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관계를 다시 세움
(2018년 주일오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8년 4월 29일-7월 15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8년 7월 26일
목 차
1. 마음을 돌이키심(말 4:6) 2018.4.29 주일오전 1
2. 자녀를 사랑으로 기르라(골 3:21) 2018.5.6 주일오전 9
3. 네 부모를 공경하라(엡 6:2-3) 2018.5.13 주일오전 20
4. 아내의 머리(엡 5:23-24) 2018.5.20 주일오전 28
5. 아내를 사랑하라(골 3:19) 2018.6.3 주일오전 37
6.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2018.6.10 주일오전 50
7. 남편은 아내의 머리인가?(엡 5:24-25) 2018.6.17 주일오전 60
8. 형제와 화목하라(잠 16:7) 2018.7.1 주일오전 75
9.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롬 9:1-3) 2018.7.8 주일오전 83
10. 참척에 슬퍼할 때(눅 7:11-16) 2018.7.15 주일오전 90
가족관계를 다시 세움1 2018. 4. 29 주일 낮 예배
< 마음을 돌이키심 >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 4:6)
I. 본문해설
- 포로 귀환 후에 다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
-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함.
-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도록 권고함.
-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새 시대를 예고함.
- 엘리야 같은 세례 요한과 함께 새 새대가 열림.
II. 하나님이 돌이키심
-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회개함으로 가족관계가 회복됨.
- 아버지의 마음과 자식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남.
A. 아버지의 마음
-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들.
- 자기를 닮아서 태어난 자식을 사랑함.
- 부모의 자식 사랑은 자연적 본성임.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 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1-13)
- 이 예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예고함.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 게 하겠음이라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 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눅 1:16-17)
- 혹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로 해석.
- 그러나 이것은 사람인 “아버지들의 마음들”임.
- 이스라엘의 신앙적 타락이 가족관계를 파괴함.
- 신앙의 타락은 부모 자식 사랑을 무너뜨림.
- 영적 회복은 자식 사랑의 회복으로 나타남.
- 가정은 출생 뿐 아니라 사랑으로 양육 받게 함.
- 자녀는 따뜻한 가정 부모의 돌봄 속에 자라감.
- 망가진 가정은 굽은 인성의 인큐베이터가 됨.
- 그렇게 자란 아이는 참 부모의 역할을 모름.
- 사랑 받을 줄도 사랑할 줄도 잘 모름.
- 부모인 자신의 불우한 삶을 대 물림 함.
- 하나님을 만난 신앙의 은혜가 사람을 바꿈.
- 성경으로부터 인간이 사는 도리를 배움.
- 그리스도의 사랑 통해서 참 부모 됨을 깨달음.
- 육신의 아버지에게 못 받은 사랑을 받음.
- 은혜는 참 부모로 자식을 사랑하게 함.
- 하나님에게는 손자나 손녀가 없으심.
- 모든 믿는 자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심.
- 자식이 하나님 사랑 받는 자녀임을 알게 됨.
- 하나님은 어떤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셨는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 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 라”(요일 3:1)
-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자녀와의 관계를 접지 말라.
-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라!
-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를 사랑하라!
B. 자녀들의 마음
- 타락한 시대의 특징은 가족관계의 해체임.
- 십계명은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규정함.
a. 하나님과의 관계 첫 번째 : 다른 신을 두지 말라.
b. 인간과의 관계 첫 번째 : 부모를 공경하라.
- 자식이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를 떠남.
- 자식이 하나님 떠날 때 : 경건한 부모 싫어함.
- 부모가 하나님 떠날 때 : 자녀에게 상처를 줌.
- 그런 부모가 아닌데도 자식이 싫어함.
- 자식이 주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임.
- 세상 사랑과 정욕을 좇아 가정을 떠나감.
- 부모의 징계와 폭력으로는 돌이키지 못함.
- 자녀가 회심하고 주님께 돌아와야 가능함.
- 엘리야는 가장 타락한 아합의 시대를 맞섰음.
- 무력이나 권력이 아니라 주의 말씀으로 맞섰음.
- 두 선지자 모두 말씀과 능력으로 이 일을 함.
- 무엇이 우리 자녀들을 행복하게 할까.
- 하나님을 떠난 부모들의 관심사.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 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시 17:14)
- but, 그것으로 자녀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함.
- 젊은 시절 가장 고통 받았던 문제들.
- 모든 고민은 인생의 근원에 대한 질문임.
- 자식의 의무는 부모에게 사람 사는 도리를 배움.
- 자녀의 마음을 주님께 돌이켜 가족을 회복시킴.
a. 자녀들의 참된 회심을 구하라.
b. 참된 인간으로 모본을 보여주라.
III. 적용과 결론
- 가족은 하나님이 직접 맺게 하신 관계임.
- 사랑의 관계 안에서 참 사람으로 자라감.
- 하나님을 멀리 떠나 가족들에 대해 무정해짐.
- 말씀과 능력으로 망가진 가족관계를 치유하심.
- 무정한 아버지 마음과 상처 받은 자식을 고치심.
-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라!
가족관계를 다시 세움2 2018. 5. 6 주일 낮 예배
< 자녀를 사랑으로 기르라 >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골 3:21)
I. 본문해설
- 골로새서는 우주적 기독론을 담고 있음.
- 구원의 우주적 목적과 신자의 생활을 다룸.
- 가정은 그 목적을 알고 사는 사람을 기르는 곳.
- 본문은 자녀의 양육에 관해 가르침.
II. 자녀를 양육하는 지침
A. 노엽게 하지 말라
- “노엽게 하다” erethizete, 화나게 하다, 격노케 하다.
- 자녀는 정서적으로 따뜻한 환경에서 양육되어야 함.
- 노엽게 할 때, 마음의 비이성적 야수성을 일깨움.
a. 폭력과 폭언
b. 방치와 무관심
c. 과도한 기대
d. 그릇된 모본
- 부모와의 인격적 관계를 상실함.
- “낙심할까 하노라” athumosin(낙심하다)
- a(부정)+thumosin(열정을 갖다)
- “절망하다”, “올바른 정신을 잃다”
- 자녀 양육에 있어서 징계가 필요함.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 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
- 잘못을 이해시킨 후 분노 없이 징계함.
- 잘못한 정도에 알맞은 징계이어야 함.
- 충분한 애정 표현으로 상처 받지 않게 함.
B. 사랑으로 돌보라
- “아비들아” 그렇게 할 위험성이 많음.
- 자녀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함.
- 자신의 편견과 고집을 강요하지 않음.
- 분재처럼 기르지 말라!
a. 회심으로 인도하라.
b. 자유롭게 살게 하라.
c. 사랑 안에 살게 하라.
- 예화 : “아버지로서의 회심”
- 자녀 교육에 있어 부모의 회심이 필요하다.
III. 적용과 결론
- 자녀를 좋은 사람으로 양육하라.
- 부모들에게 이 책임을 맡기셨다.
- 주님이 사랑하심 같이 사랑하라.
가족관계를 다시 세움3 2018. 5. 13 주일 낮 예배
< 네 부모를 공경하라 >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엡 6:2)
I. 본문해설
- 구원과 우주적 계획, 교회를 말함.
- 가정에서 신자의 삶에 대해 언급함.
- 첫 번째가 부모에 대한 순종 + 공경.
II. 부모를 공경하라
A. 하나님의 명령
-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십계명.
- 하나님께 : 1-4계명, 인간에게 : 5-10계명.
- 인간이 사는 도리 중에 첫 번째가 계명임.
- “공경하라” 중요한 존재로 대하라.
- 자녀보다 부모에 대한 계명이 먼저 나옴.
-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 : 복종 요구.
B. 보상이 약속됨
-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 십계명은 인류가 지키며 살도록 주신 명령.
- 그 중 하나만 지킴에 대한 보상이 약속됨.
- 부모 공경에 대한 신적 열망을 보여줌.
- 출20:12와 신5:16을 비교해 보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a. 장수함.
b. 복 받음.
- 신명기에서는 “복을 누리리라”가 첨가 됨.
- 부모를 공경하지 않음으로 잘되지 못함.
III. 부모를 공경하라
- 부모 공경은 인격 유무에 관계 없이 모든 자식의 의무임.
- 자식이 잘못하면 매를 들어서라도 고쳐야함.
- 그러나 자식은 부모를 강제로 교정해줄 수 없다.
- 어느 통계 10대와 20대 젊은이 78% “아버지가 밉다”
- 진정한 공경은 사랑의 관계에서 나온다.
- 깨어진 관계 상처를 준 부모와 화해해야 한다.
- 이것은 지난 시절 상처 받은 자신과의 화해이기도 하다.
- 상처 받은 자녀의 희망은 분가하여 독립하는 것이다.
- 그러나 망가진 자신을 고치지 않고 어찌 좋은 삶을 살 수 있겠는가.
- 사랑해야 할 가족끼리는 사과하지 않는다.
- 우리는 말하지 않은 상처와 원망을 안고 살아간다.
- 진심으로 부모를 공경하려면 마음의 화해가 필요함.
- 효도에는 세 가지가 있음.
a. 정치적 효도.
b.. 적선적 효도.
c. 진정한 효도.
- 자녀는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간직하지만 부모는 흘려보낸다.
- 부모가 우리 잘못 말하지 않음은 우리가 항상 잘 해서가 아님.
- 부모의 자식 사랑은 드러난게 전부가 아니다.
- “세월호 사건과 아들의 운동화”
- “나의 26살, 아버지와 화해함”
- “꿈에 본 아버지를 끌어안다”
- 우리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부모의 사망이나 치매로 화해의 길이 사라질 수도 있다.
- 효도, 얽매이지 않는 주체로 인생을 사는 길이다.
III. 적용과 결론
- 예수님은 사랑의 회복을 위해 오셨다.
-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라.
- 다시 부모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가족관계를 다시 세움4 2018. 5. 20 주일 낮 예배
< 아내의 머리 >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엡 5:23-24)
I. 본문해설
- 자기 좋은 대로 사는 방종한 현대인들.
- 자본주의와 경쟁사회.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
- 인간이 사는 도리를 몰라서 고통을 겪음.
- 가정을 통해 배우지 못함 : 인간됨 + 삶.
-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 대해 가르침.
II. 아내의 머리인 남편
- 남편에 대한 아내의 덕목은 복종임.
- 가정의 질서. 주님의 뜻을 이룸.
- 결혼을 통한 연합은 머리와 몸의 연합임.
A. 남편, 아내의 머리
-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됨.
a. 첫 번째 사람.
b. 첫 번째 언약.
c. 첫 번째 가정.
- 가정, 유기체적 가족 관계로 지으심.
- 이것은 비인격적 지배 관계가 아님.
- 자식에게 가정 질서를 배우게 하심.
- 가정의 질서에 있어 남편의 권위를 인정함.
B. 그리스도, 교회의 머리
- 두 유비 : 남편과 아내, 그리스도와 교회.
- 그리스도의 머리되심과 교회의 연합.
- 머리와 몸의 관계 : 통치 + 생명.
- 주님이 우리 몸의 구주로 사랑하심.
- 사랑하시며 목적을 향해 통치하심.
- 온 몸이 머리의 지시를 따름에 하나가 됨.
- 교회가 온전한 사랑 안으로 연합함.
- 주 안에서 남편의 권위를 인정해야 함.
- 교회가 주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 듯.
- 아내는 가정 안에서 자기의 위치를 알아야 함.
- 주께 복종치 않는 섬김은 자기 좋아서 하는 일.
III. 남편에게 복종하라
- 남편의 장점이 아닌 주님 사랑 때문임.
- 세계를 창조하고 인류를 지으신 목적을 이해함.
- 주님 때문에 남편을 만났고 사랑 했음.
-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임.
- 남편은 존중 받지 못할 때 소외를 경험함.
- 소외의 반복은 사랑의 관계 파괴함.
- 남편이 복종할 수 없는 사람인가?
a. 그것은 “주 안에서”의 복종임.
b. 비록 부족해도 머리임을 인정함.
- 아내의 부족함이 사랑 없음을 정당화 할 수 없다.
- 사랑하며 온전한 사람이 되어감.
- 남편도 마찬가지로 대해야 함.
c. 남편 뜻 따르지 못할 때도 존중함.
- 사랑하기 힘든 아내 사랑해야 함.
- 복종하기 싫은 남편을, 자기 깨어짐으로 섬김.
IV. 적용과 결론
- 부부됨은 일생을 함께 해야 할 소명이다.
- 불완전한 인간을 서로 사랑하게 하신다.
-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신 주님을 생각하라.
- 불완전한 남편을 일생 동안 세워가라.
- 그러면서 자신도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라.
-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라.
가족관계를 다시 세움5 2018. 6. 3 주일 낮 예배
< 아내를 사랑하라 >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골 3:19)
I. 본문해설
- 이어서 아내에 대한 남편의 덕목 제시함.
-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19)
- 당시에는 로마 사회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함.
- 일반적으로 남성의 힘과 권력으로 가정을 통제했음.
II. 타락 후 혼인 제도
- 여자를 남자의 몸의 일부로써 지으심.
- 이는 남자에 여자가 종속된다는 뜻이 아님.
- 부부 사이의 질서 있으나 한 몸임.
- 인류의 타락과 관계의 파괴.
a. 하나님과의 관계 : 생명과 사랑.
b. 사람들과의 관계 : 폭력과 비참.
c. 자연계와의 관계 : 수고와 소산.
d. 자아와의 관계 : 분열과 혼란.
-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의 관계 파괴.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 4:8)
- 이는 살인, 곧 혈육의 비존재 선택하는 것이었음.
- 그것은 이미 타락한 아담의 마음에 있었던 것임.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 범죄한 후, 이미 하와의 존재를 싫어하고 있었음.
-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인 제도를 유지하게 하심.
- 이후로 혼인 제도는 남성의 억압과 폭력에 물듦.
- 우리가 속한 동북아 문화권도 예외가 아님.
- 우리는 이것을 유교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함.
- but, 정통 유교가 아닌 주역을 잘못 적용한 것임.
a. 억압적 남성우월주의가 지배함.
b. 여성의 교육 기회 박탈함.
c. 이중적 성윤리를 강요함.
- 초대교회 복음의 성공적 전파의 원인.
a. 로마제국의 영토 확장.
b. 기독교인의 선한 생활.
- 당시로서는 여성과 노예에 대한 파격적인 가르침.
-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모본을 보이셨음.
- 아내와 동등한 순결 요구함. 자녀 양육의 의무.
- 로마시대에 기독교가 공인된 후 교회가 제도에 편입됨.
- 성경적이고 복음적 남녀관, 부부관이 세속화됨.
- 종교개혁시대에 와서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함.
- 여성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로 재발견함.
- 그러나 남성 우월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함.
III. 아내를 사랑하라
A. 되는 사랑 vs 하는 사랑
- 결혼하지 않은 이들의 환상 : 열애.
- 그 열애가 평생토록 갈 것이라 생각함.
- 사랑은 감정만 아니라 마음을 요구함.
- “사랑”에 대한 신경과학의 설명.
a. 사랑에 빠짐 :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페닐에틸아민.
b. 열애 그 이후 : 엔돌핀, 바소프레신, 옥시토신.
- 남녀의 사랑 : 되는 사랑 + 하는 사랑.
- 가족 관계에 있어 모든 덕목의 동기는 사랑임.
- 그럼에도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하심.
- 아내 사랑함을 본성에만 맡길 수 없음.
B. 사랑, 자기 완성의 길
- 남편에게 아내는 주어진 운명이다.
- 남편의 본분은 아내와 함께 사는 것.
- 세상 사람은 잘 몰라서 아내를 버림.
- 신자가 어디까지 아내를 사랑해야하나?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 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4)
- 그 사랑의 동기와 이유는 구원하신 하나님이심.
- 그 사랑의 표준은 예수를 통해 나타남.
-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비전.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 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 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6-27)
- 그들을 구원하신 목표가 그들을 온전하게 하는 것임.
- 예수는 완전하셔서 자신이 정결케 되실 필요가 없음.
- but, 남편은 아내와 함께 정결해져야 함.
- 한 인간을, 아내와의 관계를 통해 완성하심.
-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현실적 이유들.
a. 여러 이유를 말함 : 아내의 결점.
b. 궁극적인 이유 : 사랑이 없음.
C. 은혜로 사랑함
- agapete “(하나님의 사랑으로)사랑하라.”
- 당시 세상과 전혀 다른 명령을 남편에게 주심.
- 당시에는 어떤 식으로든지 아내는 gape 대상 아님.
- but,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이 되어야 함.
- 이렇게 사랑할 원천이 우리 자신에게 없음.
-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가 필요함.
- 그것은 은혜임. 신자의 의지와 화합해 역사함.
- 아내를 사랑할 수 없을 때.
a. 현실을 통해 자신의 민낯을 보자.
b. 아내를 사랑 못하면 자기 인생도 없다.
c. 용서와 사랑의 은혜를 간구하라.
- “선물과 마음 다스림”
- 완전한 사랑을 바라며, 현실을 인정함.
- 모든 것을 알아주지 못함을 불평하지 말라.
- 아내의 결점에서 남편의 소명을 발견함.
- 푸념, 잔소리, 무시, 한숨 : 성화 될 기회로 삼음.
- 이 모든 것을 이기는 기쁨의 삶을 살라.
- 지난날 아내에게 상처 주었다면 용서를 빌라.
- “이 여자를 반드시 행복하게 하고 말리라.”
IV. 적용과 결론
- 신자도 세상 풍조의 영향을 받음.
- but, 끊임없이 성경의 빛으로 돌아오라.
- “아내를 사랑하라.”
- 얼마나 어려운 일이면 명령하실까?
-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 남편의 성공한 인생은 없다.
- 모두 두고 가는 인생길의 마지막 족적이다.
- 아내를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라!
가족관계를 다시 세움6 2018. 6. 10 주일 낮 예배
<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 >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골 3:19)
I. 본문해설
- 남편의 덕목은 아내를 사랑함이다.
- 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
-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II. 괴롭게 하지 말라
A. 의미와 문맥
1. 의미
- “괴롭게 하지 말라” pikrainesthe.(괴롭히다)
- pikria “고통, 쓰라림, 가혹함”, “아픔”(정신과 육체)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 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히 12:15)
- “쓴 열매를 맺는 뿌리”
2. 문맥
- 교회 밖의 현실과 신자의 생활을 대조함.
- 남성 우월주의의 거친 남편의 태도를 염두에 둠.
- 당시 폭압적 가부장제 아래 일상적인 것이었음.
- 따라서 당시로서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명령임.
3. 현실
- 성경을 통해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았음.
a. 변종적 유교주의.
- 남편은 그런 사상에 젖어서 살아왔음.
- 아내는 그런 문화에 익숙해져서 순종함.
- 더욱 그것을 신앙화하려는 어리석음.
b. 탈근대적 사고.
- 아내가 그런 사상에 동조하지 않음.
- 남녀가 양쪽에 치우쳐 싸우기도 함.
- 현실과 관습으로 성경을 덮지 말라.
- 신자는 성경을 생활의 원리로 받아들여야 함.
- 그런 신앙 안에서 현대의 문맥과 대화해야 함.
B. 아내를 괴롭게 할 때
- 언어 생활 : 존중심 결여, 짜증, 화냄.
- 가정 섬김 : 양육, 가사, 관심의 부족.
- 시댁 관계 : 시댁과의 관계 조율에 무책임함.
- 생활 태도 : 인터넷, 모바일, 배려가 없음.
1. 부부의 연합
- 부부는 혼인과 함께 특별한 연합을 가짐.
-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 있는 부부의 연합.
- 다른 사람들에 대해 구별된 심신의 연합임.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 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 “아내와 합하여…한 몸을 이루라”
- “합하여” dabaq 달라붙음. “한 몸” 연합 사랑.
- 부부의 원리적 연합과 실제적 연합.
- 부부사이에 사랑과 마음의 연합이 약화됨.
- 원리적 연합은 사랑으로써 실제로 구현됨.
- 그 안에서 주님과 영적인 풍성한 생명을 누림.
- 아내는 “생명의 유업을 함께할 자”(벧전 3:7)임.
- 천국에서뿐 아니라 이 땅에서 앞서 누림.
2. 나쁜 결과들
- 아내를 사랑치 않고 연합이 깨어짐.
a. 소극적 : 기쁨 상실, 부자유, 낙심.
b. 적극적 : 상처, 분노, 복수의 감정.
- 결혼을 통해 보이신 주님의 계획에 어긋남.
- 괴롭게 함. 아내를 자기 몸으로 여기지 않음.
- 부부만 아니라 지체로서의 연합도 없음.
- 남편과 함께하는 미래의 소망이 사라짐.
- 결혼 생활을 통해 좋은 사람됨을 입증해야함.
- 서로 그런 사람 돼가도록 부부로 부르셨음.
C. 연약한 자로 여김
- 남편도 연약하나 더 약한 자로 여김.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 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 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 여자는 남자에 비해 열등하지 않음.
- but, “더 연약한 그릇” 세심히 배려.
a. 육체적인 능력.
b. 정신적 감수성.
c. 성품적 인내력.
- 그리스도께서 신부인 교회를 세심히 돌보신다.
-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며 세심히 돌보라.
- 주 안에서 남편의 사랑 받으며 살게 함.
- 한 인간으로서의 완성으로 나아감.
III. 부부, 기쁨의 삶
- 아내를 괴롭게 하지 않는 유익 : 기쁨의 삶.
- 아내를 괴롭게 한 것은 그녀에게 상처로 남음.
- 관계의 즐거움이 사라짐. 기쁨 상실.
- “개를 묶은 줄의 비유”
- “에덴”(기쁨) 동산에 첫 부부를 두심.
- 결혼 생활은 수도 생활을 가리키지 않음.
- 온전하게 되려하면 그 자체 아닌 기쁨과 사랑의 삶.
- 서로 보고 싶고 그리운 관계가 되라.
IV. 적용과 결론
-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사랑할 시간 밖에는.
-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
- 서로 사랑함으로 기쁨의 삶을 살자.
가족관계를 다시 세움7 2018. 6. 17 주일 낮 예배
< 남편은 아내의 머리인가? >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 5:24-25)
I. 본문해설
- 하나님의 구원경륜과 신자의 생활.
- 불신자와 신자의 삶의 대조, 교회를 말함.
- 하나님 자녀들의 생활, 첫 번째 말함.
- 남편과 아내 : 사랑과 질서를 따름.
II. 남편은 아내의 머리인가?
A. 찬성하는 견해
- 남편이 아내의 머리임을 성경이 증거라고 봄.
- 머리와 몸의 관계는 권위와 복종이라고 봄.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엡 5:22)
- 그 남편‧아내는 그리스도와 교회 같은 위계 질서임을 강조.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 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4)
B. 반대하는 견해
- 그런 견해는 구약적이고 봉건적임.
- 남편‧아내 관계를 구원론에서 봐야한다고 주장.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
- 그리스도의 구원은 차별이 없고 하나라고 주장.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 그리스도의 지체 안에 구별이 없음을 강조.
- 남녀가 그렇듯 남편과 아내가 그러하다고 봄.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 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 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엡 5:29-30)
III. “머리와 몸”의 비유
- 이 비유의 제한적 성격을 염두에 두어야 함.
- 성경에서 비유는 모든 것 아닌, 핵심에만 관계됨.
* 예 : 빛과 소금의 비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 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 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3-14)
- 남편 아내/머리 몸은 머리‧몸의 모든 관계를 말하고자 함이 아님.
- 예수/교회-남편/아내의 유비는 제한적인 용도에 국한됨.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 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엡 5:23)
- 이것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됨의 모두를 의미하지 않음.
- 이는 관계하는 방식의 일치이지 존재와 권위에 관한 것이 아님.
- 그러면 다음 성경구절을 어떻게 해석할까?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 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 이것은 남편을 신앙의 목표로 삼으라는 뜻이 아님.
-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의 세 의미.
a. 원천적 생명.
b. 우주적 통치.
c. 경륜적 섬김.
IV.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
A. 종속적 지배 관계 아님
- 원래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창조하심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 니라”(창 2:18)
-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 “그를 위하여”(kenegdo) “그에 상응하는”, “짝을 이루는”
- “돕는 배필”(ezer) “도움, 응원군”을 의미함.
- 아내에 대한 남편의 폭력성이 타락과 함께 들어 옴.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창 4:23)
- 아내들에게 남편이 자신의 공격적 폭력성을 자랑함.
- 여성에 대한 폭압적인 가부장 제도가 즉시 시작됨.
- 그러나 타락 후에 조차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
- 죄가 들어 온 후 부부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예고.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 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6)
- “네 남편에 대해 너의 욕망(teshukatek)을 갖지만,
- 남편에게 다스림을 받으리라(ieshmol beka)”
- 우리말 번역 “원하고”는 사랑이 아닌 지배욕, 탐욕.
- 따라서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형벌이 아님.
-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대등한 관계로 창조함.
- 남자와 여자 모두 타락으로 악한 본성과 지배욕에 물듦.
- 그러나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한 몸 된 사랑의 관계임.
B. 기능적 질서가 있음
- 창조 시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짐.
- 남자를 여자의 머리 삼으심.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 나님이시라“(고전 11:3)
- 이것은 그리스도-남자-하나님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 아님.
-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이 전개되는 질서임.
- 그리스도, 하나님은 완전하시나 남편은 그렇지 않음.
- 따라서 하나님-그리스도의 복종이 곧 남편-아내 복종이 아님.
- 그러나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창조함.
- 남녀간 : 보편적 본성 + 개별적 본성의 차이가 있음.
- 그리고 남편‧아내 사이에 기능적 질서를 두심.
- 이것을 “여자의 머리”라고 표현한 것임.
a. 남자가 먼저 창조됨 : 우열이 아님.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 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 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딤전 2:12-14)
- 타락과 함께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 금지됨.
- 이 “주관”은 모든 일에 해당되는 것이 아님.
- 이는 타락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의미임.
b. 언약의 대표가 됨.
- 하와가 지음 받기 전, 이미 아담과 언약을 맺으심.
- 아담은 하와를 포함한 인류의 대표자로서 언약을 맺음.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 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 5:14)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 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 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
- 남편에게 가정에 대한 리더십을 주심.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 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 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전 3:4-5)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딤전 3:12)
- 남편에게 리더십을 주지 않으셨다면 그런 요구 불가.
- 타락 전에도 분명히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질서 있었음.
- but, 위계적 질서가 아닌 기능적 질서가 있음.
- 그 질서는 서로 동등하고, 사랑하며, 존중하는 관계임.
- 부부사이의 지배욕은 남성만의 문제가 아님.
- 위계적 질서로 오해하여 남편은 지배하고 아내는 항거함.
* 목사 장로와 성도들의 관계.
- 성도들에 대해 위계관계가 아니나, 그들을 다스림.
- 그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 뜻의 성취를 위함.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 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 남편은 신분적으로 아내의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님.
- 그것은 창조 목적을 위해 남녀를 기능적으로 구별하신 것.
- 타락 후,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지배하려는 욕구를 가짐.
- 남성의 폭력으로 자기중심적 질서를 구축함.
- 남성의 지배를 항구화하기 위해 법과 도덕을 구축함.
- 때로는 남성의 잔인한 폭력과 이중적 도덕을 내세움.
- 아내에 대한 머리됨 : 아내가 모든 것을 복종함이 아님.
- 남편의 머리됨은 가족들을 신앙적으로 돌보기 위함임.
-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가정이 되기 위함임.
- 가족들을 신앙으로 이끎에 있어서 권위를 인정해야 함.
- 남편에게는 아내와 가족들에 대한 영적 책임이 있음.
- 남편의 비합리적 주장 : 순종 아닌 사랑과 이해의 문제.
* 예화 “신학교 가는 것과 아내의 허락.”
* 하나님 뜻과 상관없는 일에 권위를 내세우지 말라.
-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지 않을 때 많은 갈등이 생김.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 라”(엡 5:20-21)
- 머리/몸은 지배의 논리가 아닌 탁월한 사랑과 조화임.
- 부부가 서로를 지배하려는 대신 섬기려고 노력할 것.
- 아내는 가정에서 기능적 질서와 남편의 권위를 인정함.
- 남편은 자신의 권위가 매우 제한적인 것임을 알아야 함.
- 가정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해야 함.
-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고 섬기는 방식으로 사용해야 함.
V. 적용과 결론
- “남편은 아내의 머리다.” 이것은 사실이다.
-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됨과 꼭같지 않다.
- 남편의 권위는 위계적이 아닌 기능적 질서에 기초한다.
-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성취이지 지배를 위함이 아니다.
- 남편과 아내는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 하나님의 뜻은 서로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다.
-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야 한다.
가족관계를 다시 세움8 2018. 7. 1 주일 낮 예배
< 형제와 화목하라 >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잠 16:7)
I. 본문해설
-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화목하게 사는 것.
- 그러나 현실은 항상 그렇지는 않음.
a. 근원적 : 인간의 타락과 죄성.
b. 현실적 : 이해 관계와 소통 능력의 부족.
- 특히 가족은 첫 사회를 가르쳐 준 곳임.
- 본문 일반적인 관계, but 형제 관계에 적용할 수 있음.
II. 형제와 화목하는 길
A. 인생의 첫 사회
- 형제, 부모를 넘어서 만나는 첫 번째 사회임.
- 형제 관계에서 사랑, 용서, 화목을 배움.
- 첫 타인과 관계 맺는 첫 단계로서 중요함.
- 교육의 중요성 : 편애하지 않음, 교훈, 모본임.
- 아이들은 충분한 사랑과 평화 속에 자라야 함.
B. 형제 관계의 깨어짐
- 형제 우애의 깨짐 : 사랑, 소통 부족, 이익.
- 관계가 훈련되지 않은 채 인생을 살아감.
- 처음 사회에서 실패한 경험이 주는 영향.
- 함께 사는 절대적 시간과 공간이 부족함.
- 동거의 기쁨과 그리움을 배우지 못함.
- 산업 사회의 바쁜 일상이 영향을 끼침.
- 결혼과 핵가족화 형제의 아내들 갈등 영향을 줌.
- 부모 부양이나 유산 같은 이익의 충돌.
- 형제간에 신용 지키지 못한 돈거래 등에 영향 받음.
- 깨어진 형제 관계를 방치하지 말라.
- 양심의 가책과 내면의 송사를 겪음.
C. 화목하게 하심
1. 여호와를 기쁘시게 함
- 형제의 불화 : 삶의 기준이 하나님 기쁨이 아님.
- “행위로써…기쁘시게 하면”
- 내적 경외심이 샬롬의 삶으로 나타남.
- 영적 은혜가 순종으로 이어진 생활.
a. 자기 이익 포기.
b. 하나님 사랑함.
c. 그 뜻의 성취 기뻐함.
- 은혜를 베푸심 : 일반 섭리 + 은혜의 힘
- 형제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님.
- 하나님의 기쁨이 화목의 동기가 되어야 함.
- 먼저 나에 대한 하나님 사랑을 알자.
- 현실 극복할 하나님의 은혜를 받자.
2. 원수라도 화목케 하심
- “미워하는 자들” 다수의 사람.
- 미워하는 사람 많고 정도 클지라도 화목하라.
- 주님 화목케 하심 온 인류와 한 사랑.
- 틀어진 형제와의 화목이 어려움.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잠 18:19)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 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잠 18:24)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 보다 나으니라”(잠 27:10)
- 그리스도께서 은혜로 자기를 희생하심.
- 아무리 관계가 어려워도 포기치 말라.
- 십자가 사랑으로 형제를 끌어안으라.
- 끝까지 회복 안돼도 주님이 갚으신다.
-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며 살아가라.
III. 적용과 결론
- 자기 아들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라.
- 미움과 상처 극복하며 화목하게 하라.
- 그 과정은 실패할지라도 찬란하다.
- 그 실천 통해서 영광 받으신다.
가족관계를 다시 세움9 2018. 7. 8 주일 낮 예배
<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 >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롬 9:1-3)
I. 본문해설
-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의 행복을 말함.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 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 예수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에서 구원함.
- but, 신자는 육신 아닌 성령에 따라 살아야함.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 로마서 정점인 끊을 수 없는 사랑을 말함.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 가슴 벅찬 하나님의 사랑 말한 후에 본문이 나옴.
- 그 벅찬 마음의 시선을 가족, 친척, 동포로 돌림.
II. 그치지 않는 고통
A. 양심이 증거함
1. 증언이 결코 과장이 아님
- 전도를 강조하려고 지어낸 마음이 아님.
-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사랑에 감격함.
- 그 사랑의 깨달음이 클수록 친척, 가족들을 생각함.
2. 언제나 잊혀지지 않음
- 이방인 선교의 큰 역사도 슬픔을 없애지 못함.
- 그들의 오류에 자신도 빠져보았기에 더욱 슬퍼함.
3. 성령 안에서의 증거임
- 은혜 받을수록 더욱 고통스러움.
- 성령은 그들을 구원하려는 하나님 마음을 보여줌.
B. 골육 친척을 위한 고통
- 바울의 회심 경험과 관련된 고백임.
- 정통 유대인으로 태어나 성장했음.
a. 유대교란 무엇인가?
b. 구약의 정통적 여호와 신앙 떠남.
c. 그릇된 메시아와 왕국 사상 가짐.
- 기독교를 박해하던 인물이었음.
- 사울 안에 있는 두 편견 : 신학적 + 심리적.
-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
- 세계 창조, 구속, 완성 꿰뚫는 역사.
- 하나님의 우주적 사랑과 인류 구원.
-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음.
- 골육 친척들에게는 모함과 박해를 받음.
- 그들은 무지와 편견 때문에 십자가를 대적했음.
- 불타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동족을 위해 통곡함.
III. 저주 받아도 원하는 것
-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끊어질지라도”anathema einai autos ego
- anathema = ana + tithemi “따로 떼어둔 것, 봉헌제물”
“저주 받음” (고전16:22, 갈1:8-9)
- 그들이 구원 받지 못한 상태에 있기 때문임.
- 하나님이 긍휼 여기심에도 반항함.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 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 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5-16)
-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음.
- 인류의 구원 계획이 그들에게 먼저 계시되었음.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 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 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 9:4-5)
- 스스로 영적 어둠, 무지, 완고함으로 하나님을 불신함.
- 회심 후, 바울에게 그리스도가 전부였음.
-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저주를 피하도록 복음을 전하였음.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 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 그들은 종교는 믿으나 세계와 인생의 의미를 모름.
- 바울도 그들이 구원 받기를 간절히 원했음.
a. 십자가 사랑 알고,
b. 죄 사함을 받고,
c. 하나님의 생명 누리기 바랬음.
