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시리즈Ⅱ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그리스도의 낮아지심(눅2:7) 2001.12.16 주일오전 1
2. 화목제물 되시려고 오신 예수님(요일4:10下) 2001.12.23 주일오전 14
3. 귀한 동리가 된 베들레헴(마2:6上) 2001.12.31 주일오후 30
4. 화목 제물로 오신 것은(요일4:11) 2001.12.25 성탄절 36
1.그리스도의 낮아지심
“맏아들을 낳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더라”(눅2:7)
이번 주부터 몇 차례에 걸쳐서 아기 예수의 오심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본문은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이지만 오늘 성경은 가이사 아구스도의 이야기부터 시작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온 세계를 다스리고 있던 당시의 로마 제국이 정치적으로 역사적으로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설명함으로서 아기 예수의 태어난 이 사건이 단순한 사람의 출생이 아니라 우주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아기의 한 출생으로 로마 제국을 흔들어놓을 것임을 암시하듯이 역사적인 상황을 거창하게 소개한 후에 말구유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주적으로 큰 영향을 끼쳐서 전 세계의 역사를 뒤바꿔놓을 분치고는 그분의 탄생은 정말 초라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낳으심을 중심으로 비포 크라이스트 예수 오기 이전 BC와 아노도미니 주님의 시대라고 이름되는 AD로 나뉘어지는데 그 신기원을 세우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분처럼 이 세상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분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출생은 매우 초라하게 보도되고 있습니다. 거친 강보에 쌓여서 구유 위에 뉘이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쌓던 이 한 조각의 거친 강보가 가난한 사람들의 물건이었음을 금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친 강보는 바로 흠도 티도 없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펼쳐질 일생의 험난한 길을 예고하는 한 예고편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거친 강보에 쌓여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강보 한 조각,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얼마나 낮아지는 생애였을지 보여주고 그 낮아짐을 통해서 결국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자기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보며 이 성탄절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탄절과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성탄절이 어떻게 다른 지도 가슴에 새겨서 복음의 대한 감격을 우리 속에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주님의 낮아지심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제일먼저 주님의 낮아지심은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과 본체이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할 때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온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 의해서 창조되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후에 계시된 이름이지만 성자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창조 사역에 참여하셨고 그분에 의해서 이 세상은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구약에서 ‘하나님’ 혹은 ‘여호와’라고 불리시는 바로 그분이었으며 그래서 그분은 위엄과 영광에 있어서 성부 성령과 함께 동일하신 분이셨으며 세 인격이지만 그러나 그 삼위는 모두 일체이신 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 성자를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내려오게끔 하신 것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사건이었으며 이전에는 하나님이 더 이상 자기를 낮추신 적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낮아지신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하는 그분이 시간 속에 오셨으며 공간을 초월하신 그분이 공간 속에 오셨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그분이 자기의 창조하신 그 세계 속에 오셔서 모든 위엄을 오히려 포기하시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연약함에 자기를 복종시켰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또한 동시에 그분은 사람이 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되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그렇게 해야지 만 그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실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죽음이 없고 죽음을 경험할 수도 없으며 죽는 일이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죽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죄 없이 완전한 사람일지라도 사람이면 죽는 일이 가능했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탄절을 넓은 의미에서는 물론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 인간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여셨으니까 참 기쁘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세상 사람들처럼 명절과 축제의 분위기에 성탄절을 지내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복음의 정신과는 거리가 좀 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성탄절이 교회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게 중요한 절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부활절이 훨씬 더 중요한 절기였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헌금을 해도 성탄절보다 부활절을 훨씬 더 많이 합니다. 그만큼 성탄절보다는 부활절이 훨씬 더 중요한 절기이고 그리고 교회 역사에서 성탄절을 생각이 있는 교회들은 그렇게 막 치장을 하고 요란을 떨면서 이방인의 명절처럼 그렇게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부탁하는 것은 이 성탄절에 주님이 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야 했는가. 어떤 점에서 주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아기 예수로 오신 것이 기뻐 찬송할 이유가 되고 어떤 점에서 눈물을 흘려야 할 이유가 되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복음에 전체적인 구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생각한다면 나는 이 성탄절만큼 복음의 진실한 의미에 접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늘 교회에서 복음이 선포되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분의 성육신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여러분의 새롭게 할 수 있는 그런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 했던 이유는 죽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면서 까지 이 세상에 오셔서 죽어야 했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이 세상을 모두 창조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지만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 과일 하나를 따먹은 것이 무슨 손해를 그렇게 끼쳤는가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논리를 가지고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알고 싶었던 것은 인간에게 창조의 근본적인 목적을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복종하며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고 후자로서 인간이 판명되었을 때 그것은 선악과 하나를 따먹은 것이었지만 의미 그 자체는 하나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고 그리고 그것은 창조의 목적과는 전혀 거리가 먼 오히려 인간이 창조된 목적에 반항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죄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들이 타락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과 개인으로서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 앞에 시험받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키라고 명령하신 그 명령을 잘 지켜서 인간의 본분을 지켰더라면 우리는 그 시험을 받지 않아도 순종한 우리 조상과 함께 한없는 영생의 복락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조건은 하나님이 금하신 실과를 따먹지 말고 순종하라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것을 어기면 반드시 죽게 된다는 형벌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실패했고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언약의 연대 속에서 조상들과 함께 우리 모두가 함께 그 죄의 빚을 진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할 한 죄가 된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된 그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범죄하고 타락하게 되자 인간 세상 속에는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죄는 강력한 세력이 되어서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었고 이제는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마음보다는 세상의 죄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마음이 편만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은 그렇게 타고나면서부터 부패한 성품들을 가질 수 있도록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런 죄에 대한 책임과 그리고 부패한 성품들이 함께 역사 하면서 인간들은 살아가면서 죄를 짓게 되었고 그 죄는 끊임없이 자기를 더럽혀서 더더욱 죄 가운데 얽매어 살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게 만들었고 그리고 그렇게 죄 가운데 얽매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향해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한 후에 즉시 심판하셔야 마땅했지만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즉시 죽여버리셨다면 하나님의 창조는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유해하셨고 그래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으로 태어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누리며 하나님을 향해 돌이킬 기회를 얻게 되었고 그리고 이 세상에 살면서 각기 인간의 문화와 문명을 건설하며 살수 있는 그런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 인간이 하나님 앞에 그 죄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성취하시면 그는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피 흘리는 심판이 그 죄에 이어서 잇따라야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무리 아름답게 만드신 세상, 주님이 창조하신 귀한 온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에 피 흘리고 죽어간 인간들의 시체가 가득하고 단 한사람도 이 세상에 살아있지 않다고 한다면 주님의 창조의 영광이 어디에 있겠으며 주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 무슨 의미를 하나님이 발견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범죄하고 죽음밖에는 기다릴 것이 없는 그 인간들,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자로 태어나는 그 인간들을 구원할 계획을 가지고 이 세상에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게 하시려고 하나님이신 그분을 사람의 몸을 입게 하셔서 이 세상에 내려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탄절은 바로 그 날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그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 날입니다. 우리에게는 기쁨과 그리고 우리에게는 가슴 벅찬 감격의 날입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이 열렸고 숙명적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주님의 진노 아래 원수 된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고 하나님과 화해를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활짝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보거나 혹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성탄절은 마냥 기쁜 날일 수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보내시는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 그분은 참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자기의 외아들에게 입혀주실 때에 그것은 자기의 외아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사람의 성품 밑에 감추셔서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한계와 연약함을 함께 경험하고 율법 아래서 복종을 배우면서 사시도록 하겠다는 한 표였으니 이 어찌 하나님 아버지에게는 가슴아픈 날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인데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것은 또한 얼마나 가슴아픈 경험입니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그래서 일생을 사람들과 함께 지내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을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하나님이셨지만 오늘 거친 강보에 싸여서 차가운 말구유 위에 누이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은 곧 하나님이 사람처럼 사셔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며 사람들이 복종해야 하는 율법 아래 모든 고통과 금생에 비참함에 자기를 낮추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예수님에게는 사람의 몸을 입으시는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흔히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인간으로서 일생을 사셨기 때문에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셨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셨습니다. 죄를 알지 못하는 분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육체를 입으심에 있어서도 인간의 자연적인 출생의 방법을 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마리아 동정녀의 몸에 성육신으로 잉태하게 하셔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는 동시에 인간의 내재되는 죄로부터는 자유로운 완전한 참 사람인 동시에 또한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신 그분으로 이 세상에 오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일생을 사시면서 이 세상에서 당신이 하나님임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감추시고 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사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낮아지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들이 스스로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직접 하나님을 떠난 그 인간들을 찾아오시기 위해서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들과 함께 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낮아지심에 첫 번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선교 적인 삶이 어떠해야 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하늘 위에서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죄인의 모양으로 사람의 형체를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죄인들이 있는 곳에 오셔서 죄인들 속에서 그 죄인 된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성 인신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더 분명히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더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옛날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물론 그분은 보여주실 수도 또한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순결한 영이시지 물질이나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어떤 형체나 모양도 없으셨습니다. 겨우 구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기적과 전쟁에서의 승리, 놀라운 역사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특별히 대우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막연하나마 그 속에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 이제 하나님의 사랑은 보이는 사랑이 되었습니다. 느끼는 사랑이 아니라 이제는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볼 수 있었고 만질 수 있었고 그리고 더듬어 알 수 있는 그런 실체를 갖춘 사랑으로 이 세상 속에 내려오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죄인들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원하셨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인들과는 쉽게 상대하실 수 없는 분이셨고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하나님이라고 느꼈지만 그러나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분이 죄 없으신 분으로서 죄인들 가운데 함께 한 형제로 계셨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교제를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바로 죄인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삶의 한복판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깊이 더듬어 알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크고 작은 인생의 일들에 간섭하시며 그 영혼들을 돌보신 것을 보면서 예수님은 너무나 스케일이 크시기 때문에 인간의 사소한 일에는 간섭하지 않으시고 이 많은 문제들은 결국 하나님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고 하는 선입견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예수님께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여위고 슬퍼하는 사람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사람을 보며 나사렛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예수님을 보면서 슬픔에 잠긴 인간들, 믿음이 없는 인간들을 인해서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양떼를 인해서 두 눈에 맺히는 예수님의 이슬을 보면서 하나님이 당신을 멀리 떠나 방황하는 인간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모두 찾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의료 혜택도 없던 때에 눈먼 자와 저는 자, 앉은뱅이 된 자와 문둥병으로 온 몸이 하얗게 변해서 사람들에게조차 버림을 받은 그들에게까지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의 헌데를 어루만지시며 고쳐주시고 그들을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죄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주님이 그 죄인들을 부르시고 자기와 같은 소망 없는 인간도 하나님은 치료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소망을 갖게 만들어주시는 것도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내려오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역사를 통해서 기적을 통해서 전쟁을 통해서 차가운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서 주님 자신이 아버지의 사랑의 화신이 되셔서 우리에게 그 하나님의 사랑을 만지게 해주고 느끼게 해주고 보여주고 그리고 그 사랑의 채취를 맡게끔 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고통과 결핍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주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내려오신 그 사랑의 의미를 모두 알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이 되신 그 사연도 알지 못하고 그리고 그 사랑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렇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보이는 사랑의 화신으로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수치스럽게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 도성 인신, 성육신의 이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주님의 그 성육신의 교리가 우리보고는 어떻게 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꼭 같습니다. 하나님이 구약 시대에 아무리 위대한 일을 행하시고 전쟁에서의 승리를 안겨주시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적을 베풀어주셨을지라도 예수님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낯설었던 것처럼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 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여시고 예수님이 일생을 이 세상에서 인간을 사랑하다가 가신 흔적이 성경에 가득 해도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찬송에서 말한바와 같이 ‘저 죄악 세상 사람 주 오심 모르나’ 그렇지만 주 믿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하나님이신 데도 당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죄와 슬픔이 가득 찬 죄인들의 세상에 오셨던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로서 이런 도성 인신의 정신을 가지고 고통 하는 세상에 내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예수님처럼 그들이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만질 수 있게끔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최고의 섬김입니다. 이것으로서 충분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사실,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사건은 아주 우리에게 웅변적으로 말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참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으로 내려가서,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이 세상으로 내려가서 그래서 사람들이 막연히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던 것들을 분명하게 가르쳐주는데 아주 강포 한 하나님, 그리고 부도덕한 하나님, 그리고 이기심으로 가득 찬 하나님, 그리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양보하지 않고 투쟁하는 아주 그런 모순된 하나님을 잘못된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엇이 없기 때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도성 인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하늘에서 천군과 천사들과 성도들의 찬양소리를 한 몸에 받으시는 그 영광 중 단 하나도 포기하기를 거절하셨다면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실 수가 있습니까? 자기가 창조하신 그 세상에 뉘일 곳이 없어서 구유에 누이시고 그리고 거친 보자기에 쌓여서 그 추운 날에 마구간에서 지내셔야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이 되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죄인들이 있는 이 세상에서 겸손하고 낮아진다고 할지라도 그 낮아진 것이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되신 것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 그런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비참함을 맛보신 것, 그것만해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그 고난 그것까지 계산에 넣지 않더라도 예수님이 율법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셔서 결핍과 고통 속에서 가난을 벗삼아 사신 그것 자체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한없는 낮아지심이었습니다.
