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기도
만일 그것을 감사하므로 드리거든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 희생과 함께 드리고 (레7:12)
녹취자: 김경애
Ⅰ. 화목제의 규례
오늘 읽은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을 섬길 제사에 관한 규례를 가르쳐주시는 가운데 등장하는 본문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이 규정하고 있는 것은 화목제의 규례입니다. 화목제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였는데 이 화목제를 드리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로 분류됩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 감사한 일이 있어서 올리는 감사제와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맹세와 관련하여 올리는 서원제, 국가적인 경사가 있을 때나 혹은 하나님 앞에 자원하는 마음이 있을 때 올리는 낙헌제 등이 있습니다. 이 화목제를 히브리말로 ‘샬렘’ 이라고 그러는데 이것은 여러분들이 잘 아는 단어 ‘샬롬’과 같은 어근입니다. 그래서 이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사람들 속에 이루어지는 수평적인 평화와 안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평화의 효과를 사람들 속에서 누리도록 만들어주는 그 모형을 이 화목제에서 나타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린 후에는 이제 제사장과 평민, 모든 레위인들 까지 함께 하나님 앞에 경배하며 그 제물을 함께 나누며 즐거워하며 공동체 의식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Ⅱ. 감사로 드릴 제사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화목제 중에서 특별히 감사제로 하나님께 올리는 이 제물과 제사에 관한 규례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새롭게 알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면 하나님 앞에 감사로 드릴 제사에 세 가지 예물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기름 섞인 무교병이었고, 두 번째는 기름 바른 무교병이었고, 세 번째는 기름을 섞고 고운가루로 빚어서 구운 전병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소재의 제물이 모두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름이 섞여있다는 것입니다. 이 기름이라는 것은 결국 신약시대에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통하여 누리게 될 성령의 은혜와 중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공로를 통해 구원을 얻었지만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입니다. 동시에 성령의 작용을 통해서 얻은 구원이고 이 세 가지 구원의 측면은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특별히 영혼을 가진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중재의 수단으로써 성령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모든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이 무교병에 기름이 섞여있다는 것은 구속받은 우리의 삶이 누리게 될 성령의 은혜 또 그 성령의 은혜 안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이 구속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데 있어서 매우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A. 기름 섞은 무교병
제일 먼저 등장하는 제물은 기름 섞인 무교병이었습니다. 이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누룩이 없는 떡입니다. 이 누룩은 신약성경에 15번 등장하는데 13번이 부정적인 의미로 등장하고 단 두 번만 긍정적인 의미로 등장합니다. 다음절에 보면 아시겠지만 놀랍게도 무교병과 함께 유교병을 드렸습니다. 이 13회나 부정적으로 사용된 누룩이 상징하는 바는 크게 세 가지인데 거짓 교훈을 누룩에 비유하기도 했고, 외식을 누룩에 비유하기도 했고, 놀랍게도 예수님은 헤롯의 누룩을 말씀하심으로 헤롯의 윤리적인 타락, 곧 악행을 누룩에 비유했으니 지도자의 도덕적인 부패가 가지고 있는 전염시키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구속의 은혜, 주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사랑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 올린 첫 번째 제물은 기름을 섞은 무교병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올리는 꾸밈이 없고 거짓이 없는 순수한 신앙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속의 은혜를 생각할 때 놀랍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이렇게 구원해주셨으니 내가 주님을 위해서 선교사가 될까?’ 아니면 ‘돈을 많이 벌어서 교회에 왕창 헌금을 할까?’ 아니면 ‘내가 이런 저런 재능을 가졌으니 그 재능을 교회와 이웃을 위해서 사용할까?’ 사람들은 많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가 감사하다면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이 제일 먼저 보여야할 하나님 앞에서의 반응은 순수하고 꾸밈이 없는 진실한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을 불태워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 모든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박수칠만하고 수많은 이웃들에게 경탄을 자아낼만한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만약에 꾸며낸 것이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짐짓 만들어낸 외형적인 삶의 모습이라면 그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아는 사람의 반응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순수하고 꾸밈이 없는 구김이 없는 깨끗한 신앙 이것은 헌신과 충성과 모든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높은 가치인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유능한 목회자가 되고 싶으냐? 진실한 목회자가 되고 싶으냐?’ 고 물으면 우리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한 번에 후자라고 말해야합니다. ‘위대한 일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으냐?’ 아니면 꾸밈이 없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우리는 단 10초도 망설일 필요도 없이 우리는 후자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누구도 자기가 하는 일을 가지고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는 내 사랑하는 자라고 불러주신 사람만이 ‘이는 내 기뻐하는 자요.’ 라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이것을 이중의 인침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인침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앞에 하고자 하는 사역에 대한 인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순서인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과 그 은혜를 깊이 깨닫고 난 다음에는 거짓이 없는 순수한 신앙, 꾸밈이 없고 거짓이 없는 깨끗한 신앙을 갖는 것 이것이 그 무엇보다도 가장 커다란 신앙의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찬양)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갈까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천 천의 수양과 기름을 주께 드릴까 내 몸의 열매로써 주께 바칠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을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라.