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 십자가의 힘으로 살다
(2016년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설교기간|2016년 10월 10일 - 16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 2016년 11월 2일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 1 (2016.10.1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목 차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 2 (2016.10.1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 3 (2016.10.1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 십자가와 그 지혜(고전 1:23-24) 2016.10.1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 4 (2016.10.13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2. 십자가와 그 능력(고전 1:23-24) 2016.10.1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3
3. 십자가와 그 용기(마 27:33-34) 2016.10.1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26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 5 (2016.10.14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4. 십자가와 그 기도(눅 22:40-44) 2016.10.13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40
5. 십자가와 그 살림(요일 4:9) 2016.10.14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53
6. 십자가와 그 인내(히 12:2) 2016.10.16 주일오전 68
성도, 십자가의 힘으로 살다 2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 1 (2016.10.1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 2 (2016.10.1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 3 (2016.10.1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 4 (2016.10.13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 5 (2016.10.14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 6 (2016.10.16 주일오전설교)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1) 가을말씀사경회 2016. 10. 10
< 십자가와 그 지혜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3-24)
I. 본문해설
- “교수님 우리를 뭘로 보십니까?”
- “십자가의 도전, 묵은 땅∼” 사진up
- 우리는 십자가를 신앙의 초보로 여김
- 세계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
- 십자가는 구원을 통한 그 경륜의 핵심
- 교회의 두 기둥: 종말+십자가 신앙
- 새 지식: 하나님+자기+이웃+교회
- 분쟁, 이기심, 부도덕 있는 그 교회
- “십자가”로 시작⇒그 경륜을 보여줌
II. 십자가와 하나님의 지혜
- 인류의 관심사인 “삶”의 근거를 물음
A. 하나님의 지혜
- 대비: 인간의 지혜⇔하나님의 지혜
- 세상이 모름: 복음전도+구원필요
-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심∼”(20절)
고전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 믿음으로 은총을 의지하게 하시려
- 신학적 회심과 정서적 회심의 차이
- 복음 경험의 깊이+이후 교육에 좌우됨
B. 그 지혜의 가치
-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인가?
- 3대 지혜: 철학적+분별적+신령적
- 올바른 관계를 맺음+관계를 유지케 함
- 하나님+자신+교회와 이웃+세계
- 한꺼번에 들어오는 그 지혜의 빛들
- 더 이상 철학의 도움이 필요치 않음
- 믿음의 중심에 십자가의 도리가 있음
- 배움: 죄+겸손+용서+순결+사랑
- 지혜의 성장이 요구됨(고전14:20)
고전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 십자가: 앎+묵상+적용함⇒지혜
III. 적용과 결론
- 정함이 없이 뒤뚱거리는 불안한 삶
- 세상과 자기 사랑에 매여 사는 생활
- 복음이 주는 안정감이 있는가?
- 십자가로부터 멀어진 기독교를 봄
- 그리스도와 십자가 없는 기독교임
- 그 대가는 어리석은 삶⇒다시 방황
- 최초의 회심과 목양 무엇을 배웠나?
-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자!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2) 가을말씀사경회 2016. 10. 11
< 십자가와 그 능력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3-24)
I. 본문해설
- 우리의 삶의 현실적인 문제: 능력 없음
- 능력 없을 때 원망, 갈등, 미움 생김
- 무능력은 자원의 고갈 상태를 보여줌
- 능력: 자유와 연관: 작위+부작위
- 무능해서 고통을 받는데 능력을 제시함
II. 십자가와 하나님의 지혜
A. 복음의 두 특성: 지혜+능력
- dunamis가 sophia보다 앞에 나옴
- 철학의 힘: 이성 설득+본성에 호소
- 소수의 사람들이 유사 자유에 도달함
- 지혜와 능력⇒살 길과 살 힘을 제공
- 타락한 인간: 지혜와 능력을 상실함
- 죄가 박탈함: 진리의 빛+사랑의 힘
- 인간이 행복을 되찾는 조건이기도 함
- 예수의 삶: 진리+영적 권능+사랑
B. 능력은 어떻게 오는가?
- 최초의 능력과 이후의 능력
a. 최초의 능력: 중생+회심과 함께
b. 이후의 능력: 믿음+순종과 함께
- “경건의 능력”으로 표현(딤후 3:5)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 첫 회심에서 경건의 샘 터짐: 지혜의 빛
- 그것을 막았던 영들을 타파: 골 2:14∼15
골 2:14-15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 어둠을 깨뜨림: 고후 4:4, 엡 5:8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 말씀의 빛+성령의 은혜=순종의 생활
- 사중의 생활: 꾸준한 경건의 추구
a. 말씀의 빛 b. 기도의 열 c. 묵상의 힘 d. 순종의 삶
III. 적용과 결론
-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는 능력이다
- 무능력한 삶은 자유가 없는 삶이다
- 구원의 진정한 누림은 자유이다
- 하나님나라는 자유하게 하는 나라다
- 경건이 없는 삶이 자유를 잃게 한다
- 다시 열렬한 경건으로 돌아오라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3) 가을말씀사경회 2016. 10. 12
< 십자가와 그 용기 >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마 27:33-34)
I. 본문해설
- 십자가에서 남기신 다섯 번째 말씀
- “내가 목마르다”(요19:28)
요 19: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 마태와 요한복음의 차이점의 조화
- 목 마르다-포도주-입대심-거절
- “맛 보시고 마시고자∼아니하시니∼”(34절)
II. 포도주를 거절하심
A. 쓸개를 탄 포도주
- 일종의 진통제로서 동정의 표시
- 잠언 31:6∼7의 교훈을 실천한 전통
잠 31:6-7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그는 마시고 자기의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자기의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 “쓸개 탄 포도주”, “신 포도주”
- “몰약을 탄 포도주”(막 15:23)
막 15: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 스펀지 같은 데 적셔 갈대에 매닮
B. 포도주를 거절하심
- “맛보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 십자가 못 박힘의 출혈과 목마름
- 최후의 만찬시 포도에 관한 서원(막 14:25)
막 14: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나실인의 서원에 자기를 묶으심(신5장)
- 현실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함
- 인생은 우리의 맘대로 전개되지 않음
- 사람의 가치는 삶의 의미를 찾아감
- 좋아하지 않는 현실을 직면할 힘 필요
- 현실의 고통을 감당할 용기 어디서 오나?
-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알라
- 영원과 영원의 틈바구니에 있는 자
- 세상의 죄를 다 지신 그리스도의 고통
- 우리가 누릴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III. 적용과 결론
- 인간의 본분은 모든 겪음을 감당하는 것
- 우울하고 불행한 길이란 의미 아님
- 능력과 함께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
- 십자가의 고난을 당한 예수님께로부터 받음
- 예수님과 함께 죽는 자를 살려주심
- 십자가에서 이기신 예수를 바라라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4) 가을말씀사경회 2016. 10. 13
< 십자가와 그 기도 >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눅 22:40-44)
I. 본문해설
- 그리스도께서 체포되기 직전의 상황
- 최후의 만찬 후 제자들과 감람산으로
- 십자가의 영적 고난은 이미 시작됨
- 예수의 최후 기도를 통해 배우는 것
II. 현실과 아버지의 뜻
A. 인간 예수의 바람
- 고난의 잔을 피하고 싶으신 예수님
- 십자가의 고난이 침투해 들어온 상태
- 인류의 죄의 크기와 하나님의 징벌
-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함이었음
- 자기사랑에 빠진 우리는 더욱 그러함
- 그러나 여긴 분명한 단서가 있었음
-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42절)
B. 아버지의 뜻대로
- “내 원대로…아버지의 원대로”
- 예수의 고난에 숨겨진 아버지의 뜻
- 한 사람이 순종함, 많은 사람을 구함
-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짐이 존재의 이유임
- 신앙 생활의 갈등은 자기를 포기하지 않음에 있음
- 모든 현실에는 아버지의 뜻이 있음
- 망가진 듯한 현실 속에서도 찬란함
-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
- 현실은 아름다운 변화의 가능성임
- 주의 뜻 드러날 때 더러운 현실은 없다
III. 십자가를 앞둔 기도
- 그 분 기도의 세 가지 요소를 보여줌
- “그들을 떠나 … 무릎 꿇고”(41절)
a. 거룩한 고독 b. 온전한 복종 c. 열렬한 기도
- 힘겹고 두려운 현실을 대하는 자세임
-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는 믿음임
- 그 믿음의 최종적 입증은 간절한 기도임
- 현실에 불만과 회피 말고 대면하라
- 감당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주를 의지함
- 절대의존의 마음을 기도로 표현함
Ⅳ. 적용과 결론
- 현재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라
- 그것은 단순한 포기나 굴복이 아님
- 수납한 현실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으라
- 그 때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임
-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생각하라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5) 가을말씀사경회 2016. 10. 14
< 십자가와 그 살림 >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일 4:9)
I. 본문해설
-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해석
- 화목제물로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
-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 그분의 죽음은 우리를 살게 하시려
II.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A. 독생하신 성자
- “그의 아들 곧 독생자를 보내심은”
- “독생자” monogenes와 삼위일체
- in trinity 성부로부터 낳은 바 됨
- 성부로부터 낳은 바 되신 성자이심
- 성자가 인간의 몸을 빌어 태어나심
B. 이 세상에 보내심
- 성육신하사 예수 그리스도 되심은
a. 하나님을 보여 주심
b. 참 사람을 보여 주심
c. 우리의 죄를 속해 주심
- “그 세상 속으로” eis ton kosmon
- “그 세상”은 살아가는 “인간들”임
- 외딴 곳으로 부르지 않고 직접 오심
C. 십자가에서 죽으심
-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속하심
- “구속”과 “속죄”란 무엇인가?
a. 율법의 정죄로부터 b. 죄와 비참으로부터
-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길을 여심
- 모든 죄를 용서받을 길을 열어 주심
III.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
- 우리를 사랑하심은 우리를 살리려 하심
- “우리가 그를 통해 살게 하시려고”
-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속을 완성하심
- 부활은 신적 생명의 무한한 충만임
-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의 창조의 생명임
- 세상에서 신자는 “살림”의 사람임
-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세상을 보라!
- 그 기운에 삼켜진 채 있을 것인가?
- 그것은 삶이 아니다 살아가지 않기에
- “산다는 것” 자신이 주체된 생활임
-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생명이다
- “살리려 하심” 아닌 “살게 하시려”
Ⅳ. 적용과 결론
-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살게 하시려고
- 단순히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님
- 우리를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시려고
- 산다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우리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게 하시려
- 영혼을 살리시는 주님: 과거+현재
- 산 자가 되어 살리는 사람으로 살자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6) 주일 오전 예배 2016. 10. 16
< 십자가와 그 인내 >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2)
I. 본문해설
- 핍박을 받는 히브리 그리스도인의 서신
- 11장에서 믿음의 위인들을 제시함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 구름 같은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 믿음으로 승리한 자들이 바라본 것
- 승리의 증거의 예표인 예수 그리스도
- 십자가를 지기까지 인내하신 주님
II. 십자가와 그 인내
A. 부끄러움을 참으심
- 성자로서 치욕스러운 십자가를 지심
- 무죄한 분이 죄인으로 여김을 받으심
- 영원한 생명이신 분이 죽임을 당하심
-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 십자가의 고난
B. 기쁨을 위해
- 하나님의 그 기쁨과 예수님의 기쁨
- 그 기쁨은 현재적이 아닌 미래적인 것
- 아버지의 뜻 이 땅에 이뤄지는 기쁨임
- 현실을 직면할 수 있음은 하나님의 기쁨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고난을 당함
- 누구의 기쁨, 무엇을 위한 삶인가?
III. 십자가의 예수를 보라
-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결과를 보라
- 보좌 우편에 앉으심: 안식+왕의 통치
- 십자가를 지는 자: 쉼+다스릴 권세 줌
- 영광의 주님보다 고난의 주님을 보라
a. 예수: 믿음의 대상 b. 예수: 온전케 하심
- 오래 믿어도 변화되지 않는 신자들
- 닮고 본받을 모범이 없기 때문이다
- 십자가의 현재적 체험 속에서 살라
- 예수를 많이 닮음이 가장 큰 복이다
Ⅳ. 적용과 결론
- 십자가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참자
- 신자는 예수님의 뒤를 따른 사람임
- 인내하지 못함으로 그르친 적 많음
- 삶을 직면하고 견딜 수 있는 은혜를 구함
- 모든 고난을 겪으셨기에 우리를 도우심
성도, 십자가의 힘으로 살다 2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 1 (2016.10.1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 2 (2016.10.1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 3 (2016.10.1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 4 (2016.10.13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 5 (2016.10.14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성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다 6 (2016.10.16 주일오전설교)
십자가와 그 지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녹취자: 원수연
I. 본문해설
저는 오늘 이 사경회의 첫 시간에 “십자가와 하나님의 지혜”를 다루고자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신앙의 초보로 여깁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순간에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일단 믿고 나면 이제 그 십자가를 떠나서 그 십자가 이상의 무엇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세계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는 열쇠구멍과 같습니다. 그 구멍으로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왜 창조하시고, 왜 구원하시고, 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마지막에는 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쓴 성경 여러 곳에서 이것을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불렀고 이 십자가는 바로 그 경륜의 방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인간에게 구원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불변하는 방법인 동시에 또한 십자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가 누구이고, 왜 교회가 필요하고, 마지막에 인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위대한 핵심입니다.
조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역사의 질곡 속에서 많은 핍박과 환란을 겪었습니다. 멀게 보면 천주교가 먼저 들어옵니다. 그리고 혹독한 박해를 받습니다. 그리고 개신교가 들어온 이후에도 많은 박해가 이어졌고 특히 일제시대와 남북 상잔(相殘)의 시대를 지내면서 기독교는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사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아예 선교초기서부터 교회는 철저하게 핍박을 받는 속에서 그 연단에 연단을 더하는 가운데 교회가 교회다움을 추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핍박과 고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하여 복음의 진수로 더 깊이 다가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핍박과 일제시대의 박해를 견디게 만들었던 조국교회의 두 기둥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기둥입니다. 하나는 종말 신앙이고 또 하나는 십자가 신앙입니다. 즉 이렇게 모순으로 가득 찬 시대를 살며 공산정권에게 억압을 받고 또 그 이전에는 일제시대의 잔혹한 박해를 받지만, 그러나 이 세상은 곧 떠나가고 주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마지막 날이 온다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 가운데 조국교회에서는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서 역사적 전천년설이 강력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직접 온 세계의 왕이 되어 세상을 통치하시기를 천년동안 계속 하신다는 사상입니다. 이러한 종말사상, “주님의 영광스러운 통치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으니 그분의 통치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자. 그래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자.”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기둥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또 하나가 십자가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살 찢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되었으니 이제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덤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이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이번에는 우리가 예수를 위해서 죽을 차례다.”라는 결연한 고난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 신앙이 저의 기억으로는 최소한 1980년대 초반까지는 있었습니다. 그 후에 갑자기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고, 모든 형편들이 여유 있게 되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의 요인들이 많이 사라지면서 이런 십자가 신앙이 교회에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문제가 많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분파와 분쟁이 있고, 또 교만하고, 부도덕이 있고, 재물을 사랑하는 이러한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첫머리에 인사를 잠깐 한 다음에 제일 먼저 그들에게 상기시킨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이신 그리스도, 그가 우리에게 전해주신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함으로써 이 편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직접 그 분쟁을 다루고, 이기심을 다루고, 부도덕한 문제들을 까발려서 책망하고, 그 문제를 직접 다루는 대신 십자가를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오늘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집을 지을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땅을 파는 일이 아닙니다. 굴착기가 땅을 팔 때에는 이미 모든 설계도가 완성되었고 관청에 허가까지 받은 상태에서 땅을 파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밖에서 보는 사람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건축가는 이미 모든 계획을 짜놓고, 그 계획에 의해서 땅을 파고, H빔을 세우고, 콘크리트를 타설하고 하면서 공사를 진행해갑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빔을 세우는 사람들은 그 일만 합니다. 자기네들이 이렇게 빔을 세우면 어떤 건물이 될지 잘 모릅니다.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사람은 그냥 1입방미터에 얼마씩 돈을 받고 부어달라는 곳에 부어주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건축자는 모든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를 통해서 이런 문제가 많은 고린도교회에 예수를 믿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15장에서는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함으로써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II. 십자가와 하나님의 지혜
그러면서 성경은 십자가와 하나님의 지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헬라인은 여러분이 잘 아는 지혜의 천재들이 폭발적으로 태어나서 철학적인 사유를 했던 족속들입니다. 주전 5세기에서 3세기경의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천재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서 인간이 누구이고, 세계가 무엇이고,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설명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그런 철학적인 사유 속에서 아주 엄정하게 논리가 발달하고 사상이 체계화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그리스 로마뿐만 아니라 이후에 인류의 사고방식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지식, 지혜였습니다.
이에 비해서 당시 유대인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아주 특별한 선민의식을 가지고 헬라인을 비롯한 이방인들을 대했습니다. 그들이 간절히 찾는 것은 지혜와 지식이었지만 그것은 희랍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지혜와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정말 간절히 찾는 것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여주신 아주 기적적인 신비 그리고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초월적인 신비 같은 것들을 추구했습니다. 그것을 오늘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표적은 기적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믿었던 구약성경을 보면 이런 기적의 내용들이 풍부하게 나오고 이것은 바로 유대교가 헬라의 철학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제 3의 족속이 출현합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았는데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은 얼마 전 골고다 언덕에서 나무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미 십자가가 기독교라는 종교의 위대한 상징이 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 사람들의 시대에 이 십자가는 아주 치욕스러운 저주의 상징이었고 어떤 어리석은 종교도 그 말도 안 되는 십자가를 자신의 종교의 상징으로 삼을 생각을 한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그 십자가는 아주 빠른 시간 안에 기독교를 나타내 보여주는 중요한 종교적인 상징이 되었고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도전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한번 시간여행을 한다고 치고 2천년의 시간을 휙 날아가서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던 주후 50, 60년 경 로마시대에 안착해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원래 ‘스타우로스’라고 하는 이 십자가는 막대기라는 뜻이고 로마의 사람들이 변방의 야만족이었던 시절에 고안해 낸 가장 끔찍한 사형방법입니다. 참수하거나 창으로 찔러 죽이거나 아니면 목매달아 죽이는 것은 죽임당하는 그 사람들에게는 너무 호사스러운 죽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나무에 못 박아 매달면 그 온몸이 못 세 개에 지탱하면서 피가 쏟아지고 말할 수 없는 출혈과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함께 느끼면서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은 최고의 고통을 느끼다가 마지막 순간까지 그것을 다 당하고 죽게 하는 것이 십자가 형벌을 고안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니까 목숨이 살아있는 동안은 끊임없이 최고의 고통을 당하게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스타우로스’, ‘십자가’라고 하는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들을 때 가장 불쾌하고 금기시되어 있는 그 단어를 선택해서 어떤 종교의 상징을 삼는다면 그 얘기를 듣는 사람들마다 역겹고 불쾌하고 기분 나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 짧은 시간 안에 이 십자가가 기독교에 대한 상징이 되었을까요? 이 세상에 있는 종교들 중에서 그런 상징을 선택해서 이렇게 빠른 기간 내에 그 종교를 대표하는 상징이 된 종교가 없습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이 십자가가 기독교의 표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 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신학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듣고 보니까 희미하고 모호하던 것들이 아주 또렷하게 떠오르는 겁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무엇이었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실까? 절대자가 존재할까?’ 그랬는데 십자가에 자기 아들을 못 박으신 동기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주셨으니”라고 하는 그 말은 그냥 이 세상에 보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형벌을 당하고 죽음으로써 우리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끔찍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은 즉각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헬라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었습니다. 로마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인간이 누구인지를 정직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죄인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바깥으로부터 오는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고는 죄와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십자가의 설명을 올바르게 듣는 모든 사람들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전에 예수님 믿기 전에 실패한 인생을 살았던 중요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나 자신에 대한 잘못된 평가였습니다. 나 혼자 넉넉히 살 수 있다고 믿었고, 내가 내리는 판단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심지어는 다른 사람도 내 판단에 굴복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복음이 제시되었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보여줄 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는데 왜 그 평화는 없을까? 그리고 왜 사람들은 선을 행하며 살기보다는 악을 행하고 욕망과 욕망이 충돌을 하며 끔찍한 갈등과 전쟁 그리고 끔찍한 살육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이 세상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해내신 하나님은 그 인간들을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십자가를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더 설명 안 해도 되겠죠?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를 통해서 수많은 사실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를 들여다보면서 그 지식이 없기 때문에 인생을 올바르게 살 수 없었던 많은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지식들에 대한 답을 준 것입니다. 14년 2개월 된 아이가 논둑에 엎드려서 통곡을 하면서 울게 만들었던 그 질문, “나는 누구인가?” 십자가는 답해주는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이고 그러나 지금도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셔서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자기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자녀란다.” 그 아이가 그 사실을 올바르게 알았더라면 그 이후에 세월을 그렇게 방황할 필요가 없었겠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두 번째 질문입니다. 답이 나옵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열네 살밖에 안 됐는데도 죽는 건 하나도 안 무서웠습니다. 그 나이 때에도. 사는 게 무서웠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삶에 대한 견해를 가지면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고 그런 깊은 신앙적인 견해가 없어도 하나님이 일반은총 속에서 나이가 들고, 늙게 되고, 죽음이 가까워오면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고 친구처럼 느껴지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되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주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으니까 우리들이 그 죽음을 맞아들이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못 맞아들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같이 살다가 60년쯤 살고 80세쯤 되면 둘 중에 하나 죽어도 배우자가 별로 울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40세쯤 돼서 죽었다, 아니면 연애하는데 죽었다, 그러면 인생 뒤집히겠죠. 왜 저렇게 울지 않을까?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죽음을 친숙하게 받아들여서 준비가 다 된 것입니다. 그게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서 울지 않는 게 아니라 이미 충분히 사랑하지만 그러나 죽음이 오리라고 하는 것을 충분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계가 무엇인가?” 세 번째 질문입니다. 아주 명료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당신의 아름다움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창조한 세상이다. 네 번째 질문은 무엇입니까? “신은 존재하는가?” 당연하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내가 그분을 알 때도 사랑하시고 내가 그분을 전혀 모를 때도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A. 하나님의 지혜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대비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철학적인 지혜는 인간의 진정한 목적,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그리고 이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수많은 담론들을 쏟아냈지만 인간의 지혜로 이 네 가지의 질문에 답한 것은 없습니다. 각자 자기가 어떤 답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문제는 뿌리입니다. 근거가 있는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 혹은 세상의 지혜가, 철학자들이 이런 질문에 대해 답을 추구해 온 역사라고 보고, 이 세상의 지혜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어서 그 지혜를 알고 나면 이 세상의 지혜가 얼마나 미련한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우리들이 많은 일에 있어서 전문가의 견해를 존중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건강을 계속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죠. 내가 월급과 재산이 이 정도인데 내가 90세까지 산다고 칠 때 나는 경제생활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요즘 전문가의 지혜를 많이 받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나는 이렇게 뚱뚱한데 어떻게 날씬한 사람이 될까? 그것도 전문가의 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요즘 너무 전문가를 의지하는 시대입니다. 자녀도 날 때부터 전문가를 찾아서 산부인과 가서 낳고 이 아이를 기르는 것도 전문가에게 의뢰하는 겁니다. 그러면 전문가들이 다 해주면 자기는 하는 일이 뭡니까? 밥 먹고 변보는 일밖에 없잖아요. 그것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장에 문제가 생기고 그러면 변도 잘 생산이 안 됩니다. 그것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면 난 뭡니까? 물건처럼 가만히 있고 모든 걸 전문가들이 와서 다 해줍니다. 그게 좋은 삶일까요? 더욱이 내가 나의 인생에 있어서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마지막에 그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하면서는 별로 발동하지 않던 믿음이 전문가를 향해서는 거의 자기포기적 헌신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런 전문가를 믿고 투자했다가 재산을 날리고 몸이 망가지고 온갖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이 판단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 세상의 지혜와 대비되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뭡니까? 바로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시고,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이시고, 나는 누구이고, 세계는 무엇이고, 인간은 어떤 존재이고, 나는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사도가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지혜라는 게 무슨 뜻이냐면, 십자가 자체가 지혜라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구원하고, 보존하고, 마지막에 완성하시는 모든 하나님의 위대한 세계에 대한 계획이 집약되어 있다는 그 뜻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렇게 생각할 것 아닙니까? “목사님,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난 모든 사람들은 아주 탁월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어야 되는데 왜 별로 그렇지 않습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이 시간에 다 설명드릴 수 없지만 간단하게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이런 것입니다. 누구든지 지금 사는 삶이 너무 만족스럽고 행복한데 예수를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엇인가 불만스럽고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그냥 나는 힘들고 괴롭다는 생각 하나만 가지고 예수를 믿은 사람과 자기가 힘들고 괴롭다는 것은 물론 있고 인생에 많은 의문을 갖는 겁니다. 세계는 뭔가?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그리고 인간은 정말 잠시 머물다가 죽는데 이런 인간의 의미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많이 생각하고 답을 못 내리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탁 답을 들려주는 겁니다. 이럴 때는 불이 확 하고 들어오는 겁니다. 쉽게 얘기하면 질문한 많은 것들이 전구를 매다는 것이었다면 십자가를 탁 들으면서 확 하고 불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천천히가 아니라 한 번에 찬란한 빛이 들어오면서 인간의 역사와 세계, 종말,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사상이 한꺼번에 수립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신앙의 경륜이 깊어가면서 그것도 더 구체화되어가고 훨씬 발전을 했지만 어쨌든 기본적인 것들이 확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것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자신이 알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철학이 추구해온, 그러나 답을 내릴 수 없는 그것에 대해서 심지어는 유대교조차도 그것에 답을 줄 수 없었는데 자기가 핍박하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그분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는 그 순간 찬란한 빛이 비치며 이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자녀들을 교육시킬 때 그런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해서 의문을 갖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탁월한 지혜를 갖는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그 지혜와 지식에서 성장해가도록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입니다. 지혜와 지식, 사랑과 은혜에서 끊임없이 성장해가도록. 그 다음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깨닫고, 내가 정말 쓰레기 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런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이 천국을 준비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가 사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셨더라면 살았을 그 삶을 내가 함께 이루어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더 공부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어렸을 때는 던지지 못했던 질문들을 계속 던져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십자가에 대한 지식으로써 이것들을 연결해가는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 보면 아직 글씨도 못 쓰고 그럴 때 그림책을 보면 점을 연결하라고 그러잖아요. 계속 연결을 하고 나면 코끼리도 나오고 호랑이도 나오고 토끼도 나오고 하잖아요. 그런 식으로 연결해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깨닫는 것이 뭐냐면 ‘아, 정말 놀랍구나!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제가 전도할 때 늘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뭔가 안 해도 되는 어떤 특별한 것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이것입니다.
