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1:3-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보자면 그는 다윗의 자손이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이 육신으로는 성결의 영으로는 하고 번역된 이 단어는 ‘육신에 관해서는 성결의 영을 통해서는’ 입니다. 여기에서 성결의 영을 통해서 혹은 능력으로 라고 되어 있는 이 본문은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뜻하는데 다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의 부활은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 둘째로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영이시다 입니다.
II. 바울이 경험한 혼란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을 전해주는 사람은 한때 박해자였으나 기독교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던 바울입니다. 그는 신약 성경 전관에 절반가량을 기록한 사람이었고, 소위 위대한 30년의 시대를 열어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도록 기틀을 놓았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처음부터 그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표준적인 유대교인으로 태어났고, 그는 뼛속까지 유대교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인 중 히브리인이었습니다. 그러던 바울이 신학적으로 깊은 혼란을 경험하면서 복음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가 경험한 혼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혼란이었습니다.
A. 십자가와 처형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에는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의 교묘한 술책이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와 처형에 관한 것입니다. 유대인 군중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예수를 사형시켜 달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형벌로 처형해 달라고 외쳤습니다. 마가복음 15장 13절에서 4절은 이렇게 당시 광경을 전합니다.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막 15:13-14) 하였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예수를 무조건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은 단지 예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형 방법까지 지정해서 십자가 형벌이어야 한다고 요구했을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에는 놀랍게도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의 아주 깊은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던 죽음에 관한 종교적인 신념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모양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범상하지 않게 생각하는 죽음의 종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무에 매달아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죽음은 우연사일 수도 있고, 살해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사고에 의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나무에 매달려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임을 입증한다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놀랍게도 신명기 21장 23절 하반 절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겨준 가르침 속에 나와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 하) 고 말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나무에 매달려 죽음의 의미에 대한 확신을 예수의 죽음과 어떻게 연결시키려고 했던 것일까요? 그들은 기획 의도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는 후에라도 백성들이 예수의 부활을 소문낼지도 모르는 제자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회심하기 전 이 같은 종교지도자들의 음모에 적극 찬동하였습니다.
B. 예수 부활의 사건
그러나 그것이 음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주 중요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일생을 바꿔놓은 사건이었고, 그의 생애를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고 핍박하는 사람에서 위대한 복음의 시대를 연 복음의 일꾼이 되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부활의 사건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회심하기 전 그 이름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회심하기 전 두 가지 편견을 확신으로 붙들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심리적 편견이었습니다. 즉, ‘유대인만 선택된 백성이고 나머지 모든 민족은 다 쓸모없는 인간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도 지옥의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고넬료와 같이 아주 탁월하게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이 있다면 아마 천국에서 유대인들의 종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라고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두 번째 확신은 신학적인 확신이었는데 ‘나사렛에서 자란 목수인 그 젊은 예수가 결코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일 수 없다’라고 하는 확신이었습니다. 표준적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야에 대한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메시야는 신적 존재이고 놀라운 정치적인 능력과 군사적인 능력, 신비한 힘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해 번영했던 다윗의 왕국의 영광을 이 땅에 재연하는 정치적 인물이어야 했습니다. 그러한 이상과 실제 나사렛에서 온 젊은이 예수의 모습은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는 메시야일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다고 전하는 사람들은 매우 위험한 사상을 전파하는 불순분자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살기가 등등해서 대제사장에게 권위 있는 공문을 요청했습니다. 그 권세를 가지고 다메섹으로 향했으니 이는 거기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에게 예기치 못했던 놀라운 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가 직접 만나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28장 속에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면이 세 번이나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과 함께 동역했던 이 누가가 보기에도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은 개인적인 구원의 사건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고 신약 교회 시대의 새 장을 여는 위대한 사건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 3절에서 5절은 당시 이 놀라운 사건을 이렇게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였습니다(행 9:3-5). 바울은 이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한 경험을 통해서 놀라운 충격을 받게 됩니다. 예수가 부활하셨고,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는 소문은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들은 이야기기 때문에 부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이 만남을 통해서 그는 신학적으로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의 대립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지성은 커다란 혼란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첫째 사실은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 사실은 부활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표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사실의 대립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유대인들은 전통 속에서 모세가 죽었지만 하나님이 부활시키셨다고 믿고 있었고, 그 모세는 하늘로 승천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경에는 모세의 승천기라고 하는 성경과 유사한 책도 있습니다. 그것을 차치하고라도 성경에서 죽음을 보지 않았던 인물들은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사랑과 인정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창세기 5장 24절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을 올라간 에녹, 그리고 열왕기하 2장 1절에서 병거를 타고 하늘로 들리워 올라갔던 엘리야 같은 인물들이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특별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이 매우 탁월하게 인정해 주시고 사랑한 인물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예수가 만약에 하나님이 저주를 해야 했던 인물이라면 그를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고, 만약에 다시 살리셔야 할 정도로 사랑하셨던 사람이면 하나님이 그를 저주에서 죽이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실은 사울이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것이었고,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팩트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혼의 깊은 혼란 속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그는 이제껏 믿어오던 유대교의 가르침과 자기 눈앞에 양립하게 된 이 놀라운 대립적인 사실 앞에서 해석을 요구받고 있었습니다.
