세 밖에 안 된 아이도 15세 된 아이에게 멘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조폭을 보십시오. 조폭이 20살이나 된 애에게 40이 된 사람이 형님! 그렇게 합니다. 아니 조폭들도 그러는데 그게 무슨 순서가 있습니까? 조직세계에 들어와서 올라가면 그 사람이 형님이 되듯이 하나님의 참된 도를 깨닫는 세계에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깨닫고 많이 빛을 소유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간 성도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 현명하게 자기보다 더 못한 사람들에게 그런 스승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물론 조심해라. 나는 네 스승이다. 이렇게 밝히고 교제를 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감추고 겸손하게 교제를 하는가,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고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맥락에서 보면 여러분들이 이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들이 가져야 할 관계가 꼭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세 가지 아름다운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 속에서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그것은 자기보다 신앙이 뛰어난 사람에게서 배우는 관계, 그리고 자신과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신앙이 어린 사람에게 가르쳐주는 관계,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배우고 가르쳐주고 할 수 있는 그런 친구의 관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교회역사상 가장 부지런한 삶을 살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60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났다고 하니까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번 설교하면 3-4시간씩 계속되는 설교를 일년에 평균 1200편을 설교했다고 하니까 여행한 거리까지 계산을 한다면 정력적으로 인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 사람이 부지런했겠습니까, 게을렀겠습니까?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이 인생 말년에 자기의 글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을 계속해서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두 번째도 아니고 첫 번째 만남에서 결정을 했습니다. 여기서 그 사람이 만날까 말까 하는 것은 대게 목양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내 인생에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그도 목회자였으니 얼마나 많이 연약한 사람들에게 에워 쌓이고 때로는 말도 되지 않은 상담의 내용을 가지고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고 연구를 방해하고 사역에 손해를 끼치는 교인들을 섬겼겠습니까? 이 요한 웨슬리는 그런 양떼들을 두고 하는 이야기고 신앙의 동지로서 교제할 사람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걸출한 신앙의 사람들이 많았던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인간관계에서 특별히 친구를 맺음에 있어서 사려 깊었기 때문에 그는 많은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 친구라고 하는 주제가 매우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우리가 어떻게 느껴지든지 그 느낌과는 상관이 없이 과거에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친구는 우리의 신앙과 인생에 결정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부분은 본문 비평에 있어서 논쟁이 많이 되고 있는 복잡한 구절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모두 소개해서 머리를 혼란시켜드릴 생각은 없고 그러나 꼭 집고 넘어가고자 하는 몇 개의 요지를 집어서 이 본문의 의미를 정립하고 그리고 적용을 해봄으로서 오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나옵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함과 같이 또한 친구는 그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고 되어 있는데 사실 여기에 나와 있는 그 날카롭게 하다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 본문에는 이것이 동사로 되어 있지만 날카롭게 한다. 라고 하는 의미를 가진 동사로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라고 되어 있는가? 투 조인 투게더 “.둘을 하나로 묶다.” 혹은 “둘을 같이 놓다.” 이런 의미를 가진 “야합”이라고 하는 동사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서 날카롭게 한다고 번역을 했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아침에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구약히브리어 성경의 희랍어 번역이라고 할 수 있는 세트어진트가 있는데 그것 역시 수많은 필사의 과정을 걸치면서 많은 종류의 필사본들이 약간씩의 차이를 가지고 생겨납니다. 그런데 그 세트어진트 텍스트 가운데 대부분의 많은 권위 있는 텍스트에서 이 부분을 엑크스 네이 라고 변형을 시키고 원형은 엑크스 노라고 하는 단어로 번역을 했는데 히랍어입니다. 그 시대의 희랍어 사전의 뜻을 찾아가보면 엑크스 노의, 혹은 엑크스 노라고 하는 단어는 to sharpen 날카롭게 하다라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전혀 의미가 다른 날카롭게 하다고 번역을 했고 그리고 이런 해석에 대한 지지는 시리아어로 번역된 당시대의 후시대의 많은 성경들에 의해서 입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그것보다 훨씬 더 타당성이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여기에 나와 있는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함과 같이” 그랬는데 여기에 나오는 철이라고 하는 것이 히브리어로 바르젤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창세기에 나옵니다. 공장들이, 장인들이 다듬어놓은 생철이 아니라 공장, 장인들이 잘 연마해놓은 연장 같은 것들을 의미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용례가 이제 아랍어의 속담에서도 나오는데 그렇게 해서 이 바르젤이라고 하는 단어를 정확하게 해석하면 이미 날카로워진 철입니다. 날카로워진 철이 또 다른 날카로운 철과 연관지어서 생각되어질 수 있는 것처럼 동일하게 친구가 그 친구의 얼굴에 관해서도 연관지어져서 생각되어질 수 있다. 이것이 정확한 해석입니다. 그것을 우리말 성경에서 의역을 해서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친구가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고 의역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문학적인 기교는 좋지만 그러나 원래의 의미는 날카롭게 한다고 하는 그 의미가 명사 속에 이미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미 날카로워진 철은 날카로워진 또 다른 철과 연관되어져 하나로 생각할 수 있고 동일하게 한 친구는 또 다른 친구의 얼굴에 대해서 그렇게 연관되어져서 하나로 생각될 수 있다. 이것이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바르젤, 날카로워진 철이 또 다른 날카로워진 철과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당시에 칼이나 창을 벼리는 방법이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그것을 불에 달구어서 망치로 두들겨서 각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그렇게 벼려지는 과정을 통해서 단단해진 쇠를 또 다른 칼이나 이런 것들로 마찰을 함으로서 마지막에 뾰족한데 날을 세우는 역할들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한다고 하는 격언이 생겨난 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한 히브리어 랍비들의 해석이 우리에게 본래 이 성경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좋은 빛을 던져줍니다. 랍비의 탈무드에 보면 이 구절과 관련된 이런 격언이 나오는데 한 사람의 연구는 또 다른 친구의 연구의 결과에 의해서 예리해진다. 그래서 이것은 결국은 서로 서로가 지식에 의해서 온전해지고 분명해지는 지적인 연마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교제의 유익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많은 복음적인 해석가들의 공통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구절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함과 같이 친구가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 이것들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결국은 교제의 중심이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교제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전기세 때문에 방에 있을 때 좀 컴컴하게 해놓은 편입니다만 사실은 저는 환한 게 좋습니다. 저는 사실 이 밝기도 마음에 안 들고 한 세배 정도 밝았으면 좋겠습니다. 할 수 있으면 이 세상 어디를 봐도 교회보다 밝은 데가 없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누가 그것을 말리겠습니다만 전기세가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금요일마다 말씀을 준비하러 갈 때는 항상 가방에다가 밝은 전기다마를 두개를 넣어서 가지고 갑니다. 어디를 가든지 그 방의 밝기가 한번도 마음에 들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떼어 내서 갈아 끼고 그리고 한 200촉 내지 300촉을 만들어서 그리고 밑에서 말씀을 준비합니다. 물론 주인이야 싫어하겠지만 내가 좋은 것을 하나님도 좋아하실 테니 그냥 그렇게 해서 좀 쓰다가 오는 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 한사람의 신앙의 지식이 30촉밖에 안 된다고 칩시다. 그러면 30촉 하나가 둘이 모이면 30촉 하나 있는 것보다 밝아질까요, 마찬가지일까요? 누가 또 마찬가지라고 합니까? 아니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아니 30촉이 비추고 여기 30촉이 비추는데 어떻게 마찬가지입니까? 누구입니까? 도대체, 두개가 합치면 60촉이 됩니다. 셋이 합치면 90촉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조금 부족해도 같은 수준에 있는 친구를 만나고 또 한 친구가 모이면 합쳐져서 90촉쯤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30, 30이 셋이 합쳐졌는데 꽝이야, 차라리 혼자 있을 때가 밝아. 왜 그런가 하면 모여서 중심적인 기능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슨 옷을 사 입었니? 뭐 먹으러 갈래, 어디 가서 놀이기구나 한번 탈까? 아니면 무슨 영화구경이나 갈까? 맨 이렇게 육신적인 여흥이 중심이 되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혼자 있을 때는 하나님의 사람인데 하나님의 사람이 여럿이 모이면 사람의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친구를 통해서 얻는 그 유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이렇게 목회를 하면서 가장 마음에 소원하고 평신도 시절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그렇다고 해서 지금이 고신도라고 하는 의미는 아니지만 이런 성직에 종사하지 않을 때에 느꼈던 그 일들 가운데 추억이 되는 것은 그렇게 함께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나누면서 함께 위로하고 그리고 함께 그 빛을 나누면서 기뻐하는 그런 교제를 나누기가 매우 힘들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 혹은 가르쳐주어야 할 사람이지 가르침을 받을 사람은 그래도 또 발견하고 이미 죽은 사람들의 책 속에 만나서 교제를 한다고 하더라도 나눌 사람이 참 없는 것이 목회자의 길에 있어서 약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지 간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함과 같이 친구가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그런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교제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 안에는 이런 교제의 중요성의 대한 외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제가 부족합니다. 교제 좀 합시다. 우리는 너무 사랑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서로에 대해서 좀 관심을 가집시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모두 틀린 이야기는 아닌데 문제는 추구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몰려다니면서 닭 잡아먹고, 개잡아먹고, 심지어는 모여 앉아서 고스톱을 치고, 고스톱까지는 안 해도 포커도 치고, 그리고 몰려다니면서 비디오방으로, 영화 방으로, 그러고 돌아다니고 노래방까지 간다고 하니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이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교제를 하면서 사는 동안에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많이 멀어지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난 사람들의 신자의 연합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고자 했던 독특한 유익들은 누리지 못하고 그 교제가 이 세상에서 사귀던 친구들의 대용품 정도로 전락을 하고 만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매우 잘못된 것들이고 그리고 그런 교재를 통해서 우리들이 도달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없는 삶 이외에 다른 길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소외감 같은 것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나같이 말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고 그리고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박약한 사람들은 친구를 사귈 자격도 없겠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비록 신앙이 어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일천해도 하나님이 지식이 적다고 적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문제는 우리들이 함께 모여서 교제할 때 그 중심에 무엇이 흐르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함께 교제하면서 흐르는 내용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어떻게 내가 하나님을 은혜 가운데 살기를 힘써왔고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내가 태도를 가질 때 주님이 나를 축복하시고 그리고 부끄럽지만 내 마음이 어떻게 잘못 방향을 잡을 때 내 삶이 미끄러지는지를 함께 나누며 연약한 자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주고 또 그 다음에 만나서 자신에게 주신 그 은혜로 형제와 자매를 권면하고 그래서 그들의 교제를 통해서 함께 손잡고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가까이 다가가는 구도의 삶을 실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신앙적인 교제의 참된 뜻이 아닙니까?
전철을 타고 가다가 불교신자로 보이는 두 사람의 청년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야 그 형제 오늘 왔니? 하고 물어봅니다. 어느 자매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야. 그 법부 요즘 절에 잘 나오니? 무슨 뜻인가 하면 함께 부처의 법을 알아가는 구도의 동지라고 하는 그런 뜻이 아닙니까? 저는 그날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가 형제, 자매라고 부르지만 사실 단정적으로 형제, 자매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형제, 자매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모두 한 구도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형제, 자매인 동시에 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도제, 혹은 도형, 혹은 도우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한 형제로서 도제처럼, 도형처럼, 도자처럼, 도매처럼 그리고 또 도를 추구하고 따라가는 그런 사람들로서 지체 의식을 가지고 그래서 그들의 사귐 한복판에서 항상 혼자 있을 때는 흐려지던 구도의 정신이 친구를 만나고 함께 대화하면서 그 구도의 정신이 더 분명해지고 길 되신 그리스도를 추구하지 않던 삶에 대해서 후회하게 되고 그리고 친구와 헤어지고 멀어졌어도 가슴속에 그날 친구와 가졌던 도 안에서의 교제 때문에 내 안에서 빛이 증가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의 피로 자녀 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참된 교제의 도리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너무 육적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저는 교회 안에서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 마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현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렇게 함께 어울리는 것 자체는 잘못된 것인데 문제는 그렇게 부지런히 어울려서 그 중심 속에 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작용들이 그 중심 속에 반듯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저와 함께 그런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함께 몰려다니면서 먹고 마시고 이런 저런 경조사에 다니고 몰려다니면서 그때는 희희낙락하고 즐거웠지만 그런 즐겁고 유쾌한 교제를 등지고 혼자 돌아설 때 골목을 지나면서 가슴 깊이 밀려오던 말할 수 없는 외로움, 원인을 알 수 없이 밀려오는 밑도 끝도 없는 처절한 공허감, 이런 것을 교회를 등지고 걸어가면서 여러분들은 분명히 느끼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를 여러분들에게 내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함과 같이 친구가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구도의 작용이 그 친구의 교제 속에 없을 때 그런 공허감과 허무함이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어두움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 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이루신 주님의 사랑
주님 말씀 따라 생활하며 그의 사랑 안에 하나 되어
이제 주님 오시기를 간절히 원하네
흔치 않지만 저는 사랑하는 믿음의 지체들과 교회 밖에서 교제를 나누다가 헤어지고 차를 몰고 먼 길을 차를 몰고 오면서 흐느껴 운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참 어두워도 빛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살아있구나. 그리고 정말 내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 증가하도록 더 많이 그 구도의 열렬함을 간직하고 싶다는 소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7-8년 전에 어느 지체가 열린 신문에다가 그런 글을 썼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많이 방황하던 그 지체가 교회에 와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이제 교회 안에서 자기와 함께 은혜를 경험한 수많은 지체들과의 그 많은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모임이 아니더라도 같이 모여서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고 함께 기도를 끝마치고 돌아가는 평일이면 그 형제가 고백하기를 교회당을 나와 집으로 이어지는 긴 골목을 걸으면서 내 마음속에는 뜨거운 갈망이 사무쳤습니다. 왜 나는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무지할까? 어떻게 하면 성경의 진리를 더 많이 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 지체들이 이미 가본 나에게는 아직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는 은혜의 세계를 걸어갈 수 있을까? 그런 고백을 신문에다 남긴 것을 읽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빛이 있는 친구의 교제이고 구도자가 누려야 할 그 도 안에서의 교제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구도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혈육적인 교제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에게는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함과 같이 친구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이야기할 때 주고받으면서 자신 속에 추상적이고 그리고 구체화되지 못했던 엉성한 지식들이 서로 상호작용을 통해서 예리해지게 되고 아주 날카로워지고 아주 분명해져서 하나님 앞에 희미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자극적인 힘이 있듯이 또한 육에 속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혈육에 속한 교제를 나누는 그런 육적이고 성화되지 못한 세속적인 교제를 나누는 그 과정을 통해서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함과 같이 한 사람 속에 있는 정욕과 혈기가 다른 친구에게 있는 정욕과 혈기를 불러일으켜서 그릇된 신앙의 길로 들게 하고 범죄에 접어들게까지 만든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늘상 경험하고 있는 일입니다.
설령 그런 범죄에까지 이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없이 나누는 그 교제의 건조함과 그 허망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먹고 마시고 여흥을 즐기면서 돌아오는 길에 은혜가 소생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받은 은혜가 소진되는 경험을 할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교제 가운데 모든 날들 가운데서 그 교제를 근신하고 주의하여야 하겠지만 특별히 은혜 받은 주일날 밤에 이 교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실제로 많은 지체들이 주일 오전에 많은 은혜를 받고 저녁에 잘못된 교제의 시간들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오전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많은 은혜들을 사단에게 반납하고 다시 빈털터리로 집에 들어가서 지루할 정도로 싫증나고 피곤한 일주일을 다시 사는 지체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이 그 교제 속에서 항상 도이신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기쁨이 있고 그리고 그 도이신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기쁨의 과정을 얻기까지 단장의 흐느낌으로 주님을 추구해갔던 친구의 고백을 들을 수 있는 그런 성숙한 교제의 장들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지난주에 청교도의 자료를 읽으면서 윌리엠 그린 힐이라는 17세기의 청교도를 잠깐 보게 되었습니다. 참 성경을 유능하게 주석한 것을 보면서 그분에 대해서 많은 호감을 갖게 되었는데 다시 한번 읽으면서 같은 인상을 또 받게 되었습니다. 윌리암 그린 힐은 17세기 때에 사람이었고 알다시피 17세기에는 존 오웬을 비롯해서 기라성 같은 청교도들이 영국의 강단에 하나님의 진리에 말씀 메아리치게 했던 거인들의 시대였습니다. 그때 그는 미들섹스라고 하는 지방에서 한 교구를 맡아서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에 그의 둘도 없는 친구와 함께 그 목회를 공동사역을 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청교도의 많은 수준 높은 저작들을 남겨서 오늘날도 우리에게 감화를 끼치고 있는 제레미아 벌르스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둘 다 멕달린 대학의 출신이었고 바로 그 맥달린 대학은 토마스 굳 이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총장으로 있었던 그런 청교도들을 많이 길러낸 그런 수준이 높은 대학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연구 동료로 만나서 신학적인 토론을 주고받으면서 그야말로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은 서로의 발전을 가져왔고 후에 미들섹스의 한 교구에서 동사목회를 하면서 오전에는 제레미야 벌르스가 설교하고 오후에는 윌리암 그린 힐이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니 그 시대에 그 목회를 받았던 성도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오전에도 나와서 설교를 듣고 은혜를 흠뻑 받고 오후에도 나와서 흠뻑 받으면서 그들은 제레미야 벌르즈를 주일의 모닝 스타로 불렀고 그리고 윌리암 그린 힐을 이브닝 스타로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저처럼 이렇게 외롭게 별로 스타 같은 설교도 못하는 사는 사람이 가슴이 아리도록 그렇게 그리워집니다. 그들이 나누었던 많은 대화와 신학적인 성숙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일까? 선의의 구도자로서 함께 서로 그렇게 격려하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교제를 통해서 교회를 온전케 하고 간 그 아름다운 목회 사역에 그 발자취가 보면서 한없는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여러분들이 불쌍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닝 스타도 없고 이브닝 스타도 없는 그런 시대에 그런 교회에서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중에 하나는 함께 이 구도의 고단한 길을 걸어갈 신앙의 동지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우리의 인생을 아름 할 때 그 친구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인하여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네 하고 말할 수 있는 신앙이 동지가 있다면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이 고단한 성화의 길에는 하나님께서 항상 고통과 갈등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큰 기쁨을 주시고 그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기쁨 가운데 하나가 구도의 길을 함께 가는 것이며 앞서 그 구도의 길을 걸어간 스승이며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보고 마치 그 길을 따라오려고 하는 제자,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교제를 하며 그리고 친구로 인하여서 더욱 거룩해질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어서 이 성화의 고단한 인생길에서 큰 위로를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2.흐르는 강물처럼 살자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잠19:6)
사람들이 고독이 즐겁다. 외로운 것이 우리를 깊게 한다. 뭐 그렇게 말하지만 그러나 사실 외로운 것은 참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감옥에서 복역을 하는 죄수들이 죄 위에 죄를 더하게 되면 어디로 보냅니까? 독방으로 보냅니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얼마 후면 여름수련회를 할 텐데 주최 측에서 여러분 한 사람에게 찾아와서 자매님, 몸도 약하신데 이번 수련회는 독방을 쓰시지요. 기분이 좋겠습니까, 나쁘겠습니까? 너무 좋습니다. 제가 죽어도 못하는 게 모르는 사람과 같이 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싫습니다. 차라리 차에 가서 혼자 창문열고 혼자 자면 자도 정말 싫습니다. 그러니까 외로움이 좋다는 것은 그것은 양념으로 가끔 좋은 것이지 그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사람들이 다 이렇게 좋은 친구를 만나서 그래서 정말 훌륭한 우정을 나누고 함께 공통된 가치를 추구해나가고 그리고 신앙의 지식들을 공유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존재했던 그런 아름다운 우정이 있는 그런 친구가 싫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잠언에도 보면 여자에게 너무 많이 마음을 쓰지 말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힘을 너무 쓰지 말자. 이성간의 교제에 너무 힘을 쓰고 몇 년 동안 갈 길을 못가고 소진했는데 헤어지면 꽝입니다. 아무 것도 돌아오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정은 좋은 밭과 같아서 심은 대로 많이 열매를 거두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젊은 시절에 이성의 눈을 떠서 그래서 이성과의 사귐에 대해서 헐떡이는 마음을 갖지 말고 오히려 일생을 친구처럼 살 수 있는 그런 좋은 신앙적인 우정을 갖기 위해서 노력을 해보십시오. 그 밭은 아주 좋은 밭이어서 뿌린 만큼 열매를 거두게 만들어줍니다.
오늘도 이 성경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사람마다친구가 되느니라” 이게 히브리시의 병행법입니다. 너그러운 자와 선물을 주는 자가 짝을 이루고 그리고 은혜를 구하는 자, 그리고 사람마다가 짝을 이루고 친구가 되는 것과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두 개의 짝이 하나의 사실을 강조하면서 진행되는 문학적인 표현법인데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된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친구라는 사람들이 진짜 선물 좀 얻으려고 온 사람들인가, 아니면 진실한 친구인가? 그것은 이제 여기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요점이 아닙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하고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베풀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에 놓인 삶의 상황은 대부분은 우리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방식이나 우리의 성품이 빚어온 결과입니다. 흔히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라도 도저히 공유할 수 없는 그런 절대적인 고독이 요구되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세계는 높은 가치를 추구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항상 그렇게 스스로 택해서가 아니라 고독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영역이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삶에 있어서는 그런 고독한 삶, 외톨박이가 된 생활, 이런 많은 것들이 사실은 자신이 스스로 택한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자기가 소외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 자신의 삶의 방식이나 태도에 의해서 스스로 벽돌을 놓아가면서 자기 주위에 담을 높이 쌓는 그런 방식의 삶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를 소외시킨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그런 자폐적인 성격 때문에 자기 스스로 그런 삶을 택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것들은 결국은 종합적으로 고려를 하면서 판단되어져야 합니다.
나는 오늘 이 성경말씀을 빌어서 여러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교훈은 바로 그것입니다. 영국속담에 그런 게 있습니다. “행복한 구두쇠” “Happy miser는 친구를 아끼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일생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스치고 지나가만 인격 대 인격으로 그 사람을 깊이 생각하고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을 열고 가까이 다가가서 인격적인 관계를 수립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정말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일생을 살면서 마음만 먹으면 항상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이렇게 신앙의 길을 걸어가려고 할 때 그런 친구를 만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와서 자매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혼기가 늦어집니다. 그래서 왜 그런가 하면 처음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시집을 갈 각오를 하고 마음을 열었는데 변화를 받고 보니까 예수 믿는 딱지가 붙었다고 해서 이게 전부다 다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구나. 쉽게 이야기하면 마치 과일가게에 골드 표 딱지를 붙이면 다 맛있는 게 아니라 골은 참외도 있고 맛이 간 참외도 있듯이 그렇구나. 그러니까 사람 보는 눈이 점점 더 높아집니다. 형제를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실컷 소개해주었는데 돌아서면서 그것도 신앙이라고, 열린 교회에 가면 제일 되지 말라고 하는 그런 사람을 소개를 받아서 그렇게 해서 어떻게 결혼을 하는가,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비관적인 눈빛으로 나를 쳐다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사람들을 손해 보게끔 그렇게 만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짜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일평생을 같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결혼생활의 벽에 부딪히게 되면 그런 껍질은 그들의 결혼생활을 지탱해주는데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을 살면서 그런 좋은 신앙의 동지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결혼할 때 배우자를 만나는 것 못지않게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계속해서 사람들이 가까이 접근하기 어려운 스스로 벽을 쌓고 살아가는 성격적인 결함, 인생을 사는 태도에 있어서 왜곡된 방식, 이런 것들을 계속 간직한 채 자기 스스로 외롭다고 하고 좋은 신앙의 동지들도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외톨박이의 삶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매우 미성숙하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오늘 여기 보니까 “선물을 주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이것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베풀며 살아가는 사람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모인 사람들이 진실한 친구인가. 선물이나 탐하는 사람인가 그것을 오늘 여기에서 지금 편 가르는 것이 이 성경구절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좋은 신앙의 친구를 함께 사귀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태도와 방식이 우리의 마음에서 이글거리고 타오르는 신앙의 열정 못지않게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자신도 한번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별로 특별히 해주는 것이 없는데도 같이 있으면 편안한 사람이 있고 그리고 혼자 있어서 적적할 때는 같이 만나서 밥이라도 같이 먹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왠지 마음이 불편하고 편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분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물론 우리는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가 싫은 일도 해야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친구 사이는 그것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단 인격적인 신뢰와 그 다음에 감정적인 공감대가 형성될 때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삶이 흐르는 강물과 같은 삶이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리비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수로 사업을 여러분들은 들으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바닷물을 퍼서 그 물을 불로 때워서 증발시켜서 거기에 맺히는 모든 수증기를 한군데 모아서 물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물을 5600키로 달하는 관을 통해서 저 사막화되어 있는 전 국토에 쏟아 보냄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비옥한 땅으로 만들겠다고 하는 진짜 20세기에 십대 불가사의한 그런 대 역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한번 다큐멘터리에 의해서 상세하게 한 적이 있었는데 참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철판 한 장이 32평이나 되는 철판을 원통으로 접어서 그 높이가 3미터가 넘는 그 관이 파이프가 되는데 그것을 하루에 250개씩 묻으면서 그러면서 5600킬로미터를 끌고 가는 대 장정의 역사였습니다.
지금도 사막이라고 할지라도 강물이 흘러가면 금방 얼마 되지 않아서 옥토로 바뀔 수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물입니다. 물만 있으면 다 생겨나서 노력하지 않아도 생태계가 형성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렇게 흐르는 강물과 같은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있는 삶 주위에 사람들이 사랑이 없고 너무 상처투성이고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고 이런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을 그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별은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고 소금은 썩기 쉬운 물건이 있을 때 진가를 발휘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기름진 논과 밭 한복판을 흘러가는 강물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메마른 들판, 물이라고는 구경하지도 못한 그 들판에 강이 나고 그리고 거기에 맑은 물이 흘러갈 때 처음에는 그 수로에 뒤덮인 많은 흙과 먼지가 그 맑은 강물을 시커멓게 만들지만 며칠 지나고 나면 흙과 모래가 모두 가라앉으면서 맑은 물이 줄 대어 흐릅니다. 그렇게 흐르고 나면 그 물속에 작은 플랑크톤들이 기생하기 시작하고 그리고 수초들이 생겨나고 물고기들이 놀기 시작하고 그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기 위해 더 큰 물고기들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강 언덕 위로를 그 물이 스며들면서 촉촉이 젖은 땅이 되고 거기에 작은 풀포기들이 생겨나게 되고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물이 스며들어가니까 비옥한 땅이 되고 밭 자락이라도 일구어서 곡물이라도 심어먹는 사람들이 생겨나니까 작은 집들이 들어서고 집들이 들어서니까 그 집에서 쓸 수 있는 여러 가지의 물건들이 필요하게 되고 그러니까 양철조가리라도 두들겨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만들어내는 장인들이 또 진을 치게 되고 그러니까 이제 산 쪽을 향해 길이 나기도 하고 바다 쪽을 향해서 길이 나기도 하고 동리가 생기면서 동리를 서로 이어주는 길이 생겨나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의 촌락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고도 문명의 발상지는 모두 강을 끼고 문명이 발생하게 되었지 강이 없이 문명이 발달하게 된 곳이 거의 없습니다. 이처럼 흐르는 강물은 아무 것도 없는 메마른 땅을 그렇게 생태계가 꽃피게 되고 문명을 만들고 문화가 형성되게 만드는 훌륭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실존이 그렇게 해야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주위에 가족도 마찬가지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고, 직장에서도 마찬가지고, 여러분들이 몸담고 있는 환경이 너무 척박하고사랑이 없고 메말랐을 때 그것이 여러분들이 거기에 있는 자체가 미션입니다. 그래서 아주 하나님이 주신 훌륭한 기회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메마르기 때문에 한줄기의 강물이 흐르면 그 메마른 주변의 환경들이 꽃피고 새가 노래하는 아름다운 환경으로 변화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을 미션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삶이 미션의 삶입니다. 나쁜 의미에서 우리를 실족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반하게 하고 그러면서 우리에게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그래서 우리에게 악한 영향과 결과를 안겨주고 우리를 이용해보려고 하는 사악한 사람들이 언제나 우리 주위에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용을 당해서 자신의 영혼의 손해를 보고 물질에 손해를 보고 하는 것은 모두 순수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보면 사람들 저마다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그리고 사람들을 섬기고 봉사하고 사랑하기보다는 자기들 스스로 이익을 얻고 그리고 자기 스스로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좀 넓은 의미에서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해택을 주고 그리고 내가 그들 곁에 있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도움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샘물과 같은 존재로, 흐르는 강물과 같은 존재로 그렇게 남게 될 때 여러분들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게 되고 그러면서 많은 관계가 형성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런 성격을 가져야 하고 또 그런 인격을 갖춘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 복음의 빛을 드러내면서 사는 일에 매우 유용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우리들이 흐르는 강물처럼 이 세상을 흘러가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할 것이 크게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첫째는 지식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빛을 나누어주는 현자로서의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꼭 사람들을 모두 무릎 꿇어 앉혀놓고 이것은 저것이고 저것은 이것이라고 신앙의 도리를 가르치는 선생 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현자는 존재하는 그 자체가 빛이고 그리고 그의 삶의 모습은 빛의 움직임을 반영하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많은 말들은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언어 그 자체가 빛이 되어서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빛을 나누는 현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지혜자가 우리에게 빛을 줍니다. 우리는 스스로 세상이 너무 악하고 자신은 너무 순결해서 친구도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지만 오늘 지혜자는 우리에게 간결하게 핵심을 찔러줍니다. “너그러운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많고 그리고 선물을 주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되느니라” 그랬습니다.
저는 관상쟁이는 아니지만 정치인들이 이렇게 TV에 나오고 신문에 나오면 이 사람은 주연급이 될 것이다. 이 사람은 만년 조연급이다. 이 사람은 엑스트라로 끝내겠다. 대충은 점을 칩니다. 이름만 대면 여러분들이 다 알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본인의 명예와 관련이 되어 있어서 내가 말은 안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안 됩니다. 물론 정치인들 중에는 껄떡이면서 돈이나 먹으려고 하는 불한당 같은 놈들도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정말 똑똑한 정치에 많이 모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방송하면서 대화하는 것을 보면 정말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모두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으면서 주연급의 정치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몇 해 전에 엘고와 그 다음에 부시 대통령이 대선에서 맞붙었습니다. 그때 제가 잠시 미국에 갔었던 그 기간이었는데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부시가 유리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엘고가 훨씬 유리해졌습니다. 왜냐하면 TV 토론에서 그냥 부시를 압도적으로 이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시는 뭘 물어보면 눈부터 껌벅껌벅합니다. 얼빵해서 사회자가 대만의 지도자가 누구냐고 그러니까 그때 이등히였습니다. 사실 중학생도 다 알고 있었는데 리, 뭐시기더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신문에서 두들겨 맞았습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해서 외교를 어떻게 하나. 우려가 현실로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엘고는 하여튼 이 사람은 저는 영어를 잘 못합니다만 방송에서 토론하는 것을 몇 번 눈여겨봤는데 청산유수입니다. 복지, 그러면 질문할 때부터 계속 고개를 끄덕입니다.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2,3,4 결론 쭉 나갑니다. 부시가 버벅거리고 얘기하면 비판하는 것을 다 적어났다가 1,2,3, 떡을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가 하면 저 부시 바보가 아닌가. 엘고는 저렇게 똑똑한데 그러니까 한 20% 정도가 확 저리로 쏠렸습니다. 그래서 압도적으로 이겼습니다. 거기서 TV 토론이 끝났어야 하는데 더 계속된 것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엘고의 논리와 말은 아주 초연하고 거의 어떤 때는 원고 한 장도 없이 서성거리면서 그렇게 청산유수로 해냈습니다. 부시는 갈수록 더 버벅거렸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쩜 저렇게 해박한가. 어쩜 저렇게 말을 잘하나. 저것을 믿을 수 있나. 오히려 질문을 하면 눈을 껌벅거리는 시골 아저씨 같은 부시가 훨씬 더 진실할 것이야.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떨어졌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외우내형의 지도자를 좋아합니다. 밖으로는 좀 어리석어서 한번 살짝 속여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여유가 있으면서 사실은 속으로 아주 현명해서 똑똑하게 흔들리지 않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그런 지도자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외현내우입니다. 외적으로 볼 때는 아주 선명해보이고 칼 같아 보이는데 속에는 멍한 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러면 싫어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도자가 이 다음에 되려면 반짝반짝 빛나는 눈, 그런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게슴츠레 한 눈, 뭔가 얘기를 하면 좀 멍해 보이고 그런 세계도 있나 하는 그런 좀 약간 우둔해 보이는 그런 것들이 이 지도자의 매력으로 비춘 것입니다. 그래서 사귀면 사귈수록 그 사람이 뭔가 깊은 통찰이 있고 그 속에 지혜가 있다는 것이 느껴질 때 갈수록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형사 눈처럼 팍팍 돌아가고 누구 얘기 들으면 단칼에 청룡도를 빼드는 그런 결단과 그 다음에 선동을 난발하는 그런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은 상당히 유리합니다. 생기기가 이렇게 좀 멍하고 일부러 멍 하려고 노력을 안 해도 내면만 신경 쓰면 됩니다. 겉은 바쳐주니까. 한번도 외모가 샤프하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나누어준다고 하는 그 지식을 흘러넘치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칼날 같은 그런 것을 가진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인생을 사는 참된 지혜, 그리고 신앙의 진정한 도리가 무엇인가. 그것을 많은 말보다는 자신의 전 삶 속에 녹아들어서 그래서 그 사람이 걸어가는 삶의 발자취를 보면서 거기서 많은 빛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 그런 사람들에게 친구가 많이 모이는 법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지식을 끝없이 흘려 넘쳐 보내주는데 그것 때문에 가까이 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될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많은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면서 살아가는 삶이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지식의 빛을 흘려 내려 보내는 그런 강물과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지식이 모자라서 도움을 구하는 사람에게 친절히 이끌어주고 그리고 그 지식에 덕을 보게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친구가 넘쳐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지식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텅 비었는데 뭘 넘치게 하겠습니까? 넘쳐서 흘려보낼 수가 없습니다.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참된 지식의 빛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우리 마음 안에 가득 찼을 때 비로소 그것이 우리의 인격과 삶으로 이렇게 흘러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신앙에 참된 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사람들이 배우게 됩니다.
