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과 그리스도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출 17:6)
녹취자: 박은희B
출애굽기 17장이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두고두고 기억되는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므리바 맛사 혹은 므리바의 사건입니다. 알다시피 여기서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내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사건을 두고 두고두고 성경은 회고하며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을 수시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켜 왔습니다.
16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총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만나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에 아마 그들은 양식을 가져 나왔고 또 가축도 끌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가축도 끌고 나오고 먹을 것도 가지고 왔지만 정확하게 두 달 십오일 만에 모든 것은 다 바닥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약 250만내지 300만 가까운 인파가 매일 먹는다는 것은 보통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거기는 참외밭이나 호박밭이나 수박밭을 그들이 지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른땅과 모래와 전갈과 뱀과 그리고 끊임없는 원수들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광야를 지나고 있는 길이었습니다. 어디서 양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들에게 양식을 먹여 살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이 엄청나게 좋았든지 생각이 모자랐든지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 자기들이 가져온 양식만 가지면 그것 먹을 동안에 충분히 가나안땅까지 도착하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산술적으로는 그런 계산이 충분히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양식을 탈탈 털어서 다 떨어지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만나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이 주는 양식 말고 또 다른 양식,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양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수시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였던 모세는 상기했습니다. 그것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보았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먹을 것이 다 떨어지고 그리고 아무것도 의뢰할 것이 없을 때 아침에 일어나서 나가보니까 서리가 내리듯이 하얀 들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거둬 모으니까 훌륭한 곡식이 되었습니다. 아주 맛있는 과자와 떡과 빵을 구울 수 있는 그러한 음식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얼마나 놀랍고 신기했겠습니까? 얼마나 놀랍고 신기했겠습니까? 그런데 며칠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지긋지긋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아이고, 세상에 그것만 먹고 어떻게 살아?” 옛날 입맛이 살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은혜 받을 때 보십시오. 2년 동안 열린교회 하면서도 입맛 변하는 사람 많지는 않은데 가끔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눈물 펑펑 흘리며 맛있다가 세상에 나아가서 정신 차리고 영적관리를 안하고 신앙생활 안하다가 입맛이 변해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듣고 많은 예배하며 그 속에서 하나님과 만나고 그러면서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은 이것이면 충분 하옵나이다 그리고 매주일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세상으로 나가던 사람들이 언젠가 마음이 변해가지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만 가지고 살 수 있을까? 반문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여러분들 다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17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17장에서 나타나는 사건이 바로 뭐냐 하면 떡이 나오니까 그 다음에 뭐가 나오겠죠? 떡이 나오니까 그 다음에 뭐가 나오겠습니까? 물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게 두 가지 굶주리는 것과 목마른 것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필요입니다. 그리고 가장 원초적인 본능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다뤄야 할 주제는 사실은 왜 원망을 했는가? 그런 건 오늘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 백성들에게 물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자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은 목말라 죽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핍에 처할 때마다 잘 쓰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세를 향해서 당신이 우리를 이 애굽에서 인도하여 이리로 끌어내서 잘나가면 자기 탓이고 못 나가면 조상 탓이라는 말은 이때부터 있었습니다. 잘 나갈 때는 한번이라도 당신이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여 이처럼 풍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하셨나이다. 한 번도 안했습니다.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입에 달콤한 소리 들으려고 기대하는 것은 비 성경적입니다. 김 목사는 조금도 섭섭해 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그렇습니다. 잘 나가면 자기가 신앙생활 잘해서 요즘 말하자면 잘나가는 인물이 됐고 그리고 삼천포로 빠지면 ‘아 삼천포라고 그러면 삼천포사람들이 뭐라고 그러겠지’ 하여튼 어디로 잘못된 데로 빠지면 그러면 그 때마다 뭐 교회가 어떠니? 설교가 어떠니? 여러분 똑같은 일이 여기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왜 이 물이 있어야 살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에겐 물이 없을까? 하나님은 과연 주무시는가?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어야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조금 더 생각하면서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위해서는 졸수도 없고 주무실 수도 없는 분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가장 원초적인 필요에 이렇게 시달리면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주님은 뭘 하시는가? 뭐에게 문제가 있는가?’ 이렇게 질문해야지만 문제 해결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간곳이 없습니다. 차가운 이해관계만 남았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가자고 그랬으니 누가 모세가 한 사람 한 사람 손잡고 왔습니까? 모세가 부흥회 했더니 자기네들이 박수치고 할렐루야하고 쫓아왔지 언제 모세가 안 쫓아오면 총살을 시킨다고 그랬습니까? 그때는 총도 없었지만. 감옥에 집어넣는다고 그랬습니까? 아무 말하지 않았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 쫓아 나왔습니다. 심지어 이방인들도 은혜 받은 사람 쫓아 나왔습니다. 그런 은혜를 다 잊어버리니까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 자신들이 이끌려나왔던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그리고 차가운 이해관계만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와의 관계, 목회자와의 관계, 그 사람의 신앙의 은혜의 척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어쨌든 오늘의 이야기는 그다음입니다.
