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 믿음의 도리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 4:14)
녹취자: 백지영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 서신을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 향해 기록하였습니다. 서신의 연대를 대개 학자들이 64년에서 67년 사이로 본다면 이때는 이미 로마에 의한 조직적인 박해가 시작되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핍박을 앞둔 혹은 이미 핍박이 시작된 상황 속에서 이들이 복음을 버리고 다시 유대주의로 돌아가려는 위험을 감지하고 이 기록자는 강력하게 이들에게 신앙에 굳건히 서도록 촉구하는 가운데 히브리서를 기록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본문의 문맥을 보시면 불순종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불순종할 때 어떻게 비참한 결과가 오는지를 구약의 광야교회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를 들어서 역사적으로 입증한 후에, 우리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 안식은 ‘카타파오시스’와 ‘사바티스모스’의 안식이었습니다. ‘사바티스모스’가 육체적인 쉼을 의미한다면 ‘카타파오시스’는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는 완전한 안식입니다. 그런 영원한 안식의 약속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잠시 당하는 고난이나 어려움들을 하찮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여기서 배교하고 불순종한다면 우리는 그 안식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이것이 3장과 4장의 문맥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이야기의 중간 결론을 내면서, 그러므로 일의 추이가 이러한즉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붙잡을 지어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할 것이니라.”고 14절과 16절 사이에서 결론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이러한 핍박 그리고 임박한 환난 때문에 불순종하고 신앙에서 이탈할 위험이 있을 때 사도가 광야교회 시절의 유대인들을 예로 들면서 경고하고, 영원한 안식을 거론하면서 불순종하지 말도록 촉구하는 가운데 세 가지를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그 첫째가 예수 그리스도, 두 번째가 믿음의 도리, 그 다음에 세 번째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실천, 이 세 가지였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 세 가지를 말씀드림으로서 하이델베르그 교리학교에 오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선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제시하는 것은 우리를 그런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결코 홀로 두지 아니하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가 계시다고, 이것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제시장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제사장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대제사장은 언제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일 년에 속죄일에 한 차례씩 지성소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죄를 하나님 앞에 속함 받게끔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대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 것이냐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 대제사장 제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제사장은 막중한 사명을 맡았으나 자신이 이미 하나님 앞에 죄를 간직하고 있는 불결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하나님 앞에 먼저 드리고, 그 이후 용서받은 몸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공동체의 속죄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공동체로서 죄 있는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과 교제하게 하는 것이 대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그 대제사장의 예표가 실현된 것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대제사장은 자신이 제사장이 되어서 제물을 취해 드렸지만 자신이 불완전한 것처럼 제물도 영원한 제물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항상 그것은 영원히 단번에 드리는 제사가 되지 못하고 유한하고 한계를 지닌 제사였습니다. 이런 제사로서는 하나님과의 본질적인 생명의 관계를 영구히 복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오신 실체로서의 이 대제사장은 당신 자신이 대제사장으로서 당신 자신의 몸을 속죄의 제물로 드림으로써 영원히 단번에 하나님과 영적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를 이룩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숙고의 대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신학? 물론입니다. 아니지요? 조직신학? 물론입니다. 역사를 모르고 조직신학을 안다는 것은 단편적이지 않습니까? 물론 역사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숙고의 대상은 성경입니다. 성경이고, 성경에 있어서 모든 주제들이 동일한 계시의 깊이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을 숙고하는 것이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업이라고 할 때 그러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혹은 어떤 주제를 숙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냐고 할 때 그것이 바로 ‘Incarnation of Christ’,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신학에 눈을 떴다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의미에 대해서 눈을 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종종 대화를 하거나 강의를 들어보면 박학다식한 것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데 왜 그런지 수없이 강의를 들어도 가닥이 잡히는 것 같지 않는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 가르치는 분이 남들이 해 놓은 신학은 많이 공부했는데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의미에 그 사람이 붙잡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하는 가장 중요한 자격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을 하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안 한 사람들은 신학을 못하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 안에서 육화(肉化)된 신학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 어떻게 불가능할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라.”, 이런 고백은 그런 식의 신학에서는 안 나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그런 고백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에 있어서, 이 개혁신학에 있어서 장엄한 주제가 무엇이냐 하면 엑스껠렌띠아 크리스티, 그리스도의 탁월성입니다. 