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십자가와 회개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39-43)
녹취자: 장미연
오늘 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예수와 함께 매달렸던 좌우의 강도들의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십자가는 아무에게나 부과하는 형벌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제도는 로마인들이 변방의 야만족이었을 때 만들어진 제도였습니다. 사람을 산 채로 십자가에 매달아 손과 발에 못을 박고 그리고는 죽기를 기다리는 형벌이었으니 이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게 하는 끔찍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형벌이라는 이야기만 들어도 로마 사람들은 아주 불쾌하게 여길 정도로 끔찍한 형벌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있었던 형벌 가운데 비교한다면 육시를 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몸에 사지와 목을 각각 황소에게 매달아서 다른 방향으로 달려서 온 몸이 찢어지게 하는 그런 형벌 말입니다. 저는 십자가 형벌이 이 육시의 형벌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몸이 찢어지면 의식이 없기 때문에 통증을 느끼지 않고 이미 죽어버리지만 이 십자가 형벌은 사람이 며칠씩 죽지 않고 매달려 있기도 하였다고 하니 그 고통을 어떻게 말로다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십자가에 매달지 않고 당시 강도짓을 하다가 붙잡혀온 이 두 사람을 함께 십자가에 매단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평가절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성경의 예언된 대로 “죄수 중 한 사람이라 여김을 받았다”고 하는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좌우에 달린 강도를 보십시오. 가운데 예수가 계시니 다른 사람들 보기에 아마 예수는 ‘저 강도들 중 가장 많은 죄를 지은 우두머리 쯤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구원을 위해서 오신 분이시고 이 죽음이 사실은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형벌 받을 백성들의 많은 죄악 때문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에서도 십자가에 매달려 형벌을 받을 만큼 악한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아주 노골적으로 당시 로마의 통치자들에 도전하는 말씀을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돌보시는 그 일에 당신 자신을 헌신하셨습니다. 그런 분을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커다란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가시는 이 장면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모두 나옵니다. 그런데 기사마다 약간씩 차이점이 있는데 특히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이 마태복음과 대조할 때에는 특별히 좌우에 있던 강도들에 대한 상반된 이야기가 전개 됩니다. 즉 마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결국은 죽어가는 강도들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여기서는 그중 한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모순된 두 기사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간단하게 정리하면 처음 장면은 강도가 일치하게 예수님에 대해서 반항하고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사실 교회의 정사에는 나오지 않지만은 그러나 교회의 야사에는 이 두 사람의 이름까지도 나오고 이 두 사람이 함께 평생을 동업하며 강도짓을 해온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아마 십자가에 매달리면서 자기의 죄를 생각하기보다는 ‘정말 재수 없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심하게 형벌을 받아야할 끔찍한 죄인들이 많은데 내가 걸렸구나.’ 하는 마음 때문에 한탄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는데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놀라운 일이 양쪽에 있는 강도 중 어느 쪽에 있는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쪽에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둘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한 사람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고 모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면서 죽어가고 있었지만 또 한 사람은 죽어가면서 옆에 매달리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면서 많은 생각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럼 어떤 생각의 변화가 왔을까요?