그랬더니 모세는 백성들은 모세한테 대들고 원망하는데 모세는 누구한테 화풀이를 합니까? 예? (아니, 왜 아니 정초 들어서 왜) 누구한테 모세는 투덜 될 수밖에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밖에는 투덜 될 분이 없습니다. 백성들은 행복합니다. 투덜대고 맘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가 가지고 지도자를 갈구면 되니까. 갈군다는 말 막 잡아 긁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럼 하나님 앞에 가서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까?”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아십니까? 주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 민족이지만 못 말리겠나이다. 못 말리는 인간들 이옵나이다. 주님이 이 인생들의 본성을 아시지 않습니까? 이건 모두 연구대상들 이옵나이다. 먹이시는 하나님이 물을 안 주시겠느냐 이것입니다.
그런데 결핍가운데 있으면 그럼 그 결핍 속에는 뭔가 어떤 메시지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결핍 속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찾아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찾았지만 물을 보내시지 않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당신과의 관계를 찾았습니다.
여러분들은 결핍을 그런 식으로 해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지까지도 여러분들이 결핍을 해결하는 방식은 그저 하나님께 매달려보고 매달리다 응답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로 차버리고 자신의 힘으로 해버리고 자신의 힘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으면 그 다음에 세상원망하고 하나님 원망하는 이런 이방인의 태도를 가지고 결핍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결핍을 해결하는 태도가 영적인 태도로 변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계속해서 결핍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모든 고난에 아무런 상도 없을 것입니다. 고달픈 인생이 될 것입니다. 끊임없는 좌절에 직면하면서 세상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처지를 원망할 것입니다. 어느덧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인격과 성품이 급속하게 황폐해가면서 가시가 돋아날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부딪힐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픈 상처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요, 치료하시는 여호와의 보호가 아니라 이번에는 가는 곳마다 질병과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안겨주는 사람으로 변할 것입니다. 결핍을 해결하는 방식이 영적이 되어야 됩니다. 성숙해져야 됩니다. 변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 결핍을 통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번 사경회의 주제를 오늘 한번 따라해 보세요. “생애 벼랑 끝에 서서” 그러니까 시쳇말로 나는 요즘 신나게 잘나가고 있다 그러는 사람은 오지 마십시오. 들을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즘 내가 벼랑에 서있다 생각되는 사람만 오십시오. 앞에 딱 서서 우리 집사님 물어볼 줄 모릅니다. 요즘 잘 나가십니까? 네 잘나가는데요. 딴 교회로 가 보십시오. 그럴 줄 모릅니다. 여기는 좌석수가 제한되어 있으니까 “생애 벼랑에 서서 생애 벼랑에 서서” 오늘 맛만 보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결핍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그런 식으로 되면 나도 황폐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황폐해지고 사람들도 황폐해지고 그리스도인의 명분도 간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쓰레기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는 만족을 얻으면서 세상의 쓰레기가 되어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는 자신도 만족을 못하면서 세상에서 교회에서 쓰레기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결핍을 해결하는 방식이 영적인 방식으로 변해야 됩니다. 위기를 다루는 방법이 신앙적인 방법으로 변화되어야지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까 여호와께서 뭐라고 그러냐하면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것은 다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그리고 “하수를 치던” 하수를 치던 이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애굽을 탈출할 때에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가 끝까지 안 놓아주니까 하나님께서 이 모세에게 놀라운 기적의 손길을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열 가지 재앙을 모세의 손을 통해서 베푼 다음에 완전히 바로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하나님은 살아계신 신이시다라는 신앙고백까지 타의에 의한 신앙고백이지만 신앙고백까지 받아내고 그리고 모든 애굽 사람들의 열렬한 환송 물론 그 환송은 눈물어린 애정의 환송이 아니라 빨리 떠나가서 우리나라에 재앙이 오지 않게 하라는 시원한 환송이었습니다만 어쨌든 금은패물까지 줘가면서 이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더 있다가는 우리나라 결단나겠다 그러고 빨리 가라고 안 간다 그러면 집에 있는 패물을 뜯어서 주면서까지 라도 우리 승용차타고 가도 좋으니까 다 가라고 우리만 남겨놓고 그럴 정도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교적으로 이 애굽을 초토화 시킨 다음에 그다음에 여호와만이 참된 하나님의 신이시다라는 사실을 이 애굽은 그 중동지방과 관련을 짓고 있는 초강대국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은 미국에 잘 안 알려집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눈만 많이 와도 전국이 라디오로 떠들고 난리입니다. 그때도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애굽 한가운데 그것도 바로궁을 중심으로 열 가지의 초자연적이고 들어보지도 못한 위대한 역사를 행하십니다. 그래서 초토화시키십니다. 그 소식이 확 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서 광야를 들어서고 여러 나라를 거치며 지나가는 동안에 놀라운 효과를 발휘합니다.
