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안에 선 가정
(201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말씀 안에 선 가정 1 (2012.5.6 주일오전설교)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말씀 안에 선 가정2 (2012.05.13 주일오전설교)
말씀 안에 선 가정 3 (2012.05.27 주일오전설교)
1. 부모를 경외하라(레19:3) 2012.5.6 주일오전 1
2. 네 자녀를 노엽게 말라(골3:21) 2012.5.13 주일오전 10
3. 아내와 남편(골3:18-19) 2012.5.27 주일오전 21
말씀안에 선 가정 4 (2012.05.27 주일오후설교)
4. 말씀을 높이는 가정(딛2:4-5) 2012.5.27 주일오후 28
5. 남편과 아내, 그리고 신앙(벧전3:1-7) 2012.6.3 주일오전 32
말씀 안에 선 가정 5 (2012.06.03 주일오전설교)
6. 네 형제와 화해하라(창45:14-15) 2012.6.3 주일오후 41
말씀안에 선 가정 46
말씀 안에 선 가정 1 (2012.5.6 주일오전설교)
말씀 안에 선 가정2 (2012.05.13 주일오전설교)
말씀 안에 선 가정 3 (2012.05.27 주일오전설교)
말씀안에 선 가정 4 (2012.05.27 주일오후설교)
말씀 안에 선 가정 5 (2012.06.03 주일오전설교)
말씀안에 선 가정 6 (2012.06.03 주일오후설교)
1. 부모를 경외하라
I. 본문해설
II. 부모 공경과 안식일
A. 성도의 삶과 예배
- 두 의미의 예배
- 부모공경의 경륜
B. 삶이 없는 예배 없음
III. 부모공경의 의무
A. 공경이란 무엇인가
B. 네 부모를 사랑하라
- 창조의 질서를 생각함
- 용서로 상처를 이기라
- 사랑으로 관계를 세우라
IV. 결론
2. 네 자녀를 노엽게 말라
I. 본문해설
II. 가정을 주신 경륜
A. 알게 하시려고
- 하나님, 인간세계, 자신
B. 살게 하시려고
- 하나님 앞에서
–덕스럽게 행하며
III. 사랑하여야 할 자녀들
- 분재 아닌, 자연수처럼
A. 자녀를 양육함(엡6:4)
1. 주의 교양과 훈계로
2. 삶의 경건과 모본으로
B. 자녀를 사랑함
1. 자녀들이 노여울 때
- 폭언과 폭력만이 아님
- 부모의 언행이 불일치한 삶
- 과도한 기대로 깨어진 관계
- 사랑 없는 무관심
- 자녀가 낙심할 때
2.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함
- 하나님께 사랑받는 형상
- 편견과 인습을 강요치 않음
- 사랑과 한없는 자유 속에서
IV. 결론
3. 아내와 남편
I. 본문해설
II. 아내를 향한 권면
A. 남편에 대한 복종
- 복종의 의미
- 노예적 복종 아님
- 남성우월의 탐욕적 해석
B. 인격이신 하나님을 앎
- 인격적 사랑과 질서를 앎
- 주 안에서 복종함
–다툼과 허영에서 온 분쟁
III. 남편을 향한 권면
A. 아내에 대한 사랑
- 사랑의 의미
- 자기애의 확장이 아님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아내 잃어도 만족 잃지 않는 사랑
B. 괴롭게 하지 않음
- 남성성의 거친 태도
- 여성성의 쉬운 상처 받음
- 아내 입장에서 생각함
- 세심하신 하나님
IV. 세상 끝날 까지의 결합
- 그리스도의 몸을 세움
–끊임없는 까리따스로써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음
V. 결론
4. 말씀을 높이는 가정
I. 본문해설
II. 목회자의 임무
A. 교훈에 합당한 삶의 가르침
B. 교인들의 의무: 배움
III. 젊은 여자들을 향한 교훈
A. 남편과 자녀를 사랑함
B. 신중하여 순전함
C. 집안일의 훌륭한 경영자가 됨
D. 남편에게 복종함
IV. 결론
5. 남편과 아내, 그리고 신앙
I. 본문해설
II. 그리스도의 고난을 아는 삶
III. 아내들을 향한 명령
A. 남편에게 순종함
-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
–말보다 더 큰 행실의 호소력
–순결과 경외의 모본을 보임
B. 감화시키는 단장
- 사람: 용모, 치장, 옷단장
–하나님: 온유+고요한 정신
- ‘썩지아니“ 쇠하지 않는 아름다움
IV. 남편들을 향한 명령
A. 아내와 동거함
- 지식을 따르는 동거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아심 같이
B. 아내에 대한 생각을 바꿈
- 더 연약한 그릇으로 여김
–생명의 은혜를 함께 받을 자로 여김
–현세의 삶에서, 내세의 삶에서
C. 기도가 막힐 때 생각함
V. 결론
6. 네 형제와 화해하라
I. 본문해설
II. 상처로 살아온 사람
III. 형제와 화해한 사람
A. 자신의 불행을 섭리 속에서 봄
1. 인간의 악함도 사용하심
2. 세상의 구원을 위한 섭리
3. 믿음으로 삶: 섭리에 대해
B.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함
- 현실을 있는 대로 받아들임
–관계를 소중히 여김
IV. 결론
말씀안에 선 가정 46
말씀 안에 선 가정 1 (2012.5.6 주일오전설교)
말씀 안에 선 가정2 (2012.05.13 주일오전설교)
말씀 안에 선 가정 3 (2012.05.27 주일오전설교)
말씀안에 선 가정 4 (2012.05.27 주일오후설교)
말씀 안에 선 가정 5 (2012.06.03 주일오전설교)
말씀안에 선 가정 6 (2012.06.03 주일오후설교)
1.부모를 경외하라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의 계명들 중 한 토막입니다. 레위기는 죄인이고 불결한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죄 많고 불결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제사로서 이들을 깨끗케 하시고, 또 그 제사에서 받은 용서를 토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게 하셨는데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었습니다.
Ⅱ. 부모 공경과 안식일
특별히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과 연관시켜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는 바와 같이 안식일은 맨 처음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제 7일에 쉬신 것을 기념하여 인간들도 모든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쉬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기리고 그 분을 경배하는 날로 구별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6일 마치신 후 7일째 쉬신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근거였다가 신명기 5장에 들어오게 되면 그 근거가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 되었던 위치에서 구원해 내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인도하시는 이유 때문에 그 안식일을 지키는 명분으로 바뀌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신 것은 처음에는 창조 때문에 그리고 그 창조 위에 구속 때문에 이 안식일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안식일의 중심은 제의에 있고, 제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안식일의 계명과 부모 공경의 계명은 성도의 삶과 예배의 관계를 적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A. 성도의 삶과 예배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의 예배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제의의 행위였습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주일 동안 그 안식일에 받은 제의의 정신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봉사하며 살아가는 삶이 바로 넓은 의미의 예배입니다.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취되었고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날인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6일의 창조 끝의 날이었지만 주일은 6일을 시작하는 첫 번째 날이 되었고 이로써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날의 계시들이 완성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좁은 의미의 예배를 드립니다. 여기에서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때에 바로 그 정신과 능력을 가지고 6일 동안의 삶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또 6일 동안의 삶이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충성스럽게 드려졌을 그때에 비로소 주일 드리는 이 예배가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신앙의 예배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6일 동안 불순종하고 은혜에서 미끄러지고 심지어 죄를 지은 사람은 주일날 하나님을 만날 그런 희망이 없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자기의 백성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셨는데 회개하는 자에게 무한히 반복되는 죄의 용서와 순종하려는 자에게 한없이 부어주시는 은혜의 힘, 이 두 가지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미끄러진 6일이었다면,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와 진실하게 참회하는 주일이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부어주셔서 지난 6일 동안의 실패가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6일 동안의 삶이 승리하는 삶이었다면 자신의 힘으로 승리한 것처럼 자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 예배의 날에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새롭게 힘입어 다가오는 한 주간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부모 공경을 하나님께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밀접히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십계명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지시합니다. 아는 바와 같이 십계명은 10개의 계명으로 되어 있고, 1부는 인간이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지를 규율하는 계명이고, 2부는 인간이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이지를 규율하는 계명입니다. 2부의 첫 계명은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고, 1부의 첫 계명은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있게 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나머지 두 계명을 나머지 세 계명을 잘 지킨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첫 번째 다른 신을 내 앞에 있게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다면 일부 계명 전체를 어기는 것이 될 것이고, 이런 구도에서 보면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이 계명은 뒤에 나오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그리고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하는 이 모든 계명의 수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모든 계명을 지킨다고 할지라도 이웃에 대하여 우리들이 올바른 관계를 가질 가장 중요한 계명을 범하여 2부 전체의 계명을 범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1계명부터 10계명까지 어느 계명에도 현상금을 거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약속 있는 첫 계명을 바로 이 부모 공경의 계명에다가 거셨고, 그것은 바로 이 땅에서 장수하고 잘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큰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지만 광야를 지나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슴에 와 닿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질병과 전쟁으로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땅에서 너희의 생명이 길리라고 말씀하셨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슴에 와 닿는 축복의 약속이었고, 잘 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번영에 관한 약속은 결핍 속에서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큰 축복의 징표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부모 공경을 십계명 안에 두셨고, 일주일 동안에 우리의 삶이 부모를 공경하는 삶이 될 때에 하루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예배도 하나님께 올려짐직한 예배가 될 수 있다는 이 균형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B. 삶이 없는 예배 없음
여기서 우리는 삶이 없는 예배는 없다고 하는 평범한 성경의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삶은 예배의 확장이고 예배는 삶의 축소입니다. 예배드리는 것은 살기 위한 것이고, 사는 것은 예배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정신은 삶을 능가할 수 없고, 삶은 예배의 정신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예배한 것만큼만 살 수 있고, 산 것 만큼만 예배할 수 있으니, 예배의 영적인 능력은 삶의 가치이고 삶의 실제적인 실천은 예배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좁은 의미의 예배와 넓은 의미의 예배는 원뿔형의 구조를 이루면서 둘 사이에 막힌 것은 없으나 층차를 가지고 있고, 층차는 있으나 담장이 없이 예배가 삶으로, 삶이 예배로 환원을 계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관점에서 보면 6일의 삶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준비하는 삶일 뿐이고, 또 삶의 관점에서 보면 예배는 예배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기 위한 예배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III. 부모공경의 의무
A. 공경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도대체 부모 공경의 의무가 어떤 것이기에 우리에게 이처럼 안식일의 축복과 연관을 지어서 부모를 공경하는 6일의 삶이 없는 하루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무의미하고 하루 안식일이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축복의 날이 되기 위해서는 6일 동안의 삶이 하나님을 향한 공경과 경배를 동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부모를 향한 공경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합니다. ‘경외’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야뤠’(ארי)라는 동사인데,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 사용합니다. 경외의 감정은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두려움과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높은 분이고, 자기는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모든 것 위에 뛰어난 존재로서 자신은 아주 티끌 같은 존재일 뿐임을 깨닫기기 때문에 자신의 전 존재가 주님을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앞에서 인간은 자기가 불결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란 사실을 깨닫고 이러한 사실은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인간으로 하여금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떨리는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줍니다. 만약에 그것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 모든 공경은 두려운 종의 영을 가진 공경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또 한 가지 당신의 성품을 보여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와 사랑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높으시고 자신은 하나님 앞에 죄인일 뿐임을 깨닫지만, 두렵지만 도망치고 싶지 않는 것은 자기와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이끌리는 사랑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공경의 감정이 되고 그 감정 안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무제한으로 복종하고 순종하며 하나님을 섬길 삶의 자세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공경의 정신을 가지고 부모에게 합당한 두려움과 사랑을 갖도록 우리에게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사이에 지키면서 살아가야할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의 질서를 고려할 때에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인간으로 하여금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의무가 아니라 행복으로 인도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중요한 계명일수록, 이 세상 인간 사회를 이끌어 가는 근본적인 계명일수록 모든 종교와 사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그것들을 중요시 하게끔 인간의 본성에 씨앗을 심으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명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사상은 다르고 종교는 같지 않아도 모든 종교와 사상을 초월하여 공통적으로 인정받는 덕목 가운데 하나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모 공경의 대의는 우리의 많은 종교 역사에 중요한 가르침으로 등장합니다. 비록 특별 계시를 잘 몰라도 일반 계시만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하는 삶을 살면 인간은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지금은 유교 사상도 우리에게 이미 힘을 잃었고, 간신히 그 관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미 우리는 도덕의 절대 기준과 가치들을 마음으로 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유교에서 이 부모 공경의 계명이 얼마나 강조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를 여의고 나면, 부모가 죽은 것이 모두 자식 된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3년 동안 부모의 묘지 곁에 움막을 치고 매일 그 부모를 제사로 공경하며 살았습니다. 죽은 후에도 이런 효도를 요구했다면 살았을 때에는 더 많은 효도를 요구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자식이 질서를 따라서 부모를 공경하고 살았을 때에는 부모로부터도 사랑을 받았고 자기의 자녀로부터도 공경을 받았습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산업화의 물결이 밀려왔습니다. 도시화가 진행이 됐습니다. 그리고 핵가족 제도가 일반화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부모를 자신의 가족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부모는 귀찮은 존재가 되었고, 부모에게 올릴 공경을 자기 자식들에게 쏟아 붓는 비정상적인 애정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자 이렇게 되었습니다. 부모에게 돌릴 관심과 공경을 자식에게 쏟아 붓게 되었으니 이제 그 자식으로부터는 놀라운 공경을 받겠죠? 그러나 그것은 이론일 뿐이고 부모 공경을 접고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을 우상처럼 여기게 되니까 부모도 공경을 할 수 없고, 자식들에게도 공경을 받지 못하는 단절된 고립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자녀를 위하여 물질과 마음을 쏟으며 과도히 사랑했으나 자녀는 이미 우리에 대해 너무 많은 비밀을 터득해 버렸습니다. 얼마나 부모가 자신의 부모에 대해 하찮게 행동하는지,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부모라고 하는 존재가 얼마나 가벼운 존재인지를 부모의 생애 전체를 통해 학습하였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과도히 사랑을 받아도 그것이 부모를 향한 보답하는 공경으로 이어지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위로 사랑했으면 위도 아래도 모두 공경하고, 공경을 받는 아름다운 질서를 이루었을 텐데 위로 올릴 사랑을 포기하고 내리 사랑을 육정을 따라 베풀었더니 위로부터도 단절되고 아래로부터도 단절되는 비정상적인 가정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를 공경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부모를 존중하고 부모를 가볍게 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부모가 여러분보다 높은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인격적으로 여러분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고매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또 부모가 실질적으로 이 세상에서 큰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부모에게 기대어 사는 것이 행복할 수도 있겠죠.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것 없어도 부모가 돈을 많이 가지고 있을 때에는 여러분도 부모를 공경하려고 하고 그 점에 있어서 부모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웃에게 하소연을 했답니다. 애들 좀 모두 함께 보고 싶은데 명절이 되도 바쁘다고 오지를 않는다고 말입니다. 옆집에 있는 이웃이 충고를 해 주었어요. 당신의 자녀를 보고 싶을 때 모두 한 번에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게 뭐냐고 그랬더니 명절 때 모두 전화를 해서 다 오라고 하라는 거죠. 그렇게 해도 다 안 오더라 이거죠. 다음에는 전화를 걸 때에 이번 명절에 모두 오너라. 이렇게 얘기하고 뒤에다가 한 문장만 덧붙이라는 거죠. 이번 명절에는 모여서 유산 문제에 대해서 의논을 하자. 그러면 미국에 있는 자녀들도 모두 비행기 타고 올 거라는 것입니다.