여러분, 진짜 정말 여러분들이 구도의 길을 걸어갈 진실한 소원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 지식의 빛을 많이 흘려보내면서 사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또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외모나 밖에 있는 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에 더 많이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외모가 못나도 이 다음에 돈 들여서 몇 천 만원 들이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속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지식의 밝은 빛으로 단련되지 않고는 그렇게 아름다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체의 아름다운 용모는 잠깐 있다가 사라집니다. 오히려 오래도록 남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인가. 그리고 그의 삶 전체가 이런 참다운 지식을 얼마나 많이 흘려보내며 사는 삶인가. 그것에 의해서 함께 구도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많은 친구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두 번째, 흘려보내주어야 할 강물처럼 흘려보내주어야 할 것은 인격적인 감화입니다. 사실 꽃에서 나는 향기는 해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뿌리는 방어용 수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흔히 가곡이나 복음성가 같은 데도 보면 가시밭에 백합화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가시가 옆에 있어서 백합화가 휘날리면서 가시에 툭툭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향기를 더 많이 낸다고 합니다.
여러분, 허브를 좋아하시는지 모르겠는데 로즈마리나 라벤다나 애플트리나 여러 가지 많은 허브가 있을 때 허브 화분이 쭉 있을 때 냄새를 맡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을 몇 번 쳐서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향기를 확 뿜어냅니다. 순간적으로 코를 대면 냄새가 확 하고 나옵니다. 그런 것입니다.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것에 대한 어떤 반응입니다. 많은 꽃들이 있는데 아름다운 꽃들은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향기가 없는 꽃들은 정말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한때 양란에 흠뻑 반했습니다. 그래서 기회만 되면 그 양란을 떨어트리지 않고 사다놓고 그랬는데 지금은 흥미를 잃었습니다. 왜냐하면 꽃은 너무 아름다운데 향기가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일생을 살면서 좋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 신앙의 아름다운 인격과 감화, 이런 것들에 흘려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감화의 흔적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우리의 가슴속을 맴돕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습니다만 여기 오셔서 몇 번 설교를 하셨던 김희보 목사님이 계십니다. 총신 대 학장을 지내셨습니다. 60년대에는 큰 교회를 맡아서 훌륭하게 목회를 하셨고 70년대는 학장이 되어서 학교를 훌륭하게 학교를 경영하셨습니다. 아주 그분이야 외모부터 시작해서 모든 풍기는 인품이 정말 전통적인 선비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일제 시대 때 동양 척십(?) 대학교 경제과를 나오셨습니다. 지금이야 학교를 짓는다면 그저 외부 사람을 불러서 공사하시오. 해서 계약해서 모두 짓지만 그때야 어디 그랬습니까. 인부를 사서 그냥 짓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분은 학장이 되시자마자 총무과에 부탁해서 경제일간지 주간지를 구입하셨습니다. 구약을 전공하셨는데, 총무과장을 불러서 빨리 시멘트를 사놔라. 시멘트 사놓으면 몇 주 있다가 값이 쭉 올라갑니다. 철근을 사놔라. 그러면 그 다음달에 철근 값이 쭉 올라갑니다. 자갈을 사놔라. 그러면 자갈 값이 쭉 올라갑니다. 그렇게 슬기롭게 학교를 경영해서 학교를 운영하셨던 분이었습니다.
그 60년대 경에는 어느 교회라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큰 교회를 목회하셨는데 갈등이 좀 많은 교회였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이 담임목사님으로 있으니까 이쪽 편에서 와서 막 이야기를 쏟아놓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저쪽 편의 사람이 와서 사실은 그게 아니고 이것입니다. 그러면 아 그렇습니까? 모두 만족하고 돌아갔는데 반응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의 별명이 자갈밭이었습니다. 자갈밭에다 물을 한 바커스 갖다가 쏟아 부으면 다 스며들어가고 아무 것도 안 남습니다. 물을 갖다가 쏟아 붓는 사람만 힘이 듭니다. 계속 쏟아 붓습니다. 그러면서 중심에 서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그 교회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목사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돌아가신 그 목사님을 회고합니다. 그게 결국은 신앙의 인격의 감화가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목사님이 누구에게 이야기를 듣고 한번에 분노하시면서 그럴 수가 하면서 벽장을 열고 청룡도를 꺼내서 절단 또 절단했다면 많은 원수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게 신앙의 인격입니다.
그래서 항상 여러분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비난할 정도의 중요성도 없는 사람이 되기를 나는 원하지 않습니다. 정말 비난하는 사람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때에 그 사람의 인격이 드러납니다. 그 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하고 그리고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시려고 하는 일들을 터득하고 그런 마음을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른 사람이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아름답고 신선합니다. 본인이 그런 삶을 한번 살아가는 당사자가 한번 되어보십시오.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그렇겠습니까?
얼마 전에도 어느 목회자를 만났더니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목회를 하면서 보니까 가장 힘든 게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물어봤더니 목회를 하면서 교인들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고 그리고 너무 상심이 될 때 그것을 누르고 교인들을 계속 사랑하면서 설교하고 목회하는 것, 아주 명백하게 자기를 섭섭하게 했는데 그것을 누르고 편협하지 않게 사랑하는 것, 그것이 너무나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드디어 목회의 맛을 보시는군요.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들에게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윗을 보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다윗이 나라를 일으킬 때 유명한 부자들과 칼 빼는 유명한 장군들이 모인 것이 아닙니다. 병든 자, 빚지고 도망 다니는 자, 억울한 사람, 절름발이 이런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그때는 다윗이 순수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왜 너그러우니까, 그에게서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향기로운 사람의 인격입니다. 그래서 사리판단이 분명하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별로 없어도 어깨를 두들기면서 자주 위로해주고 널널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친구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함께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이런 인격적인 감화, 그것뿐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아름다운 몸부림이 있는 그런 감화, 그것은 냄새 맡는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괴롭힘을 당하는 허브나 혹은 가시에 찔리는 백합화는 참 아픕니다. 그런 아픔을 통해서 향기가 우러나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친구가 많이 모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은 모두 돈이 많고 그리고 자기가 지위가 높으면 여자들이 다 자기를 좋아할 것이라고 착각하는데 사실은 안 그렇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만 찾아다니는 여성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함량미달의 사람들이고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성들은 자매가 얼굴이 못생겼으면 자기가 쉽게 유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고집이 더 셉니다. 그런 착각에 빠지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모두가 통속적이 아니고 사람마다 다 자기 주관이 있고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관을 가지고 있고 그 중에 어떤 부분들은 예수 안에 바르게 세워지지 않은 것이지만 그 중에 또 어떤 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세워진 것이고 혹은 본성의 빛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기본질서로 많이 돌아간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땅의 자원을 얼마나 많이 소유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이 세상에 살면서 물질로 살 수 없는 그런 인격의 감화, 그 다음에 만난 다음에 잠시 교제하고 헤어지고 나서 그 사람의 채취와 사상의 그 내음 냄새가 그리워지는 그런 향취가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것들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부단히 인격적인 깊고 넓고 그리고 높은 사람으로 영글어가야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철저한 자기 부인이 필요하고 그러면서 무엇인가 목표가 있어서 그 모습을 닮아가려고 하는 신앙인 구도의 분토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짐승처럼 욕심이 이끄는 대로 살아간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이 죄인의 악취밖에는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지금은 넘어지고 쓰러지고 부족하게 살고 있지만 그러나 좋으신 주님을 끊임없이 닮아가려고 분투하고 애썼던 사람을 통해서 그들을 통해서 그들의 아름다운 인격의 감화의 향취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들리는 복음보다는 보이는 복음을 원하고 그리고 향기 없는 차가운 글보다는 인격에 향기가 묻어나오는 아름다운 실체의 사람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친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고백하기를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친구라”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마지막 세 번째는 물질을 흘려보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청년들을 만나면 가끔 직장에 계속 다니지 말고 한 5년이나 10년쯤 다닌 다음에 너의 사장이 하는 그 일을 네가 한번 해봐라. 자꾸 제가 부추깁니다. 물론 사업을 하는 것이 성공한 삶이고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것이 그보다 못한 삶이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또 모든 사람이 좋은 기술이나 지식이 있다고 해서 모두 하나의 회사를 경영해나가고 기업을 경영해나갈 그런 달란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 종류의 달란트입니다. 그러나 그런 달란트가 있다면 나는 한번 그렇게 평생을 월급생활을 하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해서 이 세상의 바다에다 자기 사업의 배를 띄어보라고 나는 그렇게 권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많이 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돈과 권력이 모두 집중되게 되면 이 세상은 점점 뒤틀린 세상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돈과 권력이 정말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이렇게 온전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면 하나님이 쓰시고 싶은 마음대로 물질을 사용하고 자기의 권력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고 그렇게 섬기고 일하는 동안에 이 세상의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더 잘 돌아갈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물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도보면 훨씬 유리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매우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은 우리들이 하나님 다음으로 우리 자신을 의탁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물질을 사랑하는 것은 동시에 한 사람의 인격 안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소유를 많이 가지고 있는가, 적게 가지고 있는가가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중년이 되면, 중년이 안 되어도 젊은 나이에 비만 때문에 여러분 고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제가 충고를 하나 드리고 싶은데 음식을 자꾸 주관적으로 생각하면 그러면 비만으로 갈 확률이 높아집니다. 주관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식탁에 있는 모든 것은 내가 배부를 때까지 먹을 수 있으며 모자라면 냉장고에 있는 것도 꺼내먹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식탁 그득히 반찬과 먹을 것이 놓여 있어도 이것은 내 몸에 해롭고 그래서 먹고 싶지만 참고 이것은 너무 먹기 싫은데 내 몸에 필요하니까 먹고 그리고 나는 이만큼 먹고 싶은데 그렇게 되면 살찌니까 건강에 안 좋으니까 이 정도에서 끝내야지 되겠다고 생각하는 게 식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객관적으로 바라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식욕이 넘칠 때는 더더욱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물질도 마찬가집니다. 물질을 항상 기본적인 태도나 객관적으로 생각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물질이 있으면 이게 주관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가장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런 것입니다. 물질이 있다. 이것은 내 것이다.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야. 그 이상이지, 왜 내게 있는 돈도 내 것이고 저 사람의 주머니에 있는 돈도 내 것이야. 그리고 흉기를 들고 접근하면 그것은 강도입니다. 무엇인가를 써야 할 때 자기에게 있는 자원뿐만 아니라 빼앗을 수 있는 것도 자기 자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무엇인가 하면 물질을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극단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면 반듯이 그에게 탐욕이 게제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물질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물질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질이 저 많은 세상에 흩어져있다. 다 내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 이런 역설이 바로 물질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됩니까? 돈을 조금 벌자마자 그것을 주관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사치하고 그리고 자기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쓰고 하면서 기업이 막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게 아니고 물질을 객관적으로 보면서 내게 하나님께서 물질을 맡기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대로 이것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굉장히 편해집니다. 그리고 물질이 많아져도 거기에 마음을 많이 기울이지 않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그래서 전에는 물질이 없어서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지 못했는데 물질을 주시니까 그 물질을 사랑하느라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물질을 보는 사람들은 없을 때는 없기 때문에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으니까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물질이 많으면 그 많은 물질이 있어도 결국은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것들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두를 돌아보십시오. 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고 다 사람들로부터 해택과 섬김과 도움을 받고 싶어 하고 따뜻한 말이라도 하는 사람에게 듣고 싶어 하지 베풀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런 인간의 약점을 다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웃에게 잘 해주라. 사람들은 기준을 어떻게 해주어야하나. 네가 받고 싶은 대로해라. 아주 간단한 말씀입니다. 네가 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해라. 그것이 바로 황금률입니다. 살면서 물질의 다과가 문제가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리고 함께 섬기고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자기중심적이어서 안 된다고 하는 그런 것들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해택을 입게 하고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여러분 가까이 다가오게 되는 그 속에서 진정한 신앙적인 교제가 이루어지고 그리고 아름다운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어떤 한 사람에게 능력도 안 되는 사람에게 한번에 어마어마한 물질을 맡기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절대로 그런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아주 어린나이에도 큰 칼을 맡기는 것과 같고 성냥을 들려주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남도 태우고 자신도 태워버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 하십니다. 항상 하나님은 작은 것부터 그 사람을 단련하시고 시험하셔서 그로 하여금 온전한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맡겨주시고 그리고 유혹을 이기고 어떻게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가를 보시면서 맡기고, 맡기고, 맡기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래서 물질을 재분배하고 많은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심으로 영광 가운데 각 사람이 자기의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이 공급해주셨다고 찬송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정말 큰 꿈을 가지고 진실한 그리스도인,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함께 동시에 큰 꿈을 가지고 중요한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으로 확신하게 된 가치를 여러분들의 온 삶으로 펼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공부할 재능을 주신 사람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그래서 그렇게 지식이 모자라는 사람들에게 지식을 나누어주고 그 지식을 활용해서 많은 물질을 벌어서 그래서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베풀어주고 그리고 인생을 사는 뛰어난 지혜를 배워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친절하게 이끄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정말 이 땅에 그 하나님 앞에 모자라는 것이나 남는 것이 없이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공존하면서 그러면서 섬기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쓰시는 것을 체험하고 또 섬김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자기를 돌보아주시는 것을 체험하면서 있는 자는 있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고, 없는 자는 없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그런 공평하고 아름다운 세계가 이 신앙 안에서 먼저 건축되어가야 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자기 사랑으로 철저하게 뭉쳐진 존재인지 여러분들은 아직 다 모릅니다.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다 부인하고 그리고 우리들이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방해받지 않는 그런 행복한 삶을 우리들이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됨으로서 우리 주위에 신앙적인 많은 동지들이 모이게 되고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기뻐할 줄 모르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를 격려하고 또 다른 친구들에 의해서 격려를 받으면서 신앙적인 동지로서 일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면 결코 누릴 수 없는 특권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닙니까? 흐르는 강물처럼 이 메마른 세상을 그렇게 흘러넘치도록 베풀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친구와 함께 하나님을 알아감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잠27:9)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성경이 그랬습니다. 구약에서 이 기름은 아주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기름은 그 기름이 속해있던 존재의 엣센스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드릴 때에도 반드시 이 기름이 필요했고 그 기름으로 불을 밝혀야 했습니다. 그런 용도뿐만 아니라 이 기름은 또한 음식을 만드는데도 꼭 필요한 용도로 사용되었고 이 기름을 가지고 또한 상처를 치료하는데 사용하기도 하고 여자들은 미용에 이 기름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향은 그야말로 향료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 팔레스타인 쪽에서는 이 향료가 아주 많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우리의 조상들도 이 향을 매우 즐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향을 사용해서 선비들이 글을 읽는데 정신을 집중시키기도 했고 심신을 쉬게 하는데 이 향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선천적으로 이 들리는 소리, 그 다음에 냄새, 이런 것들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아주 예민한 그런 감각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 같습니다. 불편할 때도 참 많은데 그런데 또 요긴하게 쓸 때도 참 많습니다. 하여튼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 이런 세계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언젠가 제가 어느 지체에게 선물을 받았습니다. 외국에 갔다 오면서 선물을 사왔는데 신혼여행을 갔다가 오면서 뭘 사다주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무슨 항아리 같은 것과 향 하나를 사다주었는데 나는 그것을 어떻게 피우는지 몰라서 향을 쏟아 붓고 성냥불을 붙였더니 불이 잘 안 붙어서 그래서 ‘뭘 이렇게 서금서금한 것을 사다주었나’ 그리고 구석에 넣고 안 썼는데 그 후로 얼마 지났는데 교인들이 집에 심방을 갔는데 그 집이 아로마 사업을 하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가서 쭉 설명을 들어보니까 아, 이게 이런 것이구나. 오는 길에 몇 병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와서 해보니까 그분들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직접 향료를 불에 태워서 향을 내는 것은 거기서 유해가스가 발생되기 때문에 인체에 매우 해롭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80도 정도의 물이 증발하면서 그 증류수에 함께 묻어서 그 향이 증발되는 것이 신체에 가장 잘 스며들고 이상적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게 뭐 그렇게 커다란 힘이 있을까? 그러고 한번 거기 처방에 쓰여 진 대로 피워봤습니다. 그런데 아주 놀랍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어깨가 결리고 두통이 나는 정도는 약을 안 먹어도 자기 몸에 맞는 향을 피우면 금방 30분 안에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거나 기도를 할 때 정신을 집중시키기 위한 향도 있고, 또 집중된 정신을 풀어서 느슨하게 해서 쉬게 해주는 그런 향도 여러 가지가 있고 조금 그 세계로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까 뭐 한없는 세계가 광야와 같이 펼쳐져있습니다. 굉장합니다.
그래서 그때 비로소 향수가 왜 그렇게 비싼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향수 값을 보면 여러분, 황당무계 할 정도로 비쌉니다. 그런 것은 오히려 아주 싼 것이고 진짜 향료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아주 비싼 향은 10밀리미터에 700만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게 뭐가 그렇게 비싼가 했더니 그 10밀리미터를 축출하기 위해서 꽃잎파리가 1톤 트럭으로 하나 가득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실 그렇게 따지면 꽃잎파리를 다 닦아서 말려서 그게 1톤이니까 그래서 그게 천정부지로 향료 값이 올라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흔히 쓰는 무슨 향료라고 그러면 화학으로 된 것이 많고요, 어째든 그것도 또 펼치면 그 세계는 넓습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만큼이나 넓습니다. 그것까지 다 지금 이야기할 수는 없고 그 향이 작용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호흡기를 타고 들어와서 허파를 타고 들어오면 허파에 실핏줄이 있습니다. 그 핏줄을 타고 흡수되어서 혹은 피부로 스며듭니다. 그것들이 깊이 핏줄 속에 스며들어서 몸 구속구석에 퍼지면서 양리작용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정신을 맑게도 하고 그 다음에 잠이 오게도 하는 그런 역할들을 하게 됩니다.
구라파 같은 데서는 이미 이런 아로마가 굉장히 오래전부터 발달되었고 그리고 아로마와 함께 이제 우리나라에는 이제 거의 도입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뮤직 세라픽 같은 것들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뮤직 세라픽은 음악 안에 이렇게 사람들에게 심층적인 영향을 주어서 그래서 이것을 이완시키고 긴축시키고 하는 이런 작용들을 멜로디를 통해서 합니다. 인간의 영혼과 육체, 감정과 의지, 정서 그 다음에 지성 이런 것들은 아주 분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접한 거리에 함께 역어져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영혼의 변화와 온 육체와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우리 인체도 골고루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또 그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 보면 거기도 한없이 넓은 세계가 존재합니다.
저는 음악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신학의 입장에서 성경적으로 음악을 볼 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규명할 수는 없지만 창조의 섭리, 창조의 원리와 부합하는 그런 오리지널 멜로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가락은 물론 아니지만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데 그런 것들이 지금은 모두 상실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음악적 감정에 의해서 그것을 찾아가서 그 창조의 원 음률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것들이 우리의 모든 부조화, 환경과 건강 이런 것들로 인해서 부조화된 상태들을 복원 화 하는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보면 정신병 같은 증상에 시달리던 사울이 음악을 통해서 그것들을 경감시켰다는 기록 같은 것들을 우리들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일본이나 구라파 같은 곳은 기능성 음반이 매우 발달되었습니다. 음악 장에 가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여러 가지 어크오스트 악기나 혹은 전자 악기, 여러 가지를 교묘하게 타악기와 현악기, 목관 악기 이런 것들을 다양하게 조합을 시켜서 그래서 치료효과가 있는 음률들을 만들어냅니다. 그것들을 통해서 음반을 분류해서 정신을 모을 때 듣는 음악, 어깨가 결릴 때 듣는 음악, 고향생각이 날 때 듣는 음악, 마음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듣는 음악, 밥을 폭식하지 않기 위해서 식욕을 조절할 때 듣는 음악, 입맛을 읽어버린 사람들이 입맛을 복구는 음악 등등으로 모두 다양하게 분류가 되어 있습니다. 향과 그런 음악을 함께 사용하면 아주 상승적인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주위에 몇 사람에게 권해보니까 들으나마나, 피우나마나 마찬가지라고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워낙 무지하니까 무감각한 사람들이니까 탱크가 지나가도 잘 자고 그러니까 사실 이래도 자고저래도 자니까 문제가 없지만 생각이 많으면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우는 적이 많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부분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그 성전에서 오늘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고 그럴 때 이것들을 모두 자기가 스스로 만족해하는 상태에 기여하도록 준비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로마 가게에 가보면 수면이 오게 하는 것, 그 다음에 정신을 맑게 하는 것, 그 다음에 심신을 평안하게 하는 것, 그 다음에 두통을 멎게 하는 것, 어깨 결림을 회복하게 하는 것, 이런 향은 있어도 신경질이 뻗치게 하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복수심을 자극하게 하는 향,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 그것입니다. 그래서 오죽 했으면 제가 그 집에 가서 회심향이 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런 기름이나 향의 사용은 인간 자신의 마음의 즐거움을 주는 것인데 즐거움을 주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아주 자극적인 것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거나 들려주어서 말초적인 신경을 자극해서 사람들이 쾌락의 경련을 일으키도록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방법이 있습니다. 대게 그런 방법을 통해서 오는 즐거움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주 기쁘고 즐거웠던 것만큼 더 커다란 허무감과 공허감 같은 것들이 동반되어서 우리의 마음에 밀려오게 되고 정신적인 공항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이 죄든 죄가 되지 않든지 간에 막 쾌락에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 정도의 그런 종류의 말초적인 기쁨을 주는 것들, 거기에 너무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 우리의 육체가 절대로 건강할 수 없고 우리의 마음이 온전한 틀을 유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티즈가 당첨이 되었는데 빨리 나와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타가기 전에 빨리 와보십시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굳이 여기에서 지금 이게 평행법입니다. 그래서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처럼 아름다우니라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기름과 향을 연결을 시키고 그리고 마음을 즐겁게 한다는 것과 그 다음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연결을 시킨 것입니다. 두개를 그렇게 비교하면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기름과 향이 갑자기 피를 멎게 한다든지 아니면 갑자기 어떤 쾌락의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사람을 순간적으로 즐겁게 한다든지 그게 아니라 이게 몸속 깊이 스며들어가서 그래서 그것들이 양리적인 작용을 일으켜서 그 사람 속을 전체적으로 새롭게 만들어서 결국은 자기의 몸의 이로운 작용을 가지러오게 하듯이 또한 동일하게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그 사람에게 그런 작용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충성된 권고”라고 하는 것이 일종의 의역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여기에 충성됨이라고 쓰여 진 단어는 의외로 “네테쉬”라고 하는 히브리단어입니다. 네테쉬라고 하는 단어는 사람, 보다 더 보편적으로는 인간의 영혼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한 사람도 없다 할 때 또 사람이라고 쓰이기도 하고 또 요나서 같은 곳에서는 목구멍으로도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어째든 목숨, 사람, 영혼, 숨 여러 가지 말로 사용이 되는데 영혼이라고 하는 네티쉬가 나오고 그 앞에 권고라는 말이 나오는데 “애차”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애차는 친구가 주는 영혼의 애차는 이것입니다. 애차라고 하는 단어는 정확하게 번역하면 카운슬링 할 때 그 카운스를 이야기합니다. 이 단어가 시편 1편에 쓰여 진 단어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의 애차를 좇지 아니하고 그래서 꾀라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꾀, 조언, 훈계, 혹은 권고 이런 말로 쓰인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애차라고 하는 것은 의논입니다.
그래서 서로 카운스 라는 사람들이 서로 자기의 생각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생겨난 어떤 꾀, 어떤 방책, 묘사 이런 것들을 의미합니다. 결국 그래서 결국은 영혼의 방책, 혹은 영혼의 카운스를 그것이 바로 이렇게 아름답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라는 말이 여기서는 충성됨이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원래 뜻은 그런 것인데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아주 진심어린 의논입니다. 꾀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번역을 실감나게 한다면 친구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서 주는 지혜, 혹은 방책, 훈계, 권고 이런 것은 마치 향이 우리의 육체에 깊이 스며들어서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듯이 결국 친구의 권고도 그러한 것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이 성경적으로 볼 때 이 친구라고 하는 것은 같은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동반관계라고 하는 것을 여기서 깨닫게 됩니다. 우리들이 친구, 그러면 성경을 떠나서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친구, 그러면 그 의미가 어떤 것입니까? 국어사전에는 오래 사귀어온 벗이라고 되어 있지만 결국 그 친구가 어떤 특별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냥 교제 그 자체를 즐거워하고 그저 그 자체 안에서 기쁨을 얻는 것, 그것이 결국은 친구를 사귀는 목적이 아닙니까? 만약에 두 사람이 오히려 어떤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그러면 사실 친구가 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둘이 함께 친구를 사귀는데 둘이 어떤 물질적인 사업상의 이익을 추구하는 관계라 그러면 사실 친구라고 그러기보다는 동업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성경적으로 볼 때는 우리 인간들에게는 이렇게 인간 사이에 가지고 있는 교제 그 자체를 엔조이 하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런 삶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두 하나의 지향 점을 향해서 다가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에게 권한 것도 바로 그런 지향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일락”이라고 하는 말은 이 세상에서 미치도록 타락하고 그리고 질펀하게 노는 것을 가리켜서 일락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락은 목표가 없이 자신의 삶을 그저 스스로 자기 중심적으로 엔조이하는 삶을 가리켜서 일락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인생을 살다가 보면 쉬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이올린을 잘 다루는 연주자들은 연주가 끝나고 나면 제일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이올린의 줄을 푸는 일입니다. 그래서 풀어서 그것을 보관해야지만 대가 휘지 않고 공명청의 손상이 없습니다. 그리고 연주할 때 다시 팽팽하게 담겨서 긴장시킨 다음에 그 천상의 아름다운 선율들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주님을 위해서 일관된 목표를 가지고 살다가 어느 한순간에 잠시 쉬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저는 사실 젊은 날에 이 점에 있어서는 매우 인색했습니다. 그래서 건강에 많은 무리를 가져오고 조언을 받기도 했는데 적절한 휴식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휴식도 아주 매우 분명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지향성이 무엇인가 하니 다시 계속 가던 길을 가기 위한 휴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할 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고, 쉴 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쉬는 것입니다. 그런 원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입니다. 그렇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깊이 인식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어느 한 지향성을 향해서 시종일관 계속 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군인이 치열하게 피 흘리며 백병전을 할 때가 있는가 하면 탄초를 깔고 그늘아래 보초만 세워놓고 엎드려서 코를 골고 낮잠을 잘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잠자는 그것 자체가 목표가 될 수가 없습니다. 결국 그렇게 해서 체력을 비축한 후에 적군과 더 훌륭하게 맞이해서 양질의 전투를 하기 위한 충전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일관적인 지향 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일관된 지향 점에 대해서 우리의 신앙의 고백은 말하기를 인간의 인성의 제일가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을 성화론적 관점에서 우리는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로서 우리가 섬기는 삶으로서 그 하나님을 인정하게끔 만들어드리는 것,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고 그것이 사실은 성화의 진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우리 인생의 목표가 밖으로 익스프레스 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뒤에 나오는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그렇게 성화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을 내면의 세계가 어떠한지를 해설해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화되어갈수록 우리의 영혼은 순결하게 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순결하게 될 수록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의 영혼은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더 많이 누리게 되고 그 연합을 더 많이 누리게 된다고 하는 것은 아주그리스도와 함께 뜨거운 밀착된 하나 된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사랑의 관계가 가져다 준 연합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심리학자들의 통계를 보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끌어안아줄 때 마음에서 이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없을 때 끌어안는 것과 이 사람이 정말 사랑해서 끌어안는 것 사이에는 9.8센티의 차이가 있다는 것으로 통계가 나왔습니다. 신체의 밀착도가 9.8센티의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 집에 딸이 하나있는데 애는 어디서든지 나를 끌어안습니다. 그리고 뽀뽀를 합니다.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보거나 말거나 교회에서도 오늘 두 번이나 했습니다. 그것도 복도에서, 그런데 끌어안으면 입을 열 여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수련회 같은데 가서 어거지로 야 누구누구하고 다 끌어안고 화해해. 마음속에서 자식, 수련회 올 때마다 매일 끌어안고 돌아가면 또 씹으면서, 그러면서 끌어안으면 그게 9.8센티 차이가 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진실한 신자가 되는 목표이고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진정한 인간으로서 창조의 목적에 기여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그 외에 나머지는 모두 지나가는 것들이고 바람과 같은 것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짧은 세상을 사는 동안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원이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이 우리들에게 물려준 것인데 불법하게 이 세상 사람들에게 강탈되었으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그것들을 되찾고 열심히 권력을 손에 넣어서 그것들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우리가 분배하고 섬기고 물질을 많이 벌어서 하나님께서 나누어주고 싶은 대로 우리가 그 마음에 부합한 도구가 되고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리고 사실은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을 많이 섬기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것도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모두 잠시 있다가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 일에 가치는 무궁하지만 그런 물질을 손에 넣은 자체, 그리고 높은 지위를 가진 그 자체, 사람들에게 없는 큰 학식을 소유하는 그 자체는 모두 헛되고 헛되니 모두 헛된 것들이라고 우리가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고 바람처럼 모두 지나가는 것입니다. 더욱이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진실한 구도의 길을 가서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는 아주 하나님과 친밀한 그 자녀가 되는가 하는 이 신앙의 문제와 그리고 세상의 이런 것들을 맛 바꾸려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마치 보석을 당장 받으면 자기의 팔뚝을 물어버릴 뱀과 바꾸는 것과 어리석은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한 가지 지향점을 가지고 같이 걸어가는 사람이 친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친구는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절대적으로 한사람이 우위에 있고 한 사람이 늘 열등한 위치에 있어서 교제의 대부분의 시간동안 계속 가르침을 받아야하고 한 사람은 계속 가르치기만 해야 한다면 그것은 사실 친구 관계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관계입니다. 똑같은 신앙의 수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항상 서로가 서로에게 이렇게 마음에서 우러나온 깊은 권고를 통해서 서로에게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두 사람이 신앙의 수준이 같아도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가 늘 똑같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사람의 지문만큼이나 매우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째 말씀드린 것을 좀 상세히 설명하자면 두 사람이 신앙의 수준이 똑같다고 할지라도 상태는 다릅니다. 성령으로 더 충만해질 때가 있는가 하면 은혜로부터 소원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할 때 한 사람은 은혜에서 비교적 미끄러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사람에게서 서로 서로 시간을 달리해서 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과 내가 신앙의 수준은 거의 같아도 내가 은혜 안에 있고 이 사람이 은혜로부터 멀어져 있으면 내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하고 충성된 권고로 저 사람을 붙들어줄 수 있고 이 신앙적인 감화를 주어서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해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입장이 서로 바뀌면 또 반대의 상황이 성립되기 때문에 신앙의 수준이 같아도 서로에게 충성된 권고를 통해서 그 영혼을 아름답게 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두 사람이 똑같이 은혜의 상태에 있다고 할지라도 두 사람에게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의 종류가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그때 그때 하나님께서 성경의 어느 특별한 진리에 대해서 마음에 강력한 찔림을 주시는 것을 통해서 영적으로 성장해왔다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대학원에 다닐 때 1학년 때의 일인데 그때 단군신전을 짓는 문제를 가지고 나라가 아주 시끄러웠던 시대였습니다. 그때 우연히 그 자료들을 성경과 함께 쭉 갖다놓고 읽기 시작하면서 온 몸이 전율을 하는 그 신앙적인 자극을 받으면서 제 영혼이 발끝까지 깨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의로움이었습니다. 이 시간에 그것을 모두 설명드릴 수 없지만 어째든 그 자료들을 대하면서 온 몸이 벌벌 떨리는 것과 같은 그런 하나님의 의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고 그래서 여러 날 동안 나라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글로 잘 써서 지금도 제가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청년들을 모아놓고 쭉 대화하듯이 이제 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내가 받은 의에 대한 도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청년들이 아주 강력하게 도전을 받고 제가 그렇게 온 몸을 전율하면서 느꼈던 하나님의 의에 대한 경험을 그들도 함께 동참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느 땐가 그 용서에 대해서 그렇게 마음을 일깨우면서 내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너무나 쉽게 원수 맺으면서 살아왔던 그 악한 성품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셔서 또 그렇게 사람을 녹이시면서 그 용서에 대해서 설교하게 하셨습니다. 교회를 하고 나서 그렇게 설교자 자신이 설교자이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그 구도의 과정을 통해서 제 영혼을 그때마다 일깨우셨고 그것들이 사실은 설교의 밑천이 되었습니다. 내 안에 뭐가 쥐뿔이나 있겠습니까? 주님이 주시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덜덜 떨리는 전율적인 각성을 경험하게 될 때에 내 옆에 있던 친구는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전율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한 사람은 의에 대해서 충성된 권고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고 또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충성된 권고를 받을 수 있음으로 서로가 온전한 신자가 되어가는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친구를 주시고 그리스도 안에 우정어린 교제를 허락하신 목적입니다.
