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서 나는 생명
그런즉 사명은 우리 안에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니라(고후 4:12)
녹취자 : 김세나
고린도후서는 신약의 예레미야서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고통을 받은 그 사도와 그 일행들의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도가 그러한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 한 후에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는 그러한 고통 속에서 어떻게 섬기는 우리들의 고난과 섬김을 받는 영혼들의 축복이 그 나타나는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것입니다. 이 안에서 우리들은 예수 생명의 원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예수 생명의 원리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시고, 또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속에 생명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객관적인 생명이신 동시에 그 생명을 그 생명으로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살게 하시는 또한 우리의 생명이 되기도 하시는 것이죠. 객관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생명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생명이신 그 분이 죽으셨죠. 생명이신 그 분이 죽으시니까 이번에는 우리 모든 사람이 죽으신 그 분으로 말미암아 그 덕을 힘입어서 우리가 생명을 누리면서 살 수 있게 된 거거든요. 이러한 예수 생명의 원리가 예수님 예수님이 그 처음 인간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방법이신 동시에 또한 이 원리가 그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살아가는 원리가 되게 하신 것이죠. 이것이 바로 예수 생명의 원리에요. 이 예수 생명의 원리는 두 가지로 집약이 되는데, 첫째는 사랑하는 자의 죽음이에요. 이 사랑하는 자는 누구를 사랑하는 자냐 하면, 예수를 사랑하는 자. 그리고 또한 예수와 함께 살리심을 받아야 할 영혼을 사랑하는 자, 그 사람의 죽음이에요. 그러나 예수를 사랑하는 자는 이미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영혼들도 사랑하는 자이니 이는 신자 안에 있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 그 자체가 사적인 사랑이 아니라 교통하는 사랑이에요.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이미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사랑한다고 하면서 영혼에 대한 연민이 없는 사람은 그 사랑이 진정한 예수의 사랑이 아니죠. 사도요한이 자신의 서신서에서 그토록 사랑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으면 이제는 좀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고 그 생명을 얻은 사람의 본질적 특성이 사랑이라는 거죠. 사랑이라는 것이에요. 예수의 생명의 본질 그 자체가 사랑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은 그 안에 새로운 사랑의 본성이 창조된 사람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그 안에 예수님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죠. 이것이 까리따스 안에 있는 사랑의 통합이에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게 딸린 많은 영혼들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그 중요한 사명이 주어지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살아나는 즉시 죽기 시작하는 사명이에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즉시 죽어야 하는 사명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은 살아나는 즉시 죽어야 하는 사명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런데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모든 죽음에 항거하는 기능이에요. 그게 생명이에요. 그것이 육적 생명이든, 영적 생명이든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그 죽은 생명은 모든 생명에 항거하는 기능이에요. 그 언제 한번 그 TV에서 보니까 낙태할 때, 그 그 아이가 곤충 정도 수준 아니에요. 그런데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집게가 들어오는 것을 감지해요. 그리고 발버둥을 쳐요. 그게 생명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그렇게 살아나는 즉시 죽어야 할 사명으로 부름을 받는데 안 죽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이거죠. 이게 바로 우리의 육적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육적 본성은 그 자기를 죽이는 그것도 생명이기 때문에 그 육적 본성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신령한 은혜의 작용에 대해서 안 죽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거예요. 몸부림을 치는 거예요. 죽지 않으면 자신의 옛 자아는 아프지 않아요. 아프지 않아요. 아프지 않은 대신에 그 아프지 않은 대신에 자신의 이 신령한 사랑이 계속 그 죽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제 그를 죽이심으로 말미암아 확 드러나게 하시고 싶은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되요.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죠. 그 죽음에 이르는 고통 때문에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거죠. 안 죽는 것 만큼 예수의 생명이 드러나지 않아요. 예수의 생명이 드러나지 않으니까 그 생명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살아나는 은혜를 전달하는 통로로 우리들이 부름을 받았는데 살아나지 않아요. 