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앞에서 사는 길
(200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십자가를 따라가는 신앙생활(눅23:27) 2000.4.17 십자가사경회(저녁) 1
2. 휘장을 지나 담대히(히10:19-20) 2000.4.18 십자가사경회(저녁) 19
3. 십자가 앞에서 사는 길(히10:22) 2000.4.19 십자가사경회(저녁) 38
4. 자기의 몸을 축사하신 그리스도(고전11:23-24) 2000.4.20 십자가사경회(저녁) 56
5. 세상을 사랑치 말라(요일2:15-17) 2000.4.21 십자가사경회(저녁) 69
1. 십자가를 따라가는 신앙생활
또 백성들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눅23:27)
우리는 종종 남의 신앙생활만 보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과거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서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서 살아온 신앙에 옛 발자국을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에 빛으로 비출 수만 있다면 그러한 점검을 통해서 얻게된 결론은 우리로 하여금 앞으로 주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데 무한히 귀한 그러한 정보를 제공해줍니다.
우리는 신앙의 과거를 한번 돌아보십시다. 우리의 신앙에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는 아주 묘한 모순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에 과거에 경험에 비추어볼 때, 가장 가슴아프던 때가 사실은 가장 행복하던 때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주님을 믿기 전에도 이 세상에서 가슴앓이를 많이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찢기고 할 켜진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 앞에 나와서 참된 신앙에 도리를 배우는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복음에 접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 십자가에 진리를 깨닫게 된 순간 우리들에게는 분명히 크고 작은 십자가에 대한 경험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교회 안에서 정직한 십자가에 복음이 인색하게 선포되는 시기에는 십자가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교회 다니는 일들을 보는 것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교회 속에서 이런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어째든 이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닌 것입니다. 누구든지 교회에 들어와서는 그는 즉각적으로 아주 선명하고 정직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복음을 들을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 예수에 십자가의 복음을 우리들이 분명하게 듣게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성경 전체를 보는 눈이 열리게 되고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세계에서 우리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여러분들이 극장에 가서 새로운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확인하지도 않고 영화관에 들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주인공은 항상 포스터 한복판에 호떡만큼 커다란 얼굴을 하고 나타납니다. 그리고 굵은 글씨로 감독보다도 훨씬 큰 글씨로 주연 배우의 이름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쯤 나와있습니다. 그 사람을 보면서 우리는 스크린을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세 시간 계속 쳐다보고 있습니다. 쳐다보면서 여러 사람이 나타나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도 보기는 보지만, 그러나 그렇게 중요하게 보지를 않습니다. 문제는 누구를 봅니까? 수없이 총 한방 맞고 죽어 가는 그 많은 사람들을 보고 일일이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은 오직 주인공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의 발자취만 추적하면 영화스토리가 나옵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를 십자가를 통해서 보지 않으면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보는 렌즈는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의 생애를 읽는 또 하나의 핵심적인 렌즈는 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있는 성도라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자신의 영혼을 째고 들어오는 찬란한 그리스도 예수에 십자가에 교리 앞에서 거꾸러져 본 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교회 생활에 대한 경험도 있을 것이고 기적을 체험한 적도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 은혜를 경험한 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러한 많은 것들을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에 십자가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여러분들의 신앙은 아직까지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했을 때 우리에게는 한 가지 분명한 체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에 십자가를 대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아마 두 번 울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 순간에 우리의 죄와 악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달으면서 참회하며 마음 아팠을 것이고 또 하나는 그런 죄인들을 위해서 자기에 사랑하는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서 십자가에 못박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닫고 나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더 가슴아픈 사건이 됩니다.
그 형상 볼 때 내 마음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그리스도 예수에 십자가를 보는 그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자기의 아들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되리만큼 하나님께 반역하고 거슬렸던 흉악하고 악랄한 죄인이었던 자신의 모습을 아울러 생각하면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울고, 또 한편으로는 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울고,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죄인을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용서의 감격 때문에 울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구원받은 인간이 이제는 어떻게 주님 앞에 살아야할지를 물으면서 주 앞에 우는 눈물이 있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경험을 돌아보십시오.
주님의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찬란하게 비치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교리 앞에 한번쯤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감격을 경험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나니까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베풀어주시는 놀라운 용서와 구원의 은혜, 그런 사랑을 내가 입기까지 이것이 결코 거저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을 버리는 그 피 절인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그 희생과 고난의 터 위에서 내가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고 새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그런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부족한 모습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아파서 울고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쓸모 없는 인간을 위해서 자기를 온전히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사랑 때문에 마음 아파서 울었습니다. 우리를 보아도 마음이 아프고 그리스도를 보아도 마음이 아픈 이런 때가 우리에게는 있지 않았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질문에 대해서 답할 말이 없다면 이번 사경 회 주간에 여러분들이 그런 십자가에 경험을 소유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때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십자가에 대한 감각이 우리의 마음에 살아있는 것만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양심에 미미한 아픔을 느끼면 느낄수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계셔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그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놀라운 행복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모두 메마른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를 하고 하루를 지내오는 동안에 여러분의 눈이 주님을 사모하는 거룩한 눈물이 씻기어졌습니까? 하루동안도 죄악 된 세상에서 수많은 유혹들과 세상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자랑거리를 보면서 탐욕으로 이글거렸던 여러분들의 눈에 그 더러운 불길을 끄는 확실한 방법은 저녁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며 흘리는 그 눈물이 그 더러운 불들을 모두 꺼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침이나 밤이나 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고난에 대한 아픔 때문에 울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놀라운 사랑을 나 같은 인간이 받아서 어두운 세상에 작은 불꽃으로 살기를 기대하시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우는, 그런 기뻐서 울고 가슴아파서 우는 이 풍부한 사랑의 정서 속에서 살아가는 신앙이 정상적인 신앙입니다.
그래서 영국에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젼은 그의 한 설교에서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마른 눈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커 보이면 주님이 작아 보이고 주님이 커 보이면 세상은 우리의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세상의 유혹과 자랑거리들, 수많은 탐심 속에 우리의 마음이 물들 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무엇을 하셨으며 그리고 누구 때문에 좋으신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지를 생각하면....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그런데 이런 것을 가끔이라도 있으면 씻겨 내려갑니다. 쌓여도 또 씻겨 내려갑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거의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눈으로 보는 수많은 죄악 된 욕망과 탐심거리들이 그대로 우리의 눈을 타고 마음을 타고 우리의 심령 속에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은 반복된 행동을 낳고, 반복된 행동은 습관을, 습관은 패역을, 패역은 인격을 형성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고쳐질 수 없는 아주 깊은 중병이든 신령하고 거룩한 정서를 모두 상실한 완전히 깡마른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그런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주제는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가 그 십자가를 볼 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흉악한 죄인이라고 하는 교리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의 진리에 대해서 동의하고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고백을 하고 그리고 자기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노라고 그렇게 고백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자기 자신에 심령으로 오늘 현재 믿지 않으면 자신의 삶은 자기가 동의하고 있는 그 진리와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짓된 신앙생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 사건은 한번 일어난 사건이지만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현재적으로 늘 반복되고 늘 경험되어야 할 사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의 선조 들에게는 하루 중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시간들을 가진 경건한 성도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시간을 내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젼이 어느 날, 서재에서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을 때, 그의 부인 스잔나가 와서 물었습니다. “여보, 기도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울고 계셔요. 무슨 일이 있어요. 물었을 때 하나님의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야 내가 매일 아침 기도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데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광경을 모두 묵상하는데 내 마음에 아무런 느낌도 없고 감동도 없어. 내가 어떻게 하다가 오늘 이렇게 돌같이 굳어진 마음이 되었을까를 생각하니까 내가 너무나 불쌍해서 하나님 앞에 울고 있는 중이라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디모데 전서 1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함이로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 디모데 전서를 쓸 때에 사도 바울은 인생 말년에 있고 그리고 옥 속에 있었습니다. 순교의 종소리가 울려오는 인생에 황혼 역에서 이제 그는 반백의 노사도가 되었을 것이고 수많은 기적과 환상적인 선교의 역사를 주도해온 일이었습니다. 이방인의 선교의 아버지였습니다. 일생을 오로지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고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도록 순교를 기다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가정도 버렸고 문벌도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동년배들로부터는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가정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헌신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 신학자요. 위대한 선교사요. 그리고 능력 있는 목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그렇게 순결하게 일생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생 마지막에 그는 십자가를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는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와 같은 사람을 충성 되이 여겨 하나님의 일꾼 삼으셨는데 사실은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 죄인 중에 우두머리일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아직도 자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일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았던 관록 있는 이 노사도가 어린아이처럼 인생에 황혼 역에 무릎을 끓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주님이 못 박혀죽으신 것이 이 흉악한 죄인을 위해서 당한 고난이라고 고백하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죄인들이 죄질에 순서대로 줄을 선다면 자기가 퍼스트 즉 첫 번째 죄인이 될 것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를 거룩한 사도로 만들었고 일평생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풍성한 신령한 세계 속에서 아버지와 교통하며 살아가는 위대한 사도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흔히 그리스도 예수의 현재적인 체험은 신앙에 있어서 초보적인 증상이고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감정적인 체험은 사라지고 뭔가 견고한 사람이 되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체험을 인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경박한 것이 아니라 풍성한 은혜 속에서 사는 증거이며 그러한 거룩한 정서를 잃어버리고 견고해지는 것은 견고해지는 것이 아니라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사형장으로 끌려가시는 광경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십자가의 형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죄인을 십자가에 못 박아 생명을 끊어버리는 인류가 고안해낸 한 방법에 불과했습니다. 로마인이 세계를 제패하기 전에 그들은 아주 흉악한 야만인이었습니다. 그 야만인이던 시절에 야만인답게 인간을 가장 잔혹하게 죽이는 한 방법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다름이 아닌 십자가의 형벌이었습니다. 이 십자가의 형벌에 그 특징은 인간을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최상의 고통을 경험하게 만들 수 있는 형벌이라는 점에서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악랄한 형벌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라버로 스타오르스’ 라고 하는 이 십자가라고 하는 이 말은 로마인들에게는 아주 흉악한 말이어서 단어 자체를 입에 올리기를 싫어했을 뿐 아니라 자기네들은 어떤 죄를 지어도 로마인들은 결코 십자가에 못박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금기지 된 형벌이었습니다. 흔히 우리들이 보는 십자가는 저렇게 위가 튀어나온 십자가인데 사실상 예수님 시대에 가장 흔하게 쓰였던 십자가는 ‘타우형’ 십자가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어에 대문자 ‘티’같이 생긴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한 막대기를 세워놓고 그 다음에 거기에 사람을 못박고 도르래 같은 것으로 올려서 그래서 티자형으로 사람을 끼워놓는 그런 십자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지기 전에 먼저 사람을 십자가에 못을 박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손바닥에 못을 박았는데 체중 때문에 자꾸 찢어져서 시체가 떨어지니까 그 다음부터는 손목에다가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그 못은 여러분들이 기차 철길에서 볼 수 있는 그 못과 아주 흡사한 못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양손에 못을 박고 도르래로 높이 올린 다음에 그 다음에는 발에다가 못을 박고 흔히는 떨어지지 않도록 발 밑에다가 판자를 대어서 그것을 딛고 설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 형벌의 특징은 금방 죽지 않는 것입니다. 빨리 죽는 사람은 3-4시간에 죽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3일씩이나 안 죽고 매달려있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릴 때에 대부분의 경우에는 동맥을 건드리게 마련입니다. 핏줄을 건드리면 그 다음에는 피가 쏟아져 내려옵니다. 온 몸에 피가 빠져나가면 그 다음에는 상처를 낸 그 못이 이제 찢어지면서 살을 찢으면서 자기 체중을 실으니까 막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오고 그 다음에 피가 쏟아지니까 그 피가 쏟아질 때에 의학적으로 사람의 신체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하면 두 가지가 일어나는데 하나는 타는 것 같은 목마름과 또 하나는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은 심한 현기증과 통증이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동안에 기절하다가는 깨어나고 까무러쳤다가는 또 깨어나고 하는 그런 과정을 반복하다가 결국은 뜨거운 태양 볕 아래서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형벌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죄인을 형벌하기 위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앞에 보면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재판장에서 사형언도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게 되셨는지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법을 모르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이 재판은 정말 부당한 재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빌라도가 재판장이었고 그 사실을 면밀히 살핀 결과 이 피고가 죄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는데도 사형언도를 내리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었기 때문에 이것은 부당한 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의문이 제기됩니다. 왜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에 무죄를 확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주었을까? 그것은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자료들에 의하면 그 당시는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그리고 그 사람들이 대 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에게 충동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수많은 군중들을 선동했고 빌라도가 재판을 할 때쯤에는 앞에 있는 동산 전체를 유대인들이 뒤덮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파의 유대인들이 모였고 만약에 거기서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내어주지 않으면 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 같은 기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의문이 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런 말도 되지 않은 형벌을 언도 받으시고 그리고 조용히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시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분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생애동안에 그분의 말씀으로 이루었던 수많은 기적들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죽은 나사로도 살렸고 풍랑 이는 바다도 잔잔케 했음은 물론이고 그리고 수많은 자연적인 이적을 불러일으켜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셨던 그리스도 예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이 아직도 그리스도 예수에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불법하고 무법 한 인간들이 저지른 이 죄악 된 재판의 결과를 그대로 감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분이 평소에 가르치셨던 뛰어난 가르침 중에 하나는 ‘정의’와 ‘공의’였습니다. 정직하고 공의로운 삶을 가르치신 그분이 이런 불의 한 재판에 불복을 해서 하나님의 법을 굳게 하는 이런 일이 될지도 모르는 사악한 재판을 그대로 담당하고 가시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더욱이 당신을 종교지도자들에게 팔아버린 가룟 유다를 기억해보십시오. 누가 가룟 유다에 마음을 충동질해서 가룟 유다로 하여금 은 30에 그것도 노예의 몸값에 지나지 않는 은30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팔게 만든 장본인이 성경은 사단이었다고 말합니다. 사단이 일을 꾸민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불의 한 재판에 결과를 그대로 지고 거기에 승복하며 끌려가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에 구원의 지혜와 관련된 것입니다. 사단은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를 죽일 수 있는 방법만 알았지만 사실은 그를 죽이고 나면 사실은 그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살게 되고 오래 동안 자기가 이 세상의 인간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써왔던 사망에 권세가 휴지조각이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까지는 사단이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도는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그런 하나님에 구원의 지혜를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이미 구약에 수많은 예언을 통해서 그렇게 이 백성에 죄를 위해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하는 대속의 교리들이 선명하게 역사의 흐름을 타고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무수한 예언을 하기 위해서 수많은 선지자들이 외쳤고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썼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수많은 역사적인 사건이 징검다리가 되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절망적인 인간의 상태에서 인간들을 구원하여 하나님과 화목 시키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그 시대의 사람들은 이렇게 명백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에 대해서 눈먼 자들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만약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받기를 원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도를 통해서 더욱 신령한 영향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먼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인간의 지혜와 편견을 버리는 자기포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의 십자가를 담담히 받아들이시고 그리고 이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당신의 생애에서 일찍이 없었던 치욕을 당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의 고난에 전초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빌라도에게 사형언도까지 받아낸 유대인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의 군병들과 함께 ‘브라이도리온’이라고 하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생애 최고의 모욕을 당하게 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옷 벗기고 그리고 그를 치고 때렸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나는 그 엄청난 가시로 관을 만들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에 눌려서 씌었습니다. 틀림없이 그 가시관은 수 없는 상처를 예수님의 이마와 머리에 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찔린 가시를 통해서 상처를 타고 흘러내리는 수많은 선혈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피 범벅되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로 때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당시에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에게 정해진 그들의 규례 이였습니다. 채찍을 연구한 사람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에 죄인들에게 흔하게 쓰여지던 채찍은 오늘날 우리들이 볼 수 있는 말채찍 같은 그런 채찍이 아니라 9홉 가닥으로 되어있는 채찍이었는데 그 채찍 끝에는 각각 금속이나 짐승의 뼈 같은 것을 깍아서 고리를 매어 달았고 그것을 벗은 몸에 내려치면 살을 휘감아서 살점을 후드득 뜯어내는 그런 인명 살상용 채찍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기도 전에 그 채찍을 맞고 절명하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합니다. 확신할 수가 없지만 아마도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그런 흉악한 채찍에 맞으셨을 것입니다. 옷을 모두 벗기고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에 등과 그리고 그의 가슴을 채찍으로 내리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몸에는 그런 형벌로 당한 그 채찍으로 살점이 뜯어지고 그리고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께 침을 뱉었고 어떤 사람들은 주먹으로 치며 “너를 친자가 누군지 알아 맞혀 보라”고 그리스도 예수를 조롱했습니다.
주께서 그곳에서 당하신 그 치욕을 우리들이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신 그분이 그 피 어린 형벌을 당하시고 이제는 당시의 규례를 따라서 자기가 매달릴 130키로 그램은 족히 되었을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셨지만 그는 스스로 종에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셨지만 그분은 참 사람이셨습니다. 주리면 배고프시고 헤어지면 보고싶어하시고 무거운 것을 짊어지시면 쓰러질 듯이 고통스러우신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아무 것도 하루 종일 잡수시지 못하셨을 가능성이 많고 밤을 새워서 기도하시고 심문과 체포로 이어지는 그 끔찍한 고통스러운 과정을 당하신 후에 십자가를 지신 것은 금요일 새벽이었습니다. 이른 아침 그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실 때에 그 예수님의 뒤에는 사람들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엄청난 인파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가 유월절이었고 그리고 유월절에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이는 법이었고 바로 예수님에 체포와 심문, 처형에 관한 모든 일들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과연 죽을 것인가 뭔가 마지막 순간에 결정적인 기적을 일으켜서 사태를 역전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신앙이전에 그들의 강한 호기심을 발동하게 하는 뉴스거리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젊은이와 나이든 사람들, 남자와 여자, 할 것 없이 종교 지도자들과 평범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예수를 쭉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이 사람들을 아주 선명하게 두 부류의 사람들로 쪼개고 있습니다. 하나는 백성이라는 사람들과 또 하나는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인의 무리들이었습니다. 먼저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이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었을까? 그것이 우리가 궁금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우리가 읽은 7절에는 정체가 분명하지만 그러나 뒤편을 읽어 가면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가 분명해집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성경 34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백성은 서서” 무엇을 했습니까? 47절을 보십시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 이었도다 하고” 이를 무엇 하러 모인 무리들이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여기에 아무런 설명이 없이 백성이라고 나와있는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에 십자가의 사건을 구경하기 위해서 여기에 나아온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금세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피 범벅이 된 얼굴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쓰러지면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는 그 처참한 형벌과 고난에 과정이 그들에게는 단지 구경거리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3년 동안 이 세상에 계실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이 만나셨을까요? 주님에 생애에는 항상 사람들이 있는 생애였습니다.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은 고치고 먹이시기 위해서 무지한 사람들은 깨우치시기 위해서 버림받은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되어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늘 사람들을 찾아다니셨고 사람들도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수 만 명이 모여서 밟힐 것 같이 된 설교의 현장도 많이 있었고 엄청난 기적들을 그들은 보았습니다. 불과 몇 일전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실 때에 자기 겉옷을 펴서 길에 깔고 종료 나무 가지를 깔면서 손을 흔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요” 라고 그리스도 예수에 예루살렘 입성을 열렬하게 환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온 성이 소동할 것처럼 그렇게 열렬하게 열광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것을 환영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사람의 열광이 사라지고 이제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죽으신 그 고난을 구경하며 따라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아마 여기에 걸어오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에 기적을 베푸실 때 주린 배를 부둥켜안고 있다가 주께서 축사하시고 나눠주시는 그 물고기와 보리떡으로 배불리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상상력을 더 발휘하면 이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고쳐주신 다리로 걸어와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고난을 구경하러 가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못 쓸 병에 걸린 사람들, 예수님이 고쳐주셔서 이제는 성한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구경하며 따라가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누구인가 하는 정확한 지식이 없는 열광적인 신앙은 그 당시에는 굉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게 30분만 시간을 주면 여러분들을 거의 열광적인 사람으로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진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해서 뭐하냐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그 열렬하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요 라고 외치면서 그러면서 그들을 제재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그런 제재까지도 뿌리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열렬하게 환영했을 때, 감히 누가 그것이 신앙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났다고 하는데. 그 주님이 내 어두운 눈을 뜨게 하시고 내 저는 다리를 온전케 하셔서 이렇게 뛰고 걸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는데, 하나님께 은혜를 못 받았다고 말할 사람이 시비 걸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에 대한 다양한 경험들을 가지고 계시지요? 그런데 오늘 이 백성들보다 훨씬 더 깊은 신앙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다리를 주님이 고쳐주셨습니까? 눈멀었었던 사람이 주님 만나고 눈뜬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까? 기적의 떡을 먹어본 적이 있고 기적의 물고기를 먹어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설교를 직접 듣고 그분이 안수해주시는 손이 여러분들에 몸에 닿아본 경험을 해본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중요한 요지는 무엇입니까? 주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정확한 지식과 그 지식에 입각해 그분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진실한 체험이 없는 한, 수많은 기적에 대한 체험들은 여러분들을 순간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기적의 떡을 먹고 이적의 물고기를 먹고 앉음뱅이였다가 일어나는 기적보다도 더 훌륭한 기적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그 좋으신 분이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사랑에 감격하고 그분을 위해서 살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깊은 감격이 현재에 있는 것, 이것이 그러한 기적의 체험보다 훨씬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게 붙들어주는 것입니다.
불을 받았다고 하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없습니까? 능력을 받았다고 하는데 왜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왜 약해지셨는지에 대한 경험이 없습니까? 나는 이 성경을 볼 때마다 아무리 오늘날 우리편에서 생각을 해봐도 여기에서 나오는 백성들이 이 세상의 불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생각이 되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종교성이 없는 사람들은 이 살벌한 사형현장에 나왔을 리가 없습니다. 그 아침 시간에 말입니다. 밤을 새우면서 철야하면서 예수님의 재판의 과정을 지켜봤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배웠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이 백성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읽을 수는 없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과 상관이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그 십자가를 볼 때마다 아직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여러분의 손에 뚝뚝 흐르고 있는 의로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못박은 죄를 자각하고 있습니까? 죄의식에 시달릴 필요는 없지만 죄에 대한 분명한 자각은 있어야합니다. 자기가 이전에 그리스도 앞에서 지은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용서의 감격을 드러낼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고 하나님 앞에 얼마나 흉악한 죄인이었는지를 깨닫는 자기 인식이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피로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격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기적의 떡을 먹고 이적의 물고기를 먹었습니다. 이들 중에 어떤 사람은 팔 복 산에서 울려 퍼지는 그리스도 예수의 낙랑하고 우렁찬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차가운 변절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경하기 위해서 따라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조용히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람들은 지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을 구경하면서 장난 삼아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지만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의 이 십자가는 누구를 위한 십자가였습니까? 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셔야 했습니까? 왜 그분이 가시관을 쓰시고 피 범벅된 얼굴로 자기를 따라오며 슬피 우는 여인들에게 말씀하셔야 했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오늘 우리가 하고 싶은 그 질문을 빌라도가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우리도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현대에 사신 분이라면 아마 보사부 장관이나 대통령이 표창장을 주셔야 했을 것이고, 보건사회부 장관도 자신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환자를 고쳤다는 공로로 아마 훈장을 주었어야 마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빌라도는 악한 인간이었습니다. 자신의 일신상에 영달을 위해서 의로운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어서 사도신경 속에서 끊임없이 저주받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악한 사람의 마음속에서도 그리스도 예수는 의인이었다고 하는 것이 그 악한 자의 고백이었습니다.
저는 고난의 주간이 다가올 때마다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탄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한번 이 고난의 주간에 묵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천 군과 천사들의 경배가 있고 경건한 성도들에 노래 소리가 있는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더러운 죄인에 몸을 그대로 입으셨습니다. 그 몸을 입으셨을 때 세상의 사람들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가 이 세상 수많은 연약한 죄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도록 그렇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한 나라의 지존인 임금이 평민의 복장을 하고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에 나타나서 여러분들의 살아가는 삶의 고충과 아픔을 들어주고 잠시 후, 그 사람이 지존이신 한 나라에 임금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난다면 여러분들은 아마 황망해서 정신을 잃어버릴 지경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미물하고 종에 형체를 가지고 인간 속에 들어오신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세운 이 세상의 임금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에 도성이신(?)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에 이 초라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탄생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골고다 언덕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수난이 빌라도의 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마리아의 천한 몸을 빌어 한 어린아이로 태어나시고 그것도 있을 곳이 없어서 겨울날에 마구간에 가난한 사람들의 거친 강보에 쌓여서 구유에 누이신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기뻐하기보다는 우리의 수많은 죄악이 우리의 죄와 수많은 불순종이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그분으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 되이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가장 천한 인간의 형체를 입으시고 시간과 공간에 매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다는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의 손으로 만드신 피조물들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함께 한 장소에 거할 수 있겠으며 그분과 함께 얼굴을 대면하고 그분의 인격을 느낄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셨지만 스스로 하나님의 성품인 시선을 인간에 성품인 인성 밑에 깊이 감추셨습니다. 그리고 연약한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사셨습니다. 죄는 없으셨지만 인간이 겪는 모든 연약함을 주님이 친히 자초하셨습니다. 그래서 결핍과 고통을 겪으며 인간과 함께 똑같이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광경들을 모두 지내셨습니다.
천지에 주인이시고 창조주이신 그분이 주리시기도 하셨고 그리고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신 그분이 죄인 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한 모금의 물을 구하고, 걸어가던 길이 너무나 피곤하여서 가던 행로에 길가에 주저앉으시기도 하셨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에 품에 안겨서 창조주시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자신을 위한 정결케 하는 예식에 참여하셨습니다. 성전이신 그분이 그 성전에서 예물을 드리고 그리고 하나님께 정결케 되는 예식에 참여하셨습니다.
