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잘 사는 것
(201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5년 4월 26일 - 7월 5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5년 7월 16일
목 차
1. 남자와 여자로 지으심(창 1:27-28) 2015.4.26 주일오전 1
2. 가정을 세우는 원리(창 2:23-24) 2015.4.29 수요예배 9
3. 가족끼리 왜 이래(창 3:12) 2015.5.3 주일오전 19
4. 남편에게 복종하라(골 3:18) 2015.5.6 수요예배 27
5. 네 부모를 공경하라(창 3:12) 2015.5.10 주일오전 38
6. 네 자녀를 사랑하라(엡 6:4) 2015.5.17 주일오전 46
7. 가족을 돌아봄(딤전 5:8) 2015.5.24 주일오전 54
8. 그치지 않는 고통(롬 9:1-3) 2015.5.27 수요예배 61
9. 아내를 사랑하라(골 3:19) 2015.5.31 주일오전 69
10.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2015.6.7 주일오전 79
11. 부부 사랑의 완성(엡 5:32-33) 2015.6.14 주일오전 87
12. 홀로 믿는 그대에게(고전 7:10-14) 2015.6.21 주일오전 99
13. 독신과 결혼의 유익(창 2:18, 고전 7:32-35) 2015.6.28 주일오전 107
14. 사랑에 아픈 그대에게(시 27:10) 2015.7.5 주일오전 120
가족과 잘 사는 것 1 (2015.4.26 주일오전설교)
가족과 잘 사는 것 2 (2015.04.29 수요예배)
가족과 잘 사는 것 3 (2015.05.03 주일오전설교)
가족과 잘 사는 것 4 (2015.5.6 수요예배)
가족과 잘 사는 것 5 (2015.05.10 주일오전설교)
가족과 잘 사는 것 6 (2015.05.17 주일오전설교)
가족과 잘 사는 것 7 (2015.05.24 주일오전설교)
가족과 잘 사는 것 8 (2015.5.27 수요예배)
가족과 잘 사는 것 9 (2015.05.31 주일오전설교)
가족과 잘 사는 것 10 (2015.06.07 주일오전설교)
가족과 잘 사는 것 11 (2015.06.14 주일오전설교)
가족과 잘 사는 것 12 (2015.06.21 주일오전)
가족과 잘 사는 것 13 (2015.6.28 주일오전설교)
가족과 잘 사는 것 14 (2015.07.05 주일오전설교)
가족과 잘 사는 것(1) 2015.04.26 주일오전예배
< 남자와 여자로 지으심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7-18)
I. 들어가는 말
- 행복한 가정의 비결 '죽어 살기'
- 칸트의『영원한 평화』Pax~이론
- '자유의 매장지 안에서의 평화'임
- 타락 전후 신적 기관인 가정과 교회
- 가정은 세계 창조의 경륜과 관련됨
II. 사람을 지으심
- 천상과 지상의 두 세계를 창조하심
- 지상세계 통치의 대리자 인간 지위
- 하나님과의 교제와 하나님의 형상
- 하나님 닮은 영혼의 특성과 온전함
A. 남자와 여자로 지으심
- 흙(아파르)과 생기로 사람을 만듦
- 육체의 생명 영혼 그의 생명 하나님
- 혼자 사는 것 좋지 않음 온전치 않음
- 외로움보다 인류 창조의 계획 관련
- 어머니같은 하나님 탕자와 호세아
- 하나님의 부성과 모성 현시하려고
B. 돕는 배필을 지으심
- 아담과 하와의 창조 방식의 차이점
- '케네그도'와 '돕는 배필'의 해석
- 남성 우위론의 잔혹한 폭력의 역사
- 질서가 존재하나 존엄과 가치 동등
C.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심
- 한 몸에서 두 사람 만드신 신적경륜
-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 우월이 아니라 한 몸의 연합 보여줌
- 남녀만이 아닌 모든 인류 연합 현시
- 연합의 본질은 '네 몸같이'의 사랑
III. 두 가지의 명령
- 인류의 대표자 아담에게 명령하심
- 종교와 노동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
A. 생육하고 번성함
- '하와'라고 부름과 여성의 생명성
- 무에서 유 창조하듯 인류를 생산함
- 온 세상을 가꿈과 인류사회의 형성
- 교회는 미래 인류사회의 복된 모형
B. 정복하고 다스림
- 정복과 다스림의 차이 남자와 여자
- 개척을 위한 용기, 투지, 결단 필요
- 다스림 위한 지혜, 세심, 공감 필요
- 정복지향의 남자와 관계지향 여자
VI. 적용과 결론
- 인류창조의 하나님 경륜을 숙고함
- 그 경륜 안에서 가정 세우신 뜻을 봄
- 가족과의 관계는 인간 되어가는 길
- 참 사람 되는 길이 얼마나 먼지 보라
가족과 잘 사는 것(2) 2015.04.29 수요예배
< 가정을 세우는 원리 >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 2:23-24)
I. 들어가는 말
- 물에 빠진 어머니와 아내를 구할 때
- 천륜과 인륜에 대한 기독교적 판단
- 남편과 아내의 사랑으로 세워주심
II. 사랑으로 세워짐
A. 인격적인 사랑으로
-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 부부가 잘 사는 것 감정적 사랑 아님
- 미혼남녀의 로망과 다른 현실을 앎
- 청교도들의 결혼은 반중매의 방식
B. 남자가 부모를 떠남
- 남편과 아내 모두 가정에서 독립함
- 부부 결합 방해하는 부모 관계 청산
- 독립적 주체로 자신들 인생 살아감
- 부모는 마음에서 자식을 놓아주라
- 자식의 자녀들에 대한 간섭 버려라
C. 연합하여 한 몸 이룸
- "연합하여" dabaq-결합해 한 몸 됨
- 육적 연합만 아닌 정신적 영적 연합
-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연합과 사랑
- 교회와 그리스도 연합에서 비롯됨
- 함께 생활+성적결합+정신적 연합
- 연합의 깨어짐 하나님께 대한 범죄
III. 적용과 결론
- 부부가 주님 안에서 사랑한다는 뜻
- 남편 아내의 장점보다 신미 때문에
- 무한정의 용납과 사랑을 기대 말라
- 지속적인 하나님 은혜 안에서 살라
가족과 잘 사는 것(3) 2015.05.03 주일오전예배
< 가족끼리 왜 이래 >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 3:12)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창4:8)
I. 본문해설
- 창조 시 완전하고 선한 상태와 유혹
- 완전하지만 안전하지는 않은 상태
- 인간의 위대함은 지성과 자유의지
- 두 가지 인식 능력 신앙과 이성 주심
- 유혹과 죄의 성향 없는 상태의 범죄
II. 부부 관계의 파괴
A. 유혹의 경로
- 선악과를 주신 의미와 은혜의 수단
- 하와의 감성에 호소한 뱀의 유혹임
- 눈의 밝음+하나님 같이+선악을 앎
- 지식+지위+호기심+감각+식욕임
- 하와가 자유로운 의지로 선택을 함
B. 타락의 효과
- 총체적 관계 파괴: 신+인간+자연
- 아담과 하와와 뱀의 책임을 물으심
- 타락과 인간성의 변화: 죄책+오염
- 이기심과 자기중심 뼈와 살이 아님
- 아담이 원망함 하나님+여자+열매
- 부부사이 아무 일 없고 단지 범죄함
- "뼈와 살"의 고백 신적 사랑에서 옴
- 신적관계 끊어지자 관계도 끊어짐
III. 형제 관계의 파괴
A. 가인과 아벨
- 아담과 하와의 동침과 자녀들 낳음
- 양치는 자 아벨과 농사짓는 자 가인
- 제사의 열납 여부: 양 첫 새끼+곡식
- 신약해석 아벨 믿음제사 (Hb 11:4)
- 믿음의 내용: 제사계시+최선드림
B. 최초의 살인
-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심과 분노
- 살인의 동기: 시기+하나님 원망함
- 하나님과 가족 관계가 함께 엮어짐
- "뼈와 살"로 고백할 형제 관계 파괴
- 철저한 자기중심성과 파괴적 본성
- 믿음으로 섬긴 자 제거로 무슨 이익
- 하나님조차 제거하고 싶었을 것임
IV. 적용과 결론
- 믿음으로 십자가 사랑으로 돌아감
- 타락했으나 믿음이 아벨에 사랑 줌
- 타락의 결과 극복하며 살 길을 보임
- 사랑할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옴
- 신적 질서 돌아갈 사랑 구함 기뻐함
가족과 잘 사는 것(4) 2015.05.06 수요예배
< 남편에게 복종하라 >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 (골 3:18)
I. 본문해설
- 하나님의 세계 창조는 질서 창조임
- 질서는 둘 이상의 사물 목적 지향함
- 남편과 아내 만드시고 질서도 주심
- 타락 이후 이 질서 위협받으나 잔존
- 이는 위계적 질서 아닌 기능적 질서
II. 아내의 덕목, 복종
A. 가족들 간의 덕목
-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덕목 규정함
- 복종, 사랑, 공경, 순종, 사랑 등 임
- 유기체적 가정 질서와 사랑으로써
- 남편에 대한 복종 쉽지 않음 보여줌
B. 복종의 의미
- 성경적 복종은 유교적 복종과 다름
- <맹자>의 삼강오륜 중의 부부유별
- 남편과 아내 구별과 타 부부와 구별
- 남존여비사상 <주역> 교훈의 왜곡
- "피차 복종하라"(엡 5:21) 주님 뜻
- '휘파쿠오'와 '휘포타소'의 차이
C. 남편의 머리됨
- 우열을 보여주기 위한 머리가 아님
-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비유 이유
- 생명적 연합과 사랑과 질서를 의미
- 존경할만한 남편 아니어도 복종함
- 모든 일에 대한 생각 없는 복종 아님
- 복종과 부부사이 정신적 연합관계
III. 하나님의 뜻을 생각함
- "마땅하다" aneken 꼭 맞다 맞춤 옷
- 메마른 논밭들과 강우 및 관계시설
- 사랑 정돗이 질서 혼란에 의해 낭비
- "신앙 좋고 존경할만한 남편을‥"
- 자신의 감정 아닌 주 뜻 함께 생각함
IV. 적용과 결론
- 곤히 잠든 남편의 얼굴 속의 외로움
- 아내가 알지 못하는 남편만의 사연
- 약한 자로 긍휼히 여기게 은혜 구함
가족과 잘 사는 것(5) 2015.05.10 주일오전예배
< 네 부모를 공경하라 >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신 5:16))
I. 본문해설
- 십계명을 주신 배경과 거룩한 생활
- 신과 인간들과의 관계 행복한 지침
- 깊은 사상이 없어도 행복에 이르는 지침
- 약속 있는 첫 계명 생명 길고 복 누림
II. 부모에 대한 공경
A. 공경한다는 의미
- “공경하라” 하나님께 대한 공경임
- 존중히 여김 + 관계 기뻐함 + 사랑함
B. 사랑이 필요함
- 사랑 없이 공경이 불가능한 관계임
- 하나님의 요구는 형식적 도움이 아님
-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 인 관계
- 존경할 부모를 둔 자녀는 배나 감사해야
III. 네 부모와 화해하라
A.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 무관심 + 사랑 없음 + 폭력 + 편애 등
- 그릇된 모범과 고통에 대한 기억들
- 상처와 맺힌 것이 영혼과 삶에 영향
B. 네 부모를 용서하라
- 용서 관계 회복의 길, 사랑으로 가능
- 하나님께로서 받은 사랑을 생각함
- 십자가는 그런 용서와 사랑의 원천
- 복음: 타락 + 죄의 상태 + 구원 + 새 삶
- 자녀에게 부모를 어찌 대할지 알림
IV. 적용과 결론
- “내게 화해할 부모라도 있다면....”
- 부모가 살아 있음이 큰 축복임을 알라
- 그리스도 상처난 가족 치료하심
가족과 잘 사는 것(6) 2015.05.17 주일오전예배
< 네 자녀를 사랑하라 >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I. 본문해설
- 성경은 자녀에 대한 사랑을 강조함
- 자식 사랑 어려움과 중요성 보여줌
- 특히 아이는 부모 사랑으로 사람됨
- 노엽게 하지 말 것과 진리로 양육함
II. 자녀를 노엽게 말라
- '아비들아' 사실상 부모에게 명령
- '노엽게 말라' 사랑보다 먼저 나옴
- 최고의 교육은 진리 안에서의 자유임
- 죄와 방탕을 억제하되 자유하게 함
- parorgizete ⇒ para+orgizo 합성
- 폭력+무관심+과한기대+부도덕
- 노여움은 표출 못 한 채 상처로 남음
- 어릴 때 상처: 소화능력+표출능력
III. 자녀를 양육하라
- 자녀를 양육함은 사람으로 살게 함
- 경쟁에서 이기게 하는 것도 필요함
- 많은 삶의 사태 속에 참 사람으로 삶
- 때론 지고 때론 이기며 인생 살아감
- 어떤 경우도 창조 목적 따라 살게 함
A. 주의 교훈으로
- paideia ⇒ 교육, 훈육, 훈련, 징계
- 단순한 지식 전달 아닌 전인적 돌봄
- 거기에는 '온전한 인간'의 상 있음
- 애정으로 거기 합치하는 사람 만듦
- 그 교훈들이 '주님에게 속한 것'임
- 좋은 부모는 참 사람이 되고픈 사람
- 지식+실천+인격화 되어 자녀양육
B. 주의 훈계로
- nouthesia 불러일으킴, 훈계 경계
- 자유와 자율을 주되 방종하게 앓음
- 중립의 선생 아니라 목적 지향 교육
- 목적은 비인격적 아닌 깨달음으로
- 인격으로 삶으로 책망소리 듣게 함
- 신령한 가치일수록 언어보다 그림
IV. 자녀를 사랑하라
- 회심 통해 인간 도리 사랑을 깨달음
- 그 사랑을 어린 자녀들이 알게 하라
- 부모 사랑 안자가 하나님 사랑을 앎
- 자녀사랑 없음에 평생 참회록을 씀
- 보이는 자녀사랑 없이 어찌 주님을
- 이제 사랑이외 아무것도 하지 말라
- 바르게 하라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 모든 책망과 교훈 동기 사랑이게 함
V. 적용과 결론
- 자녀보다 무엇을 더욱 사랑 하는가
- 자녀 완성 안에서 자신의 완성 보라
- 하나님께 회개하고 은혜를 구하라
가족과 잘 사는 것(7) 2015.05.24 주일오전예배
< 가족을 돌아봄 >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딤전 5:8)
I. 들어가는 말
-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 목회자가 성도를 돌보는 방법 교훈
- 과부 돌보길 권하다 가족 도리 말함
- 자기 친족 가족을 돌보도록 권면함
II. 가족을 돌아봄
- 과테말라의 크놉족의 사랑의 표현
- "사랑은 내영혼의 죽음"으로 표현
- 불신 가족에 대한 떨칠 수 없는 부담
- 단순한 전도 대상자로 대하지 말라
- 가족은 하나님 형상으로 사랑하라
A. 육신을 돌아봄
- 영혼만 소중히 여기는 이원론 버림
- 육신의 필요: 사회적+물질적 필요
- 화목을 이루는 자가 됨⇒선교원칙
- 마음에 맺힌 것을 자신 위해서 풀라
- 가족의 경제적인 형편을 돌아보라
- 다른 사람들이 자기로 덕을 입게 함
B. 영혼을 돌아봄
- 가족 전도를 성화의 도구로 삼으심
- 우리 삶 전체를 본 가족 전도 어려움
- 친밀함과 결점 아는 것이 전도 방해
- 그러나 가족 구원이 우리의 사명임
- 은혜 안에 있을 때 가족 향한 마음을
- 가족 전도 통해 자기 영혼 상태를 봄
C. 온전히 사랑함
- 조금 사랑은 쉽지만 온전 사랑 힘듦
- 타인 사랑 은혜고, 가족 사랑 본성?
- 모든 관계가 하나님 사랑이어야 함
- 가족 있을 때 소중한 것을 잃고야 앎
- "아들을 잃은 엄마의 편지"
- "남편을 잃은 아내의 편지"
- 하나님 안의 행복 가족들 누리게 함
III. 적용과 결론
- 가족 관계의 소중함을 아는 신자 됨
- 두 가족과 행복한 삶은 성공한 인생
- 영적 가족인 교회와 육적 가족 식구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루게 하심
- 십자가 사랑 회고하고 그 사랑 빌라
가족과 잘 사는 것(8) 2015.05.27 수요예배
< 그치지 않는 고통 >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1~3)
I. 들어가는 말
- 바울 세 번째 차 전도여행 끝 57년경
- 유대와 이방 그리스도인 위해 기록
- 구원론과 기독교 신앙 복음 중심성
- 하나님의 계획과 인류 언급의 맥락
- 이신칭의(1∼4)와 거룩 생활(5∼8)
- 문득 자기의 개인적 심경을 피력함
II. 가족에 대한 마음
A. 그치지 않는 고통
-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 말하다
- 그 사랑을 모르는 가족들을 생각함
-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음
a. 진실성: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임
b. 지속성: 큰 근심과 그치쟎는 고통
c. 신령성: 양심과 성령 안에서 작용
B. 자기희생의 소원
- "형제와 골육지친"위한 절실 소원
- 자기 저주를 기꺼이 자처하는 소원
- 하나님 사랑의 마음으로 가족을 봄
- 불신자 때 그리웠던 가족 교회 출석
- 가족 구원 교회 세움같은 연단 통해서
- 하나님 사랑으로 충만치 않은 우리
III. 우리의 헌신을 기다리심
- 아무리 사랑하고 전도해서 안 믿음
- 그렇게 진심적 사랑해 본 적이 있나
- 가족 아닌 우리가 변하길 기다리심
- 주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
IV.적용과 결론
- 불신 가족 위해 마음 다해 기도하라
- 진실한 사랑으로 주 안에서 사는 길
가족과 잘 사는 것(9) 2015.05.31 주일오전예배
< 아내를 사랑하라 >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골 3:19)
I. 본문해설
- 가정은 세계 완성위한 교회와 연관
- "뼈 중의 뼈 고백" 가정교회서 성취
- 온 인류를 주 안에서 한 몸 되게 하심
- 그때까지 남편 아내 관계 질서 사랑
II. 아내를 사랑하라
- agapete ⇒ eros, stolge, philia
A. 로마사회와 아내
- 가정에서 국가 당시 남존여비사상
- 남성 중심 가정 능력 힘의 질서 구축
- 여성 자녀 생산과 가사 돌봄 정숙함
- 검소, 침묵, 순결 동양적 가치 추구
- 행동반경 가정 국한 대외 발언 수치
B. 사랑하라
- 아가페의 대상이 아니었던 아내들
- 새로운 기독교적 질서의 핵심 사랑
- 천국은 사랑 나라 정의 사랑의 질서
- 천국이 부부관계서 먼저 실현돼감
- 천국이 가족관계 사랑으로 확장됨
- 그 시작이 부부의 사랑 결합으로 됨
C. 그 사랑의 표준
- "사랑하시고 자신 주심 같이" 엡5.
- 사랑의 목표: 거룩하고 흠 없게‥
- 희생 강요의 잔인한 목표 설정 아님
- 인간 완성이 결혼 목표 그 안에 행복
- 그리스도: a. 희생죽음, b. 사랑돌봄
- 한없는 용서와 은혜로 살아온 인생
- 그런 사랑으로 아내 사랑을 완성함
- 그 안에서 남편은 자기를 완성해 감
III. 적용과 결론
- 우리 안에 그런 무한한 사랑이 없음
- but, 그렇게 사는 게 인간 창조 뜻임
-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아야 할 이유
- 주 안에서 성령 통해 은혜 생명주심
- 서로 불쌍히 여기고 깊이 사랑하라
가족과 잘 사는 것(10) 2015.06.07 주일오전예배
< 아내를 괴롭게 하지말라 >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골 3:19)
I. 본문해설
- 주 안에서 다시 살림 받은 신자의 삶
- 옛 사람과 새 사람의 대비를 제시함
- 신자라도 옛사람 운명처럼 지고 삶
- 옛 사람은 옛 관계 새 사람은 새 관계
- 새 관계의 핵심은 거룩한 사람(12)
- 성도들간 사랑 말하다 가족을 언급
II. 아내를 괴롭게하지말라
- 피크라이네스쎄>퓨케: 쓴 비통한
- 힘의 우위로 인한 불균형과 폭력성
A. 괴롭힘이 아닌 것
1. 일반적 의미의 고난
- 불완전한 세상과 일반적 상황 고통
- 죄가 들어온 후 질병과 고통스런 삶
2. 하나님의 뜻을 따름
-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에 고통 따름
- 자기 안에 있는 악은 꺾으며 순종함
- 주 앞에서 자기 십자가는 당연한 것
B. 사랑 없음에서 나옴
- 미움인한 괴롭힘 사랑 부족 괴롭힘
- 아내의 모자람과 잘못 때문일 수도
- 그것을 용납하며 사는 것이 결혼임
- 자기 사랑의 큰 기대를 투사치 않음
- 신자의 소명 주님 성품 영광 드러냄
- <아내의 사진과 남편의 영정>
- 아내 기질 성향을 바꾸려하지 않음
-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신앙을
III. 자기를 완성하는 길
- 결혼은 단지 사는 게 아닌 인간 완성
- 결혼 생활 통해 온전한 신앙 필요 앎
- 배우자 결함 통해 부부 소명 발견함
- 사랑받음 뿐 아닌 사랑함으로 완성
- 아내와의 관계 소중히 (벧전 3:7)
- 사랑하기 힘들 때 자신의 바닥을 봄
- 사랑은 은혜에 순종하는 의지필요
- <아픈 날에 선물함> 주님을 의지함
IV. 적용과 결론
- 아내관계 포기치 않음이 인생 예의
- 치열히 살았고 이로써 무너짐 안됨
- 인생의 목표가 인간의 완성은 아님
- 아내와 남편으로 살게 하신 하나님
- 이제껏 베푸신 그 은혜를 생각하라
가족과 잘 사는 것(11) 2015.06.14 주일오전예배
< 부부 사랑의 완성 >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가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5:32~33)
I. 본문해설
- 성경은 신앙 밖에서 부부 사랑 말하지 않음
- 물론 부부 사이 상식과 본성의 빛 필요
- 그러나 그것으로 결혼 목적이 완성 되지 않음
- 교회와 그리스도를 말하다가 부부 관계 언급
- 참된 지체됨과 참 가족 됨이 하나님
II. 부부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A. 그리스도와의 연합
- 중생과 함께 그리스도께 접붙여짐
- 사랑을 부어주심으로 순종의 삶이 시작됨
- 원리적 연합과 실제적 연합을 비교함
- 이미 연합됐으나 온전한 연합을 추구함
- 꼭 같은 방식으로 남편과 아내로 살아감
B. 부부 사이의 연합
- 육체적 연합: 공간적 + 성적 연합
- 영혼적 연합: 그리스도 + 지체 연합
- 정신적 연합: 인격적 + 사회적 연합
III. 부부가 서로 사랑함
- 원리적으로 부부 관계는 사랑의 토대
- 사랑으로 관계를 시작하지만 완성은 아님
A. 아내를 교회처럼
- 자신을 버려서 교회를 사신 그리스도
- 부활 후 주님이 되셔서 교회를 자기 몸으로 여기심
- 인간이 자기의 몸을 위하는 것은 본능임
- 진정한 사랑은 노력을 안해도 저절로 되는 사랑
- 끊임없이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을 버려야 함
- 완성된 사랑을 기대할 때 불행해 짐
-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고독의 뜻을 알라
-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체라는 고귀한 뜻임
- 그것이 영원한 사랑과 생명을 바라는 근거가 됨
- 주님께서 자기를 버려 사랑하심에 만족하심을 배움
B. 남편을 그리스도처럼
- 신자의 순종은 군주제적 복종이 아님
- 진실한 신자가 주께 복종하는 방식을 생각함
- 참된 사랑으로 교회의 질서를 받아들이며 복종함
- 남편의 완성된 사랑을 기대하지 말라
- 하나님 외에 그런 사랑은 존재하지 않음
- 인간에게는 결코 누구도 대신하지 못하는 실존적 고독 있음
- 그것을 없애 줄 것 같은 사랑은 하지도 받지도 말라
- 그것은 사랑의 탈을 쓴 자유의 박탈, 곧 속박임
- 사랑 받지 않는 참 자유를 생각하라
- 참사랑을 찾는 사람은 사랑 타령을 하지 않음
- 사람에게 징징거리지 않는 사랑이어야 함
-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남편을 사랑함
- 사랑은 질서를 기쁘게 받아들이게 함
- 우리는 사랑의 원천이 아님을 알라
- 정의에 대한 의식은 종종 자기 의를 갖게 함
- 사랑에 대한 숙고는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함
IV. 적용과 결론
- 배우자에게 완전한 사랑을 기대하는 것은 옳지 않음
- 오히려 완전한 사랑을 하고자 힘씀
- 완전한 사랑을 받음으로써가 아닌 사랑함으로써 자기가 완성됨
- 하나님 사랑의 우주적 회귀 속에 있는 존재일 뿐임
- 이러한 사실을 부족한 남편과 아내를 보며 매일 확인함
- 우리의 사랑 없음과 하나님의 아가페를 소망함
-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 온전한 사랑을 구함
가족과 잘 사는 것(12) 2015.06.21 주일오전예배
< 홀로 믿는 그대에게 >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고전7: 10∼14)
I. 본문해설
- 문맥에서 혼인의 문제와 부부 관계
- 결혼과 이혼의 불변적 상황을 설명
- 불신 결혼과 믿음 생활의 조화 문제
II. 결혼의 원리
- 불신자와의 결혼을 장려함이 아님
- 결혼은 그리스도안의 영적 연합임
- 함께 불신 상태였다 한쪽만 믿는 경우
- 여자도 남편도 서로를 버리지 말라
- 영적으로 불완전한 결합임을 인정함
- 그러나 서로를 버려서는 않되는것
III. 불신자와의 결혼 생활
A. 갈라서지 않음
- 불신자와의 결혼 혹은 결혼 상태에서 믿음
- 서로 다른 영적세계에 사는 사람임
- 서로 다른 가치관과 많은 갈등이 있음
- 그러나 그를 사랑해 붙어 있어야 함
B. 다시 화합함
- 이혼한때 선택 독신, 혹은 다시 화합
- 한쪽 신앙 혹 불신 상태에서도 가능
- 원래의 부부관계 돌아감 의무 따름
- 경솔치 않게 모든 것 고려하여야 함
C. 거룩하게 함
- 여기서 말하는 거룩함은 포괄적임
- 구원과 성화에서 환경적 구분까지
- 이교적 환경과 노골적 무신론 막음
- 구원의 복음을 듣고 보게 되는 환경
- 아내를 교회 데려다 주다가 신자됨
- “할머니네가 좋아하는 하나님이기에”
- 전 삶을 보여주어 하나님을 증거함
- 불신 배우자를 전도할 하나님의 뜻
IV. 적용과 맺는 말
- 감사하라 신앙을 허용하고 들어줌
- 영혼으로 깊이 사랑하고 포기하라
- 당신 삶이 보이는 성경임을 기억하라
- 수고와 고난의 삶 사신 예수를 보라
- 영혼 사랑해 준 이들의 헌신을 기억하라
가족과 잘 사는 것(13) 2015.06.28 주일오전예배
< 독신과 결혼의 유익 >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 2:18)
I. 본문해설
- 아담 홀로 거하게 하심과 결혼 제도
- 단순한 명령 아닌 인간행복 위함임
- 결혼 제도: 신적경륜+인간행복
- 현대인의 생각 결혼 원래 의도 이탈
- 편의주의적 왜곡과 독신 부끄러움
- 독신과 결혼 모두 삶의 한 방식일 뿐
- 신약 천국 사상 이후로 더욱 그러함
II. 독신의 유익
- 고전 7: 32∼34: 결혼제도 부인 아님
- 천국바라며 종말론적인 삶 살아감
A. 사람에 얽매이지 않음 (32, 34)
- 결혼 나쁜 일 아님 섬김에 얽매임 됨
- "마음이 갈라지며" his interests divided
- 근심, 마음 빼앗김, 까리따스 특성
- 독신은 얽매임 없이 주님 섬기게 함
B. 흐트러짐 없이 섬김 (35)
- 여기 흐트러짐 없음은 집중을 뜻함
- 주 섬김에 있어 참된 사랑과 집중력
- 남편과 아내의 육적 삶과 영적 소모
- 섬김 현실 자신 쏟아 붓는 헌신 요구
C. 독신의 비용을 생각함
- 주께 집중하는 유익 있으나 비용도
- 정욕, 고독, 복지와 노년 홀로 보냄
- 경제적 난관이나 건강위기의 위험
- 독신 여부는 각자 부르심 있음 v.24
- 문제는 주를 기쁘시게 할 신앙 유무
- 독신과 결혼 모두 자기 즐거움 아님
- 결혼이 너무 커보이지 않는 신앙필요
III. 결혼의 유익
A. 자손을 얻음
- 생육과 번성이 하나님 뜻 (창 1:28)
- 자손을 얻음
a. 자연적 b. 영적의미
- Augustinus-영적자녀: 중생 회심
- 자연적 생육보다 영적 생육 중요함
- 자녀들 신앙 부모만난 혜택 누리게
- 한 사람을 빛 안에서 살게 하는 가치
B. 정욕을 피함
- 독신과 정욕과의 싸움 (고전 7:10)
- 독신 은사 확인의 중요한 시금석임
- 정욕은 살아있는 사람의 큰 숙제임
- 결혼은 방탕한 성생활 면허 줌 아님
- 죄 아니나 영혼에 주는 정욕 효과임
- 정욕 없인 잉태 없으니 그것도 사용
- 자녀 생산 아닌 성적 쾌락 권장 않음
- 성경은 성의 사용을 소극적으로 봄
- 소시적 성생활 통한 정신 결합 효과
- but, 성 없이 결합 없단 생각은 잘못
- 늙어서도 viagra 집착하는 것 잘못
- 이제 지식과 사랑의 깊이를 더하라
C. 신비적 연합
- 성례의 연합–sacramentum 창 2:24
- 그리스도와 연합 안에의 부부 연합
- 간음 이혼에 의해서 끊어지지 않음
- 사별 외 나뉜 자를 홀로 살게 하신 뜻
- 부부 연합 해제될 수 있기에 열등함
- but, 그리스도와 교회 연합 비견됨
- 이 연합 속에서 사랑으로 마음 일치
- 온전치 않기에 자기완성 기회 삼음
IV. 적용과 결론
가족과 잘 사는 것(14) 2015.07.05 주일오전예배
< 사랑에 아픈 그대에게 >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 27:10)
I. 본문해설
- 다윗의 시들 중 애송된 찬송 탄원시
- 시련과 대적 속에서 하나님만 바람
- 거룩한 담대함과 주께 경건한 불안
- 찬송(1∼3) 성전(4∼6) 간구(7∼10)
- 긍휼을 구하는 기도 속에 부모 언급
- 부모의 사랑 속에 완성되는 인간성
II. 사랑과 어린 날의 기억
-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막내 (삼상 17:12)
- 형들에 대한 이새의 배려 (17:17)
- 사무엘이 왕의 기름부음 (16:11)
- 이새와 아들들 제사 성결 초대 (16:5)
-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양을 지킴"
- 어미 거의 언급 없지만 효심 엿보임 (22:3)
- 의지할 이 없는 외로운 날 주님 바람
III. 부모와 하나님의 선하심
A. 부모는 버렸으나
- "내 아비와 어미는 나를 떠났으나"
- 언제 떠났을까? 공간의 문제 아님
- 떠나지 않았으나 버린 부모도 많음
- 왜 떠났을까? 더 소중한 것 있기에
- 나빠도 자식 잘못 아닌 부모의 잘못
- 부모에겐 자녀 사랑할 의무만 있음
- 신앙은 이해할 수 없는 섭리를 믿음
- 아픈 상황보다 신실한 하나님 의지
B. 여호와는 영접하심
- yaaspeni‥"you will take me"
- 아이를 무등 태워 높이 드는 것 연상
- 사랑은 언제나 영접하게 하는 힘임
-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스럽게 여김
- 버림받은 아픔 속에 주님 만나게 됨
-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사람이 남긴 것
- 참으면 망가지고 못 참으면 파괴함
- 섭리를 깨달음 악을 선으로 바꾸심
- 형통함 속 부요함과 고난 속 가난함
- 네 부모를 원망하지 말고 풀어주라
- 그 사랑보다 더 큰 하나님 사랑 알라
- 주님이신 것은 모두 좋은 것이기에
IV. 적용과 결론
- 부모의 버림은 우리 잘못 때문 아님
- 경건한 불안 속에 부모의 버림 회상
- 그렇게 나를 버리지 않으신 하나님
- 아무도 끊을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
- 모든 결핍을 채우는 하나님의 사랑
- 하나님 의지하며 인생길 좀 더 가자
가족과 잘 사는 것 1 (2015.4.26 주일오전설교)
가족과 잘 사는 것 2 (2015.04.29 수요예배)
가족과 잘 사는 것 1 (2015.4.26 주일오전설교)
가족과 잘 사는 것 3 (2015.05.03 주일오전설교)
가족과 잘 사는 것 4 (2015.5.6 수요예배)
가족과 잘 사는 것 5 (2015.05.10 주일오전설교)
가족과 잘 사는 것 6 (2015.05.17 주일오전설교)
가족과 잘 사는 것 7 (2015.05.24 주일오전설교)
가족과 잘 사는 것 8 (2015.5.27 수요예배)
가족과 잘 사는 것 9 (2015.05.31 주일오전설교)
가족과 잘 사는 것 10 (2015.06.07 주일오전설교)
가족과 잘 사는 것 11 (2015.06.14 주일오전설교)
가족과 잘 사는 것 12 (2015.06.21 주일오전)
가족과 잘 사는 것 13 (2015.6.28 주일오전설교)
가족과 잘 사는 것 14 (2015.07.05 주일오전설교)
남자와 여자로 지으심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18)
녹취자: 장소연
I. 들어가는 말
사람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인생의 행복을 위해 매우 요긴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런 행복한 가정을 이룰까하는 것입니다. 이 설교 시리즈를 준비하기 위해서 시중에 나와 있는 가정의 행복에 관한 이야기들을 쓴 책들을 몇 권 보았습니다. 공통적으로 흐르는 논조는 이런 것입니다. 가정에 늘 갈등이 많고 어려웠는데 남편인 자신이 죽어지내자 가정에 평화가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반대로 이런 저런 일로 남편과 부딪쳐 가정이 평안할 길이 없었는데 아내인 자신이 이게 팔자려니 하고 죽어주니까 가정에 평화가 오더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UN’, 즉 ‘국제 연합’이 창설되기 이전부터 이 세상의 평화를 도모하기 위한 인간의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팍스 로마나’, 로마에 의한 평화, ‘팍스 브리태니커’, 대영 제국에 의한 평화, ‘팍스 시니카’, 중국에 의한 평화, ‘팍스 아메리카나’, 미국에 의한 평화 같은 것들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아시아를 침략하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도 대동아 동영권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 역시 일본에 의한 평화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아닙니다. 어느 한 나라가 엄청난 세력으로 도저히 저항할 수 없게끔 약소국을 짓누르고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강요된 평화입니다. 이런 것은 진정한 인류의 평화가 아닙니다. 그래서 임마누엘 칸트는 자신의 유명한 작품인 ‘영원한 평화’라는 책에서 이러한 종류의 평화는 자유의 무덤 안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사람이 지위의 고하나 혹은 재산의 유무와 상관없이 자유롭고 자율적인 삶을 살아야 할 권리가 있듯이 작은 나라들도 나름대로 자신의 나라에 고유성을 유지하며 자신들이 존중히 여기는 전통에 따라 자율적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남편이 절대적인 힘으로 아내를 굴복시키고 아내가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가정의 평화는 그야말로 자유의 무덤 안에서 이루어지는 평화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일 수 없습니다. 타락하기 전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기관이 가정이고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기관이 교회입니다. 국가는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기관이 아닙니다. 따라서 가정은 그 행복의 문제를 논할 때에 가정만 떼어놓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교회와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경륜이 무엇이고 그 경륜 속에서 가정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를 생각해야지만 진정한 행복에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II. 사람을 지으심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고 제일 마지막에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가정의 의미는 앞으로는 세계를 창조하신 위대한 뜻, 뒤로는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계획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세계를 창조하셨으니 하늘에는 천상의 세계를, 땅에는 지상의 세계를 창조하셔서 두 세계를 실물과 거울처럼 마주 보게 하셨습니다. 천상의 세계는 하나님이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직접 통치하셨고, 지상의 세계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를 않고 당신의 대리자인 인간을 창조하셔서 당신을 대신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맞게끔 가꾸고 돌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A. 남자와 여자로 지으심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에게 이 세상을 창조하셔서 당신의 마음의 뜻과 계획에 맞게끔 다스리고 돌보게 하셨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인간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생각과 뜻을 알 수 있어야 했고,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지성을 알고 의지를 느낄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인간을 모든 동물들과는 다르게 특별히 창조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로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이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영혼과 정신의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고 인간의 육체는 이러한 특성을 가진 영혼과 정신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피조물로 존중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에게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과 더불어 영적으로 교제하심으로써 사랑하고 사랑을 받게 하셨으며 당신의 뜻과 생각을 인간에게 전달하시고 또 인간으로 하여금 그 뜻을 이해하고 행할 수 있는 은혜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셔야 했는데 하나님은 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것입니다.
흙으로 사람의 몸을 지으셨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남자를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시대의 신학자인 레랭의 뱅상(Saint Vincent de Lérins)이라는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흙으로 빚으신 사람의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이 장면을 기체와 같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일부를 인간에게 떼어주신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비록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의 영혼과 정신이 그 어떠한 피조물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닮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의 영혼과 정신이 하나님의 일부인 것은 아닙니다. 그 인간의 영혼과 정신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후하고 호흡을 불어넣으신 이 하나님의 행동은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동작이지 하나님의 일부를 나누어 주는 동작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은 아담에게 하셨지 하와에게 이 일을 하셨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이 구절을 토대로 인간의 영혼의 기원에 있어서 유전설을 따른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설파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이것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셨고 이 영혼이 육체를 온전히 주장함으로써 인간은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의 생명은 영혼에 있고 그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이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담을 먼저 창조하시고 그가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하나님이 뭘 모르고 남자 한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별로 좋지 않아서 우연히 여자를 만들게 되신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여자를 창조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도록 인간의 눈높이의 수준에서 당신 자신을 낮추고 우리와 소통하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묘사입니다.
여기에 좋지 않았다라고 하는 표현은 나빴다, 악했다는 의미이기보다는 온전하지 않았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아담 하나만이 아니라 하와까지 창조하셔서 남성과 여성으로 인간을 지으시고 그 처음 인류를 통해서 온 인류를 번성하게 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게 여겨져서 하나님이 하와를 창조하신 것은 아담의 외로움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인류를 창조한 하나님의 원래의 위대한 계획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마는 주님이 다시 오는 날까지 하나님 아버지라는 이 말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쳐도 성경이 하나님과 관련해서 가르치는 아버지의 모습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미 인간의 죄로 물든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지 않으셨던 왜곡된 아버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서에 보면 하나님이 보내신 권세 있는 선지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눈물 흘리고 피 흘리는 연약한 선지자의 모습이 실려 있습니다. 우상 숭배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눈물로 안타깝게 기다리며 돌아오라고 부르는 선지자의 이 음성은 아버지의 준엄한 외침이라기보다는 엄마의 흐느끼는 탄식소리에 가깝습니다. 끊임없이 자기의 품을 떠나 외간 남자와 음행을 하고 이름도 모르는 자식들을 낳아가지고 오는 그 아내를 뼛속 깊이 사랑해서 오늘도 찾아나서는 호세아의 이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마음이 악해서 살아있는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허랑방탕하고 타국에서 모든 돈을 허비한 가치 없는 불효막심한 탕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은 아버지였습니다. 매일매일 동구 밖에 나아가 눈이 짓무르도록 저 먼 곳을 바라보며 행여나 오늘은 그 아들이 돌아오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는 그 모습은 분명히 아버지의 모습은 아닙니다. 어렸을 때 제가 그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얘네 엄마는 뭐하고 있지?” 라고 말입니다. 남편은 가서 눈물로 아들을 기다리는데 걔네 엄마는 뭐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 엄마를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시니까.
이렇게 하나님 안에는 여성으로서의 어머니와 남성으로서의 아버지가 하나로 융합되어 나타납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 안에서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운 성품과 아버지와 같은 공의로운 성품이 조화를 이루고 한 인격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이 두 성품을 인간들에게 각기 나누어 주셨습니다. 여성에게는 어머니의 성품을, 남성에게는 아버지의 성품을 나누어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부성과 모성을 이 모든 인류에게 보여주심으로써 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그 분께 순종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B. 돕는 배필을 지으심
어떻게 그 무한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아버지로서의 성품과 한 어머니로서의 성품을 한 인격 안에 가지고 계시며 그것들을 무슨 동기와 이유, 어떤 과정을 통해서 우리 인간성 속에 그 모성과 부성을 투사하셔서 인류 사회를 조화롭게 만드셨는지를 어찌 간단한 말로 설명할 수 있겠으며 그 모든 제가 깨달은 내용들을 길게 길게 설명한 들 여러분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에 대해서 이해하고 공감하겠습니까?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로 나누실 때 하나님 안에서는 하나인 이 성품이 사람들에게 나뉘어져 각자 자신이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사회를 형성해 나가게 하셨고 그러한 도움과 조화의 관계의 핵심을 사랑으로 여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의 돕는 배필로 지으셨습니다.
