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경험하라Ⅱ
(1999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예수님(빌 2:5) 1999.3.29 십자가사경회(새벽) 1
2. 낮아지신 예수님(빌 2:6-7) 1999.3.30 십자가사경회(새벽) 4
3. 복종하신 예수님(빌 2:8) 1999.4.1 십자가사경회(새벽) 7
4. 높아지신 예수님(빌 2:9-11) 1999.4.2 십자가사경회(새벽) 9
1.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예수님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7)
좋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두번째 날 새벽 시간을 맞이하였습니다. 하나님 오늘 이시간에도 우리엑 많은 은혜 내리셔서 저희들이 깨닫도록 도와주시고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 안에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지만 주님 닮은 삶이 가능하다 그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6절서부터 뒷편으로는 그 예수님의 마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이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그랬죠.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이 겸비한 마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랬으니까 이 예수님은 원래 말하자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셨죠.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 그 삼위일체 하나님 영광과 모든 신적 성품에 있어 동일한 분이셨어요. 그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거죠.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아니하시고......무엇 때문에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하게 계실 것을 오히려 거절하시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오셨는가. 그걸 거절하지 않으시면 이 낮은 세상에 내려오실 수 없었죠.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께는 견딜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가난하게 살다가 부자가 되어서 스트레스가 되어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자로 살다가 갑자기 가난해졌기 때문에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죽는 사람들 얘기는 가끔 나옵니다.
언젠가 한번 부자가 빚에 몰려 자살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비참한 이야기죠. 부자가 살가 빚에 몰리고 사업에 몰리니 죽었어요. 죽은 다음 정리를 해보니 40억 빚 때문에 죽었는데, 남은 재산이 50억이에요. 우리 생각에 60억 정리해서 40억 갚고 20억 은행에 넣고 살아도 아무리 적게 받아도 2000만원 정도 이자로 살 수 있었을 텐데.......제가 그랬더니 그 사람이 그러니 당신은 그렇게 가난하게 밖에 못 산다......그러더라구요. 부자들의 마음은 먹고 사는게 문제 아니라, 옛날에 자기가 누린 사업의 번영, 재산 때문에 사람들로 받던 존경 같은 걸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그것이 너무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겠어요. 인간들도 먹고 입고 자는 환경만 바뀌어도 고통스러운데,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듬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신거죠. 자기를 비운거죠. 예수님에게는 두 가지 성품이 있었는데, 완전한 인간의 성품과 완전한 하나님의 성품이 함께 있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 아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셨다고 했으니까 이제 그 분이 하나님이셨지만, 스스로 하나님 되기를 내려놓으시고 인간으로 내려오셨구나,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렇지가 않아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이 말은 분명 이 땅에 오셨을때 초라한 인간 몸을 입으셨을 때도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어요. 그래서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고 고백할 수 있었고 그것이 구원의 중요한 조건이었죠. 그런데 다만 그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얼마나 찬란해요. 얼마나 아름다워. 죄인으로서는 감당치 못할 영광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도 높임을 받아서 많은 사람에게 영광 얻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버려 백성을 대신해 고난 받아 죽기 위해서 오신 거거든요.그러면 예수님에게는 무엇이 필요했냐 하면 그런 삶과 어울리는 형체를 입으시는 것이 필요했어요.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을, 비천해 보이는 인간의 인성으로 감싸셨어요. 그래서 웬만한 사람들이 자기를 하나님으로 알아볼 수 없도록 감추셨어요. 그래서 인간의 성품 속에 하나님의 성품을 가두셔서 웬만한 사람 눈에는 예수님이 단지 한 인간으로만 보이게끔 하셨어요. 왜? 그렇게 하셔야만 자기가 이 세상에 오셔서 해야할 일과 너무나 어울리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햇빛 없으면 살 수 없죠. 그러나 땅 속 두더지를 꺼내 밝은 빛을 보게 만들면 눈이 멀어 버려요.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죠. 망원경이나 그런 것을 사면 거기는 반드시 주의 사항이 써 있어요. 이 렌즈로 태양을 직접보지 마시오. 그래서 태양 관측 망원경에는 캄캄한 필터가 있어 그걸 통해 태양을 보게 되어 있어요. 바로 그거예요. 만일 예수님께서 그 찬란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감추지 않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면, 비참한 죄인들인 우리는 아마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거에요. 그래서 출애굽기 33장 20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 하셨어요. 나를 볼 수 없고, 나를 보고는 살아남을 자가 없느니라. 그게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지존하신 영광이에요. 그 영광과 동일한 영광을 스스로 버리신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도록 빌립보 교회에 얘기하면서 젤 먼저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그 영광을 스스로 버리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종의 형체를 입은 분이셨다. 그걸 먼저 가르치고 싶었던 거예요.