누구라고 말은 안 하겠습니다만 지금도 살았고 우리 교회에 남아 있습니다만 우리 교회에 청년들과 교역자를 포함한 몇몇 지체들이 노래방을 간 적이 두 번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여튼 생애 다시없도록 혼을 냈습니다. 한번만 혼낸 것이 아니라 똑같은 것을 가지고 두 세 번 혼을 냈습니다. 그 이야기가 떠오를 때마다 폭격한데 또 폭격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많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엄청나게 화를 내시는지 이해를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그렇게 이끌어갈 수 있는 권한이 우리 신자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노래하던 그 입으로 어떻게 돌아와요 부산항을 부르는가. 그랬더니 뭐라고 하는가 하면 복음송도 몇 곡을 불렀다고, 차라리 부르지 말지. 어떻게 한 샘에서 똥물과 샘물이 같이 나올 수 있겠는가. 아니 어떻게 거기에 가서 마이크를 잡고 그렇게 할 생각을 했는가. 내가 만약에 그 사람이 회사에 다녔는데 회사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가서 하나 불렀다면 내가 그렇게 탄핵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회사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이 거기에 가서 그리고 거기에 가서 마이크를 꼬나 잡고 그리고 툭툭 치고 흔드는 것도 있다는데 점치는 사람들이 흔드는 것 같은 것을 흔들면서 거기서 예수님을 찬양하던 그 입으로 그 정욕에 가득 찬 노래를 부르고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 개인이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모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제를 그렇게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이 그 사람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이 우정어린 교제는 반드시 그 목표와 지향점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 앞에서 더 온전한 신자가 되어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벌써 오래 전의 일입니다만 한 20년 전의 서울에 있는 모 대의 어느 교수 사회학자인데 그 사람이 글을 하나 썼는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강남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교회에 열심히 다니기 현상, 이것을 자기는 매우 긍정적으로 본다. 그래서 이 사람이 불신자인데 웬일인가 그랬더니 마지막 결론은 무엇인가 하면 춤바람이 난 것보다 얼마나 건전한가.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은 아직 청년들이니까 경험을 못 해보셨겠지만 장년에 가면 제 이야기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제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습니다. 애들도 다 커서 바둥거리고 안 살아도 될 정도가 됩니다. 돈도 있고 시간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없었더라면 아마 카바레도 가고 고스톱도 치고 하면서 좀 놀았을 텐데 신앙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런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신자의 양심이 증거 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변형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구역예배로 모이는데 목사님이 다 갈수는 없고 평신도들이 구역공과를 배워서 가서 성경 펴놓고 한절 읽고 중얼중얼 거리고 설교라고하면 그냥 서로 김 집사, 이 집사 놀자 이런 사이니까 뭐 그렇게 뼈저리게 가슴에 와 닿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의 국민의례처럼 구역예배를 한 20분 만에 마치고 그 다음에 본편이 시작됩니다.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음식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먹는데 한 시간 끝나고 나서 고스톱만 안 치지 고스톱 칠 때 오가는 이야기들을 다 털어놓으면서 그러면서 세상적인 교제를 갖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돌아갈 때는 정욕이 충만해서 돌아갑니다. 그렇게 하는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서 교제를 나눈 후에는 거룩한 주님의 성품을 닮고 싶고 하나님을 더 온전히 사랑하고 싶은 소원이 우리 안에 불붙여져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잠들고 있는 동안에도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처절하게 분투하며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지체를 보면서 자신의 미끄러진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인데도 더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아파하면서 좀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연합 속에서 살기를 갈망하는 지체를 보면서 자신의 영혼이 침체에 빠졌다는 것을 확인하며 자책감을 갖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고 싶은 갈망을 갖게 하는 것, 이것이 예수 안에 있는 우정의 효과입니다. 그런 것들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상정하고 있는 친구라고 하는 것은 이 권고함을 받는 사람과 똑같이 그 참된 신자가 되기를 추구하고 거룩한 언약의 백성답게 살기를 갈망하는 구도의 정신을 가진 친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가 가장 필요할 때 자신 속에서 이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권고가 가능한 것이고 그렇게 권고해줄 수 있기까지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친구에게 권고하고자 하는 바대로 우리들은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들과 대화를 나눌 때 어느 한 지체의 짧은 말 한마디가 나의 가슴을 깊이 파고 들어와서 감동을 줄 때 그것은 그렇게 짧은 기간동안 형성된 언어일 수 없는 것입니다. 진짜 실로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쓰러지고 넘어지면서 피를 통하면서 살아온 구도의 길에서 압축되고 축약된 짧은 말입니다, 그것이 마음속에 들어와서 찌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바로 그런 구도의 길속에서 얻어내어진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우정은 바로 이렇게 함께 구도의 길을 가는 벗으로서의 우정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동일한 취약점과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자기의 친구를 어떤 사람이라고 불렀습니까?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친구라.” 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자신의 친구이기를 원했고 또 그들의 친구로 불리기를 바랬습니다. 또 그들을 친구삼기를 원했고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있으니까. 여러분들이 친구를 사귈 때 눈빛이 그리스도를 향해 온전한 신자가 되기를 원하는 구도의 갈망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사람을 친구로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목사님, 흐릿한 사람이 친구도 못 갖겠네요. 흐릿한 사람을 제자로 삼으십시오. 그래서 한 수씩 가르쳐주십시오. 그러면 또 그 사람이 나중에 성장한 다음에 경건한 사람의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사슬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이외에 무엇이든지 사랑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사슬이 됩니다. 그리고 올무가 됩니다. 존 오웬은 그의 탁월한 영성을 보여주는 신자의 기도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그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그대로 암기하지는 못했지만 대게 이런 내용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탁월하게 자유롭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얽매어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본인들은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그들이 사랑하는바 욕망의 위에서 노예가 된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죄의 유혹을 받으면서 분투하는 신자가 그들의 눈에는 구속받은 사람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에서 오는 내적인 평화입니다. 그리고 그의 진정한 영혼의 자유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따라서 살고 그리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 정해놓은 선한 의도 안에 그의 모든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자유인이 되어서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을 닮고 성화의 길을 걷는다고 하는 것은 리챠드 박크의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처럼 그렇게 하늘을 날기 위해서 차고 오르는 자유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 땅에 있는 곳에 매일 보는 그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갈매기가 있었지만 리빙스턴 시걸만이 하늘높이 차오를 수 있었을까요? 나머지 대부분의 많은 갈매기 떼들은 그 뱃사람이 버리는 쓰레기를 먹기 위해서 미친 듯이 하강해서 그 쓰레기 더미에 주둥이를 파묻고 친구들은 서로 먹이를 먹기 위해서 친구들의 머리를 피 흘리듯이 쪼아냈습니다. 결국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것들에 의한 모든 사랑은 우리의 영혼이 스스로 족쇄가 되고 그리고 올무가 됩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서 힘차게 하늘나라를 향해 비상하고 구도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특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하면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처절하도록 자신을 결박하고 묶으려고 하는 그 모든 사랑이라는 구속과 더불어서 싸우고 그리고 분투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알에이 토레이 목사님이 계십니다. 전 외국인이면서 한국인처럼,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으로 사셨던 분이었고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많이 사랑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예수원에서 한번은 설교를 하시면서 그런 간증을 하시더랍니다. 자기 나이가 80이 훨씬 넘었는데 예수원을 올라오는 아리따운 자매들을 보면서 유혹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손을 들고 처절하게 기도하신다고 했습니다. 내 속에는 아직 내가 모르는 내가 너무나 많이 있고 그리고 내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수많은 욕망들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도 수없이 솟아난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솔직한 고백입니까? 그 할아버지가 자기 증손자쯤 되는 자매들이 가녀린 몸매에 예쁜 차림을 하고 그 예수원에 기도를 하러 올라올 때 그 할아버지를 보면서 얼마나 존경에 찬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그 할아버지가 그 자매들을 보면서 유혹을 느낀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간입니다.
끝없이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사랑하려고 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그것이 인간의 실체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한없이 피곤하고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랑해야 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도 연약하지만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데 있어서도 너무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이 지적하는바와 같이 기도하면 할수록 신자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고, 자기가 누구인지 하나님 앞에 자기가 다 깨트려진 가운데 참회하는 가운데서 가장 정확하게 신자는 자기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순간 하나님이 붙들어주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순간도 잘 살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잘 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또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도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그냥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어린아이처럼,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그래서 주님의 손을 꼭 잡고 절대로 자신에 대해서 자만하지 말고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한번도 나 자신에 대해서 실망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번도 믿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매순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훌륭하게 살고 내일은 미끄러진 자가 될 수 있고 어제는 예수님만 사랑했는데 오늘은 세상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어제는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고 싶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 싶어 할 수 있는 그 변화무쌍한 이 부패성을 가진 우리 인간, 친구가 좋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단지 아픔을 함께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서로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체에 있는 영혼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그러면서 주님과 함께 친구와 함께 그렇게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친구를 주신 목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재물로 더해지는 친구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잠19:4)
재물이 많으면 친구도 많지만 가난하면 친구도 끊어진다고 하는 말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세속적인 교훈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 우리말에 이 성경구절과 비슷한 속담이 있습니다. “정승 집에 개가 죽으면 조문객이 몰려와도 정승이 죽으면 오는 사람이 없다.” 분명히 개보다는 정승이 높은데 정승 집, 개가 죽었을 때는 그것을 빌미로 와서 눈도장을 찍고 그 정승에게 잘 보여서 정치적인 해택을 받으려는 사람이 많지만 정작 정승 본인이 죽으면 더 이상 그 집에 별 볼일이 없기 때문에 슬퍼하는 조문객이 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누구든지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가까이 다가가서 유익을 얻고 싶어 하고 그래서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항상 가까이 하는 친구가 많은 법입니다. 그리고 또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만난 사람들의 범위도 아주 많아서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교제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반적으로도 이 말씀은 세속적인 의미에서도 진실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문자적으로 부자면 친구가 많고 가난하면 친구가 끊어지니까 빨리 가서 돈벌어라. 그것을 가르쳐주려고 지혜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자가 이 지혜서 전체를 통해서 독자인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부자는 단지 물리적인 부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넉넉해서 사람들에게 베풀며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흔히 어려울 때마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도움을 받고 또 위급할 때마다 도와주는 사람을 만나서 인생의 어려운 고비를 외롭지 않고 잘 넘기는 사람을 가리켜서 인덕이 많은 사람이다. 혹은 인덕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복을 하나님께서 개별적으로 어떤 시기에 특별히 주실 수도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 인간세상에서 경험되는 그런 인복, 혹은 인덕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성품과 그리고 내면의 세계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산물입니다.
한사람의 인생은 한 사람의 성품이 줄긋고 달려온 궤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을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고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앞으로 어떤 인생의 궤도를 그으면서 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판단할 때는 반듯이 지금의 그 성품과 그 다음에 걸어온 길을 보면 앞으로 이 사람이 어떤 길을 걸어갈 수 있을지 아주 분명하고 또렷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흔히 말하는 인덕이 있고 인복이 있어서 늘 귀인을 만나는 사람들 중에 수전노와 같은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전노는 항상 외롭습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사람이지만 친구가 거의 없습니다. 스크루지 같은 사람에게 친구가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 친구가 되어주고 싶어도 그 스스로 안으로 꽁꽁 걸어 잠그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외롭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의 성품이 그려온 궤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하시고 축복된 삶을 살게 하시는 중요한 방법은 생긴 대로 걸어가는 사람을 그릇된 길을 갈 때마다 한번씩 방향을 틀어서 하나님이 넘어지지 않게 하심으로 올바르게 가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부차적인 일이고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것은 그 사람의 성품과 그리고 기질 속에 깃들어있는 죄를 제거하심으로서 그렇게 자신의 성품을 따라 그려가는 인생의 궤적이 올바르고 행복한 길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인생을 새롭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반론하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이 뭘 모르셔도 한참 모르시지 우리의 속담에도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뭐 쥐뿔도 가진 재물이 없는데 어떻게 너그럽게 베풀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물질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사람의 성품의 문제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열렬하게 회심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찬물을 끼얹으면서 어느 날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당신들이 내 설교를 듣고 이렇게 열렬하게 회심을 했지만 나는 당신들의 지갑이 회심할 때까지는 당신들의 회심을 믿지 않겠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진실한 회개를 사랑하는 대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기를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 사랑은 자기 사랑의 극치이고 모든 정욕은 자기 사랑의 발현입니다.
칼빈은 정욕에 대해서 말하기를 정욕은 단순한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모든 인생을 자기중심으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어느 날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니까 하나님과 그 다음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있는 연결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그런 방식으로 칼빈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어떻게 이웃을 향한 사랑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둘은 나뉘어 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는 것이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는 것이지 이것은 있고 저것은 있는 그런 방식의 사랑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을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하나님의 형상을 나누어가진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 안에 있게 마련입니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의 가장 뚜렷한 표가 집중적인 자기 사랑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사랑하지 않습니까? 사랑합니다. 단 차이가 있는데 자기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복속된 사랑이 아닙니다. 물질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속에 있는 경향입니다. 한 사람이 이기적이고 저밖에 모르고 자기중심적이면 인생을 살면서 아무리 많은 물질과 시간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지 않습니다.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 지식을 나누어주는 것을 통해서 자기가 무엇인가 영광을 받게 될 때 그 지식을 나누어주지, 단지 그 지식이 없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불쌍히 여기면서 지식을 나누어주는 그런 예는 없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재물이 많은 사람에게 친구가 많다는 것은 물리적인 재물이 많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해택을 주게 하면서 살아가는 삶,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 사람의 성향이 된 사람, 그 사람들에게는 항상 친구가 많다는 그런 의문인 것입니다.
저는 이번 스승의 날은 좀 썰렁했습니다만 학교에 선생님으로 있을 때는 매년 스승의 날이면 거짓말 조금 보태어서 한 리어카씩 선물을 받았습니다. 많이 보탠 것은 아니고 조금 보탰습니다. 하여튼 교수실 앞에 허리쯤 오게끔 선물이 쌓였습니다. 성격이 독특해서 한번도 그 선물을 준 사람에게 고맙다는 표시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 습관은 오늘날에도 계속됩니다. 교인들이 크고 작은 선물을 해줍니다. 그래도 한번도 교인들의 집에 전화를 걸어서 이런 선물을 제게 보내주어서 정말 백골난망입니다. 그렇게 얘기해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학교 선생님일 때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은 것은 저 나름대로 철학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렇게 하면 선물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소외감을 느끼겠습니까?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지금도 아무리 그렇게 큰 선물을 그렇게 큰 선물을 받은 적도 없지만 선물을 받아도 절대로 제가 집에 전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한번도 고맙다는 표시를 하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대부분 우리 집사람이나 비서를 통해서 혹은 내가 새로 나오는 책에 사인을 하나 해서 건네줌으로서 표현을 합니다. 만약에 선물을 하고도 그런 표시를 못 받으신 분이 있으면 그것은 전적으로 비서의 책임입니다. 나는 분명히 표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양말 한 켤레를 받아도 너무나 고맙다고 전해 달라. 발에 딱 맞는다고 전해다오. 사실 안 맞는 양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도 빈 말이라도 그렇게 전해 달라. 여태까지 내가 받은 넥타이 선물 중에 가장 색깔이 좋다고 전해다오. 대부분이 빈말이라는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째든 그렇게 해서 인사표시를 꼭 합니다. 여태까지 그렇게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제 마음에 가장 감동적인 선물은 그것보다 훨씬 작은 것이었습니다.
(예화: 고등부 전도사 때 8주 동안 180분씩 설교를 하셨는데 많은 아이들이 변화되고 깨트려졌는데 몇몇의 아이들이 반항하고 나감으로 마음이 아파하고 있는데 어느 여학생 하나가 와서 해태 알사탕 하나를 선물로 주고 갔지만 거기에는 많은 의미 가 있었다. 그 선물이 생애적으로 태어나서 받은 선물 가운데 가장 감명 깊은 선 물이라는 이야기)
그때 이후로 제 마음속에 깊이 깨달은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선물의 크기나 값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에서 깊이 우러나온 사랑이 담긴 그것이라는 것, 그러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들이 물론 물질도 많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많다면 금상첨하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베풀고 싶고 너무 돕고 싶은데 돕지 못할 때 그 마음은 그 돈이 없어서 고통을 받는 사람의 그 아픈 마음보다 훨씬 큽니다. 그래서 차라리 내가 그런 고통을 당하면 훨씬 편할 텐데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것이 없어도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그리고 견딜 수 없이 힘들게 고통을 받을 때 학생들로부터 전해 받은 한 장의 메모, 얼마나 커다란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1988년도 하나님을 깊이 만난 때에 그 이후로부터 이제까지 지체들로부터 작은 메모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모아두었습니다. 아마 이 다음에 여러분들이 보낸 것도 그 속에서 나올 것입니다. 때로는 오락가락하는 지체를 놓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그림을 그리면서 네가 얼마나 바보인지 보여준 그런 메모지도 그 속에 다 보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베풀면서 사는 것은 물질을 소유한 거기에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이 많이 있어도 그 마음의 경향성이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사는 즐거움을 모르면 어떻게도 그 물질은 흩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사는 사람들의 마음의 경향이 있고 그곳에서 오는 진정한 행복과 가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없어도 항상 그 사람들로부터 무엇인가를 선물로 받고 누리는 사람들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야지만 많은 친구들이 옆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랑하는 자만 너희들이 사랑한다면 너희의 사랑이 상 받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악한 사람들도 그렇게 할 줄 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마음에 맞는 몇몇 지인들을 사랑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그의 경향성입니다. 오늘 스치듯 만난 사람도, 아직 통성명하지 않은 지체도 한번도 만나서 교제해보고 속을 알지 못하던 사람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고 그 사람이 나로 말미암아 무엇인가 누렸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을 갖고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가는 삶,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가치관의 변화가 없이는 그렇게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교계에 이름을 밝히지 않겠습니다만 유명한 분 한분이 계셨습니다. 한 15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교회 정치적으로 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미스터리입니다. 극단적인 두 평가가 나오는데 한쪽에서는 인간도 아니다. 정치꾼이고 모략가고 협착꾼이다. 이런 평가와 한쪽에서는 그분이 죽은 지 10여년이 지났는데도 그분을 흠모하며 그분과 함께 그분에게서 목양을 받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교인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절대 그런 분이 아니고 훌륭한 분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그분을 뵌 적도 없고 그 가운데 있으면 양쪽에서 나오는 글이니까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어서 평가를 유보하고 있습니다. 뭐 평가할 필요도 없고 이미 돌아가셨으니까. 그런데 직접 경험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한 이야기는 나에게 뭔가 오늘 가르침과 관련해서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그리고 그분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나는 최종적인 평가를 내리지는 못하지만 그 면에 있어서는 그분을 본받으면서 살기를 힘써야 한다고 스스로 타이릅니다.
그분이 어느 큰 도시에서 목회를 크게 하셨습니다. 서울도 아니고 지방에서 부목사가 10명이 넘고 교인이 5000명이 모였다고 하니까 그 시절에는 결코 작은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 교회에 부목사로 어떤 젊은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의 동기가 시골에서 아주 작은 교회를 목회하고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순진한 생각에 내 동기가 그래도 그 도시에서 제일 큰 교회에서, 교계에서 그렇게 큰 목사님 밑에서 부목사로 있으니 내가 그 도시에 갈 일이 있는데 수요예배 시간에 들려서 그 친구를 찾아가면 아마 나를 굉장히 반가워할 것이고 그러면 바쁘지도 않으니까 그 친구와 하루 묵어서 밤새도록 회포를 풀면서 학교 다니던 시절을 나누어야지 그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악수를 하고 분명히 같은 반에서 공부한 친구인데 냉대를 하더랍니다. 그리고 계단 아래를 내려가며 아, 이것은 아닌데 자기가 이 큰 교회의 부목사면 부목사지 나를 어떻게 이렇게, 옆자리에 앉아서 공부하던 나를 이렇게 냉대할 수 있을까? 향한 마음을 안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뒤에서 어떤 목사님이 부지런히 뛰어내려오면서 팔짱을 끼면서 목사님, 목사님이라시면서 저희 교회 이렇게 방문해주셨는데 이렇게 총총히 사라지시면 제가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뒤를 돌아보니까 그 교계에서 유명한 그 담임목사님이십니다. 옆에 있는 부목사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그 먼데서 여기까지 이렇게 방문을 해주셨는데 그냥 이렇게 돌아가시면 제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날도 선선하니 제 방에 들어가서 따뜻한 꿀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십시오. 20년이나 차이가 나는 후배인데도 그러면서 부목사님에게 내 방을 모셔. 앉혀놓고 그냥 그 교회에 거물이 구십 도로 굽히면서 목사님, 정말 고맙습니다. 젊은 목사가 아니 뭐가 고마운가. 자기가 그랬더니 우리가 못 가는 농촌에 목사님이 가셔서 그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고 돌보면서 목사가 되어주시니 우리는 늘 빚진 마음입니다. 그리고 따뜻한 어차를 직접 건네면서 드시라고, 여기서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마시고 일어났는데 비서를 부르더니 뭐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비서가 와서 일어나려고 하니까 목사님이 가까이 다가가더니 어깨를 걸치면서 한쪽 주머니에다 봉투를 하나 넣어주면서 목사님 이것은 제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시골 생활이 얼마나 궁핍하십니까?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갔고 가셔서 가사에 보태 쓰시고 책도 좀 사서보십시오. 그러면서 아니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니까 아닙니다. 목사님이 그냥 돌아가시면 제 마음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그리고 모시고 가서 차대, 그러면서 자기 차를 대서 목사님 여기까지 가시니까 모셔다 드려라. 차에 태워서 구십 도로 인사를 했습니다. 이런 분을 그 후에 공개석상에서 막 그 사람은 인간도 아니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때 제일 열을 올리면서 그 사람은 그런 분이 아니라며 반대한 사람이 있는데 누구겠습니까? 이 목사님이었습니다. 내가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인격은 그럴 분이 아니다. 그랬더니 양쪽에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의 이야기가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하는 사실 하나는 아마 지어내서 그렇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친구 하나도 그분이 말도 안 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돈키오테처럼 밤중에 막차를 타고 그분께 가서 새벽에 그분의 집의 문을 두드리면서 나 좀 만나자고, 누구냐고 하니까 나는 대학원 학생인데 어째든 당신을 만나야지 되겠다고, 우리 다들 그랬습니다. 너 가봐야 그 교계의 거물이 만나주지도 않는다. 부목사나 만나면 다행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나고 나서 자기가 그 목사님과 한 시간 반을 독대했다는 것입니다. 돌아와서 이 친구가 한 시간 30분 만에 그 전에는 그 목사님의 일이라면 이를 갈고 소리소리 지르던 친구가 완전히 팬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분이 내가 가서 보니까 인격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단순한 재물의 문제입니까? 단순히 돈이 문제입니까? 그 목사님이 봉투하나 받았기 때문에 변신한 것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용납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깊이 용납합니다.
여러분은 조폭을 다룬 영화 같은 데 보면 거기서 쭉 둘러앉아서 마피아 같은데서 회의하다가 두목이 갑자기 빠따 방망이 들고 와서 어느 놈 뒤에 가서 골통을 날려서 깨트려서 죽이는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뻥입니다. 제가 회심하기 전에 조폭에 깊이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볼 것이 없습니다. 그런 태도가 비 복음적인 태도입니다. 여러분들이 조폭보다 의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조폭에 깊이 개입되었다가 나온 친구가 있었습니다. 아주 굉장히 성품이 좋고 점잖았습니다. 배우지 못했어도,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폭의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피를 나눈 형제 같은 의리로 맺어졌다고 합니다. 단 조건이 있는데 배신하지 않는 한, 배신하면 그때는 칼이 날아가고 정말 폭약이 오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배신하지 않는 한 그런 형제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오죽하면 사랑이 없는 교역자들을 보면서 조폭 오야지만도 못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하는가 하면 깊이 끌어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자기편을 어떻게 만드는지 아십니까? 신문에 모집해서 공채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어깨 좀 쓸 놈 같은데 돈도 없고 오갈 때도 없는 이런 아이들을 찾아내서 그래서 그냥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고 도와줍니다. 그래서 조직에 대해서 생명을 걸게 만듭니다. 거기에 한번 들어가면 못 나옵니다. 그렇게 합니다.
하물며 아무 쓸모없는 인간을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만났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베푸는 삶을 사는데 인색해서는 계속해서 외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고립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자신을 구원해가는 방식 자체가 자기의 것을 무엇인가 움켜쥐고,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또 이렇게 반론을 제기할 것입니다. 목사님, 나 이 설교할 때마다 나를 쳐다보면서 나는 뭐 물질밖에 모르는 놈처럼 그렇게 째려보시는데 나 그렇게 물질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누가 물질을 사랑한다고 그랬습니까?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하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나로 인해서 해택 받는 것을 좋아하는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누리게 하라.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렇습니다. 목회자를 만나면 주위에 사람이 개기는 사람이 많다고,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당신이 사람이 참 좋다는 것이다. 오죽 사람이 못되었으면 개기는 놈도 없는가. 사람들이 살면서 물질을 사랑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구현해가는 방식 자체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누리게 하는 것, 그래서 나를 더 깊게 하는 것,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서 그들에게 도움이 되게 하고 기쁨이 되게 하고 그러는 것이 내 마음에 좋은가 이것을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나쁜 성격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게기지도 않고 게김을 당하지도 않는 사람, 남한테 기대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대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 사람, 이 사람은 홀로 무조건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기대고 사는 사람보다 더 나쁩니다. 왜 후자, 전적으로 남에게 기대면서 사는 사람들은 항상 미안한 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돌이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자의 사람은 자기 의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안 됩니다.
제가 요즘 결심을 하고 소위 이야기하는 진부주의라고 이야기도 하고 자파라고 이야기하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집중적으로 몇 달 공부를 해서 나름대로 시야를 가져보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너무 근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볼 필요는 없습니다. 복음의 중심에 서 있으니까. 그중에 한 자파의 의사 이야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프랑스에 오래 살다가 온 사람인데 자본적이라고 하는 구조 자체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맞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경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치열하게 경쟁을 하게끔 제도나 이 모든 것의 시스템이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을 낳아서 처음 교육을 시키고 학교에 보냈을 때 그런 경쟁을 잘 하도록 교육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회는 것 잡을 수 없이 무자비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회 자체가 그런 자본주의적인 사회가 그런 치열한 경쟁 속에서 굴러가게 되었기 때문에 구조 속에 들어가면 자기가 노력하지 않아도 치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교육의 과정을 통해서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본적인 기본기들을 갖추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경쟁을 해야지 되겠는데 실력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겠습니까? 꼼수를 쓸 것이 아닙니까? 자기가 정식으로 연구해서 개발을 하지 않고 돈을 주어서 다른 개발설계도나 빼내고 이럴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정정당당하게 페어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기본기를 익히는 것이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어디에 집중적으로 아이들을 가리켜야지 되는가 하면 자본주의 사회자체가 철저한 경쟁이기 때문에 경쟁하는 것부터 가리키지 말고 그 경쟁 속에서 어떻게 사람과 어울려 살수 있는지를 먼저 가리켜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그렇게 배운 것과 경쟁사회 속에서 살아나을 수 있는 기본적인 실력이 베이스, 그리고 경쟁으로 몰아가는 자본주의 사회구조, 이 세 개가 삼위일체가 되어서 톱니바퀴처럼 물려가면서 그러면서 자본주의 발전적인 삶과, 그 다음에 발전의 그늘 속에 소외된 사람들을 따뜻하게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 사랑의 시각을 함께 가지면서 사람이 성장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안 그렇습니다.
지금은 좀 나아졌는데 대학 정원제가 실현되던 때에 제가 이화여자 대학교에 특강을 하러 간 때가 있습니다. 거기 학과장 한분이 저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뭐라고 하는가 하면 너무 황당하다고 하는데 무엇인가 하면 ‘나 노트 좀 빌려줘.’ 그러면 옆에 있는 친구가 싫어. 그런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느 놈이 대학제도를 이따위로 만들어서 인간관계를 다 파괴했다는 것입니다. 컷닝을 하면 다 이른다고 합니다. 물론 컷닝하는 것 자체가 부도적하지만 그렇습니다. 무슨 선지자적인 심정에서 이르는 것이 아니라 저놈 하나가 떨어져야지만 자기가 정원제 안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대 같은 곳은 군대도 안 가기 때문에 항상 졸업정원은 40명인데 있는 애는 45-6명이 되고 심하면 48명이 된다고 합니다. 8명은 자동적으로 졸업을 못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퇴하지 않는 한, 휴학하지 않는 한,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 사회가 그런 사회를 만들어서 도대체 뭘 하겠다는 것인지, 오죽했으면 어느 외국 사람이 한국 사람과 남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서 아이고 도시가 넓네요. 인구가 얼마나 되나요? 1200만 명입니다.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서 사람이 많으면 뭘 먹고 삽니까? 옆에 있던 한국 사람이 서로 속여먹고 삽니다. 이게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베푸는 것이 어려서부터 그렇게 해야지 되는데 사회가 그렇게 못 만들어주었습니다. 개떡같이 교육을 시켜났습니다. 나는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다면 유치원에서 글을 못 가르치도록 법을 만들어야지 된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모여서 5명 모아놓고 너희들 모래성 쌓아라. 10명 모아놓고 너희들 하나도 떨어지지 말고 같이 브럭 쌓아라. 이러면서 함께 섬기고 함께 생활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유치원을 삼년을 국가의 돈으로 다니는데 3년 동안 아무 것도 안 하고 계속 아이들을 놀린다고 합니다. 함께 노는 것을 배우게 합니다. 가르쳐줍니다.
결국 이런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우리가 동떨어져서 진공상태에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교회에서 그런 사랑을 베풀고 나누어주고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가는 그런 복음의 본질적인 신앙의 태도들이 사라져가게 된 것은 사실은 복음 자체의 영향의 부재에도 많은 원인이 있지만 또 하나는 사회정신이 시대의 정신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어느 사회심리학자가 오늘날 흥부가 다시 살아나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과학적으로 전부다 심리분석과 사회분석을 다한 결과 쪽박을 찬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놀부는 살아남는데 흥부는 쪽박 찬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에 베푼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박탈당한다고 생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필요이상으로 자기 보호적이 됩니다. 그러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사랑을 찾아보기가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자기의 존재를 인해서 사람들에게 누리게 하고 자기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해택의 근원이 되게 하는 그런 삶에 대해서는 아주 굉장히 낯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은 이성적이나 가능한 삶이지 실제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가능하지도 않고 그렇게 살면 쪽박 차기가 딱 맞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의 가치를 어디다 두는가,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내가 결혼하는 젊은이들에게 항상 이야기하는 게 무엇인가 하면 빨리 집을 마련하려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2평 아파트에 목숨을 걸 일이 있는가. 전세를 살든 사글세를 살든 살면 되는 것이지, 그게 무슨 32평을 위해서 부모에게도 사람 노릇을 못하고 형제에게도 인심이 사나운 사람이 되어서 미친 듯이 헌금도 안 하고 돈을 모아서 그렇게 해서 24평, 24평에서 32평 하는데 아파트와 함께 망할지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24평에서 한 5년 더 살면 어떻고, 전세 살면서 집 사는데 다른 사람이 한 7년 걸릴 것을 나는 한 9년 쯤 걸리는 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고 사람들로 하여금 나로 하여금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당장 물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한번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자신은 사람들이 당한 고통이나 어려움, 그리고 아픔이나 어려움, 그리고 아픔과 곤고함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많이 고민거리가 되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게 여러분들 안에 있는 사랑의 척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반성해보면 우리의 마음에는 그런 저장고가 거의 없이 살아가는 적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니까 말로는 사랑을 운운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런 것들이 거의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클라이드 라이드라는 사회학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들은 많이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고독은 심화됩니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개체로서의 의미만 갖는 번호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그런 것이 참을 수 없는 모욕이 될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저 앞에 서서 인사를 하면서 828번 오래간만입니다. 아이고, 623번도 오시고 새로 나온 애는 627번이라며, 그렇게 하면 여러분 얼마나 짜증이 나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취급받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그리고 지금은 내가 당장 돈이 없어서 헌금을 많이 못하고 배운 것이 없어서 유능하게 사람들을 가르치지 못하고 심지어는 건강도 안 좋아 지체들의 도움을 받으며 휠체어를 타고 그렇게 예배당에 들어와야지만 된다고 하더라도 정말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존귀히 여김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나지 않습니까? 사람이라는 말만 들어도 정말 눈물이 나지 않습니까? 이게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삶에 대해서 가져야 할 견해입니다.
