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경험하라
(1999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유월절과 십자가(마26:2) 1999.3.29 십자가사경회(저녁) 1
2. 성령과 보혈의 능력(요일5:8) 1999.3.30 십자가사경회(저녁) 15
3. 믿음과 보혈의 능력(롬3:25上) 1999.3.31 십자가사경회(저녁) 29
4. 보혈의 능력 아래 살아가는 길(롬3:25上) 1999.4.1 십자가사경회(저녁) 44
5. 죄사함과 헌신(레5:8-10) 1999.4.2 십자가사경회(저녁) 57
1. 유월절과 십자가
“너희의 아는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마26:2)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무기력한 신앙생활의 중심에는 분명히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또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을 알아도 그 뜻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이 무기력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숙명처럼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이 어두운 세상에서 안 밖으로 에워싸인 수많은 대적들과 다투어서 이기고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한 두 가지 뛰어난 방법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의 이치가 그러하듯이 중요한 것이 있고, 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이 갖추어지면 덜 중요한 것은 좀 결핍되어도 이길 수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이 결핍되고 나면 덜 중요한 것을 많이 갖추었어도 우리의 싸움은 항상 실패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그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성령과 물과 피는 하나라고 요한일서에서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가 물과 피 그리고 성령이 하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히 성령님께서 그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혈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신다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경험하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십자를 진심으로 경험하게 해 주시는 분은 우리자신도 아니고 설교자도 아니고 성령하나님 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 집회 기간동안에 내내 주님의 성령이 오셔서 말씀을 듣는 가운데 나에게 그 십자가의 그 피묻은 복음을 경험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침 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이 집회에 참석 하시고 또 말씀을 들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기록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예수님의 생애 말기에 주어진 교훈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는 말세의 교훈이라 해서 마지막 때가 되면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 어떤 일들을 당하게 될 것인지를 예고 적으로 다 말씀하신 후에 그리고 이제 비로소 25장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틀후면 유월절이라” 그때에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것이라고 하는 예언이 등장하는 장면을 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유월절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그림처럼 묶고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여기서 나오는 가장 중요한 유월절이라는 그림을 먼저 보고 그리고 그 십자가라는 그림을 보는 것이 정확하리라 생각됩니다.
흔히들 구약은 신약의 뿌리라고들 말하고 또 신약은 구약의 뿌리에서 솟아 나온 나무의 열매라고도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구약은 그림자요 신약은 신체라고도 말합니다. 요즘 말로 말하자면 구약은 영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 영화를 드려다 볼 때에 구약은 배우가 나오는 화면이고 밑에 써있는 자막은 신약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분명합니다. 그래서 구약을 보면서도 그 그림을 보면서도 우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잘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자막이 확실히 찍히게 되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림에 도움을 받아 글의 내용을 연상하게 되고 글의 도움을 받아서 그림을 정확히 이해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과 구약은 우리에게 있어서 때 놓을 수 없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기 전에 십자가를 이 구약에서는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지를 그림과 같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이나 지내다가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를 받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자가 되기 위해서 그들에게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해방하는 장면을 여러분 출애굽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그 애굽의 왕 바로는 죽어도 이 귀한 노동력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10가지의 놀라운 재앙이 애굽 땅에 일어나는 것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중에서 이 유월절이라고 하는 것은 마지막 10번째 재앙이 있던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 재앙에서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개시를 받아서 지킨 절기가 되어버린 그 한 행사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마지막 10번째의 재앙은 바로의 자식으로부터 짐승의 초태생에 이르기까지 애굽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들을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두시는 놀라운 죽음의 역사였습니다. 심판의 역사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맨 처음에 재앙이 일어날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백성들이 함께 겪었지만 몇 번 재앙이 지난 후에 그 중간 지점에 와서는 그 재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미치지 않고 애굽에만 미쳤습니다. 그러나 후에 와서는 이제 10번째 재앙에 와서는 원칙적으로 이 재앙이 이스라엘과 애굽을 막론하고 모든 가정에 다 임하여야 하는 재앙이어야 했습니다.
죽음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신 말씀에 의하면 처음 난 것들은 모두 죽는 다는 것입니다. 물론 애굽에 있는 처음 난 것들을 모두 치심으로 하나님이 이제 이 애굽에서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이시며 참 여호와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 주심으로 애굽인들의 신앙을 무력화시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부흥을 가져 오셔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이제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게 하시기 위한 한 섭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이 명령하시는 대로 순종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 명령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은 유월절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 모두 순종했고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죽음을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들도 역시 죽었을 것이라는 이 예측은 피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유월절이라는 말 중에서 유월이라는 그 말 자체가 “넘어간다” 그런 뜻입니다. 반드시 그곳을 거쳐 가야되는데 그 피를 보고 넘어 간 곳 그래서 유월이었고 그 유월을 절기로 했기 때문에 유월절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유월절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가장 커다란 개념은 무시무시한 공포입니다.
(예화) 광주 민주화 운동 때의 공포
무시무시한 공포가 에워 쌓습니다. 더군다나 10번째 이 재앙이 있기 전에 9번째 재앙은 재앙이라 하기에는 어려운 그러한 어두움이었습니다. 캄캄한 어두움이 두루 덮쳤습니다. 그 어두움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애굽 온 천지를 어둡게만 하였지만 그러나 애굽사람들에게는 아무소리도 없고 들리는 음성도 없고 그리고 무슨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캄캄한 어두움 속의 침묵이야말로 무언가 다음에는 어마어마하게 불길한 일이 일어날 전조로 이해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9번째 재앙에서도 이들은 겁에 질릴 때로 질린 사람들 이였습니다. 그리고 10번째 재앙도 다른 재앙과 마찬가지로 경고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를 통해서 바로에게 경고되었고 분명히 바로와 그 측근들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 지었던 그러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죽음이 찾아 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미 처음 난 것이 죽으리라 하는 그러한 예고가 들려오고 캄캄한 어두움과 함께 시간이 흘러가고 있을 때 그들의 두려움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리고 그 두려움의 순간이 지났는데 언제 도대체 몇 시에 이 처음 난 것들이 죽는다는 것인지 예고되지는 않았습니다. 예고되지 않은 가운데 이제 커다란 두려움 속에 싸여있었고 결국은 예기치 않은 그 때에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예측 할 수 없는 그때에 그 시간에 약속대로 처음 난 모든 것이 죽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큰아들을 죽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짐승 중에 처음 난 것의 죽음을 보아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그 아버지가 맏아들 이였으면 할아버지 앞에서 그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집집마다 죽지 않은 사람이 없는 엄청난 슬픈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또 더 무서웠던 것은 이것이 마지막 재앙이라는 사실까지는 몰랐을 가능성이 더 많기 때문에 이제 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커다란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삼천 오 백 년 전의 이야기 지만은 그러나 우리는 글로 시간 여행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용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애굽의 그 커다란 나라에서 방방곡곡의 모든 고을에 장의사도 필요 없을 정도로 집집마다 자기의 집의 시신들을 하나 혹은 둘 혹은 더 많이 치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호곡하는 소리가 애굽의 온 땅에 두루 울러 퍼지고 모든 나라 백성들이 사랑하는 혈육과 그리고 자기의 재산을 잃은 큰 슬픔에 잠겨서 왕국으로부터 천한 종들의 집안에 이르기까지 아비귀한의 울음소리가 가득한 그 땅을 한번 생각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처음 난 어린아이들과 초 태생들이 즐비한 시체로 누워 있습니다. 여러분 이 무수한 시체들의 그림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모르긴 몰라도 인구의 최소한 10%는 죽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그 속에서 우리들이 분명히 잃어야될 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는 거기서 읽어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거역하고 당신의 백성들을 놓지 아니하는 애굽의 그 많은 나라의 백성들을 향해서 진노하셨고 그 진노는 결국 죄에 대한 진노였습니다. 그래서 그 애굽에 있는 백성들 가운데 어마어마한 숫자를 한날 한시에 하나님께서 죽음으로 쓸어 넣으셨던 사실을 우리들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사건 이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지만 그러나 바로를 향하여 경고하던 모세의 경고를 무시한 바로와 그 많은 백성들이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끔직한 죽음의 재앙을 당하여야 했던 것처럼 지금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십자가가 우리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말하는 진실한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는 결국은 애굽에서 경험했던 그 끔직한 죽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죽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은 교만할 이유가 없고 이 세상 사람들은 당장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가지 않는다고 해서 자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만큼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는 것은 마치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가 이 땅에 좀더 살아 있도록 만드셨고, 기필코는 죽고야 말도록 만드셨던 것처럼 심판이 잠시 연기되고 있을 뿐이지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이 거듭된 복음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일이 죄를 향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일이시기 때문에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월절을 통해서 이 유월절이 죽음의 심판을 넘어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축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축복만 볼 것이 아니라 그 경고를 받아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죽어갔던 수많은 애굽 백성들의 시체 속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을 보아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게 끔찍한 심판을 당하였지만 대조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유월절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인방에 발랐습니다. 집집마다 그 일을 행했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최소한 300만 명은 되었을 텐데 만약에 10명씩 한 가정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약 30만 호 되는 집이었을 텐데 염소나 양이 그 문지방에서 30만 마리 이상 죽어간 것을 우리들은 보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양이 어마어마한 염소가 어마어마한 수의 유월절 양으로 죽어갔습니다.
한번 이쪽 동네와 이쪽 동네를 잘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쪽동네에는 피 흘리고 죽은 처음 태생들의 끔찍한 시체가 가득하고 사람의 피 냄새가 가득합니다. 이쪽 동네는 문지방에서 피 흘리고 죽어간 어린양들의 시체가 즐비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한 것이었습니다. 애굽사람들을 향해서 특별히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모두에게 임하는 죽음의 심판 이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서 죽어야할 사람들이 죽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이스라엘 백성들에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유월절 어린양 이였습니다.
그렇게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 백성들은 어느 한 순간도 애굽사람보다 우월감을 느끼거나 자부심을 느낄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끌려온 노예와 다름없는 종들로서 애굽의 온갖 천한 일에 종사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사람들이 손대기도 싫어하는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노동과 더러운 일들에 종사하면서 짐승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애굽사람들은 지배국의 국민답게 그들을 부리고 그들 위에 군림하면서 살았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자는 것과 생활하는 것과 그들이 누리는 문화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현격한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제는 오직 하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끔찍한 죽음 속에서 죽어가야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어린양이 대신 죽어 구원 얻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안목은 세상적 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을 가리켜서 VIP라고 부릅니다. 매우 중요한 사람입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잽니까? 몸무게나 배 둘레를 가지고 재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력, 명예, 재능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누가 중요한 사람들인지를 재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VIP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중요한 사람들은 애굽 사람들 속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부의 목숨은 바로의 궁중에 있는 왕자 한 명의 목숨보다도 더 하찮은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에서 중요한 인물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지 죽음을 면하고 어떻게 해야지만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해야 할지 모르는 그 사람들이 세사에서 아무리 중요한 인물이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마 중요한 그 사람들은 먹기도 잘 먹고 편안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피둥피둥 살찐 모습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며 도살장의 돼지처럼 비명을 지르며 피를 흘리고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진 재물 없고 자기의 몸뚱이도 자기의 것이 아니였지만 그들에게는 어린양을 아는 놀라운 비밀이 허락 됐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이 세상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예화) 초호와 매션과 같은 돼지우리에서 사는 돼지도 결국은 죽는다는 비유
이 세상에서 복잡하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인생은 오직 두 길 밖에는 없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며 살다가 죽어 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고난 없이 호의 호식하고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솔직한 인간의 심정으로 보면은 거렁뱅이처럼 집도 없이, 먹을 것도 없이 도라 다니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이 예수 믿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해 보지만 커다란 외제차에 배 내놓고 비서까지 거느리고, 강아지까지 데리고 다니는 그러한 잘 먹은 사람들을 보면은 불쌍한 생각이 들지 않을때가 더 많지요. 저 사람은 아까 본 사람보다는 덜 불행할지 모른다. 그럽니다.
돼지로 비유하자면 아까 그 사람은 후진 돼지우리에서 사육 받는 돼지이고, 그 좋은 차 타고 다니는 사람은 아까 말한 것처럼 그렇게 깨끗한 돼지우리에서 클래식 음악 들으면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운명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말입니니다.
(예화) 목사님이 어렸을 적 보신 돼지의 마지막 죽음의 모습을 회상
그날을 위해서 돼지도 역시 사육을 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오늘 이 설교자의 이 비유를 야비하다고 욕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든 이 비유보다도 더 생생하게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비유는 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이 세상에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이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사람들 영원의 깊은 괴로움 그것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영원의 깊은 몸부림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영원의 감각이 모두 마비되어 버리고 하나님을 등지고 그분을 대항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번영하는 가운데 잘 사는 사람들은 죽을 날들을 위해서 예비된 이성 없이 태어난 짐승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죽어간 그 수많은 애굽 사람들의 시체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복음 진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스폰지와 같습니다. 물을 먹으면 어마어마하게 커 보이지만 그러나 다 욱여 짜고 한줌에 쥐면 딱 한줌밖에는 안됩니다. 그 한줌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참된 진실입니다. 그 진실은 무엇입니까? 당신을 어디를 향해 가고있습니까? 하는 이러한 질문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인생의 갈 길은 매우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리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은혜가 있지만은 그러나 하나님을 거슬리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항하며 죄 가운데 살던 백성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지옥의 심판을 예비 하셨다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간 그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지방에 피 흘리고 죽어간 그 수십만의 어린양을 보면서 우리는 실재로 사람이 죽어간 애굽 사람들의 마을과 선명한 대조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이스라엘 문지방에서 누군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어야했을 그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죽어간 바로 그 불쌍한 어린양이 바라본 그림의 실체가 누구였었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어린양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 또 스스로 죽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틀림없이 생각했습니다. 이 양은 아무 죄가 없다는 사실과 이 양이 이렇게 죽음으로 우리 중 누가 산 다는 사실과 이렇게 짐승이 죽어 가는 것처럼 먼 후일에는 누군가 여자의 후손이 와서 이 양처럼 죽어 갈 것이며 그 죽음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시 받는 구원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보는 믿음으로 그들은 구원을 얻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유월절을 말씀 하셨을 때에 예수님과 제자들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 그 당시에도 지켜지고 있던 절기인 이 유월절의 그림이 선명하게 떠올랐을 것입니다.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은 그 어린양이 바로 여기에서 우리에게 말세에 관한 교훈을 가르쳐 주시고 구속의 비밀과 자신이 받아야할 고난을 예고하시는 바로 그 분이라는 사실을 몰랐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셨으니 그분의 마음은 어떠하셨겠습니까? 바로 그날에 온 땅에 하나님의 심판의 죽음의 그림자가 온 땅을 두루 덮어서 이스라엘과 애굽 온 땅에 처음난 초 태생들을 쳐서 온 땅에 호곡하는 그 저주의 죽음이 있도록 만들 수밖에 없는 바로 그 때에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피 흘리고 죽어갔던 수많은 죄 없는 그 어린양 그것이 바로 당신을 바라보고 이루어 졌다는 사실을 깊이 예수님 자신은 느낄 수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은 어린양 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에 처음 들어서시면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처음 받으실 때에 그는 영안이 열린 사람이었기 때문에 초라한 모습으로 세례를 받기 위해 걸어오시는 한사람의 유대인의 랍비처럼 보였지만은 그는 즉시 그분이 예수시라는 것과,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선포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잠시후면은 잡혀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당신의 공생에의 마지막 지점을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그분이 왜 오셨습니까? 그분이 왜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우리들이 살고있는 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까? 그분이 왜 천사들의 경배가 있고 성도들의 찬양소리가 있는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물론 그분의 생에는 병든 자를 고치시는 생애였고, 복음을 가르치시는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주린 자들을 먹이시는 생애였고, 소외 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신 그러한 생애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섬김은 단지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바로 수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고 죽어간 그 문지방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한 어린양의 실체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목숨을 우리를 위해 재물로 바치셔서 이번에는 양을 죽여서 이스라엘이 아니라, 자기를 죽여서 온 세상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비참한 고난은 고난 주간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성탄절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철없는 사람들은 예수 이 세상에 오심을 기뻐 찬송하지만 좀더 깊이 묵상해 보고 나면 우리는 역시 주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 성탄절에 우리의 구원을 인하여서는 하나님 앞에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고 아기 예수로 오신 그분을 경배 하지만 그러나 그분을 향해서는 이렇게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것이 피 어린 고난을 예고하는 서막 이였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마냥 기뻐하던 우리의 입을 잠시 다물고 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왜 그분께서 이 세상에 내려 오셔야 했는지를 생각해 보면서 우리는 우리자신의 소망 없는 이 죄인의 상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사신 그 생애는 정말 맨발로 가시밭길을 걸어 간 것과 같은 생애였습니다. 주님은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기 예수를 재물로 받지 않으시고 자기의 그 아들이 이 세상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성숙해 지셨을 때 그리고 이 성숙한 상태에서 자기의 이 세상에 내려온 것과 죽음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리고 자기가 이렇게 죽으심으로 우리에게는 어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주어졌는지를 모두 말씀하실 수 있도록 이 세상에 살려 두셨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흘리는 그 아들의 보혈과 그 살점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 오셨지만 주님께서는 33년이라는 생애동안 순결과 거룩으로 자신을 준비하셨고 연약한 육신의 옷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지만 죄 없는 생애를 사시면서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워 어떻게 하면 온 전한 하나님의 재물이 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시면서 주께서 자기 위해 우리들의 죄로 말미암는 죄를 덮어씌우시고 그 위에 저주의 심판의 칼을 내리 꽂으실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겸허하게 자신을 준비하시며 최상의 재물이 되기 위한 33년의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신앙심이 돈독했던 백성들은 틀림없이 하나님 앞에 제사드릴 양을 구하기 위해서 아마 그 양들 중 아무 것이나 택하는 대신 흠 없는 것이 어떤 것일까, 다리를 절지 않고 정말 순전한 것이 어느 것일까, 처음 난 가장 좋은 것이 어느 것일까 그러면서도 털에 때 하나 묻지 않은 순결한 어린양이 어느 것일까 하는 것을 생각하며 받쳤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이 대 제사장이 되어서 당신 자신의 몸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 제사를 드리는 상황 이였기 때문에 스스로 대 제사장인 동시에 스스로 재물이 되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제사장으로서는 가장 정성스러운 제사를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영원한 사이를 위해서 드리고 싶어 하셨을 것이며 제물로 서는 자신을 가장 순결하고 깨끗하게 준비하여 주께서 자기의 육체에 진노를 쏟아 부으셔서 깨뜨리시는 그 날을 기대하며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고 더 온전하게 되시고 가난과 시련 속에 사시면서도 순결한 생애를 사시면서 마음과 몸과 영혼의 깨끗함을 보전하시어서 결국은 흠 있는 우리 모두의 죄를 속하시기 위한 흠 없는 제물이 되시기에 성공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예고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유월절은 이미 일어난 일이었고 십자가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이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후에 일어날 그 일은 유월절 후에 일어난 일과 꼭 같은 것이었습니다. 유월절에는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어떻게 그 죽음 가운데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 미리 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지만 그 지식이 없었던 사람들은 이제 죽어 가는 비참함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이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똑같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그렇게 죄 없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 가를 깨달은 사람들은 믿고 구원을 얻지만 그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고 그의 사랑을 받아 드리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똑같이 애굽의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잠시 하나님의 은혜로 연기된 은혜로 살다가 어느 날 어느 순간에는 비참하게 도륙 당하는 짐승처럼 죽어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십자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는 똑 같이 한 편으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그 끔찍한 진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흠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고난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일류가 역사상 만들어 놓은 죄인을 죽이는 방법 가운데 가장 잔인한 방법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이 십자가의 사형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숨이 붙어있는 동안은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을 느끼게 하고 그 시간을 최대한, 체력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최대한 그 시간을 끌다. 그래서 시간 적으로도 가장 많은 고통을, 양적으로도 가장 끔찍한 고통을 안겨 주다가 그 고통 속에서 죽게 한다는 것이 이 십자가 형벌의 목표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십자가 형벌에 대해서 깊이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형벌은 로마 사람들이 야만적인 시절에 만들어 놓은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십자가가 있었는데 가장 흔한 십자가는 T자형 십자가입니다. 세로 목을 세우고 가로 목에다가 사람을 매달아서 지금으로 말하자면 레일에 박힌 못과 같은 똑같은 그런 못으로 손바닥에다 박고 그리고 발에다가도 박고 해서 높이 매다는 것입니다. 가운데 손바닥에 박으니 시신이 허공에 매달려 있으니까 무거워 계속 내려오는 겁니다. 그러면서 손가락이 찔려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물론 그 죄수는 살아있지요. 그리고 그렇게 피를 흘릴 때 인간에게는 아주 극심한 출혈이 오고 그 출혈이 올 때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두통이 온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뜨거운 태양 볕 아래서 피 흘리며 죽어 가면서 고통으로 말미암아서 혼절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이 나가고, 정신이 다시 들어오고 기록에 보면은 어떤 사람들은 얼마나 목숨이 질긴지 3일 동안을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데 죽지 않은 사람도 나옵니다. 예수님은 6시간만에 돌아가셨지요.
