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루신 십자가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6:30)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이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남기셨는데 오늘은 여섯 번째 말씀을 우리들이 본문으로 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여섯 시간 정도 매달리셨고 오늘 이 말씀을 하신 때가 어느 시점이었는지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우리 시간으로 3시 가까운 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눈길을 끄는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은 로마 사람들이 야만인이던 시절에 만든 사형 제도였습니다. 아마 인류가 고안해 낸 사람을 죽이는 형벌 가운데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은 사람이 나무에 매달려 온 몸으로 그 못 세 개에 자신의 몸을 지탱해야 하고, 그 찢어지는 상처에서 느껴지는 살을 에이는 고통과 출혈, 거기에서 오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극단적인 두통, 목숨이 붙어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고의 고통을 당하게 한다는 점에서 인류가 고안해 낸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매달려서 3일씩이나 죽지 않았다고 하니 이 형벌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스타우로스’라는 십자가 형벌은 당시 로마 사람들에게는 저주의 상징이었고 그 말을 꺼내는 것 자체도 사람들이 싫어했다고 하니까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형벌이었는가 보여줍니다. 죄인들을 죽이는 이 십자가 사형이 그 후로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십자가는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볼 수 없는 기독교의 심볼(Symbol)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기독교회는 그렇게 수치스럽고 잔인한 이 십자가를 교회의 심볼로 삼고 오히려 사도바울 같은 사람은 이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까지 말하였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십자가와 구원 역사와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Ⅱ. 십자가와 구원 역사
인간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범죄한 이후에 제일 먼저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이었습니다. 원래 인간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맺고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께 사랑을 받으며 그 생명을 힘입어 살 수 있게끔 창조되었습니다. 그 생명을 힘입을 때 인간의 영혼은 영혼에게 주신 고유한 기능을 잘 수행해서 육체를 지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미리 경고하신 바와 같이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여 선악과를 따 먹자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졌고 즉각적으로 영혼이 죽음이 도입되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나마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아마 인간은 본래의 인간성 자체를 모두 잃어 버렸을 텐데 그래도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본성의 빛이라도 남겨 두셨기 때문에 인간은 그나마 동물과 구별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된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이 영혼의 깊은 침체, 신앙의 타락을 경험해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이 돈이 없다고 죽고 싶고, 괴로운 일이 있다고 해서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완전히 주저앉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영혼에 깊은 침체가 들어와 어떠한 은혜도 내가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그때 여러분은 지옥과 같은 날을 보내게 됩니다. 더욱이 한번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였던 성도들은 더욱 깊은 기갈을 느끼며 영혼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영혼의 행복이신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그 생명을 누려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후에 인간의 육체에 도입하셔야 했습니다. 즉각적으로 죽이셔도 할 말이 없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인간이 없는 세계가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창조세계의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따라서 인간에게 죽음의 형벌을 내리시되 그 형벌을 유예하심으로써 후손들이 계속 대를 이어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충만하게 하신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기회를 인간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떨어져나가 죄 가운데 비참하게 살 수 없는 이 인간들에게 구원의 여망을 즉시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메시아를 약속하신 것과 제사의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많은 청교도 신학자들과 개혁 신학자들은 이 제사 제도의 기원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담과 하와의 타락 직후에 주어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인과 아벨 제사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견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인류는 내내 메시아를 바라는 소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들은 그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 속에서 누리는 그 크고 놀라운 행복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 이 두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을 주셔서 자신들을 이 끔찍한 죄의 저주와 형벌로부터 구원해 주셔서 그 처음있던 행복한 상태로 되돌려 주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를 바라보는 우리 처음 조상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자신의 책 속에서 비록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였지만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 즉 메시아를 바라보는 신앙으로 구원을 얻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추정에 신학적으로 상당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들이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탁월한 하나님과의 교제와 행복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똑같이 이 세상에 살면서 끊임없는 고통과 갈등을 경험하면서 행복을 끊임없이 갈구 하였다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이 세상의 사람이 종교와 성품이 달라도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점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남겨두신 본성의 빛,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씨가 남아있었습니다. 희미해졌지만 하나님께 대한,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기억이 있고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끊임없이 구원을 갈망하면서 사는 무리들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게 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맨 처음 자식을 낳았을 때 가인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었었다.’는 뜻입니다. 노아는 ‘쉼, 안식’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이어졌고 그 셋의 자손의 계보에서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혹시 이 아이가 그 아이일까 생각하며 기대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렇게 메시아를 기다리는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메시아 신앙이 만약 제사 제도가 없었더라면 아마 일찍이 실종 되었을 텐데 제사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자신들을 위해 누군가가 자기의 죄를 짊어지고 어느 동물이 죽임을 당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열리고 그 분의 생명과 사랑이 전해지는 것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한시적인 하나님과의 교통 말고, 영원한 생명의 교통을 주실 메시아에 대한 약속에 자신들의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에 위대한 인물이 나올 때마다 ‘혹시 그가 그 메시아인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멸망하고 나라를 잃어버린 다음부터는 그들이 수많은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예수님 시대 때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영웅들이 나타날 때마다 ‘그가 혹시 그 메시아인가’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잘못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육적인 이스라엘의 껍질을 깨고 영적인 이스라엘을 태동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그러한 점에서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는 신약의 그리스도의 교회,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는 도구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에 씨앗을 심어 그리스도의 교회,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었다고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구원 역사의 계획을 따라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십자가에서 인류 구속을 다 이루셨습니다.