1. 죄에 대한 생각이 바꿈
제일 먼저 죄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도” 처음에는 이 사람도 ‘정말 이 세상은 나쁜 놈들이 많은데 재수 없게 우리가 걸렸구나.’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죄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강도를 비난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그러니까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죄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신들이 죄가 없다고 믿었고 있다고 생각했다하더라도 이렇게 끔찍한 형벌을 당할 정도로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시간동안 얼마만한 시간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최장 6시간 아니면 짧으면 그것보다 더 짧은 시간 동안에 이 한 강도의 마음에 커다란 변화가 왔고 이때 선과 악, 양심과 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 받는 형벌은 정말 끔찍한 형벌이지만 ‘마땅히 당할 것을 당하고 있다.’ 라는 겸손한 마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가장 뚜렷한 표는 자신이 행하고 있는 죄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양심 앞에 데리고 가서 자기가 예전에 행한 일, 지금 행하고 있는 일, 계획하고 있는 일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할 때 진정한 회개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부인할 수 없는 아주 놀라운 공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풍부한 회개생활이 열렬한 기도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많이 회개하는 사람들이 의롭게 삽니다. 많이 회개하는 사람이 영혼을 사랑합니다. 많이 회개하는 사람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그만큼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일평생 자신이 이렇게 커다란 죄인인지를 몰랐었는데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기는 했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이 강도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그분의 죽음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자기들의 죄를 위해 돌아가시는 것이며 죽고 나면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러니 이 강도가 이 사실을 알았을리가 없지요. 그런데 막연하게나마 이 사람은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되었고 죄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 제일 먼저 죄를 생각하십시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회개하는 자에게 생명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바뀜
두 번째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죄에 대한 생각이 없었으니 당연히 조상들로부터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는 들어왔겠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가슴에 또렷해서 그를 주장하고 있었더라면 강도짓을 하며 십자가에 못 박힐 정도의 흉악한 죄인들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는 들었지만 ‘과연 그런 존재가 있을까?’ 생각했을지 모르고, 또 ‘에이, 있든지 없든지 난 몰라. 나는 그냥 내 맘대로 살아갈거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어 가시는 그리스도를 보며 자기 자신도 죽어가는 그 순간에 그는 비로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순서적으로 보면 낙원에 같이 가게 해달라고 하는 이 강도의 기도 앞에 먼저 예수님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말은 일곱 마디 말씀인데 첫 번째 기도가 “용서해주시옵소서”였습니다. 그리고 “낙원에 있으리라”, “여자여, 아들이니이다”, “나를 버리시나이까”, “내가 목마르다”,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다 이루었다” 이렇게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십니다. 그러니까 저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 돌아가시는 일반적인 모습을 보면서도 이 사람이 하나님을 생각했겠지만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온 몸에 피를 흘리시고 죽어 가시는 동안에도 “주여 저희가 하는 일들을 알지 못하나이다.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들으면서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온갖 고난 속에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 처하게 될 그 두려운 심판을 가슴 아파하시며 그 원수들을 위해 용서를 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깊은 감화를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자신들처럼 욕하고 마음의 요동을 치면서 불평하고 자신의 처지를 개탄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없으신 분이신 데도 죄인의 괴수처럼 조용히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가시는 것을 보면서 자기들에게는 없는 그 누군가가 예수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일생을 살았는데 이 마지막 순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죽어 가시는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해야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그 일을 위해서 땅의 것을 많이 생각하는 대신 하늘의 것을 많이 생각하십시오. 그 하늘에 있는 것들을 앙망하고 바라보면서 이 세상이 단지 하늘에 그림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여기는 잠시 머무는 나그네와 같이 사는 곳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영원한 나라인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또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베푸시는 이심을 마음 깊이 믿게 될 때 거기서 우리는 악을 버리고 선한 일을 하게 되며,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당할 때에도 십자가에 예수님처럼 담담하게 고난을 당할 수 있는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강도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죽어가는 인생의 마지막장에서야 비로소 두려워해야할 하나님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진작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서 그분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3.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바뀜
