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과 가족
(2016년 가정의 달 시리즈)
설교기간|2016년 5월 1일 - 6월 5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 2016년 7월 6일
목 차
가정과 가족 1 (2016.5.1 주일오전설교)
가정과 가족 2 (2016.5.8 주일오전설교)
가정과 가족 3 (2016.5.15 주일오전설교)
가정과 가족 4 (2016.5.22 주일오전설교)
가정과 가족 5 (2016.5.29 주일오전설교)
1. 네 자녀를 사랑하라(엡 6:4) 2016.5.1 주일오전 1
2. 남편과 아내(골 3:18) 2016.5.8 주일오전 9
가정과 가족 6 (2016.5.29 주일오전)
3. 네 부모를 사랑하라(골 3:20) 2016.5.15 주일오전 18
4. 아내를 사랑하라(골 3:19) 2016.5.22 주일오전 27
5. 아내를 귀히 여기라(벧전 3:7) 2016.5.29 주일오전 36
6. 젊은이의 독신, 연애 그리고 결혼(창 2:18) 2016.5.29 주일오전 46
7. 죽음보다 강한 사랑(아 8:6) 2016.6.5 주일오전 59
가정과 가족 2
가정과 가족 1 (2016.5.1 주일오전설교)
가정과 가족 2 (2016.5.8 주일오전설교)
가정과 가족 3 (2016.5.15 주일오전설교)
가정과 가족 4 (2016.5.22 주일오전설교)
가정과 가족 5 (2016.5.29 주일오전설교)
가정과 가족 6 (2016.5.29 주일오전)
가정과 가족 7 (2016.6.5 주일오전설교)
가정과 가족 1 2016. 5. 1 주일오전예배
< 네 자녀를 사랑하라 >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I. 본문해설
- 3차 전도 여행 후 로마 감옥에서 씀
- 순교(64~67경) 직전 62년경에 씀
- 에베소서의 두 주제
a. 그리스도: 하나님과 세계의 화목
b. 교회: 교회와 성도 열방과 연합
- 미신과 주술의 도시: 성도다운 삶
- 교리: 1∼4장, 실천: 5∼6장
- 가정의 문제는 가족의 온전함의 문제
II. 자녀를 기르는 길
A. 노엽게 말라
- 자녀를 기르며 노엽게 하는 일이 많음
-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서는 책망과 징계가 필요함
- 그러나 충분한 사랑이 있으면 해결됨
- 힘과 권력이 없는 자녀들의 견딤과 상처
a. 빗나간 욕망 b. 과도한 기대 c. 지나친 징계 d.무관심
-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
- 사랑이 없으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B. 양육하라
- “굳게 하다” amen 확실, omnah 유모
- 어린 아이는 아직 굳어지지 않았음
- 어린 묘목의 프레임과 나무의 성장
1. 주의 교훈으로
- 역: nurture, training, chastening
- “주의 영양” 성장에 필요한 양분들
- 육체의 음식, 정신의 교육과 말씀
- 어린 시절: 영양+세계경험+말씀
- 자녀의 정신적 영양 상태를 확인하라
- 종교적 엄격함 보다 은혜로 양육함
- 은혜는 말씀을 통해 임함: 회심 필요
- 부모가 말씀의 은혜로써 살아야 함
2. 주의 훈계로써
- 번역: admonition, instruction
- 말씀: 지성을 깨우쳐 감화에 이르게 함
- 훈계: 의무를 일깨워 분발하게 함
- 책망보다 큰 자녀 사랑이 필요함
- “돈을 훔친 자녀를 관용과 재치로”
- 자주 징계하지 말라 주님을 본받아
- 회초리보다 마음에 경건한 아픔을
- 주님이 우리의 잘못을 다루시는 방법
- “내가 너를 그렇게 다루지 않았다”
III. 적용과 결론
- 자녀 사랑이 어려울 때 예수 생각하라
- 하늘 아빠가 우리를 어찌 사랑하셨나
- 자녀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형상
- 사랑하라, 사랑하라!
가정과 가족 (2) 2015. 05. 8 주일오전예배
< 남편과 아내 >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 (골 3:18)
I. 본문해설
- 가정에 주는 권면 중 첫 번째 교훈
-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닌 주의 명령임
- 이하의 가족관계 질서의 근본적인 토대임
II. 아내와 남편의 관계
A. 남자와 여자를 만드심
- 흙으로 사람을 만드심(창2:7)
- “흙”(육체)+“생기”(영혼)
- 육체의 필요와 영혼의 필요를 가짐
B. 서로의 필요를 채워줌
- 남녀를 서로 다른 개체로 창조하심
-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신앙이 요구됨
- 다름이 온전함의 원인 ⇒ 갈등이 됨
- 타락한 인간의 사랑: 발산 아닌 흡수
III. 남편에 대한 아내의 덕목
- “복종하라” (hypotasesthe)
- “hypo”(under)+“tasso” 배치, 정리, 결정하다
A. “복종한다”는 의미
- 아담의 타락 후 무너진 가정의 질서
- 무질서 속에 양산된 불신앙과 반역들
1. 여기서 상정하는 남편
- 하나님을 경외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
- 인간의 힘의 우위로 질서가 세워지는 세상
- 폭압과 강제 아닌 인간의 존엄과 가치 인정
2. 사랑의 결합과 질서
- 개별적으로 창조된 두 사람의 결합
- 결합의 본질은 사랑임: 육체+영혼
- 서로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봄
- 사랑이 그러한 인식을 가능하게 함
-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사상을 거부함
- 인격적 존중과 하나님의 질서를 따른 복종
B. 하나님 사랑으로 복종함
-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보다 앞섬
1. 깨진 가정 회복의 길: 질서+사랑
- 사랑 없는 질서의 강요: 인성 파괴
- 신적 질서의 존중: 사랑의 통로임
- 까리따스만이 신적 질서를 기뻐함
2. 남편에게 복종함
- 노예적 복종과 인간적 아부가 아님
- 복종은 사랑에 대한 보상이 아님
- 신적 질서와 사랑을 아는 데서 시작
-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는 은혜가 필요함
- 낮은 자리에 자신을 두는 질서임
- 신적 질서에 확고히 선 아내가 필요함
- 권력의 사용은 허무한 것임 – 젊음, 돈, 힘
- 사랑 안에서 피차 존중하고 복종하라
IV. 적용과 결론
-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19)
- “aneken” 적합, 꼭 맞음, 어울림
-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기 때문‥”
- 세상의 정신과 성경의 정신 사이에서
- 가정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을 보여 줌
가정과 가족 (3) 2015. 05. 15 주일오전예배
< 네 부모를 사랑하라 >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골3:20)
I. 본문해설
- “네 부모를 용서하라” 노년의 성도
- 부모의 상처 vs 자식의 상처: 내리 사랑
- 부모에게 순종, 공경하라(출20:12)
II. 부모와 자식의 관계 경륜
- 인간 창조, 관계 맺고자 하심: 영혼
- 사람의 본분을 배움: 신+인간+세계
- 헌신적 돌봄: 제비+닭+가시고기
- 부모는 위대함: 자기 무게+자식애
- “부모에게 순종”의 뜻: 인격 형성
III. 부모를 공경하는 길
- 자녀의 우선적 덕목은 “순종”임
- 노예적 복종 아닌 인격적 관계를 요구함
A. 자녀가 해야 할 일
1. 부모를 잊지 않음
- 관계와 입은 덕을 기억함(신21:13)
- 흠, 생각의 차이, 상처에도 불구하고
2. 물질적으로 돌봄
- “아버지보다 더 부자인 할아버지”
- 인간의 품위를 잃고 고통 받지 않게
3. 관계의 기쁨을 줌
- 늙을수록 소외되는 부모를 생각함
- “네 부모를 외롭게 하지 말라”
B. 부모와 관계를 회복함
- 순종하기 위해서는 공경심이 필요함
-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함
- 자식: 매로써 바르게 함(잠13:24)
- 부모: 그릇된 때도 공경함(신27:16)
- 자식을 낳고야 철이 드는 아들딸들
- “세월호 사건: 엄마의 운동화”
- 자식이 다 알지 못하는 부모의 사랑
IV. 적용과 결론
- 현재의 관계는 과거의 추억에 달려 있음
- 상처와 결별하고 용서하며 사랑함
- “아버지에 대해 꿈꾸던 새벽에”
-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요3:16)
가정과 가족 (4) 2015. 05. 22 주일오전예배
< 아내를 사랑하라 >
“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골3:19)
I. 본문해설
- 아내와 남편은 가정의 기본 단위임
- 로마 사회에서 가정은 매우 중요함
- 남성 중심의 사회로 아내는 소외됨
- 아내: 자녀생산, 가사, 정숙, 침묵
II. 아내를 사랑하라
-사랑하라(agapete)
A. 아내, 사랑의 대상
- 아내는 남편이 사랑해야 할 대상임
- 사랑 eros+philia+stolge+agape
- 아내는 숭고한 아가페의 대상이 아님
- 로마 시민들에게는 충격적 명령임
- 에로스의 사랑을 아가페로 완성함
“약한 심근경색을 주세요”
“내가 지옥에 왔나봐”
- 자기 아내는 지배가 아닌 사랑의 대상
- 사랑은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성향임
- 단순한 감정이 아닌 인격적 관계 책임
B. 사랑, 자기완성의 길
- 한 몸으로 창조해 한 사랑을 묶으심
- 인간 자아는 “홀로” 아닌 “서로”임
- 불완전한 인간을 결혼으로 온전케 함
-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함이 승리임
- 사랑⇒집중⇒소외⇒적응을 겪음
- 권력으로써 아내를 소외하지 말라
“어디서 가짜 짚차를 구하겠나?”
“세계여행, 30살 어린 아내‥”
- 세월이 흘러가면 관계만 남는다
- 서로에게서 발견하는 단점과 소명
- 혼자 살았으면 고쳐지지 않았을 점
- 온전케 하는 희생 통해 온전해져 감
- 아내가 한 없이 가엾은 사람임을 앎
- 부족한 남편들을 바라보며 산 아내들
III. 적용과 결론
- 아내를 사랑하라
- 불쌍히 여기고, 오래 참으라
- 그 일이 힘들 때마다 예수를 생각하라
- 아내 사랑의 근거로 십자가를 생각함
- “그녀를 사랑하는 일에 승리했다”
- 우리 부부로 사는 것이 기쁨되도록
가정과 가족 (5) 2015. 05. 29 주일오전예배
< 아내를 귀히 여기라 >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3:7)
I. 본문해설
-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대할지를 제시함
- 먼저 남편에 대한 아내의 태도를 규정함
a. 순종 b. 경외 c. 선행 d. 안정
- “이와 같이” 남편에게 꼭 같은 명령임
II. 아내를 귀히 여기라
- J. Owen 사랑의 특성: 기쁨+소중함
A. 생명의 은혜를 받음
- 부부 지체로 연합해 예수의 생명에 참여함
- 이 세상에서 그 생명을 누리게 하심
- 천국에서 누릴 궁극적 생명의 탁월함
- 특별한 일체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함
B. 기도의 은혜를 누림
- 아내와 불화할 때 기도가 막히게 하심
- 모든 지체들과의 관계가 그러함
- but, 아내와의 불화는 더욱 그러함
- 서로 사랑하길 바라시는 간절함임
- 경건한 자의 가장 큰 아픔은 기도 막힘
- 기도가 막힐 때 살 수도 죽을 수도 없음
- 기도의 문을 막으려는 사단의 궤계
III. 아내, 더 연약한 그릇
- “더 연약한 그릇으로 ‥ 상속자로”
A. 연약한 그릇으로 여김
- 그릇에 관한 신약의 세 비유
a. 진흙덩이와 그릇(롬9:21∼22)
- 구원받을 자와 멸망할 자 택하심
b. 보배를 담은 질그릇(고전4:7)
- 연약한 육신 안에 예수의 생명을 지님
c. 재능과 소명의 그릇(딤후2:20)
- 하나님 주권과 금, 나무, 질그릇
- 아내 사랑은 탁월한 재능 때문이 아님
- 아내 소중함은 맺게 하신 관계 때문임
- 재능과 관계없이 약한 자로 빚으심
- 약함: 쉽게 영향 받음+의존적 존재
- 그렇게 느껴지지 않음은 사랑 없음
B. 아내와 동거함
- sunoikuntes:sun+oikeo 함께 삶
- 함께 한 공간에서 살아감을 가리킴
- 본질적으로 부부로서 정신적 연합
- 까리따스에서 비롯된 진정 하나됨
- “형제가∼동거함이‥”(시133:1)
- 참된 사랑에서 비롯되는 참된 동거
- "사랑은 멀리 있으나 가까이 둔다"
- 지식을 따른 동거: 하나님+아내
- 지식: 다트 엘로힘+ 그노시스 예수
- “사랑은 앎에 도달하는 길이다”
-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알게 함
IV. 적용과 결론
- 아내는 억압과 복종시킬 대상이 아님
- 서로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라
- 지극히 연약한 그릇으로 여겨 돌봄
- 하나님 사랑의 은혜만이 가능케 함
가정과 가족 (6) 2015. 05. 29 주일 낮 청년예배
< 젊은이의 독신, 연애 그리고 결혼 >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I. 본문해설
II. 결혼과 연애
A. 남녀 창조와 결혼
1. 아름다움의 성취와 보완
2. 서로를 의존하게 하심
3. 사랑으로 자기를 완성함
B. 결혼을 위한 연애
1. 무엇을 위한 결혼인가?
2. 신앙의 동지로서
3. 예수의 사랑으로
III. 적용과 결론
가정과 가족 (7) 2015. 06. 05 주일오전예배
< 죽음보다 강한 사랑 >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아8:6상)
I. 본문해설
- shir hashrim “그 노래들 중의 노래”
-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위해 쓴 연가임
- 정경성 시비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받음
- 사랑/이별/재회/결혼/성숙을 다룸
-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 언약적 사랑
- 보편적 경험에 특별한 신앙을 호소함
- 사랑하는 연인의 끊을 수 없는 사랑
II. 끊을 수 없는 사랑
A. 도장처럼 품고
- 권리를 행사할 때 오른손에 낌(렘32:10)
- 끈에 매달아 가슴까지(창38:18)
- 여호야긴 “내∼인장반지”(렘22:24)
- 도장은 자신의 모든 소유물과 같음
- “나를 도장같이 품고‥팔에 두라”
- “결혼 10년 이혼 앞 둔 부부” 귤 얘기
- 한 번 살고 가는 인생을 소중히 여기라
- 힘겹게 살아 온 남편 마음 둘 곳 없다
- 요구받는 의무들만 있고 힘은 없다
- 부부: 무한 용납의 관계-사랑의 힘이 필요함
- 당신 남편이 생각보다 사랑할지도
- “실명한 아내 돌본 남편 이야기”
- 고생 속에 함께 사랑했던 날 기억함
-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신 사랑
- 교회와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라
B. 죽음 같은 사랑
- “사랑은 죽음‥질투는 스올 같이”
- 질투 qinah: 열애 “열성”(시69:9)
- “강하고∼잔혹하고”⇒만족 없음
- 저항할 수 없는 죽음의 엄정함과 힘
- 죽음과 seol 엄정함 아무도 못 이김
- 사랑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
-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사랑의 감정
- 사랑은 영원한 생명의 모상이기에
- 순간을 살아도 영원에 잇대어 산다
- 사랑받아도 죽음이 두려울 수 있다
- but, 사랑하는 사람은 두렵지 않다
- 결점과 상황 극복할 수 없어 보일 때
- 사실이 아니라 사랑이 고갈된 것임
-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III. 적용과 결론
- 완전한 성인과 결혼하지 않았다
- 죄인으로서 다른 죄인과 결혼했다
- 우리 서로 달라도 불쌍히 여기라
-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사랑하자
- 내 예수 사랑의 첫 수혜자가 되게 하자
- 서로 도장같이 맘에 품고 팔에 두자
가정과 가족 2
가정과 가족 1 (2016.5.1 주일오전설교)
가정과 가족 2 (2016.5.8 주일오전설교)
가정과 가족 3 (2016.5.15 주일오전설교)
가정과 가족 4 (2016.5.22 주일오전설교)
가정과 가족 5 (2016.5.29 주일오전설교)
가정과 가족 6 (2016.5.29 주일오전)
가정과 가족 7 (2016.6.5 주일오전설교)
네 자녀를 사랑하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어린이 주일입니다. 늘 어린이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만 특별히 이 주간은 자라나는 어린이들과 또 자신의 자녀들에 대해서 우리 어른과 부모들이 올바르게 대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반성하는 주간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 앞에 놓인 이 성경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 옥에 갇혀서 순교하기 2년 내지 5년 전쯤 남긴 생애 말기의 편지입니다. 이 편지에서는 크게 두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이고 또 하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과 온 인류를 화목 시키기 위해서 오신 중보자 예수그리스도의 하신 일과 계획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 일을 이 열방에 성취하기 위해서 주님이 세우신 교회를 가르칩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께 한 사람 한 사람 접붙여져 이루어진 영적인 몸이며, 이 몸은 모든 열방을 향하여 확장되어서 그들도 주님의 몸이 되게 할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세워진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는 이 성경 마지막 뒷부분에 와서 이제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서 빛이 되어야 할지를 가르치는 가운데 특별히 가정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도 매우 큰 도시들 중 하나였고, 지금도 그 유적지를 보면 정말 놀라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도시입니다. 그 도시는 그렇지만 영적으로 정신적으로는 죽어있는 도시였으니 미신과 이단, 헛된 철학과 주술이 유행하던 도시였습니다. 그런 도시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는 것은 선교를 위해서도 그들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II. 자녀를 기르는 길
A. 노엽게 말라
그러면서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자녀를 기르는 길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길을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하나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또’라는 말씀은 이 자녀를 향한 부모의 의무가 부모를 향한 자식의 의무인 공경과 효도와 똑같은 수평의 관계에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에게 공경하지 않는 것은 큰 흠이 되지만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하지 않는 것은 큰 흠이 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많은 아이들을 학대하고 심지어는 살해한 부모의 이야기들이 매일매일 신문에 꼬리를 잇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식이 부모를 살해했다는 이야기보다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이 자체가 매우 잘못된 사고방식임을 성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은 부모가 자녀를 기르면서 노엽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자녀를 올바른 사람으로 만들고 교육하기 위해서는 책망과 징계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책망과 징계는 충분한 사랑의 관계가 있을 때에 그 의도한 결과를 열매로 거둘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맺게 해주는 첫 번째 관계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가 낳은 그 인간을 진실로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람 사람마다 흙으로 창조하지 않고 그의 부모의 살과 피를 받아서 이 세상에 창조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눈으로 아이들을 보면 그 아이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 몸에서 내 살과 피를 받아서 태어난 자식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본래에 주신 본성은 이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새끼를 낳았을 때에 그 자식을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의 형상을 닮아서 태어난 자기의 아이조차도 사랑하지 못하는 심각하게 망가진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하나님 사랑의 흔적이 가장 강력하게 남아있는 것이 바로 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만약에 이 자식과 부모 사이에 충분한 사랑이 없다면 책망과 징계가 그 아이를 사람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앙케이트 조사를 했더니 첫 번째 가장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좋아하는 단어 1위로 오른 것이 ‘엄마’입니다. 사랑, 열정, 꿈, 이런 것들은 후순위고 엄마가 1위입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인간의 종류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이 부모, 특히 엄마는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이요, 그리고 쉼터입니다. 오늘 부모가 모두 자녀를 노엽게 할 가능성이 있는데 아비에게 특별히 경고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엄마도 자식을 향해서 수시로 노합니다. 그러나 그 노는 깊지 못합니다. 아이를 기본적으로 이 엄마는 아빠보다 살갑게 사랑합니다. 자기 뱃속에서 몸의 일부로서 아홉 달 보름동안이나 있다가 그 살과 피를 다 받아서 이 뱃속에서 아이와 함께 기쁨과 고락을 함께 하다가 몸을 찢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그 아이를 태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이 엄마의 사랑은 아이와 결탁되어 있습니다. 그 인간의 자식을 향한 그 깊고 애달픈 본성이 그 엄마의 마음 안에 있기 때문에 아이에게 가끔 노한 마음을 가져도 엄마는 본성적으로 금방 금방 풀어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에게조차 남겨주신 천륜의 정입니다. 이것을 끊고 돌아선다, 자식을 버린다, 혹은 죽도록 때린다, 아니면 그 자식과의 관계를 단절한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엄마의 마음에 그 힘찬 인간의 본성을 거스리는 어마어마한 죄와 혹은 잘못된 생각의 성향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조상들이 예로부터 자식을 버리면 인간도 아니다 라고 이야기 했던 것이 그것이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힘이 그 부모의 마음속에 악하게 작용하지 않는 한 천성으로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조상들도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 그런데 이러한 사랑이 자식을 향하여 언제나 충만하게 있어야지만 자녀를 향한 징계나 책망이 자녀를 노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힘과 권력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그에게 어떠한 힘과 권력도 없기 때문에 부모의 슬하에서 부모의 힘과 권력의 보호를 받으며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갑니다. 모든 자기의 삶에 필요한 자원을 부모로부터 공급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거나 혹은 언어의 폭압적인 영향을 끼치면 자식들은 그것을 그대로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녀들에게 영원히 계속될 운명과 같은 상처를 남겨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뿐만 아니라 모든 가족의 한없는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그 따뜻한 그런 애정 속에서 그 아이가 자라야지만 참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라는 이름은 그 모든 명사 중에 가장 누구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첫 번째 1위에 올랐으나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이름은 72위였답니다. 그러니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 가슴 속에 사실 아빠는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사람입니다. 시간적으로 아이와 함께 있을 시간을 갖는 것이 사회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이따금 만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그 자식은 자기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오래간만에 만나는 그 짧은 시간에도 이 자식을 바꿔놓고자 하는 강한 아빠의 욕구가 작동합니다. 그래서 잔소리를 하거나 책망을 해서 관계를 더욱 깨뜨리는 것입니다.