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하시고 죄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해 주시는 메신저가 되셨는데 왜 죽음 중에서도 그런 끔찍한 죽음을 당하셔야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십자가의 죽음에 고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우리들이 깨닫는 것은 이 십자가가 사랑의 십자가가 아니라 저주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먼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것과 같은 사랑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이 십자가는 저주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 그 당시에 수많은 십자가가 있었지만 다른 사람이 매달린 십자가는 우리들이 지금 관심을 갖는 그 십자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다 그곳에 매 달릴만한 죄, 형벌 받아 마땅한 죄 값을 치루기 위해서 그 십자가에서 자기의 죄를 짊어지고 스스로 죽은 사람들 이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함께 매달렸던 좌 우편에 강도와 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 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런 사람들의 고난보다 매우 특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처럼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가 다른 것이 있었는데 그들은 원래 죽기 위해서 태어난 인간에 불과 했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매달리셨지만 그분은 죽으실 수 없는 하나님이셨고, 죽으실 수 없는 생명 그 차체 이셨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그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난의 형상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순결하게 자라서 마음의 소원이라고는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밖에는 없었고, 그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구원받지 못한 우리와 같이 목자 잃은 양 같은 우리들을 찾아 오셔서 구속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밖에는 생각이 없으셨던 그 흠 없는 그분 위해 일류에 모든 죄악을 그 위에 얹으시고 마치 도살장에서 끌려오는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인 그 소를 내려쳐서 단숨에 즉사시켜 버리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순결하고 사랑스러운 그 아들 위에 어마어마한 그 죽음에 바윗돌 같은 것을 던져서 그 아들을 짓이겨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그렇게 짓이겨서 즙내어서 그 보혈로 저와 여러분들 가슴에 발라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몸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주님이 당하신 고난 이 죄인을 위함이니 범죄한 날 위해 주 욕을 보셨네
나 무엇으로서 그 은혜 보답하리까 무한하신 주의 사랑 고맙고도 크셔라
내 평생 사는 동안 주 위해 살리라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아무런 느낌이 없는 사람들은 아직 주님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거나 주님의 십자가 사랑의 감격이 사라진 사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금이나 은으로 만든 십자가 찬란한 빛을 바라는 사람들의 서마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영광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흠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섬기고 사랑하시던 아버지의 심판을 받아서 으깨어져서 돌아가신 자리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그 십자가에서 피 냄새를 맡습니다. 지금도 짖은 선열과 흘러 떨어지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현재적인 고난을 그 십자가에서 봅니다. 그리고 흠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그렇게 죽어가야 했던 것은 바로 우리와 같이 죄 가운데 살다 죄 가운데 멸망 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닫기 전 까지는 누구도 철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다양한 직분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는데 이골이 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것과도 관계가 없이 한 사람의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하나님의 아들로서도 아니라 한 사람의 의인으로서는 더더욱 아니라 한 사람의 죄인으로서 자기의의 모든 신발을 버리고 주께서 자신의 육체를 갈기갈기 찢어 우리를 위해서 아버지의 보좌에 이르기까지 뿌려놓은 그 보혈로 양탄자 깔린 그 질벅이는 보혈 위에 맨발로 서본 사람이 아니면 그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그리스도인 이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생명을 건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었는데 아무 영문도 모르고 흠도 없는 어린양이 늘 즐겨 따르던 주인의 손에 의해서 목이 비틀려 자주 밟고 다니던 그 문지방에서 피 흘려 죽어 가는 광경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의 죄인으로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노라고 하는 가슴을 두드리는 슬픔과 고통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아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메마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외치는 자는 많지만은 생명수는 말라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흐르던 시냇물이 말라서 이제는 먼지밖에 나지 않는 물 없는 하천과 같이 그렇게 다 매 말라 버린 황폐해진 가슴을 가지고는 우리들이 이 어두운 세상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친근하던 자기의 아버지 하나님도 한번도 아들을 배신해 보신 적이 없고 아들 또한 그 아버지를 싫어한 적이 없는 순종하고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그 놀라운 사랑에 관계 속에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흠 없는 자기를 향에서 쏟아 부으시는 그 진노의 채찍과 자기를 죽이려고 내리치시는 그 끔찍한 십자가의 형벌을 한 몸에 모두 감당 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죄 없는 그 분이 그렇게 고난을 당하시고 이 세상에서 낙인찍힌 죄인으로서 자기가 구원하기 위해서 온 백성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면서 죽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 이였습니까? 왜 그분이 하나님께 구하여 열두 영이나 더 되는 천사를 불러내어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기적을 보이시고 엘리야 보다도 위대한 분이시라는 것을 모든 사람의 눈앞에 똑똑히 보여 주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그 사람들을 단 칼에 베어 버릴 수 있는 권세를 갖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왜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같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히 자기를 털 깎이도록 기다리는 양 때와 같이 그렇게 흠 없는 어린양으로써 순순히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고 십자가에서 자기의 옥체를 산산이 짓이기도록 자기를 내어주신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분도 그 고난이 싫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핍박하는 사람들이 다가오면 도망 다니시던 광경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처음에 성경을 대할 때에 저는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뭐 치사하시게 도망가시나.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데 하나는 예수님께서는 언제 죽어야 될지를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에 쓸데없는 고난을 피하셨고 두 번째 솔직한 인간적인 진술은 주님도 아픔을 실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아주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셨습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었을 때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운데 있을 때에는 우리가 싫은 건 주님도 싫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가 분명히 이 세상에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도 아셨지만 주님께서는 아버지에게 다시 한번 구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피할 수 있거든 피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 기도는 우리들을 구원 못 하시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은 살려달라는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 이 백성들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지어야 하지만 자기에게 허락된 이 죽음을 피할 수만 있다만 피할 수 있게 해달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신 그 속에서 우리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또 온전한 인간이신 그분의 인성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견디기 힘든 것은 그분 이였기 때문에 견디기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도 잡수시지 못하면 배고프셨고 오래 걸으시면 지치셨고 목이 마르시면 우물가 아무 곳이나 걸터앉으셔야 했던 인간의 몸을 갖으신 예수님 이셨습니다. 그분이 무엇 때문에 그런 끔찍한 하나님의 진노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경험해 본적이 없는 그 끔찍한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 그리고 그토록 연약함에 둘러싸인 그 육체 위에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끔찍한 진노의 심판을 묵묵히 그대로 감당하시면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찢어 버리셨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열두 제자 가운데는 사도 요한이 유일하게 십자가로 다시 돌아가서 죽음을 지켜 본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은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도 사람들은 그것으로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병정들은 긴 창을 예수님의 옆구리에 넣었다고 했습니다. 틀림없이 그 창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들어간 창이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오른쪽 옆구리를 꿇고 들어간 그 창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뚫고 허파를 파헤치고 마지막에는 심장을 파헤쳐서 물과 피를 모두 흘리게 하였고 그것을 자기가 보았고 자가기 증인이라고 한 이 사도 요한이 보았다고 말한 물과 피가 흐른 그 모든 흔적은 바로 그렇게 해서 쏟아져 나온 물과 피였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흠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보혈을 흘리고 자기의 고결하고 순결한 육체를 산산이 으깨어서 비참한 죽음으로 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 이였습니까? 그분의 입술에는 거짓이 없었고, 그분의 삶은 진실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생애는 악한 무리들을 위해서는 강한 생애를 사셨지만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처지가 되어서 주님밖에는 의지할 때가 없다고 따르는 자기의 많은 양 때를 향해서는 언제나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가진 긍휼에 넘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기적의 떡을 잡수신 적이 없었어도 배고픈 영혼들을 위해서는 기적으로 떡을 만드셨고 자기를 위해서는 그러신 적이 없었어도 고통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향해서는 아낌없이 자기의 시간을 쏟으시고 자신의 건강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그분의 것은 모두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시간도 그분의 건강도 그분이 가지고 있는 능력도 그분의 가슴속에 있던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도 모두 우리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한 자셨지만 가난한 우리를 구원으로 하나님 앞에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가난해지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부요한 분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는 가난한 삶을 사시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그렇게 섬기던 그 하나님 한번도 떨어져 본적이 없고 명령을 어겨 본적이 없는 그 하나님에게 당해본 적이 없는 끔찍한 불같은 진노의 심판을 당하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체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짓이겨지는 고난을 당하시고 그렇게 피 덩어리가 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그런 일을 당하시면서 예수님은 한마디의 항변도 없이 침묵으로 오히려 그 십자에서 자기에게 다가오시는 죽음을 맞이하시고 영문을 모르는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죄인들의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중보의 기도를 하시면서 그 고난을 한 몸에 받으셔야 했던 이유는 무엇 이였습니까? 오직 한 가지 때문 이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그 형벌 받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 이였습니다. 더군다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짊어진 죄인이 어떻게 비참하게 죽어가고 영혼이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과 처절하게 분리되는지를 몸소 경험하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시는 죽음을 넘나드는 혹독한 고난이 계속 될 때 예수님께서는 아마 더 자신의 그 십자가를 더 사랑하고 그 십자가를 온전히 지어야 될 것이라고 생각 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 십자가를 지기를 거절한다면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당하고 있는 내 자신을 짓이기고 있는 이 끔찍한 피의 고난을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당하고 애굽의 그 백성들이 피를 토하고 죽어갔던 것처럼 유월절 어린양들이 칼이 찔려서 문지방에서 죽어간 것처럼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그렇게 죽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마지막 한 순간도 자기의 십자가를 거절하시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십자가를 지고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그런 사랑을 알고있습니까? 지금 이 시간도 주님의 이 사랑이 우리를 향해 계속되고 있지만 우리 가운데 그 사랑에 목매어 흐느끼는 가운데 인생을 살아드린 사람들이 누굽니까? 우리를 위해 부요 하신 분이셨지만 모두 내어 주시고 가난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축복 받은 하나님의 아들 영광 받을 하나님의 어린 양 이셨지만 우리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셨고 멸시와 수치의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만약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고 그분이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어떠한 희생을 지불하셔야 했는지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인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죄인들 살면 살수록 하나님 앞에 진노의 잔을 쌓아갈 수밖에 없는 희망이 없는 인생들을 위해서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두움의 무지 속에서 도살할 양같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죽어 가는 그 끔찍한 멸망의 길을 피하게 하시려고 당신의 몸을 던지어 우리에게 날아오는 주님의 그 끔찍한 심판을 홀로 받으시고 자신이 갈기갈기 으깨어지는 처참한 고난을 당하시고 죽어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할말이 없어지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우리가 아는 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멸시와 욕을 보시고 십자가에서 죽어 가신 것은 바로 나 같은 이 비참한 죄인이 멸망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주님이 대신 지불하신 희생이라는 사실만 우리들은 알고있고 주님이 그렇게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으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아무 공로 없지만 하나님 아버지 품에서 주님과 화해를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만 우리들이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 앞에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그 십자가 앞에서 펑펑 우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으며 쓸모 없는 인간, 쓰레기와 같고 주님의 큰 사랑 입었으면서도 패역하기 그지없는 인생을 살아서 지금도 주님의 가슴에 못 박는 이 소망이 없는 죄인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시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펑펑 우는 십자가의 감격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필요한 것은 그렇게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 가슴이 녹아지는 감격을 경험하고 뺌에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흠치고는 이제는 예수의 사랑에 빚진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그 고난이 너무나 크고 나같이 쓸데없는 죄인을 주님이 구하셨으니 이제 주님의 그 사랑에 대해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그 사랑에 감격해서 이제 우리에게 그 사랑 베푸신 그 분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살다가 죽는 것이 십자가의 참 의미를 아는 하나님의 신자의 도리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고난의 주간에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원하실까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바라실까요?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내가 예수 죽인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 때문에 이렇게 살아있으니 하나님 이제 일생 사는 동안 저의 일생이 이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해 주시옵소서 이런 인생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인생을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령과 보혈의 능력
“증거하는 이는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니라”(요일5:8)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왠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 다운 사람들로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저주를 다 감당하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뤄 놓으신 구원의 길을 증거 하는 것은 우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지시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고 하더라도 결국 구원 얻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믿는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고난받고 죽으신 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촉구하고 있는지를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로도 가르쳐 주어야 하지만 삶으로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이신 지를 많은 사람들에게 진지하고 심각하게 증거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하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결코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이 최고의 섬김에 바르게 헌신하고 우리의 인생이 그리스도가 누구 신지를 증거 하는데 효과적으로 기여하는 그런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구원받은 신자로서의 순종하는 삶 그리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 그리고 매일매일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개시의 빛 아래서 살아가는 삶 이 모든 삶이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기 위한 삶이라고 말씀 드려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처럼 모여서 고난 주간을 기리며 십자가 사경회를 열고 그 곳에서 진리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도 결국은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훌륭한 증언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전해 주는지 요령을 전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로부터 내려오는 그 거룩한 감화와 십자가의 은혜를 받고 그리고 그 놀라운 사람을 깨달은 후에는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고 왜 우리들이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그분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오늘도 이처럼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십자가의 구원의 그늘아래서 살아가는 인생의 참된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몸소 보여주기 위해서 또한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은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이 셋이 하나 이니라”라고 이렇게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엇을 증거 한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는 것이 셋이 있는데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니라 약간은 어려워 보이는 성경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이렇게 이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편으로는 밖에서 우리들에게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해 주는 그러한 놀라운 증거가 필요하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 안에 예수께서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 밖으로 증거하는 이중적인 증거의 삶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니라” 희랍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증거 하는 것이 셋이 있다. 그런데 그 성령과 그 물과 그리고 그 피라 그런데 이 셋은 하나 속으로 있다. 그러면 이제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봄으로써 십자가의 이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 속에 얼마나 결정적인 일들을 하고 있는지 우리들이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여기서 이야기하는 성령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령님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은 세례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은 세례와 함께 시작되는 그리스도인의 새 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피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과 예수의 보혈은 이 세 가지는 각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하나이니라 라고 한 성경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은 하나님에 관해서 증거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 신지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생각나게 하시는 모든 일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지금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회의주의에 가득 찼던 사람들 쓸데없는 이 세상의 사조와 그리고 쓸데없는 이 세상의 헛것들로 가득 찼던 머리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성령께서 오실 때 우리의 이성으로 도저히 믿어지지 않던 것들을 믿어지게 만드는 놀라운 역사가 성령님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제가 청소년 시절에 교회를 떠나고 나서 다시 신앙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가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거듭나지 못한 채 교회를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그리움이 없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책 때문 이였습니다. 그 쓸데없는 책들... 회의주의에 가득 찬 이상한 사상가들의 글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탐독하다 시피 했습니다. 그러면서 동년배들끼리 이야기를 하면은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는 말로서는 그 사람들을 누를 수 있는 사고를 갖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성경 적으로 볼 때에는 아무 쓸 때 없고 그리고 성경의 진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말도 되지 않는 개똥 철학들 이였습니다.
그러한 사고를 많이 하니까 이제는 성경이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때도 성경은 봤어요. 그때도... 담배 한 대 물고, 담배를 성경에다 이렇게 후~ 뿜으면서 봤어요. 성경을 이렇게 보니까 말이지요 그 철학자들이 쓴 이야기들은 아구가 딱딱 맞는데 성경은 순 어거지입니다. 아니 못 보여 주면은 못 보여준다 그러지 안 보고 믿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그러구 말이지. 그리고 또 고난으로부터 인생을 보호해줄 힘이 없으면 없다 그렇게 얘기하면 되지 뭐 고난받는 것이 네게 유익이다...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 예요. 그러니까 성경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하여튼 빠져나가기 위한 구멍들을 다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래서 그 당시에 제일 불쌍해 보이는 사람이 성경을 맹종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성경을 다 믿는 거예요. 믿는 것은 좋은데 다 믿지는 마라! 제 동생이 여기 와 있지만은 예수 잘 믿고 교회 열심히 나가는 애 매일 다락방에 앉혀 놓고 성경이 왜 엉터린지 다 설명해 주었어요. 그래서 교회 못 나가게 나중에 예수 믿고 나서 얼마나 많이 회개했습니다. 다시 전도하느냐고... 그런 거예요. 성경도 안 믿어지는데 성경을 풀어서 이야기하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그게 믿어지겠어요? 그게 믿어지겠습니까. 그 사람 앞에 무릎을 꿇어도 그게 믿어질까 말까 한데 솔직히 예수 믿는 사람 둘 중에 하나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배 나오고 머리 벗겨지고 개기름이 흐르거나 아니면은 그 빼짝 마른 얼굴에 도수 높은 안경 쓰고 따지기 좋아하는... 직장에서 보면 꼭 그 둘 중에 하나 입니다. 그때 저는 배도 안 나오고 머리도 안 벗겨지고 기름도 안 흐른 적이었고 빼작 마르고 도수 높은 안경도 안쓰는....(?) 하여튼 참 역겨웠어요.
그런데 그것이 신기하더라 고요. 그 밤중에 앉아서 공부를 하는데 말이지요. 새벽 시간만 되면은 공부를 끝내놓고 들판에 나가서 기지개를 펴는데 저 끝 들판 한 가운데 교회당이 있었어요. 거기서 줄잡아 당기면서 치는 종 있잖아요. 댕그렁 댕그렁 그러면서 종이 울려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가슴에 와서 닿아요. 결국은 전도하는 사람 없이 내 발로 걸어서 작은 교회에 들어가서 나 이제 신앙생활 하겠노라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참회 기도를 드렸어요. 교회를 떠난 지 한 6년 만입니다. 그러고 가서 이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참 신기한 것이 그 성령님이 오셔서 제 마음을 움직여 주시니까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게 뭐야 못 보여 주면 못 보여 준다 그러지 그런 말씀들이 성령님이 오시고 나니까 아멘 아멘 아멘 이래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 성령님이 하시는 일 가운데 가장 커다란 일은 병을 고치거나 뭐 우리에게 돈벼락을 맞게 하시는 일이 성령님의 주된 일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는 주된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시며 그 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나게 하고 가르쳐 주시는 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님이 어떻게 어셨냐 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가면 너희를 위하여 내가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 그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따라서 그 성령님이 오신 것이기 때문에 그 성령님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 지를 우리들에게 잘 증거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그 교훈을 우리로 하여금 잘 깨닫고 생각 날수 있겠끔 만들어 주시는 일들을 누가 하시냐 하면 성령님이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못 믿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또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러고 또 하나님이신 데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 성경적인 교리를 안 믿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성령을 통해서 강력하게 그 복음이 체험되어 지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으로써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 라는 사실이 그냥 그렇구나 나는 아멘 한다. 이렇게 머리로만 믿어지던 사람들이 성령님이 오시게 되면은 그게 그렇게 마음이 아픈 거예요. 왜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이미 더럽고 추하고 이 어두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내려오셔야 했을까 그거지요. 그러니까 전에는 크리스마스만 되면은 뭐가 뭔지도 모르고 퍼 마시고 말이지 노래하고 춤추던 사람들이 복음의 교리를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그가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니 어떻게 하나님이 그러실 수 있을까? 더욱이 그렇게 비참 하리 만치 낮아지신 그 이유가 바로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는데 하면서 그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강하게 체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세사에 오신 것이 그렇게 감사하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너무 죄송한 거예요. 우리의 조상을 비롯해서 우리라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짖지만 아니하였더라면 우리가 그렇게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할 이유가 없었는데 우리의 죄 때문에 그분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의 몸으로 이 세사에 오셔야 했구나. 그것이 깊이 체험되어 지는 겁니다.
(예화) 어느 한 신학생이 써낸 항의가 실린 2번의 리포트와 “십자가”라는 책을 일고 참 회하며 써낸 3번째 리포트의 이야기를 통해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비유로 든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이러한 성령의 역사 이게 십자가를 경험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거예요. 왜 그렇게 중요한 요소가 되느냐 하면은 말이지요. 우리들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복음의 진리를 공부해도 우리들이 지성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안에 영의 역사가 없으면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갈기갈기 찢으셔서 죽으셨다는 얘기를 수없이 가르쳐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지성적인 복음탐구의 한계예요. 그럼 그건 필요가 없느냐? 아닙니다. 필요가 왜 없어요. 앞에서 뭐라고 말씀하시냐 하면은 “이 진리는 성령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와 성령이 나뉘어지지 않고 여기에서 성령과 물과 피가 하나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우리들이 둘로 나눠 봐야 하는데 하나는 성령과 피의 관계이고 또 하나는 성령과 물의 관계예요.
성령과 피의 관계라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말이지요. 정말 성령은 어느 진리와 맏다을 때에 가장 강력하게 인간을 뒤 바꿔 놓는 역사를 하시냐 하면은 보혈에 관한 진리와 성령이 만날 때 인간을 근본적으로 개조하고 바꾸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교회 역사를 보면은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도 그 성령의 역사가 외부적으로만 많은 사람들의 눈을 현란하게 만들지 사람 자체를 바꾸어서 새 사람으로 만드는 놀라운 역사는 별로 없는 영의 역사가 있어요.
예를 들자면 성령은 한량없이 받았는데 성령을 받았으면은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잖아요. 그렇게 성령을 많이 체험했으면 성경을 좀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예전에 성경을 알았던 것을 성령님이 오셔서 깨닫게 하셨으면 그 성경 진리에 대해서 풍부한 그 지식을 갖게 되야 되잖아요. 안 배운 것이 성령을 통해서 깨달아 지는 것은 힘들지만 배운 것들이 찬란하게 이렇게 우리의 가슴속에 다가오는 생생한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진리가 되야 되잖아요.
(예화) 1.건물을 지을 때 뼈대 위에 콘크리트만 부어 놓은 것 같은 건물도 건물은 될 수 있으나 보기에 혐오감을 준다. 그 곳에다 여러 가지 실내 장식을 한 후에야 비로 써 아늑하고 쓸만한 건물이 되다는 비유
2. 꾸며지지 않은 정원과 꾸민 정원의 비유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 지식 하나 만으로는 우리들이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지식은 그러나 성령이 역사 하실 수 있는 아주 훌륭하고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그 지식 하나만 가지고는 안되고 아주 정확한 지식이 있고 그 위에 그 진리를 성령이 들어서 역사 하실 때에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바뀌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씀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말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아는 사람이 아는 것이 많고 성령을 많이 체험했으면 새 사람 이라 그런 말입니까’ ‘그런데 내가 보니까 입만 열면은 청산 뉴스고 성경에 대해서 알기는 많은 것 같고 또 펄펄 뛰면서 불도 받았는데 인간은 영 아닙디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 답을 여기서 주고 있는 겁니다. 성령과 물과 피니라. 성경이나 또 이 세상 속에는 진리들이 있는데 그 진리가 아주 두드러 지고 성경에 있어서 중심적인 진리가 있는가 하면 약간은 덜 중요한 진리들도 있다 이런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 인간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어 놓고 개조해 놓는 것은 그런 사소하고 덜 중요한 성경의 진리가 아니라 두드러진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 성경에 두드러진 진리.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망가진 죄인들을 불러서 하나님 앞에 고치시는 가장 중요한 진리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앞에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랑 받아 본 적도 없고 한 일이라고는 나쁜 일 밖에 없고 내세에 대한 소망도 없고 심지어는 동물과 같이 생겼기 때문에 아예 죽음에 대한 두려움조차 없는 막대 먹은 인간입니다. 그런 사람 정말 살아가는 것이 짐승과 같고 생각하는 것이 악한 것 밖에 없는 그 사람이 변화되어서 여러분과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제일먼저 그 사람들이 들어야할 이야기가 뭐죠?