만약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셨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몸을 입고 참 하나님이신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겸비함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낮아짐을 무엇으로 형용할 수 있겠으며 무엇으로서 우리가 그분의 낮아짐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어느 날,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마치 실존주의 작가 카프카에 변신에서 나오는 것처럼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까 우리들이 갑자기 강아지 한 마리로 변해있었다고 생각해봅시다. 아무리 말을 해도 그저 개 짖는 소리 밖에 나지 않고 그리고 이제는 심심하면 자기가 발로 차기도 하고, 밥도 주기도한 집안에 여러 마리 사는 개 무리들 속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그 개들에게 물리고, 밟히고 그런 삶을 한번 우리들이 살게 되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어떤 영광과 권세를 누리시며 풍요한 삶을 사셨다고 할지라도 일단은 그리스도 예수에게는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으로 이 세상에 제한된 공간과 시간 속에 내려오셨다는 사실자체가 예수님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육체를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육체를 입으시고 사신 30년 동안에 준비는 가난과 고통에 연속이었고 3년간의 공생애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를 온전히 버리신 희생과, 고난과, 고통과, 아픔과, 시련과, 배신을 당하는 연속된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3년 동안에 생애에 성경은 풍부한 기록을 남겨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적어도 그 3년 동안 예수님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낱낱이 기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3년 동안 죄 있는 백성들과 함께 하신 생애를 기억해보십시오. 하늘에 영광을 버리고 벌레만도 못하고 버러지만도 못한 흉악하고 악취 나는 더러운 인간들을 위해서 그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아파하는 자들과 아파하고 그리고 굶주리는 자들과 함께 굶주리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에게 전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어떠한 기적도 행하신 적이 없건만 불안한 이웃을 위해서는 언제나 그분이 최선의 사랑으로서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조차 버림받았던 죄인들이 주님의 품에서 안식을 얻었고 사회에서 낙인찍힌 흉악한 죄인들이 자기들을 비로소 영혼으로 보고 다가오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치유하시는 손길 속에서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맛볼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그리스도 예수에 고난으로 가득 찬 생애를 통해 그런 영혼에 놀라운 유익을 맛보고 하나님과 화해를 누리는 동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우리의 행복과는 정반대 되는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 중에 가장 거지와 다름이 없는 가난하고 결핍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동행들의 먹을 것을 조달하기 위해서 돈 통 맡은 자를 임명하셨고 그리고 그 연보를 통해서 동행들의 먹을 것과 입을 것들을 공급하셨습니다. 예수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한번도 메시아의 대접을 받아보신 적이 없는 그런 생애를 사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사랑했지만 사람들이 그분을 향한 사랑이 그분이 사랑한 것과 같지 않았습니다.
오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이 광경을 보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입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변절했고 그분의 긍휼을 힘입어서 사망에서 생명 가운데 옮겨졌던 수많은 사람들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리스도 예수에 고난을 구경하며 따라가는 상황이 되었고 소수의 여인들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도 모른 채, 그분이 당하신 고난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예수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자기를 온전히 바치신 생애를 사셨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우리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분신처럼 먹이고, 입히고, 기르며, 가르치고 그렇게 사랑했던 제자들조차도 한 명도 남김 없이 그리스도 예수를 홀로 버려 둔 채,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서 세상으로 도망갔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 보기에 좋은 것을 말씀하시고 우리 보기에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동안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면전에서 알량하게 살다가 아첨하는 것처럼 신앙생활 하다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진정으로 고난 당하는 일들이 필요할 때, 이렇게 변절해버리는 사람들이 우리가 아닙니까? 그 가능성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손에 붙들려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주님의 고난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정말 우리의 가슴에 정직하게 손을 얹고 주님을 만났고 주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 일생이 가장 하고 싶은 일들을 포기해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을 만나기 전에, 전에는 사랑하는 것들이었는데 주님의 사랑이 이것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주님을 위해서 한번 아낌없이 깨트려서 바쳐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의 생애는 자기를 아낌없이 주신 생애였습니다. 거룩하신 자기의 온 생애를 죄인들을 위해서 쓰여졌고 불행한 인간들 배후에 있는 하나님과의 조각난 관계를 고치시기 위해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둔한 죄인들을 섬기셨고 그들이 말씀을 들을 기력이 없을 때에는 먹이시고 그들이 고통받으실 때는 그 현장에 찾아가서 함께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과 당신의 인격과 당신이 전파하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하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떠난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와 혼인을 청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제 일생을 우리를 위해서 사시다가 마지막에는 마지막 남은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서 찢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입에 넣어주어 자기의 살로 우리를 살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만약에 진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사건을 어떤 의미에서든지 결코 객관적인 사건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분의 고난이 우리의 죄를 인함이고 그분의 형벌 당하는 우리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몸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주 당하신 고난 이 죄인 인함이니
범죄한 날 위해 주 욕을 보셨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에 십자가의 피로 모든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들이 우울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 앞에 죄인은 아니고 의로운 하나님에 자녀이지만, 한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들 이였었다는 사실은 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예수 죽인 것을 날마다 자기의 몸에 짊어진다” 라고 말했을 때, 이 칭의에 교리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시지만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들이라고 하는 자기 인식을 가지고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제 너는 내 자녀라 이렇게 말씀하실 때 그렇습니다. 저는 그 믿음으로 그 사실에 대해서 아멘 합니다. 그러나 주님, 저는 지금은 주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제는 정죄함이 없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고 생명과 성령의 법에 인도를 받는 주의 신실한 자녀가 되었지만, 그러나 하나님, 한때 저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흉악한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날 내가 누리는 이 칭의에 놀라운 은혜, 하나님의 자녀에 고귀한 명분은 모두 나로 말미암아 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런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죄인들에게는 이런 고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뒤를 구경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 보면 이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슬피 우는 여자에 큰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멀리 갈릴리로부터 온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고침을 받고 나음을 받은 막달라 마리아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 여인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데 앞에 나와 있는 이 사람들이 따라가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을 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구경하기 위한 사람들이었는데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를 위해서 슬피 울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다가 아주 많이 울면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만, 울면 체력이 엄청나게 많이 소모가 됩니다. 그래서 액체가 빠져나가게 됩니다. 울 때는 항상 우리의 마음에는 어떤 작용이 일어나게 되는가 하면 모든 혈관과 신체 근육이 축소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응축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눈물이 짜져 나오는 것 같은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이완되지 않고 계속해서 응축되면서 우니까 제일 먼저 오는 것이 가슴에 통증이 오는 것입니다. 심장과 가슴 쪽에 통증이 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가슴을 두드리면 통증이 완화됩니다. 그래서 가슴을 두드리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가슴을 두드리면 실제적으로 통증이 완화됩니다. 그러니까 반사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울 때는 가슴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답답할 때도 가슴이 응축되면서 심장에 압박이 오니까 가슴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들이 그렇게 두드리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얼마나 장시간 동안 얼마나 격렬하게 울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 운다 라고 표현된 것이 히랍어 성경에서는 “통곡하며 울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흐느껴 우는 것이 아니라 통곡하면서 흐느껴 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슴을 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여인들은 예수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똑같은 하나의 사건을 놓고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들이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강원도에 산불이 엄청나게 번져가고 있지만 우리는 파자마를 입고 tv에서 봅니다. 조심들 하지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불길 속에서 자기의 집을 잃어버리고 가축들을 다 불에 태워서 잃어버린 사람들은 불 곁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면서 발을 구르면서 실신한 사람처럼 통곡하면서 웁니다. 왜, 그 화재로 불타버린 그 집이 자기의 인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백성들은 웃고 떠들고 구경하고 쫓아갈 수 있는 이 고난의 길을 왜 이 여인들은 가슴을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가슴이 터질 듯이 고통을 느낄 정도로 통곡하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을 사랑했고 아까 그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의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은혜체험 자랑하지 말고 껍데기로 산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신앙의 연륜 자랑하지 말고 자기 안에 사랑주신 주님의 사랑을 자랑하십시오.
이 여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의 뜰에서 재판을 받을 때 틀림없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도록 제재를 받았을 것이고 브리이도리온에서 밀치듯이 골고다를 오르는 언덕길을 끌려 내려와서 피투성이가 되어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나오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울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면서 그 예수님에게 뭔가 물 한 모금이라도 주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들은 철저하게 제재를 받았을 것이고 그 여인들은 연약한 육신의 몸으로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어서 주님을 따라오면서 통곡하며 우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통곡하며 따라갈 때에 여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왜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들은 십자가에 못박으시려고 합니까? 그분이 상처뿐인 제 인생에 오셔서 저를 하나님의 사랑 받는 사람으로 고쳐주셨습니다. 귀신들리고 수많은 질병에서 가족들에게도 버림을 받았던 제 인생에 오셔서 생명과 기쁨을 주신 분이 그분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손에 베푸시는 떡과 고기를 먹고 배불렀고 수많은 섬김을 받아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도록 섬김을 받았는데 왜 그리스도 예수를 저렇게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버려두십니까? 무엇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시나요. 제발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지 말고 살려주시고 그분에게 고난을 베풀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그 고난과 형벌을 내게 지게 해달라는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에 십자가의 뒤를 따라가며 통곡하고 있는 이 여인들에 눈물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틀림없이 고난을 당하고 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사실 것이라는 사실을 부활의 사실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믿지 못했으니까요. 그랬는데도 그 치욕과 멸시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닌 그 십자가의 뒤를 예수님과 한 통속이 된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라도 따라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많은 은혜를 입고 그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회에서도 은혜를 모르는 인간들을 짐승으로 취급하거늘 하물며 신앙에 세계에서야 무엇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고난을 당하셔서 생명을 주셨고 짐승처럼 살다가 도살당하는 예수와 같이 어느 날 비명 속에서 한 인생을 끝나고 죽어버릴 동물과 같은 인간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사랑으로 구원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신앙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누구를 섬기며 살아가야 할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어그러진 길로 걸어갈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어김없이 나타났고 가는 길을 가로막아 우리를 붙드시고 그 십자가의 피를 우리의 마음에 발라 우리로 하여금 참회하는 마음을 갖게 하셔서 거미줄 같은 믿음이나마 붙들고 실낙 같은 신앙의 길을 걸어오도록 만드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신앙의 길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보혈과 그분이 흘리신 피와 그분이 흘리신 땀과 눈물에 깊이 감화를 받고 그렇게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의 감격을 간직하고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물론 우리는 쓰러질 때도 있고 곁길로 나갈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는 십자가를 보면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한 일을 상고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주님이 당하신 그 고난과 십자가의 무서운 형벌이 바로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해서 충성스러운 삶을 살면서도 우리는 단지 하나님 앞에 한 사람의 죄인일 뿐이라고 하는 그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 여인들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단 하나, 우리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며 따라갈 수 있는 십자가의 고난에 길을 이 사람들은 통곡하며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이 그것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는 이런 사랑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기억하고 주님이 자기의 길을 걸어가신 그 고난과 십자가의 정신으로 은혜주신 자리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세워주신 그 길을 따라 걸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님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왔고 그리고 수많은 여인들이 통곡하고 수많은 백성들이 떠들면서 결국은 형장에까지 다다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장에 이르러 수많은 여인들에 애통하는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눕혀졌을 것이고 그리고 가로막대에 자기의 손이 못 박히시는 경험을 하셔야 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생애를 직접 목격한 어떤 사람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보기 드물 정도로 얼굴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것 하나는 그분의 외모는 그렇게 아름다우셨을지 모르지만 그분의 손은 한없이 거친 손이었을 것입니다. 그 손으로 문둥 병자들을 만지시고, 소경의 눈을 고치시고, 그리고 일하면서 섬기면서 사셨기 때문입니다. 일평생 죄인들의 발을 씻기고 섬기시던 그분의 손이 나무에 못 박히던 날들을 기억해보십시오. 지금도 조용히 눈을 감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 당하시던 그 날을 생각하며 우리 귓가에 고요히 예수님의 거룩한 손을 십자가에 못 박는 망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에 그 못으로
망치 소리 내 마음에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우리를 섬기시던 그 손은 결국은 아직도 섬겨야할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섬기고자 하는 마음도 주님의 마음에 있는데 자기들이 섬김을 받았던 그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흉악한 죄인들과 함께 못 박히신 것은 그들이 이 세상 사람을 향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가 사실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흉악하고 더러운 범죄자들 가운데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달라고 하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두 손을 못 박히셨고 그리고 높이 매어 달리셔서 십자가에 얹히셨으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심령이 상한 자들을 고치시기 위해서 이곳 저곳으로 분주하게 다니시던 그분의 거친 발을 또한 나무에 못 박았습니다. 자기에게 다가와 용서를 빌 수 없는 수많은 완악한 죄인들을 그 발로 다니셨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발을 금하고 찾아가지 않던 사마리아 땅까지 지나시면서 소망 없는 죄인들을 불러 하나님을 가르쳐주셨고 그분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셨던 그 발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우리를 가장 가슴아프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못 박은 망치를 손에 들고 있었고 그리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묻힌 그 피를 우리의 손과 우리의 옷깃에 묻히고 그 자리에 함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손에 망치질을 한 사람들은 단지 도구에 불과했고 좋으신 그분이 그렇게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던 것은 형벌 받을 우리 모든 인류의 죄악을 인함입니다. 그들은 단지 우리를 대신해서 그 자리에 있었던 도구들의 불과했고 그들은 우리보다 특별히 더 큰 증인들이 아니었고 우리의 죄와 악함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고 우리의 불순종과 죄악이 그분을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게끔 만든 것입니다.
여인들이 통곡하고 울었지만 결국은 예수님은 예정대로 저주받은 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를 빌며 하나님께 중 보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도 치워지고 주님의 시체도 치워졌습니다. 악랄한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운명하셨는데도 그냥 버려 두지를 않고 옆구리에다가 창을 넣어서 그분의 심장까지 터트려 물과 피를 모두 쏟아지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고 죄인들을 많이 사랑한 것 밖에는 잘못한 것이 없으신 그분은 그렇게 자기가 가장 사랑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버림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의 거룩한 제단 앞에 바쳐진 한 제물이 되었고 우리는 거기서 자기를 갈기갈기 찢으신 그의 육체를 통해서 뿌려진 피로 휘장이 찢어져 난 그 피 길을 얻게 되었고 이제 우리는 아무 공로 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우리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죽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밖에는 하나님께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구원의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무릎을 꿇고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을 아낌없이 받으셔서 그 보혈의 샘에서 우리로 마시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우리의 살아온 지난날들은 죄의 연속이었고 알량하게 그리스도 예수에 십자가를 경험하고 구원을 받은 날들도 사실은 믿기 싫은 그리스도를 억지로 믿는 것 같은 억지의 신앙생활로 점철되어온 날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생활에 수많은 날들을 불순종과 죄악으로 채웠고 패역과 하나님을 향한 강퍅함 속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날들이 거의 없는 인생에 길을 걸어왔습니다. 주님만으로도 살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만으로도 살수 없어서 시시때때로 곤 고한 가슴을 부여잡고 주님 앞에 나왔을 때, 여러분 가운데 주님께로부터 거절당한 사람이 있습니까? 나 같은 죄인에게 주기에는 내 아들에 피로 이르는 보혈에 샘이 너무나 정결하고 귀하기 때문에 너 같은 인간이 이 보혈에 샘에서 다시 씻음을 받을 수 없다고 하고 우리를 쫓아내신 적이 있었습니까?
빈부나 귀천이 문벌이 없이 다 와서 이 샘에 마시겠네
지금도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불러서 제발 가두지 못할 웅덩이와 같은 곳에 이 세상의 복들을 가두며 살려고 하는 그 바보 같은 신앙생활을 접어두고 핍절한 영혼들은 내 아들의 피로 이른 이 십자가의 샘물에서 먹고 소생함을 얻어 어두운 세상을 살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여러분들이 무슨 일로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고 흉악한 죄인들이 되었는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 한가지는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진실로 참회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사랑을 고백하고, 그분의 용서를 빈다면 여러분들이 어떤 죄악가운데 있든지 오늘 다시 한번 그 피로 여러분과 하나님 자신 사이에 화해의 길을 여시고 여러분들을 용납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도 치워지고 예수님도 사라졌습니다. 사람들도 모두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골고다 언덕 위에는 십자가가 서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생에 신앙생활은 누구와 같은 신앙생활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구경하던 이 백성과 같은 사람, 아니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이 여인들과 같이 눈물과 희생이 있고 사랑이 있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까? 이 고난 주간에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2. 휘장을 지나 담대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9-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마지막 운명할 때에 남기신 일곱 마디 말씀가운데 마지막 말씀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하는 개인적인 의탁의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운명하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중에 우리들이 오늘 성경 본문과 관련해서 주목해야할 사건은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둘로 찢어진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위로부터 아래로 두 조각으로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리고 있는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히브리서를 기록하고 있는 기자는 바로 제가 말씀드린 그 휘장이 찢어진 사건을 기억하면서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고난과 어떤 관계가 있고, 그리고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동안도 아니고 숨을 거두시는 동안도 아니고 마지막에 운명하시는 그 순간에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완전히 죽으시는 바로 그 순간에 기다렸다는 듯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서 둘로 갈라진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대한 의미가 있는지를 이제 여러분들에게 찬찬히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원래 성전은 성전이기 전에 성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막의 모형이 나중에는 솔로몬 시대에 와서 성전으로 지어지게 되는데 그 성전은 뜰을 포함해서 길이가 45미터쯤 되고 그 다음에 폭이 22.5미터 정도 되는 그 면적이 위에 성전 뜰을 포함한 것이고 다시 그 속에 이제 직사각형으로 성소와 지성소가 합쳐진 방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대충 길이가 13.5미터 그 다음에 폭이 4.5미터 높이가 4.5미터 되고 그것을 2대1의 비율로 나누어서 큰방이 길이가 9미터 그 다음에 폭이 4.5미터 높이가 4.5미터이고 작은 방은 가로 세로 높이 모두 4.5미터가 되는 그런 방이었습니다.
큰방이 바로 성소입니다. 뜰에는 번제물을 태우는 번제단이 있고 성소 바로 앞에는 이제 씻는 물두멍이 있고 거기를 들어가면 그 다음에는 좌측에는 찬란한 빛을 비추는 등잔이 있었고 그리고 오른쪽에는 떡이 진설 되어 진설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면에는 지성소 바로 앞에는 향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드리워져있고 지성소로 들어가면 이제 법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성소는 아주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성소까지 들어가는데 대 제사장만 일년에 그것도 딱 한차례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성소는 바로 하나님이 임재 하고 계시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충분히 속죄 제를 드리고 그리고 이제 그 지성소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 지성소에 들어가면 거기서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거기서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대면할 때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하기에 워낙 합당하지 않으면 대제사장이 그 지성소에서 죽는 상황도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밖에 있는 사람들은 대제사장의 제사 예복 단 아래에 방울들이 잔뜩 달려있었습니다. 그래서 짤랑짤랑 소리가 나면 그가 속죄소 안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고 소리가 멈추면 밧줄을 이용해서 그 시체를 끌어내게끔 그렇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지성소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엄청난 두려움에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성소 위로 구름기둥과 불기둥들이 두루 비추면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야할 바를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이 휘장은 여러 가지 실로 짜서 만든 것인데 얼마나 단단하게 직조되었는지 양쪽에 황소를 매달고 채찍질을 해서 양방향에서 잡아 다녀도 도저히 찢어지지 않는 그런 탄탄한 휘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갈 때도 두렵고 떨림으로 들어갔는데 하물며 그 중에 대제사장이 된 한사람이 누구도 건드릴 수도 없고 열어제칠 수 없는 그 지성소의 휘장을 열고 그 지성소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는 견딜 수 없는 두려움과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떠는 그런 마음으로 이제 그 지성소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이 수없이 성소를 드나들었어도 그 지성소는 신비에 쌓여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일평생 제사를 지내도 한번도 그 지성소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실제로 보지를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아니라 하필이면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그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덮개가 찢어지거나 아니면 성전이 통째로 날라 가버린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이 찢어져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위로부터 아래로, 그러니까 이것은 우연히 되는 사건이나 사람의 힘이 빌린 사건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기적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주도하셔서 위로부터 아래로 그 휘장을 찢으신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쓴 서신서 속에서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거룩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니” 다시 말하면 베드로에 의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모두 제사장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뜻인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는 이제 또 다시 누군가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제사를 드려주어야 할 중보자가 필요 없고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그 십자가의 희생을 우리가 믿고 그 구속의 은혜를 힘입어서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사장을 구약의 문맥으로 보면 사실은 성소에까지밖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성소는 아직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가장 은밀하고 신비한 장소에 핵심은 바로 그 4.5미터, 4,5미터, 4.5미터에 정육면체에 공간이 그 작은방 지성소였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이 찢어졌다 라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이제 대제사장이 필요 없고 이제는 제사장이 된 사람이면 누구든지, 성소에 들어온 사람이면 누구에 의해서도 제한 받지 않고 직접 지성소로 들어가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논리적으로 사도 베드로가 성경에서 우리를 제사장으로 불렀으니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휘장이 찢어진 것은 이제 제사장이 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든지 성소를 지나서 찢어진 휘장을 걷고 그리고 옛날에 대제사장들처럼 징계를 받거나 하나님께 죽임을 당하거나 거룩한 임재를 대면해서 자신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그 거룩한 공포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용납해주심을 기대하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면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시대를 여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히브리인들의 제사를 기가 막히도록 그 전통을 이해하고 있는 이 저자는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가 담력을 얻었나니” 라고 말입니다. 즉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담력” 이란 무슨 뜻입니까? 담대한 마음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이었을 가능성이 많은 히브리서 저자가 “지성소” 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그 성소나 혹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간 “지성소” 라고 생각했을 때 그곳은 빨리 가보고 싶은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이 한편으로는 기대하지만, 그러나 그 무엇인가 그 앞에 서면 자신의 악함과 죄악들이 드러나고 한번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생명이 삼키운 바 될지도 모르는 그런 거룩한 두려움과 기대가 공존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지성소” 라고 생각하면 항상 거기에는 기대와 함께 한없는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는 그런 신비스러운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소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곧 이제 휘장이 갈라졌으니까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구분이 없어졌으니까 거기 들어가는 것은 곧 하나님과 대면하는 지성소를 들어간다는 의미였습니다. 그곳이 얼마나 두려운 장소였으면 이 히브리서 기자가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힘입어 이제 성소에 들어갈 담대한 마음, 담대한 능력을 우리들이 얻게 되었다. 그 고백을 하고 있겠습니까?
우리는 신약시대에 주님을 믿었고 그리스도 예수에 복음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기 전에 죄가 얼마나 무섭고 그리고 이 복된 구원의 소식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전파되기 전까지 아직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시지 않던 시대에 구약의 백성들이 얼마나 커다란 두려움과 그리고 무서움 속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여야했고 그리고 하나님의 위엄과 엄위 하심 앞에서 그 백성들이 얼마나 두려워 떨었는지에 대한 인상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오직 은혜와 사랑을 기대하면서 주님의 면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지를 우리들은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직한 마음으로 구약성경을 읽어보십시오. 거기에는 하나님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받아서 한없이 감사하는 성도들에 모습도 나오지만, 그러나 압도적으로 흐르고 있는 뚜렷한 그림들 중에 하나는 두려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죄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자기의 택한 백성이라도 자기의 법도에 어긋나게 행하거나 당신을 섬기려고 할 때 단숨에 그 백성의 생명들을 거두셔서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무서움을 보여주시는 그런 광경들이 구약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진노를 통해서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이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사랑하되 두려움과 떨림을 함께 간직한 채 주님을 공경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이름이었습니다. 그랬는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서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자기의 몸 자체를 우리 모든 인간들을 위한 속죄 재물로 드리심으로서 우리의 죄를 영원히 단번에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교리 적으로 보면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처음 사람 아담이고 두 번째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두 번째 아담이라고도 부릅니다. 왜 하필이면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첫 번째도 아니고 두 번째 아담이라고 부르시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굳이 예수 그리스도와 아담을 비교할 수 있다거나 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두 번째 아담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굳이 아담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담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언약의 성격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창조하시고 그와 함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은 다름이 아니라 동산 한복판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그리고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지 말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아담이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다면 그것을 보고 하나님은 그 아담이 자기를 창조하신 당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하는 것으로 알고 그에게 영원한 생명과 축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아담에게 뿐만 아니라 아담 이후에 혈통을 받아서 자연적 출생을 통하여 태어난 모든 인류들에게 함께 주신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하셨지만 아담은 범죄 했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선악과가 어떤 종류의 열매였는가를 생각하는 것은 모두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중요한 것은 열매가 특별했고 나무가 특수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언약을 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의미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이 그것을 어긴 동기는 하나님을 향한 중대한 반역이었고 도전이었으며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이 그것을 따먹도록 만든 것입니다. 실수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의도된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었고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었으며 나아가서는 하나님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사악한 욕망의 발동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인간의 조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언약을 맺으시는 관계에 있어서도 이후에 태어날 모든 사람들에 조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담을 이제 언약을 어긴 자로서 징벌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후에 태어나는 모든 인류는 바로 죄 아래 태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는데 우리가 형벌 받을 죄인으로 태어나야 하는가. 아담이야 그래도 몇 조각 먹어봤겠지만 우리는 맛도 못 봤는데 먹어보고 형벌을 받았으면 핑계될 것도 없는데. 그 할아버지는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인데 왜 그 할아버지 때문에 내가 형벌을 하는가.’ 그런 질문도 하고 또 흔히 하는 질문이 무엇인가 하면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놓으셨는가 안 만드셨으면 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따먹으려고 할 때 손목가지를 부러트리든지 아니면 눈을 멀게 해서 선악과를 못 찾게 했으면 되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받는 질문입니다.