자녀를 향한 빗나간 욕망 그리고 자녀의 역량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과도한 목표에 대한 기대, 그리고 작은 허물에도 마음에 실망과 복수심으로 끓는 지나친 징계, 더 나쁜 것은 그 자녀를 향해 아예 관심을 끊는 무관심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부모가 자식에게 행할 때 자식은 힘과 권력이 없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그런 폭압을 그대로 당하여야 하는데 이것은 감수성이 예민하고 어린 마음속에 마치 부드러운 진흙위에 찍혀진 발자국처럼 그렇게 상처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그 부모가 죽은 뒤에도 일생 마지막 눈을 감고 흙속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그렇게 남겨진 자신의 마음의 상처 속에서 이 세상에서 바라보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과 더불어 마지막 죽을 때까지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지워주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자녀 사랑의 출발은 인간에 대한 관점부터 시작됩니다. 인간은 누구인가, 그는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도 함부로 그 형상을 짓밟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욕설과 그리고 비굴한 행동, 그리고 폭압과 무력, 이런 모든 것으로 한 사람을 짓밟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루한 인간이라도 그는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이니 아직 어린 아이로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의 자녀들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은 얼마나 소중합니까? 더욱이 그 아이는 하나님의 형상만 가진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우리의 형상을 가지고 있고 정신적으로도 우리의 기질과 성향을 닮아서 정신적으로도 우리의 형상을 꼭 닮은 사람입니다. 그 아이를 깊이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올바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며, 그렇게 충분한 사랑 속에서 참 사람으로 자라도록 우리에게 맡겨준 자녀들에게 함부로 대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제가 설교 시간에 제가 자녀를 때리지 말라고 설교를 했더니 어느 설교 청취자에게 항의의 편지가 왔습니다. “잠언에 보면 회초리를 차마 대지 못하면 아이를 망치느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당신의 설교는 성경 말씀에 어긋났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나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아이를 때려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말을 설교 속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오히려 자녀들에 대한 징계나 혹은 그 아이를 회초리질 하는 것이 그 자체가 사람을 바꿔놓을 수 없고 그것을 바꾸어 놓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충분한 사랑이 있을 때에 자녀를 향한 책망과 징계는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죄에 대한 무서운 설교를 듣습니다. 그때에 큰 두려움이 임합니다. 내가 이대로 살다가 혹은 옛날에 짓고 있는, 앞으로 지으려고 하는 이런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큰 벌을 내리시는구나 하는 큰 충격적인 두려움에 붙잡히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하던 죄에 대해서 멈칫하게 되고 그것을 버릴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율법적 회개라고 부릅니다. 율법적 회개는 아직 자기 사랑에서 못 벗어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하고 죄를 그만두는 이유는 그렇게 그 죄를 계속 짓다가 당하게 될 큰 벌이 그 죄를 지음으로 느끼는 즐거움보다 크다는 무서움 때문에 죄를 그만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와의 영원한 결별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결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참된 신자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어느 순간에 우리가 죄에 대한 무서움보다도 더 커다란 것이 우리의 마음에 다가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지으려고 하는 이 죄를 위해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흠 없는 그 분이 나의 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죽으셨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에 나는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 나의 이익을 위하여 짓는 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살을 찢으시고 피를 쏟으시며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는데 이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내가 하려 하다니 하면서 가슴을 치며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복음적 회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그러므로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이 없이 아이들을 매질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이고 더욱이 그 아이에 대한 미움에서 아이를 때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중대한 반역입니다. 그 아이는 내 몸에서 태어났으나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속에 있었고, 하나님이 그 아이를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셔서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시는 것이 그 아이가 없는 것보다 더 기쁘셨기 때문에 그 아이를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부모의 충분한 사랑을 받으며 모든 사회로부터 공정하게 참 사람으로 자랄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고 사람다운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국가도 약탈할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신 천부의 권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권리를 가장 존중해 주도록 자신의 몸을 버려서라도 이 아이를 사랑하고 보호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부모인 것입니다. 그래서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은 단지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를 충분히 사랑함으로 그 아이가 그 부모와의 사랑 속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며 참 사람으로 자라도록 돌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나는 부모에게 불효한 것을 가슴 아파하며 가슴을 쥐어뜯으며 회개하는 자식들도 거의 못 만났지만 자식에게 함부로 대했기 때문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부모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불세출의 선지자 세례 요한을 이 세상에 보내셨을 때 주님이 한탄하셨던 그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선지자 요한이 이 세상에 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인 여러분,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 가운데는 신천지에서 오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내가 오늘 그분들에게 말합니다. 5월 달 설교를 깊이 들으십시오. 여기에는 여러분이 반대할 교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반드시 여러분 회심하고 참된 신앙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옆에서 설교 시간에 고개를 떨구거나 반감을 가지고 설교자를 쳐다보거나 혹은 일부러 눈을 감거나, 설교시간에 일어나는 사람들을 붙드셔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타일러야 합니다. 그리고 동물 보듯이 무서워하지 말고 이들도 이단에 빠졌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도 새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올 기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붙들어 주어야 됩니다. 그리고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여러분이 정통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내버려두는 것은 영혼에 대한 말하자면 폭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타일러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단이시죠?’ 이렇게 물어보지 마십시오.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난 우리 교회에서 최초로 그분들이 대거 회심했다는 간증을 듣고 싶습니다. 깊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26년을 불교만 믿으신 분도 첫 번째 참석해서 회심했다는데 여러분도 그럴 수 있습니다.
자녀는 사랑받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만약에 사랑이 없다면 나는 그 부모에게 꽃으로도 자기의 아이를 때리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어린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는 세계의 전부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해 주지 않으면 그 아이들은 세상을 잃어버린 망가진 인간이 될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양육하라
두 번째 성경이 제시하는 길은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양육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굳게 세운다는 것입니다. 다시 정원 공사를 했습니다. 차를 한 7대 정도 더 댈 수 있는데 이것을 할까 말까 했는데 그 칼빈 파크를 그리워하는 교인들이 너무 많고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하는 이야기도 들렸습니다. ‘야 여기 지나갈 때 여기 정말 예뻤는데 야 이제는 돌멩이 밖에 안 남았구나. 참 황량하다.’ 그래서 이제 떠 옮겼던 칼빈 파크의 나무들을 옮겨 심었다가 다시 데리고 왔습니다. 몇 개는 죽고 이제 일부분 데리고 왔는데 다시 심어 놓으니까 그 2년 동안에 얼마나 많이 컸는지 모릅니다. 가면서 그 나무를 보는데 반가워서 눈물이 나오더라구요. 14년 전에 교회가 올 때에 그때 심은 나무였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2년 동안 이사 갔다가 다시 왔는데 뭐 눈물까지는 아니지만 가슴이 뭉클하더라구요 보던 모습들이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 나무를 세우고 옆에다가 나무들을 받쳐 놓습니다. 그리고 아주 잘 돌보아야 합니다. 영양분도 주고 잘 돌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땅에서 2년 동안 살다가 다시 집에 돌아왔는데 아직 적응이 안 되었습니다. 잘 적응이 되어서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잘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양육입니다. 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자녀들이 뿌리를 내리고 든든히 서서 홀로 영양분을 빨아올려 성장하는 나무가 되기까지 그렇게 굳게 세워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양육이라고 부릅니다.
1. 주의 교훈으로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것을 두 가지 방식으로 하라고 가르칩니다. 첫째는 ‘주의 교훈’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희랍어 단어가 매우 어려운데 이것의 좋은 번역은 킹제임스 버전에 ‘영양’이라고 혹은 ‘양분’, 영어로 ‘nature’라고 번역한 것이 최고의 번역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제 자녀를 양육할 때 주의 영양으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에 엄마가 죽거나,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가거나, 혹은 엄마의 젖이 안 나오는 아이들은 할머니들이 그 아이를 데리고 온 동네를 다니면서 다른 엄마들의 젖을 얻어 먹였습니다. 그것을 젖동냥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키웁니다. 그런데 그나마 없는 아이들은 밥을 끓일 때 미음을 퍼서 아이들에게 먹이는데 꼭 필요한 시기에 영양분이 안 들어가니까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체구가 무척 작습니다. 북한에 있는 젊은이들의 키가 작은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주 작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그 후에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절대로 그렇게 부모의 젖을 충분히 먹고 영양을 공급 받으며 자랐던 아이들과 육체적인 조건이 같지를 않습니다. 그와 똑같이 자녀들에게 어린 시절에 특별한 시기에 아주 영양 공급이 매우 중요합니다. 좋은 식품을 영양가 있게 골고루 아이에게 충분히 먹여서 육체적으로 발달하게 도와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한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발육이 계속 되는 동안에 계속 그렇게 공급을 해주어야 합니다.
똑같은 일이 필요한데 그것이 뭐냐 하면 그의 정신을 그렇게 살찌게 만들어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단지 신앙 교육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자기와 다른 세계를 충분히 느끼고, 그 다음에 아름다운 것을 충분히 접하고 그래서 문학과 예술, 사회, 모든 것들, 역사 이런 것들을 접하면서 정신적으로 많은 것을 느껴서 정신적으로 영양분이 풍부한 사람이 될 때에 풍부한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부모들은 그 아이에게 그러한 문화와 문학, 예술, 이런 것들을 접해주어야 됩니다. 자신은 너무 가난하고 힘들게 자라서 그런 혜택을 못 받았을지라도 자녀에게는 그런 것을 접하게 만들어 주어서 그래서 충분히 그런 것을 접하는 가운데 자신의 소질을 개발해 나가고 인간에 대해서 폭넓은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위에 더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서 영적인 영양분을 충분하게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영적으로 충분히 성숙한 가운데 자기의 정신과 육체를 통제할 수 있는 신앙의 사람으로 길러주는 것이 바로 주의 영양으로 아이를 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자녀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영양 상태는 어떻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자녀들과 도저히 소통하지 않는 신앙의 엄격함 하나로 자녀들이 자신의 기대대로 자라지 못할 때 미워하거나 심지어 그 자녀를 마치 자신의 신앙의 적수인 것처럼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부모의 도리가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충분한 섭취 없이는 누구도 종교적인 엄격함 하나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길러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변화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 자신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길러낼 수가 있겠습니까? 먼저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으로 강한 사람이 되고 그 안의 은혜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될 때에만 자신의 자녀들을 그런 주님의 자녀로 기를 수 있을 테이니 여러분은 반드시 주님의 말씀으로 자녀들을 기르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2. 주의 훈계로써
마지막 두 번째는 훈계로서 자녀를 양육하는 것입니다. 이 훈계는 교훈 혹은 지침, 혹은 책망 등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주의 교훈으로 자녀를 기르는 것이 지성을 깨우쳐 감화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면 훈계는 자녀에게 의무를 일깨워 의지를 분발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들을 훈계할 때에는 두 가지가 요구되는데 자신이 먼저 자녀에게 기대하는 삶을 살아내고 최소한 그렇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진실한 부모이어야 하고 두 번째는 자녀를 향한 충분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자녀를 훈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책망보다 큰 자녀의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징계하되 너무 자주 징계해서 그 징계가 자녀의 마음을 찌그러지게 만들거나 혹은 그 자녀의 마음에 상처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따가운 채찍을 경험할 때에는 그래서 그 채찍이 우리의 인생을 바꿔 놓을 때에는 항상 우리는 채찍이 아프기 때문에 운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고 버리지 아니하시고 나를 깨우치셔서 사랑의 길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울었습니다. 회초리보다는 자녀의 마음에 경건한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신앙을 불어주어야 합니다. 자녀가 정말 신앙 있으면 때리는 회초리로 상하는 자신의 종아리의 아픔보다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지 못했기 때문에 육신의 아비를 저렇게 마음 아프게 했으니 이 아파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아픔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잘못을 다루시는 방법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자식을 다루는 것처럼 다루지를 않고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릴 때에는 언제나 사랑으로 우리를 다스렸다는 것입니다. 아마 2년에 한번 정도는 빼놓지 않고 하는 간증이 어떤 분들은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 이 설교를 나의 간증으로 마치고자 합니다. 결혼 7년 만에 아이를 낳았고 나는 이 아이를 향해 엄청난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기대대로 아이는 잘 자랐고 그리고 영특했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가서도 늘 100점이었습니다. 언제부터 이 아이가 기대에 차지 않기 시작했고, 그땐 우리가 이 교회를 개척하고 부부가 정신없이 사역에 헌신할 때였습니다. 가끔 아이에게 회초리를 들어서 징계를 하였고, 정말 그때에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면 아이에 대한 사랑보다는 마음속에 실망한 마음이 징계를 하게 하였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누구에게 충고를 받았던 것도 아닌데 차를 타고 오는 어느 순간 성령께서 내 마음에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야, 네 자식도 너에게는 자식이고 너도 나에게는 새끼인데 네가 네 자식을 다루는 것은 내가 너를 다루는 것과 좀 다르지 않은지 생각해 보라.’ 그러고 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고, 급기야 저는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차를 길가에 세워놓고 운전대에 엎드려서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자식도 나에게 모자랐고, 나도 우리 아버지인 하나님께 모자랐는데 나는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녀를 어떻게 사랑하고 책망하는 것을 조화를 이루어야 되는지를 경험을 못했습니다. 부모하고 산 세월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랬는데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뜨겁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정말 무서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부드러운 음성이었습니다. ‘너도 내 자식인데 네가 잘못하고 내 기대에 어긋났을 때 내가 너를 어떻게 했는지 생각하라’ 언제나 주님은 어느 한 순간에도 ‘야, 이 자식아 내가 그렇게 많이 베풀어 줬는데 이것밖에 못하니 넌 진짜 실망이구나. 너와 내 관계는 끝났다.’ 그리고 나를 버려두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부모들도 하지 못했던 인내심으로 기다시시면서 내가 사람 되기를 하나님이 기다리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막 혼내는 것 같은데 나는 오히려 하나님이 웃으시면서 기다리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너무 많이 망가진 사람으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마치 좋은 가정에서 자라는 사람들은 100m를 30m에서 뛰고 나는 -20m에서 뛰는 것처럼 하나님은 나를 많이 봐주셨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매순간 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사랑하시고 가정에서의 많은 아픔과 후회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성품을 새롭게 깨닫는 계기가 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날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자녀 교육을 위해서 회심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이제 것까지 나는 자녀들에게 한 차례도 때리지 않았고, 큰 소리로 아이들을 야단치거나 비난을 퍼부은 적이 없습니다. 사랑만 해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자녀가 사랑하기 항상 쉬운 존재는 아닙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우스갯소리로 맨날 자기 자식들보고 “저 놈의 웬수”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자녀 사랑이 어려울 때일수록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자기의 자녀인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간절히 부모의 사랑을 바랬던 것처럼 그러나 실망했던 것처럼 자녀들도 우리의 사랑을 절실하게 바라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부모가 우리의 그 사랑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해서 우리에게 상처와 아픔을 남겼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그런 자녀가 되지 않도록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아이는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지 안 사랑하는지를 보기 위해서 자녀를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그 아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아름답기 때문에 영원 전에 선택하셔서 우리 몸을 빌려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그 아이를 눈물로 깊이 사랑하는 부모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고, 기뻐하고, 그리고 즐거워하기에도 우리의 인생은 짧습니다. 그 아이를 깊이 사랑하고 좋은 것은 아이에게 다 주고 나쁜 것은 짊어지는 부모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아이가 주님의 사람으로 잘 자라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할 주님의 훌륭한 일꾼이 될 것을 믿으면서 그 아이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그 아이를 위해 참고, 그 아이를 사랑해 주는 여러분의 수고는 하나님께 올려지는 향기로운 꽃다발이 될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 흘린 눈물은 천국에서 면류관에 달린 보석이 될 것이고 그 아이를 기뻐하면서 흘린 눈물은 그 면류관 위에 매달린 꽃잎들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이 하나님의 형상은 살아 숨 쉬는 동안에 뜨겁게 사랑해서 먼 세월이 흐른 후에 그 자녀들이 인생의 곤고한 시기를 만날 때에 엄마, 그리고 아빠라고 부를 때 그 가슴이 따뜻해져서 그 엄마, 아빠의 이름을 부르고 회상하고 난 후에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의 시련들을 극복할 힘과 용기를 얻는 사람들이 되도록 그런 부모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남편과 아내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 3:1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가 가정에 주는 권면 중 첫 번째 교훈입니다.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토대로 이하의 가족의 관계 안에서의 질서가 수립됩니다.
II. 아내와 남편의 관계
A. 남자와 여자를 만드심
그러면 오늘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에 먼저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어떤지를 성경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남녀 모두를 흙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남자 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히브리어로 ‘아파르’라고 하는 이 단어는 티끌을 의미합니다. 티끌 혹은 먼지를 가리키는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가장 하찮은 것으로 사람을 지으셔서 모든 만물 중에 가장 영광스러운 존귀한 존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후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영혼을 창조하셔서 육체와 영혼이 만나 살아있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자원들을 필요로 합니다. 육체는 하나님이 주신 물질의 자원들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고 건강을 지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이제 육체뿐 아니라 정신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학문과 도덕,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한 지식 같은 것들이 예술, 문학 이런 것들과 함께 정신의 자양분이 될 때에 사람다운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양식인데 그 영혼의 양식은 바로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영혼이 하나님을 찾아감으로써 정신들이 그 영혼의 기능에 복종하고 육체로서 이 모든 사물들을 어떻게 질서지우며 올바르게 살아갈지에 대한 판단력을 갖게 됩니다.
B. 서로의 필요를 채워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을 지으실 때에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 그 형상대로 창조된 것은 남자나 여자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여자가 아니면 온전해질 수 없는 남자, 남자가 아니면 완전해질 수 없는 여자로 창조하셨으니 이것은 바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각기 다른 개체로 창조하셨습니다. 사람마다 각각 그 성격과 인간성이 다릅니다. 그러나 크게 보면 남자와 여자에게 보편적으로 다른 성향을 주셔서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계획을 이루어가게 하셨습니다. 남자에게는 개척과 도전, 모험, 변화를 좋아하는 정신을 주셔서 아직까지 개척하지 않은 세계를 정복하고 뻗어나가게 만들어 주셨다면, 여자에게는 그러한 모험과 그리고 도전보다는 이미 있는 것들을 잘 질서지우고 그것들을 돌보고 가꾸어서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성향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이 세계를 다스리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남녀는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처음부터 서로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그렇게 해서 서로에게 도움을 받으며 온전한 인간성을 이루어가도록 남자와 여자로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다른 것들과 함께 어울리는 조화 속에서 사회를 이루어 가게 하셨고, 그 사회가 확장되어서 가정보다 더 큰 사회가 세상이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다름이 바로 사회를 온전하게 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아름다운 질서를 더해주기 위한 것이었음은 논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자 이런 서로 다른 것은 갈등의 원인이 되었고, 그렇게 해서 타락한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이 조화를 이루며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창조하신 한 몸의 관계를 파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똑같이 흙으로 짓지를 않으시고 하나는 흙으로 지으시고, 또 한 사람은 그 지으신 사람의 신체의 한 부분을 취하여 여자로 만드신 것은 남녀 간의 우월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성은 달라도 한 몸임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몸이 하나같이 우리의 몸을 사랑하듯이 동일하게 그렇게 남자와 여자가 한 가정을 이루어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 존재임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남편으로 짓밟힘을 당하도록 남편의 발의 뼈가 아니라, 남편을 지배하도록 머리의 뼈가 아니라, 남편의 보호를 받도록 품 가까운 곳에서 사랑을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서 여자를 지으셔서 둘을 한 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을 아담과 하와는 온전히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고,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끊어지자 마치 전원이 나간 모든 전열 기구처럼 남편과 아내 속에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살아갈 사랑의 힘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러면서 가정생활의 부조화가 오게 되었고,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같았던 아내는 함께 하기에 너무 싫은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 때문에 오히려 남편의 지배를 받고 남편에게 정복당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런 속에서 인류의 역사는 성의 깊은 갈등 속에서 존재해 왔고, 결국 남성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힘에 의해서 여성들을 지배하고 심지어는 착취하는 구조들을 만들어 내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남녀성의 평등주의를 가르치고 있고, 여기에서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는 이것은 위계적인 질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능적인 질서입니다. 그렇게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가정을 이끌어 가는 질서들을 세워 나가는데 있어서 남성을 사용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류를 지으신 계획들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III. 남편에 대한 아내의 덕목
그러면 오늘 성경이 남편에 대한 아내의 덕목을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고 말입니다. 복종하라 라고 하는 이 단어는 희랍어로 ‘휘포 타쏘’인데 ‘아래’라는 ‘휘포’와 ‘둔다’라고 하는 ‘타쏘’가 합쳐진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내는 남편 아래에 배치되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위계적인 질서가 아니라 기능적인 질서입니다.
A. “복종한다”는 의미
그래서 여기에서 ‘복종한다’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힘의 우위, 권력의 상위 구조로 인해서 억압받고 짓밟히는 구조 속에서 세워지는 그러한 가정의 질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가정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할지, 어떤 아빠가 되어야 할지를 온전히 교육 받지 못하는 가운데 아이들이 성장하고, 그래서 남성을 만나고 여성을 만나서도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가정이라는 사회를 형성해야 될지에 대해서 적절한 견해를 갖지 못합니다. 이런 속에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처럼 가정에서도 기가 세거나 권력이 있거나 힘이 있거나 혹은 물질적인 권한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을 지배하고 그렇게 해서 서로를 복종하고 복종시키는 관계가 되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이 그리는 가정의 질서가 아닙니다. 성경이 그리는 가정의 질서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 속에서 둘이 함께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주님이 가정을 세우신 질서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정에서 그 엄마 아빠가 서로 한 인간으로서 서로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진심으로 아끼고, 진심으로 사람에게 예의를 표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인간이 단지 권력이 있고 돈이 있고 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하찮게 여길 권한이 없다는 것을 부모를 통해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폭압과 강제, 그리고 권력과 힘에 의한 지배, 이런 것들이 아니라 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존엄한 존재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인식,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깊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인류에 대한 인식, 여기에서 비롯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에 대한 예의, 이런 것들 속에서 사랑이 꽃 피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성경이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아내가 남편에게 기계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성경 구절은 남편에게 아내를 억압하고 그리고 폭압적으로 대할 수 있는 면허증을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여기에서 상정하는 남편은 성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힘과 자본, 권력 등으로 다른 사람들을 짓밟고 그들의 우위에 서는 세상적인 가치관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입니다. 폭압과 강제가 아닌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눈뜬 하나님을 경외하는 남편입니다. 그런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서에 보면 때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남편,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실제로 구원 받지 못한 남편을 염두에 둔 것처럼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하며 아내의 착한 행실을 통해 그 남편의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결국 이것은 무력에 의한 굴복이 아니라 인격적인 복종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인격적인 깊은 존중, 서로를 향한 진실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복종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남편에게는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하고 아내에게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피차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복종시키고 남편이 아내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정을 향한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심리적인 배려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사람 안에 있는 진실한 소속감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여러분이 직장 생활하거나 사회생활하면서도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터득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동안, 기간 동안 직장을 다니거나 사업을 하거나 혹은 교회 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인데도 그렇게 잠깐 잠깐 생활을 함께 하는데도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데 한 인간이 사람을 만나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맨 처음 보면 가정생활에서 많은 답이 나옵니다.
예전에는 대가족 사회였습니다. 많은 가족들이 함께 섞여 삽니다. 그래서 보면 엄마 아빠도 성격이 똑같지 않습니다. 그 위에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있을 때에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 고모 삼촌하고 같이 있을 때에는 이것은 완전히 집안이 총 천연색입니다. 그런데도 함께 섞이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애들이 태어나서 철들자마자 배우는 게 뭐냐 하면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먼저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평하지 않은 때도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자기가 어렸을 때에는 야단을 치면서 ‘너는 나이도 어린데 왜 형한테 그렇게 대드냐?’ 그러고 야단을 맞았는데 좀 크고 나니까 ‘너는 다 컸는데 동생한데 왜 그러냐?’ 그러고 야단을 맞습니다. 그러면서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해석하고 극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자기만 경험하는 게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이 다 경험을 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이 인간, 저 인간하고 부딪치면서 집안에서 이미 사회의 축소판을 충분히 경험합니다. 그러니까 가서 부딪치며 살아봐도 괜찮은 것입니다.
