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거룩한 삶
(199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십자가와 옛 삶을 버림(벧전1:14-15) 1998.4.6 십자가 사경회(저녁) 1
2. 십자가와 거룩(벧전1:16) 1998.4.7 십자가 사경회(저녁) 12
3. 거룩한 나그네(벧전1:17上) 1998.4.8 십자가 사경회(저녁) 24
4. 두려움으로 지나는 나그네 길(벧전1:17下-19)1998.4.9 십자가 사경회(저녁) 35
5. 그리스도와 거룩한 소명(벧전1:20-21) 1998.4.10 십자가 사경회(저녁) 47
6. 순종과 거룩한 영혼(벧전1:22) 1998.4.11 십자가 사경회(저녁) 60
1. 십자가와 옛 삶을 버림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4-15)
이 베드로서는 수많은 역경에 처한 그리스도인들 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능력 있는 서신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지만 특별히 이 사도 베드로가 편지를 쓸 때에 이 편지는 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를 보내면 그 편지를 이제 많은 사람들이 교회별로 이렇게 돌려보았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아마 예배시간에 낭독하기도하고 또 함께 배겨서 돌려읽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때는 이제 로마에 조직적인 박해가 시작될 그런 무렵이었습니다. 이미 벌써 커다란 핍박의 피 냄새가 이제 날아오는 것 같은 그러한 위기를 앞두고 사도베드로가 이제 잠시 후에 큰 환난과 시련을 만나고 그리스도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를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예루살렘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그들에게 물러서지 말고 신앙으로 온전히 분투하며 그 고난의 때를 이겨서 영광스러운 신자가 되도록 그렇게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권면을 해 주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베드로가 커다란 핍박을 앞에 두고 있는 아직 여리디 여린 그 교회의 신자들에게 믿음으로 오직 예수를 바랄 지어다 하고 편지를 썼을 때에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이 이 편지를 썼을 때에 그것은 매우 특별한 감회를 가지고 써 나갔을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니 자신은 뼈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그분의 은혜를 많이 입었지만 그러나 한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굳게 붙들고 주님 중심으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뼈아프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인한 과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결국은 예수그리스도께서 갈릴리 호숫가에 오셔서 그를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면서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주셨습니다. 그것으로서 그의 모든 지난 죄고는 모두 씻겨졌고 그리고 그는 누가 보더라도 자격이 미달되지 않는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의 우두머리로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로부터 세움을 받은 선한 목자로서 목양의 사명을 목숨을 받쳐 훌륭하게 감당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난 실패라고 하는 것은 비록 주님이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해 주셨다 하더라도 역시 있었던 것은 있었던 것입니다.
(예화) 어린 시절 깨뜨렸던 금간 도자기의 비유.
베드로에게 있어서도 역시 예수그리스도를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했던 실패는 말하자면 이런 것들을 가져다주었을 것입니다. 그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주님이 그를 용서하셨고 주님이 그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를 정결한 지도자로 세우셔서 당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습니다.( ? ) 누가 그 권위를 의심하고 누가 그 소명의 진실성을 의심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이제 환난의 큰바람이 불어오고 시련의 폭풍이 불어닥칠 위기에 놓여있는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 남다른 감회를 가지고 썼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편지가 이상하게 읽어보면 물 흘러가듯이 유창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신학(?)에서는 이게 하나의 연구대상입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 보면은 학문을 하지 못한 평범한 사람으로 나오는데 신약성경 중에서 제일 수준 높은 헬라어로 쓰여진 것이 2개가 있는데 하나는 누가복음이고 하나는 베드로 전서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뱃일이나 하던 그 어부가 이렇게 유창한 문체로 써내려 갔을 것이냐 그래서 어떤 사람이 대빌 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우리들이 추측 할 수 있는 것 하나는 그거죠 우리가 이렇게 말을 하더라도 말이죠 무엇인가 가슴속에 하고싶은 말이 꽉 차있고 그것들이 자기의 마음속에서 불붙듯이 쏟아져 나올 때에는 신기하게 엄청나게 많은 말을 했는데도 논리도 정연하고, 깔끔하고, 매끈합니다. 그러나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면은 앞에 말하고 뒤에 말하고 안 맞고 옆에 말하고 다른 말하고 또 안 맞습니다.
마찬가지죠 베드로가 이 환난 그 속에서 믿음을 지킬 것 그 속에서 성도다운 삶을 살아서 결국은 마지막에 주께서 신앙의 정절을 지킨 사람들에게 주시는 거룩한 상급을 받으라고 촉구했을 때 그는 정말 불붙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써 내려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뼈아픈 실수, 아 내가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고 그토록 주님께서 나에게 경고하시고 내가 죽는 데까지 가겠나이다 그렇게 장담할 때에도 주께서 경고하시고 또 경고하시었는데 그때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그 고난과 시련을 피하지 아니하고 주와 함께 죽었더라면 얼마나 영광스러웠을까 하는 그런 후회가 이 베드로에게는 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어쩌면 환난과 시련이 두려워서 자기와 같이 또 실패 할 지도 모르는 흩어진 많은 교회의 사랑하는 어린 신자들에게 소망 가운데 흔들리지 말고 처음 믿은 것을 굳게 붙들고 시련과 박해를 이기라고 권고했을 그 때에 그의 마음은 불붙지 안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도는 이제 1장에서 그러한 사실들을 이야기하면서 이 교회가 이미 한란을 겪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잠시 환난을 다하고 그래서 근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기뻐하나니 왜냐하면 그 환난을 당하고 고난을 당한 것이 결국은 너희에게 커다란 상급이요, 칭찬이요, 영광이 될 것이 때문이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이 1장 처음에서 산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그 소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갖게된 소망입니다. 주님을 알지 못했더라면 박해도 없고, 핍박도 없고, 고난도 없는 인생을 살았겠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그들은 가정을 잃어버리고 혹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혹은 동료들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혹은 형제들을 잃어버리고 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그들을 박해하고 그들을 이방인과 같이 대접을 하고 그들을 원수와 같이 대접을 하고 고난을 받게 만들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고난 예수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과는 비교도 안돼는 것이 이들의 마음속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산 소망입니다. 희랍어 성경에서 이것은 분사형태로 되어있습니다.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신앙입니다. 움직이고 있는 소망입니다. 그 소망이 움직여서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주님을 인해 기뻐하게 만들고 그 소망이 살아있기 때문에 역경에 처했어도 역경에 처해 있어도 역경에 굴복하는 대신에 역경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고 기뻐 할 수 있는 그런 신앙을 이들이 갖게 되었던 것, 또 이런 신앙을 가지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결국 너희들에게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그리스도예수께 구원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소망이 너희에게는 있다. 그 소망이 무엇인가 하니 그 소망은 바로 너희들이 잠시 후 다시 오실 영광의 주 예수그리스도를 뵈옵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 오실 때에는 낮고 천하신 몸으로 구유에 오셔서 그리고 인간들에게 고난과 박해를 받으시면서 버림받은 생에를 사셨지만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것이며, 이 세상을 온전히 심판하기 위해서 오실 것이며,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그 때에는 너희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의지하며 살고 또 살아왔다는 사실이 이제는 주님이 오시기 전처럼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주님이 너희들의 그 소망을 인정해 주시고 예수를 바라보고 산 그 믿음을 영광가운데 너희에게 보상해 주실 것이라는 그 소망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번 사경회 기간에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그 본문의 맨 도입부를 이제 사도가 말하기를 그리스도예수께서 그 오실 날을 온전히 바라고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주실 은혜를 온전히 사모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돌아가신 사실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자들의 소망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이 소망입니다. 우리는 둘 중에 하나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우리 생전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실 것이고 만약에 우리 생전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분께로 갈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던 간에 주 앞에 서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주 앞에 설 때에 우리들이 주 앞에 인정을 받고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 너는 일평생을 이 땅에 살면서 내가 구원해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나 그리스도 예수를 온전히 바라면서 산 백성이다 말하고 인정해 주실 수 있는 그런 삶, 그런 생애를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들어가기 전에 제일먼저 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예수그리스도를 다시 뵙게될 그 날에 대한 소망가운데 우리들이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오늘날 이 세대의 한국 교회의 교인들 특별히 이 강남에서 밥술 꾀나 먹으면서 사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예수 오실 날을 고대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주 예수여 오지 마소서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왜! 지금 주님이 오시면 축복이 아니라 야단 받는 것 이외에는 남은 것이 없다라고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다시 오시는 것이 이 성도들에게 커다란 소망이 되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진실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소망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것에 대해서 소망을 갖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귀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그리스도예수와 화목한 관계 속에서 생명의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그리스도예수로 말미암아 얼마나 행복한 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것도 이렇게 지긋지긋하고 매일은 그만두고 일주일에 한번 교회 나오는 것도 교회당에 나올 때는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는데 보이시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도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는데 그런 분을 마주볼 수 있다면 그 성도가 행복할 리가 있겠습니까? 주님과 마주한 그 시간은 지옥과 같이 지루한 것입니다. 그러나 보지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의 눈으로 보고, 신앙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우리에게 경험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내가 알고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을 죄악에 구렁텅이에서 건져내어서 형벌 받을 자리에서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시고 구원해 내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나를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매 순간 진리의 말씀으로 나를 먹이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으로 나를 새롭게 하셔서 어두움에서 빛으로 고난에서 평안으로 시련에서 복된 자리로 나를 이끌고 인도해 주시는 매일매일 나와 동행하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행복을 느끼는 그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행복해 하는데 -그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할렐루야! 아멘.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은혜 생활을 잘 하던 성도들은 주님과의 만날 그 날을 너무 사모하는 것입니다. 찬송가에 보면은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 가까워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이 멀지 않네- 이것의 의미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슨 말입니까? 10대 20대 청년들이 부르는 찬송가가 아닙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노인용 찬송가 아이들용 찬송가가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건 뭐냐 하면 자기가 이렇게 겉 사람이 점점 늙어 가는 것에 대해서 소망을 갖는 거예요. 왜! 이제 이 땅의 수고를 끝내고 주님을 마주할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구나!-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 가까워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이 멀잖네- 그것이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고백을 했지 않습니까? 겉 사람은 후폐 하나 내 속 사람은 날로 새롭더라 그래서 그런 소망의 빛나는 삶을 사는 것도 결국은 무슨 소망 때문이야 하면은 주님을 다시 뵈올 것이다 하는 그런 소망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아주 핵심적인 기둥입니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의무를 행하고 무엇을 체험하고 무엇에 관한 지식을 쌓고 1권, 2권, 3권, 4권 공부해서 책가방 싸고 교회 다니고, 이러는 것만이 신앙이 아니란 말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바로 이렇게 주님이 내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인하여 기뻐하시는 것처럼 나는 이 땅을 살아가는 나를 지켜보시는 주님을 인해서 행복해 질 수 있는 그런 하나님과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 적인 관계 그래서 고난이 오고 시련이 와도 고난이 주는 아픔보다는 그 아픔을 통해서 만져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고난 중에서도 찬송할 수 있고 시련 중에서도 하나님께 노래할 수 있는 그런 사람 그것이 바로 신앙을 가진 사람의 독특한 축복입니다. 그런 것이 없이 신앙생활 하는 것은 의무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날 두렵기 짝이 없고 내가 죽을지도 모른 다는 것이 무섭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두려워하고서는 세상을 이기는 담대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죽음의 공포와 그리고 죽음의 모든 위협들을 떨쳐 버리고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볼 산 소망 가운데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 읽은 그 본문에서는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런 소망이 우리 가운데 계속 불붙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말미암아 구원과 함께 우리에게 주신 이 크고 놀라운 소망이 우리 가운데 계속 역사 하시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절박한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만 이렇게 주님과 말 할 수 없이 기쁘고 즐거운 교제를 나누며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 우리에게 말 할 수 없는 소망이 되고 그것 때문에 위로와 용기가 되는 십자가 아래서 살아가는 삶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성경에서 말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너희를 부르신 자가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한 생활을 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진심으로 체험할 때에는 거기에는 놀라운 감격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체험하는 그 곳에는 정말 감격이 있습니다. 십 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받는 그 곳에는 언제나 감격이 있습니다. 제가 어제 밤에 연애를 교회를 갔습니다. 사실 제가 그 교회를 가겠다고 그런 것은 거기 가면 유명한 사람들 다 만날 것 같아서 제가 간다고 그랬거든요. 내가 이동근씨에게 아는 체 했더니 쳐다도 안 본다고 얘기했죠? 그래도 거기 설교하러 가면 그렇게 하지는 못 할거 아니에요 그래서 가겠다고 했습니다. 가겠다고 해 놓고 가만 생각해 봤더니 어떻게 갈까? 그래 좋다. 이번에는 그냥 갈게 아니라 핵 폭탄을 장치해 가지고 가자. 그래서 주님 핵 폭탄 한 덩어리를 주시옵소서 가서 터트리고 오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이제 십자가 복음을 들고 갔어요. 그래서 진짜 많이 만났어요 고은하 씨도 만나고 신형균 장로님도 만나고 많이 만났어요. 그런데 지난번 유동근씨처럼 아는 척은 안 했어요. 무안 당할 까봐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거기서도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어느 동네에 살든지 다 같은 사람들이 구나 하는걸 느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다 전하고 구원 초청을 했는데 한 25명 정도가 일어났습니다. 모인 인원은 한 350명 한 300명 정도가 모였는데 구원 못 받은 사람들이 그날 이제 주님을 영접하는 거예요. 정확히 세어보지는 못했어요. 한 25명에서 한 35명 정도 한 40명 정도 되나? 일어섰습니다. 왜요? 왜 그들은 많은 다수 속에서 표시 안내고 튀지 않고 묻히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모든 사람들이 보는 그 앞에서 나는 신자되기 원한다고 일어섰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복음을 만나고 그 십자의 복음에 주님이 축복하시면 듣는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속에는 거룩한 기쁨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예수 죽인 것을 가슴아파하는 회계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이 그 예수 그리스도께 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그 사랑으로 주님이 나를 부르고 계시다는 이 피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감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감격이 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저는 말했습니다. 매일 한번씩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의 은혜를 인해서 눈물을 흘린다면 중심에서 그 구원의 은혜에 감격한다면 그는 범죄 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적어도 죄가 그의 신앙 속에 뿌리 내릴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감격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셨는지를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무엇 때문 이였습니까?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우리들을 향한 영웅적인 행동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이유 때문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이유라고 하는 것은 바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짖는 그 죄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보고 감격한다 라고 하는 것은 단지 그 십자가 때문에 내가 횡재했다. 나 같은 사람이 천국 가니 신난다. 그런 기쁨의 눈물만이 아닙니다.
오늘 부른 찬송가처럼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 하여 눈물만 흘리네’ 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아버지의 진노를 홀로 담당 하셨으니 이제는 내가 어떻게 죄 가운데 살 수 있겠는가’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죄 가운데 사는가 나의 이 죄가 예수를 죽였는데, 나는 왜 이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님이 아파하시고 고난 당하신 이 죄가 나에게 왜 즐거움이 되는가 하는 깊은 후회가 이 사람의 마음을 찌르기 때문에 선명한 복음이 선포되고 성령이 역사 하시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그 곳에는 언제나 감격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주님이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 십자가에 보혈의 사랑을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엄연한 사실은 우리 가운데 가장 형편없는 개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주님은 당신의 보혈로 그들의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그 사랑에 감동 받지 않을 수 있고, 우리가 살아있는 신자라면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허물과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았으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면목없는 자요, 또 우리의 그 크고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의 잔을 다 마시고 아버지께로부터 부어지는 그 불붙는 진노를 불붙는 사랑으로 바꾸어 놓으셨으니 우리가 어떻게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아들 성자 앞에서 우리가 얼굴을 들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우리를 면목없는 사람들로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면목없는 사람들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면목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행한 것이 없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주님을 등지고, 하나님께 감사치도 아니하고, 금수와 버러지와 같은 형상들을 하나님의 영광과 바꾸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 살고, 또 살아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내 인생에 내가 세운 계획과는 상관이 없이 어느 순간에 주님의 불붙는 사랑이 우리에게 미쳤습니다. 내 친구도 아니고, 내 아내, 내 남편도 아니고 오직 나에게 곧 바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나보다 더 도덕적이고, 의롭고, 훌륭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구원하면 이 세상에 유익 된 인생을 살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데 그런 사람들 제쳐놓고 주님이 나 같은 죄인 찾아 오셔서 그 피로, 그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건져 주셨습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아무리 신령해 저도 죽어도 알 수 없는 신앙의 비밀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왜 하필이면 나인가 왜 하필이면 나를 구원 하셔서 나를 주님의 크신 사랑으로 이끄셔서 남이 알지 못한 것들을 알게 하시고, 남이 보지 못한 것 보게 하셔서, 남이 하지 않는 그 일로 주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는가 돌아보면 주님을 모르던 날에 다른 사람들 보다 훨씬 훌륭한 삶을 살았는가 하면 아닙니다. 그러면 주님을 알고 난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 보다 훨씬 잘난 삶을 살았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둘 중에 하나만 맞아도 왜 주님이나를 택하셨는지를 알겠는데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해 할 수 없는 것이 제게는 감사의 제목이 되고 찬송의 제목이 됩니다. 이해 할 수 없고, 앞으로도 이해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알 수 있는 것은 하나 내가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나로서는 하나님 앞에 면목없는 죄인이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를 의지해서 그 피로 구원을 받았으니 하나님 앞에 감사하다는 것 이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로부터 내려오는 그 보혈의 공로에 눈뜨게 될 때에 우리는 놀라운 감격을 경험하게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런 감격이 없다면 여러분은 십자가를 경험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신앙의 간증을 가지고 있어도 여러분이 십자가에 대한 간증이 없다면 여러분의 모든 체험과 지식은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마치 모래 위에 세운 탑과 같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체험은 우리에게 커다란 감격을 가져다줍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회계하고 회계하다가 까 물어 치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 하나님의 사랑에 눈뜨면 눈뜰수록 자기가 얼마나 추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완악하고 광포하기 이를 때 없는 죄인들이 그 돌덩이와 같이 굳어진 차가운 뺨에 정말 (개 눈에서)? 눈물이 흐르면 흘려도 그 사람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를 리가 없는 그 사람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참 사랑에 통곡하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게 주님의 십자가에 깊이 감격하고 평생을 눈물 흘릴 순 없지 않습니까? 얼마간 울다가는 이젠 눈물을 씻고 그리고 일어날 것입니다. 이제 그는 무얼 해야 합니까? 무얼 해야 합니까? 자 이제 울만큼 울고 속에서 다 물기가 빠져서 이제는 더 이상 울 기운도 없게 되었습니다. 물먹고 수분을 보충한 다음에 다시 짜기 시작해야 됩니까?
여러분은 웃지만 사실은 부흥회 쫓아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이런 상고방식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은혜 많이 받았다고 하는 것은 한 풀었네 하고 똑같습니다. 그제 실큰 울고 나면 한이 풀리는 것과 똑같지요. 거기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답을 주는 거예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참 사랑을 너희들이 알고 그 십자가에 감격해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으면 이제는 너희들이 주먹을 쥐고, 주먹을 쥐고 거룩한 삶을 삶으라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사도는 옛 생활과 새 생활을 대조하는 것입니다. 옛 생활을 무엇이냐 하면 사욕을 좇는 생활 이였다 하는 것입니다. 사욕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사로운 욕심을 쫓았다 하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욕심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육체 속에서 개인적으로 솟아나는 죄악된 욕망을 쫓아서 산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를 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애를 쓰지만 그러나 여러분 얼마나 웃깁니까? 법이 강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죄악은 더 판을 치고 그리고 무력으로 사람을 다스리면 다스릴수록 흉악한 범죄는 더 많이 늘어납니다. 결국, 옛 생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의 옛 생활은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의 육체에서 솟아오르는 죄의 욕심을 쫓아서 살아온 삶이라는 것입니다.
옛 삶의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옛 삶의 주인은 자기입니다. 자기가 자신의 마음의 보좌에 앉아서 자기의 온 지체를 통치하는 홀을 붙들고 그리고 이렇게 해라, 이렇게 해라, 이렇게 해라, 이것을 행하라 끝없이 명령하고 온 지체는 그것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죄악에 뒤엉키고 그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진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래도 알 수 없는 사람이 이제는 더 깊은 죄악 속에 살아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 할뿐 아니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다가와도 의식적으로 그것들을 거부하고 의지적으로 그 뜻대로 안 살기로 헌신적인 다짐을 한 살을 살아왔단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욕을 쫓는 옛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사욕을 쫓고 그리고 자기 마음 데로 살아가는 자기 맘대로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뭘 내가 그렇게 사욕을 쫓았느냐고, 내가 무슨 도둑질을 했냐, 강도질을 했냐, 여러분 살아있는 사람가운데 강도질하고 감옥소에 가는 사람은 몇백 몇 천명의 한두 명입니다. 여러분 그것보다는 엄청나게 많은 죄가 여기에 있습니다.
