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가까이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십자가로 이끄심(요12:32) 2001.4.9 십자가사경회(저녁) 1
2. 성령과 하나 된 보혈(히9:14上) 2001.4.10 십자가사경회(저녁) 16
3. 화목제물 되신 두 가지 뜻(롬3:25上) 2001.4.11 십자가사경회(저녁) 31
4.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롬3:25上) 2001.4.12 십자가사경회(저녁) 45
5. 십자가를 따른다는 것(눅23:28) 2001.4.13 십자가사경회(저녁) 61
1.십자가로 이끄심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요12:32)
“내가 들리면 저희를 내게로 이끌리라”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그 십자가가 미칠 영향력을 미리 예고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들리면”이라고 한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은 이것을 부활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땅에서 나무에 매달려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들리신 그 못 박힌 고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특별히 뒤 절에 나오는 “그는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심이니라”한 설명에 비쳐볼 때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 “내가 들리면”이라는 이 말씀은 부활이기보다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높이 매달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받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 비로소 당신이 많은 사람들이 당신께로 이끌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크게 세 가지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첫째는 이끌겠노라 누구를,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으로, 그리고 세 번째는 어떻게 라는 질문으로 답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우선 여기에서 “이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를 이끈다고 한 것일까요? 우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끈다고 말씀하셨으니 무엇인가 멀리 떨어져 있고 흩어져 있는 인간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바로 그렇게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 그 사람들을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로 이끄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 세상에 만드실 때에는 이렇게 당신으로부터 멀리 떠나고 뿔뿔이 흩어진 자들로 만드시기 위하여 이 땅에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되 특별히 자기의 형상을, 당신의 모양을 그 안에 두어서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은 바로 그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시고 그와 함께 교통하심으로 이 세상에 있는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가족관계 속에서 사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 세상에 있는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방법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가족은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장 정상이고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흩어져 뿔뿔이 헤어진 가족들의 눈물과 비탄을 여러분들은 알고 있습니까? 오늘날도 되풀이되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상봉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듭니다. 가족은 처음부터 함께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교제하고 함께 생명 적인 연합을 이루며 함께 운명을 같이 하고 살아감으로서 가족 각 구성원들은 각자가 이 세상에 태어난 가치와 목적을 구현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가정이 모두 파괴되어서 뿔뿔이 흩어진 가족 구성원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서 커다랗게 변화되고 새사람이 되어서 고쳐지기 전에 그들은 모두 망가진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끌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 구속하고자 하시는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얼마나 하나님이 원래 그들을 창조하신 계획과는 멀어져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끊어졌으며 그들은 자기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하나님이 가족으로 창조하신 이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다시 찾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이 되었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들은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너희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던 자들이라고 성경은 주님을 믿기 전에 우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뿔뿔이 주님께로부터 흩어지고 생명 되신 그 분과의 교제, 가족 관계 속에서만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가치와 목적을 성취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죄와 허물을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의 눈은 어두워져서 그들의 삶은 점점 더 허무하고 더러운 것들에 복종하고 굴복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하며 살 수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 그의 가족으로서의 찬란한 영광은 이제 모두 사라져버리고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을 섬기고 이 세상에서 다스리고 정복하여야 할 자연계의 굴복하며 그것을 신처럼 섬기는 비참한 피조물들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그 인간들은 원래 자기와 가족 관계에 있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자기들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막대 먹은 피조물들로 전락해버렸습니다.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지식을 주셨지만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는 또한 여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그분의 간섭과 다스림 없이 살아가는 죄악 된 삶을 좋아하는 습성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셔서 이 세상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도로 파송하셨을 때에 어떤 마음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들을 이 세상에 보내게 하셨는지 기억나십니까?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그 시대의 수많은 백성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의 마음은 심히 민망하여 찢어지는 것 같이 아프셨습니다. 그 각 영혼들, 하나님을 멀리 떠나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며 소망 없이 살아가는 비참한 인간들을 향한 연민과 견딜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시고 동시에 권능을 주셔서 이 어두움 세상에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파송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절대적인 절망 속에 있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일반적인 은총이 아직 남아 있어서 양심도 어느 정도는 작동하고 있고 어느 정도는 이 세상의 선한 이치를 따라서 행동할 수 있는 자율적인 능력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영적인 도덕적인 행동들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기에 성하게 느껴지고 사람들이 보기에 도덕적으로 선하게 느껴지고 사람들이 보기에 도덕적으로 느껴지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역시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들 가운데 남아 있는 그런 은혜입니다.
만약에 이것마저도 없어졌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세상은 아비규환의 세상이 되었을 것이고 아마 인류는 생존조차 할 수가 없는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일반적인 은혜가 아직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어서 그래서 주님을 모르고도 여전히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는 정돈된 삶을 살고 또 어느 정도는 지극히 적은 부분이기는 하지만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서 가장 중요한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해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분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시지 않는 한 우리는 그분께로 돌아갈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향해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면 이제는 내가 너희를 이끌리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미 이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속속들이 썩었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전적인 무능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고 하나님과 함께 생명저긴 관계를 누리고 가족관계 속에서 생활하고 그 교통을 이룸으로서만 진정으로 이 세상에 인간으로 창조된 목적에 부합된 삶을 살 수 있는데 그러나 그는 아무리 원하고 아무리 갈망하여도 자신의 힘으로는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커다란 홍수가 나고 시뻘건 흙탕물이 떠내려가고 고무 기구를 타고 그 시뻘건 강물 위를 떠내려가는 사람이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며 구조를 요청했으나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고무 기구의 바람도 다 빠지고 이제 물에 몇 번씩 나왔다가 들어갔다 하며 손을 흔드는 흔들림도 서서히 약해집니다. 드디어 그는 모든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의 숨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는 물위에 죽은 자처럼 엎드려졌습니다. 그리고 둥둥 떠내려가기 시작합니다. 강물의 흐름은 점점 세차게 하류를 향해서 성난 듯이 쏟아져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모습입니다. 모든 힘이 빠지고 생명은 아직 붙어 있으나 물위에 엎어져 있는 그 사람은 아마 몇 분이면 생명이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제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헬리콥터가 떠서 밧줄을 내려주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는 잡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누군가가 헬리콥터에서 밧줄을 몸에 매고 그 아래까지 내려오는 것입니다. 손을 뻗쳐도 잡을 능력도 없고 안아주어도 매달릴 능력이 없는 그 사람을 일방적으로 그 물 속에서 건져내어 헬리콥터로 끌고 올라와서 응급처치를 하고 숨을 쉬게 해주는 것만이 어떠한 구원의 가능성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을 상상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위로부터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밖에 우리는 생각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영원한 유일한 찬송 제목이 되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철저히 죽고 그리고 생명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떠났던 우리를 건져주신 유일한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생명 되신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났고 뿔뿔이 흩어져서 짓밟히고 약탈당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스스로 파괴하며 살아가는 그 사람들, 자신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자기를 건질 수 없는 절망적인 그 사람들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달리신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일 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도 다 알 수 없는 이해와 경륜으로 우리보다도 의롭게 살아온 많은 사람들을 버려 두고 죄인 중에 괴수와 같고 범죄한 자 중에 으뜸 되었던 우리들을 특별히 선택하셔서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작정과 영원하신 계획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이었다는 것 이외에는 우리는 무엇으로도 우리의 구원을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들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늘 “내가 하늘 높이 십자가에 매달리면 너희를 이끌리라”고 하셨을 때에 이 “이끄신다”는 의미가 설마 교회로 우리를 모아놓으시겠다는 말씀이 아닌 것을 모르는 분은 아무도 없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무에 높이 매달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서 대신 희생을 당하신 후에 우리를 이끄실 것을 예고하신 것은 단지 우리를 예수 믿는다고 고백하는 고백하기만 하는 명목상의 신자들로 교회에 모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다면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은 너무나 가련한 것입니다.
그 분이 “이끌리라”고 말씀하신 이것은 단지 교회를 다니거나 명목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간신히 이어가는 쓰레기와 같은 이중인격자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우리를 이끌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이끄시기를 원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로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살리시고 그렇게 살아난 자들을 하나님의 영과 접붙이게 하셔서 그래서 그분의 영 안에서 그분과 함께 교통하며 교제하며 살아서 죄와 타락이 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렸던 그 완전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이 우리를 이끌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광경을 보면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죽으신 그 후에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겠다고 말씀하신 이것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지 우리와 죄와 허물을 용서하기만을 위한 십자가가 아니라 그 하나님과의 친교, 그 하나님과의 감격스러운 교제 속에서 살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보혈을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는 것은 우리의 구원의 가장 작은 일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그리고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것은 이제 하나님과의 더 영광스러운 교제, 하나님과의 그 아름다운 친교 속으로 들어가는 겨우 현관일 뿐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자신이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받은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으로 용서를 확인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왜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까? 죄인 된 우리와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가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보게 하시려고 담장을 허무셨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주는 평화 막힌 담을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그렇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의 보혈로 막힌 담을 허무는 것이지 그 허물어진 담장을 사이에 두고 주님과 우리를 대적하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자기의 몸을 찢으신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던 그 마지막 순간에 지성소와 성소를 가리고 있는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의미심장한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베실로 짠 그 휘장은 양쪽에서 황소가 잡아 당겨도 찢어질 수 없는 아주 견고한 휘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위로부터 찢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소에 드나들던 제사장들이 이제는 그 휘장이 찢어지므로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구별이 사라져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그 속죄소가 있는 그 지성소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데 베드로는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아래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죄의 용서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시는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를 믿기만 하면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에 보내실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런 식의 바보 같은 질문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단지 죄를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죄의 용서라고 하는 그 휘장을 걷고 지나가서 친교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십자가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지옥 갈 리가 없다라고 하는 것만을 믿는 것이 진정한 십자가 신앙이 아닙니다. 십자가 신앙은 거기에서 뛰어넘어서 용서의 현관을 지나 하나님과의 깊고 세밀한 친교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전에는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고 불러도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던 비참한 죄인들,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던 인간들이 그 죄의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진실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이끌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욕보이는 사람들은 아직도 하나님을 안 믿고 살아가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불신자들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만, 구원받았다고 믿으면서도 이런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 속에서 살지 않은 사람들도 사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욕보이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정말 하나님 앞에 진실한 신자로서 살아간다고 말할 때 그 진실한 신자의 삶에 한 복판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구원으로 말미암은 감격과 그 용서를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하며 사는 친밀한 영적인 교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령한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십자가에 깊은 사랑과 그리고 애착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다시 사신 것에 대해서 한없는 애착을 갖는 이유는 바로 자신이 그런 그리스도의 용서에 은혜를 통해서 예수님이 자기를 짐승과 같은 자기를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완전한 친교의 세계 속으로 이끄셨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절대로 용서받은 것만으로 만족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용서를 뛰어넘어서 그 용서를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이끄시고 싶으셨던 곳이 어디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한없이 더러워진 그 돼지우리간에서 뒹군 것과 같은 그런 더러운 우리를 그의 보혈의 피로 우리를 모두 옷 벗겨 깨끗이 씻으시고 그리고 우리의 더러운 옷을 다 빨아서 눈과 희게 만드셔서 우리를 다시 입혀주시고 그리고 우리를 다시 한번 살게 하셨을 때에 그 꼬까옷을 입고 예수님께서 우리가 가기를 원하시는 곳이 계셨는데 그곳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를 향한 진노와 형벌을 그 분이 대신 담당하셨으니까 이제는 그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힘입어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런 진실한 성도들이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우리들을 십자가의 피로 이끄시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 주간에 일주일 기억하면서 금식이나 몇 끼 한다고 해서 그것이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총체적으로 하나님과의 잃어버린 친교를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나를 이끄시고자 하셨던 그 지점에 내가 서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고 그리고 정말 당신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나를 하나님과 완전한 화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한없이 복된 친교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어 갖고 그렇게 살아가는 완전한 친교의 삶을 그 속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보면서 오늘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십자가를 보면서 주님이 저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한번 십자가에서 회개하여 구원을 얻고 이렇게 아무렇게나 살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저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나에게 용서를 뛰어넘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사랑과 그 친교 안에서 하나님과 계속해서 교통하는 그 친밀한 화목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전에 사울과 같이 예수 믿는 사람들, 박해하는 사람들만이 십자가 앞에서 회개해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전에 짐승처럼 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을 욕하던 막대 먹은 죄인들이 구원의 은혜로 돌아올 그때에만 회개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그 하나님의 큰사랑으로 구원을 얻고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십자가에서 구원하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시는 그 친교 속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시고 싶어 하셨는데 이런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리고 안일하게 살아가는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없이 욕보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말라깽이와 같은 신앙생활, 기도의 교제도 없고 말씀의 교제도 거의 사라져버린 앙상한 양심에 가책도 거의 무디어져 가는 그런 죽은 자와 같은 신앙생활에 대해서 십자가 앞에서 깊이 통회하고 우리의 이런 삶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신 십자가에 고난을 현저히 욕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십자가 앞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깊이 뉘우치면서 십자가의 은혜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며 주님께 이끌려서 아버지 하나님과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회복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멀리 느껴졌던 그 십자가가 오늘 내 마음에 다시 한번 놀랍게 역사해서 그래서 주님의 큰사랑,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기뻐하며 살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무엇으로, 무엇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시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끄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사용하셔서 이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이제 시대가 너무나 많이 변했기 때문에 복음으로는 승부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변하는 복음보다는 변천하는 이 시대의 상황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복음은 그냥 원래 있는 것이고 이제 우리가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신세대의 새 방법, 디지털 시대에 맞는 새로운 목회의 방식들을 연구해 내야지만 이 사람들을 이끌 수 있고 이제 수없이 오래 전에 옛날에 써먹던 그 단순한 복음을 가지고는 이 많은 사람들, 현대화되고 영악한 이 사람들을 도저히 하나님께로 이끌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다분히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불신자들, 혹은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그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들을 사실은 교회도 고민하고 있으며 교회에도 그 해답이 있고 그리고 교회도 그들이 갖고 싶어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들을 자꾸 그들에게 보여주고 그들에게 제시함으로서 교회는 그들과 함께 같은 부류다. 그리고 보니까 교회가 우리하고 틀리는 것이 없구나. 이런 확신을 줌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어느 시대든지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흘러 들어와도 교회가 우리와 너무 비슷하구나 하고 들어온 사람들 중에 하나님께로 이끌림을 받았던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근대 기독교 선교 역사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19세기에 합리주의가 한창 유럽에서 기승을 부릴 때 유럽 대륙 전체에 하루에 600개씩 교회가 문을 닫았다고 하니까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 몸에서 나셨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의 피가 남다른 효과가 있어서 그런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고 하는 것, 천당과 지옥이 있어서 믿는 사람들은 천당으로 가지만 불신자들은 지옥으로 간다는 것, 그리스도 예수께서 종말에 이 세상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수 천 년 전에 쓰여진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 기독교의 기본을 이루는 모든 기초들이 다 난도질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그런 모든 교리는 낡아빠진 시대의 유물이라고 하며 그들은 모두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때 교회가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대다수의 많은 교회들은 우리도 그렇게 비슷하게 생각한다. 그러니 갔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여기에 나오는 동정녀 탄생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그때 사람들이 그랬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소망이지 꼭 그랬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을 교회에 붙들어둘 수 있었습니까? 붙들어둘 수 없었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미명하에 이제는 복음보다는 이 세상의 변혁을 위해서 봉사하는 아름다운 봉사단체처럼 교회를 바꾸어보려고 시도했지만 역시 복음을 떠나서 세상으로 가는 사람들을 붙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으로도 그들을 사로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복음이 싫어서 떠나가는 이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통해서 사로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언제나 교회는 이런 식으로 유혹을 받아왔고 그리고 이런 유혹에 대해서 교회는 잘 굴복하면서 이제껏 지내왔습니다. 그래서 선교 역사를 보면 교회가 세상과 거의 같다고 말함으로서 세상을 선교할 수 있었던 시대는 거의 없습니다.
사도 행전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가 금과 은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손을 내밀며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그래 네가 원하고 구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있지. 그러니까 한번 교회에 와봐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네가 원하는 것은 우리에게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너의 인생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에게 계시다. 일어나 걸으라. 일어나 걸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교는 교회가 세상과 같아짐으로서 선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달라짐으로서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르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복음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지도를 보면 영국과 캐나다 사이에 저 위쪽으로 북위 60도 이상으로 올라가 보면 그린렌드라고 하는 땅이 있습니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어마어마하게 추운 땅입니다. 거기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9세기에 선교사들이 거기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모라비아 교파의 교도들이 그 그린렌드로 선교사를 보내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가서 조사를 해보니까 너무너무 미개한 것입니다. 얼마나 미개한지 정상적인 대화가 통하기 힘들 정도로 미개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교사들이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는 것은 이것은 도저히 이들에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니까 우선 기초적인 것부터 먼저 가르치자. 인간이 누구이고 그 다음에 신이 계시다고 하는 것과 그리고 그 신이라고 하는 분의 정체가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고 인간을 지으셨는데 그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을 다 말한 후에 그들이 그 개념들을 모두 받아들일 때 되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을 가르쳐주자. 그래야만 이들이 겨우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선교를 했지만 거의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때 아주 우연히 어느 선교사가 그들에게 가서 그들이 이제껏 해오던 관습을 깨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의 죄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에스키모 사람들이 펑펑 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입니까? 다시 한번만 우리에게 들려주십시오. 그리고 다시 들려주니까 그들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우리 인간의 죄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대신 우리를 위해 형벌을 받고 죽으셨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그렇게 우리를 위해 못 박히고 죽으신 그분이라면 사실 우리가 죽인 것에 다름이 없네요. 우리가 어떻게 그 분을 믿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급격한 선교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그때뿐만 아니라 모든 때에 공통된 경험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곳에 이사와서 2년 5개월 동안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2년 5개월경에 여기에 올 때 200명의 사람이 여기에 모여서 한 줄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2년 5개월, 겨우 29개월 정도 지나는 동안에 이 교회당이 가득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약 여기서 정치 강론을 했더라면 200명이 모인 사람들이 지금은 거의 떠나고 몇 명 안 남았을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서 아주 재미있는 코미디를 보여주었더라도 같은 코미디를 계속 되풀이했다면 아마 그 200명은 화를 내면서 모두 떠나고 아무도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이 복음이 2년 5개월 전에 들려주었던 복음입니다. 여러분들은 새로운 것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에 듣던 복음을 지금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이 선포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여기에 보내주셨습니다.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간 사람들 중에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소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복음이니까 그런 일들이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 기도해야지 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의 터 위에 서지 않는 교회들은 모두 무너지도록 그래서 다시 복음의 기초, 피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의 토대 위에서 다시 교회를 세우도록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 모든 교회는 반드시 무너지도록 그래서 다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복음의 가치와 그리고 인간의 재능과 사람의 말과 변론과 인간의 모든 지혜로 불가능한 그 일을 오로지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깊이 확신하고 그 복음으로 돌아갈 때까지 하나님께서 실패를 거듭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교회가 아닌 교회들의 번성함보다는 진정한 교회의 번영이 우리에게는 더 소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어떤 문제가 생겨나는가 하면 사람들이 교회는 잘만 하면 교회는 모이니까 교회에 모이는 모든 동기가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한다든지 아니면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에 매이는 사명감 때문에만 교회에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학교에 가는 애들이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민족 중흥의 역사를 일으키려고 학교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엄마가 깨워서 도시락을 싸서 가방에 넣어주니까 어디에 가겠습니까? 학교에 말고, PC방도 하루 이틀이지, 그러니까 가는 것이 아닙니까? 신앙생활도 그런 것과 비슷합니다. 주일날 어디를 가겠습니까? 가서 놀아봐야 낮에는 괜찮은데 저녁때면 왠지 찜찜하고 뭔가 일주일이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그래도 졸더라도 한시간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가면 그래도 찜찜한 것을 털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 동기에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복음이 아닌 다른 것으로서는 거기까지는 성공할 수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것은 교회에 이끌린 것이지 하나님께 이끌린 것은 아닙니다.