III.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달음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나타납니다. 아집과 편견에 가득 찼던 이 사람의 마음이 깨뜨려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깨닫게 된 것은 그가 그렇게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 자신의 죄 때문이었다면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수 없었지만 거기에 나무에 매달려 십자가에 죽으신 그 형벌이 예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구원 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소위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속의 사상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속의 사상을 통해 하나님의 이 세상을 향한 가슴 저미는 사랑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감격을 그는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4) 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의 죽음이 구원 받을 우리를 위한 대신적인 죽음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 그의 오해는 풀렸습니다. 이제 그렇게 놓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무에서 매달려서 처참하게 스스로 죽으셨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나게 당신의 아들로 여겨 부활시키실 수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러한 감격적인 대속의 사실을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이런 감격적인 언어로 피력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고 하였습니다.
사울의 마음속에 커다란 사상적인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혼의 혁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아까 말씀드린 두 가지 편견이 깨뜨려졌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예수야말로 온 이스라엘과 온 인류의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 순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이로써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분명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는 인간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은 예수의 대리적 속죄를 통해 당신이 선택한 온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먼 훗날 디도서 3장 5절을 쓰면서 그는 이 복음적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5) 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이 무엇일까요? 복음을 가장 짧은 단어로 묘사하면 복음은 예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예수다 하는 것은 그 이외의 것을 알고 있는 사람끼리 통하는 은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의미를 담고 복음을 가장 간단하게 진술한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놀랍게 우리말에도 네 단어로 되어 있고, 영어에도 네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Jesus died for us’ 여기에서 ‘위하여’ 라는 전치사는 예수의 죽음에 대해 다음 세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 ‘위하여’는 ‘대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자,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무슨 그렇게 큰 죄를 지었기에 지옥에 가야하나? 우리가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우리가 하나님 진노 아래 있어야 하나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최초의 사람 아담을 불러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은 아담 개인의 언약이 아니라 온 인류의 대표자로 맺은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조건적인 약속이었습니다. 만약에 그가 그렇게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마 그 영원한 생명을 우리도 누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한 적이 없는데도 그의 순종으로 우리가 그 행복을 누리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결국 이 죄는 우리의 죄이고, 그가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 우리도 함께 범죄했고, 그 죄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지니고 태어나고, 지닌 그 죄 때문에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그 죄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요, 반역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벌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구원할 모든 인류를 끌어안고 그들이 지은 죄를 자신의 죄로 전가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우리로부터 예수께 전가된 그 죄를 마치 예수의 죄인 것처럼 형벌에 처하여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죽으시고, 당신이 끌어안은 우리는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그리스도 죽음의 ‘내포적 대신’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를 끌어안고 대신 죽임을 당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위하여’라고 할 때 그 첫 번째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이익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대신 우리를 끌어안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 받고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대표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표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분이 의롭다 인정을 받으심으로 그 하나님의 의에 획득한 그 의를 우리에게 전해주심으로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구체적인 복음적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것은 사도 바울의 지성에 벼락을 맞는 것과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캄캄한 동굴 속에 있어서 추호의 불빛도 보지 못했는데 어느 한 순간 거대한 빛이 그 동굴을 뚫고 찬란하게 들어왔고, 그리고 그 빛은 잠시 후 더욱 찬란해지고 커져서 그 동굴을 환하게 비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자기가 하찮게 여기던 나사렛의 그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고, 그가 바로 그렇게 많은 구약의 역사를 바라보며 달려왔던 온 인류와 세상과 만물의 주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의 말년에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그의 기독론을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하였습니다. 빌립보서 2장 9절부터 11절에서 말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9-11)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캄캄한 어두움을 찢고 들어오는 한줄기 섬광이었습니다. 눈부신 빛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가지고 있었던 엉성한 세계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폭력적인 세계관이었고, 인간관이었고 아주 자의적인 가치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인류와 세계, 자신의 인생이 모두 접혔을 때 그리스도 예수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계와 역사와 온 인류와 자신의 인생의 접힘이었으며, 세계 역사의 전개와 인류의 미래와 자신의 인생은 그리스도 예수의 펼침이었던 것입니다.
