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가정
(2010년 설교모음)
2010. 05. 09 주일오전 예배
2010. 05. 12 수요예배
설교기간|201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2010. 05. 16 주일오전 예배
목 차
2010. 05. 16 주일오후 예배
2010. 05. 19 수요예배
2010. 05. 23 주일오전 예배
1. 제일 큰 선물(잠22:6) 2010.5.9 주일오전 1
2. 아비의 마음을 돌이키는 하나님(눅1:17) 2010.5.12 수요예배 10
3.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삼하18:33) 2010.5.16 주일오전 18
4. 아이에게 법이 되라(잠4:1-3) 2010.5.16 주일오후 26
5. 네 자식을 사랑하라(눅15:20-21) 2010.5.19 수요예배 32
6. 아내와 남편(벧전3:7) 2010.5.23 주일오전 40
7. 결혼과 독신(창2:18) 2010.5.23 주일오후 51
8. 네 형제와 화해하라(창33:3-4) 2010.5.30 주일오전 64
아름다운 가정 1
2010. 05. 09 주일오전 예배
2010. 05. 12 수요예배
2010. 05. 16 주일오전 예배
2010. 05. 16 주일오후 예배
2010. 05. 19 수요예배
2010. 05. 23 주일오전 예배
2010. 05. 30 주일오전 예배
아름다운 가정 1 2010. 5. 9 주일오전 예배
제일 큰 선물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언 22:6).
I. 본문해설
II. 빗나간 자녀사랑
III. 자녀 위한 최고의 선물: 가르침
A. 진리를 알도록
B. 모본을 보도록
C. 사랑을 받도록
IV. 결론과 적용
아름다운 가정 2 2010. 5. 12 수요예배
아비의 마음을 돌이키시는 하나님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눅 1:17).
I. 본문해설
II. 자식과 아비의 마음
A. 자연적 부성
B. 회복된 부성
III. 은혜의 힘이 필요함
IV. 결론
아름다운 가정 3 2010. 05. 15 주일오전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33)
I. 본문의 배경
II. 악한 아들의 죽음
III. 선한 부모의 눈물
IV. 하나님의 더 큰 사랑
아름다운 가정 6 2010. 05. 23 주일오전 1-3부 예배
아내와 남편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I. 본문해설
II. 아내는 누구인가?
A. 연약한 그릇
B. 생명의 유업을 공유할 자
III. 지식을 따라 사랑함
A. 동거함
B. 귀히 여김
IV. 결론
아름다운 가정 7 2010. 05. 23 주일오전 4부 예배
결혼과 독신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I. 본문해설
II. 결혼 제도의 신적 의도
A. 정복과 다스림
B. 남녀의 창조
1. 우열이 아님
2. 두 빛깔처럼
III. 결혼과 독신: 소명
IV. 결론
아름다운 가정 8 2010. 05. 23 주일오전
네 형제와 화해하라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창 33:3-4)
I. 본문의 배경
II. 얍복강에서 입맞춤
A. 네 형제와 화목하라
B.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함
III. 형제 사랑의 길
A. 자기사랑을 버림
B. 하나님 사랑의 감화
C. 십자가를 생각함
IV. 결론
아름다운 가정 1
2010. 05. 09 주일오전 예배
2010. 05. 12 수요예배
2010. 05. 16 주일오전 예배
2010. 05. 16 주일오후 예배
2010. 05. 19 수요예배
2010. 05. 23 주일오전 예배
2010. 05. 30 주일오전 예배
1.제일 큰 선물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언 22:6).
I. 본문해설
오늘 성경 본문은 우리가 자녀들을 어떻게 올바르게 기를 수 있을지를 가르쳐 줍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일 적에 가르쳐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늙어도 그 길을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 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둔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인생의 사명은 자녀들을 올바른 사람으로 기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바르게 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계획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를 하나님 앞에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우리에게 맡겨준 자녀들을 올바로 가르치고 교육시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적인 본능이기도 하고, 또 주님이 종족의 보존을 위해 주시는 본성이기도 합니다. 다만 동물들에게는 이 자연적인 본성을 거스르는 또 다른 본성이 없지만,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본성을 거스르는 또 다른 욕망의 본성이 있어서 부모가 부모의 노릇을 바르게 하지 못할 때에는 짐승만도 못한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사랑하는 것은 그것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II. 빗나간 자녀사랑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자녀들을 빗나간 방식으로 사랑함으로써 자녀의 갈 길을 그르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알다시피 1953년 전쟁이 끝나고 베이비붐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수없이 태어나게 되었고, 또 태어난 그 아이들을 부모들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희생을 감수하며 아이들을 교육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집안에서 자라나는 많은 아이들은 서로 사회를 형성하고 그리고 누구도 그 가정 속에 살면서 자기가 독보적인 존재이고, 독존적인 존재라는 사고방식을 갖기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라면서 양보하고, 타협하고, 봉사하고, 희생하고 하는 것들을 어려서부터 배워 왔습니다. 그러다가 산아제한이 실시되기 시작하면서 이제 핵가족화가 촉진되었습니다. 산업사회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하면서 이제 부모로부터 분가하는 것이 일상적인 것이 되었고, 아이들의 수는 하나 혹은 둘로 줄어들게 되었고, 물질생활은 점점 윤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제 부모들에게 공경하던 것을 아이들에게로 옮겨가게 되었고, 아이들은 많은 다가족 사회에서 생활하는 대신 단출한 핵가족 사회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속에서 부모들은 아이들을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이기게 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교육에 투자하게 되었고, 가난을 대물림 해주지 않기 위해서 많은 풍족한 환경 속에서 아이들을 양육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 이제 점점 더 가족들과의 유대관계는 강화되어야 할 텐데, 반대로 사람들이 치열한 산업 사회 속에서 경쟁하며 살기 위해서 남편이든 아내든 가정에 헌신할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그리고 가정보다는 자신의 행복을 더 높은 가치로 아는 현대 정신에 미혹이 되면서 가정에 점점 어려움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우리 초등학교 때만해도 이혼한 가정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이혼을 하면 큰 일 나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부모들이 자식을 찾아가서 이혼을 하라고 종용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까?
이렇게 자녀들을 향한 사랑도 올바른 가치와 철학에 기초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자기 사랑의 일환으로서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빗나간 자녀 사랑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자녀들을 정말 행복하게 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로부터 능력도 되지 않는 아이들이 높은 지위를 물려받는다든지, 많은 물질을 소유하게 된다든지 하는 일들이 있게 되면 그 아이가 그런 삶의 풍족한 조건 때문에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 가정조차도 이제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고 대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세상의 정신과 성경의 가르침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III. 자녀 위한 최고의 선물: 가르침
이런 부모들에게 오늘 성경은 자녀를 위한 최고의 선물이 ‘가르침’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행할 것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러면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타락하고 난 뒤에는 인간이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지 않는 존재들이 되었고, 그것이 결국은 비극인 것입니다. 그 길을 알지 못하기도 하거니와 또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좋은 것인 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그 길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 그게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녀를 낳은 부모가 그 자녀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그리고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지를 올바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인생의 행복의 기본적인 여건인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결국 삶의 태도에 있습니다. 올바른 태도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갈 때에 그 사람은 행복할 수 있는 것이지 모든 것을 자기의 마음대로 휘두르며 살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자녀를 위한 최고의 선물이 가르침이라면 그러면 어떤 식으로 이 가르침을 주어야 하겠습니까?
A. 진리를 알도록
우선 제일 먼저 진리를 알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모든 것의 판단 기준입니다. 그래서 이 진리는 선악을 판단하고, 참된 것과 거짓된 것들을 구분하고,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들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그러니 만약에 한 사람의 의식 속에 이런 진리의 기준이 없다고 한다면 선악의 구별도 불분명해지고, 또 참된 것과 거짓된 것, 잠재적인 것과 영원한 것들 사이에도 구분이 희미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끊임없이 판단의 착오를 불러일으킬 것이고 그래서 악을 선으로 오해하거나 추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착각하며 판단의 오류를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이런 판단의 오류는 그 사람의 삶 자체를 이리저리 흔들리게 만들 것이고 그런 속에서 인간이라는 것이 행복할 수가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이 진리는 무엇입니까? 이 진리는 우리의 믿음과 삶의 규칙인데 이 기준은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나 누구도 하나님을 직접 보아서 알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을 더듬어서 알만한 이 진리의 조각들을 이 세상 여러 곳에 펼쳐놓으셨습니다. 이 진리는 자연의 모든 세계에도 묻어있고, 인간의 마음과 정신 구조 속에도 묻어 있고, 또 이 세상의 역사와 사람의 경험 속에도 부분적으로 묻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물 흘러가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사시사철의 변화를 통해서, 철마다 옷을 갈아입는 그런 식물과 생물의 변화를 통해서 거기에서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였습니다. 거기에서 논리를 깨닫고 그 논리 속에서 자신의 삶에 적용할 지혜들을 찾았으니 이것이 바로 윤리였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통해 배우고 논리를 통해 이론을 만들고, 마지막에 그것을 삶에 적용해서 살아가는 것을 배우게 되지 않습니까? 아마 여러분도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자연의 이치를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는 윤리의 가르침으로 이어서 배우기를 여러 차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쪼가리, 쪼가리 흩어져 있는 이 모든 진리들은 사실은 진리의 원천 하나로 수렴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 계시인 이 진리의 책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우리들이 성경 없이 자연의 모든 사물들을 본다면 거기에서 조금씩 얻어내는 인생의 지혜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마치 전체적인 그림으로 맞추어지지 않은 퍼즐처럼 보는 사람마다 다른 생각을 갖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게 된다면 이 모든 자연 속에 묻어있는 진리들은 보다 더 찬란한 빛으로 드러날 것이고, 성경 계시의 지식을 통해서 자연 속에 묻어 있는 이 모든 진리들은 우리를 다시 성경으로 이끌고 성경을 통해서 깨달아 아는 진리를 아는 지식은 예배당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우주와 자연의 모든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성경에 친숙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우리 아이들이 아주 어린 나이 두 살, 세 살, 네 살, 다섯 살, 여섯 살 이때에 이미 인간성의 80%가량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라는 아이들에게 아직 성경을 모르는 나이에 오히려 우리는 이런 모든 자연 사물들을 이용해서 아이들의 마음을 끌고 있는 이 자연 사물들을 사용해서 그 아이에게 성경의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 이것이 부모의 중요한 사명이죠. 할 수 있으면 이 아이에게 참된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주기 위해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오. 이런 꽃이 있습니다. 아이가 와서 이 꽃을 보고 엄마에게 감탄을 합니다. “엄마, 엄마 꽃이 참 예쁘게 피었어요” “그래 참 아름답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꽃이란다. 이 꽃이 있어서 세상이 더 아름다워지듯이 너도 이 세상에 있어서 세상이 더 아름다워지는 사람이 되거라.” 자연에서 윤리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 사물에서 성경의 계시로 가르침을 전이시킨 것입니다. 며칠 후 아이가 와서 엄마를 불렀습니다. “엄마, 엄마, 이 꽃 이상합니다. 며칠 전까지 그렇게 예뻤는데 이제 이 꽃이 말라서 시들고 색깔이 누렇게 변하며 냄새가 나요.” 부모는 말합니다. “그것 봐라. 며칠 전에는 그렇게 아름다운 꽃이었고, 그 꽃은 예뻤는데, 이 세상에 있는 아름다움과 예쁨은 곧 사라지는 것이란다. 변함없이 예쁘고 사랑스러운 분이 계시니 그 분은 하나님이시란다.” 그렇게 이 자연 사물을 통해서 이제는 천상의 하나님께 대한 가르침으로 나아가게 되었죠. “이 세상 사람들이 물질을 얻고 명예를 얻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는 것은 꽃잎과 같단다. 당장 보기에는 예쁘고 아름다운 것 같지만 하나님이 그 사람을 계속 아름답게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의 모든 임금들이 꽃으로 꾸며 쓸 황금의 면류관도 이렇게 시드는 것이란다.” 그래서 눈에 좋아 보이는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에 불변하는 가치를 따라 살도록 아이에게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가 아이들과 관계하는 모든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자연 사물과 인간의 경험, 마음의 구조 등을 통해서 진리를 전달해 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부모 자신이 그 진리를 아는 것이 인생의 중요한 목적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에게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그럼 진리에 관심이 없는 부모는 애도 낳지 말아야 됩니까? 물론입니다. 낳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진리에 대한 아무 생각도 없는 부모들이 육신의 욕정을 따라 아이들을 생산하고 자기 사랑 때문에 아이들을 돌보지 않고 방치한 그 결과 망가진 아이들이 이 세상을 얼마나 괴롭히고 그리고 사회적인 비용이 어떻게 지불되는지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그 아이들도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니 사랑으로 돌보고 그리고 가르치고 올바른 사람으로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이것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올바른 진리를 배우고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들이 일어나야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지 않는 부모를 만나고 가정에서 상처와 고통 속에서 일그러진 모습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오늘 이렇게 올바르게 단정한 사람으로 주님 앞에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게 된 것은 기적입니다. 그런 기적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일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슬픈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부모가 되기 전에 먼저 그는 참된 인간이 되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이해하여야 하고 그 기준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그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이 바로 진리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헤매는 것이 안타까워서 주님께서는 그 모든 진리를 한 인격 속에 담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으니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가방끈이 길어서 그 진리를 왜 믿는지를 구구한 이설로 설명할 수 없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분을 믿는 단순한 신앙과 그리고 복종하는 마음, 그리고 사랑의 심정이 있기만 하면 그는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진리를 잘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약간 섞여있는 많은 것들을 통해서 진리를 아는 것보다는 진리 자체를 통해서 진리를 아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고,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고 그 분께 순종하는 부분은 비록 많은 것을 배우지 못했어도 이미 진리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도리를 터득한 현장입니다. 그가 자녀를 올바로 사랑하고 그리고 올바로 길러낼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은 과연 진리를 날마다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은 여러분의 자식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다른 집 자식으로 태어난 아이들보다 훨씬 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진리와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그래서 하나님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한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오히려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런 인생의 참된 진리를 깨닫고 마땅히 인간으로서 살아야 할 바대로 살기를 바라기 보다는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여러분 자녀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공부하는 일에 더 많이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이들이 그런 경쟁관계에서 잘 이겨서 우위를 점하고 있으면 그것으로서 여러분 마음이 부요해져서 여러분은 자녀교육에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부모가 있었는데 애가 하도 공부를 안 합니다. 그러니까 이 아버지가 야단도 쳐보고, 매도 때려보고 하는데 별로 변화가 없어요. 노력을 안 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최후 선언을 했어요. “야 임마, 너 내 이야기 잘 들어라. 내 여태까지 너를 야단도 치고 때리기도 했는데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이번 기말고사에서 또 낙제 받으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알았니?” 드디어 한 달이 지나고 기말고사가 끝났습니다. 아무래도 시험 이렇게 봤어요 하는 성적표를 안 가져와요. 그래서 아버지가 애 방을 두드렸어요. “야, 너 왜 시험봤는데 성적표 안 가져오냐? 그래 너 이번에 기말고사 성적 나왔지?” “네” “어떻게 됐어?” 이 아이가 아빠를 쳐다보면서 “아저씨 누구세요?”
그래서 인간으로서 가장 큰 행복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분의 뜻대로 살고 싶은 부모의 몸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으로서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온 마음을 다해서 이 아이의 영혼의 양식인 진리를 어찌하든지 이 아이의 영혼에 떠먹이려고 하고, 그래서 이 아이의 영혼이 점점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면서 아주 기뻐하는 부모, 그런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그런 부모 밑에 태어나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불신자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보다 10배는 더 잘 살아야 합니다. 10배는 더 잘 살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부모님을 향해서도 배나 더 공경하는 자식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특권을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모인 여러분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진리를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을 리가 있겠어요? 자신 속에 아는 것이 넘쳐야지만 그것을 가르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자신에게도 진리가 관심의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진리를 가르쳐 주면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내는데 화가 나는데 그렇게 반감과 앙심을 품은 그 진리를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할리가 있겠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진정으로 자녀를 잘 기르려면 여러분 자신이 제대로 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이상 자녀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봉사가 없어요.
여러분은 죽고 나면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기억이 될까요? 만날 공부 잘하라고 회초리 들고 닦달하던 엄마 혹은 아빠의 모습으로 남을까요? 우리 벌여먹여 살리기 위해서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돈 벌려고 정신 빼앗긴 아빠 기억이 될까요? 부모 자식들은 부모들이 자기 눈에 비춰도 그 모습을 부모에게 말해주지 않습니다. 권력이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오늘 묻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사는 것처럼 계속 살면 여러분이 죽어서 일주기가 되는 추도예배를 드리는 그 날에 여러분 자녀가 눈물 흘리며 이런 찬송을 부를까요?
(찬양) 옛날 용맹스럽던 다니엘의 경험과 유대임금 다윗왕의 역사와
그런 찬송을 쭉 부르면서
(찬양)예수 세상 계실 때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여러분은 자녀들 눈에 그런 엄마입니까?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던 성경의 어머니입니까? 성경의 아버지 입니까? 자녀들에게 진리를 잘 알도록 그래서 참답게 주님을 알고 믿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애쓰는 부모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열심히 이 진리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기쁨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가득 있을 때 자녀들에게 이 진리를 알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B. 모본을 보도록
두 번째는 ‘모본을 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들리는 것은 읽히는 것보다 호소력이 있고 보이는 것은 들리는 것보다 훨씬 더 또렷하게 우리의 기억 속에 남습니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이렇게 사는 것이 참된 인간의 본분이란다. 그것을 보여줄 수 있을 때 부모의 말이 자녀들에게 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몽둥이를 휘두르고 아이들을 억압한다고 해서 부모가 아이들에게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강력한 법은 아이들의 양심과 의식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릇된 일을 행할 때 부모의 얼굴이 떠올라야 합니다. 우리 엄마라면 이 상황 속에서 절대 이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우리 아빠라면 이렇게 불의와 타협하고 비겁하게 굴복하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로부터 의의 용기를 어머니로부터 사랑의 자애를 아이들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고는 자신도 살지 못하는 삶을 아이들에게 살라고 강요하는데 그게 어떤 힘이 있겠으며 또 자신이 그렇게 하지도 못합니다. 자신이 부모로서 기도 안하는 부모는 애들보고 절대 기도하라도 말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보고 성경을 읽거라 그렇게 타이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성경을 안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의 가장 본분이란다. 하고 이야기할 때 낯간지럽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가 진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모를 세워주신 이유는 그렇게 가정 안에서 아이들이 만나는 첫 번째 세계, 첫 번째 사회인 이 가족관계 속에서 인간으로서 참으로 살아야 할 삶의 본보기가 무엇인지를 보고 듣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가정을 만드신 것입니다.
들려주는 것은 입을 열고 말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이 알리가 없지만, 삶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내가 나의 삶을 보여주고 싶을 때뿐만 아니라 감추고 싶을 때조차도 아이들에게 드러나게 되죠. 그러면 여러분은 그 살아온 이제까지의 인생과 삶 그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살아있는 교육용 교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대로 사람들에게 여러분 아이들에게 여러분 자신을 통해서 인간은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치고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우리가 정직하게 물어봅시다. 우리 아이들이 나 산 것처럼 살면 동의하겠습니까? 여러분 마음속에는 너희들은 더도 바라지 않는다. 나만큼만 살아라! 할 때 여러분 모두 ‘아멘’할 수 있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자녀들에게 주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일에 모본이 되도록 그렇게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식들은 여러분을 통해 그 모본을 보지만 여러분은 신앙의 세계를 통해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름다운 부모의 모본을 봅니다. 경건한 부모를 둔 사람들은 부모로부터도 이 모본을 배우려니와 그런 기회가 없던 사람들도 핑계할 수 없는 것은 부모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당신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진실한 사랑으로 주님을 본받는다면 여러분은 비록 부모로부터 그것을 배우지 못했어도 자녀들에게는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C. 사랑을 받도록
마지막 세 번째는 자녀가 여러분을 통해 ‘사랑을 받도록’ 그렇게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육을 시키는 모든 것들은 틀에 박힌 교육이 아닙니까? 마치 자라나는 식물을 철사로 감아서 분재를 만드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그 교육이라는 것도 지식의 전달이요, 산업사회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살아남고 남을 이기기 위한 그런 종류의 교육에 치중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는 속에서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수없는 지시는 받지만 사랑은 잘 받지 못합니다. 특히 산업사회가 되면서 남편이든지, 아내든지 모두 사회생활 속에 투자하는 시간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가족들과 연합을 이루며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그들이 이렇게 그 사랑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의 가르침들은 흘러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러분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고 예수를 알게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도 수학을 배우듯이 지식을 통해서 지식으로 전달해지는 방식으로 예수를 알게 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예수를 알게 되었고, 주님의 그 큰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진리는 우리에게 언제나 항상 함께 전달되었고, 그래서 그 진리는 언제나 나를 판단하는 차가운 칼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이 서려있는 따뜻한 인격적인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도 역시 동일하게 사랑받지 않고는 진리를 가르침 받은 적이 없고, 또 사랑 없이 진리를 가르친 들 그 진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자녀들도 꼭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방식대로 그렇게 사랑하면서 우리가 우리의 자녀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려고 할 때 그 가르침들이 아이들에게 스며들어서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의 아이들을 보면 불만족스러운 것이 참 많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에 대해서 완전히 만족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콩꺼풀이 씌워서 그런 거지 남이 보기에는 결점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공부를 잘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공부를 잘하도록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성실히 노력하도록 아이들을 가르치고 지도하여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아이들이 다 그렇게 뛰어나게 탁월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한 방면에 있어서 뛰어난 아이들은 또 다른 점에서 결점이 있고 그래서 그 아이의 부모들은 또 다른 아이를 부러워합니다.
간혹 여러분은 그러겠죠. “목사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주위에 보면 성품도 좋고,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몸도 건강하고, 사회성도 좋은 아이가 있습니다.” 그거 어쩌라는 거예요? 있어서. 누가 그렇게 낳으래? 있어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아무 관계가 없어요. 여러분하고는. 자기가 낳은 자식이 그 “내 운명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받아들이고 그렇게 키우고 기르는 것이지, 그래서 어떡하겠다는 거예요? 저쪽 집 애들이 그렇게 예쁘다 뭐 훔쳐올 거예요, 바꿔치기를 할 것입니다. 그거는, 그런 비교의식을 느끼는 동안에 자기 자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요? “내가 왜 저 엄마 아빠 밑에서 태어났을까?”
학교에서 어떤 아이가 하도 책을 안 읽으니까 선생님이 “야 임마, 너는 도대체 어쩜 그렇게 공부를 안 하냐. 아브라함 링컨은 니 나이 때에 통나무집에서 남의 집 책을 빌려다가 책을 읽고, 그 책이 비에 젖자 가서 나무를 패서 품을 팔아서 그 빚을 갚을 정도로 임마 공부를 열심히 했어, 임마” 그랬더니 얘 하는 말이 “맞아요, 선생님. 그리고 선생님 나이 딱 됐을 때 대통령이 되셨죠”. 그러니까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잘못했을 때는 혼내고 필요하면 때려도 줘야죠. 그렇지만 아이들은 맞으면서도 이것이 정말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매인지도 알고, 쓰다듬고 안아줘도 이게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건지 아이들은 다 압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들어야 하냐면 “내가 우리 엄마 아빠에게는 절대적인 존재다” 그렇게 받아들여지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저는 모르겠어요.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 안할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 아이들을 다른 아이와 비교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어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어요. 왜냐하면 그렇게 해 봐야 마음만 상하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뉘 집에는 공부를 잘한다, 뉘 집 애는 얼굴이 예쁘다, 그걸 어떻게 하란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공부 못하는 유전자를 물려주고 못생긴 유전자를 물려 줬는데
소피마르소라고 하는 프랑스에 아주 예쁜 배우가 있어요. 소녀 때에는 전국의 젊은이들이, 전 세계 젊은이들이 밤잠을 못잘 정도로 우상이었죠. 지금 어느덧 40대 중반의 나이가 됐어요. 그런데도 변함없이 예뻐요. 기자가 물어봤어요. “저, 당신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그런 미모를 간직하는데 그 비결이 뭡니까?” 이 사람다운 대답을 했어요. “엄마 아빠에게 예쁜 유전자를 받으세요.” 그 대답 하나로 모든 사람들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없는 유전자를 어떻게 주느냐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내가 공부 잘하거나 얼굴이 예쁘거나 말 잘 들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당신의 아들이요, 자녀라고 하는 사실 자체가 우리 부모에게는 기쁨이구나’ 그것을 아이들이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사랑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도 여러분이 순종하고 주님을 잘 봉사할 때에는 더 많은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그렇지 않고 벗나갈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잘 안 느껴지지 않는 적이 있었죠. 그렇지만 결국 돌아보면 하나님은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냐 와는 상관이 없이 당신의 자녀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만 사랑하셨어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자녀들도 그런 사랑을 여러분으로부터 충분히 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자녀들을 양육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마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를 보면서 단점과 결점, 이웃아이들과의 열등한 점을 찾아내고 의식하기 시작하면 여러분도 하나님이 아닌데 사랑이 식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급기야 아이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 그 관계 자체를 아주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부모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 안 해도 사랑한다고 아이들에게 매일 그러지 않아도 전해집니다. 아이들의 마음속에 전해집니다.
(찬양)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의 존재함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얼마나 기쁨이 되는지
IV. 결론과 적용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을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기르셨는지를 잘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그것을 흉내 내어서 자식을 기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자녀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깊이 그리고 그 아이 마음 안에 그 아이에게 부족한 것이 있어도 그 아이에게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묻혀져 있어요. 여러분이 그 아이를 사랑으로 보듬고 진리의 말씀으로 잘 가르치고 위하여 헌신하려고 하면 여러분의 사랑 안에서 그 아름다운 것들이 주님의 은혜로 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직까지 드러나 있지 않은 아주 아름다운 것들이 드러나서 결국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는 도구들이 될 것입니다.