언젠가 우리 나라 일각에서 일본에서 살고 있는 왕손, 왕가의 사람들을 대한제국에 그대로 있었다면 왕이 되었을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그래서 왕가를 이 나라에 정착하게 하는 운동을 일각에서 벌인 적이 있습니다. 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때 필요한 것은 나라에서 그것을 인정해줄 리가 없으니까 뜻 있는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그분들을 모시는 운동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어느 잡지에서 읽어보니까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이런 정도의 돈이 필요하다. 상당히 큰 액수의 돈이었는데 그 중에서 나오는 게 집은 이 정도의 집이어야 하고, 그리고 차는 이 정도가 되어야 한다. 사실 지금 그분들이 그런 여유 있는 생활을 하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런데 몇 억 짜리 차가 견적으로 올라왔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말하자면 왕가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이미 대한제국은 존재하지도 않고 이씨 문중도 문을 닫은 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왕가와 왕손에 대해서 그리움을 갖는 백성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 망해버린 나라의 왕이 와서 옛날의 왕손이었다고 하는 그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많은 세상의 부가 필요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 세상의 왕이셨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도 예수님의 왕 되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뉘이실 곳이 없어서 구유에 뉘이셨고 그리고 갓난아기임에도 불구하고 거친 보자기에 쌓여서 추위를 피하셔야 했습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생애가 고난으로 가득 찬 생애가 될 것임을 이미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이신 그분이 율법 아래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요구에 복종하셔서 죽으셔야 되었으니 이 얼마나 커다란 치욕이었겠습니까? 죽으시기 전까지 예수님의 생애는 가난과 결핍으로 가득 찬 생애였고 세상의 부귀와 영화와는 거리가 먼 삶을 30년 동안 사셨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그 일을 거들면서 그렇게 성장하셨고 세상의 부, 그리고 영화와는 관계가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공적인 생애에 들어서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번의 기도로 수많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었지만 한번도 그 능력을 자기의 배부름을 위해서는 사용하신 적이 없었고 자기의 식탁을 위해서 그 기적의 기도를 사용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시장하시면 무화과나무 열매라도 먹어볼까 해서 무화과나무를 뒤져보셔야 했던 그런 삶을 예수님께서 사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삶은 가난하고 그리고 결핍한 삶이었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낮아지고 그렇게 가난해지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부요 한 사람들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많이 사랑하시고 여러분들은 주님의 자녀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고 행복하게 살기를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분에 넘치는 축복을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서 입고 먹고 마시고 누리면서 살게끔 만들어주십니다. 그런 것들을 누리면서 사는 것은 죄도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주님이 여러분들을 많이 축복해주시면 너무 궁상떨지 말고 조금 더 넓은 집에서 사십시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많이 축복해주시면 그러면 여러분은 조금 더 따뜻하고 좋은 옷을 입으십시오. 거친 음식보다 조금 더 나은 음식을 들어서 여러분들의 건강을 보호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넉넉히 많이 주시면 여러분들이 조금 더 삶을 평안하게 살아가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항상 그 속에 경건한 긴장을 유지하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결핍과 가난 속에서 사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녀들이 그것들을 누리면서 사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항상 그 일에 있어서 지나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주님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이 세상에서 만족을 누리는 것을 경계해야 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 세상이 행복하고 그리고 만족스럽게 되는 것에 대해서 아주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생애, 예수님이 결핍과 가난 속에 사신 것을 보면서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주시는 많은 부를 통해서 우리가 누리면서 살기보다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나누어주심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오히려 부유하게 하고 자신은 가난해지셨던 것처럼 그런 정신으로 사는 것이 바로 예수의 정신으로 이 세대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바와 같이 부요 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가난해지신 것은 가난한 우리를 부요 하게 하기 위해서 가난해지셨다고 예수님의 그 가난하게 되심을 그렇게 술회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들을 적절하게 누리면서 사는 것은 커다란 죄가 아닙니다. 소득이 많은 사람이 조금 여유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정죄 받고 돌 맞아야 할 죄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 마음속에 이런 경건한 긴장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요 하게 하시기 위해서 가난해지셨는데 그 긴장을 항상 우리 속에 유지해서 주님을 잃어버릴 정도로 이 세상을 사랑하고 주님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이 세상의 부에 탐닉하는 그런 삶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것이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그 도성 인신의 정신에 먹칠을 하는 것이며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서는 이 세상에 내려갈 수도 없고 내려가서 예수님의 향기를 풍기는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들이 될 수 없고 그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느낄 수가 없는 그런 죽은 신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의 것 없이 일생을 사신 정신들을 우리들이 물려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이 주님이 주신 것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가난의 정신을 본받아서 다른 사람을 부요 하게 하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 다른 사람들을 여유 있게 하기 위해서 오히려 결핍을 택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는 경제적으로도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고 경건한 지체들 가운데도 경제적인 문제로 고통을 받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등록금 고지서를 받고 한숨을 쉬는 어린 학생들부터 시작을 해서 사업에 실직하고 실직의 상태로 끼니걱정을 하는 지체도 있고 병상에 누워있으면서도 적절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해서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는 한 모금의 물과 그리고 한 줌의 떡이 항상 하나님의 응답으로부터 오는 것이 경험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생애는 당신을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보는 섬김으로 가득 찬 생애였습니다. 그분은 죄인들의 친구였고 가난한 자들의 이웃이었으며 그분의 생애 전체는 고통받는 사람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사신 생애였습니다. 그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었고 그분은 당신의 것을 우리가 누리면서 사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우리의 마음은 너무 이 세상의 부에 익숙해져있고 많은 것들을 누리면서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래서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신 예수의 뒤를 따르는 기쁨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그 고통이 훨씬 크게 우리의 가슴에 밀려올 정도로 변질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부한 삶은 영혼의 고통이고, 분에 넘치는 영화를 누리면서 제물을 움켜쥐고 사는 삶은 반드시 그 영혼으로 하여금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전 생에는 가난했지만 하나님 자신의 생명으로 넘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보다 훨씬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셨으며 예수님이 훨씬 더 가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보다 덜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셨으며 당신이 훨씬 더 고통을 받으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 와서 고통 받기 때문에 위로를 받았던 사람들 중에 예수님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도 더 많이 고통 받으시면서 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셨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아 십자가에 매달리시면서 사람들을 가슴에 끌어안으신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이 기독교 신앙은 말의 신앙이 아닙니다. 단순한 신념의 신앙이 아닙니다.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삶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말만하고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들은바 대로 살고 말하는 대로 보여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만 이 세상이 겨우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목매는 사랑에 대해서 우리를 보고 겨우 더듬어 알게 됩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돌처럼 강퍅하고 그래서 복음을 전해도 돌아오지 않지만 누군가가 그들에게 듣는 복음이 아니라 만질 수 있는 복음을 그들에게 누군가가 그들에게 만질 수 있는 그 사람 자신이 그들에게 만져질 수 있는 복음이 된다면 누군가가 그들에게 이렇게 맛볼 수 있는 그 복음 그 자체가 된다면 볼 수 있는 복음이 된다면 다시 말하면 복음이 우리를 통해서 도성 인신을 한다면 아마 이 세상은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며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예수님의 사랑에 눈물을 흘리며 돌아오는 죄인들로 교회는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예수의 삶이 있습니까?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가난과 결핍 속에 사시면서 낮아지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처럼 완전하고 온전할 수는 없어도 그분의 삶을 흉내 내면서 살아갈 소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낮아지심의 극치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것입니다. 빌라도의 뜰 앞에 서서 혹독한 심문을 받으시고 헤롯과 빌라도의 뜰을 다시 오가시면서 예수님은 나라를 반역하기 위해서 반기를 든 역적들이나 받으시는 모욕과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 사형을 언도했던 헤롯의 아내도 밤새도록 괴로워하면서 그 사람이 의인이오, 올바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그분이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하신 그분의 하신 일은 정말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혹세에 문 인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그 일은 진리를 가르치고 사랑의 참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 당신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셨으며 사람들이 더듬어 알 수 없는 희미한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피 흘리는 당신의 삶으로 눈물을 펑펑 쏟는 자신의 생애로 땀으로 범벅된 그분 자신의 생활로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죄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온 몸을 불살라서 하나님의 사랑에 화신이 되셨던 것은 그 분이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형제들로서 하나님과 원수를 맺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너무나 불쌍하셨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을 향한 연민은 그 분으로 하여금 새벽에 일어나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만들었고 주님을 떠나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절망적인 죄인들을 향한 아픔 때문에 그는 밤잠을 이루실 수가 없어 깊은 밤을 통곡과 눈물로 보내시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먹이시고 주린 자를 배부르게 하셨고 헐벗은 자들을 입히셨습니다. 가족들조차도 버린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동무가 되어주셨고 이 세상에 죄인으로 낙인찍힌 걸레와 같은 인간들에게 찾아가셔서 그들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시며 그들을 자기의 품에 안아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그들의 마음에 감화를 주셨습니다. 그분이 가는 곳에 빛이 있었고 그분이 가는 곳에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이 있었습니다. 병든 자들과 고통받는 자들은 비로소 친구를 만났고 그분의 넓은 품안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그분이 이 세상을 위해 무슨 나쁜 일을 하셨기에 세상은 그분을 미워했습니까? 그리고 왜 빌라도는 그분에게 사형 받아 마땅하다고 하는 불법한 언도를 내려야 했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안 모든 사람들은 항상 그분 마음속에 예수 죽인 것에 대한 가책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결국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을 위한 지혜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못박은 것도 아니고 로마 병정들이 못 박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택하신 도구일 뿐이고 만약에 우리가 죄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인으로 이 세상에 살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까? 결국 우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주범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준 빌라도와 그 하수인들은 우리의 주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보면서
그 형상 볼 때 내 마음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십자가를 보면서 거기서 우리는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우리를 이렇게 주님의 자녀로 높이시기 위해서 당신은 얼마나 낮아지시게 되었는지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라도 아들이 십자가에서 우리 인간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죽어 가는 형벌을 차마 보실 수 없어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는 그 때에는 온 하늘에 어두움이 가득했고 그리고 그 어두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울부짖으며 고난의 형벌을 감당하셔야 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생각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살을 찢는 고통 속에도 주님의 관심은 당신의 고통과 죽음이 아니라 자기를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형벌 받을 죄인들의 그 고통을 기억하면서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던 주님을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렇게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기까지 고난을 받으신 이 낮아지심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가르쳐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인고 하니 주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으니 우리도 이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함으로 고난을 받는 삶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는 자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그 축복을 길게 설명하시면서 주님의 나라가 저희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이라고 묻는다면 간략하게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고난에 대한 그 부채의식을 안고 그 빚을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용서받은 죄인의 심정으로 그 부채의식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살아가실 그 삶을 성취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을 받으면서 사는 그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체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화목 제물로 죽으셨던 것처럼 우리 자신이 무엇인가 희생함으로서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받는 고난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고 저는 묻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하고 예수의 사랑에 불붙었던 모든 성도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고난받는 대신 이 세상에서 안일한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빈들에서나, 사막에서나, 아골 골짜기에서나 그 복음을 전하고 자기를 통해서 예수님의 이름이 알려지고 자기를 통해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난 것으로 인해서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겉 사람은 후패 했지만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고난, 이 얼마나 우리의 삶과는 거리가 먼 단어입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받는 고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낮아지신 것을 본받아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지 못한 그 모든 일들을 이 세상에 이루기 위해서 주님이 성취하신 그 일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그 뒤를 따라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고난받는 삶,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받는 고통과 그리고 그 모든 압제받는 삶,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보기 드문 일이 되었는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올곧은 신앙으로 진리를 따라 살다가 고난을 받는 것보다는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는 타협적인 신앙이 훨씬 유행하고 있는 이런 시대에 이런 십자가의 피묻은 복음이 우리의 마음을 가르고 지나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를 전부로 여기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를 모두 포기하고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모두 버리심으로서 우리를 위한 구속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큰 이유는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셨으니 이번에는 그 사랑을 받은 자신들이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림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를 불러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장사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제물이 되기 위해서 대신 죽으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죽으셨으면 하나님이 바로 살리셨지 죽으신 후에 그분은 사람들처럼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장사되는 모든 광경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후에 부활하셨어도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된 사건은 사람들로 하여금 부활을 믿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한 빌미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모두 아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마치 죄인들과 똑같은 죽음을 죽으신 것처럼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한 사람으로 장사되셨고 죽은 시체로서 거기에 누워 부활의 새벽을 잠시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시체가 되셨다니, 하나님이신 그분이 생명이 없는 한 시체가 되어서 차가운 무덤 속에 누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실 수가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예수님의 몸은 죽어서 장사되었습니다.