(예화: 어느 성도가 다니던 교회를 그만두고 옮기려고 하니까 공산당 탈퇴를 하는 것보다 더 힘 들었는데 전화를 하고 찾아오고 하면서 힘들게 해서 결국 자신만 이사를 갔다는 이야기) 물론 우리는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얼마나 그 한 영혼이라도 놓치지 않고 그를 붙잡아주려고 애를 쓰겠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교회에 이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겨우 기회일 뿐입니다. 왜 여기에 와 있으니까 지금 복음을 듣는 것이 아닙니까? 이게 겨우 기회일 뿐입니다. 밖에 돌아다니고 술집에서 술 퍼마시고 노래방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를 하고 그러면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로 사람을 이끄는 것까지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어도 인간의 힘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한데 그런데 그를 교회를 뛰어넘어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제 속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재미있는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고 그 사람들을 하여금 이 교회에 소속된 긍지를 느끼게 만들고 그리고 여기에 와서 몇 십 년째 한 구역에서 한 교인으로 사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인간적인 따뜻한 교제, 우정으로 가득 찬 교회의 이런 모습, 이것만을 가지고는 그를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이끄시고 싶으셨던 하나님과의 그 친교 속으로 이끌기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겨울 사경회에 참석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참석하지 못하셨다면 나가시면서 꼭 겨울 사경회 테입을 구입해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로부터 이어지는 십자가 사경회 전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병적인 유아상태의 머물러 있는 육신 적인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세계로 들어가는 비결이 무엇이라고 배웠습니까? 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함으로서 가능해진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의이신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그것을 경험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선포되지 않으니까 교회까지는 사람들이 이끌려도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 수 있는 신령한 사람들로 변화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자신의 섬김을 받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린 이상한 사람들,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종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이렇게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제 속으로 이끄시는 그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복음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해서 아직까지도 불신자의 상태로 이 세상을 헤매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는 사실, 바로 그렇게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해서 못 박혀죽은지 40일만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오르신 그 예수, 다시 오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때묻지 않은 순수한 복음으로서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혹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간신히 인간적인 관계나 끈에 이끌려서 교회까지 나오는 사람들이 신령한 사람들로 변화되어서 하나님께로 이끌리는 이 놀라운 변화 역시 복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가장 놀라운 비결은 여기에서 인간의 사상이나 사람의 잔재주,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사는 아니라 아주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새빨간 복음이 선포되면 그것이 강력하게 선포될 때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오, 믿지 않은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대적하는 본성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어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당신께로 이끄시는데 그 복음을 누구를 통해서 전하게 하시는가 합니까? 천사가 해주는 것도 아니고, 천사장의 호령소리와 나팔소리로 예수님이 직접 복음의 의미를 설명해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끌리라”고 할 때에 이끌리는 것은 마치 자석을 이렇게 잡아당기면 거기에 쇠붙이들이 쭉 따라서 나오는 것처럼 사람 사람의 손을 잡고 여기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 가운데 사람이 이끌어서 여기에 오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온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어떤 사람은 방송에 설교를 듣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옵니다. 누가 이끈 것입니까? 제가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손을 내민 것입니다. 책을 읽고 결심을 했습니다. 누가 썼습니까? 제가 썼습니다. 전도지 를 보고 왔습니다. 누구죠? 전도한 사람의 손이 이끈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 사람마다 다 손에 이끌려서 자석처럼 붙어서 그렇게 해서 그들이 교회로 이끌려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이끌려 와서 복음을 들으면서 어디로, 신령한 하나님께로 이끌림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가 높이 들리워 십자가에 못 박히면 내가 저희를 이끌리라”고 말씀하실 때에 이것은 또한 우리를 향한 부르심이기도 합니다. 내가 복음으로 저들을 이끌텐데 너희들은 내가 그들에게 그들을 이끌기 위해서 전파하는 복음의 도구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늘 모여서 하나님 앞에 사경회를 갖고 있어도 지금 이 밤에도 여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숫자와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의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현저하게 하나님을 욕보이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쌓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거룩한 하나님을 향한 얼마나 심각한 도전이고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의 마지막 날에 받을 엄중한 심판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진실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예화: 1945년 히로시마에 뿌려진 삐라를 보면서 사실일지 모른다며 피한 사람들은 살았지만 믿 지 않던 사람들은 모두 원폭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살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식의 인생을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들을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너무나 곤고합니다. 인생을 사는 것이 너무 힘겹고 인생을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듭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 존재하는 무게가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이 그것을 모르셨다면 여러분은 인생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너무너무 힘겹습니다. 차라리 딱정벌레나 아니면 길가에 피었다가 지는 들풀 중에 하나로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그렇게 해서 인생에 대해서 참된 가치와 의미가 무엇 일까 를 고뇌하던 많은 사람들이 허무주의 내지는 쾌락주의 같은 데 떨어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렇게 고민하고 괴로워해도 그 인생에 참된 진실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을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지남철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잘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확실하게 경험하고 그리고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고 용서의 은혜를 뛰어넘어서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 속에서 사는 진실한 신자가 되었을 때 성능이 좋은 자석이 되는 것입니다. 저기 친척이 있는데 짝 뻗으면 달라붙는 것입니다. 저기 쫙 찰카닥 달라붙는 것입니다. 여기에 벌써 열 댓 명 붙었는데도 쫙 하면 16번째로 달라붙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영향력입니다. 영향력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골에서 배추나 무를 팔아주는 것, 그것이 복음의 영향력이 아닙니다. 바자회나 해서 무슨 양로원에 먹을 것이나 보내는 그것이 복음의 영향력이 아닙니다. 그 일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단지 이 세상에서 신문지상에서 오르내리면서 칭찬 받기 위해서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복음이 있습니다. 인생에 진실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생에 참된 진실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거룩한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속에서 살 수 있을까. 그것을 가르쳐줄 수 있는 유일신에 대한 유일한 곳이 교회입니다. 요즘 전도를 안 합니다. 전도를 안 하는데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계속 활동을 하면 전도가 되고 그것이 전도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붙지도 않는 지남철을 가지고 아무리 쇠붙이 속을 흔들고 돌아다니면 뭐 하는가 붙어야지. 아니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초등학교 때도 보면 지남철을 가지고 자연학습 시간에 많이 했습니다. 문방구에서 10원을 주고 사는 것은 대부분 말굽 자석인데 붙긴 붙는데 잘 안 붙습니다. 그런데 그 공업용 자석은 얼마나 잘 붙는지 갖다가 대면 손이 빨려갈 정도로 붙습니다. 붙지를 않는 것을 가지고 못 속에다가 넣고 계속 돌리는 것입니다. 붙어야지.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능이 좋은 지남철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딱딱 붙는데 우연히 음식점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다가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과 만나게 되면 이 사람 자체가 아주 복음으로 무장된 성능이 좋은 지남철입니다. 그래서 쫙 하면 찰카닥 달라붙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접촉하는 사람들이 계속 복음의 영향력을 받아 가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경험하는 영적인 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슷비슷하게 날라리 비슷한 교인들끼리 매일 모여서 밥 먹고 등산을 다니고 해도 변화될 리가 없습니다. 그 인간이 그 인간인데 어떻게 변하겠습니까? 그런데 들어보십시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진짜 복음을 듣고 확실히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여태까지 있었던 희미한 희망적인 생각들이 확 자리를 잡으면서 아! 이것이구나.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모이면 매일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고 구역 예배는 20분이나 드리고 노닥거리는 것은 1시간 30분을 노닥거리고 그리고 기분이 내키면 고스톱까지 치는 그런 구역이 실제로 그런 구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어느 날 변화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과 똑같이 모이는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이제 이렇게 살면 안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얼마나 갑갑해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썰렁하잖아요. 그러더니 뭐라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고스톱 치려고 막 기계를 꺼내는데 눈물이 쫙 흐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우리 이렇게 살면 안돼. 그때 비로소 거기에 있는 많은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신령한 생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뭔가 저 사람 속에 일어난 변화의 정체가 무엇일까 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쓰레기와 같고 더러운 허무한 인간의 사상과 초등학문,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 찬 말하자면 보기에 그럴듯한 신앙생활에 대한 애착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우리가 복음의 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 앞에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고 복음으로 완전히 변화된 그리스도인이 될 때에 그때에 비로소 우리들이 좋은 지남철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한 사람이 전도를 해서 교회에 데리고 오잖아요. 세월이 한참 지나면 꼭 저 같은 사람을 만들고야 맙니다. 그 사람이 그저 아무리 형식적이고 그런 사람이면 어떻게, 어떻게 해서 진짜 지나가는 황소 뒷발에 채인 개구리모양 어떻게 이상하게 하나가 전도가 되어서 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과 계속 교제를 가지면서 만들어진 그리스도인은 그 사람과 비슷한 그리스도인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복음으로 꽉 차고 주님을 정말 인격적으로 만나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통해서 전도된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하여튼 쉼 없이 성장을 해서 거의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참된 복음으로 가득 차서 참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진실한 기독교인의 생활이 무엇인가를 자기를 인도한 사람을 통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지남철에 달라붙었는가도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지남철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은 그냥 데리고만 놓고 손을 떼십시오. 계속 붙어있지 말고 손떼. 그냥 데려다만 놓고 손을 떼시기 바랍니다. 얼른 그 옆에서 사라져. 그리고 진짜 좀 지남철 같은 사람이 옆에서 붙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래도 지남철 같지 않아도 데리고 온다는데 안 된다고 그럴 수는 없잖아요. 데리고 와야지 됩니다. 그런데 붙어 있으면 안 됩니다. 갖다 놓고 멀리, 1층에 갔다 놓고 2층에 올라가고 2층에 있으면 1층에 내려오고, 그리고는 진짜 복음으로 무장된 자, 그리스도의 복음이 내 영혼을 만지며 지나간 흔적이 있는 사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감격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그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지 그리고 그 분이 왜 우리를 그렇게 하나님께로 이끌고 싶어하셨는지, 그렇게 이끌림을 받아서 지존하신 하나님과 화해 속에서 사는 우리가 이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런 사람한테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아주 확실한 지남철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 위에 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이끄시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을 이끄시는가. 거기에 대한 대답은 사랑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머리 떠나 있는 인간들을 이렇게 당신께로 가까이 이끄실 때에 그 방법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면서도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첫 번에 복음을 들었을 때에 와르르 무너지면서 대굴대굴 구르면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저런 사람에게 몇 년 동안 외치니 차라리 망부석에 대고 말하는 것이 낫지. 그렇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전하고 기도해주고 불러서 말해주고 해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안 되지만 마음속에 생각을 딱 접게 됩니다. 제는 아무래도 다른 교회에 보내는 것이 좋겠다. 여기서는 안 되겠다. 그리고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런데 또 그런 사람들이 죽어도 안 갑니다. 그런데 이제는 기도를 하다가도 지쳤는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그를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면 이제껏 까지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았던 많은 날들의 그 말씀 들음과 영혼을 향한 그런 복음으로 영혼을 섬긴 그 섬김이 의미가 없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성수대교를 누가 무너트렸습니까? 범인이 누구입니까? 차량번호 몇 번이 무너트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찾아낸다면 나도 가야지 될 지 모릅니다. 버스를 타고 거기에 지나갔으니까.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차가 지나가다가 어느 날 무너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지루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하면 한번에 복음을 듣고 와르르 무너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장시간 동안 그렇게 고함치는 복음의 선포를 들으면서도 수 삼 년 동안 깨트려지지 않던 사람들이 여러 해 후에 주님을 받아들이면서 변화되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이런 경우에서나 저런 경우에서나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 3장 16절에서도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 때문이라고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처럼은 하나의 감탄입니다. 더 이상 이제 형용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래서 또 요한 사도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다” 어떻게, “친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예수님이 우리를 당신과 교제하며 사는 친구로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은 사랑이 그것을 시킨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주신 것이라”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할 때도 우리는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 그것이 우리가 전하는 마지막 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복음을 전할 그런 것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과 점심을 함께 하시면서 그 목사님이 자기가 복음을 전한 이야기를하시는데 갈비 집에서 고기를 날라주는 자매에게 전도를 하기 위해서 집회를 하는 동안 매일 가셔 서 식사를 하시며 복음을 전했는데 끝까지 안 듣기에 마지막 날에 화가 나서 생전 갈비나 자르고 살라며 오지 말라고 하면서 가셨는데 그 날 저녁에 자매가 와서 은혜를 받고 구원 을 받았다는 이야기)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신 마음, 그래서 복음을 전하다가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고로 여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지니라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오래도록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지금도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의 레이더에 포착되어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 사랑의 원자탄에 맞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또 우리들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우리들을 이끄시되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들을 이끄십니다.
누가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이만큼이나 주님을 믿으면서 이 고난 주간에 주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을 생각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주셨습니까? 어떤 협박과 강압에 못이기셨습니까? 또 여러분들이 어떤 세상 적인 기대나 욕망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고난 주간이 올해도 다가오고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못 박히신 것을 생각하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들이 생각이 납니다. 주님이 우리 같이 쓸모 없는 인간들을 향해 베푸신 그 사랑을 기억하며 오늘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너무 초라하고 너무 비참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와서 집회에 참석하는 여러분들과 저나 우리 모두의 기대는 우리가 필요한 것은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십자가에 복음을 듣고 무슨 이 세상에서 좀더 행복하고 잘 사는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그 십자가에 놀라운 사랑을 받았는데,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한번 밖에 없는데 속히 지나가는 이 사랑을 받고 우리가 어떻게 평범하게 살수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누가 우리를 위해 자기를 주셨는지 의로운 사람도 아니고 낙인찍힌 죄인, 그것도 거저 용서해주신 것이 아니라 대신 형벌을 받고 용서해주셨습니다.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가끔 있지만 그러나 불의 한 죄인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린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만들어주셨습니까? 자기의 아들을 한없이 사랑하셨지만 그러나 당신의 아들 하나가 살고 우리 모두 죽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큰사랑이 그분에게 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날 때도 있고 붙들 때도 있습니다. 주님께 신실해질 때도 있고 불 신실해질 때도 있습니다. 충성할 때도 있고 하나님 앞에 게으를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변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고 하는 이 진리는 이 천년이 흐르도록 피묻은 채로 서 있는 이 십자가의 진실만큼이나 확실하고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확고한 불변한 진리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마지막 남은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바로 한가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까지 내어주셔서 못 박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는데 우리에게 남은 것이 있다면 이제는 두 가지,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그분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그래서 그분이 좋아하시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또 하나는 주님이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가슴에 안고 지금도 내가 받은 사랑을 못 받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예전에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던 나처럼 망가진 인생을 살아가고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주님을 대적하며 진노를 쌓는 기회들로 바꾸는 불쌍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예수의 사랑을 전해서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전해서 그들의 허기진 영혼에 그리스도의 보혈로 가득 차게 만들어주는 이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 되는 것, 이것 말고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가장 시급한 것은 커다란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하고 축복 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에 대해서 한없이 가슴 아파하고 죄송스러워하는 착한 마음, 그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하나님께 진 그 사랑의 빚이 너무나 커서 일평생 머리를 잘라 신발을 삼고 가죽을 벗겨서 그리스도 예수의 옷을 지어도 갚을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사랑에 사로잡혀서 매순간 순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들로 산 것, 그것만이 그 사랑을 안 사람들 인생 앞에 있는 유일한 대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주님의 훌륭한 사랑의 도구가 되어서 일평생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고 섬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2.성령과 하나 된 보혈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4上)
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놀라운 흡인력이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그 십자가 아래로 이끌어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그 예언의 말씀을 저희들이 지속적으로 상고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셨는데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먼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과 보혈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 어떻게 그 보혈과 성령이 하나되는지, 그래서 그 보혈과 성령이 어떻게 하나되고 또 하나된 성령과 보혈이 어떻게 우리의 삶에 변화를 주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하물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흠 없이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 예수의 피가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였느뇨”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 긴 부분을 오늘 다 다룰 수는 없고 앞부분을 다루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신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보혈과 성령의 관계를 생각해보고자 하는데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보혈과 성령,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에게 있어서 보혈과 성령 이렇게 나누어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들이 결론부터 기억해야 할 것은 보혈과 성령은 언제나 하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과 성령이 하나라는 교리인 것입니다. 성령이 보혈 안에 있고 보혈이 성령 안에 있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흠 없이 하나님 앞에 드리실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못 박혀죽으실 바로 그때에 바로 성령께서 그분 안에 계셨고 그리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자기를 하나님 앞에 흠 없이 드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다고 하는 교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공생에 들어서신 이후에 광야에 시험을 이기십니다. 그리고는 그 광야에 시험을 통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신 가운데 갈릴리로 돌아가시는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있기 전에 예수님께서 요단 강변에서 세례를 주는 세례 요한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이 세상에 죄를 지고 모든 인간들과 함께 세례를 받게 됩니다. 죄가 없으신 그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죄 있는 자처럼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는 세례의 의미가 죄를 씻는 표징이었지만 예수님에게는 이 세례를 받는 것을 통해 두 가지를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셨으니 하나는 세례를 통해서 당신이 공식적으로 메시아에 취임하시는 것이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세례를 통해서 당신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께로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심으로 구별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입증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에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그분에게 오셨는데 성경은 말하기를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다고 말합니다. 한량없이 그분 가운데 오신 성령님께서는 늘 동행하며 함께 계셨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자기의 피를 흘리는 그 순간에도 성령님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자기의 피를 십자가에서 모두 쏟으셨을 때에 그 성령과 피는 하나 되어서 이제 그 피는 성령의 놀라운 능력과 함께 영원히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역사 하는 하나님의 훌륭한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이 성령님을 영원하신 성령님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영원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것은 단지 시간적으로 기다랗게 끝도 없이 시작도 없이 이어지는 존재에 있어서 시간을 능가하는 그런 분이시라고 표현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이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하늘이 영원히 존재하고 있었다 라고 사람들이 노래할 때의 그 의미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라고 할 때에는 시간적으로 그 시간을 초월하고 영구히 계시는 분인 존재에 있어서 지속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시라고 할 때에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는 진리는 그 하나님이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기력이 쇠하거나 혹은 쇄 패하거나 나약해지는 법이 없고 언제나 그 영원 안에서 생명과 능력과 그리고 빛으로 권능으로 가득 차 있는 그런 상태에서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붙은 영원하심이라고 하는 표현은 생명이 마르지 않고 권세가 무궁하고 그리고 그분이 가지고 역사 하시는 위대한 능력과 힘이 다함이 없다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타나는 ‘영원하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를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하는 이 표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릴 때에 성령께서 함께 하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는 한 인간으로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셨지만 그 피 흘리신 보혈의 효력이 영원하신 성령과 하나 되어서 영원히 생명과 구원을 주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고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지나간다고 할지라도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는 위대한 이 보혈의 능력이 변함이 없다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 보혈이 영원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사례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선교의 역사는 복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던 미개인 불모지 땅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선교가 처음 행해질 때에 대체로 하나님의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고 그리고 놀라운 은혜가 나타나서 믿지 않은 사람들이 이적과 기사를 보고 복음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함으로서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우리도 바로 우리 한국 교회도 그러한 역사를 곱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큰 능력과 권능으로 수많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위대한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던 수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주시는 놀라운 부흥이 바로 그 예인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이런 놀라운 복음의 역사는 하나님을 처음 받아들이고 그리스도 예수를 처음 믿는 그런 선교지 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전혀 아닌 것입니다.
