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2009년 설교모음)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1 (2009/05/03, 주일오전예배)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2 (2009/05/17, 주일오전예배)
설교기간|200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3 (2009/05/24, 주일오전예배)
1. 사랑과 눈물로 양육함(눅23:28) 2009.5.3 주일오전 1
2. 아이에게 가르치라(잠22:6) 2009.5.17 주일오전 10
3. 뼈처럼 살처럼(창2:23) 2009.5.24 주일오전 27
4. 구속사와 부모공경(출20:12) 2009.5.31 주일오전 41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1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1 (2009/05/03, 주일오전예배)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2 (2009/05/17, 주일오전예배)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3 (2009/05/24, 주일오전예배)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4 (2009/05/31, 주일오전예배)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1
사랑과 눈물로 양육함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I. 본문해설
II. 울며 십자가를 따르던 여인들
A. 그리스도를 사랑함
B. 예수님의 반응
III. 그 사랑을 자녀에게로
A. 자신을 위해 울라
B. 자녀를 위해 울라
1. 자녀를 사랑함으로써
2. 하나님 사랑을 보임으로써
IV. 결론 : 사랑과 눈물로 양육함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2
아이에게 가르치라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I. 본문해설
II. 자녀교육의 중요성
A. 결정적 두 시기
1. 자연적 유아기
2. 영적 유아기
B. 인성 발달의 3요소
1. 본성
2. 환경
3. 교육
III. 운명 같은 본성
IV. 자녀를 위해 할 일
A. 진리를 가르침
1. 교리적 가르침
2. 모본적 가르침
B. 회심에 이르게 함
C. 은혜 안에서 살게 함
V. 결론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3
뼈처럼 살처럼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창 2:23)
I. 본문해설
II. 결혼의 목적
A. 함께 있게 함
B. 도와주게 함
III. 사랑의 원리
A. 아담의 고백
B. 부부 : 목적 ․수단
C. 하나님 사랑과의 일치
1. 타락 전
2. 타락 후
a. 하나님 없는 사랑
b. 사랑 없는 결혼
IV. 부부와 가정
A. 서로를 완성함
1. 서로를 도구로 삼지 않음
2. 진정한 자기실현
B. 완성되는 인간을 보여줌
1. 가족들에게
2. 이웃에게
C. 개인보다 아름다운 공동체
V. 결론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4
구원역사와 부모공경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I. 본문해설
II. 부모공경의 계명
A. 구속사와 십계명
B. 십계명과 부모공경
1. 약속 있는 첫 계명
2. 땅과 생명
III. 공경이란 무엇인가
A. ‘카베드’(דבכ): 잠 3:9, 사 43:23
B. 속성과 공경
1. 속성 : 공경의 원인
2. 공경 : 속성을 닮게 함
IV. 먼저 네 부모와 화해하라
A. 이해와 용서
B. 사랑과 공경
V. 결론 : 별처럼 빛나라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1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1 (2009/05/03, 주일오전예배)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2 (2009/05/17, 주일오전예배)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3 (2009/05/24, 주일오전예배)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4 (2009/05/31, 주일오전예배)
1.사랑과 눈물로 양육함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Ⅰ.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장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 때에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면서 여인들을 만나는 장면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형벌은 죄 있는 자들을 죽이는 형 집행의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사형언도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그때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구경하며 따라오는 백성들이라는 사람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오르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가슴을 치며 따르던 여자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무리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기 전 규례에 따라서 ‘라이도리온’이라는 왕국 수비대에게 끌려가서 심하게 채찍에 맞으시고 고문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통스러운 그 고난 속에서 온 몸이 피로 물든 가운데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당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진 채 골고다 가는 길에 등장하셨습니다.
Ⅱ. 울며 십자가를 따르던 여인들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구경했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이 여인들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좇아오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울며 십자가를 따르던 여인들이었습니다.
A. 그리스도를 사랑함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눈물로 따라왔던 이유는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경하며 따라오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없었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오는 사람들로서 받게 될 핍박이나 고난에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랑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자기와 같은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돌아보셨던 자비하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예수님이 이들을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생기게 된 그들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요한이 말한 바와 같이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요일 4:10)” 함과 같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십자가 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조차도 예수님과 한 패라고 하는 이 심문을 받을까봐 두려워 예수님을 홀로 남겨두고 도망을 쳤는데, 이 여자들 마음속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의 뒤를 따라가다 당할지도 모르는 고난이나 핍박, 시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큰 관심사는 자기들을 위해서 그렇게 사랑을 베푸시고 희생하셨던 예수님, 아무것도 악한 것을 행한 적이 없었던 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시는 그 모습이 그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요,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 여인들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들’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때문에 울며 예수님을 따라오고 있는 이 여인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까? 핍박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영광을 받으시는 주님이 아니라 모욕 받으시는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이 여자들의 신앙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습니까?
B. 예수님의 반응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위하여 지고의 사랑으로 슬피 우는 이 여자를 바라보시며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아다시피 예수님은 그 전날 밤 한 잠도 주무시지 못했습니다. 다락방에서 유월절 만찬을 떼고 꽤 긴 말씀으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땀이 피가 되기까지 자기를 쏟아 부으며 철저한 기도로 아버지께 헌신하셨습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그 처절한 기도 속에서 그 진액을 쏟으신 후 당신이 가장 사랑하던 제자들 중 한 사람의 입맞춤으로 예수님은 팔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야바의 뜰로 끌려가셔서 온갖 고초와 심문을 당하시고 종교재판을 겪으신 후 빌라도에게로 끌려가셨습니다. 거기에서 또 온갖 조롱과 모욕과 심문을 받은 후 헤롯에게로 끌려갔고 거기에서 큰 고초를 당하신 후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에게로 끌려오셨고 거기에서 성난 데모대에게 에워싸여 불공평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잡숫지 못하고 쉬지도 못한 가운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게 되었으니, 이 예수님의 고난은 얼마나 큰 것이었습니까? 더욱이 십자가를 지기 전 당한 그 몹쓸 고초와 채찍에 맞는 피 흘림, 피투성이가 된 가운데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쓰러질 듯 십자가를 지고 나타나셨을 그때는 이미 예수님의 힘이 진 하실 대로 진하신 때였습니다. 그러니 그 120kg에서 140kg이나 되었을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피 흘리시며 올라가다가 통곡하는 여인들을 향해 당신의 몸을 돌이키신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얼마나 큰일이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돌이키시며 사랑하는 여인들과 말씀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부터 마지막 못 박히실 때까지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셨으니, 이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바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자 같았도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유일하게 이 여인들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이 여자들을 “예루살렘의 딸들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예루살렘은 언약의 도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의 중심부를 가리키는 것이었죠.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들에게 그들이 비록 여인들이지만 언약이 깃든 예루살렘의 딸들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바벨론의 이상은 큰 나라, 큰 권력을 가진 나라, 더 많은 백성을 통해서 세력을 펼치는 것이었지만 예루살렘의 이상은 거룩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예루살렘의 딸들이 정말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또 다른 의무에 충실함으로 그들과 그들의 가정이, 그리고 예루살렘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거룩함으로 모든 세상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그 눈길을 끌므로 그들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일으켜 세우시고 거룩하게 만드신 하나님을 알게 함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들에게 당신을 향한 사랑은 참 아름다운 것이지만, 이제 그만 울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그 피 저린 사랑이 어떻게 또 다른 삶의 지평으로 이어져야 할지를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지체들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자기만의 은혜의 경험, 끊임없이 하나님이 붙여주신 영혼들을 향해 흘러가지 않는 자기 단절적인 사랑, 그래서 그 신비하고 은혜로운 많은 골방의 경험들, 그런 간증들, 이것은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아가페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그 일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것이 그들의 경험 안에 갇힘으로서 부패하기를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당신을 향한 그 지고의 사랑이 또 다른 삶의 지평으로 이어져 언약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예루살렘과 가정을 세우는데 이바지하기를 기대하셨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사랑을 자녀들에게로 펼치라고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Ⅲ. 그 사랑을 자녀에게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이것은 이중적인 전망 속에서 예수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즉 가깝게는 40년 후에 다가오게 될 예루살렘의 역사적인 대 멸망과 관련된 말씀이었고, 또 다른 궁극적 지평으로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당하게 될 이 세상의 예외 없는 큰 심판을 염두에 두신 말씀이었습니다. 첫 번째 심판에서는 육적인 이스라엘과 육적인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을 것이었고, 두 번째 지평에서는 영적인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믿는 모든 백성을 포함한 인류가 받을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종려주일에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면서 모두들 찬송을 불렀지만, 예수님은 통곡하면서 눈물을 흘리셨으니 이는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대 멸망이 주님의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게 된 그 도성이 당하게 될 큰 심판이 눈에 보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그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면서 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네가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 19:42)”라고 독백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도록 확정되어 다가오고 있는 예루살렘의 대 멸망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 예언은 주후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이끌어진 수많은 로마의 군인들이 끊임없이 자기들의 통치에 대항하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함으로써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예루살렘 백성들이 성을 무너뜨리고 공격한 로마의 군인들에 의해서 처참하게 살육을 당하였고 아비규환을 이루었습니다. 이런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 자신은 미래에 다가올 모든 심판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먼저 이 여인들에게 당신을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식을 위해서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들은 제일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울어야 했습니다.
A. 자신을 위해 울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이들의 참답고 진실한 사랑은 자기들을 위하여 우는 사랑으로 이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우리에게 주셨던 팔복 중 두 번째 복이 있었습니다.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마 5:4)’ 하는 복이었습니다. 천국의 백성들은 두 가지를 인해서 애통하여야 하는 백성이었습니다. 우선 첫 째는 자신들의 죄를 인하여 애통하는 사람들이어야 했고, 그리고 또 하나는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통곡하고 탄식하는 사람들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 여자들은 바로 그렇게 자신의 영혼의 죄를 위하여 울고 아직까지도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때문에 닥치게 될 예루살렘의 멸망을 인하여 눈물을 흘려야 했던 것입니다. 비둘기처럼 슬피 울며 예루살렘을 향하여 다가오고 있는 이 멸망을 예고하고 이 멸망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빌어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들은 통곡하며 예수님을 위해 울었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해서 우는 이 여자들에게 먼저 너희 자신을 위하여 울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들이 다양한 각도로 자녀교육을 말하지만, 그러나 여러분! 예전에 우리의 믿는 부모들은 지금처럼 이렇게 책이 많지 않고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세련된 이론들이 없던 시대에 회초리 하나, 우리를 때리고 눈물 흘리시며 닦으시던 행주치마 하나 가지고 우리들을 사람답게 교육해 왔습니다. 자녀들의 교육을 이야기 하지만, 하나님 앞에 교육받지 않고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지 않는 부모가 자기 자식을 아름답게 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자녀를 위한 가장 훌륭한 교육은 그 자식의 에미가, 애비가 하나님 앞에 한 착한 자녀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 앞에 부족하지만 주님 사랑 때문에 울고, 주님 사랑하지만 여전히 주님의 자녀답지 않은 자기 자신의 모습 때문에 울어서, 좋으신 주님 앞에 효자로 효녀로 살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서 가슴 아파하는 그 은혜의 세계 그 자체가 자식을 위한 가장 훌륭한 교육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시대에는 책들은 많고 프로그램은 많고 옛날보다도 자식 교육에 유난이 돈을 많이 쓰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교육의 원천인 이것,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부족한 죄인인 줄을 알고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자기와 함께 또 자기를 위해 눈물 흘리지 못하는 이 냉담함이 그 모든 교육의 재료들과 계획들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안 되는 신앙의 시기이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여러분들이 주님을 가장 사랑했던 때는 주님을 위해서 많이 울었던 때,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지신 그 십자가 때문에 가장 많이 통곡하던 그때, 여러분들 자신의 부족을 가장 많이 깨달으며 자기를 위해 울었던 때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눈물이 많은 그때에 사실은 우리를 위해 제대로 울 수 있었고, 우리가 그렇게 눈물이 있는 은혜의 세계, 통곡이 있는 탄식의 세계에 있을 때에 우리는 가장 착한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에 어려운 문제가 무엇인지 보십시오. 자식들은 부모를 보되, 그 부모가 효도하는 것을 보지 못하면서 효도 하라고 강요를 당합니다. 자식들은 자기 엄마 아빠가 그의 아버지 어머니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용서하고 함께 끌어안으며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자식을 향해서는 나도 네 가족이고 그리고 너는 나를 사랑하고 공경하고 효도해야 한다는 것을 자식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떻게 자식들에게 교육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보지 못하는 속에서 받는, 강요에 가까운 교육조차도 이제 우리는 포기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식에게 효도를 받을 것을 포기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마치 독립적인 부모의 아주 자신만만한 인생의 태도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마음과 정신을 자식에게 의지하고 그 안에서 자아를 찾으려는 것은 비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성경적으로 볼 때에 자식에 의해서 가족으로 받아들여지며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가족 관계를 유지하고 그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고 부모는 그것을 누리고 받으면서 사는 것이 성경적인 가정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그것은 부모 자신에게 필요 있고 없고가 아니라 그렇게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아직 완성되지 않은 우리의 새끼들이 완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거라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부모가 자식들에게 효도를 받아야 된다는 말이에요. 자녀들은 이중적으로 혼란스럽습니다. 자기의 부모들을 통해서 육신의 부모를 어떻게 공경하는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하지만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리사랑만 아니라 올리사랑도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은혜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한없이 못나고 부족하지만 자녀를 기르고 양육하면서 주님의 사랑으로 깎아지기 보다는 상처가 많은 가정에서 은혜를 받고 내 아버지를 용서하고 내 어머니를 사랑하는 치열한 과정을 통해서 더 많은 성화의 길을 걸었던 것을 여러분들은 경험으로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자식을 향한 사랑은 되니까 하는 사랑이지만, 부모를 향한 사랑은 해야 하기 때문에 해야 하는, 본성을 거스르는 사랑인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성화의 유익이 있었던 것이죠.
그러면 우리만 그렇게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뱃속으로 낳은 자식도 그렇게 아직 완성된 자식이 아닙니다. 집 한 칸 얻어서 결혼식 올려서 던져 버리고 나면 그 자식과 우리들과의 관계가 끊어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그 자식은 우리의 새끼고 부모로서 우리의 의무도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일평생 부모는 그 자식을 가슴에 지고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육신의 부모인 우리를 공경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도 끊임없이 성화되고, 부족한 우리들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통해서 그 관계를 지속함으로 주님의 사람이 되어가게 하여야 하는 것이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모인 우리를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부모이신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을 배우게 하는 것이죠. 이것은 강요와 위협에 의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깊이 공경하는 그러한 본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한 하나님의 자녀의 행복이 어떤 것인가를 자식들에게 알게 함으로 그 어려운 하나님의 사랑의 길을 주저함 없이 걸어가게 만드는 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사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일 먼저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신을 위해서 울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B. 자녀를 위해 울라
1. 자녀를 사랑함으로써
나는 성공한 사람들의 꿈을 이룬 간증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믿음으로 살아도 그렇게 크게 될 수 없을지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에겐 그렇게 될 사람들보다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향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어떤 사람이 기도하며 자녀를 길러서 하버드를 보내고 케임브리지를 보내고 예일을 보냈다고 간증을 했다고 칩시다. 여러분들 중의 대부분은 그렇게 지금 그 사람처럼 기도하며 자녀를 가르쳐도 여러분의 자녀들이 절대 그런 대학에 못 들어갈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의 외형에 불과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자녀들이 그렇게 몇 년에 한 번 TV방송에 타고, 우리가 부모들로서 전국을 다니면서 강사로 간증할 수 있을 정도의 그런 기적을 남길 수 있는 그런 자녀를 두지는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큰 불행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어둠 속에서 사는 것, 사랑하여야 할 하나님 대신 사용하여야 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함으로서 영혼이 파괴되어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부모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자기의 죄인 된 모습을 인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 아이들 속에 아로새겨진다면 그가 훌륭한 학자가 되든지 위대한 정치가가 되든지, 혹은 그들만 못하여 작은 가게의 주인이 되든지, 이름 없는 직장의 샐러리맨이 되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찬양)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자녀는 짐승처럼 기르는 것이 아니에요. 아무렇게나 마음 내키는 관심 없는 자녀양육은 양육이 아니라 방치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렸을 때 강아지가 서커스단에서 춤을 추는 것을 보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신기하게 IQ도 뛰어나지 않은 동물이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는지 아십니까?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에요. 창살에 커다란 철판을 놓고 우리에다 강아지를 가둔 다음 밑에다 불을 때는 것입니다. 이게 뜨거운 철판이 되면 개들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이 발 저 발을 번갈아 가면서 뜨거우니까 떼어놓기 위해서 움직이게 되죠. 이때 음악을 틀어줍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훈련이 계속 반복되고 나면 그 다음엔 불을 때지 않고 철망을 치워도 개는 그 철판 위에서 음악이 나오면 무서운 공포를 기억하면서 그렇게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데, 이게 바로 서커스를 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개의 댄스예요. 우리는 자녀들을 이렇게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분재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여러해 전에 분재를 선물해서 보자마자 즉시 바깥에 내놨습니다. 그런 것은 저는 너무 싫습니다. 그 철사로 칭칭 감아서 나무의 자연성과는 상관이 없이 사람이 보기 좋은 대로 그렇게 기르는 것, 얼마나 잔인한 일입니까? 저는 이 설교할 때마다 저의 할머니가 생각이 납니다. 항상 저보고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얘야, 나 죽거든 절대 저렇게 염하지 말고 묶지 말고 내가 평소에 입었던 옷 그냥 입고 아무것에도 묶이지 않고 묻히게 해다오.” 그러며 말씀을 이으셨습니다. “어려서부터 나는 평생을 속박 받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제는 죽는 순간이라도 자유 함을 누리고 싶다.”고 말씀이죠. 그 유언을 받들어서 돌아가셨을 때에 하얀 인조견으로 옷을 입혀드리고 아무것도 묶지 않은 상태에서 가장자리에 솜으로 채우고 가장 편안하게 우리 할머님을 눕혀서 보내드렸어요. 천사같이 고운 얼굴로 돌아가셨어요. 우리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치열한 경쟁을 이기고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그래서 잔인한 승자가 아니라 너그러운 승자가 되어서 자기와의 경쟁관계 속에서 쓰러진 사람들을 손잡아 일으켜 세우고 승리의 열매를 나누는 너그러운 자녀들이 되어서 영광스럽게 되기를 우리는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지런히 그 아이들을 회초리와 사랑으로 교육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것들을 가지고 자유롭게 자라야 할 이 아름다운 가능성의 발현을 짓밟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자녀들은 분재처럼, 개를 훈련시키는 조련사처럼 그렇게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최대한 자유롭게 마음껏 화초처럼 피어나도록,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로 눈물을 흘려 물을 주고 우리가 그들을 위해 희생함으로 비료가 되게 하고 주님의 가르침으로 햇빛삼고 비를 삼아 자녀들이 자유롭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그 지식 안에서 자라가도록 그렇게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 사랑을 보임으로써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알게 되었죠. 그러나 여러분! 우리를 그렇게 믿음의 길로 인도해 준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두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나도 별 특별한 직업도 없고 그저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의 수많은 기도와 부탁에 이끌려 교회로 인도되었습니다. 제가 예수를 믿기로 결심할 때 그렇게 예수를 믿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게 한 것은 하늘로부터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예수 믿는 평범한 많은 사람들 속에 있는, 내가 형언할 수 없는 그들만의 평안과 자신감이었습니다. 지위 높고 내가 책 속에서 만난 위대한 지성인들이 갖지 못했던 놀라운 하늘의 평화, 그것이 나로 하여금 예수 안에 내 인생의 소망이 있다고 믿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 돈을 많이 가진 재산가가 되고 미모의 뛰어난 여성이 되고 하는 것,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하나님 앞에 더 큰 것은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모습을 끊임없이 보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자녀로 살아가는 행복, 그 참된 기쁨, 그리고 자기를 끊임없이 쳐서 복종시키며 예수를 닮아 만난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는 그런 예루살렘의 딸, 예루살렘의 아들의 모습을 부모에게서 보는 것이 아닐까요?