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반응은 최고의 감사의 표시는 하나님 앞에 꾸밈이 없고 거짓이 없는 순수한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깊이 생각할 때마다 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와는 얼마나 거리가 먼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보고 아직은 드러나지 않은 자기 자신의 많은 죄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정말 선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부패한 인간인지 우리 속에 얼마나 많은 죄들이 가득 차 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순수하고 꾸밈이 없는 태도로 우리 자신을 볼 때 하나님의 은혜 밖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서울에서는 그런 것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시골에 가면 어른들이 종종 아주 귀한 손님이 오시면 씨암탉을 잡습니다. 씨암탉은 무엇입니까? 계속 계란을 낳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정란을 낳아서 병아리를 까게 해주는 어미닭입니다. 그것을 잡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부어서 털을 다 뽑습니다. 그리고 내장을 꺼내야 되니까 배를 가릅니다. 배를 갈라서 가슴을 열어보면 깜짝 놀라는 광경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닭을 잡아서 배를 갈라보면 하얗고 말랑말랑한 알이 엉덩이 아래에 딱 누워있습니다. 이것이 하루쯤 지나면 딱딱한 달걀이 되어서 꽁지로 나올 차례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 하얀 알이 있는 위를 보면 노른자위가 대롱대롱 매달려있습니다. 그러데 두 개, 세 개가 매달린 것이 아니라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져서 저 위로 올라가면 좁쌀 같은 달걀들이 수백 개가 매달린 것입니다. 날짜가 지나면서 하나씩 익어서 내려오면서 꽁지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몰랐을 때에는 ‘내가 무엇을? 이만하면 됐지? 교회에 잘 다니고 형법, 민법, 행정법 잘 지키고 경찰에서 찾아온 적이 없으니 됐지?’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처참하게 피 흘리고 죽으신 그 큰 고난이 자신의 얼마나 큰 죄에 대한 대속적 형벌이었는지를 깨닫게 될 때 그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며 예전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행한, 지금도 행하고 있는 크고 작은 죄들이 하나님 앞에 뉘우침의 대상이 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더 죄송스러운 것은 자신이 그런 죄를 지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가슴팍을 확 벌려놓은 씨암탉 위에 매달린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잉태된 죄의 씨앗들이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도 자기 안에 있는 이 죄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순수하고 깨끗한 신앙이 되고 싶지만 자신의 힘으로 불가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기에서 통절한 회개가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앞에서 그 정도 존재밖에 안 된다는 것에 대해서 깊이 통렬하게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울며 주님 앞에 참회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있는 소원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순수하고 깨끗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안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쳐야할 첫 번째 감사의 표시는 꾸밈이 없는 순수한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아멘.
B. 기름 바른 무교병
두 번째는 성경이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그랬습니다. ‘기름 바른’ 이라는 이 말이 히브리어로 ‘마샤’ 라는 단어인데 그 ‘마샤’는 ‘기름을 붓다.’ 그 다음에 여기에서 분사형태가 되어서 피동분사형태가 되어서 메시야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가 바로 그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기름 바른 무교병’이 아니라 ‘기름 부은바 된 무교병’이라고 불러야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떻게 한 것입니까? 가루에다가 기름을 섞어서 떡을 만든 다음에 익혔고 그런 다음에 그 위에 기름을 부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신약의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꾸밈이 없는 순수한 신앙위에 기름이 부어졌으니 외적인 생활자체가 내면과 일치하게 성령의 통치를 받는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천국백성들의 외적인 생활에 대해서 가르치시기를 내면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 못지않게 많이 가르쳤고 그래서 어떤 개혁신학자들은 복음서를 읽으면서 깊은 갈등을 느낍니다. 왜? 왜냐하면 예수님의 복음서의 가르침을 보면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과 같은 암시를 보여주는 구절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박윤선 목사님이라는 신학자도 공관복음을 주석하시면서 이 문제를 가지고 굉장히 많이 고민하신 흔적이 주석에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천국 백성으로서 순수하고 꾸밈이 없는 신앙 이것이 내면과 외면의 세계가 일치하여 밖으로 마치 사과나무가 사과열매를 맺듯이 자연스럽게 그 거룩한 본성에서 거룩한 삶이 흘러나오게 되는데 예수님은 내면에서 외면을 바라보고 말씀하시기도 하시고, 외면을 바라보며 내면으로 말씀하시기도 하셨기 때문에 이중적인 가르침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힘은 두 가지의 힘입니다.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사상의 힘은 무엇이냐 하면 신학, 성경, 교리, 사상, 학문의 체계 이런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학문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공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나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표는 일평생 성경을 중심으로 진리가 무엇인지를 배워서 그래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상의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인들은 미국교인들도 마찬가지지만 공부를 안 합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퀴즈를 낼 테니까 맞추어보십시오. 다음 문제에 답해보시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2종 보통면허를 딸 때 더 열심히 공부를 합니까? 세례를 받을 때 공부를 더 열심히 합니까? 왜 대답을 못하십니까? 자동차 2종 보통면허를 딸 때 공부를 더 열심히 합니까? 세례를 받을 때 더 열심히 합니까? 하늘영광교회야 열심히 시킬 것입니다. 안 합니다. 