C.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심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실 때는 흙으로 빚어서 창조하셨지만 하와를 창조하실 때에는 아담을 잠들게 하여 그의 갈빗대를 뽑아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매튜 헨리는 자신의 주석에서 이 부분을 그림처럼 아름답게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되 한 몸에서 창조하셨고 그래서 남편을 지배하도록 머리의 뼈가 아니라 남편에게 지배를 받도록 다리의 뼈가 아니라 남편과 동등하도록 가슴의 뼈에서 여자를 창조하셨고 남자의 보호를 받기 위해 품 가까운 곳에서 사랑을 받기 위해 심장 옆에서 그 뼈를 취하여 여자를 지으셨다고 묘사하였습니다. 어떤 남자들은 말합니다. “봐라 여자는 남자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남자를 도우라고 만든 것이 아니냐?”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말 성경에 “위하여”라고 된 이 번역은 명백히 잘못된 번역입니다. 히브리말로 ‘켄네그도’라는 이 단어는 ‘그와 상응하는, 그와 짝을 이루는, 그와 대응하는, 그와 맞먹는’ 정도의 의미를 가진 전치사입니다. 명백히 남성 우위론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남자들에 의해서 이런 번역이 나오는 것입니다. 더욱이 돕는 배필이라고 하는 이 단어를 토대로 여자의 임무는 남자를 돕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데 그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말로는 두 단어로 되어 있는 돕는 배필이라는 구절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에제르’라는 하나의 명사로 나옵니다. 이 단어가 가장 많이 쓰여진 것은 시편입니다. 시편에서 시인들은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며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도다”라고 할 때의 도움입니다. 그 ‘에제르’라고 하는 명사의 동사가 ‘아자르’인데 이것이 바로 ‘돕다’ 혹은 ‘응원하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에제르는 전쟁에서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먼지를 날리며 달려오고 있는 응원군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는 패색이 짙어서 이제 전쟁에 포기하고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될 위기에 있었는데 저 멀리서 웅장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며 어마어마한 구름같이 먼지가 휘날립니다. 아군의 응원군이었습니다. 패색이 짙어서 절망에 쌓여있던 군인들이 사기가 돋고 힘이 솟구쳐 전쟁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러면 전투에 패배하고 있던 군대가 대단한 것입니까? 그 군대를 살리기 위해서 달려오는 응원군이 더 대단한 것입니까? 오늘날 남성들이 아무리 여성 우위적인 사고방식에 의해서 시달리고 일부 고통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이 펼쳐온 유구하고 잔혹한 여성들에 대한 폭력의 역사에 비교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이나 가치에 있어서 성경은 어느 구절을 통해서도 남녀사이에 우열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물론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질서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복종하는 위계의 질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뜻을 잘 나타내 보여줄 수 있는 그러한 기능적인 질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어떤 질서를 하나님이 규정하셔서 그 질서 안에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더 잘 드러내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한 신자의 영적인 깊이는 사람을 대할 때에 나타난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차별이 존재합니다. 돈 많은 사람과 돈 없이 가난한 사람, 교육을 많이 받은 그러한 지성인과 부락무식한 사람이 존재하고 권력 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과 아무 힘이 없는 하층민중 중에 태어난 사람들이 존재하고, 사회에서는 아무리 민주 국가라도 엄연한 차별이 존재합니다. 특히 오늘날 외국에서 이민 온다고 와서 시집오고 장가 들어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깔보고 하는 그 우리나라 사람들의 태도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전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점에서 달라져야 합니다. 물론 남자들도 어떤 사람은 여자라고 부르고 싶고 또 어떤 여자는 그냥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용모의 아름다움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이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존중하고 그 존엄과 가치를 깊이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깊이를 보여주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돕는 배필이라고 하는 것은 위계적인 지배와 피지배의 질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인류의 계획을 잘 성취하기 위한 질서로서의 그 기능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자를 얕잡아볼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한 몸에서 두 사람을 지으신 것은 하나님이 흙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한 몸에서 두 사람을 만드심으로써 사실은 그들이 하나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창조된 하와를 하나님이 이끌고 나오실 때 아담은 말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입니다. 인간의 뼈 중에는 없어도 괜찮은 뼈가 있고 살 중에는 몇 kg쯤 떼어내도 생명에 지장이 없는 여러분이 매일매일 미워하는 살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볼 때에 하와는 그런 뼈, 그런 살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우월이 아니라 한 몸의 연합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남녀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함께 누리게 될 사랑의 연합을 현시하는 것입니다. 다음 주 설교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족끼리 왜 이래” 다음 주 설교 제목입니다. 가족끼리 왜 이럴까요?
만약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아담과 하와는 서로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때에 엄마 아빠가 뭐라고 얘기했겠습니까?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동생이 태어났습니다. 뭐라고 했겠습니까? “왜 태어났니?” 형은 그렇게 말 안하고 “이는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한 사람 아담의 몸에서 모든 인류를 창조하신 것은 이 모든 인류가 서로를 향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 속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가 들어와서 이게 깨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는 서로를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이 뼈라고 부르는 대신 미워하고 증오하게 된 것입니다.
어제 열한분의 대만 목회자가 우리 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그래서 함께 교제를 했는데 그 중 한 목사님이 네팔 선교를 열심히 다니십니다. 그래서 그 분이 자기가 전도한 사람 중에 107세의 노인이 있다고 사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107세가 됐는데도 아주 건강하시답니다. 최근에 넘어지셔서 뼈가 부러져서 누워 계시는데 아주 건강하셨답니다. 그래서 자기가 물어봤답니다. “할아버지 그렇게 오래 사니까 뭐 좋은 거 있으세요?” 그러니까 “그럼 좋은 게 있지” “그게 뭐예요?” “작년에 내 마지막 원수가 죽었어.” 그때 막 감동이 왔습니다. ‘아, 그렇구나.’ 정말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을 향한 최고의 복수가 무언가 했더니 오래 살아서 그 인간들이 죽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남편이 미우면 오래 사십시오. 그래서 원수가 죽는 것을 보십시오. 그게 바로 죄가 들어온 다음에 인류의 모습입니다.
저는 한 십여 년 전에 혼자 성경을 읽다가 캄캄한 밤에 번개가 치는 것처럼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의 빛줄기를 경험했습니다. 그게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어느 날 율법사에게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계명 중 제일 큰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그 뜻은 진짜 두 번째라는 뜻이 아니라 사실상 두 가지가 하나라는 뜻입니다.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 예수님의 의도가 바로 너희는 서로를 향해 몸속에 뼈와 살이 있잖아요. 이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런 고백을 하면서 사는 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천국은 바로 이런 사랑의 나라가 천국의 정체입니다. 이렇게 인간을 향해 이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이 고백이 죄 때문에 많이 뭉그러져 버렸습니다. 더욱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이런 고백들이 많이 깨졌습니다. 그래서 누가 그럽니다. 진짜 통계적으로 아내가 없이 독신으로 남자는 5년 빨리 죽는답니다. 아내를 가지고 있는 남자는 죽고 싶은 사람이 많습니다. 여자도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사람이 5년 빨리 죽는답니다. 의학적인 통계입니다. 그런데 남편하고 같이 사는 여자 중에는 암에 걸리는 여자가 많습니다. 이 대목은 안 웃으시네요.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이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냐 할 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입니다. 그래서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자, 이 깨달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목소리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 당시에 저는 영혼을 찢고 들어오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런 세상을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속하셔서 교회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고 이 지으신 사람의 관계가 바로 가정 속에서 이루어져 인류를 지으시고 세계를 창조하신 경륜에 이바지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가족과 잘 사는 것 2 (2015.04.29 수요예배)
III. 두 가지의 명령
그러면서 인간에게 두 가지 명령을 하시는데 첫째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이끌어 데리고 나오실 때 아담은 그를 하와라고 불렀는데 이는 생명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어떤 여자는 얼굴이 아주 예뻐서 많은 남자들로부터 대시를 받고 어떤 여자는 별로 안 그럽니다. 그래도 여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면 그 속은 무한한 생명의 샘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 인간이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것처럼 사람이 되어서 나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나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 어디에도 그보다 놀라운 기적은 없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여성을 창조하신 그 위대한 의미입니다.
A. 생육하고 번성함
온 세상을 가꾸고 인류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여성을 창조하시고 남성과 함께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류가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입니다. 다만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사람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늘어난 사람들이, 불어난 사람들이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온전한 관계를 가지고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 인구가 70억 밖에 되지 않아도 이렇게 지구가 오염이 되는데 인구가 늘어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입니다. 탐욕을 좀 줄이면 됩니다. 인류가 절반으로 줄여도 탐욕이 배로 늘어나면 지구는 더 몸살을 앓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식량을 염려합니다. 그렇지만 전 세계에 있는 식량 생산 능력은 120억의 인구를 먹이고도 조금 남을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70억 가까운 인류를 체조대형으로 벌려 그리고 펼쳐 놓으면 충청북도 안에 다 들어갑니다. 그러니 이 넓은 지구의 땅 덩어리에 비해서 인류는 아직도 얼마나 적은 숫자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더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번성해서 인류를 이루고 그 사람들이 하나님과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위대한 뜻들을 정복과 다스림을 통해 구현해 나아갈 때 그것은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교향악 연주처럼 하나님의 귀에 들릴 것입니다.
B. 정복하고 다스림
하나님이 이처럼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기 위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들을 창조하신 것은 정복하고 다스리시게 하기 위함이었는데 정복은 미개척지에 질서를 만들고 그러기 위해서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다스림은 이미 정복한 땅들의 질서를 유지하고 온전히 통치자의 돌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전자는 남자의 성품에 어울리고 후자는 여자의 성품에 어울립니다. 개척을 위한 용기, 투지, 결단, 이러한 것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남성을 창조하셨고 이미 정복된 땅들을 다스리기 위한 지혜, 세심함, 공감하는 능력, 질서를 유지하는 지혜 같은 것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여자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는 어떻게 이 남성성과 여성성을 아름답게 조화시킨 성품을 가지고 있느냐에 의해서 통치 역량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인간들을 통해서 이 세계를 돌보고 가꾸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어 가시기 위해서 인류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그렇게 인류를 창조하신 그 위대한 계획의 틀 안에서 우리는 가정의 제도를 세우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VI. 적용과 결론
결국 우리는 가장 행복하여야 할 관계가 가족들과의 관계이고 그 안에서 자기가 인간으로 태어난 경륜을 이해하고 하나님이 세계를 만드신 뜻들을 알아가는 것이 의무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가정에서는 끊임없는 고통과 아픔이 있고 무지로 말미암아서 서로를 지배하려고 다투고 상처를 받는 일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 가족들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는 훌륭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상 명사로서의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쉽지만 눈에 보이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자기도 한 인간으로서의 인간성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우리가 참 신자가 되기를 바라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정을 주신 위대한 경륜을 생각하고 그 안에서 남편과 아내로 어떻게 살아가야 될 지를 깊이 생각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가정을 세우는 원리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3-24)
녹취자 : 오희열
I. 들어가는 말
유교의 관점에서 보면 아내보다는 어머니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만약 아내와 어머니가 함께 물에 빠졌다면 아내보다는 어머니를 먼저 건져야 하고, 제일 좋은 것은 어머니를 먼저 건지고 아내를 건지다가 같이 빠져 죽으면 아마 비난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소위 우리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천륜이라 부르고 남녀가 맺어져서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을 인륜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결혼을 인륜의 대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판단과는 사뭇 다릅니다. 오히려 성경을 보면 가정의 기본은 부모와 자식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입니다. 두 사람이 맺어져서 사랑으로 가정을 이루어 가는 것이 가정의 기본적인 토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가족들과의 관계 중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관점과 자꾸 충돌을 이루면서 그리스도인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가정에서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랑으로 세워지는 것이 가정의 기초입니다.
II. 사랑으로 세워짐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를 취해서 여자를 만드시고 그 여자를 이끌어 내 오실 때에 아담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하면서 혼인에 대한 대의가 나오는데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라고 합니다. 결국 여기에서 말하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은 사랑으로 남녀가 만나 가정을 세워가는 것이 가족 관계의 중심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어떤 식으로 가정을 세울까 하는 것을 본문에 입각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A. 인격적인 사랑으로
첫째는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인데, 이것은 인류 최초의 사랑의 고백인 것과 동시에 아마 타락하기 전에 인간의 입에서 나온 고백이니까 최고로 오래된 고백인 것과 동시에 타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남긴 인간의 유일한 고백이고 또 이 고백이 남녀의 사랑의 고백의 진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감정적인 것으로 많이 봅니다. 그리고 미혼 남녀는 이렇게 누군가가 자기를 목숨을 걸고 사랑해 주는 것이 하나의 로망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랑을 한 번 해보는 것이 원이 없는 인생에 대한 중요한 기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게 그리 나쁠 것은 없겠습니다마는 한 순간에 치솟아서 저 사람을 온 몸과 마음을 불살라서 사랑하겠다고 할 때, 그것이 단지 감정에 치우친 결단이라면 그것은 일평생 지속될 가능성이 별로 없습니다.
30대 청년들 30명이 모여서 세 시간씩 세 번에 걸쳐서 질문하고 대답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책이 『서른통』이라는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제가 한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이렇게 결혼에 대해 엄청난 꿈을 꾸고 어떤 남자가 혹은 어떤 여자가 자기를 온 몸과 맘을 불태워 사랑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고 꿈꾸며 결혼하지 말고, 이것은 숙제하듯이 해야 하는 것이니까 하자, 그런 쿨한 마음으로 결혼하는 사람이 행복해질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자신을 다 불태워 자기 하나만을 끝까지 변함없이 영원히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습니다. 빨리 그 꿈을 버리십시오. 하나님 이외에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혹시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는 결혼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배신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순결한 남자와 여자와는 결합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한 순간에 치솟는 격렬한 감정으로 그 깊이가 입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소리지내 않고 흐르는 강물과 같습니다. 저 흘러가는 한강물이 몇 년 전부터 흘렀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저렇게 흐를지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밤이나 낮이나 고요히 흐릅니다. 비가 많이 오는 홍수 철에는 누런 흙탕물로 흐르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푸른 물로 흐릅니다. 조용히, 말없이 끊임없이 흐릅니다. 어떤 격렬한 몸부림도, 요동치는 감정의 격랑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천천히 변함없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많은 날들을 허비한 후에야 이 세상에 그런 종류의 사랑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동안 정말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아담과 하와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을 때, 연애지상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솟구치는 격렬한 감정의 격랑이 가져다주는 고백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부가 살면서도 감사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아내가 까칠해서 마음을 힘들게 하거나 남편이 무심해서 자기에게 눈길 한 번 안 주는 것같이 소외감을 느낄 때,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원래 그런 것이라는 뜻은 성경이 그렇게 부부 사이를 그렇게 살라고 했다는 뜻이 아니라 원래 저 인간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의미에서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저렇게 아내가 나에게 까칠하게 대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어떤 때에는 아내도 나를 보면서 외로웠던 적이 있었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왠지 좀 잘해주면 인생의 보너스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가련한 여인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선물이려니 생각하고, 하나님이 아무 쓸데없는 남자에게 베푸시는 자비려니 생각하면 인생을 사는 게 훨씬 수월합니다. 부부가 긴 세월동안을 함께 사는데 감성적인 사랑 하나 가지고 되겠습니까? 그리고 무슨 감정이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동안 요동도 않고 불탈 수 있겠습니까? 가능하겠습니까? 여러분에게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결혼을 하고 한 10년이나 15년이 지났는데도 멀리서 남편이 오는 모습을 보거나 전화가 오면 가슴이 설렌다는 여자는 가끔 봤습니다만 그렇게 산 남자가 아내에게 전화나 문자가 오면 가슴이 설렌다는 남자는 못 만나봤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주어지는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일생동안 계속 헌신하면서 사랑하기 싫을 때에도 하려고 해야 합니다. 사랑은 운동이나 기도생활과 비슷합니다. 기도생활을 거의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할 기도가 없습니다. 사랑도 계속 해야지만 자기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려고 하지, 워낙 안 해버리면 뭘 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운동도 격렬하게 가슴속에서 운동해야한다고 늘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제가 아는 친구 목사는 운동 얘기만 나오면 죄인이 왜 회심하지 않는지 알 것 같다고 합니다. 해야 한다는 것은 늘 알겠지만 늘 하기 싫은 것입니다. 이유도 다양합니다. 봄에는 나른해서 여름에는 땀이 나서, 가을에는 울적해서 겨울에는 추워서, 늘 길거리에 사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여기 결혼하지 않은 자매님들이 계신데 충고를 하자면, 불같이 뜨거운 사랑으로 대쉬하는 사람에게 붙잡히지 말고 성품이 좋아서 한번 맺은 관계를 쉽게 끊지 않는 신실한 성품을 가진 사람에게 붙잡히십시오. 물론 그 사람이 자기를 선택해주느냐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기회가 온다면, 양쪽에서 대쉬를 한다면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외로운 것입니다. 그것을 어려서부터 가르쳐야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외롭고 긴 인생길을 홀로 가야한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것을 내적으로 끊임없이 이겨낼 수 있는 정신을 신앙 안에서 배양하면서 살아, 언제나 못된 인간들은 자기와 사랑의 관계를 맺었는데 덕이 없어서 끊임없이 배반해도 늘 뭔가 잔고가 남아서 베풀어주고 나누어주어서 그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려면 자기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을 무작정 기대는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자매들을 보면 결혼 생활을 잘 이어가는 사람들이 누구인가하면 불같이 뜨거운 사랑에 부딪혀서 불같이 타오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품적으로 사랑스러운 사람,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인내를 가지고 오래도록 지속하는 덕이 있는 자매들이 잘 이기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 불같이 뜨거운 감정으로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만난 사람들이 실망스러울 정도로 몇 년 살지 않고 가정을 깨뜨리는 일을 흔히 보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산에도 가보면 채신머리없이 쫄쫄쫄 소리 내면서 흐르는 개울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두 달만 비가 안 오면 물이 없어서 소리도 안 납니다. 그래서 자신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고독한 실존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을 해야지, 어떤 사람을 만나면 그런 것이 완벽하게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이지 사람이겠습니까? 이 생각을 항상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아담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던 고백은 아주 진실한 사랑의 고백이지만 오늘날 타락한 인간들 속에 있는 연재지상주의자들의 들뜬 감정의 표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자녀들을 결혼 시킬 때 중매결혼을 많이 택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 중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나 목회자들로부터 추천을 받아서 최종적인 결정은 본인이 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유는 사랑의 감정이 안생기면 그 사람의 좋은 점이 눈에 띄지 않고, 사랑의 감정이 솟아버리면 그 사람의 결점을 냉정하게 보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인이 딸을 곱게 길렀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혀 그런 경험이 없다가 한번 꽂히니까 너무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신이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말려도 안 되니까 비록 결혼할 나이는 안 되었지만 그 남자 얼굴을 보자고 해서 한 시간쯤 대화를 나누어보니 정말 아니었습니다. 부모도 웬만하면 딸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은데 이제껏 살아온 인생의 경륜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했을 때 절대로 이 친구하고는 결혼하여 행복할 수 없다고 느낀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게 보이는 결점이 사랑에 빠져버리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딸 마음대로 결혼을 해버렸고 결과는 매우 나빴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하는 감정이 없이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사람을 잘 짝지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짝을 지어주면 만나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모나 목회자가 짝을 지어줘도 만나서 대화해보니 전혀 통하는 게 없다면 그만 두는 것입니다. 그래도 뭔가 잘 어울리는 것 같다면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나고 결혼하는데 걸리는 기간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짧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불같은 사랑이야 순간의 시선으로 시작을 하지만 그것보다는 그렇게 신앙의 동지를 고르는 마음으로 이 사람이 일평생 나와함께 성품과 신앙을 따라서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인가를 보고 판단을 하고 사랑은 살면서 계속해서 가꾸어 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저희 할머니가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데려가셔서 할머니의 신혼 방을 보여주셨는데, 결혼은 하고 남편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까지 3일인가 일주일이 걸렸답니다. 새색시가 부끄러워서 아침에 일어나서 쳐다보지도 못한 것입니다. 당연히 누군지도 모르고 부모님끼리 만나서 합의를 보고 결혼을 시키는 시대였습니다. 이건 너무 지나치다고 하더라도 사랑을 한 번 화염처럼 쏟아놓고 합체하는 게 아니라 살면서 끊임없이 사랑의 불을 지펴야하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이 인격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물론 불같은 사랑이 모두 비인격적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인격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을 하면서도 폭력을 당하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라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으면서 사랑받고 있다는 마음이 드는 사랑이어야 하고 어느 한 순간 분출하듯이 쏟아놓고 꺼져버리는 사랑이 아니라 살면서 계속해서 사랑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그렇게 위계질서적인 우열관계가 아닌, 기능적인 질서는 있지만 대등한 관계에 있는 인격적인 사랑으로 부부로서 한 몸을 이루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부부가 살면서 정말 어리석은 것 중의 하나가 사랑을 안 해준다고 투덜거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잔소리도 아니고 정말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여성들이 잘 그럽니다. 누구네 남편을 봐라, 왜 요즘 나를 사랑해주지 않느냐, 아내가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런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마음이 넉넉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사랑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아내가 자기 요새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면 요새 내가 소홀했나 생각하지만 그 말을 두 번, 세 번 하면 그래 사랑 안 한다, 어쩔래? 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난 꽤 노력했는데 소용없구나, 그래 난 사랑이 없다, 어쩔래? 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듣는 남편은 아내로부터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는 마음이 들겠습니까? 그런 마음이 들었으면 사랑하든지 미안하든지 하는 마음이 들어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 그런 되지도 않는 쓸데없는 말을 합니까? 그럴 시간 있으면 성경을 한 절 더 보고 기도를 한 시간 더 하십시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런 것은 인격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물론 부부가 대화를 하면서 이러이러한 일이 있을 때 내가 섭섭했다는 얘기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직설적으로 당신 요새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하면 그것은 막말이지, 그 속에 들어갔다 나와 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척 보면 안다는데 참 잘 났습니다. 인격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아내가 느끼기에 남편으로부터의 사랑이 부족하거나 남편이 아내로부터 부족함을 느껴서 사랑이 식은 것 같다고 느낄 때는 사랑스러운 일을 하십시오. 사랑스럽게 보이십시오. 왜 저 인간이 사랑해주지 않을까라고 구차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하면 사랑스럽게 보일까를 생각하십시오. 정말 섭섭하고 분할 때 무엇을 하라고 했습니까? 선물을 사러가는 것입니다. 이를 갈면서 분노하면서 말입니다. 인격적이지 않은 사랑을 하지 마십시오. 쓸데없습니다. 그래서 “당신 요새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은 “이혼할까봐”라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이 말을 하고나서 돌아서면 남편을 향한 사랑이 솟아납니까?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말들을 왜 그렇게 거침없이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B. 남자가 부모를 떠남
두 번째, 남자가 부모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떠난다’는 말은 히브리말로 ‘아자브’인데 이것은 ‘버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에 하나님께서 “너희가 나를 버리고 우상에게로 갔다.”라고 말씀하실 때 쓰인 말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모두 자기가 자란 가정으로부터 독립해서 부부가 만나는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 부부의 결합을 방해하는 부모와의 관계가 있다면 청산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가능성이 적지만, 자녀와의 관계도 부부의 정신적, 육체적 연합을 방해한다면 방해가 안 되도록 질서를 다시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가끔 보면 남편은 두고 아이들만 데리고 유학을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아이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가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정신적인 연합까지 와해가 되고 가정이 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모습이 아닙니다. 언제나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어떻게 성경적인 관계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이 콤파스의 중심점이고 이것을 따라서 그 모든 것들이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 기사에서 읽어보니 기러기 남편으로 두고 가서 아빠는 죽어라 돈을 벌어 보내주고, 아이하고 떠난 후에 부부사이의 정신적인 결합들이 깨어지고 그곳에서 여자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서 새 출발을 하고, 남편은 그것을 비관하여 약을 먹고 죽어버리는, 비록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그렇게 남편과 아내의 결합을 깨뜨리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성경적으로도 옳지 않은 것입니다. 결혼을 하면 그것과 함께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주체로 남편이나 아내와 함께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인생관입니다. 결혼을 해도 유아기적인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아내나 남편이 남편과 아내를 의존하지 못하고 기울어서 수시로 가정생활을 위협받는 일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 집에서는 대판 싸움이 났습니다. 아이가 자라서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엄마가 교육에 열심이 많으니까 남편을 설득해서 아이를 사립학교에 보낸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할머니가 난리가 난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 아들이 뼈 빠지게 번 돈으로 사립학교를 보낼 생각을 하냐고 말입니다. 그 사립학교 얘기가 나올 때마다 끝까지 온 집안을 휘저으면서 못하도록 방해를 한 것입니다. 그 할머니도 정신이 있는 할머니가 아닙니다. 자신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아들이 초등학교 때, 자신이 어머니로서 그렇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다 자라서 손자, 손녀가 사립학교를 가든, 공립학교를 가든, 유학을 가든 자기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전혀 개념이 없는 할머니인 것입니다. 나중에 후회합니다. 아들은 엄마가 한 때 힘들게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며느리 입장에서는 지금이야 힘이 없어서 그렇게 있겠지만 시아버지 돌아가시고 재산도 물려줘서 돈도 없어지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가족들의 관계는 보험입니다. 지금 젊은 남성들, 돈 있고 힘 있고, 아내는 집에서 살림이나하고 교회 가서 기도나 하고 아무소리 못하고 있으니까 자기가 왕 인줄 아는데 그게 항상 좋은 게 아닙니다. 세월이 지나가면 힘이 빠지고, 남편으로서 별로 그리 대단하지 않은 날이 옵니다. 그것도 빨리 옵니다. 젊었을 때는 아내가 남편만 바라보고 기다리고 있지만 50세가 되어서도 그럴 거 같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잘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꾸준히 하면 보험이 되는 것입니다. 노후에 지장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노후를 위해서 보험에 든다면서 15년 부어야 할 돈을 석 달 부어놓고 집어치웁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습니다. 원금도 못 받게 됩니다. 서너 달은 불같이 잘해주고 나자빠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식들도 마찬가집니다. 이 세상에 자기의 마음에 딱 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도 누구에게 그렇게 해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도 물론입니다.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도 될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합니까? 그 할머니가 이럴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살림에 사립학교를 보내려고 할까?’ 라고 생각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며느리가 자기 화장품을 사자고 몇 백만 원을 쓴 것도 아니고 성형수술 한다고 몇 천만 원 쓴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녀 교육을 잘 받게 해주려는 것인데, 그것이 할머니의 마음에 안 들 수도 있고 인생철학에 맞지 않을 수 도 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도 철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참아야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시어머니였다면 차라리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 결정이 맘에 안 들어도 꾹 참고 입학한다고 하는 날, 50만원이나 100만원 봉투에 넣어가지고 가서 “얘야, 일반학교 가서도 아이들 뒷바라지가 힘들다던데 사립학교 갔으니 너희 가난한 살림에 얼마나 어렵겠니? 이거라도 조금 보태서 쓰거라.” 비록 진심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고나면 며느리가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아, 우리가 이럴 형편은 안 되는데, 내가 좀 너무했나? 어머니의 마음 쓰심이 정말 착하시구나.’ 할 것입니다. 이때 보험 1회분이 입금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성경원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부모를 떠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유산이라도 줄게 얼마쯤 있다고 그것을 볼모삼아서 그렇게 한다면 더 나쁜 부모입니다. 저 같으면 안 받고 만다고 할 것입니다. 주체적인 인생을 사는 게 더 나은 것이지 그게 뭡니까? 개념 없는 며느리, 개념 없는 사위도 많지만 개념 없는 시어머니도 많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의 원리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이 결혼을 하면 ‘아, 이들 둘의 관계가 잘 되는 것이 내가 자식을 잘 기른 것이구나. 내가 이 두 사람의 결합이 잘 되기 위해서 내가 사라져야한다면 사라져야지.’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과 함께 부모는 마음속에서 자식을 놓아주어야 합니다. 물론 놓아주기가 어렵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식을 티끌만큼도 사랑하지 않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그런 부모들은 놔줄 필요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붙잡은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자식을 뜨겁게 사랑하던 부모들은 하나님 사랑에서 오는 사랑과 인간의 육적을 오는 사랑이 섞이는데 그것을 어떻게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육정이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아무리 적금을 많이 들어도 하나님 사랑이라는 계좌에 잔고가 없으면 인생의 마지막이 너무 추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그 아이들을 풀어줘야 합니다. 이제는 훨훨 날아가서 너희들의 삶을 살아라하고 말입니다. 만일 며느리가 “어머니, 조용히 의논드릴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형편이 조금 어렵긴 한데 아이를 사립학교 보내려고 합니다.”라고 한다면 정말 정신이 있는 시어머니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얘야, 그것은 나하고 의논할 사항이 아니라 애비하고 의논할 사항 같구나. 너희들이 결정해라.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 대신 기도를 많이 해주마.” 하고 돌려보내야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아합니까? 우아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우라지게 아부한다’는 뜻입니다. 이러고 나면 그 며느리가 얼마나 ‘우아’하겠습니까? 그 시어머니에게 ‘우아하게’ 대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 이렇게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중립지대가 있어야 합니다. 다 표현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접어야 합니다. 만나서 따져서 확인을 해보고 싶은 것도 참는 게 좋을 때가 많습니다. 참고 세월이 지나면 충격이 없이 지나갑니다. 다 까발려놓으면 명명백백하게, 피가 나게 부딪혀보면 복구가 안 됩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손자 사립학교 가는 일로 뒤집어 놓고 가면 며느리로부터 과거지사가 다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할 때 어머니가 해준 게 뭐가 있냐고, 쥐뿔도 해준 게 없으면서 우리 맘대로 못하게 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놓아주십시오, 풀어 놓아 주십시오. 직장 다니다가 사업을 한다고 하면 마음에 너무 안들 수도 있고 한번쯤 얘기해 줄 수도 있습니다. “요즘 사업이 얼마나 어려운데 잘 생각하거라. 엄마는 네가 다니던 직장 계속 다니면 좋을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결단을 하고 이미 그 길을 가면 잘 될 거라고 격려를 하면 될 일입니다. 모두 그게 부부와의 관계를 만들 때, 남자 뿐만 아니라 여자도 부모를 떠나서 한 몸을 이루는 부부의 결합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C. 연합하여 한 몸 이룸
가족과 잘 사는 것 3 (2015.05.03 주일오전설교)
세 번째 마지막으로 연합해서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합하여’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히브리말로 ‘다바끄’라고 하는 현대 히브리어에서 명사형으로 쓰면 ‘데베끄’가 되는데 이것은 종이를 붙이는 ‘풀’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육체적인 결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연합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연합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연합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됨으로 영적인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 연합은 아내와 남편 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사이에 있는 연합입니다. 그것 말고 아내와 남편으로서 독특한 연합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정신적인 연합입니다.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 고통스럽고 슬퍼서 어디 깊은 산속에 가서 펑펑 울고 쏟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 거기 같이 가고 싶은 단 한 사람이 누구여야 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부부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정신적인 연합입니다. 불붙는 사랑만이 연합이 아니라 그런 정신적인 연합, 그것이 사랑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끊임없이 시련도 만나고 어려움도 만납니다. 그런 속에서 수시로 인생의 누구도 채워줄 수 없는 마지막 실존의 외로움과 고독 같은 것이 있는데, 그런 것이 있어야 성숙한 인간을 만들어 줍니다.
예를 들면 저는 시인들을 위대하게 봅니다. 탁월하고 좋은 시인들을 위대하게 봅니다. 감동이 조금 있으면 말을 하고 싶고, 감동이 크면 글을 쓰고 싶어지는데, 감동이 산더미처럼 밀려오면 글도 쓸 수 없습니다. 표현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때 시를 쓰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어마어마한 감동의 격동이 밀려오면 조용히 무아지경에 들어가게 됩니다. 시라고 하는 것은 그런 정신의 표현입니다. 그렇게 솟아나는 엄청난 시심도 마지막에는 양보될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인간으로서는 누구로부터도 채워질 수 없는 고립감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정신의 크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신의 크기가 별로 없는 사람은 친구가 술 한 잔 사주면 헤헤거리면서 근심걱정 모두 날려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깊이 있는 시를 쓸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이 정신의 크기입니다. 그래서 이런 위대한 문학을 남겼던 인물들의 삶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것이 그런 이유에 있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 것은 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렇게 눈물을 쏟으며 통곡하고 싶을 때 옆에 있었으면 하는 마지막 사람이 누구여야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것이 정신적인 연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합은 하나님과 관계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뒷장에 넘어가서 부부관계가 파경에 이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아담에게 물으셨을 때 그냥 “제가 잘못했습니다.”해야 하는데 말이 너무 많습니다. 죄인의 특징은 이렇게 끊임없는 변명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함께하게 하신 그 여자가 나에게 주어서 먹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나도 피해자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자기 의지로 먹은 아담이 피해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연합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부터 인간은 누구와도 쉽게 연합을 가질 수 없고 또 가져도 오랫동안 변함없이 지속되는 것은 자신의 본성을 거슬러 살려고 하는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날 남자가 출근을 하는데 지갑을 놓고 갔습니다. 아내들은 보통 남자의 지갑에 관심이 많습니다. 요즘이야 카드를 써서 현금을 많이 가지고 다니지는 않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그 지갑을 열어보았더니 돈을 별로 없고 한 가운데 활짝 웃고 있는 아내의 사진이 들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남편이 지갑을 놓고 왔다고 전화를 했고 잘 보관하겠노라고 안심을 시켰습니다. 저녁에 남편이 들어와서 물어보았습니다. “당신 내 사진을 가지고 다니더라?” “응.” “언제부터 가지고 다녀?” “결혼하고 1년 후부터.” “결혼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늘 가지고 다니는 거야?” “그럼.” “자주 봐?” “응. 하루에도 몇 번씩 보는 걸.” “언제 봐?” “힘들고 어려울 때 보지.” 남편의 말에 아내는 감동의 쓰나미를 경험합니다. 여기서 끝났으면 그날 밤에 참 좋았을 텐데 아내는 더 캐들어 갑니다. “그때 내 사진을 볼 때, 느낌이 어때?” “좋아” “어떻게?” “어려울 때마다 당신 사진을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들어. ‘이까짓 어려움쯤 내가 왜 극복을 못하랴 이 여자하고도 사는데. 이 여자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 큰 일을 내가 감당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든 감당 못하겠는가?’ 하며 용기와 희망이 솟아.”
여러분이면 기뻐하겠습니까, 슬퍼하겠습니까? 어쨌든 용기와 희망을 주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왠지 석연치 않습니다. 정신적인 연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런 정신적인 연합들을 잘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하루아침의 헌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꾸준히 성품화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신뢰가 생기고 그 속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의지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내도 남편도 상대방 없이 혼자 울고 싶을 때 마음의 병이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연합이 없고 약화되어있다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우정도 그렇습니다. 무엇인가 이득을 보려고 정략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말 좋아서 끝까지 가는 친구들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목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좋으니까 좋은 것, 그런 정신적인 결합을 이루며 살아갈 사람, 그게 바로 가정의 기본이 되는 남편과 아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인류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나누길 원하셨고 그래서 하나님이 온 인류 안에 이 사랑의 연합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속하셨고 그에게 접붙여진 하나의 몸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끝 날에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천국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 없이, 하나의 인류애로써,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으로써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며 살겠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남편과 아내 부부사이에 다른 사람과는 공유할 수 없는 특별한 사랑의 고백과 정신의 연합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함께 부부로 산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불같은 연애감정으로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 때문에 남편을, 하나님 때문에 아내를, 하나님 때문에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늘 말씀드리지만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랑은 없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은 만났지만 우리 때문에 가슴이 시리도록 행복했던 사람이 몇 명쯤 되겠습니까?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22년을 목회했지만 여러분에게 그렇게 해주지 못했습니다. 저의 가족들은 물론이고, 저의 부모님에게, 자녀에게, 아무에게도 그런 감동을 준 적이 없습니다. 저만 그렇겠습니까? 물귀신 작전으로 나가서 미안하지만 저만 그렇겠습니까? 여러분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도 못한 일을 왜 남에게 기대를 합니까? 인간이 원래 그런 것입니다. 인생이 원래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부족하고 모자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것을 원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정말 기가 막힌 형제를 신랑으로 너에게 주마, 누구도 감히 데려갈 수 없는 여성을 아내로 주마. 얼마나 완벽한지 네가 그 사람을 만나는 순간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고 얼마나 그 사랑이 완벽한지 나조차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주시겠습니까? 있어도 안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살면서 이런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이 외롭거나, 아내와도 대화를 하고 돌아누웠는데 가슴이 아려오면서 결국은 나 혼자 풀어야 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 때, 이것을 가지고 특정한 대상을 미워하거나 하는 것은 올바르고 성숙한 반응이 아닙니다. 인생이 그런 것이구나, 좀 더 가꾸고 사랑해야 하겠구나 하면서 모자라는 것을 주님께로부터 채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 순간에 많은 사람에게서 박수갈채를 받고 사랑을 받으면서도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찬양)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그래서 남편이나 아내의 장점이 사랑의 유일한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와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 때문에 그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사람으로부터 무한정의 용납과 무제한의 사랑 같은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별로 안 좋아하십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삶의 사태들을 대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극복해갈 수 있는 그런 힘, 그런 은혜 속에서 살아서 복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가족끼리 왜 이래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창 4: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가족들 속에 태어나서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사람이 되어 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인생의 경로를 겪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도 가족이고 살아가면서 제일 먼저 경험하는 사회도 가족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가족은 우리들에게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이름이기도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이 가족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두 개의 본문은 어떻게 인류 최초의 가정이 파괴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들어서 기쁘지도 않은 이 슬픈 가족 관계의 깨어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가족들과 갈등하며 살면서도 아직도 우리가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헛된 기대와 희망을 품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가족들을 원망하고 기대 걸었던 것만큼 미워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도 가족들에게 똑같이 괴로운 존재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는지요? 이 이야기는 결코 우울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우울한 가족 관계의 파괴 속에서 하나님은 한줄기의 빛처럼 어떻게 그런 가족관계를 극복하며 살 수 있는지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II. 부부 관계의 파괴
A. 유혹의 경로
제일 먼저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부부관계가 파괴되는 상황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부부관계가 깨뜨려진 결정적인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범죄가 있기 전에 두 사람을 유혹하는 유혹의 경로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런 선악과는 만드셔서 인간을 죄짓게 하셨을까?’ 또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을 때에 그냥 죄를 짓게끔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을 과연 정의로운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과 선악과를 지으신 경륜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질문들입니다.
선악과가 아담과 하와에게 커다란 걸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선악과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악을 위한 유혹에 굴복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지상의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당신의 대리자로 삼으셨습니다. 기계처럼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지성과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의지의 힘을 아울러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복종케 하며 살 수 있는 존귀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시는 분이 아니니까 자신들이 수시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착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금하신 선악과 앞에 설 때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이 선악과를 주장하실 수 있으며 하나님과 자신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존재의 격차가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면 그것이 고통의 수단이 되었겠습니까, 은혜의 수단이 되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지만 어떤 사람들처럼 이것은 상징이나 신화가 아닙니다. 만약에 선악가의 사건이 신화였다면 그들의 범죄도 신화 속에서의 범죄가 되고 예수님은 그 신화 속에서 이루어진 범죄를 위해 역사 속에서 죽으셨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선악과가 무엇이었느냐, 어떤 신비한 과일이었느냐,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저 평범한 과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과일이 아직도 있느냐 지금은 없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과일에 부여하신 신학적인 의미입니다. ‘이것은 먹지 말라.’ 이것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서 너희는 나에게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나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된 피조물임을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단은 비교적 유혹에 취약한 본성을 가진 하와의 감성에 호소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말씀과는 달리 이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 같은 지위를 얻게 되고, 선과 악을 알게 되리라고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그중에 어떤 것은 사실이었지만 어떤 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하와가 하나님이 처음 주셨던 상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의지에 올곧은 상태를 유지했더라면 이런 유혹쯤은 물리칠 수 있었을 텐데 마음이 흔들리고 악에 그 마음이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호기심에 대한 지식의 욕심과 지위에 대한 탐냄, 그리고 감각에 호소하는 그 선악과의 매혹적인 특징에 마음이 이끌리기 시작했고 결국 하와는 자유로운 의지로써 죄악을 선택함으로 타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선하실 분일 수 있느냐고 묻지만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위대한 존재로 창조하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인간을 기계처럼 사용하지 않으시고 독립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때로는 그 자유로운 의지의 선택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도 실제로 그렇게 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실 정도로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그가 자신의 타락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B. 타락의 효과
아무튼 하와는 이렇게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했고 그것을 남편에게도 주어 함께 타락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타락의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제일 먼저 초래된 것은 총체적인 관계의 파괴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관계 속에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 관계 안에서 생명과 사랑이 부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만물의 관리자로서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타락과 함께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그 생명과 사랑이 끊어졌습니다. 결국은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어졌고 뿐만 아니라 자연과 맺었던 관계들도 깨뜨려 졌습니다. 이제 자신에게 복종하던 자연은 투쟁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무서운 상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가 들어온 순서와 정반대로 책임을 묻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와 뱀의 순서대로 책임을 물으셨고 아담과 하와에게는 변명할 기회까지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끔찍한 변화는 사실 이 세상이 저주를 받아서 자연이 무서운 극복의 대상이 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자신 속에 죄에 대한 책임과 부패성이 도입되어서 이제는 남편 혹은 아내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며 살 수 없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중의 어떤 분들은 “요즘도 사람이 사랑이 빠지면 서로를 자신의 뼈와 살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에게 잘해줄 때 한해서입니다. 이기적인 정신과 합치할 때에 비로소 그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 기대에 어긋나면 사정없이 그 관계를 깨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그 여자가 열매를 내게 주었기 때문에 내가 먹었습니다.”라고 변명하였습니다. 이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여자에 대한 미움이 함께 깃들여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아니라 이 여자는 암덩어리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고, 같은 땅에 이 여자와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가 갈리도록 싫은 사람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오늘날 부부사이에 일어나는 많은 갈등들도 이 피를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로망이 있습니다. 정말 자신을 목숨 바쳐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목마르다면 심장의 피를 짜서 먹여주고 배고프다면 살점 하나하나를 찢어서 자기 입어 넣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고 믿으며 사는 것 자체가 인간으로서 미성숙한 것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그 죄와 부패성을 타고난 불완전한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했는데 결국은 성경을 한 장 뒤로 넘기니까 함께 하기도 싫은 여자이고, 그런 여자를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도 싫었고, 그렇게 해서 자기 입에 들어간 열매도 싫었습니다. 부부관계에서 그래도 덜 상처를 받고 사는 비결을 하나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남편이나 아내가 자신에게 잘 못할 때에 ‘이 남자가 왜 그러지. 이 여자가 왜 그러지.’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그게 원래 인간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잘해주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생각하고 한없이 감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큰 소리로 아멘을 하면 오늘 저녁 때 집에 가서 안전하시겠습니까?
부부가 여행을 갔답니다. 그 여행지에 갔더니 큰 우물이 있더랍니다. 거기에는 팻말이 붙어있는데 소원을 이루는 우물 그랬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우물을 들여다보면서 동전을 던지면서 소원을 빌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먼저 우물을 들여다보고 뭔가 소원을 빌면서 동전을 던졌답니다. 그랬더니 남편도 자기도 해 보고 싶은데 키가 작아서 잘 안 닿으니까 까치발을 들고 우물에 매달려서 동전을 던지다가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저 깊은 우물에 빠져서 건지러 오는 사람도 없고 죽었습니다. 아내가 돌아서서 걸어오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정말 이루어지는구나.’ 그랬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에 즐겁지 어떤 여자가 남편이 있었는데 바람피우고, 병들고, 중풍에 걸리고 그랬는데도 두들겨 맞으면서 죽도록 봉사해서 남편을 먼저 보냈다더라 아무에게도 감동을 안 줍니다. 사실 그게 감동적인 이야기인데 아무도 감동을 안 받고 여자들 있는데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맞습니다. 혹시 그런 일이 일어났어도 온갖 비밀로 간직하고 살아야지 그런 거 간증하면 안 됩니다. 다른 여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에 자신이 학대받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타락과 함께 자기 자신이 다 망가지고 부서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한때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있고, 거기서 생명과 사랑이 끊임없이 내려왔기 때문에 그런 고백이 가능했고 그 고백에 어울리는 삶도 가능했던 것입니다. 한 순간에 끊어졌습니다. 그러자 관계도 함께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의 남편입니다. 그리고 그게 여러분의 아내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항상 좋은 신앙생활만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족의 첫 관계,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산산이 부서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내를 향해, 남편을 향해 우리 가족인데 가족끼리 왜 이러냐고 묻습니다. 여기 답이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사랑을 자가 발전해서 그래서 다른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면서 사는 그런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생명과 사랑 때문에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 관계가 끊어지자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은 정말 함께 살기 싫은 그런 사람이 된 것입니다.