2.아비의 마음을 돌이키는 하나님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 1:17).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구약과 신약 사이를 잇는 위대한 인물 세례요한을 두고 한 예언입니다. 그가 와서 어떤 일을 할 것인지를 미리 예언해준 내용입니다. 그중에서 우리에게 특이한 것은 이 세례요한의 사역 중 가정을 회복시키는 사역이 여기에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본래의 사명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자기 뒤에 따라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마음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이 사람에 대한 예언으로 끝나고 신약은 이 사람의 출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게 해서 이 엘리야라고 되어 있는 이 사람이 세례요한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사람이 어떤 일을 위해서 왔는지 보십시오. 복음서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이 사람이 와서 한 일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그의 첫 번째 메시지는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 왔는데 회개해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축복의 상징인데 그 나라가 가까워 온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 안에 살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 올 터이니 너희는 회개하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만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리 떠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면 하나님의 강력한 통치가 성령의 역사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해서 도입될 그때에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복락이 될 터인데, 불행하게도 그들은 하나님과 그러한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면 그들은 오히려 책망받을 그러한 잘못된 관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이 선포는 사람들의 강력한 회개를 촉구하는 두려움이 없는 설교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불신앙에 빠졌던 때에 이 자식과 아비의 마음의 관계를 여기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II. 자식과 아비의 마음
우선 우리들이 자연적인 부성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A. 자연적 부성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죄와 상관없이 인간에게도 본성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의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본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 하셨을 때에 마음에 두셨던 그 아름다움을 성취하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더 많은 피조물들이 번식하고 생육하고 또 인류들이 태어나서 그들이 서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를 토대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룩하면서 아름다운 그러한 그 교제를 만들어 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가 들어와 타락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모든 인간들의 마음속에 부성을 주시고 또 자연 만물들에게도 부성과 모성을 주셔서 그래서 자신들이 하는 일의 의미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러한 본성의 작용에 의해서 종족들을 보호하고 보존할 수 있는 그러한 본능을 갖게 하셨던 것입니다. 인간도 육체로는 바로 이러한 동물들과 같이 속해 있으니 하나님이 이러한 자연의 본성을 주신 것입니다. 많은 피조물들은 인간이 아닌 생물들은 대체로 이 본성을 거스르지 않지만, 인간은 도덕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이 자연의 본성을 거스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한 사람이 아비가 되어서 자식을 낳았다고 할 때에 만약에 정상적인 상태라면 비록 인간이 타락하여 죄가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자기 새끼들은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것이 창조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죄의 힘은 얼마나 강한지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자연 본성조차 부서뜨려 버리고 그리고 이기심과 그리고 욕망을 산출합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자신의 행복을 자식들의 행복보다는 더 높이고 그리고 더욱더 중요하게 생각함으로 자식들의 불행을 아랑곳하지 않는 그러한 악독한 마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때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물론 어떠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겠지만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바로 그 세례요한이 그렇게 깨뜨려진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치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적인 부성조차도 인간의 죄와 탐욕으로 인해서 부서지고 그래서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까지도 깨뜨려지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짐승의 세계에서도 차마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부모 자식 간에 일어납니다. 난지 얼마 안 된 핏덩어리를 밖에 버려다 두는 무정한 부모가 있는가 하면 자식을 여의든지 잃어버리고 나서 끊을 수 없는 것이 부정이요, 모정인데, 자기가 낳은 아이들을 끊어내고도 얼마든지 그것에 커다랗게 마음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러한 비정함들이 부모의 마음속에 남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자연적인 부성과 모성조차도 죄에 의해서 망가지고 타락했을 때 얼마나 커다랗게 부패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최근에 들어서 우리들이 어려서부터 늘 듣고 오던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어머니의 은혜라는 노래가 울려퍼지는 것을 최근 몇 년 동안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비슷할 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노래를 틀어놓으면 아이들도 그 노래를 부르기가 쑥스럽고, 부모도 그 노래를 듣기가 쑥스럽습니다. 왜냐 하면, 아이도 엄마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엄마도 그 노래를 들을 때, 아 나는 저 정도는 아닌데,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실 재 괴로움 뼈 속 깊이 기억하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전혀 애쓰지 않고, 손발이 무엇 때문에 다 닳도록 왜 고생하겠습니까. 그러한 부모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이야기 할 때, 부모의 정, 부자의 정,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 요새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고하신바 말세가 가까울수록 인간은 자기만을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차서 그렇게 악을 행하고 그렇게 마땅히 사랑해야 할 관계들조차도 깨뜨려져버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우리 어렸을 때는 어버이날도 그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 흘리는 아이가 많았고, 또 스승의 날. 뭐 어떻게 하는가도 잊어버렸는데,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의 은혜는 끝이 없어라. 그게 부르는 학생도 스승을 그렇게 생각안하고, 듣는 스승도 난 저 정도 까지는 아닌데 너무 신파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의 사회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가족을 위해서든지 누구를 위해서든지 남을 위해 헌신하고, 그것이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그를 위해 봉사하면서 사는 것이 아름답다고 하는 그러한 개념들이 막 이렇게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그렇게 갈갈이 찢어졌던 사람들과의 관계,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끊어진 관계를 보여주는 것인데 세례요한이 바로 이것들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왔나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라.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 사람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른 길로 돌려 놓으시는 하나님의 뚜렷한 방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뭐냐 하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 그가 외치는 진리, 그리고 그가 선포하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백성들을 당신 자신에게로 돌이켜 놓으신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범위를 갖고 정하느냐에 따라서 각기 달라지겠지만 표준적인 복음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설교를 믿는 것입니다. 설교를 뭐라고 하든지 그것을 믿는다 그러한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한 시대에 당신의 교회를 하나님의 세우신 설교자들을 통해서 영향력을 끼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설교요 예배라고 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성경은 설교자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평신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고, 어짜피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파의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전문적으로 훈련받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들에 의해서 선포되는 설교를 가리키는 단어가 따로 있고, 케리오소라는 단어에요.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예수에 관해서 알려주고 전하고 소문을 내는 것은 유안겔리조마입니다. 이것은 소문을 내다, 수군수군거리다. 그리고 이야기 하다는 그러한 뜻입니다. 개인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고 예수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별적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선포하는 공중적 외침입니다. 하나님이 말라기 이후에 400년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워서 다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돌이키도록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법은 바로 세례요한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어린 아이일 적에 광야로 보내시고 거기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자라고 그리고 심령이 강하여지고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게 하셨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진리의 말씀을 탐구하고, 자연을 벗 삼아 하나님께 간구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선지자로서의 자격을 갖춘 후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외친 회개의 선포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놀라운 능력으로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한 백성들을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할 작정이셨습니다. 그때에 깨어진 가족 관계, 자연적인 품성으로라도 사랑하여야 할 자식조차 사랑하지 않는 부모의 이기심이 깨뜨려져서 다시 그 아비의 마음을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움직이게 하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복된 부성입니다.
B. 회복된 부성
이 부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된 부성이고, 자기 사랑에 대하여 깨뜨려져 이제 자녀가 얼마나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인지를 보게 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어떤 주석가들은 이 부분을 여기에서 아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 이고, 자식은 이스라엘이라고 해석하기를 제안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은유적이고 또 청중들을 깨닫게 하기 위한 방법 이었다고 양보를 한다 하더라도 사실 마음을 돌이켜야 할 것은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마음을 돌이키셔야 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멀리 떠나셨다면 무엇 때문에 세례요한를 보내시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로 하여금 예수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게 하시겠습니까. 세례요한에게 그러한 사명을 주신 것은 벌써 하나님이 세례요한를 보내기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 시켜 이 세상에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셨음을 보여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이 구절이 단순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인간에게 돌이키게 하겠다고 하는 그러한 뜻이 아니라 이것은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망가지고 깨뜨려지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것이 영적인 부흥과 함께 다시 회복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자, 이렇게 보면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 이 세례요한의 선포를 통하여 도입될 그리스도 예수의 왕국의 위대한 역사는 바로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새롭게 고쳐놓는 가정의 놀라운 회복이 또 하나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제일먼저 사람의 마음속에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은혜가 임하면,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면, 진리의 말씀이 그를 변화시키면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그의 심령 속에 옵니다. 주님과 특별한 관계가 이룰어 집니다. 아버지의 통치가 내 안에 이루어집니다. 성령이 충만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순종할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 마음 안에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질 때에, 그의 마음속의 곧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통치가 이루어질 때, 가장 놀라운 변화가 두 공동체 속에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가정과 교회입니다. 그러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대부분의 모든 가족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상처와 모든 분쟁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든 것들은 대부분 다 자신을 양보하고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가정의 가족들이 모두 잘못 되도 그중에 단 부모든 자식이든 누구든지 간에 몇 사람만 그들을 온전한 관계로 이끌기 위해서 포기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러면 그 가정은 와해되지 않습니다.
저는 언젠가 여러분에게 암세포에 관한 이야기를 드렸을 것입니다. 모든 세포는 끊임없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그런데 서로 안 죽으려고 하는 덩어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암세포입니다. 그리고 엄청난 양분을 빨아들이면서 결국 그 세포는 점점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암은 젊은 사람이 걸릴수록 빨리 진전이 됩니다. 왜냐 하면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힘이 남아 있으면 그것은 엄청난 속도로 증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누구도 죽지 않으려는 암세포는 넘치는 생명력 때문에 결국은 죽는 것입니다. 넘치는 생명의 욕구 때문에 결국은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 때문에 가족을 위해서 죽으려고 하겠습니까. 자식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죽으려고 하겠습니까. 형제를 위해, 부모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죽으려 하겠습니까. 그래서 가족의 회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은혜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III. 은혜의 힘이 필요함
(예화) 같이 있었던 전도사 한 사람이 있는데, 그 결혼으로 골인도 못했는데 자매를 사귀었어요. 자매를 사귀었는데, 자매의 아버지인가 오빠인가 가족들 중에 아주 친한 사람이 간암인가 뭐 콩팥, 콩팥에 문제가 생겨서 신장이 안 좋아서 그것을 이제 이식을 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정도까지 됐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날보고 그래요. 전도사님, 왜. 그 자매 오빠,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야. 그 자매 오빠를 위해서 아무래도 내 콩팥을 떼어 주어야 할 것 같아요. 그거 왜 그러냐. 불쌍하지 않냐 그래요. 나는 잘 모르지만, 그 콩팥은 아무나 떼어 주고 싶다고 해서 떼어주는 것이 아니고 유전자나 다 맞아야 하기 때문에 부모 자식 간에 잘 맞고 형제들 간에 잘 맞는데, 형제들 여럿 있다며 그 형제들은 도와줄 수 없는 형편인가 물어봤더니, 아무도 안주려고 하니까 그렇죠. 그래서 그래서 글쎄 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사랑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장가도 들지 안 들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콩팥 하나를 떼어 주고 그렇게 해서 가족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것이 벌써 25년 전 일이니까 지금은 더 많이 세상이 변했겠죠. 아마 가족들이 그러한 상황이 되었을 때 그것을 기꺼이 떼어 주겠다고 자원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참 궁금합니다. 우리가 이만큼 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은혜의 힘입니다. 은혜의 힘. 우리 안에 있는 이기심은 악한 자기만을 위한 악한 이 이기심은 파쇄가 안 됩니다. 깨뜨려지지가 않아요. 무엇으로도 깨뜨려지지 않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깨뜨려지지 않습니다. 마치 고무위에 놓고 찧는 쇠구슬과 같아서 수없이 내려 찧어도 깨뜨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게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깨뜨립니다. 하나님은 은혜는 그것을 깨뜨립니다. 은혜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그는 자기의 완고함을 깨뜨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강한 소원을 품어요.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고자 하는 아주 강한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게 은혜의 힘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는 바꾸어 놓습니다. 이게 세상에서는 가정을 치유하고 고치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면에서는 증상을 완화 시키는 방법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완전히 사람을 고쳐놓고 멀리 떠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그리고 부모를 떠나고 이탈한 자식의 마음을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러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 속에는 은혜의 결과는 결국은 사랑인데, 이 은혜와 사랑의 놀라운 특성은 사람들을 이렇게 교통하게 하는 놀라운 속성이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은혜를 받으면 오지랖이 넓어요. 그래서 은혜를 안받았을 때는 아무 상관없이 지하고 나하고 뭔 상관이 있나 그랬는데, 은혜를 받고 나면 이 세상에 상관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길거리 노숙자를 봐도 가엾고, 옛날에 옛날에 헤어진 사람들의 얼굴이 생각이 나면서 그들을 위한 기도가 나와요. 그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간구할 마음이 생기고 기도할 마음이 생겨요.
(예화) 우리 교회 어느 집사님도 그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 와서 말씀 듣고 은혜 많이 받고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20년 전에 자기가 가르쳤던 학생들이 생각이 나더래. 그래서 수소문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게 뭐죠.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있으면 관계가 없었던 많은 사람들처럼 여겨졌던 사람들이 사실은 나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깨달아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족들은 오죽 하겠어요. 그렇죠.
하나님은 오늘도 세례요한을 보내실 때와 똑같은 때가 우리에게 이른 것을 알고 계셔요. 지금 세례요한 이 때보다도 더 심각한 시대에요. 그래서 대부분의 부모의 마음이 이제는 자식을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는 마음이고, 자식의 마음도 부모를 그렇게 사모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시대에요. 그러한 시대를 살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들의 마음을 어떻게든지 당신의 품으로 돌아와서 그래서 자기가 미워하는 그 부모도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부모도 사랑하고 마음에서 멀리 떠난 자식들도 또한 자기가 그 자식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서로 사랑하고 그러기를 하나님께서 너무나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힘입니다. 은혜의 힘은 치료하지 못할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게 부모로부터 많은 상처를 입었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마음을 고치면 아버지를 사랑하게 됩니다. 가슴의 원한처럼 품었던 어머니를 용서하게 됩니다. 미워하던 자식들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고 그리고 자식들을 위하여 온전히 돌보지 못하였던 부모의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이러한 은혜의 힘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어짜피 가정은 우리 혼자 꾸려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혼자 할 수 없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로 집약이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우리 온 가족에게 이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이제껏 내가 알았던 그들은 차마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그래서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간직하는 대신 주님께로 받은 은혜의 감격을 유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삶은 참 희한합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는 좋은 남편을 만나도 치료되지 않아요. 또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받은 상처는 좋은 자식을 낳아도 고쳐지지 않아요. 그런데 놀랍게 하나님의 사랑은 그 상처가 어떻게 생겨났든지 간에 공통적인 치료제가 되는 것입니다. 공통적인 치료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은 어찌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아 그 사랑 알도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정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으면 역설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셔야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약한 데서 강하여짐이라. 강하여짐이라.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나마 주님께 간절히 매달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병들어 보지 않은 사람은 누가 훌륭한 의원인지 경험을 통해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병들어 보고 그것도 위중한 병에서 고생해본 사람들은 자기가 고쳐준 그 의사가 왜 그렇게 훌륭한 의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상처를 그것 때문에 받을 은혜의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께, 상처받은 자로서 주님 앞에 나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특권입니다. 특권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이 그 상처를 통해서
치료하시는 주의 은혜 임하네
그러한 주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한번 돌아보세요. 주님의 큰 능력은 우리가 약하디 약할 때 체험했어요. 하나님의 큰 사랑은 하나님의 큰 용서는 우리가 새카만 죄인일 때에 경험했어요. 그리고 우리를 놀랍게 이끄시는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는 우리가 미련하고 무지하기 짝이 없을 때에 우리에게 나타났어요. 그러면 똑같이 여러분이 오늘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쓰라린 상처들, 자식으로부터 받은 상처, 혹은 오늘 성경에서 나오는 것처럼 자기 자식조차도 긍휼히 여길 줄 모르는 식어진 부모의 차디찬 마음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도 여러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피가 나고 상처가 되고 아프지만, 사실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면 그 상처가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하나님이 바로 그 상처를 치료하고 고쳐주심으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시지 않은 놀라운 은혜와 사랑의 성품을 여러분에게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은 악하디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은 혹시라도 나쁜 부모를 만나서 그리고 좋지 못한 가족들을 만나서 당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그러한 것들을 당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마치 상처를 입으면 피가 쏟아져 나오듯이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가족 중 다른 사림일지 모르지만, 거기에서 여러분의 속에 있는 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악에 넘쳐남이라 보시고 또한 그것 때문에 가족들 중 다른 사람에게 여러분은 상처를 입히고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입은 고통만 기억하고 다른 사람에게 준 고통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가족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세요.
IV. 결론
아직 구원받지 않은 가족들에게는 눈물로 복음을 전해서 예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고, 이미 믿은 가족들은 참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리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가족들이 아직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구원의 날이 지체된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만약 이러한 은혜의 힘을 넘치도록 받는다면 그러면 틀림없이 틀림없이 그 가족들을 지킬 수가 있어요. 지킬 수가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망가진 가족들의 관계를 끌어안기 위해서 내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빨리고 찢기고 삼켜지고 밥이 되는 그 모든 과정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했죠.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에게 당신이 베푸신 사랑보다도 더 큰 고난을 받게 하신 적은 없어요. 항상 더 큰 은혜와 더 큰 사랑, 더 큰 은총을 우리에게 입히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총과 사랑을 잘 활용하고 흘러가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도 받게 하시고 괴로움도 견디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일생에서 주님을 위해서 희생 했던 적이 있습니까. 주님이 아니라면 절대 그런 일을 했을 일이 없는데 예수 때문에 하기 싫은 일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쓴물이 넘어오고 죽을 것 같은데도 이 자리가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이기 때문에, 멸시와 욕을 당하면서도 그 자리를 지켜 보신 적이 있습니까. 포기하고 버리셨으면 벌써 버리셨을 정말 더러운 인간인데 그 관계를 끊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뭐 좋은 것이 있고 우리 하나님께 뭐 모자란 것이 있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죠. 당신께로부터 떨어져 나간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양떼가 될 것인가를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한 번도 당신이 우리를 그렇게 붙들고 계실 때에, 이렇게 붙들고 있으면 이놈들이 나에게 뭘 갖다가 갚아줄까 생각하신 적 없습니다. 가족들도 그런 것입니다. 뭘 해줘서가 아니라, 누가 알아줘서가 아니라 끝없이 용서하고 지금은 내게 상처와 고통을 주는 내 부모, 그리고 내 형제, 그리고 내 아내, 남편이라 할지라도 그들도 만약에 지금 나처럼 참된 은혜와 지식의 빛 아래 있었더라면 나보다 훨씬 더 잘 살았을 텐데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용서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어떠한 사람이 말합니다. 얼마나 용서해야 합니까, 목사님. 무한히 끝없이 그랬더니 뭐라 그러는가 하면, 그럼 저는 뭡니까? 넌 아무것도 아니야. nothing.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저희 가정이 복음화 되기 전에 마음 상하고 괴로운 일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은 계속 나보고만 참으래. 그래서 똑같은 질문을 했거든요. 하나님 그러면 난 뭡니까. 그랬더니 내 마음 속에 주님의 음성은 들린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에 얘야, 넌 내가 있지 않냐, 넌 내가 있지 않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넌 내가 있지 않니.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잃어버리면 모두 잃어버리고 주님을 꼭 붙들고, 아플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기쁠 때나 하나님이 힘을 주셔야 할 때나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그렇게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고통을 받은 한순간 한순간을 하나님이 모두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편이십니다. 굳게 믿고 마지막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아가기까지 가족의 구원과 한 알의 밀알이 되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3.하나님 사랑의 그림자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33).
I. 본문의 배경
구약 성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께 사랑받았던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한 인구조사를 한 것과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을 제외하면 그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일평생 주님께 붙어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제왕이 되었지만 물질적인 욕심과 명예에 대한 욕망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악기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노래했으며, 하늘에 가득 찬 하나님의 신실함을 노래하면서 우주적 명상에 잠겼던 철학자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정은 불행하게도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하고 아버지의 편애 속에서 자랐습니다. 성장한 후에는 형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우의 없이 지내왔으며, 어른이 된 후에는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으나 자신의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한 여인이었습니다. 자녀를 낳았으나 그 자녀들은 부모의 마음에 더 커다란 상처를 남겨준 자식들이었습니다. 깨어진 관계 속에서 자란 어린 시절의 고통스러웠던 가정이 그의 탁월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자기 대에서 또 다른 상처를 받은 가정으로 태어나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신앙을 잘 지키고 살면 자녀들은 저절로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아름다운 믿음의 본을 보여도 여러분의 자식들이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중생하고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자녀들의 신앙을 보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청교도들에게는 이 문제에 관한 유명한 격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만 있지 손자는 없으시다” 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어야 할 신앙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대목입니다.
II. 악한 아들의 죽음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전쟁터에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죽임을 당했다는 보고가 있을 때의 다윗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압살롬이 토벌되었다는 소식이 들었을 때 슬피 울면서 문루로 올라갔고 비통하게 울부짖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부르면서 그는 인생의 가장 고통스런 시기를 통곡으로 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다윗의 집안에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이 생겼을까요? 발단은 이것입니다. 다윗에게는 29명의 자식이 있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빈과 후궁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첫째 아들이 암논이었는데 감정적으로 격하고 음란한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아들이 압살롬이었는데 머리가 총명하고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이 둘은 서로 다른 배에서 태어난 이복 형제였어요. 압살롬과 같은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난 다말이라는 누이가 있었는데 이 암논이 누이 다말을 연모하였습니다. 정상적인 사랑의 감정 같지는 않고 욕정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병에 걸린 것처럼 드러눕고 이복동생인 이 누이를 자기에게 와서 간호해 주도록 일을 꾸민 후에 둘이만 있게 되었을 때에 자신의 여동생을 겁탈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곧 신비감이 사라져서인지 이 여자를 끝까지 돌보지 않고 버리게 됩니다. 이 슬피우는 여동생을 보고 가슴이 찢어졌던 사람이 있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압살롬, 오라비였습니다. 결국 이 암논을 죽이기로 뜻을 세우고 압살롬은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적당한 때가 되었을 때 양털을 깎는 날에 압살롬은 형제들을 모두 초청해서 성대하게 연회를 베풀고 거기서 형제들이 보는 앞에서 암논을 무참하게 살해함으로 누이동생의 원한을 풀어줍니다. 다윗 역시 암논의 비행을 알고는 있었지만 하루아침에 큰 아들이 자기 속으로 낳은 또 다른 아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광경을 보면서 압살롬에 대한 분노가 하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아버지의 이 끔찍한 진노를 피하여 도망 길을 떠나게 되었고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아버지 다윗의 마음이 다시 흔들리고 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긴 것을 눈치 챈 신하들이 압살롬을 데리고 왔습니다. 다윗과 화해를 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다시 왕국에 들어오게 하는 것까지는 허락을 했지만 차마 다시 그와 화해하지 못하고 부자 사이에 깊은 감정의 골이 생겨가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압살롬이 반역을 도모하게 됩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자신의 불안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지금은 이렇게 잠자코 있지만 어느 한 순간에 진노가 폭발하면 자신에게 복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기가 직접 왕이 되어서 이 나라를 다스려 보겠다 라고 하는 정권욕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치밀하게 이제 미래의 거사를 준비하게 됩니다. 50여 명이 넘는 개인 호위병을 결성하여 그들을 데리고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였습니다. 다윗의 수하에 있었던 장수들 중 현 정권에 대해서 불만이 있는 사람들에게 포섭의 손길을 뻗쳐 그들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한편 그는 성 앞에 나아가 아침에 재판을 받으러 나오는 다급한 백성들에게 연유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너의 이 억울한 사정을 위해 좋은 재판관을 세워 주지 않을 것이니 차후에 이런 일이 있으면 내게로 와라, 그러면 내가 잘 돌보아 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부왕인 아버지를 오랫동안 따르던 백성들의 마음을 노략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최소한 3년 이상 이런 준비가 철저히 이루어졌고, 드디어 모든 여건이 조성되었다고 믿었을 때 그는 급작스럽게 나팔을 불며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선포하고,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압살롬이 행한 더 악한 행동은 아버지를 쫓아낸 궁에 천막을 치고 모든 백성들이 다 아는 백주대낮에 아버지와 동침했던 후궁들을 데리고 자기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인류 역사에도 흔하지 않은 이 패륜적인 행동을 한 것으로 보아서 그는 결코 회심한 인물이 아니었고, 신앙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악한 자식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끔찍한 폐륜을 저질렀던 까닭은 학자들이 생각하기엔 아마도 다윗의 인품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에게 극한 복수심을 불러 일으켜 잔인한 감정으로 자기를 대하게 함으로 백성들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는 그런 견해를 내놓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무튼 다윗은 이런 있을 수 있을 것이고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추호의 상상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었고 그는 대비도 하지 못한 채 울며 벗은 발로 왕국에서 도망을 치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고, 그리하여 요단 건너편까지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라는 시편 42편과 43편의 이 시는 바로 이때에 지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골리앗을 쳐 죽이고 승승장구할 때에는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그를 칭송하였지만 이제 망명길을 떠나는 이때에 자기를 그렇게 높이던 백성들은 차갑게 등을 돌리고 오히려 침을 뱉기 시작했습니다. 시무이란 인물은 흙을 던지며 다윗을 비루한 자라고 욕하였고, 그리고 사울의 집안에 행한 것 같이 하나님이 네 집안에 그렇게 행하시리라고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다윗을 따르던 장수가 단숨에 저 놈의 목을 자르겠다고 칼을 빼어들자 다윗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저 사람이 나를 욕하는 것이니 나무라지 말라고 타이르며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다윗에게 예고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그리고 그 징계를 따라서 그는 인생 중에 가장 뼈저리도록 고통스러운 고난의 길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비록 다윗을 징계하셨지만 다윗을 치는 압살롬을 기뻐하실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인생의 위기 중에서도 징계하시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다윗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다윗의 군대가 다시 정렬을 하고 반란군과 본격적으로 전투하기 시작했을 때 다윗은 출정하는 병사들에게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너희들이 싸움터에서 나의 아들 압살롬을 만나거든 부디 선대해 달라” 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의 소년 압살롬”이라고 불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비록 그가 반란군의 수괴였으나 아버지 다윗의 마음에 그 압살롬은 어린 아이에 불과했기에 제발 그를 죽이지 말고 살려주도록 병사들에게 신신당부하게 되었습니다.