B. 네 부모를 사랑하라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이런 부모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보다 더 많은 경우에는 부모님은 연로하여 돈도 없고, 사회적인 지위도 옛날 일이 되었고, 권력은 자식들에게로 이동이 되었습니다. 예전에 부모가 권력을 손에 넣었을 때는 자식위에 군림했고 자식들은 그 권력 앞에서, 자원 앞에서 꼼짝도 못했지만 이제는 입장이 바뀌었고, 자식들이 더 많은 권력과 자원을 손에 넣게 되어 부모의 여생이 자식들에 의해서 그 행복이 좌우되는 처지로 오게 됩니다. 이때 부모를 존중히 여기는 것은 부모가 가지고 있는 어떤 장점이나 영광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부모라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고 존중히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계명입니다. 부모 공경을 말하면서 우리는 효도를 생각하게 되고,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부모가 자신보다 훌륭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경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창조의 질서를 생각할 때에 하나님이 이 모든 창조의 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부모를 우리에게 주셨고, 부모를 공경하도록 우리에게 준엄하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모를 그렇게 진심으로 공경하게 될 때에 우리도 복을 받게 된다고 하나님이 현상금까지 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전에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와 그리고 가슴 아픈 기억 때문에 부모와의 관계를 올바로 회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그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전 먼저 그 부모를 용서하고, 그 상처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일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하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 무슨 무엄한 말씀입니까? 우리의 부모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상처를 준 일도 없었고, 인격적으로나 모든 도덕과 신의의 삶에 있어서 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도덕성을 지니신 분들이었고, 내가 그 분처럼만 살 수 있다면 원이 없겠다는 고백을 여러분이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정말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더 많이 영광을 돌려야 하고 그런 훌륭한 부모님들이 여러분의 부모님이기에 여러분은 갑절이나 더 그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보다 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조차도 그런 부모를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에 부모로부터 받았던 폭력과 폭언, 가정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음주와 구타, 이런 것들로 인해서 만신창이가 된 가정 속에서 살아온 자녀들의 가슴에는 이미 수없이 많은 상처의 못이 박혔고, 세월이 많이 지나도 이것들은 사라지거나 잊히지 않습니다. 원래 사람은 남이 자기에게 잘못한 것은 돌에 새기고, 자신이 남에게 잘못한 것은 물 위에 새기는 법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행한 악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쓰라린 상처가 되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행한 악한 일은 자신도 이웃보다 먼저 자신을 용서하고 망각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상처는 쉽게 잊히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머리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계명과 도리를 이해할지라도 효도가 우리의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인데 마음에 있는 상처가 밧줄이 되어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놓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상처의 아픈 기억들은 때가 되거나 상처를 생각나게 하는 어떤 것들이 우리에게 맞닥뜨릴 때 폭발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정동이 일어나면서 과거의 모든 일들이 수십 년의 세월의 간격을 뛰어넘어 오늘 할퀴는 상처처럼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상처를 많이 받은 관계는 대부분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할 관계 속에서 그것이 충족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관계의 뒤틀림입니다. 이런 속에서 한번 깨뜨려진 부모와의 관계가 쉽게 회복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어쩌면 이것은 인간이 쉽게 뛰어 넘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커다란 벽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고 한때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하나님의 자녀들조차도 이렇게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여야 한다는 성경의 부인할 수 없이 명백한 계명 앞에서 자신의 마음대로 부모에게 그렇게 공경을 드릴 수 없는 얽매인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복음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안에 있는 우리의 사랑으로는 이 끔찍한 미움과 상처를 극복하고 부모를 뜨겁게 사랑하여 주님의 마음에 합당하기까지 그 부모를 공경할 자원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는 놀라운 자원과 능력을 줍니다. 우리는 육신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생각함에 있어 언제나 영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우리의 어머니가 때로는 우리에게 어린 시절의 깊은 고통을 안겨주고 윤리적인 혼돈을 가져다주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을 때 행했던 우리의 어두운 삶을 생각한다면 그 분들의 처지를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은혜를 입고 단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마는 원래는 죄 중에 태어났고 하나님을 원수로 알며 살던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빛으로부터 우리가 멀어졌을 때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인생의 주인인 줄을 알았고, 모질게 하나님께 원수 노릇하며 주님을 악독스럽게 모욕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주님께 돌아갈 수 없을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들려주셨고,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우리의 인생의 무게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같이 더러운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래서 그 십자가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은 모든 죄 때문에 예수가 짊어지신 십자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시인이 고백한 것처럼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께서는 나를 영접하신 것입니다. 이 큰 사랑을 깨달을 때마다 우리가 감격하는 것은 이전에 우리가 주님을 몰랐을 때에 하나님을 그렇게 원수처럼 여기고, 주님께 반항하던 악한 날들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모들이 주님을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 분들 눈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당신들을 위한 고귀한 선물로 비춰지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좋은 귀찮은 존재처럼 여겨졌고, 그랬기 때문에 그 분들은 무지의 어둠 속에서 부모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가정의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녀인 우리들에게 상처가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그 분들에게 우리처럼 복음의 밝은 빛이 비추었다면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많이 사랑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처럼 입하였더라면 우리보다 더 헌신적으로 자녀인 우리들을 위해 희생하고,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들의 목숨이라도 내어 놓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모에게 진작 복음의 밝은 빛을 비추어 주셔서 우리가 그 경건한 부모 밑에 태어나 그 분에게 사랑과 온전한 자비를 힘입으며 인간다운 사람으로 자랄 수 없었는지, 왜 이제야 우리에게 복음의 빛을 주셔서 우리가 부모를 용서하고, 용납하고, 사랑하여야 할 무거운 짐을 우리에게 짊어지게 해 주신 것인지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수많은 의문을 갖습니다. 이 모든 의문들에 대한 답을 이 세상에서는 다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랑은 우리 부모님이 받지 못한 진리의 빛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춰주셨고, 우리 부모님이 받지 못한 사랑을 우리에게는 부어주셨으며, 우리 부모님이 입지 못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우리 부모 못지않게 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자녀들을 향해 선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끔 우리를 바꾸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 살 수 있게 해 주신 이 모든 은혜는 결국 우리의 부모들에게 이 사랑을 흘려보내도록 하나님이 주신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의 특성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랑이고, 대가를 구하지 않는 사랑이며, 그리고 심지어는 그들이 우리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 조차도 바라지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 자신을 흘려보냄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 까리따스의 사랑이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이 바로 그런 무한한 자기 버림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부모들을 깊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단 한 번만이라도 무릎을 꿇고 부모로서 너의 마음에 이렇게 많은 상처를 준 것을 용서해 달라고 빌면 뜨겁게 용서해 드릴 수 있건만 부모들은 이미 기억 속에서 잊어버렸기 때문에 혹은 기억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자녀들에게 무릎을 꿇어야 되겠다는 자기 낮아짐의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일을 실행에 옮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까리따스의 사랑은 그러한 부모의 굴복이 있어야 비로소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라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지난 열흘 동안 미국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동부로부터 중부, 서부까지 네 개의 도시를 이동했고 여러 번의 집회를 인도했으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가기 전 주일을 지키고 난 후에는 떠나기 전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 두 시간 밖에 숙면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좀 잤습니다마는 몸은 천근처럼 무거웠고, 내리자마자 점심을 먹은 후 얼마 있다가 집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가니 피곤이 밀려왔습니다. 가기 전에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기온이 24도 25도 여름 날씨라고 해서 반팔 옷만 준비해 가지고 갔는데 하필이면 비행기를 제가 인천에서 타자마자 미국에서는 기상 이변이 시작 되었고, 공항에 내렸을 때에는 영상 10도도 안 되는 아주 추운 날씨였고, 북쪽에서는 8인치의 눈이 쌓였다는 뉴스까지 보도가 되었습니다. 밤에 호텔에 들어와 보니 허름한 호텔에 남방을 키니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고, 남방을 끄니 추워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바지에 위에는 긴팔 티셔츠를 입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얼마나 잠을 잤을까 새벽에 어디서 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도 흐느끼는 소리가 아니라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저는 깜짝 놀라 잠을 깨었습니다. 제가 잠꼬대를 하며 펑펑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렀고, 배게 밑이 흠뻑 젖도록 소리를 내어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꿈을 꾼 것입니다. 꿈에 돌아가신 저의 아버님을 만났습니다. 여윈 몸에 머리는 희끗희끗하시고, 반팔 하얀 와이셔츠를 넥타이도 없이 입으시고 바지는 검은 빛이 감도는 쥐색 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옷 군데군데 흙이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을 하시는 중이었고 무엇 때문인지 허리를 굽힌 체 나무로 만든 상자를 들고 계셨고 거기에 무엇을 담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뒤로 다가가서 아버지하고 두 번을 애틋하게 불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의 일을 하고 계셨을 때 저는 비로소 아버님이 연로해지셨을 때에 청각이 매우 나빠지셨다는 사실이 생각이 났고, 언젠가 아버님을 모시고 보청기 가게에 가서 진단을 받고 180만원을 들여 좋은 보청기를 해서 귀에 끼어드리던 생각이 났습니다. 보청기를 아마 끼고 계시지 않았던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가까이 다가가서 어깨를 두드리며 아버지하고 불렀습니다. 그때 그 분이 상자를 내려놓으시고 고개를 돌리셨습니다. 당뇨기운에 몸은 여위셨고 얼굴을 핼쑥하셨는데 제가 아버지의 이름을 불렀을 때 활짝 힘없이 웃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꿈이었는데도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데 이 사랑을 별로 표현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엉엉 우는 꿈을 꾸다가 잠꼬대를 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지 못했을 때에는 미움 때문에 공경할 수 없었고, 주님을 깊이 만나 용서하고 사랑한 후에는 왜 그런지 때로는 쑥스럽고 때로는 내키지 않고 때로는 어색한 것 같아서 마음에는 사랑이 있었지만 그것을 표현하지 않고 많은 시간들을 지내왔고, 앞으로도 그런 것들을 아버지께 표현할 시간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어느 날 불현듯 하나님은 아버지를 데려가셨습니다. 이제는 그 분과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있어서 그 분이 내게 오실 수도 없고, 꿈이 아니면 제가 그 분께로 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꿈을 깨고 난 후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천장을 향하여 한없이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아까는 꿈 때문에 울었고, 이번에는 꿈을 깨서 생시에 울었던 것입니다. 지나갔던 많은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고, 몰랐을 때에는 몰라서 공경하지 못했지만, 알고 사랑한 후에는 왜 그렇게 아버지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면서 침묵 속에서 그 아까운 시간들을 흘려보냈는지를 생각하며 안타까워서 어둠 속에서 허공을 응시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즉시 여러분이 생각이 났습니다.
아직까지도 부모가 살아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이 살아계신 한 아직도 용서하고 다시 사랑하고 공경할 기회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단 하루만 살아오신다면 잘해드릴 수 있을 텐데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 텐데 이제는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과거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부모님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있어서 부모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그 분들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주셨든지 그것이 좋은 것이었든지 나쁜 것이었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원수까지도 긍휼히 여기도록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그 사랑이 그리스도께 남아서 우리를 이렇게 구원했기 때문에 살아있지 않습니까? 깊이 용서하고, 사랑하십시오. 마음으로만 사랑하지 말고 수시로 안아드리고, 그리고 쓰다듬어 드리고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사랑을 마치 오늘이 이것을 표현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인 것처럼 그렇게 그분께 사랑과 경의를 표하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으로는 우리 부모에게 나은바 되어 자식이 되었지만 때로는 영적으로는 자식인 우리들에게 먼저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육신의 부모를 향해 자식인 우리가 영혼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Ⅳ. 결론
우리의 부모는 사랑받고 공경받기 위해 태어났고, 우리는 그 분들을 위해 죽기 위해 태어났다고 믿으면 극복하지 못할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마음 깊이 그리스도의 큰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을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마음의 사랑을 할 수 있으면 표현하십시오. 하나님이 이렇게 상처와 슬픔으로 얼룩진 우리의 가정들을 복음 안에서 다시금 행복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십자가의 은혜를 주셨으니 이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이 가정의 회복을 위해 썩는 한 알의 밀알이 될 때에 하나님은 여러분의 이 사랑과 은혜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여러분의 가정에는 여러분이 그 사랑의 통로가 되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랑 안에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가정을 위해 썩는 한 알의 밀알이 되라고 여러분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2.네 자녀를 노엽게 말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 3:2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바울이 가정을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기 위해 준 계명 중 일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부터 3장까지 사이에서 온 땅과 만물위에 높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이 모든 세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될 것인데 그 영광스러운 완성의 날을 바라보며 사는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될지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라고 하는 접속사로 이어지는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이 문단은 그런 영광스러운 완성에의 전망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구체적으로 그 소망을 품고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리고 특별히 가족들 간의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II. 가정을 주신 경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니라’고 말입니다. 이런 영광스러운 완성의 전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생활이 남달라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경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경륜은 두 가지를 위함인데 하나는 알게 하시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공장에서 대량 생산해 내지 않으시고, 아담과 같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이 직접 흙으로 빚으시지 않으시고, 남녀의 결합을 통해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그 사랑의 열매로서 아이들을 태어나게 하심으로 그 아이들을 가정에 두셔서 인간을 만드시는 경륜을 택하셨습니다.
A. 알게 하시려고
첫째는 지식과 관련이 되는데 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참으로 인간으로서 필요한 지식들을 얻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가정의 경륜을 두신 것입니다. 아이는 부모의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누가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도 엄마의 젖을 빨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그 엄마의 젖을 통해서 나오는 양분을 공급을 받으며 발육을 하게 됩니다.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제 엄마젖을 떼게 되고, 이유식을 거쳐서 밥을 먹으며, 자기에게 필요한 영양분들을 음식을 통해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도 똑같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로부터 태어나자마자 엄마 품에서 모든 필요한 지식들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이 아이가 지식을 습득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엄마 품에서 이제 지식을 배우기 시작하고, 그리고 잠시 후 아빠와 관계를 맺으면서 지식들을 습득하게 되는데 이 지식은 크게 세 가지 대상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과 그리고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의 습득 과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도 갖게 되는데 일종의 반성적인 지식이죠. 어쨌든 아이는 이렇게 마치 일방적으로 엄마젖을 의지하며 육체의 양분을 공급받듯이 엄마를 통해 그리고 잠시 후 아빠를 통해 거의 일방적으로 이 지식들을 공급받게 됩니다. 아이들이 보기에 엄마 아빠는 전지전능한 존재이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엄마, 아빠로부터 이 세 대상에 대한 지식들을 습득함으로써 사람답게 생각하고 살 수 있는 기본적인 자질들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되기 위해서 가장 첫 번째 조건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관한 적절한 지식을 갖고 자기가 있어야 할 인간의 위치에 서서 이 세 대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습득하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하려고 하는 열망을 가진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것이야 말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언제나 부모의 얼굴을 보면서 이 세 대상에 대해서 배우고 도덕에 대한 관념을 터득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아이가 발육하여 다리에 힘이 생기고 엄마 무릎을 딛고 어깨 너머를 바라볼 수 있을 때쯤 되면 이제 이 아이는 엄마 아빠가 아닌 다른 세계로부터 직접 지식들을 습득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아이의 마음속에는 단선적이던 지식들이 그물망을 형성하면서 아이들에게 그 지식이 서로 지식끼리 비교가 되는 그러한 판단의 기준들이 생기게 됩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해서 부모로부터 지식을 습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결혼을 해 자식을 낳음으로써만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식에게 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전해줄 수 있을 때에 그가 정말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 중 가장 이러한 지식을 전달함에 있어서 가장 정확한 지식은 성경을 통해서 습득하는 지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렇게 인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가정을 통해서 주시기 위하여 이렇게 자녀를 가정에서 양육하도록 경륜하신 것입니다.