이 교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삶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주님을 믿는 사람은 많아도 주님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고난을 받으며 충성하는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정말 소수입니다. 나는 교회가 커지면 일군들이 넉넉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를 생각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커지면 일거리가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개척할 때나 교회가 이만큼 성장했을 때나 늘 모자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없습니다. 충성된 사람이 너무 소수입니다. 고난을 받더라도 예수 사랑에 빚진 바 되어서 자기의 고난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는 그런 낮아짐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소수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그래도 좀 있습니다. 그런데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항상 말이 많습니다. 충성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 주장이 강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하는 사람들은 항상 독선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뜻인가 하면 충성스럽게 사는데 자신의 혈기가 담긴 육신이 장사지내는 일이 함께 일어나야 되는데 충성스럽게 사는데 역시 자기가 죽지를 않습니다. 장사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드림으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경험하지 못했던 단 한가지 사건을 경험하셨습니다.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죽음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참 사람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으셔서 이제는 어마어마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공중권세를 잡은 자들의 세계는 박살이 났고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 얻을 수 있는 구속의 산 길이 열렸습니다. 어둡던 세상에는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사망의 권세가 지배하던 세상에는 속죄와 부활의 영광에 우렁찬 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조용히 무덤에 누워 계셨습니다. 죽으셨습니다. 치욕스럽게도 죄인들과 똑같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으시고 죽으신 그분이 죄인들과 똑같이 사람의 무덤에 잠시 장사되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장사된 정신이 정말 필요합니다. 주님을 많이 섬기면서 자신의 혈기는 오히려 죽는 삶,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면서도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인정의 삶, 이런 장사됨의 정신이 우리들이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께서 오신 성탄은 바로 이런 주님의 낮아지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낮아짐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어렴풋이 알던 이 세상이 볼 수 있었고 느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가시고 우리는 이 세상에 남겨두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홀로 남겨두지 않으시고 성탄에 오신 그분이 지금은 말구유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계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당신이 우리를 통해서 당신 자신의 삶을 구현해나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낮아지심의 정신으로 일생을 사셨던 것처럼 이 성탄절에 낮아짐에 교리를 가슴에 새기면서 여러분 자신이 그 낮아지심 때문에 높아지셨다는 사실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낮아지심 때문에 여러분들 또한 낮아질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낮아지심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들의 이 낮아짐을 통해서 이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숨결을 느끼고 만질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의 가슴을 만질 수 있는 그런 훌륭한 도구들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통해서 하시고 싶으셨던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화목제물 되시려고 오신 예수님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下)
지난주부터 우리는 예수의 오심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강보에 쌓여 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분의 전 생애 기간동안 펼쳐질 낮아지심에 대해서 저희들이 생각해보았고,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그분의 낮아지신 생애 가운데 특별히 자기를 화목 제물로 드리신 낮아지심에 대해서 오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의 아들을 화목 제물로 주셨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찾아간다’라고 생각하는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처음서부터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간다기보다는 하나님이 죄인을 찾아 나서시는 그런 종교입니다.
그래서 성찬의 때에 우리들이 성만찬을 하면서 떡과 포도주를 성도들이 있는 곳까지 가져가는 것은 복음 적인 의미에 있어서 그 뜻이 깊은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이 사람들을 찾아가셨던 것을 그 성찬을 통해서 기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크게 지어놓고 사람들이 올 때를 기다리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도성 인신의 정신을 가진 선교의 사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선교는 고통 하는 사람들이 있는 그곳, 하나님이 아직 계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그 무지의 자리로 내려가고 고통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까지 다가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도성 인신 적인 선교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랬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들이 잘 알 수 없었을 것인데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기의 아들을 화목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여기에 “오직” 이라고 번역된 그 희랍어가 “알라”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강한 반의어입니다. 그래서 영어의 but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자기 아들을 주셨다. 그런 사실에 바로 사랑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랑이 희랍어 성경에는 그 사랑입니다. 이 사랑 안에 그 사랑이 있도다.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라 우리들이 꼭 필요로 하는 그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은 바로 이런 사실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아들을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주셨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화목 제물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의 관심은 그것인데, 화목 제물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구약에서는 제사는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살아있는 짐승을 죽이고 그리고 그 짐승을 잡아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데 그 제사를 드리면서 겨냥하고 있는 목적에 따라서 제사가 여러 이름으로 나뉘어집니다. 피 없는 제사도 있지 않은가. 예를 들자면 소제 같은 것, 곡식을 태워서 드리는 제사 같은 것이 있지 않은가 하는데 그런 제사가 있기는 하는데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없었습니다. 피 흘리는 짐승의 제사가 있고 난 뒤에 그것에 대한 보조적인 수단으로서 소제를 드리는 것이니까 그 자체만으로는 완전한 제사가 아닙니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은 제사는 반듯이 짐승들을 죽여서 드리는 그런 종류의 제사였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화목 제 라는 것은 무엇인가 제사에는 모두 하나님께 대해서 한편으로는 용서를 빌고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 헌신을 다짐하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제사에는 그렇지만 번제 같은 것은 특별히 죄의 용서보다는 헌신 쪽에 훨씬 무게를 둔 것입니다. 그래서 번제를 드릴 때에는 하나도 남는 것 없이 제물이 몽땅 다 타버립니다. 그러니까 남는 것이 없으니까 누가 그것을 제물을 취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다 태워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속죄제 같은 것은 어떨까요 속죄제 같은 것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 앞에 죄 지은 것을 뉘우친다라고 하는 속죄 쪽에 훨씬 무게가 실려있는 제사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이런 제사도 있었습니다. 속건제 라는 것이 있습니다. 속건제가 무엇인가 하면 죄는 죄인데 특별히 하나님의 거룩함을 범한 ‘죄’ 하나님의 성물에 대해서 죄를 범했다든지 이런 것들은 속건제라고 하는 것에 무게를 두어서 속건제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런 제사 제도를 만드시면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욕구들을 아주 잘 헤아려 주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거의 다 마찬가지 정신인데 그리고 그 제사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인데 그래도 이렇게 각각 여러 가지 제사를 만들어 놓으시고 죄인들의 사정, 그리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서 제사를 드리게 함으로 인간 속의 특별히 신앙에 있어서 다양한 측면 가운데 어떤 부분들을 우리들에게 강조해서 교육하고 또 회복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잘 이해가 안가죠. 예를 들면 금방 이해가 갈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오는데 일주일 내내 너무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나는 정말 진짜 쓸모 없는 죄인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주님을 믿었어도 아무런 희망이 없나보다 그런 마음속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왔는데 그날 설교가 무엇인가 하면 죄의 용서입니다.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의 설교였고 그렇게 죄 가운데서 신음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깊은 용서의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가 아주 은혜로웠습니다. 그랬더라면 그 사람은 그 설교가 그날 울려 퍼졌기 때문에 사실 자기가 일주일 내내 고통 하는 문제에서 해결을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놀랍게 회복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안고 교회를 갔는데 엉뚱하게 선교 안 나가는 사람들은 전부다 나쁜 사람들이다 고 선교사로 헌신하는 설교가 주어졌습니다. 그런 설교가 필요하기는 한데 또 그런 설교를 통해서도 자기가 놀랍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자신의 욕구는 채워지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자기 죄 문제 때문에 굉장히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은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서 막 갈망하고 그 갈망을 충족시킬 수 없는 사람들은 번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헌신을 새롭게 합니다. 그리고 남이 모르게 성물에 대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범했다는 것 때문에 늘 가슴속에 죄의식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속건 제사를 통해서 그 죄를 씻고 다시 정결해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런 것을 고려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화목제는 무엇인가? 이 화목제는 희랍어로 ‘히라스모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이 신약에서 만들어진 개념이 아니라 이미 구약 속에 있는 개념이고 구약 속에 있는 그 개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제사 제도의 계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히라스모스 여기 표현되어 있는 화목제물이라고 하는 것, 화목제, 혹은 화목 제물이라고 하는 것이 히브리말로 넘어가면 ‘셀렘’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샬롬’이라는 단어가 왔고 예루살렘에 살렘도 어원이 거기에서 온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구약 학자들이 말하기에 ‘평화의 도성’이라는 의미일 것이라고 합니다. ‘살렘’ 그래서 거기서 우리가 잘 아는 ‘샬롬’이라는 단어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샬롬’이라는 단어는 ‘샬렘’과도 관련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온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에 가면 지금도 빵을 통째로 구운 것을 ‘샬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많으면 반을 잘라서 파는데 ‘하찌’라고 합니다. 그래서 반쪽은 하찌이고 통으로 구운 것은 샬롬, 혹은 샬렘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상태, 이게 바로 샬렘입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제일 좋은 말은 ‘안녕’입니다. 헤어질 때 ‘안녕’말고 안녕하십니까? 할 때 그 ‘안녕’입니다. 안녕하다는 것은 돈이 많아도 몸이 아프면 그것은 안녕한 것이 아닙니다. 돈도 많고 몸도 건강한데 자식이 속을 썩여서 밤새도록 잠을 못 잘 정도면 그것은 안녕한 것이 아닙니다. 안녕은 큰 축복이 있다든지 그런 것과는 달리 근심과 염려가 없는 마음에, 그리고 일신 적인 삶의 온전한 상태가 ‘안녕’입니다. 그게 가장 정확한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화목제 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히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개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화목제 라고 하는 자체가 하나님과 불화 했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그 화목의 의미를 다지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한 참다운 회개 없이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과의 화해가 있는 동시에 또한 그 화해가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번제 같은 것은 다 태우니까 없어져버리니까 누구도 가질 수 없지만 속죄제 같은 것은 제사를 드리고 나면 제물이 남습니다. 그 남는 제물을 제사장이 취합니다. 그런데 화목제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고 제사를 드리고 난 다음에 남는 그 모든 제물은 제사장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들, 왕 모든 그 나라의 백성들이 함께 나누어먹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함께 그 제물을 나눈다는 의미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하면 이제 제사장이나 제사를 드리러 온 죄인이나 옆에 있던 사람이나 그 땅에 있는 모든 나그네까지도 똑같은 처지라고 하는 것을 그 함께 제물을 나누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 속에서 한솥밥을 먹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솥에 숟가락을 집어넣으면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식구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모두 동일한 지체들이라는 사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들이 모두 함께 식탁을 나누면서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각 사람 각 사람이 화목을 경험하는 사람들로서 그들 사이에 각각 화목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토대로 사람들과의 화해를 완성해 가는 그것이 바로 다름이 아닌 히라스모스의 제사입니다. 화목제의 제사입니다.