그래서 모두 우리들이 흔히 쓰며 이야기하는 인복이다, 사람 덕이다 하는 것은 모두 계곡을 메아리쳐 돌아오는 하나의 울림입니다. 내가 계곡을 향해서 욕을 하면 욕이 돌아오고 사랑을 노래하면 노래가 되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오늘 이 시간에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매일 똑같은데서 쳇바퀴처럼 돌지 말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그리고 우리가 조금만 눈을 돌리면 정말 많습니다. 저는 사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신앙에 있어서 무기력함을 벗어버리는 계기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감사를 잃어버리고 살다가 정말 고통 받는 사람을 상담하면서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우리를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점유되고 빼앗겨지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누림을 당하는 일에 있어서 오히려 즐거워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일생을 살면서 보여주신 정신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부자였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분이였습니다. 그리고 아마 예수님의 돈 통은 항상 비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일생을 베풀면서 사신 생애였다고 하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여러분들 가운데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아무 것도 없으신데 어떻게 늘 베푸시면서 살 수 있으셨습니까? 그것은 그분 자신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생애를 사셨고 사람들이 자기를 누리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고 오히려 그분은 사람들에게 갈기갈기 자신이 찢어지시는 것을 자신이 좋아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없이 자기를 나누어주시는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예수님으로부터 나눔을 받은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사람, 거기에서 흘러나온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누리면서 새 삶을 찾았습니다. 아무 하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던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었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너무 거시적인 것만 보면서 작은 것을 놓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작은 것에 집착하다가 큰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항상 이 구속사의 물줄기속에 굽이치는 한 물방울과 같은 존재로서 나는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나는 정말 풀이오,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서 맛보는 영광은 그 풀의 꽃과 같으니 이는 모두 다 시들고 떨어지는도다. 그렇게 말해야 하는 거시적인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인생 그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절망에 가까운 그 허무에 대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야지 그것을 딛고 가치가 아닌 것들을 지워버릴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고 그리고 참된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생겨납니다.
17세기의 청교도들이 그렇게 탁월한 거룩의 삶을 살게 되었던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모두 열심히 죽음을 인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거시적인 신앙의 시야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시적으로 생각하면서 자기의 배만 위한 삶을 산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종말이 가까웠으니까 오늘은 먹고 마시자. 기회가 없다고 말하는 허무주의자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거시적으로만 보지 말고 오늘 하루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나보다 못한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을 깊이 긍휼히 여기고 그리고 내가 그들보다 나은 만큼 다른 사람이 나를 누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물질이 있으면 나누어주고, 건강이 있으면 건강한 사람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섬기고, 지식의 빛이 있으면 자기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서 그들이 빛이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리고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기쁨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 기쁨을 전해주고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살아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삶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누리게 하고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 참된 의와 가치가 그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를 버리고 낮아지고 죽기까지 복종하고 그래서 그 사람들이 자기를 누리게 하는 그런 삶,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자기 양떼들을 향해 가졌던 마음입니다. 내가 재물도 허비하고 나 자신도 허비하리라 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사람들에게 누림을 당하기를 원하고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해택을 받기를 원하는 그런 삶, 그게 바로 재물을 가진 자의 삶입니다. 그게 곧 재물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떻게? 늘 친구가 끊이지 않습니다. 늘 주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교수생활을 하면서 뜻밖에 교회를 개척하게 했던 여러 가지의 요인이 있었지만 그 중에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어떤 계기의 마련이었습니다. 교수생활을 하면서 전도사를 했는데 그 교회에서 교역자 수련회를 갔습니다. 교역자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전도사, 목사, 남자 전도사, 여자 전도사가 대판거리 싸워서 마음이 다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그 자리에 앉아있는데 너무 견디기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학교에 마침 일이 있어서 나는 비행기를 타고 먼저 올라왔습니다.
그 후에 어느 강변에서서 그 강을 이렇게 내려다보는데 시편에 나오는 우리가 바벨론 강가에 모여서 예루살렘을 기억하며 울었다는 성경의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교회에서 교역자들이 얼굴을 붉히고 싸우고 심지어는 돈 때문에 다투고 하는 그런 광경을 보면서 만약에 지금은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지만 내가 교회를 하나님께서 개척하게 하시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시고 이 강가에 사랑하는 동역자들이 모여서 이스라엘 백성이 잃어버린 예루살렘의 영광을 위해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사랑하는 지체들이 이 강변에서 돗자리 깔고 총총히 쏟아지는 그 별빛을 맞으며 밤새워서 기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아마 이 지상에 하늘나라가 내려온 것 같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최초로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없는데 기회가 있으면 나에게 그 행복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성화되지 않고 모진성품들이 여러분들에게 많은 상처와 고통을 주지만 그런 허물을 제외하고 나면 분에 넘치도록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정말 살면서 일평생을 우리는 예수의 정신을 가지고 그렇게 가시고기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누리고 그렇게 보면 내가 오늘 겪고 있는 아픔이라고 하는 것은 나보다 더 아픈 지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고 내가 오늘 겪는 물질적인 궁핍과 그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더 어려운 지체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생을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나누어주는 그런 생활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시면서 아마 마음 깊이 안타까웠던 것이 더 많이 자신을 나누어주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마 더 많이 나누어주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더 많이 자신의 피를 따라서 목마른 자들의 입에 부어주시고 자신의 살점을 찢어서 입에 넣어주시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많은 지체들이 모두 나는 사랑한 적이 없지만 예수님의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관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누리는 삶을 살고 그것들이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서 나 중심으로 사는 것을 아주 미워하고 혐오하고 옛사람의 아주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사람들로 무수히 나를 누리면서 살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하늘나라에서도 보상을 주지만 이 땅에서도 보상을 주시는데 그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항상 많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 그늘 아래 깃들어서 그리고 진정으로 그렇게 예수를 보여주며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그래서 그들로 이기심과 아집을 버리고 그 사람의 본을 따라서 살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많은 친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친구 없이 사람의 완성은 없다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리라”(잠17:17상)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이것은 어느 한편에서 어느 한쪽으로 흘러들어가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라고 하는 관계를 통해서 흘러들어가고 또 흘러나오는 사랑의 풍부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이 들고 가정을 갖게 되면 새로운 친구를 사귀면서 그 친구를 뼈 속 깊이 우애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인생을 많이 살고 사려가 깊어지게 되면 사람을 향한 적절한 예의를 갖추게 되고 때로 그런 예의는 사랑에 많은 장벽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로 서로를 침범하지 않은 범위에서만 교제를 하기 때문에 사실은 나이가 많이 든 사람들은 친구관계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어렸을 때는 항상 친구에 목숨을 겁니다. 아마 부모와 형제보다 더 친구를 소중하게 생각해본 경험들이 여러분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우리 때, 중 고등학교 때만 해도 검정 교복을 입고 둘이 서로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고 변치말자 영원한 우리의 우정, 그런 1969년 몇 월 며칠, 이런 촌스러운 사진들이 유행했었습니다. 우리 세대보다 한 10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더 신파적입니다. 팔뚝에다가 칼로 살짝 긋고 피가 흐르게 한 다음에 양쪽에서 붙든 다음에 그리고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다. 그리고 사진관에서 촌스럽게 사진을 찍던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서구문명이 물밀 듯 밀려오면서 개인주의가 팽배해지고 그러면서 친구를 사귀는 것도 다분히 수단으로서 변질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임마누엘 칸트가 이야기했듯이 친구는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수단이라기보다는 사람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그런 가치를 지향해야 합니다. 그런데 친구가 이렇게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는 관계가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관계에 있어서 어느 한 관계에 있어서는 정말 승리해야지 된다.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 한번 들어보십시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없는 많은 장애가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승리했다. 그래서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고 나는 그 부모님을 깊이 사랑하면서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런 것 있습니까? 혹은 서로 우애하지 못하는 동기간에 우리 언니, 그리고 우리 오빠, 혹은 우리 동생, 우리 누이는 함께 사랑을 나누며 살기 어려운 매우 독특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고 환경도 우리가 그런 사랑의 관계를 가진 채 끊임없이 사랑이 흘러들어가고 흘러나오는 그런 관계가 되지 못하도록 많은 방해요인들이 환경 안에 있었지만 그러나 결국 나는 승리했고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많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이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 것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결혼을 꽤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력으로 안 되면 사력으로라도 도움을 받아서 결혼을 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하십시오. 하는데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결혼하는 것은 돈이 좀 있으면 하고 방 하나 얻어서 냄비하고 바가지 몇 개 사다가 놓으면 살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항상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면 그 사람은 완성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가로부터 한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일에 있어서 온전히 사랑을 받을 줄 아는 기술을 터득하면 인간이 완성된 것입니다. 프랑스의 혁명가 중에서 드메로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혈기방자 하던 젊은 날에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내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겠습니다. 성숙한 중년의 어떤 사람이 제게 능력을 주셔서 우리 가족들이 변화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죽음을 앞둔 노년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변화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지난주에 읽은 조나단 웨드워즈는 저작 속에서 그 저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Sprituality is the stirit of Love 도대체 영성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은 사랑의 영이 우리 안에 충만히 계시는 것이다. 그 조성모라고하는 가수가 나오기 전에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독특한 음성을 가진 청년인가 누가 말이지 가시나무라고 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곡이 대중가요로 히트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그런데 그것을 들으면서 좋아서 판을 하나 샀습니다. 처음에 그 노래를 들었을 때 전 온 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어쩜 그렇게 회심하기 이전에 내 이야기입니다. 회심하고 난 후에도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습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아까 우리 512장 찬송, 512장 찬송이 없었더라면 아마 제 인생이 매우 건조했을 것입니다. 그 찬송을 친구 삼으면서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소절이 너무나 뚜렷합니다.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큰 은혜를 주신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내 평생에 힘쓸 그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이 찬송에 동의할 수 없었던 때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의 고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오시기에는 내 마음이 가시나무 숲처럼 많이 안 좋습니다. 그분이 오셔서 편안하게 쉬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그런 정도의 능력이 없습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실 사랑의 열렬함에 있어서는 오늘날이 훨씬 더 자극적입니다. 그게 순애보는 별로 없어도 하여튼 충동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그 충동적인 사랑의 힘, 그것은 백년이나 뭐 옛날에 정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물론 케이스마다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면 좀 실례가 되는지 모르지만 현대의 젊은이들의 사랑 속에는 적당히 광기가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뭐에 있어서 그런가 하면 충동적 성격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자꾸 대중가요 비슷한 이야기를 해서 안 되었습니다만 하지 말까요? 하겠습니다. 대중음악을 저는 거의 안 듣는 편입니다. 그런데 셀링 디온이라고는 하는 가수는 좀 제가 주목을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음악성이 상당히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벌써 오래된 이야기지만 파워 오블러브 라고 하는 노래를 불렀는데 저는 그 노래를 들으면서도 비록 그 사람이 아마 크리스천은 아니라고 제가 알고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라고 알고 있는데 그런데 거기서 그런 어떤 종교적이고 어떤 힘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인간 깊은 내면 밑에 흐르고 있는 그 사랑에 대한 치열한 열망, 그리고 그 사랑의 힘으로서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려고 하는 그런 의욕 같은 그런 것을 진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한 힘을 가진 것 같아도 무엇인가하면 지속성이 너무 없습니다. 옛날에는 대게 결혼을 해도 중매로 했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일주일동안 잠자리를 같이 했는데도 신랑 얼굴을 몰랐다고 합니다. 밤에 와서 같이 자고 아침이면 나가고 집안에서 마주쳐도 너무 남부끄러우니까 고개를 숙여서 누가 신랑인지 무릎 아래만 보고 지냈다고 하는데 그 시대에는 우리 할머니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다 그랬습니다. 그래도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충동적인 연애 감정은 현저히 부족했어도 그들이 사랑하는 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알아갔습니다. 요즘 결혼 주례를 설 때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둘이 사랑해, 그리고 이렇게 서로 고백을 하고 좋아하는 연애는 비용이 들 게 없습니다. 데이트 비용이야 좀 들겠지만 좋잖아요. 그것을 마치 비유를 하자면 낙조가 내리는 해변에 둘이 바다를 바라보고 어깨를 감싸고 앉아서 속삭이는 것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그게 아니라 낙조가 떨어져서 아름답기는 하지만 바람이 불어서 심하게 풍랑이 이는 바다에 조그만 배 하나를 띠우고 두 사람이 올라타서 노를 저어서 어떤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뱃머리를 때린 파도가 포물선을 그리면서 머리 위로 지나가 온 몸을 짠물로 뒤집어쓰고 그리고 뒤에서 한손으로 노를 저으면서 한손으로 발목까지 차오르는 물을 바가지로 퍼내면서 그러면서 항해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다 건너지 못하고 거기에서 배가 뒤집힐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입니다. 충동적인 연애감정은 현실을 돌파하게하기에는 너무 성격 자체가 일시적입니다. 그 충동적인 연애감정은 인격화된 사랑이 아닙니다.
어렸을 때 중학교 3학년 땐가 우리 때는 극장을 가다가 걸리면 무조건 정학이었습니다. 학생입장 가라고 써 있어도 정학이었습니다. 그 학교 앞에 학생 극장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이루어졌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메타리 무드가 나오는 초원의 빛이라는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봤는데 그때는 감수성이 아까 이야기할 때보다 배는 더 예민했던 때니까 영화를 보고 와서 삼일 동안 앓았습니다. 그 여자와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윌리암 워드 워드에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하면서 흘러가면서 찝차를 타고 돌아가는 그 마지막 여자의 모습을 보면서 삼일 동안을 앓았습니다. 지금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 할머니하고 뭔 상관이 있겠습니까? 돌아가신 그 할머니하고 그런데 그때 삼일 동안에 솟아오르는 뜨거운 사랑의 감정이 솔직히 이야기하면 지금 우리 집사람을 사랑하는 감정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그런데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이것은 인격화된 사랑이고 그것은 충동적인 연애감정입니다. 이것은 자기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아무 것도 모르고 정리도 하나도 안 된 사람들이 장가를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않아도 지금 못가고 있는데 갈 길을 막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성숙해지라는 것입니다. 하여튼 지금도 생생한 기억입니다. 마치 홍역에 걸린 사람처럼 앓았습니다. 삼일 동안, 그런 영화가 몇 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충동적 연애감정입니다.
하나님을 우리들이 사랑한다고 할 때도 하나님은 그런 감정을 아주 싸구려로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삶 전체에 배이고 그 사랑의 마음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그런 종류의 인격화된 사랑을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제가 목회를 하고 설교를 하면서도 가장 경계하는 게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들의 감정을 겨냥해서 확 불러일으켜서 그래서 무엇인가 충동을 갖게 하는 이것은 아주 사악한 일입니다. 뜨거워지지 않아도 그렇게 인격화되고 성품화 된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우리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정말 한 인간을 끝까지 온전하게 사랑하려고 힘써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대상이 있습니까? 엄마, 아빠, 아니면 동생, 누나, 여자 친구, 남자친구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하게 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에게서 자기가 싫어하는바가 발견되면 그 싫어하는 바와 그 사랑하는 대상을 나누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실 것입니다. 나누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을 그 안에 있는 결점이나 결함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고 그러는데 사실 그것은 그 사랑이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게 사랑받는 사람도 가변적이고 사랑하는 사람도 가변적입니다. 똑같은 된장찌개도 어느 날 먹으면 맛이 하나도 없고 어느 날은 된장 주신 주님께 찬양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물며 사랑을 받는 이 사람도 변하고 나도 가변적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저 사람이 아무리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변해간다고 할지라도 내 마음이 온전히 사로잡아서 그를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그런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능력이 있으면 그 사람은 나로부터 사랑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완성된 사람이니까. 여기까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렇기 때문에 결국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게 하는 어떤 자원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대부분 친구 관계를 정리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사실 가족관계는 정리할 수가 없습니다. 아빠를 자르겠습니까, 엄마를 자르겠습니까, 자식을 자르겠습니까?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기준에 어긋나도 혈연이라는 끈에 의해서 그냥 시집 장가갈 때까지 개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멀리 가면 잘됐구나 하고 끊어지는 것이고 그런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친구는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습니다. 안 만나면 그만이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또 죄인들이기 때문에 매정함에 있어서는 긍휼을 베푸는 인간성보다는 훨씬 더 매정한 기질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한번 안 본다. 그러면 안면 까고 안 보는 것, 못하는 사람보다 잘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것을 마치 자신의 고상한 인격적 결단의 특징인 것처럼 이이기하는 사람들은 진짜 짐승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보십시오.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며 의기투합한 상태를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함과 같이 친구가 친구의 교제를 통해서 더욱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있어서 다듬어지지만 또한 친구가 함께 사귀면서 사람들 속에서 부딪히면서 비로소 자신의 결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사람과 부딪히면서 깨트려지기 전에는 자기 자신 속에 결함이 있는 것을 발견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을 빨리 발견하고 잘 고치는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사람을 많이 잃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 깨닫거나 아니면 깨달아도 그것을 고치기를 매우 싫어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외톨박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행히 그 사람이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지위를 얻었다 그러면 그 사람 자신을 목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의 재산이나 지위를 노리고 접근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에워싸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군중 속에 고독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향기로운 사람을 좋아합니다. 인격의 향기, 그런데 사람을 사랑할 때 진정한 사랑은 이것을 떼고 저것을 때내면 아 내가 진짜 사랑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가 어디서 입증할 있는가 하면 우리들이 예수님의 사랑에서 입증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믿는 그 순간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더 신앙이 깊이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구속했네
깨닫게 됩니다. 그때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약속으로 치면 외인이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난 자이고 그리고 이방인이고 그리고 죄의 종노릇하며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아가던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긍휼의 풍성한 사랑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고 선택의 동기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왜 그러면 나를 사랑하셨는가. 그것은 모릅니다. 우리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택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때 우리는 죄와 우리의 성품이나 영혼이 분리되었습니까? 아닙니다. 함께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분리되지도 않았는데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녹이십니다.
내 마음을 녹이셨네
녹이십니다. 그때 마음이 녹을 때 우리의 마음이 녹을 때 우리들이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아, 우리 안에 너무 더러운 것이 많구나,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너무나 많구나.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갈아 불타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계속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성화의 동기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에 대한 사랑의 경험이 없이는 신자가 결코 성화될 수 없습니다. 성화를 알아도 그렇게 할 힘이 없습니다. 율법주의자는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화된 그리스도인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핵심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현재적인 체험입니다. 그러면 뭐가 나오는가 하면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바와 같이 투 다이 이스터 케이 내게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는 고백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사랑은 무슨 오이엠 방식으로 그렇게 주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런 형을 좋아하거든, 내 사랑 받으려면 네가 그렇게 되어야 돼, 그러면 그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도 그렇게 노력을 안 하는 사람들인데 그것은 완전히 제왕적 가치관입니다. 내가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가서 여러분들이 아무리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체험했다고 할지라도 나는 너 싫거든. 그런데 사랑하고 싶어, 그런데 몇 가지 중요한 치명적 결점이 있거든 게을러, 어떻게 인간이 되어서 10시 반에 일어날 수가 있어. 그것도 고치고 옷은 그게 뭐야. 매일 고추장을 발라서 말이지, 깨끗하고 세련된 옷을 입고 다니지, 말이 너무 많아, 좀 고쳐 그럼 사랑해줄게, 그러면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네 사랑을 안 받아도 돼.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남이니까 말은 쉽게 하는데 그게 일생을 살아오면서 친구처럼 자기와 하나 된 성품이고 삶의 방식입니다. 그게 틀렸다고 말로 해서 고쳐질 것 같으면 설교를 이렇게 오래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친구가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친구가 거의 없다. 또 친구가 가끔 맺어져도 수시로 친구가 나를 자르고 친구도 나에 의해서 잘린다. 그래서 결국은 오락가락 하지만 그러나 없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해야지 됩니다. 내 인간성은 참 더럽다. 이렇게 생각해야지 됩니다. 표현이 너무 거칠어서 죄송하지만 좀 경건한 표현으로 바꾸면 나는 아직까지도 많은 성화를 필요로 하는 제 생긴 대로 살아가려는 성품을 가진 인간이구나. 그것을 자각해야지 됩니다. 향기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한때 양란에 흠뻑 빠졌습니다. 자태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동양란과 서양란을 비교해보면 동양란은 진짜 시골스럽습니다. 서양란은 서양여자들과 같이 예쁩니다. 그런데 재미가 하나도 없는데 빛깔은 예쁜데 향이 없습니다. 향이 없습니다. 그러면 쉽게 진력이 나게 됩니다. 그래서 산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산이 왜 악자 들어가는 산이 있습니다. 북악산, 관악산, 월악산, 이런 산은 바위산입니다. 그런 산 말고 풍부하고 기름진 토양을 머금고 있는 아름다운 산. 거기는 가는 곳마다 화초가 있고 그 다음에 식물의 군락이 형성되고 약초가 있고 그 다음에 어디를 한번 갔더니 더덕 냄새가 확 났습니다. 개울 건너에서부터 더덕 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많이 묻혀 있으면 그렇겠습니까. 그런 산은 끊임없는 탐구의 대상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뭐가 그런 것을 가져다주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의 성품이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친구를 수시로 자르고 바꾸고 집어치우고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을 그 사람이 사람이라는 사실 자체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깊이 사랑하면서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모든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완성되기를 희망해야지 됩니다.
보십시오,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얼마나 사랑이 없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깨달을 수 없습니다. 어느 날 담임 목사실에서 막 나오려고 하는데 어느 결혼한 지체가 비서실을 들어오더니 잠깐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해서 앉자마자 막 통곡하면서 웁니다. 왜 그러는가? 어머님이 편치 않으시는데 여러 날 동안을 간호하다가 보니까 너무 힘이 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막 화를 냈는데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오니까 마음이 너무 찢어지는 것같이 아프다고, 그래서 내가 위로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다 너나없이 그런 존재다. 그게 이상한 게 아니라 우리가 원래 그것 밖에 안 되는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 안에 무엇인가 많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위장해서는 안 됩니다. 없습니다. 우리 안에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죄 있고 흠 있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세리와 창녀들, 기생들, 병자들 이런 사람들과 그렇게 가까이 계실 수 있었던 이유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고 부여해진 사랑의 원천이 그분에게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이 악한 일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사랑을 받거나 창녀 짓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사랑을 받았다기보다는 엄밀하게 말하면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서 자신이 행한 일이 악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자신들이 이런 사랑을 받기에 얼마나 부적합한 존재인지를 아주 뼈저리게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마음이 생겼는가 하면 예수님의 마음에 들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어 합니다. 그런 마음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세리들이 긍휼을 베풀 줄 아는 신자로 바뀌었고 창녀요 기생들이 거룩한 여자들로 변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되 끝까지 예수님이 잡히실 때가 다가왔을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께서 자기의 때가 이른 줄을 아시고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렇게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실 거룩이라고 하는 마지막 삶의 열매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거룩의 마지막 삶의 열매는 결국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사로잡혀서 주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해서 자기와 접촉한 모든 사람들이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것, 거기에 기여하면서 사는 것, 그게 바로 진정한 의미의 거룩의 마지막 열매입니다. 거룩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성화의 정도를 보려면 그가 그 부패하고 희망이 없는 인간들 속에서 그 존귀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어떻게 발견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존재 그 자체로서 그 사람을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그리고 그를 온전히 사랑하는 일에 자신을 거는가. 그것을 보면 성화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많이 성화된 사람들은 많이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깊이 파헤친 시리즈가 고린도 전서 13장 시리즈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꼭 들어야 합니다. 26개로 되어 있는 시리즈인데 반듯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전체를 바라보는 안목이 거기 고린도 전서 13장에 달려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랑해야지 됩니다. 그때에 그 사랑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인이 결국 나중에 경험해보면 알게 되지만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랑해야 할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진정한 사랑의 감정은 자신이 이미 베푼 사랑을 너무 지나치다거나 충분하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진실한 사랑의 감정은 자신이 이미 베푼 덕이나 호의가 충분했다거나 혹은 그 사람의 존재에 비하면 지나쳤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사랑의 감정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이 사랑은 목마름이라는 별명을 가진 욕망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사랑해도 항상 자기와 사랑하는 그 대상을 충분히 사랑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항상 그 대상이 자신이 바치는 사랑보다는 훨씬 고귀한 가치가 있는 대상이라고 확신하고 그리고 그 가치에 비하면 자신의 사랑은 매우 적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예수께서 식사하실 때 와서 향유를 부은 그 여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게 그런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해서도 있어야 하고 그 마음에 기초가 되어서 인간을 사랑하는데 있어서도 그게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 친구가 나를 사랑해줄 때까지 사랑하고 그리고 내가 사랑한 것에 대한 적절한 대가가 친구로부터 되돌아올 한도 안에서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자아 사랑의 연장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를 있는 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받는 사람의 행복해지는 상태를 인해 자신이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의미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다가 보면 자기가 얼마나 불안전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온 인류를 가슴에 끌어안고 가슴 벅찬 코스모 폴리탄 이즘을 이야기하는 사람보다는 부족한 한 인간을 온전히 섬기며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를 바쳐본 사람이 사랑의 실제에 대해서 훨씬 더 잘 압니다. 그래서 키에르 케고아가 자기의 책 속에서 이이기하기를 이 세상에는 추상명사로서의 인류는 사랑할 수 있지만 눈에 보이는 한 인간을 사랑할 수는 없는 불구의 크리스천들이 너무나 많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추상명사로서 인류를 사랑한다면 가슴이 에이는 것 같은 인품이나 자기 부족과 끊임없는 헌신, 그리고 비참한 자기 패배 같은 것,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 한 인간을 사랑할 때는 그것을 철저히 느낍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은혜 받은 사람들을 목회자를 만드시지만 또 어떻게 보면 성질이 더러운 사람들을 목회자를 만드시나보다. 왜 그 목회를 하면서 깎이는 그 과정이 너무 아픕니다. 정말 아픕니다. 제가 기도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유 중에 거의 사분의 삼이 대게 그런 것입니다. 뭐 교회가 안 지어지면 어떻게 하나. 물론 그것도 근심이 되지만 그게 뼈를 깎을 정도는 아닙니다. 어차피 이 집에 내 집인가. 당신집이지, 하나님의 집인데.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우리 자신을 완성되어 가게 하시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끊임없는 자기 헌신 속에서 무한한 복종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을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사랑을 받는 대상의 가치를 생각하면 사랑이 실천이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이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서 우리가 완성되게 하시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그 기대하시는 사랑의 성격이 무엇인가 하면 무한히 복종적이고 완성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과연 이런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 이렇게 반문을 하게 되면 사실 사랑은 그 순간 실천이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도 그렇게 사랑하지 못하는데 그런데 무슨 자기 연인도 아니고 아내와 남편사이도 아니고 남편도 마찬가지지 그렇게 사랑을 하게 됩니까? 안 되지, 그런데 그 사람을 향해서 그렇게 무한대의 헌신과 복종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이유 자체를 사랑받는 대상의 가치에서 찾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성격이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예수님께서 피흘려주셔서 하나님이 구원해주셨습니다. 본전을 찾았습니까? 본전 생각하면 그냥 다 쓸어버리고 하나님이 흙을 빚으셔서 다시 인류를 창조하시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본전을 떠난 사랑입니다. 왜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가 하면 그게 하나님 자신의 존재입니다. 그분의 경향성입니다. 그게 본질입니다. 그러면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안 됩니다. 대답할 수 있으면 하나님이 파악이 된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우리는 그분의 가슴 저미는 사랑에 대상일 뿐이다. 그것만 우리가 알 일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런 사랑을 깊이 힘입으면서 그러면서 그것을 친구관계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를 사랑하되 그의 결점까지, 그의 아픔까지, 그의 살아온 과거의 쓰라린 기억까지 모두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끔 사랑하는 관계였는데 과거에 대한 이이기를 듣고 실망을 해서 사랑이 사라집니다. 사랑의 시험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있는 어떤 상태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사실 그 자체, 그가 하나님이 나를 만나게 해주신 친구라는 사실 그 자체, 그것 때문에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이루어가면서 자신이 얼마나 불안전한 인간인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백 명을 집적이며 사랑한 사람보다는 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 사랑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가슴 졸이고 죽고 자기가 파괴되고 자기가 깨트려지고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가슴 졸이는 그 과정을 통해서 세워진 그 사람의 성품이나 이런 모든 것들이 훨씬 뛰어나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자들이 이 마지막 때를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도 끝까지를 매우 강조했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이기리라. 끝까지 사랑하는 자는 승리하리라. 그게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보면 이렇게 사람들에게 잘 해줍니다. 성품이 좋으면 사람들에게 베풉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베풀면 공포에 휩싸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거나 관심을 받거나 베풂을 받으면 두려움에 휩싸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뭘 베껴 먹으려고 그렇게 잘해주나. 분명히 건네주는 저 맛있는 케이크 속에는 독이 들어있을 거야. 저 친절한 언어 속에는 뭔가 나를 죽이려는 비수가 숨겨져 있을 것이야. 이 파티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까? 그리고 한시 불안전합니다. 이런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한번도 누구를 끝까지 사랑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미완성의 버려진 황폐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남을 사랑하는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의 완성입니다. 조금 더 하겠습니다.
(예화: 고등학교 다니실 때 보시던 영화 ‘언제나 마음은 태양’이라는 영화 내용)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랑을 하는 것만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 것만큼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것만큼만 사랑을 할 수 있지, 어느 한쪽이 기형적으로 발전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가 하면 결국 내가 누군가를 사랑 그 자체로서 깊고 진실하게 사랑하는 것, 끝까지 사랑하고 사랑하는 과정이 자기완성의 과정으로 생각하는 것은 결국은 부메랑 효과로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대개 그렇게 뭐가 조금 이렇게 잘해주면 굉장히 부담스러워하고 그런데 그게 비성경적입니다. 사랑의 빚을 지라고 가르칩니다. 사랑의 빚을 지는 그것 자체가 경건의 한 결과입니다. 잘됐다. 오늘부터 개기자.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이 사랑을 베풀어줄 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는 계기로 삼는 이 삶의 순환 이 자체가 이게 성화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냥 많이 베풀어주는 호의를 염치없이 받고 그리고 그 은혜를 잊어버린다고 하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깊이 그를 움직이고 있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인격을 느끼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한 사람의 인격을 느끼면서 그 안에서 관계의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게 그 사람의 완성도와 직결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주 예민하게 충동적 연애감정과 인격화된 사랑을 구별해냅니다. 그래서 전자에 대해서 과도한 기대를 걸지 않고 또 후자를 과소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훨씬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자기를 완성해가는 과정이 한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할 때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이것을 못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고쳐야 합니다. 그래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에서 불러내어주셔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런 만남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최후에 만난 사람입니다. 만약에 우리 안에 그런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랑스러운 것들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서 함께 하게 된 우리들이 이런 사랑을 나누지 못할 때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마지막에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지체들을 사랑하되 자기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그것을 통해서 자기가 완성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진짜 철천지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한번 해볼만하지 않습니까? 멋있습니다. 아니 손양원 목사님이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을 그 사랑하고 용서하고 감옥에서 구원해서 자기 양자를 삼은 이야기 때문에 두고두고 인구의 회자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나를 죽이려고 칼을 들고 나를 해쳤는데 그런데 죽어가면서 그 사람의 죄를 용서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우리 자식을 죽였는데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얼마나 멋있습니까? 대가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이 우리 주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적당히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해주어도 저 사람이 용서를 자기가 받아야 된다고 필요도 못 느끼는 사람, 한없이 용납해주었는데 그래서 그 용납해주는 과정을 통해서 수없이 고통을 받았는데도 그런 이야기를 혹시 듣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저 사람이 내가 뭘? 이렇게 밖에 반응을 못 보이는 사람, 그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번 순교를 하는 것도 어렵지만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매일매일 살아가는 이 순교의 삶은 훨씬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그렇게 몇 십 년에 한번 나오는 드라마틱한 러브스토리의 대상들이 아니라 그냥 내가 그렇게 사랑하고자 하는데 나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 내가 그를 사랑하는데 고통으로 내게 갚는 사람들, 그런 평균적인 수많은 사람들, 죄인들입니다. 그것을 매일매일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자기 안에 있는 이 악한 기질들을 제거하고 주님이 자기의 사랑 안에 자신 안에 있는 넘치는 사랑 때문에 아무 가치 없고 쓸모없는 죄인들을 한없이 용서하시고 사랑하십니다. 당신 가까이에 두시는 것처럼, 우리 그렇게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친구를 통해서 끊임없는 사랑이 흘러들어가고 흘러나오면서 서로가 그 친구에 의해서 완성되어가야지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자기 사랑과 온전한 사랑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17:9상)
지난 시간에는 친구 없이는 사람의 완성이 없다는 제목을 가지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참으로 한사람을 진실로 사랑하게 될 때 또 한사람으로부터 진실로 사랑을 받게 될 때 그가 인간으로서 완성을 향해 간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모두 사실을 그런 삶을 꿈꿉니다. 그러나 충동적인 연애감정적인 사랑이야 삶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희생과 인내가 요구되지 않지만 실제로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많은 희생과 인내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많은 희생과 인내가 요구된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는 실제의 삶에 있어서 그런 사랑을 실현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어떤 자원이 우리에게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의 마음은 아무리 간절해도 실제로 우리들이 그런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꿈에 그리는 우리의 삶이 곧 우리의 됨됨이는 아닙니다. 그래서 꿈에 그리는 우리의 삶이 아니라 실제로 땀과 피가 흐르는 삶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경험하는 그 삶이 우리로 하여금 진실로 삶이 삶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많은 인간관계를 맺게 되게 되고 또 특별히 그 안에서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친구들을 진실로 끝까지 사랑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일까? 또 사람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도록 빚나간 자기 방어를 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일까? 그것을 먼저 생각을 해보고 그리고 이어서 어떻게 그런 것들을 극복하고 진정한 사랑의 대의를 이룰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우리들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좀 그런 것들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일까? 결국은 자기 사랑입니다. 동물들은 자기 사랑은 종족을 보존하고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사랑은 그것보다 훨씬 높고 고등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적 가치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을 스스로 평가할 때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것을 재는 대부분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의 유익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사람을 누구든지 깊이 사귀게 되면 나쁜 사람은 없다.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실 그것은 뒤집어서 말하면 좋은 사람도 별로 없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라고 하는 판단의 기준을 각기 자기 가치에 입각해서 내리고 그 입각점 위에서 우리들이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을 아주 쉽게 쉽게 결정을 합니다. 그러면서 대부분 우리들의 살아가는 삶이 아주 자기중심적이 됩니다. 결국은 자기 사랑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것이 죄의 문제와 개입되기는 하지만 죄보다도 좀더 구체적으로 자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이 관계는 어떻게 자기를 희생할 수 아는가, 이것에 의해서 관계가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고 살아가는 그런 것들이 자기 사랑과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사실 그게 쉬운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친구가 나에게 주는 어떤 물질적인 이익이나 기회주의적인 이익 때문에 희생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또 다른 목적을 가진 것이니까 결국은 자기 사랑의 또 다른 발로가 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결국 이렇게 얽히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이익, 자기 사랑에 대한 집착이 이렇게 사람을 끊임없이 사랑하게 하는 최대의 걸림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일 줄 알게 되면 그것을 통해 사실은 인간이 완성되어간다는 것인데 사실 그것을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또 다른 자기 사랑의 표현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고양이 같은 교인들을 참 많이 만납니다. 우리 어렸을 때보면 사람만 성격이 다 틀린 게 아니라 개도 태어날 때부터 성격이 다르게 태어납니다. 어떤 놈은 자기 주인이 아니면 무조건 물려고 덤벼드는 놈이 있는가 하면 어떤 놈은 개장수가 와도 매달리며 꼬리를 치는 놈이 있습니다. 제가 기른 개가 딱 두 마리가 기억이 나는데 하나는 테리하고 메리였는데 메리는 털이 많은 스피츠 종류였고 테리는 털이 짧은 잡종 개였습니다. 그런데 이 메리가 테리를 낳았고 그리고 이제 엄마는 먼저 갔는데 이 메리는 털이 길고 하얀 스피츠 종이었는데 애는 한마디로 얘기해서 뭐라고 할까 천방지축입니다. 그래서 그 비가 오면 개들은 좋아하는데 그리고 그때는 도로포장도 골목에 포장도 안 되어서 질퍽질퍽했습니다. 거기를 그냥 뛰어다닙니다. 흙탕물이 다 튀어서 하얀 털이 밑에가 마치 비 오는 날 자동차가 진탕에 다닌 것처럼 새카맣습니다. 그런데 이 개가 누구든지 좋아하는 성격을 가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인을 만나면 그 발로 좋다고 합니다. 그럼 빨래방망이로 두들겨 맞습니다. 그런데 자식을 낳고 죽었는데 다 낳아주고 테리가 하나 남았는데 누런 반점이 있는 개였는데 애는 또 하는 짓이 다릅니다. 비가 오면 잘 나가지도 않거니와 혹시 나가면 개들이 뛰어다니는데 이 개는 요러고 다닙니다. 마른땅만 골라서 다닙니다. 개도 태어날 때 성격이 틀리니까 사람은 얼마나 다양하겠습니까?
