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따른 사람들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눅 23:26-2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부활이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자신의 마음속에서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들만이 지금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우리말에 십자가로 번역된 이 단어는 원래 그리스어에서 ‘스타우로스(σταυρός)’라는 단어입니다. 고전 그리스어에서 이 스타우로스는 어떤 종교적인 의미도 없었습니다. 이 단어는 크게 두 가지를 의미했습니다. 첫째는 땅에 굳건히 박혀 있는 말뚝이나 혹은 기둥을 가리켰습니다. 또 한 가지 용례는 죄인들을 처형하기 위해 사용된 가로 세로 막대로 된 십자가를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던 스타우로스에 종교적인 의미가 부여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이 사건을 전파한 제자들의 복음 전도 때문이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 받을 인류의 죄를 대속하였다는 교리가 전해지면서 이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던 것입니다.
원래 이 십자가 사형은 로마인들이 변방의 야만족이었던 시절에 만든 제도입니다. 이 십자가는 대게 새로 기둥이 먼저 땅에 든든히 세워지고, 그 다음 십자가에 못 박힐 죄인을 가로 막대에 눕혀 하늘을 보게 한 후 손목 양쪽에다가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그 못은 나무로 된 기차 침목에 박던 그 못과 크기는 다르지만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못은 혈관을 뚫고 손목뼈를 깨고 그리고 나무에 굳게 박혀야 하는데 이는 못 세 개로 죄수 전체의 몸을 지탱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제 못 박은 후 팔 부분을 떨어지지 않도록 밧줄로 묶은 다음 도르래를 이용해서 이미 서 있는 세로 기둥에 끼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한 후에는 당연히 발 부분을 못 박아서 그래서 두 발을 포갠 후 보다 큰 못을 박아서 두 발과 나무를 고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십자가 형벌의 끔찍함은 목숨이 붙어있는 한 최고의 고통을 죽는 순간까지 겪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대게 이 십자가 형벌에서는 죄인들이 많은 피를 흘리게 되는데 의학적으로 출혈은 견딜 수 없는 두통을 가져옵니다. 혼절했다가는 다시 깨어나고, 깨어났다가는 혼절했다가는 지옥 같은 고통을 감내하면서 십자가에 처형을 받은 죄수들은 서너 시간 만에 죽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은 삼일씩이나 매달려 있었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겠습니까? 이렇게 십자가의 형벌이 너무 비인간적이었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자기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 형벌을 부과하지 않았고, 또 다른 사람들도 나라에 반역을 하거나 인륜을 저버리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형벌이 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형벌에 처해지게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모든 죽는 방법 중 역사상 가장 끔찍한 십자가의 형벌로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을 거두셨을까요? 이것은 십자가를 볼 때마다 온 인류가 자신들의 죄의 크기가 얼마만한 것인지를 십자가를 통해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죄수들은 매달리기 전 두 가지 규례를 따라야 했습니다. 첫째는 채찍에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판결이 끝난 후 브라이도리온이라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으로 끌려가셔서 거기에서 온 옷을 벗기고 온 몸에 채찍을 맞으시고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두 번째 규례는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130kg에서 150kg는 족히 되었을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죄인들에게 해당되는 규례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셨으니 이런 문맥에서 나온 교훈입니다.
II. 십자가를 따른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신앙적인 교훈을 줍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따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A. 억지로 따라간 사람들
첫째는 억지로 따라간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원하지는 않았으나 타의에 의해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갔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26절은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구레네는 현재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한 수도이고 로마 시대에는 여기에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많이 살았으며 기독교가 시작된 이후로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이 도시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시몬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사람이 불신자였다가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해석입니다. 두 번째는 이미 신자였기 때문에 이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억지로 진 것이지만 말입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에서는 바로 이 구레네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되어 있고, 아마도 이 루포는 사도 바울이 형제처럼 여기고 특히 그 어머니에 대해서 가족의 정을 느꼈다는 점에서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 16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 16:13) 하였으니 이런 해석에 따른다면 이 어머니는 구레네 시몬의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행렬이 지체되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를 지기 전 왕궁 수비대에서 많이 채찍에 맞으셨고, 그 전 밤에는 꼬박 세우며 체포당하고 심문을 받으시고 이송되셨습니다. 그 전 시간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고, 그 전 시간에는 제자들과 함께 눈물겨운 최후의 만찬의 시간을 갖고 거기서 꽤 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레네 사람 시몬을 잡아다가 십자가를 지게하고 예수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자기의 뜻과는 상관이 없이 억지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 때문에 제자들조차 버리고 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 전에 그가 이미 그리스도인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이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간에 그는 억지로 진 십자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정사는 아니지만 야사에 따르면 이 구레네 시몬은 은혜를 많이 받은 후 인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나옵니다.