평생에 듣던 말씀 평생에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그런 사람 앉혀놓고 “옛날에 옛날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때 율법이라는 것이 있었거든 근데 그 율법이라는 데 보면 소가 어디를 걸어 가다가 사람을 받으면 죽였데” 그런 이야기도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니까 진리는 진리지요. 그런 이야기를 잔득 가르쳐 주어봐야 그 사람의 인생이 바뀌지 않는다고 심지어는 성령이 역사 하셔도 잘 안 바뀐다고요. 성령이 역사 하실 때 홀로 역사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칼을 가지고 역사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망가진 인간이 고쳐질려면은 어떻게 해요? 뭐 엉망진창으로 살았기 때문에 인간인데도 여기 도깨비처럼 뿔이 났거든요. 그걸로 막 들이 박고 그리고 막 심장에는 이상한 잘못된 것들이 여기 많이 생겨났어요. 그것을 해결하려면은 성령님이 칼을 가지고 역사 하셔야 돼요. 우선 뿔부터 자르고 누구도 못 박게 만들고 그리고 두드려서 눕혀 놓고 그리고 배를 갈라서 하나씩 잘라 놓는 겁니다. 그래서 다 띠어내고 새롭게 치료해서 그것을 고쳐야지만 새사람이 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시대의 교회에 가장 커다란 문제가 뭐예요? 것만 번지르르한 교인들이 문제입니다. 들어와 가지고 교회 와서는 꼭 박쥐같습니다. 교회 와서는 꼭 예수 믿는 사람 같고. 이 세상에 가서는 절대로 예수 안 믿는 사람 같고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란 것을 말하는 것이 도움이 될 때에는 날개를 펴서 박쥐처럼 새가 되고 아닌 것이 도움이 될 때에는 성경책을 얼른 비닐이 봉투 속에다 집어넣고 날개를 감추고 나 쥐 맞어? 그렇단 말이지요.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왜 그런 이중적인 삶을 살수 있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그 사람이 근본적으로 바뀌질 않았기 때문에 그런 식의 이중 인격적인 삶이 가능해 져요. 야비한 삶이 그 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화 안 받았기 때문에 가능해 지는 겁니다. 정말 근본적으로 변화를 받고 나면은 정말 자가가 그 좋던 세상이 정말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죄악된 사상을 방황하다가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그러면서 옛 삶에 대한 뼈저린 후회들이 생겨나는 것도 근본적으로 바뀔 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렇게 근본적으로 변화 안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요? 이 두드러진 십자가의 진리를 가지고 가르쳐서 그 가르침을 성령이 붙들어서 그 사람 내면의 세계를 두들겨 부시고 새로 만드셔야 지만 새 사람이 되고 그래서 그 사람이 예수님이 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신앙에 가장 커다란 문제는 선명한 십자가의 복음 이것에 대한 지식이 너무 없거나 있어도 너무 피상적이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요 경험하지 못한 진리는 우리의 인생을 붙들어 주지 않아요. 경험하지 못한 진리는 우리를 붙들어 주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아 죽어 가면서도 죽기 살기 각오하고 하나님 명령 어기는 거예요. 경험되면은 그럴 수 없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누가 사랑해 달랬나’ 그러지요. ‘하나님이 사랑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살아’ 그러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어떤 객관적인 진리가 있어도 그 삶이 그 진리에 의해서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십자가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아니 그거야 세례 받을 때 다 얘기 한 것이고 지금도 내가 알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죽음이 무엇인지를 내가 깊이 체험하고 그 십자가의 사랑이 가슴에 깊이 저미듯이 나에게 뜨겁게 체험되어 질 때에 내가 비로소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해야지만 그래도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한다 이 얘기죠.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성령과 예수님의 피의 하나됨을 보는 거예요. 먼저. 성령과 피의 하나님을 본다. 무슨 뜻이냐 하면 결국 십자가의 복음. 보혈의 진리가 있는 그곳에 성령이 역사하실 때 우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아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이신 지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성령도 예수님이 누구이신 지를 우리에게 증거하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도 그 보혈이 인간의 많은 피와 같지 않고 어린양 예수의 죄 없는 그 십자가의 피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무얼 하셨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볼 때에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분이 거기서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고 거기서 그분이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바로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그분이 거기서 죄 없으심에도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요. 그렇게 때문에 그 보혈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줘요. 그리고 그 보혈의 진리에 성령이 역사 할 때 이것이 바로 위대한 보혈의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그 보혈을 믿는 사람들이 짐승과 같은 삶을 포기하고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서 새 사람의 길을 걸어가요.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이해될 수 없었던 사람들이 그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서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찾아가게 됩니다. 믿어지지 않던 사람의 마음속에 확신이 생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볼 때에 그 보혈의 능력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그 십자에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 그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대해서 십자에 나타난 하나님의 복음 진리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깨달으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 십자가라고 하는 이 프리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일곱 빛깔 무지개와 같이 찬란하게 우리의 마음속에 다가오는 거예요. 그렇게 때문에 아무리 병 낫고 그리고 축복을 받고 대굴대굴 구르는 불의 체험이 있더라 하더라도 십자가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항상 건조해요. 그리고 십자가의 체험이 없는 사람들의 신앙은 항상 불안해요. 그러니까 자기가 경험한 것보다도 더 강한 어떤 체험이 들어올 때에는 이제껏 까지 자기가 알던 것들을 포기하고 성경도 포기하고 그 체험을 쫓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심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십자가의 체험을 분명히 가지고 있고. 그 십자가의 체험을 통해서 복음 진리가 무엇인지를 몰라도 깨닫는 사람들은 흔들리지가 않아요. 그래서 이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모든 영성에 있어서 그것이 정말 안전한 영성인지를 물어보기 위해서는 그 영성의 중심부에 십자가의 체험이 있는지를 물어보면은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셔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리면서 어두운 세상에 불꽃처럼 살면서 자기를 모두 받쳐서 헌신적인 생애를 살았던 모든 그리스도인 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어요. 그 공통점이 무엇이었냐 하면 십자가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현재적이었다 이거예요. 과거적이 아니라 옛날에 구원받을 때 체험한 그것 말고 그리고 세례 받을 때 체험한 그것 말고 그 십자가의 체험이 날마다 그 십자가의 진리를 대하고 복음의 진리를 성경에서 발견하고 보혈이 무엇인지를 묵상할 때마다 성령이 그 안에 계셔서 그 진리를 통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을 불러일으킬 때 그 사람들이 그것을 능력의 원천으로 삶아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예수를 위해 살고자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그걸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과 그 보혈의 진리는 하나예요. 그래서 이 시간에도 성령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이 땅에 조국 교회에 십자가의 피묻은 복음의 진리가 인간의 생각으로 깎거나 감하지 않고 그리고 보태지 않고 정직하게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가 그대로 선포되어서 사람들에게 보혈이 무엇이고 왜 그 예수 그리스도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며 죽으셔야 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아주 정직한 복음 선포가 이 교회에 가득 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들이 잊지 말고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십자가 복음이 한 교회의 설교의 중심이 되지 않는 교회에서는 한가지 뚜렷한 특징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무어냐 하면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모여도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물론 십자가의 복음만이 성령의 모든 진리는 아니니까 다른 것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조금 씩 바뀔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 사람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바꿔놓고 삶의 목표를 변화 시켜서 자기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위해서 살게 하는 이 놀라운 근본적인 내면의 세계의 본질적인 변화,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피 뭍은 복음과 그 복음을 붙들고 역사 하시는 성령님이 아니시면 인간이 바뀔 수가 없다 이거지요. 바뀔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두 가지를 하나님 앞에 항상 구해야 되요. 그것은 뭐냐 하면 자꾸 새것을 들으려고 하지 말고, (새 것을 들으려다가 망합니다. 우리가) 늘 또 들려주시오. 또 들려주시오. 해야 됩니다. 평생에 듣던 말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 하셨다는 그 놀라운 복음의 말씀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이 허물 많은 인간들을 위해서 자기를 버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복된 구원의 말씀. 우리에게 또 들려주시오. 또 들려주시오. 그래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담긴 진리를 깊이 깨달으려는 마음이 있는 교인들이 있는 교회 그런 교회가 되기를 깊이 사모해야 됩니다. 그리고 또 실재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진리가 우리에게 언제든지 들을 수 있고 고난 주간에 한번만 듣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나와서 우리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 이 보혈의 말씀. 피 묻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그 십자가가 왜 우리의 신앙에 중심이 되었는지를 들려주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한단 말이지요. 그리고 그 위해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 하셔서 사람들이 귀로만 듣던 이 십자가의 복음, 그리고 겨우 가슴에 까지만 살짝 내려갔던 이 십자가의 복음이 어느 날 그 갑갑한 영원의 어두운 세계를 부셔 버리고 찬란한 불빛을 갖은 복음으로 그 영혼의 어두운 구석구석을 비추어서 십자가의 그 빛 아래서 인생을 다시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고 예수님이 누구이신 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서 그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로 변화 시켜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우리들이 구해야 된다 이거지요. 그럴 때 우리의 삶이 정말 예수님이 누구이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우를 구원하시기 위함 이였다는 사실. 그것을 우리들이 증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정말 우리들은 매주가 아니라 매일 매일 이 십자가의 보혈을 묵상하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로 믿음의 연조가 깊어질수록 우리의 마음이 강퍅해 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은 이 십자가 복음에 대한 감격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 찬송 부르면은 눈물이 납니다. 어느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신앙이 좋은 어머님에게 양육을 받고 그리고 그 어머니가 늘 이 아이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어요. 무릎에 놓고 가르치고 잠 잘 때 아이를 찬송가를 불러 주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어요. 이 아이는 자라면서 늘 그 어머니가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쓰고 성경을 보고 또 성경을 펼쳐 놓고는 또 엎드려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다가는 다시 성경을 읽고 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과 아주 친밀한 어머니를 보면서 일생을 살았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나서 성경책 하나가 남았어요. 이 성경책을 보면서 어떤 그림이 떠올랐냐 하면은 그 복음에 감격하는 어머님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신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그 열로 하신 어머님이 심에도 그 손때묻은 성경책을 얼마나 많이 있었겠어요. 예수 세상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일은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많이 읽었겠어요. 그런데 읽을 적마다 ‘예수 세상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신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정말 우리가 금과 은 없고 교회에서 높은 지위 올라가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우릴 존경해 주지 않아도 우리가 이런 노년을 맞았으면 좋겠어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그리스도의 보혈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예수님이 이제 얼마 남지 않는 나의 인생의 길을 다 달려가고 주 앞에 갈 때에 나를 맞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그래서 이 세상 지날 때 세월 지나 갈 때에 정말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시는 이 복음의 진리에 의한 이 감격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되어야지만 우리들이 순결하고 사랑으로 가득 찬 신자가 되어서 예수님이 어떤 하나님이셨는지를 우리의 삶과 말로써 보여줄 수 있단 말이지요.
정말 교회에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의 가장 소중한 것은 돈이나 모이는 사람이나 휼륭한 건물이나 또 지체 높은 사람이 교회에 나오는 그것 그런 것이 자랑이 아닙니다. 옛날의 어느 교회 목사님은 자기 교회 탤런트 누구도 나오고 누구도 나온다고 ... 예수님 만나러 사람들이 안 와도 그 사람을 보러는 많이 온다고 그런 것도 자랑일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희 교회는 탤런트가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교회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 뭐예요.
그것은 천막을 치고 벌판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도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식 왜 예수께서 죄 없으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곳에 내려오셔서 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지를 아는 지식이 있고 그리고 그렇게 구원받은 아이기 때문에 주님의 그 보혈이 묻어있는 그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 그 어린양을 십자가에서 죽이신 그 하나님의 피묻은 그 십자가를 볼 때 내가 아무 할 말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그 처절한 죄인으로서의 자신의 인식 그리고 그런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해의 길을 열어 놓으신 이 화해의 길은 무엇에 의해서도 다시 막힐 수 없고 그리고 우리들이 피 흘리기까지 싸우면서 아들이 십자가에서 이우신 하나님과의 이 아름다운 이 화해를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 살겠습니다. 라고 하는 십자가의 감격이 넘치는 교인들이 있는 교회, 그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겠습니까? 수십 억 짜리 성전을 지어놓고 마른 뼈 같이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는 이리저리 쫓겨다니면서도 이런 복음의 감격이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그런 교회가 정말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교회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그 보혈의 신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 천박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더 깊은 복음의 세계 속으로 우리를 더 풍성한 진리의 숲 속으로 우리를 데려 가셔서 거기서 말로만 듣던 보혈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시고 말로만 듣던 십자가의 성결케 하시는 능력을 경험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우리는 보혈의 관한 지식과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한가지로 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물이 나오거든요. 물과 성령입니다. 물은 세례 받을 때에 사용되는 그 물을 의미했어요, 그래서 이 세례를 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는 것인데 이것을 물로서 죄를 씻는 표시를 해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원래는 물 속에 들어가서 받는 침수였잖아요. 침수여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 상징이니까 그러나 물 속에 들어가는 그것이 죽음을 의미하고 다시 나오는 것이 부활을 의미해요.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또한 죄 씻음을 의미한다는 얘기지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의 깊은 감격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살아가려고 하지 않아요. 세상에서 머리 굴리고 요령 피우던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와서 신앙생활 제대로 하는 사람 많이 못 봤어요. 왜 그 뺀질 뺀질 그러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은 세상에서 샛눈 뜨고 요리 저리 새치기하듯이 그렇게 빠져나가면서 새치기하듯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교묘하게 살던 그런 사람들은 신앙의 세계에 들어와서 하나님 만나고 그 인생이 야곱과 같은 태도가 바뀌어지지 않으면 세상에 서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다 덕을 봤는데 신앙의 세계에서는 생고생하는 겁니다.
신앙의 세계에 와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잘 깨닫고 아멘 하고 하나님의 뜻 데로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고생 안해요. 그런데 뭐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줘요. 그러면은 머리가 나쁘지는 않으니까 조금 이해를 한단 말이지요. 순종하는 것은 별개이지만 딱 보고 머리를 굴려 보는 거예요. 순종하면 내가 덕이 되나 실이 되나 계산을 해 봐요. 그렇게 계산을 할 땐 이미 그 주판을 순종하면 넌 손해다 이렇게 말한다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깨닫는 것이고 머리는 마음껏 깨닫게 내버려두면서 행동은 이제 이 머리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계산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런 식의 삶을 계속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교회 나오고 신앙생활하고 기독교에 상당히 익숙해 저는 가는데 삶 자체가 거룩해 지질 않고 변화되질 않아요.
옛날에는 부적이라도 차고 다니면서 운수대통 해서 잘 살아보겠다는 마음을 갖았는데 이번에는 하나님 덕분에 한번 떠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옛날에는 누구 높은 사람 아부해서 잘 살아 보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빡빡 밀어 주시기를 바라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말 이예요. 자신이 하나님 앞에 깨뜨려 지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계획표대로 공수 물자나 빨리 보내주고 자기가 장단 두드리면 하나님이 춤춰 주시기를 원하는 이런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 삶 자체가 이미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하는 삶과는 거리가 먼 거예요. 그것은 이방의 신상이나 우상들을 섬길 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대이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거룩한 사고방식이 아니라 이거지요. 그러니까 새 삶이 안 나오는 거예요. 새 삶이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또 예수 믿는 사람들 욕은 침 튀면서 잘 해요. 그때 저는 향상 옆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너나 잘 해라 너라 잘해. 너나 잘해... 다른 사람을 막 욕하는데 다른 사람이 자기를 보고 얼마나 욕하는지 그건 몰라요. 정말 자기가 얼마나 복음 전파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지 주체 파악을 못하는 거예요. 그러고 막 얘기하는 거예요. 그 얘기하고 예수 믿는 사람 형편없다고 이야기 할 때는 자기는 그 순간 예수님이 된 것입니다. 착각에 빠지는 것이 무슨 비용이 들겠어요, 그러고 사는 거지요.
가끔 목회를 하다가 보면 그런 경우가 있어요. 우리교회의 교인이 아니었는데 돌고 돌아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 들어왔어요. 그래서 늘 이 사람 너무 비참하구나 어떻게 하다가 저렇게 까지 신앙을 저버리고 타락한 길까지 갔을까 하는 항상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어요. 말로만 듣던 그 사람을 한번 만났어요. 앉자마자 한국교회의 섞은 얘기 막 하는데 내가 자기 얼마나 썩었는지 다 아는데 안경을 벗으면서 대가처럼 얘기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썩고 목사도 썩고 뭐도 썩고 뭐도 썩고...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내가 자기가 얼마나 비참하게 썩어서 지금 그렇게 살아있는 것도 신기할 정도인지를 내가 다 알고있는데.. 인간이 그렇게 새 까먹은 정신이라고요. 자기에 대해서는 뭔가 자랑할 것이 있을 때에는 숨질 때 되도록 안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이고 정말 인간이 형편없는 구석이 있을 때에는 자기가 뭔가를 얘기할 때에는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 그게 인간입니다.
새 삶이 없어요. 우리 인간에 대해서 서로 욕하고 그렇지만은 서로 돌 던지지만 그러나 우리 어디서 정말 새로운 삶을 볼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래요. 여러분 주위에서 주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한번 보세요 놀랍게 아, 정말 그 사람 예수님 믿기 시작하더니 놀랍게 변했어. 나를 추월 할 것 같아. 내가 전도했지만 나는 이제 정말 무릎을 꿇고 그 사람한테 배우고 싶어. 예수 믿고 나더니 정말 놀랍게 변하는구나! 그런 사람들을 늘 볼 수 있어야 되거든요. 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이렇게 말해야 되거든요. 야 거 이상해 그 누구누구 있지? 교회를 3주나 나왔는데 아직도 안 변했데 세상에 포복 졸도할 일이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래야 되거든요. 우리는 안 변한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어쩌다 한 사람이 변하면 야 놀아워 예수 믿은 지 3년밖에 안 되었는데 이제 변화되기 시작한데 야 정말 하나님 살아 계셔. 변화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이야? 그럼 그 사람이지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거야 뭐 원래 안 변하는 변화고. 한 사람이 변한 것이 그 교회가 살아있는 증거나 된다는 듯이.. 얼마나 변화를 보기가 어려우면 얼마나 변화를 보기가 어려우면 그렇게 안 변화는 것이 이상한 것인데 그게 정상적인 것이 됐고 예수님 믿고 복음대로 변화되는 것이 튀는 인생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통탄하리 만치 한심한 상황이냐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교인이 책과 테잎을 통해서 진짜 은혜를 많이 받고 교회 오기 전에 이미 3분의 1쯤 변해 가지고 저희 교회에 등록을 하고 한 3개월 교회 다닌 다음에 저를 만나서 땅을 치며 통탄을 해요. 뭐라고 그러냐 면은 아니 도대체 목사님 이해가 안 간다고 왜 안가냐 그랬더니 어떻게 그 설교를 듣고 아직까지도 그렇게 안 변할 수 있냐는 겁니다. 그러더니 자기도 3분의 1만 변하고 나머지는 절대 안 변하더라고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예요. 예? 그게 결국은 성령이 그 사람을 십자가의 복음으로 본질적으로 바꿔 놓는 역사가 모자라기 때문에 삶이 바뀌지가 않는 거예요. 삶이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은 이 삶과 성령의 은혜가 순행 관계에 있어요. 성령께서 은혜를 주시면 삶이 바뀌고 삶이 순종하는 삶으로 바꿔 나가면 성령이 기뻐하셔서 더 놀라운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이렇게 순행관계로 계속 역사 하거든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주일날 와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받고 아 이제 정말 예배의 감격에 빠졌어. 예수님이 날 사랑해 난 예수님 날 너무나 사랑해! 그러면서 눈물을 펑펑 쏟고 세상에 나아가서 아무렇게나 살다가 다시 돌아와요. 그러면은 그렇게 지난주에 감격하던 사람이 이번 주에는 그 감격이 사라져요.
그런데 예수님의 그런 놀라운 사랑을 깨달았어요. 이제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 일주일동안 하나님께서 내게 깨닫게 해 주신 그 십자가의 사랑을 간직하고 나의 삶에 공을 드리는 거예요. 아무렇게나 막 살았던 삶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거예요. 하나님 이렇게 살아드리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겠습니까? 하면서 삶을 하나님 앞에 새롭고 정성껏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공을 드리고 애를 쓰는 삶을 사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비용이 많이 들고 너무 힘이 드는 것입니다. 전에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찌고 싶을 때 찌고 가고싶을 때 가고 마음대로 막 살았거든요.
짐승처럼 막 살았어요. 후회하던 말든 그건 뭐 나중 문제이고 남이 욕을 하던 말든 막 토해놓고 그러고 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것을 안 기뻐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예요. 말 하고싶어도 참는 거예요. 저 인간이 너무 미워. 전에 같았으면 골목에 끌고 가서 한판 했거든요. 화장실 뒤로 가던지. 나중에 ( ? )한이 있어도 일단 쏟아 놓고 봐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런데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요. 그것을 쏟아져 나오는 데로 내뱉는 것보다는 그것을 참는 것이 수 백 배 힘듭니다. 수 백 배 힘든 거예요. 그냥 다 쏟아 버리고 다 부서 버리고 나면은 나중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건 나중 문제고 마음은 후련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이 짐승이야 짐승. 짐승과 사람의 차이는 뭐예요. 짐승에게는 절제라는 것이 없어요.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짝 짓기 하고 싶으면 하고, 달아 다니고 싶으면 돌아다니고 그게 짐승이 하는 일 이예요. 그러나 인간은 그게 아니잖아요. 절제 있다고 하고 싶은 데로 참아. 그래야 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그러고 자기가 하고 싶은 참고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못하는 사람 이였는데 그런데 예수 믿고 나서 그러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하기 싫어도 해야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은 나 하기 싫어도 때려 죽여도 못해 이거는 것을 아주 자기 자존심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신앙의 세계에서 그런 사람들은 “나 있지 이래봐도 짐승이야!” 이렇게 말하는 것과 똑 같아요. 하기 싫으면 때려 죽여도 못해 그게 뭐 사람입니까. 짐승만도 못해, 짐승은 때리면 그래도 움직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마음에 없고 하기 싫어요. 그런데 먼저 가서 용서를 비는 거예요. 맘에는 없어.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마음 주시기를 바라면서 용서를 비는 거예요.