B. 살게 하시려고
둘째로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경륜은 사람으로 살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모든 지식은 결국은 살기 위한 지식이고, 이것은 명백히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류를 지으시고, 자기를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 이것들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인간을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셔서 부모와 가족들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기를 사용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이롭게 하며 살아가는 덕스러운 삶이 무엇인지를 가정에서 배우게 하기 위하여 가정이라는 경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국가의 최고의 존재 목적은 백성들에게 정의를 가르치는 것이고, 가정의 가장 뛰어난 목적은 인간이 누구이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두 가지 모두를 자기의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자신의 정의를 가르쳐야 할 의무를 교회에 떠넘길 수 없고, 가정은 자기의 자녀들에게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가르쳐야 할 의무를 교회에 떠넘길 수 없습니다. 국가와 가정이 이 두 가지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책임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바로 그렇게 정의롭고 사람답게 사는 인간이 되기 위한 지름길을 가르쳐 주는 곳인데 교회에서 그들은 참된 신자가 되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배움으로 국가를 향해서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그리고 가정을 향하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이 두 가지 목적을 국가와 가정과 교회가 삼위일체처럼 협력하여 이 일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선천적으로도 도덕관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선척적인 도덕관념들은 자극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그러면 전혀 개발이 되지 않는 측면도 있습니다. 1930년대 프랑스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숲속에 사냥을 나간 사람이 두 아이를 붙들어 왔습니다. 마치 정글북에 나오는 모글리처럼 짐승들에게 양육을 받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들의 나이를 제가 정확히 기억을 못하는데 한 6~7살 된 나이 정도의 아이 하나와 그보다 좀 더 나이 많아서 9살에서 열 몇 살 쯤 된 아이 하나였습니다. 그 아이들을 붙잡은 프랑스 사람들은 초미의 관심사가 이 아이를 과연 인간 사회에 적응하도록 되돌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 세계의 교육학자들의 관심이 모아졌고, 다양한 교육 방법들이 적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했습니다. 둘 다 큰 아이는 열여섯 살쯤 되었을 때 죽었고, 그 밑에 있는 아이는 한 아홉 살 정도 되었을 때 죽은 걸로 제가 기억을 해요. 그때에 교육학자들이 내린 가장 중요한 결론이 뭐냐 하면 유아교육의 중요성이었어요. 인간 사회에 함께 어울리며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한데 그 교육은 아무 때나 교육의 양을 주입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시기가 있고, 그 시기에 그 교육이 이루어지고 지식이 습득되지 않으면 인간 사회에 돌아올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죠. 우리들이 흔히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본요 관념으로서의 도덕을 이야기해요. 우리들은 그런 이론들을 신뢰해요. 그러나 사람이 사람의 사회 속에 살고 있을 때에 그것은 통용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아이들처럼 완전히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서 짐승들과 함께 살게 되었을 때 과연 그 짐승들과 어울려 살면서 그런 본유적인 도덕관념들이 발현될 수 있을까? 이것을 우리들은 확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엄마 아빠의 표정을 보면서 선과 악에 대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라고 하나님께서 가정을 통해서 인간을 양육하시는 경륜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아무리 탁월하게 경영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국가의 영속적인 번영의 기초는 가정에 있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스파르타 같은 나라, 그리고 아테네 같은 나라에서 그렇게 그리스 같은 데서 철저하게 이 가정의 교육을 중요시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III. 사랑하여야 할 자녀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렇게 가정을 주신 경륜 안에서 부모가 자녀와 맺어야 될 관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라고 되어 있지만 바로 그 앞 절에 보면 자녀들에게 순종을 요구하는데 부모에 대한 순종을 요구합니다. 그런 점에서 여기에 ‘아비들’이라고 나오는 것은 부모의 대표자로서 아비가 나오는 것이기도 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들은 엄마보다도 아빠가 훨씬 더 그럴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아비들아’라고 호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녀자들과 어린 아이들은 사람을 세는 숫자에 들어가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특히 이 아이들은 아직 인간으로서의 제대로 된 권리를 갖지 못하고 어른들에게 종속된 그런 것처럼 여겨졌죠. 그런데 이것은 성경이 동의하고 있는 삶의 자세가 아니에요. 시대의 정신, 인간의 편견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낙심할까 하노라’고 할 때에 이 노엽게 한다는 말은 분노케 한다고 하는 뜻인데 이것은 단지 적대적인 분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낙심한다는 말까지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은 노여움의 결과로서 낙심한다는 것입니다. 전체적인 의미는 단지 문자적으로 분노하고 낙담한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이 찌그러진다’ 는 의미입니다.
미러 스테인리스라고 하는 건축 자제가 있어요. 여러분이 건물 같은 데서 보면 유리거울처럼 비치는 스테인리스 판이에요. 미러라고 하는데 거울처럼 또렷하게 물체가 보이죠. 그런데 거기를 망치로 여러 번 두드리면 우그러지기 시작할 것이고, 우그러지면 거울로서의 기능을 거의 할 수 없겠죠. 똑바른 물건을 비춰도 굽거나 휘어진 물건으로 보이겠죠. 바로 부모와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부모로부터 억압을 당하거나 분노를 촉발시키는 대우를 받았을 때 아이의 정신과 마음이 이렇게 찌그러진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녀들은 가정에서 충분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A. 자녀를 양육함(엡6:4)
그래서 오늘 이 골로새서 3장 21절의 말씀은 부모가 사랑하여야 할 자녀들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서는 자녀를 양육하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부하십니다. 그런데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도록 우리에게 지정하셨습니다. 교양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정신과 마음의 자원을 가리킨다면 훈계는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할 삶과 믿음의 분명한 표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용하여 자녀들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경계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책망하고 이렇게 하면서 자녀를 양육할 때에 그 자녀가 가정에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자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주의 교양과 훈계는 결국은 부모의 인격과 말, 그리고 이 모든 가르침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흘러 들어가는 거겠죠. 그러면 이 주의 교양과 훈계는 이미 부모 속에서 육화된 주의 교양과 훈계에요. 그러면 그 부모가 먼저 자녀를 양육하는 양육자가 되기 전 거룩하신 하나님의 한 자녀로서 그 분이 자기를 참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자 하시는 그 돌보심 앞에서 복종하여 그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되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자녀를 올바르게 그렇게 양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여러분이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서 그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잘 가르치고 그 아이와 관계를 맺고, 그 아이를 참된 사람으로 신앙을 통해서 교화하는 일들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몰라서 못한다면 똑같은 어려움이 그 자녀들이 결혼을 했을 때에 그 자기의 자녀들과 관계를 맺는데서 어려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주의 교양으로 양육하고 훈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식이 있고, 그 지식 데로 살아가는 삶의 깊음이 있어야지만 자녀들에게 그것을 가르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 인생을 살아서 정말 사람답게 살아 하나님과 이웃 앞에 부끄러움이 없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는지를 가지고 고민하고 고뇌하는 사람들만이 자기의 자녀들을 사람답게 기를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갖는 거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자녀들이 어렸을 때는 부모의 앞에서 부모 얼굴을 보고, 말을 들으면서 삶의 도리를 배우지만 나이가 들고 지식의 통로가 다양해지고 나면 부모 자신을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이 지식의 그물망 위에 올려놓고 객관적으로 평가를 하기 시작해요. 그래서 어려서는 부모 앞에서 배우고 나이가 들면 부모 뒤에서 배운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삶의 경건과 거룩한 생활의 모본을 통해서 부모가 생각하고 가르치는 진리와 그의 삶이 일치하는 것을 보면서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오늘날 정말 자녀들을 이런 식으로 양육을 하는지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번 여러분에게 질문을 할 테니까 대답을 해보세요. 자녀를 낳아서 기르는데 자녀가 말을 잘 안 들어요. 두 번 말을 안 들었는데 하나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인생관에 어긋나는 행동을 자녀가 했어요. 인생관까지는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 봅시다. 학교 갔다 오면 반드시 양치질하고 손 씻고 책상에 앉아서 숙제부터 해 놓고 놀아야 한다. 엄마가 세운 원칙이에요. 애가 말을 안 듣고 그렇게 안했어요. 그때 엄마가 화가 많이 날까요? 아니면 주님도 명령하시죠.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아이가 엄마로서 아이가 자기가 부여한 생활 원칙을 어기고 학교 갔다 와서 손 씻고, 양치질 안하고 숙제 안하고 바로 놀 때 화를 더 내요?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을 때 더 많이 화를 더 내요? 전자예요? 후자예요? 전자죠. 이것은 무엇인가 영적인 감각대가 바뀐 거 아니에요? 하나님의 명령어기는 거는 별로 그렇게 큰 문제가 안 되는데 자기가 지정해 준 규칙을 어기는 것은 이 속에서 분노가 생각나고 아이를 매질하기까지 징계할 욕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질서 자체가 바뀐 것을 어느 정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산업화 사회 그리고 치열한 경쟁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날이 갈수록 뭘 해서 밥을 먹고 사느냐 하는 문제는 아주 현실적이고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을 바라보면서 많은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해요. 인터넷이 발달되고 나서 장사를 할 수가 없대. 왜? 전에는 이런 것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는 그냥 정보가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각자 이 동네에서 물건도 팔고, 저 동네에서 팔면 그냥 여기는 비싸면 이 동네니까 비싼가보다 하고 샀다는 거야. 그러나 이제는 물건하나 팔면 아이폰 들고 와서 툭툭 찍어가지고 찌르르 해보고 아줌마 저 옆의 가게보다 500원 더 비싸네요. 이렇게 되죠. 그러니까 가게끼리 경쟁을 해서 그래서 원가 이하로 팔아서 경쟁자들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본을 가지고 버티다가 이제 독점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좀 비싸게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벌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발달된 통신과 인터넷 이 모든 것들이 몇몇 기업을 남겨놓고는 많은 작은 가게, 작은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을 다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의 자녀가 미래에 뭘 해서 먹고 살 거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아주 세 끼 먹으면 충분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거는 사는 거라고 생각을 안 해요. 그러니까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구비해야 될 것이 한 50년 전에 비해서 엄청나게 많아진 것입니다. 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을 하는데 어렸을 때 어른들이 김장을 하고 쌀 다섯 말 정도를 사서 자루에다 넣어서 윗목에다가 두고 연탄 200장 정도를 들여놓으면 ‘아, 이제는 살 거 같다. 부러울 게 없다’ 그랬어요. 왜? 연탄은 연료를 해서 방을 따뜻하게 해 주고, 쌀은 주식으로 우리가 겨울동안 한 한달 이상, 두 달 이상 굶지 않을 거라는 것을 보증해 주고, 독에다 묻어 놓은 김치는 반찬의 보증이 되기 때문에 염려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안 그래요. 너무 가난해서 컴퓨터 사주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우리 밖에 없어요. 그래 가지고 가난한 아이들한테 컴퓨터를 사줬더니 학교 성적이 더 떨어졌대. 엄마 아빠 아무도 없는 사이에 애가 게임만 해가지고 방에서. 영세민에게 핸드폰 요금 보조해 주던 시절이 있었는데 외국 사람들은 생각이 안 되는 정책이에요. 그러니 그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야 되겠어요?
강남에 가면 서울대 들어가는 코스가 다섯 살부터 시작이 된답니다. 그 코스대로 되면 반드시 들어간답니다. 그런데 모든 아이들이 그 코스에 적응하는 거는 아니에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30% 정도는 떨어지고 70%는 적응을 한 대요. 그래서 지금도 서울대 입학생들 50%가 강남 아이들이에요. 대물림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지 이야기를 한번 듣는데 완전히 별 세계 같았어요. 6살에서 7살 될 때에 교육비가 400만원에서 450만 원 정도 든다고 그러더라고요. 그게 대학교 들어갈 때까지 더 들면 더 들지 덜 들진 않는 것입니다, 계속. 그리고 다 엄마가 짜 놓은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로봇처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걸 막 비난을 했더니 그 사람들이 뭐라고 그러냐면 개처럼 배워서 정승처럼 산다 그랬더니 어느 교육 전문가가 거기에 반박하는 글을 썼는데 배울 때 개처럼 배우면 절대 정승이 안 되고 짐승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그때도 선생님은 공부 잘하는 애들 예뻐했어요. 그때도. 그리고 얼굴 예쁜 여자애들 예뻐하고, 그러거나 엄마가 좀 뭐 좀 갖다 주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인식이 있었어요. 선생님이 예쁜 애들을 좋아하시고, 공부 잘하는 애들을 귀여워하시지만, 착한 애들도 예뻐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형성되어 있었어요.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믿음이에요. 그래서 우리 어렸을 때에는 설날 같은 때에 절을 하면 어른들이 세뱃돈을 주면서 항상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정말 착한 아이가 되거라,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그래서 스승의 날 노래에도 나오잖아요. 선생님이 어떻게 제자들을 가르쳤다고요? ‘참 되거라, 바르거라’. 그렇게 가르쳐 주었어요. 오늘 여러분 중에 젊은이들 가운데 최근에 아니 여러분이 초등학교나 중학교 다닐 때에 친척 어른들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참 되거라, 바르거라 그렇게 충고해준 어른이 있으면 한번 손들어 보세요. 이게 시대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이런 그리스도의 교양과 훈계를 배우지 못하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덕성에 대한 강조가 없는 교육이 성공하면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녀를 만드는 것이고, 실패하면 그 경쟁에서 패배한 자녀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정을 주시고 자녀를 주신 경륜과는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현실인 것입니다. 예전에는 육아를 다 어른들에게 배웠어요. 그런데 요즘은 시어머니들이 적응이 안되는 게 뭐냐 하면 시집을 와서 며느리가 애를 낳았는데도 엄마한테 물어보지를 않는대요. 누구한테 물어보냐 하면 인터넷에 물어본대요. 그런데 그 부모들이 말하는 게 뭐냐 하면 처음에는 걱정을 하는데 아는 게 너무 많아가지고 자기들보다 더 정확하게 잘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육신을 양육하는 일반적인 일에 있어서는 그런 식으로 지식의 습득이 가능할지 몰라요. 그러나 그 자녀를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경륜을 따라서 인간다운 사람으로 만드는 그 일은 그렇게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는 감히 여러분에게 이렇게 도전하고 싶어요.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좋은 자녀가 되려고 하는 거룩한 열망이 없으면서 자신들의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려고 하는 것은 이거는 처음부터 성공할 수 없는 욕망이에요. 육신으로는 자식들이 우리의 몸에서 태어났지만 영적으로 보면 그 아이들은 우리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아이들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아이들에요.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자녀만 있지 손자가 없어요. 우리도 육적으로는 우리 부모의 자식이었고, 우리 자식은 육적으로 우리의 자식이지만 영적으로는 우리 아버지도 하나님의 자녀고, 우리 할아버지도 하나님의 자녀에요. 우리 아들도 우리 손자도 하나님의 자녀에요. 영적으로는 모두 다 같은 세대로 하나님 1세대고 우리는 2세대로 하나님 밑에 서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만약에 우리가 자녀를 양육하라고 주신 가정의 경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알고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나를 지으신 목적대로 살아야 할 것인가? 그 참된 교양과 훈계가 무엇이고 그리고 그 경건한 모본으로 사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내가 터득하지 못했다면 자녀들을 사람답게 키우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에요. 기적이 일어난다면 가능하지만. 그 기적은 부모로부터 깊이 실망하고 상처를 받은 자녀들이 영적인 아버지인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변화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B. 자녀를 사랑함
그래서 오늘 성경은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아주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이 이야기는 자녀를 화나게 하지 말라는 정도의 뜻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자녀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것이에요. 노엽고 그래서 낙심한 그 마음은 찌그러진 마음이에요. 이런 마음은 그 아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내내 죽을 때까지 영향을 주어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혹은 하나님과 올바로 관계를 맺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어요. 어렸을 때에는 아이들에게 권력도 없고 자원도 없어요. 엄마, 아빠 집에 얹혀서 살고 그리고 용돈도 엄마 아빠가 주는 대로 얻어서 쓰면서 연명을 해요. 그런데 그래서 부모가 가끔은 폭언을 퍼붓거나 혹은 폭력을 행사해도 아이들은 당할 뿐이지 저항할 권력이 없어요. 더군다나 엄마 아빠가 아주 유치한 자본주의에 절어서 용돈 가지고 아이를 협박을 해요. 그래서 너 오늘 예배에 늦었으니까 이번 주 용돈 1000원 깐다. 동생이랑 싸웠으니까 2000원 뺀다. 엄마 심부름 했으니까 1000원 더 줄께. 이런 식으로 하면 아이가 자원과 권력이 워낙 없을 때에는 항거를 못하고 그냥 거기에 고분고분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뭐라고 그러냐면 치사하다고 그래요.