세 번째는 예수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거니와” 이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라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좀 이해가 안갑니다. 왜냐하면 이 강도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제자처럼 배우지도 않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현장에 있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의 정식적인 만남은 이 십자가에서가 처음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짧은 기간 동안 똑같은 죄수로서 매달려 죽어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자신과 예수 그리스도가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자신들은 마땅히 죽어야할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당연하게 죽는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라고 어떻게 선언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일체의 죄가 없으신 순전한 하나님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됩니까? 그분이 살았던 생애를 역추적해가서 정말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해본 후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 아니지요. 그럼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믿게 되면서가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고 싶으셨는데 그렇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는 누군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우리를 구원받게 할 정도의 의미 있는 대리적 죽음을 감당하셔야 했습니다. 죄인은 죄인을 대신할 수 없으니 죄 없는 사람만이 죄 있는 자를 대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하나님 앞에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있는 대신적 죽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강도는 십자가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가 죽는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이지만 저 분이 죽으시는 이유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도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당신 자신의 죽음이 바로 우리 모든 사람의 구원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죄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났을 때에 우리에게 이런저런 일을 겪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잠깐 떠났다고 우리를 무섭게 후려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을 그렇게 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멀리멀리 떠나 세상으로 갔는데도 하나님은 하늘에서 웃으시면서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거기서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가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 고생하는 모든 사람은 열렬하게 예수를 찾는 사람들이 될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많은 일을 겪고 그것들을 통해서 주님을 떠난 죄에 결과를 맞이하게 되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많은 고통을 통해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함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잘 나타난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기억해보십시오.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사용하는 동안에는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모든 재산을 잃어버린 그 타국에서 있었던 친구들도 당연히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흉년이 들었습니다. 민심은 사나와졌고 입에 풀칠할 수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이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돼지를 치는 일을 위해 목부가 되었습니다. 돼지우리에서 돼지를 치면서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에게나 주는 쥐엄 열매라도 먹어보려고 했는데 그것조차 없었습니다. 그 시련이 이 사람을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고생한 돼지우리와 평화가 넘치는 가정 사이에는 아버지의 집에 대한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인생 맨 밑바닥에서 고백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풍족한 품꾼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버지에게 가서 나를 아버지의 집에 품꾼 중 하나로 여겨달라고 말을 해야지.’ 하는 마음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후회와 수치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떨쳐버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마음을 갖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멀리 떠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나 시련과 역경을 통해서만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의 마음을 한 가지 사실에 준비시키기 위해서 흔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바뀔 수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한 분이고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 없이 주님께 돌아갈 수 없는 존재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겸비해진 마음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어도 자신은 여전히 하나님께 용서받은 죄인이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고백하게 됩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그렇게 마음의 눈을 뜨고 나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다. 그분 안에 있는 무한한 하나님의 용서를 깨닫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하나님께 깊이 회개하고 예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 하늘나라에 대한 생각이 바뀜
마지막 네 번째는 하늘나라에 대한 생각의 중요한 변화가 오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어떤 문학가라도 이 이상의 겸손한 표현은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이 천국에 들어갈 때에 나도 데려가소서.” 말할 수 없었습니다. 살아온 것이 너무나 더러운 죄의 연속이었고 아무리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해도 자기는 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면 하나님의 올바르심은 어떻게 될까?’라고 하며 자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죽어가는 세상 너머에 하나님이 계시고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 이 강도의 마음에 이제 믿어졌는데 하나님의 나라에 자신이 너무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애원합니다. 감히 데리고 가달라고 말씀드리지는 못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주소서.” 이 말이 얼마나 간곡한 절박감을 보여주는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강도 십자가에서 지금 숨을 거두기 위해 죽음의 순간을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살았을까요?