여리고에 있는 사람들이 왜 이스라엘이 왔다 그러니까 와가지고 오합지졸 같은 놈들을 싹 쓸어내지 못하고 문을 꽁꽁 닫고 덜덜 떨고 기다리고 있는 이유가 뭡니까? 그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여호와라는 큰 신이 그들과 함께 하는데 건드렸다가는 뼈도 못 추린다 그러더라. 바로가 코가 납작해져서 여호와를 살아있는 신이라고 불렀으니 우리가 덤볐다가는 반 죽을 것이다’ 이런 두려움이 온 성에 엄습한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이런 모습이 되어야 되는 것 입니다. 이게 선교에 있어서의 승리고 복음의 승리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하고 어디서든지 하나님이 인정해주는 길을 걷고 성령 안에 살고 말씀을 붙들고 신령한 목표와 거듭난 가치를 가지고 여러분들이 살아간다면 여러분도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제2의 출애굽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간다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멘해야 되는 대목입니다. 여기가. 믿습니까? (뭘 몰라요.)
그런데 그때 그 하수를 뭘 로 했냐하면 하나님이 모세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가지고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나는 이지팡이에 무슨 뜻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이것은 리더쉽을 의미하는 것 인줄도 모릅니다. 어쨌든 지간에 그 지팡이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물을 쳤습니다. 그러자 피로 변했습니다. 개구리, 파리, 이,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막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애굽은 초토화 되었습니다. 그 위대한 일을 행하던 그 자리에는 언제나 그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그걸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위에 너를 대하여 설 테니까 너는 반석을 치라는 것입니다. 그럼 물이 나라는 것입니다.
지질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혀를 차고 웃을 일입니다. 물은 산꼭대기에서 무슨 물이 납니까? 물은 계곡 아래로 내려와야지 물이 나는 법입니다. 산위에 물이 쏟아지면 그 물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산속에 물도 흐르는 것이 길이 있는데 물이 이러고 흐를 수는 없잖습니까? 산속에는 물이, 산에 비가 오면 물이 땅으로 스며들어서 지표 아래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표와 가장 가까이 나온 골짜기로 내려와서 샘을 파야지만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올라갑니다. 그것도 축축하고 습기가 있는 흙 땅을 파야지 물이 나오는 것이지 돌멩이를 파면 거기에 물이 나오겠습니까?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곳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팡이로 그 바위를 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거기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물이 나왔습니다.
얼마나 물이 나왔을까요? 생수통에 몇 통이나 나왔을까요? 한 바케쓰나 두 바케쓰 나왔습니까? 적어도 200만 명 내지 300만 명의 사람이 먹고 모두 해갈을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그곳에서 얼굴도 씻었을 것입니다. 강물이 쏟아진 것입니다. 큰 시내가 흘려 나왔습니다. 300만 명 가까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샘물을 먹었는데 나오다가 한 30%는 늦게 갔더니 다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큰 시내가 되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물을 다 먹었습니다. 싫도록 먹었습니다. 원하지 않을 때까지 그들은 실컷 먹었습니다.
