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씩 바쳐진 화목제물
“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찌니라”(레 7:14)
I. 본문해설
화목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규례 중 지난 시간에는 유교병을 바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누룩 있는 떡은 곧 하나님을 믿은 우리들이 복음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14절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에는 이렇게 드려진 제물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제사 드려지게 되는지 제사의 방식과 관련한 언급이 등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화목제물은 거제로 바쳐진 화목제물이었다는 것입니다.
II. 거제로 바쳐진 화목제물
성경에는 많은 제사들이 등장하는데 이 많은 제사들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분류가 됩니다. 첫째는 제사의 목적을 따른 분류입니다. 여기에는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등이 있습니다. 번제는 온전한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고, 소제는 손으로 수고한 곡식과 이러한 식물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제사였습니다. 속죄제는 죄의 용서를 위한 제사였고, 속건제는 하나님의 성물에 관하여 범한 죄 때문에 불결해진 사람이 다시 성결해지는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감사와 서원과 자원하여 드리는 화목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5가지 제사를 구약의 오대 제사로 불립니다. 그 다음에는 제사를 분류할 때 어떻게 제사를 드리느냐에 따르는 방식에 의한 분류가 있습니다. 4가지인데 첫째는 번제입니다. 이것은 모두 태워서 하나님 앞에 바치는 불의 제사였습니다. 요제가 있었는데 이것은 제물을 하나님 앞에 흔듦으로써 하나님께 열납되게 하는 제사였는데, 이 화제와 요제는 모두 동물의 제물, 식물의 제물 모두 적용되는 제사의 방식이었습니다. 전제가 있었는데 이 전제는 이미 있는 제물 위에 추가적으로 액체를 부어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기름이나 포도주 혹은 피를 부어서 드리는 제사가 그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거제가 있었는데 이 거제는 어떤 제물을 하나님 앞에 높이 올려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의 방식이었습니다.
A. 거제의 의미
이 거제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히브리 성경에 ‘테루마’[המורת]라고 되어 있는 이 거제라는 명사는 원래 ‘룸’이라고 하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룸’은 ‘높이다, 높이 들다’ 비유적으로 ‘교만해지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였습니다. 그래서 이 거제는 바로 하나님 앞에 그 제물 하나, 하나를 높이 들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의 방식이었습니다. 사람이나 어떤 물건을 높이 들어 하나님을 의식하고 올린다는 것은 높으신 하나님께만 바쳐졌다라고 하는 의미였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시편 40편 3절이나 사무엘하 23장 1절에서도 분명해 집니다. 그러면 이 거제는 제물을 하나님 앞에 높이 듦으로써 이 제물이 제사 드리는 사람의 마음과 함께 오직 높으신 하나님 한 분께만 바쳐진 제물입니다 라고 하는 하나의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제물과 신앙을 통해 하나님은 그 제사를 열납 받으셨던 것이죠.
B. 하나님께 바쳐짐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본문에 보면 하나님 앞에 거제를 드릴 때에 하나씩 제물을 드려서 하나님 앞에 올리도록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화목 제물로 하나님 앞에 바쳐진 제물인데 하나님은 바쳐진 그 제물 하나, 하나를 개별적으로 들어서 우리 하나님께 높이 듦으로써 오직 이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헌제자 자신이 높으신 우리 하나님 한분께만 바쳐졌다는 것을 표명하기 원하셨던 것이죠. 제물은 이미 바쳐졌지만 바쳐진 제물중 동물의 각이 떠진 그 부위들을 하나씩 들어서 개별적으로 하나님 앞에 높이 들어 오직 높으신 하나님께만 바쳐졌다는 것을 제사 속에서 표명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미 바쳐진 제물인데 이렇게 하나, 하나 개별적으로 제물들을 주님 앞에 올려 제사 드리게 하신 것은 아주 중요한 복음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목제가 이후에 우리 모든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후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웃들과 함께 누리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 앞에 받은바 은혜에 대한 감사로 바쳐진 제물을 하나씩 거제로 올린 것은 하나님께 받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우리의 개별적인 삶 하나, 하나 속에서 구체성을 띠고 우리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깨닫고 기뻐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자기 안에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언제나 동일한 효과를 가져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고, 높으신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롭고 사랑스러우신 분인지를 알게 해 줍니다. 이때에 우리의 마음은 깊이 감동을 받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동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많은 고백들이 나오게 되죠.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을 높입니다. 주님을 찬송하며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생활하겠습니다.” 등등의 고백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 앞에서의 보편적인 헌신의 고백이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그 고백을 삶의 한 방면 한 방면에서 높이 올려드려, 우리 하나님께 올려드려서 주님이 받으실만한 제사가 되도록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고백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삶이 아닙니다.