내가 천애고아로 외롭게 살아갑니다. 언젠가 고향을 떠나왔는데 그 고향도 잊어버렸습니다. 천애고아처럼 외롭게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만나서 그를 사랑하고 그 노인들을 지극정성으로 봉양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는 건 아닙니다. 같은 집에 세 들어 산다는 이유 때문에 이것도 커다란 인연으로 만났으니까 이 불쌍하고 어려운 노인네들을 내가 부모로 공경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자식처럼 진심으로 봉양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고,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부모의 억압이 싫어서 돈 훔쳐가지고 나와서 타향살이를 하면서 성공하면 돌아가겠다고 그러고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느 정도 살만해지고 아이도 낳고 살다보니까 자기 뿌리가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때 부모님의 간섭이 싫어서 내가 뛰쳐나왔지만 그러나 고향이 그립다. 그래서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특별한 일입니까? 어떤 사람은 해야 되고 어떤 사람은 안 해도 되는 일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원래 그렇게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그분을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된 존재였는데 집을 떠난 겁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에 자각이 생기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마땅히 그랬어야 되는데 안 하고 있던 것들을 다시 하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안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예외적인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담긴 이런 신학적인 의미를 아는 지식에서 점점 자라나가지를 않는다면 십자가의 의미는 계속 쪼그라들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십자가에 남는 것은 뭐냐면 지옥 갈 나를 구원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묻고 싶습니다. 구원받은 것이 언제나 감격으로 다가옵니까? 제가 어느 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는데 설교하기 전에 부목사님들과 모여서 같이 식사를 하는데 “목사들이 교회에서 구원, 구원 그러고 외치지만 이 잘 사는 사람들이 많은 분당에서는 구원이 십 원보다 약간 못한 것입니다.” 하찮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 고린도교회의 분쟁하고, 이기심이 많고, 부도덕하고, 이런 문제가 많은 이 교회, 그리고 말하자면 돈 많은 교회인데도 사람들이 물질적인 헌신을 잘 안 합니다. 그러한 추한 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직방으로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인생의 전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님의 경륜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 지혜의 빛으로 너희들이 너희의 인생의 빛을 지켜보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고난을 생각한다면 너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다.” 그 의미를 올바르게 알면 그런 세상의 헛된 것들을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러면서 그 지혜를 알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일생을 간절히 예수를 믿었어도 결국 성도의 인생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배우다가 죽는 것입니다. 다 배우지 못하고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우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 역사에서 수많은 믿음의 위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이유이고 그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의 그 위대한 계획에 입을 다물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십자가를 보면서 감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 혼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지으신 경륜과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이 세상의 현실 그리고 마지막에 이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하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깊이 감격하고 그렇게 자기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다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된 이 놀라운 은총을 찬양할 때 여러분이 삶 전체가 뿌리가 흔들리는 것 같은 이 세상의 많은 염려와 고통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그래서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수만 명을 먹일 때 사람들이 환호를 하며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때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사건을 보면서 예수님의 위대한 능력에 눈을 떴습니다. 그때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남기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종교지도자들의 모함을 받아 나무에 매달려 죽은 힘없는 목수의 아들로 보였지만, 바로 그 골고다 언덕에 서 있는 십자가 하나에서 그 인류의 모든 역사가 달음질쳐 하나의 점으로 모이고, 거기서 또 다른 출발이 이루어져서 새로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펼쳐져 여러분과 같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에 접붙여져 한 몸을 이루어 이 세계를 완성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바로 그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고 거기서 하나님의 위대하고 눈부신 지혜를 발견하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그 지혜의 가치
마지막 두 번째는 그 지혜의 가치입니다. 3대 지혜가 있는데 첫째는 철학적 지혜입니다. 헬라인들이 추구했던 인간의 이성에서 시작해서 이성으로 끝내는 작업인데 이것만으로 인간과 이 세상과 인간의 인생의 의미와 존재의 목적을 규명해내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인간은 세상으로부터 온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도 인간도 원저자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입니다. 어떤 물건을 보고 이게 무엇에 쓰는 물건일까를 확인하려면 그냥 써보면 되는 것도 있지만 원래 그것을 제작한 공장에 가서 무엇에 쓰려고 그 물건을 만드는지를 알아보면 원래 그 물건이 무엇을 위해 쓰이는 물건인지를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대로 사용할 때 가장 그 존재의 가치가 빛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뭐냐면 분별적인 지혜입니다. 원래 이 지혜는 판단력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도덕적인 판단력과 관련이 됩니다. 꼭 도덕적인 것만 관련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물건을 다룰 때 다른 사람보다 판단이 정확합니다. 그 사람도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지혜입니다. 그러나 도덕과 관련될 때는 더 중요합니다. 도덕적인 판단력입니다. 또 하나가 뭐냐면 신령한 분별력입니다.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에 눈뜨고 그 신령한 세계가 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판단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지혜의 빛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고 또 그 관계를 유지하도록 도와줍니다. 첫 번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데 그것은 뭡니까? 예수 믿기 전에 ‘참 내가 나쁜 사람이다.’라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그것은 양심이 자기를 꾸짖는 것이고 혹은 우울증이 자기를 비관적으로 보게 만든 것이고, 어떤 절대자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뼈저리게 아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빛이 들어가야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납니다.
신학교 다니는데 장로교 교단의 신학교가 아닌 곳에, 이단은 아니고 건전한 교단이었습니다. 거기서 강의를 와달라고 그래서 갔습니다. 굉장히 학교도 깍듯하게 대우를 해주고 학생들도 굉장히 은혜로웠습니다. 그런데 종강하는 날 한 여학생이 선물을 하나 주는 겁니다. 그래서 고맙다고 하고 가져왔는데 열어보니까 예수님을 도자기로 만들었는데 십자가에 매달린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쓰는 성물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신학교를 다니는 사람이 판단력이 없는지, 가톨릭 사람이 거기 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굉장히 기분이 나빴습니다. 치워버렸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톨릭 신자를 주는 건 또 아닌 거 같았습니다. 그런 거 섬기라고 주는 거 같고 그래서 부셔버리기에는 또 예수님이고, 왜 이런 선물을 해줘서 나를 이렇게 피곤하게 만드나. 굉장히 비싼 겁니다. 이태리에서 만든 것인데 아주 정교하게 잘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십자가를 보면서 감상에 빠지라고 하나님이 십자가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 그를 믿게 만들어줍니다. 십자가가. 그런데 보십시오. 그 다음에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주님 없이는 못살겠다고 애원하던 사람이 살만해지고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시니까 교만이 오고 마음이 부요해져서 이제는 십자가의 의미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사람이 깊이 회개하고 다시 은혜로 돌아올 때 그 사람 마음에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생각이 없는 회개는 진실한 회개일 수 없습니다. 십자가가 떠오릅니다. 왜? ‘이렇게 반역하고 당신을 떠나고 죄짓고 하나님 앞에 대적하는 이런 인간을 위해서 바로 내가 지금 행하고 있는 이 불순종의 죄 때문에 우리 예수님이 그 모든 것을 짊어지시고 대신 고난을 당하셨구나.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셨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깊이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복음적인 회개입니다. 율법적인 회개는 우리를 온전한 회개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아, 무서워. 이러다가는 하나님께 큰 벌을 받을 거야.’ 그것은 진정한 회개에 이르지 못합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그 사랑에 목이 메어서 다시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사실 때문에 뼈저리게 아파하면서 뉘우치는 그 마음이 바로 회개하는 마음이고 이런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반복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며 살아가게 만드는데 이것을 우리들이 성화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가 그 성화의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철학의 도움이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되지도 않는 철학의 도움을 받으며 자기 인생관을 스스로 결정하고 살아간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믿고 충분히 기댈 수 있는 그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차를 탈 때 항상 안전벨트를 합니다. 그런데 안전벨트를 안 하고 그냥 갑니다. 차가 좀 불안하면 손잡이를 붙듭니다. 이것은 두 팔로 결사적으로 붙들고 매달려봐야 200km밖에 못 견딥니다. ‘쿵’하고 부딪혔을 때. 안전벨트를 안 매고 있으면 그렇게 이를 악물고 붙잡고 있어도 ‘쾅’하고 부딪히면 사람이 차창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전벨트는 설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뭔가 확신을 하고 붙듭니다. 진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진짜 시련을 만나고 더 깊은 인생의 근거를 묻는 질문 앞에서 얼굴이 하얘지는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그런 철학의 도움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 중심에 철학에는 자기를 사랑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없지만 그러나 이 하나님의 지혜의 십자가의 중심에는 바로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나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내려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시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거기 있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이 거기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가 무엇인지를 배우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낮아지심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겸손하게 살아야할지를 배우고, 하나님의 용서를 십자가에서 배워서, 그 십자가로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며 살아가야 되는지 배우게 됩니다. 순결과 사랑과 순정과 모든 것을 이 십자가를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 똑똑하고 책 많이 읽은 사람보다 어린 아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나 같은 죄인을 구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사람이 훨씬 견고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찬양)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그러니까 이 지식이라고 하는 이것은 그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굳게 붙들고 살아가는 순전한 믿음을 우리에게 그 지식이 저절로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4장 2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말입니다. 그 지혜에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성장하라는 것입니다. 그 지혜에서 계속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리석은 그리스도인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를 믿기 위해 구원의 문으로 들어오는 일에만 사용하는 일회용 티켓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가 않고 그 십자가의 도리를 사도 바울도 나중에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입이 다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순교의 때가 가까워올수록 이 십자가를 통해서 바라보는 이 우주에 대한 전망이 아주 웅장해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만약 그때 순교당하지 않고 더 살았더라면 아마 더 위대한 성경의 작품을 남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놀라운 신비가 있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자, 우리는 생각합니다. 왜 이렇게 마음의 정함이 없이 뒤뚱거리면서 불안한 삶을 살아갈까? 그리고 왜 나는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데 여전히 세상을 사랑할까? 자기 사랑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를 믿지만 왜 이렇게 안정감이 없을까? 예전에 그렇게 가슴을 녹였던 복음이 왜 오늘은 나와 별로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십자가로부터 멀어진 그리스도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십자가가 언제나 울려 퍼지는 교회, 그 십자가 때문에 눈물 흘리는 교인들, 그 십자가를 전하고자 하는 마음에 불타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설교자, 그리고 그 십자가를 구현해 살아가는 것을 인생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기독교는 희망이 있습니다. 왜? 누군가 그것을 보면서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열린교회 다니는 어떤 아이가 회심을 하고 집에 가서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엄마, 전도사님이 십자가에 대해서 설교할 때는 하나도 믿어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 선생님이 공과공부 시간에 예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을 당하셨다는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글썽거리실 때 나는 모든 것이 믿어졌어요.”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는 마이크 들고 하는 거대한 캠페인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곳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감격하는 한 사람, 세상은 세상의 지혜를 쫓고 이 세상 사람들은 그 지혜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행복을 찾아서 자신의 목표대로 살아가지만 그러나 인생이 무엇인지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분명히 읽은 사람들, 그 십자가 앞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 세상이 요동쳐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담겨진 세계와 인류를 향한 위대한 경륜을 알기 때문에 “그 뜻 이루어지이다.” 눈물로 고백하며 사는 사람들은 그 모습자체가 위대한 선교의 나팔입니다. 지금 한 구석에서는 누군가 기독교를 욕 먹이고 있지만 어느 한 곳에서는 소문내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유학을 가서 말할 수 없이 방황하다가 예수를 믿게 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됐느냐고 그랬더니 학교에 가서 공부하면서 너무 고통스럽고 회의에 빠져서 사는데, 더 이상 어떻게 공부를 할 수가 없을 정도로 괴로웠는데, 너무 밝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보고 예수를 저절로 믿을 수 있냐고 그랬더니 “목사님, 그 사람들은 달랐어요.” 그게 무슨 뜻이냐면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행복이, 기쁨이, 가득 찬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최고의 선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로부터 멀어진 기독교를 봅니다. 정말 우리가 십자가의 선포를 들으며 내가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온 교회가 눈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하는 적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스도와 십자가 없는 기독교가 오늘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고 있는 현실은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꾸어 설탕이 되고 싶은 사람들임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십자가에 대한 확고한 지식, 그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사라진 대가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이 모이지만 그런 지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방황하며 어리석은 삶을 살아갑니다.
맨 처음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 교회에 와서 회심을 경험하면서 그리고 새가족반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공부하고 목양을 공부하고 예배의 감격을 경험하면서 우리들이 누렸던 그 십자가의 은혜의 감격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해도 눈물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이 모습 자체가 하나님 앞에 너무나 부끄러운 모습이 아닐까요?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던 무지한 우리들이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깨닫게 되었으니 이제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굳게 붙들려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이 가을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와 그 능력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녹취자: 조원정
I. 본문해설
어제 우리는 십자가가 어떻게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그 지혜는 이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신 경륜입니다. 그 경륜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열쇠 구멍과 같은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누구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게 되고 그 지혜를 자신의 것으로 삼음으로써 우리들이 혼란과 어둠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참된 인생의 갈 길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고 여러분에게 증거 하였습니다.
오늘 그 지혜와 함께 짝을 이루며 등장하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두 가지를 나란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현실적인 문제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능력이 없을 때 사람들을 원망하고 사람들과 갈등하고 사람들을 미워하는 문제들이 생겨납니다. 무능력은 남에게도 자원이 없고 자신에게도 그런 자원이 없는 고갈상태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능력이 없는 만큼 우리는 자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지난 몇 해 동안 저의 마음에 커다란 위안을 주는 시간은 쭉 산책을 하고 걷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두 시간씩 세 시간씩 걸으면서 묵상을 하고 참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수술하고 나니까 다리가 아파서 걸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부자유입니다. 능력이 사라지면 자유를 빼앗기게 됩니다. 능력이 있으면 자유롭습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 어떡하든지 남보다 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아주 가깝게 육체적인 능력을 포함해서 지식과 학문을 이해하는 정신적인 능력, 남들이 갖지 않은 물질적인 여유까지 포함해서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너무 궁핍한 상태에서 물질이 생기게 되면 자유롭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사랑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를 앗아가게 됩니다. 참 미묘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앞에 이 문제에 대해서 헷갈린 성경 기록자가 뭐라고 기도합니까? 너무 부자가 되게도 하지 마시고 가난하게도 되지 말게 하십시오. 하고 기도를 하는데 그것도 일면만 맞는 기도가 됩니다. 왜냐하면 부요한 사람이 모두 돈을 사랑하고 영혼의 자유를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가난하다고 해서 영혼이 물질에 대해서 자유로운 것도 아닙니다.
능력을 잃어버린 만큼 자유를 빼앗기게 됩니다. 그 자유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 하기 싫을 때 싫어. 하고 안 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쉬고 싶습니다. 오늘 벌지 않으면 내일 굶습니다. 그러면 나는 노동으로부터 쉼을 얻을 수 있는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일을 해야 합니다. 뼈가 부서져도 일을 해야지 내일 밥을 먹습니다. 여유가 있으면 내가 하고 싶으면 해도 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내가 능력이 있으니까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현 고통은 현실적으로 능력이 없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가정에 대해서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사실은 가정에 많은 문제가 있어도 아버지가 워낙 부자고 자식들에게 너그럽게 해주면 그 상처가 많이 진정이 됩니다. 아버지가 어렸을 때 폭력도 하고 말로 상처도 주었습니다. 가정에 좀 어려움도 있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워낙 부자입니다. 아들 딸 들은 살아보려고 하는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한테 오면 얼마큼 딱 줍니다. 한꺼번에 절대 많이 안 줍니다. 그들이 자유해지면 자기를 의존하지 않을 테니까 적당히 줍니다. 아버지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약간의 자유와 여유를 누립니다. 놀랍게 아버지한테 옛날에 이렇게 한 것이 나에게 상처가 된다고 막 덤벼들고 그러지 않습니다. 두 가지 아버지가 하나도 안 도와주거나 두 번째 자기가 워낙 능력이 있어져서 아버지 같은 사람한테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 그때는 발톱으로 할퀴는 것입니다.
좀 더 넓게 보면 우리의 현실적이 문제는 능력의 문제입니다. 오늘 여러분 많은 문제를 가지고 이 자리에 나아왔지만 가만히 보면 능력이 있으면 대부분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어떻게 우리들이 그런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능력에 대해서 아주 갈망하는 소원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밤에 눕는 순간까지 어떻게 능력을 스스로 가질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고 오늘도 힘쓰고 애쓰고 살아왔습니다. 문제는 그런 능력이 어느 정도 배양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충만한 자유를 주지는 못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단순히 옛날에 내가 죄인의 상태에서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한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교리가 아니라 어떻게 그 십자가가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능력을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을 주체성 있게 영위해 가는가 하는 이 문제를 오늘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려 하는 것입니다.
II. 십자가와 하나님의 지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자들, 구원을 얻도록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신 사람들에게는 그가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그런 인종과 상관없이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입니다.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 하고 나옵니다. 십자가와 하나님의 능력을 다루고 있습니다.
A. 복음의 두 특성: 지혜+능력
복음의 두 특성을 제시하는데 그게 바로 지혜와 능력입니다. 지혜를 어제 말씀 드렸습니다. 능력입니다. 어떻게 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시는지를 우리들이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음으로 최초의 조상이 죄에 빠진 이후 죄는 거대한 쓰나미처럼 온 인류를 삼켜 버렸습니다. 인간만 삼킨 것이 아니라 자연까지 삼켜서 창조 시 원래 있던 아름다움의 대부분을 앗아 가버렸습니다. 그 흔적만 남았는데도 자연의 세계가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우리들은 인간에게서도 종종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추하고 더러운 면만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희미하게 흔적만 남았는데도 그렇게 아름다우니 원래 죄가 밀물처럼 몰려오기 전에 창조하신 이 세계가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 가지고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이끌어 오실 때에 아담이 그를 보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을 했습니다. 그 사랑의 절실하고 열렬함은 죄 가운데 있는 인류의 어떠한 사랑의 고백을 합해도 그 정도에 도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완전한 아름다운 세상에서 완전한 한 여자를 사랑한 것입니다. 그것이 인류 최초의 사회입니다. 만약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이 그렇게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몸에서 태어날 모든 인류가 서로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하면서 살았을 것이고 인류가 지금처럼 온 지구상을 뒤덮어도 그 사랑은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사랑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은 결코 단절적이고 폐쇄적인 사랑이 아닌 개방적이고 공통적인 그런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죄의 힘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죄가 무서운 힘으로 이 세상을 뒤덮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세계를 그 영광을 대부분 걷어 가 버렸고 인간은 영생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가 죽음에 복속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유튜브에 들어 가보면 일본 쓰나미 사태의 생생한 기록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마어마합니다. 멀리서 갑자기 바다의 수평선이 높아지는 느낌이 들더니 불과 몇 분 만에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삽시간에 어마어마한 해일이 일어나면서 도시를 뒤덮으면서 모든 자동차들을 길거리에서 넝마처럼 떠내려 보내는 광경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꼭 그런 방식으로 죄는 세상에 한 번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도 이 세상에서 행하고 있는 위대한 힘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폭력, 파괴, 테러, 살인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순간에 쾌락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끔찍한 일들이 부끄럼 없이 자행되고 있고 명백하게 인간의 도리가 아닌 것이 인간의 본성의 빛으로 봐도 분명한데 그것을 거스르는 동성애를 비롯해서 수많은 난잡하고 추악한 일들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을 나서면 매일매일 다른 사람들의 죄가 주는 두려운 영향력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 시리아 사태나 IS사태 같은 것도 그런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이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에도 어린 아이를 굶겨 죽인 기소된 부모의 이야기를 들었고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들을 때 너무 역겨워서 토할 것 같은 이야기들이 들립니다. 마약을 운반하는데 검색 장비가 너무 첨단화되어서 도저히 통과가 안 되는 것입니다. 제 3세계의 일입니다. 어느 나라에서 아이를 산 다음에 죽여서 내장을 꺼내고 거기다가 집어넣고 꿰매서 자는 아이처럼 위장을 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으로서 그 얘기를 외국에서 들을 때 토할 것 같았습니다. 어떤 돈을 벌기 위해서 서슴없이 그런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끔찍한 일들이 움직이고 있는 힘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서 저렇게 어마어마한 힘이 나오는 것일까? 죄의 힘입니다. 밖에 나가지 말고 작은 공간에 홀로 조용히 앉아 보십시오. 우리는 놀랍게도 아무도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없는데도 우리는 그 속에서도 죄의 힘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이 임시적으로 제사를 드려 죄를 일시적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메시아를 약속했지만 그 죄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결정적으로 끝장내고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하신 이 모든 인류가 당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지으신 인간이 이 목적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할 것인가를 하나님이 생각한 것입니다.
