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새벽 십자가사경회
십자가를 따르는 삶
1. 예수를 가까이 따르라 1
2. 죄인을 위해 기도하심 5
3. 성전 휘장이 찢어질 때 9
4. 억지로 진 십자가 13
5.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16
6. 대신 당하신 고난 20
십자가를 따르는 삶 1 (2013.03.25 새벽 십자가사경회) 예수를 가까이 따르라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 22:60-62) |
아마도 예수님을 따르던 열두 제자 가운데 가장 열혈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베드로일 것입니다. 그는 결단도 있었고 헌신도 있었고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아는 지식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때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남김없이 도망갈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기까지 당하는 고난에 제자들이 함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섭섭해 하거나 그들을 미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스가랴서 말씀에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한 예언이 있는데 그것이 자신에게 그대로 임할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을 뿐입니다.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흩어져 도망갔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뜰에 체포되셔서 종교재판을 받으신 후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빌라도에게 끌려 가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국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종교적인 재판을 할 수는 있지만 사람을 죽이는 데까지는 판결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서는 당시 그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던 빌라도의 판결이 필요했고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까지 끌고 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가기 전, 종교재판을 받으시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뜰에 끌려갔고 베드로는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뜰까지 들어왔습니다. 베드로가 불빛을 향하여 앉아 얼굴을 드러내자 한 여종이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었노라.”고 지목하였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아니다. 나는 예수를 잘 알지 못한다.”라고 부인했습니다. 같은 일을 세 번이나 반복하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부인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과 눈빛이 마주쳤고 베드로는 “오늘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네가 부인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한 이야기가 오늘 읽은 본문의 개략적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었고, 결단도 있었고, 예수님이 위대한 분이신 줄을 알아 배와 그물을 다 버려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곧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고백함으로 칭찬을 받고 천국의 열쇠까지 부여받은 위대한 사람이 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던 실패를 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했던 사건의 앞뒤 맥락을 살펴 볼 때, 최소한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베드로의 실패는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는 교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이미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26장에서는 “너희가 나를 다 버릴 것이다. 성경 말씀에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했으니 너희들은 내가 고난 받을 때에 다 내 곁을 떠날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옆에 있는 모든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들이 다 주님을 버려도 저는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며 죽는 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베드로다운 장담이었고 베드로다운 용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 그리고 네가 돌이키게 될 것인데 돌이킨 후에는 네가 너희 형제들을 굳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실패 뒤에는 밀 까부르듯 제자들을 키질하고 있는 사단이 있었습니다. 키질을 해보신 분들은 알지만 키질을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곡식 속에 섞여 있는 티끌, 여러 가지 이물질들을 바람을 이용해서 날려 보내고 알곡들을 가려내기 위해서 키질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있는데 이들 중 누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인지 사단의 시험을 통해 키질을 해서 분별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확신이 지나쳐서 교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확고부동한 선언보다는 자신의 결심을 더 믿었고, 예수님이 “너희가 모두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어도 예수님의 판단보다는 자신의 결단이 더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의지하고 겸비해질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당신을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말했던 베드로의 고백이 진심이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는 진심으로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겠지만 신앙생활은 우리의 결심과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 교만함은 결국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실패로 그를 데려갔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고, 거기에서 예수님은 땀이 피가 되어 흐르기까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땀이 흐르는 모양이 마치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고 해석을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열렬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니까 땀에 피가 배어서 땀과 피가 섞여 흐르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의사였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이것은 소위 간헐증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의학적으로 땀에 피가 섞여서 핏방울처럼 떨어지는 일들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온 마음을 쏟아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물리적으로는 아직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영적으로는 십자가의 고통이 이미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커다란 고통이요 두려움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이 자기와 함께 깨어 기도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이 기도에 동참하지 못하고 이 절실한 기도의 시간에 잠들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여러 번 부탁하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간절한 부탁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책망하면서까지 “너희가 한시도 나와 함께 깨어있을 수 없더냐?”고 하시며 기도하도록 제자들에게 강력하게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슬픔 속에서 잠들었고 더 이상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에 이어지는 실패,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갔던 것, 베드로 자신도 호언장담하던 것과는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었던 것은 다름이 아닌 기도하지 않은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언제든지 우리에게 기도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편안하고 좋은 때는 없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어느 때든지 우리는 기도를 필요로 하고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 때가 없지만 우리의 인생에서 더욱더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매달려야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기도하지 않으면 언제나 커다란 실패가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혼신의 힘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베드로가 작은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은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겠지만, 멀리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와 더불어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실패는 이미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마음을 쏟고 간구하는 기도, 간절히 부르짖는 간구, 이것들은 육체의 많은 노고를 필요로 합니다. 