이 신앙의 세계에서는 제자도가 섬김의 제자도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하나님이셨지만, 그 본체 영광을 가리시고 인간 형상을 입으셔서 종과 같이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본 받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교만한 마음은 반드시 커다란 패망과 실패를 가져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아 지신 것처럼, 자신에게 비록 어떤 영광과 비록 어떤 훌륭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주님 앞에 주님의 모본을 보며 낮아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낮아지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그런 삶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교만하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므로 범하는 많은 범죄를 생각해 봐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셨지만, 그 고통가운데 종의 형체를 가지기 까지 낮아지셨어요. 인간이 변하여 벌레가 된다 해도 이런 낮아지심과 비교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러면 왜 그렇게 낮아지셔야 했는가? 어떤 사람이 그런 비유를 들었어요. 커다란 마차가 지나가는데 개미들이 비키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개미가 생각하기를 아 내가 개미라면 내려가 마차가 가까이 오기 때문에 비키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외칠 수 있을 텐데.......하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 자신이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으로 인간들을 바꾸어 놓기 원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형상을 입고 우리의 한 형제로 오셔서 우리에게 참 진리를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죠. 그래서 신앙의 눈으로 그 인간의 비천함을 통해 나타나신 그의 하나님 되심을 읽어내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 생활의 큰 과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마음을 본 받아 낮아지고 겸손해져 섬기는 삶을 살도록 부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이 아침에도 주님의 사랑하는 귀한 백성들이 나왔습니다. 주께서 낮아지신 것처럼 우리도 또한 주 앞에서 낮아지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찬송가 41장
2. 낮아지신 예수님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6-8)
그래서 이제 예수님꼐서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이 종의 형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모양을 입고 오신 것을 의미하는 거죠. 그걸 왜 종의 형체라 표현하셨는고 하니 그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심에도, 인간의 몸을 입으셨는데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종이셨어요. 그건 그 인간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들을 다 인간을 위해 만드셨지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된다 라는 면에서 보면 인간 그 자체가 종이였단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본체이시고 관계에 있어서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인간의 형상을 입으심으로,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 갖는, 종으로서의 그 모양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종 된 생애였습니다. 하나님의 종이었을 뿐 아니라 마치 우리를 섬기기 위해 오신 듯 종 된 생애를 사셨다는 점에서 사도가 깊이 감탄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자신을 표현함에 있어 그리스도의 종이라 표현했잖아요. 그렇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뵈면서 신앙의 눈이 없는 사람들은 그저 있는 대로 볼 뿐이에요. 그는 인간일 뿐이고 그저 종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종 된 생애를 사셨으니까 그 분의 생에 있어서는 무엇인가 괄목할 만하고 두드러진 것이 있어 우리 시선을 끌기에 중요한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믿음의 눈으로 그분을 보게 되고, 그분이 왜 하나님이시면서도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몸으로 내려오셨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분이 종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그분은 만유의 주시며, 인간의 형체를 입으셨으나, 그분은 우리의 섬김을 받아 마땅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며 그분 앞에 자기가 종 된 삶을 고백하는 것이죠. 이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 그렇게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사신 생애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어요. 그 생애는 세가지 단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가 설명되는데, 자기를 낮추신 생애였고 복종하신 생애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생애였어요. 겸비와 복종과 정사.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말을 한자말로 간단히 줄이면 정사가 됩니다. 못박힐 정자. 그래서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낮아지신 생애였어요. 자신을 한 없이 낮추신 생애였죠.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도 자기를 낮추신 것이지만, 자신이 하나님과 본체이시지만 인간 형상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온 것으로써 그분의 낮아지심이 끝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더 낮아져야 하는 그러한 삶을 사셨어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것 만으로도, 오셔서도 만일 이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요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고 참을 수 없는 낮아지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인간으로서 낮아지셨을 뿐 아니라 오셔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사셨어요.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고 즐기고 누리는 그 이하의 삶을 사셨어요. 그분의 생애는 늘 평안이 없고, 원수에게 시달리고 대적자에게 고난을 받는 그런 삶이셨습니다. 무엇하나 취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고, 그 분의 생애는 우리를 위해 종처럼 낮아지신 생애였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는 사람들은 비로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분의 고난받은 형상을 보면서 자신이 깊이 하나님 앞에 낮아지는 것을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 수도 없고 또 안 적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그 분이 그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사셨던 생애는 이렇게 자신을 낮추신 생애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개를 들고 걸어다니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사람들에게 잘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생애 자체가 이렇게 자기를 낮춘 겸비한 생애였기 때문에 그 겸비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십자가가 보여요.