(찬양)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고집대로 영 죽을 험한 세상이 왜 이리 허무한지 이제야 아네
저는 이 찬송가가 이 강도의 마음을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도는 몰랐습니다. 그렇게 죄 짓고 강도짓하고 남을 해치면서 성공한 날에는 웃으며 술집으로 갔을 것이고, 실패한 날에는 술을 먹으며 다시 한 번의 기회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고집대로 사는 인생이었고 그 죄악 된 인생을 살아가는 끝이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사형임을 온 몸으로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저 세상의 그림자입니다. 이 그림자를 통해 그 실체로 나아가게 되고 영원한 하늘나라라는 원판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라는 복사판이 있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들이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세상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인지를 알게 만들어서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하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장황하게 종말론을 설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고요히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면서 온 몸에 피가 흐르고 형벌을 당하고 있었지만 그분의 마음의 꿈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습니다. 곧 자신이 임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조차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써 이 강도의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명심하십시오. 세상에서 죄와 이 모든 현실을 이겨내는 훌륭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 중에 하나를 칼빈 선생은 <교회론>에서 ‘세상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모든 것을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감사하고 만남을 기뻐하며 섬기도록 주시는 기회에 최선을 다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기쁨 속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경멸하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주 쉽게 얘기하면 잃어버렸을 때 두려운 것들을 갖고 사는 세상이 되지 말고 그대들이 무엇을 하나님께로부터 선물을 받았든지 세상에 속한 것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들이니 그것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라는 뜻입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세상은 헛된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고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며 감사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의 영원한 집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하며 삽니다. 기쁜 일을 만나고 큰 은혜를 받아서 우리의 마음이 희락에 넘칠 때 우리는 하늘나라를 생각합니다. ‘여기서 이렇게 주님의 은혜 때문에 행복하니 주 얼굴 직접 뵙는 그 곳에서는 얼마나 행복할까?’ 시련에 올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합니다. ‘그래, 이제껏 모든 것을 감당하며 살게 하셨는데 이까짓 현실쯤 내가 못 견디랴. 잠시 있다 지나가는 것이구나. 이러니 내가 어떻게 이 세상을 영원히 사랑하겠는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합니다. 잔잔한 파도를 지난 것 같을 때나 큰 풍랑이 일어나는 것 같을 때나 한결 같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소망을 가지고 이기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이 감격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제가 한 30년 전에 이 본문을 읽다가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이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네가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일생 예수를 배반하지 않고 그 분을 위해 순교하기까지 살았던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면 그렇게까지 감동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요? 어차피 저는 그렇게 못 살았으니까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마도 이 강도만 못한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있다면 그것은 그 강도처럼 악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강도처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평생 죄만 지으면서 살았던 이 사람이 올리는 ‘천국에 이를 때에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간청을 들으시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가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진실로”라는 말의 뜻은 ‘어김없이’, ‘확실하게’, ‘의심의 여지가 없이’, ‘분명하게’,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로 말하건데’라는 의미입니다. 뒤집힐 수 없는 명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아름답게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행과 우리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지옥의 형벌에 떨어질 사람을 당신과 함께 낙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결국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낙원에 이르는 첫 번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이 강도를 보면서 ‘아마 성경에서 가장 럭키한 사람이다. 행운아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사실이 저를 한없이 울게 했습니다. 정말 저렇게 구원받을 수 있다면 최고가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 말씀과 관례 관계없이 온갖 즐거운 쾌락을 다 누렸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다가 마지막에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을 듣는다면 얼마나 신날까요? 하지만 그것은 죄인의 마음으로 보는 인간의 종말입니다. 이 사람은 일평생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처음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이 우리의 구주이신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자신이 낙원에 들어가는 것이 관계가 있고, 그분은 마음만 먹으시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인생이 무엇인지가 한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스도 예수가 계시고, 자기가 있고, 많은 이웃들이 있으며, 이 세계가 있고, 그리고 자기가 창조된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과 교제하며 살기위해 창조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모든 은혜와 자원을 누리면서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오히려 섬기고 그들을 유익하게 하고 불행한 자들을 위로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임을 최초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제 몇 시간 안 남았습니다. 이제 인간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인생의 도리를 깨달았는데 (십자가에서) 내려갈 수가 없습니다. 두 손은 십자가에 못 박혔고 발도 못 박혀서 끊임없이 피가 넘쳐흐르면서 자신은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죽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낙원에 가는 이 사람은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며 이 땅에 살아남아있는 우리를 부러워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가 오늘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이 날은 그 강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날들이었습니다. 만약에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한 일주일만이라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는 다시는 강도짓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었을 것이고,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였을 것입니다. 자신과 같은 죄인이 용서받았으니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찾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주신다고 외치며 사람답게 일주일을 살지 않았을까요? 어차피 우리 모두는 주께로 갑니다. 중요한 것은 남은 날들을 우리들이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말씀을 통해서 깊이 은혜를 받으십시오. 죄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내세에 대해서 생각이 바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네가 오늘 나와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응답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