재작년 12월에 영등포 교도소에 갔더니 설교하고 나오는데 그르더라고요. 그 죄수들이 하는 말이 여기는 죄인들이 있는데, 평범한 죄인들이 아니라 제수 없는 죄인들이 있는 거랍니다. 저 밖에는 진짜 죄인들이 더 많은데... 그러니 그 곳에서 무슨 교화가 되겠습니까? 재수 없어서 거기 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욕을 쫓는 삶 하나님이 전혀 계시지 않는 자기의 육체의 욕심을 쫓아서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옛 생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이렇게 살고 싶어하니까 거기에서 비극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으니 속죄를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됩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고 그리고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으니까 이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구원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삶은 옛 삶을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내 안에 모셔놓고도 주님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싶은데 성경이 살지 말아라 라고 하면 성경을 발로 차 버리고 라도 내가 살고 싶은 데로 살아야지 만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미치지만 그러나 세상하고는 이미 결단 났습니다. 세상으로 돌아가 보면 세상이 자신들을 대하는 태도가 옛날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화) 변화 전 그 좋던 술과 담배의 맛이 변화된 후에는 예전의 맛이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
영적인 본성이 바꿔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살아야 되는 겁니다. 그것만이 그가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옛날에 아름답고 옛날에 신나고, 옛날에 행복하고 옛날에 내 사욕이 원하는 데로 마구 줄달음질 쳤더니 신나더라 하고 그 삶을 택해 보면 결국은 신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인격과 영혼에 균열을 느끼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거룩하신 주님을 찬송하면서, 삶은 방종하고 자기의 욕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균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학교 다닐 때 교수가 도대체 강의가 신통치 않아서 국어시간에 산수공부하고 산수시간에 영어공부를 했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어떻습니까? 들려오는 것은 A라는 강의가 들려오는데 드려다 보고있는 책은 B라는 책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는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듣기 싫은 강의를 듣는 것이 인격도야의 길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하물며 본성이 하나님의 뜻을 쫓아서 거룩하게 살도록 그렇게 새로 만들어 놨는데, 자기가 바뀌었다고요 말하자면, 이 바뀐 사람이 옛날 즐거움만 생각을 하고 거기로 돌아가 가지고 거기서 한번 살아본다. 사욕을 쫓아서 한번 살아본다 옛날과 같이 기쁠 수가 있느냐? 기쁠 수가 없다는 예기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너희들이 누구인가 생각해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냐? 오직 두 가지의 길이 있을 뿐이다. 두 가지 길이 있다. 둘 중에 어느 길로 갈 것이냐? 하나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사는 길이고, 하나는 죄악의 길로 가는 길이다. 죄악의 길로 가면 어떻게 되냐? 행복하냐? 행복해야지 만 그것이 가능성이 있는 길인데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순종하지 않으면 자기의 원하는 길로 가도 마지막에는 막다른 골목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요. 갈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하지만 하지만 그 길은 가서는 안돼는 길이라는 말이죠.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전의 삶은 사욕을 쫓는 삶이었으며, 핏대 내고 싶으면 핏대를 냈습니다. 골 부리고 싶으면 골 부리고 집어던지고 싶으면 집어던지고 조 패고 싶으면 조 팹니다. 퍼먹고 싶으면 퍼먹고, 미친 듯이 소리 지르고 싶으면 소리 지르고, 사고 치고 싶으면 사고 치고, 되는 데로 자가의 충동이 원하는 데로 살았습니다. 이 나라 대한민국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렇게 살면 미친 짓입니다.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누가 그 사람 대단하다고 여겨주는 사람도 없고 자신도 손해고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예수를 만져 믿은 남편입니까? 여러분이 똑바로 살지 않으면 여러분의 가정은 평안할 날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내입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믿게 되었습니까? 정신차리고 잘 믿으십시오. 자식들의 앞길이 여러분들에게 달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말 우리들의 옛 생활은 이제 청산한 것입니다. 주님이 그리고 우리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전해 보십시오.( ? ) 코웃음을 칩니다.
(예화) 연세대학교 지옥설교를 들은 믿지 않는 아이들의 태도들.
십자가도 가서 설교하면 안 그럴 때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헛소리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뽑아 내서 그 진리가 여러분 속에 믿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아이큐가 모자랍니까? 여러분 우리 지금 들 떨어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꼴값하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란 말이지요.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농담처럼 들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가슴을 저미면서 다가왔습니다. 흉악하게 살던 우리의 마음속에 주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이 실제로 다가왔습니다.
믿어질 수 없었던 그 복음의 진리가 믿어지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묻은 십자가 이외에는 우리의 인생의 참 소망이 없고,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아들을 보내어 거기서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는 그 지점에서 우리의 인생과 삶에 대한 모든 사고는 덮쳤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옛것을 버리고 새 생명을 얻고 새로운 가치관을 붙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해 보면 전해 볼수록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이 얼마나 황홀하고 놀라운 구원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은 쉽게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준비된 사람은 많지만 그러나 복음을 거절하기 위해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왜 여러분들에게 주셨습니까? 옛 삶을 따라 살라고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남이 믿어지지 않는 주님 믿어지게 하시고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여러분 마음속에 믿어지게 만들어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그 십자가 믿어지게 만들어 주셔서 우리 안에 예수 생명 주신 것은 이제 우리로 하여금 옛 생활과 결별하도록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맛보지 말고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성경이 우리에게 말했고 또 우리는 적고 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무엇으로 사는가 ‘아! 이제는 돈만 있으면 살고, 출세만 하면 사는 줄 알았더니 은혜 받고 나니까 아! 그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사욕을 쫓는 옛 생활을 버리라고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피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내 멋대로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멋대로 살고 멋대로 산 조상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멋대로 살고 그래서 즐겁고 신나는 것 때문에 죄는 쌓였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우리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주범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옛 생활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버리지 않을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청산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순종의 자녀처럼 이라고 말합니다. 처럼이 2개가 나오는데 ‘순종의 자녀처럼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말합니다. 순종의 자녀처럼 순종하는 자녀처럼 무슨 뜻입니까? 부모의 말에 잘 순종하고 거기에 잘 따르는 그러한 자녀처럼 그렇게 살도록 우리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삶이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새롭게 살도록 부르시는 삶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구원의 놀라운 기쁨을 맛보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 구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주님의 큰사랑을 깨달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 시작에 불구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문을 열고 들어가고 나면 거기에는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감동이 있습니다.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우리를 위해 죄를 대속해 주신 것이 비할 대 없이 크신 사랑이지만 이제 그 사랑이 인복을 때는 그 순간에 그 십자가 속에서는 비할 대 없는 하나님의 더 크고 놀라운 사랑 신앙이 미천하고 지식이 아직 어린 우리들로서는 참아 알지 못하는 거룩하고 놀라운 큰 기쁨과 비할 대 없는 축복들이 거기에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맛보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국은 우리들이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왜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교인들이 예배당에 나올 때 골난 사람처럼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배를 드릴 때 그렇게 우울해 보이던 사람들이 끝나고 나면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 사람들이 시무룩해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그 사랑에 대해 말하는 데도 도무지 그 사랑에 감동도 없고 감화도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도 시간이 됐는데도 계획은 기도하는 시간인데 사람들은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기도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기도하고는 싶은데 마음이 기도할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춤추듯 주를 위해서 기쁨으로 봉사하며 뛰어다니고 싶은데 무엇인가 무거운 추가 자기의 허리를 잡아매고 땅에 끌린 것처럼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그들이 평소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쫓아서 살아가는 그 참된 기쁨 순종의 기쁨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 고달프고 지친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곤고함은 불순종으로부터 말미암아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 손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나 같은 죄인 나 같은 인생을 통해서 당신의 뜻들을 이루어 간다라는 감격이 있는 사람들은 결코 신앙의 세계 속에서 예배시간에 우울하고 기도시간에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그렇게 기다리던 때인데 일주일이나 기다리다가 왔는데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주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세상일이 너무 바빴습니다.
그러나 이제 비로써 주님과 마주 앉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매순간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 모두 드러나는 것이 그에게는 말 할 수 없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내 삶을 바라보고 계시겠지? 주님은 지금도 내 맘을 알고 계시겠지? 불순종하는 사람은 주님이 이것도 보실까? 주님이 이것도 알면 어떻게 하지? 이불을 뒤집어쓸까? 이것은 주님이 모르셨으면 좋겠는데.. 이것이 바로 순종하는 삶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순종의 자식 순종의 자녀의 반대말은 배역의 자식입니다. 패륜아입니다.
저는 가끔 주례에 가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다 키워서 부모가 무슨 죄가 있어요. 난 것밖에는 죄가 없는데, 다 키워서 그것도 발이 발이 싸 가지고 시집 장가 보내는데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인간도 아니다.’ 그러면은 눈물이 맺히도록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 있어요. 누굴 까요? 결혼하는 당사자가 아니라 그 부모님들이 주례사를 하고 나서 ‘목사님 감동 받았습니다.’ 그런 소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그러치 않습니다. 결혼하는 당사자가 와서 그러지 않습니다. 부모님들이 옵니다.( ? ) 제가 속으로 2둘 받으셨겠죠. 이렇게 섬겨라 그렇지 않으면 인간도 아니다. 배역의 자식이에요. 나으신 부모님 길러주신 부모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배역의 자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길러주셨습니다. 물인지 불인지 모르고 천방지축이던 여러분들을 그래도 이만큼 길러서 그래도 이만큼 철들어 신앙생활 하도록 만들어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그만큼 길러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주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마땅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적으로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되지만 인간적으로도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입고 있는 옷 여러분들이 먹은 것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 다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안았습니까?
유치원에 애들 비스켓 하나를 주어도 입을 쫙쫙 벌리며 “날마다 우리에게 양식을..” 배고프면 더 빨리 불러요. 그 애들도 다 알아요. 주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그러니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께 효도하고 순종하면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십자가의 그 큰 은혜 알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눈물만 흘리는 것 가지고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십자가 여러분들에게 믿어지게 해 주시고 남이 모르고 남이 감동 받지 않는 십자가 여러분에게 파고 들어와서 비수처럼 꽂히게 만들어 주신 것은 이제 여러분 불순종하던 옛 삶을 버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정말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고 그래서 인간의 육신의 부모는 효도할 때 불상해서 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래서 효도하는 사람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이제 사시면 얼마나 사시려고’ 하나님에게는 그런 것이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해당되는 것은 하나님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이제는 자식인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하면서 주님께 효도하는 삶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부르시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도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내가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언제 죽을 지는 모르겠지만은 정말 주님의 마음을 정말 황홀하게 해 드리면서 살수 있을까? 또 두 번째 의무는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황홀하실 정도로 해드리면 그것이 지난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던 때,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한없이 아프고 고통스럽게 해 들렸던 그 아픈 날들에 대해서 위로가 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효도하며 살수 있는 날 밖에 없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십자가의 사랑 내게 주셔서 남이 못 믿는 그 사랑 우리에게 믿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님의 그 큰사랑 받은 사람들이 되었으니 이제는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그런 삶 살아서 우리서 여기에 살아 있는 것이 주님이 보실 때 말할 수 없이 기쁘고 감격스럽고 천하를 우러러보다가 상심하시던 주님이 여러분들이 여기 살아 있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고 이 황폐한 때에 여러분들을 불꽃처럼 살게 하셔서 그래서 이 땅을 고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주님 자신이 소망의 불을 붙이실 수 있는 그런 존재들이 된다면 그게 바로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우리 그렇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2. 십자가와 거룩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찌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6)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우리를 건져 주신 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하고 눈물을 흘리는 그런 체험만을 주시려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전에는 우리들이 우리의 육체의 정욕을 쫓고 우리가 원하는 데로 우리의 마음 내키는 데로 사는 사욕을 쫓는 삶을 살았지만 그러나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나서 이제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전혀 행복하질 않고 육체의 욕심과 방종한 마음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이 전혀 기쁨이 되질 않고 나를 큰 죄악에서 건져 주시고 멸망의 형벌 가운데서 살려 주신 그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 때문에 그 크신 사랑에 감격해서 이제는 살든지 죽든지 나를 건져 주신 예수를 위해서 살고 싶다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가질 뿐만 아니라 또 옛 생활을 청산해야 합니다. 옛날의 행복했던 삶은 이제 그것으로 족했고 이제는 주님을 만나고 우리의 영적인 본성이 변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예전에 우리를 기쁘게 하던 그것이 이제는 예전과 같이 한없는 기쁨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잠시 기쁘고 잠시 자기의 육체의 욕심을 쫓아서 살고 그것을 만족할 때 잠시 평화가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뜨거운 태양볕 아래 신장로 길을 걸어가며 목말라 땀 흘리는 나그네에게 설탕물 한 대접을 먹고 나면 더 갈증이 나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큰사랑을 받았으면 이제 우리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옛것으로 행복해 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신자의 모든 불행은 바로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데서 나옵니다. 모든 불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고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그리고 하나님 대신에 자신이 자기의 인생을 지배하는 그런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종식되었습니다. 그 사랑을 몰랐을 때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사랑을 안 사람들은 이제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참된 평강이 없고 참된 기쁨이 없고 무엇 보다고 거기에는 참된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시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렇게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주님을 영접하고 난 후에도 어찌하면 내 백성들이 나의 사랑을 알고 나와 함께 동행하며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그들에게 부어준 그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가장 커다란 관심사입니다.
교회에 처음 왔을 때는 구원받지 못한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것을 깨닫고 나를 이렇게 천에 하나 만에 하나 형벌 받을 죄인들 가운데서 건져 주셔서 주님의 자녀 삼아주신 것이 황홀하고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쁨들을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그 구원이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믿음은 사라지고 오로지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환경과 염려, 환경이 가져다주는 고민, 평화나 기쁨이 아니라 그들을 움직이고 충돌질하는 옛사람의 욕심이 그들의 인생에 주관자가 되고 있습니다. 욕심은 잉태해서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가져옵니다.
왜 주님이 이런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주셨는데도 그런 것 모두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있고 그 감격이 아무리 진실하다 하더라도 이 후에 그 십자가의 참 사랑을 알고 살아가는 삶이 진실되고 올바르지 않으면 성도답지 않으면 그 속에서 성도는 성도의 참 기쁨과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그 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때에 우리에게 바라고 원하시는 그 삶을 우리들이 살아서 우리의 인생이 주님의 것이 되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그때에 우리의 삶이 하나님 영광을 돌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령이 주 앞에 생명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았으면 도저히 맛 볼 수 없었던 거룩한 기쁨과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하늘의 능력을 공급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 신앙의 기쁨은 기쁨의 비밀이고 참 신앙의 비밀은 아름다운 신앙의 체험의 비밀입니다. 사람마다 이런 비밀이 깃들여야 그가 진실로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성도입니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온 성도들에게는 회상하면 눈물나는 주님과의 추억이 있습니다.
고난의 때에도 단지 고난을 사람을 향해 원망하면서 그 고난 속에 팔자 타령하며 산 사람들은 고난이 지나고 나도 가슴에 남는 것이라고는 시커멓게 타버린 울화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고난을 당하며 그 고난 속에서 고난을 능가하는 사랑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붙드시는 분 우리를 위해서 고난 속에서 자기의 살을 찢고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 고난 속에서 배우는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걸어온 신앙의 길에 추억이 있습니다. 남들은 이해 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이 우리를 십자가에서 건져주신 그 놀라운 구원의 감격이 있은 그 뒤에 우리에게 살도록 분부하신 삶은 어떤 삶 이였습니까? 어떤 삶을 살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 가셨습니까? 고귀하신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혔으면 그것은 분명히 가치있는 일을 위해서 못 박히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벌레만도 못한 존재이고 지푸라기만도 못한 하찮은 존재이지 만은 이 하찮은 존재들을 예수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셔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 싶어 하셨던 그 일은 하찮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못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통해 이루고 싶으셨던 하나님의 일은 너무나 위대하고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일을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우리들 속에서 주님께서는 수많은 아름다운 대속을 보셨던 것입니다. 당신 한 분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를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살 찢으시고 피 흘려 죽으시면 그 자신의 끔찍한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지를 주님은 아셨습니다. 자신의 고난과 치욕은 잠깐이었지만 자신의 흐르는 보배피로 씻기워진 그 백성들이 이 후로 하나님의 계획을 때라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그 무엇을 바라보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가 요구하는 자 없이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아버지의 거룩한 제단에 바쳐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장을 허물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 막혔던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서 이 세상에 동물처럼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 동물들이야 하나님을 진노하게는 하지 않지만 그러나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죄악 덩어리이고 인간 그 자체가 생각하고 사고하는 것까지 모두 죄에 깊이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인생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저주와 진노의 덩어리로 살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하나님사이에 막혔던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찢으심으로 휘장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그 휘장을 지나온 우리들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해 내시려고 그곳에 보배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양탄자처럼 죄인 앞에 찢어진 휘장에서부터 전능하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르기까지 뿌려졌고 이제는 한없이 더러운 추악한 죄인들조차도 자신의 의의 신발을 벗고 어린아이와 같이 겸비한 심령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흘리신 피 길을 걸어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진노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 그 그리스도 예수의 피 길을 걸어온 당신의 자녀로 부름 받은 자들을 용납하시고 받아주셔서 하나님이 친히 그들로부터 아버지라 칭함 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또 그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 죄의 용서 위에 뛰어난 그리스도의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참 생명을 그의 영원 속에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죄가 우리들 영혼 가운데 가져다주었던 무거운 진노의 짐과 그리고 참되고 영원한 것들을 깨달을 수 없는 동물과 같은 본성의 껍데기를 벗겨서 우리의 눈을 밝히 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땅에 사나 하늘의 것을 바라보게 만드시고 죄로부터 완전히 결별할 수 없는 존재이면서도 거룩한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 순결한 하나님의 성품을 사모하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끊임없이 옛 생활로 돌아가려고 애쓰는 우리의 육체의 사욕을 쫓는 옛 삶을 십자에 못 박을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이제는 죄가 우리에게 있으되 그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주장하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시지 않는 이 크고 놀라운 은혜를 왜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과 저에게 주셨습니까? 우리는 이제 이 크고 놀라운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는 우리가 무엇을 붙들고 일 평생을 살아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지만 나그네처럼 잠시 머물다가는 이 인생의 길이 세월이 흘러감과 함께 허무하지 아니하고 죽음이 우리 앞에 가까이 다가와도 두려움 없이 죽음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세계를 찬송 할 수 있겠습니까? 날마다 후패해져 가는 겉 사람 날마다 가까워져 가는 이 세상을 이별한 날을 바라보면서도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 날로 가깝게 되었다고 찬송 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합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이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사랑을 배반으로 갚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욕으로 갚는 것이며 아버지의 집 떠난 자식을 받아주시는 그 아버지의 사랑을 부끄러움으로 갚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같이 쓰레기와 같은 인생들을 통해서 무엇을 얻으시려고 고귀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까? 하나님의 보좌,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죄인들과 함께 박해를 받으시고 죄인들로부터 고난과 핍박을 받으시고 마지막에는 그 죄인들을 섬기다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그 죄인들에게 배반을 받으시고 당신이 일평생 섬기셨던 그 인간들의 손에 의해서 못 박히시고 살 찍혀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토록 하시고 싶으셨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어둠 속에 있어서 참된 길이 무엇이지 몰랐던 자들에게 길이 어디인지를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길로서 이 세상에 오셨고 길로 이 세상을 사셨습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분은 참된 것만을 가리키고 참된 것만을 행하셨습니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이시기를 위해서 드디어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의 거룩한 번제단 앞에 바쳤습니다. 우리 주님에게 이런 구원의 영광을 베풀어주시기 위해서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꽃과 아름다운 노래 소리고 맞이하는 대신에 그분에게 치욕과 모욕을 주고 일평생 자신의 땅에서 나그네처럼 머리둘 곳 없는 생애를 살도록 한 그 장본인들이 바로 우리들 이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디 그 일이 바로 그 때에 있었던 사람들만의 일들입니까?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우리 속에 오셨지만 그러나 또 우리에게 오시려고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답게 살아서 그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그 사람 속에 오셔서 그와 함께 동행하시고 당신이 이 세상에서 계속 사시고 싶으셨던 삶들을 우리를 통해 펼치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교회와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나누어 가진 사람들을 보십시오. 지금도 그리스도 예수의 섬기시던 그 손길을 너무나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계시던 때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사람들은 더 많은 질병에 시달리고 고통해 합니다. 육체의 질병도 문제지만 그리나 암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영혼 속에서 섞어 들어가고 있는 영혼의 질병의 고통은 심각합니다. 그런 속에서 돌보는 사람들 없이 이 거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르고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눈을 들어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지금도 목마른 영혼들이 우리들의 손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기를 기다하고 있는 갈급한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강퍅한 사람들은 점점 강퍅해져 가지만 그것과 비례해서 가난해져 가는 사람들은 더 가난해져 갑니다.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수록 그들 중 어디 한 곳에서는 눈을 들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목마르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진실입니다.
주님이 만약 지금도 살아 계셨더라면 어떻게 사셨겠습니까? 지금 사셨어도 주님은 예전처럼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시면서 똑같이 병들고 고통받는 여러분들과 저를 위해서 찾아 오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고치시고 싸매시고 하나님의 긍휼로 목자 잃은 양처럼 유리하고 고생하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들을 보듬으시며 당신의 피로 우리를 깨끗이 씻으셔서 새 백성 만드는 일을 위해서 자신을 모두 바치시는 인생을 사셨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살기를 원하시는 삶이 바로 그런 삶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이 놀라운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까?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어두움과 죄악과 사망의 징벌 가운데 건져 주셔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 주신 일이 그렇게 하찮은 일 이었습니까? 주님의 그 참 사랑을 알고 주님의 그 참사랑을 찬송하고 경배하는 그 일이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즐거운 일이고 우리의 혀가 굳고 우리의 입술에 침을 마를 때까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랑과 은혜를 잃어버린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아서 우리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고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지만 그러나 우리를 통해 그 피로 우리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씻기셔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고치고 나면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아갈 그 삶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리라 하는 그 마음이 우리같이 쓸모 없는 인생, 주께서 피로 우리를 값 주고 사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삶으신 것입니다. 그 삶이 무엇입니까?
