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가정
(2011년 설교모음)
신앙과 가정 1 (2011.5.8 주일오전설교)
신앙과 가정 2 (2011.5.15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2011년
신앙과 가정3 (2011.05.15 주일오후설교)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신앙과 가정 4 (2011.5.22 주일오전설교)
목 차
신앙과 가정 5. (2011.05.25. 수요예배)
신앙과 가정 6 (2011.5.29 주일오전설교)
1. 네 부모를 공경하라(엡6:2) 2011.5.8 주일오전 1
2. 아내와 남편(엡5:33) 2011.5.15 주일오전 9
신앙과 가정 7 (2011.6.5 주일오전설교)
3. 상처를 은혜의 기회로 삼으심(시27:10) 2011.5.15 주일오후 18
4. 아버지가 눈물 흘릴 때(삼하18:33) 2011.5.22 주일오전 25
5.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빌6:4) 2011.5.25 수요예배 35
신앙과 가정 8 (2011.06.05. 주일오후예배)
6. 가족을 위한 가슴앓이(롬9:1-3) 2011.5.29 주일오전 43
신앙과 가정 9. (2011. 06. 08. 수요예배)
7. 네 형제를 사랑하라(창50:19-21) 2011.6.5 주일오전 52
8. 네 형제와 연합하라(시133:1) 2011.6.5 주일오후 60
신앙과 가정 10 (2011.6.12 주일오전설교)
9. 가족을 돌아보라(딤전5:8) 2011.6.8 수요예배 65
10.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막10:6-9) 2011.6.12 주일오전 76
11. 가족들의 구원을 돌아보라(럼10:13-14) 2011.6.19 주일오전 86
신앙과 가정 92
신앙과 가정 1 (2011.5.8 주일오전설교)
신앙과 가정 2 (2011.5.15 주일오전설교)
신앙과 가정3 (2011.05.15 주일오후설교)
신앙과 가정 4 (2011.5.22 주일오전설교)
신앙과 가정 5. (2011.05.25. 수요예배)
신앙과 가정 6 (2011.5.29 주일오전설교)
신앙과 가정 7 (2011.6.5 주일오전설교)
신앙과 가정 8 (2011.06.05. 주일오후예배)
신앙과 가정 9. (2011. 06. 08. 수요예배)
신앙과 가정 10 (2011.6.12 주일오전설교)
신앙과 가정 11 (2011.6.19 주일오전설교)
1.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엡 6::2)
I. 본문해설
II. 공경한다의 의미
A. 존경을 드림
B. 깊이 사랑함
III. 자녀의 마땅한 의무
IV. 결론
2.아내와 남편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엡 5:33)
I. 본문해설
II. 가정과 교회, 그리스도
III. 부부 관계의 기초
A. 인격적 사랑
B. 무한한 사랑과 질서
C. 사랑, 은혜의 비밀
IV. 결론
3.상처를 은혜의 기회로 삼으심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 28:10)
I. 본문해설
II. 잊혀지는 상처와 잊혀지지 않는 상처
III. 상처를 은혜의 기회로 삼으심
IV. 결론: 은혜에 감사하라
4.아버지가 눈물 흘릴 때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18:33)
I. 본문의 배경
II. 가정을 주심은
III. 내 기억 속의 아버지
IV. 하나님 아버지
V. 결론: 네 부모와 화해하라
5.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엡 6:4상)
I. 본문해설
II. 하나님이 주신 부권
III.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들
A. 그릇된 모본
B. 잘못된 기대
C. 과도한 징계
IV. 결론: 숲을 가꾸는 것처럼
6.가족을 위한 가슴앓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짜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9:1-3)
I. 본문해설
II. 가족을 향한 고통
A. 그치지 않는 큰 근심
B. 저주를 받을지라도
C. 예수님의 모본
III. 가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A. 사랑하라
B. 기도하라
C. 희생하라
IV. 결론
7.네 형제를 용서하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50:19-21)
I. 본문해설
II. 상처의 사람, 요셉
A. 형제들의 시기
B. 모함과 시련
III. 상처가 영광이 된 사람, 요셉
A. 형제를 용서함
B. 하나님의 주권을 믿음
C. 선하신 섭리를 믿음
IV. 상처를 사랑으로 갚음
8.네 형제와 연합하라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133:1)
I. 본문해설
II. 형제의 운명
III. 연합과 동거
A. 연합
B. 동거
IV. 결론
9.가족을 돌아보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딤전5:8)
I. 본문해설
II. 가족이란 무엇인가?
A. 하나님의 제도
B. 인간됨을 배우는 곳
C. 관계를 배우는 곳
III. 가족을 돌아봄
A. 영혼의 형편을 돌아봄
B. 물질적 형편을 돌아봄
C. 관계적 형편을 돌아봄
IV. 결론
10.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6.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더라”(막 10:6-9)
I. 본문해설
II. 혼인의 원리: 한몸됨
A. 육체적 결합
B. 정신적 결합
C. 영혼적 결합
III. 이혼이 허락될 때조차도
IV. 이혼과 관계의 파괴
A. 하나님과의 관계
B. 자녀들과의 관계
C. 자신과의 관계
V. 사랑으로 고난을 이김
A. 은혜가 필요함
B. 이혼의 십자가를 지고
VI. 결론과 적용
11.가족을 돌아보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10:13-14)
I. 본문해설
II.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들
A. 행실로만 전달되지 않는 복음
B. 선명한 복음을 전함
III. 마음을 여는 길
A. 기도하라
B. 사랑하라
C. 봉사하라
IV. 결론
신앙과 가정 92
신앙과 가정 1 (2011.5.8 주일오전설교)
신앙과 가정 2 (2011.5.15 주일오전설교)
신앙과 가정3 (2011.05.15 주일오후설교)
신앙과 가정 4 (2011.5.22 주일오전설교)
신앙과 가정 5. (2011.05.25. 수요예배)
신앙과 가정 6 (2011.5.29 주일오전설교)
신앙과 가정 7 (2011.6.5 주일오전설교)
신앙과 가정 8 (2011.06.05. 주일오후예배)
신앙과 가정 9. (2011. 06. 08. 수요예배)
신앙과 가정 10 (2011.6.12 주일오전설교)
신앙과 가정 11 (2011.6.19 주일오전설교)
1.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엡 6: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에베소서에 기록된 본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부터 4장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이고 또 우리를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한 몸 교회가 되게 하신 경륜이 무엇인지를 밝혔습니다. 마치 웅장한 노래처럼 들리는 이 1장에서부터의 4장의 교리적인 내용들은 우주 전체를 포괄하고 흐르는 교향악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의 일부분으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 세상을 재창조하시는 위대한 경륜 속에 있는 하나님의 수단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망가진 이 세상을 온전히 회복하시고 완성하시는 그 날이 될 때까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존재들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고 그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향기요, 또 편지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오늘도 목회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빚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우주적인 하나님의 계획을 노래한 후에 사도바울은 5장에서 그 포커스를 교회에 초점을 맞춘 다음 우리가 성도로서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가 무엇이고 교회가 온전하게 되어 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성도의 공동생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6장에서는 이제 가정과 세상과 그리스도인이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되는지를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다루는 것이 가정과 가족들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편지의 구성으로 볼 때 우리의 가족들과의 관계와 가정의 생활이 교회의 영광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것과 가정 안에서 진정한 구성원이 되어가는 것 사이에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가정에서는 그 관계가 깨뜨려지고 잘못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마치 교회 생활 속에서 보상하려는 것처럼 그렇게 교회 생활에 열심인 불안한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복음적인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 총체적으로 변화되고 있는 성화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제일 먼저 느끼고 혜택을 받아야 되는 사람들은 교회의 지체들이고 동시에 가족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가족에게 인정받은 신앙은 이 세상에서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밝게 비출 것이고, 이로써 그는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신 목적과 영광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사도바울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서신이 교회 바깥에 있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에서 구원을 받아 성도라 일컬음을 받는 무리들에게 보내진 서신이라는 사실을 먼저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서 자녀들은 예수를 믿은 자녀들이고, 부모는 이미 하나님을 믿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경건한 부모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인간에게 가장 행복한 것을 첫 번째는 안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는 기왕에 태어났으면 빨리 죽는 것이 그 다음 행복한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두 가지다 할 수 없을 경우에 세 번째 가능성이 있는 것이 법대로 통용되는 정의로운 나라에 태어나서 참된 인간이 되기를 갈망하는 그러한 참 인간의 길을 가고자 하는 구도자인 부모의 밑에서 태어나 그 부모에게 사람됨의 도리가 무엇인가를 배우면서 똑같은 길을 걸어가려고 고민하는 친구들과 사귀면서 자라가는 것, 이것이 인간의 세 번째 행복이라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것도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것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인간 자신에게 구원의 길이 있다고 가르치고 싶었던 이 철인도 사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느꼈던 것이 아닐까요?
II. 공경한다의 의미
A. 존경을 드림
오늘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오늘 사도바울이 제일 먼저 부모에게 공경하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공경한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공경한다고 하는 의미는 존경을 드리고 또 사랑한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공경한다고 하는 이 단어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야레’라고 하는 단어가 희랍어로 옮겨진 것인데 그 단어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 할 일은 공경이죠. 사도바울은 사실 맨 처음 이 6장을 시작하면서 자식들에게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이 진정한 순종이 되기 위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부모에 대한 깊은 공경의 마음에서 우러나야지만 그것이 진정한 순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공경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공경한다는 것은 존경한다는 뜻입니다. 존경한다고 하는 것은 그럼 무엇일까요? 무엇인가 자신보다 뛰어난 어떤 가치 있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무겁게 생각하고 그리고 그 가치를 인정해 주어서 스스로 머리를 숙인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광을 향한 존경입니다. 즉, 영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마땅한 칭송을 드리고 인정을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그리고 그것이 우리와 같은 인격적인 인간일 때 그것을 우리들이 존경한다는 말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앞 대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부모 공경에 대한 대의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우리는 종종 부모를 공경하지만 그 공경의 이유가 이렇게 부모님이 우리보다 무거운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부모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높여드리는 가운데 그 분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날이 가까왔기 때문에, 이제껏 고생하며 살아와서 불쌍하기 때문에, 그래서 부모를 공경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부모공경이 아닙니다. 나는 이것을 가리켜서 적선적인 효도라고 부릅니다. 불쌍해서, 가엾어서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애석해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걸인에게 동전을 던져주는 동냥의 다름없는 감정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부모를 이렇게 존경함이 없이 불쌍히 여기라고, 그것이 효도의 방식이라고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부모가 무엇인가 칭송할만한 장점이나 뛰어난 덕성이 없는 부모일 경우에 오히려 자식들에게 일평생 상처를 주고 이 세상에서도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많이 한 부모에게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존경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존경을 드릴 수 없는 것이 참된 공경이 아니라면 그런 덕성이나 혹은 장점을 갖추지 못한 부모들의 자식은 그야말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도리를 다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말입니다. 나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성경의 가르침을 살피면서 아주 적합한 해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존경의 이유가 참답게 부모를 존경한다는 것이 부모가 가진 영광에 대한 굴복이라고 말한다면 그 부모의 영광은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원리적인 영광입니다. 이것은 부모의 사람됨과는 상관이 없이 부모가 부모이고 우리가 그 부모의 살과 피를 받아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마땅히 인정해야할 부모의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이고 종족의 보존과 번식에 관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자식이 잘못 행했을 때에는 자식을 매를 때려서라도 바로 잡으라고 가르치지만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부모가 올바르지 않은 일을 할 때 그 부모를 때려서라도 올바로 잡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고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가 부모로서 하나님 앞에 부여받은 원리적인 영광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이것은 우리들이 깊이 인정해야 하고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 입각해서 우리는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고 만약에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도 함께 부모와 더불어 무법한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효도하고 부모를 공경하여야 할 이유가 부모의 높은 덕성 있는 도덕 생활이나 혹은 부모가 여러분에게 물려줄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들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해 전에 우리 교회를 방문하고 예배를 함께 드렸던 어느 연세 지긋이 드신 분이 저희 2층에 있는 비서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문을 왈칵 열고 들어오셨습니다. 예고도 없이 오셔서 내 앞에 앉으셨고 그리고 앉자마자 눈물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60은 조이 되 보인 듯한 아저씨가 황급히 눈물을 쏟기에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오늘 이 설교를 듣고 깨닫기까지 ‘나는 일평생 우리 부모를 미워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고백을 했습니다. 난지 7일 만에 자신을 버렸고 자라면서 자기를 버린 부모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 마음속에는 증오심에 불타게 되었고 일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참다운 행복을 몰랐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새카만 옛날에 지나간 일이고 수없이 세월이 흘렀는데도 자식의 이 마음속에는 부모를 향한 원한과 그리고 부모를 향한 그 원망과 미움의 감정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자식을 향해서 그렇게 오래된 일인데 자기를 낳아준 부모인데도 그까짓 것 하나 잊어버리지 못하느냐고 나무랄지 모르지만 사실 그 부모에 대한 원망과 미움의 감정은 그렇게 사랑받고 그 부모에게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고자 하는 어린 아이의 마음에 때린, 박힌 못이었기에 더더욱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원한과 아픔을 남기는 사람이 지나가는 길손이었다면 60년 가까운 세월동안 원한처럼 그 응어리를 품고 살 사람이 있겠습니까? 부모가 자식에게 받은 욕과 상처는 흘러가는 물에 새긴 글씨와 같아서 부모의 마음속에 잊혀집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와 고통의 기억은 자식의 마음속에서는 돌에 새긴 글씨와 같아서 그 돌멩이에 새겨진 원한과 슬픔 위에 아무리 세월의 물이 흐르고 지나가도 그 흔적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식의 마음이 부모보다 악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부모와 자식의 사랑은 내리 내리 흐르도록 하나님에 의해 섭리되어진 사랑이기 때문에 자식에게 효도를 못 받은 한은 부모의 마음에 잊을 수 없는 원한이 되지 않아도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그 슬픔은 자녀의 마음에 비애가 되어 그의 마음속에 흐르는 것입니다.
여러해 전의 통계이긴 합니다만 10대와 20대의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부모에 대해 물었을 때에 78%가 나는 우리 부모가 밉다라고 대답을 했답니다. 이러한 처지에서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이 부모를 공경하기 전에 먼저 커다란 걸림돌이 있으니 이것은 부모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정상적인 관계도 이어갈 수 없는데 그 부모를 존경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원리적인 존경 이외에 영광 이외에 또 다른 영광이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적인 영광입니다. 이것은 부모가 다른 부모들과는 달리 그 무엇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자식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그런 종류의 영광입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절대로 그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죽는 그 순간에 너희들에게 모두 물려주고 죽겠노라고 유언을 했다고 칩시다. 효도하지 않을 자식이 어디에 있을까요? 자식들은 잘 살게 하지 말고 가난하게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부모의 유산만 바라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효도하지 않을 자식들이 없을 것입니다. 아마 드러누워서 대소변을 못 가려도 그 아버지 자기의 집에 업고 가겠다고 여러 아들들이 쌈질을 할 것이고 며느리는 서로 편을 들어서 그 부모를 자신의 집에 데려가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실제적인 영광은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겨우 성공해봐야 정치적인 효도를 받아낼 뿐이죠. 모셔 가서 정성껏 밥을 떠먹이고, 똥, 오줌을 받아내지만 ‘이 늙은이 언제 죽나’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까짓 더러운 것이 무슨 효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모가 인간의 덕에 있어서 아름답고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과 추앙을 받을 만한 덕성을 지니게 될 때 자식은 스스로 그 부모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실제적인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훌륭한 부모를 둔 자식들은 배나 삼배나 사배나 더 그 부모에게 순종하고 더더욱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불신자들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부모님의 명령을 거스르며 신앙생활을 하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경험해 보기 전에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끊임없는 갈등과 사랑해야 할 가족들과의 끊임없는 관계의 깨어짐 속에서 고통을 받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덕성에 미치지 못하는 일평생 우리에게 폭언이나 퍼붓고 내 보는 앞에서 우리 엄마를 때려서 피멍이 들게 하고 그리고 온갖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로 가정을 파괴하고 혹은 바람을 펴 버리고 그래서 가정을 버린 아버지, 제비부인처럼 남의 남자 품으로 날아가 바람을 피우고 자식인 우리들을 버렸던 그런 몹쓸 어머니들을 공경해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확정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갈라진 그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를 뛰어넘고 미워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는 이 모든 관계 속에서 그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예수를 믿는 경건한 아들과 며느리 중에는 부모를 버린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통계로서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양로원에 던져놓고 온 형제들이 모아서 꼬박꼬박 생활비를 보내주지만 1년이 지나도 한 번도 찾아뵙지 않는 그런 불효자식들이 있는데 요양비만 제때 내 주어도 감당할 수 없는 효자라고 요양원에서 칭찬을 받는답니다. 어떤 자식들은 그렇게 부모를 맡겨놓고 몇 달치 던져주고는 모두 주민 등록지를 옮겨버리고 연락할 수 없게끔 단절해서 그 책임을 국가에 떠넘긴다고 합니다. 이런 새끼들 중에는 그리스도인들도 다수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이 모든 것들을 뛰어넘는 가족들과의 관계를 아프더라도 직면하고 올바른 해결의 길을 찾지 않는다면 우리의 불행은 우리 부모에 대해서 끝나지 않고 내게까지 이어져 온 것처럼 내게서 멈추지 아니하고 우리 후손에까지 미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부모가 부족한 것이 있고 심지어는 여러분에게 고통을 주었어도 주님의 명령임을 알고 그 부모에게 온당한 공경과 효도를 드린다면 자녀들도 여러분을 공경할 것이지만 만약에 여러분이 그리하지 않는다면 자식들도 여러분을 공경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교리를 몰랐던 동양 사람들조차도 알고 있었으니 불효한 집에서 효자가 나는 법이 없고 효자의 집안에서 반드시 효자가 난다는 속담이 바로 이런 일반 계시를 이해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그런 커다란 고통과 누가 보더라도 공경하고 영광스럽게 인정해 줄만한 장점을 아무것도 갖지 못한 그런 잘못된 부모를 둔 우리가 어떻게 존경을 드리는 공경에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분명히 가슴에 새겨 두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사랑은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타인에게로 가거나 혹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사랑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은 그 사랑의 시작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되는 사랑이고 그래서 우리를 통과하고 우리가 사랑한 대상들도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이 하나님 자신에게 돌아가는 하나님 회기적인 사랑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끊임없는 고통을 주었던 우리의 부모를 공경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부모의 과거를 생각할 때 역겹고 토할 것 같은 자식이 어떻게 그 부모를 공경할 수 있겠습니까? 한때는 복수를 꿈꾸던 그 새끼가 어떻게 자기를 낳아주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 부모에게 깊은 공경심을 가지고 하나님께나 드릴 수 있는 그 공경의 마음을 그 못난 부모에게, 사악한 부모에게 바칠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부모가 진심으로 참회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고 우리 앞에도 무릎을 꿇고 내가 너에게 상처를 준 지난날을 용서해달라고 고백을 했더라면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렇게 해도 용서해 줄 것이 없는데 나는 이 세상에 자기 자식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부모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믿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자식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가, 내가 에미로서, 내가 에비로서 네가 어렸을 때 이렇게, 이렇게 못을 박은 것을 용서해 달라고 진실되게 용서를 빌었다는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편리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남의 죄를 정죄할 때는 집요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것입니다. 그런 부모들을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요?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알도다
부모님의 결점을 보고는 부모님과 화해할 수 없고 그리고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편지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괄호 속에 들어갔다고 치고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 아니냐, 그러므로 자녀들아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너희는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과 비교될 수 없는 큰 사랑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자식들이 아니냐 그러니 네 아버지 어머니를 공경하라’ 고 말하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왜 이렇게 상처가 많은 가정에 태어나서 남들이 모두 누리는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과 아버지의 자애로운 그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산산이 찢어진 고통 속에서 우리의 어린 날들을 보내었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렇게 상처받은 가정에서 불신자인 부모에게 신앙의 박해를 받으며 때로는 부모들의 나쁜 습성과 타락으로 어린 아이들의 마음의 가슴에 못을 박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주님을 찾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구약의 다윗 왕은 고백하였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로다’ 라고 말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이 성경을 읽으며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히려 나의 아픈 것을 인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가 우리를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품으로 어린 아이처럼 파고들었고 어머니가 우리를 젖 물려 따뜻하게 돌보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가슴의 젖을 물고 그 말씀의 감미로움을 누구보다도 더 맛 볼 수가 있었습니다. 부모가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공경 받을 만한 선행과 덕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더 큰 아버지의 상을 찾았고, 어머니의 상을 찾았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부모에게 버림을 받고 하나님 아버지로 피하는 그런 다윗처럼 주님의 품 안에서 그 험악한 세상을 지나며 우리 같은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우리의 상처는 그 분의 자비의 증거가 되었고,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의 긍휼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부모로부터 우리가 버림 받은 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는 계기가 되었고, 이 세상에서 아무도 의지할 곳이 없는 외로움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는 독실한 신앙의 재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좋아 보이는 것들을 통해 좋은 것을 주셨지만, 우리에게는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 더 좋은 것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부모 없이도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를 삼고 그리고 성령님을 어머니 삼아 그리스도를 우리의 형제로 삼아 우리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 수 있었기에 좋은 가정에서 좋은 부모를 만난 사람보다 더 덕스러운 길을 걸어가도록 매일매일 주님의 손에 이끌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 모든 삶은 전적으로 우리 주님의 주권에 있고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돌아볼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컸어도 하나님 앞에 불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상처와 아픔이 남이 맛보지 못한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그 진주는 원래의 조개의 몸에 암 같은 사건이 생겨서 그래서 그것들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체액을 쏟아낸 가운데 만들어진 결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진주를 품지 않았으면 뚜껑이 열려 한 점 살점이 사람들 입에 들어감으로써 끝날 것이었지만 진주를 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매우 고귀하게 여겨졌던 것처럼 상처는 또한 아름다운 진주의 원인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인간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 속에서 가장 나쁘고 아픈 것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주셨던 것입니다. 이 드넓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 속에 부모와 우리의 관계를 놓아봅니다. 이때 우리는 인간의 정에 얽매여 미움과 원망을 품었던 마음을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부모의 장점과 덕성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너무나 크고 그 풍랑을 인하여 주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었던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날들을 하나님의 은덕 때문에 우리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단하고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호위호식하고 그리고 부모로부터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들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을 그때에 우리는 오히려 그 고통의 풍랑을 타고 주님의 손을 붙들었습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물론 우리는 압니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완전히 죄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고, 또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옛 사람의 멍에를 온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때이기 때문에 우리의 남은 상처와 많은 고통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압니다. 수시로 우리의 마음에 끊임없는 올무가 되어서 우리를 찌르고 우리를 아프게 할 것이며 그리고 우리에게 상처받은 사람의 독특한 얽매임을 여전히 행사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슬픔과 비극, 상처와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함께 있음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평생 동안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도 아픈 것은 여전히 아픔으로 남을 줄 압니다. 그러나 예전에 우리는 아픔 때문에 원한을 품고 원한 때문에 더욱더 상처를 받는 반복적인 실패의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수시로 주님께 피할 수 있고 오히려 하나님의 그 신실하신 사랑과 은혜를 의지하며 살 수 있게끔 해주실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할 수 없는 때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매 순간 의지하며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의 부모들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부모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악행이나 우리에게 남긴 상처에 집착하는 대신 그리고 그것을 잊기 힘들 때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어떻게 용서해 주셨는지 그 사랑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는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의 부모를 공경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인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 지긋지긋한 갈등들이 모두 막을 내리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로 우리들이 다시 태어나게 될 그때에는 이 원한과 슬픔도 모두 사라지고 그 나라에서는 부모나 신랑이나 가족도 없이 모두 하나의 하늘 가족이 되어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와 사랑만을 경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B. 깊이 사랑함
공경한다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사랑함으로써 그 효도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기 위한 효도이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 평판을 깎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발휘되는 그런 종류의 동정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부모를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이 어려울 때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은 당신의 온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며 죽어 가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원수들이 미래에 당할 끔찍한 형벌을 염려하시며 그들을 위해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비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랑 때문에 우리의 부모는 우리를 버렸으나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를 영접하셔서 당신의 큰 사랑으로 우리를 어루만지시고 오히려 우리가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맛 볼 수 없었을 하나님의 그 큰 은혜,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그 은혜로운 자비, 그리고 비참한 죄인들을 언제나 선대하시고 자기에게 피하는 자에게 피할 바위가 되어 주시고 그늘이 되어 주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우리의 부모들을 용서하고 그리고 만약에 그 부모들이 우리처럼 주님을 만났더라면 아마 우리보다도 더 훌륭하게 우리의 자식들을 사랑하고 피붙이처럼 끌어안고 그 아이들을 온전한 주님의 사랑으로 기르기 위해서 눈물과 기도의 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부모를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부모에게 불효하면 불효를 당하는 부모가 해를 입는 것보다 더 나쁜 일들이 여러분의 영혼 안에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깊이 주님을 긍휼히 여기며 아버지 앞에서 순종하며 사랑하며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원한을 품는 사람들이 되지 마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언제나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네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 때문에 내가 더 많이 사랑해주지 않았느냐’라고 말입니다. 고통스러울 때마다 이 사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에는 모자람이 있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은 마치 이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아낌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고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의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받은 사랑을 생각하며 부모를 깊이 사랑할 마음을 갖게 됩니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찬양)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
III. 자녀의 마땅한 의무
그러므로 공경은, 부모 공경은 자녀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부모님 때문에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나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피 흘려 죽기까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그 분이 그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부모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깊이 사랑하고 왜냐하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이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못 준 사랑까지 우리에게 모두 주셨기 때문입니다.
IV.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 가운데는 좋은 믿음의 가정에서 훌륭한 부모님 밑에 자라난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그런 분들이라면 그 부모님을 더더욱 깊이 존경하고 하나님께 갑절이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여러분의 머리를 깎아서 부모님이 신으실 신발을 삼아도 모자랍니다. 여러분의 살가죽을 벗겨서 부모님의 옷을 지어드려도 모자라고 온전히 그 부모를 공경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고 그 부모를 공경하는 대의를 우리의 자식들에게 가르쳐줌으로써 구원받은 하나님의 가정의 대의를 다시 세울 수 있는 그런 종자 씨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2.아내와 남편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엡 5:3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사도바울이 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이러한 교훈 속에서 가정의 대의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특별히 가정과 그리고 교회에 관한 풍부한 교훈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이야기하다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 속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언급함으로써 사실상 교회와 가정이 하나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II. 가정과 교회, 그리스도
하나님이 세우신 두 개의 기관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가정과 교회입니다. 오히려 국가는 죄가 들어온 다음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원했으므로 하나님이 허용하셔서 국가라는 제도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교회와 가정은 아마 나뉘어지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했고,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교회의 역할은 훨씬 더 중요하게 대두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고 회심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가정은 원칙적으로 그렇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이룸으로써 한 가정이 성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부이기 전에 교회의 한 형제요 자매인 것은 틀림이 없고 부부의 결합이 있기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맺어진 생명적인 관계가 먼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제일 먼저 아내들에게 명령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한 것같이 너희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쳤고, 나아가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는 남편을 경외하라고까지 가르쳤습니다. 요즘같이 남녀가 평등한 시대에 아니 좀 더 심하면 여성 우월주의를 지향하는 시대에 이 무슨 계몽시대의 이전의 이야기인 듯이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남편을 경외하라고까지 할까 우리는 성경의 본문에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그렇게 쓰여졌으니 잔소리 하지 말고 있는 대로 하라고 하는 것은 이 구절을 이용해서 아내를 자신의 수하에 복종시키려는 남편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기회는 공평합니다. 남편들에게만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아내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것은 남편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심 같이 너희도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들은 이 구절을 토대로 남편을 핍박합니다. 그래서 나보고 먼저 복종하라고 말하기 전에 네가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서 사랑하시고 자기를 모두 주신 것처럼 나를 사랑하면 복종하지 않을 아내가 어디있겠느냐고 항변을 합니다.