Ⅲ. 인류 구속을 다 이루심
예수님은 일생을 사시면서 단 한번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남았다고 말씀하시고 섬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며 임금을 삼으려고 하듯 베세다 광야에서의 오병이어 사건이 있을 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병자를 낳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갖고 기뻐할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인파에 에워싸여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입성할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겉옷을 예수님의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그 때에도 예수님께서도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단 한번,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것도 맨 처음 못 박힐 때가 아니라 영혼이 하나님께로 가시기 직전에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뜻이겠습니까.
A. 율법으로부터의 구속
첫째는 율법으로부터의 구속입니다. 이 율법은 세 개의 법으로 이루어져있었는데 첫째는 도덕법이라 불리는 십계명, 두 번째는 시민법이라 불리는 사람과 사람, 사회의 관계를 규율하는 민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불결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지 제사와 의식을 보여주는 법이었습니다. 셋 중 물론 도덕법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 가운데 어느 것 하나를 범하여도 하나님 앞에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인간이었고 모든 사람이 죄인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어서 율법을 범한 사람은 그 율법의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우리 모든 인류가 지은 그 모든 율법을 범한 죄를 자신의 몸에 짊어지시고 하나님께로부터 그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큰 진노를 보여주셔야 했고 그것이 구원받을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행위에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요즘 부모들의 흉악한 범죄가 자녀들을 죽음으로 몰고 있습니다. 어제는 또 보니까 아이를 방치해서 두 살 반 아이가 죽었다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게임하러 PC방에 가려고 하는데 하도 애가 우니까 손으로 아이 코를 틀어 막아 죽여버리고 PC방으로 간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현대문명을 이용하는 것은 물론 좋지만 절대로 그것을 탐닉해서는 안 됩니다. 게임에 빠져서 그렇게까지 합니까. 설교 듣는 분 가운데서는 핸드폰 없이 하루도 못 사는 사람들 있을 것입니다. 전화 통화만 하면 괜찮은데 그것을 가지고 밤이나 낮이나 무슨 ‘내 영혼이 주야로 스마트폰을 묵상하나이다. 아이패드는 나의 목자시니.’ 그리고 들여다보고 게임을 하고 그것을 돈을 내고 그럽니다. 인생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쓰레기 같은 삶입니다. 마지막에 자신의 영혼이 망가집니다. 왜 그럽니까. 그러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좀 살아보려고 새로 결혼한 사람들을 사람들이 다 색안경을 쓰고 봅니다. 그래서 또 다른 피해자들입니다. ‘계모’ 하면 그 생각이 납니다. 때려서 밟아서 배 터뜨려 죽인 엄마, 때려서 갈비뼈 부러뜨려서 죽인 엄마, 이러한 것만 생각이 납니다. 계모가 모두 그렇겠습니까. 그런데 10년 형, 15년 형 내렸는데 데모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사형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이미 우리의 법 경험은 그 흉악범은 아무리 형량을 높여도 그것이 범죄를 줄어들게 하는 효과는 없습니다. 사형을 시켜도 그러한 일들은 계속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울분을 터뜨리고 시민단체에서 데모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지은 죄와 받는 형벌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형을 시키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난번에 향판 이야기도 나왔지만 정말 말도 안 됩니다. 왜 사표를 받아줍니다. 다 털어서 조사를 해서 처벌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백성들은 보면서 ‘돈 없고 권력 없는 사람들은 그저 죄를 조금 줘도 뒤집어 씌워서 밟아버리고 돈 있는 사람들은 다 빠져 나간다’고 보지 않습니까. 사표를 왜 받아줍니까. 왜 그것은 데모 하지 않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한 일들이 막 일어날 때 불평이 무엇인가 하면 지은 죄에 비해서 형벌이 너무 가볍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 받은 모든 인류가 이전에 지었고 지금 짓고 앞으로도 짓게 될 모든 죄를 예수님이 짊어지셨을 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진노를 예수 그리스도 위에 쏟아 부으심으로써 하나님이 그 율법의 정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죄에 대하여 부들부들 떠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 주시는 것이라면 장본인인 우리가 저주를 받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짊어지시고 담당하신 것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었습니다.