저는 그런 일 가지고 실망하지도 않고, 낙심하지도 않습니다. 아주 오래전 일인데 설교를 준비하다가 생각이 났습니다. 방배동 지하실에서 7명이 교회를 개척을 했는데 교인들이 점점 늘어나서 25평밖에 안 되는 공간에서 240명까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골목에 주산학원부터 시작을 해서 뭐 피아노 학원까지 여러 개의 방을 빌려서 이제 어린이도 가르치고 뭐 이렇게 했어요. 그러다가 도저히 못살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큰 예배당에 사글세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때에 건축헌금을 했어요. 그랬더니 어느 성도가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을 건축헌금으로 약정을 했어요. 그 후에도 그만큼 건축헌금을 약정한 사람이 없었어요. 엄청난 금액을 헌금을 하겠다고 약정을 했어요.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강요를 했겠어요? 재산을 정리하지 않으면 웬만한 사람은 도저히 교회에 내놓을 수 없는 헌금을 약정했을 때 감동이 없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죠. 뭔가 감동이 있었고 그리고 받은바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작정을 한거죠. 그런데 한 1년 정도 지난 후에 교회를 떠났어요. 시험이 들은 것도 아니고, 무슨 마음이 상할만한 사건이 발생했거나, 교회를 옮긴 합당한 아무 이유가 없었는데 교회를 떠났어요. 한 푼도 안 내고요. 그런데 저는 조금도 낙심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기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지금도 생각에는 궁금하기는 한데 아마도 한 순간에 받은 은혜로 거액의 헌금을 작정은 했지만 아마 그것에 대한 중압감 때문에 교회를 옮긴 것이 아닐까 그렇게 추측을 해요. 아마 그 사람은 열린 교회에서 건축헌금을 작정할 때 그 작정을 받으신 하나님은 방배동에만 계신 하나님이라고 생각을 하셨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딴 동네로 간 거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은혜가 없이는 우리들이 어떤 상황을 이길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캄캄한 밤중처럼 살던 성도들이 진리의 밝은 빛을 받을 때 그렇게 기뻐하는 것이죠. 얼음덩어리 같이 차가웠던 성도들의 마음에 은혜의 뜨거운 불길이 일어날 때 그들은 기뻐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런 은혜를 경험하면서 “이제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라고 진심으로 고백한 자체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 아닙니다. 저는 17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1년 동안에 설교를 1000편을 넘게 들은 사람을 여럿 만났어요. 지금은 설교가 그렇게 길지 않잖아요. 옛날에는 길었어요. 여러분 어디 가면 꼭 전도할 때 옛날에는 길었지만 요새는 짧아졌다고 꼭 전해주세요. 어떤 사람들은 너무 길까봐 못 온대요. 요즘은 짧아졌잖아요. 길게 할 수도 없어요. 빨리 빨리 예배를 드려야 하니까. 근데 보통 90분 내지 2시간을 설교했어요. 60분을 설교하고 내려오면 근심스런 눈빛으로 성도들이 어디 아프냐고 물었어요. 그러니 그거를 1년에 천개를 넘게 들었다면 하루에 3개를 들은건데 4시간 반 내지 6시간을 설교 테입을 들었던 거죠. 생업에 종사하면서. 그러니 그게 보통 자기에게 감격이 되지 않으면 그 짓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 은혜를 받은 성도들 중에서도 정말 개별적인 삶에 있어서는 하나님 앞에 거의 바쳐지지 않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이렇게 예배 드릴 때에는 단정한 모습으로 은혜를 받고 집에 돌아가서는 아내에게 함부로 하고, 욕하고 심지어는 손찌검하는 성도들이 있다죠?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이런 경우에 해당되기 때문에 본인도 괴로운 분들도 있을 겁니다. 분명히 말씀은 깨달았어요. 그리고 주님도 만났고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신앙이 조금 올라가는가 하면 금방 굴러 떨어져서 제자리로 돌아오고, 올라가는가 하면 굴러 떨어져서 제자리로 들어오고 하는 일들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에 자신도 자신에게 실망스러운 분들 계시죠. 그 분들은 오늘 설교들을 귀담아 잘 듣고 집에 가서 또 듣고 또 듣고 고치세요. 답을 가르쳐 줄께요. 