오늘 명쾌하게 대답을 하겠습니다. 기억을 하십시오. 우선 첫 째는 선악과를 만드신 것은 한쪽 편에서 보면 그 선악과를 따먹고 실패했기 때문에 그 선악과를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따먹지 않았다고 할 것 같으면 선악과가 거기에 있는 것이 무슨 문제를 불러일으켰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아담의 마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는 사람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한 방법이었습니다. 만약에 아담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자 하는 사악한 마음이 없었더라면 선악과는 그가 에덴 동산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데 어떤 방해도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선악과는 아담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상태를 재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예화) 목욕탕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체중을 재는데 늘어난 체중을 보고 저울이 고장이 났다고 해서 올라가 보니 정상이었는데 그 사람이 자기의 늘어난 체중은 생각 하 지 않고 저울을 탓하면 논리가 맞지를 않는다는 이야기.
선악과가 거기서 아담을 유혹을 했습니까? 아담보고 오라고 손짓을 했습니까? 그냥 거기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벌써 이 속에서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권위에 불순종해서라도 ‘도전하고 싶다’ 라고 하는 마음을 그 선악과가 그냥 입증을 했을 뿐입니다. 선악과가 만약에 없었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을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떤 방법으로든지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만약에 아담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할 마음이 없었다면 선악과를 보면서 얼마나 은혜를 받았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어떻게, 동산을 돌아다닐 때는 모든 것을 아담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자기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비록 죄가 없는 인간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무한하고 그런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완전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유한했고 완전하기는 했지만 안전한 인간은 아닙니다. 언제든지 타락하고 부패할 수 있는 죄가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인간이었는데 만약에 중심에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 주님을 높이면서 살고자 하는 마음만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모든 것이 자기에게 순종하니까 그런 유한한 인간이니까 완전하기는 했지만 얼마나 자기가 최고인줄 알았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최고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를 가만히 보십시오. 인간이 조금만 지위가 올라가면 진짜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그렇습니다.
(예화) 안양에 가시려고 택시를 탔는데 기사 분이 화가 나있는데 그 이유는 친구가 택 시를 타면서 택시를 모는 것을 보고 힘들겠다고 하면서 거들먹거리는데 예전에 그는 시골에서 똥 지게를 지고 다니던 삶을 살았는데 졸지에 도로가 생기고 평촌 이 들어서면서 땅 부자가 되어서 그렌저를 타고 할 일 없이 다니면서 가끔 만나 면 속을 뒤집는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인간이 조금만 지위가 높아지고 사정이 나아지면 얼마나 교만해지는 것이 인간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아담도 아직 타락하지는 않았지만 불안전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셨는데 얼마든지 교만하고 다른 방면으로 범죄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닙니까? 그런데 만약에 그 마음이 하나님께 도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막 돌아다니면서 전부다 자기 재산 같습니다. 그러다 동산 딱 복판에 오면 선악과나무가 있으니까 보면서 뭘 깨닫는 것이냐 하면 ‘아! 나하고 하나님하고는 다르구나’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다 내 마음대로 하게 두셨는데’ 이것은 네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입니다. 먹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처분하실 수 있는 분은 누구? 오직 한 분,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 면에서 하나님과 자신이 어마어마한 질적인 차이가 있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 하다가 자기 분수를 알게 될 때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넘칩니까? 솔직히 말해서 분수 모르고 착각에 빠져 가지고 이 세상에 저만큼 잘난 신자가 없는 것처럼 껍죽거리고 다닐 때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까? 기쁨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까? 은혜가 있습니까? 인격이 있습니까? 왜 깜둥이처럼 굴러서 다니다가 어느 날 십자가의 사랑에 깊이 깨어지고 나서 ‘나는 다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쓸모 없는 죄인일 뿐이구나 그런데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용서해주셨구나.’ 그렇게 자기 분수를 알고 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막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것입니다. 안 그런가 봅니다. 소낙비처럼 쏟아집니다. 할렐루야.
아담도 그랬을 것이 아닙니까. 막 돌아다니다가 그 선악과 앞에서 ‘그래 맞아 지금 이 땅에 창조된 모든 것이 나에게 순종하고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나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창조된 이 모든 피조물에 동창생일 뿐이지’ 그리고 거기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선악과가 얼마나 은혜가 됐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어떤 의문이 생기냐 하면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어떤 의문이 생기냐 하면 왜 그러면 아담은 그 선악과를 따먹게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셨을까? 이런 의문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생각을 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은 없지만 안 하시는 일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들어놓으셨을 때,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기계적으로 만들어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음식점에 들어가면 제일 기분이 나쁜 것은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그런 소리에 찾아보면 작은 인형이 녹음된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그런 식으로 만들어놓으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그런 식으로 인간을 만들어놓으셨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이실 수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목회를 하려면 이렇게 사람들을 데리고 목회를 해야지 여기에다가 자동으로 움직이는 인형을 만들어놓고 리모콘으로 조정을 하면 “일어서서 기도합시다” 그렇게 짝 하고 또 움직이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렇게 당 회 하려면 장로 버튼을 누르면 걸어서 당 회로 모이고 찬성하게 하고 싶으면 “이것을 하고 싶습니다. 가하십니까?” 삑 누르면 “아멘” 그런 당 회를 한다고 하면 그런 식으로 만족을 한다면 그 사람은 진짜 유치하게 짝이 없는 정신병자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생명이 있는 인간을 이 세상에 만드시고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어서 이성과, 판단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인격적인 영혼을 가진 영적인 피조물들을 만드신 것은 당신을 본받아서 독립적인 주체성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공경하게 하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가 늘 하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믿기 싫으면 그만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믿으라고 눈물로 기도를 해주고, 데리고 와서 말씀을 듣게 하고, 복음을 전해주고,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고 그럴 수는 있지만, 그 사람에게 어떻게 신앙을 넣어줄 수가 있겠습니까. 머리에 드릴로 뚫어서 신앙을 넣어줄 수는 없습니다.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싫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배워야할 것이 신앙의 문턱에서 배워야할 것은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그 점에 있어서는 반성을 많이 해야합니다. 오늘 성도들이 왜 이렇게 타율적이고 타성적인 사람들이 되었는가 하면 비인격적으로 움직여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하기 싫으면 하지 않고 그 결과에 쓴맛을 보는 것도 한번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는 직분도 안 하겠다면 절대 억지로 시키지 않습니다. 하기 싫다면 그만입니다. 그 대신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옳지 않았다면 자기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뭔가 모든 것들을 이제는 좀 인격적으로 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그런 식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에게는 타락할 가능성도 있고 하나님을 잘 섬길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보다는 훨씬 위치가 낳았습니다. 왜, 죄와 악이 아직 들어오기 전의 상태니까. 순전한 상태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범죄 하는 것보다는 아담이 범죄 한 그것이 아담에게 있어서 엄청난 책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대표자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보다는 훨씬 나은 위치에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 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그 다음서부터는 계속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완전한 단절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범죄하고 나서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단절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통이 완전히 단절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누리고 있던 영적인 관계가 어느 정도였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추측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막연하게 생각해볼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는가 하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큰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이 바로 자기 안에 계신 것 같아서 너무나 기쁘고 행복해서 어쩔 줄 몰라서 금방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충만하고 기쁜 상태를 누린 것, 그것을 무한대로 확장을 해서 생각해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아담에게 있어서는 따로 예배 드릴 시간이나, 장소 그런 것들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 늘 하나님의 임재 아래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완전한 축복은 우리가 아마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나 맛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는 맛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어느 순간에 미끄러져도 무지하게 고통스러운데 이렇게 완벽한 하나님과의 임재 속에서 살다가 그것이 쾅 하고 쪼개지면서 하나님과의 완벽하게 차단된 영적인 관계가 완전히 차단되었을 때, 아담은 살아있지만 사실은 아담의 입장에서는 죽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고 보지 못했지만 또한 그는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완전히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닫혀진 그 관계가 바로 이 지성소와 성소사이에 내려진 휘장으로 대변되는 것입니다. 그나마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차례라도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그 백성들에게 알리시기 위한 제한된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성소 속에 들어갔어도 대제사장들이 맛보던 축복이나 기쁨 이런 것들은 무죄 상태에서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맛보던 것과는 비교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선 거기에는 두려움과 공포가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영원히 그런 상태가 유지되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수한 제물로 지금 9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계속 제사 제도를 이야기하는데 그 제사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시적으로 자기의 백성과 만나주실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지만, 그 제사로서는 완전히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나 그것은 제한적인 것이었을 뿐이고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금 그렇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다시금 그렇게 다시는 닫히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완전히 죄로 말미암아 차단된 휘장을 찢어버리는 역사가 있어야 되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역시 제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일시적으로 드리는 제사는 구약 시대에 늘 있어왔고 그것은 결국은 인간의 구원에 영원한 해결책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제물을 드려야 되는데 그 제물은 무엇을 위해서 드려야되는가 하면 범죄 한 것이 아담이었기 때문에 바로 완전한 인간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괴하고 범죄 했기 때문에 그 아담과 같은 범죄하지 않은 육체가 재물로 드려져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의 담을 허물면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아래 있었던 것처럼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순종으로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 그를 믿는 모든 언약의 백성들이 또한 함께 생명 가운데 있을 수가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류역사상 왜 우리들이 두 사람의 육신을 입은 인간을 기억하여야 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무죄 상태의 육신을 가져야한다 라는 제물의 조건을 충족시키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마리아의 몸을 빌어 낳으셨지만 육신 적인 방법에 의해서 잉태되신 분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잉태되신 분이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야했고 죄는 없으셔야 했기 때문에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시되 잉태되기는 성령으로 잉태되셔야 됐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수많은 일들을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시고, 복음을 가르치시고 이런 많은 헌신된 사역을 위해서 수고하셨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죽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철저하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고난의 사건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에 굽이치는 그 수많은 역사는 골고다의 십자가 하나를 바라보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역사는 이 십자가를 통해서 뻗어나가는 새로운 역사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을 오늘 성경 본문이 주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은 분명하게 이제는 그런 제사가 필요 없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보지도 못한 우리들이 대표자인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서 죄와 사망가운데 태어나게 된 것처럼 이번에는 우리는 조금도 나누어진 것이 없는 그 십자가의 고난 때문에 우리들이 그분을 믿기만 하면 그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어온 생명과 성령의 법 아래 사는 사람들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공평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 휘장이 찢어지고 인간을 하나님과 이제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놀라운 일들이 무엇을 통해서 이루어졌는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자기의 육체를 찢으시는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휘장은 곧 육체니라”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자기의 육체를 다 찢으시고 죽으시는 형벌을 통해서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주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주님과 대면하면서 살 수 있게 된 이 놀라운 일들은 우연히 일어난 일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이 궁금한 것은 이제 그 다음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늘 닫혀져있던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을 자기의 옥체를 깨트려서 찢으신, 그래서 오늘 성경에 표현대로 라면 새롭고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길을 열어주셔서 그 길로 걸어가도록 성소와 지성소의 휘장을 찢으신 우리를 향한 계획은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우선 첫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대면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이 지성소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그 일, 대제사장과 하나님 사이에 일어나고 있던 그 일을 우리들이 경험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의 육체를 찢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대면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휘장을 걷고 일년에 한 차례씩 지성소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대면할 때에 그들을 만나주시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셨다는 사실을 한번 더 주목해야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제 대제사장은 비록 철저하게 제사를 드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허락 하에 휘장을 열고 지성소에 들어갔지만, 그러나 그들에게는 여전히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지성소까지 들어갔어도 하나님이 자기를 배척하실 두려움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입니다. 대면을 하기는 하는데 어쩌면 그 대면이 하나님이 자기를 인정하지 않으신다고 배척하시는 것을 확인시켜주시는 대면이 될 수도 있었고 그런 하나님의 의지는 자신을 죽음으로 데려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를 드렸어도 그들은 안심할 수가 없었고 담대하게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두려움과 떨림, 무서움을 함께 가지고 그 성소를 벌벌 떨면서 지나 지성소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다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의 육체를 찢으셔서 휘장을 갈라놓으신 다음에는 이제 우리가 그 지성소로 들어가는데 우리는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싫어하셔서 배척하시고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배척하셔서 마지막에는 어쩌면 우리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이나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해주실 리가 없다 라고 하는 거절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그 지성소에 들어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대제사장들이 경험하던 것과는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고난에 위대함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대면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후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이루어지는 이 대면은 하나님과의 사이에 화목을 기초로 하는 대면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형벌을 다 감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다 풀어진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하나님의 마음속에 그 죄인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이제는 내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에 그 희생의 공로를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 앞에 용서를 비는 것밖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주님께서 영접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화해의 마음을 가지시고 그들을 용납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제가 증명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의 경험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안 믿고 불신자로 살다가 어느 순간에 깊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함을 받습니다. 그런데 용서만 받고 한참 있다가 하나님이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해주셨다는 사실을 내가 깨닫고 난 그 순간 단지 ‘내가 너를 용서해준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죄의 용서와 함께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이런 사랑이 동반되지 않는 죄에 용서라면 그것은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는 말씀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용서해준다 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용서해주신다고 하는 이야기는 죄를 용서해주고 그리고 그 죄를 용서받은 그 위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시 화해가 이루어지고 그래서 뜨거운 사랑이 흐르는 가족관계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이 관계의 회복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 있어서도 용서는 그런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용서한다.’ 그렇게 용서의 완성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용서의 완성입니다. 그렇지 않고 ‘용서한다’ 라고 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복수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밀려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휘장을 찢어서 우리를 대면하게 해주셨다고 하는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제 우리 인간을 당신과 이제는 화해하면서 살도록 부르시는 화목의 요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관계는 바로 가족관계입니다. 자녀를 깊이 사랑하는 아버지와 그리고 그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들,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이 아들 안에 있고, 아들의 마음이 아버지 안에 있는 생명을 함께 나눈 그 무엇으로도 그들의 사랑과 가족관계를 끊어놓을 수 없는 그런 관계가 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의 모습이 구약시대에 비쳤던 그 엄격하고 죄에 대해서 끓어오르시며 진노하시는 그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던 그 하나님의 경륜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를 않을 정도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열어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제 구체적으로 이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속에 이런 의문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되었는데 오늘도 나는 기도하면 하나님이나를 사랑하신다는 느낌이 전혀 없고 당신들은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하지만 나도 그 사랑에 감격하고 싶은데 나는 왜 하나님이 나의 친아버지처럼 느껴지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래도 내가 혹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생각해봤지만 그러나 나는 분명히 그리스도인이고 그리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이런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어떻게 다른 문제인가 하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새롭고 산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서 가지고 계신 마음은 여러분들이 그 피 길을 걸어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이제 여러분들이 죄를 버리고 이전에 불순종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관계 속에서 십자가의 감격을 간직하고 어쩌다 한번이 아니라 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살아가는 관계가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못 박혀 죽으셔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만드셨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셔서 용서하셔서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사람이 안 되도록 우리를 만들어주셨지만,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너는 이제 내 자녀다 너는 이제 내 아들이다’ 이렇게 불러주셨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오래 동안 하나님을 버리고 살아가던 옛날에 죄 성과 부패함이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단지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물 붓듯 부어주십니다. 단지 사랑만 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이기며 살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아울러주십니다. 이것은 오래된 교회생활을 통해서 죄를 이기는 영향력들이 축적되어간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금방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충만하지 못한 수십 년 묵은 신자보다 훨씬 더 죄를 미워하고 죄를 쉽게 이기고 불순종하고자 하는 자신의 욕심을 쉽게 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두 가지 요소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그런 죄를 이기는 성령에 놀라운 능력도 있지만 또 하나는 그런 성령을 거슬려 살게 하는 육체의 옛 본성들은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아있는데 워낙 성령 충만할 때는 이것들을 능히 누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는 이것이 계속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끊임없이 은혜생활을 하면서 이것을 서서히 죽여가야 되는데 그런데 이제 그렇게 못할 때, 그때 이것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다시 옛 욕심을 따라서 방황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기질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처음 믿고 그런 충만한 은혜를 받았을 때 늘 이길 수 있었던 죄악들을 그런 성령의 은혜가 식어지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지를 않으니까 옛 본성은 죽기는커녕 강력하게 살고 성령의 은혜는 떨어지고 그러니까 거기서 죄와 불순종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근심시켜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해주시지 않고 우리를 향해 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때문에 우리가 더러운 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정결해지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결케 하고자 애를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나서는 즉각적으로 배워야하는 것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 거룩한 생활을 해나가는 성화의 행복에 대해서 눈을 떠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에 목표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하면 어제 말씀드린바와 같이 십자가의 은혜를 현재적으로 늘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을 늘 대면하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들이 구원을 받았는데도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이 화해의 길을 열어놓으시고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데도 우리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불순종하고 살고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회개하고 화목하게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있는데 자식이 그릇된 길로 걸어가서 나쁜 사람이 되면 부모가 아무리 정당해도 자식의 마음속에는 부모를 향한 원망이 생겨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가 복음 15장에 보면 아름다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거기에서 핵심은 집나간 아들이 아니라 기다리시는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살아 계신 아버지께 재산을 나누어달라고, 그래서 형도 가족도 모두 버려 두고 혼자서 허랑 방탕하기 위해서 먼 나라로 가버렸습니다.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아버지를 뜨겁게 사랑했는데도 눈물을 흘리면서 타락하러 먼 나라로 갔을까요? 아닙니다. 아버지를 전혀 사랑하지를 않았기 때문에 쾌락을 좇아서 재산을 모아 가지고 떠난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한테 아무 유감도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성경에 기록하지는 않지만 죄인의 심리로 볼 때는 그는 분명히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고통스러웠고 그리고 아버지가 뭔가 자신의 행복에 장애물이 된다라고 하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정당한데 자식이 타락하니까 아버지에 대한 왜곡된 상을 갖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잘 살아도 그것만으로는 여러분들이 자식들의 존경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만 올바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도 올바르게 되어야합니다. 그래야만 존경을 받습니다. 그래서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고 열어놓은 그 산길을 향해서 우리들이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대면했습니다. 그래서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물 붓듯 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들이 다시 범죄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데 교회만 덜렁덜렁 왔다가 갔다가 깡통 같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이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려고도 하지 않고, 순종하려고 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는 자신에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고민하지도 않고, 회개하고 그런 길을 돌이키려고도 하지 않고, 복음의 진리로 자신의 삶에 새롭게 깨닫고 변화 받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옛날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고 십자가의 감격 속에서 살았던 그 날들의 대한 그리움도 모두 사라져가고 차갑게 변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완전히 변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너무나 사랑하고 자기의 영광대로 살아가는 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불순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피 길을 걸어서 자기에게 나아온 그 아들을 향해서 집을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것처럼 한번도 미워한 적이 없이 사랑하고 용서하며 그 아들이 자신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화의 문제이고 이것은 회심의 문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 혼자 하시지 않습니다. 회개 안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기는 뭘 돌아가’ 그리고 마음을 먹고살면 여러분,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 안 돌아오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관계에 변화가 올 것이라’ 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제가 묻겠습니다. 여러분, 10년 전에 신앙의 길에서 이탈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았는데 지금도 해결이 안 되신 분이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5년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그 처음 사랑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졌는데 환경의 회복도 경험하지 않고 아마 여기에 나와있는 분들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세월이 약이던가요. 세월이 지나니까 저절로 좋아지던가요. 신앙의 세계에 요행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성화의 세계에 요행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만큼, 자기가 하나님 앞에 분투하는 것만큼, 순종하는 것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문제가 없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의 그 아버지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나간 그날부터 아버지는 동구 밖에서 눈이 짓무르도록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마지막에 돌아올 때에도 먼저 발견한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먼저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또 이렇게 말하고 싶지요. ‘아니 왜 기다리시기만 하세요. 우리에게 오시지. 그러니까 우리를 강하게 멱살이라도 잡아서 회개시키고 그래서 우리를 새사람 만드시지.’ 하실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하나님은 순결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순결하게 살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회개할 마음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셔야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아! 감사하다. 야, 우리는 이제 걱정 없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못 박혀죽으시고 우리를 다 용서해주셨데’ 그런데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진 채로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고백이 도움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치사하게 지옥에 안 가려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을 대비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죽음은 우리의 결과일 뿐이고 우리의 관심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까 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인생을 살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자기의 생명까지 버리시고 사셨는데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내 인생이 그 그리스도의 고난에 부끄럽지 않은 인생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순간을 살아도 영원에 잇대어서 살 수 있는 그런 인생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지금 주님을 믿는 것이지 지옥 안 가려고 지금 예수를 믿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인생을 다 살고 난 결과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물과 피를 모두 쏟으셔서 이제는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도록 휘장을 찢어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여러분들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미 지나간 길입니다. 간 길입니다. 다시 와서 또 들어갈 것입니까? 누구 앞에서 살고있습니까? 구원받은 여러분들이 누구 앞에서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고 또 다른 죄와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충만하게 느끼는 감격과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이뤄놓으신 위대한 일들에 대한 감격이 내 마음에 없는데 여러분은 새롭고 산길이 나한테 무슨 상관이 있고 휘장이 찢어진들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단지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사건이 아니라 이것은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의 사건입니다.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오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그것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언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내가 그것을 믿었을 때, “그런 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언제? 지금,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이라 언제? 옛날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고난의 체험을 현재적으로 느끼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 몸을 찢어서 휘장을 열어놓으신 주님의 그 고난에 기대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 휘장을 찢으실 때에 우리에게 원하셨던 것은 한번 용서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고 주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사랑하면서 늘 대면하면서 사는 그런 관계가 되라고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을 찢어놓으신 것입니다.
제가 한 13-4년 전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내가 세상을 내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 못 박혔다는 그 기록들을 희랍어 성경으로 읽으면서 생애 적인 감격을 누린 적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십자가에 못 박혔다 라고 하는 것이 우리 신앙과 관련되어서 사용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희랍어 성경에서 ‘에스타오르타이’ 라고 쓰여졌습니다. 그 에스타오르타이가 무슨 뜻인가 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다’ 라는 말에 현재 완료형입니다. 희랍어에서 현재 완료형은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는데 그 사건의 영향력이 오늘 자신에게까지 미치고 있는 상태를 묘사할 때 현재 완료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쓰여진 또 다른 단어가 무엇인가 하면 ‘에게게르타이’ 라고 하는 주님이 다시 사셨다 라고 하는 ‘부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도 예외 없이 에게게르타이 라고 쓰여졌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이시고 그 부활은 옛날에 일어났는데 사도들에게는 지금 자신의 삶과 그 사건이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무엇을 이야기해주는가 하면 부활의 능력, 십자가의 고난의 희생 그것을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현재적으로 경험하고 살았다고 하는 그 표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정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완료의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힌 사건은 옛날에 일어났는데 오늘 사도들의 마음속에 영향을 주고 그들의 삶에 지극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 사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신앙을 통해서 그런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고난을 당하시고 휘장을 찢어놓으신 것은 한번 구원받기 위하심이 아니오 우리가 그들과 평화를 누리면서 계속해서 그분을 대면하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으면 여러분은 십자가에 정신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감격이 있습니까? 주님과 대면하는 기쁨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고난을 받을 때에도 그분을 대면하며 위로와 용서를 받습니까? 범죄 하였을 때도 그분의 꾸지람을 들으면서도 그분의 사죄하는 은총을 경험하고 예전보다 더욱 더 그분을 사랑할 마음이 여러분들 속에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대면하는 영적인 삶, 그분으로 말미암는 행복이 여러분들에 영적인 생활 속에 늘 있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진노를 푸시고 자기를 향해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걸어나오는 모든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고 그들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사랑을 나누며 지내시기로 하나님이 작정하고 계십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을 등지려고 합니까?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을 등진 대가로 우리들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다가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는 것 이외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그분의 사랑을 누리기 위해 살아가는 삶을 포기하고 이 세상에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어떤 것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버리고 십자가의 은혜를 버리고 주님의 그 처음 사랑을 포기하고 세상으로 나아가서 불순종하며 살아서 여러분들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의문을 묻고 싶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곤고해졌고, 우리의 심령은 메말랐고, 우리의 눈은 신령한 것을 향하여 빛나던 우리의 눈은 세상의 탐욕에 이글거리는 더러운 눈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썩어져갈 것들을 추구하느라고 신령한 것을 위해서 심을 여유가 없었고 육체와 함께 못 맺을 것들을 위해서 뿌리느라고 영원한 것들을 위해서 뿌릴 시간들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흘리신 보혈은 여러분들의 발에 의해서 짓밟혔고 그분이 고난을 당하시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활짝 열어놓은 그 찢어진 휘장은 여러분들에게 외면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이 어떻게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버리셨을 때 기대하시는 신앙생활일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이 겨우 그런 신앙생활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자기의 몸을 스스로 들고 보좌 앞에 나아가 자신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셨다는 말씀입니까? 우리는 그럴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형벌을 당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살을 찢으시고 피 흘려주신 그 처참한 고난은 바로 우리가 당해야할 심판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투자한 것이 있습니까? 주님이 자기에 육체를 찢어서 휘장을 찢어놓고 다만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오라고 부르고 계시고 우리는 또한 한때 그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하며 그리스도 예수에 품에 안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버려서 우리와 화목의 길을 여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일평생 그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 기쁨이라고 고백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죄악이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 길을 잃었네
그런데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이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하나님이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니까 이제는 신앙생활을 다했다 이제는 쉽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만일에 그랬다고 할 것 같으면 왜 그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피 흘리며 죽어갔으며 왜 히브리서를 기록한 기록자가 “너희가 죄와 더불어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아니하였노라”고 그렇게 우리들을 격려했겠습니까? 그랬더라면 왜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영생을 취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할 믿음의 사람들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면서 핍박과 고난을 이기면서 신앙을 지키도록 우리에게 촉구했겠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을 보고 ‘나 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위해서 좋으신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군요.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이 주님 앞에 갑니다’ 라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런 십자가의 구원받은 놀라운 감격을 내가 매일 누리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거룩한 성화에 삶을 살려고 작정하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이 놀라운 은혜에 합당하도록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되겠다 라고 하는 이 피나는 헌신이 없이는 이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현재적으로 누리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중요한 결론이 중간에 하나 나왔습니다.