그러면 이 화목제로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해 화목 제물이 되실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화목제와 관련해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깊은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실 때 항상 우리들이 살고 있는 그 시대에 문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기도를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가끔 꿈에 나타나셔서 말씀해주셨는데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너 참 잘한다 라든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된다든지,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그렇게 책망하실 수도 있는데 그때에는 한국말로 하시는데 이 사람이 유학을 가서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 한국말은 이제 좀 어눌해지고 그리고 영어에 아주 능숙해졌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데 영어로 말씀하시더랍니다. 그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이 당시의 사도들이 그런 꿈을 꾸었더라면 당시에 히브리어나 혹은 희랍어로 말씀하셨지만 요즘 만약에 여러분 꿈속에 나타나셔서 주님이 말씀하신다면 한국말로 말씀하실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의 계시를 보여주시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그 문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자, 그 이야기가 왜 필요한가. 신약시대에 아직 제사가 행해지고 있었지만 이 히라스모스, 즉 화목제의 제사는 그 뿌리를 이미 구약에 두고 있고 그 뿌리는 더 뒤로 거슬러 올라가면 모세의 율법 속에서 이미 계시가 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제사가 없었는가 하면 그 이전에도 제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그 제사가 아주 구체적인 율법으로 계시가 됩니다. 그러면 그 제사는 어디에서 왔는가. 사실 이 제사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죄가 들어와서 인간이 죄 가운데 살면서부터 성경에는 명백하게 언제부터 제사가 계시되었다고 말하지 않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이 제사를 인간에게 알려주신 원조 시라고 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께 죄를 짓고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인간들이 잠시 하나님과 화해하고 그 죄의 용서를 경험해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타락했는데 4장에서 에노스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것들이 반듯이 제사와 연결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구약을 열심히 읽으시던, 철저한 유교 집안에서 자란 어느 할아버지가 레위기를 읽으면서 무릎을 계속 치시더랍니다. 그래서 왜 그런가 했더니 옛날에 제사와 너무 똑같다고 하시면서 옛날에 우리 조상들로부터 올라가면 궁중에서 드리던 제사는 다 생식으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빈대떡을 부쳐놓고 싸놓고 그것은 후대에서 다 변질된 것이고 원래 제사는 짐승을 각을 떠서 갖다 올려놓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채로 드리는 그런 제사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똑같다는 것입니다. 제사의 기원 자체가 하나님이 원조입니다. 그것을 보여주셨는데 이방 종교들이 생겨나면서 그 제사가 다 흩어져서 각기 자기가 원하는 모습대로 이제 변형시켜서 제사를 만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실 때쯤 되어서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을 아는 독특한 신앙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벌써 아득하게 잊혀진 일이 되었고 그리고 사람들은 각기 다 자기가 속한 이방 문화에 젖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이제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면서 제사의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실현시켜 보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그런 하나님을 몰랐어도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몰랐어도 중동 지방에서 어려서부터 보고자란 자기 시대의 제사에 대해서는 익숙해져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셔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제사에 대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를 타고 흘러 내려오면서 모세에게 와서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아버지와 함께 우상을 만드는 집에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불상 같은 것을 만들어서 파는 그런 집안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무슨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셨는지는 누구도 질문할 수도 없고 답해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여튼 그를 기뻐하셔서 그를 택하신 것입니다. 왜 기뻐하셨는지 우리는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하나님이 뜬 금 없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이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복에 복을 많이 주겠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썰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에 여호와는 그 갈대 우르가 바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지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메소포타미아 문명지역은 세계에서 첨단을 가는 문명지역이었고 그 첨단 문명 뒤에는 반드시 무엇이 있는가 하면 어마어마한 종교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특징 자체가 일신교나 유일신교가 아니라 다신교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많은 신들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런 다신교인데 그 속에서 여호와, 혹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뜬 금 없이 하나님이시라는 분이 나타나셔서 아무 조건도 없이 나는 너에게 복을 주겠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썰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을 믿어도 되나. 왜냐하면 이분은 자기가 보기에는 새로 데뷔하신 분 같은데, 고대 근동에서 보면 새로 데뷔하신 분 같은데 이 신흥 신을 믿어도 되는가. 하나님이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신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어도 되는가.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그런 식으로 회의적인 마음을 가졌을 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 마음에 확신을 심어주는 방법을 택하셨는데 그것은 제사를 드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짐승을 쪼개어놓고 그리고 그 사이에 하나님이 불길로서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브라함 마음속에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오셔서 복 주겠다고 하신 말씀이 장난이 아니구나. 그리고 이것은 확실한 것이구나 하면서 아브라함이 그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의로운 사람으로 여기시고 그리고 그에게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는 자격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왕국이 믿음으로 들어오는 나라가 되도록 아브라함을 그렇게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 길지만 하여튼 그런 스토리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게 무엇인가? 이미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처음에 계시해주셨던 제사에 대한 관습이나 이런 것들은 이미 다 잊혀져버렸고 이방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는 것을 보면서 아브라함이 자랐는데 하나님이 명령하시는데 짐승을 쪼개놓으라는 것입니다. 쪼개서 반을 갈라놓는데 거기에 갑자기 확 불길이 나타나더니 쪼갠 고기 사이를 태우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아주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의미를 가져다준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이해가 잘 안갑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제 이런 이야기입니다. 당시에는 어떤 제도가 있었는가 하면 소위 이야기하는 봉신 계약이라고 그래서 큰 땅을 왕이 다스리고 있으면 그 땅을 왕이 다 통치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땅의 일부를 영주들에게 떼어주는 것입니다. 쪼가리, 쪼가리 떼어주면서 한 지역의 영주를 삼으면서 그 영주에게 그 땅을 다스리고 거기서 세금을 얻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범죄 사건들을 조사하고 심판할 수 있는 행정사법, 심지어는 입법 금까지 다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왕처럼 자기의 땅을 다스리게 허락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 대신 이제 그 위에 더 큰 왕이 있어서 왕에게 이 사람이 준수하여야 할 의무들을 나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조자체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영주와 그 다음에 그를 영주로 봉하는 왕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들을 회고한 것입니다. 역사적인 서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만났고 그래서 우리 둘은 하나가 되었고 이제 우리는 주인과 종으로서 이렇게 왕과 신하로서 이런 관계를 맺는다는 총론이 나오고 그 다음에 이제 구체적인 언약의 조항이 쭉 나옵니다. 그래서 뭐는 어떻게 하고 어떻게 하고 쭉 약조를 맺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이 대부분 무엇인가 하면 거둔 세금 중 일부를 왕에게 주고 전쟁이 일어나면 군사를 동원해서 생명을 다해 왕을 보호하고 그리고 왕은 사랑과 자비로 그 영주를 보호하고 그렇게 하면서 서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조항이 아무리 까다롭다고 할지라도 한 땅덩어리를 떼어서 영주를 삼아주는데 거기에 발탁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장관이 의무가 얼마나 많습니까? 까닥 잘못하면 청문회 불려나가고 그 다음에 장관 자리를 나오고 영창에 들어갑니다. 그런데도 누구도 한번씩 해보고 싶어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주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 선택을 합니다. 그 다음에 둘이서 같이 문서를 작성합니다. 약정을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나 이제나 무엇으로 믿습니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데 누구를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이제 한 게 무엇인가 하면 그 당시는 모두 신을 두려워하는 시대였으니까 황소 같은 큰 짐승을 잡아서 가르는 것입니다. 머리부터 시작해서 통으로 반을 자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벌려놓습니다. 그리고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사람이 쓰러져서 피를 흘려도 한없이 나오는데 짐승이 어떻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예화: 어린 시절 찝차와 소달구지가 부딪혀서 소의 어깨가 너덜너덜하게 부서져 많은 양의 피 를 흘리는 모습을 이야기함)
그런데 그 소를 어깨 한쪽을 떼어놓은 것도 아니고 머리부터 도끼로 반쪽을 자르는 것입니다. 박살을 내어서 쪼개서 둘로 나누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오는 피가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그 피가 줄을 지어서 막 흘러내립니다. 거기를 그 작성한 문서를 들고 그리고 여기 두 사람이 같이 지나갑니다. 누군가 하면 그를 영주에 임명한 왕과 그리고 그의 신하가 되기로 작정한 그 사람이 같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모든 백성들이 보고 만조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그 피 길을 걸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면 우리 두 사람은 이제 천지신명 앞에 이 약속을 지키기로 맹세를 한다. 그런데 우리 둘 중에 하나가 누가 배신을 해서 기록된 약속의 내용을 어기면 지금 우리가 밟고 한가운데로 지나가고 있는 이 소처럼 되기를 원한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파멸을 가져오는 죽음, 그것을 자기가 스스로 자처하겠노라고 모든 사람과 그리고 모든 신들이 보는 앞에서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아브라함은 그런 것을 보고자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는 신실한 여호와고 나는 말한 것을 꼭 지킨다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수준이 바쳐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당신 자신의 말씀이 진실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늘 보면서 자랐던 그 제사의 방법을 놓고 그리고 거기를 하나님이 불꽃으로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셔서 어기시면 어긴 것이지 누가 하나님을 그렇게 짐승이 쪼개진 것처럼 하나님을 그렇게 파멸시키실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아무도 없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브라함 마음속에 믿음을 심어주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이 시범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말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안 하십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즐겨 나오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노라” 입니다. 벌써 무엇인가 하면 이제는 그렇게 시범을 보여주시지 않아도 믿음들이 많이 생겨났기 때문에 나 여호와가 맹세하노라.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매일 뭘 봤다고 하는 사람은 초보입니다. 오죽 수준이 안 바쳐주면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하시겠습니까? 초보입니다. 그러니까 하도 수준이 안 바쳐주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다르십니다. 그러니까 창피한 줄 알아야 합니다. 수준이 바쳐주면 하나님이 말로 하십니다. “나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노라”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늘 옷깃을 여밀게 됩니다. 이때는 옷깃을 붙들고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명예를 걸고 말씀하시니까 이것은 뭐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만 이것은 특별히 우리의 마음에 각인 시켜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가 그런 것입니다. 거기를 하나님이 지나가십니다. 그리고 그 후에 이제 이것이 어떻게 구체화되었는가 하니 율법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 율법을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주셨을 때 율법을 다 낭독하고 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게 무엇인가 하면 이제 제사장이 피를 찍어서 제단에 뿌리니까 백성들은 아멘,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아까 말씀드린 것에 축약형입니다. 아까 제대로 하자면 짐승을 쪼개놓고 그 피가 낭자한 길을 율법을 외우면서 가야지 되는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셔서 주신 계명이고 우리를 이제 그 계명대로 살겠습니다 라고 약속함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읽으면서 하나님과 함께 손잡고 거기를 지나가야지 되는데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이 쌓였으니까 그것을 축약형으로 하는 것입니다. 피를 뿌리는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주셨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해주신 대로 축복해주실 것이며 우리는 생명을 걸고 이 말씀을 지킬 것이며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이 피를 제공하기 위해서 짐승들이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우리는 파멸되겠습니다 라고 하는 서약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거기에 있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미 태어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언약 속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율법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하면 인간 자신이 이미 율법 안에서 약속한 바와 같이 인간이 자기의 죄를 지고 짐승이 쪼개어져서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파멸을 당하는 것만이 인간에게 놓여진 유일한 길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속에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아무리 커다란 집을 우리에게 준다고 하더라도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고 주위에 인가가 없는 그런 큰집은 맨 처음에 들어갈 때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하늘이 아름다운 별들과 그리고 하늘의 새들이 날아다니고 땅에 짐승들이 돌아다녀도 역시 창조의 세계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피조물인 인간이 거기에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불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하나님이 만약에 죄를 지었다고 해서 단번에 짐승을 쪼개듯이 사람을 데려가 버리시고 나면 하나님과 인간이 언약을 맺었을 때에 약정은 성취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가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키십니다.
죄의 용서를 받지 못했는데도 하나님이 인간이 즉시 죽임을 받아야 할인간이 몇 십 년 혹은 몇 백년을 이 세상에 살 수 있도록 형의 집행을 유예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형 집행 정지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에게 한번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일생동안에 다시 주님을 믿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이제 영원히 하나님의 정죄 함에서 해방되는 기회를 주시지만 그러나 이제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제 죽음과 함께 형 정지가 끝나고 그 형을 직접 집행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죽이시고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지옥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등진 죄인이 받아야 할 마땅한 형벌입니다.
그런 속에서 결국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화목이 깨트려졌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바르게 반응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것이 너무 불쌍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화목 제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그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당해야 할 그 짐승이 쪼개어지는 것 같은 형벌을 그대로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화목을 힘입어서 사람들 사이에 화목을 성취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화목 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에게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셔야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몸을 입지 않은 상태에서는 죽으실 수가 없었고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실 수가 없는 동안은 제물이 되실 수 없었으며 피 흘림이 없었으면 죄 사함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화목 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임을 당하셔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 제물이 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이 아니신 것처럼 하나님의 성품을 사람의 성품 아래 감추셔서 존귀하신 분이셨으나 비천한 사람인 것처럼, 높으신 하나님이셨으나 낮아진 인간인 것처럼, 죄 없으신 분이셨으나 죄인의 형체를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화목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화목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임을 믿는 사람들에게 모두 이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죽음에 효과가 미치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화목 제물로 죽으셨다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은 바로 구약에서 짐승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머리부터 통으로 쪼개져서 양쪽에서 흘러나오는 그 피로 죄인들이 밟고 지나갈 피 길을 만들었던 바로 그 사실을 그대로 구현한 것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못 박히신 그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 고난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는 우리들이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고난에 절대적인 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죽임 당하신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고난의 깊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서는 의인을 위해서 죽는 사람이 가끔 있고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서 자기를 불사르도록 내어준 희생적인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세상의 역사는 남을 위해서 이타적인 정신으로 자기를 희생한 사람들의 고난을 기리고 그리고 그 고난을 본받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불러일으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고난은 그들의 고난과는 달랐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이셨기 때문에 죄인인 인간들이 매달린 그 고난과는 종류가 다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예수 그리스도보다 어떤 의미에서 더 흉측하게 잔인한 방법으로 사형을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우리들은 그런 종류의 죽음에 대해서 주목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그 고난은 크지만 그것은 단지 살을 가르고 피를 흘리게 하는 육신 적인 고통의 문제가 아니라 죄를 모르고 죽음을 당하신 적도 없고 경험하실 수도 없는 하나님이신 그분이 치욕스럽게도 그 고난을 당하셨다는 점에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신 그분이 부끄럽게 당한 그 육체의 죽음에 그 고난이 인간으로서는 가히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신 그 광경은 바로 하나님이 얼마나 열렬하게 우리가 하나님을 등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이 우리와의 화해를 얼마나 원하셨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하나님을 등지고 범죄한 우리와 같은 인간들을 우리와 같은 인간들과 화목하셔야 할 이유가 어디 있었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지만 하나님은 우리 없이도 얼마든지 존재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존재와 당신 자신이 하시는 일에 있어서 인간을 의존할 필요가 없는 독립적인 존재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미 구약의 모세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하실 때 “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시면서 교리 적으로 당신 자신의 독립성에 한해서 천명하셨던 것입니다. 확실히 하나님은 우리 없이도 하나님이실 수 있지만 인간은 하나님 없이 인간일 수가 없었습니다.