전도하다 보면은 정말 실감나지요. 같지 않은 것들이 나와 가지고 말이지.. 어디는 가니까 개를 불어 놓더래요. 그런 기가 막힌 일을 당하잖아요. 예수님 때문이 아니면은 그런 일을 당해야할 이유가 우리가 어디에 있어요. 그렇잖아요. 뭐가 못났어요. 단 하나 못난 것이 있다면은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죽어도 믿어지지 않는 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건 내가 못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못났기 때문에 이 훌륭한 가치를 모르니까 그런 대접을 받는 것 아니예요. 그거 하기 싫은 일인데 그걸 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옛날에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은 늘 어른으로만 살아왔기 때문에 진짜 아나 무인이셔요 당신이 딱 앉았으면 말이지요. 진짜 다 호령해요. 그런데 그분 하시는 말씀이 참 재미있어요. 자기는 일 평생 살면서 누구 앞에도 무릎 꿇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왜 자기가 언제나 어른 이였기 때문에 그리고 어른이 아니던 시절에는 어른을 인정을 안 했기 때문에 자기가 어른 이였대요. 막가파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알고 나서 무릎을 꿇는 버릇이 생겼는데 단 오 분도 무릎을 꿇을 이유도 없고 무릎을 꿇을 수 없던 자신 이였는데 그 늙은 노구를 이끌고 무릎을 꿇고 밤새도록 기도하실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신 것입니다. 내가 하기 싫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인데 그것을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새로운 삶의 의무가 생겨 나는 거예요.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 삶을 사니까 너무 힘들고 고달픈 거지요. 그렇지 안아요. 직장생활만 고달픈지 알았는데 전도사 생활은 더 고달프더라고요. 그것도 열린 교회 전도사님들이야 괜찮지만 닫힌 교회 가봐요. 얼마나 힘들어요. 정말 오죽 했으면 심장병이 생겼어요. 전도사 했던 8년 동안.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는 누구에게도 맛보지 못한 그 자존심이 다 구겨지는 것, 짓밟히는 것, 그런 것들을 교회 섬기면서 참 많이 느꼈어요. 여러분들은 전도사님들에게 잘 해야 된다고요. 교회 속에서 정말 이 젊은 교역자들이 기쁨과 보람을 가지고 사역할 수 있으면 그들의 신앙의 인격을 통해서 다음 세대의 교회가 밝아와요. 그것을 막 꼭 방제공장 취직한 것 같더라구요. 죽어도 싫어요. 그런데 어떻게 해요. 사람이 부렸으면 도망가지, 그런데 하나님이 불렸으니까 참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인생이 고난이 너무 많이 그렇게 고난받으면서도 그래도 삶으로서 주님 닮은 구별된 삶을 살다가 주일날 나오면은 감격스럽고 눈물이 흐르는 거예요.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그때 뭘 의지하게 되요? 참 그때 내가 지난 주일날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그 애틋하고 불같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내가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바로 이 교회당 이 자리에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고난받는 그 형상을 묵상하면서 그 피묻은 십자가 붙들고 눈물 흘리면서 통회하고 그 사랑 감당 할 수 없어서 내 몸을 주님 앞에 드린다고 말씀했는데 일주일 동안 자기를 죽이고 막 몸부림치면 살아왔는데 정말 상처와 고통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되는 거예요.
그럴 때 뭘 깨닫는가 하면은 주님의 지난주 받았던 그 십자가의 은혜만으로는 오늘 내가 물로 씻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한번 나는 돈도 없고, 그리고 나는 아무 의가 없으나 그러나 주님께서 오늘 이 시간에도 오셔서 나를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받아주시지 않으면 나는 소망이 없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다시 이를 악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하나님 앞에 그렇게 몸부림치며 살았지 만은 지은 죄를 자복하고 주님이 나에게 나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셨으니 나를 버리지 마시고 다시 고쳐서 사용해 주시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뭐가 밀려 오냐 하면 다시금 십자가의 보혈의 그 능력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정말 그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 그리고 죄를 이기게 하는 그 보혈의 능력이 우리에게 다시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린 거기서 일주일동안 그렇게 분투하면서 공 드려서 주님을 위해서 살았는데도 우리는 그 십자가의 감격을 경험하게 되니까 다시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나를 위해 돌아가시고 지금도 나 같은 죄인에게 그 은혜를 베푸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거기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의 신앙생활을 안하니까 자기가 뭐 조금 하고 나면은 항상 그것이 자기 의가 되는 거예요. 주님이 안 보이면은 나중에 보이는 것은 주님 다음으론 항상 자기, 보좌 우편 좌편 빼 놓고 자기가 보좌 그 바로 앞줄에는 자기가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게 인간 이예요. 그런데 때로는 하나님도 그 보좌에서 내려가시라고 그러고 자기가 그곳에 앉고 싶어 하니까 그것이 더 문제지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이고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인가 하는 것이 안 깨달아 지는데 자기가 한 그 지푸라기 같은 공로 주님을 위해서 섬긴 것, 주님을 위해서 뭐 좀 한 것, 이런 것들이 더 생각 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아요?
그런 것이 생각나니까 그 다음에는 나는 상당히 괜찮은 인간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주님을 의지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을 더 못 느끼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살면서 그렇기 때문에 순종이 없고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을 깨닫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잘 살면 잘 살수록 주님께로부터 더 멀어지는 거예요. 바리세인처럼 한없이 멀어지는 거예요. 이걸 여기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성령과 그 새 삶 그리고 십자가의 그 피 묻은 복음의 진리가 각각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증거 해 주는 거예요. 세례가 예수님이 누구 신지를 증거 해 주고 성령이 증거 하시고 보혈의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를 증거 해 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러한 증거를 받은 우리들이 그러한 이 물과 피와 성령이 삼위일체가 된 그런 삶을 우리들이 신앙생활 속에서 생활해 나갈 때 이번에는 우리가 증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보고 우리의 존재 자체를 보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아니 저 포악하고 개고기 같은 저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변해서 저렇게 온유하고 불쌍한 사람만 보면은 눈물을 글썽거리는 그런 근원이 있는 사람으로 바꿨데? 아 그가 십자가를 경험했데. 우리는 모르지만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 때문에 늘 감동을 받더니 저 사람이 옛날에 그 수전노와 같던 그런 사람이 변해서 나누어주고 베풀고 그리고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으로 바꿨데 그러면서 그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 신지를 수많은 사람들이 증거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믿음과 보혈의 능력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和睦) 제물로 세우셨으니”(롬3:25上)
어제는 우리들이 성령과 새 삶 그리고 성령과 보혈의 능력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령과 보혈의 진리는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그러한 보혈의 진리가 있을 때에 성령이 역사 하셔야 지만 인간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과 또 성령이 그런 사람 속에 역사 하실 때에 새 삶이 가능해 진다 하는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러면 그 놀라운 보혈의 능력을 어떻게 경험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은 그런 보혈의 능력을 경험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있을 수 있지만 그 사람들은 나쁜 나라 사람들이고 좋은 나라 사람들은 다 그런 변화를 받고 싶어합니다. 애들 말로요. 좋은 사람이란 말이 좀 이상하지만은 그래도 뭔가 신앙의 세계에서 합당한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변화를 경험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때에 우리들은 또 누가 장로교인 아니랄까봐 그것이야 하나님의 주권이지. 그럽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능력도 못 받고 사는 건 다 주님 책임이지.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 집에 누워 있지 이곳에 나올 필요도 없습니다. 집에 누워서 TV나 보면서 내가 이렇게 TV나 보는 것도 주님의 주권이지 그러면 됩니다. 죽어라고 뜻을 세우고 기도를 안하면서 내가 이렇게 기도를 안 하는 것도 주님의 주권이지. 그런 주권 타령을 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많이 들어 봤을 겁니다. 주님의 주권. 얼마나 사람을 기죽이는 말입니까? 주님의 주권... 물로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은 주님의 주권에 속해서 그리고 또 보내시는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도 주님의 주권이고 또 걷어 가시는 것도 주님의 주권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한 쪽 면만 보면서 주권 타령만 하면 그것은 주권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 운명을 믿는 신앙입니다. 숙명론입니다.
성경을 볼 때에 공통적으로 봐야 합니다. 주권 하나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성경의 최고 정상봉에 올라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서는 성령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주권도 말하지만 동시에 또 뭘 말씀하시냐 하면은 그 성령 주님에 대해서 약속이 주어질 때마다 항상 뭘 하나님이 요구 하셨냐 하면은 간구 하는 것을 요구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순절 성령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은 주님의 주권입니까? 아닙니까? 주권 이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 주권이 마른하늘에 그냥 내려온 주권이 아니라 간절히 부르짖는 사람들을 통해서 주권이 행사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같이 봐야 합니다.
주님이 분명히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주시기까지 기다리라” 열렬히 기도해라 그러면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일어날거다 그렇게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다리라고 그러니까 야, 예루살렘 떠나지 말래 그래 예루살렘 근처까지 가서 옆에 경계선이지 경계선 깔고 누워서 주님의 주권 이루소서 이렇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라는 말의 의미를 그들은 단순하게 생각하질 않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주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는 주권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내 들이 기도하면 될 것같이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주권을 믿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물론 성령님이 오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오시지 만은 그러나 간절히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그 예수님의 제자들은 우리 이렇게 기도해도 주권에 안 들었으면 안 될꺼야 그리고 초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열렬히 기도하는 것도 다 주님에 대한 주권에 침해야 주실 때 되면은 주시는 거고, 안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지 왜 너희들이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이렇게 열렬히 기도하니 그리고 초치고 왕따 된 사람이 없었다. 이 말씀입니다. 그들이 전혀 기도에 힘쓸 때에는 주권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기도하면 주님이 보내시기로 한 약속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주권을 믿는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것에 대해서는 솔직히 주권에 대해서 더 많이 말씀하시기보다는 주권도 말씀하셨지만 구하라는 말씀을 훨씬 더 많이 하셨습니다. 구할 때 그냥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이 있잖아요. 그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겁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어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가 이런 사실들을 새롭게 깨달았잖아요.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경험해서 우리가 온전히 새로운 사람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있어야 되는데 하나는 정직한 보혈의 진리가 있고 그 진리를 붙들고 역사 하시는 강력한 성령이 있을 때에 그때에 우리들이 근본적으로 변화된다는 얘기를 했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들이 십자가의 진실한 복음을 접하는 것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우리가 찾아 낼 수는 없지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잖아요.
보혈에 대해서 정직하게 설교하는 테이프를 들어도 되고 아니면은 책을 읽어도 되고, 뭐든지 우리가 할 수 있잖아요. 성경을 올바르게 묵상을 해도 좋고 정 안되면은 나보다 복음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가르쳐 달라고 그러면 되잖아요. 그리고 거기에 뭐가? 성령 주시기를..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이에요. 주권 이제, 하나님은 약속 하셨습니다. 구하면 주신다고요. 그런데 구할 때 어떻게 구하냐 하면은 주님 성령이 역사 하실 때 제가 바로 이 십자가의 복음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 복음을 들고 성령이 역사해 주시옵소서. 그러면 그 성령이 나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고 나의 근본적인 가치관과 인생관도 바꿔 놓아서 새 사람 되게 하신다는데 하나님 그렇게 한번 성령님이 그 보혈의 진리로 역사 해 주시옵소서 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는 겁니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는 그런 기도를 해야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구하고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우리가 어제 들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한 걸음 더 구체적으로 나아가서 그러면 그렇게 그 보혈의 능력이 우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고 십자가를 경험할 때 우리 자신이 그렇게 놀랍게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는데 그런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역사 하시는 것이 무엇으로 되느냐? 그것이 기도로 되느냐? 그런데 우리들이 생각하기를 기도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먼저 있습니다. 기도는 나중의 문제이고 기도보다 더 선행되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만히 구원의 경험을 한번 회상해 보면 십자를 경험하고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이렇게 한번 회상을 해보고 우리의 경험을 종합해 보면은 어떠한 결론을 하나 이 끌어 내야 하면은 모든 사람에게 다 획일적이지는 않지만은 십자를 경험하게 해 달라고 열렬히 기도를 했더니 십자를 경험하게 되었다 라고 하는 것도 성립 할 수 있지만 그가 전에 십자를 경험하게 해달라고 열렬히 기도했을 때에는 그는 뭔가 벌써 십자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맛을 본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달라고 매달려서 기도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면은 그렇게 열렬히 기도하고 그 것 없으면 못 살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릴 수가 없다 이 얘기입니다. 그러면 그게 뭐냐? 그게 오늘 성경에서 보면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
그래서 오늘 뭐라고 그랬냐 하면은 “그 보혈을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 제물로 삼으셨으니” 그렇게 말라고 하거든요. 이 비슷한 표현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은 에배소서 2자에 보면은 “너희들이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느니라”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어떻게 주어집니까?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뭐 한 것은 없습니다. 거제 주어집니다. 그게 은혜거든요. 거져 주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와서 하나님 말씀 듣고 주님 영접한 사람들 어제도 있었고 그제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고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물어 봐요. 너 열린교회 가서 십자가 사경회 때 주님 영접했다며? 그럼 구원받았다며? 그럼. 좋아? 정말 좋지. 전에는 내가 어둠에 자식이었는데 바로 1999년 고난주간에 주님 영접하고 이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래 너가 어떻게, 뭘 했더니 주님이 권을 주셨는데 그러고 말할 때 어 내가 거기까지 갔었거든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구원을 주셨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서 돈을 이렇게 꺼내서 가져하며 이렇게 줄 때 나와서 이 돈을 받아 갔어요.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는데 받아 갔다고요. 그 사람이 이걸 받아 가지고 가서 야 너 어떻게 그렇게 큰돈을 얻게 되었니? 말할 때 어 나에게 공로가 있었거든 그런데 내가 거기까지 걸어 나갔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고요. 그것은 자기가 갖은 것이고 얻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론 원인을 있었을 겁니다. 교회까지 갔다고 하던지 전철을 몇 번갈아 타고 왔다고 하던지.. 있지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요. 너 교회 갔는데 어떻게 구원을 얻었니? 그러면은 아무리 자기가 전철을 타고 넘어지고 코가 깨지고 왔더라도 자기가 온 것이 공로가 되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냐면은 하나님의 은혜였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어. 나는 아무 공로가 없는데 주님이 그냥 어느 날 나에게 찾아 오셔서 너 구원받아라 그렇게 불러 주셨어. 친구 셋이 갔는데 애도 안 불러 주시고 애도 안 불러 주시고 나만 구원을 얻게 되었어. 그런 고백이 나오는 거지요.
하나님이 그러한 은혜를 그들에게 주시는데 하나님이 그 하나만을 가지고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역사 하시는 겁니다. 믿음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데 그것을 받는 바가지 비슷한 내미는 손입니다. 내미니까 주어지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공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이구 손 내미는 것이 얼마나 힘든데”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는다구요. 그러니까 이중의 원인을 나타내는 말과 함께 쓰이는 겁니다.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러니까 형벌 받을 수밖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형벌 받아서 이미 죽은 상태로 태어나는 그 인간들이 구원을 얻게 하시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런데 그 은혜는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에게만 역사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그랬는데 그것은 사실은 옳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은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은 끝까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 드리지 않고 회계하고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와 아담과 하와로부터 물려받은 부패성을 인해서 결국은 형벌을 받는데 그 형벌은 예수님이 안 오셨어도 그가 그렇게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종류의 형벌입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모든 죄를 지고 형벌을 받으셨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이 죽음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받아드리고 구원 얻을 사람들의 죄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오셨어도 안 오셨어도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얘깁니다.