우리들이 그런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잃어버리고 현재적인 감격이 없이 차갑고 냉담한 신앙생활을 계속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우리의 신앙의 연 조가 깊어졌기 때문이 아니고 또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이 신중해졌기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그것은 우리가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처음 하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로 구원해주신 그 은혜에 어울리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노력들이 필요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은 하나님과 화목을 늘 누리면서 살아가도록 주님이 만들어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이 날마다, 날마다 ‘우리의 살아가는 이 삶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그 은혜에 부합하는 삶인가’ 하는 것을 스스로 반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에 말씀에 자극을 받고 자신들의 결점을 발견했으면 그것을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다시는 그런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면서 살아야 되겠다’ 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삶을 너무나 힘겹고 고통스럽다고 느껴질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의 깊이와 희생의 아픔을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을 죽여야하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는 신앙에 있어서 지름길이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청교도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으로 되풀이되는 모든 신앙생활에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바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무슨 일로서 하나님을 섬긴다 어린아이들을 가리킨다 처음에는 놀라운 감격과 사명감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마지못해서 하는 것으로 바뀝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매일 그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자기가 입은 그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바로 자기에게 맡겨준 그 영혼들을 위해서 피 흘리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 영혼들을 진심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그 영혼들을 섬기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각성을 하는 것이 자신의 일상적인 섬김의 삶에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고 밤늦게 나와서 기도하는 것보다는 TV 앞에 누워서 자고 놀러 다니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여러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도 그렇고,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렇게 육신대로 살면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의 감격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럼 어떻게? 기도하기 싫어도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에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혼자 내버려두었는데도 피 흘리시면서 까지도 기도를 했는데 나는 피까지는 흘리지 못해도 그래도 눈물이라도 흘리면서 기도해야되지 않을까. 그 정신이 자기의 일상적인 기도에 십자가의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그런 것, 뭔가 주님을 위해서 희생을 할 때, 주님이 자기를 위해서 희생한 것을 생각을 하고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희생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그 놀라운 은혜를 먼저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며 그 일을 행하는 것, 이것이 예수의 피를 십자가의 피를 일상적인 생활에 바르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을 매일매일 해야만 우리가 거룩해지고 십자가의 감격도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한달, 두 달, 한 주, 두 주, 일년, 이년 멈춰있는 상황이 될 때에 결국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하는 소식을 들어도 ‘그것은 내가 다 아는데 그것이 오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다윗이 염려했던 “구원의 기쁨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시고” 라는 그 기도가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내리는 결론은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기억하고 주님이 그렇게 자기의 육체를 깨트려서 화목의 길을 여셨으니 이제는 그분을 대면하되 늘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는 우리들이 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찢어졌다고 하는 것은 이제는 우리의 삶 전체가 성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구별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하나님 앞에 제사할 때에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삶이 찢어진 휘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눈앞에 있는 삶을,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심으로 휘장을 찢어놓으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전 삶을 하나님의 면전 앞에서 사는 삶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행복해지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행복하지 않는 이유는 오직 하나 때문입니다. 한 가지 행복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행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행복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불순종하며 사는 삶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복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의 모든 삶을 감찰 하셔도 좋은 그런 삶 속에서 행복을 느껴야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뭔가 기쁨을 느끼기는 느끼는데 항상 하나님이 보시지 마셔야할텐데 하는, 심각하게 설교를 하는데 왜 웃으십니까? 그런 것,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예수님이 휘장을 열어놓으신 그 의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떤 삶이 되어야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안 좋아하시는 삶을 통해서 뭔가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야비한 마음을 버려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영적인 상태가 잠들어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즐거움은 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때에 획득되는 즐거움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에 해당되는 사람이 굉장히 많을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잠들어있을 때에는 십자가를 향한 감격이 사라질 때에는 그 마음속에 느껴지는 즐거움은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야지 만 획득되는 즐거움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계속 끌려서 살아갑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는 그는 견딜 수 없는 부조화를 느끼는 것입니다. 의의 병기로 드리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다시 죄의 병기가 된 것입니다. 왕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는데 다시 죄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죄악 된 세상에 살면서도 고향은 거기가 아닙니다. 즐거움을 거기서 느끼면서도 그러나 항상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고통이 있습니다. 어디에서도 그는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죄와 불순종이 우리를 삼키도록 까지 망가진 인생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얻는 즐거움에 눈을 뜨고 거기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돌아가고 싶으면서도 그 마지막 집착을 놓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하나님의 면전에 바로 나아가도록 화목의 길을 여신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연약합니다. 마음 한편으로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데 끊임없이 밀려오는 세상에 유혹과 정결해지지 않고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부패한 본성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하고 이런 것들은 하나님과 이 땅에 포진하고 있는 수많은 악한 영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우리를 점점 죄 가운데로 끌어갑니다. 그렇게 우리는 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항상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우뚝 서 있는 그 십자가, 지금도 그 피 길을 걸어서 나오는 모든 죄인들을 용납하도록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방법이 우리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왜 주님이 그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버려 구원의 길을 여시기까지 어떻게 세상을 버리고 자기를 버리고 그리고 희생의 길을 걸으셨는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우리들은 세상에 붙어있는 지배한 욕망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기억하며 펑펑 우는 감격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세상의 안일과 즐거움을 모두 버리시고 멸시와 치욕과 천대를 받으시고 자기의 모든 안 락을 포기하신 생애를 사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런 희생을 자초하셨고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그분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랑에 빛 진자가 되어서 누구도 우리에게 그것을 버리라고 명령하는 사람은 없지만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세상과 육신에 속한 것들을 버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화란에 있는 어느 그리스도인이 쓴 글의 내용- 철을 따라 이동하는 청둥오리들 이 있는데 그 중에 한 마리가 다리를 다쳐서 날지를 못해 치료를 해주었는데 오 랜 시간을 사람이 기르다보니 날개는 약해지고 몸은 너무 비대해져서 다음 해에 같은 청둥오리들이 날아가는 그 대열에 끼지를 못했다는 이야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자기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로지 한 가지 자신의 사명을 주목하면서 사셨습니다. 어떤 사명, 내가 매일 생명을 버려 아버지의 백성을 구원하리라고 하는 그 사명 하나를 바라보고 사셨습니다. 그분이 일평생 살았지만 자기의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고 머리 둘 곳도 없고 깃들 곳도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참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은 모두 순례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이 다만 지나는 나그네길이라’는 생각을 해야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붙은 욕심을 버리고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영혼을 섬기면서 그 영혼들이 잘 되는 것을 보며 기뻐하고, 우리의 선한 생활에 진전이 있는 것을 보면서 감사하고, 하나님의 교회의 부흥을 주시는 것을 보며 눈물 흘리며 감격하고, 선교 지에서 구원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감격하고, 기뻐하고, 나 같이 쓸모 없는 인간, 막대 먹은 인간을 사용하셔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되게 하셨다 라고 하는 사실에 감격하면서 아무리 기뻐해도 하나님 앞에 가책 받을 일이 없는 그런 주님의 기쁨을 누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을 배워나가게 하시려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찢어 휘장을 갈라놓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손을 털어 버리십시오. 주님 모르게 뒤에 감춰두고 있는 즐거움, 그것이 여러분들을 얼마나 상하게 만들었습니까? 양심에 찔렸고 여러분들의 신앙에 양심은 주님의 존 전 앞에 선명하게 나아올 때마다 가책을 받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그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는 주님 앞에 살겠노라고 다짐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우리에게도 기쁨이 되고, 주님이 분노하신 것이 우리에게도 분노할 이유가 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울고, 웃고, 분노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그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그런 삶을 사셨기 때문에 그 행복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이 미리 아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런 행복을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십자가 앞에서 사는 길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22)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갈라놓은 그 질긴 휘장을 찢으시고 이제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구별을 의미 없게 만드심으로서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들이 하나님과 대면하는 지성소에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다고 어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기의 아들의 몸을 갈라 휘장을 찢으셔서 당신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 앞으로 우리를 부르심은 첫째는 그분과 화목하게 살게 하기 위함이요 또 하나는 그분 앞에서 대면하며 살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그렇게 휘장을 찢어놓으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살아가고 하나님 면전에서 살아가는 행복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자신이 이런 행복을 얻게 되었다 라고 하는 인식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시선을 아무리 끄는 특이한 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영성의 한복판에 십자가가 없으면 그것은 기독교의 영성은 아닌 것입니다. 그만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셔서 휘장이 찢어진 이 사건은 우리에게 있어서 의미심장한 사건이었고 찢어서 나부끼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은 우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지는데 ‘너희가 하나님과 화목하냐’ 또 하나는 ‘너는 그분 앞에 사는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너무 중대한 진리를 제시받아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놀라운 희생을 통해서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대치할 수 없는 희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면전 앞으로 나아올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다면 거기에는 틀림없이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삶을 계획하시면서 그렇게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을까요? 그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오게 하시기 위하여 휘장을 찢어놓으셨다”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속죄함을 받은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되겠는가. 속죄함을 받은 성도들이 십자가 신앙의 정체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두 가지 즉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고난의 감격을 현재적으로 체험하면서 살도록 우리에게 가르치셨는데 이 십자가의 신앙의 정체를 말하기에 앞서서 그 앞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에 고난을 통해 이루어놓으신 두 가지 일을 구약의 제사에 맥락과 연결해서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큰 제사장이 계시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제사장은 매우 특이한 대제사장입니다. 눈에 보이던 인간적인 대제사장들은 짐승을 죽여서 제사를 드렸지만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을 직접 제물로 드리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신 일을 두 가지로 묘사를 하는데 하나는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달았고’ 두 번째는 ‘그 물로 우리의 몸을 씻겨주셨다’ 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제사 관습을 우리들이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속죄 일에,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해서 하나님 면전에 서기 위해서 굳게 닫혀진 휘장을 걷고 성소를 지나 지성소로 들어갈 때에 그는 피 흘리는 제사, 두 가지를 행해야했습니다. 한가지 제사는 수송아지를 드리는 속죄 제이었고, 또 한가지 제사는 수 염소를 드리는 것이었는데 그 제사는 번제의 제사였습니다. 먼저 그는 수송아지를 잡아서 죽이고 그 피를 가지고 성소를 지나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그래서 그것을 속죄 소에 뿌려야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면 자신이 하나님 면전 앞에 서기 위해서 먼저 자기가 지은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그 피를 뿌리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위해서 주님이 작정하신 규례 데로 수송아지가 내 죄를 짊어지고 죽었으니 이제 이 죽음을 당한 송아지의 피를 보시고 내가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용서해주시고 나를 대면하실 때에 내가 죽지 않고 살게 하소서 라고 하는 탄원이 깃들여있는 속죄의 제사였습니다.
수 염소를 잡아서 드리는 제사는 태워서 드리는 번제였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헌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제사 제도가 기가 막히게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한편으로는 자기의 죄를 속할 대속의 제물이 필요했고 또 한편으로는 제사를 통해서, 번제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맹세가 필요했습니다. 이 번제가 의미하는 것은 짐승이 불에 타서 다 태워지듯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다 태워지도록 헌신한다 라고 하는 헌신의 의미였습니다. 그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자기의 죄를 속죄 받기 위한 제물은 수송아지였는데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는 염소였습니다. 비중이 어디에 더 많이 가있다는 것입니까? 속죄입니다. 헌신 보다는 속죄에 그 비중이 훨씬 더 많이 가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참 큽니다.
그러니까 우리 중에는 복음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전혀 기초가 잘못 놓여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상태인데도 뭔가 자기의 꿈과 의지를 따라서 자기 딴에는 하나님을 위해서 훌륭하게 산다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보십시오.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 하나님을 대면하기 전에 그는 번제가 아니라 속죄제를 먼저 드려야했습니다. 그것도 헌신을 상징하는 번제의 제물이 수 염소이었으나 자기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드리는 이 제사는 큰 송아지였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속죄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융통성이 없어서,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복음 적인 메시지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면하면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압도해야할 커다란 진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먼저 얼마나 흉악하고 소망이 없는 무서운 죄인인가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보면서 자기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은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자신의 죄를 자각하는 마음이 헌신하는 그 마음보다 훨씬 더 우선해야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제 맛에 겨워서 하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대게 그런 사람들이 뭔가 헌신적으로 살아가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면 살수록 자신의 의를 쌓아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흉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극 받을 줄 모르는 사람들은 헌신적인 삶을 살면 살수록 그리스도가 점점 보이지 않는 삶을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 이야기를 한번 잘 여러분들의 삶의 현장에 적용해보십시오. 여러분들 주위에는 도무지 신앙의 열심에 있어서는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데 그런데도 뭔가 우리가 분명하게 저 사람같이 되고 싶다 고는 말할 수 없는 뭔가 신앙에 있어서 기본이 잘못 되어 있는 그러나 아주 헌신적으로 사는 그런 사람들을 우리들이 발견하지 않습니까? 빗나간 열심입니다. 헌신적으로 사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흉악한 죄인이었고 자기가 오늘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게 된 것은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런 용서를 위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리스도 예수의 고결한 희생에 빚지고 있다라고 하는 자각이 없는 사람의 헌신은 모두 제 멋에 겨워서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럴수록 그에 신앙과 마음에 상태는 잘 살면 잘살수록 그리스도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는 신앙이 되는데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책망을 받아야했던 종교지도자들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앤드류머레이 라는 목사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겸손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이 세상에는 죄인들 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종류의 죄인은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인들이고, 또 한 종류의 죄인은 용서받은 죄인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들입니다. 죄 값을 치루고 용서받았는데 미안하게도 그 죄 값을 우리가 치룬 것이 아니라 죄는 우리가 짓고 그 죄 값은 순결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치루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피를 뿌리는데 번제를 드리고도 피를 뿌립니다. 번제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면 그렇게 속죄를 받은 내가 이제 번제의 제물에 피를 뿌리면서 하나님 앞에 마음속으로 고백해야할 내용들은 무엇인가 하면 ‘이 염소가 완전히 죽어서 생명이 되는 그 피를 당신 앞에 뿌린 것처럼 내가 이 죄를 속함을 받았으니 이제는 내가 일평생을 나의 생명을 모두 버리면서 주님의 율법을 주의 말씀을 준수하면서 사는 일에 생명을 걸고 헌신하겠습니다’ 라는 그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에 십자가는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하는 동시에 그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즉시 그 사람은 오로지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신 그리스도 한 분만을 위해서 살아야할 것을 십자가가 동시에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성도는 그렇게 피 흘리기까지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살지 않고는 그는 결코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체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신앙생활로는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그 피를 뿌리는데 오늘 성경은 뭐라고 그런가 하면 “마음에 그 피에 뿌림을 받았다” 라고 말합니다. “마음에 그 피에 뿌림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가 피를 뿌리는 주체가 아니라 이번에는 피를 뿌리는 분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리고 주님이 마치 우리의 마음이 속죄소인 것처럼 그렇게 피를 우리의 마음에 뿌리신 것으로서 문학적인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우리의 마음이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피를 뿌리심으로 이제는 우리가 지성소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에서 그분을 만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속죄소 위에는 구름이 있고 그 구름 위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속죄소로 삼아서 피를 뿌리심으로 바로 우리의 마음이라는 그 장소에서 지존하신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피가 뿌려지는데 그런데 불행하게도 자기의 마음에 뿌려지는 그 피가 구약의 수많은 성도들이 보았던 송아지의 피나 염소의 피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십자가가 강력한 자극을 준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주님이 뿌리시는 그 피가 어떤 피입니까?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제물로 바쳐주셔서 쏟으신 그 피를 우리의 마음에 뿌리신 것입니다. 한번 묵상을 해보십시오. 우리가 성경을 깊이 깨닫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본문의 뜻을 정확히 이해를 못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정확히 이해를 해도 그것을 깊이 명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지성소에 누워있고 예수님이 자기를 죽이고 쏟으신 그 피를 가지고 손수 들어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속죄소로 삼아서 우리의 죄를 씻는 피를 뿌리시고 그리고 또 헌신을 위한 피를 우리에게 뿌리십니다. 그 피를 뿌리실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쏟아지는 그 수많은 핏방울이 흠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에 피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에게 즉시 무엇을 일깨우는가 하면 두 가지 사실을 일깨웁니다. 왜 어린양이 자기를 죽여서 그 제물의 피를 가지고 이 지성소로 들어오셨을까? 두 번째는 왜 나같이 더러운 인간의 마음을 속죄소 삼아 하나님 아버지와의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인가. 그래서 이 더러운 마음에 그 십자가의 피를 뿌리시는 것인가. 그것을 깨닫는 순간에 즉시 무엇에 대한 결론에 도달하는가 하면 나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양심입니다. 양심의 깨달음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리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지 우리들이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구원의 도리에 귀를 기울이고 십자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찬란한 복음 진리의 빛에 우리들이 주목한다면 우리는 즉시 수많은 깨달음들이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십자가를 보면서 깨닫는 가장 커다란 진리는 자기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자기의 죄 때문에 그분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고난을 당하셨다 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는 너무나 큰 진리이고 너무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도리이기 때문에 아무리 흉악하고 마음이 악랄하고 굳어진 죄인이라도 제대로 그 십자가에 복음을 듣고 깨닫기만 하면 그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하나님 앞에 끔찍한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 노래를 지은 사람은 한때는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사냥하다가 노예로 팔아먹은 아주 악랄한 노예 상인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복음을 깨닫고 나니까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 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손에 총을 들고, 칼을 들고, 그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을 사냥해서 그렇게 수없이 잡아죽이면서 문명시대에 노예로 팔아먹는 그 사람이 야수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흉악한 죄인들도 그 십자가, 피 뿌리신 어린양에 보혈을 마음에 받으면서 자기의 심령에 악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악하고 자기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는 순결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죄인 된 자기를 살리시기 위해서 죄 없는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언제든지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찾을 때 여러분들은 영원히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아무리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주님 한 분 만을 위해서 탁월한 헌신의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여러분 자신은 겨우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상기시켜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몸을 물로 씻으셨으니”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대제사장이 제사를 지내러 들어갈 때는 세마포 고운 옷을 입고 그리고 흉배를 두르고 그리고 그 다음에 관을 쓰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입기 전에 반드시 해야되는 일이 있는데 온 몸을 물로 깨끗이 씻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맥락에서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이 ‘거듭남’ 중생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그것입니다. 몸을 온전히 다 씻은 자들은 이제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우리들이 늘 죄를 짓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그 순간 우리의 몸은 모두 그리스도의 중생에 씻음으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원죄로부터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짓는 죄, 지을 죄로부터도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짓는 계속적인 불순종에 문제를 하나님 앞에 정 죄 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와 거기로부터 오는 능력의 삶을 위해서 청결 케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씻음은 그러므로 명백한 중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결혼하신 분들은 어린아이들을 씻겨보신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아주 간난 아이 때 말고 그저 유치원쯤 다닐 때쯤, 춥다는 아이를 목욕탕에 넣고 깨끗이 따뜻한 물로 씻겨주고 커다란 타올로 온 몸을 감싸서 그래도 찬바람 쐬여서 감기들까봐 빨갛게 히타 까지 틀어놓고 얼른 안고 안방으로 와서 부리나케 드라이어로 머리를 깨끗이 말려주고 온 몸을 씻은 다음에 새 내복, 새로 산 하얀 타이즈, 반바지 이렇게 옷을 깨끗이 입히고 마지막에 로숀까지 발라서, 머리에 기름까지 살짝 발라서, 가르마까지 타서 그렇게 새것으로 만들어서 그래서 밖에 딱 내놓을 때 기대가 무엇입니까? 대 실망할 때는 언제입니까? 그렇게 내 보낸지 30분도 안 되었는데 “엄마” 그러면서 왔는데 완전히 어디서 뒹굴었는지 개꼴을 해서 들어옵니다. 그 다음에는 얻어맞는 것입니다. 죽도록 씻겼더니 그 다음에는 그냥 막 때리면서 옷 벗기며 “빨리 목욕탕으로 들어가” 그렇게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습니다. 옛날에 대제사장들은 물로 자신의 몸을 씻었습니다. 중생에 씻음은 물로 씻은 씻음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당신이 흘린 피 다라니 안에 우리를 부르셔서 머리에 그 피를 부으셔서 우리의 생각을 깨끗하게 하시고 그 피로 우리의 마음에 부어 우리의 정신을 온전하게 하고 그 피를 우리의 손에 발라 씻어주시면서 옛 삶을 버리도록 하셨습니다. 그 피를 우리의 몸 전체에 쏟아 우리의 발까지 깨끗이 씻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중생 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깨끗하게 씻겨주셨을 때, 그때 주님의 기대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는 이제 내 피로 깨끗이 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 정결함을 입은 백성답게 살아라’ 그리고 세상에 내보내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깊이 깨닫고 우리를 위해서 속죄의 제물로 자기를 드리셔서 그 피를 우리의 마음에 뿌리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커다란 가책을 받고 그리고 아울러서 그 피 다라니에 우리를 불러들여 우리의 온 몸과 정신과 우리는 모두 죄악 덩어리였습니다. 그것을 깨끗하게 씻겨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씻어서 정결한 사람으로 우리를 만들어서 세례까지 주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놓으셨을 때 주님의 마음에 기대가 어떠하였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속죄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감격과 함께 또 한편으로는 이제 그렇게 속죄함을 받았으니까 이제 우리가 정결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비롯해서 그 많은 사도들이 편지를 쓸 때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종이라는 말은 이제 하도 높임말이 되어서 또 어떤 사람은 나보고 ‘종 님’이라고 합니다. 누구를 희롱하는 것입니까? ‘사장 놈’ 하는 것과 똑같지 ‘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런 것과 똑같지 더 실감나는 말은 ‘노예’입니다. 우리는 노예가 있는 시대에 살지 않기 때문에 노예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모릅니다. 노예는 자기의 소유가 없습니다. 뼈심을 들여서 풍년이 됐다 누구의 것입니까? 주인 것입니다. 주인이 여자를 붙여주어서 결혼을 시켜주었습니다. 주인 것을 빌려다가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산을 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면 누구의 것입니까? 논리적으로 반은 자기의 것같지요. 그런데 아닙니다. 자기것이면 뭐합니까. 자기도 주인의 것인데.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소유권에 대한 이야기가 쓸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주인 것입니다. 다 주인 것입니다. 그것이 노예입니다.