헌신하는 일에 있어서 마음을 쏟지 않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 시간은 우리에게 고통이요 힘든 것이지만 필요한 때에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형통하게 하고, 시험 중 넘어질 위기에서 우리를 굳게 붙들어 주어 오히려 시험의 때에 승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미래에 우리의 신앙이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훌륭한 투자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쏟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시간과 노력과 힘을 빼앗아 가는 것 같지만, 사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지 않을 때 다가오게 될 커다란 손해에 비하면 훨씬 더 커다란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기도하지 않는 것은 당장 표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내일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만들고 모레 시험을 만났을 때 넘어지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간절한 기도의 실천이 없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그의 기회주의적인 태도가 이런 실패를 불러왔습니다. 54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 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가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망가지도 못했고 자신이 호언장담한대로 죽을지라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도 없었습니다. 멀리 도망가자니 양심의 가책이 그의 마음을 찔렀고, 가까이서 예수를 보호하며 따라가자니 그와 함께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하였습니다. 멀찍이 따라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기는 했지만 위험한 일이 생기거나 어려움이 발생하면 예수님께로부터 도망치겠다는 계산이 들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기회주의적인 태도는 베드로의 마음속에 있는 커다란 두려움을 나타내주는 것이었고, 이 두려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하고 간절한 사랑의 결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느니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회주의적인 태도는 결국 믿음의 실패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 중 우연히 신앙을 지키고 영적으로 승리했던 사례가 있었습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시험을 당하게 되고, 이 시험은 결국 그의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베드로는 호언장담할 수 있는 담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실제로 예수를 따라야할 시간에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결국은 커다란 실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더라면 예수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지는 않았을 텐데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감으로 도망간 제자들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기회주의적인 태도는 결국 우리에게 실패를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앙에는 회색지대란 없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결단이 있든지 아니면 그것이 없어서 실패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고난을 고려하면서 따르도록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얻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이요 모든 것을 잃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혈기로서 호언장담하였지만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따랐기 때문에 결국은 그의 기회주의적인 태도 속에 깃들어 있는 두려움과 공포, 믿음 없음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사단은 밀 까부르듯 하며 제자들을 흔들었습니다. 제자들만을 본다면 사단의 까부르는 키질에 남아날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태도로 당신을 따르는 베드로가 사단에게 아주 파멸되지 않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빌어주셨고, 그것 때문에 베드로는 잠시 실패했으나 다시 돌이켜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기회주의적인 태도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고 하나님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만함과 기도하지 않음, 기회주의적인 태도가 결합해서 베드로를 크게 넘어지게 하였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않아야 될 정도로 좋은 때는 없고,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평안한 때는 없고, 결단하지 않아도 순조로운 때는 없습니다. 이런 때는 항상 계속 되지만 우리가 잘못된 태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이 모든 것들이 결합하여 언젠가는 우리를 한번 크게 넘어지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합시다. 성경 말씀에 넘어지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그 말씀이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처럼 경계를 삼고 두려워합시다. 주위에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다가 넘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오면 입에 거품을 물고 그들을 비난하는 대신 조용히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나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을 살피며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십시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을 의지하며 따르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매일 매일 그 은혜로 이기게 하십니다. 어제의 은혜는 어제를 승리하며 살게 만들었고, 오늘 승리하기 위해서는 오늘 부어주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이 무엇인가 된 것처럼 생각하지 맙시다. 우리 앞에 모두 통과했던 시험들이 있고 그 점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우리 주위에 시험에 들었던 많은 사람들도 한때는 우리보다 더 헌신된 사람들이었고 우리 못지않게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넘어졌습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실패를 거울삼아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손에 꼭 붙들려 사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이것이 바로 오늘 베드로의 실패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실패할 때 마치 주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처럼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당신을 버릴 것을 이미 아셨으면서도 그를 용서하셨고 그를 위해 기도하셨고 그가 돌이킨 후에는 형제의 믿음을 굳건히 하는 사명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드십시오.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주님은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굳게 믿고, 어떤 때든지 그 분의 사랑을 의지하며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십자가를 따르는 삶 2 (2013.03.26 새벽 십자가사경회) 죄인을 위해 기도하심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눅 23:34)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쯤이었습니다. 세 시쯤 운명하셨고, 그 사이에 예수님이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12시쯤 어두움이 하늘 가득히 밀려왔고 그 사이 6시간 중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첫 번째 말씀입니다. 십자가에서 남긴 첫 번째 말씀이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는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첫 번째 기도가 용서의 기도였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못 박혀 계신 십자가가 무엇을 위한 십자가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형벌은 아주 끔찍한 형벌이었고 매우 커다란 고난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위중한 고난의 순간, 제자들도 모두 당신을 버리고 도망갔고 당신의 사랑과 섬김을 받던 백성들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무리들로 변하였지만, 예수님은 그 순간에도 하나님 아버지와 영적으로 교통하고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하며 십자가 고난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신약 성경 어디를 펴든지 성경은 우리에게 똑같은 질문을 폭풍같이 제기합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은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받았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즉, “영원히 죽을 무한한 형벌로부터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과 동일한 것입니다. 