오늘도 가슴이 너무 아픈 사고가 났습니다. 부모들이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겠습니까. 내일 아침에 아마 많은 슬픈 소식이 기다릴 텐데 어쩌면 그렇게 끔찍한 사고가 일어날 수 있습니까. 실수였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결과가 참혹합니다. 그러한 사고가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군인들을 빨리 들여보내야 한다고 난리입니다. 저는 걱정이 됩니다. 군인들도 또한 누구의 자식인데 구조 활동 하다가 인명 피해라도 나면 어떻게 하나 걱정됩니다.
결국 인간이 지은 끔찍한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율법의 저주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더군다나 그 죄를 대신 짊어지신 분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면 그 저주가 그렇게 극적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시고, 참 사람이신 흠 없는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의 사랑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은 율법의 저주를 한 몸으로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누구도 하나님과의 한시적인 교통을 위해서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도록 모든 의식의 의무로부터 우리를 구속해 주셨습니다. 율법으로부터의 구속이 우리의 모든 죄, 우리의 허물에 대한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구속이었다면 하나님은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죄로부터의 구속을 다 이루셨습니다.
B. 죄로부터의 구속
이제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신분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는 것이 인간이었는데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죄인의 신분으로부터 우리를 구속해 주시는 일을 다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자기의 죄와 형벌 받을 허물 때문이라는 것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죄인의 신분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저주를 당하심으로 모든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의 신분에서 의로운 자녀의 신분으로 변화시켜 주셨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죄의 꽁꽁 묶여 있다면 그것은 마치 앉은뱅이가 되어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는 좋은 자전거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실 뿐 아니라 누구든지 구원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살기만 하면 자신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고 믿었던 죄로부터 죄를 극복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시고, 또한 그 죄로부터 벗어버리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놀라운 비밀입니다.
(예화) 언젠가 인턴십을 하던 어느 신학생이 공부를 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더니 나눔의 시간에 간증을 하였습니다. 예전에 어떠한 죄된 생각이 자기를 사로잡거나 하면 자기는 속수무책으로 끌려 다녔는데 이제 복음을 알고 은혜를 받고 보니까 그때 마다 마음을 모아서 짤막하게 “하나님, 도와주세요.”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라고 기도하면, 아주 짤막한 기도인데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그러한 죄된 생각을 극복하게 만들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의 상태로부터 구속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걱정과 근심스러운 일들이 해일처럼 밀려옵니다. 죽을 것 같고 고통스러울 때, 잠시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가슴에 두 손을 포개고 눈을 감고 우리 주님을 부릅니다. 언어가 많지 않아도 “주님.”하고 부르는 마음 깊은 곳에서의 주님을 향한 부름과 그리고 심령으로 올리는 기도는 비록 아주 짧아도 우리의 마음을 놀랍도록 쇄신시킵니다. 우리의 인내를 시험이나 하듯이 “너의 인격이 얼마나 수양되었는지 보자.”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 생각하면 정말 우리가 참을 수 없는 일이 없고 견딜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우리를 얽어 매였던 미움과 원한, 이러한 모든 것들로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벗어나게 만들어 주십니다.