구약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죽어간 수많은 이방의 백성들, 주님을 거스르면서 광야에서 죽어간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많은 백성들, 과연 그들의 죽음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죽음을 볼 수 있습니까? 이 사이에 고기를 물고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심판 받아서 죽은 백성들, 심지어는 그만도 못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슬리는 것을 인생의 본분으로 알다가 짐승처럼 죽어간 그 수많은 이방인의 죽음들, 오늘도 복음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도 알지 못한 가운데 육체만을 위해서 살다가 어느 날 불현듯 이를 갈며 두려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그 사람들의 죽음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짐승의 도살되어 죽은 그 모습과 인간이 죽어간 그 모습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을 등지고 죽어 가는 그 수많은 사람들, 그들과 화목하기를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인간이 짐승과 다름이 없이 도살당하는 가축과 다름이 없이 죽어 가는 모습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그 인간에게 화해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우리는 아기 예수께서 보자기에 쌓여서 거친 구유에 누이신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이 슬프고 아픕니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로든지 하나님이신 그분이 구유에 거친 강보에 쌓여서 누이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 왕 중의 왕이신 그분,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이 누이실 곳이 없어서 구유에 가난한 사람의 거친 보자기에 쌓여서 그 추운 겨울날에 누이신 것은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고 강보에 쌓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보면서 우리들이 더 가슴아픈 것은 그 거친 보자기와 같은 생애가 예수님의 앞날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으로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셔서 가난한 부모를 봉양하면서 30년의 사 생애를 사셔야 했고 공생애 들어서신 그 후에도 바다를 잔잔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리고 고통 당하시는 생애를 사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그 귀한 옥체를 못 박으셔야 할 것을 암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은 비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보면서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기뻐하는 이유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도성인신 하신 그 성육신이 우리에게 미칠 구원의 영향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화목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를 위해 화목 제사로 구원의 길을 여실 수 있었지만 그분이 만약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우리를 위해 구원의 길을 여실 수 있겠으며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해서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실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두 좋은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있어도 그 사랑의 마음을 실현할 수 잇는 능력이 없을 때에는 그 사랑은 오히려 더 슬픈 사랑입니다. 목회를 하다가 보면 성도들이 임종하는 순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신학교에서 나에게 공부를 배웠던 한 형제가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견디다, 견디다 이제는 죽어 가는 광경입니다. 자식들 둘이 아빠 앞에 섰고 아내도 머리맡에 섰습니다. 이제 호흡기도 다 떼었고 그리고 이제 가족들은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엄마가 말했습니다. 애들아, 아빠다. 이제 아빠가 마지막으로 가시는 길이다. 마지막으로 아빠 손이라도 좀 잡아드려라. 두 아이가 아빠의 한 손을 나누어서 붙들고 저는 거기서 잠깐 동안 하늘의 위로가 천국의 소망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믿음을 잘 지키고 살면 우리 모두 그 나라에서 아빠와 함께 만나게 될 것이라고 위로했습니다. 아이들은 어깨를 들먹이면서 한없이 울고 있었고 그리고 고인이 될 사람의 숨결은 점점 가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체념한 듯 기도를 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습니다. 그 가족들의 그 죽어 가는 사람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마지막인데,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아빠인데, 그리고 남편인데, 영원히 말입니다. 진짜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기의 목숨을 10년씩 헌납을 하면 아빠 혹은 남편이 3년을 더 살수가 있다면 그 가족들은 망설이지 않고 10년을 깎았을 것입니다. 너무 사랑합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하면 고통 가운데서 죽어 가는 그 아빠, 혹은 자기의 남편에게 그 사랑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우리를 향해서 눈물을 흘리시는 사랑일 뿐만 아니라 강한 능력을 가지고 당신이 우리를 향해서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완성하실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랑이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그 사랑이 더 감동적인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에서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나고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 속에 죄를 스스로 거슬려서 그 죄에서 자유 할 수 있는 어떤 힘도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죄를 물려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아래 있고 한편으로는 죄를 계속해서 지어가면서 자기 속에 있는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익숙한 경향성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 티끌 만한 것이라도 그 무엇인가 선한 것을 할 수 없는 숙명적인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그 화목 제물을 통해서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이 건져내 주신 것입니다. 그게 사랑의 완성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우리 위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랑에
주 하나님을 사랑해
(예화: 오래 전에 어떤 사람이 와서 행패를 부리기에 만나 보니 젊은 시절에 고시 공부까지 한 사람인데 지금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서 살고 있기에 돈과 테입을 주면서 듣고 설교 내 용을 요약해서 오라고 하니까 얼마 후에 요약한 내용을 적어서 왔는데 너무나 정확하게 말씀에 대한 이해를 깨끗하게 정리해서 왔기에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가 하고 물으니 은 혜를 받았다면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는 그때도 술을 먹 고 왔는데, 그가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는 받았지만 그 은혜보다 더 깊이 배인 술 없이 살 수 없는 그 오랜 생활에서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이야기)
그렇다고 해서 말씀을 들으면서 펑펑 운 그것이 거짓이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으면서 깊이 은혜를 받아서 하루 7병씩 먹던 것을 2병으로 줄였는데 2병도 많습니다. 그래서 내가 오죽했으면 그랬습니다. 당신이 이것을 한번에 끊는다는 것은 거의 기적이니까 1병 정도로 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펑펑 울고 가서 다시 술을 먹어도 좋으니까 그러니까 계속 말씀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한달 동안 지도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 후로 다시 오지 않아서 만날 수가 없었는데 말하자면 그것입니다. 우리 속에 죄를 싫어해도 그 죄를 지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 인간이 하나님과 끊임없이 화해를 깨트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숙명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 존재로서 일생을 살아가는데 아무 희망이 없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화목 제물로 죽으심으로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 죄의 세력을 끊어주셔서 그래서 그 죄를 대항해서 살수 있게끔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한번 보십시오. 세상을 많이 사랑합니다. 그러다가도 그리스도의 설교를 듣거나 말씀을 깨달으면서 한번 펑펑 울고 회개하고 나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이제는 주님만 사랑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성질머리가 그지 같아서 그냥 가족의 전도를 위해서 공을 들이면서 일년동안 희생도 하고 봉사도 하고 하다가 한번에 성질을 부려서 다 깨트립니다. 그리고 회복하는데 한 2년이 걸립니다. 그 성질이 어떻게 죽습니까? 십자가 앞에 데리고 가지 않으면 그 성질이 그게 보통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 데리고 가서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저렇게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죽으셔야 했던 이유가 바로 나 같은 인간이 이렇게 육체를 따라서 살면서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저렇게 고난을 당하셨구나. 그것을 깨달으면서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보면서 자기의 그 못된 성질머리를 십자가에 매달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성화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화목 제물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런 화목 제물로 오셔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자기를 깨트리셔서 피 흘리심으로 새롭고 산길을 열어놓으셔서 이제 믿음으로 그 피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죄를 용서해주시고 그래서 죄에서 해방된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한 교제를 누리며 살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 이런 화목을 주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즉 가치 없는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인 우리가 당해야 할 형벌을 당신이 가장 사랑하시는 외아들에게 그 형벌을 홀로 당하게 하시는 그 끔직한 일을 실행하시게 만들었던 하나님의 사랑의 그 본질이 무엇일까? 그것은 오늘 성경에 의하면 사랑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누구도 그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경험은 우리 사이에 존재합니다. 그것이 다름이 아닌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입니다.
가끔 신문에 보면 부모를 자신의 장기를 떼어서 부모를 준 아들의 이야기는 신문에 가끔 나옵니다. 그러나 자식을 위해서 자기의 콩팥을 떼어준 아버지의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것은 뉴스거리가 안 됩니다.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차이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부모에게 상처를 받은 자식들이 자식에게 상처를 받은 부모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부모가 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부모의 마음에는 자식을 용납하고 이해하고 끌어안는 아가페의 사랑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를 향한 사랑은 그가 하나님에 의해서 본성적인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기 전에는 자기 이기적인 욕심을 타파하고 부모를 그렇게 깊이 사랑하는 것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효도를 받으려면 자식들에게 돈을 물려주지 말고 신앙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깊이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할 때에 우리에게 자주 오르내리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그 아버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산을 나누어달라고 하던 그 못된 아들이 허랑 방탕하게 자신의 재산을 다 날려버리고 그리고 죽을 몸이 되었다는 사실이 들렸을 때 아버지는 떳떳하게 동구밖에 서서 나는 지금 집나간 내 아들을 기다리는 중이다 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새라 눈에 띨 새라 일하다가 동구 밖을 응시하면서 기다리는 그 아버지의 마음은 그 아들의 귀향을 기다리는 마음이었습니다.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저놈이 빨리 돌아오면 빨리 빨리 일을 시켜서 자기가 탕진한 재산보다 더 많은 것을 벌어서 내 재산을 채워놓으라고 해야지 되겠다 그런 마음으로 그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그 동안에 내가 저 때문에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는데 오기만 해봐라. 내가 복수하리라. 그런 마음을 가지고 동구 밖에서 그 아들을 가다리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다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은 아들이 들고 온 돈이나 미래에 그 아들이 벌어다 줄 수입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입힐 그 불명예나 재산 적인 손해가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에 간절히 원하는 것은 한때 자기의 아들이었던 그 아들이 살아 돌아와야지 만 그 관계가 회복될 수 있기 때문에 오직 그가 오매불망 동구 밖에서 눈이 짓무르도록 기다리는 것은 아들 그 자체였습니다. 잘난 아들, 출세한 아들, 돈이 있는 아들, 의롭게 살아온 아들, 사람들에게 영광을 한 몸에 받는 아들 그런 아들이 아니라 어쩜 그런 못난 아들을 다시 자식으로 받아주는가 하고 동리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해도 좋으니 자기의 그 아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바로 우리 예수님에게 사람의 몸을 입혀서 이 세상으로 내려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분은 동구 밖에서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눈빛이며 그분의 오심은 그 아들을 기다리는 그 아버지의 목 매이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이제 내가 내 아들의 몸을 갈라 죄 때문에 나에게 가까이 올 수 없었던 너희들에게 내 앞에 나아올 수 있는 새롭고 산 피 길을 열어주었으니 너희들이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와서 나의 품에 안겨서 나와 함께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음성이 오늘 이 성탄을 눈앞에 둔 여러분의 마음에 들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바로 이런 화목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내려오신 아기 예수께서 들판에서 양을 치던 평복 차림의 목자들에게 먼저 인사를 받으시고 경배를 받으신 것도 바로 우리들이 이제는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위한 화목의 길을 열어놓으신 하나님이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당신에게 나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화목을 누리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죄는 우리가 지었고 하나님과의 화해는 우리로 인해서 파탄 났음에도 불구하고 피해를 보신 그분이 용서도 빌지 않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화해의 악수를 내미셨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믿을 수 없다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이제 볼 수 있게 해주시고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만져보실 수 있도록 살과 피를 담고 뼈를 가지고 사람의 몸을 입으신 자기의 사랑의 화신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요한처럼 우리 예수님의 품에서 안겨서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의 생애를 눈에 보듯이 환하게 알게 되었고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경험함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 심장의 박동 소리를 듣던 요한과 다름이 없이 주님의 그 사랑의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과 이 진리를 통해서 주님의 그 사랑이 우리에게 만진바 되었고 우리의 두 눈으로 목격한 바 되었으며 그리고 우리의 피부에 와 닿는 사랑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이 과연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의 가슴깊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안 우리들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제는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고 더군다나 성령을 통해서 그 사랑의 맛을 보게 한 우리들은 우리 죄인 됨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의 그 사랑을 의심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백성들이 당신의 아들의 성육신을 통해서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는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놓으신 그 화해를 믿음을 통해서 누리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그런 소원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릴 뿐만 아니라 이 화목을 당신의 자녀들이 함께 누리면서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입니다.