부부관계가 심각하게 깨지고 도저히 서로를 견디지 못합니다. 나쁜 사람은 상대방을 죽이기도 합니다. 그것보다도 덜 나쁜 사람은 자기가 죽고 맙니다. 얼마나 함께 사는 것이 괴로우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까? 이 세상에 그런 비극을 안겨줄만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어떤 사람이 정의를 해치면서 산다고 지구 반대편에서 그 사람을 위해서 자살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결국은 인간에게 이 끊임없는 상처와 고통은 사랑하기로 되어 있는 관계가 깨질 때 그것은 무서운 상처가 되어서 자기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를 대등한 결혼 계약으로 맺어진 책임 있는 당사자라고 보는 한도 안에서는 이러한 비극들은 극복될 수 없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먼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그 남편을 혹은 그 아내를 영혼으로 보십시오. 그러면 그 인간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는 물론 못 고쳤고 아내나 남편 자기 자신도 스스로 고칠 수도 없는 질병적인 상태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면 심지어는 자신에게 끔찍한 악을 행하는 그 사람도 너무너무 가엾습니다. 왜냐하면 그 인간이 망가져서 그 따위로밖에 못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치 불구인 상태에서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하는 사람을 보면서 불쌍하다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게 이제 인간의 원래의 모습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해결은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그 망가진 사람이 고쳐지지 않고는 해결의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이고 여러분의 아내를, 남편을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III. 형제 관계의 파괴
A. 가인과 아벨
뒷장을 넘기면 그것 못지않게 끔찍한 장면이 나오는데 인류 최초의 살인입니다. 형제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모두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낳은 그들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즉각적으로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셨고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정녕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 죽음의 때를 잠시 연기시켰고, 그래서 그들이 영생 불사할 수는 없지만 자손을 남기고 죽을 수 있는 여유를 주셨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메시아에 의한 구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제사의 제도를 허락하셔서 타락한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 중에서 메시아에 대한 약속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자신의 몸에서 그러한 메시아가 태어날 것과 그가 자신들을 유혹한 원흉인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생명을 줄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아담과 하와는 살았고, 이 믿음 때문에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동침하여 처음 아들을 낳았는데 아담과 하와의 기대는 가슴에 꽉 찼습니다. ‘이 아이로 말미암아서 어쩌면 우리가 구원을 받을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았을 때에 그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가인이라고 하는 그 말의 뜻은 ‘획득했다’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때문에 이 아이를 얻게 되었다라고 하는 고백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아이로 말미암아 여호와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그들의 믿음을 반영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일 정도의 나이가 되었으니까 상당한 세월이 흘렀을 것이고, 아마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깨어진 관계가 그 자식 속에 그대로 투영된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는 아담과 하와가 원하는 데로만 자라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에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 이름을 ‘허무하다’라고 지어버렸습니다. 아벨이라는 이름은 ‘헛되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아벨이라는 이름을 지었을 때에 어쩌면 이 두 사람은 깊은 영혼의 침체 속에서 아들을 낳아 봐도 구원의 희망이 없다는 낙심 속에서 이 아이를 출생했을 지도 모릅니다.
결국 이 두 아이는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존 오웬 같은 청교도 신학자는 제사 제도가 인간의 타락 즉시 아담과 하와에게 계시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긴 그랬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 보면 그런 계시가 있었으니까 이 두 사람이 제사를 드렸다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였고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각기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렸고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았습니다. 이것이 제물 때문이었다라고 해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 당시에는 제물보다는 이 두 사람은 각기 자기가 종사하는 그 직업에서 얻은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오히려 그 중요한 단서는 첫 새끼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에서 첫 새끼라고 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처음 난 것이기도 하지만 히브리말로 이 초태생은 최고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영어의 초이스가 ‘the best’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도 이렇게 성경을 번역한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벨은 하나님 앞에 최선의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 성경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는 아벨의 이 제사를 믿음으로 드린 제사라고 설명하고 있고 그 믿음의 내용에 대해서 가르쳐 주기를 하나님이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이심을 믿은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벨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과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베푸시는 분임을 믿으면서 계시해 주신 대로 제사를 드렸고 자신이 가진 최선의 것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는데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벨의 제사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아벨이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이 주신 그 계시대로 제사를 드리고 자기의 마음에 있는 최선의 것을 드리고 자기의 제사를 받으시는 그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모든 자들에게 자기처럼 나아가면 하나님이 상을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을 뿐입니다. 가인과 아벨 사이에 무슨 다툼이 있었거나 이해관계가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B. 최초의 살인
그런데 최초의 살인이 자행됩니다. 가인이 아벨을 살인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의 제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자신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면 자신의 무엇이 부족해서 동생의 제사는 받으시고 나의 제사는 거절되었을까 하고 반성하고 회개를 하고 고치면 될 텐데 자신은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하는데 인정받는 아벨을 보며 그 마음속에서 열등감과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그리고 시기심 속에서 그 동생을 들판에 있을 때에 돌멩이로 쳐서 죽였던 것입니다. 한 번에 죽었겠습니까? 절대 엄청난 살인의 기술을 갖지 않는 한 번에 돌로 쳐서 동생을 죽였을 리가 없습니다. 가인은 살인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미친 듯이 동생을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머리 부분을 미친 듯이 두드려 해골을 박살낸 상태에서 죽였을 것입니다. 결국 마찬가지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싸움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각자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범죄했고, 아벨은 그래도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가해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지만 가인은 불신자의 조상이고 혹은 배교자의 조상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해야 할 형제 관계가 파괴되었고, 철저한 이기심과 자기의 중심성 속에서 자기의 뜻대로 질서 지워지지 않는 현실을 보며 분노 끝에 동생을 쳐서 죽였던 것입니다.
동생에게 무슨 죄가 있었습니까? 동생이 가인에게 어떤 나쁜 일을 했을까요? 동생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겼을 뿐인데 도대체 그것이 가인에게 무슨 커다란 해를 끼쳤기에 이 아벨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벨의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존재의 울림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인 이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없었으니까 못했지 만약에 할 수만 있었더라면 그 돌로 하나님도 쳐 죽였을 인간입니다. 이게 바로 인간이 범죄 한 다음에 가족 속에 파고 들어온 죄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가장 사랑을 나누고 행복하여야 할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이렇게 망가진 채로 태어납니다. 그렇게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태어났고, 그 밑에서 우리 엄마 아빠가 태어났고, 그 모친이 우리를 죄 중에 잉태해서 우리 같이 망가진 인간을 세상에 쏟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난 우리 아내, 우리 남편, 그리고 우리가 낳은 자식들도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철저한 절망밖에 없다는 느낌을 받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두움을 가르고 비춰오는 한줄기 빛이 있습니다. 말하지 않고 조용히 순교의 길을 간 아벨입니다.
엄마 아빠가 타락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 범죄의 멍에를 짊어지고 불행하게 사는지를 가인도 보았고 아벨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가인은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죄의 심각성과 그 결과인 타락의 끔찍한 결과를 직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야 되겠는가 하는 것을 거의 깨닫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달랐습니다. 아벨의 인생 전체를 요약하면 믿어서 믿음으로 산 생애였습니다. 그 끔찍한 타락의 멍에를 짊어지고 모두 찢어지고 박살이 난 가족들과의 관계 속에서 아벨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오히려 살아있는 첫 번째 순교자가 되어서 죽었으나 그 피로 말하는 믿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가족과 잘 사는 것 4 (2015.5.6 수요예배)
IV. 적용과 결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까지 도대체 ‘가족끼리 왜 이래?’ ‘우리 엄마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우리 아빠는?’ ‘우리 남편은 나한테 그렇게 밖에 못해?’ ‘우리 아내는?’ ‘내가 어쩌다 저런 여자를 만났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에게 놀라운 만족을 준 적이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때 이 세상에 여러분 때문에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사람들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오늘 이 최초로 깨어진 이 가정을 보면 이만큼 살아간 것도 인류가 받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더 불행해질 수 있고 더 비참해질 수 있었는데도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그 죄의 증가를 막고 타락을 방지함으로써 이만큼이라도 사람들이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속에서 가족들을 보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 그 생명과 사랑으로부터 단절되어 뼛속깊이 망가진 존재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면 그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망가진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는 비참한 가족들을 보면서 결국은 그런 가족들을 향해서 자신이 원하는 데로 그 가족들이 움직여 주지 않는다고 독설을 퍼붓고 미워하고 어떻게 하면 이 가족들과 단절하고 동떨어진 삶을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여러분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들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그래서 우리에게 너무나 하나님의 구원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망가진 가족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경륜과는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이 불쌍한 인류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 가족들 중 여러분을 먼저 예수를 믿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누구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아 알게 하셨고, 그리고 우리에게 원망스러울 정도로 가슴 아픈 일을 자행했던 가족들을 보면서 어떻게 그들이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지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결국은 이런 사람들 끝까지 사랑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망가진 인간을 어떻게 하든지 고쳐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 주님의 뜻인데 그런 사람들로 가족들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렇게 우리의 가족들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희생하며 섬길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명령하실 때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힘도 주시겠다고 하는 무언의 약속이 그 안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자신의 무능을 알고 하나님 앞에 사랑할 능력을 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는 가족의 질서로 돌아가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차피 그렇게 죄 때문에 타락하고 망가진 가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놀랍도록 그렇게 죄로 깨어지고 망가진 가정을 고칠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고,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아벨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망가진 가정을 고치시고 그 가족들을 참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가족들에게 이런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에 기리 남을 위대한 일을 하고 선교 역사에 기록될 만한 괄목할 만한 일을 남기는 것이 여러분의 사명은 아닙니다. 정말 가까이 있는 여러분의 가족,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고 망가진 가족들과의 관계를 고쳐 주님의 경륜대로 가정을 이끌어 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빛이 되라고, 소금이 되라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맛보기가 되라고 여러분을 먼저 불러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주님을 의지하고 간절히 은혜를 구하며 여러분이 속한 그 가정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으로 고쳐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어려움보다 더 큰 은혜를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남편에게 복종하라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 3:18)
녹취자: 조원정
Ⅰ. 본문해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정말 질서롭습니다. 그 질서는 저 멀리 하늘에 있는 우주 천체로부터 시작을 해서 심지어 우리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 하나 풀잎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 한 마리에게도 모두 질서가 있어서 그 질서를 따라서 존재하고 생존하고 아름다움을 발하는 것입니다.
질서라고 하는 것을 둘 이상의 사물이 어떤 의도와 목적에 맞게끔 관계가 설정된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질서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질서 있는 모든 만물들을 안에서 질서를 발견하고 그 질서를 따라 아름답게 가꾸도록 창조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질서를 없는 존재로 인간을 만드실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하실 리가 없습니다. 더욱이 인간은 자연적으로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능력을 가진 존재로서 창조가 되었으니까 이 질서는 하나님이 반드시 주신 것입니다. 한 인간이 그런 질서를 찾아가는 게 그것이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고 지혜입니다.
정말 오래간만에 7층에 있는 어거스틴 파크를 찾았습니다. 어저께 어거스틴에 대한 책이 한 권 나왔습니다. 그것도 하나 어거스틴에 전해드릴 겸 7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아침에 거기서 사진 한 장을 찍고 어거스틴에게 내가 당신의 고백록을 가지고 책을 썼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하고 그러고 보니 너무나 오랫동안 내버려 두어서 엉망이 되었습니다. 오전에 설교 준비를 하고 오후에 일보고 다하고 저녁에 짜투리 시간에 올라가서 풀 뽑고 물주고 그러다가 내려왔습니다.
출판실에 있는 최환석 형제하고 같이 풀을 뽑았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얘기했습니다. “얘야, 내가 삶의 지혜를 하나 가르쳐 주마, 너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되 이유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라. 돈이 있는 사람이나, 얼굴 예쁜 사람이나, 너 칭찬 해주는 사람만 사랑해 주지 말고 할 수 있으면 모든 사람을 그 사람들에게 어떤 좋은 특징이 없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라. 가능하면 널 정말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대신 너는 다른 사람에게 그런 사랑을 받을 기대를 하지 마라. 그런 사랑을 받을 기대를 하고 살면 인간이 불행해져.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이 너를 볼 때 ‘어떻게 저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이유를 꼭 갖도록 노력을 해라. 그것이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아름다운 삶을 사는 비결이다. 그것도 하나의 사랑의 질서이다.” “야, 너 그렇게 사랑이 없냐?” “그러는 사람은 사랑이 있나?” 사랑이 있는 사람은 그런 말 안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에게 섭섭하게 한 것이나 가슴 아프게 한 것을 사랑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둘이 다투어 본들 마지막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인생에 있어서 모든 지혜로운 삶은 이런 질서를 찾아가는 삶입니다. 이런 질서를 어려서부터 발견하면서 감탄하는 사람들은 좋은 인생을 살아갈 가능성이 아주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럼 당연히 부부 사이에도 하나님이 질서를 두지 않으셨겠습니까? 없다고 하면 하나님이 아무 생각 없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입니다. 설마 이러하겠습니까? 너희 둘이 싸워서 이기는 사람이 위로 올라가거라. 그건 내가 너희들에게 맡겼다. 그러시겠습니까? 그 질서는 처음에는 잘 지켜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질서를 지키는 것은 그 사람의 완전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완전성이 타락 이후에는 깨져 버립니다. 그리고 이 질서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 질서가 깨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완전히 깨져버렸다면 아마 짐승과 방불한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질서들에 대한 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인류사회가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질서는 위계적인 질서가 아닙니다. 기능적인 질서입니다. 고대의 사람들은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먹는 것, 자기를 헤치려는 적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는 것,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국민이 먹고 사는 것, 다음에 외적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 사실 국가의 중요한 목적이 정의라고 가르쳐 드렸지만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이 되지 않으면 그 정의를 구현할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힘을 가진 사람이 정의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좋은 삶입니다.
그런데 이 질서는 위계적인 질서가 아니라 기능적인 질서입니다. 사람의 높낮이에 대한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질서를 마련해주셔서 그 질서를 가지고 그 질서 안에서 살면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질서입니다.
Ⅱ. 아내의 덕목, 복종
A. 가족들 간의 덕목
오늘 성경에는 아내의 덕목이 있는데 그 질서 안에서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이런 질서를 위해서 가져야 할 덕목을 아내에게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의 덕목을 모두 말씀하시면서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있는 덕목들을 규정하십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을 남편은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할 것, 그냥 사랑이 아닙니다. 그냥 사랑은 아내도 해야 합니다. 사랑을 하고 복종을 하면 노예이지 그게 무슨 아내입니까? 사랑은 맞는데 남편은 아내에게 희생적인 사랑을, 자식에게 있는 덕목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 그리고 부모는 자식을 노엽게 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이 가족 구성원들 간의 주신 덕목들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유기체적인 질서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유기체라고 하는 것은 나의 어떤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다른 사람 것은 나에게 영향을 미쳐서 이것들이 여러 개 톱니바퀴가 얽히면서 마지막에 시계바늘 두 개, 세 개를 돌리는 것처럼 그렇게 속에서 작용하도록 유기체적인 공동체로 만드셨는데 그것이 질서 안에서 사랑으로 이루어져 가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마땅하니라. 오늘 이 편지를 불신자에게 쓴 것이 아니라 골로새 교회에게 쓴 편지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경건한 자매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편지를 쓴 것입니다. 로마시대의 가정, 남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제가 몇 번 설교 시간에 말씀 드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여성들은 지위도 별로 없이 남편의 큰 위세아래 굴복하고 있던 때였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교회 안에서 너희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이야기 했으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복종이 로마시대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사회적인 복종과는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것이 성도들에게도 얼마나 결핍되기 쉬운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B. 복종의 의미
여기서 이야기하는 복종이라는 개념은 로마시대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복종이라는 개념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복종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로마시대에 가지고 있었던 복종의 의미는 오늘날 유교문화권에 있는 우리들이 여성에 대해서, 혹은 아내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복종의 의미와 아주 유사합니다. 오히려 동북아 사상의 산실이 되었던 중국은 유교의 영향을 별로 안 받습니다. 문화혁명이 일어나면서 공자부터 시작해서 공자, 맹자 할 것 없이 싹 쓸어버렸습니다. 거기는 정말 기가 셉니다. 중국 남자들이 한국 여성들을 은근히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중국에서는 그런 여자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자기 남편만 알지, 고분고분 순종하지, 물론 그것도 일부의 이야기지만 잘못 만나면 정말 고생하는데,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남자들은 중국 여자를 알고 나면 그렇게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빼어난 미모에 반한다든지 경제력에 눈독을 들인다든지, 그런 경우가 아니면 진실하게 사랑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굉장히 억세고 남녀평등에 대한 사상보다도 그 이상을 넘어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여성들이 남자에게 기가 죽고 하는 것 없습니다. 공산주의에서 철저하게 훈련되어 왔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모택동이나 이런 사람들이 중요 위치에 여성들을 포진시켰습니다. 이유는 배신을 안 합니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이런 유교에서, 그것도 유교도 아닙니다. 이번에 조사해보니까 정통유교도 아닙니다. 더 깊이 공부를 해 보면 다른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지만 제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남존여비 사상은 정통 유교가 아닙니다. 맹자에 보면 삼강오륜 중에 부부유별이 나옵니다. 학자들이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해석을 합니다. 하나는 부부, 지아비와 지어미, 남편과 아내 사이에 구별이 있어야 한다는 그런 의미이고 또 하나는 부부와 남의 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전자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하는 일이나 기능이나 이런 것 사이에 뚜렷한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부부 두 사람의 이 결합이 다른 사람과의 결합과는 구별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정통적인 유교에서는 남자가 절대적으로 위에 군림하고 여성을 짓밟고 무시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고 학자들은 해석을 합니다. 후에 주역에 나오는 교훈을 유교학자들이 남성주의 적으로 해석을 하면서 후에 들어온 사상이 남존여비사상이랍니다. 말하자면 왜곡입니다. 우리는 그런 선입관을 가지고 자꾸 성경을 들여다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내용보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파고들어가면서 나의 선입견을 오히려 성경 속에서 불어넣어서 성경으로 하여금 자기가 원하는 의견대로 해석을 내놓게끔 성경을 왜곡해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1절에 보면 남성들은 이 구절을 별로 기억을 안 합니다. 괄목할만한 구절이 나옵니다. “피차 복종하라” 만약에 이것이 위계질서라고 하면 ‘피차’라고 그러면 안 됩니다. 왕하고 신하를 놓고 둘이 서로 복종하라고 하면,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둘 놓고 서로 순종하라고 하면 그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위계질서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남자가 여자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것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남편이 아내에게 복종할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나는 번역이 썩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복종하라’고 번역을 했는데 ‘휘포타소’라고 하는 희랍어입니다. 질서 있게 어떤 물건 같은 것을 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명령하면서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할 때는 ‘휘파쿠오’인데 ‘휘포’에 ‘아쿠오’, ‘듣다’입니다. 아래에서 이렇게 듣는 것입니다. 명백히 히브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마음을 다 기울여서 커다란 권위를 의식하고 거기에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기꺼이 복종할 마음을 가지고 충심의 자세로 엎드려 부복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히브리어의 ‘샤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을지어다”라고 할 때,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이렇게 했을 때 이것은 건성으로 듣는 그런 것이 아니라 충심에서 그 말씀을 받들려고 하는 부복한 정신과 내적인 깊은 순종의 의혹을 동반한 것입니다. 우리말로 이렇게 번역이 되었지만 사실은 순종이 훨씬 더 높은 강도의 복종의 의미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휘포타소’는 오히려 기능적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찾아간다고 하는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만드시고 어떻게 하나님이 통치하시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교회의 머리이시면서 교회의 남편으로서 그 교회를 신부로 삼으셔서 다스리고 통치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통치하실 때에는 교회와 동등한 위치에서 교회를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공동의회 회원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를 비유할 때 그리스도와 교회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비유로 들 때 거기에 있었던 핵심적인 것은 남편이 여자에게 있어서 예수님처럼 높은 위치라는 식의 해석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있는 생명적인 연합, 그것을 채우는 사랑의 관계, 교회가 조금 아플 때에 교회는 그 아픔을 못 느껴도 예수님은 아파하시는 것, 이러한 사랑의 관계를 설명하시기 위한, 거기에 주된 강조점이 있는 비유입니다.
C. 남편의 머리됨
남편이 머리되었다고 하는 의미는 우열을 보여주기 위한, 그래서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더 나은 존재이고 우월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머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신 것처럼 또한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할 때 이것은 오히려 생명적으로 그리스도와 교회가 연합되어 있는 것처럼 남편과 아내가 생명적으로 연합되어 있고 서로 사랑하고 그 안에 질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아니 남편이 존경할만해야지요.” 자기가 존경할 만하면 더 좋은 데로 장가갔지 왜 자기한테로 장가 왔겠습니까? 이미 결혼함으로서 그 사람을 남편으로 받아들일 때에는 그 모든 것을 다 책임을 지겠다는 서약 속에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남편이 존경할 만한 남편이어야 복종하지요.” 하고 이야기를 하면, 물론 여기에서 복종은 주님 안에서의 복종입니다. 주님 안에서의 복종이 아니면 복종을 하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사랑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마치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헤어지려고 마음을 잔뜩 먹고 있다가 신앙도 없는 남편이 화가 나서 “교회가지 마라.” 아니면 “예수가 좋아? 내가 좋아?” 양자택일 하라는 말 한번 했다고 해서 ‘옳거니. 정말 기가 막힌 기회가 왔구나.’ 그때 없던 신앙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것처럼 과장을 하고 이혼의 사유를 찾아내는 것은 아주 더러운 속임수입니다. 사람은 속겠지만, 교회 가서도 목사님 제가 너무 핍박이 심해서 제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갈라서야겠습니다. 교회에서 전부다 남편 욕하지 누가 아내를 욕하겠습니까? 자신의 양심은 압니다. 하나님은 압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신앙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옳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안에서 복종해야 되고 주 바깥에서의 요구를 하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에도 사랑하면서 그것을 피해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에서 복종은 모든 일에 대해서 아무 생각 없이 남편 시키는 대로 하는 그런 종류의 복종이 물론 아닙니다. 존경할만해야지 복종하지요, 하고 얘기합니다. 자기도 그 남편이 볼 때 남편보고 이야기하라고 하면 “사랑할만해야지 사랑하지.” 똑같은 이야기 합니다.
남을 사랑할 때는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과 좋은 장점 때문에 사랑하지 말고, 그러면 그런 장점이 없는 사람들은 그 사람 앞에서 얼마나 소외감을 느끼겠습니까? 물론 사람이니까 좋고 아름답고 자신에게 유익이 있으면 더 사랑이 가는 거야 어쩔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자식을 향해서도 그런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러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존경할만한 남편이 아니어도 그 사람이 남편이기 때문에 복종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성들이 잘 모릅니다. 남성들이 잘 모르는 것처럼, 여성들은 얼굴이 예쁘고 경제적인 능력이 있고 등등 성품이 좋고 그러면 남자들이 저절로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생각이 없는 사람은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귀어 보면 그 사람의 깊이를 압니다. 남자들은 여성들이 자기를 의존할 때에 사랑을 느낍니다. 물론 마음에 드는 사람이 의존을 할 때에 사랑을 느끼지,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 그러면 더럽게 느껴집니다. 당연합니다. 이상하게 자기한테 기대려고 할 때 얼마나 불쾌하겠습니까? 그래야지 그 남자가 정상적인 남자지 이 여자가 기대도 좋다하고 저 여자가 기대도 좋다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감정이 있을 때에는 너무 씩씩하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남자에게 매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얼굴은 잘 생기고 허우대는 멀쩡한데 너무 여성스러워서 끊임없이 여성에게 기대는, 제가 아는 목사님 한분이 그랬답니다. 나도 건너들은 이야기인데 “여보 저거 어떡해?” “저 바퀴벌레?” 사모님이 와서 손으로 탁 때려잡는답니다. 남자가 그런 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그러면 여성들이 늘 그 남자를 끌어안고 씩씩하게 어머님처럼 살아야 하는데,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데 한두 번의 모성애가 이성애를 촉진하는 것이지 매일 모성애 속에서 살아야 되는데 그런 남자를 좋아할 여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여성이 있다면 그 여성은 그 남자 말고 그 남자 아버지하고 결혼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실제로 들은 이야기인데 사회적으로 꽤 명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일생에 한 번도 탈선해 본적이 없는 사람인데 탈선해서 사랑에 빠졌습니다. 누가 봐도 동의해 줄 수 없는 화류계 여성입니다. 나중에 이 사람이 고백을 하는 것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가 해 달라는 대로 해준 최초의 여자랍니다. 무슨 사연인데 그런 얘기를 한지는 모르지만 그 속이야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 심정을, 남성의 심리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야 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너무 씩씩하지 마십시오. 그거 별로 안 좋습니다.
어느 형제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냉장고인가 뭔가 옮겨달라고 아내가 한번 이야기를 합니다. “어 그래. 옮겨줄게.” 약속을 못 지켰습니다. ‘내일은 꼭 일찍 들어가서 옮겨줘야지.’ 그러고 왔는데 벌써 옮겼습니다. 아내가 힘 좀 쓴 것입니다. 들고 밀고 해서 어떡하든지 혼자서 한 것입니다. 밑에다가 뭘 대고 하면 할 수는 있습니다. 돌아와서 느낌이 ‘저거 굉장히 힘들 텐데 우리 아내가 다해줘서 어려움을 덜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헐, 이 여자는 내가 별로 필요 없구나. 할 수 있는 것도 못한다고 그러고.’ 그 사모님도 연애할 때 바퀴벌레 손으로 때려잡았겠습니까? 파리만 나와도 나 어떡하나 그러고 품으로 파고들었을 겁니다. 어느 정도는 그런 것을 유지하고 사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그러면 좀 일깨워서 그런 것은 스스로 좀 해결하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가정의 질서를 이루는 것이라고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전혀 따뜻하지 않은 아내들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들은 이야기인데 교회가 이렇게 있고 여기에 사택이 있었답니다. 사택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 교회당이었답니다. 그런 식의 사택을 예전에 많이들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관리인도 없고 하니까 자기가 사택에서 창문만 열면 교회당이 보이게끔 그런 사택을 많이 지었습니다. 도둑이 복면을 쓰고 손에 칼을 들고 교회당에 들어오더니 그러니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목사님은 장애가 있으셔서 다리를 저시는 분이신데 딱 보고 “도둑이 들어왔네. 저거 어떡하지?” 그러니까 사모님이 벌떡 일어나서 내려가더니 고무신 두 짝이 교회당에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를 붙들더니, “이놈 자식 너 거기 서있어. 어느 때라고 네가 칼을 들고 감히 강도질을 하러 그것도 하나님에 집에 들어와?” 그러고 가서 여자 고무신으로 뺨을 수없이 때리는 것입니다. 도둑이 기겁을 해서 도망을 간 것입니다. 나중에 도둑 잡혔습니다. 알고 보니까 초범입니다. 그것도 불쌍합니다. 목사님이야 장애가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지만 그런 속에서 정말 아내가 로봇 태권브이처럼 보이겠지만 범사에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일생 살면서 아내에게서 정말 섬세하고 자상하다고 느끼면서 사는 남편들은 정신적인 연합을 이루기에 아주 좋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복종하는 이 문제는 부부의 정신적인 결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엄청 예민합니다. 특히 많은 대중들 앞에서 자신이 아내에 의해서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 정나미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물을 여러 번 해도 복구가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데에 있어서 제일 좋은 것은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백 개 해주는 것 보다 그 사람이 아파하고 싫어하는 한 가지를 안 하는 것이 훨씬 사랑을 지속하기 좋은 것입니다. 아픈 구석을 꼬챙이로 쑤셔가지고 피고름을 내놓고 그 다음에 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 줄 바에야 안 건드리는 것이 낫습니다. 특히 열등감이라든가 개인적인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개념 없이, 그런 것들을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휘저어 놓으면 정말 부부로서 정신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이 문제는 단순히 복종한다, 안한다, 이런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연합의 관계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한번 가서 남편하고 불 끄고 오늘 설교도 했고 잘됐으니 한번 대화를 해보십시오. 여보, 내가 당신 말 안 듣고 고집 세고 사람들 앞에서 당신 가끔 깔아뭉갤 때 당신 기분이 어땠어? 하며 솔직한 답을 한번 끌어내어 보십시오. 그런 대화를 해야지 부부관계가 점점 이렇게 교정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이 난 그런 것 없어,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 얘기는 쑥스럽게 그런 이야기를 왜해? 그런 뜻입니다. 천천히 끌어내어 보십시오. 상상할 수도 없었던 많은 사연들이 마음에서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기억을 못합니다. 정말 무딥니다. 그것은 부부사이의 정신적인 연합을 심각하게 헤치는 것입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아내에게 늘 무시당하거나 아내가 불복종하면서 이런 훌륭한 연합을 이루며 사는 사람들을 거의 못 봤습니다. 여성들은 심각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어떤 것은 고집을 써서 남편과 다툴만한 가치가 있는 것도 때로는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엄청난 문제가 걸렸다든지 등등, 한번은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인데 아내하고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굉장히 힘든데 포기하고 산다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세금 내는 거였던 것 같습니다. 세금을 내거나 이런 것들을 정확하게 법대로 규칙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아내는 경제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이니까 이야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도 옳지 않느냐?” “당신이 내가 얼마나 힘들게 결혼 후부터 여태까지 어려운 살림에 가정생활을 이끌어 온지 아느냐?” 그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성경말씀에 이렇게 되어있다고 하는데 내가 시집와서 얼마나 고생한지 아느냐고 이렇게 얘기하면 얘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현저히 마음에 눌림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습니까? 남편이 하라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할 때에는 여보, 그것은 좀 아닌 것 같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나왔으니까 성경대로 하라고 정직하게 이야기하는데 그러면 자기가 마음에 좀 안차도 힘들지만 신앙적으로 그게 맞으니까 그렇게 한번 해볼게 하면 좋은데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정신적인 결합이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여성들은 거의 모릅니다.
얼마나 남성들이 자존심 상해하고 몇 번 계속되면 남자는 그런 것을 포기합니다. 말 안한다고 해서 남편이 모두 다 기뻐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기다리십시오. 그것은 다음 주에 할 것입니다. 오늘은 아내의 덕목만을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살면 부부관계가 자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피상적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이야기는 가슴에 팍 와 닿습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나서 아내에게 막 잘해줘야겠다고 하니 이혼서료 들고 오는 경우, 아무 그거 없이 수더분하게 잘 사니까 아 이 여자는 정말 하나 밖에 없는 배필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진짜 마음에도 없이 결혼 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니까 넌 싫다. 하고 탁 차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이 어디 여자에게만 있겠습니까? 남자에게도 있습니다. 똑같습니다. 결국 잘못된 방식의 생활입니다.
Ⅲ. 하나님의 뜻을 생각함
마지막에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편하고 겨뤄서 이겨야겠다는 그런 생각 하지 말고, 독하게 마음먹으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애들도 셋이나 낳았는데 아내가 갑이지 남편이 갑이겠습니까? 아내가 애 둘만 낳으면 그러면 헤어질까? 제일 무서워한답니다. 특히 30대 중반쯤 된 남성들, 30대 중후반 된 남성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그것이랍니다. 통계가 나왔습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되었을 때 그 엄마가, 어떻게 28세에 시집을 갔다고 하면 29세에 아기를 낳았다고 하면 37세쯤 되었을 때, 그때에 여자로서의 자존감이 최고랍니다. 아이는 컸고 나는 아직 젊고, 남자는 두 살쯤 보태서 39세 아니면 40쯤 되었을 것입니다. 남자는 그때 꺾일 때입니다. 그때 헤어질까 하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갑인데 마음 놓고 갑질 하면 안 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주안에서 마땅하니라” 하고 나옵니다. ‘아네켄’이라고 하는 히랍어인데 ‘꼭 맞다’ 입니다. 살이 13키로 정도 빠지고 나니까 옷이 하나도 맞는 것이 없습니다. 낡은 것은 많이 버리고 겨울옷은 새로 사지 말고 줄여 입자고 해서 양복을 7-9만원을 주고 다 줄였습니다. 줄였는데 옷이 이상해졌습니다. 모든 것을 다 똑같이 줄일 수는 없습니다. 줄일 수 있는 것만 줄이니 옷이 기형이 된 것입니다. 옷을 입으면서 바보짓을 했다 싶었습니다. 세벌을 줄일 바에야 차라리 하나를 사는 것이 나은데 절약한다고 했는데 옷이 영 아니었습니다.
옷을 기성복으로 사 입는데 몸이 표준형인 사람은 기성복이 최고입니다. 그런데 디자이너들이 볼 때에는 대부분이 기형입니다. 내가 누구라고 이야기는 안하겠는데 우리 교회에서 여직원 유니폼을 맞췄는데 저 자매에게 입혀보면 어떨까요? 그랬더니 디자이너가 와서 몸이 기형입니다. 나는 그래도 꽤 골라서 추천을 했는데, 아직도 다니고 있습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외과 의사가 보는 기형이라는 것과 디자이너가 보는 기형이라는 게 이런 건가. 그 얘기 듣자마자 이 여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속으로 그랬습니다. 당신도 기형입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정상체형이 몇 명이나 있을까 하며 솔직히 물어 봤습니다. 그랬더니 많지 않습니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기형입니다. 배가 이렇게 나온다든지, 그럼 무슨 문제가 남았느냐 하면 배에 맞는 옷을 삽니다. 그러면 허벅지 이것이 완전 몸빼처럼 나옵니다. 허벅지에 맞추면 도저히 배가 안 들어갑니다. 그래서 체형이 정상이 아닌 사람들은 옷을 맞춰서 입으면 몸에 딱 맞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만들기 전에 손을 한번 봅니다. 무지하게 비싼 줄 알았습니다. 옷감을 너무 비싼 것을 안 고르면 기성복 사는 것 하고 큰 차이가 안 납니다. 맞추었는데 되게 편합니다. 딱 맞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네켄’이라는 단어가 바로 ‘딱 맞다’ 무슨 뜻인가 하면 관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참 좋다.’ 그것이 뭐냐 하면 가정에서 질서가 있어서 아내가 남편에게 있어서 복종하는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도 딱 맞다. 참 좋다. 가정에 그 질서의 옷을 딱 입혔을 때 딱 맞는 참 좋은 옷이다. 그것을 여기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점심시간에도 청계산에 한 이십분 걷고 왔는데 비가 오는데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혼자 걸으면서도 중얼중얼 거립니다. “그래 맞아. 계곡에는 물이 흘러야 하고 교회에는 은혜가 흘러야 돼.” 계곡에 물이 흘러가니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숲속에 공기 온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비가 몇 번 왔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흐르는지 모릅니다. 너무 좋습니다. 메마른 들판에 단비가 쏟아집니다. 아무것도 없는 천수답입니다. 혹은 물길이고 아무것도 관계수로가 정리되지 않은 멍텅구리 논밭이면 비가 확 쏟아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때 비가 맞춰오면 다행이지만, 이게 맞추어 안 오면 농사를 못 짓습니다. 조금만 더 오면 토사가 막 쓸어내려갑니다. 그런데 질서정연하게 관계수로가 되어 있어서 바둑판 모양으로 논밭이 잘 나뉘어져 있습니다. 비가 확 쏟아지면 물이 많이 들어오면 물길로 빠져나가고 모자라면 물길에서 물이 들어옵니다. 그게 바로 질서입니다. 그런 질서가 흐르면서 온 물길이 그 질서를 따라 나있고 그 물길을 따라 물이 흐르면서 논밭이 풍성하게 수확을 거둘 수 있게끔 되는 것처럼 똑같이 사랑도 비와 같습니다.
부부 사이에 보면 사랑의 정동이 쏟아날 때가 있습니다. 거의 안 쏟는 사람도 있어서 문제지만 정동이 쏟아납니다. 사랑이 질서가 있으면 질서 속에서 이렇게 흐르는 것입니다. 이 질서가 없고 그 질서가 없는 것 때문에 고통을 받으면 사랑의 감정들이 너무 많이 낭비가 됩니다. 어느 날은 너무 뜨겁게 사랑을 했는데 계속해서 개념 없이 부딪히는 일이 생겨나게 될 때에 여기에서 쏟아나는 많은 사랑의 감정들이 낭비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자신의 삶이 비 영적인 틀들 속에 묶여 있을 때에는 그것 때문에 은혜가 자꾸 낭비가 됩니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남편과 아내사이에 이 질서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신앙이 좋고 존경할 만한 남편을 주옵소서. 결혼하지 않았을 때에는 그런 기도 많이 해도 됩니다. 결혼하고 나서는 신앙이 좋고 존경할만하기 전까지는 복종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이런 기도를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남편이 된 것도 다 자신에게 주어진 분량이라고 생각하고 어쩔 수 없습니다. 남편도 아내를 그렇게 생각하고 자신의 감정이나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이 아내인 나를 보면서 원하는 뜻이 무엇이고 우리 사이에 하나님이 세우시려고 한 질서가 어떤 것들인지 이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가족과 잘 사는 것 5 (2015.05.10 주일오전설교)
Ⅳ. 적용과 결론
이 모든 것과 함께 너무나 중요한 것은 남편을 긍휼히 여기는 아내의 마음입니다. 오늘 저녁도 집에 가서 곤히 잠들어 있는 남편 얼굴을 이렇게 한번 쳐다보십시오. 불쌍하지 않습니까? 사업이나 혹은 직장을 다니면서 그 일어나는 일들, 글쎄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집에 와서 하나씩 얘기하는지? 교회에서 있었던 일, 집에 가서 별로 이야기 안 합니다. 어떻게 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중에 어떤 것들은 직장 다니면서 일어나는 일, 직장 다니면서 당한 치사하고 그런 것들, 집에 가서 남자들이 자존심이 있지 그것을 다 이야기 하겠습니까?
남성들이 오늘날 이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그 모습은 여러분이 집에서 만나는 품위 있는 모습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경우가 많습니다. 능력도 있고 돈도 있고,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들이 간혹 가다가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너무 험한 세월을 삽니다. 그것을 나눌 사람이 없다고 할 때 남편은 홀로 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부관계에 있어서 매우 안 좋은 것입니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프고 슬픈 일이 있으면 아내가 생각이 나고 달려가서 쏟아 놓고 싶은 것이 정신적인 유대관계입니다. 연합입니다. 한번 정말 뒷조사를 해볼 수는 있지만 남편의 마음을 두드려서 진심을 한번 풀어 놓을 수 있도록 그래서 어려우면 혼자 어려워하지 말고 내게 이야기해보라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소통을 해 보십시오. 훨씬 힘들고 고통스러운 인생의 과정을 살핍니다.
IMF가 일어났을 때 저는 직접 봤습니다. 과천 쪽으로 오다 보면 관악산이 있습니다. 요즘은 안 다니는데 전에는 큰길로 안 오고 항상 뒷길로 관악산 아래로 오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여러 대의 차들이 서서 와이셔츠 입고 사람들이 아침에 옷을 다 풀고 갈아입습니다. 윗도리 갈아입고 등산을 하는 것입니다. 내려와서 국수 한 그릇 먹고 퇴근 시간 되면 다시 양복 넥타이 매고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몇 달이나 그렇게 한지는 모르겠지만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하루 아침에 쫓겨났는데 집에서 차마 말을 못하고, 그런 것을 내 눈으로 직접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아 이게 뉴스에 나오는 그거구나.’ 과장이 아니고 ‘진짜 저렇구나.’ 그런 사람이 집에 들어갔을 때 그것을 과연 아내들이 알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여전히 아무 일 없는 듯이 바가지 긁고 다투기도 하고 그랬을 것입니다.
사랑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저 인간이 잘못했지? 내가 잘했지.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어떻게 견디면서 살아갈까! 생각을 하고 가엾다고 생각을 하면 그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것처럼 그가 지금 불쌍하고 가엾다는 것 밖에는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그것이 없으면 사랑 아닙니다. 사랑은 언제나 그런 힘입니다. 그런 사랑을 남편이 아내에게서 충분히 느끼며 살 수 있도록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제가 지난 시간에 그랬습니다. 세상에 못난 여자들이 자기 남편한테 사랑 안 해준다고 투덜대는 사람입니다. 해봐야 무슨 소용 있습니까? 만약에 남편이 아내를 정말 사랑해주지 않았다면 그 속에 사랑이 없는 건데 투덜거린다고 나옵니까? 사랑이 애들 과자 값입니까?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랑이 그런 방식으로 이끌어내면 남자들이 사랑을 표현하고 싶다가도 투덜거렸기 때문에 마치 잘 보일 것처럼 하는 치사한 마음이 들어서라도 표현을 안 합니다. 남성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솔직히 대답해 보십시오. 대부분의 남자는 치사해서 표현안합니다. 세상에 쓸데없는 소모적인 불평입니다. 저는 한 번도 아내에게 그런 불평 해 본적이 없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제 사상하고는 안 맞습니다.
그렇게 가슴이 허전해 보이면 남편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 뭘 하라고 했습니까? 받을 생각만 하지 할 생각은 해 봤습니까? 이벤트는 왜 꼭 남편이 해야 합니까?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정말 남편이 사랑해주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되면 남편한테 투덜거리지 말고 자기 자신한테 투덜거리십시오. 네가 어떻게 했으면 남편이 저렇게 가을이 되었니? 스스로 생각하면서 거짓말로도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 보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노력하지도 않고 외모는 가꾸지도 않고, 외모 때문에 예뻐하는 것은 아니지만 폭탄 맞은 머리를 하고 집안은 개꼴을 해놓고 맨날 사랑타령만 하고 있을 때 걸식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사랑은 구걸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것입니다.
남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아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사연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엾게 여기고 약한 자로서 긍휼히 여기면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슬프고 마음 아프고 살다가 너무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으면 가슴속에 따뜻하게 생각나는 사람이 아내이어야 합니다. 달려가고 싶고 붙들고 펑펑 울고 싶고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쏟아내고 싶고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좋은 아내임에 틀림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분에 넘치는 섬김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지만 정말 한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이런 부부 사이의 정신적인 연합의 관계를 돌아보면서 남편에게 얼마나 막하면서 살았는지를 한번 깊이 반성하십시오. 다음주일만 기다리지 말고 깊이 반성하면서 정말 남편이 나 때문에 가슴이 시리도록 행복한 적이 있었을까? 그렇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신 5:1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어릴 적 시골에서의 경험이지만 암탉이 계란을 품고 병아리를 태어나게 하는 과정은 신비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암탉이 계란을 품고 21일쯤 되면 알을 깨고 병아리들이 나옵니다. 그때까지 그 알을 부화시키기 위한 어미닭의 희생과 수고는 그야말로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달걀을 품고 둥지에서 절대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잠깐 물을 먹기 위해서 내려오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21일 내내 계란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도 날개로 계란을 계속 굴리며 골고루 자신의 체온이 전해지게 해서 결국 병아리들이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태어난 후에도 어미닭이 병아리들을 돌보는 광경은 참 신비하기 그지없습니다. 지렁이나 곡식 알갱이나 모이를 발견하면 큰 소리로 병아리들을 부르면 노란 병아리들은 날갯짓을 하면서 엄마가 부르는 곳에 달려가 모이를 쪼아 먹습니다. 지금도 한 장의 사진처럼 선명하게 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광경이 있습니다. 병아리들이 흩어져 마당에 놀고 있을 때 솔개 한 마리가 떴습니다. 그 솔개는 빙빙 돌면서 먹잇감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다급해지자 이 닭은 거의 비명 소리에 가까울 정도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노란 병아리들은 재빨리 엄마 곁에 모였습니다. 어미닭이 날개를 넓게 펼치자 그 병아리들은 그 날개 속으로 숨어들기 시작했고 거의 20여 마리가 되는 병아리들이 절대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도록 엄마의 두 날개 그늘 아래 꼭꼭 숨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미물들이 자기의 자식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감정이고 태도입니다. 아마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하자면 오늘 하루 종일 해도 다 못할 것입니다. 동물들의 세계가 이러하니 하물며 영혼을 가진 인간이 올바른 지성의 빛을 받는다면 그가 자녀를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과 애틋함은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하나님은 인류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십계명을 주셨고 이것은 제일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두 개의 돌판 속에 새겨졌다고 하는 이 십계명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렇게 살아라 하고 주신 계명입니다. 하나의 돌판에는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 계명이 담겨 있었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보여주는 돌판입니다. 두 번째 돌판에는 여섯 번째 계명부터 열 번째까지 기록되어 있는 돌판이었는데 이것은 인간과 인간이 어떤 관계를 맺어야 될지를 보여주는 계명이었습니다.