- 그들이 이방인들과 하나 되어 사랑하며 살기를 원함.
- 창조와 구속 목적을 따라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함.
- 하나님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게 한다.
- 가족들의 구원을 위한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IV. 적용과 결론
- 우리를 어떤 사랑으로 구원하셨나.
- 구원 받지 못한 가족들을 생각하라.
- 그 영혼들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다.
- 마음 다해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자.
- 저주 받기 원하는 마음으로 전도하자.
가족관계를 다시 세움10 2018. 7. 15 주일 낮 예배
< 참척에 슬퍼할 때 >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눅 7:11-16)
I. 본문해설
- 자식을 잃은 슬픔보다 큰 것은 없다.
- 참척의 경험 : 박완서, 마르크스, 이순신.
- 춘추전국시대 子夏 : 喪明이라고 부름.
-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 청년의 죽음.
- 청년 죽음의 행렬 예수 생명의 행렬.
II. 참척을 당한 어미
- 아들을 잃은 어미의 비참함과 절망감.
- “울지 말라” klaie “통곡하지 말라”
- 방성대곡함으로 아들의 주검을 따라감.
- 신앙 여부는 모르나 아들을 깊이 사랑함.
- 이혼할 때 자녀를 고아원에 보내는 세상.
- 사랑이 없이 자식을 사랑할 줄 모름.
- 육신보다 더 큰 영혼의 죽음 슬퍼하라.
III. 살리시는 예수님
A. 죽은 자를 살림
- 묘지 향하는 행렬 막아 서시며 관에 손대심.
- “청년아…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14)
- 주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려 주셨음.
-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15)
- 영적으로 죽은 자가 살아 나는 것이 큰 기적임.
- 지금도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주님.
- 자녀들에게 스며드는 죽음의 기운을 보라!
- 중생과 회심의 의미를 되새기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 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요 3:5)
-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함으로 구원을 받음.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 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 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B. 불쌍히 여기심
-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13)
- 예수님은 죽은 아들보다 슬피 우는 어미를 보심.
- “불쌍히 여기사” espranknisthe.
- 영혼의 깊은 자리가 움직이기까지 감동을 받으심.
- “가슴이 찢어지기까지 아파하셨으니”
- 비참에 처한 인간에 대한 절절한 사랑임.
-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은 우리가 예수 생명을 누리는 것.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 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 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 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24)
- 과부로서 독자 잃은 것을 불쌍히 여기심.
- 부모의 의무는 자식을 깊이 사랑하는 것임.
- 자식의 육체 뿐 아니라 영혼까지 사랑함.
- 자식의 곤궁한 영혼과 마음을 누가 채울까?
- 영원의 관점에서 자식을 바라보라.
-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영혼으로 보게 함.
- 구원 받지 못한 자녀들 위한 눈물이 있는가?
-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실 만큼 비참한가?
- 자녀의 최고 보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
- 다시 참척의 슬픔으로 부르짖자!
IV. 적용과 결론
- 예수님은 죽었던 아들을 살리셨다.
- 이로써 모든 사람이 주님께 영광을 돌렸다.
-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16)
- 자녀들에게 복된 회심의 날이 이르기를 간구하자.
- 눈물로써 자녀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자.
가족관계를 다시 세움(2018.4.29 주일오전1)
마음을 돌이키심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맨 처음에는 감격 속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신앙생활 했지만 얼마 후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 선지자는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악에서 돌이켜 회개하도록 강력히 촉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율법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권고하였습니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예언으로 구약의 성경은 막이 내립니다. 구약의 마지막 부분인 말라기 4장과 신약성경은 그 첫 부분이 중첩됩니다. 그래서 말라기는 엘리야가 오리라고 하는 예언과 함께 끝나고, 신약성경은 또 다른 엘리야인 세례 요한이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회개를 촉구하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말라기의 시대나 세례 요한의 시대나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참된 종교의 본질에서 멀어진 때였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오셔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II. 하나님이 돌이키심
A. 아버지의 마음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회개함으로써 가족들과의 관계가 회복될 것임을 세례 요한은 외쳤습니다. 이때에 아버지의 마음이 하나님께 회개하면서 자식에게로 돌아가고, 자식들의 마음이 아버지께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먼저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일을 당신이 직접 다스리시는 대신 당신의 대리자인 인간을 두셔서 이 세상을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이 모든 세계를 계획 있게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했고,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함께 다스릴 이웃도 이해해야 했으며,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이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매우 고도의 지적인 능력과 감성적인 능력과 의지의 능력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허락하지 않은 그 무엇을 인간에게 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이 형상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영혼과 마음의 놀라운 특성으로서 하나님을 닮은 성품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주체성을 가진 존재로써 알고, 사랑하고, 그리고 결정할 수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인간은 하나님이 끊임없이 번성하게 하셔서 인류를 이루어 그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며 행복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제 남녀가 결혼을 함으로 생식을 통하여 자신을 닮은 자식들을 낳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 세상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든 세계의 생체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태어난 것들이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래서 이 모든 인간과 그리고 자연의 모든 생물들에게 자기 자식을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고 보호할 수 있는 본능을 주셨습니다. 때로는 이것은 매우 이타적인 것이어서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부모가 자식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합니다. 인간에게도 이런 자연적인 본성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도 분명합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눅 11:11-13)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아무리 악해도 그 자식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마음을 끊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앞으로 와서 하게 될 그 위대한 일에 대해서 누가복음 1장은 이렇게 예고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그가 또 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눅 1:16-17)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라고 하는 구절을 혹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의 마음이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이스라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사람인 아버지의 마음이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라기서 4장에서도 아버지라고 번역된 것이 ‘아보트’라고 복수로 나오고, 특히 신약성경 누가복음 1장 17절에서는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들을 자식들의 마음들에로 자식으로 돌아가게 하고, 자식들의 마음들을 아버지들에게로 돌아가게 한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 주냐 하면은 말라기 시대에나 혹은 이 세례 요한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륜이 무너졌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탁락한 신앙이 가족관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신앙이 타락했기 때문에 불신자들 속에서도 남아있었어야 했던 자식을 향한 절절한 사랑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어느 판사가 글을 썼습니다. 가정법원에서 일어난 일인데, 가정법원 담장 길에서 남자 한 사람하고 여자 한 사람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아이를 중간에 놓고 “넌 네 아버지한데로 가라” 아버지는 “야, 난 너 필요 없어. 네 엄마한테 가라” 아이는 자지러지게 우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결국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고 극도의 이기심에 사로잡힘으로써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창조할 때 두셨던 DNA조차 부정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 개를 길렀습니다. 그런데 이제 배가 불러오고 그래서 새끼를 낳을 때가 다 되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할머니가 새끼를 낳기 며칠 전쯤 새끼를 낳으라고 두툼한 솜이불 쪼가리들을 개집에 이렇게 넣어 주십니다. 그런데 이 개는 신기하게 가마니를 마루 밑에 깔아 줬는데, 밤이나 낮이나 그 가마니를 긁습니다. 그러니까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나니까 시끄럽다고 신발을 가지고 마루를 때리면서 조용히 하라고 해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이 개는 계속 긁습니다. 도대체 뭐하는 것인지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하여튼 긁습니다. 긁어서 그 지푸라기를 발톱이 닳도록 긁으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하자면 보드라운 보푸라기들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이만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걸 물어다가 자기 집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새끼가 태어나면 자기가 여태까지 살고 있는 그 가마떼기 위에 새끼가 거기 누우면 춥고 불편할까봐 그걸 긁습니다. 그것을 누가 가르쳐 주었겠습니까? 아니, 새끼를 낳아본 개는 학습이 되었다고 치지만 엄마한테 배운 것도 아니잖습니까? 엄마가 그렇게 긁었을 때 자기는 기억도 안 날 것입니다. 눈도 못 뜨는데, 어디서 배웠겠습니까? 하나님이 DNA 속에 새끼를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넣어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동물들이 번성할 수가 없습니다. 다 죽습니다. 그것을 인간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동물들은 그 DNA에 순종합니다. 그냥 따라갑니다. 그런데 인간은 극도의 이기심으로 하나님이 선명하게 새겨준 그 자식을 위한 희생이라고 하는 그 DNA를 파괴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다우면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아름다운 존재가 되지만 인간이 참된 인간의 도리를 저버릴 때에는 그야말로 짐승들 앞에 무릎을 꿇고 배워야 될 정도로 잘못된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까지는 무너지지 않는 마지노선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게 결국은 자식 사랑입니다. 남편하고는 싸워서 헤어졌지만 엄마는 그 자식을 그리워합니다. 아빠는 별로 안 그리워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다 술 먹으면 생각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립니다. 근데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아버지이지만 하나님은 아버지의 마음속에도 자식을 향한 그런 절절한 사랑을 그 DNA속에 새겨 넣으신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떠나니까 인간성이 파괴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만을 위하는 사랑으로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나 애정 같은 것들이 사라진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자식을 낳는 곳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식이 사람으로 자라도록 만들어 주는 환경입니다. 그래서 자녀는 태어나면 따뜻한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스러운 돌봄 속에서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모든 자녀들에게 주신 천부적인 권리입니다. 망가진 가정은 자녀들에게 굽은 인성의 인큐베이터가 됩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자기가 참 부모로써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배웁니다. ‘난 시집가면 우리 엄마처럼은 살지 말아야지. 우리 아버지는 정말 나쁜 사람이었어. 나는 저런 사람은 되지 않을 거야.’ 그런데 교육에 있어서 부정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교육이 안 됩니다. 그래서 항상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함께 그러면 무엇이냐를 함께 가르쳐야지만 이게 사람으로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만 배운 사람들은 안 됩니다.
목회도 똑같답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 자기도 보는 관점이 있으니까 봅니다. 저도 전도사 생활을 했었고 배워가면서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몇 교회 다니면서 수없이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를 배웠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목회를 잘 할 수 있느냐? 전혀 아닙니다.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는 부정적인 학습만 할 뿐만 아니라 ‘아! 저렇게 하는 거구나. 아, 나는 정말 저렇게 하고 싶다.’ 그걸 학습을 해야지만 목회를 배우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이렇게 하지 말아야 되겠다는 걸 부모에게 배우는 것만으로 절대로 좋은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란 아이는 자기가 자식을 사랑할 줄도 모르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는 원하지 않았지만 부모인 자신의 불행한 삶을 자기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대물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으니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의 은혜가 사람을 바꿔 놓는 것입니다.
자, 우리 옛날에 시골에 가면 계란 넣는 곽을 지푸라기로 만들었습니다. 예쁩니다. 열 개씩 들어가게끔 지푸라기를 엮고 계란 하나마다 짚을 엮어서 한 개씩 들어가게 했습니다. 열 개의 계란이 담겨져 있다고 칩시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봅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참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엄마로부터 사랑을 받아야하고, 아빠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좋은 동기간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되고, 성장할 때는 친구로부터 받는 사랑이 인생을 좌우합니다. 그리고 훌륭한 선생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됩니다. 결혼을 해서는 좋은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좋은 아내, 자식을 낳으면 자식으로부터도 사랑을 받아야 됩니다. 그게 계란처럼 꽉 채워지면서 행복한 사람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디 그런 사람이 있냐는 것입니다. 어디? 여러분 중에도 있습니까? 난 아직 못 만났습니다. 그 열 개의 계란 알이 꽉 채워지듯이 그렇게 자기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모든 관계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으면서 일체의 상처도 없이 자란 사람이 있습니까? 누구입니까? 만약에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다면 굳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뭐냐 하면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빈자리는 훌륭한 남편을 만난다고 해서 채워지는 것이 아니고, 효성을 다 하는 자식이 태어난다고 해서 채워지는 게 아닙니다. 남편으로부터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는 훌륭한 부모님을 바라보면서 자란다고 해서 그것이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다른 것들이 채워져도 채워지지 않았던 그 빈자리는 여전히 빈 공간으로 남아서 우리 인생의 발목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이 무엇이냐면 계란 알이 10개가 있는데 여기서부터 하나가 엄마, 아빠, 아내, 남편, 자식, 동기간, 선생님, 친구 이렇게 있습니다. 이게 저 자리로 옮겨서 대신 메워주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다른 곳에서 가져온 계란 알을 거기에다 집어넣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느 빈자리도 모두 채워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관계에서 오는 모든 사랑은 그 원산지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부모가 자식을 절절히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이 그런 사랑을 인간의 본성 속에 심으셨으니까 그게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라진 거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게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자기사랑에 눈이 어두워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자식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못 받은 부모도 주님을 만나면 그 다음에 그것이 상처가 되지 않고, 그 다음에 아내로부터 충분히 사랑을 못 받은 남편도 그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그렇게 자신에게 잘못한 아내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잉여의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남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는 힘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대체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망가지고 깨어진 가정을 고칠 수 있는 인류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난 신앙의 은혜가 사람을 바꾸고, 바뀐 그 사람에 의해서 관계는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렇게 인간이 참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인간이 무엇을 행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는 훌륭한 책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참 부모가 되려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아버지에게는 충분한 사랑을 못 받았을지라도 하나님께 사랑을 받음으로써 오히려 그 인간의 모든 아버지께로부터 못 받은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성품을 깨닫는 대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아버지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보십시오. 자신의 몸에서 태어났고, 그리고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거의 본능처럼 하나님이 그의 심성에 새겨주셨지만 그 우렁찬 외침을 못 듣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기심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자녀의 행복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본성에 주신 율법조차 거스르며 사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에게로부터 사랑을 못 받은 자식들이 결국은 자기 자식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이런 불행이 결국은 대물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 모든 것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은혜로 돌아가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은혜는 참 부모가 누구인지를 깨닫도록 만들고 자식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알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버지로써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을 우리는 배우기 때문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진정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며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이 땅에서 아버지를 섬겼던 예수를 보면서 우리는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손자나 손녀가 없으십니다. 모두 당신의 자녀입니다. 모든 믿는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거듭나고 변화되게 만들어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자식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임을 알게 되는 것은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게 됨으로써 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을 어떠한 사랑으로 돌보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요한일서 3장 1절은 말합니다. “보라 께서 어떠한 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의존하는 마음은 부모가 버려야 합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면서 이 자식이 커서 나를 호강시켜 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녀를 기르는 사람들은 동기가 잘못 된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자녀에게 효도하라고 가르쳤으니까 어떡하던지 자식을 효도하는 자식으로 길러야 되겠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좋은 생각입니다. 노력해야 됩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이 효도해도 마음속으로 그것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십니다. 처음 네 번째 계명은 아마도 하나의 돌판에 새겨져 있을 것이라고 보고, 또 하나의 돌판에 5계명부터 10계명까지 새겨져 있을 것이라고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첫 번째 돌판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규정하는 율법이고, 두 번째 돌판은 인간과 인간을 규정하는 율법입니다. 근데 하나님과 관계를 규정하는 율법의 첫 번째 시작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입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첫 번째 시작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입니다. 근데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 그 계명이 다른 모든 아홉 계명보다 특별합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1계명부터 10계명까지 모든 계명에는 보상이 없습니다. 그냥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입니다. 그냥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근데 부모를 공경하면 이 땅에서 장수하고 잘 되리라 하는 하나님이 현상금을 거십니다. 그러면 거꾸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추적해 가면 하나님이 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부모와 자식에 대한 이 관계가 얼마나 중요했는가 하는 것을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그 안에서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런 관계가 무너졌다고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기르면서 자녀들이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부모 눈에 안 찼습니다. 절대 안 찼고, 그 부모도 그 위의 부모의 눈에 안 찼습니다. 재미있는 건 뭐냐 하면 제가 한참 고대 근동 문헌에 빠져있을 때 혼자서 쐐기 글자를 600페이지짜리 토판 한 권을 공부하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근데 지금 생각하면 허무한 짓이었는데 어쨌든 근데 그게 제일 오래전에 읽은 게 주전 22세기 아브라함 시대 문헌이었습니다. 거기도 ‘요즘 젊은 것들은’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게 인류의 모든 경험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젊은 것들은’ 그것은 진짜 요즘에 나오는 말이 아니라 모든 나이든 사람이 그냥 아담과 하와 때부터 하던 식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그것을 읽다가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이게 주전 22세기면 지금으로부터 4200년 전입니다. 거기에도 ‘요즘 젊은 것들은’ 그러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마음에 안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요즘 젊은 것들은’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엄마도 아빠도, 그 엄마의 아빠엄마도, 그 엄마의 아빠 엄마도 모두 대대로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이 같이 앉아서 요즘 애들이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그러고 이야기를 하는데 아빠한테 좀 친절하게 해 주고 그러면 얼마나 좋습니까? 뭐 어마어마한 걸 바라지도 않잖습니까? 어느 목사님처럼 딸이 하루에도 몇 번씩 문자를 보내고, 그런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아빠를 사랑해요. 아빠가 있어서 너무 자랑스러워요.’ 어느 목사님은 매일 그런 문자를 딸한테 받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희귀한 케이스고 그런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고 그냥 좀 이렇게 따뜻하게 말 한마디라도 건네고 그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제들이 앉아서 이제 요즘 애들은 안 그런다고 투덜투덜 대는데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야, 우리 어렸을 때 아버지한데 그랬냐?” 그러니까 “안 그랬지?” “왜 그걸 너무 큰 기대를 갖느냐?”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자녀와의 관계를 접으면, 잘 들으십시오. 두 번 반복하겠습니다. 자식이 마음에 안 든다고 자식과의 관계를 접으면 자식이 먼저 망가지는 게 아니라 그 아버지가 망가지는 것입니다. 자식이 마음에 안 찬다고 그 관계를 접으면 자식이 망가지는 게 아니라 부모가 먼저 망가집니다. 그러니까 나는 매일매일 나 자신을 성찰하면서 노력합니다. ‘자식에게 바라지 말자.’ 효도하는 애들이 되는 건 좋습니다. ‘난 마음으로 바라지 말자. 아무것도 안 바란다.’ 근데 그게 잘못하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난 너희들과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마음으로 변질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가 내 사랑을 몰라도 나는 끝까지 너희를 위해서 해바라기로 살 거야. 그러다가 내가 죽으면 지들이 깨닫고 눈물을 흘리겠지.’ 근데 죽어도 눈물 못 흘리는 자식들도 많습니다. 그 정도만 돼도 아빠로서 훌륭한 삶을 산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명심하십시오. 자식이 맘에 안 든다고 관계를 접으면 여러분들이 먼저 망가지는 것입니다. 자식이 불행한 게 아니라 부모가 불행한 것입니다. 그때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모자라는 자식이었는데 하나님은 나 같은 쓰레기 같은 인간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 같은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리고 기뻐하시는 그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자식에게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자식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에게 베푸신 그 은혜 때문에 자식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자식은 부모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만이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자식을 끝까지 사랑하는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를 사랑하도록 마음을 돌이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자녀들의 마음
다음은 자녀들의 마음입니다. 오늘 성경은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께로 돌이키게 하며”라고 말합니다. 자식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질 때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인 부모 사랑으로부터도 멀어집니다. 자식이 하나님을 떠나면 경건한 부모를 싫어하고 부모가 하나님을 떠나면 자식에게 상처를 주게 마련입니다. 그런 상처를 주는 나쁜 부모가 아닌데도 자식은 부모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젊은 시절에 까부는 마음에 별로 가치도 없는 세상 사랑에 빠져서 자기에게 허락된 이 부모와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그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걸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에 깊은 후회가 됩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부모에게 그렇게 못한 자식들이 오히려 자기 자식을 보면서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얘기를 하는데 자식들은 그걸 잔소리라고 생각하고 부모가 자기 이익 때문에 자신에게 그런 걸 강요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인생의 진리는 아무리 머리가 총명해도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그 만큼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못 깨닫는 진리들이 있습니다. 그걸 우리의 자식들도 뼈저리게 진리로 느끼고 가슴 아파하기 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왜냐하면 까불고 자기가 좋은 것이 이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확신 있게 살아가지만 마지막에는 그것이 진짜 인생에 중요한 게 아니라 관계라고 하는 사실들을 나중에 깨닫게 되는데 그것을 자식은 가봐야 아는데 아버지는 위에서 내려다보고 그렇게 걸어가면 어느 길로 가게 될 지를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입니다. 근데 그걸 잔소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것들에 대한 해결은 결국은 자식이 주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세상 사랑과 정욕에 달떠서 그래서 결국은 가족들의 사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떠나고 언제 돌아가도 가족은 언제나 거기 있으니까 숨 쉬는 공기처럼 고마운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의 징계와 폭력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물론 자녀가 아직 어렸을 때 선악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때로는 회초리를 들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회초리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에는 그런 교육 방법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녀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리고 자신에게 참된 자식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충분히 느끼고 주님께 돌아올 때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어둡던 역사의 한 때였습니다. 이세벨과 아합의 정권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었고, 그리고 참된 선지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도망을 다니고, 그리고 바알교를 섬기는 사람들이 온 천하에 장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가장 탁원한 선지자 두 사람을 보내었는데 엘리야와 엘리사였습니다. 두 선지자가 모두 이 불의한 시대를 맞서서 창칼을 들고 일어나거나 병정들을 모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말씀과 능력으로 이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많은 부모들은 어리석게도 자녀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17편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자니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녀들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녀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젊은 시절에 우리가 고통 받았던 문제는 먹고 입고 사는 문제들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뿌리까지 흔들어 놓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민은 사람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자식의 의무는 경건한 부모에게서 이것을 배우는 것이고 부모의 의무는 자식에게 사람이 어떤 존재이어야 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배우는 자식이 아니면 인간이 아니고, 그것을 가르쳐 주는 부모가 아니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늘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이 임하면 자녀들의 마음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식들로 하여금 경건한 부모로부터 인생을 배워야 할 그 참된 의무로 돌아가게 해주는 것입니다. 자녀의 마음을 주님께 돌이켜 가족을 회복시키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위해 열렬히 기도하고 그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그들 중에 누구도 하나님의 참 사랑이 아니면 올바른 인간의 자리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 올바른 인간으로 돌아오지 않는 한 좋은 아버지, 좋은 자식, 좋은 아내, 좋은 남편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불행은 결국 대물림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여야 할 것은 자녀들을 위한 참된 회심입니다. 그 자식들이 부모의 간섭에 못 이겨서 억지로 교회에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정한 참 생명과 사랑에 도달해서 부모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사랑에 감격하고 그 십자가의 사랑을 붙들고 살 수 있는 사람들로 변화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의 마음이 돌이켜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고 그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그렇게 완전하지 않은 우리 부모에게로 돌아오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아직 온 가족이 회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은 가정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더 깊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우리 불신 가족 중에서 나를 예수 믿게 만드시고 이제껏 까지 인생의 걸음걸음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간증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자신에게 물어봐야 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그 사랑으로 희생하고 용납하고 더 헌신함으로 가족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Ⅲ. 적용과 결론
가족은 하나님이 직접 맺게 하신 관계입니다. 사랑의 관계 안에서 한 인간은 태어나고 태어난 인간이 참 사람이 되어갑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그 사랑에서 멀어질 때 가족들에 대해서 무정한 사람들이 됩니다. 그래서 기꺼이 부모를 버리는 자식이 생겨나고 눈앞의 즐거움을 위해서 자신의 살과 피와 같은 자식들을 버리는 부모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말씀과 능력으로 망가진 가족 관계를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무정한 아버지의 마음을 고쳐 인자한 아버지가 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상처 받은 자식을 고쳐서 다시 하나님 때문에 그 모자라는 부모들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회복은 하나님의 사랑 이외에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주부터 시작되는 이 설교를 들으면서 생애적으로 주님을 깊이 만나고 고쳐지는 가정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족관계를 다시 세움(2018.5.6. 주일오전2)
자녀를 사랑으로 기르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 3:2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골로새서는 우주적인 기독론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한 우주적인 기독론의 빛 아래서 다가올 완성된 세상을 향하여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우리가 각 가족으로서 가정에서 어떤 태도로 서로를 대하여야 할 것인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II. 자녀를 양육하는 지침
A. 노엽게 하지 말라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낙심할까 함이라”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속에는 자녀를 양육하는 지침이 나옵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노엽게 하지 말라’라고 할 때 ‘노엽게 하다’라는 단어는 ‘에레디제테’라는 단어인데 이는 문자 그대로 ‘화나게 하다’, ‘분노하게 하다’라는 뜻이니 우리말의 번역이 썩 잘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땅에 모든 자녀는 가정에서 태어나 엄마 아빠의 따뜻한 사랑 속에서 성장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그런 사랑으로 양육하지 못할 때 아이들은 노하게 되고 이런 노함은 아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비이성적인 야수성을 일깨우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열거한 네 가지는 바로 아이들을 그렇게 분노하게 하는 대표적인 요인들입니다. 우선 먼저는 폭력과 폭언입니다. 아이들이 아직 심성이 굳건하여지지 못했기 때문에 따뜻한 사랑과 돌봄 속에서 성장하여야 함에도 부모가 자식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거나 혹은 폭언을 퍼붓는 것은 이 아이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는 일입니다. 더욱이 부모가 서로 폭력을 행사하며 폭언을 퍼부으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 자체가 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커다란 상처가 됩니다. 그런 폭력과 폭언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십시오.
예전까지는 우리나라 사회가 그래도 유교의 관성 아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사람의 마음속을 흐르는 천륜이었습니다. 아마 그랬기 때문에 가정에서 아이들을 때리는 일에 대해서도 관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만큼 자기 자식을 아끼는 사람이 없는데 그 부모가 아이들을 때릴 때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이 정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폭행하는 정도가 아니라 학대를 해서 아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례가 자주 발견되고 있으니 알려진 사례가 이러하니 알려지지 않고 감추어진 사례까지 합친다면 세상 1년에 몇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부모의 폭력과 학대로 죽어가는 것일까요? 저는 이제 이것을 가정의 판단에만 맡겨두는 것은 매우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와 사회가 나서서 자녀들에게 더는 부모라는 이름 하나 때문에 아이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이러한 범죄 행위들이 종식되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여러 번 폭력으로 학대한 부모들에게는 아예 친권을 박탈해서 더는 부모들이 자녀를 가까이할 수 없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폭력과 폭언뿐만 아니라 방치와 무관심은 아이들에게 더 커다란 상처를 주고 그들을 노엽게 하는 일입니다. 부모가 각기 자기 일에 바쁜 나머지 자녀들을 내버려 두는 것, 그리고 무관심하게 자녀들을 버려두는 것은 이 아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제일 먼저 맺는 관계가 엄마와의 관계이고, 아이들이 조금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아빠와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제 두 사람 넘어서 또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처음 맺게 된 관계인 엄마와 아빠의 관계 속에서 이 아이들이 버림을 받게 될 때 그것은 이 아이들의 마음속에 고스란히 큰 상처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이 아이들이 자신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부모들 밑에서 그렇게 온갖 관심을 받으며 사랑 속에서 자라야 하는데 어린 나이에 부모로부터 버려지고, 무관심하게 방치된 아이들은 일생 첫 번째 관계에서 실패하였다는 강한 인상을 자기의 마음속에 갖게 됩니다. 더욱이 사연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린 시절에 엄마, 아빠에게 버림받게 된 아이들은 일평생 누구도 대신 질 수 없는 십자가를 지고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버림받음과 무관심 속에서 아이들은 끊임없이 노여움을 경험하게 되고 권력이 없어서 이것들을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니 그 속에서 아이들은 끊임없이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자랄 때는 아이들이 엄마 아빠 앞에서 말과 글로 옳고 그름을 배우게 되지만 인생을 살고 자각이 생긴 후에는 이제 부모 뒤에서 부모의 모습을 보고 배우게 됩니다.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이중적인 삶, 그리고 그릇된 모형을 보면서 아이들은 도덕적으로 더 큰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혼란을 느끼게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도덕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될 때는 이것이 더욱 큰 상처가 됩니다. 그래서 결국 부모로부터 보는 그릇된 모본 때문에 아이들은 노엽게 되고, 이 노여움은 그 아이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안겨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자녀에 대한 과도하게 그릇된 기대는 또한 자녀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는 또 다른 원인이기도 합니다. 자식을 낳아보면 알지만 모든 부모는 자기의 아이가 매우 특별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때로는 이것이 아주 크고 높아서 그래서 자신의 자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높이의 꿈을 주고 아이가 거기에 미치지 못할 때 부모는 아이를 닦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자녀를 맡기셨지 자녀를 소유물로 주신 것은 아닙니다. 자녀를 잘 돌보고 가꾸라고 주신 것은 마치 여러분들에게 식물을 맡기는 것과 같으니 자녀라는 밀가루 풀을 빵 기계 속에 부어서 틀로 찍어낸 것처럼 부모가 원하는 사람을 만들라고 자녀를 주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읽은 이야기지만 가정의 달이 다가오면 언제나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방에 한 도시에서 아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유달리 총명해서 어려서도 공부를 잘했고, 중학교 와서도 줄곧 학교에서 그 우등을 할 정도로 그렇게 뛰어난 여자아이였습니다. 그러다 이 아이가 중학교 2학년 들어서면서 인생에 대한 자의식이 생기고 나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일과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이 아이가 매우 총명한 아이이기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열심히 가르치는 대로 공부를 해서 서울에 있는 일류대학에 진학하여 이러저러한 삶을 살기를 아주 강하게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바로 그 중요한 시기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아이를 나무랐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용돈을 모아서 사놓은 캔버스를 찢어버리기도 하고, 이젤을 꺾어서 내팽개치기도 했습니다. 아이는 엄마 모르게 불 꺼놓고 숨어서 글을 쓰기도 하고, 친구 집에 가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엄마와 이 딸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어느 날 불현듯 아이가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투신자살해 버렸습니다. 그제야 이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이 딸의 죽음을 슬퍼하며 자기가 잘못했노라고 아이의 관을 붙들고 울었지만 때는 너무 늦었습니다. 아이가 죽은 후에 그때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딸이 쓰던 방을 정리하였습니다. 거기서 이 엄마는 딸이 그려놓은 그림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고, 또 그가 써 놓은 습작들도 꽤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이미 죽은 아이이니 그 사람들이 그렇게 각박하게 평가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튼 그 아이가 써 놓은 글을 읽어본 문학가와 그림을 본 미술가들은 한결같이 말하기를 적절하게 이 아이를 후원해 주었더라면 미술가로서도 크게 성공할 재능을 가지고 있고, 문학가로서도 남다른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그런 특별한 아이였다고 그렇게 평가를 해주었습니다. 딸이 죽은 후 얼마 세월이 흘러 엄마는 딸에 대해서 너무 미안한 마음에 작은 전시회를 열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딸이 평소에 그린 그림과 그가 쓴 글, 이런 것들을 모아서 시화전을 만들어 많은 사람이 관람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었습니다. 자녀는 그렇게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는 자유롭게 그렇게 살게 태어난 아이입니다.
제 인생에 자유에 대해서 제일 먼저 가르쳐 주신 분은 저희 할머니셨습니다. 할머니는 자녀들을 함부로 가르치신 사람은 아니었지만, 할머니는 웬만하면 자식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해보게 두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입에 달고 사시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놔둬라. 쟤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하지 않니? 내버려 둬라. 좀 하게 둬라’ 저는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야 이러한 나에게 자유를 가르쳐 준 그 가르침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자녀를 교육하는 데 있어서 부모와 당사자 간에 충돌이 있을 수도 있고, 아이들이 잘 몰라서 옳지 않은 길로 갈 수도 있으니 갈등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라도 부모와 자식 간에 있어야 할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파괴하면서까지 얻어낼 만한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오늘 성경이 이렇게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명령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 성경에 의하면 노엽게 하지 만들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낙심하다’라는 단어는 희랍어로 ‘아듀모시니’라는 단어인데 ‘아’는 ‘없다’는 뜻이고 ‘듀모시니’라는 단어는 ‘열정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올바로 옮기자면 ‘절망하다’ 혹은 ‘올바른 열정을 잃어버리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자녀를 계속 노하게 할 때 이 마음의 상태는 분노가 되고 이 분노의 반복은 아이들에게 절망을 느끼게 하고 올바른 열정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방향이 올바르기만 하다면 사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보고자 하는 열정이 아니겠습니까?
열정이 없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생이란 자기 인생도 아니고 남의 인생도 아닙니다. 안 살기에는 아쉽고 살아보면 별 특별한 기쁨이 없는 그런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을 자신이 삶의 의미를 부여하며 무엇인가 완성을 향해 나가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이 이른 바와 같이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비유하자면, 기차가 있는데 그 기차를 움직이는 힘은 엔진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그 엔진이 싸늘하게 식었습니다. 그 기차는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부모가 끊임없이 이런 폭력과 폭언, 매어버림과 무관심, 그다음 그릇된 모형과 잘못된 기대로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면 이 아이는 자신의 인생을 올바른 열정을 가지고 살아갈 힘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왜 그 끔찍한 짐을 안겨줍니까?
자녀들을 때리지 말라고 설교를 했더니 어느 설교를 들은 어느 한 네티즌이 저한테 장문의 이 메일을 보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아이들을 때려서 가르치라고 되어 있는데 그렇게 아이를 때리지 말라고 설교하면 되겠습니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설교의 의도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이들을 때리지 말자.’ 이런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자녀 교육에 있어서 올바른 징계는 꼭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잠언 1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절)” 이런 분들에게는 매와 징계라는 글자만 들어오지 ‘근실히’라는 부사는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문제는 아이를 때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때릴 때는 충분히 아이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이해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해시키느라고 상당히 시간을 허비하고 나면 대부분 부모는 때리고 싶은 마음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때릴 때는 일체 분노의 감정이 없이 아이들을 진심으로 잘 되기를 바라며 때려야 하는 합니다. 그리고 그 징계는 아무리 이유가 있다고 할지라도 잘못한 정도에 꼭 알맞은 징계여야만 합니다. 그를 넘어서게 되면 아이는 공정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되고 이것은 반항심으로 변합니다. 만약에 잘못한 정도에 훨씬 미치지 않는 것이면 이 징계를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정도에 꼭 맞는 양만큼만 징계 되어야 하고, 징계할 때나 징계하고 난 후에도 충분한 애정을 표현함으로 아이가 관계에서 상처를 받지 않도록 특별히 돌보아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녀들을 부모는 징계할 수 있지만 충분한 사랑 속에서 이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쳐야 합니다.