그런데 가끔 보면 그런 교인들을 만납니다. 나는 괭이교인이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고양이를 보면 그것도 또 여러 가지 성품입니다. 그런데 뭐가 재미가 없었는지 마루 밑에 숨어서 그리고 발톱을 감추고 고개를 집어넣고 그리고 꼬리를 세우고 누워서 파란 빛을 냅니다. 귀여워서 떡이라도 하나 가지고 나비야 이것 먹어라. 그리고 갖다 줍니다. 그러면 발을 들어서 손을 확 할퀴고는 더 속에 들어가서 으르렁거리면서 째려봅니다. 그런데 고양이만 그런 게 아니라 사람도 그런 사람이 참 많습니다. 잘못한 것이 없이 그냥 떡 좀 먹으라고 그래서 줬는데 그런데 그렇게 하는지 개 패듯 패는 것입니다.
그것도 결국 무엇인가 하면 저 사람이 떡을 주는데 저것으로 인해서 저것으로 인해서 자기가 어떤 해를 입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 자체가 고문에 가까운 형벌입니다. 그가 간절히 원하는 바는 그냥 제발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고 가만히 있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도 역설적인 것입니다. 날 좀 제발 그만 내버려달라는 이야기는 관심 좀 가져달라는 이야기입니다. 날 좀 제발 죽게 내버려달라는 이야기는 살려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자기가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갈망이 사랑에 대한 거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한번이나 두 번 사랑을 베풀지만 그렇게 해서 발톱으로 손톱을 할퀴고 떡을 떨어트리고 나면 그러면 상대도 안 합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계속 잘 해주어도 각각 자기 사랑이 충돌을 빚게 될 때에 서로를 거절하는데 하물며 마음을 한껏 낮추어서 호의를 베풀고 사랑을 하는데 그것을 한번 할퀴고 도망가면 또 한번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무제한적으로 희생하면서 사랑하려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을 깊이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깊이 사랑받고 이러는 것들이 실제에 있어서 드문 이유가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구도자적인 헌신을 가지고 누군가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 지난번에는 남자들의 위대한 착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게 무엇이었습니까? 못 생긴 여자들은 쉽게 유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형편의 원칙에 의해서 오늘 여자들의 착각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자기가 옛날에 한번 좋아한 사람이 아직까지도 자기를 좋아하고 있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인간의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한없이 흐르는 것입니다.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에 나오는 그런 사랑은 그냥 지어낸 사랑이지 우리 실제의 인생의 경험 속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시 한번 만나고 나도 옛날에 그런 감정이 다시 생겨난다고 하는 보장이 없습니다.
지금 90이 넘은 수필가 피천득(?) 선생님이 한 3년 전에 인연이라는 수필집을 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참 감동 깊게 읽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인연이란 수필이 나옵니다. 아사꼬라는 여학생을 동경에 유학을 가서 사랑하게 되었는데 결국 헤어지고 두 번째 만난 여인이 전용미군하고 결혼한 부인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온 이야기가 그때 마지막은 안 만났으면 좋았을 뻔 했다. 그리고 수필을 맺습니다. 인간의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모든 당신의 자녀들을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동일하게 사람들을 사랑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율법의 요체가 무엇인가 말씀하시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율법의 강령이다. 이것을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인간을 향해서 사랑하게 되고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서 내가 인간으로서 마음의 문을 여는 것과 똑같을 정도로 인간의 향해서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동일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낯선 사람은 사실 하나님에 대해 낯선 사람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한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진실한 사랑은 그것이 사람들을 향한 사랑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렇게 나타나지 않는 부분만큼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그 감정은 인격화된 진정한 사랑의 감정이라기보다는 충동적인 연애감정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이 신앙은 인격 속에서 용해되어서 인격화되고 그 인격을 통해서 삶으로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삶 속에는 인격과 사람됨이 있고 사람 된 그 인격 안에는 그 사람의 마음과 영혼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항상 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자신의 삶을 보면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를 더듬게 되고 자신의 마음과 인격을 보면 어떤 삶이 흘러나올 것인가 하는 것을 대충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좋은 나무에서 좋은 실과를 맺고 그리고 나쁜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성품을, 본성을 하나님 앞에 변화시키는 능력이 이 기독교입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그래서 그런 빚나간 자기 사랑이 바로 이렇게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 다음에 사람들로 하여금 온전히 자기를 사랑하도록 내어맡기는 이런 것들을 못하게 합니다. 외적인 삶에 대해서 어느 것을 희생하는 것은 순간의 희생을 통해서 가능하지만 자기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성품을 거슬려서 무엇을 행하는 그것은 대단한 고통이 따릅니다. 그래서 술이나 담배에 중독이 된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안 됩니다. 술을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담배를 펴서 니코틴이 들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속이 질적으로 그런 경향성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자기 사랑이 파괴되지 않고 잘 깨트려지지 않아서 아주 완고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사랑에 입각한 그런 삶을 내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을 용납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싫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본성을 거슬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고통이 따릅니다. 두 가지가 함께 병행되어야 합니다. 무엇인가 하면 그러한 본성이 끊임없이 성화의 작용을 통해서 변해가야지 하고 아무리 변해간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완전히 포기하고 버린 그런 성화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자기 기술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두 가지가 함께 가야지 됩니다. 의무에 대한 진실한 실천과 함께 거기에 내 마음을 고정시키는 것과 함께 또한 자신의 영혼의 성향을 거룩한 은혜로서 계속 바꾸어가는 하나님의 신령한 역사가 그 영혼 안에서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결국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게 되는 이것은 자기 자신 안에는 자원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원만을 가지고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면 기껏해야 이를 악물고 희생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는 사랑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사랑은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자기만족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로 말미암아 참된 선이 무엇이고 만족이 무엇인지 알게 된 사람들의 행복으로부터 찾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냥 12시간이 넘도록 진짜 땀을 뻘뻘 흘리며 진통을 하다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자신의 몸은 아직까지도 아픕니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를 보면서 부모가 만족을 느낍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아이를 낳은 엄마의 진정한 그 순간의 가치의 기준이 자기의 행복과 건강, 그 다음에 자신의 신체의 좋은 상태, 이런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로 옳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그 아이를 보면서 해산의 고통을 잊어버립니다. 그런 관점이 바로 누구의 관점인가 하면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사랑의 증거자가 되게 하시는 방식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를 먼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깊이 깨닫게 하고 경험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에 대해서 부채의식을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일단 부채의식을 느끼면 사람들에 대해서 많은 사랑하기 위해서 헌신하게 될 때 그것이 지나치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너무 과하다, 지나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기희생입니다.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자기희생과 사랑은 이를 악물고 마치 살점을 떼어주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극기적인 요소를 가지고 자기가 희생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윤동주씨가 자기의 서시에서 예수님을 행복했던 사람이라고 묘사를 합니다. 그 의미는 무슨 뜻인가 하면 그게 예수님이 정말 하시고 싶으셨던 일입니다. 죽음 그 자체를 하시고 싶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를 사랑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죽음으로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그 결과를 예수님이 너무 보시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희생하심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된 것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행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생애에서 자기 관점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의 진정한 행복은 우리들이 당신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과 다시 화목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누리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자기가 이루신 모든 속죄의 결과들을 우리들이 모두 누리면서 사는 것, 그 씨를 보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이고 그 진정한 은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터득하게 되면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꼭 닮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바울이었습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어떻게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내게는 더 중요하다. 그러나 너희에게는 내가 여기 있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이 땅에 살아있는 목적 그 자체가 자기 자신이 가치를 판단한 입각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이 자기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런 것을 누리게 되는 이것이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의 정신이 그 사람의 인격 속에 이입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떤 인간의 가치를 판단할 수 없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그 중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서 지적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동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순간에 그 사람의 전 존재를 판단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자 예를 들자면 오늘 우리에게 예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잘 가르쳐주고 있는 사도 바울을 만약에 우리들이 판단하게 될 때 회심하기 직전의 상태를 가지고 만약에 판단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요? 핍박자요 포행자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스스로 흠이 없다고 교만한 사람이었고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였고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가치는 어떻습니까? 아주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쓸어버리심으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살려두면 계속해서 나쁜 신앙을 전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영적인 눈을 혼미하게 할 사단의 자식 같은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에 사도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다루셨다고 하는 것을 그 후에 회상하게 되었습니까? 그러나 그분의 일체의 오래 참으시는 긍휼함으로 인해서 죄인 중에 괴수인 자기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지금 가치 없다고 판단을 내리는 그 사람을 보면서 우리가 그 사람의 일에 대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 중에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 앞에 가치 있었던 사람이 누구인가요? 우리들이 흔히 사람들에게 조금 사랑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사랑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고 분노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우리도 한때는 그런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불구자와 같았던 사람이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 우리의 긴 인생은 치료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온 여정이었습니다. 성화의 여정 자체가 입원실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시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친구를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용서하는 그 모든 원천을 자신의 판단이나 그 사람의 존재 가치나 이런 것들에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그런 사랑의 수고를 지탱할 수 있는 수고는 거기는 없습니다. 무너지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비결은 간단한 것입니다. 기초 자체를 거기다두지 말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자신이 받은 사랑, 그리고 자신은 그 사랑 앞에서 아무 가치가 없다고 하는 인식,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오늘 나일 수 있다는 인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부채의식을 자기가 가지고 그것을 원천으로 삼아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하는 주체가 주님이시고 나는 단지 그 사랑을 전달하는 도구일 뿐이라고 하는 의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누군가를 많이 사랑해도 그것을 또한 스스로 공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물론 영생을 얻는 것은 죄인들을 위해 자기를 다 내어주는 헌신을 통해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의는 이것이니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그 의의 이것을 율법을 능가하는 의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동시에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실로 알고 그래서 그 의를 덧입은 것이 무엇인지를 자신이 이해하고 있다면 그는 정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서 자기를 내어줄 수 있는 그런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본질은 나타난 외부의 삶을 외면적인 삶에 의해서 입증되고 외면적인 삶의 뿌리는 본질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 문제를 아주 명쾌하게 설명을 합니다. 무엇인가 하면 그 각 사람 안에는 어떤 더러운 죄인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형상을 향한 사랑은 사람이 소유한 형상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곧 그들의 형상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대한 사랑이다. 각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진정한 영이신 하나님과 신비한 관계에 있듯이 그 한 인간의 속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향한 사랑은 신비하게 하나님 자신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한 인간에 대한 진실한 사랑은 그들 안에 형상을 두신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 없이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사람들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속에서 경험하는 궁극적인 선의 마지막 기준이 윤리적으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에 대한 앎이 없이 인간을 사랑하는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인간을 사랑하실 때 거래하시는 분으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거래한다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성립될 수 없는 투자를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죽게 하시면서 까지 구원할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들이었습니까? 이게 가치 면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망가지고 하나님께 대적한 그 인간들이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까? 더군다나 구원한 인간들은 더더욱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로 살아가려고 애를 씁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짐승처럼 먹고 사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에 있어서 이런 거래관계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죄로 말미암아 어떠한 쉼도 없이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깊이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헌신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이 최고조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대하신 바는 그 사랑을 진심으로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부채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죄 많은 여인이 눈물로 향유를 부으며 예수님의 발을 씻겨주시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많은 죄가 사하였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랑했기 때문에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은 그 자체가 사랑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예수님 주위에는 항상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은 결국은 주님으로부터 어떤 물질의 해택 때문에 거기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거래관계 때문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 떠났습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물고기 보리떡을 먹고 배불러서 예수님을 임금 세우자고 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예수님 곁에 남아서 예수님을 사랑하던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께로부터 아무 가치가 없는 죄인인 자기를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 인격 안에서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되고 나면 가치와 이 모든 것들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솔직히 말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돈 많이 벌어서 뭐합니까? 어차피 세상 사람들이 쓰는 것처럼 자기를 위해 쓸 수 없습니다.
그러면 정말 불행한 것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옛 세상의 길과 가치를 여전히 못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마치 아름다운 연애장에 전투복을 입고 온 사람과 같습니다. 또 반대로 치열한 전쟁터에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유리 구두를 신고 나타난 사람과 똑같을 것입니다. 왜 자기는 이제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인데 여전히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새사람이 되었는데 그가 추구하고 걸어가는 길은 세상의 길과 가치입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혼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주위에 있는 사람도 행복하지 않고 하나님도 행복하지 않고 예전에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모든 가치관과 길이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이 무엇인지,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어떤 것인지 그 은혜의 세계가 무엇인지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럼 이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 변화된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진정한 사랑 그 사랑의 근원, 그래서 그 사랑 때문에 우리를 안식하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랑을 깊이 받은 사람, 그래서 이 세상의 길과 가치를 그 사랑 때문에 버리고 거듭난 길과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그 진정한 살아온 길과 가치가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서 사는 것이라는 이치를 터득한 사람들에게는 완전한 안식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지만 그 안식을 맛보여주는 인격적인 쉼을 제공해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진정한 행복은 돈을 모으고 그리고 이 세상의 길과 가치를 좇아서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에 만약에 우리의 삶의 가치를 둔다고 하면 그런 것들 자체가 욕망이 되어서 우리 자신을 칭칭 동여맵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한없이 고통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내가 물질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만 내 스스로 물질에 종이 되는 것입니다.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지위가 나를 누리는 것입니다. 나를 지배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예전에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죄의 종이었는데 지금은 또 다른 형태의 종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 사랑에 묶여서 종이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어디에서 느껴야 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로 말미암아 쉼을 누리고 행복해지는 것, 그 속에서 자기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고 행복을 느끼고 그 속에서 자기가 존귀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터득하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 사랑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번 보십시오. 고양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한번 두 번 사랑을 해주려고 해도 할퀴고 도망가면 이 마음이 상합니다. 그런데 오래 참습니다. 결국은 사랑입니다. 어린애들을 볼 때 어린애가 때를 씁니다. 이리 오너라 하면 싫어 싫어하면서 가슴팍을 두들기면서 이러고 그러는데 그때 애를 어떻게 할지 몰라서 이러면 진짜 발로 차고 반항합니다. 그런데 꼭 안아줍니다. 그리고 달래고 다독거립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주먹으로 치고 막 난리를 치다가 그 품안에서 조용해집니다. 그게 사랑의 설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식으로 설복하십니다. 그래서 어디에서도 그런 사랑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제껏 우리가 만난 분들 중에서 유일하게 우리의 인생의 가치 우리의 존재의 가치를 우리의 소유나 우리의 성품이나 이런 것들에 의해서 다 달아보지 않으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단지 당신이 창조하셨다는 이유 때문에 단지 당신의 외아들이 우리를 위해 피 흘리셨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를 깊이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에 의해서 정복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도 그런 삶입니다. 그래서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사랑을 베풀면 그러면 그가 멈춧 거리면서 사랑을 받아들이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망가진 것들을 하나님께서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깊이 고치시면서 그 사람이 비로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어가고 그 변화가 곧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어가는 과정과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받은 것만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에서 고쳐질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학문으로 고쳐질 수 있겠습니까? 높은 지위에 그를 올려놓으면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물질적인 부함 가운데 그를 두면 그가 그것을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고쳐지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고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숙명적으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고치는 도구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함으로 한사람에게 일생을 바꾸어놓고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놓는 그 일을 통해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고쳐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교회에는 도장 찍고 완전히 이혼해서 남남으로 살다가 은혜 받고 다시 결합한 부부들이 여럿이 있습니다. 사실 그것이 가능합니까? 그게 사실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이혼이 장난입니까? 한번 도장 찍고 남남으로 갈라섰을 때는 사실 웬만하면 참았는데 가슴에 칼을 여러 번 맞은 것입니다. 이혼한 부부가 다시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혼했는데 말을 못합니까? 이혼을 했는데 다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 사람이 전 남편인데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어떤 여자가 그렇게 말하는데 자기 헤어진 그 남편이 천국에 가면 자기는 차라리 지옥에 가겠다고 합니다. 그 인간이 있는데 거기가 어떻게 천국일 수가 있는가. 그러니까 증오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이를 악물고 헤어졌는데 다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게 전 남편입니다. 전 아내입니다. 그래서 다시 혼인신고를 했습니다. 두 번 결혼했는데 한사람과 한 것입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그게 무엇인가 하면 사랑의 혁명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게 인생의 변화입니다. 와서 남편이 혹은 아내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변화를 합니다. 그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무슨 죄는 마음속에 안 지었겠습니까? 그 헝클어진 것을 모두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러면서 깊이 그 헝클어진 것들을 모두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이 나쁜 놈의 자식이 네가 이혼을 와서도 나에게 아버지라고 불러. 나는 너 같은 놈을 둔적이 없다. 그리고 발로 차버리셨습니까? 아닙니다. 나의 죄 때문에 도래 하게 된 상처요 고통이어서 사실은 그런 죄 때문에 당하게 된 상처와 고통을 내가 맛보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공정하신 성품을 따라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인데 주님이 어느 순간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해서 명백히 우리의 죄와 불순종을 인해서 당한 고통인데 그 고통의 이유를 초월해서 아파하고 있는 우리의 그 소리를 들으면서 주님이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어둡고 캄캄한 가시밭길에 길 잃은 어린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다. 그리고 깊이 용서해주십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생애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사랑해주십니다. 그 안에서 그 더러운 죄인이 누구에게도 용납 받지 못했던 자기 자신이 그 예수 그리스도 인격 안에서 쉼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궁궐과 같이 아름다움은 곧 사랑이 없는 그 호화로운 궁궐보다는 쓰러져가는 오두막집이라도 사랑이 있는 그곳, 거기에서 인간이 진정으로 쉼을 누리게 됩니다. 그 속에서 진정한 쉼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고 나니까 무엇인가 하면 나를 그렇게 아프게 하고 고통을 주었던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가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도 변화되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정죄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 사람의 고통 그 자체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갖게 됩니다. 이게 compassion입니다. 이게 바로 긍휼입니다.
예수님이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무리들을 보시면서 그렇게 가슴저며하시고 아파하셨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예수님 시대에 있어서 많은 죄인들이 일반적인 피해자들입니까? 그들도 죄를 택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바라보는 인간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을 보시면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며 그렇게 보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피해자인 것처럼 수동분사로 표현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에레미노이 에스케미노이라고 수동분사로 표현하셨습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버림을 받고 누군가에 의해서 압박을 당하는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리하고 방황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실 정직한 관찰이라기보다는 예수님 속에 있는 compassion 긍휼이 그들이 왜 그런 상황을 당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들의 책임을 주목하기보다는 그들이 고통 받고 있는 상태 그 자체를 주목하신 예수님의 compassion 긍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보다도 더 큰 사랑을 우리들이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이 훌륭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이 훌륭하다는 것이 주님 영접하는 순간 알기나 했습니까? 성경에 대해서 쥐뿔도 모르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성경 중에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했는데 나중에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럼 어땠습니까? 우리를 감동시킨 것은 한번도 우리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그런 인격적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compassion 긍휼입니다. 그런 마음을 우리들이 갖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니까 자기 남편이나 아내를 향해서 그런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가서 내가 잘못했다. 나를 용서해라. 아내가 이렇게 만나보니까 금방 알게 됩니다, 사람이 변했는데 자기가 그렇게 증오하던 남편, 자기가 그렇게 꿈에 만날까봐 두려워하던 그 아내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입니다. 두 번 세 번 만났는데 진짜 다른 사람입니다. 그를 그렇게 변화시킨 것이 무엇인가? 당연히 먼저 변화 받은 그 사람 속에 있는 사랑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없는 곳에는 어떤 사랑도 없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 하나님 없는 곳에서 발견되는 희망은 모두다 환상이다. 그래서 그는 예전에는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이혼했지만 지금은 자기를 그 여자, 그 남편에게 사랑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사랑받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영원히 헤어진 채 살아도 자기는 행복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가치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온 몸으로 체득된 가운데 복음을 전하고 자기를 변하시킨 그 인생을 일인칭의 언어로서 사람들에게 증언할 때 그 권위는 성경 다음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그런 하나님이 있다면 나도 만나보고 싶다. 그래서 만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선택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헛된 욕망, 헛된 길, 헛된 가치에 매어서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은 우리의 관계를 서로 파괴하고 그리고 서로 아프게 찌르며 그렇게 살았구나. 사실은 날아간 어린 새들이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바람이 불면 부대끼면서 소리를 내는 내 안에 있는 수많은 자아와 그 포악한 본성들이 문제구나. 깨닫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은 일어날 수 없는 기적입니다. 복음은 이런 기적을 창출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인생의 가치를 돈 많이 벌면 뭐 하겠습니까? 많이 벌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헌금도 좀 많이 하고 선교비도 좀 많이 내고 그리고 예수 안 믿는 다른 사람들이 돈을 벌면 그것을 가지고 다 나쁜 짓 할 것이니까 비자금 만들어서 정치인들에게 갖다 주고 말이지 그 짓 할 것입니다. 기업을 비윤리적으로 운영하고 말이지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면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그랬습니다.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는데 돈을 많이 벌어서 이 세상의 길과 가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답게 그것을 주님이 계셨더라면 쓰셨을 그런 곳에 쓰십시오. 그래서 이 구겨진 사회를 펴십시오. 고통 받는 사회에 고통을 경감시키면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알게 하십시오. 용서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높은 지위에서 사람들을 섬기고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인격 안에서 사람들이 쉼을 얻게 만드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참다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리게 하신 그 예수님의 생각나게 그리고 우리가 베푼 사랑과 우리의 인격 안에서 쉬는 이 쉼은 맛보기일 뿐이고 궁극적인 쉼터요 궁극적인 진정한 피난처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세반석이신 예수 안에서 그들을 쉬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통으로 가득 차고 이기심으로 분투하는 이 굶주린 개떼 같은 세상에서 진정한 쉼이 사랑 이외에 어디에서 발견될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포악한 이 세상에서, 그래서 사랑은 폭풍이 있는 때의 피난처요, 메마른 때의 흐르는 계곡의 물이며, 춥고 어두울 때 타오르는 모닥불과 같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가치를 자기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에 두고 나 같은 사람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니 나같이 우매하고 더러운 인간이 다른 사람의 사랑하기 위해서 감히 희생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다니 그렇게 생각하면서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보람을 자신으로 말미암아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쉼을 누리게 하고 그래서 자기로 말미암아 안식을 얻게 하고 그래서 그들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하나님 사랑 안에서 행복하게 되어가는 거기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지친 나그네의 길, 우리 자신의 존재가 한 쉼터가 되고 메마른 가슴을 가진 사람들에게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존재들이 되어가는 그래서 돈이 많은 사람,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그런 지위에 올라야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세상 모두가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뇨
곳곳마다 소리쳐서 사랑받기 원하네
지금도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면 울부짖는 함성 소리가 우리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릇된 자기 사랑의 뿌리가 우리의 귀를 막습니다.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해서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결국 자기의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갑니다. 자기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그릇된 자기 사랑의 속박으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구차한 자기 사랑의 구실을 떨쳐버리고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나를 사람들에게 제공함으로서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안에 있는 안식을 경험하도록 만들어줍니다.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신이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 사랑으로 뭉쳐진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의 친구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허물을 사랑으로 깊이 덮어주고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까지도 그 사람을 사랑할 때 내가 사랑하여야 할 몫이라고 생각할 때 그들은 비로소 그 친구를 통해서 이 세상에는 없는 진정한 랑이 무엇인지를 터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형제의 모습 속에서 친구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그런 수준 높은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전체가 흐르는 강물 같은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여러분들을 누리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분들을 마시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여러분을 먹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여러분들을 소유하게 해야 합니다. 그게 진정으로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는 삶이고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착해야 합니다. 이제 믿는 그 순간에 구원받았다고 하는 그런 것만을 이야기하지 말고 믿었으면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어쩜 저렇게 착할 수가 있을까? 느끼게끔 내 안에 예수님의 끊임없는 강건하신 사랑 때문에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그래서 진정한 가치가 자기 사랑의 충족이 아니라 자기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누리면서 사는 것, 그래서 다른 사람을 완성하면서 그 완성 속에서 자신도 완성되어가는 그런 사람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의 소명입니다. 그런 것을 훈련시키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을 완성해가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에 의해서 주물러져야 합니다. 잘 빚어져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 친구의 영혼을 사랑함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잠27:6)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부당한 평가를 내리기 매우 쉬운 존재입니다. 때로는 자기를 매우 사실 이하로 비하해서 그래서 좌절과 그 다음에 절망감에 빠지기도 하고 그리고 또 어떤 때는 사실 이상으로 자기를 평가해서 분량에 지나치도록 교만해지도록 합니다. 그래서 패밀롱이라고 하는 옛날에 설교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를 바라보면 교만해지기 싶고 자기를 모르고 하나님을 바라면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 두 절망과 교망 사이에 균형을 갖는 일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도 나타나 있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도 나타나있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특별히 인간이 교만해지기가 매우 쉬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든지 사실 이상으로 자기를 평가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기 쉬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친구의 정직한 충고가 필요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이 충고를 해주어야지만 비로소 자신에 대해서 알 수 있고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자기를 모른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결국은 자기 자신을 그렇게 보게 되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오히려 신앙이 성숙해지면 성숙해질수록 사실은 사람의 충고보다는 직접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자기가 잘 교정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사는 그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고 또 말씀을 볼 때마다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그것을 고치고 싶어 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교정되어갑니다.
가끔 우리들이 약국에서 약을 삽니다. 그런데 꼭 읽어봐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부작용입니다. 그저 사면 우선 약이 어떤 효능이 있는가, 그리고 부작용이 무엇인가. 잘 눈여겨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피부에 바르기만 하면 연고인데도 간이 나쁜 사람이 바르면 치명적인 연고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 약물작용을 모르고 함부로 약을 남용하게 되면 나중에 커다란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에게 충고하는 모든 충고에는 항상 부작용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절대로 부작용이 없는 약이 있으니 신약과 구약입니다. 아직까지도 부작용의 사례가 발견된 일이 없습니다. 구약은 옛날이야기고 신약은 요즘 약입니다. 해석을 통해서 그 약효는 점점 진가를 발휘하게 됩니다. 그것을 바르고 복용함으로서 사람이 고쳐지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우리들이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거기를 들어가게 됩니다. 주님의 그 면전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으면 그렇게 생활합니다.
그 모습 내 눈에 안 보이고 그 음성 내 귀에 안 들려도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그러면서 깊이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분별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부작용이 있겠습니까? 부작용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영성이 깊고 그리고 충만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사랑 특히 하나님의 사랑의 충고가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한 삶을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책을 한권 읽었는데 그 책을 보니까 겸손에 대해서 썼는데 그 중에 한 구절이 제 마음을 후벼 파고 지나갔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람 앞에 낮추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를 사실 이상으로 높게 평가하는 것을 견디기 괴로워하는 것이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말리는 것까지가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 대목에 가서는 참 힘듭니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이 날 보고 당신은 사람이 참 그렇게 살면 안 되지, 그리고 논리적으로 다 이야기하면 나는 그보다 더 정교한 논리를 가지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정말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야. 당신 그렇게 훌륭할 수 있어. 그러면 기껏 겸손해봐야 뭘 그리고 말지, 다 논리를 다 세워서 나 그런 사람이 아니야. 왜냐? 첫째 이런 인간이기 때문에, 둘째 이런 것이 있기 때문에, 셋째 이런 인간이기 때문에, 넷째 이러 일 때문에 결론 그러므로 당신의 평가는 빗나갔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는 것은 교만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참회록을 썼습니다. 왜 썼는지 아십니까? 초창기에 쓴 게 아니라 말년에 쓴 것입니다. 감독이 되어서, 그 사람은 참 천재였습니다. 몇 백 년 만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천재가 이교에 빠졌다가 그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방탕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참회록에 다 나옵니다. 17살에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나이에, 그것을 쓴 동기가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너무 성자로 취급합니다. 그러니까 아니다, 나는 인간쓰레기다. 그것을 얘기하고 싶어서 참회록을 썼는데 이게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렇게 털어낼 수 있다니 진짜 위대한 사람이 아니냐. 참 그렇습니다.
저도 언젠가 참회록을 쓰고 싶습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요즘은 그렇게 참 눈물이 많아졌습니다. 제가 꼭 목회 10년인데 사실 죄밖에 지은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남은 10년도 지나온 10년 같다면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하나님께 더욱이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어째든 우리는 그만큼 부당한 평가를 스스로에게 내리고 그런 위험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끊임없이 깎이고 그리고 저 밑바닥에 남아 있는 우리의 부족, 그리고 많은 허물을 발견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그 완전하심과 그분의 구속의 사역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 아버지의 그 거룩하심에 비하면 우리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고백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고백을 해야지 되는데 그것 가지고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 필요한가 하면 친구의 통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이렇게 다가가면 사실 부작용이 없는데 사람의 통책에는 부작용이 따를 수가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는 이럴 수가 있습니다. 친구가 진심으로 나에게 지적하고 충고했는데 그 친구가 판단을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소위 기독교 윤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아디아 포라’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아디아 포라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희랍어 원어로 하자면 “아무래도 좋은” 그런 의미입니다. 성경이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로 남겨진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될 수 있으면 결혼하지 않은 것이 좋겠다. 그러면서도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것은 내가 주께 받은 것이 아니다. 너희 좋은 대로 해라. 그런 것입니다. 이게 아디아 포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그런 부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런 아디아 포라의 영역에 있어서 아디아 포라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상관없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비추면 아디아 포라라에 있는 영역의 많은 논쟁점들도 어떻게 하는 것이 보다 성경적이겠는가 하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순수한 아디아 포라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 여기 보십시오.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아담과 하와가 계속 아이들을 낳았을 것입니다. 죄가 들어와도 애는 낳지만 아무튼 아이들을 계속 낳았을 것입니다. 죄가 안 들어왔다면 그 아담과 하와가 낳은 그 많은 아이들이 다 기계로 찍어낸 듯한 아이들이었을까요, 아니면 개성이 다 달랐겠습니까? 개성이 다 달랐을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있는 나무 하나도 하나님이 다 똑같이 창조하신 나무가 없습니다. 어떤 분이 나에게 와서 목사님 이거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무입니다. 다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나도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 똑같은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도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 죄가 안 들어왔어도 아담이 낳은 자식들 가운데는 성격이 급한 아이도 있고, 탐리주의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도 있고, 또 미적 감각에 있어서는 꽝인 녀석도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 미적 감각은 없어도 먹는 것에 발달한 아이도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가 있어서 하나는 요리사가 되었을 것이고, 하나는 디자이너가 되었을 것이고, 이렇게 다양하게 사람들을 창조하심으로서 당신의 창조의 세계로 온전케 만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잠시만 사색을 해봐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죄가 들어온 것입니다. 각자의 다양한 성격에 죄가 들어와서 스며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죄도 다 시커먼 죄가 아니라 아롱다롱이가 다 된 것입니다. 새빨간 열정적으로 죄를 짓는 놈이 있는가 하면 또 노란 죄도 있어서 시기심으로 가득 찬 죄도 있습니다. 또 시퍼런 죄도 있어서 기가 펄펄 산 놈도 있는가 하면 새카만 죄인도 있어서 속속들이 썩은 죄인도 있습니다. 또 누런 죄인도 있어서 그래서 똥같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죄인들이 있습니다. 그 죄인들이 비슷한 사람끼리 무엇입니까? 파시스트는 파시스티끼리 나치주의자는 나치주의자끼리 그 다음에 쾌락주의자는 쾌락주의자끼리 사기꾼은 사기꾼들끼리 그렇게 서로 동아리를 지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아주 칼라플한 죄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죄를 제외해놓고 생각해보면 그 죄인들에게 그렇게 칼라플한 죄인들이 되었는데 모든 성격이 과당성이 있고 추진력이 있는 사람이 죄가 안 들어왔다면 하나님을 위해서 탁탁 결단을 하면서 훌륭하게 창조세계를 다스려온 것입니다. 죄가 들어와서 폭력적이 된 것입니다. 그 과당성이 불 신앙적인데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어, 그리고 결단을 내립니다. 나, 왕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결단을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서 살아가니까 그 과당성과 용기 같은 것들이 이제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기질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갈피갈피 배어 있는 그 죄가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이 성화가 되면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합니다. 그런 아디아 포라의 영역에 속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인생관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우리의 인생은 남의 인생관을 위한 남의 인생관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예증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아니면 굴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비난하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부작용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여러분 자식들을 낳아보지 않았겠지만 여러분 한번 예를 들어보면 퀴즈를 내겠습니다. 자식을 때리면서 교육을 시켜야 사람이 되겠습니까, 계속 칭찬하면서 격려를 시켜야 사람이 되겠습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선입견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되나. 아무리 칭찬하고 격려를 해도 선악에 대한 관념이 분명하게 심어주지 못하면 제왕적 가치관을 가진 아주 쓸모없는 인간으로 변질됩니다. 옛말에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두들겨 패서 기른 집안에서 효자가 나오더라,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러면 누구나 자기자식을 개 패듯 패면 효자가 되는가? 아닌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상처받고 아버지가 폭력을 휘둘러서 아버지가 죽이고 싶도록 밉고 뭐 이런 가슴 아픈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 아버지는 나를 잡아 패면서 길렀는데 나는 효자가 안 되었는가. 그것은 두들겨 패는 그것이 효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효자를 만든 것입니다. 사랑하면 좀 두들겨 패며 길러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이 격려하고 선악에 대한 관점이 없이 칭찬하고 격려하면 교만한 인간이 되면 사랑이 없이 두들겨 패면 적개심만 키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옳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매우 비판적입니다. 심지어는 시기합니다. 뭐하면 그런데 그것이 공정하게 마음속에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여러 가지 부작용과 문제들이 나옵니다.