우리는 충만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아멘하며 진 십자가도 있지만 때로는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짊어지게 된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지게 된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진 십자가였으나 이 십자가를 짊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영광스러운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지어진 십자가든지 그것을 감당 하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주님과의 만남도 주시고 그리고 큰 은혜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지어진 십자가든지 믿음으로 이 십자가를 감당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구경하며 따라간 사람들
둘째는 구경하며 따라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에는 백성이라고 한 단어로 나오는데 이들이 누구인지는 그 뒤의 문맥에서 상세하게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자기를 못 박는 사람들이 받을 형벌 때문에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주님께 빌었습니다. 이때에 백성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누가복음 23장 35절은 다음과 같이 보도합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예수를 따라온 것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죽나 보기 위해 호기심으로 따라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7-48절은 다시 한 번 이 백성들이 예수 십자가 사건을 구경하기 위해 온 사람들임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눅 23:47-48) 하였습니다. 이때는 유월절이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민족 최대의 명절에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들에게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한다는 이야기는 최고의 뉴스거리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를 따라온 동기는 구경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평소에 기적을 일으킨 예수가 죽음의 순간에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 위기를 모면하지 않을까 그것이 보고 싶었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것이 하나님을 모독한 죄에 대한 심판이라고 여기며 그가 어떻게 죽는지를 구경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죄가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이 재판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고금으로부터 법의 정신은 100명의 죄인을 놓아주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자를 처형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예수님은 이 불법한 사실이 아닌 재판의 결과를 조용히 받아들이고, 그 말없이 모든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의로움을 외치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불의한 재판의 결과를 말없이 받아들이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동기와 예수가 당신의 목숨을 내려놓는 동기가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예수를 죽임으로서 자신의 종교적인 기득권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기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법한 사람들의 불법한 재판의 결과로 억울하지만 처형당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었음을 아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계셨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조용히 성례 속에서 이 십자가를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교회에 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교회를 찾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수의 십자가를 구경하기 위해 따라가는 것처럼 교회에 온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자기의 실존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분명한 답이 없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회개하지도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믿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감격도 없이 교회에 나옵니다. 본인도 왜 이렇게 교회에 나오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대해서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와 자신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릅니다. 무지와 불신을 친구 삼아서 지식과 총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 주위를 수없이 돈 인공위성이 한 번도 지구를 만난 적이 없듯이 그렇게 예수님 주위를 뱅글뱅글 돌지만 한 번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무엇이 구경거리입니까? 오늘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이런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감당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어떻게 구경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자기들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시고, 자기들의 죄 때문에 채찍에 맞으신 고통이 어떻게 구경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믿음도 없고 지식도 없고 생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의미를 안 사람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의미를 안 사람이 아니면 그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습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내가 누구이고 나의 사랑하는 이웃이 누구이며 교회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안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도대체 여러분들의 마음을 뛰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저는 궁금합니다. 세상의 쾌락도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에 쾌락에 마음이 심하게 뛰놀았다면 여러분들은 교회를 뛰쳐나가서 더러운 죄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쾌락이 아니면 그 다음에 어떤 것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뛰게 하는 것입니까? 복음입니까? 