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2015년 새벽 십자가사경회)
설교기간|2015년 3월 30일 - 4월 3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 4월 10일
목 차
1.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행 2:36) 2015.3.30 새벽 십자가사경회 1
2. 십자가와 화평을 이루심(골 1:20) 2015.3.31 새벽 십자가사경회 6
3. 십자가 외에는(고전 2:2) 2015.4.1 새벽 십자가사경회 11
4. 자기 십자가를 짊(마 10:38) 2015.4.2 새벽 십자가사경회 17
5. 옛사람과 십자가(롬 6:6-7) 2015.4.3 새벽 십자가사경회 24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1) 2015.03.30(월) 새벽 십자가사경회
<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 2:36)
I. 본문해설
- 오순절 성령강림과 복음을 깨달음
- 성령의 강림과 예수 그리스도 증거
- 성령 충만한 베드로의 설교의 중심
-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의미를 밝힘
II.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A. 사람들이 못 박음
- 영원한 경륜과 악한 자들의 행악함
- 그가 사랑하신 이스라엘의 악행임
- 예수를 죽임에 우리 모두가 참여함
B. 죄 때문에 죽으심
- 인간과의 생명 교통을 위한 죽음임
-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죽음임
- 성령 강림으로 십자가 죽음 의미 봄
C.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함
- "주"는 곧 만물 다스리는 여호와임
- 성육신 상태와 부활한 상태 비교함
- 신자의 삶은 그의 주되심을 의지함
- 십자가 죽음은 그 통치 아래 살게 함
III. 적용과 결론
- 신자의 영적 생명의 보고는 십자가
- 십자가의 의미 알고 체득하며 살자
- 충만한 사랑과 생명은 십자가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2) 2015.03.31(화) 새벽 십자가사경회
< 십자가와 화평을 이루심 >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20)
I. 본문해설
- 십자가는 죄인을 죽이는 형 집행 방법
- 개인 구원은 우주적 계획에서 비롯됨
-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시작
II. 십자가의 피로 이룬 화평
A. 화평을 위한 십자가
- 인간의 죄로 인한 상호 교통의 파괴
- 우주 만물의 회복과 인간 구원 계획
- 순서가 있음: 신-인, 인-인, 인-자연
- 모든 화평의 관계 꼭대기에 십자가 있음
B. 하나님과의 화목
- 화목은 죄로 인한 불화로부터의 회복임
- 손해 당한 쪽의 보상과 용서 받음이 필요
- 십자가는 범죄에 대한 대속적 배상임
- 하나님에 의한 공의와 사랑의 조화
-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최대 발현임
C. 화목 실현과 교회
- 교회는 구속을 통한 화목의 첫 공동체
- 하나님과의 화목이 세상에 나타나야 함
- 사람에게 사랑과 자연에게 관대함
- 현재 임한 나라로 임할 나라 보여 줌
- 그의 삶을 살도록 은혜와 생명을 주심
- 예수와 함께 죽는 십자가의 경험 필요
III. 적용과 결론
- 당신의 뜻을 위해 죽은 예수를 살린 주님
- 십자가의 뜻을 위해 죽는 신자들을 살리심
- 미래에는 완전한 육체의 부활로써 완성함
- 현재에는 영혼의 생명을 부어 주심으로써
- 그리스도와 함께 잘 죽는 삶을 살아야 함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3) 2015.04.01(수) 새벽 십자가사경회
< 십자가 외에는 >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
I. 본문해설
- 사도바울의 고린도 사역의 여정
- 에피큐리오스 및 & 스토아 학파와 논쟁
- 떨리는 마음으로 고린도에 들어옴
II. 바울의 새로운 결심
A. 복음 전도에 대한 각성
-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아는 것
- "아무 것도 알지 아니 하기로"의 뜻
-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십자가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적 계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1 (2015.3.30 새벽 십자가사경회 첫째날)
- "십자가" 구원의 중심성을 깨달음
B. “그 외에 알지 아니 하기로”
- "알다"와 "사랑하다"의 관계성
- 십자가 외에 지식 필요 없다는 뜻 아님
- 예수와 십자가 없이 하나님을 모름
- 철학과 사상보다 복음이 유효함
- 십자가를 이미 알았다 함이 아님
- 십자가 통한 하나님 사랑을 앎
III. 적용과 결론
- 십자가를 아는 깊이가 신앙 깊이
- 개인구원⇒교회⇒세계 완성임
- 그리스도 깊이 아는 지식 성장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4) 2015.04.02(목) 새벽 십자가사경회
< 자기 십자가를 짊 >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2 (2015.3.31 새벽 십자가사경회 둘째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마 10:38)
I. 본문해설
- 제자들 사도로 파송하시는 긴 설교
- 복음 전도자의 사명과 자세 가르침
- 34∼39절: 복음 전도는 영적 전투임
- 가장 사랑하는 관계 깨어질 가능성
- 쉬운 사랑 포기 아닌 고난을 각오함
II. 제자로서의 신자의 삶
A. 자기 십자가를 짊
- 십자가는 구원받은 자의 삶의 비유
- "십자가" 아직 종교적 의미였을 때
- stauros: 당시 로마인들 인식 설명
- 생경스런 끔찍한 비유는 제자 희생
- 살아가는 신자 모든 삶이 이국적임
- 존재, 사상, 삶 때문에 박해를 받음
B. 예수를 따름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3 (2015.04..01 새벽 십자가사경회 셋째날)
- 예수의 무엇을 따른다는 말인가?
- 예수의 지상생애: 신앙+사상+삶
- 예수의 고난과 함께 기쁨을 경험함
- 영적 기쁨 현실적 삶에 발현 되야 함
C. 쓸모 있는 삶
- "합당치 아니하다" ouk∼aksios
- ouk 강한 반의어+aksios 쓸모 있는
- "무게를 달다" ago에서 유래한 말
- 구원은 창조 목적에 쓸모 있게 하심
III. 적용과 결론
- 구원 받았으면 소명의식 속 살아야
- 십자가를 지는 삶이 생명주신 방법
- 십자가로 돌아가라 짊어질 힘 구함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5) 2015.04.03(금) 새벽 십자가사경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4 (2015.04.02. 새벽 십자가사경회 넷째날)
< 옛 사람과 십자가 >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롬 6:6-7)
I. 본문해설
- 이신칭의의 교리 논증함 (3∼4장)
-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의 삶 (5장)
II.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A. 죄를 용서해주심
- 인간이 지은 무한한 죄 크기 생각함
- 그리스도의 무한한 의와 공로 입음
- 인간을 다시 관계 속으로 부른 사랑
B. 의롭다고 해주심
- 칭의는 명목상 허울뿐인 선언 아님
- 죄의 능력과 권세에서 벗어나게 함
- 죄를 이기며 살아갈 은혜를 약속함
- 칭의는 성화의 소명을 요구하는 것
III. 십자가 구속의 뜻
A. 예수와 함께 못 박힘
- 우리가 내포적 대신의 죽음에 참여
-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죽음 확인함
- 실질적 죽음 아니라 적용적 죽음임
B. 죄의 몸을 죽게 함
- "죄의 몸" 죄의 지배된 육신적 본성
- 몸의 죽음으로 활동과 작용 불가함
- 몸은 죄의 습성에 물든 옛사람 본성
- 그 죽음으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남
C. 종 노릇하지 않게 함
- 거래자, 고용인, 노예는 신분 다름
- 신자: 불죄론은 거짓임 (요일 1:8)
- 자백할 때, 용서해주심 (요일 1:9)
- 신자도 우연적인 죄들 지을 수 있음
- 그러나 죄의 종이 되지는 말아야함
- 이미 의롭게 된 신자이니 거룩히 삶
IV. 적용과 결론
- 우리 구원은 인생만큼 소중한 것임
- 구원에 합당한 삶 살 때 감격 유지됨
- 날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여 살라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4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1 (2015.3.30 새벽 십자가사경회 첫째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2 (2015.3.31 새벽 십자가사경회 둘째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3 (2015.04..01 새벽 십자가사경회 셋째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4 (2015.04.02. 새벽 십자가사경회 넷째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5 (2015.04.03. 새벽 십자가사경회 다섯째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녹취자: 장주은
I. 본문해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시고 일어난 제일 큰 변화는 복음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이 가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면 그 보혜사 성령님이 당신이 가르친 말씀들을 생각나게 할 것이라고 하는 예언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복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확연하게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있어서 두 가지,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 빛을 가지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계실 때 하셨던 말씀, 하셨던 행동들을 해석하고 나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고 무슨 일을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는지 이런 모든 것들이 아주 분명하게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때 성령충만을 받은 사도들이 변화된 설교를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만났는데도 도대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맞지만 그것이 무엇을 위한 부활이고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다시 살아난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사실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방황하고 있다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깨닫게 된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였습니다.