제가 첫 번째 사역하던 교회에 횟수로 8년을 있었는데 하여튼 진짜 유별난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떠나면서 두 가지의 자신이 있었습니다. 나는 어떤 까다로운 담임 목사를 만나도 부교역자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다. 두 번째 아무리 가난해도 나는 견딜 수 있다 그거였습니다. 훈련은 우리를 굉장히 많이 발전시킵니다. 그런데 지금은 훈련이 안됩니다. 한 가정에 태어나서 조용히 친구들하고 안 어울리고 스마트폰이나 보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결혼이라는 현실에 딱 내몰리면서 어떤 사람하고 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가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안 하고 사는 사람들은 일찍 죽는답니다. 그래서 생명 보험회사에서 독신들은 보험의 상당한 유리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평균 결혼 안한 남성은 5년 빨리 죽는답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그런데 결혼한 사람들 중에는 죽고 싶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판단력의 결핍 때문에 결혼을 하고, 인내력의 결핍 때문에 이혼을 하고, 기억력의 결핍 때문에 재혼을 한다고 합니다. 그게 훈련이 안되어 있는 것입니다. 굉장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항상 결혼을 어떻게 생각해야 되냐 하면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이 결혼이 자기를 완성해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한 방법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평생 자기를 완성 못하겠네요.’ 완성 못합니다. 완성 못하고요. 제가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결혼을 해 보면 유인원이 된 것이고, 자식을 둘 낳으면 이제 사람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완성의 기회가 없겠네요.’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좀 더 살아보면 독신으로 살면서도 감당해야 할 시련이 많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기 스스로와 싸우면서 또 온전한 인간이 되어갈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는 서로를 부딪치면서 완성해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도 있고, 혼자 살아가면서 부딪치면서 사람이 되어가게 하는 경륜도 있으니 각자 하나님의 받은 은사대로 살 것이고, 결혼을 했다고 해서 너무 우월감을 느끼지 마십시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못했다고 해서 열등감을 느끼지도 마시고 그저 여러분은 남들보다 판단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아직 결혼을 안 하신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것 속에서 정말 하나님께서 결혼이라고 하는 이 과정, 넓게 보면 한 인간으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나라는 인간을 완성해 가시는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결혼과 함께 굉장히 이것 자체가 어떤 주어진 행복을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무엇인가 자기를 끊임없이 완성해 가기 위해서 자신과 싸우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교역자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 다 떠났습니다. 노총각이 되어서 장가를 못가고 있었는데 연애를 시작을 했습니다. 드디어 선을 보고 장가를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좋아서 어쩔 줄 모릅니다. 그래서 조용히 불러서 이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야 아무개야?’ ‘네’ ‘좋아?’ 그러니까 ‘예. 좋죠.’ ‘그런데 잘 들어라. 결혼을 하고 좀 살다가 보면 무서운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거다. 무슨 무서운 생각이냐 하면 가슴이 턱 막히고 앞이 캄캄해지면서 이 여자하고 어떻게 일생을 사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을 거다. 그게 네가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 가까운 거다.’ 그랬더니 ‘어이, 목사님 왜 그래요. 나는 지금 기분 좋은데 깨뜨리지 마세요.’ 그러더니 갔습니다. 신혼여행 갔다가 왔습니다. ‘목사님 경험했어요.’ ‘뭘’ 그러니까 ‘그 캄캄한 밤이요’ ‘왜?’ 신혼여행을 가서 3일째가 됐는데 자매가 팍 하고 성질이 솟구치더랍니다. 그런데 그 기가 얼마나 센지 그 친구도 결코 만만한 친구가 아니고 자기 맘대로 하는 친구인데 오랜 내공으로 다져진 그 기가 그 자매에게서 쫙 뻗치니까 벌써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도저히 자기 같은 이런 존재의 울림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에 콱 눌리는데 자기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때에 앞이 캄캄해지면서 식은땀이 나면서 이게 일주일이나 한 달이 아니라 일평생을 죽을 때까지 이 여자하고 살아야 되다니 그러면서 확 밀려오더랍니다. ‘야, 너는 정말 빠르구나. 어떻게 며칠 사이에 경험 하냐?’ 월요일마다 전도사님 목사님들이 모여서 공부를 합니다. 결혼한 지 일주일 됐습니다. ‘그래. 장가를 가니까 행복해?’ 그러니까 ‘네’ 6개월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 선배로서 장가간 지 6개월 된 그대는 어때? 행복해?’ 그러니까 가만히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아이 낳고 1년 반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선배. 1년 반 된 그대는 어때? 장가가니까 행복해?’ 고개를 툭 숙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며 살았다면 존경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사업가로써의 성공은 경제계의 박수를 받음으로 입증될 지도 모르고, 또 한 권력자로써의 성공은 정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음으로서 입증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 참 성공한 삶은 대중의 수만 명의 박수에 의해 입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이서 그의 삶을 모두 지켜본 한 사람의 박수에 의해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한 남편이 인정해 주면, 한 아내가 인정해 주면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결국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서 일생을 사는 것은 아주 무거운 십자가를 진 길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도 처음부터 잘 맞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연애 기간하는 동안에는 인식과 해석의 오류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감정에 눈이 어두워져서 안 맞는 것을 맞는 것처럼 그리고 나쁜 것을 좋은 것처럼, 그리고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좋아하는 것처럼 자꾸 해석이 되어서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의 감정을 계속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없으면 누구도 무모하게 이 사람하고 일생을 같이 하겠노라고 도장을 찍지 않습니다. 그래서 판단력의 결핍이 어떻게 보면 사랑의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자, 문제는 뭐냐 하면 둘이 아무리 뜨겁게 사랑해도 연애 시절의 불붙는 뜨거운 감정이 일생동안 계속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인생이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은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고, 감정을 출렁거립니다. 그때에 이 저변에 그 감정이 아주 불타오를 때나 약간 덜 타오를 때나 일관된 삶을 살아가게끔 만드는 것이 뭐냐 하면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있는 인격적인 신뢰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그 의존의 감정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제 복종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뭐냐 하면 여성은 남편이 자기만을 바라보지 않고 일에 몰두하고 또 다른 여성에게 눈길을 줌으로써 사랑과 신뢰의 마음에 금이 가지만 남자는 여성들에 의해서 존중받지 못한다고 생각될 때 그때에 인격적인 신뢰의 관계들이 천천히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 하면 평소에는 똑똑하고, 얼굴도 예쁘고, 사회적으로 능력도 있고, 그런 여성하고 결혼하기를 원하지만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계속 무시당하게 될 때에 그 보다 훨씬 못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존중해 주고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에게서 깊은 인격적인 신뢰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 역사를 움직인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는 외모나 나이 같은 것과 관련되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도 찰스 황태자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나폴레옹도 그랬고 중국의 많은 황제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8년, 9년, 심지어는 20년씩 차이나는 사람인데도 그런 권력자들이 아내와 여성에게 깊은 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뭐냐 하면 미모나 아니면 젊음이 해줄 수 없는 매우 특별한 어떤 정신적인 것들을 그 남성에게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순간의 불붙는 사랑의 감정은 외모나 그리고 사회적인 지위나 외적인 것들에 의해서 자극 되어서 생겨날지 모르지만 그러나 결혼 생활은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라 긴 세월동안 지속되어야 하는 마라톤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속에서 한 사람과의 관계를 온전히 하고 그런 관계가 서로 위로가 되는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자기가 그 여자에게 소속되어 있고, 그 여자가 자기에게 소속되어 있다고 하는 귀속의 감정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있어서 복종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수시로 아이들 앞에서 권위가 짓밟히고 사람으로서 존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것이 일상화된 남편이 단지 살림을 잘하고 희생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아내에게 저절로 사랑을 느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도리는 좋다는 것을 느낄지 모르지만 사랑은 그것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스러운 아내는 남편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특별한 이익이 없이 남편을 수시로 꺾고, 자기의 모든 지휘 아래 두려고 하는 이런 사람들에게서 남편이 깊은 사랑과 소속감을 느끼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 사람이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닌 한은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눈에 보이는 우리 남편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이 여러분보다 훨씬 뛰어난 지성을 가진 사람, 높은 신앙을 가진 사람, 그리고 탁월하게 지혜로운 사람, 그리고 탁월한 인격과 학식을 갖추고 사회적인 지위와 심지어는 그의 부모도 자기 부모보다 훨씬 더 뛰어난 부모를 가진 사람을 남편으로 두었다면 쉬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그럴 정도의 남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남편을 가지고 있어도 그 여자가 그런 남편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한 아내로서 하나님이 결혼 생활을 통해 그 여자를 사람으로 완성해 가는 과정, 성화를 통해서 진정한 인간으로써 빚어 가시는 과정 속에서 남편은 매우 중요한 하나의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항상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냥 단순하게 저 인간의 결정, 나의 장점, 혹은 의견의 충돌, 그리고 어떻게 해야 내가 저를 누를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결혼 생활이 한 사람의 인간성을 완성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더 큰 틀에서 봐야 합니다. 그리고 한번 오늘 저녁에 집에 가서 하나님이 저런 남자를 내 남편으로 두게 하셔서 내게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나쁜 것 말고 내가 하나님이라도 저런 남자를 짝 지워 주실 것이라는 이유를 찾아보십시오. 아마 집요하게 물으면 많은 이유들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에 도달하기를 여러분이 좋아할 것처럼 마음에 그리고 있는 남편을 만났더라면 여러분은 이만큼도 성화되지 않았을 거라는 은혜로운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B. 하나님 사랑으로 복종함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복종하되 그 위세와 힘, 권력에 눌린 것이 아니라 기계적인 복종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경륜을 알고 그리고 이 가정이 어떻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데 이바지하는가를 배우고 그 속에서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함께 인격적인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라고 부르신 부르심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어려울 때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저런 남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한 것을 기억하면서 자신에게 부족한 하나님의 사랑을 은혜로 채워 달라고 빌어야 합니다.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이것은 노예적인 복종이나 인간적인 아부가 아니고 더욱이 복종은 사랑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사랑해 주면 내가 그대에게 복종하리라, 혹은 복종하면 네가 사랑을 받으리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인격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질서와 우리를 향한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내는 가정의 질서에 대해 이해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부족해도 하나님이 남편을 통해서 그리고 부족한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게 하기 위해 가정을 세우신 것을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이고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낮은 자리에 자신을 둡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이야기는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 속에서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 누구든지 권력이 더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들을 굴복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젊음, 돈, 힘, 권세, 이런 모든 것들은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결국 마지막에는 관계만 남습니다. 정말 여러분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남편은 여러분을 그리워할까요? 여러 날 헤어져 있으면 여러분 보고 싶어 할까요? 생각이 날까요? 그리울까요? 보고 싶을까요? 말로 다 표현하지 않아도 아마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내가 남편이 되었는데도 이런 오랜 시간이 흘러도 아내가 그립지 않을까 이것은 남편이 하나님 앞에 해야 될 질문입니다. 아내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긴 세월을 살아왔는데 나는 남편에게 그리움이 되지 못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지금이라도 우리의 남은 일생이 정말 아름답고 사랑에 넘치는 인격적인 관계가 되어서 남편이 나를 그리워하고 보고 싶은 관계가 될까 라고 한번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입장을 바꿔서 만약에 여러분이 남편이라면 여러분 같은 아내를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고 사랑하는 것이 쉬울지 어려울지 한번 물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일은 하나님이 남편에게 명령하신 일을 아내가 권리처럼 생각하면서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명령하신 일을 남편이 권리처럼 여기면서 아내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다 접어야 됩니다. 그리고 아내와 남편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사람 된 것만큼 남편과 그리고 아내와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남편들에게 말합니다. 아내가 여러분을 깊이 존중하고 예의 바르게 대하고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어쩌다가 여러분은 성숙하지 못한 아내를 만나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존중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아내는 종종 가진 것이 없다고 직업이 뛰어나지 않다고 능력이 모자란다고 여러분 무시하는 적이 있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알고 존재 자체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아내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눈에 차지 않는 그 남편,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구속하신 사랑받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그 사람이 훌륭한 직업을 갖고, 높은 지위에 있고,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영광의 자리에 있을 때보다도 아내에 의해서도 존중을 받지 못하고 주님을 바라보며 살 때에 더 많은 사랑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행여나 그런 남편의 외모 때문에 외적인 이유 때문에 남편에 대한 존경과 배려, 사랑이 식었다면 여러분은 인간이 덜 된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녀로서 이 세상 사람과 다른 가치관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오히려 오늘 하나님께서는 아내인 여러분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세우신 질서이기 때문에 그러해야 합니다. 아주 사소한 일에 있어서 의견이 충돌될 때에는 남편이 자존감을 잃지 않도록 설복 하셔서 그렇게 극복을 하십시오. 직원들을 직장에 다닐 때나 교회에 와서나 교역자나 직원들을 다루어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까칠하게 자기 고집을 부리면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시키는 대로 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중요한 처세술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어떤 경우에도 사람들의 면전에서 그 사람을 무시하거나 맞서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와 어떤 관계를 가지면서 사는가 하는 삶의 그림은 자녀들에게 언제나 영화처럼 개봉됩니다. 그때 남편에게 예의를 갖추십시오. 존중하십시오. 그래서 아이들이 정말 아내가 남편을 함부로 대하기 때문에 애들이 아빠를 우습게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려서부터 터득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란 집안의 딸이 좋은 아내가 될 가능성이 낮을 것입니다. 그런 가정에서 보고 자란 아들이 좋은 아빠가 될 자존감을 갖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아내에 대해서 저렇게 남편에 대해서 공격적이고 우습게 여길 수 있는 성질을 여성들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피해의식 같은 것들을 공유하게 됩니다. 그것은 결코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들은 아내에게 많은 일들을 맡기고 아내 소신껏 하게 해야 합니다. 그 대신 아내는 남편들을 깊이 존중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약간은 경제적으로 이치에 닿지 않거나 혹은 논리가 좀 모자라도 남편이 그것을 원한다는 이유 때문에 가끔은 자신을 꺾을 수 있는 신앙의 여유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어봅시다. 아내들인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정말 최근에 남편이 남편의 말이기 때문에 자신은 원하지 않아도 자기를 꺾고 남편에게 승복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구해본 적이 있습니까?
IV. 적용과 결론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 안에서 피차 존중하고 복종하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오늘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라고 가르치면서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고 말합니다. 희랍어로 ‘아네켄’ ‘적합하다, 꼭 맞다. 어울리다’ 이런 뜻입니다.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질서를 따라 사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가정을 통한 최고의 존재적인 선교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당신을 만나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가정,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아내에게서 가장 존중 받고 있다고 하는 남편, 이런 사람들이 가정을 이루고 있는 한 많은 풍파에도 그 가정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깊이 가슴에 새기고 오늘 가기 전 남편과 맺힌 것을 풀고 가정의 질서로 다시 돌아가 복된 생활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네 부모를 사랑하라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 3:2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지금은 도시에서 보기 어려운 풍경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어릴 때에는 제비들이 처마 밑에 집을 짓는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사실 제비들이 그렇게 처마 밑에 집을 지으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물어오는 진흙이나 지푸라기들이 떨어지고, 또 참새들이 그 처마 밑에서 아래로 배설물을 떨어뜨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처마 끝에 제비가 집을 짓는 것을 좋아했고, 그리고 마치 선택받은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어쩌면 놀부와 흥부의 이야기에 나오는 박 씨의 사건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린 마음에도 그 제비들의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면 참 신기했습니다. 알을 낳고 그 알을 까고 나면 어느 날 아주 작은 새들의 우는 소리가 들렸고, 어미는 이제 바깥으로 나아가서 열심히 벌레를 잡아옵니다. 조용하던 새들이 어미가 오는 소리를 들으면 모두 까치발을 뜨고 노란 입을 벌리며 자기의 입에 그 벌레를 넣어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 아이들이 서로 부대끼면서 자리가 바뀌기도 할 텐데 어미 새는 틀림없이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고 하나씩 교대로 벌레를 물어다 먹여 살립니다. 어렸을 때 저는 닭을 키웠고, 닭을 잘 길러놓으면 사가는 고객이 우리 식구들이었습니다. 학교에서 하교할 때 시장에 들러서 배춧잎들을 주워 다가 칼로 잘게 썰어서 사료에 버무려 그래서 병아리에게 먹여서 그 병아리를 커다란 닭으로 키우고 했습니다. 그 닭들을 키우다 보면 참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이 닭이 알을 품고 부화를 하는 광경입니다. 알을 낳고 닭이 한 21일 동안 달걀을 품습니다. 이때에 어미는 그 둥지에서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 달걀을 품습니다. 골고루 따뜻해지도록 어느 한구석 망가지는 데가 없도록 날개로 혹은 다리고, 그 알을 굴리면서 자신의 따뜻한 체온으로 품느라고 물 한 모금, 모이 한번 제대로 먹지를 못합니다. 그러면서 20여 일 동안 암탉은 꼬챙이처럼 바짝 말라가고 그 알에서 병아리들이 깨어나게 됩니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 살았던 경험에서는 더더욱 재미있습니다. 그렇게 알에서 깨어나면 어미닭이 마당을 돌아다닐 때면 그 새끼들이, 노란 병아리들이 졸졸졸졸 엄마 뒤를 따라 갑니다. 먹을 것을 발견하면 엄마가 자기도 꽤 먹고 싶을 텐데 소리를 지르며 병아리들을 모아 그것을 주워 먹게 하고, 자기는 먹고 싶은 마음에서인지 침을 꿀꺽 삼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병아리들을 지킵니다. 이 모든 생물의 세계가 바로 이렇게 부모의 끝없는 헌신 속에서 새끼들이 생명을 보존하고 번식하고 종을 유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II. 부모와 자식의 관계 경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도 그 인간을 보존하고 번식시키기 위해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어떤 경륜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그 자식들을 태어나게 하셔서 그 자식들을 돌보고 가꾸는 본성을 인간에게 주셨기 때문에 인간도 다른 모든 동물들과 일치하게 자식을 향한 본성적인 끝없는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개나 돼지나 소처럼 창조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직접 흙으로 빚어서 사람을 창조하셨고, 영혼을 그에게 불어넣어 주셔서 그 영혼으로 하나님을 알고 자기를 알고 세계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 영혼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단지 부모로부터 먹고 살아가는 생존 방법만을 배우고 보호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그 부모에게 돌보고 양육을 받으면서 착한 것이 무엇이고, 나쁜 것이 어떤 것이고, 참 인간답게 사는 도리가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아직 어렸을 때에는 부모가 얼마나 위대한지 알지 못하지만 자식을 낳고, 그리고 그 아이를 기르고, 이 험한 세상에서 그 자식들을 보호하며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다보면 부모가 위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철이 없을 때에는 권력이 없어서 늘 부모에 눌려 지내지만 이제 권력이 생기고 나면 그 다음에 한 인간으로서 자기를 지탱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인생의 무게가 어떠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거기에다가 자신의 짐도 지기 어려운데 자식이라는 짐을 지고 그 아이를 위해서 염려하고 사랑하고 돌보고 헌신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고 난 후에는 부모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III. 부모를 공경하는 길
특별히 오늘 성경이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였을 때에 이 자녀는 모든 자녀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특히 사도가 염두에 둔 것은 바로 인격이 형성되고 성장하는 과정에 있는 연령적으로 어린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판단력이 부족하고 지혜가 모자라기 때문에 세계에 대해서 다 알지 못합니다. 부모도 물론 세계에 대해서 모두 알지 못하지만 현명한 부모의 판단을 따르며 그 권위의 우산 아래에서 이 세속주의의 비를 피할 것이 요구되기 때문에 부모에게 순종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순종은 두려움과 공포에서 하는 그런 복종이 아닙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대한 의무가 바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이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이것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복종하는 노예적인 순종이 아니라 부모를 알고 또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은 그가 맺는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사람이 되어가고 완성되어 갑니다. 적어도 한 인간이 태어나서 세 사람과의 관계를 온전히 하고 그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면 그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먼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모와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와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 이 세 가지만 올바르게 한다면 그는 한 인간으로서 결코 실패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에게 존경을 표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박수와 갈채는 잘 모르고 그렇게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모두 보아온 우리의 부모가 우리의 남편이 아내가, 그리고 우리의 자식들이 우리를 인정해 주면 그것은 진정한 평가입니다. 이렇게 올바른 관계 속에서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며 사는 것이 효도의 길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A. 자녀가 해야 할 일
1. 부모를 잊지 않음
그러면 이 부모를 공경하기 위해서 자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우선 첫 번째는 그 부모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은 존재하지 않았었는데 부모로부터 자신의 존재가 비롯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로부터 살과 피를 받아서 자기가 이 세상의 사람으로 생겨났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는 부모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가 자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다음 그가 베풀었던 모든 덕과 희생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나실 때 괴로움 잊고 진자리 마른자리를 갈아 눕히며 그렇게 사람으로 기르기 위해서 희생하고 애쓴 그 덕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모와 자식이라도 서로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혹은 부모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식인 우리가 볼 때에 잘못된 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 관계에서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의 차이, 도덕적인 흠결, 혹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그 부모를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 부모의 살과 피를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 부모와 나의 관계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부모로부터 입은 덕을 기억하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도리입니다.
2. 물질적으로 돌봄
두 번째는 물질적으로 돌보는 것입니다. 가정의 질서가 바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든 자식이든 기본적으로 인간들은 이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은 가난하고 아버지는 부자입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그 아버지보다 10배쯤 부자입니다. 그러면 그 가정의 질서가 저절로 섭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할아버지 사이의 질서가 올바르게 서고, 그 질서를 보면서 자식들도 질서가 있게 되고, 또 며느리들은 그 아버지와 시할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돌아올지도 모르는 분명한 유산을 위해서 정치적으로라도 효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그렇게 우리보다 훨씬 부자이거나 또, 할아버지가 아버지보다 10배쯤 부자인 사람들은 흔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 늙을수록 결국 노인들은 소외되기 마련이고 우리의 부모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가면 사람이 늙고, 늙으면 중심적인 자리를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비켜주고 그 자리를 다른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나이들은 사람이 느끼는 소외감과 외로움은 때로는 자신이 감당해 나가기에는 더 크고 아주 무거운 것일 수 있습니다.
