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으로 인자를 보내심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시 107:20-21)
시인이 노래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헤세드’라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사랑이 주는 느낌과 같았습니다. 그들이 ‘헤세드’라는 개념을 통해서 이해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공정한 이해의 깊이는 오늘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이해하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에는 미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헤세드’라는 개념은 아주 강력한 개념이었고, 이것을 여러모로 사용합니다. 헤세드를 이스라엘에게 국한된 것이라고 해석했을 때 ‘선민사상’이 나오고, 헤세드가 시행되는 것이 이스라엘 나라라고 생각할 때 정의의 개념이 나오고, 헤세드가 인생의 목적이라고 할 때 헤세드 안에서 인간의 참된 행복의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은 상태라는 철학적인 해석도 나왔던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헤세드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를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헤세드를 설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헤세드는 언약백성들에게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은 언약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지만 우선적인 의미와 고유한 의미에서의 헤세드는 언약 관계를 전제로 합니다. 거기에서 ‘하씨드’, ‘성도’라는 말이 나옵니다. 언약관계 바깥에는 성도라는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도’는 ‘헤세드를 입은 자’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헤세드라는 개념은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중요한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이었습니다. 시인이 누군인지는 모르지만 이 시는 다윗의 시가 아니라 바벨론 포로 이후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회상하면서 쓴 후대의 시로 보입니다. 그러나 헤세드라는 개념은 다윗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강력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드는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개념이었습니다. 사실 헤세드를 노래하면 하나님을 다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반대 개념을 흔히 ‘정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정의를 완성하려고 투쟁하고 몸부림치는 이유는 사랑과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정의는 사랑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서 사랑을 온전히 성취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정의는 사랑에 이르는 과정이고, 사랑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의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정의를 완성하지 못하는 사랑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사랑이 아니고, 사랑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정의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정의가 아닙니다. 사랑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의여야 하고, 정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향해서 인자하심을 노래하는 것이 시인의 마음이었고, 인자를 확인하는 길이었습니다. 접근 방식이 언약 백성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다운 해석은 오늘 우리가 읽은 20절에서 나옵니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이것이 어떻게 언약 백성다운 헤세드의 해석인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정의와 사랑이 다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격려와 힘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책망이 됩니다. 진리는 항상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집중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눈부신 햇살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안질이 걸린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곤욕일 것입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컴컴한 밤이나 어둑어둑한 흐린 날씨가 더 만족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말씀을 보내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왜 말씀을 보내시는 것이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의 표현일까요? 말씀이 관계를 고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말씀의 은혜를 받는다고 할 때 그것은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주관적인 사랑의 영향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의 영향력에는 목적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잘못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관적인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심정이 편안하고 마음에 안정이 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타나는 이유는 첫째로 말씀의 은혜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도록 분발하는 의지를 갖게 됩니다. 은혜의 힘은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내 인생을 감당할 수 없다.” 이렇게 엎드러졌던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근원을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나서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하고 싶다.” 이렇게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히 생겨납니다. 그게 바로 은혜의 선한 영향력입니다. 은혜는 그 자체가 힘입니다.