구원의 적극적인 측면이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살게 하시는 것이라면, 소극적인 측면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셔서 다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없느냐고 물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없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성경의 최고의 관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죄인의 자리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고 그분께로부터 생명과 사랑을 충만하게 받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복된 생활을 누리는 것,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생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하신 첫 번째 기도는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라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한 십자가였다면,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가장 큰 기쁨은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의도대로 우리에게 구원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예수님의 마음에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을 얻는 것에 대해서 수없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온 것도 결국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곳이 아닌 십자가에서 손과 발이 못 박힌 극심한 고통 속에 죽어 가시면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신 기도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것은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중보자로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죽음을 통해 우리가 죄를 용서받지 못할 때 하나님 앞에 어떠한 형벌에 처해지는지를 당신이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십자가 아래에 있던 악한 로마 병정들과 예수님의 고귀한 섬김을 받았음에도 그분을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던 유대 백성들, 종교지도자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받지 못할 때 당하게 될 영원한 죽음의 형벌이 얼마나 크고 고통스러운지를 당신이 대신 경험하신 것입니다. 그 순간에 이 기도를 올렸다는 점에서 이 기도는 특별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손과 발이 못 박히고 머리에 쓴 가시관에 의한 육체의 고통만이 아닙니다. 온 인류의 죄로 인한 커다란 고통이 영혼을 엄습하고 마음속으로 밀려왔습니다. 용서받지 못했을 때 당하게 될 저들의 영혼의 큰 고통과 하나님의 마음의 아픔을 아셨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위하여 또 한편으로는 구원받을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비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을 때 마음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가 터져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어도 하나님을 멀리 떠난 영혼들이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한지를 생각하면서 흐르는 눈물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고통이고 또한 아픔입니다. 그것을 우리 같이 죄 많은 인간이 아니라 순전하신 예수님이 느끼셨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육체의 고통보다 더 커다란 고통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몸소 겪으시면서 땀이 피가 되기까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던 통곡의 시간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 다시 큰 고통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절박한 마음은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들, 하나님이 누구인줄 모르기 때문에 대적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한걸음 더 나아가서 구원에 이르는 용서를 받았지만 삶 속에서 여전히 죄를 짓고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화목한 삶을 누리며 성화에 이르는 것이 예수님이 간절히 원하는 바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간절히 비셨던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고, 교회 자신을 위해 존재하며, 또 세상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예배와 하나님을 향한 경배로 나타나지만, 교회 자신을 위한 것은 목양과 돌봄으로 나타납니다. 교회가 이 세상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위함’은 죄 가운데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 일을 위해 교회는 온 마음을 다해 헌신하고 온 뜻을 다해 충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올리셨던 그 기도를 계승하는 눈물이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흘리는 교회의 충만한 눈물과 애타는 심정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영적인 관계를 어떻게 얼마나 풍성하게 갖느냐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원하는 것이 자기만족을 위함이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있을수록 우리의 심령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득 채워져야 합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 흘리는 눈물과 깊은 탄식을 교회가 함께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한 섬김과 봉사는 이러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끊임없이 이 세상 인류들에게 하나님의 죄사함을 입어야 할 우리의 처지를 알게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진노를 받아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해야 합니다. 온 마음과 삶으로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선포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넘나드는 끔찍한 고통을 겪고 계셨지만 그 분의 마음은 아직까지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 수많은 백성들에게 있었고, 심지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악한 로마 병정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 하나님께 기도하시기를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빌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악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자신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알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쌍한 영혼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그들을 위해 변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만약 그들도 하나님이 누구신줄 알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누구인 줄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악을 행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희의 무지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주십시오.”라고 그들을 위하여 대신 변명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 안에 있는 최고의 사랑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하나님과 십자가의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큰 능력이나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주는 헌신만이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기적이나 능력, 은사보다 위대한 것입니다. 큰 능력과 기적에 움직이지 않던 죄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녹는 일은 언제나 있습니다. 우리를 불순종의 길에서 돌이켜서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었던 것은 하늘을 가르는 위대한 능력이나 기적, 커다란 지옥의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녹여 예수를 따르게 만든 것은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자신을 값없이 내어주시는 십자가의 사랑이었습니다. 산을 옮길 위대한 믿음이나 공중을 가르고 강림하는 불같은 능력으로 바꿀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점령하시는 것입니다.
고난 주간에 우리는 인간의 불순종과 죄의 크기와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를 용서받게 하시려는 커다란 사랑의 대조를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불쌍한 죄인이고 비참한 인간인지를 절실하게 깨닫고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현재적으로 기억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사랑하고, 기억하고, 그 분의 뜻대로 살고, 그 분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합시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이루신 위대한 화목을 기뻐합시다. 그리고 이것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매일매일 내가 누구였는지, 그 분이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기억하며 사는 성도들이 됩시다. 아직까지도 죄를 용서받지 못하여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그들의 영혼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성도로 살아갑시다.