그러니까 가여울 정도로 무지합니다. 그런데 또 청교도 개혁신앙을 어디서 들었다는 교인들은 우쭐합니다. 그래서 또 다른 사람을 아주 깔보는 기질이 있습니다. 가소롭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은 ‘디아노이아’ 라는 단어인데 ‘지성’이라는 뜻입니다. ‘마음과 지성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런데 예수 믿은 다음부터는 지성의 스위치를 끄는 것입니다. 드라마는 코를 박고 보면서 책은 안 읽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고 쉬운 성경공부만 하지 말고 어려운 성경공부도 하고 실천적인 책만 읽지 말고 이론적인 책도 읽고 사변적인 책도 읽고 현대사상이 어디까지 왔는가 하는 것도 읽을 수 있어야합니다. 왜? 신앙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야합니다. 우리교회는 교리반에 들어오면 라틴어부터 배웁니다. ‘스투데오 에루구숨!’ 나는 공부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왜 태어났습니까?’ 라고 제가 묻습니다. ‘공부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일제히 큰 소리로 대답해야합니다. ‘무엇을 공부하기 위해 태어났습니까?’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 보편 존재로서의 일반 인간과 개별 존재로서의 인간인 나에 대해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 대상에 대한 지식을 가장 잘 보여주셨으니 우리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 배우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당신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매일 외워야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사상의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중고등학생들이 하는 스타크래프트를 아십니까? 스타그래프트 라는 게임이 있는데 그것을 마스터하는데 교본이 550페이지랍니다. 부산에 사는 초등학교 여자아이들은 일본만화를 보기위해서 일본어를 공부한답니다. 일본 아줌마들은 배용준을 만나서 ‘안녕’ 한번 하려고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 남미 애들이 한국어를 배웁니다. 이 세상에서 육체의 즐거움을 위해서도 그렇게 배우려고 하는데 사랑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안하고 텅 빈 머리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주님이 우리에게 머리를 주신 목적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머리는 우리를 좌우 중심 잡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디자인이나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지성으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 배우고 그러면서 날마다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야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죽는 그 순간까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과 관련된 책을 읽고 경건서적을 읽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경건서적만 읽지 말고 마음을 날카롭게 하는 책을 읽으면서 그러면서 기독교 진리에 대한 확신을 점점 더 깊게 가져서 흔들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또 하나의 기독교의 힘이 무엇이냐 하면 윤리의 힘입니다. 그 윤리는 무엇이냐 하면 외적으로 드러난 삶이 하나님의 율법의 표준에 맞는 삶입니다.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끊임없이 맞추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끊임없이 진리의 말씀에 빛을 받고 성령의 은혜로 자신이 깨뜨려지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신의 모습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현대의 기독교와의 깊은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누가 자신의 요즘의 생활에 대해서 어느 학생이 나에게 글을 썼는데 이렇게 썼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친구에게 물었더니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생각과 뜻을 잘 아셔서 그래서 모든 것을 용납해주시고 나에게 맞춰주셔.’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러니까 뭐냐 하면 요즘은 정말 무서운 시대가 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철저하게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회개하여야 한다든지, 거듭나고 회심하여야 된다든지, 가던 길을 돌이켜야 된다든지,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된다든지, 이런 것들은 현대인들에게 너무 잔인하고 짜증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하면 인간이 회개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회개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시대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고 옛날에 사람을 다루시던 것같이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성경을 비틀어야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우리 박 목사님도 그런 이야기를 하셨지만 철학계에 들어가 보면 철학자들이 모두 모여서 작당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일을 하느냐하면 옛날 하나님이 아닌 요즘의 하나님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내고, 그 다음에 목회자들은 구원에 이르는 다른 길을 만들어내고, 평신도들은 예수를 믿을 다른 동기를 찾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합력해서 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올바른 앎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기독교의 진리를 행하지 않을지라도 일단은 알아야합니다. 이게 쥐약이면 쥐약이라고 여기다가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것이 우유가루인줄 알고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단은 안 행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를 시켜야합니다. 내가 우리 교인들에게는 그럽니다. 공부 안하는 사람들하고는 놀지도 말라고 그럽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히 알려는 사람들하고 놀아라. 그러면 하나님을 알려고도 안하고 공부도 못하는 사람은 그러면 뭐 사람도 아닙니까? 사람인데 그것은 동정심으로 가까이 가서 돌봐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의 마음을 일깨워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도록 만들어줄 것인가? 그것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취미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취미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 인간의 의무이고 천사의 의무입니다. 모든 영혼을 가진 피조물의 의무입니다. 영적인 피조물들의 의무입니다. 그렇게 해서 철저한 사상인데 그것 하나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삶으로 표출되어 나와야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삶을 살수밖에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출장을 갔습니다. 