II.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제일 먼저 사도가 오늘 선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것을 전파하면서 그 예수를 바로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부활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A. 사람들이 못 박음
제일 먼저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이 못 박은 십자가였다 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무슨 뜻일까요?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말한 것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오래 전에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당신을 멀리 떠나 죄를 짓고 악하게 된 이 세상의 백성들을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그들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게 하심으로서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었고 그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의 일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자신의 착한 삶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서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를 통해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의 근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일부이고 구원계획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시행해 오신 역사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 홀로 이 일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싫어하고 그를 통하여 보여주는 하나님의 성품을 미워하고 그래서 마지막에는 진리를 배척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그들의 악과 흉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이 온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그의 자비롭고 은혜로운 성품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택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핏줄로 태어나신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나왔던 것입니다.
B. 죄 때문에 죽으심
여기서 사도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이라고 한 것은 좁은 의미에서 보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음모에 가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던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속하여 구원 얻게 할 모든 구원받을 인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너희는 좁은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처형과 음모에 가담한 사람들이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서 대속해주시면 안되었던 모든 구원받을 인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 때문이었다, 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오늘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한없이 사랑하시는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야 했을까. 그것의 대한 대답이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서 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꼭 주시고 싶어 하셨던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어제 설교한 것처럼 하나님이 바로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라도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죽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고 죽으셨을 때 사실 그 진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셔야 했을 진노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언제나 사랑하는 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은 그 못 박히는 순간만큼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가 아니라 우리 모든 죄를 짊어지신 그 죄와 하나가 된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형벌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죄를 향한 당신의 거룩한 진노를 쏟아 부으실 때 그것을 우리가 당해야 했지만 만약에 우리가 그것을 당한다면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목적은 무색해질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엄위로우신 공의와 그리고 그 한없는 사랑을 십자가에서 조화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셨을 때에 구원받을 모든 사람을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 속으로 끌어들이셔서 실제의 육체의 죽음은 당신이 당하고 그렇게 속죄하신 그 효과는 모든 백성들에게 전달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 라는 의미입니다.
성령강림 사건은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제자들에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든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라도 자기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그 예수님의 제자들의 마음속에 빗줄기처럼 쏟아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에 대한 깊은 감격은 결코 이전에는 경험한 적이 없는 위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를 지은 것은 절대적으로 보면 매우 나쁜 것이라고 하겠지만 결국은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셨고 그 구원의 사건을 통해서 죄가 없었더라면 인간이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경험할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봇물처럼 인류 속에 터져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죽음의 의미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입니다.
C.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함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은 복음의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더 중요한 복음의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이 부활사건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 하면 첫째는, 이 인류를 지배하고 있던 사단의 권력을 무력화 시킨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골로새서에서는 무장해제 시키신 사건이었다고 말합니다. 자 그러면 그게 무슨 뜻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단이 인류를 향해 가지고 있었던 지배권을 무장해제 시킨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난 다음에 들어온 가장 커다란 재앙은 죽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죽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선한 것들의 불완전성이었고 그리고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에게 선고된 이 죽음 때문에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도 저주가 깃들게 되었고 결국 인간의 모든 일생동안의 고통은 죽음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건강하지 못해서 아픈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아프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죽음의 일부가 우리의 육체에 스며들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분쟁합니다. 결국 그것이 무엇입니까? 충만한 생명이 있으면 사랑할 수 있는데 그 생명이 죽음에 의해서 침투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지겹게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싸우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죽음의 장난입니다. 그 죽음이 언젠가는 여러분의 육체를 삼킵니다. 그것을 우리가 사망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침체에 빠져서 방황하고 타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죽음이 그들을 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식시킨 사건이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사건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종식되었을까요? 영원한 죽음의 종식은 마지막 우리가 영화될 날에 도래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우리가 지금도 누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낙심하고 좌절해서 죽음의 기운이 삼킨 사람도 어느 한순간 주님께 은혜를 구하고 진실하게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입을 때 그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헤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육체도 부활할 약속을 얻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초대교회의 기둥과 같은 지도자였던 야고보가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에 함께 죽기로 되어있는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얼마나 사랑하는 동료가 목이 떨어져 죽는 것을 보면서 베드로가 얼마나 두려웠겠습니다. 이 사람이 감옥 속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아십니까? 푹 잤습니다. 그래서 사자들이 그를 구원하러 왔을 때 그를 쳐서 깨우면서 일어나라고 일으켜 세워서 눈을 뜨게 할 정도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요? 평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셔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이 “내가 평안을 주노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안입니다. 무슨 평안일까요? 죽은들 무슨 대단한 것이겠는가? 왜? 그건 다 예전의 일이고 이제는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이 약속되어 있으니 죽음이 곧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는 영광스러운 기쁨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미쳤던 그 위대한 존재의 기반이 죽음을 깔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성경을 살필 때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보다는 훨씬 낫다는 확신.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교부는 죽기 위해서 안달하는 사람처럼 일생을 살았습니다. 왜? 그 부활의 영광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의미를 주었는데,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세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무엇이 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렇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던 그 세계를 향한 모든 통치를 대신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곧 주와 여호와가 되신 것입니다. 여기서 ‘주’ 라고 하는 것은 구약성경의 ‘아도나이’라고 하는 단어를 희랍어로 옮긴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에 대해서 당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며 당신의 권한으로 이 모든 질서들을 움직인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결국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는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경배의 마음속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인가? 예전에는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이렇게 이 모든 세계와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통치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따르며 그에게만 복종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성찰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우리를 위한 대속적인 죽음으로 데려가고, 대속적인 죽음에 대한 깨달음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데려가고, 그 부활에 대한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명제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십자가가 가장 중심적인 복음의 진리가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매일매일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이고 또 이 세상과의 싸움이고 궁극적으로는 죄를 다스리고 있는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이 모든 싸움에서 우리들이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렇게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 세계 모든 만물을 다스리신 권세를 가지고 계신 그분이 오늘 그분의 보내신 영이신 성령님으로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으로서 여러분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차마 하시지 못한 일들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매일매일, 매일도 너무 멉니다. 매 순간 매 순간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 한없는 구원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고,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받은 십자가의 은혜가 고마우면 고마울수록 그 고마움을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감격하는 것과 함께 미래의 삶을 그렇게 부활하셔서 온 땅에 주가 되신 그 그리스도 예수께 복종하면서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그분의 통치에 복종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십자가와 화평을 이루심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녹취자: 원수연
Ⅰ. 본문해설
원래 이 십자가는 죄인을 죽이는 형 집행의 방법이었습니다. 아마 인류 종교의 역사상 이렇게 죄인을 죽이는 형틀인 이 십자가가 한 종교의 상징적인 표시가 되기까지 그렇게 짧은 시간밖에 걸리지 않은 종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할 때 그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우주적인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모든 우주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Ⅱ. 십자가의 피로 이룬 화평
A. 화평을 위한 십자가
우리들이 십자가라고 하면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을 기억하는데, 그 피라고 하는 것은 생명이고 그 피가 흘렀다라고 하는 것은 곧 생명을 쏟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짐승을 피 째 먹는 것을 율법에서 금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피가 곧 생명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십자가의 피로,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신 것은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화평을 위한 십자가입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온 우주의 화평이 깨집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 맨 처음의 상태는 화평의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고, 사람들 속에 평화가 이루어지고, 그리고 인간과 관계를 맺는 모든 자연의 세계에도 화평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평화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서 깨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깨진 이 모든 평화의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십자가를 단순히 나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내려오신 사건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이 모든 세계,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트려졌기 때문에 불행해진 세계를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그렇게 감격해하는 십자가를 통한 우리의 개인적인 구원이 무엇을 위한 구원인지를 깨닫게 되고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인류와 세계의 평화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세상에서 바로 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실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소명이고, 그 길이 어렵고 힘들어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있었고, 또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서 감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화평을 이루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 순서가 뭐냐 하면 제일 먼저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을 서로 만나게 해서 사람과 사람사이에 평화를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고는 그렇게 평화를 이룬 사람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자연의 세계를 선량한 관리자의 마음으로 대하게 하심으로써, 관용을 갖게 하심으로써 이 피조물을 후하게 대우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전에는 수많은 물질들을 소비하고 그 자연들을 파괴하면서 살던, 그래서 겨우 행복을 느끼던 사람들이 이제는 단순한 물질로부터의 행복이 아닌 그 이상의 행복을 찾게 됨으로써 이 자연을 선하게 대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전문가들이 아니기 때문에 지구온난화, 환경문제가 어려운가보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나게 심각한 이 지구의 환경적인 위기도 결국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중요한 이유입니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이고 그것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입니다. 결국 이것은 제일 먼저 인간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는 십자가입니다.