II. 부모에 대한 공경
A. 공경한다는 의미
그 여섯 개의 계명 중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계명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그러니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생각에 모든 인간이 서로 관계를 맺고 사는 그 세계 속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나머지 아홉 개의 계명은 하나님이 계명을 주셨을 뿐이지 계명 끝에다가 이 계명을 이행하면 어떤 보상을 주겠다고 하는 약속이 붙어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계명만큼은 하나님의 약속이 현상금처럼 붙어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하는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간곡한 말씀을 뒤집어서 읽으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는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주지 않은 남의 땅에서 요절할 것이며 걸식하며 가난하게 살 것이다 이것입니다. 그러니 이 계명을 뒤집어 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어떤 강도로 이 계명을 인류에게 명령하셨는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장수의 시대입니다. 80 넘은 노인네들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고 이제는 70을 넘기지 않는 사람이 경로당을 찾는 것은 경로당에 있는 분들에게 실례라고 합니다. 이런 시대에 장수는 가슴에 와 닿는 복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성경이 기록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가기 위해 약 40년 동안 광야를 유리방황하는 중이었고, 수많은 사람이 전쟁과 질병, 그리고 수많은 사건, 사고로 죽어가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런 속에서 오래 살 것이며 땅을 얻게 될 것이며 그리고 하늘과 이 땅의 복을 물질과 정신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이 약속은 정말 그들에게 현실감이 있는 상급의 약속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가르쳐 주는데 인간에게 있어서 부모 공경이 얼마나 중요한 도리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또 한 가지는 이것이 얼마나 실천하기 어려운 계명인가 하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공경한다고 하는 이 의미는 무슨 뜻일까요? “네 부모를 공경하라”에서 이 ‘공경한다’라고 하는 이 말은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는 말, 혹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말과 정확하게 같은 의미를 가진 동일한 단어입니다.
나는 부모 공경에 있어서 그 공경이라고 하는 동사 속에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그 부모를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존중히 여긴다고 하는 것은 그가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를 무겁게 대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히브리적 사유로 풀자면 영광을 인정한다 이런 뜻입니다. 귀히 여기고 소중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훨씬 더 가치 있기 때문에 중요한 분으로 생각하는 것이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자, 어떤 자식에게 부모님이 있습니다. 자기는 인격이 허접하기 짝이 없는데 부모님은 고매한 인격을 가지고 있어서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정신적인 제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또 자신은 겨우 겨우 마지못해서 학교 다니다 졸업해서 밥 벌어먹고 살고 있는데 부모님은 자신 같이 범상한 사람이 따라갈 수 없을 탁월한 학문을 가지고 계십니다. 자기는 이제 근근덕신으로 직장생활 하면서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사는데 부모님은 어마어마하게 높은 지위에 있어서 자식이 아니었더라면 일평생 도저히 만날 수 없을 정도의 사회적 지위의 격차가 있습니다. 자기는 전세방에서 전세방으로 전전하는데 이 부모님은 어마어마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부자입니다. 자기는 100m 달리기도 못하는데 부모님은 42.195km를 300번을 완주를 했습니다. 이럴 경우에 어느 자식이 그 부모를 존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존중히 여기는 게 현실적일 것입니다. 돈도 많으신데 좀 잘 보여야지 돌아가실 때 국물이라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 자녀들에게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네 부모가 존경받을 만하거든, 사회적인 지위가 높거든, 인격이 고매하거든 공경하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네 부모를 공경하라 수식어 없이 간략하게 명제로 던집니다. 현실적으로 이 일이 쉬운 일일까요?
두 번째는 부모를 공경한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관계를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실로 이것 없이는 진정으로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부모님은 연로하고 힘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유산도 다 분배가 끝났습니다. 아무 며느리도 모시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기 먼 섬 지방에 요양소에 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10만원씩 걷어서 매달 요양비를 보냅니다. 공경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안하는 사람들보다야 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관계에 대한 기쁨이 없습니다.
오래전 일인데 어느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어머님 살아계실 때는 그렇게 우울하던 며느리들이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렇게 표정이 밝을 수가 없습니다. 잠시 조문 온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자기가 까만 상복을 입고 있는 것을 깜빡 잊어버렸습니다.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껄껄거리고 웃으면서 상대방 친구의 등을 두드리는 모습이 곗날에 모인 계꾼들 같았습니다. 너무 마음이 상했습니다. ‘아, 저분은 살아있는 동안에 추호도 자식들에게 공경을 받으신 적이 없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부모와의 관계를 기뻐하는 것 없이는 공경을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어느 정도 나이 들면 부모님하고 마주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어디 가고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잠시 후 여러분이 그렇게 소외를 당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사랑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을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효도입니다. 공경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사랑이 꼭 필요합니다. 사랑이 없이는 법적인 의무를 다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공경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B. 사랑이 필요함
그러면 여기에서 오늘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명령하기를 “부모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입을 것을 주어라. 그리하면 너희 자녀의 책임이 면제 되리니.”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공경하라는 것이고 공경 밑에 깔린 전제는 사랑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저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공경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 의해서 조롱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시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사랑이 없이 공경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요구는 형식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식이 부모에게 가져야 될 아주 탁월한 효도의 감정이 무엇인지 아세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나이가 들고 삶의 상황이 바뀌면 부모에 대한 집착도 많이 잃어버립니다. 또 그것이 한 인간이 독립해가는 과정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두 살, 세 살, 네 살, 다섯 살, 여섯 살, 일곱 살, 혹은 여덟 살, 그 이상까지 그 어린 시절에 부모를 향한 감정이 어땠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그 고백이 바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었습니다. 누가? 엄마가, 아빠가. 그 이외에 그 엄마가 아빠가 자신의 친구이고 애인이고 엄마인 동시에 아빠이고, 또 동시에 자신의 인생의 동반자였습니다. 그 이외에 아무 사람도 자기와 관계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시절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나이 때에 엄마 아빠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이 아이들의 마음속에 말랑말랑하게 살아있을 때에 그때에 엄마 아빠는 한없이 아이들을 사랑해 줘야 됩니다. 이유 불문하고 한없는 사랑을 물처럼 쏟아 부어주어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사람이 됩니다. 그럼 물을 것입니다. “목사님, 그렇게 안 해주면 사람이 안 되나요?” 물론입니다. 사람이 안 됩니다. 망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어쩌면 일평생 그 망가진 것을 십자가처럼 짊어지고 피나는 가시밭길을 걸어야 될 지도 모릅니다.
어떤 형제가 제게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이제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어떤 자매를 만나야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얘기했습니다. “내가 물론 이야기해주겠지만 내 조건을 충족시킨다고 네가 결혼을 하겠니? 예뻐야 되겠지. 그건 기본이고 신앙이나 외모나 그런 것은 기본이겠고 그래도 이야기를 하라고 물어왔으니까 가르쳐 주마. 공부를 많이 하고 좋은 학교를 나왔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조금 양보할 수 있고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가진 것도 많고 부모님들이 높은 지위에 있으면 마다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것은 양보할 수 있는데 꼭 이런 조건을 가진 자매를 만나거라. 어렸을 때 커서는 좀 괜찮아. 어렸을 때 지금 말한 그 나이 때에 엄마에게 한없는 사랑을 받으면서 자란 자매를 만나라. 그러면 최소한 남편과 새끼들을 버리지는 못한다. 50점은 보증이 되는 거다.” 그럼 오늘 설교를 듣는 자매들 가운데 좀 썰렁한 자매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랑을 못 받았는데요.” 그러니까 예수 열심히 믿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고쳐지면 그러면 아까 말씀드린 그런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가 조가비를 단단하게 하듯이 인생의 여러 가지 시련과 많은 고통들이 와도 그것을 신앙으로 잘 소화하면 자연적인 성품의 아름다움보다 더 뛰어난 아름다운 성품을 갖게 되는데 그 신령한 성품의 아름다움이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능가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존경할 부모를 둔 자녀들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배나 감사해야 되고 갑절이나 그 부모님께 효도해야 됩니다.
III. 네 부모와 화해하라
A.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에게 부모님은 기쁨과 아픔을 동시에 준 애증의 인물이고 그들 중에는 도저히 부모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공경이 불가능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네 부모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기억들은 자녀들의 마음속에서 좀처럼 잊혀지지를 않습니다. 상처라고 하는 것은 사랑과 깊은 관계가 있는데 부모를 향한 사랑은 올리 사랑이고 자식을 향한 사랑은 내리 사랑입니다. 올리 사랑은 이기적인 본성과 끊임없이 싸워야지만 실현이 가능하지만 내리 사랑은 웬만하면 가능합니다. 웬만하지 않은 사람도 요샌 많습니다. 그래서 자식이 나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은 물에 새긴 글씨와 같아서 금방 사랑의 흐르는 물속에 씻겨 버립니다. 그런데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는 돌멩이에 새긴 글씨와 같아서 때로는 세월이 지난 후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 상처의 기억들이 잊혀지지 않는 게 인간입니다. 때로는 부모님이 어린 시절에 매우 무관심하거나 사랑이 없이 자녀들을 대합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무관심 속에서 자녀로서 소외되는 것이 무엇인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의미를 아직 모릅니다. 그래서 그냥 기억으로만 남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이 성숙하게 됩니다. 이게 확 터져서 피가 솟구치면서 이제 상처가 독을 품고 번지기 시작합니다. 어렸을 때 부모가 아이들에게 잠깐 잘못해도 다시 부모가 태도를 바꿔서 사랑해주면 아이들은 다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그것 없이 내버려 두면 어렸을 때는 모릅니다. 혹시 또 그 의미를 조숙해서 조금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권력이 아이에게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장합니다. 정신적으로 자라면서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때에 솟구치는 분노가 상처에 휘발유를 부어버리는 것입니다.
몇 해 전이었는데 60세는 훨씬 넘어 보이는 어느 신사분이 2층에 있는 제 방 문을 어깨로 확 밀면서 벌컥 열면서 들어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간사가 깜짝 놀라서 “아니 왜 이러세요?” 그랬더니 개의치 않고 무조건 제가 앉아서 쉬고 있는 소파 맞은편에 털석 주저앉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두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좀 시간이 지난 다음에 “무슨 일이십니까?” 그랬더니 “제 나이 65세인데 어머니가 일주일 만에 저를 버렸습니다.” 그것을 후에 깨달은 것입니다. “일평생 동안 부모를 미워하며 살았는데 오늘 네 부모를 용서하라는 설교를 들으니 너무 괴롭고 하나님께 죄송해서 제가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축복의 기도를 드려주고 보내드렸습니다. 65세면 손자를 보고도 남을 나이인데 65년 전에 상처받은 기억이 그렇게 오늘 일어난 일인 것처럼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 분의 어머님이 살아계셨는지 돌아가셨는지 모르지만 살아계셨다고 해도 90은 넘으셨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폭력과 폭언, 그리고 그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하는 편애, 도덕적인 잘못된 모본을 보여주고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고통을 준 그 쓰라린 기억들, 자기의 가슴을 짓밟는 구둣발이 되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받는 수많은 상처와 맺힌 것들은 자신의 삶의 영혼에 영향을 주어서 원하지 않으면서도 망가진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자식과 남편을 하찮게 아는 엄마 밑에서 자란 딸은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유사한 길을 걸어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깊이 고민하며 인생에 대해서 성찰하고 신앙을 가져야 된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인간이 살아갑니다.
B. 네 부모를 용서하라
그래서 공경하려면 사랑이 필요하고 사랑을 하려면 먼저 화해가 필요한데 그 화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부모를 진심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용서만이 관계 회복의 길이고 오직 사랑으로서만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체 살아가는 사람들은 좀처럼 부모와 화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상갓집에 다니면서 부모 돌아가셨을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자녀들 많이 보았습니다. 티끌만한 사랑도 자식의 마음속에 남아있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는 그러한 용서와 사랑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신앙을 가져야 된다고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망가진 인간관계, 깨어진 가족들과의 관계 직면해 보십시오. 여러분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왔던 것 아닐까요?
가족과 잘 사는 것 6 (2015.05.17 주일오전설교)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에 어느 날 아침 제 연구실에서 신문을 보면서 지금 드리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을 울었습니다. 세월호에서 죽은 어느 남학생의 집안에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녀석이었는데 어느 날 아침에 학교를 가기 전에 엄마한테 떼를 썼습니다. “엄마, 나 운동화 하나 좀 새 거 사줘” “너 운동화 멀쩡하지 않냐” “아, 엄마 이런 싸구려 말고 메이커 있는 좋은 것 좀 사줘. 나 친구들한테 창피해서 학교를 못 가겠어.” 운동화 가게에 가보니까 20만원이 넘는 운동화도 있다는 걸 몇 년 전에 알았습니다. 와, 금을 바른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비쌀까? 이 아이는 그런 운동화가 아니라 그냥 말표나 기차표 그런 것 신고 다녔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막 땡깡을 부리고 그냥 거칠게 말을 하고는 문을 꽝 닫고 나간 것입니다. 엄마가 얘기합니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운동화 타령이나 한다고 그러고 네놈 발에 아무거나 신으면 어떠냐?” 그러고 “못 사줘.” 하고 독하게 쏴 붙인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며칠 있다가 이 아이는 수학여행을 떠났고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아이가 죽었을 때 엄마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세요? 신발 가게 가서 아들이 그렇게 신고 싶다는 그 운동화를 사서 그 아이의 방 책상 위에 놔 줬습니다. 이 자식은 엄마가 싫은 소리 하니까 그게 엄마 맘 전부인 줄 알고 야속한 마음에 대문을 쾅 닫고 나갔겠지만 어쩌면 엄마는 돌아서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씻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식에게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리며 “그래. 네가 그렇게 운동화를 갖고 싶다는 것은 이해를 하는데 우리가 너무 가난하구나. 미안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식들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면서 저게 엄마 마음의 전부려니, 혹은 아빠 마음의 전부려니 생각하고 그 분들이 상처를 받았는데 잘못 해석해서 사랑한 그분들을 향해서 상처받을 일도 아닌 것을 마음속에 상처로 기록해 놓는 일들은 흔히 일어나는 일들 아니겠습니까? 자식들이 부모로부터 받았다는 상처 중에 정말 하나님이 보시면 인정해 주실 수 있는 상처가 도대체 몇 분의 몇이나 될까요? 모두 자기 사랑에 빠져서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요?
부모님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여러분을 많이 사랑하셨을 겁니다. 그런 부모님을 공경하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화해해야 하고, 화해하기 위해서는 용서해야 되는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끊임없이 마음을 먹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운명처럼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사랑의 무능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 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 안에 있는 죄 때문에 인간은 행복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불행한 길을 걸어가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렇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자신을 건질 수 없는 불쌍한 인간들을 위해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지은 모든 죄들을 당신이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죗값을 치루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든지 당신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고 그 분을 의지하면서 살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도록 힘을 주셨는데 이것을 우리는 구원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기독교에 귀의한다라고 하는 의미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안 해도 되는 어떤 일을 추가적으로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그 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부모 그늘에서 사는 것이 갑갑하고 좀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 집안을 가출해서 집안을 나와서 낯선 타향을 해맵니다. 그러다가 철이 들고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보니까 인생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연로한 부모님들이 생각이 나고 상처보다는 그 분들의 외로운 처지가 생각이 나고 아무리 돈이 있어도 근본이 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이 모습이 너무 외롭다는 소외감이 들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으로서 철이 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그렇게 집 나간 탕자가 철이 들어서 저의 원래 부모를 찾아오는 그 귀향의 길이 바로 기독교에 귀의하는 길입니다.
이렇게 망가진 가족 관계 하나 우리 힘으로 고칠 수 없는 정말 나쁜 인간이고 무능한 인간인데 만약에 이런 인간을 내버려 둔다면 어떻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여러분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힘입어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고 고백을 하면 주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V. 적용과 결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은 좀 더 좋은 당신의 자녀가 되도록 우리를 어루만지시고 고치시고 가르치시고 돌보고 훈련시키십니다. 그때에 우리가 주님이 원하는 자녀가 되면 될수록 좋은 아버지가 되고 좋은 어머니가 되고 좋은 자식이 되고 좋은 남편과 아내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싶으셨던 구원의 은혜 안에 인간의 행복이 있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형제자매가 모여서 집안일들을 의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형제가 자기는 부모님 때문에 너무 괴롭다고 그러면서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다 끝나고 침묵이 흐를 때에 옆에 있던 자매가 말했습니다. “그래도 넌 참 좋겠다.” 울다 말고 그 자매를 쳐다보았습니다. 허공을 응시하면서 “그래도 넌 부모님이 살아계시잖아. 난 없어. 지금은 마음 아파해도 내일은 화해할 수도 있잖아. 난 없어.”
오늘 아침도 새벽에 일어나서 잠시 기도를 하고 나오면서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났습니다. 한 3일만 살아 돌아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야기하기 좋아하시는 분이시니 조용히 앉아서 그 분의 이야기를 기쁘게 들어드리고 맛난 것도 사드리고, 가고 싶다는 곳도 모시고 가서 보여 드리면 한 3일만 그렇게 달콤하게 같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이루어질 수 없는 꿈입니다. 그러면서 후회가 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33년 혹은 34년 전에 2월에 어느 날 내가 다니지도 않은 남의 교회에 아침에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거기에서 주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네가 너에게 상처를 준 네 아버지를 그렇게 미워하느냐? 너도 만약에 하나님을 몰랐더라면 네 아버지보다 더 나쁜 사람이 되었을 거다. 네 아버지도 너 만한 나이에 구원받고 나의 은혜를 알았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아빠가 되었을 것이란다. 용서해 주면 안 되겠니? 대신 내가 너 많이 사랑해 줬잖니?’ 추운 마룻바닥에 엎드려서 얼마를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저의 아버지를 미워한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아무리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도 양심에 손을 얹고 미워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 사랑만 해드렸습니다. 그런데 후회가 됩니다. 그렇게 긴 세월동안 같이 있었는데 그 많은 시간들 중에 그 분과 함께 한 날은 얼마나 짧은 시간이었을까? 그래서 자식에게는 부모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십자가의 보혈로 상처 난 가족들과의 관계를 치료하고 고치시기 위해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구원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십자가의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그 분을 여러분 마음 밖에 언제까지 혼자 있게 하지 마시고 그 분을 마음속에 모셔드리고 주님과 함께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네 자녀를 사랑하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성경은 자녀 사랑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마냥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과 또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히 어린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으로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부모가 진심으로 그 아이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사랑해 주는 것이야말로 그가 사람으로 자라는 가장 중요한 비결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그러한 부모에 의한 자녀의 양육을 노엽게 하지 말 것과 진리로 양육할 것으로 지시하고 있습니다.
II. 자녀를 노엽게 말라
제일 먼저 성경은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라고 하였습니다. 아비라는 이름을 불렀지만 사실상 이것은 부모에게 주는 명령이지 아비에게만 주는 명령은 아닙니다. 엄마와 아빠가 있는데 아이들을 노엽게 하고 상처 줄 가능성이 두 사람 모두에게 있지만 일반적으로 아비들에게 그럴 위험이 높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는 이 말이 사랑하라는 것보다 먼저 나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양육하라는 말보다 먼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향한 최고의 교육은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는 교육입니다. 사람은 악한 성품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니까 죄와 방탕을 억제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적절히 가르치고, 필요하면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하지만 그 이외 나머지 부분에 있어서는 아이를 정말 자유로운 사람으로 그리고 마음껏 생각하고 마음껏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며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고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 아이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부모 안에 가득히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노엽게 하지 말라”에서 ‘노엽게 하다’라고 하는 이 단어는 희랍어로 ‘파로르기제테’라고 하는 단어인데 ‘파라’ ‘옆에, 넘어서서, 주위에, 혹은 부풀려서’ 이런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파라노이야’라고 그러면 ‘과대망상’이라고 합니다. ‘파라’라고 하는 전치사와 ‘오르기조’ ‘화가 나게 만들다’라고 하는 것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기를 때에 자녀들에게 많은 것을 해주기보다 먼저 이 자녀들이 분노하지 않도록 이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10살이라고 그러던가요? 9살이 된 여자 아이가 시를 썼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엄마를 소재로 시를 썼는데 섬뜩합니다. ‘엄마가 자꾸 잔소리 한다. 엄마를 씹어 먹어버리고 싶다. 하나씩 하나씩 씹어 먹을 거야. 맨 마지막에 눈깔을 파먹어 버릴 거야. 꼭꼭 씹어 먹을 거야.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그게 시의 끝입니다. 그래서 이제 몇몇 교육 단체 뭐 이런 사람들이 그 시집이 출간된 것을 보고 가처분 신청을 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것을 시라고 내느냐 그러면서 아이들 인성 교육에 안 좋다고 그러고 소송을 했는데 결국은 그 부모가 그 시집을 다 포기하기로 그렇게 했는데 어떻게 보면 어떻게 아이가 이런 심성일수 있을까라고 하는 비판적인 생각도 갖게 되지만 그 반대쪽에서 보면 그 판단력 없는 그 아이의 마음속에 그 학원가라, 뭘 하라, 그러고 비인격적으로 잔소리하는 그 부모의 처사가 이 아이에게 준 무의식적인 상처가 얼마나 큰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도덕적인 여과 없이 아이가 그대로 시로 표현한 게 ‘눈깔을 파먹을 거야. 꼭꼭 씹어 먹을 거야’ 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 폭력, 그리고 무관심,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자식들에게 투사시킨 과도한 기대, 무엇보다도 자신들에게 가르친 것과 일치하지 않는 부모의 부도덕한 삶, 이런 것들은 아이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하는 폭력입니다. 그리고 이것들 때문에 아이들은 분노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표출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것들은 그의 영혼과 정신에 깊은 내상을 입힌 채 상처로 남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소화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그래서 결국은 그것이 그 사람의 인성에 아주 깊이 부정적인 영향을 남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를 기르면서 ‘내가 뭐 자녀들을 노엽게 한 게 뭐가 있나? 자식들이 나를 노엽게 했지.’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어른들끼리 모여 앉으면 여러분의 그런 생각을 지지해 줄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어쩌면 여러분의 그런 생각 자체가 자녀들에게 매우 폭력적일 수도 있습니다. ‘엄마 눈깔을 마지막으로 파먹을 거야. 꼭꼭 씹어 먹을 거야.’ 그게 그 한 아이만의 생각은 아니리라 나는 생각합니다. 어떤 아이들은 그것을 표현할 능력이 없거나 용기가 없거나 혹은 표현하지 말아야 되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을 정도로 분별력이 있거나 할 뿐이지 그 느끼는 감정, 그 폭력성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자기가 자식에게 희생하고 잘해준 것만 생각하지 자녀들에게 폭력을 행한 것에 대해 정신적인 폭력을 행한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 여러분 깊이 한번 반성해 보십시오. 그리고 깊이 자신을 돌아보세요. 그리고 어떤 것들이 자녀들에게 이런 깊은 상처를 주고 표현하지 않았지만 분노하게 만들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자녀들을 위해 희생하고 모든 좋은 것을 자녀들을 위해 헌신했다고 생각하지만 자녀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III. 자녀를 양육하라
두 번째는 자녀를 양육하라는 명령입니다.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원래 양육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히브리어에서는 굳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자녀들을 양육한다고 하는 것은 ‘한 사람으로서 아직 불완전하고 부족하니 스스로 자기 자신을 세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뛰어다니고, 병아리도 태어나자마자 걸어 다니는데 인간은 장구한 세월이 걸립니다. 손녀딸이 여덟 달이 되었는데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최근에 하나 생겼습니다. 젖병을 두 손으로 들고 먹는 것, 그게 8개월이 걸렸습니다. 아직 걷지도 못하고 기지도 못합니다. 더 많이 세월이 걸려야 하고 이 아이가 한 사람으로서 나름대로 판단을 하고 스스로 자기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몇 십 년의 세월이 걸릴지 아무도 장담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인간은 정말 모든 동물들의 뛰어난 인내심이 없이는 자기 자식을 사람답게 양육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내심의 본질이 사랑입니다.
자녀를 양육한다라고 할 때 우리의 개념은 경쟁 사회에서 이기도록 준비시킨다는 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제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정말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 우리들이 살고 있으니까 자녀들이 그런 경쟁에서 패배자가 되지 않도록 이기게끔 준비시켜주는 것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차피 그 아이들의 인생도 우리의 인생처럼 경쟁한다고 해서 늘 이기는 것도 아니고 늘 지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이기고, 때로는 지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그래서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만납니다. 경쟁에서 항상 이긴다고 해서 늘 행복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경쟁과는 전혀 상관없는 육체의 질병을 만날 수도 있고,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경쟁 속에서 늘 이겼기 때문에 누군가의 원한을 사서 복수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이 모든 것들에 문제가 없는데 정말 이상한 여자를 만나서, 그리고 말도 안 되는 남자를 만나서 자기가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인생의 막다른 골목길에 접어들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이런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겪으면서 살게 되고 누구도 완벽하게 행복하고 완벽하게 승리한 삶을 살다가 인생을 끝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숙제는 그러면 우리 인생에서 만나는 그 수많은 삶의 사태 속에서 어떻게 참으로 사람다운 삶을 살다가 죽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데 여기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고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바로 부모가 하여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의사들은 모두 다 자기 전공과목이 있습니다. 전문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문의를 따지 않으면 별로 의사로서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 전문의들은 그 전공 분야별로 심화된 공부를 하면서 실습을 하고 경력을 쌓아서 전문가가 됩니다. 예전에는 내과, 외과, 그 다음에 피부과, 비뇨기과 뭐 이렇게 간단했는데 이제는 훨씬 더 복잡해졌습니다. 병원에 한번 가서 건강 검진을 하는데 자꾸 무릎이 아프고 어쨌든 그다음에 다리가 안 좋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외과 의사가 해주는지 알았습니다. 이 사람 이야기가 뭐냐 하면 간호원이 안내해 줄 거랍니다. 간호원을 만났더니 이 선생님은 정강이 위쪽 전공이고 정강이 아래쪽은 전공하는 선생님이 다른데 예약이 밀려 있어서 6개월 후에나 진찰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확인은 안했지만 아마 발목 아래 발가락 쪽은 또 전공자가 다른 것 같습니다. 웃을 일이 아닙니다. 30년 전만 해도 항문외과라는 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항문만 전공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아주 세분화 됩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들의 말이 예전에는 덜컥덜컥 수술을 했는데 이제는 어느 부분을 수술하게 되면 다른 과에 자문을 다 받아야 된답니다. 그래서 전문의가 되기 전에 인턴, 레지던트를 거치면서 공부를 하는데 자기가 무슨 전공을 택하든지 간에 모든 분야를 다 들어가서 두 달씩 실습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예를 들어서 외과를 지망해도 비뇨기과, 피부과, 소아과 다 마지막에 돌고 온답니다. 이유는 뭐냐 하면 의학 전반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쌓고 그 위에 자기의 전공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자, 그 어린 아이가 앞으로 증권 전문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그냥 동네에서 슈퍼를 경영하면서 살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카센터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세 살, 네 살 밖에 안 된 아이의 갈 길을 정하고 카센터 영업하는 것을 아이에게 가르쳐 줄 수가 없습니다. 필요하지도 않고 왜냐하면 40년 후에 카센터가 없어질 지도 모르는데 어떤 무인 자동차 시대가 점점 다가오니까 어느 전문가가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20년 후에는 차를 타고 운전대에 손을 대면 체포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나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남을 해칠 의사가 없는 한 운전을 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런 때에 카센터가 어떻게 될지 알고 벌써 아이들에게 돈 버는 법을 가르쳐 주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무엇을 하든지 간에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부모가 할 일입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떠한 삶의 사태를 만나든지 사람다운 사람으로 기르는 것, 이게 바로 성경에서 부모인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자녀를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A. 주의 교훈으로
그러면서 성경은 두 가지를 제시하는데 첫째는 주의 교훈으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예전 성경에는 교향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희랍어로 ‘파이데이아’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1차적으로 교육을 의미하고 훈육, 훈련, 때로는 이 단어가 징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성품과 생활을 포함한 전인적인 돌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물론 지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뭔가 지식을 전달해 주어서 그 아이가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교육하고 훈련하고 때로는 야단을 치는 것까지 모두 포함해서 그것을 파이데이아라고 이야기하고 여기에서 교수, 교육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페다고지’라는 단어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자녀를 가르치는 부모의 입장에서 이 아이를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지식을 전달하고 교육하고 훈육하고 훈련하고 때로는 징계도 해서 어떤 지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면 먼저 부모의 마음속에 온전한 인간이 누구인가? 이 아이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야 될 것인가라고 하는 상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부모의 마음속에 이 아이를 의사로, 변호사로, 가수로, 학교 선생으로, 교수로 이런 상만 있지 그 아이가 무슨 직업을 갖게 되든지 참된 사람으로 살도록 만들어야 되겠다고 하는 상이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그 사람들이 그런 고민을 안 하기 때문에 그런 상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무슨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의 교육은 바로 부모가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혹은 부분적으로는 이미 자신이 된 그러한 인간상을 설정하고 자녀들이 그러한 상에 합치하는 사람이 되도록 애정을 가지고 이 아이를 무한히 사랑해 주며 인격적인 설득을 통해서 때로는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아이가 거기에 합치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할 중요한 사명입니다.
강남에 서울대 입학하기 프로그램이 5살부터 시작되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람다운 새끼 만들기 프로그램을 다섯 살부터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관심이 어떻게 이 아이를 다른 사람을 딛고 일어서서 이긴 사람으로 만들 것인가 거기에 집중되어 있지 그 아이의 인간성을 어떻게 아름답게 만들어서 삶의 어떠한 사태들을 만나든지 자기가 주체적인 힘으로 자신의 인생을 의미 있게 이끌어 가는 사람으로 만들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 고민이 바로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한 고민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를 위한 최악의 부모는 이렇게 진정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고민이 없는 가운데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기르는 것이 이게 자식으로는 최악의 부모를 만난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안하고 내다 버리는 짐승 같은 부모들도 있지만 말입니다.
중국은 70년도 문화 혁명을 할 때 지적인 사상적인 기반들을 쓸어 버렸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상가들을 죽였고 소탕시켰습니다. 지금도 중국 정부가 무서워하는 것이 뭐냐 하면 어떤 철두철미한 사상을 자기 국민이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자, 맹자, 이런 덕과 인의 통치를 펼쳤던 사람들은 신념이 확고한 사상의 체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보면 중국의 위대한 역사를 이끌어 오는 힘이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싹 쓸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요즘 자기들이 죽인 공자와 맹자를 다시 부활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완전히 살아나기는 바라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부분적으로 살아나 주시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중국을 갔는데 거리에 보니까 새로운 표어가 붙었습니다. ‘염치를 알자’ 충격적이었습니다. 얼마나 염치가 없었으면 염치를 알자 한자로 또렷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 공자 할아버지, 맹자 아저씨가 딱 이렇게 자비로운 자태로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치열하게 경쟁에서 이기면서 자본주의에 있어서 승리자가 되기 위한 목적으로 국가를 경영하여 왔는데 사람들의 삶은 행복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야, 이거 안 되겠구나. 염치를 알자.’ 좋은 부모는 바로 자식들이 앞으로 인생을 살며 어떤 상황을 만나도 하나님 앞에 보람 있는 인생을 살아가도록 그렇게 교육시키는 부모가 훌륭한 부모입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은 그 교훈들이 주님에게 속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주의 교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B. 주의 훈계로
그리고 두 번째 나오는 요소가 주의 훈계로 그랬습니다. ‘누데시아’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뭔가 자녀들의 마음에 뭔가 감화를 불러일으키고 혹은 훈계를 하고 쉽게 말해서 정신 차리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훈계 혹은 경계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마음껏 자유롭게 자율적으로 자라도록 허락을 하되 타락과 방종에 흐르도록 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부모의 책임을 말하자면 방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들의 인생에 선생이지만 그냥 중립적인 선생이 되어서 아이들이 가는 데로 내버려두는 중립적인 선생이 아니라 이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리고 그 목적에는 의사를 만들겠다, 변호사를 만들겠다, 정치가를 만들겠다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의 상황을 만나든지 인간으로서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의 상이 있고 그것이 목적이 되고, 그 목적으로 아이가 갈 수 있도록 그러나 그것이 비인격적이고 타율적인 방법이 아니라 가르치고 타이르고 부득이한 때에는 이 아이를 책망하고 혹은 때려서라도 인격적인 방식으로 이 아이가 그 부모의 가르침을 깨달으면서 참된 인간이 되게 하는 것, 이게 부모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교육적인 사명입니다. 이것은 교회보다도 부모에게 더 많이 위탁된 것입니다.
어떤 부모들은 내버려 두면서 ‘그냥 기도만 합니다. 그냥 주님께 맡깁니다.’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무슨 주님께 맡깁니까? 그것은 믿음 아닙니다. 그리고 기도한다고 그러는데 뼈저리게 기도하는 부모들은 자식을 그렇게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말이 됩니까? 그 말을 항상 새겨들어야 됩니다. 그냥 그런 사람들이 ‘주님께 맡깁니다.’ 그러는 것은 ‘우리 애들 구원문제는 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지들 팔자죠.’ 속에 있는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런 무책임한 발언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히려 이래야 되잖아요. ‘우리 애들이 예수 안 믿는 것은 다 내 책임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이 아들이 예수를 믿을까요?’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지 하필이면 칼뱅주의를 그런데다가 적용시킵니까? 그런데 그러한 목적으로 이 아이들을 데려가는데 그 방법이 비인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게 제일 여러분이 하지 말아야 될 것이 ‘너 교회에 주일날 안 나가면 용돈 안 준다.’ 절대 그러면 안 됩니다. 교회 안 나와도 용돈은 줘야지. 그 아이들이 그것을 그런 부모들 여기에도 틀림이 없이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말은 안하지만 속으로는 뭐라고 그럽니까? ‘아이고, 치사 빤스다.’ 그럽니다. 실제로 고등학교와 중학교 다니는 아이들한테 부모가 그런 식으로 하니까 부모 몰래 알바를 하고 말더랍니다. 그게 뭡니까?
신령한 가치일수록 언어로는 전달이 안 되고 그림으로 전달이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애들을 쥐 잡듯이 잡으면서 ‘너 교회 왜 안 갔니? 너 신앙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냐?’ 장구하게 늘어놓아도 아이들은 그 말에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을 보여주십시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기보다는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엄마가 정말 평안하고 행복한 것을 보여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만 다그치지 말고, 주일 지키라고만 다그치지 말고 여러분이 지극한 평안과 행복 속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존경스럽고 가치 있는 삶인지를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자녀의 어떤 잘못을 책망하지 않아도 더 큰 울리는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 세상에 가장 행복한 자녀는 부모로부터 이런 존재의 울림을 듣는 자식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데서는 엄마 아빠를 존경한다고 표현하지 않지만 이 아이들은 언제나 부모로부터 그런 울림을 들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위해서나 자녀를 위해서나 최고의 섬김은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정말 잘 양육했는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아이를 주님의 교훈으로 잘 양육하고 주님의 훈계로 아이를 잘 가르쳐서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이 아이를 길러낼 때 그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큰 공로를 세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될지 아무도 모르잖습니까? 제가 항상 가난하고 심지어는 공부를 못해도 그 자라나는 어린 아이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또 신학생들을 희생해서 잘 섬겨야 된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저는 말씀드렸다시피 정말 그렇게 공부도 잘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졸업하는 날까지 졸업식을 포함해서 하루도 학교 가고 싶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학교에서 뛰쳐나오지 않고 다녔던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고 우리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단 하루도 행복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학교를 다녔으니 무슨 공부가 제대로 되었겠습니까? 나는 확신했습니다. ‘나는 정말 열등하구나.’라고 말입니다. 거의 꼴찌를 하지는 않았지만 평범하다고 할 정도도 안 될 정도의 성적이었습니다. 나중에 그렇게 학교를 다녔을 때에 집도 가난해서 등록금도 못 낸다고 만날 보따리 싸 가지고 1교시 끝나면 집에 가라고 그러고 그렇지 않으면 치사하게 창문 열어줄 테니까 복도에서 공부하라고 그러고 그럴 때에 제가 후일 목회자가 되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던져주어 그들의 인생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만드는 도구가 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대학원 과정 마지막에 나 혼자 공부하면서 깊이 깨달았던 게 이 나라의 교육이 나한테는 정말 거지같이 안 맞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내 잘못일 수도 있지만 한 나라의 교육이라고 그런 것 아닙니까? 자기의 틀에 맞는 애들은 교육시키고 안 맞는 애들은 내치는 것은 국가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아이들이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그 아이들에게 맞는 교육을 받고 그 아이 안에서 있는 잠재적인 좋은 것들을, ‘에듀카레’ 교육이 ‘에듀카레’에서 나왔는데 ‘에듀카레’는 라틴어로 끌어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끌어 내어서 그래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지 머리에 구멍을 뚫고 온갖 지식들을 발로 꾸겨 넣어서 그런 것을 만드는 것이 교육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나는 어떤 때는 학교에서 적응 못하고 자라나는 이런 아이를 보면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서 가슴이 갈갈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공감합니다. 그 부모는 그 아이를 학습 지진아인줄 아는데 저도 한때 그랬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제가 학습 지진아 목사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못 느낍니다. 부모인데도 못 느끼는데 나는 피한방울 안 섞였는데도 지금도 이 교육 제도에서 고통을 받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어떤 분이 ‘목사님이 교육부 장관을 좀 하시죠.’ 시켜줘야 하죠.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것에 마음 쓸 여유가 없습니다. 정말 그것 아닙니다. 정말 우리나라가 좀 좋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그래서 그 자녀들을 마지막으로 그런 교육과 양육들을 사랑 속에서 해야 됩니다. 그게 자녀를 사랑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족과 잘 사는 것 7 (2015.05.24 주일오전설교)
IV. 자녀를 사랑하라
아이들은 부모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첫 번째 사회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잔인한 행동은 자기 새끼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부모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아이들을 자신의 살과 뼈처럼 아끼면서 살아가는 것 대신 더 가치 있는 그 무엇이 있다고 찾아간 부모들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을 마치는지 여러분 한번 살펴보십시오. 결혼은 사람과 사람이 하는 것이지 짐승들이 만나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을 해서 새끼를 낳았으면 자기 부모가 자기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해야지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 뱃속으로 낳은 새끼는 연애하는 애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운명입니다. 그 인생의 무게가 너무 무거우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주지 말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의 핏줄인 새끼도 사랑할 줄 모르는 그 사람이 어떻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우리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이제껏 인생을 살면서 남편으로부터 받은 상처,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같은 것들을 끌어안고 아파하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지만 자식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것이 아이들로 하여금 어두운데서 눈물 흘리게 만들었다는 생각 때문에 회개한 적 있습니까? 인간이라는 것이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진실하게 사랑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평생 참회록을 쓸 수 있는 부모가 진실한 부모입니다. 아이가 명백하게 잘못된 길로 갈 때 부모는 하나님 앞에 피어린 기도를 드릴 뿐만 아니라 때로는 칼을 든 여호와의 사자로 자기의 자식 앞에 나타나서 ‘너 죽을래? 살래?’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있을 때만 그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이에게 가르쳐 주려고 하는 가치를 따라서 살아왔을 때에만 그게 위엄이 있는 경고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는 사랑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이들에게 하면 안 됩니다. 정말 그 아이들을 바르게 하고 때로는 매질도 해야 되겠지만 그 이외에는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면 안 됩니다. 항상 모든 책망과 교훈의 동기가 아이를 향한 최선의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비록 최고의 교육을 받지 못해도, 최상의 물질적인 것들을 누리지 못하며 살아도 바르고 굳센 정신의 힘을 가진 아이들로 자라는 것입니다.