그래서 아주 바쁘게 일을 보고 7일 동안 16번의 설교를 하고 간신히 시간을 내서 서점에 갔습니다. 상당히 많은 양의 책을 사는데 좀 싸게 살까하고 중고서점에 들어가서 책을 골랐습니다. 그 책방에서는 많이는 사지 않고 1500불 정도의 책을 샀습니다. 그리고 어디로 보내주면 되냐고 묻기에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그러니까 코리아냐고 그럽니다. 고개를 흔들기에 왜 그러느냐고 이야기를 해보라고 그러니까 한국에서 어떤 사람들이 와서 자기네 가게에서 책을 잔뜩 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로 보내달라고 주소를 써놓고 갔다는 것입니다. 보니까 신학교였답니다. 그래서 책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개인이 아니라 학교니까 그것을 보내주면 거기에서 받았다고 통지를 하고 자기네가 거기에다가 돈이 얼마라는 영수증을 집어넣었으니까 돈을 입금할 줄 알았는데 아무 연락이 없는지가 6개월이 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한국으로 보내달라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염려하지 말고 여기 돈을 받으라고 카드를 주고 결제를 했습니다. 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입니다.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삶이 이렇게 너절할까? 아니 책을 사갔으면 돈을 보내주어야 되는데 거기에는 물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책을 사간 그 교수가 죽어버렸다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수가 개인적으로 산 것이 아니라 그 학교이름으로 샀으니까 책은 갔을 것입니다. 누군가 받으면 거기에 계산서도 나오고 돈을 보내달라는 편지도 들었을 테니까 책임감 있게 그것을 처리해주어야 하는데 너무 화가 나는 것입니다. 내가 돈이 있으면 그것이 얼마냐고 물어보고 내주고 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있는 후배목사님에게 ‘당신이 책임지고 찾아라. 도움이 필요하면 한국에 있는 나에게 연락을 하면 직접 연락해주거나 우리 부목사님을 통해서 찾아서 반드시 내가 받아주마.’ 너무 너무 창피합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살아갑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입니다. 차를 바꾼 지 채 1년도 안되었는데 아파트에 차를 세워놓았는데 아침에 차를 타려고 나와 보니까 차를 긁어놓고 지나간 것입니다. 아니 인간들이 왜 그럽니까? 인간이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거기다가 메모지를 붙여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몇 동 몇 호에 사는 누구인데 아침에 급히 차를 빼다가 당신 차를 긁었는데 연락하면 내가 고쳐주겠다.’ 그래야하지 않겠습니까? 안합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인들끼리 모인 주차장에서 쿵 하고 찌그러졌는데도 그냥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교수생활을 할 때 점심을 먹으려고 차를 가지려 내려왔는데 아파트밖에는 갈 데가 없어서 미안하지만 아파트에 차를 댔는데 그때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쿵 하고 하얀 소나타를 뒤꽁무니로 받았습니다. 차가 푹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누구 차인지 모른답니다. 그래서 거기다가 메모를 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학교로 전화가 왔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미안하다고 백배사죄를 했는데 이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차를 찌그러뜨리고 도망을 안가고 거기다가 그렇게 메모를 해놨느냐고 고맙다고 그러기에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그랬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그럽니다. 분명히 이런 한국의 기독교에 대한 모욕에는 근본적으로 깔려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강력한 무신론 사상입니다. 옛날에는 신이 있다고 그래도 ‘아 그러세요? 저는 없다고 생각하는 이런 사상 자체가 이 사람들에게는 아주 분통터지고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강력한 무신론입니다. 그게 이런 반감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리를 강력하게 고수하는 게 개신교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가톨릭은 벌써 1962년 바티칸 총회에 오면서 종교다원주의로 휙 돌아섰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동양종교나 불교 같은 것도 세계관이 우리와는 다릅니다. 지금은 점점 현대화되면서 이런 식의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들이 치를 떠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기독교를 이렇게 욕하는 것의 기본적인 이유는 현대인 속에 강력하게 뿌리를 내리는 강력한 무신론 정확하게 말하면 반유신론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잘못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한국의 현대사 속에 굽이굽이 나라가 고통을 겪고 온갖 부정과 스캔들 거기에는 전부 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 개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즘도 예수 믿는 대통령을 만들어놓고나서 측근에서 터지고 있는 이 수많은 비리들 속에 전부 다 그리스도인들이 다 끼어있는 것입니다. 정부 어디를 가든지 저 위의 장, 차관부터 시작해서 저 아래 환경미화원까지 선교회 없는 단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쩜 그렇게 철저하게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막된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저기에서 권력을 가지고 부패를 행하고 부정직하고 올바르지 않게 행하지 이런 일들이 난무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있었던 한기총 사건 같은 것을 가지고 신문에 떡칠을 하고 도배를 하고 이러는 금권의 작태 이런 것들이 기독교를 점점 우습게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개독교라고 욕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에 있어서는 우리들이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은 정말 생각을 다시 해봐야하는 것입니다. 이신칭의의 교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해놓으셨으니까 너희들은 걱정 말라는 식의 개신교적인 가르침이 오히려 이 도덕지수를 떨어뜨리고 이 부패한 삶을 살게 하는 오히려 중요한 한 이유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런 위대한 소위 이야기하는 ‘화이브 솔라’의 이 개혁교리 자체가 나빠서 그런 것입니까?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부패한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렇게 망가진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칼빈에 대해서 어떤 인상을 가지고 계십니까? 아마 로마서를 집중적으로 설교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신칭의의 교리,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 교리, 이런 것들만 설교했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칼빈이 성경 66권을 설교하는 것 가운데 정말 공들여서 설교를 한 성경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신명기 설교입니다. 200편 이상을 설교했습니다. 