그게 문제가 되는 거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화) 한 알의 밀이 있는데 그 밀에는 밀 눈이 있어요. 밀이 썩어 들어가면서 그 밀 눈이 양분을 먹고 식량을 삼아서 성장해요. 그래서 이 밀알이 썩어 들어가서 양분을 공급해 주는데 이것이 다 떨어질 때 쯤 되면, 밀 눈에서 뿌리가 내려서 스스로 양분을 섭취할 수 있게 돼요. 그런데 절반쯤 썩었어요. 그것을 통해서 밀 눈이 양분을 공급을 받아. 절반까지만 썩고 그 다음부터는 안 썩는 거예요. 그러면 밀 눈을 향해 공급되는 양분이 차단되는 거죠. 뿌리를 내릴 수가 없어요. 결국 그 밀 눈은, 밀 눈은 싹을 틔우기는 할지 모르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결국은 죽고 마는 거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신이 죽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의 결말이에요. 그러면 밀 눈이 죽어서 다시는 그 밀알이 싹을 낼 수 없는 밀알이 되고 반 토막 정도는 썩고 반 토막 정도는 남았는데 그 밀이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한 알갱이의 모래만도 못하지 않겠어요?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정말 비참한 사람들은 주님을 믿지 않은 불신자들이겠죠. 그 다음으로 비참한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그 예수 닮으러 가는 길에서 도중하차한 사람들이에요.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영혼을 돌보는 사역에 부름을 받았으면서 결국은 끝까지 자신이 죽지 않고 버팀으로 말미암아 자신 속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나지 못하는 거예요. 이것이 가장 불행한 삶입니다. 그는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이 목회 사역에 있어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사역의 성공이 아닙니다. 성공이 아니에요. 성공이 뭐가 행복하겠어요? 성공이 아니야. 물론 실패도 아니에요. 큰 업적, 그것도 아니에요. 이런 것들은 다 유전하는 사물들이기 때문에 흘러가고 그 다음에 전해지는 사물들이기 때문에 흘러가고 굴러가는 사물들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해요. 신자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자신, 생명이신 예수님 자신이에요. 그 예수님의 생명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에요.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법을 먼저 배우지 말고, 자기를 죽이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해요. 자기를 죽이는 법을 배워야 해요. 그런데 잔인해지지 않으면 사람을 죽일 수 없어요. 잔인해지지 않으면 사람을 죽일 수 없어요. 내 안에 있는 죄된 본성, 내 안에 예수와 함께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나의 이 본성도 죽을 수 없어요. 잔인해지지 않으면 죽을 수 없어요. 그래서 사도가 영으로서 육신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말한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그래서 잘 죽어야 됩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이에요.
그러면 그렇게 자기가 죽어야 하는 일이 꼭 필요한 일이고, 그것을 통해서 예수의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것은 인정을 하겠는데 그러면 그렇게 죽는다는 것은 무통 죽음은 없어요. 신앙의 세계에서 안락사는 없어요. 안락사는 없어요. 반드시 죽음은 마지막 죽는 그 순간까지 고통을 수반해요. 두려운 것은 비존재로 돌아간다는 죽음이 아니라 사실은 그 끝까지 다다르게 만드는 고통이 두려운 거예요. 정확하게 이야기해요. 비존재가 되는 것 보다도 더 두려운 것은 비존재가 되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그 고통이에요. 그게 두려운 거예요. 그런데 한번 여러분들에게 물어봅시다. 만약에 내 말이 맞으면 큰 소리로 아멘 해 보세요. 여러분은 온전히 죽고 예수님만이 여러분들 가운데 충만히 사시기를 원합니까. 그것 봐요.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 없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안 해요? 왜 우리 자신 부터가 안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나는 죽고 예수가 충만해 지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되기까지 지불해야 하는, 그렇죠. 내가 비존재가 되는 거야. 죽음이라는 것은 비존재가 되는 것 아니에요. 내가 나의 육적인 자아가 비존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에요. 두려운 것은 뭐냐 하면 비존재가 되기까지 당해야 하는 고통. 그게 두려움이에요. 그것이 싫은 거예요. 싫은 거죠. 그래서 아무리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자기가 거의 죽지 않은 사람보다는 조금만 아는데 그 조금 아는 지식의 빛을 가지고도 자기가 철저히 죽으려고 애쓰는 사람 안에 예수의 생명이 더 풍성하게 역사하는 거예요. 더 풍성하게 역사하는 거예요. 더 풍성하게 역사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러한 죽음의 고통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죽어가고 어떤 사람은 그 죽음의 고통이 두려워서 자기는 죽고 예수로 충만해 지는 것을 원하지만 안 죽어요. 그 차이가 뭐냐. 무엇이 그 사람들을 그렇게 다르게 만드느냐. 자기 깨어짐에서 내가 네 가지로 설명을 했는데 그 네 가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사랑이에요. 사랑. 사랑이에요. 그 사랑은 뭐냐 하면 자기는 한없이 부족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향한 사랑, 자기는 너무나 부족하지만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를 위해서 자기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고통을 견디는 거예요. 그 사랑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하게 되는 그 고통을 감내하도록 만들어 주는 거예요. 감내하도록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거예요.