1. 자녀들이 노여울 때
더욱이 자녀들이 점점 자라고 사리 판단을 할 때가 되면 부모가 폭언과 폭력을 퍼부은 것보다도 더 커다란 상처가 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언행의 불일치하는 부모의 삶을 목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회복하기 어려운 커다란 충격을 자녀에게 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부모가 과도한 기대를 자녀에 대해서 가져요. 그리고 자기가 이루지 못한 것을 자녀에게 투사해서 이런 자녀가 됐으면 좋겠다고 하는 욕망을 갖게 되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런 과대한 기대를 강요하게 될 때에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깨뜨려지게 되요. 더욱이 사랑 없이 내버려 두는 무관심 같은 것들은 이 자녀를 노엽게 하고 그 마음을 찌그러들게 해서 결국은 그 내면의 세계를 망가뜨리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녀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기르도록 우리에게 위탁하셨을 뿐이라고 하는 청지기적인 정신을 가져야지, 소유주적인 정신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혐오하는 선물이 있는데 분재예요, 분재. 최근에도 분재 하나가 선물이 들어와서 하여튼 보자마자 나 안 보이는데 갖다 치워라 했어요. 근데 이런 것들에 대한 혐오감이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져요. 저는 오랜 세월을 부모님보다는 할머니하고 살았어요. 저를 공부시키겠다고 서울로 유학을 보내고 그래서 부모님들과 떨어졌는데 한참 감수성이 예민하던 그 일곱, 여덟 살 때부터 초등학교 졸업할 그때까지 였어요. 부모님 있는 집에까지 갈려면 시외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가서 9시간을 가야 되요. 한 다섯 시 반쯤 출발을 하면 거기에 도착하면 거의 두 시정도 됐어요. 그러니까 아홉 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아홉 시간 가까이 되죠. 8시간 넘어서 9시간 사이가 되요. 그것도 차가 망가지고, 도로가 장마로 안 끊어졌을 때 일이에요. 우리는 얼마나 불행한 시대를 살았느냐 하면 중학교도 시험보고 들어가고, 고등학교도 시험보고 들어갔어요. 그것도 아주 치열한 경쟁을. 그러니까 방학 때가 되어도 충분히 놀 수도 없어요. 딱 열흘 있으면 돌아와야 되요. 그러면 부모님이 보고 싶어가지고 눈물이 나고 우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못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대단하게 공부를 했느냐 하면 뭐 뭐가 그렇게 했겠어요. 그 시절에 저는 모르겠어요. 나 자신의 변명인지 몰라도 우리나라 교육이 나에게 안 맞았던 거 같아요. 아니 정말이에요. 마지막 박사과정 공부 할 때까지 그런 고민을 했어요. 정말 나하고는 코드가 안 맞는 공부다. 이런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되게 웃을지 모르는데 왜 박사를 마지막에 논문을 안 썼냐고 그러는데 공부를 하고 싶어서 안 썼어요. 왜? 학교에서 하라는 공부 말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안 맞았어요. 근데 그렇게 해 가지고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데 그게 엄마 아빠를 그리워하고 관계를 맺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고 그러는 거 딱 몇 년 동안이지 그 시간이 딱 지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부모가 관계를 맺자고 가까이와도 왠지 싫고 불편한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깊이 회개하고 회심하고 나서 우리 아버지를 정말 사랑했거든요. 근데 사랑은 했는데 표현하는 거는 마음에 있는 사랑 하나 가지고 안 되더라고요. 왜?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배우지를 못하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표현하는데 잘 안 돼요. 나중에 그래서 사실 지난주에도 그렇게 눈물이 났던 것입니다. 더 표현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게 어찌 부모와의 관계에 대한 것만 이겠어요? 자녀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할머니와 참 친했어요. 할머니를 내가 정말 사랑했고, 그리고 할머니도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셨죠. 그 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몇 번 나에게 유언같이 말씀하셨어요. ‘얘야, 너는 죽으면 절대 저렇게 염하고 베보자기 씌워서 나를 묶지 마라. 나는 일평생 억압받으면서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죽어서라도 묶이는 거는 너무 싫다’ 그러셨어요. 상가 집에 가서 확인한 건데 수의가 베로 만들잖아요. 그게 내가 확인한 것 중에 제일 비싼 게 450만 원짜리까지 있더라고요. 살아서 부모님에게 450만 원짜리 옷을 선물해 본 적이 있을까? 그런데 그런 거 선택하는 사람들이 대게 평소에 부모에게 되게 못하던 사람들이 속죄하는 마음으로 마지막에 한 대요. 450만 원짜리든, 150만 원짜리든지 간에 어쨌든 그거 입고 천국 가서 패션쇼 할 것도 아닌데 그거를 해서 마지막에는 뭘 하든지 간에 비싼 베옷이든지, 싸구려 베옷이든지 간에 마지막에 칭칭 동여매서 꽁꽁 묶는 것입니다. 그게 나도 싫어요. 그래서 이 자리를 빌어서 나도 유언을 하는데 ‘나도 묶지 마. 나도 싫어’ 그래서 우리 할머니 그때 이제 내가 장례를 주관했으니까 묶지 말라 필요 없다. 그리고 한복집에 맞춰서 썩어야 되잖아요. 화학사는 잘 안 썩잖아요. 잘 썩는 인조견으로 동정가지 하얗게 달아서 속옷까지 다 맞췄어요. 그래서 깨끗이 씻겨드린 다음에 옷을 입혀서, 하얀 옷을 입혔어요. 그리고는 침대에 눕히듯이 관에 눕혀드리고 몸이 흔들리는 그 부분에는 솜을 끼워서 몸이 안 흔들리게, 세상에 그렇게 오랜 세월을 할머니하고 살았지만 돌아가셨을 때가 제일 예쁘셨어요. 하얀 얼굴에 천사 같았어요. 오죽했으면 제가 마지막 입관하기 전에 뚜껑을 열고 그리고 문상 온 모든 사람들에게 저 얼굴이 천국 가는 얼굴이라고 보고 가라고 했어요. 사람들이 다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렇게 평화롭고 고우실 수가 없어요. 그러던 할머니를 한 17년 만에 가서 이장을 할 때 다 유골을 다 수습했어요. 정말 아무것도 없고 뼈만 남으셨더라고요.
2.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함
우리가 말이죠. 신앙이 열렬하고 은혜가 충만할 때는 우리에게 의무를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계명이 달콤하게 느껴져요. “너 이렇게 해라” “아멘” “너 이렇게 해라” “주님 저 같은 사람을 그렇게 써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항상 그런 건 아니잖아요. 항상 그러진 않잖아요. 그러면 우리의 자녀들도 은혜 많이 받고 부모인 우리를 뜨겁게 사랑할 때에는 참 되거라, 바르거라, 하나님의 말씀 이걸 지켜라 하는 이러는 것들이 달콤하게 들리겠지만 우리의 자녀들도 항상 그렇게 하나님 사랑하고 부모인 우리들을 존경하는 거는 아니잖아요. 그러면 그것도 때로는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잖아요. 제 말씀은 뭐냐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우리들이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이 계명들에 대해서는 양보 없이 자녀들에게 가르쳐도 환경이 이렇게도 괜찮고 저렇게도 괜찮다고 그러는 것은 자유를 주어서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으면서 속박 받지 않는 채 자유롭게 한없는 사랑을 받으며 온전한 자유 속에서 마음껏 자라도록 그래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돌봐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부모가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아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해야 되요. 그리고 그 하나님이 바로 내 아이의 그 형상을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조차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 모든 부수적인 것들을 넘어서서 그 형상을 볼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부수적인 것들은 어떤 걸까요? 예쁘고, 공부 잘하고, 말 잘 듣고, 착하고, 유능하고, 날씬하고 등등 등등에 관한 것들이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걸 넘어서서 정말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결혼하고 7년 만에 아들을 낳았어요. 근데 얼마나 똑똑하고 공부를 잘하는지 나는 천재가 태어나는 줄 알았어요. 그랬더니 나만 그러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부모가 다 그러더라고요. 학교 선생하는 어느 지체가 얘기하는데 교편생활 하다보면 모든 부모들이 다 와서 똑같은 얘기를 한 대요. “선생님 우리 애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한다” 자기가 보기에는 노력도 안하고 머리도 나쁜데 분명하게 머리가 나쁜 게 틀림없는데 부모는 마지막까지 그거를 안 믿는 것입니다. 어쨌든 4학년 때까지 모든 시험을 항상 100점이에요. 그리고 그 학교에서 가장 상식이 풍부해요. 도서관에서 거의 사니까. 책. 그래서 이제 정말 내가 못 가본 길을 얘를 통해서 가보겠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나는 지금 예수 믿고 나서는 그런 욕망을 거의 다 버렸지만 나 평범하게 한 200년 쯤 사는 것보다는 천재로서 딱 한 달만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천재가 태어났잖아. 이게 4학년 때서부터 빗나가기 시작하면서 참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어요. 내가 사실은요. 그렇게 깔끔한 사람은 아니에요. 일할 때는 막 어지럽히고 그래요. 딱 하고 나면 깨끗하게 정돈을 딱 하는 사람이에요. 근데 얘는 누구 닮았는지 정돈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정돈된 환경에 들어가면 오히려 불안해서 정돈된 거를 흩트려서 어지럽게 해 놔야 해요. 그래서 처음에는 야단도 쳤어요. 혼도 내고 그 다음에는 공부도 안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변명 같지만 그때는 교회를 개척하고 정신없이 우리 부부가 바빴을 때에요. 그래서 우리는 별로 싸우는 일이 없는데 항상 자녀 문제 가지고 가끔 다퉜어요. ‘당신 뭐하는 거냐? 아이가 저렇게 공부 안하는데’ 그 다음에는 뭐냐 하면 한없이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찌는 것입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하는 것입니다. 한참 지나고 나니까 야단도 치고 때리기도 하고 막 이랬어요. 그러다 나중에는 결국은 그저 평범한 아이였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그때는 평범하게만 되도 좋겠어요. 기대를 낮춰서. 그러고 제가 좀 성격이 까칠한 데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강아지도 자기를 이렇게 귀여워하면 그 사람이 오면 꼬리를 치지만, 들어와서 술 먹고 발길질 하면 애가 문을 두드려도 안 나오고 자기 집 속에 들어가서 짖잖아요. 더군다나 사람인데 얼마쯤 지나고 나니까 우리 집 사람이 얘기 하는데 ‘여보, 중대한 변화가 있대. 당신 조심하라’고. ‘왜 그러냐고?’ ‘엄마 아빠 오늘 들어와요. 안 들어와요.’ ‘아빠, 일주일동안 집회 가서 못 들어오신다.’ 너무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뭐 그렇게 크게 깨닫고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회심 사건을 한번 주셨어요. 차를 타고 가는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가는데 불현듯 하나님이 생각을 주시는 것입니다. ‘너, 네 아들 때문에 속상하지?’ 마치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같았어요. ‘나도 너 때문에 속상하다. 너는 네 아들이 네 맘대로 안한다고 관계가 많이 깨졌지? 너도 내말 안 들었거든. 근데 봐라. 우리 관계 안 깨졌잖아. 너는 영적으로 하나님인 나의 아들이고, 네 아들도 육적으로 너에게 아들인데 내가 너를 자녀를 다루는 것과 네가 네 자녀를 다루는 것은 전혀 다르지 않냐’ 그거였어요. 그러고 막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갓길에 차를 세우고 얼마를 울었는지 몰라요. 그러면서 스틸 사진처럼 찰칵 찰칵 찰칵 찰칵 그러면서 사진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딸한테는 그렇게 못해 준 게 별로 없는 거 같아요. 근데 물론 딸은 동의를 안 하겠죠. 근데 아들은 얼굴이 팍팍 찍히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 얼굴이 뭐냐 하면 아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자신 없음, 자신에 대한 실망, 그러고 아빠와 마주치기 싫어하는 기죽은 얼굴, 그 다음에 혼낼 때 우는 모습 이런 것들이 막 스틸 사진처럼 지나가요.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그러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방황하다가 회심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날들이 생각이 났어요. 한 번도 하나님이 나를 버린 적이 없고, 항상 내가 하나님께 대해 실망을 하고 내 발로 하나님을 떠났지만 언제나 하나님은 거기 계셨어요. 그러면서 정말 한없이 눈물을 흘렸어요. 그게 나에게 있어서 회심 사건이었어요. 자녀 교육에 있어서. 그 이후로 한 번도 안 때렸어요. 그 이후로 한 번도 안 때렸어요. 그 정도가 아니라 심하게 야단을 친 적도 없어요. 그러면 그 사건 이후에 아이가 완전히 달라져서 내 기대에 부흥하게 끔만 했느냐? 그런 게 아니라고 내가 누차 얘기 했잖아요. 그 응답하고 현실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그거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고는 바로 그러고 나서 바로 그때에 “아들아 아빠하고 같이 백화점에 가자” 그러고 백화점에 갔어요. 백화점 옆에 의류 매장들이 쭉 있었어요. 방배동에. 그래서 가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새로 사줬어요. 양말하고 운동화까지. 혁대까지. 제가 또 옷을 고를 줄 알잖아요. 슬림해 보이도록. 그랬더니 그 선물을 받고 가서 엄마한테 그러더래요. “엄마 난 참 잘 몰랐어. 나는 아빠가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사실은 아빠가 마음으로 많이 사랑하고 있었던 거야.”
정말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자녀를 주시는 것은 분재처럼 키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에요. 내 뜻에 맞도록 그렇게 키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에요. 지금도 마음의 기대는 그렇죠. 어차피 목회자의 길을 간다니까 그냥 힘들게 목회를 시작을 했는데 이 교회 가면 실력 없다고 나가라고, 저 교회가면 영역 없다고 그러고 딴 데 좀 찾아보라고 그러고 그렇게 발로 툭툭 채이면서 살다가 목회자로서의 일생을 끝나기를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공부도 잘했으면 좋겠고, 그래서 한번 설교하면 많은 사람들이 감화를 받았으면 좋겠고, 기도도 많이 해서 영적으로도 깊이가 있고, 그리고 은혜도 끼치고 인격도 훌륭해서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 30년 흐른 다음에 목사들도 머리를 숙이고 배우고 싶은 목사가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나는 집착하지 않아요. 그건 자기의 몫이에요. 그냥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실하게 삶의 모든 방면에서 최선을 다하며 아빠보다는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사람이 되어 가려고 하면 나머지는 그냥 하나님 손에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몫이다 이것입니다.
이러한 자녀를 주신 경륜들을 이해를 잘 못했어요. 그래서 분노하고, 자녀의 마음을 찌그러지게 만들고, 낙심하게 만들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왔으니 이게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끄러운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들이 부모를 충분히 누리면서 그 안에서 정말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한없는 자유 속에서 오직 그 분의 사랑의 줄에 매여서 종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랑받은 하나님의 자녀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꽃이 활짝 피어날 때까지는 우리가 무슨 색깔인지도 모르고 무슨 꽃이 필 줄은 알지만 왜? 나무가 있으니까 무슨 색일 줄은 몰라요. 그렇듯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자유로운 존재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책임 있는 실존으로 그렇게 살도록 부모는 모든 자원을 다 동원해서 그를 그렇게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정말 의미 있는 인생을 살도록 도와서 그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한줄기 빛이 되어서 자기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유익하게 하면서 살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삶이라고 생각을 해요.
Ⅳ.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을 그렇게 한없이 풍요로운 햇살을 받으며 비를 머금으며 그렇게 하늘 아래서 자유롭게 자라도록 그러면서도 주님의 말씀과 그 은혜의 줄에 굳게 붙들려 치고 때리는 부모의 구타나 협박, 위협, 그리고 부모의 참견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랑에 매여서 그 분에 의해 양육 받고, 그 분에 의해 훈계 되며, 그 분에 의해 교양으로 길러지면서 주님의 사람으로 자라가도록 그렇게 할 때에 그런 자녀들이 정말 커다란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품고 이 땅에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목적에 이바지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그 일을 돕기 위해서 주님이 세우신 공동체이니 마음을 다해서 뜨겁게 신앙생활 하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전망하는 자녀답게 남다른 그런 생활을 여러분의 가정 속에서 펼쳐나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3.아내와 남편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골 3:18-1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사도는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고 성도들을 권면한 후에 우리들이 삶 속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덕스러운 행동들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 앞에서 사도는 “땅의 것을 바라보지 말고 위엣 것을 바라라”고 우리에게 권면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나라를 위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서 마치 우리의 삶의 의미가 영원을 향하여 계속되는 것처럼 그렇게 덕스러운 삶을 살도록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광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하늘나라의 백성들이기에 이 땅이 전부인지를 알고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사도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II. 아내를 향한 권면
A. 남편에 대한 복종
그 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남편을 향한 아내의, 아내를 향한 남편의 덕스러운 삶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도는 먼저 아내를 향한 권면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고 말입니다. 아내에게 남편에 대해 복종하라고 명령하고 있는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아내들이 이렇게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이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사도는 아내들에게 주 안에서 마땅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남편에 대한 복종을 말하고 있는데 이 복종의 의미는 자기의 뜻을 굽히며 상대방에서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아내들을 향하여 사도가 명령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노예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하나님께서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했다고 해서 남편에게 아내를 복종시킬 어떤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예적인 복종이 아니고, 더욱이 이 틈을 비집어 남성우월주의에 탐욕적인 성경 해석을 허용하고 있는 구절도 아닙니다. 이 복종은 아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속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규정된 신적인 질서를 이해하는데서 오는 복종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편지를 사도는 불신자를 향해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에게 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의미가 보다 더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B. 인격이신 하나님을 앎
아내의 꿈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복종시켜 남편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남편과 이 가정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그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복종을 하는 아내의 관심사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인격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 여기에서부터 진정한 복종과 사랑이 나온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가 상정하고 있는 이 아내들이 골로서 교회의 교인인 것만은 틀림이 없지만, 그들만을 염두에 두고 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을 리는 없습니다. 신실하게 주를 믿고, 의지하며 살려고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사도는 이 계명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성도라 불리지만 예전에는 불신자였고, 지금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만 예전에는 자기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던 여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버림으로 교회를 세우신 비밀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부활과 함께 우리도 그 부활의 영광스러운 약속을 유업으로 받았으며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도 사실은 하늘나라를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살아가야 할지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알고 나니까 의무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니까 질서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여자들의 마음속에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온전해지고 가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고, 거기에서 아내의 자리를 깨달았고, 그것은 바로 경건한 남편에게 경건한 아내가 복종하면서 사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많은 다툼과 분노, 남편과 아내의 관계의 깨어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질서를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참된 질서를 찾지 못하니 사랑이 지속되기가 힘들고, 사랑이 없으니 이 질서를 알아도 이 질서를 가지고 남에게 의무를 강요하지, 거기서 자신의 의무를 달콤하게 여기며 복종시킬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드물긴 하지만 제 책을 읽은 독자들이 우리 집사람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빼놓지 않고 꼭 물어보는 질문이 있답니다. “은혜로운 책들을 쓰시고, 우리에게 말씀을 잘 전해주시지만 그래도 가끔은 부부 싸움을 하시죠?” 이렇게 물어본대요. 결혼한 지 32년이 지났는데 다퉜어요. 근데 이렇게 심하게 폭력을 쓰면서 싸운 적은 없어요. 싸운다고 하면 최대한이 언쟁을 하는 것입니다. “뭐 잘했냐? 왜 그렇게 했느냐?” 이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언쟁한 게 15년 전이었어요. 15년 이후로는 별로 언쟁한 적조차 없어요. 이렇게 대답을 하면 독자는 매우 실망을 하는데 뭘 나한테 기대 하는지 지금도 궁금해요. 그래서 전 내심 15년 동안 다투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자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온 조엘 비키 목사님은 23년 동안 다투지 않았다고 하네요. 갑자기 뭔가 찌그러지는 듯 한 느낌을 받았어요.
