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1:3-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기독교의 위대한 교리를 담고 있는 로마서를 서술하기에 앞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분의 육적인 혈통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모든 유대인들 가운데 태어나셔서 그래서 그분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지만 그 분은 또한 참 사람이신 동시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실 수 있으셨습니다.
II. 바울의 신학적 혼란
오늘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 자신도 사실 이점에 있어서 커다란 혼란을 경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이런 신학적인 큰 혼란 속에서 예수가 누구신지를 몰랐고, 그래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느낀 신학적인 혼란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느낀 혼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유대인들의 교묘한 술책의 희생양이 되었던 유대 종교 지도자 사울의 형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A. 십자가와 처형
제일 먼저 십자가와 처형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유대인들을 선동해서 빌라도에게 그렇게 요청하도록 사주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5장 13절에 보면 “그들이 다시 소리를 지르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어차피 예수가 싫으면 죽이면 되는 것이었고, 칼로 목을 쳐서 죽이든 창으로 찔러 죽이던 아니면 목을 매달아 죽이든 아무 상관이 없었을 터인데 이들은 빌라도에게 사형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습니다. 로마시대의 십자가의 형벌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십자가 형벌을 집행하지 않았고, 죄수들 중에서도 반란을 일으키나 끔찍한 살인을 한 사람, 혹은 흉악한 강도 외에는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지 않았을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들이 거짓 증인을 세워 예수님을 모함했습니다. 어떤 죄도 예수님이 지은 죄가 아니었지만 혹시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십자가의 형벌이 처해질 정도로 큰 죄는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죄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게 해달라고 소리를 쳤을까요? 사형을 시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지 않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의 처형을 지정하면서 예수를 못 박으라고 데모를 하였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것에 대한 답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긴 신명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이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들여보내고 자신은 운명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때에 이미 광야에서 그들에게 베풀었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신신당부하는 의미에서 그들에게 다시 설교하게 됩니다. 이 내용들이 신명기입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체를 나무위에 밤새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니라”고 말입니다. 이 가르침의 문맥과는 상관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형벌을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는 분명한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유대인들 속에 있는 종교적인 인상들을 100%활용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자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이 단순한 죄인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의 죽음이라는 것을 보여주어 제자들이 그 후에 어떠한 가르침을 발설하든지 간에 그를 따르지 못하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계교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예수는 하나님께 죄를 지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하는 믿음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모세 시대에 십자가 형벌은 없었습니다. 십자가 사형 제도는 로마가 변방의 야만족이던 시절에 만든 가장 잔악한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구약 신명기서 가르침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남은 종교적인 이상을 새롭게 해석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결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만 죽일 뿐 아니라 누구의 마음속에서도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나지 못하게 하려고 이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종교적인 가르침에 충분히 설득된 사람이었고, 예수가 나무에 매달려 죽은 그것이 곧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B. 예수 부활의 사건
그런데 아직도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식을 전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청하여 이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거기서 일생의 전환점이 되는 한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예수 부활의 사건이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는 생시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습니다. 꿈이나 환상 중에 만난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생시에 살아나셔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대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모순되는 두 가지 사실 대립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라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도저히 양립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하나님이 저주하실 정도로 죄를 지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아나게 하실 리가 없고, 살아나게 하실 정도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그렇게 나무에 매달아 죽도록 저주하실 리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부활을 믿었고, 어떤 사람들은 안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구약의 전통을 보면 이런 부활 사상을 믿는 것이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더 고유한 신앙이었습니다. 창세기 5장 24절에 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고 나옵니다. 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아니지만 살아있는 사람을 그 육체를 신비하게 변화시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에 올라가게 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열왕기하 2장 1절에는 “여호와께서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시고자 하실 때에” 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도 역시 엘리야의 몸을 신비하게 변화시켜 하늘나라로 직접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더욱이 유대인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죽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부활시켰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 부활은 많은 유대인들에게 기본적으로 있는 교리적인 확신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부활은 일반적인 평범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특별히 인정해 주시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사람이 만났습니다. 예수가 살아난 것을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저주하셔서 나무에 매달려 죽인 그 사람을 하나님이 왜 다시 살리셨을까?’ 이 양립할 수 없는 두 사실을 인식하면서 그는 커다란 신학적인 혼란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생동안 자신을 사울로 살아오게 했던 모든 종교적이고, 철학적이고, 학문적인 기반들을 무너뜨려 버리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르는 그런 불쌍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일생동안 사람들에게 이렇게 믿고 이렇게 살라고 가르쳤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께 ‘주여, 내가 어찌하리이까?’ 묻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III. 바울의 깨달음