저는 한 2년 전에 손녀를 보았고 그리고 몇 달 전에 손자를 보았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이 손주 손녀를 낳고 푹 빠져서 가슴에 사진을 품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 참 이상한 사람들도 많다 나는 그렇게는 안할거다 그랬습니다. 그러는데 진짜 손녀가 태어나고 보니까 정말 귀여워요. 그것을 어떻게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자식들한테 미안한 얘기지만 젊었을 때에는 자식을 낳아도 그게 그렇게 귀여운 줄을 잘 모르고 그냥 일에 미쳐서 그냥 바쁘게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손녀는 정말 귀엽습니다. 제가 한번 교회에 출근하면 좀처럼 집에 안 들어가는 성격인데 집에 오후에는 꼭 한 번 들어가서 손녀를 한번 봐야 됩니다. 정말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해가 됩니다. ‘아,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구나.’ 할아버지는 제가 7살 때 돌아가셨으니까 기억들이 그렇게 많지 않지만 할머니가 나를 그렇게 예뻐하셨던 기억들이 스쳐지나가면서 이렇게 귀여우셨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인 내가 자기를 그렇게 예뻐하고 좋아하는데 나만큼 그 아이가 나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장난감이다, 유모차다, 옷이다 막 끊임없이 연애하는 것처럼 그렇게 선물을 했습니다. 매일 보니까 두 번째 연애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지금은 아들은 유학을 떠나고 며느리는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내려가 있는데 보내는 그 날에 어떻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몇 달 사이에 그렇게 정이 들었습니다. 한 1~2년 사이에. 그래서 이 아이가 도대체 누구를 좋아하나 그러고 봤더니 무엇을 많이 사다주고 자기를 안아주는 사람을 좋아하나 했더니 그런 측면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 행태를 보니까 나이가 젊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얘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기들입니다. 자기 또래의 아이들, 그리고 그 다음에 좋아하는 사람이 젊은 자기 고모, 할아버지는 굉장히 많이 사다줘야지만 겨우 조금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옛날에 할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할머니가 나를 그렇게 예뻐하셔서 만나면 꼭 끌어안고 볼을 부비고 끌어안아서 나를 당신 품에 안고 나를 숨을 못 쉬게 했습니다. 그게 참 싫었습니다. 냄새도 나고 어떤 때에는 음식을 만들다가 나를 끌어안으시고, 어떤 때 주무실 때는 당신이 나를 꼭 끌어안고 당신의 무거운 다리를 내 엉덩이에 올려놓고 주무십니다. 나는 숨이 갑갑해서 빠져나가고 싶은데 차마 그렇게 못합니다. 그렇게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쬐그만 아이들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아주 그런 사랑을 받으려면 엄청나게 헌신을 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주위에 자기를 귀여워해줄만한 젊은 사람이 없을 때 그나마 이제 좋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3. 관계의 기쁨을 줌
생각보다 노인들이 가정에서 겪는 외로움은 아주 큽니다. 깊고 재미난 이야기도 항상 노인들을 제외하고 젊은이들끼리 젊은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로 합니다. 효도는 바로 그렇게 이 관계의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물질이 없어서 노년에 고통 받지 않도록 그렇게 물질을 공급하고,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돌보는 것도 자식의 의무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관계의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늙을수록 끊임없이 소외되는 것이 부모이니 그 공경한다는 것은 곧 그 부모를 외롭게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효도는 돈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서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그렇게 연로하신 나이가 되었는데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그렇게 여러분과 함께 가족으로서의 관계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돌본다면 여러분은 훌륭하게 효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B. 부모와 관계를 회복함
자, 그런데 이렇게 부모를 기억하고 물질로 돌보고 관계를 기쁘게 해 주고 하는 이 모든 일들이 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바로 관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부모와의 관계가 정말 사랑스럽고 평화로운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하기 쉽지만 부모와의 관계가 깨어진 사람들, 그리고 극복하기 어려운 과거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부모를 공경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와의 관계를 회복하여야 하는데 이렇게 부모에게 순종하기 위해서라도 관계의 회복이 필요하고, 더욱이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며 효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랑의 관계가 필요합니다. 그런 사랑스러운 관계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화해하는 일이 필요하고 그리고 미움에서부터 벗어나 서로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잠언 13장 24절에 보면 빗나가는 자식은 매로써 바르게 하여 교정할 수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부모가 잘못하고 오류에 빠져도 자식은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말고 공경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젊어서 이 세상일에 정신이 없이 몰입하여 바쁘게 인생을 살아갈 때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자식을 낳고 깊이 부모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면 그제야 비로소 철이 듭니다. 저는 한 1년 전에 가족이라는 책을 썼고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책을 쓰기 한 1년 전부터 저는 가족에 대한 깊은 묵상을 했고 또 여러분에게 설교로 들려드리기도 했습니다. 그 책을 쓰면서 저는 거의 매일 밤마다 산책을 했고, 산책을 하면서 아주 매일 빼놓지 않고 들었던 음악이 바로 SG 워너비의 일원인 김진호의 ‘가족사진’이라는 그 음악이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그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온 몸에 전율하는 것과 같은 깊은 충격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짧은 대중가요 속에서 우리들이 일생을 살면서 겪는 가족 관계에 대한 모든 그리움들을 그렇게 담아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사의 내용을 다 불러드릴 수는 없지만 대충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자식을 낳고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가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어느 날 가족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그 가족사진을 보니까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이 거기에 있는데 바로 자기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가족사진의 아빠의 모습이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야 비로소 그 자기의 인생을 꽃 피우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모든 것을 바쳐서 희생하고 그리고 수고하며 살았던 그 부모의 마음을 느끼게 되었다는 자식으로서의 절절한 호소였습니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고, 그리고 분노였고, 아픔이었습니다. 저 역시 대한민국의 한 아버지로서 그 세월호 사건을 지켜보면서 어쩜 이렇게 한 인간이 이런 사태에 대해서 이렇게 무기력해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여러 날들을 우울하게 보냈습니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아침마다 올라오는 세월호 사건에 대한 보도는 내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겨레신문은 매일매일 그렇게 죽은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을 눈물겹게 보도했고, 그래서 저는 매일 아침 눈물로 하루를 열곤 하였습니다. 그때 실렸던 기사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저에게 감동을 주었지만 정말 눈물을 많이 흘리게 만들었던 사건이 바로 지금 말씀 드리려는 사연입니다.
어느 날 아들 녀석이 학교를 가면서 엄마에게 골을 부렸습니다. “엄마, 운동화 하나 새로 사줘. 친구들은 다 좋은 운동화 신고 다니는데 나는 메이커도 없는 거 신고 다녀서 너무 창피하단 말이야” 그러고 투정을 부렸으니 엄마인 여러분이 잘 알듯이 그 아이에게 공손히 손을 모으고 “엄마가 돈이 없어서 못 사줘서 미안하다 내일 꼭 사주마.” 그럴 부모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 미친놈 공부는 안하고 겉멋이 들어서 운동화 타령이나 한다고 등짝을 한번 때려서 보내기는 그 부모나 우리들의 엄마나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 자식이 돌아서서 엄마에게 타박을 받으며 집에 가면서 아마도 길거리에 있는 돌멩이를 발로 차면서 엄마를 원망했을 것입니다. ‘엄마는 내 마음을 전혀 몰라.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해서 나한테 명품 운동화 하나 못 사주는 거야’ 하고 발로 돌멩이를 차면서 투덜거리며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며칠 후 그 아들이 세월호 사건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는 제일 먼저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아무리 불러도 들리지 않는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엄마는 조용히 보따리를 풀러 아들의 발에 꼭 맞는 좋은 운동화를 사서 둑 위에 올려놓고 아들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습니다. 아들이 세월호 사건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엄마의 마음을 찌른 것은 며칠 전 운동화를 사달라고 조르던 그 아들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었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그 운동화를 사가지고 가고 없는 아들은 떠나고 없는 그 팽목항에 그 신발 두 짝을 올려놓고 아들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다 알지 못합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우리가 길러보고 난 다음에 또 우리와 함께 자식들을 기른 동시대의 모든 부모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부모는 언제나 자식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자식을 더 많이 사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부모와의 관계가 온전하지 못한 그래서 상처를 받은 많은 사람들조차도 죽고 없는 혹은 아직 남아있는 부모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그 진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 나와 똑같이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아직 살아 계시다면 이것은 여러분의 최고의 선물입니다. 심지어 그 관계가 깨뜨려졌다고 하더라도 부모님이 살아있는 것은 자식에게 최대의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아직은 화해하고 서로 용서를 빌 수 있는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해 전 이렇게 온가족 교회 오는 날 그날에 부모 효도에 대한 설교를 하고 제 방에 잠시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연세가 지긋하게 드신 분이 제 방의 문을 열고 들어오셨습니다. 노크를 하고 양해를 구한 후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어깨로 제 방문을 벌컥 열고 뛰어 들어오셨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 모두 황당한 눈빛으로 그 분을 지켜보았는데 그 분은 자기가 누구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제가 앉아있는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으셨습니다. 그리고는 통성명도 하지 않은 채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연세가 65세라고 했으니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는 한없이 울고 통곡을 하다가 드디어 손을 떼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올해 나이 65세 교인입니다. 이 교회 온지는 얼마 안 되었습니다마는 오늘 이 설교를 들었습니다. 난지 일주일 만에 엄마가 저를 버렸습니다. 그 사실을 철이 들어서 알고 난 후 그 엄마를 죽어라고 미워했고 원망하면서 살았는데 오늘 설교를 듣고 보니 내가 참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린 아이처럼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마음속으로 함께 울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얼마나 크기에 이제는 그 사람이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자식을 낳아서 할아버지가 된 나이인데도 그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잊혀지지 않아서 저렇게 통곡하고 울고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공부한답시고 부모의 곁을 떠나 서울 할머니 댁에서 유학을 했고, 그리고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받은 정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든 아버지이든지 응석을 부려본 기억도 없고 귀염을 받아본 기억도 전혀 나지 않습니다. 한번쯤은 아이들이 엄마 아빠와 함께 소풍을 간 기억도 있고, 함께 즐겁고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도 있을 텐데 어쨌든 저는 한 조각의 사진도 마음속에 없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분이었고, 내 마음에 많은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일생동안 미워했습니다. 아마 아버지와 아들로서 일생 동안 나눈 대화의 시간을 다 합쳐도 몇 십 시간이 될까 말까할 정도로 아버지와 나와는 거의 함께 마주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법이 없었습니다. 어려서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생각만 있으면 아버지와 함께 자리를 하지 않으려고 피했고, 내 마음속에 그려진 아버지의 모습은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한테 사업차 두 달 혹은 네 달에 한 번씩 올라오셔서 그래서 그 동안 아들이 학교에서 받은 시험지를 넘기며 점수를 조사하는 것 이외에 아버지의 특별한 모습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아버지를 제 나이 26되는 해 주님을 영접한지 그리스도인이 된지 5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때 하루 휴가를 내고 조용히 동네에 있는 교회의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꽤 추운 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제 마음을 움직이셔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아버지를 가엾은 한 영혼으로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버지가 그동안 나와 함께 살아왔던 날들을 회상하면서 아버지로서 그렇게 어려운 인생의 십자가를 지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우리를 낳고 기르기 위해서 살아온 그 모든 날들이 얼마나 무거운지가 느껴졌습니다. 그리고는 한없이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고,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엄마 아빠를 불러야 될 상황에서 저는 언제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살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하나님은 저에게 새 마음을 주셨고 그래서 그 날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일을 많이 벌이셔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자식들에게 고통을 주시는 때가 많았지만 언제나 마음으로 용서하고 그 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그 책을 쓰기 얼마 전 밤에 깊이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에 어디서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번뜩 잠에서 깨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것은 제가 잠꼬대를 하면서 우는 소리였습니다. 나이가 들면 꿈을 잘 꾸지 않고 꿈을 꾸어도 거의 기억에 남지 않고 희미합니다. 그런데 그 날은 이상하게 꿈이 총천연색처럼 또렷하였습니다. 꿈속의 아버지는 바짝 여위신 모습으로 반팔, 흰 셔츠를 입고 까만 바지를 입고 작은 체구에 비닐하우스 같은데서 나무 상자에 무언가를 담고 계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반가운 나머지 “아버지”하고 뒤에서 불렀습니다.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한 번 더 불러도 대답이 없으셨을 때 저는 비로소 아버님의 청력이 너무 약해지셔서 얼마 전 보청기를 맞춰드렸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서 아버지를 툭 건드리며 “아버지”하고 불렀습니다. 그때 두 손에 무언가를 들고 당신의 몸을 돌리시며 아들을 쳐다보셨고 그때에 활짝 웃으시며 기뻐하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꿈속에서 저는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가슴에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그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아버지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아들로서 한 없이 울었을 때에 제 마음의 기억은 또렷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그렇게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그리고 그렇게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에게 나의 사랑을 표현하며 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후회가 가져온 눈물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끌어안고 한 없이 울면서 그렇게 울다가 제 우는 소리에 잠이 깨었던 것입니다. 그 꿈을 꾼 후에 저는 일어나 침대 머리에 앉아서 캄캄한 새벽 어두운 허공을 응시하며 또 한 번 목 놓아 울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계실 때에는 너무나 많은 날들을 미워하느라고 흘려보냈고, 그 분을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게 된 후에는 그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어색해서 그 분에게 정말 사랑한다는 고백을 별로 하지 못하고 그렇게 지내왔던 많은 날들이 후회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날 이후로 아버지를 깊이 사랑했고 한 번도 미워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미워하려고 해도 미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이상한 일을 벌이시고 저에게 고통을 주었는데도 언제나 그 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명절이면, 설날이면 항상 세뱃돈을 드렸고, 어느 해에 저는 마음속으로 결심했습니다. 이제 이 분이 얼마를 이 세상에서 사시든지 매년마다 작년에 드린 세뱃돈보다 더 많은 세뱃돈을 드리자 그래서 이 분의 마음에 명절 하루에 기쁨을 느끼게 해 드리자 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바로 직전에 저는 마지막 세뱃돈을 드렸고, 그때 세뱃돈이 150만원이었으니 그 당시로서는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세뱃돈을 드리며 “아버님 이제 것까지 제가 드린 세뱃돈 중에 가장 많은 액수입니다. 편안히 쓰시고 올해도 건강하세요.” 그러고 절을 하면 항상 너희도 어려운데 이런 걸 왜 주니 그러면서 얼른 주머니에 집어 넣으셨습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렇게 함께 살던 아버지는 떠나가시고 이제 저는 그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이들의 아버지가, 그리고 어린 아이들의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요즘도 가끔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만약에 한 일주일만이라도 천국에서 이 세상으로 휴가를 오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그동안에 나누지 못한 대화를 나누고 그분이 가고 싶어 했던 곳에 함께 가고 그렇게 교제를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룰 수 없는 꿈이 되고 말았습니다.
IV.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그리스도가 아니었더라면 예수님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그 할아버지처럼 일생을 아버지를 미워하며 원망하며 불행하게 인생을 살았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에게도 너무 귀한 독생자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의 죄 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나에게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하셨고,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아버지를 용서하고 사랑하기 어려운 아버지를 사랑하며 결국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 깊이 그 분을 사랑하고 지금이라도 그 분을 그리워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은 모든 미움과 상처를 치료하고 자기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예수의 사랑을 내 마음속에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별다른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는 집안을 떠나 타지에 살면서 돈 벌고 성공하기 위해 미쳐서 인생을 살다가 철이 들면서 그 가족의 품이 그리워지고 부모가 생각나서 돌아오는 것이 바로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그리고 원망하고 미워하며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당신의 구원을 베푸셔서 화해하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바로 그렇게 아버지를 사랑하게 하시고 상처를 은혜로 바꾸게 하셔서 그것을 영광으로 바꾸게 하셔서 상처와 아픔 속에서 살았을 우리들을 당신 그리워하며 살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오셔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을 알게 하시기를 빕니다. 우리의 인생 짧습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 그렇게 여러분의 부모와 화해하고 하나님 안에서 복된 가정을 이루며 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내를 사랑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어서 사도는 남편들이 아내에게 하여야 할 일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아내와 남편은 가정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입니다. 로마 사회에서 가정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통치자들은 강력한 로마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세포와 같은 것이 가정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가정의 도덕을 굳게 하고 그 가정에서 로마에 충성할 수 있는 시민들을 양육해 내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로마 사회는 기본적으로 남성 우위의 사회였습니다. 여성들에게는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아내의 역할도 가정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정에서도 역시 남편 우위의 가장 중심제가 정착되어 있었고, 아내에게는 경제권도 없었습니다. 아내는 자녀를 생산하고 가사를 성실하게 돌보며 근검절약하고 정숙하고 그리고 침묵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습니다. 집 바깥에서 여자가 자기의 의견을 사람들에게 표출하거나 사회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남자의 수치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아내는 남편의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남편에 의해 지배를 받고 남편에게 복종하며 가정을 일구어 가는 역할이 요구되었습니다.
II. 아내를 사랑하라
이런 사회에서 오늘 사도는 남편들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희랍어 성경에 ‘아가페테’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아가페의 사랑으로써 아내를 사랑하라 이런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하나의 단어이지만 당시 로마 사람들에게는 그리스 사람들의 사유를 따라서 사랑을 네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남녀 간의 불붙는 에로스(eros)의 사랑, 형제들 간에 언제나 있는 필리아(philia)의 사랑,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사랑인 스톨게(stolge)의 사랑, 그리고 신과 인간 그리고 그 신의 사랑에 감화를 받은 인간의 사랑인 아가페(agape)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A. 아내, 사랑의 대상
아내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숭고한 아가페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라고 한 이 아가페테라고 하는 명령이 당시 이 편지를 받고 있었던 로마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생소하거나 혹은 충격적인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내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이런 숭고한 아가페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는 바로 그 아가페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고 남편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은 에로스의 사랑으로 시작을 합니다. 처음부터 신이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것 같은 사랑 때문에 남녀가 사랑에 빠지고 결혼에 이르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에로스의 사랑 하나를 가지고 부부가 일생을 함께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그런 감정이 사람을 불타오르게 만들어서 이성을 향한 불같은 사랑으로 사랑에 빠지게 만들고 결혼에 이르게 하지만 사랑의 감정이 일생동안 똑같은 형태로 사람들에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랑의 감정은 결혼과 함께 다른 형태로 계속 승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해야지만 사랑은 온전해질 수가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의 사랑은 되니까 하는 사랑입니다. 그렇지만 결혼하고 난 뒤에는 그렇게 사랑이 저절로 되기도 하지만 그 사랑을 해야 할 경우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누군가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남편으로 맞아들여 결혼을 하는 것은 단순한 사랑의 고백 행위가 아닙니다.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함께 동시에 서로에 대해서 일생동안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자기 서약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많은 사람 앞에서 그것을 서약하고 자기에게 묶이는 것이고,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람과 자신 앞에 서약을 함으로 또한 자기 자신을 그 약속에 묶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사랑을 어떤 로맨스나 이성적인 에로스 사랑의 낭만에만 기댄다면 과연 그것이 얼마나 갈 수 있을까요? 종종 결혼하고 10년이 지나고 15년이 지났는데도 멀리서 걸어오는 남편을 보며 마음이 설렌다는 여성들은 보았지만 그런 남성들은 거의 만날 수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에로스로 시작된 이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완성될 때에 남편과 아내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아내를 아직도 자신이 지배해야할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남성들을 만납니다. 아니면 세월이 많이 흐르고 이제 사정이 바뀌어서 또 다른 이유에서 남편을 그렇게 생각하는 아내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남편이 아내에게서부터 받아야 할 사랑도 또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받아야 될 사랑도 위로부터 하사되는 애완견적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아주 인격적이고 또 동등한 입장에서 단순한 감정이 아닌 자신의 인격 전체를 건 그런 종류의 상호적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한 대상에 마음이 묶여서 그것을 독점적으로 계속해서 누리려고 하는 마음의 성향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하도록 남편을 아내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많은 남성들은 여성들과 똑같이 이런 사랑의 낭만을 꿈꿉니다. 여성들도 남편에 대해서 그런 낭만을 가지고 있듯이 남성들도 똑같이 그런 꿈을 꿉니다. 그러나 둘이 연애하는 것은 낭만일 수 있지만 결혼은 현실입니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현실 그 자체가 때로는 자원의 결핍 때문에, 때로는 삶의 다른 방식 때문에 결혼 전에 가졌던 그 낭만을 계속할 수 없도록 제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낭만적으로 흐르는 감정 하나만을 가지고는 인생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한 대상에게 정착해서 거기에서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이 끊임없이 그런 원인을 제공해야 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기 안에 이 사랑이 성향이 되어서 그래서 한 남편과 아내를 그렇게 지속적으로 사랑 안에서 헌신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만이 아닌 인격적인 관계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될 때만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기 어려울 때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꺾으며 아내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 아내와의 관계 안에서 즐거움을 찾으려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복종시키는 삶을 살 때에 그것이 자신 속에 성향이 되어서 서로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부부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우리에게 그의 결점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눈 어둡게 만들어서 착각에 빠져 사람을 사랑하게 하지만 에로스의 사랑은 모든 결점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사랑이 진정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어떤 남편이 혼수상태에 빠져서 병원에 누웠답니다. 그리고는 한참 후에 깨어났습니다. 옆에서 근심하는 아내가 남편의 손을 잡으며 남편에게 좀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대답했습니다. “여보 내가 전생에 정말 나쁜 짓을 했나봐” “왜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지옥에 와 있어.” “아니 당신 죽지 않았어요. 아직 살아있어요. 당신 여전히 내 옆에 있잖아.”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유머가 남편에게 감정을 배설해 주고 있을까요?