여러분 이 사건을 가리켜서 신약성경에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리스도를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서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던 성경의 기자 바울은 말하기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이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만나의 사건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심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사건, 모세가 반석을 쳐서 샘물이 나오게 하는 이 사건은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오늘 이 모세가 반석을 치는 이 사건을 가지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얘기하면 어쩐지 좀 이상하다 말할 것입니다. 그 어쩐지 좀 이상한 것을 성경해석에서는 우화적인 해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성경을 우화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근간에 우리나라 교회에 유행했던 우화적인 해석의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그게 예루살렘을 떠나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강도를 만난 사람의 비유입니다.
(예화) 오리겐이라고 하는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는 그런 우화적인 해석의 대표자였습니다. 그의 설교를 보면 이런 식으로 묘사를 했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은 누구냐? 그러면 우리다. 그러면 예루살렘은 뭐냐?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이고 여리고는 뭐냐? 내려가는 곳이니까 세상이다. 아마 여러분들은 이런 식의 설교를 많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러면 그가 강도를 만난 것은 무엇이냐? 사단에게 공격을 당한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뭐냐?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러면 그를 나귀에 태워서 술집으로 데려갔다 주막집으로 데려갔다 그러는데 그 주막집은 뭐냐? 그건 교회다. 왜 하필이면 술집이 교회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교회다. 데나리온 둘을 주었습니다. 그건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라고 준 이 착한 사람의 말하자면 비용지불이었습니다. 두 개다. 그 두 개는 무엇이냐? 신약과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재림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묘사해 나가는 것을 해석해나가는 것을 우화적인 해석이라고 말합니다.
한때는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성경을 기가 막히게 쪼갠다고 칭찬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한번 들을 때는 맛있는데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계속 듣고 나면 그 다음에 성경이 엉망진창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뭐든지 성경을 보고 상상의 날개만 펴기만 하면 새로운 해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도깨비장난같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하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안됩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성경에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사건을 신약성경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화) 예를 들자면 복음 전하는 사람이 성도들이 공급해주는 물질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는 사실을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얘기를 하면서 율법을 예를 들면서 율법에도 이르기를 곡식을 밟아 떠는 타작 일을 돕는 그 소에게 망이라고 하는 것은 곡식을 이렇게 먹을까봐 못 먹도록 입에다가 마스크를 씌우는 것을 얘기하는데 그것을 씌우지 말라고 했거늘 그러니까 복음 전하는 자들이 성도들이 주는 물질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면 졸지에 목사가 소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화적인 해석입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을 받은 성경의 저자들은 그렇게 해석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한 한도 안에서만 우리는 그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그 두 가지를 연결시켜서 성경을 해석을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반석을 쳤습니다. 물이 솟았습니다. 그리고 300만 명 가까운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고 마셨습니다. 이렇게 그리고 그 사건은 역사 속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받은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초적인 물의 문제를 가지고 고통 할 때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셔서 한번 시원하게 음료수를 공급해주는 사건이 아니라고 못 박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반석을 쳐서 그렇게 반석이 지팡이로부터 침을 당하자 생명의 물을 낸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자 그가 그 옥체를 깨뜨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든 사람들이 생명의 놀라운 은혜의 샘물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죄인들이 그 임마누엘의 샘에서 새 생명을 얻게 된 사건, 바로 그것이 예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시기 위해서 생수를 터뜨리시는 방법을 보십시오. 먼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백성들 앞을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모세의 행동을 주목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어떻게 해서 구원을 얻게 될까요? 그리고 어떻게 해서 우리들은 예수라고 하는 것을 이름만 수없이 듣고 그 예수가 무엇을 했고 예수 그리스도가 왜 우리 신앙의 중심이고 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는 것과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산다는 것을 동일시 말하는가? 