저도 심방하다가 두 다리 건너서 들은 이야기니까 뭐 어느 정도 정확할지 모르지만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아이들이 연초에 마음지킴의 교리로 사경회를 했습니다. 어느 날 엄마가 조그만 아이 앞에서 짜증을 내고 성질을 부리니까 이 아이가 엄마 앞에서 손을 가리키면서 “엄마 지금 엄마 마음이 새까만 마음인거 알지? 잘해.” 아이들이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에도 언어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 부모는 바보입니다. 아이들은 이미 모두 봅니다. 여러분들이 날 나리 그리스도인인지 주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인지, 은혜 있는지 은혜에서 멀어져 부패하고 있는지 자식들은 너무나 잘 압니다. 여러분들이 아이들을 족치고 두들겨 패고 강요해서 무엇을 얻으려고 합니까? 길거리를 지나가다 보니까 학원 이름이 자물쇠에요. 자물쇠 학원이 요새 유행인거 아세요? 아이들을 집어넣고 밖에서 학원 주인이 문을 큰 열쇠로 잠가버리는 거예요. 난 그러다가 화재나 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는 두 시간씩 아이들이 죽어도 바깥에 못 나오게 하는 거예요. 그게 자물쇠 학원이에요. 주님이 이러한 우리의 교육의 현실을 보시면 얼마나 마음 아프실까요? 당신의 형상을 닮은 아이들, 꽃처럼 활짝 피어나야할 아이들이 그렇게 비인간적인 교육을 받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할까요?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괄목할 만한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자랐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산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여러분들은 자녀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주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Ⅳ. 결론 : 사랑과 눈물로 양육함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들에게 자녀를 위해서 울라고 가르쳐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서 우는 것과 자녀를 위해서 우는 것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식들이 공부 안할 때에 눈물이 납니까? 혈기가 납니까? 아마 혈기가 나겠지요. 그리고 공부하라, 질서대로 아이들이 행동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죠. 남편과 아내의 일 말고 우리의 마음속에 자식의 일보다 더 큰 관심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게 우리는 관심을 갖는 것만큼이 내안에 있는 내 새끼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자신의 자녀를 향해 베풀기를 원하는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보십시오. 예수를 위해 충분히 눈물 흘릴 수 있는 그런 사랑, 그 사랑을 자기의 자식들에게 베풀어주기를 기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자녀를 위해 마음을 썩이고 근심하고 많이 고통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녀를 향한 여러분들의 사랑이라고 믿지는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 자신을 향한 사랑일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향해 많이 마음을 끓였지만 여러분들의 자녀를 위해 울어본 적은 언제입니까? 자식의 부족한 모습 속에서, 하나님 앞에 부족한 한 자녀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읽으며 이중적으로 투사하면서, 그러면서 자녀 앞에서 나의 부모 됨을 인하여 울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자녀 됨을 인하여 우는 그런 경험이 언제입니까? 자녀를 깊이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 사랑의 관계야말로 모든 가르침이 흘러들어가게 하는 유일한 통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사랑과 눈물로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고 그 동일한 사랑으로 주님의 당부를 받아 자녀를 위해서 사랑과 눈물로 양육할 때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주님이 직접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기르고 싶을 그런 자녀들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1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1 (2009/05/03, 주일오전예배)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2 (2009/05/17, 주일오전예배)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3 (2009/05/24, 주일오전예배)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4 (2009/05/31, 주일오전예배)
2.아이에게 가르치라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 22:6)
Ⅰ.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우리의 자녀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자녀가 어렸을 때에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이에게 이 진리를 잘 가르치면 그 아이가 그 진리가 가르치는 삶을 살되 나이가 많이 들어서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 교육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Ⅱ. 자녀 교육의 중요성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자녀 교육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부터 이제 이 세상은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그렇게 죄가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 이제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가며 아이들을 생산해내게 되는데, 이 부모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지 못하는 무지하고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생산해내는 많은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하나님과 창조의 계획과 자기를 구원하신 목적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무지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세상에 맞서기 위한 방법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자기의 자녀들을 잘 신앙 안에서 양육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될지를 가르침으로서 이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 언약의 백성들 안에서 보존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의 독특한 성격, 즉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삶이 되도록 돕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교회와 가정, 두 기둥을 세워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들을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게끔 은혜의 수단들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A. 결정적 두 시기
그러나 우리의 자녀 교육이 필요하다고 해서 아무 때나 우리의 자녀들을 교육시키면 사람다운 사람으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결정적인 두 시기가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1. 자연적 유아기
첫 번째는 자연적 유아기예요. 자연적 유아기는 아직 아이가 엄마의 품에 있는 이 어린아이 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한 살이나 두 살부터 시작을 해서 다섯 살 정도에 이르기까지의 이 유아기가 자연적 유아기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이제 엄마의 품이 자기가 만나는 처음 세계이고 그 엄마의 품에서 이 아이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성장해가고 인지가 발달하게 됩니다. 이때에 이 아이가 점점 자라가고 성장하면서 엄마에게서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됩니다. 이 엄마에게서 외부의 모든 세계를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엄마를 통해서 제일 먼저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죠. 그래서 엄마의 화난 표정을 통해서 자기의 행동이 악하다는 것을, 엄마의 활짝 웃는 표정 속에서 자기의 행동이 선하고 올바르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이 선과 악을 배우게 되고 그리고 엄마의 품속에서 이제 바깥 세계와 접하면서 엄마를 선생님으로 해서 하나씩 둘씩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한창 어렸을 때에는 “엄마, 이게 뭐야?” 라는 질문들이 아주 많아지게 됩니다. 이때 엄마가 친절하게 사랑으로 아이에게 올바로 가르쳐 주는데, 아이가 물어보는 대부분의 사물들은 자연사물들이에요. “ 마, 사랑이 뭐야? 하나님이 누구야? 은혜가 뭐야? 천국이 뭐야?” 이렇게 물어보지 않습니다. “정의가 뭐야? 용기가 뭐야?” 이렇게 물어보지 않고 아이들이 대개 물어보는 것은 풀을 보고 “엄마, 이게 뭐야? 이건 뭐야? 이건 뭐야?” 대부분의 모든 사물들은 자연 사물들을 보며 아이들이 질문을 하게 되는 거죠. 이때에 엄마는 이 아이에게 이것을 가르쳐주면서 간접적으로 “이것은 꽃인데 하나님이 만드신 거야. 이것은 풀인데 하나님이 창조하셨어. 이것은 나문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어.” 이렇게 자연 사물을 먼저 가르쳐주고 그것을 매개체로 하나님에 대해서, 신령한 것에 대해서 가르쳐주게 되는 것이죠. 이 교육이 이렇게 중요한 이유는 이제 이렇게 자연사물에 대해서 궁금증이 많고 이것을 배우고자 할 때에 이 아이는 본성에 있어서는 악한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 아이의 본성이 이제 정신과 몸이 성장하면서 충분히 발현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이제 신령하고 하나님께 속한 이 진리의 요소들을 배우고 터득하고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거침돌이 되는 많은 저항적인 요소들이 아직 충분히 발현되지 않게 되는 거죠. 그래서 자연적인 사물들을 잘 깨닫고 받아들이는 수용성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부모가 잘 설명해주면 하나님은 없을 거야, 은혜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아, 인간의 영혼은 없어, 하는 이러한 선입견들이 비교적 적게 확립된 시기이기 때문에 이제 자연 사물들뿐만 아니라 그것을 너머서 있는 신령한 세계에 대하여 가르쳐주어도 아이들은 그것을 잘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자!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믿을 때 잘 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안 믿고자 하는 불신앙의 고집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이것이 비교적 적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이런 아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이런 자연적 유아기의 상태가 바로 이렇게 이 자연의 세계의 진리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관해서 잘 심겨질 수 있는 그러한 때인 것이에요. 우리들은 흔히 어린아이들이 너무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종교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아이일수록 종교적인 것이에요.
최근에 이 어령 선생이 글을 썼는데 자기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심리학에 메메멘토모리라는 용어가 있어요. 직역을 하면 죽어야 할 운명에 대한 자각이에요.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어떤 기억 때문에 슬픔을 느끼는 것을 메멘토모리라고 하는데, 자기가 그 메멘토모리를 느낀 것이 여섯 살 때였다고 이야기를 해요. 굴렁쇠를 굴리면서 신나게 달려가다가 어느 한 순간에 어떤 빛이 확 비치는 것처럼 갑자기 자기가 혼자인 것 같고 이제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이 확 밀려오면서 그 굴렁쇠를 팽개치고 울었던 기억을 이야기하는 거죠. 자! 이게 이론적이에요, 아니면 종교적이에요? 놀랍죠. 제가 이런 메멘또모리를 처음 느낀 것은 초등학교 3학년 쯤 되는 것 같아요. 갑자기 부모도 나와 상관이 없고 친구도 나와 상관이 없고 내가 이 모든 세상에 홀로 있는 것 같은 그런 두려움, 그 속에서 내가 혼자라는 자각 속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어요. 노래를 부르며 그렇게 울었던 기억이 있는데 어렸을 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그것이 바로 죽어야 할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이 소년기적인 자각이라 이거죠. 이런 자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것들이 종교적이에요. 그래서 아이들을 보면 신화나 전설, 판타지 이런 것들을 어른들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만화 영화 같은 공상, 신화에 속하는 것들을 좋아하는 거죠. 그래서 아이들의 세계일수록 훨씬 더 종교적인 세계라고 하는 것이죠. 이렇게 아이일 적에 우리의 이성으로 파악이 어렵고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이런 높은 수준의 진리를 가르치는 그 일은 아주 효과적이라는 거죠. 그래서 많은 기독교의 교부들은 이 어린아이 적부터 종교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래서 테루틀리아누스 교부 같은 사람은 “아이들의 최고의 신학교는 엄마의 무릎이다. 엄마의 무르팍에서 이제 가장 훌륭한 종교 교육을 받는다.”고 가르쳤던 것이죠.
이런 자연적인 유아기가 지나가게 되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기독교의 진리들, 그런 것들을 가르치기가 굉장히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벌써 초등학교만 들어가고 이제 여러 가지 많은 과학적인 정보나 이 세상의 많은 사실들을 접하고 나게 되면 그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일거라고 하는 저항감이 마음속에 많이 생기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것을 전해줄 때에 그것을 어린아이처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거죠. 그래서 어른들의 교육 보다는 청년, 청년들의 교육 보다는 청소년, 청소년들의 교육 보다는 초등학교 학생들, 초등학생들보다는 미취학 아동들의 교육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자본을 회수하기에 확률이 가장 높은 투자에요. 그래서 거기에 교회가 온 힘을 쏟아야 해요. 그래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미취학인 상태에서 회심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초등학교 들어오면서 부터는 이제 신앙의 도리들을 배워가면서 성화의 길을 걸어가게 해야 되는 거죠. 이것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2. 영적 유아기
또 한 번 이제 결정적인 두 시기중 하나, 기독교의 가르침이 액면 그대로 놀랍게 받아들여지는 그러한 결정적인 시기가 한 번 더 오는데 이것이 바로 영적 유아기에요. 이 영적 유아기는 자연적인 연령에 있어서는 노년에 올 수도 있고 어른일 때 올 수도 있고 청년일 때 올 수도 있고 소년일 수도 있고 청소년일 수도 있고 미취학 상태의 어린 유아기에 올 수도 있어요. 이 영적 유아기는 회심 즉시 시작되는 어린아이의 시기에요. 이때에는 이제 자연적 유아기와 아주 유사한 상태가 되죠. 그래서 회심하고 거듭나게 되면 이전에 없었던 아주 놀라운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뭐냐면 죽었던 영혼이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사랑하지 않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거죠.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선하신 하나님의 선함의 광채에요. 하나님의 선함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활짝 펼쳐지게 되었을 때에 이것이 바로 아름다움으로 나타나게 되는 거죠. 이 아름다움은 이제 우리의 감각, 육신의 눈을 통해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으로 직접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을 볼 수 없는데, 눈에 보이는 세상의 사실 보다도 확실히 믿게 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들의 꽃의 아름다움이나 예쁜 여자의 아름다움과 같지 않은데도 그렇게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보다도 확실하게 하나님의 정신적인 아름다움에 대해서 지각을 하게 되는 거죠.
자! 잘 들어보십시오. 여기에서 두 시기에 아주 미묘한 대조가 이루어지게 되죠. 자연적 유아기 때에는 눈에 들어오는 감각적인 사물들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해 가르쳐주면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영적 유아기 때에는 먼저 들어오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이에요. 이게 믿어지니까.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매개로 해서 하나님의 선함을 이 자연세계 속에서, 도덕의 세계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자연적 유아기 상태에는 자연사물에 대한 인식에서 창조주 하나님에게로, 영적 유아기에는 구속 주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아는데서 자연의 세계로 다시 내려오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중의 지식, 즉 창조주를 아는 지식과 구속 주를 아는 지식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하나님과 이 세계 모두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는 거죠. 이런 일들이 영적 유아기 때 이루어지는 거죠. 자연적 유아기가 오래 가지 않고 금방 끝나는 것처럼, 영적 유아기도 오래 가질 않고 금방 끝납니다. 그래서 아이가 회심 했을 때, 혹은 우리 어른인 신자들이 회심 했을 때 즉시 그게 절호의 기회에요. 뭐든지 하나님의 말씀이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을 때, 그리고 그 하나님에 대해 배우면 그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 것이 증진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그때에 기독교가 무엇을 믿는지 하는 교리를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이 교리를 잘 가르치면 빨려들듯이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거죠. 그래서 이것들이 축척이 되게 되는 거죠. 흔히 여러분들이 설교를 듣거나 교리를 배우면서 너무 어렵다고 이야기 하는데, 사실 그 어려운 것은 내용 자체가 지적으로 어려워서 일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강한 힘, 아이로 말하자면 엄마 품에 안겨서 젖을 쪽쪽 빠는 그런 정신이 식었기 때문에 그게 어려워 보이고 힘들어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증거를 대라면 저는 15년 목회에서 수 없이 많은 증거를 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공부 많이 하고 박사들도 많이 계십니다. 대학교 교수님도 계시고. 이런 많은 사람들이 계셔도 이분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교리를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예전에는 한 번도 교회 다닌 적이 없는, 심지어는 예전에 절에 다니거나 남녀호랑개교 믿던 이런 사람들이 와서 그것도 나이가 많이 드신 분들이 한 순간에 그것들을 이해하고, 아무것도 의심하는 것이 없다는 듯이 그 진리를 빨아들이고 그 속에서 은혜를 받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이런 것들은 영적인 감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죠. 이 시기가 짧은 시기인데 이 시기에 기독교 진리를 꽉 채워주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이걸 닫아 버려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어도 듣지 않는 딱딱한 마음으로 변해요. 그러면 그가 나중에 어떤 계기든지 주님을 다시 만나고 깊이 회개하고 깨뜨려지는 기회가 오면 다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말씀에 은혜를 받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서 아주 놀라운 속도로 심겨지고, 뿌리를 내리고 아름다운 결실을 이루게 되는 것이죠.
