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심과 인자하심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녹취자: 백두라
오늘 아침에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안 될 때 많이 힘들어합니다. 그것 자체가 결국은 자기가 어떤 식으로 내 인생이 전개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욕구가 강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욕구가 아주 분명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숭고한 뜻을 초점으로 하는 그런 목표에 대한 열망이라면 바람직합니다. 그리고 그런 목적 없이 인생을 사는 것은 인생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허망한 것 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우리들이 삶의 어떤 사태를 만났을 때 힘겨워하는 이유의 대부분은 그런 원대한 목적을 품었기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 내가 고통스럽고 힘들고 내 마음 먹은 대로 안 되기 때문에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결국은 우리의 삶에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생각을 좀 과감하게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살면서 어떻게 우리가 되었으면 좋았을 우리의 삶의 상태에 대한 생각. 이런 거 하나도 없는 삶을 살수 없습니다. 일평생 돌을 닦으며 살지 않는 한 우리가 아무리 우리 자신을 경계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욕망을 품는 존재이고 숨을 거두는 순간 그 전까지는 우리는 욕망덩어리인 것이 우리 인간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의 사태들이 우리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 그것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이는 마음 그것이 우리에게 매우 필요합니다. 삶이 원래 우리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때가 많다는 것도 그런 이유이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우리의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게 하심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정돈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칼빈이 자기 기독교강요 서문에서 이야기 하면서 아주 독특한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삐에 비엔 오르디네이 오르디니’ 단어입니다. ‘정돈된’, 혹은 ‘질서지워진’, ‘비엔’, ‘좋은’, ‘비에’, ‘삶’, ‘질서지원진 좋은 삶’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는 질서가 지워진 질서롭게 된 좋은 생을 영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입니다. 구원은 그런 질서지워진 좋은 삶을 위한 겨우 출발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목적 자체가 이 긴 우리의 인생을 건너뛰어서 천국으로 점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구원이 ‘비에 비엥 오르디’, 정돈된 질서지워진 좋은 삶을 살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과 은총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우리의 삶이 아주 하나님 앞에 칼빈이 이야기한 적절히 세상을 경멸하고 하찮게 여기는 태도를 함양하는데 우리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인생을 생각하고 나면 훨씬 더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매몰되어 버리거나 고통을 받는 일들은 적어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미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놓여있는 삶의 사태가 전부가 내가 원하는 삶의 사태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자신의 책에서 자실을 정의 하면서 자살은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너무나 너무나 다르게 살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라고 썼습니다. 그래서 정말 자살하는 사람이야말로 생의 의욕이 너무나 충만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어떤 삶에 대한 욕망이 너무 갈급한 나머지 현실 앞에 펼쳐진 삶의 사태들을 죽어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자신의 삶의 상황과 결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그리스도인에게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최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좋은 설교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치던 좋은 설교자가 자살을 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자는 사라졌어도 음성을 틀어놓으면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드립니다. 교회는 잘못된 겁니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의 사실이 우리에게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 선택을 했든지 자기는 선택을 하지 않았는데 주위에 의해서 가미가 되었든지 간에 어쨌든 자신의 삶 앞에 펼쳐진 이 현실을 수납하고 인정하는 것은 개혁신앙이나 청교도신앙을 추구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훌륭한 믿음의 행위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째서 이런 일이 나에게 왜에게 이런 일이 하필이면 왜 나에게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이 깃들 마음에 공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피할 수 없이 맞닥트리는 이 현실을 원망하게 되며 그 원망 속에는 반드시 인간을 향한 미움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앙심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민수기 14장을 깊이 설명하면서 그 원망이 얼마나 무서운 영혼의 파괴를 가져오는가를 여러분들에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처한 현실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도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그 앞에 전개되는 고통 받는 자신의 모습도 자신에게 자신이 놓아버릴 수 없는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승낙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가 너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숙명론이나 체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것과는 현저히 다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선하심이라는 것은 이 짧은 시간에 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선하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성품입니다. 그 선이 바로 하나님이 바로 자기 자신이 이 세계를 향해 가지신 목적을 스스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게 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적인 실수로 그 사랑이 우리에게 이타적이고 우리의 사랑이 이기적이면 이 기적일수록 절대로 이타적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충실하시고 당신 자신만을 생각하며 당신 자신의 일을 행하실 때에 인간은 그 안에서 참으로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훌륭한 증거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고통을 만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선하심의 가장 확실한 표입니다. 아주 놀라운 표입니다.