그러나 이 성경 구절을 하나님이 그런 뜻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내에게 너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그를 경외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남편 기를 세워주시기 위해서 남편 들으라고 짐짓 아내에게 주신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아주 깊은, 뿌리 깊은 여성의 성향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올 때부터 들어온 이후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피 속에는 남성을 자신의 질서에 복종 시키고 싶어 하는 그런 지배욕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한두 권쯤은 인문학 속에서 남성과 여성의 관계와 지배욕에 관한 사회학적 성찰들에 관한 책들을 한두 권쯤은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여성이 이 성을 가지고 집요하게 어떻게 남자를 자신의 지배아래 두려고 해왔는지 그런 것들을 밝히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여성이 남성을 복종시켜 자신의 수하에 두고 자신이 원하는 질서 아래 남편을 두고 싶어 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여성의 부패적인 성향을 내버려둘 때에 가정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지점에 있지 못하고 표류할 것을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남자의 기를 세워주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여자들 보고 너희 속에는 너도 모르는 이러한 본성이 숨어 있으니 이로 인해서 너희의 가정이 불행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하나님의 경고로서 주어진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자들은 하나님이 아내에게 주신 계명,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이 계명 하나를 가지고 마치 하나님이 자기 손을 들어주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남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주심같이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인데 이것은 정도에 있어서 무한한 것이고 시간에 있어서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성에게 ‘네 아내를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아내의 편을 들어주시거나 기를 세워주시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남자의 성품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남성은 결혼하기 전까지는 한 여성에게 꽂히고 모든 것을 쏟아 붓지만 그것이 끝나고 나면 그래서 가정을 이루게 되면 그 다음에는 마음이 가정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오히려 밖으로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개척하고 통치하고 다스리고 번영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본래 하나님이 가정의 질서를 위해서 남성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성은 마음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분산되어 있다가도 결혼을 하게 되면 남편과 가정, 그 속으로 마음이 모두 집중되게 되고 남성은 결혼하기 전 한 여성에게 집중되어 있다가도 결혼을 하면 밖으로 확 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영향이 아니라면 이 두 남녀의 각각 다른 성향은 하나는 구심력으로, 하나는 원심력으로 작용을 하면서 마치 바람이 있는 하늘에 연을 띄우는 것처럼 아주 질서로운 가정과 세계의 관계를 가꾸어 갈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게 되면서부터 남성들은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자연적인 습성 속에 아내를 멸시하고 무시하는 죄 된 성향과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지 않으려는 이러한 모든 무법한 사랑 없음의 성향들이 그를 지배하게 되는데서 모든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남성의 성품을 아셨기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기를 주심 같이 끝까지 무한히 사랑하도록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우리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은혜를 충만히 받은 교회가 완전히 복종하는 것처럼 그렇게 남편을 복종할 여자가 어디에 있겠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경외하기까지 할 그런 여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는 결혼하고 30년이 지났지만 한 번도 나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버리심같이 아내를 사랑한다거나, 사랑할 수 있다거나 라고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누가 그런 종류의 사랑을 예수님 말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 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이 계명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어두운 밤바다에 배를 띄우고 그리고 돛대와 삿대 하나로 항해를 한다고 칩시다. 북극성을 바라보고 항해를 하라고 분부를 받았다면 그 명령은 물 위에 떠있는 배를 띄워서 공중으로 올라가 구름을 뚫고 대기권을 통과해서 펄펄 불타는 북극성에 도착하라는 뜻이 아니죠. 그런 일은 사공은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방향을 지시해 줄 뿐입니다. 마치 노를 저을 때에는 자신이 그 북극성을 향하여 올라갈 수 있는 것처럼 노를 젓지만 그러나 목표는 북극성에 가는 것이 아니라 북극성 쪽으로 자리하고 있는 항구에 안전하게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지표적인 교훈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남편에게 복종하고 난 후에 내 복종은 충분했다고 말할 수 없도록, 누구든지 아내를 사랑하고 나서 이 정도면 나는 그 계명을 다 성취했다고 말할 수 없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완전한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의 유비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III. 부부 관계의 기초
A. 인격적 사랑
많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를 그렇게 사랑해봐 복종하지’ 남성들은 말합니다. ‘그렇게 복종해봐 사랑해 주지’ 라고 말합니다. 영원히 평행선을 달리는 이 대화는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진정한 부부관계의 기초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먼저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는 인격적인 사랑을 기초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사랑의 개념은 서양에서는 이성과 감정 사이에 걸쳐있는 종류의 미덕입니다. 그러니까 감정을 전혀 배재하지 않고 또 인성도 배재하지 않으면서 사랑은 감정과 이성 모두를 포괄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랑이 모두 같은 비유를 가지고 있다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이라는 말 하나 가지고는 표현하기에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아가페로부터 시작해서 스톨게, 에로스, 필로스 등등의 사랑을 세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각각 사랑에 있어서 대상과 그리고 이성과 감정 사이에 균형을 측정하는 그런 구분인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저절로 되는 사랑은 아주 가치가 낮게 평가했고, 오히려 해야 하는 사랑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녀 사이에 충동적으로 솟아오르는 사랑은 사랑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동양인들에게는 특별히 동북아시아 사람들에게는 남녀상열지사라고 하여 약간은 멸시하는 감정이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 사랑은 정이 아니라 단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동양에서 이야기하는 인의 개념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부 사이의 사랑을 측정할 때 그 기준을 연애하는 시절의 격동 치던 그 뜨거운 격랑과 같은 감정을 기준으로 사랑이 식었다, 뜨거워졌다고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혼 생활에 있어서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 번 이혼한 사람들을 상담해 보면 첫 번째 이혼이 어렵지 두 번째, 세 번째는 매우 쉽게 결행을 합니다. 그 사람들은 특별히 악하거나 방탕해서라기보다는 사랑에 대해서 남다른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혼을 반복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기대라고 하는 것이 연애 시절의 솟구쳐 오르는 그러한 분출하는 감정으로서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인격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랑이 사실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아마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어도 분명히 인간은 종족이 퍼지면서 이렇게 분출하는 것처럼 솟구치는 격렬한 연애 감정을 유지하였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이렇게 한 순간에 마음이 꽂히는 격렬한 연애의 감정이 없고 모두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서로 소, 닭 보듯이 한다면 어떻게 연애라는 것이 성립할 수 있겠으며 또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결혼이라는 것이 성립할 수 있겠으며 주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그 계명을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이 감정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는 거기에 많은 오류들이 함께 묻어 들어와서 그래서 이 선한 것과 악한 것을 함께 분출하는 마치 폭발하는 화산의 용암과 같은 성격을 지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결혼 생활 속에서 계속 되어야 좋은 그런 종류의 감정 체계가 아닌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그러한 격렬한 때를 기준으로 하여 남편이 자신을 향한 사랑에서 멀어졌다거나 아내의 마음이 변했다고 생각합니다. 톨스토이는 ‘결혼의 행복’이라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동일하지만 나이에 따라서 그 사랑을 표현하는 양식은 각각 다르다. 불행은 자기의 나이에 맞지 않는 방식의 사랑의 표현을 요구하고 기대할 때 불행이 일어나게 된다’라고 하는 요지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감정은 다릅니다. 연애할 때에는 ‘바다가 보고 싶어’ 하면 몇 시간 후에 바다 앞에 세워주지만 결혼한 후에 ‘바다가 보고 싶어’ 하면 ‘너 미쳤나?’ 그렇게 묻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결혼이라고 하는 그 현실의 그 실제성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애하고 결혼하고 또 세월이 흘러 부부가 함께 늙어가는 이 모든 과정에서 서로의 사랑을 상대방에게 표현하고 확인하는 그런 방법들을 배우고 기술들을 익혀 나가는 것은 실제적으로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러면 인격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선 이런 것은 인격적인 사랑은 아닙니다. 상대방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따르지 않는 사랑은 인격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청소년들이 배우들이 등장한 드라마 한 편에 곧바로 마음이 한 곳에 쏠려 열병을 앓듯이 그 남성이나 여성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이것은 격동하는 사랑의 감정일 수는 있지만 인격적인 사랑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인격적인 사랑이란 상대방과 자신 모두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책임 있고 독립된 실존이라고 생각하고 서로를 존중히 여기면서 자신의 선택과 사랑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함께 하나님을 알아가는 관계가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니 엄밀하게 말하면 인격적이지 않은 것은 사랑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느 한 순간에 연애의 감정이 우리의 마음속에 불같이 일어나서 상대방을 좋아하게 될 때에 그 좋아하는 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것이라고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에 몇이나 될까요? 이처럼 격동하는 사랑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B. 무한한 사랑과 질서
오히려 청교도들의 생각이 훨씬 성경의 교훈에 근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혼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격동하는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 서로를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소중한 존재로 인정하고 같은 신앙의 길을 추구하는 동지애로서 부부의 사랑을 가꾸어 가는 것이 이것이 참된 결혼 생활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결혼의 절대적인 조건이었고, 지금처럼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신랑이 개혁파 정통주의 신앙을 사랑하는 자매와 결혼하는 것 같은 예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요즘은 사랑에 빠졌다고 자기 아내 될 사람이 이단에 속하였는데도 남편 될 사람이 명백히 이단에 속한 교회에 출석하고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도 교회까지 옮겨가면서 결혼을 결행하는 것을 보면 사실은 청교도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결혼관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먼저이고 그리고 결혼이 두 번째였습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있는 그곳에 비로소 진리를 함께 나누며 걸어갈 신앙의 동지가 있고 거기에 바로 남편과 아내의 항구적인 결합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인격적인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무한한 사랑과 질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스승의 날입니다. 그리고 며칠 전 교역자들이 저와 함께 모여서 스승의 날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학생이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다음날 저는 아직까지도 살아계신 스승들에게 몇 분께 꽃다발을 스승의 날 꽃다발을 보내드렸습니다. 우리는 한편으로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그리고 받은 우리는 다시 누군가에게로 흘려보냅니다. 이러한 사랑의 질서의 저 끝은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미약하여 그 근원이 무엇인지 모르고 우리를 통하여 전달되는 이 사랑은 누구에게까지 전달되는지 우리는 시간 속에 묶여 있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끝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았고 그리고 나는 그 사랑을 또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는 그런 커다란 좌표 위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뿐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이 피조물 인간들과 맺으시는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그 좌표위에서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과 자비를, 어떤 사람들에게는 진노와 공의를, 어떤 사람에게는 긍휼과 위로를 베푸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사람을 보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사랑의 좌표축 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좌표 없이는 우리가 얼만큼 이탈했는지,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의 사랑에 대한 생각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자리를 매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아래에서 우리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존재는 물론 남편과 아내라고 하는 이 실존도 하나님과 독자적인 관계를 가진 소중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들로 인정을 하고 좌표 값을 매기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남편으로부터의 도리로부터 떠났다거나 아내로부터의 도리로부터 이탈했다라고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무리 근거를 삼는다고 할지라도 아내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함으로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복종을 불러일으킬 남편은 없고 누구도 잔소리와 바가지로 남편의 마음속에서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 같은 사랑을 길어 올릴 아내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정의 참다운 질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책임 있고 인격적인 실존이라고 하는 이런 사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추게 되면 일평생 남편이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복종하지 않고 살아왔던 아내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면서 회개하게 됩니다. 남편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이 비추고 예수 하시는 일이 기억될 때에 그는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의 좌표축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깨닫게 되고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로부터 이탈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즉각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은 것을 회개하게 되고 사랑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사랑에 미치지 못했음을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각 남편과 아내는 참된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오고 그것이 곧 진정한 아내와 남편의 자리이며 그것이 바로 성화를 통해서 우리를 도달하게 하시고자 하는 참 사람의 자리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회를 주시고 또 가정을 주십니다.
C. 사랑, 은혜의 비밀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그 말씀의 빛을 받으며 우리가 사랑의 질서에서 멀어진 것을 깨닫고 뉘우치는 바로 그때에 아내도 함께 뉘우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남편이 그렇게 회개할 때에 바로 그 순간에 아내도 함께 회개를 한다면 정말 신나는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는 그렇치 않습니다. 오히려 남편은 회개하는 아내의 신앙을 이용할 수도 있고, 아내는 뉘우치는 남편의 이 회개를 다시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는 사랑이 바로 은혜의 비밀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아름다움을 남편과 아내에게서 발견했다고 칩시다. 과연 우리 가운데 그 무한한 아름다움을 자신이 잠재적으로 간직하고 있어서 한 인간에게 끊임없이 보여주어도, 보여주어도 여전히 아름다움을 다 보여주지 못할 만큼 그런 아름다움을 가진 인간이 존재할까요? 아마 그런 인간이 존재한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없이도 독자적인 힘으로 구원을 받을지 모릅니다. 그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그 사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력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전가된 아름다움, 이것을 그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를 사랑하고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와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이 그 생명적인 관계를 통해 흘려보내는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과 은혜의 분량이 무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하나님이 아무리 당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셔도 인식하는 사람이 그것을 아름답다고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게 되면 그러면 그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결혼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사랑하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분이라고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말로만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담 없이 사랑할 수 있고 사랑에 실패해도 누가 나더러 인류를 사랑한 죄를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인류를 사랑하지 못했다 하더라고 그 결과가 나에게 즉각적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런 이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눈에 보이는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은 인류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고 특별히 서로 사랑해야 할 관계인 경우에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 결과가 자신에게 메아리가 되어서 돌아오는 것이니 더더욱 이 사랑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런 사랑을 지속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은혜는 사랑의 감화입니다. 은혜는 언제나 우리에게 사랑을 결과로 남겨놓습니다. 이 사랑은 우리의 의지를 선하게 바꾸어 놓고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행한 것과는 정반대로 갚을 수 있도록 선하게 우리의 의지를 변화시켜 줍니다. 부모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어도 그 사람이 은혜를 많이 경험하고 나면 주님을 몰랐을 때에 미워하고 원망하던 그 부모를 오히려 그런 부모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 부모의 망가진 영혼의 상태, 고장 난 인생을 불쌍히 여길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타락한 후에도 아마 남녀를 각각 따로 따로 독신으로 살아가게 하셨더라면 하나님을 덜 의존했을 텐데 하나님 앞에 타락함으로 악과 가시가 가득한 두 인간을 만나서 부대끼며 살게 하시는 동안에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사랑인지를 서로 배우게 하시고 자신 안에는 이 인간을 만족시킬 사랑이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혼하기 전까지는 주님을 의지하지 않던 사람들이 결혼하고 나서 주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되는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하고 나면 말할 수 없는 달콤한 행복이 기다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거기에는 향기롭고 달콤한 과일과 함께 그 열매를 얻기까지 걸어가야 할 가시밭길과 그리고 엉겅퀴들이 함께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그 밭길을 헤치고 온몸에 생체기가 난 후에야 그 결혼의 향기로운 열매를 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혼을 함으로써 아내든 남편이든 서로를 신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명운이라는 것을 배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교회에 다니면서도 세월이 많이 흘러도 이 사실을 못 깨닫는 사람들이 있는데 유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경험 속에는 부에 관한 두 가지 속담이 상반되게 전승되어 왔습니다. 두 속담 다 들어본 속담입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가르기다’ 들어봤죠? 부부는 어차피 헤어질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갈등하고 싸워도 다음 날이면 잊혀져서 표가 안 난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반대의 속담도 있습니다. ‘부부는 한 이불 속에 있어도 등 돌리면 남이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두 속담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부부의 끈끈한 정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의 갈등에는 전자의 속담이 정답입니다. 그러나 그 수용 능력을 초과하는 갈등에 대해서는 후자가 정답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전자가 진실이든 후자가 진실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매일매일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끊임없는 갈등을 소화하고 다투어도 칼로 물을 베는 것과 같은 사이가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 은혜를 공급받으며 참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자신을 낮추고 자기를 희생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없어도 그대가 나 때문에 그대를 잘 실현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의 성공의 그늘 아래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라고 아내도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말할 수 있을 때에 그때에 정말 아무런 갈등도 그들을 갈라놓지 못할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러나 이 한계를 넘어서는 갈등일 경우에는 등을 돌아 누우면 남처럼 되기 때문에 우리는 깊이 고민하면서 결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쉽습니다. 왜? 하나님이 끊임없이 용서해 주시니까, 그리고 봐 주시니까, 그리고 이미 하나님에게는 나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약속이 보증되어 있습니다.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마 여러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세상 누구의 마음에도 완전한 만족을 준적이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무서운 존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다른 사람들도 여러분에 대해서 똑같이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복종하라고 말씀하시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종종 바람피운 아내를 어떻게 해야 되냐고 상담을 받는 적이 있습니다. 나는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대에게는 헤어질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헤어진 결과는 그대로 받게 되는데 헤어질 권리가 있다고 해서 헤어지면 행복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늘 말합니다. 근데 이러한 높은 결혼의 이상을 성취해 갈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사실 결혼 불능자들입니다. 모두 정도의 차이가 조금씩 있지만 결혼 불능자들입니다. 더욱이 그 결혼이 그냥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이라고 하는 기준에 맞춘 결혼일 경우에는 불능자들입니다. 그런데도 결혼을 하라고 권합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셔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며 살게 만들어 주십니다. 살아온 길을 보면 그 사람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하고 참는 과정인 것 같은데 사실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그런 아내, 남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볼 수 없었을 나 자신 속에 있는 극도의 악함과 더러움들을 보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언젠가 청년들이 모여서 나한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그럴 때 결혼에 대해서 묻는 질문에 대해서 내가 답했습니다. 너무 큰 기대를 가지지 말고 쿨한 마음을 가지고 결혼을 해라 그러면 천천히 뜨거워질 것이다. 그러나 급격한 기대를 갖는다면 쉽게 식을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열렬히 연애하다가 결혼한 사람들이 많이 깨뜨려지는 이유가 그런 사랑에 대한 정의를 잘못 내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있었던 어떤 교역자 얘기에요. 결혼을 한다고 신이 났습니다. 노총각인데 장가를 못가다가 덜컥 선을 봤는데 정말 예쁜 자매가 탁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 완전히 넋이 나갔어. 홀렸어. 홀렸어.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에이 말할 수 없이 기쁘지?’ ‘네’ ‘잠시만 기다려’ ‘왜요?’ 연애하고 선보고 바로 결혼했습니다. ‘결혼하고 한 달 이내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이 올 거야.’ ‘왜 그래요?’ ‘괜히 좋은데 목사님 겁주고 그래요?’ 그러더니 한 달은 무슨 놈의 한 달 신혼여행 갔다 오더니 ‘목사님, 그게 사실이었습니다. 신혼여행하고 이틀째 되는 날 앞이 하나도 안 보이고 캄캄했습니다. 저 사람하고 늙을 때까지 어떻게 사나? 절망이 밀려왔습니다. ‘그건 예고편이다.’ ‘어떻게 해야 되요?’
(찬양) 세상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얼굴 예쁘고 날씬한 자매가 너 섬기려고 시집왔다고 생각하지 말고 불쌍한 자매가 날개 꺾어진 새처럼 네 품을 파고 들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네가 절대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없다. ‘어떻게요?’ ‘신앙생활 잘 하거라’ ‘다른 질문은 너 혼자 풀어가거라’ 지금도 어느 지구 한 모퉁이에서 그 숙제를 풀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IV. 결론
근데 여러분은 아직 문제지도 못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결혼할 걸 생각하면 명복을 빌어.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낙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마음에 오셨을 때 우리에게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사람들도 용서하게 만드셨고,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겪는 아픔과 슬픔을 기쁨으로 삼게끔 우리를 바꿔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 세상에 가장 복 있는 형제자매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을 남편과 아내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아내와 남편을 배우자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잖아요. 이처럼 사랑은 은혜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모든 나빠 보이는 것들을 사용해서 그래서 좋은 것으로 바꾸어놔요. 그래서 나도 온전케 될 뿐만 아니라 나와 만나는 미래의 내 남편, 내 아내도 나빠 보이는 것들을 가지고 있었던 그 사람을 그것 때문에 오히려 좋은 사람들로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함께 둘이 손잡고, 우리 둘이 손잡을 때 수십만 볼트의 전기는 안 흐르고, 연애할 때처럼 격동하는 감정의 마그마 같은 분출은 없어도 여기서 주님을 함께 알아가고 그리고 이름을 불러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들로서 함께 그리스도 앞에 각자 아주 소중한 영혼을 가진 인격적인 존재로 서로 존중하며 그렇게 하면서 남이 가지 않는 그 신앙의 길을 , 부부의 길을, 남편과 아내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정의 근본이 되는 것이고, 바로 그런 부모 아래에서 정말 개념을 가진 제대로 된 인간이 태어나고 자랄 수 있는 환경이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하면서 이런 길을 걷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상처를 은혜의 기회로 삼으심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 27:10)
녹취자: 김인철
I. 본문해설
시편 27편은 다윗이 지은 시 가운데서도 아주 널리 알려진 시입니다. 여러분은 시편의 편수는 기억하지 못해도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라고 시작되는 이 힘찬 믿음의 시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27편의 시작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있는 이 시인은 하나님을 자신의 빛으로 삼고 자신의 구원으로 삼으셔서 자기가 누구도 두려워하여야 할 이유도 없고 또 무서워 해야 할 이유도 없다는 것을 담대하게 노래합니다. 악인이 자신을 둘러 진 친다고 하는 것은 포위되는 것을 의미했고 전쟁을 무수히 경험했던 군인출신이었던 이 사람은 그 포위의 위험을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때 혹은 깊은 밤 병사들이 잠들었을 때 사방에서 울리는 고함소리와 횃불 그리고 군사들의 말발굽소리는 그야말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그는 평안할 것이며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며 참 담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인의 이런 담대함과 강함은 처음부터 원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겠노라고 깊이 다짐함으로써 그런 강함의 비결이 마음속에서 약하게 우리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신앙에서 온다는 것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내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일생을 산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겠사오니 하나님은 그 얼굴을 자신에게서 숨기지 마시고 그리고 당신이 이 시인을 향해 노하심으로 버리지 말아 달라고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어린 시절에 받았던 상처가 이 시인의 마음속에 급히 생각이 났습니다.
II. 잊혀지는 상처와 잊혀지지 않는 상처
우리들이 일생을 살면서 많은 상처를 받고 그리고 우리들이 어차피 우리의 인생살이는 그런 상처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상처에는 잊혀진 상처가 있고 세월이 많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상처가 있는 법입니다. 이 세상에서 기대를 많이 걸지 않았던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는 우리들이 상처를 받아도 심각하게 손상을 입지는 않습니다. 몇 시간 혹은 몇일 괴로워하고 힘들어 하다가 잊어버리기가 일 수 이고 세월이 지나고 나면 마치 약과 같아서 그런 상처들이 아물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상처들이 있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답을 해보십시오. 어린 자식이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그를 더 오래도록 지배하겠습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그의 인생에 더 오래도록 지배하겠습니까? 첫 번째입니다. 왜냐하면 남편과 아내는 한때 뜨겁게 사랑하다 누가 누구를 배반하면 피차 상처를 입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미 성인이 되어서 만났기 때문에 사실 엄밀히 말하면 상처가 남기 보다는 복수심에 불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사랑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아내만 의지하고 남편만 의지하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에는 부모가 신앙입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이들에게 부모는 신입니다.
(예화) 그래서 어느 방위병이 있는데 현역을 못가서 방위병에 편성이 되었는데 그래서 군부대 가서 봉사를 하는데 맨날 그릇이나 씻고 허드렛일을 하는 것입니다. 청소하고 공사하고 그런 노가다를 시키는 것입니다. 친구가 일찍 장가를 들어서 아기를 낳았는데 네 살쯤 되었는데 다행히 현역으로 안가고 방위병이 되었기 때문에 저녁마다 퇴근해서 아들도 보고 하면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게 사는데 이 아이가 헬리콥터만 뜨면 자기 아빠가 그것을 타고 이동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 눈에는 아빠가 그렇게 개구리복을 입었어도 그 사람이 군인이기 때문에 저 정도 헬리콥터를 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렸을 때에 부모를 바라보는 아이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부모에 대한 의존의 마음은 거의 종교입니다. 부모가 그 사랑을 배반하고 나면 그것은 그 아이가 신앙을 갖는데도 굉장한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보면 인간관계를 하면서 사는데 아무리 마음을 주고 해도 쉽게 사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대게 보면 부모로부터 그런 신뢰를 거절당했던 사람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부모가 자식 사랑을 저버렸을 때에 사실은 아이의 마음속에서는 신이 자신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커다란 종교적인 충격입니다.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III. 상처를 은혜의 기회로 삼으심
다윗이 바로 그런 상처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다윗은, 그러고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상처의 사람들입니다. 요셉도 그렇게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고 그리고 또 이 사람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했고 아버지는 형들을 편애하고 다윗을 멸시하는 아버지였습니다. 또 자녀들이 후에 생겼지만 자녀들은 아버지를 전혀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신앙이 자식들에게 안 물려 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아버지의 신앙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내를 만났지만 아내는 자신의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 이해를 전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침에 설교한 것처럼 그런 격정적인 사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어디 하나 마음 붙일 곳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상처를 간직하며 산 사람이었고 아마 하나님을 못 만났더라면 그 상처는 염증이 되어서 그의 인생 전체를 두루 삼켜 버렸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 상처를 은혜의 기회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항상 말씀 드리지만 우리 인간은 좋은 것들을 통해서만 좋은 것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하지만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오히려 나빠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는 줄 수 없는 아주 좋은 것들을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저는 다윗이 나라를 일으켰을 때에 억울하고 빚지고 그리고 장애가 있고 이런 사람들을 모두 끌어안아서 쉽게 이야기 하면 사회에서 짓밟히고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모두 모아서 나라를 세웁니다. 그럴 수 있는 그 심성이 이렇게 자기 자신이 억눌리고 상처 받은 속에서 살아 온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향한 이해가 남 깊었다고 판단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오히려 그의 불행했던 그의 과거가 오히려 사울의 통치 아래서 모진 박해를 받으면서 고통을 받아 이반되었던 그 상처 입은 백성들을 끌어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 없는 사람이 상처 있는 사람을 끌어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상처를 받으면서 살아 왔던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변화 되어서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심성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행복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값지게 사용하시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역설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소중하게 쓰시기 위해서 남이 걷지 않은 길들을 걷게 하시고 나빠 보이는 인생을 길들을 걸으면서 남이 맛보지 못한 하나님의 사랑을 남이 만나지 못한 하나님을 만나게끔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만들어 주십니다.
(예화) 바이올린이나 첼로 같은 악기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줄을 만듭니다. 그런데 줄도 명주실로 만드는 것도 있고 그 다음에 구리로 만드는 것도 있고 가죽으로 만드는 것도 있고 여러 종류의 줄이 있습니다. 똑같은 힘으로 튕겨도 그 줄이 무엇으로 만들어 졌느냐에 따라서 각각 다른 소리가 나듯이 똑같은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섭리로서 튜닝하실 때 그때 우리 각자 각자가 어떤 형편과 사정에 처해 있는가에 따라서 다른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사실은 그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하나님은 오히려 평탄하게 산 사람들이 도저히 낼 수 없는 아름다운 음을 내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섭리 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다윗에게도 쉽게 잊혀질 수 없는 깊은 상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시인이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이것은 내 부모가 나를 버릴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버릴 것입니다 그 뜻이 아니라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회상하면서 부모님이 나를 버렸습니다 라고 단언을 할 때에는 단언 하는 말은 한마디이지만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담겨 있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다윗과 똑같은 과정과 그 어려움을 거친 사람이 아니면 아마 알 수 없을 그런 깊은 상처를 가진 사람만이 토해 놓을 수 있는 그러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그 고백이 결국은 하나님이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히브리어로 보면 이것은 영접하시리이다 아직 일어 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기대도 되지만 이렇게도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이미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지금 영접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현재진행형으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고 계시나이다 라는 이 바이올린의 이 음색은 상처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낼 수 없는 가락입니다. 누가 감히 이런 비유를 할 수 있겠습니까?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이것은 자기가 사랑했던 대상으로부터 받은 지워지지 않는 심경에 깊이 아로새겨진 그 상처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들이 은혜를 받으면 이제 상처가 치유 되었다 그런 말들도 하고 아니면 상처가 나았다고 하는데 그런 것 없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죄가 들어 온 다음에 이 세상에는 상처 받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치료는 없습니다. 치료가 무슨 치료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면 치료 받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냥 심리적인 착각이거나 아니면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상처가 문제가 안 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상처를 받기는 하지만 치료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치료는 없으니까 우리는 치료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은혜에 붙잡혀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상처가 우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상처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어서 이렇게 누구도 고백할 수 없는 아름다운 고백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고 있습니다’ ‘영접하시는 중입니다’ 이렇게 노래 할 수 있는 가락을 울려 퍼지게 할 수 있는 그런 힘들이 이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보기에는 잔인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 상처를 은혜의 기회로 삼으심으로서 돌아보면 이런 아픈 상처가 없었더라면 기대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의 은혜를 깨닫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아시다시피 다윗은 천재적인 사고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철학함에 최고의 전본으로 삼은 인물이었습니다. 동시에 아주 감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남긴 시 속에는 이 사람의 독특한 지문이 묻어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이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축복중 하나가 시편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하다가 괴로운 일을 만나도 그 속에서 위로를 얻고 개인적으로 생활하다가 힘든 일을 만나도 시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시편과 함께 인생을 살았노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삼천년 전의 사람인데도 지금까지 살아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의 뛰어난 시인으로서의 감성 때문일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남들보다도 더 큰 상처를 부모의 무관심과 편애 속에서 이 시인이 얼마나 깊이 받았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부모 속에는 자기의 장인이면서도 집요하게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울에 대한 기억까지 이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다윗은 사울을 미워한 적이 없고 하나님이 버리셨어도 끝까지 기름부음 받은 자로 대접하고 하나님이 버리셨다는 이유로 그를 얕잡아 본 적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집요하게 이 사람 다윗을 죽이고자 자객을 풀고 원수처럼 대했지만 다윗은 언제나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하며 피했습니다. 아마 속으로 정말 복도 지지리 없다 라고 한탄했을지도 모릅니다. 뱃속으로 나아준 부모는 자기를 버렸기에 이제 인연으로 맺어진 이 부모로부터는 사랑을 기대했는데 다윗은 그를 해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으나 그는 다윗의 목숨을 집요하게 노림으로서 이제 이 시인 다윗은 주저함이 없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시인은 바로 그 상처 때문에 하나님의 품을 간절히 파고들었고 그래서 그는 탁월한 권력과 지적인 능력 그리고 수많은 재주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남모르게 받은 상처는 주님이 그 상처를 치료하시고 그 기억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성품을 연주하시는 동안에 그런 상처를 받은 시인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우려 낼 수 없는 아름다운 가락을 온누리에 울려 퍼지게 만들었습니다. 삼천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그 가락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예화) 우리는 종종 나무로 깎아 만든 조각들이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을 종종 봅니다. 우리는 언젠가 광화문의 현판이 쩍 갈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들이 분노하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비판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갑자기는 그런 작품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좋은 조각을 하는 나무, 글자를 새기는 갑판을 하는 나무는 소금물에 절이고 그늘에 말리고 그래서 터지는 것들은 다 버리고 다시 소금물에 절이고 그늘에 말리고 이것을 일년씩이나 되풀이 하고 마지막에는 기름 가마에 나무를 튀겨서 그래서 갈라 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그곳에 글자를 새겨서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그 갑판들이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들은 그런 재료들이 좋은 재료라고 생각하지만 재료의 입장에서는 땔깜으로 쓰여지는 나무들은 겪지 않아도 되는 혹독한 짠물을 마시고 그리고 햇빛에 말리우고 추운 겨울과 여름을 보내고 마지막에 모두 끝까지 살아남은 나무들은 뜨거운 기름 가마에 던져져 튀겨지기까지 하는 연단의 과정을 거치면서 드디어 이제 소중한 문화적인 유산을 아로새길 수 있는 말하자면 재목거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인간이 불행해 지는 것은 상처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기 때문에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이 살아 온 인생의 많은 길들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살아 온 지난날의 모든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쉽게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그 상처가 마음에 독이 되어서 오히려 우리의 인격을 굳게 만들고 우리의 성품을 뒤틀리게 만드는 일들을 언제든지 보게 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오히려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아마 그런 아픈 날들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에 대해서 그렇게 감격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으셔서 우리를 당신의 아들로 당신의 딸들로 삼아 주신 뒤에는 부모가 내게 준 모든 상처를 능가하는 사랑과 돌봄으로 나를 선대해 주셨고 오히려 부모님께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흔히 주시지 않는 특별한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 주심으로 상처 받는 그 고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성품과 그리고 이 세상의 아버지들은 모두 흔한 아버지를 흉내 내다가 실패한 사람들뿐이지만 오히려 아버지가 못해 준 그 사랑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온전히 보여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의지하며 살도록 매일매일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 순간도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시지 아니하시고 나를 버린 내 부모는 자주 나를 잊고 종종 생각했으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나를 자녀 삼으신 이후로부터 한 번도 나를 잊지 않으시고 그 이름을 가엽게도 당신의 마음속에 아로새겨 언제나 우리를 결손가정의 자녀 생각하듯이 돌보며 우리를 이끌고 지켜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전에 우리가 받았던 상처 때문에 우리의 부모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상처 때문에 부모에게 고마워 할 수 없었을지는 모르지만 그 상처에 대한 보상을 주님이 엄마 아빠의 사랑과는 비교 되지 않는 더 크고 완전한 은혜로 우리에게 은혜로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가 나에게 해준 값진 희생 그 댓가 때문에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세월이 많이 흘러 가 우리가 흙 이불을 덥고 무덤에 눕고 그리고 우리의 눈이 감기는 그날까지 우리의 어머니가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시는 어머니가 아니었다는 것 때문에 받은 상처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고 자비롭게 대해 주지 않은 이 기억들은 우리들이 일평생동안 짊어지고 살게 될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지 그 상처들은 우리의 마음과 삶속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들이 상처 속에서 원한을 키우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상처는 받았지만 주님은 그 상처 때문에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노래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고통과 아픔이 없었더라면 결코 주님을 찾지 않았을 짐승 같은 우리의 마음을 때려 주시는데 이 상처를 사용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세상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넘어 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하나님 어머니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면서 오히려 주님께로 피하며 매일매일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고난과 시련이 겹칠때마다 우리는 부모도 버린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시고 언제나 영접해 주셨던 주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열어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 좌표에서 보면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당구알 같은 우리를 주님께로 이끌기 위해서 우리의 부모들의 그 아픈 모습들을 사용해서 우리를 당신의 섭리 속에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인간의 지혜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큰 섭리, 사람의 힘으로는 다 이해할 수 없고 인간의 지력으로는 다 파악할 수없는 탁월하고 놀라운 지혜 속에서 우리 부모들과 우리가 행한 악과 모든 잘못들을 오히려 섭리의 구슬 삼아서 하나님의 경륜에 그 실속에 꿰임으로서 우리가 주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여기에 서 있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에 하나님의 그 섭리의 은혜를 깊이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찬양)
이제 어두움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이루신 주님의 사랑
주님 말씀 따라 생활하며 주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되며 그렇게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화) 이번에 우리 교회에서 은혜를 많이 끼쳤던 줄리어스 김 교수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너무 신앙이 훌륭하셔서 그 신앙을 자식들에게 물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할아버지가 너무 나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쫒아 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내 살 길은 공부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공부해서 그 당시에 경성제대에 합격했습니다. 이제 이만큼 내가 합격했으니 아버지에게 내려가면 아버지가 등록금을 대 주겠지 하고 내려갔더니 종들을 부르면서 내가 모르는 놈이 왔는데 쫒아 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연로 하셔서 그리고 미국에 가셔서 다른 학교를 가시고 유학을 가시고 미국에 가서 자리를 잡으면서 좋은 신앙을 갖게 되었을 때 자식들에게 해 주시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내가 만약에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더라면 나도 나의 아버지를 용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다 용서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훌륭하게 변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나쁜 아버지보다 더 좋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풀어 주신 그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었다 라고 고백을 하셨다고 합니다.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침체에 빠지지 않는 비결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잘못했든지 누가 잘못했든지 그것과 상관이 없이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 것입니다. 후회하되 회개할 때만 후회하고 돌이킬 수 없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사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반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처를 많이 받고 풍랑이 있는 세월이 지났지만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못 만났더라면 그 풍랑 속에서 재앙을 만나서 파멸하였을 텐데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셨구나
(찬양)
그 풍랑이 오면 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여러분에게 고난과 칼빈의 주권사상에 대해서 가르쳐 드렸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고난과 시련과 그 모든 것을 담담하게 피하지 않고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리고 그의 관심사는 그것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 맞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어떻게 이 십자가를 굳게 붙들고 살아가는가? 그것이 인간의 관심사이어야 합니다.