자! 이렇게 되어 지게 되는데 이러한 영적인 유아기에 교회는 열심히 교육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의 경험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즉시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일에 자기를 드려야 됩니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이런 자연적인 유아기를 놓쳤다면 영적 유아기가 찾아오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이 영적 유아기에 우리가 믿는 신앙의 참된 도리를 부지런히 넣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자녀를 주시는데 우리의 자녀들을 우리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남보다 훨씬 높은 지위,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남들을 지배하는 위치에서 살기를 원해요. 그게 모든 부모의 공통된 욕망이죠. 그렇지만 엄밀하게 보면 모든 사람들이 꼭 같은 능력을 타고 날 리가 있겠습니까? 하늘에 더 반짝이는 별과 그렇지 않은 별들이 있어서 밤하늘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녀들도 동등하게 다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절대 뛰어난 학자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고요, 아무리 바이올린 학원에 보내도 세계를 주름잡을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사람은 수십만 명의 아이들 가운데 한 둘도 될까 말까입니다. 이런 모든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모인 우리에게 위탁하신 것은 이 아이들에게 어떤 가능성을 주셨는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면서 이 아이들이 자유롭게 성장해가면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달란트, 그러나 아직 기회가 없어서 드러나지 않은 이 달란트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주는 것은 좋은 것이에요. 그래서 아이들이 공부하고 싶다면 공부할 기회를 열어주고, 아이들이 놀고 싶다면 놀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러다보면 그 아이가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는 거죠. 그래서 아이를 이렇게 마치 철사나 막대기로 묶어서 분재를 만드는 것처럼 아이를 기르지 말고, 아이가 자유롭게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다 보면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의 특성들이 발견이 되는 거죠. 물론 마냥 놔 둘 순 없지만, 그러나 그렇게 충분히 자신을 발휘할 수 있도록 허락할 때 아이들은 다양한 자기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렇게 그 길로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하나의 삶의 양태의 문제라는 것이죠. 자! 악기를 연주해서 예술가의 삶을 살든지, 아니면 공부를 많이 해서 학자의 삶을 살든지, 아니면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버는 장사꾼의 삶을 살든지, 남의 회사에 들어가서 열심히 봉급생활을 하는 회사원의 삶을 살든지 하나님은 그것 자체 때문에 그 사람의 중요성 여부를 평가하지 않죠. 그리고 그 사람의 삶의 모습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는데 덜 이바지 하거나 더 이바지하는 것은 아니죠. 중요한 것은 그것보다도 그 사람이 누구냐 하는 사람됨의 문제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독재자가 되든지, 아니면 가장 세속적인 통치자가 되겠죠?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히지 않은, 변화되지 않은 사람이 뛰어난 예술의 탐닉한다고 하면 그 예술을 통해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정신적인 영향을 줄 것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이런 사람들이 전파성이 강한 음악이나 문학을 하게 된다고 할 때에 그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겠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양태의 문제이고 마지막에는 결국 그 사람이 누구인가의 문제에 집결되게 되는 거죠.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그 아이의 인간성과 관련이 있는 거죠. 그래서 이제 인성의 발달, 이 문제와 관련이 되는 거죠.
B. 인성 발달의 3요소
많은 사람들은 인성발달의 3요소를 이야기해요. 첫째는 본성이고 두 번째는 환경이고 세 번째는 교육이에요.
1. 본성
이 본성은 다시 둘로 나누어지는데 자연적인 본성과 신령한 본성이에요. 자연적인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선악과는 상관이 없이 어떤 사람에게는 예술의 본성을, 어떤 사람에게는 학문에 적합한 본성을, 어떤 사람에게는 운동에 적합한 본성을, 이런 재능을 따르는 본성이죠. 이건 중립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면에 있어서 인간의 본성은 누구이든 간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거죠. 이 본성은 이 세속 교육에서는 변화되지 않는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본성은 밑변으로 놓고 환경과 교육만을 가지고 움직여서 뾰족한 삼각형, 뭉뚝한 삼각형을 만들 수 있다고 보는 것이지, 바탕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나 이제 우리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바탕이 되는 본성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보는 거죠. 특히 신령한 본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중생과 회심이라는 역사를 통해서 근본적으로 그의 본성을 바꿔 놓고 변화시키는 역사를 하나님은 하신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기독교의 교육은 있는 사람을 그냥 가꾸는 교육이 아니라 사람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는 그런 종류의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본성이 사실은 하나님의 성령의 강한 역사에 의해서는 쉽게 바뀌는 것 같지만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 본성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악한 본성이 후천적으로 몸에 배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배인 본성을 떨쳐냄에 있어서 우리는 매우 무기력한 것을 발견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이 근본적인 신령한 본성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바꾸어 놓으시지 않으면 운명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죠.
2. 환경
자! 환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환경을 바꾸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 환경이라고 하는 것이 단지 깨끗한 집안에 살 것이냐 더러운 집안에 살 것이냐 하는 이런 환경이라면 쉽게 바꿀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아이가 사람답게 자라는 이 환경은 이미 그 시대 안에서, 그 나라 안에서, 그 가정 안에서 형성이 되는 것이죠. 그걸 바꿀 수 없는 거죠.
자! 그래서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인데 이런 일이 있었어요. 프랑스에서 법을 만들었는데, 아이들의 장난감이 너무 흉측해지니까, 칼, 탱크 이런 것들이 나오니까 이런 것들을 어린아이를 위해서는 만들지 못하게 해야 된다는 논쟁이 벌어진 거죠. 그러면서 이제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서 아이들의 심성을 키워야 된다고 했더니, 한쪽에서 얘기가 나온 거죠. 그러면 미래에 우리의 적국이 될지도 모르는 나라의 아이들이 탱크와 총 같은 것을 가지고 놀 때 우리 프랑스 아이들은 인형 머리나 쓰다듬으면서 자라야 됩니까? 그러면 그것이 가장 좋은 교육입니까? 라는 논쟁이 아주 치열하게 벌어진 적이 있어요. 환경은 결국 그 시대에 태어나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되는 환경이에요. 자!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들이 자라서 학교에 가면 그 환경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죠. 또 만약에 착한 아이들끼리만 모여서 사는 학교를 만든다고 칩시다. 그것도 또 문제가 안 될까요? 그렇게 해서 초등학교 마쳤는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그렇게 완전히 따로 모여서 예쁜 아이들만 교육을 시켰는데 대학에 들어갔는데 도둑놈들, 엉터리 같은 놈들이 가득한 대학을 들어갔다고 치자 이거죠. 걔네들이 거기서는 어떤 영향을 받게 될까요? 혹시 사회 부적응자 들이 되지는 않을까요? 어느 정도는 스스로 악을 극복하고 모순을 배우면서 그러면서 살아야 되는데, 문제는 이 도가 지나치게 되면 자기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는 거죠. 지금 우리가 이십 년이나 삼십 년 전과 비교를 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위생적인 환경에 삽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거리거리마다 오줌 똥 천지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안 그렇죠? 전 세계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 내에 후진국의 화장실에서 선진국 화장실로 바뀐 나라가 우리나라에요. 이게 전 세계적인 모범 사례에요. 그래서 연구하러 많이 와요. 그럴 정도예요. 이렇게 똥 두간의 문화도 바뀌고 사회가 아주 깨끗하게 되었잖아요.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지금 이렇게 이상한 바이러스들이 변종을 일으키고 이런 바이러스에 대해서 약한 질병들이 많이 생겨나는 이유가 우리 아이들을 너무 깨끗하게 길러서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렸을 때에는 적당히 지저분하게 길렀기 때문에, 물론 아이들 중에는 그랬기 때문에 병들어 죽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아이들 대부분이 그런 불결한 환경에서 스스로 이기며 저항력을 키워왔던 거죠. 그런데 이제 완전히 거의 멸균 상태에서 기르다시피 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죠. 그래서 적당히 좀 아이들 흙도 파먹고 그러면서 가다가 오줌도 싸고 그러면서 냄새도 맡고, 아이들이 땅바닥에 기기도 하고 이러면서 살아야 되는데, 아이들이 거의 멸균된 상태에서 살아야 되니까 심각한 질병에 노출이 되는 거죠. 그런데 이것이 정도가 넘을 경우에는 인간성 자체가 아예 파괴되어 버리는 거죠. 그런데 오늘날은 이 정도를 넘어버린 거죠. 그래서 아이들이 심각해요. 청소년 사역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얼마나 심각한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이고 그 사역자들이 자기들이 돌보는 청소년들에 대해서 어떤 비밀들을 터득해도 부모에게 얘기를 못한대요. 충격을 받거니와 믿지도 않는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고, 부모가 자기 자식들의 청소년기에 아는 것은 20%도 안 된다는 겁니다. 이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이 환경을 우리 마음대로 단번에 바꿀 수 있습니까? 바꿀 수 없습니다.
저는요, 하루를 살아도 시골에 살고 싶어요. 그래서 기도원 같은데 갈 때 보면 너무 좋아요. ‘아우, 내가 여기서 산다면 새벽기도라도 매일 새벽에 차 몰고 나갈 텐데.’ 그렇지만 환경을 그렇게 바꾸고 싶지만 애들이 학교 다니고 내가 여기에서 목회를 하는데 되겠어요? 안 되죠. 그러니까 충분히 할 수 있을 정도면 이제 쓸모없는 사람이 된 후에나 가능한데, 또 그렇게 쓸모없는 때 그런데 가면 불편해서 못 살죠. 하다못해 뭐 하나라도 살려고 해도 다리에 힘이 없는데 가까운데 있어야지만 그래도 뭐 사다가 먹고 살 거 아니에요?
3. 교육
이렇게 환경이란 바꾸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가 교육, 교육을 통해서 이 문제에 우리들이 도전해보고자 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 교육이 굉장히 중요해요. 그래서 아이를 사람답게 기를 수 있는 사명을 일차적으로는 가정에 주셨고 이차적으로는 교회에 주신 것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학교 교육은 이미 다 무너져 버렸거든요. 그렇죠? 그런데 가정도 무너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가정을 통해서 부모가 반듯하게 올바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요즘 아이들에게 안 하는 이야기가 있죠? “너 이다음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린 어려서 짜증나도록 들었거든요. 설날에도 가면 세뱃돈은 안 주고 맨 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넌 이다음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된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착한 사람이 되어라.” 요즘 누가 그럽니까? 안 그러죠? 여러분도 스스로 한 번 자녀들을 쓰다듬으면서 “얘야, 너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본 적 있어요?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남은 것은 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가정과 교횐데, 이것도 이제 심각한 문제죠. 예수 믿는 가정도 이제 막 파괴되기 시작하는 거죠. 형편없이 파괴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이제 교회도 진리를 가르치는 일에 열심을 내지 않아요. 부모 자신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진리에 목숨 거는 게 아니라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면서 예수의 지원도 받고 하나님의 지원도 받고 싶은 그런 자기중심성을 포기하지 않은 교회생활을 해나가고 있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가르쳐줄 피 묻은 진리가 없는 거예요. 있어야 가르쳐주지. 뭘 가르쳐줘요? 없는데.
Ⅲ. 운명 같은 본성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인간의 본성이란 절대 안 바뀐다고 보고 이게 그의 운명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운명과 같은 본성을 이야기했습니다. 사실 신앙을 떠나놓고 보면 이 말은 사실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태어날 때 타고 나기도 하고 후천적으로 형성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이 본성이 태어난 본성은 어쩔 수 없다고 할지라도, 자라나는 환경이 나쁜 본성을 계속 발생시켜서 본성을 쌓아가지 않도록 돕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해 전에 영국에 갔을 때 일인데 교회들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영국에서 일어났어요. 한 천 명 정도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였는데, 영국에서 천 명은 한국에서 만 명보다도 훨씬 더 기이한 숫자입니다. 이 굉장히 많이 알려진 그런 목회자였는데, 교회도 있고 가정도 있는 목회자였는데 아주 짧은 쪽지 하나를 써 놓고 가출을 했어요. 정부와 함께 도망을 간 거예요. 더 기가 막힌 건 그 정부가 남자였어요. 그 뭐냐는 거예요. 게이에요. 동성애자로서 동성애 애인과 함께 도망갔는데, 남겨놓은 쪽지에 뭐라고 쓰여 있냐면 내 인생 최대의 실수는 결혼을 한 것이고, 두 번째 실수는 목사가 된 것이다. 그렇게 써 놓고 떠났어요. 그래서 난 즉시 생각했어요. 그리고 대화했어요. 이 사람이 이 전에 게이였을 것이다. 아니나 달라요. 이 사람이 대학 때 동성애에 빠져서 비참한 상황에 있었는데 복음을 듣고 깊이 변화되어서 은혜를 받고 목사로서 소명을 받아서 신학을 공부하게 된 거죠. 그러면서 그 생활을 청산을 한 거예요. 그리고 목회자가 된 다음에 그 본성이 다시 발동을 한 거예요. 이렇게 된 거죠. 이건 뭐죠? 거의 운명이잖아요. 본성은 그런 운명이에요. 최근에 목사 한 사람이 마약 복용 혐의로 체포되어서 구속되었어요. 이 사람은 또 뭔가 하고 보니까 마약 중독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였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됐냐? 호기심으로 마약에 손을 댄 것이 아니라 예전에 마약 중독자였어요. 그 중독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헌신을 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이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만드는 그 일을 위해 헌신하다가 결국은 자기도 거기에 빠지게 된 거죠. 이 본성이 얼마나 피할 수 없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결국은 운명이라고 하는 것을 본성이라고 보는 거죠.
그럼 이제 그리스도인을 이 운명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친구들과 어울려서 점치러 갔대요. 그랬더니 점쟁이가 바른말 잘 하잖아요. 점쟁이가 점 통을 막 흔들더니 “에이 씨, 점괘가 안 나오네. 너희들 중에 예수 믿는 년이 있지?” 친구들이 자기를 다 쳐다보더래요. 그랬더니 “너구나. 이 못된 년. 예수 믿는 년이 이런 덴 왜 와? 나가.” 그러더래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예수 믿는 것들은 어차피 운명대로 안 살기 때문에 점 볼 필요가 없단 말이야. 가서 예수나 잘 믿어.” 그러더래요. 그래서 그 사람이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대요. 교회에서 수없이 예수 잘 믿으라고 해도 감동이 안 되는데, 점집에서 외치니까 이게 하나님 말씀처럼 들리는 거죠. 콱 하고 찔리는 거죠. 놀랍죠.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은 운명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운명대로 살지 않는다고 할 때 그 가능성은 오직 둘 밖에 없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그의 본성이 변화되고, 변화된 본성이 유지가 되어야 되요. 그렇지 않으면 아까 같은 비극적인 일들이 다시 환원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자녀를 교육하는 최고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이냐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가 그 아이의 마음에 기쁘고 즐거운 것으로 여겨지는 성향, 그것을 그 아이에게 넣어주는 것이에요. 다시 한 번 더 할게요. 우리의 자녀 교육의 최고의 궁극적인 목적은 뭐냐면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될 의무들이 이 아이의 본성상 기쁜 것이 되는 성향, 그것이 바로 이 아이를 교육시키는 목적이라고 하는 거죠. 제가 어려서부터 마늘을 굉장히 싫어했어요. 왜냐하면 그걸 먹고 곰이 사람 됐다는 전설도 있고 하여튼 말할 수 없이 독한 그것이 싫었고 어른들이 독한 그것을 먹고 뿜어내는 그 냄새도 너무 싫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마늘이 혈관 계통에 좋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의식적으로 그것을 먹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억지로 먹는 거죠. 그런 음식 중의 하나가 브로콜리에요. 그게 무슨 맛으로 먹어요? 그것을. 무슨 털실로 짠 것 같이 맛도 하나도 없잖아요. 그런데 먹으니까 이게 맛있네요. 지금은 마늘을 아주 좋아하고요. 덕분에 이번에 가서 심장을 검사할 소견이 있다고 해서 찍었거든요. 그랬더니 그 의사가 얘기하기를 자기 예상을 깨고 핏줄이 너무 깨끗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얘기했죠. “제가 마늘을 많이 먹었거든요.”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마땅히 섭취해야 되는 음식이 기호식품이 되게끔 하는 것, 이게 건강의 지름길이에요. 그걸 이를 악물고 먹으면 몇 번이나 먹겠어요? 이게 성향이 되게 하는 거거든요
그럼 여기에서 교회에서 끊임없이 성화에 대해서 가르치는 그 마지막 목표는 뭐냐면 이게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끊임없는 자기 극복의 과정이지만, 그게 제 2의 본성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 뜻대로 사는 게 즐거움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 그런 본성이 변질되지 않고 오래 지속되는 것, 그것이 바로 성화를 통해서 우리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상태란 말이에요.