III. 선한 부모의 눈물
그러나 전쟁은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에 따라서 압살롬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반란군이 토벌되고 이스라엘 군대가 승리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는 승리의 소식과는 상관없이 나의 소년 압살롬은 어찌되었냐고 물었습니다. 차마 죽었다고 대답할 수가 없어서 지혜로운 병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의 원수와 왕을 대적해 일어나는 모든 자들이 다 그 소년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결국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그는 반란군이 토벌되었다는 승리의 기쁜 소식에도 불구하고 슬피 울면서 문루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실성한 사람처럼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가 널 대신하여 죽었다면, 나의 아들아, 나의 아들 압살롬 내 아들아” 슬피 울면서 올라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임금 다윗이 가진 자식 압살롬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진리가 사람의 지성 속에 다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진리는 나이가 들고 인생을 살아야지만 깨닫게 되는 이치들이 있습니다. 그런 중에 제게 오는 한 깨달음은 부모도 자식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또 자식도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지만 부모로부터 받은 자식의 상처와 자식으로부터 받은 부모의 상처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자식의 상처는 뼈에 사무치지만 자식으로부터 받는 부모의 상처는 부모의 마음에 그토록 사무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종종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고 친구나 이웃에 하소연하는 사람은 너무 자주 만나지만 자식에게 부고를 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호소하는 어버이를 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죄인이고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자식도 상처를 받게 되어 있고, 부모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 좀처럼 마음을 풀지 않습니다. 철들기 전 어린 시절의 부모로부터 받은 한 장의 흑백사진 같은 빛바랜 상처의 기억들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할 때까지 그 기억을 간직하고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한을 품는 것이 자식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평생 자식들로부터 상처만 받다가도 어느 한 순간에 자식이 조금만 마음을 열고 사랑을 보이면 과거의 그 모든 상처의 기억들을 잊어버리는 것이 에미, 애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자식의 마음에는 돌로 쓴 글씨처럼 새겨지지만 자식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부모의 마음에 물 위에 새겨진 글씨와 같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연적 피조물들인 동물들에게 종족을 번식하고 보존하게 하기 위하여 자식을 보호하는 본능을 주셨습니다. 동물들은 이성이 없기 때문에 자식을 위해서 그런 보존의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하지만 그들은 본성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본성에 충실하기 때문에 그들의 자식을 향한 보살핌은 때때로 인간 부모를 능가할 정도로 탁월합니다.
여러분은 가시고기의 일생을 들어본 일이 있습니까? 민물에 사는 아주 작은 손가락 보다 작은 고기입니다. 그 고기는 어떻게 된 것인지 에미가 와서 알만 까고 어디로 도망가 버립니다. 그러면 이제 애비가 와서 그 위에 수정을 하여 이제 산란의 때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산소입니다. 물이 잘 흐르는 곳에는 산소가 많아서 좋지만 거기서 알을 까면 알이 다 떠내려가 버리겠죠? 그러니까 웅덩이나 아니면 양쪽을 이렇게 막고 있는 바위나 틈바구니에 안전하게 알을 낳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에비가 수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이 잘 유통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산소가 부족하여 그 알에서 새끼들이 부화하는데 어려움이 있을까봐, 이 가시고기 아빠는 바로 그 앞에서 이 겨드랑이에 붙어 있는 두 개의 지느러미를 이용해서 끊임없이 물질을 하여 새 물을 갈아 줍니다.
알에서 깨어 작은 새끼로 부화할 때까지 2주일가량 걸리는데 아비는 바로 거기서 음식도 안 먹고 끊임없이 물질을 하며 새로운 산소를 머금은 물을 부화하려고 하는 알 위로 보냅니다. 이제 두 주일 정도 지나게 되면 가시고기 새끼들이 알에서 조그맣게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 고기들은 이제 나와서 바깥세상으로 나가려고 할 때에 애비는 그들이 그 곳에서 못 나오도록 끊임없이 위협을 하고 물질을 합니다. 이유는 너무 작은 몸집이기 때문에 그것이 그 곳을 자기들이 태어난 그곳을 떠나게 되면 은신처가 없어지게 되고 그럴 때에 물고기와 곤충들에게 금방 잡아먹히기 때문에 에비 가시고기는 거기에서 자식들이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는 몸집을 키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끊임없이 물질을 하고 물속에 섞여 있는 먹을 만한 것들이 이 자기 자식들에 의해서 섭취될 수 있도록 봉사를 합니다.
다시 일주일쯤 더 지나게 되면 거의 3주가량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물질을 한 끝에 이제 이 물질하던 두 개의 지느러미는 너덜너덜해지고, 온 피부는 부패하기 시작을 해서 결국은 허연 그 뭔가 이렇게 허연 것들이 몸에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결국은 그렇게 죽을 때까지 물질을 하다가 죽게 됩니다. 그러면 자식들은 그 아비의 고기를 뜯어먹으면서 며칠 더 머물며 몸집을 키우게 됩니다. 그게 바로 이 가시고기의 일생입니다.
이렇게 동물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종족을 보존하는 본성을 주신 것입니다. 인간도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도덕적 질서 안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의 자연적 질서 속에 있습니다. 이 두 질서 속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동물에게 있는 이런 자기 종족의 보존을 위한 본성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동물은 본성밖에는 이성이 없기 때문에 본성대로 살지만 그리고 본성에 항거하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도덕적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런 본성을 거스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도덕이 올바로 행사되지 않을 때에는 짐승에게 준 그 본성과 같은 것조차도 거슬러 나쁜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자연적 본성을 주신 이유를 이성 속에서 잘 깨달으며 이것을 영혼의 움직임인 사랑으로 승화시키면서 살아가면 동물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주 찬란한 사랑으로 승화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성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고 만약에 자기를 위하는 일에 감정을 사용하여 본성을 거스르는 악을 행하게 되면 인간의 자식에 대한 행동은 아주 무정하고 더러운 것이 되고 짐승만 못한 상태로 인간이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렇게 나쁜 부모들이 있습니다. 인간이 완성이 안 되었기 때문에 자식이 무엇인지 시집 장가가서 새끼를 낳는 것이 무엇인지, 가정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육욕을 따라 시집, 장가를 가고 그리고 자식들을 낳는 것입니다. 이런 부모 밑에 태어난 자식들이 행복해 질 리가 거의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신이 나쁜 부모가 되고 그리고 이러한 부모들을 통해서 자식들은 고통과 상처를 대물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많은 부모들의 마음속에는 비록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이런 주신 자연적 본성으로서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자식을 향해 흘러 들어가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압살롬이 결국은 눈을 부릅뜨고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압살롬 마음에 있는 아버지 다윗에 대한 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암논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뼈저린 상처, 누이의 원한에 대해서는 아랑곳 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아버지, 일이 터지고 나서 자기를 죽일 정도로 미워하던 엄격한 아버지, 돌아와서 사죄하고 싶었지만 끝까지 화해를 받아주지 않던 무서운 아버지에 대한 인상을 가지며 죽어갔을 것입니다. 그런 압살롬이 자기가 죽고 나면 사실 그 아버지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오히려 자신이 죽고 나면 그 아버지가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사랑하는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널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슬피 울었을 아버지라고 상상을 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감추어진 아버지의 마음, 부모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식의 사랑을 부모가 모르는 법은 거의 없이 들키지만, 부모의 마음에 있는 자식을 향한 사랑은 발각되지 않을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상처에 대한 반응 때문에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명백한 성경의 죄입니다. 상처가 모든 것을 합리화시켜 주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은혜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런 상처를 극복하며 살 수 있는 은혜의 무한한 공급을 약속하셨고, 또 그런 사랑을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먼저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부모로 인해 상처를 받고 많이 아파하는 세월을 지냈다고 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부모님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려고 노력했습니까? 상처에 대해서 상처를 갚으면 여러분은 부모에 대해서 복수하는 사람입니까? 나는 오늘 아침에 예년과 꼭 같이 마당에 나와서 이 설교 원고를 세 번이나 읽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울었습니다. “아, 그랬구나”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들을 오랫동안 가슴에 묻었고 한 번도 내가 부모에게 상처를 주거나 나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러나 정말 돌아가신 아버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내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얼마나 적은 날들이었는가 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 앞에서 여러분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다고 믿는 여러분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려고 노력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진심으로 여러분의 부모를 향해 이런 노래가 있습니까?
(찬양)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의 존재함으로 인하여 우리에겐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IV. 하나님의 더 큰 사랑
나에게 너무나 길고 오랜 세월동안 상처란 한 단어를 붙들고 아버지를 사랑할 여유 없이 살아왔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죄 많은 이 세상에서 불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나 상처를 받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상처를 부둥켜안고 미움을 미움으로 갚으며 사는 것은 자기 사랑의 또 다른 결과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리고 아버님 살아계시는 동안 공경하려고 애썼고, 그리고 사랑하려고 애썼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 ‘저 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의 사랑을 그렇게 많이 받으셨을까? 아, 차이가 있다면 나는 우리 주님으로부터 일찍 상처를 잊어버릴 정도로 사랑을 받았고, 그 분은 그럴 기회가 없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섭리 속에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부모로부터 받은 충분한 사랑이 부족하고 또 상처가 있었기 때문에, 고독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 그렇게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우리 하나님의 품을 파고 들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육신의 부모로부터는 상처를 많이 받았지만 오히려 하늘 아버지는 그 육신의 아버지, 어머니가 못해 준 사랑까지도 해 주셔서 오히려 그 상처가 주님의 자비를 깨닫는 도구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고백한 바와 같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라” 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한번 이런 사랑의 눈으로 그대들의 부모를 바라보기 바랍니다. 여러분 정말 그 부모들이 여러분으로부터 충분히 사랑을 받았습니까? 그대들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것처럼 여러분의 부모는 여러분으로부터 사랑받으셨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에게는 그 부모가 살아있어서 존귀한 존재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아버지 살아계신 것이 기쁨이 됩니까? 어머님이 생존에 있는 것이 여러분 마음에 감격이 됩니까? 감사의 조건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다 느끼지를 못해도 하나님의 사랑과 부모님의 사랑 사이에는 놀라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 사랑은 훨씬 크고 넓다는 것입니다. 자식인 여러분은 부모로부터 받은 작은 상처의 기억들을 붙들고 화해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부모들은 여러분에 대해 잊혀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기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랑의 추억들은 사랑하는 대상에 의해 버림을 받아도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을 멈출 수 없게 하는 지속성의 원인이 됩니다. 그대들에게는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와 고통의 기억이 있을지라도 부모의 마음속에는 평생 잊혀지지 않는 예쁜 기억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대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 표현 못해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 무한해도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해 본 사람 이외에는 하나님의 그 사랑의 비밀을 알 사람이 없는 것처럼 여러분의 부모의 사랑이 크고 넓어도 그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해본 자식들 이외에는 부모의 마음에 알알이 박힌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라도 여러분은 부모를 깊이 사랑하고 공경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죄 많은 세상에 태어나서 때로 부모로부터 상처와 고통을 받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백성이 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 명령받고 있는 의무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우리 부모가 혹은 여러분에게 상처의 빚을 졌다할지라도 주님의 큰 사랑은 육신의 부모가 진 빚조차 대신 갚아 주셨으니 그대들은 부모님을 하나님 때문에라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효도의 첫걸음은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전에 부모가 이미 존재하지 않으신다면 지난날들을 깊이 회개하고 이제는 하늘 아버지를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부모들이 이 땅에 살아있다면 그 자체가 여러분에게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상처를 주었어도 아버지가 살아있으면 화해할 수 있고, 고통스러웠어도 어머니가 생존에 있으면 그 관계를 회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까지 상처와 어둠 속에서 살고 무관심 속에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며 살았다면 이제 인생의 남은 날들이라도 빛 가운데 살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미워하고 다툴 시간이 없습니다. 사랑하며 살아도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너무나 짧고 우리의 과거가 어둡고 가정 속에 슬픔의 상처의 그림자가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대물림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맺힌 것을 풀고 진심으로 사랑하고 용서하여 부모 공경의 대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어려울 때마다 여러분이 주님의 사랑을 처음 알았던 그 회심의 대에 우리 주님 앞에서 무엇이라고 고백을 했는지 한번 기억해 보십시오. 형언할 수 없는 예수의 그 큰 사랑을 받았을 때 여러분은 이제 여러분의 인생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인정하였습니다. 힘들 때마다 노래하십시오.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주님이 범죄한 우리와 사랑하시는 아버지 사이에서 자기의 살을 찢고 물과 피를 쏟아 화목 재물이 되셨던 것처럼 그 희생으로 우리가 주님께 사랑을 입은 용서받은 자녀가 된 것처럼, 또한 주님의 사랑으로 그대들의 부모를 깊이 사랑해서 마지막 그 분들이 숨지고 눈을 감을 그때까지 여러분이 자녀로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그 분들의 마음에 위로가 되도록, 그 분들이 여러분의 부모가 되는 것이 이 세상에 가장 큰 보람이 되도록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길을 가는 동안에 끊임없는 고통도 있을 것이고, 수시로 살아나는 과거의 기억들이 그대들이 가려고 하는 까리따스의 길을 가로막을지도 모릅니다. 그때마다 우리를 위해 자기를 다 주셨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주님을 의지하며 따르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모를 깊이 공경하는 그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아이에게 법이 되라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었노라" (잠 4:1-3).
누가 감히 나는 자식 기르는 일에 있어서 성공을 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회적으로 훌륭하고 심지어는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뛰어난 목회자의 집안에도 때로는 정말 남에게 보이기 싫을 정도로 그렇게 인간의 도리를 하지 못하는 자식들이 있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누구도 눈 감을 때까지 이점에 있어서는 장담을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아무리 좋은 본을 보여주고 또 올바른 가르침을 주어도 자식이 그대로 살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부분적으로는 우리들이 부모가 행실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무지해서 자녀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상처를 너무 많이 주어서 등등의 이유로 자녀들이 잘못 됩니다 그건 또 사실입니다. 또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인간 자체가 부패하고 망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때로는 부모가 그렇게 비난받을 일이 없이 올바르게 살고 부모의 도리를 하고 자식들을 옳은 길로 이끌려고 애를 쓰는데도 이상하게 자식들이 빗나가는 때도 있다는 사실에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제가 어떤 책을 읽었더니 거기에서 청소년 문제를 전공을 하고 그쪽 방면에 일을 하고 있는 어느 선생님이 쓴 내용입니다. 옛날에는 문제아는 문제 가정에서 라는 공식이 딱 맞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제아가 있으면 더듬어 가면 반드시 문제 가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이들을 돌본 사례들을 이야기 하면서 그중에 어떤 아이들은 자기가 깊이 그 가정을 들여다보면 그 부모가 그렇게 나쁘거나 상식이 없거나 아니면 자녀에게 비인격적으로 대하거나 쉽게 이야기 하면 문제 가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문제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 때문인가 자기가 생각 했더니 예전에는 부모로부터 가정으로부터 억눌리거나 상처를 받으면 반발심 때문에 아이들이 빗나갔는데 이제는 그것이 아니라 가정에 문제가 없어도 이 세상에서 유혹이 너무 심하고 그리고 아이들이 예전에는 집안에서만 단속을 잘 하면 부모의 영향 아래에 있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커뮤니케이션도 발달되고 사회가 복잡 다양해지니까 오히려 인터넷이나 친구들 등 다른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가운데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유혹에 빠지고 잘못된 관계들에 얽혀 들어가고 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는 분석을 해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예배시간에도 말씀 드렸지만 영국에 있는 청교도들은 아주 분명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에게는 자녀만 있지 손자는 없다. 이것이 처음 들을 때에는 별말이 아닌 것 같아도 곰곰이 곱씹어 보면 사실 우리는 손자가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안은 대대로 믿음의 집안이고 심지어는 예수 믿은 지 3대째이고 4대째이고 그 다음에 할아버지 그것도 안 되면 옆에 있는 외삼촌에 외갓집의 누가 사촌이 목사이고 하면서 환경들을 쭉 이야기 하면서 그러니까 이 사람은 굉장히 잘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그런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우리 주님을 만나서 변화되는 것만이 경건한 집안을 이루는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손자는 없다 굉장히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아이들이 엄마가 예수 잘 믿으니까 "애야! 하나님에게는 손자는 없단다. 너도 주님을 만나고 직접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개인적인 중생과 회심의 필요성을 아주 강조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종합하면 부모가 아무리 본을 잘 보이고 올바르게 해도 자식이 그것을 받아 들여서 그대로 따라서 살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그 아이들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무엇인가 하면 자녀들 하나 하나가 주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 되어서 이제는 부모 때문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서 각각 하나님과 올바른 각자의 관계를 가지고 신앙으로 살 수 있는 그런 힘이 있는 신앙적인 비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맨 처음에 전도를 받을 때 저처럼 홀로 예배당 걸어가서 예수 믿겠다고 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가 데리고 갑니다. 데리고 갈 때에는 그 사람을 많이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어도 이 사람이 설명하면 아 그렇구나 하고 마음이 생기고 그 다음에 성경도 가르쳐 주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사람을 많이 의지 합니다. 그러다 이 사람이 정말 주님을 만나고 변화를 받게 되면 마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던 동네 사람들의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야! 이제는 너 때문에 그 분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그 분을 만났기 때문에 그 분을 믿는다 너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신앙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독립적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그것이 필요 합니다. 그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 영혼의 힘과 변화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만 가지고 안 되고 또 하나가 뭐냐면 그렇게 한 아이에게 올바른 모본을 보이고 부모의 말이 올바른 기준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말로 법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솔로몬이 무엇이라 했는가 하면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 하거라" 훈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 하는 교훈입니다. 여기에서 명철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데서 오는 판단력입니다. 그런 판단력을 전달해 주는 것이 이 잠언의 목적입니다. 이 말이 사실은 얼마나 당찬 말입니까? "애들아! 아버지의 이야기를 잘 듣고 살면 된다. 내가 명철한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나를 보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판단력을 배우도록 하라"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선하게 사는 도리를 너희에게 전해 줄 텐데 내 법을 떠나지 말아라. 하나님의 법이지 자기 법입니까? 내가 법을 만들어 놓을 테니까 떠나지 말아라! 그렇게 감히 자기의 말을 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발언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사실은 나도 우리 아버지에게 아들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다윗이 있고 그 다음에 솔로몬이 있고 그 밑에 자식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솔로몬이 자기 자식들에게 내가 너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겠고 또 하나는 너희들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판단해야 할지를 판단력을 너희에게 가르쳐 줄 텐데 그대로 해라 그러면 너희가 살리라. 영혼도 살고 육체도 살고 너희들이 살리라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디에서 배웠다고요? 자기도 아버지에게서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뜻인가 하면 당시 모세5경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삶의 법칙이었는데 모세5경을 통해 보이는 훈계와 그리고 판단력도 아주 탁월하고 분명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객관적인 계시입니다. 그것도 훌륭하지만 그것도 소화하고 그것을 실제의 삶 속에서 살아가는 부모의 생활과 판단력을 보는 것은 어린 아이들에게는 훨씬 더 쉬운 교재입니다. 분명하고 아주 쉬운 교재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죠?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 가끔 보면 좋은 책이 있는데 그 책을 읽기에는 너무 시간이 없습니다. 예룰 들면 옛날에 나왔던 책 중에서 박경리의 토지 같은 것인데 20여권입니다. 그것을 목사가 아니었으면 벌써 읽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저도 읽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읽고 싶어도 시간을 못 내서 읽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책은 읽기 힘들어도 드라마 보는 것은 쉽습니다. 드라마는 켜 놓으면 막 움직이니까... 그러니까 보면서 아! 내용이 이런 거구나! 그리고 머릿속에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아이들 용입니다. 아이들은 그래서 책을 펼쳐 보면 그림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림보다 더 좋은 것은 영상입니다. 움직이는 것... 만화영화에 빠져 드는 것 보십시오. 놀랍습니다. 그런데 만화영화의 움직이는 것들을 새카만 글씨로 써 놓았다면 아무리 어휘가 초등학교 1-2학년이 읽을 수 있는 어휘라도 아마 아이들이 읽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 아이들에게 부모가 하나님의 법을 반영하는 생활을 하고 그 법에 맞게끔 판단하는 것을 보면서 거꾸로 부모를 통해서 부모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그 부모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 훌륭한 교육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솔로몬이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자기의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자기에게 가르쳤던 것 같은 방식으로 자녀에게 가르쳐 줄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녀교육이 우리들이 실패하고 원만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은 부모가 안 믿으면 자식들이 믿음 없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될 때 아이들을 공부하라고 다그치고 공부하지 않으면 이 아이들을 장래가 어떻게 될까 고민하고 염려하지 부모가 돈이나 좀 있다고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해서 가슴에 맺힌 것이 없으면 자녀들을 꼭 그렇게 공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결혼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렇게 보니까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엄마는 자식이 나이 드는 것을 그렇게 힘들어 하지 않습니다. 안 믿어집니까? 100% 일치 하지는 않는데 비율적으로 많습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 한분이 있었는데 딸이 그 당시에 30이 넘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30이 다 되어 가는데 결혼 어쩌구 저쩌구 하면 "결혼할라면 하지만 안 되면 그냥 혼자 살어. 그리고 살면 편한거야. 그것 굳이 해야 되는 것 아니야." 라고 공공연히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결혼생활에 있어 재미를 못 느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진지하게 "혼자 사는 것도 괜찮단다" 그것이 누구에게 이야기 하는 것인가 하면 자기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혼자 살 걸 왜 시집을 와서 이 고생을 하나...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심어 주고 싶으면 정말 그 일을 충심으로 할 수 있는 부모는 부모 자신이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그 하나님 앞에 사는 참된 기쁨과 행복이 무엇인지를 자기 마음속에 받았기 때문에 자녀도 꼭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렇습니다. 여러분 전도사 많이 쓴다고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사랑 많이 받은 간증인이 많은 성도들이 있는 교회가 전도가 됩니다. 그런 교회는 전도 프로그램이 필요 없습니다. 하도 안 하려고 하니까 프로그램이지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 자랑하고 자기가 얼마나 비참했는데 예수 믿게 되었는지를 말하니까 전도를 해야 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속에서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성향이 계속 꿈틀거리는 것입니다. 나는 가장 이상적인 전도라고 봅니다. 안 나오겠다는 놈을 네가 못 나오면 사람을 사서라도 보내라 그렇게 해서 안 나오면 벌금을 내라고 하고 이번 전도는 우리교구 담당이기 때문에 40명 몰고 나가야 하는데 내가 회장인데 네가 안 나오면 다시 얼굴도 안 본다 이렇게 공갈을 해서 모이는 것도 안 모이는 것보다 낫죠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이 속에서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프로그램은 필요 없습니다. 슈퍼에 가서 물건을 사다가도 그 아저씨 보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그 다음에 우편 배달부 오면 그 아저씨에게 전하고 싶고 심지어 옛날에 누구는 전도학교 하면서 친구를 만나서 그랬다고 합니다. 5분만 너에게 이야기 할 수 있게 해 줄래 했더니 친구가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그래서 해 봐라 했더니 예수의 사랑을 전했다고... 마음속에 그렇게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전도의 기회입니다. 문제는 이 안에 열정이 없으니까 문제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부모가 똑바로 살려고 부모가 완전한 사람입니까? 다윗은 자식보고 너 똑바로 잘 살아라 그런데 외로우면 나처럼 바람도 피거라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러면 솔로몬은 자기 자식들에게 완전한 사람이었습니까? 마지막에 가면 그가 처음의 아름다운 신앙을 잊어버리고 결혼을 통해 이방여자들을 후궁으로 맞아들이면서 외교로서 국가의 안보를 지키려는 불신앙에 빠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그런 한계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다윗 같은 경우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많이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부모를 볼 때에도 그렇게 자기도 못 사는 삶을 부모에게 제시 하면서 이렇게까지 못했기 때문에 부모가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안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주님을 닮아 가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자식이 조금만 성장하고 나면 어렸을 때는 모를 수 있지만 알게 됩니다. 부모가 어떤 것을 가르칠 때 부모가 그대로 100%살지 못했는데도 뼈에 사무치는 교훈이 되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부모가 그렇게 충분히 살았는데도 이상하게 승복이 안 되고 부모가 그것을 가르칠 때 반발하는 자식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법이 되어 주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완전한 법이신데 부모는 자식들에게 그렇게 완전한 법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하면 부모님이 끊임없이 회개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온전히 되려고 애썼던 기억들까지 자식들에게 함께 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없습니다. 원리가 똑같은 것입니다. 결국은 저수지가 가득차고 그것이 수로를 따라 물이 흐르는 것처럼 모든 부모의 가르침이 법으로 자녀들 속에 흘려 가기 위해서는 부모가 최소한 우리 자녀들이 이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으로 자기가 되었거나 적어도 되어 가려고 몸부림쳐야 하고 그리고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하는 기대대로 삶을 내가 이미 살고 있거나 그렇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그런 부모들이 될 때에 비로소 자녀들에게 내 아버지가 나에게 이렇게 훈계하고 이렇게 판단력을 가지라고 가르쳤던 것처럼 나도 또한 부족하지만 너에게 이렇게 가르치노라 할때 부모의 그 모습을 보면서 자녀들은 부모 자신에게 탁월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붙들고 있는 하나님 은혜의 탁월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온전하게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또 그 부족한 부분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는 부모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 갈 도전을 얻고 이렇게 하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자녀들 앞에서도 내가 부족하다 내가 모자란 것이 많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때가 없습니까? 우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어머니가 살려는 삶, 우리 아버지가 믿으려고 하는 신앙 그 태도 이 모든 것이 나에게 법이다 나도 저만큼만 몸부림치면서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그런 인상 하나를 자식에게 남길 수 있을 때 그 부모는 충분히 그 자식에게 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다른 모든 사람과 함께 불완전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에 진리와 양심의 기준에 부합하도록 이것은 이것이라고 그렇게 감명 깊게 한마디 말을 교훈으로 던져 주어서 듣는 자녀들의 마음속에 감동의 파문을 주기 위해서는 그것은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그 말씀을 붙들고 그래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친 흔적이 있을 때 그런 권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소리 지른다고 그것이 카리스마가 아니고 아무 대목이나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불끈 쥐고 두들긴다고 그것이 카리스마가 아닙니다. 조용히 이야기해도 저항할 수 없는 권위가 느껴질 수 있고 침을 튀기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도 빈 깡통이 굴러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꾸밈이 없고 진실한 삶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는 그 부모로서의 일관되려고 몸부림치는 삶 그것이 자녀로 하여금 부모로부터 받은 교훈을 받아들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무엇인가 하면 부모는 부모가 잘 믿는다고 해서 자식도 잘 믿는 법이 없고 아름다운 모본을 보여 준다고 해서 자식들이 아름다운 자식이 된다는 법이 없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식들이 하나님의 손자가 되지 말고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주님의 생명이 아이들 안에 있을 때 부모의 모자라는 점도 받아들이면서 거울로 삼고 또 용서할 수 있고 또 부모의 훌륭한 점은 받아들이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신앙이 없고 은혜가 없으면 탁월하게 훌륭한 사람을 보면 열등감이 들지만 신앙이 있고 은혜가 있을 때에 탁월한 사람을 보면 하나님 도와 달라고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진리를 내가 섭취하고 이것을 받아 들여 소화해서 자녀들에게 흘러가게 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너무 쓰라린 과정이니까 이렇게 넘겨서 자식들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아픔은 너에게 그리고 신앙의 편리함은 나에게 부모가 그렇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자꾸 가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저에게 설교 시간에 눈물을 흘린다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대들이 모두 울고 나처럼 회개하면 아마 안 울것이라고...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그래서 누구도 왕도가 없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자녀교육을 배웠습니다. 다른 사람을 자녀교육을 하면서 목회를 배운다고 하는데 사람이 워낙 부실해서 거꾸로 그렇게 배웁니다. 그렇게 목회를 하면서 배우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잘 가르친다고 해서 잘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그것은 소설책 같은 데서나 나오는 것이지 부모가 잘 하니까 아이들도 잘 하더라 그것이 그렇게 딱딱 떨어지면 다윗의 집안에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아침 설교에서도 보면 다윗의 집안의 아이들이 어디 다윗을 닮을 것이 있습니까? 닮은 것 없습니다. 아버지는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나쁜 것을 본받았다고 하면 좋은 것도 좀 같이 본받지 그러면 표준이라도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 신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가 좀 부족해도 온전히 살려고 노력하는 것도 물론이거니와 이 아이들 하나하나가 주님을 만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여러분이 잘못한 것도 아이들이 마음속에서 지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효도 받는 비결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얼마정도 기가 막히게 하면 자식들이 일반 은총적 차원에서 무릎을 꿇고 나는 다시 태어나도 엄마 아들이 되고 싶어 그렇게 말할까? 은혜 안 받은 아들이, 회심 안 한 딸이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까? 하나님도 싫다는 아이들인데... 하나님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아이들이 안 믿으려고 합니까? 이유 없는 반항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못난 저와 여러분 같은 부모들이 과연 순수하게 아름다운 행동 하나로 자식들에게 무릎을 꿇려서 이 세상에 존재했던 여자 가운데 최고의 여자가 엄마에요 이 고백을 아이들이 신앙이 없는데 받아 낼 수 있습니까?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이들 속에 신앙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이 생기는가 하면 아버지로부터 상처를 받았는데 회심하지 못했을 때에는 아버지는 나쁜 사람 이렇게 생각하다가 오죽했으면 아버지는 나에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부모가 그렇게 주님을 만나면서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려고 하고 그것을 자식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자식에게 좋은 부모가 되는 비결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좋은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식 앞에 좋은 부모가 됩니다. 그러면 누가 묻더라구요. 그러면 목사님 좋은 아내가 되는 비결은 어디 있습니까? 똑같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아내가 되어 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좋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아내 바로 좋은 아내가 되는 비결, 좋은 남편이 되는 비결, 좋은 엄마 아빠 심지어 삼촌, 이웃집 아저씨 되는 비결까지 이속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이 아직 괜찮습니다. 아직은 기회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위해서 힘껏 기도하고 자녀들이 손을 내밀지 않아도 여러분이 다가가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리고 진심을 전해주고... 용서하고 기다려 주고 참고... 지난주에 제가 그랬습니다. 어떻게 저런 놈이 나왔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 그 아이는 아! 정말 싫다 왜 엄마 아들일까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말을 안 해도 이심전심으로 오고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을 정말 우리 부모의 말이 법이 될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는데 저는 청소년 시절에 방황하다가 신학생이 된 후에도 무엇인가 혼란스럽고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를 때에는 항상 누가 떠올랐는가 하면 선생님들이나 훌륭한 분들이 떠올랐습니다. 이 분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면 일관성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똑같이... 오늘은 여기에 붙고 내일은 저기에 붙고 왔다갔다 하는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고난에 처 했을 때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나를 많이 사랑해 주지 않아도 똑바로 살아가는 그 분은 지금 내 위치에 있다면 어떻게 결정하실까 그런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멘토입니다. 신앙의 스승입니다. 여러분이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아이들을 깊이 사랑하고 그리고 아이들에게서 무슨 결함이 발견되면 저것 내가 찍어 놓은 도장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놈이 저것 나한테 배웠지... 들여다보면 반성할 것이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러니까 너무나 자주 도대체 저 종자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다만 어떤 것은 하나님의 성화에 의해서 많이 묻혔고 아직은 안 묻히기고 한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기다려 주고 사랑하고 그러면서 아이들이 변화되도록... 여러분이 포기하면 누구도 마지막까지 붙들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5.네 자식을 사랑하라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눅 15:20-21).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성경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탕자의 비유입니다. 비유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생생한 묘사가 그림과 같아서 마치 예수님이 실제로 경험하고 보신 사건인 것처럼 우리에게 전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진정한 부모가 어떤 자식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오늘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실 이 비유는 돌아오는 아들을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또 인간 부모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엄밀하게 말하면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그 주인공이십니다. 그래서 이 15장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 잃은 양의 비유와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마지막의 탕자의 비유 세 개를 나란히 말씀하셔야 했던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그분 가까이 모였을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라는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이 사람들하고 음식을 먹는 구나. 당시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하는 것은 한 형제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니 세리와 그리고 죄인들이라고 칭해지는 창기를 비롯한 많은 악한 사람들과 함께 스스럼없이 식탁을 나누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과 한 패거리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어요. 이러한 비난에 대해서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있고 한 마리가 있을 때, 그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마음,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을 때 그것을 찾고자 하는 잃어버린 여자, 그리고 아들이 멀리 허랑방탕하여 집을 떠났을 때에 그 아들을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사랑.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얼마나 그렇게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이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또 당신이 그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함께 밥을 먹고 그들을 가족처럼 영접하신다는 것을 깨우치시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 놀라운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가정의 그리는 부모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어야 되는지를 간접적으로 읽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이 잃은 양의 비유는 양의 연약함 때문에 길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러한 양을 보여주고요. 두 번째 드라크마의 비유에서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잃어버린바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자기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그래서 잃어버린바 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하나님 아버지는 그렇게 잃어버린 영혼들을 간절히 찾고 이해타산을 초월하여 그들을 구하고 또 간절히 그 영혼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그려내는 아버지는 이 아들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했을 때에도 그 재산을 나누어 주고 그리고 이 자식이 멀리 떠나서 마지막에 자기 자신에게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시던 아버지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에게 인격적인 신앙을 기대하시는 아버지에요. 아버지는 권위가 있기 때문에 아들이 재산의 분할을 요구해도 아버지에게는 그것을 줘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죠. 안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둘째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지 않았더라면, 그것을 팔아서 먼 나라로 갔을 리도 없고, 그리고 방탕하게 타락했을 리도 없죠. 아버지가 살아있는데 유산을 나누어 달라고 하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난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뜻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것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 이죠? 아버지는 아들과 자신과의 관계가 인격적이길 원했어요. 아버지에겐 권력도 있고 힘도 있으니까, 건장한 하인을 시켜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그리고 일체의 돈을 빼앗고, 유산을 일체 나누어 주지 않으면 그가 아버지의 집을 아예 떠날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아버지와 자식 간의 사이가 비인격적인 억압 속에서의 관계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가 하고 싶은 대로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허락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으니까, 우리도 우리 애들한테 그렇게 하자 그러면 설교가 이상해지겠죠.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여기에서 한 원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던 신앙의 관계가 인격적인 관계가 되기를 원했듯이, 부모는 권력을 가지고 있고 힘이 있기 때문에 자식보다 위에 있어요.