V. 적용과 결론
여러분의 마음속에 자녀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습니까? 자녀보다 더 소중한 무엇이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티끌만한 것도 없습니까? 막 나가는 자녀들을 보면서 망가진 자신을 보십시오. 자녀가 한 인간으로 아름답게 완성되어 가는 것은 부모가 눈물의 기도와 끝없는 희생 속에서 자신을 완성해 가는 과정과 일치를 이룹니다. 그래서 정말 자녀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했던 것들을 깊이 회개하고 여러분의 자식의 인생과 영혼의 운명이 여러분 자신의 것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가족을 돌아봄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녹취자: 장소연
I. 들어가는 말
디모데전서는 나이 많은 사도 바울이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목회자가 성도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다가 나오는 본문입니다. 당시 교회는 과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진심으로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은 교회가 가진 경건의 중요한 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교회의 과부들을 경제적으로 돕는 문제에 있어서 이렇게 충고합니다. 만약 그 과부들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과부인 그 어머니나 할머니에게 효를 행해서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 앞에 교회가 직접 그를 돕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II. 가족을 돌아봄
그러면서 오늘 사도 바울은 자기 친족과 가족을 돌아보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가족을 돌보라고 말합니다. 말은 굉장히 쉽지만 현실적으로 이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만약에 가족들에게 분쟁과 상처가 있을 경우에는 이 명령을 받드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가족을 돌아보는 것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가족을 사랑하고 돌보라는 주님의 명령은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과테말라에 크놉이라는 족속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아주 독특한 표현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기를 사랑이란 내 영혼의 죽음이다 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은 자신의 영혼이 죽는 것과 같은 내면의 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경향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불신 가족에 대한 떨칠 수 없는 부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족을 단순한 전도 대상자로 생각하고 전도할 목적으로 가족들에게 잘해 주는 것은 자칫하면 참 사랑이 아니라 아첨이 되기 쉽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가족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자들로 여기며 사랑하는 것이 가족들과 관계를 맺는 가장 중요한 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A. 육신을 돌아봄
그러면 가족들을 돌보라고 할 때에 이 돌봄은 무슨 돌봄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선 첫째는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 하는 바와 같이 가족들의 육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영혼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 영혼을 담고 있는 육체를 하찮게 생각할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이렇게 영혼과 육체를 아울러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형상은 고유하게 인간의 영혼에 속한 것이지만 육체는 그 형상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에 육체까지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피조물로 인간에게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 사랑의 첫 걸음은 가족의 육신의 필요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어떤 물질적인 결핍이 있는지를 돌아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물질을 나누어 돕는 것입니다. 그게 부모님이든지 혹은 자녀든지 혹은 남편이든지 아내든지 그렇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의 물질의 결핍으로 말미암는 고통을 해소해 주기 위해서 돕는 것이 바로 육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오늘 이 디모데가 목회하는 교회의 과부들도 역시 경제적으로 결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이 넉넉한 재산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의 필요한 모든 것을 조달하고도 남음이 있다면 교회에서도 도울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교회가 돕기 전에 먼저 가족들이 그를 돕게 하는 것이 도리라고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이 있어도 인간은 그것만 가지고 살 수가 없는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그래서 나이든 사람들의 가장 커다란 고통이 사회적인 소외감입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소외되고 가족들에게 소회되고,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이런 소외감이야 말로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결핍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사람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물질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중요한 사명은 화목자로서의 삶입니다. 우리가 아니었더라면 쪼개지고 갈라지고 나뉘어지고 서로 미워하며 살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서로 사랑하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그런 화목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팔복의 중요한 인격적인 특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가족들의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필요를 돌아보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의 마음속에 가족들로 말미암아 맺힌 것이 있고 상처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해소하고 풀어서 이렇게 가족들을 진심으로 돌아보는 일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족들을 위한 문제일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이 세상에서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비결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 상처와 그 고통과 미움을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 일인데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두 부부가 있고 아들, 딸이 있는데 딸, 아들이 모두 결혼할 나이가 되었고 실제로 그 아이들이 결혼하려고 하는 그때였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식탁이 차려졌는데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단절감이 가족이 아닌 저에게도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왜 그런지 자녀들은 부모를 살갑게 대하지 않고 부모는 자식들을 굉장히 어려워하는 눈치였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뭘까 그렇게 느껴졌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두 부부가 서로 가정을 가지고 살다가 각기 이혼을 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래서 딸은 남편이 데려오고 아들은 아내가 데리고 와서 한 가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장성했으니까 나가서 따로 살고 결혼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니까 길게 잡으면 한 20년 이상 이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정도 세월이 흘렀으면 이제는 잊혀질만한데 전혀 잊혀지지 않고 그 아이들의 가슴속에 그 가슴 아픈 일들이 그대로 남아서 정상적인 가족관계를 이루며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엄마 아빠가 어떻게 각각 엄마 아빠를 배신하고 가정이 깨지고 그렇게 해서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되었는지를 고통 속에 본 것이 그 긴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상처를 쉽게 받아도 한번 가슴속에 들어와 박힌 상처는 운명처럼 남아있어서 좀처럼 그것을 빼어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우리 인생은 그런 상처를 수없이 받으면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에게 완전한 사랑을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사랑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적용하지 말고 자신에게 적용해서 자신은 그런 사랑을 이루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에 맺힌 것이 있는 사람들은 가족을 돌아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마음에 맺힌 것은 곧 자신의 영혼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도 이것들을 풀고 그리고 가족들의 모든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필요를 돌아보며 섬기는 가운데 가족들을 사랑하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여러분이 이미 받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나에게 작은 고통을 준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데 주님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악을 행하고 표독스럽게 그분을 대적한 우리들을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자신이 가족들을 사랑하는 많은 고통들에 십자가의 고난을 투사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보다 더 큰 은혜와 용서, 사랑을 입은 것을 기억하고 가족들을 돌아보는 것이 자신이 사는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B. 영혼을 돌아봄
가족들을 돌보는 것은 이렇게 육신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영혼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남들에게는 복음을 전하기가 그렇게 쉬워도 가족들에게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남들은 우리의 좋은 점만 보았고 또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전도를 하지 우리 보고 욕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고 싸운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전도하지 않습니다. 가족들은 우리의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본 사람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전도가 어렵습니다. 우리와 친밀하고 우리의 결점까지도 다 아는 것이 전도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방해가 될 때가 훨씬 더 많기 때문에 가족을 전도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남의 가족에게는 복음을 전해서 쉽게, 쉽게 예수를 믿게 하는데 우리 가족을 전도하는 일이 어려운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구원 받은 우리에게 주신 가족을 향한 최고의 사랑은 그 가족을 구원하여 하나님을 힘입어 살게 하는 것입니다. 가족에 대한 전도는 쉽지 않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 애쓰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꺾으시고 낮추시고 다듬으시고 순전하게 하셔서 그 모든 상황들을 성화의 도구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그 가족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사랑스럽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 그들이 육신적인 결핍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고 굶주리고 지친 영혼을 보면서는 더더욱 눈물겨워 함으로써 그들에게 무엇인가 주어 누리게 하고 싶고 지금보다 더 행복한 상태에 살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그들을 위해서 하고 싶은 마음을 갖습니다. 사도 바울은 역사에 없는 선교의 업적을 이루었고 이방인의 선교사가 되었지만 골육지친 가족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물로 고백하기를 내 골육지친의 몇이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라고 극단적인 고백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 위대한 사도에게도 가족 구원은 그렇게 어려운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가족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그 영혼을 온전히 돌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의 영혼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사랑 없음과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태도들을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의 눈에 눈물이 흘러 주께서 예정하신 그 잔에 차기까지는 가족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남의 가족들이 구원받는 것이 쉬워 보이는 것 같지만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먼저 믿은 가족들의 많은 눈물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은혜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여러분은 그 은혜를 어디에 쓰시려고 합니까? 바로 이렇게 사랑하기 힘든 가족을 사랑하고 그리고 내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었을지라도 핍절하게 살아가는 가족들의 영혼들을 위해 사랑하고 희생하고 돌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그렇게 평화의 도구가 되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은 채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하신 일은 바로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 시키는 것이었고 불화한 사람들을 서로 화목케 하여 평화를 누리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주님이 여러분의 영혼을 돌아보시는 것 같은 마음으로 가족들의 영혼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온전히 사랑함
마지막 세 번째는 이 모든 육신의 돌봄과 영혼의 돌봄은 온전한 사랑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을 조금 사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온전히 사랑하는 것은 그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수많은 사람을 조금씩 사랑한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지만 한 사람이라도 온전하게 사랑한 사람은 그 사람의 인간 본성을 완성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만 가족을 사랑하는 데에는 본성만 있어도 된다고 말입니다. 그 말이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가족을 알아보는 본성이 있어서 그래서 못된 인간이라도 지 자식은 사랑하고 막된 자식이라도 부모는 생각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또 그것이 아주 믿을만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식을 사랑하는 본성을 주셨는데도 티끌만큼도 자기 새끼를 사랑하지 않고 버리는 부모 아주 많습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이 본성으로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티끌만큼도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새끼들도 많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그리고 형이 동생을, 누나가 동생을,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본성에 속하는데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 그 본성이 신뢰할 만한 본성이냐고 물을 때에는 우리 눈앞에 펼쳐진 현실들은 아니라고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결국 모든 관계가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고 주님의 사랑이 아니면 남을 진심으로 온전히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생전 만난 적이 없는 타인이든지 아니면 원수든지 혹은 내게 상처를 준 가족이든지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가족과 잘 사는 것 8 (2015.5.27 수요예배)
III. 적용과 결론
우리들은 가족이 살아있을 때에는 교만합니다. 그래서 서로 잘하고 잘못한 것을 재면서 자기가 남들에게 고통을 준 것은 잊고, 남이 자신에게 고통을 준 것은 기억하면서 원한을 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 있을 때에는 깨닫지 못하지만 그 가족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식이 소중한 줄 몰라도 언제나 옆에 있어서 잘해줄 거 같아도 죽어버리고 난 다음에 엄마는 자식에게 행한 그 모든 상처준 일들을 마음 아파하고 자식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애비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뼈저리게 후회하게 됩니다. 가끔 다투고 싫은 소리 하면서도 살지만 남편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남편 없는 자신의 삶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아내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남편은 그 아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그가 없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거친 벌판을 혼자 걷는 것 같은 외로운 인생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은 익숙해진 것들은 언제나 자신 가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자신이 어떤 마음이 될지, 무엇을 후회하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지혜를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의 보고이고 그 지혜를 통해서 우리는 경험한 것들을 올바로 해석하게 되고 경험하지 않은 것들을 미리 알 수 있는 분별력이 생기게 됩니다. 결국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고 없이 가족들을 서로 잃어버리고 몇 년 후에 가장 가슴아파하고 보고 싶을 때 돌려준다면 서로 잘해줄 겁니다. 그러나 한번 건넌 죽음의 강을 건너서 다시 돌아온 사람이 없고 이쪽에 서 있는 사람은 저쪽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가족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함부로 대하고 가족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줄 수 있는 날들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모릅니다. 그래서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수많은 날들을 헛되게 허비하고 결국은 그들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사랑하는 사람의 잃어버린 생명은 살아있는 우리의 죽음이 되어 우리에게 슬픔의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저는 돌아가신 저의 할머니와 아버님을 생각했습니다. 정말 후회되는 것은 하나님이 두 분과 함께 이 세상에 살도록 허락해 주신 나의 인생의 날들이 참 많았는데 진심으로 그분들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표현해서 그 분들에게 기쁨을 드린 날들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그런 날들 밖에는 없었다는 사실이 너무 후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상처를 받는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로부터 아주 좋은 것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넘치도록 받은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고 우리를 인생 발걸음, 발걸음 인도해 오신 우리의 삶의 전 과정이 이미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의 나타남이었기 때문에 사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압도할 때 우리에게는 언제나 이런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그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을지라도 심지어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가져가실 지라도 우리는 주님의 사랑 때문에 충분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가족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을 충만히 누리며 살지 못하는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추하고 추한 것은 누군가가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징징거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추한 것이고 인간이 얼마나 미성숙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고 또 그 사랑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에 우리는 이미 그런 사랑을 하나님 안에서 찾기로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충만한 사랑 때문에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자기를 온전히 주는 데서 기쁨을 찾겠노라고 다짐한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었습니다.
결국 여러분은 이제껏 어떤 인생을 살아왔건 가족들에게 무슨 상처를 받았든지 간에 그 가족을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여러분의 입장에서 보지 말고 그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면 단 한 사람도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매일 소리 지르고 자기가 온 집안의 왕인 것처럼 행사하는 아빠도 알고 보면 가엾은 사람이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참고 이기며 살아가는 엄마도 가엾은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두 가족과 행복한 삶을 산다며 그는 비록 세상의 높은 지위와 많은 재물이 없어도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두 가족은 영적인 가족인 교회와 육적인 가족인 식구들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상처와 고통을 통해서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이루심으로써 우리에게 당신의 위대한 은혜의 능력을 증거 하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약점, 가정에 있어서의 아픈 기억들은 여러분이 올바로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주님의 위대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베푸신 십자가 사랑을 회고하십시오. 그리고 자기를 아낌없이 주신 그 주님의 사랑을 여러분에게도 부어달라고 빌면서 주님을 의지하여 복된 가정생활을 이루어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렇게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은혜를 주십니다. 간절한 기도 속에서 말씀 속에서 찬양 속에서 이런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하시니 여러분이 승리할 것입니다.
그치지 않는 고통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녹취자: 백지영
I. 들어가는 말
로마서는 바울이 제 3차 여행을 하던 끝 무렵에 주전 57년경에 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만이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모두를 염두에 두고 쓴 편지인데, 이 편지를 기록한 목적이 아주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스페인 선교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이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고 일반적인 안부도 전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구원의 도리에 대해서 조직적으로 서술하고 싶은 마음이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교회사에 기적을 가져온 성경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어거스틴의 회심이 로마서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또 전설적인 설교자 요한 웨슬레가 회심한 것도 바로 로마서에 관해서 쓴 마틴 루터의 주석을 읽으면서 일어났습니다. 그처럼 구원이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교하거나 그것을 해설할 때 개인과 교회에 아주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구원의 도리를 굳게 붙들고 살아야 된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죽음의 날이 가까워 오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구원의 도리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좀 짜증나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제가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의 저자인데 28번을 읽다가 멈췄습니다. 여러분은 한번이나 겨우 읽었을까 말까할까요? 그것도 지금은 다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더 읽으십시오. 오늘서부터 차분하게 앉아서 일독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과 9장에서 하나님의 타락한 인류에 대한 위대한 계획과 인류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언급하는 맥락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을 말합니다. 우리가 읽은 이 부분은 사실은 괄호를 쳐야 되는 부분입니다. 1장서부터 4장까지 이신칭의에 대해서 말하고 5장부터 8장까지 성도의 거룩한 생활에 대해서 말하다가 불쑥 자기 개인의 심정을 울먹이면서 토로하고 있는 장면에 9장 1절서부터 3절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아주 분명합니다. “자기 마음에 끊임없는 근심과 마음에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 골육친척 가족을 포함해서 나의 동족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사도의 마음속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었습니다.
II. 가족에 대한 마음
A. 그치지 않는 고통
무엇을 이야기하다가 지금 그치지 않는 고통을 이야기했는지 보겠습니다. 8장은 그 마지막에 32절부터 그 유명한 하나님 사랑에 대한 찬송이 나옵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이 편지를 쓰면서 사도 바울의 마음이 격해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자기 외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고 그를 죽게 하심으로써 그분의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인간이 차마 감당할 수 없는 그 위대하고 놀라운 사랑에 대해서 말하다가 이 사도가 울컥하면서 그 사랑을 전혀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자기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들 그리고 동포들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아는 것만큼 그 사랑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그 사람들을 향해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a. 진실성: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임
이것은 최소한 세 가지 성격을 내포하는 감정입니다. 첫째는 진실성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사도가 이야기합니까?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이 구절 자체가 이방인들이 자기의 신에 대해서 맹세하는 그 맹세를 빌려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런지 저는 정확하게 판단할 근거는 없지만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맹세까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것은 추호의 과장이 없는 사도 바울의 진실성이 담긴 고백이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b. 지속성: 큰 근심과 그치쟎는 고통
두 번째는 지속성입니다. 이것이 어느 순간에 울컥하고 솟아난 감정이 아니라 이 속에서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래에 없었던 것이 9장 1절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기적을 일으키고 수많은 병자를 낫게 하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고 위대한 능력의 복음을 설교해서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도, 여전히 이 사도의 마음의 밑바닥에 깔려있었던 한처럼 서려있는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순간도 사도의 마음속에서 지워져 본 적이 없는 지속적인 고통이었습니다.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사도의 마음속에서 계속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이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짐승같이 살던 이방인들도 저렇게 기뻐하고 그 사랑 안에서 생명을 누리는데 일생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살아왔던 사람들이 그 어떤 어리석음 때문에, 영혼의 미혹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일어난 그 큰 근심과 고통이었습니다.
c. 신령성: 양심과 성령 안에서 작용
세 번째는 신령성입니다. 이러한 고통의 원인이 인간적인 감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 작용이었습니다. 자신의 양심을 따라, 그 양심은 어떤 양심입니까? “자, 너도 똑같이 유대인중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죄인이었는데 너는 이렇게 구원을 받아 생명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저들은 저렇게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져 하나님의 생명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이 되었는데 속이 편 하느냐? 이런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무엇인가 저들을 위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견딜 수 없는 중압감을 느낀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것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작용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근심은 우리의 뼈를 썩힙니다. 그래서 근심하는 것은 정말 나쁜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지 모르지만 근심한 사람의 오줌은 맛을 봐도 맘 편한 사람의 오줌과 맛이 다르다고 합니다. 오줌을 누가 먹느냐고 하겠지만 오줌을 약으로도 씁니다. 유로키나제라는 성분이 나와서 그 오줌을 받아가지고 거기서 약재를 추출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근심은 인체 모두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근심이 결국은 우리의 모든 만병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오래 사느냐 하면 그냥 생각이 좀 없는 사람들이 오래 삽니다.
지난번에 캐나다에서 107세 먹은 할머니 이야기 했습니다. 이렇게 오래 사시는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했다는 그 이야기를 듣더니 우리 집사람이 그러면 우리는 만날 남의 일에 참견하며 사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하느냐고 그러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저는 의사가 아니니까 정확한 판단은 못 내리겠습니다. 그런데 예방의학자 황성주 박사 설명에 의하면, 근심에 대해서 우리 몸이 다 똑같이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종류의 근심인지를 우리의 육체가 인식한다고 합니다. 그것을 책으로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에서 나오는 근심은 육체를 한없이 갉아먹습니다. 병의 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거룩한 근심, 말하자면 남의 영혼을 위한 염려 이런 것들은 육체에 활기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책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신 것이 기억이 나는데,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전혀 없으면 몸이 아주 굉장히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니랍니다. 적절한 스트레스가 있어야지만 몸에 활기가 돌고 에너지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끝까지는 이해가 안 되지만 상식적으로는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됩니다. 우리도 보면 몸이 아프던지 질병 상태에 있으면 무조건 쉬어야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 맥을 다 놓고 하던 일이고 뭐고 다 치우고 있으면 몇 시간이나 하루 이틀은 괜찮지만 그 다음에는 무료해지고 그리고 온 몸이 늘어집니다. 그런데 너무 무겁지 않은 적절한 부담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게 자극이 되면서 우리의 몸에 전달이 되면서 건강을 좋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너무 심하지만 않다면 적절한 근심과 스트레스는 우리의 몸에 아주 요긴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또 한의학에 대한 생각도 막 떠올랐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있는 이 고통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마음의 걱정과 근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의 영혼이 남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건강한 것입니다. 그리고 남의 영혼을 위해 울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 울 수 있습니다. 육체를 위해서는 안 그래도 됩니다. 그런데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는 울 수 있습니다. 남의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것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결국은 성령 안에서 성령님이 시키시는 근심입니다. 성령님이 하게 하시는 근심이고 하게 하시는 고통입니다. 그 고통을 끊임없이 이 사도 바울이 경험하면서 가족과 그리고 사랑하는 친척과 그리고 같은 핏줄을 나눈 동족들을 생각했습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사도 바울이 그렇게 끔찍하게 아파하고 고통 하는 것만큼 그는 이미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은 열기가 조금 떨어졌습니다만 진실한 부모들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우리가 어린이 회심집회를 처음 했을 때 정말 한 한 달 동안은 교회가 눈물 바다였습니다. 특히 회심하지 않은 자녀들을 둔 부모들은. 그럼 제가 묻고 싶습니다. 왜 몇 달 전까지 마음에 늘 부담은 되지만 그렇게 자식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지 않았는데, 어느 한 시점에서 그렇게 가슴 저미도록 자녀들을 위한 가슴앓이를 하고 눈물이 쏟아지고 그랬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괴롭히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괴로움은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이 그 부모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은혜를 주셔서 그 하나님 사랑을 알게 해 주시니까 그 다음에 그 사랑을 발견하고 나니까 자식들이 그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진 것이 그렇게 가엾어서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의 마음에 있는 고통이었습니다.
제가 요새 힘을 내서 200페이지라고 한 것이 작년 여름이었는데 1600 페이지로 늘어났습니다. 거의 절반 정도는 제 자서전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는데 초고를 완성을 해서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읽으라고 오늘 넘겨주었습니다. 내가 처음 15살에 논두렁에 엎드러져서 주일날 통곡하고 교회를 끊은 그 이야기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가장 최근의 일은 없습니다. 글을 쓰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한 순간도 마음에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뒤집어보면 예수를 믿고 한 순간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남은 생애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됩니다. 책을 쓰면서 제가 그랬습니다. “하나님, 정말 짧은 인생을 되게 길게 살았습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결국 탁 무릎을 치고 깨달은 게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쓰리고 아픈 고통과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쁨과 희열은 밧줄과 같다는 것입니다. 씨줄과 날줄이 만나면서 직조가 되듯이 사랑과 기쁨, 슬픔과 근심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지면서 하나님의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직조물이 짜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9장 1절부터 3절을 보면서 절대 사도를 가엾은 눈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가엾은 사람은 사도가 아니라 이런 사도의 눈물겨운 섬김의 기도를 받으면서도 아직까지도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았던 이 불쌍한 사도의 가족들과 그리고 친척들, 유대인들로서 아직 어둠 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B. 자기희생의 소원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우리의 상식을 깨는 발언을 합니다.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이게 말이 됩니까? 사도 바울이 그 유대인중의 유대인이요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었던 명분을 다 버리고 장래가 보장된 종교지도자의 길을 포기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그렇게 가시밭길을 가면서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되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이때는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신양성경의 저자니까. 그러니까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사도가 저주를 이야기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문둥병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 저주받은 병, 또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사람들이 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 모든 것, 멀리 갈 필요 없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저주를 받으신 그것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뭐가 끊어진다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그리스도 하면 뭐가 있었던 것입니까? 바로 앞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사도 바울이 그 고난과 역경의 가시밭길을 딛고 헤치면서 이렇게 씩씩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리스도를 통해 부어지는 하나님의 충만한 영적 생명이었습니다. 그것의 위대한 능력과 힘이 얼마나 큰 것을 알았고 그것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한 사람들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 사람이 오직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노라고 말하고 남은 생애가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을 하며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서 끊어져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단절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끊어져 나갈지라도 원하는 게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그러니까 사랑하는 가족과 내 친척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과격한 성격을 보여 주거나 극단적이 화법을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그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우리 인간에게 절실한지를 알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랑의 깊이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실 수 없는 기도이겠지만 그렇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하는 이것은 바로 구원의 화급성,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속히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절실한 복음의 요청을 오늘 이 사도 바울이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해석을 거기에서 멈춰야 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동양인에게 있는 고유한 화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할 때 너무 실감이 안 나니까 “죽도록, 죽도록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사는 게 죽는 것보다 어려울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살도록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죽도록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런 화법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언어적인 지식 속에서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죽음의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감정에 맞게끔 번역한다면 “일편단심으로”, 아니면 “내가 정말 죽을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로다”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는 가족들이 불신 상태에 있을 때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예수를 믿고 가족을 모두 주님께 인도한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평생의 소원이 온 가족이 손잡고 주일 예배를 같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얼마나 간사한지 그렇게 해서 그 소원이 다 이루어졌는데 감격적이지 않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금식기도를 해서 남편을 교회로 인도했다고 좋아하면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고 또 몇 주일 있다가 부부 싸움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 때의 그 마음을 생각하시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족이 함께 교회 나오고 있으면 이런 생각을 하십시오. 만약에 여러분의 가족들이 지금 예수를 안 믿고 있다면 여러분의 심정이 어땠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가족 구원』이라는 책을 제가 참 은혜롭게 썼습니다. 그런데 안 팔렸습니다. 2004년도에 썼는데 11판밖에 안 찍혔습니다. 마지막에 찍힌 게 2011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케팅적으로 분석을 해보았는데 제목을 잘못 붙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구원이라는 말을 서점에서 딱 보았을 때 마음에 울렁증이 오는 것입니다. 저 책이 무엇을 이야기할 지 너무 뻔한 것입니다. 그것을 대면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냥 “가족 구원해야 돼.”라고 하고 싶지 그것을 펼쳐서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거기 직면해서 회개하고 용기를 얻어서 자기 삶을 돌이키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때의 간절한 소원은 정말 온 가족이 예수만 믿을 있다면, 네가 죽으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그러면 “내가 왜 죽어?” 그러는 사람 아마 별로 없을 것이고 기꺼이 손들었을 것입니다. 자기 가족을 전도한 사람들은 그 사람이 지금은 어떤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다 한때는 그런 십자가를 지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게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가족이 여러분이 전도를 했다면 더더욱 그렇고, 비록 여러분이 전도를 안 했어도 예수를 여러분의 가족이 믿고 있으면 더 이상 바라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위해서 최고의 것을 해 준 것입니다. 반대로 상상을 해 보십시오. 지금도 예수 믿는다고 다 큰 자식들에게 성경 집어던지고 쓰레기통에 버리고 폭력을 행하는 집안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치더라도 만일 여러분 가족이 이단에 빠져 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교도가 됐다던가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의 사랑을 알았더라면 그 이교도가 된 여러분의 가족과 형제들을 보면서 어떤 마음과 어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 있었겠는지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가족들을 업고 다녀야 합니다.
III. 우리의 헌신을 기다리심
문제는 정말 우리가 가족들의 영혼에 대해서,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 대해서 이러한 그리움이 아직도 있느냐 이 이야기입니다. 정말 조금만 자극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가족을 향한 절실한 눈물의 기도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주님이 알아서 하시겠지요.” 그러나 자기가 가족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말할 때 그게 힘이 있는 것이지 자기는 기도도 안하고 가족들 위해 희생도 안하면서 주님이 하실 것이라는 그 이야기는 “남들보고 하라고 하세요. 제 십자가는 아닙니다.” 그런 뜻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가족들을 구원하여 예수를 믿게 만드는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시고 겸손하게 하시고 그 많은 그 고난과 시련들을 경험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하고 아무리 전도해도 안 믿는 사람도 물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대담하게 불신자로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시고 우리 양심은 증거 합니다. 우리가 힘닿는 대로 그 영혼을 사랑하고 위해서 눈물 흘리고, 위해서 희생했는지, 아니면 그냥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죽음의 강물로 떠내려가 버린 것인지 적어도 우리 양심은 알고 하나님은 아십니다. 정말 우리가 그렇게 진심으로 우리 가족들의 영혼을 사랑해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는 가족들이 변화하기를 기다리지만 하나님은 정말 우리가 변화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어제 잠깐 텔레비전을 틀었다가 한참 눈물을 흘렸습니다. 별로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영화배우인데 아들은 미국의 고등학교 유학 보내고 아내하고 둘이 살았습니다. 잠을 자다가 아내가 꿈을 꾸었습니다. 갑자기 일어나서는 이야기를 하는데, 아들이 꿈에 나타나서 엄마 너무 보고 싶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미국으로 전화를 했는데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미국에서 수사를 했는데 자기 친구하고 몸싸움을 하다가 동맥출혈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 아빠는 그 몸싸움이 있기 전에 다수의 많은 학생들에게 구타를 당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 심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더 이상 수사를 해주지 않으니까 매일 검찰청에 가서 검정 옷을 입고 8개월째 자기 아들을 다시 수사해 달라고 지금 탄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일주일에 몇 번인지는 모르지만 동네 지하실에다가 소극장을 차려놓고 아들의 죽음을 주제로 일인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삶은 다 피폐해 졌고 가산은 탕진했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면서 여러 가지 많은 교훈을 얻었지만 하나 섬뜩한 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아, 저게 엄마구나. 저게 엄마 자식 간이구나.’ 한국과 미국이 얼마나 먼 거리입니까? 그런데 아들이 비명 속에 죽으면서 마지막에 생각난 것은 엄마였습니다. 그리고 그 엄마는 그 먼 거리에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 받으면서 죽는 아들이 느껴진 것입니다. 사랑이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가족과 잘 사는 것 9 (2015.05.31 주일오전설교)
그러면 우리가 정말 가족들을 사랑한다면 가족들이 그렇게 하나님 없이 어둠 속에서 죽은 영혼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30년, 40년, 회심한 이후에 50년 이렇게 인생을 살아온 것을 돌아보아도 참 눈물이 날 정도로 힘든 인생이었는데,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그 사람들의 그 인생이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럽겠습니까? 사랑은 그 고통을 공감하게 만들어 줍니다. 너무나 절실하게 사랑하면 그 사람을 공감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의 힘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랑이 영원에 속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시간도 필요 없고 공간도 뛰어 넘습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죽으셨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매일 매 순간 재현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 공간과 시간을 뛰어 넘습니다.
정말 우리는 가족이 변화되기를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정말 우리가 변화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종종 교회에 보면 예수님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교회에 편안히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자기가 예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게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지 모릅니다. 애들도 모르고 어른도 모릅니다.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같이 불신가정에 태어나서 그런 모든 시련을 거치고 예수를 믿어본 사람들은 평생에 지금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거꾸로 투사가 되어 가지고 젊었을 때의 그런 기억들이 그리움처럼 떠오르면서 눈물이 납니다. 그렇게 온 집안이 행복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버지와 사랑하는 엄마 그 속에서 함께 신앙 생활하는 그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하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정말 감사하지 않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이 마음은,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는 사도 바울의 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 아닙니까? 예수님이 하셨던 똑같은 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지셨기 때문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해서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렇게 울부짖었던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IV.적용과 결론
가족들이 강퍅하다 그러면서 가족 구원에 무력해지지 말고 그리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 내 눈물의 분량이 아직 차지 않았구나.’ 정말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감화를 주시고 은혜를 주시면 마치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당신 스스로 하고 싶은 기도를 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정말 그렇게 구원받지 못한 가족과 혼연일체가 되어서 영혼들을 위해 기도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을까요?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어린 자녀들을 한없이 사랑하십시오. 그 무엇도, 그 어떤 이유라도 여러분이 자기의 자녀를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마음을 기도의 눈물로 적셔서 회심에 이르게 하십시오. 여러분 주위에 은혜 많이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자녀가 그저 자기 따라서 교회 나오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많이 배우고 그런 생각을 가집니까? 정말 진실하게 회심에 이르도록 여러분의 자녀의 마음을 눈물로 적시십시오. 지금은 비록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것같이 고통스러워도 언젠가 기쁨으로 추수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치지 않는 고통으로 초청하시는 이유이기도 하니,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여러분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고, 여러분을 그런 고통 속에서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며 여러분의 영혼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가족들을 위한 최고의 섬김, 그것은 그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몇 주간에 걸쳐 설교한 바와 같이 가정은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을 완성함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기관입니다. 더욱이 이 가정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부로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인류 첫 조상의 사랑의 고백을 현실 속에서 실현해 가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처음 이런 한 뼈, 한 몸으로 창조된 인간을 인간의 죄 때문에 서로 나뉘고 다투면서 살아가던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되게 하셔서 마지막 때에 그 완전한 한 몸의 사랑을 회복시키시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때까지 남편과 아내는 서로 하나님 안에서 지정해 준 질서를 지키며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II. 아내를 사랑하라
사도는 남편들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라고 하는 이 명령형은 ‘아가페테’라고 하는 명령인데 이것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스 때부터 이 사람들은 인간의 사랑을 여러 종류로 나누어 생각했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은 ‘에로스’(eros)의 사랑이라고 불렀고, 부모와 자식 간의 끊을 수 없는 혈육의 사랑을 ‘스톨게’(stolge)의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형제들끼리의 사랑을 ‘필리아’(philia)라고 불렀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신이 인간에게 하는 사랑인데 인간의 어떤 장점 때문이 아니라 신 안에 있는 충만한 사랑의 본성 때문에 인간을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그 사랑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대가를 바라는 목표와 목적이 없기 때문에 흔히 맹목적 사랑이라고 우리들이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의 사람들에게 아가페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는 이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아주 생경스러운 요청이었을 것입니다.
A. 로마사회와 아내
당시 로마 사회와 그 속에서 아내 즉, 여성의 위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제까지의 연구에서는 로마 사회가 대가족 단위로 이루어진 가정을 가진 사회였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에 학계의 연구에 의하면 로마는 아주 복합적인 사회로서 대가족적인 가정 이외에 핵가정처럼 이렇게 분열되어 있는 작은 가정의 단위들까지 아주 다양하게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어쨌든지 로마는 그 거대한 제국을 꾸려 나가기 위해서는 가정이 그 국가의 한 분자와 같은 단위라고 생각했고, 그 가정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국가를 지탱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가정을 매우 중시했고 가정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키고 또 부부와 가족들이 어떤 질서를 지키면서 사는가에 대해서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주 1세기에 로마 사회는 남존 여비의 사상이 지배하던 사회였습니다. 당연히 가정은 남성 중심이었고, 가정의 경제권도 여자에게 없었습니다. 남성이 쥐고 있었고 남성은 가족들을 벌어 먹이고 사회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 덕스럽게 여겨졌고, 그 힘을 밖으로 행사해서 가족들을 보호하고 부양할 뿐만 아니라 가정을 그 힘으로 장악해서 질서를 잡고 가족들을 자기가 원하는 질서 아래 두는 것이 남편으로서의 기본적인 자격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이런 속에서 여성은 자녀를 생산하고 가사를 돌보고 정숙할 뿐만 아니라 사치하지 않고 검소하며 침묵하고 그리고 성적인 순결을 지키는 것이 여성의 의무라고 여겨졌습니다. 아내는 행동반경이 가정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사회적으로 활동을 하거나 혹은 목소리를 내어서 자기의 의견을 사회적으로 표명하는 것은 남편에게 매우 커다란 수치라고 여겨지던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회학자는 좀 심하게 말해서 당시 여성의 지위는 거의 노예와 같은 수준이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B. 사랑하라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도는 ‘아가페테’ “너희 남편들아 너희 아내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불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명령이었을 것이며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든지 남편은 아내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도록 명령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또 아내는 아가페의 사랑의 대상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편지는 불신자인 로마 시민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편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실한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편지입니다. 그래서 이 편지 서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의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이 편지를 받는 수신자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하게 주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쓰는 편지입니다. 그 사람들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너희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는 이 사도바울의 명령이 전혀 낯설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도 바울과 목회자들로부터 배운 가장 중요한 복음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셨으니 이제 너희도 그 사랑을 본받아 그 사랑으로 지체들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복음을 믿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대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은 새로운 기독교적인 질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당시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은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우월한 사회적인 지위와 힘, 완력 같은 것들을 이용해서 여성을 억누르고 지배하는 그러한 구조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질서가 도입되는 새로운 세상의 맛보기를 교회에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을 몰랐을 때에는 제 마음대로 살고 힘 있는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지배하며 자기가 원하는 마음의 소원대로 질서를 만들면서 살던 인생들이었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난 후에는 이제 그 사랑의 질서에 의해서 지배되는 새로운 기독교적인 사회를 지향하게 된 것입니다.
초기에 조선 시대에 복음이 전파되고 사회가 변화되었던 상황들을 보면 흥미진진합니다. 그리고 정말 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얼마나 놀랍게 사회를 바꾸어 놓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사랑에 의해서 재편되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김제 쪽에 지난주에 말씀을 전하러 내려갔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있는 목사님들이 여기에 아주 가까운 곳에 기독교 유적지가 있는데 한번 보여주겠다고 해서 갔습니다. 그랬더니 우리나라에서 남한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ㄱ’자 교회입니다. 1910년도에 지어진 교회인데 그 중에 폭격도 맞고 다 부서져서 이제 복원된 것이기는 하지만 ‘ㄱ’자 교회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복음이 전해지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에 여자들이 어염집 남자들과 함께 모여서 다리를 부딪치면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지혜롭게 만든 것이 ㄱ자형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ㄱ자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쪽이 똑바로 되어 있고 그리고 요쪽은 옆으로 보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는 남자들이 쭉 와서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는 여성들이 예배를 드리니까 당연히 여기 있는 여성이 저쪽 남성을 볼 수 없고 남성들은 여성을 없을 뿐만 아니라 여염집 여자가 한 시간 내내 남의 집 외간 남자인 설교자를 쳐다보는 것도 불경스럽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쪽에는 커튼을 딱 쳤습니다. 커튼 속에서만 들려오는 소리만 여자들이 듣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그러한 성차별이 무너지고 이렇게 남녀 섞어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도 이게 기독교의 힘입니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이 기독교가 여성들의 지위를 얼마나 사회적으로 높여줬는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떤 여성들에게 아부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복음 안에 있는 사랑의 질서에 대한 믿음이 이렇게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천국은 기본적으로 사랑의 나라입니다. 정의를 많이 부르짖지만 어떻게 보면 그 정의도 정의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정의가 없어서는 사랑의 완성이 안 되기에 정의를 부르짖는 것입니다. 정의라고 하는 것은 공평한 것입니다. 올바른 것입니다. 그러면 올바르지 않게 되면 그러면 어떤 사람이 부당하게 덕을 보는 대신 어떤 사람은 부당하게 손해를 보는 사람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기심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혹은 무지 때문에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의라고 하는 개념에 의해서 지지받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정의란 개념에 의해서 사랑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재제를 받지 않으면 참된 사랑이 이 세상에 실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결국은 정의는 사랑을 통해서 완성되기도 하지만 결국 사랑은 정의를 통해서 완성되기도 하지만 정의가 사랑을 통해서 구현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한 사랑의 나라이고 이 세상에서는 그 나라의 완전한 완성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이제 이 세상에서 먼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이 주님께로부터 배운 사랑의 질서들을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해 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으면 그 사랑의 질서를 제일 먼저 구현해야 할 것이 자기 자신이고, 그 다음으로는 교회와 가정 속에서 이 사랑의 질서를 구현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랑이 온 세상에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 나라를 위해서 수고하며 사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남편들을 향해 명령 하시기를 네 아내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남편들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이미 하나님이 그 남편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구속하셔서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렇게 아내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연애할 때 사랑은 굳이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사랑입니다. 보고 헤어져도 다시 보고 싶고 심지어는 같이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데도 그리운 것이 되는 사랑입니다. 그렇지만 남편과 아내의 사랑은 이렇게 될 때도 있지만 해야 할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인간이 생으로 노력하는 것만도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을 해서해야 하는 것 사이에 걸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완전히 이성에 속한 것도 아니고 완전히 감정에 속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은 감정과 이성에 걸쳐 있고 인간의 안에 있는 본성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심과 도덕심 사이에 걸쳐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속에 아가페의 사랑으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본성을 심으신 것과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남편과 아내를 사랑하며 사는 실천적인 그 삶이 함께 연결되어 있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되기 때문에 되는 성격도 가지고 있지만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성격도 아울러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을 할 때에 성경에서 이런 남녀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에 이렇게 열렬하게 이루어지는 사랑이 아니면 결혼하지 말라 그렇게 성경이 이야기하기보다는 오히려 강조점이 너희가 결혼해서 부부가 되었으면 서로 사랑하라 여기에 오히려 성경의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30대 청년 30명을 모아놓고 세 시간동안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결혼을 이제 하는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모두 꿈을 꿉니다. 그래서 특히 여성들은 언제 자기는 전혀 공주같이 안 생겼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왕자입니다. 그래서 왕자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를 정말 세상에 없이 사랑해주기를 바라고 소설이나 영화에나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를 다 불살라서 자기 하나만을 사랑해주는 남성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목이 마른데 물이 전혀 없으면 손가락을 잘라서 입에다가 핏방울을 떨어뜨려주고 배가 고프다고 하는데 먹을 것이 없으면 살점을 베어서 입에다 씹어서 넣어줄 남자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 있으면 절대 그런 사람하고 결혼하면 안 됩니다. 자기는 그 사람하고 결혼할 자격이 안 되거든요. 불행해집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는 그런 사랑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런 것 중에 어떤 것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실화는 많이 있는 사실 가운데 여러분이 감동 받을 것만 골라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어떤 뛰어난 작가가 여러분 남편과 아내의 인생 중에 수많은 사실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일부만 취해서 만들면 여러분의 일생도 소설보다 더 아름다운 일생이 됩니다. 그런데 어차피 소설이나 그거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사랑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증거가 무엇인지 아세요? 그런 것을 기대해 본 사람 중에 옛날에 죽은 사람하고도 그런 사랑을 해본 사람은 없습니다. 막 사랑에 불이 붙고 그 사람의 실체를 발견하기 전에 그 사람이 죽어버렸으면 가능합니다. 그런데 살아보면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어떤 끊임없는 이상과 동경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은 남들이 보기에는 순수한 사람이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초등학교 다니는데도 계속 손가락 빨고 다니는 애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제 그만큼 성장했으면 눈을 뜨고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인지 사실인지를 분간할 수 있는 사람이 그게 정말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런 것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표준을 가지고 사니까 이상적인 아내는 소설에 있고 현실에 있는 아내는 진짜 재수가 없어서 만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생을 살아도 한 번도 감사한 생각이 안 듭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얼마나 불행하겠으며 또 그런 사람하고 사는 그 사람은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말씀 드리잖아요.
부부가 이렇게 살아가면서 남편이 나를 이해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내 마음을 다 몰라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 마음을 그렇게 잘 알아 준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을 몰라주니까 내 아내는 나쁜 여자다, 내 마음을 몰라주니까 우리 남편은 못된 인간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아내로서 어느 날 소외감을 느끼며 외로워하면 남편도 가끔은 눈물을 흘리며 잠드는 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인간은 서로를 그렇게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서로 대화와 노력 속에서 그 간격을 줄여가면서 우리가 이렇게 성숙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느냐 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언젠가 남편이 자기 마음을 알아주거나 아내가 자기 마음을 알아주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고맙고 정말 기쁜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내가 있기 때문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못하고 사는 것을 그것을 억압이라고 생각하고 희생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렇게 평생 결혼하지 말고 소설책이나 읽고 연애소설 만화나 보며 살아야지 현실 속에 있는 여자하고 만나서 결혼하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순정 만화나 보면서 계속 살아야지 눈물을 흘리고 결혼은 그런 게 아닙니다. 거기에서 감사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한 인간이기 때문에 짊어져야 할 피할 수 없는 실존적인 고민, 그런 것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이외에 누구도 나누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니까 사람이 부부사이에 문제가 없어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 의지하려고 그러지 그렇지 않고 완벽한 사람을 만나면 그 인간이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배반은 안하지만 그 인간은 실망을 시킵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그렇게 인생을 설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결혼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충분히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해서 서로를 남편과 아내로 맞아들일 때 항상 이 사람 안에는 내가 발견하지 못한 부족한 부분과 결함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결함이 발견돼도 존재가 흔들릴 정도로까지는 실망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결혼의 서약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C. 그 사랑의 표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할 그 표준을 제시하시는데 아주 높습니다. 성경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에베소서 제 5장입니다. 25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5장 25절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아멘. 그 뒤는 더 어렵습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케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데 그 표준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심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명령을 하시는 이유는 뭐냐 하면 어느 인간도 아내하고 산 다음에 나는 충분히 아내를 사랑했다라고 말할 수 없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남성들이 조금 불리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만 가혹하게 명령하시느냐고 말입니다. 그게 그렇게 가혹하게 느껴지면 지지난주 수요일에 교회에 나왔어야지요. 그때에 “남편에게 복종하라”를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어떤 말씀이 나오냐 하면 그 바로 앞에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내들의 입장에서 보면 더 가혹한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힘든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힘들다면 복종할 깜냥이 안 되는 인간에게 복종을 하는 것은 더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한다고 하는 것은 맞을까봐 그리고 뭐라도 좀 줄까봐 그런 복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온전한 사랑이 없이는 교회는 온전하게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복종 속에는 이미 복종과 함께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경까지도 이미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여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가혹한 명령이겠습니까?
제가 긴 세월 목회를 해왔지만 심방 갔을 때 자기 아내를 자기가 사랑한다고 그리고 나만큼 아내한테 해주는 사람 나와 보라고 그러는 사람 치고 상처 없는 가정이 없습니다. 그것은 아주 괴기스러운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이루기를 원하는 가족 속에서의 사랑은 그런 양심을 따르는 사랑입니다. 맨날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내가 뭐 바람을 폈어? 돈을 벌어서 내가 딴 주머니를 찼어?” 딴 사람도 다 그렇게 삽니다. 자기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왜 자기를 아주 몇 천 명에 한명 있을까 말까한 나쁜 사람하고 비교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도 그렇게 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무슨 농약을 먹였어? 독약을 국에 탔어? 그러면 좋겠습니까? 물론 그런 여자 보다야 훨씬 착하지 남편은 자기 아내가 그런 사람하고 비교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안 합니다. 그래서 남자 중에 누구도 국에다 독약 안타고, 농약 안 먹이고, 생명 보험 몰래 들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에게 감사하는 남편은 없다는 것입니다. 항상 그 이상이기를 원합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을 보면 결혼에 대한 아무 생각이 없이 결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애들이 양육이 안 됩니다. 본인이 이 가정의 대의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결혼하는 것만큼 성스러운 것이 없는 것처럼 성경이 표현하는가 하면 이 세상에 가장 타락한 세속적인 일을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라고 성경이 묘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생각과 이 믿음을 가지고 결혼을 대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너무나 성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정말 종말이 와도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세속적인 사랑의 대표가 바로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가 아내를 아무리 사랑했어도 그래서 “충분히 사랑했다고 이런 여자가 나 같은 남자 만나서 사랑을 받고 산 것은 가문의 영광이라고 말해야 되지요.” 남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더욱이 우리 남자들로 하여금 주님 앞에 엎드리게 만드는 것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목표와 비슷하게 아내를 사랑하는 것의 목표가 뭐냐 하면 그가 예수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보면 엄청난 희생의 강요이고 잔인한 인생의 목표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차피 추상명사니까 그렇지만 눈에 보이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대상이 강아지나 물건이면 쉽습니다. 사람은 어렵습니다.