Ⅳ. 자녀를 위해 할 일
A. 진리를 가르침
그래서 이러한 본성을 바꿔 놓는 일을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부모인 우리가 할 일이 있는데 첫 째는 뭐냐면 아이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진리를 좋아하고 진리를 따라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1. 교리적 가르침
가장 필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어렸을 때에 기독교의 진리를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는 거예요. 아주 어렸을 때에 기독교 진리의 핵심을 가르쳐 주는 것이죠. 그래서 아이들에게 성경 전체를 일게 해 주는 것 보다는 기독교의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 여러분들이 세례 문답 시간에 배운 그런 내용들을 아이들에게 정확하게 가르쳐주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깊이 알도록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것이 가장 훌륭한 유아교육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교리를 아는 지식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그동안에 우리 교회는 교리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그러나 최근에 이제 지난 시대의 교리 교육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너무 허술하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많이 깨닫게 되요. 그러니까 교인들의 삶이 교리를 알아도 그 삶이 부합하지 않는 원인은 희미한 지식과 떨어진 은혜, 그것 때문이에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거든요. 직접 열린 신문에 나왔으니까. 열린 교회의 이런 교육시스템에 대해서 걱정을 했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아, 이렇게 어렵게 공부를 가르쳐야지만 예수를 믿을 수 있나? 이과 나온 사람은 열린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기 힘들겠다.’ 그러나 사실은 자, 보십시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열심히 배우는 것을 포기하면 즉시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죠? 두 개는 각각 별개이면서도 함께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리의 말씀을 아무리 어렵게 배워도 성령이 함께 하시고 은혜를 받으면서 배우면 지적으로 놀랍게 성장하면서 자기 인격도 변화되어 가는 거죠. 여러분, 그러나 또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어차피 은혜를 못 받는 사람들은 배워도 은혜를 안 받으려 하고 안 배워도 은혜를 안 받으려고 해요. 그러니까 은혜를 못 받는 것은 진리를 많이 가르치기 때문에 은혜를 못 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서 진리를 사모하지 않으니까 못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배우면서 ‘아, 이게 있으니까 은혜는 없어도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안 되고, 또 ‘배울 만큼 배웠으니까 이제는 집어 치우고 은혜나 열심히 받아.’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게 모든 은혜는 깨달음에서부터 오기 때문에 진리의 가르침이 없는 은혜는 신뢰할 수 없고 오히려 존 오웬 목사님 같은 분들은 그런 것들을 영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심각하게 경고했어요.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는 이렇게 진리와 은혜를 떨어뜨려놓고 생각하는데 있어요. 종교개혁자들은 이 두 가지를 굳게 함께 붙들었어요. 나누어질 수 없다고 한 거죠. 그러니까 ‘진리를 배우고 교리를 배우면서 많이 배우니까 은혜가 없어도 되지.’ 하고 생각하면 안 되고 그걸 배우면서 ‘아무리 많이 배워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이 지식은 쓸모없는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해야 된다는 거죠. 그렇게 하면서 진리 안에서 계속 자라가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이제 이 교리 교육을 지난 시대를 보니까 비교도 되지 않아요. 더군다나 이 혼탁한 세상에서 교리를 가르쳐주면 대충 교리 가르쳐 주고 나니까 가서 교만해지거나, 아니면 더 실제적인 일들 속에서는 자기의 교리를 적용하지 못하고 세속의 가치관을 따르는 것들을 보면서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겠다고 하는 결심이 생겨지게 된 거죠. 내가 늙어서 힘이 없어지면 할 수 없고 죽으면 못 가르치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그리고 이렇게 이 세상의 사고와 이 세상의 조류들이 얼마나 정교하게 세속주의를 부추기는지 몰라요. 이것들을 파괴할 수 있도록 우리들은 보다 더 철저하게 하나님의 진리로 무장되고 가르쳐야지만 자녀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그런 것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제 교리 반을 하면서 내가 이랬어요. “이제 교리반이 조만간 끝날 거다. 그리고 이제 하나의 교리 반을 일곱 개로 나누어서 교리 반 모두 떼려면 3년 반 정도를 연속해서 들어야 되는 그런 시대가 올 것이다.” 여러분, 지금 웃죠? 종교개혁시대에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할 때 예수 믿고 학습에서부터 세례까지 3년이 걸렸어요. 복잡하지도 않고 주기도문 1년, 사도신경 1년, 십계명 1년, 그렇게 3년을 배웠어요.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어요. 그러니 우리들이 지금 배우는 이 내용이 얼마나 엉터리입니까? 그것도 마음도 기울이지 않는 그런 식의 교육, 그리고 교리 공부 다시 하라고 그러면 15년 전에, 14년 전에 뗀 것 가지고 졸업장 보여주는데 그것도 유효기간이 있는 거죠. 무슨 그걸 가지고. 그래서 어쨌든 자녀들에게 교리를 잘 가르쳐야 되요.
2. 모본적 가르침
잘 가르치고 그 다음에 두 번째는 그런 교리대로 살아가는 부모들의 삶의 모본을 보여주어야 하는 거예요. 얼마나 재미있냐면 말이죠. 우리 큰 애가 여섯 살쯤 됐을 때 밤에 잘 때 저 혼자 기도를 하는데, 기도를 하라고 그러면 눈물도 안 나오면서 계속 손바닥으로 땅을 치면서 우는 시늉을 하면서 기도를 하는 거예요. 그것도 하나의 외식이잖아요. 그래서 쟤가 왜 이러나 그랬어요. 그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우리가 가정예배를 몇 달 드리는 동안에 그때가 개척교회시절이었잖아요. 교회가 너무 안타까우니까 우리 부부가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엎드려서 손수건으로 눈물 닦으면서 거실 바닥을 툭툭 치면서 기도를 했는데 그걸 이 여섯 살짜리가 그대로 본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도 계속 그렇게 흉내를 내는 거예요. 교육이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그 아이에게 기도할 때에 너무 슬픈 마음이 밀려오면 그렇게 땅바닥을 치고 표정은 이렇게 하고 기도를 하라고 말로 가르쳤으면 그 애가 그렇게 따라하겠어요? 눈으로 보는 그것은 아주 생생하게 다가와서 가슴 속에 지워질 수 없게 찍히는 거예요.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설교를 90분, 100분짜리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그러지만 여러분이 천재가 아닌데, 나도 그 프레임을 다 못 외우는데 여러분이 그 프레임이 다 생각이 나겠어요? 그런데 은혜를 깊이 받은 설교는 마음속에 한 폭의 그림이 선명하게 딱 남는 거예요.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도 안 사라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그 부부로부터 입으로 나오는 그 수많은 논리들은 다 기억이 안 나도 딱 그게 가슴속에 찍히는 거죠. 어려움이 있을 때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의지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는 이런 건데 그것들은 이렇게 극복하고 이것은 교리적으로 이것이고, 기억이 다 안나요. 그런데 가정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눈물로 기도하는 엄마를 보면서, 침상에서 머리 숙이고 간구하는 아빠를 보면서 인생의 위기가 오면 나도 저렇게 기도해야지. 그게 모본이에요.
이런 모본이 부모에게서 훌륭하게 주어지는데도 자식들이 이를 안 따르는 경우가 있어요. 그것은 사랑의 부족이에요. 그래서 이 사랑은 부모의 모든 가르침이 자식에게로 흘러들어가는 아주 아름다운 통로예요. 그래서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냐면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항상 한 곳에 있게 하신 것은 아니잖아요. 목회자도 보면, 나야 그러지 않기를 바라야지만, 또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목회지로 옮기잖아요. 그런데 옮길 때 옮기더라도 ‘에이, 안되면 가 버리지.’ 이렇게 하면 목회가 안 돼요. 교인들을 목회 하는 게 목회가 안 되는 게 아니라, 물론 그것도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목사하고 시집간 여자하고 비슷해요. 시집간 여자가 그 남편하고 살 때 “여보, 난 당신 없으면 갈 데가 없어.” 그렇게 얘기해야지 사랑을 받지, “당신 아니어도 오라는 사람 많아.” 그러면 그게 실지로 안 가도 그 남편은 썰렁한 거요. 똑같이 목사도 갈 데가 많아도 말이라도 “여러분들이 나를 가라고 그러면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래야지 교인들이 좋아하지, “나 갈 데 많거든.” 그러면 가지도 못할 거면서 그런 얘기 뭐 하러 하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목회자 자신이 하나님이 나를 여기다 박아두셨기 때문에 난 어차피 여기 있을 수밖에 없다. 이래야지 목회가 되는데 그 목회가 자기 목회가 되는 거예요. 갈 수 있는데 여기 있다고 그러면 지금 당하는 괴로움은 괜히 당하는 거 아니에요. 괜히 당하는 괴로움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그게 주님 앞에 연단이 되겠어요? 안 되는 거죠. 그렇다고 뭘 고개를 힘차게 끄덕 거려요? 그렇게 되는 거거든요. 그럼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이렇게 ‘내가 갈 데가 없습니다.’ 하는 의존의 마음을 가질 때 사랑을 받는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그렇게 이게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을 아이에 대해서 가져야 되는 거죠. 어렸을 때 제일 짜증나는 이야기가 뭐냐면 “아유, 내가 저 새끼를 왜 낳는지.” 왜 낳는지 가르쳐줘요? 그런 얘기 뭐하려 해요? “너는 다리에서 주워 왔다.” 자식으로 하여금 가장 좌절하게 만드는 게 뭐냐면 부모가 자식의 존재를 후회할 때, 그것은 아이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아도 굉장히 커다란 상처와 고통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깊이 자기의 자식을 사랑해야 하는 거죠.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 이 아이와의 관계에 있어서 운명이다. 그것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할 것이 없다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거죠.
B. 회심에 이르게 함
자녀를 위해 할 또 하나의 일은 그 자녀를 회심에 이르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녀가 이렇게 모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성장해 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가 하나님 앞에 거듭난 사람이어야 된다는 거예요. 거듭나고 회심한 아이여야 된다는 거죠. 많은 사람들은 ‘에이, 아이도 어린데.’ 그게 아니라 어리니까 예요.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멀어질수록 회심할 확률은 현저하게 떨어지는 거예요. 백발이 허연 노인들이 최근에 여러분 주위에서 회심한 사람을 본 적이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없습니다. 일생을 살아도 몇 번 보지 못해요. 안 일어나요. 놀라워요. 똑같이 준비하고 정성을 쏟아서 사경회를 준비하면 어린아이들이 훨씬 더 회심을 많이 해요. 어른들은 이미 곤고해서 나왔어도 머리 속 에서는 달그락거리며 수많은 계산을 해요. 그러니까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에 놀랍게 교회 오는 날 회심하고, 어떤 사람은 수없이 교회를 다니고 수없이 설교를 들어도 절대 회심 안 하고 마치 회심 안 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어린아이니까 아직도 기회가 많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멀어질수록 기회가 줄어든다고 생각을 하고 회심을 위해서 전심으로 기도해야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들 중에서 ‘아이, 하나님이 때가 되면 하시겠지.’ 십 년이 됐는데도 안 됐잖아요. 여러분 죽을 때 마지막으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네가 교회 다니는 걸 봤으면 좋겠다고 유언하고 죽을지 누가 알아요? 그리고 그 아이가 유언을 받아들일지 어떻게 알겠어요? 가거나 안 가거나 빤 한 길이에요. 여러분들이 그렇게 좋은 부모 만나서 어렸을 때 회심하지 못하고 신앙생활 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인생을 이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고통의 쓴 물을 마시다가 주님께 돌아왔는지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그렇게 주님을 만난 날들이 훨씬 더 이른 시기였다면 여러분, 얼마나 행복한 신앙생활이 되었겠으며 주님을 위해서 얼마나 아름다운 일들을 많이 했겠어요? 나는 요즘 그런 생각을 절실하게 합니다. 내가 어린 시절에, 최소한 중학교 때 회심을 하고 고등학교 때 그 열렬한 독서열이 있고 지적인 탐구열이 있을 그때에 누군가가 나를 이 신학의 세계로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어서 젊은 날, 욕망에 뒤흔들리고 짓 까불리는 이 폭풍과 같은 수많은 날들을 안정되게 진리에 말뚝을 박고 거기에 내 인생의 배를 묶고 하나님의 말씀에 정착하게끔 했더라면 지금쯤 내가 얼마나 많이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이제는 가야할 길, 탐구해야 할 길은 보이는데 이제 몸도 정신도 현저하게 약해져서 예전과 같이 그렇게 발휘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대학원 다닐 때만 해도 기록이 스물 두 시간을 앉은 자리에서 책을 읽고 에세이를 쓴 적이 있어요. 아래에다 오강 갖다 놓고. 지금은 그렇게 하면 쓰러집니다. 그저께 밤을 샜더니 이틀 동안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아요. 기분이 좋지는 않아요. 이제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언젠가는 기적적으로 예수를 믿게 될지 모르겠지요. 그때까지 허비할 인생의 수많은 날들은 누가 보상해 줄까요? 그런데 얼마나 부모들이 못됐는지 자식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기를,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것처럼 안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녀들은 회심하지 않고 그런 속에서 점점 죄악에 빠져가고 하나님을 모든 사상에 없다고 하는 이 불신앙이 커다란 둥치가 되어서 그의 삶 속에서 발현되기 시작하는데 부모의 눈에 눈물이 흐르지 않는 거죠. 뭘 보면 알 수 있냐면 여름이 되면 우리가 다시 회심집회 하잖아요. 아이들 회심 안 했는데 부모가 정신 못 차려요. 그래서 어떨 땐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얘가 회심해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저런 부모 밑에서 보존이 될까? 하는 생각이요. 그렇게 해서 자기 자녀가 회심 안했는데도 얼마나 급한 일이 있고 중요한 일이 있는가는 모르지만 어떻게 거기 참석 안 할 수가 있어요? 나 같으면 얼굴이 간지러워서 거짓말로라도 거기 참석할 거예요. 들리지 않아요? 아이들이 그 격동의 청소년기를 겪으면서 이 순간에도 수없이 수면제 먹고 죽어가요. 보셨죠? 지금 강원도 등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동반자살 사건 속에 모두 고등학생들이 다 들어가 있어요. 열아홉 살 미만의 고등학생들이 다. 그래서 이 조합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조합이냐고 따지는 거예요. 동반자살 할 때 그 아이들이 다 끼어들어가서 죽어가는 거예요. 들리지 않아요? 여러분들이 자녀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때 아이들이 음부에서 소리쳐요. “가엾은 어머니, 왜 날 나셨나요?” 눈물이 나오지 않아요? 여러분들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녀의 회심을 위해서 헌신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한 겁니다. 교회에서 여러분들이 무슨 직분을 맡고 깃발 휘날리는 엄청난 섬김을 다했을지는 모르지만, 아무것도 안한 거라는 거죠.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그렇게 누가 회심 안했는지 훤히 아는데, 그 회심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는데 안 나와요.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그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서 몰입해야 되지 않아요? 생각해 보세요.
오늘날 여러분들이 자녀를 위해서 음악 하는 아이들은 여름방학이면 아예 집에도 못 오게 하고 산속에다 가두고 선생들 데려다가 음악 교육을 시켜요. 몰입교육이라면서요. 영어를 하기 위해서 방학 때는 집을 떠나서 아이들을 영어 학교에 집어넣고 외국으로 보내요. 신앙 몰입 교육은 언제 해요? 대답을 좀 해보세요. 언제해요?
(찬양)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자녀를 이 세상에서 출세 못했다고 혼내지 않으세요. 사람을 만들었느냐? 이거예요. 그 좋은 어린 시절 다 보내고 어떻게 하려고 해요? 그러나 낙심할 필요 없죠. 지금 이 날이 여러분의 자녀가 남은 인생에서 가장 어린 날이에요. 지금이라도 기도해야죠. 그리고 “네가 울 수 없을 때 내가 대신 울어주마. 이 엄마가, 이 아빠가 돈 없어서 너 고액과외는 못 시키고 비싼 학원에는 못 보내도 내가 널 사람다운 사람으로 가르치고야 말거야.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네가 회개할 수 없다면 내가 대신 회개하마. 네가 너 자신을 위해 염려할 수 없다면 너의 영혼과 나의 영혼이 하나 되어서 울자.” 여러분들 가운데 자녀의 회심하지 않은 영혼을 위해서 금식한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어요.