그림으로 표현을 하자면 그렇게 죄와 함께 마귀가 이 세상 인류를 장악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죽음이라는 카드를 가지고 모든 인류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은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그 카드를 가지고 위협하고 때로는 그것만 가진 것이 아니라 당근으로 유혹합니다. 이런 죄를 지으면 너에게 이런 유익과 기쁨을 주마, 성공을 주마. 하고 제시합니다. 헛된 꿈을 크게 품도록 만듭니다. 그 꿈 때문에 사람들을 짓밟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그 힘을 발휘하는데 강력한 힘으로 사람들을 장악해서 감히 그 사슬에서 놓여날 사람들이 없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하나님이 그 얽매인 것에서 풀어주시지 않으면 당신이 구원하고자 하는 백성들을 사슬에서 끌러 주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보여준다고 해서 자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능력으로 그 권세들을 깨트리고 인류들을 마귀의 손에서 구해 궁극적으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고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인류를 강하게 사로잡고 있었던 죄의 지배, 마귀의 권세를 끊어 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그 사건이 사단의 허리뼈를 박살을 내어서 분질러서 뛰어다니던 마귀가 엎드려져서 겨우 기어 다닐 수밖에 없는 제대로 기지도 못하는 그런 존재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등뼈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아작을 내어서 주저앉아서 배밀이로 기어 다니는 처지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부활하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는 사건이 먼저 있어야 했습니다.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 능력으로 하나님이 단숨에 마귀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도입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마귀의 그 힘에 절대적으로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만 그 자유 속으로 들어오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능력을 희랍어로 ‘두나미스’라고 하는데 ‘다이나믹’이라는 말, ‘다이나마이트’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큰 힘입니다. 무엇에도 억압받지 않고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는 큰 하나님의 힘을 동반한 능력입니다. 철학의 힘은 이성을 설득하고 본성에 호소하는 힘이지만 이 능력은 사람들에게 실제적으로 살아갈 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이니까 인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습니다. 무엇엔가 질질 끌려 다니면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오래 살았는데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사는 것도 아닙니다. 매일매일 살아가는데 나의 인생은 아닙니다. 한 번도 자신의 삶에 주체다워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견딜 수 없을 때 그 삶을 포기합니다. 자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않는 것은 인생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기계로 찍어내듯이 이렇게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만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밥을 먹을 수가 있다. 찍혀서 나갑니다. 경쟁 사회 속에서 사니까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그것은 하나의 수단이고 진짜 내가 살고 싶어 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경쟁에서 이겨서 내가 어느 정도 지위나 혹은 어떤 것들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경쟁해서 얻게 되면 혹은 얻으면서도 내가 나이기 때문에 살아갈 어떤 삶이 마음속에 그림이 그려져야 됩니다. 이것은 내가 살아야 할 삶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사는 것이다. 이것은 참 보람이 있다. 그럴 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물질이나 지식, 이 세상에서의 사람들과의 관계, 자아의 상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을 살아가게 할 원동력이 아닙니다.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될 지에 대한 길을 모르는데 그 사람이 돈이 많고 넘치는 건강이 있고 미모가 아름답고 모든 것이 아름다워도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다른 사람에게 이끌리는 인생을 살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돈이 많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얻어 가지려고 달려들겠습니까? 그중에 똑똑한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돈을 그 사람의 재산으로부터 이익을 얻기 위해서 그가 생각지도 않았던 어떤 방향으로 그의 삶을 이끌어가지 않겠습니까? 얼굴이 그림처럼 예쁘다 칩시다. 얼마나 많은 남성들이 대시를 하겠습니까? 결국 자기가 생각지도 않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다고 해서 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논증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느 정도 자유를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을 주체성 있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원래의 자원은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필요한 것이 두 가지입니다. 살길과 살 힘입니다. 살 길이 무엇입니까? 어떤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내가 정말 사람답게 사는 길인가? 하루를 살아도 후회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인가 하는 살 길의 문제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런 질문은 자기 혼자만 주고 받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누가 나는 누구라고 하는 정의를 내릴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결국 관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존재입니다. 홀로 자아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마주보는 관계 속에서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가를 알게 되고 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가족들, 모든 관계들을 보면서 내가 있어야 될 자리가 어디이고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알게 되고 거기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내 인생의 참된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은 나라와 자신, 인간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인생의 참된 가치가 무엇이고 군인으로서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없으니까 별 달고 군복 입고 수없이 해먹고 매일 신문을 도배하고 있는 그런 비리들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무원도 마찬가지이고 성직자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두 개입니다. 살길이 무엇인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의 자원이 우리에게 살 길이 무엇인간에 대해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부러워할 정도로 이 세상의 자원과 권력을 소유하고 있지만 정말 가엾을 정도의 사람을 수시로 봅니다. 그러한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복음이 가르쳐 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문제는 그 길을 따라 길을 알았으면 그 길을 따라 살아야 행복할 것입니다. 때로는 그 길을 따라도 살 힘이 없습니다. 그 살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이 모든 죄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요소들을 하나님이 끝장내시고 실제로 능력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힘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간절히 바라는 것은 행복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열네 살 2개월 된 아이가 논둑에 엎드려져서 한없이 울고 난 다음에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하는 것이 내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무신론을 택한 것입니다. 6년 후에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교회 나온 것이 아니라 무신론자로 살다 보니까 아주 피폐해지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모든 무신론자의 이야기를 다 들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견지하고 있는 그 무신론으로서는 내 인생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마지막 설득 받은 것은 자살하라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나는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다시 무신론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돌아 선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성숙하고 신앙의 지식이 들어가고 나니까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하게 되었지만 그것도 알고 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에게도 행복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행복이 예전에 내가 이 세상에 살 때 추구했던 행복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 능력을 회복하는 것은 곧 인간이 행복을 되찾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에게 참된 진리의 빛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의 살 길이 무엇인가에 하는 것을 보여주셨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떻게 알게 된 살 길을 따라 살 수 있는 힘을 공급받을 수 있을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고 마지막으로 그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심을 마음이 온유한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죄에 사로잡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을 그렇게 완벽한 하나님의 권세로 마귀의 뼈를 아작을 내어서 펄펄 뛰던 그 놈을 땅바닥에 엎드려 거의 기어 다니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마귀의 지배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 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나 어떤 나쁜 상태가 우리를 기다린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신천지에 고유한 화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뭐 힘든 것 있어? 어젯밤 꿈에 당신이 힘들어하는 꿈을 꿨는데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살 힘이 없는 사람들, 살길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솔깃해서 확 쏠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도움을 받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살길도 모르고 살 힘도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저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의지하면 극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다 사기입니다. 무슨 투시? 웃기고 있습니다. 육체의 눈도 안 보여서 안경을 쓰고 다니고 혹은 백내장 수술하는 사람들이 투시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투시입니까? 미국에서 그런 사기극들이 밝혀졌습니다. 목사가 와 가지고 너는 남편의 당뇨병으로 기도하고 있구나. 내가 명하노니 네가 나을지어다. 이 여자는 깜빡 죽는 것입니다. 남편이 당뇨병입니다. 여러 명이 이걸 꼽고 다니면서 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무슨 내용으로 기도하는지를 엿들으러 다닙니다. “자, 스물다섯 번째 H 라인 남편 당뇨병. 오버.” 스물다섯 번째 H 줄을 찾으러 가는 것입니다. 몇 번 당하고 나면 졸도하는 것입니다. 집이고 뭐고 다 팔아서 기꺼이 바칠 용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단이 성업 중입니다. 세상 종말까지 성업일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렇게 구질구질한 삶을 삽니까? 내 인생인데, 하나님 앞에서 내가 살아가는 인생인데 진리의 빛과 성령의 은혜, 목양에서 오는 하나님의 자유, 이런 것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참 사람이 되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런 것들에 현혹되어서 무릎을 꿇습니까? 하나님 앞에 그렇게 무릎을 꿇지 않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무릎을 꿇고 자기를 내장 채 다 뽑아서 쏟아 놓습니까? 구역질나지 않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걸음 두 걸음을 살다가 죽어도 참 살길을 찾고 살 힘을 받아서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뚜벅뚜벅 걷다가 더 이상 기력이 없을 때 거기에 무릎을 꿇고 죽는 것이지 그렇게 구차하게 길 위에서 인생을 사는 삶이, 사람들이 그러면 우리에게 참 살길을 가르쳐 준 복음 진리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느냐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살 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부르짖으며 나는 내 인생에 갈 길을 찾았지만 살아갈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나에게 이런 능력을 줄 분이 없습니다. 무능한 나를 능력 있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주님께 매달리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자신의 인생입니까?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스스로 버리는 행위입니다.
B. 능력은 어떻게 오는가?
그 능력은 어떻게 오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런 사단에 허리뼈를 척추부터 목 아래서부터 꼬리뼈까지 아작을 내어 버리셨습니다. 두려워 할 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밟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꿈을 굉장히 불길한 꿈을 꿨다고 우울한 얼굴로 그러는데 참 할 일 되게 없다. 대부분이 개꿈일 것이고 신령한 꿈이어서 자기가 뭔가 뉘우치고 회개할 것인가에 대해 하나님 앞에 뭘 잘못했는지 반성하고 용서해주십시오. 내가 새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정 안되면 그럴 수 있는 힘이 없으니 나에게 힘을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해서 내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내 인생이 주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하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피를 토하도록 외쳐도 졸다가 다 떠내려 버린 사람들이 개꿈 하나 가슴에 품고 하루 종일 불안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자유로운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점집에 다니는 것은 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회심 안한 어느 점쟁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점을 치러 옵니다. 한 번에 알아봤습니다. “너 예수쟁이지? 네가 오니까 점괘가 안 나온다. XX.” 하면서 욕을 하더니 충격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예수나 잘 믿어. 어차피 너희 예수 믿는 것들은 운명대로 안살아.” 거기서 그리스도인을 발로 밟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게 뭡니까? 내 인생의 무슨 일을 만나든지 결국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나의 인생은 우리 주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아멘. 그게 성도입니다. 성도는 예수를 믿기 시작할 때에도 성도인 증거가 나타나지만 그것보다도 더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죽을 때 어떻게 죽는지를 참 성도인지 아닌지를 압니다. 성도는 다릅니다. 삶을 대하고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다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 큰 능력으로 강력하게 사로잡고 있었던 죄의 원흉인 사단을 그 등뼈를 아작 내어서 거꾸러지게 만드셨을 때에 당신의 큰 능력으로 그렇게 해서 온 세상을 뒤엎은 죄를 쓸어버리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죄를 깨끗이 쓸어버리신 것이 아니라 남겨두셨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단은 거꾸러지고 이미 하나님의 승리는 이루어졌는데 그 승리한 것을 매일매일 성취해나가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악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악과 더불어 싸웁니다. 우리 안에도 죄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죄가 남아 있는 것 때문에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 우리가 살 길이 무엇이고 살 힘이 무엇이고 하는 것을 깨달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을 의지하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주 위대한 경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죄가 남아 있습니다. 때로는 이 죄가 굉장히 커다란 힘을 발휘해서 전혀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도록 나를 뒤흔듭니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자신 안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돈을 모은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새집을 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좋은 화장품을 바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 경치 좋은 곳을 구경하고 다닌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것들이 아무 도움 되지도 않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런 것들을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바뀌어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으며 그 은혜의 힘에 절실하게 목마른 사람이 되어서 주님께서 도와 달라고 하나님이 나에게 현실을 극복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죄 자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에 대한 우리 인간의 올바른 반응을 통해서 그 죄가 없었더라면 우리 인간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가을철이 되면 여러분 독감 예방 주사를 맞습니다. 꼭 맞으십시오. 제가 무슨 제약회사에서 설득당한 것 아니고 경험을 해봤는데 그것을 맞으면 겨울에 독감에 안 걸립니다. 걸려도 비교적 가볍게 넘어갑니다. 그런데 걸려도 한주 동안에는 꼼짝도 못하고 거기에다 장염까지 합병증 오면 2주 동안은 죽다가 살아나야 합니다. 그냥 한 대맞고 말지 얼마 안합니다. 그 백신의 성분이 무엇입니까? 독감 균을 거기에다 집어넣는 것입니다. 집어넣을 때 센 것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약간 약한 것을 집어넣습니다. 독감 균은 독감 균인데 침투해서 들어옵니다. 온 몸이 평화로웠는데 온 몸이 비상경계령을 내립니다. 온 몸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독감 예방 주사 맞을 때에는 건강하고 컨디션 좋을 때 맞는 것입니다. 감기 기운 있고 컨디션 안 좋을 때는 그것은 최악의 상황입니다. 아주 충분히 감기에 걸리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잘 먹어야 합니다. 몸을 잘 관리한 다음에 상태가 괜찮을 때 맞아야 합니다. 이게 들어옵니다. 온 몸에 경계가 일어납니다. 한 일개 중대쯤 침투했는데 일개 사단이 가서 박살을 내는 것입니다. 감기 균이 무엇인지를 파악했습니다. 이겨봤습니다. 자신감이 생기고 어떻게 온몸이 작동해야 하는지를 이놈을 때려눕히고 파악하는 것입니다. 진짜 독감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균이 똑같은 놈이 온 것입니다. 숫자만 다를 뿐이지, 한번 싸워서 이겨 봤으니까 온 몸이 깨어서 한 겨울 동안 그것과 싸워서 이깁니다. 대부분 모든 백신이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 안에 혹은 이 세상에 그냥 있는 죄가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붙들고 그것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것이 내 자유를 앗아 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허리를 아작 내시고 우리 모두가 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믿고 돌아오면 참 자유와 능력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인데 아직까지도 이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이 있다는 현실, 그 갈 길을 모르기 때문에 방황하고 잘못된 길을 가르치고 그 힘의 능력이 없이 살아가는 그래서 불행해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가슴아파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는 나라가 있습니다. 지금 여기 모여 있는 여러분 중에도 아직도 가족이 예수를 믿지 않아 눈물로 기도하고 계신 분들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게 정말 놀라운 은혜입니다. 안 믿는 것이 놀라운 은혜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그렇게 예수 안 믿는 가족을 끌어안고 마음에 깊은 부담을 안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정말 교회에서 열심히 섬기고 사람들에게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아도 명절에 고향에 돌아가면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끊임없이 슬픈 것입니다. 돌아오는 길에서 기차 안에서 혹은 버스 안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그런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의존의 마음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 회심하게 될 때 큰 능력이 그 사람에게 들어오게 됩니다. 처음 우리들이 회심하자마자 은혜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처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만나고 주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그분을 위해서 사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는 순종하기 너무 힘든 것도 없고 버리기에 너무 아까운 것도 없고 사랑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것도 없습니다. 왜입니까? 그에게 임한 은혜의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최초에는 모두 그렇게 하나님이 능력을 주십니다. 그런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체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이후에는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이 능력이 가변적입니다. 그 능력이 자기가 계속 은혜 생활 잘하고 말씀을 깨닫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 마음을 흐트러지지 않고 하나님께 고정하여 살면 이 능력이 계속 늘어납니다. 무슨 어떤 특별한 은사를 받으면 개떡같이 살아도 그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무슨 영적인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사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그런 능력 안에서 자라가면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에 간섭해서 우리를 뒤흔들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5절에서는 경건의 능력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경건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그런 내적인 마음의 품질이 그의 삶을 규율하여 그로 하여금 거룩하고 구별된 생활을 하게 만드는 것을 통틀어서 경건이라 말하고 그것을 움직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과부를 돌보고 고아를 거두는 것, 이런 것들이 경건한 사람들이 즐겨하는 선행입니다. 그것을 능력이라고 표현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경건과 능력을 분리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1970,80,90년대 까지 미국과 캐나다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치던 신사도 운동이 있었습니다. 빈야드(Vineyard) 운동이라고 하는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 운동을 하면서 귀신을 축출하고 영계를 본다고 이야기하고 예언을 한다고 하고 심지어는 자신이 직접 주님께로 지명 받은 사도라고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그 모임을 따라 다녔습니다. 저도 캐나다에 가서 그 집회를 참석하였습니다. 그때에는 신학적인 궁금증 때문에 거기를 갔습니다. 오직 그 일 하나로 갔는데 삼일을 참석하려고 갔는데 더 이상 참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전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막 졸도하고 예배시간에 깔깔 거리고 뒤집어지고 하는데 회개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 운동의 제 2인자 되는 부인이 언론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폭로를 했습니다. 자기 남편이 포르노 광이라고 폭로했습니다. 그 어리석은 사람들은 경건과 능력이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당신 자신의 신적인 능력을 나누어주면 그 사람의 도덕생활이나 경건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 능력이 하나님이 특별히 주셨다는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을 따라다닌다고 본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경건의 능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상한 소리를 내고 사람들에게 행세를 하는 거짓 수작이 아니라 주님을 부족하지만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분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공경하며 삶의 한순간이라도 그분께 드리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그 사랑 속에 능력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다 어마어마한 돈을 다 쓸어 넣는 것입니다. 정통 교회 신자들은 그렇게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돈을 쓸어 넣으면서 심지어 인생을 망치기도 합니다.
바로 이 첫 번째 회심에서 경건의 샘이 터지면서 자신과 세상과 마귀를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샘처럼 솟구쳐 오르는 것입니다. 이 힘에서 나가는 것입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이라도 이러한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때 경건한 사람이 되고 그가 바로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십자가가 악한 영들을 타파했다고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골로새서에서 2장 14절과 15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들을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어두움을 깨뜨립니다. 어두움을 어떻게 깨뜨립니까? 빛 이외에는 어두움을 깨뜨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하나님이 찬란한 빛을 주시고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하는 마귀의 권세를 부서뜨려서 불쌍한 사람의 마음에 빛이 비취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런데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 모든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는 어둠의 능력을 깨뜨리시고 찬란한 빛을 그 마음에 실어 나르십니다. 우리와 같이 하나님 없다고 하는 사람들, 무신론을 선택한 사람들, 자신 안에 욕심대로 사는 것이 인생의 의미라고 믿던 사람들의 그 마음을 깨트려서 어두움을 이기며 살 수 있는 능력을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을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너희는 빛이라고 말합니다. 예전에는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어두웠고 우리와 접촉해서 무엇을 배우는 사람들도 어두움 밖에 배울 것이 없었는데 우리가 이제는 빛을 부름을 받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십자가의 지혜로 그 능력으로 어두움의 권세에서 빛의 나라로 옮기신 것입니다. 우리의 진실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말씀의 찬란한 빛 아래에서 사는 것, 성령의 뜨거운 은혜 아래서 사는 것, 모든 살 길에 대한 지식, 살아갈 힘에 공급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일체의 순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아가길 원하시는 생활입니다.
우리 각자 몸무게가 궁금하면 저울에 올라갑니다. 정확하게 저울은 우리 몸무게를 달아서 지난주보다 많이 먹고 살이 쪘는지 혹은 빠졌는지 달아줍니다. 혹은 건강을 잃을 정도로 몸이 쇠약해진 것이 아닌지 체중계가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숨김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에 무게를 달아줄 저울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 자신을 성찰해야할 필요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한번 깊이 곰곰이 우리 자신을 성찰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본다면 우리는 어떤 상태일까? 정말 자유롭고 가벼운 영혼일까? 하나님을 향해 날아오르기 충분한 영혼일까? 아니면 이 세상의 욕심과 더러운 탐욕들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향해 날아오를 수 없는 무거운 영혼일까? 우리는 달아 보게 됩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 이런 말씀의 빛을 통해 끊임없이 살 길에 대한 빛을 받고 그 살길을 또렷이 알았으면 그 길을 따라서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도록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절실히 필요하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지를 모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그 능력으로 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부자유와 무능은 영적인 은혜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고 우깁니다. 돈만 조금만 잘 번다면, 장가만 간다면, 남편이 좀 더 가정적이 된다면, 내 인생은 정말 힘 있게 내 갈 길을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의 영혼이 소리치고 있습니다.
예전에 그렇게 말씀의 빛 아래 살아가던 것을 행복해 하던 사람들이 오늘날 그 빛 없이도 넉넉히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왜? 그렇게 주체성 있는 사람을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살 힘을 잃어버렸는데도 십자가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갈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까? 반성해 보십시오. 간절히 어린 아이가 엄마한테 떨어져서 아주 간절하게 우는 그런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구해본 적이 있습니까?
영아부 아이들이 12개월까지 자모실에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면 이제 엄마를 떨어져서 드리기 시작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나에게 그게 가능하냐고 묻습니다. 엄마를 떨어져서 아이들이 18개월, 24개월, 이렇게 되는 아이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능하냐고 묻습니다. 가능합니다. 우리 손녀도 예배드립니다. 처음에는 쉽지 않습니다. 처음에 엄마하고 떨어질 때 자지러지는 것입니다. 선생님을 봤을 때 저 여자는 엄마와 나를 떼어놓는 나쁜 사람이라고 새겨집니다. 선생님 사진만 보여줘도 웁니다. 그것을 엄마가 약해서 못합니다. 그런데 어차피 이 아이는 신앙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엄마가 단호하게 기도하면서 내려놓습니다. 4주정도 걸리면 이 아이가 그 공동체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예배드리고 기저귀 차면서 헌금위원도 하고 그럽니다. 뒤뚱뒤뚱 걸어 다니면서 헌금위원도 하고 얼마나 놀랍습니까? 아이가 그렇게 처절하게 영아부 예배실에서 입술이 파랗게 되면서 엄마하고 간절히 부르짖는 것처럼 주님을 찾아본 적이 있습니까?
예배드리고 나가면 하루가 끝나고 나면 그 다음날 하루를 맞이할 때마다 나의 무능을 매일매일 발견하게 됩니다. 내 살길을 알았는데 흐릿해졌습니다. 그 흐릿한 길이라도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기의 아들도 우리의 죄를 위해서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신 하나님 아버지이신데 아들을 십자가의 제물로 값 주고 사신 바 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기위해 능력이 필요합니다. 살아갈 힘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힘을 주십시오. 라고 할 때 아들은 아깝지 않게 널 주었지만 그 은혜는 너무 아깝구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절대로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그러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묵상의 필요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는 삶,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며 이 세상을 사시고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모든 삶의 상황을 해석한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칩니다. 시련이 옵니다. 낙심하고 주저앉으라고 우리의 모든 감각들이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봐라. 하나님은 없다. 너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릴 때마다 우리는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아무 죄가 없이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며 사셨지만 고난의 길을 걸으셨던 예수를 생각하며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고통을 당하면서 주님을 생각합니다. 예수가 그렇게 2000년 전에 죽으신 그 고난이 오늘 나의 마음속에 침투해 들어와서 예수 죽음의 기운이 살아서는 안 될 나를 죽이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기 죽으면서 내안에 예수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고 나면 순종할 수 없던 일에 순종할 힘이 생기고 섬길 수 없었던 우리의 팔과 다리에 섬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주저앉아서 눈을 뜨고 싶지 않고 괴로웠던 우리의 심령에 다시 소망가운데 주님을 향해 살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경회 때 한 번씩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기도 속에서 묵상 속에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항상 그렇게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의 죄를 이기게 하신 그 위대한 능력을 우리의 심령 속에서 현실화시키는 것입니다. 이 능력을 의지하여 살 힘을 얻어 주체성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일생을 자기 인생도 아니고 남의 인생도 아닌 것처럼 의미도 없는 인생을 살다가 삶의 종지부를 찍는 사람들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대답하셔야 할 차례입니다.