그것에 대해서 오늘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거룩한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레위기 10장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베드로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교회 안 에서 늘 듣는 말이면서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말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거룩이라는 말입니다. 이 거룩이란 말은 그저 은혜롭고 신령하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거룩이 무엇이고 그 거룩이 우리에게 어떠한 삶을 살라고 하는지를 말씀드림으로서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될지를 여러분들에게 증거 하고자 합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크게 3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는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라는 히브리말은 자르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때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쓰여지는 목적이 다르고, 정해지기를 다른 위치에 있도록 정해졌습니다. 이것이 거룩하게 된 것은 구별되어서 별다른 용도, 별다른 목적에 마쳐졌기 때문에 이것이 거룩한 것이 된 것입니다. 거룩하다 라고 하는 말은 구별됐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니 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들이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은 우리와는 다른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와는 구별된 분이십니다. 땅이 주님이 찾아오시지 않을 때에는 마음 데로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 땅에 오시면 사람들은 이제 주님이 그 땅에 계시지 않던 것과는 구별되게 행동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구별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신들이 있다고 치더라도 그 신들은 하나님과 구별된 신들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떠한 위대한 피조물도 하나님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그의 능력에 있어서, 그의 거룩함과 도덕적 성품에 있어서 모든 것에 있어서 인간과는 다른 존재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거룩한 분이 우리를 불러 내셔서 빼어 내셨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예수 믿지 않던 사람들과 함께 쓰레기통에 돌아 다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의 목사가 와서 쓰레기장을 돌아다니다 이런 가구하나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깨끗이 수리하고 닦아서 교회당에 같다가 놓았습니다. 이것이 구별된 것입니다. 감히 쓰레기 장사가 와서 1kg에 얼마요 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는 쓰레기 같은 존재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값 주고 사셔서 한 사람 한사람 불러모아 주셨습니다. 그렇게 불러모아 진 사람들은 우선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떤 식으로든지 옛날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썩여서 살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구별된 존재, 따로 떼어놓은 존재들입니다.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주님이 따로 떼어놓은 존재들입니다. 주님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떼어 놓으셨습니까? 이것을 모르니까 그 쓰레기통에서 건져내서 다 닦아서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 놓았는데도 계속해서 옛날의 그 쓰레기통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 구별해 놓으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같이 쓰레기와 같고 벌레와 같은 인생들을 불러서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씻어서 우리를 정결하게 만드시고 깨끗하게 새 사람 만드셔서 이제는 정결해진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주님이 정결케 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시지 않은 진리의 말씀을 주셔서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감격하고 깊이 감동을 받지만 그러나 사실은 은혜의 세계 속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우리 안에 얼마나 고쳐져야 할 것이 많은 가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고 그 사랑을 체험했을 때에는 내 죄가 사함 받은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데 살아가려고 하다 보니 이전에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자신 속에 있었던 그 패역한 요소들과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그 악한 생각들과 그 사악한 자신의 본성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고치십니다. 어느 때에는 생각 없이 건들건들 교회당에 왔다 갔다 하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은 말씀을 주셔서 그들이 깨달아 알 수 있게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고 그들은 고치십니다. 못된 성질도 맘대로 막 살다가 하나님이 보여 주셔서 고치게 됩니다. 이렇게 고치며 새로워지면서 우리는 결국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구원해 놓으신 것이 얼마나 큰 목적이 있는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옛날에 나와 같이 너절한 쓰레기와 같고 머리 속에 쓰레기로 가득 찬 한심한 사람들에게 내가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어서 나로 하여금 나 변화시키신 하나님, 나를 변화시키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게 하는 사람들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주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구별된 삶을 살고 구별된 백성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도움 없이는 죄인 중 누구도 하나님 앞에 용서받을 수 없고, 그렇게 사모하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구별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실을 인정하는 삶을 살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 신가를 보여주면 우리들을 통해서 그 사람들이 우리가 만난 주님을 만나게 되고 그래서 그들도 우리와 함께 거룩해 지는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별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별을 가슴깊이 새기지 않고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쳐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구별해 놓으신 사람들입니다.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우리는 건넜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우리는 건넜습니다. 돌아갈 수 없는 강을 우리는 건넜고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취소 될 수 없는 구원입니다. 우리에게 행복이 있다면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구별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가슴깊이 인식하고 옛날에 즐겨 살던 하나님이 원치 않는 삶을 끝난 것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보다 더 불행한 것처럼 보이는 삶을 살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구별된 존재라는 의식이 무너져 버리기 때문에 그런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별이라는 것은 거룩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성도, 거룩한 신자라고 불러줄 때에 여러분들은 그 소리를 듣는 즉시 “나는 이제 옛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제 옛날의 나와는 다른 나다. 이제 나는 옛 생활로 돌아 갈 수 없으며 옛친구들을 만나도 그들과 하나일수 없다. 나는 구별된 존재다”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거룩의 두 번째 의미는 무엇인가 하면 아주 높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은 위대하시다는 말과 통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와 하나님은 어떤 면에서든지 비교 될 수 없는 존재다라고 하는 것이 거룩의 두 번째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보든지 인간은 하나님과 감히 비교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화) 우주 세계를 바라볼 때 마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다.
거룩은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와는 비교될 수 없는 뛰어나신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어서 그 하나님의 거룩을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 지는 것 밖에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이런 거룩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참 사람을 알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자신에게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고 인간의 작은 소망은 주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 왜에는 우리에게 참 소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을 섬기며 공로 될 만한 일을 하면서도 공로 될만한 일이 기억에 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이고 주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 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을 아는 지혜입니다. 주님의 거룩을 맛본 사람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 신지를 깨달은 성도라고 일컬음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주님의 위대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깊이 겸비해지는 사람입니다.
이 신앙의 세계에 들어와서 가장 고달픈 삶을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끝 발 날리다 와서 영웅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대접받기 좋아하는 사고로 신앙의 세계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큰 은혜를 알았으면 이제 하나님 앞에 겸비해 져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신 줄 알고 자기가 거룩한 일들을 위해서 거룩한 백성을 세우기 위해서 보냄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그분의 생에는 어떠했습니까? 낮아진 생애로 일관되었고, 겸비함으로 일관된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교만하고 거만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치는 돌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버리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쓸모 없는 인간인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시는 그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면 어떻게 살수 없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그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입니다. 예수의 사랑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의로운 사람들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어렸을 적 들었던 전도 부인의 애절한 간증과 구원 초청이야기.
이 세상에서 아무리 고생을 하고 어렵게 살아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거리일 수는 없습니다. 결국은 그런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그 감격의 세계로 인도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인정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내 인생은 주님이 돌봐 주시지 않으면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 주시옵소서.” 이런 겸비함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기가 얼마나 철저하게 무능하고 아무 것도 아닌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내 인생의 전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평생을 몸부림치면서 해결하지 못했던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다 라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을 깨닫는 성도들이 체험하게 되는 겸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각별히 크게 파고 들어와서 우리를 울리고 우리를 감동시키고 그 사랑 때문에 뛰어 놀게 만들고 하는 어떤 사랑의 작용을 우리에게 주실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안 사랑 하십니까? 늘 사랑하시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만을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그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힘입어서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돌 같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감동을 받고 녹아지는 은혜가 있어야 지만 거룩한 삶을 살든지 성도다운 삶을 살든지 할 것입니다. 방종하게 자기 멋대로 살고 방탕한 자식들이 부모가 사랑을 안 해주어서 그렇습니까?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아버지도 물론 바뀌어야 하지만은 철들려면 자신이 부모의 가슴속 사랑을 깨달아야지만 철이 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많이 사랑하는 일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에 반응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사랑만 있는 곳에는 언제든지 방종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셔도 그 방종을 막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반응하는 은혜가 있는 곳에는 옛 생활을 버리는 결단이 있습니다. 옛날의 자기를 부인하는 용기가 생겨납니다.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평안한 길보다는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다 라고 하는 결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깨닫고 나면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가 얼마나 차이가 있고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 얼마나 겸비해 지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 들어오는 통로인 것입니다. 겸비한 사람들 이외에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를 통해서 이미 이런 것들을 보여 주시 않으셨습니까? 아버지의 거룩을 알고 우리를 거룩한 백성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아버지의 거룩하심을 인정하는 거룩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아버지께 복종으로 나타났습니다. 영광을 버리고 세상에 내려오신 것도, 마지막에 아버지의 뜻이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지길 원하는 기도도 모두 주님의 거룩을 안 겸비한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겸비한 삶을 사셨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위대하심을 생각할 적마다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자만해 지거나 오만해 지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신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비해 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그러한 겸손이 극치에 달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기까지 복종하사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삶을 산다고 할 때 그것은 여러분들이 철저하게 낮아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죄가 여러분들의 은혜를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겸비하고 겸손하게 낮아져서 자기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 고하는 그 처음 은혜를 받을 때에 그 겸손함이 사라졌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깊이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깊이 묵상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티끌 같은 존재이고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낮아지기를 배우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죄 없으신 분이 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한없이 낮아지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비참하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분의 낮아진 삶.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위대함을 안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다시 한번 눈뜨십시다. 그리고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 얼마나 낮아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깨닫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거룩의 세 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의 완전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거룩하시다 라고 할 때 그것은 완전하신 도덕적인 성품과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도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완전하질 않습니다. 편애 편견, 그리고 사랑을 많이 받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사랑을 올바로 받아 드리지 못하는 것 많은 은혜를 사람들에게 입었으면서도 그것을 원수로 갚는 것. 그러한 잘못된 것, 이러한 것들이 바로 불완전한 사랑입니다. 우리도 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는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온전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하다라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참 사랑을 깨닫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고귀하신 분이 신지를 깊이 깨닫고 나면 대충 살아가는 것으로서 만족이 되질 않습니다. 사람들이 좀 쉬면서 믿으라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큰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 신지를 깨닫고 나면 그런 것 가지고 우리의 삶이 온전하지 않다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의 사랑에 대해서 깊이 눈을 뜨게 해 주실 때 우리는 온전한 삶에 대한 그리움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인데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 사람되고 나면 이제는 살인을 하고 싶다든지, 간음을 하고 싶다든지, 사람을 죽이고 보험금을 타 먹어야 되겠다든지, 그런 극단적인 죄에 대한 생각은 안든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떠올랐다가는 사라져 갑니다. 은혜를 받고 나면 그 다음에는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만약에 살인죄, 간음한 죄, 도적질한 죄와 같은 것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면 내가 뭐 그렇게 감사 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나의 온전하지 못한 삶 그 자체가 죄요 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고 근심하게 해드리는 것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나면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전에는 “내가 이만큼 하는 것도 나니까 이 정도지” 하고 생각하던 것들이 십자가의 사랑이 은혜로 다가오게 되면은 깊이 깨달으면서 그런 것들이 후회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때 더 용서하고 참고 긍휼히 여겨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사람들에게 감화와 용서를 베푸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들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자각이 아니라 온전하지 못한 삶에 대한 깊은 아픔, 온전해 질수록 나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내가 온전하지 못한 것만큼 나 같은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참사랑과 은혜를 한없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충 살아온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온전하지 못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보내시고 성령의 능력을 보내셔서 조금 더 온전한 사람 만드셔서 거울로 말하자면 일그러지거나 우그러지거나 오물이 묻지 아니하고 깨끗한 거울이 되어서 예수님이 누구 신지를 정확하게 보여 줄 수 있는 그런 온전한 사람 만들고 싶어하시는데 대충 대충 살아왔던 그 수많은 날들이,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그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에 깊은 감화를 받게 되면은 이런 변화된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온전한 삶을 살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뵈올 수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 믿기 전에는 요만큼만 살았어도 세상에서 우리보고 사람이 바뀌었다고 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속으로 깊이 들어와 보십시오.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주 이름으로 구원해 날 받으옵소서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이 찬송이 말하는 바는 나도 어찌 할 수 없는 이 모난 나 하나님의 그 큰사랑의 은혜를 입어 감동을 받으면서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 이 부도덕한 모습, 주님의 사랑에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도 씻고 나서는 돌이키지 못하는 나의 포악한 모습, 주님의 그 큰사랑과 한없는 용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죄 지은 자리를 즐거이 용서하지 못하는 강포한 나의 마음, 이것을 한없이 고통 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찬송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아는 참된 은혜가 있어서 그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신 지를 깊이 깨닫는 그 인생은 언제나 도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잘 믿으면 뭐 합니까? 안 믿는 사람보다 더 포악하고 천국 가면 뭐합니까? 함께 천국 갈 사람들을 지긋 지긋하게 미워하고 강포하고 성질 데로 살고 평안 할 때는 천사처럼 생글거려도 조금만 여러분이 와서 심사가 뒤틀려 버리면 왈칵 뒤집어지는 그러한 부도덕한 성품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성품입니까? 주님이 그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깊은 감화가 있는 곳,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을 깨달은 그 곳에는 도덕적인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칼을 내밀어야 될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일도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용서의 비밀인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자기를 향해 저주하고 욕하는 강도를 용서해 주신 것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거룩을 알고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것에서 일어나는 도덕적인 변화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막 사는 것이 아니라 눈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한번 보여 보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얼마나 온전하신 분이시고, 온전한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온전한 교통은 온전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하지요. 그런데 온전한 하나님과의 교통이 힘들어서 애를 쓰지요. 말씀을 들어도 깨닫는 것 같은데 그 말씀이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헤쳐서 나를 뒤집어서 나도 어쩔 수 없는 나를 뒤집으셔서 새 사람 만드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를 원하지요. 그런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통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주님의 성품을 본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변해야 합니다. 어떻게 여러분들이 안 변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깨달을 사람들이 어떻게 안 변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변하지 않으면 박수를 치는 것은 마귀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실족시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 도덕적으로 온전해 지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귀한 은혜입니다. 여러분 정말 도덕적으로 온전해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삶이고 이것 없이는 누구도 주님을 뵈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거룩한 나그네
외모로 보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1:17上)
지난 시간에 우리는 거룩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거룩은 3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구별이라고 말씀을 드렸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와는 비교 될 수 없이 탁월하신 분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체험했던 청교도 시대에는 하나님의 탁월하심,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 대해서 많은 찬송과 저서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와는 비교 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시다는 사실, 그 위대한 권능, 그 초월하심이 거룩의 의미이고 그것을 배운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지푸라기와 같은 인생임을 알고 겸비하게 사는 것이 거룩한 삶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거룩하다는 말이 도덕적으로 완전한 것이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거룩해 지는 성도들은 자신이 적당한 신자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고 적당히 도덕적인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온전해 지길 바라며 살기에 엉터리 같은 이 성품, 모나고 더러운 냄새가 나는 이 성품을 간직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말할 수 없이 너무 죄송한 것이 됩니다. 그렇게 주님을 온전히 닮아 가는 것만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 가는 것입니다.
(예화) 뷔페에 어울리지 않는 더러운 장화와 옷차림으로 인해 식사 내내 안절부절못한 이야기(백인호 집사님).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이 그렇게 거룩하고 아름다운 지위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이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셨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깊은 결함이 있으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막가파 식으로 사는 것과 잘 살려고 노력하며 가끔 실수하는 것과는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전자와 같은 삶을 살면 하나님 앞에서 자유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받으면서도 그 은혜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는 가장 합당한 이유가 됩니다.
거룩이 없는 그 곳에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는 어떤 곳에서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나타났던 호렙산 가시나무떨기 불붙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났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 하셨습니까?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의 신을 벗어 버리라.” 모세가 신은 신발에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이제까지 친구처럼 발에 붙어서 양을 칠 때나 걸어다닐 때나 물을 길러 갈 때나 언제나 함께 하고 자기에게 그렇게 유익을 주었는데 왜 그곳에서 신을 벗어야 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지 않았을 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것이 거룩한 하나님과 대면하니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과의 만남도 없고, 신앙의 감격도 없고, 기도의 응답도 없고, 하나님의 축복도 없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증도 없고 그저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룩한 이름을 말은 하지만 하나님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그 생명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특별히 거룩하고 온전한 삶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이름만 교회당에 걸어 놓고 교회에 빠지고 싶으면 빠지고 다니고 싶으면 다니고 믿고 싶으면 믿고, 그저 내가 살고 싶은 데고 살다가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하면 언제든지 하나님께 불복종할 준비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도덕적으로 거룩해 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그러한 거짓과 허함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곧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고 거룩하고 신령한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서 그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맛보고 신자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하나님과의 교제의 놀라운 특권을 맛보아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원한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도덕적으로 온전해 지어야 합니다. 불결하고 부정한 그곳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그곳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을 혹시 사용하셔서 거룩한 일들을 하실 찌라고 여러분들은 거룩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화) 불구덩이에 있는 감자를 꺼낼 때 더러운 부집게를 사용하여 꺼낸다. 감자를 꺼낸 부집게라고 그 부집게를 빨아먹지는 안 듯이 더러운 부집게를 사용하여 하나님도 일 하실 수 없다.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깨끗하지 못한 사람도 하나님은 쓰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쓰셔서 거룩한 일들을 행하시지만 그 거룩과 자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도덕적으로 훌륭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이점에 있어서 너무 취약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는 말은 좋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도덕이 패기처분 된 것과 같이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 하셨을 때는 ”너희의 그 구원이 너희의 공로와는 상관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 공로로 너희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이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피 공로로 내가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는 구원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너무나 감사해서 어떻게 하면 이제 말로 다 할 수 없는 이 고마운 구원을 하나님 내게 주셨는데 어떻게 하면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까? 더 도덕적이고 더 온전한 삶을 살아서 그 은혜의 감격하는 삶을 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한 것이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사는 것이야 아무렇게나 살면 된다는 식으로 세게 믿고 ”믿습니다“만 많이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없습니다. 계시록에 넘어 가면은 다 나옵니다. 그 나라에는 거짓말하는 자, 우상을 숭배하는 자, 간음을 행하는 자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없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간음하지 말고 우상숭배 하지 않은 사람들만 천국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십자가의 참 사랑을 알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속에서 숨길 수 없는 도덕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주님처럼 거룩해 지고 주님처럼 순결해 지고싶어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적인 침체와도 깊은 상관이 있습니다. 육신이 끌리는 데로 상황이 몰리는 데로 막 사는 것입니다. 막 사니까 은혜가 막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너무 곤고하고 고달픕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막사는 사람의 마지막 종착역은 곤고한 것입니다. 전혀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한 번 불순종하고 하나님이 금하신 실과를 한번 따먹을 때는 신이 나지만 그러나 신이 나고 자유로운 것보다도 더 아프고 고통스러운 곤고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치도록 힘이 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 주셔서 어떨 때는 말씀을 깨닫게도 해 주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시간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해 주셔서 회개하고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 새롭게 힘이 납니다.
그러나 문제는 도덕적인 삶이 개선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옛날에 사기 치던 사람은 그대로 사기 치고 탈세하고 뇌물 받던 사람은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거룩한 삶을 살수 있겠습니까? 삶이 거룩하지 않은데 거룩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겠으며, 거룩한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는데 그의 성품이 거룩하게 변화 될 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쪽자리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껍데기는 예수 믿는 사람 비슷한데 내부는 썩어서 부도덕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욕먹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무언가 바람몰이 식으로 흥분을 하고 그냥 어디로 줄달음질 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무엇을 보아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바람몰이 식으로 어디론가 치닫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그러한 군중 심리에 시달리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처럼 온전해 지기를 사모하는 그러한 삶이 있습니다.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도 두 가지로 나뉘어 집니다. 도덕자체를 추구해서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경우가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추구하기 때문에 도덕적인 경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자는 반드시 문제를 낳습니다. 솔직히 우리의 신앙의 세계에서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철판같이 굳어지고 도저히 자신이 깨뜨려지지 않는 사람들이 두 종류인데 하나는 죄에 깊이 쩌른 죄인들이고 또 하나는 도덕에 쩌른 죄인들입니다. 죄인들은 너무나 많은 죄가 그들의 심령을 두텁게 만들고 돌밭과 같이 딱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도덕을 지키면서 도덕을 실천하고 그러한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그 뿌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뿌리 박혀있지 않고 거룩한 하나님과의 만남에 뿌리를 박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은혜를 받고 뻘뻘 뛰어도 “너는 탈세하지? 나는 탈세 안한다. 넌 사기 치지? 난 사기 앉힌다. 넌 뇌물 받고 촌지 받지? 난 안 받는다.” 그런 식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 이데올로기입니다.
여기에 이야기하는 거룩은 이러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순결하심과 주님의 정의로우심과 주님의 자비하심과 그리고 주님의 순전하심을 너무나 깊이 체험했기 때문에 그 거룩과 순결하심과 그 은혜와 사랑의 성품을 가지신 그 주님 앞에 설 때마다 그 하나님을 감격하면 감격할수록 자신의 죄가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 가면서 결국은 도덕 자체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닮고 싶어서 애를 쓰다보니까 도덕이라고 하는 부산물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점점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해져 가는 것입니다.