C. 은혜 안에서 살게 함
마지막으로는 이 아이들을 은혜 안에서 살게 해야 해요. 아이들 회심 시켰다고 자만하지 마십시오. 은혜의 상태에 들어갔다 미끄러진 사람들의 죄는 더 교묘해요. 여러분, 알죠? 은혜 상태에 있다가 미끄러진 사람들은 험해요. 험해. 교회에서도 보면 은혜도 못 받고 교회에 와 가지고 설교할 때 들어왔다 축도할 때 슬쩍 헌금이나 내고 도망가는 신자들은 그렇게 험하게 행동 안 해요. 한 때 말씀을 먹고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이 무슨 이유에서 은혜에 미끄러지면 아주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타락이 얼마나 끔찍한가 하는 것을 거룩한 교회 속에서 그 입과 그 모든 삶 속에서 오물들을 토해 내면서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두렵지 않아요? 여러분의 자녀도 영혼이에요. 여러분, 아이가 은혜 많이 받고 회심했는데 어느 날 말대꾸도 하고 퉁퉁거리고 불만으로 가득 차고 아이가 슬픈 얼굴 있죠? 은혜 떨어져서 그래요. 성화의 길에서 미끄러진 거예요. 마음을 못 지켰든지, 죄를 지었든지, 은혜 생활을 못했든지, 죄의 지배 속으로 들어갔든지, 성화가 안 되든지, 기도를 안 하든지 그거죠. 그런 아이를 잘 타일러서 은혜 안에서 살도록, 그래서 엄마가 아빠가 부족한 인간이지만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일을 아이가 배우면서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냥 한 가족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과 한 지체라는 것,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어서 그래서 신앙생활 해 나가게 하는 거예요.
(찬양)고난도 이기고 슬픔도 이기면서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Ⅴ. 결론
어차피 죄 많은 이 세상에는 끊임없는 시련과 고난과 도전이 있어요. 우리 아이들도 그 눈물 골짜기를 지날 거예요. 어찌 밝은 날만 있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우리 아이들, 하나님과 같이 가는 아이들을 만들어 준다면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주님 영광을 드러내는 빛들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부모의 자식을 가진 영광이겠죠.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1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1 (2009/05/03, 주일오전예배)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2 (2009/05/17, 주일오전예배)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3 (2009/05/24, 주일오전예배)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4 (2009/05/31, 주일오전예배)
3.뼈처럼 살처럼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창 2:23).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가정의 첫 시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하와를 창조하셔서 아담과 짝 지워주셔서 한 가정을 이루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결혼의 결합이 있기 전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을 함으로써 가정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결혼의 목적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언어로써 우리에게 이 결혼의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말씀하신 것이죠. 사람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아담입니다. 그래서 아담이라는 말은 사람이라는 보통 명사도 되고, 혹은 아담이라는 개인의 이름도 되는 것이죠. 저는 이것을 사람이라고 번역하는 것보다는 아담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독신도 있기 때문에 아담이라고 번역을 하는 것이 맞다 고 생각합니다.
II. 결혼의 목적
결혼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두 가지인데,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돕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A. 함께 있게 함
그러면 함께 있게 한다고 할 때 우리에게 드는 의문은 독처와 관련된 것이죠. 하나님이 “아담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독처하는 것이 보기 좋지 않으면 처음부터 두 사람을 만드시지, 왜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만드시고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 또 하나는 이제 창세기 1장에 보면 마지막 절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이렇게 좋지 못한 것이 있는데도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이렇게 답변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고 나서 보니까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부랴부랴 하와를 창조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셨다 기 보다는 이미 이 사람을 남녀로 창조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지만 두 가지 이유를 가지고 시차를 두셔서 창조하신 것이죠.
우선 첫 째는 아담으로 하여금 홀로 살아가는 것과 아내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비교함으로써 함께 살아가는 이것이 훨씬 복되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이어 하와를 창조하심으로써 한 편으로는 아담의 몸을 취하여 여성을 만듦으로 두 사람이 한 모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편, 또 하나는 아내의 창조 앞서 남편을 먼저 창조하심으로 가정의 질서를 암시하십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문제와 관련되어서 오해되고 있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아담과 하와의 창조에 관련해서 나오는 이 대목입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위하여”라고 하는 이 말을 많은 사람들은 그러므로 하나님은 남자를 창조하셨고,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창조된 존재다. 그러므로 여성의 사명은 남자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해석을 하는데, 이것은 성경의 견해와는 상관이 없는 자기의 개인적인 남성 우위론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해석인 것입니다. 오히려 여기의 ‘위하여’ 라고 하는 것의 히브리어는 ‘케네게도’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누구누구를 위한 종속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누구누구와 대응하는, 상응하는, 맘먹는, 짝을 이루는, 그런 의미를 가진 단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하와를 아담을 위해서 창조하신 것은 종속의 의미가 아니라 함께 있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죠. 그러므로 결혼 생활은 먼저 공간적으로 함께 있는 것이 결혼의 대의예요. 그 결혼의 대의보다 훨씬 못한 목적 때문에 부부가 공간을 나누고 떨어져 있는 것은 성경적인 가정의 원리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물론 몸만 함께 있다고 해서 부부가 함께 있는 것은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정신적인 결합은 몸의 연합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몸은 장소적으로 함께 있고 마음과 정신은 거리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연합을 이루는 이 상태가 하나님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주신 목적이에요. 그러므로 부부는 한 공간 안에 함께 생활하고 정신으로는 어떤 것으로도 떼어놓을 수 없는 마음과 정신의 연합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결혼의 대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나머지는 각자 여러분들이 삶 속에 적용을 하십시오.
B. 도와주게 함
두 번째는 도와주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혼인의 제도를 만드신 것이에요. 여기에 보면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했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남자를 지으시고 남자의 사명은 본질적이지만 여자의 사명은 부차적이고 남자에게만 하나님이 사명을 주셨고 여자는 그 사명을 이루기에 이바지하는 존재일 뿐이다. 라는 남성우위론적인 해석을 밀어 집어넣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돕는 배필은 하나의 형용사와 명사,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이 두 단어가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에제르’ 라고 하는 단어이고 이 단어는 원래 시편에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도움이라고 번역이 되어서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오,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라, 여호와는 나를 돕는 자시라, 라고 할 때에 도움, 돕는 자 이것이 ‘에제르’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보조적인 역할이 아니죠. 이 ‘에제르’라는 단어가 군사 용어로 사용되게 되면 이것은 전쟁을 하고 있을 때 피아가 얽혀 싸우다가 아군이 거의 전세가 기울 때 지평선에서 흙먼지를 날리며 말발굽 소리와 함께 달려오는 우군의 대규모 응원군을 가리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에제르’가 없이는 패배할 싸움을 그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승리로 이끄는 그런 개념으로의 도움이기 때문에 시인은 전쟁과 같은 자신의 삶을 살면서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라는 고백을 쉼 없이 되풀이하였던 것입니다.
자. 이렇게만 놓고 보더라도 여성의 창조는 아담에게 종속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각각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연합을 이루며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하나님이 독자적으로 여성을 창조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순서상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고, 여자는 나중에 창조되었으니까 남자는 훨씬 더 중요하고 여자는 덜 중요하다고 말이죠.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죠. 남자는 흙에서 만들어졌고 여자는 창조된 사람의 몸에서 만들어졌으니까 재료 자체가 벌써 틀리잖아요. 더욱이 하나님이 만드신 아담에게 무슨 하자있는 그런 제품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여성은 신제품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볼 때 여성이 열등하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의 창조가 하나님의 중요한 창조명령과 관계가 있어요.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다음에 명령을 내리시는데 종교적인 명령과 문화적인 명령이에요. 종교적인 명령은 선악과를 따먹지 않음으로 아담이 끊임없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종교명령은 아담이 홀로 받은 것이 아니라 하와를 포함해서 이후에 존재하게 될 모든 인류와의 연합 속에서 대표인 언약의 머리로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종교명령의 언약의 대표성만 강조하지, 그것 말고 또 하나의 명령인 문화명령의 대표성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문화명령을 주시는데, 이게 세 가지로 나오는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 이렇게 세 가지 명령으로 주어지는데 이것은 아담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개인에게 주신 명령이라기보다는 하와를 포함하여 이후에 태어날 모든 남녀인간의 머리로서 아담에게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에요.
그런데 이 세 가지 명령은 다시 둘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명령 이것은 바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한 번에 육십억 정도의 인구를 확 창조하셔서 땅에 씨 뿌리듯이 확 뿌려놓으시지 아니하시고 한 사람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셔서 그 씨가 이 땅에 충만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짧은 시간에 다 설명할 수 없을 아주 깊은 하나님의 경륜이 이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만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이 이렇게 한 번에 수십억의 인구를 창조하지 않으시고 한 사람을 창조하시고 두 사람을 창조하셔서 이 일들을 이루게 하신 것은 이제 그들을 사람의 연합을 만드시기 위함이었어요. 그래서 하와를 창조하실 때 왜 또 다른 흙으로 만드시지 아니하시고 아담의 몸에서 만드셨을까요? 그렇게 함으로 아담이 하와를 보면서 자신의 몸의 일부처럼 생각한 것처럼 번성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각지 인간의 생육을 통해서, 자기의 몸에서 살과 피를 받아 만들어지게 하심으로 그들을 양육하고 기르는 가운데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게 하심으로서 참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고 살아가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 아래서 터득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는데, 그 경륜이 가정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이제 “충만 하라.”는 명령은 여성과 남성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육의 명령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여성을 바라볼 때 매우 신비한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생명의 기운을, 인간의 탄생을 위한 생명의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거예요. 하나의 볍씨를 뿌리면 2400~2700개의 쌀알이 나온다고 합니다. 땅이 없다면 그러한 번식과 증식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땅 안에 그러한 놀라운 생명과 번식의 능력이 있는 것처럼 그런 능력을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주신 것이죠. 그래서 이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의 씨를 받아 이렇게 번성하도록 인류를 만들어 가심에 있어 가정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셔서 사랑하고 사랑받고 사랑을 배워가며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터득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배워가며 그렇게 하나님과 관련이 있는 인류 집단을 만드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런 방법으로 인류를 번성하게 하신 것이에요. 이렇게 해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남자 아니면 여자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성비는 사람들이 손대지 않고 환경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고 계속 내버려두면 성비가 아주 아름다운 일치를 이루게 되어 있는 것이에요. 특별히 이 여성의 생명성과 관련해서 오늘날 이렇게 많은 환경이 공해로 말미암아 망가지고 특별히 여기에서 생성되는 환경 호르몬 같은 것들은 이 여성의 생명 성을 해치는 중대한 타격을 가져와요. 남성에게도 마찬가지고. 이러한 것들로부터 여성들이 보호받아야 해요. 그러니까 이렇게 너무 많은 소비생활 속에서 재화를 허비하고 살아가는 것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서 인간에게 불행으로 다가오는 것이에요.
자, 이제 이렇게 되면서 하나님께서는 남녀에게 두 가지 명령을 주시는데,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입니다. 얼핏 보면 이 명령은 반복되는 명령인 것처럼 보이지만 두 명령은 서로 다른 명령입니다. 정복한다고 하는 것은 개척을 의미하는 것이죠. 가보지 않은 땅에 찾아가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 속에 도전과 모험, 호기심이 필요합니다. 불굴의 투지와 의지, 그리고 개척정신, 이런 것들이 필요한데 하나님이 이런 일들에 적합한 정신의 능력과 힘을 인간에게 주고, 남자에게 하나님이 부여하신 거예요. 여성들에게는 두 번째 명령인 ‘다스리며’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말로 ‘라다’ 라고 하는 단어인데, 왕이 나라를 아주 선하게 통치하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예요. 옛날의 학문에 ‘제왕 학’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제왕 학’은 남성적인 학문이 아니라 여성적인 학문이에요. 물론 이제 군대를 일으키고 정복하고 정적을 숙청하는 이런 것들은 남성적인 특성을 띠고 있지만 원래 한 나라를 통치하는 정치라고 하는 것은 나라 안에 있는 각 요소를 함께 연결시키고 관계를 맺게 만들어줌으로 어느 하나가 작용하는 것이 다른 것에 해를 끼치지 않고 이바지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제왕 학이에요. 이 학문은 학문 가운데 가장 뛰어난 학문이며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학문이죠. 이런 것 하나도 공부 안 한 사람들이 정치 지도자가 되니까 나라가 이 모양입니다. 지도자들이 공부 안 하고 머리가 나쁜 것은 한 나라의 재앙이에요. 그냥 집에서 아내 거들어서 살림이나 하면 적당한 사람들이 감투 쓰겠다고 고개 들고 나와서 잘못해서 권력을 쥐게 되면 나라가 이렇게 어지러워지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다스리는 것을 위해서는 새로운 모험심, 개척, 투쟁, 불굴의 의지, 이런 게 필요한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기뻐하고 그것들을 돌보고 가꾸고 해서 더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발현되기를 기대하고 좋아하고 하는 이런 성격이 필요한 거예요. 그걸 하나님이 여성에게 주신 것이에요.
그런데 만약에 여성에게는 완벽한 여성성만, 남성에게는 완벽한 남성성만 있다면 서로를 이해하기가 어렵겠죠. 그래서 하나님이 남자에게도 여성성을 좀 주시고 여자에게도 남성성을 좀 주셔서 공통부분을 가지고 서로 교통하며 살게 하셨는데 이게 의학적으로도 입증이 되요. 그래서 남성에게도 여성 호르몬이 나오고 여성에게서도 남성 호르몬이 나와요. 그런데 이게 어떤 사람에게는 많이 나오고 적게 나오고 그래요. 집에서 설거지도 잘 해주고, 부인 어깨도 주물러주고, 어디 간다고 하면 댓돌에 내려와서 부인 신발도 챙겨주는 사람은 여성 호르몬이 많은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들은 대머리가 잘 안 벗겨져요. 대개 머리 벗겨지는 사람은 아랫목에 앉아서 다리 꼬고 에헴 하는 사람들, 절대 부엌에 들어가면 이변이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부부가 유별하다고 생각하는 근엄한 사람들, 침실에도 갓 쓰고 망건 쓰고 들어오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머리가 빨리 벗겨집니다. 또 여성도 와일드하고 개척 정신이 있고 해서 남편보고 외조나 잘 하라고 하며 바깥 활동하는 사람들은 대개 머리가 벗겨져요. 남성 호르몬이 많아서. 창조의 세계를 보면 신비해요. 설교시간이니까 다 얘기 못하지만 신비해요. 제가 나이 먹고 가능성은 전혀 없겠지만 너무너무 배우고 싶은 학문이 의학이에요. 조금 조금씩 생물학적인 지식을 터득해 나가게 될 때 이 하나님의 세계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조화와 일치를 이루고 있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창조하신 세계를 인간이 잘 돌보고 가꾸어서 하나님 앞에 아주 아름다운 세계가 되도록 그렇게 돌보는 일들을 감당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일들에 필요한 성품들을 여성과 남성에게 나누어 주신 거예요. 그래서 함께 나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데 핵심은 뭐냐면 엄마는 아내로서 좋은 아내가 되고 남편은 남편으로서 좋은 남편이 되면 아이들이 나중에 그런 가정에서 컸을 때 하나님에 관한 설명을 들었을 때 무릎을 치는 거예요. “아, 그럼 그렇지. 야, 그거였구나. 우리 부모를 통해서 내게 보여준 그 여자로서의 성품과 남자로서의 성품, 이 두 가지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결국은 하나님이 거기 계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이 아름다운 성품들이 남녀를 통해서 분광된 것이구나.” 하면서 깨닫게 되는 거예요.
이런 성경의 원리에서 볼 때 동성애의 결혼은 비 성경적인 것으로 정죄되는 것이에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것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에요.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있게 하고 함께 도움으로써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따라 이 세계를 정복하고 잘 다스림으로써 인간의 노동이 가미되지 않았더라면 도달하지 않았을 아주 아름다운 상태로 만드는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거든요.