우리들이 종종 신장이식 수술하는 사람들을 보죠. 이식 받는 사람은 요만큼만 째면 돼요. 이식 받는 사람은 등 뒤에서부터 찢어야 해요. 그래가지고 평생토록 이 수술 흔적이 남아요. 큰 상처가. 그것을 감당하게 만들어 주는 그 동기가 사랑이에요. 사랑이 그것을 감당하게 해요. 그래서 남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철저히 죽음에 이르는 고통으로 가기까지 자기를 죽이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은 사랑이 동기가 될 수도 있지만, 사랑이 아닌 것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해서 섬기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어요. 악한 사람들도 자기에게 잘 해 주는 사람에게는 선을 행하면 기분이 좋아요. 그러나 자기를 죽이는 그것은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요. 다른 것으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바로 그러한 사람들 속에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자기를 죽여가게 하시는 거죠.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자기 죽음이에요. 자기 죽음이에요. 사도바울과 같이 훌륭한 신앙의 인격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이야기 했어요.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자기를 죽이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했어요. 철저히 죽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것을 사도바울 자신이 경험한 거예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보면서 많은 고생을 하면서 그 속에서 끊임없는 자기의 죽음을 경험해서 자신이 계속 죽어가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이것이 예수 생명의 첫 번째 원리에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사랑받는 사람들의 생명이에요. 사랑받는 사람들의 살아남이에요. 여기에서 사랑받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신자의 사랑을 받는 영혼들이에요. 그들이 살아나는 거예요. 항상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죽음에서 살아나게 하실 때에 하나님이 하늘을 가르고 직접 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셔서 우리를 살아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살아나게 하셔요. 목회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심으로 살아나게 하시고,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나를 위해 진지하게 눈물로 기도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의 섬김을 통해서 살아나게 하셔요. 나에게 신앙의 도리와 믿음의 교훈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을 통해서 살아나게 하셔요. 방황하고 고통할 때 나를 위로해주던 사람들의 그 위로를 통해서 나를 살아나게 하셔요. 항상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셔서 사람들을 살아나게 하셔요. 여러분들은 바로 그렇게 사람들을 살아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택하신 도구들입니다. 특히 목회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들은 더더욱 하나님이 많은 영혼들을 살아나게 하시기 위해서 택하신 하나님의 도구요, 그릇이에요. 그래서 목회자의 영광은 이 세상의 지위나 지명도, 그리고 큰 교회, 그의 안락한 삶, 거기에 목회의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목회의 영광은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살아나는 거예요. 이것이 없으면 그는 죽은 사람이요. 이것이 영영 없으면 그는 하나님이 사역에 있어서 버린 사람과 같아요. 버린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이 살아있는 경험도 있을 수 없는 거죠. 있을 수 없어요. 그래서 목회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기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기도는 사랑이 없으면 기도할 수 없어요. 주님과 사랑에 빠져 보세요. 기도하지 말라고 핍박을 해도 반드시 기도하고 맙니다. 새벽이면 나와서 구석구석에서 그렇게 흐느낌으로 그렇게 기도하고 눈물 흘리는 지체들 보십시오. 가슴 아픈 통곡으로 혹은 감사의 눈물로, 감격의 흐느낌으로 눈물 흘리는 지체들을 봐요. 예수의 생명이 그 안에 있을 때 예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예수님께 사랑을 받을 때에 그런 기도 생활이 가능해지게 되는 거예요. 기도 생활이 가능하게 되는 거예요. 목회자의 영광은 사람들에게 사람들을 살리는 도구로 쓰이게 되는 거예요. 그 이외는 아무것도 영광이 아니에요. 그 이외의 것들은 심지어 있어도 되는 것이고, 없어도 되는 것이에요.