그 답이 뭐냐 하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눈물을 흘리고, 감동을 받아도 구체적인 삶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지 않으면 그러면 여러분들은 계속 반복해서 똑같이 굴러 떨어지는 생활을 되풀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영적인 성장이라는 것이 없는 거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아요. 그러면 어려움이 없습니까? 아니죠. 어려움이 생기죠. 또 극복해요. 그러면서 또 어려움을 이기고 또 나가고 계속 승리하면서 영적으로 성장하는 거죠. 그러면 영적으로 성장한다고 해서 항상 은혜 충만한 게 아니라 많이 성장을 했는데 은혜가 떨어질 때가 있어요. 그러면 이렇게 꼬꾸라지지는 않아요. 이렇게, 이렇게 성장하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은혜가 떨어지면 완전히 불신자인 그 시절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것은 성장이 아니에요. 그러면 왜 성장이 없을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을 못하는 거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성경의 지식을 터득할 때에 기쁨을 누린 것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주 훌륭하게 이미 헌신되었고 바쳐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알고, 교리와 지식을 정확하게 터득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달은 교인들 중에도 사실은 하나님 앞에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은혜를 받았어요.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움직이고 교리들을 분별할 수 있는 지식들이 생겨나게 되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해서 머리는 커졌지만 손은 꼬부라졌고, 다리는 부러졌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구체적인 삶의 실천이 없어요. 이런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남들 가르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앉혀놓고 이 교리, 저 교리, 이 성경지식, 저 성경지식 가르쳐요. 그 태도가 마치 적선하듯이 하나씩 나누어 주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모든 사람들은 특별한 헌신이 없는 한 교만한 마음, 우쭐한 마음을 어느 정도는 갖게 마련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 입술에 침을 바르는 데는 힘이 들지 않아요. 그러나 자기가 그 말씀을 남에게 가르치기 전 자신에게 적용해서 그 말씀을 따라 땀을 흘리고 피를 흘리면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헌신은 우리의 생명을 요구해요. 그렇게 산 사람들은 말씀에 지식이 자신에게 많다는 것 때문에 교만해질 수 없어요. 왜냐하면 무지한 사람들과 비교하면 자신은 선생되기에 충분하지만 진리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그 진리를 아직 다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죠. 교회에 옵니다. 주보대 앞에서 세상살이용 살던 가면을 걸어놓고 주보를 들고 교회에 옵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은혜를 받고 눈물도 흘리고 감격도 하고 기뻐도 합니다. 나갈 때는 다시 예배용 눈물 젖은 예배용 가면을 주보대 위에 두고 그리고 아까 벗어 놓았던 세상살이용 가면을 쓰고 다시 걸어 나가는 것이죠.
보십시오. 오늘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바쳐진 화목제물이 있습니다. 바쳐졌잖아요. 그런데 다시 하나님은 다시 그 제물 하나씩 들어서 한꺼번에 들지 말고, 하나씩 들어서 하나님 앞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당신께만 드려질 만한 제물이옵나이다 라고 표명하라는 것이죠. 은혜를 많이 받았죠. 교회에서는 열심히 섬기고 가난한 사람을 도울지는 몰라요. 그런데 여러분들의 가정에서의 삶도 하나님 앞에 높이 올려질만한 거제의 제물이 되었습니까? 은혜 받고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폭언을 퍼붓고, 자기의 자녀들에게 신앙적인 모본을 보이지 않고 함부로 하는 성도들, 말씀의 은혜를 받고 주중에는 성도들을 가르쳐도 주말에는 남편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부인들의 태도,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드려질만한 거제의 제물이 아닙니다. 온갖 핑계와 이유를 대면서 자신의 불순종을 합리화 하지만 그것은 쓰레기 같은 변명일 뿐이에요.