의문을 가져보지 않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고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바로 내 죄를 위해였다라고 하는 사실은 나는 교회 다니고 나서 어른이 된 뒤에도 교회에 들어가서 4년 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무지함이 하늘을 찌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모세가 손에 지팡이를 짚고 모든 백성들 앞을 고요히 지나가며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그렇게 지팡이를 손에 잡고 호렙산 반석으로 오르는 장면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장면을 보면서 거기서 뭔가 자신들의 그 고통 하는 필요가 채워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생각했을 리가 없습니다. 아마 모세가 하늘을 열고 기도할 때 먹구름이 모였더라면 오히려 모세의 그 손든 행동을 통해서 자신들의 필요가 채워질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엔 안 나오지만 아마 하늘은 청명했을 것입니다. 비가 올 공산도 없었습니다. 뜨거운 태양을 구름기둥만이 살짝 가리고 있었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놀라운 골짜기도 아니고 샘도 아니고 우물가도 아닌 언덕을 오르며 호렙산 반석위에 서는 모세를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인생의 결핍된 문제를 해결해시는 하나님의 방법도 이처럼 얼토당토 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의 벼랑에 서서 코에서 단내가 나오고 밤이면 잠이 안 오고 수면제를 먹고 며칠에 한 번씩 ‘이까짓 세상 죽어버릴까’ 한사람의 인생이 지하실교회에 들어와서 여기 앉았다고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의 인생을 바꾸는 방법이라고 말할 때 어떤 사람이 ‘아, 그럼’ 하고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놀랍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물동이를 메고 샘을 향해 달려가지도 않았습니다. 물이 있는 저 나라를 정복하자고 제의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돈을 주고 이방에서 물을 숨겨다가 이 백성들은 먹이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구름을 잘 부른 영력 있는 기도자들을 모아서 하늘에 구름을 내자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고요히 지팡이를 집었습니다. 뭐하던 지팡이였습니까? 애굽의 하수를 그리고 홍해를 가르던 그 지팡이, 그 지팡이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였겠습니까? 아니면 미디안에서 양떼를 치던 지팡이로 보였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전자로 보였겠습니까? 후자로 보였겠습니까? 당연히 후자로 봤습니다. 출애굽하게 하셨던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시로 잊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 이 모세는 “너희는 생각하라 어떻게 하나님이 너희에게 어떠한 사랑을 베풀어주셔서 독수리가 새끼를 업어 나름과 같이 너희를 어떻게 애굽의 손아귀에서 건져내어 복된 땅에 이르게 하셨는가 하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했습니다. 잊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모세의 손에 들려진 그 지팡이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언제나 권능을 불러올 수 있는 지팡이로 보였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모세는 이제 연로한 몸이었습니다. 그 노인네가 노구를 이끌고 지팡이를 들고 후줄근한 장로들 몇 사람과 함께 그렇게 물이 아닌 마른 땅밖에 없는 호렙산 반석위에 올라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의 결핍의 문제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여러분 시각으로 하나님을 제한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역사가 여러분의 장단에 의해서 춤 맞춰지고 여러분들이 장단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박자를 맞춰주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상식을 깨뜨리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정관념을 파괴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잘못된 아집과 생각들을 터뜨리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며 산다는 것이 나를 의자하며 산다는 것과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세상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고 주님을 의자하며 사는 것이 정말 값지고 보람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 아닙니까?
새 인생은 새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거듭난 인생은 옛 방식으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듭난 인생, 주안에서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 이것은 옛 방식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새 방식대로 새로운 양식을 가지고 새로운 목표를 위해서 새로운 사람이 새로운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 인생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호렙산 반석에 모세는 섰습니다. 그리고 지팡이로 그 반석을 쳤습니다. 누구에게도 맞아본 적이 없던 산위에 반석이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한가하게 등산모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등산하는 사람, 등산객도 없었을 테이니 아마 그 반석이 지팡이에 얻어맞아 보기는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지팡이가 반석을 쳤습니다. (탕탕)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자 생수가 터뜨려지는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 반석은 그리스도 예수의 몸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반석이 존귀한 그리스도 예수, 그가 어떻게 우리를 위한 반석이 되시고 우리의 갈한 영혼을 위해서 충족한 생명의 물을 이 세상에 흘려보내실까? 하는 것을 미리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적을 행하던 지팡이는 불행히도 축복을 불러 내리는 지팡이가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10대 축복을 베풀며 바로로 하여금 여호와만 참 신이시다 말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지팡이는 재앙의 지팡이였습니다. 적어도 애굽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러하였습니다. 그 재앙의 지팡이였습니다. 지팡이가 움직이는 곳, 모세가 지팡이를 잡고 그 지팡이를 딱 치는 순간 거기에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있었습니다. 엄청난 고통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메뚜기와 파리와 이와 악질과 독종과 우박으로 인하여 죽어갔고 고통 했습니다. 가축들이 죽어갔습니다. 마지막에는 애굽의 처음 태어난 모든 생물들이 죽어갔습니다. 장례 지팡이였습니다.
