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돌아오다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요 19:33-35)
녹취자: 손주희
요한복음은 요한이 쓴 복음서이고 이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 고난, 죽으심, 부활에 관한 사실과 그 사실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던 그 순간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약 6시간 만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이미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더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였는지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그 중의 한 군인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사형을 집행했던 로마의 군인 중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추측해보면 이 옆구리가 오른쪽 옆구리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창이 옆구리를 뚫고 허파를 통과해서 심장을 찌른 것입니다. 그래서 다량의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고, 이는 피와 섞인 체액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체액과 피가 눈에 보이도록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물같이 흐르는 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추측이지만 그렇게 심장을 터뜨린 다량의 피가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로 쏟아져 나왔고 그 때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쏟아지는 물과 피를 생생하게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갔고 그들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항거하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여인이 슬피 울며 통곡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갔고 로마의 병정들은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은 대로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했습니다. 도대체 사도요한이 그 시간에 어떻게 거기에 있었을까요? 마태복음 26장 56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셨던 광경을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성경은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으니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사도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옆구리를 창에 찔러 피가 흐르는 광경을 어떻게 목격하였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자기 어머니를 보시며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고,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기록되어있는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라고 말씀하시므로 어머니의 장래의 일을 사랑하는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6절에서는 제자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제자 중 한 사람인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기 전에 자신과 대화한 기록과 마지막에 포도주를 맛보시고 거절하신 후 죽으시고 죽은 시체에 창을 찌르시는 장면, 거기서 피와 물이 흐르는 장면까지 어떻게 모두 보았다고 남기고 있을까요?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이 두 매듭을 연결시킬 수 있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물과 피를 흘리는 장면을 보았다고 하는 구절도 요한복음에만 나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요한이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본 증인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할 수 있었을 것이고 다른 제자들은 그러한 목격담은 있었으나 자신의 관점에서 기록한 복음서에 귀로 들은 그 이야기를 굳이 기록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성경이 이 두 사건 사이에 어떤 연결을 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금세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6절에 기록된 것처럼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것도 사실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전 요한과 대화를 나누고 마지막에 물과 피가 흐르는 광경을 본 것도 사실입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두려움 속에서 모든 제자들이 도망간 것처럼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멀리멀리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요한은 도망갔으나 나중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어느 시점에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남기신 일곱 마디 말씀 중에 세 번째 말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는 말씀을 받들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사도요한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못 박히시고 난 후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으로 돌아왔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브라이도리온에서 끌려나와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억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랐고 어떤 사람들은 구경하면서 뒤따라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들은 가슴을 치고 슬피 울며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분이 채찍에 맞으시고 온 몸이 피로 물드시고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를 진채로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는 장면을 보면서 이 여자들은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고난을 받는 것이 부활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도 몰랐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죽으시는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인 줄도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잘못한일 없이 그렇게 죄인중 하나로 취급을 받아 혹독한 고난을 받으시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들은 통곡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에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런 심한 통곡과 눈물에 아랑곳없이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사람들은 기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는 물 위를 걷기도 하고 병든 자를 고치기도 하고 맹인의 눈을 뜨게도 하고 또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적을 행하여 물고기와 보리떡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옆에 있는 두 죄수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죄인의 수치스러운 죽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은 없었지만 어떤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에 매달렸고 시간이 지나면 피를 흘리고 죽는 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그 긴 시간을 거기서 기다려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틀림없이 많은 사람들은 발길을 돌려 언덕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못내 그리워하고 그분을 사랑했던 여인들은 거기에 머물러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시는 모습을 보며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한번 마음속에 그 광경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골고다 언덕에서 물결처럼 내려옵니다. 그런데 어떤 어린 한 젊은이가 그 내려오는 인파를 헤치며 눈물을 흘리며 골고다 언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예수와 한 패라는 지적 따위는 추호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끌려가실 때에 큰 두려움을 느꼈고, 그래서 본능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예수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오래전에 예고하신대로였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행동을 같이해서 숨어있었는지 혹은 뿔뿔이 흩어졌는지 우리는 확실한 증거를 같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결국 함께 있었다 해도 신앙은 각자 하나님 앞에 홀로서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홀로 떠나있었는지 몇몇 제자들과 함께 섞여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제자들에게는 없는 어떤 마음이 요한의 가슴속에 솟아나서 그의 양심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생전에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던 제자들 중 세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주님은 나이가 가장 어린 이 요한을 너무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어리광을 부리듯이 예수 그리스도 가까이 있었던 사도였습니다. 