이 땅에 얼마나 많은 부모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자신도 부모에게 이런 일들로 상처를 받았음에도 똑같이 자식들에게 폭력과 폭언을 퍼붓고, 아이들을 버림받게 하고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고 그릇된 모형을 보여주고 과도한 기대로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일들을 반복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이렇게 자녀들을 대하는 부모들이 많다고 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비록 큰 권력을 가져본 적이 없고, 괄목할만한 재물을 모은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살면서 자녀가 노년에 ‘우리 엄마 아빠는 참 훌륭한 분들이었어.’라고 평가를 받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한 50년을 살아보아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정말 나에게 부족했던 부모들도 힘껏 인생을 사느라고 애쓰시던 분들이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60세가 넘으면 인류애가 생겨나서 그런 부모들도 마음으로 품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자녀를 양육하도록 주는 지침은 이것이니 자녀들을 분노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자신의 인생을 위한 올바른 열정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라는 것입니다.
B. 사랑으로 돌보라
이렇게 ‘노엽게 하지 말라’라는 지침 이외에 오늘 우리가 하나 더 강조하여야 할 것은 ‘사랑으로 돌보라’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 희랍어에는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 이것은 아버지에게만 해당하는 명령이라기보다는 어머니 아버지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지만 어머니보다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이렇게 노엽게 할 위험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반대의 집안이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겠지만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볼 때는 아빠는 엄마만큼 다정다감하지도 않고 자녀들을 향한 배려심도 부족합니다. 용기와 인생을 헤쳐나간 투지는 있을지 모르지만, 아이들의 마음을 갈피갈피 헤아리는 몫은 아빠의 몫이 아니어서 아빠들은 자녀들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노엽게 할 때가 많아서 이렇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들이 자녀들을 이렇게 노엽게 할 위험이 많다면 그 아버지들은 어떻게 이런 위험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어머니도 똑같이 자녀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 아이의 회심의 문제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 아이가 다른 아이들처럼 공부 잘하고 똑똑하지 못해도 남다른 재능이나 특별한 능력이 없어도 심지어는 그 아이가 정상적인 아이로 태어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부모는 그 아이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비록 육신으로는 자기를 빌려 육체로는 부모인 자기들의 모습을 닮아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의 정신과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 아이들을 존중히 여기는 첫 번째 발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자녀들이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을 따라서 창조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이 세상에 보낼 때 그 마음도 헤아려야 합니다. 부모의 눈에는 아이가 남다르게 뛰어난 것 같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것 같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내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이 세상이 아름다워서 하나님이 때가 되매 그 아이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며 자기의 아들이고 딸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한없이 이 아이를 존귀하게 여겨야 할 존엄성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아이를 일평생 대해야 합니다. 자신의 편견과 고집을 강요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선물이 분재입니다. 청소년 시절에는 이 분재를 그렇게 나쁘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자유에 대해서 눈을 뜨면서 특히 기독교 신앙을 갖고 나서 분재는 나의 눈에 언제나 싫은 물건이었습니다. 우리 아들 결혼식 때에도 누가 분재를 보냈습니다마는 즉시 치워버리라고 해서 지금은 어디 있는지도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분재가 멀리 보면 아름다워 보이지만 무엇인가 자연적인 식물에 가하는 학대가 담겨 있습니다. 우선 식물이 자라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성장 억제제를 뿌립니다. 그리고 그 나무가 자기가 원하는 모습대로 보이도록 그 나뭇가지와 줄기들을 철사로 칭칭 감아서 이리저리 자기가 원하는 모양으로 움직여 고정합니다. 그리고 나무는 다른 방향으로 자라고 싶어도 그 나무의 팔다리를 붙들어 매고 그 나무가 원하는 대로 자라주어야 합니다. 그 철사의 흔적을 간직한 채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자연에 대한 학대이고 폭행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들도 자유롭게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땔감으로 쓸 나무와 보아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나무는 이미 종류부터 다릅니다. 무슨 종류든지 그렇게 칭칭 감긴 그런 철삿줄 아래 살고 싶은 식물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자라면서 자유롭게 산다고 할 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들이 좋아서 선택하는 모든 것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회심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통하여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 아이의 마음속에는 자기를 사랑하던 본성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성이 하늘로부터 심어지게 되고, 이 본성은 그 사람 안에 주어지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아이의 인생의 방향이 세상 사랑에서 자기 사랑에서 하나님 사랑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이 회심의 은혜를 매일 매일 간직하며 성화의 삶을 살아가게 해 주는 것입니다.
부모로 이 세상에 태어나 자식을 낳고 자식에게 두 가지만 해주면 부모의 의무는 거의 다한 것입니다. 하나는 이 아이를 잘 돌보고 사랑 가운데 길러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교육을 받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저 최소한으로 잡는다면 중학교, 조금 더 잡는다면 고등학교, 여유가 있어서 좀 더 잡는다면 대학교 정도를 가르쳐 주면 부모는 자식을 위해 충분한 도리를 한 것입니다. 그다음 이 아이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이로 변화 받게끔 해주면 부모는 이 아이에게 거의 모든 것을 해준 것입니다. 부모는 더는 못 해주는 것에 대해서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고 자식은 더 못 받은 것에 대해서 너무 서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결혼을 하고도 부모에게 이렇게 물질적으로 기대는 자식은 한국 자식밖에 없습니다. 미국이나 구라파에서는 고등학교까지 다 졸업시키면 그다음에 서로 약속하지 않아도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자식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대학쯤 가르쳐 주어도 대학원도 보내주지, 그리고 회심에 이르게 해줘도 장가갈 때 집은 한 채 사주지, 그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그런 것을 못 해준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그러는데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심으로 인도한 사람들은 그게 훌륭한 보험이 됩니다. 우리가 살면서 보험을 한두 개쯤은 다 들었을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암에 걸리는 거 원하지 않고, 집에 불나는 거 원하지 않고, 우리가 교통사고 나서 죽는 거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그때를 위해서 우리는 보험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아이의 인생의 앞길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것을 위해 가장 훌륭한 대비는 아마도 물질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부모가 많은 물질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거나 혹은 부모가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어서 노력도 경쟁도 안 해 본 상태에서 어떤 지위를 준다고 칩시다. 그것이 당장은 이 아이들에게 보험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아이들은 0m부터 달리기를 준비하는데 얘는 30m쯤 앞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턱걸이를 0부터 해야 하는데 얘는 10개 접고 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인생을 살 때, 이 아이들이 정말 편리합니다. 그렇지만 이게 영원한 보험이 될 수 있겠습니까? 가지고 있는 재물을 아이들이 영원히 간직한다는 보장도 없고, 그리고 또 계속 간직할 정도로 많이 물려준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인생은 돈 갖고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오늘날 갑질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좀 분노를 했습니다. 그러나 인류애를 가지고 가만히 보니까 이 두 사람도 너무 가엾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기로 했습니다. 만약에 그 사람들이 저 밑바닥에서 음식점에서 물컵을 나르는 서빙으로 인생을 시작했다면, 그리고 공장에서 기름때를 묻히면서 그렇게 퇴근하는 생활부터 배워서 능력을 인정받아 그 정도 지위에 오르게 되었더라면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자세한 내막이야 알 수 없지만, 사람과 관계를 맺을 줄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조폭도 자기가 아끼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느 날 문제가 터져 나오니까 수많은 직원이 나도 피해자라고 하고 광화문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과 올바르게 관계를 맺는 것을 자라면서 잘 배우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하는 마음이 들다 이제는 정말 측은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기도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두 사람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그 필연성을 자신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눈물을 흘려도 다시 내일이 되면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이 미래의 여러분들의 자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우리는 잘 되기를 원하지만 잘 안 되는 때도 만나고 그래서 시련과 폭풍을 만나 울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도 하고, 믿었던 일에서 큰 낭패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앞으로 그런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라는 항구를 떠나 조그만 쪽배를 타고 내 아내 혹은 남편과 함께 노를 저으며 그 험한 파도를 헤쳐 오늘 여기에 이르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자녀들도 그런 고난의 파도를 넘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없을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그 자녀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돈, 모으십시오. 그래서 물려주고 싶으시면 물려주십시오. 그러나 내가 말씀드리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그것이 완전한 보험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정말 회심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이 된다면 그것은 완전한 보험이 됩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그런 모든 인생의 시련과 난관은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우리에게 겪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 자녀에게 아무 잘못이 없어도 하나님이 그런 시련을 통과함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어서 주님은 당신이 쓰시려고 우리의 자녀들을 그런 고통스러운 시련의 길을 지나게 하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자녀들에게 믿음이 없다면 그런 시련을 만날 때마다 인생의 뿌리 채 흔들리는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처지에서든지 우리 주님을 끝까지 사랑한다면 그 아이들은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인생의 많은 시련의 시기들을 해치며 살아온 것처럼 그들도 때로는 눈물로 기도로 그리고 고난을 이기는 믿음으로 그 난관을 헤쳐 나올 것입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녀를 회심으로 인도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다음에는 아이들이 그릇된 것을 선택하지 않는 한 바람처럼 자유롭게 창공을 날아가는 새처럼 그렇게 자유롭게 살게 해주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식이 좋아하는 것을 한다는 이유로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파탄에 이르도록 상처가 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호주에 말씀을 전하러 갔는데 오래전의 일입니다. 평생을 선교사로 목회에 헌신해온 부부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날 참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같이 교제를 나눴는데 사모님은 참다 참다 자신의 딸에 대한 자신의 이 억눌린 감정을 우리에게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총명한 딸이었습니다. 호주에서 모두 부러워하는 가장 좋은 대학을 나왔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아주 큰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얘가 공부를 더 하든지 아니면 사회에 진출해서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졸업을 하고 직장에도 다녔지만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유일한 즐거움은 학교 마치고 혹은 직장에서 돌아와서 이 자기 방에 들어가서 쇠 쪼가리를 가지고 망치로 두드리면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반지도 만들고, 그다음에 브로치도 만들고 목걸이도 만들고, 핀도 만들고, 팔찌도 만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딸에게 아주 강력히 토로했습니다. 그것은 ‘다 네가 얼마든지 취미 생활로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너는 이러이러한 길을 가거라.’ 딸은 그것이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이제 딸이 돈이 궁하니까 자기가 만든 작품들을 007 가방에 담아가지고 길거리에 가서 팔았습니다. 사람들이 점점점점 알려져서 이제는 가지고 가면 삽시간에 팔리는 것입니다. 그러고 신문을 보니까 그 지역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이 아이가 특집으로 실렸습니다. 여러분 르네상스에 샛별처럼 태어나서 예술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는 바와 같이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그 다음에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지오토(Giotto di Bondone),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이런 사람들 원래는 이 사람들은 대부분이 다 피렌체에 공방 거리에서 공방의 견습생으로 일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귀족들을 위해서 금은세공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성당에 장식품들을 납품하고 이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했던 이야기 똑같이 했습니다. “내버려 두세요. 하고 싶다지 않습니까? 내버려두면 언젠가 그 아이는 그 방면에 명장이 될 지도 모릅니다. 또 명장이 안 되고 그냥 조그만 가게를 하나 만들어서 일평생 자기가 만든 공예품을 팔고 그렇게 산다고 하더라도 아이가 그게 좋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그것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이들은 그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을 것 아닙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것을 뭐 하러 자기 인생도 아닌 사람들이 자녀들에게 너는 이 길로 간다하고 줄을 그어주고 그 길에서 어긋나는 것은 모두 잘라버리라고 하고 이러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부모가 그렇게 하는 것을 아주 지겹도록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그렇게 싫어하던 일을 자녀들에게 왜 강요합니까? 여러분 부모가 원하는 대로 살지 않았어도 여러분 훌륭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잘못 살고 있는 분들은 꿈에라도 부모의 말을 안 들어서 요 모양이 됐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도 여러분들이 선택한 길입니다. 선택한 그 길 속에서 더 좋게 잘 살았더라면 지금보다 훌륭하게 될 수 있었는데 무엇을 선택했느냐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선택한 그것을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이루려고 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가끔 과천에 가면 빵집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빵집인데 마침 병원 옆에 있습니다. 병원 갈 때마다 들릅니다. 그런데 그 빵집에 들어가면 기분이 좋은 게 뭐냐 하면 빵집 주인의 자존감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20대 때도 저는 이렇게 빵을 구웠고, 30대도, 40대도, 50대도 이렇습니다. 그렇게 써 놓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맛있습니다. 그래서 그 집 빵을 먹으면 빵을 먹는다는 느낌이 드는 게 아니라 장인의 손길을 거친 그 무엇을 먹는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 열린 공간의 빵이 거기에 상당히 근접해 있는 것 아시죠? 정말입니다. 여러분 웃으시는데 정말입니다. 서울에서 일부러 빵 사러 여기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후에 일찍이 이미 벌써 다 나갑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선택했든지 간에 진짜 잘했다면 그러면 지금과 다른 인생을 살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자녀들을 그렇게 사랑으로 대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할머니의 음성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내둬라. 그렇게 하고 싶다 하잖니’ 자녀들에 대해서. 때로는 그것이 부모의 마음에 차지 않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너무 사랑하는 그 아이가 좋다지 않습니까? 그것을 살면서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하는 것을 나무라지 말고 ‘네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그렇게 그 일을 하거라.’ 그렇게 격려하고 돌보아 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는데 지금도 아들에게는 미안합니다. 아이가 한 네 살 되기 전까지는 정말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아이 분유 살 돈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가난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한참 부모의 따뜻한 돌봄이 필요한 시기에 우리는 열린 교회를 개척을 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학생들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했고, 또 끊임없이 집회를 다니고 글을 써야했고 그리고 거기에다가 교회 목회까지 해야 됐습니다. 아내는 교회가 작을 때이니 청소를 하던 부엌일을 뭘 하든 빠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을 아이를 내버려두었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충분히 돌봐주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항상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직한 목회자의 눈으로 아들을 볼 때 얘가 회심하지 않았습니다. 6학년 거의 다되었을 때 일인데 아니 내가 가서 설교하면 그 젊은 아이들이 그렇게 회심을 합니다. 남의 집 애들은 이렇게 회심을 시키면서 왜 우리 집 애들은 회심이 안 될까? 중고등학교 학생 사천 명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랍니다. 그래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냥 그 회개하는 울부짖음 소리가 밤하늘을 가득 수놓았습니다. 돌아오면서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놀라운 능력이 우리 아들에게는 안 나타나는 것일까? 가정 예배도 드려보고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봐도 뭐 특별한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던 끝에 저는 아내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교회도 조그맣고 하니까 애가 그냥 교회도 집처럼 생각하면서 왔다 갔다 하니까 착하기는 하지만 회심이 없다 그래서 어린이 선교를 전문으로 하는 기관에서 여름 캠프를 하는데 우리 아들을 보내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 아이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캠프에서 이 아이의 담임선생님을 맡은 자매가 제 책의 열렬한 독자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잘해주었겠습니까?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셨는지 그 수련회가 아들을 위한 수련회였다고 말할 정도로 그렇게 깊이 주님을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진짜 변했습니다. 기도할 줄을 알고 가정 예배를 드리는 태도가 달라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말 하나님을 사랑할 줄 압니다. 그런데 그뿐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상을 원했습니다.
제가 88년도에 안양 대학교에 처음 교수로 갔을 때 그 다음해에 조교를 하던 자매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에게 긴히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뭐냐고 그랬더니 자기 여동생이 서울대 원서를 냈는데 어느 과를 갔으면 좋을지 교수님이 지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애 집이 지방인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반에서 그냥 중간정도 밖에 못했답니다. 그런데 얘가 겨울 수련회 때 회심을 하고 열심히 공부하더니 모의고사 성적이 그저 웬만한 시 전체에서 20등 안에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울대를 영문과 의과대, 문과 계통이니까 핵공학과 몇 개 학과를 제외하고는 어디든지 마음먹으면 갈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라고 학교에서 그렇게 인정해 주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들과 똑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더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몇 달 지나고 나니까 그냥 그렇습니다. 그래도 확실하게 변한 건 이 아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됐다는 것, 예배드리는 태도나 이런 것들이 달라졌다는 것 인정을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렇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드디어 내가 우리 아이를 구원에 이르게 했으니 내가 중요한 일을 완수했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또렷이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어떤 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무슨 설교나 성경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운전을 하면서 오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어떤 깨달음을 주셔서 내 온 몸을 전율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얘야, 나도 너의 아버지고 너도 네 자식의 아버지인데 네가 아버지 노릇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로서 너를 다루는 것과 너무 다르지 않니?’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나의 온 몸이 전율을 하는 것 같은 깨달음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차를 도로 가장자리 한적한 곳에 세우고 운전대 위에 손을 올려놓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없이 울었습니다. 제가 운전하다가 그렇게 많이 운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때 내가 그렇게 가슴 아파했던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가만히 이 아이를 보니까 자기는 이미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는 아들이라는 패배감에 깊이 사로잡힌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아이들이 1~2등이었으면 했는데, 나는 1, 2등 하라는 이야기 안했습니다. ‘3등만 해라. 그게 그렇게 어렵냐?’ 그리고 개인적으로 엄마와 나눈 대화 속에서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한 깊은 좌절감이었습니다. 그때 느꼈던 것은 뭐냐 하면 여기 지금 내가 나열한 모든 것입니다. 비록 내가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아이를 징계한다는 미명하에 1년에 한 차례 정도씩 아이를 때렸던 기억이났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종아리에 멍이 들었던 기억들, 그렇게 하면서 아마도 과격한 말도 했을 것입니다. 이 아이가 혼자 자기 방에 울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도저히 아빠의 기대에 채워질 수 없는 자신, 그리고 아주 냉정한 징계, 그리고 나는 나의 일에 너무 바쁘고 그리고 어떤 하나도 내가 버릴 수 없다고 하는 생각에 저는 양심에 손을 얹고 놀지 않았습니다. 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무관심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도달한 적이 없는 높은 기대로 아이를 바라보았습니다. 충분히 그릇된 모본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혼자서 가슴 아파하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한 영혼의 울음소리였습니다.
제가 이 똑같은 간증을 10년 넘게 합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 사실을 이야기할 때마다 아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납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자식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냥 온몸으로 부딪치며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씩 배워간 것입니다. 그러나 한참 동안을 울고 회개하고 나서 하나님 앞에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아버지였습니다.’ 그날이 그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후로 나는 단 한 번도 아이의 성적표를 본 적이 없습니다. 마음에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무엇을 하든지 지켜봐주시는 분이시다. 내가 단 하나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기만 하면 그 분은 정말 기뻐하는 분이시다’ 이런 아버지로 인식되기를 원했습니다. 나는 모든 문제가 내 자식이 회심 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자녀가 회심 안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부모로서 참 자식을 어떻게 사랑하고 그를 사람답게 길러야 될 지에 대해서 회심이 필요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 후에 아들에게 단 한 번도 매를 댄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기가 꺾일 정도로 그렇게 포악하게 말한 것도 기억에 나지 않습니다.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자녀 교육에 있어서 부모의 깊은 회심이 필요합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부모가 숨질 때까지 자식에게 해주어야 할 것은 그 자녀를 한없는 사랑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식이 나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부모는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기를 자신의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인 것처럼 사랑하며 참고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면서 살게 해주어야 합니다. 지금도 귓가에 맴돕니다. ‘놔둬라. 그렇게 해보고 싶다 하지 않니? 지하고 싶은 거 한번 해보게 해라.’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녀를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만든 자녀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녀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인 여러분이 그 자녀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들에게 이 아이를 그냥 맡기신 것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돌보라고 맡기셨습니다. 인류가 모두 힘을 합해도 할 수 없는 일을 우리 부모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는지를 우리는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배웁니다.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집을 멀리 떠난 탕자를 언제나 거기서 기다렸던 그 아버지처럼 우리가 그런 사랑으로 자녀들을 돌보도록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아주 큰일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경험하는 바와 같이 우리 속에서 자녀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저절로 샘솟듯 솟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자식의 아름다운 것과 장점만을 보고는 자식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부모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천사가 와도 그 일은 할 수 없을 것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 본성에 깃든 사랑만이 아니라 매일 매일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돌보라고 우리를 부모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 부르심을 깊이 받아들이며 죽을 때가지 자녀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부모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족관계를 다시 세움(2018.5.13. 주일오전3)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엡 6: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라는 인물이 감옥 속에서 말년에 쓴 편지입니다. 이 작은 편지에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러한 우주적인 경륜 안에서 우리가 가족들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가족과의 관계에 관해서 가르쳐 주면서, 5장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먼저 설명한 후 6장에서 첫 번째로 자녀들이 부모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것은 자식에 대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II. 부모를 공경하라
A. 하나님의 명령
십계명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계명입니다. 그 중에서 인간이 사는 도리들 중 첫 번째가 바로 부모 공경의 계명입니다. 일계명부터 사계명까지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보여주고, 오계명부터 십계명까지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보여주는데 그 첫 번째가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공경하다’라고 하는 이 말의 뜻은 ‘부모를 중요한 존재로 여기며 대하라’라고 하는 뜻입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태도보다는 부모에 대한 자녀의 태도가 먼저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 계명에는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라고 말합니다. 십계명은 온 인류가 지키며 살도록 주신 명령입니다. 일계명부터 십계명까지 모든 계명은 그것을 지키면 그냥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고 올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불행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상이 약속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B. 보상이 약속됨
그런데 오늘 이 부모 공경의 계명에는 하나님의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 공경이 하나님의 간절한 뜻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처음 십계명이 주어졌던 출애굽기 20장 1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부모를 하라 그리하면 네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광야 생활이 모두 끝나고 이제 가나안 들어가기 직전에 반복해서 주어진 십계명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신명기 5장 16절에 “너는 네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하라 그리하면 네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명기서의 전통을 따라서 오늘 에베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입니다.
지금같이 의학이 발달해서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때에는 땅에서 장수하는 것이 그렇게 큰 매력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어떤 삶의 질을 누리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전쟁과 질병으로 가족들이 수없이 죽어가던 때에 네게 준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한 하나님의 이 약속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신명기서에는 한 가지 약속이 더 추가되는데 복을 누리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복은 정신적인 마음의 복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평안한 그 모든 복을 포괄하는 그런 의미의 복입니다. 만약에 부모를 공경함으로 하나님이 그를 장수하게 하고, 그리고 땅에 많은 복들을 누리게 하신다면 그 말을 뒤집으면 이런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네가 부모를 공경하지 아니하고 함부로 대하면 너는 젊은 날에 죽을 것이요 땅에서 무얼 하든지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니라.’라고 말입니다.
III.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면 보상까지 약속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으니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겠는데 이 일은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부모를 공경해야 될까요? 부모 공경은 모든 자식의 의무입니다. 부모의 고상한 인격이나 모아놓은 많은 유산이나 그가 오른 높은 사회적인 지위 때문에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부모가 부모라는 사실 때문에 그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많은 자식들은 생각합니다. 자기 아버지가 어머니가 아주 훌륭한 분이었더라면 아마 자신이 공경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그 자식은 부모에게 정말 자랑스러운 자식일까요? 물론 우리의 아버지들 중에는 수십 만 명에 한명쯤은 1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아주 위대한 인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아버지도, 저의 아버지도 대부분 평범합니다. 그냥 힘들게, 힘들게 인생을 살아오셨고, 힘들면 잠시 주저앉기도 하고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기도 하고, 넘어졌다가는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일어서서 걸어가기도 한 여러분이 사는 것과 똑같은 삶을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살았습니다. 어머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 잘못하면 우리는 매를 들어서라도 자식을 올바로 잡아줍니다. 그러나 자식에게 부모를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올바르지 않은 길을 걸어가면 자식으로써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부모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 아뢰며 그 길은 옳은 길이 아니니 가시지 말라고 간청하는 것 이외에 자식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너무나 많은 자식들이 자신의 분량을 오해하고 부모를 자기가 훈련시키거나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관계가 깨집니다. 더욱이 시집을 와서 현저히 다른 시댁의 문화를 접하며 시부모님을 자기가 이렇게 고쳐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며느리들이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결코 좋은 관계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몇 년 전 어느 통계에서 보니까 10대와 20대 젊은이들 중 78%가 아버지가 밉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부모에 대한 공경은 사랑의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의 관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깨어진 관계, 상처 난 부모와 진심으로 화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이미 지난 날 상처를 받은 또 다른 자신과의 화해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에게 부당하게 취급을 받고 가정에서 살 깊은 애정을 느끼지 못한 어린아이들은 성장하면서 그 상처가 깊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청년이 되고난 다음 이런 가정에서 자란 젊은이들의 유일한 소망은 빨리 결혼해서 이 집안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망가진 자신을 고치지 않고 어찌 분가했다는 이유 때문에만 좋은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자식에게 상처를 주고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부모들도 있지만 그러나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 상처를 받은 자식은 그만큼 망가진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것을 고치지 않고 외면한 채 좋은 사람을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고 어떻게 저절로 행복이 찾아올 수 있겠습니까? 행복은 환경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 행복의 중요한 요건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 행복을 창출해 낸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환경이 주어져도 마음이 병든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반성을 할 줄을 압니다. 그 반성은 영혼을 가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정신작용입니다. 더욱이 그 반성이 자신에 대한 진정한 성찰일 경우에는 그것이 우리의 삶을 많이 바꾸어 줍니다. 우리가 항상 올바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종종 우리를 반성하면서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사과를 합니다. 자, 직장 다니는 젊은이를 들고 예로 들어보십시오. 뭘 실수를 하고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좀 대들었습니다.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까 정말 자신이 잘못했어요. 그러니 이튿날 직장에 가서 인사를 합니다. “부장님, 집에 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것은 명백한 저의 실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조금 불손한 태도를 보였던 것도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다음에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제 마음을 상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오늘 점심을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이렇게 합니다. 친구와 사귀다가도 우리가 항상 좋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뭘 잘못해서 친구의 마음을 상하게 했어요. 집에 가서 반성을 합니다. 그리고는 문자를 보냅니다. ‘아 내가 정말 미안했어. 그리고 이러이러한 거는 너한테 해서는 안 될 말이었는데 내가 그냥 홧김에 해버려서 네 마음을 상하게 해서 정말 미안해. 그래도 우리는 친구잖아. 야, 십년동안이나 지내온 우정을 생각해서 용서해 줘라. 우리 오늘 저녁, 술이나 한잔 하자.’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정작 사랑하며 살아야 할 가족에게는 그런 일을 안 합니다.
여러분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아들이나 딸, 심지어는 여러분들의 형제나 자매에게 잘못했을 때 진심으로 이렇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용서를 빈 적이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왜 그러는 것입니까? 그냥 시쳇말로 막 개깁니다. 딴 데 가서는 절대 안 그러면서 유독 집에 와서만 그냥 막 개기는 겁니다. 경우에 없는 일인데 왜 저렇게 하나 라고 살펴보면 그 사람의 의식 속에는 ‘에이 가족끼린데 뭘.’ 그러면 그 사람은 가족들이 하는 그런 개기는 행동들을 기쁨으로 받아 주냐 하면 아닙니다. 그럼 왜 이렇게 살아요?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랑하면 그렇게 개기면서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는 게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렇게 올바른 도리를 갖추며 살아갈 때 그 안에서 사랑은 가장 잘 보존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은 부모에게 한없이 개기고 부모가 조금 잘못한 것은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차곡차곡 상처로 쌓아 둡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모는 좀 자식에게 개기면 안 됩니까? 그러면 부모에게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형은 좀 동생에게 개기면 안 됩니까? 그러면 동생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회사 가서 사회생활 할 때는 전혀 안 그러는 사람들이 왜 가정에 가서는 부모에게 왜 그렇게 합니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은 상처와 원망을 끊임없이 차곡차곡 쌓으며 살아갑니다. 부장님하고는 털고 가고, 동료하고는 털고 가고, 친구하고는 털고 가면서 부모하고는 안 털고 갑니다. 그리고 장부에 차곡차곡 쌓아 놉니다. 그리고 상처와 미움의 칼을 갑니다. 그게 인간이 할 도리입니까? 논리적으로 생각해도 그렇게 하면 안 되잖습니까?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러는 것입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부모에 대해서 예의도 표하지 않는 무도한 사람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은 두더지에게 대낮에 총천연색 영화를 보라는 거하고 똑같지 않습니까?
부모를 따라서 진심으로 공경하는 것이 부모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내가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하는 말씀을 뒤집으면 ‘네 부모를 함부로 대하라 그리하면 넌 젊은 날에 죽을 것이며 이 땅에서 무얼 하든지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의 미래의 인생이 그렇게 펼쳐지길 원합니까? 젊은 날에 요절하고 뭘 해도 되는 일 없이 마지막에 눈을 부릅뜨고 세계를 향해 원망을 품고, 그리고 죽어버리는 그런 인생이 되기를 원해요? 한 맺힌 인생이 되기를 원해요? 원하지 않죠? 잘 되기를 바라죠? 그리고 좋은 삶의 질을 누리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찌감치 이별을 하는 슬픔을 겪고 싶지 않죠?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는 문제는 부모의 문제가 아니라 자식인 여러분 자신의 인생의 문제라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결혼을 합니다. 세기에 다시없는 열렬한 사랑으로 결혼을 합니다. 그것이 결혼의 미래의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얻을 때에는 그 자매와 엄마와의 관계를 보고, 형제를 얻을 때에는 형제와 아버지의 관계를 봅니다. 근데 그 관계가 그렇게 차곡차곡 상처와 슬픔을 쌓아서 교통할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깨어진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이제 부모에게 공경을 하는 것은 부모의 문제가 아니라 자식인 여러분 자신의 인생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아껴주는 엄마하고도 화목하면서 살 수 없었던 딸, 기본적으로 사랑이 흐르고 관계가 흘러야 하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좀 털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인간성도 안 되는 그 남자가 만나서 자신들이 예전에 어렸을 때 살았었던 가정과는 완전히 다른 천국과 같은 가정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공상과학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살아가다가 결혼을 하고 둘이 만나서 살다가 힘든 날이 옵니다. 그러면 ‘이 사람 과거도 이렇게 힘들었겠구나.’ 생각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오늘 그 부모를 마음깊이 공경하고 그럴 수 없는 관계는 털고 지나가면서 새로운 사랑의 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이것은 부모와의 싸움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여러분 자신의 인간성과의 싸움입니다.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결국은 온몸으로 부딪쳐 피를 흘린 후에야 한 30년 후에 아니면 40년 후에 아니면 죽을 때까지도 못 느끼다가 죽을 것입니다. 근데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부모와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와 아픔을 극복 못 하면서 교회에 와서는 입술로 원수를 사랑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원수보다 더 못한 사람입니까?
효도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정치적인 효도입니다. 이것은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해서가 아니라 속셈이 있어서 효도를 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권세를 누려서 오늘날 뉴스거리에 오르고 있는 어떤 사람들처럼 그 권세를 이용해서 지위를 얻거나 혹은 부모가 가진 많은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효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적선적 효도입니다. 사랑이라기보다는 가엾으니까 다 늙고 기운은 없고 오갈 데도 없고, ‘가엾으니까 잘해줘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식이 부모를 향해 가져야 될 마음이 아니라 보건복지부가 서민을 향해 가져야 될 마음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세 번째 효도는 무엇인가 성경적인 효도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효도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부모를 공경하는 효도입니다. 이것은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이미 자식의 인간성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살아보십시오. 부모가 죽고 나면 세상 어디에 내가 이렇게 맘 놓고 개길 사람이 있나, 남편한데 몇 번만 하면 이혼하자고 서류를 내밀 것입니다. 회사에 가서 그러면 잘리거나 외톨이가 될 것이고, 사업을 하면 거래처의 관계가 모두 끊어져서 결국은 쫄딱 망할 것입니다. 그렇게 개기면서 살아도 좋은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상처 받았고 마음속으로 차지 않았지만 그러나 ‘엄마 아빠가 내게 정말 잘해 주셨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식들은 부모에게 상처를 받았다는 자식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사이가 친해지면 그걸 다 털어 놓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이런 짓을 했고, 엄마가 이렇게 못된 여자고 다 털어 놓습니다. 친구들 사이에 두루두루 퍼집니다. 그러나 놀라운 건 부모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간직하지만 부모는 자식의 허물을 사람들에게 대부분 말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간직합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오해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쌓인 게 많은 것은 우리 엄마아빠가 못됐기 때문이고, 엄마아빠가 나에 대해서 뭔가 나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내가 굉장히 훌륭한 자식이라서 할 말이 없나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자신도 시집 장가가서 자식을 낳아 보면 부모가 그렇게 아무 말이 없었던 것이 항상 마음이 편하고 우리가 항상 마음에 찼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대해서 영원한 을입니다. 그래서 그냥 모든 것을 용납해 줘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데도 힘으로 자식을 교정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관계가 분질러져야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의 잘못을 말하지 않는 것은 자식이 항상 잘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할 말이 많이 있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수없이 쌓이고 때로는 막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을이니까 그냥 참는 것입니다. 자식의 수많은 갑질을 참아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부모는 을이 된 것입니까?
(찬양)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
이 세상에서는 힘이 없고 잘못한 사람이 ‘을’입니다. 부모는 힘도 있고 잘못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을이 되었을까요? 이유가 있다면 오직 하나입니다. 그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니까 그 관계를 깨뜨리고 싶지 않으니까 할 말이 있어도 참고, 을로 살아가더라도 자식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싶기 때문에 을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얼마 있으면 을이 될 겁니다.
자식의 부모를 향한 사랑은 두 번 반복 할 테니 가슴에 새기십시오 부모를 향한 자식의 사랑은 드러난 게 다입니다. 감추어진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나타난 게 모두가 아닙니다. 다시 한 번 부모를 향한 자식의 사랑은 나타난 게 전부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나타난 게 전부가 아닙니다.