그래서 강력하게 율법을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야하는 인간의 엄숙한 의무, 그리고 그 의무를 실천하면서 살아야할 목숨을 건 그리스도인의 헌신을 촉구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속에는 그런 것이 너무 없다는 것입니다. 유약해 빠져서 그렇게 안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힘들 것이 없습니다. 주시는 은혜를 받으면 되니까 말입니다. 그랬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에서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사상, 교리, 성경, 신학, 이런 것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들려주는 것은 오디오입니다. 요새 AM라디오를 듣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옛날에 비하면 FM라디오를 듣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TV는 수십 집에 하나가 있으니까 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입니다. 연속극을 들으면서 같이 눈물을 흘리고 그랬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집에 가서 키면 TV가 나옵니다. 요즘은 TV가 3D까지 나온다고 그러는데 사람들은 정신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 비디오로 하나님을 보여주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윤리적인 생활입니다. 요즘은 세태가 얼마큼이나 썩었느냐하면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똑바로 삽시다.’ 라고 설교를 하거나 글을 쓰면 율법주의라고 그럽니다. 율법주의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려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으니 똑바로 좀 삽시다. 라고 이야기하면 율법주의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사상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뭐냐 하면 자기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데 개념 없는 인간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하도 답답해서 내가 ‘개념 없음’ 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개념 없는 인간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상의 힘도 별로 없습니다. 왜? 누가 그렇게 진지하게 기독교 신앙을 탐구합니까? 여기 하늘영광교회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 이외에 누가 그렇게 지독하게 탐구를 합니까? 안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 오면 예배 시간에 그저 우스운 이야기나 하고, 무슨 돌아가는 이야기나 하고, 그리고 지납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다녀도 이 속에서 지적으로 쌓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윤리의 힘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과 똑같이 아니 때로는 더 심하게 비윤리적인 삶을 살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산업사회가 되면서 인간의 가장 큰 비전은 개인적인 풍요와 평안입니다. 그 이상이 없습니다. 그게 신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위해서 벌벌 떨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들이 윤리적으로 살고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그것은 정말 피나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 시대가 악하고 그러니까 더 심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많은 결단이 필요한데 그렇게 살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대로 살자고 외치는 것은 쉽습니다. 왜? 입에 거품만 물면 됩니다. 그런데 그 말대로 자기가 살아가려면 땀을 쏟고, 눈물을 쏟고, 때로는 피를 흘려야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대가가 항상 좋은 것으로 즉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들은 이야기인데 이승만 대통령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독재정치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온갖 부정부패를 다 자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4.19 정신을 가진 목회자들이 여기저기에서 들고 일어나서 이 정권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저쪽 강북에 있던 어느 교회의 일인데 주일마다 이 목사님이 서슬이 시퍼렇게 ‘하나님이 이 정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부패한 정권을 하나님이 반드시 징계하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침을 튀기면서 설교를 합니다. 천장에서 강대를 비추는 환한 빛이 전기불빛이 내려옵니다. 계량기를 통하지 않고 들어오는 전기불빛이었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실 것입니다. 모든 전기는 계량기를 통해서 메타가 돌아가서 요금을 내게 되어있는데 예전에는 너무 가난하니까 사람들이 후딱 하면 천장을 뚫고 올라가서 전봇대에서 바로 뽑아서 썼습니다. 우리 때에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불을 키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절약이 됩니다. 왜? 불을 다 켜놓아도 계랑기가 안돌아갑니다. 그런 것을 한전에서 와서 두꺼비집을 내려 보는 것입니다. 그때 불이 켜있으면 난리가 나는 것입니다. 엄청난 돈을 물었습니다. 어느 집에서 벌금 무는 것을 봤는데 집 한 채 값이 떨어졌습니다. 기와집 한 채 값이 이백만 원 이백오십만원 정도하던 시절이었는데 말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개혁신학, 청교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삶이 남달라야하는 것입니다. 타협하지 말아야하는 것입니다. 단호하게 말입니다.
내가 아는 한 형제의 직업이 감정사였습니다. 지방에 감정을 하러 내려갔는데 어마어마하게 큰 건의 감정이 들어온 것입니다. 큰 회사가 휘청거리고 있었는데 부동산을 담보로 거액을 대출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부동산 가격을 10%만 높게 감정해주면 몇 십억 원에서 몇 백억의 대출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그때 아예 회장이 찾아왔더랍니다. 그러면서 금방 끝날 일이 아니니까 여관을 찾았는데 여관을 찾아왔더라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에게 무릎을 딱 꿇더라는 것입니다. ‘감정사님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애원을 하더랍니다. 대출을 많이 받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형제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사업을 하시는데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비서를 부르니까 밖에서 가방을 하나 가지고 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가방을 여니까 만 원짜리가 열다섯 다발을 묶었는데 어디서 그런 것만을 구해왔는지 만 원짜리 너덜너덜 한 것을 구해왔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추적이 절대 안 되는 돈이라고 그럽니다. ‘이것을 받으십시오.’ 그러니까 ‘봐주십시오.’ ‘봐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최선을 다해서 회장님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 돈은 받을 수 없습니다.’ 