십자가를 따르는 삶 3 (2013.03.27 새벽 십자가사경회) 성전 휘장이 찢어질 때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눅 23:44-45) |
성경은 때가 제 육시쯤 되었다고 하였는데 우리 시간으로는 12시쯤 된다고 합니다. 이 때 해가 빛을 잃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해가 빛을 잃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두터운 구름이 해를 가려서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구름이 가리운다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여러 해 전에 서울 상공에 매우 두꺼운 구름이 가득했던 날이 있었습니다. 대낮인데도 시내에서 차가 전조등을 켜고 다녀야 할 정도로 어두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연현상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에 대한 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는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는 기록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탈출할 때 하나님이 내리셨던 아홉 번째 재앙, 즉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는 재앙에 비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속사적으로 상당히 일리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피, 개구리, 이,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이러한 모든 재앙이 일어나도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처음난 모든 것들이 죽는 큰 재앙이 있고나서야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게 됩니다.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들, 위로는 바로의 아들부터 시작해서 짐승의 처음 난 것까지 모두 죽는 끔찍한 형벌이 있고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풀려났던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음 난 자식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어린 양을 희생제사로 하나님께 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두움은 큰 심판, 처음 난 것들이 모두 죽는 심판을 도입하는 전조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섬겼던 최고의 신 중 하나는 태양신이었습니다. 대낮에 태양이 빛을 잃고 캄캄해지는 기적을 체험하면서 그들은 어마어마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피, 개구리, 이, 악질, 독종, 메뚜기, 우박 등의 재앙은 눈에 보이는 재앙이었지만 어두움은 그냥 어두움이었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애굽 백성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깊은 공포를 느껴야 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한 것이 세 시간 정도 지속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 정도까지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어두움이 가득 내리고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 성소의 휘장 한 가운데가 찢어지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던 순간도 아니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시던 순간도 아니고, 마지막 운명하심과 동시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버린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이 부분이 조금 더 상세하게 나오는데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직접 주도된 기적이었음을 말해줍니다. 휘장은 직사각형으로 된 성막을 2/3, 1/3로 나누는 방 중간에 쳐있던 막입니다. 큰 방이 입구 쪽에 있는 방으로 제사장이 들어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성소였고, 지성소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막 뒤편에 있는 방이었습니다. 휘장은 아주 단단하게 직조되어 양쪽에서 황소를 매달아 채찍질하여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천이었습니다. 찢어질 리가 없는데 이것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기적적으로 성소의 휘장을 찢으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위로부터 찢어졌다고 하는 것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구별의 철폐를 하나님이 직접 주도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의 뜰까지 들어갈 수 있었고 제사장들은 성소까지, 대제사장들만 일 년에 한 차례씩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이제부터 실제적으로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구별이 철폐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지성소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이 이루어질까요? 지성소는 한 사람, 대제사장이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위한 속죄의 제사를 올리는 곳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을 위한 제사장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를 용서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탄원을 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는 속죄일에 이 제사의 직무를 담당하였습니다. 대제사장만이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의 구별이 철폐되었다는 것은 이제부터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대신 빌어주어야 할 대제사장이 필요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구원받은 모든 백성들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사람들은 이러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희생제물이라면 그 제물을 바치는 대제사장은 어디에 있느냐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독특성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었고, 제물은 하나님께 바치기 위하여 짐승 중에서 취하여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제사였지 영원한 제사는 아니었습니다. 짐승을 죽여 바치는 대제사장의 제사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죄에서 잠시 용서받도록 하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열어줄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범죄 하면 이스라엘 공동체와 하나님 사이의 화목은 다시 막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제사는 영원한 제사가 될 수 없었고 단번에 드리는 제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 제사는 일시적이었고 반복해서 매년 하나님 앞에 올리지 않으면 안 되는 제사였습니다. 이러한 제사는 완전한 속죄제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불완전하고 일시적인 속죄를 통해 바라보는 완전한 속죄의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게 하셨습니다. 대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올린 제사의 독특성은 예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셨던 동시에, 그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올리는 대제사장이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제사장이 자기 자신을 희생제물로 삼아 하나님 앞에 스스로 산제사를 올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가 가지고 있는 독특성이었습니다. 인간에 의해 한시적으로 올려지는 대제사장의 제사에 익숙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속죄제는 매우 낯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성경을 바라보면서도 그 예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 분이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요 화목제물이심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죄와 허물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그 죄와 허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흠 없는 제물도 될 수 없었고 흠 없는 제사장도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한 속죄의 제사를 드릴 때 먼저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자신을 위한 제사를 하나님께 먼저 드려 정결해지고, 용서받은 대제사장으로서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죄를 위한 속죄의 헌제를 주님 앞에 올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당신 자신을 위한 제사를 올릴 필요가 없었고 우리를 위한 제사만 올리면 충분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지 않으셨더라면 인간으로서 비참한 죄인 된 처지를 알 수 없었을 텐데,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셔서 죄는 없으시지만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고통을 온 몸으로 체험하여 아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찢어질 수 없는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 것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구별이 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대제사장이 되어서 구원받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영원히, 단번에 제사를 드려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제사장이라면 누구든지 성소까지 들어갈 수 있는데 성경은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사장이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제사장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중보의 탄원을 올리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와 같은 중보는 아닐지라도 그분께서 이미 이루신 속죄를 기초로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받게 하기 위한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께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고, 대제사장은 더 이상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제는 지성소까지 들어가 하나님을 직접 뵈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사건이 주는 파격적인 의미였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나누게 되는 깊은 영적인 교통과 놀라운 은혜는 구약의 성도들이 미처 맛보지 못했던 놀라운 특권이며, 지성소에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커다란 영적인 축복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한 몸으로 받았기에 우리들은 모든 은총과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탁월한 