4년 만에 세월호 선체가 똑바로 다시 섰습니다. 전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시 선체를 수색해서 시신의 유해라도 찾아서 아직 시체를 찾지 못한 유족들의 마음이 위로받을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세월호 사건이 나고 나서 어느 신문에서 매일 그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일면 한 쪽에 실어서 내보낸 적이 있습니다. 아침마다 연구실에 가면 그 신문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는데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울었습니다. 그 중에 한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를 가면서 엄마에게 투덜거렸습니다. “엄마, 나 운동화 하나 새 거 사줘.”, “운동화 멀쩡한데 무슨 운동화를 새로 사 달래?”, “아 이런 거 말고, 메이커 있는 거 좋은 거 말이야. 난 학교가면 쪽팔려 죽겠어.”, 투덜거리는 아들의 등짝을 엄마가 손으로 내리쳤습니다. “이 미친 놈.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이놈아.” 그리고 보냈습니다. “에이씨, 정말 내 진짜 엄마 미워 죽겠어.” 그리고 학교를 갔습니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수학여행을 떠났고, 그리고 며칠 있다 시신으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엄마가 팽목항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바다를 보면서 아들의 이름을 불러 목 놓아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품에서 무언가 부시럭부시럭 꺼냈습니다. 그게 좋은 메이커 달린 하얀 운동화였습니다. 그리곤 또 목 놓아 울면서 “아들아 미안하다. 운동화 못 사줘서 미안하다.” 하고 울었습니다. 아마 그 아들 녀석은 엄마 하면 떠오른 게 그거였을 것입니다. 사달라고 그러니까 ‘이 미친 녀석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하고 자기 등짝을 아프게 내리치던 엄마의 매정함이 엄마의 모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엄마는 돌아서서 자식에게 그 운동화를 사주지 못한 것이 이젠 어떻게 할 수 없는 한이 되었습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저는 21살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많이 깨닫게 되었고, 새로운 삶을 살았지만 아버지와 화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아버지가 정말 인생을 막 산 사람이고 나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냥 10년에 20년에 한 번 태어난 위대한 인물을 아니셨습니다. 그냥 평범하셨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것 중에 어떤 부분들은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한 6년이 흐른 어느 날 직장 다니고 있던 저는 하루 휴가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 때문에 동네 있는 교회에 가서 오후에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는 중에 마치 벼락을 맞는 것 같은 깨달음이 내 마음에 왔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것 같았습니다. “얘야, 이제 네 아버지를 용서하거라. 네 아버지도 너처럼 젊어서 하나님을 믿었더라면 너보다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 텐데 하나님 없이 하나님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그랬다. 너도 나를 만나지 못했으면 네 아버지보다도 더 잘못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용서해 주거라” 그리고는 그 마루에 엎드려서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긴 시간을 기도하면서 그 어린 시절부터 그때까지 모든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나에게 완전한 아버지가 아니었지만 나 또한 우리 아버지에게 완전한 아들이었던 적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그 큰 사랑을 내게 주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하셔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 아버지 때문에는 내가 아버지를 용납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이 큰 사랑 때문에 나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공경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오래된 미움과 결별한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그 후로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힘들 때도 있었지만 늘 사랑으로 이기려고 했고 그리고 나 자신의 양심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공경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느 날 밤 큰 소리로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라서 잠을 깼습니다. 알고 보니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제가 소리를 내며 엉엉 우는 그 소리였습니다. 베갯잇은 눈물로 흠뻑 적셔져 있었고 저는 눈을 떴습니다. 꿈을 꾼 것입니다. 아버지와 저의 나이 차이가 23살입니다. 아버지가 23살에 저를 낳으셨습니다. 꿈에 나타나실 때는 딱 50세쯤 되신 젊은 모습이었습니다. 마르시고 그런데 왠지 기운이 없어 보이시고 까만 바지를 입으시고 하얀 셔츠를 입으신 채 창 쪽에 서서 나무로 만든 박스에 무엇인가를 옮겨 담고 계셨습니다. 반가운 나머지 “아버지” 하고 불렀습니다. 대답이 없으셨셨습니다. 더 큰 소리로 “아버지” 못 들으셨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얼마 전 아버지가 청력을 많이 잃어버리셔서 모시고 가서 보청기를 해드린 것이 기억에 났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서 아버지 어깨를 손으로 살짝 치면서 “아버지”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고개를 돌리면서 활짝 웃으시면서 “어, 너 왔니?” 그때 소리 내서 엉엉 울었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는 표현을 너무 어색해서 너무 긴 세월동안 그런 표현을 안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못 해드린 것이 너무나 미안해서 한참을 울다가 깬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아버님은 너무 건강하셔서 평생을 새벽 4시에 일어나셨습니다. 저는 90세 이상 사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던 그분이 감기에 걸려서 병원에 잠깐 가신 후 3일 만에 유명을 달리 하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하나님을 몰랐을 때는 미워했기 때문에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고 그리고 주님을 만나서 그 사랑을 알고 아버지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한 후에는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그런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몸에 굳어져서 사랑하면서도 그것을 표현할 줄을 몰랐습니다. 75세에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는 날까지 결국 그분은 저의 전도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셨고 믿음 생활하시다가 하나님께로 가셨습니다.
지금도 한없이 그립습니다. 한 열흘만이라도 살아오신다면 아니 지금까지 살아계셨더라면 내가 정말 잘해 드렸을 텐데 회개한 후에는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리고 이전에 내게 너무 아픈 상처를 남겨주셨던 모든 일을 용서해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행하셨던 일, 사셨던 삶 가운데는 그것 때문에 아버지와의 사랑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종종 병원에 심방을 가면 자식들이 부모를 문병하러 온 것을 봅니다. 너무 사랑하는데 불행하게도 이 엄마가 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에 걸리셨어요, 자꾸 누구시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딸은 병원을 나서며 한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게 여러분들에게도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긍휼히 여기면서 살아도 그 시간은 잔인하리만치 너무 짧은 날들 밖에 없습니다. 무지 속에서 사랑이 없는 그런 척박함 속에서 인생의 많은 날들은 나에게도 흘러갔고 부모님들에게도 흘러갔습니다.
여러분들이 부모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은 부모에게 생활비를 안 주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외롭게 하는 것입니다. 소외시키는 것. 여러분도 얼마 안 있으면 부모보다 끔찍이 사랑하는 자식에게 곧 소외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왜 인생을 이렇게 사는 것입니까? 부모의 사망이나 치매로 화해의 길이 영영 막히기 전에 심지어 공경을 해도 그게 진심의 공경인지를 알 수 없는 그런 연세에 이르기 전에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것은 부모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는 자식으로부터의 소외나 외로움을 그냥 운명처럼 받아들이지, 항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그렇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자식은 이미 상당히 망가진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와도 외로움과 기쁨을 공감할 수 없는 자식이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딴 남자, 딴 여자를 만나서 순식간에 그것을 느낄 수 있다고요? 사랑이 불붙는 동안에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효기간이 얼마 안 됩니다.
(찬양)
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아갈 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 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진정으로 자신의 인생을 자유로운 주체로 사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해야 할 모든 사람을 살아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품에서 태어났고 그 품에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배웠고 옳음과 그름을 익혔습니다. 그 부모를 마음 깊이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인간성을 완성해 가는 길입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미래에 태어날 자녀들에게 인생의 참된 도리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부모를 공경함으로 이 땅에서 생명이 길고 복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V. 적용과 결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진실하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을 구원할 분이라는 사실을 믿으면 하나님이 그에게 하늘의 문을 여십니다. 그리고 그 충만한 생명의 은혜와 그리고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내 사랑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부모, 내가 가지고 있는 애정으로서는 사랑할 수 없는 부모를 사랑하게 해주십니다.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용서하게 해주시고 사랑하기 힘들었던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해주십니다. 예전에는 갑으로 살았는데도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는데 왜 그런지 을로 사는데 행복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때로는 아프지만 그러나 그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어떤 사랑으로 사랑하셔서 여기까지 데려오셨는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이 부모를 함부로 대함으로 젊은 날에 요절하고 이 세상에서 무얼 하든지 되는 일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함으로 이 땅에서 생명이 길고 무엇을 하든지 잘 되는 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이런 사랑의 은혜를 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가족관계를 다시 세움(2018.5.20. 주일오전4)
아내의 머리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엡 5:23-2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날은 객관적인 진리를 사람들이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가정생활도 이제는 진리라는 규범에 따라서 아내와 남편이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몸으로는 교회에 나오지만 마음으로는 이 세상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아서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가정도 많이 망가졌습니다. 그런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두 가지를 배우지 못합니다. 참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이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지 못합니다. 유교적인 관점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가정의 핵심이지만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편과 아내가 가정의 기본 단위가 됩니다. 가정에 대한 풍부한 교훈을 담고 있는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모두 가정에 대해 말할 때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제일 먼저 다루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II. 아내의 머리인 남편
성경은 오늘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크게 부각되는 가르침은 이것이니 아내의 머리가 남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내는 머리인 그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족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각 가족 구성원에 따라 우선적인 덕목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함께 사랑하며 살아야하되 자식의 부모에 대한 우선적인 덕목은 순종과 공경입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해 보여 주어야할 우선적인 덕목은 그를 노엽게 하여 낙심하지 말게 해야 합니다. 오히려 주의 교양과 교훈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같은 방식으로 남편이 아내에 대해 가져야할 가장 우선적인 덕목은 아내를 사랑하고 그리고 아내를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A. 남편, 아내의 머리
이에 비해서 아내가 남편의 관하여 가지는 덕목은 존경과 복종입니다. 무엇 때문에 성경은 이렇게 시대에 뒤떨어진 명령을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성경은 우선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말합니다. 머리라고 하는 것은 산 사람의 머리를 가리키는 것이지 죽어서 홀로 나뒹구는 머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 없는 몸, 몸 없는 머리, 모두 상상할 수 없습니다. 몸과 머리가 모두 하나의 몸이지만 온 몸이 머리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고 행동하면서 한 사람이 살고 싶은 삶을 전개해 갑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고 머리와 몸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이 가정을 통해서 이루어가고 싶은 삶을 전개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남편이 여자의 머리가 되었을까요? 무엇을 근거로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선 세 가지인데 남편은 첫 번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흙으로 빚으셨고, 하나님이 그 남자의 몸에서 일부를 취하여 여자를 지으셨으니 남자가 먼저 지은 바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그 몸의 일부로 지은 바 되었기 때문에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두 번째는 첫 번째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온 인류에게 영원한 두 가지 명령을 내리십니다. 소위 노동 명령 혹은 문화명령이라고 하는 것과 신앙 명령 혹은 종교 명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다스리라” 하신 명령은 모든 인류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홀로 그 명령을 받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동산에 모든 실과는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게 하라 명령하셨을 때 그 명령은 모든 인류에게 주신 것이지만 그 대표자로서 아담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그 언약이 성립되고 난 그 다음에 남자의 몸에서 여자를 지으십니다. 벌써 하나님이 아담을 온 인류의 머리로 삼으시고 여자를 남자의 머리로 삼으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 번째 가정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그 가정의 첫 번째 가장으로 아담을 삼으셨습니다. 하와가 범죄 했는데도 하나님은 하와에게 먼저 가서 묻지 아니하시고 아담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가장 엄중한 책임을 하와와 함께 가져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된 것입니다. 가정은 유기체적인 가족 관계로 지어졌습니다. 인간이 창조되면서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자기가 있어야 될 위치, 살아가야할 도리가 있듯이 남편과 아내를 만나 한 가정을 이루게 하실 때 거기에는 분명히 지정된 아내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아내의 자리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인격적이고 폭압적이고 노예적인 지배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 인간을 창조하시고 홀로 있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여자를 지으시고 둘이 연합하여 한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가정이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고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계획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에 가정이 탄생했으니 그 가정 안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서너 명이 동호회를 만들면 회장부터 먼저 뽑습니다. 모든 질서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이루어지는 이유는 질서 없이는 그 목적에 이바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서 속에서 살게 하셨으니 이 질서는 남편은 아내의 머리요, 그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복종은 한 인간에 대한 굴욕적인 복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질서에 대한 복종입니다. 그런 복종의 관계 속에서 남편과 관계를 맺을 때 하나님이 그 가정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고 인간은 그 안에서 가장 행복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가정의 질서 속에서 자녀들을 자라게 함으로 그 자녀들이 자식으로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통해 가정의 질서를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이 가정의 질서에 있어서 아내는 마땅히 남편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서 남편을 사랑할 뿐 아니라 또한 남편과 아내가 만나 이루는 그 가정 속에 부여한 하나님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내에게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B. 그리스도, 교회의 머리
그러면 아내는 남편을 자신의 머리처럼 여기기를 어느 정도까지 해야 될까요? 성경은 오늘 그리스도가 머리이심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아들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아들에게 부어준 사랑은 아들과 혼인관계에 있는 신부인 교회에게 부어졌고 우리는 모두 그 몸에 접붙여짐으로써 그 사랑에 참여합니다.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이 온 지체들에게 전해집니다. 그것은 하늘의 생명입니다. 그 그리스도 때문에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는 사람에게 살아갈 힘이 생기고 관계를 지속하며 함께 아끼고 살아갈 수 없었던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주님이 당신에게 접붙여진 교회를 당신의 몸처럼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목적이 없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한없이 사랑하시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살게끔 내버려두시려고 교회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온 몸이 머리와 하나를 이루어 머리가 생각하고 마음먹는 대로 온 지체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입니다. 팔과 다리는 분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머리가 한 가지로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발이 손보다 못나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복종했기 때문에 손과 발은 서로 모순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편과 아내가 이런 식으로 연합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가 온전한 사랑 속에서 그리스도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처럼 또한 아내는 주 안에서 남편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남편이 자신의 머리이고 그리고 남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질서라고 믿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굴욕적으로 노예처럼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가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위치와 분량을 아는 것처럼 아내는 남편을 향하여 자신의 위치와 분량을 헤아리고 복종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요즘 같은 여성 상위 시대에 무슨 캑해 묵은 말씀입니까?’ 라고 말한다면 여러분들은 교회에 있으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이제 참된 사람이 되고 참된 인생을 살기 위한 모든 진리가 우리의 상식이나 세상의 문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나를 참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모든 진리의 규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가정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아야 하고 남편이 자신의 머리이며 그에게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많은 아내들에게 걸림이 되는 이유는 복종에 대한 잘못된 그림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난 날 남성 우위의 시대에 남편으로부터 짓밟히고 억압당하고 노예처럼 그렇게 복종을 강요당하는 역사의 경험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복종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 인간의 이기심과 그리고 폭력적인 경향성이 만들어낸 역사적인 발자취일 뿐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니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하고 그것이 아내로서 가장 중요한 위치임을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III. 남편에게 복종하라
성경이 아내들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명령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남편의 장점 때문에 남편의 훌륭한 점 때문에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남편이 남편이라는 이유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합니다. ‘아니, 존경할만해야 하지만 존경을 하고, 복종할만한 인간이어야지 복종하지 않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물론 남편이 아내인 그대들만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의 남편이 존경받을만한 숭고한 인격을 가지고 있고 사회적으로 능력이 있어서 놓은 지위에 올랐고, 또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어서 큰 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심성이 따뜻하고 착해서 한없이 아내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그 남자가 왜 여러분한테 장가를 오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돈 많고 능력 있고 그리고 친절하고 얼굴도 예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서 한번 집에 가서 거울을 들여다보십시오. 무얼 가진 게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웃지만 나는 하나도 우습지 않습니다.
아침 일찍 교회당에 나왔습니다. 열린 공간 마당에서 성경을 펴며 오늘 할 하루의 설교를 묵상하는 가운데 이 땅에 있는 수많은 남편들의 신음소리를 들었습니다. 한번 가서 거울을 보십시오. 뭐 내세울게 있습니까? 어마어마한 유산 가지고 시집 왔습니까? 미모가 몇 십 년에 한번 태어날 정도로 출중합니까? 교양이 넘치십니까? 그리고 인격이 고상하십니까? 그 정도 남편이면 됐지 않습니까? 수준에 맞게 능력에 맞게 만났습니다. 기우는 결혼이었다고요? 누가 그래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왜 그렇게 삽니까? 여러분들은 남편이 좋아서 남편 때문에 결혼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 큰 계획 속에서 여러분의 남편과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결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신앙으로 인정하는 바이잖아요. 그래서 주님 때문에 남편을 남편으로 받아들이고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남편이 모자라고 그리고 깜이 안 된다고 그리고 이 결혼은 기울은 결혼이었다고 그래서 마치 시집온 것이 커다란 희생이나 감수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데 전 세계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본인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부모도 그렇게 생각 안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남편들에게 함부로 합니까? 아니 남편이 모든 것을 말할 때 백번 복종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아니 서너 번 이야기 하면 그 중의 하나는 들어줘야 합니다. 그런데 안합니다. 마치 결혼이 무슨 일수불퇴의 족쇄에 채워진 것처럼 애 둘 낳은 것이 무슨 어마어마한 면류관인 것처럼 남편을 하수처럼 깔보고 남편을 함부로 대하는 여러분들은 그게 올바른 아내의 자리에서 하는 행동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개척하고 이제껏 가정의 달 설교에서 저는 아내를 편애했습니다. 횟수를 보더라도 아내에게 남편을 보고 잘하라는 설교는 한번이었고,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는 설교는 언제나 두 번이었습니다. 그런데 금년서부터 공평하기로 다짐했습니다. 피해자처럼 살아가는 착한 아내들도 있지만 반대의 아내들도 너무 많습니다. 아니 결혼을 해서 남편이 되어 애 둘을 낳은 것이 무슨 큰 죄입니까? 그리고 무슨 어마어마한 일을 한 것입니까? 그렇게 해서 남편을 지가 이제 어디를 가랴 하는 마음으로 깔보고 함부로 대하고 그것이 복종하도록 부름을 받은 아내의 자리에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해합니다. 그리고 깊이 동정합니다. 이른 아침서부터 어린애들 데리고 치다꺼리하고, 살림살이 하고, 심지어 가정 형편이 어려우면 돈까지 벌기 위해 나가야 합니다. 얼마나 아내가 힘들겠습니까?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이해가 갑니다.
저녁에 남편이 들어옵니다. 집은 난장판입니다. 이미 그 시간에 아내는 모든 삶의 에너지가 고갈됐습니다. 남편이 ‘딩동, 딩동’ 하고 들어오는 순간 심리적으로 벌렁 드러눕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도움을 기대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매일 반복된다면 어느 남자가 그 가정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잘 들으세요. 이 세상에 마구 기대고 항상 개기기만 하는 그런 관계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인데 누가 여러분들을 그렇게 대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리고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없이 치덕거리고 기대고 온 체중을 실어서 자기를 힘들게 해도 웃으면서 받아준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었습니까? 여러분들은 예수님께 대해서도 그렇게 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그렇게 기대는 분도 아니시지만 그런데 왜 여러분들은 남편이 그렇게 해주어야 됩니까? 남편이라는 이유가 그런 거 해주려고 남편이 된 것입니까? 이것은 대등한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사랑으로 교통하기 위해서 남편과 아내가 된 것입니다. 물론 너무너무 힘든 날 만세를 부르고 “여보. 이제 나 아무 기운이 없어. 나 좀 도와줘.” 그럴 수 있습니다. 육신의 질병이 있어서 정말 마음은 있는데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남편이 희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맨날 남편이 퇴근하면 만세를 부릅니다. 그 속에서 어떻게 남편과 아내가 사랑의 관계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사랑의 관계는 일방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폭포수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은 관계 속에서 서로 소통하며 내가 저 사람에게, 저 사람이 나에게 흘러들어오고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 나는 하여튼 힘드니까 그리고 매일 남편이 들어올 때 만세를 부르고 당연히 밤마다 잠자리는 거부됩니다. 그것은 결혼이라는 이름 아래서 한 여자가 남자에게 행하는 갑질입니다. 왜 남편이 여러분들에게 그런 갑질만 당해야 합니까? 그리고는 언강생심 러브스토리에 나오는 그런 사랑을 매일매일 표현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어디가 예뻐서요? 솟아나지 않는 사랑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여러분이라면 그런 남자 말에서 남편을 존중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한번 해볼까요? 남편이 퇴근합니다. 술을 먹고 들어왔습니다. 구두 두 짝을 내팽개치고 그리고는 아이들이 거실에서 놀고 있고 “아빠!” 라고 달려오는데 뿌리치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양복도 안 벗고 누워버립니다. 아내가 가서 “씻고 저녁 드세요.” 그러니까 “아, 나 지금 건드리지 마. 지금 폭발 직전이야.” 그리고 문 쾅 닫고 자버리고 아침에 자기가 일어나기 전에 출근해 버리는 날이 석 달만 계속 된다면 여러분들은 그 남자와 살겠습니까? 여전히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표현하면서 그렇게 헤헤 웃고 애교를 떨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부부관계에 있어서 한 사람을 성인처럼 보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학대입니다. 왜 남편이 여러분들을 향해서 성인처럼 되어야 합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은 언제나 어린애처럼 칭얼거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그게 무슨 부부관계입니까? 그 안에서 누가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여러분들이 살아가면 남편은 출장 가서 절대 여러분 그립지 않습니다. 애들은 생각이 나도 여러분들은 생각 안 납니다. 오히려 해방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게 결혼생활입니까? 물론 남편은 고분고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끄러우니까, 잔소리 그리고 짜증이 폭발하니까 그럴 바에야 내가 참아주지 하고 삽니다. 그러나 그것은 견디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죽어도 남편은 별로 울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 어른들이 하신 말씀으로 병풍 뒤에서 웃을지도 모릅니다. 왜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결혼해서 남편이 된 것이 무슨 커다란 죄를 지은 것입니까?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들이 별 특별한 일 없이 애나 키우고 경력이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경단 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환상적인 콜이 왔습니다. 우리나라 굴지의 유명한 그룹에서 여러분들을 채용할 의사가 있다고 전화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가보았습니다. 정말 고개를 직각으로 들어도 옥상이 보이지 않는 어마어마한 빌딩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면접을 보고 드디어 합격 통지를 받았습니다. 출근을 해보고 나니까 자기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젊고 활기차고 어쩜 외모도 그렇게 아름답고 세련되고, 일도 능력 있게 하고 생기에 넘칩니다. 집에 가서 거울을 봅니다. 아, 이것은 아니다 싶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평촌에서는 안 될 것 같아서 강남에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랫동안 거울만 보고 있던 자신이 체중계만 올라가면서 한숨만 쉬던 자신이 드디어 다이어트를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이 모습은 그 회사에 안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강남의 백화점에 가서 세련된 옷을 샀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이 항상 새로 다니게 된 직장에 꽂혀 있습니다. 뭐가 있습니까? 긴장감이 있는 것입니다. 경단 녀인 내가 이 어마어마한 굴지의 그룹에 직원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이 세련되고 능력 있는 젊은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해서 이 직장을 그만 두게 되면 어쩔까 라는 긴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관계입니다. 모든 관계 속에서 긴장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이 돌아올 때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아, 이제 남편이 돌아오는구나. 하루 동안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을까?’ 아내는 집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남편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합니다. 남편은 잘 이야기 안합니다. 저도 직장을 8년이나 다녔습니다. 직장 생활에 대해서 아내가 아는 것 별로 없습니다. 어쩌면 오늘 애를 키우고 살림하느라고 힘들다고 머리는 폭탄 맞은 것처럼 하고 남편이 오자 만세를 부르고 정신적으로 아내가 드러누운 그 날 남편은 직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박 과장, 자네는 도대체 뭘 하는 거야? 난 자네를 채용한 것을 정말 후회해. 어디 좋은 자리 있나 한번 알아봐. 우리는 자네 필요 없어.”, “김 과장, 실적이 이게 뭐야? 이렇게 해서 어떻게 미안해서 월급을 타가? 저 다른 사람들 하는 것 좀 봐. 자네는 저렇게 못해? 다음 달까지 성과에 변동이 없으면 각오해. 징계야.” 어떻게 집에 와서 아내에게 그 얘기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심신의 힘이 없는 것을 경험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아내는 자기와 소통하고 사랑의 관계를 맺을 1%의 에너지도 없습니다. 모두 딴 데 써버렸습니다. 그러면 써버린 그 딴 것들 중에 남편만큼 소중한 것이 어떤 것이 있어서 남편은 집에 올 때마다 짜증 폭발 그리고 잔소리로 갑질하는 아내를 참아야 합니까? 그런 부부관계는 성공하면 그냥 살기 싫어도 그냥 같이 사는 것이고, 실패하면 어느 날 초연히 남편이 가정을 떠납니다. 모든 사랑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권한이 있고 혜택이 있는 동시에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살림 안 해보셨죠? 아침에 일어나서 체력도 별로 없는데 세 아이에게 시달리고 살림 다하고 마지막에 집안 청소까지 하고 저녁때가 되어 보세요. 목사님도 하루만 해 보세요. 그러면 마음으로 만세 부르고 드러눕는 것을 이해하실 거예요.” 아니요. 난 이해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살림하느라고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을 경험했지만 나는 다른 이유로 매일매일 온 에너지를 소비하며 삽니다. 자기만 그렇게 사는 줄 아십니까? 그런 착각이 어디 있습니까? ‘하여튼 뭐라고 말씀하든지 난 못해요. 힘들어요.’ 그것은 결혼을 해서 한 가정의 남편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냥 혼자 사셨으면 참 좋았습니다. 그러면 본인도 덜 힘들고 남편도 다른 인생이 펼쳐졌을 거고 아이들도 그 되지 않는 가정을 보면서 굽은 인성을 가지고 성장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셨어요? 그것은 그 남자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그냥 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야하는 인생의 무게입니다. 그것은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하나님과 자신의 인생 앞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 심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착각하는 것은 돈 많고 내가 편하고 남편이 지금보다 훨씬 능력이 있어서 재산이 많으면 나는 안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돈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자살을 하고 이혼을 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아이들 때문에 가정 때문에 무능한 남편, 잘나지 않은 남편 때문에 생겨나는 인생의 무게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의 무게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느끼는 그 어려움이 단순히 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는 이유 때문이라면 그 남자하고 결혼하지 않은 내 친구들은 모두 행복해야 되잖아요. 그리고 만약에 가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이라면 시집 안간 모든 자기 친구들은 다 행복합니까? 왜 대답을 안 합니까? 행복합니까? 안하지 않습니까? 가장 심각한 것은 이것입니다. 아내가 되었으면서 남편과 관계를 맺으면서 사랑의 관계를 발전시켜야겠다는 마음속에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들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의 온 체중을 남편에게 싣고 남편은 자기를 깃털처럼 받아주기를 원합니다. 그랬던 때가 있었습니다. 연애에 불붙어서 남편의 눈이 멀었을 때 잠깐 몇 년 몇 달 동안은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부로서 살아가는 인생의 모든 날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규칙은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왜 변했습니까? 여러분도 처녀 때에는 그 오빠 때문에 마음 설레고, 그가 아파하면 자신의 아픔처럼 슬퍼하고, 그를 붙들어 주고, 그를 위해서 모든지 희생하겠노라고 마음먹었던 젊은 시절이 있잖아요. 여러분 안 그럽니다. 여러분 안 그러는데 남편만 왜 그래야 됩니까? 왜 남편 혼자 갑질을 당해야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얼 잘못했습니까? 핵심은 이것입니다. 만약에 집안 일이 너무 힘들어서 남편과 소통할 에너지를 완전히 고갈시켜 간다면 좀 덜 하십시오. 아이들을 돌보느라고 모든 기력을 소진해서 퇴근한 남편과 대화할 수 없다면 아이들을 좀 덜 돌보세요. 그리고 남편이 오면 대화를 트세요. 할 말이 없다구요? 인터넷을 보셔서 유머라도 몇 개 찾아놓으세요. 그리고 말을 건네세요. 하기 싫다고요? 해야 하는 게 아내의 도리입니다. 남편이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다고요? “네가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황금률입니다.
남편이 무엇을 하든지 무조건 복종하라 그것 아닙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의 복종입니다. 지혜로운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헤아립니다. 남편이 열을 받았습니다. 혹은 화나서 열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뭐라고 막 합니다. 왜 이렇게 안했냐고 이렇게 하라고 막 토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는 그 자리에서 ‘알았어. 여보.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 볼게’ 그리고 그 순간을 지나갑니다. 그리고 하루나 이틀쯤 지난 다음에 그 감정이 남편에게서 사라지고 난 후에 조곤조곤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의 의견도 좋은 것인데 사실 이렇게 하면 이런 어려움이 생기는데 괜찮겠어?’ 대부분의 남자가 당신 생각 뭐야 그러고 물어봅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더 좋지 않을까? ‘여보, 가정 일이니까 당신이 알아서 해.’ 이렇게 넘깁니다. 어리석은 아내는 그 순간에 바락바락 대듭니다.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혹은 사태에 대한 판단이 자기보다 조금 떨어진다는 이유 때문에 요즘 애들 하는 말로 남편을 개무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로미오와 줄리오’에서 나오는 사랑을 기대합니다. 누가 어떤 남자가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그런 사랑을 해주겠습니까?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여자는 남편이 자신을 아무리 높게 평가해 주고 높이 띄워줘도 그것 가지고는 만족이 안 됩니다. 사랑을 표현해 주어야 합니다. ‘쓸데없이 돈이 쎘구나. 왜 이런 꽃을 사와’ 그리고 겉으로는 욕을 하지만 속으로는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표현을 해야지만 여자는 숨을 쉴 수 있고 자기가 남편의 아내가 된 존재의 가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높여줍니다. 사람들 앞에 자기 아내를 높이 칭찬하고 모든 면에서 “여보. 당신은 나보다 더 뛰어나.” 라고 고백을 하는데 사랑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아내는 소외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남편은 다릅니다. 남편은 아무리 애교를 떨고 그리고 하루에 몇 번씩 문자를 보내도 그럴 리도 없지만 아무리 사랑의 표현을 많이 해도 존중히 여김을 받는다는 느낌이 없으면 그 사랑의 감정은 시멘트 위에 뿌려진 씨앗과 같아서 자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성은 거기서 소외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여자는 사랑의 표현에서, 남자는 존중의 표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들은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세속적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해? 주님 바라보고 모든 것을 견뎌야지.” 자기는 안하는 신앙을 왜 남편에게만 강요합니까? 우리가 주님을 믿고 순종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사는 거지 아내나 남편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그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의 문제이고 시쳇말로 ‘너나 잘하세요.’ 이렇게 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내인 여러분들에게 물어봅니다. 여러분들이 모든 면에서 넘칩니다. 돈도 많고 집안도 훨씬 빵빵하고 미모도 받쳐주고 인간성도 탁월합니다. 그러면 남편에게 사랑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렇게 안 됩니다. 돈도 그렇게 많지 않고 상냥하지도 않고 결함이 좀 있습니다. 그리고 미모도 뛰어나지 않고 한창 땐 그랬는데 지금은 별로입니다. 그러면 남편이 그만큼 깎아서 덜 사랑해줘도 괜찮습니까? 왜 대답을 안 합니까? 대답할 자유를 줄게요. 그래도 괜찮습니까? 안되잖아요. 그러면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능력이 좀 모자라도 그리고 미모가 덜 받쳐줘도 배가 좀 나왔어도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은 그를 하늘처럼 생각해 주어야 합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아내입니다. 가능하면 착각 속에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그만 알고, 그만 사랑하고, 그만 그 사람만 훌륭하다고 믿고, 그 사람만 너그럽다고 믿고, 내가 그 사람은 나만 사랑한다고 그렇게 믿어주어야 됩니다. 그게 하나님이 아내에게 부여하신 역할이기도 합니다.
아내는 사랑의 표현을 통해 소속감을 느끼지만 남편은 아내에게 존중히 여긴다는 느낌을 받을 때에 소속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내가 부족한 것이 남편이 사랑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면 남편이 모자라는 것도 아내가 그를 존중히 여기지 못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남편의 뜻을 따를 수 있을 때도 있고 따를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에라도 따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존중심까지 짓밟히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에게는 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이 바로 가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내가 결함이 많지만 남편은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허락해주신 유일한 아내임을 믿고 그가 모자라는 점이 있으면 그렇기 때문에 이 여자를 혼자 살게 하지 않으시고 나 같은 사람을 남편으로 불러 저 모자라는 점을 보태며 살게 하셨구나. 그렇게 생각해야 하듯이 아내도 똑같이 남편의 부족하고 모자란 점을 보면 ‘저게 내 소명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이 남자의 아내로 만드셔서 그 모자라는 점들을 잘 보충해 남편도 사람 되고 아내인 나도 사람 되라고 이 사람의 아내로 부르셨구나.’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시험을 해보십시오. 나는 매일 저녁 남편이 돌아올 때 만세를 부릅니다. 나는 도저히 더 이상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시험을 해보십시오. 30분 아이들을 덜 돌보고 집안 청소 안한다고 집이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30분 오후에 시간을 내어서 골방에 들어가 간절히 기도하며 내 남편을 사랑하고 존중히 여길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그렇지 못하는 나를 용서해 달라고 매일매일 갑질하면서 남편에게 상처를 주는 이 못된 아내를 용서해 달라고 눈물로 기도하면 신기하게 남편을 마주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그 비밀을 세상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압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살아가는 신앙의 비밀입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뼛속깊이까지 배인 남편에 대한 무시, 실망 그리고 그의 허물에 대한 오랜 기억, 그것을 붙들고 살 때 불행해지는 것은 남편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렇게 남편을 무시하고 남편은 아내와 함께 살아가면서 어떤 경우에도 존중받지 못하고 늘 깔봄을 당하고 소외된 가운데 그렇게 살기 힘든 인생을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끔찍이 사랑을 받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려면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진지한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부부의 일생은 함께 살아가야할 소명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을 만나게 하셔서 서로를 사랑하게 하십니다. 혼자 살 때는 제법 괜찮은 인간인줄 알았는데 남편을 만나서 바닥까지 박박 긁힘을 당해보니 시커멓게 탄 누룽지 같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칩니다. 십자가에서 이렇게 아무 희망이 없는 자기를 위해서 매달려 죽으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지금 내 자리에 있었더라면 남편에게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합니다.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아픔이 있어도 교회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자신이 선택한 남편을 존경하고 그리고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것은 남편에게 아내의 도리가 아닌 동시에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자녀의 도리가 아닙니다. 불완전한 남편을 일생동안 세워가는 것이 아내의 도리입니다. 그렇게 남편을 어려움을 이기고 진실로 존경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자기의 막돼먹은 인간성도 완성되어가는 줄을 왜 모르십니까? 남편의 허물을 이웃 아낙네들과 함께 나누는 것만큼 그렇게 치욕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머리이니 그렇게 남편의 허물을 많은 사람들에게 대놓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머리에 똥을 바르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보호 받아야 할 명예, 지켜져야 할 인격, 그런 것들을 마지막까지 보호해 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 있는데 그가 바로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힘든 길을 걸어가면서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그렇게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하게 사랑하셔서 구원의 길을 가게하신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그렇게 갑질만 하고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또 다른 삶의 에너지를 가지고 남편을 존중하고 그 남편과 사랑으로 교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 절망하는 것만큼 하나님에게 소망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과 기도의 은혜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불평과 불만 하는 입을 닫으십시오. 아내로서 남편을 깊이 존중하고 자신의 머리처럼 여기며 복종하지 못했던 나를 진심으로 뉘우치십시오. 그리고 남편이 자신에게 어떤 남편이 되는 것과는 상관없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좋은 아내가 되기를 결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족관계를 다시 세움(2018.6.3. 주일오전5)
아내를 사랑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골 3:1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어서 성경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편지가 쓰인 당시 로마 사회는 기본적으로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하던 때였습니다. 일부 개인적인 예외는 있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남성이 힘과 권력으로 가정을 통제하던 때였습니다. 여자는 남편이 주는 돈으로 경제생활을 꾸려가고 그의 활동 범위는 가정의 테두리를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그 가정 안에서 순결하고 정절을 지키며 인내하고, 그리고 온유하며 남편에게 복종하고 희생하고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이 아내의 일이었습니다. 집 담장을 넘어서 공개적인 장소에서 무엇인가를 발언하는 것은 남편이 그 가정을 통솔하고 있지 못한 증거로 여겨져서 가장에게 수치가 되던 때였습니다.