어디 그뿐입니까? 하나님 앞에 바쳐진 교회의 봉사라고 하는 하나의 영역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중에 대부분은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고 아직도 무위도식하는 분들도 많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를 섬깁니다. 그러나 일하는 것이지 정말 섬기는 게 아니죠. 사람들 앞에서는 할 얘기도 많고 억울한 것도 많지만 여러분들이 교회에 드리는 봉사의 영역을 높이 들어 하나님께 올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교회 봉사의 영역을 들어서 하나님 앞에 올리려고 하는데 ‘없어’ 아예 들을 것도 없어, 그런 사람들은 생각하지도 말고 그래도 있어요. 들어요. 근데 뭐야. 결함이 너무나 많아요. 하나님께만 바쳐진 거라고 말할 수 없어요. 하나님께 바치기는 커녕 그런 제물은 개가 줘도 안 먹을 거 같아요. 그런데 그게 하나님 앞에 은혜 받았다 라고 하는 그래서 이제 나는 주님께 바쳐졌다는 보편적인 헌신으로 이런 것들이 다 무시되고 있는 거죠.
오늘날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욕을 먹는 것은 현대인의 밑바탕에 깔린 강력한 무신론을 반영해요.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도 잘못한 게 많지요. 교회에 나오고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을 하고 그리고는 아직 충분히 하나님의 은혜를 못 받았어요. 혹은 은혜를 받았어도 삶의 어느 부분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지를 못해요. 그래서 정직하지 못하게 살고, 불의하게 살고, 타협하면서 살아요. 그게 우리끼리는 연약한 거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위선이에요, 위선. 그럴려면 차라리 예수를 믿지 말고,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을 하지 말든지 이익이 될 때는 박쥐처럼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손해를 보고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살아가는 이것이 결국 복음적인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죠. 이미 하나님 앞에 바쳐진 제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물 하나, 하나를 높이 들어 위에 계신 하나님 한 분께만 바쳐진 제물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계속 제사를 올려야지만 이 화목제사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이었어요. 그리스도인 가운데 만연한 부정직, 그리고 정의롭지 못한 삶, 이런 것들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내면적으로 경험하는 이것은 복음적인 신앙생활에 있어서 핵심이에요. 그런데 그의 합당한 개별적인 삶에 있어서 구체적인 헌신이 따르지 않을 때 이런 종교적인 경험들은 자기만족적인 소비의 영성이 되고, 오히려 그런 은혜의 경험들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는 것이에요.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말씀의 은혜를 받고 남이 모르는 신앙의 길을 깨닫고 남이 보지 못하는 진리를 보게 되었다면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신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 신자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고백할때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위해서 당하게 되는 많은 괴로움과 고통을 감당하겠다는 신앙의 고백이 담겨있는 것이에요. 강남에 있는 어떤 교인이 학부모들이 모두 자기를 왕따시키더래요. 협조 안한다고. 그런 거예요. 많은 경우에 가장 좋은 신앙의 이상은 하나님께 칭찬받고 사람들에게도 사랑받으면 최고죠.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사람에게 밉게 보이지 않고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 것이에요. 그때에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삶 하나 하나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거에요. 예수 믿기 때문에 정직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야죠. 사람들이 보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업을 한답시고 부정직하게 탈세를 하고 교회에 장로요 일군이라는 사람들이 공직에 취임시켜놓으면 뇌물이나 받았다는 기사가 신문에 오르내리고 하는 이런 저급한 윤리적인 생활은 하나님 앞에 은혜는 받았지만 보편적으로는 구체적인 삶 하나, 하나가 드려지지 않은 사람이에요.