오래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고 많은 세월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해져 있다가 이제 점점 생기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신앙이 점점 사라져버립니다. 교회가 점점 빕니다. 사람이 텅 비고 이제 교회는 생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런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회 안에도 성령으로 이 놀라운 역사를 하시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영국과 같은 곳에 가보면 심각합니다. 교회당이 막 팔립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이 이렇게 많이 있었는데 다 사라지고 노인네들 한 20명 남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내놓은 헌금을 가지고는 교회당을 도저히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노인네들이 죽으면서 자기 유산을 교회에 물려주고 죽는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수입원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게 무슨 법에 나온 것도 아니고 그런 사람이 별로 없게 되면 그러면 2-30명의 헌금을 가지고는 교회당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그 교인들이 모두 모여서 교회를 팔고 자기들은 다른 교회로 흩어지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판돈은 선교단체나 교회에 기부하고 교회를 허물어버리고 거기에 슈퍼마켓이나 심지어는 술집까지 들어서는 것입니다.
제가 영국에 갔을 때는 그 근처에 있는 교회 하나는 도저히 이 교회를 유지할 수 있는 경비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사람들에게 주일 오후에는 빌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교회당을 빌려서 무엇을 하는가 하면 술 마시고 댄스파티를 하는 것입니다. 악단들을 불러서, 그렇게 해서 얻은 임대료를 가지고 교회 전기세도 내고 물세도 냅니다. 그러다 도저히 감당이 안 되면 벽돌을 쌓아서 반을 막아서 반을 다른 단체에다 파는데 그것을 누가 사는가 하면 모슬림들이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철저히 거의 잠들어 있는 그런 교회들에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피가 증거 될 때 그때 피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그들에게 증거 되고 그들에게 선포될 때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 속에서 가끔 언급하는 찰스 하든 스펄젼 목사님은 19세기 때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100년 정도 넘는 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타보나클 처치에서(?) 얼마나 훌륭하게 목회를 했는지 평균 6000명, 많을 때는 12000명, 아주 많이 모였을 때는 20000명까지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그 시대에 20000명이 모였다고 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너무나 사람들이 많이 올라가서 이층이 주저앉을 정도였으니까 굉장했습니다. 그런 유서 깊은 교회가 75년도에 한국에 있는 어느 목사님이 가보셨는데 50명 내지 70명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제는 스펄젼의 영광이 사라졌다. 거기에서 수많은 노동자 철학자 할 것 없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회개하고 주님을 믿던 그곳인데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에 다시 5-600명씩 모인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더 늘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누가 왔는가 하면 아주 이 복음을 사랑하는 젊은 설교자가 와서 거기서 열심히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니까 다 죽은 교회가 다시 살아나서 역사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 보혈을 통해서 성령으로 역사 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실 때 그때에 이 성령께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심으로 주님이 피 흘리고 죽으시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효과를 성령이 취하셔서 그래서 성령과 보혈은 하나가 되어서 그래서 이 성령과 보혈이 교회 역사 속에서 늘 하나 되어서 놀랍게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사실 하나는 성령이 먼저가 아니라 보혈이 먼저였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고 그래서 그 성령으로 모든 사람들이 변화되고 그런 일이 구약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는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오늘날은 우리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님의 성령이 믿는 자 안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고 자기의 죄를 진실하게 회개할 때 주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그리고 우리 안에 주님의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오신 그 성령이 우리 안에 항상 계십니다. 항상 계시면서도 또 우리에게 계속해서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충만한 성령의 은혜 안에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이 땅에 오셔야 했는데 그렇게 성령님이 오신 사건이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입니다. 성령 강림을 통해서 성령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 시대에도 성령님이 오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구약 시대에 오신 방식들은 대게 어떤 특정한 일을 위해서 어떤 특정한 사람 속에 오셨고 그리고 일이 끝난 다음에는 성령님이 그를 떠나가시는 그런 형태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사울과 같은 사람, 혹은 다윗과 같은 사람 이런 사람들을 기름 부어서 세우실 때에 주님의 성령님이 오시고 그리고 그로 하여금 일하게 하시고 그리고 그가 너무나 당신을 슬프게 하면 사울처럼 하나님이 그 성령을 거두어버리시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아주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사람 속에 성령을 보내셔서 그 성령으로 한 사람 안에 거하게 하시지만 그것은 항구적이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다시 그 성령님이 떠나가실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도 말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오신 분이었기 때문에 성령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첫 번째 오신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 가운데 성령님이 오셔서 믿는 사람들이 누구든지 그 성령의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은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구약 시대에는 어떤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려면 주님이 직접 물로 표현한다면 성령을 주시려면 직접 하나님이 성령을 가지고 오셔서 믿는 사람 그 속에 부어주셨는데 이제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에는 하나님이 커다란 저수지를 만드시고 거기에 성령을 가득 부으셔서 그래서 누구든지 이제 믿기만 하면 그 성령을 자신 속에 가득 계시게 할 수 있는 그런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놀라운 축복입니다.
우리들이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우리 안에 영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을 얻게 되었고 많은 죄와 불결로부터 정결해져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우리에게 오신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의 실현이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게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것도 역시 주님이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보내실 성령을 통해서 자신이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고 하는 성령을 통한 당신과 우리의 연합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복된 성령의 놀라운 은혜, 이것이 결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을 통해서 이것이 이루어졌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들이 성도로서 우리들이 맛보는 대부분의 축복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부패한 본성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와 더불어 싸워 이기고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원동력과 힘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공급을 받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알지 못하는 영적인 세계의 신비한 비밀들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가르쳐주신 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고 성경에 담겨 있는 깊은 하나님의 계시와 뜻을 알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능력과 은혜를 얻고 그리고 신앙 안에서 얻게된 이 놀라운 생명력과 은혜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성령의 은혜의 축복이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 사역에서는 먼저 그리스도 예수의 피 흘림이 있고 난 후에야 비로소 성령의 오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놀라운 능력을 자신이 소유하셨고 그래서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고 병든 자를 고치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크고 놀라운 능력을 당신은 행하셨지만 누구에게도 당신 자신이 직접 성령을 부어주시고 특별히 그 성령 부어주심이 이렇게 보편적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부어주심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당신 자신이 지금 살아 있는 동안에 물 붓듯 성령을 부어주겠노라고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구약에도 그렇게 성령을 물 붓듯 부어주신다고 하는 약속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시고 성령이 오신 그후에 일어날 말세에 대한 예언을 제외하고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혹은 오신 그 후에라도 그런 성령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이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 자신도 그렇게 성령의 능력을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물 붓듯 그런 성령의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분 권한 밖에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교리에 의하면 그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성령을 보내신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데 아들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와 함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그 일들을 예수님이 이루셨을까요? 대답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피 흘리신 그 죽음이 그 보혈이 바로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게 한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때 성령으로 이 일을 하실 것임을 이미 작정하셨고 그래서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물 붓듯 부어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홀로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도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셔야지 만 가능했던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십자가 지고 가는 그 순간까지도 그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성경이 말합니다. 특별히 요한과 같은 제자는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그분의 품에 안겨서 그분의 심장의 박동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결코 성령을 물 붓듯 부어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우리에게 물 붓듯 성령을 부어주시기 위해서는 당신이 먼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셔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 사함의 희생이 있고 난 후에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 보혈의 효과를 취하여 그 보혈이 영원한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역사가 되게끔 만드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계속해서 기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심으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실 수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다시 한번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 안에서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축복된 생활에 토대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날 우리가 받는 모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형식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워서 그의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불러일으키신 그 양심의 가책을 거저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깊은 속사정을 털어놓으며 자기의 죄와 허물을 보고 그것에 눈뜨게 만들어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렇게 발견한 자기의 죄를 인해서 아파하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게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그렇게 통회한 사람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잠들어 있는 자와 방불한 그리스도인들, 죽은 자와 다름이 없는 수많은 신자들의 가슴에 새 생명을 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잠들어 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모르는 차가운 신자들도 주님의 성령이 오셔서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역사 하실 때 그는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에 공로를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열렬한 그리스도인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방종하게 살아가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자마자 그들은 비로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그리고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수많은 인생들이 얼마나 불쌍한 인생들인지 보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를 수만 있다면 자신을 어떻게 희생해서든지 그들에게 하나님의 참 사랑을 전하고 싶어하는 열렬한 전도자로 바꾸어놓는 것입니다.
오늘날 도처에 가득 고여있는 죽은 자와 다름이 없는 생기를 잃어버린 신앙생활을 보십시오. 메말라가고 있는 영적인 생활과 거룩을 잃어버린 경건의 생활과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다름이 없는 속된 모든 신자들의 방탕한 삶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와 능력이 이 죽은 자와 같은 교회당과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형식적인 신자들에게 유일한 대안인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신앙생활을 하고 또 목회를 하면서도 가장 보람있고 아름다운 일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안 변할 것 같은 사람이, 정말 세종로 광화문에 서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눈물을 흘리면 흘려도 그것을 기대하는 것이 낫지, 저 인간은 정말 깨지지 않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습니다. 그 사람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알지도 못한 어느 시간에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역사를 보면서 결국은 대답이 성령님이다.
아무리 그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고 또 불쌍하다고 그러고 잘해주고 수없이 상담을 해주어도 안 됩니다. 도저히 개선이 안 됩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에 성령님이 그에게 오시면 놀랍게 허물어집니다. 옛사람이 허물어지고 완전히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이 성령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성령이 그런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좋은 성령의 역사, 그것이 어떻게 가능해졌는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심으로서 가능해진 것입니다.
지금 잘 생각을 해보십시오. 지금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은혜만 주시면 내가 비록 많은 죄를 짓고 하나님 자녀답게 살지 못했지만 이제 새롭게 일어설 수 있다라고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이 만약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들을 피 흘리시지 않으셨다면 아주 황당한 기대인 것입니다. 그렇게 미음을 갖고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들을 구약의 성도들이 얼마나 부러워했겠는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십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우리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주님을 근심시켜드리고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은혜를 구하면 주님이 우리를 회복시켜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굳게 믿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돈을 얼마 드리면 회복시켜주시는 것도 아니고 교회 봉사를 몇 달하면 회복시켜주시는 것도 아니고 무슨 대가를 지불하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뉘우치면서 용서를 빌고 다시 주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간절히 주님께 간구 하면 주님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이 씻으셔서 그래서 우리에게 다시 생명을 주셔서 그런 은혜 속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리면서 살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일들이 무엇을 통해서 이루어졌는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피 흘리신 보혈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흘리신 그 보혈은 영원한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누구든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사람들, 누구든지,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를 정케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그래서 우리는 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의 은혜를 받아서 주님이 우리를 침체되었던 우리들을 회복시켜주실 때 잠들었던 우리의 신앙을 다시 일깨워서 정말 주님을 진실하게 믿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로 놀랍게 바꾸어놓으실 때 그때 우리는 즉시 무엇을 찬양하게 되는가 하면,
어린양 찬양
주 예수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그 보혈, 예수님의 어린양으로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속죄의 은혜, 그것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놀라운 성령의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흘리신 보혈, 그 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그 속죄 사역에서는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과 피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원리는 그 후에 그리스도 예수를 믿을 때에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 보혈에 피가 성령과 함께 신자의 영혼 속에 산 안에 함께 역사 하는 것입니다. 자 이것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는데 하나는 보혈의 피는 성령을 통해 역사 하는 것이고, 또 마찬가지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만 성령은 이 보혈의 피를 통해서 역사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을 갈망하지만 그러나 참으로 그 성령의 능력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리고 또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서 살아간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은 성령의 실제 하시는 어떤 힘이나 임재가 아니라 자기 느낌과 기분일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주시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놀라운 기쁨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우리들이 전혀 기쁨이 없다고 하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봄에 유원지나 노래방에는 성령님이 많이 계셔서 사람들이 그렇게 기뻐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성령님이 떠나가시는 행동을 하면서도 사람들은 아주 기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자신이 지금 성령 충만하다고 하는 것이 진짜 실제 하시는 성령님이 그 사람 안에 충만해지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렇게 종종 착각하며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니어도 아침에 일어나면 무슨 일 인지 기분이 좋은 적이 있습니다. 성령이 역사 하지 않으셔도 아침에 전화가 옵니다. 따르릉! 김 과장님 댁입니까? 예 간밤에 발령이 났습니다. 갑자기 사색이 됩니다. 구조조정 때문입니까? 어디로? 덜덜 떱니다. 그런데 축하드립니다. 부장으로 승진하셨습니다. 성령이 역사 하지 않아도 너무 기쁜 것입니다. 그야말로 충만합니다. 막 어쩔 줄 모르고 나오는데 부인이 여보, 사실 저 미안해. 뭐가 당신 지갑에 있는 돈 30만원을 내가 꺼내갔어. 어 괜찮아. 사람이 무엇을 통해서 기쁘든지 간에 그 기쁨이 충만하면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집니다. 성령 충만해도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집니다.
그런데 그 기쁨도 기쁨인 것이 사실이지만 성령이 그 사람에게 임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기쁨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따라서 얼마든지 실제로 성령 때문에 말미암지 않았는데 자기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자신이 충만하다고 생각하는 착각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더욱이 정말 성령 충만할 때에 우리들이 얼마나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갈망하고 목마르게 되는지를 경험해본 적이 별로 없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자기가 충만하다고 느끼는 것이 자기의 느낌인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든지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런 진실한 성령의 충만한 속에서 살아가는데 왜 하나님께서 성령을 이 세상에 충만하게 부어주셔서 누구든지 믿는 자들이 그 안에 성령께서 계시는 놀라운 경험을 하도록 만들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으로 충만해지지 못한가 하는 이 질문은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에 대해서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도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착한 일을 해야지 만 하나님이 성령을 주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순종해야지 된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교회를 봉사하다보면 충만함을 받을 일이 올 것이라고 우리들에게 충고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는 소중한 것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지 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지만 그것보다도 더 우선적이고 본질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에 눈을 뜰 때에 비로소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에 경험하게 되는 성령의 충만함이 진실 된 성령의 충만함일 가능성이 많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제 성령과 그리스도 예수의 피는 우리 신자들의 체험 속에서도 늘 항상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고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도 이런 그리스도 예수의 진실 된 복음에 깊이 깨달음이 오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보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참된 복음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그에게 어떤 영적인 변화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직업 중에서 신기하게 보이는 직업 중에 하나가 저는 영화배우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 한 사람에 행동과 표정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을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합니다. 그런 놀라운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한없이 기쁘게 할 때에 그가 실제로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안에 잠재하고 있는 어떤 느낌들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느낌이 사라지고 나면 싹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경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 피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진리를 우리가 깨닫되 성령님께서 역사 하시면 우리에게 진짜로 성령이 충만히 임하고 그래서 우리들이 그 안에서 잃어버렸던 교제의 친밀함과 거룩한 삶을 위한 놀라운 능력들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참된 도리,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분명한 이해, 이런 깨달음이 부족한 사람들이 교회생활 속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나 아니면 교제를 위한 여러 가지의 행사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받는 은혜들이 사실은 영적인 것이 아니고 심리적인 것들이 상당한 부분이라고 하는 사실들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교제 속에서 기쁨을 누리기도 하고 교회생활에 보람을 찾기도 해도 신기하게도 자기 자신의 영혼에는 거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나마 이런 것들로부터 모두 깨달음을 얻고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진짜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구나.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이외에는 진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없구나. 그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에게 정말 중요하구나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무엇인가 그 십자가의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진리를 통해서 자기가 무엇인가 그 십자가의 사건들을 경험하려고 애를 씁니다. 특별히 요즘과 같은 절기는 모든 교회들이 십자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주간입니다. 그러나 고난 주간에 자신의 인생에 놀라운 영적인 변화가 찾아왔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만난 적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단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의 유익만을 파악하고 그리고 그것을 2000년 전에 일어난 그 사건을 오늘날 다시 한번 이렇게 투영해서 그래서 그 십자가의 사건을 이렇게 생각하면서 어떤 그 십자가의 그 고난의 분위기에 한번 젖어보려고 하는 그런 애처로운 노력들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놀라운 지적을 했습니다. 만약에 그런 것들을 통해서 사람이 변화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이 고난 주간을 지나고 나면 고난주간에 변화된 사람들을 매년 많이 만나야 합니다. 어느 교회든지 고난 주간에는 십자가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는 교회가 없고 그리고 모든 신자들이 고난 주간이라 그럴 때 그때 고난 주간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 교인들은 거의 없습니다. 지난 주일이 바로 교회가 모두 십자가에 대해서 설교한 그런 주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목회 현장에서나 교제의 현장에서 고난 주간이 자신의 인생에 아주 획기적이고 놀라운 변화의 계기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발견할 수 있는 사실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도리에 대한 윤곽을 알고 그리고 그것을 회고하면서 뭔가 그 느낌으로 돌아가려고 애를 쓰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서 보혈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한가. 그 대답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우리들이 십자가의 도리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그리고 그것을 깨달으려고 애를 쓰고 그리고 또 이런 고난의 주간에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고난의 때를 기억하면서 그러면서 밤에도 나와서 기도하고 안 나오던 새벽기도도 나오고 또 마음이 동하는 사람은 금식도 하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관한 책이나 테입을 읽거나 들으면서 그렇게 깨달으려고 애를 쓰는 것까지는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 모든 것들은 실제가 되어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서 우리의 영혼에 놀라운 변화를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와 성령은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리를 알려고 애를 쓰는 모든 사람들은 항상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하면 이 십자가의 도리를 깨우쳐도 성령이 필요하고 그리고 이 십자가의 진리를 터득한 때에도 성령이 오셔서 역사 해주실 때에 내가 깨달은 이 십자가의 도리가 나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만들어주시고 그리고 나의 영혼을 변화시켜 놓으셨다 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면서 십자가의 도리를 깨닫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 우리들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성령이 역사 하시되 이 보혈을 통해서 역사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한 사람을 바꾸어놓기 위해서 역사 하시는데 그 성령의 역사는 통상 성령 홀로 역사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셔서 역사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을 근본적으로 고치고 변화시켜서 그를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실 때 사용하시는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칼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사람을 바꾸어놓습니다.