믿었더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안 믿은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십자가의 사랑, 사랑 얘기하는데 그것은 구원받은 사람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섭게 나타났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도 그렇게 그 진노 가운데서 죽어가야 했을 사람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했는데 그러한 구원의 은혜를 자기에게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에게는 참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이구나 하고 깊이 깨달은 사람들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러니까 보혈을 인해서 보혈이 기초가 되는 겁니다. 그 보혈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입니다. 그런데 이는 중요한 초점이 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있는 겁니다. 생명에.. 그래서 구약에 보면은 핏 채 먹지 말라는 얘기도 나오지 않습니까? 그 피가 구약에서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 피를 다 흘렸다 라고 하는 말은 무슨 의미를 갖느냐 하면은 다 죽었다. 생명이 끝났다 그런 의미를 갖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피라는 말을 가지고 피 이면에 있는 말을 설명하시고 싶어하시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죽음.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번역을 해 다시 이야기하자면 “너희가 그 예수님의 죽음을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 제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인하여 그분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나씩 더 설명을 해 나가면 무슨 이야기가 됩니까? 이런 이야기가 되는 거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서 죽으신 것이 보혈이라고 할 것 같으면 예수님의 그 죽음, 그 죽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던 거예요.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 죽음이 없었더라고 할 것 같으면 아무리 믿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이 효력이 있고 역사하는 것은 약속이 있을 때에 그 믿음이 하나님께 귀하게 보이는 겁니다. 약속이 있을 때에... 이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신념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예화) 고등 학교 때 이민간 선생님이 떠나시면서 신념을 갖고 살면 자신의 이빨이 나 은 것처럼 무언가 될 것이라고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
성경에서 믿음을 이야기 할 때에는 이런 식으로 자기 암시적인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위탁과 믿음입니다. 병이 나아도 병 자체를 보아서 믿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고쳐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겁니다. 그런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깊이 잘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되는데 그러한 그 믿음이 있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위한 죽으심이 그 기초에 있는 것입니다. 죽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에게 구원의 약속이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약속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믿을 수 없었을거니와 믿으려고 발버둥 쳐서 무언가를 믿었다고 할 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그것이 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한가지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기초가 무엇이냐 하면은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생명적인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죽으심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생명을 다 버리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죽음 그것에 대해서 우리들은 무한한 가치를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믿음도 헛것이고 소망도 헛것이고 사랑도 헛것이고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을 많이 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해서 우리들이 온 마음을 모으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그것이 우리에게 그런 이유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이유를 갖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 고난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쉽게 파악하고 이해 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말씀드렸지 만은 인간이 고안해 낸 형벌 가운데서 가장 악랄한 형벌이었고 또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신 동시에 하나님 이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는 그 죽음이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면 예수님 혼자서 그런 죽음을 죽으신 것은 아니잖아요. 강도들도 그런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말하겠죠? 아까 사람들이야 워낙 나쁜 사람들이니까 다르지 않느냐? 그렇지요. 그런데 선한 뜻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로 말하자면 전태일 같은 사람들입니다. 평화시장에서 그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보면서 분신 자살해서 뛰어 내렸어요. 선한 뜻을 위해서 그렇게 처참하게 예수님과 버금가는 그런 고통을 맛보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을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서 그렇게 깊이 우리들이 생각하고 그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우리들이 많은 묵상을 하고 그 예수께서 죽으신 그 사실들을 기회만 있으면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이 없었으면 또 죽으셨다고 하더라도 그 분이 바로 그분이 아니 셨다면 믿음도 소용없고 피가 흘러도 소용없고 그리고 우리들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우리의 모든 신앙적인 활동의 기초가 날라 가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중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설령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흉악하게 찢겨 돌아가시지 아니하시고 안락사로 돌아가셨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안하게 죽으셨다고 하실지 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죽는 그 과정이 우리에게 중요하게 다가오기보다는 죽으신 그분이 다른 분이 아닌 바로 하나님 이셨다 라는 사실, 하나님이시며 또 여호와의 외아들인 그분이 죽으셨다는 사실. 그것이 엄청난 사건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듣거 난 십자가를 경험한다는 것을 너무 감상적으로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대못에 박혔습니다. 하면서 신파조로 한참 나가면 다 울지요. 10분 안에 다 울게 할 자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정말 참 십자가가 십자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심각한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우리에게 심각한 거예요.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거기에서 죽으셨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나님이 왜 행하셨을까요? 그것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셔야할 이유가 없었는데 하나님이신 그분이 죄인인 인간들이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셔서 우리가 이렇게 갈망하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애원하지도 않는 하나님 없이 얼마든지 잘 살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그리고 고통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 할 줄 모르는 대분분의 인간들로 가득 찬 이 세상에 그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를 보내어서 그 그리스도를 죽게 하신 거예요. 왜? 우리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시기 위해서. 그게 성경은 그 동기 차체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사랑이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필요한 지도 모르고 구원을 갈망하지도 않은 그 영혼들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 고통의 의미도 모르고 거기로부터 구원받고 싶다 라는 소망도 없이 살아가는 그 비참한 인생들을 하나님이 보시면서 불쌍하게 여기시는 그 마음이 바로 사랑 이였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예화) 목사님의 중 고등 시절 때 복장단속으로 걸린 아이들의 편에 서서 선생님과 씨 름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긍휼을 이야기하신다.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죽게 하신 이유가 바로 그 긍휼입니다. 우리는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서 끊어진 체로 살아도 할말이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왜? 다 자기가 한 짓, 그것을 벌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의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마땅했다 이야기입니다. 왜?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범죄한 인류의 후손으로 태어나서 또 그 죄 때문에 자기 속에 있는 죄성이 힘을 입어서 더 범죄하고 그 죄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살아가던 사람들이고 그렇게 죄에 잡혀서 살아간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향해 대항하면서 살아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런 인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다가 마지막에 형벌 받아서 죽어 마땅하다 이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하셨어도 하나님은 비난받으실 것이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전에 그들의 조상이 범죄 했고 그들이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신을 배반하고 하나님께 대항했는지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다가온 것이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죄의 권세에 눌려서 자기도 죄를 좋아하지만 그 권세가 워낙 커서 그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다가 멸망을 받으면서 불구덩이 속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보시면서 그들이 불쌍하다는 마음이 드신 겁니다. 불쌍하다는 마음이 드신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드셨을까 형벌 받아 마땅한 죄인들이 확실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구원을 받게 되었을 때에는 항상 마음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함께 있습니다. 감사하다는 말과 또 한편으로는 이것은 말도 않된다. 뭐가요?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수가 있을까 무엇 하려고 하나님은 이 벌래 만도 못한 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고귀한 당신의 아들을 죽게 하셨을까? 그렇게 그것은 참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는 마음과 또 하나는 참 감사하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구원받고 나니까 어두운 눈이 띄어 지면서 예수님은 죽으셔서는 안되는 분이셨고 내가 바로 죽어야 되는 죄인인데 하는 자각이 생겨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 죽음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거든요. 하나님이 자기의 그 깨끗한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당신의 그 끌어 오르는 진노로 짓이겨 죽으신 겁니다. 자기의 외아들을 그 유월절 어린양이 문 앞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자기의 외아들을 짓이기신 표적입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해 줍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무서움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그런데 그 일을 우리를 위해서 행하셨다는 면에서 볼 때 그것이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자체만을 볼 때에는 그 순결한 자기의 외아들을 짓이겨서 죽여 버리신 그 하나님의 처참한 분노를 보지만 그 피가 우리의 가슴에 발이움 바 되어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니까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 이셨구나. 여러분 이것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은 예수님이 십자에 못 박히실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죄인들을 향해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그렇게 십자가에서 짓이겨 죽게 하셨지만 그러나 한번도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렇게 끌어 오르는 저주로 죽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죽으심에 대해서 후회하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재물로 자기의 외아들을 죽여서 많이 구원받는 백성들의 씨를 볼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제도 그리고 그제도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들이 생에 최초로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살아있는 날 동안 우리가 힘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면 우리가 경험 한 것 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 오시는 날까지 이 아름다운 구원의 역사는 계속 될 것입니다. 그 기초가 무엇이냐 하면은 예수님의 그 보혈입니다. 예수님의 그 죽으심이라 이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이 사건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사건인지를 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분의 죽으심이 없고 그분의 죽으심의 기초인 죄의 용서가 없다면 이 기독교는 모두가 거짓말입니다. 모두가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에 죽으심을 보면서 단지 나 하나의 구원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의 끝없는 기초를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죄로 가득 차고 아무 희망이 없는 이 죄 가운데서 태어나서 살다가 비참하게 죽어도 마땅한 이 인간들을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죽이신 그래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게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사랑을 찬송하는 겁니다.. 여러분도 그 사랑을 아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거든요. 그런데 그러한 은혜가 우리에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되겠다 이겁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거기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보혈의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보혈의 능력을 경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은 무엇이냐 이것만큼 정의 내리기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안 믿어지는 것을 믿사오니 라고 인상을 쓰고 이를 악 무는 것이 믿음이냐? 확실히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아무리 믿사오니 믿사오니 그래도 우리가 못 믿고 있는 것이 주님이 아시잖아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말로해도 속에서는 너만 믿어라 난 못 믿겠다 그러는데 이게 어떻게 믿음으로 화합할 수 있겠어요. 이것은 단순한 심리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어느 택시를 탔더니 택시에 이렇게 써 붙여 있습니다. “여러분 좋은 일이 일어 날 것 같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정말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그런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그럼 믿음이란 뭐냐? 믿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전 인격을 실어서 의지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겁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아주 쉽게 잘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다가 불 뱀에게 물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불 뱀이 뭐냐 두 가지 설이 있는데 뱀의 종류가 셋 빨강 뱀이 여서 불 색깔이었기 때문에 불 뱀이다 그러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그게 아니라 한번 물리면은 몬 몸이 열이 나는 것과 같이 불이 나기 때문에 불 뱀이다 그러는데 어쩌면은 색도 그렇고 생긴 데로 물었을 때에 정말 그렇게 온 몸이 불붙는 것과 같이 열이 났을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 하나는 물리면은 죽는다는 것은 분명 합니다. 물렸습니다. 사람들이 다 죽게 된 겁니다. 퉁퉁 부어 오르면서 죽는 겁니다. 약이 있겠어요 무엇이 있겠어요. 무서워요. 독사한테 물린 것 보면 무섭습니다. 몇 시간만에 온 몸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어 오릅니다. 빨리 주사 안 마지면 죽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주사가 있어요. 뭐가 있어요. 죽는 거지요. 그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 하면 이상한 말씀을 하셔요.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어 가지고 높이 매다는 겁니다.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쳐다보는 것이 하나님에게 무엇이 보탬이 됩니까? 그것을 쳐다보는 것이 하나님에게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또 이스라엘 백성들의 편에서 보면은 주님이 하라고 명령하신 것 예를 들자면 뭐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침을 뱉어서 흙을 발라서 눈에 발라주시면서 실로암에 가서 씻어라. 그랬으면 모르겠는데 이것은 그것도 아니고 너무 싱겁고 맹탕이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더 안쳐다 봤을 겁니다. 뭐 예를 들면 다섯 번을 구르고 네 번을 업드린 다음에... 이렇게 복잡하게 뭔가를 요구했더라면 했을 겁니다. 공식을 복잡하게 만들었으면 뭔가를 했을 겁니다. 그런데 여태까지 들어보지 못한 황당한 말입니다. 이렇게 높이 들면서 ‘여기 쳐다보면 산다’ 그러한 하나님의 명령의 특징이 뭔가 하면 아무 비용도 안 들고 수고도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토끼뜀을 열 번 뛰고 대굴대굴 구른 다음에 흙을 발라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라고 그러면 중풍병자는 못할 것 아닙니까 그러고 팅팅 부운 사람들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건 자체가 뭘 보여 주는가 하면은 인간의 구원하신 것이 사람의 공로와 의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시고 또 설령 하나님이 양보해서 인간의 공로를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마음을 먹으셨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 대목이 복음입니다.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장대에다 구리 뱀을 매달아서 높이 달고 ‘이것을 쳐다보라’ 바라본 사람들은 다 나았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런 생각을 해야 됩니다. “에이씨 그걸 본다구 날려구” 하면서 쳐다본 사람들이 나은 것이 아닙니다. “바보같이 구리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어 난 아파 죽겠는데” 그리고 쳐다본 것이 나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가지고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아주 기가 막히게 요한복음 3장에 연결을 시키시는 겁니다. 당신을 어디에다 비교하시냐 하면은 그 구리 뱀에 비교하시는 겁니다. 장대에 매달려서 높이 구리 뱀에 매달리신 것처럼 인자가 매달려서 높이 들리 울 텐데 그 바라보는 사람들은 낫다 이거지요.
그런데 여기서 기가 막힌 공식이 나오는데 우리가 믿음이란 뭐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건데 그 바라봄의 심정이 어떠해야 되냐 그것은 구약에 있는 성도들에게 물어보면 잘 알아요. 구약에 있는 성도들이 불 뱀에 걸려서 다 부어 가지고 부어 일어날수도 없고 껄덕거리고 죽는 상황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마음으로 그 구리 뱀을 쳐다 보았겠느냐 이겁니다. 성경에는 정확한 기록은 안 나오지만 본 사람이 다 나은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은 신약에서 그 쳐다 본 것을 그냥 보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해석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 사람들은 아마 한결같이 ‘에이씨 진짜 누구 놀려 뭐야 대체’ 그러고 보질 않았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섭리 속에서 아예 안 봤을 겁니다. 섬리 속에서 안 봤을 거고 본 사람들은 그랬을 거예요. “아 난 이 광야에서 가나안도 못 보고 이렇게 죽는 구나” 그 처참한 절망과 두 번째는 희망이 있다면은 저것뿐이구나 왜? 하나님이 약속 하셨으니까 그래서 바라보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래도 막가파는 아니 었어요.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된다고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엉망진창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 이더라도 여러분도 막가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왜? 그렇게 길게 설교를 하는데도 가만히 있잖아요. 기본은 되 있다고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다고요. 그러니까 완전히 자기가 뱀에게 물려서 불붙듯 하면서 죽어 가는 그런 상황에서 그 구리 뱀을 장대에 매달아 높이 들었어요. 그것이 즉시 매단 것이 아니라 충분히 고통을 맛보고 이젠 얼마나 비참하게 이 인생이 끝나는가 아마 그들은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떠날 때에 보았던 하나님의 위대하고 놀라운 능력 그리고 믿으므로 말미암아서 승리를 거둔 놀라운 일들 많은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것들이 역사 하면서 하나님이 하시면 하실 수도 있다 그런 마음이 생겨나면서 내가 이렇게 여기서 몇 시간 후면 죽어 가는데 나의 유일한 희망은 저 약속이다 그러고 그걸 본 거예요. 그때 그 심정이 어떻겠는지 여러분 이해가 갑니까? 삶과 죽음과 인생 모든 것을 그 구리 뱀에다 걸은 거예요. 구리 뱀에다가 걸었다기 보다는 그 구리 뱀을 쳐다보는 거기에다가 걸은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구리뱀을 쳐다본 것이 믿음이라고요. 믿습니다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죄인의 마음속에 반드시 어떤 마음이 일어나냐 하면은 껌 씹으면서 주님 영접하는 사람은 없다고요. 소주병 차고 니나노 부르면서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없다고요. 그런 일은 안 일어나요. 아무리 중생의 작용이 은밀하더라도 그런 식으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화투 치다가 주님 영접하는 일은 안 일어나요. 영접하기 전에 주님께 그런 믿음이 생기기 전에는 반드시 어떤 마음이 생기느냐 하면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진노 아래에 있고 저주를 받았으며 자기는 마치 이전에 몇 시간 후면 죽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뱀에 물린 심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을 얻고 나면은 즉시 느껴지는 것이 너무 가볍고 무거운 죄지만 벗었다는 거거든요. 그 사람보고 야 너 취소하고 다시 돌아가 그러면은 “그래 뭐 그때 주님과 나누었던 구원 조금 아까 받았지만 한 마당의 어지러운 꿈이지 나도 돌아가서 살수 있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없이는 못 산다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세월이 한참 지난 다음에 변심해서 다시 세상 맛이 그리워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그 당시에는 그런 마음이라 이거지요.
무엇 때문에 자기자신이 철저하게 절망적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겁니다. 거기서 절망하는 것입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돈만 많으면 신났어요. 그런데 구원 받을 때가 되면은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되는 것예요. 이까짓 것 뭐해. 그렇게 생각이 되는 드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자기 미모 뽐내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이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걸 깨달아요. 비참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요. 걸래처럼 되어버린 자신의 인생을 보는 것입니다. 아무 희망이 없고 여태까지 너무나 잘 살았는데 이제는 자기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힘겨운 것입니다. 절망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약속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 그 소식이 너무나 기쁘게 들리는 겁니다. 이 갈등이 많고 나 스스로 이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 봤자 마지막에는 형벌 밖에 없는데 구원의 길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란 말이지. 딱 보는데 예수님이 거기서 보혈을 흘리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희망이 있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때 그 심정이 어떤 심정입니까? 뭐야? 그런 심정만은 아닙니다.
그 십자가를 보면서 거기에다 자기의 전 존재와 자신의 모든 것을 실어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나는 비참한 죄인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정죄되었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잠시 이슬같이 사라질 이 인생의 지나는 길에는 치열한 하나님의 진노 밖에는 없고 그때는 내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짓이겨 죽으신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죽을 것입니다. 나를 건지실 분은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사신 주님 밖에는 없습니다. 오 주님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당신의 나라에 이르실 때에 나를 새각해 주시옵소서. 도와 주시옵소서. 애원이 생겨나는 겁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질 때 보혈의 능력이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을 영접하는 그 순간에 죄만 용서받는 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죄만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으면서 또 직각적으로 죄를 이기며 살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나고 예전에는 결별할 수 없었던 이 세상의 사랑과 결별하는 겁니다. 그게 인간의 갸륵한 결심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겁니다. 여태까지 그렇게 맛있게 먹던 그 술 그것을 왜 끊어요. 빨리 많이 먹어서 후손들을 그 술독으로부터 건져야 되잖아요. 사명감을 가지고 먹던 그 사람이 그거 그렇게 사랑하던 그 사람이 그걸 싫어하고 끊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 은혜 고마워서 대단한 결단을 했구나! 물론 결단도 한 원인입니다. 그렇지만 결단은 도구일 뿐이고 성령이 그 결단을 통해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이 가능한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 영접하신 분 여기 계시지요. 시작할 때 확실히 해요. 시작할 때 그때 확실히 해야지만 신앙이 반듯하게 섯습니다. 믿자마자 주일 수요예배 금요 기도회 새벽 기도는 자동이다 그렇게 생각하라고요.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재물은 다 하나님 꺼다 이렇게 분명하게 하라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정말 구원 얻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어야 되거든요. 왜냐하면 처음 믿은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보면서 생활하거든요. 그런데 앞에 가는 사람들의 줄이 개판 이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좀 서 보려고 그러면은 이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언가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신 분들 있지요. 처음에 주님을 영접했으니까 대충 살다보면 나중에 잘 믿게 될꺼야 그런 달콤한 말에 속지 마요. 지금이 가장 능력있는 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처음 깨닫고 나 같은 죄인 위해 자기의 몸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깊이 사무치듯 죄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것과 함께 보혈의 능력을 덧입혀 주셔서 죄를 이기고 내 자신을 주님 앞에 드리면서 살수 있게 됬을 때 10년 20년 엉터리로 믿은 사람들이 죽어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그 일을 오늘 주님을 영접한 그 사람은 합니다. 이게 보혈의 능력입니다. 그런 사람들 보면서 배우지 말라구요. 그런 것이 보혈의 능력이 가능합니까?.
그 좋은 담배 피기만 하면은 인생의 시름이 날라 가고 전매총 수입도 올라가는 그 좋은 담배 왜 끊어요. 담배 연기 속에 인생도 날라 가고 시름도 날라 가고, 인생에 대해서 뭔가 한가락하는 사람 중에 담배 안 피우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피는 모든 사람이 한가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도 그래 본다 이거지요. 왜 끊어요. 그것을 끊을 수 있어요? 얼마나 어려워요. 제가 증인입니다. 세례 받고도 4년 동안 열심히 물고 다녔는데... 성경 볼 때 후 하고 읽고 말이지요. 어떻게 끊어져요. 교회 나와도 못 끊어요. 사람들 눈치 본다고 그게 끊어 지는 줄 알아요 안 끊어 져요. 그런데 이상하게 보혈의 능력은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요.
그런 믿음을 가질 때 보혈의 능력이 역사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묵상하세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시지 아니하셨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그분의 죽으심이 나에게 무엇을 가져 왔는가? 그리고 지금도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죽음 때문에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이 많은 성도들을 한번 보라구요.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지 않으셨으면 여러분 지금 뭐 하고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구요.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면전에 대항하고 침 뱉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다가 결국은 지옥에 던져 버릴 그런 비참한 인생들 이였잖아요.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이 형제도 구원 얻고 나도 구원 얻고 저 자매도, 저 성도님도 구원을 얻어서 우리모두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져서 한 형제요 자매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됐잖아요.
이젠 어두움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이루신 주님의 사랑
주님 말씀 따라 생활하며 주님 사랑 안에 하나되어
주님 오시기까지 빛 가운데 살겠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어두움에 살 이유가 없습니다. 이젠 어두움 뿌리치고 그 빛 가운데로 나와야 됩니다.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어떤 사람들을 부르고 계시냐 돈 많고 지위가 훌륭한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까? 종교심이 뛰어난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까? 흠 없는 이생을 산 사람들을 부르고 있습니까? 학식이 뛰어나고 가문과 문벌이 뛰어난 사람들을 부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아무나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피를 보고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싶어서 자신의 인생의 전 존재를 걸고 날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말고는 내 이 저주받은 인생에 희망이 없다고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을 부르시는 겁니다. 그래서 문벌이 뛰어나지 않아도 구원을 받았고 학식이 뛰어나지 못해서 한글을 못 읽어도 구원을 받았어요. 그렇다고해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못 받았냐 하면은 뛰어난 철학자도 구원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학자들도 구원을 받았어요.
이 세상에서의 어떤 지위 무엇을 하며 사느냐는 세상에서는 대단할 줄 모르지만 하나님 보기에는 모두 멸망 가운데 달려가고 있는 비참하고 불쌍한 죄인들 이였기 때문에 누구든지 인간의 의로운 행위나 인간의 의로운 행실로 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께서 흘리신 보혈을 믿고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저렇게 날 위해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분의 주시는 구원 이외에는 내게 아무 희망이 없다고 믿는 그 사람들을 피부 색깔에 상관없이 나이와 연령에 상관없이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불러서 당신이 구원받은 백성을 삼으신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이 십자가를 바라보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믿음이 어떻게 생기느냐 이러한 믿음이 우리에게 창출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그런 믿음이 그렇게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정확한 영적인 지식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눈에 보이는 이 인생의 껍질을 양파 껍질처럼 벗겨내 버려야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이 우리를 얼마나 현혹시키고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은 어떻다고 말해요.
(예화) O양 비디오 사건이 알려지기 전에는 아무 느낌이 없다가 알려진 후에는 살고 싶 지 않을 만큼이 고통이 왔다는 고백
성경이 이런 식의 태도에 대해서 동의를 해 줍니까? 동의하지 않잖아요. 죄인들이 겪는 현실이긴 하지만 성경은 그런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다른 일들이 일어나요. 그것이 무어냐 하면 다 끝났고 아무 일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데 그게 알려진 것 보다고 더 괴롭고 아픈 것입니다. 왜 내가 지난날 그런 삶을 살았는가 정말 죄악된 세상을 방황하면서 천국과 지옥도 모르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았구나 하는 뼈저린 후회가 알려진 것보다도 훨씬 더 그렇게 가슴 아파 하면서 회계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게 바로 세상의 관점이라고요. 그렇게 그럴싸한 얼굴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여기저기 나와서... 그렇게 그런 옛날의 일들이 있어도 그런 모습으로 나와서 살아가면은 인생은 행복하고 문제가 없다 하는 것이 세상의 관점입니다. 그것을 벗겨 버려야 된다구요. 돈만 있고 사회적으로 적당히 지위를 보장받고 어디 가서든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고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 위에 굴림 할 수 있으면은 인생은 살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의 사고 방식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 껍데기를 확 벗겨 버리고 그리고 너가 누구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인간이 뭘 입고 다니고 뭘 먹고 어디에 앉아 있느냐에 따라서 엄청 놀랍게 달라 져요.
(예화) 직장 다닐 때에 상사였던 위엄 있고 당차던 고급 공무원이 등산복으로 갈아입 고 나니 그가 평소 취하던 태도와 다른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평소와 다 르다. 예비군복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이 변화되는 모습
그렇게 벗겨 나 봐야지 인간이 누구인지를 안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게 이 세상의 시각으로 너무나 많이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희망이 없는데서 인간은 희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데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마치 향류를 모은 그 여인처럼 몸 팔고 술 팔면서 조금 씩 조금 씩 향류를 모았어요. 갔고 나가면 언제든지 팔 수 있거든요. 그런데 희망을 거는 것입니다. “어머 반이야 삼분의 일이야 삼분의 이야” 그러면서 여러 남자들의 품에서 놀아나면서 말입니다. 그렇겠죠 이것다 가득 차면은 팔아서 택시라도 얻어서 그래서 돌아다니면서 돈을 벌까 땅이라도 한 마지기 살까 아니면은 풀 빵집이라도 하나 차릴까 그런 생각을 했겠지요. 그렇게 희망을 거는 것입니다. 그것이 희망 일수 있느냐 이거지요.
차가운 땅 바닥에서 뒹굴며 살던 그 돼지가 도살당하는 것이나 클래식 음악 들으면서 도살을 당하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절대로 마찬가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편견과 그 껍질들을 벗겨내기 전에는 믿음이 생기질 않는 것입니다. 우선 바라보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 것입니다. 이번 사업하는 일만 잘 되면 내가 지위가 높아질텐데, 이번 시험만 붙으면은 내가 뭐가 될텐데 이번에 한탕 하기만 하면 앞으로 잘 살수 있을 텐데 이런 사고 방식이 계속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기 전에 내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다리가 팅팅 부었는데도 그냥 원망하면서 그 십자가를 안 바라보고 왜 나는 돈 못 벌게 해주는 거야 씨! 그러고 죽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을 모르는 인간의 비참함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분명히 여기 구원받지 못한 분 계셔요. 제가 확신해요. 잘 생각하세요. 여러분들이 덜렁거리고 교회에 왔다 갔다 해도 개인적으로 주님 영접하지 않으면 구원 없어요. 특별한 경우를 재외하고는 구원이 없습니다. 좀 직면해요. 복음의 진리를 이렇게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으니까 지금 가르쳐 주고 있는 이 진리 앞에서 직면하라 이 이야기입니다.
구원받았습니까? 직면하라 이겁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입니까? 요 고비만 넘기면 구조 조정 끝나고 나면 내 자리도 튼튼해 그래서 어떻다는 겁니까? 이틈에 틈 좀 비집고 들어가서 돈 좀 벌었지. 그래서 걸아 다니는 사람이 자가용 타고 후진 차 타고 다니는 사람이 좋은 차 탔어요.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다. 티셔츠 바람으로 덜덜 떨고 다니던 사람이 멀끔한 양복을 입었어요.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그게 인생 전체에 무슨 유익을 가져다 주었습니까? 물론 입고 먹고 차 타고 다녀야 해요. 그런데 그 차체가 인생 자체의 운명을 좌우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정직하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런 지식이 있어야지만 믿음이 생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죠셉 얼라인이 뭐라고 말했어요. “용서받지 못한 죄인의 유일한 희망은 정직한 복음이 강력하게 선포되는 그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희망이다.” 그랬어요. 왜? 거기를 떠나면 어디를 가더라도 그런 인생의 진실에 대해서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다 거짓말만 하는 것입니다. 야, 아무렴 어때 돈만 있으면 사는 거야 임마, 야 승진만 해봐 신나지. 이것은 다 인생의 마취제입니다. 맞고 있는 그 동안에는 통증을 다 잃어버리지만 언젠가는 그 죽음 앞에 직면해야 됩니다.