제가 맨 처음 목회의 소명을 받고 한 때 일평생 목사가 되지 말까 생각한 사람이에요. 어린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요. 그들에게 생명을 주는 도구로 나를 쓰시는 것이 너무나 감사했어요. 그래서 내가 영혼들을 위해서 일생을 살되 그냥 내가 소박한 직업 하나 가지고 그리고 이 영혼들을 위해서 일생을 살면 어떨까라고도 생각을 했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영혼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반드시 목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여성사역자들은 너무 불행하죠. 상관없어요. 중요한 것은 직분이나 직책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담임 목사이면 어떻고, 한 기관을 섬기면 어떻고, 아니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선교지에서 고생하는 사람이면 어때요. 영광은 다른 곳에 있나니 그 영광은 바로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혼들을 살리시는 거예요. 그는 자랑스러운 사람이에요. 그는 사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고 환경을 무서워 할 이유가 없어요. 광야에 내다놔도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실 것이고, 사람을 살릴 수 있으면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서요. 그런데 가슴 아픈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잘 죽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도구로 잘 쓰시지 않는단 말이죠. 그런데도 자신의 심각성을 느끼면서 이 생명의 역사가 나를 통해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려 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리고 그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모두 환경, 그 다음에 여건, 그 다음에 주변의 모든 상황, 이런 것에만 계속 탓을 돌리는 거죠. 그것이 결국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점점 더 육에 속한 사역의 길에 걸어가게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얼마나 깊은 모순에 빠지게 됩니까. 자기는 사랑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라고 가르쳐야 하고 자기는 죽으려고 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는 거죠.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려고 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는 못 박히라고 외치니 그 가르침이 성공하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는 설교요. 성공한다면 고도의 허위가 아니겠어요? 진리의 위대한 이끄는 힘은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진리와 합치되었을 때, 적어도 합치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아파하고 합치하려고 몸부림 칠 때, 거기에서 진리는 사람들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힘을 갖게 되는 거예요. 힘을 갖게 되는 거예요. 힘을 갖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항상 잘 할 수 있겠어요? 우리가 아무리 몸부림을 치며, 그리스도를 닮으려 한들 우리가 어느 때에 나는 이미 온전히 붙잡았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하죠.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는 말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예수여 내가 당신께 온전히 합치되지 못하고 있나이다. 나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는 거예요. 그 속에서 자신이 죽어가는 거예요. 그 속에서 자기는 죽고 자기 안에 계신 주님은 살아나는 거예요. 아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왜 이 너무나 당연하고 명백한 이치를 잘 알려고 하지 않는지 정말 궁금해요. 궁금해요.
그래서 목회의 길은 일평생 자기 죽음의 길이에요. 자기 죽음 없이는 새로운 진리를 깨닫는 것도 없고 그 진리를 보여주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해요. 오늘 보십시오. 사망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사망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우리는 날마다 죽고 우리는 날마다 고난을 당하고 그냥 육체로 핍박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고 굶고 주리고 춥고 배고프고 그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고 고린도후서 1장에서 우리가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을 알았노라. 벼랑 끝에까지 내몰려서 이제는 우리에게 아무 희망이 없구나 그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될 때까지 그게 자기가 철저하게 죽는 거예요. 그렇게 자기가 철저하게 죽는 거예요. 그렇게 사랑이 자기 안에 역사하는 거예요. 그랬더니 생명은 너희 안에 역사함이라. 그들이 막 살아나기 시작해요. 살아나기 시작해요.