그래서 만찬석상에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품에서 함께 만찬을 나눌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친아들처럼 생각했던 제자였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간 요한의 마음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묻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나쁜 일이라고는 티끌만큼도 하신 적이 없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자기들을 불러 허무한 인생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셨는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세월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함께 먹고 자고 말씀을 전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상세히 풀어 가르치시던 교제의 때를 기억했습니다. 그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죽음의 위협이 밀려왔을 때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의 기억보다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단지 그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므로 자신이 유대인에게 무슨 대접을 받는다든지 세상에서 높은 영광과 지위에 오르게 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단순히 죽음이 두려워서 그것 때문에 한 순간 신앙을 놓치고 예수를 버리므로 다른 모든 제자들과 함께 예수를 멀리 떠났습니다. 예수는 죽어도 자신은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시간이 흐르며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를 배반한 것에 대한 깊은 가책을 느꼈습니다. 이 가책은 요한만 느낀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버렸을 뿐만 아니라 멀찌감치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 대제사장의 뜰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새벽닭이 울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아가 심하게 통곡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어떤 때에든지 그리스도를 떠나지 아니하고 그분의 손에 붙들려 일생을 그분과 함께 산다면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의 손을 붙들고 벚꽃놀이를 갔다가 재미있는 구경거리에 눈이 팔려서 엄마의 손을 놓듯이 그렇게 세상사랑 때문에 주님의 손을 놓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능력이 없으셔서 우리의 손을 그냥 놓으시는 것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잠시 그렇게 손을 놓도록 허락하심으로써 그리스도 예수의 손을 꼭 잡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이고 그분을 멀리멀리 떠나 어두운 곳에 쓰러지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 가고 싶은 데로 가도록 우리를 붙든 당신의 손을 놓으실 때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이렇게 잠시 그리스도 예수의 손을 놓고 물러가 잠시 은혜에서 멀어지고 신앙에서 떨어지는 적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람직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충분히 그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인간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자신을 어떻게 구원해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이끌어 오시고 매 순간 자기를 어떻게 어린아이처럼 양육하여 여기까지 이끌어 오셨는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그분의 손을 놓을 때는 잊었으나 그분의 손에 놓여 그렇게 주님 없는 외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좀처럼 신앙에 유익되는 기억을 잘 떠올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떤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지금 현재의 마음의 상태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미워하기로 하면 이상하게 그 사람과 함께 있었던 좋은 기억들은 그렇게 많은데도 기억이 나지 않고 회상되지를 않습니다. 섭섭하고 가슴 아프고 힘들었던 일만 아주 기가 막히게 또렷이 회상이 됩니다. 그래서 일단 마음이 그 사람을 버리면 기억도 버리기에 적합한 기억들이 소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멀리 떠난 신자가 그냥 떠난 상태에 가만히 있으면 주님께 가까이 가게 만들어주는 좋은 기억들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미치도록 힘든 자기의 현재 상황, 그리고 주님이 자신은 차별대우 하는 것처럼 자기를 돕지 않으셨다는 이상한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그를 더욱 신앙에서 미끄러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필요한 것이 그 기억을 불러내는 환경입니다. 이 환경이라는 것은 그냥 사람이 처해있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기억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정말 세상 살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아주 친했던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대화를 나누는데 이 사람은 정말 은혜 충만한 사람입니다. 자신보다 갑절이나 힘든 상황에서 인생을 헤쳐 왔는데 지금보아도 자신이 훨씬 더 나은 위치에 있는데 이 사람 속에 감사가 넘칩니다. 이것도 감사하고, 이렇게 해 주신 것도 감사하고, 그때 그렇게 힘겨운 일이 있었던 것도 감사하고, 지금 있는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시는지를 고백합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을 때에는 마음에서 반감이 생기지만 그러나 진심으로 그가 기뻐하며 온 인격으로 그렇게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기억들을 소환해내는 광경들을 보면서 생각이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줌마와 총각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총각들 중에서 군대갔다온 사람들이 모이면 술을 먹습니다. 술을 먹고 군대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자기는 정말 군대에서 무지무지 고생했다 이야기 하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하며 계속 자기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고백이 줄을 잇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자기는 진짜 군대생활 3년을 특별한 혜택을 받으며 편하게 지냈다고 이야기 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하며 자기가 얼마나 군대생활을 특혜를 받으면서 했는지가 줄을 잇습니다. 아줌마들이 모여도 똑같습니다. 한 아줌마가 얼마나 자기가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잘 살고 있는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 이야기가 떨어지기 무섭게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아들은, 우리 남편은 하며 자랑을 막 합니다. 그러다 한 사람이 사실은 자기 가정이 얼마나 불행한지, 자기가 얼마나 외로운지를 말하고 눈물을 흘리면 다 함께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자기 고생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결국은 남들이 우리에게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도 그건 부분이고 마치 상품을 선전할 때에 좋은 점만 선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의사선생님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약을 소개해 주실 때 좋은 점만 소개하지 마시고 나쁜 점도 똑같이 소개해 주셔서 환자가 정확하게 판단을 하게끔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가 좋다 그러니까 그것을 깊이 신뢰하고 먹는데 알고 보니까 부작용이 있습니다. “선생님, 이런 부작용이 생겼습니다.”라고 말하니까 “네, 원래 그 약이 그런 점이 좀 있습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미리 이야기 해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의 인생을 남의 인생과 비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너무 자존심 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로 살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주님께 너무 죄송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겉으로 호강하며 사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순서가 아니고 고난을 당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순서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진짜 인생 살 맛이 나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마음속에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지고 살다고 허망하게 죽는 사람들이 부럽지 않습니다.