III. 사랑의 원리
제가 나무를 좋아해요. 그래서 몇 해 전에 나무가 하나 들어왔는데 너무 예뻐요. 꽃은 없지만 너무 예뻐서 방에다 들여놓고 아침에 나오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고 음악을 틀어주고 물을 주고 정성껏 길렀어요. 그런데 이 나무가 알고 보니까 통풍이 잘 되는 곳에 있어야 되는 나무였어요. 그런데 공기도 안 좋고 하니까 매일 열어놓을 수 없잖아요. 더군다나 겨울에. 그랬더니 나무 끝이 빨갛게 죽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봄이 되었을 때 이 나무를 밖에다 내어 놓았어요. 그리고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병이 다 나아 아름다운 나무가 되면 내가 다시 데리고 와야지, 그랬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도 바쁘니까, 간사들이 가서 물은 주었을지 모르지만, 바쁘니까 한 넉 달 정도 그게 있는지도 잊어버렸어요. 그러다 어느 날 그 나무가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옥상에 올라가서 봤더니 내 방에 있을 때에는 도시에 사는 예쁜 처녀 같은 나무였는데, 이게 넉 달 만에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가 올라갔더니 죽어가는 빨간 점은 다 없어져서 건강하게 되었는데 밭 매는 시골 아줌마 같은 모습이 되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매일 나무를 깎아주지 않아도 그것이 사람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 햇빛에 노출되고 바람을 맞으니까 튼튼하게는 됐는데 그냥 튼튼할 뿐이에요. 그래서 느낀 것이 아, 식물도 사람이 옆에 있을 때에 사람을 의식하면서 예쁘게 자라가는구나. 그러면 당연히 부부가 같이 살아도 닭 보듯, 소 보듯 하면 밭 매는 아줌마처럼 되는 거예요.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그러나 남편이 가까이 봐 주고 사랑하고 하면 오래되었어도 그렇게 도시에서 자란 처녀처럼 예쁘장한 모습으로 식물도 그러니 인간은 얼마나 많이 그렇겠느냐 이 얘기에요. 그래서 결혼한 사람이 이렇게 봐서 원판이 예쁘게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생긴 원판 한도 내에서 아주 아름답게 아주 예쁘게 보일 때는 둘 중의 하나예요. 남편의 사랑을 받든지, 바람이 낫든지. 그러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신 원리라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가정의 기본이 되게 하는 사랑의 원리에요. 그래서 오늘 아담의 고백이 나와요. 그것이 뭐냐면
A. 아담의 고백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는 고백이 나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 그랬으니까 우리 몸에 필요 없는 뼈, 살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중요성은 각각 다르지요. 어느 살은 좀 베어내도 생명에 지장이 없지만 어떤 살은 손톱만큼만 떼어내도 즉사하는 그런 종류의 살이 있습니다. 어떤 뼈는 좀 부러져도 문제가 없지만 골수가 지나가는 척추 같은 것이 부러져서 파괴되면 생명의 위협이 오는 거예요. 여기에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이 고백은 히브리 문학에서 the best 라는 의미에요. 최고, 가장 소중한, 그런 뜻이라는 거죠. 그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의 갈비뼈로 여성을 창조하셨는데 아담이 나아왔을 때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웠으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없어도 되고 치명적이지 않은 뼈가 내 몸에는 많이 있는데 너는 내 속에 있는 뼈 중 사라지면 내가 존재할 수 없는 그런 뼈요, 또 내 몸에는 나도 원하지 않는 살이 여기 저기 붙어 있는데 너는 그런 살이 아니라 한 점만 떼어내도 내가 죽는 그런 종류의 살이라고 고백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냐면 자기의 진정한 존재를 아내의 존재 속에서 확인하게 되는 이 육체와 정신의 연합, 이것이 결혼에 있어서 사랑의 원리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B. 부부 : 목적 ․수단
그러면 이제 부부들이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을 하는데, 그럼 우리들이 대국적인 견지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거지요.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인데 이게 우리의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이것이 우리의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죠. 자,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하게 되는 거죠. 정답부터 이야기하자면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함으로 인간의 창조목적을 실현해 가는 것이 우리를 하나님이 이 세상에 창조하신 이유고 우리를 남녀로 짝지어 부부가 되게 하신 이유에요. 이러한 궁극적인 목적과 단절된 채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살아간다면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완전히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통해 의도하신 그 인간으로 자라지는 못하는 것이죠.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되는 거죠.
그러나 만약에 남편과 아내가 서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한다면 이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 사랑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가정을 이루게 하신 목적과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나누어놓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의미인 것이죠. 이것은 이렇게 설명이 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뵈올 수 없는 분이죠.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신 속에도 볼 수 있는 기능을 주셔서 만져지진 않지만,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정신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데, 이 정신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뜻이에요. 이렇게 주님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그 주님을 알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죠.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자연의 세계의 이 오묘함이 하나님에 대한 아주 훌륭한 그림책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 하나님을 가장 닮은 사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이에요. 더군다나 자기가 사랑하는 그 아내는 하나님을 가장 닮은 피조물이에요.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하면 아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남편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더욱이 남편이 아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미루어 알게 될 때 그것은 자신 혼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성품이죠. 왜냐하면 남성으로 여성의 성품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이고 또한 반대의 경우도 남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여성인 자신 혼자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많은 성품들을 남편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분의 창조의 목적대로 사는 것이 정의되어 있으면 남편과 아내를 향한 전심의 사랑은 그 자체가 최종적인 목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은 날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못 박았지만 후에 신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성숙하면서 이런 원리에 의해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사랑의 최종적인 목적이 될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요한 1서 주석에서 이런 의미 깊은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 형제 말고 거기에 누가 있겠으며 우리가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의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 하나님 말고 그 속에 누가 있겠습니까?” 라고 반문하였던 것입니다.
C. 하나님 사랑과의 일치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의 일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일치,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내와 남편을 사랑하는 사랑 사이의 완전한 일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1. 타락 전
타락 전에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그것이 처음부터 하나님께로 향한 사랑 때문에 시작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면서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는 목적이 하나님인,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더 사랑하게 되는, 그러면서 자신도 사랑받게 되는 그런 완전한 사랑의 통합적인 질서를 이루어 갔던 것이죠. 그래서 남녀의 사랑은 그들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고양시키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남녀의 사랑을 더욱 더 고양시키는 이 사랑의 일치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2. 타락 후
그러나 타락한 후에는 이것들이 깨뜨려졌습니다. 하나님 중심이던 사랑이 사람 중심의 사랑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자기중심의 사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동기가 되었을 때에는 목적 자체가 사람인 자기 자신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만족이고 그 안에서 자신은 하나님 만족 때문에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존재로 머물기를 좋아했어요.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죄의 속성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질서들이 다 깨뜨려진 거예요. 그래서 인간세계에서 남녀의 사랑이 아무리 뜨거워도 들여다보면 결국은 지가 좋아서 사랑하는 거지, 남을 위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에요. 그렇게 해서 타락하고 난 다음에는 이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말하자면 하나님 중심일 때에는 하나님이 한 분 밖에 없으니까 남편이 사랑을 해도 하나님 중심, 아내가 사랑해도 하나님 중심이 되니까 하나예요. 그런데 이제 죄가 들어온 다음부턴 자기중심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중심이 두 개에요. 그러니까 가정에서 이 두 개가 싸우는 거예요.
개척하고 얼마 안 되어서 심방을 갔는데 가정이 좀 그래요. 부부가 서로 사이가 안 좋고 오랫동안 서로 갈등하던 부부였는데, 심지어는 결혼해서 애들이 컸는데도 그 부인이 나하고 상담하면서 이 결혼이 하나님의 뜻이었는지를 얘기해요. 뜻이 아니었어도 살아야지, 이미 애를 낳았는데 어떡해요. 그런데 그들이 은혜를 받았어요. 그러고 나자 가정이 많이 회복이 되었어요. 그래서 심방을 갔는데 남편이 그러는 거예요. “제가 주님을 믿고 은혜를 받고 나니까 생각이 바뀌어졌습니다.” 그래서 “그게 뭡니까?” 그러니까 옛날에는 아내보고 항상 마음속으로 외쳤다는 거예요. ‘자기가 순종만 해봐. 내가 사랑하지 않나. 아니, 사랑을 받게 해야지 사랑해주지. 옛말에도 있잖아. 제 사랑 제가 받는다고.’ 이러고 외치면서 산거예요. 마음속으로. 아내의 고백은 더 재미있어요. ‘지가 사랑만 해 줘봐. 내가 순종을 안 하나. 언제 한 번 순종할 힘을 줘 봤어?’ 하고 평행선을 달리는 거예요. 그게 죄가 들어와서 결국은 가정을 깨뜨리는 거예요. 2부 예배 때 이 예화를 들었더니 이해를 못해서 안 웃더라고요. 그래서 3부 예배는 수준이 훨씬 더 높지 않을까?
천사가 어떤 남자를 찾아왔대요. “당신, 내 맘에 드는데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줄게요.” 그랬대요. 그 남자는 수지를 맞은 거지. “아유, 고맙습니다.” “첫 번째 소원 뭘 들어줄까요?” 그랬더니 “골프 좀 잘 치게 해 주세요. 질 때마다 자존심이 상해서 죽겠어요.” 천사가 “문제없습니다. 그렇게 해 드릴게요. 그 대신 아셔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당신 이미 결혼하셨죠?” “네.” “당신 원하는 축복은 주는데 부인은 두 배로 받게 됩니다. 그래서 당신은 이제 즉시 골프를 잘 치게 되는데 부인은 두 배 잘 칠 것입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하는 말이 “아유, 괜찮아요, 천사님. 어차피 우리 편 먹고 치거든요.” 그래서 이제 진짜 이루어져서 둘이 아주 골프를 잘 쳐서 둘이 편먹고 쳐서 다른 부부들을 늘 이겼어요. 어느 날 천사가 다시 나타나서 “자, 이제 두 번째 소원을 얘기해 보시죠.” 그랬더니 “천사님, 백만장자가 되게 해 주세요.” 그랬더니 “문제없습니다. 그 대신 당신의 아내는 이백만장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 괜찮습니다. 어차피 우리 같이 사는데요, 뭐. 그럼 우리 합해서 삼백만 장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루어졌어요. 그래서 남편은 백만장자가 되고 아내는 이백만장자가 되었어요. 그런데 아직 천사가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열심히 천사를 부르는 거예요. 세 번째 소원을 말하게 해 달라고. 그래서 천사가 “자, 그럼 마지막 한 개 밖에 안 남았는데 말해 보시죠. 뭘 해 드릴까요?” “천사님, 가벼운 심근경색을 주시옵소서” 왜 웃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분들 있어요. 무슨 상황이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고 있나? 설명해요, 넘어가요? 가벼운 심근경색은 죽어요, 안 죽어요? 그거 두 배는 죽을까요, 안 죽을까요? 됐죠? 굉장히 힘들게 만든 예환데. 결국은 이렇게 타락한 후에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서로를.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밟아서 자기 질서 속에 복종시키려는 권력의 투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어느 사회학자가 이런 부부의 갈등의 역사에 대해서 문헌학적으로 쭉 책을 썼는데 굉장히 두꺼워요. 핵심은 뭐냐면 이렇게 여성을 남성의 발아래 복종시키기 위해서 남자는 권력, 돈, 재산, 지금은 여성들이 “여보, 이번에 집 산거 두 사람 같이 이름 해 놓으면 안 돼?” 아니면 “이것 땅은 당신 이름으로 되어 있으니까 이 집은 내 이름으로 해주지.” 그럴 때 뭐 그럽시다, 맙시다. 이런 얘기 나오지, 삼십 년 전에 그런 얘기하면 신문에 나요. 아예 이빨도 안 들어가던 시대거든요. 그러니까 남성들은 그렇게 재산을 자기의 소유로, 자기 혼자 번 것도 아니잖아요. 아내가 해 준 밥 먹고 기운 나서 돈 벌었지. 그렇게 하고도 그런 소득이나 얻은 것들을 자기중심으로 해 놓고 그걸 무기로 해서 아내를 지배하려고 한 거죠. 반면에 여성은 성을 무기로 삼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러한 갈등, 자기의 질서 속에 상대방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은 죄가 들어와서 일어난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없는 사랑도 가능해졌고 사랑이 없는 결혼생활도 가능해지는 이런 비극적인 시대가 오게 된 거죠. 그래서 가정은 급속하게 본래의 아름다운 결속들을 깨뜨리고 파괴되어 가는 거죠. 이제 여기에는 원죄에서 비롯되는 문제들도 있고 사회적인 문제들도 있어요. 그게 산업화사회의 문제에요. 뭐냐면 예전에는 외부와 정보 교환이 잘 안 되는 거예요. 끊어져 있는 거죠. 그리고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요. 이 두 가지가 발달이 안 되어야지만 공동체라는 것이 안정적으로 형성이 되는 거죠. 그래서 옛날에 무서운 것은 쫓겨나는 거였잖아요. 그러나 지금은 쫓겨나는 것 하나도 안 무섭잖아요. 왜냐하면 공동체 자체가 자기의 삶의 기반이 아니기 때문에 어차피 쫓겨나든 안 쫓겨나든 거기가 삶의 기반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제 텔레비전 이런 것들이 발달되면서 거리 감각이 없어지고 전 세계에 대한 정보를 다 아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굳이 이 집단에만 소속되어야 하고 여기서 멀어지면 어떻게 되나 하는 두려움 같은 것들이 없는 거죠.
두 번째는 뭐냐면 교통이 발달되니까 이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사람들이 이동을 하게 되는 거죠. 장소적으로 서로 해체되어 있는 상태이고, 모여 있어도 언제든지 해체될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공동체적인 결속이 없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가족들도 이러한 이치로 말미암아서 가족만이 누리는 독특한 가족들끼리의 시간, 장소 이런 것들의 공유가 별로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서로 가족 구성원을 위한 헌신할 시간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이 결속들이 급속하게 깨지고, 또 하나는 뭐냐면 그러는 속에서 점점 더 자기중심이 되어가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가족이라도 자기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면 언제든지 서로 제명해 버릴 수 있는 그러한 상황으로 가게 되는 거죠. 뿐만 아닙니다. 산업화가 되면서 어마어마한 재화들을 생산해 내게 되잖아요. 이게 가족 해체의 심리적인 원인이 되는 거죠. 보십시오. 옛날에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물건은 우리 주위에 있는 게 다 사연이 있는 거였어요. 시어머니가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그릇, 시할아버지가 만들어 놓고 삼 대 동안 물려 쓰는 종, 안경은 우리 할아버지가 남겨 놓은 것, 이 책상은 내 삼촌이 나 시집 올 때 짜 준 것, 이렇게 해가지고 물건 자체가 귀했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사연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버리질 않고 계속 붙들고 있는 거예요. 못 써도 계속 붙들고 있는 거지요. 그 이유가 뭐냐면 첫 째는 사연을 가지고 있고 두 번째는 이런 재화를 또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어때요? 지금 집에 가서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물들을 보세요. 사연 있는 거 거의 없어요. 그냥 어느 날 마트에 가서 한 보따리 사서 확 쏟아놓은 것들이에요. 그거 쓰다가 맘에 안 들면 휙 갖다 버리고 시장에 가면 이것보다 더 좋은 것 갖다 놓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하나 사연이 없어요. 이런 물건 속에서 대량소비를 하며 사는 거예요. 이것이 매일매일 우리에게 암시를 주는 거예요. 무슨 암시를 주냐면 오늘도 그런 것 중의 하나라는 거예요. 인간도 그런 것 중의 하나라는 거예요. 특히 일회용품 같은 경우는 대표적인 거예요. 한번 쓰고 사연도 없거니와 있을 필요도 없이 한번 쓴 다음에는 휙 갖다 버리는 거죠. 이것이 우리에게 끊임없는 암시를 주는 거예요. 이걸 우리 인간관계에 대입을 하는 거예요. 사회심리학적으로 그런 상황이에요. 결국은 많은 재화들을 소비하면서 세상 살기 좋아졌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면에서 파괴되는 부분도 많이 있는 거라는 거죠.
IV. 부부와 가정
결국 부부라고 하는 것은, 부부와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내버려두면 완전히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완성해가는 거예요.
A. 서로를 완성함
그래서 서로를 도구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깊이 사랑함으로써 사랑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달으며 자기를 고쳐가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살을 에는 것처럼 힘든 과정이에요. 그걸 왜 하겠어요? 왜? 여러분하고 오래 살면 살수록 가정에 대해서 더 많이 배워요. 그런 거죠.
1. 서로를 도구로 삼지 않음
제가 목회잔데, 만약에 여러분들하고 생활하면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설교를 하고 목회를 하는 것은 이거를 딛고 어디를 도달해야할 더 높은 목표가 있다고 생각이 들면, 이 교회를 돌보고 목회하는 것이 나에게 방해가 된다고 생각이 들 때에는 더욱 힘들고 고통스러운 거예요. 지금도 교인들이 많이 있지만 대부분 다들 잘 아시지만 또 어떤 사람은 감사함으로 기도할 때에 기쁨이 있지만,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에 마음이 괴롭게 느껴지는 사람이 왜 없겠어요? 그렇죠? 그게 목회자인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을 때에는 그 자체가 아주 감사의 조건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고 그래서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산에서 흐르는 아름다운 물소리는 그 물들을 무수히 부딪치는 수많은 돌멩이들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거요. 그래서 그 물이 계곡을 휘돌아 와서 호수 아래 내려가면 시퍼렇잖아요. 멍이 들어가지고. 그래서 주님을 사랑할 때는 가끔 말을 안 듣거나 아니면 말씀의 젖을 먹다가, 애들이 엄마 젖을 먹다가 심통나면 엄마 젖꼭지를 확 물어버리잖아요. 그런 경우도 있거든요. 그러면 아프지만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구나. 내가 애쓰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구나. 그러면서 그것도 오히려 성숙의 기회가 되고 자기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런 마음이 사라지고 나면 마치 바람난 여자가 딸린 수많은 아이들을 보면서 이게 애물단지처럼 느껴지듯이 그 마음이 들게 되는 것 아니겠어요?
2. 진정한 자기실현
그래서 결국은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고 할 때 내 질서대로 저 사람을 이용하고 지배해서 내 만족을 얻는 수단으로 가족을 사용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그건 기본적으로 처음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고 오히려 내가 끊임없이 희생하고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새로워짐으로써 이렇게 함으로써 내 아내가 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도달할 수 없는 아름다운 상태에 도달하도록 돕고, 또 남편이 그렇게 되도록 도우면 그를 좋아하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나는 만족할 수 있다. 이게 바로 가정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에요.