공로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처지와 형편에 놓였든지 언제든지 간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용납하시며,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커다란 축복, 구약의 성도들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엄청난 축복을 누리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커다란 복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속죄를 기초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지 않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불신자는 아직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할지라도 신자가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 복음의 영광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이 열어 놓으신 길을 걸어가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마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은혜로운 힘, 나를 이기는 은혜로운 능력, 마귀를 이기는 모든 권세는 세상의 자원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돈과 명예와 세상의 즐거움이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고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찢어진 휘장을 지나 보혈의 길을 걸어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분의 임재 앞에서 큰 사랑을 받고 그것을 생명으로 누리면서 세상의 자원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며 살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 휘장을 찢으심으로 오랜 세월 동안,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단단히 가로막아 제사장조차 용납하지 않았던 지성소에 이르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공로 없이, 어떠한 희생 제물도 없이,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의 공로를 믿고 당신 앞에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용납하십니다. 그 임마누엘의 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씻고 하나님의 생명의 물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샘물은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서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의 샘물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주님이 찢어놓으신 휘장 한 가운데로 걸어가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와 마주하여 큰 은혜를 누리고, 삶 속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그 안에서 영적인 생명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좋은 은혜가 주어질 때마다 이것이 나의 의와 공로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이루신 거룩한 공로와 희생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주님을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염려하지 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승리할 것을 굳게 믿고,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희생의 공로를 기억하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
십자가를 따르는 삶 4 (2013.03.28 새벽 십자가사경회) 억지로 진 십자가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막 15:21) |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 자꾸 쓰러지셨던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을 구경하기 위해 따라오고 있었는데, 군병들은 그중 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한 채,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게 하였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을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구레네’라는 곳은 지금의 북 아프리카에 있는 리비아의 한 마을입니다. 지금도 ‘구레네이카’라는 이름으로 그 마을이 남아있습니다.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이 흑인이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봅니다. 예수님을 보기위해 아프리카에서부터 왔다기보다는 그곳 출신 사람으로서 이스라엘 지방에서 유대인들과 섞여서 살았던 이방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아니면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 살고 있다가 명절을 맞이하여 유대인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이한 것은 마가복음을 보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마가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가 시몬의 가족 내력을 속속들이 아는 것처럼 시몬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억지로 진 사람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들이 그를 억지로’ 십자가를 지우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군인들이 왕궁수비대가 있는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예수님을 끌고 가서 조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로마 병정들이 시몬에게 억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때로는 억지로 진 십자가도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라고 기록한 마가는 이 가족의 내력까지 상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게 된 사건을 계기로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11장 19-20절에 보면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이때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 가운데 ‘구레네에서 온 몇 사람’이 등장합니다. ‘구레네’라는 이름이 초대교회에 자주 등장하면서 예루살렘 교회의 선교에 크게 이바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고고학자들의 발견에 의하면 예루살렘 기드론 골짜기에서 12개의 무덤이 발견됐는데 그중의 하나가 ‘구레네 시몬의 아들 알렉산더의 무덤’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하므로 그가 이 사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억지로 진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가족들까지도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초대교회의 선교와 성장에 깊이 헌신한 일꾼들이었음을 여러 곳에서 증언하고 암시하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충만한 신앙으로 기쁨과 말할 수 없는 은혜의 감격으로 눈물을 흘리며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은혜가 모든 것보다 크다고 여기며 감사와 감격으로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훌륭할 것입니다. 지금은 가사가 바뀌었지만 예전에 “즐겨 고난길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라는 찬송의 가사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고난을 즐거워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고난 그 자체가 즐거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 고난을 당하면서 겪는 아픔보다 주님과 동행하고 섬기는 기쁨이 십자가의 고통보다 큰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남이 볼 때는 무거운 십자가 같지만 정작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그것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특권으로 여기며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부르셔서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며 이 길을 걸어가게 하셨는가?’ 하는 감동과 은혜를 고백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십자가를 자원하여 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어쩔 수없이 짊어지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라 할지라도 그 십자가를 지고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기며 잘 감당해나가려고 할 때 주님을 더 깊이 만나게 해주시고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주님을 배반하거나 버리고 갔지만 사도들과 비교한다면 별 볼일 없는 사람, 구레네 시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고 미워했으니 그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이 사람도 함께 멸시를 받고 부끄러움을 당했을 것입니다. 처음에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갈 때 ‘왜 하필이면 내가 뽑혀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갈까?’ 하고 로마의 병정들을 원망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정말 재수 없는 일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는 예수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명료하게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갔으니 그는 틀림없이 예수님과 함께 골고다 언덕까지 이르렀을 것이고 거기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매달리시고 유언을 남기시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이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목격하고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같은 사실을 한번 적용해 봅시다. 우리에게 맡겨진 다양한 십자가가 우리 자신 안에, 교회 안에, 우리의 가족들 안에, 가정 안에, 그리고 이 나라 안에, 사회 안에 있습니다. 그 중 주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기꺼이 지고 가는 십자가도 있지만, 그 중 어떤 것들은 내가 이 집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져야하는 십자가도 있고, 내가 이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내가 장로이기 때문에, 권사이기 때문에, 집사이기 때문에, 구역장이기 때문에, 순장이기 때문에 억지로 지게 된 십자가도 있을 것입니다. 한때 70%에 달하는 젊은이들이 자신이 다시 태어나면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갈 때까지는 기분이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그런데 남의 나라에 내리는 순간부터 돌아오고 싶습니다. 제가 특별히 애국자여서가 아니라 이게 내 나라, 내 조국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십자가가 있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원해서 진 것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짊어지게 된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지게 된 십자가를 원망하고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억지로 진 십자가도 잘 지고 가면 알렉산더와 루포, 아버지 구레네의 시몬과 같이 은혜가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 것이 계기가 되어서 예루살렘교회에 훌륭한 일꾼들이 되고, 복음이 없었다면 어둠 속에 살았을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교회의 기초를 놓는 일에 이바지하며 살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은혜와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영적전투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의 무게가 십자가입니다. 그중에는 즐겁게 진 것도 있지만 억지로 진 것도 있습니다. 어떻게 짊어지게 되었든지 간에 그것을 짊어지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려고 할 때,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해 이 십자가를 지고 믿음으로 걷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여러분 자신에게만 은혜요 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도 복이 되고 은혜가 되어서 구레네 사람의 집안처럼 잠시 십자가를 지고 부끄러움을 당했으나 가문이 모두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교회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십자가를 따르는 삶 5 (2013.03.29 새벽 십자가사경회) 나를 위하여 울지말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눅23:28) |