만약에 복음에 여러분들의 마음이 두근거린다면 이렇게 죽은 자처럼 신앙생활할 리는 없습니다. 힘겨운 강의를 억지로 견디는 사람처럼 예배를 드릴 리도 없고, 그리고 그 많은 세월을 교회당에 다녀도 하나님 앞에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그런 삶은 살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구경거리로 생각합니다. 아니 더 심하게 말하면 이제는 구경거리 축에도 들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가 수없이 듣지만 복음에 대해 모르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침묵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문맥에 비추어 볼 때에 지금 구경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뒤따라가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뱃세다 광야에서 베푸신 다섯 개의 기적의 보리떡과 두 마리 물고기를 먹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겉옷을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병든 자를 고치는 기적을 경험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지금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구경꾼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정말 가슴에 한번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이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같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몹쓸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이 아파서 눈물 흘린 적이 언제입니까? 그 마지막이 언제입니까? 읽던 성경이 눈물에 젖거나 기도하던 자리가 눈물에 고이고 그리고 책을 읽다가 예수 십자가의 고난 때문에 눈물을 흘렸던 적이 얼마나 됩니까? 교회 좀 다닌 사람들은 맨날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예전에는 성경 지식도 부족했고, 교리도 잘 몰랐는데 왜 옛날에 저는 뜨거웠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열렬하게 믿음 생활 할 수 있을까요? ‘이전에는 많이 섬기지는 못했지만 지금은 많이 섬기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능숙하게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는데 내 마음은 왜 이렇게 냉랭할까요?’ 라고 말입니다. 질문은 여러 개지만 대답은 하나입니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한 가지만 변했을 뿐입니다. 그때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흘리는 눈물이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입니다. 불변의 사실입니다.
그러면 신약성경으로 돌아가서 이 십자가와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경건이라는 측면에서 연결되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선 이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것과 함께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가 자기의 죄 때문에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을 통해 경험하면서 그 분이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그 분의 고난이 극심하면 극심할수록 그것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는 죄인임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한마디로 캄캄했던 영혼의 어두움이 걷히고 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위해서 실감나는 비유를 해보겠습니다. 자, 이 예배당 안에 여러분들이 있는데 이 예배당 안쪽이 새카맣고 어두운 막으로 완전히 싸여있습니다. 어떠한 빛도 보이지 않습니다. 예전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본성과 상식의 빛을 따라서 먹고 사랑하고 살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몰랐고, 더욱이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더 깜깜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어두움을 운명처럼 알고 살았는데 하늘에서 큰 칼이 내려와 북하고 그 어두운 장막을 찢어버린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눈부신 빛이 확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닭이 알을 깨고 바깥 세계로 나오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아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이 어두움의 세계가 모든 세계가 아니라 이 밖에 빛의 세계가 있으며 그리고 내가 생각하던 세계 말고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과 내가 무슨 관계에 있는지,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은 왜 창조하셨는지 왜 그들 중 일부를 교회 삼으셨는지, 자연의 모든 만물들을 왜 주셨는지 의미를 발견하게 한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이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나면,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되면 세계관과 인생관이 바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두 번째는 자, 그렇게 주님을 만났던 위대한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갔는지를 기억해 봅시다. 놀라운 일입니다. 사람들마다 예수를 믿었는데 핍박을 받아 고통을 받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을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스테판은 그저 집사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고, 구약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구속사적인 설교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극악하게 예수를 죽인 정신으로 스테판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돌로 쳐서 죽였지만 그에게는 어떠한 두려움이나 복수심도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가 죽으면서 무슨 말을 남겼는지 기억하십니까? ‘내가 보좌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노라’하고 ‘이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하고 죽었습니다. 그 사람 안에 살아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그런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아 그러니까 목사님이 말씀하고 싶은 요지는 이것이군요. 그러면 그런 위대한 순교적인 삶을 위해서는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 필요하다. 아니요. 그것은 기본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없는 특별한 순교자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충만해진 것입니다. 그 사랑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게 만든 것입니다.