키에르케고르는 인류는 사랑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희생이 따른다고 말했어요. 한 사람이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희생이 필요하지 않아요. 우리가 인류를 사랑하자고 말하면 그 일을 위해서는 메마른 입술에 침 한번 바르면 누구든지 그렇게 말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보이는 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참고 희생하고 기다려 주고 자기가 있는 것을 그를 위하여 소비하여야 해요. 교인끼리 주차장에서 차가 부딪쳤다고 얼굴을 붉히고 큰소리로 다툽니다.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전기, 전화 쓰고 그리고는 도망을 갑니다. 미국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에요. 너무 창피해요. 오죽 했으면 미국의 어느 시에서는 한국 사람인 경우에는 미리 전기세를 내지 않으면 전기를 공급하지 않겠다고 했대요. 얼마나 유학생들이 떼어먹고 도망을 가는지.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에게 유학이 무슨 필요가 있는지 나는 궁금해요.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지 말아야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올바르게 사는 삶은 삶의 모든 방면에서 구체적으로 그 삶이 하나님 앞에 거제처럼 드려집니다. 아버지께만 드려지는 이 삶은 받은바 하나님의 은혜를 유지하고 그 은혜를 더 풍성하게 하는 중요한 비결이에요. 왜 그럴까요? 설명을 할테니 들어보십시오. 교회에 가서는 은혜를 받아도 집에 가면 자녀들에게 폭언을 행하고 부인에게 심지어 폭력을 행사하는 교인이 있다고 쳐요. 그래도 오늘 예배를 통하여 짐승 같은 사람이지만 은혜를 주셨어요. 집에 갔어요. 그런데 또 개념 없는 아내가 성질을 돋구는 거예요. 예전 같으면 확 쏟아버렸을 텐데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가정생활이라는 방면에 있어서 이것을 거제로 하나님 앞에 올려야지. 아내는 개념 없이 굴어도 깊이 인내하면서 참아요. 그게 쉽습니까? 개념 없는 아내하고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죠. 남자들은 그 남자대로 괴롭죠.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되는데 너무 괴로운 거예요. 마지막에는 깨닫는 거에요. 내 힘으로는 참을 수가 없구나. 그래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거예요.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가 모자란지를 알지 원래 안 받은 사람은 자기가 모자라는 줄을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제가 은혜를 받았는데 이렇게 가정에서 개념 없는 일들이 일어나니 제가 저를 누를 길이 없습니다. 혈기대로 살수 없으니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해요. 그러면 어떤 마음이 생기냐면 정말 나는 은혜를 받아도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이구나. 하나님 앞에 더 큰 은혜가 필요하구나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게 되는 거예요. 겸손해 지게 되죠. 하나님이 더 은혜를 주시죠. 어려움과 역경이 있지만 계속 믿음이 성장하는 거에요.
제가 여러분 양성 평등주의자인거 아시죠. 별로 모르세요? 하나님의 은혜를 자매가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집에 가면 안 믿는 남편이 자기를 그렇게 괴롭히는 거예요. 교회 가자고 몇 달 동안 구슬려 놓고 성질날 때 한 방에 날려버리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오늘은 달라요. ‘내가 이러면 안되지.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는다고 했지.’ 그런데 개념 없는 남편하고 사는 아내들은 결혼생활이 지옥이거든요. 해보신 분들은 아시는데..보통 괴로운게 아니에요.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아 그렇구나. 내가 교회 봉사를 좀 한다고 하고 선교 아웃리치 나가서 설치기는 했지만 가정은 정말 내가 포기했구나. 그래서 우리의 가정의 영역을 우리의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거제처럼 높이 들어. 너무 결함이 많아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해. 남편이 아주 자기를 잔인하게 괴롭게 해. 잔인하게 괴롭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그때 깨닫게 되는 거죠. 주님 주신 은혜를 내가 받았지만 이 은혜를 가지고도 이 인간은 극복이 안되는 구나. 더 많은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면 큰 은혜를 부어 주시죠. 그러면서 다시 극복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어도 구체적인 그 삶에 적용해서 그 삶 자체를 높으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헌신의 고백이 있을 때에만 그 은혜는 유지되고 강화될 수 있는거에요.