어떤 여성이 남편을 잃고 혼자됐는데 그렇게 개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하고 삽니다. 그래서 기자가 물어봤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동물을 사랑하세요? 박애주의자신가봐요.” 그랬더니 이 여자로부터 돌아온 대답이 아주 충격적입니다. 개를 쓰다듬으면서 “얘들은 아무리 나빠도 얘들을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 인간은 흔히 하지만 얘들이 안 하는 게 있대요. 그게 뭐냐 하면 개는 배신을 하지 않아요.” 이것도 인간으로 미성숙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이렇게 아직 인간과 충분히 교감을 나눌 능력이 없을 때 동물을 기르게 해주는 것이 아주 좋답니다. 우리는 아이들한테 그런 배려를 못했는데 여러분은 하십시오. 좋답니다. 그 속에서 관계를 맺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동물하고 그걸 잘한 아이들이 인간과도 관계를 잘 맺는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한 사람이 이제 성장해서 자기의 독립적인 인격을 갖추게 되었을 때는 배신을 당하는 것이 두렵고 힘이 들어서 배신하지 않는 동물과만을 관계를 나누고 사랑을 계속하는 것은 인간성의 미성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배신을 당해도 혹은 실망하고 낙심을 시켜도 인간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면서 도전하고 자신의 정신과 마음의 크기를 넓혀서 더 못된 사람도 끌어안고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 그게 남에게 뭔가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앙케이트를 했답니다. 대학생들에게 “네 어머니 아버지가 몇 살에 돌아가시면 좋겠냐?” 그랬더니 63세라고 써냈답니다. 그래서 이게 또 무슨 의미가 있나하고 봤더니 60세나 61세에 정년퇴직을 하고 재산을 다 모아서 퇴직금 수령하려면 몇 달 걸리잖아요. 다 정리를 해 놓은 다음에 쓰시기 직전에 돌아가시도록 가슴이 섬뜩합니다. 시집 장가를 가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친정이나 처가에 가서 징징대면서 기대는 것도 인간의 미성숙의 표징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체성 있는 인간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을 그렇게 기르는 것은 자녀들을 한 인간으로서 자칫하면 망가진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절대 그렇게 기르면 안 됩니다. 너의 인생이다. 그리고 툭 던져서 이 세파를 헤치면서 고뇌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보면 매정해 보이고 정말 나쁜 것처럼 보이고 부모로서 마음에 사랑하니까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 아이를 정말 사랑하는 길이고 후에도 이 아이가 부모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야 어차피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적이 없으니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여기에 63세라고 써낸 그 녀석들도 이게 정상적으로 성숙한 인간으로 살아갈 가능성은 별로 없는 애들입니다. 그렇게 써낸 녀석들 중에 “너 몇 살까지 살고 싶으니?” 그럴 때 “퇴직금 타고 다 쓰기 전에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63세에 죽어야 되겠죠?” 이러는 학생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미성숙입니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정말 먹고, 입고, 마시고, 높은 지위에 이르는 것보다도 더 사모해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한 인간으로서 자기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자기 인생의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15살 되던 해에 교회를 가던 주일에 논둑에 엎드러져서 펑펑 울고 무신론자의 길을 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침에 눈만 뜨면 무서운 것입니다. 죽는 것은 한 번도 무서운 적이 없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눈을 뜨고 사는 게 너무너무 무서웠습니다. 나는 그때까지도 도대체 그 두려움과 무서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가난을 무서워 하냐? 아닙니다. 고통을 무서워하냐? 그것도 아닙니다. 도대체 그 두려움의 정체가 무엇이냐 그땐 답을 못 내렸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지금 와서 딱 보니까 그 두려움의 정체가 뭐냐 하면 내 인생에 나 스스로 주체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내 인생에 나 스스로 내 인생의 주체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사상에서 보면 자기 인생에 자신이 주체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그 주체성을 하나님 없는 주체성을 찾습니다. 그러니까 심하면 하나님과 대적하면서도 자기 주체성을 찾으며 이게 인생이라고 강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 앞에 서기 전까지는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없이 끊임없이 자기의 삶에 자기가 주체가 된다고 살아가는 그것은 사실은 주체가 아니라 노예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까 빛이 확 들어오고 제가 그 15살부터 시작을 하면 그게 한 45년 전의 일입니다. 한없이 울었습니다. 왜 울었냐 하면 15년 전에 있는 그 소년이 너무 가엾은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럴 것입니다. “목사님이 조숙하셔서 그러시죠?”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의 자녀 중에서도 그런 아이들 많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그때 나는 너무 괴로워서 논둑에 엎드려져서 눈이 퉁퉁 붓도록 통곡했지만 여러분의 자녀들은 음란물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아세요? 그리고 향락에 빠지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결혼을 해서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서 부부로 서약을 합니다. 그러면 이제 둘은 한 몸이 되어서 이 사람이 무엇인가 결함이 발견되거나 모자란 것이 발견되어도 그것을 자신의 인생의 일부라고 짊어지고 살겠다고 하는 서약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런 식으로 미성숙하니까 뭐가 딱 발견되었을 때 ‘아이쿠 속았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정리할 생각부터 먼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이렇게 불완전한 사람들을 만나서 남편과 아내로 살게 하심으로써 그렇게 모자라는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고 도저히 복종할 수 없는 남편에게 그 은혜의 힘으로 복종하는 것을 배우면서 자기의 인간성을 완성해 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하신 일이 크게 두 가지인데 희생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당신은 죽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구원한 당신의 자녀들을 한번 구원해 놓으신 것으로 만족하지를 않고 끊임없이 사랑하시며 돌보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자신을 내어버려 한번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사랑으로 당신의 몸인 교회를 돌보며 가꾸고 그 사람들이 흠과 티가 없는 온전한 사람들이 되어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끊임없는 용서, 끊임없는 긍휼과 사랑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가족과 잘 사는 것 10 (2015.06.07 주일오전설교)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한없는 용서와 은혜로 일생을 살아왔고 단 하루도 주님의 그 용서하시는 은혜와 사랑에 빚지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아내를 그렇게 끝까지 사랑하려고 해도 우리는 그런 사랑의 자원이 우리에게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금방 발견합니다. 이것은 불신자들만이 그런 게 아니라 불신자들은 그런 사랑을 하겠다는 생각도 못합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 정체를 모르니까 신자인 우리들도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옳다는 이야기를 들었어도 당장 오늘 집에 돌아가서 그렇게 사랑을 하려고 할 때에 사실 자기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마치 가난한 주부가 가족들을 위해 밥을 짓기 위해서 땅 속에 묻어 놓은 쌀독에 팔을 쭉 뻗고 바가지를 긁어도 아무리 긁어도 바가지 속에 쌀이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자기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 안에 그럴 수 있는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남에게 은덕을 입은 것만큼만 똑같이 갚으며 살아도 아마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정말 은혜를 기억도 안하고 심지어는 은혜도 원수로 갚는 막된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습니다. 그런데 받지도 않은 사랑을 인간이 그렇게 베풀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네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들으면서 우리는 “못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런 사랑으로 아내 사랑을 완성해 가면서 남편은 비로소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안에는 그런 무한한 사랑이 없는데 주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남편과 아내로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뜻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 받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당신을 의지하고 간절히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그렇게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주님께 구할 때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그 사랑과 생명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힘으로 그 은혜의 힘으로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자기를 먼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의 깊이를 깨달아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부로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 일이 항상 달콤하고 행복한 일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제가 묻고 싶습니다. 우리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이제껏 살아오신 날들은 항상 달콤하고 그리고 즐거운 일이었습니까? 사랑은 남편과 아내가 사랑이라는 꿀통에 빨대를 넣고 그저 미친 듯이 빨아먹으며 행복해 하는 그런 것이 부부의 사랑이 아닙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내와 함께 일생을 살고 난 후에 아내가 망가진 인간으로 최후를 마치면 여러분도 사람으로 잘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높은 지위 없고 그리고 가진 것 없어도 심지어 자식들은 여러분을 존경하지 않아도 내가 일생을 산후에 내가 이 사람을 만나서 인간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 자신이 어느 정도 완성됐다라고 고백을 할 수 있다면 훌륭한 삶을 산 것입니다. 사람은 그것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러분이, 남편들이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매순간 어떻게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불완전한 사람으로서 온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고 주님 앞에 어린 아이처럼 매달렸는가 하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오늘 이 말씀을 가슴에 깊이 받고 그리고 아내를 사랑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사랑해서 하나님이 주신 남편의 덕목을 완성해 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우리가 읽은 성경의 문맥에서 사도는 주 안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은 신자의 삶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구원 받기 이전의 옛 사람과 구원 받은 이후의 새사람을 대비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완전히 새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획기적인 변화를 겪은 사람들입니다. 신분으로서는 죄인이었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다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신자 안에는 옛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과 함께 우리의 믿음 생활을 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옛 본성을 옛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음으로 하나님께서 새롭게 부여하신 본성을 새사람이라고 의인화하여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사람으로서 옛 사람을 끊임없이 짊어지고 살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자의 운명과 같은 삶입니다.
옛사람은 옛날에 하나님과 사람과 더불어 가지고 있었던 옛 관계의 핵심이고 새사람은 이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수립되는 새로운 관계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관계의 핵심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거룩한 새 생활입니다. 사도가 성도들 간의 사랑을 말하다가 가족을 언급하면서 남편과 아내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을 해야 하는 것도 비인격적이고 노예적인 의미의 복종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이 세워주신 가정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질서 안에서 서로를 주님의 사람으로 구축해 가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복종입니다.
II.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
똑같이 하나님께서는 남편들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괴롭게 하다’라고 하는 이 단어는 ‘피크라이네스쎄’라고 하는 단어인데 ‘쓰라리게 하다. 비통하게 하다. 괴롭히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편지가 쓰여진 로마시대에도 남존 여비의 사상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에게 죄가 들어온 이후로는 언제나 사랑이 아닌 힘으로써 상대방을 제압하려고 했고, 이것은 부부의 관계에서도 이기적인 성향으로 나타났습니다. 남성들은 그 완력과 사회적인 힘의 우위성을 사용해서 불균형과 폭력성을 도입했고 이것은 부부관계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여성은 엄밀하게 말하면 남자와는 격이 다른 존재로서 괴롭힘 쯤은 당해도 그게 큰 사회적인 문제가 안 되는 존재였고 남편은 이러한 사소한 일로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된다고 교육받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성경이 남편들에게 아내를 사랑하라 그것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말하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 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기이한 명령으로 비췄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편지의 수신자들인 골로새교회 교인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울 것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통해서 그들은 단지 아내에게만 이렇게 아가페의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을 뿐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지체들에게 그렇게 하고 심지어는 자기와는 다른 이방 세계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이루며 그들과 함께 이렇게 안온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지시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A. 괴롭힘이 아닌 것
그러면 여기에서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할 때의 그 ‘괴롭힘’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다음과 같은 것들은 남편이 아내를 괴롭히지 말라고 할 때에 그 괴롭힘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는 일반적인 의미의 고난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불완전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자 마음을 먹어도 언제나 그 선이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하려고 해도 언제나 정의가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는 의롭게 살기 때문에 박해를 받고 온전하게 살려고 하기 때문에 더 힘든 인생을 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더욱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일반적인 삶에 있어서도 언제나 고통과 결별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산다는 것 그 자체가 시련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삶에는 끊임없는 고통과 시련이 뒤따르게 되고 죄가 들어온 후에는 육체의 질병과 인간관계의 깨뜨려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데서 오는 생명과 사랑의 결핍, 자연과의 관계가 깨뜨려진 데서 오는 끊임없는 자연으로부터의 위해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괴롭힘을 당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할 때에 그 괴롭힘은 이런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고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고통을 당하게 되는데 그러한 고통으로 인한 괴롭힘도 여기에서 말하는 괴롭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고통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이 세상의 뜻을 좇으려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것을 고생이라고 부르고 그리고 전자를 가리켜서 고난이라고 부릅니다. 어차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남편이기 때문에, 아내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미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 안에 있는 악을 꺾고 자기 밖에 있는 악과 싸우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될 사람입니다. 이렇게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이것은 남편과 아내가 누군가가 대신 지어줄 수 있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그것은 남편이 아내에게 사과하거나 혹은 용서를 빌어야 할 그런 종류의 괴롭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B. 사랑 없음에서 나옴
여기에서 말하는 이 남편의 아내에 대한 괴롭힘은 사랑 없음에서 나오는 괴롭힘입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아름다우면 사랑하게 마련이고 추한 것을 발견하면 싫어하게 마련입니다. 미움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더럽고 추한 것을 발견하는데서 오는 혐오의 감정이고 사랑은 아름답고 좋은 것을 발견하는데서 오는 애호의 감정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선한 것을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매우 나쁜 일인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말 좋은 것을 버리고 나쁜 것을 행하며 기쁨을 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로 살다가 보면 아내가 어떤 부분에 있어서 모자라는 것을 발견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도 사람이니까 잘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깊이 들여다보면 그 모자란 것과 잘못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그 여자의 생김새가 원래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모자람과 잘못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남편은 아내에 대한 사랑이 변하여 실증이나 미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원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하는 당사자도 좋은 것을 보면 기쁘고, 나쁜 것을 보면 괴로운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선택을 잘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좀 더 신중하게 선택을 하시지 왜 그렇게 대충 골라버렸습니다. 너무 선택에 신중한 나머지 50이 되도록 장가를 못가는 것도 문제겠지만 왜 그렇게 급히 선택을 해서 ‘아, 이건 정말 내가 모르고 잘못 선택했구나.’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둘 중의 하나인데 충분히 생각하고 판별한 후에 결정을 하시든지 아니면 내가 선택한 결과에 대해서 내가 책임지겠다는 마음으로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든지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또 늘 말씀드리지만 정말 그런 결함도 없이 정말 완전한 사람이라면 왜 자기 같은 사람한테 시집을 왔겠습니까? 좀 더 좋은 데로 갔지요. 그렇게 고개를 심하게 끄덕거리면 옆에 남편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자기는 아내를 보면서 아이 이거 잘못 골랐구나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남편은 그게 처음이지만 아내는 오래전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우연히 처갓집에 놀러갔답니다. 그랬더니 보니까 일기책이 하나 있었습니다. 늘 말이 없고 아주 조신하고 자기 처제였는데 보니까 처제의 일기장입니다. 그래서 너무 궁금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넘겼는데 우연히 자기가 아내와 함께 사귀고 결혼을 하겠노라고 그 집에 와서 처음 인사하는 그날 일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니가 형부 될 사람을 데리고 왔다. 웬 쓰레기.” 그게 처제가 그날 한 두 시간동안 밥을 먹으며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 이 남자에게서 받은 인상입니다. 자기는 이제야 아내가 쓰레기 같은 부분이 있다고 발견했지만 처제는 그 집에 인사 오는 그날 발견했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라고 하는 것은 말입니다. 자기 스스로 그것을 입증해 살아갈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으로 인간을 존엄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대해주어야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인간이 존엄하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러면 자기가 선택했으니까 그러면 선택을 했으면 책임도 져야 됩니다. 그게 책임 있는 인간입니다. 정말 아내의 모자람과 잘못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용납하면서 사는 것이 결혼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책임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는 사람들만 결혼해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그 자식들부터 시작해서 모든 아이들이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나는 어제 잠깐 뉴스를 들으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서른다섯 살 먹은 여자가 아이를 낳아서 그 아이의 시체를 자기 엄마한테 소포로 붙였습니다. 그게 어떻게 경찰에 신고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이를 낳아서 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엄마가 불쌍하고 그런 게 아니라 그 태어난 아이, 한 아이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태어났는데 맞이한 첫 번째 세상이 엄마가 자기를 죽이는 세상이었습니다. 아무 저항도 못하고 탯줄도 못 끊는 핏덩어리가 엄마의 손에 의해서 죽어갔을 때 정말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누가 생각이 났냐 하면 영국의 공주 미들턴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금 숟가락이 아니라 다이아몬드 방석에 앉아서 태어나고 영국 모든 국민과 세계의 관심을 받으면서 그렇게 태어나고 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엄마 손에 의해서 죽습니다. 나는 어느 정도는 이해를 합니다. 얼마나 사는 것이 괴로웠으면 생활비도 없고 남편하고도 별거 상태라고 하니까 이해됩니다. 그런데 그래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은 그러면 안 됩니다. 살려고 태어난 그 자기 자식의 생명을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아내에게서 남편으로서 불편하고 혹은 어려운 점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때마다 생각하세요. 그게 인생입니다. 그래서 소설 같은데서 그리는 영화 같은데서 그리는 그런 사랑을 생각하니까 자신이 너무 불행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 없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집회에 가서 저하고 교제를 했습니다. 목사님이 15년 전에 엄청나게 아프셔서 그래서 병원에 입원을 해서 병원에서 장례를 준비하라고까지 할 정도로 그렇게 죽음의 끝자락까지 가셨답니다. 그리고 이제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어서 병원에 누워있는데 어느 날 아내가 지갑을 두고 잠깐 나갔답니다. 그래서 지갑을 이렇게 열어 보니까 정 가운데 활짝 웃은 자기 사진이 있더랍니다. 이 목사님이 너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아내가 굉장히 무뚝뚝하고 그랬는데 이렇게 늘 사진을 품고 다녔구나.’ 그래서 마음에 너무 감동이 되어서 여러분 생각하고 있죠. ‘또 무슨 반전이 있을까?’ 그래서 이제 너무 감동이 되고 굉장히 정적이신 분이시더라고요. 이 아내가 탁 들어왔는데 너무 감동이 되어서 “여보 내 사진 늘 가지고 다녔어?” “그거 당신 죽으면 쓸려고 영정하려고 가져온 거야. 그런데 안 죽어서 지금 있는 거야.” 뭘 그렇게 큰 걸 기대하세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다 만들어진 어떤 사랑이 있어서 그 속으로 쑥 들어가는 무료입장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런 충분한 사랑을 받는 것에 대해 그렇게 해준다면 자기도 뭔가를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누구도 나는 이미 사랑했다 그 사랑을 완성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 완성을 향해서 가는 것이 부부의 사랑입니다.
많은 남성들은 아내의 기질이나 성향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그리고 그 성향을 바꾸려고 시도를 합니다. 그렇게 바꾸려고 하는 자신도 못 바뀌는데 그 인간이 누구를 바꿔 놓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젊었을 때에 지금보다 훨씬 원칙주의자였던 것 같습니다. 한번은 어느 친구 전도사님 집에 갔습니다. 막 결혼을 한 부부인데 그래서 그 집에서 결혼을 했다고 집들이를 한 것입니다. 친하니까 맛있게 먹는데 “내가 콜라 한통 사가지고 올게” 그러더니 부인이 옆에 있다가 “아니에요. 제가 사올 게요.” 그리고 남편한테 돈을 받아서 갔습니다. 콜라 두 통을 사가지고 왔는데 잔돈을 갖다 주니까 남편이 즉시 일어나서 서랍에서 노트를 꺼내더니 그 콜라 값을 기록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전도사 때부터 제가 그런 기질이 있었습니다. “김 전도사 지금 뭐해?” “콜라 먹은 것 적어야지” “그게 뭐야?” “가계부야.” 그래서 “너 결혼했는데 아직까지도 돈 통 안 넘겨줬냐?” 그러니까 “우리 집사람은 늘 언니들하고 살아서 이런 거 할 줄 모르고 월급 받으면 다 언니 가져다주고 나는 홀어머니 모시고 일평생을 살아서 이것을 잘해.” 그래서 내가 “야, 구약에서 선지자가 가계부 쓰디? 집어 치워라. 너는 세계 평화나 염려해야지 그런 사소한 것들 우리 선지자 될 사람들이 그러면 되겠냐?” 그랬더니 이분이 엄청나게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정말 김남준 전도사님의 그 이야기가 주님의 음성처럼 들린답니다. 그날 저녁에 깊이 고민을 하다가 그날인가 그 다음날인가 아내를 불러 놓고 “여보 나는 선지자야. 선지자가 가계부 적는 것 봤어? 이거는 당신이 해야 해.” 아내가 정말 “저는 못해요.” 막 그랬는데 “그래도 당신이 할 수 있어.” 넘겨줬답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놀라워요? 아주 훌륭하게 해내는 것입니다. 맡겨 줘 봐요. 처음에는 좀 두렵지만 하면 다 합니다. 그런데 그 후로 인생을 더 살고 보니까 절대 못하는 여자들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남자가 가계부를 써도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람직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 아니라 문제는 남편으로서 아내가 가지고 있는 기질이나 성향을 어떻게 하든지 바꿔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완력으로 때로는 아부로 바꿔 놓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만 바꾸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뀐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그러면 그것은 그것대로 또 좋은 점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에 그때는 정년도 없었는지 77세가 된 선생님이 무슨 선생님으로 와 있는지 모르겠는데 카랑카랑하고 아주 새빨간 루즈를 바르고 다니는 여 선생님이 도덕을 가르치셨습니다. 얼마나 무서운지 막 고등학교 3학년 형들도 교탁에서 점프를 하면서 따귀를 때리는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항상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너희는 이것을 명심해라. “마음은 둥글고 일은 네모지게” 제가 교회에 직원이나 교역자를 고를 때에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없습니다. 마음이 둥글둥글해서 모든 사람이 그 직원 좋다고 그러는 사람은 특별히 하는 게 없습니다. 안 되는 것도 된 것 같고 된 것도 안 된 것 같고 그럽니다. 일 하나를 맡기면 밤을 새더라도 해가지고 칼로 자른 것처럼 딱 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힘들어 하는 사람이 주위에 꼭 있습니다. 그래서 그게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아내가 네모나서 문제가 돼서 둥그렇게 하면 또 망가지는 부분이 있고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이미 골랐으니까 그냥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을 자기 맘대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서 폭력과 미움 같은 것을 낳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하나님에 의해서 고쳐질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잘하게 도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끝까지 안 고쳐주시면 그냥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짊어지고 사는 것이 부부생활입니다.
III. 자기를 완성하는 길
그래서 결국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완성하는 길입니다. 결혼은 단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시련, 역경과 어려움, 모든 것을 거치면서 인간성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남자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세상 어떤 사람도 자기를 몰라줘도 평생을 같이 살아온 아내가 정말 당신 좋은 사람이야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인생을 훌륭하게 산 것입니다. 아내에게서 혹은 남편에게서 어떤 결함을 발견하면 우리는 힘들어하고 파르르 떨거나 혹은 저 인간이 저런 인간이 아니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결함이 없었으면 자기 차례에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 더 좋은데 장가갔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배우자의 결함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야 됩니다. ‘아, 이런 모자라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충해 주라고 그렇게 하나님이 나를 이 여자의 남편으로, 혹은 이 남자의 아내로 부르셨구나.’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희 부부도 처음에 너무 안 맞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궁금한 게 왜 우리를 만나게 하셨을까? 한쪽은 짜게 먹고 한쪽은 매우 싱겁게 먹고, 한쪽은 먹는데 관심이 많고 한쪽은 아무 관심이 없고 한쪽은 고기를 좋아하고 한쪽은 고기를 쳐다도 안 보는 채식주의자이고 그러니 하나도 맞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 그 하나는 일치했고 나머지는 다 안 맞았습니다. 처음에는 참 오해도 많이 했습니다. 왜냐하면 무슨 말만하면 나는 항상 이렇게 무시당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집사람이 어린이 집에서 유치원 교사를 오래했기 때문에 누구 시키는 것이 몸에 벤 것입니다. 되게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집사람은 흥분할수록 말이 커지고 나는 너무 화가 나면 소리가 들릴 듯 안 들리 듯 말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하루 동안 며칠 동안에 있었던 어려운 일들을 대화로 풀어보자고 이제 누워서 불 끄고 내가 이야기를 합니다. 정말 어렵고 힘들고 괴로운 일이니까 점점점점 톤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대답도 많이 하였던 아내가 조용히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다 얘기하고 ‘엄청 감동을 받는구나. 당신 이제 알아듣겠지?’ 그러면 코를 드르렁 곱니다. 그래도 우리에게 확실한 것 하나 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이유라는 것, 그리고 그 분의 무한한 지혜의 경륜 속에서 우리를 만나게 하셨다는 것, 그리고 이제 신앙이 성숙해지면서 그런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부부가 막 뭘 집어던지고 싸운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약간 큰 소리를 내고 다툰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마지막 다툰 것이 21년 전이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돌아보면 결국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아내를 품는 나의 사랑과 인격이 모자라기 때문에 아내의 고통과 아픔보다는 자신의 불편함을 더 많이 생각했기 때문에 때로는 폭압으로 아내를 바꿔 보고 싶어 하는 유혹을 느끼고 힘들어하는 그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은혜의 부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도 인간으로서 자기를 완성하는데 꼭 필요한 조건이기는 합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태어나 부모로부터 그리고 커서는 형제들로부터, 자라서는 남편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비교적 성격이 원만하고 선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할 때 인간성의 형성에 결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특히 어린 시절에. 아이들을 깊이 사랑해 줘야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랑을 받음으로써 어느 정도 인격을 완성해 간다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진정한 완성은 남을 사랑함으로써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 받는 것은 희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냥 수동적입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끝까지 사랑하는 일은 가시밭길입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조건들과 치열하게 싸우면서 그 사랑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서는 아내는 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유업을 함께 나눌 자이며 그러니까 귀히 여겨야 한다고 남편들에게 충고하면서 이는 너희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부의 관계에는 영적인 관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 그래서 아내와의 관계 속에 막힘이 없어야지만 하나님의 그 생명과 은혜를 누리는 삶을 남편이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기 힘들 때마다 자신의 바닥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기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 끈을 놓고 싶을 때마다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든지 거기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한계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이 사람은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고 그렇게 해서 자기를 이 온 우주의 중심으로 놓고 그렇게 아내와의 관계를 생각하거나 남편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그것은 정신적인 폭력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자기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그런 겸손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 사랑이 자기완성의 길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할 수 있는 날에만 사랑하는 것은 그것은 악한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부분적으로는 동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랑은 항상 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여야 할 책임도 그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한 그루의 나무를 결혼을 통해 심고 그것을 가꾸어 가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결혼 생활입니다. 결국은 그 사람의 결혼생활의 건강함이 아내를 얼마나 온전하게 사랑하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인간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족과 잘 사는 것 11 (2015.06.14 주일오전설교)
IV. 적용과 결론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인생을 치열하게 살았고 그리고 여러분 중에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시련과 역경의 시간들을 지내면서 이제껏 까지 한 인간으로, 신자로 살아왔습니다. 그런 인생을 살은 여러분이 아내와의 관계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이제까지 몸부림치며 살아왔던 여러분의 인생에 대한 예의입니다. 세상은 그까짓 것 청산하고 새 길을 찾아봐라 하고 가르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생의 목표에 성공이라는 목표에 도달한 것이 곧 그 인간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우리를 자기 아들을 우리를 대신해서 죽게 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그 무한한 지혜 속에서 우리를 아내로 남편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부로 살게 하셨습니다. 공중의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데 이것이 어찌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이것이 어찌 단지 우리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안 맞는 때도 있고 갈등하는 때도 있을 것을 아셨지만 그래도 그것이 좋아서 여러분을 아내와 남편으로 만나게 하셨습니다. 인류가 창조된 이래 이제까지 지구 위에 살았던 사람들의 숫자를 인류학자들은 1천억 정도로 계산을 합니다. 그 1천억 분의 1의 사람을 여러분이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찌 우연히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버려두셨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을 그런 아내의 남편으로, 그런 남편의 아내로 부르셨다면 함께 사랑하며 사는 것을 왜 기뻐하지 않겠으며 그렇게 하려고 할 때에 너무 힘든 일을 만난다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할 때 왜 은혜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남편 혹은 아내 앞이 아니라 그렇게 남편으로 아내로 온전하게 살아가도록 은혜를 간절히 구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얼마나 망가진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고, 주님의 은혜로서 우리가 온전해지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사람을 사랑하는 그것이 남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내를 사랑함으로써 가장 큰 유익을 누리는 사람은 남편인 여러분 자신입니다. 아내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불행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사랑한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힘입어 사랑에 있어서 승리하는 남편과 아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부부 사랑의 완성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가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 5:32-3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성경은 신앙 밖에서 얻을 수 있는 부부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부부사이에는 상식과 본성의 빛이 필요합니다. 그런 규칙을 따라 올바르게 살면 삶이 비교적 안정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서 하나님이 가정을 제정하시고 부부를 결합시키신 목적을 성취할 수는 없습니다. 에베소서를 잘 읽어보면 그 전체의 관심사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경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1장부터 3장까지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경륜을 이야기하고 4장에서는 성령께서 어떻게 신자들과 관계를 맺으시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4장 이후로 넘어가면서 옛사람과 새사람의 대조가 등장하고, 5장에서 하나님을 본받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다가 바로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 대해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해서, 종과 상전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남편과 아내로 만나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가정을 이루어가는 이 일이 결국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완성하시는 그 위대한 구속의 경륜의 성취 속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부부의 연합을 이야기할 때에 또한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연합도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II. 부부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A. 그리스도와의 연합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우리가 거듭남으로써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구원 얻은 사람이 되는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질 때에는 몸에 접붙여짐으로써 머리에 접붙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우리는 구원받아서 예수의 몸의 일부가 됨으로써 그 분이 주신 생명과 사랑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신자로서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 받을 때에 그리스도 예수와 영적으로 연합된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또한 순종의 삶을 살면서 실제의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어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미 연합됐지만 그리고 이것은 변함이 없지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은혜를 받고 순종하면 순종할수록 주님과 내가 하나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그 고백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남겼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한 고백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꼭 같은 방식으로 남편과 아내도 결혼을 통해서 결합했지만 서로 긍휼히 여기고 사랑함으로써 남편이 아내 안에 아내가 남편 안에 있는 것 같은 온전한 연합을 이루어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각각 남편과 아내로 불러 한 가정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B. 부부 사이의 연합
부부 사이의 연합은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말할 수 있는데 첫째는 육체적인 연합입니다. 부부는 하나의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육체의 연합을 이루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차원은 영혼의 연합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남편과 아내로 만나기전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체로서 남편과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과 아내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모두 그리스도와 지체의 연합이 존재하고 특히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매우 특별한 영적인 연합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비밀이 너무나 놀랍기 때문에 사도는 “그 비밀이 크도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또 한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을 때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지체이고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거기에도 어떤 영혼의 연합이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물론 거기에도 연합이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는 아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도 인성을 가지고 계시고 구원 받지 못한 인류도 각각 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모종의 연합을 이루고 있고 또 그 연합이 남편과 아내 사이의 연합에도 적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연합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구원 받은 두 사람이 누리는 그 연합과는 약한 연합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남편과 아내를 구원하여 그리스도 예수께 인도하여야 할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부부 사이의 연합의 세 번째의 차원은 정신적인 연합입니다. 이 연합은 남편과 아내가 각각 하나님 앞에 독립된 자기 결정적인 존재이지만 서로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사회적인 연합 속에서 살아감으로써 두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정신의 연합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부부는 실제적으로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고 또 기뻐하게 되고 이럼으로써 둘 사이가 매우 특별한 사랑의 관계라는 것을 확인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III. 부부가 서로 사랑함
그러면 이 남편과 아내, 아내와 남편을 묶어주는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남편은 높은 지위에 있어서 아래 지위에 있는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낮은 지위에 있어서 높은 지위에 있는 남편을 올려다보며 존경하라고 하는 명령같이 여겨지지만 그러나 우리가 읽은 33절의 이 뜻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이 아내가 자기 남편을 존중하는 것은 군주제적인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존경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정 안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제정해 주신 질서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오늘 여기에서 남편에 대한 존경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존경과 그리고 아내에 대한 배려,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본적인 토대가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결국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결혼하기 전에 남녀가 만나서 함께 사랑하는 그 사랑의 완성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랑으로 부부관계는 시작이 되고 이 자체가 사랑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연애시절에 사랑이 결혼으로써 완성이 되지만 또한 결혼과 함께 그 사랑은 새롭게 시작이 되어서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이 바로 부부사이의 사랑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사랑이지만 결혼하고 나면 사랑이 될 때도 많이 있지만 해야 할 경우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 나면 이 사랑이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성의 문제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바로 결혼생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A. 아내를 교회처럼
성경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기를 교회처럼 사랑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아내를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주 높은 표준입니다. 다다르기 어려운 표준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누구도 아내를 사랑한 후에 나는 충분히 사랑하였다고 말할 수 없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끊임없이 아내를 사랑하는 일생의 전 과정을 통해서 불완전한 자기 자신의 인간성을 발견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해지기를 갈망하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높은 표준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이런 명령을 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그 방향을 향하게 하기 위해서 어떤 프로그램으로써 우리에게 그것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인공위성이 없었을 때에 바다를 항해할 경우에 밤이면 언제나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겨냥하면서 항로를 결정했듯이 그때의 사공은 그 별에 도달하고자 마음을 먹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별자리를 보고 배가 그리로 향하는 것처럼 운행을 하여야지만 안전하게 자기가 원하는 목적지를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충분히 아내를 사랑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떠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분은 자신을 버려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당신이 구속하신 사람들로 교회를 이루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는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높은 이름을 가지신 주님이 되셨지만 그러나 여전히 지금도 그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당신의 교회를 자신의 몸처럼 여기며 돌보고 계십니다.
인간이 자기의 몸을 위하는 것을 본능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몸을 위하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거의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보존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승용차뿐만 아니라 큰 차도 마찬가지로 정면충돌을 하면 운전하는 사람보다는 옆에 있는 사람이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사고가 날 그 순간에는 본능적으로 운전자가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기의 보호의 본능을 자신에 대해서만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식들에 대해서도 그런 본능을 주십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못한 죄인이라도 자기 자식을 아주 사랑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자기의 새끼를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종족들이 멸절되지 않고 이렇게 보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자기 자식을 전혀 사랑하지 않거나 버리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정신의 크기가 매우 큰 사람입니다. 나쁜 의미에서 큰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의 본능이 자기 새끼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인데 그것에 대항해서 자기 자식에게 악을 행하고 혹은 미워하고 그리고 자기 자식에 대해서 나쁜 일을 행할 때에 그것은 보통 커다란 정신의 작용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칭찬할 수 없는 것은 결국은 그 속에서 도덕과 양심, 그리고 신자의 경우에는 율법과 복음의 빛이 사라졌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종의 결함 상태입니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악을 행하고자 하는 정신의 큰 크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안 해도 저절로 되는 그 사랑이 정말 덕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내가 자신을 충분히 이해하고 잘 인정해주고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할지 모르지만 그렇지만 여러분 자신은 누구에게 대해서 그런 완전한 사랑을 베풀어 본 적이 있습니까? 자식에게? 부모에게? 아니면 형제에게? 누구에게 그런 사랑을 베풀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끊임없이 이기심과 싸우고 자기중심성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와 사랑을 나누어도 해결될 수 없는 그러한 빈 공간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물론 부부가 함께 이해하고 사랑하고 노력함으로써 그 간격을 좁혀가고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하고도 나눌 수 없는 그런 깊은 사랑을 공유하고 이해해서 그래서 연합을 이루어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완전히 그 사랑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모자라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바라보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한번 설교 시작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제 나이 15살 되는 해에 그것도 하필이면 주일날 교회를 가다가 논둑에 엎드러져서 통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뭐 가난하고 병들고 힘들고 그래서가 아니라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어디로부터 왔는가? 세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내 인생의 고통은 왜 존재하나? 정말 신은 살아있는 것인가? 그리고는 15살 먹은 아이가 논두렁에 혼자 엎드러져서 일요일의 햇살을 받으며 통곡하며 펑펑 울었습니다. 그러고는 충분히 울고 난 후에 일어나서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일평생을 무신론자로 살기로 말입니다. 그때 직면했던 것은 뭐냐 하면 근원을 알 수 없는 외로움이었습니다. 그리고 불안 그리고 두려움이었습니다. 눈을 뜨면 오늘도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 그 정체가 무엇인지를 그때는 몰랐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후 저는 비로소 그 두려움이 자신이 자기의 인생의 주체가 되는 두려움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거기에서 오는 인간의 외로움은 사람이 사람을 향해 베푸는 사랑으로서는 해소가 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너는 이 세상에 누구도 아니고 내가 창조한 너란다. 그리고 너는 내가 너에게 지정해준 너의 인생을 내 앞에 살아야 한다.”라는 고귀한 메시지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누구에 의해서도 해소될 수 없는 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으로서 그 분 앞에 단독자로 서 있는 그 한계적 상황의 외로움을 수납하는 것이 인간의 성숙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에 태어나 아내와 남편으로 만나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그렇게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영원한 사랑과 생명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어떠한 경우에도 잊어버리지 않고 찾게 되는 유일한 틈바구니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 학문이 깊어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15살에 그 어린 나이로 그 벌판에 홀로 엎드러져서 통곡을 하며 울다가 뺨에 흐르는 눈물을 씻으며 무신론자로 평생 살겠다고 다짐을 한 그것이 사실 알고 보면 “나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외로운 실존입니다.”라는 고백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바로 그런 아이들에게 답을 들려주고 그리고 그 두려움과 삶에 대한 무한한 공포심을 그리스도의 사랑의 품안에서 해결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인데 저는 그 혜택을 티끌만큼도 못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자신을 온전히 버려 교회를 사셨고, 그 교회를 사랑하심에 있어서 교회로부터 자신의 사랑에 대한 어떠한 보상이나 대가를 기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자기의 몸을 끝까지 아끼시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들에게 말합니다. 아내를 충분히 사랑했노라 교만하지 말고 그리고 아내가 복종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랑하냐고 그렇게 비겁하게 말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기억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B. 남편을 그리스도처럼
아내에게는 이렇게 명령합니다.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남편을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한 것처럼 그렇게 아내도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군주제적인 복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왕은 생사를 여탈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쥐고 있고 신하는 그 권력 앞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아부해야 하기 때문에 군주에게 복종하는 그런 종류의 복종이 아닙니다. 진실한 신자가 어떻게 우리 주님께 복종하게 되는지 한번 그 방식을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을 몰랐을 때에는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인줄 알고 자기를 임금 삼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사랑 앞에 자신이 깨뜨려지게 됩니다. 그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주님이 지정해주신 그 질서가 가장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참된 사랑으로 주님의 지정하신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고 거기에서 주님께 복종하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주신 질서들을 받아들이며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복종, 존경의 기본적인 토대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존경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지시하고 있는 그런 존경이 아닙니다. 남편의 어떤 장점이나 우월한 지위 때문에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닌 아내인 내가 사랑하는 그리스도께서 지정해주신 질서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때문에 남편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그와 나 사이에 주어진 질서를 존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내의 도리입니다.
남편들보다는 아내들이 훨씬 더 많이 남편으로부터 완전한 사랑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남편은 완성된 사랑을 자신에게 베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외에는 그런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아무리 서로 뜨겁게 사랑해도 그래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서로 기뻐하고 소중히 여기며 살아도 인간에게는 결국 누구도 대신하지 못하는 마지막의 그 실존적인 고독과 소외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녀의 사랑은 수시로 이 사랑에 빠지기만 하면 그 마지막에 남은 무엇으로도 해소할 수 없는 그 실존적인 소외감과 고독감도 일시에 해결해 줄 것이라고 하는 유혹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가오는 것이 결국은 사랑에 대한 잘못된 기대를 만들고 그리고 연애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기대들을 결혼생활에 투사할 때 그 결혼생활은 반드시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결혼하기 전에 한 눈에 반해서 뜨거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헤어질 때도 화끈하게 헤어집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비현실적인 기대치가 연애하는 동안에는 매일 같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서 모두 알지 못해서 어느 정도 유지가 되지만 같이 살아보면 깨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현실 속에 그 이상적인 사랑을 투사시키고 이 사랑으로써 인간의 실존으로 도저히 해소할 수 없는 하나님 아니면 해소될 수 없는 그러한 실존적인 고독과 소외감까지도 모두 해소해줄 것이라고 다가오는 것은 마치 이 마약을 복용하면 천국에 갈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꼭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대를 결혼 생활에 투사시키니까 매일매일 실망의 연속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신이 엄청나게 불행한 결혼을 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어떤 좋은 사람도 그를 만족시켜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주어서 하나님 아니면 해소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절대적인 고독과 소외감까지 모두 깨끗이 해결해 주는 그런 사랑을 해주겠노라고 그렇게 우리에게 인상을 줄 때에는 그런 사랑은 하지도 말고 받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은 성공하면 하나님을 버리게 되고 실패하면 엄청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사랑이라는 탈을 쓴 자유의 박탈, 곧 속박입니다. 한 사람이 결혼을 해서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어떤 경우에도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이해하고 용납하고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을 하면서 우리는 아주 놀라운 인격적인 소통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얻는 위로도 참 크기 때문에 인생을 살면서 그 많은 시련과 다양한 삶의 사태들에게서 오는 고난과 어려움들을 극복해 나가는 아주 훌륭한 원천이 됩니다. 그것을 충분히 인정해야 됩니다. 누구라도 쉽게 원래의 남편과 아내라고 하더라도 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실존적인 고독이 있는 법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을 쉽게 포기하는 것은 결혼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사랑만 하면 그런 모든 문제들이 일시에 없어져 버리고 우리가 유토피아에 도달할 것 같은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청년들에게 이 설교를 했는데 굉장히 힘들어 합니다. 그런 꿈을 꾸고 있는데 깨는 게 좋은 것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런 사랑 때문에 힘들었던 두 사람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게 첫 번째가 야곱과 라헬의 이야기였습니다. 창세기 29장에 나옵니다. 야곱은 라헬을 볼 때에 한 눈에 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 여자를 얻기 위해서 14년을 종살이를 했던 것입니다. 그 14년을 종살이를 하는 동안에 그 신제품이 서서히 구제품으로 되어 가고 있었는데도 기꺼이 14년을 희생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면서 순간순간 야곱은 위로를 받았을 것이고, 고단한 나그네 세월과 같은 인생길에 그 라헬에 대한 사랑이 그에게 많은 위로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여자들이 있었지만 첩들도 있었고 본처도 있었지만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라헬 하나였습니다. 그러면 나는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나는 라헬이 야곱이 가지고 있는 실존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었는가? 그러면 얍복 강가에 둘이 같이 있었어야 합니다. 다 보내고 자기 혼자서 잤습니다. 그리고 언니가 연달아 아이를 셋이나 낳으니까 불같은 투기가 라헬의 마음속에 일어나면서 뭐라고 그럽니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난 죽어버리겠다” 그때에 이 야곱이 그렇게 자기가 사랑한 아내인데도 불같이 화를 내면서 이제 아내를 책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신을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 아니냐?” 그러고 책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마지막 남은 야곱의 실존적인 고독까지 아내가 완벽하게 해결해 주었습니까? 아닙니다.