법 이야기 하나 해줄까요. 여러분이 만약에 남의 우편물을 확 뜯어본다든지 그것을 감추거나 빼앗아 버리면 벌 받아요. 우편법 위반입니다. 거기에 만약에 우편함 증서나 유가 증권이 들어있으면 그러면 그것은 절도죄에요. 남의 내용을 뜯어보기만 한 것으로도 법 위반입니다. 그래서 제가 기억 속에 있는 것은 3년 이하의 징역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애들 앞으로 온 우편물을 엄마, 아빠가 뜯어보는 것은 애가 아무리 법정에 고발을 해도 안 받아줘요. 그게 뭐냐 하면 사법상의 특별 권력 관계에요. 그래서 성인이 될 때까지는 부모에게 특별 권력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우편물을 뜯어 봐도 되고, 그리고 인터넷 안 좋은 사이트를 신청했는데, 엄마가 전화 걸어서 끊어버려도 그것은 사생활 침해가 아닙니다. 그 권력이 있어요. 그것은 함부로 너무 많이 사용하면 안됩니다. 꼭 필요할 때, 단호하게 사용해야지 늘 그것을 그저 늘 지팡이 사용하듯이 늘 사용하면 아이가 부모와의 관계에서 인격적인 관계가 성립이 되지 않아요. 그래서 가장 큰 힘은 인격의 힘입니다. 인격적인 관계의 힘입니다. 그래서 강한 힘이 인격적인 교통에서 나와요.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가족 관계 속에서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는 아들을 방탕한 길로 갈 줄 뻔히 알면서도 한번 니 마음대로 해봐라 준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에게 모두 이렇게 행한다고 그렇게 적용할 수 없겠지만, 근본적인 정신 자체가 자녀들에게 오래 참고 기다리면서 스스로 깨닫고 인격적인 관계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렇게 자녀를 가르쳐줘야 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가르쳐주고 자기가 체득하지 못한 백점짜리 모범 답안 보다는 스스로 체득하면서 깨달은 85점짜리 답안이 훨씬 인생을 살아가는데 강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그 자녀를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해주고, 또 한편으로는 부모인 우리가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으며 신앙으로 통제가 되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 부모와 함께 관계를 갖으면서 부모 앞에서 영향을 받고 통제를 받아요. 자녀들을 그렇게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비인격적인 교육이 만약에 분제를 만드는 것이라면, 그러면 인격적인 교육은 나무가 자라도록 물을 주고 비료를 주고 가지를 쳐주고 벌레를 잡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라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아버지가 자녀를 향하여 가지고 있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자, 아들이 멀리 방탕하게 떠나서 그 나라에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허비하고 허랑방탕한 삶을 살면서 그러면서 망가진 인간이 되었어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기다리고 있었어요. 문맥으로 볼 때에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간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늘 동구 밖을 바라보면서 그러면서 아들이 이제나 오나 저제나 오나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아들이 아주 그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 주는 쥐염 열매라도 먹으려 했으니까 그 형색이 떠날 때 그 화려가호 당당했던 모습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지 않겠어요. 그러한 모양새로 동구 밖에서 동네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데 먼저 발견한 것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였어요. 사랑은 발견하게 하는 힘입니다. 사랑하면 그게 보입니다. 사랑하면 그게 보여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보이는데, 사랑하면 보입니다. 그리고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뒤이어 나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저를 보고, 까지는 이해가 됩니다. 네. 달려갔다. 동양의 문맹에서는 아랫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몸을 급하게 움직이는 것은 경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 애들이 보는 앞에서 옛날 어르신들은 뛰거나 그렇게 말하자면 뭐라고 말할까. 요란을 떠는 법이 없죠. 그래서 점잖아야 하죠. 뛰어갑니다. 목을 끌어안아요. 이것도 아버지에게 어울릴만한 행동은 아닙니다. 더 뒤로 넘어간 이야기는 입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마나 하는 것이지, 아빠가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당시에도 볼 수, 보기 드믄 아버지의 모습을 이 속에 이입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너희 타락한 인간 사회 속에서 굳어 져온 아버지의 그것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제가 그런 말씀 드렸죠.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 엄마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요.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이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 특히 우리나라 같이 유교와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 굳어져온 이스라엘 같은 그런 집안의 아버지의 모습으로서는 포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훨씬 더 자애롭고 따스한 그러한 어머니의 모습. 나는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 아들이, 이렇게 이 아들, 일평생 아버지와 살아온 이 아들에게도 이날 이 아버지의 달려가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성경엔 안 나오지만 어쨌든 우리가 읽을 때 울음이 복받칠 것 같은 그러한 분위기는 그렇게 오랫동안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아들도 사실은 예상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이었어요. 그러한 모든 행동을 하게 만든 아버지의 마음의 바탕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겼기에 그러한 뜻입니다. 그러면 측은히 여긴다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놀랍게 여기에 쓰인 단어가 마태복음 9장 35절 이하에 쓰인 그 단어와 똑같은 단어예요. 열린교회가 새워지게 된 성경 구절이기도 한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어떻게, 민망히 여기시니 그 희랍어 단어와 여기에 측은히 여겨라는 단어가 알파벳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똑같아요. ἐσπλαγχνίσθη(에스프랑크니스데)라는 단어예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창자가 흔들리기까지 감동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언제도 한번 설명을 드렸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이 있는 자리가 창자라고 여겼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만약에 우리의 문맹에서는 영혼이 있는 자리 하면 심장을 예로 들잖아요.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해봐 그러죠. 이 사람들은 창자에 영혼이 있다고 봐요. 아프리카 콩고 사람들은 간에 영혼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간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여러분 옛날에 이디아 야민이라는 이상한 독재자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상상가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나라를 잡았어요. 그래서 밑에서 꿈틀거리면서 다시 나라를 엎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반란을 일으키려는 무리를 잡은 다음에 이디아 야민이 어떻게 했어요? 그 부하를 잡아서 배를 가르고 간을 씹어 먹었어요. 그런데 그게 미친 놈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영혼이 다시 부활하지 못하도록 자기가 죽여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필이면 콩팥도 아니고 염통도 아니고 간이었어요. 그것을 씹어 먹는 것입니다. 다시는 영혼이 자글자글 씹혀서 간자체가 살아져서 거할 곳이 없도록 만들었어요. 다시 환생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제의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무리를 볼 때에 주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이야기 하듯이 이것은 뭐라고 번역을 해도 맛이 안나요. 우리로 말하자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팠으니 하면 거의 비슷한 등가 번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때에 이 아버지가 그 방탕한 길에서 돌아오는 자식의 남루한 모습을 보면서 느꼈던 아마 성경에서 가슴 아프다고 하는 최고의 표현입니다. 이 단어가 그렇게 많이 안 쓰여요. 최고의 표현입니다. 그렇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그러한 아픔을 이 아버지가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아픔을 자기의 자식을 보면서 절실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한 소행을 생각해 봐요. 아버지가 살아있는데 감히 유산을 달라고 해, 죽었으면 좋겠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줬는데 허랑방탕하게 다 허비하고 이제 지금은 남루한 모습으로 돌아와요. 요절을 내도 시원치 않은 분노가 솟구칠 수 있는 대목이잖아요. 어느 하나 아버지를 향한 공경이나 배려 이것은 볼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런 모든 필름이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게 바로 긍휼입니다. 긍휼. 그러한 논리 적인 필름과는 상관없이 지금 놓여있는 딱 단편적인 그 비참한 그 모습을 보고 슬픔에 가득 찬 사랑이 솟구치는 것, 그것이 너무나 커서 가슴을 에는 것 같은 통증을 동반하는 ἐσπλαγχνίσθη(에스프랑크니스데)라는 단어에요. 자, 조금만 더 설명할 게요. 여러분도 그러한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뭐 늘 그러한 것을 경험하며 살지는 않겠지만,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회심했을 때 짧은 기간이라도 이런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고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긍휼히 여겨 주시는 아주 놀라운 사랑을 알고 나니까 그 다음에 이런 사랑을 모르는 버림받은 영혼들,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 그 다음에 아직까지 거듭나지 못한 내 가족들을 생각할 때,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막 아픈 마음이 들어올 때가 있잖아요. 그러한 게 바로 이렇게 ἐσπλαγχνίσθη(에스프랑크니스데)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그렇게 느끼셨던 그 마음을 성령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함께 공유하도록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은 언제나 통증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표현에 의하면 요한복음 3장 16절이 아주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확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때에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가슴이 저미는 것 같은. 저민다는 말 알아요? 저민다는 것. 저미는 것이 뭐예요? 살이 이렇게 있는데, 잘 드는 칼로 이렇게 포 뜨듯이 뜨는 것입니다. 끔찍한 이야기죠. 사실은. 저미는 것입니다. 저며요. 그래서 칼집을 내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소금을 뿌린다고 생각해봐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통증과 아픔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깊이 저며 내는 것입니다. 포를 뜨듯이. 그러한 통증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아주 극대화 되어서 도저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이 그러한 통증을 느끼는 것이 목회의 소명입니다. 요즘은 안 그런 것 같아. 그냥 한창, 어떻게 목회의 소명을 받았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그 교수 생활 할 때 옛날에 입학시험 면접 보는데 왜 신학교 오셨습니까. 목사가 되려고 왔습니까. 왜 어떻게 오셨습니까. 80 노모님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왔습니다. 노모를 보내십시오. 그랬습니다. 어떤 사람이 왔어요. 왜 오셨습니까. 교수님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만 의지 한댄 줄 알았어요. 제가 왜 와야 아는지는 우리 집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다 응답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집에 돌아가시고 집사람을 신학을 하라고 그러십시오. 그것입니다.
이 아버지가 그 느낀 사랑이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얼마나 컸으면 그렇게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다고 표현했던 예수님이 마태복음 9장에서 언급하셨던 그래서 사도를 파송하셨던 바로 그 단어가 ἐσπλαγχνίσθη(에스프랑크니스데)가 그대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똑같은 불행한 상황을 만났을 때, 왜 어떤 사람은 그 똑같은 광경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데, 또 어떤 사람은 그 광경을 보면서 그러고 까불더니 그 꼴이 됐지 라는 객관적인 마음이 생기냐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사랑의 차입니다. 사랑의 차이.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부모는, 부모는 자기 자식을 공정하게 못 봐도 괜찮아. 그럴 정도로 자식을 아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되는 거야. 자식들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공정히 보게 해 주는 현실을 이 세상에서 매일매일 맞딱 들여요. 문제는 자기편이 없어요. 그런데 마지막까지 그 자식을 불쌍히 여기고 기대하고 믿어주고 그리고 그 자식이 어떠한 잘못을 했든지 간에 잘못한 그 과정보다 현재 처하게 된 육신적이고 영적인 고통의 상태를 함께 아파할 수 있을 때에 타이름, 깨우침, 책망, 교훈, 모든 것들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애들한테 큰 소리만 쳐도 선생님들이 시말서를 쓴다고 하니까 옛날엔 우리 참 많이 맞았거든요. 정말 많이 때렸어요. 난 비교적 그래도 말썽을 안 부렸는데도 꽤 아프게 맞은 몇 번의 기억이 나요. 그러니까 뭐 많이 맞았고요. 그리고 그렇게 맞으면서 큰다고 부모들도 학교에서 얻어맞고 왔다고 그러면, 그렇게 이야기 하는 애들도 없지만 그러면 너가 오죽했으면 선생님이 그렇게 팼겠냐. 그런데 지금은 어림없죠. 당장 아마 가서 선생님 머리를 잡아당길 것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학생이 이렇게 맞으면서도 감이 와요. 이 선생님은 날 염려해서 때린다. 이 선생님은 지금 독기가 생겨서 날 패는구나. 실제로 나 아는 선생은 그랬어요. 야, 이놈의 자식들아. 내가 너희 잘 되라고 때리는 줄 알아? 너무 화가 나서 패는 거야. 그러한 이야기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때려요. 그런 게 느껴져요.
그러니까 부모가, 오늘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닮은 성품을 자녀들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지 물어봐야 합니다. 교훈할 수 있고, 책망할 수 있고, 바르게 할 수 있고, 의로 교육할 수 있고, 다 할 수 있어요. 또 다 필요합니다.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바탕에 있어야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식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런데 사실 그게 참 어렵거든요. 그래서 이 정도는 살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안 살아요. 아이고, 이것들 기합이 빠져 가지고 아이고 저래 가지고 뭘 할까. 아 저렇게 퍼질러 자기는 자는지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 참아야 합니다. 참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내가 우리 자식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이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내 자식이 잘못되었다 말해도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마지막 사랑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 마지막 사랑입니다. 사랑이 마지막입니다.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그게 마지막 사람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기다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순종하고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중에는 그런 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부부가 살아도 마음으로 서로를 버린 사람들이 있듯이, 자식을 데리고 살아도 부모의 마음 가운데 자식을 지운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그 자기의 자식을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마음이 ἐσπλαγχνίσθη(에스프랑크니스데)의 마음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비록 많은 유산을 물려주지 못하고 자녀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켜주지 못했어도, 좀 이 세상의 학문적으로는 뛰어나지 못했어도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 부모를 통해서 자식들이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그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부모에게서 찾을 수 있다면 그 자식에게 중요한 역할은 부모가 거의 다 한 것입니다. 거의 다 한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때로는 무관심 한 것도 너그러움으로 오해될 때가 있어요. 그런데 결국은 드러나요. 관심이 없어서 내 버려둔 것인지, 아니면 관심이 있고 마음으로 애를 태우지만 그러나 오래 참는 사랑으로 기다려 주었기 때문에 말이 없는 것인지 그것을 왜 모르겠어요. 그래서 오늘날 우리 부모들에게는 부모들도 현대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똑같아요. 자식에 향해서도 오래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조금 조금 실망을 시키면 아예 마음속으로 접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아버지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 보여주는 아버지였어요. 그래서 그 아들은 풍요로운 삶을 방탕하게 살면서 아버지를 잊었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제가 말씀 드렸죠. 때로는 우리가 잘 몰라도 부모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감추어진 사랑이 많아요. 자식은 부모와의 기억이 별로 없어도 부모 속에는 자식에 대한 예쁜 기억이 많이 있어서 오래 참고 기다릴 수 없는 그런 마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생각해 보면, 이제 드디어 아들이 입을 열었어요. 그리고 뭐라 그러는가 하면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습니다. 이 아이는 그런 방탕한 타락의 길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집에 있는 품꾼 중의 하나로 여겨 주십시오 그 이야기죠.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뭐냐 하면 이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이 안 나와요. 괜찮다든지, 그것을 이제 깨달았냐. 너에게 어떻게 벌을 내리면 되겠냐. 뭐 이런 대화가 안 와요. 아버지는 이런 절실한 자기 죄에 대한 고백, 아버지는 그것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와서 이 아들과 함께 누리는 아들과의 관계가 너무 행복한 것입니다. 그게 뭘 보여주죠? 용서에요. 용서. 그래서 자녀를 끊임없이 용서해 줘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무한히 용서해 주지 않아요. 그런데 부모는 그래야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무리 많이 잘못해도 마지막에 자기를 용납하고 용서해주는 부모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 부모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무한히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가장 강력한 방식이 뭐라고 그랬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뭐라 그랬어요? 용서. 용서. 용서를 통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알았던 성경의 모든 인물들은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거였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요.