오늘 아침에도 마당에 나와서 묵상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 우리가 얼마나 더 이런 죽음의 길을 가야 하나. 신기한 것은 우리가 잘 죽으면 수많은 영혼들이 살아나고, 수많은 영혼들이 살아나요. 수많은 영혼들이 살아나요.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셔요. 중심을 보셔요. 나는 지금도 이 여름이 가까이 다가오면 어릴 때 교회를 섬기던 때가 생각이 나요. 교회는 조그맣고 돈도 없고 교역자도 없고 교역자 한 사람, 중고등부. 어느날 갑자기 집사님, 당신이 여름성경학교 하시오. 돈 한 5만원 주고 하라는 거예요. 뭘 하겠어요? 은혜 받은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 할 수 없이 직장에 휴가를 일주일을 내고 그 전 일주일동안에 생각을 할수록 기가 막혀요. 주일학교 여름성경학교를 하라고 하는데 선생이야 해봤지만, 내가 어떻게 하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가 막혀요. 전도사가 아니고 집사니까 선생님들도 말도 안 들어요. 아주 우습게 알고 지금도 생각하면 아주 불쾌하고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청년들이에요. 할 수 없이 일주일을 금식기도를 했어요. 직장 다니면서. 그 때 읽었던 말씀이 빌립보서였어요. 수 없이 읽었어요. 한 60번은 읽은 것 같아요. 그러면서 일주일동안 직장을 다니면서 꼬박 일주일을 기도했어요. 여러 가지도 필요 없고 오직 하나에요. 이번 여름성경학교 때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기도를 하고는 퇴근하면 교회에 딱 가서 거기 엎드려서 기도하고, 거기에서 자거나 아니면 밤늦게 집에 와서 다시 세수를 하고 다시 가방을 메고 직장을 다녔어요. 일주일동안을 그 일을 했어요. 그렇게 기도를 하는데 마음속에 하나님이 평안을 주셔요. 내가 너와 내가 너와 함께 해 주겠다. 교회가 골목에 따닥 따닥 따닥 붙어 있는데 우리 교회는 애들 한 80명 나오는 교회였어요. 따닥 따닥 붙어 있는데, 다음주에 성경학교가 시작을 하는데 교사로 지원하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6명이 교사로 지원을 했어요. 최소한 12명은 있어야 되는데. 그렇게 하면서 청년들이 얼마나 교만하고 못됐는지 그렇게 사람을 무시하고 정말 교양이 없어요. 그래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했어요. 그때가 제가 24살인가, 25살이었어요. 일주일 금식을 했는데 기운이 하나도 없어요. 그 다음날이 이제 다닥다닥한 교회들이 새카맣게 한꺼번에 여름성경학교를 동시에 시작을 하는 거예요. 다른 데는 돈도 많고 악기도 있고 전도사도 있고 온 교회가 동원되었어요. 교회는 어쩌면 집사 한 사람 나와서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어요. 정말 생각하기 싫은 상황이었어요. 그랬는데 그렇게 하고 이제 주일 새벽부터 성경학교가 시작이 되었는데 일주일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요. 주일 새벽에 일어나서 미음을 끓여서 한 숟가락을 먹고 그리고 새벽에 나가는데 정말 눈물이 나는 거예요. 비가 창대같이 퍼붓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학교가 주일이 대목인데 비가 퍼부으니까 어떻게 하겠냐는 거예요. 그래서 갔더니 애들 한 20명 나왔어요. 부삽하고 쓰레기 치우는 삽하고 쓰레받이와 빗자루하고 들고 동네 새벽기도 끝나고 나서 다 쓸어 주는 봉사로 여름성경학교를 시작을 했거든요. 한 20명 나왔는데, 비가 주저리 주저리. 이게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25살쯤 먹었을 때인데 성경본문 중에서 그 십자가에 달린 강도 설교를 했어요. 새벽에. 새벽에 설교를 하는데 하여튼 설교가 목구멍에 기어 들어가서 안 나오는 거예요. 마음에 세상에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비가 내리게 하실 수 있고, 애들은 이게 20명이 더 되야지, 이게 뭔가. 설교를 하다가 펑펑 울어 버렸어요.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어요. 그 새벽에 모였던 애들이 그 내 설교를 듣고 애들이 울고 불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그래서 생전 처음 경험이었어요, 그 때가. 아이들이 초등학교 2학년, 3학년 된 아이들이 막 우는 거예요. 그래서 주먹을 쥐고 그 의자에 엎드려서 기도를 하는 거예요. 그게 제가 경험한 첫 번째 회심의 역사였어요. 그러더니 오후가 되었는데 햇빛이 쨍하게 나는 거예요. 그러더니 이게 무슨 기적인지 우리 교회로만 애들이 몰려오는 거예요. 