육적 이스라엘의 역사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사실 그것은 영적인 이스라엘, 곧 그리스도의 교회를 바라본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전에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명목상 하나님을 믿었으나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믿던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그에게는 하늘 자원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세상 자원으로 살았고, 그것은 생명 없고 차가운 율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복종뿐이었습니다. 복종하면 복종할수록 그는 하나님보다 자기 의를 믿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더 멀어졌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하늘의 자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복음 안에 깃들여 있는 온 세상을 뒤엎는 자신의 인생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놓는 능력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찢어진 틈으로 쏟아지는 복음의 찬란한 빛은 생명과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진리와 함께 풍성한 삶의 비밀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신앙생활 하지 못하는 이유를 환경에서 찾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곤고하고 힘든 일이 계속되기 때문에 예수를 제대로 믿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런 저런 어려운 일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한 것이지 사실 모든 것이 잘 갖춰지면 자신은 제법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가족 중에서, 지체들 중에서, 이웃 중에서 나를 힘들게 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미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믿기 싫으면 그냥 솔직하게 ‘싫습니다’라고 말하세요. 그 자존심도 없습니까? 주체성도 없이 자신의 인생을 모든 환경의 탓으로 돌리고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그리고 자기는 어떠한 책임도 신앙에 대해서 지지 않으려는 태도는 신자이기 전에 인간으로 대단히 비겁한 행동입니다. 싫으면 털어놓고 ‘예수여 난 당신 믿기 싫습니다.’ 그리고 선언하세요. 그리고 여러분 힘으로 살아보세요. 그러나 여러분들은 반드시 못살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나쁜 환경에서 믿음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보십시오. 만약에 특별한 일이 일어나서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기 너무너무 좋은 환경이 되고, 염려와 근심이 모두 물러갔다고 칩시다. 그리고 여러분 주위에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미움이 드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그냥 온통 여러분들을 공주처럼 떠받들어주고, 임금처럼 떠받들어주는 여러분 좋아하는 사람만 가득 찼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제 좋은 믿음 생활할 수 있을까요? 천만에요. 확신하건데 그 환경에서 여러분들은 타락하게 될 것입니다. 미끄러지고 부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죄인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두 죄인이고 뼛속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면 죄와 친구가 되어서 살 수밖에 없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제 무슨 핑계를 대시고 예수를 제대로 안믿으려십니까? 저는 한 사람의 신자가 되기 전에 먼저 한 인간으로서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체성 있는 삶을 선택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자들은 인간을 비롯한 많은 동물들이 어떻게 그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생물학자, 생화학자, 물리학자, 이런 많은 연구자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태양은 무한한 에너지를 보낸다. 두 번째, 이 에너지는 식물 안에서 화학 에너지가 된다. 세 번째, 이것을 섭취함으로써 동물과 인간의 몸속에서 에너지로 활용된다. 이것이 육체의 생명이 가지는 메커니즘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인생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것은 육체의 생명만은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한 바와 같이 인간의 육체의 생명은 영혼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이십니다. 영혼이 육체에 대해서 지도하는 기능을 잃어버리면 그는 아무리 왕성한 육체의 힘을 가지고 있어도 그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결국 영혼의 어떤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이것을 성경에서는 영생, 혹은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럼 이것의 메커니즘은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신다. 두 번째 인간의 마음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은혜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의 정신과 마음이 그것을 에너지로 삼아서 사람다운 삶을 살아간다. 이것이 영혼의 생명이 가지고 있는 메커니즘입니다.