A. 십자가의 신학적 의미
그러나 이 커다란 혼란 속에서 그는 그 어두움을 찢고 들어오는 찬란한 빛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 소위 복음의 광채라고 부르는 그것이 사도 바울의 어두운 지성을 찢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였습니다. 그가 깨닫게 된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신학적인 의미였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것도 맞고,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셔서 다시 부활시키신 것도 맞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것은 당신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면 저주 받은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을 리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멸망할 수밖에 없는 그 모든 인류를 가슴에 끌어안고 그들의 죄를 자신의 죄로 자청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로부터 형벌을 받고 죽으셨다는 것이고, 사울은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으신 것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이유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그 많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 바치신 순종의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을 인간들을 위한 대신적인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서 캄캄했던 이 사울의 지성 속에 복음의 찬란한 빛이 들어왔습니다. 대속의 비밀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온 인류가 창조되었고, 타락한 이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 모든 위대한 계획들은 한 사람을 향하여 줄달음쳐 오고 있었으니 그 목표 지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전개될 역사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펼쳐질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로서 나타나게 될 것들임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하면서 사울은 어두운 지성을 뚫고 들어오는 찬란한 빛을 보게 되었고, 이 빛을 통해 하나님과 세계와 인류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오해의 어두움이 물러나가고 참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속의 비밀을 통해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기 위함이었고, 우리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었고, 또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진 두 번째 아담의 대표자로서 우리를 위해 대신적 죽음으로 죽으신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성의 벼락을 맞는 것 같은 신학적인 깨달음에 직면하면서 그는 부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사울에게 있어서 이 십자가는 하나님을 모욕하고 모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흉악한 괴수가 정당하게 하나님께 정죄를 당하여 저주를 받은 십자가였으나 이러한 신학적인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이 십자가는 온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되었고, 부활은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모든 하나님이 구원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으로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의 경험을 통해 이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뿐만 아니라 온 세계와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인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인생관과 세계관, 모든 가치관이 무너지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새로운 신학적, 철학적, 그리고 모든 학문적인 기반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무에 매달려 죽은 나사렛의 그 젊은이는 결코 구세주일 수가 없다는 신학적인 편견과 유대인 이외에 모든 이방인들은 쓰레기와 같은 존재들이라고 하는 심리적인 편견에서 그는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유일한 하나님의 나라라고 믿었던 육적인 이스라엘이 사실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세우려고 했던 또 다른 나라를 위한 씨앗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씨앗이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처럼 육적인 이스라엘은 강성해질 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썩고 멸망함으로써 그 육적인 나라의 껍질을 깨고 영적인 예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온 세상에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십자가의 신학적인 의미를 깨달으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결국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랑과 관계없는 사람이었으나 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경험하면서 그는 이 세상 인류를 위해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를 자신을 주어 구원하고자 하는 예수 사랑에 붙들린바 되었던 것입니다.
B. 새로운 자원에 눈뜸
그렇게 십자가와 부활의 신학적인 의미를 깨닫고 난 후 그 앞에 펼쳐진 삶은 끊임없는 고난과 시련, 역경의 연속이었습니다. 부모 형제와 골육지친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예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을 존경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모욕을 당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로서의 화려한 영광은 사라져 버렸고, 죄수처럼 맞았으며 죄인처럼 고통을 당했습니다. 사십에 하나를 감한 매를 여러 번 맞았고, 죽을 고비를 넘겼고, 마지막에 살 소망까지 끊겨지고 끝내 만물의 찌끼처럼 여김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쁨에 넘치는 삶을 살며 자기를 구원하신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신명을 바쳤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새로운 자원에 눈을 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전에도 종교생활을 했으나 그는 하늘 자원을 몰랐습니다. 종교 생활을 했지만 세상 자원으로 살았습니다. 차가운 율법과 복종은 있었으나 그에게 생명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한 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졌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부어주시는 새로운 하늘의 자원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회심과 함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을 복음으로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늘의 자원으로부터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쏟아지는 것을 경험했고, 이로써 그는 시련과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의 날을 오히려 사명 하나를 생각하며 걸어갈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안식년 기간 중 중국을 몇 번 다녀왔습니다. 