이것이 이제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하면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보혈의 경험을 통해서 신령한 사람이 되고, 그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계속 해서 신령한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것도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에 대한 성령 안에서의 체험이 지속됨으로서 그 사람이 점점 신령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놀라운 역사는 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일어나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특별히 모든 말씀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러나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새롭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쳐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복음입니다. 그 복음을 통해서 사람들을 하나님이 신령한 사람들로 만드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새롭게 하시는 놀라운 변화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그 속죄의 피는 성령이 그 피의 진리를 가지고 우리 신자들의 마음속에 역사 하실 때 그때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은 우리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생명을 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심지어는 이미 그리스도를 믿어서 진실한 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버린 우리들을 일으켜 세워주셔서 그래서 진실한 신자로 다시 태어나도록 주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 주간에 두 가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또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는 우리가 비록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지금 우리들이 경험하는 것보다 더욱 뛰어나고 놀라운 강력한 성령님, 그 성령님의 놀라운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성령님의 은혜는 흔히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그렇게 신비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물론 신비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오기는 하지만 그러나 성령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단지 아무 것도 없이 성령을 구하는 것으로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진정으로 우리의 삶을 역사하고 움직이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보혈의 가치와 그분이 그 흘리신 보혈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을 해놓으셨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함으로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신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께서는 이미 우리가 거듭날 때에 우리에게 오셨지만 그후에도 우리에게 계속해서 충만하도록 우리 안에 오셔서 그래서 우리를 영의 사람들로 만들어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고 또 이미 받은 그 성령 안에서 다시 충만한 은혜를 힘입을 수 있는 특권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제껏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의 복음과 그리고 진리와 떨어져서 영적인 깊은 침체 속에 빠졌고 죄와 불순종 속에서 여러분들이 생명을 잃어버린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오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간구하고 기도할 때 여러분들이 복음의 진리를 붙들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여러분들이 용서받은 것과 그리고 이 약속의 피를 의지하여 언약의 성령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 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주셔서 영원하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마르지 않는 능력과 생명, 은혜와 충만함으로 우리를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 주님을 섬기는 삶으로 만들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리 같이 쓸모 없는 죄인들, 우리 같이 아무 자격이 없는 죄인들이 이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기억하고 아버지 앞에 매달리기만 하면 성령의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하는 이 약속을 받게된 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우리를 위해서 속죄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께 담대하고 당당하게 나아가도록 만들어줍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의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과 은혜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공로와 우리의 힘으로는 버린 그 하나님께 돌아갈 양심이 없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주시면서 까지 우리를 부르신 그 하나님을 배반한 과거의 불순종을 생각하면 우리가 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때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씻으신 어린양의 보혈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한없이 불의한 죄인들이고 미천한 인생들이지만 우리의 공로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속죄의 공로를 보면서 그 피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는 부족하고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사오니 아들의 피를 기억하셔서 나를 용납해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간청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한번 선악과를 따먹은 우리의 조상이 영원한 형벌에 처한 그 비참한 징벌을 받은 것에 비하면 우리는 아담보다도 훨씬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한번이 아니라 수없이, 그리고 거듭거듭 하나님을 거스르고 죄 가운데 살며 하나님과 대적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모든 것들을 우리를 위해 사용하고 우리를 위해 써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주님이 거셨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멀리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떠나셨을 때 처음에는 여러분이 좋아서 그 길을 선택해서 갑니다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목자의 품이 그리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고난 주간에 여기에 나온 여러분들이 아마 틀림없이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도리가 무엇인지 공부하러 한번 가보자 그러고 학원에 가는 마음으로 오신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피 흘리고 못 박혀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며 살도록 만들어주셨는데 여러분들은 정말 그렇게 영적으로 부요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삶은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 예수께 보람을 안겨 드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오늘 눈을 떠서 십자가를 보십시오. 거기에 못 박혀 피 흘려 가시관을 쓰시고 죽어 가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눈빛과 한번 마주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오! 주님, 주님이 저를 위해 죽으신 그 희생, 그 고난에 보람을 안겨 드릴만한 삶을 오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들입니까?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이든지 그리고 어떤 인생을 살아왔든지 제가 여러분들에 대해서 아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는 여러분들이 아주 질이 나쁜 죄인들이라고 하는 것과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머리 떠나서 불순종과 죄로 갈 길을 잃어버린 분은 안 계십니까? 상황에 짓눌려서 고통을 받으면서 처음에는 세상이 좋아서 세상을 버렸지만 이제는 주님께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길을 알지 못하는 그런 성도들은 없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신 것을 알면서도 그 보혈에 흘려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는 많은 날들의 불순종과 죄가 여러분들을 너무나 멀리 끌고 가서 이제는 귀가 있어도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입이 있어도 하나님께 여러분 속에 일어나고 있는 그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하나님 앞에 토해놓을 수 없을 정도로 기도를 잃어버린 성도들, 여러분 가운데 없을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주님을 생각하면서도 한낮 실 낙과 같은 희망을 가지고 여기에 나온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으니 이것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유일한 소망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멀리 하나님을 떠나서 죄 가운데 방황하고 하나님을 버렸지만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들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오늘도 여러분들을 찾아 나서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아들이신 그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흘리신 그 보혈을 보시고 차마 여러분들을 용서하고 다시 부르시지 않으실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불의와 우리의 죄, 우리의 강퍅함과 하나님을 향한 도전들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야 할 때 양심에 가책에 시달리고 그 양심에 가책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입니까?
흔히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교회를 나오지 않습니다. 왜 안 나오는가. 교회를 안 나오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니까 인생이 될 리가 없습니다. 고난을 많이 겪습니다. 찾아가서 물어봅니다. 이렇게 힘들게 살면서 하나님께 안 나오는가. 대답이 걸작입니다. 너무 치사한 것 같습니다. 뭐가 치사한가. 아니 살만할 때는 주님을 안 찾고 이제는 도저히 못 살겠고 죽을 것 같으니까 주님을 찾는 것이 너무나 낮 간지럽습니다. 내가 말합니다. 언제쯤 되면 네가 살만해지겠니?
주님을 나의 길이라 부르면서도 그 길로 가기 싫어 딴 길로 헤매네
어둡고 캄캄한 그곳 가시밭길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예수님을 못 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았던 죄와 불순종만을 보는 것입니다. 그 죄를 씻어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이렇게 극단적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잘난 것만 눈에 들어오고 예수님은 눈에 안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진실하게 자기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통회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바꾸는 그런 경험들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반대로 자기의 허물과 죄는 많이 보고 그리고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그런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셔서 하나님이 그 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음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나의 죄는 붉고 주홍 같지만 그러나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주님이 이제 나의 모든 죄를 사하고 용서해주셨으니 이제는 내가 진심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나의 많은 죄와 잘못을 구하고 나는 공로가 없으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흘리신 그 보혈을 보시고 나를 다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님과의 친밀한 교통 속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아들의 피를 보셔서 속죄함을 받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흘리신 속죄의 피는 오늘도 십자가에 흘려 내려서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죄를 위해 내가 아버지 앞에 형벌을 받고 죽어서 그리고 내가 너희를 위한 용서의 길을 열었으니 이제 너희는 다시 나를 통해 아버지 앞에 나아가 내 피를 주님 앞에 보여주며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 앞에 정말 진실한 자녀로 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놀랍게 회복된 사람들은 누구를 찬양하게 되는가 하면 결국은 성령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찬양하는가 하면 예수를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양 찬양 우리 죄 위해 죽으신 주님
또 무덤에서 부활하신 영원하신 주 할렐루야
어린양 예수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 어린양을 찬양하는 것이 곧 그 피와 하나되신 성령님을 찬양하는 것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찬양하는 것이 곧 그 성령과 함께 우리를 용서하고 용납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1서 5장 8절에서는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성령과 피,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과 성령, 그 성령을 아들과 함께 보내신 아버지, 이 모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선택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고 믿는 높은 담장, 사실 이미 무너진 담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피 흘리고 여러분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 어린양에 피를 믿었을 때에 이미 주님이 용서해주신 것들입니다.
이제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피, 그 보혈의 공로를 의지해서 아버지 앞에 나아가 용서함을 빌고 그리고 다시 한번 나의 이러한 죄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 분으로서 고난을 당하셨다고 생각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처음 주님을 영접하는 것처럼 그렇게 진실한 마음으로 통회하고 뉘우치며 이 죄를 용서받고 다시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고 싶습니다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오늘도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다시금 회복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화목제물 되신 두 가지 뜻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3:25上)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성경 밑에 난하주를 보면 정확한 번역이 있습니다. “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이게 바른 번역입니다.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아멘
성경이 인간의 죄 된 상태에 대해서 너무나 절망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죄로부터 용서받은 것에 우리의 생각을 집중시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는 구원도 없고 은혜도 없고 우리들이 오늘날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죄를 용서받는 것이 정말 형벌 받을 인간의 운명을 떠나서 구원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되겠지만 그러나 이미 구원받고 성도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죄의 용서를 받고 즉각적인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이제 겨우 출발이며 시작일 뿐입니다. 죄를 용서받는 사죄의 은혜는 구원을 아주 아름다운 동산으로 표현한다면 이 사죄의 은혜는 이제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 문을 통과하고 나면 이제 그 문과는 비교될 수 없는 찬란한 아름다움이 그 동산에 가득 있습니다. 오늘 저는 그 동산에 있는 중요한 한 축복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며 십자가의 도리를 풀어가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화목 제물로 죽은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사상은 분명히 구약에 화목 제사를 염두에 둔 사상입니다. 화목 제사는 하나님과 화해를 위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리고 이 화목 제는 하나님과 화해인 동시에 또한 사람들과의 화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화목제로 드린 제물은 제사장만 먹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은 물론 그리고 성중에 있는 모든 백성들과 함께 나누어먹으면서 한 하나님의 선택받은 공동체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처음서부터 하나님과의 화목과 사람의 화목을 나누지 않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지면 사람들 사이에도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고 하나님과 매이면 사람들 사이에서도 매이리라고 하는 것이 이 화목 제사의 규례 속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하나님 앞에 못 박혀죽으셨다 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니 우리들이 이전에 하나님과 불화 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와 허물, 불순종과 반역으로 말미암아 거룩하신 하나님을 등지고 그 하나님과 불화 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죄가 들어온 이후로 또 적극적으로 자신이 죄와 불순종을 택하며 살아감을 인하여 자신 속에 하나님을 향한 미움을 간직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거스르고 반역하면서 살아가는 자연스런 경향성들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과의 언약을 파괴하고 불순종과 죄로 당신과의 언약을 더럽힌 그 백성들을 향해 진노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불화 한 관계를 화해시키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입니다. 이 화해는 이중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을 인간에게 화목 시켰고, 두 번째는 인간을 하나님께 화목 시켰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인간에게 화목 시킨 것이 먼저일까, 인간을 하나님께 화목 시킨 것이 먼저일까? 하는 질문이 떠오릅니다만 그러나 단연코 하나님을 인간에게 먼저 화목 시킨 것이 우선 입니다. 다시 말하면 언약을 파괴한 당사자인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을 찾게 한 대신에 먼저 이 언약을 파괴한 인간에 의해서 고통을 받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풀어드리는 놀라운 일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가지고 계신 그 진노를 인간을 향해 쏟아 부으셨다면 마땅히 인간은 모두 영혼과 육체가 단숨에 멸절 되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함으로서 당신이 창조한 세계를 무의미하게 만드시는 대신에 용서의 기회를 여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인간의 구원을 놓고 커다란 갈등이 있는 것처럼 묘사하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는 인간을 형벌 하고자 골몰하시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권적으로 그분을 만류하신 것처럼 그렇게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인간을 위해서 구속의 길을 계획하고 그 길을 여신 분이 성부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그 아들을 보내신 분도 성부 하나님이시고 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못박아 인간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신 것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속에 무슨 갈등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구원을 둘러싸고 묘사하는 것은 신성모독 적인 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향해서 범죄한 인간을 향해서 그들을 형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공의로운 속성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러나 그 공의로운 속성을 인간을 향해 푸신다면 인간은 멸절 되고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 속에 있는 범죄한 인간을 마땅히 징벌해야 할 당연한 도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그분에게 우리에게 쏟아 부어질 진노를 담당케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간과하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의 배후에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편에 서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탄원한 제사장인 동시에 왕이신 동시에 선지자이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하나님의 진노를 푸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마음을 녹이시고 그리고 형벌을 대신 담당하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화목하실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는 우리를 또한 화목 시켜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도록 만들어줍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감화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막무가내로 자기의 고집대로 살던 흉악한 죄인들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진리의 복음을 듣고 그 피에 접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마음에 놀라운 감화와 은혜를 불러 일으켜서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매력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아무 희망이 없는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도 또한 우리 인간을 하나님께로 화목 시키시는 한 방법인 것입니다.
죄인의 마음에 성령의 놀라운 감화와 은혜의 역사가 일어날 때 그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전에 자신이 너무나 의로운 백성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자기의 죄로 인해서 애통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자기밖에 몰랐던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사랑에 눈을 뜨게 됩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찾으시지만 또한 하나님이 감화시키는 죄인들은 찾으시는 그 하나님에게 응답하는 감화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둘을 화목 시켜서 만들어주신 이 일을 십자가가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인생은 우리는 시간 속에 매어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과거는 지나갔고 그리고 현재 속에서만 삽니다. 그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현재라고 말하는 그 순간 또 현재는 없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시간에 매여서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다고 할 때에 과거의 죄만을 용서해주셨다 라고 한다면 우리의 구원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때 그때 하나님이 우리의 옛날의 죄만 용서해주셨다면 회개하고 용서를 받은 그 순간 이후부터 즉각적으로 인간은 다시 크고 작은 범죄들을 하게 되는데 그것들은 어떻게 용서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천국은 대체로 죄가 없는 사람이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완전히 죄가 없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렇게 완전히 죄가 없는 피조물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서 우리에게 부어지는 죄 사함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만약에 과거의 지은 죄만 용서를 받았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들이 현재 짓고 있고 앞으로 지을 모든 죄들은 용서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회개를 통해서 용서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모든 지은 죄를 회개할 리가 없고 또 모든 지은 죄에 대해서 회개를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머리가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기억할 리도 없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죄와 친화 적인 성격을 가진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죄 사함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영원, 현재, 미래 이런것들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우리의 모든 죄를 시간을, 공간을 초월해서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비행기를 타고 태백산 위에 날아보십시오. 아래로 내려다보면 꼬불꼬불한 길을 작은 차들이 돌아서 올라갑니다. 산모퉁이를 돌아온 차는 저쪽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앞으로 무슨 길이 나타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산 위에 높이 떠 있는 비행기에서는 그 차가 앞으로 가다가 앞에 커다란 돌이 굴렀기 때문에 멈추어 설 것이라는 것, 그리고 돌아갈 것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거기만 지나고 나면 길이 잘 뚫려서 빠른 속도로 달릴 것이라고 하는 등등 모든 것을 한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 같은 이는 말하기를 “하나님에게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영원히 현재만 있을 뿐이라”고 시간관을 피력하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다 라고 할 때 이것은 교리적으로 시간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죄의 용서를 받는 그 순간, 우리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영적 생활에 획기적인 변화가 오는데 그것은 멀리 계시던 하나님이 갑자기 가깝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화목이 우리의 영적 생활의 투영입니다. 그래서 이 죄 사함은 흔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종종 저의 이 메일 속에 들어와 많은 지체들이 편지를 보냅니다. 전국에 혹은 해외에서 보냅니다. 정말 보면 인간의 필설로는 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지체들이 수년동안 괴로움 속에서 견디지 못하며 허덕이다가 어떻게 주소를 알고 이 메일을 보냅니다. 그들이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모르고 있는 교리가 죄 사함의 교리입니다. 이것을 알면 그럴 수가 없을 텐데. 죄 사함의 교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큰 죄를 지었는데 내가 하나님 앞에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까? 그 말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말입니다.
내 지은 죄 주홍빛 같더라도 주 예수께 다 아뢰면
그 십자가 피로서 다 씻으사 흰눈보다도 더 정하겠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얼마 전에도 지체 하나가 편지를 보냈는데 정말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진짜 영혼이 짓눌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신앙이 거의 없던 사람들은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에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영적 생활이 있었던 사람들이 그렇게 될 때에 미친 듯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제가 작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때 제가 가르쳐 준 교리가 바로 이 영원한 죄 사함의 교리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지체들의 가슴속에 ‘나는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 내가 이렇게 큰 죄를 짓고도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이런 많은 가책들은 성령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대게 두 가지로부터 오는데 하나는 율법과 또 하나는 양심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정직하게 율법을 정 죄 하고 있습니다. 그것과 그 양심을 통해서 송사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너는 희망이 없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에서 우리들이 의문이 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죄를 지으면 힘들까? 그리고 죄를 짓게 되면 한꺼번에 사라지고 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죄를 짓고 범죄 하면 하나님이 모든 기회를 용서해주셨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으리만큼 자신의 영혼이 냉담해지고 그리고 기도할 때나 말씀을 들을 때나 하나님 앞에서 차가운 거절 감을 느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오해해서 자신이 정죄 되었다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사도가 로마서 8장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건져내셨도다”그렇다면 도대체 만약에 하나님이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순간에 우리의 모든 시간을 초월한 죄들을 용서하셨다고 할 것 같으면 지금 오늘 우리들이 죄를 지었을 때에 느끼는 이 갑갑함과 영적인 냉담한 그리고 심령의 고통은 이게 정체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오늘 설교하려고 하는 주제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트려진 자의 고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은 단지 정 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관심이 죄의 용서를 받고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죄를 용서받고 이렇게 살다가 죽어버리면 천국에 가는가, 지옥에 가는가 이런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주신 것은 죽음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삶을 위한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천국에 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즉시 죽지, 사는 것이 그렇게 행복하고 좋아요? 내가 젊은이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여태까지 살아온 날이 정말 다시 살고 싶은 만큼 행복한가 그러니까 열 명을 물어보니 열 명이 고개를 다 절래절래 흔들었습니다. 또 물어봤습니다. 앞으로 남은 날은 좀 과거보다 나을 것 같은가 물어보니까 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습니다. 그럼 왜 사는가, 대답을 못합니다. 그게 아니고 죽어서 우리들이 천국에 가는 것은 하나의 자기가 살아온 삶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나는 천국에 가기 위해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말하면 틀린 것은 아닌데 그런데 요점을 벗어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만약에 나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인생을 산다라고 말하면 안 믿는 사람이 무덤에 들어가기 위해서 산다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17장에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기도문을 보면 뭐라고 나왔는가 하면 “내가 아버지께 간구하는 것은 이 거룩한 내 백성들을 데려가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오 이 땅에 살게 하시기 위함이니라”기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 용서받은 다음에 이 세상에 살아 있게 하심으로서 그래서 무엇인가 이 세상에 살면서 죄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인생에 목적이 다 어그러졌습니다. 죄가 들어오고 또 인간이 죄 가운데 태어나고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을 등지면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계획, 인간을 이 세상에 보내신 그 계획하고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선하신 계획과는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인간들이 하나님이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따라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만나고 죄 용서함을 받고 그분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서 인간으로서 다시 재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비로소 이 땅에 하나님이 자기가 사랑하는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고 그 살아가는 삶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간이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나게 하셔서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님을 믿게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수 믿은 다음에 우리를 여기에 살아있게 하시려고 남다른 죽음을 죽게 하시기가 아니라 남다른 삶을 살게 하시려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그 순간 멀리 계셨던 하나님이 아주 가까이 계시는 것처럼 심지어는 내 안에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놀라운 변화는 불화 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고 다시 하나님과의 화목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이미 하나님이 우리와 화목을 이루셨습니다.많은 죄를 짓고 심령이 곤고 해지고 양심과 율법에 송사를 끊임없이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는 이미 원칙적으로는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죄함이 없고 죄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주님 앞에 기도할 수 있고 주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지만 지속적으로 불순종과 죄 가운데 살아가면 하나님과의 화목은 깨트려집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한번 주신 그 커다란 관계는 깨트려지지 않지만 화목은 언제나 깨트려집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이 비유를 들면 교리적으로 이해가 되기 쉬울 것입니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너무나 쓸쓸해서 그래서 아주 마음에 드는 아들을, 혹은 딸을 입양해서 그래서 길렀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부모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또 후회하지 않고 잘 지내는 집도 있습니다. 사람 나름이겠지만, 한번 나와 관계없는 사람을 내 자녀로 입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호적에 입적이 되었고 그는 내 많은 재산을 법적으로 상속할 수 있는 상속자로서의 권한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 역시 자기를 그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기의 은인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그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리고 그 어머니와 아버지의 아들이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오랜 동안 자신이 기른 자녀가 아니었기 때문에 잘못된 집안에서 교육을 재대로 받지 못한 가운데 자라나서 수시로 이 부모가 성품 적으로 아주 싫어한 일들을 하면서 자꾸 부모의 마음에 근심을 시켜드리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어떻습니까? 부모와 자식이라는 법적인 관계는 유지되고 있는데 무엇이 깨트려집니까? 화목이 깨트려집니다. 그래서 자식은 아버지를 자꾸 피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자식을 생각하면 우울해지고 근심이 생겨나는 그런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 앞에 용서받고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화목해진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 살아갈 때 하나님과의 이런 화목들이 깨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로 돌아가셨다고 하는 이 사실은 단번에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는 일회적인 구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성화 생활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 살아가야 할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은 구원 얻을 때만 수용되는 교리가 아니라 구원을 얻고 이 성화 생활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십자가의 교리가 아니면 우리는 이 성화에 대해서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2장에서 그 유명한 기동론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그와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그 발아래 무릎을 꿇어 주라 부르게 하셨느니라”이 장쾌한 기동론 이것을 왜 이야기했는지 아십니까?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이야기하면서 무슨 일이 있든지 간에 너희들이 서로 자기 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면서 화목하고 성령 안에서 일치된 삶을 살라고 그런 도덕적인 권면을 하다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교리를 장쾌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그의 성화론에 핵심에 그리스도 예수론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낮아지심의 극치가 십자가이고 그리고 십자가는 동시에 높아짐의 시작입니다.그래서 하늘 영광을 버린 낮고 천한 세상에 온 작은 어린아이가 마지막에는 온 우주를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스리는 통치 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그 엄청난 변화를 기동론 속에 담은 것입니다. 거기에 절정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죽으셨다 라고 하는 것은 불신자들에게는 구원을 통해서 일회적인 화목을 이루라는 권고가 되겠지만 이미 믿는 자들에게는 그 십자가의 화목 제물을 통해서 성취하게 된 하나님과의 화해된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살아가라고 하는 메시지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 커다란 의문점 하나가 풀립니다. 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불화 한 관계 속에서 거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하나님과의 화해를 다시 복구하지 못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설명하지만 그러나 가장 커다란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 친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그리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그 하나님과 깨트려진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존 감이 있습니까? 그에게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이 있습니까? 그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함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인격적인 성숙이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트려진 가운데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 저 정도밖에 살 수 없을까 하는 실망과 아주 악취가 나는 인간의 냄새이외에는 아무 것도 그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들도 내가 구원받은 자녀로서 겨우 이렇게 밖에 못 살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그래 이렇게 초라한 것인가. 이런 것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 존귀한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할 때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서 구원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살아가는데 실패한 메마른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십자가는 모든 영적인 회복의 관건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증거를 한번 대보겠습니다. 남의 말을 하면서 증거를 대면 여러분들이 잘 안 믿을 테니까 여러분 자신의 경험을 제가 떠올려 보겠으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거스르며 불순종하면서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뭐 교회는 계속 다닐 수도 있고 중간에 쉴 수도 있는데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나오나 안 나오나 마찬가지가 아니라 하여튼 어째든 그것은 본질이 변하지 않으니까 그 가치가 적습니다. 어째든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납니다. 죄 가운데서 삽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자기가 좋아서 그릇된 길로 걸어갔는데 한참 살다가 보면 이 길이 이제 나도 싫은데 자기 힘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죄와 타락의 놀라운 위력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담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끊어야 한다고 합니다. 의사가 분명히 말합니다. 조금만 더 먹으면 당신은 죽는다. 그러면서 끊어야지 되는데 그러면서도 결국은 못 끊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가 됩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가 있든지 돌아옵니다. 돌아와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으면서 펑펑 울고 그리고 아주 진실한 회개를 경험합니다. 그때에 예외 없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반죽이실 것이라고 하는 어떤 공포 때문에, 표현이 너무 걸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요절을 내실 것이라고 하는, 난 최대한 어휘를 동원하는데 왜 이렇게 어필이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정말 가만두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는 그런 어떤 강한 공포,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펑펑 울며 회개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결국 이 죄인의 마음을 녹이는 것은 공포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에 확 녹아지면서 나 같은 인간이, 나처럼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을 버리고 이렇게 방탕한 길로 갔는데 이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시는군요. 그렇게 고백할 때에 예외 없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교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다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예외 없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처음 돌아오고 나서 가장 가슴에 깊이 찌르듯이 들어오는 찬송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오래 동안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고 죄 가운데 살던 제 마음에 팔을 확 벌리고 나를 맞으시는 그 예수님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품이 그냥 품이 아니라 십자가 형벌로 짓이겨진 그 피의 가슴이었습니다. 왜 때리시고 왜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시면서 나를 어루만지셨을까? 나는 죄와 불순종, 그리고 나의 허물 그리고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선택해서 하나님이 죽었다고 외치며 그리고 나는 하나님 없는 삶을 스스로 선택했는데 주님이 때리시고 나를 치신 것은 분명한데 왜 영원히 치고 때리시고 그리고 나를 모두 파멸로 몰아가지 않으시고 그렇게 때리신 후에는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하는 내가 당하고 있는 그 고통을 보시면서 한쪽으로는 때리시고 한쪽으로는 눈물을 흘리시면서 그러면서 어루만지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십니까?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아십니까? 자식을 낳아보면 압니다.