그런 복음의 지식 없이 그런 영적인 복음의 지식 없이는 믿음이 안 생긴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정직하게 구원에 대해서 확신이 없으면은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되요. 그리고 복음을 하나 씩 하나 씩 배워야 되요. 깨달을 수 없으면 가르쳐 달라고 그래요. 그리고 테이프를 듣던지 책을 읽던지 하십시오. 그러한 지식 위에 그러한 지식을 갖다가 보면은 성령이 그 지식을 가지고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믿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질 때에 주님이 우리가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보혈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주님이 화목물로 삼으셨다고 그래셨거든요. 이 화목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죄로 말미암아서 원수 되었던 관계를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화해가 이루어 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서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이 기초지만 개인에게 적용되는 것은 믿음을 가질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믿고 그런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 인생의 유일한 구원의 희망이라고 애초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 사람들의 그 눈빛을 주님은 믿음이라고 보시고 그리고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 버리고 화해를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믿음을 가졌고 구원을 받았으면 이제 하나님과 우리는 원수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낯을 피해야할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까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고 나면은 주님이 하늘에 계신 것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내려 오셔서 나를 안아주고 계시고 내 안에 계신 것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친밀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십자가의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왜? 이 화목제물로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담이 무너지고 적대감이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노의 아들이 아니라 은총의 자녀입니다. 진노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되는 거지요.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4. 보혈의 능력 아래 살아가는 길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和睦) 제물로 세우셨으니”(롬3:25上)
지난 시간에는 보혈의 능력을 우리들이 경험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인데 지지난 시간 이였고요. 그 보혈의 능력을 우리가 경험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진리가 필요하고, 두 번째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믿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 믿음이 바로 우리의 전 존재를 건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인생에 구원을 위한 유일한 희망이시다 라는 그러한 바라보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인정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 그리고 그 구원을 단순한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용서 이상의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그것을 가르쳐서 우리들은 보혈의 능력이라고 부른다는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어제 그러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끝났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시고 또 우리를 믿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보혈을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화목제물이 되셨단 말이지요. 화목제물은 나빠진 사이에 그 제물이 바쳐져서 서로 화해를 회복하고 관계를 되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목하게 되었더라고 하는 말은 다시는 이제 복수심에 불타는 관계가 아니라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끝났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서 사랑이 함께 역사하고 있는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단순히 복수하지 않는다. 서로 죽이려고 복수하다가 화목하게 되었다 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복수하지 않거나 싸우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손에 들었던 칼을 집어던지고 어긋맞게 끌어안고 엉엉 울면서 화해를 하고 이제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그것이 화목이라 이것입니다. 그런 관계를 하나님이 그의 보혈을 인해서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신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중대한 의문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어냐 하면 “그런데 저는 하나님과 지금 화목하지 않는데요.” 이런 얘기가 나올 수 있다 이거지요. 하나님과 화목하게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느낀 그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반응하고 우리도 하나님을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 있어야 된다 이겁니다. 그게 화목한 사이입니다.
그래서 화목한 사이 속에는 아주 뜨거운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런 뜨거운 사랑이 흐르는 것이 그것이 화목한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목에다가 칼 밀어 내밀고 우리의 인생을 막 곤두박질 치게끔 만드시는 그러한 징계를 받지 않는 생활이라고 해서 그것이 곧 화목한 생활의 관계는 아닙니다. 세상에서 돈 잘 벌고 출세하고 승승장구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다 깨어진 관계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관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그런 화목의 관계가 우리들에게 있느냐 말할 때 “뭐 하나님 뵙기가 겁난다 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은 그러나 그런 뜨거운 사랑의 관계가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이것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시는 데도 그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고 그것도 그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져도 그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는 만큼 자신이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려고 한단 말입니다.
사랑하고 있는지 사랑하지 않고 있는지 하는 것은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느냐 하면은 그 사랑을 잃어 버렸을 때에 어떠한 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이 세상에서 유행가나 노래들을 보면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떠나간 다음에야 사랑하는 줄을 알았네 뭐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제가 뭘 하나 읽어 드릴 테니까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것이 있는지 잘 들어보십시오.
“사랑하는 당신이여 내가 괴로울 때에 당신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십시오. 당신의 귀를 내 목소리에 기울이셔서 내가 이렇게 울부짖을 때에는 속히 내게 대답을 드려주십시오. 당신이 떠났기 때문에 내 사는 것이 젖은 짚을 태우는 연기와 같고 그리고 내 뼈가 당신 생각에 바짝 말라 갑니다. 당신을 떠나 보낸 후에는 내가 먹고 마시는 것도 잊었으며 내 마음은 여름날의 된풀과 같이 그렇게 마르고 있사오며 당신 생각에 탄식하는 소리를 인해서 나의 살이 뼈에 붙어 버렸습니다. 나는 거친 들판에 밤새와 같고 황폐한 곳에 슬피 우는 부엉이 같으며 내가 당신 생각에 밤을 새우니 나의 처지가 마치 지붕 위에서 슬피 우는 어린 참새와 같습니다.“
가슴이 찌릿하지 않습니까? 성경 시편 102편을 현대어로 각색해서 읽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를 쓴 사람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사랑을 잊어버리고 나니까 그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깨달은 마음으로 노래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잃어버린 것을 화목을 잃어버린 것을 그런 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화목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부부생활도 싸우면서 화목한 가정이 있다. 그것이 어패가 있지만 매일 부어 터지고 피 나면 화목하다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겠지만 싸움을 하나도 안 하면서 전혀 화목하지 않는 가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너는 너 나는 나. 그러면은 하나도 안 싸워도 불화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목의 조건은 싸운다 안 싸운다 복수심이 있다 없다의 그런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가 성립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인해서 화목 제물로 자신을 삼으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시려고 그렇게 우리에게 죄 사함을 주셨는데 그러면 지금은 화목 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화목은 단번에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만들어주신 겁입니다. 그리고 이 화목은 영혼을 향해서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결국은 하나님의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로 하나님이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면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은 죽은 다음에 천국 가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께서 죽으셔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 되신 것이 지금 현재 나의 인생에 깊은 의무를 부여하고 효과를 가져다주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이루신 이 화목은 양쪽의 측면을 함께 생각해야 되는 겁니다. 하나는 영원한 형벌과 관계 되어서의 화목이고 또 하나는 매일매일 삶 속에서 누리는 이 화목입니다. 매일매일 삶 속에서 화목을 누릴 때 그때 예수님이 날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가치가 찬란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이렇게 엄청난 사건인 것을 우리가 어제 깊이 살펴보았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는 다 동의하고 생각하면서도 감격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간단합니다. 영원을 향해서는 화목한 관계를 갔었는데 지금 현재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우정어린 뜨거운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옛날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가 최초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을 때 우리에게 주셨던 그 화목의 놀라운 그 꿈과 감격이 모두 사라진 겁니다. 그런 것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없는 겁니다. 누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부인하면 이단이 계요. 그러면 그것을 안 믿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구원 못 받게요.
그런데 그 감격이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옛날에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감격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 그런 적이 있었어도 지금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 사실이 우리에게 감격으로 다가오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만히 보면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느끼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만 이 십자라는 주제가 우리의 가슴속에 불붙는 주제가 되지 우리가 그런 사랑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의 그런 관계가 깨뜨려져서 불 화하게 되면은 십자가의 이런 감격이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신앙에 있어서 다른 모든 체험도 그렇듯이 십자가에 대한 체험도 현재적으로 반복되어야지 만 감격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예화) 이곳에 맨 처음에 이사 왔을 때 중국대륙과 같이 느껴졌으나 지금은 너무 좁다 라는 생각이 든다.
똑 같은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 있어서나 육신의 안목의 세계에 있어서나 우리는 항상 감격할 이유가 새롭게 발생할 때 그 감격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를 인쳐 주시는 이 성령의 역사도 반복 되어야지만 그 감격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차가운 확신만 남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이지요. 우리가 그런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고 산다 이 말입니다. 잃어버리고 산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이 무엇 때문이라고요. 역설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고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화목한 관계를 오늘 계속 이루며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그러니까 역시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영혼이 단번에 드린 사건이지만 그 사건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늘 반복 되어야할 사건입니다. 물론 구원을 받는 것은 한번이지만은 그 감격이 우리에게 재현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반복되어서 그 진리가 자꾸 우리에게 들려지고 거기에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 감동을 받아야지 만 된다 이 말입니다. 성령이 그 일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논리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있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더니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화목한 관계가 되었단 말입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계속 살기 위해서는 계속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맨 처음에 주님을 영접 할 때에 저 십자가 이외에는 내게 아무 희망이 없다 라고 하는 그 믿음을 가졌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실어져 전 인격적으로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저기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밖에는 내 인생의 진정한 희망이 없다. 그런 기대와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 믿음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 믿음이.
그러면 처음 믿음이 생기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바라봄이라고 말을 했는데 그 바라보는 그 바라봄이 한참 쳐다보다 진력 나지 않고 계속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볼 때마다 감동이 새로워지고 정말 맨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도록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미 10년 20년 전에 주님을 영접했지만 지금도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다시금 내 존재를 걸어서 주님의 그 십자가 거기서 죽으신 그 예수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밖에는 내 인생이 영원히 아무 희망이 없구나 하는 그 마음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믿음을 유지하는 삶입니다. 어제는 처음 믿음에 대해서 말했지만 이제는 그 믿음이 유지되는 삶. 어떻게 되야 해야 하나요?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이 풀려야지만 우리들이 한번 하나님과의 화목을 경험하고는 다시 잊혀버린 삶을 살지 않고 한번 허물어진 그 담장 위에서 계속해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이 화목한 관계를 가지고 그렇게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이것입니다. 그것을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믿음 안에서 성도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계속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계속 믿음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그리스도와의 교제입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은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아요. 진짜 죄악된 세상을 방황하면서 천국과 지옥도 모르다가 어느 순간에 복음이 들어와요. 그러니까 막 뒤집어 지는 겁니다. 정말 이 놀라운 사랑을 내가 왜 몰랐을까. 그러면서 펑펑 울고 회계하는데 거짓이 아니라 진짜 보혈의 능력이 있었고 그리고 성령이 사용하셔서 그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꿔 놨어요.
나 세상 자랑 버렸네, 나 주님만 사랑하네 할 수 없는 이 몸을 값지게 하시었네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회심이 가짜 일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그 회심이 정말 진실했는데도 그 회심했을 때의 그 삶이 계속 유지되지 않고 금방 다시 세상 적인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회심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 일리는 있지만은 완전히 통용하는 것은 적용될 수 있는 진리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비밀이 무엇이냐! 잘 들어보십시오. 분명히 예수님을 만나고 펑펑 울면서 회심을 했는데 진짜 정확한 복음 진리가 있었고 그리고 그것을 성령님이 사용하셔서 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은 것입니다. 정말 세상에 있는 헛된 것들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주님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마음이 생기고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보니까 분명히 그러한 고백은 있었고 또 지금도 머리 속으로는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삶은 그러한 삶이 아입니다. 그런 이유는 무엇 때문이야 하면은 근본적으로 그가 변화되었다고 하더라고 그것으로 한번 태엽을 감아서 쉼이 없이 달려가는 장난감 자동차처럼 그렇게 저절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근본적으로 변화가 됐는데 어떻게 그렇게 금방 그런 세상에 있는 것들을 하찮게 여기면서 십자가만을 바라보는 삶이 안 되느냐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하나님과의 화목이 놀랍게 이루어 졌는데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갖지 못하고 살아가니까 그 화목이 금방 깨뜨려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이미 받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나라는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처음 우리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 졌을 때에는 영혼이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만 화목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동시에 매일매일 하나님과 교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 화목도 동시에 이루러 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들어주시고 찬양하면 감격이 있고 말씀을 들으면 빨려 들어오는 이러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우리가 구원받는 그 화목은 우리가 내버려두어도 되지만 매일매일 이런 감격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그 화목은 그리스도와 지속적인 교제를 이루어야지 만 그 감격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재를 잃어버린 겁니다. 교재를 잘 하지 않는 겁니다. 감격은 했는데 하나님 앞에 교재 하는 생활 자체가 견고하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까 죄에 의해서 잠식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머릿속에는 분명히 옛날의 감격이 살아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정한 틀의 신앙생활을 안 벗어납니다. 물론 완전히 개 판치고 튀어 나가는 사람도 있지만은 대부분의 경우 틀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옛날에 누렸던 그런 감격은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또 한 케이스의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원이 아니더라도 진짜 아까 얘기한 것과 같이 교제도 잃어버리고 다 잃어버리고,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도 잃어버리고 교회에 와서 팔장을 끼고 잠자는 것이 일인 출근부에 도장 찍듯이 말이에요. 교회 와서 주보 한 장 가지고 가는 것이 일이었던 그런 사람이, 그렇게 형식적인 신자로 살아가던 깡통 같은 사람이 어느 날 그 보혈의 능력을 경험하는 겁니다. 보혈의 능력은 처음 예수 믿는 그 순간에만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반복 될 수 있는 경험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데 깨끗한 복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에 들었던 것이지만은 다시 새롭게 이해가 되면서 정리가 되는데 그때 성령님이 내버려두시지를 않고 그 말씀을 통해서 강력하게 그 사람에게 역사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처음 구원받을 때만 십자가 앞에서 펑펑 울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화목한 관계를 다시 회복 할 때에도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한없이 감격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옛날에 엉망진창의 신앙생활에서 이제 변화되는 겁니다. 성경도 보고 예배도 참석하고, 전에는 주일 한번만 나와줘도 목사에게 유세를 하던 사람이 이제는 수요예배 주일 오후예배 금요예배, 다 잘나옵니다. 변화된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가고 나면은 다시 또 흐지부지 해 버리면서 예수님의 보혈이 그런 능력이 있고 다 알지만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신자가 계속해서 믿음을 유지하는 비결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세상은 우리의 신앙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놀라운 삶을 살수 있었는가 하고 껍질을 다 까고 들어가 보면은 정 중앙에 노른자가 하나 나오는데 그것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체험입니다. 그런데 저는 확신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겠지만 강도에 있어서 바울보다 더큰 신앙의 체험을 한 사람이 없다라고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 바울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처럼 산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무엇 하나는 알 수 있습니까? 체험이 그렇게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하지만 그것 하나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처럼 은혜를 받고 변화되어도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육신이 살아 있습니다. 마귀도 살아있고, 세상도 살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번 우리들이 내가 정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밖혔구나 하는 그런 고백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나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세상이나에 대하여 못 박혔고“ 그 목 박혔다 라는 말이 희랍어로 ‘에스타우로 타이’인데 이것은 현재 완료 시제입니다.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는데 그 영향이 지금까지 계속적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번 놀라운 신앙의 체험을 한 것이 얼마나 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놀라운 신앙의 체험을 한 다음에 기도도 하지 말고, 예배도 나오지 말고, 성경도 읽지 말고, 찬송도 하지 않는 겁니다. 몇 시간이 갈 것 같습니까? 거이 안 갑니다.
저는 같은 예배 시간에도 두 시간을 예배 드리는데 그 중에서 제가 설교하는 시간이 80분 길면은 120분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80분이라고 치면 그 80분밖에 안 되는 데도 그 사이에 어느 부분에서는 마음이 막 녹아지는 것 같이 설교가 쏟아져 나오고, 어느 순간에는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곳에 서 있는 것과 같이 마음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신앙에 있어서 체험의 가치를 우리는 상당히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체험이 우리의 신앙을 붙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와 같은 생각입니다.
또 보십시오. 이렇게 하나님과의 보혈의 능력을 경험하는 놀라운 경험이 없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 누리면서 산다, 얼마나 누리면서 살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교제를 한다 그러면은 만 저지고, 느껴야 계속해서 교제가 되지, 만져지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그분과 교제를 나누면은 얼마나 나누겠습니까?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함께 갑니다. 그리고 물론 체험이 먼저입니다. 솔직히 여러분이 하나님 만나기 전까지 기도를 하셨습니까? 기도는 무슨 기도를 합니까? 밥 먹을 때 하는 기도, 그것도 옆에 안 믿는 사람이 있으면 주눅이 들어서 못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했었습니다. 왜 하지 않았습니까? 필요를 못 느꼈습니다. 그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왜 기도를 안 하였나? 기도를 할 필요를 못 느꼈던 것입니다. 그때는... 왜? 주님의 대한 체험이 없었으니까 모르는 사람에게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악수를 하고 그라느냐 구요.
(예화) 잘 아는 사람과의 식사는 너무 좋고 편해서 더 길게 많은 대화를 나누며 오래도 록 식사하고 싶은 반면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식사는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워 소화가 되지 않을 만큼 싫다는 목사님 자신의 이야기.
그런데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먼저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인격적인 체험이 있으니까 너무 반갑고 그 사람하고 밥을 먹고싶고,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서 돈도 내어주고 싶고 그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인격적으로 체험하기 전에는 기도를 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무나 낯설기 때문에 기도를 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저는 맨 처음에 예수님을 믿을 때 신기한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한글을 전혀 모르는 할머니가 예배 시간에 대표기도를 하시는데 청산뉴스로 기도를 잘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저것을 쓰라고 하면 못 쓰실 텐데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시면 기도를 너무 잘 하셨습니다. 그것이 너무도 부러워 따라 했었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과 한달 만에 그렇게 기도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나니까 쏟아져 나왔습니다. 철야 기도할 때 대표기도를 15분 할 정도로 기도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인격적인 체험입니다. 체험이 있어야지만 기도할 마음이 생기게 되고 말씀을 듣고싶은 체험이 생기게 되지 않습니까?
(예화) 불시에 방문객이 찾아와 해야할 것들을 하지 못하게 될 때 단호하게 청교도들처 럼 꾸짖을 용기는 없지만 그 시간이 아주 힘이 든다.
왜 여러분 예수님 만나기 전에 설교를 들으면 계속 자고, 설교가 1시간만 넘으면은 설교자가 보기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먼저 주님을 만나는 그 체험은 중요하다 이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데 그 체험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그랬습니다. 지속적으로 그분과의 교제 속에서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교제의 기초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는 교제 속에서 살아가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주님 영접하고, 또 영접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십자가를 새롭게 아신 분들에게 제가 말씀을 드립니다. 즉시 여러분들의 경건 생활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규칙적인 기도 생활과 규칙적인 예배 생활 그리고 규칙적인 성경 읽기 이것을 엄청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계속 지속하겠노라고 다짐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오냐 하면은 체험 한번하고 다 털어먹고 그리고 나면 다음에는 하나님과의 교제는 없어 믿음으로 못 사니까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지고 그로 인해 어두운 죄의 길에 들어가게 되고 끝까지 가게되면 죽을 것 같아서 헐떡거리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은 또 한번을 체험을 주십니다. 그런데 다시 개가 토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한번 체험하고는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다가 죽는 겁니다. 그렇게 살면은 결국은 체험을 한 것이 성도로서 살아가는 대에는 아무 도움을 안주고 가끔 정신 차리게 만드는 도구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짐승은 짐승인데 약간의 지능이 있는 짐승과 같은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십자가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이 십자가의 감격을 경험한 이후로 주님과의 교제를 유지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애쓰지 않고 삶아간 것을 주님께서는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다.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뭐 하루 기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뭐 어떠랴. 하루 말씀 안 본다고 해서 어떠랴. 예배 한번 빠진다고 해서 어떠랴.” 그런데 한번 굴복하게 되면은 그 다음의 항거하기 위해서는 처음 굴복하던 것의 항거하면 벗어날 수 있었던 것에 2배, 4배, 8배, 18배의 힘이 필요하게 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보혈의 공로, 그 위에 맺혀진 하나님과의 화목, 이것을 우리들이 현실적인 삶 속에서 계속 이루면서 십자가의 감격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 믿음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주님과의 교제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 고난 주간에 펑펑 우는 감격도 필요하고 뒤집어지는 감격도 필요한데 뒤집어 진 다음에는 다시 똑바로 와야 합니다. 그래서 차근차근히 기초를 다지는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새벽기도 안 나오던 사람은 나와야 됩니다. 누구든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출근시간 되기 직전까지 잠자다가 직장에 가는 것이 편한 줄은 모두가 다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육체가 원하는데로 편안한 삶을 살면 마지막에 우리의 영은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자기부인입니다. 자신은 이러한 삶을 살고 싶은데 주님이 이러한 삶을 살기를 요구하시기 때문에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포기하고 자기가 살기 싫은 삶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을 얻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쇠 심줄입니다. 기도를 안 하기로 뜻을 세웠어요. 뭐 수요일 날 애원을 하면서 내일 하루만이라도 나올 사람 그랬는데 손을 안 들기로 뜻을 세웠어요. 내가 김 목사에게 지는 것은 가문의 수치다. 당신이 아무리 외쳐도 나는 안돼. 그런 식으로 결심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아무리 백 배, 천 배의 체험을 해도 결국은 마찬가지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체험이 중요하지만 체험의 크기만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체험을 통해 얻어진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만드는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복음의 감격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삶의 3가지 방편이 있는데 그 첫 번째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 치고 십자가의 감격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기도하는 모든 사람이 십자가의 감격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감격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 치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도가 맨 처음에는 5분 10분하기도 어려운데 이제 그러한 주님의 십자가의 놀라운 체험을 하고 나면 이 기도가 하면 할수록 점점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넓어집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입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를 했었는데 나중에는 자기의 영혼을 쏟아 붇는 것처럼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기도에 깊이 들어갔던 사람들은 맨 처음에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은 기도가 어렵다고 그러는데 머리에서 기도가 안 떠오른다는 이야기고, 깊이 기도가 들어가기 전에는 사람들이 기도가 쉽다고 그러는데, 그것은 마음이 기도를 따라오기 때문이고, 더 깊이 들어간 사람은 기도가 힘들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가 보면은 그 기도는 자기를 초월하는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영교의 세계 속으로... 그런데 모두 초보에 머무르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 이렇게 기도 안 하다가 망합니다. 두고 보십시오. 기도 안 하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한국교회의 기도의 열기가 뜨겁다” 다 옛날 이야기입니다. 뜨거운 것 중에서 쓸데없이 뜨거운 것을 빼놓고 나면은 진짜 뜨거운 면에서 뜨거운 것들만 남겨두면은 얼마나 될지 저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아주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한 때는 십자가의 놀라운 감격을 누렸고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은 아주 우습게 보이는 겁니다. 하수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모르고 있고 자신은 알고 있는데 감격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 없기도 마찬가지이고요. 그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기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계속적인 교제가 이루어지어야 하거든요. 그때에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믿음이 생겨나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 볼 때에 뿐만 아니라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마음에 큰 고통 사라져” 처음만이 아니라 볼 때마다 그 십자가는 우리의 마음속에 감격을 가져다주고 그 십자가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일생을 다 살고 난 후에도 그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고백하며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흔들며 흐느낄 수 있는 그러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을 가르쳐서 저는 ‘돌 가슴 철 마음 경영대회’라고 부릅니다. 철판을 깔았습니다. 그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기대하느니 차라리 석고상에서 피 떨어지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낫지요. 그런데 ‘돌 가슴 철 마음 경영대회’를 하면 항상 입상권에 드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교회에 오래 다니는 사람들이 입상권에 듭니다. 그리고 그랑프리는 누가 차지 하냐 하면은 교회에서 직분이 높은 사람들이 차지합니다.