결국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한 토막을 놓고 보면 ‘예쁘냐? 미우냐? 아니면 부자냐? 가난하냐? 남편이 능력이 있냐? 없냐? 자녀가 속 썪이냐? 아니면 착하냐?’ 등 이런 것을 가지고 도토리 키재기를 하면서 상실감을 느끼게 되지만, 긴 안목에서 바라보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렇게 한 순간 바람처럼 살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잠시 모습에 불과한 것이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처럼 거기에 목메고 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그 기억을 소환해 내는 것입니다.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 예배, 성경공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육, 이 모든 목표는 사람에게 바로 그 기억을 소환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멀리 떠났는데도 하나님이 이렇게 세상을 사랑하신 것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해 주셔야 했던 그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소환시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는 소망과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사랑으로 사는 존재지만 그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서 항상 느끼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 볼에 볼을 비비면서 그 아이 없으면 못살 것처럼 그러다 어떨 때 화가 나면 “나가죽어, 저 원수 요즘 호랑이는 뭘 먹고사나” 그러면서 두 마음이 교차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큰 재산은 사람들에게 나와 함께 나누었던 하나님과의 사랑의 기억들을 많이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 심어준 모든 사람이 여러분에게서 받은 사랑을 다 기억할 것이라고 그렇게 거래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심어준 사랑의 기억들을 잘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 밭에 씨앗처럼 떨어졌는데 길가에 있는 밭처럼 흘려보내지 아니하고 그 속에 심겨져 있어 그것들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들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관계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누가 나를 너무 힘겹게 하고 좀 양보하고 베풀면 그것을 이용하는 것처럼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나를 이용할 때도 있습니다. 그 때에도 당장 괴로운 것만 생각하면 짜증이 나는데 좋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 1년을 함께 산 것이 아니고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 좋았던 기억들, 그가 나를 사랑하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그래서 이 외로운 세상에서 서로에게 의지가 되었던 때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회상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데 커다란 자원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회개했던 사람이 회개하고 말씀에 은혜를 받았던 사람이 은혜를 받고 깨졌던 사람이 깨지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이 그렇게 되기는 드뭅니다. 주님을 멀리 떠나서 “당신을 배신했나이다”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은 언젠가 신실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아프게 한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하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럼 보십시오. 요한의 마음속에 그런 회상이 떠올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뭘 잘못하셨습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어떤 나쁜 기억들이 있을까요? 한번 우리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잘못하신 어떤 기억이 마음에 새겨졌습니까? 그런 기억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사랑의 주님을 오해한 것입니다. 마음이 빗나가서 그렇게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아이들이 아직 철이 들지 않고 아직 인간으로서 자각하지 못했을 때 그렇게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하는데도 마치 자기 부모가 자기 인생에 엄청난 걸림돌이나 되는 것처럼 그렇게 부모를 미워하고 씨름합니다. 그건 아직 세상을 살지 못해서입니다. 그렇게 철없이 까불던 그 딸도 이제 시집가서 연년생으로 아이 둘만 낳고 죽어라 시집살이 하면서 고생을 해 보면 “엄마” 하고 부르면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생을 해보면 엄마가 누군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엄마한테 한 그대로 그 두 녀석한테 당하면서 세월을 보냅니다. 그래서 짜증나면 “너도 시집가서 너 같은 자식만 낳아라”고 합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보십시오. 주님이 무슨 나쁜 기억을 요한에게 심어주셨을까요? 늘 그렇게 사랑하시고 먹이시고 그리고 함께 삶을 나누고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순간이 오셨을 때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 기억이 요한의 마음속에 소환된 것입니다. 그 사랑의 기억이 울컥하고 떠오르고 그 마음을 지배하고 나니까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요한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찬양)