B. 하나님과의 화목
화목이라고 하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서 좋던 사이가 깨트려졌을 때 그것을 다시 고쳐서 좋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화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손해를 입은 쪽이 먼저 보상을 받고, 위로를 얻고, 그리고 그가 용서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예화) 우리가 오랜 세월동안 이렇게 일본 사람들과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불화의 원인이 어리석게도 속이 좁고 끝까지 뭘 물고 늘어지는 한국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보상하고 그에게 겸손하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독일의 총리가 와서 아주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과거사에 대한 용서는 한번 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속죄의 마음을 갖는 것, 그리고 피해자는 그것을 너그러운 아량으로 용서하는 것,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합니다. 그러니까 화해가 이루어지질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그 율법을 따르는 형벌적인 죽음을 통해서 먼저 인간의 죄 때문에 손해를 보신 하나님께, 그것이 보상될 수는 없지만 그 분의 진노를 풀어드리고 그리고 그 분의 공의에 합당한 대가를 치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거저 받은 구원이라고 하는 이 말이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지만 어떻게 보면 전혀 옳은 표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혜택을 입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거저 받은 구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죗값을 충분히 치름으로써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십자가는 우리를 끝까지 용서하고 긍휼이 여기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께 범한 죄에 대해서는 지나치실 수 없어서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정의가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의 죄 때문에 부들부들 떨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 한 눈물겹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또한 만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은 죄의 깊이와 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는 공의를 의식하는 깊이만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고난의 깊이를 이해하게 되고 그 고난을 통해 얻은 구원의 은총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으면서 그 죄가 몰고 온 결과에 대해 후회하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회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를 하면 그 다음에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신을 구원해주실 수 있는 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 분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심리적인 믿음이 아니라 이런 것입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모든 길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배우기 전까지는 그런 구원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또 인간이 그런 구원을 받아야 할 필요성도 못 느낍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전혀 모르는 때에도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삽니다. 그것을 어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높은 지위에 올라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어느 놀이에 푹 빠지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말하는 구원의 개념은 자신의 행복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모든 가능한 선택,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그 순간에 자기가 생각했던 그 모든 구원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또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깨달으면서 마지막에 알게 되는 것이 결국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모든 구원의 길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C. 화목 실현과 교회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한 곳에 모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면서 종말에 이 세계가 모두 완성이 되었을 때 그 때에 인류가 구현해나갈 공동체의 모습을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가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산다고 할 때 그것은 일차적으로 사상의 삶이고, 이차적으로 사랑의 삶입니다. 이런 인간을 지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위대한 계획과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광대한 구원 계획을 하나의 지평에서 이해하면서 오늘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고 우리의 죽음도 바로 그런 신학적인 구도 안에서 의미 있는 죽음이 되도록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당신이 이루신 이 화평을 당신의 교회에서 구현해나가시는 방법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된 이후에는 모든 죄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나 흠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종말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누리고 있지만 또한 우리들이 완전히 죄가 제거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한편으로는 완전히 구원을 받아 취소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 교만과 이기심, 그리고 나를 주인삼은 삶을 살려고 하는 욕망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올바로 예배하고 올바르게 기도하고 올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서 살면 충분히 이기고 극복할 수 있지만 우리들이 마음이 흐트러져서 그런 은혜 생활에 열심을 내지 않을 때 죄는 번성하게 되고 우리는 도대체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시로 하나님과의 화목이 얼마나 중요한가하는 사실을 미끄러짐을 통해서라도 깨닫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수시로 십자가의 사랑을 통한 우리의 구원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해 주셨는지, 그래서 어떠한 사랑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는지를 깨달으면서 매일매일 그 의미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오늘 성경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죽음의 피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 하늘에 있는 것들과 심지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완전한 화목을 누리길 원하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고난과 희생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과의 화목의 관계를 지키고, 사람들과의 화목의 관계를 지키고,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아주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고 돌봄으로써 그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의 평화도 유지하고, 그렇게 하면서 그 삶 속에서 행복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진정한 삶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화평을 위해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헌신하는 것이 어려울 때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고, 나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관용하는 것이 어려울 때마다 그것이 아무리 어려워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죽음만큼 탁월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고난을 감내하면서 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큰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이 자연의 모든 세계를 돌보며 그 세계가 온전한 세계로 돌아가도록, 그렇게 티끌만큼이라도 이바지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해주신 의도인 것입니다.
십자가 외에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녹취자: 오희열
I. 본문해설
사도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 끝 무렵에 사도바울이 간 곳이 아덴 즉, 아데네라고 하는 곳이었습니다. 아데네에 가서 에피큐리오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을 만납니다. 거기에는 전문적인 철학자들도 있었겠지만 아마 그 철학을 잘 따르고 추종하는 사람들까지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사도바울은 박학다식한 자기의 철학적인 사유와 사상을 개진할 수 있는 능력을 유감없이 보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사람들을 논리적으로 굴복시킵니다. 에피큐리오스 학파라는 것은 여러분이 학창시절 때 쾌락주의라고 배웠는데, 거기서의 쾌락은 감각적인 쾌락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인간과 잘사는 것’에서 제가 강의할 때, 스피노자와 코나투스에 대한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에피큐리오스 학파는 스피노자의 사상과 아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기본적인 이론은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가 인간의 자기의 만족과 자기 자신이 느끼는 행복이며, 그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여야 하는 것이지, 바깥으로부터의 어떤 행복의 조건들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스토아 학파는 반대였습니다. 스토아학파의 사상은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불교와 노장 사상을 섞어 놓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지푸라기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이 무엇인가 밖에 있는 질서에 맞춰가며 살아야하는데, 밖에 있는 질서라고 하는 것이 자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토아 학파는 엄격한 금욕주의를 실천하고, 인생에서 만나는 어떠한 어려움과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고 영향을 받지 않는 바위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 삶의 사태들을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으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자연을 생각하고 우주의 원리를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깊은 자연에 대한 초시간적인 명상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학창시절에 마르코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어보신 분이 있을 텐데 저도 고등학교 다닐 때, 그 책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스토아 학파는 그런 사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쨌든 사도바울은 그 논적들을 논리로 타파합니다. 그러면서 결국 이깁니다. 그러나 승리의 결과가 아주 초라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일부 몇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선교학에서 얘기하는 ‘정황화’(contexturization)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선교사가 피선교지의 사람들의 사고방식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에게 맞춰서 복음을 전파하여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이것을 26년 전쯤에 성경을 읽으면서 깨닫게 된 것인데, 사도바울이 아데네에서의 전도를 마치고 오게 된 그 다음 선교지가 고린도입니다.