연말이 되고 명절이 되면 여러분 손에, 손에 고기 근이나 사들고 부모님들을 찾아갑니다만 그것을 하기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부모에게 자식이 부모님이 연로해지실수록 자식이 부모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화목은 그 아버지 앞에서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번에 명절 다가오기 전에 형제들과 함께 맺힌 것이 있으면 여러분들 손에 들려있는 효도 선물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형, 누나, 동생을 깊이 용서하고 그 아버지 앞에서 형제를 사랑하므로 껴안아야 합니다. 그것이 노년의 부모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효도입니다. 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명하고 훌륭하게 자식들이 높은 사람이 되지 못했어도 자식들이 형제가 서로 사랑하고 우애하면서 살면 그것이 하나님의 큰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화목제의 정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려 화목제물이 되신 것은 하나님을 등진 우리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해 속에서 살기 위함이었고 동시에 주님의 사랑을 안 우리들이 그 화목 안에서 함께 즐거워하며 살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탄절은 또한 그리스도 예수께서 도성인신 하신 그 정신이 없어서 형제들 사이에서 맺히고 그리고 원망하며 살았던 것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데도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셔서,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주님이 당하신 고난
이 죄인을 위함이니 범죄한 날 위해 주 욕을 보셨네
믿음의 형제들이 미워하고 반목하면서 사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죽기까지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낮아지셨던 예수의 마음을 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화합과 일치를 당부하면서 부탁한 말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 됨으로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형제와 불화하고 그리고 무엇인가 화해를 누리며 살지 못하고 미워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같이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신 데도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33세 해 동안 온갖 곤욕과 고초를 당하시다가 치욕스럽게도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팔려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다 라는 생각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도성인신의 정신으로 자기를 낮추어서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납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그런 화해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화목 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주님에게는 아끼는 것이 없이 자기를 다 드리신 후에야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우리들에게 아들을 사람의 모양으로 만드셔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화목하게 만들어주신 이 놀라운 은혜는 바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며 살면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끊임없이 자기를 허비하며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을 이루시기 위해 남김없이 자기를 바치셔서 희생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또한 예수의 뒤를 따라서 우리를 희생하며 완성되지 못한 화해를 완성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두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값없는 죄인이 용서를 받은 후에는 주님의 사랑을 가슴에 새기면서 희생적인 인생을 사는 것밖에는 인생에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살게 내버려두더라도 도성인신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안 우리들은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사랑을 간직하고 주님을 위해서 사는 날이 고달프다고 느껴질 적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아끼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위해 드리면서 우리의 온 몸으로 제물을 삼아 우리와 그리고 하나님 사이에 화목제가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서 주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주님이 오심을 모르는 이 죄악 된 세상,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그 지체들과 하나님 사이에 한 화목제물로서 살아가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성탄절에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그렇게 나아지신 도성인신의 정신을 가슴에 새겨 우리를 존귀하게 여긴 나머지 내려가지 않았던 그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고 우리를 크게 생각한 나머지 더 낮아질 수 없었던 그 자리에까지 내려가서 엎드려짐으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화해와 화목을 전하는 훌륭한 도구로서 이 세상에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성탄절에 주 오심을 마음에 기리는 성도들의 자세요, 삶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귀한 동리가 된 베들레헴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은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라”(마2:6上)
예수님이 오시는 장소에 대해서 이미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기를 베들레헴이라고 예언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을 따라서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나셨는데 누가복음은 왜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사셨는데 태어나시기는 유대 땅에서 태어나게 되셨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함으로서 선지서에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된 것이 어떻게 예수님에게 성취되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깊은 섭리 가운데서 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이고 그것은 동시에 구약의 예언의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성경은 말하기를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베들레헴은 유대 땅에서 아주 작은 고을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사람들은 큰 성이 있고 큰 성 주변에 작은 마을들이 있으면 그것을 ‘딸’이라고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서울이라고 한다면 여기 안산, 성남, 의왕, 과천 이런 것들은 다 서울 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자면 위성 마을, 위성 도시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위성 마을들을 가르쳐서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베들레헴도 말하자면 그런 아주 작은 동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가이사의 명을 받들고 호적 하러 가기 위해서 일시에 많은 사람들이 고향에서 이동을 할 때 그 여행객들을 받아 줄만한 숙소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작은 그런 마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은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네가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그러니까 베들레헴이 이제껏 까지 사람들에게 이해되어온 아주 작은 마을이고 이름 없는 구석이었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것을 바라보면서 그 베들레헴은 결코 사소한 도시, 작은 땅이 아니라 아주 굉장히 큰 곳이고 그리고 이제 이 도시는 이제 작은 도시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마을이 될 것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베들레헴에 무슨 새로운 개발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이 베들레헴을 유대 고을 중에서 결코 작은 도시가 아니라 크고 중요한 도시가 되다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인 도시의 크기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이 가지고 있는 구속 역사에 있어서 의미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에 구속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도시로 등장하게 된 이유는 오직 하나 거기서 아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이후에 출생하셔서 베들레헴에서 교회를 세우신 것도 아니고 특별히 많은 기적을 베들레헴에서 유독 행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은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심으로 인류를 구속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있어서 잊혀지지 않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마을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나 그 후에나 예수님 시대에나 이 베들레헴은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여야 할 만한 큰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시골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지만 그러나 이 베들레헴은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적인 역사에 있어서는 그 의미에 중요성이 마을의 크기와는 전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마을이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가장 훌륭한 저택에서 태어나신 것도 아니고 그 고을의 유지의 아들로 태어나신 것도 아니고 베들레헴으로 보자면 예수님의 가족은 지나가는 과객이었고 그리고 예수님은 그 과객이 묵을 수 있는 사관, 거기에도 자리가 없어서 베들레헴에 있는 마구간, 말구유에 강보에 쌓인 채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헤롯의 박해를 피해서 도망가야 하는 그런 처지, 잠깐 스쳤다 지나가는 그런 곳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들레헴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처음 맞이하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중요성을 가진 그런 마을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괄목할만한 축복을 받아서 그래서 엄청난 부를 누리게 된 사람도 있고 거의 죽어가던 몸이 예수님을 믿고 그리고 건강해져서 그래서 정말 펄펄 날 정도로 강건한 사람이 된 예도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정말 별 볼일 없는 알코올 중독자, 인생 쓰레기였는데 예수님 믿고 나서 큰 기업체를 갖고 있거나 훌륭한 직장에 들어간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일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더 많은 사람들은 예수 믿은 후에나 믿기 전이나 별 특별한 변화가 없이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다니던 회사 믿고 나서도 다니는 사람이 있고, 예수 믿기 전에 건강하지 않았던 몸이 예수 믿고 난 후에도 특별히 더 나빠진 것도 없지만 더 좋아진 것도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후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도 그렇다고 우리의 몸이 늙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사업하던 사람이 예수 믿고 그냥 사업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 속에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겉으로 볼 때에는 우리는 예수님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나 특별한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그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오고 나신 후에 베들레헴이 그때나 그 후에나 작은 마을이었지만 의미에 있어서 그 중요성은 예수님이 거기서 태어나신 후에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큰 의미를 가진 마을이 된 것처럼 우리도 겉으로는 차이가 없지만 주님을 믿고 난 후에 우리들은 정말 의미에 있어서는 과거와 비교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지 됩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그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 때문에 그렇게 아무렇게나 살아가던 그런 많은 소망 없는 가족들이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시게 되자 이제는 하나님이나를 중심으로 역사하기 시작하십니다. 예전에는 내가 그저 일평생 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고 환경에 억눌리며 그렇게 살아가는 수동적인 사람이었는데 이제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고 나니까 내가 가정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셔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우리 아버지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게 하시고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하던 우리의 남편과 아이들에게 예수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 전해지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는 사람이나 원망하고 살던 사람이 그 마음속에 주님이 오시고 나니까 이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무너져 가는 회사를 살리기도 하고 관계된 거래처를 다시 건져내기도 하고 심지어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는 주님의 도구로 살수 있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 믿고 나서 복도 많이 받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공부 못하던 사람들은 공부도 좀 잘하고 사업에 매일 실패만 해서 수많은 동업자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사람들은 이제 주님을 믿고 좀 사업도 잘 되어서 그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사람으로 살기를 저는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서 직장 다니는 사람을 보면 특별히 물어볼 것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잘 다니고 있으면 안 잘린 것이니까 그저 감사하고 또 물어봐야 바쁜가, 안 바쁜가 하는 것인데 사업하는 사람들은 항상 물어볼 것이 많습니다. 잘 되냐. 안 된다고 하면 그럼 당장 자기가 위태로운 것이니까 잘됩니까 해서 잘된다고 하면 밥 한 그릇을 얻어먹어도 마음이 편하고 안 된다고 하면 소화가 안 되고 괜히 밥 먹으로 왔나 그런 생각이 들고 걱정스럽습니다. 그렇게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님을 모신 가운데 새 사람이 되어서 의미에 있어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베들레헴은 의미에 있어서는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별로 중요한 그런 마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주님이 오시게 되자 하나님의 그 놀라운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중심적인 마을로 부상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감격을 잊지 않고 있는 동안에는 항상 기억되는 마을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간이역에 깃발 흔드는 철도원이 철도청장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간이역’이라고 하는 곳은 완행열차밖에 안 서는 역인데 간이역에서 깃발을 흔들면서 철도원을 하는데 내가 여기 오래 살았는데 여기에서 보는 동해일출은 정말 기가 막힙니다. 여기에서 기차가 휙휙 지나지 말고 여기에 굉장히 아침에 뜨는 해가 아름답다고 선전을 하고 여기에 기차에서 사람들을 내려서 여기를 보게 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을 청장이 진짜 한번 가보고 나서 상품을 만들었는데 그렇게 해서 떠오르게 된 그곳이 ‘정동진’이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한 시설도 없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안 갔는데 ‘모래시계’라고 하는 작품 하나를 어느 여류 작가가 써서 한번 히트를 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그 도시가 어마 어마하게 개발이 되었습니다. 최근에도 가봤는데 어마어마하게 개발되어서 특급 호텔까지 들어서고 도시 전체가 변화되었습니다. 물론 안 좋게 변한 점도 많이 있습니다.
거기서 모래시계를 찍었으면 찍었지 거기에 집채만한 모래시계를 8억을 들여서 만들었습니다. 모래를 한번을 부으면 일년동안 떨어진다고 합니다. 왜 우리 나라 사람들은 발상이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거기서 모래시계라는 드라마가 상영되었으니까 다행이지 거기 만약에 황소에 관한 영화가 상영이 되었다면 이 사람들 머리 속에서 황소를 집채만하게 만들어서 거기에 상을 하나 세웠을 것입니다. 아니 모래시계가 찍다가 갔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지 거기 8톤 트럭 한 트럭이 들어가는 모래를 담아야 되는 세계에서 제일 큰 모래시계라고, 그런데 그게 뭐 자랑거리입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못 만들어서 안 만든 게 아니라 만들 필요를 안 느껴서 안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조그만 공원에다가 집채만한 모래시계를 세워놓고 거기다 십이 간지를 그려놓았으니 아니 그 발상의 유치함에 진짜 학대받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지금은 이미 잊혀져가고 있는 몇 명의 배우들이 머물고 갔는데 그 도시가 그렇게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떠오르게 되었다면 정말 우리의 마음속에서 예수님을 제대로 모시고 살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우리와 우리의 가족, 그리고 교회, 그리고 이 시대 속에 우리 자신의 존재가 떠오르게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 가까이 있어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반포하며 사람들에게 그 구원의 역사를 반포하며 사람들에게 그 구원의 계획을 확장하기 위해서 처음 쓰임 받았던 주님 가까이 있었던 인물들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도마, 바돌로메 마태 예수님 곁에 있던 많은 제자들은 당시 인물로 볼 때는 그렇게 중요한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고기 잡는 어부나 당시 손가락질 받는 세리나 아니면 셀로당 당원이거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의미가 없었던 베들레헴과 같은 그런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는 중요성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는데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의미로서는 교회의 초석을 놓는 주님의 도구들이 되었고 오늘날의 교회는 그리스도와 및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들에 대한 사도의 신앙에 고백의 터 위에 서 있는 교회가 될 정도로 그렇게 구속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들이 그렇게 구속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람들이 되었을까요? 물론 그들이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을 제외하고는 주님의 의해서 세워진 제자들 중에는 자기의 수를 누리고 죽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들은 로마 시대에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고 거기에서 순교의 길을 모두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죽은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람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 단지 그들이 희생했지만 희생과 헌신 때문에 그들이 뛰어난 사람들이 되었기보다는 그들 속에 있는 예수님 때문에 그들이 의미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들의 마음속에 모시고 진실한 신자가 되고 예수의 미션에 펄펄 붓는 사람들이 되자 그들의 사회적인 하찮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의미의 중요성으로 가리워 졌고 그들은 사회적인 신분이 열악하고 하찮은 사람들,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 그 시대에 흔히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 안에 있는 예수님 때문에 그들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 받도록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삶이 마치 베들레헴 같지 않습니까? 유대 지방에서 가장 사람들이 알아줄 이유가 없는 하찮고 외진 시골 마을 하나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태어나시자 의미에 있어서는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 도시로 떠올라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 머무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똑같이 사도들의 마음속에도 주님이 오시고 그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까 그들의 하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중요한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참 신자되기를 꿈꾸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우리들의 교회 마당에서 지금은 장난치면서 뛰어 다니는 아이들 중에서 조국의 역사를 움직이고 세계의 역사를 움직일 일군들이 나올지 누가 압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예배당 여기 저기를 뛰어다니고 그러면서 소란스럽게 하고 유리도 깨고 벽에 낙서도 하고 그리고 부모인 여러분들을 속상하게 하는 그 아이들 중에서 조국의 역사에 새 시대를 열 일군이 나올지 누가 압니까? 그러니까 좀 넉넉한 마음으로 애들을 좀 봐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담을 죽죽 긋고 낙서를 해났어도 애들 욕하지 말고 저렇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건강한 팔과 창의력이 있는 정신을 가졌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얼마 전에도 우리 교회 집사님의 애들이 마당에 나가서 차에 동양화를 하나 그려 났습니다. 돌멩이로 둘이서 합작을 했습니다. 잘 그렸습니다. 별도 그리고 원도 그리고, 그것을 부모들이 보고 참 잘 그렸다고 했습니다. 어쩜 그 애는 그렇게 창의력이 뛰어난지 다른 애들은 다 도화지에 그리는데 그 애는 새차에다가, 철판에다가 그러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아이들을 봐야 합니다. 미래에 어떤 아이들이 될지 어떤 사람이 될지 모릅니다.