미뤄놓았습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선생님!’ ‘나도 너무너무 이 돈이 좋습니다. 저도 너무너무 쓸데가 많습니다. 그러나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아 괜찮습니다. 이것은 추적도 안 되고’ ‘제가 받을 수 없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왜요?’ ‘내가 글쎄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습니까? 제가 예수만 안 믿었더라면 얼마든지 받을 텐데 가져가십시오.’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그때에 사람들은 ‘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 이것이 정말 있는 것이구나!’ 그것을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윤리적인 삶을 통해서 확연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적인 무신론이 오늘날 기독교 선교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경험 못해보셨을 것입니다. 어제도 우리 집사람이 하루 종일 전도를 하고 와서 이야기를 합니다. ‘여보, 정말 눈물이 나요.’ ‘왜?’ 하루 종일 전도를 다녀도 문을 열어주는 집도 손을 꼽을 정도입니다. 어떻게 하느냐하면 ‘싫어요. 다음에 믿을게요.’ 그 정도가 아니라 막 욕을 퍼붓는 것입니다. 욕설을 퍼붓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내일 아침에 전도지를 들고 9시에 아파트를 누비면서 ‘하늘영광교회에서 왔는데 예수님을 믿고 선하게 사십시오.’ 그렇게 전해보십시오.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욕지거리를 막 퍼붓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전도현장에서 보면 이제는 말로 전하는 복음 가지고는 소용이 없겠구나! 지나친 말이지만 그 정도 느낌이 들 정도로 이 그리스도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에 대한 강력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도 돕고 불우이웃돕기 헌금도 많이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 그것은 나중의 문제이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더 중요한 것입니다. 돈을 사람들에게 주고 노력 봉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순수하고 진실한 신앙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외적인 삶이 어떤 것인가 하는, 이 사상의 열매인 윤리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엊그제 부목사님과 둘이 면담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따르릉 왔습니다. 우리 직원이 전화를 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사고에 대해서 잔뜩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뭐 어쩌고저쩌고 그럽니다. 그래서 요지가 무엇인가 그랬더니 전도를 나간 것입니다. 차를 빼다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뒤차를 쿵하고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살짝 찌그러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좋은 차 같던데 저게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그러면 저게 얼마 비싸게 나오지 않을까요?’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비싸든 싸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 자기가 한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이지 빨리 표 딱지 붙이고 오라고 그래!’ ‘핸드폰 번호 붙이고 잘못했다고 그러고 오라고 그래!’ 왔는데 그 차가 외제차여서 도색하는데 천만 원쯤 들어간다면 그러면 대출을 받아서라도 해주어야합니다. 당연히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오십만 원이든 천만 원이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어차피 자기가 책임을 져야하는 것입니다. 보험회사에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자기가 책임을 져야하는데 그러면 오십만 원이면 해주고 오백만원이면 도망갈 것입니까?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인이 구김이 없는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행위를 신뢰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회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너무 부정직하기 때문에 그냥 특별히 잘하지 않아도 그냥 자기의 길만 걸어가도 사람들이 존경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느냐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왜? 다른 사람들이 안사는 것이 신기하다고 그럽니다. 자장면을 배달하는 자장면 배달부가 돈을 벌어서 틈틈이 오만 원 삼만 원 가난한 사람을 계속 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틀째 신문에 특종으로 보도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특종이 되는 것입니까? 그런 종자를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놀라운 기회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개념이 있게 우리가 똑바로만 살면 엄청난 희생을 하지 않아도 똑바로만 살아도 그 사람들에게는 정말 대단한 존재처럼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안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신학교 1학년 때 310,000원짜리 회사 카메라를 학교 채플실에서 잃어버렸습니다. 그때 310,000원이면 제가 전도사 사례비를 70,000원을 받을 때였으니까 310,000원이면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저는 당연히 신학교 채플실에 두고 와서 20분 만에 채플실에 돌아갔는데 당연히 거기에 있다고 믿었는데 없었습니다. ‘아 누가 보관했겠구나!’ 생각하며 학교에 방송을 했습니다. 안 옵니다. 그래서 ‘있을 텐데! 있을 텐데!’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쩌면 전도사님은 그렇게 순진하십니까?’ 그럽니다. 벌써 남대문에 가지고 가서 팔아먹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신학생이 말입니다. 정말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고 이런 속에서 내가 백번 양보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치고 이런 그리스도인의 인상을 가지고 있는데 교회가 찬양 집회를 하니, 무슨 선교헌금을 하느니, 열심히 40일 새벽기도를 해서 무슨 성전을 확장하니, 입당 예배를 드리느니, 헌당예배를 드리느니, 전부다 헛된 짓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럴 것입니다. 역겨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전부다 세금 포탈하고 속이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이런 식의 오늘날 벌어지는 이 현실은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다가 무슨 기독당을 만들겠다고 그러는데 참 주제를 알아야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한 번 더 욕을 먹이려고 용을 쓰는 것입니다. 정말 창피합니다. 나 스스로도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수준 이하의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이 만나는 것입니다.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 그 무교병 위에 기름을 부으시는 것입니다.