예수 그리스도는 밤새도록 심문을 당하시고 브라이도리온이라고 하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에서 채찍에 맞으시며 많은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자꾸 쓰러지니까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이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예수를 따르게 할 정도였으니 예수님은 모든 기운이 소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곳까지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남은 힘을 다 쏟는 커다란 노역이고 수고였습니다. 그러한 처지에서 예수님은 누군가에게 설교를 하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여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오면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예수를 위하여 울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돌이켜 자기를 따라오는 많은 여인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여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면서 울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경하며 따라갔는데, 이 여자들은 통곡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뒤를 쫒아갈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후에 부활의 영광을 누리실 것도 몰랐고 이렇게 십자가를 지셔야만 자신들의 죄를 대속해 주실 수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 통곡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라고 말씀하셨을 때 나를 향한 사랑을 거두어 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 나의 고난을 마음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그만 두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현실적인 일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은 너희의 자녀들을 위하여 울며 그들의 구원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화) 정말 일어나지 말아야할 사고인데 아이들이 유치원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죽는 일들이 있습니다. 조심해서 운전을 해야하고 인솔교사가 아이들을 인솔해서 내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럴 수 없는 처지이면 운전자가 내려서 밖에서 문을 열어 주고 아이들을 한명씩 내려 보낸 후에 자신이 문을 닫고 차를 운행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통학버스는 추월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신중하게 하지를 않습니다. 이번에도 서너 살밖에 안된 아이가 봉고차 뒷바퀴에 깔려서 죽었습니다. 운전수가 돌멩이가 걸린 것 같다고 차를 세우고 보니까 아이가 그 바퀴에 깔려서 즉사를 하였습니다. 남의 집 아이지만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인명을 가볍게 생각하고 부주의할까?’ 물론 운전자에게 이 아이를 죽여야겠다는 의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부모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 충격으로 뱃속에 있는 아이까지 죽었다고 하니 실수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고로 육체가 죽임을 당한 어린아이를 보면서 피도 섞이지 않는 내 마음이 이렇게 찢어지는 것처럼 아픈데 부모는 얼마나 아플까? 그리고 잠시 죽는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앞에서의 형벌일 경우에는 그것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일까?’ 한꺼번에 아이를 둘이나 잃어버렸는데 부모의 마음속에서 그 고통과 상처가 죽을 때까지 지워지겠습니까? “실수였습니다.”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 중 누가 다른 사람을 그렇게 슬프게 할 수 있는 권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조심하여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주일학교는 절대적으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교역자들과 교사들이 이런 점에서 깊이 각성을 하고 정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했던 바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우리가 모르는 일들도 아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 계시에 의하면 40년 정도 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이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들은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하는 이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도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잉태하지 못한다. 해산하지 못한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지 못한다.’는 것은 자녀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날이 오면 자식이 없는 자가 복이 있다 하리라.”는 뜻입니다. 그날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탄생을 주전 4년 정도로 봅니다. 33세에 공생애를 마치셨으니까 이때가 30년에서 32년 사이라고 봅니다. 약 40년 뒤, 정확하게 말해서 37년에서 39년 사이에 이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로마의 디도장군이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위해 쳐들어옵니다. 그리고 전투 끝에 예루살렘은 항복을 하지 않아 에워싸게 됩니다. 그 날이 예루살렘 함락의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결국 성은 함락당하고 많은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는 아비규환의 역사를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런 사실을 몰랐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미래의 끔찍한 일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을 때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아 평화에 관한 일을 내가 알았더라면 좋았을 뻔 하였거니와 이제는 내 눈에 숨기웠도다” 하시며 예수님이 우셨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성이 에워싸이고 모든 보급이 끊어져서 사람들이 굶주린 채 하나씩 둘씩 죽어가고, 마지막에 성이 함락이 되고 산산이 파괴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살육을 당할 때 자식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자식이 전쟁 속에서 굶주려 죽거나 로마 군인들의 칼에 찔려 죽는 끔찍한 광경을 지켜보는 것이 부모들에게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차라리 자식이 없으면 자신하나 목숨을 잃으면 그만일 테지만 눈을 뜨고 자식들이 끔찍하게 죽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아마 상상할 수 없는 큰 고통이고 표현하기 힘든 최고의 재앙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그만 두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구경하며 따라 오는 백성들과는 달리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위해 우는 것을 고맙게 여긴단다. 그러나 너희에게는 나를 위해 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단다. 그것은 바로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우는 것이다.”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울면서 따라 오는 여자들 중 대부분은 약 38년에서 40년후에 다가 오게 될 예루살렘의 끔찍한 멸망을 겪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현실적인 가르침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분이 당하는 고통을 느끼며 그분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은 너무 훌륭한 것입니다. 그분이 이천 년 전에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는 광경을 생각하고 주님의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를 묵상하며 우는 것은 정말 훌륭한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죄를 위해 회개의 눈물을 흘릴 때와 자기의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생각하며 가슴아파하는 순간이 가장 순수한 마음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를 위해 우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이고 훌륭한 것이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것, 현실적으로 더 급한 것은 하나님의 큰 심판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될 때 너희와 너희 자녀들의 처지를 생각하며 우는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이 땅에 더 살아 계셨더라면 이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리셨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기 전날 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던 기도보다 이 땅에 홀로 남겨두고 가야하는 많은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해 주시고 긍휼히 여기시도록 빌었던 기도가 겟세마네를 가득 채웠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봅시다. 