(찬양)
거친 바다 험한 산 비가 내쳐도 십자가 가지고 끝내 이기리
불속이라도 들어 가서 불속이라도 들어 가서 세상의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IV. 결론: 은혜에 감사하라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함께 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으로 굳게 붙들어 하나님 의지 하면서 살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상처 받은 여러분의 인생을 더 아름답게 연주해서 인생을 평탄하게 살아 온 사람들 인생을 통해서는 들려 줄 수 없는 믿음의 가락들을 더 슬프고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울려 퍼지게 하여 희망을 갖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섭리 속에서 이런 삶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모두 접고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깊이 사랑하십시오. 상처 난 것 같고 버림받은 것 같을 때 마다 그 풍랑으로 인해서 주님의 품에서 누렸던 그 기쁨과 자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고난도 시련도 이기고 믿음의 길을 걷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아버지가 눈물 흘릴 때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3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다윗이라는 왕이 겪은 실제의 일들을 보도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주요, 또 가장 강력한 나라를 구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정생활은 그리 행복하지를 않았습니다. 여러 명의 부인들이 있었고, 거기에서 낳은 소생들이 29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대단히 큰 가족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다말이라고 하는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다윗의 큰 아들이 암논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 이 여자와는 배가 다른 오누이였습니다. 이 여자 아이를 마음으로 깊이 연모하다가 자신이 병을 든 것처럼 누워 간호를 받고 있는 중 이 여자 아이 배다른 누이동생을 겁탈하게 됩니다. 이때에 이 여자 아이와 같은 어머니 속에서 나온 오빠 압살롬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이 오라비는 누이동생의 복수를 꿈꾸게 됩니다. 아버지 다윗은 경건하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가정에서 일어났을 때에 그 고통과 노여움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에서 큰 아들 암논을 향한 사랑이 완전히 식은 것을 확인한 후 어느 날 압살롬은 큰 형을 주연을 베풀어 그를 살해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는 그 길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다윗은 못된 짓을 한 큰 아들도 미웠지만 그 이후로 형을 죽여 버린 이 압살롬은 더더욱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내리 사랑이라는 말이 있듯이 세월이 지나면서 아버지는 다시 이 아들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신하들이 두 사람을 화해시켜 이제 함께 다시 나라에 들어와서 사는 관계로 발전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이미 입은 피차의 상처는 골 깊은 것이었고, 이후로 압살롬은 정상적으로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줄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는 끔찍하게도 반란을 기획하게 됩니다. 여러 해 앞두고 이미 착실하게 거사를 준비했고, 아버지 휘하에 있던 장수들 중 불만 세력들을 규합해서 정부를 전복하고 아버지의 왕권을 탈취할 꿈을 꾸게 됩니다. 막상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 다윗은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한 적인 없었기 때문에 황망히 벗은 발로 왕궁을 빠져나와 도망을 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 다윗은 신앙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끔찍한 불행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앙으로 그 고난을 견디게 됩니다. 약삭빠른 이 압살롬이라는 자식은 아버지가 워낙 인자하기 때문에 자신이 반란을 일으켜도 커다란 격정 속에서 자기를 미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미처 챙기지 못하고 남겨두고 간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과 이제 백주에 동침해서 아버지의 분노를 자극 하고자 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하나님은 그래도 다윗을 불쌍히 여겨서 이 난이 평정되도록 하나님이 그를 도와주셨습니다. 이제 반역의 무리들과 싸워 승리했고, 도망치던 압살롬은 말 위에서 달리다가 미처 보지 못한 나무 가지에 목이 매달려 걸리게 되고, 이제 그가 결국은 반란군을 토벌하는 군대에 의해서 피살되게 됩니다. 이제 반란의 괴수는 죽었고, 난은 평정되었습니다. 문제는 누가 이 승리의 소식을 왕에게 전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병사 중 마지막 병사가 이제 왕에게 이렇게 모든 난이 토벌되고 그리고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우회적으로 완곡하게 전달하였습니다. 이때 다윗은 문루로 걸어 올라갔고, 거기서 홀로 통곡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 내 아들아,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하고 통탄하는 통곡을 쏟아놓았던 것입니다.
II. 가정을 주심은
우리는 여기에서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사랑이 그렇게 큰 것이라면 도대체 이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또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많은 제도들을 허락해 주셨지만 그것들은 역사의 전개 속에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들입니다. 그러나 가정의 제도는 하나님이 직접 내려주신 제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가정에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올바른 이치를 터득하고 우리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시기 위해서 가정을 주신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나라에서 로또복권에 당첨이 되어서 대박이 터진 사람들이 그 이후에 어떻게 살게 되었는지를 추적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참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까짓 거 5000원, 만원 이렇게 맞은 거는 말고 몇 십억씩 당첨된 사람들이 꽤 많기 때문에 그들을 일일이 추적을 해서 그 이후의 삶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찍었는데 결론은 그렇게 예상치 못했던 대박을 맞은 사람들 중에 아무도 행복해진 사람은 없었더라 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그렇게 해 가지고 커다란 복권에 맞아서 엄청난 돈을 손에 넣게 되었을 때에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행복해지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꼭 로또의 대박이 아니더라도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부동산 경기를 타고 조상 대대로 논밭 갈아먹던 농부가 한꺼번에 그 토지가 신도시에 수용이 되면서 현금으로 180억 원의 보상을 받았답니다. 이거는 자신이 싫다고 해서 안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받은 아버지는 이 돈을 가지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니 다른 곳에서 땅을 사서 농사를 짓겠다고 했을 때 자식들은 그건 안 된다고 하면서 그 현금을 나누어 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결국 자식들의 성화에 못 이기다가 아버지는 그 돈을 자식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했고, 그 분배가 공평치 않다고 형제들이 형제들을 걸어서 법정에 고소를 하게 되었고, 결국은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는 자식들의 그 처사에 분통이 터진 아버지는 집안에서 목을 매달아 죽어버렸고, 그 소식을 듣고 아내는 충격으로 중풍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평화롭던 가정은 한 번에 180억이라는 현찰이 생기면서 산산이 풍비박산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정을 주신 것은 바로 이렇게 인생이 무엇이고 어떻게 인간이 살아가야지만 진정으로 행복한지를 모르는 인간들에게 참으로 사람답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남녀가 서로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해 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습니다. 그러면 자식은 거기에서 정말 인간다운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양육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 품에서 젖을 물고 자라기 시작하는 동안에는 엄마가 세계의 전부입니다. 그러다 아이가 걷기 시작하고 이윽고 엄마 무릎에서 따로 설수 있게 되고 그때에 아이는 엄마의 어깨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계를 보게 되는데 이게 바로 아버지라는 세계입니다. 엄마하고 있을 때에는 엄마와의 관계에서만 선과 악을 분별하였고 배웠지만 이제 아이가 걷기 시작하고 아버지를 보면서부터는 이제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사람이, 그리고 자신과 다른 사물들이 관계를 맺을 때에 그것이 올바른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를 아버지를 통해서 책망을 받고, 어머니를 통해서 용서하고 감싸 주는 것을 경험하면서 사랑과 정의를 함께 배워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아이들이 참으로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직 글도 모르고 문장도 모르던 그 시기에 부모의 삶을 통해서 사랑과 정의를 배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인간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사람다운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참으로 인간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부모의 구도자적인 자세를 통해 배우면서 거기에서 인간의 삶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삶의 이치들을 배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 이후에 자라나면서 배우는 많은 지식과 인생관, 그리고 자기들이 모은 재물 같은 것들이 어느 방향으로 사용되고 자신의 삶을 위해서 기여하게 되는지 그 길들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가족이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서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부모로부터 옳음과 그름을 배우고, 부모에게 공경하고, 부모를 순종하고,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고 형제들과 함께 우애하며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게 되는 일 없이는 그가 결코 인생에서 물질이 많고 높은 지위에 오른다고 해서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오늘날 자식들을 유학이니 혹은 조기 교육이니 하면서 부모와 떼어놓는 이런 것들은 정말 성경적으로 볼 때 잘못된 교육의 방식입니다.
III. 내 기억 속의 아버지
제가 바로 그런 교육의 희생자였습니다. 부모님들은 지방에서 시골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고 그리고 제가 유치원 때까지 부모님이랑 있었지만 더 좋은 교육을 시킨다는 이유로 저를 서울로 공부하러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어린 시절 전부를 우리 할머님과 함께 보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부모님들이 나의 교육에 대해서 뭐 어마어마한 관심과 집중이 있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자식의 교육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면 자신들이 사업을 처분하고 서울 올라와서 살면서 공부를 가르치면 되잖아요.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막연하게 이 지방보다는 서울이 훨씬 더 아이에게 좋은 장래를 주지 않을까 라는 한 가닥의 기대를 가지고 보낸 것입니다.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중학교 시험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3학년 4학년 밖에 안 된 초등학생들을 학교 모아놓고 ‘삼당사락’이라고 가르쳤습니다. 3시간을 자면 중학교 시험에 붙고 4시간을 자면 떨어진다. 그리고 학교 수업이다 과외다 했고,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게 사회 교과서 같은 것들은 거의 깡그리 외워야 했고, 음악 교과서는 덮어놓고 그 곡을 오선지에다가 그 음표 길이와 그 다음에 높낮이를 노래로 외워서 그 악보를 옮겨 적을 수 있도록 그렇게까지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도대체 그 교육이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인지 지금도 사실은 의심은 많이 듭니다. 그렇게 하니까 결국 부모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오직 방학 때 밖에 없습니다. 그래 방학도 방학 때 가서 방학 끝날 때까지 거기 있으면서 공부하다가 오면 얼마나 좋아요? 적절히 교육을 시키면 되잖아요. 그렇게 허락이 안 됩니다. 그래서 짧으면 5일, 길면 10일 시골에서 장날이 두 번 설 정도까지만 집에 있다가 그 다음에 올라와야 됩니다. 제가 살던 그곳은 서울에서 지금은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지만 그 당시에는 10시간 가까이 비포장도로를 달려가야 했습니다. 차멀미를 엄청나게 많이 해서 내일 집에 간다. 그러면 오늘 저녁서부터 이 아이가 토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도 가면 거기에는 엄마가 있고 아빠가 있고 그리고 동생들이 있고 또 시골에서 사귄 친구들이 있어서 그렇게 정겹게 놀았는데 어쩜 그렇게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지 이제 열흘이 꿈같이 지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 전날이면 항상 혼자서 헛간에 앉아서 혹은 뒷방에 앉아서 울었습니다. 어른들은 별로 그런 거에 관심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서울로 돌아오면 며칠 동안 먹지도 못하고 집 생각하면서 또 우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모두 잠들면 바깥에 나와 할머니하고 살았으니까 식구들이 잠들면 마당밖에 나와서 우리 엄마도 저 달을 보고 있겠지, 우리 동생도 저 달을 보고 있겠지 그러고 울었습니다. 도대체 그렇게 교육을 시킨 것이 내 인생에 무엇을 주었는지 나는 묻고 싶은 것입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준 게 없습니다. 오히려 빼앗아 간 게 되게 많았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늘 그리웠습니다. 그 대신 할머니 사랑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6학년 때쯤 되었을 때 가족이 타의에 의해서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사업이 망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합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합쳤는데 이미 그때는 제 마음 속에서 부모를 그렇게 필요로 하는 마음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저는 탁월하게 공부를 잘한 거는 아니지만 그렇게 못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범적으로 비교적 자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한번 따귀한 번 맞아본 적이 없습니다. 최악의 상황이 노트로 머리를 한 번 툭 하고 맞아 본 것이 전부 다였습니다. 어머니한테도 종아리를 걷고 회초리로 맞아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렇게 살았는데도 결국은 어떤 것이 남았느냐 하면 아버지가 한 없이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거리감이 느껴져서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아버지 앞에서 책상다리를 하고도 앉아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너는 내 앞에서 무릎을 꿇어라 절대 그러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나는 제일 편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하고 같은 방에 둘이 마주앉아 있으면 어떤 느낌이 드느냐면 초등학교 때 학교 담임선생님이 새 학년이 되고 나서 집에 가정 방문 오신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머릿속에는 어떻게 내가 핑계를 대고 이 자리에서 벗어날까?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다닐 때에도 지금도 이해가 안가는 게 아버지는 늘 사업에 바쁘셔서 그랬다고 하지만 어머니 같은 경우는 매주 올라오시기는 힘들었겠죠. 왜냐하면 거리가 워낙 거리가 머니까 그래도 나 같으면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먹을 거라도 싸들고 그렇게 와서 자식은 학교를 필요한 거는 뭐 없나, 그때는 가정에 집안이 잘 살아서 여유도 있었거든요. 그렇게 하고 뭐 필요한 것도 사주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여유가 됐는데 지금도 이해가 안가요.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습니다. 기껏 부모와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한 석 달에 한 번씩, 혹은 두 달에 한 번씩 물건을 하러 서울로 올라오실 때 오시는데 오셔서 하는 일은 석 달 동안 내가 학교에서 시험 본 것 집게로 집어서 모아서 벽에 걸어둔 것, 그것 펼쳐서 검사하는 것이 아버지와 만남의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6학년이 되어서 할 수 없이 같이 살게 되었는데 이제 이렇게 행복하고 기쁜 게 아니라 벌써 적응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어머니가 나를 붙들고 ‘뭐, 너 보고 싶었다, 뭐, 널 사랑한다’ 뭐 눈물을 흘리시면서 그러는데 가슴에 하나도 다가오지 않아요. 지금까지 다가오지 않아요. 그러면서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부모에게로부터 이런 것들을 잘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저는 이제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밀려오는 이 세상과의 모든 문제들을 나 스스로 배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책을 읽는 것이 저의 구원의 방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 2학년, 3학년 졸업하고 나서까지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성적이 지금도 보면 썩 좋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는 그 공부를 왜 해야 되는지를 몰랐었습니다. 그 대신 다른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때로는 무릎을 치면서 경탄을 하고 마치 내 자신이 인생의 이치를 터득한 것 마냥 교만하기도 했지만 저의 인생은 점점 곤고해져 갔고 부모님들은 다시 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속에 살아가면서 저는 마음 깊이 아버지를 미워하고 그리고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정과 사랑이 깊으면 서로 결점이 보여도 그 정과 사랑의 물에서 이것들이 녹아요. 그런데 이런 정과 사랑이 형성이 안 되어 있으면 자식이든지 부모든지 그 결점이 그대로 가슴에 와서 꽂힌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왜 저렇게 사실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무관심하거나 혹은 미워하면서 일생을 지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21살이 되던 해에 제 인생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제가 예수님을 믿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특별히 전도해 주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별로 아니었는데 책을 많이 읽다가 마지막에 톨스토이라는 사람의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내 인생으로 살아보려고 했던 이 모든 인생의 무게감을 견딜 수 없다고 판단을 내리고 하나님을 의지할 신앙의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큰 교회나 의리의리한 성당은 나와는 안 맞는 것같이 생각이 되어서 동네 멀리 떨어져 있는 아주 작은 교회당을 홀로 찾았습니다. 내가 찾았을 때는 시월이 깊어가는 어느 날 수요일이었는데 예배당 안에는 20여명 정도 성도들이 모여 있었고, 그리고 삐거덕거리는 풍금 반주에 맞춰서 사람들이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어쨌든 아버지의 집에 온 것처럼, 고향집에 온 것처럼 따뜻한 포근함을 인생 처음 경험했습니다. 가정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그 포근함을 거기에서 깊이 경험하면서 주님을 의지할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후로 그 교회에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고 나의 죄를 위해서 자신을 버리셨던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달으며 눈물로 하나님을 반역하며 살아왔던 나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어느 해 2월이었습니다. 꽤 쌀쌀하고 추운 때였는데 동네에 있는 어느 교회에 찾았습니다. 그리고 마룻바닥으로 된 그 교회에 홀로 무릎을 꿇고 앉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때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생애 처음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얘야, 너는 이제껏 네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하며 일생을 살았잖냐. 그랬기 때문에 너는 나를 만났고 너의 아버지는 너를 본척하지 않았지만 나는 너를 지극히 사랑해서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게 만들어 주었으니 이제는 너의 아버지를 용서하거라”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최초로 아버지의 모습이 또렷하게 저의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물론 그땐 아버님이 살아계셨죠. 그리고는 기도하면서도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아버지를 미워하며 일생을 살았는데 그러면 우리 아버지는 누구에게 그렇게 사랑을 받았을까? 그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당신 자신의 성격과 가정에 대해서 무관심한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서 할머니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았던 것 같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아버지의 외로운 마음이 나의 슬픔이 되어서 마음에서 소리치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최초로 그 아버지가 이제 나에게 상처를 준 아버지가 아니라 불쌍한 영혼을 가진 아버지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눈물 흘리면서 기도했는지 기도하는 자리가 흠뻑 젖도록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속에서 생애적인 결심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거의 버렸고, 내게 상처를 주었으나 나는 이 아버지에게 사랑으로 복수를 하리라’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득하게 잊혀졌던 옛날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사업에 망하고 나서 고통을 끔찍이도 겪으셨고 매일 밤마다 빚쟁이들이 집에 찾아와서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고 위협을 하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를 조용히 부르셨습니다. 그러더니 저보고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여튼 담배를 엄청 피우셨을 때인데 그날도 방안에 담배 연기가 가득한데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얘야, 네가 알다시피 내 사업에 망해서 지금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단다. 죽을 것처럼 괴로웠는데 하도 답답해서 점쟁이를 내가 찾았단다. 그래서 점쟁이에게 점을 봤더니 점쟁이가 하는 말이 당신에게 아들이 여럿 있는데 다른 아들은 별로 소용이 없고 당신의 큰 아들 때문에 호강을 하게 될 것이고, 정말 편안한 여생을 보내게 될 것이니 큰 아들 때문에 소망을 가지라” 얘길 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때 100원짜리 종이돈이 있었습니다.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한 장이었는지 서너 장이었는지 기억이 안나요. 그런데 평소에는 어쨌든 잘 받아보지 못한 그런 액수의 돈이었는데 그거를 접어서 제 손에 들려주실 때 제 느낌에는 그것이 뇌물처럼 보였습니다.
어쨌든 그날 그렇게 스물 몇 살 때에 눈물로 기도를 하고 아버지를 영혼으로 생각한 다음 그 아버지에게 효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들이 알듯이 우리 아버지는 참 효도하기 힘든 아버지였습니다. 70을 바라보시던 어느 날 저를 찾아오시더니 “얘야, 너 한문 잘하지?” “예” 제가 한문을 참 좋아하거든요. 수첩 하나를 손에 내밀면서 “내가 부르는 데로 써라.” 그래요. 시장, 비행장, 기차역, 버스정류장, 병원, 경찰서, 대사관, 시장, 약국, 그 단어들을 한자로 쓰라는 것입니다. 써서 “아버지 이것 뭐하시려고 그러세요?” 그러니까 “니가 알 것 없다”. 그러고는 그 길로 한 번도 외국에 안 나가보신 분이 중국을 혈혈단신으로 들어가셔서, 무역로를 개척하시고, 그 유명한 보따리장수를 시작을 하신 것입니다. 무역협회에 아예 무역업자로 등록까지 하고 그리고 본격적으로 무역을 하시기 시작했는데 남 같으면 그 연세에 경로당에 앉아서 화투나 치고 있을 분이 그렇게 정력에 넘쳤습니다. 그래서 살림이 보탬에 됐냐고요? 몇 년 흐른 다음에 저를 붙들고 1억을, 이제 손해가 1억을 보게 됩니다. 제가 급히 해결해야 된다고 저를 보고 “얘야, 네게 부탁한다.” 그러셨습니다. 그러니 당시에 제가 교회에서 월급 170만원 받을 때였는데 어디 제가 1억이라는 돈이 있습니까? 그래도 어쨌든 형제들하고 그거를 감당을 해서 어떻게 정리를 해서 해결을 해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간절히 부탁한 게 그것입니다. “용돈이 없으면 제가 드리고 생활비 드릴 테니까 아무 일도 안하시는 게 우리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여튼 아무리 연세가 들으셨어도 새벽 4시에 일어나시는 분입니다. “큰 애야.” “예” “150만원만 다오.” “아니 150만원이 누구 애 이름입니까? 그거 왜요?” “8대조 할아버지 산소가 무너져 간다 고쳐야 되겠다.” 8대조 할아버지는 후손이 수천 명일 텐데 그 후손 중에 왜 내가 뽑히는 거예요? 무슨 유산을 물려줬어요? 뭘 했어요? 그랬더니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 “나는 산 사람한테 150만원 구제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 이미 지옥의 아랫목에 누워 있는 분의 그 묘지를 왜 꾸며줍니까? 그거 꼭 하고 싶으세요?” “그래 하고 싶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나는 정말 저는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버지 그 일을 하고 아버지 즐거우시다니 그냥 마음속으로 오락비 낸다는 마음으로 해드리겠다고 그랬습니다. 결국은 못 고치고 돌아가시긴 했지만 그렇게 어쨌든 이 효도하기 힘든 분이었습니다. 저도 결혼하고 올바른 집 가지고 살아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다가 아시다시피 제가 교회에서 10년을 살지 않았습니까? 여기에 와서도 3층에 여기에서 제가 가족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이 정해진 집도 없이 그렇게 셋방으로 전전하는 것이 마음이 아파서 동생들과 뜻을 모아서 크지는 않지만 작은 집이라도 하나 마련해 드리려고 열심히 모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책을 쓴 인세도 모으고, 모으고 해서 간신히 대출을 좀 받으면 작은 집을 살 수 있게 됐는데 마침 이제 집을 사려고 하는데 또 사고를 터뜨리셨습니다. 그래서 그 돈을 모두 갖다가 빚 갚는데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고는 결국은 세월이 흐르고 그래도 마음이 아파서 어떻게, 어떻게 해서 인천에 크지는 않지만 17평짜리 집을 사드렸고 거기에서 사시다가 결국은 돌아가셨죠.
한 번은 건강하시던 분이 갑자기 위암 판정이 나와서 그래서 원효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셨습니다. 비교적 초기였기 때문에 수술이 잘 되었고, 위의 1/3을 절제를 했습니다. 그래서 노인네가 딱해 보였는지 구역식구들이 교구들이 교구의 지체들이 문병을 가서 그러면서 이제 올 때마다 봉투를 하나씩 이만원, 삼만원 이렇게 넣어주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건강하셨기 때문에 평생 그런 섬김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염려하는 마음으로 제가 찾아갔더니 이분은 당신이 아픈 것을 잊어버리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자기에게 찾아와서는 가는 사람마다 침대 속에다가 봉투를 넣어주고 간다고 이렇게 많이 들어왔다고 그러면서 대견해 하셨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시는데 그때도 저도 여기서 목회하면서 정신없이 바빴죠. 그래서 아버지가 이렇게 입원해 계신 때도 살면서 얼마나 있으랴. 내가 할 수 있으면 매일 가야지. 한 30km 떨어진 곳인데 매일은 못가고 한 이틀에 한 번씩은 꼬박 꼬박 간 거 같습니다. 한번 갔더니 어머니랑 다투고 계세요. “왜 그러세요?” 그랬더니 머리에서 하도 냄새가 나서 머리 좀 감으라고 했더니 몸은 괴로운데 귀찮게 군다고 소리를 버럭 지르시더래요. ‘아버지 정말 냄새가 나거든요. 머리 감으러 가시지요.’ 얼른 내려오셔서 휠체어에 앉으셔서 휠체어를 저는 밀고 수돗가로 갔습니다. 목에 수건을 두개 걸어드리고 그리고 이제 비누로 씻기고 그리고 머리를 감겨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어깨 뒤에서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분은 자신이 나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 그리고 자식이 내가 일생동안 당신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고 눈물로 살아왔는지를 모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머리를 감겨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세수도 씻겨 드리고 코도 풀어드리고 손도 씻겨 드리고 마지막에는 물수건으로 다리까지 깨끗이 씻겨드리면서 그러면서 마지막에 머리를 마른 수건으로 털면서 말려드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가까이에서 아버지를 살 깊게 만지면서 섬겨드린 것이 처음이었고 또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머리를 털어드리면서 그러면서 머리를 말려드렸습니다. 그리고 양치질도 씻겨드렸습니다. 그때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시면서 “얘야, 정말 시원하구나”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명절이 오면 얼마나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시는지 며느리하고 아이들이 아직까지 잠옷 바람으로 곤하게 자고 있는 캄캄한 때에 와서 대문을 두드리면서 명절 준비 시작하자고 그러시던 못 말라던 분이셨습니다. 어느 날 명절이 되었을 때 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생동안 우리에게는 시간이 참 많았는데 그 시간들을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싶을 때에는 아버지가 나를 좋아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나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을 때에는 내가 받은 상처 때문에 내가 아버지를 피하면서 이 긴 시간들을 허비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늦게 우리들이 서로 사랑해야 할아버지와 아들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심을 했습니다. 구정이면 모두 모여서 설을 쇠는데 우리 아버지의 연세에 이 설을 몇 번이나 내가 같이 쇨 수 있을까? 그러고는 해마다 아버지에게 작년보다는 더 많은 세뱃돈을 드리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100만원을 도달하던 그날 100만원을 봉투에 넣어서 세배를 드리고 100만원을 쥐어 드리면서 그랬습니다. “아버지 여태까지 아버지 받으신 최대의 세뱃돈입니다. 100만원인데 쓰십시오.” 그랬을 때에 아버지는 “너희도 어려운데 뭘 이런 걸 주냐”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는 이미 돈을 집어넣은 다음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이제 매년 세뱃돈을 갱신해서 제 기억으로 150만원까지 드려보고 그 다음부터는 아버지와 함께 명절을 지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살아있는 날 동안에는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이 은혜를 받지 못했을 때는 부담스러웠고, 죽어버리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살아있는 것이 마음에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2월에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되었고, 아버지 없이 첫 번째 어버이날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때 돌아가신 것도 잠깐 잊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5월 달에 아버지 모시고 같이 식사라도 한 번 하자” 그때 아내가 정색을 하면서 “당신 정신없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가 몇 달이 지났는데 어디 아버지 계셔?” 그때 비로소 저는 마음에 아버지가 없이 고아처럼 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주일이면 늘 예배를 드리시고는 삼 층에 있는 사택으로 올라오셨습니다. 허름한 공간이었지만 주일이면 언제나 거기에서 아버지를 뵐 수 있었습니다. 젊어서 그렇게 자식들에게 상처도 주고 폭군처럼 군림하시던 그맘때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으시고 그리고 머리는 하해지시고, 힘없이 유리창을 등지고 앉으셨을 때에 그 분의 그 뒷모습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젊었을 때처럼 기력이 넘치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알고 그리고 안정되고 지극히 평화로운 모습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식들은 부모에게 자꾸 이것도 해 주세요, 저것도 해 주세요, 그리고 아버지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지만 돌아가시고 난 후에야 부모가 자식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살아계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서 이미 하늘나라에 계시고 이 세상에서 아직도 고생을 하는 저와는 비교되지 않는 행복 속에서 주님과 함께 계시겠지만 가끔 생각해 봅니다. 단 일주일만이라도 한 번 다시 살아나셔서 나와 함께 이 세상에서 시간을 보내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침에도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당에 앉아서 묵상을 하면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은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내 아버지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로다 하였던 이 다윗의 고백을 수없이 곱씹으면서 저는 상처받은 날들을 지내왔고,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승리하게 만들었습니다. 몇 번이라도 의절했을 사이였지만 나중에는 아버지가 아무리 잘못하시고 사고를 치셔도 내 맘속에는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우리 부부가 앉아서 한참 웃었습니다. 당신 아버지를 이 세상에 누가 말리겠는가? 그래도 그 아버지가 밉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내 마음속에서 그 상처를 모두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나는 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아버지보다 더 큰 사랑으로 아버지가 나를 버렸을 때에도 나를 영접하시고 부모에게 못 받은 그 사랑 때문에 오히려 더 불쌍히 여기셔서 더 많이 사랑해 주시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그 모든 것들을 다 녹여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주일이라도 이 지상에 오셔서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마 목욕탕에 가서 때도 밀어드리고 머리도 감겨드리고, 그리고 안마도 해 드리고,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가시고 싶으셨던 곳도 가서 보여드릴 수 있을 텐데 효도할 기회는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가슴 아픈 기억들만이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IV. 하나님 아버지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우리의 아버지와의 인연도 끊을 수 없는 인연이지만 더욱더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랑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육신으로 나를 낳은 반쪽짜리 부모일 뿐이지만 하나님은 우리 부모와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한 영원한 우리의 영혼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분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사람을 만드셨으며 하나님의 무한한 섭리 속에서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이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하셨지만 불행의 길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을 2000년 전에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사람의 몸 입고 인간과 함께 사시면서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에게 먹이시고, 무지한 자에게 진리를 가르치시면서 알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죄는 없으셨지만 죄 지은 우리들이 하나님과 다시 화해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들이 지은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형벌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가 뼈대가 있는 가문의 자손이라는 것,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라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 아버지 안에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자원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한번 깨어진 이 가족들과의 관계가 치료가 되지 않은 채 일생을 미움과 원망 속에 마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나를 낳아준 부모와 나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끊고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누리는 행복은 사람의 행복이 아니라 짐승의 행복인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 앞에 자신이 아버지를 멀리 떠난 탕자와 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신뢰하고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저에게 주셨던 것처럼 아버지를 용서하고 다시 사랑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한 주간 동안에도 저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일생을 지냈습니다. 함께 손잡고 백화점에 가 본 기억도, 그리고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가서 예쁜 옷을 사줬던 기억도, 함께 여행을 다닌 기억도 없지만 그러나 아버지를 많이 사랑하고 지금은 하늘에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이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찬양) 밤마다 문 열어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V. 결론: 네 부모와 화해하라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태어나서 예수를 믿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모가 있는데도 그 부모를 모르고 객지에서 한잔 술에 취해서 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탕자의 삶이 그게 비정상적인 삶이듯이 이제껏 하나님 모르고 살아온 여러분이 잘못된 인생을 사신 것입니다. 이제 철이 든 때가 되어서야, 자식을 낳아본 후에야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사랑이 무엇이고,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듯이 여러분은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다시 효도하는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 지금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자식이 자기를 죽이고자 목에 칼을 겨누고 반역을 일으켰는데도 그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에 그는 통곡하면서 문루로 올라갔고, 거기서 아들의 이름을 여덟 번이나 부른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이 주님 없이 살 수 있었지만 주님은 여러분 없이 사실 수 없기 때문에 오늘도 여러분을 불러 당신께로 돌아오도록 안타깝게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 아버지가 여러분에게 계심을 굳게 믿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버지의 초청에 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가족들을 모두 용서하고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래서 여러분이 이 땅에서 좋은 믿음의 가정을 세워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5.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빌 6:4)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지난번에도 설교를 했습니다만, 이 6장에서는 가정에서 가족들이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야 될 것인가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제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친 후에 그 다음에 부모들이 자녀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지를 말합니다. 그 가운데서 유독 아버지에게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에게는 명령을 안 하는데 아비된 자들에게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 이것이 자녀들을 향하여 부모에게 주는 첫 번째 명령이었습니다.