왜 그리스도가 그렇게 탁월하신지, 특히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왜 그렇게 탁월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여기에서 모두 논변하는 것은 이 수요예배 설교의 의도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계시를 주실 때 관계를 통해서 계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변하고, 무한하고, 단순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이 변화무쌍한 이 세상 속에서 주어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당신의 계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불변하고, 무한하고, 영원하신 그래서 인간의 이성의 추론을 초월하는 탁월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존재와 성품을 그 인간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찬란하게 알리시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들자면 이것입니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프리즘 가지고 장난을 많이 했었습니다. 햇빛이 들어 올 때 새카만 마분지를 비치고 햇빛이 통과하게 한 다음에 내버려두면 하얀 빛이 들어오는데, 무색의 밝은 빛이 들어옵니다. 거기다 프리즘을 갖다 대면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색으로 찬란한 색깔을 내면서 분광(分光)이 됩니다. 그런데 분광된 그 색에다가 다시 프리즘을 댄다고 그것이 다시 합광(合光)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찬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색깔이 없이 밝은 빛줄기가 하나님의 심플리띠따스, 하나님의 단순성이라면, 이 프리즘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그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탁월한 성품이 아주 찬란한 빛깔로 프리즘을 통과한 햇빛처럼 찬란하게 비추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시간 안에 계신 분처럼 사귀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존재인 것처럼 관계를 맺고, 영원하신 그분을 일시적인 존재인 인간이 서로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듯이 그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시간 생활 안에서 도덕 생활이 가능해 지게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하지만 그 하나님에 대한 찬송이 마지막에 모아지는 지점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에 대한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안다’라고 할 때 소위 이야기하는 ‘다트 엘로 힘’,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 하나님을 안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존재 자체를 계시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기껏 계시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이것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언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무한하고, 완전하고, 영원하고, 불변하시는 분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우리들이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자체에 대한 지식보다는 하나님의 성품, 즉 속성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이고, 그 속성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인간들을 사용해서 이 세상에 시행이 되는가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라고 할 때에, 타락하고 난 다음에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당신을 떠난 비참한 인간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셔서 당신과의 생명의 관계로 돌아오게 하실 것인가, 이것이 사실은 역사의 대부분의 의미라 이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구속사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당신을 멀리 떠난 죄인을 돌이켜서 다시 당신의 생명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 구원 역사의 대드라마에서 프리즘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그리스도의 인카네이션’, 성육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청교도들과 개혁신학을 가졌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이라고 할 때 그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이 바로 그런 종류의 구속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자신의 정체를 그저 시골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목회자로서 제가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안타까움은 신학의 깊이가 그리스도를 아는 깊이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체 그런 신학을 공부해서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을 전하던 교회에서 전도사 때 있었던 일이었는데, 어떤 자매 하나가 인생을 올 스톱하고 휴학을 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이냐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라”, 나도 그리스도인인데 왜 나에게는 이 고백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이 고백의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인생을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민이 정작 신학생들에게는 너무 없습니다. 매일 앞에 펼쳐지는, 어느 교회로 갈까? 가서 무슨 일을 할까? 장로님이 연말에 쫓아내지는 않을까? 담임목사가 유학을 간다고 하면 백 불이라도 보내줄까?, 온갖 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까지,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의 고상함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누군가가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과 인성을 입으신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해서 고뇌하면서 찾아간 구도의 발자취가 남겨 놓은 결과물이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깊이 추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해서 승천하시고 처음에 만드신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그러면 첫 번째 지도자를 뽑는 일이 예수님께도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누구를 고르셨습니까?