어떻게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눈물 흘리고 그를 진실하게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고통을 느끼며 아파하는 것은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경건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아무 상관이 없이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하여 우는 여자들의 눈물과 통곡이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는데서 나오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우리도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이런 눈물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것이 나의 죄 때문이며 나는 하나님께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회개의 눈물과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눈물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이것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시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위해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것과 함께 현실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울어야 할지를 함께 생각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임박한 예루살렘의 멸망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너무나 불쌍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나를 위해 울기 전에 먼저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큰 사랑을 입은 자들로서 구원받은 백성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고난을 위해서 우는 개인적인 경건한 사랑이 확장되어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아 계셨더라면 가슴 아파하며 우셨을 기도제목을 우리들이 계승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 기도제목이 바로 주기도문에 나오는 기도제목들이고, 본문에 나온 것 같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특히 회심집회를 앞두고 자녀를 위해 많이 기도하십시오. 한순간 회심하는 것은 너무 소중하지만 회심한 자녀들이라고해서 안심하면 안 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회심에 부합하는 삶을 살면서 주님 앞에 올바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부모들은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어야 합니다. 울지 않는 부모들을 가진 아이들은 우리가 영적으로 입양하여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진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리기 위해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면서도 그분의 마음을 찌르는 고통이 되는 것은 당신이 받고 계시는 고난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과 아픔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며 눈물을 흘리는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당신을 향한 사랑이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위한 눈물의 기도로 이어지도록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 앞에서 사는 것, 믿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붙들고 가슴에 십자가의 사랑을 간직하고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해서 눈물로 주님께 간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따르는 삶 6 (2013.03.29 금요기도회) 대신 당하신 고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
이사야서 53장은 메시아의 고난의 장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형벌을 받고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53장은 걸림돌이 되는 장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그는 멸시를 받아,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그가 찔림은, 그가 곤욕을 당하여도’, 분명히 3인칭 남성 단수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사람들에게는 어떤 한 사람이 대신 고난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용서를 받거나 구원을 받는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을 힘들어 합니다. 의도적으로 ‘그는’이라고 되어 있는 명백한 3인칭 남성 단수를 1인칭 복수로 바꾸어서 ‘우리는 멸시를 받아, 우리가 찔림은, 우리가 곤욕을 당하여’라고 바꾸어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종종 이사야 53장을 읽던 유대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구속하신 메시아를 만나고 회심을 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한다고 합니다. 유대교 학자였다가 개신교의 학자가 되는 사람들이 종종 있고 카톨릭의 학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53장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메시아의 대속적 형벌과 죽음을 가장 명백하게 보여주는 은혜로운 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행하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인간들의 지혜를 초월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고 외치면서 이 위대한 53장을 시작합니다. 이사야 한 사람만이 아니라 앞서 갔던 수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아가 오실 것과 메시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임을 전하였지만 누가 그것을 믿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고 할 때, 여호와의 팔은 바로 구원하시는 팔, 구원하시는 능력의 팔입니다. 팔은 힘과 권세, 그리고 보호의 상징이었습니다. 이것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말구유에 오실 때 그 아기를 보면서, 또 그가 자라나서 유대 박사들과 함께 성경을 토론하는 것을 보면서, 혹은 목수의 아들로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유대 광야에서 40일을 기도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실 때 그분을 보면서 과연 ‘이스라엘과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큰 능력이 여기에 있구나!’라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분은 육체로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과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힘없는 뿌리와 같아서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고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인간이 볼 때 그렇게 나약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측하지 못한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인간적인 방법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주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종이 나타나서 기적과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민족의 압박과 고통 속에서 건져내어 다윗의 나라를 잇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연한 순 같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연약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셔서 그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하시고 그를 형벌하심으로써 우리가 대신 용서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오셔서 질고와 징벌을 당하신 것이 우리 때문이었지만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 자신이 잘못해서 하나님께 징벌과 고난을 당한다고 여겼다고 말합니다. 5절은 모든 오해를 풀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신 일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언대로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뿐만 아니라 창으로 찔림을 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으셨을 때 로마의 병정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 번 확인 사살 하듯 그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고 그 창은 옆구리를 지나 폐를 관통하여 심장을 찔렀습니다. 물과 피를 흘리셨다는 것은 창을 깊이 찔러 옆구리에서 허파를 지나 심장을 터뜨려 물과 피가 흘려졌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죄 없으신 그 분이, 일평생 한순간도 자기의 행복을 위해 살지 않으시고 남을 위해 자신을 다 버리는 섬김의 생애를 사셨던 그 분이 창에 찔려서 물과 피를 모두 쏟고 내장이 창에 찔려서 해체가 되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다른 두 강도는 예수님보다 훨씬 악한 사람들이었는데도 창이 허리를 찔러 허파를 관통하고 심장을 터뜨렸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에 깊이 찔리심으로 예수님이 오시기 700여 년 전에 예고되었던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가 찔리심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성경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옆구리를 찔러 창으로 내장을 관통하고 심장을 찢어 물과 피를 쏟게 하셨습니다. 순결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우리의 죄와 허물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참하게 찔려 고난당하신 것은 당신의 허물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버렸고 그분 앞에 악을 행하였으며 그분을 등지고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아닌 나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의 끔찍한 허물을 대신 용서 받게 하시기 위해, 우리의 무한한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무한한 형벌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분이 죄 있는 인간이라면 아무리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어도 그분의 죽음이 속죄의 무한한 가치를 갖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그분의 순종, 십자가에서 창에 찔려 죽으신 그분의 고난은 무한한 크기를 가진 대속의 형벌로서 효력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볼 때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삶은 죽음의 빛으로 비추어 보아야 그 의미가 분명해지고 죽음은 생명의 의미로 비추어야 그것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찔리심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그분이 나의 무한한 죄 때문에 무한한 순종으로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내가 하나님 안에서 어떤 행복을 누리고 있다면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용서 하시는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앞에서는 할 말을 잃어버리게 되는 사람입니다.