가끔 자매들이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가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우리 형제가 얼굴이 멋있지 않아도 괜찮고요. 돈이 있으면 좋지만 가난해도 괜찮고요. 그러면 좋지만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가 없어도 괜찮은 거 같아요. 그런데 꼭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뭐냐?”, “제가 형제와 만나서 결혼할 때 다른 건 다 없어도 그 형제가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제가 깊이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때 대답합니다. 30년 연상 중에서 골라보시면 가끔 그런 사람이 나올 겁니다. 없어요. 혹시 그렇게 느껴진다면 콩꺼풀이 씌워있는 잠깐 동안 그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한 이불 덮고, 한 솥의 밥을 먹으면서 살다보면 다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그런데 종종 나이가 든 어른 중에서 진심으로 아내가 남편을 존경하고 본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 풍파 많은 결혼 생활 가운데 성화되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편에게 복종한다는 의미가 모든 면에서 남편의 영광이 자기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복종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가정에서 남편을 깊이 존중하려고 애쓰고,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질서를 따라서 남편에게 복종하려는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정생활을 행복하게 해 나가는 성경적인 첫 번째 원리인 것입니다.
III. 남편을 향한 권면
A. 아내에 대한 사랑
두 번째는 남편을 향한 권면이 이렇게 계속됩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이 일이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라면 굳이 사도가 입 아프게 명령을 했을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에 내버려 두면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괴롭게 하는 것이 자연적인 본성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남녀의 사랑은 되니까 하는 사랑이지만, 결혼하고 난 다음에 사랑은 될 때도 있지만 안 될 때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하기 전에 사랑은 되니까 하는 사랑이고, 결혼한 후에는 되지 않을 때에도 사랑을 해야 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이러한 특성을 알았기 때문에 동북아 철학에서는 사랑을 감정의 활동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성의 활동이라고 믿었어요. “인의예지” 사단, 이거는 이성에 속한 것이고, ‘희로애락애오욕’ 7정은 인간의 감정이 요동을 치는 것입니다. 사람이 분명히 감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그 인이라고 하는 사랑은 요동치는 감정의 덩어리로만은 해결할 수 없는 아주 고상한 명제라는 사실을 선조들도 알았기 때문에 인을 7정이 아닌 사단에다 둔거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은 자기 이외의 사람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자 하고. 이미 맺어진 관계는 그것을 돈독하게 하고자 하는 정신과 마음의 성향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인데 이것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그런 종류의 누림입니다.
자, 남편과 아내가 있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안됐는데 이 아내가 정말 부잣집 딸입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오늘 낼 오늘 낼 돌아가시려고 해요. 아내가 남편에게 물어요. “여보 당신 나 사랑해?”, “그럼”, “정말 사랑해?”, “그럼” 그 여자들이 꼭 물어보는 게 있습니다. “왜 사랑해?” 그때 남자들은 무조건 모른다고 대답해야 돼. 그런데 이 남자가 “너희 아버지가 죽을라고 그러잖아”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내의 아버지의 유산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을 해서 남편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내가 아니라 유산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초창기에는 인간이 인간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규정을 했어요. 근데 후일 신앙이 깊어지고 더 성숙해 지면서 인간이 인간을 향한 사랑도 최종적인 목적이 될 수도 있다고 자기의 견해를 바꾸었어요. 그러면서 이 변경한 견해가 어떻게 젊은 시절에 토해 놓았던 그 명제와 화합할 수 있는지를 자기의 책속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그 분 안에 우리의 형제들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 그 안에 하나님 말고 누가 계시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면 올바른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그 사람 때문에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면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바른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커다란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을 향한 사랑은 최종적인 사랑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용어를 빌자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는 궁극적인 목적이 있고, 최고의 목적이 있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이 만약에 사람들이 함께 사랑하며 행복한 삶을 사는 거라면 이것은 최고의 목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분을 기쁘게 하기 위한 그 목적에 이바지함으로써 이 두 목적인 상충되지 않고 서로 성취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입증이나 하듯이 성경은 아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에 대해서 남편에게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대 자신을 주심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이게 어찌 감당할 수 있는 명령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모두 내어 주신 것처럼 그러한 완전한 자기희생의 사랑으로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명령하고 계시니 누가 자신의 아내를 충분히 사랑했으며, 의무를 모두 이행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향해 주신 사랑은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이고, 이 사랑도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불러 일으켜진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삼위일체 안에서 이미 받은 사랑이니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은 교회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게, 교회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감으로써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인간의 세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 하나 안에서 모두 회귀하는 신적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가 사랑을 입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내를 사랑하도록 남편에게 명령할 때에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사랑입니다.
이기심에 넘치는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이 남편에게 명령한 것을 마치 아내의 권리가 되는 것처럼, 아내에게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처럼 복종하도록 그렇게 명령하신 것이 남편이 법적인 권리나 되는 것처럼 아내에게 당당히 요구하는데 이것은 이 사랑과 복종의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아내를 향한 이 남편의 사랑은 명백히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이고, 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교회를 통해 나에게 부어진 사랑이고, 다시 아내를 사랑하는 이 사랑은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께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향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원천을 하나님께 둔 사랑이고 또한 돌아갈 목적을 하나님께 둔 사랑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사랑의 발생적인 원인이기도 하고, 또한 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만약에 한 남편이 아내를 한없이 사랑했는데 남편이 죽은 후에 일주일 만에 아내가 너무 외로워서 따라서 자살을 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내를 사랑하도록 기대하신 그런 종류의 남편 사랑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교수님이 목회를 하셨는데 장로님 부부가 아주 금술이 좋은 분이 계셨어요. 그런데 무슨 뜻인지 아내가 갑자기 죽었어요. 권사님이신데. 돌아가시고 나서 장로님이 교회도 잘 못 나올 정도로 우울증에 걸리고, 영적인 깊은 침체에 빠졌어요. 한마디로 금술이 너무 좋았던 것입니다. 목사님이 낙심하고 있는 우울증에 걸린 그분에게 권면했답니다. “우리 중국으로 놀러갑시다” 그리고 모시고 가서 여행도 하고, 특별히 중국 지하 교회에서 그 가난을 무릅쓰고 핍박을 견디면서 하나님 사랑하며 신앙생활하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과 교제하게 했습니다. 깊은 은혜를 받고 돌아와서는 자신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너무 없었고, 하나님보다 아내를 더 사랑했노라고 고백을 했답니다. 이것입니다.
이 편지는 불신자에게 주는 편지가 아니라 골로새 교회의 경건한 성도들에게 주는 편지였습니다. 그러면 이 아내는 바로 그 하나님의 큰 사랑을 힘입어서 그래서 이 남편은 아내를 깊이 사랑하고, 아내를 잃어버려도 아내를 사랑하게 한 하나님, 아내를 사랑하는 목적이 아내를 궁극적으로 사랑함으로 사랑하여야 할 하나님은 사라지신 것이 아니니 만족을 잃지 않는 진정한 사랑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B. 괴롭게 하지 않음
두 번째로 남편을 향해서 괴롭게 하지 말도록 강력히 촉구하고 있으니 이는 남편이 아내를 괴롭히는 일이 얼마나 본성상 쉬운 일이고, 그 아내를 상처받게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남성은 원래 하나님이 자연적인 본성을 주실 때에 정복과 개척에 적합한 정신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남성성의 거친 태도는 죄가 들어오면서 아주 더 거칠어졌고, 여성성은 또한 쉽게 상처를 받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로 이기적인 마음과 정신들은 서로 충돌을 일으키며 가정을 잘 세우도록 주신 남성성은 거칠게 행사되어 여성들에게 상처를 주고, 품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여성성은 오히려 자신에게 주는 상처에 예민한 마음을 갖게 하였으니 결국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참다운 가정으로 회복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 입장에서 서 보고 그리고 그를 배려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보다는 차라리 엄마라고 부르고 싶은 유혹을 받게 하는 세심한 하나님의 배려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여성스러워서라기보다는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랑이 자기의 백성들을 그토록 배려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배려이고 그리고 사랑은 긍휼히 여기는 것이고, 사랑은 사람을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남자가 연애를 할 때에 애인과도 밥을 먹고, 그 애인이 결혼한 후에 아내가 된 다음에도 같이 밥을 먹는데 밥상에서 주고받는 대화가 다르다고 그래요. 애인이 밥을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으면 깜짝 놀라면서 “그것 밖에 안 먹어? 그걸 먹고 어떻게 살아? 더 먹어” 아내한테는 “그걸 다 먹으려고? 그렇게 많이 먹고 어떻게 살아?” 한마디로 배려심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사랑의 힘으로 살 수 있는데요. 아줌마가 되면 밥심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남편과 아이들을 건사하기 위해서 과중한 노동력에 시달리고 애 셋쯤 키워놓고 보면 여리디 여린 아줌마의 어깨와 팔은 마징가 제트가 되죠. 그리고 가까이 가지 않으면 거의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소곤거리던 목소리는 우렁찬 기차소리처럼 변하게 됩니다. 배려와 그리고 긍휼의 마음에서 보면 그 모두 가정을 위한 수고와 희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호리호리하고 마르면 좋지만 나이가 들어서 살이 빠지면 얼굴도 부쩍 늙어 보이고 근육 량이 줄어들어서 뼈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니 아줌마가 된 다음에는 허리 잡고 쳐다보지 말고, 밥도 먹고 조금 살이 쪄도 그러려니 하고 그것을 긍휼히 여기고 배려해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지만 괴롭게 하지 않는 부부생활을 할 수 있다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남성들의 거친 폭언이나 심지어 폭행 그리고 거친 언사, 그리고 안하무인격의 저만 아는 태도, 이런 것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적합한 태도가 아닙니다. 사랑은 오래 참게 만듭니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불평합니다. 여자들은 우리 남편은 정말 괜찮은데 이러이러한 결점이 있어서 그렇게 말해도 고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제가 늘 웃으면서 충고를 합니다. 그마저도 완벽하면 그 남자가 당신 차례가 됐을 리가 있겠습니까? 더 좋은데 장가를 갔죠. 남편들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아내는 이러이러한 점이 나쁜데 결혼하고 10년이 지나도 고치라고 그렇게 얘기해도 안 고칩니다. 그것까지도 완벽했다면 당신보다 훨씬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갔겠죠. 바로 그런 모자라는 부분을 배려 속에서 고치고 다듬으며 나로 말미암아 이 여자가, 나로 말미암아 이 남자가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한 가정으로 만들어 그래서 안 살 수 없도록 한데 묶어 놓으신 것입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은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Ⅳ. 세상 끝날 까지의 결합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요. 서로 사랑하며 살아도 모자라는 시간인데 다툼과 원망, 미움과 학대 속에서 그렇게 괴롭히며 살아야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내를 학대하고 괴롭게 하는 것은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니 아내와 남편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참된 복종과 사랑, 사랑과 자비의 관계를 세상 끝 날까지 결합하며 유지하도록 하나님께서 가정을 세우신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가정은 그 몸을 이루는 세포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의 질서를 알고 복종하며 자비롭게 대한다면 그 건강한 세포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건강한 몸을 이룰 것이고, 이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요즘은 가정들이 정상적인 가정보다는 깨뜨려지고, 깨뜨려지지 않았어도 사랑이 와해된 가정들이 아주 많기 때문에 그냥 가정이 교회 다니면서 행복하게만 살아도 그 자체가 커다란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잖아요. 서로 집에 왔다 갔다 하잖아요. 근데 자기네 집안은 다 쪽박 났어. 엄마 아빠가 매일 싸움 박질하고 집에 들어가면 평화가 없는 거야. 근데 얘가 여러분 집에 친구를 따라 놀러왔어. 근데 여러분이 너무 화목하게 지내는 거야. 그걸 보면 얘가 자기는 예수를 안 믿어도 우리 엄마, 아빠도 제발 예수 좀 믿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할까요? 안할까요? 종종 우리 교회에도 있는 일인데 자기는 절대 예수를 안 믿는대. 아내를 교회에 매주일 데려다 주는 남편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 앞에서 아내 내려주고 자기는 예배 끝날 때까지 주차장에서 자. 주차장보다 여기가 훨씬 편한데 안 와. 어떤 사람은 1년이 되어서야 겨우 간신히 전도를 받고 들어와. 그래서 언제 심방 갔을 때 물어봤어요. 그게 하라고 시키면 그게 할 만한 일이겠어요? 매주일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누가 시킨다고 하겠어요? 파자마 바람으로 앉아서 스포츠 경기 혹은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을 그 시간에 그 황금 같은 시간 아니에요? 10시나 12시 예배니까 그러니까 아내를 데려와서 점심시간도 쫄쫄 굶고 아내 예배 끝날 때까지 기다려요. 그래서 도대체 무슨 그렇게 충성발이 뻗쳐서 그렇게 아내를 그렇게 교회에 열심히 데려다 주느냐? 그랬더니 이 남자가 하는 말이 재밌어요. 만약에 아내가 매주 데려다 달라는 데가 헬스클럽이었으면 자기는 안 데려다 주었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데려다 주느냐? 아내가 교회에 가서 은혜를 받고 오면 일주일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도 그 은혜의 효과를 알아요. 자기는 비록 그 은혜를 받고 싶지 않아도 아내에게는 제발 더 큰 은혜를 주셔서 자기를 행복하게 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V. 결론
이렇게 끊임없이 부족해 보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결점이 많아 보이는 아내를 사랑할 수 있을 때에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없을 때에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양심과 그리고 인간적인 마음에서만은 이것이 나오지 않아요. 한 두 번이야 나올지 모르지만 이게 무한히 솟아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로 말미암는 까리따스의 사랑이 우리의 심령 속에서 새로워질 때, 그때 정말 아내를,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외롭고 슬픈 것은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아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한 몸에 받아도 그는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많이 받을 때 외롭지 않고 행복한 이유는 사실은 사랑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랑이 계기가 되어서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외롭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슬픔도 고통도 견딜 수 있는 힘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이 세상에 주시면서 그리스도를 통해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교회에 넘치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이 사랑을 주셔서 복종하기 어려운 남편을 사랑하며 복종하게 하시고, 사랑하기 어려운 아내를 사랑하며 그 아내를 배려할 수 있는 자비의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결점과 한계를 뛰어넘어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니 여러분도 이 신앙의 힘으로 부부의 결합을 굳게 하며 고난도 슬픔도 이기고 세상 끝 날까지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말씀을 높이는 가정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딛2:4-5)
녹취자: 김인철
I. 본문해설
오늘 이 디도서에서 사도바울은 믿음의 아들 같은 디도에게 편지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레대 지방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이 디도에게 어떻게 사역을 하여야 될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자기 편지 속에서 늘 하듯이 기독교의 유장한 교리를 올바르게 가르치고 그것이 만약에 우리의 교리라고 한다면 그 교리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성도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디도에게 강조하면서 가정생활을 어떻게 영위하도록 가르쳐야 할지를 디도에게 상세하게 일렀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나이 든 남자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에게는 절제와 경건과 신중, 믿음과 사랑, 인내에 있어서 온전함을 가르치고 늙은 여자들에게는 거룩한 행실과 모함을 하지 말며 이것이 나이가 많아서 말을 가지고 문제를 많이 일으켜서 사람들을 헐뜯고 하는 일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말고 또 여자들이 나이를 많이 먹어서 술을 많이 마셨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말고 그리고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게 하거라 그렇게 놓고 그 집안의 어른들로 하여금 젊은 여자에게 가르치도록 그렇게 지시했던 것입니다.