오래전에도 한번 여러분에게 들려준 이야기지만 이렇게 우리는 부부로 살아가지만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이미 그 인격적인 관계의 끈을 놓아버린 많은 세태를 우리는 유머 속에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골프를 치러 갔답니다. 세 쌍의 부부가 함께 모여서 골프를 치면서 우의를 다지고 내기를 했습니다. 못 치는 한 남자가 골프를 쳐서 골프공이 저 숲속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투덜거리면서 혼자서 공을 주우러 갔더니 어느 요정이 나타났더랍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당신을 오랫동안 지켜봤는데 참 괜찮은 사람이더라 그러면서 내가 당신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줄 테니까 말해보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요정이 하는 말이 조건이 있는데 당신이 무슨 소원을 말하든지 간에 당신이 들어준 거의 두 배를 당신 아내가 받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남편이 말했답니다. “지금 내기 골프를 우리 친구부부들하고 치고 있는데 매번 우리가 꼴찌를 해서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나 골프를 잘 치게 해 주십시오.” 요정이 흔쾌히 “그렇게 해 주마. 그 대신 네 아내는 너보다 두 배를 잘 친다.” “아 괜찮습니다. 어차피 부부가 합산해서 순위를 결정하니까 좋습니다.” 두 번째 소원은 뭐냐 “저를 백만장자로 만들어 주십시오.” “그래. 그러면 너희 아내는 이백만 장자가 된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우리 합쳐서 삼백만 장자가 되니까 상관없습니다.” 마지막 소원이 뭐냐 그랬더니 요정의 귀에다 대고 “저에게 약한 심근경색을 주십시오.” 그러더랍니다. 이제 좀 이해가 되세요? 1층에서는 지금 아직도 무슨 소리인지를 몰라서 옆에 사람에게 물어보고 계십니다. 물어보세요. 무슨 뜻인지. 이런 유머들이 이 시대에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은 자기 결혼생활에 있어서 사람들이 얼마나 냉소적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시대가 흐르고 세월이 변천해도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네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일방적으로 아내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 남편에게 희생 어린 사랑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 남자로 태어나서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한 후에 그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랑받는 아내에게 뿐만 아니라 사랑을 해야 하는 그 남편에게도 가벼운 멍에이고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남편이 아내에게 하는 그것이 곧 자기에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둘이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아내에게 거친 폭력과 그리고 거치고 더러운 말을 퍼부을 때에 그것은 마치 칼로 자신의 육신을 마구 찌르고 오물을 자신의 몸에 스스로 끼얹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한 인간으로 돌아와서 아내를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내는 그렇게 오랜 세월을 나와 함께 살았는데도 어쩌면 이 세상에서 자신의 마음을 가장 몰라주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가정을 가진 남성은 자기를 외면하는 수많은 세상 여성들 앞에 외로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결혼을 한 남자에게 아내는 세계의 전부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 여자에게서 자신이 못났다고 느끼고 인생에 실패했다고 느끼고 버림받았다고 느낍니다. 우리의 남편이 이 세상에서 특별한 사람들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아내도 그냥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남편이 매우 특별한 신앙의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그런 남편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에 대한 생각보다는 그러한 신앙을 통해서 유익을 누릴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 더 크게 자리 잡은 적이 많습니다. 우리도 아내가 신앙생활 잘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생각에서라기보다는 그런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기를 끝까지 사랑하고 존중해주기를 원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과 기쁨을 남편과 아내로서 가로채는 것이 아닐까요?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생긴 그대로 살아가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자원이 넉넉하지 않을 때에는 여기서 부딪치고 저기서 깨어지며 고달픈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 만나서 함께 인생을 같이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미모로 한 시대를 흔들어 놓았던 안젤리나 졸리는 자신의 잠깐 동안의 첫 번째 결혼생활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결혼은 끔찍하고 미친 짓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결혼을 했고 곧 이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B. 사랑, 자기완성의 길
한 사람이 만나서 자기가 아닌 또 다른 사람과 한 인생을 살아가는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때에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 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렇게 자기 아닌 아내를 사랑하며 사는 것이 자기완성의 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은 흙으로 지으셔서 만드시고 또 한 사람은 또 다른 흙이 아니라 그 한 사람의 몸에서 일부를 취하여 또 다른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처음부터 홀로가 아니라 서로를 대면하는 존재로 창조되었고, 그 첫 번째 대면하는 관계가 바로 남편과 아내의 관계였습니다. 우리들은 이제 자신이 모두 완성된 인간으로 또 다른 한 인간을 맞는다고 생각하고 결혼하기 때문에 아내는 남편에게서 그 많은 결점을 발견하게 되고, 남편은 아내에게서 그런 결점을 발견하면서 결혼 생활에 끝까지 헌신해야 할 의무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셨고, 이는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지만 그 인간을 보다 완전한 인간으로 완성하기 위하여 결혼이라고 하는 제도를 선택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이제 끝까지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길이고 어떤 의미에서 그 길은 형극의 길이기도 합니다.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사는 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세계에서 자기와는 다른 또 다른 사람을 자신의 분신처럼 되기까지 그렇게 사랑하며 걸어가야 할 무거운 짐이 그의 어깨 위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타락하고 망가진 인간 둘이 만나서 이런 고통과 시련을 주고받으면서 살 수 밖에 없게끔 그 이상의 것을 아무것도 주시지 않았더라면 아마 결혼한 모든 사람들은 불행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은 기쁨도 주시고, 자녀도 주시고, 보람도 주심으로 이런 어려운 서로 사랑의 길을 걷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홀로 자기를 대면하는 자아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있는 자아의식은 서로를 대면하면서 생겨나는 자기의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처음부터 홀로 있는 주체가 아니라 서로를 대면하는 주체입니다. 한 남편이 완성된 인간인 줄을 알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라는 사람을 만나서 살아보면서 참 한 인간으로써 함께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 자각을 결혼을 통해서 하게 됨으로써 온 인류를 향하여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못 느끼던 남자가 한 여자를 함께 데리고 사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면서 자신에 대해서 반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모자라고 신앙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고 자신의 삶에 맞춰주지 않는다고 아내를 박해하고 미워하고 혹은 결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자기를 성찰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그런 조화의 불균형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기가 한 인간 앞에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달으면서 자기가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인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여자가 결혼하기 전에는 관심사가 온 세상을 향하여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남자와 마찬가지로 그 여자 앞에는 수많은 가능성 있는 선택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면 한 남자가 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집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 자신의 인생 모두를 걸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게 됩니다. 그러나 남자는 그 반대입니다. 그렇게 집중해서 그 한 여자를 사랑하다가 이제 이 여자가 자신과 한 부부가 되었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남자의 관심은 이제 이 가정을 토대로 밖을 향하여 분산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개척하고 정복하고 또 다른 삶을 일구는 일에 안정적인 마음으로 헌신할 수 있게 됩니다. 이때 아내는 바로 그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남편을 따라 왔더니 가정이라는 무덤 속에서 스스로 갇히고 남편의 마음은 그 가정에서 떠나 자기만이 홀로 그 가정에 소외된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적절한 도움 없이 세월이 흘러가도 아내는 그저 그런 삶에 적응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남편이 이제 더 이상 사회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이제 비로소 가정의 가치를 느끼고 가정으로 돌아가 아내와 함께 살려고 하지만 이미 아내는 남편 없이 살아오는 일에 오랜 세월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남편이 돌아왔을 때 그에게 내어줄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남편은 자신이 젊어서 살아온 일생동안 뿌린 그 씨앗을 나중에 자기의 인생 말년에 결국은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모여서 함께 술을 마시며 농담을 하다가 결혼 선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한 남자에게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자네 올해 결혼 10주년이라며 아내에게 무엇을 선물해 줄 건가?” 그래서 이 사람은 경제적인 여유도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이아반지를 선물해 주기로 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를 가장 잘 아는 친구가 질문을 했습니다. “어. 왜 그래? 너는 여유도 있잖아. 너의 아내는 오래전부터 짚차를 가지고 싶다고 했잖아. 기왕이면 아내가 갖고 싶어 하는 짚차를 선물해주면 아내가 훨씬 더 좋아하지 않겠어?” 라고 말하자 이 친구는 대답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서 가짜 짚차를 구할 수 있겠나?”
부부가 동갑으로 60세를 맞이해서 환갑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한 요정이 나타나서 아내에게 물었답니다. 당신이 60년 동안 살고 남편과 함께 40년 동안 살아온 것을 축하한다. 당신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데 뭘 원하냐 그랬더니 “남편과 함께 세계 여행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금방 비행기 표와 그리고 돈 가방이 땅에 떨어지더랍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에게도 하나 선물을 주고 싶다 그랬더니 남편이 아내를 한번 쳐다보면서 요정에게 말했답니다. “저는 세계 여행을 하고 싶지만 나보다 30살 어린 아내와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요정이 그 소원을 들어 주겠다 하더니 펑 하더니 그 남자가 90세로 변했답니다. 이런 이야기 속에는 결혼에 대한 냉소가 아주 엷게 깔려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보십시오.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언젠가 저는 우연한 기회에 저의 친구 목사님과 만났습니다. 그분 곁에는 그 분의 아내가 함께 따라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정답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 부인을 보면서 제가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니던 시절에 두 사람이 결혼을 했고, 그때 제가 과대표였기 때문에 결혼식에 참석했던 기억이 납니다. 평일 저녁 7시에 결혼식을 했고 우리 가서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정말 그림처럼 예쁜 자매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학우들이 모두 감탄을 했습니다. 그런데 긴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에 그 분이 그때 자매였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원래 외모가 수수하고 별 눈에 띄지 않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도 아름답습니다. 워낙 젊었을 때 탁월하게 예뻤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그 아름다움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야, 내가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리고 결국은 세월이 흘러가면 젊음도 가고 아름다운 미모도 사라지고 그리고 명성도 사라지고 모든 게 사라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관계만 남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살면서 서로에게서 찌르는 듯한 고통스러운 단점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자지러지게 아파하고 그런 상처와 고통이 반복되면서 ‘아 이 여자하고 사는 게 너무 힘들다. 이제 내가 이쯤에서 이 결혼의 날개를 접어야 되겠다.’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혼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것을 발견할 때에 이를 악물고 내가 어떻게 하든지 결혼의 서약을 지키고 그리고 이 고통스러운 인생의 시기를 두 눈을 지끈 감고 견뎌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사는 게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래서 여기서는 우리들이 이런 점에 대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그러한 성격의 차이나 고통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서로에게서 어떤 단점을 발견했을 때 속았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래서 제가 결혼하기 위해서 인사 왔을 때 혹은 결혼하고 난 후에 신혼여행 갔다 와서 인사를 왔을 때 말합니다. “연애를 몇 년이나 했니?” “1년 했어요.” “2년 했어요.” “6개월 됐어요.” “3년 됐어요.” 그럽니다. “너희는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모르는 게 훨씬 많단다. 서로에게 놀라운 단점이 발견되어도 놀라지 말거라. 그리고 그게 무서우면 결혼하지 마라.” 결혼과 함께 저 사람에게서 어떤 단점을 발견하게 되면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저 여자가 이런 단점을 가지고 있구나. 만약에 나 만나지 않고 혼자 살았더라면 영원히 고쳐지지 않고 저 단점을 가지고 이 사람, 저 사람 부딪치면서 그렇게 고통을 주고받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저 여자에게 있는 그러한 단점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구나. 그리고 그런 단점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이 여자의 남편으로 삼아 그것을 돕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남편 삼으셨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거기서 남편으로서의 소명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짝지우실 때에 둘 다 서로 불완전한 것들을 보완해 주기 위해서 그래서 남자는 여자 때문에 온전해지고 여자는 남자 때문에 온전해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서로 다른 둘을 만나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연애할 때는 둘 다 성향이 꼭 일치하는 사람들이 불붙듯 연애하지만 오래 사는 사람은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서 오래 사는 것입니다.
결점을 발견할 때에 바로 그 결점 때문에 아내가 그 결점을 안고 인생을 살아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힘겨운 인생을 살았을까? 오늘 나는 그 여자의 남편이 되어서 괴로움을 당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살아오는 인생길에서 이 여자와 부딪치면서 많은 고통을 받고, 또 그 대가로 우리 아내에게 상처를 주면서 인생을 함께 살아왔을 것이다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나 없이 혼자 살았으면 결코 고쳐지지 않았을 그런 단점을 고치고 온전한 사람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나를 이 여자의 남편으로 불러주셨구나 하는 소명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아내를 바라볼 때에 자기가 힘들어 하는 어떤 결점이나 단점을 보면서 힘든 자기를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단점과 결점을 가지고 힘겨운 인생을 살아왔을 아내의 지난날들이 불쌍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내가 한없이 가엾은 존재이고 그리고 바로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저 여자의 남편으로 짝 지워 그렇게 불쌍한 저 사람을 돌보고 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꺼지고 사라졌을 그 아름다운 인간성을 진정한 자유 속에서 꽃 피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나를 저 한 여자의 남편으로 부르셨구나 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한 여자를 끝까지 사랑하는 일이 어려울 때마다 그렇게 한 여자의 남편으로 일생을 살아가게 하는 사랑의 힘이 나 자신에게서 스스로 일구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깊이 의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신의 눈에는 부족하고 단점 투성이고 때로는 그 결함이 있는 여자와 살아가는 것이 마음에 견딜 수 없는 쓰라린 고통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의지할 한 남편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던 가엾은 한 영혼으로 아내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며 사는 일이 어려울 때마다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셔서 자기를 버려 생명을 주시고 그리고 그 사람들을 교회로 하나 되게 하셔서 지금도 그들 안에 계셔서 그를 보호하시는 것처럼 또한 바로 남편인 나를 그 한 여자의 보호자로 선택하시고 일생에서 마지막까지 그 한 여자 안에 있는 결함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한 남편으로 택하신 것에 깊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한 정치인으로서 성공했느냐 하는 것은 국민들이 평가해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저술가로서 성공한 사람이었으냐 하는 것은 심사위원이나 독자들이 평가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인간이 한 사람으로서 성공한 인생을 살았느냐 하는 것은 가족들이 평가해 줍니다. 세상에서 아무 인정을 받지 못하고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생을 함께 살아온 아내가 ‘내 남편은 참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눈을 감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나는 비록 이 세상에서 값진 명예와 분에 넘치는 세상의 자원을 내게 가져다주지는 못했지만 내가 이 남자와 결혼하고 이 남자에게 나의 인생을 의탁하고 이 사람의 아내가 된 것이 행복합니다. 비록 아프고 쓰라린 날이 없지는 않았지만 다시 태어나도 이 남자의 아내가 되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하면 그 남편의 인생은 결코 실패한 삶이 아닙니다. 한 아내에게서 진솔하게 그 고백이 나오기까지 그 남편은 무수한 날들을 자기와 싸웠을 것이고, 수많은 날들 자기로서는 이룰 수 없는 이 부부 사랑과 일치를 위해 하나님께 눈물을 흘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서 그 몸을 버리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그 분이 평화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에 불화하게 살 수밖에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비를 입었고, 망가진 여자를 만났기 때문에 일생일 불행하였노라고 서러움과 소외감 속에서 인생을 마쳤을 그 남편이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아내와의 관계 속에서 평화의 도구가 되는 것으로 깊은 만족과 쉼을 누렸을 것입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III. 적용과 결론
조용히 요동치는 마음을 접고 사랑하는 아내와 만난 때부터 이제껏 살아왔던 순간들을 회고해 보십시오.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도 있고,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던 순간들도 있을 것이고, 가슴을 칼로 째는 것 같이 비명 소리 섞인 아픈 시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사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게 해주셨고, 아내가 잘못한 것은 나를 너무 사랑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준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간에 우리의 남편의 일생은 아내의 끊임없는 희생을 딛고 살아온 삶이었습니다. 평정한 마음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그 아내를 아프게 한 순간들이 너무나 많았고 나를 사랑한 것이 오히려 그에게 수치스럽게 한 순간들이 너무나 많지 않았습니까? 그러는 동안 우리는 행복했나요? 아닙니다. 아내가 눈물을 흘리고 아픈 가슴을 부여안고 밤잠을 못 이루는 동안 우리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준 모든 상처와 고통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지나가고 나면 후회가 됩니다.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닌데 왜 그까짓 일로 아내를 괴롭혔을까? 젊어서는 우리의 마음에 치밀어 오르는 자존감 때문에 그 자존심 때문에 자기를 존중해 주지 않는 아내 때문에 괴로워하며 아내에게 복수했고,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든 다음에는 스스로 못난 자격지심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는 속에서 아내의 평범한 언어나 태도가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하며 아내를 멸시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사회적인 모든 소망들이 끊어지고 마지막에 함께할 수 있도록 남겨진 유일한 사람이 아내밖에 없을 때 우리의 관계가 깨어졌다면 그것은 얼마나 커다란 비극이겠습니까? 명심하십시오. 세월도 흘러가고 젊음도 흘러가고 재물도 사라지고 자식들도 모두 떠나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관계만 남습니다. 이렇게 자기 아닌 또 다른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며 살아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어려운 길이지만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를 완성해 가는 것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지만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사랑 받은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 수 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한 사람은 사랑하였음으로 행복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남편들이여,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의 몸을 사랑함과 같이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한 여자 앞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버려 교회를 피로 사신 그리스도 앞에서 그 분이 교회를 사랑하신 것을 본받으며 아내를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고 오래 참으십시오. 그 일이 어려울 때마다 한 모자라는 사람이 한 부족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원래 이렇게 어려운 것임을 고백하십시오. 그 일이 힘들 때마다 예수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내가 사랑하는 그 근거가 아내의 육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에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그래서 한 인간이 일생을 산후에 내가 모든 일에 있어서 실패하였으나 한 여자를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는 승리했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그런 남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부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이 우리에게만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기쁨이 되도록 끊임없이 그렇게 아내를 불쌍히 여기며 그를 향한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여러분의 소명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서 마지막으로 그 한 아내에게 존경을 받는 남편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내를 귀히 여기라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아내를 귀히 여기라는 충고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잘 견뎌야 할 것을 바로 베드로전서 2장 15절에서 25절 사이에서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먼저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제시하기 전에 남편에 대해서 아내가 어떤 태도를 가지며 가정을 꾸려가야 할지를 규정합니다. 아내의 네 가지 덕목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남편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리고는 경외하는 마음, 세 번째는 이웃에 대한 선행, 그리고 어떠한 삶의 변화에서도 요동하지 않는 안정된 마음을 가지고 남편을 대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II. 아내를 귀히 여기라
이제 사도는 이러한 가르침을 그대로 이어받으며 아내에 대한 남편의 태도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즉, 아내가 남편에 대해 순종하고 하나님에 대해 경외하고, 이웃에게 선행을 행하고, 또 안정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듯이 남편도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속에서 아내에게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아내를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는 귀한 물건도 있고 하찮은 것도 있습니다. 하찮은 것은 아무렇게나 버려두고 그저 굴러다니고 혹시 그것이 사라지고 없어도 별로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매우 값지고 귀한 물건은 소중히 여기고 또 간직하고, 또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반드시 기억해서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어느 날 학생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공손히 인사를 하면서 강의에 은혜를 많이 받고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자기는 밤에 신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사실은 목사가 되기보다는 사업을 잘해서 선교에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를 하면서 자기 명함을 주었습니다. 꽤 큰 회사를 경영하면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에도 미국에 출장을 다녀왔다고 하면서 자기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에 저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간절히 해주고 났더니 목사님 생각이 나서 선물을 하나 사왔습니다. 그리고 꺼내 놉니다. 열어보니까 볼펜입니다. 저는 사실은 그렇게 그런 특별한 볼펜이 필요가 없고 연필을 즐겨 쓰던 사람이었는데 해서 그냥 서랍에다 휙 던져놓고 사가지고 오려면 먹을 것을 좀 사가지고 오든지 하지 이까짓 볼펜은 한국에도 흔해 빠진대 그리고 던져주고 여러 달이 지났습니다. 우연히 외국을 나갈 길에 시간이 남아서 면세점을 기웃기웃하는데 어디서 많이 보던 볼펜이 거기 있습니다. 그래서 어 저것을 어디서 봤지 그러고 생각하니까 그 학생이 사다준 볼펜입니다. 머가 궁금했을까요? 가격이. 그래서 들여다봤는데 태어나서 한 번도 그렇게 큰돈을 주고 필기구를 사본 적이 없었을 정도의 가격입니다. 그리고 갔다 오자마자 제일 먼저 서랍을 뒤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열어보았습니다. ‘야, 이것이 이렇게 비싼 것이구나.’ 그 다음서부터 한번 먼지를 씻어내고 그리고 잘 보이는 곳에 놔둬서 사람들이 오면 쓰지는 않지만 ‘야, 이게 얼마짜리다.’ 그리고 보여주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늦게나마 가치를 인식하고 나니까 아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뜻입니다. 제 기억에는 아주 스승님인가 누구에게 그럴만한 분에게 아주 정성껏 다시 포장해서 선물했던 기억이 납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사랑의 특성을 두 가지로 설명하셨는데 하나는 사랑은 기쁨이고 또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을 하면 아주 기뻐합니다. 그 대상을 만나고 또 생각하고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랑하면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목숨을 주고서라도 그것을 지키려고 합니다.