그래서 은혜 받을 때쯤 되면 말이죠 조짐이 보여요. 그 조짐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겸비함이에요. 은혜 받을 때 우리의 마음의 상태의 특징은 마음이 하나님 앞에 한 없이 가난해 지는 것이에요. 가난하다는 것은 낮아지는 겁니다. 누가 나를 도와줘도 나는 그 도움을 받고 싶다, 라고 하는 낮아진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깊이 낮아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신다구요.
이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 생애를 사신 생애가 겸비하신 삶이었기 때문에 주와 함께 겸비해지는 사람들이 보이는 거죠. 그런데 이제 은혜로부터 멀어질 때 우리가 교만해지지요. 교만해 지니 분수를 몰라요. 예전에는 하나님께 제가 정말 쓸모없는 죄인입니다. 주님이 나를 거두어주신 것 만으로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당신의 자녀로 삼아서 주님 믿게 해주신 것만으로 저는 참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런 고백이 사라지는 거예요. 그러니 십자가의 감격 같은 것들은 교만한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거예요. 삶 속에서 주님의 정신은 보이지 않고, 주님 정신의 지배를 받는 것도 없는 거죠.
오늘 사도 바울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마음,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는 저 사람이 훨씬 낫다 라는 고백이 사라지는 거죠.
두 번째로는 복종하신 생애였습니다. 이 복종이라는 단어는 뭔가 강제적인 것을 보여주잖아요.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을 사시면서 저절로 복종하신 생애를 사신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도 끊임없이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자신을 복종하신 생애를 사신 것이에요. 그래서 중세 수도사들의 최고의 계율은 복종이에요. 위로는 하나님께 자기를 쳐서 철저히 복종, 수도원에서는 수도원 지도자들에게 복종, 그런 관계를 이뤄가는 거죠. 예수그리스도께서 복종의 생애를 사셨다는 것도 크게 나누어보면 하나님을 향한 복종이고 자신을 향한 복종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복종시켜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도구로 인생을 살게 하신 것과 또 하나는 끊임없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자신을 복종시켜서 자기 중심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의 생각을 택하며 살아가신 생애입니다. 그 복종의 마지막 장면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며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다가 결국 복종하시는 장면을 봅니다. 이런 예수님의 생애가 지상 생애 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무엇때문입니까? 그렇게 한없이 낮아지고 복종한 생애를 사셨는데, 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복 주시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예수께서 이 지상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었기 때문이었죠.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축복보다 더 소중한 것은 사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세상에서 복 누리고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복종하신 예수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어제 새벽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의 지상생애는 세 단어로 요약된다 말씀 드렸습니다. 겸비, 복종, 죽음.
예수님의 생애는 그 겸비와 복종의 마지막은 죽으심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예수님의 그 죽음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그랬습니다.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셨으니 모두 다른 인간과 동일하게. 인간의 약점들을 스스로 담당하셨죠.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죄로 말미암아 죽게 마련이죠.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이었거든요. 그래서 죽으셔야 했다는 것도 예수님께는 굉장히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스런 일이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십자가라는 말을 첨부함으로 예수님의 죽음이 다른 인간들의 모든 자연적 죽음과는 달리 인위적인 죽음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 의해 형벌을 받아 죽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죽는 모든 것이 다 비참하지만, 영광스런 죽음이 있고 수치스런 죽음이 있죠. 영광스런 죽음도 있을 수 있어요. 나라를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죽는다던가, 자연적으로 죽었지만, 수많은 사람의 애도 속에 죽는다던지.....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신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이었어요. 그리고 그 십자가는 당시에 죄 있는 자들을 형벌하는 그런 구체적인 사형 방법이었어요. 그 당시 이 십자가 형벌은 로마 사람들이 입에도 올리기 싫어하는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경에서 십자가라는 말을 들을 때 드는 느낌과는 다른 느낌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질병이 무엇일까요? 어떤 죽음을 가장 무섭게 생각할까요? 제 생각에는 여러 가지 죽음이 많이 있지만 아마 나이든 성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은 아주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만드는 암 같은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번 대입시켜 생각해보세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그 마지막에 그 단말마적으로 울부짖으며 죽어가야하는 그런 암에 걸려 죽는다 생각해보세요.