그렇게 애굽을 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하는 죄악의 나라를 치던 그 지팡이가 바로 반석을 친 것은 그리스도 예수 그 육신을 때린 것이 하나님의 진노였음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인 것은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모두 사단의 도구에 불과했고 사단이 그 일을 주모했지만 그러나 그 뒤에는 더 훌륭한 디자이너가 계셨습니다.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하수를 치던 그래서 죽음을 불러다니던 그 지팡이, 그 지팡이의 깊은 그 메시지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내 백성을 놓아 내 백성으로 그들의 길을 가게 하여 나만 섬기는 민족이 되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의 나라를 이렇게 치리라” 피, 개구리, 이,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수없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모두 죽음을 동반했습니다. 사망의 고통을 동반했습니다. 여러분, 그 손에 들기만 하면 쏟아져 나오는 피비린내 나는 죽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진노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내가 세상을 향하여 이렇게 진노하면서도 내가 너희를 구해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엄청난 진노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떨어진 것입니다. 애굽의 사람들을 향한 진노는 애굽 속에 있는 죄악이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흉포한 강포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나님은 그 바로의 죄, 세상의 죄뿐만 아니라 구원받을 백성들을 위한 죄, 그것을 짊어진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퍼부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을 수 없는 진노를 그 아들을 향해 쏟아 부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호렙산에 반석과 같이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그런 대우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생명 자체였습니다. 죽음과 양립하실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본성상 그럴 수밖에 없는 분이었는데 그리스도 예수는 구원받을 백성의 죄를 지시고 진노의 지팡이를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이신 그 육체를 하나님의 진노의 지팡이가 때리자 사람들은 도구가 되어서 그의 몸에 못 박고 살을 찢었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실 것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호렙산 반석에 모세가 지팡이를 칠 때 어떤 식으로 물이 나왔을까요? 여러분, 치니까 하늘에서 반석을 향해 물이 쏟아졌습니까? 아닙니다. 언제나 그러하듯 이 바위는 터치고 깨뜨려진 그 바위사이로 생명의 물이 솟아나왔습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을 먹고 마시게 할 수 있는 강물이 되어 흘렀습니다. 모세가 그 반석을 쳤을 때 반석은 터뜨려졌습니다. 그리고 그 반석이 터치고 갈라지자 수많은 사람을 해갈시키는 생명의 물이 폭포수와 같이 쏟아졌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마르지 않은 생명을 주시는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마르지 않는 영혼의 샘물을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오늘도 지금 방금 저기 양평에서 설교를 하고 오는 길입니다. 학생들이 한 이백 명이나 될까요? 모여 있습니다. 근데 너무 메말라있는 게 느낍니다. 오늘 집회 마지막 날인데 오늘만 갔었습니다. 십자가를 설교를 했습니다. 모두 다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는 사실을 오늘도 확인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갑갑하고 소망을 잃어버리고 곤고할 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수의 그 놀라운 그 은혜와 사랑을 묵상할 때 우리가슴 속에 스며드는 그 목 메이게 여러분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그 가슴 저린 사랑을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느끼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당을 진짜 들어설 때는 말입니다. ‘아 이러고도 살아야 되나? 벼랑 끝에 서있구나’ 그러고 들어옵니다. 지체들을 만나고 웃는 얼굴을 보고 그리고 찬송을 하고 기도 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들려옵니다.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너는 이 일 년을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살라” 그때 우리는 그렇게 살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멀리 계시던 하나님이 오늘 가까이 오셔서 나를 붙들고 나로 하여금 실제로 그런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이런 생명 물을 어떻게 여러분들이 얻게 되었습니까? 이물이 갈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 막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으려고 하니까 “얘야, 미안하다 오늘은 다 떨어졌구나. 너까지다. 다음에 와라” 주님이 그렇게 여러분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신 적이 있었습니까? 곤고할 적에 원인은 항상 여러분들이 그 샘을 싫어했습니다. 우리가 그 물을 싫어했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생명이 그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에서 먹고 마시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반석을 터트려 물을 쏟아졌습니다. 강물위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물이 개방되었습니다. 존귀한 자나 비천한 자나 모세나 그리고 노예나
(찬양)
생명의 샘물