B. 완성되는 인간을 보여줌
우리들이 여기에 이렇게 그렇게 해서 결국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완성되어갈 때 그렇게 완성이 되어가는 인간을
1. 가족들에게
2. 이웃에게
가족들에게, 이웃들에게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그들에게 나타내 보여주는 거예요. 이게 사실은 인간으로 태어난 가장 중요한 의무예요. 우리가 그렇게 신자 되기를 원하는 것은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런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를 닮는 것도 아름답지만
C. 개인보다 아름다운 공동체
개인보다 아름다운 공동체가 있어요. 그래서 아름다운 것들이 아름다움은 함께 어울리고 모여 있을 때에 아름다운 거죠. 애들 노래가 있죠. 꽃밭에는 꽃들이 피어 있고요. 유치원에는 우리들이 모여 있어요. 하나의 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종류가 다른 꽃들이 어우러져 있음으로 늘 예쁘지만 오늘 아주 예쁜 꽃꽂이가 된 것처럼, 한 사람의 아름다운 신자를 보면 아름답지만 이것이 다발처럼 함께 엮어진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가정이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엄마는 아빠 때문에, 아빠는 애들 때문에, 애들은 부모 때문에, 부모는 할머니 할아버지 때문에, 그렇게 한 다발로 아름답게 엮여져서 사람들에게 이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줄 때 그것이 훌륭한 전도가 되는 거란 말이죠.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먼저 부르시고 어떤 사람은 나중에 부르시고 이렇게 하셔서 예수를 믿게 만드셔요.
V. 결론
그들이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의지하고 변화되어 가면서 가족들 모두가 그런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어 가기를 하나님은 바라시는 거죠. 이 첫 걸음이 회심이에요. 그리고 그 둘째 걸음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화되어 가는 것이에요. 이 일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부르셨어요. 여러분들은 부디 이 가정에서 자신이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살아가는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섬김의 중심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렇게 개인보다 아름다운 이 꽃다발과 같은 가정을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1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1 (2009/05/03, 주일오전예배)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2 (2009/05/17, 주일오전예배)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3 (2009/05/24, 주일오전예배)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4 (2009/05/31, 주일오전예배)
4.구속사와 부모공경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Ⅰ.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중 하나입니다.
Ⅱ. 부모공경의 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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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십계명 속에서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이 세상에 베푸심에 있어서 부모공경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A. 구속사와 십계명
그래서 이 부모공경은 단지 가정의 행복만을 위한 계명이 아니라 이 타락한 인간 세상을 구원하셔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역사와 직접적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이 부모공경의 계명이란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제일 먼저 이 부모공경의 계명이 십계명 안에 나온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명백히 구속사와 십계명의 관계에 대한 이해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이 노아와도 언약을 맺으셨고 또 그 이전에는 아담과도 언약을 맺으셨습니다마는 이스라엘 백성,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실질적인 조상은 아브라함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신약 처음 시작은 ‘다윗과 아브라함의 세계라.’ 그리스도의 족보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을 하지 않습니까? 원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모르는 메소포타미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모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민족의 우두머리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이 일생동안 여러 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지만 그와 맺은 언약의 내용은 항상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은총을 베풀 것이고 그의 후손에게 복을 주셔서 만민으로 그 백성들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복을 받게 할 것이라고 하는 은총의 약속입니다. 거기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지켜야할 계명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 아브라함이 살아야 할 언약상의 의무보다는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고 그에게 베풀어주실 일방적 은총의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약속의 실현을 우리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속에서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한 집안에서 점점 번성하여 커다란 민족을 이루게 되었고 그 민족이 바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드디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 내시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을 그들에게 주겠다는 약속의 실현이죠.
오늘 이 십계명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 홍해를 건넌 후 도착한 시내산 아래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애굽의 오랜 습속들을 떨쳐내고 거기서 일 년 가까운 기간 동안을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배워가던 시기였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십계명을 주시는데, 이 십계명은 바로 아브라함 언약과 대조를 이루는 모세의 언약의 형태로 주어졌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후손들과 맺을 언약을 그에게 주셨지만, 이 모세의 언약은 모세를 중보자로 해서 이제는 집안 식구들이 아닌 한 민족 대 하나님으로 해서 관계를 맺으시는 언약 의식의 체결인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이제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 볼 수 없었던 아주 새로운 형태의 언약의 요소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 언약은 본질상 계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계약이 맺어지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많은 축복을 줄 것을 약속하시고 그 대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삶의 표준들을 제시받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언약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무사항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의 형태로 주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이 십계명에 대한 구체적인 작은 명령들로 이루어지게 되어서 이 전체가 모세의 율법이 되는 것이니, 모세의 두꺼운 율법의 핵심은 바로 이 십계명으로 집약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이제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계약적 특징이 도입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명백한 삶의 표준을 그들에게 제시해 주시고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살고 순종하면 복을 주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불순종하면 계약을 파기한 자로 여겨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준엄하게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는 맹세까지 함께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는 한없는 축복만 있었지만 이 모세와의 언약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신앙적으로 성숙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신앙을 토대로 축복의 약속과 저주의 칼을 함께 제시하시며 그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할지를 선택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죠. 이러한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선택하면 율법을 모두 지킬 것이라고 생각해서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을 따라 살 수 있는 돕는 은혜들을 하나님께서 많이 주셨습니다. 선지자와 제사장과 이러한 제도들을 세우시고 또 모세와 같은 지도자들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또 살지 못했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제사의 길 까지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질 충만한 성령의 은혜에 비하면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이렇게 은혜의 수단들을 허락해 주신 것이죠.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민족과는 다른 신앙, 다른 생활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든 민족 가운데 거룩한 백성들로 구별하여, 그들과 관계를 맺고 계신 거룩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러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B. 십계명과 부모공경
이 부모공경의 계명이 십계명 속에 위치한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십계명과 부모공경의 계명이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먼저 위치를 살펴보면 그 앞에는 하나님을 향한 네 가지 계명이 나옵니다. 다른 신을 있게 하지 말라, 우상을 만들거나 절하지 말라,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이 네 가지 명령은 하나님을 향해 지켜야 할 명령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명령은 엄격한 종교적인 순종의 의무를 동반한 대신 적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제 여섯 번째 계명부터 주어지는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 탐심 이런 것들을 금하신 명령은 모두 아래에 있는 인간들끼리 관계를 하며 살아야 할 그러한 계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아래 계명과 위의 계명 그 사이의 연결 고리로서 부모공경이라는 계명이 다섯 번째로 주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 다섯 번째 계명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명령의 돌 판의 내용과 또 한편으로는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덕스러운 인간의 의무, 이 두 개의 연결 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모공경의 의무인 것입니다.
1. 약속 있는 첫 계명
그러면 부모 그 자체가 사랑인데, 그렇다면 그 부모공경의 의무가 왜 목사님은 고리의 역할을 한다고까지 격상해서 생각하십니까? 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이제 부모공경의 계명은 대신 적 계명이 아니라 대인 적 계명입니다. 인간 사이의 계명 중 첫 번째 자리에 있는 것이죠. 그러나 여기에 미묘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이 부모 자식이라고 하는 가족의 제도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전체 사이에서 맺어진 언약관계를 표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의 관계는 종과 상전의 관계가 아닌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 언약의 핵심이 이 언약을 준수하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으로서 너희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으로 내 자식이 될 것이니 부모가 자식을 사랑과 정의로 대하는 것처럼 나 하나님은 너희를 한없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돌볼 것이라고 하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모공경에 대한 대의는 대인 적 명령과 대신 적 명령의 사이의 연결고리의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은 매우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약속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죠. 앞에 있는 네 가지 계명은 하나님 앞에 십계명 안에 구체적으로 어떤 축복을 약속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큰 벌이 임하겠지만 어떤 상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죠. 대신 적 명령 뿐 아니라 대인 적 명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인하지 않으면 부자가 되게 해 주마, 간음하지 않으면 이백 살까지 살게 해 주마, 이런 약속이 없습니다. 그저 그 일을 안 하면 안 하는 겁니다. 그것으로서 인간의 도리를 한 것이죠. 그러나 이 부모공경은 매우 중요한 약속을 물고 들어옵니다.
2. 땅과 생명
그 약속이 바로 네가 부모를 공경하면 이 땅에서-네게 준 땅에서 오래 살겠다, 즉 생명이 길게 되리라는 약속이 들어오는 겁니다. 오늘날같이 땅과는 별로 상관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 계명입니다. 물론 땅은 옛날보다 더 큰 축복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아무리 돈이 없다고 해도 “그저 땅이 조금 있습니다. 서울 중심가에 그저 십만 평 가지고 있죠.” 하면 우린 돈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동성이 있어서 언제든지 현금으로 바꿀 수가 있기 때문이죠. 이처럼 오늘날은 땅 자체가 현금이라는 유동성과 연결되어서 생각되지만, 이것은 산업화 사회에서의 일이고 농경사회에서의 이 땅은 유동성으로서의 물질을 대신하는 부 라기 보다는 자기가 먹고 사는 삶 의 터전이에요. 그러니까 이 땅을 기초로 해서 계급이 생겨나게 되고, 이 땅을 가지고 있는 소유주는 노예를 부리는 사람이 되고, 이 땅에서 목숨을 연명하고 사는 사람은 하층민이 되거나 노예가 되는 것이죠. 이것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땅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에요. 소유는 오직 하나님 홀로 가지고 계시고 모든 사람은 이 땅을 세내어서 살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고전적인 국가의 개념은 그렇지가 않아요. 그것이 바로 가산제 전제 국가의 개념이니 이는 나라의 모든 땅이 왕의 집안의 것이라 생각하고 나머지 모든 신하들과 백성들은 왕의 집안에서 그 땅을 빌려 쓰는 것이에요. 많이, 오래도록 그 땅을 쓸 수 있도록 권한을 빌린 사람들은 상층 계급이 되고 그것이 없어서 언제든지 그 땅을 쓸 수 없도록 땅에 대한 연관이 불확실한 사람들은 종이 되었던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그렇게 비참한 노역의 삶, 노비의 삶을 살았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에게 허락된 땅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땅을 준다고 하는 이 약속은 우리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축복이었던 것이죠. 바로 이러한 큰 축복을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들에게 현상금으로 거신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 자신이 이 계명을 얼마나 중요한 계명,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구현하고 구속을 통해서 그 본래의 목적으로 인간을 돌이킴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이방에게 구원의 계시를 알려주는 도구로 사용하심에 있어서 이 계명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실감하게 되는 것이죠.
또 하나는 생명이 길리라는 약속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비상하리만치 목숨이 길게 이어지는 장수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제 팔십을 넘는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팔십이 넘은 것을 기이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 얘기를 들으니까 이제 육순 그런 거 안 한다고 그러고 환갑도 안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환갑 먹어서는 경로당에서도 안 받아주니까 그게 무슨 새삼스러운 인생의 경사라고 생각을 안 한다는 거죠. 그래서 오히려 칠순을 하는데 요즘 추세로는 칠순도 너무 흔해서 그거 하는 사람들 찾아다니려면 무릎이 아플 정도니까 그것도 너무 허례허식이 아니냐는 반성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래서 그저 환갑은 팔십 세 쯤 하고 구십 세를 맞이하면 그건 또 요즘 많이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드문 일이니까 그 나름대로 희소성이 있다, 이런 추세로 간다고 합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저 환갑이 그렇게 대단한 자랑거리가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 예전에 보면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잔치가 되게 많았고 절차가 많았습니다. 그중의 하난가 삼칠일 아닙니까? 이십일 일 동안 아이를 낳으면 숯하고 고추하고 걸어서 널어놓은 금줄이죠. 그게 뭐냐면 이십일 일 동안 이 아이가 살아있기 매우 힘드니 감염되지 않도록 잡인은 출입을 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아이를 낳았지만 생명에 대한 불안을 이야기 하는 것이죠. 요즘은 백 일 하는 사람 거의 없죠. 그러나 옛날에는 백 일 동안 이 아이가 살았으면 앞으로 살 가능성이 매우 많기 때문에 경사할 만한 일이다, 이게 백 일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돌이 되면 이제 앞으로는 계속 살걸? 하는 마음의 안도감을 가지면서 축하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어렸을 때 까지만 해도 아이들을 낳으면 부모가 즉시 출생신고를 안 했습니다. 왜냐하면 출생신고하고 나서 얼마 안 있다 돌도 안 돼서 죽으면 또 가서 사망신고하면 빨간 줄을 그어야 해요. 그래서 이것저것 다 가슴이 아프니까 충분히 살았다고 믿을 때 까지, 한 네 살 될 때 까지 출생신고를 안 하고 있다가 가서 하려면 금방 태어났다고 출생신고를 해야 되는데, 얘는 벌써 겅중거리고 뛰어다니는 거죠. 그럼 할 수 없이 부모가 소양이 부족하고 무지하여 출생신고 하는 것을 잘 몰랐습니다. 각서 하나 쓰고 소급해서 언제 태어났다고 출생신고를 하면 받아주고 그랬습니다. 1940년대 한국 남성의 평균연령이 마흔 둘 밖에 안 됐고 17세기 청교도 시대를 되돌아보면 그때에 신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의 평균연령이 35세 밖에 안 되었답니다. 남자가. 여자는 좀 더 살았죠. 원래 여자가 모질거든요. 여자가 오래 삽니다. 그러니 인생이 보통 급한 게 아니죠. 그래서 보면 열세 살이면 대학을 들어가요. 그리고는 벌써 스무 살이면 대학원을 다 마치고 심지어는 박사까지 다 마치고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도대체 게임이나 하고 있을 나이에 어쩜 이렇게 훌륭하게 글을 쓰고, 사상이나 이런 것들이 엄청 성숙하고, 그리고 벌써 스무 살만 되면 커다란 일을 맡아서 나라를 다스리거나 돌볼 수 있는 자리에 오르게 되잖아요. 장군이 되고. 이런 놀라운 것들이 우리 눈에는 기이하게 보이지만 그들의 인생의 시간표로 보게 되면 참 이해가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열네 살에 우리 할아버지가 장가를 드셨다고 그러는데, 보면 사십에 일생을 마쳤는데 만약에 열다섯 살이나 이렇게 장가를 들었다고 그러면 팔십까지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게 절대 빨리 든 게 아니고 서른 댓에 장가를 가는 거예요. 서른다섯 살에 죽는다고 그러면 열일곱 살에 장가를 들어도 팔십 살에 죽는 인생에서 사십 세에 장가를 간 거요. 그러니까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당시의 사람들보다 훨씬 불확정한 시대에 살고 있었어요. 끊임없는 재앙과 전쟁, 그리고 저항할 수 없이 밀려오는 질병들 속에서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었죠.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오래 살 수 있도록 장수를 허락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현실적인 축복이었겠습니까? 당시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끌리는 최고의 축복을 제시하시면서 부모를 공경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죠. ‘아!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렇게 부모를 공경하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구나!’ 이제 부모가 하나님을 본받는 거룩한 백성이 되고 그 부로를 자식이 진실하게 공경함으로써 지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고, 그렇게 해서 자식은 다시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 공경을 받기에 합당한 거룩한 부모가 되어가는 이 가정안에서의 계대적인 연결을 통해서 한 가정은 거룩한 가정이 되고 그 가정의 연합을 이루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는 이러한 부모 공경과 가정의 대의를 모르는 이방의 민족과는 구별이 되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신 거요. 그래서 이들로 하여금 주님을 향한 공경이 가정 안에서의 질서와 사랑의 연합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그들이 다른 모든 이방의 백성들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백성이라는 표식이 될 수가 있었던 거죠. 그것을 이방백성들이 보고 그들의 행복한 삶 한 가운데 자신들에게는 없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그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구속의 역사를 이어가시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사용하신 방법이었던 것이에요.