II. 하나님이 주신 부권
우리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부권에 대해 생각을 해야 합니다. 부권이라고 하는 것은 한 가정에서 자녀들의 아버지로서 그에게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한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위로 올라가보면 굉장히 커다란 권세와 권위를 하나님께서 이 가장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자, 이제 보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이제 자손들이 계속 퍼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사람들이 이 지면에 점점 흩어져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미 벌써 그 때부터 작은 나라들이 성을 쌓고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생긴 것 보다 먼저 생긴 것은 당연히 가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남녀를 만나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아내는 내향적인 기질로서 가정을 잘 다스리고 남편이 정복하고 이룬 것들을 잘 관계를 맺고 가꾸는 그러한 성향을 갖게 하셔서 가정을 이루시고, 또 남편으로 하여금 계속 바깥으로 뻗어나가면서 개척을 하고 한편으로는 가족들을 보호하고 한편으로는 가족들을 윤택하게 하고 또 다른 가정들과 관계를 맺고 국가와 관계를 맺는 이러한 외향적인 일들에 종사하게 함으로써 가정의 균형을 맞추어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버지의 권한은 아주 굉장히 막강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후 이 사람들의 이어지는 계보를 족장들의 계보라고 하는데 그 족장들의 경우에는 이후에 이루어질 생겨나게 될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의 기능을 함께 수행할 정도로 그렇게 커다란 영적인 권위를 아버지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가족의 생사여탈권 까지도 이 아버지에게 부여함으로써 가족의 제도와 질서를 잡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그런 권세를 주셨다고 하더라도 이게 이미 타락한 죄인이고 죄가 들어온 세상이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님이 이런 권세를 주셔도 이 권세와 권한을 올바르게 사용을 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주신 그 뜻에 부합하도록 가족을 이끌어 가야 하는데 타락한 성품 때문에 사실은 이것이 어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우리들이 말입니다. 가만히 보면 오늘도 신문 지상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일을 보면 그렇게 큰 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뭐가 부족해서 물질이 부족한 것도 아닐 텐데 뭐가 부족해서 그렇게 부정과 부패를 일삼고 그렇게 해서 결국은 마지막에 그것이 들통이 나서 쇠고랑을 차고 감옥소를 가고 이렇게 부끄러운 일들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총신 신대원에서 송전탑 문제를 가지고 계속 씨름을 했는데 잘 해결될 것 같지 않습니다. 경계선을 두고 이쪽에 있는 땅이 그 땅으로 송전탑이 지나가게 되어 있었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것이 계획에서 밀려나서 학교 쪽으로 휙 넘어오게끔 그렇게 설계가 변경이 되어서 그래서 학교 측에서 학생들 머리 위로 76만 볼트의 송전탑이 지나가니까 얼마나 끔직합니까. 사람 살고 있는데, 그러니까 학생들이 대모를 하고 그랬는데 거기에 있는 그 땅이 힘 꾀나 쓰는 권력 실세의 지지를 받는 그런 대그룹의 회장이었습니다. 벌써 보면 영향력을 행사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의구심을 다 갖게 됩니다. 그러던 와중에 보니까 회장이 구속이 되었습니다. 왜 그러나 보니까 40억인가 사람들에게 세금을 조금 내 준다는 댓가로 현찰을 받았답니다. 현찰이 40억이면 얼마나 부피가 많겠습니까. 무거워서 어떻게 다 들고 갔겠습니까. 트럭으로 하나를 실어 조그만 트럭으로 하나가 될 그러한 돈인데 가만히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이 참 끝이 없구나. 지금도 자기가 회장이고 갖은 돈이 먹고 살기에 충분하고 부러울 것이 아무것도 없고 사람들에게 조금만 덕을 베풀면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을 사람이 이게 뇌물도 그 액수가 적으면 덜한데 5억인가가 넘으면 이것은 엄청나게 벌이 무거워집니다. 40억을 받았으니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뭐가 부족한 것이 있을까. 큰 그룹의 회장이고 이미 벌어 놓은 돈도 주체할 수 없을 텐데 그것을 40억을 현금을 자루에 넣어서 받아다가 그것을 어디에다가 쓸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받아다가 교회에 헌금을 한다든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든지 그러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을 할까. 여러분, 그 40억을 놓고 그 만 원짜리 다발이 그것 한 보따리 된 것을 매일 그냥 오전에 한 덩어리 쓰고, 오후에 한 덩어리 쓰고 그래도 일평생 못 씁니다. 40억이면 일 년에 1억씩을 써도 40년을 써야 하는데 그 나이에 40년을 못 삽니다. 20년을 쓴다고 하면 1년에 2억씩을 돈을 써야 하는데 그 한 달에 2천만 원씩 돈 쓰는 것도 보통 힘든 것들이 아닐 텐데, 왜 그런 일을 할까.
이게 바로 인간의 타락 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 것이 가장에게도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가정에서 일어나는 가정 폭력이라든지, 남자들 보면 돈 벌어다가 절대로 아내에게 돈 안주는 사람 있습니까. 아내를 무슨 치사한 사람 만들어서 쌀 사온다 하면 5천원 주고, 라면 사온다 하면 천원 주고, 콩나물 사온다 하면 300원 주고 이런 웃지만 그런 정신병적인 가정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가정 가운데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무엇입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주신 그 권한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막 폭력을 행하고 아내에게 폭력을 행하는 그런 것들, 하나님이 주신 권한들을 잘못 사용하는 것 아닙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커다란 사업을 한답시고 부부가 애써서 같이 일궈놓은 가정의 재산들을 한꺼번에 탕진해서 사업의 위기를 만나고 하는 이런 것들, 알고 보니까 아내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일을 저질러서 그렇게 가문이 흔들릴 정도가 되는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부권들을 잘못 사용한 것이다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여기에서도 사도바울이 이 계명을 주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에베소에 있는 경건한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을 드리지만, 좋은 아내,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좋은 자식이 되는 모든 비결이 모든 비결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거기에 비결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정말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 때 그 사람이 좋은 아내, 좋은 남편, 그리고 좋은 자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자녀들의 가슴에, 오늘 성경에 보면 우리들이 자녀를 위한다고 하는 생각 속에 개념 속에 들어와 있는 생각들이 어떤 것들입니까. 우선 좋은 교육을 받게 해주는 것, 그리고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해 주는 것.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여러분 기억하시죠. 우량아 대회 있었던 것 아십니까? 그래서 우유회사에서 대게 주관을 해서 그냥 애들 먹여가지고 볼이 깨질 정도로 해가지고 울퉁불퉁하게 몸무게가 많이 나가게 하면 걔가 일등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렇게 데려가면 비만이라고 치료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이제는 살기가 좋아진 세대가 된 것입니다. 좋은 환경에서 먹이고 좋은 환경에서 자라게 하고 교육을 받게 하고 하는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가만히 보면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결국은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는 것은 경쟁이 될 수 밖에 없는 사회인데 치열하게 경쟁을 하다가 보면 결국은 이러한 경쟁에서도 이기는 사람들은 항상 부모로부터 잘 제공받는 사람들이 세습이 되다시피 계속해서 좋은 학교 가는 사람, 뭐 뭐 잘하는 사람 계속해서 되물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옛날에 나온 뉴스이기는 하지만 미국에서 나온 뉴스를 요새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 켜보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있고 대학에 입학시험을 볼 때 그것을 무조건 공정하게 몇 %는 소수민족을 위해서 떼어 놓는답니다. 예를 들면 미국에 있는 아이들이 100점을 맞아야지 들어가는 시험이라고 한다면 아프리카 출신 미국인들은 예를 들면 90점이나 80점만 맞아도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와 같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그러한 환경에서 이길 수 있도록 자원을 공급하고 하는 것들이 자녀를 위해서 하는 것들이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참 묘한 것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통계가 한번 나왔는데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부모를 막 대한답니다.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싸가지가 없는 자식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역설적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올바르게 행하고 효도하는 이것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을 막 들이부어서 자녀들을 누리게 한다고 해가지고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자녀들은, 여기도 여러분 자녀들 같이 예배드리니까 쑥스러울지 모르지만 아무리 잘해줘도 그것 때문에 부채의식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뼈 빠지게 고생하셔서 오늘도 나에게 옷을 입히시고 오늘도 내가 배가 부른 것은 우리 아버지가 노동을 했기 때문이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기대입니다. 애들이 그런 것을 잘 몰라주려니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물론 어버이 날이나 이런 날 설교에 은혜 받고 가서 아버지, 이제까지 잘 길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주간에 한번 말하는 것이고.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을 오늘 성경이 명령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거라. 노엽게 하지 말라.
너희들이 자녀에게 이런 것 저런 것 이런 것 저런 것을 막 해 줌으로써 언제나 자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역사가 흘러도 자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원래 그런 것 아닙니다. 자녀 사랑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 아닙니다. 그러니까 중국 관광객이 홍콩이나 한국이나 이렇게 오면 분유가 다 동이 난다고 합니다. 자기 나라에서 자꾸 분유가 문제를 일으키니까 한국산 기저귀 같은 것, 일본 중국 이런 나라에서 최고의 인기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비싼데도 자녀들에게 그렇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녀에게 해줘야 할 첫 번째 것이 아니라 자녀에게 부모가 해줘야 할 첫 번째 것은 부정적이 것입니다. 그것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라. 그 이야기입니다. 대부분 보면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희생적으로 살고 자녀에게 모든 것을 해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커다란 이유가 뭐냐 하면 해준 것은 맞는데 자녀들에게 상처를 너무나도 많이 준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받은 은덕이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부모의 마음에는 해준 것만 기억에 남고 자식의 마음에는 해준 것 하나도 기억에 없고 상처 받은 것만 기억에 남습니다. 그래서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라.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그렇게 잘 알아서 하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일어나라. 밥 차려 놨으니까 일어나 학교가라 그랬습니다. 새벽에 교회 와서 부르짖고 났는데 집에 가서 또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니 노여워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자매들이 가만히 보면 결혼하기 전까지는 같이 앉아서 이야기 하면 들릴 듯 말 듯 목소리도 곱고 조용조용하고 차분차분합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한참 세월이 흐르면 저기 퓨리탄 라이브러리에서 소리치는 소리가 비서실까지 들립니다. 저거 우리교회 아무개 여집사님 인데 그 자매도 결혼하기 전에는 그렇게 자분자분하고 말 한마디로 하면 곱게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우렁찬 소리가 나겠느냐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결혼을 해도 애 안 낳은 자매는 똑같은 그렇게 소곤소곤 이야기 합니다. 애들을 기르다가 이놈들이 하도 말을 안 들으니까 소리를 지르다가 이제는 그 소리가 크게 귀에 들어와야지만 자기가 발음을 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소리가, 우리 조그맣게 이야기 합시다. 그래도 조금 있다가는 다시 올라갑니다. 그렇게 자기들이 알아서 하지 못하기 때문에 노여워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뿐만입니까. 부모들의 마음속에는 자녀들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꿈을 꿉니다. 거기에 못 미치니까 소리를 지르는 것 아닙니까. 사실 그것도 애정의 표현입니다. 가끔 여러분 보면 경기 같은 것, 축구 경기나 아니면 야구 경기 할 때 감독이나 코치들이 밖에 나와서 막 소리 소리 지르면서 뭐라 그럽니다. 그래서 심판에 의해서 어쩔 때는 쫓겨나기도 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우면 들어가지는 못하고 거기에서 소리소리 지르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여러분도 언젠가는 그렇게 부모님으로부터 부모님의 목소리를 옥타브를 높이게 해준 사람이었고 여러분도 그렇게 자녀들을 대하면서 삽니다.
그러니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또 여기에도 타락이라는 것이 개입이 되는데 올바르게 야단을 치면 항상 아하 하고 무릎을 꿇고 내가 잘못했구나 그래야 하는데 그런 자식들이 몇이나 됩니까. 자기가 그렇게 거지 같이 해 놓고도 야단을 치면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은 생각 안 하고 자기가 야단맞은 것 섭섭하다고 아무래도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 보다고 그렇게 하고 부모에 대해 원망을 하는 마음을 품습니다. 너무너무 어려운 명령을 사도가 믿음의 가정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들, 특히 아비된 사람들은 내가 그냥 일상적으로 행동하면 자녀들에게 자녀를 노엽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자녀를 향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III.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들
A. 그릇된 모본
그러면 자녀를 노엽게하는 것들이 어떤 것일까. 우선 제일 먼저 그릇된 모본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자녀에게 매, 회초리 한번 안들고 따귀 한번 때리지 않았어도 자녀들의 마음이 부모로 말미암아 크게 상처를 받고 찌그러져서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릇된 모본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참 위대해 보이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자기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자식도 훌륭하고 그 부모도 훌륭한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훌륭한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경우에 자식들이 처음에는 그 자식이 그 부모를 자기가 살고 있는 모든 세계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애들이 뭐 하다가 불리할 때마다 우리 엄마한테 이를 꺼야. 우리 아버지한테 이를 꺼야. 그럽니다.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 아버지, 엄마는 전지전능해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떻게 합니까. 어렸을 때는 그 아버지, 어머니의 모든 행하는 것과 그 다음에 판단, 모든 것이 전부다 다 완전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라면서 이제 그것들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깨진 것도 두 가지 측면인데, 현실화의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부모에게 실망한다기보다도 자기가 점점 성숙하고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되면서 그러면서 이제 부모에 대한 공정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실 아이들이 상처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안방 밖에 나와 엄마 품에서 그러다가 기어다니기 시작하면 마루로 나가면 건너 방도 있고 그 다음에 형들 방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좀 더 커서 뒤뚱뒤뚱 하며 엄마 손을 잡고 계단을 걸어가면서 옆집도 있다는 것을 배우고 그러다가 유치원 다니면서 이 과목 저 과목 배우면서 야, 동네가 참 넓다는 것도 배웁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가서 소풍도 가고 하면서 더 넓은 세계도 보고 그 다음에 외국도 가면서 세상이 두 배라는 것도 비행기를 타면서 배우게 되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집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습니다. 현실화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올바름에 대해서 자신이 인생을 살면서 터득해 갈 때, 그 부모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될 때 그 때 자녀들은 노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도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그 부모를 이해하기까지는 정말 많은 시간이 걸리고 그리고 시간이 걸려서 이해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이 곧 어린 시절에 부모로 말미암아 노여워하였던 자신의 마음이 치료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이해는 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아플 수는 있습니다.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여전히 고통스럽고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로서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길은 그릇된 모본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올바른 것을 보여 줘서 자녀를 실망시키지 않고 어디를 가서든지 내가 그 집안의 자식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러한 자녀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녀들이 만약에 여러분이 돈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여러분을 철없이 무시하고 여러분의 집안을 하찮게 여긴다면 그것은 아직 철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올바르게 인간된 교육을 받고 나면 인생의 본질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부모인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 자식들이 부모 앞에서 말을 통해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등 뒤에서도 배운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책임 있게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B. 잘못된 기대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잘못된 기대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자녀들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미숙하고 더 잘못될 때가 많습니다. 사실은 자녀가 하고 싶은 대로 모든 것을 자녀에게 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조차도 자녀를 잘 설득을 해서 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이 자녀들이 올바른 미래의 꿈들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 각자마다 각각 다른 달란트를 주셨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아이들이 각각 다른 달란트를 가지고 생활을 하고 자기를 구현해 나가면서 이 세상에서 자기들에게 주신 그 재능을 따라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길을 찾아가고 자신들이 그것을 기뻐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면 그게 참 좋은 것이다 하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리고 자녀들이 미래의 삶이 돈 많이 벌고 평안한 삶이 되기 위해서 현실적이고 획일적인 기대를 가지고 자녀들을 억압하고 끝까지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관계가 깨뜨려져버리고 이러한 것들은 진정으로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것이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해 전에 있었던 일인데 그 내용을 신문인가 잡지에서, 신문은 아니었던 것 같고 읽으면서 마음속으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춘천에서 있었던 일인데 여자 애가 참 공부를 잘 했습니다. 너무 잘 했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데, 조금 잘하는 게 아니고 막 전교에서 1-2등을 하고 이러니까 부모로서는 당연히 기대를 갖지 않겠습니까. 집안도 괜찮게 사는 집안이고 하니까 얘를 공부를 시켜서 의대를 보내려고 작심을 했는데 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림 그리고 시를 쓰고, 말하자면 문학, 예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특히 엄마가 열성적인 엄마였습니다. 캔버스 갖다 놓으면 찢어 버리고 공부하라고 하고 대학들어가서 하면 된다고 하고, 소설책도 못 읽게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 아이가 자살을 했습니다. 죽고 나서 다음에 딸 방을 뒤져 보니까 그런 아이들일수록 감쳐 놓은 것이 많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글들이, 자기가 쓴 글들과 그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교수들이 보고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중학생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믿어지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이제 후회를 하고 공간을 하나 빌려가지고 딸이 그려놓은 그림을 전시하고, 그리고 써놓은 글들을 거기에다가 놓고, 책은 내 줬는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했는데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자녀가 그것을 좋아하면 그런 자녀가 뭐 끝까지 그것을 하겠다 그럴 때 자녀를 잘 격려하고 해서 자신의 소질을 개발해서 그렇게 살게 해 줬더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제야 이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그 자식에게 잘못했던 것을 참회를 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미 죽어 버렸는데. 그러니까 자녀들을 할 때 잘못된 기대를 갖는 것, 그런 것들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끊임없이 자녀를 노엽게 하고 관계 자체가 깨뜨려져 버리게 됩니다. 관계 자체가 깨뜨려져 버립니다.
(예화) 호주인가, 어디를 갔는데 목사님 사모님이 자녀들 이야기를 하다가 자녀 이야기가 나왔는데 복장이 터질 듯이 막 열을 받으셔서 억울하고 원통한 심정을 나한테 털어놓았습니다. 공부를 아주 잘 했답니다. 어렵게 좋은 대학 들어가서 무슨 과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경영이나 뭐 법학이나 이런 쪽이었던 것 같습니다. 잘 가르쳐 놨는데, 대학원도 가고 공부를 잘 할 텐데, 공부를 꽤 했는데 갑자기 얘는 공부는 안 하고 맨 칼, 톱 이런 것으로 쇠 조각을 자르고 그런 것들을 하더랍니다. 뭐냐고 물었더니 취미로 하는 거라고 뭐냐 하면 목걸이도 만들고 브로치도 만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날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그것을 밤새도록 만들어서 낮에는 궤짝에다가 가지고 가서 진열을 해서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파는 것입니다. 그것을 직업이라고 가지고 있으니 부모는 얘를 대학을 가르치고 대학원을 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공부도 잘 하고 하는 애가 갑자기 얘가 노점상이 되었으니 이게 얼마나 열을 받겠습니까. 그 다음에 이제 본격적으로 작업실을 차려놓고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들여서 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만들어 가지고 와서 전세계 하나밖에, 물론 하나밖에 없습니다. 각자 손으로 만들었으니까, 그것을 가지고 파는데 그러니 부모의 실망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재밌는 것은 뭐냐 하면 그렇게 된 것이 걔가 브로치 만들고, 쇠 조각을 두들겨서 만드는 것 가지고 무슨 대회에 나갔는데 그 시에서 개최한 거기에서 아주 중요한 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역 신문에까지 나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격려를 했습니다. 사모님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네가 이것을 난전에서 펼쳐놓고 파는 게 그것 하라고 엄마, 아빠가 여기 와서 이 고생을 시켜서 너를 공부를 시켰냐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왜 평생 당신 아이가 여기에서 노점상이나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재능을 인정받았는데 누가 압니까. 여러분 피카소라는 사람 그림 보면 이상하게 하얀색, 파란색 밖에 안 나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너무 가난해서 물감 든 튜브를 여러 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얀색과 파란색만 사다가 계속 그려서 그 때 그것을 그릴 때 그게 몇 십 년 세월이 흘러가고 나면 그림 하나에 몇 십억 몇 백억에 팔릴 것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그 일을 좋아하고 거기에 대해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때 부모는 그것을 잘할 수 있도록 마음은 좀 쓰려도 그래 하나님은 너에게 브로치를 만드는 재능을 주셨구나. 법학을 공부했어도 경영을 공부했어도 진짜 네가 잘하는 것이 그게 정말 좋은 것이다. 보람을 느낄 수 있다면 해봐라. 이렇게 타이르면 마음이 쓰려도 부모와 자식 간에 관계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관계가 단절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이제 끊임없이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C. 과도한 징계
세 번째는 과도한 징계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 적절할 때에 따끔하게 혼내 주는 것은 너무 필요합니다. 특히 그게 언제냐 하면 유치부 때, 유아부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아, 유치부, 그 다음에 초등학교 때 사춘기 되기 전까지 내가 통하지, 애들이 매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는 때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매를 무서워 할 때 그 때 따끔하게 혼내 주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부모들이 아이들이 잘못하긴 잘못했는데 한차례 매를 대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그 다음에 아침에 남편과 싸워서 우울한 것, 직장에서 승진 안 돼서 미역국 먹은 것, 그 다음에 동네 사람들한테 자기 무시당한 것, 옆집은 기가 막힌 냉장고 들여놨는데 자기네 냉장고는 10년 째 덜걱덜걱 소리 나는 것, 이런 것들이 다 쌓여서 그 아이한테 막 퍼 붓는 것입니다. 그때 분풀이 비슷하게 하는 것이 이때 언어의 폭력, 주먹이 오고가고 하는 과도한 징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권력이 없으니까 맞고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이제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IV. 결론: 숲을 가꾸는 것처럼
결론적으로 자식을 기를 때 숲을 가꾸는 것처럼 그렇게 길러야 합니다. 나무가 잘 자라도록 그저 물을 주고 그 다음에 비료를 주고 가치를 쳐 주고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서 이제 길러서 자기 자신이 자라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자녀를 기르는 것이지, 자녀가 마치 제가 가끔 저한테 그런 선물을 보내오는 사람이 있는데 제일 싫어하는 것이 분재입니다. 분재. 그것을 어떻게 잘 모르겠습니다. 남의 취미생활에 대해서 말할 것은 없지만 그것을 성장 억제제를 뿌려서 못 자라게 하고 그 다음에 나무 가지가지에 철사줄을 엮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라게끔 그렇게 만드는데 그게 너무 비나무적인 일 아닙니까. 비나무적인 일 아닙니까. 자신들은 비인간적으로 취급되기를 싫어하면서 나무는 그렇게 비나무적으로 취급하면 되겠습니까. 그것이 자라나는 대로 자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그것이 자라는데 좋은 것이지 그것을 자기 혼자 책상위에 놓고 보기 위해서 그렇게 심하게 비틀고 하는 그것이 나는 너무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아름답게 느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것들을 이렇게 보면서 우리들이 자녀를 그렇게 분재를 가꾸듯이 기르는 부모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니까 다 일일이 자식에 대해서 이런저런 기대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접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 아이를 다루어 가시도록 그렇게 주님께 맡기면서 오히려 그 아이의 신앙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집니다. 그 아이가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법학을 공부해서 변호사 사무실에 있든지 브로치를 만들어서 길거리에서 팔든지 아니면 유명한 공예가가 되어서 신문지상으로 오르내리던지 어쨌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자녀에게 맡겨진 중요한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히려 애정의 표현을 더 많이 하면서 아버지의 품안에서 엄마의 품안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는 한 용납 받고 이해되는 마지막 장소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느낄 수 있게 해줄 때 오히려 아이들이 바르게 자랄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가족을 위한 가슴앓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로마서 8장에서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저희를 구원하였도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성화의 삶을 이야기 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다”고 감격에 찬 목소리로 선언했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9장에 오면서 어조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바뀌면서 그는 자기 안에 있는 큰 근심과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동포, 친척, 그리고 가족을 향한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그치지 않는 큰 근심이 있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근심은 예전에는 없었던 근심이었습니다. 그도 한때는 나사렛에서 그 목수의 집안의 아들이 인류의 구원자일 수 없다고 굳게 믿었고 오히려 이 작자는 하나님에 관한 허망한 풍설을 퍼뜨리는 이단의 괴수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의를 따라 그는 처형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그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황당한 소문이 퍼뜨려 혹세무민하는 자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확신에 찬 동작으로 그는 대제사장의 공문을 취하여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 것입니다. 그 분이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다는 말인데, 그는 분명히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고 그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죽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날 수 있을까? 바울의 이성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상충된 논리였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고, 성령의 강력한 빛이 그의 마음에 비취게 되었을 때 그는 복음의 신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신 것은 하나님 자신, 자신의 저주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죄 때문에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저주를 받으신 것이고,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저주를 받았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누구신지 알게 되자 찬란한 복음의 빛이 들어오게 되었고 이것을 통해 그는 어릴 적부터 자랐던 유대교의 거짓 신앙에서 놓임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부터 그는 오직 이 예수야 말로 하나님을 아는 모든 지식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전파하는 복음 전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II. 가족을 향한 고통
A. 그치지 않는 큰 근심
이러한 커다란 하나님의 복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것은 한편으로 이 사람에게 감격을 가져다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끔찍한 근심과 처절한 고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골육지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빛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예전에 자신처럼 허무한 일에 굴복하며 거짓된 유대교의 가르침 속에 살아가는 동포들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자가 되기 전까지는 동포들에게 존경을 받는 종교지도자였고 가족들에게 사랑 받는 식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알게 된 이것이 그의 인생 전부를 뿌리 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도바울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어둠 속에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골육지친들, 가족들을 생각할 때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근심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족들, 함께 먹고, 함께 살고 한 식구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르고 어둠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의 가족에 대한 그치지 않는 큰 근심과 고통이 있냐고 묻는 것입니다.
B. 저주를 받을지라도
더욱이 사도는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로다.” 즉 골육지친 중 몇이라도 구원을 얻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로라고 노래를 하였습니다. 저주를 받다라는 말은 희랍어 성경에 ‘아나데마’(ἀνάθεμα)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도 저주를 받는 것을 싫어하는데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핵심은 ‘저주를 받을지라도’가 핵심이 아니라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이것이 핵심입니다.