왜 이렇습니까?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끊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사랑이 없습니까? 왜 생명이 없습니까? 왜 은혜가 없습니까? 왜 주님에 대한 충성심이 없습니까? 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자 하는 욕망이 없지요? 이 모두가 기도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사라지기 때문에 죄와 더러움은 누적되고 이전에 받았던 깨끗함과 순결함은 점점 잃어버리는 겁니다. 주님 앞에서 살았던 신령한 기쁨은 기간이 지나면서 점점 식어지고 이제 식어지면서 들어온 세상의 감정은 세속적인 감정은 점점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기도를 하지 않으니까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하지 못하고 그 교제를 못 하니까 믿음이 식어지고,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이루어 놓으신 그 화목한 관계를 현재의 삶 속에서 누리며 살아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상한 부조화가 생가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체험 그 십자가에 대한 경험을 다 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도 다 압니다. 그런데 항상 머리 위에서만 놀지 이 목 이하로는 따로 노는 그러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고난 주간에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뚝뚝 떨어지는 그 피를 느끼면서 펑펑 우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는 그리스도의 교제생활을 계속하기 위한 장기적인 결심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장기적인. 그렇게 주님 앞에 교제하면서 깊이 살아가다 보면 어떻게 되냐하면 그 십자가의 진리가 들려질 때 금방금방 새로운 감격이 일어나는 겁니다. 예배 시간에 늘 감격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은 늘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쉽게 이 감격이 주어지는 겁니다. 늘 그런 사람들이라고 해서 완전하게 사는 것은 또 아닙니다. 완전하게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죄 죽임의 교리를 설명할 때 그런 비유를 들지 않았습니까? 촛불을 이렇게 켜 놨는데 하나는 추운 겨울날의 생초이고, 하나는 이제껏 계속 타다 지금 껐습니다. 그 초를 지금 켜면은 성냥을 근처에다 갔다 데어도 불이 금방 붙습니다. 그런데 추운 겨울날 산 초는 성냥을 두 개씩 켜서 그 불을 갔다가 비벼야 됩니다. 그래야 겨우 불이 붙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약간 허물이 있는 삶을 살아도 늘 기도하면서 그리스도와의 따뜻한 교제를 유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복음이 제시가 되면은 금방 감격하는 것입니다. 금방. 그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가져다주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안 하니까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끊어지니까 이러한 마음이 딱딱하게 식어지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마음은 어름장 같아지고 나중에는 돌 같아지고, 나중에는 쇠 덩어리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불을 그어 데어도 녹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굳어지고 그 딱딱한 그 속에서는 수많은 죄악들이 저질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자체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사람하고는 거리가 먼 자처럼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죄가 겨냥하고 있는 목표가 무엇이라고 그랬습니까? 배교에 가까운 삶을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을 얻었어도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의 예수와 지속적인 교제의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막판은 어디로 가는지 뻔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는 눈물이 단지 그 십자가를 보고 예수님이 피 흘리신 것 불쌍해서 우는 것이라면 주님은 그런 눈물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당신을 동정하는 그런 눈물이 아닙니다. 큰못에 박히고 살 찢어 진 것을 동정하는 그런 눈물이 아닙니다. 동정 받을 사람은 우리입니다. 그분은 아닙니다. 그러면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깨달았으면 그 다음에는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던 것처럼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예수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됩니다.
여러분 기도하고 싶을 때는 기도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기 싫을 때에는 기도하기 싫지요. 그렇게 사는 것은 또 어떤 의미에서 신앙적인 짐승과 같은 삶입니다. 스펄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도 할 수 있을 때 기도하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은 기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할 수 없을 때에는 더 기도 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당신은 기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명언입니다. 그러면서 지속적인 기도 생활을 해 나가려고 깊이 결심하는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번 십자가 사경회에서 하나님 앞에서 받치는 최고의 헌신은 무엇입니까? 무론 헌금을 받치겠지요. 그러나 그것과 함께 하나님께 받칠 최상의 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기도생활을 게을리 해서 주님과의 교제를 잃어 버렸기 때문에 지속적인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누리며 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제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도하겠습니다. 라는 결심을 하는 것이 주님을 훨씬 더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는 2번째 수단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가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주어지지 않고는 우리는 지속적으로 주님과 교제를 나누며 살수 없고 그 교제를 계속해서 유지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이 식어집니다. 그리고 믿음이 식어지게 되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화목의 길을 열어 놓으셨는데 우리가 그 길로 안 걸어가게 됩니다. 특별히 이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는 것과 공적인 예배 중에 선포되는 설교입니다. 이것이 두 축입니다. 가장 중요한 축입니다. 얼마나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계십니까? 우선 여러분 매일 매일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어 나가고 읽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개인적으로 여러분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도 조나단 에드워드를 읽어보니까 “나는 매일 매일 성경을 읽었다. 그러나 어떤 날은 한 절에 붙잡혀서 계속 읽을 수 없을 때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 성경 한 절에서 너무 어마 어마한 진리들이 쏟아져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런 일들이 삶 속에서 일어나야 됩니다. 매일 매일 성경을 읽을 면서 그곳에서 하나님이 나이게 주시는 말씀이다 하는 것이 가슴에 다가오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성경을 그렇게 읽을 수 있기 위해서 다양한 다른 성경 공부들도 해야만 합니다. 얼마나 여러분 성경을 읽으면서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구나 아, 나는 참 깨달았어.“ 그러면서 읽으십니까?
통계에 보면은 51% 한국 교회의 교인이 전혀 성경을 안 읽는 것으로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환율이 낮을 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도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짐승처럼 살다 인생을 마치는 것과 같습니다. 예배 속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얼마나 깊이 기를 기울이며 감화를 받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한다는 증거는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예화) 말씀에 사모함이 기본적으로 있는 녹취 헌신자들도 예배 시간에 선포되어지는 말씀 중 많은 부분을 그냥 지나치고 녹취(말씀을 글로 풀면서)를 하며 감화를 받 는 것이 이를 입증시킨다. 또 설교자 또한 자신이 설교한 내용을 잃어버리는 경 우를 들어 듣는 우리들이 많이 놓치고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심각성을 이야기한 다.
하나님의 말씀들을 우리들이 그렇게 많이 흘려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를 깊이 감동 시켜서 우리에게 신령한 은혜에 대한 갈망을 주고 그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이 우리를 변화시켜주는 역사가 매일 되풀이되고 반복 될 때에 그때에 우리들이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 설교를 들은 다음에 정말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설교를 듣고 감화를 받고 나서는 3가지 정도의 결심이 떠오르게 됩니다. 첫째는 자신이 너무 성경을 모른다는 것과 그래서 성경을 많이 깨닫고 싶다는 것과 두 번째는 저렇게 살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깊은 후회, 그리고 세 번째는 저렇게 살고 싶다는 거룩한 결심 이 3가지가 반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누리는 교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예배를 통해서 성경 읽기를 통해서 말씀의 감화를 계속 유지하면서 살아 갈 때에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좋은 교제가 유지되고 언제나 십자가의 감화를 받을 수 있는 주님과의 화목한 관계들이 유지가 됩니다.
그런데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주일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기 위해서 토요일 날 푹 쉽니까? 최상의 육신의 상태로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청취합니까? 그리고 듣고 이해가 안가는 부분을 자기보다 성숙한 자나 교역자에게 물어 보려고 합니까?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해서 다시 깨달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정기적으로 주님이 내게 하신 말씀이 무엇 이였고 나는 그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며 살았는가도 점검되고 있습니까? 그러한 삶이 없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끊어진 삶 속에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마치 벤 풀이 곳 말라 버리는 것과 같은 그러한 삶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감화를 받고 변화를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이 하나님 앞에 놀랍게 준비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저희 교회에서는 모든 예배의 설교를 2번씩 청취하면서 영적으로 놀라운 복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은 우리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고 그 말씀을 깊이 받아드려서 그 말씀에 감화를 받아서 주님의 뜻을 준행하며 살아가려는 의지가 약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몇 주전에 “듣고자 모였나이다”. 그 설교를 하면서 듣는 것이 들리는 것이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듣는 것과 들리는 것은 다릅니다. 들리는 것과 마음을 다 하여서 들으려는 것은 다릅니다. 듣는 것에 있어서도 우리는 누구를 본 받았어야 한다고 그랬습니까?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사 내 심사를 통촉하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와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건성으로 듣지 않고 우리의 기도를 전심으로 응답하시기 위해서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처럼 그 주님을 본 받아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성찬입니다. 이 성찬은 믿음이 연약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강화하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보혈의 의미를 새롭게 갱신시키기 위해서 주님이 눈으로 보면서, 참여하면서 우리가 예수 죽이고 그 예수 주님의 죽음 때문에 주님 죽인 죄로부터 용서받는 것을 그림처럼 형상화한 예식입니다. 이 예식은 역사상으로 볼 때에 이 성찬 예식은 단지 기념일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념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참여하면 하나님의 십자가의 도를 들을 때에 믿음으로 참여하면 성령이 역사 하셔서 놀라운 변화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것처럼 이 성찬 자체가 그렇게 눈에 보이는 피의 복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찬이 자주 거행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은 너무 자주 하니까 사람들이 성찬을 대하는 마음의 태도가 너무나 약화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아까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살아가면 늘 성찬을 해도 즉각 피묻은 복음에 대한 감격이 있고 예수 못 박혀 죽으신 것에 대한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매일 교회에 나와서 십자가만 들어도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매일 성찬을 해도 똑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의 그러한 교제가 사라지고 믿음을 잃어버리고 화목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니까 십자가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잃어버리니까 성찬에 대한 감격을 함께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1년에 2차례밖에 안 하겠습니까? 칼빈도 한 달에 한번 정도 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한 달에 한번 하는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는 편입니다. 1년에 4차례나 합니다. 할 수 있으면 늘려야 합니다. 할 수 있으면 매주 하더라도 매주 “예수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하는 십자가의 죽으심의 대한 현재적인 감격이 새로워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자기를 다 버리셨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었습니다. 막힌 담장이 허물어지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우리에게는 정죄 함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외 그 복음에 대한 감격, 구원에 대한 그 십자가의 감격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 주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끊어 진 것 때문이 아닙니까? 감동이 없는 차가운 성찰, 눈물 한 방울 없는 게으른 기도생활,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지 못해도 그것이 영혼에 적 신호등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그 방종한 신앙생활, 이런 것들이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헛되게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이 고난의 주간에 기도하기 싫을 때에는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의 고난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생활이 우리에게 고난을 요하더라도 우리는 그 고난을 지불할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지 못 할 때에도 우리들이 십자가에서 자기를 찢으신 주님의 고난의 형상을 보면서 주님이 두루 마리에 기록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저렇게 죽으셨으니 우리들이 주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고난과 아픔이 따르더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겠다 라고 하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십자가의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과 한번 허물어진 그 담 위에서 늘 주님과 교제하며 사는 화목한 삶에 있어서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5. 죄사함과 헌신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 제물을 먼저 드리되 그 머리를 목에서 비틀어 끊고 몸은 아주 쪼개지 말며 그 속죄 제물의 피를 단 곁에 뿌리고 그 남은 피는 단 밑에 흘릴지니 이는 속죄 제요 그 다음 것은 규례대로 번제를 드릴지니 제사장이 그의 범과를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레5:8-10)
이 레위기에는 제사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제사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에 대한 많은 예표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선 우리들이 읽은 이 부분은 소위 ‘속건제’라고 하는 제사의 규례를 설명하다가 나온 부분입니다. 속건제라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나 성물에 대해서 범죄 하거나 혹은 자신을 더럽히거나 객관적인 죄가 있을 때 적용되는 그러한 제사입니다. 그 제사는 하나님 앞에 흠 없는 수양을 기름진 부분을 떠서 불태워 드림으로서 죄를 사하는 그러한 제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보면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속건 죄 이야기를 하면서 번제가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번제는 일반적으로 제물을 통해 제사 드리는 자의 헌신을 특별히 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제 그러면 떠오르는 의미가 제사를 드리는 자의 철저한 헌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속건 제나 소제, 회목제, 속제제는 번제와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소제, 화목제, 속건제, 속제제는 잡은 짐승 가운데 일부를 불태운 다음에 나머지 부분은 제사장이 먹거나 혹은 화목제 같은 경우는 제사장과 제물을 받친 자가 함께 친교의 식사를 나누는데 사용되는데 번제는 아무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짐승을 잡아서 남김없이 모두 다 태워 버려서 남은 부분이 없기 때문에 제사 드리는 자나 제사장이 번제의 제물은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번제에는 흠 없는 수컷 혹은 빈부에 따라 소나 양, 염소, 지금 말하는 것처럼 비둘기와 같은 동물들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어떠한 잘못이 있어서 신정 모독적이고 자기를 더럽힌 죄를 지은 사람들이 두 가지의 제사를 드려야 했는데 하나는 자기의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와 하나님 앞에 드리는 번제, 이 두 가지가 함께 묶어져서 죄 사함을 얻는 그러한 제사가 되었다고 오늘 성경 10절에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며 오늘 설교자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오늘 이 특이한 본문을 읽었을까요?
우선 우리들이 어제는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계속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보혈로 이미 이루신 화목을 실제의 생활 속에서 계속 누리면서 살아가는 길이라고 말씀을 드렸고, 그것이 바로 보혈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저 십자가 외에는 나에게 참 소망이 없다라고 하는 이 믿음은 구원받을 때 한번만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그렇게 십자가를 바라 볼 수 있는 믿음의 마음이 유지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유지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유지된다고 말씀을 드리면서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교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와 성찬에 의한 감동이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세상에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 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조차도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한번도 깨뜨리지 않고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끝까지 온전히 유지하고 누리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다 그게 그거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히 거룩하게 사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나머지 사람은 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유지하면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에 있어서, 마음에 있어서 그 거룩함의 차이는 짐승과 인간과 가까울 정도의 커다란 차이를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칫하면 신앙에 있어서 우리가 완전해 질 수 있다는 이러한 사고는 거절하며 아예 처음 서부터 온전해 질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을 저버리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완전해지고 온전해 지라고 하는 명령을 스스로 짓밟아 버리는 그러한 결과도 가져옵니다. 그러니까 두 면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완전해 질 수 없다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성경은 끊임없이 동적인 의미에서 그 완전에 도달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삶을 살기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죄와 우리의 허물 그리고 우리의 불순종 때문에 혹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결핍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교제가 깨뜨려 질 수 있습니다. 완전히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깨뜨려 진 채 방치되고 있다라고 하는 것과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끊임없이 누리면서 살려고 애를 쓰다가 이따금 씩 우리의 연약함을 인해서 그 교제가 방해를 받는 것은 다릅니다.
산에서 큰소리로 목청껏 소리를 지를 때 언제 그 소리가 가장 멀리 잘 들리는지 아십니까? 보슬비가 살 살내리는 습기 낀 바람 불지 않는 날 목소리가 가장 멀리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함치며 외쳐도 바람이 불면은 소리가 흩어집니다. 우리의 소리가 들렸다가는 들리지 않고 계속 끊어집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교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교제를 완전히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은 없지만 끊어진 체 방치하는 것과 끊어질 것 같으면서도 그렇게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누리며 살아가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몸부림으로 가끔 끊어지면서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이어진 인생과 가끔 이어지면서 거이 끊어진 삶을 산 인생은 같은 인생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전자의 사람은 주님과 나누는 아름다운 교제 속에서 가끔 주님의 은혜의 빛에서 멀어진 것 같고 어두운 골짜기에 들어선 것 같은 위를 느끼고 마음이 메말라 우는 것을 느끼지만은 후자의 사람들은 가끔 울컥 솟아오르는 기쁨과 감격을 누리지만 인생의 대부분의 날들은 깊은 바다 속 어두움에서 지낼 것이며 거기에는 마치 하나님의 은총의 햇살이 깃 들지 않는 죽음의 바다와 같은 그러한 삶이 연속됩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십자가의 도리와 관련해서 그러면 그 최상이 정말 그 예수 그리스도와의 아름다운 교제를 유지하면서 언제든지 십자가를 향해서 감격이 살아있고 그 십자가의 진리에 대해서 반응 할 수 있는 그러한 그 여린 마음을 유지하면서 살았으면 참 좋겠는데 그렇지 못했을 경우에 그리스도와의 그러한 교제를 잃어버리고 우리들이 범죄해서 영혼의 어두움에 빠졌을 때 그 때에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소개하시기를 나 여호와는 자비로우며 은혜로우며, 오래 참는 여호와라고 아주 기쁘게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며 범죄 하는 자들을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우리에게 소개하셨습니다. 특별히 자비라는 말에 이 번역은 번역 역사상에 있어서 유래를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훌륭한 번역입니다. 자애로울 자에다 슬플 비자를 썼는데 이것은 슬픔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뜻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비라고 부르는데 하나님의 자비는 따라서 긍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냐 라고 말할 때 세 가지의 요소로 말하는데 하나님의 자비, 즉 하나님의 긍율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입니다. 그런데 그 긍휼이라고 하는 것도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는 항상 눈물을 머금은 사랑입니다. 그것이 자비의 의미입니다.
높은 곳에서 앉아서 그래 이것이나 먹어라 하면서 호의 베푸는 식의 황제의 호의 베품이 아니라 진실로 그 존재 자체를 깊이 사랑하고 그 존재와 어떤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데서 비롯되는 눈물 썩인 애정이 하나님의 자비라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자비하신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 그리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기뻐하시되 특별히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사유해 주시기를 즐겨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입은 다음에 그리스도와의 그 아름다운 교제를 계속 유지하지 못해서 십자가와 보혈의 능력으로부터 멀어지고 구원의 감격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을 그대로 버려 두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한 편으로는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고 있는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인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피 토할 것 같은 뜨거운 십자가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추억을 간직한 체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저버리고 살아가는 곤고한 영혼들을 위한 눈물겨운 주님의 사랑의 초청을 이 십자가 보여주기도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소망일 뿐만 아니라 이미 믿는 우리들을 위해서도 우리의 삶과 죽음 한 가운데서 유일한 소망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뵈올 때마다 우리가 아직 주님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그리고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마음과 그리고 우리의 온 인격으로 그분을 거슬리며 대적하며 사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때조차도 그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을 보기 때문에 또한 이제 우리들이 그 피로 속제함을 입은 자로서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후에 하나님 앞에 그 십자가의 놀라운 감격과 우리를 구원해 주신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채 죄 가운데 있어서 곤고해진 영혼들에게도 그 십자가는 여전히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주님의 고난의 표적이며 우리가 바로 그 십자가를 볼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 십자가에 죽으셔서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화해의 길을 여셨고 열려진 그 길을 다시 닫을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관계임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는 이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만이 와서 거기서 죄를 자백하는 그것이 아니라 이미 믿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또한 그 십자가 앞에 와서 자기의 죄를 깊이 자복하고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받고도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채 세상에서 방황하던 영혼들이 그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할 때 주님께서 여전히 그들을 그 십자가의 능력을 회복하게 만들어주시는 치유의 십자가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여기에서 나오는 가정적인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어떤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 범죄 하게 되었을 때 그때에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하나님과 한번 잃어버린 아름다운 교제의 관계를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졌는데도 쉽게 회복하지 못하는가? 회복의 길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오늘 다루어 보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우선 그렇게 범죄한 사람을 위해서 두 제사가 하나로 묶여져서 죄 사함을 이루는 요건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는 속제 제물로 드리는 제물 이였고 또 하나는 번제로 드리는 제물 이였는데 이 제물은 똑같은 것 이였습니다. 비둘기 두 마리, 여력이 없을 때에는 이 비둘기로 사용해서 하나는 죄를 속하기 위해서 드리고 또 하는 번제 제물로 드리는 이러한 일들을 해야 했습니다. 속제 제물은 말 할 필요도 없이 자기가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속제의 의식에 바쳐지는 제물이고 번제 제물은 그 제사와 함께 겹쳐서 자기를 하나님 앞에 온전한 헌신으로 받치는 상징으로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끊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우리에게 화해의 길을 열어주신 것은 그 화해의 길을 부지런히 걸어가서 그 찢어진 휘장사이로 부지런히 그 지성소를 드나들며 하나님을 뵈옵고 하나님과 교제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사귀고 우정이 있는 경배의 교제를 나누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 휘장을 찢으셔서 단번에 성소를 지나 지성소,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까지 들어가도록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이 열어주신 길은 우리 스스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그러한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지만 우리의 범죄로 인해서 우리의 영혼이 어두워지고 우리의 마음이 둔해지기 때문에 주님의 그 지성소에서 죄가 없을 때에 나누었어 던 그 친밀한 그리스도와의 교제 하나님 아버지와의 완전한 사귐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일시적으로 지성소에 들어오는 길을 막아 놓으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지성소까지 들어갔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의로운 성품에서 비롯되는 거절 감을 스스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정말 주님을 닮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구속하신 그 뜻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사랑이 쌍방 적인 사랑이 되어야지 일방적인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 사랑을 느낄 수 있고, 또 우리가 우리의 사랑을 그분께 드릴 수 있고 우리의 사랑이 그분께 받아드려지는 느낌이 우리들이 받을 수 있는 그러한 관계가 될 때에 그때에 정말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한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독특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모두 지성소로 나오는 길을 열어주셨지만 인간 스스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 때문에 주님의 그 지성소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은 아직 한마디도 아직 꾸중하시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낮을 피하여 숨었던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나면 양심이 스스로 지성소로 들어가지 말라고 우리를 강력하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범죄하고, 혹은 범죄 하도록 유혹을 받으면서 세상을 깊이 사랑함으로 범죄를 향해서 마음을 내어준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거룩한 그 만남을 회피하고싶은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양심이 하나님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깨뜨려진 상태라고 하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때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가장 시급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들이 먼저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용서받는 것입니다. 오늘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 중 가정적인 어떤 사람이 먼저 와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먼저 속제 제물을 드리고 그 다음에 번제 제물을 드리라고 지적 받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우리의 죄 때문에 잃어 버렸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십자가 복음의 보혈의 능력 가운데서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그런 경우에 우리 자신의 죄를 정직히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토설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의 용서를 받는 일이 다른 어떤 일 보다도 시급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들이 행하는 모든 위선적인 행동이나 가식적인 행동, 하나님 앞에 범죄 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이 생겨서 그래서 영혼의 어두움이 깃들 어서 우리의 영혼이 곤고해 지고 우리 영혼이 심히 상해있는 이것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토설하고 죄의 용서를 받음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보혈의 능력 가운데서 살아갈 수가 없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끊임없는 회개와 믿음의 두 날갯짓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날마다 자기의 죄를 토설하고 죄 용서를 받는 그런 사람들의 삶 속에서만 십자가 보혈의 능력은 지속적으로 유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완전한 삶을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온전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다가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부패성과 연약성으로 말미암아 죄에 떨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화목함을 잃어 버렸을 때에 최상의 선택은 그 죄가 하나님과의 불 화한 관계가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즉각적으로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죄 사함의 속제를 힘입는 것입니다.