여러분들의 문제는 무엇인지 압니까? 육체의 생명은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육체의 생명도 가물가물 꺼져가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영혼의 생명이 없습니다. 그렇거나 혹은 현저히 적습니다. 그래서 육체가 여러분들의 영혼에 의해서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미운 사람을 보면 이를 갈게 되고 그리고 죽이고 싶은 증오감이 폭발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의 삶이 아닙니다. 동물도 그렇게 살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을 주신 것은 바로 이렇게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때 영혼의 생명은 그것을 이기고 견디며 사랑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육체의 정욕이 발동해서 어떤 죄를 짓고 싶습니다. 생명이 없으면 그냥 지어버립니다 .그리고 도저히 지을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면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죄를 상상하면서 영혼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영혼의 생명은 즉시 통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아니다. 그 끝은 아무런 선한 것이 없다. 그리고 우리를 선한 길로 다시 돌아가도록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도록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육체의 기능에 대해서 통제하는 것입니다. 저거 너무 갖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명이 없으면 도둑질이라도 해서 손에 넣고 맙니다. 그런데 영혼의 생명은 그것을 하지 말도록 통제합니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을 그 마음속에 주게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은 결코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이 삶의 동기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설명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세속적인 행복을 삶의 동기로 삼는다면 그 행복은 성취하면 그 행복은 다시 도망갈 것입니다. 성취하면 또 도망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취하면 성취할수록 여러분들은 또 다른 욕망이 생기는 것을 경험할 것이고, 욕망이 생기게 되면 그 행복은 계속 미래의 것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일까요? 행복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의미를 따라 살도록 창조된 사람입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마는 우리 인생은 절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10년 살면서 손바닥을 치면서 이것은 내 마음 먹은 대로 됐어. 얼마나 신나는 일이야. 행운의 대박이 나에게 터졌구나. 몇 번쯤 손뼉을 치면서 데굴데굴 구를까요? 저는 10년 동안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불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런 거는 그렇게 크게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에는 그런 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 않은 때는 그냥 어두운 태양의 흑점과 같은 때로 치고, 그리고 일어날 확률이 1/1000도 안 되는 그 아주 희박한 사건을 소망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이라구요? 누가 그렇게 가르쳐 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내 맘대로 되든, 되지 않든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인생의 진정한 기쁨은 바로 내가 어떤 일을 만나든지 내게 일어난 그 사건의 의미를 하나님과 세계 그리고 나 자신과 연결을 시키면서 오늘의 의미와 어제의 의미를 연결하고, 두 날의 의미를 내일의 의미와 연결하면서 살아온 나의 모든 날들이 모두 기쁘고 행복하지는 않았으나 그러나 정말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그렇게 믿으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그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람으로 창조하신 뜻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초월하는 정신을 가지고 자기 인생사에서 일어나는 기쁘고 행복한 일로 교만해지지 않고 그리고 나쁘고 힘든 일 때문에 좌절해 하지 않는 마음의 평정을 누리면서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 분의 이름을 찬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을 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하늘의 놀라운 생명과 사랑이 폭포수처럼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넉넉히 이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2000년 전에 사울이라는 한 사람만이 아니라 이제 그를 통해 주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생명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에 빠져 있다가 회의를 느끼면서 그러면서 자신이 육욕에 빠져서 도저히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었을 때에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 하셨다기 보다는 믿음의 아우구스티누스가 믿음이 없는 자신에게 하는 증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것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자, 봐라. 너보다도 아는 지식이 별로 없는 저 평범한 아녀자들도 장수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그 모든 육체의 정욕을 이기면서 살아간다. 이게 어디 네 힘으로 되는 것이냐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니이다” 이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위대한 회심의 경험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문제는 여건이나 환경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믿으십시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히 받았으면 지금 여러분 주위에 있는 가장 나쁜 인간보다도 더 못된 인간들을 위해서 선교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그렇게 놀라운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충만해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V. 적용과 결론
인간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지와 죄는 천상과 지상의 자원을 가로막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십자가의 부활의 능력을 현재적으로 누리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여러분도 인생의 다메섹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새로운 생명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