II. 타락 후 혼인 제도
오늘 성경은 바로 그러한 사회 속에서 성도들을 향해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라고 말합니다. 자,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혼인제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인데 우리는 이해를 위해서 타락 후에 혼인제도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해서 잠깐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의 몸의 일부를 사용하셔서 지으셨습니다. 이는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거나 혹은 남자에게 종속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당시에도 분명히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질서는 있었으나 그것은 두 사람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방해하지는 못합니다.
최초의 인류가 타락함으로써 그것은 관계의 파괴로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하늘의 사랑과 생명으로 살게 되어 있었는데 이 공급이 끊어진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을 현저히 잃어버리고 폭력과 비참이 도입되었습니다. 자연계와의 관계에서는 많이 수고해야 겨우 먹고 사는 그러한 황폐함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자신과의 관계도 파괴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스스로 분열과 혼란에 처한 존재가 되었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알 수 없는 무지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남자를 흙으로 빚으시고 그 다음에 여자는 같은 흙으로 빚지 아니하시고 그의 몸을 일부를 취하여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혼인을 할 때에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라고 고백했으니 하와도 이 고백에 동참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자 이제 더 이상 인간들은 서로를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로 여길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끔찍하게도 다음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창세기 4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최초의 살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살인은 너무나도 간절히 어떤 한 사람의 비존재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견딜 수 없어서 그 존재를 제거해 버리는 사건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사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는 사회와 정 반대의 사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처음 타락한 아담의 마음 안에 이미 있었던 것입니다. 하와와 함께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였을 때에 성경 창세기 3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의 열매를 내게 줌으로 먹었나이다” 한번 눈길을 주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말을 바꾸면 이제 아담에게 하와는 더 이상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있어서 견딜 수 없이 괴로운 여자, 자신의 인생에 추호도 도움이 되지 않는 여자, 내 안에서 도려내 버리고 싶은 여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 가인의 살인은 이 마음의 자연스러운 표출이었던 것입니다. 범죄하고 난 후 아담은 이미 하와의 존재를 극도로 싫어하고 있었습니다. 둘이 싸운 것이 아니라 각자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더니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일반 은총 속에서 이 혼인의 제도를 유지하게 하셨습니다. 인류를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고,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게 하시려는 창조의 목적, 그를 통하여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아직 포기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결혼관계를 통해서 그 속에서 바로 하나님의 구속을 이룰 그런 수많은 사람들을 태어나게 하실 예정이었고, 그 사람의 피에서 여자의 후손이 나올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인 제도는 유지되었으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지극한 예외가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 인류의 역사에서 혼인 제도는 남성의 억압과 폭력으로 피에 물들여졌습니다. 우리가 속한 동북아 문화권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남존 여비 사상에 젖어서 살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하고 여성은 남성의 지도와 돌봄, 그리고 보살핌이 없이는 매우 어리석어서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없는 판단력과 의지가 모자라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이것을 유교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통적인 유교 사상이 아닙니다. 유교 사상의 가르침에 핵심이라고 알고 있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은 전한(前漢)시대에 동중서(董仲舒)라고 하는 사람이 ‘공맹사상’을 종합하여서 풀어놓는 가르침입니다. 오륜의 원조는 맹자의 가르침입니다. 특히 그에게서 엿볼 수 있는 ‘부부유별(夫婦有別)’이라는 가르침은 부부가 서로 구별이 있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 일에 참견하면 안 되고, 남성은 여성과는 다르다 우월한 방향으로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고 설득하는데 이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이것은 정통적인 유교의 가르침이 아니라 후일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주역(周易)의 가르침을 오용하여 잘못 적용한 결과로 생겨난 기형적인 윤리입니다. 저는 이 시간에 주역의 잘못된 해석이 어떻게 부부유별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길게 논증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통적인 유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부유별’이라는 이 가르침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부부’ 끊고 ‘유별’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는 그들만의 독특한 교제와 관계, 정절 등이 있기 때문에 그 부부는 다른 부부와 구별이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부부간의 성적인 순결을 지켜야할 의무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둘째, ‘부’와 ‘부’ 사이를 나누는 것입니다. ‘부. 부 유별’입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 구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폭압적인 남성 우월주의의 구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질서 음행의 질서 상 남녀의 자리가 따로 있고, 하는 일들이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서로는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서로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정통적인 유교가 기형적인 형태로 나타나면서 그것은 당시 사회에 권력을 가지고 있던 남성주의와 함께 융합되면서 최악의 남녀관을 가져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억압적인 남성 우월주의가 지배하게 되었고 심하면 폭력과 그리고 끔찍한 만행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여성을 분명히 남성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고 남성의 종속물처럼 생각하는 가르침도 유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이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염집의 여자는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절대로 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 여염집에서 이러한 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기생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선비들은 기생을 가리켜서 해어화라고 불렀습니다.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생들은 시화를 배우고 글을 익히며 자신들의 고객인 선비들과 말을 틀 수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불합리한 이중적 성윤리를 강조했습니다. 남자가 외도를 하는 것은 그가 호남이라는 증거이고 아주 호걸이라는 증거이고 여자는 엄격하게 목숨을 걸고 자신의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이중적인 성윤리를 강요당하고, 우리는 아직까지도 그런 관성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애들은 아무나하고 재워도 여자애들은 절대로 아무나하고도 재우지 않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세상의 영향을 그리스도인들도 충분히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복음이 그토록 성공적으로 전파될 수 있었던 원인을 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를 꽂습니다. 첫째는 로마 제국의 영토의 확장이었습니다. 로마가 강력한 군대로 주변의 국가를 복속시킵니다. 그리고 나면 길이 생깁니다. 그 길의 첫째적인 이유는 군사적인 목적이었습니다. 제국 어느 곳에서든지 반란이 일어나면 잘 닦여진 길로 로마의 군대가 질풍처럼 달려가 한숨에 제압해 버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두 번째로 그 길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상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똑같이 길이 나자마자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복음 전도자들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시대에는 다양한 민족이 제국을 이루고 있었으나 이미 알렉산더 대제가 그 전체의 제국에 퍼트렸던 코인의 헬라어라고 하는 그리스어의 쉬운 방언이 제국의 공용어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디서든지 코인의 헬라어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영토의 확장이 복음 전파의 폭발적인 성장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외적인 이유라면 그 다음은 내적인 이유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생활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은혜로 복음을 듣고 회심한 사람이었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가 가르쳐 주신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 선한 것이 아니라 이제껏 보지 못했을 정도의 충격적인 선한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여성과 노예를 사람의 수에 넣지도 않았습니다. 그랬는데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여성을 존중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남성과 꼭 같이 매우 소중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자유인과 노예가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파격적인 윤리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들의 고안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이러한 새로운 윤리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모본을 보이고 친히 가르쳐 주신 윤리였던 것입니다. 더욱이 남편에게 아내와 동등한 순결을 요구하고 자녀를 기르는 것이 전적으로 아내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던 시기에 자녀를 양육하던 것에 아버지의 의무를 강조하는 것은 그 당시로서 파격적이다 못해 혁명적인 발상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선한 생활의 충격적인 영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의 복음은 특히 억압 받았던 여성과 그리고 노예들에게 급속히 전파되었고, 뿐만 아니라 부자와 많은 사람, 인생의 갈 길을 잃었던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선한 생활의 윤리의 토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환영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로마 제국 전체를 뒤집어 놓는 혁명적인 새로운 윤리의 혁신이 일어났습니다마는 이제 기독교가 공인이 되고 이제 로마의 국교가 된 후 교회는 이제 로마의 일반 제도에 편입되게 됩니다. 그러면서 초대 교회의 시대 때에 생생하게 살아 역사하고 세상을 뒤집었던 성경적인 남녀관, 복음적인 부부관이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중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것들은 더더욱 견고하게 굳어졌습니다. 심지어 종교개혁 시대에 와서도 이러한 잘못된 남녀관, 부부관은 근본적으로 개혁되지 못했습니다. 루터와 칼빈은 파격적으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해야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으나 여전히 당시를 지배하던 남성 우월적인 이념에서 자유롭게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타락 이후의 혼인 제도의 변천의 역사 속에서 동북아에 태어나서 그리고 굽어있는 유교의 이상한 가르침이라고 오해된 그러한 교리에 의해서 윤리가 형성된 가운데 남자와 여자를 보고, 남편과 아내를 보면서 자라왔던 것입니다. 신자도 사람이니까 세상 속에 살면서 조상들로부터 살아왔던 이 땅의 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세상의 풍조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은 이러한 그릇된 잘못 해석된 사이비 유교의 이상한 가르침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이것에 반발해서 남녀의 차별이 전혀 없고 심지어는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하다는 가르침, 논리를 초월해서 남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일어나는 새로운 여성상의 시대 속에서 혼란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견해는 무엇입니까? 세상의 풍조 속에서 영향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이것을 무분별하게 모두 섭취해 버리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독특한 맛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과 신학을 공부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세상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중 성경과 부합하지 않는 것들을 덜어내어 버리고 세상에 살지만 세상이 우리를 형성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형성하게 하여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살 수 있고, 맛 잃은 세상의 소금으로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III. 아내를 사랑하라
A. 되는 사랑 vs 하는 사랑
그러면 도대체 남편에게 아내를 향하여 어떻게 하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에 앞서 먼서 사랑에는 ‘되는 사랑’과 ‘하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녀의 환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열애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남성과 여성으로부터 일평생 변하지 않는 열렬한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현실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감정만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요구하고 더욱이 그 인간의 감정과 마음은 끊임없이 변천하는 시대와 환경 그리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끊임없이 변하는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마음과 정신의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또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사람이 무엇으로 사랑하게 되는가’, ‘그 사랑은 왜 변하게 되는가’에 대한 유물론적인 해석을 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수반 물리학’이라고 하는 학문은, 속하는 물질이 인간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인데, 특히 신경 과학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신경 전달 물질이 주는 화학적 작용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엔도르핀(endorphin),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 페릴, 에틸아민(Ethanamine) 같은 물질이 나오게 될 때 기분이 상기되고 열정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리고 그 상대방을 열렬하게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신경 물질은 계속 콸콸거리고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1년 6개월 정도가 한계이고, 넉넉잡고 2년에서 3년이면 이 물질의 분비는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에 열애 이후에 물질이 나오게 되는데 엔도르핀, 바소프레신(vasopressin), 옥시토신(oxytocin) 같은 물질이 나와서 마음이 들뜨고 열애를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고 즐겁고 안락하고 안심이 되고 그러한 관계의 느낌을 갖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물론적인 설명을 우리는 모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설명을 극단적으로 받아들이면 사랑을 못하는 것은 도파민이 덜 나오기 때문이고 내가 아내와 서로 사이좋게 살지 못하는 것은 엔도르핀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랑을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사랑은 우리의 마음 안에서 복잡한 정신의 작용을 거쳐서 끊임없는 의지의 선택과 결정, 지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녀의 사랑은 되는 사랑과 하는 사랑이 합쳐져서 진정으로 바람직한 사랑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주위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서로를 열애한 나머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결혼이 난관을 모두 극복하고 결혼을 했는데 뜻밖에도 몇 년 못 가서 원수처럼 갈라지는 사람들을 보게 됐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되는 사랑 하나에 모든 희망을 거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되는 사랑과 함께 하는 사랑이 필요한 것이니 되는 사랑은 특별히 노력할 일이 없지만 하는 사랑은 끊임없이 사랑하려고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에베소서와 함께 가족 관계의 덕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가족들 관계의 덕목의 뿌리는 사랑입니다. 그것도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뿌리를 삼고 각 가족 관계의 덕목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그 사랑 때문에 남편에게 복종하고 그리고 자식은 그 사랑 때문에 부모를 공경합니다. 그리고 아비는 그 사랑 때문에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남편은 아내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할 텐데 사랑은 이미 토대가 되었으니 사랑을 반복해서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아내보고는 남편을 사랑하라, 그리고 복종하라, 그렇게 말하지 않고 남편에게는 아내를 사랑하라 그리고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일보다 매우 어려운 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남편의 본성에 흐름대로만 맡길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짧은 구절이 우리에게 이런 심오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남편들이 아내를 저절로 사랑하게 된다, 자기가 노력하지 않아도 아내를 저절로 사랑하게 된다, 얼마나 잘 될까요? 간혹 아내들 중에는 결혼하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도 남편을 멀리서 보면 가슴이 설렌다는 여자들을 가끔 보지만 남자 중에서는 못 봤습니다. 결혼하면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던 여성들의 마음은 일반적으로 한 인간에게 초점이 맞춰집니다. 그런데 남자는 한 여자와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게 되면 이제 연애 시절에 그 여자에게 모아졌던 초점을 사회와 자신의 성취에게로 발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려 가시고 가꾸어 가시기 위한 하나의 성향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극단적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아내에게나 남편에게나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인정해야 될 사실은 이것입니다. 저절로 흘러가듯 저절로 되는 사랑은 없다. 그것은 불과 유효기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결혼과 함께 될 뿐만 아니라 하여야 하는 사랑의 바다에 들어섰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쉽습니다. 어차피 추상명사이기 때문에 그 맹세대로 실천을 안 해도 별로 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여자를 사랑하기로 맹세하고 실천을 하지 않을 때에는 반나절만 실천하지 않아도 당장 표가 납니다. 그리고 저녁때에는 바가지를 긁히게 됩니다. 이 세상에 정말 어려운 일은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스톨게(Storge)의 사랑도 아니고 필리아(Philia)의 사랑도 아니고, 에로스(Eros)의 사랑은 이미 많이 덜어내진 상태에서 한 여자를 사랑하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있을까요? 말로 사랑하는 것 말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많은 남성들의 오해는 자신이 아내를 사랑하면 아내가 최대의 수혜자이고 따라서 자기가 사랑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이익이 아내에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해 준 보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부간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사랑, 자기완성의 길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깨어진 부부관계, 망가진 가족 관계를 회복하는 첫 번째의 한 발은 바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는 결혼했고 아내는 주어졌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내 운명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남편들이 그렇게 생각 안합니다. ‘아, 살기 싫다.’ ‘아, 내가 그 여자하고 결혼을 했더라면, 처음 선본 그 여자, 첫 사랑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면’, 심지어 ‘이혼까지는 아니더라도 다 싫다.’ ‘벗어나서 <나는 자연이이다>와 같은 TV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처럼 살고 싶다.’, ‘그냥 풀뿌리나 캐면서 건강을 위해서 공기 좋은 곳에서 그렇게 혼자 조용히 살고 싶다.’ 이런 생각 중 단 하나만 해도 여러분들은 계속 망가진 채로 일생을 살아야 합니다. 서른다섯에 이 생각을 했다면 별로 이른 나이게 자각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가 95세를 산다면 아직 60년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살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사는 날 동안 지불해야 할 고통과 번민이 얼마나 클까요? 더욱이 상황이 묘하게 되어서 자신이 아내보다 훨씬 오래 산다면 아내가 죽는 날까지 그 고민을 해야 합니다. 이게 과연 선택할만한 삶일까요?
여러분 남편 중에 상당수의 사람이 이렇게 애매모한 태도로 살아왔습니다.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셨을까요? 두 번째 묻습니다. 여러분은 그 동안 행복하셨습니까? 세 번째, 그래서 또 다른 행복의 길을 발견했나요? 그러므로 깨어진 아내와의 관계를 복원하는 첫 번째 출발은 남편이 나에게 지금의 아내는 주어진 운명이다 이것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것을 잘 몰라서 아내를 버립니다.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요? 물어 보십시오. 새 삶이 기다리고 있나, 새로운 번민이 기다리고 있나 말입니다. 결국 아내는 운명처럼 나에게 주어졌고 일수불퇴(一手不退)이고 이 사람이 내 앞에 있는 것은 나의 현실입니다. 그 현실을 정직하게 회피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인 여러분의 본분은 바로 그 아내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살아갈 뿐만이 아니라 그 아내를 어찌하든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남편으로서 아내를 사랑 안한 줄을 아십니까? 누구는 사랑 안 해보고 힘들다고 하는 줄 아십니까? 사랑했지요. 사랑하려고 노력도 했습니다. 수없이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잘 안 되더군요.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참아야 합니까? 에베소서 5장 25절은 그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의 표준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하기를 께서 를 하시고 그 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과 같이 하라” 이었습니다. 아내를 그렇게 사랑하는 이유는 아내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랑의 동기는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아내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랑의 동기가 내가 이미 받은 하나님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기까지 하시면서 그렇게 나를 사랑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감화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이제껏 나를 주인 삼으며 살았던 삶을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다시는 나를 주인 삼은 삶을 살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찬양)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그래서 아내를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표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났나니 그것은 바로 사랑하시되 그 교회를 위해 자기를 내어주심과 같이 그렇게 온전한 희생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설명하실 때에 그 비밀이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가 못 알아들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 속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설명할 때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의 유비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생각해라’, 바로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남편인 너희들이 아내를 사랑하기를 바란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에는 그냥 교회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것은 하나님의 원대한 비전이 있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래 하나님에게 있었는데 그 사랑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부어집니다. 그리고는 그 아들과 혼인관계에 있는 신부이자 아내인 교회에 부어집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남편과 아내이기 이전에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우리로 예수를 믿게 하거나 아내와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에베소서 5장 26절과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곧 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은 궁극적으로 교회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남편과 아내를 구원하신 목표는 그들을 사랑하며 살게 할 뿐 아니라 그 사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을 흠도 없고 순전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교회의 신랑이신 예수는 완전하십니다. 그래서 교회와의 관계를 통해 당신이 다시 정결해지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내와 연합된 한 인간 남편은 결코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아내와 함께 끊임없이 더러운 불결을 털어내고 하나님 앞에 점도 티도 없이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할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한 남편으로서의 인간을 완전하게 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이 많은 관계를 사용하시는데 그 중에 매우 특별하게 그에게만 주신 관계가 있으니 아내와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한 인간을 아내와 함께 살고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서 불완전한 그의 인간성을 완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으로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 완성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남자들은 자기가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현실적인 많은 이유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내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결점, 약점, 그런 것들은 또 반복됩니다. 여러분들이 말다툼 많이 합니다. 그거 좋지 않습니다. 하지 마셔야 됩니다. 어쨌든 말다툼합니다. 그러면 말다툼 한 것을 한 10년 동안 모두 적어 놓으면 개수만큼이나 많은 이유로 말다툼을 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항상 몇 가지 안 되는 공통적인 이유 때문에 그 말다툼이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내도 남편인 나도 하나님이 생긴 대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구속하신 것이 아니라 망가진 모습을 고쳐가며 하나님 보실 때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아내의 결점과 약점을 오래도록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운명처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어리석은 사람은 끊임없이 아내를 학생처럼 가르치려는 사람이고 이보다 더 크게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은 아내를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 아내는 그 아내의 엄마도 못 고쳤고, 아빠도 못 고쳤습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아직 다 못 고치셔서 그냥 그렇게 참고 계시는 아내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여자 얼마 만난 지 얼마도 되지 않는 불완전한 여러분이 확 뜯어 고쳐서 새 사람을 만들겠다고요? 너나 잘하십시오.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내를 현실적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많은 이유를 말하지만 그러나 그 뿌리를 모두 캐 들어가면 하나의 사실에서 만납니다. 그것은 사랑 없음입니다. 그것은 인정해야 됩니다.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없는 걸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우리가 내리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할 수 없다.”, “못한다.”는 것입니다. 천사보고 내려와서 자기 아내 사랑하며 평생 살아보라고 하십시오. 천사들은 할 수 있는지. 모든 남자에게 아내와 함께 온전히 사랑하며 사랑하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 개인에게만 매우 특별하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 일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하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합니다. 심하면 이 여자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그냥 내가 조용히 눈을 감고 사라지면 안 될까 생각하는 남편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끊임없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에게 퍼주고, 아내의 이익을 도모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끝까지 한 사람을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를 보게 되고, 자신의 모든 밑바닥까지 다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한 남자는 한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려고 몸부림치면서 그 여자를 만나지 아니하였더라면 결코 갈 수 없었을 자기완성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B. 사랑, 자기 완성의 길
그러면 없는 사랑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이것입니다. 깨어진 아내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제일 먼저 받아들여야 할 것은 이 사람이 나의 아내이고 죽을 때까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아주 정직하게 내 아내는 그런 사랑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로 사랑해야 함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희랍어로 ‘아가페테’라는 단어인데 ‘사랑하다’라는 동사 ‘아가파오’의 이 인칭 명령형입니다. 그러면 아시다시피 그 당시에는 우리 눈에는 그저 사랑이면 모두 같아보였고 그래서 한 두 단어밖에 사랑에 대한 표현이 없지만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이 인간의 사랑이 인간 세계에서 경험되는 사랑이 무지개 빛깔처럼 다양했습니다. 그래서 이성 간에 만나서 본능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을 에로스라고 불렀고, 한 피 받아 부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은 필리아로 불렀고, 부모가 자식을 향해 가지고 있는 숙명적인 사랑은 스톨게라고 불렀습니다.
이 세 개 말고 또 하나의 사랑이 있었는데 그것이 아가페입니다. 이 아가페는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아가페는 앞의 세 사랑과는 조금 다를 것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사랑의 시작이 신에게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두 번째는 모든 사랑들과는 달리 이 아가페의 사랑은 사랑받는 자의 장점 때문에 시작된 사랑이 아니다. 신의 무한한 자비심 때문에 인간을 불쌍하게 여겨서 사랑하게 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특징은 인간은 사랑을 포기해도 신은 인간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아가페의 사랑이 기독교에서 소화되면서 성경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개념들을 담게 된 것입니다. ‘아가페테’, ‘사랑하라’, ‘아내를 사랑하라’ 이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납득이 되지 않는 명령으로서 남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든지 그 당시에 아내는 아가페의 대상이 아니었고, 더욱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남편에게 사랑을 받아야 할 정도의 존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을 가르쳤습니다. 이 아가페의 사랑을 아내에게만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는 원수에게도 사랑하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비록 신자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사랑할 원천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 사랑이 우리 자신에게서 자가 발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 아주 간단하게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하지만 인간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가능하도록 만드시는 사랑의 감동입니다. 그 사랑에 깊이 감동을 받음으로써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사랑의 감화를 주고 이 사랑의 감화는 우리의 의지를 불러일으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먼저 우리에게 주어져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고 실제로 실천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힘을 주고 계시다는 것이 경험되게 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입니다.
한 남편이 아내와 함께 살아가면서 아내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갖지 않은 사람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 인류 중 아무도 못해본 사랑을 홀로 하고 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별로 사랑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해 봤어야 멀어지는 것을 알지 원래 멀게 살았는데 사랑이 식은 것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남편들에게 말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느낌을 받을 때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이 땅의 남편들이 그 길을 걸었습니다. 아내를 사랑할 수 없을 때 이제 더 이상 이 여자를 사랑할 수 없다는 이 지점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가정에 충실해 보이고 남이 보기에는 세상에 없는 남편이라고 칭찬하지만 아내의 마음에는 만족이 안 될 때 우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자신의 민낯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 곳에서 덧칠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정치가였다면 정치가로서 업적에 의해 그의 인생이 평가될 것입니다. 그가 사업가라면 훌륭하게 사업에 성공함으로써 사람들은 그의 인생을 평가할 것입니다. 학자였다면 뛰어난 연구 결과물들에 의해서 그의 학자적인 유능함이 입증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까짓 것들은 모두 우리의 인생에 양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치가도 일선에서 물러나야 하는 때가 있고, 사업가도 이제는 은퇴해야 되는 때가 있습니다. 학자도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고 새로운 논문을 발표할 수 있을 정도로 지력이 왕성하지 않아서 조용히 펜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정치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고 그리고 더욱이 사업가도 아닙니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살아야 합니다. 정치가나 학자나 사업가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아내가 먼저 죽었어도 자신은 살아야 합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죽는 날까지 내 인생을 살아내야 하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밥을 먹고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인생의 많은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자기가 자신의 인생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어떤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으로서 모든 것에서 다 떠나도 아내는 죽지 않는 한 내 앞에서 나와 함께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만약에 아내를 사랑하며 살지 않는다면 자신은 인생에 있어서는 실패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고 그리고 참으로 소중한 인생입니다. 이제껏 살아온 길도 수없는 눈물과 때로는 피 흘림 속에서 즐겁고 기쁜 일보다는 시련과 괴로움이 많은 모든 상황을 통과하며 이제까지 왔습니다. 그랬는데 언젠가 우리의 인생을 마름할 때 그때에 자기가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여 한 인간으로서 완성의 길을 가지 못했다면 그것은 자신이 살아온 수많은 인생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C. 은혜로 사랑함
문제는 이것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살고 싶은데 도저히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이 없다는 사실을 그냥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아내에게 이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나 진짜 당신이랑 못 살겠어. 당신은 도대체 왜 그래. 나는 진짜 당신하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 그런 이야기를 아내에게는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는 많이 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 진짜 이 여자하고 못 살겠습니다. 너무너무 힘듭니다. 나는 이런 많은 약점과 결점을 가지고 있는 여자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많이 기도하십시오. 그 대신 간절히 기도하면 마지막에 항상 똑같은 결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게 하셨고 그리고 나는 어찌하든지 이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남편인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은혜 언약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들에게 무한히 주시기로 하신 것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한 가지는 죄를 지었을 때 용서를 빌면 무한한 횟수까지 용서해 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만약 하나님의 자녀가 순종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간구하면 순종할 수 있는 은혜의 힘을 무한정으로 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 앞에 누리는 혜택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일이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식 사랑하는 일은 쉬웠나요? 그리고 우리가 내게 상처 준 부모님을 용서하고 다시 사랑하는 일은 아주 쉬웠나요? 어차피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깨지고 망가진 인간들끼리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해나가는 것은 어차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었습니다. 5월 첫 주일날 저의 간증을 들으셨잖아요. 그렇게 어리석고 완고하던 제가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녹아지고 나니까 아이들을 사랑하잖아요. 왜냐하면 그를 사랑할 힘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상처가 많은 가정 속에 자라났어도 마음 깊이 내게 아픔을 줄 수밖에 없는 부모님들이 결국은 하나님 없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고 나니까 하나님 없이 살았을 그 분들의 핏기 없는 얼굴이 떠오르면서 더욱 사랑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 그게 자식 된 우리의 공통적인 경험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성격을 가지고 와서 온 교회와 구역식구들을 뒤흔들어 놓고 고통에 고통을 주던 지체들도 이겨냈습니다. 왜냐하면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도저히 이길 수 없는데 그냥 내 위치가 한데거리하고 싸울 수 없는 위치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은혜의 도움을 구합니다. 신기하게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할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게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 아니라 은혜로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것을 매년 경험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힘들다고 한들 빗나가는 우리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만큼 그보다 더 힘들까요? 그리고 상처를 준 부모님을 다시 사랑하는 것보다 고통을 주는 지체들을 한없이 용서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까요? 남편인 여러분들이 훨씬 그게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분량 이상의 기대를 아내에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량에 하나님이 마땅히 정해주신 분량을 넘어서는 것은 지나친 욕망이고 그 욕망이 커지면 하나님을 대신해서 아내를 지배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지배할 수 없을 때에는 아내를 최소한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물론 부부는 완전한 사랑을 바래야 합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현실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때로 남편들은 아내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외로워하고 불평을 합니다. 물론 부부는 이 세상의 다른 사람과는 비교될 수 없는 부부로서의 결합 속에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를 아내와 허물없이 털어놓고 아내의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슬픔을, 아픔을 함께하고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아주 독특한 관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부부의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사랑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는 것보다 더 큰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한 남편으로서 완전한 만족을 누린다고 하더라도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만족은 그것보다 더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씀드리려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아무리 장벽이 없이 너무너무 사랑하고 그리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해 주어도 한 인간으로서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인간 실존의 소외와 외로움은 남아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게 없으면 사람이 결혼함으로 구원을 얻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리석은 남자들은 아내와의 관계 속에서 이것까지 모두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는 너무나 큰 기대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내도 역시 남편의 무한한 사랑을 받아도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가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 있는 이 실존의 무게는 남편이 덜어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무게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 알아주지 못한다는 것을 불평하지도 말고, 그리고 아내가 나로 말미암아 완전한 행복을 얻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지만 그 목표를 바라보면서 그냥 뒤엣것은 잊어버리고 앞의 것을 향하여 매일 달려가는 것입니다.