저의 사돈 어른 한 분이 암에 걸려 돌아가셨는데, 밤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굉장히 말이 없으신 분인데 소리 소리 지르며 얘들아 얘들아 누가 내 다리 뜯어 간다......얼마나 고통스러우면 그러시겠어요. 그런 죽음을 죽는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수치스러운 죽음이었어요. 십자가는 다 훨씬 공포스럽고 치욕스러움이 더했어요. 그건 죄인으로서 죽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죠. 그런 끔찍한 형벌.....우리 나라에 비유하자면 육시를 한다고 하잖아요. 몸을 쪼가리 쪼가리 소에게 매달아서 찢어 죽이는...그런 거라고 생각해보세요. 우리들이 오늘 날 십자가, 할 때 그런 고마운 십자가 개념이 당시에는 아니었어요. 겸비하게 하늘 영광 버리고 오시고 낮아진 생애를 사시고 철저히 자신을 복종시킨 생애를 사셨는데, 그 마지막이 그렇게 끔찍하고 수치스럽게 죽으신 것이 생애 마지막 장면이었죠. 여기서 우리는 결국 예수님의 그 모든 지상의 생애가 한 꼭지점을 향해서 달려오고 올라오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건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죽으심은 바로 형벌받아 마땅한 우리 죄인들을 위해 못박히신 그런 종류의 십자가였다, 그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죽어가시는 그 끔찍한 형벌의 이유가 바로 우리가 지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럴때 그 예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뭐 하늘 영광 버리고 겸비하게 사시고 복종하시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어느 한 목표로 가기 위한 과정이에요. 그리고 마지막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이었다는 것이죠.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최종적으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버리는 그 고난과 희생의 마음, 하나님께 순종하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사랑이 동기가 되어 자신을 십자가에 매다시는 그 끔찍한 고난, 그것을 가능케 한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십자가의 피로 구원 받은 우리도 품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의 사명이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는 것이 마지막 사명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지막 사명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구원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우리를 향한 마지막 사명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렇게 하늘 영광을 버리는, 낮고 천한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겸비함. 매일 매일 삶 속에서 아버지 뜻에 자기를 굴복시키는 복종함. 이런 것들롤 일생을 다 살고 나면 그 때 비로소 하나님께거 우리 인생에게 주신 최종 사명이 완성되는 겁니다. 이런 복종 순종 자기 부인 자기 낮아짐의 과정없이는 결코 우리 인생의 사명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루어질 수도 없어요. 기도하겠습니다.
4. 높아지신 예수님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이름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여기서는 이제 예수님의 낮아지심이 아니라 높아지심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란 말은 앞에 이야기와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계속 예수님께서 낮아지신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것, 그리고 겸비한 인생을 사시고 복종하는 인생을 사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생애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그랬죠. 예수그리스도께서 한 없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한없이 낮아져 겸비하고 복종하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인생을 다 살고 나니 하나님이 그 분을 지극히 높이시는 일들이 일어났어요.
이것은 예수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에요. 물론 그 분을 주라 만드신 예수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지만 낮아질 때 다 낮아지고 나면 주님이 우리를 높이신다고 하는 것은 너무 분명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당하신 고난과 우리를 위해 겸비하고 복종하고 죽으신 생애도 참 견디기 힘든 치욕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인간이 더러운 죄인으로 동등하거나 혹은 자기 보다 못한 사람앞에서 낮아지는 것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하나님이시고 만유 주시며 모든 만물의 경배를 한 몸에 받으셔야할 그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렇게 낮아지시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겸비하고 복종하는 인생을 사시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생명되신 그 분이 생명이신 자신을 드려 죽음에 복종시키신 이 일은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이러므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이름을 지극히 높여 만물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주님, 아도나이, 이렇게 부르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호칭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신약시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면 그 주님이라는, 여호와 하나님께만 적용되던 그 명칭이 예수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어요. 이것이 지극히 자기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구원 계획을 위해 한 없이 낮아지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갚아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보상이었어요. 이런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 받으면서 살 때에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높이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신자의 삶은 겸비와 복종과 죽음의 삶이에요. 순간 순간 낮아지기를 거부하는 자신과 더불어 깊이 싸우면서 낮아지는 방법을 배워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고통스럽고 힘들게 느껴질 적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어떻게 낮아지셨는지를 배워나가야 해요. 자기를 복종시키는 것이 너무 힘겹게 느껴질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복종의 생애를 사셨는지 생각해야 되요.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철저한 자기 복종의 생애를 사신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마치 당신의 외아들을 하늘 영광을 버리고 비천하고 더러운 인간의 형상을 입게 하시면서 이 세상에 보내신 이후로 예수님의 인생은 없는 것처럼 자기의 외아들을 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이 기쁘게 하나님과 교통하며 자기 길을 걸어갈 수 있으셨던 것은,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라는 철저한 자기 복종의 생애였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가능했습니다.