젊은이들은 지금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나 의미 있는 인물이 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젊은 사람들에게만 미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든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미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새롭게 시작하고 또 새로운 인생을 열어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도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또 그런데도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나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정말 주님을 품은 사람이 될 때에 그때 하찮은 베들레헴이 지금 우리가 주목하는 베들레헴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하찮은 우리들이 주님을 우리 안에 곱게 품음으로 우리들이 정말 의미 있는 인생을 살수 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말 귀하게 쓰임 받고 사람들에게 잊혀질래야 잊혀질 수 없는 그런 의미 있는 삶을 살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주님이 오신 성탄절에 여러분들이 좀 깊이 생각하고, 물론 성탄절에 하나님 앞에 헌금도 하고 또 가족들과 함께 기쁜 성탄절을 지내고 물론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베들레헴에 주님이 오심으로 새로운 베들레헴, 그 의미를 가지게 되었던 것처럼 이 성탄절에 정말 내가 베들레헴과 같이 주님을 내가 내 안에 모시고 그 주님 때문에 의미에 있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 이방에서 온 새 동방의 박사들도 주목하고 따라와야 했던 그런 마을이 되는 그런 변화가 우리에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성탄절에 우리를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만들어주시는 분이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면서 언제든지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또 오실 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마음에 계실만한 그런 사람들로 하나님 앞에 새롭게 세워져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탄절에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은혜에 깊이 감격한다면 그 은혜에 대해서 깊이 감격하면서 여러분들이 보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그 주님을 여러분 마음에 모심으로 그래서 여러분들이 새 사람이 되고 그래서 주님을 모시지 않았다면 별 의미가 없었을 여러분들의 인생이 의미를 가진 베들레헴처럼 그렇게 놀랍게 새롭게 인정받는 그런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빌어 마지않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4.화목 제물로 오신 것은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등졌던 우리들과 하나님이 새롭게 화목하시기 위해서는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 했던 이유도 바로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장을 헐고 구속의 새 길을 열기 위해서 죽으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으셨고 그리고 예수님의 그 죽으심은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이었으며, 아들이 대신 짊어질 우리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판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새롭게 열어 화목의 관계를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베푸신 화목제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 이 세상에 보내셨지만 자기를 믿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에게 그 화목이 적용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아기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기 위한 화목 제물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고 있는 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아기 예수의 이 세상에 오신 그 의미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고 하나님과 그들 사이는 여전히 화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위해 죽으셨고 화목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는 막힌 담장이 무너지고 다시 그 위에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누리면서 살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주셨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쓸모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보내시고 그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어 이 세상에서 온갖 치욕과 고통을 맛보게 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한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그 하나님의 생명을 힘입어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새로운 사람들로 주님이 우리를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입은 사랑을 말로 형용할 수 없이 큰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사도 요한은 오늘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우리들을 이같이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사랑하니라”는 희랍어로 ‘아가페 토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엄밀하게 말하면 피동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말이 바로 구약에 나오는 ‘핫시드’입니다. 아가페 토이는 아가페에서 나왔고, 핫시드는 헷세드에서 나왔습니다. 헷세드와 아가페는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그렇게 아가페 토이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을 구약에서 다 '성도'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혹은 “은혜를 입은 자”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정확하게 말하면 사랑 받은 자들아, “하나님께 사랑 받은 자들이여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은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니까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이 의미에서 첫째로 우선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화목 제물 되신 이 복음의 사건은 그 의미를 참으로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이 의미를 압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정말 주님을 믿기 전까지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 평소에는 교회에 나오라고 그래도 그렇게 안 나오던 사람들이 성탄절이 자기들의 명절인가 우리 명절이지, 백화점이 더 좋아하고 여관이 더 좋아하고 술집이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축 성탄’이라고 그렇게 하면서 막 흔드는데 그게 정말 성탄의 의미를 알고 그렇게 하는지, 아무리 그들이 성탄절을 기억하고 장식을 만들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성탄선물을 나누어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전까지는 참된 성탄의 의미는 그들에게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오늘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화목 제물이 되어주신 이 놀라운 감격을 불신자들에게 먼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구원받은 자기의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여”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주님이 우리를 “사랑 받은 자들이여”라고 불러줄 만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남들이 알지 못하는 십자가의 복음을 우리들이 들었고, 어떻게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는지 우리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누구도 우리 주님을 본 사람이 우리들 가운데 없지만 눈에 보이는 누구보다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 사랑을 우리가 입었으면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 복음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 의미, 그리고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불화를 차마 보실 수 없어서 자기를 버려 자기를 죽여, 자기를 제물로 바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를 이루시려고 했던 그 예수님의 복음의 정신을 항상 가슴에 기억하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본분이 우리들의 신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누구일까요? 우리의 정체는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한가지 점에 있어서는 이 세상의 사람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비록 비참한 존재들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입니다. 한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기 자신에 대한 신분적인 정체성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옛날에 벌써 한 30년이 지난 이야기인데 어느 사극 드라마에서 그때 TV도 별로 없었을 때니까 라디오에 들으니까 왕이 지나가는데 어느 궁녀가 왕 앞에서 치마를 밟고 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황망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 왕이 그날 기분이 좋아서 저런! 하면서 손을 내밀어서 일으켜 세워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임금이 단 한번도 그 궁녀를 찾지 않았습니다. 누군지 모르고 새카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궁녀는 임금이 자기의 손을 한번 만져주었다는 이유 때문에 일평생 한번 스치고 간 왕의 손길을 기억하며 독신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들으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지만 옛날에 문맥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갈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지존인 그 왕이 감히 그 처녀의 손을 잡아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일으켜주는 은총을 입었는데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그런 정절의 정신을 가지고 주님의 사랑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산다면 아마 이 세상에는 어마어마하게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런 신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셨고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그 사랑을 안 사람들이다. 우리의 정체는 바로 주님의 그 한없는 사랑을 받은 성도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면 그 사랑을 입은 자녀들답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 본분이 있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의미를 안고 살아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사랑에 대한 놀라운 감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 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여기서 “이같이”라는 이 말은 헤아릴 수 없는 크기에 대한 사랑의 감탄사입니다. “이같이”라는 것은 그 앞에 나오는 다름이 아닌 자기의 아들을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바친 그 사건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제사에 대해서 제가 그저께 상세하게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게 아름다운 제사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죽어야지 만 그 제사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제물이 죽어야지 성립이 됩니다. 죄인이 하나님과 만나는 제사의 결과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러나 그 아름다운 제사의 결과를 위해서는 죄 없는 짐승이 피 흘리면서 죽어가야 했던 것처럼 죄인인 우리들이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게 된 것은 정말 아름다운 결과이지만 그 아름다운 결과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쪼개는 커다란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에 자기 자신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을 요한이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를 화목 제물로 드리신 예수님의 희생에 의해서 혜택을 받은 것은 용서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끔찍한 죄인들이고 그리고 그 더러운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신 그분은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다 라는 사실, 그리고 그 죽음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죽음보다도 뛰어난 가장 비참한 고통 가운데 부끄러운 형태의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나니까 그 쓸모 없는 죄인과 그 죄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특별한 화해, 이 사이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이처럼 크신 사랑이라는 말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이 같은 이야기는 요한 복음 3장에서 사도 요한이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 설명할 수 없이 크신 사랑이라는 사실을 이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도 가운데 가장 뛰어나게 예수님과 친분을 누리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였습니다. 늘 그분 곁에 있었고 그분과 함께 먹고 마셨으며 그분과 함께 잠을 자고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의 품에 있었던 그 요한이었습니다.
그 사도 요한의 마음에 죄인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이 세상을 인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사랑이라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아들을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주신 것이라” 그것이 바로 참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너무나 큰 것이었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도 당신이 우리 인간들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사랑을 그 이상으로 표현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큰사랑을 알게 된 요한이 하나님의 사랑, 특별히 죄인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처럼 사랑하사, 혹은 이같이 사랑하셨으니”라는 부사 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 예수의 탄생을 바라보며 가졌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을 읽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탁월한 감격을 이 사람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사람은 순교의 자리에까지 갔었으나 죽지 않아서 결국은 유배를 당했으며 그리고 종신 하도록 그 밧모 섬에서 우리 주님을 앙망하다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일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그가 한때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버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을 때 함께 도망간 겁쟁이였었는데 결국은 돌아온 후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고 계시록에 자기가 소개한 바와 같이 복음을 인하여 고난에 동참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위대한 계시들을 전달해주는 성경의 마지막을 기록한 위대한 계시의 전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한때는 겁쟁이였고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던 나약한 이 사람을 변화시켜서 마지막에는 주님을 위해서 죽는 자리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능욕을 받는 자리로 마다하지 아니하고 복음과 함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만들어주었을까요? 무엇이 이 연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이렇게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을까요? 무엇이 그렇게 했을까요? 대답은 오직 하나이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람 마음속에 있는 예수님의 큰사랑,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죽기까지 자기를 내어주심으로 하나님과 불화 하게 살아가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은혜 받은 사람으로 바꾸어놓으시기 위해서 죄 없으신 그분이 화목 제물로 자기를 버리신 그 놀라운 사랑에 대한 감화가 그로 하여금 예전에 마음속에 있던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주님을 위해서 죽는 자리까지 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늘 현실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는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나 현실이 너무 믿음으로 살도록 허락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적당한 타협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흔히들 변명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믿음으로 살기에는 이 세상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나약하게 세상과 야합하고 불 신앙과 타협을 했지만,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믿음의 사람들이 오직 ‘믿음’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히브리서 11장에 속편을 쓴 주인공들이 되어서 주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찬송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질그릇 같이 연약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표호 하는 사자와 같이 살았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세상과 더불어 대면하면서 두려워 떨고 주저할 그때에 그들은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갔으며, 세상과 야합하고 부끄러움을 자처하는 대신 영광스럽고 떳떳한 죽음을 맞이할 각오로 신앙하나로 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한가지였으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 모두 예외 없이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화를 입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깊은 감화를 입은 사람, 죄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내려온 그 사실을 보면서 예수님이 그렇게 부끄러움을 당하시고 고난을 자처하심으로 자기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면 그 큰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기들이 이번에는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그 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사람으로서는 감히 흉내낼 수도 없는 탁월한 믿음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두 공통된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이고, 그 사랑은 목숨을 내어놓은 사랑이었으며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은 얼마나 진지하고 열렬한 사랑이었는지 자기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형벌을 받고 죽어 가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아들의 울부짖는 고난보다도 그 고난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는 죄인들인 우리들과의 그 화목을 바라보고 계셨다는데 그들은 깊이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 각자 각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에 대한 다양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런 경험들이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지 않는지는 세상에 유혹에 쉽게 흔들리는 우리의 실제적인 삶을 보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은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난 여러 가지 체험이 있습니다. 병든 몸을 고쳐주신 주님의 체험부터 시작해서 사업의 위기에서 건져주신 은혜, 또한 우리의 생업에 여러 모양으로 복을 주시고 우리에게 자녀를 주시고 인생에 있어서 굽이굽이 어려운 길을 함께 하신 다양한 은혜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과의 은혜의 경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의 경험은 어느 정도는 우리의 신앙을 세우는데 가히 도움을 주고 그렇게 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런 경험들은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한 가지 경험에 비하면 모두 지푸라기와 같습니다. 그 한 가지 경험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경험,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구원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에 대한 깊은 감격, 그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커다란 감화, 이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고 세상 속에서 신앙으로 살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어떤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주셨을 때 그것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이 어느 정도 가는 것 같습니까? 예를 들자면 집안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그 어려움을 해결해주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즉시는 막 뛸 듯이 기뻐합니다. 그것도 기도한 사람만 기뻐합니다. 그리고 기도 안 한 사람은 ‘올해는 재수가 좋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토종비결이 맞나봐’ 그런데 기도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이 해주셨다고 합니다. 아! 정말 빚이 있어서 막 그렇게 고통을 받고 그래서 매일 울면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아주 놀랍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 것을 깨달았다.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가는 것 갔습니까? 