(예화: 언젠가 아들이 말을 안 들어서 매를 때리셨는데 밤에 자는 모습을 보니 다리에 피멍이 든 것 을 보고 약을 발라주며 생각한 것이 때리시고 어루만지시며 위로해 주시는 주님의 품을 생각 했다는 이야기)
그렇게 불순종하고 제멋대로 살았던 나를 주님이 싸매시고 어루만지시며 끌어안으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서 나를 위해 대신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당한 흔적이 나를 안으시려고 벌린 팔 사이에 고난 받은 피 흐르는 예수의 십자가에 가슴이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정도의 차이는 있고 약간의 묘사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다시 찾는 모든 사람들 영적 생활 속에 일어나는 공통된 경험입니다. 그러니 조국의 교회에서 이 십자가가 언제나 울려 퍼지지 않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손해인가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저는 벌써 25-3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목사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곤고한 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가슴 벅찬 회복을 경험할 때는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합니다. 나같이 쓸 모 없는 인간, 그리고 쓰레기와 같은 인간을 위해서 고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십자가에 달려 거룩하신 몸을 찢으셨을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아직까지도 여전히 세상에서 헛된 것들을 찾고 추구하고 그것들을 위해서 죄를 짓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훼방하며 살을 수밖에 없는 이 비참한 인생을 위해 예수님이 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 목회를 하고 영혼들을 돌보다가 힘겨워지고 고통스러워질 때 때로는 저의 부주의한 영적인 관리로 침체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리스도 십자가는 저를 살립니다. 맞아.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십자가 붙들겠네
그래. 이런 놀라운 사랑을 입어 구속받은 주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잠시 내게 찾아오는 육신의 불편함과 고통, 마음의 갈등과 가슴을 후벼파는 아픔정도야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사랑에 비하면 얼마나 작은 것인가. 이렇게 쓸모 없는 인간에게 주님을 위해서 손톱만큼이나 그의 고난에 참여하게 해주신 은혜는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그 십자가를 보며 깊이 감화를 받는 것입니다.
(예화: 집회를 다니실 때 어느 교회에서 구해준 숙소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너무나 지저분하고 환경이 불쾌한 상태로 잠을 못 이루고 있는데 찬송이 하나 떠올라 부르며 눈물로 기도를 하 면서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회개했다는 이야기)
그 십자가의 징계는 이처럼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께로 잘못된 관계로 돌이켜 서서 하나님과의 화해를 회복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아주 공통된 경험으로 우리에게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잃어버렸습니까? 심령이 냉담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간 곳이 없고 그리고 기도가 막히고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여러분들을 주장하지 못할 때 여러분들은 무엇을 잃어버렸습니까? 아무 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습니다.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하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복음은 그래서 우리의 영혼에 놀라운 영적인 순발력을 허락해줍니다.
사역을 하고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자신이 대접받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를 줍니다. 교만해질 것 같아서 두려워질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의인도 아니오, 하나님의 충성된 일군도 아니오, 단지 그의 피로 용서함을 받은 옛날의 죄인이었던 용서받았던 한 죄수의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만들어줍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 시키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이 사건은 단지 우리들이 한번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주신 사건이 아니라 그 화해를 계속해서 유지하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주님을 믿는 우리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님을 현저히 욕보이는 사람들은 누군지 아십니까? 여러분들 중에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라고 선전하고 다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으며 그분의 죽음은 미련한 것이었다고 말할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대적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죽음을 욕보이는 것은 불신자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는 그리스도를 예수를 욕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한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화목 제물로 드리심으로서 우리에게 참된 하나님과 화목 속에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런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린 채 영적으로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거기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현저히 욕보이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너희들이 하나님과 화해했는가를 묻지만 그러나 이미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들을 향해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너희가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이룬 하나님 아버지와 너희 사이에 그 화목을 오늘도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주님께서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깊이 감격하고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충만한 은혜 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 신앙생활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끔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이라고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마치 매일 술 먹고 집에 들어오던 사람이 하루 이틀 술을 먹지 않고 들어오면 동네 사람들 비롯해서 그 집안에 부인까지 불안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정상적인 하나님과의 화목 안에서 살아가는 영적 생활들이 거의 소수가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깨트린 상태에서 그렇게 냉냉하게 살아가는 죽은 영적 생활이 보편화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디서도 그것을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오늘 이 십자가를 보면서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이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주신 그 화목을 계속 유지하며 살아가도록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는가 여러분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다면 너희들이 내가 이 십자가에서 너희들을 위해서 못 박혀죽을 때 그렇게 이루고 싶었던 하나님과의 화목 속에서 살아가는 그 관계, 너희들이 지금 누리며 살고 있는가 하고 십자가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화목한 생활이 결정적인 특징이 무엇일까요? 물론 화목한 생활이 하나님과의 영적인 화목을 현재적으로 누리고 있으면 그러면 그 화목한 사람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놀라운 표징들이 있습니다. 우선 개인적인 경건 생활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음성은 그 뜻이 무엇인지를 몰라도 목소리 자체로 아름다움이 되고 그리움이 됩니다. 그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 냉담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간직한 그런 성도는 없습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단지 머리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가슴으로 정말 내가 하나님을 더 알기를 원하고 그리고 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고 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게는 꿀과 같이 달고 송이 꿀과 같이 달콤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화목 속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게 되면 또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 중에 하나가 열렬한 기도 생활입니다. 함께 모두 모여서 무릎을 꿇고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어떤 사람들은 닫쳤던 수 문이 열리는 것처럼 폭포수와 같이 막 기도가 쏟아져 나옵니다. 입이 아니라 가슴속에서 충만한 언어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눈물과 탄식과 통곡과 애통함으로 기도 제목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머리를 땅에 처박고 계속해서 이마만 비비며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트려져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토로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마음에 하나님을 향해 담긴 것이 없으니까 뚜껑을 열어서 아무리 흔들어도 국물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럴싸한 이유로 자꾸 변명하지 말고 이렇게 직설적으로 깨고 들어가 보십시오. 이것이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의 마음이 벅차고 샘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주체할 수 없이 하나님을 향한 수많은 언어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리고 그 언어와 기도의 제목들이 쏟아져 나올 때 어떤 때는 기쁨으로 어떤 때는 통곡으로 어떤 때는 탄식으로 한없이 쏟아져 나온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기도를 할 때에 그런 것이 하나님의 화목 속에서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바로미터입니다. 그런데 뭔가 기도를 하려고 할 때에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막 쏟아지듯이 막 퍼붓는데 그런데 자신은 거의 기도하지 못하며 머리를 땅바닥에다 대고 이마만 문지르면서 여러 시간을 보낼 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은 통성 기도를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그러면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기도만 기도입니까? 묵상으로 하는 기도도 기도가 아닙니까? 물론입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그러나 묵상도 두 가지입니다. 가슴속에서 쏟아놓을 언어가 없기 때문에 침묵하며 기도하는 자세만 지키는 것은 묵상기도처럼 가장해 보이는 것입니다. 묵상 기도를 가장한 단절입니다. 그러나 묵상을 할 때에도 소리를 낼 수는 없지만 이 속에서 수많은 언어들은 가슴을 벅차고 심장을 터트리며 찢어 올라옵니다. 그리고 가슴을 향해서 하나님 앞에 머리 속에 올라와서 가슴으로부터 솟아서 우리의 온 인격을 적시고 머리 속에서 언어가 되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해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왠만한 사람이면 그가 소리내지 않고 엎드려 있을 때 그의 신음 소리만을 들어보아도 그 속에서 정말 살아있는데 침묵하며 기도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도할 수 없어서 침묵하는 것인지 그것은 조금만 영적으로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대다수가 전자입니다.
정말 여러분 기도가 깊이 들어갈 때에는 기도의 내용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오로지 신음소리만 쏟아져 나오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묵상입니다. 그런 기도를 드릴 수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그것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은 관심사가 다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그 화목을 현재적으로 누리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관심은 자신의 육신의 행복에 많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성이나 대가, 주위의 인정, 칭찬 이런 것의 성취 이러 것의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사는 사람은 그것보다도 자신이 거룩해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거룩에 대한 열망이 없다 하면 여러분들이 다른 부분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열정적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서 거할 때 일어나는 또 하나의 현상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입니다. 영혼을 맡겨주었는데 그 영혼이 죽던 말던 교회에 나오든 안나오든 관심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뜨려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혼을 볼 때에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 너무나 불쌍하고 구원받아서 거룩하게 자라 가는 영혼을 보면 가슴 벅참을 느껴서 때로는 탄식으로 때로는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 있는 그 사람은 일단 하나님과의 화목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화목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죄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이 말한 바와 같이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하는 의로운 심령에 고백이 있습니다. 다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뿐만 아니라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잘못 가르쳐 주는 것을 보면 견딜 수 없이 가슴이 아프고 분노하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그리고 참된 것들을 가르쳐 주고 그것들을 따라 살려고 하는 욕망들이 생겨납니다.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에 바로미터를 재보십시오. 그런데 이런 다양한 하나님과의 화목 속에서 살아갈 때에 이런 다양한 표징들이 나타나는데 이런 다양한 표징 한가운데 그것보다도 훨씬 더 결정적이고 중심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뜨거운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 속에서 살아가지 못할 때에는 세상에 있는 것들이 너무나 좋고 세상에 있는 것들이 너무나 귀해서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도 버릴 수 있는데 하나님과의 화목 속으로 들어가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는 바꿀 수 없네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랑합니다. 그런 사랑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흘러 들어가고 흘러나오면서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친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비로소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인간이 하나님 자신 때문에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너무나 모릅니다. 하나님과의 이런 화목 속에서 살아가는 영적 친교의 행복에 대해서 깊이 깨닫고 나면 왜 우리의 교리 문답 제 1번이 인생에 제일 가는 목적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를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인지 말하는지에 대해서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인생의 최고의 즐거움은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같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을 엔조이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너무나 기쁘고 주님 때문에 너무나 행복하고 주님 때문에 너무나 즐거워서 인생에서 내가 느끼는 모든 행복 속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이 계시지 않은 그 어떤 곳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들이 회복해야 할 삶입니다. 그 삶은 한번이나 두 번 회복되어야 할 삶이 아니라 계속해서 회복되어서 우리의 전 삶이 우리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하나님과의 영적인 친교의 감격 속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우리를 구원하시며 기대하신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 당하신 이 주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에게 화해의 손을 내미셨고 그 손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화목을 지키면서 그 첫사랑의 화목 속에서 살고 있는가 하고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이 무엇일까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 지나가는 것들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누릴 수 있는 것은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등지고 범죄 한 인간들에게 열어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은혜의 그 아름다운 친교의 길을 오늘 우리들이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찢으심으로 휘장을 가르신 것도 우리를 주님과 대면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당신이 피 흘려서 우리를 위해서 그피를 뿌려 하나님 앞에 이르는 보좌에 새롭고 산길을 여신 것은 단지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한 길이 아니라 즉 지금도 죄 가운데 있고 하나님을 떠나서 곤고한 우리들이 그 피 길을 걸어서 그래서 우리는 흉악하고 결코 죄와 결별할 수 없는 더러운 인간이지만 수시로 씻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그 은혜, 회복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보혈을 힘입어서 다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런 생활을 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것이 아니십니까? 너무나 여러 차례 하나님 앞에 범죄 했고 화목을 주시면 깨트렸고 또 화목을 주시면 또 깨트리고 해서 여러 번 같은 실수를 되풀이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돌아갈 수 있는 길은 그 길 말고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못 박히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신이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 보혈의 충족한 공로를 믿고 이제껏 살아왔던 많은 죄들을 회개하며 빈 손들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가서 피 묻은 그 십자가를 붙들고 내가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살지 않고는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으로도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가져가시고, 심지어는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시더라도 내 영혼이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빛나는 화목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백하며 나오는 사람들을 오늘도 그 팔로 안으시고 그리고 그들에게 십자가로 말미암는 회복의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며 살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고난의 주간에 이렇게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해서 영원히 이 무능력한 삶과 결별하고 주 앞에 사는 진실한 주의 자녀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십자가를 믿는다는 것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3:25上)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화목 제물이 되신 것은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원수가 되었던 우리들을 죄의 용서를 받음으로 하나님과 화목 시키기 위함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죄의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 시키신 것은 단지 한번 죄를 용서받기 위함이 아니오 그 분과 화목한 생활 속에서 주님을 위해서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주님과 화목 시키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죄를 집중하고자 하는 교리는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에 죽음이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인하여 쭉 나오는데 이 부분이 번역이 좋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성경 밑에 나와 있는 난하주의 번역이 희랍어 본문을 정확하게 번역했다고 이렇게 여겨집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에는 뭐라고 되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렇게 보면 화목 제물로 세우신 원인이 우리였는데 “그의 피로 인함이고”, 또 하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이렇게 되어 있는데 사실 희랍어 본문으로 보면 이렇게 번역을 해야지 맞습니다. “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다시 한번 성경을 잘 보십시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렇게 해야지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런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화목 제물이 되는데 그 화목 제물이 되실 수 있는 중요한 원인이 하나 더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음으로서 믿는 그 사람에게 예수가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의 그 유명한 제한 속죄의 교리라고 하는 것을 만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죽음이 누구에게까지 화목 제물로서의 효력이 미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여러 가지의 많은 논란들이 교회 역사에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 앞에서 화목 제물이 되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분을 믿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즉각적으로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화목 제물이 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이런 질문입니다. 당연합니다. 요즘 애들 말로 ‘당근’입니다. 당연합니다.