여러분들도 저 같은 생각을 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경험을 여러분들이 좀 참고삼으시면 하나님 앞에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실은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면 사실 성화의 삶이 힘듭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향한 분노로 가득 찰 때 상실감과 허탈감에 사로잡힐 때 그러면 기도에 몰두할 수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래서 이 마음의 평정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퀴트니스라고 그러는데 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그 경건의 기술들에 대해서 청교도들이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가지만 내가 소개를 하겠습니다.
언젠가 지금으로부터 한 7-8년 전 된 것 같습니다. 10년은 좀 안 되었습니다. 아주 모욕적인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남에게 들은 것이 아니라 정면에 대놓고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죽어도 동의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난 그런 일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일이 저 사람에게 그렇게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한 일을 하나님이 기뻐한다고 생각했는데 불신자니까 비난할 수 있을 것인데 나를 대놓고 하는데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모멸감을 느낄 정도로 비판을 받은 적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며칠동안 잠이 안 왔습니다. 그때 내가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부당하게 내 이름이 모욕을 받을 때 내가 이렇게 마음이 아프고 그 사람을 향해 증오하는 마음이 들고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렸는데 하나님의 이름이 업수히여김을 받는 것 때문에 이렇게 뼈아파본 적이 있는가 생각을 하니까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많지 않습니다, 그때 내가 결론을 내린 것이 아, 나는 아직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사람이구나. 그리고 어떻게 해야지 될까?
그때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지혜가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이 날 비난하면 일단은 그 비난을 객관적으로 듣자. 받아들이지도 말고 면박을 주면서 거절하지도 말고 그냥 조용히 듣자. 그리고 즉시 하나님께 가서 다 이르자. 그랬습니다. 하나님 제가요 나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 그랬고 나는 틀려먹었다고 말했고 이것은 하나님이 슬퍼하는 행동이라고 나한테 다 애기해주었데 제가 즉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동의가 되면 제가 하나님 이렇게 기도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동의가 잘 안 됩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기도를 합니다. 그때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건성으로 덜렁덜렁 기도하면 선입견이 이깁니다. 어떤 선입견? 자기는 뭐가 잘났다고 그 입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이런 선입견이 있게 됩니다. 그것 말고 진심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항상 응답해주십니다. 무엇인가 하면 그 이야기가 맞다. 그 애는 내가 보낸 사자다. 정신 좀 차려라. 이놈아! 그러면 그때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람이지 하나님이 뭐라고 한다고 해서 눈물을 펑펑 흘리고 나를 용서해달라고 그러고 가서 기도해보니까 아닌 것 같아. 어제 내가 괜히 그런 것 같아. 그러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 사랑은 사람 앞에서 먼저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먼저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가서 다 이릅니다. 그 후로부터 항상 이런 자세를 유지해왔고 이게 마음의 평정을 지키는데 아주 말할 수 없는 유익을 주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난받을 때 둘 중의 하나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오기가 생겨서 거부하든가, 아니면 말할 수 없이 비참해지든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반응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시니까 말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너무 좋은 방법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러십니다. 아니야, 그렇지 않으십니다. 그렇지 않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정해주십니다. 그럼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관용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대게 관용하지 못할 때는 언제인가 하면 자기 자신이 없을 때 관용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그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비난 하는 것은 굉장한 실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실험해보십시오. 얼굴이 조금 미안하게 생긴 사람에게 얼굴도 못생긴 게, 그러면 가슴에 칼이 꽂힙니다. 그런데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매에게 얼굴도 못 생긴 게, 그러면 생글생글 웃습니다. 왜 상처가 안 됩니다. 한번도 자기 얼굴에 대해서 콤플렉스를 느낀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사람마다 그렇게 다릅니다. 그러니까 비난받을 때 사람을 평가에 의해서 자기가 움직이고 그러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간절히 마음을 쏟아놓아야 됩니다.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 대답해주십시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다시 살수 있게 된 사람의 자신감, 사람 앞에서 비굴함이나 불안함이 아니라 사람의 평가에 매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담대함, 그런 것들이 속에서 생겨납니다. 그게 저 자신으로서는 마음을 지키고 심령에 평정을 유지하는 흔들리지 않는 훌륭한 경건의 한 기술이 되었습니다.
친구가 유용한 것은 그에게 진정으로 충고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친구에게 충고할 때 그 충고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가 받아들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마음이 강퍅하거나 죄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충고를 하는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진실한 인격적인 사랑이 없이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은 정죄하기 쉬운 판단이 되기 매우 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면서도 사람에게 기운 패거리의 우정이 아니라 그들 교제 속에서 주님이 중심에 서계신 교제가 되기 위해서는 둘 다 하나님의 사랑이 되어가려고 하는 진지한 구도자의 열심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플라톤도 이야기할 때 당신이 무엇인가를 비판하려거든 먼저 그 비판받는 대상을 깊이 사랑하십시오. 하고 충고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런 깊은 사랑을 가지고 충고를 하되 자기가 뭔가를 이야기해서 이 사람을 발길로 차서 고치려고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그가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생각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친구의 통책의 진정한 목표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로 하여금 자기의 충고 앞에 서도록 만들지 말고 그러면 자꾸 사람 의존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목회자를 의지 하는 것을 자꾸 혼동합니다. 심지어는 목사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목사님이 하라고 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양장점을 할까요, 분식집을 낼까요? 나는 음식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분식집을 경영해본 적도 없고 양장점은 더더욱 해본 적이 없습니다. 뭐라고 충고를 해주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사람에게 매이고 그렇게 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항상 우리들이 사람들에게 충고할 때는 생각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가서 그 사람이 그 충고가 계기가 되어서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검하게 하고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의 충고는 항상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귀에 울려 퍼지도록 만들지 않고 성경을 더 탐구하고 싶도록 만들어주는 자극제의 역할을 합니다. 누가? 경건한 사람의 충고가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친구는 바로 이런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세워주신 사람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친구를 사랑하므로 그에게 양약과 같은 충고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그를 꺾어서 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해서 궁극적으로 그 친구를 자기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세우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아름다운 충고 이것이 바로 신령한 우정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그 충고를 통해서 서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그런 복된 삶을 누려야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 친구를 떠나가게 하실 때
“주께서 나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나의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시88:18)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당신을 전심으로 의지한 가운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와의 실제적인 연합, 성화의 삶 속에서 획득되는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캐들어 가보면 그 연합의 내용이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뢰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실제적으로 온전히 의지하는 것, 이것이 성화를 통해서 획득된 연합된 삶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은혜생활을 잘할수록 그리스도와 늘 연합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원리적으로만 연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 연합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을 누리면서 살아갈 때 사람들은 결핍이 많은 세상에 살면서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하나님께서는 어쩌다가 한번 신자들이 경험하는 것을 인해서도 기뻐하시지만 그러나 늘 이런 상태 속에서 살기를 기뻐하시고 이런 상태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 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근심하게 되십니다.
오늘날 우리들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대의 기독교 신앙이 갖는 가장 공허한 면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신자들은 도무지 좀더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와 좀더 연합된 가운데 합일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래로부터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끊임없이 주님께 접붙인바 되어서 살려고 애쓴 수많은 성도들의 삶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그렇게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신자의 영혼을 참답게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물질들을 소비함으로 느끼는 만족 같은 것들도 잠시 신자의 마음을 만족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만족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이 기쁘고 행복한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행복감을 지속시키게 할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만족을 얻기 위해서 쾌락으로 치닫고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숙제는 무엇인가 하면 어떻게 하든지 우리들이 참된 만족이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하나님이 아닌 어떤 것으로도 마음에 완전한 만족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그런 삶을 저희들이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우리들이 즐거움을 얻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 좋은 대로 살기 위해서 빚어진 것이 아니고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그 피로 우리를 구속하셔서 우리는 이미 우리의 것이 아니요, 주님의 것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해놓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 이외에 어떤 곳에서도 우리의 즐거움을 찾거나 혹은 있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들이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 이렇게 아름다운 친구의 관계를 누리고 하나님 안에서 참다운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함께 누리도록 우리에게 유업을 주시는 것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우리가 만약에 이 세상에 부랑아처럼 떠돌다가 그러다가 돈이 많고 형제들이 많은 부모하고 인정이 많은 집에 우리들이 입양되었다고 하면 처음에야 우리들이 그저 단순히 가서 그 집에 들어가서 먹고 입고 마시는 문제정도 해결했다. 그렇게 생각하겠으나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들은 그 집안에 한 식구가 되어 살면서 그 집안의 자녀들이 누리는 모든 특권들을 함께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들과 함께 어울려서 한방을 쓰기도 하고 전에 그 집에 입양되지 않았을 때 만약에 집안에 들어가서 냉장고를 뒤지고 뭘 꺼내먹었다면 가택침입죄와 절도죄가 성립되었을 것인데 그 집안에 입양이 되고 난 뒤에는 자기 집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누리며 살수 있는 권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똑같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게 되면 더불어 하나님 이외에 많은 것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살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물질적으로도 축복해주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나면 그는 그렇게 해서 이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것들을 함께 누리면서 이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나면 예전에는 전혀 만날 이유가 없었던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래서 목사와 양의 관계가 되고 그리고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랑하는 지체들과의 관계가 됩니다. 그리고 많은 형제자매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 사랑 안에 거하게 되고 그를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들을 우리들에게 누리면서 살게 해주십니다.
어떤 분이 간증을 그런 간증을 했습니다. 저는 사업도 할 만큼 해보고 공부도 할 만큼 해보고 누구보다도 애쓰면서 분투하면서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늘 가난했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그렇게 매일 망했습니다. 매일 망해서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그런 삶을 살았는데 그래도 아주 투박한 얘기로 그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그래도 밥술이나 먹게 된 것은 내가 예수 믿고 나서부터입니다. 간증이 매우 투박하기는 했지만 2-30년이 지났는데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아주 투박한 언어로 그래도 내가 그래도 밥술이나 먹게 된 것은 예수 믿고 나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당신 앞에 돌아온 사람들을 축복하셔서 그렇게 부요한 삶을 살게 하고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주시는데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모든 것들을 함께 누리며 살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는데 그런데 인간이 간사하고 악하고 부분적으로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주님이 사랑스러우셔서 우리에게 이 많은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하나님께 받은 것들을 더 많이 사랑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것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덜 의지하게 되는 그런 때가 있는 것입니다.
친구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친구를 주십니다. 또 믿음의 친구가 아니더라도 사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두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에게 누리게 하신 것들인데 그것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보다 친구를 더 많이 사랑하고 의지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를 하나님께서 결합시키셔서 남편이 아내를 만나게 하시고 아내가 남편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지만 그러나 각자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해서 눈이 머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우선순위가 하나님에게 분명하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종종 우리에게 너무나 사랑하고 가까이 있고 싶은 사람들인데 우리를 헤어지게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그것을 사용하시는 방법은 무궁무진합니다. 한사람의 생명을 거두어감으로서 그들을 헤어지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환경과 여건을 사용하시고 혹은 그렇게 둘이 한마음으로 연합되어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갈라지게 하시고 나누게 하심으로서 그들의 마음을 나누어지게 하시고 그래서 헤어지게 하시고 혹은 죽음으로 그들을 갈라놓기 전에 그렇게 하면 그들이 너무나 아파할까봐 먼저 갈등을 통해 마음을 갈라놓으신 후에 죽음으로 두 사람을 떼어놓은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이 몇 가지로 분리되어서 간단하게 말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상처가 얼마나 큰 것입니까? 재물을 잃어버리는 것은 조금 잃어버리는 것이고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은 많이 잃어버리는 것이지만 관계를 잃어버리는 것은 모두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새카맣게 다 잊으셨을 것입니다. 한 25년 전의 이야기인데 공무원들이 모여서 축구대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열심히 축구경기를 하다가 젊은 공직자 한사람이 뇌출혈로 쓰러져서 즉시 죽었습니다. 나이가 35세밖에 안 되었고 행정고시를 패스해서 아주 전도가 유망한 젊은이였습니다. 그 일이 있고나서 일주일밖에 안 되어서 여성 한사람이 서울 시내에 있는 높은 호텔 17층에서 떨어져서 죽어버렸습니다. 그 남편의 아내였고 거기는 바로 옛날에 결혼식하고 그리로 간일은 없겠지만 하여튼 신혼시절에 둘이 묶었던 그 방을 일부러 찾아서 거기에 가서 뛰어내려서 죽은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랑하는 남편이 죽었다고 해서 변한 것이 딱 그 사실 하나만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그런데도 설마 그 여자가 이제 월급 갖다 주는 사람이 없으니 뭘 먹고 사나. 그래서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재물을 잃어버린 것은 조금 잃은 것이고 명예를 잃는 것은 조금 더 많이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는 것은 매우 많이 잃어버리는 것이지만 관계를 잃어버리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행히 그 사람에게 만약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유한한 것이고 그리고 죽은 자신의 남편보다 더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전해주었다면 그렇지 않았겠지만 그런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잃어버린 관계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은 투신해서 일생을 피로 끝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시지만 항상 그 모든 것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잃어버리고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누리게 된 것들을 주님보다 더 많이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너무 마음아파하시고 때로는 하나님은 질투하십니다.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친구에게 하는 감정은 단순히 사랑하고 선행을 하며 서로 격려해서 주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그런 인격적 상호작용을 뛰어넘어서 하나님보다 더 많이 의지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이 메일을 통해서나 편지를 통해서나 황당한 질문을 받습니다. 목사님, 꼭 답장을 주십시오. 기도하고 응답을 해주십시오. 양장점을 해야지 되겠습니까, 갈비집을 해야지 되겠습니까? 참 저는 그렇게 얘기할 때 저는 할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목사는 할말이 없습니다. 뭐라고 해야지 됩니까? 그런 것을 낼름낼름 답변을 해주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겠습니까, 사람을 의지하겠습니까? 누구를 의지할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자랑스럽게 답장을 합니다. 나도 모르겠으니 직접 물어보십시오. 나도 모르지만 확실히 아는 것은 이것이니 양장점을 하건 갈비 집을 하건 할 사람은 당신이니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서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엇 그제도 편지 하나가 왔는데 보기 민망할 정도로 그렇게 나에 대해서 그릇된 평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장을 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당신에게 기쁨이 될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전적인 착각이고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을 차리십시오.
눈을 들어 영광의 주를 보라 소리 높여 주를 송축하라
사랑해요 송축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사람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변덕이 죽 끓듯 합니다. 사랑받는 대상이 신실하지 않고 요동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사랑하지만 단단히 주님 사랑에 붙들려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큰 풍랑이 일면 바다가 요동을 칩니다. 그때에 배들이 황급히 해변으로 대피합니다. 그러고는 그 줄을 부두가에 단단히 묶어둡니다. 그래도 역시 배는 요동을 칩니다. 요동을 치나 그러나 그 배를 그 파도가 깨트릴 수 없고 먼 바다로 끌고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배의 중심이 이 바다가 부두에 굽게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주님과 함께 할 때에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네
굳게 주님께 붙들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우리의 인생을 아주 가깝게만 보지 말고 때로는 멀리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나는 얼마 안 되는 인생을 살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순간들이냐고 묻는다면 목회를 하고 고생하고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리고 또 그런 것만큼 힘든 것이 무엇인가 하면 단절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 어깨를 부딪치면서 볼을 비비며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천국을 이렇게 그리워하면서 소망을 갖는 것이 하나가 다시는 헤어짐이 없겠구나. 다시는 이별이 없겠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장소의 거리감 때문에 만나지 못하는 일도 없고 갈등과 오해 때문에 찢어지는 관계도 없고 함께 있고 싶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의 배를 띄워 저 요단강 멀리로 떠나보내며 홀로 통곡하는 그런 종류의 슬픔이 없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그 나라를 사모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친구 앞에 살아가는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데 지장을 받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과감하게 우리를 그 친구와 작별하게 하십니다. 그때에 그 아픔과 혹은 갈등에서 오는 그 갈등은 무엇으로 비할 수 있겠습니까? 둘이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데도 피할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때는 그 아픔이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반대로 그렇게 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갈등을 일으켜서 서로 오해하고 미워하게 될 경우에는 정말 혓바닥 사이에서 쓴물이 올라올 정도로 고통스러운 관계의 단절들을 경험하게 합니다.
오늘 시인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깊은 죄 가운데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인 저자가 표제와는 상관없이 표제에 나오는 인물은 보관한 사람이고 다윗의 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죄 때문에 그는 몸부림치고 도처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발견합니다. 하나님 앞에 거절당한다고 생각할 때 인간이 피하기 쉬운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품에서 거절감을 느낄 때 쉽게 피하기 좋아하는 곳이 사람의 품입니다. 때로는 그 사람의 품을 피해서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우리들이 그런 갈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시시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런 당신의 인내를 보이십니다. 그래서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하시고 때로는 사랑하는 친구를 우리 곁에 떠나보내시기도 하십니다. 그것을 두고 그렇게 관계가 깨트려진 것이 누구의 잘못이니 또 따지며 미워하고 원망하고 이러는 것은 정말 욥이 자기의 친구들을 원망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 인생을 장구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미워할만한 사람도 없고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을 잊어버릴 정도로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들로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모두 하나님 안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삶의 균형을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친구는 자기의 사람이 되는 것이 좋은 친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사람이 좋은 친구고 자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 인간인 자기에게 목매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자기를 용서하는 사람, 그래서 자기도 하나님 때문에 그 사람에게 매인바 된 사람, 이런 사람들의 관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친구관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 인내 없이 친구는 없다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찌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잠27:10상)
지난 시간에는 우리들이 때로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할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우리에게서 떨어지도록 섭리하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또한 친구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하나님보다 친구를 더 많이 의지하거나 그에게 가려서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 도달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정말 사랑하는 친구를 우리 곁에서 데려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다시 하나님 앞에 집중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는 섭리가 있을 수 잇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와 정 반대로 지혜자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친구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친구의 아버지조차도 버리지 말아서 의를 돈독히 하고 살아가는 그 우정의 사람들을 가까이 두고 그들과 결별하지 말라는 권면을 지혜자가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어느 한순간에 결단을 하고 그리고 이제 이 사람과의 관계는 내가 단절해야지 되겠다. 마음에 도끼를 들고 나타나서 인연의 줄을 끊어버리는 일들도 없지는 아니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랑 없음을 인해서 그 관계가 멀어지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중한 친구들이 우리의 부주의나 게으름, 그리고 관계에 대한 태만함, 헌신에 대한 인색함 이런 것들 때문에 끊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한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관계의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큰 선물 가운데 하나도 역시 관계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임이여” 사실 여기에서 땅의 기업으로 얻는다는 이야기는 물리적인 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온유한 사람,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품이 변화된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참된 사랑과 은혜의 깊이를 알아서 자기가 얼마나 가치 없는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남들이 매우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이 진정한 온유함, 그 마지막 결국은 땅을 얻는 것입니다.
땅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이 성경에서 땅과 사람은 나누어지지 않고 하나입니다. 땅을 얻는 것은 곧 사람을 얻는 것입니다. 땅을 얻는다고 할 때 사람이 하나도 살지 않는 만년 빙하로 덮은 지도에도 안 나오는 북극 가까운 땅, 넓은 땅을 우리에게 준들 우리에게 그 땅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땅은 곧 거민을 의미하고 땅을 얻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사람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칼 한 자루 그리고 방패 하나 없이 일생을 사시고 오히려 마지막에는 사람들에게 체포되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지만 온유하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온 세상을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예수님이 지배하지 않으셨습니까? 바로 그것이 우리들에게도 계속 누려야 할 기업이요, 축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결혼을 하게 되면 자녀들을 위해서 많이 헌신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아이가 이 세상에서 한 인간으로 존재하도록 모든 준비를 갖추어주는 것은 그 부모의 의무입니다. 또 그렇게 훈련되도록 아이를 살게 하는 것도 부모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에 있어서 착각을 합니다. 그것은 많은 유산을 물려주면 그 아이가 이 세상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한편으로는 공부를 많이 시켜서 높은 학식을 갖게 하면 아마 그 아이가 안전하고 평화롭고 그리고 행복한 삶을 살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는 그가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도움을 주는 게 사실이지만 궁극적으로 그것들이 사람의 행복과 불행을 완전히 좌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은 좋은 성품입니다.
한 사람의 삶은 그 성품이 흘러나온 발출의 흔적이고 한 사람이 살아간 인생의 길은 그 사람의 성품이 흘러나온 결과입니다. 그 사람의 성품이 그리고 간 궤적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인덕이 많다. 인복이 많다. 그런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 그것도 알고 보면 성품의 메아리입니다. 한 사람의 성품이 울려 퍼진 메아리입니다. 그래서 수전노 같고 자기밖에 모르고 야비하고 쩨쩨하고 비겁하고 남을 무시하기 잘하고 교만하고 또 자기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비굴하고 이런 사람들이 인복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기회주의적인 사람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다시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온 지면을 두루 적시고 모든 것이 나로 말미암아 살아있게 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치관의 대대적인 변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가치관의 변혁의 핵심에 계신 분입니다. 가치관의 변혁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그러면 진정으로 남과 다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남과 다른 가치를 지니지 않으면 얻고자 하는 바가 모두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완전히 충돌을 일으키게 되고 양보할 수 없을 경우에 치열한 경쟁이 일어나고 정당한 경쟁으로 획득이 불가능할 때 가장 비겁한 방법인 폭력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것들이 나라로 확대될 때 그것이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은 유한한 자원을 놓고 서로 획득하기 위해서 벌이는 욕망의 충돌입니다. 아무리 제 아무리 대의명분을 이야기하고 나팔을 불어도 결국 마지막에 알고 보면 욕망들이고 욕망의 충돌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개인의 삶에 있어서 아주 야비한 경쟁관계가 성립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비인간적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창조의 아름다운 질서를 파괴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 사람들과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 그러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치하에서는 처절한 경쟁은 사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정상적인 경쟁보다는 비정상적이고 비겁한 경쟁이 훨씬 더 야기됩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도 어떤 결과가 됩니까?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잘살고 못살고 하는 차이는 당연히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살고 못 사는 사람들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실은 사회가 역동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제가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2장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썼습니다만 (?)공산주의다 뭐다, 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해가 매우 미숙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에서 잘살고 못 살고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하나의 강점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잘 못사는 사람들이 잘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대체로 승복하는 사회가 되어야지만 이제 건강한 자본주의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못 사는 내가 도저히 승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는 사회는 한이 맺힌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한이 맺힌 사람들이 생겨나게 될 때 사회는 불안하게 됩니다. 나는 오늘날 공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우리 애들도 그렇게 뛰어난 애들이 아니지만 옛날에 지금부터 수 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들 초등학교 시절, 그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사실 그때도 공부하는 여건이 잘 사는 아이들과 못 사는 아이들의 차이가 있었고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는 중학교 시험까지 있었습니다. 가장 불행한 세대를 거친 것입니다. 중학교 시험까지 있었는데 시험이 얼마나 치열했는가 하면 초등학교 5-6학년 애들을 모아놓고 과외공부 선생이 칠판에다가 3단 4락 그렇게 쓰면서 공부를 시켰습니다. 3시간을 자면 중학교 시험에 붙고 4시간을 자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무식하게 공부를 시켰는가 하면 음악교과서를 1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저의 경우 안보고 모두 쓸 수 있게끔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몇 분 음표 몇 분 음표를 외우고 쉼표 외우고 높낮이 외워서 그렇게 해서 88.... 이런 식으로 숨표를 첫 페이지에서 끝 페이지까지 다 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888... 8박자 8박자. 이렇게 신호등인가 뭐 그런 곡조입니다. 58 44해서 그래서 다 외우는 것입니다. 쉼, 그것 딱 한 토막 비어놓고 그것을 메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생각하면 말도 되지 않는 그런 교육을 그렇게 받고 조회시간에 아이들이 쭉 서서 조회를 하면 꼭 서문영(?)씨 신음소리를 내면서 운동장에 쓰러졌습니다. 왜 그랬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살고 아예 우리 초등학교 같이 나온 아이들이나 어떤 아이들은 중학교 시험 떨어진 것을 비관해서 돌산 높은 곳에 올라가서 투신자살한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비인간적인 사회가 촉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보면 그 빈민촌들에 대한 이야기가 신문지상에 많이 나오는데 교회가 심각하게 방침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난이 대물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공부 못하는 것이 계속 대물림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학교에 다닐 수가 없습니다. 말이 중학교 의무교육이라고 하지만 돈이 없는 아이들이 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다 갖추어져도 얼마나 지겹게 공부를 안 하려고 하는지는 여러분들이 증인이 아닙니까? 정말 공부하기 싫잖아요. 좋았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아무튼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입니다. 다 공부하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내가 아는 친구 목사님 사모님은 자기 아들보고 애 공부 좀 해라. 그렇게 하면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 하며 야단을 치니까 정색을 하면서 그러더랍니다. 엄마, 엄마는 고등학교 다닐 때 한 공부했수? 그러더랍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일류대를 나온 것이 아니니까 그래 나 못했다. 어쩔래? 그러니까 그런데 뭘 그러슈. 이만큼 하면 됐지. 그러니까 그렇게 공부하기 싫은데 여건 자체도 안 갖추어져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들이 교육을 못 받은 채로 살아가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그런 것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사역자들을 불러놓고 그랬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청년들이 바글바글해서 할 일이 없어서 가치도 없는 것을 가지고 고민하는 청년들도 많은데 그런 데라도 가서 공부방이나 차려놓고 열심히 가르치면 안 되겠나. 몇 번을 이야기해도 회신이 없어 내가 한번 신림동에 한번 가보려고 합니다. 도대체 영성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리고 도대체 그리스도인이 이 죄로 가득 찬 세상에서 함께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을 받으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정말.
언제나 그렇게 해서 자란 아이들이 자기가 가난하게 무지하게 사는 그 현실에 대해서 승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적극적인 의지가 아니라 이미 교육의 해택에서 완전히 배제된 채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가난을 대물림하게 되고 거기에서 범죄하고, 범죄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어떻게 보면 엄청나게 나쁜 짓이지만 그것을 좀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보면 정상적으로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자기 미달의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한 차선의 선택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범죄함을 박멸하려고 해서 일괄백계를 다스린다고 해서 그 범죄가 절대로 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무엇인가 하면 궁극적으로 그들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 진정한 성향의 변화가 일어나야 하고 그리고 외적으로나 환경적으로 그렇게 치열하게 승부하며 살지 않아도 되는 기본적인 삶의 여건들을 사회가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저는 뭐 비전문가이고 매우 짧은 식견을 가지고 있는 미숙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나는 국가가 발전하는 것을 원하겠는가, 사회가 발전하는 것을 원하겠는가 하면 나는 사회발전을 먼저 택하겠습니다. 결국 국민이라는 말 자체가 엉터리입니다. 국민은 무슨 놈의 국민입니까? 나라 국자가 들어갔습니다. 영어의 people이 아닙니까? 영어의 people은 국민이 아닙니다. 그냥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그런 것들을 채택할 때에도 모두 정치주의사회관이 지배를 한 것입니다. 모두 일제 유산들입니다. 청산되지도 않은 그 친일파 문제들까지도 다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승복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사회 자체가 승복이 안 되는 구조 속에서 계속 발전을 해온 것입니다.
역사 이야기를 자꾸 이야기해서 미안합니다만 생각해보십시오. 처음에 해방이 되기 전에는 민족주의나 반 민족주의나 사실 그것도 좀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하여튼 어떻든지 간에 민족주의나 반 민족주의나 이런 것은 선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판단해서 딱 들이대면 일제에 굴복하고 그렇게 비겁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깨끗이 정리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을 공개적으로 (?)안 됩니다. 여러분 비근한 예로 프랑스가 독일에 의해서 4년 동안 지배를 받습니다. 그때 쓴 정권이 그 유명한 비시정권입니다. 4년 후에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7,000명을 사형시켜버렸습니다. 철저히 잡아내서 7,000명을 사형시켜버렸습니다. 그 과거를 딱 청산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냥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게 딱 민족주의 반민족주의가 갈라졌었는데 어느 한순간에 이상하게 갑자기 이게 일제에서 남행하려는 사람을 등에 업고 민족의 피를 빨아먹은 그런 더럽고 비열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인데 상관없이 갑자기 느닷없이 공산주의 대 민주주의가 들어온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대 공산주의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렇게 친위대에 가서 빌붙어서 먹고 살던 그 비겁한 선택을 했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육신의 영달을 위해서 처절한 움파로 둔갑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기회를 독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승복이 되겠습니까?
나는 지금 어느 사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승복이 안 되는 가운데 역사가 전개되어 왔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위에 최악의 자본주의 형태가 이 땅에 도입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승복이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잘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승복하지 않는 것, 기회를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이 기회를 독차지한 사람들에 대해서 승복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출세의 길을 달린 사람들에 대해서 승복하지 않는 기회가 박탈당한 그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인정합니다.
우리 선배 가운데 국문학을 아주 좋아하는 선배가 있습니다. 재능도 있어서 신문에도 가끔 나오고 그러는데 지금은 다 늙은이가 되었겠지만 어째든 그렇습니다. 그런데 꿈이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교대를 나와 다 하려고 했는데 마지막에 면접에서 떨어졌는데 이유는 어머니의 8촌이 북한에 조금 부여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8촌이 누구인지 얼굴도 모르는데 결국 그 꿈을 모두 접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승복할 수 있겠는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렇게 승복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우리들이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게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인이 제대로 된 사람들이 나와서 이런 사회에 새로운 정신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이런 사회, 이런 승복을 할 수 없는 사회, 예를 들자면 이렇지 않겠습니까? 죽어도 승복이 안 됩니다. 그리고 막 엄청나게 잘 삽니다. 언제 한번 여기서 택시를 탔더니 택시기사가 세상이 개떡 같다고 욕을 합니다. 그래서 나는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개떡 같은가 하니까 사실 개떡이 얼마나 맛있는데 그 사람이 개떡을 모욕을 해도 분수가 있지 여기 평촌에 산다고 합니다. 어느 날 친구가 동창회라서 만나자고 그래서 갔더니 자기는 영업용 택시를 몰고 갔는데 이 친구는 그때 제일 좋은 차 그랜저를 기사를 딸려서 몰고 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쳐다보더니 요즘 뭐 하는가 해서 택시 운전을 한다고 하니까 힘들어서 어떻게 하나. 그래서 이 자식아 하나도 안 힘 든다. 살만하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일도 안 하고 매일 화투나 치고 정미소 있는 것도 다 말아먹고 어느 날 개발을 하더니 돈벼락에 올라앉은 것입니다. 똥 지개를 지고 다니고 그 일도 제대로 안 해서 정미소까지 날려버리고 화투치기나 하고 다니던 놈이 어느 날 갑자기 기사를 딸리고 나타나더니 조금 있더니 뭐 지역의 무슨 구 의원으로 나온다고 그러니 승복이 되겠는가 하면서 그러면서 욕이 막 나오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그런 예가 부지기수로 많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내가 궁금해서 이야기하는데 공부라고 하는 것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차근차근 한사람의 사회인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공부를 가르치는 가운데 그것들을 테스트해서 그래서 자기의 적성을 찾아내서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공부입니다. 중학교 다닐 때부터 수학능력을 족집게처럼 가르치는 선생님을 붙들어 매서 그래서 그것을 막 집어넣어서 떡볶이 하듯이 해서 그 애가 최고성적을 받아서 인류대학을 갔는데 고액과외를 못한 아이들이 승복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부모지만 승복할 수없습니다. 우리 아들보고 그랬습니다. 나는 능력도 없지만 내가 능력이 닿는다 해도 나는 너를 그렇게 교육시키지 않는다. 차라리 인류 대를 못가고 삼류 대를 가고 삼류 대를 가기 위해서 제수를 하는 한이 있어도 나는 범죄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아이가 피해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는 내가 그 아이의 입장이 되어도 나는 죽을 때까지 승복을 못 할 것 같습니다. 그 아이는 말하자면 홈 레이드 된 집에서 돈을 가지고 만들어낸 우수학생입니다. 그렇게 된 아이들이 기회를 얻고 사회의 지도층으로 등극한다고 할 때 이 사회가 무슨 희망이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올바른 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어떤 사람 그리스도인이 열심히 사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고용을 창출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진짜 그 사람이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없고 정말 자기 회사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잘했습니다. 그럴 경우 어떻게 되겠습니까? 실제로 미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거기는 노동조합이 굉장히 무섭습니다. 대통령이 무서워하는 사람이 그 사람인데 발권하는 총재하고 노조연맹위원장입니다. 자기가 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돈 찍어오라고 그래도 나는 못해. 하면 자기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런데 노조에 다 가입하게 되어 있는데 60명이나 모여서 이뤄온 회사인데 온 교원들이 다 노조를 만들지 않겠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분명히 외합이 있었다. 생각을 하고 그리고 노조연맹에서 사람들이 파견되어 나갔습니다. 조사를 해보니까 황당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사람은 거기에 가서 기업을 했는데 이 사람이 그 직원들하고 이제 하는데 완전히 한국전통적인 사회의 방식을 가지고 향약이나 두레로 시작되는 그런 공동체 정신을 가지고 기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코쟁이들이 그런 기업의 정신을 사실 알 수 있겠습니까? 말로 해서 설명이 안 되니까 자기가 몸소 실천을 해보는 것입니다.