앞에 말씀드린 도덕 자체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도덕적이 되어 가면 되어 갈수록 부도덕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도덕적이 되어 가는 자신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점점 더 높아져 교만한 마음을 갖고 부도덕한 사람들을 우습게 알고 죄인들을 하찮게 여기는 바리새인적인 사고들이 그들 마음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언제나 비교하면서 자기가 우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사랑은 투기하지 않으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라고 말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핵심부에 있는 사랑의 진리와 정면으로 대치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후자에 방법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분이 얼마나 뛰어나신 분이신 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분의 성품에 감화를 입어서 그분 앞에서 자기의 죄를 보고 자신의 교만과 자신의 사랑 없음과 자신의 무지함과 자신의 불결함을 깨달아서 주님을 닮아 가는 사람들은 자랑할 여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그 거룩의 빛 앞에서 자기가 여전히 더럽기 때문입니다. 그 거룩의 빛 앞에서 자기는 사랑의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칭찬하지만 자기가 얼마나 포악한 사람인지를 주님의 그 빛 앞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그 순결의 빛 앞에서 보기 때문에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이지 깨닫기 때문에 자랑하고 싶어도 할 것이 없고, 투기하고 싶어도 할 것이 없습니다. 교만하고 싶어도 교만할 여지를 그의 마음에 주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선에 기초한 도덕적인 변화입니다.
전자의 사람들은 도덕적인 자기 자신의 삶을 자랑 하지만 후자의 사람들은 뛰어나신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시며 순결하시고 공의로우시고 인자하실 뿐만 아니라 영원하시고 항상 우리들을 용납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내하심을 찬송합니다. 무슨 일이 있든지 어떤 기쁜 일이나, 어떤 슬픈 일이 있을 찌라도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들의 관심과 찬송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곳이 바로 성도들이 모인 그런 곳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오늘 우리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명심해야 될 3가지를 보여줍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누구 시며 두 번째는 우리가 누구이며 세 번째는 살아있는 동안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될 것인가 하는 세 가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에게 보여 주는 진리는 이런 성경 구절 속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행위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너희가 아버지라고 부른즉...”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 신줄 생각나게 함으로써 사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산 우리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데 그 분이 어떤 분이 신가 하니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행위로 사람을 취하시는 분이시다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 구절이 마음에 조금 들지 않습니다.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행위로 판단하신다” 이것보다는 우리의 마음에 더 다가오는 말은 “행위로 판단하지 아니하시고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이래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온전하게 행하지 못한 것도 도망갈 길이 많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외모로 판단하지 아니하시고 행위로 판단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인간의 마음의 깊은 속에서 울어 나오는 작용과는 관계없이 나오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깊이 알고 그 사랑을 체험한 가운데서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은혜에 뿌리를 박고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는 마음을 둔 행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금방 볼 수 있습니다.
(예화)기독 대학교로 들어가게 되면서 53박스 되는 책 박스를 나르는데 도와주신 김승 기 집사님과 그곳의 학생들을 보면서 그들의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남을 이야기 함.
행위는 우리가 철저하게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우리 인간도 판단합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고 행위로 판단하신다는 말씀은 곳 하나님께서 사람의 중심을 보고 취하신 다라는 말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을 보시고 그리고 그 중심에서 울어 나오는 행동을 보시면서 그가 참 하나님의 사람인지를 분간하십니다. 외모로 취하지 않는 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야 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한 내면의 세계와는 상관이 없이 그럴듯하게 종교적으로 포장되어 있는 껍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직분 그럴듯한 명예 그럴듯한 그리스도인의 모습 그럴듯한 칭찬... 이러한 형식에 싸여있는 사람들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하나님은 파하시고 오히려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보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판단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들이 입으로 혹은 여러분들의 말고 혹은 여러분들의 찬송으로 거룩에 대해서 수없이 말을 많이 하고 성도의 올바른 도리가 무엇이고 여러분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수없이 많이 간증해도 주님께서는 그러한 것 모습을 보고 여러분들을 취하시는 것이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 높임을 받으소서”아무리 해도 그 찬송 때문에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그 찬송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예화) 맨트를 많이 붙여 찬양을 리더 하는 한 형제에게 한 자매가 “형제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것인지 이해될 수 없다.”라는 이야기.
삶에 뿌리를 둔 고백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누가 와서 ‘나는 그렇게 생각 않해!’ 그래도 흔들리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사고 속에서만 나온 것이라면 더 똑똑한 사람이 와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러고 정교한 논리를 들어대면은 부러지거나 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깊은 삶에서 그 고백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삶 그 밑바닥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뿌리를 내리고 있고 있습니다. 그 속에는 저절로 솟아 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생명 적인 교통이 가져다준 삶이 있습니다. 그 삶에서 행위가 나왔고 행위 위에 고백의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이것을 부인해도 그 다음이 나오고 그 다음을 파도 그 다음이 나오고 그 다음을 파고 들어가면 나중에 하나님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희안합니다.
요한 사도베드로의 설교를 보면서 커다란 감화를 받는 것이 그것입니다. 실제로 이 편지를 쓸 때 이 사람은 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 뼈저린 과거를 깊이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설교보다도 소망을 갖고 환난과 핍박이 다가와도 변하지 말고 소망가운데 굳게 살아서 승리하는 삶이 되라고 피 어린 편지를 쓸 때 이 속에서는 솟구치는 불길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요한 사도가 사랑에 대해서 쓸 대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도전을 우리들이 받게되는 것입니다. 요한 자신이 우레의 아들이라고 할 정도로 강하고 이러한 성품이 주님을 만나고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무엇인가 진리를 말할 때 진리에 대한 고백이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삶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내면의 세계가 있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승에 보면은 요한이 마지막에 반모섬으로 끌려가지 전에 사랑하는 공동체의 식구들이 모두 모이면 너무 기력이 없어서 사람들이 두 팔로 노인이 된 요한을 부축을 해서 올라가면 말을 잘 못해서 손을 높이 들고 너희는 서로 사랑해라 한마디만 하고 내려오면 성도들이 모두 울음바다고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힘은 삶의 뿌리를 박고 행위의 뿌리를 박은 고백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든든한 성도의 삶을 원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러한 삶을 살지 않고는 결코 성도다운 삶을 살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처음 신앙에 첫 발을 내 딛을 때 잔재주를 배우는 신앙생활을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요령을 배우고 잔재주를 배우고 기능주의를 배우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처음 배울 때부터 올바르게 배워서 자신의 삶과 자신의 행위에 뿌리를 박은 신앙의 고백이 나오고 그 행위와 그 자신의 삶 밑바닥에는 하나님이 계신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밑바닥 하나님이 계신 삶. 이것이 우리교회에서 누차 강조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이렇게 보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이름은 예수 믿는 사람이면서도 세상에 대한 사랑을 끊지 못하고 예수 믿는 형식만을 가지고 속에는 내용도 없고 이러한 말씀을 들을 때는 늘 고민하게 되는 사람은 그래도 행복합니다. 고민은 하니까 언젠가는 변화되겠지요.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괜히 마음속에서 화 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가장 불행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은 생명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무엇이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 그렇게 우리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주님이 우리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시는 분이 십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행위로 인정받는 삶이 어떤 삶입니까? 그것이 바로 거룩한 삶이고 거룩한 삶은 거룩한 은혜 생활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영혼은 하나님을 낯설어 하고 내게 생명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낯설어 하면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는 거룩한 삶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무엇하나 조금 고친다고 해서 소망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다 바꿔야 합니다. 그렇게 바꿔지고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어야 합니다. 거룩한 삶을 창출해 낼 수 없을 정도로 여러분들의 내면의 세계가 망가져 있지 않나 봐야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설교해도 그 설교를 들으면서 이방인들을 향한 설교 같고 그러한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 도저히 나는 그러한 삶을 살수 없다고 생각이 되면 그러면 여러분들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수 있게 하는 기계가 망가진 것입니다. 은혜 생활이 망가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라 고하는 부속도 망가지고 말씀이라고 하는 부속도 망가지고 경건 생활이라고 하는 부속도 망가지고 말입니다. 겉모습은 그럴 듯 합니다. 교회 와서 직분을 맡아 교사가 되고 구역장이 되고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고... 변해는 갑니다. 그래서 그를 사람들이 점점 높여주고 인정해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모일 뿐이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그 하나님 앞에서 그 거룩의 빛을 느끼고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구별된 존재이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 아는 그러한 진정한 변화가 없이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러한 분이 십니다.
두 번째로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그네로 있을 동안에”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에서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거룩한 것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두 거룩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목사가 되는 것은 거룩하고 길목 어기에서 슈퍼를 하거나 풀 빵을 굽는 것은 속됩니까?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예화)복음성가 가수를 하려하는 자매에게 대중가수가 되어 그 곳에서 하나님의 창조하 심을 드러내는 노래와 사람들의 정서를 맑게 하는 노래를 하는 것은 어떻겠냐는 한 자매를 향한 목사님의 질문.
여기서 이야기하는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아 갈 때에만 거룩한 삶과 속된 삶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올바르게 신앙 생활만 해도 우리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하나되는 것을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은 제가 가게의 좌판을 벌려놓고 장사를 합니다. 예전에 돈을 벌기 위해서 장사를 할 때에는 속된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곳에서 성경을 팔아도 그 장사는 속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를 만나고 참으로 변화되게 되면 제가 똥을 퍼도 주님을 향해서 하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 한 의원이 콧노래를 부르며 쓰레기를 치우고 있는 청소부에게 뭐가 좋아 그러느 냐는 질문에 청소부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의 한 모퉁이를 정결케 하는 것이 즐겁다라는 답변.
사고가 바뀌는 것입니다. 돈을 벌겠다고 빗자루를 들고 나간다면 얼마나 처량하고 괴롭겠습니까 그러나 빗자루를 들고 나가면서 “오늘도 나와 같은 쓰레기와 같은 인생이 이 쓰레기를 치우는 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의 한 모퉁이를 정결케 하는구나“ 그러니까 찬송이 나오고 하나님 앞에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쓰레기를 치우는 것이 아니라 똥을 푸고 정화조를 청소해도 그 사람은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즉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분투하고 투쟁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우리들이 힘쓰고 해야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구원도 받지 못한 사람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을 보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내가 십자가의 피로 너희로 구원하였으니 너희는 이제 나의 성품을 닮아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아무 것도 안 주시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수 있는 능력을 이미 주시고 어떻게 살아야지 거룩한 삶인지를 이미 알게 하시고 알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고 그렇게 살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시면서 너희는 나를 본 받아서 거룩한 삶을 살아 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느냐하면 거룩한 것보다는 속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못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고 속된 삶을 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속된 삶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기서 무슨 문제가 부각이 되냐 하면은 나그네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지 않으니까 이 세상에서 죄를 짖고 범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나그네와 같은 마음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본분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식이 철두철미해야 됩니다. 상류층에 돈을 물 쓰듯 쓰고 다니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나그네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철저하게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삶의 표본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마귀가 아닙니다. 환경이 아닙니다.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거룩한 나그네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입니다.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이 세상은 잠시 깃들다 가는 길입니다. 나그네는 집을 짓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지나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그네가 묵는 곳은 여관입니다. 여관에는 아무 것도 자신의 소유가 없습니다. 하루 밤 돈을 내고 주인에게서 빌려서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두고 떠나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속에서 아름다운 추억이 있고 아무리 엄청나게 놀라운 기억에 남을 만한 일들이 있을 지라도 숙박비 내고 현관을 걸어 나가면 그것은 나와는 관계가 업습니다. 나 떠나고 나면 다른 사람이 내가 누었던 자리에서 눕고 내가 씻었던 목욕탕에서 씻고 그러고 사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호텔에 들어가거나 여관에 들어가서 어제 묶은 사람이 누구냐고 깨끗한 사람인지 불결한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물어 부지 않습니다. 내가 가고 나면 이 방을 잘생긴 사람에게 줄 것인지 못생긴 사람에게 줄 것인지에 대해서도 물어보지 않습니다. 앞에 누가 있었고 뒤에 누가 올 것인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잠시 머물다가 떠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살이 인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바로 이런 나그네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이 살아서는 주먹만한 인간이 속에 탐욕과 욕망과 수많은 꿈과 사연을 많이 갖고 있지만 죽으면은 비료로 처서 1300원 어치의 가치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초상집에서 많이 배웁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잠시 머물다가 가는 것을 보면서 인생이 그렇게 미친 듯이 집착하는 그것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은 잠시 머물다가 가는 길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랑해야 할 것이 없고, 우리들이 사랑해야 될 것은 잠시 머무는 이 길에서 만나고 마주치고 붙잡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마지막으로 도달해야할 우리들의 본향을 사모하는 것이 우리의 참된 신앙이요 그리고 이 나그네길을 걸어가면서 본향에 대한 그리움이 언제나 있어서 주님을 뵈올 날을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며 성도의 본분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많이 소유한 사람이나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나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차이가 나는 것 같고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는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지만 마치 물이 얼어붙으면 높은 얼음 낮은 얼음이 있지만 녹아 버리고 나면 모두 한 물이 되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결국은 마지막에 돌아갈 그 곳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은 영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우리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적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우리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 갈 때에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적당히 이 세상을 멸시하고 이 세상에 번영이나 실패를 하찮게 생각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단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우리의 인생이 곧 끝나고 잠시 후에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에 대한 소망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소유에 대한 사랑이 영원을 향한 우리의 눈을 멀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모든 사랑에는 그런 속성이 있습니다. 재물을 향한 사랑에 눈을 뜨게되면은 재물 이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되면은 하나님 이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뭐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뭐든지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됩니다. 물질을 사랑하면 모든 것이 물질에 마음이 가지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거룩한 삶을 말씀하시면서 우리 자신의 신분을 상기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 우리가 추구하고 우리가 견고히 붙들고 있는 이 것이 만약에 우리의 인생에 휘장이 내리는 순간에 그것도 의미 있는 것이 되어버릴 것 같으면 우리는 이것을 영원한 것을 붙잡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붙잡고 우리들이 붙잡고 우리들이 추구하는 것은 삶 이쪽 편만이 아니라 죽음 저편에서도 의미 있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이런저런 지위를 누리고 이렇게 저렇게 수단 좋게 부동산 투기도 하고 땅 투기도 하고 뇌물도 받고 해서 만약에 돈을 모았다고 하면 그렇게 누리며 산 것은 이 세상에서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 세상에서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돈 있는 사람들은 상류층 취급을 받습니다. 돈이 없으면 인간 취급을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가 붙잡고 있고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이 세상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잠시 맡겨두신 것들이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소유와 어떤 지위를 누리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당장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께서 생명을 거두는 그날에 오늘밤에 내 영혼을 취하리니 그러면 너의 소유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우리들이 사랑하고 연연해하고 이 세상에서 우리를 그렇게 즐겁게 하던 그것이 마지막날에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그것이 우리를 위로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즐기는 재물로는 우리의 영생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도록 십자가로 우리를 부르신 그 하나님 앞에서 그런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깨고 우리에게 사랑 받기 위해서 다가오는 물질, 소유, 명예, 사람의 영광, 이런 것들을 자랑하고 구하려고 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우리는 나그네라고 하는 것을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나그네는 자기가 가는 길에 때로는 주막에 들러 목을 축이기도 하고 식당에 들러 밥을 먹기도 합니다. 이런 저런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교제를 나누기도 합니다. 이런 저런 일들을 만나기도 하고 가슴아파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나그네길에 정줄 수 없습니다. 나그네는 오직 나그네일 뿐이고 그가 지나가면서 만나고 마주치는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을 누리고 무엇을 자랑하고 어떠한 지위를 누리는 것들은 주께서 우리를 부르는 그날에 우리를 위로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붙들어 주지 못하고 주님이 우리를 세워 주지 못합니다. 마지막 때에 여러분들이 주 앞에 섰을 때에 주님이 뭘 물어 보실 것 같습니까? 회장님이셨습니까? 사장님이셨습니까? 부장님이셨습니까? 동장님이셨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것을 물어 보시겠습니까? 주님이 물으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그러한 지위를 누리고 영광을 누린 것은 주님에게 있어서 질문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그러나 내가 거기서 나를 어떻게 섬기었는지는 잠시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주님을 섬기는 행위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이것은 그 사람의 영혼 깊은 밑바닥 속에 내재하고있는 우리 주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이였기 때문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진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방언도 패하고 믿음도 그치고 소망도 이루어지지만 주님의 나라에까지 가서도 그대로 주 앞에 인정받는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나그네는 이 세상에 사랑을 주지 않는 사람입니다. 언젠가 얼마나 우리들이 인생을 살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하게 우리의 죽음을 예비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야 합니다. 올 때는 순서대로 오지만 갈 때는 순서와는 상관없이 갑니다.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의 영광을 취하고 많은 재물과 부와 영애로 이 세상에 집착하며 살면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 할 때에 마음을 모으고 뜻을 모아서 수시로 이 나그네길에 정착하려고 하는 자신을 채찍질하며 우리의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여 거기에 소망을 두고 잠시 머물 이 세상을 하찮게 여기며 산 사람들은 마지막 고단한 인생 길 천로역정과 같은 이 가시밭길 인생 길을 마친 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썼을 때 그날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날이 되겠습니까? 일평생 그토록 사랑하던 주님을 그 자리에서 뵈올 것이며 일평생 그렇게 마음이 사무치도록 온전히 높임을 받기를 원하시던 하나님, 그리고 내 인생을 사용하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이 빛날 수 있다며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처럼 그렇게 종처럼 심기며 살았던 그 사람의 인생이 어느 날 휘장이 내리고 주께서 우리들을 그 자리로 불러주실 때 그날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날이 되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상급을 받고 “잘 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고 칭찬하실 때 이 세상을 나그네 길 처럼 여기며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고 수고하며 주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펼치기 위해서 희생하는 삶으로 일평생을 종처럼 살았던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주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래서 시시각각으로 우리의 마음을 파고들어 와서 좋지도 않은 이 세상을 마치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전부 인 것처럼 우리를 유혹하는 모든 우리의 믿음의 도전들을 향해서 과감하게 우리는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나그네 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까? 저희가 돌아가려면 돌아 갈 수 있었으려니와 이제는 저희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너는 누구뇨 하는 질문에 나는 이 땅에 우거하는 나그네 노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그가 주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만을 바라보았던 것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가 나그네 노라 하는 그 인식 자체 속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육체의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듭니다. 그러나 주님만을 위해서 살고 주님만을 위해서 매일 매일 방종하게 살려는 자신의 육신을 쳐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받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하는 삶을 살았던 성도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나그네처럼 살아간 그들의 생애를 인정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4. 두려움으로 지나는 나그네 길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7下-19)