어렸을 때 땅 따먹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말까기를 하면서 땅을 넓혀갑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친구하고 다툽니다. 그런데 골목에서 나오는 엄마 한 마디의 목소리에 모든 것이 끝나고 돌아갑니다. ‘밥 먹어라’ 그 한 마디에 모두 끝나는 것입니다. 언제 주님이 여러분들보고 ‘밥 먹어라’ 하고 부르실까요? 이게 십자가를 통한 지혜입니다.
결국 말씀 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영적 생활은 그 근본의 뿌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입니다. 신앙의 타락은 큰 죄를 짓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죄가 시작된 이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시작할까요? 존 오웬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구원이 평범하게 느껴지는 것 그게 죄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지금 살아있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훌륭한 증거입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그런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경하며 따라갔습니다. 잠시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늘이 빛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무덤들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깊은 두려움을 느끼며 떨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나님 앞에 옳은 사람이었도다.’ 라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였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당하신 고난과 그 큰 죽음 때문에 내가 살리심을 받은 것은 전혀 당연하지 않다. 잃어날 수 없는 일들이 내게 일어난 것이고, 내가 구원 받은 것이 매순간 그런 점에서 부자연스러운 것이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에서 나온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가 없이 성경적인 사실입니다. 하루에 두 번씩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그는 부족하지만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한번은 죄 없는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그 큰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 아파 흘리는 눈물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더러운 죄인을 그렇게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격하는 눈물입니다. 이런 사랑은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당신의 일을 위해 쓰실 것입니다. 때로는 시련과 고난을 만나나 그는 결코 꺾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사람들처럼 예수 십자가를 구경하며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합니다. 청산해야 합니다. 그리고 깊이 회개하며 또 다른 사람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C. 울면서 따라간 사람들
셋째는 바로 울면서 따라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백성은 한 단어인데 이 사람들은 꽤 긴 묘사를 가지고 설명합니다. 27절에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했습니다. 이 여인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어머니도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5절은 십자가 아래서도 그대로 남아있었던 여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 19:25) 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고난 받는 현장을 구경하며 따라갔지만 또 많은 여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행렬을 울면서 따라갔습니다. 여기에 ‘울며’ 라고 되어 있는 단어는 흐느끼다가 아니라 소리를 내어서 우는 동작을 뜻합니다. 그 울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이 여자들은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예수를 따라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가벼운 울음에는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울 때에 가슴을 치는 이유는 극심하게 울 때에 혈압이 높아지고, 호흡이 가빠지면서 이 가슴이 응축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때에 가슴을 두드리면 혈액 순환이 원활해지고 통증을 덜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인들의 이 울음이 얼마나 극렬한 슬픔을 동반한 아픈 눈물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어떤 사람은 구경하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데 이 여자들은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통곡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을까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학력의 차이가 있었을까요? 성별의 차이 때문일까요? 아니면 신앙의 연조의 차이 때문일까요? 아무것도 그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오직 단 하나 이렇게 슬피 울며 예수를 따라가는 여자들에게는 구경하며 따라간 사람들의 마음에 없던 단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이전에 만나서 복음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기와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 분의 인격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의 자녀로 그 분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 죄도 지으신 것이 없는데 마치 죄인중의 큰 죄인처럼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그 전에는 가장 비천한 자 취급을 받으며 모욕을 당하며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공감하게 하는 힘입니다. 아마 이 여자들은 마음으로 울부짖으며 외쳤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 같은 죄인들을 하나님 앞에 용서받게 해주시고 무지한 우리들을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고 외로운 자의 이웃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당신은 머리 둘 곳 없는 분으로 일생을 사셨으나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여인들은 세상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를 통해 경험했고 그것이 이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이었습니다. 칼빈이 올바르게 주석한 바와 같이 이 여자들은 예수의 죽음 후에 위대한 부활이 있을지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이 고난당하고 죽는 것이 자기들의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인 것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몰랐지만 오직 하나 그들이 아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자기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고, 사랑해 주셨으며, 그분 때문에 하늘 아버지를 마음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랑이 죽음을 넘나드는 열정으로 십자가를 따라가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이 세상에서 무슨 그렇게 좋은 쾌락이 있을까요? 