십자가와 그 용기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마 27:33-34)
녹취자: 백지영
I. 본문해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남기신 다섯 번째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요한복음 19장 28절에 "내가 목마르다" 하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요한복음 조금씩 이 장면에 대한 묘사가 다릅니다. 그래서 목마르다 하셨고, 또 포도주를 입에 대셨고, 그리고 거절하시고, 또 받으신 후 돌아가셨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태복음은 훨씬 상세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님이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니라."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남기신 다섯 번째 말씀 "내가 목마르다" 이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이 쓸개를 탄 포도주를 십자가에 매달린 채 받으셨으나 그것을 거절하신 예수님의 행동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켜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어떤 십자가의 진리들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II. 포도주를 거절하심
A. 쓸개를 탄 포도주
오늘 우리가 본 이 본문에는 예수님이 포도주를 거절하신 행동이 나타나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제시된 것은 쓸개를 탄 포도주였습니다. 쓸개를 탄 포도주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많은 해석들이 있는데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것은 일종의 진통제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워낙 크니까 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좀 덜어주기 위해서 동정의 표시로서 포도주를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에게 먹여주는 것입니다. 높이 매달려 주기가 어려우니까 스펀지 같은데 해융이라고 하는 곳에 포도주를 잔뜩 머금게 해서 갈대에 꿰어 높이 들어서 그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가 그것을 먹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효과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서 온 몸이 찢어지고 피가 흘게 되면 신체상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타는 것 같은 목마름입니다. 그래서 출혈이 있으면 엄청난 양의 물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포도주는 사람의 목마름을 어느 정도 해갈시켜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 하나 더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진통제의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 크니까 불쌍해서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죄수들에게 사람들이 그런 포도주를 진통제로 먹이는 것을 그냥 동정심을 가지고 로마에서도 허락을 했던 것입니다. 특히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잠언 31장의 6절과 7절의 교훈을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고통 받는 죄수에게 자비를 베푸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게 자에게 줄지어다 그는 마시고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자기의 고통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잠언 31장 6절과 7절 말씀을 자비롭게 실천하는 행동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들은 당시의 율법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들이지만 그 십자가의 고통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죄인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로서 스펀지 같은데 포도주를 적셔서 갈대에 꿰어 높이 들어 그것을 좀 빨아 마시며 목마름을 어느 정도 해갈하고 고통을 진정시킬 수 있도록 그렇게 배려를 하는 관습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쓸개 탄 포도주라고 나오는데, 또 마가복음에는 몰약을 탄 포도주라고 나오고 몰약은 향료입니다. 또 다른 복음서에서는 신포도주라고 나옵니다. 이것을 다 종합해 보면 결국 이 포도주는 포도주 자체를 먹이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여기다 어떤 약을 집어넣어서 최면과 진통의 효과를 주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쓸개를 탄 포도주라고 할 때 어떤 사람들은 아마 동물들의 쓸개를 포도주에 넣어서 몸의 진통을 경감시키는 그런 포도주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몰약을 넣었다고 하니까 아마 거기다 몰약도 더 넣고 다른 것들을 집어넣어서 마지막에 그 포도주의 맛은 아주 쓰면서도 신 그런 맛이 나는 포도주였던 것이 각각 어떤 한 면씩을 각각의 복음서에서 부각시킨 것이 아닐까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쓸개를 탄 포도주라는 이 말이 진짜 쓸개가 아닐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표현방식에 의해서 이 쓸개는 아주 쓴 맛의 대명사입니다. 예를 들어서 "시집살이가 고추처럼 맵지?" 그러면 진짜 고추와 상관이 있는 게 아니라 진짜 혹독하다는 뜻이듯이, 이 쓸개가 그렇게 쓰디쓴 고통과 말하자면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쓸개를 탄 포도주라는 이 표현이 어떤 사람들에 의하면 진짜 동물의 쓸개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아주 쓸개를 탄 것같이 그렇게 견딜 수 없게 쓴 그런 맛을 가진 포도주였을 것이고, 그것을 '쓸개 탄'이라는 형용어구를 넣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하겠습니까? 확실한 것 하나는 이 포도주가 그렇게 목마름을 경감시키고,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서 살이 찢어지고 피가 쏟아지는 그 견딜 수 없는 고통 그것을 경감시켜주는 진통제 내지 마취제 역할을 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의미입니다.
B. 포도주를 거절하심
그 당시에 이 십자가는 대개 가로막대를 미리 세워놓고 세로 막대에 사람을 못 박은 다음 도르래로 묶어서 높이 올려 그래서 이미 서 있는 세로막대에 끼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손에다가 못을 박고 발에다가 못을 박고 그리고 몸무게를 그 못으로 하여금 유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박히는 그 못은 온 몸을 지탱할 수 있을 정도의 대단히 큰 못이어야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손바닥 가운데 못을 박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죄수들의 몸무게 때문에 손가락이 자꾸 찢어지니까 손목에다가 못을 박게 됩니다. 그리고 다리에다도 못을 박고 이렇게 해서 온 몸을 그 십자가에 박힌 못 세 개로 지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그 시대로 건너 띠어서 거기 가서 보거나 혹은 고고학적인 증거를 찾은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렇게 매달아 놓고 그 몸이 떨어질 것 같으면 밧줄로 묶기도 하고 아니면 발밑에다가 조그마한 것으로 받치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죽지 않은 채로 사람이 반쯤 죽어서 떨어지면 곤혹스러운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는 머리 위에 죄인의 명패를 예수님이 다셨습니다.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이 미친 사람 그런 뜻으로 경멸하는 조로 그 명패를 위에다가 단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떠한 마취제나 이런 것 없이 그냥 곧바로 사람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고 최소한 60키로 내지 80키로 정도 되는 그 몸을 못 세 개나 네 개에 지탱하고 온 몸이 아래로 늘어질 때 결국은 계속해서 살이 찢어지고, 그리고 찢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뼈마디 사이에 걸려서 온 체중이 실리는 고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피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잘못하다가 동맥을 건드렸으면 울컥울컥하면서 더 많은 피가 쏟아졌을 것이고 머리가 터지는 것 같은 두통을 느끼면서 타는 듯한 목마름을 느끼고 그러면서 혼절했다 깨어나고 깨어났다가는 혼절하면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예수님은 여섯 시간 만에 돌아가셨지만 어떤 사람들은 삼일씩 안 죽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니 그 고통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인류가 발견해 낸 가장 잔인한 사형제도입니다. 금방 죽게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대 형벌에 의하면 육시가 있습니다. 팔, 다리, 머리 이렇게 신체 부위가 소에다가 매달려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음질치도록 만들어서 확 찢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간입니다. 십자가는 목숨이 붙어있는 순간까지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면서 마지막에 결국은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예수님의 다섯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이 포도주를 거절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는 맛을 보시고는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이 마시려고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수들이 죽고 또 그런 포도주를 먹이는 그런 전통을 경험해 보지 못하셨기 때문에 아마 사람들이 무엇을 묻혀서 올려 보내니까 맛은 보신 것 같습니다. 맛을 보시니까 예수님이 금방 아셨습니다. ‘아, 이것은 십자가에서 매달리는 죄수들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는 진통제가 들어있는 포도주구나.’ 마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이 수술을 하거나 아파서 고통을 당하다가 진통제를 맞아본 사람들은 그 묘미를 알 것입니다. 견딜 수 없습니다. 수술을 하고 온 몸이 아파서 입술을 깨물고 참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와서 진통제를 놓고 가면 3분도 안 되어서 통증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오히려 기분이 좋아집니다. 제가 『인간과 잘 사는 것』이라는 책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진통제의 힘이 컸습니다. 심장의 한쪽을 수술을 하고 마취에서 딱 깨어나니까 줄이 여섯 개가 매달려 있습니다. 그런 모습은 나 자신도 처음 보았습니다. 그런데 산상세미나 원고를 써야 되겠다는 생각이 또렷하게 떠올랐습니다. 처음에는 얼개만 만들어서 휙 던져주었는데, ‘아니다, 이것을 써야 된다.’ 의식이 들자마자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꺼내서 쓰기 시작하고 그리고 퇴원할 때는 거의 완성을 했고 한 삼일 더 있다가 썼습니다. 너무 힘들 때는 진통제를 놓아줍니다. 너무 황홀경에 글이 잘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썼습니다. 진짜 육체는 견딜 수 없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는데 황홀한 시간이었습니다. 진통제를 맞으면. 온전히 몰두해서 그러면서 가장 아픈 첫째 날, 둘째 날 제일 많이 썼습니다.
마시시면 고통이 경감할 텐데 그러면 이 중요한 인류의 구속사건의 마무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분이 하신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가 없다면 거짓말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살을 찢는 고통을 당하시면서 그 고통을 경감시켜 드릴 수 있는 쓸개 탄 몰약을 섞은 그 쓰고 신 포도주를 거절하셨을까요? 수술에서 깨어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한번 모든 것을 견뎌볼까?" 그런데 너무 아파서 못 견디겠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병원에서 주는 진통제의 절반쯤 넘게 먹고 나머지는 안 먹었습니다. 견뎠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여기에 두 가지 답이 있습니다. 우선 첫째,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건이 무엇이냐 하면 마가복음 14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이 빵을 찢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받아먹으라 그리고 먹을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혹은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식후에 이와 같이 또한 잔을 가지고 축사하셔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포도나무에서 난 것은 포도열매나 포도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제 당신이 이후로 포도나 포도주를 마시지 않을 것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포도주를 특별히 혈압이 낮아서 약용으로 드시는 분 있습니다. 혈압이 낮으신 분들은 포도주를 휴대하고 다니셔야 합니다. 가장 훌륭한 응급처치법입니다. 빨리 마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약용으로 먹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도주를 우울한 날 혼자 앉아서 마시지는 않습니다. 있을 수는 있겠지만 대개 기쁜 날 마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신명기 5장과 연결이 됩니다. 신명기 5장에는 나실인의 규례가 나옵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사무엘, 삼손과 같은 사람 하나님 앞에 드리기로 작정이 되어서 주님께 바쳐진 사람입니다. 레위인도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기쁜 날 포도주를 마시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 포도가 음료입니다. 우리에게 물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의 질이 썩 좋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유럽 쪽의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많은 나라에서 나오는 물이 석회석 성분이 아주 많습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느냐 하면 그리스나 로마의 유적들, 그리고 체코나 이런 데를 보면 대리석으로 된 건축물들과 실내 인테리어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정교하게 조각을 해서 예술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석회석, 대리석이 너무나 흔한 돌이기 때문입니다. 대리석도 그렇게 무른 돌입니다. 석회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대리석하면 이태리대리석이 아주 유명합니다. 굉장히 비쌉니다. 좋은 것은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쌉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에는 항상 석회 성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쓴물’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물은 물인데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풍부한 일조량 적은 강수량에서 잘 햇볕을 받으면서 자란 포도를 거두어들여서 그것으로서 즙을 짜서 혹은 포도주를 담가서 그 액체를 마시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주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포도주는 그 당시 사람들도 신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플라톤도 신이 인류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포도주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포도주를 예찬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이야기는 포도주는 일상적인 음료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이 거절하신 그것은 포도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 나오는 나실인의 서원에 자신을 묶은 것입니다. 부모가 죽으면 자식은 당연히 부모를 장사 지내야 합니다. 나실인은 부모가 죽어도 시체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만 구별되어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당신을 나실인의 서원에 묶었다고 하는 것은, 이제 이 순간 너희와 함께 만찬을 베푸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제껏도 나는 주님께 바쳐진 삶을 살았지만 곧 마지막 고난의 때가 오고 이제는 내가 나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께 바쳐야 할 시간이 왔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이 포도주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이 해석을 우리들이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포도주를 거절하신 사건은 당신의 맹세와 관련이 있고, 그분의 최후의 만찬에서의 맹세는 신명기 5장에 나오는 나실인의 서원과 관련된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당신 생애의 마지막을 하나님 앞에 온전한 헌제물로 바치는 바로 그 자기 헌신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받아들이고 나면 도대체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느냐가 궁금해집니다. 이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실 때 그분의 용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을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지금 그분은 마귀에게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단지 도구였을 뿐입니다. 지금 죄 없이 순전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퍼부어 지는 이 무서운 불길과 같은 죽음의 고통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고통이었습니다.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은 우리 구원받을 모든 인간을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 그리고 우리가 당하여야 할 고난의 이유인 죄를 당신 자신의 몸에 짊어지시고 이제 하나님 앞에서 그분은 순결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진 어린양이 되어서 인간의 그 끔찍한 죄를 향한 맹렬한 진노를 한 몸으로 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생애에 언제 예수님이 이런 울부짖음으로 아버지를 부른 적이 있습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런 울부짖음의 탄식을 주님이 쏟아놓으신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인성 안에서 당하시는 그 하나님께로 부터의 버림받음과 고통의 깊이가 얼마나 치열한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분의 온 몸이 찢어졌고, 그리고 이미 골고다 언덕 오르기 전 브라이도리온이라고 하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에서 지독하게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이미 고난을 당하시고 치욕을 당하시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매달리셨습니다. 당신이 온 마음을 다해 돌보고 고쳐주었던 병자들은 없었고 소수의 여인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며 모여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아무 힘이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진리의 말씀을 배우던 사람들, 주린 배를 채우던 벳새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사람들도 다 사라졌습니다. 심지어 당신의 생명처럼 아끼고 돌보던 당신의 제자들도 모두 당신을 버리고 배반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홀로 그 모든 고난을 당하실 때 그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는 포도주를 거절하셨습니다. 마취의 효과를 가져다주어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는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그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를 위해 당하는 나의 고난은 나의 몫이니 내가 다 당하겠노라. 이 고통을 경감시켜 줄 수 있는 어떠한 진통제도 나에게는 필요치 않다." 그렇게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서 그 치열한 고통을 다 당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에게 올바른 인생의 길을 보여주시고 살 힘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사는 것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은혜에서 멀어진 채 살면서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당연히 힘든 것입니다. 모르셨습니까? 주님의 은혜 없이 사는 신자의 삶은 주님 모르고 불신자로 사는 삶 보다 더 힘듭니다. 불신자 시절에는 죽을 수라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다 알고 나니까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살면 힘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름대로 그래도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섬기면서 산다고 칩시다. 그것도 힘들다고 말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그런 사람들과 함께 그런 사람들을 거슬러서 내 안에도 예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나의 자아와 싸우는 그 삶이 왜 안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안 힘들 수 있는 한 길이 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마취제에 취해서 살면 안 힘들 수는 있습니다. 저는 마약주사를 맞아본 적은 없습니다. 맞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다섯 번 정도 맞으면 중독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무엇을 통해서도 그러한 평안과 기쁨, 안식으로 데려가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온갖 쾌락을 누려도 그만큼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는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가서 수면 내시경 할 때 놓아주는 미다졸람이라는 게 있는데 맞으면서 그게 무슨 느낌일지를 집중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미끄러지듯이 잠으로 사르르 데려갑니다. 젊었을 때 그냥 드러눕기만 하면 잠이 오던 시절에는 그런 게 신기하지 않았는데 나이가 들어서 늘 충분한 수면을 취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고나서는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압니다. 그러면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현실을 잊는 것입니다. 편안히. 그렇게 취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맞고 저쪽 병원에서 맞고 하면서 하루에 2백만 원씩 쓰면서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얼마 전에 경찰의 수사를 받고 법의 처벌을 받고 의사들도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방법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그것이 인생을 사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힘들어서 쾌락에 취했는데 그것이 자신이 주체가 된 삶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오늘 목사님 말씀 듣고 보니까 산다는 것이 정말 괴로운 것이네요." 그렇습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고해입니다. 그러니까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살면 나쁜 길을 걸어가니까 하나님이 끊임없이 자갈밭을 놓아서 고통이 그치지 않게 하시니까 괴로운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불순종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지만 신자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순종하고 싶은데 욕망이 그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순종하자니 세상 사랑이 울고, 세상을 사랑하자니 주님 사랑이 흐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말하기를 "둘 사이에서 나의 정신은 찢어지나이다." 그것이 인간의 비참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런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설교를 듣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아, 진짜 인생이 정말 우울하구나."
그러니까 세 가지의 삶이 가능하다고 말씀드렸는데, 취해서 사는 것, 그것은 인생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능력을 개발해서 아침서부터 독한 술을 먹고 코가 거의 삐뚤어져서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기분 좋게 거리를 휘청거리면서 니나노를 부르며 밤까지 지낸다고 합시다. 고통은 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산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런 인생을 우리는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향정신성 약품에 빠져서 자기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현실과 맞설 용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 삶은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동의합니다. 확실히 그것은 삶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입니까? 죽음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러면 한 길은 아닙니다.
또 한 길은 계속 불순종하며 죄 가운데 침체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끊임없이 고통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그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길을 계속 가면서 고통이 없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악인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증거입니다. 악인이 고통을 계속 당하는 것이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가장 훌륭한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길을 가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선에 대한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불순종하면서 가고 악을 행하면서도 살아가는 데도 평안한 게 있으면 될 것입니다.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실제적으로 두 번째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가 그런 길을 가도록 선택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의 인생이 가야 할 길이라고 탁 붙들고 그 길로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길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소명이라고 해서 목사가 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 구원을 통해서 그리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인간을 다시 돌아가게 하시는 그 목적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참된 성도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면 끊임없이 시련과 난관이 부딪치게 됩니다. 주님을 믿어보려고 하면 가족들이 박해를 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아서 가족들의 박해는 없지만 교사나 구역장이라도 한번 해보려고 하는데 자기는 엄청난 희생을 해서 시간도 내고 물질도 바치고 하면서 기도하고 나오는데 구역원들이 안 받쳐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인내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2월 달부터 11월 달 구역장 사표 낼 날만 기다리면서 살아가게 만듭니다. 그리고 많은 고통이 주어집니다. "왜 내가 이러고 살아야 하나? 무슨 월급을 받나?" 집어치우고 싶은데 무엇인가가 나는 붙들어 매고 거기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면 끊임없는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그래도 선택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주님을 섬기기는 하지만 은혜가 모자랍니다. 섬겨보려고 하는데 어려움들이 생기고 오해를 받고 혹은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에워 쌓이고 아니면 자기가 돌보는 영혼들이 자기를 심히 힘겹게 합니다. 그러면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은혜가 넘칩니다. 그러면 말할 수 없는 희열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통해서.
저는 못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도 마라톤 좋아하는 지체들이 있는데 10킬로, 20킬로를 달리고 결승점에 도달했을 때 막 심장이 터질 것 같고 100미터만 더 달리면 쓰러질 것 같은 그때에 그렇게 안 해 본 사람은 전혀 모르는 엔도르핀이 쏟아진다고 합니다. 원래 그런 엔도르핀이 쏟아지는 게 결국은 극점에 도달할 때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기 전에 남은 엔도르핀이 확 쏟아져서 마지막 죽는 순간에 환희에 차서 사람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적인 배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숨이 넘어갈 정도로 그렇게 운동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희열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은혜가 많이 있으면 어떤 마음이 드느냐 하면, 영혼을 섬깁니다. 그런데 지겹게 말을 안 듣습니다. 그래서 하여튼 마음에 고통을 줍니다. 그리고 와서 말씀도 배우고 은혜를 받으라고 하면 말을 안 듣다가 자기가 살다 살다 죽겠으면 6개월, 1년 전의 구역장한테 전화를 해서 자락을 펴고 하소연을 하기 시작합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전화를 붙들고 그렇게 전화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밥 사 먹이고 이야기 들어주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확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은혜가 없었더라면 "아이고, 네가 생겨먹은 게 그렇게 생겼으니까 그렇게 쓰레기같이 살다 죽어라." 그럴 텐데 주님의 은혜가 있으니까 그가 무지한 것도 밉지가 않은 것입니다. 저렇게 무지하니 얼마나 힘들까? 머리가 나쁘면 팔다리가 고생을 합니다. 판단력이 없으니까 온 몸으로 부딪히면서 피투성이가 되면서 겨우겨우 깨달아가고, 자기가 잘못해서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하나님 또 원망합니다. 그런 영혼을 부둥켜안고 기도할 때는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섬길 때, 예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실 때 그 심정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통 속에서 남의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아파할 때 내 안에서 나는 죽고 예수님 사는 것이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까 얘기했듯이 그 고통을 통해서 말할 수 없는 희열이, 은혜가 밀려오고 살을 찢는 것 같은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찢어지듯 열리면서 그런 고난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사랑, 은혜의 세계, 하나님의 자비, 그리고 쓸모없는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육체는 고난을 많이 당해서 쇠합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30대밖에 안 되셨는데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네가 오십도 안 되었거늘"이라고 하였으니, 예수님이 얼마나 고난으로 가득 찬 생애를 사셨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병원을 가서 주사를 맞는데 간호사가 그럽니다. "목사님, 육체를 좀 살살 쓰십시오.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과 정신의 고갈은 더 커다란 건강의 위협을 가져옵니다." 아마 내 얼굴이 굉장히 초췌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내 영혼과 마음은 안 그렇거든요? 아는 척 하지 마시고, 육체가 좀 약한 것은 내가 인정을 하겠고 야단을 쳐도 할 말은 없지만 그러나 영혼은 안 그렇거든요? 고갈 안 됐거든요?"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그래서 그리스도인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삶에 대해 너무 너무 결정적으로 필요한 자세는 자신의 삶의 현실을 대면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가 아니라 삶의 상황이 흙탕물처럼 나를 끌고 가서 내가 장마철의 콸콸 흐르는 하수구의 쓰레기처럼 떠내려가는 사람이 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현실은 우리가 한순간에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성격적으로 심각한 결함이 있습니다. 오늘 내가 12시에 깨달으면 12시 1분에 내가 바뀝니까? 가정에 문제가 있고 금이 갔습니다. 내가 생각을 바꾸면 그게 한 번에 다 해결이 됩니까? 내가 이런 상황 속에 놓여 있는데 이 상황 너무 싫습니다. 1분 안에 이 상황을 탈피해서 다른 상황으로 갈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어차피 나는 현실이라고 하는 이 사태 앞에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용기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 현실을 인정할 때 내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살 길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지만, 실제적으로 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도 내 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바깥에서 주어져야 합니다. 살아가야 할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도 2년이나 10년 좋은 데 시집가고, 사업이 성공하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조건을 붙인 그때가 아니라, 내가 지금 받아들이기 싫은 이 엄연한 현실 속에서 이것을 헤치고 살아가는 것이 나의 삶입니다. 이것이 삶입니다. 그리고 피할 수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집에 가서라도 곰곰이 생각해서 그러면 그렇게 안 하고 피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그래 나는 이 정도 인간밖에 안 된다,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렇게 상처를 받고 내가 여기에 있다, 피투성이가 됐다, 그리고 나는 이미 나와 함께 인생을 출발한 많은 사람들에게 뒤졌다, 그리고 나에게 많은 결함이 있다, 이것을 인정하고 그리고 자신의 현실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갈 각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극단적인 쾌락은 아니더라도 혼미한 정신으로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끊임없이 택하고 그러면서 정리도 되지 않은 생각 속에서 그냥 살아갑니다. 신경질내고, 원망하고, 그리고 못 견디겠으면 한번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대판 부딪혀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사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현실을 대면합니다. 너무 현실이 좋아서, 혹은 현실에 어려움이 있지만 현실을 극복해 갈 수 있는 의지와 힘, 은혜가 너무 커서 '아, 이까짓 것쯤'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삶이 너무 버겁고 힘든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정에서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내 부모의 자식이 아니었다면, 저런 동생이 나에게 없었다면, 저런 남편이 내 남편이 아니었더라면, 저런 여자가 내 아내가 아니었다면, 그때 어려운 일 당했을 때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쓸데없는 시간낭비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이냐는 말씀입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미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우리 부모입니다. 우리 형제입니다. 그리고 교회입니다. 그리고 내 남편이고, 내 아내입니다.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쉬운 길을 걸어가는데 하나님이 왜 나에게는 이렇게 힘든 길을 주시나? 가서 물어보십시오. 그냥 쉽다고 그러는지. 언젠가 설교시간에도 한번 말씀드렸습니다. 강남에 있는 부인들이 동창회로 모여서 서로 남편 자랑을 합니다. 한 사람이 도, 두 번째 사람은 레, 미, 파. 솔, 라, 시, 도, 막 올라갑니다. 서로 부러워합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리듬을 깹니다. "너는 좋겠다. 네 남편이 그렇게 잘하고, 엄청나게 돈도 많이 벌고, 지위도 높고." 그러니까 한숨 푹 쉬면서 말합니다. "그러면 뭐해. 남편은 나를 사랑하지 않은지 오래됐어." 그리고 눈물을 흘립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다시 실토를 합니다. 사실은 나도 그러면서 얘기를 하는데 도, 시, 라, 솔, 파, 미, 레, 도, 마지막에는 모두 울음바다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어낸 것인지 실화인지 모르지만 가능한 실화라고 봅니다. 남자도 똑 같습니다. 모여서 한 사람이 자기는 군대 가서 진짜 편했다고 하면 마지막에 자기는 별 넷하고 똑같이 대우를 받으면서 군대 생활했다고 우깁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야, 너희는 좋았겠다. 나는 진짜 개고생 했다." 그러면 다시 도, 시, 라, 솔, 파, 미, 래, 도, 자기만큼 나라를 위해서 고생한 사람이 없습니다. 다 좋아 보이고 신나보여도 가 보십시오. 거기도 지지고 볶고 비슷한 것입니다.