또 한 사람 생각난 사람이 다윗과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야의 아내와의 간음사건을 순수한 정욕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그런 해석을 받아들이기 굉장히 힘듭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물론 어느 한 순간 동물적인 정욕이 솟구쳐서 그래서 죄를 짓는 경우도 있겠지만 다윗의 경우는 존재 자체가 상처투성이 인간이었습니다. 부모로부터도 거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했다기보다는 아버지로부터 거의 편애의 피해를 본 당사자였습니다. 형제들로부터도 그랬습니다. 아내로부터도 그랬고 그리고 자식들로부터도 그랬습니다. 정말 그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부러워할만한 것이 없는 상처투성이의 인간이었습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그 쓰라린 상처를 통해서 남이 보지 못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게 되었고
(찬양)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그 하나님의 궁창에까지 미친 신실하심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한 인간에게 당신의 성품의 위대한 빛에 관한 지식을 주실 때에 금 쟁반에 담아서 주시는 법은 없습니다. 언제나 그것은 쓰라린 가시와 불같은 시련과 끊임없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풍부한 지식의 사람은 예외 없이 고난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모든 것을 이기게 한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은혜가 식었습니다. 그러니까 견딜 수 없는 소외감과 그리고 고독, 그 상처로부터 오는 배타감, 이런 것들이 마치 많은 물이 물 내려가는데 뚜껑을 열면 한쪽으로 빨려 확 쏠리면서 빨려 내려가듯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딱 만났을 때 확 쏠려 내려간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힘으로 쏠려 내려간 것입니다. 사랑했습니다. 만약에 한 순간 목욕하는 그 여자의 육체를 탐했다면 그 다음에 즉시 괴로움이 왔는데 한 번에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그래서 그 사랑이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실존적인 고독의 마지막의 문제를, 소외감의 문제를 해결해 줬냐는 것입니다. 해결해 주었습니까? 못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아내로부터 혹은 한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서 아무 근심 염려 없이 낙원에 사는 것 같은 그런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하는 그 기대가 성경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기대냐고 지금 묻는 것입니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아내를 보니까, 그런 기대를 가지고 남편을 보니까 진짜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진짜 지지리도 운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부러워하는 그 사람도 자기가 보는 한도 내에서만 부러운 거지 까놓고 보면 그 인간이 그 인간입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40대에 부인들이 모두 모여서 제법 그래도 산다는 부인들이 모여서 친구들이 만나서 교제를 했답니다. 한 여자가 이제 입을 여는 것입니다. “아, 요새 우리 남편은 아주 그냥 정신이 없어. 병원을 하는데 너무 잘 되가지고 얼굴 보기가 힘드네. 그래서 돈을 어떻게 관리를 해야 되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네.” 그러고 말문을 여니까 그 다음에는 관직에 있는 남편을 가진 사람이 자기 남편이 어떻게 승승장구 승진하고 있는지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에 학자 남편을 둔 부인은 자기 남편이 어떻게 세계적으로 지금 세계적인 논문을 써서 학계의 인정을 받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돈 버는 이야기, 계속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 친구가 밥을 다 먹고 차를 마시다가 기분이 맬랑꼴리 해졌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세상 사람들이 다 부러워할 정도로 우리 남편은 잘 나가고 애들도 좋은 학교 들어가고 공부 잘하고 그러는데 남편이 바람을 펴” 그리고 한 사람이 입을 여는 것입니다. 눈물을 글썽이면서 한 사람이 말을 여니까 그 다음 사람이 다시 한숨을 쉬면서 “남편이 세계적인 학자면 뭘 해. 가정은 돌아도 보지 않는데.” 그러면서 하나씩 하나씩 이야기를 하는데 눈물바다가 되더랍니다.
IV. 적용과 결론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지 아십니까? 부러워하지 마라. 어차피 그것은 내 인생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부러워하는 대부분이 사실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도 여러분 보면서 무지무지 부러워합니다. 우리 인생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예증이 아닙니다.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내 인생을 사는 거지 그게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내로서 남편에게 사랑을 많이 받으면 여자로서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사랑을 충분히 받는 사람은 셋방을 살아도 그 주인하고 전기세 때문에 싸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일 가지고 이를 그냥 악물듯이 상대방을 뜯어먹기 위해서 그렇게 악다구니로 싸우지 않습니다. 대게 그런 사람들이 뭐냐 하면 남편으로부터 충분히 사랑을 받지 못하니까 인간성이 자꾸 꾸겨지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누군들 자기 마음대로 인생이 풀리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애들이 속을 썩이거나 그런 일이 있어도 남편이 충분히 사랑해 주면 이게 풀립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을 받는 것은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그런데 사랑 받지 않는 자유도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지 않음으로써 정말 자유로워지는 것도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말하자면 그런 실현될 수 없는 사랑, 아니면 욕망을 투사시킨 그러한 자기중심적인 사랑 그런 사랑을 받으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게 그런 것 아닙니까? 집요한 집착증으로 여자들에게 덤벼드는 스토커, 스토커가 아니더라도 부부사이에도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착증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내가 어디 가면 90번씩 100번씩 전화하고 그러는 남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정신 질환입니다. 그거는 뭐냐 하면 미성숙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사랑타령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내들이 모든 남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내가 아내들을 이렇게 볼 때에 끊임없이 사랑타령을 하고 자기 남편하고 누구하고 비교하고 우리 남편은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추해보입니다. 사랑은 구걸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잔소리를 하면 남편이 시끄러워서 태도를 좀 바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원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인격적인 사랑은 메아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산 사이의 계곡에 서서 노래를 부르면 노래가 돌아오지만 욕을 하면 욕이 돌아옵니다. 그런 사랑은 사람에게 징징거리는 종류의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내의 품격을 현저히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남편에게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고 징징거리면서 돌아오는 사랑은 애완견적인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랑은 존엄한 인간이 받아야 할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닙니다.
나는 누가 나를 사랑해주는 것이 싫지 않지만 마치 베푸는 것처럼 하수에게 시어하는 것처럼 그런 식의 사랑은 내가 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까짓 사랑이 뭐라고 자기가 엄청나게 높은 지위에 있어서 먹다가 남은 것 하나 던져주는 것처럼 그런 사랑을 여러분이 원합니까? 그거는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존귀한 인간이 받아야 될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누구를 향해서도 구김이 없이 대등한 관계 속에서 존중받고 존귀한 자로 인정을 받으면서 평등하게 주고받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이 징징거리고 사랑 타령한다고 없는 것이 생겨납니까? 그것은 지혜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내로서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미성숙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치셔야 됩니다.
가족과 잘 사는 것 12 (2015.06.21 주일오전)
어떤 사람이 글을 썼는데 이런 이야기를 썼습니다. 남자들이 자꾸 여자들에게 치근덕거리며 추행하는 것에 대해서 쓰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여자의 마음을 사고 싶으냐? 그러면 두 가지를 해라.” 그리고 남자에게 충고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멋있는 사람이 되라 그리고 자기가 자기를 사랑해 주었으면 좋을 사람을 향해 달려가지 말고 무관심한척 당당하게 살아라. 그때에 여자의 마음은 끌린다.” 그거 읽으면서 그랬습니다. “남자도 그렇다.” 진짜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으면 아름다운 사람이 되세요. 매력을 느낄만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리고 남편에게 왜 사랑해 주지 않느냐고 바가지를 긁지 말고 남편의 사랑 없이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처럼 의연하게 하나님 앞에 자기 인생을 걸어갈 때 남편도 그 아내를 보면서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왜 아멘을 안 합니까?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남편을 진심으로 그런 구도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끊임없이 노력하고 그리고 우리가 마치 천국에서나 가능한 사랑을 이 땅에서 부부로 누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좁힐 수 없이 남아있는 한 인간의 실존으로서의 고독과 소외감을 받아들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소해 주지 못하는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부부사이에 앙심을 품고 하는 것은 그것은 정말 인간으로서 미성숙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진정으로 인간이 완성되는 것은 사랑을 받음으로써만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모자라는 결함이 있는 남편을 온전히 사랑함으로써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정의에 대한 의식은 종종 나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자기 의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해주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숙고는 언제나 우리에게는 우리는 그렇게 사랑하지 못했구나 하는 반성을 가져옵니다. 그러한 사실을 모자라는 남편과 자기의 기대에는 현저히 미치지 못하는 아내를 보면서 그러면서 그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부여받은 자기의 인간성을 완성해 가는 길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자라는 남편, 모자라는 아내는 도 닦는 도구입니다. 아니 그게 웃으라는 소리로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면서 끊임없이 온전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정말 우리 안에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소망이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정말 이러한 성경적인 사랑으로 남편과 아내를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 온전한 사랑을 구하며 어제보다는 나은 남편이 되고 오늘보다는 더 나은 내일의 아내가 되는 그 과정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많은 사람을 사랑하지 못했어도 아내에게 혹은 한 남편에게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 그리고 내가 당신을 만나서 당신의 아내로 당신의 남편으로 산 것이 후회되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은 헛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불완전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사랑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홀로 믿는 그대에게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전 7:10~14)
녹취자: 오희열
I. 본문해설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는 사도바울이 결혼과 부부관계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결혼과 이혼의 불변성에 대해서 그 강조점을 설명하고 불신자와 한 부부로 살아가는 결혼생활의 실제적인 원리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읽은 이 본문은 사변적이고 정적인 교리가 아니라 실제 우리들의 매일 매일의 삶속에서 겪고 있는 상활들을 향해 적절한 답변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내용들입니다. 한쪽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신자가 되고 또 다른 한 쪽이 불신자이었을 때, 어떻게 이러한 결혼의 상태가 개인적인 믿음의 생활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느냐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II. 결혼의 원리
이 문제에 접근하기 전에 결혼의 원리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성경으로 볼 때, 결혼이라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한 사람이 똑같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또 다른 사람과 남자와 여자로서 결합함으로 부부가 됩니다. 그러므로 한편이 불신인 상태의 부부관계에 대해서 성경이 설명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결코 불신결혼을 허락하거나 격려하기 위한 내용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주위에는 불신자와 만나서 결혼을 했지만 비교적 행복한 상태로 들어가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교회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결합에 실패한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를 떠났고 혹은 신앙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비교적 성공적인 케이스만 눈에 띄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불신자와의 결혼도 상당히 매력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 가정에서 어려서부터 결혼의 원리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믿는 자끼리 결혼하는 것이라는 결혼하는 것이라는 성경의 사상들을 확고히 가르쳐주고 젊은 시절에 확실하게 회심해서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찾아 짝을 찾게 하는 것이 좋은 교육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뜻밖에도 불신자와 깊은 사랑에 빠져서 도저히 이 사람과는 결혼을 안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기다려야합니다. 그가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 될 때까지 기다려주라는 것입니다. 그 남자를 사랑하거나 그 여자를 사랑하면 기다릴 수 있을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이 신자가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결혼에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입니다.
III. 불신자와의 결혼생활
오늘 성경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그런 내용이 아니라 두 사람이 모두 불신상태의 부부로 있다가 그 중의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실하게 회개하여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의 가르침은 여자인 그 아내도, 남자인 그 남편도 신앙을 안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배우자를 버리지 말라는 것이 오늘의 가르침입니다. 물론 한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영적인 자녀가 되었고 한 사람은 불신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불완전한 결합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신앙이 서로 다르게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서로를 버리는 것은 성경이 지정하고 있는 혼인의 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어떤 가르침을 상세하게 줄 때에는 이미 그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거나 벌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그 가르침이 나온 것입니다. 이 편지를 사도가 고린도교회에 주었을 때에 고린도교회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크게 세 가지의 세속주의의 물결이 고린도교회에 심각하게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고린도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분파주의적인 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람들이 갈리고 나뉘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에서는 그 도시가 항구도시로서 엄청나게 많은 무역이 이루어지는 곳이었고 재화가 유통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사랑의 정신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문란한 성문제였습니다. 히랍어에서 ‘고린디아조마이’라는 단어가 성적인 탐닉을 뜻합니다. 이렇게 고린도의 타락한 양상들이 교회에 스며들어오게 되었고 실제로 교회 안에는 두 사람이 불신자로 있다가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신자가 되었는데 과연 이런 상황에서 불신자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신앙적으로 옳은 것인가, 또 성경에는 믿지 않는 자와는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비추어 이 혼인 생활을 지속해야하는지의 문제가 대두되었고, 또 실제적으로 같이 불신자일 때도 별로 살기 싫었는데 자기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제는 신앙과 불신앙이 부딪히면서 부부관계가 더 어려워졌을 때, 이미 신앙을 가진 한쪽의 사람이 슬그머니 그 혼인의 관계를 종료시켜 버리고자 하는 유혹을 느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바울이 명확한 성경의 가르침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면 불신자와의 결혼생활에 대해서 오늘 성경본문이 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A. 갈라서지 않음
세 가지인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갈라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신자로서 불신자와 결혼을 한 경우이거나 혹은 둘 모두 불신 상태였는데 내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서로 신앙과 불신앙의 상태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떤 경우이든 간에 그 신앙의 있고 없음의 이유 때문에 결혼을 해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서로 다른 영적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고 당연히 서로 다른 가치관과 많은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이 불신자로서 살아갈 때에도 성격이 안 맞고 가치관이 달라서 갈등을 하는데 그중에 한 남편, 한 아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이런 갈등은 더 깊어지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랑의 대상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전에는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이, 혹은 자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의 가치관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예전에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던 사람들이 이제는 신령하고 거룩한 아름다움에 눈 뜬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때에 당연히 그런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과의 정신적인 결합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고 공감하는 부분들이 더 줄어들고, 그래서 원래 있던 갈등들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아내들이, 혹은 남편들이 그 처음 회심의 시기에 남편과 아내에게 너무 못할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지와 영적인 미숙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교회에서 보면 아내가 예수를 먼저 믿고 남편이 불신상태에 여전히 있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고 경우에 따라서는 남편이 예수를 믿고 거듭났는데 아내가 불신상태에 있어서 남편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저렇게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고 전도하는데도 안 믿는 것을 보니 저 남편이나 아내가 심히 강퍅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들과 만나고 그들의 삶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어 보면 그 사람들이 특별히 강퍅해서라기보다는 먼저 믿은 아내와 남편이 잘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런 것입니다. 아내가 먼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고 이 추하고 더러운 세상과 아름답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조가 생기는 것입니다. 당연히 영적인 선과 악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적인 피조물이라서 자기를 말로만 좋아하고 입술로 사랑하는지 아니면 진심으로 사랑하는지를 말로 안 해도 사람은 사람에게서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태 같이 살던 아내가 예수를 믿고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랑을 바치면서 살 때 남편이 소외감을 느끼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남자라면 질투라도 할 텐데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아내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남편이 어느 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회심을 해서 그분께 깊이 빠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 허무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상하게 자기가 그 세상 속에 들어가는 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더니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관심사가 아니고 온 관심사가 교회가 되어버립니다. 월요일은 원래 교회가고, 화요일은 화나서 가고, 수요일은 수수하게 가고, 목요일은 영적으로 목마르다고 가고, 금요일은 금새 갔다 온다고 가고, 토요일은 어쨌든 또 갑니다. 이러면서 일주일 내내 교회에 가서 삽니다. 그러면 남편입장에서는 당연히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왜 교회를 가냐고 말은 안하지만 왜 이런 것은 안 해주고 이런 것은 잘 못하느냐고 이야기하면 아내는 예수를 믿는데 남편이 시비를 걸면서 어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때 선과 악의 구도, 영적 전쟁의 구도, 마귀와 하나님과의 구도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모두 자기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생기는 핍박과 시련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것을 인내하면서 싸워 극복해야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자기는 상상치 못하는 방법으로 배우자에게 인격적인 상처를 주는데 그 상처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심각한 상처를 남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말씀을 깊이 배우고 성경을 이해하고 나면 자신의 그런 잘못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데 죽을 때까지 그 눈을 못 뜨고 죽는 사람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철이 든 다음에 이런 것이 아니었구나하고 그 관계를 새롭게 고쳐보려고 할 때는 이미 너무 많은 갈등의 골이 깊어진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남편이나 아내의 마음에 방어기제가 되어서 그런 하나님이라면 나는 믿고 싶지 않다는 확고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잘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갈라서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이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부부로서의 정신적인 결합들을 신자와 불신자이기 때문에 넘어설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부부로서 할 수 있는 한 사랑하며 화합하며 살아가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B. 다시 화합함
두 번째는 다시 합치라는 것입니다. “만일 갈라졌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보면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고 주시라”, 그리고 뒤에도 나오는 둥근 괄호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석에도 잘 안 나오지만 설명을 드리자면, 이 부분은 희랍어 성경에는 어떤 부호도 나오지 않고 사도바울이 그냥 쭉 썼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이것을 후에 번역을 하고 다시 편집하다가, 10절에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고 주시라”는 구절이 삽입구이니까 이것을 문맥을 끊지 않도록 괄호에 넣은 경우입니다. 11절의 경우는, 희랍어 성경 네슬알란트 28판에 보면 여기에 나오는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는 부분이 하이픈(-)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사도바울이 썼다기보다 그 후의 사람들이 사도바울이 쓴 내용들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위해서 보충 설명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계속 사본 속에 들어가서 마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유대인의 대표적인 기도의 구절이 주기도문 뒤에 삽입되었듯이 이 부분도 이렇게 괄호 속에 넣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괄호 속의 내용이 사도바울이 후대의 사람들이 첨가해서 넣었다면 영감 된 말씀이냐 아니냐는 논쟁이 나올 수 있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내용이 앞에 나온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보충하고 설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글자보다는 내용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도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혼을 했을 때, 두 가지 선택지가 있는데 하나는 독신으로 그냥 살든지 아니면 본래의 남편으로 돌아가든지 입니다. 둘이 모두 불신자였다가 한쪽이 신앙을 가진 상태에서 헤어졌다면 다시 여전히 불신자로 남아있는 상태에서 합칠 수도 있을 것이고 더 이상적인 것은 신앙 때문에 갈등을 일으켜 서로 헤어졌는데 불신상태였던 그 사람이 그사이에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 형제, 자매가 되어 다시 만난다면 가장 이사적인 결합이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원래의 부부관계로 돌아간다는 것은 본래의 남편과 아내로서 가지고 있던 의무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이루어졌을 때, 그 속에서 부부관계의 의무를 다하여야 하는 것은 물론 입니다.
우리교회에서도 종종 남편과 아내가 헤어졌다가 그 후에 남편과 아내가 예수를 믿고 변화되어서 다시 헤어진 남편이나 아내를 찾아가서 화합하여 한 가정을 이루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아주 권장할 만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런 경우에도 할 수 있으면 그냥 합치기보다는 아까 말씀드린 혼인의 절차에 따라서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돕고 기다린 후에 결혼을 하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예전에 부부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본성적인 단점과 결함들이 어떤 부분들은 아직 고쳐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다시 재결합을 할 때에는 자신이 그 사람과 부부관계 속에 들어가서 그 모든 것들을 사랑으로 감당하고 온전한 부부관계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선행되어서 경솔한 재결합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어쨌든 사도는 그렇게 이혼을 한 때에 독신으로 있든지, 다시 그와 화합하여 가정을 이루도록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C. 거룩하게 함
여기서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구절은 14절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불신자와의 결혼 생활은 불신자를 거룩하게 성격이 있다는 것을 오늘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거룩하게 한다”는 말씀은 좁은 의미에서 보자면 그 사람이 거듭나고 중생하고 구원을 받고 성화되어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겠지만 여기서는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의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남편이나 아내가 예수를 진실하게 믿고 배우자가 불신상태에서도 함께 살게 되면 남편이나 아내의 신앙 때문에 저절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결혼의 결합이 불완전하긴 하지만 그렇게 믿는 아내와 남편과 함께 살면 상대방이 불신자 임에도 불구하고 무한정으로 이교적인 환경과 노골적인 무신론으로부터는 차단되고 어느 정도 보호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아는 한 사람은 공무원으로 불신자였습니다.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지만 예전에 보면 관공서를 건축할 때도 고사를 지냈습니다. 지하를 파고 관서장이 판공비에서 돈을 대고 사람들이 와서 절을 하면서 돼지 머리에 만 원짜리를 꽂아줍니다. 그 사람들이 그걸 안 할 이유가 없습니다. 터줏대감한테 고사를 지낸다고 하는데 터줏대감이 복을 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심술이나 부려서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과 미신적인 습성들이 결합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불신자이지만 아내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우상에게 절하고 미신을 섬기는 것을 아내가 매우 더럽게 여기는 것을 알기에 거기에 참여하길 원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거룩하게 하나니”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구원을 실제로 받게 만드는 효과가 불신자 남편에게는 신자인 아내와 살면서, 불신자 아내는 신자인 남편과 함께 살면서 그런 기회를 제공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도 있었던 일입니다. 남편은 불신자인데 아내가 주일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열심히 교회를 가는데 대중교통을 두 번씩 갈아타면서 가니까 안쓰러워서 차로 태워다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를 가고 나니까 데려다주고 오기가 너무 멀어서 차에서 기다렸다는 겁니다. 제 설교가 길어지면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짧으면 일찍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교회의 안내 위원에게 들켰습니다. 안내위원이 차에 계시지 말고 로비에 앉아 계시라고 해서 로비에 들어오고, 거기 있을 바에야 예배당 안에 들어가서 계시라고 해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이게 바로 거룩함의 효과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남편을, 혹은 불신상태에 있는 아내를 진실하게 사랑해서 그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그의 사명입니다. 114에 전화를 하면 “사랑합니다, 고객님”하는데 저는 너무 싫습니다. 길에도 보면 여기저기 “사랑합니다”라는 말들이 써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렇게 떠벌이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도대체 거기서 이야기하는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저는 그리스도인들도 사랑을 너무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여러분 같은 경우, 결혼과 함께 이루어지는 사랑은 뭘까 하고 생각을 할 텐데, 기독교인 중에 아주 많은 사람은 이 사랑이 아주 끈끈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녀가 사랑할 때 피가 빨리 돌고, 상대방을 만나서 보고 싶고 헤어져도 그리운, 그렇게 그 사람이 자신의 의식과 마음을 꽉 채웁니다. 그렇게 사랑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 적절하게 정욕적인 사랑도 동반됩니다. 그렇게 사랑을 하고 받으면 기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 이런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인류적으로 확대되는 게 많은 그리스도인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정말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그 사랑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아가페테’, “너희는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을 때의 그 사랑은 어떤 한 사람에게 집착하고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있는 사랑이 전 인류적으로 확장된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쳐도 남녀와의 관계에서 뜨겁게 사랑할 때 오가던 그 독특한 정동의 끈적끈적한 사랑을 온 인류에게 확장해서 사랑을 느껴본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도 그런 종류의 사랑은 안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끈적끈적하게 누군가에게 달라붙는, 그리고 그와의 아주 집착하는 사랑 때문에 또 다른 사랑의 질서들을 파괴하는 종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젊은이들이, 이미 시집가고 장가간 성인들이 여전히 그런 종류의 사랑의 극단적인 사랑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진짜 이상적인 사람은 TV에만 나오고 집에 와서 보면 이 남편, 아내는 전혀 그 이상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격차만큼 이 사람에게는 나를 향한 사랑이 없다고 느껴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 중에서 기독교만큼, 기독교의 가르침을 주신 원천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다르게 사랑을 이해하는 종교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에 대해서 엄청나게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의 시선을 보내면서 고린도전서 13장 같은 것을 다시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부부 사이의 성에 대해서 상당히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휴머니스트들이었다는 것을 설교시간에 두 번 정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아주 엄격하게 성경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인데도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 같은 경우, 아내나 남편이 성적인 불구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교회에 호소하면 교회에서 적절하게 심사를 하여 이혼을 허락했습니다. 이것은 긍정적으로 볼 수 도 있습니다. 적극적인 해석으로는 부부가 되었으면 성에 대한 즐거움을 누릴 권리가 부부모두에게 있다는 것이고, 소극적으로 보자면 사람은 모두 정욕에 흔들릴 수 있는 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한쪽이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으므로 아예 이혼을 허락하여 교회에 악이 번성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혼인을 그렇게 거룩하게 이야기하면서도 정욕이 불같이 탄다면 결혼을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가장 세속적인 일의 대표적인 인간의 일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보면 인류에 있어서 가장 심오하고 아름다운 결합이며 신비한 일인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결혼이라는 제도가 어떤 사람이 어떤 목적을 지향하고 어떤 종류의 사랑을 하느냐에 의해서 이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청교도들이 부부 중 한 쪽이 성적불능의 상태가 되었을 때 이혼을 허락했다는 것을 마냥 좋게만 해석할 수 있느냐하면 저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결혼을 하기 전에는 젊고 육적인 정동에 예민합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너와 나를 분간할 수없이 일체의 관계의 들어가기 원하고 사랑도 전적으로 배타적이어서 함께 교제할 때는 다른 사람에게 곁눈질도 못할 정도로 독점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한 인간성을 완성해 가는 발전의 과정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는 어린 아이가 엄마를 독차지 하려고하고, 엄마가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만 해도 심통을 부리는 것처럼 그럴 수 있습니다.그런데 그것을 결혼하고 나이가 들어서 늙어가면서도 똑같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랑의 충만이 아니라 전적인 인간성의 결함입니다. 결혼해서 부부가 서로 정욕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도록 남편의 몸은 아내가, 아내의 몸은 남편이 주장하면서 서로의 영적인 요구를 채워주라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사랑은 한쪽이 성적인 불구의 상태가 되었을 때 그런 것을 초월하고 넘어설 수 있는 사랑이 진정으로 성숙한 사랑인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어쩔 수 없는 육욕에 들떴다고 할지라도 결혼을 하고 부부가 한 인간으로 완성되어 가면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일 하나밖에 없고, 그것이 너무 결정적인 나머지 그것이 없을 때는 부부관계를 계속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인가 말입니다.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자기와는 다른 여자, 다른 남자를 만나서 한 부부가 되어서 가정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늘 말씀드리지만 둘이 끈끈이같이 달라붙어서 그 빨판에서 뜨거운 사랑을 빨아먹고 평생을 사는 망각적인 사랑의 몰입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서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해가는 그 완성의 아름다운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자기 같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너무 무거운 의무를 동반하는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결혼만 만하면 동화 속에 나오고 TV에 나오는 것처럼, 재벌의 아들이 백화점 점원이나 평사원, 심지어 알바를 따라다니고 사랑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현실에는 그런 일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말도 안 되고 현대인의 심리의 약점만 노리고 꼬치에 꿰어 던지니까 사람들이 그런 드라마에 미치듯이 빠지는 것입니다. 있지도 않은 일들이고,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런 드라마를 보고 감동받는 사람은 알바나, 평사원, 비정규직도 들어가기도 힘든 자매들이지, 진짜 재벌집의 아들들은 그 드라마를 보면서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런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한 인간의 완성은 마치 『데미안』에서 알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나오듯이, 물론 거기서는 알을 까고 아프락사스로 들어가는 게 나오는데 아프락사스는 선과 악의 융합인데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아집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자기중심적이 세계관을 깨뜨리는 것이 사상적인 회심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넓고 우주적이고 충만한 하나님의 질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게 회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런 세계와 질서가 있다는 것은 모르고 달걀껍질 속을 생각했던 사랑과 그걸 깨고 바깥으로 나갔을 때 펼쳐진 이 우주적인 질서 속에서의 사랑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어리석은 그리스도인들은 깨고 바깥으로 나왔으면서도 이걸 제대로 못 보니까 자기가 알 속에서 사랑하던 이기적이고 육욕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적이고 끈끈이처럼 달라붙는, 그래서 사랑을 하면 할수록 누군가를 구속시키고 인간의 자유를 끊임없이 짓밟는, 이런 사랑을 우주 속에 투영시키고 확장시키면서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얘기하는데, 이런 사랑의 특징은 절대로 확장이 안 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을 생각하고 부부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런 환상을 가지고 받아들인다면 착각을 하거나 오만해지거나 아주 낙심하게 됩니다. 일평생을 지내도 나에게 그런 사랑에 빠져서 다가와 그렇게 생명을 버리겠다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 모든 사랑에서 탈락되고 소외된 사람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 시집가고 장가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의 사랑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진정한 부부는 처음 시작은 끈끈이 같은 사랑으로 시작하지만 눈을 뜨고 지식의 세계에 대해서 우주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십자가에 나타난 아가페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면서 그 사랑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어가는 가운데, 마침내 부부가 함께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친구처럼 동지처럼 교제가 즐거워서, 육욕적인 요구가 죄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하지 말아야지만 거룩한 부부가 된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라, 그런 것을 뛰어넘어서도 서로의 존재 때문에 기뻐하고 사랑하는 관계가 될 때, 그게 진정으로 성경이 그리고 있는 사랑의 완성이고 인간성의 완성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예수를 믿고 열렬히 주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자기와는 전혀 가치관이 다르고 영적인 세계가 전혀 다른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아내를 진심으로 그 눈높이로 낮아지면서 그가 고민하고 있는 바를 이해하고 소통하면서 그를 사랑하고 그가 자신의 헌신과 사랑에 의해서 주님의 은혜로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그 안에서 자기완성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사람들이 너무 찢어지고 갈라져서 소외감을 느끼니까, 사랑에 대한 강한 욕구는 쏟아져 나오지만 성경에서 그려내고 있는 모든 인류를 행복하게 하는 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맑지 않은 사랑들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면서 마치 하나님의 사랑인 것처럼 둔갑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그릇되고 허황된 개념들을 만들어내니까 사람들이 같은 사랑의 샘에서 맑음과 흐릿함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돈을 느끼면서 자신들의 도덕생활에도 오류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불신자인 남편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은 것, 내가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데도 내 아내가 나를 버리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의 신앙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은 우리가 신앙 없을 때도 우리를 이해해주셨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야 합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영혼으로 깊이 사랑하고 내가 발견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그가 발견한다면 나와 같이 육욕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맑은 사랑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면서 자기를 기꺼이 포기할 때, 그때 그 사람의 마음속에 어떻게 육욕적인 사랑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려고 했던 맑고 우주적인 사랑이 다른지를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아까 말씀드린 그런 종류의 육욕적이고 끈끈한 사랑으로 어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펼쳐서 온 인류를 향하여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못하는 것은 자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입니다. 누가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확장시켜서 해주려고 시도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사양한다고 해야 합니다. 가능하지도 않지만 백번 양보해서 가능하다고 한들 그 사랑이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한 여성이 시골에서 자라서 미국의 아이비리그를 나오고 석사까지 마쳐서 잠시 한국에 와서 영어 강사로 자리를 잡았는데 연봉이 억대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참하게 살해된 시신으로 발견된 것입니다. 학원에서 만난 어떤 수강생이 열렬히 좋아했는데 집착증세가 있는 남자였고, 너무 힘들게 해서 헤어지자고 했더니 살해된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사랑을 받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 사랑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사랑은 안 받는 사람에게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그리고 있는 결혼생활에서의 사랑, 그게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게 정말 성경에서 정말 주님이 “너희가 아내로서 남편을, 남편으로서 아내를, 신자로서 이 세상을 사랑하라”고 하신 그런 종류의 사랑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불행은 사랑이 부족해서 생겨난다기보다는 끊임없이 사랑을 오해하고, 옳지 않은 사랑을 마음속에 그려내고 상실감에 빠지는 여러분의 사고방식이 계속 여러분 자신을 괴롭히고 상실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복음의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사랑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IV. 적용과 결론
40대가 되어도 결혼하지 못한 형제들이 축 쳐져서 다니는 모습을 보면 저는 너무 싫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에 있어서 패배하거나 누구에게 진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결혼하지 못한 것이 엄청난 자기 결함이라도 있는 것처럼 자신에 대해서 움츠러들어서 사는 것은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정말 뭐가 모자랐기 때문에 선택이 안됐다고 생각하는 것도 바보스런 생각입니다. 그럼 선택된 사람들은 모두 넘치는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버림을 받습니까?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로, 써보니까 아니어서 끊임없이 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결혼을 했어도 당당하게, 안 했어도 당당하게, 그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양식이 인간 존재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안 사람으로서, “괜찮아. 살만해. 혼자 사는데 충분해. 기회가 오면 생각해보고.” 하면서 그렇게 누군가와 만나서 완성될 사랑을 이미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남편이 불신자일 때, 아내가 불신자일 때, 남편이나 아내가 이해의 부족으로 그가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기가 소외된다고 잠시 느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그런 모든 결핍들을 채워줄 수 있습니다. 불신자인데도 신앙의 모습을 깊이 보고 있으면 예수님과 자신은 라이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 아내가 예수님도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는데, 이 둘 사이는 갈등하고 대치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내 아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나를 사랑하고, 내 아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나와 연합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불신 남편과 아내 앞에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삶입니다.
가족과 잘 사는 것 13 (2015.6.28 주일오전설교)
때로는 우리도 완전히 아름다운 사랑의 사람으로 완성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종종 우리의 마음속에 갈등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은혜가 있을 때에는 불신 남편을 위해서 아내로서 헌신하고 잘 섬겨서 이 사람을 예수 믿게 해야겠다는 마음도 있고, 아내가 불신자일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그런가하면 또 한편에서는 세속적인 견해를 가지고 한 사람에게 집착해서 빨판을 대고 빠는 끈적끈적한 사랑에서 만족을 느끼고 싶은 구도도 가지고 있어서 생각 속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자기 분열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남편에게 잘해주다가 어느 한 순간에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그리고 몇 달 있다가 회개하고 돌이켜보려고 하지만 자기 마음처럼 남편은 쉽게 돌이켜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다시 부부로서 결속을 다지기 어려울 정도로 갈등을 만들어내는 것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알고 난 후에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이 그분께로부터 공급된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은혜를 구하면 육욕적이고 집착적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사랑이 물러나고 맑고 깨끗한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사랑함으로, 사랑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만큼의 신앙을 가지고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기까지 이제껏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 사랑을 안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그렇게 끈적끈적한 사랑을 받지 않았어도 어떻게 아름다운 희생으로 여러분을 섬기며 여기까지 헌신해왔는지를 생각하면 불신남편과 아내 앞에서 여러분이 어떤 사랑의 삶을 살아야하는지 명료해지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불신 남편과 아내가 여러분과 꼭 같은 아름다운 신앙의 동지가 되어서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독신과 결혼의 유익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 세상의 모든 제도가 사람이 살다가 보니까 만든 것이지만 혼인 제도는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입니다. 이 혼인은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들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고, 또 혼인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도 깃들여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혼인에서 경험하는 모든 불만족과 고통은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생겨난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이지 제도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결혼은 이처럼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경륜과 주관적으로는 혼인한 자들이 그 안에서 행복을 얻는 것인데 오늘날 현대인들은 혼인에 대한 제도를 심각하게 왜곡하여 해석하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편의주의에 의해서 왜곡하고 심지어 결혼 그 자체가 인생의 매우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처럼 여겨져서 아직까지도 결혼하지 못한 사람들은 무엇이 스스로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사람들은 혹시 결혼하지 않은 저 사람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결함이 있냐고 까지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독신과 모두 결혼에 있어서 한 방식일 뿐이고 신약에서 하나님의 나라 사상이 들어온 이후로는 더더욱 이 독신과 결혼에 대해서 삶의 한 방식이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한 중요한 인생의 과정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두 번째 읽은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도는 이렇게 오히려 독신에 대한 강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비록 이것이 결혼제도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천국을 바라보며 종말론적인 삶을 살기에 독신 생활이 적합하다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이런 생활을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II. 독신의 유익
A. 사람에 얽매이지 않음
그러면 어떤 점에서 사도는 독신의 유익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제일 먼저 독신의 삶은 주님을 섬기에 있어서 사람에게 얽매이지 않는다고 32절과 34절에서 말합니다. 장가가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할까 생각하지만 장가간 후에는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염려하고 마음이 갈라지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결혼은 나쁜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얽매임이 된다는 사실을 사도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이 갈라진다는 말은 관심사가 나뉜다는 뜻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오롯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앙망하고 그 분을 섬기기 위해 마음이 고정되었지만 결혼을 함으로써 아내는 남편 때문에, 남편은 아내 때문에 마음이 갈라지고 그 틈 사이로 세상의 근심과 염려들이 들어오게 되는데 이것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며 살아가는데 있어서 적잖은 얽매임이 된다는 것입니다. 독신은 이 모든 것들에 얽매임이 없이 자유롭게 주님을 섬길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사도는 이 독신 생활의 유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B. 흐트러짐 없이 섬김
또 한 가지 본문에서 말하는 독신의 유익은 흐트러짐이 없는 섬김입니다. 35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흐트러짐이라고 하는 것은 분산을 의미하는 것이고, 흐트러짐이 없다고 하는 것은 고도의 집중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렁 설렁 주님을 섬긴 사람들은 결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지만 마음을 모두 쏟아 부어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이 섬김이 얼마나 우리에게 진실한 사랑을 요구하며 고도의 집중된 헌신을 요청하는지를 압니다.
결혼을 해서 남편이 생기고 아내가 생기면 맞지 않는 성격을 조정해 가며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많은 육적인 자원과 영적인 자원들을 사용하게 됩니다. 자칫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섬겨야 할 그 마음이 흐트러져서 그래서 결국은 남편과 아내가 너무 뜨겁게 사랑하면 그 사랑의 욕심 때문에 주님보다 배우자를 섬기게 되고 갈등을 일으키게 되면 그 갈등 때문에 많은 자원들을 낭비하느라고 주님을 섬길 여유가 없게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독신의 유익이 흐트러짐이 없이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의 본질로 들어가 보면 섬김의 현실은 자신의 일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철저한 헌신을 요구하고 그것을 통해서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50%나 60%의 헌신이 아니라 자기를 다 드린 헌신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향한 당신의 뜻들을 이루어 가는 것을 봅니다. 독신은 사람에 의해서 흐트러지지 않고 자신을 모두 모아서 주님을 위해 살 수 있게 하는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C. 독신의 비용을 생각함
이런 분명한 유익이 있지만 그러나 독신의 삶을 사는데 있어서는 결혼한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만 집중하고 사람에게 얽매이지 않고 흐트러짐 없이 섬기는 유익도 있지만 많은 희생과 수고가 뒤따르게 됩니다. 가장 큰 것이 젊은 육체의 정욕입니다. 어떤 사람은 소위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리비도’ 이런 욕망이 매우 낮아서 별로 문제가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높아서 끊임없이 성적인 욕망이 생겨나는 사람일 경우에는 독신으로 사는 일은 보통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더욱이 홀로 있는 시간을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독신은 정말 어려운 십자가일 것입니다. 더욱이 경제적인 난관이나 건강의 위기가 올 때에 누구도 자신을 돌보아주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홀로 그것을 감당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숙제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독신을 강요하지 않고 24절에 각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으니 그 부르심을 따라서 살라고 권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독신이나 결혼이나 모두 삶의 한 양상일 뿐이지 그 자체가 인생의 본질은 아닙니다.
결혼하지 않은 형제자매들의 경우에 30넘으면서부터 주위에서 끊임없이 너 결혼 안하니 하는 소리를 계속 들으면서 그러면서 자신이 결혼하지 못한 것이 사회자에서 무엇인가 패배자가 된 것 같은 상실감을 느끼기도 하고 그래서 더더욱 결혼 자체가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숙제인 것처럼 고민을 하는데 그 고민의 1/3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쏟아도 놀라운 행복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제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별로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너 결혼 안하니? 어떻게? 아이고 큰일 났네.’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그것보다 큰일 날 일은 훨씬 더 많습니다. 그게 무슨 그 사람이 결혼을 못한 것이 매일매일 기도 제목이 되고 눈물이 흐르는 것도 아니면서 지나가는 말로 ‘아직도 결혼 안했어? 어떻게 하려고?’ 자기 친엄마 아빠가 이야기를 해도 아이들이 지겨워합니다.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오히려 본인이 ‘집사님 나 어떻게 해? 시집도 못가고.’ ‘권사님 나 어떻게 해요. 40이 넘었는데 아직 장가를 못 갔어요..’ 그러면 점잖게 ‘얘들아, 그것은 삶의 한 양식이란다. 네가 정말 누구를 향해 무엇을 위하여 어떤 의미를 찾으면서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니?’ 그게 위로지 그렇다고 자기 아들 줄 것도 아니면서 문제는 뭐냐 하면 독신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그 독신을 하나님을 위해 그 독신이 주는 놀라운 유익, 얽매이지 않고 흐트러짐이 없이 살 수 있는 그 유익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을 안 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결혼을 했던 독신으로 살던 어차피 주님을 위해 살 것이 아니면 시집 장가가는 것도 세속적이고 독신으로 사는 것도 세상일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시집갈 사람, 장가갈 사람으로서의 고민보다도 앞서야 할 것이 사람으로서의 고민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내가 믿음으로 인정하는 우리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나의 인생을 사람답게 살아서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과 가치를 구현할 것인가 하는 것이 숙제가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한 인간으로 어떻게 잘 살 것인가 하는 이 고민이 결혼보다는 훨씬 크게 느껴져야 된다는 것이 그것이 신앙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가슴을 후려치는 것입니다. 시집 장가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묻는 것입니다. ‘얘야, 네가 정말 시집가기 원하냐? 네가 정말 장가가기를 원하냐? 그 일이 이루어진다면 네 인생에 뭐가 달라지는데’라고 묻는 것입니다. 어차피 삶의 방향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자기가 독신으로 살면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둘이 살면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오히려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은 독신이든 혼인이든 이것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인생을 살 것이며 그리고 어떤 의미를 구현하면서 내 일생을 살아서 주님이 나를 창조하고 구원하고 독신으로 살게 하신 혹은 혼인하게 하신 그 목적을 이루어드릴 수 있을까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결혼의 유익을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성경은 오늘 말합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셨습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이 혼인의 제도를 기뻐하셨다는 것이고,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의미 있는 독신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위해 홀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이 독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특별히 살아야 할 소명을 느낄 때에 그때 그 독신은 아주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독신으로 살려면 성령 충만해야 하고 결혼해서 살려면 대충해도 되는구나.’ 그럴까요? 자, 그런 충만한 은혜가 없이 대충 사는 사람들이 둘이 만나서 혼인을 하고 남편과 아내로 살 때에 얼마나 힘든지를 여러분은 매일매일 체험합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구별되고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리며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은 이것은 독신으로 살든 결혼하든 이것은 우리 모두가 신앙 안에서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III. 결혼의 유익
A. 자손을 얻음
성경은 결혼의 유익을 크게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는 자손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자기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지으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결혼의 유익은 바로 이렇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방법인데 결혼을 통해서 후손을 얻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아름답고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모든 아름다움과 선한 것을 다 드러내신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현실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셨고 가능하게끔 그 안에 담아두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그것들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노동을 통해서 봉사를 하면 그 속에 감추어져 있던 선한 것들이 발견이 되고 아름다운 것들이 찾아내게 되어서 이 세상이 더 아름답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류를 지으신 뜻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선한 세상에 인간의 타락으로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거기서부터는 인간을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면 절대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창조하셨던 목적을 따라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자손을 얻는다고 하는 이 의미는 자연적으로 생식을 통해 후손을 얻는다는 의미도 되지만 영적인 의미로는 그 자식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에서 이 자손을 얻는다는 말이 영적인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니 곧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중생과 회심을 뜻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자연적인 생육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생육은 더욱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정말 생육에 헌신해서 한 12명쯤의 아이를 낳았다고 칩시다. 첫째는 불량배, 둘째는 조직폭력, 셋째는 강도범, 넷째는 군인 가서 탈영한 사람, 다섯째는 간첩 등등으로 이어졌다고 칩시다. 차라리 그 아이들을 안 태어나게 하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그 아이들이 기왕에 예수 믿는 가정에서 여러분의 슬하에서 태어났으니까 그 아이들이 좋은 신앙을 갖도록 참된 회심에 이르도록 돕고 그래서 부모인 여러분의 지도 없이도 우리 주님을 꼭 붙들고 사는 신앙의 사람으로 길러내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의 결혼의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15살 때에 주일날 교회 가던 길에 논둑에 통곡한 이야기를 한 두어 번 했더니 어느 교인이 그럽니다. “목사님은 똑똑하고 조숙했으니까 15살 때 그런 생각을 하면 논둑에서 울었지 우리 애들은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틀렸다는 것입니다. 자기 뱃속으로 낳은 새끼인데도 정말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걔네들이 컴퓨터 게임이나 하고 핸드폰이나 붙들고 아무 생각 없는 것 같이 보일 것입니다. 얘기해 보셨습니까? 진짜 생각이 없는 애라는 것을 한번 대화를 통해서 확인을 해보셨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한 인간의 실존으로서의 고민은 어려서부터 시작되지만 그 처음 시작 때서부터 아주 송곳처럼 또렷한 질문으로 떠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제 그야말로 진짜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안개처럼 떠오릅니다. 그래서 형체도 모르겠고 뭔가 안개가 가득 쌓여서 떠오릅니다. 이것 때문에 힘들고 괴롭고 다른 많은 인생의 문제들이 꼬이는데 이 구름처럼 떠올라 자기 마음을 에워싸고 있는 이것의 정체를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엄마의 사명은, 아빠의 사명은 그런 아이들과 대화를 하면서 자신도 안개처럼 느껴지는 그 질문이 무슨 질문이기에 그렇게 자신의 마음에 그늘을 던지는지를 이끌어내어 주는 것이 그게 부모가 가진 신앙적인 사명입니다. 그리고 대화를 해보면 이제 형체를 갖추게 되고 명료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들이 어려도 독서를 하고 생각을 자주하는 아이들은 지적인 성숙도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아이들을 책을 읽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엄마 아빠가 늘 책을 손에 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읽어라, 읽어라 그러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게임하는 애 옆에서 조용히 톨스토이의 인생론을 읽습니다. 성경을 읽고. 그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나는 피를 철철 흘려야 겨우 깨닫는 것을 걔네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엄마 아빠의 무릎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15살 때 논둑에 엎드려서 펑펑 울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일어나면서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그런 치열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게 얼마나 큰 복입니까? 그 복을 여러분이 누리게 해야지만 진짜 혼인한 사람입니다.