여러분 새 집 사서 이사 가본 적 있죠? 얼마쯤 행복합니다. 한 13평 쯤 살다가, 한 17평 쯤 살다가 한 32평으로 이쪽서부터 저 끝까지 걸어가도 끝이 안다죠. 그죠. 얼마쯤 행복합니다. 영국 사람들은 한 달 쯤 행복하다고 그랬대요. 속담에서. 말을 사면 일 년 정도 행복하다 그래요. 여러분 실제로 안 그럴 것 같아요. 결혼을 하면 일주일이라 그러더라고요. 말만도 못합니다. 그런데 자기 같은 죄인이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하는 이 감격은 일평생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까먹고 있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깨닫게 될 때, 그냥 가슴이 확 녹으면서 그렇지, 이 벌레 같은 죄인을 위해서 우리 주님이 죽으셨구나. 사랑해 주셨구나.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 그게 은혜에요. 그러니까 자녀들을 끊임없이 용서해야 합니다. 습관적인 악에 빠져 있는 경우 있잖아요, 자녀들이. 도벽이라든지 여러 가지 많잖아요. 그것을 자기 십자가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엄마, 아빠는 무한히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내가 저 놈의 자식을 왜 낳았을까. 그런 이야기 괜히 홧김에 많이 하잖아요. 너는 내 새끼도 아니다. 그렇게 이야기 들을 때에 얘 마음속에 이미 오래 전에 엄마는 이미 잘렸어. 아빠는 이미 잘렸어. 그게 이 아이 속에 이미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들을 때 아이들은 충격도 안 먹어요. 끝없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게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데 실패해도 마지막에 자기의 자식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는 실패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사랑입니다. 깊이 자식을 사랑해야 합니다. 육욕이 흐르는 사랑은 짐승들도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이 아니라 참된 사랑은 그래서 왜 자식들이 좀, 제가 아는 자매 하나는 아버지가 워낙 똑똑합니다. 거의 천제에 가까울 정도로 똑똑한데, 자식들이 있어요. 그런데 자식들이 각각 아버지 닮아서 워낙 공부를 잘 해서, 사법 고시도 붙고 이런 애들도 있고 좀 못한 애들도 있잖아요. 아주 정확하게 탁월하지 못한 자식은 탁월한 자식을 위해 봉사하도록 질서를 세워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뭘 사도 넌 오빠 줘야지. 니가 그걸 왜 갖냐. 오빠 꺼다. 넌 공부도 안하면서, 오빤 공부 열심히 하니까 책을 사도 오빠 책을 사야지. 방을 줘도, 책상을 사도, 그렇다고 해서 걔를 완전히 땅바닥에 엎드려서 공부하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똑같아도 끊임없는 차별을 느끼잖아요. 그 속에서 분노를 느끼게 되잖아요.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물들도 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랑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이들 속에 아이들이 아무리 망가지고 말을 안 들어도 기대에 어긋나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시집간 어느 자매한테 전화가 왔어요. 어떻게 지내니. 목사님, 애들 때문에 고달퍼 죽겠어요. 그러더니 뭐라 그러냐 하면,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 말을 안 들었는가 애들을 통해 보여 준대요. 그때마다 자식을 향해 오래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래서 뭐가 필요하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자식 사랑은 그저 본성에만 충실해도 될거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제가 지난 시간에 설명했잖아요. 인간만이 그 본성을 거스를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인간이 인간만 못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인간이 위대한 것입니다. 고달픈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다.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그러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해요, 안 필요해요? 많이 필요하답니다. 제가 주례 설 때 항상 하는 말이 결혼하기 전에 하는 사랑은 되니까 하는 사랑이고, 결혼한 다음의 사랑은 해야 하니까 되어야 하는 사랑입니다. 연애에 꽂혀서 정신 못 팔고 뭐라 그래요. 콩 꺼풀이 씌었을 때는 은혜가 방해가 돼지. 은혜를 받으면 자꾸 절제하라고 양심이 소리치거든. 그래서 콩 꺼풀이 씌어 가지고 막 물이 한쪽으로 쏠리듯이 쏠리는 것입니다. 무슨 은혜가 필요해. 그게 꽂혔는데, 필요하지. 절제를 하려면. 그런데 절제를 안 하려고 하니까 막 물동이에 물 쏠리듯이 막 쏠리는 것입니다. 무슨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말 몇 십 년에 한번 태어날까 말까 한 사람, 석고상 같은 깎은 것 같은 미모의 얼굴과 결혼을 해도, 실제로 그런 사람도 별로 없지만 해도 그 유효기간이 6개월이 그랬죠. 그런데 어느 자매가 목사님은 틀렸어요. 제가 경험해 보니까 4박5일이래. 신혼 여행가서 싸우기 전까지 4박5일밖에 안 되는 그거. 그거 끝나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 정말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랑입니다. 은혜가 필요합니다. 연애도 오래 한 사람들은 그 비밀을 알아요. 그래서 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지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구나. 이것은 벌써 사랑에서 쓴맛 단맛을 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주 많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식 사랑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한없이 필요해. 인간이 어떤 존재인데, 자기 뱃속으로 낳은 새끼라도 무한히 참을 수 있어요. 만약에 그렇다면 왜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겠어요. 왜 원수 되겠어요. 그렇게 쉬운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3주 동안의 설교를 다 종합해서 묶어 보면 결국 뭐냐 하면 문제는 다양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아가페의 사랑이 이 모든 것의 답입니다. 부모 때문에 찌그러진 자식들도 부모가 나중에 가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 펴줄려고 해도 펴져요? 안 펴집니다. 물론 이럴 수는 있어요. 어렸을 때 막 자식들에게 상처를 줬는데, 나중에 아버지가 잘 살게 됐어. 엄마, 아빠가. 얘네들이 끼니가 간 곳 없는 거야. 집도 사주고, 차도 사주고, 뭐 장가도 보내주고 생활비도 엄마, 아빠 의존하면서 살아. 그러면 상처가 저 아래 묻혀 있는 거지. 묻혀 있어야지 그게 드러나면 당장 다음 달부터 생활비가 안 들어오는데. 그렇지만 그것은 치료된 것이 아닙니다. 적당한 계기가 생겨서 조건이 틀어지면 확 뻗혀서 오는 것입니다. 치료는 무슨 세상에는 치료가 없어요. 무슨 치료가 있어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엄마, 아빠는 상처를 주었어도 그것을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도 그것이 빼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 마음을 녹여서 그것을 사랑하게 합니다. 정말 놀라워요. 그래서 부모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았는데도 주님의 은혜가 역사하면, 오죽했으면 우리 엄마가 그런 상처를 주었을까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 자식이 오죽 했으면 그런 삶이 되었을까. 그러면서 ἐσπλαγχνίσθη(에스프랑크니스데)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확 찢어지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다. 은혜를 많이 받아야죠. 많이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의지 않고 자기는 남편을 많이 사랑한다. 아내를 많이 사랑한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하나님이 가끔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생사 간에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자식을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많이 기도해야 됩니다.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매일 참고 인내하며 내 새끼처럼 기르지 말고 주님 자식을 내가 맡아서 유모처럼 돌본다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책임감을 가지고 그렇게 오래 기다리고 용서하고 그래야죠. 세 가지. 인격적이어라. 그 다음에 측은히 여기라. 마지막에 용서하라. 기도합시다.
6.아내와 남편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I. 본문해설
오늘 성경은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남편 된 자들에게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라’ 는 권면의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이와 같이’라고 하는 이 부사구는 바로 그 앞 1절과 6절 사이에 나오는 내용을 염두에 두고 '이와 같이' 라고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앞부분에서 사도는 아내가 가정의 질서 상 남편에게 순종하고, 또 거룩한 단정함으로 가정의 아내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촉구하였으니 이와 같은 원리에 따라서 ‘남편 된 자들도 아내와 함께 동거하고 귀히 여기라’ 고 하는 권면입니다.
II. 아내는 누구인가?
A. 연약한 그릇
그러면 오늘 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아내는 누구입니까? 제일 먼저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릇이라고 번역된 ‘유스코스’라고 하는 이 희랍어 단어는 어떤 특정한 그릇이 아니라 그릇 전체를 총칭하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디모데 후서에서 우리에게 주었던 사도바울의 교훈을 생각나게 해 줍니다. 그는 교회 안에는 하나님이 쓰시는 다양한 일꾼들이 있다는 것을 그릇으로 비유하였습니다. 금 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어서 어떤 것은 귀히 쓰고 천히 쓰는데 그 모든 것들이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도록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바로 아내도 비록 남편과 함께 가정생활을 이루며 겉보기에는 남편을 수종 드는 것처럼 살아가지만 사실은 그도 역시 하나님께로 부름 받은 독특한 일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흔히 여자가 아무리 많은 계획을 세워도 결혼을 하면 남자가 하여야 하는 일에 의해서 일생의 가는 길이 결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실 또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한 자매는 평생 선교사로 가기로 늘 마음을 먹고 기도했다가, 시골에 목회하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지금 시골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저에게 그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여성은 이런 저런 꿈과 계획을 세워도 그것은 소용없고, 결국은 남자가 남편이 되어서 가고자 하는 그 길에 결국은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자매의 가는 길은 원래 시골 목회인데 자기가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 그렇지 않아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이런 저런 꿈을 꾸어 본 것입니다. 저도 원래 목사를 하려고 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딴 거 하고 싶은 게 있었어요. 그랬는데 여러분 이렇게 만나고 보니까 결국은 이 길이 나의 길이었고, 실컷 꿈꾸던 그 길은 주님이 가기를 원하던 길이 아니었으니까 여러분하고 결혼을 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자매도 역시 마찬가지니까 오히려 자신이 갖고 있던 착각과 편견이 결혼을 통해서 깨뜨려지고 현실이 드러났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지 그게 모든 일 뒤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신앙이지 그런 거하고는 상관이 없이 남자하고 결혼해서 결국 글로 우겨 넣어서 내가 시골 목회를 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하면 남편 때문에 목회하는 거지, 소명 때문에 목회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웃은 것에 대해서 사과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그렇게 그런 방식으로 남편과는 다른 영역에서 섬겨서 남편과 더불어 주님을 섬기게끔 선택하신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연약한 그릇이라 그랬는데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여성들만 연약한 게 아니라 남자도 연약한데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다 연약한데 여자가 좀 더 연약하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연약이라고 지금 말씀하셨습니까? 우리 아내는 그 단어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 아내는 산소(生牛)와 같은 여자 입니다. 산소 ! 언제나 씩씩하고 힘이 넘쳐서 내가 눌려 삽니다. 라고 말이죠. 그것은 원래 아내의 모습이 아닙니다.
요즘에 어느 회사에서 광고 카피를 했는데 참 잘했더라고요. 사진이 석장인가 넉 장이 나오는데 남편하고 마트에 가서 시장을 보고 남편은 양쪽에다가 무거운 걸 들고 올라가고, 계단도 한 다섯 개 밖에 안 돼. 아내는 수박 한 덩이를 들고 못 올라가서 남편을 애처롭게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 밑에다 썼어. “아내는 약하다.” 그 다음에는 애기 유모차를 끌고 아파트 앞을 왔는데 올라가는 길이 없는 거야, 사방을 둘러보더니 번쩍 들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 엄마는 힘세다.
우리 종종 과거의 시대의 어머니들을 보면 그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남편 일찍 여의고, 혹은 여의지 않아도 그 놈팽이 같은 남편 만나서 남편은 맨 날 술이나 먹고 방안에 퍼질러 자고 아내가 미친 듯이 시장 바닥에서 일하고, 막 거칠게 살면서 자녀들을 키우고 하는 그런 어머니의 삶들을 우리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죠? 자녀들에게 결코 눈물한번 보이는 법이 없지요. 그죠? 그래서 자녀들은 자라면서 우리 엄마하고 여자 됨하고는 거리가 멀다. 언제나 씩씩하고 그리고 아빠 같은 엄마, 그렇게 생각을 하죠. 그러나 그것이 엄마의 모습일지는 몰라도 아내의 모습은 아닙니다. 아내의 모습은 언제나 연약하고 그리고 남편을 의존하면서 그리고 남편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아내가 함께 나누어 하면서 그러면서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불러 주신 사람이 아내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남성을 창조해 놓고 보니까 외로워서 여자를 우연하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인간들이 하도 머리가 나쁘니까 알아듣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고,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셔서 이 세계를 창조의 목적에 맞도록 돌보시게 하시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신 명령 속에서도 드러나요. 그 명령이 뭐냐 하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 아래에 구체적인 명령이 둘이 나오는데 ‘정복하라’는 명령과 ‘다스리라’는 명령이 나와요. 정복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개척되지 않는 곳에 도전하고 개척하여 자기의 땅을 만드는 것입니다. 통치권을 확보하는 것이고, 다스리는 것은 이미 그렇게 통치권이 확보된 땅에 서로 관계를 짓고 질서를 이어서 그래서 말하자면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의 뜻이 펼쳐지도록 그렇게 돌보는 것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복과 개척이 남성의 정신이라면 다스림과 돌봄은 여성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제왕 학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아주 영면한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이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잘 정신 속에서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척과 정복의 정신이 있어서 그래서 외국에 있는 군대를 무찌르고, 땅을 차지하고, 깃발을 꽂고, 그리고 야심차게 정복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왕국 전체의 운명을 걸고 자기의 목숨까지도 걸고 전쟁을 해서 남의 땅을 빼앗고 개척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 하면 안 되죠. 그렇게 개척된 땅은 사람들을 심어서 그 제도를 만들고 법을 제정하고 질서를 가꾸어서 그래서 왕인 자신의 통치의 철학이 그 모든 영토 속에 아주 서민들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전부 다 실현되도록 만들고 그러는 동안에 또 다시 정복을 하고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보면 종종 이 두 가지 정신의 균형을 잃은 왕들이 종종 나타나요. 이게 뭐냐 하면 전자는 아주 탁월하게 잘하는데 후자를 못합니다. 그러면 결국은 열심히 정복한 큰 땅이 내분을 일으켜서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내적인 것들은 아주 잘하는데 외적인 것들은 못해. 그러면 아주 아름다운 문화를 일구어 놓고도 이민족의 말발굽 아래에 짓밟혀져 왕국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묻겠죠? 둘 다 못하는 사람은 어떡합니까? 백성이 불쌍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되는데 괜히 태어나서 그 시대에 살아가는 모든 국민들을, 백성들을 도탄에 몰아넣는 것입니다. 두 개가 다 갖춰있으면 진짜 역사에 남는 대단한 임금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여러분이 지도자의 길을 걸어가려면 그것이 무슨 방면의 지도자이든지 간에 이 두 가지 정신이 마음 안에서 아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야지만 그런 지도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이 남성들은 그렇게 정복하고 그 다음에 개척하고 하는 것들을 주시고, 여성들에게는 그렇게 개척하고 정복한 것들을 관계를 묻고 통치하게 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근데 저 사람이 더 연약한 그릇이다’라고 말합니다. 남자도 연약한 그릇이지만 여자는 더 연약한 그릇입니다. 그러니 한 아내가 남에게 절대 연약해 보이지 않는 산 소 같은 사람이 되었을 때 그가 살아온 그 삶이 얼마나 역경에 가득 찬 삶이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씩씩한 모든 여자들을 마음 한 구석에서는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남성들은 누가 내 아내를 저렇게 산소처럼 만들었을까? 그것을 스스로 반성을 많이 해야 됩니다. 깊이 생각을 많이 해야 됩니다.
여기서 특별히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비교급까지 써서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남성들도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나이가 들면 더 약해져요. 왜냐하면 남성들에게서 여성 호르몬 분비가 많아지고 여성들은 줄어들고 남성 호르몬 분비가 많아져요. 그래서 나이가 점점 들면 젊었을 때는 산소 같은 여자들이 나이가 들면서는 산소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성들은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아내가 있든지 말든지 그런 거 아주 알기를 우습게 알고 씩씩하게 살다가 이제 정년퇴직 하고 나이 들면 마누라가 문만 열고 화장실 가도 “여보 어디가?” 그런단 말이야. 그러고 곰국 끓여놓으면 가슴이 철렁하는 것입니다. ‘마누라가 며칠 동안 나가 있으려고 곰국을 끓여놓나?’ 그렇게 의존하는 마음에 생겨서 막 따라 다녀요. 그래서 젊었을 때 남성들이 보험을 잘 들어놔야 됩니다. 그 보험이 뭐냐 하면 서로 사랑하는 관계의 보험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절대 남편 없이 살 수 없게끔 그렇게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나이 들어서 아내가 방문 드르륵 열 때 “여보 어디가?”그러면 “그건 알아서 뭐해?” 그런 핀잔 안 듣게 된다. 이 남성들 진지해지는 것 봐요. 보험을 별로 안 들었어요. 큰일 났어요.
근데 그런 관계들을 가로막는 것이 뭐냐 하면 비인격적인 생활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잘 생각해 보세요. 성경적으로 인격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격을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위격 간에 그러한 아름다움과 그 다음에 사랑, 그리고 일치, 그것이 위격적인 것이라면 그 위격적인 것의 반영이 인간 사회에서의 인격적인 거야. 그래서 아내나 남편이 볼 때에 젊었을 때 이 세상에 살 때에는 각각 자원의 차이가 있을 수 있어요. 젊어서는 남편이 돈을 와락와락 벌어. 돈 통을 자기가 쥐고 있어. 그것도 하나의 권력 아니에요? 또 아주 젊었을 때는 아내가 미모가 있어요. 그것도 6개월 밖에 안 간다 그러지만 또 뭐 꽂히면 더 갈 수도 있잖아요. 사람에 따라서요, 그것도 미모가 될 수 있어요. 나이가 들면 남편이 건강이 약해져. 오늘날의 여성이 남성보다 4년 내지 5년 더 사는 것으로 통계가 나왔잖아요? 78세인데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남성의 삶의 질이 여성보다 훨씬 떨어지는 사람이 많아요. 왜? 젊어서는 너무 건강을 마구 허비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런 결과도 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아내는 기운이 썽썽해. 자원에 차이가 나죠. 그런데서 그런 자원을 가지고 서로를 대할 때 무시하기도 하고 깔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근본적으로 살아온 부부의 일생에서 인격적인 그런 연합들이 제대로 안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은혜 많이 받고 사랑으로 충만할 때 형제가 돈 없다는 이유 때문에 멸시해본 적이 있어요? 오히려 돈이 없고 가난하면 더 불쌍히 여김을 받게 되고, 그리고 건강이 나쁘면 “아유 저거 병이 걸려서 골골하는 게 옆에 교회에 가서 등록하지 왜 우리 교회에 와 가지고 병균을 퍼트린데?” 그런 생각 안하잖아요? 오히려 “저런 연약한 지체를 우리 교회에 붙여주셨으니까 우리들이 더 잘 섬겨야지.” 그런 생각 갖잖아요? 그게 바로 사랑의 연합이 시키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러면 남편과의 관계도 그렇게 돼야지 정상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서 각자 하나님께로부터 그릇으로서의 사명을 받아 이 가정을 동등하게 꾸려가고 있다라고 하는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식을 안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시중에서 나오는 가정에 관한 책들 중에서도 조심해야 할 책들도 많아요. 어떤 책들은 심지어 기독교인이 썼는데도 성경적인 가정관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대 센 쪽이 이기잖아요. 그래서 어느 한 쪽이 그 대에 굴복해서 평화가 이루어진 것 그게 간증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대 센 남편에게 죽은 듯 사는 여성, 그 사람이 진정으로 인격적인 남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부부간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애완견적인 사랑도 있고 인격적인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아부하듯 들러붙어서 껌벅 죽어지내니까 개뼈다귀 하나 던져주듯이 아내 머리 쓰다듬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받으라고 이 땅에 아내들을 만들어 내신 게 아닙니다. 더군다나 그런 사랑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불쌍한 사람입니다. 인격적인 사랑은 각자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났고, 그리고 ‘그가 아내가 되어서 비록 나의 일을 돕고 있지만 사실 나를 섬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그릇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라고 여길 수 있을 때 자기가 하고 있는 밖의 일보다도 가사를 하찮게 생각한다던지, 아내의 역할을 하찮게 여긴다든지 그러는 것은 잘못한 거지요. 법원에서 무슨 판결을 내리기를 가사 노동하는 주부들의 임금을 150만원 * 결혼한 날 수라고 했는데 그건 성경적으로 동의되지 않는 거죠 그런 게 어떻게 있을 수 있겠어요? 거의 말하자면 날마다 와서 일하는 심부름센터 도우미 수준의 월급 계산인데, 그걸 계산할 수 있겠어요?
그렇게 해서 오늘 날의 가정 속에서 일어나는 그 폭력적인 언어, 거친 욕설, 거기에 한 발짝 더 나아가서 물건을 집어던지고 폭력을 행사하는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아주 커다란 죄예요. 초대교회 때 같으면 전부 다 치리를 받고 교회에서 수찬 정지되거나 심하면 출교 당할 죄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일반화된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거는 너무 나쁜 것이고 한 사람이 그렇게 남편이 폭력을 행해서 비인격적으로 아내에게 대하게 되면 그 폭력이 결국은 메아리가 되어서 자신의 노년에 그대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무슨 사랑의 일치나 결합이 있겠어요? 노예적인 생활이지.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일 수가 있겠어요? 심지어 이런 폭력들이 예수 믿는 사람의 가정에서도 버젓이 행해진다고 하는 것은 아주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방치하는 것도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 젊은 사람들 결혼할 때 내가 이야기하는데 “부부싸움 하지마라. 피할 수 없이 부부싸움을 하게 되더라도 말로 다투는 것 이상으로 넘어서서는 안 된다. 죄짓지 마라. 그리고 폭력을 행사하면 일단 경찰서에 집어넣고 이야기하라. 왜 웃어요? 그게 웃을 일인가요? 제일 먼저 목사한테 전화하고, 경찰서에 전화해서 집어넣고 쇠창살 가운데 두고 대화를 시작을 해라.” 혼을 내놔야 돼. 내가 맘대로 할 것 같으면 지하 밑에다 감옥소를 만들어 놓고 콩밥을 먹여요.
그렇게 해서 아내가 한번 두 번 세 번 봐주니까 그 폭력이 습성화 되면서 얻어맞는 아내가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하나님의 형상이 막 파괴가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치료를 요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 일에 있어서 남편들이 깊이 각성을 해야 합니다. 그 잘못된 비 성경적인 가부장적인 태도를 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통계적으로 보면 여성이 남성화된 가정에 평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약간 여성화된 가정에 오히려 평화가 있어요. 그렇게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에서 폭력이 없는 인격적인 대화가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에요. 그 아내가 남편에게 완력으로서는 남편을 이기지 못하니까 폭력을 행사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에 맞고 사는 남편들도 많이 있어요. 그래서 맞고 사는 사람이 한번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게 때릴 때 자기가 덤벼들어서 확 꺾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내가 까무러친다는 것입니다. 눈을 하얗게 뜨고 거품을 물고 쓰러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말의 사랑이라도 남아있으면 그렇게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더라도 비인격적으로 남편을 대하는 여성들의 그 마음의 태도와 이런 것들도 심각합니다. 물론 따지면 거기에는 “남편이 남편 구실을 제대로 하면 내가 그렇겠느냐?” 하는 반감도 있어요. 그런데 오늘 성경은 남편도 약하고 여자도 약해, 그런데 여성은 더 약해, 그러니까 그릇을 다루듯이 잘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결국은 가정에서의 교육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기를 때 남자아이에게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로서의 덕목을 아버지로부터 배우게 하고, 그 다음에 딸에게는 엄마의 덕목을 배우게 해야 됩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하죠? 아이들이 말 안 들으면 때려서라도 길러야 된다고 그러니까 그 쬐끄만 여자아이를 쥐어 패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딸을 때리면서 키우는 것은 짐승입니다. 그러면 아들만 때리라는 겁니까? 물론 아들만 패라는 것입니다. 딸은? 때리면 안 됩니다. 제 기억에는 아직 우리 딸 때린 적 없어요. 아들은 너댓 번 아주 심하게 때렸어도 딸은 때린 적 없어요. 딸은 그렇게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 내버려두어야 합니까? 아니죠. 다른 방법으로 그 아이를 자극하고 일깨워서 갖게 해서 자기의 여성성 자체가 파괴되지 않도록 만들어 줘야 됩니다. 그래서 여자 아이가 곰살궂게 뭐 예쁜 거 만들고 그럴 때에 막 놀리고 그러면 그 아이가 여성스러워지는 거 자체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 가정에는 딸이 하나 있는데 하여튼 미장원에 한번 가려면 펑펑 울고, 그리고 남자처럼 하고 다니는 것만 좋아하고, 바지고 운동화고 모두 남자 거를 입고 그리고 칼싸움을 좋아한대요. 그러면서 그날도 칼을 사가지고 갖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조금 더 애들을 길렀잖아요. 그래서 내가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거는 그 아이가 그걸 좋아한다고 해서 부모가 무조건 동조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지금 걔가 칼싸움 좋아하는 것을 칼을 확 뺏어서 ‘너 이딴 거, 계집애가 이딴 거 하면 혼난다’고 그러면 이 아이가 상처를 받고 찌그러져.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 하는 게 뭐냐 하면 얘 그런 식으로 만약에 지금 하는 것처럼 하면 그럼 얘는 나중에 이제 대인 관계에서 남성들과 굉장히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사귀는 게 다 남자친구들만 사귄대. 저 그런 자매들 몇 만났어요. ‘여자들 왜 안 사귀냐?’ 하니까 ‘아이고 짜증난대, 잘 삐지고 울고 샘내고 남자들은 화통해서’ 여자 애가 뛰어 다니면서 ‘형형형형’ 그러고 다녀요. 그거는 놔두면 안 된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으냐? 그래서 칼싸움을 하는 것을 좋아하면 칼싸움을 아주 용기 있게 잘하는 것과 아주 예쁘고 여성스러워지는 것이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아이 속에 동시에 넣어야 된다. 그러면 칼싸움은 초등학교 졸업하면 안 해. 걔가 결혼했는데 첫날밤에 칼 두 자루 들고 와서 신랑하고 그거 하자고 그러겠냐고? 철이 들면 안하지. 우리도 어렸을 때 딱지치기, 구슬치기 다 했는데 지금 집사님들 그거 땅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서 그거 하는 사람 있어요? 그때는 영원히 할 거 같지만 나이 들면 안하거든. 그러니까 그 칼싸움 좋아하는 것은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거를 하기 위해서는 머리도 남자처럼 해야 되고 옷도 남자 옷을 입어야 하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만들어서 여성스러워지는 것 자체에 대해서 막 자기가 그거를 짓누르면서 억압하게 만들면 이 인성자체가 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내가 가르쳤어요.
그러면서 내가 아주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줬어요. 여러분 안젤리나 졸리라는 배우 기억하시죠? 자매님들은 별로 잘 몰라요. 형제님들이 좋아하시지. 지금은 다 아줌마가 되어서 그렇지만 한참 젊었을 때 20대에 보면 그 액션이 정말 화려하죠. 막 ‘툼 레이더’ 같은 영화에서 막 그 무덤처럼 생긴 바위 사이를 뛰어 다니면서 거의 전광석화와 같이 카리스마에 넘치는 액션 연기를 보여주잖아요. 근데 일단 딴티플로구 군복 다 벗으면 정말 예쁜 여자거든. 그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넣어 줘야지만 그게 여성성이 찌그러지지 않으면서도 개별적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상한 특질들을 소화해 낼 수 있는 거지.
남자 아이들도 마찬가지에요. 비록 실패했어도 여자아이들이 할 수 없는 과감한 일을 해냈을 때 그때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고 칭찬해줄 때 남성성 자체가 꺾이지 않고 계속 개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거 봐라, 인마 엄마 허락도 안 받고’ 줘 패고, 욕하고 그러면 아이가 더 이상 도전해야 엄두를 못 내서 찌질 한 남자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거를 항상 부모가 판단을 하고 생각을 하면서 자녀들을 길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제 남성과 여성성들이 발달하면서 한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성은 더 연약한 그릇이다’. 우리 여러분 고무 다라니나 플라스틱 바께스 같은 것들 우리가 헤져서 못쓰고, 깨져서 못 쓰는 경우 있습니까? 쓰다 쓰다 지겨워서 쓰레기 담다가 나중에 버리잖아요. 그리고 새 것 사잖아요. 왜? 발로 차도 안 찌그러지고 집어 던져도 안 깨져 그런 고무 다라야. 근데 오늘 성경은 ‘아내는 잘 깨지는 그릇’이다. 그래서 그런 그릇을 우리들이 꼭 필요할 때 꺼내서 쓸 때는 아주 조심해서 다루듯이 그렇게 남편이 아내와 관계를 맺고 살아갈 때에는 말이나 행동, 모든 육체적인 힘, 모든 것에 있어서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생각하고 배려하고 돌보면서 살아야 될 사람이 바로 아내다 이렇게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내도 이렇게 여러분에 의해서 연약한 그릇으로 여김을 받기를 바랍니다.