주님께서 엎드리신 자리에 엎드리고 주님이 죽으신 자리에 죽도록 그렇게 부르신 사람들이 우리 주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에요. 주님이 그 모본을 보여주셨을 때. 그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인생이었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러므로’라고 말씀하십니다. 다 낮아진 후에 높아집니다. 완전한 복종의 인생을 산 후에 주님이 이제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 권세로 자기의 이름을 주라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상황이 되셨습니다. 자기를 죽음에 내어주셔서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죽으신 그 후에 비로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이름을 한없이 높이셔서 자기를 거치는 자들과 자기에게 대적하는 많은 사람들을 영광가운데 심판하러 오실 수 있는 그 권리를 그분에게 주셨고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하며 그 애정으로 주님의 뒤를 따라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권세를 아울러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그 분을 따르고 그 보혈 은혜에 감격하면서도 정말 우리가 그 분의 뒤를 따르는 데는 얼마나 인색한지 몰라요. 주님의 십자가에는 감격하지만, 주님처럼 죽으려 하지 않고, 고난에 넘치는 그분의 지상 생애를 생각하며 눈물 흘리지만 주님 처럼 자기 복종하는 삶을 살려고 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한없이 복종과 겸비함으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죽음으로까지 낮아지셨을 때 그 분을 반드시 높이셨던 하나님이 오늘도 예수와 같이 낮아지는 그 사람들을 불러서 예수님과 같이 높여주시는 그 일을 하는 것이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지극히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에서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능하신 팔아래 낮아지도록 우리를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약속을 주기를 때가 되면 하나님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우리는 낮아지고 주님은 높아지시고 우리는 멸시와 천대의 길을 걸어가도 주님은 우리 가운데 영광과 경배를 받아시기를 원하는 마음이 항상 우리 속의 진실한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오리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만약 우리들이 그렇게 주님의 이름만 높이고 자랑하기 위해 겸비와 복종과 마지막에는 자기드림의 인생을 다 산다면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 인생 끝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지불한 그 겸비와 복종의 생애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큰 상급으로 우리를 갚으셔서 우리를 높여주시리라고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살 때 뿐 아니라 죽은 후에도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주님, 오늘 이 새벽에 우리의 거친 마음 가운데 오시옵소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우리 내면의 모든 것들이 주님의 보좌로부터 들리는 그 음성에 복종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거치는 것들과 주님을 거스려 살려고 하는 본성과 주긱까지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려는 사악하고 방종한 고집이 우리에게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시옵소서. 그리스도시여, 우리의 마음에 손을 내미시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삶 구석 구석에 못자국난 그 피묻은 손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그리스도 예수의 그 고난의 의미를 새김으로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들을 물리치게 해 주시옵소서. 경배할 줄 모르는 우리의 교만한 자아와 하나님 앞에 거치는 삶을 살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우리의 거칠기 짝이 없는 마음을 비둘기와 같이 온유한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매 순간 우리를 위해 주님이 어떻게 겸비한 인생을 사셨고 복종하는 삶을 사셨으며 마지막에는 자기를 복종시킨 그 삶을 십자가에서 못 박으심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는지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고난을 받을 때나 시험을 당할 때나 주님이 우리에게 희망이 되게 하옵시고 이기고 견딜 때나 넘어졌을 때나 용납하시고 우리를 다시 세우시는, 주님이 우리에게 희망이 되게 해주시기를 비옵나이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에도 기도하오니 우리도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주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 시민권이 아버지 나라에 있음을 알고, 수년을 살아도 영원에 잇대어 살고 잠시를 살아도 영원히 살 사람처럼 그렇게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의 십자가가 그 십자가의 정신이 우리의 온 삶을지배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저희들이 살아갈 모든 삶이 충성스럽게 그리스도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고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엎어져 깨어졌지만 일어나서 변함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삶이 되도록 도와주셔서 우리 생이 마감하는 날 우리를 붙들고 인도하신 주님과 우리 앞서 우리 인생길에 모본 되신 예수그리스도와 우리를 부르신 아버지 하나님 성삼위 하나님이 우리의 찬송제목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십자가를 경험하라 Ⅱ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