Ⅲ. 공경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도대체 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A. ‘카베드’(דבכ): 잠 3:9, 사 43:23
오늘 공경하라는 이 계명은 ‘카베드’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무겁다’라는 상태 동사에서 왔습니다. 이 무겁다는 이야기가 정신적인 의미에서 사용될 경우에는 남이 없는 중요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중되는 상태를 의미하죠. 바로 이 ‘카베드’라는 단어에서 영광이라는 단어 ‘카보드’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광과 공경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죠. 이런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남이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들을, 물질이나 명예 정신적인 특성이나 덕의 힘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함부로 자신을 대할 수 없게 하는 무게가 되는 것이죠. 그것의 효과를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부모를 공경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부모를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그 부모에 대한 두려움과 무게감을 갖고 그를 영광스러운 존재로 생각하며 자기를 낮춘다는 의미가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이죠. 그래서 잠언 3장 9절, 이사야 43장 23절 등에 보면 이 ‘공경하다’라는 단어가 똑같이 하나님께도 사용이 됩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공경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돈을 가지고 계시고 명예를 가지고 계시고 땅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은 아니죠. 만약에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참된 구원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진정으로 공경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당신 자신의 어떤 특성 때문에 우리들이 그 하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시간과 관련해 영원하시고, 장소와 관련해 어디든지 계시고, 또 속성에 있어서는 우리를 향해 자비하시고 의로우시고 신실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런 속성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 때문에 하나님이 물리적으로는 어떤 돈이나 물질, 권력을 소유하지 않아도 그것보다도 중요한 근원으로서 하나님을 존경하고 하나님을 무겁게 여기는 것이죠. 이게 공경의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참된 지식에서만 하나님을 향한 공경이 나오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지 못하는 무지 속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공경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배에서 설교와 기도와 말씀 이 모든 지식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이유는 그 배우는 한도 안에서만 그분의 무거움을 인정하고 그분을 공경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면 이 ‘공경하다’라는 말이 하나님께 적용될 때에는 육신의 눈으로는 물질이나 돈, 명예가 안 보이지만 영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보다도 뛰어난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무겁게 여기고 공경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부모는 과연 이런 존재입니까? 아니죠. 만약에 우리의 부모가 이렇게 하나님과 똑같진 않지만 하나님을 흡사하게 닮아서 의롭고 진실하고 신실하고 긍휼이 넘치고 사랑이 무한해서 우리가 자식으로서 그 부모에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고상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면 공경하지 않을 자식이 어디 있겠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부모에게 높은 인격과 뛰어난 학식, 그리고 모든 사람위에 뛰어난 권력, 또 거기에다 보태서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유산도 많이 가지고 있다면 그 부모를 공경하지 말라고 그래도 “나는 할 거야.” 라면서 공경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부모는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닌 경우가 훨씬 더 많아요. 죄가 들어온 이후로는 이러한 일들이 더 심해지게 되었던 것
이죠. 하나님의 경륜은 이러합니다. 부모가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부모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로부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배워갔을 것이고 자기가 접하는 자연의 모든 만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배워갔겠죠. 하나님과 개별적인 교제를 통해서도 주님의 성품과 거룩함을 배워나갔을 것이고, 이후에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지 그렇게 하나님을 충만하게 알아간 부모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능가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거죠. 그러면 자식이 부모보다 자연적인 면에 있어서 뛰어난 지성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죄가 없는 상태에서 충만하게 들어오는 계시의 빛의 크기는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보다 훨씬 더 뛰어나게 축적되었을 것이고 자식은 태어나서 그 부모 안에 있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지식들을 통해서 부모를 부모이기 전에 스승처럼 배워갔을 것이라는 거죠. 이런 관계 속에서 자식은 부모를 통해서 어린 시절에 하나님이 어떤 분 이신지를 배워가게 되고 장성한 후에는 하나님을 배우면서 또한 부모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를 배워 그래서 부모를 향한 사랑이 하나님께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부모에게로 상승하고 하강하는 가운데 자식과 부모 간에 사랑의 일치를 이루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가정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었고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계획은 아주 훌륭하게 불멸하는 가운데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부터 이 관계는 모두 깨뜨려지게 되었던 거죠. 부모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공경하고 사랑하는 그 속성을 배우는 사람이 될 수 없었고, 또 설령 그렇게 올바로 배운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자식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싫어하고 마음에 원수 맺었기 때문에 그 참된 부모를 통해서 비치는 진리의 빛을 거부하고, 이렇게 해서 부모와 자식이 모두 타락함으로 참된 인간의 자리에서 이탈하게 되어 부모는 참 부모가 될 수 없었고 자식은 참 자식이 될 수 없게 되면서 이 가정은 파괴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속성과 공경의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B. 속성과 공경
즉 이 부모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속성을 알면, 신앙으로 그 속성을 이해하게 될 때에 하나님 앞에 하나님 앞에 자기가 정말 미천한 존재라는 사실,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을 찬송하며 공경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배워야할 가장 많은 지식은 하나님의
1. 속성 : 공경의 원인
속성과 이 속성이 우리의 삶 속에서 행사되는 방식이에요.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 가는 것,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중심적인 것이죠. 이렇게 하나님의 속성을 배우고 알아 가면 주님을 공경하게 되고,
2. 공경 : 속성을 닮게 함
이렇게 주님을 공경하게 될 때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속성을 미약하나마 닮아가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타락한 이후에는 더욱 더 절실하게 필요한 사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가정의 회복을 노래하고, 가정의 회복을 당연하다는 것을 아무리 정치적인 구호처럼 내걸고 외쳐도 가정은 급속히 파괴되어 가고 있는데, 이런 정치적인 구호로는 가정을 지킬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에요. 이것 가지고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특히 산업화 사회가 되어 가면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인간의 이기적인 죄악과 욕망은 더욱 더 훌륭한 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산업화 시대를 살면서 가족 구성원들은 이제 격자간의 거리를 왕래하고 더 많은 사람들과 이익의 관계를 맺으면서 생산 활동에 종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너무나 많은 시간을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 쏟아 붓게 되고 가족 구성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바깥에서의 삶 속에 몰두하고 거기에서 주어진 의무를 감당함으로 경쟁의 사회에서 이탈되지 않기 위해서 헌신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가족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여유를 점점 상실하게 되는 거죠. 이렇게 하면서 가정은 이제 마치 가족들과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산업화 사회에서 이익을 맺는 관계와 다른 하늘에 기원을 둔 관계라는 사실이 사라지고 이제 이 가족도 자기의 인생의 실현을 위한 이익의 관점에서 이용할 공동체로 간주를 하는 거죠.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공동체가 자기의 인생의 행복을 위한 이익을 주지 못할 경우 언제든지 폐기하듯이 가족들의 관계도 이제 그렇게 해도 된다는 암시를 받게 되는 거죠. 우리가 이용하는 산업화 사회에서의 소비 생활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그 수많은 일회용품,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하고 편리하지만 아무 사연이 없는 그런 수많은 물건들을 낭비하고 쓰는 가운데 이렇게 인간도 우리의 인생의 많은 행복에 기여하는 사물 가운데 하나인 것처럼 끊임없이 암시를 받으면서, 이익에 따라서 관계들을 끊고 포기하게 되는 거죠. 미래에는 어떻게 될 것이냐? 가족 관계는 완전히 와해될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가족관계가 와해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힘겹기 때문에, 배우지를 못하기 때문에 점점 가상의 공간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에요. 저의 이 예고가 저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죽고 나서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한 번 이루어지는지 두고 보십시오. 이 가족 관계를 위협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로봇의 출현이라고 저는 보는 것이죠. 애완견을 기르는 풍속이 놀랍게 확대되고 있습니다. 벌써 20년 전에 미국에서 일 년에 고양이 사료로 수입하는 것만 일조 원 가까운 수입액을 자랑했습니다. 우리나라도 통계를 본다면 아마 여러분들도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애완견들, 아니면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이 일상화되고 사람들은 점점 결혼하지 않으려고 하고, 결혼해도 가족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 이러한 풍조들이 생겨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이게 바로 아까 말씀드린 사람들 사이의 단절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정하신 가정의 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파괴에요. 이것이 산업화 사회에서 미친 듯이 우리의 번영을 위해서 치르는 희생의 대가예요. 그래서 미래에는 이런 시대가 올 거라고 저는 예고합니다. 아마 수많은 로봇들이 생겨나게 될 것이고 정교하게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로봇, 남편로봇, 아이들 로봇, 부모로봇, 밥하고 빨래하는 로봇, 노래 불러주는 로봇, 함께 성생활 하는 로봇까지 생겨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은 저의 이 예고가 황당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지나온 인류 역사의 발걸음, 특히 19세기 이후의 이 산업화 사회의 발전의 과정이 이런 예상을 가능하게 만들어줍니다. 더 할 얘기가 많습니다만 넘어가겠습니다.
이렇게 위협을 받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이제 우리의 가정이 참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로 돌아와야 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올바르게 되면 교회는 저절로 거룩해 집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여러분들이 진실로 하나님 보기에 아름다운 교회의 한 지체가 되면 여러분의 가정은 아무리 망가졌어도 여러분 때문에 고쳐집니다. 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용하셔서 그렇게 고쳐나가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필요한 것이 어쨌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인데, 문제는 공경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가족 관계가 깨뜨려진 것이죠. 공경이라고 하는 것은 그를 지극히 존중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우러나오는 그를 무겁게 여기는 그러한 마음의 태도예요. 그런데 부모를 그렇게 여길 수가 없어요.
Ⅳ. 먼저 네 부모와 화해하라
그래서 우리가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이 공경이기 이전에 자기의 부모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먼저 네 부모와 화해하라는 명령을 우리들이 들어야 되는 것이죠.
A. 이해와 용서
여기 필요한 것이 이해와 용서입니다. 이 이해는 우리들이 둘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굳이 하나님을 몰라도 인생을 살아보면 부모가 자신에게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식으로서 어렸을 때에는 자신들은 약한 아이일 뿐이지만 부모는 완전하고 위대한 존재라는 환상을 갖습니다. 이러한 환상과 부모에 대한 높은 평가는 부모가 거기에 어울리는 삶을 살지 않을 때 파괴적인 실망으로 밀려오게 되고 이것은 바로 그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안겨주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자신도 성장해 보면서 어른이 된다고 하는 것이 별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어른 속에도 사실은 자기조차 어떻게 못하는 많은 연약함이 있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깨닫게 되었을 때 인간적으로 그 부모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렇게 부모 속 썩이면서도 지 잘못은 생각 안하고 부모가 뭐도 안 해주고 뭐도 못 해주었다고 그러다가 지가 시집가고 장가가서 똑같은 새끼 낳아서 똑같은 괴로움을 당해보면 비로소 부모의 눈물의 의미를 알게 되고, 그렇게 자신이 부모로 말미암아 아플 때에 사실은 부모의 마음이 어땠는가 하는 것을 터득하게 되요. 그래서 사도 바울도 여자가 해산을 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어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가서 자식을 낳고 고생을 해 봐야지만 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인간다운 인간이 될 거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모와 충분히 화해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죄인의 연약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해요. 그것이 바로 이제 우리의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만 그것이 깨달아지는 것이죠. 우리가 우리와 이 세상에서 만나는 우리에게 고통을 준 많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심지어는 원수까지 용서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런 원수 된 자들이었는데 주님이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용서해준 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와 원수 맺고 상처를 준 사람들을 그렇게 용서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알고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나면 죄인이 얼마나 무력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부모도 주님을 잘 믿고 주님의 은혜 아래서 살지 않았더라면 어쩔 수 없는 존재였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의 부모가 만약에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더 많이 이해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도 주님을 몰랐더라면 여러분의 자녀에게 여러분의 부모가 준 것 보다도 더 큰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 우리 부모는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집사고 권사고 장로였습니다.” 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면 내가 말하겠습니다. 믿는 게 다 믿는 겁니까? 집사가 다 집사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믿어서 교회에서 직분이 올라갔다는 게 그게 거룩의 크기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 여러분들은 스스로 너무 잘 알지 않습니까? 여러분 중에 누가 감히 나는 집사기 때문에 대단하고 권사기 때문에 엄청나며 구역장이기 때문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거라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면 그저 힘이 없고 연약해서 매일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는 그런 비참한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부모가 신자라도 그런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입술로는 주님을 부르고 교회에서는 이런 저런 일로 봉사하면서도 뒤에서 그런 직분에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산 적이 l여러분은 얼마나 많았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삶들을 은혜가 떨어져서 살 수 있었다면, 부모를 여러분들은 왜 그렇게 위대한 분으로 보십니까? 하나님 이외에 위대한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하여야 한다는 의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이렇게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이 순간에도 여러분들은 수많은 의무에서 이탈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집의 가장입니다. 왜 의무에서 이탈했습니까? 한 남자의 아내입니다. 왜 그만을 순종하고 사랑해야 할 의무에서 이탈합니까? 한 여자의 남편입니다. 과연 여러분들은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고 존중했습니까? 여러분도 교회에서 구역장이고 직분을 맡고 있고 교회의 성도입니다. 여러분들은 과연 성도로서, 구역장으로서, 직분을 맡은 자로서 합당하게 그 자리에 서 있습니까? 그렇지 못한 때가 많기 때문에 오늘도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눈에 이슬이 맺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끊임없이 할 수 없는 죄인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서, 그 사랑을 힘입어 오직 주님의 은혜 때문에 조금 씩 조금 씩 주님 닮은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과정에서 그 성화의 길이 더디기 때문에 우리가 남편으로서 남편답지 못할 때가 있고 아내로서 아내답지 못할 때도 있고 부모로서 부모답지 못할 때가 있는 것처럼 또한 우리의 부모도 그러한 연약함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하나님 앞에 상처 입은 한 어린 양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부모를 깊이 공경하고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B. 사랑과 공경
그래서 우리에게 또 하나 다가와야 할 것이 사랑과 공경입니다. 우리는 섭리를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아파보이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시고 가장 큰 슬픔인 것처럼 보이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살을 에는 것 같은 깊은 슬픔과 견딜 수 없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최근에도 몇 년 동안에 가슴 아프게 자녀를 하나님 앞에 여읜 가정이 우리 교회에도 몇 가정이 있습니다. 전 그 슬픔을 보면서 아주 오래 전에 제가 봉사활동 갔던 시골 교회에서 들은 간증이 기억이 납니다. 저희가 가서 식사 대접을 받았던 그 집은 강원도 산골에 있는 작은 교회를 여러 해 섬기고 있는, 그 교회의 집사의 가정이었습니다. 그저 지금 생각하면 서른 댓 되어 보이는 그런 나이의 부부가 사는, 그렇게 부유하지 않은 그런 집안이었습니다. 그 부부가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지 몰라요. 그래서 그런 열심 있는 신앙생활의 이유와 근거를 이야기하고 나누는 가운데 그 집에 네 살 난 아주 예쁜 딸이 있었어요. 그러니 그 부모가 그 자식이 얼마나 눈에 넣을 것처럼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웠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무슨 뜻이 계신지 그 아이를 불식간에 사고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때까지 그 부부는 그렇게 뛰어난 열심히 별로 없이 교회에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식을 떠나보내고 나서 그 부모가 너무 가슴이 아파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신앙도 별로 없으니까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그래도 남편에 비해서 신앙이 좀 있는 이 자매의 마음속에 큰 두려움이 밀려왔어요. 그게 뭐냐면 이 아이를 신앙으로 잘 가르치지 못했다는 것과 이 아이가 구원받지 못했으면 어떡할까 하는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이 자매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부부 에게 똑같은 확신과 같은 종류의 꿈을 보여주셨는데 그게 뭐냐면 어느 날 이 아이가 천국에서 아주 예쁜 옷을 입고 활짝 웃는 모습으로 손을 흔들면서 “엄마 아빠, 나는 천국에서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있거든. 나중에 여기에서 만나.” 하는 선명한 꿈을 특별히 그 아빠에게 꾸게 해 주신 거예요. 그러면서 이 부부가 넘치는 확신을 갖게 된 거예요. 그러면서 거기에서 교회까지가 걸어서 삼십 분 정도 되는 거린데, 그 시골에 보안등 하나 제대로 없는 거리를 그 추운 겨울에도 네 시 반에 하는 새벽기도를 그 부부가 일 년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간다는 간증을 제가 들었어요.
보십시오. 하나님은 겉으로는 아픔처럼 보이는 것을 통해서 사실은 하나님이 정말 우리에게 꼭 주셔야 할 아름답고 행복한 것들을 주시는 징검다리가 되게 하는 경우는 너무나 많습니다. 섭리를 믿는 우리의 신앙은 그래서 지난날에 받은 상처를 인해서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상처 속에서 자랐던 다윗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오히려 그것 때문에 나를 영접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고백과 같이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이전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가족 속에서 가슴 아프고 쓰라린 수많은 일이 있어도 그 상처 때문에 오늘을 힘겹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큰 섭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들의 그 불신앙 때문에 우리들이 그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지난날 부모로부터 받은 화해하기 어려운 상처가 있다면 그 부모님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그렇게 육신의 부모가 상처를 준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상처와 고통을 주었지만 여러분의 육신의 아버지를 대신해서 하늘 아버지가 베푸신 은혜를 기억해 보십시오. 하늘 아버지가 그렇게 용서해 주신 사랑을 기억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부모는 여러분들에게 많이 해주지 못했지만 부모의 사랑 없이 살았던 여러분들의 날 들 동안 하나님이 친히 여러분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홀로 있을 때에도 육신의 아버지는 우리에게 없었지만 영의 아버지는 우리 옆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어머니처럼 우리를 보호하시고 부모에게로부터 받지 못한 많은 결핍이 오히려 그래서 주님의 사랑에 목 매이는 그러한 간절한 신앙으로 이어지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부족한 것이 없는 부모 밑에 살았더라면 아직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찾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주님의 큰 섭리를 받아들이고
Ⅴ. 결론 : 별처럼 빛나라
(찬양)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런 고백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큰 사랑을 가슴에 안고 우리의 부모와 화해하고, 상처받은 일은 용서하고, 그런 상처를 간직하며 사느라고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많은 날들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남은 날들이라도 부모를 잘 공경할 수 있도록, 그래서 오랫동안 그분들은 우리의 아픔이 되었지만 우리의 이름은 그분의 마음에 노년의 위로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사는 것이 가정에 내려오는 모든 아픔을 끊는 비결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들이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면서 사는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고 십자가 사랑을 아는 사람들의 가정이 어두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그렇게 살게 하시기 위함이에요. 여러분 모두가 이런 주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사랑으로 세우는 가정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