인생을 살다가 보면 포기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박살나는 적이 많습니다. 포기해야하는데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때 십자가를 한번만 그려보십시오. 그리고 그 밑에다가 한번만 써보십시오. ‘하나님, 나는 내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와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민망히 여기사 치료에 은혜허락하소서
신앙에 세계에 대부분의 갈등은 자기 것을 고집하는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나는 아닙니다. 그래서 어느 목사님은 성경 갈피사이에 노비 문서를 하나 써가지고 다닙니다. 자기 이름을 쓰고 ‘우측에 기록된 노예는 나에게 팔렸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사신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당신이 흘리신 그 피 다라니에 우리를 불러서 깨끗이 씻어서 세상으로 내보내시는데 우리가 왜 부정해집니까? 왜 불결해집니까? 바깥에서 오는 무엇이 우리를 더럽게 만드나요. 바깥에서 오는 어떤 것이 우리를 불결하게 만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서 나옵니까? 악한 것들이, 더러운 것들이? 우리 안에서 나옵니다. 왜 아직까지도 자기의 인생, 그리고 자기의 소유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안 빼앗기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불순종을 하고,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짓밟으면서라도 그것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강한 집착이 우리를 불결하고 더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깨끗이 씻은 몸을 다시 죄로 더럽혀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믿음의 선조들이 그렇게 영적 생활에 비결이 십자가에 대한 묵상에 있었던 이유는 그들 나름대로에 독특한 특징이 아니라 복음 진리가, 그리고 복음에 대한 경험이 그것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말은 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노예다.’ ‘우리의 것은 없다.’ ‘그만큼 은혜를 입었으면 이제는 값을 줄도 알아야지.’ 말하기는 굉장히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포기합니까? 말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뭔가 우리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을 요만큼 포기하는 것은 손가락을 이만큼 잘라버리는 것만큼 힘듭니다. 정말 포기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포기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어디에서 납니까? 누가 공갈을 치고 협박을 하면 그것을 포기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피로 씻으셔서 이제 우리를 모두 사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주님의 소유다.’ 그런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피뿌림과 그 다음에 그피로 정결케 하심을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들이 그 십자가 아래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그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아가는 삶입니다.’ 누구에게로 나아가는 삶,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굉장히 재미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성경은 여러곳에서 우리에게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얼마나 무능한 인간인지를 묘사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오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가 말합니다.“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화목제물로 주신 것이라” 사람은 다르지만 사도 바울은 또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주셨는데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막 몸부림치면서 하나님 앞에서 요구를 하니까 하나님이 내가 어떻게 저렇게 부르짖는 소원을 마다할 수 있을까 하면서 자극을 받아서 아들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직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깨트려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창조시에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에 우리에게 의도하셨던 그런 관계의 행복을 다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그 이상의 삶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때에 죄가운데 노예되어서 살아가는 이 사망을 향해 치닫는 인생 밖에는 다른 대안은 없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사는 것에 조금도 불편을 느끼지 않는 그때에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도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 교회 중에서도 이상하게 성찬을 할 때 사람들을 나오라고 해서 성찬을 자기가 받아먹게 하는 그런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넌센스입니다. 여러분, 왜 카톨릭에서는 이 성찬을 사람들이 나오고 사제가 하나씩 입에다가 넣어주고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들고 가는지 아십니까? 사람이 너무 많아서 불편하기 때문에 편의를 봐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찢으신 살과 피가 우리가 나아와서 그것을 발견하고 취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이 있는 삶에 현주소로 주님께서 자기의 살과 피를 가지고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필요하다는 사실 조차 느끼지 못할때도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실 때 까지 그 이후에 십자가에 이루신 구원의 도리를 죄인들에게 적용하셔서 구원에 사역을 완성시키실 때 까지 항상 성경은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러브스토리입니다. 죄인된 인간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추적해서 우리들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고 나니까 그 다음에 이야기가 또 달라집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만을 기대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뭐라고 말합니까? “나아가자” 어디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내 일생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목표로 알고 살고 그분과 더 가까이 더 가까이 그분 앞에서 사는 것을 삶의 목표로 알고 쉼없이 전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속에서 살고 싶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 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지를 깊이 체험하고 나면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물질적인 결핍이나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하는 것을 알게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남자가 아니면 여자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해본적이 있을 것 아닙니까?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주변이 모자라서 영영 못해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중에는 너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든지간에 누군가를 깊이 사랑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 남자가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아서 그 사랑받는 참된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했고 거기에 자신의 존재에 이유까지 실어보았던 사람들은 그런 사랑을 잃어버리고나면 자기가 왜 사는지를 모릅니다. 내말이 맞지요? 뭘 또 고개를 끄덕끄덕해요. 사실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쯤 그렇게 사랑해보지 않으면 이면이 성숙하기 힘듭니다. 아, 그럼 이때에 신앙생활을 잠깐 접고....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니고 이제 그런 사랑을 할 때가 옵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했는지 사랑하지 않았는지는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을 때는 모릅니다. 언제 입증이 되는가 하면 그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변했던지 물리적인 제악에 의해서 그 사람을 도저히 만날 수 없도록 멀리 떨어지게 되었던지 그럴 때 정말 그 사람을 사랑했는지 내가 그 사람의 사랑을 받아들였는지 그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최고의 행복은 무엇입니까? 조금더 조금더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가까이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위험한 길을 걸어갈 때에 그 손을 아버지가 꽉 잡고 가는 것처럼,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길을 걸어가면서도 내옆에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아버지의 존재를 늘 느낄 수 있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긍국적인 행복입니다. 제가 여러분, 요한복음 15장을 설교하다가 아주 격해지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의 신앙에 성장을 위한 도구만 될 수는 없습니다. 이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는 도구로만 쓰여지는 것은 나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긍국적인 행복입니다. 주님이 내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는 완전히 합일 된 이런 삶, 이것은 주께로 끊임없이 더 가까이 나아가는 그런 삶의 행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히 다 나아갔다 그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하여튼 무엇이든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약간이라도 간격을 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한없이 멀리 떨어져있어서 도저히 주님의 마음을 내가 느낄 수도 없고, 내 마음이 주님께 전해질 수도 없고,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불렀을 때 그 이름이 너무나 낫설게 들리고, 주님의 가치의 기준을 내 인생 속에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것에 도저히 연결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진 관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늘 주님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삶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끊임없는 삶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이제 이것도 성화의 맥락에서 봐야되기 때문에 두 가지 요소가 함께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구원해놓으신 다음에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고 너희들이 와라 그러시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 나오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역시 성화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구원받는데 있어서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면서 하나님 면전 앞에서 살아가는 의식할 수 있는 이 행복은 의식 세계속에서 우리가 죄와 악을 버리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속한 것을 찾으면서 내가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으면 어떠한 성화에 진전도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친밀한 진전이나 견고함에 진전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것이 첫날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던 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의 아들을 주신 그 십자가에 현재적인 감격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한 그 메시지와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 그것을 여기서 말하는데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입니다” 뒤에 것부터 이제 설명을 해서 위로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여러분, 우리는 기독교 세계에서 늘 자주 쓰면서도 사실은 그 의미에 대해서 잘 모르는 말들이 많습니다. 너무 자주 썼기 때문에 자기가 참된 의미를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그런 단어들이 많은데 그중에 하나가 이 믿음이라는 단어입니다. 믿음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믿음이 어떤 것입니까? 그냥 “하나님, 나는 믿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되는데 다른 말을 할 때는 안 그러는데 “믿습니다.” 라는 말을 할 때는 쥐어짭니다. 믿~씁니다. 얼마나 안 믿어지면 배에 힘살을 당기면서 하는지. 그리고 믿었는데 머리속에서 ‘안될거야 안될꺼야’ 막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마귀야 물러가라’ 좆아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 암시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자기 암시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자기 암시가 아닙니다.
이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 자신이 구원과 관련시켜서 아주 확실하게 말씀하신 성경구절은 요한복음 3장 15-16절입니다. 특별히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랬습니다. “믿는 자마다” 그러니까 앞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는 믿는 것이 있고, 그 다음에는 그 믿음에 대해서 하나님이 영생이라는 선물로 값아주시는 것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는 일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믿어도 소용이 없는데 못 박혀서 죽으신 대속의 사실이 있고, 그다음에 그것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 영생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말씀하실 때에 예수님께서 구약에 있는 한 사건을 지목하시면서 요한복음3장14-16절을 끌고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광야에서 놋 뱀이 나무에 매달려 높이 들리운 것처럼 인자도 그리하여야 하리라”
여러분, 병원차가 지나가는 것을 잘 보면 막대기에 뱀이 감긴 것, 그런 그림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기분나쁘게 뱀인가 하는데 그것이 모세가 장대에 구리뱀을 매달아서 높이 들어서 사람들이 치유함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치유의 상징입니다. 거기서는 그것이 뱀탕의 상징이 아니라 치유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높이 들리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구약에 보면 예수님이 오실 것을 바라본 사건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랬는데 왜 하필이면 예수님께서 뱀을 장대에 끼어서 높이 들었던 그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믿음을 말씀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묘한 관계가 있습니다. 설명을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구약으로 돌아가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을 잔뜩 하니까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그 불뱀을 보냈는데 왜 불뱀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그 불뱀의 모습이 불처럼 붉은 빛을 띠었기 때문에 불뱀이라고 하는 설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독이 워낙 강해서 한번 물리면 온 몸이 불붙는 것처럼 맹독이 퍼져나가기 때문에 그 신체적인 반응을 보고 불에 타는 것같은 고통을 가져다준다고 해서 불뱀이라 이렇게 보기도 합니다. 저는 후자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물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맹독을 가진 뱀에게 물렸을 때에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약이 개발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를 않습니다. 지금은 약이 있습니다. 산에 같은 곳에 가서 독사 같은 것에 딱 물리면 볼 것도 없이 택시에 실려서 큰 병원으로 가야됩니다. 작은 병원에는 가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옛날에 직장생활할 때 근처에 있는 교장 선생님이 새벽에 나가셨다가 물리셨는데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겼는데 온 몸이 퉁퉁 부었는데 두 대를 맞고 낫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한 대가 그 당시 15년전에 50만원이라고 그랬으니까 싸지는 않습니다. 돈 없으면 물리지를 마십시오. 어째든 그 뱀에게 물렸을 때 해결책이 없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것입니다. 뱀이 사람의 목이나 머리를 물리는 없습니다. 다리부터 뭅니다. 다리부터 부어서 불붙은 것처럼 다리가 통증이 번져올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당시의 의술로서는 그것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고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하나님 앞에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매달렸으면 되는데 그럴만한 신앙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불평하다가 징벌을 받아서 이제 퉁퉁 부어오르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하나님이 기상천외한 명령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장대에다가 구리뱀을 매달아서 높이 들어라.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해라. 야, 이것 쳐다보면 낳는다. 그렇게 말해라.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쳐다봤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안 쳐다본 사람도 있었습니다. 왜 안 쳐다봤을지는 나도 모르겠습니다. 뭐가 힘이 들다고 이렇게 쳐다보기만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것을 안 했습니다. 그러면 쳐다본 사람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나음을 받고 그 약속대로 고침을 받았는데 쳐다보지 않은 사람들은 퉁퉁 부어오는 다리를 붙들고 쓰라린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고 죽어간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힘이 듭니까? 예수 믿는 것이 힘든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이 좀 힘들지. 아니 말이야 분명하게 해야지. 예수 믿기 힘들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이렇게 쳐다보면 되는데.
그를 위해 내 죽었노라
다 주님이 전해주실 때 ‘아멘’ 그러면 구원을 받는데 뭐가 힘이드는 것입니까? 힘든 것은 이렇게 말해야합니다. “아, 주님 닮기가 너무 힘들어. 교회생활하기가 쉽지는 않아. 신자답게 살아가기가 만만하지 않구나. 신앙생활은 역시 고난이 따르는구나”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지. 주님 믿는데 뭐 한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스스로 복음의 도리를 찾았습니까? 싫다고 싫다고 마다하면서 뿌리치는데 누군가가 죽도록 기도하고 쫓아가서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전해준 사람 주스라도 한잔 사주었습니까? 열심히 전하니까 성령이 역사하셨습니다.마음에 믿어졌지요.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영접했지요. 아멘 한 것말고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왜 여기서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했음이라 할 때에 그 믿음을 이야기할 때에 왜 그 장대에 높이달린 구리뱀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는 자신을 도저히 구원할 수 없는데 하나님의 구원을 내가 필요로 하는데 하나님의 선처를 기다리며 주님을 쳐다보는 것밖에는 할 것이 없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그분을 주시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자” 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들이 구원을 얻을 때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세례문답할 때 마다 제일 먼저 묻는질문이 무엇입니까? “그대들은 죄인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얻는 것 이외에는 인생에 다른 소망이 전혀 없는 것을 믿으십니까?” 이것이 첫 번째 서약입니다. 거기에 모두 “아멘”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의 그 피에 은혜를 깨닫는 순간 우리의 양심이 살아났고 그리고 우리의 악과 죄가 모두 생각이 났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기에는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진 죄인이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상 도저히 우리가 그분의 품에 안겨서 그분의 자녀라고 불림을 받을 수 없는 인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양심의 가책과 죄악되게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그리고 우리는 아무 희망이없는 인간이고 앞으로도 나 자신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라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그 십자가 아래서 절망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울었습니다. 무엇으로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와 악함, 우리가 하나님을 버린 절망적인 상태, 저주받아 진노아래 있는 우리에 형벌받은 상태를 깊이 자각하면서 하나님을 쳐다보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주님에게는 우리를 구원해주실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선처를 바랄 뿐입니다. 주님, 우리는 흉악한 죄인들이고 주님 없이 살 수 없는데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내어놓은 이 깊은 계곡을 건널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며 용서해달라고 기도하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그 공로 하나만을 의지했을 때 주님이 우리의 그 믿음을 보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구원받기 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다음에도 그 사실을 회고하는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어떤 믿음이여야 하는가.
여러분, 구원받았습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놀라운 용서를 경험하고 이제는 주님만을 위해서 살겠다라고 하는 진실한 마음에 소원도 생겼는데 신앙생활은, 인생살이는 마음에 결심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 실제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어야지만 되는 것입니다. 그나마 주님이 우리가 그 주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 성령이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에게 능력으로 임하시고 그리고 그 성령이 우리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인도해주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죄를 이기고 유혹을 이기면서 그나마도 신앙생활에 흉내를 낼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들이 그렇게 예수를 믿은 다음에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당신의 피로 씻은 정결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을 위해서 살고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런 능력이 있는 삶, 이런 순종하는 삶은 끊임 없이 십자가를 통해서 부어지는 하나님의 새로운 능력주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도 이야기하기를 이런 십자가에 대한 체험은 우리에게 이해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로부터 오는 신령한 힘과 능력을 공급받으면서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비롯해서 그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끊임없이 그 십자가를 회고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 십자가를 온전한 믿음으로, 다시 말하면 그 십자가만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고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을 때 우리에게 의도하셨던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의 원천이 된다 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십자가를 온전히 주시하는 그 사람들에게 능력주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끊임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회고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믿음은 다른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가 그의 피로 인해 정결함을 입어서 휘장을 지나 담대히 주님 면전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 그 믿음입니다.
여러분,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근원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험악한 세상을 이길 위대한 힘이 어디로부터 솟아납니까? 여러분의 사상입니까? 주위의 사람들의 충동을 통해서입니까? 그런 것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정말 능력있는 교회가 되려면 이런 저런 운동을 한다고 해서 교회가 능력있는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정말 능력있다 라고 할 때에 죄를 이기는 능력이 아니면 그 능력이 무슨 능력입니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아니면 그 능력이 무엇을 위해서 능력이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까? 죄 가운데 오래 동안 고착되어 온 세상의 관습과 세상의 습관들을 타파하고 죄악된 행실을 꺽어버리는 그런 능력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들이 능력있는 삶을 사는 비결은 사람들로부터 이런 저런 충동과 자극을 받아서 운동권 중에 한 사람이 되는 것이 그것이 곧 능력있는 삶을 사는 비결이 아닙니다. 외치는 고함소리는 크고 불끈 쥔 주먹으로 무언가 뒤집어 엎을 것 같은 기세가 보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육체로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정말 능력을 받기를 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전히 주시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뱀에게 물려서 퉁퉁 부어오는 도저히 살아날 가능성이 없고 죽음이 눈 앞에 다가올 이 절망의 지경에 치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밖에는 그 하나님의 약속 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바라보았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신령한 능력을 공급받으면서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십자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입니다.
마지막 한가지 성경이 또한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이 있는데 그것은 온전한 믿음과 함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참 마음으로” 이것은 진실한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인격과 삶 전체를 움직이는 사령탑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원수들에게 점령되면 우리의 의식과 우리의 생각, 우리의 인격, 우리의 모든 생각은 원수를 기쁘게 하는 삶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 대한 사랑을 지배하면 우리는 생각으로 세상을 좇았고, 의식 속에서 세상의 것들로 가득채우고, 삶의 목표자체가 세상을 위한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이 끊임 없이 우리에게 “지킬만한 그 무엇보다도 마음을 지키라” 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참 마음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참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희랍어로 “알리데이아” 진리의 마음, 그 참된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참된 진리의 마음입니다. 그 진리의 마음이란 것은 어떤 마음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사실을 깊이 깨닫고 양심으로 우리의 악을 깨달아서 정결케 되었을 때, 그때 하나님이 제일 먼저 청소하시는 부분이 우리의 마음부터 피를 바르시는 것입니다.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탁 경험하고 나면 순간적으로 우리의 눈이 밝아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졌던 것과는 그 밝아졌다고 하는 사실은 그것은 밝아진 것이 아니라 보지 말아야할 것들을 볼 수 있는 밝아진 것이니까 그것은 어두워졌다는 이야기하고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우리의 눈이 맑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이 무엇인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것밖에 없구나 그러면서 미친 듯이 인생을 살았는데 어느 한 순간 주님의 피로 우리의 마음에 눈을 깨끗이 닦고 나니까 그것이 정말 허무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가 하는 것들을 깨닫는 것입니다.
왜 여태껏 우리의 인생을 거짓된 마음으로 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참 마음으로 보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아주 선명하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고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아주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삶의 목표가.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도 인생관이 변화되지 않는 것은 오직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주님을 제대로 못 만나 아직 눈에 비늘이 안 벗어졌기 때문에 세상 밖에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한때는 벗어졌는데 마음을 세상 것들과 더러운 것들에게 빼앗겨서 이미 그 마음의 눈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결국 그 참 마음은 주님의 피로 씻은 진실된 마음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특별히 친밀하게 느낄 수 있는 어떤 불가항력적인 은사 같은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대게 어떻게 합니까? 뭐를 싸들고 와서 ‘나를 위해서 기도해달라. 내가 이것을 해야 되는지 저것을 해야 되는지 한번 응답을 받아달라.’ 늘 우리들이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죽 못났으면 다른 사람이 기도해줘야지 겨우 확인을 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도 자기는 또 확신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큰 능력보다도 사모해야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마음이 진실한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엄청나게 여러번 반복해서 강조를 합니다. 중심에 통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유는 그 통회의 눈물을 통해서 마음에 진실을 회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모르게 신앙생활 하면서 달라붙어 있는 거짓, 허위, 위선, 잘난체 하는 것, 뽐내는 것 이런 것들을 모두 십자가에 못 박아야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거들먹 거리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모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불쌍한 인간으로 취급을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주님을 모르고 지옥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는 그 인간들 보다도 훨씬 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거짓과 위선, 거품, 거들먹 거리는 것, 남한테 인정받기 좋아하면서 뭔가 자신이 영적으로 위에 있는 것처럼 과시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전부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현재적인 감격 속에서 살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하는, 영성을 흐리게 만드는 더러운 오물들입니다. 거짓을 미워하지 않고는 결코 십자가의 감격 속에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가식이 없는 하나님의 진실한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읽고 거기에 감동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신앙생활에 70퍼센트는 아마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 영향을 받겠지만 30퍼센트는 함께 신앙생활 하고 있는 동료들을 통해서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그때 누구와 함께 신앙생활 하느냐 하는 것이, 누구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은 그 다음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처음 한 사람들은 이제 그런 위선이나 허위, 가식, 뻥튀기는 것 그런 것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구한테 배우는가 하면 먼저 믿은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막 폼잡는 것, 그리고 막 뭔가 말할 때 아주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자기를 과시하는 것, 그리고 사람들을 일단 한번 한풀 꺽으면서 자기가 신앙적으로나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그런 분위기 그런 것들 말입니다. 이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조국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거들먹 거리는 진실함을 잃어버린 사람들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런 것이 어떻게 무너집니까?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렇게 거들먹 거리던 인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핵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능력을 경험하고 그 앞에 모두 뭉개져버려서 그리스도의 그 보혈에 피 외에 자기가 보이지 않는 복음에 대한 경험을 하면 그 오만들이 모두 무너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십자가 외에는 내게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예전에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모두 거짓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정말 진실해져야 합니다. 허위와 위선, 거짓, 가식 그런 것들을 버려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채 정직하게 서는 것이 화려한 왕의 의관을 걸치고 수많은 죄인들에게 박수 갈채를 받는 것보다 더 좋아해야지만 그 사람의 영혼이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실한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과시하고 위선의 탈을 쓰고 자기를 부풀리는 그런 거짓된 모습들이 얼마나 역겨운지 아십니까? 죄가 많은 인간도 조금 진실해지면 그런 것들에 대한 아주 역한 감정을 갖는데 하물며 온전히 진실하신 하나님의 면전에서는 어떻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왜 음식 같은 것을 맛있게 막 먹다가 어느 순간에 냄새가 역한 냄새가 음식에서 확 올라오면 숟가락을 놓게 됩니다. 그런 것입니다.
(예화) 점심 식사를 하시기 위해 돈까스를 드시는데 역한 돼지고기 냄새가 나서 드시지 못하셨다는 이야기.
하나님이 우리를 불쾌하게 여기실 때 그런 감정일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마음으로 우리들이 하나님을 뵈올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는데도 그런 하나님의 진실된 성품을 경험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참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정직함이 없는 사람들이 복음의 감격을 경험하며 그 능력 안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물론 우리는 기도하다가 손을 높이 들때도 있고 간절히 피를 토하듯이 부르짓어야 될 내면에 욕구를 느끼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위대한 힘은 하나님 앞에 진실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죄와 떨어져서 살 수 없는 우리 같이 연약한 인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를 정결케 해주시는 하나님의 사유하시는 은혜 없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지속해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사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누구에게 깃듭니까?
여러분,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은총이 있다” “주의 노여움은 잠깐이오 그리고 주의 은총은 영원하도다” 이런 고백을 다윗이 한 것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그는 범죄했지만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진실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국 터득했고 정직하고 진실한 자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의 은혜에 빛 아래서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엄청 실망하게 됩니다. 어느 때는 우리와 같은 인간을 통해서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향해 뜨거운 사랑에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가던 사람들도 정말 온전히 그 한 분만을 위해서 살지는 못하는구나 하는 사실을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볼 때 그와 우리 같이 부족한 인간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은 깊은 자극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살다가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 가는구나. 끊임없는 용서와 힘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주님의 은총과 주님의 사랑을 덧입어서 수많은 약점과 결점들을 이기면서 살아야 할 주의 은혜가 필요한 인간들, 그 인간들이 불의하고 죄 가운데서 떠나지 못하는 그 불쌍한 인간들이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끊임 없이 대면하게 만드는 가장 큰 무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권능이 아니라 정직입니다. 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깨트려질 때에 가장 진실한 마음이 되는데 우리의 마음이 깨트려질 때에 사실은 제일 먼저 깨트려지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교만한 마음이고 그 다음에 깨트려지는 것은 하나님 이외에 것들을 사랑하는 그 마음에 깨어짐입니다. 우리 속에 얼마나 많은 교만들이 있습니까? 오늘도 여러분 여기에 참석해서 모범답안 만들어지고 와서 저 설교자의 말을 들으면서 한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맞나. 한번 공표하고 가위표 해보는 분은 여기에 없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 받는 대신 감상하고 비교하기 위해서 나온 사람은 없습니까? 주님의 말씀의 은혜 앞에 엎드려져 주의 거룩한 임재 속으로 들어가기를 열망하는 마음 대신 맛을 한번 보기 위해서 온 사람들은 없습니까? 그것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끊임 없이 십자가 주위를 맴돌기만 하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십자가 아래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교만의 마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더더욱 가로막고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 속에서 살지 못하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이야기할 때에 가장 꼴불견 중에 하나는 말할 때마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아침에 주님이 그러시는데” 물론 우리는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다가 그 말씀을 통해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인격이 워낙 분명하기 때문에 감히 내가 설교를 듣고 생각이 났는데, 성경을 읽다가 내가 잠잠히 생각을 해보니까 이런 말로 표현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이 그런 진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다 라는 하나님의 현존을 아주 심각하게 지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매일 그렇습니까? 매일 그러는 사람이 왜 그렇게 사는 게 그 정도 밖에 안됩니까? 그런 허세를 좀 버리십시오. 그것은 바리새인 적인 허세가 아닙니까? 저 사람은 내가 성경을 읽다가 깨달았는데 설교를 듣다가 마음에 깊이 감동을 받았는데 이렇게 말하는데 한 사람은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이야기는 끝난 것입니다. 어떻게 둘이 마주앉아서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한 사람은 사람의 말을 하고 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데.
우리들이 잊지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자주 하다가 보면 우리가 예수님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우리들이 이것이 죄고 이것이 잘못된 것을 계속 말하다 보면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새파란 칼날만 남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고도의 위선입니다. 자기 기만이고 거짓입니다. 교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찾으실까요? 정말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한결 같이 곧은 의로운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진실해지기를 사모해야합니다.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탐하지 말고 허세와 위선을 배우려하지 말고 정직한 마음, 진실한 마음 하나님의 말씀의 칼로 난도질 당하고 진리의 밝은 빛이 나를 홀딱 벗겨서 발가벗겨 세운다고 할지라도 재왕의 의관을 쓰고 수많은 거짓된 인간들에게 박수 갈채를 받는 것보다는 훨씬 희망이 있다 라는 생각을 가져야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옳지않다 하시면 그 말이 맞습니다 라고 인정하는 것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옳지 라고 동의를 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 우리의 신앙생활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예증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위선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 피묻은 십자가를 통해 자기의 사랑을 과장하셨습니까? 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도 우리를 위해 뭔가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음이고 그 십자가를 흥건히 적신 붉은 피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피절인 진심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께서 지고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셨고 오늘도 하나님은 의로운 자 하나도 없는 이 세상에서 죄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을 불러 당신의 자녀로 구속하시고자 찾고 계십니다. 찾으신 자들을 또한 부르셔서 의롭게 하시고, 의롭다 한 자들을 또한 거룩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한 자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셔서 아무 공로 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보배 피를 힘입어 주님의 은혜의 나라로 옮기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진실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교회 속에서 돈 많은 사람들이 지체들의 부러움을 사거나 많이 배운 사람들이 부러움을 사거나 큰 직분 맡은 사람들이 부러움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이 정직한 신앙을 가진 사람, 그리고 주님 앞에 진실하게 살아가는 마음과 삶에 작용이 인격 속에 깊이 배어서 끊임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 수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주의 거룩한 임재 앞에서 사는 진실한 성도들이 모든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고 선망에 대상이 되는 그런 공동체가 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아닐까요?
여러분, 얼마나 많은 위선과 거짓과 허위, 잘난체하고 뻐기는 우리들의 교만한 옛 자아가 십자가를 통해서 비오듯이 쏟아지는 하나님의 보혈의 은혜와 능력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지 아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큰 능력이 없고 어떤 사람들처럼 아침마다 밤마다 십자가의 사랑에 펑펑 울 수 있는 풍부한 신령한 정서 없어도 하나님은 진실한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참 마음을 가진 사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으니 내가 어찌하면 그리스도 예수에 십자가에 죽으신 그 고난이 헛되지 않도록 참된 신자가 될까? 고민하는 사람들, 그래서 자신에 마음에 악함을 깨닫고 주의 성품에 빛을 자기에 죄악된 영혼에 비쳐 참 마음 갖게 해주시도록 구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향해 부어주실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지금도 예비하고 그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4. 자기의 몸을 축사하신 그리스도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고전11:23-24)
오늘 성경은 성찬에 유례를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을 위하여 떡을 떼어 축사하시고 이것이 내 몸이니” 하고 나눠주신 것과 다시 잔을 가지고 사례하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니 곧 언약의 피니라 이 일을 행해서 나를 기념하라” 하셨기 때문에 성만찬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지를 못하는 사람들은 성만찬에 참여해도 아무 유익을 받을 수 없고 또 참여시켜서도 안됩니다.