II. 바울의 새로운 결심
A. 복음 전도에 대한 각성
고린도에 들어와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그 다음이 재밌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3-4) 이렇게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합니다. “작정했다”는 것은 사도바울의 결단을 말합니다. 전에는 모호했던 것을 확정하고 자기 자신을 거기에 고정시켜서 이렇게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심이 무엇인가하면 복음 전도에 대한 각성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결심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이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알고 싶지가 않다거나, 혹은 그런 모든 지식들이 추호도 필요가 없다는 뜻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는 균형을 가지고, 공정한 생각을 가지고 봐야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우선 여기서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것은 아주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했다”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하면, 히브리 사람의 맥락에서 ‘안다’라고 하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너희를 알고 너희가 나를 알고”, “목자가 양을 알고 양이 목자를 알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목동이 모든 목양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 양을 세었더니 한 마리가 모자랐을 때, 왜 목자가 양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느냐고 묻는다면, ‘양을 알았기 때문에’라고 대답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내가 너희를 알고”, “내가 너를 알고”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들에게는 성경에서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최고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들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간혹 버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부모가 자녀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자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 앎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이고, 경험의 관계이고, 그 사랑의 경험과 앎 속에서 지식이 그 안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를 보면 이 의미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말년으로 갈수록 이 의미에 천착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 시리즈에서 이 이야기를 다루었고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시리즈의 네 번째 설교(엡 1:10)에서도 다루었고, 심지어 수련회에서 성경공부까지 했고, 고린도전서 2장으로 길게 강의했던 “복음 지혜와 성령” 시리즈에서 이것을 강의했었습니다만 요약하자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에는 하나님의 흔적이 묻어있습니다. 모든 것에 말입니다. 심지어 마귀라는 존재에게도 하나님의 흔적이 묻어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마귀가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 마귀에게 하나님의 흔적이 묻어있다면 우리가 마귀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냐고 어거지 같은 질문들을 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도덕적으로는 악하지만 자연적으로는 선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있도록 허락하신 것이 완전히 악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창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천사가 마귀가 되었다고 - 비록 희미하지만 - 인정을 한다면 그 안에 천사의 존재가 남아있으니까 자연적으로는 선하고 도덕적으로는 악하다고 정의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귀가 인간을 꾀고 교회를 파괴하려고 하고 분쟁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수많은 사람을 허무한데 몰아넣어서 살육을 자행하게 하는 것을 선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에게 설교했던 것처럼 인간의 악이라고 하는 것들은 결국 하나님을 본뜨는 것입니다. 선은 올바르게 본뜨는 것이고 악은 잘못 본뜨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귀가 사람들을 자기 수하에 넣고 자기가 왕처럼 다스리려고 하는 것은 누구를 본뜨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본뜨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을 잘 연구해보면 하나님의 성품의 빛을 자신에게 잘못 적용할 때 어떤 인간이 되는가 하는 것을 아주 훌륭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반면교사’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모를 통해서 ‘아, 아버지라는 존재는 저런 식으로 인생을 살면 안 되는구나.’ ‘엄마라고 하는 존재가 저렇게 할 때 자식들은 엄청나게 고통을 당하는구나.’ 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질서 안에서 자신이 만족을 누리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이 무엇인가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에는, 심지어 화학의 분자식에서 시작해서 우주에 있는 어마어마한 천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지극히 선한 하나님의 성도의 심성에서부터 극악한 마귀의 사악함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귀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면 사랑해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것은 인간입니다. 그래서 천사도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보여주지만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보여줄 뿐이지 하나님에 대해서 핵심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하나님에 대해서 핵심에 근접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두 죄를 지었고 그 형상이 파괴된 존재입니다. 파괴되었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루터파에서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파괴되어버렸다고 보고 믿음으로 회복된다고 봅니다. 그럼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하면 믿음으로 회복되기 전까지는 동물과 인간이 차이가 별로 없어지게 됩니다. 동물에 가까운 불신자를 사랑하고 존귀하게 대해야 할,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대해야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약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보질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봅니다.
인간은 그렇게 망가져 버렸습니다. 정신과 모든 구조 속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보여주기는 보여주지만 올바르지 않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본뜨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 자신을 ‘안다’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일생을 살면서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1/10 도 발견하지 못한 채 죽는 것입니다. 그 중에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거의 동물의 수준 밖에는 모르고 죽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없이 말입니다. 이런 사상이 불교에도 나타납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깨치는 것이 부처가 되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칼빈도 하나님을 아는 만큼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다고 얘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가장 찬란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바라보았고 신약성경은 오신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확장해서 써내려간 것입니다. 그것을 자신의 삶과 교회, 세계, 우주와 연결시켜 써 내려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입니다. 그것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이 자연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아는 그 광대한 지식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B. “그 외에 알지 아니 하기로”
이 문을 통과하지 않고 세계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지식에 대한 관심사가 신에게로 집중될 때에 수많은 이방의 종교들과 사상들이 나오고 심지어는 신은 없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이 문을 통과하지 않고 인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이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세계 정신이 흘러가는데 있어서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거나 인간 그 자체가 신이라고 보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과하지 않고서 자연의 세계를 보는 사람들,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같은 사람들이 세계를 보면서 세계가 이런 식으로 진화하고 되어진 것은 비인격적이고 맹목적인 법칙에 의해서 이렇게 된 것이고, 정교하게 누가 설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어떤 절대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적합한 요소들을 택하는 자연적인 진화의 과정에 의해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학문이 우리와 같은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나지만 그들은 더 많이 알면 알수록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과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계시하셨고, 그런 모든 지식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증거 한다고 생각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마치 우리들이 "Sola scriptura"(오직 성경으로)라고 할 때, 성경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지식들이 있어도 오직 성경만이 진리에 대한 유일한 표준이 된다는 점에서 “오직 성경으로”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이 세계의 과학들이 발전하고 흘러가는데 과학의 발견을 통해서 뭔가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런 발견들을 추동하고 움직이는 정신이 있습니다. 그 원리가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을 과학철학이라고 합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라는 학자는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만이 참된 과학이다.”