II. 목회자의 임무
A. 교훈에 합당한 삶의 가르침
여기서 우리는 목회자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그리고 교인들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우선 교훈에 합당한 삶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들을 가르치고 그 가르치는 것이 그것으로만 끝나면 이것은 지적인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기독교의 유장한 교리가 있으니까 너는 어떻게 살아라 하고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삶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아침에 설교한 내용과 똑같습니다. 위의 것을 바라보고 살아야 할 이유를 분명히 한 후에 위의 것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가정에서 생활이 달라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임무입니다.
B. 교인들의 의무: 배움
그래서 목회자는 끊임없이 기독교의 교리를 탐구하고 그 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삶을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의무라면 교인들의 의무는 이것을 잘 배워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인생을 살아감으로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고 자신도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III. 젊은 여자들을 향한 교훈
A. 남편과 자녀를 사랑함
그러면서 젊은 여자들을 향해 교훈을 하는데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일이 쉬운 일이면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이렇게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특히 이 젊은 여자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기독교의 유장한 진리를 알고 그리고 그 진리를 인하여 하늘나라의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니까 너희 젊은 여자들, 그리스도인이 된 너희 젊은 여자들은 이세상의 여자들과 달라야 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남편과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B. 신중하여 순전함
그러면서 세 가지를 더 거론을 하는데 첫 번째는 신중하여 순전함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집안에 아내가 되어서 그 남편과 자녀와 함께 살아가는 이 아내는 남편은 종종 신중하지 못하고 그렇다 하더라도 아내가 이 중심을 굳게 잡아서 순전함을 지킴으로서 가정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륜을 이루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것이 남편과 아내가 있는데 외형상 보면 남편이 훨씬 더 많이 권리를 가지고 있고 가정의 생활도 책임을 지고 남편이 기둥같이 든든히 서 있을 때 온 가족이 남편을 중심으로 모이게 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가정의 뿌리는 남편이 아니라 아내입니다. 예를 들자면 남편이 집을 나가고 아내가 집을 지키면 그나마 가정이 유지가 되는데 아내가 나가고 남편이 꿋꿋이 서 있어도 가정이 유지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가정에서 아내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았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순전할 뿐만 아니라 신중한 사람이 되어서 이 가정을 굳게 지키도록 이 젊은 여자들에게 어른들이 잘 가르치고 그 어른들은 목회자에게 잘 배워서 가정의 도리를 세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C. 집안일의 훌륭한 경영자가 됨
또 한 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기도서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범사에 내 자신이 집안일을 하면 선하며 이렇게 되어 있는데 성경에는 집안일의 좋은 경영자가 되며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살림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원래 이코노미 경제라고 하는 말이 집안이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 집안이 말하자면 하나의 경영체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일을 하고 물론 아내도 일을 하고 아이들도 함께 일을 하고 혹은 아이들을 양육하고 하면서 이 가정이 경제적으로 모든 면에서 경영되어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자녀들에게 올바른 삶의 자세가 무엇인가 신앙이 무엇인가 이런 것을 가르쳐 주는 것도 물론 아내의 역할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남편과 함께 공동적으로 지는 짐입니다. 그런데 주어진 수입과 그 다음에 가게의 형편에 맞추어서 그 가게를 훌륭하게 경영하여 나가는 것은 아내의 몫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젊은 여자들이 사치하거나 방종하거나 게으르거나 아니면 미래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 없이 아무렇게나 살게 되면 온 집안이 고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을 뼈가 빠지도록 돈을 벌어 와도 아내가 지혜가 없고 슬기롭지 못해서 가정사를 올바르게 경영하지 못하게 될 때 가정은 전체적으로 흔들리면서 온 가족이 마치 지붕 없는 집에서 사는 것처럼 그렇게 풍파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제가 예를 들지 않아도 그런 경우를 수 없이 볼 것입니다. 남자들이 사업에 대한 판단을 잘 못해서 가족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고생을 하는 일도 많이 일어나지만 남자들이 벌 만큼 벌고 다른 집 같았으면 분명히 잘 살았을 텐데 아내가 이 경영에 대한 올바른 생각이 없기 때문에 온 가족이 고생하게 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무서운 이야기 인지 모르지만 가정을 경영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제일 좋은 것은 어머니를 만나서 훌륭하게 가정을 경영하는 것을 어려서부터 익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어머니를 못 만나서, 개념 없는 어머니를 만나서 자기가 고생을 했다면 다른 사람에게라도 진지하게 이 가정의 일을 올바르게 경영해서 가족들을 고생시키지 않는 비결들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늙은 여자와 남자들에게 가르치면서 그 늙은 여자와 남자들 즉 집안의 어른들로 하여금 젊은 여자들을 가르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성경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대대손손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물론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지만 이런 식으로 축복이 물려지는 것입니다. 좋은 아버지를 만나서 확실하게 인간이 어떤 도리를 지키며 살아야 하는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뛰어난 학식이 없어도 그러면 그 자식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알게 됩니다. 훌륭한 어머니를 만나서 집안일을 어떻게 훌륭하게 경영하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터득하고 일평생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그렇게 가정을 경영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축복이 상속이 되는 것입니다.
D. 남편에게 복종함
그러면서 아내에게 다시 요구하는 것이 남편에게 복종하도로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훌륭하게 집안일을 경영하면서도 남편에게 복종하는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신중함과 순전함, 집안일을 훌륭하게 경영하는 능력, 남편에게 복종함 이런 모든 것들의 토대가 무엇인가 하면 남편과 자녀를 향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다른 그 무엇이 빛을 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래전 어렸을 때에는 부모의 자식을 향한 사랑이 마치 운명이고 숙명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도 이렇게 젊은 여자들에게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도록 강력히 촉구 하는 것을 보면 이 천년전에도 그렇지 않은 사람이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많았던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화) 저는 오늘 아침에 화장실에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기도하려고 운 것도 아니고 화장실에 가면 항상 신문을 펼쳐 보는데 기자가 납골당에 가족들이 유해를 납골당에 봉안하고 그리고 방문하러 온 사람들이 수첩에 써서 남기거나 메모지에 써서 붙여 놓고 간 것을 취재하고 그곳에 온 사람들을 인터뷰 한 내용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가 하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것, 첫 주에도 부모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부모님이 살아 있는 것이 선물이요 특권인지를 모르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뼈아프게 자기의 불효를 후회하면서 비로소 부모님이 살아 계신 것이 정말 선물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이 사실은 부모에게만 해당 되는 말이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어떤 엄마가 그 납골당에 매달 찾아오는 것입니다. 찾아와서 아들에게 쓰고 간 메모지입니다. 먼저 떠나가 아들에게 엄마가 이런 메모를 남겼습니다. 눈을 뜨면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에게 하늘에게 별들에게 나는 말을 한단다. 오늘도 잘 잤느냐고 그리고 엄마도 잘 지낼 것이라고. 늘 엄마 걱정을 해 주었던 아들에게 이제는 엄마 걱정 하지 말고 별들 친구 삼아 잘 지내라고 아플 곳도 없을 것이고 이제는 앞도 잘 보일 테고 말이야. 아들은 엄마의 영원한 애인이란다. 아들을 사랑한단다. 영원히 엄마가. 그러니까 눈 먼 자식을 먼저 보내고 자식은 이미 떠나갔지만 엄마의 마음속에서 죽은 아들을 향한 사랑이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기적으로 납골당에 찾아 가서 아들을 생각하면서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몇 년이 지나도 잊혀질 수 있는 사랑이겠습니까? 그러면서 어떤 엄마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아들아! 오늘이 설 명절이란다. 친척들이 다 모였는데 우리 아들만 안 보이네. 며칠 전 꿈속에서 나는 너를 보았단다. 그때 너는 엄마를 못 찾겠다고 하면서 나타났지? 그때 나는 네 얼굴을 한참동안 매만지면서 울었단다. 이 자식을 먼저 보낸 엄마의 마음입니다. 있을 때에는 원수 같이 여겨져도 세상 떠나 보내면 이렇게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런 사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납골당에 봉안한 아내의 글도 올라와 있습니다. 여보! 나 왔어! 나 혼자 정동진까지 왔다 기특하지? 당신이랑 함께 왔던 기억을 더듬어 가며 어리버리 넋 놓고 있다가 길을 잃을까봐 집중하며 찾아 왔지. 여보, 이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 그런데 이상하게 두렵지 않아. 선택의 순간에서 고민에 빠질 때에는 당신이 이 상황에서 나에게 무엇이라고 했을까 생각하면 신기하게 머릿속이 개운해져. 여보, 내가 당신을 많이 사랑해 알지? 그 사람들이 볼 때에는 아직도 자식을 떠나보내지 않고 데리고 있는 엄마 그리고 아빠 그리고 아직은 남편이 살아 있고 아내가 살아 있는 가족들이 한없는 부러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사람들이 그렇게 소중한지를 모릅니다.
IV. 결론
우리가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오늘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무나 당연한 남편과 자녀를 향한 사랑을 젊은 아내들에게 간절히 촉구하고 계십니다. 어디 이것이 젊은 여자인 아내들만 향한 교훈이겠습니까? 가족들이 모두 함께 가져야 할 교훈이고 함께 생각하여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선물인지 모르지만 그러나 가족을 여의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 저편으로 떠나보낸 사람들은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압니다. 가슴이 쓰라리도록 알고 그래서 함께 있어 주는 그 자체가 그들에게는 큰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받고 그리고 가족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가족들과 있게 한 것 자체가 달란트요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관계로 인하여 버거워 하지 않는 사람이 되도록 충분한 사랑을 갖는 것이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의 모습이고 가정이 이런 삶을 살아 갈 때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높여지게 될 것이고 그들이 믿는 교리와 신앙의 내용들도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소재가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더 이렇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5.남편과 아내, 그리고 신앙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사도 베드로는 한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죄를 저지른 사람이었습니다. 임박한 핍박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사도는 그들이 자신이 행한 것 같은 실패를 다시는 행하지 않도록 격려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를 시작하자마자 소망에 관한 이야기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핍박을 이기고 고난을 견딜 장엄한 미래의 소망을 그들에게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영광스러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갈 것인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가정의 문제로 눈을 돌리며 남편과 아내에 대하여 그 도리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II. 그리스도의 고난을 아는 삶
먼저 남편과 아내의 문제를 교훈하기에 앞서 앞부분에서 사도는 꽤 길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죄도 없으시고, 거짓도 없으신 그 분이 욕을 당하실 때에 맞대어 욕하지 않고, 고난을 당하실 때에 그들을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자기를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며 우리를 위해 나무에 매달려 죽으시고 우리는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하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부부의 문제를 부부의 문제로 국한해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을 보면 부부의 문제는 부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관계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각자가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를 토대로 하여 세워지는 관계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아는 삶에 대해서 앞부분에서 상세하게 기록을 하면서 바로 남편과 아내에 대한 교훈을 받는 성도들이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던 무리들이었는데, 이제는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이에게 돌아왔노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III. 아내들을 향한 명령
A. 남편에게 순종함
그러면서 그는 아내들을 향해 먼저 명령합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바로 그 앞에 나오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거짓도 없으셨지만, 욕을 당하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적인 모습을 본받아서’ 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제일 먼저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과는 얼마나 다른지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만약에 여기에 결혼한 자매들 가운데 “제 남편은 나보다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인격적으로도 매우 훌륭하고, 신앙적으로도 나의 스승이고 모든 면에 있어서 내가 본받을만한 분이며, 그리고 밤에 자다가 깨어도 나 같은 무지랭이가 어떻게 이런 훌륭한 남성을 만나 아내가 되었을까 생각하면 꿈인지 생시인지 황홀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남편들 생각에는 꽤 될 것 같지만 거의 없습니다. 세월은 돌고 도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여성이 남성에게 그렇게 압박을 받으면서 사람 취급도 못 받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로 태어난 것이 무슨 커다란 죄나 된 것처럼 그렇게 무시를 당하던 때가 있었죠. 그래서 그 당시에 통용되던 말이 남존여비입니다.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 이것입니다. 세월은 참 공평한지 이제는 시대가 돌아서 이제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 어디에 가서 사람들에게 면박을 당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남존여비가 이제 와서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요. 남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여자의 비위를 맞춰야 된다. 이게 남존여비입니다. 이런 농담을 할 때 아무 남자도 웃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죠. 이런 시대에 아내에게 남편을 순종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순종은 남편이 가지고 있는 어떤 장점이나 사회적 지위,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완력이나 혹은 금전적인 능력 때문에 남편에게 순종하는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질서를 깨닫는 데서 오는 순종입니다.
인간이 마음속으로 쏟아내는 이성 없는 정념은 질서가 별로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놀라운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고 그 분께 돌아간 후에는 즉각적으로 질서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되고, 그 질서에 대한 감각은 우리에게 의무에 대한 아주 분명한 인식을 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인간인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리고 이 가정에서 남편으로서 내가 아내에게, 아내로서 남편에게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부모로서 자녀에게 어찌 행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아주 정확한 인식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정에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사랑을 능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 있는 질서입니다. 그래서 그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당시에도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는 여자들이 많이 있었고, 교회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남편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자신에게는 너무 과분하고 무엇으로 보든지 남편에게 자기는 너무 하찮은 존재여서 그저 복종하고 사는 것만 해도 언감생심 감당할 수 없는 특권이라고 생각되시는 분들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오늘 이 3장 1절에서 상정하는 이 여자의 남편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 혹은 불신자까지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편이 내리는 판단이나 생각, 그의 언행이나 행실, 가정에 대한 태도나 많은 것들은 아내가 깊이 존경하고 경외하기보다는 오히려 설득되지 않고 복종되지 않는 그런 요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도록 강력히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입니다.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이 아니라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입니다. 말, 희랍어 성경에 보면 “말없이”라고 나옵니다. 말없이 아내의 행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아내의 행실의 공로가 남편에게 전달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말로서는 보여줄 수 없는 그 무엇을 남편에게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 아내가 자신의 행실로 말미암아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순결과 경외의 모본을 보임으로 말미암아 저렇게 반항적이고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던 야생마 같은 내 아내가 어떻게 나에게 복종하게 되었을까? 나는 어느 한 순간에 저 아내가 나를 존경할 만큼 변하되지 않았는데도 저 아내가 나를 존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하게 한 무엇인가가 내 안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만들어 주는 요인이라고 합니다.
Β. 감화시키는 단장
그러면서 사도는 남편을 그렇게 감화시키는 단장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걱정을 좀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안 꾸미고 다니는 사람이 많은데 이 설교를 듣고 용기를 얻어서 더 폭탄 맞은 머리를 하고 다니면 어떻게 하나? 어떻게 이거를 균형을 잡아서 가르칠까 생각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적절하게 자기 몸을 가꾸는 것은 의무입니다. 의무. 왜냐하면 자기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 남들도 같이 사는 세상이니까 나는 나에게 나일뿐이지만 나는 남에게 풍경이 되거든요. 내 주위에 풍경이 안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기도도 열심히 하고,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는데 집에 심방 가보면 어지러워서 늘 가르쳐준 질서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그리고 본인은 검소하다고 자부하는데 검소한 게 아니라 게으르기 때문에 머리를 산발하고 그 옷도 그래요. 그러면 안 됩니다. 그래서 잘 가꾸고 그 여기에 중점을 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중점을 두는 것은 바래지도 않고 그러지 말고, 자기를 기본적으로 가꾸어서 그래서 이 뭐라고 그럴까? 단정한 모습을 보여야죠. 특히 그 어딥니까? 여리고 전도 화요일 날 나가고 뭐, 심방 나가고 그럴 때에는 깔끔하게 그렇게 입고 와서 남의 전도하러 갔는데 얼굴에는 다크 서클이 지고 사연이 많은 사람처럼 그렇게 가면 그러면 전도도 안 되고 그래요.
한 10여 년 전에 교회의 행정 직원들이 수련회를 갔습니다. 여름마다 가니까 여름이었는지 겨울이었는지 기억이 안나요. 어쨌든 주일날 밤에 늦게 도착을 했구요. 그리고 이제 그 다음날 아침에 새벽 예배로 모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새벽에 세수까지는 할 수 있었는데 화장할 시간은 안 되잖습니다. 이제 교회 출근할 때에는 항상 예쁘게 화장하고 그리고 옷도 입고 오는데 근데 추리닝 바람에 세수 화장 다 지우고 민얼굴로 나왔는데 옆에 앉아있던 형제가 예배드리기 전에 그래요. “목사님?” “왜?” 귀에다 대고, “목사님?” “왜?” “저 앞에 앉아있는 아줌마들 누구입니다? 전혀 얼굴을 못 알아보겠습니다.” 나도 처음으로 눈을 들어보니까 정말 못 알아보겠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괜찮지만 나이가 들면 조금씩 가꾸어야 해요. 그래서 이 사람의 기본적인 품위를 잃지 않도록 그렇게 가꾸어야 되요.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거는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육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머리를 붙이고, 뭐 예전에도 가짜 머리까지 올려가지고 그렇게 비싼 돈을 들여서 꾸미고, 금은보석을 다 차고, 예쁜 옷을 입어서 그래서 겉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아름다움으로서 자기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려고 하지만 너희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니까 그런 것들을 통해서는 남편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이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면서 너희에게는 또 다른 종류의 단장이 있단다. 그게 뭐냐 하면 온유한 마음과 고요한 정신이란다.