제가 여러 권의 책을 썼지만 여러해 전에 ‘아이야 엄마가 널 위해 기도해 줄께’ 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로서 이런 이야기 뭐 하지만 괜찮게 썼습니다. 표지도 아주 아동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안 팔립니다. 안삽니다. 왜 그게 안 팔리는지 사실 인식했을 때 무서웠습니다. 책이 재미가 없어서 안사는 것이 아니라 그 제목을 확인하는 순간 엄마는 그 책을 열어보기가 싫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양심이 이미 그 새끼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엄마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책을 읽는 것은 결국은 자신의 영적인 문제에 수술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게 싫은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생각합니다. 회심하지 못한 혹은 회심했더라도 자식을 둔 엄마가, 아빠도 마찬가지로 그 책을 읽으면 다 읽기 전에 회개하며 울든지 다 읽기 전에 벽에다가 집어던지든지 둘 중의 하나일 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의 정말 하나님 앞에 저를 포함해서 누구도 예외 없이 정말 간사하고 비겁하고 야비한 것은 뭐냐 하면 진리를 향해서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진리를 향해 달려가서 진리 없이 사느니 진리와 함께 죽겠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자기 입맛에 맞는 진리만을 골라서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칭찬하고 자기 입맛에 맞을 때에는 할딱거리고 진리를 좋아하지만 그 진리가 자기를 꾸짖고 책망해서 올바른 길로 인도할 때에는 아주 싸늘하게 진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믿는 것에 대해서 행복도 이야기하고 성공도 이야기하고 번영도 이야기하고 축복도 이야기 하지만 사실 신앙의 가치는 그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가치는 진리의 빛을 발견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는 복 덩어리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특히 그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에게 진리는 복 덩어리가 아닙니다. 진리를 몰랐을 때에는 무질서한 삶을 살던 사람이 그 진리를 발견함으로 말미암아 그 무질서한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가치를 뒤집으면서 중요한 것을 하찮게, 하찮은 것을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서 사랑의 질서를 심히 어지럽혀서 살아가는 인생 자체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끊임없이 저항하던 사람을 그 진리로 질서를 잡아주는 것이 이게 진리의 위대한 힘입니다. 내가 그 진리를 따라 잘 살 때에 그 진리는 나를 격려하고 위로하지만 내가 진리를 따라 올바르게 살지 못할 때에는 당연히 그 진리가 채찍을 들고 우리를 때리기도 하고 우리는 그 진리 앞에서 피를 흘리기도 하는 것인데 사실은 그 피는 어차피 쏟아야 할 욕망의 피입니다. 그게 진실한 구도자의 삶입니다.
1부 2부에서 안한 이야기인데 3부에만 내가 이야기하겠습니다. 목회자들은 가끔 저에게 20년 후에 한국 교회가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데 미리 살아보지 않았으니 정확한 예측은 불가능하겠지만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교회의 지도자로서 추측할 수 있습니다. 20년 후에는 기독교의 인구가 여러분이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교회도 상당수가 이제 이 세상의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사상들을 수용하게 될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이 오염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가 큰 건물이나 많은 교인들의 수, 그리고 열정적인 사역을 가지고 사람들의 매력을 끌 수 없는 시대가 올 것이다 지금도 이미 그런 시대가 왔습니다. 예전에는 교회가 굉장히 크면 사람들이 뭔가 좀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존중하거나 아니면 인정해주는 분위기였지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지금 자기 교회를 덩치를 키우기 위해서 애쓰고 그 다음에 말하자면 교회끼리 연합을 해 가지고 엄청난 세력을 부풀려서 그것을 정치 세력화하고 하는 이런 것들이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보기에는 하나도 눈여겨 볼만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면 그렇게 할수록 교회를 아주 같지 않게 보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그러면 뭔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가 어차피 세상 맘에 들려고 합니까? 그런데 상당 부분 성경도 그렇게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더 크게 많이 세력을 결집해서 엄청나게 이게 예루살렘의 가치관이 아니라 바벨론의 가치관입니다. 만약에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고등학교 세계사에 두 줄밖에 안 나오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지 말고 로마나 몽골 제국이나 대영제국이나 아니면 중국 진나라 같은 나라를 선택하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20년 후에도 교회는 줄어들겠지만 사람들은 교회의 필요성은 간절히 느끼게 될 것입니다. 어떤 교회이냐 하면 그렇게 15살 먹어서 논둑위에 엎드러져서 펑펑 울던 아이가 눈물을 씻고 일어나서 무신론자가 되지 않을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교회, 그런 교회에는 나는 사람이 수없이 몰려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게 제가 그냥 뻥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미국은 이미 요새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체의 섞임이 없이 고고하고 그 엄청난 기독교 사상을 설교하는데 사람이 구름떼처럼 모입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라든지, 존 바이블 이런 사람들이 목회하는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다 사상이 찢어지고 파편화된 시대에 ‘야 도덕이란 것은 없다.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은 없다. 야, 남자가 남자와 결혼해도 되고 여자가 여자와 결혼해도 되고 성생활 해도 되고 그 혼인제도 같은 것 아무 필요 없다.’ 맘대로 그렇게 사는데 사람이 행복하냐 하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1980년대에 미국 오렌지카운티에서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주 부유하고 조용한 동네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반상회를 하면서 제비를 뽑아서 아내와 남편을 서로 돌려가면서 사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제 그런 거는 놀라운 것도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조차도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스와핑 사이트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경찰이 끊임없이 솎아내도 이제는 거의 보편화 되다시피 되었습니다. 간통죄도 폐기되었습니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하십니까? 갈 때에 주민등록 등본을 떼어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부부관계에 있다는 것을 주최 측에 입증을 해야지만 억셉트를 해줍니다. 자,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기준이 사라졌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그런데 그 사람이 행복하냐는 것입니다. 안 행복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 타는 갈증을 자유다, 너희 맘대로 살아라, 뭐든지 좋다, 한없는 자유를 줘도 그 갈증은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교회에서 고고하게 울려 퍼지는 설교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그 속에서 이 뇌가 씻겨나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찬양)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나올 거라는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나는 20년 후의 한국 교회에 대해서 절대 비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그런 교회들이 매우 적을 것이기 때문에 그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가 신학생들에게, 후배 목사들에게 ‘20년 후에 깊은 사상을 가진 사람이 살아남는다. 두고 봐라. 그런 설교자가 되거라.’ 그런 사람들이 들으면 웃긴다고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이 말씀을 여러분은 그냥 조용히 듣지만 20년 후의 사람들은 헐떡거리면서 듣고 싶어 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제 죽은 다음에 확인해 보십시오. 한 사람이 그렇게 빛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가치입니까? 그러니까 결혼했으면 그 자식들을 그렇게 잘 길러야 된다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B. 정욕을 피함
두 번째 결혼의 유익은 정욕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 9절에 보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독신의 은사가 있느냐는 문제는 이 정욕에 대해서 얼마나 극복하면서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매우 약한 사람은 독신의 은사가 아닙니다. 결혼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 중에 누구도 나는 이 정도 되었기 때문에 이제 성적인 욕망, 이 육체의 정욕은 나와 거의 상관이 없다 그것을 선언할 수 있는 완전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제 이 문제도 사실은 성경의 가르침을 현저하게 떠났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결혼은 이렇게 하나님이 결혼을 한 사람들은 부부가 성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이 정욕의 노예가 되지 않고 그 유혹을 이기며 살 수 있도록 해소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주 적극적으로 해석을 해서 결혼이 마치 방탕한 성생활의 면허증을 주는 것처럼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 혼인 이외의 사람하고가 아니라 둘이 결혼을 했는데 이제 남편과 아내가 됐으니까 아주 질탕하게 성생활을 아무리 탐닉하고 즐겨도 그것은 좋은 것이다. 심지어 뭐라고 가르치나 하면 그리스도인이 여태까지 선입견에 의해서 잘 몰라서 그렇지 사실은 하나님이 이 성을 적극적으로 즐기라고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오히려 이제까지 편견을 깨뜨리고 우리는 이 성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사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매우 좋은 일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쓰레기처럼 넘쳐나는 수많은 서점가의 책들이 기독교의 이름을 쓰고 지어진 책들이 그런 사실들을 공공연하게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나는 학자적인 양심으로서 이 신학을 통해 성경의 모든 가르침들을 객관적으로 주목할 때 비록 그것이 부부라고 하더라도 성적인 아주 지독한 탐욕을 권장하는 내용을 나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제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워낙 존경하니까 아우구스티누스 이야기는 모두 제가 따르는 줄 생각하는데 안 그럽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아십니까? ‘혼인을 해도 성생활은 죄다. 그런데 아주 사소한 죄이고 부부끼리 그런 것은 하나님이 아주 쉽게 용서해 주실 수 있다.’ 나는 이런 이론을 쓰레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어거스틴이 당시에 널리 퍼졌던 금욕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지만 이런 사람에게 오류가 있을 때마다 나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왜냐하면 이때가 바로 내가 그의 맹목적인 추종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영원 안에서 나를 찾다’라는 책을 쓰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에 대한 해설이지만 아우구스티누스보다 더 아우구스티누스적인 해설집이다 왜냐하면 그답지 않은 이야기를 가끔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쓸어내 버려야 합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부부가 아니라도 모든 성생활을 죄악으로 보는 극단주의, 실제로 어느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전도를 보낼 때 우리 목사님은 35세서부터 절대로 부부생활을 안하신 거룩한 분입니다.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이 극단적 금욕주의 아니면 반대편은 뭐냐 하면 결혼을 하면 부부사이에는 아무리 질탕하게 성에 탐닉해도 아무 문제가 없고 오히려 이게 사랑을 촉진한다고 가르칩니다. 눈을 떠서 아침에 신문을 보거나 잡지를 보거나 15초짜리 텔레비전 광고를 틀면 자동차에 기름 넣을 때도 성이 등장합니다. 여자가 등장합니다. 그 다음에 옷을 선전할 때도 여자들이 등장합니다. 호텔을 선전하거나 여행지를 선전할 때도 성을 상품으로 미끼로 합니다. 먹는 음식을 선전할 때도 성이 등장합니다. 모든 문화에서 이 성이 동원되면서 상업주의와 결탁되면서 인간에게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성을 탐닉하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인 것처럼 그 즐거움을 만끽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 뭔가 심각한 결핍이 있는 것처럼 모든 문화 구석구석이 이것들을 선전하고 이런 필름과 영화의 영향이 엄청나게 크게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뭐라고 그러냐 하면 팬섹슈얼리즘이라고 합니다. 범 섹스주의라고 합니다. 모든 문화에 있어서 섹스를 중시하는 주의라는 것입니다. 팬섹슈얼리즘입니다. 이런 희대 사상에 기독교 자체가 깊이 물들었기 때문에 그 쓰레기 같은 해석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절대 여러분이 그것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부부간에 성적인 생활은 절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탐닉하고 비정상적으로 집착을 하면 매우 좋지 않은 효과가 이 마음과 정신 속에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는 정상적으로 부부생활이 잘 안되니까 밤마다 아주 심각한 X등급의 포르노를 틀고 서로를 흥분시키고 말하자면 성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인데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죄이냐 아니냐 문제를 떠나서 그런 식으로 성생활이 지속될 때에 과연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오롯한 경건이 깃들 수 있을까? 반문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 목사님이 결국 매우 민감한 문제를 지금 건드리고 있구나. 결국 저분은 도대체 견해가 뭔가? 성생활을 하지 말라는 건가, 그것을 죄악시 하는 건가? 아니라고 그러지만 권장하지 않지는 않는가?’ 요약을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성의 사용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성경의 견해는 지금 보는 바와 같이 소극적입니다. 허용을 하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이 성욕이 왕성하고 자식을 번성하고자 할 수 있기에 적합한 육체적인 능력이 왕성합니다. 그러니까 말하지만 정욕의 욕구가 많기 때문에 유혹으로 미끄러질 위험성도 높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그 젊은 남편에게 수시로 잠자리를 거부합니다. 그러면 그 틈을 마귀가 타는 것입니다. 아내는 아직까지도 이게 불붙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수시로 잠자리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그 아내의 약한 점을 마귀가 틈탈 때에 그런 것들을 경고하면서 분방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성적인 의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남편을 자기가 성적인 만족을 방탕하게 즐기는 수단으로 삼으라거나 아내를 끊임없이 욕망을 풀 수 있는 말하자면 성적인 노리개로 삼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약하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그렇게 사랑으로 배려하면서 정욕의 유혹에 빠져서 마귀의 시험에 들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위한 하나의 구제 장치입니다. 그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늙습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오는 것이 성적인 능력의 감퇴입니다. 다른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할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50, 60, 70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성적으로 왕성해서 그래서 수시로 말하자면 정욕에 빠져서 범죄할 위험을 느낍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그러면 발기부전 치료제라도 먹고 아내가 시험에 빠지지 않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이가 들었는데도 도저히 그렇게 성생활을 통하지 않고는 부부의 결합을 느끼기가 너무너무 어려운 것이 50, 60, 70, 80까지 계속 되어서 그래서 늙어도 비아그라 없이는 결혼생활이 불가능할 정도가 된다면 그게 성도의 삶이냐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아주 인생의 문제에 전면에 놓고 절대로 자연적인 노화에 순응하지 말고 비아그라라도 먹고 성의 즐거움을 찾아보라고 60대, 70대, 80대까지 격려하는 이것은 거대한 자본주의의 의료 산업과 그리고 말하자면 탐욕으로 가득찬 의료인들이 그 속에서 여러분을 이 세상에 인류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이런 팬섹슈얼리즘의 경향에 의해서 깊이 파고 들어와서 정욕과 참된 사랑을 흐릿하여 구별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 세상의 풍조에 대해서 정리된 견해를 갖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이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살 수가 있겠습니까? 젊은 사람들을 부러워하면 결코 성공한 인생을 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샘나십니까? 젊음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까불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 부러우세요? 부러워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한탄해야 될 것은 여러분의 늙음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나이가 됐는데도 젊은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정도로 신앙 안에서 성숙함이 없는 그것을 한탄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위에 이렇게 보면 젊은이들이 까불고 돌아다닙니다. 예쁘고 밤새도록 놀아도 그 다음날 아침에 사우나 한번 하고 나면 다시 또 신나게 놀 수 있는 체력이 있습니다. 까불고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쾌락을 즐깁니다. 자신의 몸을 던지고 그런 애들을 보면서 젊은이들에게 정말 눈물로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너희 청년들아, 붉은 피 출렁이는 젊음을 그렇게 쓰지 마라. 너희들이 그렇게 살면 늙어서 선지피를 흘려야 될 때가 온다.’ 늙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인생입니까? 10대, 20대 때에는 개인적으로 자신이 교육받고 성장하는 일에 집중합니다. 30대 40대가 되면 이제 사회인이 됩니다. 직장을 다니거나 사업을 해서 그 일에 아주 전심하게 됩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이 생깁니다. 아이들을 낳습니다. 아내와 함께 삽니다. 가족이라는 것이 형성되면서 헌신을 합니다. 그래서 40대 50대가 됩니다. 그러면 전에는 늦게 퇴근만 해도 아빠, 아빠 그러고 막 매달리던 애들, 시장만 잠깐 가도 엄마 어디가, 엄마 어디가 그러고 울면서 매달리던 이제는 아빠가 아래층에 가면 애들이 2층에 올라가고 2층에 따라 올라가면 애들은 나가버립니다. 그리고 연애하고 결혼했을 때에는 아내가 언제 퇴근 하냐고 수없이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합니다. 40대 50대 되고 나면 들어오든지 나가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때에 이제 이 남편이 혼란이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30대 40대를 다 쏟아 부으며 가족을 위해 살았는데 그리고 회사를 위해서 온전히 바쳤는데 회사에서는 나가라고 그러고 자식들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고 아내의 눈빛도 이제 달라졌습니다. 이제 별로 벌어다 주는 것도 없고 이제 은퇴하고 같이 있어보려고 해도 아내가 원하지 않습니다. 그때에 소위 이야기하는 갱년기의 자기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것입니다. 인생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원심력과 구심력을 유지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한 인간으로서 자기는 인간으로 아내가 사라져도 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고 자식들이 다 떠나고 지구가 다 멸망하고 자기 혼자 남아도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신앙 안에서 찾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 안에서 찾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봉사를 소홀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찾아가는 의미와 일치를 이루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끊임없이 신앙을 배우고 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고 간단한 복음을 붙들고 살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철학에서도 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차이는 무엇이냐 하면 이러한 사실들을 붙들고 살 뿐만 아니라 이런 것들을 붙들고 살게 하시는 환경을 초월하고 그리고 인간의 연약함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놀라운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만이 가르쳐줄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이게 젊은 것을 부러워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이 바라보면서 ‘아 나도 저분처럼 늙고 싶다.’ 그런 마음을 갖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이 왜 사는지 그런 의미를 물어야 합니다. 결국은 떠나갑니다. 어느 순간에는 교회도 떠나고, 사랑하는 자식들도 떠나고,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도 함께 헤어지는 날은 없고 누군가는 먼저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인생이 뿌리째 흔들린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있을까요?
(찬양)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를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그 하나님 앞에서 사는 인간은 결국 원하든 원하지 않던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만나고 가슴 아프고 쓰라린 인생의 날들도 지납니다. 그러면 신앙은 그 모든 출렁거림이 인생의 모든 사태들에 대해서 초월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신앙의 목표입니다. 비록 사랑하는 아이들이 나를 떠나도, 심지어는 아내가 나를 두고 먼저 죽음의 강을 건너고 남편이 나를 두고 삶을 등져도 충분히 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그 어떤 정신과 영혼의 힘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을 세상의 가치 기준을 다 풀어놓고 무엇을 니들이 하든지 자유라고 외치는 그 속에서는 그런 힘들이 발견되지를 않습니다.
1995년까지 120세 나이를 살아서 기네스북에 최장수 노인으로 올랐던 일본 사람이 있었는데 그 양반 이름이 이즈미 시케치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115세 때 인터뷰를 했습니다. “할아버지, 참 오랜 세월을 사셨는데 지금 이 순간 여성이 있다면 어떤 여성이 좋으시겠습니까?” 이 할아버지가 얼마나 재미있냐 하면 “역시 여자는, 같이 살 아내는 연상이 좋아.” 115세. 세계에 몇 명이나 연상이 있을까요? 그런데 비록 이게 신앙을 가진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멋있습니까? 이 분은 이미 115세가 되어서 부부로 산다는 것이 그렇게 끈적끈적하게 성에 탐닉하고 미친 듯이 쾌락을 빨아먹고 사는 것이 결혼의 본질이 아닌 사람을 안 사람입니다. 여기에 묻어 있는 것입니다. 일반 은총의 빛을 발견한 사람도 결혼에 대한 생각을 그렇게 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지식과 사랑에 있어서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할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C. 신비적 연합
마지막으로 신비적인 연합입니다. 성례의 연합이라고도 하는데 창세기 2장 24절에 근거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고 말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각각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있는 신자이고, 둘이 결혼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성립할 수 없는 영적인 연합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을 혼인으로 말미암는 영적인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성례의 연합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새크라멘툼’(sacramentum), ‘성례’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언약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이 영적인 관계가 특별히 맺어진 것을 자신들의 부부간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그 언약에 충실하면서 그 언약들을 구현해 가고 의견의 일치를 이루면서 한 마음으로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원래 이 ‘새크라맨트’라고 하는 말은 라틴어 ‘새크라멘툼’에서 왔는데 ‘새크라멘툼’은 원래 로마 군인들이 군인이 될 때에 나라에 의식을 하고 서약을 하면서 군대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나 개인이 아니라 로마의 군대의 일원으로서 이 나라를 위한 군인으로서 이 공동체 속에 한 일원으로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서약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혼인 언약도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잘 들으세요. 이렇게 언약이 이루어지는데 이 영적인 결합이 생기는데 보세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영원히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남편과 아내의 영적인 결합은 해지될 수 있습니다. 해지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부부의 영적인 결합은 신자로서의 그리스도의 결합보다는 열등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쉽게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쪽이 간음한 경우에도 이 결합은 안 끊어집니다. 이혼을 해도 안 끊어집니다. 한쪽이 죽었을 때에 끊어지게 됩니다. 이게 바로 이혼한 여자에게 장가들지 말라고 하는 근거입니다. 그런데 동방 교회 같은 경우는 죽어도 안 끊어진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한번 결혼을 해서 상대방이 죽으면 우리 같은 경우에는 남편이 죽거나 아내가 죽었으니까 그 언약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사람에게 결혼을 합니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안 보고 하나님이 하나의 결합만을 만드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아주 젊은 나이에 일찍 죽으면 남편은 평생 수절을 하는 것입니다. 여자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 신학적인 판단을 할 시간은 아닙니다. 그러나 확신하는 것 하나는 부부 사이에 이런 연합이 있습니다. 해지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열등하지만 간음이나 이혼에 의해서도 끊어지지 않는 결합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 하십시오. 그래서 성경이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을 이야기하면서 자주 유비로 드는 것이 바로 남편과 아내의 결합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혼 생활에 있어서 신의를 진키고 그리고 영적으로 연합된 것을 실제의 삶 속에서 마음의 일치를 이루면서 살도록 구현해 가는 이 과정이 바로 그를 도와서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이고 나 자신이 그렇게 부족한 아내나 남편을 섬기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완성되어져 가는 성화의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혼인의 성경적 정신을 비추어보면서 사실 어떤 때에는 나는 독신으로 살 자격도 없고 결혼할 자격도 없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사랑이 많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어도 부르심에 도저히 부응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고백하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빌면 하나님이 무지한 자에게는 지혜를, 힘이 없는 자에게는 은혜를 주셔서 그 삶을 살아가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슬처럼 잠시 이 땅에 왔다가 사라져가는 인생의 수많은 날들, 살 힘이 있을 때에는 무지해서 못 살고 살 수 있는 지식이 있을 때에는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이 없어서 못 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독신의 삶을 살든지, 결혼해서 살든지 독신을 선택했으면 후회하지 말고 결혼을 했으면 물릴 생각을 하지 말고 부름 받은 대로 그 자리에서 사는 것입니다. 다만 독신으로 사는 사람은 결혼해서 한 여자, 한 남자에 매인 것보다는 훨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결혼을 한 사람은 독신으로 살았더라면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를 주님께 맺으며 그 분을 영화롭게 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결혼으로, 독신으로 불러주신 이유입니다. 이 유익을 각자 부르심의 자리에서 충분히 누리며 하나님을 섬기고 여러분 자신도 완성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사랑에 아픈 그대에게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편 27편은 다윗이 지은 여러 개의 시편 중 가장 애송되고 있는 시 중 하나입니다. 다윗이 언제 이 시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련과 고통 속에서 대적들에게 에워싸인 상황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탄원으로 이 시를 적어가고 있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자신이 의지하는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실 것이라는 거룩한 담대함과 눈앞에 부딪치는 현실 속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이 시를 쓰고 있기 때문에 그는 시편 구절구절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 시 속에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있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1절부터 3절까지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 4절부터 6절까지는 성전의 아름다움, 그리고 7절부터 마지막 10절까지는 간구와 탄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는 대적들에게 에워싸여 고통 받는 시련 속에서 자기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라고 말입니다. 그 하나님이 반드시 자기를 불쌍히 여기실 것이며 도와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면서 그는 문득 부모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러면서 앞뒤 문맥과는 맞지 않게 부모의 이야기가 들어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말입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모로부터 사랑과 고임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 속에서 자라며 한 사람으로서의 인간성을 완성해 갑니다. 그러나 눈물 섞인 다윗의 이러한 탄원은 우리로 하여금 부모 사랑과 다윗의 어린 날들의 가슴 아픈 기억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사무엘상 17장 12절에 의하면 유대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고, 다윗은 그 중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이미 이 성경에서 이새가 나이 많아 늙은 사람이었다고 되어 있으니 인정으로 생각하자면 노년에 낳은 이 막내아들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이렇게 노년에 낳은 아들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이 당연하고 야곱도 그래서 요셉과 베냐민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이새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이제 성경에 근거해서 이 이새를 여러분 앞에 고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II. 사랑과 어린 날의 기억
사무엘상 17장에는 블레셋이 쳐들어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의 아들 중 세 사람 큰 아들 엘리앗과 아비나답, 그리고 삼마, 이 세 아들이 사울과 함께 블레셋과의 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국운을 걸고 싸우는 그야말로 전쟁입니다. 칼과 칼이 부딪치고 화살이 날아다니고 누구도 자신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곳이 전쟁터입니다. 세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놓고 이새는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들들이 너무 걱정이 되어서 전쟁판에 굶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볶은 곡식 한 에바와 떡 열 덩이 그리고 그들의 상관에게 드릴 치즈 열 덩이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들 중 한 사람에게 그것을 짊어지어 단독으로 그 전쟁터에 가서 형들 셋이 잘 있는지를 확인하고 상관에게는 치즈를 드리고 그리고 돌아오라는 명령을 어느 한 아들이 부여받았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자식이 다윗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이새라는 사람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요? 세 아들이 문제가 아니라 또 한 아들이 가서 그 전쟁터에 가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가겠다고 해도 가지 말아라하고 말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큰아들도 있는데 전쟁에 나간 세 아들 말고 그리고 다윗을 제외하고도 네 아들이나 중간에 더 있었습니다. 그 중에 형들도 있는데 하필이면 이 다윗에게 그 목숨을 건 위험한 심부름을 시킵니다. 이새는 아니라고 그럴지 모르지만 이런 것 아니었을까요? 어차피 그 위험한 곳에 가다가 죽어야 될지도 모르는데 저 막내아들은 없어져도 제일 괜찮은 아들이라고 말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언제까지 내가 이미 버린 사울을 위해서 슬퍼하겠느냐 이새의 아들 중에서 내가 임금을 세울 것이니 가서 기름을 부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이 명령에 순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이 사울에게 알려지면 그것은 곧 사울의 정권에 대한 반역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를 짜냅니다. 그 지역에 있는 제사장에게 말합니다. “내가 제사를 지내러 가겠다. 제사장 너희들도 와서 같이 제사를 지내자. 그런데 제사를 지낼 때 이새와 그 집안의 아들들을 다 오게 하여 정결하게 하고 제사에 함께 참여하게 하라”고 분부를 내립니다. 당연히 이새는 자기 아들을 데리고 그 가슴 벅찬 제사의 자리로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한 아들씩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합니다. 엘리야는 맏아들이었고 풍채가 있고 과연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만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말씀하십니다. 아들들이 모두 사무엘 앞을 지나갔습니다. 그들 중에는 아무도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시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사무엘상 16장 11절에서 이새에게 물었습니다. “네 아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 질문에 대한 이새의 답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왜 이새는 분명히 모든 아들을 데려오라는 사무엘의 분부를 받고도 한 아이, 다윗을 제외해 놓고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타났을까요? 도대체 그 아들은 누가 낳은 아들이기에 그렇게 차별대우를 하는 것일까요? 사무엘은 이새에게 말했습니다.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이런 사람이 이새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이새의 이야기는 성경에 몇 군데 나오는데 그 어머니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습니다. 희귀하게 사무엘상 22장 3절에 잠깐 언급이 됩니다. 당시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도망을 다니던 시절이었고 아둘람 굴로 피신합니다. 거기 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 400여명이 다윗에게로 옵니다. 그들은 다윗을 지도자로 모시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빚진 자, 억울한 자, 한 맺힌 자 그야말로 사울의 치하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백성들이 다윗을 목자로 여기고 그 앞으로 모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사람으로서 왕인 사울에게 버림받은 백성에게 새로운 나라를 꿈꾸게 됩니다. 이때 놀랍게도 다윗의 부모가 다윗과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이리저리 이 백성들을 데리고 피난을 다녀야 하는 몸이니 부모를 안전하게 모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자신의 편에 서주었던 모압 왕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부모를 부탁한다고 간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미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지만 부모에 대한 다윗의 효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III. 부모와 하나님의 선하심
A. 부모는 버렸으나
다윗의 인생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는 버림받은 인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는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고 커서는 장인으로부터, 아내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늙어서는 자식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반역이 일어났을 때에는 자기가 그토록 피붙이처럼 사랑하던 백성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일생을 이렇게 의지할리 없는 외로운 날을 보냈고 그 중의 만난 친구 요나단은 사막과 같은 인생에서 오아시스와 같은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의지할리 없는 인생의 외로운 날들을 지났지만 그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외로움 속에서 우리 주님을 바라보았고 그것이 이 상처뿐인 인생을 살아온 사람, 다윗을 위대한 신앙의 인물로 만들어 준 이유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똑같이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시련을 당하던 인생의 어느 한 지점에서 자신을 버린 부모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우리말 성경에는 한 단어 ‘부모’, 'parents'라고 나오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정확하게 “나의 아버지와 그리고 나의 어머니가 나를 버렸습니다.”라고 나옵니다. 여기에서 버렸다고 번역되는 히브리어 동사 ‘아자브’는 여러분이 창세기 2장 24절에서 “그러므로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하여”라고 할 때 ‘떠나다’라고 번역된 그 단어입니다. 저는 다윗이 27장 10절의 고백을 토로할 때 그는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상처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10절을 토로했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10절을 어린 아이의 표현으로 번역을 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아주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면 “울 엄마, 울 아빠가 나를 버렸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세계의 멸망이나 죽음이 아닙니다. 엄마가 어디 가는 것, 그래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그냥 끈끈이 풀처럼 엄마를 따라다니며 “엄마 어디가? 아빠 언제와?” 이게 아이들의 주된 대화입니다. 시인이 나이가 들었을 때에 ‘자기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완결형입니다.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 우리 아빠와 우리 엄마는 나를 버렸습니다.”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도대체 다윗의 부모는 언제 이 어린 다윗에게서 떠났을까요? 언제 이 다윗을 버렸을까요? 적어도 이것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한 번도 한 집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별거한 적은 없지만 마음속에서 사실은 자식을 버린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자식을 버리는 부모들을 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상당한 사회적인 지위와 지식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기가 낳은 아이가 장애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이를 버린 부모를 여럿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윗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떠났으나”라고 고백을 하지만 이것은 단지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는 함께 살면서도 언제나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느낌으로, 어머니가 떠나가 버린 느낌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도대체 다윗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왜 그 부모는 그렇게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 다윗을 버렸을까?”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부모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자신의 막내아들을 버렸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이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다윗도 버림을 받았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무엇일까요? 모릅니다. 그렇지만 알 수 있습니다. 자식을 능히 버릴 수 있는 것은 그 새끼보다 더 소중한 무엇이 그 부모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것이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일지는 않겠지만 부모가 자식보다도 그게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으니 어린 다윗이 그것을 어떻게 말릴 수 있겠습니까?
물론 자식에게 어떤 결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절망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든지 혹은 모든 것들이 제대로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어서 양육하기에 너무너무 힘든 그런 육체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성격적으로 기르기 어려운 아주 힘든 아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부모에게는 자기의 자녀를 버릴 수 있는 권리는 없습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태어난 자기의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겠다는 의무에 대한 서약입니다. 가정이나 결혼, 자녀에 대한 무슨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젊은 날의 끓어오르는 정욕으로 성관계를 맺고 엉겁결에 애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인간은 그렇게 태어난 자식도 자연히 사랑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손톱만큼의 사랑도 없이 기꺼이 자기 자식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시인은 그렇게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에 여러 해 전 한 자매가 등록을 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유학을 보냈고 뺑소니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급히 비행기에 실어 서울에 있는 좋은 병원에 입원시켰지만 아이는 깨어나지 못한 채 식물인간으로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 그 아이 옆에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남자 아이였습니다. 아이는 식물인간이 되었지만 엄마는 매일 닦아주며 말을 겁니다. 그리고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로션도 발라주고 여드름도 짜주며 대화를 합니다. 결국은 하늘나라로 갔고 자매는 감당할 수 없이 세계가 무너지는 아픔을 끌어안고 교회에 왔을 때 공교롭게도 그 주일에 울려 퍼진 설교는 ‘천국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라’였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소망이 되었습니다. 그게 부모입니다.
B. 여호와는 영접하심
다윗은 불행하게도 그런 엄마 아빠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엄마 아빠에 대한 아련한 기억은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신앙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왜 이 끔찍하게 불행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해명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시는 신실한 하나님을 믿으며 상처뿐인 상황보다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자기를 그렇게 버린 부모와 대조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말입니다. 히브리말로 ‘야 아스페니’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사실은 영접하다라기보다는 좀 다른 뜻입니다. 그래서 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가장 정확하게 해석 번역한 성경으로 정평이 나 있는 1611년에 킹제임스 버전 초판에는 ‘이야 아스페니’라는 단어를 이렇게 번역합니다. 'You will take me up.'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마음속에 있는 빛바랜 한 장의 사진을 봅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엄마가 팔을 벌리고 다윗을 안아주는 그림입니다. 어떠한 주석가도 이 성경구절을 나처럼 해석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지만 나는 나의 이 해석이 다윗의 이 시에 가장 의미에 근접하고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 10절 전체가 다윗의 어린 시절에 상처와 기쁨으로 남았던 두 흑백사진처럼 빛바랜 두 개의 사진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엄마 아빠가 자기를 버리고 어디로 가버려서 한없이 슬퍼하며 입술이 새파래지도록 울고 있는 어린 다윗의 그림이고 두 번째는 부모가 떠나버린 그 자리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두 팔을 벌리시고 자기의 품에 안겨오는 이 다윗을 번쩍 치켜들어서 안아주는 그림입니다. 나는 이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아일랜드의 민요인 'You raise me up.'이라는 노래를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치켜드십니다. 그래서 나는 험한 산봉우리와 같은 인생 그 위에 설 수 있으며 폭풍우 치는 바다 한 가운데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당신의 어깨위에 있을 때 나는 가장 강했습니다.’라는 노래 말입니다.
어쩌면 다윗의 어린 시절에도 한번쯤은 엄마 아빠의 품에 안긴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그 사건을 이렇게 하나님을 주어로 묘사하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영접하는 힘이며 우리를 끌어안아 높이 치켜드는 힘이며 그를 어깨에 무등 태워 사랑해 주는 정신의 힘입니다. 사랑은 우리 존재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고 기뻐하게 해 주는 힘입니다. 멀리 집을 떠나 아버지의 가산을 탕진하고 비참한 신세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그 탕자를 사랑으로 영접하게 해 준 것은 아들의 공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속에 있는 자비였습니다. 자식을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고 자식이 자신에게 행한 그 모든 악들을 기억하지 않고 자신의 그 자식이 고통 받고 그리고 비참하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저며하는 그 아버지의 마음속에서 우리는 인간 부모에게 기대하시는 그 마음이 무언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견디기 힘든 상처는 대부분 사람이 남긴 것입니다. 신앙 없이 그것을 참으면 자기가 망가지고 참지 못하면 주위의 사람들을 망가뜨리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두 가지 일 중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상처뿐인 인생의 길을 걸었고 생애 전체가 버림받은 불행의 연속이었지만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섭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살아보아야지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시인은 눈앞에 일어나는 모든 현실들이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 우리처럼 알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폭풍 속에서, 어둠 속에서 엄마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는 어린 아이처럼 그렇게 우리 주님의 손을 붙들고 시련의 폭풍 속을 지났고, 외로움의 광야를 통과했습니다. 모든 것이 형통하고 잘 되어서 부요한 마음으로 주님을 잊어버린 사람보다는 오히려 고난 속에서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지를 이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시인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생동안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버렸던 부모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대신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을 돌보고자하는 효심을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좋은 부모를 만나 충분한 사랑을 받는 것이 그렇게 바라기 힘들 정도의 아주 특별한 사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들에게는 정말 자연스럽게 허락되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마치 꿈꿀 수 없는 기적인 것처럼 허락되지를 않습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고 이 세상에 고아처럼 되었지만 그는 그 외로움을 사람을 원망하고 복수하는 것으로 풀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러한 상처와 버림받은 깊은 고통 속에서 어린 아이처럼 울며 엄마 같은 하나님의 품을 파고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의 품에 안기는 다윗을 높이 들어 안아주셨고 그래서 그는 시련으로 이어진 험한 산과 같은 인생 속에서도 그 산봉우리에 우뚝 설 수 있었고 시련과 고난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바다와 같은 이 세상을 믿음으로 걸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쓰라린 상처와 버림받음의 기억을 통해서 그런 나쁜 일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꿈꿀 수 없는 그런 나쁜 일을 당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누릴 수 없는 탁월한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셨고, 삼천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하나님의 성품의 어떠하심과 그 위대하심의 크기를 그 사람의 눈물 어린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고 있습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정말 좋은 부모님을 만나서 이런 설교가 낯설게 들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배나 더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부모님께 효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설교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이제는 마음속에 묶여있는 여러분의 부모를 풀어줘야 합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픈 기억들을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의 강물로 떠내려 보내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여러분을 버리고 상처를 주었던 모자라는 부모님을 보지 말고 그렇게 갈 곳이 없이 버림받은 여러분을 당신의 품에 품어 안아주시고 여러분을 그 어깨 위에서 가장 강하게 해주셨던 우리 주님의 사랑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그 상처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모가 여러분을 버린 것은 여러분의 잘못 때문이 아닙니다.
시인이 경건한 불안 속에서 부모가 자신을 버린 것을 회상한 것은 상처를 회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의 인생에서 그 쓰라린 상처를 능가했음을 회상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부모는 그렇게 자기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자기를 주우셨고 그래서 자기를 높이 치켜들어 올려서 그렇게 험한 인생의 승리자가 되게 하셨고, 그리고 아무도 끊을 수 없는 그 탁월한 사랑으로 자기를 건져주시고 보호해 주셨던 그 사랑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결핍은 하나님의 부요를 맛보는 계기가 되었고 상처는 하나님의 치료의 능력을 맛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록 시편 27편 첫 절에서 시인이 위대한 승리와 확신을 노래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 시인의 내면의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반대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자신을 에워싼 어두움의 두려움이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에 자신이 버림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믿음으로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고 노래했습니다. 자신의 속에서 모든 생명의 기운이 사라지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경험했을 때 그는 오히려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땅에 아버지는 우리를 버렸지만 하늘 아버지는 그 아버지가 주지 못한 모든 것까지 우리에게 주셔서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회상할 때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고백을 하게 만들었고, 그리고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그 상처조차도 하나님의 탁월한 아가페의 사랑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그런 부모 밑에 태어나서 버림을 받고 상처를 받았는지 인생의 눈을 감고 흙 이불을 우리 몸 위에 덮는 날까지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가면 우리는 이 땅에서 다 못한 끊어진 멜로디와 같은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우리가 왜 그렇게 가슴 아픈 일들을 겪어야 했는지 그리고 결국은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결국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데려갔는지를 보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육신의 살과 피를 나눈 아버지와 엄마와의 인연은 길어야 100년 짧으면 몇 십 년도 되지 않는 아주 하찮은 세월로 끝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더 이상 그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고 그 엄마가 그 엄마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짧은 인생 동안 일어나는 고통의 기억들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영원히 우리를 버리지 않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은 숨질 때까지 우리에게 찬송 제목이 되어야 할 것이고 하늘나라에 가서도 이것은 우리의 가장 탁월한 찬송의 이유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정에서 입은 상처가 있어도 잠시 잠깐 우리에게 허락된 인생의 길을 좀 더 가야 합니다. 원래 이 세상은 그렇게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사랑 받아야 될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신뢰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며 쓴 물을 머금는 때도 있는 법입니다. 주님은 그런 인생의 과정을 통해서 정말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생명을 걸고 신뢰할 수 있는 분, 생사간의 어떻게 그 분을 의지해도 우리를 배신하지 않으시는 완전한 신뢰의 대상이 우리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당할 때마다 그 분의 품에 피하고 거기서 그 말씀의 젖을 먹으며 우리는 영혼에 원기를 회복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일어난 가정의 쓰라리고 아픈 일들은 어떻게 보면 당신의 품으로 쉽게 돌아오지 않으려는 완고한 여러분을 여러분이 버림받은 부모의 사랑보다도 더 큰 그 사랑의 품으로 여러분을 불러 영원한 복의 근원이신 당신 안에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 처해 있든지 두 가지를 잊어버리지 맙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하신 분이시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좋으신 분이시라는 사실과 그 하나님은 우리를 역경 속에서 언제나 그 분의 말씀으로 구하시는 분임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이 시인이 대적들에게 에워싸인 절망의 인생의 한 골짜기에서도 자기를 버린 부모의 사랑과 자기를 들어 올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대조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