물론 자신의 영혼을 관리하기 따라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얼마나 가는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험을 보여줍니다. 홍해 앞에 있었습니다. 큰일났습니다. 앞으로 가자니 빠져 죽을 것이요, 그리고 뒤로 물러서자니 뒤에서는 애굽의 병사들이 추격을 하는데 죽임을 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막 미친 듯이 두려워 떨다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홍해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지나갔습니다. 그때 건너가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감격했는지 미리암의 소고에 맞추어서 한 2-3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가대가 되어서 우렁찬 찬송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런데 삼일 길을 가다가 물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쓴 물밖에 안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거기에 삼일이 걸렸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정상적인 사고라면 그 큰 역사를 봤는데 우리라면 그 큰 역사를 봤으니까 삼일 물 안 먹어도 살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놀라운 광경을 봤는데, 또 하나는 물을 주시는 것이 더 커다란 기적이겠습니까, 홍해를 갈라서 물을 벽같이 세워서 그 마른땅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지나게 하는 것이 더 큰 기적이겠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삼일 전에 일어났던 그 기적을 기억하면서 그것도 해결해주셨는데 이까짓 것 문제도 아닐 거야. 하나님이 틀림없이 해주실 거야,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어려운 것이 생겨나니까 과거의 그 어려움 속에서 자기를 건져주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회상하면서 오늘 그것을 신앙의 원천으로 삼는 그 일에 있어서 실패한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가 하면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찬송은 그렇게 했는데 다양한 하나님의 사랑, 은혜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가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이나를 얼마나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는지 거기에 대한 깊은 감격이 있을 때에만 나머지 다양한 신앙의 경험이 우리를 신앙으로 살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특별히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옛날에 누구였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더더욱 할말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흠 없으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못 박힌 것이 바로 자기와 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으신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하시는 사랑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뼈저리고 깊이 경험함으로서 저 사람도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구나. 저 사람도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구나. 그런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는 사람이 누군가 하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자기의 철저한 죄인 됨과,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소망이 없었던 자기를 살리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의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찬송을 해야지 너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너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난 다 알 수 없지만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스도인은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나면 그는 형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숨지는 그 날까지 우리들이 늘 하여야 할 의무가 있으니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늘 역사 해야 합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아무리 높이 들어서 사용하시고 우리를 존귀하게 하셔도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한낮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위협과 시련, 환난과 박해, 고난이 우리를 에워싸고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된 것 같아도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보내신 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이었는지를 깨달으면서 세상으로부터 경험하는 버림받음과 그리고 멸시, 이런 것들이 앞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이 얻게될 하나님의 더 큰사랑을 위한 보증에 불과하다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체험하면서 우리들은 약하나 우리 안에 역사 하는 예수 사랑 때문에 우리는 훨씬 강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진실하고 건강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면서 이 세상에서 주님 때문에 멸시와 천대를 받고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아도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에 비하면 우리의 시련과 아픔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도록 우리 속에 끊임없이 이 십자가에 대한 감격들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을 통해서 나타났고 그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받은 자기의 자녀들을 보시면서 얼마나 마음이 안타까우실 까요? 당신은 가슴 저미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까지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주셨는데 사람들은 그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한때 그 사랑을 알았던 사람들인데도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고 주님의 그 큰사랑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 까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의 소원은 먼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았던 여러분들이 먼저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그 십자가의 사랑을 알아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가장 간절한 바램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은 결국은 주님의 뜨거운 사랑의 감화를 받은 사람들의 헌신적인 섬김과 그리고 희생적인 복음 전파, 자기를 버리는 철저한 희생의 정신을 통해서 사람들을 사랑하는 그 사람들의 복음전파와 선한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많은 희생이 필요하지만, 헌신이 필요하지만 주님의 사랑을 알고 경험한 사람들 이외에는 그렇게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그 큰사랑에 감화를 안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아서 세상을 그렇게 섬겨줄 사람들이 없습니다.
사도가 오늘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예수님이 화목 제물이 되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감격하는 것처럼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도 화목 제물이 되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감격이 여러분 속에 새로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신 그 성육신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형제 사랑의 삶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사람들을 한 종으로서 철저하게 섬기시면서 인생을 마치는 것이나,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서 화목 제물로 자기를 깨트려 희생하심으로서 구속의 길을 열어주신 그 십자가의 은혜가 이 모든 것은 결국은 예수님께서 당신만 이루신 일이었지만 그러나 그런 정신의 삶은 당신이 가고 나셔서 이 세상에 강물처럼 계속 흐르기를 원했던 삶입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이 가시고 나서 성령을 보내셨는데 그 성령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성령 받은 사람들이 살기 원하셨던 삶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일생동안 헌신하셨지만 그러나 그 팔레스타인 지방 밖을 나가신 적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다니셨고 물론 다른 기록에는 예수님이 어린 나이에 많은 곳을 여행한 것으로 나오지만 그것은 사 생애 때의 일이고 공생애에서는 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 지방과 갈리리 그리고 사마리아 그리고 요단강 건너 그 작은 지역밖에는 예수님께서 가신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렇게 계실 때에는 사람들이 볼 때 번듯한 교회 하나 세워놓지 못하시고 이 세상을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셨지만 다 고치셨나요? 또 한때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고통에 시달리는 상황이 예수님 가고 나신 후에 없었을까요? 여전히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평생을 무릎으로 병든 자들을 고치셨지만 병든 자들을 남겨주고 가셨고 외롭고 고통받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실 때에 여전히 소외당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 많은 사람들, 진리가 무엇인지 몰라서 유리하고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보며 마음 아파하셨지만 그래서 그들을 끊임없이 일평생 섬기셨지만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부활하실 때 그 사람들은 이 세상에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차마 그들을 남겨두고 발길을 돌리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내가 하는 이 일이 나의 제자들을 통해 계속 되니라.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나는 그들과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의 성령을 보내셔서 그 성령님이 그들과 함께 있게 하심으로 예수님의 살아온 삶의 뒤를 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우리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시는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살았던 그 삶을 뒤잇게 하시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감히 누구라고 예수님의 삶을 살수 있겠습니까? 우리 같은 죄인이 어떻게 예수님의 삶을 살수 있겠습니까? 예수처럼 사는 것, 우리는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이건대 예수처럼 살수 있겠으며 예수님의 삶을 우리들이 계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살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주님이 충만하게 계셔서 그래서 우리의 삶 전체를 예수의 정신으로 채우시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의 그 성육신의 정신에 사로잡히게 하면 예수님처럼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살고 싶으셨던 그 삶을 흉내내며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밖에 위로해줄 수 없었던 사람들을 우리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위로해주시고 예수님 밖에는 깨우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우리같이 쓸모 없는 인간들을 통해서도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그들을 깨우칩니다. 우리와 같이 부족한 인간은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놀라운 치유의 은혜를 주님이 우리를 도구로 해서 당신이 하시고 싶으신 그 일을 계속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사랑해주신 이유입니다.
그러면 그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무엇인가 그 사랑을 받은 사람답게 남다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항상 예수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계시도록 경건한 삶을 살고 우리의 영혼의 축복을 위해서 우리의 영적인 상태의 고양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더 간절히 기도하고 자기를 지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가는 삶이 어디 한 두 가지이겠습니까? 고통받는 자도 돌보고, 가난한 자도 섬기고, 무지한 자도 가르치고 그 삶이 얼마나 다양하고 많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다양한 삶을 통활 할 수 있는 한 표현이 있으니 그것이 사랑의 삶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모든 지식은 그 지식이 무엇이든지 간에 사람들을 교만하게 만드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 중에는 교만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뭔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분야가 있으니까 그것에 대해서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 하나 예외가 있는데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우리들을 더 겸손하게 만들고 무릎을 꿇어서 사람들을 섬기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비밀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자기가 얼마나 쓸모 없는 죄인이고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사랑인가 하는 것에 대한 감격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리 내가 많이 알아도 모르는 사람을 보면서 교만해질 수가 없습니다. 교만해질 수 있다면 진정으로 예수를 안 것이 아닙니다. 물론 나는 저 사람보다 예수를 더 많이 알아. 그런데 알면 알수록 더 깊이 깨달아지는 것은 내가 정말 쓸모 없는 인간이라는 것,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에게 사람의 몸을 입어 이 세상에 보내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은 나 같은 죄인이 받아 누리기에는 부당한 사람이었다는 그 마음이 교만해질 수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보십시오. 세상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많은 것들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제시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사람들은 많이 누려도 전쟁과 고통에 벗어나지 못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천국과는 거리가 먼 삶을 누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 사랑은 신기루와 같아서 어디에 가서 잡아보려고 해도 잡히지 않습니다. 모두들 사랑 받기 원하고 또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람들의 이기심은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충돌을 일으켜서 사람과 사람사이에 분쟁을 일으키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 속에서 한없는 고통, 그것으로 가득 찬 세상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궁극적인 답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자신의 삶의 온전한 완성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쓸모 없는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쓸모 없는 죄인이 오늘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주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바로 그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 성도이고, 그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나를 향해서 대해준 태도에 대해서 어울리는 반응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도 모두 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자기를 위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세상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도 모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상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면 항상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내게 베풀어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셨는가. 그리고 내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기까지 낮아지심으로 하나님이나를 사셔서 주의 백성을 삼았으니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사람이다. 그리고 그 빚은 이 세상에 살면서 갚으라고 하나님이 주신 그 빚입니다. 물론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도 그 사랑을 갚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채의식의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또 하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가 하고 있는 행동이나 그가 교회에서 가지고 있는 중요성이나 그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지위나 이런 것들을 가지고 그 사람의 가치를 재는 것은 세상에서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사람을 향한 가치가 다릅니다. 다른 것은 세상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사람의 대한 새로운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저 사람이 지금은 주님을 믿지도 않고, 그리고 교회를 박해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훼방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정말 끔찍한 죄인이지만 그러나 그 사람 한복판에 있는 그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혼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로 그 속에 주신 그 영혼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도 구원하고 변화시키려고 하는 바로 그 영혼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깊이 목회에 있어서 한계를 느낄 때가 수도 없이 많지만 한계를 느낄 때는 언제인가 하면 그 중에 하나가 정신이 좀 잘못된 사람들, 귀신이 들어갔다고 하면 문제가 간단한데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명백한 정신병자는 아니고 그런데 하여튼 꼭 말하자면 얼음판 위에서 자동차가 가는 것처럼 정상적이지 않고 말로 형용할 수 없이 미끌미끌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신앙의 기본적인 공식이 잘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으면 성령께서 은혜를 주시고 변화되는데, 이런 일반적인 공식을 적용시킬 때 잘 적용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신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 뇌에 무슨 장애가 있다든지 해서 우리들이 이제 생각하고 있는 자폐아라든지 정신적인 장애가 있어서 도저히 정상적으로 복음에 마음에 쉽게 들어가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절망을 느끼기에 충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서 마지막 내리는 결론은 정말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입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무모할 정도의 많은 희생을 통해서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지라도 우리들이 그 일을 해야지 됩니다. 그것을 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에 대한 새로운 생각입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은 그가 아무리 정신병에 걸리고 그가 아무리 정신적으로 뭔가 문제가 생겨서 복음의 진리를 건강한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저렇게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누군가는 그들을 위해서 울어주고 누군가는 그들을 사랑해주고 그리고 경제적이고 효율적이라고 하는 이런 판단과는 상관이 없이, 경제성이나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투자나 소득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무제한적인 희생을 가지고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서 용납하고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주시고 혹은 그들을 새사람 만들어주시고 변화시켜주시기를 아파하고 매달리는 그런 몸부림이 누군가에게는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이 부채의식을 가지고 짊어지고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베풀고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의 사랑에 깊이 붙들려서 이런 사랑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죄와 불순종이 이 세상에 그치지 않는 한 이 세상에서는 영원히 주님오시는 날까지 모순과 고통이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이 세상에 모든 고통과 전쟁, 그리고 슬픔을 종식시킬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의 사랑을 힘입어 주의 자녀가 된 감격에 예수의 사랑을 가슴에 안고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하는 삶을 살고 자기가 받은 그 무제한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소망이 없는 죄인들에게 부어주면서 산다고 할 것 같으면 괄목할 만한 변화가 이 세상에는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도, 들어도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또 보아서 알 수 있게 되는 그런 변화가 일어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일평생의 소명은 예수의 사랑을 나타내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 오신 성탄절에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께서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큰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서 주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럽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의 희생을 마다하고 예수님의 성육신의 정신으로 아파하는 사람들 가까이 다가가기를 거절한 적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은혜 될 수 없었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능력이 능력으로 남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성탄절에 다시 한번 경건하게 우리의 옷깃을 여미며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기까지 낮아지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렇게 낮아지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주님 섬기고 사랑하는 진실한 주의자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성탄시리즈Ⅱ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