제가 어느 책에서 한 15년 전에 읽은 이야기인데, 하도 자기가 진 십자가가 너무 무겁다고 하니까 천사가 데리고 월드컵 경기장 수십 배만한 창고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수많은 십자가가 있고, 천사는 말했습니다. “네가 힘들다고 하니까 이것 벗어놓고 네 마음에 드는 것으로 한번 골라보아라.” 그래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이것은 가벼운데 너무 크고, 이것은 작은데 무겁고, 이것은 작고 가벼운데 옹이가 배겨가지고 등뼈를 누르고, 다 벗어놓고 딱 맞은 십자가를 지고 나오는데, 그것이 일평생 네가 지고 온 십자가라고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저는 별로 그렇게 크게 부러워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진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제일 좋다 그런 것도 아닙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저렇게 공부를 잘하니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저렇게 노래를 잘하니 얼마나 좋을까 그런 정도는 부러워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뭐가 그렇게 부럽겠습니까? 그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고도 보면서, 저렇게 웃고 다니지만 저 사람도 속에는 참 힘들고 어려운 십자가가 많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비겁한 것입니다. 뭘 비교를 합니까? 그 사람이 내 인생을 다시 살아줄 것도 아니고 내가 그 사람하고 체인지 되어서 영혼이 바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은 이미 내게 주신 나의 삶을 내가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참 이유를 모르지요. 텔레비전에서 가끔 불치의 병에 걸려서 거의 24시간 돌보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는 그런 아이들을 가진 부모들의 눈물 나는 사연이 나오고 거기에 전화번호가 뜨는 프로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제발 눌러서 돈을 좀 보내십시오. 그렇게 눈물겹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런 장애가 된 자식들이나 남편을 버리고 도망가는 부인들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들은 더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꿋꿋이 버티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공부 많이 한 사람들, 얼굴 예쁜 사람들, 아니면 몸이 튼튼한 사람들 그런 게 아니라,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더 깊은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고통 속에서 어떤 인생의 의미를 찾으면서 사는 사람들이 그것을 모두 견뎌나갑니다. 사랑이 그것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러면 이제 다 탐색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마지막 갈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뜻이 무엇일까 생각되고, 그 길이 너무 힘들고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 길이 정말 어렵고 힘들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자꾸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어떤 진통제를 찾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어떤 진통제나 마취제 같은 것들을 끊임없이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당신 자신이 나실인의 서원에 자신을 묶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이라고 믿으셨습니다. 우리 모든 인류가 지은 죄악들을 당신의 몸에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당하시는 그 죽음을 넘나드는 치열한 고통 속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시면서도 죽어가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품에서 생명을 얻을 수많은 씨앗들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여러분, 시험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을 테스트해보시라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따라서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전혀 예기치 못한 기쁨,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가끔 우리는 믿음이 없을 때 생각합니다. "저렇게 시련과 고통을 당하면서 어떻게 저렇게 기뻐할 수 있을까? 저 사람은 아마 현실감각이 없는 사람인가보다." 아닙니다. 현실과 맞서서 용감하게 살면서도 그러면서도 우리의 인간의 생각으로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시시때때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고통이 있는 곳에는 기쁨이 있을 수 없지만 신령한 세계에서는 거룩한 고통과 함께 신령한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렇게 일생을 눈물과 기도와 헌신 속에서 사셨지만 예수님 자신이 요한복음 8장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아버지가 당신을 기뻐하시고 또 자신이 아버지를 사랑하시면서 동행하는 삶을 사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예전 같았으면 내게 이 현실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 다음에 생각하는 것이 남의 자원을 끌어다가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끌어오는 게 불가능하면 그러면 자신의 자원과 자신이 살아가야 될 삶을 비교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앞에 펼쳐진 삶이 1억 원짜리 빚이라면 자기가 갚을 수 있는 돈은 백만 원도 안 됩니다. 그때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은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혹은 현실을 회피하면서 쾌락이나 마취에 빠져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을 직면해야 하는데, 그 직면하게 용기를 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오늘 설교를 듣고 보니까 나에게는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나는 오늘부터 현실을 직시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지긋지긋하게 고통을 받고 상처를 받은 이 가정, 시집가서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장가가서 분가할 생각만 했는데 그것은 그때 일이고 일단 제가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가정으로부터 어마어마한 무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성격적으로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며 어디가든지 환영받는 성격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 제 탓만은 아닙니다. 저는 너무 상처받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것도 제가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기꺼이 나를 인정하기로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이제 엄청난 짊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망가진 성격을 가진 자기 자신을 짊어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회피하고 그런데 이제는 부딪히면서 자기를 깎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까 자기의 현실을 감당하며 살기 위해서 용기와 힘은 100입니다. 그런데 나한테 가진 것이라고는 10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때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살아가야 되겠는데 제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는 자원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나님과 원수된 나를 하나님과 다시 화목케 하시고 나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에,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이실 그때 주님은 당신의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누리게 하시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나에게 그런 생명과 사랑을 부어주셔서 이 현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달라고 매달릴 때 인생의 산만하게 벌어졌던 나의 관심사가 좍 오그라들며 또렷하게 하나로 꽂히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고 살자. 하나님이 나의 모든 삶의 능력이고 힘이시다. 나는 그분을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된 존재이다." 그러면서 전심으로 그 주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살 길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두 눈은 예지의 총명으로 반짝거리기 시작하고, 마음은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헐떡거리는 마음이 되고, 그리고 의지는 하나님께만 순종하고 그분만 따라 살고자 하는 의욕으로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자존심을 개의치 않고, 그리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겠노라는 마음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놀라운 힘을 주십니다.
지금도 그 얘기할 때면 항상 눈물이 납니다. 고등부를 담당하던 목사님이 자기의 고등부에서의 최근의 은혜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너무 상처뿐인 가정에서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고 그렇게 하면서 상처를 받으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그 상처가 어렸을 때는 상처가 되는데 점점 한 인간으로서 자라서 능력을 갖추게 되면 원한이 된다고 합니다. 그 원한은 상처를 복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 갖추게 될수록 실제적인 원한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만면에 웃음을 띠고 절대로 안 우는 자식들 많이 보았습니다. 그것은 결국은 이 사람들이 얼마나 불효자인지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얼마나 그 상처가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아이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은 아버지 때문에 꼬였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일까요? 그것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인간은 얼마나 비참합니까? 물론 말할 수 없는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가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면하면서 살아오다 보니까 깨달아지는 게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사랑하고 의지하면 그것도 하나님 앞에 보석처럼 빛나는 그 무엇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회심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 아버지가 자기에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불쌍한 영혼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느 한 순간에 생각이 딱 바뀌는 것입니다. 물론 그 후에 계속 은혜 생활을 해 가야지만 이겨나갈 것입니다. 그것은 어차피 필요한 일이고.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되던 여리성과 같은 인생의 문제들을 무너뜨리고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한 순간에 주시는 것입니다. 그 위에 물론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는 단서가 붙지만, 그러나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을 넘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겁하게 자신의 인생의 현실 앞에 정직하게 마주하고, "그래, 이게 나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것이 나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직면한 현실이다. 내가 이렇게 만난 사람들과 함께 내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아멘. 하오나 나는 능력이 없으니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이렇게 하는 대신에 어디서 더 효과 좋은 포도주가 있나, 어디 마취성분이 더 뛰어난 그 진통제가 어디 있나, 그리고 찾아다니면서 자기 인생의 현실 속에서 대면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나쁜 사람 만들고, 그리고 그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망가진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마지막에 절대로 하지 말아야 될 것이 무엇인가 하면 누구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망가졌다는 그런 비겁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짜 인생 찌질이입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묘미는 그러한 속에서 내가 태어났고, 살고, 현실에 놓여있지만, 그러나 여기서도 여전히 나에게 자유가 있고,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나를 이런 상황 속에 두신 이유는 바로 이런 상황을 통해서도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나를 여기에 두셨다고 정직하게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차게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길을 달려가다가 몇 걸음 못가서 혀를 깨물고 죽는 순간이 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내 인생을 내가 주체가 되어서 우리 주님과 함께 살리라고 하는 결단 속에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내가 왜 여기에 있을까? 그렇게 하면서 실의에 빠지고 낙담하는 것은 바보입니다. 현실을 정직하게 인정하십시오. 문제는 그것을 극복하고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주실 때 하나님이 아낄 그 무엇이 남아 있겠습니까? 아들도 주셨는데. 더군다나 주님이 그렇게 능력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힘을 주시면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하는데 왜 안 주시겠습니까?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눈에는 안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인간들은 우리의 한두 가지 단점을 보고 매장해 보고 쓰레기라고 짓밟지만 밟는 그 사람은 더 쓰레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대하시지 않으십니다. 어둠속에서 심지어는 죄를 짓고 홀로 버려져서 흐느껴 우는 신음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리고 그렇게 현실을 살아나갈 수 있는 용기와 위대한 힘이 십자가를 통해 온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포도주를 냉정하게 거절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웁니다. "우리도 우리를 나실인의 서원에 묶자. 우리는 주님께 바쳐진 사람들이다. 내가 무엇을 당하든지 예수와 함께 당하리라. 또 하나는 현실에 직면할 용기를 갖자. 어차피 이것은 남이 살아줄 수 없는 나의 삶이다."
저는 화투를 잘 못 칩니다. 아마 기억을 더듬으면 민화투는 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화투를 하다가 보면 자기가 지게 생겼을 때 방석을 확 들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둑 두다가 지게 생겼으면 확 흩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성이 안 돼 먹은 사람입니다. 끝까지 해서 돈을 내야지, 그리고 졌다고 정직하게 인정을 해야지, 인생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하다하다 안 되니까 '에이 씨' 그리고 화투판은 엎을 수 있지만 인생 판은 엎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엎고 싶어서 '에이 씨' 그러고 나가서 술 먹고 자기 맘대로 미친 짓 하다 돌아옵니다. 돌아오면 화투 그 패 그대로 깔려 있는 것입니다. "너 칠 차례다."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화투는 방석을 들어서 엎을 수 있고 바둑은 지게 생겼으면 계수하기 전에 확 쓸어 엎어버려서 자기가 몇 집 차로 졌는지를 숨길 수 있지만, 인생은 그게 안 됩니다. 여러분이 여태까지 이 정도 나이 먹도록 살아와 보셨으면 그게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처음 젊었을 때는 그런 생각합니다. '에이 씨'하고 확 한번 엎어보는 것입니다. 되느냐 이것입니다. 기껏 한다고 하는 것이 못 엎겠으니까 죽는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동지들 만나서 손목 끊기 클럽 같은 것 만들어서 죽는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손목 끊기 쳐 보십시오. 수없는 사이트가 나옵니다. 이게 뭡니까? 인생이.
"살면 더 행복하고 좋은 일이 있다." 그런 것으로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것이 살도록 부르는 명제입니다. 명령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고, 자신의 양심도 자신에게 명령하는 바입니다. 비겁하게 하지 마십시오. 되지도 않게 자신의 인생을 화투판 엎듯이 엎어보려고 그게 되면 할 사람이 있겠지만 안 됩니다. 화투판은 되지만 인생 판은 뒤집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가 풀어도 마지막에 자기가 풀어야 되는 문제입니다. 그대로 현실을 직면하고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 이 문제는 내가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마취제, 나 싫습니다. 나는 정직하게 예수님처럼 내 인생의 현실을 대면하겠습니다. 내 십자가를 내가 지겠습니다. 예수님 십자가는 내가 못 지지만 내 십자가는 나 이외에 질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차례대로 말씀하십니다. 왜 자기를 부인해야 된다고 합니까? 누구든지 그 십자가를 지기를 싫어하니까. 그러니까 그 지기 싫어하는 자신을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마치 신앙의 세계에서 단물을 빨아먹기 위해서 몰리는 파리 떼들처럼 그렇게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가 있고, 그리고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이 길을 가야겠다고 하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그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용기를 가지십시오. 속된 말 써서 미안합니다. 쫄지 마십시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겁먹지 말고 딱 인생을 대면하십시오. 그리고 있는 문제들 한번 다 꺼내놓아 보십시오. 내 인생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작습니다. 마취제 찾지 말고 정직하게 직면해서 힘들 때마다 예수의 고난을 생각하고 마지막에 최후의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찬송을 부르며 이길 결심을 한다면 하나님이 놀라운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와 그 기도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0-44)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체포되시기 직전의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이것이 아주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기도의 습관을 따라 그렇게 자주 산에 올라가셨기 때문이고 또 제자들도 그렇게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예수께서 나아가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육체적으로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영적인 고난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당신밖에는 질 사람이 없는 이 십자가를 질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던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당신을 배반할 것도 아셨고 또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시던 제자들이 당신을 버려도 홀로 그 고난을 당하시게 될 것도 이미 아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 전 체포되기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생사를 건 기도의 사투를 벌이심으로 당신 자신의 십자가를 감당할 하늘의 능력을 힘입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오는 예수님의 이 고난의 보도를 통해서 어제 말씀드렸던 인간이 현실을 직면하는 문제에 대해서 더 커다란 교훈을 받고 싶어서 이 본문을 택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인생을 살아가면서 매일 매일 우리의 현실과 마주합니다. 그리고 그 현실이 우리의 마음에 썩 드는 날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이 나에게 좋은 현실이어도 내 현실이고 마음에 안 들고 나쁜 현실이어도 내 현실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의 상당히 많은 시간을 내 인생을 마치 내 인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의 인생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좋은 날도 행복하지 않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날은 더더욱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식을 생각해보십시오. 결혼을 해서 핏덩이를 낳았습니다. 엄마든 아빠든 마음속에 그리는 자식의 상이 있습니다. 이 아이가 꼭 대통령이 되기를 모든 부모들이 원하지는 않지만 아이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혼하기 전 연애하면서 마치 남편과 만나면 이런 부부관계가 되어야겠다고 꿈꾸고 그리던 것처럼 뱃속의 아이를 품고 그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면 이 아이가 자라고 이 아이와 함께 살아갈 꿈을 꾸면서 이런 저런 아이에 대한 그림을 그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를 낳고 깨지기 시작합니다. 왜? 엄마가 되는 것이 아주 우아한 줄 알았는데 개고생입니다. 낳기까지도 고생이지만 낳자마자 잠을 잘 수 있나? 먹을 수가 있나? 아픈들 드러누울 수가 있나? 기도할 수 있나?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간신히 넘겼나했는데 둘째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또 간신히 넘겼나했더니 셋째가 태어납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셋은 낳으라는 뜻입니다. 셋째가 태어납니다. 이렇게 보면 영적인 침체가 십년입니다. 십년 후에 극복할 수 있다는 보장이 저절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그렇게 낳아놓고 못 먹고 못 자는 것이 힘들었는데 이것이 조금 크고 나니까 살살 말썽을 부립니다. 이 아이가 좀 더 크고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낫겠지 했는데 또 다른 종류의 말썽을 부리고 이 아이가 사춘기를 지날 때 우리는 같이 사추기를 지납니다.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납니다. 그 다음에 그 아이가 대학을 간다고 난리를 치고 주인이 된 것처럼 고3의 시기를 같이 보냅니다. 그런다고 그 애가 공부를 더 잘하는 것도 아닌데 좋은 대학을 들어가면 자기 머리가 좋은 것이고 별로인 데를 들어가면 엄마 아빠가 써포트를 안 해서 그런 데 들어갔다고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들어갑니다. 졸업을 했는데 취직이 안 됩니다. 취직은 하는데 연애를 못합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는데 시집을 가지 못하고 장가를 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억지로 권사님들에게 광고를 하고 해서 붙여줘서 그래서 어떻게 통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사니 못사니 합니다. 그러다가 어쩌다가 잘 붙이고 사는가? 했더니 애를 턱 낳아놓는 것입니다. 만날 가서 밥 해주고 빨래 해주고 거기에 발목이 잡힙니다. 이제는 자유하려나 했더니 둘째가 태어납니다. 그런데 그래도 힘든데 그 아이들을 보는 즐거움에 봅니다. 이제 중학교에 들어가더니 할머니는 싫다는 것입니다.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자식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너무 속상하고 괴로울 때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잘나도 내 새끼 못나도 내 새끼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인생에 적용시켜 보십시오. 여러분이 제대로 된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대해본적이 있습니까? 자식도 우리의 인생 속에서 만나는 한 관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가지는 것은 새끼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가지는 것보다 더 큰일입니다. 그러면 왜 그 사랑이 많은 엄마 아빠가 자기 자식에 대해서는 잘나도 내 새끼 못나도 내 새끼 그러면서 운명적으로 그자식이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는 왜 못하느냐? 그것은 인생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어서 그럽니다. 그리고 인생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나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현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마음에 드는 현실도 만나고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도 만납니다. 그럴 때 누구든지 마음에 드는 현실은 머무르고 싶은 순간들이고 마음에 안 드는 현실은 만나고 싶지 않은 시간들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둘은 우리가 만나고 싶어 하든지 만나고 싶지 않든지 그냥 밀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내가 현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현실이 나를 선택한 것같이 그렇게 우리에게 커다란 힘으로 다가와서 우리가 회피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것을 극복하며 나아가는 길이 무엇이냐 하면 믿음인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현실 속에서 그것이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 하고 인생을 생각하면 90까지 살아도 ‘혹시나’ 하고 살다가 ‘역시나’ 하며 숨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Ⅱ. 현실과 아버지의 뜻
그래서 현실과 아버지의 뜻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 현실 속에서 어차피 내게 좋은 현실이 오든 내가 직면하기 싫은 현실에 내게 오든지간에 그 현실과 마주하면서 어차피 그것은 현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가야합니다. 왜 살아가야한다고 했습니까? 살아있으니까 살아야합니다. 그것들을 헤쳐 나가는 그 열쇠가 무엇이냐 하면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합니다. 그것을 연결 짓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현실이 내 마음대로 전개될 때에 아버지의 뜻을 깨달으면 돈을 좀 번다고, 인기 있다고, 지위가 올라간다고 까불고 교만할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이 지위에 왜 올리셨을까?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사업이 잘되어서 이렇게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혹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남보다 훨씬 여유 있는 경제력을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이 남보다 10배 더 좋은 것을 먹으라고 그리고 10배 더 호화로운 삶을 살라고 주셨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잘 되는 현실 속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내 마음에 드는 현실 속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우리의 부나 성공에 대해서는 우리의 번영 우리의 뜻대로 되는 이 모든 것을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쿨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런 객관성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때에 부자들의 경험에 의하면 자기 돈이 자기 돈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절대로 돈을 벌지 못한답니다. 자기의 돈이 남의 돈처럼 보일 때 그때에 돈이 굴러가면서 돈을 번답니다. 이것은 경험담이 아니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지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에도 정부의 고위직에 계셨던 분이 이야기한 것입니다. 싫다고 싫다고 하니까 나중에 안 되니까 대통령이 직접 부르더랍니다. 아니 전화를 했다나봅니다. ‘아니 새 정부에서 일을 해보자는데 뭐 그리 비싸게 구십니까?’ 야단을 치더랍니다. 그런데 한번 올라가 보려고 막 애쓰는 사람은 부장까지는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구름을 타듯이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도 경험담은 아닙니다.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볼 때 교만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안 됩니다. 안될 때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잘 묻지 않습니다. ‘에이 씨’ 열심히 기도하면 뒤집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마치 열렬히 기도해서 현실이라는 화투판을 확 뒤엎어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수없이 시험을 해봐도 잘 안 일어납니다. 왜?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마음을 우리가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됩디까? 화투를 치다가는 확 엎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생이 담요를 휘두르듯이 뒤집어엎으면 판이 ‘에이 씨 할 수 없다. 다시 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해주더냐는 것입니다. 안됩니다. 그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안합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너무 힘이 듭니다. 믿음이 없이 하려니까 힘든 것입니다. 안될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거기서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현실에 대해서 우리들이 승리할 수 있는 길입니다.