사랑이 식으면 아내의 결점에서 그녀와 함께 살지 말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은 수시로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으면 아내의 결점에서 남편은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은 시간과 공간에 매이지 않고 넘나듭니다. 한 사람이 어떤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면 그 사람이 과거에 겪은 슬픔과 고통, 그때에는 내가 그 사람을 알지도 못했을 때인데 더욱이 그 일에 내가 책임이 없는데도 그리고 당사자는 그 아픔에서 이미 벗어나 행복하게 사는데도 사랑하는 나의 마음속에는 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그 사랑하는 사람이 과거에 겪었던 그 슬픔 때문에 가슴이 에이는 통증을 겪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이 가지고 있는 영혼의 특성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지 눈치를 채셨나요? 아내가 나에게 매우 거친 언사로 나를 비난합니다. 그러면 과거에 그 일로 아내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으면 내게 이렇게 거친 언사를 퍼부을까, 혹은 아내가 어떤 결점을 보이면 저 여자가 나에게 발견된 저 결점을 안고 그 결점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 속에 부딪치며 고통을 받았을 텐데 원인도 모르고 살아오느라고 얼마나 힘든 인생길을 지났을까 생각해 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그렇게 생각해야 되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제일 가까이 불러준 사람이 아내입니다. 그래서 그를 보며 그의 결점에서 저런 결점을 가지고 그냥 혼자 살았을 사람에 하나님이 나를 만나게 해주셔서 저런 결점을 보완하고 지금 당장은 내가 고칠 수 없지만 그러나 오래 기도하고 인내하면서 주님이 저를 빚으셔서 인생을 괴롭히던 저 결점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나를 이 여자의 남편으로 불렀구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구나 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당신 같은 남자하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이 말을 듣고 이렇게 대답하면 안 됩니다. ‘너만 힘들었는줄 알아? 나도 힘들어.’ 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결론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헤어지지도 못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래? 나하고 사느라고 힘들었지? 나도 나랑 사느라고 되게 힘들었다. 내가 고칠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런 모든 것들 이기면서도 기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의 오늘 설교를 남편을 너무 수도사로 만드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지 마세요. 왜냐하면 이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렇게 어려워 보이는 사랑을 통해 끊임없는 자기완성의 길을 가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예기치 못한 기쁨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것은 단순히 아내가 자기를 예뻐하고 자기를 귀하게 여기고 맛있는 반찬을 해놓고 기다리고 다른 사람 앞에 남편인 자기를 추켜세우는데서 오는 그런 기쁨이 아닙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신비한 기쁨을 우리에게 주셔서 바로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저 여자를 위해서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인 여러분들이 지난 날 아내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면 말없이 잘하지 마시고 반드시 지난날 여러분들의 잘못에 대해서 정식으로 깨끗하게 용서를 비십시오. 그런데도 아내가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 아내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새 출발을 하십시오. ‘이제 나는 네 남편이기 때문에 겨우 너하고 함께 사는 것이 아니다. 당신과 결혼했지만 나는 당신의 아름다움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 아들의 아름다움, 그 분이 내게 가르쳐 준 그 무한한 아가페 사랑 때문에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이다.’라고 출발을 합니다. 끝까지 아내가 용서를 안 하고 마음에 안 좋은 감정을 품고 자기를 대하면 그냥 사십시오. 그냥 그것이 나의 처지려니 하고 사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이 반드시 그녀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 남편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남편에게 주신 권리가 무얼까, 그리고 아내에게는 무얼 하라고 명령하셨는가를 도끼눈을 뜨고 찾아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아내가 찾게 놔두십시오. 그리고 눈을 크게 열고 남편이 누구이고 아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남편인 나에게 어떤 삶을 살라고 하는지 생각하세요. 이렇게 은혜를 받으면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아내를 사랑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은혜를 받지 못한 아내는 여전히 푸념과 잔소리, 무시하는 발언, 한숨,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을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아내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깊이 용서를 비십시오. 그리고 한 남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명예를 걸고 자신에게 다짐하십시오. 어떤 난관이 와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저 여자를 반드시 사랑하고야 말리라. 인생이 끝난 후에 살아온 길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IV. 적용과 결론
신자도 어쩔 수 없이 세상의 풍조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성경의 빛으로 거짓된 교훈에 물들지 않도록 자기를 씻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이 말하는 바를 명심하십시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아내는 두고 가는 인생길에 마지막 벗는 신발과 같습니다. 그와 헤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 길에는 결국 불가능하고 어려운 길이었지만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기쁨으로 이 한 여자를 사랑하며 왔노라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가족관계를 다시 세움(2018. 6. 10 주일오전6)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골 3:1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남편의 덕목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야 할까요?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라는 것입니다. 남편들에게 명하는 바는 아주 단순합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II. 괴롭게 하지 말라
A. 의미와 문맥
그러면 이 명령은 어떤 의미를 나타내고 또 어떤 문헌에게서 사용이 되었습니까? “괴롭게 하지 말라”에서 ‘괴롭게 하다’라는 동사는 ‘피크라이네스데’라고 하는 동사입니다. 이 동사는 ‘피크리아’라고 하는 명사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단어인데 이 명사의 의미는 고통, 쓰라림, 가혹함, 아픔,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단어가 우리들이 잘 아는 히브리서 12장 15절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형용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쓴 뿌리라고 표현된 이 단어의 ‘쓴’이라는 형용사가 바로 우리 본문에 나와 있는 동사에서 나온 형용사입니다. 흔히 이 구절을 이야기할 때 ‘쓴 뿌리’라고 하는 것은 한약재처럼 뿌리 그 자체가 쓴 맛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니라 쓰디쓴 열매를 맺게 하는 나무나 혹은 화초의 뿌리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 할 때에 바로 이런 그림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몸이 약해서 어쩔 수 없이 한약을 복용하게 되었습니다. 하얀 약탕기에 거무스름한 액체가 담겨있는데 한번 먹어보니 온몸이 진저리를 치도록 쓰디씁니다. 그 다음에는 아직 약을 복용하지 않았는데도 약 그릇을 보면 그 쓴 경험이 마음속에서 살아나서 정동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다시 그 약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이런 존재가 되지 말라, 아내가 이런 마음을 느끼도록 괴롭게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 명령이 주어진 문맥이 어떤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명령은 교회 밖에 있는 현실과 성도의 생활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가부장제였고 남성 우월주의적이고, 폭압적인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억압이 있었습니다. 아내 따위, 여성 따위가 괴로움을 좀 느끼는 것 같은 것들은 남편의 행동을 구속할 수 있는 사유가 되지 않던 때입니다. 이런 때에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주어지는 이 명령은 당시로서는 매우 생소한 명령이었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하나님 자녀들의 윤리가 당시 세상과 어떻게 달라야 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정신에 영향을 받지만 우리는 성경에 영향을 받아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부부로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매우 혼란스러운 시대의 상황을 지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변종적 유교주의’의 관성이 남아있습니다. 남편은 남자를 존중히 여기고 여자를 깔보는, 여자는 홀로 살아서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고 남성을 의존해야 한다는 그러한 ‘변종적 유대주의’의 관점에 젖어서 성장해 왔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남존여비 사상’을 가지고 있고, 또 조상들로부터 폭압적으로 여성 위에 군림하는 아버지 할아버지 상들을 보아왔습니다. 더욱이 아내는 그런 문화에 익숙해져서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법을 교육이라는 이름하에 배워왔습니다. 신자가 된 다음에는 더 나쁜 일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 ‘남성 우월주의’가 짙은 폭압적인 가부장 제도의 지배가 이것이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는 그 잘못된 관점들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가 하면 또 한쪽에서는 탈근대적인 포스트모던적인 사고들이 스며들어오면서 아내가 도저히 그러한 유교주의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유로운 탈 근대주의 정신이 이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자는 여전히 이런 변종적 유교주의에 집착하고 있을 때 양쪽은 매우 심한 갈등을 일으키며 다투기도 하고 결국은 성격 차이라는 미명하에 이혼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현실이 어떠하든지 우리가 지내온 관습이 어떠하든지 그것을 항상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항상 그 현실과 바뀐 상황, 그리고 지속되어 온 관습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생각하며 성경이 가르치지 않은 것들을 덜어내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들을 보태며 우리의 도덕 생활을 영위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성경을 믿음과 생활의 원리로 삼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것을 읽는 독자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독자가 일체의 주관이 없이 성경의 진리대로 해석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자신의 주관을 아무 이상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성경을 읽는 것과 자신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그러한 편견과 오해를 덜어내면서 성경을 읽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렇게 최대한 자신의 선입견과 그리고 시대정신에 물든 사고방식을 덜어내고 성경을 살핀 후에는 그 성경 한 구절이 자기가 좋아한다고 해서 절대적인 가르침이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한 주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전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한 구절을 너무 심하게 강조할 때 다른 구절이 어떻게 잘못 영향을 받는지를 보면서 그렇게 성경 전체에 여러 구절이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가르치는 교훈을 체계적으로 이끌어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적인 결론을 얻은 후에는 그것을 현대의 문맥 안에서 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최상의 적용점을 이끌어 내어서 자신의 삶에 실제로 사용해 보는 것입니다. 그 결과 만약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고, 성경이 가르치는 다른 교훈과 모순되지 않게끔 도덕 생활을 해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면 그것은 훌륭하게 적용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아무리 성경을 올바로 해석 했다고 믿어도 그것을 적용 했을 때에 이러한 하나님을 경외할만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거나 다른 도덕 생활과 모순을 일으킬 때에는 그것은 적용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결국 이 모든 해석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교회 바깥에서는 아내를 함부로 대했지만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성경의 윤리가 있으니 그것은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B. 아내를 괴롭게 할 때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모든 교인은 아니지만 결혼한 20대, 30대, 40대, 50대의 아내들에게 설문조사를 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남편이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할 때에 아내로서 가장 괴롭습니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20대의 답변과 50대의 답변이 약간 차이가 있었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차이가 아니라 중요하게 생각하는 무게 중심의 차이였습니다.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영역에서 아내들은 가장 많은 괴로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첫째의 범주는 ‘언어생활’입니다. 남편의 언어생활 때문에 아내는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남존여비 사상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아내를 약간 깔보는 것 같은 마음, 이것은 존중심의 결여로 나타납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은 아내의 일보다 중요하며 또 자기와 관련된 일은 아내 일보다도 훨씬 더 관심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우월감에서 오는 아내에 대한 존중심의 결여입니다. 이것은 일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존재 자체에 있어서도 아내는 약간 덜 존중받아도 된다고 하는 이런 존중심의 결여뿐만 아니라 작은 일에 폭발하는 분노와 화내는 것, 그리고 얼마든지 인격적으로 이야기해줄 수 있는데도 짜증을 내는 이런 언어생활들이 아내에게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내에 대한 존중의 마음은 언어를 통해서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니 이러한 언어생활에서의 존중심이 없는 이러한 언어 태도는 아내를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범주는 ‘가정생활’입니다. 즉, 남편은 자신의 영역이 회사, 직장, 사업, 이것이 자신의 영역이고 가족이 생활할 수 있도록 돈을 벌어오면 그것은 내가 하는 거의 모든 일을 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아이들을 양육하는 문제, 가사를 꾸려가는 문제, 이런 것들에 대한 현저한 관심의 부족으로 나타나는데 이 속에서 아내는 부부관계가 불평등하다는 것을 느끼고 부당하게 자신이 짐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남편에 의해서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으면서 마음의 괴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자가 전업 주부인 경우에 뿐만 아니라 여성이 사회 활동을 하며 남편 못지않게 수입을 올리는 가정에서도 여전히 가사와 양육은 아내의 몫이라는 생각이 남편의 의식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범주는 ‘관계’입니다. 특히 시댁과의 관계에서 무엇인가 자신과의 집안에 불일치하는 것들이 생겼을 때 당연히 가장으로서 가족을 대표해서 시댁에 당당하게 의사를 표시하고 혹은 더 좋은 방법으로 그것을 해결해서 시댁과의 관계를 조율해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책임하게 그것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당장 본가에 있는 친 부모님이나 혹은 동기간에 싫은 소리를 듣기 싫어서 가장이 조율해야 할 일을 무책임하게 방치함으로써 결국은 그 부담이 아내에게 돌아오고 의도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아주 나쁜 며느리가 되게 하는 일들이 아내에게 있어서는 매우 커다란 고통이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범주는 ‘생활의 태도’였습니다. 특히 가정 경제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무책임한 태도, 그리고 인터넷 같은데 몰입해서 게임이나 하고 가족들과 의사를 소통하지 않는 태도, 모바일에 몰두하고 이렇게 자기만의 아성을 쌓으면서 집안에 들어와서까지 그렇게 생활하는 태도가 아내에게 괴로움을 더하였으니 이것은 배려가 없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 늦은 시간까지 아주 바쁘게 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일들로 시달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일이 모두 끝나면 집에 돌아올 때 물론 피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이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직장에서, 사업의 터전에서 내 모든 것을 쏟아 붓고 돈도 벌었고 지쳤으니 이제 집에는 안식이 기다리겠구나.’ 그리고 돌아와서 가족들과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서 쉬거나 아니면 ‘이것 말고 내가 하루에 위안이 어디 있겠어?’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에 몰입하거나 텔레비전을 틀고 멍 때리면서 소파에 앉아서 그거나 지켜보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너무 힘듭니다. 집에 와서라도 못 쉽니까?” 그 쉼이라는 것이 그런 식의 쉼이라면 그 남자는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원룸에서 살면서 끝나고 나서 집에 돌아와서 혼자 살아가는 삶이라면 어떻습니까? 씻지 않고 양복을 입어 누운 채 잠이 들던지, 신발을 신고 하얀 침대 위에 올라가든지, 어제 먹은 그릇을 치우지 않고 오늘 아침 먹은 그릇 내버려둔 채, 컵라면에 물을 말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멍 때리든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결혼했잖습니까? 공동생활이 아닙니까?
그러면 아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냥 계속 휴식을 취하고 자다가 남편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스펙도 안 생기는 가정 일에 아이들 양육에 심지어는 자기 자신이 돈벌이까지 해야 하는 아내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아내가 하루 종일 가사에 시달리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었을 때 ‘아, 정말 오늘 하루는 힘들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 이제 남편이 들어오는 것과 함께 아이들, 설거지, 집안일, 모든 것은 바통 터치야. 나는 이제 퍼져야하겠어.’ 그렇게 사시려면 시집을 오지 마셨어야 됐습니다. 혼자 자취방에서 생활을 한다면 아니 여섯시에 퍼지던지 아니면 밤새도록 비디오를 보든지 누가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그런데 결혼 했잖습니까? 남편도 있고 아이들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두 살, 세 살, 네 살,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사춘기가 되기 전까지 아빠가 아이들과 충분히 놀아주면 그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교육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그 속에서 가족의 소속감을 배우고 갖게 되고 또 아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아빠가 그림을 그려서 설명하지 않아도 자신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아빠를 보면서 어떤 아빠가 되어야 할지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이 가정이 왜 그렇게 독특한 공동체인가 하는 것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독교적 가르침의 혁명적인 교훈은 전통적으로 로마 시대에 아내에게만 속했다고 믿었던 자녀 양육의 책임에 아버지도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가르침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러면 물론 피곤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면, 다 때려치우고 세수하고 가서 침대에 벌렁 누워버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책임과 의무가 우리에게 그 열매로서 기쁨과 권리도 가져다주지만 그 모든 의무가 우리에게 항상 달콤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의무와 책임이라는 단어를 잃어버리고 나면 그러면 그 사람은 공동체에서 생활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아내를 향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에 대한 배려를 가지고, 남편은 아내에 대한 배려를 가지고 그리고 집안에 돌아오면 자기가 많은 일을 했으니 쉬어야 할 육체와 정신의 필요와 가정에서 자신의 의무를 해야 하는 그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책임 사이에 조화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녀들과 함께 어울리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런 네 가지 영역, 언어, 가사, 시댁과의 관계, 생활태도, 이런 것들이 남성들에게 있어서 몸에 배어서 계속 똑같은 방식으로 아내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이 바뀌거나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에 대해서 아내들이 하소연을 하면 항상 같은 내용이 비슷하게 반복이 되니까 저것은 무엇인가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본성이 사람을 달달 볶기를 좋아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늘 습관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의미 없는 언어라고 생각하고 정리를 하고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부부생활의 갈등이 깊어지는 그런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부부가 혼인과 함께 특별한 연합을 갖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원래 성도에게 있어서 결혼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와 또 다른 하나님을 믿는 자녀의 결합입니다. 두 사람은 부부로 결합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연합은 어떤 식으로도 깨어지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그 연합을 그대로 살려둔 채로 남편과 아내가 만나 결혼을 하면 다른 사람들과는 배타적인 독특한 부부만의 연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연합 안에서 부부는 성적으로 연합하고 육체적으로 연합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연합을 누리게 됩니다. 이 연합은 결코 깨지지 아니하는 것이니 둘 중 한 사람이 죽어서 혼인 관계가 끝나기 전까지는 이 결합은 해제되지 않습니다. 두 사람 다 죽은 후에는 천국에서 만나게 될 텐데 그때에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으니 이 혼인 관계의 연합이 부활한 이후에 천국에서도 그 연합이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 같은 곳은 이것을 훨씬 더 적극적으로 생각을 하는 것이니 남편과 아내는 혼인을 통해 아주 중요하고 독특한 영적인 결합의 관계로 들어가고, 둘 중의 한 사람이 죽어도 이 결합은 깨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들이 재혼을 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한 사람의 남자는 한 사람의 여자와만 영적인 연합을 갖도록 지정되었으니 설령 그가 결혼 후 속히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 연합을 지키면서 혼자 살다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이러한 중요한 결합의 관계가 있습니다. 창세기 2장 24절은 이에 대한 고전적인 설명을 우리에게 줍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했는데 ‘합하여’라고 하는 이 단어가 히브리어로 ‘다바크’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사실상 두 개인데 그것이 붙어서 한 덩어리가 된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다바크의 명사 ‘데베크’라는 말은 현대 히브리어에서 풀을 가리킵니다. 혹은 접착제를 가리킵니다. 이 남자와 여자가 둘이 합하여 딱 달라붙은 상태에서 한 몸으로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의 몸에서 하와를 만드시고 둘을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신 것은 두 가지가 솟아나오는 곳의 공통된 뿌리이니 하나는 인류 모두가 그렇게 한 몸을 이루어 사랑하며 살게 하시는 미래의 사회의 뿌리이고, 또 하나는 남자와 여자가 마지막 날 때까지 함께 결합하여 부부로서 살아가게 하는 그 사랑의 연합의 뿌리인 공통분모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남녀를 짝 지워 부부가 되게 하신 것은 그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으니 그 둘의 연합은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누구와 누릴 수 있는 연합과도 구별되는 독특한 부부만의 연합입니다. 이 부부의 연합에는 ‘원리적인 연합’과 ‘실제적인 연합’이 있습니다. ‘원리적인 연합’은 혼인하면서 그 남편과 아내가 합하여 한 몸으로 살아가도록 그를 결속시키신 연합이며, ‘실제적인 연합’은 그런 원리적인 연합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현실로 실현된 연합입니다. 이 실제적인 연합을 좌우하는 것은 바로 현실 속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서 부부는 원리적으로 연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 연합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사랑과 마음의 연합이 약화되는 것은 바로 서로를 현실적으로 사랑하지 않거나 혹은 그 사랑이 심히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실제적인 연합 안에서 남편과 아내는 함께 살아가는 즐거움을 터득하게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있음으로 해서 불편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참 자기로 살아가고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경 속에서 이렇게 아내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유업을 함께 누릴 자라는 사실을 강조했으니 이러한 실제적인 사랑의 연합 안에서 남편과 아내는 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그 기쁨을 앞당겨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혼인 속에 즐거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괴롭게 할 때 이렇게 되면 결국은 아내와의 사이에 실제적인 연합이 깨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소극적으로 아내는 결혼의 기쁨을 상실하게 되고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고 희망 대신 낙망하게 됩니다. 적극적으로는 상처를 받게 되고 이것이 치료가 없이 계속될 경우에는 분노로 변하고, 이것이 더 나쁜 형태가 되면 남편을 향한 복수의 감정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했던 하나님의 계획에 현저히 어긋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가정을 만들어 놓으신 그 계획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현실인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괴롭게 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 결혼의 계획에 전면적으로 위배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괴롭게 하는 것은 자신의 아내를 자기의 몸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인데 현실에서는 남편이 가해자요 아내가 피해자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결국 나중에는 그 모든 것이 부메랑이 되어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니 그러한 사랑 없이 아내를 괴롭힌 모든 잘못된 태도와 행동들은 자신에게로 돌아와 그를 고립시키고 외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남자로 태어나서 한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합니다. 이 세상에 굽이굽이 시련과 고통의 길을 통과하고 결혼 속에 두신 단맛과 쓴맛을 한꺼번에 경험하며 인생을 살아갑니다. 누구도 한 인생을 살고난 후에 빨간 카펫 위를 걷는 것 같은 인생이었거나 혹은 푸른 풀밭을 걷는 것 같은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 남자가 어느 순간에 죽습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 자녀들이 아빠를 생각합니다. ‘아, 우리 아빠는 참 훌륭한 분이셨어. 그리고 나는 시련이나 어려움이 닥칠 때 가정생활이 한없이 힘겹게 느껴질 때마다 아버지가 생각이 나. 아, 아빠 보고 싶다.’ 홀로 남은 아내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탁자 위에 올려놓은 남편의 사진을 보며 옷깃으로 먼지를 씻으며 ‘여보, 보고 싶어요.’ 라고 할 수 있는 영예는 모든 남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자녀들의 아버지로서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며 살고 아내와의 사랑의 연합 속에서 마음의 연합을 이루며 살아가는 그런 아름다운 삶 끝에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이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그런 삶을 살지 못했다고 생각되시는 남편들은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오늘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아내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비십시오. 만약에 용서를 안 해준다면 하나님이 혼낼 것입니다. 그리고 옛 생활과 결별해야 합니다. 언어로 가정의 생활에 있어서 관계에 있어서 생활의 태도에 있어서 집요하도록 아내를 괴롭혔던 잘못된 삶과 결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책임 있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고 망가진 부부 관계를 방치하고 아내에게 괴로움을 그치지 아니한다면 결국 당신이 죽는 날 아내와 자녀들에게는 해방의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자녀들은 나쁜 기억 이외에 당신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며 아내는 자신이 죽고 난 후 자신이 죽을 때까지 자기의 인생의 최고의 불행은 여러분을 만난 것이고 그래도 위로가 되는 것은 일찍이 당신을 죽음으로 떠나보낸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게 정말 우리 남편인 성도들이 바라는 삶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인데도 부모나 친구, 혹은 이웃이나 가까운 친척, 동생, 언니, 형, 그립도록 생각이 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 소수일 것입니다. 저에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오래전에 나를 떠난 특정한 사람을 그렇게 보고 싶게 만들까 질문했을 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너무 사랑했거나 혹은 나를 사랑했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그것을 깨닫고 났더니 죽음의 강을 건너 저편으로 갔는데도 그를 꿈꾸고 그리워합니다.
여러분들은 남편으로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특별히 가정을 파괴한 일도 없고 신문에 날만한 나쁜 일을 저지른 적도 없고, 외도를 한 적도 없고, 집안의 돈을 딴 데 빼돌려 노름으로 탕진한 적도 없이 그냥 살았을 뿐인데 그런데 가족들에게 전혀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남성들이 가장 깊이 생각해야 될 것은 아내의 잔소리 속에 부부관계를 행복과 불행으로 이끄는 매우 중요한 어떤 사실들이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귀담아 듣고 반성하고 그것을 고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것에 대해서 찬동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아내는 이런 괴로움을 계속 당할 때 부부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체로서의 연합도 사라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남편과 함께 할 미래의 소망이 아내들에게는 사라집니다. 이것은 얼마나 슬픈 것입니까? 사랑은 끊임없이 미래를 꿈꾸게 만들고 희망을 갖게 만들어 주지만 낙심과 좌절은 우리를 절망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부부로서 이 세상에서 함께 누리며 살아가야 할 기쁨들을 잃게 한다는 것입니다.
C. 연약한 자로 여김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남편들이 아내를 끊임없이 괴롭게 하는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성경은 그것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는 오늘 그 중 한 가지를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남편이 아내를 자신보다 연약한 자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남편도 한 인간으로서 실존의 무게를 짊어지고 세상에서 사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내는 자신보다 더 연약하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베드로 전서 3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의 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남자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보십시오. 목사님. 어쨌든 여자는 남자에 비해 약하지 않습니까? 이러니 어찌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과 여성으로서의 특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만약에 남성이 여성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단단하기 때문에 만약에 더 우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다음 질문에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아무거나 담을 수 있고 집어 던져도 상하지 않는 그릇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갈비탕을 담아 먹을 때 쓰는 아주 튼튼하게 만든 스테인리스 국사발이 있다고 칩시다. 그 국그릇은 아무렇게나 던져도 설거지할 때 부주의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1년에 몇 차례 사용하는 얇은 유리로 예쁘게 만든 수입해온 유리그릇 화채를 담는 용기가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설거지할 때 그 갈비탕 그릇을 닦을 때의 마음과 화채 그릇을 닦을 때의 마음이 꼭 같겠습니까? 훨씬 더 조심해서 다룰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름다운 화채 그릇은 갈비탕 국그릇에 비해 열등한 것입니까?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기능과 특성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해 보이는 이것과 강해보이는 그것을 약한 것을 강점으로 삼고, 강해보이는 것을 약점으로 삼아서 둘을 융화하여 하나님이 가정을 통해 당신의 사회를 이루어 가시도록 구별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에 비해 열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아내가 남편보다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육체적인 능력에 있어서 남성이 여성보다 더 힘이 셉니다. 그런가 하면 여성은 정신적인 감수성에 있어서 남성보다 훨씬 더 예민하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동일한 시련과 역경을 견뎌내면서 그 성품적인 인내의 힘이 상대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적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이것은 남녀의 우열을 재는 기준으로서 여성을 연약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내가 남편보다 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에 세심하게 배려하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신부인 교회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생각해 보면 남편들이 어떻게 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해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높은 믿음의 기준과 삶의 표준을 정하신 후, ‘나를 믿을 자들은 모두 따라오라. 여기에 도달하지 못한 자는 쓰레기니’ 라고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이르지 못하는 너희들은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으니 교회에 붙어서 사는 그런 존재들에 불과하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더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어찌할 수 없이 그렇게 연약한 사람들, 심지어는 악에 빠진 사람들까지도 버리지 아니하고 긍휼히 여기며 그들을 하나님 앞에 신자다운 신자로 세우도록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심하게 돌보십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연약한 자들의 편에 계시고 무지한 자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일깨우시고 서 있는 자들보다 넘어져 있는 자들을 일으켜 주시는 세심한 신랑이십니다.
바로 그렇게 성도들은 한 남편으로서 아내를 그렇게 사랑하며 세심하게 돌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으며 살게 한 것이 교회의 운명인 것처럼 아내는 또한 그렇게 남편의 세심한 돌봄을 받으며 사람다운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갈 수 있음을 결혼 관계 속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아내는 남편보다 더 연약하나니 남편인 그대들은 아내를 자신처럼 대하지 말고 오히려 연약한 자처럼 대하여 그를 배려하고 그를 사랑해 주라는 것입니다.
III. 부부, 기쁨의 삶
지난 주 설교와 오늘 설교를 듣고 나면 남편들은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야, 생각 없이 아내하고 같이 살아왔는데 알고 보니 진정한 부부생활은 남편인 내가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이구나. 도를 닦고 도를 닦으면서 아내를 행복하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고행에 고행을 거듭하는 운명이구나.’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부부는 기본적으로 기쁨의 삶을 살기 위하여 하나님이 혼인하게 하신 것입니다. 한 남편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내를 괴롭혔던 모든 삶을 회개하고 더 이상 아내를 괴롭게 하지 않을 때에 그가 받는 최고의 유익 중 하나는 기쁨의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아내를 괴롭게 한 것은 그녀의 마음속에 상처로 남겠고, 그리고 관계의 즐거움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부부의 기쁨은 둘이 소유한 물질이나 혹은 세상 명예에서 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런 기쁨과 즐거움은 동업자들과도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부부의 즐거움은 남편이 높은 사람이기 때문에, 부자이기 때문에, 아내가 예쁘기 때문에 또 아내가 내 마음에 들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 있어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 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쁨을 주는 관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이 관계에서 오는 그 기쁨이 얼마나 크고 즐거운 지는 결혼 생활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연애에 비해서 이것이 얼마나 지속적이고 한 인간을 안정적이게 만드는 지는 연애를 많이 해 본 사람들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아내를 끊임없이 괴롭게 하여 부부 관계가 실제적으로 깨뜨려지게 되면 이런 관계의 즐거움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아직 젊고, 돈도 있고, 그리고 권력도 있습니다. 그러면 가정에서 느끼지 못하는 이 애틋한 즐거움을 길거리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게 오늘날 유흥 산업이 저렇게 번성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엉뚱한 식으로 분출이 되면서 잠재되었던 인간의 더러운 욕망의 물꼬가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젊음이 있고 돈이 있고 권력이 있는 동안에는 그 자원을 가지고 다른 곳에서 아내와의 관계에서 오는 즐거움을 대치할만한 어떤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갑니다. 돈도 떨어지고 젊음도 가고 이제 가지고 있던 권력도 내려놓게 됩니다. 그때 더 이상 그에게는 그 즐거움과 기쁨을 대치할만한 쾌락이 그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가 죄를 버린 것이 아니라 죄가 그를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웠던 인생의 나날은 지나가고 이제 인생의 늦가을이 찾아올 것입니다. 자녀들은 다 컸고 아빠가 그들을 너무 사랑해 주어도 관심이 없을 나이인데 무관심과 상처 속에서 어린 시절을 살아왔으니 아버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아내와의 관계 속에서 이미 끊임없는 괴롭힘으로 그 관계의 모든 희망을 접어버린 지가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래도 가끔 아내가 예배 시간에 와서 은혜를 받고 남편에게 잘 해야 된다니까 조금씩, 조금씩 가뭄에 콩 나듯이 잘해주는데 이미 상처 나고 망가진 아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찾아온 노년에 모든 외로움과 소외, 고독, 모두 떠나간 홀로 있음, 이것은 그대로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아내도 아이들도 아끼는 자 없이 눈을 감을 것입니다. 그런 삶이 그렇게 매력적입니까? 그렇게 꿈꾸고 싶을 정도입니까? 모든 관계를 희생하면서까지 도달해 보고 싶은 그런 마지막의 결말이 그런 것입니까? 한 인간으로서 너무 비참한 마지막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후 그들을 두신 동산의 이름이 ‘에덴’이었습니다. ‘에덴’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의미심장합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그에게서 또 다른 사람을 만들어 둘을 부부로 연합시키신 후 그들이 거하는 땅을 ‘기쁨의 땅’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둘이 혼인을 해서 생식을 하고 자식들을 퍼트리는 것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니라 그 둘이 홀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더 큰 기쁨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오늘 설교를 듣고 남편으로 마음에 깊은 찔림을 받아 돌아가면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다 일상적으로 행하던 일들이었는데 이것들이 아내에게 끊임없이 잔소리가 되어서 내게 돌아왔을 때 나는 이것으로 인해 아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했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내 삶의 태도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해 보십시오. 예전에 아내와 여러분 사이에 있던 골 깊었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아내를 고통 주면서까지 얻었던 즐거움과는 비교도 안 되는 달콤한 즐거움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부부는 바로 이렇게 서로를 깊이 사랑하며 연약한 것을 함께 짊어지며 서로를 긍휼히 여기며 이 세상에 있는 누구와도 누릴 수 없는 사랑의 아름다운 연합을 누리면서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서로 보고 싶고 그리운 관계가 되고 그 깊이만큼 함께 있으면서 달콤한 삶의 즐거움을 나누는 관계가 되도록 기쁨의 삶으로 여러분들을 초청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과 함께 깊이 은혜를 받고 여러분들은 그렇게 아내를 진심으로 배려하며 그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않는 남편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V. 적용과 결론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지난 많은 날들은 우리들이 무지했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살았고, 그리고 아내가 남편을 괴롭힌다고 믿었습니다. 이제는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며 살아도 모자라는 시간인데 예전의 상처를 곱씹으며 그렇게 괴로워하며 깨어진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 말할 수 없는 에덴의 기쁨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있어도 서로 깊이 사랑하며 기쁨의 삶을 부부로서 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족관계를 다시 세움(2018.6.17. 주일오전7)
남편은 아내의 머리인가?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 5:24-2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에베소서는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신 경륜과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본서는 불신자와 신자의 삶을 대조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 자녀로서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권면하는 가운데 첫 번째 등장하는 관계가 바로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과 질서를 따르며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교회를 세우신 경륜을 가정 안에서 이루어가라는 최종적인 가르침을 향하고 있습니다.