지난 시간에는 거룩한 나그네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해 지어야 하고,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제 못 다한 “너희는 나그네로 있을 때에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본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제 이 세상에 거쳐가는 나그네라는 사실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룩해지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우리의 마음속에 탐욕을 버리고 세상에 대한 사랑을 끊어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에 이르지 못합니다. 모든 부패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그 부패로 인해 신령한 것들은 사라지고 속되고 죄악된 것들에 대한 진념이 생겨나기 때문에 거기에서 모든 세상 사랑이 비롯되고 거기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사악한 세상에 대한 욕망과 진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정결해 질 수 없습니다. 정결하지 않고 부패해진 마음을 가진 사람 마음속에서 외모는 바뀔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마음에서 솟아 나오는 모든 생각 자체가 악한데 그의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해 질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때로는 부할 때도 있고 가난할 때도 있습니다. 많은 것을 얻는 때가 있는가 하면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모아도 모아지지 않는 때가 있는가 하면 흩어도 모아지는 때가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때를 거치며 살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할 때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를 지나든지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우리는 단지 나그네요, 우리의 인생 길은 단지 거쳐가는 나그네길이라는 인식을 우리는 분명히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순간 우리는 이제 이 썩을 장막을 떠나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영적인 순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땅에서 태어나서 땅에 것과 함께 살고 땅에 것과 함께 씨름하고 땅의 것을 자랑하다가 땅과 함께 곧 망해 버릴 수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나라를 보이셨습니다. 이 세상은 곳 망할 장망성이요, 이 장망성을 떠나서 우리는 영원한 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자로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순례자로 부름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역시 믿는 그 순간에 그 순례의 길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은 다음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과 동일하게 슬픔과 유혹과 죄가 많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경건한 성도에게는 커다란 고통이요, 슬픔이요, 또 아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자로 부름을 받았으니 우리는 반드시 거룩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밖아 죽으신 가장 높으신 뜻이 우리를 거룩한 삶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거룩한 삶을 통해서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배우게 됩니다. 거룩한 삶을 통해서 사람들은 우리를 바라보고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자신들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부유하게 권력을 누리며 살아도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우리가 기뻐하는 것 때문에 그들은 불안해하고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 때문에 그들은 조바심 나기 시작합니다. 무엇인가 인생의 허무의 본질을 깨뜨려 본 것과 같은 어떤 삶의 모습을 거룩한 성도의 삶의 모습 속에서 발견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 피로 우리를 건져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막 살게 하려 하심이 아니오, 우리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거룩한 것들에 대한 사랑을 갖지 아니하면 그는 결코 거룩한 삶을 살수 없습니다. 거룩한 것들에 대한 사랑과 거룩한 것들에 소망을 갖지 아니하면 그는 거룩한 삶을 살수 없습니다. 잠시 스쳐 가는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것들을 붙드는 성도들이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땅에 살아도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성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속히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그렇게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 모릅니다. 잠시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이 인생입니다. 여러분들은 시간이 그렇게 속히 지나가서 주님 앞에 설 텐데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서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물론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분투하며 살아서 주님을 위해서 큰일을 하며 왔는지도 물론 보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내 피로 너를 구속하였는데 너는 네 인생을 통해서 나를 얼마나 드러내었느냐?” 결국 바꾸어 말하면 “내 피로 내가 구원을 얻었는데 나그네로 사는 동안 네가 얼마나 거룩한 사람으로 거룩한 일을 위해서 충성을 했느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때 가서 정말 나그네처럼 우리의 인생을 살다가 갔다면 주님 앞에서 단지 “밥 벌어먹다가 왔나이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그리스도의 속제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단지 이 세상에서 밥 벌어먹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우리를 어두움 가운데서 빛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보여주고, 아직까지도 죄와 시련이 많은 이 세상 속에서 시달려 살면서 참 인생의 길이 어디인지를 모르는 무지하고 목마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붙잡아 주시고 그들에게 참 진리의 길을 알려 주시려고 불러내어서 우리를 건져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대치 할 수 없는 그 거룩한 뜻을 쫓아서 살지 않으면 우리는 행복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만이 우리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대한 미련과 사랑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 훨훨 날아오르지 못하는 그러한 불구의 신앙생활을 하고있지 않습니까? 결국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세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예화) 파킹을 달아 날아다닐 수 없는 창경원의 새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으면 안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의 신분이 바로 나그네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그네로 있을 때 두려움으로 지내라. 나그네로 지내는 동안에 너희들은 겁을 먹으며 지내라는 그런 뜻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에 대해서 많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기쁨도 한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정말 하나님과의 화목으로부터 오는 기쁨이고, 하나는 스스로 만족하는 즐거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쁨은 후자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하나님의 생명이 그에게 가져다주는 진정한 기쁨으로 기뻐하는 그런 것을 그리스도인의 기쁨이라고 말하는 것이지 성도가 되었으면서도 이 세상에 있는 속된 것으로 즐거움을 취하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 즐거워하는 그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즐거움이 아닙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로 부터만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모든 좋은 것이고 그분께로부터 오지 않는 것은 모두가 나쁘고 쓸데없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나그네로 있을 동안에 두려움으로 지내라”라고 하는 말씀은 우리에게 커다란 경종을 울려주는 것입니다. 너희의 인생이 그리스도의 예수의 피로 속죄함을 받은 그 순간 사는 것은 너희들이 살지 만은 그러나 너희의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너희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잊지 마라 너희 인생의 마지막에는 너희의 인생을 심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살든지 우리는 이 세상에 만족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선악간에 무엇을 위해 살든지 끝 날에 그리스도 예수의 심판대 앞에 각각 나타날 때는 선악간에 그 행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선하게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영원한 가치 있는 것들을 위해서 산 사람들은 영원한 기쁨과 거룩한 상급과 영광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의 피로 구속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살고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해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이 살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날에 어떠한 식으로든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의 피로 주님이 우리를 구속해 주신 것만을 감사 할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구원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를 안 자가 되었고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깨달은 자가 되었고, 이제는 주님이 나에게 어떻게 살라는 지를 명령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일 수 없고, 이제는 인생의 참된 의미가 무엇이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왜 날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자기의 몸을 깨뜨려 피 흘려서 날 사셨는지 이제는 의심 할 수 없고, 부인 할 수 없고, 다르게 말 할 수 없는 분명한 진실 앞에 내가 직면하게 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몰랐을 때는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는지 그래서 왜 내가 예수 죽인 죄인이 되었는지, 우리는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제는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주실 뿐만 아니라 신앙의 경험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 떠나서 살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 없이 사실 것 같으면 한번 나가 보십시오. 용감하게 사표 내고 나가 보십시오. 살수 있나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수 없으면 주님께 붙어서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인생을 봐야 합니다. 이제 얼마나 남았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의 생애를 마감하는 날까지 다시 오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생애는 지극히 짧은 인생입니다. 그 짧은 생애를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가 나그네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우리의 인생을 농담이나 장난하듯이 써 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인식해야 되는 것입니다. 할 일없이 세월을 낭비하고 가치도 없는 일에 죽을둥 살둥 매달리는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가장 잘 쓰여지기 위해서는 경제 원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면 한정된 인생, 이 짧은 시간, 이 짧은 생애를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다 죽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위해서 써야지 만 주님이 참 기뻐하시는 인생이 될 것인가 라고 말입니다. 지나온 날들이 너무나 많은 나그네들은 지나온 날들을 한탄하지 마십시오. 그 날들을 나그네처럼 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주인대접 받으며 살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날들의 후회가 남은 날들은 아무렇게나 살기 하도록 만들어 주는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지난날 많이 주님 모르고 내 멋대로 살아서 두려움도 없이 가치 없는 일들에 내 인생을 모두 소진해 버린 것이 너무 원통해서라도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인생의 황혼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젊은 세월이라고 하는 것은 30년 후에는 반드시 갚아야 할 만기 어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때 부도나면 우리의 인생은 끝장입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나름 데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의 남은 생애를 받아야 합니다. 한 순간 한 순간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셔도 더 이상 그렇게 밖에 살수 없는 그런 삶을 살면서 우리의 나그네의 삶의 공간을 한 칸 한 칸 주님을 의해서 매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서 받을 그 상급과 함께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해 주셨는데 그 구속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면 당하게될 부끄러움까지 염두에 두다 두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의 나그네길을 지나야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또 있습니다. 나그네길은 유쾌하고 즐거운 길이 아닙니다. 나그네길은 목적지를 향해 찾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늘 유혹이 따르기에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두려워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환경이나, 가난이나 시련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함을 받고 그 사랑에 깊은 감화를 받았을 때 우리는 주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곳이라면 가시밭길이라도 해치고 가서 그분을 뵈옵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전에 그렇게 사랑하고 혹은 그렇게 미워하던 사람들이 없어도 나는 주님 한 분만을 의지하면서 내 인생 길을 걸어가야 하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주님을 신랑 삶아서 혹은 주님을 부모 삶아서 혹은 주님을 친구 삶아서 일생 주님이 내 곁에 계시다는 것, 하나만으로 만족하며 그 주님만 계시면 자기는 모든 것이 없어도 모든 것이 있는 것이요. 주님이 계시면 모든 것을 잃어 버렸어도 사실은 잃은 것이 아니다라는 신앙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나그네길에는 변심도 많은 법입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나그네길은 수 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하루 저녁 자고 내나가면 어떻겠느냐는 유혹도 하고 혹은 여기서 아예 자리를 펴고 함께 살자고 유혹을 하기도 합니다. 거기에는 안락한 삶이 있고 안일한 생활이 있습니다. 고달프고 외롭고 고독한 투쟁도 없고 거룩한 고민대신 속된 즐거움이 그곳에는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어떤 불신앙적인 자아가 세상에 나그네길의 유혹에 대해서 내미는 손을 붙잡지 않는다고 장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신앙 생활을 할수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 무서운 존재는 마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라는 사실입니다. 마귀가 제아무리 놀랍고 무서워도 우리가 마귀를 향해서 준비된 마음만 갖지 않고 하나님께만 바쳐진 마음을 갖고 있으면 그는 우리를 어찌 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준비된 심령에 오시는 것처럼 마귀도 준비된 사람들의 마음속에 역사 합니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고 시련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혹은 유혹에 넘어지거나 혹은 커다란 시련을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마귀 홀로 그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마귀의 역사에 손 내밀고 손잡는 내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나 지신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입니까?
그러면서 나그네길을 걸어 갈 때에 또 하나의 지혜는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나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은 뜨거운 눈물로 내 굳은 뺨에 뜨거운 골을 빠으며 눈물을 흐르게 만들어도 그러나 주님이나를 붙들어 주시지 아니하시면 얼마든지 주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이 세상과 짜하여 이 영적인 순례의 대열에서 도망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 나그네길을 지나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무서운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따금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악한 생각과 하나님을 향한 불 신앙을 보면서 자지러지게 놀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무서운 존재가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일하게 살고 방심하게 사는 긴장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는 결코 거룩한 삶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데로 파도가 치면 파도가 치는 데로 그렇게 살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 속에는 거룩한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순례의 길에는 언제나 긴장이 있습니다. 때로는 갓끈 하나 풀어놓고 짚신도 벗지 못한 체 마루에 걸터앉았다가 벽에 등을 데고 잠시 눈을 부치고 다시 길을 떠나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행장을 가슴에 숨에 앉고 그렇게 신발도 차마 벗지 못한 체 주막에 누워서 한숨 붙이고는 곧 그렇게 떠나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비가 억수로 오고 눈이 내리면 잠시 쉴 때는 있지만 그러나 다시 날이 게이고 해가 뜨면 일어나서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일하고 안락한 삶을 살길 원하는 사람들은 결코 거룩한 삶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 자체가 사악하고 불결하게 되기 위해서는 가만있으면 되지만 그러나 우리가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 밭을 끊임없이 기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전옥답이 가시덤불과 잡초로 우거지게 하기 위해서 가시덤불의 씨와 잡초의 씨를 뿌릴 필요는 없습니다. 내버려두면 자랍니다. 그러나 문전옥답의 아름다운 곡식들로 영들게 하기 위해서는 구슬땀을 흘리는 농부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본성이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깊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나그네길의 사는 동안에는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나그네길을 지날 때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위로가 없이는 이 나그네길을 승리하며 걸어 갈 수가 없습니다. 들려오는 이 사면에 초가요 그리고 앞을 보고 어디를 돌아봐도 그곳은 홈 그라운드가 아닙니다. 끊임없는 도전이 있고 끊임없는 고독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는 그들만이 아는 놀라운 양식이 있습니다. 그들만이 아는 놀라운 위로가 있습니다. 이 세상과 짝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순례의 길을 마다하고 이 세상에 안주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맛볼 수 없는 하늘의 신령한 맞나가 있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의의 길을 걸어가고 영적인 순례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고통을 받고 외로워 질 때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신실한 위로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고달픈 광야와 같은 인생 길에서 영적인 나그네로서 거룩한 길을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묻어두고 좋아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면서도 우리들이 이 영적인 순례의 길을 오늘도 힘차게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이런 길을 걷지 않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하늘의 위로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양식이 우리에게 있고 신령한 음료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솟아나는 기쁨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마시며 그것을 먹으며 하늘 나라고 걸어갈 수 있는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보십시오. 하늘 나라를 위해서 영적인 순례의 길을 걸어가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냥 버려 두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메마르고 어찌 할 바를 모르던 그 건조하고 황폐한 심령에 주의 거룩한 사랑과 은혜의 비를 주님이 우리에게 뜻밖에도 내려 주십니다. 바로 우리들이 모일 때마다 지체들이 참회하고 은혜를 받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라고 하는 생각이 여러분들에게 들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의무만을 부여하신 다음에 몇 년 몇 월 몇 시까지 장망성을 떠나서 영적인 순례의 진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각자 살아서 하늘나라로 귀향하라고 그렇게 살벌하게 명령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걸어가는 것은 우리지만 걸어갈 힘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의 길 때로는 흔들리고 쓰러지면서도 이만큼 걸어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살게 되었다고 칩시다. 누가 그렇게 만들어 주셨습니까? 정말 우리의 힘으로 이렇게 걸어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주님 없이는 살수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고아와 같이 버려 두셨습니까? 시련이 너무나 높기 때문에 우리를 버림받은 아이들처럼 그렇게 내버려두셨습니까? 심지어는 죄 가운데 있을 때에도 주님이 우리를 내버려두시지 아니하시고 찾아 오셔서 사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결국은 우리의 구두 끊을 다시 메게 하시고 옷깃을 다시 여미게 하시고 행정을 꾸려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순례를 새로 시작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거미줄 같은 믿음을 가지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습니까?
나그네길을 어떻게 우리들이 이기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나그네길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자기를 두려워하며 그렇게 순례에 대한 진념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도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붙들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새 사람 만드셔서 그래서 결국은 주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구속해 주신 그 계획대로 살도록 주님이 우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자 여러분 이제는 소망을 견고히 하십시오. 무엇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살겠습니까? 여러분의 앞에 예배된 길은 어떤 길입니까? 그리스도의 속제의 은혜와 구속의 놀라운 은혜를 입은 여러분들은 이제 어느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까? 수많은 길이 여러분들 앞에 있기 때문에 선택하기 위해서 혼란을 느껴야할 필요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에게는 한 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의 피를 흘려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가는 산 길을 열어 주셨고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맛 본 다음에는 우리로 하여금 죄 많고 어두운 이 세상을 향해 걸어갈 수 있는 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사랑의 비밀은 곧 믿음의 비밀이요 믿음의 비밀은 기쁨의 비밀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십자가에서 맛본 모든 사람들은 이제 이 세상에서 순례의 길은 걸어가며 영원한 것을 바라보며 그리고 영원한 가치들이 자신의 순례자의 삶을 통해서 획득될 때 그는 뛸 듯이 기뻐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칭찬 받는 것보다 하늘에서의 상급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주신 자유와 기쁨과 같은 많은 은혜들을 지금껏 하나님의 큰사랑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배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앞서간 성도들의 공통된 고백은 우리의 인생은 잠깐이었다는 것입니다. 잠시 머물다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주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올 수 없는 이 인생이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지지 아니하면 우리의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여러 모양으로 우리를 세우시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돈 많은 사업가로 세우기도 하고 목사로 세우기도 하고 가정 주부로서, 또 어떤 사람은 정치가로 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하다가 온 사람이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그네길에서 자신에게 맡겨준 그 때를 두려움으로 알고 누구를 섬기면서 산 사람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니엘은 제게 많은 도전을 줍니다. 여러 왕들을 거치면서 그는 정부 요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사시는 하나님을 항상 섬기는 종이였다고 기록을 합니다. 국무 총리나 행정가나 유명인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장사를 하면 어떻고 똥을 푸면 어떻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며 살다간 사람들은 모두 그가 무엇을 했든지 거룩한 생애을 산 사람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했든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다간 모든 성도의 생애는 하나님 앞에 칭찬 받을만한 생애를 산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잠시 머물다가 지나가는 나그네길을 이렇게 지혜로운 사람되어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생을 살다온 성도라고 칭찬 받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그네길을 모두 마치고 주님의 나라에서 영광스런 면류관을 쓰고 만나는 그날 우리 그 곳에서 제 천국 열린교회 동문회를 한번 합시다.
이어서 사도는 우리에게 우리의 구속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를 소상하게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의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구속받기 전에 어떤 존재들 이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절망적인 존재들 이였습니다. 조상으로부터 악한 피를 물려받은 존재들 이였고 그리고 그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행실을 통해서 나타났는데 그것은 망령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치매에 걸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원어 성경으로 볼 때 헛된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영원을 향하여 아무 의미도 없는 그 일에 핏대를 내고 열심을 내면서 미친 듯이 산 생애. 그것이 바로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아갔던 조상들의 생애였고 그러한 삶을 숙명적으로 물려받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이 세상 속에서 세상을 사랑하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모르며 모독하면서 짓는 죄만 해도 절망적인데 그 죄의 뿌리까지 우리 속에 내려져 있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의 삶은 어떠하였습니까? 헛된 것을 위해서 열내고 헛된 것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헛된 것을 위해서 죽고 헛된 것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헛된 것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모두 소진하는 그런 허망한 인생을 산 사람들 이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인생을 산 그런 사람들 그 피, 그 속성, 그 하나님을 거스르는 본성을 물려받았으니 우리의 절망적인 상태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심했는가 하는 것을 우리들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래서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는 사람들 이였고 그 하나님을 알아도 영화롭게 할 수 없는 사람들 이였습니다. 하나님을 영광을 금수와 썩어질 이 세상의 것들과 우상과 바꾸어 버린 사람들 이였습니다. 영화롭게 해야할 하나님을 모욕하고 그 대신 미워하여야 할 가증한 것들을 향해 경배하고 그것에 대해서 불탔던 사람들입니다. 철로, 동으로, 금으로 만들어 놓은 우상들에게 구부렁 거리고 절하며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던 사람들이나 이 세상에 보이지 않는 영애나 물질이나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위해서 미친 듯이 그것들을 경배하면서 살아간 모든 사람들의 생애는 하나님 앞에 동일하게 우상을 숭배하며 산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탐심은 곧 우상 숭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외에 대한 사랑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대한 집념 거룩한 것 이외의 것들에 대한 집착 그리고 그것들을 위한 자신의 인생의 모든 투자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의 심판 앞에 정죄 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포함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생들은 오로지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존 귀히 여기고 하나님만 영화롭게 섬기며 살아야할 의무 이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그렇게 죄 가운데서 일평생 수고의 눈물과 애쓰며 땀을 뿌려봐야 나중에 돌아오는 것은 저주의 진노의 불밖에 없는 그런 인생을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돌아오기 전에 어떤 생애를 사셨습니까? 돌아온 후에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감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 삶을 끊어버리지 못해서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고 온 애굽을 그리워하던 때 저질렀던 그 모든 죄들이 우리 안에 있었습니다. 사기와 분 냄과 미움과 원망과 같은 모든 것들이 우리 안에 있었습니다. 성결하게 살도록 우리에게 명하셨지만 우리는 불결하게 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깨끗하고 주 앞에 구별된 백성이 되기를 원했지만 우리는 세상과 하나된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사랑하기를 원했지만 미워하고 치료하기를 원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질병과 같은 죄악을 불러일으키는 삶을 우리들이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인생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정말 절망적인 인생이었습니다.
암 환자가 말기가 되면 어마어마한 냄새가 납니다. 그리고 붙기 시작합니다. 온 몸이 수박보다 더 붙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었던 사람들 이였습니다. 의사도 손을 놓고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하는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 이였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기 전에 우리의 옛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떠한 사람들 이였는지 우리는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매일 매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기대 앞에 서있는 우리의 모습도 잊지 말아야 하지만 그러나 주께서 그의 피로 우리를 구속해 주시기 전에 우리가 어떤 절망적인 존재였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예수 믿지 않고 여러분을 하나님이 사랑으로 감동시키시지 않으셨다면 지금 여러분은 틀림없이 바보 상자 앞에 앉아서 낄낄거리고 있던지 아니면은 IMF시대에 실직을 당해서 이리저리 다니며 소주잔이나 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나마도 IMF를 안 타고 다행히 비겨 갔다면 노래방에서 니나노나 하고있을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으면 뭐 집에 들어와서 선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자기를 창조하신 이도 모르고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불러주시는 참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도 알지 못한 체 그렇게 막 가는 인생을 살수밖에 없었던 그런 사람들인데 주님이 우리를 그의 피로 건져 주셨습니다. 우리를 새 사람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망령된 행실에서 우리를 구속하여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이것을 생각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자랑과 이 세상에서 제법 자신이 잘난 사람이고 무엇인가 자신이 꾀 뭐가 된 것처럼 알던 사람들도 십자가 앞에 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면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주 달려 죽으신 십자가를 불 때 우리는 우리의 사랑 얻은 것도 보게 되지만 주 달려 죽으신 십자가를 볼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아무 것도 선한 것이 없고 우리 안에 아무 것도 영원한 것을 갈망하고 찾아 갈만한 자격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 앞에 깊이 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자신 앞에 절망하게 될 때 눈물을 씻고 나면 그 십자가는 새로운 소망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우리는 소망이 없고 쓰레기와 같은 인생들이지만 그러나 우리를 보지 마옵시고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피를 흘러 우리의 시커먼 죄를 씻어 주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속죄의 불은 피를 보시고 우리를 그 보혈로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 느끼던 하나님 앞에서의 절망은 결국은 십자가를 향한 찬송으로 끝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떤 사람들 이였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절망적인 사람들 이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매주 교회 나와서 가끔은 찔끔 찔끔 눈물을 흘려도 이렇게 지겹도록 안 변하는 게 난데 옛날에 그리스도도 모르고 은혜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도 몰랐을 적에 우리들이 하나님 보시게 에 어떤 존재였을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폐역으로 줄달음질 치고 그리고 저 좋을 데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던 사람들 이였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그렇게 사랑하시는데도 우리가 대체로 순종만 해도 하나님의 그 큰사랑이 우리에게 감격으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어느 날 은혜 받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주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그 사랑 안에서 살고자 할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빛으로 다가오십니다.