B. 생명의 유업을 공유할 자
두 번째는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라고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바 그 구원,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릴 자가 바로 ‘아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나누어 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경우라면 믿는 형제와 자매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게 되어있는 것이 가정의 원리이고, 그렇다면 두 사람은 부부로 연합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를 몸으로 한 교회의 연합된 성도였어요. 그렇게 한 몸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 남자의 아내, 그 여자의 남편이기 전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하나의 지체예요.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정에 대해서 가르쳐 주실 때에는 교회를, 교회에 대해서 가르쳐 주실 때에는 가정을 함께 비유로 들어가시면서 우리에게 두 기관을 같은 연장선상에서 가르쳐 주시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만나는 일반적인 사람들과의 관계는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 있다가 깨뜨려지는 관계일 수 있지만,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영원 무궁히 지속되는 것처럼, 나의 아내 역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한 몸으로서 우리의 관계가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도 없으니 거기에서 우리끼리 살림을 차릴 일은 없지만 그러나 그렇게 남편과 아내 된 그 완전한 사랑과 연합의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관계로 승화되어서 한 결합을 이루며 살아가게 됨으로써 같은 생명의 유업을 하나님께로부터 누릴 사람들입니다. 앞으로 누릴 뿐만 아니라 또한 지금도 이미 누리고 있죠.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아내에게 그런 태도로 섬겨야지만 기도가 막히지 않는다 라고 단서를 붙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매일 매일 살아가는 모든 삶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영적인 생명과 사랑의 힘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인데 이렇게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그리고 남편이 아내에게 폭압과 폭력으로 대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현저히 파괴하게 될 때에는 그때 하나님과의 관계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 은혜의 교통의 문이 막힌다는 것, 그래서 생명의 유업을 오늘 누리지 못하며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경고가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은 보이는 아내와 남편을 향한 사랑 속에서 구체화되는 것이니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남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지식을 따라 사랑함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이냐? 성경은 오늘 ‘지식을 따라서 사랑하며 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말하는 지식은 도대체 무슨 지식을 따라 살라는 뜻입니까? 이거는 넓게 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지만, 가깝게 말하면 아내를 아는 지식입니다. 아내를 아는 지식은 다시 둘로 나뉘는데,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아내를 아는 지식과 개별적으로 자기 아내를 아는 지식을 두 가지를 다 포함을 하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생각해 봅시다. 아내라고 하는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렇게 연약한 그릇이고 생명의 유업을 공유할 자인 동시에 이 아내는 성향 자체가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과는 즉, 남편과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남편은 대출을 얻어서라도 집을 하나 더 사야지만 만족을 느낄지 모르지만, 아내는 지금 있는 집으로도 만족을 하고, 오히려 새 집 살 돈이 있으면 그 돈 중에 일부를 가지고 화단을 가꾸고, 가구를 새로 들여놓고, 집안에 칠도 새로 하고 이렇게 그 가정을 가꾸는 관계 속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남자는 집을 새로 사서 바닥을 수입제 대리석으로 까는 것에 관심이 있을지 모르지만, 여성은 그 공간에서 도대체 누가 모여서 무슨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더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그것이 남자와 여자의 차입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우리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을 갖지 않게 되면 아내의 눈에는 남편이 이렇게 아름다운 관계를 증진시킴으로 가정다운 가정을 만드는 것을 자꾸 방해하는 사람이 남편이라고 생각될 수 있고, 끊임없이 뻗어나가서 개척을 하려고 하는 정복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는 남성에게는 이 여자 때문에 발목을 잡혀서 내 꿈을 못 펼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그렇지가 않아요. 가정이 안정되게 되면 아내는 그 안정된 가정 속에서 이제 우리끼리 행복하게 살자라고 말하고 싶고, 남성은 가정은 아내가 어련히 잘 꾸려가니 이제 나는 밖으로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이 두 마음은 어느 하나가 누구를 굴복시켜야 될 마음이 아니라 그렇게 긴장을 유지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만든 비유가 연의 비유에요. 바람이 부는 날 실패를 풀어서 연을 띄워요. 그럼 알다시피 여러분 연을 띄울 때에는 줄을 풀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팽팽한 줄이 되도록 그 연을 끌고 들판을 막 달리죠. 연이 뜨면서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겨요. 그래도 쉽게 풀어주지 않습니다. 충분히 뜨는 것을 보고 팽팽하게 잡아당기면 힘이 느껴지면 그 다음에 풀어줍니다. 그렇지 않고 마구 풀어주면 그나마 올라간 연이 가라앉고 말아요. 그래서 잡아당깁니다. 때로는 오히려 감아버려요. 감으면 강한 압력을 받으면서 연이 줄 좀 풀어달라고 줄을 막 땡깁니다. 하늘 꼭대기에서. 그때 조금씩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줄을 느끼면서 하늘 높이 날아 오른 연은 저 놈의 줄 때문에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되겠죠. 그러나 일단 끊어지고 나면 연은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로 잡아당기는 그 힘에 의해서 떠 있기 때문에 결국은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두 긴장 관계가 있다는 거 자체가 정상적인 가정입니다. 그러니까 남편과 아내가 어느 한 사람을 전적으로 굴복시켜서 꺾으려고 하는 그런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들은 어떻게 하든지 바깥으로 뻗어나가고 개척하고 정복하려고 하는 남편의 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남편은 그럴 경우에 생겨나는 위험과 그 다음에 염려, 그렇게 자원을 한쪽에 몰아서 쏟아 부을 때 연약해질 지도 모르는 가정 안에서의 결속이라든지 이런 것에 대해서 우려하는 아내의 목소리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이면서 그렇게 연과 떠있는 연과 연줄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렇게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가 수시로 손바닥을 맞부딪치며 완전히 의견일치를 보는 가정이 위험합니다. 위험합니다. 아니 정말입니다. 위험합니다.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그게 원리예요.
나는 그런 거를 가정에서도 보지만, 전 목회자니까 교회에서도 더 잘 발견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면 만약에 교회가 그냥 자신들끼리 모여 교재하고 헌금 걷은 거 자기네들이 쓰고, 그 다음에 자기네 교제를 즐거워하고 이렇게 내적으로 말하자면 응축되잖아요. 반드시 부패합니다. 교회가 헌금 많이 걷히고, 일군들이 많이 세워지고, 교인이 많아졌는데 할일이 무엇인지를 모여서 옹기종기 앉아있으면 반드시 부패합니다. 그 돈 때문에 교회에서 사고가 나고, 그리고 그렇게 모여 있는 사람들 속에서 교제가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하면 끊임없이 누군가가 목회자를 비롯해서 지도자들이 그 남성적인 마음을 가지고 그 교회 바깥에 있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보고, 그 속에서 주님의 마음을 느끼면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그러고 성도들이 하나님께로 받은 많은 자원들로 봉사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그럼 꿈들을 보여 줘야 합니다. 그런 미래들을 보여줘야 됩니다.
지난주에 아웃리치 우리가 950여명 정도 갔다고 하는데 많이 갔지요. 근데 14년 전이었어요. 그때는 저희들 교회에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지하실에 있는 쬐그만 교회에서 그리고 나도 그런 것 해 본적이 없어요. 목사님 어디서 훈련을 잘 받았다고 그러는데 아닙니다. 나도 해 본적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그렇게 시골 교회에 대해서 애지중지하면서 여름마다 교인들이 가서 땀을 흘려주는 그런 교회 전 다녀보지 못했어요.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경험들을 생각하고 실제로 가보면서 사역의 장을 열었어요. 그렇게 해서 14명이 가서 시골교회에 땀을 흘리며 전도해서 10명밖에 안 모이던 교회가 갑자기 100명으로 불어나는 역사를 경험한 것이 시작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시작을 하게 되니까 뭐 주위에서도 여러분 이렇게 교회가 가서, 아까 그 안경 쓰신 여자분, 그때에 우리들이 가서 전도해 가지고 예수 믿고 한 번도 교회에 안 빠졌다고 하잖아요. 하나님과 약속한 건데 어떻게 주일을 빠지냐고 그러잖아요. 여러분 본받으셔야지. 근데 그거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그 일들을 하시잖아요. 그런 일들이 수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서 그렇게 열어 놓으니까 사람들이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 여러분이 이번에 가서 거의 1억 원 가까운 돈을 쓰셨잖아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쓰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자원이잖아요. 그걸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 돈 뿐만 이에요? 눈물과 땀과 기도, 모든 것 마음을 모으면서 누가 그렇게 합니까? 그런데 그렇게 흘러가잖아요. 그렇게 흘러가서 여러분은 빈털터리가 되서 돌아왔습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받았다고 그렇게 기뻐하고 감사하지만, 우리는 정 반대로 그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 너무나 많이 퍼줬는데 사실은 우리가 빚지고 온 거라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끊임없는 도전들을, 이 세상에는 너무너무 주님이 일군들을 기다리고 있는 일들이 세고 버린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와서, 그런 것들을 보여주고 거기에 꿈을 심고, 우리 모두가 가진 않아도 이 정복하는 사람들이 달려가서 정복을 하고 여기에서는 탄약을 만들고 김밥을 싸고 이렇게 하면서 협력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봉사해 가라고 하나님이 성령의 은혜도 주시고, 진리의 지식도 주시고, 이 세상의 물질도 주시고, 아직 써금써금 하지만 건강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흘러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하면 교회가 망가져요.
그런데 또 안에 어떻게 돌아가든지 내버려 두고 바깥으로 쏟아져 버리면 그러면 교회 안에서 다시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를 잘 이루어야 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교구별 목양 보고를 받으면서 이제 청년 교구만 남았는데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너무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구역밖에 모르고 자기 구역식구 밖에 모르고 열심히 봉사하고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 흘리는 그런 구역장들이 있고, 일군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먼 곳까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두 가지 균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에요. 그런 균형을 이루어서 서로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내가 때때로 제동을 걸지만 기본적으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꿈들을 이해해 준다. 그리고 남편이 때때로는 자기 할 일을 모두 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누구보다도 이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고 우리들과의 관계를 가장 기쁘게 생각한다는 마음을 서로 인격적인 관계에서 읽을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내예요.
그런데 이제 이러한 보편적인 아내를 생각하면서 이제 그 이해를 토대로 자기 아내가 누구인지도 알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아내는 이웃집에 다른 아내들하고는 다른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동네 아저씨는 몰라도 돼. 어차피 데리고 살 거 아니니까. 내가 잘 알아서 그래서 내 안에 사용 설명서를 잘 익혀야 됩니다. 내 아내 제품이 어떤 제품인지.
하도 무뚝뚝한 경상도 사람한테 시집을 간 어떤 자매의 이야기인데 뭐 사랑한다 그런 이야기를 할라치면 온 몸에 뭐가 돋는다고 진저리를 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근데 또 구두쇠여가지고 결혼한 지 5년이 됐는데 외식 한번 안 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 전화를 불쑥하더니 ‘내 밥 사줄게, 나오라’ 그러는 것입니다. 이게 5년 만에 웬일이니 칠보단장을 하고 보신탕집으로 쑥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보글보글 끓는 것을 열심히 땀을 흘리면서 꺼내서 소스를 찍어서 질질 흘리면서 퍼먹고 있는 거야. 그 남편이. 그러더니 ‘와 안 묵노?’ 그때까지도 아내가 개고기를 못 먹는 다는 거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지식을 따라서 살아가는 거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연구를 해요, 연구를 ‘내 아내는 어떤 사람이다’ 그리고 연구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한 10년 살면 그래도 500페이지 논문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지식이 되어야지. 저 사람의 인간, 인간성, 단점, 약점, 결점, 그리고 좋은 점, 등등등등 쭉 해서 그래서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여러분 아내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여성들도 마찬가지이죠. 그렇게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릴 필요도 없어요. 제 남편이 뭘 좋아하는지, 누군지, 사용 설명서를 알아야지, 평생 데리고 살 텐데.
A. 동거함
그렇게 하면서 성경은 두 가지를 명령하는데 ‘동거하라’ 같이 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장소적인 것은 물론 포함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연합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하죠.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 지요.’ 정신적으로 연합되어 있는 관계, 사랑, 그곳에서 한 장소를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부부예요.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기도하는 것 이외에는 분방하지 말도록 가르치셨는데 이것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부부가 결혼을 했어도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부부 사이에 이 정신적이고 영적인 결합들이 얼마나 쉽게 와해될 수 있는지를 아셨기 때문에 주신 경고의 말씀이니 새겨듣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정신적인 사랑의 연합 속에서 함께 동거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남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B. 귀히 여김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귀히 여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사랑의 특성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기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없어지고 나면 또 다른 기회가 올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건 자기의 생각이지 사람이 결혼하고 나이가 들수록 이제 두 사람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되고, 그리고 결혼하기 전에는 홀로 있는 것이 아름다워 보이고,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결혼을 하고 후에 홀로 있는 것은 정말 독처하기에 좋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IV. 결론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더 많이 의지하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며 사는 것이 그것이 서로를 귀히 여기는 부부의 관계이고 사랑입니다. 그래서 소중하게 생각을 해야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셔서 살게 하셨으니 이 사람 안에서 그래도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고, 그리고 좋았던 기억들을 회상하면서 그러면서 마치 사람이 나무를 가꾸듯이 그렇게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가꾸며 귀히 여기며 살아가는 가정이 될 때에 그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기에 적합한 자녀들이 자라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가운데 자신들의 영혼도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오늘이라도 가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리고 화해하고, 용서를 빌고, 남편과 아내의 정해진 자리로 돌아가서 그래서 주님의 가정을 교회답게 세우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7.결혼과 독신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창세기 2장입니다. 1장과 2장은 창조기사가 중첩해서 보도되고 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혼란을 느끼는데 혼란 느낄 거 하나도 없고 1장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창조 전체를 그려내고 있고 2장에서는 다시 인간에게 포커스를 맞춰서 창조기사를 중첩해서 쓰고 있는데 히브리 사람들의 아주 전형적인 역사 문학 기술 방식입니다. 자, 이렇게 해서 이제 드디어 하나님이 아담이라는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흙으로 빚어서 그래서 그 사람을 동산에 두시고 그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홀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말씀입니다. 그러며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18절을 보면서 이런 의문이 들지 몰라요. 여기서 독처한다는 것은 홀로 있는다는 뜻인데 그러면 하나님은 아담 홀로 있으면 그것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모르셨단 말인가? 그래서 하나님이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셨다면 결국 아담을 창조하신 그것은 완전한 창조가 아니라는 말인가 등등의 많은 시비성 의문들이 나올 수 있어요. 그러나 사실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기로 마음을 먹으신 것이고 다만 그 과정을 인간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람의 화법을 사용하셔서 그림처럼 보여 주셔서 그래서 이후에 나타나게 될 여성의 창조와 결혼제도에 주목하게끔 하시려고 이렇게 기술을 해 나가신 것입니다.
II. 결혼 제도의 신적의도
그러면 이 결혼 제도에는 어떤 신적인 의도가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미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교리 레카피탈라치오의 교리에 대해 배우면서 이 창세기 2장 기록에서 나오는 인간 창조 기사의 중요성과 특이성에 대해서 학습을 하셨으리라고 믿습니다만 참고로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자연만물을 창조하시고 제일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셨어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는 가시적인 세계고 물질적인 세계에요. 그런데 하늘나라는 천상세계는 영적인 세계에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지상의 피조물 가운데 육체로 이 땅에 있으면서 당신의 나라와, 천상의 나라와 교통할 수 있는 영적인 특성을 가진 피조물을 딱 하나를 만드시는데 그게 바로 인간입니다. 그렇게 하여야 했던 것은 2가지 이유인데 첫째는 그렇게 하여야지만 인간이 정신과 영혼으로서 하나님과 보이지 않는 나라를 이해함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반영된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러했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렇게 하늘나라와 교통할 수 있는 그런 영적인 자질들을 부여하신 이유는 이 두 나라가 마지막에는 인간들의 섬김을 사용해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인 개입으로 두 나라가 모두 하나의 통일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에도 두 나라는 통일되어 있었지만 나중에 이루어지게 될 통일은 처음 통일보다 훨씬 더 영광스런 종류의 통일이 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을 그렇게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A. 정복과 다스림
이제 우리의 시선을 창조세계로 내려와 봅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제 이 땅에 수많은 것들로 창조세계를 가득 채우셨습니다. 하늘에는 새가 날고 그 다음에 땅에는 육축과 짐승들이, 그리고 곤충과, 그리고 또 식물들이, 채소들이 있었고 그리고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이 세계를 지으신 창조목적을 따라서 질서를 짓고 그리고 정복해 나아가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선하고 그리고 완전한 세계였습니다만 그러나 그 선하고 완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그 완전은 정태적인 완전이 아니라 완전해서 더 아름다운 완전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완전이었고 선은 선하고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노동에 의해서 더 아름답게 가꾸어 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꽃을 생각해 봅시다. 모든 사람이 활짝 핀 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꽃이 활짝 피기 전에 몽우리가 터지려고 하는 그때의 그 꽃이 나는 나 나름대로 참 아름답게 생각이 되어져요. 그러니까 여성으로 말하자면 여성의 아름다움이 완전히 발현되어서 아주 화려한 그런 여인의 모습보다는 아직까지 그 모습이 활짝 피어나지 않은 그런 청소년 때의 그 모습 속에서 오히려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그런 미적 감각도 있듯이 동일하게 꽃도 그렇고 모든 만물에 대한 생각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앞으로 아름답고 완전해질 가능성까지 모두 넣어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가꾸어서 세계를 아름답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성을 그 세계 속에 두시지 않았더라면 불가능 했던 일이기 때문에 인간이 가꿈으로써 아름다워지는 이 세상도 결국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되는 것이지 인간의 노동을 찬미할 것은 아니다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자, 어쨌든 그러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명령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제의적인 명령, 혹은 종교적인 명령이고 또 하나는 문화적인 명령, 혹은 노동적인 명령입니다. 그래서 이 종교적인 명령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할 것을 요구하신 명령이었고 그것은 선악과를 둔 하나님의 언약에서 잘 나타나요. 그리고 두 번째는 문화적이고 노동적인 명령은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창조된 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는 것이었고 그리고는 그 다음에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계명이었어요. 그래서 이 정복과 다스림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이 정복은 아직까지 통치에 들어오지 않은 그러니까 이 에덴동산 이 자체가 세계 전체가 이런 동산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특정한 지역만 이런 모습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이 에덴동산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이 세계의 아름다운 질서를 아담에게 학습을 시키신 다음에 그것을 끊임없이 뻗어나가면서 그것들을 정복하여 세계를 가꾸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었단 말이죠. 그런데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는데 먼저 필요한 것은 정복이었어요. 그래서 정복한다는 것은 미지의 땅을 개척하고 혹은 말하자면 도전해서 그래서 미지의 땅을 개척하고 아직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은 곳에 통치권을 세우는 것이라면 다스림은 그렇게 통치권이 확보된 곳에서 질서를 잡고 사물과 사물들의 관계를 연결시켜서 그 땅을 차지하고 있는 주인의 의도가 구현되도록 만드는 것이 다스림입니다. 그래서 고대의 제왕학에서는 이 두 가지 기술이 바로 제왕이 되는 기술입니다. 그래서 제왕이 되는 사람은 그 제왕이 될 수 있는 정신적인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시켜주면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극소수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국가의 가장 최고 지도자들도 너나없이 개나 소나 다 하려고 그러지만 사실은 실제로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적정한 사람에게 그 권력을 주느냐를 놓고 이제 세습 군주제도 해보고 공화정도 해보고 귀족정치도 해보고 별의 것을 다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인류가 도달한 결론이 결국은 민주 공화정이 아니에요 그죠? 재밌잖아요. 이런 이야기가 결혼하고 연관이 된다니까 그것 참 신기하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제왕학에서는 이 두 가지 정신이 군주 안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보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점령해보지 못한 땅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거기를 말하자면 도전하여서 그래서 그것을 개척하고 그 다음에 반항하는 세력들을 짓누르고 거기를 정벌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걸 위해서 왕국 전체를 건 도박도 해야 하고 때로는 제왕이 자기 목숨도 걸고 도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이 없으면 왕국이 흥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땅을 정복하죠. 그리고 끊임없이 그런 새로운 정복의 비전들을 이 제왕이 제시를 해서 신하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군인의 충성심을 불타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그런 새로운 제왕의 도전을 따라서 말하자면 개척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그런 건 아주 잘 했는데 내부적인 것들을 못했기 때문에 나라가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나라를 그렇게 다스리고 정복을 해 놓잖아요. 정복을 하면 그 다음에는 다스려야 됩니다. 그래서 정복을 하면 고도의 기술을 가지고 다스리면서 법을 만들고 도로를 건설하고 조직을 세우고 사람들과 사람과의 연관 질서를 만들고 국가의 기능을 조정해서 그래서 왕이 자기 뜻을 딱 펼치면 만들어진 그 질서를 통해서 자기의 뜻이 흘러가면서 온 백성들과 관리들, 귀족들이 앞 다투어 충성을 해서 그래서 제왕의 뜻이 그 땅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 제국의 영광입니다. 역사에서도 보면 발해라는지 고구려라든지 이런 나라들을 보면 어마어마하게 넓은 땅을 펼쳤는데 순식간에 영토를 잃어버리는 경우를 보잖아요. 그런 경우가 말하자면 전자는 제왕들의 탁월한 정복과 개척의 정신으로 잘 했는데 다스림의 기술과 정신의 부족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냐면 제왕이 만약에 이렇게 개척정신은 왕성한데 다스림의 정신이 부족할 경우에는 결국은 엄청나게 영토를 넓혀놓고 나중에는 내부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나서 우르르 무너져버리는 것입니다. 마케도니아 제국 같은 경우가 그런 경우잖아요. 반면에 내치는 참 잘하는 데 그런데 정복의 정신이나 개척의 정신, 도전, 그 다음에 전투의 정신이 부족하게 되면 아주 아름다운 문명을 이루어놓고도 외적의 침입에 의해서 어느 순간에 나라가 순식간에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대의 그리스 국가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런 거잖아요. 그런 것들이 바로 이러한 정복과 다스림의 정신입니다.
자, 이것을 우리들이 국가라고 하는 커다란 단위로 이 문제를 논의했는데 이것이 결국은 쭉 축소시켜서 하나의 교회로 다시 생각해 봐요. 교회로 생각하면 또 재미있는 그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뭐냐면 하나님이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 중생하고 회심을 경험한 후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주님이 영적으로 자원을 주시고 또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육신적인 자원들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죠. 예전엔 그런 것들을 목적 없이 낭비했는데 이제는 그런 것들을 자기에게 많이 주실 때 그것을 교회를 통해서 사용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끊임없이 현상적으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통치권이 아직까지 실현되지 않은 그 땅을 탐내면서 그 무형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끊임없는 도전정신을 가지고 그것을 개척하고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 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슬퍼하는 마음을 가지고 튀어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우리 밖에 있는 새로운 지경을 보게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난 주일에 아웃리치를 많이 다녀오셨을 것입니다. 그죠? 한 950명 정도 갔다 그러는데 14년 전에 갈 때는 열 몇 명이 갔어요. 저도 거기 따라 갔는데... 시골교회에 어떤 사람들은 목사님 목회하기 전에 훈련을 철저하게 받아서 교과서대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그러는데 나 그런 거 받은 적 없거든요. 나 내가 다닌 교회들은 그렇게 시골 교회들을 위해서 애달파 하고 눈물을 흘리고 그런 교회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냐. 나 자신이 기도하고 은혜를 받고 시골 교회를 생각하다가 그림을 그려낸 것입니다. 그러고 실행해 옮겨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이해하는 마음이 더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갔던 그 교회가 교인이 열 명밖에 안되어서 문을 닫을 정도로 된 교회였는데 우리가 갔다 오고 나서 하나님이 100명을 그 교회에 가득 채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막 은혜를 받고 조금 있다가 우리가 뉴스에서 보게 될 얼굴이 자글자글하고 언어도 분명하지 않은 노인네들이 뉴스에서 보는 것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고 회심하는 역사를 거기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네들을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예수 못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많은 사람들의 상식을 막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누군가가 만약에 해보지 않은 것들에 대한 두려움, 그 다음에 그럴 경우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어려움, 또 어떤 일을 하다가 보면 끊임없는 방해들이 생겨나잖아요. 그것들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겨난다면 도전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누군가가 이런 남성적인 도전의 정신을 가지고 교회에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위해 필요한 헌신의 땅들을 보여줘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정탐하고 왔다. 그리고 그들을 비록 장대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가서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저희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와서 말하자면 강한 승전의 확신을 가지고 교회에 있는 성도들, 하나님의 나라에 애국심에 불을 지를 개척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여기 와서 문 하나 바꿔끼고 그 다음에 꽃을 심고 그런 거에 관심 없어도 됩니다. 지금 그런 게 문제에요? 무슨 국화꽃을 심든지 장미꽃을 심든지 그게 뭐가 중요합니다. 전 나라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수 없이 있고 지금 주님이 부르는데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튀어나가는 사람들이 교회에 항상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일단의 사람들이. 그래서 사건을 일으키면서 그러면서 교회가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너도 나도 그것만 한다면 안 되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자원을 부어 주셨는데 그렇게 쏟아 부어서 헌신할 곳이 나오지 않으면 그 자원이 교회에 모이면서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돈 안 쓰고 잔뜩 모아놓잖아요. 언젠가 반드시 문제가 생겨요. 그 돈 때문에 시험에 들어요. 그리고 교인들이 은혜 많이 받잖아요. 영적체험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모여서 기도만 하고 봉사를 안 합니다. 그러면 그 놀라운 성령의 체험 때문에 교회가 문제가 생겨요. 그 대표적인 교회가 고린도 교회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령을 받아서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난리가 일어났는데 헌금은 안 해. 반대로 그런 외적인 것에 대한 것이 없이 교인들이 모여서 자기만족적인 그런 생각을 하게 되고 하면 그러면 그냥 교회가 그 자원들을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정신이 두 개가 균형을 이루어야 됩니다.
자, 그러면 그것을 가정으로 가지고 와 봐요. 이제 3단계를 거친 것입니다. 가정으로 가져오면 이게 바로 오늘 말하고자 하는 그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럼 가정에서는 하나님이 여기에 보면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와를 창조하셨다. 그러니까 결국은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창조된 것이다. 그냥 독처하는 것이 별로 안 좋았기 때문에 독처하는 것이 안 좋은 것을 좀 면하기 위해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남성 우위론적인 성경해석 방식이다 이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다 라는 걸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처음서부터 이 정복은 정복과 다스림이라고 하는 이것 자체가 사실 가정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가정 안에서 남성은 끊임없이 개척과 도전, 그리고 모험으로 일들이 성취되는 것을 향해서 가고 여성들은 그렇게 성취된 것을 뒤따라가면서 관계를 짓고 연결을 지어서 어머니 같은 심성으로 그것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두 사람의 남성과 여성의 성향이 조화를 이루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들을 이루어 가는데 그런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가 가정에서 그 다음에 교회에서 그 다음에 국가 전체에서 이것들이 어우러진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성숙해 가고 확장되어 가는 모습이다 이것입니다.