직원이 어느 날 안 나왔습니다. 직원이 전화를 해서 아파서 못 나간다고 했습니다. 노동자는 아프면 쉴 병가를 낼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황당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람이 몸이 아파서 회사에 못가고 누워 있는데 누가 방문을 한 것입니다. 사장이 사과를 들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짐승을 보듯 하더랍니다. 이런 사람이 있나. 무례하게 말이지, 내가 아파서 회사를 못 갔으면 그런 줄 알지 어떻게 찾아오나. 이 사람은 뭔가 이면에 감추어진 어떤 (?)이 아닌가. 그런데 시종일관 똑같이 행동하면서 이 사람이 한국의 정신, 동양의 가족정신을 이종업원들이 이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2월에 가서 더 가관이 일어났습니다. 12월 연두결산이 끝나고 1월 달에 직원들을 다 모아놓고 온 기업을 완벽하게 공개합니다. 여러분들이 제품을 만들어서 이만큼 팔았고 그리고 원가는 이만큼 들어갔고 원가의 세부적인 이 사항은 이것이고 돈이 얼마 남았다. 그런데 내가 얼마를 투자했고 이만큼 일을 했다. 나도 일을 했고 여러분도 일을 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10%씩 월급을 다 올려주고 나도 남는 돈이 이만큼인데 내가 이만한 액수를 투자하고 이렇게 했다. 그런데 재투자를 이만큼 해야지 되겠다. 그리고 이만큼 남는데 나도 수고하고 돈을 많이 집어넣지 않았나. 내가 이만큼은 가지고 가겠다. 괜찮겠나. 종업원들이 좋다. 그러면 내가 가지고 가겠다. 이렇게 기업을 한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니까 모든 종업원들이 모두 신뢰를 하는 것입니다. 그 회사 자체가 하나의 가족공동체처럼 모인 것입니다.
그러고 그렇게 야박한 사람은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경찰이 경찰차를 몰고 가다가 5시가 되면 간판을 아웃 오브 서비스 하고 지나가는 나라입니다. 근무시간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인데 회사에 대한 동양적인 애사심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노조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하고 만약에 그런 식으로 기업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러면 이게 잘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마음 저 한구석에서 수긍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아주 많아진다면 사람들이 점점 더 수긍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가치관이 그냥 돈을 벌어서 어떻게 하든지 종업원들 조금 주고 세무당국을 속이고 그렇게 비자금 모아서 정치인들 똥이나 닦아주고 그렇게 해서 어떻게 불법적인 해택을 받아서 그래서 잘 먹고 잘살아서 이렇게 하고 이래야지 되겠다. 그런 가치관을 가지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흉내를 못 냅니다.
새로운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리적인 업적보다도 사람을 매우 소중히 여기며 생각하는 그런 정신입니다. 그래서 나는 망한 기업의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깊이 비난합니다. 왜냐하면 하다가 안 되면 집어치우면 되지. 어느 사업을 하는 사람이 그래서 내가 대놓고 뭐라고 그랬습니다. 당신 그 사고방식이 잘못됐다. 당신이 만세 부르면 당신이야 그만두면 그만두지만 밑에 딸린 수많은 젊은이들의 인생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사회적인 의식이 없는 사람이 절대로 지도자의 자리에 올라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안중에 없는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고 아끼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것이 동일한 가치관을 가지고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가치관이 변해야 합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근로자들에게 박한 임금을 주고 그리고 비자금을 모아서 특혜를 받고 그래서 부자가 되고 그리고 검은 돈을 모아서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쌓고 그렇게 한다면 그렇게 하기 위한 가치관이 있습니다. 그 가치관과 결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은 별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결국은 신앙심이 아니면 안 됩니다. 사실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도 개개인에 대한 깊은 존중 위에서 그 윤리를 가지고 토대가 쌓여져 있을 때는 사회가 건강하게 하는데 힘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아주 유물론보다도 더 극단적인 물질주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유물론에서는 사람이 물질에 부하다고 말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말로는 그러지 않는데 사람을 사고파는데 인신매매가 행해집니다. 계급이 없다고 그러는데 공산주의사회보다 더 비참한 물질적인 부의 소유 여부에 따라서 더 비참하고 세습적인 계급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그 별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될 사람들이 여러분들입니다. 특히 젊은 여러분들이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 자신이 변혁된 가치관을 지녀야 하고 변혁된 가치관이 소중하다고 하는 끊임없는 인식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 원동력이 결국은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덧없음과 공허함을 인식하고 존재하는 모든 자원은 창조주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창조의 질서에 맞도록 그 물질을 사용하고 그리고 거기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를 누리게 하고 그리고 사람들에 의해서 자기의 존재가 누려지고 공유되는 그 곳에서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그 좋은 친구관계 같은 것도 지속되지 못하고 깨트려지는 모든 이유들이 대부분 무엇 때문입니까? 사실은 욕망과 욕망이 충돌되기 때문에 깨트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십시오. 많은 친구, 좋은 이웃사람들이 금전적인 거래관계를 인해서 사업상의 경쟁관계로 말미암아 깨트려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그 사람이 진정으로 이런 친구와 친구 관계를 유지하게 하고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변혁된 가치관을 지녀야 하고 그 변혁된 가치관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인간 개개인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고 그리고 그 위에 그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의 형상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렇게 그 한사람 한사람의 그 형상을 위해서 희생하고 인내하는 그것이 자기 자신의 존재의 행복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원래 기독교는 철저한 개인주의를 기초로 해서 그 다음에 교회라고 하는 총체적인 연합주의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그래서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그 사람이 부도덕한 사람이든, 도덕적인 사람이든, 성결한 사람이든,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든 우리는 그 한사람 한사람의 가치를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삶의 상황이나 그 사람의 지위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교회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정신에 물든 것입니다. 왜 한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가치가 사실은 신자에게 뿐만 아니다 더 멀리 떠나가서 불신자에게까지도 심지어는 이교도들까지도 확장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인간관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깊이 사랑하고 그들을 깊이 존중하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그런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그분의 형상을 가진 매우 고귀한 존재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상이나 그 무엇보다도 더 뛰어난 성경적인 견해입니다.
그래서 6.25도 지난 주간에 지났습니다만 인류역사상 최고의 미친 전쟁이 6.25입니다. 정당하게 죽은 군인의 숫자의 몇 배나 되는 사람들이 민간인으로서 전쟁과는 상관이 없는 민간인들이 말할 수 없는 복수심에 의해서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교회가 뭘 했는지 역사가 묻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 하나님 형상을 가진 고귀한 존재라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이해한 성경관이 인간관의 토대 위에서 연합적인 정체를 생각했더라도 그렇지 않습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그 미친 광기는 마치 미국사람들이 저쪽으로 건너간 다음에 아메리카에 원주민들인 인디언들을 머리껍질을 벗기고 주일예배 끝난 다음에 총 들고 인디언들을 사냥나간 그 역사와 다름이 아닙니다. 깊이 통회해야 합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이 개인의 가치위에 그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이 결국은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떠난 것입니다. 그러고 자기의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런 가치기준이 있으나 그러나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본래의 가치로 회기 할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여전히 그 인간들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 때문에 사실은 교회라고 하는 이 지체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한도 안에서 교회라고 하는 이 전체가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훈련되어야 합니다. 그것들을 짓밟고 무시하면서 교회를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거듭난 피조물로서 가치를 바라보면서 교회 전체의 가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궁극적인 가치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동정이 불신자와 이교도들에게까지 확장되어야 하는 이것이 기독교적인 전통입니다. 이게 정말 성경적인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존 오웬은 자기가 쓴 책 속에서 그런 식의 국교도 신앙을 가지고 비국교적인 청교도들을 그렇게 무참하게 박해하고 살해하고 그리고 오 마일 령을 내려서 자기가 사는 곳에서 이동하지 못하게 설교사역을 못하게 하는 이 폭압적인 만행에 대해서 그렇게 비통하게 울부짖듯이 호소했습니다.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어떻게 예배의 방식이 다르고 믿는 신앙의 심령이 다르다고 이유 때문에 그렇게 비참하게 인간을 죽이고 살육할 수 있는가. 이것이 진리와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이란 말인가. 이것은 모두 인간의 죄와 광기의 역사이지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 그런 정신이 이 교회 밑에 도도하게 흘러서 깔려져야 합니다. 하물며 예수님도 인간을 그렇게 대하셨다면 국가라고 하는 이런 기관 같은 곳은 더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상과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국가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켜라.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하는 것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것을 누가 가르치는가 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가르치고 일깨워야 합니다. 보십시오. 우리들이 비록 그런 역사적인 정죄주의나 전체주의나 군국주의나 이런 도구들이 되어서 비참한 살육에 참여하고 그러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사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인간에 대해서 얼마나 하찮게 생각하는 사고가 우리 속에 깔려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물려주신 정신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중심의 이기심들이 자꾸 친구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쳐놓은 울타리, 자기의 사고방식, 자기의 이익에 도움이 되고 그들 안에 그런 모든 것들을 이렇게 놓고 볼 때에 그때 거기에 맞고 유익이 되면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끊어지게 만들고 토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성경적으로 보면 옳은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몇 주 동안 그런 주제를 가지고 깊이 묵상하면서 만들어낸 문장입니다. 적어 놓으실 수 있으면 적어놓아도 좋습니다. 두 번 반복하겠습니다. 한 인간이 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인간이 한 사람만이라도 진실 되게 사랑하면 그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반복하겠습니다. 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단 한 사람의 어린아이라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결코 외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한 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누군가로 하여금 자기를 충분히 사랑하도록 허락할 줄 알고 자기가 또한 다른 사람을 그렇게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면 그는 한 인간으로서 완성된 사람입니다.
사실 주님이 우리를 많이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긴 세월동안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어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굉장히 힘들어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를 녹여서 그 사랑이 우리를 감화시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 앞에서 할말을 잃어버립니다. 왜 쓸데없는 인간을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셨을까? 우리가 도대체 무엇인데.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가슴을 녹이고 지나갔는데도 쉽게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우리 자신의 성품은 한번에 모두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느 자매가 옛날에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거듭나고 나서 3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왜 아버지의 사랑이 잘 모르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저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목회를 하면서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면서 사랑할 줄 모르는 불구상태에 있는 사람만큼이나 사랑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불구상태에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정말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그렇게 망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서서히, 서서히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그런 사랑을 진실 되게 알고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자기 용납의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이 사람은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고독감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록 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진실 되게 친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그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심지어는 그 사람이 자기의 사랑을 몰라준다고 할지라도 사랑을 받은 사람보다는 실제로 사랑하고 그를 위해 참고 기다리고 그를 위해 희생한 그 사람이 훨씬 외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여기서도 사랑의 가치관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사실 관점 자체가 사랑을 받는데 갈지 그래서 따뜻한 사랑이 모두 넘쳐나면 나도 해택을 받을 거야, 여기에 가있지 그렇지 그게 아니고 정말 사랑을 꿈꾸고 이야기하면서 거기에 가시밭길을 걸으며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는 그 일에 자기를 바치고 싶은 그런 소망을 가지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 세상에 새로운 변혁을 일으키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소망 있는 존재들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들이 좀더 많이 희생을 했다면 그래서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해도 한사람을 진실 되게 사랑하고 희생하게 될 때 그때 비로소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청마 유치한씨가 자기의 우체국의 사람 시 속에서도 동일한 고백을 했습니다. “사랑하였음으로 나는 행복하였다.” 이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게 이 사실을 우리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가만히 보면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가장 기쁨이 충만하고 행복했던 때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스타처럼 군림하던 그때가 아니라 하나님을 혹은 그 하나님 때문에 내게 맡겨진 한 영혼을 혹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지체를 진심으로 낮아진 가운데 섬기면서 우리를 위해 낮아지셨던 예수의 정신을 배우던 그때가 가장 외롭지 않고 행복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랑으로의 부르심을 고난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새로운 특권으로서 사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가만히 돌아보십시오. 우리들이 얼마나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진 존재입니까?
그래서 결국은 이 모순 되고 왜곡된 이 세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나도 변하지 않고 세상도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소위 우리의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수도사적인 자기만족적인 영성이 되어가고 있거나 아니면 고매한 신앙관에다 세상욕망이 뒤섞인 그런 혼합주의적인 신앙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정말 구원받은 우리를 통해서 구현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그 복음의 계획들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치열한 삶과 명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찰하는 지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책임 있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딛는 것이 매일매일 삶의 연장이 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도자로서 따라가는 사람들로서 이 빛을 잃어버린 어두움이 많은 세대에 모든 질문에 이 빛을 던져줄 수 있는 지혜자, 빛을 나누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로서 현자의 삶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 사람 앞에서 자기를 현자라고 뽐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를 통해서 이 참다운 인생의 진실과 이 모든 지혜가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주어진 지혜가 그들에게 공급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현자적 소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지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명상과 자기 성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탐구와 그 삶의 적용, 그 속에서 분투하는 삶과 분석, 이런 것들을 통해서 어떻게 제한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들이 참으로 하나밖에 없는 이 인생의 빛을 비추는 주는 현자의 삶을 살아가서 총명을 잃어버리고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빛을 나누어줄 수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길을 주님과 함께 걸으며 깨달은 진리를 누군가에게 가르쳐줄 때 그 진리가 벼락처럼 그의 온 지성을 내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발견하고 그래서 이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리게 만들어야 합니다.
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해매일 때
믿는 자여 어찌할꼬
누가 그들을 위해서 울어주겠으며 누가 그들을 위해서 희생하겠습니까?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안위나 무가치한 일에 대한 몰두에 자기에 대한 부당한 평가, 거기에서 비롯되는 근거 없는 사랑, 이런 것들 때문에 친구를 잃어버리고 잃어버려도 아무 부족한 것이 없이 살아가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또 하나의 결론은 자기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고 아주 가치 있게 생각되는 동안에는 결코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 희생할 수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남을 위한 희생과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는 전적으로 무가치하고 사랑받는 사람의 가치가 자기의 존재 가치보다 매우 뛰어나다고 하는 그것을 인식할 때 비로소 희생과 헌신이 가능해집니다. 진정한 사랑의 수고가 가능해집니다.
주님께 자기 자신을 쏟아 부으며 불꽃처럼 헌신했던 사람들, 생명을 걸고 순교하기까지 주님을 섬겼던 많은 사람들, 영혼들을 위해서 타는 가슴을 부여안고 동 터의 땅을 누렸던 선교적인 삶을 살았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 자기를 매우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기를 이 모든 일을 행한 후에는 스스로 우리는 무익한 종일 따름이옵나이다. 그렇게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철저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정신에 사로잡혀서 그래서 주님이 사랑하셔서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 그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깊이 인식하면서 똑같은 정도로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인식하고 그러면서 그 주님이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고 그들로 하여금 나를 누리게 하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메마른 대지 한복판을 가르고 흐르는 강물과 같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행복을 소유하는데서가 아니라 관계하는데서 찾고 인생의 진정한 성취를 많은 사람들이 나를 누리는데서 나를 이용하는데서 찾고 나로 인하여 유익을 누리게 하는데서 찾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면서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바로 이 시대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좌표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와 탐욕과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상채기낸 교회와 이 세상 구석구석 인간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보혈의 고약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 포도주로 씻겨내고 고치고 치유하면서 살 때 그렇게 새살이 돋는 교회와 세상을 보면서 행복해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 곁에는 항상 많은 친구들이 있고 그들에게 있어서 친구들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많은 소유를 잃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더 가슴 아픈 일일 것이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이 친구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자기의 친구는 물론이거니와 아비의 친구까지 소중히 여기고 그들로 자신을 누리게 하고 자신의 이 희생의 그늘 아래서 살도록 만들어주는 사람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 안에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복음의 은혜 안에서 살아야 할 필요가 더 많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 친구가 배신할 때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욥16:20)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의 사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사랑이라고 하는 우리의 덕행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부분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자신을 중심으로 한 욕망에 의해서 포장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가 사랑하고 싶을 때 사랑하고 싶은 사람,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 혹은 자기가 사랑할 때 그것을 충분히 알아주는 사랑을 사랑하는 일은 쉬운 일이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가져야 할 그 진실한 사랑의 덕목은 오히려 그런데 보다는 다른데서 나타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메아리도 없고 내가 사랑을 베풀어도 돌아올 줄 모르는 메아리로 울려 퍼지게 할 줄 모르는 그런 돌같이 굳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사랑을 입은 증거로서 나타내보여야 할 덕목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아는 바와 같이 욥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큰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재물을 단번에 다 잃어버렸고 거지가 되었습니다. 좋은 평판도 모두 잃어버렸고 사랑하는 자녀들도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던 아내마저도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은 그 아내마저도 잃어버렸습니다. 그 위에 그는 심한 질병을 얻어서 온몸에 악창이 나고 부서진 폐허가 된 집터 위에서 기왓장으로 자기의 헌데를 긁어야 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정말 마지막에 남은 것이라고는 모질게 육신에 붙어 있는 목숨 하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셋이서 욥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욥을 위로하고 그리고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회개케 하여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하는 것이 아마 이 친구들의 우정어린 방문의 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자마자 욥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며 그 욥에게 네가 이렇게 망한 것은 너의 죄 때문이니 이제 너의 죄를 토설하라고 욥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친구들의 이런 요청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첫째는 욥 자신이 양심에 심히 거리끼는 큰 죄를 자신 안에서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을 동방의 의로운 사람, 그리고 사단에게 말씀하실 때 그와 같이 순전한 자가 없다고 하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틀림없이 그는 부자였고 그리고 많은 재산과 사랑스러운 자녀들을 거느린 하인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모자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그 위에 좋은 신앙이 있었습니다. 경건하고 진실한 신앙을 가져서 무엇인가 양심에 거스르는 큰 죄는 악을 행한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그것을 하나님 앞에 이 친구들이 원하는 바와 같이 시원하게 토설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욥이 완전히 그렇게 정결하고 의로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욥이 나중에 이제 많은 환란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면서 인생이 그런 게 아니고 신앙이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은혜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면서 깨닫게 됩니다. 그 비슷한 암시가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오리라” 이게 굉장히 중요한 암시입니다. 왜냐하면 욥이 자기 입으로 그런 고백을 했다고 하는 것은 뭘 의미하는 것인가 하면 적어도 이제야 자기 자신이 믿음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공경한 사람이었으며 순전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정금과 같은 존재는 아니라고 하는 것을 거기에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야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말 아직도 불결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러나 처음에 그 사실을 욥의 신앙의 수준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의 요구대로 응하면서 토설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찾아왔을 때 한번 골탕을 먹이고 정죄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이 세 친구들이 욥을 찾아왔을 때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그림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욥을 찾아가면 제일 먼저 욥을 따뜻하게 위로하면서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가. 이야기하고 욥 자신이 교만하여 모르고 있었던 죄를 토설하라고 이야기하면 욥이 그 자리에서 와르르 무너지면서 맞아, 이보게 친구들 그대들이 나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달해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떻게 나의 죄를 깨달을 수 있을까. 그대들의 말을 듣고 보니 나에게는 나의 양심에도 가려졌고 많은 사람에게도 감추어졌고 그대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죄가 있다네. 사실은 하면서 이런 저런 죄를 고백하며 와르르 무너지는 회개를 경험하는 광경을 상상했고 그러면 아마 친구들을 오히려 아니야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회개하는 사람에게 다시 복을 주시잖아. 그리고 위로할 스토리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자 너는 보았지 않니, 죄를 짓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철저히 망할 수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복 받지 못한 일을 본적 있는가. 그렇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욥은 비슷하게라도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결백을 강변하였고 그리고 자기는 하나님께 이런 대접을 받을 정도로 그렇게 잘못한 죄가 없다고 강변했습니다. 그러니 이 욥을 향하여 따뜻한 위로와 사랑의 마음을 베풀어야지 되겠다고 온 이 친구들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치열한 논쟁이 이루어지게 되고 그 논쟁 속에서 욥이 분명히 죄가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추궁하는 가운데 그 친구들의 마음도 감정적으로 많이 흥분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이 욥을 죄 위에 죄를 더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그렇게 되자 이 친구들의 마음속에서 맨 처음 욥을 불쌍히 여겼던 마음 같은 것들은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욥을 휘몰면서 정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욥은 자기 친구의 마음속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욥은 친구들이 자기를 조롱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조롱한다는 말은 마치 불신자들이 하나님이 모든 사상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비웃으며 조롱하는 것과 같은 그런 행동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욥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욥을 비웃고 욥을 하나님 앞에 대단히 교만하고 방자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며 욥을 몰아세웠고 그런 논쟁의 과정에서 욥을 향해 가지고 있는 따뜻한 예전의 우정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부분 이렇게 친구가 이렇게 비난을 하게 될 때 그 친구에게 우정을 기대했던 사람들의 마음에는 분노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 친구들이 이렇게 욥을 몰아세우고 욥을 조롱하고 그리고 욥을 비난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것도 알고 보면 이 욥의 친구들이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더 깊이 캐들어 가보면 사랑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이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한 지식의 단편성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가지고 계신 은혜의 세계, 하나님이 죄인을 다루는 그 섭리와 통치와 그 깊이와 넓이와 그 지혜는 욥의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훨씬 넓고 입체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미처 그 세계를 모두 깨달을 수 없었고 하나님께서 살을 에이는 것 같은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아는 인식의 지평을 하나님이 욥에게 넓혀주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욥이 놀랍게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인가 하면 오늘 성경에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보인이 계시고 증인이 계시다. 라는 말로 암시되고 있는 중보자에 대한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이 속에서 욥의 기동론을 읽어냅니다. 그래서 욥이 그 치열하게 연단을 당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 자신사이에 중보자가 되시며 그분이 보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정을 자기에게 알게 하고 자기의 사정을 하나님께 고해주신다고 하는 보인 사상, 중보자 사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치열한 고난의 연단 속에서 이 욥이라고 하는 인물이 그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중보자의 계시의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런 욥의 중보자 사상은 많은 논쟁거리가 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나오는 몇 가지 단어로 암시해볼 때 많은 학자들은 욥의 시대를 아브라함의 시대로 봅니다. 그럼 아브라함 시대라고 할 것 같으면 주전 2200년이고 다윗보다도 1200년 전인데 그때에 이처럼 탁월한 중보자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치열한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의 세계,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셨고 그 인식이 확장되는 과정 속에서 이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중보자를 읽어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서 이 욥이 “내 친구들은 나를 조롱하나 나는 주께 눈물을 흘리고” 할 때 여기에서 이 주를 역시 그 중보자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라고 여겨집니다.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서 사랑대신 배신을 당하게 될 때 그때에 모든 인간 속에 공통적으로 자기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사랑의 깊이와 비례하는 증오와 그리고 미움, 질투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자신의 친구를 최종적인 목적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설교 바로 두 주 전에 저는 시편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친구를 사랑하게 하셨지만 그러나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보다도 사람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별이라는 아픔을 주신다고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 바로 꼭 같은 상황입니다. 물론 욥이 하나님보다 친구를 더 의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이 욥을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보임을 더욱더 주목하게 하시고 그 중보자에게로 나아가는 은혜의 비밀을 터득하게 하시기 위해서 욥으로 하여금 주께 더 많이 눈물을 흘리게 하고 친구들에게 조롱을 받을 때 복수심에 불타고 그들과 맞장을 뜨는 대신에 오히려 중보자의 품으로 피하는 은혜의 비밀들을 터득하게 하셨습니다.
마치 시편 31편에서 다윗이 많은 고난과 사람들로부터의 핍박과 마땅히 사랑을 기대해야 할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할 때 노래했던 그 한 시를 생각나게 하지 않습니까?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저를 구설에 면케 하시며 그 은밀한 곳에서 나를 지키신다.”고 하는 고백을 시편 31편에서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사랑을 기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배신하고 등 돌릴 때 그들과 함께 맞서서 싸우는 대신에 다윗은 마치 병아리가 어미닭의 품으로 파고들 듯이 인생 앞에서 비난을 받을 때 그는 하나님께 피하는 비결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품에 피하자 사람에게 상처받은 것보다도 더 큰 은혜의 비밀들이 그 품안에서 다윗에게 보여 졌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누리면서 다윗은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지만 하나님에게서 오히려 그 상처 때문에 사랑으로 충전되는 은혜의 비밀들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욥이 바로 다윗 이전에 1200년 전에 이런 경건한 비밀을 터득했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조롱할 때 그는 보인이신 중보자에게 피하였고 그리고 그분께 눈물을 흘리며 은혜를 구했습니다. 욥이 그 중보자에게 눈물을 흘리며 무엇을 호소했을까요? 그 뒤편에 보면 자기의 사정을 홀로 통촉해주실 주님께 자기의 의로움을 변백하였고 그리고 그분께 자신의 인생을 의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자이신 보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바라보았던 그 욥이 행한 일이었습니다.
친구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고 우리가 의지해야 할 대상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누구도 당신을 능가해서 의지하는 것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당신을 의지하지를 원하시고 당신이 베풀어주는 도움을 전달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분량 이상으로 사람들을 높이거나 그 사람을 의존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친구들을 의지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친구들에게 감정이 섞인 비난을 받을 때 욥은 그들을 원망하고 그들을 인해서 가슴아파하기보다는 자신의 모든 사정을 통촉하시는 보인이신 중보자 앞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간구하면 중보자이신 그분이 자신의 사정을 변백하시고 그리고 자기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 비난받는 상황을 통해서 오히려 은혜의 비결을 터득하게하실 것이라고 하는 깊은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당신의 사랑을 받는 자녀인 우리들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쇄신시키시는 방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마음이 부요해지고 하나님을 덜 의지할라치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생겨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하시고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시시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고 그래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온전한 피난처요 그리고 내가 의존해야 할 분이라는 사실을 터득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일평생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십니다.
사람에게 비난을 받거나 친구에게 배신을 받을 때 그 친구를 너무 미워하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는 사람의 사람이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죄와 이기심 이런 것들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과 사랑하고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그 일이 기적에 가까운 일이지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고 그가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일이 일어나는 일이 어떻게 이상한 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라는 기적이 사라지고 나면 평범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미움과 시기와 다툼과 원망과 질투 이런 것들입니다. 경건한 욥은 이렇게 친구에 의해서 조롱을 받고 업신여김을 받을 때 그 즉시 예수님께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친구에게서 당한 그 원한 맺힌 사연들을 복수심으로 불태우는 대신 보인이신 중보자 앞에서 자기의 마음을 쏟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에게 비난을 받거나 실망했을 때 당신에게로 피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만이 변함이 없는 영원한 친구이시며 그리고 환란당할 때 외로울 때 그리고 고통 받을 때 위로가 되어주시고 피난처가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맛보게 하십니다. 구설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고 그리고 그를 자신의 품안에 품고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거나 고통의 연단이 없었더라면 깨달을 수 없었던 은혜의 세계의 심오한 비밀들을 터득하게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비로소 놀라운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시는 이 오직 예수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나를 버리지 않네
한번도 우리의 일생을 사는 동안 우리를 배신하지 않으신 분은 그리고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신 분은 당신의 신실성을 의심하게 하는 어떤 행동도 우리를 향해 하시지 않으시는 분, 그분이 오직 예수 한분뿐이라는 사실을 오히려 가슴 아픈 상황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인간에게로부터 모든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위로와 넘치는 비밀스런 상황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힘을 얻어서 자기를 미워하고 가슴에 칼을 꽂은 사람을 용서하고 그리고 자기를 원망하고 평판을 깎아내린 사람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고 그리고 그를 용서하게 만듭니다. 이런 사랑의 힘의 자원이 우리 안에는 없습니다. 그 비밀스러운 은혜의 세계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늘의 자원이라는 우리에게 공급해주실 때 비로소 우리를 그 자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순간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런 은혜로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바로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가는 삶입니다. 적선하듯이 물질을 찢어서 나누어주는 것만으로는 강물같이 흐르는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의협심에 불타서 고통당하는 사람을 돕고 올바르지 못한 강한 사람과 맛서는 투쟁 같은 것이 곧 강물같이 흐르는 삶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강물은 기분 내킬 때 흐르고 기분 나쁠 때 흐르지 않는 물을 우리들이 강물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굽이쳐 강원도 북쪽으로부터 경기도를 두루 적시며 서울 한복판을 갈라 서해로 흘러가는 강물은 도대체 언제부터 흘렀을까요? 언제부터 그 경기도 일대 땅을 두루 적셔 평야로 만들며 그렇게 흘렀을까요? 바로 그런 것입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사는 삶, 자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삶이지, 배짱으로 살거나 깡다구로 살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그런 자원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경건한 사람들은 욥과 같이 가장 가슴 아픈 하늘로부터 흐르는 강물처럼 살수 있는 자원을 공급받는 비결들을 터득했습니다. 자기를 배신하고 자기를 깎아내리고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비난하는 친구들을 향해 그 친구와 맞서서 대결하는 대신 미움과 원망으로 가슴을 불태우는 대신 오히려 주님께 눈물을 흘리는 비결을 터득했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그렇게 나를 험하게 대접하는 그런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만나지 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는 특별히 사람들과 원수 맺는 것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어째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설교자로 부름을 받아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안 다음부터는 그런 성품과 그리고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하고 진리인 것은 진리라고 말해야 한다는 그 사이에 충돌을 일으키는 상황이 없지는 않았습니다만 어째든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떨 때는 내가 명백히 잘못했기 때문에 선한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 그가 나를 미워하는 동기를 제공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내가 그만큼까지는 잘못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매우 내 뜻을 곡해하거나 오해해서 그래서 나에게 내가 잘못하는 그 이상의 복수의 감정을 품거나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전혀 근거 없이 애매하게 사람들에게 도전을 받거나 미움을 당한 적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각각의 경우마다 해결해야 할 방법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내가 억울하게 사람에게 비난을 받거나 미움을 당한다고 생각할 때 잘못한 일이 없이 혹은 매우 적은데 분량 이상의 고통을 그 사람으로부터 받는다고 생각할 때 예외 없이 언제나 가슴속에 처음 복 바쳐 오르는 것은 영혼을 향한 사랑이나 눈물 이런 것들이 아니라 미움과 복수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어느 순간에 그런 상황들을 이겨내는 비결들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를 진심으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처음에는 죽기보다 싫은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사람과 무관심해지고 관계를 끊고 그리고 그에게 복수하지 않는 것까지는 할 수 있겠는데 그를 축복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영혼을 위한 비결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고 사는 것을 절대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혜로 충만한 한 사람의 뜨거운 마음을 한순간 얼음장처럼 만들어버릴 수 있는 죄는 살인이나 간음, 폭행 도둑질 이런 죄만이 그의 가슴을 차가운 얼음처럼 단숨에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움의 죄, 원망의 죄 같은 것도 한순간의 그 뜨거운 가슴을 얼음장으로 만들 능력을 가진 악덕들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내 마음에 고통을 주는 사람을 위해서 욥의 친구처럼 자기를 조롱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를 축복하고 그를 진심으로 비는 것은 먼저 기도를 받는 그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기도하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분노를 잠재우고 미워하는 마음의 쓴물들을 중화시키는 놀라운 효과를 갖습니다. 건성으로 말고 진심으로 자신을 조롱하고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심지어는 자기에게 배신의 칼을 꽂은 마음의 그 친구를 위해서 진심으로 축복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를 축복해주십시오. 주님 앞에 이렇게 기도하기 전에 변화 받지 않았던 내가 샘이 날 정도로 하나님께서 복 주십시오.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은 그놈의 짓입니다. 회개하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됩니다. 그건 그 사람이 기도해야 할 것이고 자기는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됩니다.