그런데 한번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삶에 공들이지 않습니다. 그냥 습관에 쫓아서 남이 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갑니다. 어제도 산지 1년 밖에 안됐는데 제 차를 수리 했어요. 어느날 나와보니까 차 옆을 북 긁고 가버린 거에요. 써 붙여야 될 거 아니에요. 어디 사는 누구인데 긁고 갔는데 정말 미안하다 연락하면 책임지고 수리해야주마 그래야 되잖아요. 세상 사람들은 안 그래요.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거죠. 어쩌면 만약에 아주 좋은 외제차였으면 한번 북 끓으면 돈 1000만원 이상 물을지도 모르고 6개월치 월급을 거기에다가 쏟아부어야 될지 몰라요. 1년에 보험료가 수십만원 올라갈지 몰라요.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라는 고백 속에는 그렇게 살겠다는 고백이 다 포함되 있는거에요.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그리스도인이 기회주의자처럼 보이는 이유도 이런 단호한 삶의 고백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는다는 사실 그 자체로 우쭐해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도무지 사람들에게 오디오로만 가르치려고 들지 비디오로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책상다리하고 앉아서 하나씩 하나씩 가르치고 못 알아 들으면 혼이나 내고 그러면 무슨 선심이나 쓰는 것처럼 한사람씩 적선하듯이 가르치고 심지어는 가르친 댓가로 자신에게 봉사하게 만드는 이런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아가는 거죠. 그리고 자신은 가르치기만 할 뿐 그 가르침 대로 살 때에 어떻게 눈물을 쏟아야 하는지 어떻게 땀을 흘려야 하는지 어떻게 피가 쏟아져야 되는지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는거죠 그러니까 받은바 하나님의 은혜가 간직되지 않는거죠. 여러분들이 오늘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정에 가서 개인의 삶 속에서 치열하게 피 흘리며 살다가 돌아오면 다음 주에는 예배당 들어서자마자 예배가 시작되기도 전에 감격에 빠질 거예요. 들어서자 마자 눈물이 확 쏟아질 거예요. 그게 예배의 감격이죠. 삶에 분투함이 없는데 예배의 감격만 맛보겠다고 휴지 뜯어서 예배당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늘나라는 눈물 흘리는 사람이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주를 위해 산 사람들만이 들어가는 나라에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삶을 두리뭉실 하게 하나님께 바치지 말고 아주 구체적으로 바쳐야 해요. 공직을 맡은 사람들은 청렴해야 해요. 자신이 없으면 처음서부터 다른 사업을 해야지 공직자는 되면 안되요.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삶을 사는게 어려워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고 주님의 사랑에 목마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주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혜를 구체적인 삶 속에서 고백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제사장들에게 바쳐짐
마지막으로 이렇게 거제로 올려진 제물은 불태워서 없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돌려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제물을 취했고 자신의 생활에 활용을 했어요. 그게 누구죠? 제사장들이었어요. 여기에서 이 제사장이 누굴까? 제사장의 중보가 없으면 당시에는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이 제사장들의 직무는 제사를 드릴 때 짐승의 피를 뿌리므로 제물이 하나님과 헌제자 사이의 속죄와 중보를 위해 희생했다고 하는 것을 표명하는 임무를 맡았어요. 그러나 먼저 생각할 것은 이 제사장이 오늘날의 목회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럼 여기에서 말하는 제사장이 신약에서 누구를 예표한 것이었을까. 그러기 위해서 구약이 아니라 신약에서 이 제사장이란 말이 누구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는지를 보면 이 질문에 대답할수 있는 것이죠. 신약성경에는 제사장이란 단어가 40회 사용됩니다. 세 가지 용례가 나오는데 가장 많이 나오는 용례는 그 당시에 있었던 혹은 구약에 있었던 제사장 그 자체를 지칭하는거에요. 이것은 제사장이 제사장을 지칭하는 것이니까 제외합시다.