B. 남녀의 창조
지금은 시간이 없어 못하겠는데 이것을 두 사람의 가정 속에서 생각하지 않고 이걸 축소 시켜서 한 사람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 안에도 이 두 가지 기질이 조화를 이루면서 존재해야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따라 살기에 아주 적합한 사람이 되는 거라 이것입니다. 이거는 나중에 나한테 시간을 마련해줘요. 그러면 내가 이걸 따로 이야기 할게요. 그래서 인간의 참 인간된 모습이 성경적으로 어떤 모습이어야 되느냐 이거는 이제 별개의 담론입니다. 이제 넘어가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기한 게 시집 장가가서 애 낳으면 딱 둘 중 하나야. 아들이든지 딸이든지 중간은 없어요. 그래서 이 남성성과 여성성이 한 가정 안에서 두 개가 함께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여자 아이들이 여성성을 본받으면서도 남성성의 적용을 배우고 남자 아이들이 이 두 가지를 같이 조화롭게 배우면서 그러면서 한 인간 안에도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인간의 영혼과 마음, 가정, 교회, 그 다음에 국가,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 이 모든 것들이 전부다 다 하나의 연결선 상에서 마치 꼬치에 꼬치 꿰듯이 일관성 있게 그렇게 되는 거라 이야기에요. 재밌죠 그죠? 정말 재미있어요. 이래서 이제 여기에서 아주 뒤틀린 것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남자인데 이런 남성성이 결핍되거나 여자인데 여성성이 결핍될 경우 이제 좀 복잡한 문제가 나오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이것은 본래에 그렇게 된 것이라기보다는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이제 어느 정도는 인간에게 역성적인 성격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동성애 같은 것도 마찬가지예요. 신기하잖아요. 남잔데 여성호르몬이 나와, 그리고 여성인데 남성호르몬이 나와요. 그죠. 신기하잖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서 인간을 아주 조화롭게 만드신 것입니다. 만약에 남자에게는 남성만 가득하고 여자에게는 여성만 가득하다면 못 살 것입니다. 아마. 그 무슨 접촉점이 있겠어요? 그런데 적당히 해서 조화를 이루게 되어 있었는데 죄가 들어오면서 이런 것들이 엉키기 시작하면서 설명하기 아주 복잡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설명하기 복잡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러면 가정을 통해서 이런 것들을 배워나가는 거거든요. 그런 정신들을 함양해 나가는 거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런 남성성과 여성성 때문에 사실은 죄가 들어온 다음서 부터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들 때문에 가정에 그것이 함께 어울리며 살지 못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냐면 결혼을 하잖아요. 그러면 남자는 가정이 안정되었으니까 그러면서 이제는 눈을 바깥으로 돌리고 정복할 땅, 모험할 일, 그 다음에 개척할 터전 이런 것들을 찾는 거요. 그래서 바깥으로 쳐 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이제 이렇게 가정을 이루었으니까 그러면서 안으로 더 오그라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이서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남자는 새 집을 대출을 얻어서라도 하나를 더 사야지 속이 시원한데 여자는 그거 대출받지 말고 차라리 모아 놓은 돈 조금 가지고 꽃밭도 가꾸고 가구도 바꾸고 마루도 바꾸고 칠도 새로 하고 그러고 그냥 알콩달콩 하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어요. 복 아줌마들... 복 아줌마들은 대개 그런데 남성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게 해서 가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자는 ‘아 씨 친구네 집에 가 보니까 외제 대리석으로 마루를 쫘 깐 거야. 니가 독일제 대리석으로 깔았냐, 그럼 난 이태리제로 바꾼다’ 그래서 뉘 집 대리석은 뭐냐, 그 다음에 우리 마루는 뭐다 이런 거 가지고 보람을 느끼지만 여성을 그 마루에서 누가 둘러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면서 행복하게 지내느냐 그것에 더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끊임없이 관점의 차이들이 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제일 이해 못하는 게 성격의 차이로 이혼한다는 것입니다. 차이가 나야 됩니다. 원래. 그래가지고 남자 여자가 둘이서 무슨 이야기하면 하이파이브 하고 싶을 정도로 이렇게 의견의 일치를 딱딱 이루잖아요. 연애할 때는 참 재미있어요. 그런데 결혼하고 나면 그 집안이 오래 안가요. ‘야 오늘 한판 쓰는 거다’ 하고 남자가 손을 드는데 여자가 거기 딱 친다 이거야.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그날 그달 월급을 가지고 호텔에 가서 그날 저녁에 우아하게 먹고 그 다음에 2주 동안 손가락 빨아야 되잖아요. 그런 거 몇 번 하고 나면 그 다음에 집안이 거덜 나는 것입니다. ‘야 오늘 기분이다, 가자’ 그럴 때 여자가 옆구리에다가 바람을 푹 빼면서 ‘가긴 어딜 가 이 사람아, 정신 차려. 지금 어느 땐데 통장에 돈이 이것밖에 없는데... 라면 불어 얼른 먹어’ 그래야지만 집안이 된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만들어낸 비유인데 말이죠. 이제 여러분이 시골에서 연을 날려 보잖아요. 연을 크게 만들면 맨 처음에 뜰 리가 없죠. 그래서 실을 짧게 한 다음에 막 뛰는 것입니다. 그러면 연이 떠요. 그러면 이제 연이 바람을 받으면서 막 당기잖아요. 그 때 쉽사리 풀어주면 떨어져 버려요. 그래서 안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떠요. 그 때 조금씩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연이 쭉 떠서 나중에 높이 뜨고 바람을 받으면 막 실을 끊어질 것처럼 막 잡아 당겨요. 아주 큰 연은 사람까지 움직일 정도로 막 당겨요. 그때에 조금씩 조금씩 풀어줘요. 풀어주다가 이게 느슨해지면 오히려 감아요. 팽팽하게 만들고 올라가겠다고 막 잡아 당겨도 끝까지 안 놔줘야 됩니다. 그러면 압력을 탄탄히 받으면서 줄이 팽팽해 져요. 그때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럼 연이 높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올라가면서 연은 항상 투덜거려요. ‘아 씨 저놈의 줄 때문에 내 마음은 지금 저 꼭대기까지 올라가는데 저놈의 줄이 나를 잡고 안 놓는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줄을 끊으면 그 즉시 떨어져요. 그러니까 가정 속에 그런 팽팽한 긴장이 있어서 남자가 친구들하고 여러분은 안 그러지만 술도 먹고 돈을 헤프게 쓸 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눈치를 봐야 됩니다. 그래야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써, 써, 써’ 몇 번만 해봐요. 썩어요.
사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결혼은 행복해지는 게 예외고 불행해지는 건 별로 노력을 안 해도 불행해지게끔 되어있어요. 처음서부터 생각의 방향 자체가 달라요. 그러니까 저 사람하고 나하고 성격이 딱 맞는다 그러면 높은 성화의 경지에 이르렀거나 아니면 곧 파멸을 눈앞에 두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에요. 그래서 연애할 때 그렇게 좋았던 커플이 결혼하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시간 내에 와해되어 버리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에요. 그래서 자기하고 대부분 똑같은 기질의 사람을 찾거든요. 그런데 그건 무덤 파는 것입니다. 절대 하나님의 뜻일 가능성이 적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나게 안 하신다 이것입니다. 절대 안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뻗어 오르는 것이 개척과 정복의 정신이라면 잡아당기는 구심력은 질서를 유지하고 그 안에서 관계를 맺는 그런 거라 이것입니다. 그걸 위해서 하나님이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처음부터 상반된 가운데 만나 보완을 이루는 것이 결혼이지 똑같은 사람이 만나서 놀라운 의견의 일치를 이루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하이파이브를 하는 그런 거는 그 커플이 하나님의 뜻일 가능성이 매우 적은 것입니다. 살아보면 불행해 진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깨뜨려지지 않고 잘 산다면 두 사람이 하나님을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왜? 남녀가 만나서 사랑에 빠졌을 때 언제 하나님을 찾냐하면 외로움을 느낄 때 하나님을 찾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폭 빠져 버리면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연애할 때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꽂혔어요. 그래서 마음이 막 쏠려요. 그래서 기도하기를 ‘하나님의 뜻이라면, 뜻이라면’ 그게 무슨 이야기에요. 자기가 별로 마음에 안 드는 자매는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자기가 마음에 좋은 사람은 주님의 뜻이라고 맨날 만나는 사람마다 주님의 뜻이라고 그렇게 한다 이것입니다. 그럼 마음이 그렇게 빗물이 양철지붕을 타고 한쪽으로 쏠리듯이 마음이 막 쏠려서 어떤 사람에게 꽂혀서 흘러가는데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해요? 내둬도 연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 안 해도 연애는 잘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는 절제하고 방향을 올바르게 이끌어 주고 그런데 필요한 것입니다. 육욕에서 우러나온 사랑인데 무슨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겠어요. 그냥 너무 많이 콸콸거려서 문제지. 막 흘러가는데. 근데 하나님이 그렇게 남녀를 창조하셔서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결국은 뭐냐면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반복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이 보기에는 내가 성에 안 차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성 평등주의자에요. 할 수 있는 한. 나도 잘 모르는 부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도 역시 남성이니까. 그렇지만 할 수 있는 한 내가 눈을 뜬 한도 내에서는 그런 평등의 원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이렇게 나오거든요. 남자들이 즐겨서 인용하는 구절이죠.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여기 사람이라는 단어는 아담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아담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 번역을 하는 것이 오히려 문맥에 어울려요. 왜냐하면 사람이 없었잖아요. 아담밖에. 그러니까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그리고 그 뒤에 아주 해괴한 표현이 나와요. “내가 그를 위하여” 그래요. 우리말에서 이 ‘위하여’는 무슨 뜻이죠? 종속입니다. 대부분. “국가를 위하여 이 한 목숨을” 그럼 나는 국가를 위해 바쳐진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주님이 최고이고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기에서 똑같이 그런 논리를 가지고 보면 내가 그를 위하여 그랬으니까 뒤에 여성을 창조하는데 이건 아담을 위한 거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그렇게 생각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본문은 이런 우리의 생각에 쇄기를 박아요. 히브리에서 ‘누구를 위하여’라는 단어가 대개 “레”에요. “레” 그런데 그 단어가 씌여진 게 아니라 “캐매게도” 라는 단어가 쓰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번역을 하면 ‘corresponding to"라는 단어예요 corresponding to 알죠? 중학교에 나오는 숙어 아닙니다. “무엇 무엇을 따라서” 혹은 “무엇 무엇에 맞먹는” 그래서 펜팔을 할 때 내가 오늘 내 correspondent 한테 편지를 썼다 그러면 펜팔 상대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Korean foreign minister가 American correspondent와 Shake with hand 했다 이게 뭐냐하면 한국 외무부 장관이 미국 외무부 장관하고 악수를 했다는 뜻입니다. 그게 바로 correspondent야 corresponding 입니다. 그래서 뭐냐하면 “캐매게도” 라고 하는 단어 자체가 맞먹는 혹은 상응하는 그런 뜻입니다. 남자들이 여자들 보고 너 나 지금 맞먹는 거야 하고 부부싸움하다 그런 말 하잖아요. 원래 맞먹으라고 하나님이 창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성경적인 부부싸움의 근거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죠. 원래 맞먹으라고 나중에 시집가서 너 지금 맞먹는 거냐 그러면 나는 맞먹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그러면 됩니다.
그래서 서로 상응하는 존재로 영역이 다른 것입니다. 가끔 자매들이 그러잖아요. 목사님 저는 선교사가 되고 싶어요. 뭐 아프리카 인디언들에게 가서 무슨 사역을 하고 싶어요. 그러잖아요. 그럼 저는 별로 신뢰를 안 합니다. 시집가봐라. 맨날 노래 부르며 해외선교 꿈꾸던 자매가 결국은 시골 목회하는 남자에게 시집가서 결국 시골목회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매는 독립성이 없구나. 아무리 하나님께 소명을 받아도 시집을 글로 가니까 결국은 소명도 바꾸는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그 자매는 원래 소명이 시골목회였어. 근데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해외선교라고. 그러다 결혼이라는 관계를 통해서 그 착각의 껍질을 깨고 정상으로 돌아간 거야. 그렇게 해석을 안 하면 그게 평생 남편의 종이지 하나님께 소명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러면 결국은 시집가기 전까지는 꿈도 갖지 말아야 되겠네요. 아니 가져야지, 갖는데 그 자매가 진짜 받은 해외선교의 꿈이 변동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소명이었다면 그 남자한테 시집 안 갔겠지. 그리고 독신으로라도 아프리카 선교를 갔겠죠. 그렇게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생각을 해야지. 그래야지 주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실하면 끝까지 자기 주관을 지키던지 아니면 그 꿈은 내가 한번 꿔본 꿈이었다고 인정을 하고 그러고 주님이 알고 보니까 내게 주신 소명이 시골목회였다 그러고 가면 하나님께도 받은 소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다스리느냐 정복이냐 이것을 어느 것이 우월하냐 열등하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최근에 책이 한권 나왔는데 여성들이 아주 여성스럽고 연약하게 된 것들이 그런 상들을 만들어낸 것들이 여성자신의 거대한 음모라고 보는 책들이 그 논리로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는지 모르지만은 그러면서 자기를 그렇게 위장하고 말하자면 남성들의 계급에 침투해서 그렇게 성간의 계급투쟁을 조장했던 그런 역사를 쭉 들어가는 것입니다. 뭐 100사람은 100사람 다 자기하고 싶은 대로 애기 하니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건 성경적으로 보면 우열을 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하나가 그 두 명령이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 그 자체가 한 덩어리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이것 없이는 저것이 의미가 없고 저것이 있어도 이것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 그런 종류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전체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이 각기 놀랍게 태어나서 그래서 이렇게 가는 거죠 그래서 아이를 낳으면 둘 중에 하나에요 남자든지 여자든지 제3의 성은 없어요. 근데 신기한 게 자연적으로 계속 출생을 하면은 여자가 90% 남자가 10% 그렇게 되는 예는 없어요. 내버려두면 성비가 맞게 돼있어요. 그걸 인위적으로 조작을 하니까 성비가 깨지는 것입니다. 근데 내버려두면 절대 안 그래요. 그래서 균형이 딱 맞게 돼있다는 것 자체가 뭐냐 하면 양성이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는데 필요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거든요. 그래서 결혼을 할 때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하면 내가 이 사람과 함께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신, 나아가서는 교회를 세우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 그 목적을 이루어가기에 서로가 이 사람이 없는 것을 내가 가지고 있고, 저 사람이 없는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 우리는 흔히 내게 있는 것이 저 사람에게 없으면 결함처럼 여겨지고 나는 없는데 저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그게 문제처럼 여겨지거든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그런 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 두 가지가 보완을 이루면서 하나님을 섬겨가도록 만드는 것이 가정의 제도다. 그래서 연애하기에 적합한 상대와 하나님이 결혼으로 소명하신 상대는 현저하게 다를 수 있어요. 그런 열린 마음을 가지고 짝을 찾아야 된다. 그러면 아마 여러분의 선택의 범위가 훨씬 넓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근데 가끔 어떤 사람이 내게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성경적으로 결혼에 있어 연령의 차이를 어느 정도까지 극복할 수 있습니까? 성격에 그런 거는 없어요. 몇 살까지어야 된다 그런 거 없어요. 일반적인 원리를 찾으면 생육하고 번식하라고 했으니까 남자가 여성을 선택했을 때 생육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가 난다던지 하면 안 되겠지. 또 여성이 아무리 남성을 연하를 소화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생육할 수 없을 정도의 어린 나이에 사람을 남편으로 생각하고 선택할 수는 없겠죠. 그런 정도의 커다란 틀들만 주어지지 다른 건 없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거를 좀 넓혀 훨씬 더 그러니까 내가 아는 목사님은 13살, 15살 그렇고도 잘 사셔요. 우리 교회 안에도 13살 차이나는 교역자 커플 있는데 그 정도 넓게 확대해서...
그래서 우열이 아닙니다. 그런 걸 형제들은 빨리 버려야 됩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은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3장에서 여성 아내를 가리켜서 말하기를 더 연약한 그릇 그랬거든요. 흔히 남자는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요 약합니다. 남자도. 그래서 거기다가 “더 연약한” 이라고 쓴 것입니다. 그래서 남성들이 약해질 때가 그 사람의 마음을 차지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에요. 그래서 그런 약해졌을 때 역사를 보면 나폴레옹이나 그다음에 중국의 황제들 이런 사람들이 말도 되지 않는 연령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20세 그렇게 차이나는 여성들과 사랑에 빠져서 왕비로 혹은 황후로 모시고 사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것들은 뭐냐 하면 바로 그런 남성 안에 있는 연약함을 파고 들어온 여성들입니다. 대부분... 단순히 막 에로스적인 뜨거운 그런 끈적끈적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건 오래 안 간단 말입니다. 그런 경우를 얼마든지 우리 주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연약한 그릇인데 이렇게 하나님 앞에 대등하게 가정의 질서를 통해서 창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을 해야지만 인격적인 관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속적인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의 폭력, 폭언 그리고 결혼하기 전에도 남성이 지나치게 가부장적이어서 자기를 이렇게 한 팔에 억압하려고 한다는 느낌이 들잖아요. 그럼 굉장히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 결혼에 대해서. 그 기질은 못 바꿔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가정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거 여러분 너무나 잘 알죠. 교회에 와서 거룩하게 예배드리고 저녁에 가서 피가 나도록 쥐어 패고 멍들고 그러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병원에 실려 갈 정도로 그렇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건 벌써 이미 정신적으로 망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 아내가 하는 일이 결코 열등하지 않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일이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하는 그런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에 밖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괄목할 만한 주목을 받는 나의 일보다 열등하다 그런 정도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 안된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뭐 법원에서 가사노동 한 것에 대해서 판결을 내렸는데 몇 년 전에 150만원이라고 판결을 내렸더라고요. 보면서 나는 남성이기 하지만 굉장히 부끄러운 걸 느꼈어요. 우리나라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돈으로 계산할 수가 있겠어요. 솔직히 이야기해서. 그거는 그런 식으로 계산하면 안 됩니다. 그건 그렇게 계산하면 안 되고 그거는 그 재산을 형성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비례해서 어떤 사람은 하루에 1500만원도 모자라고 1억 5천만 원도 모자라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150만원도 안되지. 왜냐면 어차피 돈이 없는데 그거 계산하면 뭐하겠어요. 그런 생각 속에서 이루어져서 이건 무형의 커다란 소명이고 가치에요. 영혼에 대해서 여러분이 눈물을 흘리고 그 영혼들에 대해서 뜨겁게 복음을 전하고 일당 얼마를 계산할 수 있겠어요. 그런 정신적인 가치를 존중히 여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국가는 국가답게 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을 해보세요. 그렇게 해서 이 여성도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아서 내 아내가 됐고 그리고 나도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 둘은 각자가 다른 영역들에 봉사하면서 그 영역들이 합쳐져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이바지 한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조화롭게 이바지 되고 있을 때 그 밑에서 태어나는 자녀들이 남성성과 여성성을 골고루 받으면서 미래의 남편, 미래의 아내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지는 거라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들이 가끔 보면 여자들은 연약하잖아요. 연약해서 남성들이 그 자신에게 의존하는 여성의 의존성들을 발견하면서 남성은 자신 나름대로의 여성에게 소속감을 느끼고 또 다른 면에서 그 여성들을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성은 여성이 자신에게 의존적인 여성을 향해서만 의존적이 되지 자기에게 의존하지 않는 여성을 향해서는 절대로 의존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보면 알잖아요. 엄마는 모든 살고 죽는 것이 아이에게 달려 있잖아요. 의존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엄마를 의존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결혼하신 남성 교인들 보면 ‘우리 아내는 그런 의존 그런 단어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산소같은 여잡니다. 산 소’ ‘씩씩합니다. 그 넘치는 에너지와 정열, 그 파워를 감당을 못하겠습니다. 연약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제발 연약한 자하고 살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는데 사실 그게 연약한 것입니다. 그 산 소 같은게 그게 연약한 것입니다. 왜냐면 이 속에서 죄가 들어온 이후로 인간의 본성 자체가 뒤틀리게 되었고 또 하나는 환경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인데 딸이 초등학교를 다니나 중학교를 다니나 그러는데 미장원도 안 갈려고 그러고 그 다음에 예쁜 여자 옷은 아주 혐오하고 그리고 남자처럼 딱 상고머리처럼 깎고 남자아이들하고만 어울리기 좋아하고 치마 절대 안 입고 뭐 꽃 달린 그런 물건은 아주 질색입니다. 그러고 뭐 좋아하냐면 칼싸움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 날도 칼하고 방패하고 사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아이들은 내가 더 오래 길러봤으니까 내가 tip하나를 주겠다. 근데 그거 그냥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러지 말고 그 아이가 어느 순간에 칼싸움을 좋아하고 하는 거는 일시적인 취향일 수 있어요. 그 아이가 설마 결혼한 첫날밤 칼 두 자루를 사 가지고 남편하고 겨루기 하겠어요? 우리 어렸을 때 땅바닥에 엎드려 딱지치기 하고 구슬치기 했는데 지금 우리 집사님들 가운데 아직도 엎드려 그거 하는 사람 있어요? 여러분 고무줄 놀이했잖아. 근데 그거 예배 끝나고 나서 여러분 마당에서 할까? 안하잖아. 그러니까 어린아이 적에 하던 일은 시간이 지나면 버려. 근데 그 일을 하기 적합했던 성향은 어른이 된다고 해서 바뀌는 게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내가 가르쳐 줬어요. 그 아이가 칼싸움하기를 좋아하는데 아버지가 야단을 쳐서 계집아이가 그러거 해서 뭐하냐고 야단을 치면 인격적으로 상처를 받는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게 둬라 그 대신 뭘 가르쳐주냐 하면 여자처럼 예쁘고 여성스러운 것과 터프한 칼싸움이 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아이에게 가르쳐 줘라. 그래서 상고머리처럼 하고 그 저기 남자 티셔츠에 바지입고 남자 운동화 신고 칼싸움하는 것보다는 원더우먼 같은 복장 같은 것으로 칼싸움하는 게 더 이쁘다. 그거를 아이에게 가르쳐 줘라. 그래서 내가 구체적으로 안젤리나 졸리 애기를 했어요. 툼 레이더에서 그게 캄보디아에 있는 곳이거든요. 사원인가 그렇거든요. 그거 보면 진짜 으스스해 근데 거기를 현란한 발차기로 그 막 자기몸을 회전 시키면서까지 최신무기를 가지고 포스를 발휘하잖아. 그런데 탄피 딱 풀고 총 딱 내려놓으면 아주 예쁜 여자가 되잖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아이에게 심어줘야 된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 칼싸움하기 좋아하는 취미는 없어져. 시집가서까지 그러진 않을 것 아닙니다. 부부싸움 하다가 진검승부를 오늘밤 해보자 그러진 않을거 아닙니다. 그거는 때가 되면 버리는 거다 이것입니다. 버렸는데 그건 버려도 여성성은 남아 있잖아. 그래야 언젠가 남성과 어울려서 살 거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주위에서 용모도 괜찮은 사람을 많이 봤어요. 근데 남자들하고만 다녀. 형형 그러고 다녀, 대학을. 결국은 결혼 못합니다. 나는 그것도 하나의 정신적인 장애상태로 보는 것입니다. 근데 그런 것들을 어릴 때부터 우습게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릴 적부터 바로잡아 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쁘면서 하얀 드레스를 입고 예쁘게 꽃핀을 달고 칼싸움을 할 때 더 예쁘다는 것을 아주 아름답고 놀랍다는 것을 보여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거 진짜에요. 근데 그렇게 해가지고 가정 속에서 아이들이 그것들을 보면서 미래를 자라는 것입니다. 이거는 부모가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면도 있지만 오히려 자연스런 가정의 구조 속에서 바람직한 남편과 아내 속에서 바람직한 미래의 남편과 아내들이 계속 재생산되는 것입니다. 이게 사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가정을 이루고 둘이서 그런 이치를 알고 조화를 이루는 것을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게 얼마큼만큼 인류에게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이 그걸 보면서 그담에 또 되고, 또 되고 그러면서 이게 계속해서 흘러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그 자식은 그 보고 형성되는 그것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이담에 낳아서 기를 때도 남자애가 남성다운 일을 했을 때는 박수를 세게 쳐 줘야 되는 것입니다. 실패했어도 남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모험을 했다든지 물론 나쁜 짓을 한 거 가지고 박수쳐주면 안되지만 무모해 보이는 시도라도 선한 뜻으로 했을 경우엔 실패했을 때라도 박수를 쳐주는 것입니다. 야 니가 아니면 감히 누가 그렇게 도전을 했겠느냐. 뭐 여자아이가 뭔가 이렇게 예쁜걸 만들고 뭔거 이렇게 아까 애기했던 가정의 질서에서의 다스림에 어울리는 행동을 했을 때 박수를 쳐줘야 되는 것입니다. 근데 이게 뒤바뀌게 되면은 애들이 성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역할의 혼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뭐 이렇게 예쁜 걸 만들었는데 야 뭐 닭살 돋는다 한다든지 이러면 아이가 그런 걸 점점점점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 엄마아빠한테 예쁜 편지를 그려가지고 왔는데 야 닭살 돋는다 그러고 야 너답지 않게 왜 그러냐 그러고 그러면 너다운 게 뭔데 누구를 만들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요 그렇게 해 가지고 아이한테 그것을 계속 가꾸도록 그렇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두 빛깔처럼 우열의 문제가 아니고 두 빛깔처럼 찬란하게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정복해 가면서 정복한 땅을 다스려가면서 하나님의 빛깔들을 이 사람들과의 관계의 질서 속에서 사물들과의 관계의 질서 속에서 다 이렇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게, 그러면 여러분 알지만 남성도 뭐 일 하나 시켜보면 사람의 됨됨이가 어떤지 다 드러나잖아요. 내면에 있는 게 나오잖아요. 자매들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운 빛깔들을 드러내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일차적인 삶이라는 것이 뭐냐하면 남성과 여성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서로 보완관계를 이뤄가면서 혼자 살았더라면 살아갈 수 없는 삶을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거 그게 바로 본보기에요. 그런데 그것이 계속 행복하고 좋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면 안되요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성격이 안 맞는 친구하고 한 학기동안 짝을 하는 것도 그게 쉽지 않은데 그런데 매일 매일 함께 생활을 하는 사람이 그런 것들에 일치를 이루기 힘든 사람이라고 생각될 때 그거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해본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쉽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그렇게 말 안해요 그래서 그런 유명한 교훈이 있죠.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 그래서 하고 싶은 사람은 하고 후회하겠다. 그래서 그게 쉬운 게 아닙니다.