자, 이 이치는 이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실과를 따먹고 범죄 했을 때 이미 인간은 하나님과의 그 처음 언약을 파괴함으로서 주님께서 이미 인간과 맺으신 언약 속에서 주어진 바대로 사람은 죽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동시적인 죽음이었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이고,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의 모든 좋은 교제가 단절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이 금하신 실과를 따먹는 자들을 향해서 약속하신 그런 계명이었습니다. 인간이 그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범죄하고 그리고 인간은 타락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럼 왜 그 선악과를 만들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따먹게 하고 이렇게 세상을 복잡하게 하게 만드셨느냐고 투덜댑니다. 좀더 아는 사람들은 그 선악과를 우리가 맛도 보지 못했는데 왜 그 할아버지가 따먹은 선악과를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가 하고 투덜댑니다. 사실 투덜거림과 불평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나도 같이 맛을 봤다면 그럼 뭐 형벌을 참을 수 있겠는데 그 할아버지 먹으라고 내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 할아버지가 그것을 먹고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안에서 범죄한 자가 되어서 죄 아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들이 새로운 시각에서 이 선악과 사건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 이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인간이었지만 그러나 그 완전한 것이 하나님에게 이를 정도로 그렇게 절대적으로 완전한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든지 그 완전 이 깨트려질 수 있는 그런 불안전한 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렇다고 말을 안 하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완전하다면 그가 왜 범죄를 하겠습니까? 그럴 가능성이 그 인간에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하나님이 온 세상과 우주를 창조하고 거기에 생육하고 번성하고 무엇 보다도 다스리라고 온 세상과 우주를 그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는 온 세상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그 다스리는 권세는 마치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의 세계를 다스리는 것과 거의 같이 주인 노릇을 하면서 그렇게 주님이 지으신 피조 세계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이 피조의 모든 세계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그 사람과 하나님이 마치 차이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예를 들자면 회장이 자신의 회사를 다스릴 수 있는 모든 권한을 사장에게 맡기고 그리고 회장은 멀리 출장을 떠나고 나면 사장이 그 모든 회사를 맡아서 다스릴 때 회장과 다름이 없이 생각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위임하신 창조 세계에 대한 통치가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간에 자기가 곧 다스리는 이 모든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대신해서 온 세상을 다스리면서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산 중앙에 있는 한 나무 앞에 와서는 분명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무한한 질적인 차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것을 따서 먹을 수 없거니와 만약에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그 선악과 앞에서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질적인 무한한 차이를 발견하고 자신도 바로 그 나무 앞에서야 비로소 나는 이 세상에 지어진 모든 피조물 중에 일부일 뿐이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에 관계는 그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는가 행하지 않는가에 달렸다는 점에서 그 첫 번째 언약을 행위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 실과를 따먹음으로서 이제 그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선악과가 있는 것이 그들이 만약에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선악과는 계속 해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질적인 차이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더욱더 경배하고 사랑하게 하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게 하는 중요한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있었던 것인데, 신앙을 잃어버리고 나니까 그것을 따먹고 범죄 하게 되었으니 이제 그 선악과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인간이 투덜거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아담과 하와뿐만 아니라 그 후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에게 그 죄를 유전하게 하셨습니다. 이것도 우리들이 잘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신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이 선악과 사건에 이 시험이 영원히 계속되는 시험이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분명히 이 시험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시험과 같이 그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는지를 시험하시고자 하는 한시적인 시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그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했더라면 우리는 한번도 그 선악과를 보고 유혹을 받거나 그 선악과를 따먹은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가 그 언약을 지킨 이 때문에 우리들이 그들과 똑같이 그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처음 축복을 그대로 누리면서 살아갔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가 불순종하였을 때에 우리도 함께 그 불순종에 참예한 자가 되고 그래서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 것을 우리들이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이렇게 해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이제 죄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른 행위 언약을 파기하고 하나님이 금하신 실과를 따먹은 죄,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 안에는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 속에는 그런 처음 범죄를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제 타락한 자손으로서 본성적으로 그 마음속에 아비들의 타락한 경향성을 몸에 지고 태어났습니다. 그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부패성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의로운 사람, 선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교육을 해야지 됩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냥 내버려두면 저절로 악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을 입증하는가 하면 그 사람 안에 있는 부패한 경향성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어떤 동물학자가 실험을 했습니다. 왜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는가. 실제로 고양이가 쥐를 잡아서 그것을 먹는가 하면 사실 아닙니다. 그럼 왜 고양이가 쥐를 잡는가. 그래서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것은 아마 부모로부터 뭔가 지속적으로 본 습관들로 인하여 이것이 전수되었을 것이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금방 태어난 쥐새끼와 금방 태어난 고양이 새끼를 같은 우리 안에서 길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나 봤더니 어렸을 때는 잘 살아가는데 어느 날 고양이가 쥐를 물어서 죽여버렸습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고양이의 본성 속에는 그 쥐를 잡아죽이고자 하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 안에도 그렇게 죄를 짖고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그런 경향이 인간 안에 있습니다. 물론 인간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희미한 그리움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미하고 죄를 짖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고자 하는 경향은 뚜렷합니다. 아주 뚜렷합니다. 무엇인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그 경향성들을 폭격해서 파괴시키지 않으면 인간은 숙명적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살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패성입니다. 그렇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부패성을 가지고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것,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훌륭하게 합니다. 그러나 거짓말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면서도 진실을 말하는 것은 철저한 훈련과 무엇인가 주입된 교육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한편으로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살아가면서 자기 안에 있는 이 숙명적인 부패성을 인해서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정 죄 아래 놓여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할 때에 그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죄와 그리고 부패한 경향성에서 양산되는 수많은 범죄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이것은 영광에 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찬란한 영광이신 하나님과 잇대어서 인간이 함께 교류하면서 살도록 되었는데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서 인간이 그 영광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무엇으로, 뭔가 인간들을 도덕적으로 교육시키고 그리고 선한 양심을 가르치려고 애를 쓰지만 그러나 본성 안에 있는 그 죄 된 성품을 인해서 도저히 하나님과 누렸던 영광의 교제에 다다를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의 놓여 있는 상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정 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당부하시면서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그 예고를 그대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입증해 보이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그 말씀은 영적인 면에서 이미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도 없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그 분을 사랑할 수는 더더욱 없는, 하나님에 대해서 전적으로 그 분을 찾고 사랑하고 창조 시에 인간의 본분 중에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 행할 수 있는 그런 어떤 영적인 능력도 없는 완전히 무력한 상태에서, 죽은 상태에서 인간이 태어납니다. 그러니까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한 그 예언이 그대로 실현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육체적인 죽음인데 그 육체적인 죽음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즉각적인 죽음을 선고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즉각적인 죽음을 선고하시면 어떻게 될까요? 즉각적인 죽음을 선고하면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그 자리에서 죽고 후손도 태어날 수 없고 그러면 인간이 없는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속에서 인간에게 어느 정도 살다가 죽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생명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인간일 수 있었던 것은 살아 있는 육신 때문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영혼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교류하며, 하나님과 영적인 영광스런 교제 속에서 인간이 사는 것이 인간의 참모습이었는데 그것은 죽고 육체만 살았으니까 이제 그것을 가지고는 도저히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창세기를 읽으셨을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타락하고 나서 4장 이후에 펼쳐지는 그 비극적인 인간들의 역사와 5장에 나오는 죽음의 놀라운 역사들을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쭉 이어갑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이 세상에 지으신 것이 제가 늘 사랑하면서 쓰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가족 관계 속에서 사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간을 지어놓으신 것입니다. 당신을 대신해서 이 피조 온 세계를 다스리고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어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랬는데 그렇게 지으신 그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범죄 함으로 영혼이 죽고 육체는 살아 있었으나 그러나 도저히 하나님께서 처음 이 세상에 창조하셨던 그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갈 수 없는 존재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은 남아 있으니까 인간이 그 뛰어난 두뇌를 사용해서 집을 짖고 건축을 하고 무기를 만들고 사람을 죽이고 그리고 높은 성을 쌓아서 자기의 이름을 내고 하는 이런 육적인 왕국들을 건설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왕국들을 건설해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전혀 그런 것을 기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가 막힌 비유 하나가 지금 생각이 났는데 이렇게 생각을 하시면 아마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정원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산을 아주 아름답게 가꾸었습니다. 외국에 나가면 진귀한 풀, 화초를 사 가지고 오고 돈을 얼마든지 아끼지 않고 투자를 해서 전세계에서 예쁘다고 하는 모든 나무들을 사서 모으고 그리고 엄청난 기술을 가진 장인들을 불러서 아름다운 조경공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너무 아름다운 동산을 만들었는데 그야말로 아름다운 잔디, 잔디도 수많은 종류의 잔디를 심고 넓은 울타리를 쳤습니다. 이제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완벽한 동산이 되었습니다. 그 동산을 보면서 이 주인이 너무나 흡족한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와서 동산을 한번 쳐다보고 호흡을 한번만 하면 가슴이 서늘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이제 그 동산을 모두 관리하도록 거기에 관리하는 사람을 몇 명 두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덧 세월이 흘러갔는데 어느 날 동산을 관리하던 모든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모두 미쳐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미친 사람들 눈을 보았습니까? 눈에서 광채가 납니다. -침을 흘리고 막 이미 처음에 그 아름다운 동산을 관리할 때에 입혀주었던 그 고결한 옷은 다 찢어서 버리고 온 몸에 가시에 긁혀서 피투성이가 되고 그리고 침을 흘리고 온갖 더러운 모습을 하고 그리고 도끼며 망치며 들고 다니면서 그 동산을 마구 짓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년이 지나고 나니까 그 동산의 모양은 겨우 남았는데 흐르는 시내는 끊어지고 그리고 꽃이 피던 아름다운 나무들은 가꾸지를 않아서 모두 말라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답게 풀이 돋고 꽃향기가 날리고 열매가 맺던 그 동산은 까마귀나 이따금씩 와서 깃드는 황폐하고 으시 으시한 그런 동산으로 변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그렇게 망가트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죽은 채로 태어납니다. 영적으로는 죽은 채로 태어나고 육적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비참한 죄인들을 그렇게 계속해서 살게 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하나님이 두 번째 언약을 맺으시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은혜의 언약입니다. 행위의 언약이고 이것은 은혜의 언약입니다. 명칭 자체가 그 언약의 성격을 드러내 보입니다. 첫 번째는 그 언약을 지키는지에 여부의 문제가 무엇에 의해 결정됩니까? 행위에 의해서 결정이 되는데 두 번째 언약은 무엇에 의해서 결정이 되는가 하면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격적으로 그것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세상을 그렇게 짓이겨 놓은 모든 죄, 그것을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과 우리를 다시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십자가에 피 흘려 우리를 위해서 행위 언약을 어긴 대가를 다 치루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렇게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으로서 저절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죄와 형벌로부터 구원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바로 거기에서 필요한 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못 박혀죽으셨고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모든 정죄와 진노에서 구하셨다 라고 하는 이 대속의 사실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화목의 길을 여신 것이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처음 행위 언약 하에서 우리에게 주어졌던 그 정죄 아래 그대로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이 우리의 구주이시라는 사실에 대해서 아멘 하고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의 언약을 통해서 구원해주시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지만 그 효력이 미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복음 전파의 화급성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못 박혀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 때문이오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하는 이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사람이 이 은혜의 언약 안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작정되었는지를 우리들이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 제물이 되셨다 라고 하는 이 복음에 대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전혀 기뻐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심으로 그들을 향해서 주어질 심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신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이 십자가에서 남긴 네 번째 말씀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하나님 앞에 탄식하며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아낌없이 당신의 진노를 그리스도 예수께 퍼부으셔서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짓이겨 피 흘려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 고난 당하고 죽으신 그 광경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의 미래에 당하게 될 형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똑같이 그런 정도로 잔혹하게 그렇게 하나님께 형벌을 당하고 자기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그분의 창조 세계를 짓밟으면서 살아온 그 불 신앙과 죄를 그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형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 사건은 더 놀라운 구체적인 정죄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들은 보라, 너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이후에 받게될 심판이 바로 이런 종류의 심판이라. 이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여기에서 그의 피를 하나님이 예수를 그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 제물이 되게 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에서 들어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 제물이 되게 하셨다. 제일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 이 믿음일 것입니다. 그만큼 이 믿음은 정의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이 믿음을 어떻게 설명할까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믿음은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흔히 평범하게 사용하는 믿음이라는 의미하고는 겹치는 부분도 좀 있지만 그러나 그저 제 짐작에는 30% 정도는 겹치고 70%는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그럼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우리들이 일상적인 생활에서 정의를 내리고 있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과는 성경에서 특별히 이 구원의 사건,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을 두고 제시하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 사이에 통용되고 있는 믿음의 개념과는 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들 사이에 통용되는 믿음은 사실 상당부분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런 종류의 인격적이고 존재 적인 위탁이 있는 믿음이기 보다는 확률을 놓고 거는 식의 것을 우리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다분히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서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다양하게 사람들이 설명을 합니다. 그 중에서 제일 인상이 깊었던 설명은 그것입니다. 요즘은 그런 이발소들이 많지 않습니다만 옛날에는 이발소에 가면 누워서 면도를 시켜주었습니다. 요즘에는 자기들이 합니다. 기다란 가죽 혁대를 놓고 커다란 칼을 갈고 아주 충실한 사람은 아예 숫돌로 갑니다. 진짜입니다. 옆에서 숫돌로 갈고 그리고 그것을 남자들을 눕혀 놓고 면도를 하는데 그 면도를 할 때 출발점이 어딘지 아십니까? 멱입니다. 여기서 딱 출발을 합니다. 목부터 수염이 나기 시작하니까 거기에 칼을 댐으로서 면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분이 믿음을 설명을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가 믿음이 없다면 그렇게 목을 맡길 수가 있겠는가. 시퍼런 칼날에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길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무엇을 보고 믿는 것입니까? 그 사람 얼굴이나 압니까? 면도할 때는 예외 없이 눈 위에다가 따뜻한 수건을 팍 덮었습니다. 옛날부터, 그리고 밉니다. 그 사람에 대한 인격적인 아무런 경험도 없는데 그 사람을 믿는다라고 하는 것이 그게 말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들이 그것을 흔히 세상에서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확률적으로 면도하러 들어갔다가 멱이 따진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게 만원 짜리 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원 짜리 돈입니다. 이것을 내면 어디에 가든지 만원 한도 내에서는 달라는 대로 줍니다. 누구도 이것을 받으면서 주민등록증을 보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수표를 낼 때에는 주민등록증을 보자고 합니다. 주민등록증을 보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 위조지폐도 있지만 그러나 위조지폐는 있기는 있지만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만한 돈을 정교하게 만들려면 만원이 더 듭니다. 그러니까 없습니다. 그것도 역시 줄 때에 그 사람을 쳐다 도 안 보고 돈을 내미는데도 그냥 받아서 넣으면서 줍니다. 그런데 이게 위조지폐면 물건값만 손해를 보는데도 줍니다. 그 사람의 얼굴도 안 봅니다. 무엇을 보고 믿는 것입니까? 믿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받았지만 한번도 거스름돈을 받을 때 위조지폐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으면서 이렇게 돈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확률의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식의 확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의 피를 믿음으로 인하여”라고 할 때에 그 믿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믿는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믿음은 그것이 그럴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물론인데 확신이 없는 믿음은 없으니까, 확신은 있는데 그 확신이 확률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믿음에서는 대체적인 확신에 그치는데 여기에서는 어떤 확신을 갖는데 그 확신이 간절한 의존적인 갈망을 동반한 확신입니다. 무슨 말인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절대적인 의존의 감정을 동반한 그런 확신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신 그 피를 믿는다. 그 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피의 의미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당연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말할 때 나무 십자가인가 쇠 십자가인가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십자가에 담긴 의미를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여기서 피를 믿는다라고 할 때도 피 속에 담겨진 그 의미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자신의 인생 전체가 살고 죽는 것과 관계가 있다라고 하는 마음으로 절대의존 적인 감정을 가지고 믿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자, 그럼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서 피를 흘려주심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화목 제물이 되셨는데 바로 그런 사실이 피를 통해서 왔는데 그런 사실을 내가 굳게 믿는다, 그럴 때 이것은 단지 지적으로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충분히 예수님이 그러셨으리 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화목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이제 내가 나 되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화목 제물이 되시지 않으셨다면 내 인생은 하나님의 큰 진노와 정죄 아래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안 죽으셨는가 하는 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아주 절박하고 중요한 질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으니까 그 사실이 이제는 나를 하나님 앞에서 생명과 소망을 누리며 살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런 종류의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걸린 문제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이 사건을 접하면서 그것이 뒤집힐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그 생각이 뒤집힐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뒤집힐 수 없는 질문이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을 생각하면서 그 사건의 의미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방금 좋은 비유가 하나 생각이 났습니다. 아유회를 갔다가 절벽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절벽 끝에 가서 한번 밑이 얼마나 아찔한가 하고 이렇게 들여다보다가 흙더미가 무너지는 순간에 으악! 하면서 절벽에서 험한 계곡으로 계속해서 떨어졌습니다. 떨어지다가 으악! 하고 졸도했는데 한참 지나도 쿵 소리가 안 납니다. 살았나 죽었나 하고 눈을 떠보니까 나무 가지에 이 옷이 딱 걸렸습니다. 마침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까 고맙게도 핸드폰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서- 비유가 너무 세속적인가. -그래서 헬기가 날라 와서 자기를 거의 나무 가지가 부러지는 상황에서 아주 극적으로 구출을 해주었습니다. 그때에 그 사람에게 있어서 평생 그 헬기도 잊을 수 없겠고 핸드폰도 잊을 수 없겠지만 더 잊을 수 없는 것은 탁 튀어나온 그 나무 가지입니다. 툭 튀어나온 그 나무 가지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늘 생각이 나서 그 나무 가지에 대한 그 생각과 이미지가 아주 마음속에 깊이 고정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하면서 또한 자기의 생명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똑같은 나무 가지지만 그 사건을 통해서 그 나무 가지에 대해서는 아주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그 나무 가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생기에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이 십자가에 사건의 의미는 뒤집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구원해주셨지만 그러나 그것으로서 십자가의 경험은 끝나고 새로운 경험으로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이 자기가 바로 그렇게 영원히 지옥에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는데 그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이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 십자가 사건을 끊임없이 회고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회고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볼 것 같으면 자기의 신앙에 출발을 말할 때마다 항상 무슨 사건이 나오는가 하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가는 길에서 만난 그 사건을 이야기하고 그리고 그 사건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 사건과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못 박혀죽으신 그 사건은 나뉘어지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도 바울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처음 하신 말이 “사울아 사울아 어찌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모습으로 이 바울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그때에 이 바울의 마음속에는 십자가와 관계없는 또 다른 예수가 생각이 난 것이 아니라 그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 분이 바로 얼마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그 분이라고 하는 것이 같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그 부활이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사는 모든 날 동안에 자신이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그 십자가의 고난의 사건에 의미에 붙들려 매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경험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그 일의 의미에 묶인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고의 중심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그리고 모든 섬김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의 중앙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그가 고난을 당할 때에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고 그래서 쓸모 없는 자기를 구원하셨다 라고 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리고 또 그런 고백은 그가 마지막에 죽을 때가 가까워올 때가 되더라도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입니까?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심으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만나서 그분을 구주로 믿는 사도 사울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주신 그 위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귀한 그릇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보여준 것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그 십자가의 죽음이 내 인생에 있어서 절대적인 의를 가진 사건이며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만이 나를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화목 시키실 수 있다라고 믿으면서 그 확신이 자신의 전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 그것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후일에 보면 알지만 믿었다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제가 보기에는 분명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표적이 따라오는데 그 표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라고 하는 그 사건의 의미가 그의 인생에 깊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 보이지 않는데도 자신이 믿고 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의 거짓입니다. 그것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한번 잘 생각을 해보십시오. 저는 아주 착하고 모범생이던 아이들이 지금은 거의 지나갔습니다만 옛날에 한참 운동권 때 거기에 빠져서 자생 빨갱이 사상에 접목이 되어서 애가 완전히 공부도 버리고 성격이 이상한 사람이 되어서 그렇게 방황하는 것을 경험한 부모가 쓴 수기를 기억합니다. 어느 날 선배들과 우연히 간 엠티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선배가 하루 밤 동안 이 아이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가르친 것입니다. 거기에서 공산주의 사상에 확 사로잡혀서 그것이 하나의 인생과 세상을 보는 하나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공산주의 사상에 접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보니까 공부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해서 살아간다는 것이 결국은 민중에게 나쁜 짓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밖에 안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자생 빨갱이 조직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80년대에 있었던 그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일부 과격분자들이 이 안에서 자체적으로 생겨나는 빨갱이들입니다.