A. 인간 예수의 바람
그러면 오늘 여기서 인간 예수의 바람이 나옵니다. 인간 예수님이 무엇을 바라셨습니까?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잔이 무엇입니까? 복음서에서 이 잔은 죽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나라의 왕이 되실 때에 높은 자리에 자신의 자식을 임명해달라는 사람에게 뭐라고 이야기 하십니까? “그것은 아버지께서 정하시는 것이지만 너희들이 진정으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물으십니다. 그 잔은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이 잔은 죽음입니다. 그 죽음을 왜 잔으로 묘사하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찾아봐도 뚜렷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 잔은 무엇이냐 하면 내 앞에 주어져서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잔입니다. 유추해볼 수는 있습니다. 우리들이 잔을 줄 때 그냥 아무것이나 주워서 마시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귀한 손님 앞에는 잔치자리 혹은 어떤 예식자리에서 하나씩 잔을 갖다 주고 주인이 거기에 포도주를 따라주는 것입니다. 혹은 하인이 주인을 대신해서 따라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포도주입니다. 그것을 먹고 한 모금 더 먹고 싶다고 옆에 사람 것을 빼앗아 먹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잔을 받았는데 슬며시 바닥에 부어버리는 것도 주인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필연을 나타내는 하나의 의미로써 이 잔이 등장합니다. 죽음과 관련해서 나타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서의 말씀에서도 분명합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것을 먹을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나누어준 피잔, 앞으로도 제자들이 마시게 될 그 피잔이 결국은 당신 자신이 지실 십자가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흘리실 보혈로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그 필연성 그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인간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셨고, 예수님은 이중인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 하나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인성을 입으셨기 때문에 사람으로서 죄인이 아닌 한 완전한 인간 그러나 동시에 소멸할 육체를 빌려 입은 연약한 인간성으로서 가지시는 소망과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그 바람은 고난의 잔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육체의 생명에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더 큰 것은 영적으로 우리 모든 구원받은 인류가 지은 죄의 값을 짊어지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으시고 아버지와의 거의 단절을 경험할 것 같은 그런 무서운 심판에 직면해야하고 그것이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를 깨뜨리는 무서운 고난을 동반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참인간성을 가지신 예수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자신이 마셔야할 이 고난의 잔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으셨던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셨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셨지만 순전하게 하나님 아버지만을 사랑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육체를 가지셨기 때문에 그 육체의 고난의 잔을 피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더욱이 자기 사랑과 결별할 수 없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런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면하고 싶으셨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분적으로 예수님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현실,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어 쏟아지기까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매달리시면서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죽어 하나님의 진노를 한 번에 받으셔야할 그것을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으셨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이야기는 그냥 마치 소 잡아먹은 귀신이 죽은 것처럼 엎드려서 그냥 미련하게 두들기면 맞고 밟으면 밟히면서 운명론적으로 현실에 지배받는 자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한 현실에 대한 소원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럽니까?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 죽음이라는 이 잔을 내가 마셔야할 하나님의 이 진노의 잔을 내가 지나치게 해주시옵소서. 구약의 잔을 진노로 표현하는 구약의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어느 정도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잔을 내가 피하게 해주십시오. 그것은 예수님의 현실에 대한 생각이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현실에 대한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해서 그냥 현실이 밟으면 밟힌다는 생각을 가지고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이 그렇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명백하게 ‘이 현실은 내가 원하는 현실이 아니다 이렇게 내가 현실에 지고 그리고 패배하고 또 패배를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가족들과의 관계도 힘들도 깨지고 그리고 가는 곳마다 이렇게 내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행복을 주기보다는 고통을 주고 나 자신도 고통을 받으며 사는 이런 현실은 아니다.’ 아니면 또 일반적인 축복의 견지에서 보자면 ‘나는 이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원한다.’ 왜입니까? 우리가 결핍한 것은 결핍한 것만큼 부자유합니다. 그것은 현실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들이 현실을 직면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이야기는 거기에 굴복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는 이런 현실이 싫습니다.’ 아니면 ‘나는 이것보다 좀 더 나은 현실을 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렇게 바뀌었으면 좋겠고 이 상황은 이 상황이 아니라 저런 상황이었으면 좋겠다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마땅히 감당해야할 것 같은 어떤 어려움도 ‘하나님 이것을 할 수만 있으면 피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라고 우리는 소원을 가질 수도 있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무엇을 원하느냐보다 훨씬 더 중요한 상위의 가치에 통제를 받아야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먼저 말씀하십니다.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런데 예수님 자신도 이 잔을 마시고 당신이 죽어야지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모르셨습니까?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느니라” 이미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오시기전 수많은 말씀 속에서 당신의 죽음을 필연적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물론 그 필연은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필연이 아니라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당신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자원하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한다는 것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의 뜻이거든”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한 인간 예수가 소리치는 것입니다. ‘이 고통은 정말 싫다. 이렇게 그 온몸이 짓이겨지는 끔찍한 육체의 죽음과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퍼부어지는 이 어마어마한 진노를 나는 감당하기가 너무 두렵고 힘겹다.’ 라는 것이 예수님의 인성의 외침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느 때까지 내 상황을 이렇게 두시겠습니까?’ 하면서 이 현실에 대한 개선을 그리고 이 현실에 대한 새로운 변화를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 현실이 우리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로 우리들이 나아가야한다는 절박감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내가 이 잔이 싫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뜻을 바꾸시오.” 이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표현은 하지 않지만 삶의 많은 순간에 그렇게 그런 태도로 하나님 앞에 오리발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신앙생활을 해도 뭔가 자꾸 어긋나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셔도 그 은혜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낭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소리칩니다. 그런데 예수님 마음속에 있는 또렷한 생각은
(찬양)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이다
B. 아버지의 뜻대로
그것이 예수님의 인성의 소원을 통제하고 있는 높은 차원의 통제력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예수님도 믿음으로 사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죽으실 때 남기신 기도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당신께 부탁하나이다.” 그러면서 죽으십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분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대로”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두 개의 소원이 충돌할 때 그때 주님은 “나의 소원을 무시하시고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성은 그 무서운 고난을 바라보시면서 그러면서 슬퍼하지만, 두려워하지만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는 더 큰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확신이 아버지의 뜻이 우선이라는 고백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불순종하고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처럼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으로 말하자면 정말 이 잔을 마셔야하는 현실이 힘겨운 현실이었지만 자신의 순종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면 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알게 계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인성의 소리치는 소리를 한 단서 안에 가두셨습니다.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그러니까 이 기도는 자기를 미친 듯이 내세우는 기도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과정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대부분의 갈등은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자기를 다 포기하고 그리고 나의 인생의 참 기쁨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라는 고백 속에서 살게 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의 대부분의 갈등은 종식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저는 만족합니다.’ 라고 고백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삶 전체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한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날 때 일어나는 현상 중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총론 중에 고백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날 때 중요한 현상 중에 하나는 총론적인 고백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주님 영광을 받으소서. 제 인생은 주님의 것입니다. 거룩하고 존귀하신 하나님 주의 뜻 이루어지이다.’ 그런 고백에 스스로 만족하고 하위의 삶이 그 일에 구체적으로 복종하지 않을 때 그게 오히려 자신을 주님께 드린다는 이 고백은 면피성 발언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뜻은 우리가 절대로 행할 수 없는 먼 이상형의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현실에는 아버지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있으셔서 우리의 현실을 망가뜨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 것이고 그리고 모든 나쁜 것은 우리의 잘못 때문에 된 것이거나 혹은 나 자신과 직접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인류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깨진데서 오는 비참한 결과들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 직면하여 고통을 받을 때 마치 하나님이 자신의 현실을 망가뜨린 주범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내가 오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당신을 용서해줍니다.’ 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의 심리 속에 다 있는데 차마 표현하지 않고 있던 말을 여러분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집에 가서 깊은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너무 힘든 현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어떠한 죄와 불순종, 나 아닌 나와 함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이 인간과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지체들과 그리고 또한 성육신적 연합 안에서 모든 인류와 공유하고 있는 인류적인 연합 안에서 이루어진 죄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이것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렇게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악과 잘못도 나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지 않습니다. 진짜 은혜를 받고 진리의 빛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됩니까? 너무 싫은 것입니다. ‘내가 왜 이런 현실에 있어야 돼!’ 그런데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 현실을 주신 하나님을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자기 아래에 있는 것 같습니다. 더 높은 데서 ‘제가 오늘 용서를 받았습니다. 제가 당신을 이해해드리겠습니다. 용서해드리겠습니다. 양해합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십시오.’ 그런데 인생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이렇게 부분적으로 수정되는 것이 아니라 판 자체가 바뀌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현실에 어떤 좋은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일반적이든 혹은 일반적이 아니든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보시면 나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의 불의와 죄 때문이고 혹은 나 자신의 그것들 때문에 온 결과들입니다. 그래서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할 책임과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책임을 인정하는 것, 현실을 인정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짓밟아 노예로 만드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거기에서 그것을 딛고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길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렇게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결국은 무엇을 깨닫느냐하면 자신이 그 길을 모르는 자신의 지혜의 한계를 깨닫게 되고 혹시 그 길을 안다고 하더라도 살 힘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능력의 한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뿐만 아니라 이런 현실 자체를 내가 직면할 용기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지혜, 그 능력, 그 용기 이 모든 것들은 다시 주님께로부터 와야지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의 놀라운 지혜를 주셔서 살 길을 보여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살 능력을 주십니다. 현실을 대면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겁쟁이로 살다가 그러다가 그 현실을 보면서 쫄지 않을 수 있는 담대한 용기를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런 것을 주실 때는 우리들을 데려가시려고 하는 어떤 궁극적인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어르고 달래고 해가지고 우리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그 지혜를 우리에게 눈을 떠서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 현실을 대면할 수 있는 담대한 용기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똑같이 우리도 거기에 우리의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이 바로 그 지혜, 그 능력, 그 용기를 힘입어서 그것을 뛰어넘어서 현실과 마주보면서 살아가야합니다. 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상식 안에서 일하신다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나의 현실이 수십만 대군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어오는데 나 혼자입니다. 그래서 그 지혜와 능력과 용기를 얻어서 그리고 ‘주여’ 그리고 나가면 나 한사람이 머리통을 내밀고 받아버렸는데 수십만이 피를 흘리면서 쓰러질 꿈을 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꼭 그렇게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도 오랜 세월을 지나고 반복해서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마치 그것이 내가 생생하게 현실에서 경험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한 성도가 꿈을 꾸는데 시커먼 군대들에 쫓겨서 산 위로 도망을 갔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군대들이 쫒아오고 자기는 혈혈단신으로 지금 도망을 가는데 더 도망을 치고 싶은데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에 서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커먼 군대가 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죽었다 생각하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벌리고 “주여” 그리고 저 시커먼 군대에 짓밟혀죽느니 하면서 허공을 향해 “주여” 하며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감은 것입니다. 눈을 감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만약에 300미터 벼랑으로 몸을 던지고 아래는 바위가 가득 있는 곳에 몸을 던진다면 눈을 똑바로 뜨고 떨어질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눈을 감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천국이겠지 그랬는데 하나님이 날개를 달아주셨답니다. 그리고 그 천길만길 되는 계곡 위에서 유유히 나르며 그 건너편 계곡을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꿈속에서도 상상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인간의 모든 지혜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길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신비한 방법으로 역사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이 예화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방법은 무엇이냐 하면 항상 하나님이 우리의 현실을 극복하게 하는 방법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랑이 예기치 않게 찾아오듯이 그렇게 예상할 수 없게 찾아옵니다. 그래서 쓰러질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우리를 일으키시고 그리고 짓밟힐 수밖에 없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을 밟고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경험하고 나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놀라운 경외심에 사로잡혀서
(찬양)
주 여호와는 광대하시도다 찬양할지어다
온 땅과 하늘위에 높으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예전에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던 그런 계단을 뛰어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1년 전 혹은 6개월 전의 자신을 무릎을 꿇게 해놓고 타일러주고 싶을 정도로 자신이 신앙의 키가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바라보는 지혜의 키가 성장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제가 요새는 육체가 연약해지니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 것은 아닌데 그런데 어쨌든 약해지니까 제일 손해 보는 것은 공부하는 시간을 자꾸 손해 보는 것입니다. 정말 열심히 공부할 때 거의 늘 그랬지만 교육관에서 어떤 때는 밤 12시 어떤 때는 1시까지 공부를 하면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는 내려옵니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마지막으로 문을 잠그고 길 위에 딱 서면 겨울에는 바람이 불면 하늘을 봅니다. 도시니까 아주 맑은 날이 아니고는 별이 초롱초롱하지는 않습니다. 하늘을 봅니다. 운 좋은 날이면 몇 개의 별을 볼 수 있습니다. 혹은 그렇게 9시나 10시쯤에 공부를 마치고 대공원을 갔습니다. 호수를 혼자서 뚜벅뚜벅 걸어가면 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는 별을 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 자신의 키가 한 키쯤 큰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1년 전 혹은 6개월 전에 내가 스스로 답을 주지 못했던 그래서 인생을 너무 힘겹게 살았던 내 자신을 가엾게 여기며 힘내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네가 지금 눈물을 뚝뚝 흘리며 괴로워하는 것은 잠깐 지나가는 것이라고, 그리고 괴로워하고 밤잠을 뒤척이는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은 다른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시겠지만 제가 누렸던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은총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매일 매일의 아주 작은 배움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만들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고, 나는 자신의 뜻을 꺾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피 흘리는 결투를 해야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시는 것 같지만 사실 결정적으로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감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 때문에 자기의 뜻을 기꺼이 포기하게끔 그렇게 마음을 녹이시는 것입니다.
(찬양)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그래서 되게 얻어맞고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주님의 뜻 앞에 무릎을 꿇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다 다릅니다. 이것은 편지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꽃 편지지가 주어집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신문용지 같은 것이 주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A4 복사용지 같은 용지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다른 편지지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우리는 그 편지지에 우리의 삶을 써내려가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에이씨, 주님이 나에게 사랑의 편지를 받고 싶으시다면서 쟤는 꽃 편지지를 주고 나는 신문용지를 주는 거야.”라고 이야기를 해봐야 시험지는 이미 종이는 다 줍니다. 쟤는 꽃 편지지 같이 보이지만 가보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냥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만약에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연인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꽃 편지지에 되지도 않는 거짓부렁을 써서 제가 책을 쓰던지 글을 쓰든지 제일 싫어하는 것이 과장입니다. 과장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런 과장으로 꽉 찼습니다. 읽어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쭈글쭈글한 시험지에 쓰다가 잘못 써서 침을 붙여서 지우는데 너무 열심히 지우느라고 구멍이 뚫어졌습니다. 옆에다가 동그라미를 긋고 작대기를 긋고 이것은 이것이라고 또 씁니다. 그런데 까맣게 가득 채운 것입니다. 그것을 읽으면서 눈물이 납니다. 왜? 그 속에는 진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삶이라는 눈물에 젖은 편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느 편지를 보고 감동을 받으시겠습니까?
금수저, 흙수저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한번 말해볼까요? 금수저 타고 났습니까? 금수저로 온갖 맛있는 것을 먹고 자기 입에 쑤셔 넣어서 김정은처럼 돼지가 되었다고 칩시다. 그것이 아름다운 삶입니까? 흙수저? 흙수저입니다. 그것으로 죽이라도 떠서 죽도 못 먹는 사람의 입에 넣어서 그가 배부를 때 기뻐하고 좋아하고 그리고 너에게 희망이 있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흙수저가 멋있는 삶입니까? 멋있는 삶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은 바로 당신이 직면하기 힘들다고 소리치는 이 인성의 외침 앞에서 ‘아버지의 뜻대로’를 외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모든 현실에는 아버지의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망가진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하나님이 그런 속에서 상처받고 자란 자신을 사용하셔서 꼭 그런 사람들을 위로하고 힘주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을 봅니다. 내게 일어난 모든 나쁜 일 심지어는 어떤 때는 우리가 이미 지은 죄까지도 되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힘으로 돌려놓을 수 없는 이미 주어진 일을 가지고 후회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도전입니다. 그리고 내게 일어난 모든 나쁘고 힘겨운 현실도 하나님이 아주 좋게 사용하십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문제는 우리 인생을 어느 구간에서 잘라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 우리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믿음의 사람 요셉이야기를 해봅시다. 자기는 그렇게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고 마지막에는 자기를 팔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한테는 아버지의 아들이 짐승에게 뜯겨서 죽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피 흘린 옷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라면 그 현실을 “아멘 할렐루야! 아!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국무총리로 만드시기 위한 것이야.” 미리 모범답안을 본 것입니다. 그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히브리 종으로 팔려가서 그 나라 종도 비참한 대우를 받았을 텐데 히브리 사람의 종으로 팔려갔으니 사람대접을 받았겠습니까?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보디발의 집을 섬기고 밤에는 형들을 죽일 칼을 갈았다고 칩시다. 복수에 성공했겠습니까? 성공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자살 폭탄 테러하는 것처럼 집에 가서 그 자식들을 다 찔러죽이고 처자식이고 뭐고 다 죽여 버리고 마지막에 자기 자신도 너무 괴로우니까 죽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왜? 형들을 모두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후의 일입니다. 내가 늘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상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끈이 그 비참하게 나락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인생을 끌어올렸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그것입니다. 마지막에 정리가 된 다음에 두려워하는 형들 앞에 고백합니다. “당신들은 나에게 악을 행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나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야기합니다. 인류를 구원하고 그들을 살리려고 하나님이 자기를 그곳에 보내어 그렇게 하나님이 높은 자리에 올리셨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명료하게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것은 아직 잘 모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들이 시련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은 명료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살려면 이렇게 인정하기 싫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내가 그 지혜, 그 능력, 그 용기를 가지고 현실을 대면하면서 살면 어떻게 나의 인생이 항해를 하고 그 길이 전개될지는 모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계시는 공표된 뜻이고 섭리는 삶이 전개되어 봐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원하느냐하면 모든 것이 한 번에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재미없습니다. 하나하나 펼쳐지면서 그러면서 ‘그것들이 이렇게 연결되는구나!’ 그래서 드러나지 않은 것은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서 인생의 아주 아름다운 묘미가 주어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큰 명제를 붙들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인생을 사는 재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지혜로 무장되고 그 능력으로 사로잡히고 그 용기가 분명히 있어서 현실을 직면할 때에는 내가 원하는 현실이 아니고 때로는 이것들이 상당한 에너지를 요구하는 힘든 현실일 때에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기대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드디어 이제 내가 잘 몰랐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구나!’
직원들이 여름에는 수련회를 갑니다. 6개월간의 일들도 돌아보고 요즘에는 안 그렇지만 옛날에는 야단도 맞고, 울고, 회개도 하고 그러면서 다이내믹하게 2박3일의 수련회를 보냅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굉장히 자비로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대들이 무슨 특별 프로그램 하나를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냐?” 그랬더니 인제에서 래프팅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라고 그랬습니다. “우리만 하면 재미없으니까 목사님도 하세요.” 그래서 그때는 “내가 한번 하마.” 하며 그곳에서 교육을 시킬 때 앉아 일어나 다 따라하고 그 래프팅을 따라 내려오는 것입니다. 마침 비가 많이 오고 물이 맑고 풍부한 때였습니다. 처음 해보았습니다. 오후시간에 타는 것입니다. 물길을 타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20년 동안 수련회에 참석했지만 그때 잊히지 않는 수련회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무섭습니다. 저쪽 내린 천에서 타고 내려오는데 조교가 안전을 위해서 막 소리 소리 지릅니다. 그런데 ‘으악’ 하면서 곤두박질치고 물을 뒤집어쓰면서도 너무 재미있는 것입니다. ‘이 계곡을 돌면 무엇이 나올까? 드디어 떨어진다.’ 그렇게 인생을 살아야합니다. 그렇게 오후에 시작한 래프팅이 음기와 양기가 만나는 저녁시간에 딱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잔잔한 물가에 와서 그래서 그 자연을 만끽하는데 우리의 인생도 이렇게 살아야합니다. 돌멩이가 있어서 물이 내려오면서 부딪히고 부딪혔기 때문에 멍이 들어서 아래에 내려오면 시퍼레집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흐르는 물소리가 없다면, 그냥 대롱을 타고 물이 내려온다면 얼마나 시시하겠습니까? 재잘재잘 노래하다가 폭포수가 나오면 ‘으악’ 하면서 떨어지고 밑에 돌멩이들이 있어서 떨어지면서 시퍼렇게 멍이 들고 아래에 내려가면 퍼런 물이 됩니다. 아니 그렇게 해석을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래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 그래서 이 현실을 마주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것을 굳게 믿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어차피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당신의 아름다운 성품을 나에게만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가끔 그럽니다. 책이나 수첩을 꺼내서 한 사람에게만 보여줍니다. “너만 봐라.” 그리고는 얼른 집어넣습니다. 하나님이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 그리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찬란한 빛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일생을 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찬양)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우리는 종종 망가진 현실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고장 난 것 같습니다. 망가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현실은 마치 중앙선 충돌을 해서 자기는 많이 다치지 않았지만 차는 박살난 것처럼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고 남의 인생은 방금 자동차 쇼윈도에서 한길에 들어선 차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사실은 아닙니다. 그 사람도 데려가서 마음을 다 꺼내놓으면 서러워서 밤새도록 꺼이꺼이 우는 사연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경주마 아십니까? 경주마들은 선글라스 같은 것을 씌웁니다. 옆을 보지 못하게 씌웁니다. 왜 그럽니까? 이렇게 열어놓으면 말머리를 흔들면서 사방을 쳐다보면서 달리지를 못합니다. 옆을 가린 채 자기 레인만 보면서 미친 듯이 달리는 것입니다. 단거리 육상선수가 옆을 보고 뒤돌아보고 망보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그것만 보고 미친 듯이 질주를 하고 100미터를 달린 다음에 퍼져서 숨을 몰아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십니다. “원치 않는 곳으로 사람들이 너를 끌고 가리니 너는 팔을 벌린다.” 순교를 의미하는지 다 압니다. 베드로가 그러니까 다른 제자들이 “쟤는요?” 하며 예수님의 품안에 있는 요한을 보고 묻습니다. “얘를 계속 살게 한들 너희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런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게 나에게 주어진 현실입니다. 금수저? 흙수저가 금수저가 됩니까? 되어도 다음 세대에나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감사하십시오. 수저 없이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가 마련해야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열심히 해서 자식한테 물려주면 그 다음 자식들의 세대에나 금수저입니다. 그냥 수저가 어떤 수저냐 묻지 말고 그 수저로 무엇을 하느냐? 퍼먹고 김정은처럼 자기가 돼지가 될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기여하는 수저가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인생의 생각을 바꿔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런 현실을 맞이하게 된 데에는 아버지의 뜻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면서 인성은 그것을 피하고 싶다고 소리쳤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믿음은 그렇게 당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으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분명한 아로새겨진 명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굳게 붙들고 아버지의 뜻을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새로운 시각으로 여러분의 인생의 현실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어디에 쓰시려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시지 않았던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나 같은 인간에게 보여주시고 그리고 이렇게 미력한 인간을 통해서 잘나고 똑똑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시지 못했던 그 뜻을 약한 자를 부르시어 하늘 뜻을 이루시는구나! 찬송을 부르게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Ⅲ. 십자가를 앞둔 기도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앞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아버지의 뜻대로 되십시오.” 하고 벌렁 누워서 주무신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자신의 마음을 쏟아서 당신 생애에는 거의 없을 정도로 깊이 기도의 사투를 벌이시면서 아버지께 당신의 마음을 쏟아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뭐라고 나왔느냐하면 사중의 묘사가 나오는데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최상급 용어는 다 동원했습니다. 그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더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과 같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땀에 피가 섞일 수 있느냐? 섞일 수 있습니다. 오래 금식하고 땀은 모르지만 오줌에 피가 섞여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온 진액을 다 쏟아 부으시면서 그렇게 땀에 피가 섞여 핏방울이 되기까지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떠나 돌을 던질 만큼 가서” 두 번째는 “무릎을 꿇고” 세 번째는 “기도하였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세 가지 요소가 나오는데 거룩한 고독, 무릎을 꿇는 온전한 복종, 그리고 열렬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을 바꾸며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인 다음에는 자신을 그렇게 하나님 한분을 바라보는 믿음으로써 주님께 무릎을 꿇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현실을 내가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내가 찾겠습니다. 라는 눈에 보이는 최종적인 입증이 뭐냐 하면 간절한 기도입니다. 왜? 하나님의 뜻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그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간절히 비는 열렬한 만큼 그가 진정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 우리 인생의 날들은 너무 짧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인생의 날들은 회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둠인지 밤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그렇게 방황하면서 인생을 낭비하고 십자가 앞에서 회개할 때는 그렇게 주님 없이 살아온 날들이 서러워서 통렬하게 울었습니다. 그리고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어떤 때는 성령 충만하고 믿음대로 살려고 하지만 어떤 때는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방황했습니다. 믿을 마음은 있는데 어느 것을 믿어야할지 그리고 가고 싶은데 그 길은 무엇인지 길을 알았을 때는 그렇게 살 힘이 없습니다. 그나마다 어떻게 힘을 가지고 살아보려고 하는데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유로 방황하던 날들을 다 제외하고 보면 진짜 지혜와 능력과 용기가 충만해서 뚜벅뚜벅 확신 있게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살았던 인생의 날들은 너무나 짧은 시간밖에 안됩니다. 인생을 돌아보면서 교만해서는 안 되지만 ‘아 그때 내 인생의 그 구간은 내가 정말 주님만 사랑했어! 내 인생의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어!’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렇게 하고 살다보니까 청소년이 장년이 되었고, 장년이 노년이 되었고, 그리고 노년이 이제는 천국의 합창소리를 들을 시간이 가까워왔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인생의 날들은 얼마 안 됩니다. 자, 현실에 대해서 불만하고 욕하고 투덜거리고 금 수저 없다고 불평하고 그리고 자신의 현실을 마주보면서 슬슬 피하고 꽁무니 감추고 그러면서 욕이나 하고 인생을 삽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행복할 수 있다면 미친 정신을 가지고 한번 해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이 누가 행복하겠습니까? 그런 삶은 누구를 위한 삶입니까? 누가 좋아하는 삶입니까? 마귀는 구원받은 사람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최종적인 목표는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구원받지 않는 사람처럼 살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다가 거치는 돌로 죽게 하는 것이 사단의 목표입니다. 마지막에 그런 삶을 보고 박수치는 그 소리는 천국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 지하에서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얻은 구원인데 주님이 오늘 무엇 때문에 죄도 없으신 그분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으며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지막 당신이 지신 십자가를 누구와도 나누어 지지 않고 그 고통을 잠시 면하게 해주는 진통제도 거절하시고 자신의 현실을 직면하며 그 끔찍한 형벌을 다 당하고 죽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겨우 그런 너절한 삶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까? 그런 예수를 믿으려고 여러분이 세상을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품으로 돌아온 것입니까? 그렇다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이제껏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이고 이제껏 분투하며 하나님을 향해 살아왔던 우리 인생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이 이루고자하는 뜻이 있고 그 뜻이 이루어질 때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숨 쉬는 그것을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Ⅳ. 적용과 결론
현재 여러분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십시오. 이것은 단순한 포기나 굴복이 아닙니다. 받아들인 그 현실 속에서 이제껏 여러분의 관심을 가졌던 것은 여러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꼬봉으로 부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안 됩니다. 받아들인 현실 속에서 한번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한 나의 뜻도 이루어질 것이다. 혹은 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나는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영원한 행복이신 그분 안에서 나는 만족을 누릴 것이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어느 그리스도인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님 없이 천국의 황금 길을 걷느니 예수와 함께 지옥의 불길 가운데를 지나는 것이 나는 더 행복할 것이다. 그것이 신앙이 우리에게 부르짖는 바입니다. 왜? 주님이 함께하시니까. 그런 현실을 수납하고 거기서 주님의 뜻에 관심을 갖고 그것이 여러분의 삶의 모든 난제를 풀어가는 결정적인 열쇠입니다. 그 열쇠를 찾고 그 열쇠구멍에 집어넣고 돌릴 때 여러분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렵고 힘든 많은 일이 있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던 그날 밤에 그 전날 밤 혹은 그날 새벽까지 어떻게 당신 자신이 지실 십자가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온전히 쏟아 붓는 치열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매달렸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 여러분의 귀에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여라. 얘들아.”