거기에서 사역을 하면서 정말 이 세상에 태어나서 들어보지도 못했던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국수를 사먹었답니다. 그 국수의 가격은 4원,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650원정도 하는 금액이었습니다. 20살 먹은 청년이 4원을 내고 줄을 서서 국수를 먹으려고 했더니 주인이 안색을 싹 바꾸면서 ‘너는 5원을 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왜 5원을 냅니까?’ 그랬더니 ‘저 사람들은 4원에 먹었지만 난 너한테 5원을 받을 거야. 5원을 내놔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이 계속 투덜대니까 “싫으면 그만이지 왜 여기 와서 그렇게 말이 많냐?”며 모욕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젊은이가 분을 참지 못하고 포장마차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칼을 가지고 그 주인을 찔러버렸습니다. 이런 일들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만 사람이 너무 화나면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그 정도로 끝낸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도 찔러서 쓰러진 주인의 머리를 끌고 땅바닥에 눕혀 놓고 목을 완전히 잘라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쓰레기통에 던지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물론 그 청년은 체포되었습니다. 문제의 시작은 인종차별 때문이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중국 내에서 소수 민족이었고, 국수집 주인이 자신이 소수 민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무시하면서 5원을 요구했다는 사실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 사람을 아주 잔인하게 죽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참 많은 나쁜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질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배신하거나 실망시키기도 합니다. 너무나 함께 있고 싶은 사람과 헤어지기도 하고, 죽음으로 인해 영원한 이별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자기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 이런 일은 이 세상에서 언제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인생이 불행해지고, 이런 것 때문에 자기의 삶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뿌리까지 흔들리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죄와 불완전으로 가득한 세상을 살면서 모든 사람들이 다 겪는 그런 어려운 일들을 단 하나도 안 겪고 피해가면서 인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너나 나나 피할 수 없이 겪는 일들인데 문제는 그것을 이기며 살도록 만들어 주는 생명의 힘이 없는 것입니다.
생각만 좀 바꾸어 봅시다. 앞서 말씀드린 그런 일이 있을 때 ‘아휴, 얼마나 돈이 없으면 저 젊은 나이에 1원을 가지고 저럴까? 참 가엾다.’ 그러면서 국수 한 그릇을 줄 수 있는 힘이 국수집 주인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그 청년도 멸시를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좀 참으면서 ‘그래, 내가 소수 민족이라서 이렇게 차별을 받는구나. 내가 이런 것을 교훈 삼아서 좀 더 성공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서 이 세상을 고쳐야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자원이 그 청년에게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원이 단 하나도 없는 사람들끼리 만난 것입니다. 그때는 끔찍한 악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답게 살게 하는 그 놀라운 힘이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태양 중심부에서 핵폭발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빛의 입자가 태양의 표면으로 올라오기까지 10만년 내지 20만년이 걸립니다. 10만년 걸려서 올라온 빛이 태양을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구까지 날아옵니다. 그래서 이런 잎사귀에 들어갑니다. 그 태양 에너지가 이 잎 속에 들어가면서 화학 에너지로 바뀌게 됩니다. 그 에너지를 가지고 세포분열을 하고 입사귀가 성장해 갑니다. 사람은 그것을 따서 먹습니다. 먹으면서 그것이 사람의 육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됩니다. 그 에너지의 힘을 가지고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고, 무엇인가를 느끼고, 그리고 무엇인가를 실천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모든 생명은 만들어진 생명입니다. 창조되지 않은 생명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그 생명의 힘을 입어서 나머지 모든 생명들이 고리처럼 얽히면서 생명을 엮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예전에 주님을 믿지 않을 때에는 나 자신에게 그런 생명의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실은 있다고 믿었던 그것도 사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었는데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유사한 생명이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인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 믿는 사람이라도 자식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식을 신앙처럼 생각하며 역경과 시련을 이기고 결국은 자식들을 보호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사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부모가 다 그러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옛 생각이었습니다.
IV. 적용과 결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복음을 깨달으면서 이런 힘이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행여나 그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온전한 인생을 살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의 출발입니다. 육신의 본성으로 살 때에는 죄와 사망의 법이 우리를 지배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통해서 생명과 성령의 법이 심겨졌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이 생명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고난을 받으면서 그 고난 속에서 사모하고 기도하고 매달리고 간절히 부르짖음으로써 그 생명이 더 풍성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평탄하고 부요하고 안락한 환경 속에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림으로써 생명이 고갈되어 갑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먼 훗날 우리를 예수 오실 때 살려내게 하시기 위한 그 부활을 주기 위해서만 죽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오늘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신자들인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오는 그 충만한 생명의 능력을 믿음과 순종으로 받으면서 그 충만한 생명과 부활을 현재적으로 누리면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부활을 그토록 기뻐하고 예수의 부활을 영광스러워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그 부활의 힘으로 오늘을 살아갈 때에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부활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며 그 하늘 자원을 누리면서 우리가 승리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한숨이 변하여 노래가 되며, 고통과 아픔과 상처가 변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런 삶을 살 희망이 예수 부활의 사실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 은혜를 뜨겁게 사모해서 이 부활의 능력으로 오늘을 이기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