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과학자들의 결론을 토대로 삼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중심적인 창조주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를 기본으로 삼고 그 다음에 그 정신에 의해서 과학의 연구와 과학의 흐름들을 판단하고 꾸짖을 수 있는 능력을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어야하고, 그래야만 이 세상에서 올바른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것이지, 과학이 이루어낸 결과물들에 달라붙어서 벌레처럼 그거나 빨아먹으며 자신의 영혼은 어떻게 되고 이 세계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도가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다짐하였다”고 이야기하면서 철학과 사상, 이런 모든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복음이고 그 복음의 핵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라는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위대한 그 지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지식을 우리에게, 우리가 도저히 접근할 수 없고, 접근해도 끊임없는 오류 속에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낸 것이고 그래서 이런 철학과 사상과 과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신실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면서 열렬한 인격적인 사랑 속에서 살면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복되고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월요일 마다 인턴쉽 학생들이 와서 공부하는데, 신대원 학생들, 졸업한 학생들입니다. 이들에게 ‘깊이 읽는 주기도문’을 읽게 하였습니다. 다 읽으라고 하면 기겁을 할까봐 절반씩, 한 주에 200페이지 정도씩 읽고 오라고 했습니다. 두 주를 읽혔는데 이 친구들이 멘붕에 빠졌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느냐 했더니 그 책과 작은 강의 하나를 주었는데 이해가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큰일입니다. 다음 세대에 우리 자손들이 어떻게 신앙을 영위해 갈 수 있을까가 저는 매일매일 걱정입니다. 그래서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중심에 서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 확고한 중심에 서고 그다음에는 인간과 세계와 사회와 모든 것 속에 숨겨있는 하나님의 흔적을 찾아내서 그리스도 예수의 지식의 빛으로 그것을 비추어서 그 정체가 무엇인지 가르쳐서,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겨우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산을 오르며 개울가를 걸으면서도 하나님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어제도 제가 허리가 아픈데 진통제 주사를 맞고 신경치료를 받고 와서 오래간만에 한 시간 반을 걸었습니다. 너무너무 행복했습니다. 비가 차분히 내리고 사람은 없고 물은 졸졸졸 흐르고,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여기 평촌 학의천이 세계적인 경관지역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세계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에서 느끼는 감동이라는 것은 너무너무 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면 그런 것을 봤을 때 삼겹살이나 구워먹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걸 보면서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 찬 하나님을 노래하면서 그 아름다운 지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 그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지식을 가지면 여러분이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세계가 아름다운 풍경이라면 그리스도 예수는 그 모든 풍경을 볼 수 있도록 하늘에 떠있는 찬란한 태양입니다.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위대한 일들로 이 모든 세계를 볼 때 그 찬란한 빛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입니다. 윌리엄 워즈워스라는 영국의 시인은 “저 하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뛰노라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어른인 지금도 그러하고 늙어서도 그러하리” 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바로 그런 마음입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위대한 지식의 세계에 들어가는 문이신, 사람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위대한 사랑, 그리고 공의, 그리고 하나님의 인자와 그 모든 긍휼, 그 모든 아름다운 속성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끊임없이 알아가면서 그 찬란한 지식의 빛 가운데 예수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래서 우리 각자에게 주어주신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짐과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고 그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부르신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자비가 특권으로 여겨져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주님의 위대한 은혜의 세계에 대한 감격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짊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녹취자: 김세나
Ⅰ. 본문해설
마태복음 10장은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는 지점입니다. 9장까지는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데리고 계셨는데, 10장에서 그 제자들을 사도로 삼으셔서 그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이전까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야말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이었다면, 이제 10장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동역자가 되는 기점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큰 권능을 주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연약한 자를 치료할 수 있는 성령의 큰 권세를 주셨습니다. 사실 이러한 권세를 주는 것은 구약의 맥락에서 보면 하늘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는데 이스라엘의 잃은 양들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서 부활하실 때까지는 이방인들을 향한 사도들의 본격적인 시대가 아직 열리지 않고 그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할 세상을 바라보니까 그 모습이 마치 양들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10장에서 꽤 긴 설교를 남기셨습니다. 제자를 사도로 파송하시면서 긴 설교를 남기셨는데, 여기에는 복음전도자로서의 자세와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34-39절은 복음전도가 영적전쟁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극단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고 나면 그 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과 그 나라에 대항하려는 사람들이 나누어질 텐데, 거기에서 가장 사랑하는 관계도 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사도들에게 가족관계 같은 것은 깨뜨려도 괜찮다, 그러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쉽게 포기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배척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심각한 균열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어떤 때는 도저히 화평이 이루어질 수 없는 때가 있는데 그 때 고난을 당하게 되는데 그것을 견디고 이겨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Ⅱ. 제자로서의 신자의 삶
그러면서 이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 제자로서의 신자의 삶이 어떠한 것인가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 하시면서 제일 먼저 나오는 이야기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입니다.
A. 자기 십자가를 짊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이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정의입니다. 칼빈은 이것을 조금 더 구체화하여 인생을 살아가면서 인간이 성숙한 인간이 되도록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신자의 모든 고난과 시련을 전부 총칭하여 십자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첫날 설교에서처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사도들의 설교가 있은 후에 십자가가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로마제국에 확 퍼졌습니다. 그 전까지는 누구도 십자가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희랍어로 ‘스타우로스’라는 단어인데 인류가 이 세상에서 고안해 낸 가장 야비하고 잔인한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땅에 세로 막대를 세워 놓고 가로 막대 위에 사람을 눕히고 못을 박았습니다. 처음에는 손 정 가운데에 박았습니다. 그런데 죄수의 몸무게로 인하여 늘어져 자꾸 찢어져서 시체가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손목에 못을 박게 되었습니다. 동맥과 정맥이 흐르는 곳에 박으면 피해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다리에도 못을 박습니다. 그러다가 시체가 떨어지니까 밑에다가 나무를 댔습니다. 혹은 다리를 묶든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슨 형벌인가 하면 매달리니까 금방 사람이 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3일씩 매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피가 흐르면서 천천히 빠져 나옵니다. 뜨거운 팔레스타인의 태양빛 아래에서 죽어갑니다. 그것은 가장 극심한 고통을 목숨이 붙어있는 순간까지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피가 많이 흐르면 목이 마르고 출혈이 있을 때 엄청난 두통이 일어납니다. 아이들이 운동을 하다가 다칩니다. 겉으로 표가 나지 않고 내부적으로 출혈이 납니다. 그럴 경우 아프다고 하면서 물을 찾습니다. 이러한 것은 속에서 출혈이 있는 경우인데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상황입니다. 물을 마시면 안 됩니다. 로마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십자가 형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너무 잔인하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에게 이러한 형벌을 주는 것은 로마답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고 변방의 종교 지도자이니까 데려다가 못을 박았습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스타우로스’라는 단어를 대화중에 꺼내는 것 자체를 아주 불쾌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십자가가 지금처럼 아직 종교화되지 않았던 시대에 “너희 나 믿으려고 하니?” “너희 나 믿지?” “너희 십자가를 져야 한다.” 그럴 때 그 단어의 사용이 주는 강렬함은 오늘 우리들은 실감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제자들은 엄청 심각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다고 봐야 합니다. 이 끔찍한 비유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 할 희생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 보여줍니다. 살아가는 신자의 모든 삶은 이국적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자신의 고향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타국에서 살아가는 나그네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소명대로 살려고 하는 모든 신자의 삶에는 존재 그 자체 때문에 박해를 받고 사상 때문에 박해를 받고 삶 때문에 박해를 받으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자의 삶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과 소명을 다 팽개치고 방종하게 살면 결국은 고생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구원 받은 나에게 맡기신 신자의 소명대로 살아야 되겠다고 하면서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고생을 하는 것은 아무 상급이 없습니다. 