이 샘에서 마신자마다 목까지 갈하지 않는 속에서 솟아나 생수가 되어 영원히 솟아나는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꿈에도 그리던 이 생수를 주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흥 물이 나오는구먼. 그리고 돗자리 깔고 앉아서 화투나 한판 더치자’ 그랬겠습니까? 그들은 하던 모든 일들을 다 버려두고 “물이다” 외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달려가서 먹었습니다. 먹고 어땠을까요? 얼싸 앉고 뛰었습니다. “아 물이다, 하나님 우리에게 물을 내신다. 우리 같은 사람에게도 물을 주셨군요. 반석에서 물이 나다니” 막 뛰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인생의 위기라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벼랑 끝에 서있는 것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기뻐하고 한없이 즐거워하며 그 샘에서 물을 먹고 모든 사람들이 어린아이나 자유자이나 종이나 노예나 모든 사람들이 그 샘에서 먹고 마시며 부둥켜 앉고 그리고 뛰며 즐거워하고 하늘을 향하여 환호성 치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발견하고 그 샘물에 우리의 젖줄을 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해서 그 그리스도를 인하여 말할 수 없는 그 그리스도의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부요함을 인하여 이것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생명을 가서 전하고 가르치고 함께 마시게 하고 ‘깊도다. 이 지혜의 부요함이요’ 우리는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우리였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샘물에 목을 축이고 한없이 즐거워하고 기뻐 뛰는 이스라엘 백성들 말고 오랜 동안 터뜨려지지 않은 채 견고하게 서있던 그 놀라운 반석은 어떻게 됐습니까? 박살이 나버렸습니다. 터졌습니다. 그리고 샘은 솟아났습니다. 터지자 솟아났습니다. 깨뜨려지기 전까지는 솟아나지 않던 샘물이 터뜨려지자 쏟아져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의 샘에서 먹고 마십니다. 저는 이것을 영적인 순발력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영적인 순발력이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우리 침체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하’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찬송을 한번 부르고 나면 속에서 깊이 가라앉았던 영혼들이 다시 떠오르며 ‘아하 그리스도 예수의 부요함, 주님, 주님만이 내 삶의 유익이고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목표이고 주와 함께 하는 것만이 내 인생의 진정한 축복이옵나이다.’ 이렇게 곧 돌아오는 것 이것을 영적 순발력이라고 그럽니다. 근데 이 순발력이 없습니다. 한번 가라앉으면 일 년도 이 년도 삼 년도 그러면서 한 세월 흘러가는 동안에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인생은 덧없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연세 드신 분한테는 죄송하지만 거울을 보면서 서글픔을 느낍니다. 원하지 않는데 하얀 머리가 자꾸 나온단 말입니다. 자꾸 세월이 흘러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요? 속히 우리는 그런 순발력을 가지고 하나께로 돌아와야 됩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반석이 그렇게 깨뜨려지자 샘물을 쏟아내었던 것처럼 그 샘물이 쏟아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그 생명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여러분들이 자랑하는 그 놀라운 영적인 순발력, 그리스도가 아니면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죄 가운데 있을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심을 확신하지 못하고 사죄의 은총을 받지 못할 때 눌리고 고통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찬양)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사죄의 경험은 ‘주님,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고백할 때 ‘아들아, 내가 너를 십자가에 못 박혔을 그때에 내가 이미 너를 다 용서한다.’ 이 사죄의 확신이 우리 속에 확 파고 들어올 때 어두운 그림자 사단의 사슬에 묶여 교회에 들어왔던 사람들이 기뻐 뛰며 찬양하며 교회를 나섭니다. 이런 영적인 부요함들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런 생명의 놀라운 부요를 그렇게 누리며 기뻐하기 위해서 그렇게 그 백성들로 하여금 언제든지 그 샘에 와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자신의 옥체를 깨뜨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먼저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의 옥체를 깨뜨려서 뿌리신 피로 만든 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피 뿌려서 죄인들은 도달할 수 없는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사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가리고 있던 그 튼튼한 휘장은 어떻게 찢어졌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찢으심으로 그 휘장은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새 길이 났고 거룩한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은혜의 길이 열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에게 이러한 생명과 은혜의 부요함을 주기위해 그가 당하신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인자 앞에 있는 그리스도는 바로 그렇게 인이라고 하는 한글자의 사람을 위해서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번 물을 먹이기 위해서 터뜨려지고 영원히 갈라진 채 남을 수밖에 없었던 반석의 깨뜨려짐과 같이 그리스도는 자신의 육체를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해 깨뜨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옷깃을 여미는 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 부르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 육체로 휘장을 가르시고 물과 피를 흘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새롭고 사는 길을 열어주시는 구속의 예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축복스러운 일들은 반석이 터뜨려지므로 이루어졌고 그리스도 예수의 귀한 옥체가 깨뜨려지고 나서야 성취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의 진노의 지팡이에 깨뜨려진 것과 같이 이번에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깨뜨려진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흐르는 구속의 보혈이 우리를 깨뜨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권한이 있습니까? 