옛날에 내가 가르친 자매 하나가 매일 자기 동생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동생 하나님 기억해주십시오. 이 자매가 기도하는 형제한테 하나님, 내 동생 훈이 순교하도록 도와주십시오. 매일 기도하니까 뒤에서 동생이 있다가 누나 그런 기도하지 마. 나 순교하기 싫어. 내가 그랬습니다. 순교를 하려면 자기가 하지 왜 동생 보고 죽으라고 그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의 가슴에 나의 마음에 못을 박고 그리고 나의 사랑을 원수로 갚은 그 친구를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해주십시오.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진심으로 비십시오. 저는 거기에서 승리하는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기도가 너무 힘들고 자존심이 상하는데 나중에는 정말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축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실 때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친구로부터 상처를 받거나 아니면 부모나 사랑받아야 할 관계로부터 상처를 받고 피해자가 되었는데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기도하다가 나중에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저 사람이 나에게 행한 것을 기억하지 마십시오. 그를 축복해주십시오. 필요하시다면 내게 줄 축복을 저에게 돌리시더라도 하나님 저가 복 받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오게 해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저를 멸시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도 저에게 좋은 것을 주십시오. 그러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축복을 빌 때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시겠습니까? 아! 과연 내 아들, 내 딸답구나. 그러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 이외에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라크에서 일어나는 살해하는 이런 것을 보면서 뭐 거기에서 남의 종교를 들먹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는 이슬람의 종파가 극단적인 종파라고 하지만 나는 묻고 싶습니다. 알라는 사랑을 가르치지 아니하는가?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기독교인인 미국사람에게 똑같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전쟁에 쏟아 부은 500조 가까운 그 어마어마한 돈을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데 사용하였더라면 아마 이슬람과 기독교가 화해했을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그 어마어마한 돈,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주둔하는 비용이 1조원이라고 합니다. 9900억, 그것을 이슬람에 베풀어보십시오. 처음에는 콧방귀를 낄지 모르지만 아마 놀라운 화해가 일어날 것입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다르다느는 이유 때문에 서로 죽이고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한 것이 얼마나 미친 짓인가 하는 것이 십자가 전쟁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나중에 그 십자가 전쟁을 일으킨 것을 기독교인들이 많이 회개한 것을 아십니까?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그래서 진심으로 축복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주시도록, 그때에 우리의 영혼 안에 놀라운 해방이 주어집니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복수심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 올무와 사슬을 끊어버리고 정말 자유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정말 흐르는 강물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정말 자기를 주면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 그가 어디에 살든지, 또 어떻게 살든지, 어떤 모습으로 살든지 그렇게 흐르는 강물처럼 원수를 사랑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고 자기를 배신한 자를 위해서 등 뒤에서 수없이 축복을 빌어서 결국은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 돌이키게 하고 어떤 미움의 죄도 자신 안에 자기를 결박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1. 은혜 받은 친구의 도리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아5:1)
우리들이 흔히 사람을 판단할 때 우리 보기에는 참 나쁜 사람인데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참 좋은 사람처럼 느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혹평한 것을 봅니다. 물론 어느 한쪽이 전적으로 그 사람을 잘못 평가한 경우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을 얼마나 오래도록 교제하였나. 또는 각각의 사람들이 그 사람을 만날 때에 평가의 대상이 되는 그 사람의 상태가 어떠했는가에 따라서 우리들이 서로 다른 평가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렇게 한 사람을 집중적으로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집중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스치듯 만나는 사람들을 어느 한 공간, 어느 한 순간에 그가 자기를 향해 대하는 여러 가지의 태도를 보고 쉽게 결정하고는 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정말 그렇게 착해 보이고 사랑스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적이고 그리고 정말 주님을 의지합니다. 착합니다. 그런데 살아온 길이 너무 불행합니다. 참 사람들도 너무 몰라본다. 그렇게 착하고 사랑스럽고 저렇게 귀한 자매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참 짓밟았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참 마음속으로 네가 참 많은 피해를 보면서 살았구나. 정말 상처받은 양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자매가 은혜가 떨어집니다. 그때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은혜가 떨어졌을 때 사실은 제가 못 본 때가 아닙니까? 왜냐하면 은혜 받은 사람들이 목사님 가까이 오지 은혜 안 받은 사람은 안 붙어, 그래서 안 오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도 선생님 곁에 졸졸 따라다니면서 출석부라도 들고 다니는 아이들은 그래도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오지, 공부를 못 하면 오락회라도 뭘 잘하든지 그런 애들이 돌아다니지, 학교생활에 흥미 없는 아이들은 그렇게 따라다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또 교회에 오기 전에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그 사람을 내가 어떻게 압니까? 탐정도 아니고 그러니 내 눈에 보인 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 받고 눈물을 흘리고 변화되고 간증한 모습만 내가 본 것이지, 그리고 주위에서 변화 받았다고 다 그러는데 그런데 어느 날 은혜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얼굴이 여우처럼 변하면서 전에는 자매였는데 이제는 여자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때 드러나는 자기의 옛 모습들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은혜가 떨어지면 사라진 것 같은 옛 성품들이 일제히 반역을 일으키면서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때 깨닫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그러니 그런 인생을 살아왔지. 여러 사람이 피해를 받았겠구나. 그래서 그랬습니다. 네 속에 네가 너무도 많아. 참 놀랍습니다.
형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쩜 그렇게 순수한지, 어쩜 그렇게 영혼들을 사랑하고, 어쩜 그렇게 예수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지. 그런데 은혜가 떨어집니다. 형제였는데 사라지고 남자로 변합니다. 그리고 그 포악한 기질, 야비한 성격, 비겁한 태도, 사람을 무시하는 오만함 이런 잠재되어 있던 것들이 고개를 들고 전부다 일어납니다. 그때 아, 그렇구나. 결국은 그래서 그런 인생을 살았구나. 그래서 정말 내가 막 온 마음을 다해서 그대들에게 말하는 것은 행복해지고 싶으면 소유를 확보하려고 애쓰지 말고 존재 자체가 변해야 합니다. 그러면 행복해집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온 성품의 궤적입니다. 그 이하일 수도 없고 그 이상일 수도 없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더 마음이 아픕니다. 아, 그랬었구나. 결국은 그 사람이 다 자기 자신의 존재의 성품에 어울리는 삶을 사는 것이지 그것을 뛰어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삶은 성품 안에 묶이고 성품은 기도 안에 묶입니다. 양자는 서로 공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아가는 삶 전체가 결국은 자기 자신의 성품에 반영입니다. 그것은 자기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그 삶이 가장 자연스러운 삶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여러분들이 들으면 다 쓸데없는 소리다. 그럴지 모르지만 한번 들어보십시오. 특히 자매들이 그렇습니다. 좀 이렇게 시집을 가고 싶으면 가치가 좀 나가게 보자기를 포장하고 다니면 되는데 무슨 그렇게 스스로 자기를 가꾸지 않은 사람은 내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매우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죄의 벌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영어로 화장품을 cosmetic라고 합니다. 그런데 희랍어 코스모스에서 왔습니다. 코스모스는 희랍어로 질서입니다. 그래서 화장품은 무엇인가 하면 질서를 잡아주는 것입니다. 질서가 없는 얼굴을 질서로 잡아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뭘 믿고 질서를 안 잡아주는지, 그러면서 매일 자기를 시집보내달라고 나에게 그러는데 참 딱합니다. 본인 자신은 자신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질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잘 보십시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이 이렇게 드레스하게 예쁘게 옷을 입으면 그것이 예쁜 것은 모든 여성들이 잘 압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안 하는지, 돈이 없어서 그렇게 드레시한 옷을 살 수 없습니다. 물론 말이 됩니다. 그런데 싼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안하고 다니는 것은 구멍 뚫린 청바지가 훨씬 편한 것입니다. 그리고 슬리퍼를 신고 발가락에 메니큐 바르고 맨발로 그렇게 다니는 게 얼마나 편합니까? 제가 제일 싫어하는 옷이 이 넥타이맨 이것입니다. 정말 싫습니다. 예배시간 이외에 아마 좀처럼 이렇게 입은 모습을 여러분들이 못 볼 것입니다. 회의가 있든지 특별한 공식적인 모임이라면 모르지만 나는 정말 싫습니다. 왜? 그게 불편하니까. 그럼 결국 어떻게 되는가. 옷을 살 때도 전부다 다 편한 옷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흘러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합니다. 아줌마와 처녀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두 가지인데 고무줄 바지를 좋아하고 전철에서 앉으려고 하면 아줌마의 표시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긴장감들이 다 사라집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어느 자매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게 하고 다니면 불편하지 않습니까?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는데 예뻐지고 싶은 사람은 불편한 것을 항상 비용이라고 생각하고 감수를 하는 것이 몸에 익어야지만 예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참 별로 예쁘지 않은 사람이 하는 말이지만 평범한 말이기는 하지만 참 놀라운 진리입니다.
교회를 질 때도 저는 그랬습니다. 이렇게 하시면 교회가 관리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건축하는 사람보고, 관리를 내가 할 테니까 예쁘게 하라. 예쁘게 해놓으려면 항상 비용이 들고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당신은 만들기만 해라.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결국 자기 성품을 따라서 살아가는 그게 성품입니다. 그러니까 정돈된 상태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향한 최대의 고문은 난잡하게 어지럽혀진 방에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 그리고 아무 것도 치우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 고문입니다. 또 그냥 어지르는 사람에게 가지런히 정돈된 방에서 가구 하나 손대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것도 고문입니다. 결국은 한 사람이 살아온 발자취는 성품이 그려놓은 궤적입니다.
보십시오. 왜 똑같은 사람에 대해서 한때는 너그러운 판단, 후한 판단이 주어지고 어떤 때는 그 사람에 대한 혹평이 주어지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판단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상태가 문제가 되겠지만 판단을 받는 사람이 무엇인가 풍부한 자원을 누리고 있을 때는 너그럽고 풍부한 사람이 되고 그리고 그런 자원을 거의 누리고 살아가지 못하는 박한 상태에서는 좋은 평판을 얻기가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여러분 자신도 많이 풍부하게 변화무쌍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가서에 나오는 이 부분은 신랑의 노래입니다. 신랑이 자기만을 위해서 예비 된 동산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king secret garden 가든 왕의 비원에 들어간 것입니다. 왕의 비원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왕 외에 아무도 못 들어갑니다. 잠근 동산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덮은 우물이 있고 봉한 샘이 있습니다. 그 동산에 간 것입니다. 오래간만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자기가 오지 않는 동안에 정말 아름답게 열매들이 맺은 것입니다. 그래서 각양 약초와 그리고 몰약과 그리고 값진 향 재료들이 가득 나오고 그리고 꿀도 나오고 송이 꿀도 나오고 그러면서 그 모든 것들을 먹고 마시면서 기분이 최고도로 만족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프거나 혹은 병든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는 약제와 향, 그리고 값비싼 몰약까지 한 짐 지고 내려오는 그런 자원을 풍부하게 소유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신랑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나의 친구야. 나의 친구야 어서와라. 그리고 여기서 먹고 마시자. 많이 먹고 마시라. 그러면서 친구를 부르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주옥과 같은 진리들을 많이 찾아낼 수 있지만 오늘 주일 저녁마다 계속되고 있는 주제와 관련해서 나는 여기서 두 가지 진리를 찾아내고 싶습니다. 첫째는, 풍부한 자원을 누리고 있을 때 친구에 대해서 너그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보십시오. 이 신랑이 이제 왕의 정원에 들어가서 그래서 정말 오래 만에 그 정원을 거닐었는데 정말 상상할 수도 없이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꾸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값진 약초와 그리고 향 재료, 그리고 값비싼 몰약 같은 것들이 잔뜩 있었고 그리고 거기에는 그뿐만 아니라 꿀과 송이 꿀도 있어서 모든 것으로 배부르고 그리고 덮은 우물 봉한 샘에서 맑은 물까지 마셨습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을 회복하고 정신을 쇄락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기쁘고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너무 아름답고 행복한 것입니다. 너무나 기쁘고 좋아서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너그러운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친구들을 초청합니다. 와라. 여기가 비록 왕의 정원이지만 내 친구들아 오너라. 오늘은 괜찮다. 와서 내가 마신 것 같은 이 꿀과 젖을 마시고 그리고 내가 누린 것 같은 똑같은 것들을 너희도 함께 누려서 나의 즐거움에 동참하자구나. 그들을 향해서 너그러운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인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사람들에게 늘 부담스러운 어디에 가든지 누구에게 기대어서 사람들에게 피곤하게 하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어디에 가든지 사람들을 쉬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점심시간이면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그래서 이제 그것도 며칠 생각해서 호떡 의자를 사온 것입니다. 호떡 의자는 제가 붙인 별명인데 동그란 작은 의자를 사온 것인데 그 이유는 공간을 가장 적게 차지하고 가격을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쌉니다. 그래서 몇 년 쓰다가 망가져도 비쌀 게 없겠다. 싶어서 그것을 산 것입니다. 그렇지만 값이 싸서만 그 의자를 산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부러 거기에 앉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려고 작은 의자를 산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열린 공간이 전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와서 이렇게 앉아있으면 아무 것도 안 먹고 거기에 앉아있어도 보탬이 됩니다. 왜 그래도 거기 아무도 앉아 있지 않으면 누가 들어올 때 좀 어색한데 몇 사람이 앉아 있어서 이야기하고 겨울에 모닥불에 불이라도 피어 있으면 나도 한번 앉아볼가 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평일 날에도 사람이 꽉 차고 열린 공간에 들어가면 한적한 것이 아니라 그저 왁자짓걸 합니다. 밖에도 사람들이 꽉 차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나무로 예쁘게 테이블을 다시 세 개를 맞추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비치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앉은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내가 지나가도 인사도 안 합니다. 어떤 때는 아저씨 저것 좀 갖다 주세요. 그렇게도 합니다. 누군지 아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러는 것인데 이게 무엇인가 하면 테이블이 터닝 되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그래서 내가 실무자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저 의자를 뽑아내고 다른 곳에 보내고 그리고 거기를 지금 있는 의자보다 더 케쥬얼한 의자로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지만 좌석수도 70석 이상으로 늘어나고 테이블이 돌아가는 소위 이야기하는 터닝 타임이 짧아진다. 그래야지만 여러 사람이 이용할 수 있고 경영이나 모든 면에서 합리적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게 소파입니다. 한번 철퍼덕 앉으면 일어나기가 싫은 것입니다. 왜 허리까지 푹 묻히니까 그러니까 거기에서 피로가 풀립니다. 심지어는 거기서 사람들이 고개를 떨구고 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편하니까, 그런데 호떡 의자는 어떻습니까? 이것은 불편합니다. 실례지만 어떤 분은 하나를 깔고 앉아있는 게 너무나 불안해 보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두개는 깔고 앉아야지만 되는, 하나를 깔고 앉아서 너무 불안해 보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대신 어떻습니까? 작은 의자를 일부러 한 것입니다. 장소뿐만 아니라 불편하게 하려고, 왜 밥 먹었으면 빨리 일어나야지. 그래야지 다른 사람이 와서 먹고 그래서 테이블이 계속 터닝 되어야지 많은 사람의 숫자가 소화가 됩니다. 그러니까 거기는 밥만 먹으면 벌써 밥 먹는 동안에 엉덩이가 저려옵니다. 그러니까 숟가락을 딱 놓으면 자동으로 일어나서 나가게 됩니다. 그래야 그 다음사람들이 와서 차지하게 됩니다.
자,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누리게 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럴 때도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 자기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누리게 하고 그런 삶을 산다. 좋습니다. 제가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위한 시리즈를 하면서 그런 설교를 몇 번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가치 있는 삶 중에 하나는 빛을 나누어주는 현자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진리를 깊이 깨닫고 그것을 체득한 후에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게 된 사람들이 그 인생의 지혜를 사람들에게 빛으로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을 어두움 가운데서 건져내어서 빛 되신 주님께 돌아오는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어야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현자의 삶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강조했고 그 현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많은 부와 높은 지위가 아니라 진리를 아는 지성의 빛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지성의 빛이 자신의 삶 전체에 녹아들었을 때 그가 바로 현자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똑같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할 삶의 한 가치는 사람들에게 쉼을 주는 삶입니다. 그래서 내 친구와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 가족과 그리고 내 가까이 있는 부모와 형제들의 마음은 우리가 어떠한지를 비추어보는 거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우리가 옆에 있는 것이 그들의 마음에 평강이 되고 즐거움이 될 때 우리는 많이 성화된 사람이고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쉼을 주지 못하는 가시방석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서 앉기는 앉았는데 서 있는 것보다도 불편할 때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가시방석과 같다고 합니다. 그럼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의자가 되고 싶습니까? 10분만 앉으면 엉덩이에서 쥐가 나는 의자와 같은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호떡의자와 같은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한번 와서 나와 함께 관계를 맺으면 내 인격과 내게 주신 그 감화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쉼을 경험하고 그 안에서 안식을 오래도록 누리게 하는 안락의자와 같은 그런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앉기는커녕 잠시만 머물러도 벌떡 일어나고 싶은 차라리 무릎을 꿇고 손들고 서 있는 것이 편한 가시방석과 같은 그런 의자의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1번, 2번, 3번 중에서 어느 삶을 살고 싶습니까? 대답을 하십시오. 1번입니까, 2번입니까, 3번입니까? 아니 왜 그렇게 말을 안 듣습니까? 대답을 하지 않으시는데 어느 것입니까? 말로만?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의 인격 안에 그런 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결국은 우리 안에 그렇게 살수 있는 자원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그런 풍성한 자원을 은혜 안에 거함으로서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적으로,
그래서 저는 치유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동의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인데 최종적인 치유는 없다. 지상에서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치유학교에 가서 눈물을 펑펑 흘리고 치유가 됩니다. 나는 이제 우리 아버지 다 용서하고 우리 형제를 다 용서하고 그래서 돌아와서 몇 달 있는데 또 형제하고 아버지가 자기를 그냥 뒤집어놓습니다. 그래서 갈등하다가 보니까 아직도 치유가 안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재입학합니다. 그러면서 가서 치유가 된 줄 알았는데 아직 안 되었다. 그것을 백날 해봐야 해답이 나오나. 치유는 무슨 얼어 죽을 치유인가. 그렇게 치유된 줄 알았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았을 때고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죄가 바닥을 드러내게 되면 밑에 잠재되어 있던 모든 옛 성품, 아버지를 미워하고 형제들을 포악하게 대하던 그 한 맺힌 것들이 이기적인 속성들이 전부다 일어나서 데모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성화되어도 안전한 성화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더 안전히 거룩해지는 부활과 함께 누리게 되는 영화를 사모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세상이 전복되게, 그게 아닙니다. 그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비결이 무슨 비결입니까? 날마다 죽고 날마다 다시 사는 것,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에스타오르 타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제껏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현재 완료입니다. 그 십자가 영향 아래서 나의 옛 사람을 한번 못 박은 것이 아니라 계속 못 박힌 상태가 되도록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왕년에 은혜를 받았는데. 아니 왕년에 은혜를 안 받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금년입니다. 왕년에 은혜는 왕년에 받았고 금년에는 왕년대로 사는 것도 아니고 내년의 은혜로 사는 것도 아니고 금년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그게 현재적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이 신랑이 자기의 동산에서 많은 것들을 누리고 흡족하게 먹고 마셔서 자기 자신이 그것을 누리고 나니까 사람들을 향해 너그러운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은혜를 받지 아니하고는 절대로 빚진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을 향해서 안락의자와 같이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삶을 살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무리 그렇게 살고 싶어도 사람들이 살수 있는 모든 삶을 자기가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고 싶은 모든 것을 사람들이 다 살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렸을 때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 노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부러워하지 않았어도 성악가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면서 나도 10번만 노래를 잘하고 죽어버린다면 그래도 한번 나는 택해보고 싶다. 그래서 한번 저 노래를 가지고 유명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당시에 (?)파노나 그 다음에 마리아 칼라스 같은 그런 사람처럼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쭉 들으면 자기가 흥에 겨우면 자기가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번은 차를 탔는데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틀었습니다. 노래가 나오는데 뒤에 앉은 승객이 동승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남자 분이었는데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노래를 자기가 화음을 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꺼버렸습니다. 나는 잘 듣는데 초를 쳐도 분수가 있지, 이 사람이 눈을 지그시 감고 파바로티 노래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주제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가 부르는 노래에 흥에 겨워서 이렇게 노래를 부르면 그와 함께 듀엣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다른 사람은 너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하면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되는 것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없는 것은 없는 것이고 있는 것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냉정한 자원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수없이 깔고 뭉갤 수 있는 그런 제공된 의자의 삶을 살만한 자원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힘든데,
여러분, 어렸을 때 초등학교 다닐 때 말 타기를 해보셨을 것입니다. 벽에 서서 쭉 머리를 남의 엉덩이에 박고 서있으면 가위바위보 해서 점프해서 뛰는, 그 덩치가 큰 애들이 올라가서 말 타기할 때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 삶을 일평생 산다고, 안 됩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은혜의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예수님 때문에 용서하고 사랑할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들을 매우 존귀한 자로 여겨주고 그리고 그들을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로 축복해주고 그리고 나는 불편해도 그들을 섬겨주는 것을 나로 인해서 그들이 나를 누리면서 사는 것을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은혜의 자원을 우리들이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신랑이 그 비밀스러운 왕의 정원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너무 쾌활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육체는 그 꿀과 꿀 송이와 젖을 먹고 배부르게 되었고 그리고 어깨에는 향유와 그리고 몰약과 각양 각종 약초들로 가득 한보따리 지고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너그러운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도 어떻게 됩니까? 그 왕의 정원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의 그 비밀스러운 secret garden 그 은혜의 비밀스러운 정원,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예전에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예전에 맛볼 수 없었던 말씀의 그 복된 세계, 예전에 마셔본 적이 없는 그 아름다운 생수의 세계를 맛보는 것입니다. 아!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큰 은혜의 세계를 맛봅니다. 아, 정말 훌륭한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메마른 땅을 걸어가며 타박거리며 먼지를 일으키는 길 이외에 걸어가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그 왕의 정원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에서 그 하나님의 오묘한 은혜의 세계에 그리스도의 그 비밀스러운 성품, 그리고 거기에서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성품, 그리스도의 성품에 대한 비밀스러운 지식들, 그 지식이 가져다주는 영혼의 행복, 거기에서 체험하는 관계의 즐거움, 이런 것들을 말할 수 없이 느끼게 됩니다. 돌아와서 누군가에게 그것을 이야기해주어도 사람들이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만족하게 됩니다. 저는 특별한 취미가 없습니다. 가끔 그런 취미를 가져보라고 권고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 좋아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숲에 누워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참 좋습니다. 제가 작년에도 너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소진이 되어서 하여튼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로 그렇게 무리가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내가 한 일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읽는 일과 마지막 세 번째가 숲에서 누워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숲 속에 들어가서 의자를 펼쳐 뒤로 제치고 그리고 거기에서 누워서 컴퓨터에다 음악을 틀어놓고 그리고 누워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에서 히튼 치드가 떨어집니다. 그래서 온 몸에 다 묻습니다. 거기에서 3-4시간 동안 가만히 누워 있습니다. 1시간 반은 자고 2시간은 명상하거나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심호흡을 하면서 쉽니다. 그러면 정말 쇄락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내가 아, 그렇구나. 육체가 이 자연의 숲 속에 들어와서 이 히튼 치드가 떨어지는 이 숲에 누워서 심호흡을 몇 시간만 하고 쉼을 얻어도 이렇게 몸과 마음이 쇄락해지는데 하물며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의 동산에 깊이 들어가서 거기서 주님을 만나고 사랑을 받고 그럴 때 우리의 영혼에 공급되는 그 힘은 얼마나 놀라운 것일까? 그리고 그런 자원을 누림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 된 삶을 살 수 있고 안다고 하더라도 희생이 필요한 그 헌신된 그 빛 된 삶을 살수 있을 것이며 또 어떻게 우리들이 이 썩어가는 세상에서 소금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인가. 불가능합니다.
오늘 새벽에도 눈을 떴습니다. 일부러 수면을 충분히 취하려고 애를 쓰는데 새벽에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유명해본 적도 없지만 유명한 것도 싫고, 돈을 많이 가져본 적도 없지만 부요해지는 것도 싫고, 큰 교회를 목회해본 적도 없지만 대교회의 목회자가 되는 것도 싫고 하나님, 주님, 어떻게 하면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을 수 있을까? 주님께 많이 사랑받는 것, 그리고 내가 주님을 가장 많이 사랑하는 것, 그것을 인생에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일생을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의 모든 야비한 삶, 그리고 조잡한 신앙의 인격, 그리고 정말 피보다도 더 진한 그리스도의 보혈로 맺어진 지체들 함부로 대하는 것, 그들을 종처럼 섬기고 그들에게 쉼을 제공하면서 기뻐하고 보람을 느끼기 보다는 열등감을 느끼고 혹은 억눌린 마음을 갖는 그 모든 반응들이 결국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은혜의 자원이 부족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신랑이 오늘 비밀스러운 왕의 정원에서 정말 쉼을 얻고 그리고 많은 것들을 먹고 마시고 힘을 얻게 되니까 너그러운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래서 그 은혜의 자원을 하나님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답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궁극적인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 도움이 될 뿐입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소유하는데 열심을 내는 것에 십분의 일도 이 은혜의 자원을 소유하는 일에 열심을 내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교회처럼 이렇게 마음만 먹으면 말씀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언젠가 교리 묵상집을 만들어서 동네 목사님들 하나씩 나누어주었더니 어느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이 이런 것을 하는 것에 대해서 좋게도 생각하지만 그러나 좀 걱정스럽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 했더니 교인들이 아무 노력을 안 해도 이렇게 모든 것을 만들어서 공급해주는데 교인들이 태만해지지 않겠습니까? 내가 펄쩍 뛰었습니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는가. 밥 안 먹는 놈들은 죽을 써서라도 먹이는 게 부모의 마음이고 죽을 안 먹으면 누룽지라도 만들어서 긁어서 먹이는 게 부모의 심정인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내가 요즘 그 목사님의 지적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설교를 다 듣습니다. 설교 시간에 태만해서 놓치면 테입이 있습니다. 구역예배에 가면 그날 설교한 것 다 정리해서 프린터해서 다 나누어줍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한달이 지나면 묵상집이 나옵니다. 두 달이 되면 책이 되어서 나오고 세 달이 지나면 구역공부를 합니다. 수련회를 가면 수련회 교제로 나오고 가면 GBS 조장들이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또 도서관에 가면 돈이 없으면 무료로 빌려주고 그리고 또 가면 어디든지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누가 그렇게 말합니다. 모든 설교의 프레임들을 인터넷에 들어가서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만들기도 했습니다, 수요예배, 주일오후 예배, 주일예배 계속해서 지나간 것까지 다 정리해서 골격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렇게만 하면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있는데 정말 어린아이가 엄마의 가슴팍을 파고들어서 그 때 묻은 앞섶을 헤치면서 그 젖꼭지를 무는 그것은 누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욕구입니다. 누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자기가 가서 왕이 거기에 들어가서 자기가 실제로 그 몰약을 얻고, 향 재료를 얻고, 약초를 얻고, 생수를 마시고, 꿀도 마시고, 송이 꿀도 마시고, 젖도 마시고 이렇게 자기가 직접 그것들을 경험하고 나니까 친국들이 생각이 나고 그 친구들에게 너그럽게 될 마음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닫고 듣는다고 할지라도 죄에 지배아래 있을 수 있습니다, 그가 듣는 많은 지식들이 개념으로만 머물러 있다면 그는 명백하게 죄 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아무리 많이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으로 변할 것 같습니까? 절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편안한 의자와 같이 자기를 제공한 삶을 살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 비밀스러운 왕의 정원에서 은혜의 세계를 맛보아야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어떠한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의 그 깊이 넓이 죄인들을 향한 그 하나님의 말할 수 없이 존귀한 사랑과고귀한 은혜, 이 모든 것들을 알아가는 은혜의 경험, 은혜의 현재적인 누림의 상태가 될 때 그때 비로소 자기를 섬기는 자로 제공할 수 있습니다.
영어의 섬김, 봉사, 혹은 대접, 예배로까지 번역이 되는 service라고 하는 단어가 라틴어에서 왔습니다. 세레브스 노예입니다. 정말 그 주님의 은혜의 세계를 맛보고 그분 앞에 즐겁게 그리스도의 노예가 된 사람들, 그 사람들만이 그렇게 자기를 섬기는 자로 제공하고 자기를 누리는 사람들의 행복을 인해서 자신도 기뻐할 수 있는 그런 가치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은 여기에서 신랑이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누린 사람들의 의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초청할 의무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나누어준다고 칩시다. 그리고 사랑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에게 쉼을 제공해준다고 칩시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서 여러분들의 물질을 나누어주고 긍휼을 베푼다고 칩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그 사람들이 공유하게 되었다고 칩시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인생에 곤궁한 문제가 모두 해결이 됩니까? 친구의 그 고통스러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왕의 정원에서 많은 것을 먹고 마시고 그리고 비옥하게 된 상태에서 우리가 누리게 된 그 즐거움을 인해서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지고 우리들이 한보따리 가지고 온 몰약과 향 재료와 약초 이런 것들을 나누어주어서 그들에게 부분적으로 보탬이 될 수 있게 하지만 그러나 그들을 위해서 가장 아름다운 섬김이 무엇일까? 그들의 손을 잡고 그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그 은혜의 강가로, 그 십자가의 강가로, 그 은혜의 무한한 보고의 세계를 그들에게 보여주고 거기로 인도해가는 그래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그 자원을 그들도 누리게 만들어주는 것, 그게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고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상반기에 교역자들이 모여서 며칠동안 상세하게 6개월 동안 교회를 섬긴 것을 이제 분석했습니다. 6개월을 정리하고 나면 책이 이렇게 두꺼운 게 나옵니다. 도서관에 비치된 것을 한번 가서 보십시오. 1년을 하고 나면 한 1200페이지가 나옵니다. 거기 깨알같이 새카맣게 교회가 돌아가는 상황이 나옵니다. 커다란 회사도 그 정도의 분석을 하기 힘들 정도로 그렇게 세세하게 분석을 합니다. 그 분석 속에서 우리들이 하나 얻은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홍보지를 만들고, 그리고 인터넷 방송을 내보내고, 전단지를 만들어 가가호호 방문하고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오래 잘 정착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면 관계를 통해서 전도한 사람입니다. 그게 압도적으로 높은 정착 율을 나타냈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인격적인 통로를 통해서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많이 기도해주고 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은혜의 세계로 그를 데려가려고 애를 쓰고 이렇게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그들을 위해서 간절한 기도가 있을 때 정착한 것입니다. 물론 지역을 놓고 하나님 이 지역에 있는 영혼들 한번 폭발하는 성령의 역사를 주십시오. 기도를 하면 응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 사람을 놓고 기도하면 사랑이 있는 섬김이 동반된 전도를 할 때 그들이 가장 잘 변화되고 변화된 사람들이 잠깐 있다가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손에 붙들려서 교회에 잘 정착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우리에게 그런 삶을 누구나 살 수 있습니까? 누가 어두움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빛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메마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자원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습니까? 누가 그들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세상의 자원을 나누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자원 너머에 있는 보다 더 궁극적인 우리의 인생을 풍성하게 하는 전적 자원의 보호를 열어 보일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영혼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린 신자들 이외에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아니면 누가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유한한 세상에 태어나서 얼마나 많은 부를 누리고 이 땅에 있는 자원을 다른 사람과 다투어서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그것을 독점하면서 사람들을 지배하며 사는가, 거기에서 인생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길과 가치입니다. 그게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된 인생의 지혜를 발견하고 빛 되신 주님의 그 은혜 아래 거하면서 빛 가운데 살아가고,
이제 어두움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이루신 주님의 사랑
주님 말씀 생활하며 주의 사랑 안에 하나 되어
내 마음에 주님 오시기를 간절히 원하네
세상의 어두움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사는 사람, 그래서 그 빛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리고 그들에게 이 세상에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하늘의 신비한 자원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그것을 누리게 하며 사는 삶, 그것을 신자가 아니면 누구도 살 수 없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살면서 우리로 많은 사람을 누리게 해서 우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핍절하고 가난했을 그 사람들이 우리의 원 자원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간접적으로 힘입어서 그래서 그들이 그를 자원으로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길들을 알게 하므로 그것이 삶의 가치입니다. 얼마나 가난하게 사는가. 부하게 사는가.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자원을 소유한 사람들로서 그런 자원을 소유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많은 친구와 이웃들에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그들에게 진정한 자원의 원천이신 주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은혜의 동산으로 데리고 들어가야 합니다.
몇 달 전에 어느 지체 하나가 새가족 공부를 하면서 목자와 양을 배우는데 성경공부를 하는 시간에 통곡하면서 울더랍니다. 성경공부가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왜 그러느냐 했더니 너무 불쌍한 사람들이 생각이 나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 빛 가운데 살고 싶지만 그 빛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 그렇게 유리하며 고생하면서 주님의 품속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어떻게 그 유리하고 고생하는 상태를 종식시켜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 그래서 뜯기고 찢기면서 그것이 마치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실패를 숙명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 생각이 나서 그래서 막 눈물을 흐리더니 눈물을 씻고 나서 전도하기 시작하는데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 변화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다른 일들은 부업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그 사람들에게 그 은혜의 동산을 보여주고 그 은혜의 동산을 누리도록 그들을 불러낼 수 있는 그 사랑의 마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합니까?
그래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영혼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저 사람을 위해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겠지. 저 사람도 주님이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주셨겠지. 저들 가운데 빛이 비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은혜의 아름다운 동산에서 내가 맛본 그 아름다운 경험들을 한다면 저들이 지금과는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아, 그들에게 이것을 나누어주고 싶다. 이것이 어두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게 하는 삶의 소명적 동기입니다. 그것을 마지막에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가슴속에 보석과 같이 간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친 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