같은 고백을 한 구약의 인물 모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모세는 하나님 앞에 만약에 하나님이 그리하시려거든 생명책에 기록된 내 이름을 지워달라고 자신의 영적 생명을 걸고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도록 매달렸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모세와 같은 영적인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지는 것과 ‘아마데나’를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저주를 받아 끊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경솔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이 사람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가족들이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는 것, 동족들이 주님께 버림을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저주를 받을지라도’ 라고 노래하며 하나님 앞에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은 그들이 스스로 터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배운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면서 그 분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 죽어 가시면서까지 구원받아야 할 불쌍한 자기의 백성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시는 그 광경을 생각하면서 오늘 하나님 앞에 예수가 자기를 위해 그렇게 저주를 받으면서도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으니 자신도 또한 저주를 받을지라도 골육지친 중 몇이라도 구원을 할 수 있다면 그것도 자신이 원하는 바로라고 담대하게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C. 예수님의 모본
이것은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신 모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 지상의 생애는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눈물로 가득찬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우셨다는 기록은 세 번이나 나오고 그 중의 한 번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기도의 소원을 올렸다고 하였고 그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가리킨 내용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당신 자신이 잠시 후에 끔찍한 형벌의 십자가를 감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죽는 것과는 상관이 없이 남기고 가는 이 땅의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하나님께 벌을 받으시면 서도 형벌을 받는 당신 자신의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자기를 이렇게 못 박는 사람들이 이후에 당하게 될 끔찍한 형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가족이 아직도 구원받지 못했는데도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면 우리가 정말 우리 엄마, 아버지의 아들, 딸이 맞습니까? 저는 종종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가족들의 장례하는 장례식장에 초청을 받는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남은 유족들을 위해 예배를 드려줍니다. 마음을 다해 그들을 위로합니다 만은 그들이 그 몇 마디 말에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일 수 있겠습니까? 일생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엄마가 지금 방금 지옥에 떨어졌는데 위로를 받을 수가 있을까요? 일생동안 자기와 함께 계셨던 아버지가 끝까지 불신앙을 고집하다가 죽으셨는데 그 딸이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어떤 식으로 위로를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그 눈물의 의미는 말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엄마, 아빠 살았을 때에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지 않았던 나를 용서해 달라는 참회의 기도가 아닐까요? 지금 아직까지도 부모님이 살아계시니까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난 다음에는 복음을 전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참회의 눈물을 아무리 흘려도 두 번 다시 복음을 전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어디 부모님뿐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오빠를 여의고 뜻밖에 동생을 먼저 보내고 혹은 사고로 질병으로 어린 자식을 보내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는 가족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족을 먼저 보내면서도 피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일 리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렇게 개념된 세상에 무슨 놈의 지옥이 있겠느냐고, 천국이 있겠느냐고 스티븐 호킹의 말대로 유약한 인간들이 동화처럼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만약에 지옥이 없으면 천국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옥이 있다고 쓰여진 그 성경이 천국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둘 다 없다면 예수님은 허무하게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고, 그 분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은 그냥 한 이상주의자가 핍박을 받고 죽은 도덕적인 죽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 분의 십자가의 공로를 찬양하는 여러분은 거짓된 광신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정직하게 대답을 해 보십시오. 믿지 않고 아직까지도 불신한 가운데 머물러 있는 여러분의 가족들은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까? 단 한 번이라도 아침 식탁에 마주앉은 가족의 영혼의 운명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면 잠시 후 이 세상을 떠날 우리 엄마가 예수 믿지 않고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외면하지 않고 그 결과를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여러분은 부모의 영혼을 위해 가족들이 식구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키더민스터의 청교도 리처드 벡스터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 대신 울어 주어야 할 불쌍한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열린 교회를 목회하면서도 여러 번 저에게 와서 작별 인사를 하는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직장도 서울에 있고, 신앙 생활하는 것도 열린 교회가 좋은데 작별인사를 합니다. “웬 작별인사냐?”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 엄마, 아빠가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데 점점 연세가 드십니다. 저러다 치매라도 드시면 영영 복음을 못 전할 거 같습니다. 제가 1년을 목표로 삼고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그 분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가족을 위해 종종 예수 안 믿는 우리 식구들 다 예수 믿게 해 달라고 잠자리에서 한 두 번씩 기도하는 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가족이 그렇게 기도했는데도 끝까지 예수 안 믿고 죽은 식구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가족을 구원하여야 하겠는데 우리의 가족을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정말 어두움에 가득찬 우리 가족들의 영혼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믿어지는 이것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정말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셔서 우리 어머니의 맘을 녹이셔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돌 같은 마음을 깨뜨리셔야 합니다. 먹고 사는 일에 정신이 팔려 종교나 신앙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우리 누이의 마음에, 우리 언니의 마음에, 우리 오라버니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비춰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 홀로 우리 가족을 구원하지 않으시고 먼저 예수를 믿은 나를 사용하셔서 우리 가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나를 하나님이 우리 집안에서 예수 믿게 만드신 것은 나 홀로 예수 믿고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나로 하여금 내가 믿은 예수 그리스도, 내가 받은 아버지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우리 가족들에게 전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남이 못 보는 하나님 보여주시고, 우리 식구들이 받지 못한 사랑을 먼저 받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III. 가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가족을 구원하시려고 하실 때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쓰임 받는 도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온 마음을 다해서 우리의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 몸부림 치고, 애를 써도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우리의 가족들에게 이런 놀라운 은혜로운 역사의 일들을 이루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 분의 마음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간증을 하나를 하겠습니다. 우리 집사람과 결혼을 했는데 장인, 장모님은 전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우리 집사람이 예수를 믿었지만 웬일인지 인자하신 그 분이 작대기로 그 어린 딸을 두드려 패면서 교회 못 나가게 했습니다. 그래도 그 매를 맞으면서 교회에 다니고 신앙을 길러왔습니다. 어머님은 어떻게 설득을 해서 교회에 나가게 해드렸는데 장인어른은 요지부동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하도 답답한데 시골에 계시니 매일 찾아뵐 수는 없는 것이고 생각을 하다 저희 아내가 여기 서점에다가 설교 테이프를 매주 보내주는 정기회원으로 등록을 하고, 그 설교 테이프를 장인어른에게 매주 보내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분이 그것을 순순히 들으실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병에 걸려서 몸져 누으셨습니다. 그래서 움직이시지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천장을 쳐다보고 누워있는 것도 한 두 시간이지 하루 종일 누워 계시니까 무료하니까 카세트를 들으시는데 거기에다 갖다가 그거 하나를 꽂아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이 노인네 귀에 그 설교가 재미있게 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재밌잖아요. 아니에요? 그래서 아침에 잠 깨면서부터 주무실 때까지 그 많은 설교를 계속 들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분이 병상에서 홀로 회심을 하시고 주님을 영접하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들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의 가족들에게 말씀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더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이거는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본인이 저에게 직접 편지를 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생생하죠.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를 둘인가를 둔 자매에요. 집안에서 시어머님이 권사님이신데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계셨지만, 이 며느리는 아직까지도 예수를 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그게 이상한 일이 밤마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분명히 시어머니가 주무시는 것을 확인했는데 새벽에 나가보면 새벽 1시쯤 됐는데 거실엔가 나와 가지고 컴퓨터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 노인네가 야밤에 무슨 컴퓨터인가 그랬더니 거기에서 열린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와서 그래서 인터넷 사역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홈페이지에 들어와서 그래서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어와서 가끔 보면 설교를 듣다가 울다가 또 기도하다가 웃다가 그러다가 새벽에 그렇게 주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 하도 기이해서 며칠 보고 난 다음에 시어머님에게 물어봤습니다. “그게 뭔데 새벽에 일어나서 그렇게 깊은 밤에 컴퓨터를 켜놓고 영화를 보세요?” 그랬더니 “열린 교회 설교인데 너도 기회가 되면 들어봐라” 그러고 며칠 지났는데 이 자매가 밤중에 정신이 초롱초롱하고 잠이 안 오는 것입니다. 근데 이상하게 마음속에 “너도 한번 들어봐라, 들어봐라, 들어봐라, 들어봐라” 자꾸 소리가 들리더래요. 그래서 자기도 일어나서 가서 툭 켜놓고 보니까 어머니가 거기에다 이렇게 표시를 해 놓은 것을 탁 치니까 설교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진지하게 혼자서 설교를 들은 적은 처음이었는데 딱 그 설교 1시간 반짜리 한 편을 들으면서 제가 그 설교가 무엇이었는지 적어줬는데 그건 기억이 안나요, 오래되어서. 그 설교를 들으면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는 몇 달 있다가 교회에 잘 출석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두 달 정도 됐다고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가족들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접촉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해요.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A. 사랑하라
그런데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과 함께 해야 할 일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에게 자신 있게 ‘어머니 예수 믿으세요, 아버지 구원 받으십시오’ 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충분히 가족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오늘날 같이 깨어진 가족들의 관계가 일반화 되어 있는 때에는 사랑하는 일은 고사하고 복수만 하지 않아도 상당히 괜찮은 사람으로 여겨지는 시대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들에게 충분히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자신 있게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고,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도 만났으면 좋겠어.’ 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먼저 가족들과 마음으로 화해를 해야 합니다. ‘아, 용서를 빌어야 화해를 하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못 박혀 죽으셨을 때에 십자가에 매달려 달라고 여러분이 애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까? 여러분은 그때도 죄인이었고 그리고 그 이전에도 이 세상에 있는 구원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이유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 제물로 주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물론 가족들로부터 받은 상처도 있겠죠. 어려서부터 폭력으로 나를 때리고 폭언으로 나를 짓밟은 아버지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어요? 사랑할 수 있겠어요? 젊어서 나를 버리고 바람난 엄마를 어떻게 내가 사랑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사랑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먼저 마음 깊은 곳에서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를 용서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 때문에 어머니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은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받은 사람만 그 사랑알도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예수님을 통해 받은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면서 용서하고 화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부모님들을, 동기간을 깊이 사랑하면서 아무리 여러분이 억울해도 여러분의 부모님이 못 받은 것을 여러분은 받았잖아요. 예수님. 아무리 동기간이 나에게 함부로 대해도 형, 언니, 오빠, 동생이 못 받은 그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은 더 많이 받았잖아요. 하나님께 많이 받은 사람이 빚진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이 언제 이방인에게 돈을 꿨어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 빚졌어요? 예수님이 사도바울을 구원하면서 너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하지 않으면 죽여 버릴 거라고 예수님이 협박하셨어요? 그런데 뭐라고 그래요? “내가 그들에게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모두 용서해야 해요. ‘나도 우리 엄마처럼, 우리 아빠처럼 예수님 몰랐으면 내 자식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을 거야. 나도 아마 우리 오빠처럼 예수님 몰랐으면 우리 오빠보다 더 나쁜 오빠가 되었을 거야’ 생각하고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 불쌍한 영혼을 보면서 울어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순수해지는 때가 두 번 있는데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십자가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릴 때와 하나님 모르는 영혼이 너무 불쌍해서 눈물을 흘릴 때 그때 인간의 영혼이 가장 순수해지는 때에요. 그런 순수한 영혼으로 가족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 보신 적 있습니까? 여러분도 “목사님 1년만 기다려 주십시오. 내가 시골로 내려가서 우리 엄마, 아빠 예수 믿게 하고 난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용기가 있습니까?
시골에 있어서 기도만 하고 전화만 할 뿐 전도할 수 없는 지체들에게 제가 지혜를 가르쳐 줬습니다. 이 지혜는 저도 배운 거였습니다. 어느 날 얼굴도 모르는 형제, 자매 둘이서 열린 교회 담임목사를 찾았습니다. 저를 만나게 해 줄 리가 없습니다. 교인 외에는 상담을 안 하니까 그랬더니 그래도 좋으니까 한 번만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을 해서 뭔 일인지 만나보자 하고 만났습니다. 앉자마자 눈물이 그렁그렁 해서 자신들은 외국에 산대나, 먼 지방에 산대나 하여튼 부모님과 완전히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근처에 부모님이 계셔서 예수를 믿게 해 드리려고 하는데 어느 교회에 가서 여기 우리 부모님이 있으니까 복음도 전해주고 예수 믿게 해 달라고 했더니 그 교회 부목사가 하는 말이 ‘우리 하는 일도 너무 많아서 그것까지 서비스 해드릴 수 없습니다.’ 차갑게 그래서 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적어놓고 심방을 가보니까 병상에 누워서 오늘, 낼, 오늘, 낼 죽어 가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후에 제가 한 번 갔고 교회의 전도대원들이, 교역자들이 부지런히 가서 복음을 전했더니 그 병상에서 죽기 직전에 정말 눈물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서 돌아가시려는 그 분께 세례를 드렸습니다. 장로님하고 가서. 그래서 내가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직접 매주 내려갈 수 없으면 언젠가 기도 많이 하고 영혼에 대한 애정을 가진 교회를 찾아라. 그리고 가서 눈물로 빌어라. 그리고 복음을 전하고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할 교회를 만들어라” 내가 오죽했으면 그렇게 구체적으로 충고를 해주었어요?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B. 기도하라
두 번째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른 새벽 미명에부터 기도로 하루를 시작을 하셨고, 깊은 밤도 기도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가 다가왔을 때 그 분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를 올렸고, 남겨두고 가야하는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땀이 피가 되어 흐르도록 우리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공으로 되돌아오는 법이 없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혹시 우리가 살아있을 때 우리 가족을 구원하지 못해도 기도는 살아남아서 우리가 기도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워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평생 오만 번이나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조지 뮬러 고아의 아버지도 불신자가 된 자기 친구 셋을 위해서 43년을 기도했는데 그 중의 두 사람은 끝까지 믿지 않았지만 목사님 돌아가시고 7년, 9년 된 후에 한 사람씩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가족의 이름 석 자가, 예수 모르는 가족의 이름 이름 석 자가 그리움이 되어서 그 이름을 눈물로 적실 때 하나님이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여러분의 가족들을 주님께 돌아오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남편이 아직도 예수를 안 믿는 것은 강퍅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아버지가 예수 안 믿는 것은 아직도 세상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한때는 모두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때려주셨기에 우리는 주님을 믿을 마음이 생겼고 우리의 영혼에 그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우리가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름도 알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 우리의 영혼을 위해 빌어주는 그 눈물어린 기도의 응답으로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가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것은 운명론자입니다.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족에게 절대로 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그냥 구원해 주실 거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남이 하겠지 라고 미루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남도 할 수 있는 일을 나도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니면 누구도 이 복음을 전할 사람이 없다고 믿고 그래서 나밖에는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소명에 불타는 사람이 정말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전도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절히 우리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지 않았던 것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간절한 기도로 우리 가족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비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희생하라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희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은 원래 가족들에게 인정받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을 못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게 인상과 관련이 있다고 저는 봅니다. 청년 때 교회에 와서 수줍게 인사하던 기억이 머리에 탁 남으면 ‘아, 참 어리구나! 생각했는데 세월이 흘러서 시집가고 애를 낳고 걔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어도 우리 마음속에 그 자매는 그저 어린 청년으로만 보여요. 근데 그래서 가족들이 그렇게 함께 어울리면서 우리의 결점과 약점을 보고 다 알던 우리가 진리란 무엇입니까?, 영생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라고 물었을 때에 가족들은 가소롭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게 가소롭게 느껴지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영적인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 중의 하나가 여러분이 이미 믿고 있는 이 복음이 참된 것이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희생입니다, 희생. 자 생각해 보십시오. 어버이날이 되었는데도 애들하고 놀러가느라고 전화한 통 걸어서 ‘어머니 아버지 어버이날 축하해요.’ 그 말 한마디로 전화 끊는 그 자녀들이 담대하게 ‘엄마 아빠 사랑해요. 예수님 믿으세요.’ 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아버지가 남겨두고 간 유산을 가지고 소송중인 동생이 형한테 ‘형님 우리의 소망은 복음 밖에 없어.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말할 수 있겠어요? 시부모님 모시기 싫어서 동서 집으로 떠민 형님이 그 동서한테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와.’ 그렇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예 낯모르는 사람하고는 신앙 이야기를 재미있게 주고받아도 가족들이 모이면 신앙에 관해서는 입을 딱 닫는 것입니다. 왜? 경제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게 위선적인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도 집안에서 인정을 받지 않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는 봉사자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여러분이 예수 믿고 진실하게 변화된 혜택을 가족들이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희생입니다.
(찬양)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를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 번째 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여러분의 사랑하는 남편이 오늘 병원에 갔는데 진찰을 했더니 일주일 안에 죽을 거라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가슴이 먹먹하고 머리가 하예 지겠지요.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여러분의 가족은 사망 선고를 죽을 거라고 받은 사람이 아니라 지금 죽은 사람입니다. 희생해야 합니다. 그 잃어버린 영혼이 예수를 믿고 우리와 함께 복음의 빛 가운데 살면서 하늘 가족이 될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IV. 결론
내가 하나님께로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나는 관계없습니다. 어느 날 죽음이 불현듯 찾아오고 우리 모두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 가겠죠. 그때 주님이 우리에게 물을 것입니다. “네 가족들은 어디에 있느냐?” “예수님 죄송합니다. 제가 절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가족들이 모두 지옥에 있습니다. 저기 울부짖는 소리가 우리 가족들의 소리입니다.” 말해야 할 때 거기가 어떻게 우리에게 천국일 수가 있습니까? 제일 먼저 불쌍한 것은 미리 하나님을 믿은 우리에게 돌봄을 받지 버려졌던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의 불쌍한 영혼이 아닐까요? 그럼 그 보다 더 불쌍한 것은 그렇게 불쌍한 가족을 위해서 기도할 줄도 모르고, 눈물 흘려줄지도 모르고 희생할 줄 몰랐던 더러운 우리의 영혼이 아니고 누가 불쌍한 영혼이겠습니까? 처음 주님께로 돌아왔을 때 저희 집에서 저 혼자 예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지 않는 집안에서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저처럼 생생하게 아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정말 부러운 것은 부잣집도 아니었고, 그리고 높은 지위에 계신 아버지를 둔 집안도 아니었습니다. 가난해도 온 가족이 주님의 손잡고 교회에 나오는 가족, 밥상머리에서 아버지의 기도를 들으면서 숟가락을 드는 가정,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아내가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부모가 자식을 위해 기도하고 어린 아이들이 무릎을 꿇어 엄마, 아빠를 위해 기도하는 그 집이 가장 부러웠습니다. 우리의 자손들에게는 이러한 슬픔을 물려주는 부모들이 되면 우리는 주님 앞에서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깊이 회개하고 여러분의 가족을 가슴에 깊이 끌어안고 눈물 흘리는 전도자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7.네 형제를 사랑하라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19-2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믿음의 사람, 요셉이 형제들과 진심으로 화해하고 용서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한 사람이었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사서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고, 죽을 고생을 한 끝에 그는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형제들을 그리고 부모들까지 모두 불러 애굽에서 함께 살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에 형들은 두려워 떨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아버지가 죽은 후 자신들이 동생에게 행한 그 악을 기억하고 보복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믿음의 사람 요셉은 두려워하는 이 형들을 위로하며 오히려 용서하고 자기의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형제에게 어떻게 대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Ⅱ. 상처의 사람, 요셉
1. 형제들의 시기
요셉은 원래 상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면 이 상처의 사람 요셉이 어떻게 이렇게 형제들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베풀고 사랑하기까지 형제들을 용납할 수 있었는지가 궁금해집니다. 형들이 자신을 상인에게 팔아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게 하기 전까지 그는 부족한 것이 없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살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이 요셉이 형들의 눈에는 밉기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요셉은 형들에게 말할 수 없는 시기와 원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날도 아버지의 분부를 따라 형들이 가축을 잘 치고 있는지 안부를 알아보기 위하여 형들에게로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형들은 멀리에서 오는 요셉을 바라보며 “꿈꾸는 자가 오는 도다” 라고 서로 시기하며 마침내 해와 달과 열한별이 자신에게 절할 것이라고 그 꿈을 이야기하던 동생을 시기하여 이제 애굽 상인에게 팔아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형들의 시기로 인해서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와 결별하고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생을 하며 이국땅에서 비참한 노예 살이에 복종되어야 했습니다.
2. 모함과 시련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노예로 팔려와서도 그는 변함없이 자신의 주인의 집에 충성하고 지난날의 상처를 잊으며 헌신적으로 주인을 위해 봉사하였으나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한 신앙의 행동 때문에 오히려 그는 옥 속에 갇히게 되었고 거기에서 모함으로 말미암는 끔직한 옥살이를 계속하여야 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일어난 이 비참한 시련들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도 몇 개만 일어났어도 아마 우리는 그 상처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인생 전체가 멍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경은 오늘 이 사람 요셉이 바로 그 상처로 말미암아 영광을 누리게 된 사람이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 요셉은 상처가 영광이 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어린 나이에 부모와 강제로 결별하고 노예로 팔려와 자유도 없이 이방인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그것도 끔찍한 모함으로 다시 충성스럽게 살았지만 감옥 속에 갇히게 되었던 이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상처가 영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좋을 것을 통해서만 좋은 것이 온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좋은 것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뿐만 아니라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렸을 때에 우리들이 제일 두려워하고 싫어했던 것은 아마 주사 맞는 것이 아닐까요? 이 나이가 되어서도 병원에 가서 제일 싫은 게 주사를 맞는 것입니다. 설령 그 주사가 영양제라고 하더라도 보약이라고 하더라도 주사를 맞는 것은 참 싫습니다. 어렸을 때 예방주사를 맞히러 가면 울고불고 난리를 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팔뚝을 꽉 잡고, 간호원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어깨를 꽉 잡고, 또 다른 간호원이 주사를 놓습니다. 그들이 모두 합력하여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 아픈 주사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몸에 저항력이 생기고 그래서 균을 이기게 되고 몹쓸 질병으로부터 우리가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그렇게 끔찍하게 엄마와 간호원이 내 팔을 붙들고 우는 나에게 억지로 큰 주사를 놓는 것이 나를 향한 지극한 애정의 표현이었다고 생각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Ⅲ. 상처가 영광이 된 사람, 요셉
우리의 신앙도 그런 것입니다. 요셉도 인간이었기 때문에 상처는 쓰리고 영광은 즐거웠을 것입니다. 그 쓰라린 상처와 고통을 당하면서 이 사람 요셉은 결국 이 상처가 영광이 되도록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신앙을 굳게 붙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보면 이 형제들을 용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버지가 죽자 형들에게는 큰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자신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하였고, 그래서 결국은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도록 일을 꾸몄습니다. 이로 말미암아서 요셉은 어린 시절에 부모와 헤어져 그 많은 날들을 종살이를 하여야 했고, 그 고생이 얼마나 막심하고 상처가 컸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들을 후에 깨닫게 되었을 때 요셉은 자신들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아버지가 죽자 자신들을 보호하던 울타리가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죽고 만약에 요셉이 옛날 자신들이 한 악행을 생각하였더라면 아마 보복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1. 형제를 용서함
마침내 그들은 있지도 않은 말을 꾸며서 요셉의 동정심을 자극하고자 하였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너 모르게 아버지가 우리에게 말씀하셨는데 ‘요셉에게 가서 너희 형들의 죄를 용서해 주라’고 얘기하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진심으로 그 발 앞에 엎드려 두려워 떨며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때에 요셉은 이 형제들을 진심으로 용서해 주었습니다. 형들의 죄가, 형들의 악이 작았기 때문이 아니라 요셉이 애굽 생활 속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이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은 사람이었는지는 그가 애굽에서 결혼한 후 낳은 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로 지은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잊어버림’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애굽에서의 그 고난과 시련이 얼마나 컸으면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이름을 ‘잊어버리고 싶다’ 혹은 ‘망각’이라고 지었겠습니까? 즉 이 아이가 태어남으로써 내가 애굽에서 당하였던 그 끔찍한 고난의 기억들을 잊어버리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상처가 컸으나 주님의 은혜가 상처보다 컸기에 이 사람요셉은 자기에게 그렇게 끔찍한 악을 행한 형제들을 중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요셉은 흠이 많은 인간이었고, 예수님은 흠 없으신 하나님이셨지만 오늘 우리는 이 요셉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를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모본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자신의 육신의 영달과 그리고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죄 때문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혹독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모함하고 시기하고 박해하였습니까?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누구에게도 잘못하신 것이 없었건만 그 분이 진리이시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 분을 미워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분의 순전한 삶은 자신들이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삶이었고, 빛 되신 그 분의 존재는 자신들이 죄악된 어두움 속에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에 미움과 원망을 받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 불쌍한 인간들을 끝까지 당신의 형제로 생각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계신 그 분을 끊임없이 아프게 하고 악을 행하였으나 주님은 오히려 그것을 상처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우리를 형제처럼 여겨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형제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세상에 어느 인간이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온 형제들로서 서로 미워하고 원수처럼 여기며 살고 싶어 하겠습니까? 오히려 사랑하고 우애하며 살기를 간절히 원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형제와 등지고 사는 이유는 아마 형제들이 여러분에게 악을 행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준 상처와 거짓 그리고 미움을 받을만한 일들, 여러분에게 끼친 재산상의 손해, 이런 모든 일들로 인해서 형제들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그리고 멀어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의절하며 살고 싶은 혹은 이미 의절해 버린 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형제를 보면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셉도 형제들이 자신에게 행한 그 끔찍한 악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으며 어떻게 그것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형들이 준 그 상처 한 마디, 한 마디가 오히려 하나님이 상처보다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기회가 되었기에 언약 백성들에게 신실하게 대하시는 우리 주님 때문에 오히려 기뻐하고 주님을 의지하며 신뢰했기에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허물이 많은 우리의 형제들을 직접 바라보는 동안에는 우리가 형제들을 용서할 수 없고 더욱이 우리에게 악을 행한 형제들을 용서하고 선을 베푸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사람을 보는 대신 우리와 같이 악한 인간에게 선을 베풀어 주셨던, 모질게 악을 행하고 원수처럼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서해 주셨던 우리의 구주이자 우리의 형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께 사랑에 빚진 사람임을 기억할 때마다 그 분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 중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사람이 아니라 나를 용서하고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원수들도 용서할 수 있으니 여러분의 형제들을 진심으로 용납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주권을 믿음
이렇게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 요셉이 오히려 이 상처 때문에 영광스러운 인물이 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형들이 요셉의 앞에 엎드려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는 당신의 종들일 뿐입니다”라고 울부짖었을 때 요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요셉의 마음을 굳게 붙들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 주권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아직까지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그 지성이 밝지 못하기 때문에, 또 주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왜 아무 죄도 없이 이 낯설고 물 설은 애굽의 땅에 노예로 팔려오게 되었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난을 거치고 마치 한 알, 한 알 구슬이 실에 꿰어져서 아름다운 목걸이가 만들어지듯이 알 수 없는 자신의 인생의 불행한 일들을 하나하나 엮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큰 섭리를 보면서 자신의 인생을 붙들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도 도구로 사용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지혜로운 생각을 발휘하여 7년 풍년 때에 수많은 곡식을 모아 들였고, 끔찍한 7년 흉년이 들었을 때에 그 곡식으로 온 땅의 만민을 구원하게 하였습니다. 바로가 요셉을 국무총리로 발탁하였으나 그가 만약에 옥 속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면 결코 추천받지 못했을 것이고, 만약에 그가 옥 속에 갇혔지만 만약에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에 걸려들지 아니하였더라면 감옥 속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감옥 속에 갇혀서 보디발의 아내의 간교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였지만 멀리 보면 그렇게 하신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이루기 위한 당신의 주권적인 행사의 소산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잡하기 그지없는 인생사에 가녀린 떨림 들은 모두 하나님의 그 큰 주권의 역사 속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형들은 자신을 미워하여 노예로 팔았으나 그것을 통하여 만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주권이 이루어지게 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람 요셉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두려움 속에서 자기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 형들에게 오히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함으로써 주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을 가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보여주셨던 신앙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악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였고, 사랑하는 형제는 형제처럼 대하였던 제자는 예수님을 배반하여 은 30 노예의 몸값에 예수를 팔았지만, 예수님이 그들을 원망하지 않으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은 단지 도구일 뿐이고 하나님의 더 놀라운 지혜 속에서 당신이 고난을 받음으로 우리같이 죄 가운데 고생하고 있는 수많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이 이루시는 일들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면서 까지 저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며 저희들을 위해 아버지께 구원을 빌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굳은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선하신 아버지 한 분을 바라보며 역경을 이기고 사람들을 미워하는 죄에 빠지지 않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사랑하는 형제들인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육신의 형제들과의 관계를 돌아보기 바랍니다. 참으로 사랑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의 형제들이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만나도 할 말이 없고 우리의 사이가 더더욱 갈라졌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만 사랑하면 너희의 의로움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의 것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찬양)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나타나 내 영혼 구원했네.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 심지어 우리가 주님을 배반하고 그 분을 표독스럽게 대적하였을 그때에도 주님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제가 21살에 회심하고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내가 그렇게 표독스럽게 주님께 대적하고 쥐꼬리만큼 아는 철학과 사상에 대한 지식 때문에 우리 예수님이 단지 인간일 뿐이고,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모질게 대적하였을 그때에도 사실은 내가 당신의 품 안에 있었고, 당신의 품안에서 나는 수없이 그 분의 가슴을 손톱으로 할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때에 한없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흘렀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땅위에서 사람들과 함께 만나고 살다가 보면 참 인생이 대단하고 사람들이 큰 것 같아도 수십 층 빌딩 옥상에 올라서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개미 같은 인간들을 볼 때에 인생이 참 티끌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기 때문에 당신에게 상처를 준 우리들에게 복수하는 대신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기 때문에 우리를 품으셨던 것처럼 여러분의 형제들을 그렇게 용서하고 품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종자가 악한 종자이기 때문에 아마 좋은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고 우리를 한없이 사랑해 주는 형, 동생들과 함께 살아왔다면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필요한 줄도 몰랐을 사람들입니다. 형제들과의 갈등 때문에 때로는 형제들 속에서의 외로움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주님께 은혜를 구했고, 그래서 우리가 가정에서 받은 상처와 많은 아픔들을 주님이 씻어주셨고 뺨에 흐르는 상처로 말미암는 눈물들을 주님이 친히 닦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동행했던 과거를 돌아볼 때에 이 세상에서 영광 받았던 날들은 주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고 오히려 상처를 받았던 날들을 오히려 주님 앞에 자랑스럽고 은혜에 감사한 순간들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주권을 굳게 바라보면서 주님의 그 넓은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도구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여러분의 형제들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으며 부모와 한 피 받은 자식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형제들을 충심으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많이 믿을수록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나에게 악을 행하는 형제들에게 복수할 수 있었는데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후에는 주님이 우리에게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마다 억울하고 불공평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이미 더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찬양)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가진 것 없으나 남이 없는 것 나에게 이미 주셨기 때문에 사랑하고 용서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일 따름입니다. 사는 날 동안에 선하고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련과 고난도 있고 진리를 따라 살라치면 악인들의 핍박도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우리의 가슴을 할퀴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눈을 들어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요셉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러한 모순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의 인생의 주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일들을 통해서 마음을 오로지 함으로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고 그 분의 주권을 의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티끌 같은 인간일 뿐이고, 왕이신 주님의 큰 섭리의 홀 아래에서 우리는 그 분의 주권의 큰 흐름 속에 있는 티끌 같은 존재들일 뿐임을 봅니다. 그리하여 온 맘을 다해 우리의 살아있음이 이 세상에 이루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뜻의 성취에 이바지하게 되도록 살아감으로써 그 안에서 주님이 기뻐하시고, 기뻐하시는 주님 안에서 우리도 행복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도와주시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에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 만 바라봅니다.