주님 뜻대로 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사도 바울 설교를 듣는 것보다는 주님 뜻대로 살려는 사람이 제 설교 듣는 것이 훨씬 더 잘 깨달아 집니다. 어차피 안 살텐데 청산뉴스면 뭐해요? 골만 아픕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순종하고 예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깊은 감격이 있을 때 우리의 영혼에 빛이 들어옵니다. 그렇게 환하게 빛이 들어오면 이전에는 애매하고 모호했던 것들이 이제는 명료하고 분명해 지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개념으로밖에 알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는 손에 닥치는 실체로 다가옵니다. 물론 설명할 수는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사랑하면은 그저 가난한 사람 밥이나 나누어주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사랑하면 만져질 것처럼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다가도 마음이 변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순전한 마음과 삶을 조금이라도 버리게 되면은 이전에 어둠을 가르고 자신의 지성 속에 들어왔던 그 찬란한 빛, 돌덩이와 같고 몇 년 동안 시냇물 한번 흐르지 않은 돌짝 밭과 같은 그 개울에 시원한 강물이 물 되어 그런 기쁨들이 있었는데 이런 것들이 멈추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진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영적인 침체에 빠져있는 것은 죄입니다. 2가지 점에서 죄인데 침체를 가져온 것이 죄이고 또 하나는 침체의 빠져 살면 그만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면서 인생을 낭비한다는 점에서 볼 때 죄입니다. 언젠가는 돌아가겠지. 언젠가는 돌아가겠지요.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살수 있는 수많은 날들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물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대항하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비방하고 조상의 망령된 행실을 물려받으면서 그 피로 속죄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피로 안팎에 그 피로 망령된 행실을 위해서 미친 듯이 줄달음질 치는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마디로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절망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기 직전에 율법을 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지를 깨달으면서도 정말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몸부림치고 그리고 죄 가운데서 죄에게 몸부림치면서 살아가는 그런 인생들이 얼마나 비참한 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은 구원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죄에 깊이 눌려서 그래서 도저히 죄로 말미암아 이전의 자유와 기쁨을 찾을 수 없는 그 처절한 몸부림이 바로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라” 하물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고 원수 맺은 자처럼 살아갈 때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크셨겠습니까? 그 진노 아래 있는 인간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아무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구속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했다고 먼저 말하는 대신에 너희들을 구속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 혹은 썩어질 것들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라고 말합니다.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들로 우리가 구속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이나 금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은이나 금은 실제 은이나 금을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제유 법적인 표현입니다. 은이나 금은 그 당시에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그런 물건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애착과 집착을 불러일으키는 그러한 보물입니다. 보십시오. 그런 집착과 애착을 갖게 하는 그러한 은과 금 같은 것으로 너희가 구속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좋은 철학, 세상에 좋은 사상, 세상에 좋은 학문, 돈, 도덕 이런 것들을 통해서 너희들의 속죄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기초가 인간 위에 놓여있기 때문에 영원하 기초가 될 수 없고, 기초가 인간 위에 놓여있고 그 기초 밑바닥에 있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들이 결함과 부패와 죄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결코 온전히 구원해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미친 듯이 쾌락에 몸부림치면서 자신을 내동댕이치는 것도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은 구원에 대한 갈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들이 참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지 못하는 것이지 그렇게 미친 듯이 쾌락에 자기 몸을 집어던지고 미친 듯이 성공을 위해서 자신을 집어던지는 매몰되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결국은 그런 것들을 하지 않고는 정상적으로 이 세상에서 살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구속함을 입은 것은 은이나 금과 없어질 것들로 구속함을 입은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구속함을 입은 것은 흠 없는 어린양 예수의 피로 속죄함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힘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흠 없는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흠 있는 인간의 죄를 속하게 위해서 당신의 흠 없는 몸을 그리스도 자신의 흘리신 피로 모두 적셔서 그래서 그 피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그 피로 우리를 건져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 피로 구속함을 입고 그 피로 우리의 몸만 새로워지지 않고 마음도 우리의 가슴도 우리의 심장도 우리의 생각까지도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에 잠갔다가 꺼낸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생각이 뭔가 달려져야 할 것 아닙니까? 어떻게 시뻘겋게 피가 묻었는데 머리는 생생하게 살아서 옛날작품 입니까?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그 피에 잠겨서 그 피로 속죄함을 입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분이 나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고 그분이 나를 위해 죽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지를 깊이 깨달아 알았더라면 우리는 이제 금이나 은 같은 옛날의 집착과 결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옛날의 사상, 옛날에 내가 좋아하던 것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알지 못했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가로막았던 이전에 내게 유익했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 고상하고 그분이 아니면은 우리가 어떤 인생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버려 흠 없는 어린양으로서 단번에 죽어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침으로 우리를 구원 얻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몸이 동강나고 그래서 동강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다시 흐르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죽으셔서 우리는 살았고 그분이 버림을 받아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새롭게 발견되었습니다. 진노를 그분이 담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다가오셔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아 주시는 광대한 복음의 축복을 우리들이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의 은혜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속죄의 보혈의 공로 그 속제를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불하셨던 그 고난과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의 버림받으심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인간도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자랑이 우리의 모든 행복과 구원과 거룩한 삶이 그분의 속제의 피 위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5. 그리스도와 거룩한 소명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1:20-21)
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은이나 금과 같이 없어질 것으로 구속하지 아니하고 흠 없고 보배로운 어린양의 보혈로 우리를 구속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씀을 드리기 전에 우리 인간이 얼마나 비참하고 소망이 없는 존재인지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 속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자라고 거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아니 엄밀히 말해서 이미 죽었던 존재들 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그 절망적인 상태에서 주께서 우리를 건져 주셨고 그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 이였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사도는 어제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에게 다시 한번 흠 없고 점 없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를 이 절망적인 죄 가운데서 건져내어서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한 기초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린 양 예수께서 우리의 찬송을 받으셔야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 진노의 대상이고 형벌 받아야 할 죄인 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그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해서 대속 제물로 받치게 하심으로서 우리를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형벌과 죄악에서 건져 주시고 엄밀한 의미에서 이미 조상의 망령된 행실과 우리 자신의 죄악된 삶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철저히 영적으로 죽어있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신앙과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시고자 하셨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우리에게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그 보배로운 흠 없는 어린양 예수의 보혈로 구속함을 얻었기 때문이고 우리들이 만약에 그 피로 구속함을 얻지 못했다면 우리의 인생의 모든 생각이나 우리의 신념이나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여러 가지 방식이나 우리들이 추구하는 모든 행복들이 하나님 한 분이 보시는 그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형벌 받을 죄악에서 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엄청난 사건 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그 때에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을 우리에게 살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두꺼운 성경책을 보고 이 말씀을 지키면서 살고 그리고 이렇게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비하신 하늘의 놀라운 상급과 영생의 약속들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되기 전에는 꿈도 꾸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요구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님께서 명령과 계명을 주신 것은 어차피 못 살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두껍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계명을 지키고 그 계명을 쫓아서 살아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그러한 길을 우리의 인생 길을 걸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주님이 우리에게 예비하시고 그렇게 살수 있는 삶의 자원을 준비하셔서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바라보면서 그 십자가에서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건져주신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단지 우리를 미래의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졌을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실재로 죄를 이기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삶을 청산하고 불의와 더불어 싸우고 믿음으로 소망으로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그 신앙의 길을 우리도 살수 있는 능력을 아울러 공급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다.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구속함을 얻었다. 하는 이것은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죄를 이기고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늘 지지만 그러나 어린양의 피로서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올바로 성장의 원리를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면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그 일에 절대적인 어려움과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거룩한 삶으로 부름 받은 우리의 삶을 우리의 의지에 반해서 좌절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약속된 커다란 축복입니다.
문제는 그런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힘입고도 하나님의 뜻을 쫓아서 온전히 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비참한 결과를 저희들이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은 단지 우리를 위해서 고통을 지불했기 때문에만 우리가 그 십자가에서 감격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를 위해서 주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그 십자가 앞에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잔을 우리대신 마시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며 한없이 면목이 없어 하고 그 죄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구속의 사랑을 찬송하게 됩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형벌을 받으신 그 공로 때문에 우리는 소위 하나님 앞에 은혜라고 하는 것을 입게 되었습니다. 은혜는 형벌 받아 마땅한 죄인들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조건이 없는 사랑이요 호의인 것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그런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예수의 소죄의 피로 아무런 공로 없이 지금 이 시간도 당신 앞에 나아와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진실로 고백하고 참회하는 자에게 모두 구원의 은혜와 회복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이런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참 사랑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고 그 사랑 때문에 그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우리들이 구속함을 얻어 이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용서하시는 속죄의 사랑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거기에 그쳐서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구속은 이제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새 생명을 부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죄 가운데서 숙명적으로 그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형벌의 형벌을 더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름질 치고 치달아도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질 뿐이었습니다. 거듭나지 못하고 하나님께 속죄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가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결국은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우상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인간의 사상이라고 하는 그러한 인간의 철학인 정신적인 우상으로 도달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그분의 속죄함을 입고 그 속죄를 기초로 해서 우리에게 보내어 주신 성령의 도우심 없이 진리의 도우심 없이 우리는 결코 구속에 합당한 삶을 살수도 없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올바로 찾고 그 하나님을 경배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속하신 그 순간에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새 삶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이전에는 성경을 한 장만 읽으면 그 다음 장을 넘어가면 뒷장에 무슨 말씀이 쓰여졌는지 이해 할 수 없었던 사람의 마음속에 성령은 오셔서 깨닫게 하시고 빛은 비춰 주셔서 무식하고 어리석을 정도로 미련하던 인생들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 데로 살게 하신 놀라운 삶을 주셨습니다. 회개할 때 회개를 받아 주시고 갈 길을 물을 때에 그 갈 길을 지도해 주시는 성령의 놀라운 인도하심과 권능 주심을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신 사건이 바로 구속의 사건 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에서는 영원히 우리와 천사의 경배를 받으실 분은 어린양 예수이신 것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원하시는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에게 상상 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유혹하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죄의 세력들을 결박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천국과 방불한 삶을 살지 않습니까?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그분의 생명 안에서 사는 그 황홀한 기쁨을 우리가 어디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참된 기쁨이 있지만 그 기쁨을 아무리 누려도 그 기쁨 끝에 이 세상에 기쁨을 누릴 때에 맛보게 되는 허무가 뒤 따라 오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은 맛보면 맛볼수록 그 기쁨은 사랑으로 이어지고 끊임없는 사랑은 우리에게 배신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은 우리에게 거룩한 영생의 소망을 더더욱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게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 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이 없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우리는 짐승과 같은 존재와 같이 되었을 것입니다. 한 모금의 뜬 물을 먹고 즐거워 하다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와 방불한 인생을 우리는 살고야 말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다시 사셔서 우리에게 구속을 주심으로 우리는 이제 이런 비참한 인생과는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고 우리는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전혀 이 세상에서 주어진 우리의 인생을 무 목적하게 살 이유도 없고 잘 못된 목표에 우리의 인생의 목표를 설정해서 급기야는 우리의 인생 자체가 불행으로 떨어지고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이러한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없으리 만치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의 의미를 알고 그 구속의 사랑에 합당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깨달을 수 있도록 밝히 우리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주를 믿고, 어떻게 주를 경배해서 결국은 잠시 머무는 이 세상을 거룩한 나그네처럼 살다가 그 본향에서 그리스도 예수께 환영받는 그런 거룩한 생애로 마감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성경 천체는 애매 모호하지 않고 명백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사랑과 놀라운 은혜가 바로 이 구속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 떨거나 멸망에 대해서 체념의 지혜를 배울 때 우리는 소망의 지혜를 배웁니다. 다른 사람들이 체념의 지혜를 배우고 절망의 지혜를 배울 때 우리는 절망과 체념이나 포기가 아니라 소망과 거룩한 은혜에 우리가 더욱 빛나는 삶을 사는 비결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 죽음이 죄에 대한 형벌이요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깨끗이 속죄함을 얻고 새 소망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살도록 부름을 받은 우리들은 이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고통스러운 상황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이 죽음을 다리로 하여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긴다고 하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가 모두 구속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인생, 우리의 신앙 전체를 모아서 한 주먹으로 꽉 짜면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베드로 사도가 말한 것과 같이 믿음의 결국은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나그네로 있는 동안에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도 그렇게 거룩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약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속죄함을 입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의 길을 나그네로 라고 자청하며 거룩한 길 걸어가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도 다르고 관심도 다른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천국의 소망과 구속의 감격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이 무미 건조해 보이고 그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고 살았던 지난날들이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삶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3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오셨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가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이 되신다는 사실과 마지막에는 그 나그네길을 거룩한 나그네로 사는 구체적인 방법이 진리를 순종함으로 우리의 영혼을 깨끗케 하는 길이라고 3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일먼저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 말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탐구하고 또 상고하던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당신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실 이 계획은 이미 태초로부터 예비된 것이었고 특별히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구원이 필요하게 된 시점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체적으로 계시된 것은 이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하는 그 순간에 여자의 후손이 오실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예비 되었습니다. 그 후로 한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는 족장들의 갈망은 신앙으로 나타났습니다. 번영을 향한 갈망도 결국은 인간의 구속을 향하는 갈망 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것도 한 땅 안에서 안식을 얻었던 그 사람들이 결국은 한 사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유와 안식을 얻게될 표였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은 미래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품으로 들어가게 될 예표 적인 사건 이였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가나안 땅에 이르기 전부터 시작되고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더욱더 구체적으로 나타났던 성막, 성전, 제사에 관한 많은 계시들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많은 제물들이 죽어가고 제물들이 죄인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어 가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들이 속죄 밭는 장면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결국 우리의 죄를 구속해 주실 사건을 예표적으로 바라본 것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이 사건은 전부터 미리 하나님께서 예배하시고 그리고 창세 전에 예비하셔서 결국은 우리에게 미리 보여 주셨다가 나타난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골고다 언덕에서 못 박히신 것은 어떤 예수 그리스도를 시기하고 모함하는 자들의 충동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었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결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그런 돌발적이고 충동적인 사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충동적이고 돌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자로 젠 것과 같이 정확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때가 차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오셨다고 갈라디아서에서 말합니다. 그곳에서 때가 차매 라고 하는 이 단어는 여인이 산달이 가득 찰 때 쓰는 그 단어입니다.
여러분 달수가 차면 허리를 분대로 둘러매도 아이는 나옵니다. 어떤 방법을 취해서 아이라 뱃속에서 죽지 않는 한 결국은 달이 차면 아이는 나오게 되었습니다. 무슨 방법으로 태어나는 그 아이를 죽이기 전에 그 아이가 나올 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막을 수 없습니다. 때가 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던 때에 인근 주변의 역사를 잘 살펴보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말 우연히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 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헬라라는 나라, 그리스도라고 하는 나라가 유럽 전체 온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그리고 온 세계를 가득 지배한 그 나라가 문화의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지배하는 동안에 전 제국을 하나의 언어로 묶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그리스의 치아에 있는 나라는 어느 나라든지 그리스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에 있든지 자신의 모국어와 그리스어를 함께 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자신의 모국어는 통하지 않아도 그리스어는 제국 이 끝에서 저 끝으로 달려가도 어디서든지 언어가 통하는 언어의 놀라운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유사 이례로 그런 때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일들은 복음이 전해지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그 후에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나아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구속의 놀라운 사랑을 전한 이러한 놀라운 일들이 제국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서 희랍어, 혹은 헬라어로 말하기만 하면 제국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누가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세밀하게 계획 하셔서 예수께서 오실 수 있는 역사의 한 지점을 예비하셨던 것입니다. 유사 일에 그런 최초의 전 세계적인 언어의 통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놀라운 일들을 헬라의 세계 속에만 이루신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로마 제국이 들어서게 하셨습니다. 로마제국이 순식간에 헬라 나라를 다 삼켜 버렸습니다. 로마 나라가 그리스 제국을 다 삼켜 버린 다음에 정치적인 권력은 그들이 쥐게 되었는데 그들은 야만족 출신 이였습니다. 문화라고 할 것이 없는 사람들 이였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제국을 모두 삼켜 버렸지만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헬라 나라의 지배를 받는 기이한 현상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로마대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귀하게 예수 그리스도오시는 준비를 훌륭하게 완수했습니다. 로마 시대에 강력한 중앙 집권제 국가가 이루어지면서 모든 길은 로마로 하는 대대적인 도로 공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길이 만들어지게 되면 그러면 거기에 군인들이 정복을 하기 위한 여행을 떠나고 이어서 상인들이 떠나고 그 다음 세 번째로 그 닦아놓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들 이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로마시대 직전만 해도 경찰과 치한력이 너무나 형편없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어디를 여행을 쉽게 다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1장에서 사도 바울도 해로의 위함과 육로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그러면서 쭉 여행의 고통과 어려움을 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에는 로마의 놀라운 치안력이 발휘를 해서 이전에 흉악하던 그 해적들과 수많은 때 강도들이 모두 소탈되고 복음을 듣는 일꾼들이 비교적 이전 시대에 비해서 안전하게 여행 할 수 있는 길들이 열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 민족 속에도 그런 놀라운 일들을 예배 하셨습니다. 이전에는 이 사람들이 모두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제사 중심으로 모이던 사람들 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시기 직전이 되자 제사를 중심으로 하던 이스라엘의 종교는 책의 종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시대에 있을 때 제사 지낼 수 있는 예루살렘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수 백년에 걸쳐서 생겨난 새로운 구약 종교의 전통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성경을 읽고 그 성경을 해설해 주고 해석해서 가르쳐주는 회당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에만 480개가 있었다고 하니 10가정에 1개씩 회당을 만들었다고 하니 유대인들이 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회당이 만들어진다는 격언을 낳았습니다. 이 회당이 교회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그 사람들이 회당에서 하고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 기독교 예배에서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2가지가 가장 중요했는데 성경을 읽는 일과 그 읽은 성경을 해설해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세밀하게 예비해 놓으신 어마어마한 수의 회당이 후일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그 곳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고 해설하기 시작했는데 그 성경을 해설한 것이 구약을 읽었지만 그 구약을 예수 그리스도 오실 예언으로 보고 참된 기독교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재료로 사용해서 설교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회당 속에서 기독교를 위한 설교가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입니다.
처음에 그런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개하고 어떤 사람들은 불순종하면서 이상한 사람들이 우리 회당에 와서 자꾸 이상한 설교를 하고 다닌다고 로마에 투서를 넣지만 로마는 생각하기를 자기들끼리 하는 일이데 하고 기독교를 내버려두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유대교의 품에서 기독교가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로마 제국 자신이 기독교는 유대인이 믿는 종교와는 다르구나 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는 커다란 세력으로 번져 갔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불과 200년 정도 흐른 후에 결국은 기독교 앞에 로마 제국 전체가 무릎을 꿇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역사와 배경을 쭉 살펴보면 정말 하나님이 놀랍습니다.