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간 그 사람, 베드로입니다. 기왕이면, 열 한 제자는 다 예수님 버리고 도망가고 팔아먹고 그랬는데 한 제자가 신앙의 정조를 지키고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면서 지조를 지킨 제자가 있었더라, 그런데 그 사람이 예루살렘 교회의 처음 지도자가 되었더라, 그러면 우리들이 감동받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람이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 않습니까? 사도들도 열둘 중에 하나만 그렇게 되었는데, 그래서 그것이 복음적인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실패한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뭘 물어보십니까? “Do you love me?" 세 번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한 조건인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성품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 자매들이 연애를 하고 어느 한 형제가 좋아졌을 때 뭐가 좋다는 것이지요? 큰 키나 무거운 체중? 그런 것은 처음에 하나의 매개체 역할을 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점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품에 끌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성품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다양한 성품을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나타낸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신학을 공부해서 경력이 흘러가면 갈수록 주님을 깊이 만날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최근에 반더빌트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폴 림 교수가 우리 교회에 왔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재미있게 교재를 나누었는데 최근에 충격 받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석사과정 때까지 기독교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학생이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다가 무신론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은 아니었는데, MDB에서는 가끔 그런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박사과정에서도 그럴 수 있구나 자신도 너무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해야 할 최고의 기도제목은 하나님 좋은 교회를 주십시오, 훌륭한 담임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로 가서 사역을 하게 해 주십시오, 아니면 돈 많은 집안의 자매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기도 많이 하는 장모님 만나게 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깊이 주님을 만나도록, 한번이 아니라 신학을 하면서 몇 번 결정적인 계기가 있어서 깊이 주님을 만나서 인간이 쓴 그리스도의 묘사들이 흑백사진처럼 보일 정도의 그 어떤 계기가 여러분들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신학이 불가능하다 그 뜻이 아니라 정말 살아있는 제대로 된 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를 깊이 추구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A.W. 토저의 ‘The Pursuit of God’, 하나님을 추구함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 책들은 이런 사상을 아주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한 번 읽어보십시오.
두 번째는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 굳게 라는 부사는 안 나옵니다. ‘잡을 지어다’, ‘크라토멘’이라는 이 단어는 줄이나 막대기 같은 것을 어떤 조건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서 굳게 파지(把持)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도리’라고 번역이 된 것입니다. 이 번역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 ‘호몰로기아’라고 하는 히랍어의 번역입니다. 이것은 컨패션(confession) 혹은 정확하게 말하면 프로패션(profession)입니다. 프로패스(profess), 프로패서(professor), 고백한 것입니다. 이 히랍어 ‘호몰로기아’라고 하는 단어는 공(公)고백을 의미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로기아’가 ‘호모’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예수에 대한 견해, 성경 진리에 관한 견해가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고백한 호몰로기아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확히 말하면 '신조'입니다. 신앙고백, 형식화를 거쳐서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신앙의 공고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굳게 붙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할 때에는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이 신학의 유니버셜리티(universality)와 파티큐래러티(particularity), 이 두 가지의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니버셜리티(universality)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처음 기독교 신앙이 시작되었던 사도 시대에는 감리교도 장로교도 장로교 안에서 고신파도 합신측도 합동측도 없었습니다.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신앙고백들이 이루어지고 그 고백들은 불분명 했었습니다. 소극적으로는 이단들과 맞서서 이단의 도전을 받으면서,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이제껏 믿어 왔는가 하는 것을 불분명하던 것들을 명확하게 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지고, 혹은 이단의 도전이 없어도 이교 사회를 향해 우리는 이런 방식의 믿는 바를 추구한다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 사상은 이런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프로패스(profess)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들이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서 발전해 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초대교회 교부들, 그리고 2세기의 변증가들, 초대교회의 교부 속에도 들어가지만, 그 다음에 테루툴리아누스, 에레나이우스, 어거스틴 그러면서 중세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중세에 그를 거치고 이렇게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모든 유산들은 소위 이야기하는 신학에 있어서 보편성에 관한 것인데 그래서 우리들이 보편교회라고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캐톨릭 쳐치(Catholic Church)라고, 유니버시알 쳐치(Universal Church).