왜? 잘 들으십시오. 기독교의 역사를 회고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은혜가 체계적인 사상에 기초하지 않고 그 받은 은혜가 치열한 윤리적인 삶으로 표출되지 않은 시대에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 소위 영적인 은혜라는 것은 개인적인 만족을 주기 위한 자기만족적 영성으로 소비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나 자기가 번 돈이 많은데 함부로 낭비하고 살면 우리가 그 사람을 칭찬할 수 있겠습니까? 칭찬을 안 할 것입니다. 그러면 물질을 낭비하는 것은 비난 받을만하고, 지상의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비난 받을만하고, 그러면 하늘의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적으로 많은 은혜를 주신 것이 낭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자신의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거룩한 삶을 생산해내지 못하고 정욕과 더불어 씨름하는 가운데 전부 소비해버린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영적인 은혜를 구하고 그런 은혜를 받으면 무엇을 하십니까? 가서 치열하게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활을 안 합니다. 윤리적으로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하고 따돌림을 당해도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그렇게 안 합니다. 그러면서 때로는 뭐라고 그럽니까? ‘세상의 법이 너무 비현실적입니다.’ 언제는 현실적이었습니까? 그런 핑계만으로 우리들이 위로를 삼을 수 없습니다. 단호해져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 이제는 어두운 세상에 주님이 우리를 빛으로 부르셨으니 위기 위식을 가지고 똑바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집과 직장과 교회가 천장에 유리가 되어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못해도 최소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부끄럽지 않아야합니다. 그런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것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면서 고난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청교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평생을 진리를 따라 살아온 성도들의 얼굴에는 악마의 손톱자국이 가득할 것입니다.’ 가만 내버려두겠습니까? 그냥 쥐어뜯어가지고 피투성이가 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이 진리가 시퍼렇게 살아있고 이 세상에 소수의 사람들이긴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이 시퍼런 진리의 칼날을 따라서 살고 또 죽을 각오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것을 사람들 속에 깊이 아로새겨지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의무이고 세상이 타락하고 개념이 없는 인간들이 모이면 모일수록 이것은 아주 놀라운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미국에 갔더니 뉴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국의 유학생들이 가면 전화료, 전기료, 모두 Deposit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몇 전까지는 안 그랬답니다. 왜 그러느냐하면 무수한 경험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항상 떼어먹고 도망을 간다는 것입니다. 통계를 내보면 대부분 한국 사람이고 그중의 상당수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미국 이야기를 자꾸 해서 미안합니다. 초등학교 학생 몇 명이 걸어가는데 가로수에서 과일이 두둑 떨어졌습니다. 애들이 막 줍습니다. 나무 밑에 그대로 쌓아놓고 가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이 하도 신기해서 ‘얘 이리 와봐.’ ‘네.’ ‘너희들은 사과를 주었는데 안가지고 가느냐?’ ‘아저씨 이것은 우리 것이 아니에요.’ 우리나라 사람은 남의 것이 아니면 다 내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뇌물을 받아먹고 상상할 수 없는 비리 공화국이 되고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의 부패공화국입니다. 그런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기생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런 너절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그렇게 힘들게 우리를 구원하셔서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우리를 씻어주셨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찬양)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의 매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그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그러나 이 세상이 부패하고 타락할수록 그런 하나님의 법에 일치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어느 정도로 고통스럽지 아십니까? 실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자, 어느 날 교회에서 물건을 샀습니다. ‘이 방송장비를 사고 싶습니다.’ ‘사가시죠.’ ‘얼마입니까?’ ‘오천만원입니다.’ ‘아 그렇군요. 주십시오.’ 오천만원을 주니까 물건을 건네주면서 영수증을 안주는 것입니다. 거래명세서 한 장을 주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교회에서는 통용이 안 됩니다. 정식 영수증을 주셔야 합니다. ‘아, 그러면 칠백만원을 더 주셔야합니다.’ ‘왜요?’ ‘부가가치세 오백만원, 종합소득세 신고하면 이백만 원을 포함해서 칠백만원을 더 주셔야합니다.’ 칠백만원을 더 내고 그 하얀 영수증을 받아온 것입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남의 돈이라면 할 수 있지만 여러분의 돈이라면 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너무 어렵습니다. 우리 교회의 장로님 한분은 세금을 정직하게 신고했더니 당연히 일 년 뒤에 세무서장 표창을 받을 줄 알았더니 감사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발칵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사실대로 신고했더니 세무서에게 찍힌 것입니다. 왜? 정확히 신고를 했더니 매출이 다른 병원의 두 배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무서에서는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자식들 말이야 시키는 대로 하지 말이야!’ 잘난척한다고 샅샅이 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타협하며 살아가려면 기도할 필요가 없는데 그대로 살려고 결심을 하고 보면 이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 한분이 동해안에서 군대생활을 했답니다. 그런데 거기는 전통이 있는데 신병이 들어오면 고추장하고 김치를 조달해야 한답니다. 어디서 조달하느냐 하면 동네에서 조달하는 것입니다. 동네에서 조달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밤중에 민가에 가서 훔쳐오는 것입니다. ‘이번에 네가 조달해야한다.’ 그때부터 이 그리스도인이 고민이 생긴 것입니다. 자기는 죽어도 그것을 훔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해오면 반쯤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기도하기 시작했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그것도 무슨 두 달 후에 조달하라고 그러면 집에 연락해서 가지고 오라고 그러면 되는데 그런데 내일 모레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참한테 이야기했답니다. 어떤 식으로든 조달할 테니까 방법은 저에게 맡기라고 그랬답니다. ‘훔쳐와 인마.’ ‘어쨌든 가지고 오면 될 것 아닙니까?’ 간절히 기도하는데 아무 길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누가 고추장을 갖다 주겠습니까? 그런데 간절히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련한 차림새를 하고 동네를 찾아간 것입니다. ‘아주머니 이 부대에서 왔는데요.’ ‘그런데?’ ‘저희가 집을 떠난 지 오래되었는데 고추장이 너무 먹고 싶습니다. 조금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래 우리 아들도 군대 갔는데 주어야지!’ 그러면서 한 바가지를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집에 가서 또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고 얻어온 김치와 고추장이 훔쳐온 것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집사님이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쩔 수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라는 말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를 생생하게 알게 되었고 모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모자라는 것이지 하나님의 법대로 살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상상치 못한 방법으로 길을 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열지 아니하실지라도 그렇게 살아가야합니다.
자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상이 여기에 있습니다. 윤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살고 싶지를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힘들게 세금을 내고 정직하게 거짓말 안하고 올바르게 온갖 비난과 손해를 당할지라도 법도대로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평행선입니다. 살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상의 힘, 윤리의 힘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개를 이어주는 제 3의 힘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은혜의 힘입니다. 이것을 이 세상 사람들은 그런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왜? 이것은 믿는 자들만이 아는 비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세상에 나아가 분투하는 윤리운동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며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그렇게 순종하며 살고자하는 거룩한 힘이 생겨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그 법을 따라 살 강한 욕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삶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 무교병에 기름을 부었던 이유입니다.