어려서는 인간으로 사는 것 때문에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지만 그것에 눈을 뜨거나 포기하고 난 다음에는 혹은 가난에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갈등 때문에 고통을 받고, 이 나이쯤 되면 세상에서 즐거움을 누릴 기대쯤은 접게 됩니다. 살아있는 우리의 날들 중 시련이 아닌 날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패스미스트의 항변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도 영원히 우리를 행복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들은 세상이 앗아갈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 안에서 발견했기 때문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다 구경하며 가는 그 길을 눈물 없이는, 통곡 없이는 걸어갈 수 없었고, 다른 사람은 억지로 진 십자가였지만 이 여자들은 자원해서 예수 대신 그 십자가를 지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증거로서 회심의 확실성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성의 깊이가 경험의 특이성에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조용히 복음을 듣고 눈물을 흘렸을 뿐인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범하지 않은 영적인 경험을 하고 때로는 육체의 경험까지 했는데 거듭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한 사람이 진심으로 회심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회심 경험의 특이성이 아니라 지금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연인이 있고 그를 진심으로 인격적으로 사랑한다면 옛날에 사랑했다는 강렬한 기억 때문에 오늘 아무렇게나 살아가지 않을 것이며, 또 미래에 언젠가는 우리가 뜨겁게 사랑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오늘 나눌 사랑을 내일로 유보하는 일은 더욱 없을 것입니다. 의심할 수 없이 어떠한 회심의 특이한 경험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내가 언제 어떻게 회심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도 오늘 이 여인들처럼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고난에 공감할 사랑이 있고, 그 분의 아픔이 자신의 고통으로 느껴지는 사랑이 있다면 그는 그것으로서 더 이상 뒤집을 수 없는 구원의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문제가 많기 때문에 자기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듣고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눈을 감는 순간까지 불만족스러운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사실은 내 맘대로 안 되는 어려운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불행하고 힘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리스도 예수께서 날 위해 죽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고, 그리고 이 더러운 죄인이 그 사랑으로 구원 받았다는 사실이 마음을 가득 채울 때 우리 인생에서 나머지 것은 아무래도 괜찮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고통과 번민은 사랑과 집착에서 생겨납니다. 그리고 정말 그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현재적인 감격을 누리면 그런 것들은 괜찮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89년도에 생애적으로 주님을 깊이 만났을 때에 매일매일 울며 드리던 저만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너무 애쓰지 마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충분히 행복합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정말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은 내가 꼭 필요한 것이 아니고 정말 내게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세상이 빼앗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게 십자가 경험의 신비함입니다. 모든 기도를 접고 오늘부터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하나만 주시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경험이 살아나게 해주시옵소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신앙은 인간의 마음이 자기만족에서 하나님 사랑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에 한복판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이렇게 답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 확증은 법정적 용어입니다. 판결에 앞서 더 이상 뒤집을 수 없이 제출되는 완벽한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팩트가 이게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더 이상 뒤집을 수 없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복음을 믿음으로 그 사랑에 참여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서 회심하고 회심의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결국 예수님은 그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브라이도리온에서 내동댕이쳐지듯이 골고다 오르는 길가로 예수님이 던져졌을 때 여인들은 울기 시작했고, 그 흐느낌은 언덕을 올라가며 울음으로 변했고, 처형당할 장소에 가까이 오자 핏빛 통곡으로 변했습니다. 여인들은 울며 매달렸으나 악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세파에 찌든 우리의 마음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그때 그 소리가 들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던 망치 소리 말입니다.
(찬양) 망치소시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병정도 가버렸고, 구경하기 위해 따라오던 유대인들도 사라졌습니다. 통곡으로 예수를 따라가던 여자들도 사라졌고, 이제 예수님이 쓰러지며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던 그 길에는 이름 모를 집들이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그 골고다 언덕은 아직도 서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길을 억지로 걸어 올라가고, 어떤 사람들은 구경하기 위해 걸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울면서 그 길을 올라갑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이 가신 십자가의 길에 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예수 죽은 후에 나타난 생명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이 되고 싶으십니까? 잠시 머무는 나그네와 같은 인생의 길에서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이 충만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