우리의 신앙이 어느 날 갑자기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천지가 창조되듯이 우리가 믿는 바를 신학자 한 사람이 던져 준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역사적인 뿌리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공부하는 것이 신학에 있어서 한 측면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신학에 있어서 유니버시얼리티(universality)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부를 공부 잘 안 한다는 것을 내가 너무 잘 압니다. 그러나 생각을 많이 바꿔서 초대교회의 속사도교부들부터 시작을 해서 꾸준히 그들의 저작집을 읽는 것이 생활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중요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거대한 교부들, 테루툴리아누스, 에레나이우스 그 다음에 어거스틴 그 다음에 토마스 아퀴나스 그 이전에 안셀무스 이런 사람들은 필수적으로 공부를 해서 충분히 섭취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서 있는 시점에서 기독교의 보편적인 뿌리에 대해서 공부를 하게 되면 그 보편교회의 유산이 가톨릭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오히려 그것을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 해석했는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그것만 강조하다 보면, 보편교회에서 오는 많은 다양하고 폭넓은 신학들 중에서 자의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게 되면 우리들이 견지하고 있는 개별적인 신앙고백과 충돌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중에 어느 하나를 따라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발전 과정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깊이 숙고하면서 그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가 믿는 이 신앙을 형성해 왔는가를 연구하는 배경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 내가 개혁파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개혁파신앙을 가지고 있는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우리 공동체의 신앙고백은 무엇인가, 그것이 호몰로기아입니다. 이 공동체가 역사적으로 지지하는 신앙의 고백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유니버셜(universal)한 것이 아니라 파티큘러(particular)한 것입니다. 이것을 굳게 붙들고 이 빛에 의해서 유니버셜리티(universality)를 해석하고 이 유니버셜리티에 의해서 파티큐래러티(particularity)가 해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누군가 한 사람의 추종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개혁주의만 해도 얼마나 폭넓은 다양성들을 가지고 있는데, 누구 한 사람의 책 한 권을 가지고 아니면 어느 신조 딱 하나를 가지고 여기에 없는 것 여기에 어긋나는 것은 전부 다 성경적이 아니라고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의 공부가 같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도리를 굳게 붙들라, 흔들리지 않도록 콱 붙들고 마치 전쟁에 나가는 군인이 창을 들고 돌격할 때 그 창을 굳게 붙든 것처럼 그렇게 굳세게 붙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쪽을 공부함으로써 자신이 이것을 붙들고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 감격스럽게 여겨져야 되는 것입니다. 굳게 붙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플라톤을 공부하면서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너무 감사했고, 어거스틴을 읽으면서는 기독교인인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루터와 칼빈을 읽으면서는 가톨릭 교인이 아니고 개신교도인 것이 너무 영광스러웠습니다. 그리고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을 공부하면서는 그 다양한 개신교의 교파들 중 내가 개혁파 교인인 것에 대해서 무한한 긍지를 느꼈습니다. 감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한테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목사님 조심하십시오. 어거스틴을 너무 많이 인용을 하십니다. 어거스틴은 개혁주의하고 많이 다릅니다.”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는 16세기에 생겨난 것이고 어거스틴은 4, 5세기 때 사람인데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물론 그 사람의 이야기는 어거스틴에게는 오류가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원천으로서의 그 가치를 우리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을 여러분들이 깊이 사랑하고, 내가 여러분들의 위치에 있다면 한 2년 내지 3년 정도는 어거스틴의 신학 속에 세례를 받고 싶겠습니다. 깊이 들어가 보면 완전히 신학이 다르게 보일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면서 파티큐래러티(particularity)의 신학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굳게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커다란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 개혁교회 혹은 장로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앙고백을 안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우리가 다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신앙의 도리를 잘 해설하고 가르쳐서 사람들이 그 속에서 찬란한 지식의 빛과 은혜의 불을 함께 보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천착해서 교리를 연구해야 합니다. 물론 교리를 연구할 때 믿음의 도리를 굳게 붙드는 것은 좋은데 그것을 굳게 붙들고 가르칠 때 앵무새처럼 가르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이런 교리를 그대로 있는 대로 가르칠 것이 아닙니다. 현대 사회에 대한 고민은 하이델베르그 캐터키즘(The Heidelberg Catechism)을 쓰던 시대의 사람들의 고민과는 사회에 대한 고민, 교회에 대한 고민이 다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지금 21세기의 현대 사회에서 복음이 어떻게 취급받고 있고 복음을 안 믿는 사람들의 정신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이것을 온 몸으로 선교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끌어안고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떼들로 생각하면서 고민하면서 그들을 녹일 수 있는 그 무엇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에서 모든 청년들에게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의 책을 읽게 했습니다. '배제와 포용', Exclusion and Embrace을 읽혔는데, 저는 그 책을 두 번을 읽었습니다. 정말 깊이 감동을 했고 그리고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연 북한이나 일본의 문제에 대해서 과연 이 저자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까? 체첸과 크루아티아 사이에 일어났던 갈등. 이 사람은 대단한 사람인데 고등학교 이후의 모든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보면 무슨 특별한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하면 아닙니다. 우리들이 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책이 꽤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그냥 결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개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과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대화를 해서 자신의 토론의 장 속으로 끌어들여서, 그래서 성경적인 결론에 함께 이르게 만들어 줍니다. 꼭 읽어보십시오. 영어로 읽으면 더 좋습니다.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민이.