(찬송)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린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겸손의 기초이고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는 모든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사야 선지자는 동일한 어조로 그리스도의 상하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여기에서 ‘상하다’는 뜻의 히브리어는 사람을 때리거나 흉기로 그 사람을 가격해서 신체가 훼손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짓이겨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고 브라이도리온으로 끌려 가셔서 거기에서 심한 매질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때리면서 너를 때린 자가 누구인지 선지자처럼 알아 맞혀보라고 조롱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화의 주로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성취하기 위해서 오셨지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이 평화를 이루기 위해 오셔서 평화를 깨트리는 사람들을 때로는 폭력이나 구타, 형벌로 다스리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폭력과 비참을 없애기 위해서 오셨지만, 또 다른 폭력으로 폭력을 해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화를 말씀하셨지만 그 분은 심하게 고통을 당하고 상하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닌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허물이 우리가 고의적으로 의도한 성격이 적은 것이라 하더라도,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의 율법을 어기고 행한 모든 악과 그 뿌리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상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에게 객관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보이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가 주관적으로 다가오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나서 변화되지 않고는 누구도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고, 자신의 삶에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도록 허락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고집하다가 우리의 고집을 내려놓는 때가 언제입니까? 나의 유익을 위해 살고 나의 목표를 위해 살다가 그 모든 것이 헛된 줄 알아 내려놓고 주님을 목표로 삼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삶의 목적을 돌이킨 때가 언제입니까?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회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어떤 죄인이었고 그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죄 용서 받았는지를 절실하게 깨달으면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됩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고 우리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었던 나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가치 없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을 위해서 고결하신 주님이 십자가에 대신 못 박혀 형벌 당하신 그 사랑 때문에 죄를 미워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
이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우리 때문에 형벌과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유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노라”고 말입니다. 징계가 무엇입니까? 무엇인가 의도적으로 잘못했거나 의도하지 않았어도 잘못해서 주인의 일을 망치거나 법을 어겼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가로서 처벌을 받는 것이 징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실 때부터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전까지 모든 삶의 순간이 하나님을 섬기시던 생애였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야할 추호의 이유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실 때 우리가 모르는 놀라운 기쁨을 충만하게 가지고 계셨는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 사랑을 받는 기쁨이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울려 퍼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셨고 하나님이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셨고 언제나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께 징계를 받으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징계는 찔림으로 나타났고 그의 상함으로 나타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고난의 죽음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분이 그렇게 징계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지만 보편적으로 합의를 이루는 것은 '예루' 라는 말과 '샬렘'이 합쳐졌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예루’는 ‘이루’의 옛 말로 성읍을 가리키는 단어이고 ‘샬렘’은 평화를 의미합니다. ‘평화의 도시, 평화의 성’, 즉 하나님과 온전한 평화가 이루어진 도성, 그 가운데 하나님이 좌정하고 계신 것을 의미하는 성읍입니다. 그것이 예루살렘의 의미입니다. ‘샬롬’, 하나님과의 평화에 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갈망은 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불순종하고 죄를 행함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버렸고 모든 인류도 그 뒤를 따라 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것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받으신 징계는 평화로 되돌아옵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린 적이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대신 징계를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의 결과로 비참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을 보시면서 긍휼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아들의 이름을 믿고 당신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성경은 마지막으로 말하기를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질병적인 상태로부터의 구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해도 우리의 마음과 몸에 심각한 장애가 있어서 마음이 옳은 것을 원해도 마음먹은 대로 행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망가진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채찍에 맞으시고 형벌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을 의지하며 은혜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을 영혼과 육체의 병적인 상태에서 구해주시고 고침 받게 해주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비록 오늘 우리 자신이 정말 비참하도록 망가져있고 영혼의 불구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희망 없이 죄 가운데서 형벌의 길을 스스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불구의 인간이 변하여 당신 앞에서 새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주시고 만지셔서 치료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 우리의 일생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붙여져서 그분의 진리와 그분의 사랑으로 고쳐지고 새로워져가는 과정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예언을 따라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찔리신 것과 상하신 것, 대신 징계를 받으시고 대신 채찍에 맞으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의 고통과 고난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우리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아직도 우리에게 나쁜 것이 남아있다면 이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고 죄 가운데로 걸어들어 간 우리의 잘못 때문에 덧난 영혼의 질병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참 소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고, 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생을 마치고 숨질 때까지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살려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주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