한 사람이 어떤 생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철학과 사상을 통해서 주입된 신념 하나가 바뀌어도 눈빛이 달라지고 심지어 학업도 포기하고 그 운동에 뛰어드는데 하물며 전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 살던 사람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 흘리신 것은 자기의 죄를 인함이며 그 십자가에 죽음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고 하는 놀라운 사실을 깊이 깨닫고 확신하게 된 그 사람이 인생이 바뀌어지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발소에 들어가서 웃통 벗고 목 내미는 심정으로 설마 저 면도사가 내 목을 따랴 그런 심정으로 나도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믿는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정말 믿음의 표징이 있습니까?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볼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면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저는 그런 증거를 볼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무슨 목사가 되겠다는 사람들에게조차도 볼 수가 없습니다. 정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이 진짜 참된 믿음인지 아닌지 하는 것은 후일 주 오시는 날에 우리는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구원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셔서 우리를 위해서 피 흘리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피 흘리셨으니까 이제는 그 피 묻힌 그리스도 예수의 피가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에 피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을 굳게 믿는 그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미 하나님을 믿은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자녀가 된 사람들도 역시 똑같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고난을 현재적으로 경험함으로서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 어제 설교의 두 번째 대지였습니다. 똑같은 논리에 의해서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 제물이 되었다 라고 하는 것은 단지 구원받을 때 일회적으로만 믿는 그 믿음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믿어야 할, 계속해서 믿고 있어야 할 현재적으로 반복되어야 할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떤 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요? 자 이런 종류의 것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자기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자기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제물이 되셨음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사람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이 아주 뛰어나게 좋기도 하다가 또 어떤 때는 믿음이 쉽고 믿음이 아주 작아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환난이 오고 어려움이 많이 닥쳐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나를 해칠 수 있으랴. 그렇게 담대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기를 온전히 던지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똑같은 사람이 얼마 지난 다음에는 믿음으로 살아가라. 믿음으로 살면 내가 사업에서도 많은 손해를 보고 이렇게 많은 어려움을 당해야 되는데, 옆에 사람이 하나님이 지켜주시잖아. 그렇게 설득을 해도 이 사람이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떨어진 것입니다. 약화된 것입니다. 이렇게 이미 믿는 자의 마음속에 믿음도 다변적입니다. 불변한 것이 아니라 다변적입니다. 믿음의 상태로,
그런데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제 설명을 들어보십시오. 구원을 받은 사람들조차도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계속해서 그런 믿음 속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자,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려보겠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셔서 화목 제물이 되심으로 나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지속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항상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예수 공로 아니면 영원 형벌 받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구원이 놀라운 은혜라고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감격으로 다가오기 위해서는 항상 무엇에 대한 생각이 항상 앞서갑니까? 구원받지 못했을 때에 인간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생각함으로서 구원받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인지를 우리 온 삶으로 온 마음으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영적 경험은 이렇게 정반대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구조적으로, 그러면서 감격과 감사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맛보면서 은혜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만약에 예수를 믿었다고 할지라도 누구 말대로 구원받았다고 할지라도 내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더라면 내 인생이 구원받은 것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얼마나 삭막하고 비참했을까? 그 생각을 하니까 정말 하나님이 왜 나 같은 인간을 이렇게 사랑해 주실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한없는 감격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정말 쓸모 없는데 내가 일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내가 일할 때 축복하십니다.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혼도 구원하시고 그 영혼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시고 그래서 다 망가지고 깨트려진 그 인생에 새 살이 돋고 새 희망이 솟아 나오게 만들어서 그들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영광을 돌리는 그런 도구들이 되게 끔 그렇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 앞에 내가 이렇게 쓸모 없는 사람이 아니라 전혀 쓸모 없는 사람이 되었다면 지금도 나는 아마 영적인 어두움 속에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이 내 인생, 내 육체를 즐겁게 하는 일에 열심을 내면서 하나님 앞에 불 충성하는 삶을 살다가 그리고 저녁이면 갈등과 고통 속에서 잠이 들텐데 이렇게 오늘도 보람있게 주를 위해 일하게 하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정반대와 서로 연관이 되어서 이렇게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있는 어느 지체가 점심을 대접했습니다. 먹으면서 대화를 하는데 그 부부가 작년 십자가 사경회 때 여러분들이 열심히 전도해서 돌린 그 전단지를 보고 깊이 마음에 찔림을 받으면서 자기 발로 걸어서 우리 교회에 나온 사람입니다. 온 첫날 십자가 사경 회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 그리고 펑펑 울고 완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쓸모 있는 사람으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때도 똑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저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서 십자가의 복음의 의미를 알고 그렇게 놀라운 변화를 받았으니까 참 감사한데 그렇게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몰랐더라면 여전히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방황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역시 아무런 기쁨도 없이 갈등과 고통 속에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일년 전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행하신 그 일들이 한없는 기쁨과 감사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정도만 예를 들면 이해하실 것입니다. 이게 서로 연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이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신자로서 십자가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이 두 사건은 항상 두 상황, 즉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갔을 때 그 상황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고 구원받아서 주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고 있는 이 두 가지의 상황이 항상 대비해서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심지어 말하기를 하나님이 자기를 충성 되이 여기셔서 주의 일군으로 삼으신 것에 대해 감격하기 전에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전에는” 항상 전에를 이야기합니다. “전에는 내가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를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때에 자신의 모습과, 그리고 지금은 복음 안에서 충성된 일군이 되어서 주님께 쓰임을 받는 자신 둘을 이렇게 비교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자기의 인생을 이렇게 놀랍도록 바꾸어놓은 것입니까? 무엇이?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이 이 사람을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완전히 정 반대의 인생을 살 수 있었는데 자신의 삶을 그렇게 바꾸어놓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한없는 부채 의식을 느끼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감격과 부채 의식을 동시에 느끼는 것입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그때 두 가지가 함께 떠오르는 것입니다. 하나는, 아 그래 맞아.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나를 위한 화목 제물로 죽으심으로 이렇게 하나님을 거스르며 짐승처럼 살아야 했던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지. 거기에서 오는 한없는 감격, 그리고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이 되어주셔서 오늘 나에게 이런 놀라운 새 삶을 주셨는데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나. 이 감격과 부채 의식을 유지하면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십자가 사건과 관련해서 그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라고 질문하면 우리는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내가 현재적으로 계속 체험하며 그 의미에 대해서 감격과 부채 의식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 그래서 그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미래의 나의 삶도 좌우하는 것, 그것이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의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우리들이 얼마나 믿음으로 살지 않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믿음에 대해서 너무 현세적이고 자기 암시적인 확신들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믿음의 개념들을 대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완전히 믿음이 작동을 안 하고 거의 죽어 있다가 자기가 뭐 하나 하나님 앞에 얻어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주님이 그것을 줄 것을 믿습니다 하면서 옴 몸이 다 믿음으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짓 믿음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인격적인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감나무 밑에 서서 ‘저 감이 떨어질 것을 나는 믿는다’ 그런 믿음을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관계에 대한 믿음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믿음에 대해서 사람들은 너무 많이 오해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조종하는 리모콘처럼 사용합니다. 내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도 꼼짝 못할 거야 하며 들어대는 성경 구절이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명하여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오 하는 식, 그 성경 구절도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거기서 이야기하는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관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데 옮아가라고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난무하고 있는 이 믿음의 개념들이 가지고 있는 결정적인 결함은 무엇인가 하면 비인격적인 믿음입니다. 그런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와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그분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생각하며 그 의미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는 삶,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셨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지금 살고 있을까요? 이따금 여러분들이 원하는 대로 세상 사람처럼 살고 싶어하는 그 소망이 그대로 이루어졌더라면 여러분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기억하고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한 그 일에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그 십자가 사건이 내 인생에 미친 영향을 지속적으로 회상하면서 거기에 감동을 받으며 그 능력으로 살아가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나는 여러분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이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십자가는 내 인생에 있어서 한번 건너온 징검다리와 같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풍성한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모든 충만했던 사람들은 항상 그 충만한 열정 한가운데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화목 제물로 죽으셨다 라고 하는 신앙에 뜨거운 고백이 한복판에 있습니다. 사건은 이천 년 전에 일어났지만 그러나 그 경험은 오늘에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눈은 그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면서 저 십자가 사건이 아니었다면 나의 인생은 정말 비참한 인생이었을 것이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행복과 나의 나된 이 모든 놀라운 축복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스스로 버리심으로 내게 주신 그 보혈의 공로를 인함이라고 하는 그 고백 속에서 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이런 고백, 이것이 바로 그 십자가 사건을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으면서 살아가는 믿음생활입니다. 그 십자가 사건은 그 빛 안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이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믿음의 대상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데 “그의 피를 믿음으로” 그런데 이런 사소한 전치사 하나를 가지고 교리를 세운다고 하는 것은 좀 무모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의미는 이런 의미입니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희랍어에서 전치사, 영어에 to, at, of, with 이런 전치사가 있습니다. 그 전치사의 일격서부터 사격이 있는데 삼격과 사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격은 제가 몇 주전에 디모데 후서 3장을 설교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내용을 설명하면서 구원을 이야기하다가 사격 전치사가 쓰였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 사격 전치사는 속으로 들어가는 의미라고 설명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삼격 전치사는 무엇인가 하면, 사격 전치사는 이동의 개념인데 삼격 전치사의 개념은 정지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으라 할 때에는 대부분 정지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온 그의 피를 믿는다라고 할 때에 그 믿음의 목적이 되는 그 피 앞에 쓰여진 전치사가 삼격입니다. 무슨 이야긴가 하면 이 피라고 하는 이것이 움직이는 개념이 아니라, 이동하는 개념이 아니라 이미 고정되어 있고 불변하는 정지 상태에 있는 그 피를 믿으면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이런 삼격 전치사가 쓰여짐으로 말미암아서 여기에서 설명하려는 이 믿음이 시대에 따라서 계속해서 변하는 이동 적인 개념의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되는 그 피 자체도 불변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 피를 믿는 그 자체도 시대가 지남으로서 수시로 변하고 달라지는 믿음이 아니라 언제나 똑같은 믿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림같이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보십시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풍성한 삶이 약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복음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그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진 이 십자가의 정지된 세월이 많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이 불변의 복음을 가르치는 대신에 변천하는 인간의 사상과 이 시대의 정신들을 가르치는 일에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국의 교회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묻은 복음 대신에 인간의 주위와 사상들이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해주신 생생한 피묻은 그리스도의 복음은 오늘날과 같이 디지털로 발달된 시대에는 이제 너무나 구태의연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끔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그들의 가슴에 순결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에 대한 경험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보혈의 능력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이 피를 사용하셔서 인간에게 영원한 믿음의 근거가 되는지에 대한 간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경박한 이 세상에 사상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대치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교회가 생명을 잃어버린 시대에는 언제나 그런 시도들이 있어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시대에 흘러가고 있는 사상에 대해서 열광을 하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피묻은 복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에 대한 진정한 복음의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그 자신 영혼 안에 하나님께서 만지고 지나가신 위대한 흔적을 지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지만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그런 삶, 박쥐와 같이 낮에는 쥐처럼 밤에는 새처럼, 평일 날에는 불신자처럼 주일날에는 신자처럼 그렇게 이중 인격적인 생활을 사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한번 선명하게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물론 설교 속에서 십자가는 많이 이야기를 합니다. 정말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보니까 정말 내가 끔찍한 죄인이구나.
웬 말인가 웬 은혜인가 그 사랑 크셔라
나는 오늘 분명히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무너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구원시의 경험이든 구원후의 경험이든 어째든 간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놓고 아! 나는 정말 쓸모 없는 죄인이구나. 나 같은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와 징벌에 놓였구나. 하나님의 외아들이 나 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 거기에 대해서 흐느끼면서 자신이 무너져 무릎을 꿇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진정한 신자일 수 없습니다. 결코 진정한 신자일 수 없습니다.
이 시대에는 복음에 눈을 뜨는 것 정도가지고 안 됩니다. 벼락을 맞는 것 같은 복음의 벼락이 필요합니다. 벼락치는 것 같은 복음에 대한 깨달음, 복음에 놀라운 그 낙뢰와 같이 내려치는 복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세워지게 하는 우리 속에 있는 바벨탑과 같은 가슴들이 벼락을 맞아야 합니다. 그래서 막 무너지고 그리고 그 위에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깨닫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내 인생에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라고 하는 그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만약에 백지를 여러분에게 주고 십자가에 대해서 써보라고 하면 한 장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것은 저 자신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영적인 생활을 이어감에 있어서 이제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영성 문제가 나오는데 이게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그리스도 중심에 영성이어야 하고 십자가 중심에 영성이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완전한 영성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생활에 진보가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 진보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이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인지 그가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깨달음에 대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당하신 우리를 위한 그 비참한 그 죽음을 보면서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면서 죄인들인 우리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을 보면서 그 안에서 우리는 동시에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아버지의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 마음을 거기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그리고 우리의 모든 신앙의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깊은 경험 속에서 살아가야 되는데 그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은 십자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지를 생각하며 그 진리를 깨달아감으로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무슨 의미를 하나씩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한 9년 전에 십자가라는 책을 한 권 쓰면서 그때 제가 충격을 받은 것이 우리 나라에 전 서가를 다 뒤져도 십자가라는 책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쓴 책이 89년도쯤에 번역된 것, 외국 사람에 의해서 쓰여진 책으로 딱 한 권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관해서 다루고 있는 책이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점점 더 그런 진리에 접근하는 것이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일생동안 알고 싶어했던 그 비밀스런 지식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마지막으로 알고 싶어했던 중요한 비밀은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모두가 무엇을 통해서 답변될 수 있는 것인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미를 통해서 답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전심으로 나의 영적인 생활에 진보를 위해서라도 십자가에 대해서 무지한 나의 눈을 열어 십자가의 복음을 보고 그리고 거기에 깨달음 속에서 살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5.십자가를 따른다는 것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8)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대단히슬픈 장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기 위해서 당신이 매달릴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재판으로 사형언도를 받으시고 그리고 당시 로마인들의 규례를 따라서 두 가지를 규례를 행하십니다. 하나는 당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당신 스스로 지고 가시는 일과,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십자가를 지기 전에 심하게 채찍으로 맞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자 하셨지만 예수님도 사람인지라 기력이 진하여 아마 십자가를 지고 자주 쓰러지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은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메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라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분의 몰골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간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 방울처럼 떨어지도록 기도하셨고, 그리고 그분은 가야바의 뜰로, 헤롯에게로, 빌라도에게로 수없이 끌려 다니셨습니다. 가야바의뜰에서 빌라도에게로, 빌라도에게서 헤롯에게로, 헤롯에게서 다시빌라도에게로 가는 곳마다 견딜 수 없는 모욕과 심문이 기다렸고 그 속에서 구타당하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금요일이른 아침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그리고 홍포를 걸치시고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몸은 이미 십자가를 지기 전에 브라이 도리온이라고 하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에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모욕과 채찍, 그리고 견디기 힘든 모든 수모를 당하신 후였습니다. 그분은 틀림없이 그 긴 가시면류관으로 인하여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안면에는 피가 흐르셨을 것이고 벗은 몸에는 흉악한 채찍 자국들이 나 있었을 것입니다. 살절음이 묻어나는 채찍에 온 몸이 피로 물들었고 쓰러질 듯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십자가를 지고 가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십자가 마저 구레네 시몬에게 넘겨주시고 예수님은 힘없이 로마의 병정들의 채찍을 맞으며 군중들의 야유 소리를 들으며 형장을 향하여 끌려가고 계셨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오고 있었는데 한 부류의 사람들은 백성들이었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슬피 울며 예수님을 따라오는 가슴을 치는 여인들이었습니다. 그 백성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구경하기 위해서 따라오는 사람들이었지만 여인들은 가슴을 치고 예수님의 그 고난에 가슴아파하는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갈릴리로부터 온 이들도 있었고 어째든 이 많은 여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예전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 때문에 모욕과 멸시를 받는 이 십자가 행렬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떠밀리듯이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거리에 내팽겨졌을 때에 여인들은 예수님의 피범벅이 된 모습을 보며 흐느끼기 시작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골고다에 가까이 올 때쯤 되어서 이 여인들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는 피 어린 통곡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여인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 것은 오직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 여인들은 예수님이 지고 가시는 이 십자가가 부활의 십자가가 될 것이라고 하는 진리도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여러 번 가르쳐 주셨지만 제자들도 모르는 이 놀라운 진리를 이 여자들이 깨달았을 리가 만무합니다. 여자들이 이렇게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때에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면서 얻을 수 있는 좋은 평판이나 이득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로마인들에 의해서 형벌을 당하시고 유대인들에게 버림을 당하셨으며 심지어 자기가 사랑하던 제자들에게조차도 버림을 당하시고 홀로 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시고 계셨습니다. 여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올라가 봐야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로마군인들의 박해와 유대인들의 차가운 시선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강요를 받는 것처럼 이 여인들은 남들은 구경하며 따라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곡하며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히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백성들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이 여인들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에 남들은 다 구경하며 따라갈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행렬을 통곡하지 않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가슴을 두드리지 않고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남들은 구경하며 따라갈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행렬에 눈물을 흘리며 따라가도록 만들었고 가슴을 치며 슬퍼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배워야 할 점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영광과 존귀를 한 몸에 받는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받은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죽으셨으니 즉 이제는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입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면서 우리도 그분처럼 고난을 받으며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 라고 하는 그 고백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신 자신의 십자가조차 지실 수 없어서 구레네 시몬에게 메어 따르게 하시고 예수님은 쓰러지실 듯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골고다 언덕을 향해 채찍에 맞으며 끌려가실 때 예수님이 무엇을 말하실 수 있는 힘이 남아있겠습니까. 쓰러지지 않고 걸음걸음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게는 기적과 같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육신의 힘에 있어서는 결코 하나님 같은 분이 아니라 사람 같은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육체의 모든 연약함을 함께 가지고 이 세상에 사셨습니다.
그러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성경에 보니까 몸을 돌이켜 그 여자들에게 뭔가 말씀하셨는데 꽤 긴 연설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전부를 옮겨놓은 것인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가운데 핵심만 간추려서 옮겨놓은 것인지 우리들은 알 수 없습니다만 설령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모두 옮겨 적었다고 할지라도 쓰러질 듯이 고난을 받으시며 올라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난받으시는 형상을 생각하면 이 연설은 결코 짧은 연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성경은 예수께서 돌이켜 가라사대 말씀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자동적인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은 설교를 들으면서도 어떤 사람은 생애 적으로 주님을 만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깊이 잠듭니다. 여러분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고 라는 청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많은 졸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유일하게 졸던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들으며 영혼이 살아나고 있었는데 유두고 라는 청년은 그 말씀을 들으며 육체가 깊이 잠들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으면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맛보는데 어떤 사람은 성경을 펴놓고 깊이 잠이 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기만 하면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는데 어떤 사람은 아무리 오래도록 무릎을 꿇어도 생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신다고 하는 인격적인 만남의 경험을 못 같습니다. 차이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 기도 이런 모든 것들에는 자동적인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그것을 하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이 어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그 은혜의 접하는가에 따라서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다른 것입니다.