십자가와 그 살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녹취자: 오희열
I. 본문해설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에 의해 기록이 되었습니다. 요한 사도가 요한복음 뿐 아니라 요한 서신까지 기록을 했는데 요한서신에서는 그의 변화된 관심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갖는 신학적인 의미에 대해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그는 사도 중 유일하게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있은 후에는 더더욱 자신이 목격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생생한 죽음이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누구보다 극명하게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이었다고 간단하게 선언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앞에 놓인 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죽음이 무엇을 지향하는 죽음이었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것은 우리를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II.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A. 독생하신 성자
그러면서 그는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합니다. 제일 먼저 독생하신 성자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시선은 ‘독생자’ 즉, 독생 하신 성자에게 꽂히게 됩니다.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모노게네스’라는 희랍어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런 말은 아마 성경 전에는 없었습니다. ‘모노’는 ‘단 하나’라는 뜻이고 ‘게네스’는 ‘낳은바 된 자’, ‘겐나오’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데 각각에 대해서 아주 독특한 관계적 특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누구로부터 창조되지도 않고 낳은바 되지도 않고 발출되지도 않은 스스로 계신 성부입니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낳은바 되신 분이고, 성부는 성자를 낳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부의 특징은 ‘낳으심’이고, 성자의 특징은 ‘낳은바 되심’입니다. 성령은 바로 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심’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되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창조세계가 있기 이전에, 영원의 세계에서 성부는 성자를 낳으셨습니다. 낳았다는 의미를 인간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낳았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지, 마치 여자가 아이를 잉태해서 그 아이를 뱃속에서 바깥으로 내놓는 것 같은 그런 방식으로 성자를 낳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신비에 속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성자는 영원 전에 성부로부터 낳은바 되신 분이라고 규정합니다. 이 일이 영원 전에 시간을 초월해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성자가 성부로부터 낳은바 되셨지만 성부 혼자 계셨던 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때’라는 말 자체가 이미 시간 세계에서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부, 그에게서 낳으신 성자,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신 성령이 영원 전에 삼위로 계셨고, 그래서 성부로부터 성자가,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왔지만 어느 한 분이 없이, 성부와 성자 없이 성령이 계신 적도 없고 성부가 성자와 성령보다 앞서신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할 때 어떤 대상을 만나서 사랑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해야 할 인간이 없었을 때조차도 하나님이 사랑일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성부와, 그로부터 낳은바 되신 성자, 그 두 위로부터 나온바 된 성령이 계셨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를 사랑하셨기에 그 하나님은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사랑의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나오는 ‘독생자’라는 말은 육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예수님 말고도 또 다른 형제들을 육체로 낳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생식을 통해서 태어나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과는 구별되고 그런 점에서 독특한 출생을 하신 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독생자’라는 이 말은 예수님이 마리아의 가계에서 ‘독생자’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영원 전에,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이미 영원 전에 오직 이 성자만이 하나님께로부터 낳은바 되셨다는 점에서 이 분은 ‘모노게네스’ 곧, ‘독생자’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독생자’라는 말 자체가, 이 분이 영원 전에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로부터 낳은바 되신 성자로 계셨음을 보여주고 그렇게 계시던 신이신 성자가 인간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묻습니다. “아, 그러면 그 예수님이 하늘을 떠나서 마리아의 몸속으로 오신 거군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인 예수는 갈릴리에 있는 동안에는 가버나움에 없었고, 그리고 태어나시기 전에는 인간 예수는 없었지만 신이신 성자는 안 계신 곳이 없고 없었던 때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 충만한 신성을 계셨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 분 안에도 성자가 계셨고, 하늘에도 성자가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자는 성부, 성령과 함께 온 세상 물질 안에 있다고는 말할 수는 없으나 이 세상의 어떤 피조물들도 그 분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이 ‘모노게네스’, ‘독생자’라는 말은 이러한 광대한 그림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인간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고 봉사하신 그 모든 감동적인 생애를 그려내심으로써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하는 도덕적인 명령을 우리에게 내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분이 그냥 순수한 인간으로서 온 마음을 다해서 인류를 사랑하다가 불태우듯이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이라면 그의 도덕적인 감화가 우리에게 끼쳐서, “저 사람은 저렇게 인류를 위해 애쓰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산화했으니, 우리도 저 사람을 본받자.”라는 정도의 감동을 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순국선열들을 기립니다. 그렇게 안중근 의사나 이순신 같은 순국선열들을 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그분이 죽었으나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도덕적인 감동의 방식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런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러한 독생자라는 표현 자체가 우리에게 가쳐주는 것은, “어떻게 2천년 전에 나무에 매달려 죽고 시체가 치워진 그 유대인 청년 한 사람의 죽음이, 오늘 우리 구원받을 모든 인류의 죄를 씻어주어서 하나님 앞에 다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독생자’라는 말이 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집에서 태어난 외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 전에 단 한 분, 성자께서만 성부로부터 낳은바 되셨습니다. 그분을 ‘독생자’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독생자’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고 보면, 광대하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를 박해하고 미워하며 종교지도자들의 꼬임에 넘어가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사실은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고 자기의 생명을 못 박은 것이었습니다.
B. 이 세상에 보내심
그 영원한 성자가 인간의 몸을 빌어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오늘 성경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어떻게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그것은 사람과 똑같은 모습을 입혀, 그 사람 중 한 사람인 것처럼 예수를 인간되게 하셔서 우리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저는 회심하기 전에 사실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매우 의심스러웠습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이 그렇게 오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예수를 보내셨을까?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눈부시게 찬란한 어떤 빛처럼 보내셔서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절대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 빛을 모든 사람들이 보면서 눈이 부시고 신비인 것으로 느껴 그는 인간과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게 했더라면 더 잘 믿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했더라면 수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예수는 사실 신이 아닌 그냥 인간이었고, 후대의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조작해서 신처럼 떠받들게 만든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지 못했을 거라는 인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독생 하신 성자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은 매우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고 단언합니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들에게 오신 이유는 우리들과 똑같은 눈높이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많이 배웠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위대하고 놀라운 분이었고 기적도 베푸시고 권능도 베푸셔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아주 현자하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분이었지만 그 분이 진정으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현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교제하며 사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진리를 알지 못해 무지한 자들, 그 어두움 가운데 있는 영혼을 불쌍히 여겨 그 진리를 온 힘을 다해 가르치셨고 병든 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쌍히 여겨서 그들의 병을 고쳐주심으로서 하나님 아버지가 병들고 아파하는 자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마음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예수님의 표정과 눈빛, 예수님의 그 비참에 종속하는 섬김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그대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불의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예수님이 때로는 분노하시고 책망하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참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참 사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서만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보여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변화된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예수님이 몸소 사람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모본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존재라는 것, 모자라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모습은 굉장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이 두 가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죽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가장 위대한 일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 때문에 받아야 할 모든 형벌을 대신 받음으로 우리의 죄를 속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 구원받을 인류가 짓고 있고 앞으로 지을 모든 죄를 사람의 몸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두 짊어지게 하시고 구원받을 모든 인류를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 그렇게 내포적인 대신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그 진노의 형벌을 당하심으로 우리는 살게 하시고 당신은 고난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가 죽음에 해당하는 죄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 죽음의 갚을 치러야 했는데 우리가 죽임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죄는 해결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무한하고 영원하고 가장 놓으신 하나님을 향한 인간들의 죄는 그 죄의 양이 무한대의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어떠한 죽임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죄에 대한 대가라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순전하고 죄 없으신 예수님이, 더구나 참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가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의 죽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입혀 세상에 보내신바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세상’, ‘세상에’라는 말은 희랍어로 ‘에이스 톤 코스몬’, “그 세상 속으로”인데, 이 ‘세상’은 그냥 자연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세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저 높은 곳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계시며 “구원이 필요한 사람은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직접 당신이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그 냄새나고 추악하고 더러운 곳으로 직접 오시고 그 속으로 쑥 들어가셨습니다. 그분이 즐겨 찾으신 곳은 왕궁이나 권세자들의 응접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오히려 온 몸에 헌데가 나고 누구도 돌보아주지 않는 병자들, 문둥병 걸린 사람, 중풍병 걸린 사람, 그리고 귀신 들린 사람, 혈루증 걸린 사람, 이렇게 절망적으로 육체의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셨고 창녀와 기생, 세리와 잡놈 같은 인간 말종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기에 가게 하셨습니까?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함께 공유하면 꼭 같은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셔서 마지못해 오신 것이 아니라 그분이 기꺼이 가기를 원하셔서, 아버지의 요구를 받고 겨우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일치한 마음으로 당신을 버려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 모든 인류를 구원하여 우리와 함께 한 몸을 이루시기를 기대하시며 이 세상 속에 보낸바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세상에 보낸바 되었지만 사실은 자기 스스로 높고 높은 영광의 하늘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C. 십자가에서 죽으심
오신 그분의 마지막 마침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라고 나오는데 “이렇게”라는 부사가 지시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어떻게 나타났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어떻게? 어떻게 입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서술이 그 “이렇게”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사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보내신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으신 순전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버려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고 죽으신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찬양)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
죄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우리는 찬송하는 것입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속죄’라는 중요한 개념을 만나게 됩니다. ‘속죄’는 죄가 있는데 그 죄의 책임과 결과를 면제해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9장 11절과 12절에 보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해석하기를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렸다”고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그것이 당신을 믿을 모든 사람들을 위한 영원한 속죄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그림 같은 묘사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죄를 지었고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우리가 지불할 수 없지만 우리가 지불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죄는 씻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숨의 가치는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받으신 손해보다 훨씬 작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쓰나미처럼 죄가 온 세상과 인류에 밀려들어와 그것을 악으로 뒤덮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운 세계는 그 영광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찬란한 광채와 빛과 영광은 창조 세계에서 사라졌고 “이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며 살아야할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인류사회의 꿈은 산산이 부서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책을 쓸 때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는 대게 남이 지은 집에 삽니다. 그 집이 마음에 들어서 집을 샀을 뿐이지 그 집에 대한 보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그 집을 설계하고 애써서 건축하고 마지막에 들어갔을 때의 그 느낌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아름다운 집을 꿈꾸던 사람이 땅을 사고 설계도를 그렸습니다. 그렇게 구상을 하고 이렇게 저렇게 짓기로 하고 전문가에게 설계를 맡기고 매일 나가서 보면서 “제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고 제가 머릿속에 그린 것은 그 색깔이 아닙니다. 그런 재질이 아닙니다.” 하면서 다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머릿속에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본 적이 없는 어느 날 마지막에 마당에 벽돌을 깔고 모든 마감이 끝나고 나니까 한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래 의도했던 것 같은 예쁜 집이 탄생한 것입니다. 목조로 지은 아름다운 집, 그리고 그 앞에 펼쳐진 아주 예쁜 잔디밭, 그리고 소나무가 있고 거기에 강아지들이 뛰어놀게 만들었습니다. 원목으로 아주 고급스럽게 깐 마루와 이태리에서 직수입한 주방기구들이 있었고 등 하나까지도 모두 자신이 직접 외국에 나가서 골라 최고의 것으로 만들었고, 최고의 가죽을 만든 소파에 앉아보니 모든 것이 너무 잘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일주일 휴가를 다녀와서 보니까 누군가가 들어와서 자기 대신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마당을 뛰어다니던 예쁜 강아지들은 죽여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고 여기저기 땅은 파헤쳐져 있고 이태리에서 직수입한 싱크대에는 똥을 싸 놓았습니다. 그리고 가죽에는 온갖 과자와 더러운 김칫국물이 쏟아져 있었습니다. 유리창도 깨지고 망가져있고 고급스런 원목은 지나다니면서 송곳을 스크래치를 내서 다 망가졌습니다. 그때의 그 집 주인의 심경을 생각해라는 것입니다. 어떠했겠습니까? 엄청난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죄로 망가뜨린 인간의 죄과는 그렇게 큰 것이었습니다. 그런 처지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자식들이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그렇게 죽도록 내버려 두신다면 하나님의 이 창조세계는 그런 더러움과 악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렇게 당신을 믿고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품에 끌어안고 그들이 죽지 못하도록 자신의 몸을 덮어 모두 감싸셨습니다.
얼마 전에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앞자리에 아이들을 데리고 앉으면 안 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어떤 외할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탔습니다. 정면으로 충돌해서 외할머니는 즉사했지만 그 품안에서 아이는 다치지 않고 살았습니다. 품에 안고 아이를 노출시키지 않게 숙인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구원받을 모든 인류를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우리들이 지은 죄는 그 품의 어깨위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그 죄를 보고 죄에 합당한 진노를 쏟아내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의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비참함이고 그분이 바로 당신 자신을 직접 제물로 들어서 하나님 앞에 바치면서 우리는 당신 안에 감싸 우리를 그 생명싸개로 보호하심같이 우리를 보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죽임을 당하시고 당신의 품 속에 있는 우리 구원 받을 사람들은 죄의 값을 치른 것으로 여겨주시는 것이 ‘속죄’입니다. 그게 ‘속죄’입니다.
이 속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속’을 받게 됩니다. ‘구속’이라는 말은 당시 로마의 노예 제도를 배경을 합니다. 마음씨가 좋은 아주 부자인 사람이 좋은 마차를 타고 지나갑니다. 시장을 지나가는데 노예를 파는 곳을 보니 울부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마차 안에서 커튼열고 보니까 노예 가족 네 명이 모여 있는데 잘 팔리지를 않으니까 가족을 각각 따로 팔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노예 가족들은 서로 헤어지게 되니까 아이들이 피어린 절규를 하고 부모들도 아이를 끌어안고 우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시종에게 “가서 얼마인지 물어 보거라.” 시종이 다녀오더니 얼마라고 전해줍니다. 돈 통에서 금화를 한 자루 꺼내어 주면서 “넷 모두 사 오거라.” 그렇게 그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와서 깨끗이 씻기고 잘 먹이고 잠을 자게 했습니다. 여기에 온 노예들은 행복했습니다.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팔려서 어떤 나쁜 주인을 만날지 몰랐는데 여기 맘 좋게 생긴 사람이 사서 이렇게 먹이고 한 집에서 주인을 섬길 수 있게 되어서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의 사건은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납니다. “이리 오너라.”, “예, 주인님.” 하고 옵니다. 주인이 종이를 하나 꺼내더니 노예들의 이름을 다 적었습니다. 그리고 “이 노예의 주인인 나는 조건 없이 이 네 가족을 자유인으로 석방하노라.” 하고 쓰고 주인이 도장을 찍습니다. 이제 이 사람은 이 증서만 있으면 어디 가든지 팔릴 위험이 없이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속”의 그림입니다. 운명적으로 노예로 살아야 할 사람, 율법으로부터 우리는 죄인이라는 정죄를 받고 현실적으로는 죄와 비참으로부터 고통을 받는 우리들을, 거기에서 살려서 아무조건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들을 자유인으로 해방시켜주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때, “널 구원해 줄 테니 평생 동안 10억 원을 나에게 바쳐라.”, 혹은 “내가 너를 구원해 줄 테니 목사가 되어라.”, 혹은 “구원해 줄 테니까 너는 평생 기력이 있는 동안에 교회에서 화장실 청소를 해라.” 그렇게 하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유롭게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그 사랑에 감동을 받은 우리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우리가 이런 저런 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누가 여러분에게 벌금을 내라고 하거나 형벌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교회 지하실에는 유치장이 없습니다.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형벌의 위협보다 나를 크게 붙잡아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 그것을 위해 은혜를 받고자 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의 힘입니다.
이런 노예에서 그들을 해방시켜줄 때 노예 판매상에게 “저 네 명의 노예를 석방해라!” 할 수 있는 권한이 그 부자에게는 없습니다.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것을 “속전”이라고 합니다. 그들을 구속하기 위한 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속전”으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희생의 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이 사셔서 우리를 “이제 너희는 자유하라.”하시면서 우리를 내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비로소 인류가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냥 서울도 아닌 평촌 한 구석에, 평평한 촌입니다. 여기서 삽니다. 그리고 집도 별로 없습니다. 촌에도 집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냥 삽니다. 돈 많고 강남에서 큰 집에서 화려하게 사는 사람을 보면 너무너무 부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유롭다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억압 없이 자신이 올바른 것을 선택할 수 있고 그것을 살아낼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여러분, 술 먹고 취해보셨습니까? 별로 없습니까? 저는 회심하기 전에는 취해봤습니다. 술을 많이 먹지 못했지만 괴로워서 실컷 먹으면 토하면서도 취합니다. 취하면 어떻습니까? 이 세상의 질서에 대한 생각이 다 사라집니다. 그리고 내가 자유로운 존재가 된 것 같습니다. 마약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합니다. 제가 마약 주사까지 맞아보진 않았지만 그렇게 주사를 맞은 사람은 모든 질서에 대한 감각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내가 정말 자유인이 되었다는 느낌을 갖는 답니다. 미국에서 20세기의 올더스 헉슬리 같은 사람들은 약물을 복용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길이라고 사상적으로 체계화시켜서 젊은이들에게 광범위하게 전파함으로 수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마약에 맛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복용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 아니라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어떤 자유를 찾아가는 인간 정신의 방향이라고 보았습니다. LS같은 약물들을 복용하면서 현실에 대한 이탈을 꿈꾸고 이상향을 찾아가며 그 안에서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뜨면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유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개뿔, 그게 무슨 자유입니까? 무슨 자유입니까?
미국에서 만든 광고인데, 예쁜 여자가 나옵니다. 그림같이 예쁘게 화장을 했습니다. 그 화장을 하나씩 지웁니다. 마귀 같은 모습이 드러납니다. 다크 써클이 깊이 새겨있고 입을 벌리는데 이빨이 다 쏟아지면서 피가 쏟아집니다. 아래에 자막이, “마약의 결과는 생각보다 불행합니다.”라고 나옵니다. 그게 자유입니까?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은 왜 남자는 여자와, 여자는 남자와 결혼해야 하느냐? 누가 그런 선을 그었냐고 하면서 그것을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남자와 남자가 결혼을 하고 부부로 삽니다. 성행위를 합니다. 그런 성행위를 통해서 남자는 괄약근이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요실금이 아니라 요실변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입니까? 그게 무슨 자유입니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자유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로이든 존스 목사님이 골초였습니까? 특히 파이프 담배를 굉장히 좋아하셨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담배를 배워야겠다고 하지는 마십시오. 미국의 많은 교회에서는 “아디아포라”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면 그냥 피웁니다. 그런데 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어느 날 담배를 끊었습니다. 그것이 보통 단호한 결심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네 번을 시도해서 마지막에 하나님 은혜로 성공했습니다. 이 분이 이것을 끊게 된 계기가, 항상 있던 담배가 그날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물건 하나 때문에 자신을 어떻게 지탱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아! 이것은 자유가 없는 삶이구나!’ 하고 끊은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의 개념을 너무 육체적으로 생각합니다. 육체는 신령한 사고가 없어도 무엇이 부자유한 지 잘 느끼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으면 위축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나는 돈이 없어도 하나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바람직한 것입니다. 아주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돈이 없으면 위축됩니다. 얼굴이 못 생겨도 위축됩니다. 자기의 신체적인 특징으로 시작해서 자신의 직업, 모든 것에 대해서 위축됩니다. 부자유를 느낍니다. 그것들을 주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는 자유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렛미인”이라는 TV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몇 케이스를 제가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심사위원이 출연자를 고를 때 아무나 뽑지 않고 딱 봐서 살 빠지고 성형수술하면 그래도 될 가능성이 있는 원판을 가진 사람들만 뽑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그렇게 기가 막히게 뽑아냅니다. 그리고는 말도 안 되는, 거의 방치되다시피 살아온 그 몸을 고치는 것입니다. 한 100kg, 80kg, 85kg 나가는, 맨날 방에서 뒹굴면서 과자를 20봉지씩 먹는 그런 사람을 데려다 놓고 가족들과 떨어뜨려놓고 6개월 동안 혹독하게 트레이닝 시키면서 최고의 성형수술 전문가들이 자원해서 코도 올려주고 뼈도 갈아내고 등등해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디자이너가 완전히 디자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엄마도 처음 보는 것입니다. 둘이 끌어안고 펑펑 웁니다. 골방에 앉아서 과자를 매일 20봉지씩 뜯어서 먹을 때 자유로웠을 것입니다. 과자가 없었으면 부자유로웠을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자기도 싫은 상태, 건강도 현저히 나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가 부자유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가 일시적으로 육체만 누리는 자유인지, 육체와 영혼이 영원히 의미를 찾아가는 자유인지의 문제, 우리 인간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은 후자의 자유이지 전자의 자유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자가 전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필요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으면 내가 이 땅에 살아있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살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어느 보험설계사가 와서 저에게 자꾸 보험을 들으라고 합니다. 보험을 별로 든 것도 없는데 자꾸 들으라고 해서 왜 그렇게 자꾸 들으라고 하느냐고 물으니까, “목사님이 아무리 성직자이지만 제 말 좀 들어보세요. 법정스님은 일평생 무소유를 외치다가 마지막에 암에 걸리셔서 삼성의료원에서 8천만 원의 병원비가 나왔는데 무소유로 살아와서 그것을 갚을 돈이 없어서 어떤 독지가가 대신 내주었는데 목사님은 절대 그런 민폐 끼치지 마십시오.” 하는데 굉장히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들어주지는 않았습니다. ‘진짜 그렇구나. 무소유를 부르짖었으면 그냥 무소유로 죽어가야지 다른 사람의 소유를 끌어다가 대신 민폐를 입히면 안 되는 것 아니냐.’ 목사님은 그런 민폐를 끼치며 살지 마시라고 하는데 굉장히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계약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III.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인류가 진정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놀랍게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이 번역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는 번역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죽어있는 우리를 살아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원래 희랍어 원문에는 ‘히나’라는 접속구문의 가정법입니다. 그것을 거의 예외 없이 모든 영어 성경, 가장 권위 있는 킹제임스 버전부터 시작해서 NIV, ASV에 이르기까지 많은 성경이, ‘in order that’, 혹은 ‘that we might live’라고 표현했습니다. ‘might live’,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제대로 번역을 하려면 “그가 우리를 통하여(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시려고”, 혹은 ‘live’, ‘살아가게 하시려고’ 여기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삶’이라는 것, ‘삶’이라고 하는 것의 중요한 의미는 ‘사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식물이나 무생물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삶’에는 ‘살아있다’, ‘목숨’, ‘생명’, 이런 것들이 모두 포함되지만, ‘삶’이라는 그 자체는 국어적으로 보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철학적으로 보면 ‘삶’이라는 것은 ‘의미’와 연결됩니다. 다시 말해서 병원에서 호스를 꽂고 가만히 호흡기에 의존한 채 의식을 잃고 살아있는 것도 살아있는 것이고, 넓은 의미에서 그것도 삶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삶은 자신이 자기의 존재를 자각하고 외부와 반응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혹은 자신 안에서, 혹은 신을 향하여 구현하면서 살아가는 생활, 그것이 진정한 삶입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요점은, ‘살아있는 것’이 곧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살아있는 존재입니까? 살아가는 존재입니까? 다시 말해서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찾으면서 어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영위해 가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아침에 눈을 떴으니까 그냥 먹고, 화장실가고, 먹고, 즐거우면 히히 웃고, 슬프면 꺼이꺼이 울고, 그러면서 그냥 살아가는 것인지, 무엇인가 내게 있는 상황들을 개선하고 고치고,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 살고 있는 의미를 구현하는데, 그 구현은 세 가지 대상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그 의미를 구현하는 것이고, 나 때문에 하나님께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의미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둘째로는 구체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그것입니다. 현실을 대면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이런 가정에서 태어났을까?’ 그런 얘기는 해 봐야 소용없는 것입니다. 누가 답을 줄 수 있겠습니까? 엄마 아빠도 답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니은 답을 주십니다. 뭐라고 답을 주시겠습니까? 믿어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왜 여기에 태어났는지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게 자신의 사명을 깨닫는 일입니다. 이미 결혼했습니다. ‘왜 저런 인간이 내 마누라가 되었을까? 저런 인간이 내 영감탱이가 되었을까? 내가 다시 20대로 돌아간다면 저런 인간과는 절대 결혼하지 않을 텐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화투는 치다가 성질이 나면 국방색 담요를 확 엎어버리면 “에이씨, 어쩔 수 없네.” 하면서 모든 사람이 져 줍니다. 그런데 인생은 그렇게 판을 엎을 수 가 없습니다. 술을 마십니다. 춤추고 노래합니다. 고래도 한 번 잡으러 갑니다. 돌아오면 그 자리에 모든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가 그를 통하여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체성을 가지고 우리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을 구현하며,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이웃에게도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 행복이 되고 자기 자신에게도 그렇게 사는 것이 기쁨이 되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1회용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죄 밖에 지은 것이 없는 나를 누군가가 대신 노예시장에서 돈을 주고 나를 사는 것처럼 사야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까 말씀드린 노예제도의 배경에 대한 이 설명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지만 우리가 항상 기억하여야 할 한계는 이런 것입니다. 그 노예 네 사람이 주인인 써 준 노예 해방증서를 간직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로 인심이 좋은 주인이니까 갈 때 굶어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노잣돈, 여행경비라도 좀 주고, 마음씨가 더 좋았다면 돈을 더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어디 정착하는 데에 써라.”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가면 그걸로 끝입니다. 하루밖에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노예들이, “그분의 뜻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지.” 이런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아, 정말 좋은 사람 만나서 노예에서 해방되고 이제 꿈에도 그리던, 할아버지도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이제 누리게 되겠구나! 아, 신난다!” 그 정도이지, 그 분을 깊이 알면서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매일 그분을 묵상하며 살았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생각은 많이 나겠지만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그분을 그렇게 묵상하면서 살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조건 없이 자유롭게 해방시켜주셨지만 하나님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은혜는 그 자체가 반드시 하나님의 소명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의 대가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그 은혜를 주신 어떤 목적을 따라 살라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 은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단 한 번의 위대한 구원의 은혜뿐이 아니라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받는 한 번의 은혜, 오늘 눈물을 쏟고 기도하는 그 은혜, 큰 은혜나 작은 은혜나 구원의 은혜나 성화의 은혜나 모든 것이 같은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 인간으로 살아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도 기쁨이 되고, 내가 올바른 삶을 산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만족을 줄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선하게 산다면 악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정의로운 존재가 된다면 불의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거치는 돌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행복이 된다는 기준을 망가지고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유괴범이 작은 아이를 사탕을 가지고 꼬입니다. “이리오렴, 이리오렴.”, “싫어요, 난 안가요.”, “이 사탕 줄께. 이리와”하면 따라옵니다. 사탕을 빨아 먹습니다. “아저씨랑 저기 가자. 더 맛있는 거 사 줄게.” 아이가 멈칫멈칫합니다. “가자. 아저씨 믿어봐.” 아이가 따라갑니다. “참 착하다. 정말 착하다.”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악한 의도에 딱 맞추어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매일 성경을 보고 그 속에서 무슨 은혜를 받든지 마지막에 내리는 결론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길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그 살 힘을 공급받을 것인가?” 그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찌질한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소 닭 보듯 하면서, 남의 일처럼 생각하면서, 결국은 자신의 현실과 한 번도 대면하지 않는 인간이 제일 찌질한 인간입니다. 사람이 잘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깨끗하게, 가장 좋은 것은 깨끗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한 페이지 찢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 쓰는 것입니다. 왜? 이미 일어난 일인데, 잘못한 일인데, 그런데 결국은 자기가 한 것 아닙니까? 자기가 선택한 결과로서 다가온 현실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선입니다. 그래서 이미 이루어진 일, 어쩔 수 없이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집착하고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하는 것은 일평생 남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남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아무의 인생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현실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왜? 버릴 수가 없습니다.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것이 바로 “we might live”, “우리로 하여금 살아가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구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우리를 사망에서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계속 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공급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속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십자가의 죽음 이후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은 완전히 죽은 시체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완전히 죽으신 그분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하나님의 생명의 충만함입니다. 그 생명의 충만함이 죽음을 이긴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안에서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완전히 죽어서 희망이 없었던 사람들을 우리가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날 때, 주님이 우리를 살아나게 하시고 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그의 죽으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 어떤 식으로 죽음에 참여합니까? 이렇게 삶의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예수 죽음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이 무한한 생명이 부어진다는 것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사랑이고 힘입니다. 본론적인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분도 자신의 경험에 잘 비춰보십시오. 지금보다 훨씬 어렵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기쁨의 삶을 살 때가 있었습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런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그것들을 능히 감당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기력이 떨어지고 에너지가 없으면 작은 일에 짜증이 납니다.