카톨릭에서는 성찬에 아무런 의미를 몰라도 거기에 참석하면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들의 영혼 속에 주입된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그런 진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여러분들 가운데는 아무런 감화도 받지를 못하는 성찬에 참여함으로서 심령이 변화되고 믿음이 생기게 된 그런 신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바로 이런 진리를 증거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풍부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감격을 누리고 살 때 성찬도 우리에게 역사하는 바가 크다는 말씀입니다.
역사적으로 성찬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견해로 나뉘었습니다. 즉 성찬은 곧 성찬에 사용되는 떡과 그 포도주에 대해서 곧 카톨릭에서는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제가 떡을 들고 축사하고 그리고 잔을 들어서 축복하는 그 순간에 그 떡은 눈에 보이는 것은 떡이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의 살이고 그리스도의 피가 되어서 우리에게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니 이것은 나의 피니” 라고 직설법으로 말씀하셨다고 할지라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예수님께서 떡을 들고 축복하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니” 하셨을 때에 그것이 예수님의 피묻은 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목말라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물 한잔을 건네면서 “이것은 너를 위해 주는 생명이니” 라고 할 때 진짜 이 속에 생명이 담겨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는 이치입니다. 그것을 소위 화채설이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그런 미신적인 이야기들을 믿지 않습니다. 카톨릭에서도 역사적인 문헌을 보면 12세기에 ‘파스카시얼스라디베르터스’ 라고 하는 사람이 나오기 전까지는 이 화채설을 믿은 흔적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에 사용되는 떡이나 포도주 그 자체에 어떤 신비적인 성질이 축사하기 전이나 후나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견해는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단지 기념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혁가들 가운데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무엇인가 이 성찬 예식을 통해서 감화를 받으면 그것은 하나의 기념하는 그 일을 통해서 정신적으로 감동을 받는 것이지 그 이상의 무엇이 아니다 라는 단순한 견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견해는 성찬을 할 때 이것이 비록 그리스도의 살이고 피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눈에 보이는 떡과 포도주 그 안에 그것과 함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있다는 어떻게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고 모호한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생각할 때 성찬에 관해 가장 성경에 근접한 견해는 이 성찬이 비록 그리스도 예수의 살이나 그리스도 예수의 물리적인 피는 아니지만 떡은 떡이고 그리고 포도주는 포도주지만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이 늘 먹고 마시는 포도주나 떡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우리에게 교훈하시고 싶어했고 그것은 하나의 그 자체가 복음 진리였기 때문에 이 성찬 예식을 행하는 것을 통해서 그 안에 강한 복음 진리의 요소가 있고 그 진리위에 성령이 임재하심으로서 우리들은 비록 떡은 떡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지만 그것을 먹고 마시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믿음이 강화되고 우리들이 다시 한번 주님을 위해서 열렬한 헌신을 맹세할 수 있게 되고 복음의 도리를 깊이 실제로 경험하게 되는 기회가 된다 라고 하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마지막 견해를 믿고 있습니다. 떡은 떡일 뿐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포도주를 마시고 떡을 먹을 때에 경험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이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면 우리의 영혼 속에 우리가 충분히 지각할 수 있도록 놀랍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떡을 들어서 제자들에게 이것은 내 몸이니 라고 말씀하시면서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신 그 날은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이였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바로 요일로 치면 목요일 밤이었고 그리고 성만찬은 목요일 밤 해가 지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유월절 잔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하필이면 이 만찬을 베푸시면서 성만찬 예식을 제정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믿기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3년 동안 공적인 생애를 사셨다고 믿는데 학자들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두 번 내지 세 번에 유월절을 지나셨을텐데 그 전에는 이런 예식을 정하지 않으시고 마지막 제자들과 함께 나누는 마지막 유월절, 그리고 마지막 만찬에서 잡히시기 직전에 바로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식으로 성만찬 제도를 세워놓으셨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들은 두 가지로 답할 수가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때가 아니라 잡히시기 직전에 이 일을 행하신 것은 제자들의 신앙을 강화하시기 위함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잠시후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두 도망간 가운데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끌려가시고 그리고 심문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렇게 흩어진 제자들 가운데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살아계신 예수님을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만찬을 통해서 복음에 가장 중요한 비밀을 그들에게 가르치고 싶어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 예수는 죽음을 통해서 너희를 떠나도 그러나 사실은 내가 떠난 것이 아니라 너희와 함께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와 나는 생명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 눈에 육신으로 보이건 보이지 않던지 그것과는 상관 없이 너희는 나를 떠나서 살 수 없고 나는 너희를 떠나지 않으리라 하는 주님이 제자들과 신비하게 하나가 되는 복음 교리를 그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직전에 이 일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복음 교리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사실에 직면하게 하심으로 예수님이 떠나셔도 제자들은 온 몸으로 예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느끼고 경험하며 믿으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님께서 하필 잡히시던 날 밤에 이 일을 행하신 것은 유월절과 관계가 있습니다. 유월절은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에 마지막 10번째 재앙은 모든 처음 난 것들이 죽는 재앙이 일어날 때에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가르쳐주시지 않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서 사는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죽음을 보지 않도록 미리 가르쳐주셨습니다.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설주에 바르고 문지방에는 왜 안 발랐을까요? 문지방에서 잡았으니까 그 피가 문지방에 범벅이 됐고 그것을 다시 인방과 설주에 바르고 그리고 쓴 나물을 먹고 무교병을 먹고 이러면서 양을 잡았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온 애굽 땅에 처음 난 것들을 칠 때에 그 문지방에 피 바른 그것을 보고 그곳에 있는 초태생들을 죽이지 않고 넘어가신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보면 놀라운 구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 때에 죽음을 보이심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안이 죽음을 보지 않는 것이 원래 그런 권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이 대신 죽고 그 피를 바르면서 그들을 특별히 구해내시려고 그들을 보호하셨다는 구원 사상을 그들에게 남겨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유월절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인류를 위해서 못 박혀죽으심으로 그 피를 인류역사에 문지방과 그리고 인방과 설주에 자기의 피를 바르고 그리고 그를 믿는 자들의 마음에 그 피를 바르셔서 구원하실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 우리들이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되는데 누구도 이 유월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는 것을 원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선 대제사장들과 그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잡아 죽일 궁리를 하였지만 유월절에는 이 일을 하지말자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그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는 인파의 환영이 너무나 열렬했기 때문에 만약에 저렇게 인기가 높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이 교묘한 방법으로 생명을 빼앗으면 저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자신들을 처단할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유월절에는 예수님을 죽이지말자 그랬습니다.
누가 유월절에 예수님이 죽기를 원했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이 유월절에 죽기를 원했습니까? 가롯 유다는 예수님이 죽기를 원했다기보다는 돈을 벌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죽든지 가롯 유다에게 있어서는 날짜나 절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에 관한 정보를 넘겨주면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그 일을 하게 만들었으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가롯 유다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어떠했습니까? 당신이 메시아라는 의식이 있으셨기 때문에 분명히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죽고자 하시는 소원이 있었고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억지로 한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처음 주님 앞에 드리던 간절한 기도는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자기에게서 지나가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역사적인 필연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미 유월절 의식을 만들기 훨씬 전부터 그 예식과 여러 가지 율법 의식들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위해서 죽으실 것이라고 하는 분명한 예고를 역사적인 사건이나 선지자들의 선명한 선포를 통해서 남겨놓으셨는데 그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가장 호소력이 강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어린 양이 자신들을 대신해서 죽어 자신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죽음에 징벌이 유월절 넘어가게끔 만든 그 유월절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메시아가 다시 오셔서 자신들을 이렇게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아주 강한 실연식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멀리 350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약속, 더 멀리는 우리의 처음 조상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에 즉시 우리에게 뭔가 구원에 여명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원 복음의 약속을 따라서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아무렇게나 살고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아주 정교하게 자기의 역사를 움직여 가고 계셨고 때가 차매 그리스도 예수께서 어김없이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볼 적마다 우리는 죄인들을 향해서도 약속에 신실하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리스도 예수를 필요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구원 얻을 것을 기대하지도 않던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때가 차매 이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게 하심으로 유월절이 바라보던 인류의 구원을 궁극적으로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십자가를 보면서 실제로 우리들이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커다란 위로와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사악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에 세들어 살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줄 모르는 무지 몽매한 인간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셔서 구원을 이루셨던 것 처럼 또한 구원받은 우리들도 또한 그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언제나 신실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번도 우리를 죄가운데서 구원하여 자기의 아들 어린 양의 피로 우리를 속량하신 것을 후회하시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잡히시던 날 밤에 성만찬을 제정하시고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떡을 가지고 축사하셨습니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찢으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바 나의 몸이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떡”이라고 되어있지만 희랍어 성경에는 “알토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빵”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떡이라고 번역을 하건 빵이라고 번역을 하건 간에 우리의 가슴에는 예수님께서 그때 행하시던 그 광경을 생생하게는 전해주지는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떡이든지 빵이든지 간에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떡 없이는 못산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빵 없는 나라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빵을 아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안 먹고 살아도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있어 알토스 라고 하는 빵은 물론 여기에서는 무교병이었습니다만 그 빵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주식이었습니다. 반찬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반찬은 바뀔 수 있어도 주식이 되는 이 빵은 언제나 이것이 없으면 식사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작품들을 번역할 때에, 소위 이야기하는 문화적인 맥락을 고려한 등가번역을 한다면 이것은 “떡”이라고 번역을 하면 안 되고 “밥”이라고 번역을 해야지만 등가번역이 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빵이 한 덩어리로 되어 있지만 우리는 밥은 그릇에다가 먹습니다. 이것을 만약에 우리들이 생생하게 그려본다면 예수님께서 밥을 들고 그리고 숟가락으로 떠서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바 나의 몸이라” 밥을 떠서 축사하시면서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바 나의 몸이니” 그렇게 말씀하셔야지 우리에게는 아주 현실적으로 어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은 식생활이 굉장히 서구화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부터도 밥을 안 먹고도 하루 정도는 지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것을 먹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한번 과거로 돌아가보십시다. 우리들이 된장 찌개에 김치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었던 때, 그래서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저도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밖에 나가서 부득히 외식을 해서 양식을 대접받을 기회가 있으면 집에 와서 꼭 된장에 비벼서 몇 숟가락을 먹어야지만 잠이 왔습니다. 양식이 적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개운한 느낌을 안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식집에 가서 스테이크 같은 것을 시키면 항상 김치가 있냐고 물어보고 그랬습니다. 지금도 어른들은 식생활에 대한 굉장한 경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차려놓아도 “그까짓껏 먹어서 되나 그래도 밥을 먹어야지” 그렇게 많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 분들이 이 설교를 들으면 훨씬 가슴에 와닿습니다. 주식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떡을 드시고 그것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한바 나의 몸이니”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우리로 말하자면 밥 없이 우리가 살 수 없는 것 처럼 그리스도 없이 우리가 살 수 없다는 것은 아주 생생한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당시 그 유월절 만찬에 참여하던 이 제자들에게는 더 생생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구약적인 배경이 무엇입니까?
만나 사건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신기한 방법으로 양식을 조달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서리가 내린 것처럼 하얗게, 그 새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 친 그 가장 자리에 하얗게 내렸습니다. 가서 그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깟씨 같기도 하고, 씨 같기도 하고 우리는 보지를 않았으니까 생생하게 알 수가 없지만 그리고 꿀 섞은 과자 같은 맛이 난다고 그랬으니까. 그것을 정성껏 잘 찧어서 그래서 그것을 반죽을 해서 그래서 떡을 구워먹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광야생활 내내 주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도 역시 곡식을 가지고 그렇게 찧어서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서 그것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서 먹은 그것이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알토스, 히브리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레헴”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먹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떡을 가지고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의 마음에는 아주 생생하고 풍부한 그림으로 와닿았던 것입니다. 결론은 무엇인가 하면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이 하늘로부터 내리는 만나없이 살 수 없었던 것처럼, 그 만나로 만든 알토스 없이 살 수 없었던 것처럼, 또 지금도 너희들이 그 가루로 빗어서 만든 이 빵 없이 너희들이 도저히 살 수 없는 것처럼 내가 너희에 주식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고 했는데 요한복음 1장은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육신이 되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가르키신 것이니까 구약에 그 말씀이 여기에서 정확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시간이 짧아서 뒤에는 오늘 다루지 못하겠습니다만, 뒤에 나온 포도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포도주 없어도 얼마든지 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포도주를 먹을 일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포도주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포도주라고 번역을 하면 우리들의 마음에 다가오지를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당시에는 물이 귀하고 또 땅을 파도 대부분의 샘이 쓴 물을 내어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잘못 먹으면 풍토병이 걸려서 다리가 퉁퉁 부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포도주는 등가번역을 하면 물이라고 번역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바 곧 물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데 있어서 절대로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 주식을 생명을 위해서 꼭 필요한 아주 본질적인 것, 그 밥과 그 물을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 두 가지만 있으면 우리는 안 죽고 삽니다. 밥하고 물만 있으면. 반찬이 맛이 없어서 죽었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요. 그 뒷부분은 못합니다. 그 앞에 부분을 보겠습니다.
그래서 그 빵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축사하셨을 때 제자들의 마음에는 주식을 가지고 축사하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라” 그러신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에게는 굉장히 커다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요한복음 6장에서 벳세다 광야에서 일어난 그것을 말씀하시면서도 또 말씀하셨고 예수님께서 여러 번 자신이 생명의 떡으로 이 세상에 온 것, 그것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것을 그렇게 주의 깊게 깊이 깨닫고 가슴에 두었을 리가 없으니까 더더욱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제 눈길을 끄는 것은 축사하셨다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구를 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똑같은 일을 어디에서 하셨는가 하면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벳세다 광야에서 당신의 말씀을 듣다가 지친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놓고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떡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서 수많은 군중을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나 남게 끔 그렇게 역사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손에 들고 계신 이 떡이 자기의 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것을 축사하시는데 그것이 말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어떻게 우리의 음식이 될 수가 있습니까?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큰 덩어리로 구운 히브리 사람들이 “샬롬”이라고 부르는 큰 빵을 예수님께서 손수 찢으시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니” 하며 제자들에게 먹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에 바로 그 떡을 놓고 축사하셨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육체를 음식처럼 생각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어떻게 이 세상에 빵이나 밥, 떡과 같이 음식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는 것은 식탁을 앞에 놓고 식물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몸을 들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축사하셨으니 이것은 마치 제사장이 제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행하셨을 것입니다. 손으로 떡을 드시고 그것을 찢으실 때에 제자들은 그저 먹기에 좋으라고 찢으시는 것 처럼만 생각했을 것이고 그 행동에 담긴 어떤 깊은 의미들이 가슴에 다가왔을 리가 없습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행하시는 그 일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이 알았더라면 아마 펑펑 울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행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 행동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의미를 거의 알지를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이 떡이 내 몸이라” 말씀하시는 것도 그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셨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드시고 “이것이 내 몸이라” 말씀하셨을 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아셨을 것이고 그 떡을 찢으시면서 “내 일을 위하여 주는 바 나의 몸이라” 말씀하실 때 이미 몇 시간 앞으로 다가온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실 십자가에 고난에 대한 생생한 경험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영혼 속에 아로새겨졌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기의 몸을 음식인 것처럼 축사하시고 그리고 “이것이 내 일을 위하는바 나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우리들은 그리스도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밥없이 우리들이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처럼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결단코 그 밥과 결별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사는 날 동안 그리스도를 떠나서 살 수 없다는 평범한 복음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더욱이 이 점에 있어서 우리의 옛 조상들은 조상들이 흔히 사용하던 용어와 말투들은 아주 더 생생한 기억을 우리에게 증가시킵니다. 옛날에 어른들이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흔히 밥술을 놓았다” 그랬습니다. 다시 말하면 늘 밥을 먹다가 이제 더 이상 밥을 차려가도 먹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죽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죽음이 찾아와서 생명을 걷어가기전 까지는 우리가 밥을 떠나서 살 수 없었던 것 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생명이 있는날 동안에는 그들이 이 빵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을 먹고 자라왔고 그리고 마지막에 그것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전쟁을 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에 ‘떡’ 이라는 말과 ‘전쟁’ 이라는 말이 한 어근입니다. 떡은 ‘레헴’이고 전쟁은 ‘밀하마’입니다.
그 사람들의 생각에는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떡을 얻기 위한 인간에 처절한 생존투쟁이라고 본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떡집’ 이라는 뜻입니다. 이미 지명자체가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태어날 것을 지명자체가 섭리 속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필이면 그 가난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몰랐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예식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아셨고 그리고 당신이 바로 인류를 위해 우리를 위한 양식이 되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떡을 높이 들어 축사하시면서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주는바 나의 몸이라” 말씀하셨을 때, 그것을 밥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것을 빵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보여준 메시지는 아주 선명합니다. (?) 고난을 당하여 죽어도 너희들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아도 너희들은 나 없이 살 수 없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혼이 왜 핍절합니까? 보혈의 샘에서 우리의 죄를 씻고 휘장을 지나서 담대히 아버지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특권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곤고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영혼의 양식으로 삼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의 마음과 삶 속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어도 여러분들의 영혼은 핍절하고 굶주린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떼어서 축사하시고 찢어나눠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너희를 위하는바 나의 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단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우리의 죄를 위해 피 흘리고 우리의 죄 값을 치루고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단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짊어지고 죽으시는 것만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죽으시고는 다시 사셔서 우리 안에 계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오늘 점심에, 오늘 저녁에 여러분들은 식사를 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드신 식사가 여러분, 어디에 있습니까? 어제 여러분들이 드셨던 맛있는 식탁이 이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제자들이 오늘 예수님이 찢어주시는 이 떡과 포도주를 먹은 후에 떡과 포도주는 어디로 갈까요? 이 떡과 포도주에 대부분은 이제 예수님의 손에 있을 때는 자기의 몸과는 다른 것인데 그것이 들어와서 입으로 들어가고 소화가 되어서 그 다음에 흡수가 된 후에는 이제 그들의 몸에서 예수님이 주신 그 떡과 포도주를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의 혈관 속에 우리의 살 속 깊이깊이 존재하고 우리를 통해서 당신이 살고 싶으셨던 삶을 이어가게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적인 연합이고 신비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이 참 의미하는 이 말씀을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내가 네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 예수에 그 생명적인 연합의 교리와 연관지어서 여러분들이 이해해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만찬에 의미는 보다 더 큰 감격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허기짐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날이 세상은 거칠어가고 있고 이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인하다 못해 하나님을 대적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자신의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일을 중계처럼 신앙처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육신의 쾌락과 육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마치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힘이 된 것처럼 성경의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고 욕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선구자처럼 취급을 받고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보십시오. 사람들이 모든 굴레를 벗어 버리고 모두 자기의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이 때에 사람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구속을 느끼고 있고 자유를 느끼면 느낄수록 그들은 정말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대로 살면 살수록 그들은 더없는 허무감에 노예가 되고 있고 더없는 굶주림에 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인들의 삶을 보면 무엇이든지 자기 원하는대로 모두 하면서 그러면서 또한 정체도 알 수 없는 무엇인가에 포로가 되어서 살아가는 그런 비참한 모습들과 허기진 모습들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인간 속에 있는 궁극적인 갈망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고통하는 이 세상에 대한 유일한 답이 무엇입니까? 정말 복지 국가가 되는 것이 고통하는 이 세상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일까요? 우리 서로 어울려서 서로서로 양보하고 살아가는 공존공생의 사회가 정말 고통하는 이 세상에 대한 최종적인 대안이 될 수 있습니까? 정말 무기를 모두 버리고 전쟁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만 하면 정말 이 땅은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서 인류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고통하는 이 세상에 대한 유일한 답은 하나님의 생명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버리고 범죄한 죄인된 이 인간들이 그 생명의 샘에 접근하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후에 그들이 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되었고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두루 도는 화염 검을 두셔서 누구도 접근할 수 없도록 그 나무를 차단하신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계속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샘에서 잇대어 물을 먹고살지 않으면 그 하나님의 생명을 부여받으면서 살지 않고는 인간은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인간의 타락 이후로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는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깨트리심으로 그 두루 도는 화염 검을 치우시고 이제는 생명나무에 접근하고 영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을 해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떡을 찢으신 것은 바로 그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부여하시기 위해서 잠시후 십자가에서 못 박히셔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이 세상에 고통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주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착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생명되신 하나님과 연합 되게끔 만들어 주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참된 사명에 대해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미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찢으신 이 고난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생명의 원천이 됩니다. 핍절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았는데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먹고 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적인 연합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살았으나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인간처럼 움직이고는 있으나 적극적으로 일할 수 없는 기아선상에 죽어가고 있는 난민들처럼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유도 결국은 우리의 주식이 되신 그리스도를 먹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몸을 마치 무슨 음식이나 되는 것처럼 축사하시고 그것을 찢으시는 광경을 보면서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생각이 파고 들어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손에 드셨던 그 한 덩어리의 떡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몸이었습니다. 33년을 이 세상에 오셔서 사셨고 제자들을 만나고 제자들을 부르셔서 섬기며 사신 3년에 생애는 제자들이 손바닥과 같이 알고 있는 생애였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을 사시면서 자신의 시간도 모두 제자들을 위해 주셨고 그리고 자기의 모든 육체의 힘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도 다 제자들을 위해서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제는 자기의 육신 하나 남아있는데 이제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찢어서 자기의 몸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떼어 주심으로 자기는 죽고 그것을 받는 모든 사람들은 살게 하시려고 이 예식을 예수님께서 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로 그런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찢어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나누어주신 것은 이제 우리가 충분히 그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식 삼아서 그래서 그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살아가게 하시고 또 그리스도 없이 살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를 소유하는 삶을 살도록 주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성취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로든지 우리들이 생명이 없는 다 죽은 파리한 영혼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로 주신 아버지의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를 힘입어서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 안에 충분히 계십니까? 여러분, 한 끼니도 굶지 못하고 매번 허기질 때마다 식사를 찾듯이 여러분들은 그렇게 여러분 자신에 영혼에 허기짐과 목마름에 예민한 사람들이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어쩌다 한번이 아니라 아침마다 저녁마다 이런 고백이 있습니까?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그 귀한 보배 피로 날 구속하시니
내 주는 나의 생명 또 나의 힘이라 주님을 의지하여 새 힘을 얻으리
하도 많이 간증을 해서 이제는 다 닿고 닿은 수십년 전에 예수님 만난 그 간증 먹고 지금도 살아갑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과거에 주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소유했던 추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지금 여기에 이 삶의 자리에,
주 내 마음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부요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거나 주님의 말씀을 깊이 청취하면서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그 복음의 빛 아래서 정직하게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순간에는 주님이 충만히 내 안에 살아계시지 않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가책을 받고 그리고 정말 ‘주께 더 가까이 가기 원합니다’ 라는 고백을 아픔과 슬픔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하는데 그런데 왜 우리의 그 주님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살아계셔야 한다’ 라고 하는 이 소원이 그렇게 아침 안개와 같이 잠깐 있다가 또 싫어지면 금방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존재를 향해서 이따금 감상을 갖는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마치 구약시대에 들릴라를 인해서 범죄에 빠졌던 삼손과 같이 하나님 앞에 수시로 불순종 하면서 영적인 사람이었으니까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괴로워 하다가는 다시 들릴라를 찾아가고 괴로워 하다가는 다시 그에게 입을 열고 뭔가 하나님과에 관계에 예수님이 충만한 생명으로 내 안에 계시기를 원하는 그런 소원이 언뜻언뜻 우리의 마음 속에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정말 충만하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것이 이따금 일어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민하면서도 수시로 들리라에 무릎을 베고 드러눕는 삼손의 처지와 같은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하루에 몇번씩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생각을 전혀 안 한다면 그 사람은 확신하건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수시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생각으로 그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자기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다”고 말하지 얼핏얼핏 주님이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그런 충만한 생명을 부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일이 바쁘거나 그래도 밥먹는 것도 잊어버렸다고 그러는데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래봐야 한 끼니입니다. “세상에 밥먹는 것을 일 주일 동안 잊어버렸는데...” 그렇지는 않는 것입니다. 뭐에 미쳐서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밥먹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하는 사람은 정말 못봤습니다. 무엇을 말씀드리고 싶어하는지 이해하시겠지요? 주님이 오늘 그들의 주식인 빵을 들고 그들에게 축사하시고 떼어주시면서 “너희를 위하는바 나의 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의 주식인 밥먹는 것은 거의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예수님이 우리 속에 충만한 생명으로 계셔야지만 우리는 살 수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잊어버립니까?