그래서 굳게 붙들고, 우리의 고전적인 교리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성찰한 후에는 그들과는 다른 우리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적용하면서 고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이빌드 웰스 교수를 제가 여러 번 만났지만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개혁주의자들 가운데 그런 식으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가서 4월 달에 만났을 때도 많이 격려해 드리고 왔습니다. 당신이 하는 이 일을 홀드 온(Hold on.), 굳게 붙들고 계속 하십시오! 그렇게 확고한 개혁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대 사회를 가지고 역사적으로 그렇게 고민하면서, 이 사회가 선교의 대상이라는 것, 이 사람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고 그리고 변함없는 불변하는 복음이 변화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시대정신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는 것입니다. 굉장히 원더풀한 학자입니다. 대화를 해 보면 대화의 깊이와 폭이 엄청난데, 그런 고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데이빌드 웰스의 4부작은 꼭 읽어야 합니다. 시험공부를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꼭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치열하게 고민을 해야 합니다. 영어에서는 방황이나 방랑이나 모두 원더링(wondering)입니다. 그런데 한국말은 방황은 방랑하고는 다릅니다. 방랑은 처음부터 목적이 없는 것입니다. 방황은 목적이 있는데 갈려고 하는데 잘 안되어서 어쩔 수 없이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게 되는 것을 방황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신학 활동이 방랑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연약할 때에는 방황하는 한이 있더라도 방랑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기 확인을 확고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내가 이것을 믿을 수밖에 없는가라고 하는 아주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리에 천착하고 깊이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학은 그 자체가 ‘독트리나’, 교리입니다. ‘독트리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리를 모르는 사람은 기독교 철학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우리 교부시대로 돌아가 보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무엇이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철학’,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이방인들이 철학을 통해서 인생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하나님 없이 고민했다면, 하나님 있이 그렇게 고민하며 내 놓은 결과의 집적물들이 ‘독트리나’, 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곧 교리를 알고 그 교리를 따라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학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학이 바로 독트리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교리가 재미없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사고 체계가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인문학에 있어서 문학이나 법학, 철학, 논리 이런 것들에 대한 공부가 현저히 토대가 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부족을 알고 부지런히 교리를 탐구해서 그래서 그 교리를 자신이 굳게 붙들고 사람들에게 그 교리를 가르치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그러면 그것이면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열렬히 간구하는 삶입니다. 이것을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는 것은 그때그때마다 적합한 은혜, 예를 들자면 믿음이 흐려질 때면 믿음을 굳건히 하는 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핍박을 받을 때는 용기가, 나의 질서와 너무 안 맞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그를 품을 수 있는 사랑이 필요할 것입니다. 등등 이 모든 것들은 종류는 달라도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그것의 원 저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 다양한 사랑의 속성을 만들어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지 아니하며 등등 나오는데, 그것이 그렇게 모습은 다양해도 뿌리는 하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크라치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내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감화에 의해서 그런 다양한 사랑의 속성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은혜의 고귀함과 가치는 은사하고는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은사 중의 또 다른 은사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것들이어서 그 은혜의 토대가 없이는 이 은사가 아무런 의미가 없을 정도로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어디서 오는가? 우리들이 예전에 믿었던 전통적인 신앙의 고백들을 반복해서 읽고, 외우고, 가르치는 것만으로 그런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신학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찬동을 통해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실천적인 경건의 생활, 마음을 모으고 주님을 간절히 부르는 갈망하는 마음의 실천, 이것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시련을 이기고 극복해 나아갈 수 있는 그리고 연약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자기가 붙잡은 믿음의 도리를 끝까지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 그 무엇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힘이. 