무슨 권한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되 자기의 의로운 행실로 구원하지 아니하시고 중생과 성령의 씻음으로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들을 믿는 자에게 구속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반석을 터뜨렸던 지팡이와 같은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서 깨뜨려졌지만 우리는 그 뜨거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서 흐르는 보혈의 능력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능력 앞에 우리자신이 깨뜨려질 때 그 생명 샘의 물이 우리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생명의 근원을 그렇게 우릴 위해 이미 죽고 그 일을 이루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위대한 생명 샘의 뿌리를 대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여러분 잘난 방법대로 살아보십시오. 저 잘났다고 잘나간다고 하나님 떠나고 못 나간다고 신앙의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다고 그런 식으로 살아보십시오. 여러분 주님이 위대한 일들을 이루셨지만 여러분들은 평생 가난하게 살 것입니다. 주님의 부요는 그 부요하심을 믿고 그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그렇게 자신의 몸을 깨뜨렸던 것처럼 이제는 그 피로 흐르는 생명샘 물이 우리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우리를 깨뜨릴 차례인 것입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향해 마음을 닫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깨뜨려지고 그리고 우리자신이 새로워지길 원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의 향기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물은 우리 속에 있는 가시나무를 불태우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불태우는 그리고 우리의 죄악을 정결케 합니다. 우리를 깨끗케 하고 새롭게 하고 그 은혜가 차도록 우리를 변화시켜서 새롭고 놀라운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이 부요한 생명의 샘물을 여러분 이번 집회를 통해 충만히 마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이 집회를 열면서 어떤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집회를 통해서 여러분의 호주머니를 우려내려는 생각도 없습니다. 집회를 통해서 교회의 어떠한 목표를 홍보하려는 생각도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러한 놀라운 은혜의 반석의 샘물이 우리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물을 등 뒤로 한 채 작렬하는 태양을 원망하며 자기의 목을 피가 나도록 쥐어뜯으며 메마른 벌판을 이를 악물고 지나가고 그것을 세상은 용기라고 칭찬하고 거기서 사람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죽어가는 수많은 목마른 영혼들의 대한 마음 아픈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집회를 준비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생명의 부요함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미 성취하고 이루셨습니다. 그것을 인해서 우리는 즐거워합니다. 여러분, 모세가 그 능력의 지팡이로 터뜨린 반석의 쏟아진 물은 잠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갈하게 만들었고 그리고 그 다음날은 그들이 똑같은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을 터뜨려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이루신 이 영적인 은혜의 임마누엘의 샘물은 영원히 마르지 않고 우리에게 솟아나고 지금까지 우리에게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 말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다 나아오라 결핍가운데 시달리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는 나와 내가 너의 그 원초적인 결핍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샘물을 이루기 위해서 더할 수 없는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나무에 달렸습니다. 높이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기도할때마다 그 망치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목사님, 우리가 주님이 그렇게 힘들어서 이루어 놓으신 그 샘물을 어떻게 우리가 마실 수 있겠습니까? 뭐를 가지고 나아가야지만 주님께 강 그 샘물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 샘물을 마시는 티켓은 무엇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값없이 은혜로 너희에게 이 선물을 주마. 누구든지 나와서 그저 이 샘에서 마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마시는 것입니다. 아무 대가 없이 우리는 마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반석에서 쏟아지는 샘물을 값없이 공로 없이 마셨던 것처럼 그렇게 깨뜨려진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생명수를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집회에서 여러분들이 이 생명의 물을 마시고 어두운 세상을 이 나라 방방곡곡에서 불꽃처럼 사십시오. 이것이 우리교회가 집회를 향해 걸고 있는 최대의 소망이고 그리고 바람인 것입니다. 주님의 바람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