미래에도 상급이 없고 오히려 심판이 있겠습니다. 그리고 현세에도 상급이 없습니다. 그렇게 불순종하고 방종하게 사는데 그 사람의 인생이 행복하겠습니까? 제자에게 요구되는 삶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삶을 살거나 아무 가치를 못 느끼면서 사는데 그 사람에게 간절한 기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치 벌레를 불 속에 집어넣을 때 뜨겁기 때문에 미친 듯이 춤을 추듯이 살다가 너무 고생한다 싶으면 죽을 것 같이 하나님을 부를 수는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가 가려고 하는 인생의 좌표나 목적이 하나님께서 동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억지로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고 위로를 하여도 삶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돌이켜 서지 않는데 이것은 하나의 진통제입니다. 예배 시간에 은혜를 받아도 그것은 진통제일 뿐입니다. 그리고 눈물을 씻고 자기 가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한 사람의 삶은 일생동안 죽도록 고생합니다. 돈이 좀 있고 건강하고 그러면 고통은 조금 덜해 질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또 모를 일입니다. 정신적으로 얼마나 고통 받고 괴로운가 하는 것은 모릅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둘째 날에 세계적인 인기를 모으고 유명한 스타들이 되었던 미국 연예인들이 죽어가는 모습들을 소개하였습니다. 자신의 삶을 지탱해 나아갈 수 없는 그러한 삶이 번영을 누리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은 본인에게는 너무나도 불행한 일입니다. 어차피 주님께 불순종하며 살아도 고생하고 순종하며 살아도 고난을 받습니다. 그렇게 고난 받으며 가는 길에는 이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포기하게 만들어주고, 그러한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면 전혀 깨달을 수 없었을 진리들을 발견하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심지어 그가 만일 인생을 사명을 위하여 살아간다고 하면 성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부모와 원수가 되고 아내와 원수가 되고 친척들과 원수가 된다, 심지어 그렇게 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지 않았더라면 잃어버리지 않았을 텐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기 때문에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남들이 보면 너무 쓰라린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 안에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그러한 하나님의 교정과 위로, 그러한 시련을 통해 주는 말할 수 없는 생명의 작용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생을 하며 살아가는 인생과 고난을 받는 인생의 차이입니다. 결국 언젠가는 우리들이 살았던 삶이 하나님 앞에 모두 드러납니다. 하나님 앞에 살아갔던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 모두 드러나게 되고 여러분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였다든지 교회를 신통치 않게 섬겼다든지 제대로 가족들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든지 이유 때문에 구원을 취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평안이 있겠습니까? 계속 불순종하고 죄 지으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아무리 몰라도 어느 정도는 양심이 이야기 해 줍니다. ‘너 이런 식으로 살면 안 된다. 너 이런 식으로 가족들을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너 이런 식으로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양심이 울립니다. 아무리 논리를 가지고 자신이 하나님이 잘 섬기는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하여도 양심의 울림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신통치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것을 교정하고 올바르게 하도록 끊임없이 시련을 주십니다. 그것이라도 믿음으로 붙들면 주님을 만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죽도록 고생하며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제가 예수를 믿기 전에 15세에 자각이 생겨나면서 혹독하게 무서운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저는 그때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닌데도 가슴 한쪽을 뛰게 하는 단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치’입니다. 어떻게 하면 가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 그런데 알 수가 없었습니다. 신자는 가치가 무엇인지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끊임없이 십자가를 지면서도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결국은 이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르틴 루터는 “패배한 선은 승리한 악보다 여전히 위대하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든지 악이 이길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상히 여기면 안 됩니다. 불완전한 세상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을 추구하며 몸부림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가 하나님께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어떠한 사람이든지 승리한 선 때문에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을 행하려고 하는 몸부림 친 그의 덕 때문에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습니다. 윌리엄 포사이즈라는 신학자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설교자는 설교의 결과로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설교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과정을 통하여 상을 받는 것이다.” 자신이 설교를 하였는데 어떠한 날은 수만 명이 회심을 합니다. 어떤 날은 한 인간도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설교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회심시켰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그가 칭찬을 받는가 하면 얼마나 한줄의 설교를 하기까지 열심히 설교를 준비하였는가, 일생을 그래도 모자라지만 그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쳤는가, 그것에 의해서 상을 받습니다.
B. 예수를 따름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로서의 신자의 삶을 살기 위한 두 번째 요소를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무엇을 따른다는 말입니까? 따라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걸어가시고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인데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고 계시는 중입니까? 십자가를 향하여 가고 계십니다.
우리나라 기독교는 복음으로 성공과 번영을 가르치면서 모두 변질하였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축복도 계량화, 물질화 하면서 기독교가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하수인처럼 되었습니다. 어제도 잠깐 뉴스를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상했는지 모릅니다. ‘이규태’씨가 기독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한 번 기독교가 엄청 욕을 먹게 생겼습니다. 이 사람이 뇌물을 받은 돈을 교회에 헌금을 하고 교회 몇 푼 주고 자기에게 다시 돌려주는 조건으로 교회와 협의를 하고 헌금을 하였습니다. 교회가 그러한 돈을 받으면 되겠습니까? 굳이 이해를 한다면 교회가 워낙 가난하니까 그럴 수 있겠지만 정말 말이 안 됩니다. 교회를 지어줬는지 수리를 해줬는지 모르겠지만 교회 한 층을 자신의 사무실로 만들어서 거기에서 수많은 연예인들을 만나고 정관계 사람들을 만나 로비자금을 주었다는 것이 지금까지 드러난 실체입니다. 교회 안으로 사람이 들어가고 교회 안에서 그러한 기획사 같은 사무실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누가 생각했겠으며 조그마한 교회에 소녀시대가 와서 교회에서 공연을 했답니다. 거물급 가수들이 마을 잔치 한다는 미명하에 돈을 주고받았는데 그것이 교회 3층입니다. 그 기획사가 세워진 연도와 교회가 세워진 연도가 같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이 아예 교회를 설립하도록 지원하면서 그러한 용도로 사용하려고 뜻을 세우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자기가 전 세계에서 술, 담배, 도박을 하지 않는 무기상이라고 하면서 클라라와 문자 주고받을 때는 “내일 우리 와인 한잔 어때?” “좋습니다, 회장님.” 그것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술, 담배 안하고 놀음 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다 도와주시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패널들이 입에 개 거품을 물고 “그렇다면 하나님 도움으로 뇌물을 주고 사기를 쳤는가.” 욕을 하였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너무 너무 괴로웠습니다. ‘왜 기독교인들이 그러할까?’ 힘이 없을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뷔페에 가서 무순을 씹어 보아도 무의 쓴 맛이 나옵니다. 힘이 없어도 작은 교회라도 무엇인가 대찬 면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당신이 아무리 돈이 많고 우리 교회 출석하여도 헌금을 했으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지, 그것을 커미션을 주고 다시 돌려준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교회를 이용해서 자금을 세탁한 사람이 역사상 최초입니다. 어떻게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공범이 되고 목사님은 구속이 될 수 있습니다. 너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신앙, 예수님의 사상,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물론 똑같지는 못하겠지만 따라가려고 애를 쓰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신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당하신 고난과 함께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가는데서 기쁨을 경험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그러한 영적 기쁨 때문에 그것이 현실의 삶이 발현되어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교회가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있구나, 그것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면서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어느 시점에서 도저히 굴복하지 않는구나, 권력으로도 못 누르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괜히 성질을 부리고 다투고 하는 것이 아닌 거룩한 기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로서의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용기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신학자 모임에 가서 그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어떻게 여러분은 죽은 사람을 비판할 때는 어떻게 그렇게 목소리가 큽니까?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을 비판할 때에는 어쩌면 그렇게 소리가 없습니까?” 