제가 학부에 다닐 때 이 책을 쭉 일다가 너무 감격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어느 때에 내 백성을 구해야겠다 하고 단독으로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인체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예수 보내실 계획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때가 되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이야기 하고있는 미리 우리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창세 전에 계획된 일을 우리에게 미리 알리시고 미리 보여주신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이 왜 그렇게 세밀하게 역사를 간섭하시고 문화를 간섭하시고 유대인의 종교를 간섭하셔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수 있는 훌륭한 그리스도의 자리를 예비하고 결국은 구유 안에 태어났지만 역사는 이미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너무 간단하게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라고 못 박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를 움직이고 문화를 움직이고 종교를 움직여서 그렇게 예수 오실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놓으셔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예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셨던 지상의 생애는 당연히 철저하게 우리를 위해서 죽기까지 복종하면서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생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성육신 하신 것도 결국은 우리를 위한 일이었고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신 동안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양떼들을 타고 다니거나 당신의 양떼들에게 대접을 받으시려 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오히려 자기의 몸을 대속물로 주시는 인생을 철저하게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당연히 우리를 위한 생애였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섬김으로서 하나님을 섬기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언뜻 보기에 종과 같이 힘없는 생애였습니다. 이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침돌이 됩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모습을 보고 걸려 넘어지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너희를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철저하게 우리를 위한 생애였습니다. 그분이 먹으시는 것도 입으시는 것도 그분이 고난을 받으시는 것도 모두 우리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슨 가치가 있기에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가운데 살아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리를 위한 생애를 살기 위해서 고난과 고통을 받으셔야 했습니까?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생애를 모두 이 세상에 핍박과 고난 속에 피로 얼룩진 상처받은 생애를 사셔야 했습니까? 무엇 때문 이였습니까? 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은 그런 대접을 받으시고 그렇게 이 세상에 살아가셔야 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그저 주님이 왜 그렇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이 세상에서 그 사랑을 알아주지도 않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위한 생애로 당신의 고난으로 가득 찬 생애를 마감하셨는지 우리는 필설로는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우리를 위한 그 생애를 그렇게 사신 것은 바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형벌 받아 마땅한 죄인들이 죄 가운데서 죽어가고 고난과 고통 속에서 존귀하게 여겨야할 하나님을 거슬리며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을 알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함께 죄의 칼로 서로를 찌르다가 죽어 가는 미움과 고통으로 가득 차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이 불쌍하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생애를 당신을 위해 사시는 대신에 우리를 위해 사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천국에서의 그 거룩한 보좌 위에 앉으신 사건도 묵상해야 하고 주께서 구름을 타고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이 세상에 강림하실 영광스러운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도 우리는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고 묵상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어떻게 우리를 위한 생애를 사셨는가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감화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분이 하나님 이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우리에게는 커다란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구원받은 자의 거룩한 삶은 결국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셨던 삶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존귀하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일념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한 생애를 사셨다면 이젠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우리들이 이제 이 땅에 머무는 동안에 누구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들은 한 푼의 돈과 잠시 있다 들풀처럼 사라질 인간의 명예를 위해서 살도록 내버려두십시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안 우리들은 이제 주님이 이 지상에 사시는 동안에 우리를 위해 사셨던 것처럼 우리가 이 지상에 살아 숨쉬는 동안에 우리의 생애가 주님을 위한 생애가 되도록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로서의 마땅한 삶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의 삶이요, 또 주님의 참 부활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맛 볼 수 있는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지상 생에는 우리를 위한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의를 위한 목마름과 그분의 진리로 인한 박해와 그리고 거룩한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당하셨던 그 모든 쓰라린 고독, 머리 둘 곳 없고 깃들 곳 없는 생애를 사셔야 했던 그분의 그 고난으로 가득 찬 모든 생애는 결국은 우리 때문에 그렇게 살수밖에 없는 생애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감동 받는 일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단지 우리 속에 있는 지식은 우리를 참 그리스도인 되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 속에 머물러 있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형식적인 삶의 습관이나 날이 갈수록 점점 세련되어져 가는 교회생활 가지고는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의 생애를 우리들이 모방하는 삶을 살수 없습니다.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의 생애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그분과의 참된 영생의 관계 속에서 생명을 누리며 사는 삶을 위해서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사셨던 생애를 통해 끊임없는 감동과 감화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생애를 사셨던 그분의 삶이 고통과 고난으로 얼룩진 삶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이 세상에서 우리를 위해 당하셨던 그 고난과 고통을 우리들이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당하시는 그 고난, 주님이 우리를 위해 받으시는 그 고난,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구속을 입었고 은혜를 입었은즉 이제는 우리가 주님처럼 짧게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지나는 동안 이제는 우리가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 할지 마음에 정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쌍한 그리스도인들은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이 불쌍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불쌍한 그리스도인은 머리가 하얗게 되는데도 무엇에 닻을 내려야 할지 모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짧은 신앙생활 동안에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습니까? 때로는 중언 부언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도 속에서 보냈고 또 기도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아 왔습니까? 여러분이 앉은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신앙생활을 해 왔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제 방황하고 흔들리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인생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어디에다 우리의 인생의 소망의 닻을 내리고 살아야 하는지 이제는 든든히 뿌리 박힌 나무와 같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과 희생의 생애를 사셨던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이 세상 거룩한 나그네길을 우리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우리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사는 생애가 되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날마다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거나 우리 좋아하는 인생을 살고 싶을 그때마다 자기를 죽이고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한 생애를 사시다가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남은 몸을 대속 제물로 산산이 깨뜨려 아버지 앞에 바치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의 넘쳤던 생애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그 흠 없는 보배 피로 구속 하셨으니 이제 나는 더 이상 나를 위해 살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우리를 타일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께서 이 세상 계시는 동안 우리를 위해서 사신 것처럼 이제 우리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열심히 주를 위해 살고 오직 주를 위해 아파하고 주를 위해서 고민하고 주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 우리의 시간, 우리의 물질, 우리의 건강, 마지막에는 우리의 생명까지라도 주 앞에 바치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주께서 우리를 구속하셔서 그 십자가의 피로 건져 주셔서 오늘도 여기까지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다고 우리는 믿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이 지상의 생애가 주님을 위한 생애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서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소망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예화) 똥물 선생님의 숙제검사 이야기.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소망이 되었다는 비유를 하자면 숙제를 안해 가지고 그 시간에 들어가서 선생님이 오시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못 나오셔서 마음에서 숙제를 해왔기 때문에 숙제 검사를 꼭 하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마음만 바뀌었으면 정신병자인데 상황이 바뀐 것입니다. 이전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입지 못했을 때에는 ‘하나님’ 하면은 우리에게 무슨 느낌으로 다가왔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면 그게 누구야? 하고 다가왔겠고 구원받지 못했으면 율법을 배워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의 뜻에 거슬려 죄 가운데 살며 사죄의 은총을 입지 못한 자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 아래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 하면 이것은 절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오시리라.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십니다. 주님이 여러분 가운데 오실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그날은 그야말로 제사 날입니다. 주님이 이 시대에 서울 한 복판에 오시면 이렇게 아나 무인으로 하나님을 거슬리고 막되 먹게 살아가는 이 인생들을 하나님이 내버려두실 것 같습니까? 회개할 기회를 그렇게 주고 당신의 종들에게 그렇게 인생의 진실과 믿음의 진실을 증거 하도록 소명을 주셔서 그들을 통해 참된 믿음이 무엇이고 참된 신앙과 구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렇게 지루하도록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는데 그 구원을 거절하고 강퍅하게 마음을 세우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박해하며 살던 이 세상은 주님이 오시면 가만 두시겠습니까? 만약 가만히 두시면 누가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 하나님을 섬기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신다고 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의 변화인 것입니다. 우리가 뭐가 변했습니까? 우리는 그대로였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슨 다른 일을 행했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속죄의 피로 구원을 어느 순간에 입게된 것, 주께서 오셔서 우리의 가슴에 피 바르고 지나가신 것 이외에 우리가 무엇을 보탠 것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악한 강도처럼 일평생을 강도와 그리고 죄악으로 일관된 생애를 살아오던 그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를 받게되자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뵈올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주제를 알아야지 그 주제에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평생 살아온 길이 폭력과 강도 짓을 일삼고 어쩌면 살인도 하고 어쩌면 가정 파괴범으로 수배를 받았던 그래서 결국은 로마의 법대로 그를 나무에 매달아 죽일 수밖에 없는 흉악범의 생애였는데 그가 무슨 면목으로 하나님을 뵈올 수 있겠으며 어떻게 그렇게 살던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를 뵈옵는 것이 소망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평생 죄 가운데 살았고 인생의 이력서라고는 사람들에게 강도질하고 죄를 범하며 살아온 그 더럽고 구차한 날 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해서 그렇게 두려워 해야할 그 하나님이 소망의 하나님이 되셨고 무서워야할 하나님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하나님으로 바뀌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의 우리의 도덕적인 행동, 그것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구속이 이 놀라운 일들을 우리에게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족하고 그리고 우리는 한없이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내가 감히 어떻게 해서 내 앞에 나아올 수 있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 보배피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보혈로 우리를 씻으셔서 우리를 새 사람 만드신 것이 우리의 공로가 아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 이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의 그 십자가의 피를 보고 우리가 당신 앞에 당당히 나아와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게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그러나 주님 뵈올 날이 날마다 가까이 올 날을 우리는 찬송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죽음의 강을 건너게 되면 벗어버리게 될 이 세상의 짐과 다시 맛보게 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사는 그 즐거움들로 인해서 우리의 다가오는 죽음을 기쁨으로 맞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의롭고 잘 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이러한 소망을 우리들이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소망이 없다면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능력의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부활의 약속과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상한 자들이요.
또한 우리가 전파하고 가르치는 기독교의 복음도 모두 거짓말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소망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떠한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이든지 여러분들이 소망은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여러분들의 아버지이시고 그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들을 낳으셨습니다. 그분이 여러분들의 양육자 이시고 그분이 여러분들을 길러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에 사는 우리 인생들이 이렇게 주님이 주시는 이 소망 속에서 살게 되길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앞에 나와서 속죄함을 입고 그 피로 구속을 얻은 사람들은 이러한 소망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때를 지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자살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결핍과 가난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 생명을 집어던지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좋았던 가정들이 파괴되고 결국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이 거칠고 황폐하기 짝이 없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붙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때로 실패와 고통을 맛보게 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나라가 따로 있고 우리는 이 세상의 나그네 일 뿐이며 우리에게는 육신의 부모 말고 영혼의 부모님이 계셔서 그 하나님 아버지 그분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것을 고난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이 우리에게는 무한의 소망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죄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교회에 나갈 수 없고 어떤 사람들은 죄가 너무 많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할 힘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밖에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회복할 수 없는 죄 가운데 빠진 사람들은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없습니다. 예수 앞에서는 없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중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고치시고 새롭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징계를 주시기도 하고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책망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야단 맞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 아닙니까? 주님이 우리를 책망하시고 나무라는 동안에는 주님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바르게살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으면 여러분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고 기도하려고 할 때 여러분들의 마음에 고통을 주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과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여러분들에게 배우게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보든지 저렇게 생각하든지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 이 세상의 많은 재물과 인생들이 의지하며 사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러나 이것들이 우리들에게 잠시는 의지가 될지 모르시지만 영원한 의지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도 알고 성경을 통해서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나 고아와 같은 인생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아버지가 되시고 가난하고 곤고한 자들에게 공급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 앞에서 소망을 배우고 우리가 어떤 역경과 어려움과 절벽에 다다른 것과 같은 한계 상황에 다다를 때도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소망과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늘 말씀드립니다 만은 혼자서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집을 떠난 탕자가 어떻게 되었을 때 그 아버지의 마음에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까? 돈을 많이 벌어서 자기의 집에서 축낸 그 상황을 벌충 할 수 있는 상황이 될 때에 아들을 보고 기뻐하고 그 아들을 대견스럽게 하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가지고 간 것은 모두 탕진하고 재산의 절반을 모두 거들 내었지만 그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소망을 결국은 잃어버리지 않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죄를 그대로 짊어지고 어쩌면 병든 몸으로 힘없이 품꾼 중 하나로 써달라고 걸어 들어오는 그 아들을 보는 그 순간 아버지의 마음은 불붙는 것 같고 녹는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렸어도 이제 그 아버지는 관계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당신의 관계를 파괴하고 떠나버렸기 때문에 당신 마음속에 불붙는 사랑이 있어도 그 아들을 찾을 길이 없었고 관계를 지속할 길이 없었는데 아들이 결국 돌아오자 그 관계는 회복하게 되고 사랑으로 불붙게 되었다는 그 비유를 들면서 여러분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부자처럼 보입니까? 가난뱅이처럼 보입니까? 돈이 많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사람을 풀어서 아들을 잡아오면 아들이 재산을 거들 내기 전에 찾을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한번만 발로 차면 여러분 중에 어떤 사림이라도 엎드려져 “아버지 날 살려 주시오.” 그렇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번 불면 한 데가 없는 게 인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들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인격적으로 깊이 승복해서 정말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없고 그 하나님을 소망으로 삶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는 자기 승복의 고백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나오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소망으로 삶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바로 이러한 소망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 이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을 들어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그 보좌로부터 비취는 거룩한 주님의 영광과 얼굴빛을 보면서 우리를 힘겹게 만들고 하나님의 향해 차 오르는 우리 신앙의 순례에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세상에 있던 헛된 것들을 단숨에 끊어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소망이시고 그리고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의 이유이시고 그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간증 할 수 있는 재료를 우리들이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 더 성경은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들에게 가져다 준 또 하나의 사실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진리를 순종함으로 우리의 영혼이 깨끗케 된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끊임없이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할 때에 우리를 가로 막는 것은 거룩한 삶을 쟁취하기 어려워 서가 아니라 더러운 삶을 살기가 너무나 쉽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거룩한 삶을 가로막는 것은 거룩한 삶 자체가 너무 어려워 서가 아니라 속되고 더러운 삶을 살기가 너무나 쉽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삶은 분투 속에서 이루어지고 속된 삶은 방심하는 속에 자기도 모르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영혼을 깨끗케 하는 비결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를 순종하므로 우리의 영혼이 정결케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믿어 순종함으로서 우리는 정결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닫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바로 이렇게 진리를 순종하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진리 가운데 순종하며 살도록 부르셔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답게 살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대치 할 수 없는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하신 다음에 왜 우리를 진리에 순종케 하심으로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겠습니까? 왜 진리에 순종하는 삶은 우리에게 정결함을 가져다줄까요? 그리고 이러한 정결함을 가져다주는 말씀의 능력은 어떻게 해야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다음 시간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6. 순종과 거룩한 영혼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벧전1:22)
이 시간에 사도는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흠 없는 보혈의 피로 구속을 얻은 성도들이 이제 어떻게 살아야 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고 또 주님이 그런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렇게 늘 더럽혀 지는 우리를 어떻게 정결케 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는 지에 대해서 방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리스도 예수의 피는 우리를 정결하게 씻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의 보혈은 우리의 모든 죄를 구속했습니다. 그래서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는 더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는 풍성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믿고 자기가 옳은 것처럼 행동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참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사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더러운 사람들은 더욱더 깨끗하게 씻겨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물론 죄가 많은 그곳에 저절로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죄가 많은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히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진실 되게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가 있고 진실한 통회 자복이 있는 그곳에 거기에는 반드시 그 죄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성경을 보면서 특별히 바울 서신을 읽으면서 우리는 바울이 마치 자신이 죄인 이였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것과 같은 모순된 표현을 발견합니다. 자랑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약한 것이었고 마치 자신이 이전에 하나님을 모르고 어그러진 길로 걸어가며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던 것을 자랑처럼 이야기하는 것들을 봅니다. 왜 사도가 그렇게 좋지도 않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추억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 이였고 자신이 얼마나 못된 인간 이였고 자신의 죄가 얼마나 자신의 마음과 삶 속에 차도록 넘치는 사람 이였는가 하는 것을 반복해서 말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자기 죄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요. 자기의 죄를 자랑함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죄가 많은 곳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주홍빛과 같이 붉은 죄인들이 가득한 곳에 하나님께서 양털과 같이 희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속죄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렇게 더러운 죄인들이 정결케 되어지는 그곳에는 그 정결케 함을 받은 모든 성도들의 찬송 제목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씻어 주셔서 정결케 하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깨끗하게 되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제 그 하나님 앞에서 정말 의롭다 함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고 마음과 생각과 그리고 정신의 세계 속에서 원하고 생각하는 바가 모두 악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구속의 은혜를 얻고 난 다음에는 생각이 바뀌고 삶의 목표가 달라지게 됩니다. 이전에는 자기를 위해 살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이전에는 자기를 위해서 살고 기껏 해봐야 자기 가족을 위해서 사는 것 이외에는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더더욱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께 효도하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이 그 사랑을 바꿔 놓았습니다.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깊이 깨닫고 죄가 넘치는 그곳에 은혜도 더욱 넘치기 때문에 그 은혜가 그를 감동시키고 자기가 더러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정결케 될 수 있었던 것은 나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그런 진실한 신앙 고백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시고 자기를 구속해 주시기 위해서 대신 진노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셔서 먹보다도 더 검은 자기의 죄를 정결케 씻어 주셔서 새 사람 만들어 주신 이 놀라운 사건 앞에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 밖에 찬송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받은 사람은 오직 그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감동시키고 있는 동안에 그에게는 오직 한가지 소원 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제는 나의 인생이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인생일 수밖에 없구나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오랜 세월을 거쳐야 지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도를 올바로 듣고 깨닫기만 하면 여러분은 분명하게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난 것은 결국은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은 우리의 인생은 결국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로 속죄함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것 인줄 알고 여전히 옛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 앞에는 죽음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육체는 죽지 않고 살아있을 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구속의 은혜의 기쁨은 송두리째 사라져 버리고 마음에는 검고 더러운 죄악의 먹구름들이 돌덩이처럼 단단한 가슴을 에워싸서 살아있으나 사실은 산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을 믿으나 것 모양만 교회를 다니고 아버지의 이름을 주여, 주여 부를 뿐이지 말세에 결국은 하나님 앞에 칭찬 받을 수 없는 길을 걸어가는 불순종의 자식들로 살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처럼 우리에게 먹보다도 더 검은 죄 주홍보다도 더 붉은 죄를 정결케 하십니다. 죄인들의 소망은 구원받기 전이나 구원받은 후에나 오로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분 앞에 나아와서 자기의 죄를 자복 하고 그 피로 정결케 함을 입은 사람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토설하지 아니 할 때에는 그 마음이 녹는 것 같고 더러움과 죄악이 주장하여 그의 삶과 사고 속에 어두움과 더러움이 가득하지만 그러나 흉악한 죄인이라도 자기의 죄를 토설하고 자기의 죄를 자복하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샘에 정결케 씻으면 그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녀입니다.
주님의 노여움은 잠깐이고 그리고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은 영원한 것입니다. 잠시 하나님을 떠나고 살아간 죄의 길속에서 맞 본 고통의 밤은 잠깐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그 피로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것을 믿고 아버지 앞에 나오기만 하면 그 두려움과 어두움은 잠깐이요 반드시 은총의 아침은 우리에게 밝아 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자기의 몸을 저주의 형벌아래 자기를 버리셨습니다. 그때 우리들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정결하게 된 영혼들을 우리들이 얼마나 더럽히며 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고” 이 말씀은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더러워지기 쉬운지를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거룩한 속죄의 보혈로 씻어 주셨지만 그렇게 구속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 영혼이 다시 더러워 질 수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신 속죄하심이 영원한 속죄였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의 연약함을 인해 범죄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취소하시거나 혹은 우리의 구원을 없이 하시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를 정결케 하신 영혼을 얼마든지 더럽게 할 수 있는지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러워진 그 영혼에는 이전에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 갈 때와 유사한 어두움이 뒤덮는 것입니다. 이제 이것은 정죄를 받느냐 구원을 받지 못하느냐 하는 구원의 취소와 승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받았다고 하더라고 우리는 이상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속죄함을 입은 정결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영혼을 가지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을 입은 성도들도 이전에 그렇게 가슴을 파고 들어오던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은혜가 사라지고 그리고 하나님께 찬송할 때마다 그의 마음이 어린아이와 같아져서 주님을 향한 감격과 은혜에 넘치던 그런 영혼의 감화가 졸지에 사라 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만약에 너희가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너희가 살리라고 한 그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우리의 죄를 단번에 그 피로 씻어 정결케 해 주신 것처럼 이번에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들고 그 십자가 앞에 나아가 그 십자가의 못 박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는 말은 곧 우리의 영혼이 더러워지는 것을 막는 길이요 더러워진 우리의 영혼을 정결케 하는 길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지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못 박음으로 우리의 영혼을 정결케 한다는 의미는 곧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죄지을 마음이 있고 하나님께 불순종할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시험입니다. 그러나 이 시험에 모두 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지지만 어떤 사람은 이기고 승리합니다. 죄 짓고 싶은 마음이 들고 내 육체의 욕심을 쫓아 살아서 내가 쾌락을 맛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마음이 생길 때 그때에 우리는 즉시 십자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십자가를 보면서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는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속하여 낸 구속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나는 너에게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정결케 하였으니 나는 네게 명하노니 너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라”는 음성을 십자가를 통해 듣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단지 나그네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집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십자가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처럼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이 바로 내가 지금 유혹 받고 있는 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범죄하기를 원하고 죄 가운데서 떠나기를 싫어하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버릴지언정 그 죄를 버리기 싫어하는 사악한 그 마음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이신 것이 그처럼 비참한 고난과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그 말할 수 없는 치욕을 짊어지신 십자가 그 십자가 지심의 이유가 오늘 바로 내가 짓기를 원하는 내가 유혹 받고 있는 이 죄 때문에 주님이 갈기갈기 찢기시고 물 쏟고 피 쏟으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거룩한 감동이 솟구치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도다 하는 잠시 유혹을 받을 때 잊었던 십자가에 대한 분명한 의식과 감동이 우리 속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불러 일으켜 지도록 우리는 십자가를 묵상하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신 것을 찬송하고 그것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비로써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범인이 바로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가슴 아파하는 그런 변화의 역사가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날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하늘높이 날려서 하나님의 저주를 죄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홀로 당하사 그리고 그 보혈의 피를 우리를 위해 흘려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거기에 감격하는 순간 죄의 유혹은 박살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얼거 매었던 세상에 대한 욕망과 우리가 주님의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바보 같은 어리석은 생각, 이 세상에 살면 영원히 살 것처럼 잠시 머물다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고 하여금 당신 섬기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재물, 주신 지휘, 주신 명예, 주신 모든 것들을 누리며 살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오히려 멀어지려고 하는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 박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영원히 더러워지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이 찾기에 목마른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목마름으로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갈망해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렇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 같이 하나님 앞에 갈망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매달리고 주님이 내게 은혜를 주시지 아니하면 내가 살수 없나이다 하는 간절한 부르짖음과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이 신앙생활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영혼은 어두운 마음과 오랫동안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렇게 범죄하고 마음엔 깊은 어둠이 깃들 어서 도무지 생명에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이미 그는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지옥에 불길을 지나는 것과 같은 고통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향해 도무지 그 태도를 돌이키지 않는 그 태도는 무엇 때문입니까? 가장 많이 기도해야할 위기의 상황가운데 있으면서도 도무지 무릎을 꿇지 않고 입 벌려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예배 시간에 나와도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깨달으려는 마음도 없고 귀 기울이려는 마음도 없고, 마치 술에 취하고 물에 취한 사람처럼 그렇게 마취 잠든 자와 같이 꿈꾸는 자와 같이 그렇게 신앙생활 하려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죄가 자신의 심령을 먹어 들어가고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파괴해서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을 모두 잃어 버리겠끔 만들어버려도 도무지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진노의 칼을 갈고 우리 속에 끊임없는 불행을 보내어 많은 고통과 아픔을 우리로 말미암아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우리의 가족들과 우리의 주위에 경고를 하나님이 보내셔도 도무지 두려움이 없고 떨림이 없는 돌멩이와 같이 강퍅한 마음은 무엇 때문입니까? 왜 하나님의 두려움을 알고 그 앞에 두려워하고 그 앞에 겸비하게 엎드려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성령께서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죄악을 드러내고 우리 자신의 어리석은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면 보여 줄수록 그것을 인정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해서 새 삶을 찾는 대신 변명과 회피로 일관하고 마지막에는 진리를 짓밟고 지나가는 방종하고 어리석은 삶을 고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두 그 영혼이 순결을 잃어버리고 때가 묻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때묻은 영혼은 진흙으로 칠한 거울이 사물을 비춰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나 더러워진 그의 영혼은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해도 그것을 받아드릴 마음이 없습니다. 받아 드릴 마음이 있어도 그것을 때라서 실천하며 살 의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넘치는 더러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는 신령한 마음에 깃듭니다. 정결한 심령에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비취고 깨끗해진 그 심령 속에 하나님의 거룩의 빛이 비취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정결한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당신이 그 마음에 가시려면 먼저 하나님은 그 마음이 청소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회개의 눈물과 성령의 불로 자기의 마음의 죄를 씻어 정결케 하는 진정한 참회와 영혼의 변화 없이 이 모습 이대로 받아 달라고 때를 쓰는 것은 억지인 것입니다. 이 모습 이대로 안됩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더러워지고 어두워지기만 하면 형식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형식 속에 깃들여야할 모든 실제는 사라져 버립니다. 마음의 정결함 없이도 예배 드리는 모습을 가질 수는 있으나 예배를 통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의 거룩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의 마음이 깊이 찔림을 받고 거기서 죽은 자와 같은 영혼이 살아나는 심령의 부흥의 역사는 찾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잠들고 어두워진 마음 더러워진 그 심령에는 오로지 죄의 욕심과 탐욕 구원받았으나 어떻게 하면 말씀을 요리 저리 회피해서 옛날 주님 없이 살던 시대의 그 달콤한 죄악의 낙을 맛볼 것인가에 그이 마음은 집중되어 있습니다.
