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심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녹취자: 장주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전에 이미 우리를 아셨다고 했는데, 아셨다고 하는 것은 사랑하셨다 라는 뜻과 다름이 아닙니다. 얼핏 지나가는 이야기지만 곱씹어 보면 우리가 있기도 전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깨닫게 됩니다. 시간과 모든 물질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이 세상에 나게 하시기 전에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실 것을 예상하시고 시간 안에 있지도 않은 우리들을 당신의 마음 안에서 사랑받게 하셨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의 세상 경험에서도 같은 것을 합니다. 여러분 혹시 상상임신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 교회에서도 그런 자매들이 있어서 가서 기도도 해주고 했는데 나중에 임신이 아니었던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아이를 갖지 않았는데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있지도 않는데,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자기 뱃속에 있는 아이를 사랑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그런 감정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우리가 깨닫는 한 가지 교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마음 안에 있고 아직 존재하지 않을 때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제 횃불 트리니티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상담학교에서 세미나를 열었는데 반더빌트의 폴린 교수가 와서 첫 번째 강의를 했는데 ‘방황하는 청소년, 젊은 루터에게 길을 묻다’라는 주제였습니다. 그 다음에 내가 강의를 올라가서 강의 제목을 ‘방황하는 청소년, 늙은 어거스틴에게서 듣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한참 뒤집어졌습니다. 루터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어거스틴이 들려준다.
그래서 강의를 했는데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야기하면서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장면이 그 장면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죄를 짓고 어떠한 시련을 만나고 그래서 우리에게 어떤 곤궁한 날이 이르러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복하신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하나님은 그러신 분이 아닙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셔서 그래서 우리를 올바르게 하실지언정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보복하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막 승질을 못 이겨서 매를 휘두르던 부모에게 구타를 당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주 쉽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 한 교리를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두 번째 교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자질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자질들을 가리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까지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포함시켰던 것은 아주 엄밀하게 말하면 이원론의 위험에 대한 하나의 방어장치였습니다. 워낙 서구를 휩쓸던 플라톤주의가 가지고 있는 이원론의 위험 때문에 사실은 수도원 주의나 이런 것들이 다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에까지 이르렀다, 라고 얘기하지만 사실은 가만히 보면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비유는 보석과 보석함의 비유입니다. 보석이 담겨진 보석함. 그 함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보석이 담겨졌기에 아주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몸을 보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이다, 성령의 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 때문에 우리의 육신이 매우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생물학 적으로만 본다면 많은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아주 고등하고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유전자의 수도 그 일반 개나 돼지나 짐승보다 훨씬 복잡하고 많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결론이 났습니다. 육체적인 구조에 있어서 인간의 탁월성도 어떻게 짐승들에게 없는 이성과 영혼이 있어서 그것들이 육체와 함께 작용하느냐고 하는 그런 것들이지, 그런 의미에서 저는 종교개혁자들의 하나님의 형상을 육체까지 보는 것들은 하나의 방어적인 면에서 그런 이원론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펼쳐준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주님의 형상은 무엇이겠습니까? 지난번에 신문에서 예수님의 원래 얼굴이라고 하면서 과학적으로 복원을 해서 만들어냈는데 진짜 무식한 어느 원주민처럼 얼굴을 만들었습니다. 요세푸스나 이런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기록들을 보면 아주 굉장히 준수하게 생기신 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만약 그 형상을 본받는다고 할 때 그 형상이 예수님의 육체까지라고 말한다면 원래 원판이 준수하게 안 생긴 사람들이 어떻게 그분의 형상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혼의 상태입니다. 그의 신성을 본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이 모든 죄로부터 그를 완벽하게 보호하셨을 때에 나타나는 온전한 사랑의 형상, 그 선과 사랑을 좇는 온전한 참 사람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에 이미 형상을 본받을 기반이 마련되지만 끊임없이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주님의 형상을 점점 더 본받아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형상을 본받아 가는데 하나님은 행복하고 즐거운 날들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프고 힘들고 괴로운 날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내 인생에 어려움이 일어나고 시련이 오고 삶의 사태가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 아파하고 괴로워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주님 앞에서 발견해가는 과정, 이것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것을 해석하면서 자기 안에 있는 불완전하고 더러운 마음의 찌끼들을 씻어내면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고난이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어떤 사람보다 아주 탁월하게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면 예외 없이 고난을 겪은 사람이고 그의 고난의 총량이 나의 고난의 총량보다 많지 않다면 그는 그 고난을 해석하고 자기에게 적용하는 믿음이 있어서 자기보다 훨씬 앞서간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성취와 업적을 중시하고 사람들은 그 결과물을 보고 박수를 치지만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능력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진정으로 기쁘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 이상 하나님의 마음에 더 기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참되게 살아가는 참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형상을 닮아서 우리를 보는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알려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결국 우리 자신에 의해서 온전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완성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될 것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여기서 다 완성하지 못한 하나님의 형상을 주님이 우리를 반성시켜서 우리를 완전한 주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만드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결국은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형상을 모두 닮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그 형상을 얼마나 많이 닮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사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이전의 나보다 나아지고 있다는 기쁨, 어렸을 때 몰랐던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그 기쁨,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계속 자라갈 때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삶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교리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예수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외 없이 그것은 성취됩니다. 다만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와 하나님이 협력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만큼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만큼 그도 기쁨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들도 우리들이 주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은혜를 받고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 우리도 기쁘고 주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들에게 행복이 되는, 세월이 많이 흘러도 너무너무 다시 만나고 싶은 그리운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