3. 선하신 섭리를 믿음
주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으로 형제들을 용서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요셉의 상처가 영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굳게 믿는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한 토막, 한 토막 요셉의 생애를 잘라놓고 보면 주님이 선하신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토막을 모두 연결할 때 오히려 요셉이 고통을 당한 그것은 그 다음에 있을 축복을 위한 준비가 되었고, 외로움 속에 몸부림쳤던 요셉의 괴로운 나날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그 일에 있어서 꼭 필요한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이 요셉은 하나님께 훈련 받았습니다. 이해할 수 있을 때에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했고, 이해할 수 없고 아직 알 수 없었을 때에는 눈에는 아무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자신에게 선을 행할 수밖에 없으신 인자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굳게 의지하며 고난의 날들을 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노예로 팔려가서 학대를 받을 때에도, 모함을 당하여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을 때에도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합력하여 이 모든 것을 선으로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도 그러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랑하셨지만 사람들은 그 사랑을 배반으로 갚았고. 예수님은 우리 인간에게 먹이시고 입히시고 병을 고치심으로 선을 행하셨으나 그런 은덕을 입은 많은 죄인들은 표독스럽게도 주님께 악을 행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원수처럼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당하는 이 모든 고난을 통하여 평소에 자신이 늘 아버지께 올리던 기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를 성취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내게만 선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굳게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굳게 믿으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여 십자가에 못 박힐 때조차도 아버지의 이름을 친근히 부르며 당신의 기도의 소원을 아버지께 올렸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어느 인간이 평안한 길을 버리고 가시밭길을 걷고 싶겠으며, 축복의 길을 버리고 저주받을 것 같은 고통의 길을 걷고 싶은 인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형제를 사랑하는 대신 미워하고 원수지고 싶은 동생, 그리고 누이 그리고 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상처가 많은 것은 믿음의 가정에도 이런 쓰라린 상처가 계속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앙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복수로 되갚아지고 우리의 선의가 악으로 되갚아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형제의 고움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악한 우리에게 선을 베풀어 주셨던 주님을 믿고 의지하였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이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누구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들은 주님이 결코 악하게 버림받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음을 굳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오늘 이 요셉이 고백한 것처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당신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사 만민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당하는 악이 악을 품으면 그 악이 악이 될 뿐이지만 악을 당할 때에 선하신 주님을 굳게 믿음으로 그 악을 선으로 갚을 때 그 악조차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시니 오늘 요셉과 같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이 이 선한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이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Ⅳ. 상처를 사랑으로 갚음
요셉, 이 사람은 상처를 사랑으로 갚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모질고 포악스럽게 자기를 대적했던 인간들에게 그 많은 미움과 그리고 반역을 사랑으로 어떻게 품고 용서하실 지를 보여 주시는 예표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거나 쓰라린 상처를 입을 때마다 그들의 악을 기억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오히려 주님이 이제껏 베풀어주셨던 그 큰 은혜가 이렇게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는 형제들을 용서하고 품고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주님 앞에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상처를 준 사람의 상처는 상처로 남아도 그것을 받았을 때에 용서하고 사랑으로 갚은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오히려 영광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본성으로는 이런 용납하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되죠. 그래서 주님의 크신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달라고 그래서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우리 형제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우리의 형제들을 더 많이 사랑함으로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우리는 주님 앞에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용납할 수 없는 우리의 형제들을 용납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더 큰 사랑을 부어주심으로 오히려 이 상처를 영광이 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 더 많이 의지하고 믿음으로 여러분의 가정을 고치는 도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네 형제와 연합하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133:1)
녹취자: 김인철
I. 본문해설
성전에 올라가는 시 라고, 노래라고 했으니까 이것이 아마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부르는 찬송으로 쓰여졌던 것 같습니다. 이 133편에는 하나님의 성도의 참된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복중에서도 특별히 형제가 함께 연합하여 동거하는 행복 하나님이 마치 헐몬의 이슬이 시온산들에게 흘러내리는 것 같이 영적인 축복이 바로 형제의 연합과 동거를 통해서 우리에게 내려온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II. 형제의 운명
여기에서 우리는 형제의 운명을 보게 됩니다. 형제는 처음부터 함께 태어나서 한 아버지인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서 함께 연합하며 동거하면서 살도록 부름 받은 것이 바로 형제의 처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형제의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혈통으로서가 아니라 신앙으로서 할레로서 하나님과 하나인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가운데 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한 말씀을 받아 한 떡을 먹으며 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방의 백성들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내어서 하나의 백성들을 만드심은 이들로 하여금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으로 서로를 연합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연히 이 연합은 사랑의 연합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영적인 연합이 사랑하는 형제들 속에서는 구체적으로 사랑의 연합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제들끼리는 함께 잘못했어도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고 또 함께 필요한 것들을 나눔으로서 형제의 결합을 용서와 사랑으로 굳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형제의 운명이고 형제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동거’ 라고 하는 말은 함께 거한다는 것인데 나그네가 주막에 잠시 들러서 목을 축이고 길을 떠나는 것은 우리들이 거한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히브리말에서 거한다는 의미인 ‘야샤브’ 라는 단어는 아예 그곳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언약백성들을 함께 불러 그들로 함께 살도록 만들어 주신 것은 각각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거래하듯이 만나는 그런 관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의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족이 함께 사는 이유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같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은 가족이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 있냐고 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족은 가족이라는 사실 자체 때문에 함께 살고 함께 사랑으로 엮어져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일부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랑이 그러하지만 가족을 향한 사랑, 형제를 향한 사랑은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하는 것으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III. 연합과 동거
그래서 이렇게 형제는 함께 연합하고 동거하면서 살아가는 것인데 이것이 사실은 영적인 형제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육신적인 형제들에게 더더욱 해당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 받아 새사람이 되었을 때 아직까지도 주님을 믿지 않는 형제들과는 가치관과 인생관 그리고 그 모든 생각들이 현저히 달라지게 됩니다. 그렇게 다르게 되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함께 서로 교제하고 이야기를 나누어도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형제됨을 포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것을 극복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형제간에도 이익 계산이 앞서서 서로 만나고 동거하였지만 한 사람이 주님의 깊은 사랑을 알고 난 후에는 그 형제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함께 연합하고 동거하기를 꿈꾸고 그 일을 위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비로소 영혼이 진정으로 변화되고 구원받게 되고 이렇게 하면 연합과 동거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A. 연합
그러면 도대체 그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는 사랑의 연합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가장 고귀한 특징은 기뻐하는 것이고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특성은 그를 기뻐하고 그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사랑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있으면 서로 만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기쁨이 됩니다. 이것이 형제의 관계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형제들의 관계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불신자의 육신의 형제들과도 이런 연합을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진정한 연합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믿고 진실한 신앙을 가질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완전하게 변화되고 새사람이 되어 연합이 이루어지기를 힘쓰면서 끊임없이 자기의 형제를 사랑하고 마음이 그에게 흘러가도록 끊임없이 그에게 사랑을 베풀고 자비를 베풀고 함께 연합하기를 힘쓰는 그 사랑이야말로 그의 영혼이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고 변화받기 위해서라도 너무나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언제나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주님 믿는 자녀로 삼아 주신 것은 오늘 찬송에서 부른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함으로서 하나님과 함께하고 주님과 동거하시는 것을 우리의 형제들에게 보여주어 그들도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우리를 먼저 예수 믿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형제들을 이렇게 마땅히 사랑하고 서로 기뻐하고 소중히 여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계들이 자꾸 깨뜨려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그 대부분이 우리의 이기심 때문이고 우리의 무관심 때문입니다. 작은 이익의 문제로 충돌해서 형제들 간의 의가 깨뜨려지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매우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돈거래를 할 때에도 견해를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형제에게 줄 수 있으면 주고 자기의 능력을 넘어서는 빚보증 같은 것을 서면 안 되는 것입니다. 힘 닿는 대로 형제들에게 베풀고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너무나 많은 은혜를 받았으니 오히려 형제들에게 우리가 이용되고 그리고 형제들에게 우리들이 나누어주고 우리가 좀 더 손해를 보고 이렇게 해서라도 형제의 우의와 관계를 돈독히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계신 부모님들께 대한 효도의 방법이고 또 그렇게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 갈 때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언제든지 복음을 전할 마음의 문들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자신들에게 선을 행하고 은혜를 베푸는 사람들의 선행은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으면 우리 육신의 형제들과 화목하게 지내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B. 동거
뿐만 아닙니다. 오늘 성경은 동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 장소에서 함께 살아가는 가족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옛날에는 가족들이 심지어는 씨족들이 한 동네에 모여 사는 대가족 사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이렇게 형제들이라도 분가를 하고 나면 함께 같은 곳에 모여 사는 일들이 쉽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피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기에 나오는 그 동거는 단지 장소적인 동거일뿐만아니라 마음의 동거로도 해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같은 집에 살아도 입 닫고 마음 닫고 서로 원수처럼 여기며 살면 사실 그것은 동거하는 것이 아니고 멀리 떨어져 살아도 늘 그리워하고 연락하며 자주 만나고 심정적으로 그 형제와 함께 살아가면 그것이 오히려 정신적인 동거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형을 그리워하고 동생을 보고 싶어 하고 하는 일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옛날과는 비교도 안 되게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몸부림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그런 무한경쟁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구조는 가족들의 관계까지 다 깨뜨리고 자기와 자신이 하는 일, 이익을 위하여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이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을 갖지 않도록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때에도 물론 신앙 때문에 이 세상에서 뒤처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구조 때문에 우리들이 형제를, 자매를 외면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믿음의 사람으로서 자기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이 힘이 되는 것입니다. 남 하는 것을 다 하면서 혹은 그 이상을 하면서도 가족들을 돌아보고 형제들과 정신적으로 동거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영적인 피조물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해도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말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무관심하고 하찮게 여기는 말인지 정확하게 이해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저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가족을 전도하는 일이 가장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삶을 모두 가족들이 보기 때문입니다. 이미 살아 온 삶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삶에 자신이 없으면 담대하게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할 마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부모님을 모시는 일 때문에 다투는 형제가 한 형제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정신적으로 형제들과 동거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형제들을 위해서 마음을 다해 늘 기도하고 그가 아직 회심하지 못했다면 회심에 이르도록 간절히 기도해 주어야 하고 회심했어도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더 충만한 믿음으로 온전한 삶을 살도록 아버지께 간절히 빌어 주어야 합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미웠던 사람을 향해서도 사랑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영혼이 불쌍한 영혼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속에 믿어집니다. 그때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간절히 형제들을 위해 기도 하면서 그 형제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있을 때 우리는 자신 있게 그들에게 그들의 영혼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고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들이 가족조차 뿌리치고 이 세상에 몰두합니다만 어디에 그런 사랑이 있습니까? 자기가 무관심한데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며 사랑해 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으며 심지어는 자신은 자신의 이익에 밝을 뿐인데도 그런 자신의 불쌍한 영혼도 긍휼히 여기며 사랑해 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언제나 그곳에서 기다려 주고 언제나 그곳에서 참아 주고 언제나 그를 보고 싶어 하고 언제나 그를 사랑 안에 있게 하고 싶은 그런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이 세상 어디에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가족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을 찾지 못해서 사람들이 헤매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선의는 오해될 수 있고 그리고 우리는 사랑하는데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사랑을 복수로 갚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과 허위는 언제나 잠깐이고 진리와 사랑은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사랑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화) 언젠가 목사님들과 만나서 오늘날 교계에 돌아가는 혼란스러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이단들과 잘못된 교회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그런 일들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어느 한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가 이 일을 위해서 많이 헌신 하면서 살아 왔는데 깨달은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악인은 낙심하지 않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실입니다. 낙심하는 악인을 저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악인이 항상 희망 속에 사는 것은 아니지만 악인이 낙심하는 법은 없습니다. 낙심하는 사람은 누군가 하면 선하게 살려는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 선을 행하려는 사람 그래서 성경 말씀에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지니’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 참 그렇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족들과의 깨진 관계들을 한번 수습해 보려고 애를 쓰면 정말 많이 낙심하게 됩니다. 여러분 미친 개 싸우듯이 물어뜯는 이웃들을 한번 화해시키려고 노력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낙심합니다. 얼마나 개 같은지 그냥 한번 물면 놓지 않습니다. 어쩜 그렇게 더러운 묘사들이 머릿속에 잘 생각이 나는지 그렇게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악인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들은 낙심합니다. 그렇게 힘이 듭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로 가서 깨어진 형제들의 관계를 어떻게 치료해 보려고 해도 누가 기다렸다는 듯이 누가 협력해 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 짓을 하나 하고 집어 던져 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런 형제들이 내 인생에 별로 도움도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움이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용서가 됩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가여운 마음이 들게 되고 그래서 그를 돌보고 끌어안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깊은 영적인 은혜, 심오한 교리와 신학 이런 것들도 참 중요하지만 우선 제일 시급한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좀 착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 같은 사람을 구원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감읍할 때에는 자기의 인생을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너무나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이익에도 형제들과 더불어 다투고 싸웁니다. 눈에 불을 켜고 한푼이라도 더 가지겠다고 악을 써서 싸웁니다. 그 속에서 무슨 선교가 이루어지겠습니까?
(찬양)
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갈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죄와 강팍함 주님께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라 하시네
IV. 결론
그래서 항상 세상 사람들은 형제 사랑의 이유를 형제가 자기에 준 이익에서 발견해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여야 할 이유를 이익에서 발견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에서 발견하고 주님이 나에게 많은 은혜를 주시고 더 좋은 것을 갚아 주신 것은 불쌍한 형제들에게 베풀기 위함이었다고 생각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갚아 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연합하며 동거하며 살아가게 되는 그 신앙의 날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이 용납하고 살아가는 그것이 그 부모가 살아 있건 돌아 가셨건 그분 앞에도 효도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우리 형제들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만약에 마음에 맺힌 것이 있다면 푸십시오. 용서를 빌고 서로 사랑함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덕을 베푸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9.가족을 돌아보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을 어떻게 대하며 신앙생활 하도록 지도해야 될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아비에게 하듯 권면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처럼, 늙은 여자에게는 어미에게 하듯 젊은 여자들은 자매에게 하듯 그리고 참 과부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쭉 이야기 하는 가운데 가족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당시에는 과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뭐 남편에게 버림 받은 과부도 있을 것이고, 또 남편에게 남편이 먼저 사별을 하고 과부가 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과부들이 있었고, 그들은 사회적인 약자요 가난했기 때문에 과부와 고아를 돌아보는 것이 사실 교회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에 과부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교회가 책임을 지고 돌봐줘야 할 과부가 어떠한 과부들인지를 정확하게 선을 그어서 교회에 혼란스러움을 방지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첫째는 나이입니다. 나이가 너무 젊은 사람들은 교회에서 과부의 목록에 올려서 전적으로 도와줄 필요가 없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첫째는 젊으면 다시 시집을 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교회가 과부로 지정하는 명목이 흐려지고 두 번째는 자기가 일을 해서 스스로 자신을 부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외하고 두 번째 조건은 한 남편의 여자였던 자여야지만 과부입니다. 그러니까 이리저리 여러 번 시집 돌아다니다가 과부가 된 사람들은 교회에서 과부의 목록에 올릴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그가 살아온 삶에 대한 정죄라기보다는 아마도 외부 세계를 향한 교회의 건덕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과거가 복잡한 사람들이구나.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사실 교회의 덕이 안 됩니다. 아무도 그렇게 주님을 믿기 전에 살아왔던 삶을 정죄하거나 그러지 않는데 건덕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한 남자의 아내였던 사람, 이게 조건이었습니다. 세 번째가 뭐냐 하면 과부의 조건은 충족시켰지만 그 사람을 충분히 돌볼 수 있는 자녀들이 있을 경우에는 교회에서 그 과부를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의 경제적인 부담을 줄이기 위한 의도라기보다는 가정의 도리를 바르게 세우기 위한 의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에서 이제 가족을 돌아보게 하라고 하면서 누구든지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도 악한 자니라. 그리고 못을 쾅 하고 박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간단한 이야기 같은데 요즘은 이 이야기가 아주 특별한 감동과 그리고 찔림을 가지고 우리의 가슴에 다가오게 된 것은 오늘날 그만큼 가족이라고 하는 이 제도가 허물어졌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저는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 신자에게는 가족을 돌아볼 의무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 전에 도대체 가족이라는 게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이클 호튼 교수가 왔을 때 저보고 물어봤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개를 잘 먹는다는데 그게 정말이냐. 그래서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일 년에 평균 100만 마리 정도 먹는다. 수량이 100만 마리입니다. 추산하는 거지 정확히 쟀겠습니까. 그런데 참 놀랍다 그럽니다. 그래서 제가 한 15분 동안 한국 사람에게 있어서 개와 서양 사람에게 있어서 개가 어떻게 다른지 그것을 한국의 전통 문화를 얘를 들어서 쭉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굉장히 놀라는 눈빛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개라고 이야기 할 때 요즘 젊은 애들이 가슴에 끼고 개에 리본 달아주고 끌어안고 자고 그러는 개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우리나라가 서구화 되면서 서구 사람들로부터 배운 서양 문화입니다. 그것은 우리 원래 심성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이런 것도 사실은 옛날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산에 울타리를 쳐놓고 수백 마리의 개를 길러서 그것을 일주일에 한 번씩 끌어다가 근으로 달아서 자동차에 실어서 업자들에게 넘기고 주인도 그 개를 모릅니다. 수백 마리인데 어떻게 알아요? 그런 개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냥 하다못해 이름 못 붙이면 워리워리 그랬습니다. 워리워리. 워리가 영어로 근심하는 건데 매일 개는 근심을 합니다. 복날이 다가올까봐 근심합니다. 워리워리. 그리고 왜, 미국 사람들 좋은 이름은 다 개한테 붙입니다. 존. 우리 집에 있었던 개도 메리였습니다. 그 다음에 테리, 톰. 하여튼 유명한 정치인과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을 개한테 다 붙입니다. 내가 아는 친구는 자기네 집에 개가 있었는데 존슨이라고 지었답니다. 존슨이 그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는데. 한국 이름을 붙힌 것은 없었습니다. 옛날이야 있었겠지만, 그 때는 영어가 안 들어왔으니까. 그러나 다 그렇게 붙였습니다. 그런데 이 개를 다 아무리 똥개라도 그 주인과 주인집 식구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개들입니다. 이렇게 정해놓고 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서양 사람들에게 이 개가 근대에 와서 아주 사랑을 받고 현대에서는 그것을 반려동물이라고 합니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동물은 반려가 없는 것입니다. 반려자가 사람이 반려자이지 무슨 동물이 반려자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가까이 두고 산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서양사회의 가족과의 관계가 와해되기 시작하면서 반려동물들에 대한 욕구가 엄청나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에 미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1년 동안 고양이 먹이로만 수입하는 것이 8천억 원 어치였습니다. 지금은 뭐 몇 조 단위가 될지 모릅니다.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개들이 개나 막 반려동물들이 막 들어오는 게 뭐냐 하면 가족관계의 결핍들을 이것들이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개를 막 아끼고 사랑하고 개를 정기검진까지 받게 해주고 스케일링에다가 미용에다가 굉장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개를 좋아하냐 그랬더니 개는 최소한 배신을 안 한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일리는 있습니다. 개가 뒤통수 쳤다는 소리 들어본 적 있습니까. 개한테 실망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습니까. 또 똥개가 상처 줬다는 소리 들어본 적 있습니까. 개는 동물은, 특히 개는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많이 투자해서 사랑하면 그 반응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약화된 가족관계에 대한 대체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여러 번 갈려도 개는 계속해서 일관되게 한 마리 개를 계속해서 키우는 것입니다. 개가 오래 사는 것은 20년씩 살지 않습니까. 그 사이에 몇 번도 이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는 전 남편들처럼 배신을 안 합니다. 그러한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그게 아닙니다. 예전에는 가족 관계가 결속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이 개를 미워하고 학대했느냐, 아닙니다. 정말 개를 좋아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놀랍습니다. 개가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이 있습니다. 문지방입니다. 맨 처음에는 문지방도 아니고 개가 올 수 있는 한계가 마루 밑구멍이었습니다. 마루 위로 올라오면 얻어맞는 것이고 이 문지방을 넘으면 뭐 죽으려고 작정한 것이고, 개 패듯 패는 것이고. 무슨 의미냐 하면 거기는 가족이 들어오는 경계선입니다. 그것을 침범한다라고 하는 것은 아주 불결하다고 여겼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지하실 교회에 있을 때 특히 지하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새 한 마리가 뛰어 들어왔습니다. 환기통을 타고 참새가 들어왔습니다. 공중에 참새가 날라 다니는 게 더럽습니까?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공해야 묻기도 했겠지만 뭐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새가 숲속의 파랑새였다고 칩시다. 숲속의 파랑새가 막 날라 다니는 것을 보면 예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방안에 들어오면 쥐하고 똑같습니다. 얼마나 견딜 수가 없는지 할 수없이 피스를 전부다 연결한 책꽂이를 다 뜯었습니다. 그리고 다 뜯어서 저 속에서 참새 헐떡거리면서 이제 엎드려 있는 것을 꺼내서 날려 보내주고 물걸레질을 얼마나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이 쥐가 들어왔다 나간 것과 똑같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더럽다. 추하다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더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숲속에 있는 나무나 이런 것들이 너무 이쁩니다. 그런데 큰 나무를 뿌리 채 뽑아서 거실에다가 덜컹 가져다 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더러운 것입니다. 산속에 있으면 예쁜데 거실에 있으면 더러운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질서의 개념이 한국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탁 서 있는 것입니다. 영원히 개는 가족 중에 일부이거나 사람과 동등한 그 어떠한 것일 수 없고 늘 사랑하고, 사랑한다기보다는 돌봐주고 좋아하지만 그러나 먹어야 되겠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든지 먹는 것입니다. 동물일 뿐이니까. 어떤 할머니가 한번 나와서 개 먹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장날 나와서 강아지를 막 사는 것입니다. 할머니, 뭐 하러 사가시게요? 그러니까 아, 이거 가지고 가야지 그래서 1년 키우면 그러면 복날 때 서울에서 애들이 내려와서 잡아먹는 거지. 불쌍하지 않으세요? 불쌍하긴 뭐, 재미있지. 그러면서 할머니가 막 웃습니다. 그런데 너무 순박하신 것입니다. 외국 사람들은 그 정서를 죽어도 이해를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슴에는 확 와 닿습니다. 할머니가 이 개를 평소에 학대하고 밥도 안 주고 그랬느냐. 절대 아닙니다. 어디 갈 때에는 옆집에다가 개를 부탁하고 가고 마실 갔다가도 개 밥줄 시간이 되면 달려옵니다. 그러나 가족일 수는 없습니다. 영원히 가축일 뿐인 것입니다.
II. 가족이란 무엇인가?
A. 하나님의 제도
그러면 이 가족이라는 의미가 뭐냐.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제도입니다. 하나님은 맨처음에 인간을 지으실 때 가족관계로 살아가도록 지으신 것입니다. 주님의 원래의 계획은 온 인류를 한 가족처럼 살아가게 하고 싶으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가족이면 어떻게 됩니까. 어머니, 아버지가 있고 그 밑에서 자식들이 있고 형제, 누이, 동생, 언니, 누나, 오빠 있고 세월이 흐르면 위로 할머니, 할아버지 좀더 오래 살면 증조 할머니, 증조 할아버지. 제가 24살 때까지 증조 할머니가 살아계셨습니다. 할머니의 시어머니가 살아계셨습니다. 참 대단하셨습니다. 94세까지 사셨는데, 그러니까 위로 좌표가 쭉 그려지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그 다음에 할머니, 할아버지, 증조 할머니, 증조 할아버지, 아래로 아들, 손자 좌표가 그려집니다. 옆으로 아버지의 동생, 아버지의 형, 엄마의 동생, 엄마의 형, 내 형, 내 동생 좌표가 그려집니다. 그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딱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내 옆에 누가 있고 내 위에 누가 있고 내 아래는 누가 있고,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각자 그 속에서 살아갈 때 인간이 비로소 우리 모두가 그러면 하나님과는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가. 인간의 질서가 이렇게 평면으로 그은 바둑판 같다면 그 위에 계신 분은 누구신가. 하나님이십니다. 그 아래에 있는 존재는 동물들이고, 이 세상에 있는 자연입니다. 그러면 그런 존재들이 하나님과 어떤 존재를 맺고 그 다음에 자연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는 그 가운데 그 속에서 인간이 어떤 관계를 갖으며 살아가는가 그것을 보면서 비로소 인간이 참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만 딱 뛰어놓으면 뭐하는데 쓰는 인간인지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음 달에 <개념 없는 그대에게>라는 책이 나오는데 여러분 꼭 한 번씩 읽고 그리고 주위에 개념 없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많이 하시길 바랍니다. 그런 개념 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누구냐 하면 이렇게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가정의 제도 안에서 자신을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의 연관 속에서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독립적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제도 속에 사람을 집어넣어서 그래서 사람이 태어나고 그 다음에 자라게 하신 방법이었다는 것입니다.
B. 인간됨을 배우는 곳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은 맨 처음엔 당신이 창조하셨습니다. 그 다음엔 창조 안 하셨습니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는 모두 생식 관계를 통해서 남자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이. 믿음의 사람 가운데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에 올라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신기합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 올라간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나 엄마, 아빠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 모두가 가족 관계 속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 가족이라는 제도는 어떻게 보면 교회보다도 먼저이고 국가나 이런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개념입니다. 제일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가 어떻게 서야 할 것인가 하는 그 그림은 가정이 어때야 할까 하는 그림과 연속선상인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사회는 어떠냐 하면 무슨 나라가 되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거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 있기는 있습니다. 핸드폰도 많이 팔고 기계도 많이 만들어 팔아서 돈을 많이 버는 나라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 어떤 사람이 될래 물으니까 돈 많이 벌고 싶어요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대답에 대한 완전한 질문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개념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무슨 말이 있었냐 하면,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50년대에는 무찌르자 공산당, 60년대에는 증산, 수출, 건설. 70년대에는 유신으로 번영하자. 80년대에는 부모에게 효도, 나라에 충성. 90년대는 삐삐는 진동으로. 2000년대는 와서 그것 마저 뜯어 버렸답니다. 그래서 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그게 바로 가정입니다. 가정의 의미는 뭐냐 하면 어떤 가정이 잘 된 가정이냐 하면 인간됨을 배우는 곳입니다. 그게 바로 가족입니다. 잘된 가정, 정말 좋은 가족은 누구냐 하면 아빠 돈 많고 엄마 미인 유전자 있는 그러한 집안이 좋은 가족이 아니라 진짜 좋은 가족은 뭐냐 하면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가족이라고 해서 좋은 가족은 아닙니다. 아버지가 조폭 두목이고 서로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래서 한 가지 사업을 위해서 열렬하게 협력합니다. 절대 안 싸우고 아버지가 죽으면 한 날 한 시 가족 모두가 폭사하기로 그럴 정도로 가족이 뜨겁게 사랑합니다. 좋은 가족입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래서 중요한 게 뭐냐 하면 거기에서 인간이 누구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빠가 비록 큰 부자가 아니고 엄마가 빼어난 미인이기는커녕, 옛날에 우리 목사님은 자기 어머니를 어버이날이면 설교하시면서 항상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엄마 설교를 했습니다. 연세가 60이 넘어 70을 바라보시는 분이 그런데 어머니가 곰보였답니다. 외모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게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 하나하나가 나를 참 사람 되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가족들일 때, 아주 좋은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돈이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지위가 높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하잘 것 없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인간의 사는 도리를 알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청소부가 2400만원이 든 현금 가방을 주웠습니다. 그것은 가지면 될 텐데, 아무런 증거가 있을 수가 없는데 가방에 연락처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잃어버린 사람은 다시 찾을 생각도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정말 그야말로 세끼 중 한 끼는 라면을 먹을 정도로 가난한 삶을 사는 사람이 그것을 경찰서에 가져다주었다는 것이 신문에 났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경찰서에서 아니 이것을 왜 가지고 왔냐. 대답이 간단합니다. 그것은 내 것 아닙니다. 그것을 보고 뉴스 꺼리가 되는 세상이니까 이 세상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월요일날 절약 좀 해보려고 저기 가서 수동 세차를 했습니다. 3천원이면 실컷 하겠더랍니다. 만 원짜리 놓고 만천오백원이 나왔습니다. 그게 참 이상한 기계였습니다. 아마 나중에 그렇게 하면 또 그렇게 나올 것입니다. 다 청소하고 나오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천오백 원 돌려주려고 하는데 주인이 없습니다. 아예 주인은 나오지도 않습니다. 무임시설이었습니다. 그냥 천오백 원 돈 나오는 그 위에 올려놨습니다. 누가 가져간 사람이 죄를 지을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내 것 아니야. 요새 지금 자기 것 아닌데 먹은 사람들이 줄줄이 망신을 당하고 있습니다.
C. 관계를 배우는 곳
그런 것들을 배우는 곳이 가정입니다. 학교, 아닙니다. 가정입니다. 가정. 가정에서 올바르게 자란 아이들은 학교에서 잘 안 망가지고, 가정에서 잘 안 자란 아이들은 학교에서 세워지지 않습니다. 절대 안 세워집니다. 그것이 인간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 가정이고 그것을 배우게 해주는 사람이 가족인데 이것은 가족이 일방적으로 그 한 사람을 학습해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 속에 있는 것이 가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나 에미는 자식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나 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남편은 아내에게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나 아내는 남편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앞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라는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이 세상에 아내로서 집어치우고 안 데리고 살아. 그 앞에 하나님의 자녀로서가 붙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통하는 윤리와는 다른 윤리가 통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참 그리고 용서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인데 동생에게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나는 동생인데 형한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 때, 여러분 태극기 휘날리며 영화가 1200만 명이 보았는데 기억하십니까. 형과 동생이 있었는데 형이 한없이 희생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 영화가 너무 인기였습니다. 우리 동생 하나가 물었습니다. 형, 그 영화 보면서 느낀 것 없어? 있지. 기대한 대답은 이런 것입니다. 정말 내가 그 형처럼 그렇게 희생을 못해서 미안해 그럴 줄 알았을 것입니다. 느낀 것 없어? 뭔데. 동생은 영원한 싸가지더라. 이런 질문과 대답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것을 빼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딱 보면 동생이 그것을 보면서 나 동생이라는 존재에게는 저런 싸가지가 유전자 속에 배어 있구나. 내가 형에게 혹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형이 그것을 보면서 아, 저 형은 저렇게 못된 동생을 위해서도 한없이 주는 구나. 그리고 마지막에 희생하는구나. 우리 동생은 저 싸가지보다는 나은데. 내가 뭘 했을까. 이것은 앞에 붙은 ‘로서’라는게 붙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간됨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곳이 바로 가정이고, 가르쳐 주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제일 바보 같은 사람이 가족이 내게 해 준 게 뭐가 있어? 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가족은 내게 뭘 해주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기계가 아니고, 엄마는 새끼 밥해 주는 식모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관계를 배우는 것, 관계를 배우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이런 설교를 하면 이런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자기의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우리 엄마 아들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이 부끄러운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우리 그 형이 우리 형이 아니었더라면 등등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끄럽고 최악의 가족 관계라 할지라도 우리는 자기가 그런 사람들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게 자기의 실존입니다. 그것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울수도 있고, 너무 괴로우면 하나님 앞에 호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존은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때 말은 정말 쉽지만 정말 깨어진 가족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폭언을 행하고 폭력을 행사했던 아버지, 자기에게 정말 못할 짓을 했던 어머니, 이런 사람들을 진심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여전히 나의 가족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보통 용기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어짜피 이 세상은 이 세상도 죄에 감염되고 우리 안에도 이런 죄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 어떻게 우리들이 한없이 행복하고 좋은 삶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고난과 시련을 아울러 겪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5월이면 목사님 설교를 듣기가 참 힘이 듭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우리 아버지를 제일 존경하고 우리 어머니가 나의 인생의 스승이고 우리 형 같은 나만 될 수 있으면 정말 좋겠고 우리 동생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3배, 4배 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최고의 축복을 다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늘 감사해야 합니다. 그게 가족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외면할 수 없는 실존입니다. 자신의 일부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욕을 먹는 이유 중 하나가 뭐냐 하면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오늘날 새롭게 생겨난 습관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 시대부터 그랬습니다. 그 사람들이 핑계 대는 것이 뭐냐 하면 고르반 이었습니다. 고르반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 바쳐진 바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 바쳐졌다고 하니까 그 다음에는 사람인 부모를 섬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을 너무나도 사랑해서가 아니라 부모에게 자기의 의무를 회피하고 싶은 사람들의 핑계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를 잘 섬기고 하는 일이 싫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이 아까워서도 그럴 수 있지만, 그러나 마음속에서 자기를 낳아주고 이제껏 길러준 부모와 이렇게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가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르반이라고 하고 툭 쳐 버리고 끝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결국은 그 사람안에 있는 이기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좋은 가정을 만나서 올바르게 인간이 되고 또 인간이 어떠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바로 배우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복음의 말씀을 통해 교정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가정에서 그런 것을 못 배웠어도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깨달으면서 그것이 고쳐져야 되는 사람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고쳐져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요.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사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족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III. 가족을 돌아봄
가족을 돌아본다에서 돌아본다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사람들의 염려, 근심을 가지고 살피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요하면 얼마든지 도우려고 하는 그 욕구를 가져야 되는 것이 가족을 향한 돌아봄이란 것입니다. 그러면 가족의 무엇을 돌아봐야 할 것인가.