A. 생명의 은혜를 받음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렇게 아내를 귀하게 여겨야 할 이유를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받기 때문입니다. 부부이기 이전에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성도 남편과 아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지체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지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믿기 전엔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는 있지만 죄와 타락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는 멀리 떠나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불신자 시절에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방인이요, 외인이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를 믿고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선택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접붙여 예수그리스도의 몸에 일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의 생명과 그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히 흘러 들어오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나의 남편, 나에게 속한 사람이기 이전에 예수께 속해 그도 또한 나와 동등하게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부이기 이전에 예수의 생명을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온 것입니다. 그가 나를 만나기 전에도 그리스도인이었다면 그렇게 살아오다가 나를 만났고 그리고 부부가 된 후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없이 생명 없이 살던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그 생명을 누리며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시련과 고난을 당할 때에도 아내가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인 우리가 잘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그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기억나지도 않는 우리의 결점과 모자라는 것들을 그녀에게 부어주신 예수의 생명이 그것을 참고 양보하고 이기게 만들었습니다. 이 생명을 그만 누리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도 누리고 있습니다. 피도 살도 섞이지 않고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도 그가 그 소용돌이치는 인생의 시련 속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왔는지를 간증할 때에는 우리가 그의 마음에 동참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 그 사람 안에 있는 생명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아내가 이런 생명을 함께 나누며 한 생명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마지막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충만하고 완성적으로 받을 그 생명의 맛보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살 때 포장되어 있는 것들은 뜯어볼 수 없지만 시장이나 푸드 코트에서 음식을 살 때에는 한번 먹어봅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빵이든지 튀김이든지 무엇이든지 먹어볼 수 있도록 진열되어 있습니다. 한번 먹어봅니다. ‘야, 맛있다.’ 그러면 지금 눈앞에 요리되고 있는 음식이 전부다 맛있는 것입니다. 맛보기를 보고 그 음식을 평가하면서 삽니다. 바로 우리가 오늘 고난과 시련, 역경과 모든 환란을 이기며 살아가게 만드는 그 생명의 힘은 미래에 누릴 완전하고 충만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의 맛보기입니다. 바로 이 아내와 함께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그 궁극적인 생명을 충만히 누릴 때 함께 상속받을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아내를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나 보기에는 세월이 흘러서 젊었을 때의 나를 만났을 때 꽃다운 모습이 없어도 그러나 자기도 젊었을 때에는 예쁜 청년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젊음이 주는 아름다움도 사라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후패해져 가는 육신을 벗게 되는 어느 날 그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을 입을 터인데 내가 아내와 함께 그 생명을 상속할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소중히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 충만한 사랑과 은혜를 누리면서 그러면서 바로 아내와 내가 이 예수의 생명을 지니고 있고 그리고 우리의 겉 사람이 후패해도 이 생명의 은혜를 함께 누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기 때문에 아내를 소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귀히 여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기도의 은혜를 누림
두 번째는 기도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아내와 불화하면 남편의 기도가 막힌다고 말합니다.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함이라” 사실 그 불화한 관계, 아내와 남편이 불화할 때만 기도가 막히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과 관계가 깨질 때 기도가 막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관계는 정도가 다 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특별히 사랑하고 평화를 누리기를 바라는 특별한 관계들이 있습니다. 이때에 평화가 깨지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많이 막히게 되고 그렇지 않은 관계는 덜한 것입니다. 내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어떤 사람을 관광지에서 스치듯 만납니다.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고 해서 물론 그것도 영향이 있겠지만 내가 신앙의 심각한 위기를 만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내를 미워하는 남편, 하나님과 평화할 수 있을까요? 남편에게 복수를 꿈꾸는 아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을까요? 교인들을 향한 미움을 간직한 목사, 과연 열린 목회를 할 수 있을까요? 목사에게 보복을 꿈꾸는 교인, 과연 기도의 열린 문을 가지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이것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권위, 아내에 대한 남편의 권위, 혹은 교인에 대한 목사의 권위, 목사에 대한 교인의 권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지정하신 관계들이 하나님 사랑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교인이 누구냐 하면 그냥 목회자와 교인, 교인과 교인, 이런 사람들끼리 지겹게 싸우면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가끔 은혜를 주셔도 그런 부패에서 오는 샘을 막는데 거의 소모되지 하나님이 일을 하는데 그것이 소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아내와 불화는 더더욱 그렇게 심각한 영적인 장애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뭐라고 얘기 하냐 하면 기도가 막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얘기는 무슨 뜻이냐 하면 아내와 불화한 처지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더 이상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들이 교만해질 이유가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그러면 아내와 불화할 때 남편은 기도가 막히고 아내가 남편을 미워하면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리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아내를 하찮게 여기고 막 대해서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남편에게 훨씬 쉽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간절함을 가지고 계십니다. 혹시 남편과 아내 사이에 다툼이 있을 수 있고, 의견의 차이로 충돌이 있을 수 있지만 해가 지나기 전에 화해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화해할 때는 항상 상대방의 잘못을 보지 말고 깨끗하게 자기가 잘못한 것만을 보고 잘못했다, 진심으로 용서를 빈다, 그렇게 사과를 하고 화해를 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의 가장 큰 고통은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시련과 역경이 와도 기도할 수 있으면 그것은 시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스포츠 가운데 익스트림 스포츠라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말도 안 될 정도로 위험한 극단의 위험을 무릅쓴 스포츠입니다. 예를 들자면, 30m 높이의 파도 위에서 보드를 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무것도 없이 맨손으로 한번만 손을 놓치면 천길 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져서 죽을 그런 맨손 등반, 그 다음에 상공 한 8000m 꼭대기에서 떨어지면서 그러면서 에어보드를 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지면 가까이 와서 낙하산을 펼치는 것 등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이렇게 보면서 그 커다란 배도 삼킬 것 같은 어마어마한 그 삼각형의 파도 위에서 그림처럼 서핑을 타고 보드를 타고 그 파도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오고 파도가 치면서 동굴처럼 생기는 그 사이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즐깁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사태도 똑같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기독교 신앙은 우리 삶에 일어날 수 있는 불행한 모든 사태들을 다 행복한 것으로 바꾸는 게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걷다가 예수 믿고 나서 잔디밭을 걷는 것 같은 게 아닙니다. 똑같이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시련도 만나고 역경도 만나고 그리고 고난도 당합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그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의미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요동치는 수많은 삶의 사태, 그것을 초월해서 인생을 관통하고 있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행복할 때만 행복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불행하다고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 때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 신앙을 유지하고 있을 때 우리는 단정한 삶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렵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유혹해서 신앙의 길에서 미끄러지게 할 수 없고, 핍박과 시련과 위협으로 그를 두렵게 만들어서 굴복시킬 수 없는 그런 사람, 그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의 가장 큰 고통은 시련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가 막힐 때 그는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는 처지가 됩니다. 사단도 이러한 사실을 압니다. 자기를 대적하며 이길 수 있는 놀라운 힘이 신자들 개개인 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서 기도의 문을 막고자 애를 쓰고 몸부림을 칩니다. 만약 아내와 불화하게 될 때 이런 기도의 은혜를 누릴 수 없게 된다고 남편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원래 경건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회심도 하지 않아서 기도가 뚫린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남편은 기도가 안 되도 그게 그것 때문에 기도가 안 되는 건지 눈치 채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은혜를 누려본 성도들은 그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충만한 생명의 은혜로 시련을 극복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기도의 은혜가 막히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지를 압니다. 그러니 주님은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대하는 것이 자신에게 대하는 것인 것처럼 만드셔서 각자에게 행하는 그것이 자기에게 돌아오게 하였으니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귀히 여김으로 이런 기도의 은혜를 계속해서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아내, 더 연약한 그릇
A. 연약한 그릇으로 여김
두 번째는 아내가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연약한 그릇으로 여기라”고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릇에 관해서 신약 성경에는 세 개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로마서 9장 21절 이하에는 진흙덩이로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드는 비유가 등장합니다. 여기에서는 구원받을 자와 멸망 받을 자를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는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나오는 구절인데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질그릇을 연약한 육체에 비유하고 신자는 비록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이 안에 담겨진 예수의 생명이 보배와 같이 귀하기 때문에 질그릇 같이 연약한 몸을 가진 인간도 소중하다는 뜻으로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 나오는 비유인데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서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재능과 소명의 그릇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의 생각에는 여기에서 아내를 연약한 그릇이라고 말했던 것은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비유가 합쳐진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우선 아내는 육체적으로 남편보다 연약합니다.
저는 한 10년 전에 그 당시로 한 45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그리고 한 25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골을 수습해서 이장을 하느라고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눈에 두 분의 뼈가 정확히 구분이 되었습니다. 남자의 뼈는 훨씬 굵고 튼튼해 보입니다. 그리고 실제 체구에 있어서는 할머니가 할아버지보다 작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뼈는 약합니다. 그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한 분은 45년, 한 분은 20년 정도 지났는데 그 뼈의 상태가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그것을 제가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 할머니의 육신을 이 땅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만지는구나 하는 감회도 있었지만 이렇게 여성들의 육신은 연약하구나. 물론 우리 남자들 중에는 전혀 연약해 보이지 않는 튼튼한 아내를 가지고 있는 남편들도 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자기보다 훨씬 더 강하고 그리고 정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아내에게 피하고 싶은 그런 아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본질적으로 여자는 약한 질그릇과 같다, 육체적으로 연약합니다. 정신적으로 많은 환경들을 극복하며 그렇게 살아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후천적으로 그런 형질을 얻었을지는 모르지만 아내는, 여자는 육체적으로 약하게 창조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질그릇, 그렇게 연약한 육신을 가진 질그릇인데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은 그의 탁월한 재능이나 혹은 그의 육체적인 아름다움 때문이 아닙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아름다움도 사라집니다. 남편에게 아내가 소중한 이유는 그와 맺게 하신 특별한 관계 때문입니다. 재능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여성을 연약한 자로 빚으셨습니다. 약하다고 하는 것은 쉽게 영향을 받고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한 의존적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의존하는 감정이고 또한 자기의 품에 사랑하는 사람이 기대올 때에 행복을 느끼는 감정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아내에 대해서 남편에 대해서 그렇게 느껴지지 않음은 우리의 사랑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가끔 질병에 걸리거나 아내가 많이 아파하는 날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조금만 무리하면 자기를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일생을 파도처럼 헤치며 살아왔습니다. 남편을 위해 가족을 위해 하나님 앞에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 연약한 자신의 본성과 싸우며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을 헤치며 살아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 연약한 아내가 연약한 그릇으로 남편들 옆에 있음은 남편으로 하여금 그를 의존하게 하고, 그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게 하고, 그를 가엾게 여기기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죄와 번민으로 방황하던 때에 주님께로 돌아왔던 시간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리 떠나 피곤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내 자신이 내 인생의 주체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터득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갈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을 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를 의존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을 온전히 의지했고 그리고 우리는 죄악 길에서 지치고 피곤한 우리의 육신과 마음을 기대어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인생의 시련과 고난 속에서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그 분을 의지했던 것처럼 주님이 당신의 넓은 가슴을 벌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든지 간에 당신의 품에서 쉬게 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아내에게 쉴 자리를 제공하고 용서받고, 또 용납되고, 이해받고, 사랑받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의 관계를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연약한 그릇이라고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바로 아내의 부족을 발견할 때마다 저렇게 연약하고 모자라는 것들을 내게 섬기고 보충하게 하기 위해서 나를 이 사람의 남편으로 불러주셨다고 생각을 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생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도 힘들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내를 자신의 품속에서 쉬고 의지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남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여기는 남편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아내와 동거함
마지막으로 아내와 동거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쉰 오이쿤테스’라는 희랍어 단어는 ‘쉰’ ‘함께’라는 말과 ‘오이케오’, ‘살다’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오이코스’, ‘집’이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파생되었고, 살림이라는 economy가 바로 여기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이것은 그냥 한 공간 안에만 머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림을 하는 것입니다. 함께 살림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면서 각 가족들의 육체적인 생명과 정신적인 생명들을 북돋아서 한 사람으로서 자기의 삶에 온전한 주체가 되어서 살아가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살림은 아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 그리고 모든 자녀들을 비롯한 가족 구성원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게 살림살이입니다. 좁은 의미에서 살림살이는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 다른 궁극적인 살림살이의 수단일 뿐입니다. 그 살림살이는 각 사람을 살게 해 주는 것입니다. 살려내는 것입니다. 지친 가족들에게 휴식을, 삶의 용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은혜가 식은 사람에게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채워주는 그것이 바로 살림입니다.
자주 아내와 이야기할 기회가 없어도 어느 날 말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은혜,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생명을 이야기할 때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그렇게 대화를 하고 나면 삶의 희망이 솟는 느낌이 듭니다. 회사에서, 사업에서, 직장에서 어려운 일을 만나고 삶의 용기가 꺾입니다. 그런데 아내와 대화를 시작합니다. 어떻게 우리를 만나게 해주셨고, 시련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고,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인생의 고민 속에서 간증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는지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놓지 않고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 거기에 붙잡혀서 살아왔는지를 간증하며 이야기할 때 살림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정신이 살아납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아납니다. 아내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남편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관계 속에 함께 계신 하나님 그래서 모질기 짝이 없고 정말 못나기 짝이 없는 아내인 자신을 깨뜨려 남편을 통해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신 것, 그리고 포악하고 그렇게 완고하던 남편인 자기를 주님이 시련과 고난 속에서 깨뜨리시고 빚으시고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통해 섬김을 받게 하셔서 살아온 날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서로 때문에, 때로는 아픈 부분 때문에 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남편의 단점은 아내인 나를 소중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었고, 또 아내의 모자라는 점은 남편인 내가 결코 성찰할 수 없었던 부분들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산에서 폭파함과 함께 거친 돌멩이 하나가 덜컹하고 떨어져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트럭에 아무렇게나 실려서 그냥 어느 한 작업 공간에 던져졌을 때에는 그 한 덩어리에 불과 몇 십만 원 하지 않는 바위 덩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조각가의 디자인에 따라서 석수장이들이 두드리고 자르고 깎으며 여러 달을 거쳐서 예술적인 조각품을 완성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바위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정말 아내를 만났을 때까지는 가치가 없고 거친 인간이었지만 함께 만나 살면서 용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용서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고통을 나누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고, 때로는 시련 속에서 그의 생명과 나의 생명이 결탁되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인생을 살아왔지만 아내와 함께 살면서 남편과 함께 동거하면서 자신이 인류는 사랑했어도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 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어떤 때는 관계가 깨져서 갈등이 생기고 화가 나고 어떤 때는 ‘이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내 인생이 꼬였구나. 너무 힘들구나.’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이고 잠시 갈등이 지나고 나면 다시 그리운 얼굴로 떠오릅니다. 운명처럼 내 마음에 묶여서 내려놓을 수 없는 사람, 이제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내 마음에 묶인 사람이라는 생각을 깊이 하면서 다시 그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아내의 모든 잘못이 용서되고 그리고 오해했던 모든 잘못된 것들을 다시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이 어찌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만 느끼는 감정일까요? 남편에 대한 아내의 감정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비로소 부부로서의 정신적인 연합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배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동거한다고 하는 것은 함께 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함께 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이 동거가 아닙니다. 본질적으로는 부부로서 얼마나 강력한 정신적인 연합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부부가 직업상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원 거리를 떨어져서 잠시 혹은 상당한 기간 동안 생활해야 하는 때를 만납니다. 우리는 종종 부부가 그렇게 사는 것이 비성경적이라고 비판을 합니다. 물론 그것이 그렇게 추천할만한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공간 안에 살아가는 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떨어져 있으면서도 정말 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그리워하고 애틋해 하고 생각나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같이 살아가면서도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걸고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처럼 그렇게 동거하는 부부도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33편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이것은 그냥 형제가 한집에 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적인 연합이 있고 그것이 외적인 삶에 있어서 함께 사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은 멀리 있는 사람도 가까이 느끼게 만들고 미움은 매우 가까이 있는 사람을 멀리 있는 사람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오늘 성경은 그래서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지식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게 만드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원동력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4장에서 너희가 지식을 버렸기 때문에 나도 너희를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고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향해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주님을 경외하며 살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이것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고, 이것을 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태어나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게 신약 성경으로 넘어오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변환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약 시대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예수를 아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분과 동거하는 그 지식을 따라서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내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배우면서 아내와 함께 정신적인 연합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젊은이들을 주례 섰습니다. 그 중에는 인간적으로 불행해지려야 불행할 이유가 없는 조건을 가지고 결혼하는 부부들도 봤습니다. 그런데 그 조건이 결혼 생활에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남편이 도달한 사회적인 지위, 여성이 지니고 있는 외모가 그 사람의 속사람을 보여준다면 속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 보면 살아봐야지 비로소 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알려진 그 사람과는 너무 다른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차이가 나고 서로 달라도 그 남편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으면 아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이,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이 그리스도라면 어떠한 남편도 아내도 적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멀리 있는 사람도 가까이 있게 만들고, 또 미움은 가까이 있는 사람도 아주 멀리 있게 만듭니다. 어떤 인간을 가장 잘 아는 길은 도마 위에 올려놓고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플라톤도 말하기를 어떤 대상을 비판하려면 그것을 먼저 사랑하라 말했으니 이는 바로 사랑이 참된 지식에 도달하는 길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앎에 도달하는 길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일생동안 서로를 알아가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발견했기 때문에 너무 감격스럽고 사랑스러운 것도 있지만 때로는 발견했기 때문에 아주 아프게 느껴지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만나기 전에 있었던 그 지난날 어렸을 때 과거의 아픔까지도 그것을 알고 난 후에는 자기 아픔으로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 전 존재적인 사랑입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은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IV. 적용과 결론
정말 사랑하면 아내의 결점을 발견할 때 소속감을 느낍니다. 정말 사랑하면 남편의 모자라는 점을 발견할 때 긍지를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런 정도의 남편의 결점을 보충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나를 여겨주셨구나.’ ‘하나님이 나를 저런 아내의 약점을 보필할 수 있을 정도라고 나를 평가하시고 세상에서 저런 까다로운 여자를 저렇게 다루기 힘든 여성을 만나게 하셨구나.’ 느끼는 것입니다. 문제는 배우자의 결점이 결혼 생활에 불행의 원인이 아니라 사랑 없음입니다. 사랑 없음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인간은 가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콩꺼풀 현상이 나타나서 결점을 못 보고 눈이 어두워서 미친 듯이 결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신앙 안에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하셔서 짝 지워주셨습니다. 그렇게 함께 모자라는 사람끼리 만나 남편과 아내로서 아내의 모자라는 점은 남편에 의해 용납되고 남편의 모자라는 점은 아내에 의해서 보충되고 서로가 서로를 깎으며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작품으로 빚어지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러면서 우리는 진정한 동거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살면서 얼굴을 보기 싫은 부부가 이상적일까요? 떨어져 있을 때에 그리운 부부가 정상적일까요? 주님은 그 아내와 함께 동거하면서 그 연약한 부분들을 보충하고 보호해 주라고 남편을 아내 곁에 두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래서 잠시 이 땅에 있는 동안 부부로서 함께 살아갈 때에 그렇게 아내가 남편인 여러분 품 안에서 충분히 동거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은혜로운 삶을 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젊은이의 독신, 연애 그리고 결혼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녹취자: 장주은
I. 본문해설
연이어지는 가족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이 많이 힘들어 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남편이 있어야 복종을 하지, 없는 아내를 어떻게 사랑하라고 저렇게 울먹이시면서 말씀을 하시나. 줘 봐야지 사랑하는지 안하는지 알 텐데. 그래서 갈등 끝에 오늘은 젊은이의 독신, 연애 그리고 결혼에 대해서 설교를 하기로 했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각자 소명을 따라서 독신으로 사실 분들은 독신을 고집하시고 연애를 하실 분들은 하시고 결혼하실 분들은 속히 결혼을 하셔서 청년부에 아무도 안 남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후 아담을 지켜보시면서 하신 당신 혼자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흙으로 빚으셔서 산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사람들은 불과 몇 시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부터 상당히 긴 시간이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지만 어쨌든 일정 기간 동안 아담은 혼자 살았고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 라고 했습니다.
첫 구절부터 마음에 걸립니다. 왜 하나님이 좋아 보이지 않는 일을 하셨을까. 이것은 하나의 눈높이 교육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소위 ‘아콤모다치오’라고 해서 눈높이 교육으로서 화법으로 우리를 이해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신 후 아마 아담 자신도 혼자 이렇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식하게 하신 다음에 여자를 주셔서 아내를 삼게 하심으로 둘이 부부로 살아가는 것이 홀로 독신으로 사는 것 보다 훨씬 더 좋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돕는 배필을 지으셨습니다. 그 배필을 지으시는 방법이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고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살로 대신 채우시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가 원래 한 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결국 몸이 하나가 되고 정신이 일체를 이루어서 마치 두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한 몸처럼 살아가게 하는 것이 결혼의 이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일 먼저 결혼과 연애에 있어서 남녀의 창조와 결혼의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II. 결혼과 연애
A. 남녀 창조와 결혼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혼인이라는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만든 모든 제도는 사람들이 살다가 보니까 필요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혼인의 제도는 인간의 경험 이전에 하나님이 미리 예정하셔서 이 결혼제도를 수립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결혼에 대한 성경적 생각을 보게 되는데 우선 첫째는 아름다움의 성취와 보완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한 인간 아담을 만드셨는데 인간을 창조하신 개별적인 목적은 아담을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심으로서 성취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담을 한 사람이 아니라 그에게서 또 다른 인간을 지으셔서 서로 다른 인간들이 사회를 이루며 살게 하심으로서 진정한 인간의 아름다움을 드러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들이 제일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을 위한 아름다움인가,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인류 사회를 아름답게 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들, 복수가 필요했고 그 사람들의 아름다움은 그들이 함께 관계를 가지며 살아가는 것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에게 디자인에 대한 감각이 있습니다. 파란 바닷가는 푸른 소나무 사이로 보면 더 아름답고 돌멩이만 있는 해변보다는 하얀 모래사장이 있는 그림이 더 예쁩니다. 색깔과 빛, 모양 같은 것들이 어우러지면서 한 개별사물만으로는 도저히 창출해 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완전한 것도 좋지만 그런 불완전한 사람들이 함께 관계를 가지면서 그 관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관계가 될 때에 인류 사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수많은 인류 중 단 한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 없도록 서로 다르게 창조하셨고 그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보완하면서 자신은 덜 아름다워도 다른 사람 때문에 아름다워지도록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서로를 의존하게 하심이었습니다. 즉, 남자와 여자를 각기 본성적으로 다른 본성을 가진 두 종류의 사람으로 창조하셨고 남성과 여성은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같은 남성 안에서도 또 다른 성격과 본성을 가진 사람으로 창조하셨으니 그것은 마치 지문이 서로 다른 것처럼 모든 수십억의 인류가 여태까지 이 지구상에 있었다고 믿어지는 1천억의 인간들 중 아무도 똑같은 사람이 없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같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뱃속에서 똑같이 쌍둥이로 태어났는데도 두 아이는 각각 성격과 기질이 다릅니다. 일란성 쌍둥이인데도 다릅니다. 신기한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사람으로 창조하셔서 그 사람들이 사회라고 하는 관계를 이루면서 사는 것을 보며 하나님은 인류 사회를 아름답게 여기시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자,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 성경에 나오는 ‘에제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여기서 보면 낯설지만 시편에서 아주 많이 나옵니다. ‘도움’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니, 나를 돕는 자시니,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할 때에 바로 그 도움입니다. 원래 이 에제르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전세가 기울 때 쯤 지평선에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는 응원군을 지칭하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응원군은 전투적인 부대를 돕기 위해서 오는 것이고 그 응원군 때문에 전투의 승패는 결정적으로 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이라는, ‘돕는 배필’이라는 것이 한 단어입니다. 이런 성경 구절을 토대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를 말하는 것은 가부장적인 성경 해석입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고 결정적으로 말하자면 도움을 주어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정도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에제르, 배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한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고 아직 죄가 없고 당신의 마음속에 의도하신 대로 남성을 창조하셨지만 절대적인 의미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결함이 없이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사람이 되기는 했지만 그렇지만 여성과 만나 한 몸을 이룸으로서 또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가지고 남성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둘이 하나가 되어서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일체를 이룸으로서 서로에게 도움을 줌으로서 각자 떨어져서는 도저히 구가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구가하게끔 만드신 것이 결혼 제도의 의의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이런 반문을 제시합니다. 그러면 결혼하지 못하는 것은 결혼한 것보다 열등한 것입니까.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창세기만 보면 안되고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오히려 신약성경에서는 독신을 아주 높이 평가합니다. 물론 모든 독신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이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은 주님의 사랑에 매여서 주님께 자신을 이미 다 드렸기 때문에 어떤 남성을 위해서도 봉사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상태의 독신을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라고 말하지 않고 독신의 삶을 유지했던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권고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가르침을 종합해 보면 결국 독신이냐, 결혼을 하는 것이냐 하는 것은 각자의 은사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독신과 혼인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혼자 사는 것도 아주 세속적이고 결혼 하는 것도 시집가고 장가가는 아주 세속적인 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결혼을 아주 성스럽게도 묘사하고 속되게도 묘사합니다. 노아의 심판 중에서도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간다는 이야기를 성경이 언급하면서 가장 세속적인 일, 신령한 것에 대한 관심을 끊고 현실에 몰두하는 세상적인 일의 한 본보기로서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확인을 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신에게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신의 삶을 살든지, 결혼을 하든지, 확실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붙들고 그 길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의에 의한 독신이 되지 말고 자의에 의한 독신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런 독신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에 대해서 확인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은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남성이 그리워지고 연애를 하고 싶고 특히 성적인 충동을 참기가 어렵다면 독신의 은사가 없는 것입니다. 빨리 시집을 가야합니다. 눈높이를 낮추어서라도 일단 빨리 가야합니다. 더 세월이 지나가기 전에 가야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있는데 물론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이 보내주십니다. 그런데 계속 기도만 하다가 끝나는 사람도 많습니다. 기도와 함께 자신도 남성들에게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매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시집가고 싶다고, 요즘은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정식으로 찾아와서 나를 시집보내달라는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세 가지를 이행하면 내가 너를 보내주마. 첫째, 기도를 많이 하거라. 두 번째,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거라. 세 번째, 예쁘게 하고 다니거라.” 그런데 그것을 끝까지 다 이행하는 자매는 거의 못 만났습니다. 어렵습니다. 어렵겠지요. 그런 노력을 기도도 노력도 함께 하면서 결혼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내가 해주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독신으로 살기로 부름 받은 것을 후회하지 말아라”. 그리고 “결코 그 독신의 삶을 외롭고 힘겨운 수도생활 하는 것처럼 살지 말아라.” 그래서 돈 벌고 건강하고 좋은 친구를 가지고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가치와 보람을 느끼면서 그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미리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있습니다. 나이가 많이 들면 외롭습니다. 그리고 건강을 잃어버리고 젊음이 사라졌을 때 혼자 살기 어려운 때가 옵니다. 그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모든 것도 내가 삶의 한 양식이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하는 미래에 대한 손익계산서를 다 짜고 그것을 예상치 못한 일이라고 맞이하면 안 되고 그런 일이 일어나도 이미 자신의 계획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꼭 독신으로 산다고 해서 반드시 신학교를 가서 여전도사가 될 이유는 없습니다. 그것만이 최고의 섬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각자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제 결혼을 해야 되겠는데 결혼을 할 때 결혼에 대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남녀를 보완의 관계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칭찬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세상적으로 슬기 있는 남성들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예쁘고 연애할 때 마음이 딱딱 맞는 사람과 재밌게 연애를 하다가 결혼할 때에는 평생을 같이 살 사람과 만나서 결혼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남자입니다. 신앙적으로 권장할 만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보면 연애할 때는 둘이 생각이 딱딱 맞아서 기분 낼 때 기분 내고 돈 쓸 때 돈 쓰고 이런 것이 신나겠지만 그런 사람과 결혼하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연애를 해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둘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한 6개월 살고 헤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같이 연애하고 지냈는데 결혼하고 나서 보는 모습은 그 긴 연애기간 동안 전혀 파악되지 않은 모습이 발견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보완의 관계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연애 할 때 잘 안맞는 것 같았던 사람들, 근본적으로 인간성에 신뢰가 안 간다든지, 죽어도 싫은 것, 끝까지 아무리 참고 기도하고 테스트를 해봐도 끝까지 싫은 것, 저 남자와 사느니 독신으로, 저 여자와 사느니 차라리 그냥 조용히 주님 품으로, 그런 경우에는 짝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티격태격 하고 뭐가 안 맞습니다. 그 때에 보완의 관계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결혼생활을 좌우하는 것은 능력인데 그 능력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와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고 살아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예를 들자면 모든 사람이 그렇진 않지만 외동딸로 태어나서 엄마 아빠가 도저히 그 아이를 못 꺾었습니다. 해달라고 해서 안 해주면 딱 드러누워서 발 막 뻗고 신발 집어던지고 하면 엄마가 무릎 꿇고 사과하고 해주는 집안에서 자랍니다. 그런 사람이 결혼을 하기 굉장히 힘들고 결혼을 해도 직장 다니는 것부터 힘들지 않겠습니까? 직장 다니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서 자유업을 하거나 사람들에게 많이 눈치 보이지 않는 직업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렇게 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런 환경 속에서만 살던 사람이 결혼생활 속에서는 누가 누구를 굴복시키고 그런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 그렇게 하면서 살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은 함께 살아가면서 안 맞는 것들을 서로 깨달으면서 서로 조정하고 양보하고 대화하고 하면서 배워야 하는데 기본적으로 자기희생과 절제, 자기의 욕망과 꿈을 위해서는 무한히 절제하면서 살아가는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절제라고 하는 것은 그런 절제가 아니라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데서 오는 부조화를 조화로 바꾸는 절제와 인내입니다.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나 이번 시험에 꼭 합격할거야.” 하고 안자고 안 먹고 미친 듯이 각성제까지 먹으면서 공부해서 결국 합격하고 마는 사람, 그 사람이 인간관계에서도 그렇게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능력입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은 좀처럼 자기를 꺾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자신에게 실망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더더욱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고 꺾는 것이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여자들을 남자들끼리는 대가 세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것은 결혼의 원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보면 그런 성격 때문에 결국은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엄두를 못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소설이나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무한한 사랑으로 자기는 백화점에서 알바 하는데 재벌 2세가 그냥 한없이 무한한 사랑으로 자기를 품어줘야 하는데 내가 이야기하잖아요, 그런 것이 현실로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는 작가도 믿지 않고 쓰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훨씬 냉정합니다. 그러면 결국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해주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남을 사랑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자기를 완성해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형제들도 자매와 지금 교제하고 있을 수도 있고 교제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진짜 센 여자를 만났습니다. 지금 뭐 하나 밥 하나 먹는 것도 마음대로 결정을 못할 정도로 거칠고 아주 폭력적입니다. 그 대신 또 그런 사람이 마음에 맞을 때는 뭐든 것을 불사르게 다 내어줍니다. 그 때에 결정하십시오. 이 여자를 끝까지 사랑하면서 나를 완성해 갈 것인가? 아니면 그만 둘 것인가?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 때에 돌연변이 같은 여성을 만난 형제들은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내가 얼마나 완성이 덜 됐으면 저렇게 센 사람을 만나게 해주셨을까? 그리고 한번 소속감을 가지고 도전해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만나야 되겠습니다. 만나야 합니다.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성을 만났을 때 거의 사차원 같고 정신이 하나도 없고 적응이 안 됩니다. 왜? 자기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남자가 있습니다. 외모는 이미 오랜 세월 연속된 실패 속에서 포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자기에게는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그 외모의 남자가 합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다른 사람이 인정해줄 정도가 되어서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속에 있는 인간성이라든지 예의, 범절, 매너, 이런 것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안 만났을 때에도 한 번쯤은 생각을 바꾸어 보라는 것입니다. 이정도 다른 점에 있어서 모든 것들이 큰 문제가 없다면 한번 이 사람과 살면서 내가 살가죽이 벗겨지더라도 한번 끝까지 이 사람을 사랑하고 낮추어 가면서 내가 자기완성의 길을 한번 걸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리고 한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던져보는 것입니다. 그 대신 결혼을 하기 전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결혼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일수불퇴입니다. 끝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그 관계에 헌신하면서 자기를 맞추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생활을 한 많은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모두 행복한 사람도 없고 모두 불행하기만 한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물론 아주 소수는 있겠습니다. 대부분 쓴맛과 단맛이, 슬픔과 기쁨이 함께 뒤섞여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을 다 산 후에 한 번 더 인생을 살겠냐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은 ‘노’ 하는 것입니다.