그것은 신비한 것이고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은혜의 힘이고, 사랑의 힘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신학은 그것은 살아있는 신학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전설적인 17세기 설교자 조지 윗필드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이 단지 믿을 뿐이라면 마귀는 당신이 칼빈주의자가 되든지 아니면 자유주의자가 되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단지 지성적으로 무엇을 이해하고 찬동하는 그것 말고, 마음속에서 그것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어떤 열렬한 힘들이 초월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바와 같이, 정신으로서는 그렇게 해야 되겠는데 라고 생각을 하는데 죽어도 그렇게 실천할 수 있는 힘이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자신의 고백록 속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은 얼마나 이상합니까? 마음이 손더러 이것을 집어라 하면 즉시 집고, 발더러 명령하기를 걸어가라 하면 즉시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마음에게 명령할라치면 신기하게 마음은 그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그런 것을 극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크라티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주관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은혜,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솔직히 지금 와서 이런 간증하는 것은 좀 부끄럽습니다. 요새는 옛날처럼 그렇게 열렬하게 기도생활을 못합니다. 나이가 많아서 육체가 힘들기도 하고, 일도 그 당시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기도 하지만 그런데 늘 반성은 하고 애를 쓸려고 합니다. 여기 돌멩이로 깨끗이 만든 새로 지은 강의동 그것 딱 하나 있었는데 그때는 빨간 벽돌로 지었었습니다. 딱 그것 하나고 어마어마하게 추웠습니다. 추웠다는 것밖에는 이 양재에서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3학년 때가 되었는데, 3학년 때는 사당동으로 돌아갔는데 그때 박영희 총장님이 너희 올라가지 말고 여기서 한 해만 더 다니면 안 되겠느냐고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2년 동안 다닌 거리를 도합 합계를 해보니까 지구를 한 바퀴 반을 돌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몇 바퀴나 더 돌아서 시간을 여기서 허비해야 됩니까?” 그래서 어쨌든 올라가게 되었는데, 나의 양재에서의 3년의 생활은 정말 최선을 다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는데 여러분들 앞에서는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어도 그 이상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 점에 있어서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더 이상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기도의 은혜입니다. 말로 하기 싫을 정도로 고난이 가득 찬 생활을 3년을 보냈습니다. 정말 우여곡절도 많고. 그런데 그래도 내가 감사한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그 눈물 골짜기 같은 3년을 지나고 다른 형제들은 가보지 않는 험난한 인생길을, 목회사역의 길을 걸으면서 하루도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올라오면 8시 반에 수업시작인데 항상 8시에 버스가 여기에 도착을 합니다. 30분 동안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합니다. 가을에 단풍이 빨갛게 물 들으면 여기 굉장히 멋있었습니다. 커피를 한 잔 들고 산책을 하면서 즐길까?, 채플 실에 들어가서 기도를 할까? 항상 후자가 이겼습니다. 앉기만 하면 막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교회의 형편, 가정의 형편, 그 다음에 한국교회 문제, 그때나 지금이나 학내 사태 이런 것을 보면 너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찬양)
우리를 사랑 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갈 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책은 한 학기에 한 키 읽고, 기도의 눈물을 한 학기에 한 됫박을 받아야 거기서 신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사람의 설교자가 되어서 짧은 시간에 한 마디의 말로 무감각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게 되기까지는 가혹할 정도로 잔인하게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온 희생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한 편의 설교는 한 사발의 피인 것입니다. 그 흔적이 자신의 연약함을 충분히 알고, 올바른 지식과 교리 속에서 자신의 모든 무능함과 약함을 그분께 토설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라고 하는 거룩한 무기력함에 사로잡혀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당신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학의 언어로는 묘사할 수 없는 신비한 은혜를 그 신학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쓴 신학의 고백적인 글 뒤에 숨겨진 거대한 실체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스위트니스 오브 갓(Sweetness of God)’, 하나님의 달콤하심입니다. 신학을 하는 그 과정 자체가 주님의 사랑의 품에 안겨서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젖가슴에 자기가 안기는 것 같은 그러한 달콤함, 그런 속에서 신학이 습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굳게 붙들고 살아가야 할 양보할 수 없는 어떤 체화(體化)된, 체험된 교리들이 견고한 신학의 기반 위에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나의 이상적인 ‘신학함’은 하나님과의 뜨거운 사랑에 빠진 얼음 같은 지성, 이것이 최고의 ‘신학함’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