보십시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자기의 몸을 떼어서 축사하실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이제는 제자들이 당신을 버리고 가던 우리들이 또한 예수님의 생명을 누리고 살던 안 누리고 살던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축사하시고 죽으셔서 자기의 몸을 산산히 찢어 우리 인간들에게 나누어주셔야 했습니다. 당신의 고난이 깊이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이 고난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기를 먹고 그리고 당신을 그들 안에 살아있게 하기를 간절히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너무나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 고난의 십자가를 보면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선명하게 묻고 있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의 마음에 지금 충만하게 살아계시다. 너희가 오늘도 끼니를 거르지 않고 밥을 먹어 건강하고 힘이 있는 육체를 유지하고 있듯이 너희의 영혼도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셔서 충만한 영적인 삶을 생명력있게 살아가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단지 1년에 한번씩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추모제가 아닙니다. 추도 기념일이 아닙니다. 추도 예배를 드리려고 모인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향해서 눈물을 흘리는 깊은 슬픔과 아픔은 그가 그 십자가를 힘입어 충만하고 능력있는 삶을 살 때, 그 슬픔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슬픔은 한낮 종교적인 감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 승전할 때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 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그래서 이 십자가를 보면서 아무 쓸모 없는 죄인을 위해서 자기의 고결한 몸이 무슨 빵 한 덩어리 되는 것처럼 그렇게 하잘 것 없이 축사하시고 먹어도 죄나 짓고 사는 인간들을 그 핍절한 영혼들을 살리려고 그것을 찢어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아름다우신 기도하시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그 십자가에서 단지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통해서 내 안에 계시니 이제는 내가 모든 불결과 악을 버리고 내 안에 나는 죽고 그분은 살아 그분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주님의 십자가에 고난 앞에 슬퍼하며 흘리는 눈물을 훔치고 이제는 내가 생명이 있는날 동안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자기를 온전히 버리셨던 것처럼 내가 그분을 위해서 살리라 하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그분이 자기를 버려서 우리의 양식을 삼으시기 위해서 축사하셨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일하고 그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이 삶이 우리의 양식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차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으니 이것은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할 시간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몸을 축사하신 이 고난의 광경을 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할 차례입니까? 한번 우리의 일생 동안에 주님께 빚지면서 일생을 살아왔지 않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기도 제목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 제목을 넘어설 수 있을만큼 그렇게 많은 기도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기도의 제목들은 더 많이 늘어나고 기도하고 난 다음에는 기도 제목의 심각성에 비해서는 기도가 그렇게 깊지 않았다 라고 하는 후회와 반성들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기도의 제목들은 이루어져도 되고 이루어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주님이 꼭 이루어주셔야 하는 기도의 제목들이 우리의 마음 속에 알알히 탄원에 구슬이 되어있습니다. 그것도 결국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의 개인적으로도 생애에 있어서도 가장 기뻤던 기도의 순간은 제가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고 그리고 오래동안 불순종 하면서 목사가 되지 않겠다고 하다가 결국은 어느 한순간에 일주일동안 금식하고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항복하고 ‘내 인생을 이제 주님께 다 드립니다. 일평생 주님께 받기만 하고 살았는데 내가 주님께 나를 드릴 수 있어서 참 기쁩니다. 하나님, 내가 내 인생에 주도권을 포기하고 주님 마음대로 사용하시옵소서.’ 그 기도가 제일 기뻤습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교회를 옮기면서 목사님하고 면담을 했습니다. 100년 정도 된 교회인데. 목사님께 제가 여쭈어보았습니다. “목사님, 목회하시면서 제일 기쁜 때가 언제였습니까?” 그랬더니 그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은혜많이 받은 성도가 찾아 와서 “목사님, 어디에든지 교회에 필요한 곳에 저를 써주십시오.” 그럴 때가 가장 기쁘셨답니다. 그래서 몇 주 후에 가서 제가 그랬습니다. “목사님, 어디든지 필요한데 저를 써주십시오.”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한없건만
나 주 위해 값은 것은 참 적으니
주 예수여 너그럽게 보옵소서
이제는 전에는 예수님이 자기의 몸을 드셔서 축사하시고 그리고 그것을 우리를 위해 찢어주신 것처럼 이제 그 놀라운 사죄의 은혜와 화해의 은총을 한 몸에 받고 하나님 앞에 살게 하셨으니까 이번에는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한번 더 높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축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의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우리의 모든 즐거움이 주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를 온전히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위해 자기를 주셨던 주님을 위해서 우리를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새로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세상을 사랑치 말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
우리는 지난 4일 동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우리에게 필요했는지 그리고 우리가 입은 십자가의 사랑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에 대해서 우리들이 깊이 깨닫고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정말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과 종교적인 감상을 잠시 느꼈다고 하는 차이는 그 느낀 것이 정말 삶으로 이어지는가 아닌가 거기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우리 자신이 죄인됨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은혜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은혜에 깊이 귀를 기울이고 감격했다면 이제 우리는 그렇게 용서받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될 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불안전하고 결점 투성이의 인간도 누군가를 깊이 사랑할 때에는 그를 향한 계획이 있거늘 하물며 생명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목숨을 버려 좋으신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우리를 그의 보혈로 구해놓으셨다면 우리의 인생을 향한 계획이 어찌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먼저 이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우리들이 동의해야 할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믿고 그 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이미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제 새 사람으로 살게 되는데 그 새 사람에 행복은 이제 그 십자가 그늘 아래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우리를 향해 거셨던 기대와 계획을 좇아서 사는 것만이 인생에 진정한 행복이라는 사실을 동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오늘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다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이는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여러분, 먼저 사도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제일 먼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고 말하기 전에 그 앞에서 무엇을 말하려다가 이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사도는 그 앞에서 이 편지를 쓰는 이유가 사랑하는 지체들이 범죄하지 않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쓴다고 말하고 오늘 고백하고 있는 아름다운 고백과 권면의 말이 나오기 전에 자기의 편지를 받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에 승리를 경험한 사람들인지를 그 앞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큰 시험을 이긴 자들이었고, 큰 싸움을 이긴 자들이었고, 큰 어려움을 이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하기를 “너희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한번 더 못 박듯이 “누구든지” 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얼마나 놀라운 행복이고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었던 사람들이 휘장을 지나서 담대히 주께서 뿌리신 피 길을 걸어 보좌에 계신 아버지의 품에 안겨 그분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는데 그 행복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특별히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고 말하면서 마치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구별되는 것처럼 말합니다. 이것은 구별되었다기 보다는 세상에 있는 것들이 세상 속에 있으니까 세상을 사랑하면 곧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가 굳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이라고 구별하면서 말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 뿌리와 기원을 세상 자체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굳이 사도가 여기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 이라고 구별한 이유는 특별히 “이 세상에 있는 것들” 이라는 표현을 가지고 소유에 대한 사랑의 집착이 크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도의 편지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그리스도 안에 지체들이었습니다. 큰 믿음의 시련과 싸움을 이긴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사도는 상당히 자랑스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그렇게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런 훌륭한 믿음의 싸움을 싸워서 이기고 분명한 구원의 경험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하고 속죄함을 받은 성도들도 얼마든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이 세상을 향한 사랑과 세상을 향한 집착은 우리의 생명만큼이나 질기기 짝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생명보다도 훨씬 더 질겨서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예화) 염전을 하시는 장로님의 이야기- 바다 물을 퍼다가 염전에 뿌려 놓으면 날씨가 좋으면 일주일이면 소금이 되어서 자루에 담아 배에다가 실기 위해 후크로 찍어 실으면서 실수로 어쩌다가 바다에 빠트리면 순식간에 건져도 소금이 녹아 없어진 다면서 그분의 하시는 말씀이 성도들이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취 해서 되었기 때문에 기회만 닿으면 세상으로 흘러가서 순식간에 성도로서의 정체 성을 잃어버린다고 하는 이야기.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세상 사람들을 좇아가면서 세속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별로 노력할 필요가 없고 그냥 신앙생활만 잘 안하고 경건한 삶을 버리고 편하게 살면 그냥 세속적인 물결을 우리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따라갑니다. 그러나 그 세속에 물결을 거스려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입은 십자가의 사랑을 많이 경험한 주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울어야됩니다. 오늘 새벽에도 많이 울던데요. 매일매일 울어야합니다. 왜? 그렇게 못 살았다고 매일매일 자기를 죽이고, 내 안에 더러운 것들이 있는지 살피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가르침을 받고, 이렇게 하면서 매일매일 자기와의 피나는 싸움이 있어야지만 조금씩 조금씩 세상을 거스려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그 큰 믿음의 싸움을 이긴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기의 자녀들에게 그들이 그렇게 큰 싸움을 이긴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즉각적으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누구도 이점에 있어서는 “내가 이제는 세상을 전혀 사랑하지 않노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없습니다. 이 싸움에 있어서는 누구도 “나는 이제 완성에 도달했다” 라고 장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 속에는 하여튼 무엇인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아무 것도 사랑하는 것이 없으면 인간 자체가 굉장한 허무주의에 빠집니다.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이 고생스러워서 자살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삶에 어떤 초점을 잃어버리고 공허감이 밀려들 때에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어서 허덕거리고 땅이라도 파야 되는 가난한 나라에서는 자살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자살은 대게 어느 나라에 많은가 하면 먹고 살만한 나라에 많습니다. 우리도 자살하는 인구들이 계속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미 선진국에 비교하면 아직 멀었습니다. 아직은 후진국입니다.
초점이 없는 것입니다. 초점이 없으니까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그래서 세상이라도 열심히 사랑해야지만 사람들이 생기가 도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노숙자 대책이 시급하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8개월 정도를 노숙자 생활을 했더니 한 사람들의 공통된 점이 8개월 후에는 정상생활로 돌아가는데 굉장히 힘들다고 합니다. 너무나 어렵다고 합니다. 그만큼 삶의 초점을 한번 잃어버리고 거기에 빠지고 나면 그 다음에 다시 초점을 가진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제 둘 중에 어느 하나를 사랑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갈등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는 육체가 원하는대로 흘러가는 사랑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보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그랬는데 이것은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것은 대격의 의미를 가진 소유격입니다. 즉 목적격의 의미를 가진 소유격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많이 사랑하시지만 우리를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셔도 문제는 우리가 그 사랑을 느끼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의 조건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보십시오. 아들이 비록 유산을 먼저 달라고 그래서 나누어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허랑 방탕하며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는 삶을 살았지만 아버지가 집나간 아들을 향한 사랑이 변함이 있었습니까? 늘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버지가 사랑했는데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버리고 타국에서 허랑 방탕하게 살고 마지막에는 있던 재물 다 털어먹고 친구도 잃어버리고 그리고 흉년이 들어서 돼지 우리에 뒹구는 신세가 되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그렇게 사랑했는데 그 사랑 때문에 그 아들이 행복해질 수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하나님 혼자 우리를 짝사랑 하는 동안에는 우리가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귀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내가 뼈저리게 깊이 체험하고 그래서 즉각적으로 주님이 나를 향한 그 사랑 때문에 나도 그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그 사랑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거의 없으면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 생활을 하다가 어느 주일날 나와서 일주일 동안 개판같이 살고 일주일 와서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저는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주님이 저를 사랑하시지요.” 아무리 혼자 그렇게 떠들어봐도 자기가 행복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양심이 아는 것입니다. 공허한 것입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진짜 하나님의 사랑을 현재적으로 느끼고 있는 사람이 이 찬송을 부르는 것과 남이 부르니까 부르는 사람 그 사이에는 다른 사람도 알수 있는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벌써 자신의 내면에 뭔가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 그 자체가 실제적으로 흐르고 있는 사람이 말하는 것과 그것이 흐르지 않는데 그 말을 해야되니까 말하는 사람 그 사이에는 숨길 수 없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교회에서 작은 일, 하다못해 쓰레질 하나를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그렇게 일하는 사람과 빨리 해치우고 일당이나 받고 가야지 하는 사람 사이에도 뚜렷한 차이가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겉에 어떤 표현에 양식은 흉내낼 수 있지만 그런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내면 세계에 내용은 흉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흉내낼 수가 있겠습니까.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받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베푸신 희생의 큰 사랑과 그 사랑을 거절하며 살았던 우리의 옛 삶에 엄청난 차이를 깨닫고 그리고 이제는 그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야 되겠다 그렇게 작정을 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것 없이는 그의 삶은 껍데기일 뿐입니다.
제가 늘 비웃듯이 말하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 생활은 무엇입니까? 지금 제가 여러분을 보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지지 않고 꾸준히 교회에 나오는 것을 지금 비난하는 것입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자기에게 인격적인 주님과의 만남을 허락해주었던 교회와 그 교회 안에 있는 성도의 교제와 그 교회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목양의 축복을 사모하면서 늘 그리워하며 늘 교회에 나오는 삶을 살아갈 때,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생활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아름다운 생활인데 그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빠져버리고 그저 성실과 인내로 교회만 출석하면 매일 욕먹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위선과 진실에 차이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는 것이 잘못되었습니까? 십일조 헌금을 드리는 것이 잘못되었습니까? 거리에서든지 들판에서든지 집에서든지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 무슨 비난 받을 일입니까? 길거리에서나 골목에서나 골방에서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이 무슨 비난 받을 일입니까? 그들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너무나 커서 억제할 수가 없어서, 제가 초창기에 은혜를 받고 그랬습니다. 바보 비슷하게 되는 것입니다. 직장에 출근하기 위해서 사람이 가득 찬 전철에 매달려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걸어가는데 ‘주님이 왜 나같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 막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전철에서 내려서 출구로 올라가면서 메모지를 꺼내면 거기에 가르치는 아이들의 이름이 있습니다. 너무 바쁘니까 걸어가면서 하나씩 둘씩 읽으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눈물이 쏟아집니다. ‘아! 이런 놀라운 사랑을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셨는데 왜 나는 이 영혼들을 이렇게 밖에 돌볼 수가 없을까.’ 길거리에서 기도하는 것 뭐가 잘못입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이 마음에 가득 있어서 십일조를 드리고, 그리고 헌금을 하고, 길거리에서 정신병자처럼 펑펑 울면서 기도하고, 찰스 피니가 그랬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 멘하탄 거리에서 사람들이 출근할 때, 길거리에 나와서 전도하다가 주저 앉아서 막 통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하나님, 저 영혼들이 지옥에 가고 있는데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그속에 깃들여 있으면 바리새인이 행했던 그 모든 행동들이 사실은 한없이 우리들이 본받아야 되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 하나의 차이입니다. 다른 것의 차이가 아니라 오직 그것 하나의 차이입니다.
여러분들이 영혼을 돌보고 있다면 삭꾼과 선한 목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삭꾼은 머리가 돌이라서 글자도 모르고 성경을 제대로 못 가르치는 사람들이 삭꾼입니까? 아닙니다. 선한 목자는 공부를 많이 하고, 영어도 하고, 희랍어도 하고, 히브리어도 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차이가 납니다. 영혼을 돌보는데 정말 주님을 향한 사랑,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 형상 가진 그 영혼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서 돌보면 그 사람이 어떤 자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지 상관이 없이 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섬기면 선한 목자입니다. 여러분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면 주님을 사랑하니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의 모든 그럴듯한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오한 진리 깨달은 자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 ~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 주위에 많습니까? 무슨 사랑이 그렇게 시시한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바보가 되고 가치 기준 자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해야 되는 것처럼 사람이 돌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한참 연애에 빠지고 나면 무슨 말도 안 되는 별을 따다가 주고 싶다고 합니다. 꿈을 깨십시오. 무슨 별을 따다가 줍니까. 거기가 어디라고 올라갑니까. 떨어지려고. 아니 뭐 별이 할 일이 없어서 자기에게 따져서 누구 어떤 여자한테 주려고 거기에 달려있는 것인지. 뭐 달을 딴다. 별을 딴다. 그것을 시니까 그렇지 평상적인 대화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당장 정신병원에서 잡아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면 정신나간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돌아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시시한 것입니다. 마치 먹기 싫은 빈대떡을 먹는 것처럼 그렇게 시시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워낙 형상학적이기 때문에 열렬함도 없고 눈물도 없고 무슨 그런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사람을 너무나 열렬히 사랑하는데 그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죽어버리거나 아니면 물리적으로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게 떼어 놓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상사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세계에서의 사랑은 왜 그렇게 시시합니까? 사랑해봤으니까 알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면 다릅니다. 둘이만 멍하니 앉아 있어도 많은 시간이 정신 없이 빨리 지나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루만 안 봐도 굉장히 오래 안 본 것 같고 헤어지고 그 다음에 만나도 되는데도 꿈에서도 자기 꿈 꾸라고 그러고 합니다. 꿈에 시달리면 잘 자는 것이 아닌데 그런데 어떻게 “잘자 내 꿈꿔”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까. 차라리 “잘자라 네 꿈은 내가 꾼다” 그래야지. 꿈에도 그린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보고 싶으니까 이게 의식적으로 ‘사랑해야지 사랑해야지’ 이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이 진실되니까 이것이 자신의 인격과 의식의 세계를 넘어서서 무의식에 세계까지 모두 배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잠을 자면서도 그 무의식 세계 속에서도 그렇게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순결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거의 하나님께 미친 사람입니다. 하나님 밖에는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없어도 당신이 곁에 있으면 나는 언제나 있습니다
그 하나님 자신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겨우 자기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사랑입니다. 누가 여러분 주위에 주님 때문에 상사병이 난 사람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주께 가까이 가고 싶지만 우리의 죄와 강팍함, 혹은 예배드릴 수 없는 억압된 어떤 환경, 혹은 하나님 만나주시는 그 자리로 갈 수 없는 어떤 물리적인 억압 이런 것들 때문에 마음에 한이 되고 병이 되어서 주야로 눈물로 음식을 삼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사랑입니까? 무슨 놈의 사랑이 그렇게 시시하게 그렇습니까?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나 일반적으로 쓰이니까 그런 것들은 모두 통속 소설 같이 하찮은 것들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들 속에 있는가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것은 그것을 가지고 있을 때는 잘 모르지만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에 어떤 마음이 되는지를 보면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는지 안 사랑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의 시나 유행가나 가곡 같은데서 ‘당신이 떠나가고 나니까 비로소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는 것은 괜히 멋있으라고 쓴 것이 아니라 사랑해 본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경험입니다. 있을 때는 모르는데 사라지고 나니까 그 사랑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가 확인 되었었는데 그 존재가 없으니까 자신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이 신앙생활에 핵심으로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최대의 의무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최대의 의무는 큰 교회를 만들고,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돌려드리고 그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신앙의 최대의 숙제는 어떻게 신자가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했을 때 가슴 깊이 밀려왔던 그 피묻은 사랑을 간직하고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숙제고 가장 커다란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촉진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지를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촉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보다는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수비해야 할 성향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빼앗기지만 않으면 그 사랑은 계속 우리 안에 불붓는 것입니다. 계속 붙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런 사랑을 빼앗아 가는 유일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진실한 사랑을 가져갑니다.
남녀가 사랑을 하는데 한 여자가 다른 남자를 뜨겁게 사랑하지 않는한, 그 사랑은 언제든지 회복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이 다시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올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친절은 아주 불결하게 느껴지고 모든 배려는 귀찮게 느껴지고 모든 표현은 역겹게 느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별을 따온다 달을 따온다고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은 ,미친놈,이라고 그래도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기분이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야! 저 별을 날 위해서 따온다고 그러더라.’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마음만이라도 고맙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 있으면 아버지를 향한 사랑은 그 그리스도의 속에 이 세상을 향한 사랑과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공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럴 때에 그러면 세상을 조금이라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은 하나도 없는가. 그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하나도 없고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만 가득 찬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없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만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을 향한 사랑은 일점도 없는 그런 사람은 존재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문제는 순결에 있어서 정도의 문제입니다.
순금을 가르켜서 우리들이 99.9 퍼센트에 금을 ‘순금’이라고 부릅니다. ‘순’이라는 말이 되려면 100퍼센트 이여야 합니다. 그런데 금을 제련의 세계에서 100퍼센트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세계에서 100퍼센트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이 99.9퍼센트면 우리들이 순금이라고 불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말했으면서도 자기가 죄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충만해지면 세상을 향한 사랑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 조금씩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뜨거운 태양볕 아래 잠시 머물러있는 풀 끝에 매달린 이슬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이 속에서 자극을 받으면 그런 것들은 없는 것처럼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누구든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라고 하는 이것은 정도의 문제이고 순결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순결로 나아가는 생활이어야 하는데 이 순결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공허하게 비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의 인격이 온전하게 가득 차 있어서 다른 것들을 향한 사랑이 거의 비집고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 된 것, 그런 상태를 가르켜서 순결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거기에 우리의 마음이 실리기 시작하면 순결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믿기던 하나님을 향한 친밀함과 그 사랑의 풍부함이 신자들의 마음 속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정말 나는 여러분들 모두가 한번만이라도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을 경험해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들이 아무런 집착을 못 느끼게 됩니다. 모든 것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소원은 어디에 고정되는가 하면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놓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사랑의 표현이 증진될 수 있을까.
어떤 심리학자가 이야기하기를 남녀간의 사랑을 표현하는 이 표현은 결코 뒤로 후퇴하는 법은 없다고 합니다. 후퇴해서는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 내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 출석만 했는데 그 사랑이 깊어지게 되면 이제는 단지 교회에 나오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안됩니다. 심오한 하나님의 도, 진리를 깨닫고 싶어하고, 깨닫고 나면 살고 싶어지고, 살고 나면 살지 못한 자신이 미워지고, 그렇게 살지 못한 자신을 미워하고 나면 살기를 기대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한없이 회개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거룩한 삶에 진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관건은 어디에 달려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서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달린 것입니다. 아니, 새로나온 폭탄, 총, 칼 첨단 무기를 주어서 진짜 수십억짜리 인간 병기를 만들어서 전투에 내보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싸울 의지가 없는데 그것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도 결국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인격이 있을 때에 깨달음이 증폭되는 것이지 일단 세상에 내 마음을 빼앗기고 세상을 열렬하게 사랑하기 시작하면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 자체가 그에게 있어서는 아주 고역이 되고 말씀을 세밀하게 깨닫도록 강요받는 그 환경자체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거추장스러운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변절자에게 신의와 의리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강조하고 신의를 저버리는 것이 인간도 아니고 그들의 운명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연설하는 것을 듣는 순간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신자가 계속 유지하며 산다 라고 하는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뿌리입니다. ‘그분은 운세가 뛰어나는데 하나님을 참 많이 사랑하는 특기가 있어’ 특기의 성질이 아닙니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첫째는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사랑치 말아야 하는가. 두번째를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타오르는 욕망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그렇게 많은 것을 선물로 주시고 영광스러운 피조물에 자리에 두신 그 지위를 잃어버리게 된 가장 궁극적인 원인도 하와의 유혹, 뱀의 유혹 그것 다 쓸데없는 이야기고 궁극적으로는 그 유혹에 반응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잘못된 욕망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했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주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타락한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그들의 불순종을 통해서 들어온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기의 육체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종교적인 열심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거의 사람들이 미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나라에도 축구 경기 같은 것을 하면 열심당원이 되어서 돈을 모아서 가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빨간 티셔츠를 입은 그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뭐 응원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는 그래도 비교적 사람들이 온순한 편인데 외국을 보면 살인이 일어납니다. 8년 전에 월드컵을 할 때, 콜롬비아 선수가 자살 골을 넣었습니다. 그것을 막으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어떻게 하다가 자기의 발을 맞고 골대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졌습니다. 그런데 3일 뒤에 암살을 당했습니다. 누가 죽였는가 하면 그냥 집에 앉아서 텔리비젼을 보던 사람들이 죽였을리는 없고 열렬하게 스포츠를 응원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영국 같은 나라에 가보면 훌리건 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전국적으로 조직이 되어 있어서 영국 팀이 어디와 축구를 한다 그러면 모두 휴가를 내고 돈을 걷어서 버스를 빌리고 비행기를 타고 미국이고 독일이고 몰려가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머리를 박박 깍고 머리를 축구공 모양으로 이렇게 만들고 그럽니다. 그리고 웃통 벗고 피를 철철 흘리면서 응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바보같이 애국심하고 연결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국심이 아닙니다. 애국심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릅니까? 나라를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것이 좋으니까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법이 있는데 사람들이 왜 그렇게 법을 어깁니까? 자기의 육체의 욕망을 법에 의해서 제재를 받고 그런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싱가폴 같은 곳에 가면 거리가 너무 깨끗합니다. 여성들의 천국입니다. 거기서 만약에 지나가는 여성들을 성희롱하면 우리는 재판을 하고 그러는데 그곳은 재판이 필요가 없습니다. 잡아다가 벌금도 아니고 유치장도 아니고 그냥 발가벗겨서 곤장을 때려서 볼기를 너덜너덜하게 찢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무슨 노상방뇨를 하거나 술먹고 주정하고 껌을 뱉고 이런 일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언제 한번 뉴스에 나있는데 the peace under steel ‘철근 아래 평화’ 너무 깨끗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성인들이 자꾸 싱가폴을 떠납니다. 그것이 왜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이 법을 지키면서 사는 것은 너무 좋은데 자기는 가끔 술을 먹고 길거리에 오줌도 싸보고 싶고, 성희롱도 하고 싶고, 술먹고 고래고래 소리도 지르고 싶고, 껌도 씹어 뱉고 싶다는 것입니다. 숨이 막혀서 못 살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러는 것은 숨이 안 막히는데 내가 그러는 것은 숨이 막히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찾아서 날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보십시오. 사도가 아주 정확히 봤습니다.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육체에서는 뭔가 원하는데로 움직이면서 그대로 충동을 받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디에 맛이 있는 게 있다고 하더라 그러면 차를 타고 몇 시간씩 달려가서 기껏 짜장면 하나 먹고 그럽니다. 아무데서나 먹으면 어떻습니까. 전부 다 무엇입니까? 육체를 즐겁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세상의 특징을 사도가 이야기하는데 안목의 정욕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보면 보는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눈을 즐겁게 하는 감각적인 일에 몰두해 오는 것이 세상의 역사입니다. 세상의 역사가 그런 역사입니다. 잠깐 동안의 눈의 즐거움을 위해서 인간들은 그냥 치닫듯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런 행동이 자신의 인생에 무슨 의미를 주고 마지막에 자기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그런 생각 복잡해서 안 합니다. 좋으면 그냥 하는 것입니다. 뒤돌아볼 필요도 없이 하는 것입니다. 못하면 능력이 안 되어서 못하는 것이지, 능력이 되고 여건만 갖춰지면 얼마든지 자기의 눈에 좋은대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본래의 모습이고 이 세상 속에 흐르는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사도가 말하기를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랑은 ‘프라이드’입니다. ‘교만’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스스로 누구의 다스림을 받아야 된다든지 누가 자기들을 통치해주어야 한다든지 누구, 어떤 ‘마스터’ 주인이 있어서 그분에게 무릎을 꿇어야한다든지 그런 세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교만으로 가득 찬 것이 이 세상이고 세상에 있는 많은 것들은 이런 안목의 정욕과 육체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이 만들어내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없이 세상을 뜨겁게 사랑하고 나면 그러면 그 역시 그 세상 속에서 그렇게 육체의 정욕을 좇아서 살게 되고, 안목의 정욕을 따라 행동하게 되고,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프라이드를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그런 세상의 분위기 속에서 휩쓸려서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들이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됩니다.