저는 생각을 이렇게 합니다. 젊은 사람이 부럽냐? 부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10대에 14살, 15살 때에 자각이 생기고 나서 너무 힘겨운 인생을 주님을 만나고 주님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 겪었기 때문에 나는 지금 얻은 평안을 양보하고 진짜 넘치는 싱그러운 젊음을 준다고 해도 나는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철학자 두 사람이 앉아서 대화를 하면서 80이 다되신 분들이 인생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마음대로 한다면 언제쯤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을까, 하고 두 철학자가 도달한 결론이 65세였답니다. 40대도 아니고 30대도 아니고 65세. 왜? 그 때 쯤 돼서 이제 인생의 이치를 터득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65세 쯤 되고 나니까 아내하고도 갈등할 것도 없고 이미 벌써 다 아는 사람이고 친구처럼 살아가고 하는 가장 안정된 시기가 65세, 그것도 열심히 살았을 때 그 나이에 거기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 사람이 얼마나 완전한 배우자를 만나느냐에 의해서 결혼의 행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 수많은 불행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이 바람을 피울 수도 있습니다. 또 사람은 성실하고 너무 좋은데 일찍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죽지는 않아도 매우 병약할 수도 있습니다. 또 재해를 만나고 어떤 재난을 당해서 불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수많은 인생의 우리들이 상상치 못했던 수많은 변수들이 거기 있고 결혼을 함으로서 적어도 많은 사람들, 최소한 자식을 낳게 되면 혼자 살았으면 안 가졌어도 될 관계인데 거기에서 별 자식들이 다 태어납니다. 그 자식들은 어떤 자식은 진짜 위로가 되는 자식도 있겠지만 어떤 자식은 저걸 내가 왜 낳았을까, 여러분의 부모들이 탄식하던 탄식을 되풀이하게 만드는 새끼도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 관계뿐만 아니라 젊었을 땐 결혼하고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동생, 그 중의 한 사람만 이상하게 사차원으로 행동을 해도 가정의 평화가 뒤집어지고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차피 우리에게는 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변수들이 거기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는데 결코 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해서 담 쌓고 박스 속에 들어가서 공중에 매달려서 살 것입니까? 어차피 시집과 처갓집 왔다갔다 하고 심지어 경제적인 것도 얽히고 섥히고 하면서 복닥거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별의 별 일들이 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래도 뭔가 행복을 찾아가게 만드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람과 관계를 맺는 능력입니다.
신앙이 그것에 도움을 주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신앙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줍니다. 성경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삶을 다 살아본 분이신 것처럼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라, 하고 정답을 알려주십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 답이 안 나옵니다. 살짝 뒤를 봐서 답을 보았습니다. 그럼 풀립니까? 안 풀립니까? 풀립니다. 그것이 신앙의 유익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믿고 기다리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신앙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최소한 함께 살아가기 어려운 사람들이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결국은 가정을 그래도 안정되게 만드는 사람들 중에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했을까? 최소한 그 사람들은 대부분 모두 예외 없이 신념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이 없어도. 아시겠습니까? 신념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일관되게 자기의 삶을 이끌어가는 가치가 있기 때문에 물론 그 가치가 이까짓 것, 하고 확 끊어버리고 이혼을 하게 하는 가치관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함께 살아가게 하는 가치관일 경우에는 일관된 가치관이 있기 때문에 아내로서 남편의 태도 하나에서 인생이 다 뒤집혀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편으로서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에 지옥과 천국을 오르내리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연애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연애할 때 아무것도 아닌 일로 대판 싸웁니다. 다 때려치우고 싶습니다. ‘때려치워야겠다.’ 마음먹고 절교편지를 막 쓰고 이러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또 생각이 납니다. 오후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분한 것입니다. 이렇게 감정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내가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언제 저 친구가 화해를 신청해오나. 그 때는 내가 한번 튕기다 두 번째 받아줘야지.’ 이러면서 머리를 굴리면서 살 때, 그게 즐겁습니까? 그걸 다시 반복하고 싶습니까? 난 아닌 것 같습니다. 진짜 쓴 물을 먹으면서 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인간으로 태어나서 한번정도 결혼을 하기 위해서 그런 과정을 겪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이 만약 일생의 삶이 그런 것이라면 살만하겠습니까? 그게 무슨 재미입니까? 그것은 그것을 다 통과한 사람들이 제 3자가 하는 것을 보면서 “아 좋을 때다. 그것도 참 재미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지 실제로 그것을 통과하는 사람들은 그런 안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관계를 맺는 기술입니다. 이것이 내가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보십시오. 여러분이 직장에서 함께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가족과도 관계가 잘 안됩니다. 교회 와서도 어떤 구역에, 순에 들어가면 그 순이 굉장히 힘들어합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이 관계를 맺는 능력이 몇 점 쯤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면 그 점수 이하가 나오지 이상은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제가 늘 하는 말로,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결혼을 한다고 해서 평소에 없었던 관계를 맺는 능력이 하늘로 치솟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 푹 빠졌을 때에는 심장도 빼줄 것 같은데 그걸 왜 못할 것 같습니까. 그런데 관계는 어느 한 순간에 심장을 훅 빼서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심장을 간직한 채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함께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한순간에 불타는 헌신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순간의 불타는 열정과 순교적인 각오의 헌신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동안을 부대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진짜 사람답게 살아가고 싶어 하는 부모님 곁에서 이상적인 인간을 발견하고 스승에게서 가장 모범적인 인간의 자세를 발견하고 그렇게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친구를 만났어야 했습니다. 우리 중 그런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 망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떡합니까?
예전에는 사람과 부대끼면서 사람이 자기를 슬쩍 스치기만 해도 적개심을 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관계에 있어서 자기 할 일은 딱딱 하더라도 자기 보호본능이 워낙 강해서 자기와 다른 사람하고 함께 이야기하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밥 먹는 것 자체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관계 맺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다른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자기와 다른 것들을 어떤 의미에서 어느 정도는 즐길 수 있고 용납할 수 있어야지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인데 찬바람이 나게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우리는 예전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항상 관계가 잘 안되면 항상 다른 사람의 탓을 합니다. 저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친구를 사겨보면서도 여러분은 그래도 정상에 많이 가까운데 친구가 아주 정상으로부터 멀어져 있어서 교제 자체가 힘들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든지 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망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사람의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감히 예수님이 너희는 이렇게 형제를 용서하라, 이러실 때 아이고 주님 잘났어,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사람을 향해서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주님을 향해서는 그렇게 못합니다. 참 인간으로서 살아야 하는 모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웁니다. 신앙이 있으면 그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자기가 깨뜨려지고 주님 앞에 자기를 꺾었던 것만큼 다른 사람 앞에서 그것을 꺾을 수 있는가, 그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앙에 있어서 이런 기회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다른 사람보다 더 훌륭한 좋은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능력을 길러가는 것은 주님과 관계를 맺는 능력을 길러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보면서 진심으로 자기의 모습을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보고 자신의 잘못된 삶에 대한 태도를 죄와 연결시켜서 주님 앞에 회개하고 그래서 깨뜨려지고, 그렇게 깨뜨려지고 변화되고 자기가 꺾어지는 것이 처음에는 너무 힘든 것입니다. 꺾어지느니 차라리 부서뜨려서 파멸되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게 되면 그렇게 자기가 꺾어질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강물처럼 밀려들어옵니다. 여러분이 기억을 잘 못하셔서 그렇지 조용히 객관적으로 회고를 해보면 강물처럼 밀려들어오는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때에는 언제나 자기가 꺾어지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거울을 보면서 하나님은 어쩜 이렇게 잘 만드셨을까, 진짜 나는 주님이 만드신 걸작이야, 진짜 나는 훌륭해, 이 때 강물 같은 은혜가 밀려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구나, 나는 정말 망가진 사람이구나, 엄마와의 관계가 이걸 보여주잖아? 어느 날 자기를 돌아보니까 온전한 관계를 맺은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입니다. 아빠, 엄마, 동생, 누나, 오빠,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돌아보면서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가 살아도 그리운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 나는 정말 망가진 사람으로 일생을 살았구나.’ 하는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만나고 21살 회심했을 때 절실하게 느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너무 너무 그 관계가 그립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혹은 헤어지는 것이 두려운 사람이 한 두 사람쯤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모습을 처음으로 진리의 빛 아래서 객관적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진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비교될 수 없는 진리의 탁월한 가치는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관성이 있게. 그냥 생긴 대로 살다가 진리를 딱 깨닫고 나니까 그 빛이 쫙 비치면서 그 진리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또렷하게 들어오면서 그 진리가 질서를 잃어버린 모든 관계들을 정상화 하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힘입니다.
제가 결혼식 할 때마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사랑의 원인이지만 그 아름다움이 육체, 심지어는 정신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은 언제나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자매가 젊으니까 풋풋하고 예쁩니다. 나이도 어리고 예쁠 것입니다. 실제로 더 예쁜 사람을 얻었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도 다른 사람에 비해 덜 나빠서 순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외모는 영원하고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은가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뒤져보면 이게 작대기를 넣지 않아서 그렇지 작대기를 넣고 휘저어보면 속에 온갖 것들이 다 잠재되어 있습니다. 쏟아져 올라옵니다.
결국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하면 사랑받는 대상에게 사랑의 원인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 이외에는 참 사랑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의 성품으로부터 사랑을 완성해 가야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 주님과의 관계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교정하고 고치고 깨뜨려질 때 주님과의 관계가 더 온전해지는 이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연애도 결혼도 부부생활도 그런 것이라는 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해도 늘 기도하고 눈물 흘리면서 살아온 모든 부부들은 이 말이 이심전심으로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겨우 시작일 뿐이고 이제 전혀 같지 않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면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해 가면서 자신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면 하기 싫은 것 가운데 하나가 폐활량 측정입니다. 숨을 들이마시고 훅 붑니다. 들여 마실 때도 한껏 들여 마셔야 하니까 평소의 숨 쉬는 것보다 훨씬 많이 숨을 쉽니다. 폐가 찢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들여 마시고 숨이 넘어가도록 훅 붑니다. 특히 스트레칭 같은 운동을 할 때 평소에 쓰는 근육의 각도보다 더 비틀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통을 통해서 근육의 활동 영역도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고 폐활량도 늘어나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 고통을 동반하지 않고는 사람과 관계를 맺는 능력이 증대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형제 많은 집에서 함께 어울리면서 힘겹게 살아온 자매들이 그런 형제들이 이 본성적인 면에 있어서라도 훨씬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은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인정해야 합니다.
결혼은 끊임없는 자기완성의 길입니다. 그 행복을 찾기 위해서 결혼을 하지만 사실은 행복을 찾아가는 그 과정이 불완전한 자신을 완성해 가는 과정과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많이 들게 되면 그것도 성공적으로 인생을 살아야지 그런 것입니다. 결혼 생활을 많이 부부가 함께 살아오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냥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보고 싶고 그립고. 짜릿짜릿하게 그립고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푸근하고 이 세상에서 들리는 언어가 없어도 자기를 다 이해해 줄 것 같은 그런 교감을 누리면서 사는 그것이 성공적으로 결혼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난관을 만납니다. 그리고 결혼을 했는데도 독신으로 살 때보다 더 외로워서 혼자 눈물을 흘리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얘기하지만 결혼한 남자가 어두운 밤에 홀로 흘리는 눈물은 발에 꽂히는 칼과 같습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라고 하는 자아를 자기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망가진 사람 둘을 하나로 묶어놓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속에서 쓰라리고 힘들고 자기를 꺾는 고통스러운 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자기를 꺾고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포기하고 자식들을 위해서 자기를 낮추고 희생하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사람과 관계를 맺는 우리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근육들이 고통 속에서 이 범위를 확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한 남자와 인생을 교감하며 마지막에 친구가 된 노년을 맞이하고 자식들과 갈등이 있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관계가 된 엄마 아빠는 이미 어떤 의미에서 인생에 있어서 대가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언젠가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 한 인간으로서 세파를 다 헤치고 여기까지 살아왔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그 사람의 사회적인 지위와는 상관없이 존경하게 되는 날이 옵니다. 그 날이 철든 날입니다. 안 그럴까요? 전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냥 살아서 내 앞에 희끗희끗한 머리로 서있는 사람들이 존경스럽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그리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본받고 싶지 않아도 어쨌든 자기 인생을 헤치고 왔다는 것이 마치 저 위의 상류에서 만난 회귀한 연어같이 그렇게 대견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끊임없는 자기완성의 길입니다. 그것을 깊이 인식하고 연애할 때도 그런 것을 배우십시오. 그렇게 했더라면 결혼으로 골인할 사람들이 자기 성질대로 막 하고 파토내고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입니다.
B. 결혼을 위한 연애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결혼을 위해서 연애를 하는 건데 무엇을 위한 결혼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두 사람이 함께 엮어지면서 사는 것을 기쁘게 여기셨으니까 결혼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함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아름다움이지만 그것이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한 결혼인가. 혼자 살아갔더라면 자기가 추구했을 목적과 결혼을 함으로써 추구했을 목적이 달라서는 안 됩니다. 목적과 목표는 다릅니다. 목표는 당장 이룰 어떤 성취의 과녁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이룰 목적은 보다 더 궁극적인 것입니다. 목표는 여러 개일 수 있습니다. 내가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 행정법을 50번 읽겠다, 헌법을 외우겠다, 기출문제 만 문제를 풀겠다, 이것은 목표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변호사가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보면 변호사가 되든지 회사원이 되든지 뭐가 되든지 간에 그것은 삶의 양식일 뿐입니다. 목적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독신으로 살든지 결혼해서 부부로서 살든지 간에 목적 자체가 달라질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혼자서 살아갔더라면 갔을 그 목적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양식이 독신이냐 결혼을 해서 가는 길이냐에 의해서 차이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가려고 했던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 남편과 혹은 이 아내와 함께 그 길을 간다는 마음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결정하게 해주는 것은 세속적인 지능이 아닙니다. 신앙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못하고 가방끈이 짧아도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일생을 주님을 위해 드린 사람은 이 목적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편의점 하나를 경영하거나 도너츠 가게를 경영하거나 하다못해 만두집을 해도 그 목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결혼생활의 목적을 정할 수는 없습니다. 목표는 정할 수 있습니다. 결혼하고 3년 안에 집을 사고 5년 안에 아기를 낳고 그 다음에 뭘 하고 뭘 하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인생에 대한 비전을 품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이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셨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나로 태어나게 하셔서 나는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인류를 창조하신 목적에 어떻게 이바지하며 살 것인가, 나머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이냐, 어디에서 살 것이냐, 어떤 모양으로 살 것이냐는 양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깊이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이 두 사람이 만나서 이런 자신의 인생의 목적에 대한 뚜렷한 이해를 가지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면서 가난할 때도 있고 부유할 때도 있고 시련과 많은 어려움들을 만나겠지만 마지막까지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궁극적인 인생의 목표에서 일치를 이루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혼을 할 때에 배우자를 정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이 한 순간에 외모나 어떤 만남의 불꽃처럼 화학작용이 일어나서 이 사람에게 끌리게 해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마음속에 스파크가 일어나고 불붙는 사랑으로 그렇게 연애하는 감정을 어떻게 하면 계속 지속할 수 있을까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안 됩니다. 결혼한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남편을 보면서 설렌다는 여자는 봤어도 그런 남자는 못 봤습니다. 감정 구조가 다릅니다. 그래야 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결혼을 하고는 결혼을 한 사람으로서 맞는 사랑의 양식, 그런 것들이 필요한 것이고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느끼게 되는 것은 그런 사랑의 출렁이는 감정은 시간에 따라 변하겠지만 아까 3부 예배 때 설교한 것처럼 남편은 아내가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운 것입니다. 만나서 뭘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연애 때는 항상 만나서 뭘 하는 게 있었습니다. 만나서 뭘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립고 푸근하고 신앙의 동지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동질성을 가지고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살림입니다. 살림이라는 말이 살려내는 것입니다. 삶의 기운을 다 잃어버린 사람이 가정에 와서 살림의 혜택을 보면서 살아가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좁은 의미에서의 살림은 밥하고 빨래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살림의 극히 일부입니다. 지치고 힘겨웠던 사람이 가정에 와서 오늘은 엄마가 힘을 주고 내일은 아빠가 힘을 주고 아이들이 힘을 주고 하면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는 가정이 영혼의 복원력을 가진 은혜의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동지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냥 남성들이 여성에게 프로포즈를 하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물론 죽도록 따라다녀도 절대 안 되는 짝도 있습니다. 진작 알아보시고 포기하고 괜히 헛돈 쓰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냥 오래 버티면 좋아하게 돼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회심하고 하나님의 은혜 중에 있을 때 우리 교회에 신학생 하나가 있었습니다. 4학년 학생이었는데 진짜 주님을 위해 열렬한 그 여전도사 출신의 자매였습니다. 전도사 생활 하다가 우리교회에 올 때는 전도사로 안 오고 청년으로 와서 저와 함께 교사 생활을 열심히 했는데 정말 열렬했습니다. 어느 날 와서 진짜 자기 큰일 났다며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총각 때 집사였습니다. 왜 그러냐 했더니, 물론 저는 그분에게 전혀 끌리지 않았습니다. 전혀 제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진짜입니다. 전혀 아니었습니다. 못생긴 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전혀 끌리지 않았습니다. 그 때 또 저는 주님만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프로포즈를 한 사람이 있는데 너무 위험할 정도로 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지켜주실 거라고, 당신 마음이 중요하니까, 하며 그 수준에서 적당한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종종 만나서 자기 괴로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도 집까지 따라왔다, 자기는 쳐다보지도 않고 문 닫고 들어갔다 그러더니 결국은 1년 반 후에 결혼했습니다. 결혼을 하면서 하는 말이 “집사님 어쩔 수가 없네요. 계속 따라다니니까 결국 좋아지더라구요.” 합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한번 싫다고 그랬다고 해서 진짜 싫은 거겠습니까? 정말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여러 해 전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펄펄 뛰었는데 결국 결혼했습니다. 인내입니다. 끝까지 곁에 있어주는 것입니다.