나머지 두 용례가 있는데 첫째는 속죄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 제사장이란 말이 사용되었어요.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도 표현되었지만 히브리서 7:3,20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사장으로도 표명이 되었어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삶의 어떤 부분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올려 감사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쳤을 때 이 올린 제물은 제일 먼저 예수그리스도께 돌아가야 되요. 이렇게 설교한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구약에 올린 짐승의 뒷다리를 예수님이 내려오셔서 드신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죠. 예수님은 당신이 이 지상에 계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게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으니 나의 양식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 그럼 여러분들의 삶의 한 부분, 한 부분을 구속받은 은혜가 감사해서 높이 올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바쳤다고 한다면 그 바쳐진 헌신의 유익 때문에 예수님이 배부르셔야 해요. 그 예수님을 배부르게 하는 비결이 뭐냐면 예수님이 이땅에 계셨더라면 우리와 함께 하셨을 그 일들의 뒤를 잇는 것이죠. 그래서 병든자를 돌보고 무지한 자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고 고통 받는 자들과 아파하며 진리로 시련을 이기게 하셨던 주님의 착한 행실을 본받아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거에요. 그것이 바로 구체적인 삶이어야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나 만남을 통해서 그를 이용해서 나의 이익을 가져야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봉사의 원리가 아니에요. 어디에 살던지 내가 다른 사람 때문에 이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여기에 있음으로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익을 얻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이 이용되고 다른 사람 위해 더 많이 소비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더 많이 주고 그렇게 자신이 바쳐지는 구체적인 삶이 하나님 앞에 개별적인 어느 부분이 드려진 삶이에요.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봉헌해야하는 복음의 원리를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이미 받은 것이 너무 크고 많기 때문에 이제는 나 자신을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으면 사랑했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면서 그들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나 자신이 희생해야 한다고 고백해야 해요.
그런데 그렇지를 않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으니 이제 예수님이 나를 책임지셔야 합니다. 돈도 주시고 출세도 하게 해주시고’ 끊임없는 욕망이 솟구쳐 올라와서 요구사항이 점점 늘어나요. 채워주시지 않을 때 하나님께 앙심을 품는거죠. 이런 것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이것은 그가 진정으로 십자가에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못 박히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고 자기 같은 죄인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주시는 이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안 사람들은 이미 주님이 주신것 때문에 충분히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죠.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의심 있는 곳을 믿음을 분열 있는 곳에 일치를 심게 하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그것이에요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 안 사람들은 자신의 개벽적인 삶을 하나님 앞에 거제로 올리고 이 유익 때문에 예수를 배부르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에요. 아멘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성경에서 더 많은 구절 벧전 2:5,9 계 20장 혹은 5장에 보면 이 왕 같은 제사장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니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감사한 이 감격은 하나님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이 아름다운 영적인 연합을 위하여 하나님께 바쳐진 이 개별적인 제물을 돌려드렸어요.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성도들을 풍요롭게하고 번여하게 하는데 이바지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도 무위도식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교회 와서 예배드리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이것은 죄악이에요. 회개해야해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위해 봉사를 해야 되요. 그런데 그렇게 봉사를 함으로써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여러분 때문에 행복해지고 없었던 사람들은 있게 되고 무지했던 사람들은 깨닫게 되고 힘이 없던 사람들은 힘을 얻고 상처받은 사람들은 여러분 때문에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되어야 해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여러분들을 제물로 드렸을 때 일어나는 일이에요.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건져주셔서 다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시기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셨고 어떤 삶을 사셨는지를 되새겨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주셨고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권세에 그 능력 가주고 우리를 이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 많은 권세를 받으셔서 우리를 당신 발아래 굴복시켜 타고 다니셨습니까?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병든자를 고치고 주린자를 먹이시며 종 같은 인자의 생을 사셨어요. 우리는 그분을 배부르시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분이 사랑하셨던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예수의 피로 구속해주신 구원의 백성들이에요.
III. 결 론
우리 과거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의 행복에 골몰하는 동안에는 우리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았어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가득차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힘이 없는 교인들을 눈물로 붙들어 주는 섬김의 삶을 살았을 때 마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했어요.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자기와 화목해진 사람들에게 원하는 바로 그 사랑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듣고 받은바 은혜의 경험에 자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삶의 작은 부분이라도 주님께 드려서 그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바쳐지도록 그런 섬김 때문에 그리스도가 배부르시고 이 땅의 많은 성도와 많은 이웃이 배부르도록 교회가 번영되도록 그런 삶을 살게 되시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