선생님이 한바퀴 돌면 애들이 새카맣게 오는 거예요. 320명이 모였어요. 예배당에 앉을 자리가 없어서 의자를 다 들어내고 문을 확 열고 골목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열려진 문으로서 예배당 속에서 들려오는 설교소리를 들었어요. 그게 저의 첫 번째 여름성경학교였어요. 그 아이들을 마지막 3일째 되는날 이제 철야를 했어요. 철야를 하면서, 그러면서 선생들이 하나씩 둘씩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집사님들이 와서 돕고 마지막 날 저녁때에 이제 얘네들을 토막을 나눴어요. 시끄럽게 떠들수가 없잖아요. 맨날 싸워요. 그것 때문에 동네사람들과. 그래서 한 클래스씩 데리고 지하에 있는 기도실로 내려가서 144장 찬송을 부르면서 기도회를 했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기적이 일어났어요. 아이들이 거기에서 초등학교 1학년도 안되는 유치부 아이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요. 아이들이 찬송을 부르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을 생각하면서 기도하자. 아이들이 막 우는 거예요. 어느 정도 우는가 하면 장판이 질퍽질퍽 할 정도로 눈물과 콧물이 한 클래스 가면 그 다음 클래스 들어오고 그 다음 클래스 들어오고, 온 몸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어요. 거의 모든 애들이 거기에서 주님을 영접했어요. 320명까지는 아니었지만, 그 날 밤에 온 아이들, 거의 대부분 한 150명 정도 모였는데 거의 대부분 주님을 영접했어요. 그리고는 선풍기를 틀어놓고 희미한 불을 켜놓고 아이들을 의자에 바닥에 다 눕혔어요. 그 다음에 마지막에 잘 때 선생님이 부채질을 해 주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어떻게 사셨는지 그 분을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그 아이들에게 가르쳐줬어요. 쭉 부채질하면서, 그 선생님의 성경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씩 둘씩 선생님의 무릎을 베고 아이들이 잠들기 시작했어요. 이게 저의 첫 번째 여름성경학교에요. 그 때에 신학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랐지만, 깊이 가슴에 평생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진리가 이 가슴에 꽂혔어요. 그게 뭐냐 하면 아, 예수의 생명이 이렇게 역사하는구나. 내가 잘 죽으면 영혼은 사는구나. 그거였어요. 그 후에 약 2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그 아이들이 내 학교 연구실로 찾아왔어요. 그 때는 이미 벌써 결혼할 때가 된 청년들이었어요.
(찬양)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은 다 체험 하셨네 나 주님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사마와 같이 아름다운 저 천성 떠나서 이 천한 세상 오신 주 참 내 구주니
그게 저의 첫 번째 여름성경학교였어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어린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예수님 죽게 하신 것을 용서해달라고 가슴을 두들기며 울던 그 기도의 함성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잘 죽어야 해요. 그러면 영혼들이 살아나요. 선한 목자는 유능한 사람이 아니야. 선한 목자는 설교 잘하는 사람이 아니야. 선한 목자는 성공하는 사람이 아니야. 선한 목자는 잘 죽는 사람이야. 양떼들에게 생명이 나타날 수 있다면 자기가 기꺼이 죽고 싶어 하는 사람, 그래서 죽으면 죽을수록 예수의 죽으심을 이해하는 사람.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사는 비밀들이 이러한 자기 죽음의 사역의 과정을 통해서 경험되는 거예요. 경험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몰라요. 우리가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리가 있겠어요. 기도하죠. 그리고 영혼들을 위해 희생 안 하는 목회자가 있겠어요. 희생하죠. 그런데 불행하게도 양떼들의 마음은 많이 굳어요. 그래서 목회자가 피를 흘리면 양떼들은 눈물을 흘리고, 목회자가 뜨거운 눈물을 쏟으면 양떼들은 땀을 흘려요. 여름이 가까워 오고 있어요. 깊이 이 예수 생명의 원리를 터득하고 잘 사역하세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