오늘 이 여인들은 통곡하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고 거기서 무슨 예수님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그런 여건을 기대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그리고 그 행렬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뜻밖에 피투성이가 된 몸을 돌려서 그 여인들을 보면서 뭔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심으로 구원하셨는지를 알고 그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 본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는 여러분의 인생에 모든 행복이 어떠한 의미도 없다 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될 때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주님을 깊이 사랑할 때 이번 사경회 표현을 빌자면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갈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잘 깨달아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스치고만 지나가도 마음이 아프고, 혹은 마음이 기쁘고 그리고 그 마음이 녹아지고 그리고 새 힘을 얻고 그런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 있을 때에는 우리의 이 정서가 아주 굉장히 풍부해집니다. 우리의 정서 자체를 불러일으키려고 하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저희 교회에 통성 기도도 잘 안 합니다. 그냥 하면 하고 말면 말고 하지 그것을 막 소리를 지르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속에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화목이 있고 그리고 자기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사랑에 놀라운 은혜에 감격이 있으면 그가 말씀을 듣는데 눈을 지극히 감고 끝나기를 견딘다든지 기도합시다 하는데 바닥에다 이마를 비비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함께 하는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그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은혜로운 정서를 계속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사랑하고 싶고 예수님을 위해서 살고 싶고 그리고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살고 싶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봉사하고 싶은 인생에 참된 보람이 주님을 마음껏 사랑하고 그 주님의 은혜를 자랑하고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영혼의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잘 깨달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보면 “무릇 지킬만한 모든 것보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 나리라”그래서 인간의 그 마음을 지키면서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 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그 십자가에 사랑에 내가 빚진 사람이다라고 하는 이 사랑에 대한 깊은 감격, 그속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과 변화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나 이런 것들이 우리의 심령 속에 역사 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대게 집회를 가면, 최근에도 집회를 갔는데 첫째 날은 대게 힘이 듭니다. 안 그럴 때도 있지만, 왜냐하면 요즘 세상에 이렇게 긴 설교를 들으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길어야 40분 정도, 짧으면 한 25분 정도 들으면서, 하다가 25분했는데 겨우 서론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그러고 시작을 합니다. 그러니 뒤집어질 노릇입니다. 두 시간을 첫날 설교하고 끝났는데 어느 집회에서 나와서 내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면서 대견해 하는 것입니다. 나를 대견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대견해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두 시간을 설교를 들었습니다. 내 생애에 기적입니다. 그런데 스치로폴 엉덩이를 가진 사람들은 어쩔 줄 모르게 들썩들썩 하고 심하면 저 뒤에서 “에이씨!”그렇게 말합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으니까 듣는 사람을 보고 말합니다. 첫날 그러다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끝나고 둘째 날, 셋째 날 저녁때쯤 가면 3시간을 한번 어떻게 하나 보려고 나오는데 까지 가느라고 세시간을 설교를 했는데 여러분하고 똑같습니다. 여러분만큼이나 잘 듣습니다. 불과 3일인데, 3시간, 3시간 반, 심지어 얼마 전 미국에서는 4시간 15분을 설교를 했습니다. 쉬지 않고 4시간 15분을, 그런데 담임 목사님은 2시간 반까지는 계속 시계를 보더니 포기하셨습니다. 나를 보라고 이렇게, 나는 그 목사님을 안 보았습니다. 저기 보고 했습니다. 3시간 반을 하는데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흐트러짐이 있는 사람은 벌써 갔지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벌서 쭉 설교가 나가면 어디까지 갔는지 나오잖아요. 아직 1시간 반을 했는데 3분의 1밖에 못 간 것입니다. 갑니다.
오늘 내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왜 며칠 전에 안 들리던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까? 무엇에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까?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거기에 가서 달라붙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마음인가. 그리고 자신이 자기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고 진실하게 그 하나님께 고정시키면서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아름다운 노력 없이, 그런 것은 하나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설교자가 잘 설교하기만 하면 자기는 깊이 깨닫고 은혜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진리를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일생 가운데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던 때가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언제였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래도 여러분의 마음에 깊이 와서 닿고 그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십자가에 대한 감격의 핵심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감격하는 사람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든지 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최소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고 싶은 간절한 그리움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도저히 말씀에 은혜를 받을 상황이 아닌데 하여튼 말씀을 접하게 하셔서 그 말씀에 깊이 가슴에 파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게 하십니다. 그래서 나를 깊이 거꾸러트리시는 것입니다.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변화시키셔서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런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여기도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 여인들이 흐느껴 울고는 있었지만 이 여인들에게 뭔가를 말씀하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온 몸에 피가 흐르고 쓰러질 듯이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데 돌이켜서, 돌이켜서 뭔가 여인들을 향해서 막 말할 수 있도록 군인들이 내버려두었을 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상황이 그렇게 여인들에게 길게 말씀하실 상황이 아닌데 예수님이 돌이켜 말씀하셨습니다. 그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구경하며 따라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울며 당신을 따라오는 그 가슴 아픈 사랑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그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오늘 여기에서 받는 중요한 교훈은 여러분들이 십자가 사랑의 감격을 깊이 간직하고 사는 것, 그것이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 은혜 속에서 사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사랑이, 십자가의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예수님을 위해 살아서 언제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랑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는,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아라”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뒤를 통곡하며 따라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들은 왜 십자가에 못 박으십니까? 그분이 우리에게 잘못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분은 귀신들린 우리들을 고쳐주셨고, 병든 우리들을 치료해주셨으며, 굶주린 여러분들을 먹이시며, 진리가 무엇인지를 몰라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신 훌륭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합니까? 그러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 흘리심은 누구의 죄 값인가
어린양 보혈의 피 어이해 흘렸는가
채찍에 피 흘리심은 누구를 위함인가
채찍에 맞으며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저렇게 맞아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무슨 대속의 놀라운 은혜를 입고 십자가의 속죄의 도리가 있어서, 그런 것 아직 몰랐습니다. 가르쳐 주셨지만 어리석어서 몰랐습니다. 그냥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가 사랑하시는 예수님인데 그렇게 십자가를 지실까? 그리고 한없이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픔 때문에 통곡하면서 쓰러질 듯이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시면서 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참된 이치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잘 몰랐지만 그러나 그 마음속에 예수님을 향한 진실한 그 흐느끼는 사랑을 오늘날 우리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십자가의 참된 도리를 몰랐는데도 이렇게 통곡을 하면서 흐느낄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했다면 이미 그 십자가의 도리, 그렇게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 바로 나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미 배우고 아는 우리들은 얼마나 이 십자가에 대해서 가슴아파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수 죽인 것을 날마다 내 몸에 짊어지노라”하는 이 고백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가 무슨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이 많아서 항상 기도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용서해주셨지만 그러나 나는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영원히, 영원히 예수 바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그 삶입니다. 그 마음을 여인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가슴아파 하면서 깊이 통곡하고 아파하는 그 흐느낌이고 그 통곡이었고 그 눈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울지 말아라”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흐느낌을 그칠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예수님께서 “울지 말아라”말씀하신 것은 그렇게 흐느끼며 우는 것이 의미가 없다.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무엇인가 하면 너희가 나를 위해서 너무 사랑함으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너희를 위해 피 흘리고 죽으러 가는 나를 위해서 통곡하며 우는 것은 옳다 만은 그러나 애들아 너희에게는 단지 나의 이 십자가의 고난을 인해서 슬퍼할 뿐 아니라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들이 너희에게 있단다. 그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참된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십자가의 경험은 감상일 수가 없습니다. 단지 일시적으로 가슴이 찔려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이 너무 불쌍해서 흐느끼는 그런 종류가 곧 십자가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고난 당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그가 우리를 위한 죽으심에 깊이 마음 아파하고 우리 인간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올라가시던 그 예수님을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마음이어서 주님의 고난에 대해서 깊이 아파하는 이 착한 마음이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는 할 수만 있으면 조국에있는 모든 교회가 예배드릴 때마다 나 같은 죄인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랑 때문에 울음바다가 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흘리는 성도들의 깊은 통곡과 눈물로 우리의 눈을 멀게 했던 세상 사랑으로 떠내려보내고 우리의 심령을 아프게 하고 곤고하게 만들었던 세상에 대한 헛된 것들에 대한 욕망도 떠내려보내고 육체의 자랑, 자기 의를 뽐내는 모든 인간의 교만조차도 쓸고 가버리는 그런 일들이 모일 때마다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일들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렇게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을 위해서 깊이 울고 통곡하는 그 마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슬픔뿐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없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신앙이 가져다준 슬픔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감상이 가져다준 슬픔입니다.
그 사명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밝히 말하시기를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이중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국지적인 전망인데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갈 때가 주후 30-31년경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1년이라고 안 보고 대게 4년이나 7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로마에 ‘디도’라는 장군이 쳐들어와서 반란을 진압한 가운데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망시켜버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로마 제국 치하에서의 일입니다. 그때에 아주 비참한 예루살렘의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향해 결사항전을 했지만 그러나 여러 달의 대치 끝에 성안에는 모든 먹을 것들이 끊어지고 심지어 아이까지 먹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그리고 결국은 함락 당하고 성안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그리고 피의 도성이 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거의 이 사람들 생전에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보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에 성을 보시면서 그렇게 통곡하며 우신 것입니다. 그 멸망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죄를 많이 지었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갔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제 그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는 계획을 확정하셨는데도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그런 계획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뭔가 고치려고 마음을 갖지 않고 그렇게 방종하게 살아갔습니다.
그것을 예고하는 것이 첫 번째 전망이고,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국지적인 전망, 다음에 우주적인 전망입니다. 우주적인 전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의 이와 같은 심판에 대한 예고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주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당하게 될 고난과 형벌에 관한 예고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국지적인 전망을 겨냥한 것이든, 종말론을 겨냥한 것이든지 간에 어찌하든지 간에 이들에게 있어서 시급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올라가신 것을 보고 너무 슬퍼요. 왜 그렇게 십자가를 지세요. 하고 가슴아파하면서 우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과 자기의 자녀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트려서 심판에 들어가게 될 이 도성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심판 중에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을 수 있도록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깊이 회개하고 돌이키고 그리고 자신들에게 있는 그 자녀들을 위해서 그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진노를 쌓는 백성들이 되지 말고 사랑을 받고 심판 중에서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백성이 되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눈물로 당신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말씀하셨고 이렇게 자기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깊은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구나. 그리고 왜 이 쓸모 없는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을까 하며 눈물을 펑펑 흘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고난과 그렇게 예수님이 못 박힐 수밖에 태어나고 또 살았던 자기의 악함을 깊이 회개하고 뉘우치는 충분한 시간을 가진 후에는 이제는 그렇게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닦고는 그 다음에는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나에게 이런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주셨으니 구원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 중에도 이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 같은 인간에게 십자가의 놀라운 감격과 은혜를 주셨으니 이제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이번에는 그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전에 십자가의 은혜를 몰랐을 때는 고난이 오면 피하고 핍박이 오면 타협했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 십자가를 회피하고 그리고 주님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 그것을 고백함으로 내가 손해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아주 쉽게 자기를 위장하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와 같이 행동을 밥먹듯이 쉽게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나니까 이제 자기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혼을 맡겨주면 영혼을 다 잃어버리고도 뻔뻔스럽게 이렇게 영혼들이 다 떠나간 것은 애들이 너무나 강퍅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무엇을 안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 영혼이 잘되면 모두 주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고백을 하고 그 영혼이 곤고하고 위기에 떨어지면 마치 모두 자기의 죄인 것처럼 아파하고 가책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빕니다. 사실은 그들의 마음이 강퍅해서 하나님을 떠났고 은혜로부터 멀어졌는데도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 그래서 그 사명이 무엇인지를 받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안 사람들은 주님이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영혼들을 보내어주시고 그 영혼들을 변화시켜주셔도 결코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큰 은혜를 부어주셨는데 내가 더 충성했더라면, 내가 더 많이 주님이 내게 주신 그 사명에 충실하고 내 자신을 아끼지 않고 헌신했더라면, 아마 이렇게 큰 은혜를 부어주신 주님이 있으니 더 많은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었으리라’고 하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감입니다. 누구 사람에게로부터 온 사명감, 누구 인간에게로부터 온 사명감,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사명감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우리 주님, 날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 그분을 위해서 내가 느끼는 사명감입니다. 그러니까 불타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십자가를 경험했습니다.
제가 들은 어떤 간증에 의하면 일제시대 때 만주에 가서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한 어느 여성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권사입니다. 그런데 그 과부의 몸으로 만주에 80개의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어떤 성도에 의하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몸부림치다가 너무 허기가 지면 흉년이 든 어떤 때는 소똥을 흐르는 개울에 씻어서 소화가 되지 않은 옥수수 알갱이를 주워 먹으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생업에 종사하는 시간이 아깝고 복음을 전하는 자신이 구걸하는 일이 너무 비참해서 그랬다고 합니다.
무엇이 그를 살게 했습니까? 무엇이 그런 삶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똑같은 성정을 가진 육신을 지닌 인간인데 왜 그들은 그런 삶을 살고 오늘날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고난이 오면 피하고 핍박이 오면 타협하고 그렇게 이중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는 왜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요?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의 그 한복판에 무엇이 있었는가 하면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불붙는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No mission, No life"사명이 없으면 생명도 없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사명이 모두 끝나면 하나님이 자신을 데리고 갈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 사명감의 한복판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바로 무엇입니까? 실제로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너 복음을 전해라." 그렇게만 말씀하셨지 "안 전하면 내가 너를 대대로 저주하리라."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화가 있을 것 같이 느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이 너무나 크고 놀랍고 십자가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알게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이 너무 큰데 이 사랑을 몰랐을 때는 이 사랑을 전하지 않고 살 수 있었는데 이 사랑을 알고 나니까 사랑을 전하지 않아서 이 사랑을 깨닫지 못해 죽어 가는 수많은 영혼들이 자기 책임 때문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명감입니다. 그러니까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명감 없이 살아갑니다. 생명도 없습니다. 그렇게 사명감 없이 살아가는 이유가 결국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와의 참된 만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자기가 그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구원받은 것이 어떤 삶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들먹거리면서 너희 교회에 나와주는 것만 해도 대단한 줄 알아라. 그런 신앙생활을 합니다. 수많은 성도들은 목회자는 그래도 그 사람이 변화되기를 기다리면서 나와 주셔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지만 그 마지막에 돌이킬 줄 모르고 사명감도 없이 인생을 살다가 마지막에 죽는 인간은 도살장에 죽어 가는 짐승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빛나게 하는 것,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을 얻은 우리의 인생을 빛나게 만드는 것은 좋은 옷이나 높은 지위나 화려한 학벌이나 많은 재물이 아닙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찬란하게 빛나게 만드는 것은 불타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명감에 불타는 마음, 내가 여기 왜 사는지를 알고 그리고 내가 왜 살아서 주님을 섬겨야 하는지를 아는 그 사명에 불타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나를 구원하셔서 내게 주신 사명이 있는데 그 사명을 완수하기 전까지는 눈을 감을 수 없다라고 하는 삶의 분명한 표대를 가진 사람, 그 사명에 의해서 우리의 인생은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목사면 어떻고 집사면 어떻습니까, 권사면 어떻고 장로면 어떻고 아무 직분이 없으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 의미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고 더욱이 하나님이 사명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해준 사람은 없습니다. 사명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많지만 그 사명이 원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그리고 충성된 마음이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리고 망각한 채 살거나 혹은 사명이 무엇인지 어렴픗이 알면서도 그 사명이 자기에게 요구하는 길이 너무나 멀고 험하기 때문에 그것을 외면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전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생명을 주고도 꼭 이루고 싶은 주님께로만 받은 여러분의 존재의 목적과 이유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 기도 제목을 떠올리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녹는 것 같고 그리고 이 기도의 제목이 성취되지 않으면 나의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깊은 아픔이 여러분들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에게 있어서 사명은 바로 우리였습니다. 우리와 같이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거룩하신 하나님께 정죄 받고 아무 희망도 없는 우리 인간을 그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로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시키고 그분께 사랑 받는 가족 관계로 우리를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가지고 계신 사명이었습니다. 그분이 왜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까? 왜 그분이 모든 것을 가지셨는데도 아무 것도 없는 자처럼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일생을 사셨는지, 왜 자기의 백성들에게 모욕을 당하며 지금 당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계십니까? 오로지 하나만 그분의 눈에 보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성공적으로 자기를 다 부수어서 제물로 드리는 것, 자기가 잘 죽는 것, 그래서 자기의 그 피에 하나님이 이끌고자 하는 모든 백성을 적셔서 주님께 사랑 받는 백성들 되게 하시려고 그 하나를 위해서 모든 사사로운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섬김의 정신으로 사셨습니다. 자기 것이 하나도 없이 모두 베풀며 사셨고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고 넉넉함과는 상관이 없는 고난과 형극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종처럼 무릎을 꿇고 더러운 인간들의 발을 씻기시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정죄하고 비웃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죄 가운데 살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그들이 놓여 있는 그 비참한 삶의 자리로 내려가서 그들을 끌어안고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마지막 남은 자기의 몸까지 대속 제물로 주신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죄 가운데 형벌을 받아서 멸망 받을우리를 살리신 것은 단지 살아 있게 하심이 아니오,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주신 독특하고 고유한, 내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그 사명을 이루면서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그 십자가에 놀라운 피로 그 보혈로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제 여러분들이 각자 하나님 앞에 대답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아주 고귀하게 쓰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피로 닦으셔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나 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나 같이 더러운 죄인이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소중하게 쓰시려고 여러분들을 그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명이 우는 사명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 자신을 위하여 울고 우리의 자녀를 위하여 울고 이 시대의 우리가 아니면 주님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수많은 무지한 백성의 영혼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오늘 여기에 많은 지체들이 모였습니다만 그러나 여기에 이렇게 모여서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묵상하는 일들이 우리에게만 일어나야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두움이 도시에 죽어 가는 수많은 영혼들, 그들이 모두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리를 생각하고 예수 죽인 것을 가슴아파하며 그분의 십자가의 은혜 아래서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사람들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모두는 복음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것인데 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정체는 세상 끝날 까지, 땅 끝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 받은 그 놀라운 사랑을 가슴에 간직하고 이 십자가를 모르고 죽어 가는 내 가족, 내 동포, 나의 이웃들에게 이 복음과 이 은혜 이 사랑을 전하고 그래서 생애 목적을 잃어버리고 주님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는데도 미움과 절망 속에서 한탕 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주는 그런 도구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사명이 있는 인생은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일까요? 이 세상에 가슴 벅찬 일은 주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을 사용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용서해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 나 같은 인간을 사용하셔서 주님의 뜻을 이루시고 아버지의 일을 이루시면서 사명을 감당해 가시는 그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입니까? 땅에 살아도 그들은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이며 이 세상에 살아도 영생의 영광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시간 우리 주님은 무덤에 고이 뉘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밤을 하루 더 자고 나면그 주일 새벽에 우리 주님은 영광 가운데 찬란히 부활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슬퍼할 필요가 없고 죽음을 이기고 다시 부활하실 영광의 아침을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활의 찬란한 아침, 소망으로 가득 찬 새 날이 밝아 와도 우리들은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우리의 죄를 인해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과 그리고 형벌 받을 인간의 죄를 위하여 고결하신 주님의 아들이 자기의 몸을 찢고 피 흘리신 것을 기억하고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지고 사명을 따라서 사는 주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죽고 주님은 살고 나는 아골 골짝 빈들에 가도 주님의 이름은 높임을 받고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주님의 이름이 찬란하게 드러나고 우리는 그 십자가의 그늘 아래 가리워 멸시와 천대는 우리가 받고 존귀와 영광은 주님이 홀로 받으시는 그런 인생이 되어서 오늘 우리처럼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하고 예수를 위해서 살고 싶어하는 수많은 십자가의 군사들을 우리의 사명과 섬김을 통해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주님의 커다란 도구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나 그랬듯이 이 사경회도 오늘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의 도리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사경회는 여기서 끝났지만 그러나 이제 여러분들의 삶에서 그 십자가의 정신을 따라 사는 생활의 사경회는 이제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께서 우리에게 그 큰 은혜를 주셔서 여기까지 살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이 세상에 잠시 머물라고 하시는 동안 어찌하든지 우리의 모든 인생을 주님을 위해 쓰고 우리의 온 소유를 주님 위해 쓰고 우리의 모든 시간과 우리의 모든 재능도 주님을 위해 써서 그래서 주님을 위해 허비되는 인생들이 됩시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를 구하신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사는 주의 사랑 받는 자녀들 되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합시다.
십자가로 가까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