이 은혜는 내적으로 우리에게 그것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행복의 근본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를 고치게 만들어줍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치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고친다’라는 것은 하나님을 좇아가서 하나님을 고치거나 다른 사람에게 달려가서 그 사람을 수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대게 망가진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들과의 관계에는 자기 자신의 고장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고칠 수 있는 놀라운 힘을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옵니다. 오늘 말씀에 고면 ‘고치시고’라고 나옵니다. ‘라파’라는 단어인데 여기에서 ‘로페’라는 명사가 나오는데 그게 바로 ‘의사’입니다. “여호와 라파”, “하나님이 치료하신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선한 의지의 힘을 불러일으키고, 관계를 고칠 수 있는 치료의 역할을 합니다. 이 두 가지를 하면 우리는 모든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100번이 넘게 읽었지만 오기 전에도 읽었습니다. 알리피우스와 네브리디우스와 함께 길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거지를 한 사람이 싱글벙글하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친구들에게 물었습니다. “얘들아, 저 거지는 행복하고 만족스러워 보이는구나. 우리는 철학자인데 왜 이렇게 불행해보일까? 인간의 행복이 만족에 있다면 저 사람이 우리보다 앞서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에게 질문합니다. “그러면 너는 저 만족하는 거지처럼 되고 싶으냐? 아니면 늘 괴로워하고 정신의 찢어지는 고통을 경험하며 씨름하는 네가 되고 싶으냐?” 그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선뜻 “나는 거지처럼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나는 이대로 괴로운 내가 되고 싶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면서도 자기도 헷갈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내가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고, 그래서 행복하지 못한 것이지, 내가 이렇게 괴로운 상태에 있겠다는 것이 어찌 진실된 말이겠습니까?” 이렇게 반문을 합니다.
그렇게 쉽게 읽어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진리가 그 속에 숨어있습니다. 행복이 정말 주관적인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포스트 모던시대에 살면서 TV를 통해 어떤 사람이 모든 것을 뿌리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더니 행복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야, 용기 있다. 나도 흉내 내고 싶은 삶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어려운 이유는 행복이 가지고 있는 미묘한 성격 때문입니다. 분명히 행복은 주관적인 만족함을 포함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그게 다라면 당연히 다 때려치우고 거지처럼 되어야 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만족하는 돼지가 되기보다는 불만족스러운 인간이 되고 싶다.” 여기에서 방점은 불만족스럽게 되고 싶다는 뜻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되고 싶다는 것에 있습니다. 불만족스러운 상태를 개선해서 제일 좋은 것은 만족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만족한 돼지보다는 만족한 철학자가 되고 싶고, 만족한 돼지보다는 만족한 인간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돼지를 불행하게 하거나 거지를 슬프게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갈 길을 가라고 하면 됩니다. 그러면 결국은 여기에서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 있습니다. 행복은 천상적인 것임을 암시합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쉽게 대답을 못하는 것을 보면서도 행복에 천상적인 것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에 갔을 때 깔망신학교에서 칼빈에 관해 공부하고 있는 박사과정에 있는 후배를 만났습니다. 대학원에서 플라톤을 전공했다고 합니다. 플라톤을 전공한 사람답지 않는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인생의 목적이 인간의 행복에 있다고 말해도 됩니까?”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 행복을 뭐라고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행복이 거지의 만족한 상태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절대 그런 것을 위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행복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전도되는 'beatitude', ‘지복’이라면 바로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하지 않은 인간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19세기 미국 역사에서도 인간의 행복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 지루할 정도로 도덕 논쟁이 벌어집니다. 행복의 기준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결국 지복의 행복을 느끼게 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을 얻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자라면, 말씀을 통해서 선을 행할 수 있는 힘과 관계를 고칠 수 있는 치료의 하나님이셔야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에 관계가 깨어지고 망가진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쳐본 경험이 있습니까? 망가트리는 것은 쉬워도 고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살을 에는 것처럼 힘이 듭니다. 그래서 한번 원수 맺으면 끝까지 가고 대를 이어서 갑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 이야기를 하는데 교인들이 30년 동안 싸운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 다 은퇴할 텐데요.” 그랬더니 목사님이 “김 목사는 왜 그렇게 생각이 단순해? 자손들이 있잖아.” 그 장로의 아들, 저쪽 편 장로의 아들, 며느리, 딸, 안 고쳐집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오셔서 망가진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치시고, 유대인과 헬라인과의 관계를 고치시고, 자유인과 노예사이의 관계를 고치시고, 얼마나 놀라운 능력을 하나님이 행하셨습니까? 이것을 성경은 ‘기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벨론 포로귀환해서 돌아온 것도 기적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쳐서 다시 은총을 받게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쳐서 다시 하나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을 좇아서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