영혼을 향해서는 처음 믿는 그 순간에 속죄함을 받았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양심이 그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소리치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그 죄를 인해서 실질적으로 새롭게 들어온 그 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들이 영혼을 향해서는 정죄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짖는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즉각적으로 회계하고 자백하고 용서를 받는 것만이 지속적으로 보혈의 능력아래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들은 얼마나 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범죄 하는 것은 매우 후한 인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진심으로 회개하는데 있어서는 얼마나 인색한지 한번 생각해 보기 시를 바랍니다. 존 오웬은 말하기를 “참된 회개의 마지막 목표는 하나님과의 평화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 죄에서 돌이켜서 하나님과 참된 평화를 이루었느냐 이루지 않았느냐 하는 것은 어떤 죄를 지은 다음에 눈물로 기도했느냐 안 했느냐에 문제가 아니라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이전의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며 기도하게 만들었던 그 죄가 이제는 자신에게 혐오스러우냐 여전히 사랑스러우냐 그것이 하나님과의 평화가 회복되었느냐 회복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의 관권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들이 무수하게 많은 죄를 짓고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서 처리되는 죄는 지은 죄 중에서 매우 소수에 불과하고 우리들이 안 죄도 사실은 어떻게 하든지 핑계를 대고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인정했더라도 철저하게 왜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고 그 죄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나를 주님 앞에 실족하게 만들었으며, 그리고 그 뿌리가 어떤 것이고 어떻게 자신이 그것과 싸워야 하겠다고 하는 철저한 분석과 반성이 없이 그저 그냥 하나님 앞에 범죄 했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그 후회가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 때문에 받는 그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눈물 흘리게 하는 그것이 회개라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는 계속해서 마치 갚지 않고 밀리는 가겟집의 외상 장부처럼 계속 싸여가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는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가 점점 사라지게 되니까 점점 보혈의 능력은 자신의 내면 속에서 희미해져 가고 그렇게 보혈의 능력에 붙잡힌 삶이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수면 적으로 말해서 다가오는 죄에 대해서 점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려서 마치 휘도는 물결을 따라서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빠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휘도는 물줄기를 따라서 물 아래로 빨려 내려가듯이 이간이 그렇게 비참한 처지로 휘말려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우리의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해서 깊이 용서를 받는 것이 그리스도의 그런 친밀한 교제를 회복해서 복음의 능력을 되찾는 길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실한 회개 우리의 지은 죄를 위해서 우리가 그의 죄가로 말미암아 마음의 번민하고 아파하는 그것 이상으로 주님께서 고통을 받으신 사실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습니까? 회개의 순간이 우리에게 얼마나 진지하게 우리 자신의 삶을 전환 할 수 있는 그러한 지점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보혈의 능력 아래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온전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인 동시에 즉각적으로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회개 할 수 있는 철저한 회개의 영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 이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딱딱하고 굳어져 있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을 인해서 우리의 마음이 민감한 것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 우리들이 민감한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화) 목사님이 사랑하던 어떤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은 것이 2년 동안이나 아침저녁 으로 생각이 나 고통스러웠음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비난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2년씩이나 매일 고통 해 본적이 없었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람이 한 비난이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고 자신 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기 보다 사람 앞에서 사는 자임을 보았다는 고백.
이러한 고백은 저만의 고백이 아닐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설교자가 강단에서 퍼 붇는 죄에 대한 지적을 성경에 의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증거 하는 지적을 가지고도 깊이 마음 아파하는데 하물며 여러분들이 의로우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 대해서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고 그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무언가를 깊이 지적하실 때 그것 때문에 여러분들이 너무나 마음 아파하고 고통하고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그것을 위해서 괴로워하고 아파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거의 회개하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는 그러한 표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말로는 십자가를 말하고 심지어는 십자가가 중요하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훈수도 두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체험적으로 역사하고 있는 십자가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된 십자가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의 뿌리는 이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교제, 체험되고 있는 복음의 뿌리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의 활력은 울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 순간마다 우리들이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삶을 살수 없는 인생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완전한 삶을 살수 없고 완전한 삶을 성취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온전한 회개는 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우리가 피할 수 없이 지었던 우리의 죄 아직까지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세상사랑 때문에 범하고 있는 우리의 죄와 많은 허물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자복할 수 있는 그러한 마음과 그러한 은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왓슨’이라고 하는 청교도 설교자가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더러운 삶들은 회개의 눈물로 씻고, 타오르는 성령의 불길로 사르기 전에는 깨끗해 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형식적인 교회 생활이나 분주하게 섬기는 우리의 봉사 마음에도 없는 헌신,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정결해지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의 지은 죄를 돌아보고 반사적이고 즉각적인 태도로 하나님 앞에 그러한 회개의 순발력을 지닌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딱딱하고 굳은 마음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죽는 것에 대해서는 대단치 않게 생각하면서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마음속에서 작은 죄의 야수의 새끼와 같은 것들을 키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보호를 받으면서 우리 안에 죄가 자라고 우리의 보호를 받으면서 우리 안에서 불 신앙들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서 불 신앙과 죄들이 자라면서 우리는 점점 하나님 앞에 회개 할 수 없는 돌같이 굳고 얼음같이 차가운 마음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들어도 감동 할 줄 모르는 돌 같은 마음은 이런 회개하지 않는 오랜 동안의 삶을 통해서 만들어진 하나의 아주 나쁜 작품이고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가장 복된 것이 무엇인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축복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재물이나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영애를 우리의 손에 소유하는 것이 성도의 축복이 아닙니다. 또는 남다른 많은 재능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도 우리의 인생의 있어서 가장 큰 가치 일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언제든지 완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뒷면으로 돌리면서 잘려나간 부분)
-못한 것들을 지적해 주실 때에 다윗과 같이 그 자리에서 깊이 회개하고 자기의 죄를 인해서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고 즉각적으로 참회 할 줄 아는 겸비한 마음이 있는 누군가가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의 훌륭한 장점을 칭찬하고 높여줄 때에는 항상 마음속으로 다 쓸데없는 이야기야 라고 말해야 하지만 어떠한 개기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의 잘못과 불결의 혹은 죄에 대해서 지적을 해 주실 때에는 만조 백간 들이 보는 앞에서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고 어린아이처럼 보위에서 내려와 뒹굴었던 다윗과 같은 참회의 마음의 갖는 사람들이 될 때에 우리들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으로 다시 보혈의 능력을 회복한 삶을 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매 순간마다 이런 보혈의 능력과 십자가 능력 아래서 살아가는 그러한 성도들이 될 때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칭찬 받는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고 잠시 실패할지라도 다시 보혈의 능력으로 돌아가서 그 능력을 힘입는 그러한 삶을 살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하고 참회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언제나 그늘이 됩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정직하게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진심으로 참회하는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됩니다. 그 십자가 그늘 아래는 죄가 적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크게 회개한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여러분들이 천국에 가게되면 그 문을 들어서기 전에 그 문 위에 이렇게 쓰여진 것을 발견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무나 오라” 그러나 여러분들이 천국을 들어간 뒤에 여러분들이 들어온 문 뒤를 돌아보면 이렇게 쓰여졌을 것입니다. “회개한 자들이 들어온 곳” 이라고 말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한때 보혈의 능력을 힘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잃어버리고 어그러진 가운데 그 보혈의 능력으로부터 멀어져서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 이면서도 빛 가운데 살지 못하는 사람들, 진리를 아는 지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식의 의해서 주장되고 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주님과의 사랑의 기억은 있지만 지금 그러한 관계를 잃어 버렸기 때문에 지성소에 스스로 들어가고 있지 못하고 있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은 주님께서는 오늘도 부르셔서 그들에게 피할 바위를 제공하시고 양심과 율법의 송사를 막아 주시는 방패가 되십니다. 단 하나 조건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깊이 회개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 햇빛 심히 쬐이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순전한 몸을 갈가리 찢으시고 흠 없는 보혈을 우리를 위해서 흘리셔서 우리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 피로 바르셨는데 우리가 속죄함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외 그 햇빛 심히 쬐이고 그리고 짐이 무거운 광야와 같은 삶을 살아야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물론 주님을 떠나서 범죄한 우리들이 잘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믿고 단 한번 범죄한 사람들을 영원히 버리고 마는 십자가의 사랑이라면 왜 성경이 그토록 우리를 그 십자가 아래로 불렸겠으며 일찍이 구원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성도들이 왜 그렇게 입이 닳도록 숨 질 때 되도록 이 십자가의 죄인의 향한 값없는 사랑을 입이 닳도록 이야기했겠습니까? 그래서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은 하나님의 참 사랑을 잃어버리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두운 죄의 길에서 방황하며 그리스도와의 참다운 교제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오늘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완악하고 강박한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을 생각 할 줄 모르는 그렇게 너무나 지나칠 정도로 굳어버린 영혼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징계하시기도 하고 못 박힌 그 손으로 우리를 어루만지시며 피 바르시며 용서해 주셨던 그 손으로 사랑의 그 채찍을 드셔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그 질투 속에서 우리를 향해 부어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결핍과 외로운 속에서 주님과 나누었던 깊은 교제의 날들을 회상하게 만들어 주셔서 주님을 버린 대가로 우리 손에 움켜잡았던 잠시 있으면 이슬처럼 사라져 버릴 땅의 것들을 스스로 내려놓게 만드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주 달려 죽으신 십자가 우리가 생각 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왜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에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죄인들을 용납해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위대한 능력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십자가의 피로 이루신 임마누엘의 샘에서 한번 우리의 몸을 씻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먹어야 하는 이 죄와 슬픔으로 가득 차고 고통으로 충만한 이 세상을 지나면서 우리 안에는 이러한 세상을 이길 수 있게 하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정직하게 깨닫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우리조차 이길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다는 사실도 깨닫고 더욱이 이 시간도 시시때때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믿는 우리라도 삼키고자 울부짖고 있는 사단의 그 위협아래서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를 위해서 못 박혀 죽으신 그 십자가 임마누엘의 샘 아래로 나아가서 애나 고로의 샘에서 그 물을 마시고 소생했던 삼손과 같이 우리는 그 복음의 물을 마시고 다시 한번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하고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 졌을 때에 우리를 짓밟으려고 달려드는 그 모든 율법과 양심의 송사로부터 자유로와 지는 것도 그 보혈의 샘에서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없는 사랑을 만나면서 우리는 이렇게 짓밟히며 살아도 우리가 주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우리는 시시때때로 우리를 버리고 싶어도 주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버리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그 십자가의 은혜의 샘에서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과 화목하게 살 때에나 주님의 그 면전에서 쫓겨난 것 같은 그러한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에나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왜에는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우리가 스스로 주님 앞에서 멀어졌을 지라도 여호와의 낯 앞에서 사는 것밖에는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떠난 우리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살을 모두 갈아서 그 피의 즙으로 용서해 주신 그분이 그 사랑을 배반하고 우리들이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그 보혈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다시 급속히 옛 삶으로 돌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바라보십니다. 정말 우리가 잘못한 그 일은 너무나 큰 일 입이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교제로부터 멀어진 불쌍한 인생들을 향해서 주님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그 십자가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굳어진 심령을 가지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순간, 말로 할 수 없는 수많은 아픔을 주님께 드렸고 이 세상에 나아가서는 영원히 속죄 할 수 없을 정도로 주님의 이름에 불명 애를 끼쳐 드렸습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우리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습게 본 것이 얼마나 많으면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죄인을 부르실 때에 그 죄인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죄인에게 무엇을 원하셨습니까?
죄인은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자기의 죄를 보상 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범죄해서 복음의 빛을 버리고 죄의 어두움 속에 들어가서 주님을 찬송하며 살도록 부름 받은 인생이 주님을 모욕하며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 음성은 어떤 음성입니까? 돌아와서 네가 입힌 나의 손해와 네가 저질러 놓은 이 엄청난 잘못들에 대해서 배상을 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는 돌아 오라, 너는 다만 내게로 돌아 오라. 내가 너를 찢었으나, 싸맬 것이요. 내가 너를 때렸으나 내가 너를 고치리니 제발 너는 내게로 돌아 오라“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잃어버리고 보혈의 능력을 잃어버린 체 살아가는 우리들을 향한 주님의 처절한 초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던 사람들은 몰랐기 때문에 주님의 이러한 구원의 초청을 거절했고 우리도 그러한 사람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구원을 받았고 그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어떠한 줄을 알았고 경험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회개하고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의무에 충실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는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깊이 회개할 때 마치 허물이 있었던 오늘 이 성경에 나오는 가정적인 이스라엘 사람이 속죄의 제물을 드림으로 죄 용서를 받았던 것 같이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죄 용서를 받는 바로 그 자리에서 헌신을 상징하는 그 번제가 함께 드려진 것은 진정한 회개와 그리고 용서 뒤에 우리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그림과 같이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할 수 없는 죄인들을 그리스도께서 용서 하셨을 때 그래서 저 어두운 밤을 지나 복음의 밝은 빛이 있는 새벽 앞으로 나아 왔을 때 그래서 이제는 어두움의 일들을 버리고 빛 가운데 살게 되었을 때 우리들은 마땅히 이렇게 번제로 하나님 앞에 바쳐진 비둘기와 같이 누구도 우리를 소유 할 수 없게 모두 태워서 날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우리 자신을 드려야 했습니다. 이전에는 제물을 드렸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 제사장이면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들고 가서 아버지 앞에 바치셨던 것을 본 받아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속제함을 입은 자녀로서 우리 자신을 들고 그리스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우리 자신을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것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남편의 것도 아니고, 부인의 것도 아니고, 여러분의 부모의 것도 아니고, 여러분의 자식의 것일 수도 없고 심지어는 여러분은 교회의 소유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의 어린양의 보혈의 피로 속죄함을 받는 순간 구별되었고 여러분은 누구도 소유하수 없는 하나님 자신의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 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남은 유일한 의무와 기쁨은 자기를 아무도 소유 할 수 없게 하나님 앞에 통제로 드리고 그리고 예전에 재물은 타오르는 물리적인 불길로 탔지만 이제 우리의 몸은 물리적인 불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받는 이 세상의 핍박의 불로 태워져야 합니다. 그 천한 몸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버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불 붇는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태워서 남김없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리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우리의 거룩한 만남의 제단 그 위에는 항상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를 온전히 태울 수 있는 그러한 거룩의 불길이 타올라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경배하고 그분의 임재와 마주하는 그 곳에서 우리가 구별된 존재이고 우리는 누구의 것일 수도 없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시고 우리의 이름을 불러 그 피로 속제해 주신 그 순간에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묶여 종이 된 자유인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가치 없는 죄인들을 위해 흘리신 그 보혈의 사랑을 우리가 무엇으로 값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난 아버지 하나님의 참 사랑을 보답한다는 것은 우리의 손으로 천지를 다시 창조하는 것보다 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을 다 갚을 수 없고 거기에 보답하는 삶을 살수 없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이고, 죄 없는 그분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와 같이 쓰레기와 같은 인간들을 위해서 당신의 고결한 몸을 산산이 부수셔서 우리를 위한 제물로 흩어 뿌리셨는지를 아는 그 순간 우리는 감히 우리의 인생으로 그 십자가의 사랑에 보답하는 인생을 살수 있다고 말하지 않지만 그 사랑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홀로 있을 때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을 때나, 먹을 때나, 잠잘 때나, 꿈꿀 때나 생시에 살아서 행동할 때나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분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 이외에는 우리에게 참된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랑은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영광일수 없습니다. 더욱이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짓밟으며 그 위에 다스리듯이 굴림 하듯 살아가는 생애가 우리의 자랑거리일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은 주께서 그 십자가의 피로 건지신 그 은혜의 감격하며 우리의 혈관에 피가 흐르고 우리의 코끝에 호흡이 있는 동안 어떻게 우리의 인생이 좋으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온전히 받쳐진 헌신의 인생을 살수 있었는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숙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설교자 찰스 스펄젼은 말하기를 “누가 나더러 황금의 면류관을 쓰고 이 세상의 제왕이 되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에게 말하겠습니다. “나는 그런 사소한 일에 내 인생을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친절하시고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과 글로서만이 아니라 생생하게 보이는 삶으로서 우리에게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구보다도 이 십자가의 감격을 일생동안 유지하며 살았던 우리의 신앙의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인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지상의 생애를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음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의 생애가 왜 하나님의 아들 이셨음에도 자기를 낮추시는 생애이셔야 했습니까? 무엇 때문에 높으신 그분이 스스로 낮아지신 생애를 사셔야 하셨습니까? 얼마든지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자기를 영광 가운데 드러내실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생동안 짓밟히는 자처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자처럼 가난한 자들과 함께 가난해 지고, 고통 하는 자들과 함께 고통을 받으시면,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죄인이라고 버림을 받고, 죄인들에게는 자기들에게는 자기들에게 필요로 하는 것들을 주시지 않는 다는 이유 때문에 멸시를 받으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왜 주님은 그렇게 낮아 지셔야 했습니까? 왜 주님께서는 그토록 자기를 처서 복종시키는 그런 삶을 사셔야 했습니까?
그분의 너그러운 생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혀온 그 여인을 향해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까? 돌멩이에 피를 묻히기 위해서 그 돌을 높이 든 유대인들, 그들이 그 돌멩이를 모두 내려놓고 사라질 때 그를 정죄할 수 있는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그 비참한 여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여러분은 기억하고 계십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그렇게 죄인들을 향해서 너그러운 생애를 사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구원받은 이후에 그렇게 가슴이 저미도록 감격한 대목이 바로 그것 이였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향해서 일체의 오래 참으심으로 기다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너그러운 사랑 당신을 대적하고 그리고 의로운 사람 스데반의 순교의 피를 손에 바르는 그 순간에 조차도 주님이 너그러움으로 일체의 오래 참으심으로 바울을 향해 참아 주셨던 그것에 대해서 바울이 그토록 감격하며 말 할 수 있었던 것도 주님의 그 오래 참음과 자비하심과 너그러움 때문 이였습니다. 죄인들을 향해서 참아주실 필요가 없고 너그럽게 대해 주셔야 할 필요가 없는, 그러한 가치가 없는 우리를 향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우시던 그분이 자신을 향해서는 너무나 가혹한 삶은 사셨습니다.
그분의 생애에 안식이 없었습니다. 깨어있는 시간만이 그분의 것이 아니라 잠드시는 동안에도 그분의 시간은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먹고, 마시고, 그리고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주무셨습니다. 그분이 왜 그렇게 자기를 철저히 쳐서 그렇게 가혹하게 자신을 복종시키는 형극의 길을 걸어 가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렇게 자기를 처서 복종시킨 가혹한 삶을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이 세상에서 어떤 좋은 것들을 보상으로 받으셨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곳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낮추시는 겸비함과 노예처럼 자신을 처서 복종시키시는 처절한 복종의 그 마지막은 꽃으로 꾸며 쓴 황금의 면류관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박수와 갈채를 받는 월계관이 아니라 쓰디쓴 십자가였습니다. 자기의 옥채를 깨뜨려서 피 발라야할 그 십자가, 그것이 복종하신 당신의 생애를 기다린 마지막 이였습니다. 왜 주님이 거기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까?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죄 없으신 생명이신 그분을 그렇게 일평생 복종의 생애를 사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힘은 어디에서 못 박게 한 힘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자기를 하나님 앞에 남김없이 바치고자 하는 헌신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생애는 어떤 사람들이 주님의 생애를 읽으면서 감동을 받을까요?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세상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기억하며 눈물 많이 흘리시던 그 어머님은 어떤 생애를 사신 분이셨을까요. 어떤 사람들이 고난받으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쉼이 없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겸비함과 복종과 죽음으로 가득한 생애를 보면서 감격합니까? 주를 위해서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예수 생애를 대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우리의 양심과 부담을 덜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요. 다시금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리스도와의 피로 구속하신 우리들이 당신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서 사는 그 삶을 회복 시켜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그 십자가 아래로 다시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회개함으로 그분과의 관계로 돌아가지만, 용서의 감격을 경험한 후에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가지 이러한 죄인을 용서하셔서 다시 당신의 사랑의 품으로 불러 주시는 예수를 위해서 나를 다 드리는 헌신된 삶을 사는 것 그래서 나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찬란하게 증거되는 것 이외에는 희망이 없다라고 하는 헌신의 고백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경험하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