기도하는 모습은 정결한 영혼을 갖지 않은 사람도 취할 수 있지만 그러나 거룩한 기도의 향불을 키워 올리는 것은 정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모든 허장생사와 그럴 듯 폼잡는 허위와 허식을 모두 내던지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건강한 영적 생활에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우리는 이런 허위와 허식들이 얼마나 우리에게 깊이 파고 들어왔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사람들로 높이 여김을 받고 사람들에게 대접받는 것 사람들에게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받는 것을 언제나 두려워하고 떨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우리의 분에 넘치는 많은 칭찬을 들으면서 우리는 마치 그렇지도 못하면서도 정결한 영혼을 갖으며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의 일이 우리를 정결하게 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 우리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거짓과 허세와 위선들을 배워 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마치 그리스도의 모든 복음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참된 신앙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바보 같은 것입니다.
가끔 특별히 오래된 교회에서 오래 믿은 교인들에게서 그런 것들을 봅니다. 집회를 가면 교회가 두 유형입니다. 어느 교회는 미리 기도를 참 많이 했습니다. 가서 강단에 서면 느껴집니다. 어떤 때는 전화에다 대고 몇 번씩이나 우리가 기도 엄청 한다고 그러는데 가서보면 아닌 것 같은 교회도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집회를 하고 나면 힘이 쏟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펼쳐지고 성도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것과 대조적인 어느 교회는 부흥회를 해달라고 해서 가보면 그래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자 그러고 다리는 꼬고 팔장을 끼고 그리고 고게는 지긋이 숙이고 눈까지 감고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하나 봅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허장성세와 허세와 위선과 가식 자기를 그럴듯하게 과시해 보이고 마치 자기가 신앙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허장성세를 부리는 모든 일들은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입니까? 모두 영혼의 더러움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더러워진 영혼에 정결하게 되는 변화가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그 영혼을 파헤치고 지나가서 그의 영혼에 더러움들을 모두 말갛게 씻어버리고 그에게 거룩한 회개와 참된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그의 마음에 진리의 말씀으로 지져 놓으면 그렇게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정결한 마음, 거기에서 모든 거룩한 영적인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지만 그렇게 더러워진 영혼들을 정결케 하고 불결하게 된 자신의 마음이 깨끗케 되는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물론 회개하는 것입니다. 참회해야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런 회개와 참회를 추상적으로 말하지 않고 아주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을 깨끗케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영혼을 깨끗케 하는 비결이요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정결케 하신 우리의 영혼에 순결을 지키는 길이라고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결케 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화) 비오는 날 마구 뛰어 노는 옆집 개와 비오는 날은 조심조심 걷는 목사님 개를 비교.
우리가 영혼이 더러워지는 이유는 그 어미 개처럼 살기 때문입니다. 비가 오든 흑탕물이 튀든 냅도 이렇게 살다 죽을 꺼야 그렇게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두러 누우면서 정결케 되길 원하니 정결케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무슨 영적인 삶을 원하고 주님 사랑한다고 말하고 어떻게 하든지 주님의 뜻대로... 되겠느냐 말입니다. 소원이 그런 것이 있어도 삶이 진리로 말미암아 순종하는 삶이 없으니까 그는 점점 더 자신이 살면 살수록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무지 자신의 삶 자체가 그를 너무나 더럽게 한 나머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리 만치 그렇게 자기가 죄의식을 일으킬 만치 완전히 더러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모든 더러움은 결국은 우리가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일들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삶의 생명적인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도록 강조하고 예배시간에 집중된 마음으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이해하도록 여러분들에게 끊임없이 훈련시키고 경고하고 촉구하고 가르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나면 어떤 유익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려야 지만 그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이유 신앙적인 이유도 있지만 그것과 함께 또 중요한 것은 그렇게 집중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 위함입니다. 예배 시간에 도무지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 현격하게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배 시간에 와서 도무지 예배를 견디지 못하고 손장난을 하고 삐삐가 오고 핸드폰을 들고 어쩔 줄 몰라하지 않나 다리는 왜 그리 긁고 또 숨겨놓은 애인이 있는 듯 목을 빼고 왜 두리번거립니까? 어쩔 줄 몰라 합니다.
밤에는 2시까지 잠을 안자고 애국가까지 동참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는 왜 좁니까? 그것도 2시간 반밖에는 안되는데 말입니다. 용의 눈물을 볼 때는 초롱거리던 눈이 십자가의 보혈을 설교할 때는 게슴 치래해 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삶이 그래서 그런 겁니다. 삶이 흐릿하고 삶이 멍하고 삶이 일주일 동안 하나님 앞에서 의식한 적이 없기 때문에 예배당에 나와도 이곳이 거룩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삶의 관심의 초점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이 심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각해지면 심각해질수록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장난처럼 예배드리는 것이 훨씬 더 부드럽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빨리 피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니까 1절만 부르고 마치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쁜 사람들이 무엇을 하러 여기까지 왔습니까? 모두 진리에 대한 참다운 순종이 없기 때문에 영혼이 더러워지고 영혼이 더럽기 때문에 진리에 진정으로 순종하며 살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지엽적인 것도 있고 핵심적인 것도 있습니다. 주일 오후예배를 오후에 드리는 것이 맞느냐? 밤에 드리는 것이 맞느냐? 지엽적인 것입니다. 수요 예배도 수요일 날 드리는 것이 맞느냐 목요일에 드리는 것이 맞느냐 하는 것도 지엽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핵심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핵심적인 것이 있습니다. 지엽적인 것은 약간 벗어나도 신앙생활에 결정적인 어려움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핵심적인 것은 거기서 빗겨나가기만 하면 즉시 신앙의 생명에 영향을 줍니다.
(예화) 인간의 목숨은 파리목숨과 같지만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생명은 모질다 수술할 때 살을 가르고 내장을 파헤치지만 인간이 그러고도 살아간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정적인 곳만 건드리지 않으면 작은 변화는 우리들이 얼마든지 수용하고 적응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적으로 그렇게 귀한 치명적인 부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치명적인 부분을 다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에 대한 순종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경험들을 많이 합니다. 이제는 우리 전도사님과 구역장님들도 어느 정도는 익숙해 졌습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맨 처음에는 열린교회에 오고싶어서 기도를 많이 하고 이제 목자 잃은 양과 같이 떠도는 삶을 청산하고 들어옵니다. 오랫동안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들어왔으니까 이제는 매일 매일 예배 시간에 참석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꿀과 같습니다. 매일 눈물로 예배를 드리고 변화가 있고 깨달음이 있고 그리고 자기는 이렇게 은혜를 받는데 아직까지도 변화되지 않고 은혜를 못 받는 사람들을 보면은 동물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감격합니다. 그렇게 감격하고 눈물 흘리고 감사 드리고 어쩔 줄 모르던 사람이 얼마 지나고 나면은 싸늘하게 식는 것 같고 그리고 점점 신앙생활에서 뒤로 물러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고 이번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서 옛날에 자기가 했던 것처럼 눈물을 흘리고 콧물도 흘리고 은혜를 받습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는 항상 건강한 신앙으로 가는 초기 증상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건강한 신앙으로 가는 초기 증상에는 눈물도 많고 감격도 많지만 그러나 성숙해질수록 감동과 감격이 사라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누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있다면 믿지 마십시오. 거짓말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오늘이 편지를 쓰고있는 이 베드로 바울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오랫동안 예수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인생 길을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곤란과 시련과 박해와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일평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주님을 믿고 오랫동안 하나님을 섬겼다는 이유 때문에 감동을 잃어버리거나 마음이 굳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생의 노년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들의 두 눈은 하늘나라의 소망으로 더욱 빛나게 되었고 그들의 가슴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 흘러 죽으신 그 거룩한 십자가에 감격하고 예수 죽인 것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원통함이 충성이 되어서 그들의 삶 속에 흘러 나왔습니다. 날로 그 감격이 새로 왔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감옥 속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한없이 감격하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자랑 할 것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모든 가슴 벅찬 감동을 단지 오래 믿었다는 이유 때문에 잃어버렸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누가 그렇게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다면 믿지 마십시오. 그것은 오직 하나 진리를 순종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깨달음대로 순종하는 거룩한 삶이 없이는 그의 감격과 신앙의 기쁨, 생명의 거룩한 은혜는 유지되지 않습니다. 주께서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에 감화를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며 살라고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적당히 순종하거나 어느 정도 비교적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그 길을 따라서 걸어가는 그 일에 매진하고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에 기쁨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순종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경계하며 순종의 그 외길로 줄달음 지는 삶을 살아 보십시오. 감격은 더 큰 감격을 불러오고 은혜는 더 큰 은혜를 불러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 그 드넓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깨달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알게 되어서 바가지 만한 우리의 머리 속에 담았다면 그 용량이 얼마나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286컴퓨터만큼도 안돼는 그 머리에 우리들이 얼마나 들어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가르침을 받는 성경을 통해서 깨닫는 진리의 내용 자체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이미 알고 있는 진리의 내용에 대한 순종하는 충성된 삶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감동을 걷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면 분명해 집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가르치시는 방법이 무엇 이였습니까? 새것, 새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옛것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가르쳐 주셨습니다. 구약을 읽어보십시오. 신명기라는 말 자체가 2번째로 하나님이 명하신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그 모세의 유언적인 설교는 처음 한 설교가 아니라 이미 광야에서 한 모든 설교를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이 누구 신가 하는 것을 보여 주셨지만 주님이 보여주신 것은 당신 자신가운데 지극히 일부였으며 주님이 보여주신 일부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우리들이 깨달은 것은 또 아주 작은 일부일 뿐입니다.
그러나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자주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는 이 단순한 성품을 한번만 알려주신 것이 아니라 반복하고 또 반복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증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진리를 따라 살고 하나님을 만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듣던 말씀이 옛 말씀이기 때문에 진부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들에게 감동과 감화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미 이전에 알았지 만은 옛 말씀을 다시 들으면서 그들이 삶은 옛 삶에서 새 삶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말씀이지만 그러나 내용은 옛것인데 그러나 옛 내용이 그들에게 새로운 결심을 불로 일으켰고 새로운 헌신을 다짐하게 만들었고 새롭게 주님을 위해서 충성 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도전과 감화와 변화를 가져다 주었던 것입니다.
평생에 듣던 말씀 평생에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하나님은 이처럼 진리를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우리의 신앙생활의 진수로 삶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에 순종하면서 살려고 하는 의지가 없는 것은 아버지의 집에서 유산은 받기를 원하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는 사양하는 패역한 아들과 같은 것입니다. 그가 호적을 파가지 않고 아버지 집에 거하는 것은 빨리 아버지가 죽어버리고 나면 땅이라도 몇푼 얻을까 해서 호적을 걸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자식들은 패역한 자식들입니다. 이런 자식들은 애비 없는 것과 같이 패역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아버지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자식들은 아버지가 집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비 없는 자식처럼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손가락질 받고 그래서 하나님이 있으면서 하나님이 없는 백성인 것 같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그런 삶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관계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유산을 물려받은 적도 없고 물려줄 계획도 없지만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악한 것이 유산을 둘러싸고 아버지와 자식들과의 얽긴 관계입니다. 저는 교회에 있으면서 장례식을 많이 다녔습니다. 한 장의사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목사님 가난한 집 장례를 지낼 때는 팁은 적게 들어와도 마음은 편한데, 부잣집 초상나면 십중팔구는 반드시 안색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아직 아버지가 안방에 누워있고 병풍이 그를 가리고 있는데도 유산 때문에 울구락 불구락 합니다.” 정말 동기간끼리 슬퍼하고 한 마음이 되어야 할 때에 그 몇 푼의 유산을 가지고 그런 것을 보면 자기는 배운 것도 없고 신앙도 깊지 않지만 인간 같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시체나 치워서 밥을 먹고사는 장의사가 보기에도 그것이 인간 같지 않은데 거룩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이 내려다보실 때 그 사람들이 인간 같겠습니까?
더군다나 세상에 속된 부모를 그런 식으로 대해도 그게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데 거룩한 아버지 앞에 와서 그저 호적 파가지 않고 걸어 놓는 것은 “주님 그래도 이렇게 라도 걸어 놓아야지 천당에라도 갈 것 아닙니까? 여기서 편안한 삶을 살다가 천당에 가서 갑자기 고통받으면 그 충격을 어떻게 감당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여기서 특별히 호강하며 살았으니 죽어서라도 저는 일등 칸 타야겠습니다.” 이런 심보로 명암 걸어놓고 주일날 와서 얼굴 도장이라도 찍으면 마지막날에 주께서 기억하실까 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패역한 자식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렇게 유산이나 상속받으려고 호적 안 파고 걸어놓는 그런 호적상의 자식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들어오고 나가며 인사하고 그리고 부모의 자식 속에 깊은 사랑이 흐르고 그래서 거기에 전부를 걸고 그곳에서 가족 관계가 있고 거기서 당신의 자식은 당신 때문에 기뻐하고 당신은 당신의 자식을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런 가족관계로 우리를 부르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들이 진리를 순종하지 않고 영혼이 더럽혀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호적을 파가지 않고 걸어놓는 그런 못된 패역한 자식과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거 안 펴놓고 거기에 매달아 놓은 것이 또 믿음이라고 그럽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고 정결하신 하나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보면서 단지 그 감격에 눈물 흘릴 뿐만 아니라 그 눈물 흘린 뒤에는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죄악 때문에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 죄악은 결국 진리의 말씀을 거역한 죄악일 진데 이제 주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그의 피로 속죄 하셨으니 이제는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진리의 말씀을 순종해서 다시는 죽음의 길을 걸어가지 아니하겠노라고 깊이 하나님 앞에 다짐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주님의 말씀을 잃어버리고 말씀을 불순종하고 거역하며 살아갔던 날들을 하나님 앞에 합리화하는 대신에 하나님 앞에 나아 올적마다 예수의 그 크고 놀라운 구속의 사랑을 입었으면 서도 불구하고 이렇게 순종하며 살지 못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를 진심으로 돌아온 탕자의 마음으로 회개하고 참회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변화의 축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번 진리를 따라 살고 그 진리를 위해서 살아갈 많은 담대한 결심과 마음을 하나님 앞에 새롭게 갖게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로 이런 일들을 위해서 흠 없는 어린양의 정결한 보배 피를 우리에게 구속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고난의 주간을 지나고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생각해야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으니 이제 우리는 그 피로 사심과 되었고 우리는 이제 불순종의 아들이 아니요 순종해야할 아들이요 이제 우리는 거짓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진리를 쫓아 살아야할 사람들이라고 깊이 다짐하면서 우리를 새롭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드리는 마음으로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굳건히 묶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줄 그 은혜의 줄, 그 진리의 밧줄로 우리를 주님 앞에 묶고 진리에 의해서 주장 받고 진리에 의해서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보배 피를 흘려주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는 우리에게 피차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 이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당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오신 생애를 역시 부당한 죽음으로 마무리하신 이유는 우리를 그 피로 구속해 주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이 죽으심으로 구원받은 우리와 같은 많은 열매를 맺으시기 위함 이였습니다. 주님에게는 십자가를 지시는 것조차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었고 고통 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 이셨지만 동시에 참 사랑이셨기 때문에 스스로 신성을 인성에 감추시고 그렇게 연약한 육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은 이제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스스로 취하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에게 있어서도 죽음은 두려운 것이었고 더욱이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한 번도 경험해 본적이 없는 버림받음을 경험하셔야 한다는 사실, 한번도 그래 본적이 없는 아버지의 철저한 진노와 철저한 버림받음에 그 진노 아래 놓여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겟세마네 동안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조차 잠들었을 때 하늘을 우러러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버지 한번도 관계가 단절되어 본적이 없고 버림받아 본적도 없고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 경험해 본적도 없으신 그 예수 그리스도가 그 거룩한 아버지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제게서 옮겨 주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간곡히 기도하신 것을 보더라도 그 죽음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가장 진한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잠언에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사형 당하는 사형수들에게는 이 신 포도주를 먹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스펀지 같은 것에다 이 신 포도주를 묻혀서 갈대에 끼어 높이 들어 예수님의 입에 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잠시 맛보시고 그것이 통증을 멎게 하기 위한 진통제용 포도주란 사실을 깨닫고는 그 포도주를 거절하셨습니다. 당신에게 맡겨진 그 고난을 모두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무엇 때문 이였습니까? 예수님이 무슨 소망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 앞에 저주를 받으시고 그 끔직한 고난을 한 몸에 홀로 짊어졌습니까? 주님에게 무슨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물론 예수님은 당신이 그렇게 죽고 나면 이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이 영광의 부활로 바뀔 것을 알았습니다. 잠시 후에 맛보게될 영광이 지금 맛보고 있는 구차한 죽음과 비교될 수 없는 것도 알았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나면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를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만물로 그분의 발 앞에 무릎을 꿇어 주라 시인하게 하시는 영광을 주실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에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게 만들었던 유일한 이유일 것 같으면 예수님의 죽음은 영웅주의 적인 사고방식이 빚어낸 죽음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실은 주님이 그 모든 것을 믿으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도 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치욕스러운 고난을 감당하게 하신 것은 우리를 향한 사랑 그것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님은 당신 한 분이 진노를 당하시고 당신 한 알이 밀 알로 썩어져서 우리와 같이 하나님 앞에 형벌 받을 죄인들을 그 십자가로 구속해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 만드시는 그것이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회복하며 사는 그것이 주님에게는 십자가 지시는 이유였고 그것이 곧 우리를 향한 사랑에서 출발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의 생에는 바로 주님의 죽음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명백히 보여주는 생애였습니다. 어제 우리는 성경을 토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바로 우리를 위함 때문이라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렇게 소중하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렇게 존귀하고 귀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고 아깝다 하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방종하고 거만하게 살아가서 재 멋대로 살기 좋아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인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아깝다거나 혹은 당신의 죽음이 너무 손해 난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인생을 다 살고 주님을 믿어 봐야할 기회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모진 고난과 버림받음을 당하셨다는 이유 때문에 주님이 나이 많이 든 성도들을 구원하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남녀노소 죄인이나 의인이나 많이 아는 자나 아는 것이 없는 자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십자가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유일한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뒤에 우리를 향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십자가를 경험한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이 역사하고 있는 곳에는 거룩한 성도들의 불붙는 사랑이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 한 사람이 아니라 내 지체와 내 형제 내 삶의 모두를 위해서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고난 당한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한 형제, 한 연약한 지체가 모두 하나님 앞에 나처럼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각성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사랑을 바로 알고 경험하는 동안 그들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이나를 구속하고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한다는 사실을 깊이 알고 있기 때문에 같은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와 지체들을 향해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고 피차 뜨겁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정결하게 지키는 비결입니다. 미움과 시기와 분쟁과 사랑 없는 포악 함들이 얼마나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고 우리의 영혼을 더럽게 만드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정결한 사랑을 잃어버리면 정결한 마음과 심령도 함께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지고 그분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한 사랑을 입었고 그래서 우리가 그 사랑 때문에 이제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그리고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주께서 부르시는 부름을 따라 만나는 지체들을 함께 성도의 기업을 받을 자들로 알고 존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아직도 이 사랑에 울타리에 들어오지 못한 우리밖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의 영혼들을 위해서 우리의 남은 인생을 주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품고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을 안 우리들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경회는 끝나고 이제 우리는 다시 평상적인 신앙생활과 교회 생활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듣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깨닫고 하나님 앞에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에게는 그 하나님의 말씀 데로 살아야할 거룩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 데로 살고 그 뜻대로 살아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이 인생이 주님 바라보실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저 인생을 거지고 구원해 주었더니 정말 네가 나를 이렇게 영화롭게 하는구나 하고 칭찬 받는 그런 그리스도 예수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와 거룩한 삶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