생선을 잡아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주 비닐이 굵고 큰 생선은 비닐이 칼날 같습니다. 그래서 비닐과 지느러미에 손이 베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고기를 잡을 때 애로사항이 있는데 비닐을 거슬려서 잡으면 고기는 미끄러지지 않는 대신 손이 베일 수 있습니다. 지느러미를 거꾸로 잡으면 찢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닐을 결을 따라서 잡으면 손은 안 다치는데 고기가 빠져 나옵니다. 그래서 대게 장갑을 끼고 생선을 잡고 옮기고 하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많이 맛보아 알게 되고 그분을 거스르면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악인들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고 그러나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쫒고자 하는 사람들은 아주 놀라운 은혜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을 행하실 때 가장 양보가 없고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함은 주먹이나 발길질이나 폭력으로 순간적으로 강하게 보이는 그런 힘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일하고자 하는 것과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자 하는 것 사이에 일치를 이룰 때에 그 하나님의 선하심은 알 수 없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향한 믿음이 아무리 탁월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신앙을 동반하지 않는 다면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일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도 하나님의 속성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유신논증을 하면서 속성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보다 훨씬 견고한 믿음생활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언제나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됩니다. 삶의 사태가 내 맘대로 안 되고 때로는 뼈아픈 시련을 만나고 내 앞에 전개되는 현실이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기대를 합니다. 이 특별한 삶의 사태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일을 하려고 하시는 걸까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시는 것일까 그것을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선이 하나님 자신의 목적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일치를 뜻한다면 인자하심은 일을 행하시는 과정에서 언약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어떤 무신론자와 기독교 유신론자 둘이서 논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논쟁해봐라. 시간을 줬더니 한참을 이야기 하더니 나는 당신이 증명한 것에 동의를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지금 당신에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보이겠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퍼부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것 봐라 하나님이 안계시다는 것을 내가 증명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기독교인이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당신이 증명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도 한때는 하나님을 모욕하고 그의 이름을 욕보이던 사람들이었는데 긍휼에 풍성하시던 하나님이 일체의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에 우리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믿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시편 전체를 미루어보면 약한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들 주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들 그 긍휼과 사랑을 의지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인자하신 성품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오래 참으심을 경험할 수 있는 문입니다. 그 신앙의 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오래 참으심이라는 사랑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으면서 삶의 사태들을 견뎌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인생의 쓴맛이 완전히 사라질 때 인간이 갈수 있는 길이 타락 말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탕 자체가 거룩한 바탕이 아니라 불결하고 죄 된 본성인데 완전한 만족과 평화와 휴식 속에서 인간이 마지막으로 갈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눈을 뜨고 살아있는 동안 더욱이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위해 그리스도 교회를 섬기는 동안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시련과 연단들을 만나 우리의 입에 쓴물을 머금게 하시고 그것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연단되고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매 순간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안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성경에서 보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미사일이 추격하듯이 그렇게 추격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듯이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라옵니다. 악한 길을 걸어가도 그 선하심이 끝까지 따라옵니다. 본인이 그것을 못 느낄 뿐이지 하나님의 그 선하심으로 추격하셔서 결국은 우리를 승복시키시고 주님 앞에서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마음을 한번 털고 여러분들이 힘들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내 마음에 안 들고 힘든 상황을 기도 많이 해서 바꾸는 것도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믿음보다 위대한 믿음은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어떻게 이것이 바뀌도록 기도해야 할 것인가 함에 있어서 자기의 행복이라는 기준점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 내게 맘에 안 드는 상황이 생겨났을 때 기도를 세게 40일 금식을 해서 물러났다 해서 한번으로 그게 끝나지 않습니다. 40일이 시작하기 되기 전에 또 다른 삶의 사태들이 생겨나는데 일생동안을 자기 맘에 안 드는 걸 그렇게 세게 기도로 밀어붙여서 자기에게 만족스러운 상황으로 바꾸면서 사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여러분 똘마니지 어떻게 여러분들을 통치 있어서 만왕의 왕이 되겠습니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칼빈은 왜 31가지가 넘는 병에 시달리며 살았고 사도 바울은 사단의 가시를 몸에 지니고 살았고 베드로는 왜 순교를 했겠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브라함 믿음을 참 소중하게 생각한 이유가 전 교회의 경건은 하늘나라에 소망을 둔 경건이었습니다. 철저하게 현실에 뿌리를 내린 경건, 영성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감동과 도전을 줍니다. 왜? 우린 그렇게 못 살기 때문입니다. 한번 마음을 활짝 펴서 지금 내가 설교한 것처럼 살아온 우리 인생길이 끊임없이 쓴물을 먹으며 고통 속에서 살아온 우리의 인생인데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삶의 상황이 내맘대로 전개되지 않는다 해서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흔들릴 수 있겠습니까? 마치 삶이 더 이상 살아 볼 것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낙심하며 사는 것이 과연 믿음인가 반성을 해야 합니다. 한 번쯤 괴로운 일이 우리의 인생에 일어난 것처럼, 정말 피눈물이 나는 고통스러운 것이 될 때 이제껏 살아오면서도 많이 겪었으니 한번쯤 그런 일이 일어난들 내 인생이 무엇이 바뀌랴 그러면서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 받아들이지 못할 때에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아주 반짝이는 하나님의 섭리. 여전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긍휼이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아픔을 능가하는 사랑으로 상처를 능가하는 자비로 이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25살 때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 인데 1월 첫 주간을 기도원에서 출퇴근을 했습니다. 동두천에서 기차를 타고 퇴근하자마자 기도원 들어가서 밤새도록 기도하고 새벽에 기차타고 직장 나오고 그것을 일주일을 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추운 날에 난로에 새벽2시쯤 해서 교인들이 모여서 서로 은혜로운 간증을 하는데 권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그 풍랑 인연하여서 주께로 갑니다 라는 찬송이 있었습니다. 누가먼저 시작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한사람이 부르니까 함께 따라 불렀습니다. 찬송이 끝나고 60세쯤 넘어 보이는 권사님이신데 얼굴이 고우신데 자기의 젊은 딸은 하나님께 먼저 떠나보내고 죽을 것 같은 고통스런 세월을 보내다가 이 찬송을 부르면서 그 딸을 하나님께로 가게 해 주신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간증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죄 많은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는 대신 순전히 젊은 나이에 하나님이 불러 가셔서 얼마나 큰 안식이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것들이 오래된 삶의 멍에를 내려놓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에 대한 기대도 인간적인 행복에 대한 기대가 우리의 삶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신앙을 하나님의 집에 거하면서 지키는 것 그 결심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 신앙이 주관적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내가 고통을 받을 때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이게 공동체생활의 유익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기도 한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