C. 고운가루로 빚어 구운 전병
마지막 세 번째는 ‘고운가루로 빚어서 구운 과자’ 라고 나오는데 사실은 이것이 전병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Cake라고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고운가루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곡식을 빻습니다. 그리고 체에 내립니다. 그리고 체에 내려오지 않는 것을 다시 빻습니다. 그리고 다시 더 고운체에 흔듭니다. 그러면 더 고운가루가 내려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굵은 것은 다시 빻습니다. 다시 고운가루를 내립니다. 이것을 계속 반복하면 아주 부드러운 분 같은 가루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입자가 고운 음식재료로 빚으면 이것을 먹을 때 아주 부드럽고 감미로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일식요리에 ‘자무시’ 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똑같이 계란을 익힌 것인데 이상하게 그 집에서 먹으면 굉장히 부드럽습니다. 집에서 한번 계란을 풀어서 컵에 집어넣고 전자레인지에 돌려보면 맛이 되게 없습니다. 비결이 무엇이냐 하면 계란을 곱게 풀어서 아주 가느다란 모시 같은데다가 계속 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따뜻한 밥통에 천천히 익히면 그렇게 떠먹으면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다른 요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고운 가루를 만들어서 거기다 기름을 넣어서 빚어서 그래서 그것을 구워서 하나님 앞에 바쳤던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깊은 감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표명되어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깊은 자기 깨어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 안에서 자기 안에 있는 죄에 대한 사랑과 자기를 신뢰하는 자신의 의에 대해서 깨뜨려지고 깨뜨려지는 일들이 계속 반복될 때 그때 고운 가루와 같은 마음이 됩니다. 거기에 기름을 붓고 반죽을 해서 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루가 고우면 고울수록 이것이 찰진 반죽이 되어서 요리하는 사람이 만들고자하는 형태대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농로에 있는 토기장이의 손에 붙여진 점토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가장 아름다운 제사는 자기를 깨드려서 주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후에 깊은 참회의 시를 51편에서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레브 디슈바르’ 라는 히브리 두 단어의 결합인데 직역을 하면 ‘부서진 마음’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고집하던 형태가 깨드려져서 그래서 주님의 통치를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대한 인간의 최고의 반응은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아주 곱게 부서진 그것을 불에다가 구웠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이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 가운데 연단 받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반죽으로 떡을 만들었다고 칩시다. 그것을 익히지 않고 여러분들은 먹을 수 있겠습니까? 시련의 불을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많은 은혜와 복을 준 사람들은 쉽게 인생을 사는 것 같아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람들을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을 많이 주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또한 그에 합당한 불같은 시련과 연단을 주셔서 하나님 앞에 교만할 수 없도록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도록 하나님이 매 순간 그를 겸손하게 하시고 그를 하나님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없도록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누구도 당신이 많이 사랑해주시고 복을 주셨기 때문에 복을 주신 당신 자신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못하도록 하나님이 불로 시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 자신의 마음과 삶을 다 드려 순수한 신앙으로 주님을 섬겼던 사람, 시련의 사람이 아닌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불같은 시련을 당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불같은 시련이 자신을 다 태울 것처럼 고통스러운 가운데 속에 익어가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인격과 삶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깨어졌는데 하나님이 돈을 주시고 명예를 주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깨어졌는데 불같은 연단을 통해서 그를 하나님이 익히시고 구우셔서 그렇게 떡 다운 떡을 만들어 가시는데 그 모든 과정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교인들에게 잘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조금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는 돈을 주시고 진짜 많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는 연단을 주신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는 과정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느냐하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한 제물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감사로 하나님 앞에 드릴 제사입니다.
D. 희생제물과 함께 드림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것을 제사상으로 소제라고 부르는데 이 소제는 독립제사가 아닙니다. 소제만으로는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희생제물이 있어야합니다. 피 흘리고 죽은 희생의 제물이 드려진 제사와 덧붙여서 드리는 제사였으니 이렇게 이 무교병의 제사를 하나님 앞에 올릴 때에 이것을 열납되게 만드는 것은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 먼저 죽임을 당한 희생제물이 바쳐짐으로써 열납되는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표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순수한 신앙으로 꾸밈이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되고자 힘쓰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내적인 사랑의 고백이 우리의 외면적인 삶을 통해 이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나타나도록 철저하게 윤리적인 삶을 삽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깨뜨려져서 주님의 주권에 복종하고 불같은 시련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쳐질만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러한 자기 자신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고난의 희생, 그분의 대속적 죽음이 주님 앞에 바쳐졌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인하여 주님 앞에 열납되는 것이라는 신앙을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려고 몸부림쳤어도 사상의 힘과 함께 윤리적인 힘을 이 세상에 보여주며 살았다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깨뜨려져 자기를 포기하는 삶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산 것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모두 잊혀지고
(찬양)
내 예수 주신 은혜 한없건만 나 주 위해 바친 것은 참 적으니 주 예수여 너그럽게 보소서
그러면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자기의 이런 모든 몸부림이 주님 앞에 열납되게 만들어주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값없는 희생, 자기를 다 버려 우리를 구속해주신 십자가의 사랑만을 우리가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런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그 큰 은혜에 부합하며 우리 온 마음을 다해서 우리의 삶에 공을 기울여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