II. 남편은 아내의 머리인가?
A. 찬성하는 견해
오늘 여러분들에게 던지고자 하는 화두는 ‘과연 남편이 아내의 머리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것을 찬성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 견해가 옳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와 몸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권위와 복종의 관계이기 때문에 아내는 범사에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이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라고 말입니다. 이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편과 아내는 그리스도와 교회 같은 높고 낮은 위계의 질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에베소서 5장 24절을 거론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특히 강조하는 부분은 범사이니 이것은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한다고 해석합니다. 이 견해는 성경적으로 옳은 주장도 가지고 있고, 그릇된 주장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일에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이 가정을 세운 질서라고 보고 이러한 사상에 한국이라는 문화에서 계승되어 온 변종적 유교주의와 융합시켜서 전통적인 가부장제를 지지하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압적인 지배를 도모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런 견해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B. 반대하는 견해
이에 비해서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사실을 반대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견해가 구약적이고 봉건적인 사고방식의 소산이라고 보고, 남편과 아내를 창조관계에서가 아니라 구원론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로마서 12장 5절을 자주 거론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류를 구원하신 다음부터는 구원받은 지체들 안에 결코 차별이 없고 하나이기 때문에 남편은 아내의 머리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지체 안에는 어떠한 구별도 없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가 그렇게 머리와 몸의 관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남녀가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게 구속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남성인 남편이나 여자인 아내 사이도 그러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9절에서 30절을 거론합니다.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라고 말입니다. 물론 이 견해는 성경에 부합하는 주장도 포함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주장도 역시 포함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주장이 순수하게 성경에서 나온 사상으로만 무장되지 않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방식이 스며든 것이 문제입니다. 모든 도덕과 윤리의 선험적인 규범을 거부하고, 그리고 남성과 여성을 끊임없는 폭력과 갈등의 역사로 보면서 항거하는 운동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1850년에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라고 하는 사람이 『제 2의 성』이라는 책을 씀으로써 이제 이러한 남성에 대한 여성의 항거, 혹은 페미니즘의 역사의 문을 열어 제칩니다. 이러한 풍조들 속에서 여성 우월주의나 혹은 남성과 여성을 권력 투쟁의 관계로 보면서 정치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삶, 문화, 모든 영역에 있어서 여성들이 남성에 항거하여 자신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페미니즘 사상에 섞이면서 오히려 성경의 순수한 가르침이 오용된 채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조차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을 다분히 따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렇게 남편이 아내의 머리인가에 대한 아주 분명한 견해를 가지고 결혼 생활이 이루어진다기보다는 현실적으로 기가 센 사람이 우위에 있고,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이 거기에 어느 정도 굴복하며 현실적인 결혼생활이 이어져가고 있는 것이지 성경적인 성찰을 통해서 가정의 질서를 찾아가는 모습은 보기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설교를 통해서 과연 남편은 아내의 머리인가라는 이 화두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제시하고 여러분들이 이 표준을 따라서 가정생활을 해나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III. “머리와 몸”의 비유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이 화두를 해석하기 위해서 머리와 몸의 비유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어떤 비유가 나올 때에는 해석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마치 그 비유를 해석할 때 푸줏간에 있는 사람이 고기를 자르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되고, 아주 능숙한 외과 의사가 수술을 집도하는 방식으로 이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비유는 어떤 거론되는 사물의 모든 것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비유를 거론하는 화자가 말하고자하는 문맥에서의 핵심에만 관계되는 것이라는 원칙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해를 하실 수 없을 것 같아서 비유 해석의 한 예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과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라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금은 맛을 내는데 쓰는 물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약 전체에서 소금의 용례를 찾아보면 소금은 맛을 고르게 하는데 사용이 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는 그것은 정말 재미없고 맛을 잃은 이 세상에서 너희 때문에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갈 의미를 찾고, 그리고 모든 음식 자재가 뛰어나도 소금이 제대로 적당량이 들어가지 않으면 음식에 맛이 없듯이 그렇게 너희는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어라 하는 것이 이 비유가 가지고 있는 제한성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금을 예로 들면서 이 소금이 부패를 방지하니까 절임용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것의 화학기호를 예로 들면서 무엇과 무엇이 결합되었으니 이것은 어떤 종류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면서 사설을 늘어놓는 것은 이 비유에 대한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 뒤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이제 해가 지고 어두움이 깔립니다. 모든 사람이 그냥 산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집, 두 집 등잔불을 켜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산을 보면서 ‘아, 저게 다 산인 줄 알았더니 저기 집이 있었구나. 사람이 사는구나.’ 그렇게 인식하게 되듯이 사람들이 너희들을 볼 때에 ‘그냥 우리와 함께 한 세상에 살고 있구나, 그런데 아, 아니네. 이 사람들은 완전히 우리와 구별되는 사상과 윤리를 가지고 있구나. 이 사람들이 여기 있구나. 그리고 이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구나.’ 이것을 알게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이 비유가 가지고 있는 제한성입니다. 이 비유를 해석하면서 빛은 7가지 파장으로 되어 있으니 빨주노초파남보가 각각 무엇을 의미한다고 거기다가 사설을 붙이든지, 혹은 빛은 입자인 동시에 파장이니 빛이 입자라는 사실은 이런 것을 의미하고 파장이라는 사실은 저런 것을 의미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성경에서 이 문맥에서 말하는 비유해석의 한계를 자의적으로 넘어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비유를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을 아내의 머리라고 했을 때 이것은 머리와 몸의 모든 관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예수와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유비로 삼은 것은 제한적인 용도에 국한된 것이지 예수님의 교회에 대한 머리되심 모든 것을 남편이 아내에게 머리된 것에 대해서 모두를 적용하는 것은 이 비유의 의도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5장 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신다는 사실을 말하지만 그 그리스도가 교회에 대해서 머리가 된 모든 것을 꼭 같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적용해야 된다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남자들이 이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머리와 교회가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교회와 관계하는 방식이 남편과 아내가 관계하는 방식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존재와 위계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교회에 대해 가진 것을 똑같이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가져야 된다고 하는 것을 승인해 주는 성경 구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어느 한 구절을 놓고 상상력을 동원해서 깊이 캐들어 가서는 안 되고 한 동일한 주제에서 말하는 모든 성경 구절을 테이블에 놓고 좋아하는 한 구절을 확장해서 해석할 때 그 해석이 다른 성경 구절의 가르침과 모순이 되지 않는 통일성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는 것이 곧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시는 것과 방식뿐만 아니라 존재와 위계에 있어서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다음 성경 구절은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5:23) 그러면 이것이 모든 아내는 남편을 신앙의 목표로 삼고 남편을 닮아가라는 뜻일까요? 이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남편은 사람의 아들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는 완전하시고 모든 우주의 통치권을 가지고 계신 위계질서 상 우리와는 비교될 수 없는 무한자이신 하나님이시지만 남편은 그냥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인간일 뿐입니다. 다만 그가 나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고 부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남편을 신앙의 목표로 삼거나 혹은 그를 닮아가라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럴 정도의 권위와 그리고 특성은 오직 성도에 대해서 그리스도만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머리 되심인 것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신다고 할 때 이것은 신학적으로 크게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원천적인 생명이십니다. 삼위일체 안에 있는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이시기도 하였으니 하나님이 주신 이 생명을 당신과 혼인 관계에 있는 교회에 부어주신 것이고, 이 생명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남녀가 종이나 자유인이나 구별이 없이 모두 함께 동등하게 이 생명을 누리는데 우리가 누리는 이 생명은 바로 원천적인 생명이 아니라 파생적인 생명입니다. 원천이신 그분께서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은 마치 수도를 틀어놓는 한에서는 계속 물이 어디든지 호스를 타고 갈 수 있지만 그 수도를 잠그면 아무데서도 물이 공급될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원리입니다. 이 생명은 또한 사랑이기도 하니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에게 주어지고 신부인 교회에게 부어져 우리 모두 그 사랑에 참여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 안에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완벽하게 예수님의 사랑과 동질의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는 두 번째 의미는 우주적인 통치입니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의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세계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세상은 그 분으로 말미암아 지음 바 되었고 그 분이 없이는 존재하는 것이 없는 것이 세계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죄가 들어와서 잠시 하나님이 인간의 죄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과정으로 삼으십니다. 그 사이에 죄와 은혜의 갈등이 있고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시기를 마치 밤하늘에 찬란하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모든 갈등은 종식될 것이며 마지막 날에는 그리스도 홀로 이 모든 세계와 우주를 통치하시는 것을 모든 사람이 또렷이 보게 될 것이고, 그 이전에는 불신자들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세 번째 의미는 경륜적 섬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불의한 사람을 징벌하실 심판의 날만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날이 될 때까지 이 세상에서 분배적인 정의를 실현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생애에 당신이 진리를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주린 자를 먹이시고,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신 것은 바로 죄와 갈등이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이루며 섬기셔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머리와 몸의 비유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아내와 남편의 모든 관계에 완벽하게 적용하는 것은 이 비유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사실상 로마 사상을 형성하는 원동력이 된 것은 여러분들이 배운 그리스 철학이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사상은 인류 역사가 자랑하는 휴머니즘적인 사고를 태동시켰습니다. 여러분들이 지도를 펼쳐놓고 그리스를 보면 매우 특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 문명의 모태는 크레테(Κρήτη, Crete) 문명이었습니다. 크레테는 섬이었고, 바다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이 섬을 중심으로 동서양의 무역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이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은 사람과 관계하며 무역을 하는 것으로 생업을 이어갔다는 점에서 농업과 그리고 땅의 경작에만 의존하던 애굽 사람, 이집트 사람들의 문화 환경과는 현저히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관심사는 늘 사람이었고, 사람의 판단이었고, 그리고 물건을 거래하기 때문에 거래의 원칙, 법칙, 그리고 도량형, 이런 것들에 대한 감각이 발달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 라고 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역사상 로마시대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그리스 사상의 부활이 있을 때마다 휴머니즘적인 사상으로 돌아가는 인류의 유익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여성에 대한 생각은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리스 철학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의 경우에는 여성을 전사 그룹에 놓고 그 국가에 소용이 될 만한 아이를 길러내는 수단으로서 여성의 의미를 부여하는데 국한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와서 우리가 깜짝 놀랄만한 이 사람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데 그 결정적인 언명이 이것입니다. ‘여성성은 잘못 생산된 남성성이다.’ 즉, ‘신이 남자라는 인간을 만들다가 그 좀 하자난 제품들이 여성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당시 로마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기독교가 부흥을 하면서 이런 가르침에 항거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주신 가르침이 이 교회의 아주 기본적인 토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가 와서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형제 용서에 대해서 물은 후 갑자기 대화의 초점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끌고 갑니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서 아내를 내보내라고 했는데 아내를 버리는 것이 가하겠습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은 대답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덫이었습니다. 만약에 버리는 것이 옳지 않다고 이야기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아내를 내보내도 된다는 모세의 가르침에 반기를 드는 것이었을 것이고, 만약에 버려도 된다고 하면 평소 예수님이 사람들을 사랑하되 무한히 용서해 주고 사랑하라고 하는 가르침에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 덫에 놓은 것입니다. 이때 이 문제를 해석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영원한 부부관계의 지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의 해석을 요약하면 이런 것입니다. 모세는 그 당시 백성들에게 이혼 증서를 써서 여자를 내보내라고 했는데 이것은 영원한 윤리가 아니라 한시적인 어쩔 수 없는 윤리였다는 것입니다. 문맥은 이런 것입니다. 이미 죄가 들어오고 타락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란해졌습니다. 그래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데리고 삽니다. 그런데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너 싫어’ 그러고 멀어집니다. 그러면 여자는 당연히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다가 또 이제 여자는 이 남자하고 갈라섰다고 생각을 하고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갖게 되었는데 불쑥 나타나서 예전의 혼인관계를 지속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사회가 얼마나 커다란 도덕적인 혼란 속에 빠지겠습니까? 현실적으로 이런 일들이 이미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에 대한 한시적인 방책으로 남자가 만약에 마음이 들지 않아서 여자를 내보낼 경우에는 이혼 증서를 써서 이렇게 갈라지는 것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을 명확히 하면 그나마도 혼인관계에 문란함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이슬람에서는 문자로 세 번을 ‘나는 너와 더 이상 부부가 아니다.’ 라고 문자로 세 번 보내면 혼인관계가 끝난답니다. 이런 말하자면 비인간적인 일들이 자행이 되었는데 이것보다 훨씬 더 심한 일들이 모세의 사회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IV.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
A. 종속적 지배 관계 아님
그러면서 예수님이 모세의 가르침 하나만을 가지고 남녀의 혼인 관계를 생각하지 말라 하면서 예수님이 호소하신 것이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최초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부부로 만드셨던 그 가르침의 빛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르침에 의하면 어떻습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라고 하는 사랑의 고백과 남자와 여자를 각기 다른 존재이지만 함께 사랑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이 남녀를 창조하시고, 그 남녀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고 교회를 만드신 그런 위대한 세계의 경륜을 이루어가기 위한 인류를 생산해 내도록, 사람을 만들어가도록 가정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교부 시대에 들어오게 되면서 이제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 당시에 남존여비 사상과 폭압적인 남성 우월주의가 잘못된 것이며 복음에 의해서 이것이 해방되어야 하고, 남녀는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외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아주 중요한 한 윤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당시의 모든 초대 교회, 특히 그 초대 교회 시대에 이어지는 교부들과의 사이에서 완벽한 의견의 일치를 이룬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그 당시 로마의 사상에 젖어있던 많은 교사들은 여전히 여성은 남성보다 미약하고 지성과 의지, 판단 등에 있어서 부족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남자가 지도해 주어야지만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이러한 기독교의 가르침과 융합해서 한편으로는 여성을 해방시키는 것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당시의 체제에 순응하게 만드는 양면적인 두 얼굴을 교회가 보여주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로마가 기독교를 고민하고, 후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교회의 많은 가르침들은 자연스럽게 독특성을 잃어버리고 당시 로마주의 문화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남편과 아내에 대한 모든 관계에 대한 규정도 그 문화 속으로 흡수되어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이 그런 것에 항거하고 산 흔적이 없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에 역사는 그렇게 흘러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종속적인 지배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성경이 여러 번 번역 성경이 개정되었지만 이 부분은 한 번도 바뀐 것이 없을 정도로 똑같이 번역이 되어옵니다. 그러나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번역은 남성 우월주의가 강력하게 반영된 번역입니다. 히브리 성경의 원래의 뜻은 결코 이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구절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한글 성경을 놓고 남성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봐라.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창조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일, 나의 존재는 우선이고 여자인 너, 아내인 너는 내가 잘되게 하는 것이 너의 임무다. 일도 내 일이 더 중요하고 네 일은 중요한 것이 아니며, 그리고 네가 하는 가사의 일은 약간 하찮은 것이고 내가 나가서 돈 버는 일은 우월한 일이니 네가 하는 모든 일이 내 일이 잘되는데 이바지하여야 한다. 이게 너의 존재의 가치다.’ 이렇게 규정해 버린 것입니다.
두 번째는 “돕는 배필”이라는 단어인데 ‘돕는’이라는 말은 히브리 성경에 안 나옵니다. 그냥 ‘배필’이라는 말만 나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그를 위하여’ 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케네그도’ 라고 하는 단어인데 위한다는 뜻이 아니라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에 상응하는, 그와 맞먹는, 그와 짝을 이루는, 그에 대응하는’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종속의 의미가 아니라 동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을 놓고 남성들은 어떻게 해석합니까? ‘봐라. 너의 임무는 나를 도와주는 것이다. 그리고 주된 일은 내가 하고, 모든 결정과 그리고 이 일을 행하는 주체는 나다. 너는 돕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방을 연상하는 것입니다. 머리 높이 하얀 모자를 쓴 최고 주방장이 현란한 솜씨로 아름다운 요리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름다운 접시에 꾸밀 때 뒤에서 양파 깎고 그 다음에 파 다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여자고 그 조리사가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돕는 배필을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자, 그런데 그게 과연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닙니다. 그것은 히브리어 말로 ‘돕는’이라는 말은 아예 성경에 안 나오고 ‘에제르’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에제르’에 해당되는 한국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배필이라는 말도 여러분 이게 동등한 의미로 조선 시대 때 사용이 되었습니까? ‘여자인 너는 저 남자의 배필이다.’ 라고 할 때 절대 그것은 동등한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에제르’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한국말로 정확하게 옮길 수 없지만 시편에 이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데 ‘도움’이라고 번역이 되었고,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가장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오.’, ‘주께서 나를 도우시리로다.’ 할 때 그 ‘도움’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나의 도움이시오.’ 할 때에는 내가 다 하는데 하나님이 보조해 주신다는 뜻입니까? 그 뜻이 아닙니다. 이게 전투와 관련 되서 사용될 때에는 응원군이라고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투의 판세가 기울어지고 있을 때 저 멀리 지평선에서 수많은 기병대와 보병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는 그 광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차피 에제르에 대한 완벽한 한국어 동치어가 없기 때문에 번역이 불가하지만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그래도 심사숙고해서 번역하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제안을 해보는 것입니다. ‘내가 그 남자에 상응하는 천군만마를 지으리니’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혹시 이것을 ‘도움’으로 번역한다고 하더라도 이 속에는 보조의 개념이 아니라 남자 혼자서 살아서는 이룰 수 없는 어떤 일들을 이루게 해주는 동등한 존재로서의 여성을 의미한다고 해석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남녀를 이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는 폭력적인 남성우위론이 파고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저는 한 30년 전 히브리어 성경을 읽으면서 받았던 그 충격을 지금까지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과 함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무자비한 폭력성이 들어오게 됩니다. 타락한 아담과 하와로부터 불과 몇 대에 이르지 않아서 남편이라는 사람이 아내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창세기 4장 23절입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하다가 누군가가 의도를 했는지 실수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실수가 아닐까요? 무언가 실수를 해서 라멕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가 조금 상처를 입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을 죽여 버렸습니다. 여기에서 ‘상한다’ 라고 하는 것은 대개 맞아서 상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 모르지만 누군가가 손이나 혹은 어떤 도구로 잘못해서 그 사람에게 맞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가 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배상을 받든지 사과를 받든지 해야 되는데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아내에게 왜 떠드는 것일까요? ‘알아서 기어라.’ 그 뜻입니다. ‘나 무서운 사람이야. 상처 조금 입었는데 그 자식을 내가 단칼에 죽였어. 누가 나를 약간 상하게 했는데 나 그 존재를 없애버렸거든. 그러면 내가 너희들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제는 가늠할 수 있겠지?’ 이 얘기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살과 뼈의 관계로 지은 그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얼마나 무서운 폭력성이 들어왔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타락 후 많은 역사가 흐른 다음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폭압적인 가부장 제도가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남자에게 여자에게는 없는 강력한 육체적인 힘과 정복할 수 있는, 개척할 수 있는 이런 성향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 그 힘을 주신 것인데 그것이 타락과 함께 폭력성으로 변하여 가정 안으로 들어와서 그 육체적인 힘의 완력을 아내를 억압하는데 폭력을 행사하는데 사용이 되고, 그런 개척적인 정신 속에 잔인함이 들어오면서 폭력적인 권력과 지배의 관계가 남녀 사이에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남성들의 행태는 타락했을 때 하나님이 하와를 징계하셨다고 하더라도 그 분량을 넘어서는 것이고,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에게 징벌을 내리시기를 ‘너는 남편을 사모할 것이요, 남편은 너를 지배하라 했으니 여성이 남성을 사랑하는 것은 타락에 대한 징벌이다.’ 라고 경악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창세기 3장 16절을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개혁 개정 성경에서 사모하고를 ‘원하고’ 로 바꿨는데 이것은 올바른 번역에 반쯤 가다가 멈춘 것입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구절,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을 다스릴 것이다” 라고 했는데 ‘원하다’ 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테슈카테크’ 라는 단어인데 ‘너의 욕망’ 이라고 해석해야 됩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다스림을 받으리라 하는 다스림을 받으리라는 구절은 ‘이슈모르베카’ 라는 단어인데 ‘이슈모르’는 ‘지배할 것이다.’ 라는 뜻이지만 ‘베카’는 ‘속속들이’ 혹은 ‘너의 의지와 반하여’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구절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제대로 번역을 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너는 네 남편에 대해서 너의 욕망을 가질 것이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남편에게 다스림을 받으리라. 너의 의지에 반해서 혹은 너를 속속들이’ 이런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나오는 ‘테슈카테크’ 라고 하는 이 단어는 이게 정확하게 번역하면 ‘욕망, 지배욕, 탐욕’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특히 많은 주석가들은 지배욕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타락하면서 여성의 마음에는 남성을 지배하려는 야심이 생겨나고 결과적으로는 남자가 여자를 그 의지에 반해서 혹은 속속들이 지배하게 되는 우울한 역사가 전개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상대방을 권위로 지배하여 사실상 자기 발아래 두려는 욕망은 남자에게 국한된 욕망이 아닙니다. 여성에게도 타락 후에 똑같이 들어온 욕망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태까지 10번의 최근의 부부싸움을 한 것을 가지고 통계를 내보면 두 가지 특징이 발견되는데 첫 번째로 열 가지 사유로 다툰 것이 아니라 몇 개의 제한된 사유가 반복돼서 다툼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다툰 열 개 중 단 하나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다툼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면 아내가 탱탱 놀고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면서 “너 기도 그렇게 안 해서 신자일 수 있어?” 하고 폭력을 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내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러면 남편에게 아주 깔보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따위로 예배드리고도 네가 신자일 수가 있니?”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령한 것을 향한 질서는 그것을 갈망하는 사람들 마음 안에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랑의 원리로 사람을 대하지 그런 식으로 폭압적으로 사람을 대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부들이 으르렁 거리고 싸우고 있는 이것은 사실은 하나님의 일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서로가 서로의 우위를 차지하고 자기 뜻대로 가정에서 질서를 형서하려고 하는 다툼이 부부싸움의 대부분의 원인이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남자가 여자의 머리입니까 라고 의문을 제기한 여성이나 틀림없이 남자는 여자의 머리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때 그 주장하는 부분들이 각각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세우기 위해서 그렇게 핏대를 올리며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남편과 혹은 아내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각자의 지배력을 그런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런 것들을 논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이 의도한 바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남자와 모두 타락과 함께 서로를 지배하려는 악한 본성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를 위계질서적인 종속적인 지배의 관계로 세우신 적이 없고, 더군다나 여성이 남성을 그런 종속적인 관계 속에 둠으로써 하와가 가질 것이라고 예고했던 그러한 욕망을 가지고 남편을 대하는 것은 더더욱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니 두 사람은 동등하게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를 지극히 존중하도록 그렇게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B. 기능적 질서가 있음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었다고 할 때 두 번째로 그것은 기능적인 질서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창조되었을 당시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진 사람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이 창조의 위대한 계획을 이루어감에 있어서 남성은 여성을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었고 여성도 남성을 그리하게 하셨으니 이는 둘이 한 몸인 것처럼 사랑하며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라고 하여 남자가 여자의 머리가 된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으니 여자의 머리가 된 남자는 그 머리가 된 것이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된 것이나 혹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머리가 된 것과는 같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남자 하나님 사이에 존재와 위계질서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삼위일체적 경륜을 그리스도를 통해 시간과 공간 안에 펼치시고 그리스도는 또한 이 경륜을 교회로 하여금 알게 하셔서 이 경륜에 참여하게 하시고, 또 각 가정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뜻을 앎으로 그 경륜에 이바지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이러한 경륜이 전개되는 질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완전하고 무한하고 영원하시지만 남편은 그냥 사람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복종하신 것처럼 그렇게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관계와 방식이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남편과 아내 사이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있는 그런 절대적인 위계와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공통된 본성을 주셨고 남자에게는 남자에게 공통된 본성을, 여자는 여자에게 공통된 본성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자나 여자나 모두 인류로서의 본성, 남녀로서의 본성 말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이기 때문에 독특하게 가지고 있는 본성을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구슬과 같이 아주 형형색색의 알록달록한 것이어서 서로 다른 것이 모든 인류의 행복이 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죄가 들어오고 타락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다양성은 서로를 공격하고 서로의 존재를 못 견디게 하는 이유가 되었고,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본성은 물론 남자로서의 본성, 여자로서의 본성, 개별적 독특한 존재로서의 본성으로까지 죄에 물들면서 다름은 서로를 아름답게 하기 보다는 서로를 공격하고 파괴하고 지배하게 하는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비극이 해결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은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는 죄를 해결하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 우리가 구원받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남편과 아내 사이에 복종하고 지배를 받는 우월주의적인 차별을 두시지는 않으셨으나 분명한 것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한 가정 안에서 기능적인 질서를 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자가 왜 여자의 머리라고 신약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러한 신약의 선언은 어느 사도의 독특한 신학적 창조력에 반한 것이 아니라 면밀하게 구약의 가르침을 해석한 것입니다. 먼저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창조되었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창조된 것이 그렇게 머리일 수 있느냐?’ 이런 질문하는 사람의 사고 속에는 머리와 몸의 관계를 제왕과 신하 그리고 어묵한 주인과 굴종하는 종, 그리고 성격이 괴팍한 사장과 그 회사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직원, 이런 관계로 보기 때문에 거부감을 받는 것입니다.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남자가 우월하다는 증거라는 뜻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창조되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사이에 기능적인 질서가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저의 판단이 아니라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서 14절에 근거합니다.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어떤 남자들은 이 구절을 하면서 모든 가정생활에 이 이야기를 적용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성경이 의도하는 해석이 아닙니다. 문맥은 지금 교회에서 여자가 주관하여 가르치는 것과 교회를 다스리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이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성경이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남자가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여성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남성과 여성 사이에 질서를 두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질서를 주셨느냐 그것은 하나님 마음입니다.
더욱이 타락과 함께 여자에게는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없었을 또 다른 어떤 멍에 같은 것이 주어집니다. 그것을 여기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국한해서 이야기한다면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 금지됩니다. 이것은 어떤 남성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자기가 주관해야 하고 여자는 따라야 한다, 그것 아닙니다. 문맥 자체가 가르침,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신앙의 주관, 이점에 있어서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주간은 가정사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타락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타락 이전에는 질서가 없었고, 남녀 사이에 어떠한 구분과 질서가 없었다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타락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있는 질서의 관계가 오늘처럼 이렇게 지배와 복종의 논리로 갈등을 일으키는 방식으로는 전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진리와 교회를 세움에 있어서 여성들이 주관하는 일들에 제한을 가하는 일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하지 않았으면 교회조차 세워지지 않았을 것이니 이것은 모두 무익한 상상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또 하나는 아담이 언약의 대표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대표로 하여 모든 인류에게 두 가지 명령을 주셨는데 하나는 ‘종교명령’이고, 하나는 ‘문화명령’입니다. 물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고 하는 이 명령은 모든 시대에 영원히 계속되었을 명령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단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도록 내리신 명령이었고,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가꾸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인류에게 주시는 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아담과 언약 관계가 맺어지는데 이때는 하와가 창조되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니 하와는 그 언약의 자리에 없어도 동일하게 선악과를 따 먹으면 안 될 의무를 지고 있었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만물들을 다스리라는 그 명령이 내렸을 때에 하나님께 그것을 직접 듣지 못했지만 그 명령을 따라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하와에게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즉, 아담이 죄를 지었는데 그 죄에 참여하지 않는 모든 인류, 하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그 죄의 결과를 대가로 받게 되었고, 똑같은 방식으로 한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의를 이룸으로 모든 믿는 사람이 의를 지니게 될 텐데 그런 대표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로 보면 두 번째 아담이 되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언약의 대표자가 되었기 때문에 따라서 남녀 사이의 구별이 복종과 지배의 논리는 아니나 그러나 확실히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일정한 질서를 두셨다고 하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와를 포함한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 언약을 맺었고, 그 언약에 실패했을 때 사실상 그는 그 범죄의 당사자가 되어서 처음 선악과를 따 먹은 사람이 여자였는데도 하나님은 그 처음 책임을 첫 번째 범죄자에게 묻지 아니하시고, 두 번째 그 범죄에 동참한 오늘날 형법상으로 보면 종범관계에 있는 사람, 정범은 하와이고, 종범은 아담인데 그 종범을 정범으로 보시고 그에게 제일 먼저 책임을 국문하셨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1절은 더 명백한 선언을 우리에게 줍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 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이 모든 인류의 언약의 대표자요,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지 않을 때에도 그도 함께 복종하지 않으면 언약의 대표적인 당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고 이런 관계를 하나님이 머리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를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에서 가정이라는 문맥 속으로 가져오고, 교회라는 문맥 속으로 가져옵니다. 그래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나는 확실히 남자와 여자는 차별이 없이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누구도 누구를 지배하고 짓밟지 못하도록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대등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남편에게 가정에 대한 일정한 리더십을 주셨다고 하는 것은 부인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증거 성경 구절이 디모데전서 3장에 등장합니다.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라고 했습니다. 집사, 당시로서는 안수집사가 되겠지만 이 집사를 세우는 기준을 이야기하면서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그러면 결국은 만약에 남편에게 리더십을 주시지 않았다면 왜 감독이 됨에 있어서 집사가 됨에 있어서 집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절대 그런 사람은 감독이나 집사가 될 수 없다 이런 요구를 하셨을까요? 분명히 남편에게 그 집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어떤 종류의 리더십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폭압적으로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라고 주신 리더십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잘 다스릴 줄 알아야, 다스리는 자라야 했는데 다스린다는 것이 무얼까요? 왕이 나라를 다스린다고 할 때 그 다스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백성들을 놓고 자기 이욕을 채우기 위해서 착취하는 것을 우리는 다스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이 그 나라의 국민이 된 것에 긍지를 느끼며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고, 그리고 자신의 존엄성을 잊지 않고 국가 안에서 존중 받으며, 모든 법이 공통하게 통용되고 그 다음에 생계의 모든 문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패배한 사람조차도 그것에 위협을 받지 않아 인간다운 존엄성을 잃지 않는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이 그게 나라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자의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가정, 자기만 떠받들어주는 이기적인 폭력, 나는 이 가정의 머리이니 몸 된 나의 몸종이라는 식으로 이런 식으로 가정을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이 어떤 뜻을 구현하기 위해 만약에 가정이 그 뜻대로 잘 가정이 영위되지 않으면 교회 지도자로서 자격은 없다 이 얘기입니다. 그러면 남성이 그것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책임을 하나님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자들에게 엄중하게 물으신 것은 그것이 성도의 본분이기 때문에 지도자가 될 사람은 이 점에 있어서 보다 온전해야 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책임을 주셨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그런 권한도 주셨다는 뜻입니다.
분명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나는 타락하기 전에 조차도 하나님은 분명히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질서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위계적이고 폭압적인 질서가 아닌 기능상의 질서였습니다. 이 질서는 서로 각기 다른 기능을 하여 보완하며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돌보고 그리고 서로 동등하고 사랑하며 존중하는 관계였습니다. 부부 사이에 지배욕은 남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가정에서 보면 그 여성의 폭력적인 지배욕이 구현되어 남자들이 기를 못 피는 집안도 많이 있습니다. 위계적인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머리와 몸의 관계라고 이야기하면 많은 여성들이 그게 위계적 질서가 아니고 무어냐, 어떻게 동등한데 누가 누구를 다스릴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면 나는 성경이 에베소서에서 이야기하는 구절을 해석해 주고 싶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로마 카톨릭 시대에는 이 교회에서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직분의 다양성을 계급 질서로 세우셨습니다. 이 계급 질서의 맨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 교황이고, 이것은 각 계층이 위의 계층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최고의 표현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것을 종교 개혁자들이 놀라운 말하자면 교회의 직분과 질서에 대한 개혁적인 생각을 펼친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이미 종교 개혁이 시작되기 전 벌써 한 4세기 전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같은 사람에게서 싹을 틔웠는데 이것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 이렇게 세워진 질서를 모두 확 펼쳐서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목사이고 장로이지만 여러분 위에 있는 계급적인 지배자 계급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는 교회를 다스리지 않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의 형제입니다. 그리고 또 장로들도 여러분의 형제입니다. 그러나 어떤 형제가 죄를 저지르고 그게 심각하게 교회의 존립에 위협이 될 때에는 그 사람을 교회에서 내쫓을 수도 있고, 그는 사실상 신자가 아니다 라고 선언하고 모든 성도들이 그와 절대로 접촉하지 못하도록 명령할 수 있습니다. 다스리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모두 동등하게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이고, 서로 꼭 같이 구원 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았고, 누구도 누구 위에 있는 관계가 아닌데도 하나님은 수평적인 질서 속에서 사람들을 다스리고 당신의 통치를 구현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사도의 일을 하도록, 그리고 선지자는 선지자의 일을 하도록, 복음 전하는 일은 그 일을 하도록 각각 부르신 것입니다. 제가 맡은 일은 생업에 종사해서 돈을 벌지 않고 일주일 내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말씀을 연구하고,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여러분들을 사랑하다가 이렇게 설교를 함으로써 여러분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일에 매진하게 하셨습니다. 이 일은 여러분들이 나가서 돈 버는 일보다 더 상층에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계를 만드시기 위해서 횡적으로 펼쳐 놓으신 많은 일들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 일이 매우 고귀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과 인생의 운명을 좌우하는 목회 사역의 일들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저는 밖에 나가서 돈 한 푼 벌지 않아도 여러분들은 우리 가족을 부양하고 그리고 목회자가 근심과 염려에서 최대한 해방된 가운데 기도하고 연구하고 목회할 수 있도록 그렇게 편의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계급의 관계입니까? 언젠가는 장로도 그만두고 목사도 그만두게 됩니다. 누가 그 아래 지배로 굴복을 하겠습니까?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바로 이런 관계다 라고 는 것입니다.
타락 후에 남자와 여자는 서로 지배하려는 욕구를 갖게 되었고, 이 싸움에서 대부분의 경우에 남성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남성은 폭력으로 자기중심적인 질서를 구축하고 이러한 여성에 대한 자기들의 지배를 항구화하기 위해서 잘못된 법과 도덕을 구축하고, 이것을 교육시켜서 여성을 지배하려고 해왔습니다. 때로는 이 일에 순종하지 않을 때 잔인한 폭력에 동원되었고, 그리고 심지어는 도덕률조차도 이중적으로 구축해서 그렇게 해서 남자와 여자에게 적용되는 도덕률이 각각 다르도록 교묘하게 사회를 만들어갔습니다.
아내에 대해서 남편이 머리가 된다고 하는 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남편이 아내에게 그렇게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남편이 머리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내를 포함한 가족들을 신앙적으로 돌보고 가정에 있어서 일정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대로 가정이 영위되기 위한 그런 리더십을 남자에게 주었다는 것이고, 이 리더십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이 주인이 되고 아내가 종처럼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 철학이 휴머니즘으로 돌아갔다고 말하고 이 정신을 가진 르네상스가 인간의 해방을 가져왔다고 말하면서 휴머니즘의 놀라운 도래라고 칭송하지만 죄송하지만 역사를 보면 그 휴머니즘의 휴먼 속에 여자가 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휴머니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인문학에 심취하고 빠지는 것에 대해서도 깊은 한계를 느끼면서 비판적으로 읽으며 기독교적인 정신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가정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남편에게 리더십을 주었고, 이것은 우열의 질서가 아니라 기능의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가족들을 신앙을 이끌고 그리고 가정을 질서 있게 이끌어감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 일에 관한한 남편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가족들을 신앙으로 이끌림에 있어서 이런 권위를 인정해야 하고 남편에게는 아내와 가족들을 영적으로 제대로 돌보아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할 중대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책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책임을 방해하고 남성들이 제멋대로 살기 때문에 가정의 질서가 무너지고 그리고 자녀들이 사람다운 사람으로 자라지 못하는 나쁜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은 아내가 남편의 모든 비합리적인 주장에 대해서 남편이라는 이유 때문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이 감독될 사람이나 집사될 사람이 가정을 다스리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처럼 남편에게 아내가 복종해야 할 분명한 권위를 주신 것은 사실이고, 별다른 리더십을 주신 것은 틀림없지만 이것의 용도는 폭압적으로 여성을 지배하고 가정을 자기 놀이터로 만들라고 하나님이 주신 권위는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가정으로 세우기 위해 이런 권한을 주셨고, 남성들이 이런 영적인 권위를 잃어버렸고 여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경건한 신앙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가정에 이런 혼란들이 찾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성은 비록 아내의 머리이나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는 일에 이 교리를 함부로 동원해서 아내를 억압하는 이런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상 아내와 남편 사이에 생겨나는 이 많은 갈등은 사실은 남편이 아내의 머리된 교리의 이해여부에 달렸다기보다는 오히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지 않을 때 수많은 갈등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은 말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이지만 아내가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 경우에는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 것이 가장의 영광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남자가 머리됨을 회복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머리와 몸은 지배의 논리가 아닌 탁월한 사랑의 조화이며 부부가 서로를 지배하려는 대신 섬기고 살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가정에서 남편의 일정한 한계 안에서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질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편은 자신의 권리가 자기 사욕을 채우기 위한 혹은 아내를 폭압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권위로 사용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현실이 주어집니다. 성경을 놓고 일반적인 인간이 사는 이치를 놓고 봐도 아내가 저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말을 합니다. “여보, 이것은 꼭 무슨 성경에 십계명을 어긴 정도는 아니지만 당신이 이렇게 하는 것은 세상 살아가는 이치에서 보더라도 이게 일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지 마라. 내가 너무 힘들고 불편하다” 이야기를 합니다. 아내도 그러겠노라고 합니다. 그런데 안 고쳐집니다. 계속 됩니다. 이것이 다툼이 됩니다. 싸움이 됩니다. 그리고 내가 저 여자를 뜯어 고쳐놓고 말겠다는 오만한 마음을 가집니다. 고쳐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한번 ㄱ자로 휘게 할 때에는 실제로 그 물건이 그 정도 직각으로 가진 성질의 물건인지 아닌 물건인지를 생각하고 시도를 합니다. 어떤 물건은 부들부들한 플라스틱이어서 꺾어지지만 어떤 물건은 90도로 꺾으면 나무젓가락 같은 것들은 분질러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그렇게 고치기를 원합니다. 좀 바뀌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힘듭니다. 그런데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해결의 길은 둘입니다. 안 살든가, 참고 살든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왜 아내가 이런 사람일까? 왜 이런 게 잘못됐는데도 이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게 아닌데도 왜 이렇게 할까? 그런데 그 똑같은 것이 남편인 자기에게도 있습니다. 그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랑으로 기다려 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봐. 당신 내 남편인데 영적인 리더야? 가정을 신앙으로 이끌어 가고 있어? 못하고 있지? 내일부터 당장 그렇게 해.’ 아니 교회도 가끔 나오는 남편이 어떻게 내일부터 그 일을 하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은 남편이 이런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당신이 이런 사람이 못되잖습니까? 그러면 결혼할 때 잘 골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러한 구조 속에 사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내하면서 언젠가는 남편이 나보다 훌륭한 신앙을 갖고 가정을 그렇게 이끌어갈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되고 그렇게 사는 과정 속에 분투하면서 이 아내는 점점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러한 사랑과 인내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마지막에 헤어져야 된다, 못하겠습니다. 같이 살아야 된다, 그것도 못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둘이 같이 사는데 이거는 사는 것도 아니고 안 사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사는 것도 아니고 남이 사는 것도 아니고 쉽게 이야기해서 인간의 주체성이 없는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지루한 결혼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마지막 그 결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런 가정을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이 정말 신령한 영적 생활을 해나갈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남자가 여자의 머리냐 아니냐를 가지고 논쟁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사랑과 인내로 이것들을 극복하면서 현실을 개혁하면서 하나님 앞에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둘을 남편과 아내로 부르신 것입니다.
V. 적용과 결론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된 것과 꼭 같지 않습니다. 남편의 권위는 위계적이 아닌 기능적인 질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성취이지 남성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지배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서로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하며 섬겨서 그 남편을 아내를 더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세월을 인내하고 사랑하며 살면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이해하게 되고, 주님 앞에서도 아름다운 사람으로 서고 가정에서도 아름다운 아내와 남편, 존경받는 어머니와 아버지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가족관계를 다시 세움(2018.7.1. 주일오전8)
형제와 화목하라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잠 16: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화목하게 사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는 우리 인류를 한 살과 한 뼈로 지으신 것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특히 가족은 바로 그 첫 사회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 곳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항상 우리가 그렇게 화목하게 살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잠언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누리며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인 가족, 그리고 형제 관계에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II. 형제와 화목하는 길
A. 인생의 첫 사회
우선 성경은 우리에게 형제와 화목하는 길에 대해 가르쳐 주려고 합니다. 우리는 가족 관계 안에서 인생의 첫 사회를 배우게 됩니다. 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은 엄마입니다. 그리고 좀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 아빠라는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 부모는 인간이 태어나서 처음 마주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그 부모의 어깨를 넘어서 아이는 이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되는데 부모의 어깨를 넘어서 만나는 첫 번째 사회가 형제들과의 관계입니다. 그 형제들과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이 아이는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때로는 다투고, 때로는 용서하고, 때로는 사랑하고 사랑을 받으며 이제 인간 세계를 배워 갑니다. 마치 알 속에서 태어난 작은 물고기가 그 부모 가까운 곳에서 놀면서 몸집을 키워가며 넓은 세계로 나가게 되듯이 그렇게 만나는 첫 사회가 형제들과의 관계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부모를 제외하고는 대등한 관계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는 첫 번째 발걸음이 형제들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 첫 번째 사회의 경험에서 아이들이 실패를 한다면 그 실패의 경험이 일생동안 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들이 자라면서 이 첫 번째 사회에서 실패하지 않도록 정말 잘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아이들이 이 첫 사회에서 실패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 아이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부모에게 한없는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는 것은 그 아이들에게 운동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가장 큰 의무는 자기가 낳은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그 아이를 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운전을 하고 길을 가다가 앞에 가는 차의 뒷 유리판에 새겨진 글씨를 보고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왔습니다. 대게 초보 운전에 대한 것들을 거기다 붙이고 다니잖아요. ‘나도 내가 무서워요.’ 너무 흔한 거고, 요새 펑펑 울면서 땅을 치면서 내가 왜 이 놈의 차를 사서. 뭐 이런 것도 나오고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정말 못 보던 글귀가 쓰였습니다. ‘먼저 우리 아이들을 구해주세요.’ 그 이야기는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차가 사고가 났을 때 나와 그리고 우리 어른들은 상관하지 마시고 위급 상황에서 우리 아이들을 먼저 구해 주세요 라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 차에 타고 있는 엄마의 마음이 아주 절실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게 부모입니다.