성경이 흔히 “세상을 사랑한다” 라고 할 때에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합니다. 하나는 지금 말한 것 같은 세상을 사랑한다 라는 말을 부정적인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어느 때에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가 하면 세상을 향한 사랑이 신자의 독특성을 허물어트릴 때, 그때 그 사랑은 부정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또 다른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은 신자의 독특성을 전혀 허물어트리지 않고 오히려 강화하는 세상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어떤 것,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시면 사랑하실수록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고자 하는 계획이 구체화됐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은 세상을 정말 사랑하신 분이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핍박하는 자들, 그리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공모하는 야비한 인간들이 있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그 놀라운 사랑을 예수님을 통해서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욕으로 받는 수많은 인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끊임없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가 눈물에 생애였다고 하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 예수님이 이 세상을 향해 가지고 있는 뜨거운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였는지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세상을 사랑하시면 사랑하실수록 당신이 그리스도 예수되신 독특성을 잃어버리셨는가 하면 잃어버리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시면 사랑하실수록 자기가 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고 그리고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이 더 분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날 밤에 기록들을 성경이 말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이제 자기의 때가 가까운지를 아시고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상을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은혜받은 모든 사람들이 다 신학교를 가서 목사가 되는 것은 반대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에는 목사를 빼놓고 다 쓰레기들만 남을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혼돈을 많이 일으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아, 이제는 내가 전문적으로 주님의 일을 하라는 것이구나.’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평범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는 목사도 아니고 전도사도 아니고 선교사도 아니면서도 주님을 진실되게 사랑했던 수많은 성도들이 불꽃처럼 살다가 갔습니다. 여러분들이 천국에 올라가보면 목사의 수가 유난히 적은 것을 보고 놀랄지도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우리의 사랑을 받습니다. 이 세상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자기의 쾌락을 좇기를 하나님 숭배하듯하고, 자기 육체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치않고,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수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일을 눈하나 깜짝 안하고 하는 이런 세상, 그러면서도 자신이 잘못됐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이런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세상이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로부터 받지 않으면 무슨 희망이 있냐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이 이렇게 쾌락을 향해 치닫고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살아가는 이 세상을 단지 분노하고 정죄하는 마음으로는 우리들이 어두운 세상에서 한줄기의 빛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런 세속적인 풍조와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좇아서 치닫는 이 세상의 물줄기 아래 존재하고 있는 어떤 질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질병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공허감 같은 것들이 깊이 그들을 타락으로 줄달음질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지금 마약이 미치는 어마어마한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나라도 여러분들은 구별된 장소만 왔다가 갔다가 하는 사람들이니까 잘 모릅니다. 그런데 심각합니다. 서울 시내 여자 고등학교 화장실에서 주사기들이 얼마나 발견됐는지 여러분들 아십니까? 학교에 다니는 애들이 마약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미친 듯이 치닫는 쾌락에 풍조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을 멈출 수 있는 대안이 이 세상 속에는 없습니다. 교육을 잘 시키면 된다고 하는데 그럼 뭐 교육을 안 시켜서 세상이 이 모양이 됐습니까? 세상은 세상 자신이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치닫는 이 세상의 풍조, 젊은이들이나 청소년이나 나이든 사람들이나 모두 동일하게 치닫고 있습니다. 나이든 사람들이 청소년에 비해서 훨씬 도덕적입니까? 도덕적이기는 뭐가 도덕적입니까. 애들은 내놓고 막 살고 어른들은 뒤에서 호박씨까는 차이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런 세상에 궁극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누군가가 자기들을 사랑해주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청소년 문제도 전 그렇게 봅니다.
그러니까 애들을 나무라고 야단치는 그런 것만을 가지고는 안되고 그들을 진실로 용납하고 받아주는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합니다. 머리는 노랑물들이고 귀뚫고 이상한 바지를 입고 그리고 껄렁껄렁 하고 교회와도 자꾸 아래 위로 흩어보지를 마십시오. 그렇게 아무 것도 들은게 없어 보이는 애가 교회에 나왔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나는 하나도 우습지 않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런 시야를 갖기 위해서 얼마나 나 자신과 싸우는지 아십니까? 아직까지 정리가 안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도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인사 안하는 것, 왜 인사를 안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죽했으면 그랬습니다. “야, 너 왜 목사님한테 인사를 안하니?” 그러니까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그런데 왜 인사를 안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한테는 더 안하겠지요. 요즘 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것도 이해하면 안될까. 왜냐하면 진짜 은혜를 받으면 바뀝니다. 진짜 은혜를 받으면 성도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그리고 사랑받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통해 자기를 이렇게 사랑해주는 것이 무엇에 대해서 빚진 마음을 갖게 하는지도 압니다. 인사 좀 안하면 어떻습니까. 또 이 말을 듣고 젊은 사람들이 ‘아이 됐다 이제 인사 안 해도 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짐승입니다. 이해해도 되잖아요. 저렇게 버르장머리 없는 애인데도 그래도 교회 출석 하고 있으니까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그리고 그것을 좀 이해하려고 합니다.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그러면서 그 지체를 마치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그렇게 대해주는 것 이외에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 사랑을 몰랐으면 여기 교회에 와서 뒷짐 지고 ‘아, 저 자식은 건방져. 재는 왜 또 노랑머리야. 재는 코를 뚫었어.’ 그런 이야기를 여기서, 교회에서 하고 있었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젊었으면 자기도 돌아다니면서 귀뚫고, 코뚫고, 발찌끼고 그러고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아직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고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런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아직도 신앙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휘둘린 삶을 살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어느 정도 정리했습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차이밖에 더 되겠습니까? 정말 이 세상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해서 흘리는 눈물에 젖을 때에 이 세상은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가끔 와서 여 성도들이 “죽겠어요. 목사님,” “왜 그러느냐고” 그러니까 “그 인간은 어찌 그렇게 변화가 안 되는 것인지....” 그 인간이 누군지 아시지요? 그러니 변화될 리가 있겠어요. 그게 인간으로 보이니 변화가 되겠어요.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어느날 남편이 남편으로 안 보이고, 인간으로 안 보이고, 영혼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육체의 욕심대로 안목의 정욕대로 제 멋대로 사는 이 인간이 누군가에게 정말 진실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을까.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데 누구에게 받아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자기의 사랑없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우리들이 세상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지 이런 사랑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투덜대듯이 교회 나가자고 몇번 재촉해보고 나서 그 인간, 저 인간 그러는데 그 인간 소망이 없습니다. 희랍어로 말하자면 ‘아마데마의 정신’ 저주를 받아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내 골육지친들 몇이라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저주를 받아’ 아마데마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을 사랑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자기가 좋은줄 알고 육체의 욕망대로 치달으면서 행하고 거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처단해 버리고서라도 자기 욕망대로 살아야 되겠다고 미친 듯이 길길이 뛰던 인간들이 어떻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그런 고백을 받아낼 수가 있겠습니까? 지옥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줄을 아세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그런 승복을 가져다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눈물로 가득 찬 뜨거운 사랑, 그런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나면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서 사는 그 일이 얼마나 시시하고 더러운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믿기 전에 술도 좋아하고 그럴 때에는 퇴근하고 허름한 주막집에 앉아서 친구들과 너절한 것도 낭만이라고 거기서 되는 이야기 안 되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그러다가 술에 취해서 흔들거리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의 행복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나서 이제는 그런 분위기 자체가 싫어지는 것입니다. 정말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니까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이 주는 만족으로 자신의 영혼이 위로받는 것이 얼마나 감질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사도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이 세상을 너희들이 만약에 사랑하면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로 너희들이 가까이 다가가게 할 어떤 요소는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사도가 오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에게 이런 의문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아!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깨달은 사람들이 직업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깊은 산 수도원 속에 들어간 선택이 정말 옳은 선택이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제 주님을 몰랐을 때는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사랑하고 오늘 사도가 경고하고 있는 것처럼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에 있는 자랑에 빠져서 그것이 주는 즐거움으로 영혼을 소진하며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세상이 주는 그런 즐거움보다 더 크고 놀라운 신비를 깨달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같이 티끌 같은 더러운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그런 놀라운 고백을 마음 속에 소유하면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렇게 되었으면 이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그런 사랑을 돌려주지 않으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나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세상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버리지 못하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삶은 바로 사단이 원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삶이고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이 가장 기대하지 않으셨던 삶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지막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렇지요? 술먹고 나쁜짓하고 타락하는 것도 젊고 어렸을 때는 귀여워 보이는데 나이가 먹어서 그러고돌아다니면 이제는 너무 더러운 것입니다. 진짜 더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사람이 성결해지고 거룩해져야지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추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우스운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남자 애가 예쁘장하게 옷을 입고 머리에 브릿지라도 하고 귀걸이도 하고 그렇게 예쁘장하게 생긴 애가 자기 같이 생긴 여자아이를 졸졸 쫓아 다니는 것이 얼마나 귀여워요. “한번 만나줘요. 네” 그렇게 하고 다니면 얼마나 귀여워요. 길가는데 계속 쫓아가면서 그러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으로 “야, 한번 만나줘라” 얼마나 귀여워요. 머리가 하얗게 되어서 얼굴은 주글주글하고 배는 나오고 그러면서 쫓아다니면서 자기 같이 생긴 아줌마 쫓아다니면서 “한번 만나줘요. 네” 상상하기 싫은 그림입니다. 역겹고 추합니다. 더 비참한 것은 세월이 흘러가고 나이가 들면 죄도 사람을 버립니다. 상대를 안 해줍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토마스 왓슨이 정확하게 분별을 했습니다. 나쁜짓 하고 그랬는데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나쁜짓 할 기력이 없습니다. 죄짓고자 하는 소원은 있고 죄에 대한 연모함은 있는데 죄가 상대를 안 해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 모르고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따라서 살아가는 인생의 마지막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뭔가 세상에 것들에 빠져서 한없이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뜻언뜻 그런 사람이 부러울 때가 있지 않습니까? 없다고 그러면 그것도 솔직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앙이 식고 그러면 부러워질 때가 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매일 그까짓껏 돈 몇 십 만원 받으려고 그렇게 힘들게 직장생활 하는데 굉장한 차를 타고 돈을 물쓰듯 쓰면서 돌아 다니는 그런 사람들을 이렇게 보고 그리고 ‘나도 한번 그런 생활을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없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나는 겨우 내내 일이나 하고 고생이나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스키를 타러 카나다를 간다니 어디를 간다니 그러면서 돌아다니고 사람들이 근사하게 보일 때 안 부러워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할 것은 어떤 사람이 행복해 보이면 그 행복한 그 당시의 그 모습만 보지 말고 그런 행복이 쾌락적인 순간이 끝난 후에 그가 홀로 있을 때에도 행복할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렇게 신앙이 없고 이 세상에 육체의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서 미친 듯이 사는 사람들이 잠을 안 자려고 그러는 것이 특징입니다. 야밤에 까지 놉니다. 왜 밤이 너무 무서운 것입니다. 홀로 있는 시간이 너무 무서운 것입니다. 인류가 9시에만 잠자리에 들면 전 인류의 죄악에 50퍼센트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일을 안합니다. 왜 그 긴 밤을 지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친 듯이 그렇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은혜 아래 있어 보십시오. 그러면 어떤 면에서 세상에 어떤 짜릿한 쾌락이 주는 그런 종류의 자극적인 사랑은 없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주여 꽃처럼 향기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주님이 좋을 수 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그런 평화와 행복이 신앙을 버리고 육체에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없습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평화, 어떠한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든든히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방패이고 우리의 요새이시며 산성이신 주님에 대한 자부심,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세상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는 세상을 버렸는데 그런데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무엇을 하려고 세상으로 돌아왔는가 하면 다른 목적을 가지고 돌아온 것입니다. 무슨 목적을 가지고? 예전에는 이 세상에서 육체의 정욕에 물을 마시고 자기의 마음에 원하는대로 하나님의 법을 짓밟으면서 그런 육신을 신으로 섬기며 자기 눈에 좋은대로 아무렇게나 살면서 육체의 만족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세상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만족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자기처럼 못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무엇을 팔아서라도 그런 이 세상적인 행복을 누리고 싶어하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시 돌아온 것은 이제는 그런 삶을 살고 그런 즐거움을 다시 얻으려고 돌아온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인생에 진정한 행복이 이것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어서 그들이 참된 인생에 행복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에 대해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저들도 세상 안에 있고 우리도 세상 안에 있지만 우리는 세상 안에 있으면서 또한 세상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똑같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동상이몽에 꿈을 꾸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세상에서 세상 나라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고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면서 사는 것은 육체로서 잠시 살면서 영원을 향해서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릅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는 했지만 이게 바다에서 끌어내온 소금과 같아서 세상으로 돌아갔을 때 한편으로는 ‘아, 이곳이 정말 내가 있을 곳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라고 보내셨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왔고 그래서 내가 여기에 있는 동안에 고향같지는 않지만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그 사명들을 잘 감당해 나가야 되겠다’ 이런 훌륭하고 착한 십자가의 마음이 있는 동시에 또 한편은 신앙이 떨어지기만 하면 여기가 고향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날 좌석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는데 앞에 있는 사람이 담배를 후 하고 피웠습니다. 뒤에 있는 내가 훅하고 들이마셨습니다. 담배를 끊은지 3년 반이 지났을 때에 일입니다. 얼마나 제가 은혜생활을 잘 할 때였는데 전혀 무의식적으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담배를 피지 말고 이런 것들은 다 헛된 것이라 이것은 내 의식이고 육체에서 깊은 곳까지는 아직 까지도 아침에 품어져 나오는 담배의 향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사람이 신앙생활 하다가 하도 되는 일이 없어서 기도원에 가서 술을 마시 면서 하는 말이 세상은 변하는데 너의 맛은 변하지 않았구나 자기가 변하지 않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
교회에서 젊은이들이 은혜를 충만하게 받고 나면 직장생활을 굉장히 하기 힘들어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초기 은혜 받은 시절에 굉장히 힘이 듭니다. 왜? 전에는 막 탈세를 위한 일도 막 하고, 가짜 보고서도 막 쓰고, 영수증도 가짜로 만들고, 촌지도 챙기고, 누군가를 찔러서 받을까 생각하고 그렇게 불의하고 살았는데 이제 신앙이 들어가고 나니까 너무 싫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러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참 좋겠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가짜 보고서를 쓰라는 사람도 없고 핍박하는 상사도 없고...” 한번 해보십시오. 그것이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아직 미숙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자기의 마음 속에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가 형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너무 사랑하니까 교회에 나오면 너무 행복한 것입니다. 왜? 교회는 그래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직장에 갔다가도 교회에서 무슨 일만 있다고 하면 다 팽개치고 교회로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제대로 깨닫지를 못하니까 은혜를 받을수록 직장에서는 찍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던 일을 다 팽개치고 가는 것입니다. 왜 가느냐고 그러니까 지금 교회에서 주님이 부르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기쁘게 하랴. 주님을 기쁘게 하랴. 그런 순교의 각오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찍히지, 그리고 이제는 세상에서 승진하고 그러는 것이 취미가 없습니다. 그냥 교회에서 찬송이나 부르고 하나님께 은혜받는 것에나 관심이 많습니다. 그렇게 다 팽개치는 것입니다. 유능하던 사람이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승진을 못하고 나이가 들어 빙빙 돌고 있는 사람이 다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항상 출근하는 목적은 퇴근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확실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하여튼 전에는 안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속에 다른 세계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것도 생기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상에 돌아갈 때 자연스럽게 세상이 본향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도 옛 친구가 낫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도 옛날에 내가 놀던 바닥인데’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신앙이 있을 때는 안 그런데 신앙이 사라지고 나면 옛날 입맛이 그대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사랑해야 되는 사명이 있으면서 또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세상을 사랑하면서 사는 게 위험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질될 위험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해결을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하면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자신의 마음이 늘 충만해져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매일 기도해야 한다고, 주일 낮 예배 한번 오는 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고 그렇게 계속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 우리 교회 교인들이 여기에 있지만 주일 낮 예배 달랑 나오는 것 가지고 우리 교회에서 집사가 아니라 권찰이라도 될 생각은 꿈도 꾸지를 마십시오. 시키지 않습니다. 아니 이렇게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주님 의지하면서 살려고 몸부림쳐도 세상이 만만하지 않은데 와서 반토막짜리 예배드리고 도망가는 그런 신앙생활을 가지고 정말 자기가 이 세상에서 세상을 거스르면서 정말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진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 생활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힘입어서 세상을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이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자기에게 부어져서 슬픔과 죄악이 많은 이 세상에 자기를 보내시고 고치고 치료하는 도구로 자기를 쓰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도 알 수가 있을까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자기 속에 충만하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내가 주님 만나고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이제는 내가 한달에 몇 십 만원씩 받는 다른 사람에게 내세울 것도 없는 가난한 봉급쟁이고 또 길거리에서 하다못해 호떡을 구워서라도 파는 그런 천한 노점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내가 밥 벌어 먹으려고 거기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자부심을 우리들이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왜 나는 이제 주님의 십자가에 사랑을 알고 그 놀라운 은혜를 안 다음부터 ‘나는 이제 주님의 손에 의해서 이 세상을 파송된 하나님의 사람이다’는 그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이 세상에 나와서 밥이라도 벌어먹는 여러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마주대고 씨름을 하면서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사실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로운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예전에는 잠시 머무는 세상에서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 육체의 쾌락을 위해서 안목의 정욕을 좇아서 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인생을 살았지만 이제는 내가 어쩔 수 없어서 여기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내 발은 땅에 딛고 있으나 내 꿈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고 주님이 내안에 계셔서 나를 향한 남다른 사랑을 보이시며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이 일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여기에 존재하노라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표출해보일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이 무엇인가 하면 전도입니다. 복음 전도입니다.
그래서 저도 8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했는데 학교에서 교수로 있었을 때 말고 3년은 사표써가지고 다니고 나머지 5년은 찬송하면서 다녔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왜 얼마나 좋은가 감사했습니다. 내가 단지 내 육신을 위해서 이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아침에 일찍 일어날 때도 짜증이 나고, 늦게 퇴근시켜줄 때도 자존심 상하고, 월급봉투를 받을 때는 더 신경질나고, 내가 저 좋은 직장 다니는 애들하고 내가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사람이 아닌데 나는 왜 이러고 다니는가. 늘 그런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막 불만하고 감사도 없고 하니까 오죽했으면 체중이 56킬로까지 내려갔겠습니까. 밥도 못 먹고 그렇게 곧 죽을 것처럼 그렇게 살았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고 나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후진 직장에 나를 보내신 것은 깊은 사명감이 있으시구나. 그것이 무엇일까? 눈뜨고 보니까 하나님이 내 손길을 기다리고 계시는 일들이 수없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기쁘고 감사한 것입니다. 틈틈히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전도하고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이 세상으로 파송하셨고 이제 내가 세상에서 사는 것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 보내신 사명으로 사는 것이다 라는 사상을 훌륭하게 보여주고 “하나님, 내가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뒤에 마지막으로 나옵니다. “이는 세상도 지나가고 육신의 정욕도 다 지나가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영원히 있느니라”
보십시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예수를 믿기 전에 자기 육체의 즐거움을 위해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고 주님께 불순종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도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앙이라고는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번도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서라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라도 육체의 즐거움과 안목의 쾌락을 위해서 죄를 지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죄를 짓고 잘못을 행하는 그 순간 짜릿한 기쁨을 느꼈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희생하고 피를 흘리는 것보다는 비교도 안 되는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뭐가 남았습니까? 지금. 뭐가 남아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버리고 났을 때, 그렇게 지독하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일을 악물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께 절대로 순복하지 않고 악랄하게 불순종하면서라도 자기가 만족을 얻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그 만족이 그 순간이 흐르고 난 지금 무엇을 우리에게 남겨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남겨놓았습니까?
평화로운 아버지의 집에서 재산을 나눠 달라고 불효막심한 요구를 하고 재산을 가지고 떠날 때, 아들은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재물을 가지고 허랑 방탕하면서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기쁨을 거기서 맛보았을까요. 고리타분한 형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가슴이 탁 트이는 남자다운 친구도 사귀었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매일 앉아서 땅이나 파고 하는 고리타분한 그 시골 생활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진짜 멋있는 사람들이 있는 그 사회 속에서 사교적인 생활도 했을 것입니다. 아리따운 여인과 하루 밤에 추억도 있을 것입니다. 가슴 짜릿한 쾌락도 있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그런 영광도 맛보았을 것입니다. 왜 어느 시대든지 돈을 많이 뿌리면 숭배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랬습니다. 최고인줄 알았습니다. 그때 맛보는 즐거움과 쾌락을 어떻게 아버지의 집에서 땅이나 파는 즐거움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땠습니까?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모든 즐거움은 끝났고 잔치는 막을 내렸습니다. 이제 자기는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는 굶주린 한 마리의 나그네로 아무도 환영해주는 이가 없는 외톨박이가 되었습니다. 세상도 지나갔습니다. 정욕도 지나갔습니다. 뭐가 남은 것이 있었습니까?
여러분,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생활이 너무 싫어서 주님의 말씀 앞에 깨어지기가 너무 괴로워서 내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며 발버둥을치고 주님의 마음에 못 박고 목자의 마음에 칼집을 내면서라도 내 멋대로 살겠다고 길길이 뜁니다. 그런데 후회한들 몇 시간이 지나면 왜?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으니까. 주님 밖에서 맛 본 즐거움은 다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혜자가 “헛되고 헛되도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그럴까. 그것도 다 지나가는 것인데. 자, 들어보십시오. 이것이 신기한 원리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삶이 영생에 이르는 삶입니다. 잘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내가 느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너무나 행복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자기처럼 복음을 모르고 어둠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실의에 빠진 자를 위로하고, 복음을 모르는 자에게 빛을 주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 시간은 다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때 행했던 일들은 하나님이 상 주실만한 일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원히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 섬김을 통해서 그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 언제나 기억이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아 선지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너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내 마음이 불붓는 것 같다” 긍휼로. 선지자들의 입을 빌어서 하나님이 가끔 “내가 너희와 맺은 사랑을 추억하노라” 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지금은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개판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때는 저 백성들이 나만을 섬기고 나만을 사랑했던 백성들인데 그런 마음을 하나님께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주님을 위해서 진실하게 인생에 단 하루라도 산다면 그 다음에 그렇게 살지 못해도 그렇게 살았던 날은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입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주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주님의 참 사랑을 깨닫고 주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의 말씀에 도를 배우려고 애를 쓴 이것이 어디로 갑니까? 어디로 안 갑니다. 그것을 토대로 해서 우리는 주님을 아는 지식을 쌓아가고 하나님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언제까지 계속됩니까?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영원히 계속해서 남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에 목매어서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아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교회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세상의 한 구석에서 아픈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을 섬기며 살았던 모든 날들, 은밀한 날들일수록 주님은 기억하십니다. 결코 여러분들은 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히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 버리고 불순종해서 잠시 육체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내 육신의 정욕대로 살았던 수많은 날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줍니까? 아무 것도 남기는 것이 없습니다. 고작해서 남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한 그 골깊은 자책감과 반복되는 불순종 속에서 우리의 뼈속 깊이 사무치는 패역 밖에는 남기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볼 때마다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같이 더러운 인간들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주셨는데 그 피로 용서받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에게 남은 길은 여러 갈래의 길이 남은 것이 아니라 오직 꼭 한 길 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놀라운 사랑으로 나를 불러주셔서 그 사랑을 받게 하셨으니 “이제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고 하는 그 고백을 따라서 사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길은 천로역정입니다. 혼자서 길도 보이지 않는 가시 밭길을 찔리며 피 흘리고 헤치고 가야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마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살았던 모든 날은 주님 앞에 기억되고 육체의 정욕을 좇아서 살았던 헛된 날은 모두 허무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여정을 모두 끝내고 강 건너편에 이르러서 주님이 고단한 우리의 인생의 짐을 벗기실 그때에 여러분들이 주님을 위해서 무릎으로 살았던 그 무릎의 피를 닦아줄 것이고 주님을 위해서 경건한 심령으로 의로운 눈물을 흘렸던 여러분들의 눈을 그리스도 예수의 못 박힌 손으로 예수님이 친히 씻어주실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사랑에 사무쳐서 오직 하나님 한분을 사랑하고 경외하기 위해서 진리의 말씀을 좇아서 분투하며 살아왔던 우리의 서러운 나날들은 모두 새벽 빛과 같은 기쁨으로 보상될 것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서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걸어온 인생의 길을 보면서 그 나라에 도달하기 전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사랑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길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인가를 늘 생각했던 그 생각이 마지막날 받게 될 위로에 비하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의 피로 속죄함을 받아서 주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못 자국 보다도 더 선명하게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 속에 “너는 나의 사랑하는 택한 백성이라”고 하는 흔적을 우리의 가슴 속에 남겨 놓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에 또 다른 제 삼의 길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주님의 것이고 우리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쓰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없습니다. 내게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이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님을 기쁘게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인생에 주인처럼 살다가 노예처럼 죽으실 것입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노예처럼 이 세상을 살다가 마지막에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받는 자녀로 나타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날마다 피 떨어지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주님을 위해서 주님 섬기며,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 외길이 힘들 때에는 주님도 눈물을 흘리고 피 흘리셨던 고난에 길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그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승리하며 주님만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이기며 사는 성도들이 됩시다.
십자가 앞에서 사는 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