III. 결혼과 독신: 소명
그런데 이게 신약으로 돌아와서 보면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가능성들을 보여줘요. 그게 독신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임박한 종말의 신앙과 관계가 있어요.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사도바울이 곧 예수님이 올 거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이 결혼제도에 대해 오도하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종말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으로 내년이나 후년이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문제에요. 예를 들면 10년 후에 종말이 오는데도 아득히 먼 옛날처럼 느낄 수 있고 천년 후에 종말이 오는데도 그것이 임박한 것처럼 느껴져서 주님만을 위해 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끌고 들어오는 영원에 대한 개념입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이 회심을 할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에 대해 가슴아파하고 눈물을 흘리지만 그거 코미디 아닙니다. 예수님 2000년 전에 죽으셨어요. 지금 여러분이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그 고통이 경감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사라진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뭐죠 그건 사랑이 2000년 전이라는 간격을 뛰어넘어서 예수 구속의 사건을 영적인 세계 속에서 여러분에게 실어 나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초시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랑 영원하다고 맨날 노래하는 영원을 애기하는 이유가 사랑이 가지고 있는 그런 초시간적 성격 때문입니다. 그러면 과거의 것이 초시간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면 미래의 것도 그렇게 다가오잖아요. 그것을 무엇을 가지고 비난 할수 있겠어요. 그 시간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식의 문제인데. 그래서 사도들이 나타날 때부터 주님은 곧 오시기로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지금 우리들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긴박한 종말론을 느꼈다는 것을 하나님의 시간 역사에 대한 착각이라기보다는 초시간적인 사랑경험의 확장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갈망하면서 살면 그것이 또한 하나의 시간개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게 없다. 그렇지만 나는 권하는데 그저 독신으로 사는 것도 괜찮다 그렇게 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은 다 은퇴하셨는데 그분이 독신이세요. 아주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죠. 그래서 물어봤데요. 교수님 왜 60이 넘도록 결혼을 안 하세요. 그러니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결혼이요? 아니 그런 거 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주님이 곧 오시는데 그게 바로 그분의 신앙입니다. 평생 그렇게 혼자 살다가 아마 돌아가신 것 같애요. 굉장히 오래전 애기니까. 그게 그런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혼이던지 독신이던지 간에 필요한 것은 소명입니다.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성경에서 결혼을 성스럽게 생각해요 세속적으로 생각해요? 둘 다에요. 그래서 마지막 날까지 시집가고 장가갔느니라. 멸망을 눈앞에 두고도 지극히 세속적인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던 대명사가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입니다. 가장 세속적인 일입니다. 그러는가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가 교회와 연합함과 같이 아내와 남편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성스럽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 두 개의 차이가 뭐냐 하면 소명입니다. 소명. 그 의미를 알고 분명한 목적으로 하는 거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결혼을 해도 그냥 육욕으로 하는 결혼이 있고 관습에 이끌려서 하는 결혼이 있고 소명을 받아서 하는 결혼이 있어요.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결혼은 소명을 받고 하는 결혼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결혼을 왜 하냐고 물으면 왜 결혼을 한다는 이유가 분명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 부모님이 하도 못살게 굴어서, 누구를 위한 결혼이에요? 아이구 나이가 찼는데 그럼 더 나이가 찬 사람은 어떻게 합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의 온전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아니에요 그래서 분명하게 하나님 앞에 그리고 결혼에 대해서 여러분이 독신의 소명이 없고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면 좀 간절해져. 그 뭐 응답이 되든지 말든지. 마치 뭐 불성실한 낚시꾼이 낚시 줄 던져놓고 술 먹으면서 고기 물리기를 기다리듯이 그렇게 하면 안 되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결혼에 소명이 있으면 이것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좀 간절히 매달려야 합니다. 여러분 결혼을 가지고 근심을 하는 시간들 중에 10분의 1만 매달려가지고 기도를 했으면 독신의 소명을 주셨던지 벌써 결혼을 했던지 둘 중에 하날 것입니다. 우리 결혼의 적령기 때만 하더라도 우리 때는 30 넘더라도 여성들 같은 경우는 큰일나는 줄 알았거든. 남성도 사실 32만 넘으면 상당한 결격이 있다고 봤거든요. 그렇게 조혼이었어요. 그래서 보면 20, 30 딱 걸리려는 자매들 있잖아요. 특히 연초에 가면 기도원에 가면 새까맣게 모여서 금식하면서 기도해 제목도 보면 복잡하지도 않아요. 딱 하나야 어느 때까지이니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되겠사옵나이까? 그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던 지금은 다 50세가 넘었을 환갑을 바라볼 그 자매들 생각이 아주 또렷하게 나. 그렇게 바위에서 그 추운 밤에 인천 앞바다가 내려보이던 그 바위에 주루룩 앉아서 어느 때까지이니까 여러분 그래봤어요. 웃기만 하지 말고 좀 진지해 보라고 그래봤느냐 말입니다. 했으면 좋을 텐데 희망한다는 것과 갈망한다는 것을 틀려요. 그게 뭐에요. 그러면서 세월이 점점 흘러가잖아요. 그런 건 있지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아서 그래요. 하나님 앞에 확실히 매달려요. 그러면 하나님이 보내주세요. 누구를 어떻게 그건 모르지만 보내주세요. 그러니까 좀 절실해 지라는 것입니다. 진지해 지고 절실해 지라.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다. 평소에 집중적으로 기도하지 않으니까 사건이 벌어지고 상황이 나타나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뜻인가 이런 것보다는 이속에서 주판이 계속 떠오르면서 사람을 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합격하면 저쪽에서 불합격이라 저쪽에서 합격이라 그러면 이쪽에서 불합격이라 그러고 그러면서 세월말 계속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바람직한 삶이 아니잖아. 하나님 앞에 매달리세요. 또 하나 독신을 선택한다면 타의적인 독신이 되지 말고 자의적인 독신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너는 나를 위해서 살아라. 분명히 그런 소명을 주시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근데 나만을 위해 살아라 그런 대답을 듣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어정쩡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고 세월이 흘러서 60, 70 먹으면 주님만을 위해서 살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안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고 애매모호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신은 하나님 앞에 소명 받은 독신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타의에 의한 독신이잖아. 그거는 좀 우리의 모든 삶의 주권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잖아요. 자 하나님 앞에 한번 간절히 매달려 보는 것입니다. 주님 정말 제가 어느 때입니까? 그렇게 딱 하나님 앞에 매달려보는 것입니다. 자 금년에는 갈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 목숨을 걸고 간절히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도 결혼할 때 10kg 가 빠지도록 기도를 했는데 그것도 정확하게 일주일사이에 10kg 가 빠지더라고 그냥 기도하다가 죽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 결과가 어떻지 간에 중요한 것은 과정이 결과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야 되는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그런데 하나님이 너는 나를 위해 살아라 그런 소명을 받은 자매들이 있어요. 굉장히 씩씩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딱 지키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주님 한분을 의지하면서 삽니다. 그런 고백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도를 분명히 해야 됩니다. 결혼 할 거면 간절히 매달려서 빨리 가라 이것입니다. 그리고 진짜로 하나님 앞에서 독신으로 살 거면 간절히 기도해서 이제는 순전히 주님께만 바쳐진 마음으로 평생을 주님을 섬기면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IV. 결론
어느 것도 쉽지는 않아요. 그런데 어느 것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렵지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셔서 우리가 결혼을 하고 안하고 상관없이 지극히 소중한 존재로 여기고 사랑하세요.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하셨던 똑같은 말씀을 여러분께 권하고 싶어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살아야 될 삶의 양태가 어떠해야 될지를 간절히 묻고 비록 결혼만이 아니라 직업, 자기의 활동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께 간절히 묻고 그리고 분명한 목표를 가진 사람이 되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주님이 길을 열어주시지 않겠어요. 하나님이 도와주셔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칼날같이 그 가슴에 칼을 품은 것 같이 결단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그게 나는 굉장히 안타까워요. 그게 무슨 시집을 못가고 장가를 못가서 안달이 아니라 그래서 여러분은 아이구 기도제목도 많은데 그걸 가지고 가슴에 칼까지 품고.. 그러면 도대체 무슨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걱정은 턱 놔야지 걱정은 또 왜 그렇게 많이 합니다. 그거는 표리부동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짜피 건너야 될 강이라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야죠. 그래서 기도만 할뿐만 아니라 노력도 하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소명을 받아서 결혼할 이유를 분명히 받아서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인도를 받으면서 결혼도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뜻대로 사는 거지 그래서 여러분이 이 설교를 듣고 나서 좀 이렇게 간절히 기도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소명을 받아서 그래서 가정의 대의를 이루어 가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분복 되로 하나님을 아름답게 섬기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이 시간에 우리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시오. 기도의 문제로 기도하는 저희들을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고 우리에게 분명히 소명을 주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8.네 형제와 화해하라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고 피차 우니라”(창 3:3-4).
I.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야곱이라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을 합니다. 이삭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아들은 에서였고, 또 한 아들은 야곱이었습니다. 이 둘은 쌍둥이였는데, 형은 사람이 단순하고 남자다운 기개가 있었지만, 동생은 여성스럽고 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집안이 불행해 지려고 그랬는지 아버지는 형을 편애하고, 어머니는 동생을 편애하였으니 두 형제가 화목했을 리가 없습니다.
당시 이들의 아버지, 이삭은 족장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이 족장은 아직 아브라함의 집안이 국가와 민족을 이루기 전의 언약 백성들을 통솔할 권한을 가진 지도자였습니다. 나라가 만들어진 이후에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신정국가로 통치하셨는데, 그 전에는 가정이었을 시절에 족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이 족장은 세 권한을 모두 가진 인물로서 언약 백성을 통솔하였습니다. 그래서 족장에게는 가족에 대한 생사여탈의 권한까지 있었습니다. 특별히 족장으로서 아버지가 마지막 죽을 때에 아들에게 남기는 축복의 기도는 그대로 이루어지는 신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작은 자를 선택했고, 동생이 형을 섬기게 되리라고 예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안목이 흐려졌는지 이삭은 육정에 흘러 큰 아들을 편애하게 되었습니다. 앞까지 잘 볼 수 없게 된 노경에 이르렀을 때에 이삭은 아들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사냥해서 고기를 잡아다가, 짐승을 잡아다가 요리로 나를 섬겨라 내가 그것을 먹고 너를 마음껏 축복하리라’고 말입니다. 이 소리를 엿들은 아내는 사랑하는 작은 아들에게 그 축복을 받게 하려고 형처럼 위장을 해서 들여보내 축복을 빼앗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형과 동생 사이에는 말할 수 없이 커다란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복수를 꿈꾸고 있는 큰 아들을 두려워하며 어머니는 이 작은 아들을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자기 오라비의 집에 보냅니다. 거기에서 20여년의 긴 세월동안 고난과 시련을 많이 당한 이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재산도 모으고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얻은 상태에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야곱에게는 절대 절명의 숙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긴 세월동안 복수의 칼을 갈고 기다리고 있는 형과 대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II. 얍복강에서 입맞춤
A. 네 형제와 화해하라
그것은 바로 얍복강에서 아주 탁월한 방식으로 두 형제가 화해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일곱 번이나 머리를 숙여 신하의 예로 에서에게 절했고, 에서는 달려와 야곱을 끌어안고 목을 어긋맞기며 입을 맞추고 피차에 울었다고 나오는데 일어날 수 없는 일이 기적처럼 발생한 것입니다. 오늘 이 같은 얍복강의 화해의 장면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네 형제와 화해하라’는 목소리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여러분의 형제는 어떻습니까? 저는 어버이주일에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에게 부모가 여러분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그 분들이 살아계신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자녀인 여러분이 부모에게 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형제들로서 함께 그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몇 해 전 이런 내용으로 설교 하였을 때 예배가 끝난 후 연세 많으신 어느 성도님이 교회 복도에서 제 손을 붙들고 펑펑 우셨어요. 그래서 ‘왜 그러시냐?’ 고 제가 말씀드렸더니 ‘목사님이 그렇게 가슴아파하면서 설교한 그 동기간의 불화한 자식들이 바로 우리 자식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식들이 서로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하며 주름진 얼굴에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습니다. 많은 사람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열하며 흐르는 눈물을 보며 그 자식들이 부모에게 얼마나 불효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정말 형제와 화목합니까? 정말 여러분은 여러분이 형 때문에 행복하고, 그 형의 동생인 것이 기쁘고, 그 동생의 형, 그 누이의 동생, 그리고 그 오라비의 누이인 것이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시인은 자기의 시속에서 말하기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지요’ 라고 노래했습니다. 여기에서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정신적이고 영적인 유대를 가리키는 것이며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 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과 연합 안에서 형제가 일치를 이루며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삼위 하나님의 아름답고 선한 교통의 모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경험할 수 있는 두 기관을 주셨어요. 하나는 가정이고 하나는 교회입니다.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파괴된 것은 바로 이 가정이었습니다. 주님은 형제들이 이렇게 우애하고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는 진정한 일치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살아가는 불화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사람들까지 들어있으니 이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겠습니까?
B.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함
결국 이러한 형제의 불화한 관계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장성해서 이미 시집가고 장가가서 흩어진 여러분의 동기간들을 정말 아직도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진정으로 형제간의 화목을 이루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여러분은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까? 형제들이 화목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며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동기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캐 들어가 보면 그 불화의 원인은 모두 이익의 문제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래도 서먹했지만 동기간으로서의 예의를 지켰는데 아버지가 죽고 나니까 아직까지도 상중이고 굵은 제복을 하고 있는데도 뒤뜰에서 재산 분배를 놓고 언쟁을 벌이는 가슴 아픈 일은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일이고, 이것이 법정의 소송으로까지 번지는 일들도 우리는 심심치 않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를 가지고 형과 동생이 다투고, 며느리끼리 서로 다투다가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는 의절한 관계가 되는 일들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려웠을 때 한번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었는데 도와주지 않는 것에 앙심을 품고 이제 완전히 형제와의 관계를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또 도와주었는데 그것을 제때에 갚지 못한 돈 거래 때문에 사람이 서로 매장 되어서 다시는 그 돈 때문에 얼굴을 보지 않는 그런 형제들도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런 가정의 형제들이 서로 불화하고 살아가는 가정 그 뒷편에는 그 형제들의 아내의 더 심한 갈등이 있습니다. 형제는 피를 나눈 형제지만, 오누이도 피를 나눈 오누이지만 아내는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동생이 형의 마음을 많이 상하게 하거나, 혹은 형이 동생의 마음을 많이 상하게 했을 그때에 집에 가서 하소연하면 아내들은 그 갈등을 부채질 합니다. 그래서 가서 형에게 섭섭한 것이 있었다고 아내에게 털어놓으면 ‘당신이 형만 못해, 당신이 동생이니까 이해해야지’ 아내들은 그렇게 해서 가정의 화목을 도모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편의 편을 들고 찢어진 관계를 더 깊이 골 생기게끔 갈라놓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고 그래서 형제간에 다툼과 갈등은 급기야 며느리와의 관계까지도 갈등이 이어지고 자식들끼리도 서로 왕래하지 않는 단절된 사촌의 관계들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더욱이 이런 사람들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모두 이익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속에서 가족들과의 관계는 점점 더 깨뜨려지고, 이러한 형제 사랑은 연합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갈등이 있는 집안은 무관심한 집안보다는 낫습니다. 동생이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형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연락이 끊어지고 관계가 단절되어도 조금도 궁금해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의 가족 이기주의에 물들어서 그래서 지 새끼, 지 마누라만 챙기고 형제는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것들은 반드시 그 다음 대에 가서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형제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한 가족으로 살아가려고 해야 되는지를 경험해 보지 못한 아이들이 자기의 형제를 그렇게 뜨겁게 사랑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옛 어른들의 말씀에 ‘형제가 띠앗머리 살아온 집안에서 효자가 나는 것을 본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많은 갈등들이 있지만 이러한 형제들과의 사랑을 복원하고 유지하는 일은 말과 혀로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과거에 형제로부터 서로 주고받은 상처를 용서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이 없이는 화해할 수 없고, 이런 화해 없이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상태에서는 결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았더라면 에서는 군대를 끌고 와서 동생의 가족을 도륙하였을 것이고 얍복강에는 붉은 피가 흘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간섭하시자 이 서로 죽였어야할 형제들 간에 뜨거운 용서와 화해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형이 동생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통곡하여 우는 화해의 역사를 이루어 냈습니다. 이런 일들이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생겨나야 하는 것입니다. 에서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얍복강 강에서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었더니 하나님께서는 변화된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이 에서를 움직이는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셨고, 돌 같았던 에서의 마음이 녹으며 화해와 일치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III. 형제 사랑의 길
A. 자기 사랑을 버림
그러면 형제와 화해하는 길이 무엇일까? 제일 먼저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자기 사랑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이 형을 만나러 가는 것은 정말 절대 절명의 위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야곱은 깊이 고민하며 인간적인 꾀를 만들어 냅니다. 제일 먼저 종들을 앞서 보내며 짐승을 300마리쯤 붙여주었습니다. 형에게 뇌물로 먼저 마음을 푼 후에 누그러뜨리고 만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어서 자기의 가축과 많은 종들이 있는데 이것을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종들과 그리고 가축의 떼, 그리고 가족들을 보냈습니다. 이는 이 떼를 치면 뒤에 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그 떼를 이끌고 도망치려 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네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만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해서 얻은 아내고, 나머지 셋은 끼워 팔기로 딸려 들어온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끼워 팔기로 들어온 세 부인은 죽어도 좋다 생각하고 앞으로 보내버렸습니다.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라헬은 자기와 함께 제일 뒤에 있게 해서 다 죽어도 그녀와 그녀의 소생과 함께 도망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 좋은 야곱이 이 모든 방책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것으로만은 자신의 인생의 위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 다 보내고 혼자 얍복강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신 수행하는 천사니까 천사를 붙들고 자기를 축복해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천사가 뿌리치려고 하니까 더욱 천사를 꺾어보려고 씨름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것을 가리켜 옛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믿음이라고 불렀습니다만 사실 호세아 12장의 문맥에 보면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야곱의 인간적인 고집이었다고, 교만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천사를 붙들고 씨름했는데 야곱은 짐승을 치면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으니 근육과 뼈가 단단했을 것입니다. 천사가 이 야곱을 내려쳤고, 그로 말미암아 환도 뼈가 위골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환도 뼈가 꺾어졌으니 척추에 이상이 생기고 다리를 질질 끄는 처지가 되었고, 손에 힘도 풀려서 놓아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이길 수 없는 이 눈앞에 닥친 엄청난 현실 앞에서 통곡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빌었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야곱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깨어진 최초의 순간이었고, 이것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주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울면서 통곡하고 회개하였고, 결국은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 회개가 당신을 이긴 것이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씨름이 하나님을 이긴 것이 아니라 가슴을 찢는 통렬한 회개가 하나님을 이기게 만들었다고 인정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통곡하며 자기를 깨뜨리는 야곱을 통해 당신을 향한 태도가 바뀐 것을 보시며,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을 에서의 마음 속에 행하셨습니다. 야곱이 왔을 때에 에서는 400인을 이끌고 나아왔다고 하는데 동생을 진정으로 용서할 요량이면 무엇 때문에 400명이나 되는 군사가 필요했겠습니까? 틀림없이 그때까지도 동생을 향한 복수의 칼을 갈 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에서가 이 동생이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까이 갔을 때 그때에 동생의 몰골은 에서의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자기를 속이고 아버지에게 불효하고 축복을 강탈하여 어마어마한 인물이 되어서 온 줄 알았더니, 계속 짐승을 쳤으니 재산이야 있을지 모르지만 몰골이 오죽했겠으며, 한 숨도 못자고 얍복 강가에서 땅바닥에 뒹구르며 회개했으니 그 옷매무새는 어떠했겠습니까? 그런 남루한 차림에 장애인 하나가 다리를 쩔뚝거리며 끌면서 걸어와서 비천한 신하가 하는 예로 자기를 왕처럼 일곱 번이나 섬기며 절하는 광경을 보면서 돌멩이 같았던 에서의 마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가족들과의 관계는 가족들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랑을 먼저 안 여러분이 깨뜨려지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모든 답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결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가족과의 관계를 꺾어뜨리고 부러뜨리면서까지 자기의 이익을 따라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이 바로 그 가정을 회복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실인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신학교 섬김의 날에 가서 학생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즘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 중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는 찬송이 있잖아요. 그거는 평신도용이다. 그리고 너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죽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이런 소릴 들으면 여러분은 굉장히 은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니 당신은 죽으시오 라고 말이죠. 그런데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목회자가 죽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지만 여러분은 나보고 죽으라고 말할 권리는 없다는 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그러셔야지,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모두 사랑받기를 원하는 거기에서 가정의 비극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평신도들이지만 은혜 많이 받은 사람은 자기 머리를 그 찬송을 부르며 자기 머리를 쓰다듬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런 찬송을 들어야 할 사람은 회심하지 못한 사람, 막 사는 사람, 짐승 같은 인간, 불신자들, 예수 믿었지만 예수님 사랑하지 않고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 들어야할 찬송이고, 은혜를 많이 받은 여러분은 이제 ‘나는 죽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B. 하나님 사랑의 감화
하나님은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자기를 포기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는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꺾여야 하고 나에게는 없는 선한 의지를 불러 일으켜 주셔야 하는데 이 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그 은혜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부분 형제와 화목하고 가족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애쓰다가 좌절하는 이유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도덕심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사랑으로 가족들을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주님의 사랑의 감화가 아니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마음, 인간의 방법을 다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안되겠다고 얍복 강가에서 주님 앞에 슬피 울며 용서를 비는 이 야곱의 마음을 우리들이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그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주십니다.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 원수보다는 훨씬 나은 우리 형, 우리 동생, 우리의 누이와 언니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일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끊임없이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상처뿐인 형제들과의 관계를 주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기 위하여 누군가는 죽어야 하고, 누군가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향해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선한 의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이렇게 바꾸어놓는 놀라운 힘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그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C. 십자가를 생각함
이것이 어려울 때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이렇게 우리를 희생해 가족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일치를 이루라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빚진 자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족의 화해를 위해서 우리들이 겪는 수고와 희생은 크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과 저는 쓰레기 같은 죄인들이었습니다. 아무 공로와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아무 공로 없는 더러운 죄인들이고, 하나님 나라에 손해를 끼치는 악인들이었는데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복음이 들리고 우리의 강퍅한 마음이 녹아내리던 그 날에 우리는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며 이제 내가 사는 것이 나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요,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예수 때문에 산 것이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 십자가 사랑 안에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를 포기하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또한 그 분의 사랑을 그렇게 입었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를 끊임없이 포기하고 버리며 우리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신적 죽음이 아니었다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었을 그 인간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참 보람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 형제는 참으로 소중하고 그래서 형을 둔 것 때문에 동생들이 행복하고, 동생 때문에 형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고, 누이 때문에 행복하고, 언니 때문에 행복한 그런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이 우리를 십자가 아래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형제들이 서로 불화하고 반목하며 사는 것도 큰 죄를 짓는 것이지만, 믿음의 가정에서 그렇게 반목하고 형제들이 불화하게 사는 것은 현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런 가족들 간의 서로를 돌아보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자식들이 그것을 보면서 자라갑니다. 우리 아빠가 사랑할 수 없는 자기 동생을 사랑하고, 우리 아빠가 용서할 수 없는 자기 형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우애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러면서 자녀들은 가족의 의미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포기할 수 없는 이 가족을 배우며 가족은 무언가 자신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에 가족이 아니라 그냥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가족일 수밖에 없고, 한 식구일 수밖에 없는 것을 아이들은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는 가족들과의 관계를 붙들려고 할 때 우리의 아이들도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지 않고는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 깨어진 가족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밤마다 눈물로 기도하고 새벽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하고 긍휼히 여겼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의 얼굴을 생각하며 아이들은 이 가족이 하나님이 주신 공동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의 사람들입니까? 예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지 않았습니까? 그때 우리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녹여 우리를 주의 그 큰 생명의 은혜 속에 들어가게 하셨을 때 우리의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부자가 되는 것이었습니까? 형제들의 덕을 보는 것이었습니까? 부모의 유산을 나누어 떵떵 거리며 사는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녹였을 때 우리의 간절한 소원은 오직 우리를 버려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피붙이인 우리의 가족들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노래했습니다.
V. 결론
(찬양)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시뿐인 세상 속에 밀알로 썩게 하소서
주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보여주신 생애는 한 알의 밀알의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우리를 살리게 하시기 위해 죽으신 생애였고,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 가난해진 생애였고, 우리를 주님과 화목 시키기 위해서 당신은 거룩한 하나님께 버림 받으신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그 큰 희생과 옥체를 깨뜨리시는 그 놀라운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입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입는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소명을 내포하는 것이니, 우리에게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그 큰 은혜를 우리에게 입히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깨어진 가족들과의 관계를 치료하는 주님의 약이 되도록 우리를 그 가정에 보내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특히 아직 믿지 않는 가족들을 두고 있는 여러분은 가족을 위해 깊이 기도하고 무엇보다도 그 가족들의 영혼을 염려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 모두 구원받아야 합니다. 잠시 후 구름 같은 이 세상의 일생이 끝나고 불현듯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분명히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얘들아 너희 동기간들은 어디에 있느냐’ 라고 말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머뭇거리지 말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 예수님 이렇게 우리 동기간들이 하나님 나라에 모두 모였습니다. 혹은 우리는 먼저 왔지만 남아있는 우리의 동기간들이 아직은 하나님이 살게 하신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기까지 주님을 섬기고 있나이다. 잠시 후 우리는 여기서 주님을 함께 뵈올 것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까지 여러분은 형제를 위해 희생해도 괜찮습니다. 손해를 봐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 형이 못 본 하나님을 보았고, 그 동생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비밀들을 여러분에게는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님을 온전히 믿은 사람은 영생을 소유했고, 영생을 소유한 사람의 기쁨은 자기를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허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의 본질이 곧 영원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사랑하는 육신의 형제들과 함께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험한 세상을 지나는 동안 내가 우리 형의 동생이어서 기뻤습니다. 제가 내 동생의 형이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이 세상의 형제로 살며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날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용서하고 자기를 버리는 사랑으로 가족을 섬기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가정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