새벽닭 울 때 난 괴로웠어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텐데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날 위해 바친 고귀한 사랑
그런 고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는 두려워서 예수 끌려갈 때 도망갔는데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쏟아져 내려오는 인파를 헤치며 눈물을 흘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간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서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지막 말씀 유언을 받드는 유일한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한 번도 예수를 떠나지 않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자신은 예수를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해도 그러나 마음이 이미 예수를 떠난 것을 증거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잠시 세상에 대한 두려움, 욕심, 번민 이런 것들 때문에 주님의 사랑이 묻히긴 했으나 여전히 저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사랑이 솟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한 번 우연히 유투브에서 그것을 보고 정말 눈물이 났습니다. 어느 젊은이가 영국 런던을 여행하다가 헤롯백화점을 들렸습니다. 헤롯백화점은 우리나라에서는 뭐라고 말 할 수가 없는데 영국 런던에서 헤롯백화점은 백화점의 끝판왕으로 그 나라의 최고급 물건만 가져다 놓는 백화점입니다. 때가 아직 동물보호법이 시행되기 전인 60년대였기 때문에 놀랍게도 헤롯백화점에서 아기사자를 팔고 있었습니다. 이 두 젊은이는 여행을 갔다가 너무 사자가 귀여워서 같이 기르기로 하고 사가지고 왔습니다. 두 젊은이는 부부가 되었고 1년을 길렀는데 1년 동안에 어마어마하게 커졌습니다. 도저히 자신의 집에서는 이 사자를 기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그가 원래 태어난 아프리카로 돌려보내기로 했습니다. 그 때에 그 소식을 들은 동물연구가가 그 사자가 야생에 적응하는데 도움을 주기로 하였습니다. 아프리카에다 사자를 보내고 눈물을 흘리며 부부는 돌아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상당한 세월이 흐른다음에 너무 그 사자가 보고싶어서 사파리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자를 놓아둔 곳에 갔습니다. 그런데 저기서 사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당연히 그 사자가 그 사자인줄 알아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한 살 때 보냈는데 제 기억으로는 정확하지 않지만 한 7년 정도 세월이 흘렀는데 완전히 성장할 대로 성장한 엄청난 덩치의 사자가 오는 것입니다. 사자가 몸무게가 많이 나가면 한 400∼500키로까지 나갑니다. 거의 황소 한 마리 정도입니다. 그런 사자가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사자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왠지 직감적으로 그 사자일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자가 맞았습니다. 사자가 달려와서는 끌어안고 데굴데굴 구르는 것입니다. 저는 그걸 보면서 눈물이 났던 이유가 뭐냐하면 우리들이 이성이 없는 짐승이라고 불리는 맹수도 자기를 이렇게 사랑해 주었던 옛 주인의 1년짜리 기억을 회상하면서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에도 와서 그렇게 어쩔 줄 모르는데 정말 눈물겹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소설로도 나왔습니다. 유투브에 여러 가지 비슷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사육사가 은퇴하고 여러 해 있다 돌아왔는데 사자가 끌어안고 데굴데굴 구르면서 우는 소리를 냅니다. 너무 그리워서. 그게 사랑의 기억을 소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염려하고 근심하고 쾌락에 빠지고 헛되게 시간을 보내면 괴롭기만 하지 그 기억이 잘 소환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우리 속에 잠자고 있었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기억을 소환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두려움 때문에 예수를 버렸으나 후에 더 큰 사랑으로 돌아왔던 요한처럼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올 힘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었던지 무엇을 했던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잘못을 했던지 주님은 그 사랑의 기억을 다시 더듬어 당신께 돌아오려고 하는 모든 사람 앞에 이미 계십니다. 힘을 잃어버린 자들에게는 힘을 주시고 희망을 잃어버린 자에게는 희망을 주시고 삶에 좌절한 사람에게는 놀라운 새로운 힘과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들이 잠시 요한처럼 주님을 떠났으나 다시 당신에게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을 멀리 떠난 삶에 행복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1년밖에 길러주지 않은 주인을 몇 년 만에도 알아보고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끌어안고 뒹군 맹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성이 있는 인간이고 더욱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사랑으로 돌아가 다시 주님의 은혜 안에서 힘과 용기를 얻으며 사랑으로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