에펠탑을 만들 때 사람들이 다 욕했습니다. 그런데 시장이 20년 후에 시민 투표를 하겠다고 했는데 20년 사이에 너무 친숙하고 정이 들었습니다. 맨 처음엔 사람들이 창문을 열다가 보기 싫어서 창문을 닫았답니다. 지금은 사랑받는 에펠탑이 되었습니다. 그냥 끝까지 한번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친근한 정이 갈 수도 있습니다. 아닐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여성들은 자기 의사를 명료하게 표시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명료한 표시를 남성들은 모두 믿지는 마십시오. 기다리십시오. 괴롭히지는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기다리십시오. 그래서 결혼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결혼은 무엇을 위한 결혼입니까? 자기를 완성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하나님의 제도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신앙 안에서 하나님께 그 뜻을 물으며 가야 하고, 또 그 뜻이 일치를 이룬다고 할지라도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함께 신앙의 동지를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중요한 검증이 필요한 것입니다. 서로 다르고 다투고 힘든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한두 번의 사건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의 사랑으로 인내하고 참고 주님 안에서 깨어지는 법을 배우고 하면서 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그렇게 노력을 하면서 우리들이 한 가정을 이루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배우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나도록 하나님께 기도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에게 끌릴 만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수많은 사람과 경쟁해서 쟁취한다고는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을 맺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준비된 사람에게는 기회가 와도 기회이지만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기회가 와도 그것이 기회인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똑같은 충고를 하고 싶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매력이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정말 하나님 앞에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지를 묻고 결혼을 통해서 독신으로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길을 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아 8:6上)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아가서는 솔로몬이 자신의 사랑하는 신부, 술람미 여인을 위해서 쓴 주고받은 연가입니다. 교회의 역사가들은 이 아가서는 마치 열쇠를 잃어버린 자물쇠와 같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만큼 이 속에는 비유도 많이 나오고 해석이 어려운 구절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정경성의 논란이 있었지만 역사적으로는 거의 빼놓지 않고 성경의 목록 속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아가서가 사랑을 받은 것은 이 아가서가 단지 남녀의 애정행각을 담은 노래가 아니라 보다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비유하고 있는 시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녀의 사랑이라고 하는 보편적인 경험의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이라는 특별한 신앙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혼인 언약적인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그 큰 사랑, 그리고 교회가 어떠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열애해야 되는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동시에 신랑과 신부의 아름다운 사랑의 감정과 그리고 연합의 정을 보여줌으로써 아내와 남편이 어떻게 서로를 사랑하며 일생을 살아야 할지도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II. 끊을 수 없는 사랑
A. 도장처럼 품고
시간 때문에 오늘 이 유서 깊은 6절 전체를 해설하지는 못하겠지만 6절 전체에 흐르고 있는 단 하나의 사상은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랑과 신부 사이에 무엇으로도 끊어질 수 없는 사랑이 있음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 사랑을 오늘 이 아가서는 “도장처럼 품고”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 도장은 권리를 행사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예레미야 32장 10절이나 혹은 예레미야 22장 24절을 참고할 때에 이 도장은 팔찌처럼 끼거나 혹은 손에 끼는 반지와 같은 타입이었습니다. 창세기 38장에 보면 그 반지를 끈에 매달아 목에 걸기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렇게 목에 걸어서 늘어뜨린 것이 가슴에까지 닿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도장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도장의 휴대 방식을 은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에 늘어뜨린 목걸이처럼 매달고 다니는 도장이 가슴에 매달린 것처럼 그렇게 남편은 아내를 가슴에 품고, 또 도장이 팔에 혹은 손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아내를 자신의 품 가까이에 두고 연합의 감정으로 살아가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장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물들에 대해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작지만 자신의 전 재산이요, 모든 것과 같습니다. 아마 성경에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그 고백 다음으로 그림 같은 표현일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거의 도장이 별로 쓸모없이 사인으로 통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이때 권리를 행사할 때에는 손에 낀 인장으로 도장을 찍거나 가슴에 매단 도장으로 찍습니다. 그때는 아직 종이가 발견되기 전이니까 부드러운 진흙같은 데에 그 도장을 찍어서 그것을 불에 굽거나 햇빛에 말려서 그 사람이 승인을 한 것이라는 표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연합하기를 마치 아내에게는 남편이 남편에게는 아내가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주고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사람인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꼭 한번 살고 지나가는 것이고, 아내와 남편으로 만난 인연도 이 세상에서 단 한번 유효한 것입니다. 천국에서도 우리는 남편과 아내로서 교회의 지체로서 서로를 알아볼 것이지만 천국에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도 없으니 모든 성도들 속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꼭 한번 살고 가는 우리의 인생의 결정적인 만남이 아내와 남편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서로를 깊이 용납하며 각기 하나님이 자신에게 짝 지워 주신 고귀한 형상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의무임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남편이 연애시절처럼 자기를 대해주지 않는다고 징징거리는 아내들을 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게 징징거려서 사람들에게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이야기가 있으면 부드럽게 정색을 하고 여러분이 원하는 내용을 정확하게 이야기하십시오. 어린 아이처럼 징징거리고 조르는 태도로 그렇게 불평하는 태도로 남편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힘겹게 살아온 사람입니다. 아내는 결혼에 있어서 늘 가사에 얽매이며 자신의 인생에 결혼이 마치 커다란 피해를 준 원인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런 아내를 두고 이 세상의 세파를 헤치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살아가는 남편의 존재의 무게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힘겹게 살아가고 이 세상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이 외로운 남편들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아내는 소싯적처럼 그렇게 낭만적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지만 남편은 마음을 터놓고 자기를 진심으로 용납해 주는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외로운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요구받는 의무들은 사회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수없이 많고 그 의무들을 이행하지 못했을 때에 여기저기서 손가락질을 하지만 그러나 남편도 때로는 그 모든 것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없고 고갈될 적이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내도 남편에게서 아이들에게서 그리고 교회에서 요구되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을 다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없으리만치 그렇게 고갈이 올 때도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징징거리거나 무엇을 행하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는 무한히 서로를 용납하는 관계이고 그래서 자신도 힘든 삶을 살면서 또 한 사람을 가슴의 팔에 기대게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남편에게나 아내에게나 사랑의 힘이 필요합니다. 아내들은 종종 남편이 생각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고 불평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남편은 그 모든 사랑을 다 표현하지 못해도 사실은 마음 깊은 곳에서 그 사람 이외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사랑하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인터넷에 나와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한 일화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나이 많아서 이제 막 노년에 접어드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찌어찌한 사연으로 질병에 걸려 아내가 점차 시력을 잃어가게 되었습니다. 부요하지도 못해서 큰 돈 들여 치료받지도 못한 탓에 결국 아내는 점점 시력이 약해졌고 마지막에 남편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내는 완전히 앞을 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그래도 아내는 자기 하던 일을 계속해서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손을 이끌고 이제 건널목을 건너고 버스를 타고 일터까지 바래다주었고, 그리고 저녁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데리러 와서 집으로 귀가시키고 그렇게 정성껏 아내를 보살폈습니다. 불편했지만 남편의 이 끔찍한 도움으로 아내는 그나마 위로를 받으며 앞을 못 보는 슬픔을 달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짜증을 내면서 말했습니다. “나 이제 나도 바쁘고 힘들어서 이렇게 당신을 매일 데려다 줄 수 없어. 당신 스스로 한번 직장을 출퇴근 해보라”고 남편이 짧고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여러 날 동안 가본 길이라 아내는 지팡이를 의지하고 때로는 건널목에서 들려오는 신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발바닥에 밟히는 그 보도블록의 감각을 읽으면서 때로는 넘어지면서 사람들에게 길을 물으며 버스를 타고 이제 일터에 나갔습니다. 그러기를 여러 날 하는 동안 이제 아내는 큰 어려움 없이 그렇게 자신 혼자서 불편하지만 일터까지 왔다 갔다 하며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몇 달 동안의 세월이 흘렀을 때였습니다. 드디어 자기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 도착한다는 그 버스의 방송 소리를 듣고 지팡이를 짚고 그리고 위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출입문 쪽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때에 그 버스 기사가 그 할머니를 자주 보았는지 반색을 하면서 앞도보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는 참 좋으시겠어요.” “왜요?” “아니 이렇게 매일같이 할아버지가 바로 뒤에서 할머니를 늘 보살펴드리면서 버스를 타고 내리고 길을 건너고 그러시니 할머니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제야 이 아내는 남편이 자기보고 혼자 일터를 다니라고 퉁명스럽게 내뱉은 말이 자기를 바래다주기가 싫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남편도 나이 들고 노인의 건강은 믿을 수가 없어서 언젠가 자신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아내가 자기를 더 이상 의지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이 남편은 아내를 그렇게 혼자 가라고 해놓고 그렇게 여러 달 동안 아내 바로 뒤에서 넘어질까 쓰러질까 살피면서 일터까지 바래다주고, 또 뒤에서 보살피면서 데려오기를 여러 달을 계속하였던 것입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이 짧은 만화 형식으로 된 영상을 보면서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도 그 영상을 기도원에서 보면서 참 많이 눈물이 났습니다. 부부는 비록 그것을 말로 모두 표현하지 않아도 그 사람 안에 그런 사랑이 있으려니 하고 믿으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시편에 보면 사과나무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간이 없어서 이것을 상세히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힘들고 어려운 날에 이 신랑과 신부가 함께 사랑을 나누었던 추억이 깃든 장소를 회상하면서 그 사람을 향한 사랑, 자기를 향한 그 사람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많은 주석가들이 일치한 의견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을 때 아내가 남편이 밖으로만 돌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 같지 않다고 느낄 때 징징거리고 불평하고 그리고 홀로 외롭다고 생각하는 대신 고생 속에서 어떻게 만나고 그 많은 인생의 길을 어떻게 함께 헤치면서 살아왔는지를 회상하며 남편의 사랑을 그리고 아내의 사랑을 신뢰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당신의 피로 교회를 사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을 힘입어서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주님의 사랑은 신실하고 변함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의 사랑의 품을 떠나기도 했지만 떠난 그곳에서도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설복하여 우리를 일깨우고 당신의 사랑의 품 안에서 사는 진정한 행복을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분은 신부인 우리에게 징징대면서 당신을 사랑해 달라고 유치하게 조르지도 아니하였고, 또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우리를 위협하고 공갈하며 복수를 하겠노라고 주먹을 움켜쥐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허허롭고 가슴 아픈 날들은 언제나 그 분의 사랑을 떠난 시간들이었고, 따뜻하고 행복했던 날들은 교회의 남편이신 그리스도의 품 안에 있는 날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사랑하고 용납하며 살라고 그 본보기를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보여주셨고, 교회가 순결하면 순결할수록 그 분을 향한 사랑이 뜨거워지도록 섭리하심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아내를 사랑하도록, 주님의 은혜를 배우면 배울수록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우리를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는 아내를 사랑할 사랑의 자원을 아내의 아름다움에서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꽃처럼 곱던 모습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늙어가고 그렇게 아내를 바라보는 자신도 그렇게 젊음을 잃어버리고 늙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의 아름다움은 그렇게 풀의 꽃과 같고 그리고 잠시 머무는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과 같습니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이슬의 영롱함은 잠시 아름다움이고 햇살이 퍼지면 안개가 사라지는 것처럼 풀잎 끝에 이슬도 마릅니다. 그러나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관계의 모상으로서 영원히 마르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아내들을 도장처럼 마음에 품고 팔에 두십시오. 여러분의 남편을 도장처럼 가슴에 품고 그 사랑을 가슴에 안으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교회에 보여주신 아름다운 사랑 때문에 이 남자를 사랑하고 이 여자를 사랑하며 사는 것이 내가 한 사람의 온전한 인간이 되는 길이라고 믿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사랑의 완성은 고고한 하늘에만 속한 것이 아니요 매일 부딪히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생사 전체가 이 사랑을 이루는 기회이니 이렇게 부대끼는 삶 속에서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는 아내를 한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랑하십시오. 그 속에서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한 여자의 품에서 기대어 사는 남편의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서로를 보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도장처럼 서로를 품고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죽음 같은 사랑
두 번째는 죽음과 같은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불길같이 일어나나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질투’라고 번역된 구절은 히브리말로 ‘끼나’라고 하는 단어인데 많은 주석가들은 이것이 질투라기보다는 ‘열애’라고 번역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같은 단어가 여러분이 잘 아는 시편 69편에 등장하고 신약 성경에서도 시편 69편에 이 구절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성이 나를 삼켰나이다”라고 할 때에 그 열성이 바로 여기에 사용된 ‘끼나’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해석을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사랑'과 '열애'가 동일한 의미를 가진 단어로 짝을 이루고 '죽음'과 '스올'이라는 단어가 똑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로 짝을 이루어서 AB, A'B'로 이어지는 작시법의 병행법입니다. 그 의미는 사랑은 죽음같이 엄정하고 강한 것이며 열애는 음부와 같이 아무리 많이 사랑해도 만족함이 없다 이런 정도의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스올’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구약 성경에서 천국과 지옥의 신학적인 개념이 충분히 발전하기 이전에 사후 세계를 묘사하는데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스올은 음부라고 많이 번역이 되었는데 사실은 정확한 의미를 규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대충 뜻은 생존 세계와 대조되는 사후 세계입니다. 생존 세계에는 격동하는 인간의 기쁨과 쾌락, 즐거움, 생명력, 약동함, 변화무쌍함, 이런 것이 있지만 사후 세계에는 이런 생기가 모두 사라지고 음울하고, 축축하고, 칙칙하고, 생기가 모두 없어진 그런 유령과 같은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스올이라는 말은 종종 구약성경에서 희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모두 스올로 들어가게 된다고 믿었는데 스올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어서 그 스올로 들어가도 스올은 여전히 너무 사람이 꽉 찼기 때문에 더 이상 죽을 사람을 받을 수가 없다고 말하지 않고 항상 허기진 자처럼 입을 벌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마찬가지로 뜨거운 사랑은 아무리 상대방을 사랑해도 ‘이제 나는 충분히 사랑했다 한 인간으로서 내가 이 이상 어떻게 사랑하랴. 나는 이 사랑을 완전히 완수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감정은 참 독특합니다.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언제나 사랑받는 사람 앞에 자신이 초라함을 느낍니다. 사랑의 감정이 아주 극도로 치솟아 올라 한 사람을 뜨겁게 열애하게 될 때 자신은 그 사람을 사랑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많이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자신이 그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스럽게 하고 그를 외롭게 한 날들을 회상하며 상대방이 당한 아픔을 자신이 겪은 고통처럼 공감하면서 가슴을 뜯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달콤함의 감정이 아니라 죽음과 같은 고통을 동반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공감에서 오는 그러한 효과입니다.
죽음과 스올은 아주 엄정하고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스올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또한 사랑도 그렇게 엄정하고 힘이 있어서 무엇도 그 진실한 사랑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이렇게 엄정하고 스올이 이렇게 무섭지만 모든 사람이 죽음과 스올을 두려워할지라도 사랑은 그 모든 공포보다도 더 뛰어난 감정입니다. 사랑만이 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열애만이 이 스올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사랑의 감정입니다. 물에 빠진 사랑하는 아들을 보고 헤엄칠 줄 모르는 아버지가 물에 뛰어드는 것은 사랑의 감정이 죽음의 공포를 이긴 것이라고 톨스토이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그럴까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서 진실한 사랑은 죽음의 공포를 이길까? 명확하게 그것을 심리학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성경의 진리를 종합해서 희미하나마 답을 찾아본다면 무엇이든지 진실한 사랑은 항상 그 끝이 영원한 생명과 만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또한 영원한 생명이고 누구든지 자기를 온전히 버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끝에서 잠시 사라지는 육신을 뛰어넘는 영혼의 영원한 생명과 만납니다. 이 생명에 대한 기억이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죽음이 무서울 수 있지만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중심을 드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사랑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남편과 아내 사이에 심각한 커다란 건널 수 없는 깊은 구렁이 존재하는 것을 봅니다. 상대방의 결점이 너무나 심각하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남편과 아내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적으로 그러한 현실에 깊이 공감하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포기하려고 하는 그 사람들에게 감히 손가락질 할 수 없는 엄중한 삶의 상황들을 보게 됩니다. 때로는 사면으로 에워싸인 시련과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도저히 그것을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 그들 앞에 놓여 있어서 그들이 부부로서 함께 살아가기가 매우 어려운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모든 현실이 엄중한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상대방의 결점과 극복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 자체가 부부를 하나 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사랑이 고갈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통이 필요한 사람이 아내와 남편이면서도 아마 가장 소통되기 어려운 것이 또한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결점이 아무리 클지라도 하나님이 그런 결점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을 그 사람의 남편으로 부르셨고 또 여러분의 아내로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 강제로 그렇게 묶어 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자유로운 의지로서 그 사람과 부부가 되기로 결단을 하고 그렇게 부부관계 맺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에게는 실수나 그리고 실패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머리털 하나도 헤아리시는 하나님이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당신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게 하지 않고 붙드시는 하나님이, 그런 약점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나의 남편으로, 그런 사람을 나의 아내로 주신 것은 내가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해서 그런 약점을 보충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라고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 찼을 때에는 그런 약점과 결점 때문에 하나님 앞에 소명을 느꼈고, 그래서 우리를 온전히 주어 나의 아내가 그리고 내 남편이 남다른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는 남자라고, 보람이 있는 여자라고 다짐하며 상대방의 결점을 자신의 소속감을 증진시키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렀고 오랜 동안 쌓이는 소통의 부재로 우리는 서로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은혜로 가득 찼을 때에는 감사하며 살던 남편과 아내와 마치 자신의 인생이 이 사람 때문에 불행해진 것처럼, 자신의 인생이 이 사랑 때문에 비참해진 것처럼 서로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서로의 잘못 때문이겠습니까? 오히려 처음 그 사랑을 가능하게 했던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은혜의 결핍 때문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여기저기서 구걸하듯이 사랑을 찾는 불쌍한 인간들에게 웅장한 천둥소리처럼 선언합니다.
(찬양)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났도다
사랑은 그렇게 길거리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은 그렇게 징징대고 칭얼대고 불평하는 그 속에서 구걸하듯이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내를 만난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났고, 한 불쌍한 남편을 자신의 배우자로 맞아들이게 된 것이 순간의 감정이 시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건 고백이었다면 그 또한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아내를, 하나님 때문에 남편을 자신의 남편으로 받아들여 사랑하기로 하였으니 여러분이 남편이나 아내 때문에 실망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이 다 그렇지,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능가하는 그 무엇을 어찌 얻을 수 있겠으며 그것을 기대하는 것이 어찌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악하고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 찼을 때 우리는 주님께 사랑을 받고 이 세상에서 한 남자를 나의 남편으로 그리고 한 여자를 나의 아내로 부르며 홀로 살지 않고 함께 살게 해 주신 하나님께 충분히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꽃처럼 향기나는 생활이 아니어도 그렇게 우리를 섭리 속에서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쓰러지고 넘어지고, 때로는 우리가 잘못한 것까지도 그 분의 섭리 안에서 녹여내어 우리를 남편과 아내로 살게 해 주신 주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난관을 이기고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죽음 같이 엄정하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 사랑이 그냥 한 남자가 육체의 아름다움 하나 때문에 여자를 사랑한 것이라면, 한 여자가 한 남자의 외적인 멋짐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라면 언젠가 하나님은 그것에 우리가 실망하게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랑의 원인이 육체의 아름다움에 있지 않고 그를 나에게 아내로 주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를 나에게 남편으로 주신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우리를 철든 남편과 아내가 되게 하시지 않겠습니까? 죽음 같은 사랑, 이것을 되찾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는 완전한 성인과 결혼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죄인으로서 또 다른 죄인을 만났고 망가진 사람으로서 또 망가진 사람을 만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해지는 길을 걸어가기로 인격적으로 서로를 남편과 아내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우리를 만나게 하셨으니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서로를 불쌍히 여기지 못하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아내의 마음을 충분히 몰라주는 남편도 언젠가는 조용히 눈을 감을 때 자신의 아내를 생각할 것이고, 지금은 어린 아이처럼 칭얼거리며 남편의 마음이 자신에게 떠났다고 외로워하는 아내도 결국은 마지막에 눈을 감는 순간 자신의 마음속에 남는 이름 석자가 자신의 남편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그렇게 사랑한다는 고백 없이 흘려버린 수많은 날들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할 수 있는 한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부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믿는 이 예수를 사랑하는 이 사랑의 첫 번째 수혜자가 내 아내가 되게 합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나의 이 사랑의 첫 번째 혜택을 입은 사람이 불쌍한 나의 남편이 되도록 그렇게 그 이름 석 자를 끌어안고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남편과 아내로서 서로를 사랑하는 일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서로 다투고 칭얼거리고 징징거리며 있지도 않은 사랑을 구걸하는 비참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일이 어려울 때마다 자기를 온전히 주심으로 우리에게 사랑의 근원이 되신 예수를 생각해야 합니다. 남편에게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에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 얼마나 불쌍한 사람이고, 아내로부터 받은 사랑만큼만 아내를 사랑하겠다는 그 사람은 얼마나 가엾은 사람입니까?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그 분의 섭리 안에서 만났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 이 여자를 사랑하며 살아온 길이 그렇게 외롭고 힘들고 아팠고 그리고 그럴 때 심지어 내가 사랑하던 아내도 나와 함께 해 주지 않았지만 교회의 신랑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신부인 교회에 속한 내 곁에 언제나 계셔서 나에게 당신의 사랑을 위한 그 비밀스런 세계를 보여주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가득차서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노라고 말할 수 있게 하신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한 남자로 태어난 보람이 그렇게 아무나 쉽게 용납해질 수 없는 한 여자를 만나서 그를 위해 하나님 안에서 그를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도록 쓰임 받는 도구가 된 것을 기뻐하고 아내도 그 안에서 보람을 느끼며 자기를 완성해 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시련과 폭풍의 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꽃 피고 새 우지 짖는 즐겁고 아름다운 날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덧없는 우리의 일생을 끝내고 그리고 아내의 곁에서 눈을 감거나, 남편 곁에서 마지막 이 세상의 광경을 우리의 마음의 화폭에 담고 마지막 눈을 감을 것입니다. 그때에 남편이 “자기 옆에 있어서 당신을 사랑한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었습니다.” 아내가 눈을 감는 남편 옆에서 “당신을 끝까지 사랑한 것이 내 인생의 최고의 행운이었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그렇게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가정과 가족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