그러면 이 온유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팔복에서 이 온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복이 있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인데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이것은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 부동산을 해서 돈을 번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은 부동산 투기에서 돈 벌 수가 없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감화를 끼쳐서 그들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 평의 땅도 칼과 창으로 차지하신 일이 없지만 그러나 그 예수님은 그 온유한 인격과 삶의 모본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쳐 보좌에 앉은 왕들조차도 그분 앞에 무릎을 꿇어 그의 종이라고 고백을 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모세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구스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고, 그렇다면 그 여자는 흑인이었습니다. 민족주의에 빠졌던 이 유대인들은 히브리 사람들은 모세를 비난하고 욕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그의 동기간이었던, 그의 동기간들조차도 미리암과 아론조차도 한패가 되어서 그를 욕보였습니다. 그때에 그의 태도가 어떠했습니까? 모세는 비난 받을 때에 그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 모든 사람보다 더 뛰어났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온유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모두를 품는 그런 부드러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온유한 마음이 바로 구원받지 못한 남편을 위하여, 혹은 가정을 올바른 질서로 돌리기 위하여 아내가 함양하여야 할 정신과 마음의 단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있는데 고요한 정신입니다. 이것은 우리말 성경에 안정한 심령이라고 했는데 고요한 정신입니다. 이 고요한 정신은 자신이 양심에 구김이 없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데서 오는 평정입니다, 평정. 호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물이 고요하고 맑으면 주변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호수면 위에 어립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 물결이 치기 시작하면 아무 그림도 어리지 않죠. 남성은 본래 개척과 정복에 유리하도록 역동하는 정신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래서 종종 마음의 안정감을 잃어버리고 출렁거리기도 하지만 이때에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 가정에서 아내입니다. 고요한 마음으로 평정을 누리게 됩니다. “여보 오늘 우리도 기분도 그런데 한번 호텔에 가서 비싼 음식을 우아하게 먹어볼까?” 남자의 마음이 출렁거리고 있는 겁니다. “여보, 집에 된장찌개하고 밥통에 밥이 많아.” 이게 고요한 정신입니다. 예를 들자면, 예를. 그러면서 물질생활에서도 기본을 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연애할 때 딱딱 맞고 재미있던 사람들이 잘 헤어져요. “우리 호텔에 가서 밥 먹을까?” “좋지. 와 신난다. 가자.” “어디어디로 가자.” “에이 남자가 쪼잔 하게 그 보다 더 좋은 호텔로 가야지.” 그러고 그 다음에 헌금 서비스를 받으면서 나머지 20일을 사는 것입니다. 10일 동안 그렇게 쓰고. 오래 못가요. 연애할 때는 굉장히 좋죠. 이거는 좋지 않습니다. 연애할 때 잘 안 맞는 사람들이 오래가요. 이거는 물질생활에 대해서 예를 들었지만, 물질생활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활에 있어서 여자들이 이 고요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은 들뜨기 쉬운 남자들을 통제하여 가정을 안정되게 이끌어가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사람들은 반대로 생각하거든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의 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다 살아봤으니까 알지만 부부싸움을 할 때 한쪽이 고요한 정신을 한쪽만 가지고 있으면 싸움이 성립을 안 해요. 혼자서 팔딱 거리고 뛰다가 제풀에 그냥 꺼져버리죠. 그런 고요한 정신을 신앙이 없는 남편을 가진 아내들에게 요구합니다. 그게 바로 단장이란다. 왜? 머리를 예쁘게 꾸민 여자는 술집에 더 많아, 보석을 휘감은 여자는 강남에 가면 더 많아, 예쁜 옷 입은 여자는 잡지에 보면 더 많이 나와요. 아내는 그런 것들 가지고 경쟁해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벌써 결혼하고 한 20년 지났는데. 이제 그런 잡지에 나온 사람들은 결혼도 안한 예쁜 여자들인데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도전하는 것은 좋지만 그거 보다는 남편을 감동시키는 거는 이 속에서 우러나오는 그 온유함, 그래서 자신이 이기는 것 같아도 결국은 아내가 그를 품고 너그럽게 대하여 이해하고 받아줌으로써 소속감을 느끼게 되는 것, 그리고 고요한 정신 이것입니다. 때때로 아내가 결혼 초기부터 기선을 제압해서 이긴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남편이 다 치다꺼리를 해 주는 것입니다. 뒤에서. 그러다가 이제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것들이 이제 몸에 베이게 되면 아내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죠. 그것은 정상적인 가정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번 여기에서 나온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안정된 심령에 썩지 않을 것으로 하라” 그랬는데 번역이 어려워요. 그래서 어느 영어 번역에서는 “everlasting ornament”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항상 지속해서 존재하는 장식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조시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여자들은 머리를 꾸미고, 보석을 치장하고, 예쁜 옷을 입어서 아름다움을 자랑하려고 하는데 진짜 남편을 감화시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아름다움은 온유한 마음과 고요한 정신이다. 왜? 이거는 남편에게 결핍되기 쉬운 그리고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입니다. 그러는 것이 바로 사라지지 않는, 쇠하지 않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아내가 구원을 얻은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성인군자는 아니잖습니까. 남편은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때에 아내는 온유하고 고요한 정신으로 남편의 모든 것을 용납하면서 끌어안고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한 여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내에게 이것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사도가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대해서 길게 언급한 것입니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주께서 죄도 없으시고, 거짓도 없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않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않고 그리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아버지께 자기를 부탁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잠잠히 어린 양처럼 참아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여셨던 것처럼, 아내들은 남편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들은 물을 수 있겠죠. 아니, 저 막대 먹은 남편을 위해서, 개념도 없는 남편을 위해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아내가 된 게 죄입니까? 아니요. 아내가 된 게 죄는 아닙니다. 그럼 뭐가 죄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더 먼저, 더 많이 알았다는 것이 죄입니까? 예, 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했다는 의미에서의 죄가 아니라 빚으로서의 잘못, 빚, debit, 빚입니다. 빛. 부채, 누구에게 진 부채, 만약에 남편이 나에게 복종하라 하면 순종 안 해도 돼. 그런데 아내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기뻐하시며 네 남편에게 순종하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편의 장점과 존경스러운 어떤 점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주님이 주신 명령이기 때문에 주님이 세우신 가정의 질서를 위해서 남편에게 순종합니다. 그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을 받을 때에 남편에 대한 정을 느끼지만,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사랑할 뿐 아니라 사랑할 때보다도 자신을 신뢰하고 순종해 줄 때에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더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려우니까 오늘 그렇게 할 때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신 것을 기억하며 그렇게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남편의 모든 요구사항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종과 복종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범위 안에서 남편에 대한 순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들은 가슴에 새기십시오. 남편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비록 그가 적은 돈 벌이, 높지 않은 지위, 그리고 탁월하지 않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사랑할 뿐 아니라 충분히 존중하십시오. 그리고 그 남편이 여러분의 인격 안에서 순결과 경외의 모본을 보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여러분 마음에 있는 그 온유함과 정신에 있는 고요함을 발견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남편 자신의 장점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그가 지극히 사랑하고 의지하는 주님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어 그래서 여러분의 남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 주시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아내의 행실을 통하여 남편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Ⅳ. 남편들을 향한 명령
Α. 아내와 동거함
이어서 사도는 남편을 향하여 명령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녀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여겨 귀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아내와 동거하라고 가르칩니다. 동거는 같은 장소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맥락에서 신약까지 모두 살펴 볼 때에 이 동거는 단지 장소적인 공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했습니다. 이 동거는 다름이 아닌 정신적인 연합이 있는 동거를 가리키는 것이고, 사랑의 합치가 있는 동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에 지식이라고 번역된 희랍어 그노시스는 구약으로 가면 선교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아내와 동거하되 지식을 따르는 동거입니다. 이 지식은 그렇게 남자와 여자가 성적인 관계를 통해 서로 알게 되듯이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는 그 관계 속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결코 몰랐을 어떤 지식들을 공유하면서 서로 사랑하게 되는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지식을 좇아서 정신적인 연합을 이루며 함께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아셨는지를 생각해 보면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자,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오시고, 그 성령의 임무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생각나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는 연합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 되어 그래서 그리스도는 교회를 아시고, 또 교회는 그리스도를 압니다. 그리스도는 나를 아시고, 나는 주님을 압니다. 내가 아는 것 중 주님이 모르시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내가 주님을 향해 모르는 것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주님께 모두 드러난바 되었고, 알고 계십니다. 감정 없이 단지 감시자처럼 아시는 것이 아니라 슬프고, 괴롭고, 눈물 나고, 기쁘고 희열에 가득한 우리의 삶의 희로애락에 주님이 동참하시면서 우리를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기뻐할 수 있고, 또한 주님은 아파하는 우리와 함께 고통을 받으시면서 그렇게 아시는 것, 이게 바로 주님과 함께 동거하면서 지식을 따라 주님을 알아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는 계명을 받고 보면 오늘날 가정을 하숙집처럼 생각하는 남편들, 그리고 모든 정력과 힘은 바깥에다가 다 쏟아놓고 집에 와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조건 쉬려고만 하는 이 남편들의 모습은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와 함께 지식을 따라 함께 살아가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아시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함께 알아가며 동거하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반드시 바쁘다는 핑계만 대지 말고 시간을 내어 가정에서 함께 시간을 가져야 하고, 그리고 가족 간의 일치, 아내와의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힘쓰는 남편들이 되어야 합니다.
Β. 아내에 대한 생각을 바꿈
두 번째는 아내에 대한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서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남편의 눈에 아내는 강한 그릇입니다. 애인이었을 적에는 연약했으나 지금은 강해 보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남편들은 아내가 연약하고 예쁜 애인적 모습을 유지하기 보다는 무쇠 팔, 무쇠 다리, 로봇 주먹을 가지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언제나 자기 없어도 씩씩하다고 여기죠. 그런 생각을 바꾸라고 오늘 성도인 남편들에 사도는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인이었을 적에는 목소리도 아주 갸냘퍼요. 아내가 된 다음에는 제발 볼륨 좀 줄였으면 좋겠습니다. 평범하게 얘기하는데도 고막이 터지는 것처럼 우렁차요. 그거 전부 아내가 혼자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환경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요. 나이가 많이 드셨어도 아이가 없는 집안의 아내는 목소리가 여전히 고와요. 그렇게 소리 지를 일이 없습니다. 목소리가 좀 나습니다. 그런데 이 시커먼 사내놈들 둘, 셋쯤 기르고 보면 힘이 장사가 되고, 목소리는 우렁찬 장수의 함성을 변합니다. 왜? 속삭이는 이야기로는 이 아이들이 복종을 안 하기 때문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보니까 목청이 트여서 그렇게 거칠고 큰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리야리하고 약해 보이던 자매들도 아이 둘만 낳으면 그렇게 팔에 근력이 붙고 튼튼해 질 수가 없습니다. 영아부 전도사 하던 여성 교역자 처녀였는데 언제 그래요. “목사님.” “그래 요즘 사역 잘해?” 그러니까 “목사님 제가 얼마나 영아부 사역 잘하고 있는지 아시죠?” “내가 어떻게 나야?” “이걸 보세요. 1년만 하고 나면 알통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건 일주일에 한번인데 엄마는 그 녀석들을 하루에도 몇 십번씩 들었다 놨다 목욕 씻기고 돌보면서 그들과 씨름하면서 무쇠 팔, 무쇠 다리가 됐습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비난 받을만한 일입니다? 그것 때문에 아내가 강해졌으면 아이들을 생존시키고 가정을 꾸려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환경에 의해서 강해진 거지 원래 마음은 연약한 그릇이었다는 말입니다. 그거를 그 입장에서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게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아이들을 다스리면서 고함치는 장수와 같은 아내의 목소리, 아이들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살림살이를 하면서 그렇게 튼튼해지는 어떤 때는 자기보다 훨씬 더 그 품에 기대고 싶을 정도로 우람한 아내의 팔과 다리를 보면서도 그 속에서도 연약한 그릇을 읽어내는 것이 바로 남편의 아내를 향한 사랑이란 말입니다.
이 편지가 기록될 당시 로마에서 흔히 쓰이던 그릇은 크게 네 종류의 재료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선 제일 좋은 거는 돈 많은 사람들이 쓰던 거는 뭐냐 하면 철로 만든 그릇입니다. 철기 그릇, 두 번째는 뭐죠? 사실 무른 돌이 많았기 때문에 무른 돌을 사용을 해서 우리나라에는 사실 무른 돌이 별로 없습니다. 무른 돌을 사용해서 깎아가지고 석기를 만들었습니다. 아주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또 뭐죠? 이제 찰흙 같은 것을 빚어서 만든 도기. 그리고 네 번째가 나무로 만든 목기 그릇들입니다. 그런데 철기나 목기 같은 것들은 잘 깨지지 않죠. 특히 철기 같은 것들은 웬만큼 집어 던져도 깨지지 않죠.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재료로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난 잘 모르는데. 뭐죠? 이렇게 떨어뜨려도 잘 안 깨지는 거 있죠. 그릇. 코닝? 코렐. 그런데 한 1m 높이에서 떨어뜨려도 유리그릇하고 똑같은데 안 깨져요. 좀 비싸죠. 그런데 안 깨져요. 그런 그릇부터 시작을 해서 뭐 많죠. 특히 뭐 바가지 같은 거, 그런 것들은 뭐, 깔고 앉고, 발로 차고, 집어 던지고 해도 안 깨지죠. 사람들이 애인이었을 때에는 유리그릇처럼 다루죠. 추우면 어떻게 하나? 괜찮습니다. 추우면 어떡하긴 뭘 괜찮습니다. 뭘 먹었을까? 알아서 챙겨 먹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염려를 해요. 그런데 아내가 된 다음에는 아내를 플라스틱 바가지처럼 생각합니다. 그러지 말아라. 연약한 그릇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한 20년 전에 누가 선물을 했습니다. 여섯 개로 된 잔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좋은지도 몰랐는데 쓸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포도주를 이렇게 따를 수 있는 잔이었습니다. 큰 잔은 아니고 조그만데 그래서 이제 가끔 생일 때 포도주스도 따라 먹고, 어떤 때에는 또 몸이 피곤하고 그러면 포도주도 한잔 따라 먹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딪쳐 보니까 건배할 때 탁하고 하니까 아주 예쁜 소리가 나는데 나는 여태까지 유리그릇 중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그릇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근데 그게 그렇게 좋은 그릇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여섯 개 세트 중 4개를 깨먹은 다음이었습니다. 두 개 남았을 때 인제 이게 정말 좋은 거라는 거를 알았는데 설거지 하다가 둘 다 다 깼습니다. 그런데 알고 그 가치를 귀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아주 조심해서 다루는 것입니다. 아내를 그렇게 다루라고 오늘 사도는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베드로는 바울과 달리 결혼 생활을 실제로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아마 훨씬 더 체험적으로 이것을 남편들에게 충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C . 기도가 막힐 때 생각함
사랑의 가장 중요한 징표는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생명의 은혜를 함께 받을 자로 여기라고 했는데 이것은 물론 미래에 예수 믿고 천당 간 다음에 거기에서 생명의 유업을 함께 누리며 영생을 하게 되잖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유업으로 받을 자이지만 현세의 삶에서 보면 이게 기도가 막히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뭐라고 말 하냐면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남편과 아내에 대한 올바른 관계, 사랑하고 순종하고 하는 이 올바른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정립되어 있을 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아주 중요한 증거가 되고, 이런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려 기도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또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응답을 받는 이런 영적인 교류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아내를 학대하거나 혹은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거나 혹은 아내를 약한 그릇으로 여기지 않고 아내를 함부로 다루고 가치 없게 생각하게 될 때에 이것은 결국은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이와 같이”가 뭐예요? 그게 바로 앞에 나오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구원받은 자녀들을 위하여, 구원할 자녀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하여 죽으신 그 고난처럼 그렇게 아내를 대하라는 것입니다.