이미 300년, 400년 전에 죽은 사람은 입에 거품을 물고 비난을 해봐야 소송 들어오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무엇을 잘못할 때 혹은 이단이 날 뛸 때 비판 하지 못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두 달인가 전에 우리 교회 와서 이단 특강하러 오신 최삼경 목사님 교회에 가서 집회를 하였습니다. 첫날 집회를 잘 하였는데 이튿날 갔는데 난리가 났습니다. 부흥회를 열어서 교인들이 오려고 하는데 이단들이 한 200명 와서 교회 로비를 점거하였습니다. 목사님과 저는 이리저리 피해 다녔습니다. 그 사람들과 이야기 해 봐야 소용없으니까 피하였습니다. 거의 매주 겪는 일이랍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정말 목사님보다 교인들이 위대합니다.” 교회가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다 때려치우려고 하는데, 이단들이 와서 유리창 부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협박과 위협을 하는데 그것을 다 견디면서 긴 세월 목사님 이단사역 하는 것을 당장 그만 두시라고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린교회 교인이 지식에 있어서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충격을 감래할까, 이단들이 몰려와서 김 목사님이 설교한 것이 우리 영업에 방해되니까 하면서 칼 들고 피켓들과 와서 예배당 마당을 점거하고 못 들어가게 해서 뒷문과 유리창으로 들어가는데 그것이 매 주일 계속되는데도 “목사님, 계속 이단사역 하셔야 합니다.”라고 하겠는가 생각했을 때 저는 우리 교회는 안 그러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절대 여러분은 못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목사님보다도 교인들이 너무 너무 위대하였습니다. 목사님이 하는 것을 신뢰하는 것, 교인들이 이단에 대하여 무엇을 그리 잘 알겠습니까? 이단만 오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교단의 교회들이 와서도 난리를 칩니다. 유리창이고 뭐고 다 때려 부숩니다. 결국 둘째 날 집회를 한 시간 늦게 시작하였습니다. 경찰들이 오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거의 매주 그 교회처럼 일어날 때 열린교회 교인들이 나를 신뢰하고 믿어줄까 하는 생각에 ‘예’하고 자신이 없었습니다. 요즘 보기에 여러분은 온전한 줄 알겠지만 제가 보기에 여러분은 온상에서 자란 묘목들입니다. 너무 곱게 자랐습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교회에서 손 하나 까딱하면 모든 말씀을 섭취할 수 있도록 모든 서비스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일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거룩한 강인함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교회를 보면서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 교회 집회를 보낸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간 조금만 불편해도 어쩔 줄 몰라하는 여러분의 모습과 거칠게 살아가는 교인들이 대조가 되었습니다. 물론 여러분 은혜 많이 받았고 일방적으로 열등하다는 것 아닙니다. 주시는 은혜가 놀랍습니다. 그런데 정말 고통스러운 상황이 매주 될 때 버틸 수 있을까? 4일 집회를 하는데 이틀을 그렇게 괴롭혔습니다. 3일을 괴롭혔을 때 아예 경찰이 와서 저 아래에서 바리게이트를 치고 못 올라오게 하였습니다. 그러한 상황들을 정말 견뎌낼까?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제자의 삶은 당신을 따르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C. 쓸모 있는 삶
마지막 세 번째는 쓸모 있는 삶입니다.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 희랍어로 ‘우크 악씨오스’입니다. ‘우크’는 강한 부정형이고, ‘악씨오스’는 ‘쓸모 있는’ 이란 의미입니다. 원래 ‘무게를 달아보다’라는 ‘아고’라는 단어에서 온 형용사입니다. 무게를 달아볼 때 ‘이 사람은 굉장히 가치 있고 쓸모가 있는 사람이구나.’ 저울을 달아봅니다. 그 때 너희들이 그렇게 달려볼 때 정말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희는 쓸모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고 하는 것은 조금 전 잠시 말씀드렸지만 제가 예수 믿고 구원 받기 전에는 이 더러운 세상을 왜 살아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왜 이렇게 눈만 뜨면 비극적인 이 세상을 왜 살아야 하는지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기 전에도 저는 기본적으로 돈을 많이 벌고 부자 되면 인간이 행복할 것이라고, 예수 믿고 보니까 예수 믿은 사람들 중에도 그러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예수 믿기 전에도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 안 믿은 제가 예수 믿은 당신들보다 훨씬 철이든 인생을 살았구나, 예수 믿고 나서 그러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아,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구나.’ 다 버리고 포기한 것들을 이 사람들이 다시 주워 모으면서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교만하고 없는 사람들은 자존심 상해하는 그런 사회가 바로 교회였습니다. 신실한 사람들도 물론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무엇에 쓸모 있는 인생이 될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목적도 이해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삶으로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결국 우리를 구원하시고 연단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은 당신의 목적에 쓸모 있게 하셔서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는 것, 그것입니다. 구원 받았으면 소명 의식 속에서 살아야 하고 매일 인생을 살면서 주님을 섬기고 구원의 계획대로 살려 할 때 부딪히는 수많은 시련과 어려움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한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결론입니다. 그러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지속적으로 공급받으면서 인생을 살 때 쓸모 있는 인간이 됩니다.
옛 사람과 십자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7)
녹취자: 김세나
Ⅰ. 본문해설
사도가 편지를 쓸 때 언제나 그러하듯이 먼저 교리를 논증하고, 그 교리에 토대를 둔 신자의 삶이 무엇인지 설파합니다. 3장과 4장에서 사도바울은 이신칭의의 교리를 논증합니다. 그 후 5-8장까지 그렇게 이신칭의로써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말합니다.
Ⅱ.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A. 죄를 용서해주심
제일 먼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이야기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고, 인간의 지은 죄의 크기가 무한히 크기 때문에 그 큰 인간의 죄의 크기를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큰 고난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의 죄가 질적으로, 그리고 크기에 있어서 무한한 것은 그들의 죄가 완전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죄이기 때문이고 그 죄의 결과가 자기 개인 하나가 아니라 이후에 태어날 모든 인류들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까지 망가뜨렸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 죄를 용서받고 싶어 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일을 행했다고 한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의로운 일을 해야지만 그렇게 무한한 크기의 죄를 상세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자신의 힘으로 의롭게 살아도 그 죄를 상세할 수 없고, 또한 어떤 선한 사람이 좋은 뜻으로 그 사람을 대신해서 죽어준다 하더라도 그의 죽음의 효력이 그렇게 무한한 크기의 죄를 용서받게 할 수 있을 정도의 보상의 능력을 갖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무한한 죄의 크기를 감당하실 수 있었고, 참 사람이셨기 때문에 그 죄 값으로 죽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심으로 하나님이 다시 죄 때문에 끊어졌던 당신과의 관계 속으로 불러들인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신 일입니다.
B. 의롭다고 해주심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를 의롭다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칭의’라고 합니다. 사실은 죄가 있는 사람을 베푸는 사람의 자비에 의해서 의롭다고 여겨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칭의’를 법정적인 의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 칭의는 법정적인 의라고 할지라도, 그저 선언만 의롭다고 하고 그 죄에 매여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내버려두는 완전한 법정적 칭의와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심한 도벽이 있어서 굉장히 많은 재산이 있는데도 끊임없이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외국에도 그러한 예가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부자의 딸이 매일 어느 곳에 가서 물건을 훔쳐야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결국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1-2년 옥살이를 해야 하는데 그 사람을 가엾이 여긴 피해자들이 그 사람을 용서해달라고 탄원을 하여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무죄로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은총을 입어서 이 사람이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고, 그 사람의 속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나가다가 다시 슈퍼에 들러서 하다못해 비누라도 하나 훔쳐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순수한 법정적 의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해 주실 때에는 그러한 식으로 명목상 허울뿐인 의의 선언이 아닙니다. 실재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의 용서를 받을 때 의롭다 칭함을 받을 때, 바깥에서만 선언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놀라운 일들이 함께 일어납니다. 그것은 예전에 없던 성령을 주십니다. 죄의 능력을 이기고 그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놀라운 영혼과 정신의 힘이 되게 하십니다. 죄를 이기며 살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집니다. 이러한 점에서 결국 칭의는 성화의 소명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이 이러한 칭의와 함께 죄를 이기고 그 권세를 무찌르며 살 수 있는 은혜를 약속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뜻을 따라 살도록 그렇게 요구받고 있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사람들이 죄를 이기고 그 능력과 권세를 파하며 사는 것은 조건적입니다. 하나님과의 은혜 언약을 따라서 하나님이 어떠한 방식으로 신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는 약정들이 있습니다. ‘기도를 해라. 은혜를 주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라. 은혜를 주마.’ 어떠한 식으로든지 하나님이 어떤 약정적인 은혜, 그것을 따르고 순종할 때 그렇게 그 모든 것들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후에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성화의 소명이 즉시 내포되어 있듯이 자신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부르면서, 은혜를 붙들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Ⅲ. 십자가 구속의 뜻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A. 예수와 함께 못 박힘
제일 먼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이야기 합니다. 성경에서 구원받기 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을 이야기 할 때 사람은 하나인데 사람의 본성을 이야기 할 때 두 단어를 같이 사용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 우리의 새 사람 혹은 너희의 옛 사람, 너희의 새 사람, 이것입니다.