A. 영혼의 형편을 돌아봄
첫째는 가족의 영혼의 형편을 돌아봐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영혼의 형편을 돌아봐야 합니다. 영혼의 형편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두 가지입니다. 정말 구원받지 못한 영혼인가. 구원받지 영혼은 아닌가 하고 그의 구원의 문제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으로 복음을 잘 전해서 어찌하든지 주님을 믿고 회심에 이르도록 그의 구원을 위해서 힘써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족을 위해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최고의 사랑. 그러면 오늘 내가 하루나 이틀 기도하고 어머니에게 아버지에게 누나에게 동생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영접하는 일들이 언제나 일어나느냐. 그런 일들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가슴이 저리도록 찢어지도록 기도했는데도 마지막에 가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면 어쩌면 그렇게 차갑게 거절하고 다른 때에는 그렇게 의가 통하던 가족이 차갑게 돌아서면서 멸시하고 박해합니다. 그런 일들에도 불구하고 그 영혼의 형편을 돌아보아 그가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서 보면 집안에서 연세 많은 어른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이런 분들이 결국 끝까지 예수 안 믿고 돌아가십니다. 그런데 잘 들어 보십시오. 해당되신 분들은 너무 마음에 상처 받지 마시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뭐냐 하면 사실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되는데 사실은 그 사람들이 그 중에 어떤 분들은 여러분이 열심히 전했는데도 마음을 강팍해 하면서 거절하고 죽어간 분들도 있겠지만 그러나 사실 그런 분들 중에 대다수는 가족중 누구든지 따뜻하게 다가가서 손을 꼭 잡고 정말 그 영혼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 줘 본 적이 별로 없는 분들입니다. 그게 문제인 것입니다. 두 번째 경우는 어떠한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까. 구원은 받았지만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아주 멀어져 있는 경우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구원받았는데 이리저리 꼬이고 침체에 빠져서 도저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있는 생활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그런 경우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다시 신앙을 불 붙여 주어야 합니다. 목사님, 그것 구원받게 해준 것 만해도, 뭐 자기가 구원하였습니까. 마치 구원을 자기가 구원을 선물로 준 것처럼 이야기 하는데 그것도 얼마나 힘든데. 그러면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그것을 내가 그 신앙까지 책임을 져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책임을 지고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잘 보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 구원해 놓으신 다음에 그 다음에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구원해 준 것만해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날마다 오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믿음으로 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족들 중에서 예수를 온전히 믿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막 아프고 어떻게 하든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기를 원하고 그의 눈에 비늘이 벗겨져서 예수님을 새롭게 믿을 수 있는 그 무엇이 그 마음속에 생겨나기를 하나님 앞에 노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런 생각 들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나만 해야 되나요?’ 다른 식구들은 예수 안 믿으니까. 아니에요. 우리 형도 교회 다니고 우리 엄마도 교회 다녀요. 다니면 뭐해. 다닌다고 해서 그게 다 믿는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인은 너무나 잘 알잖아요. 그러니까 해야 합니다. 아무리 돌아봐도 저 밖에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제일 큰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많이 받은 사람이 빚쟁이입니다. 그래서 부채 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가족들의 영혼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족들의 신앙을 잘 일깨워서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들은 교회 나오든지 말든지 열심히 전도만 하러 다닌다고 하는데 가까운데서 해야 합니다. 가족들의 영혼의 형편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러면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나게 될 때 가족들과의 관계도 살아나게 됩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가족들이 어느 한 사람만 살아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살아있는데 관계를 다 끊습니다. 혼자 불탑니다. 가족들은 스르르 가라앉습니다. 그것은 안됩니다. 불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이 힘들고 오해도 많고 자기 대접도 안 해주고 핍박도 하고,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간다면서요. 소돔성에도 사랑가지고 간다면서. 그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그런 것 하라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영혼의 형편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물질적 형편을 돌아봄
두 번째는 물질의 형편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물질적 형편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주 쉽게 이야기해서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어야 합니다. 보증은 서지 마십시오. 보증을 굳이 서야겠으면 핸드폰 보증은 서도 됩니다. 아닙니다. 그것도 사고 나면 몇 천 만원 사고가 납니다. 어떤 사람이 훔쳐다가 거기에다가 수천만 원 어치 문자를 날린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정도는 그냥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절대로 자기의 능력에 닿지 않는 보증은 서면 안 됩니다. 못 한다고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안 한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 대신 도와줘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족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그 정도가 지나쳐서 빚을 주고 도와줘서 자신의 삶의 터전 자체가 흔들리게 되면 그 관계 자체가 깨지게 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내가 형이고, 동생이 있는데 동생이 보증 좀 서 주십시오. 그래서 10억을 보증을 쾅 섰습니다. 그런데 10억이 어디 있습니다. 어디에서 뻥 터져서 교회에서 나오는 월급까지 차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 형제 관계가 유지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더 나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적인 형편을 돌아볼 때 자신의 형편의 여력이 있는 범위 안에서 이기심 때문에 돕는 것이 방해 되지 않고 도와야 합니다. 그것을 안 하고 그 다음에 영혼만 염려한다고 하는데 영혼을 위해서 정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그의 곤고한 형편을 돌아볼 마음이 안 생기면 눈물은 소금기 없는 눈물입니다. 진심이 담겨지지 않은 눈물입니다. 영혼에 대한 진지한 사랑은 육체에 대한 사랑을 포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의 회심하지 못한 영혼을 향해서 눈물 흘릴 수 있을 때 굶은 그의 육체를 위해서도 염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돌봐 줘야 합니다. 돌보고 따뜻하게 돌보고 사랑하고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을 보면 이런 경제적인 이기심 때문에 형제들과의 관계, 심지어는 부모와의 관계, 자식과의 관계가 얼마나 쉽게 깨뜨려 지는지를 보십시오. 그런 것들은 가족을 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큰 잘못이 뭐냐 하면 추어도 손해를 안 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삶의 원리를 항상 지켜야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소한 것은 언제나 손해를 본다. 그러나 큰 것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다. 이런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물질로 형제들을 섬기는 것, 그런 것들은 적게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핸드폰 보증을 섰는데 일년 치 안내서 나에게 대신 날아왔다. 즐겁게 내 주십시오. 조금 내주고 두고두고 울궈 먹지 말고, 즐겁게 희생을 해 줘야 합니다. 그러면서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게 물질적인 형편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 저도 가난하고 없는 생활을 많이 해 봤는데 곤궁하지 않을 때 도와주는 것은 별로 기억이 안 납니다. 그런데 정말 곤궁할 때 도와주는 것은 세월이 오래 흘러도 그렇게 명료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잊혀지지 않습니다.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너무 여러분에게 잘못했을 때, 그 때 여러분이 베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못했을 때는 베풀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풀 위치에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동생이 형에게 너무 잘못했습니다. 관계가 완전히 단절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을 추스리고 아, 우리의 형제가 이러면 안 돼지, 하고 용서해 주면 다시 사랑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게 권세입니다. 물질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흐르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잘 먹고 잘 산다. 돈 싸들고 갈 필요 없습니다. 살만큼 살면 되지, 뭐가 문제가 있습니까. 그런데 한쪽이 굶는다 매우 어렵다. 쌀이라도 사다 주고 굶는 동생한테 승용차를 사줄 필요는 없습니다. 차라리 지게를 사주는 게 낫습니다. 돈 벌라고.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되십니까. 혼란을 느끼면 안 됩니다. 형이 지금 실업자로서 굶는다. 그러면 필요한 것은 쌀, 먹을 것, 당장 교통비, 아이들 교육비, 그리고 구루마라도 하나가 필요한 것입니다. 승용차가 필요하거나 팔찌나 목걸이나 수십만 원짜리 만년필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그런 정확한 삶의 원리를 가지고 형제를 도와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신이 희생을 해야 합니다. 쓰고 싶은 것을 덜 쓰고 절약하고 도와주면서 이게 어떻게 모은 돈인데. 그렇게 쓰라고 모은 돈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물질적인 형편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은 내가 이만큼 오늘 도와주면 내일 큰 감동을 받고 교회에 와서 펑펑 울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의인은 구제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성경이 했겠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겠습니까.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항상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생색내지 않고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의 형편을 돌아보고 항상 돈만 주고 속에서 마음을 담아서 기도를 담아서 사랑을 담아서 이게 한두 번은 있는 척 하네, 아니면 갑자기 또 그러나. 그럴지 모르지만 계속 되는 것은 진심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계속 되는 가운데 아, 우리 동생의 마음이 그 마음이 아니구나. 우리 형의 마음이 그런 마음이 아니었구나.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알게 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도 돕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냥 돕는 것입니다. 이게 가족을 돌아본다는 의미입니다.
C. 관계적 형편을 돌아봄
세 번째가 관계적 형편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유럽에 출장 가는 길에 화란에 자유대학에 있는 한 교수가 쓴 논문을 읽으면서 갔습니다. 그런데 정말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분이 누구냐 하면 장애인의 복지를 전공하신 분입니다. 특별히 누구에게 관심이 많냐 하면 지적 장애인들, 정신 발달에 문제가 있어서 지능이 낮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인권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논문 두 편을 읽으면서 가는데 가슴에 깊이 정말 눈물이 나오도록 공감이 된 부분이 그것이었습니다. 뭐냐 하면 당신들은 그 사람들을 물질로 도우려고 한다. 그리고 아주 좋은 나라들은 사회 보장 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그 사람들을 장애가 있어도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그것이 사회가 지출하는 비용이라고 생각을 하고 투자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사람들에게 그렇게 계속해서 돈을 줘서 먹고 살게 하면 그 사람들이 정상적인 삶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캐나다나 미국에 원래 그 원주민이 인디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디언들이 어떠한 식으로 미국 사회에서 이렇게 말하자면 영향력이랄까 잃어버리고 쓸모없는 사람들이 되어갔느냐를 누가 설명해 주었는데 그게 보조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디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지금도 미국 같은 곳은 캐나다 같은 곳은 대학까지 무상으로 공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 푼도 안 내고. 그런데 들어가는 애들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돈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라나면서 돈이 한 푼 없어야지 구두를 닦던지 쓰레기 질을 하던지 해서 그러면서 사람들과 접촉해야 할 것인데 단지 인디언이라는 이유 때문에 돈이 툭툭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꽤 큰 돈이 나옵니다. 그것을 가지고 마약 하고, 도박하고 하면서 이 사회 속에서 섞여 살 수 없는 사람으로 피폐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치료 같은 것 거저 받게 해주고, 그것은 좋습니다. 그리고 돈을 준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들의 삶이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사회 속에서 적응하고 섞여야 할 이유가 더 없어지는 것입니다. 방에 앉아만 있으면, 컴퓨터나 하고 아니면 잘 못하면 혼자 누워서 오락이나 하고 그러면 돈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행복해 질 수 있겠습니까. 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외국 같은 곳은 어떻게 하냐 하면 일자리를 만들어 줍니다. 예를 들자면 맥도날드 회사에서는 지체의 정신의 어려움이 있는 청소년들만 모아서 햄버거 싸는 것만을 용역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일이기 때문에 자꾸 하면 하게 됩니다. 물론 건강한 사람들이 와서 하면 열 개 할 때 이 사람들은 세 개 밖에 못 합니다. 그것을 다 돈으로 쳐서 계산해 주는 것입니다. 굉장히 아름다운 노력입니다. 이 사람은 이것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훌륭한 일처럼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 힘으로 근로를 해서 돈을 벌어서 살아가게 되니까.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사람들만 모아놓고 방에 가둬서 계속해서 과자 봉지만 싸가지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서 돈을 받는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뭐냐. 인간다움을 누리는 것이다. 인간다움이라는 것은 뭐냐, 그것은 관계이다. 사람이 어떻게 한쪽은 베풀고, 한쪽은 일방적으로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은 사람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에게 영향을 주어서 저 사람이 내 덕을 보게 만들어 주고 저 사람은 선한 영향력을 끼쳐서 나에게 유익을 주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때에 이것이 서로 인격이 흘러들어가는 교통이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 진정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대철학의 예를 들면서 조명을 하면서 오늘날의 장애인의 정책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데 사실은 그것을 읽으면서 썰렁하게 느껴지는 것이 뭐냐 하면, 야, 우리나라는 그만큼만 해도 할아버지인데 그런데 이 사람은 그것이야말로 정말 이 세상이 인간다운 세상이 되는 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가족들을 돌아보면서 필요할 때 물질을 주고, 그런 것만이 아니라 아까도 이야기 했듯이 우리 아버지가 젊은 나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어도 가까이 다가가서 지금도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내가 무엇을 얻고 있다는 마음을 드리고 그리고 내가 그 아버지의 마음에 영향을 주고 그래서 아버지가 나를 만날 때 당신이 나의 인생을 참여하고 부족하지만 당신이 나의 인생에 여전히 도움이 되고 있고 그리고 내 아들이 아버지인 내가 살아서 기뻐하는구나. 우리 딸이 어렸을 때는 나한테 그렇게 상처를 받았는데도 내가 이렇게 살아있지만 그 딸이 나 때문에 그렇게 좋아하고 행복해하는구나. 그것을 쭉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가족들의 관계적인 형편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사실은 아무도 없을 때 우리 엄마 예수 믿게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것은 쉽습니다. 동생이 돈 떨어졌다고 그럴 때 야, 계좌로 10만원 보냈다 이것은 조금 쉽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불신자인 내 동생과 함께 삶을 나누고 나에게 어렸을 때 그렇게 폭언을 한 우리 아버지와 함께 하루를 보내면서 가족과의 관계를 나누는 것,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어려운 이유는 아직까지 내 마음 속에 교만과 이기심이 살아있어서 어려운 것입니다.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주님은 간음한 여자가 더럽다고 피하신 적도 없고 문둥병자가 불결하다고 물리치신 적도 없습니다. 형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주님께 조른 사람을 욕심으로 가득 찬 더러운 인간이라고 욕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들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 주시면서 자신의 사랑 안에서 녹여 내셨습니다. 그것입니다. 그게 관계적인 형편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족들을 돌아볼 때 그들의 영혼이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설령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설령 그 사람들이 끝까지 예수를 안 믿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도리이고 우리의 영혼에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6.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더라”(막 10:6-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면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혼인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모세는 이혼할 때 이혼증서를 써 주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께로부터 어떤 답변을 기대하는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만약에 이혼을 하는 것 자체가 안 된다고 하면 율법 수여자로 여기는 모세를 반대하는 것이고, 그래서 백성들에게 비난을 받을 것이고 만약에 이혼을 허락하는 것이라고 하면 예수님이 평소 가르쳐 주신 사랑의 정신과 어긋나고 창세기 2장에 나오는 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셔서 부부로 만드신다는 그것과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II. 혼인의 원리 : 한 몸 됨
예수님은 아주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원래는 그런 것이 아닌데 너희들이 너무나 완악하기 때문에 무질서한 이혼의 현실을 적절하게 규제하기 위해서 임시적으로 이혼 증서를 써주어서 아내를 버리라고 한 것이지 원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모세의 전통이 아닌 창세기 2장의 전통으로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이 될지라,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혼인의 원리가 한 몸이 되는 것임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몸은 단순히 살코기로 된 사람의 육신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니 한 몸이 되는 혼인의 원리는 크게 세 가지의 결합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A. 육체적 결합
첫째는 육체의 결합입니다. 한 사람이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을 이룬다면 어떻게 구약시대에는 일부다처제가 허락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명확한 답을 내리기 쉽지 않지만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원래 일대일로 결합하여 한 남자와 여자가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홍수에 인류가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고 또 타락한 인간의 부패를 허용하시는 측면에서 일시적으로 이러한 일부다처제를 허락하여 이 땅의 자손들을 많아지게 하였을 것이다’ 라고 하는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이 육체적인 결합은 장소적으로 한 곳에 동거하는 사이가 부부라는 것을 보여주고, 한 공간 안에서 같이 살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육체의 결합은 성을 통해 부부가 한 몸으로 결합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B. 정신적 결합
두 번째 요소는 정신적인 결합입니다. 이 정신적인 결합은 육체적인 결합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서 부부가 함께 정신적으로 연합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사랑하고 서로를 용납하고 용납 받을 수 있는 그러한 상대로서 아주 특별한 배타적인 관계를 가지는 정신적인 결합 이것입니다. 이것에 의해서 가정의 제도는 한 몸을 이루는 혼인의 원리를 따라 유지되는 것입니다.
C. 영혼적 결합
세 번째는 영혼의 결합입니다. 이것은 결혼을 통해서 남녀가 부부로서 두 영혼이 결합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에베소서에서 사도바울이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피력하는 가운데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생명적인 관계를 가지고 머리가 되시는 것처럼 남편은 또한 아내와 그런 영혼의 결합을 통해서 한 몸을 이룬다고 하는 사상이 에베소서의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남편 사이에 존재하는 이 영혼의 결합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기초한 성도의 연합의 토대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원래 타락하기 전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과 영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연결은 사람 사이에 완전한 연합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 올곧은 지성과 그리고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써 이런 연합들은 깨뜨려지게 되었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서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구원받은 자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인 접붙임을 받아 연합을 이루게 하시고, 그 안에 이미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을 이룬 남녀가 특별히 만나 부부관계가 되게 함으로써 특별한 영적인 연결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정의 결합은 이제 교회의 영적인 연합을 더욱 공고히 하게하고 이러한 교회 안에서의 진정된 성화의 연합은 이후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되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온 세상의 구원받은 인류를 한 가족으로 사랑의 연합으로 묶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에 이바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믿는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 결혼입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당사자들이나 혹은 자녀들을 결혼하게 하여야 할 입장에 있는 여러분은 마음에 깊이 새기십시오. 반드시 불신 결혼은 꿈꾸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 안에서 남편과 아내는 그리스도 때문에 또한 부부의 연합을 공고히 하게 되는데 일평생 이렇게 삼중의 연합 즉 육체의 연합, 정신의 연합, 영혼의 연합을 완성해 가는 그 자체가 한 사람이 온전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며 한 사람이 참 신자가 되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러한 결합을 통해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이 결혼이고 바로 혼인의 원리요, 가정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그런 가정에 태어나서 어떻게 그 남녀가 아름다운 한 몸을 이루는 지를 보면서 미래에 자신들이 들어가게 될 혼인과 가정의 원리를 터득하는 것입니다.
III. 이혼이 허락될 때조차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혼을 허락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으로 와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더라도 이혼이 허락되는 사례가 있는데 그것은 간음입니다. 상대방이 혼인 시에 선약했던 정절을 배신하고 그때에 배우자는 그 사람과 살지 않도록 이혼할 수 있게끔 허락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가르침으로 넘어가면 한 가지 사유가 더 등장하는데 그것은 아내나 남편이 이제 예수님을 믿게 되어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데 배우자 중 한 쪽이 결혼 생활과 신앙생활을 병립할 수 없도록 선택을 강요할 때 이혼할 수 있다고 허락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교회는 이 두 가지 원칙만으로는 사실 혼인 생활을 지속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영국 청교도는 언약도로서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야 할 인간의 의무에 대한 탁월한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만 결혼에 있어서는 몇 가지 또 다른 사유들을 교회가 이혼을 허락할 수 있는 사유들로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첫째는 결혼을 했는데 어느 한편이 정신 이상이었을 경우 그것은 이혼을 허락 받을 수 있는 사유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에서는 정신적으로 연합을 이룰 수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사유는 결혼을 했는데 어느 한쪽이 불치의 병을 숨기고 결혼을 했을 때에도 이혼을 교회는 허락해 주었습니다. 또 한 가지 경우가 있는데 부부가 결혼을 했는데 어느 한쪽이 성적인 불구의 상태일 경우 교회는 이혼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신약이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이혼을 할 수 있는 더 많은 조건들을 결혼생활을 지탱하기 어렵게 하는 요소들 안에서 발견해 가려고 했던 흔적들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성경에 제시되고 있는 이 모든 것들과 역사적 교회가 제시한 이 모든 것들은 이혼을 할 수 있는 허용적인 사유가 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이 최선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였던 선지자 호세아에서 이 대답들을 발견합니다. 그는 선지자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으나 불행하게도 창녀로 이름난 디블라임의 딸 고멜과 결혼하도록 계시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그 여자와 결혼했고 그러나 이 여자는 가정을 지킬 수 없는 바람기가 많은 여자였습니다. 한 남자로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여인이었고, 남편은 이 여자에게 사랑을 쏟고 용서해 주셨지만 외간 남자의 품으로 날아가서는 임신하고는 아이를 낳아서 집으로 돌아온 후 용서와 자비를 경험하고는 또 다시 집을 나가 같은 악행을 되풀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는 그 여자를 끝까지 용서하고 자녀들을 길렀습니다. 그가 이혼하는 것이 두렵거나 이혼이 선지자의 가문의 명예를 더럽힐 것 때문에 감추기 위해서 그러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호세아의 마음속에는 이 아내를 향한 뼛속 깊이 타들어 가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를 한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경험을 통해서 호세아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무한한 헷세드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끊임없이 자기의 아내를 구속해 오는 호세아의 행동 예언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어떤 여성이 있는데 이미 남편과 살기 싫을 정도로 정이 사라졌습니다. 남편이 싫어지고 싫증이 나고 서서히 남편에 대한 미움이 생기는데 그래서 이 남자는 마음 둘 곳 없게 되었습니다. 부부의 결합이 와해되고 남편은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하고 여성은 이혼을 청구했고 그래서 이혼 판결을 받아서 부부는 갈라졌습니다. 이런 경우 아내를 단순한 이혼의 피해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내가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갈라서고 싶은데 도대체 구실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더욱 외롭게 하고 학대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잘못했습니다. 이때 기회를 잡아서 옳거니 하고 이혼을 감행했습니다. 이것이 과연 남편을 이혼의 피해자로 만든 것입니까? 이것은 이미 계획된 이혼인 것입니다. 열린 교회를 하는 초기에 우리 교회 자매는 아니었는데 가끔 와서 은혜를 받던 자매가 어느 날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나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40대 후반의 부인이었는데 무슨 인사냐 그랬더니 하나님이 자신을 선교사로 가라고 불러 주셨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아니 직장 다니는 남편과 지금 중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어떻게 할 거냐?’ 그랬더니 ‘주님을 위해서는 그것도 버려야지요’. 그래서 제가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것은 절대 소명이 아니고 당신이 남편하고 아이들하고 살기 싫으니까 이 힘든 생활을 탈출하는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IV. 이혼과 관계의 파괴
A. 하나님과의 관계
그러니까 이혼이 허락된 경우에도 최선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혼은 세 가지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이혼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저에게 이렇게 대꾸할 것입니다. “목사님은 제 남편이 저에게 어떻게 했는지 모르실 것입니다”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는 알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내가 아내와 이혼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날들을 몸부림 쳤는지 모르실 것입니다.” 물론 나는 그 모든 사정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남편이든지 아내이든지 이혼할 당시에는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이혼을 결심하는 사람은 나는 아직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40일 금식 기도를 하고 이혼을 응답받았다는 사람도 나는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 바닥까지 내려가서 기도할 수도 없는 완전히 혼란된 상황 속에서 그는 신앙을 완전히 제외한 인간의 계산과 생각으로 이혼을 하는 것입니다. 이혼을 하고 홀가분해지는 사람들을 가끔 만나는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홀가분함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당장은 매일 핍박하던 남편으로부터 벗어났으니 자유가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악랄하게 괴롭히고 의심하던 아내와 헤어졌으니 일시적으로는 평화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평화가 아닌 것입니다. 부부의 결합이 깨지고 이혼을 하게 되었을 때에 그것은 어느 한쪽의 책임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소극적으로는 아내와 남편이 의무를 다해야 하겠지만, 적극적으로는 아내와 남편이 서로 정신적인 결합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고 이바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혼의 원인을 더 많이 제공했을 수 있지만 그러한 판단은 갈라설 때에 재산을 분할하는 법정에서나 필요한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이혼하였을 때에 어느 한 사람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는 것 같은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보다도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인 자기의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했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혼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가 된 것을 확정하는 것입니다.
B. 자녀들과의 관계
두 번째는 자녀들과의 관계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서로가 이혼하는 마당에 더 기대하는 것이 없으니 더 이상 파괴될 것이 없다고 칩시다. 그러나 자녀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아마 여러분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내가 한 여자로서의 행복이 어머니라는 이름 때문에 무시되어도 괜찮습니까? 한 남자로서의 행복이 아버지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무시되어도 옳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로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한 행복에 대한 생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세상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말할 수가 없는데 요즘은 그리스도인조차도 서슴없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혼하면 자녀들과의 관계가 깨진다고 했는데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남편이나 아내가 미워서 이혼하는 것이지 자식들이 미워서 이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서 너희들을 사랑해도 이혼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자녀를 자신의 행복보다 더 사랑하면 그는 이혼할 수 없습니다. 그가 이혼하는 것은 자식보다는 자신의 행복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지체 가운데 이런 자매가 있었습니다. 벌써 나이 많이 들었는데 가정 이야기를 하면서 펑펑 울었습니다. 아직까지 마음의 치유가 안 된 것입니다. 김 씨 집안에서 태어난 딸이었습니다. 어렸을 때에 엄마, 아빠가 이혼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되던 어느 날 엄마가 딸을 불렀습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네가 아빠 없는 아이로 자라는 것이 너에게는 더 나쁠 거 같아서 엄마가 재혼해야 하겠다” 1학년 밖에 안 된 이 아이가 엄마의 이런 제안에 대해서 뭐라고 항변을 할 판단력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여자는 다시 재혼을 하였고, 그래서 박 씨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더니 어느 날 유치원 다닐 때까지는 김 아무개였던 아이가 박 아무개로 바뀐 것입니다.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을 어린 나이에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결코 소화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만약에 어떤 경우에 이 여자가 한 번 더 시집을 간다면 이번에는 그 성이 최 씨로도 바꿀 수 있겠죠. 그러면 유치원 때에 김 씨, 초등학교 때에 박씨, 고등학교 때에 최 씨로 바뀌는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목사님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러면 아이 성을 바꾸지 않기 위해서 이 말도 되지 않는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 되느냐”고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여러분이 자녀를 낳았는데 그 자녀들이 받을 충격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누가 한 인간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이런 식으로 짓밟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묻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살고 싶었으면 처음부터 독신을 하든지, 시집장가를 가도 자기의 정욕만 채우고 애를 낳지 말든지 하지 왜 새끼를 낳아서 그렇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슴에 남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린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는 세계의 전부 다이고, 그리고 이 세상이 모두 무너져도 엄마, 아빠 두 사람만 견고히 서 있으면 그 인간은 망가지지 않습니다. 그 엄마, 아빠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인간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가정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이 바로 부모를 주신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혼을 하고 자식들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게 될 때에 그것은 그대로 이 아이의 깨어진 인간성이 되어서 남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아이가 후일 기적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회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알아 여러분을 용서한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한 순간의 용서로 모두 지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뜨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 날 동안에는 그 뼈저린 기억과 더불어 싸워야 하고 그러면서 부모인 여러분 속에 말미암아 속에 맺힌 그 상처를 되씹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피 흘리게 의지하며 매일 매일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자녀를 주셨을 때 자녀들에게 남겨주라고 하신 유산이 그런 것이었는지 나는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나마 주님을 만나서 부모를 중심으로 용서하는 자녀는 수천 명에 하나도 될까 말까입니다. 그렇게 이혼을 하고 자식들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하면서 찾을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리고 그런 행복을 몇 십 년이나 누리고 살 것인지 나는 묻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자녀들을 그렇게 가학하는 그 에미 애비가 진짜 부모일 수 있는지 나는 묻는 것입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저희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군인이셨는데 잘 나가는 군인이었습니다. 그랬는데 부인이 바람이 났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 아버지는 얼마 후 전역을 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연금을 가지고 이 자녀들을 양육하였습니다. 저는 곁에서 그 광경을 다 지켜보았습니다. 아침이면 여느 주부처럼 일찍 일어나 아이들의 도시락을 다 챙겨서 밥을 먹여서 싸서 보냅니다. 저녁에는 밥을 해 놓고 기다립니다. 아들이 셋이었는데 아버지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나이가 들면서 인생이 무엇인가를 터득 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아버지의 경우라면 도저히 그렇게 자식을 위해 희생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 아버지를 끝까지 존경했고, 아버지는 결국은 혼자 사셨습니다. 기지촌의 일하던 여성이 미군과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한국에서 온 여자라고 업신여기고 폭행을 하고 결국은 버렸습니다. 아들 하나를 낳아서 정성을 다해서 길렀고, 그 아들이 미국 최고의 럭비 선수가 되었습니다. 어느 해 우연히 신문에 보니까 그 아들이 한 해에 번 돈이 250억이었습니다. 그러한 신문의 보도를 접하고야 비로소 그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의 상태에서 그 아들을 찾아갔습니다. ‘내가 네 아버지라’고 말입니다. 그때 이 아들은 말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어머니 밖에는 없습니다. 이제껏 어머니와 함께 살았고 앞으로도 어머니와 함께 살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정이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언제나 정을 느낍니다. 그러나 자식은 자식이 부모의 정을 필요로 하는 시기에 정을 주지 않으면 그 자식은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부모에 대한 정을 아무 때나 스스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날 유치원, 초등학교 다니는 자식들을 조기 유학을 보낸다, 뭘 한다고 하면서 남편과 떨어지고, 엄마, 아빠와 헤어지고 하는 이런 기러기 생활 같은 것들은 전혀 성경적인 생활이 아닙니다. 도대체 경쟁에서 좀 밀리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50평 아파트에 살 때에 30평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 인생의 행복을 그렇게 크게 좌우하는 것이라고 신앙이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셨습니까? 세상의 가치관을 똑같이 따라가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을 보면서 나는 참 슬픕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교육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일 적에 엄마와 아빠와 함께 동거하며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고, 관계를 갖는 것이 무엇이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서로를 세워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도록 충분히 그들과 함께 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가정에서 하나님께서 가정에서 자녀를 낳아 사람으로 자라게 하신 경륜인 것입니다. 이혼은 이러한 결혼과 자녀의 모든 관계에 대한 원리와 정신들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고 부수어 버리는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을 결행할 때에는 ‘이제 나는 아무도 필요 없고, 이 자식들과도 만나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이 자식들의 불행도 나는 아무리 불행해져도 나는 상관이 없다’라는 질문에 “예”라고 답을 하고 이혼해야 하는 것입니다.