Ⅴ. 결론
많은 남편들은 경험합니다. 그리고 아내들도 경험합니다. 남편과 대판 싸우고 습관을 따라 나오는 그 다음날 새벽기도에 하늘이 열릴 리가 없습니다. 아내와 언쟁을 하고 다투고 나아온 그 날 예배에 남편이 은혜 받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부부가 내세에서 뿐만 아니라 현세의 삶에서도 생명의 은혜를 함께 누리며 살아갈 자들로 하나님께 지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여러분에게 가르칩니다. 결혼의 원리는 사랑의 원리이고, 이 사랑의 토대위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여기며, 그와 함께 생명의 은혜를 함께 나누며 살아갈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일체의 순결과 경외의 모본을 보임으로 온유한 마음과 고요한 정신을 통해 예수를 보여주십시오. 변하는 태도로 아내를 대하십시오. 그래서 그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아시는 것처럼 아내를 알고 사랑하고 약한 그릇으로 여기며 이 현세의 삶에서, 내세의 삶에서 그 아내와 함께 유업을 누리는 남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남편과 아내, 상대방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님 앞에 세우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네 형제와 화해하라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야 요셉과 말하니라 (창45:14-15)
녹취자: 김인철
I. 본문해설
오늘 본문은 그 유명한 요셉의 이야기에 한 토막입니다. 어린 나이에 형들에 의해 팔려 애굽으로 끌려갔고 거기에서 천신만고의 세월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가 드디어 우여곡절 끝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고 그가 나라를 구하고 수많은 민족과 백성들의 목숨을 구한 지혜로 말미암아 온갖 영광을 얻고 있을 바로 그때였습니다.
II. 상처로 살아온 사람
남들이 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삶이었지만 그러나 히브리에서 팔려온 노예로서 살아 온 그 요셉의 일생은 상처로 살아 온 사람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는 형들에 의하여 팔려 낯선 애굽 땅의 보디발의 집에 끌려오게 되었고 아버지의 집에서는 채색 옷을 입으며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식이었지만 여기에서는 피붙이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온갖 고생을 하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요셉은 바로 그 보디발의 집에서도 변함없이 충성하고자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는 언제 끝날지도 알지 못하는 기약 없는 고통스러운 감옥살이를 시작하여야 했습니다. 거기에서도 마음을 접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곳에서도 모든 죄수들 가운데 모범적으로 복역을 하였고 그리하여 그는 옥에서 그 모든 옥의 사무를 맡아 보는 죄수로서 마치 간수처럼 그렇게 봉사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정말 상처로 가득한 삶을 살아 온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아 온 죄 밖에는 없는데 형들의 시기를 받아서 형들로부터 팔림을 받아서 노예로 끌려오게 되었고 한 번도 고향에 돌아 간 적이 없이 그 노예로 고통 받는 세월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풀지 못하는 상처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형제들과의 문제였습니다. 물론 두고 온 고향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웠겠지만 요셉에게 있어서 자기를 애굽에 팔아 그 빚으로 다 할 수 없는 고생을 하게 한 그 형들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애굽에 커다란 흉년이 들게 되었고 이것을 알아맞힌 꿈의 해석자로서 요셉은 국무총리가 됩니다. 7년 동안의 풍년, 7년 동안의 흉년이 있었는데 2년의 흉년이 지나가 아직까지도 5년이나 더 남은 고통스러운 기근의 때에 이제 양식을 구하기 위해 사랑하는 형제들이 애굽까지 내려오게 된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III. 형제와 화해한 사람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형제와의 뜨거운 화해를 이루게 됩니다. 형제와 화해한 사람 바로 이 요셉 어떻게 자기를 그렇게 끔찍하게 고생하게 한 장본인 이었던 형제들과 이렇게 화해하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A. 자신의 불행을 섭리 속에서 봄
제일 먼저 이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보았습니다. 아마 형들에 의해서 팔려 낯설고 물설은 땅에 끌려 온 그 첫날밤에는 아마 이 요셉도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앞에 닥친 이 끔찍한 현실 앞에서 그는 어찌할 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무엇 때문에 이런 불행을 당해야 하는지를 아마 그 어린 신앙으로서는 풀어 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에게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불행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욱 치열하게 타 올라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처음 팔려 와서 어떻게 보면 이 요셉은 인복이 정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지만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팔려 버렸고 보디발의 집에서 그렇게 충성스럽게 했으면 사랑을 많이 받아야 했는데 그 나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쳤다는 이유 때문에 이 여자의 불타는 복수심 때문에 이 여자는 나라의 대역 죄수들을 가두는 그 감방에 수감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또 한 번 인간으로부터 배신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을 만나게 됩니다. 꿈을 올바로 해석해 주었고 그는 그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구출 받아야 마땅했지만 요셉의 예언대로 석방된 그 관리는 요셉의 고마움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요셉은 다시 한 번 인간적인 배신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만약에 평범한 사람들에게 일어났다면 처음 배신에서는 형들을 이를 갈며 미워했을 것이고 두 번째는 보디발의 아내를 미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모함에 빠진 것 아닙니까? 형들이 팔아 버린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다 하더라도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다가 실패하니까 복수심에 불타서 젊은 청년을 옥에 가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한번쯤은 그 여자가 그랬다고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폭로하기 좋아하는 시대이니까 비리를 폭로하겠다고 이번에 유혹한 것이 한번이 아니라고 폭로해 버렸을 것 아닙니까? 어차피 이판사판인데……. 그런데 정말 머리가 숙여 지는 것은 옥에 끌려가기 전에는 물론이고 옥에 들어 간 후에도 그 사람들 중에 관원장은 바로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평범한 사람 같았으면 당연히 왜 억울한지를 이야기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사실 이렇게 충성스럽게 봉사 했는데 그 여자가 나를 유혹했다 나는 정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중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거절을 했는데 이 여자가 나를 여기에 넣었다고 웬만하면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자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없는 이야기도 지어 내는 세상인데 웬만하면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그것도 거짓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뭐라고 까지 이야기 했는가 하면 내가 이 옥에 갇힐 만한 잘못을 하지 않았다고 거기까지만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옥에 갇힐 만한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그렇게 비참하게 추락시킨 여자의 명예와 안녕을 보존해 주는 것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뭐라고 해석했는가 하면 요셉이 갇힌 그 곳이 국가의 아주 중죄인들을 가두는 감옥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보디발 자신의 아내의 방자하지 못한 것을 알고 그를 아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추측할 뿐이지만 여러 가지 많을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떻게 보면 인복이 없는데 사람에 대하여 정말 신실합니다. 그것이 요셉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나를 보복하여 이렇게 불행에 몰아넣어도 나는 그 사람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불행을 하나님께서 어떤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그것을 막상 그 일을 당할 때에는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보고 다 이루어진 다음에는 돌아보니까 자기가 믿는 그것이 맞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원래 계시는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고 섭리는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감추어져 있는 두루마리처럼 살아 봐야지만 이것이 펼쳐지면서 뭐가 기록되어 있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그 하나님의 섭리는 오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몇 십 년 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것을 알고 싶어 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오늘 하나님을 믿으며 신실하게 살아가면 10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도 거기에서 아주 아름다운 결과가 맺어 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 사람은 그런 자신의 불행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인간의 악함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것이 형들이 자기를 그렇게 팔지 않았으면 보디발의 집에 올 수 없었을 것이고 올 수 없었으면 그 집의 총무도 될 수 없었을 것이고 총무가 되지 않았더라면 여자가 유혹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유혹을 하지 않았으면 갇히지 않았을 것이고 갇히지 않았으면 그 사람들을 못 만났을 것이고 그 사람들을 못 만났으면 바로를 만날 일도 없고 참 신기한 것이 그곳에서 바로가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배신인데 왕이 꿈을 꾸어서 번민하고 있을 때 제가 생각이 난다고 이야기 했을 때 요셉을 깨끗이 씻기고 수염도 깎고 해서 데려오는데 그때 나이가 30세였습니다. 나중에 고고학자들이 애굽의 문헌들을 발굴해 보니까 30세가 공무를 담당할 수 있는 말하자면 최소연령이었습니다. 만약에 일 년이나 일찍 나왔으면 국무총리가 못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섭리가 아주 그렇게 인간의 악함까지도 사용해서 자기의 뜻을 이루시고 뿐만 아니라 요셉이 여기에 와서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애굽은 7년 풍년동안에 곡식을 거두어서 보관했습니다. 왜냐하면 7년의 혹독한 흉년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지방, 다른 나라에서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양식이 다 떨어지니까 곡식이 있는 유일한 곳이 애굽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으로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곡식을 얻기 위해서……. 그 곡식을 풀어먹이면서 땅들을 거두어들이고 그래서 영토를 넓혀 가면서 그 사람들의 목숨을 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민족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보내셨다는 섭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형들에게 팔렸을 때에도 여자의 모함을 받아 옥 속에 갇혔을 떄에도 그리고 관원장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에도 그런 일이 일어 날줄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섭리에 대하여 믿음으로 사니까 결국은 하나님께서 이 요셉에게 가장 나빠 보이는 불행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행복하고 아주 복된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라서 지금까지도 살고 있고 우리가 분가해서 복된 가정을 만든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사실은 상처가 많은 가정에서 태어나서 상처를 많이 겪으며 산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것을 극복하고 가족들과 진정으로 화해하기 위해서 아주 꼭 필요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B.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함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어떻게 보면 기도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하고 은혜 받는 것 보다 더 급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현실을 인정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처한 그 현실이 아무리 받아들이기 힘들고 어렵더라도 이것이 나의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한 순간에 뜨거운 사랑이 솟구쳐 오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현실을 인정합니다. 그대로 인정하고 그 토대 위에서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하고 다른 사람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를 풀어 나가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도 말씀 드렸는데 정서장애아를 둔 부모들은 굉장히 힘듭니다. 만약에 그것을 내 아이가 왜 이럴까 이렇게 생각하면 한시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는 정말 너무도 예쁘게 신앙생활을 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 부모들이 그 아이를 복덩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 변화가 어디에서부터 시작이 됩니까? 내 아이가 왜? 내 남편이 왜? 내 아내는 왜? 내 자식은 왜?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딛고 시작할 수 있는 기반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절망으로 우리를 데려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니까 부모들 마음속에 감사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은 그런 질문을 해 보아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내 아이가 왜? 내 남편이 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을 거두고 나서 현실을 보면 현실은 그대로 이지 않습니까? 내 현실은 내가 살아야 할 기반입니다. 그것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현실을 현실과 타협할 것인가 극복할 것인가 이것은 나중 문제이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생각 하여야 합니다. 요셉은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누군 인들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제가 일주일 동안도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습니까? 일주일 동안에도 무수히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무엇을 읽으면 잊어버리지도 않고 누구는 철들 때부터 하나도 안 잊어버리는 여자도 있다는데……. 그런 머리 좋은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자주 잃어버리는 가 정말 총명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등등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이 요셉은 모릅니다. 형이 왜 팔았는지……. 처음이야 가슴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떠 보면 현실입니다.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끌려 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형이 왜 팔았을까? 나는 여기에 와서 이 처지가 되었을까? 라고 생각하면 정상적인 삶을 살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직장이나 학교에서도 보면 일을 안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내가 왜 이 직장에 들어 왔을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실력이 없어서 들어 왔고 자기는 재수가 없어서 들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발전이 없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실은 형들로부터 팔려서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떨어 졌을 때 그것은 아주 나쁜 것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좋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계산 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일어 날 일을 미리 비디오로 보여 준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형들이 나를 팔아서 이렇게 된 것이지만 내가 여기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살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신앙 그것이 말하자면 현실을 인정하고 난 다음에 두 번째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왜 나를 그렇게 하셨을까? 내가 왜 이런 집안에 태어났을까?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지난주에도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는데 강력한 범죄자들이 집안에서 생산됩니다. 집안에서 상처를 많이 받고 분노와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면서 그 사람들을 살인하고 그렇게 나쁜 일들을 합니다. 그것도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도 그런 부모 밑에서 안 태어났고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 텐데 태어나면서부터 그들은 굉장히 불리하게 인생을 시작합니다. 너무 가엾습니다. 심지어는 부부가 싸우다가 아이를 던져서 죽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 아이는 그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얼마나 귀여움을 받고 사랑을 받았을 텐데 그 가정에서 태어나서 부부싸움을 하다 그 사이에 끼어서 죽어 버리는 그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것은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굉장히 불행합니다. 우리가 항상 경쟁도 좋지만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그렇게 말도 안 되게 불리한 위치에서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항상 경쟁에서 이긴 사람은 진 사람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서 그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결국은 어찌 할 수 없는 인간의 현실이 신앙을 요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 이외에 자신의 인생을 개선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을 합니다.
요셉은 그런 믿음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굳게 바라보면서 자신의 불행을 섭리의 좌표 속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형제와 화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형제들이 자기를 판 것은 너무 가슴 아픈 것이었고 눈물 나는 것 이었지만 형제들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형제들의 그 나쁜, 자기를 팔아 버린 그 매정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오히려 자기를 지극히 높여 애굽의 주로 삼으시고 많은 민족과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도구로 삼으시고 자신을 지극히 높여 주시는 계기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불행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보지 않았을 때에는 자기를 팔아 버린 사람들에 대해서 이를 갈고 미워하는 것 밖에는 없지만 하나님의 큰 섭리에서 보니까 자기에게 일어난 이 불행이 그들은 단지 도구였을 뿐이지 사실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형들이 요셉을 팔아 버릴 때 자신들의 이 악한 행동을 통해서 요셉을 통해 하나님이 큰 뜻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셉을 불행하게 만들려고 했지만 하나님이 그를 버리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불행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저는 상처가 많은 가정에서 자라 난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간절히 붙드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고 오히려 형제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교회에서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받는 사랑에 감사하는 사람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누가 그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형제도 없고 가족도 없는데 교회가 우리 집이요 성도가 나의 가족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아무리 외롭고 힘들어도 성도의 교제를 생각하면 희망이 솟는다는 것입니다.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런 믿음을 못 가졌을지 모르지만 또 가졌다 할지라도 그렇게 애절하고 절절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그런 기회로 삼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의 불행을 사용하셔서 자기의 뜻을 이루어 가시고 그런 면서 자신을 높여 주시는 것을 보면서 형제와 화해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형제와 화해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만 해도 형제들이 헤어져 있으면 되게 보고 싶고 했습니다. 만나면 기뻐하고 했는데 더 위에 어른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한 달만 못 만나면 너무 보고 싶어 하고 만나면 반가워서 울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정말 진정한 가정에서의 형제의 우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대가족 사회로 함께 모여 사니까 정말 형이나 동생이 어디를 떠나서 몇 달 안 보이면 그립고 보고 싶고 만나면 눈물도 흘렸을 것입니다. 지금은 처음부터 갈라져서 가정을 시작하니까 그런 애틋한 정이 적은 것도 사실입니다. 사실 같이 살지 않으면 가족이 아닙니다. 그런데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오늘 이 요셉의 생애를 보면서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형제들과의 상처, 가정에서의 아픔이 정말 하나님을 만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정말 도움을 주었고 그래서 어디에서도 받아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게 되니까 우리의 신앙이 더 간절하게 예수님을 붙잡게 됩니다. 그러면 요셉과 같은 시각에서 보게 되면 우리 가정에서의 아픔과 형제들과의 불화는 어떻게 하면 우리를 우리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통로였고 도구였다는 사실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기를 불행하고 아프게 했던 도구가 된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했을 때 진정으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자신의 불행을 보고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한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으십니다. 손해를 입은 사람이 우리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용서할 수 있는 권세를 우리에게 일부 맡겨 주십니다. 그러면 사실은 그때의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용서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악을 행한 사람은 큰 의무를 지고 있지만 악을 당한 사람은 큰 권리를 쥐고 있는 것입니다. 그를 용서할 수 있는 권리를 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셉은 아름답게 행사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형들이 자기에게 한 그 끔찍하고 악한 행동을 사랑과 신뢰로 갚았습니다. 그래서 요셉 집안에 모든 원한 관계는 여기에서 종식이 됩니다. 그런데 만약 여기에서 우리 옛날에 중국 영화 보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복수를 하고 복수를 당한 자식이 또 한을 품었다가 다음에 복수를 하고 하면서 원한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화해의 모습을 보면서 사실 이 요셉이 그리스도 예수의 아름다운 한 예표가 됩니다.
Ⅳ. 결론
그래서 요셉이 자기가 고난을 받은 고난당하고 희생당한 사람으로서 그가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해 주는 평화의 도구가 되었던 것처럼 이 사람도 역시 용서해 주는 사람이 되었는데 마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면서 당신 자신은 모든 죄악으로 인하여 죽으시고 누구를 향해서도 복수를 꿈꾸시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들을 종식시키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는 도구가 되셨던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셨던 것처럼, 화해를 만드는 사람이 되셨던 것처럼 똑같이 요셉을 통해 그 모본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러면 요셉은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모본이 되었다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그 특별한 용서와 사랑의 은혜를 경험하였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그리스도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용서하고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 형제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여야 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해의 손을 먼저 내밀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며 이렇게 한 가정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말씀안에 선 가정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