저는 ‘상처’라는 단어를 잘 안 쓸 뿐 아니라 매우 싫어합니다. 농담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말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무슨 낙원에서 지내는 사람처럼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러분과 똑같이 연약한 한 마리의 양에 불과합니다. 나는 누군가 그러한 것을 호소할 때마다 “기대를 낮추라”고 말합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마음이 잘 통하고 자식들이라도 내 말을 잘 듣고, 아내나 남편이라도 내 말을 잘 듣고, 사람들이 나의 기대대로 움직여 주면 그것은 우리 인생의 보너스라 생각해서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박수를 올려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위로해주시는 보너스라 생각해야 합니다. 원래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자기 뜻대로 안 되게 되어 있고, 사람들을 만나도 그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만 만납니다. 자기가 의도한 대로 일이 잘 안 되고 계획된 것과는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 원래 인생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그렇게 입에 있는 혀처럼 그렇게 여러분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한 사람만 대 보십시오. “나?” 없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해 주는 사람 없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하는 이 순간에도 나 때문에 그렇게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눈에 거슬리는 존재이고, 누군가에게 아쉬운 존재이고, 누군가에게 나를 끊임없이 참아줘야 하는 그렇게 민폐를 끼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원래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면 편안합니다. 3등 열차 탈출 알았는데 무슨 일이 생겼는지 3등 칸 다 찼다고 2등 칸에 태워주면 보너스 얻은 것 같지만, ‘나는 2등 칸 탈 수 있어.’라고 생각하고 갔는데 꼬리 칸으로 가면, 설국열차에 나온 것처럼 비참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기대를 낮추고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이기 때문에 매 순간 배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망가진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너무 신뢰하지 말고, 자신에게 너무 가까운 사람이라도 믿고 의지해야 할 사람이라 생각하지 말고 ‘긍휼히 여기고 사랑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안전하고 좋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렇게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는데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구속해 주시는 것과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하도록 해방시켜 주시는 모든 일들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그 구원에 보태야 할 것이 없고, 완전히 이루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하신 은혜 이외에는 아무 것에도 또 다른 소망이 없다고 믿으며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들을 누리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Ⅳ. 신앙과 십자가의 중심성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과 십자가의 중심성을 발견합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바로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온 인류의 구속을 바라보며 달려오던 그 구속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성취되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점으로 육적인 이스라엘이 깨어지고 영적인 이스라엘의 왕국이 세워집니다. 이제 그 나라는 율법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 이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보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자기와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교만한 우리의 마음을 낮춰주고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라 인정받을 지라도 원래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던 많은 사람들도 자기가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사람을 구원하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그 때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의 그 큰 은혜와 사랑을 받을 사랑스러운 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형벌 받아 마땅한 자신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뵈면서 자신이 이렇게 불결하고 더러운 자신이 순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바꿀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은혜를 찬송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오늘도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당신 앞에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마누엘의 샘에서 그 피로 모든 죄를 씻겨 깨끗케 하여 흠 없는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운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가 정말 우리의 마음에 맺힌 슬픔을 마음을 풀어 터쳐 흐르도록 내버려 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 예수님이 당하신 그 고난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 깨달아 그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하며 눈물 흘린 적이 언제입니까. 주님은 다른 곳이 아닌 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고 그렇게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죄인인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구속을 받고 죄로부터 구속을 받아 죄인들이 사는 이 세상에서 하늘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는 눈물이 사라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붙들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고 이웃에게 전파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Ⅴ. 적용과 결론
우리에게 각자에게 지어진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강제로 지워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기고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이제는 우리의 인생이 주님의 것이라는 확신이 생겨서 받은 바 그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정말 이 적은 것이라도 주님께 드리고 싶어서 우리가 스스로 짊어진 십자가입니다. 삼엄경을 느꼈기 때문에 우리가 짊어지신 것이지 반항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강제로 노예처럼 우리 몸에 매달아 주신 십자가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은혜가 있을 때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십자가가 그렇게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용서받은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이 십자가를 내게 짊어주셔서 예수님을 섬길 기회를 주시고 예수 모욕 받는 그 곳에서 나도 모욕을 기회를 주셨구나, 하는 것 때문에 감사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아팠지만 그 십자가를 지면서 주님을 섬길 때 그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서 떠나고 나만을 위한 이기심이 고개를 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하는 사랑이 사라져 버릴 때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억울하고 이 십자가가 가혹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과연 우리 중 채찍을 맞기까지 십자가를 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욕설과 침 뱉음을 당하기까지 십자가를 진 사람이 우리 중 누가 있습니까. 마지막 죽기까지 못 박히기 까지 십자가를 진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우리의 몫에 매인 십자가는 아주 작은 것이었고 그에 비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그 푸른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무제한의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십자가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 사라져 갈 때 우리는 자신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자기 연민의 눈물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살을 찢으시기까지 내어주신 그 고난을 통해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날마다 날마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을까, 이 큰 구속의 사랑을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셨을까, 감당할 수 있는 은혜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고난 주간에 이렇게 다 이루신 십자가 앞에 서기만 하면 우리는 이 세상의 영광과 내가 마음속에 애 끓이고 있는 세상의 모든 자랑거리들이 분토와 같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얼마인지 모르지만 하루 혹은 일 년 혹은 십 년 혹은 십오 년,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서 살게 하실 동안 다 이루신 십자가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감격하며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교회와 이 어두운 세상의 모퉁이에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보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