C. 자신과의 관계
그 뿐만이 아닙니다. 자신과의 관계도 파괴됩니다. 이혼을 할 때에는 모두 이것으로서 내 인생은 끝장내겠다고 이혼을 하고 오전에 도장을 찍고 오후에 자살하는 사람은 난 못 만났습니다. 대부분 이혼을 할 때에는 결혼보다는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 가정을 깨뜨렸다는 가책, 내가 내 새끼들을 버렸다는 가책, 이것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한 순간 좋은 남자, 좋은 여성을 만나 새로운 사랑에 빠지고 가정을 이루면 정욕이 불붙는 동안에는 상처의 아픔들을 잊어버릴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지푸라기에 붙은 불과 같은 것입니다. 그 후에는 사라지지 않는 양심의 가책과 그리고 내 자식들을 버렸다고 하는 양심의 찔림 들이 여러분을 마음속에서 결코 자유롭게 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다행히도 예수님을 깊이 만나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회개하고 은혜의 세계로 들어갔다고 해서 갑자기 여러분이 버린 남편이 여러분에게로 돌아오거나 혹은 여러분이 짓밟고 상처를 주었던 자식들이 새카맣게 그 상처를 잊고 여러분에게 끔찍이 효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을 용서해 주셨는데도 끊임없이 그 속에서 자신은 용서하지 못하며 일생을 부자유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면서 이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V. 사랑으로 고난을 이김
그러면 여러분은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결혼생활에서 수많은 괴롭힘을 당하고 함께 살 수 없을 정도로 박해와 의심을 받고, 남편과 아내로서는 차마 받을 수 없는 모욕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라고 말입니다. 6년 전에도 그러했듯이 나는 오늘도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음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 있는 불쌍한 지체의 얼굴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 남편 밑에서 그렇게 모욕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내와 함께 결혼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이 선택한 결혼이었고 여러분은 참아야 합니다. 그래서 참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혼을 결행하는 대부분의 남편과 아내들은 완전히 은혜가 고갈된 상태에서 결정을 내립니다. 정신은 혼미하고, 은혜는 고갈되고, 의지는 악으로 기울고, 하나님 사랑하는 정서는 메말라 버린 혼돈 속에서 어느 한 순간 이혼을 결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A. 은혜가 필요함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인내할 힘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비유가 적합할지 모르지만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이런 이치들을 많이 깨닫습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의 관계는 아내와 남편의 관계와 아주 유사합니다. 여러분도 저와 함께 17년을 살아오는 동안에 항상 제가 좋지만은 않았던 것처럼 저도 17년을 살아오는 동안 항상 여러분이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저는 언젠가는 교회를 떠나고 싶은 때도 있었습니다. 나는 이 교회의 목회자입니다. 어느 날 여러분이 나를 대하는 것을 보니까 마음에 차지 않고 상심이 되어서 어느 날 사표를 던지면서 나를 오라는 교회는 많다, 어디 가든지 너희들 정도는 대우를 해 준다, 내가 여기 아니면 설교할 데가 없는 줄 아느냐 하고 보따리를 싸서 수시로 교회를 떠난다면 여러분은 저를 목자라고 인정해 줄 수 있겠습니까? 목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 기도하면 언제나 주님은 참으라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괴로움을 당해도 교인인 여러분은 아파도 교회는 아프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항상 갈 데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라는 곳은 많지만 갈 곳은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이 교회로 시집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 들어보십시오. 이렇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해도 내게 은혜의 자원이 부족하면 교인의 허물이 보이고 가정에서는 아내의 허물, 남편의 허물이 보이고 목회자의 허물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빕니다. 마땅히 감당해야 할 하나님이 주신 의무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자원이 없는 현실 사이에서 주님께 목 놓아 은혜를 간구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외면하지 아니하고 고난을 이길 은혜를, 시련을 견딜 은총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은혜를 구하면 어제까지는 남편이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영혼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제까지는 나의 마음에 괴로움을 주던 교인들인데 사랑스러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위기를 넘기고 그렇게 주님의 은혜를 입으며 고난의 때를 지나고 또 시련이 오면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며 그렇게 용서하고 용납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아 바로 부부이고, 교인이고 그리고 목회자인 것입니다. 그렇게 결함 없는 자매이면 어찌 나같이 못난 인간의 아내가 되었겠으며, 그렇게 완벽한 남성이 어떻게 나같이 부족한 것이 많은 자매의 남편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온전한 교인이라면 왜 나 같은 사람에게 목양을 받겠으며 그렇게 완벽한 목회자라면 하나님이 왜 우리 같은 교인들에게 그런 목회자를 주셨겠습니까? 미움과 원망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대한 한탄 같은 것들이 일어나 마음과 감정이 뒤엉키게 되면 혼란이 일어나게 되고 이게 바로 죄가 아주 좋아하는 환경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혼할 일에는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은 되는데 성령의 비추심은 없습니다. 가장 오래도록 생각을 해서 내린 결단이 가장 바보 같은 결론을 도입해 오는 것입니다.
B. 이혼의 십자가를 지고
한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해서 자녀들을 낳고 뿌리를 내린 가정을 갈아엎으려고 할 때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건 결심입니다. 그러니 만약에 그렇게 이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매달려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원래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남편의 진정한 회심을 위해 기도하고 아내의 진정한 성화를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비록 부족하지만 거미줄 같은 믿음이나마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성령의 은혜를 의지하며 인생을 걸어가려고 할 때에 시련과 고난도 있지만 그때마다 주님을 의지하면 주님은 우리를 깨뜨리시고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받게 하셔서 용납할 수 없었던 아내를 용납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남편을 긍휼히 여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을 생각하는 여러분에게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이혼하기를 사모하지 말고 고난도 이기고, 슬픔도 이기게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하십시오. 우리의 인생은 바람과 같아서 잠시 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눈을 떠서 여러분의 아내와 남편, 그리고 자식들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그리고 마음깊이 그 인간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자기 사랑에 붙들리면 자신의 상처가 가장 아프게 느껴지겠지만 주님 사랑이 붙들리면 여러분이 아파도 아픈 여러분의 고통 때문에 여러분이 평화의 도구로 사용이 된다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더 많은 은혜를 맛보고 그래서 여러분을 통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고쳐질 수 없는 여러분의 가정을 고치게 하기 위해서 그런 은혜를 주신 줄 누가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희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아파도 아픈 우리 때문에 온전해지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게끔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평화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 오늘 여러분을 부르시고 여러분에게 너희 가정을 위해 희생하라고 말씀하실 때 여러분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개척교회 때 새벽마다 교회에 와서 기도하던 남의 교회 교인이 있었습니다. 가끔 저보고 기도해 달라고 해서 기도를 해주면 가슴이 꽉 막혀요. 그래서 “내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 주랴”고 물었더니 이혼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응답이 될 리가 없습니다. 그 후에 그 부인이 우리 교회로 교회를 옮겼고 정말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남편이 좀 나쁜 사람입니다. 근데 그렇게 은혜를 받고 나더니 남편을 그렇게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건강할 때에 직장 다니면서 돈 벌어도 주지 않고 남편이 부인에게 욕하고 때리고 그러더니 부인이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 중풍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침까지 흘리는 신세가 됐는데 그 뒤뚱 뒤뚱하는 남편을 매일 끌어안고 심방 가서도 그 턱에 수염도 못 깍은 남편을 끌어안고 볼을 부비면서 “목사님, 전 이 사람이 그렇게 사랑스럽고 불쌍해요.” 남편은 먼저 하늘나라 가셨는데 죽을 때까지 아내의 사랑을 한없이 받다가 갔습니다. 은혜가 있으면 나에게 그렇게 악하게 할 수밖에 없는 남편이 불쌍하게 보이고 은혜가 내 마음에 밀려오면 아내를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나를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있으면 아이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목이 메이고, 그 은혜는 언제나 아이들을 향해 소망을 품게 만들어 줍니다. 은혜는 소망의 원천이고 그리고 죄악은 절망의 원천이 됩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 더 귀하다
VI. 결론과 적용
주님 의지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불같은 시험을 지날 때에도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주님도 때로는 나처럼 이 고난의 길을 통과하셨기 때문에 주님은 죽으셨으나 나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마음 깊이 여러분이 은혜를 구하며 마지막까지 승리하는 여러분 되십시오. 잠시 잠깐 후면 모든 것들이 지나갑니다. 그때 주님 앞에 잘 견디고 이겼노라고 칭찬 받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1.가족들의 구원을 돌아보라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3-1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신앙과 가정’ 열한 번째로 마지막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정말 예수를 믿은 사람이라면 아직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 자신의 가족들에 대해서 자유롭게 마음이 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신앙의 돈독함의 여부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에 대해서 부담을 갖게 되고 심지어는 괴로운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가족들은 모두 예수를 믿으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제가 부족해서 아직 가족들이 다 예수를 안 믿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복음 전파의 시급한 중요성을 사도바울이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인데 여기서 부른다고 하는 말은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해서 자기가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자기를 이 모든 죄에서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는 그런 종류의 전심의 부르짖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믿음이죠. 그렇게 정말 예수 없이는 살수 없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이 그를 구원해 주지 않으면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인데 사람들이 그걸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2000년 전에 나사렛에서 태어나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오히려 반문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이렇게 사람들은 반응하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누구든지 새 생명을 얻고 죄 사함을 받아 구원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믿음이 없이는 그렇게 부르짖을 수가 없는 거죠. 그런데 그 믿음은 들어야지 생겨난다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들을 수가 있겠느냐는 거죠.
II.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들
어떤 신학자들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 심각성을 지적하면서 자폐성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안으로, 안으로 오그라들어서 그래서 자기 자신만을 들여다보고 자기 자신만을 가지고 고민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파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에 대해서만이 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가족들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이야기 할 필요 없이 아직까지도 우리의 가족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복음을 열렬하게 전하지 않는 이것이 가족들이 아직 예수를 믿지 않고 불신자로 살아가는 가장 커다란 이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A. 행실로만 전달되지 않는 복음
우리는 종종 말합니다. 나의 행실이 아직 가족들에게 감화를 주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행실로만으로는 복음이 전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파하는 복음이 본분이라면 우리의 삶은 각주예요. 그래서 논문이 하나 있는데 각주가 아무리 박식하고 철저한 연구를 통해 각주가 만들어졌다고 할지라도 각주만을 매달아 놓은 것을 가지고는 자기의 학문적인 사상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각주가 좀 부족해도 본문이 정확하게 무엇인가를 진술해 주면 그러면 사람들은 그 본문을 읽으면서 학문성은 좀 떨어질 지라도 이 논문을 쓴 사람이 무엇을 주장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내용은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본문도 훌륭하고 각주도 철저해서 학문의 깊이와 내용을 동시에 보여준다면 최고의 논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제가 아직 본이 못 되고,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행실이 거룩하지 못해서 가족들에게 복음을 못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얼마쯤 기다리면 여러분이 복음을 전할 수 있을 정도로 가족들에게 감동을 주는 인격과 행실을 가진 사람들이 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죽을 때까지 기회가 안 올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훌륭한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너무너무 훌륭한 삶을 살아서 가족들이 여러분의 행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받는 그런 날이 올까요? 온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의 행실은 촛불이고 복음의 내용은 햇빛과 같은 것입니다.
언젠가 지방에 집회를 내려갔는데 함께 강사로 오신 목사님들이 모여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때 마침 주최 측에서 우리들을 돼지 갈비 집에 데려갔습니다. 그래서 먹고 있는데 옆에 있는 목사님 한 분이 자기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교회 근처에서 식당을 갔는데 교인하고 우연히 돼지 갈비 집을 갔답니다. 목사니까 돼지 갈비를 가지고 와서 굽는 종업원에게 “교회 다니십니까?” 그러고 물어보니까 “안다닙니다.” 그러더래요. “예수님 참 좋으신 분입니다. 예수 믿고 복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 다음에 기회 있으면 가도록 하죠.” 자기 믿기 싫으면 “아 그 교회 다니는 사람은 할일 없는 사람들이 다니는 거죠.” 영업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좋은 말로 설득하는데도 끝까지 아주 그 뭐가 이게 뭐라고 그럴까? 마음이 이렇게 찌그러져가지고 이상하게 그러더랍니다. 이 목사님이 거칠습니다. “그래 잘났다. 그래 그대는 평생 이 집에서 돼지 갈비나 자르다가 죽어라”. 그런데 그 다음 주일날 교회에 나왔더래요. 그 자매가. 그래서 “아니 어떻게 그 당신은 절대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더니 왜 나왔냐?” 그랬더니 그날 밤서부터 잠을 자는데 메아리가 치더래요. ‘평생 돼지 갈비나 자르다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토요일까지 들리더래요. 그런데 갑자기 자기 신세가 처량한 생각이 들더래요. ‘내가 이 나이에 머리가 허옇도록 이 집에서 돼지 갈비나 자르다가 죽으면 무슨 희망이 있을까?’ 그래서 생뚱맞게 대들다가 교회에 가는 게 이상하지만 그래도 가야될 것 같아서 나왔다고, 그래서 그 자매가 예수를 믿고 자기네 교회 집사가 된 이야기를 ‘돼지 갈비 집사’래요. 별명이.
우린 여기서 사마리아 여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여자였고, 자신이 스스로 본이 안 되기 때문에 동네 사람하고 같이 물조차 기를 수 없는, 우물가에 제 시간에 나와서 물 긷는 것도 두려워하던 여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생수를 주겠다고 하니까 “아이, 그것 좀 달라”고 그랬더니 예수님이 “남편을 불러 오너라” 그랬습니다. 남편이 다섯이 있었는데 지금 있는 이 남자도 이 여자의 남편이 아니에요. 고개를 들을 수 없는 이 여자였는데 예수님이 복음을 전해 주셨고 이 예수님이 바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아멘’하고 믿게 된 거죠. 그 순간 이 여자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물덩이를 버리고 동네에 뛰어 들어가서 예전 같았으면 사람들이 자기를 보러 와도 숨었을 이 여자가 동네에 뛰어 들어가서 “야. 내 말 좀 들어봐라. 내가 바로 메시야를 만났다. 그 분이 내가 이제껏 살아온 나의 이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너희도 그 분을 믿고 구원을 받아라” 막 전한다구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동네 사람들이 그 여자의 그 허접한 행실을 가지고 있는 부끄러운 여자의 힘찬 간증을 들으면서 예수를 믿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요.
어느 그리스도인이 있었는데 바로 그 옆집에 전도 대상자를 하나 정해놓고 기도를 시작을 했대요. 그래서 교회에서 늘 교육 받기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이웃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지만 복음이 전해진다. 그렇게 해서 아침에 일어나면 그 집골목도 같이 쓸어주고, 만나면 정성껏 인사하고, 음식도 나누고 그리고 어쨌든 그렇게 친절하게 공을 들였대요. 그러면서 전도를 하는데 그 바로 윗집에 열렬한 은사 운동을 하는 교회에 건전하지 않은 교회 다니는 집사가 있는데 이 사람은 돈 꿔 가면 안 갚고, 집에서 자주 싸우는 소리가 동네에 들리고, 애들도 버릇이 없고 그래서 평판이 아주 안 좋은 사람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여러 달 공을 들인 그 사람이 그 동네 사람들에게 별로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하는 그 아줌마 전도를 받고 그 교회에 나가더래요. 그 사람은 비록 평판은 좋지 않고 행실은 모본이 되지 않았지만 주책 맞게라도 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사람이었습니다.
B. 선명한 복음을 전함
행실의 아름다운 모본은 복음이 전파되는 물길을 만드는 것입니다. . 그러나 물길을 만들었어도 흘러갈 물이 없으면 그 길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오히려 성령님은 우리의 아름답고 건전한 행실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십자가의 복음을 심으시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행실이 좀 부족해도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은혜에 감격하는 직설적인 증언을 통해서 더 많은 영혼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생각이 납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성령 강림 이후에 전파했는데 들었던 첫 번째 청중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실로 전달되는 복음이 아니라 선명하게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너희가 나무에 매달아 죽인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너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이 너희들의 죄를 사해주시고 그리고 구원해 주시고 성령을 보증으로 주셔서 은혜를 받는 날이 올 것이라’고 하는 선명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에 그는 도대체 무슨 행실로 유대인들에게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는 세속적인 직업에 있어서는 하잘것없는 뱃사람이었고, 아주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 가운데 말고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뭘 잘못했습니까? 주인이 시켜서 하는 일인데 칼을 휘둘러서 귀를 한쪽 떨어뜨려 버렸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유대인들이 그가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일 수가 있는 행실의 사람이었을까요? 우리는 어디서도 베드로가 복음을 전해서 유대인들이 다 은혜를 받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기까지 베드로가 아시시의 프란시스처럼 헌신적인 가난한 삶을 살면서 유대인에게 환심을 사서 아주 이웃을 사랑하는 착한 행실로 감동을 끼쳤기 때문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성경의 보도를 우리 읽을 수 없습니다. 그런 그 사람이 복음을 전했을 때 유대인들이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실은 아무리 깨끗해도 그 속에 죄가 담겨 있습니다. 최고로 빛나봐야 촛불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순전하게 복음을 전하면 그것은 찬란한 태양빛 입니다. 우리가 온전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손가락질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교회가 도덕적인 문제로 지탄을 받는 시대에는 더더욱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갈 때에 이런 생각을 가집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손해를 보며 살아도 난 괜찮다. 왜? 그게 어떻게 보면 공평한 거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너무 크고 많으니까.’
(찬양)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같이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살아가는 것이 너무 행복한데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나님과 동산 안에만 살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은혜에는 항상 소명이 있어서 하나님이 ‘어두운 세상에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었기 때문에 부도덕하고 타락한 이 세상을 살면서 올곧게 살기 위해서는 손해를 받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살아보면 알지만 우리가 잘못했을 때에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우리를 후려치셔서 우리를 징계하시지 않으십니다. 오래 참으십니다. 우리는 바라기는 그것입니다. 나를 향해서는 오래 참아주시고 할 수 있으면 끝까지 참아주시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는 절대로 참지 마시기를 그래서 날 괴롭히는 사람들을 즉각 손을 보셔서 저녁때 마음 아프게 한 사람이 다음날 아침에 와서 몇 대 터진 멍 자국을 지니고 와서 눈물을 흘리며 ‘내가 너한테 잘못했더니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시더라. 미안하다’ 이렇게 하나님이 즉각, 즉각 손보아 주시기를 바라죠. 그런데 하나님은 나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의 원수도 사랑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도 주님은 참으셔요. 그래서 때로는 우리는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올바르게 산 것에 대가는 직접 주어지지 않고 고난은 즉각 다가오는 적이 있는 거죠.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살면 신앙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걸 모순이라고 생각하면 그거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거를 참고 인내하면서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고, 그래서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신앙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올바로 살아야죠. 그리고 희생도 각오해야 해요. 예수님 믿는 사람은 탈세하고 뇌물 바치고 부정직하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거죠. 올바르게 살아야죠. 그러나 항상 생각할 때 이런 나의 올바른 삶이 복음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그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의 썩은 행실을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서로 어떤 사람이 나의 부족한 삶을 보면서 ‘정말 당신은 훌륭합니다. 그리고 내가 만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정말 당신처럼 진실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고백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복음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지 어떻게 내가 복음을 대신할 수 있겠으며 내 행실이 복음의 대치물이 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선명한 복음을 전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가족들에게는 매우 어려워요. 매일 지지고 볶고 살아가다가 어느 날 “여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가 전하는 선명한 복음 들어” 쉽지 않죠.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내가 전하든 남이 전하든, 쓴 글로 읽든, 아니면 영상으로 보든, 소리로 듣든 무엇으로 보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수, 선명한 복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철저한 죄인이라는 것과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 누구든지 자기의 죄를 통절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멸망이 있을 뿐이라는 것, 그러나 누구든지 그 분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용서와 구원의 은혜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이 선명한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누구도 우리의 행실만으로는 구원을 얻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등록하지 않은 남의 교회 성도들은 상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월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아무리 간곡하게 부탁을 해도 거절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나한테 장문의 편지가 왔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네 부모님이 우리 교회 근처에 사는데 복음을 전해달라는 거죠. 받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가 전하지. 왜 우리보고 전하라고 해’ 그런데 보니까 그 사연이 그렇게 간단한 사연이 아니에요. 두 가지 이유가 있겠죠. 멀리 떨어져 사니까 자주 뵈올 수가 없고 또 하나는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 계신데 어느 날 가서 선명하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니까 용기가 잘 안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우여 곡절 끝에 결국은 만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뭐냐?’ 그랬더니 자기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데 기도만 하는데 기도만 해서는 안 될 것 같더래요. 그래서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가서 목사님에게 “우리 아버지가 우리 교회 교인은 아니지만 가서 복음을 좀 전해주고 구원해 주십시요” 그랬더니 “우린 너무 바빠서 거기까지 신경 쓸 시간은 없습니다” 딱 잘라서 얘기를 하더래요. 그리고는 내 책을 읽고 은혜를 받고 이 교회에다가 부탁하면 해 줄 거 같은 생각이 들어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았다고 그러고 그러면서 눈물을 글썽해요. 그 순간은 성령님이 내 마음에 감동을 주시는 거 같습니다. 참 얼마나 오랫동안 마음에 부담이 되었으면 저럴까? 그래서 저희들이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교리 교육까지 시켜줬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내가 병상에서 교회에 올 수가 없습니다. 완전히 침대에 누워 계신 분이라서 가서 그 가족들과 함께 병상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문답을 하고 장로님도 가고 세례를 주고, 딸이 한 없이 우는 거예요, 옆에 서서.
정말 우리에게 이렇게 어떻게든지 선명한 복음을 우리의 가족들에게 전해야 하겠다라고 하는 정말 애끓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열정은 모든 창조적인 생각의 원천입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 아이디어가 그렇게 해야겠다라고 하는 다급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기상천외한 방법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가족들에게 선명하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시골의 여러분의 부모님이 계시면 지지난 주에도 설교했지만 청년들은 종종 1년을 작정하고 가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정성껏 섬기면서 효도하면서 그 부모님을 예수 믿게 만들려고 하는 착한 청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 가지로 핑계 대겠죠. ‘아유, 우리 아버님은 성격이 워낙 유별나셔서 절대 예수 안 믿으셔요.’ 해봤어요? 그 눈에 아버지를 향한 뜨거운 눈물이 몇 리터나 흘렸나요? 그리고 정말 복음을 전해봤나요? 그랬더니 재떨이를 집어 던지면서 집어치우라고 여러분의 머리통을 후려치던가요? 그렇다면 감사할 일이죠. 예수 때문에 핍박을 받으셨군요. 대부분 해 보지도 않고 시도도 안 해보고 우리의 가족들을 세상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 목사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저 시골에 계셔서 저희가 도저히 자주 찾아 뵐 수 없습니다’ 얼마나 다행입니다. 옆집에 계시다면 부담이 얼마나 컸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멀리 계시니 합리화 할 이유가 생기지 않았어요? ‘차타고 6시간 7시간 가는 거리에 부모님이 계셔서 자주 뵙지 못해서 복음을 전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편한 변명입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아까 예화로 든 자매처럼 그 근처에 있는 교회라도 찾아가서 눈물로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전도하고 심방해 달라고 한 번 눈물로 그 자매처럼 목회자에게 애원해 보신 적이라도 있습니까? 우린 이 점에 있어서 회개해야 합니다.
저는 열 한주 동안 가정의 진정한 행복과 평화와 길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무리 많이 은혜를 받았다고 칩시다. 그리고 지난 주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서 이혼을 하려고 했던 자매들이 생각을 접고 이제 내 남편 데리고 살기로 결심했다고 칩시다. 내 아내하고 갈라서려고 했는데 그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못나도 버리지 말고 평생 데리고 살아야 되겠구나 라고 맘먹었다고 칩시다. 그게 그 설교의 목표일까요? 그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의 궁극적인 목표일까요? 그래서 예수 믿되 복음 안 전하는 아내와 예수 믿는 여자와 살면서도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하는 남편이 살다가 죽었데더라 그 이야기 쓰려고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를 설교했습니까? 아니죠. 그럼 무엇입니까? 자꾸 가정에 상처가 많다고 그러는데 한번 여러분 중에 가정에 상처가 없어서 너무너무 행복해서 다시 두 번 태어나도 내 가정에 태어나고 싶은 사람 한번 손들어 보세요. 있겠죠. 그러나 별로 얼마 안 됩니다. 죄가 들어오고 나서 제일 먼저 깨뜨려진 것이 가족들과의 관계예요. 그러면 궁극적으로 우리 가족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참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알기 전에는 가족들이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없는 거죠. 그러면 이혼 안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참고 인내하고 서로 긍휼히 여기면서 사는 것은 수단일 뿐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이 복음이 우리의 가족들에게 전파 되어서 못된 아내가 그 복음 듣고 깨져서 발톱의 때만치도 안 알던 남편을 주님이 주신 선물로 알도록 변화되는 것이고, 성경에 버리지 말라는 말만 없으면 벌써 버렸을 텐데 라고 마치 그 못난 아내 데리고 사는 것이 평생의 엄청난 위업을 이룬 것처럼 생각하던 남편이 꺾어져서 자기같이 못난 인간에게 아내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회개하고 변화되기 위해서는 우리 가족 각 사람들에게 신앙이 들어가지 않으면 가족은 영원한 모래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싸우는 모래알이냐, 안 싸우는 모래알이냐 그 차이지.
언젠가 우리 일가 친척 중에서 어른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아무도 안 울습니다. 시골에서 한복을 입은 어느 할아버지가 올라와 가지고는 자식들이 죽 서 있는데 조문객들하고 웃으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할아버지가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여기가 무슨 경사 났는줄 아냐” 뒤로 돌아서 등때기를 한 대씩 치면서 “이눔의 자식들아. 니 애비가 죽었다. 제발 좀 울어라. 우는 시늉이라도 해라” 그러니까 자식들이 “아이고, 아이고” 그런 것입니다. 있는 건 있는 거고, 없는 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요. 사람의 핏줄로는 우리가 상처가 많고 찢어진 가정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핏줄로 우리가 하나 되어서 용서하고,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그렇게 사는 영적인 가족이 되어야지 않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가족이 예수 믿어야 됩니다. 나는 확신해요. 경험에 의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족을 위해서 금식해 보신 사람 있어요? 간절히 이 복음이 우리 엄마, 우리 아빠, 내 남편, 우리 자식들, 그리고 우리 동기들에게 전해져야 하는데 눈물로 가득 찬 마음이 있으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가족들에게 이 선명한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가족 구원이 이루어 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이 강퍅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강퍅함을 능가하는 복음에 대한 열정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 사는 내 가족들이 내가 믿는 복음의 혜택을 못 누리며 살아간다면 어떡하겠어요? 온 마음을 다해서 가족들에게 이 복음을 전파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금년 가기 전에 옆에 와서 가족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부인이 새벽기도마다 구두를 들고 오더래요. 그래서 목사님이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그게 뭐냐?’ 그랬더니 항상 와서는 새벽기도 시간에 옆에다가 놓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편 구두먼저 왔습니다. 이 구두 임자가 여기 와서 여기 와서 예배드리게 해 달라”고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은 웃지만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눈물이 나는 예화죠. 간절히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마음을 여는 길
결국 복음을 전해도 이 복음은 사람의 마음에 제시되고 사람의 마음이 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선명한 복음을 가족들에게 전하는 것과 함께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그 가족들의 마음이 열릴 수 있기를 하나님 앞에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를 숙제를 내 줄 테니까 하십시오.
A. 기도하라
첫째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셔야 되요. 기도를 충분히 못했기 때문에 나는 복음을 전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이야기는 기도도 하기 싫고 복음도 전하기도 싫다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여러분이 기도를 했든지 못했든지 복음을 전하십시오. 그러나 전하는 말이 능력 있기 위해서는 간절히 가족의 이름을 품고 기도해야 되요. 그래서 그것이 그리움이 되고 마음속에서 서러움이 될 정도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해요. 이렇게 기도를 하면 놀랍게 하나님이 환경을 열어 주셔요. 사람이 자기가 놓여있는 환경에서 절대로 예수를 안 믿으려고 하다가 환경이 바뀌게 되니까 예수를 믿을 마음이 생기게 되기까지 변화됩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능력을 주시고, 충분히 기도했을 때에 우리의 입에서 나아가는 복음의 메시지는 아주 놀라운 능력을 갖게 됩니다. 간절히 다시 한 번 가족들의 이름을 품고 기도하십시오. 하기 싫은 숙제하는 것처럼 의무적으로 중얼거리지 말고 가슴에 먼저 품고 가족들의 이름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B. 사랑하라
두 번째 숙제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적인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인가 가족들에게 선한 이야기를 베풀 때 이것이 저 사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애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입술에서 나온 소리인지 금세 압니다. 가족의 마음을 품고 사랑하기 시작하면 내게 상처를 준 아빠는 사라지고 구원받지 못한 불쌍한 영혼으로 보이게 됩니다. 사랑하면 그들의 많은 결점들은 우리에게 잊혀지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고 곤고하게 살아가는 비참한 영혼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그들을 향한 뜨거운 눈물이 흐르게 됩니다. 자신이 영혼이 얼마나 불쌍한지를 몰라서 아버지 앞에 뉘우치고 나를 구원해 달라고 눈물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가 대신 그렇게 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미 예수를 믿은 이유이고, 또 이렇게 예수를 믿은 사람이 그들의 가족이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서 그들은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여러분에게 준 상처를 너무 많이 기억하지 말고 오히려 그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십자가의 은혜를 주셨을 때에는 우리의 목숨을 노리는 야만인들에게까지 가서 이 복음을 전하라고 은혜를 주셨는데 하물며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에게 주신 사명이랴 생각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C. 봉사하라
마지막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희생이 없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이 열릴 수 있겠습니까? 유산을 놓고 소송을 하고 다투는 형제간에 누가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겠으며, 작은 물질적인 이익 때문에 낫을 돌리고 사는 부모자식 형제자매가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은혜는 우리보고 이 세상 살 때 손해 보면서 살라고 주신 하나님의 사은권입니다. 그런 마음을 품고 가족들을 향해 희생하고 섬기고 봉사하고 오래 참으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 해가 가기 전 평생에 예수 믿지 않던 여러분의 가족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이 일을 위해 전심으로 매달려 기도하는 이것이 여러분의 사명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신앙과 가정 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