여기에서 옛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본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옛 사람과 새 사람이 공존합니다. 어거스틴이 자기의 책 속에서 “구원 받은 우리는 일생동안 옛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짊어지고 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새 사람이 옛 사람을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옛 사람은 자기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고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를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자기를 주인 삼은 정욕적인 삶입니다. 정욕이 꼭 성적인 정욕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임금 삼아 살려고 하는 모든 사상과 욕망의 총체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한 사람이 옛 사람이고, 이것을 옛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새 사람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이신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하나님이 다시 살려주신 우리의 속사람입니다. 다시 우리를 살려 주셔서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새 본성을 의미하는데, 나를 주인 삼던 삶에서 하나님을 주인 삼고, 자신의 세상적인 행복이 최고로 알던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의 삶의 가치로 알아서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려고 하는 그러한 본성이 새 본성입니다.
그래서 이 옛 본성과 새 본성이 있는데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옛 본성입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고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그것은 구원 받을 모든 사람을 당신이 끌어안고 당신과 그들이 하나가 되어서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그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를 당신이 품으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신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시간과 공간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그들이 십자가에서 자기를 위해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날 때 그렇게 자기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할 때 실재적인 죽음이라기보다는 적용적인 죽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모두 끌어안고 하나가 되셔서 우리의 죄를 당신의 죄로 여기셔서 그 형벌을 당신이 대신 당하시고 우리를 구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그 진리가 마음에 새겨지면 그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분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이유가 바로 지금 짓고 있는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할 때 불가능합니다. 죄는 크기는 다양하지만 질은 항상 같습니다. 그 죄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불러온 몸이었다고 생각을 하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는 한 자신이 그 죄를 지을 수 없게 됩니다.
B. 죄의 몸을 죽게 함
계속해서 성경은 죄의 몸을 죽어, 라고 말합니다. 죄의 몸을 죽게 하는 것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신 뜻입니다. ‘죄의 몸’은 그러한 옛 사람에 의해 지배된 육신적인 본성을 가리킵니다. 몸은 우리의 육신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 몸을 죽음에 적용한다면 죽음은 모든 활동을 정지시키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죽었는데도 계속해서 죄를 짓고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실재적인 육신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물든 옛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것을 죽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죽음으로써 우리들이 죄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었던 옛 사람의 삶을 종식시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던 이유입니다. 옛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내 인생을 불태워 주님께 드리기로 다짐하였다고 하는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매일 매일 그러한 십자가에 대한 경험 속에서 살 때 옛날에 하나님 앞에 돌이켜 주님을 위해 살기로 한 각오가 우리의 마음속에 새롭게 됩니다.
C. 종 노릇하지 않게 함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종 노릇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속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섬길 때 다양한 자격으로 그 사람을 위해서 일하게 됩니다.
이 공간을 보십시오. 교회를 새롭게 깨끗이 고쳤습니다. 꽤 많은 물질을 들여서 고쳤습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이곳을 고쳐 주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고쳐 주었습니다. 마치 우리의 하수인인 것처럼 우리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해서 고쳐 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거래하는 사람입니다. 돈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을 해줘야 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대등한 자격으로 이 일을 하였습니다. 만일 돈을 못 주겠다고 하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까?
이 당시의 문맥으로 돌아가 보면 소위 종이라고 할 때 여기에서 번역이 잘못 되었습니다. 노예입니다. 그 당시의 종은 'servant'라고 하는데 그 당시의 종은 직종이 다양하였습니다. 월급 받으며 집에서 출퇴근 하는 종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거주하는 종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1611년에 킹 제임스 버전 성경이 번역될 때 원래 이 '둘로스'라는 단어가 'slaves'로 번역되어야 하였습니다. 노예. 그 당시에 노예제도가 성행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의 양심 속에도 아프리카 사람들을 잡아다가 흑인 노예로 비참하게 두들겨 패면서 동물처럼 부리는 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엄청난 양심의 가책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노예를 그렇게 학대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할 때, 그러한 모습이 비추어졌던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비틀어서 'servant'라는 단어를 채택하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한 식으로 당시의 'servant'처럼 그러한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고용된 종이 있고,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노예가 있었습니다. 보수도 없고 자식을 낳아도 그 자식이 주인의 소유가 되는 노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우리가 예전에 이러한 노예의 상태에 있었는데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도록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슬레이버리’라고 하는 로마시대에는 노예가 아닌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어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전쟁을 합니다. 적국의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와 죽이지 않고 노예로 사용하는데 일평생 호의호식 하고 손가락 하나로 사람들을 부리던 사람들입니다. 옷을 벗겨서 노예 옷을 입혀 놓았지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귀족입니다. 그 사람들이 노예살이를 할 수 있겠습니까? 못 합니다. 굉장히 큰 부자였는데 망해서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런데 노예를 할 수 밖에 없는데 일평생 부잣집 자제로서 부족함 없이 살았습니다. 노예 할 수 있겠습니까? 못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데려다가 단 시간 안에 노예다운 노예로 만들어 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첫 번째는 무자비한 폭력입니다. 엄청난 두려움을 주어서 자유에 대한 모든 생각을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신매매 하는 사람들의 수법인데 6개월이 걸린 답니다. 짓밟듯이 무자비한 폭력으로 자유에 대한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도망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아도 도망가지 않습니다. 정신적으로 망가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종 노릇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자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요한일서 1장 8절이 고쳐져야 합니다. 뭐라고 하는가 하면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고 진리에서 떠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미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고 9절에서 이야기 합니다. 신자가 되었어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죄를 우연적으로 짓는다고 하여 죄의 종이 된다고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죄의 종이 된다고 하는 것은 죄에 푹 젖어서 그것이 본성 중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우연적인 죄들은 다양하게 지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깊이 빠지는 것입니다.
엊그제 신문에 보니까 아이들만 심각한 것이 아니라 성인들 또한 심각한 것이 인터넷 게임, 음란물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습성화 된 것입니다. 호기심으로 잠깐 볼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만 습성화되어서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상태가 되면 그것에 의해 죄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마치 큰 고기가 낚시 대에 걸리게 되면 200-300kg되는 고기들이 그것을 따라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도록, 왜냐하면 입속이 찢어지고 아프니까, 그러므로 따라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도록 되는 것처럼 그렇게 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왜 입니까? 옛날에는 그러한 삶이 불신자의 삶이었습니다. 그러한 삶을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속해 주신 것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우리가 받은 구원은 우리의 인생만큼 소중합니다. 우리가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 때 구원의 감격이 유지됩니다. 구원의 감격 속에서 우리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기억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