일본에서 실험한 것인데 밥을 잘 먹이고 하는 회의는 실패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회의를 시작했다가 11시 반쯤 되면 짜증인 나고 싸웁니다. 왜 그렇습니까? 배는 고프고 당은 떨어지는데 자꾸 이야기는 꼬이는 것입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 현실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 감당할 수 있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가난이 제일 큰 것일지 모르지만 돈 많은 사람은 돈과는 상관없이 인생의 무게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게 신앙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현실은 받아들여야 하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길은 처음부터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비겁하게 죽음을 택하는 것 이외에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죽음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겁한 것입니까?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의 방법이 있는데 매일 술 마시고 취하면서 마취제에 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삶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정의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에게 의도하신 일이 아닙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that we might live”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시려고”, 살아가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우리를 그렇게 살아가게 하시려고 현실을 우리가 대면한다고 하면 그것을 내 삶으로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너무 침체되고 힘겨울 때에는 호흡을 하고 살아있는 그 존재 자체를 지탱하기가 너무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눈 감을 때 주님이 데려가 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TV에서 나오는 사건 사고, 비행기가 추락해서 모두 전멸했다고 나오는 것을 보면서 ‘내가 저 비행기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지경까지 가는 것입니다. 호흡을 하는 것조차 너무너무 힘이 들고 한 인간으로 살아있다는 자체가 몸서리치도록 무서운 부담감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모든 사람들이 맨 정신으로 인생을 바라볼 때 느끼는 것입니다. 각각 자각하는 정도는 다르지만 냉정하게 우리의 눈의 비늘을 벗고 보면 그 현실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가 참된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일 경우에는 그 자유에 대한 기대치가 훨씬 크기 때문에 더 큰 부자유와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자가발전 시킬 수 있는 힘이 아닌 것입니다. “하자! 하자!”한다고 해서 그 힘이 솟아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힘이 외부로 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대면하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투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그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걸어오신 고난의 길,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사건에 자신의 고통을 투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 속으로 자신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느낄 때, 그때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가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기를 끊임없이 거부하면서 마치 자기 인생도 아니고 남의 인생도 아닌 듯이 그렇게 애매모호하게 인생을 살면서 의미는커녕 겨우 생존이나 하는 그런 쓰레기 같은 삶을 살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깨달으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회개할 때, 2천 년 전에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의 죽음이 자신 속으로 현실화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자신 안에 있는 죄악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죽인 것만큼 거기서 예수가 다시 사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던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능령이 없었더라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소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that we might live”, “우리를 살아가게 하시려고”라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부활은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의 창조의 생명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우리가 매일매일 그분으로부터 충만한 생명을 받으면 그렇게 죽음의 기운을 이기면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신자는 죽은 자를 살리는 살림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세상을 보십시오. 이 속에서 어디에 가든지 죽음의 기운이 가득해서 미움이 있는 곳에 상처, 고통이 있는 곳에 원한이 사무치고 하나님의 창조의 본래의 목적에서 이탈하는 죽음의 기운이 가득합니다. 우리의 삶의 선택지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죽음의 기운에 삼켜진 채 겨우 살아있어서 자기의 인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의 인생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한 번도 자신의 인생을 뜨거운 눈물과 뜨거운 피로 끌어안지 못한 채 그렇게 주체성 없는 삶을 살다가 의미도 찾지 못한 채 죽어갈 것인가, 아니면 그 생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받아 정말 자신의 삶에 진정한 주체가 되는 자유인으로서 살다가 죽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죽음 가운데 삼켜진 채 살아가는 것은 생존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삶이 아닙니다. 산다는 것은 자신이 주체가 된 생활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지만, 너무나 너무나 맞기 싫을 상황을 겪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내 잘못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잘못이 아니라 나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오류와 잘못으로 인해서 내가 정말 있고 싶지 않은 자리에 있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당면하고 싶지 않은 사건에 당면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그때 기분은, 냉면에 생고등어를 비빈 것 같은 기분입니다. 맛있는 냉면에 상한 듯한 생고등어가 피를 뚝뚝 흘리고 토막 나서 들어왔는데 그게 비벼져있습니다. 그것을 한 그릇 먹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지 않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면 토하면서도 그것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인생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지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먹고는 쓰레기통에 토할 것입니다. 그래도 먹어야 합니다. 그게 내가 스스로 저질러서 온 결과든지,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은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든지 간에 그것은 내 삶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그것들도 사실은 주인인 나에게 사랑받기 위해 존재하는 나의 삶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정말 신성한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거기서 온갖 구토와 쓰라림, 모욕, 그리고 자기 치욕을 당하면서 인생의 또 한 고비를 넘는 것입니다. 그때 그러면서 나에게 이런 상황을 만들어준 저 인간, 이 인간, 이놈, 저 놈 하면서 손가락으로 헤아리고 칼을 가는 것은 또 다른 자신의 주체성과 자유를 죄악에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대면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앙을 통해서 배운 것은, 눈을 똑바로 뜨고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자신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현실이 나의 현실이라는 것, 그리고 그 중에 어떤 것은 내가 잘못한 결과라는 것, 그것을 그대로 정직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미슐랭 스타 세 개 받은 고급 양식집에서 까만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맨 사람들에게 서빙을 받으면서 저녁 먹는 날이 어떻게 우리에게 매일매일 계속 되겠습니까? 그런 인생은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적어도 가치를 찾아가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와 여러분의 인생을 함께한다고 생각할 때, 교회는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혹은 자신 안에 있는 불완전으로 말미암아 고통과 시련, 모욕을 당합니다. 그것을 함께 참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도 아닌데 왜 내가 이것을 당해야해?”, “저 인간과 관계를 끊어버리면 될 텐데 왜 저 사람이 아내이고 자식이고 남편이어서 내가 이 고생을 해야 해?” 그 자체가 바보 같은 소리인 것입니다. 자기가 선택한 삶이고 자기에게 주어진 삶입니다.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놀라운 생명입니다. 그런 생명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지금 여러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고난과 죽음의 현실 속에 살면서도 여러분과 비교도 안 되는 기쁨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결론적으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단순히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고 주체성 있는 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생명이신 그분이 죽어있는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살아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진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도 아니고 남의 인생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내 인생은 한 번도 주인에 의해서 장악되어 본 적이 없이 그렇게 버림받으며 그렇게 부끄럽게 버려진 채로 남아있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 자신이 어차피 이 세상을 사노라면 우리가 원하고 원하지 않는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겪게 되고 우리는 그것에 대한 설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파도치는 삶의 사태들을 뛰어 넘어서 한 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비참한 죄인을 구원해 주셔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고 살려낸 자를 하나님이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도 하나님의 생명의 힘을 넘치도록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셨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주시는 속죄의 은혜를 힘입어서 구속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상상할 수 없는 행복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허접하고 아무것도 아닌 삶같이 느껴져도, 아무런 영광이 없는 같아도 그들에게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위로와 행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한히 공급되는 하나님의 넘치는 힘이, 죽음의 흰 이빨을 드러내고 우리의 사자처럼 부르짖고 우리의 모든 삶을 삼켜버릴 것 같은 어마어마한 삶의 폭풍이 일어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은 주님의 손 안에 있고, 어차피 삶과 죽음 사이는 우리에게는 백지장 한 장의 차이일 뿐입니다. 오히려 사도바울처럼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우리에게는 더 좋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소망을 이렇게 품고 용기있게 자신의 현실을 대면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힘을 오늘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그렇게 예수의 죽음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위대한 생명의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잇대어 그렇게 우리를 끊임없이 살도록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충만하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침체되어 도저히 살 수 없을 때에도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용기와 힘이 솟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직접 그 생명을 경험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강한 자가 되겠습니까?
Ⅳ. 적용과 결론
사경회를 마치면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과연 내 인생 이 긴 시간동안 내가 진정으로 살았던 삶이 얼마나 될까? 내가 든든한 주체가 되어서 우리 주님의 손을 붙들고 내 삶을 뜨겁게 사랑하며 내 삶 속에서 일어나는 달콤한 순간뿐만 아니라 생 고등어가 들어간 피범벅 된 냉면을 비벼먹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기꺼이 감당해 나가고, 누구도 이것을 나누어 가질 수 없고 나에게만 제공된 나의 인생이라는 사실에 엄숙함을 느끼며 성스러운 마음으로 그 인생을 직접 대면하고,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대면해서 자신의 힘이 부족하고 지혜가 부족할 때 좌절하지만 우리는 믿을 곳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현실을 극복하며 살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얻을 때 이미 주님께 죽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내가 정말 살고 싶습니다. 남의 삶이 아닌 내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인생을 살면서 현실과 맞닥뜨리면서 현실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하나님이 약한 자를 들어서 크게 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주님이 십자가의 은혜로 담으신 그 보배를 보여주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 내가 살고 싶고 사는 것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더 이상 죽은 자처럼 사는 이것은 치욕스러운 삶입니다. 하나님, 나를 데려가시든지, 살아있게 하시려면 그 생명의 충만한 능력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이 오늘도 마른 뼈와 같은 여러분을 군대처럼 살아나게 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와 그 인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 편지는 핍박받는 히브리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쓴 서신입니다. 11장에서 믿음의 위인들을 제시하고 그들이 어떻게 환란과 시련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 승리하는 삶을 살아냈는지를 노래하였습니다. 웅장한 웅변처럼 들리는 11장의 장중한 서술이 끝나고, 12장에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하나님이 반드시 지키고 보호하고 승리하게 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본받는 신약의 성도들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경주에 비하고 있습니다. 달리기에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이 달리기는 우리로 말하자면 전국 체전처럼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 하던 로마 시대의 올림픽과 같은 경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각기 자기네 지방, 자기네 도시의 명예를 짊어지고 나와서 경주를 시작합니다. 가슴이 터지도록 심장이 터질 것처럼 달음박질할 때에 그 달리기 선수는 오직 승리해야 되겠다라는 일념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이 길을 마지막까지 달려가서 자신의 고장의 명예를 안겨야 하겠다는 생각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달리기 선수처럼 우리 성도들은 예수라고 하는 마지막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경주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일이 너무 어렵고 힘든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보고 생각하여야 할 것이 있다고 성경은 제시합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와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서 참으신 그 인내입니다.
II. 십자가와 그 인내
A. 부끄러움을 참으심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인내를 본받도록 성경은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그 십자가의 고난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부끄러움을 참으신 고난이었다고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성자로서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일생동안을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을 보여주면서 사셨습니다.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목수의 집안의 한 천한 아들로 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사셨고, 이 모든 세계가 당신의 손에 의해 지음 바 된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그런 가난하고 어려운 삶을 사셨습니다. 더욱이 그분이 그렇게 일생을 우리를 위해 섬기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고, 무지한 자를 가르치신 후에 마지막 남은 것이라고는 당신의 몸뚱이 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화목제물로 바치심으로 우리 모든 사람을 구원 얻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의 마지막 운명하시는 그 순간까지의 모든 삶은 부끄러움을 참으신 삶이었습니다. 무지한 분이 죄인으로 여김을 받았고, 영원한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하찮은 인간들에게 죽임을 당하시는 일을 기꺼이 겪으셔야 했습니다. 힘이 없고, 능력이 없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당신이 죽는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살리는 길이라고 그 분이 아셨기 때문에 기꺼이 우리를 위해 그 치욕스러운 부끄러움을 참으시며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셨습니다. 무엇을 참으셨습니까? 원망과 불평이 있어서 오늘도 하나님 앞에 어그러진 삶을 살고 있지만 그러나 여러분이 정말 예수를 위해 참아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너무너무 그 일을 하고 싶은데 예수님이 그 일을 기뻐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참아본 적 있습니까? 나는 너무너무 싫은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자기를 꺾어본 일이 있습니까? 예수를 믿고 그 분을 따라가는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예수를 위해 참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만 부어지는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십자가에서 마지막 죽어 당신의 몸을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제물로 바치시기까지 치욕스러운 생애를 살았지만 그러나 끊임없이 참으신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도 참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 믿고 그 분의 뒤를 따라가는 삶이 언제나 영광만 받는 삶이 아니라는 것, 붉은 양탄자가 깔린 길을 깨끗한 구두를 신고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걸어가는 길만은 아니라는 것,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잊혀져 가고 있는 이 복음적 신앙중 하나는 십자가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그 모든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를 살리셨으니 이제는 내가 그렇게 예수를 위해 부끄러움을 당하고 예수를 위해 죽을 차례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B. 기쁨을 위해
그러면 왜 그랬을까요? 왜 예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죄가 없으신 순전한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멸시와 모욕을, 부끄러움을 끝까지 참고 마지막 십자가를 지고 당신 자신이 잘 죽으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오늘 성경은 ‘그의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그랬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 앞에 있는 그 기쁨을 위해서 십자가를 참고 부끄러움을 견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이 기쁨은 무슨 기쁨일까요? 도대체 예수님은 무슨 기쁨이 기다리고 있기에 이 멸시와 치욕을 당하는 그 모든 것을 감당하셨을까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셨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수 오시기 700년 전에 내다본 이사야 선지자는 그 유명한 메시야의 시편, 메시야의 장, 53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뜻으로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의 기쁨은 무엇이었습니까? 씨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어 고난을 당하심으로 당신이 그렇게 죽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영원히 멸망 받을 수많은 인류의 씨들이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는 그 열매를 보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 기쁨을 기대하면서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과 인류를 제외한 당신만의 이기적인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자,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죽은 그를 다시 살려 내시고 부활의 주가 되게 하심으로 마지막 이루고 싶으셨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 한분의 이기적인 기쁨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이 기쁨은 자기를 낳으신 아버지의 기쁨이었고,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쁨이었고, 또 자기의 죽음을 인하여 구원을 받을 수많은 인류의 씨들의 기쁨이었습니다. 바로 그 기쁨을 생각하시면서 잠시 당신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멸시와 욕을 개의치 않고 견디셨던 것입니다.
그 분이 무슨 잘못이 있으셨습니까? 그 분이 무슨 죄를 지으셨습니까? 그분이 죄를 지은 것이라고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 세상의 인류를 너무나 사랑하신 것 이외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 그 분이 멸시와 욕을 당하실 때 기꺼이 당하신 이유에 대해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지만 죽지 않으면 한 알이 그대로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바로 당신의 죽음이 수많은 인류의 씨를 살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예고의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기쁨이었으니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의 모든 인류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구원받을 모든 인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놀라운 생명의 비결은 바로 삶에 있습니다. 삶이 누구를 기쁘게 하고 무엇을 위한 삶인가에 대하여 답할 수 있을 때 그때 그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은 더 풍성하게 주어집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라도 마음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삶의 한 가지라도 결심해 보십시오. 그러면 힘이 솟아납니다. 그렇게 살고 싶은 용기가 생겨납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기쁨, 무엇을 위한 기쁨의 삶입니까? 어떤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을 줍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좋아하시고 당신이 위하여 십자가에 죽을 당신의 어린 아들이 행복해지는 일이라면 그것이 당신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바로 그렇게 예수의 뒤를 따라가게 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지만 하나님 밖에서 기쁨을 찾는 사람들은 언젠가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가 좋아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도 부끄러운 일이었고, 치욕이었고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에게도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참으셨습니다. 인내하셨습니다. 견디셨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기쁨을 위해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십자가의 예수를 보라
결국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은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십자가 지기까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고 멸시와 욕을 당하며 사시는 삶의 모든 과정, 그리고 그 마지막 결국인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이 모든 것을 당하고난 결과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입니다. ‘앉았다’라고 하는 이 의미는 두 가지를 뜻합니다. 하나는 할 일을 모두 끝내고 쉰다는 것입니다. 그게 앉는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그 앉는 자리가 휴게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앉으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를 대신해서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앉는다라고 하는 이 의미는 쉼과 안식과 통치를 의미합니다.
우리들이 논다고 해서 휴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삶의 진정한 안식은 자신에게 지워진 십자가를 지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안식이 있습니다.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가 어디인줄을 아는 사람, 그래서 부끄럽고 때로는 치욕스럽지만 예수를 위해서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감당해 나가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육신으로는 고달픕니다. 남이 잘 때 기도해야 합니다. 남이 쉴 때 섬겨야 합니다. 남이 놀 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고 다 망했습니다. 그리고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큰 병에 걸렸습니다. 일생동안 교회에서 집사로 장로로 권사로 그렇게 일생동안 주님을 섬긴다고 애썼는데 마지막에 하나님이 나에게 겨우 이런 결과를 주시나 낙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이가 드니까 우울증 비슷한 것이 찾아왔습니다. 삶이 말없이 아주 황폐해졌습니다. 돌볼 사람이 없어서 부인은 요양원으로 가고 그리고 자신은 폐인이 되다시피 방구석에 처박혀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가서 권하고 해도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러다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이 분이 선교지를 가게 되었습니다. 선교지에 가서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의 환경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그런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그렇게 기쁨의 삶을 사는 것을 보면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의 안식은 물질의 크기가 아닙니다. 거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명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은 거기에 쉼이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렇게 예수 위해 십자가를 지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권세를 주십니다. 어떤 권세냐 하면 연약한 자를 붙들어줄 수 있는 권세, 흔들거리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에 대해서 권위 있게 말할 수 있는 힘, 그래서 왜 그런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설득이 되고 그리고 정말 예수 사랑하는 참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무릎을 꿇게 되는 그 무엇을 거기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고난의 십자가를 다 지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마지막에 그 보좌에 앉아 안식과 통치를 누리신 것처럼 오늘 십자가를 지는 성도들에게도 그런 쉼과 다스릴 권세를 주십니다. 미래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쉼을 누리며 이 세상을 심판하는데 동참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적으로 그 안식과 통치를 누리며 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광을 받으신 주님을 보기 전에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는 믿음의 대상인 동시에 또한 누구든지 당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가 그 사람을 결정하게 되는 것처럼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에게 감화를 받고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사셨던 삶, 베푸셨던 사랑, 죽으셨던 희생, 당신이 감당하셨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 이 땅에 계셨더라면 사셨을 삶을 부족하나마 살려고 애쓰는 모든 사람들은 조금씩 온전해져 갑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보면 예수를 오래 믿었는데도 향기가 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오래 믿어서 교회에서 집사는 되고 권사는 되고 장로는 됐는데 왜 그런지 예수 냄새가 안 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 줄을 아십니까? 십자가를 지는 삶이 없이 교회에서 계속 직분만 받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거기에서 피 울음을 울며 자기를 죽인 흔적이 있어야지만 예수의 냄새가 나는 것이고, 그게 예수를 닮는 삶입니다. 오래 믿어도 변화되지 않는 신자들은 닮고 본받고 싶은 모범을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직접 닮는 줄을 잘 모른다면 진짜 인격이 고매하고 신앙이 순수했던 선배를 생각하고 그 분이라도 닮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변화됩니다. 교회에서 세월이 흘러서 모든 신자들 나만큼 예수 오래 믿은 사람이 없다고 깔보고 거들먹거리고 다니고 그러니까 예수의 냄새가 안 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예수의 냄새가 아니라 썩은 내가 납니다. 그게 어떻게 예수를 바라보는 성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동안 사도로서 살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교를 앞둔 순간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누군지를 생각한 사람입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피 묻은 십자가는 자기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그는 죽을 때까지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왜요? 무엇 때문에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다메섹 가는 길에서 한번 떠오른 것이 아니라 매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의 마음속에서 체험되고 그리고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죽으신 것이 한순간도 당연하게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로서 이 순간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예수를 믿을수록 예수를 많이 닮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은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살면서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죽을 때까지 눈을 뜨고 그 어려운 것을 들여다봐도 여러분의 인생은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십자가의 현재적인 체험 속에서 살게 될 것이고, 그러면 여러분도 예수를 닮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여러분의 인생이 변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기억하며 참는 여러분이 되셔야 합니다.
Ⅳ. 적용과 결론
신자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고, 많은 사람들이 성령으로 시작했으나 인내하지 못함으로써 신앙을 그르친 적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삶의 현실을 대면하고 견딜 수 있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이 세상에서 온갖 인간이 겪는 질고와 고통을 다 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고통을 받는 모든 인간들이 얼마나 괴롭고 아픈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처럼 고통과 시련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도우시는 분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이 예수를 끝까지 붙들고 오래 참음으로 “결국은 네가 나의 은혜로 승리하였구나.”라는 주님의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성도, 십자가의 힘으로 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