그래서 이런 교육, 저런 교육 다 그건 나중 문제이고 아이들이 무한한 사랑 속에서 살 수 있도록 장을 열어주는 것이 부모의 할 일입니다. 그리고 자식을 그렇게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은 부모가 되기에는 아직 미성숙한 사람들입니다. 형제간에 누구를 편애하지 아니하고 공정하게 사랑하도록 노력한 일과 그 아이를 한없이 사랑하지만 결코 방치하지 아니하고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형제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치고, 그리고 올바르게 하고 교육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부모가 그 형제 사랑에 있어서 자녀들의 모본이 되는 것은 아주 훌륭한 교육 교재입니다.
아이들이 그냥 부모로부터 방치되어 그래서 형제간에 갈등하고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서로 하고, 심지어는 서로를 미워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부모로서 한 인간의 삶을 파괴한 일입니다. 아이들은 충분한 사랑과 평화 속에서 자라며 사실상 첫 번째 사회인 가족 관계 안에서 서로 양보하고 용서하고 자기 꺾는 것을 배우고 남을 세워주고 또 자기가 세워지는 경험을 하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형제의 관계의 깨어짐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형제 관계가 저절로 우애 깊어지는 일은 없고 오히려 특별히 노력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사랑의 부족, 소통의 능력의 차이, 그리고 이해 관계의 얽힘 등에 의해서 형제우애는 얼음처럼 갈라지기가 쉬운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이런 관계의 훈련이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종종 살아가면서 무례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때로는 말을 함부로 하고 그리고 너무나 쉽게 많은 사람을 비판하는 인간들을 봅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요즘은 마음이 상하기보다는 너무 가엾은 생각이 듭니다. 저렇게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고 너무나 쉽게 비판하고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예의 없이 행동하면서 살아오는 동안 저 사람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마 그는 아끼는 사람이 없이 일생을 살아왔을 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구에게 마음 하나 털어놓을 수 없는 그런 고독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시련을 만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대로 세상이 되지 않는 것을 어렸을 적부터 경험합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자기반성에 사용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성숙시키는 기회로 삼느냐가 문제입니다. 조선 시대에 실학자인 정약용은 간신배들의 많은 모함으로 귀향살이를 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생전에 자기가 죽을 묘비를 스스로 써놓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묘비를 이렇게 썼습니다. ‘포악한 자들과 아첨하는 이들이 이 세상에 활개 치며 살았지만 하늘은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여 너를 곱게 빚으셨구나’ 그가 남긴 자신의 비문이었습니다. 한 인간의 깊이는 자기 밖에서 일어나는 많은 시련과 모순, 때로는 아픔과 미움, 이런 것들을 보면서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서 자신에게 닥치는 많은 시련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기를 성숙시키는 기회로 삼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매순간 가슴에 손을 얹고 다짐해 봅니다. 진리 이외에는 다른 이유로 누구도 비판하지 말자, 진리 이외에 아무 신념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용감해지지 말자. 처음 사회에서 형제와 우애하는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일평생 그 첫 사회에서 실패한 경험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전처럼 농경 사회이고 그리고 대가족들이 함께 살아가는 그런 사회 속에서는 인간의 도리를 배우기가 훨씬 쉬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핵가족 사회가 되었습니다. 형제가 우해하고 서로를 이해하려고 해도 함께 살아가는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동거의 기쁨이라든가 혹은 만나고 싶은 그리움을 배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저 가까운 친구만도 못한 형제 관계를 영위해 가는 것입니다. 더욱이 성장한 후에는 바쁜 산업 사회의 일상생활이 형제들 간의 교류를 끊어놓고 그나마 결혼한 후에는 아내들 사이에 속 좁은 갈등이 그나마 소원한 형제의 관계를 끊어 버립니다. 이런 처지에서 부모 부양의 의무나 유산 같은 이해관계가 충돌될 때에는 여지없이 커다란 상처를 주는 행동을 서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어진 형제들과의 관계를 우리는 도처에서 봅니다.
B. 형제 관계의 깨어짐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도 여러 가지 이유로 깨뜨려진 형제 관계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럿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는 여러분들의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고 내면의 송사를 겪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이렇게 깨어진 관계를 고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자녀지만 항상 잘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단정하게 살지만 예전에는 방탕하던 때가 있었고, 지금은 형제 사랑을 배웠지만 예전에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형제에게 상처를 준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연약한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성공하지 아니하면 그는 진정으로 자기를 이긴 사람이 아닙니다. 살처럼 뼈처럼 한 몸으로 지음바 된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신의 부모와 자식,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할 줄 모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나를 속속들이 모르는 사람들, 나의 반듯한 교회 생활을 바라보고 존경하는 사람들, 친절한 나의 행동에 고마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나를 속속들이 아는 우리 가족들, 나의 장점 뿐만 아니라 단점과 약점, 심지어는 나의 결함까지도 모두 알고 있는 가족들, 때때로는 자신의 그러한 연약한 부분들을 후벼 파며 때로는 아프게 하는 가족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은 천만 배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신앙의 이중성이 발견이 됩니다. 정말 주님을 깊이 만났는데 그 받은 바 은혜의 자원을 가족을 위해서는 사용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존경하는 사람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 자기를 높이는 사람들, 멀리서 자기를 바라보고 칭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마음에 송사를 겪게 됩니다. 내가 우리 육신의 형제들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말 한 마디라도 해 준적 있나? 이러한 배려를 우리 부모에게 해 준 적이 있나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이중성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심리적으로 무엇 때문일까요? 왜 살도 피도 섞이지 않고 어쩌다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간을 빼어줄 듯 잘하면서 왜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 때문이라고 고백하면서 왜 그 은혜를 가족을 위해서는 베풀지 않는 것일까요? 그 심리가 무엇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렇게 만나는 교회의 많은 지체들, 자신에게 섬김을 받아야 할 사람들과 자신 사이에는 상처의 관계가 별로 없습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을 섬겨도 좋아하는 사람들을 섬기지 자기를 비판하고 자신을 향해 날을 세우는 사람들을 그렇게 따뜻하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만 선을 행하면 너희의 의가 바리새인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고 격려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을 향해 베풀어진 사랑은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특별한 정신적인 이상이 없는 한 우리 본성에서 우러나올 수 있는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깨어진 형제들과의 관계를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내가 이 숙제를 푸는 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큰 은혜의 비밀이다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거저 주어진 모든 은혜 속에는 하나님의 경륜의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주신바 그 목적의 경륜을 따라 살 때에 우리 안에 잘 보존되고 우리 안에서 더욱 풍성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C. 화목하게 하심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깨어진 형제들을 화목하게 하십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고 말합니다. 제일 먼저 여호와의 기쁨을 말합니다. 히브리어 문장으로 보면 ‘사람이 그 행위로서 여호와를 기쁘시게 한다면’ 이런 뜻입니다. 형제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사이의 불화는 삶의 기준이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때때로 양보할 수 없는 진리 때문에 어떤 사람과 마주 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의 의견에 반대해야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리 없이 사람의 다수 편에 서는 것보다는 진리와 함께 한분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우리에게 올바른 행동이요, 그리고 의로운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 이외에는 우리들이 모든 사람과 화목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사랑하기 싫은 사람을 진리를 핑계 삼아서 미워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비판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그의 명예를 깎아내리기를 조금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경건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볼 때에 마음이 아프다면 완전하신 하나님은 이렇게 한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에 참여한 모든 인류 공동체 안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보며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아무리 심각하게 깨뜨려진 관계가 있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삶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하나님이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은 영적인 은혜가 순종으로 이어진 생활입니다. 그 은혜 때문에 자기 이익을 포기하고 세상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보다는 우리 주님을 위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자만하기보다는 그 분의 뜻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것이 진정한 성취입니다.
사람들은 선교를 하면서 매우 중요한 경험을 합니다. 문화가 다를 때 우리가 소통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 문화의 표현 방식이 너무나 달라서 A 문화에서는 좋은 것이 B 문화에서는 매우 모욕적인 될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면서 하나님이 은혜로 터득하게 하신 것이 있습니다. 물론 어느 나라 문화를 많이 배우고 그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과 소통하는 매우 중요한 비결이기 때문에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에 팀 켈러 목사님을 집회에서 만나서 함께 시간을 가졌는데 그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네 리디머 장로교회가 40%의 교인이 한국인, 그리고 헌신도가 제일 뛰어나고, 그 다음에 한 40%가 앵글로 화이트, 백인들이고 나머지 한 20%가 다른 인종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 중에서 문화를 이해하는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사람들이 앵글로 화이트고, 한국 사람들은 오히려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데 훨씬 폭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서 한 가지 터득한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어느 나라 문화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태도가 있는데 그것은 겸손입니다. 겸손한 태도는 그리고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태도는 모든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게 만듭니다. 우리보다 잘 살고 선진국에 있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못 살고 가난한 나라의 사람이든지 누구 앞에서나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겸비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과 소통하고 어깨를 함께하며 대등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형제들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피부 색깔과 학력의 수준, 외모, 문화 그리고 그 모든 다른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관된 겸손한 태도가 모든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만드는 위대한 힘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나 가르치고 싶어하는 사람보다는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대접을 받으려는 사람보다는 섬기려고 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서 타인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니까 소통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화의 차이만이 아니라 인간 감정의 단절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왜 드리냐 하면 아무리 형제간에 생각이 다르고 삶의 태도가 상이할지라도 만약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형제와 소통하기를 원한다면 겸손해 지십시오. 비굴해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겸손하게 낮아지고 형으로서 내가 너를 도와주는 위치에 있다, 동생으로서 내가 형에게 보태주는 위치에 있다 그런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자기를 낮추어서 그래서 형제를 섬기는 마음이 되려고 할 때 가르치기보다는 들어주려고 하고 부탁하기보다는 부탁을 자신이 들어주려고 하고, 이용하기보다는 형제에게 이용당하려는 마음을 가질 때 모든 이상한 성격을 가진 형제를 향해 우리는 소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를 이 세상에 맛 잃은 세상에 스며들어 소금처럼 그렇게 살만한 사회로 만들라는 우리 주님의 명령이기도 한 것입니다.
형제 때문에 형제를 사랑한 것이라면 우리는 진즉에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화목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너무 하기 싫은데 주님이 너무 기뻐하시기 때문에 내가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내가 그 일을 행하겠나이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게 예수 걸어가신 길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 기도를 통해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학 공부를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는 결코 자기 소비를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즐거워하고 그 자체 안에서 그것을 기뻐하며 소비해 버리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렇게 그 은혜가 아니었으면 결코 될 수 없는 내가 되어서 그 은혜가 아니었으면 용납할 수 없는 형제들을 용납하고, 사랑하기 힘든 형제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내게 상처를 준 부모를 용서하고, 화해하고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며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현실은 요지부동으로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깨뜨려진 형제와의 관계에 가끔씩 괴로워하는 여러분들이 30대라고 합시다. 그 어떤 행동들이 취해지지 않는다면 여러분 60이 되어도 형제를 데면데면하게 지낼 것이고 혹은 서로를 지독하게 미워하며 지낼 것이고, 더 먼 훗날 형의 장례식에 와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동생, 동생의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형이 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 하셨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이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기뻐하며 살다가 불행해졌으니 이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바로 행복의 실패에 대한 고백입니다. 나를 주인 삼아 나를 기쁘게 하며, 내가 온 우주의 중심인줄 알고 나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인 줄 알고 일생을 살다가 이렇게 불행해져서 주님께 왔으니 이제 내가 다시는 속지 않고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라는 고백입니다.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에 도구로 써주소서
주님은 오늘 만약 우리가 삶으로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절망적인 원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화목하게 해주신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원수라도 다시 화해하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원수는 미워하는 자인데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많고 그 미움의 정도가 매우 클지라도 하나님이 화목하게 만들어 주실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화목하게 하심을 기억해 보십시오. 온 인류가 죄짓고 그 분의 창조 세계를 더럽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망가지고 깨진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 없이 살아가는 비참한 인류를 보실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먼저 사랑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손해를 입힌 쪽이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하거든 손해를 당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세계를 망가뜨린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한 사랑으로 온 인류를 사랑하셨고, 그 사랑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형제 관계가 틀어졌을 때에 화목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잠 18:19)”고 말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육신의 이런 형제들보다 가까이에서 삶을 나누는 친구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잠 18:24)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보면 형제가 쓸모없는 것처럼 그리고 친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또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 보다 나으니라”(잠 27:10) 이것은 지혜자가 이런 삶을 권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이 형제와 갈등을 일으키고 등졌을 때에 좀처럼 그 화해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인생의 짧지 않은 경험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평가가 그 사람의 실제의 모습과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존경을 받던 사람도 들어가 보면 실망할 구석이 있고 그렇게 진실해 보이는 사람도 들어가 보면 가식이 있습니다. 그렇게 충성스러워 보이는 사람도 들어가 보면 이기심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가족에게 깊이 인정받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우리를 잘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우리의 약점과 허물 이 모든 것을 보는 우리 가족들이 우리가 그 가족들에게 인정받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 우리가 일생을 걸어왔습니다. 나를 찬미한 사람들은 내가 걸어온 모든 길을 알지 못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인생의 말년은 아니지만 40대 후반 정도 되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존경하는 것을 보며 마음이 상해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사람들은 나에게 좋은 말을 많이 하지만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지나온 나의 많은 허물들을 이 글을 통해서 밝히고자 합니다. 내가 한 나쁜 일들이 좋아서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나를 고치신 우리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나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모두 압니다. 우리가 우리 중에 누가 잘 살기만 했던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인생의 무게를 지고 그리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 사랑하며 살아온 인생의 날들 중 한번쯤 넘어지지 않은 사람, 인생의 무게가 너무 힘겨워 쓰러져서 울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를 향해 박수를 치는 모든 사람들은 나에게 그런 날이 단 한순간도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모두 보았습니다.
(찬양) 거친 바다 험한 삶 피가 맺혀도 십자가 내가 지고 끝내 이기리
다만 하나, 때로는 쓰러지고 넘어졌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일으켜 세웠기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고 우리는 빛 가운데 있는 것이니 우리가 빛 가운데 있음을 자랑하려면 우리를 거기로 이끌어 살게 해주신 우리 주님의 은혜를 찬송하여야 할 것입니다. 가족들은 그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때로는 피를 나눈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몸부림치며 일어나려고 했던 은혜의 과정들은 눈을 감아버리고 예전에 자신들에게 손해를 끼친 한 가지 잘못된 일을 창에 꽂힌 듯이 가슴 깊이 간직하고 집요하도록 나를 미워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십자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족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든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든 우리들은 가족과 화목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 앞에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악한 자들이, 아첨하는 자들이 활개 쳤으나 하나님은 우리를 곱게 빚어 가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깨어진 형제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역설적인 희망을 보여주십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모든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아무리 관계가 어려워도 그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형제와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은 예수를 포기한 것이니 우리가 그 분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고 오늘도 그분에게 고임을 받음으로 살아 숨 쉬고 기동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 분을 포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십자가 사랑으로 형제를 깊이 끌어안으십시오.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며 노력하면 반드시 그 형제와 화목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특별히 그가 악하거나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서 결국 죽을 때까지 회복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여러분들의 그런 아픔을 아시고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용서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형제들을 용서하며 사십시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낮아지신 것처럼 겸비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자기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우리에게는 미움과 상처를 극복할 복음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 과정이 때로는 실패할지라도 주님이 보시기에는 어두운 세상에 찬란하게 타오르는 불꽃과 같습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의 그런 자기 죽음의 노력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여러분들을 결국은 최후의 승리자가 되게 하시고 모든 억울함을 풀어주시며 형제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이렇게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족관계를 다시 세움(2018.7.8. 주일오전9)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롬 9:1-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사도 바울은 바로 앞장인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자들의 행복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로마서 8장 1절에서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구원받은 자들이 이제는 예수의 생명의 법으로써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 받은 자유인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구원 받은 신자는 이제 육신의 소욕이 아닌 성령을 따라 살아야한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로마서 8장 13절은 말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이러면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함으로 이 위대한 로마서 8장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고 말합니다.
II. 그치지 않는 고통
A. 양심이 증거함
이러한 가슴 벅찬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 후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슴 저미는 듯한 그 놀라운 사랑으로 자신을 그리고 동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마음의 시선을 잃어버린 가족과 골육지친 동포로 돌립니다. 이때 그는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을 경험합니다. 이 고통은 먼저 양심이 증거하는 고통이었습니다. 이는 이 증언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교인들에게 전도를 강조하기 위해 지어낸 마음으로 하는 빈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함으로써 주님의 마음으로 가슴에 계속 되는 고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크면 클수록 가족과 골육지친 그리고 동포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서 잊을 수 없는 증언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 전설적인 선교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났지만 그 어마어마한 선교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골육친척을 위한 그의 마음의 슬픔과 고통은 없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족들이 빠져있는 오류에 자신도 빠져 보았기 때문에 더더욱 안타까운 마음으로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이 양심의 증거는 성령 안에서의 증거였으니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받으면 받을수록 고통스러워지는 아픔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바로 그 가족 골육지친들을 구원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마음속에는 골육 친척을 위한 고통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고통은 바울 자신의 회심 경험과 관련된 고백입니다. 그는 정통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교인으로 성장했으며 율법을 지키기로 가장 엄격했던 베냐민의 지파에서 성장했습니다.
유대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오셨을 때에 그분을 믿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가장 커다란 걸림돌이었습니다. 당시 사도 바울과 예수님 시대 때에 온 나라에 두루 퍼졌던 유대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유대교란 무엇일까요? 이 유대교의 역사는 저 멀리 주전 586년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바벨론의 멸망과 함께 많은 예루살렘에 명망 있는 지도층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의도적으로 바벨론은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중심이 되지 못하도록 사민 정책을 썼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혹은 체포되고, 노예로 팔려가고 혹은 강제로 이주를 당하여 마음과 정신의 고향인 예루살렘을 등져야 했습니다. 그들은 구약 종교에서 제사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사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릴 수 있었으니 그들은 이제 제사를 드릴 수 없는 디아스포라의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책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복음의 앞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섭리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상당수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들은 성전을 수축하고 이제 새로운 신학을 수립하는 운동을 펼칩니다.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과 그리고 역사에 대한 신학을 과감하게 수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인 대대적인 수정의 작업은 당시 이스라엘이 처하였던 정치적인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이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고 언제 다시 나라를 회복할지 기약이 없는 정치적인 상태가 계속 되었습니다. 나라는 많이 바뀌었으나 그러나 지배자만 달라졌을 뿐 식민지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형편은 추호의 변화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편견 없이 구약을 잃고 여호와의 종교의 가르침을 전수받은 사람들에게는 구약의 이스라엘이라는 껍질이 깨지고 영적인 왕국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로 세워질 것임을 분명하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적인 작업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으로 이루어질 왕국이 아니라 다윗 왕국의 영광이 재연되는 것이라는 사실과 이 일의 지상적 시련을 위해서 신적인 메시야가 정치적인 지도자로 나타날 것이라는 사상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치적인 지도자는 군대를 이끌고 이 민족의 압제에서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투쟁으로 국권을 회복하게 될 것을 학설로, 신학으로 정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들은 그 당시에까지 있었던 구약의 정통적인 여호와 신학을 떠나서 유대교라고 하는 거대한 이단에 빠지게 됩니다.
B. 골육 친척을 위한 고통
이 사람들이 기독교가 처음 등장했을 때 박해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 기독교의 가르침이 등장하였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흔히 있어왔던 유대교의 한 종파이고, 해석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오순절 성전 강림 사건이후 기독교 사상의 가르침은 명확해졌고 그때야 비로소 유대인들과 로마는 모두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세력은 결탁하여 기독교를 집요하게 박해하였습니다. 오늘 이 가슴 절절한 고백을 쏟아내고 있는 바울도 한때는 그런 유대교의 사상 때문에 기독교를 박해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바울로 변하기 전 사울이었을 적에 그의 마음속에는 두 개의 편견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신학적인 편견이었으니 나사렛의 목수였던 그 젊은이는 결국 메시야일 수 없다는 편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에서 기다리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야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심리적 편견이었는데 이스라엘 이외의 다른 모든 종족들은 가치가 없는 쓰레기와 같은 존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구약의 가르침이 아닌 유대교의 선민사상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이런 편견 속에 사로 잡혔기 때문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원수처럼 여기고 박해하였습니다. 그 일을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 그는 소문으로만 듣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순간 커다란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기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인 존재였고, 범접할 수 없는 눈부시고 찬란한 빛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분이 환상 중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나타나 함께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으니 사도 바울의 충격이 매우 컸을 것임을 우리는 짐작합니다. 순간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의미이고, 부활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여 다시 살려냈다는 뜻이니 하나님이 저주하신 사람이면 부활하게 하실 리가 없고, 부활하게 하셔야 할 분이었다면 하나님이 저주하셔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혼란에 휩싸여 있을 때 그는 성령의 도움으로 무지로 캄캄한 어두움 속에 그 어두움을 가르는 한줄기 빛이 들어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사울이라는 한 사람의 인생의 밑바닥까지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었습니다. 후일 기독교의 가르침의 핵심이 되었던 대속의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즉, 그의 죽음이 자신의 죄 때문에 겪은 죽음이었다면 하나님이 다시 살려내실 이유가 없었지만 그의 죽음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실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죽음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를 더 인정하셨고, 그래서 그를 살려내심으로 우리를 구원 받게 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캄캄한 어두움을 찢고 들어온 눈부신 찬란한 한 줄기의 빛이 그를 새로운 사상으로 데려갔습니다. 유대교가 가르쳐 준 어두운 미몽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세계를 창조하시고, 또 구속 하시고, 또 그렇게 구원하신 세계 안에서 교회를 만드시고 인류의 역사를 어떻게 완성하실 지를 꿰뚫는 장쾌한 역사관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우주적인 사랑과 그리고 인류 구원을 위한 절절한 하나님의 은총을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즉시 하나님께로부터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으셨으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 부르심이었습니다. 이렇게 깨달은 새로운 사실로 말미암아 그는 유대교의 어두운 미몽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이 세계를 왜 창조하시고, 왜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셨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과 이러한 소명이 가족과 골육지친들에게는 모함과 박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한 무지와 유대교의 편견 때문에 십자가를 대적했고 불타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거절하였습니다.
II. 저주 받아도 원하는 것
이러한 동족을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은 가슴 저미는 슬픔으로 동족을 위해, 가족을 위해 통곡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저주를 받아도 원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 자신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바였습니다.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에게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나데마에나이아우투스에고’라고 되어 있는 이 구절은 그 앞 구절을 번역하자면 이렇게 번역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 저주가 있을지라도’ 혹은 ‘나 자신이 저주 받은 자가 될지라도’ 말입니다. 저주를 받아 라고 번역된 ‘아나데마’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는 ‘위로’를 의미하는 전치사 ‘아나’와 ‘두다’를 뜻하는 ‘티데디’ 동사를 합한 것입니다. ‘따로 위로 올려 떼어둔 것’, ‘봉헌 제물’이라는 뜻이 있고, 고린도전서 16장 21절과 갈라디아서 1장 8절에서 9절에서 이 단어는 ‘저주받음’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들었던 것은 그 가족과 골육지친, 동포들이 구원 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매우 긍휼히 여기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온몸과 마음으로 하나님께 반항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로마서 9장 15절과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5-16) 아멘. 하나님은 그런 긍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의 어두운 미몽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이었고, 인류 구원의 위대한 계획이 그들에게 먼저 계시되었습니다. 로마서 9장 4절과 5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9:4-5)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계획이 계시되었는데 이스라엘에게 제일 먼저 알려졌고, 그들은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담지하고 온누리에 전할 선지자적이고 제사장적인 나라로 선택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통적인 구약 여호와의 신약을 거부하고 스스로 영적인 어두움과 무지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거짓된 가르침으로 돌같이 굳어진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불신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회심 후 바로 이러한 미몽에서 깨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도록 온 마음을 다해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역사하였던 하나님 사랑이 그에게 강제적인 힘을 행하사여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빚진 자가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 갈라디아 3장 10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자라 하였음이라”(갈3:10)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도록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자신을 모두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종교를 믿고 있었으나 세계와 인생의 의미는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도 자신이 그런 처지에 있어 어두운 유대교의 미몽 아래서 불행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들이 모두 구원 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우주적인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 서로 기대고 사랑하며 살과 뼈처럼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 인류로서 사랑의 사회를 이루어 가며, 창조와 구속의 목적에 따라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믿었으며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한 형제가 되고, 종이나 자유인이나 모두 한 사랑 안에 한 인류가 된 것을 알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에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을 사랑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에 역사하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면 감격할수록 그의 마음에 계속되는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으니 구원받지 못한 가족과 골육지친 그리고 눈물로 사랑하는 동포들의 고통 받는 영혼 때문이었습니다. 가족들의 구원을 위한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이전에는 우리도 한때 기도의 시간의 대부분을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위한 눈물로 채웠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합니까? 도대체 이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화) 저는 며칠 전 혼자 차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우연한 뉴스 한 토막에 마음이 절여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어느 한 애견단체에서 식용견을 기르고 있는 한 농장을 방문했습니다. 그 농장에는 약 200여 마리의 식용견이 복날을 위한 방출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을 설득해서 이 식용견 농장을 문을 닫도록 그렇게 집요하게 설득했고, 적절한 가격에 협상을 하여 200마리의 개를 모두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개들은 애견 단체의 보호를 받으며 그 개를 분양 받아 데리고 갈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6개월, 1년 전쯤 보았던 그 동물 학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광경은 성남 모란 시장의 풍경이었습니다. 개고기를 파는 상점들이 즐비했고, 도축 시절이 따로 마련되지 않은 것은 개가 가축 위생법상 도살할 수 있는 가축으로 분류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로 개고기를 파는 뒷방에서 하나씩 개를 끌어다가 전기로 지져서 죽이고, 그리고 즉석에서 토치로 털을 불태운 뒤 해체하여 내장을 끄집어내고 바로 토막 쳐서 한 근에 4000원씩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개는 인간보다 250배나 넘는 후각을 가지고 있고, 청각도 매우 발달했습니다. 인지 능력도 많은 동물 중 뛰어난 편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끌려간 동료들이 죽는 것과 그 비명 소리와 그리고 털 탄 냄새와 내려치는 그 칼로 끊어지는 그 친구들의 몸뚱이와 거기에 나오는 피 냄새를 모두 맡고 있었습니다. 철창 안에 갇혀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눈동자는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저도 한때는 개고기의 애호가였고 개고기를 먹는 것이 문화의 차이일 뿐이라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다시 개를 기르고 사랑하게 된 이후에는 개고기를 먹는 사람을 비난할 의사는 추호도 없지만 안 먹고 사는 것도 멋진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졌습니다. 초롱초롱 유난히 맑은 코코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하면서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나와 함께 볼을 부미고 있는 코코의 운명은 그 모란 시장에서 토막토막 끊어져 살육을 당하는 그 식용견들의 운명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가?’ 제가 그 짧은 뉴스를 라디오에서 들으며 가슴이 울먹였던 이유는 그것만큼 하나님의 구원을 잘 설명해 주는 예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식용견과 같은 처지에 있어서 죽음을 기다리던 사람들이었고, 정확하게 말하면 죽은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린 후 54분이 경과하였습니다. 벌써 우리나라 사람 중 한 사람이 자살을 했고 다음 사람이 약 20분 후에 자살할 순서를 기다리고 있으니 매년 죽는 교통사고 사망 환자의 3배가 자살하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이런 현상을 매일매일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기운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식용견으로 길러지고 있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복날의 죽음이었는데 그 애견 센터에서 값을 주고 그들을 모두 산 이후로 이제 그들은 해외에 있는 가족들을 찾아가거나 혹은 국내에서 입식을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가정에게 환영을 받는 애완견이 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에 그 개 중 사나운 몇 마리가 있어서 죽어도 그 개 사육 농장을 떠나지 않겠다고 보호견 센터에서 온 사람들을 물어버리고 포악하게 행동을 해서 그들이 그 개를 구조할 뜻을 포기하였다면 그 남아있는 개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그러한 그 죽음에서 건져내실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건져내셔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출하여 생명과 성령의 법 안에 살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 중 한 두 번쯤 자살을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살아있기 때문에 죽음을 친숙하게 여기지 않던 사람이 우리 중 누가 있겠습니까? 그만큼 현실은 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우리들이 가족의 구원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것도 그들이 이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구원의 참된 의미를 알고 난 후 지엽적으로 보이던 인생의 모든 슬픔과 고통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처음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했을 때에는 구원 받지 못한 가족들이 우리의 눈물 어린 기도의 제목이었고, 구원 받지 못한 가족들을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보다도 큰 소원이 없었고, 다음 달에 죽더라도 한번 온 가족이 손을 잡고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의 대부분을 우리 아빠를 위한 눈물로 채웠고, 불쌍한 우리 엄마를 위해 울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형제들을 위해 그들의 영혼의 죽은 상태가 내 영혼의 죽은 상태인 것처럼 눈물을 흘렸고 내 사랑하는 자녀들이 아직도 영적으로 죽어있는 것을 생각하며 애미된 것을, 애비된 것을 형벌처럼 느끼며 우리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그런 서럽게 그들의 이름 석 자를 부르며 울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우리의 마음은 퇴색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젠 그런 눈물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따금 전하는 복음의 빛은 오랫동안 가족들을 비인격적으로 대하고 이기심 속에서 가족과 다투는 그러한 불화 때문에 묻혀 버립니다. 그래서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자위할 수단을 찾았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은 매우 특별히 강퍅한 사람들이다, 인간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이제 하나님이 누군가를 통해서 하시겠지 하는 사이에 엄마가 예수 믿지 않고 돌아가셨습니다. 아빠가 예수 믿지 못한 상태에서 치매에 걸렸고 그리고 형제들은 점점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의 구원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가 대신 울어주어야 할 불쌍한 영혼이라고 리차드 벡스터는 말했습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 천국에 가서 우리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자랑스럽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 제가 구원 받아서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물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네 가족들은 어디에 있니?’ 그때 우리의 눈에는 눈물이 샘솟듯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에서 울부짖는 가족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그 천국이 우리에게 어떻게 천국일 수가 있겠습니까?
(찬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영혼을 위해 흘릴 눈물이 있으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영혼을 위해 흘릴 눈물이 없습니다. 불쌍한 가족들에게는 누가 복음을 전할까요? 여러해 전 얼굴도 모르고 교회도 모르는 한 성도가 한사코 저를 만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 윤리상 남의 교회 교인은 상담하지 않습니다.” 정중하게 거절했으나 그런 것이 아니니 제발 만나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래서 만났더니 부탁하는 바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자기 어머님이 예수를 안 믿고 병원에서 돌아가시려고 하는데 자기 교회에 심방하여 복음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더니 교역자가 교회에 오지 않는 사람까지 찾아갈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고 해서 목사님에게 부탁드린다고 눈물로 간청했습니다. 교역자들이 갔고 그 아주머니는 너무나 놀랍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세례 교육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이게 가족의 영혼을 향한 눈물 어린 사랑입니다.
부모님이 멀리 시골에 떨어져 있으십니까? 그 가까운 교회에 찾아가 목회자에게 무릎을 꿇고 눈물로 우리 아버지를 전도해 달라고 빌기라도 해보셨나요? 여러분들의 무관심 속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여러 가족들이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지옥에서 슬퍼하며 부르짖는 가족들의 고통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별로 없습니다. 그분들이 살아있는 날 동안이 예수를 믿을 기회이고 예수를 믿지 않고 살아가는 동안 그들이 정말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사랑으로 구원하셨습니까?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시고 멸시와 욕을 모두 당하게 하신 후 십자가에서 살과 피를 찢어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그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들을 구원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구원 받지 못한 가족들의 현재의 비참한 상태와 미래의 심판 받을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랑을 여러분들에게 먼저 알게 하신 것은 여러분들이 그 가슴 저미는 사랑을 안고 눈물과 땀과 피로 가족들을 사랑하며 이 복음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원하셨기에 여러분들을 예수 뒤따라가는 한 알의 밀알이 되도록 먼저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닙니까? 구원 받지 못한 가족을 깊이 생각하며 다시 눈물 흘리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영혼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죽으셨고, 지금도 가슴 저미는 눈물로 보좌 우편에서 그 영혼들을 위해 빌고 계십니다. 마음을 다해 다시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 그 영혼이 자신의 영혼인 것처럼 눈물로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차라리 여러분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나의 사랑하는 가족, 골육지친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라고 고백하며 주님께 매달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모으고 다시 한 번 잃어버린 가족들을 향한 예수의 고통 하는 마음을 물려받고, 아나데마의 정신으로 전도하여 구원의 날이 이르게 하는 가족이 되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참척에 슬퍼할 때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눅 7:11-1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인생에서 겪는 슬픔 가운데 아마도 자식을 잃은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은 없을 것입니다. 작고한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예비의사였던 외아들을 사고로 앞서 보내었습니다. 그녀의 고백을 따르면 그일 후에 두 달 동안을 낱알 한 톨 입에 대지 않고 술로만 보냈으며 후에 처음 밥을 먹던 때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자식을 앞서 보내고 제 목숨 살자고 밥을 목구멍에 쳐 넣는 어미인 나의 모습이 너무 구역질나고 역겨워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고 말입니다. 한 시대를 흔들어 놓았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경제학자였던 카를 마르크스도 자식의 죽음 앞에 연약해지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자식을 잃은 슬픔을 견딜 수가 없었으며, 아내는 그 일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고 슬펐던 그 시절을 회고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자식을 잃은 슬픔을 겪고 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하늘이 어찌 이렇게 어질지 못하더냐? 네가 살고 내가 죽어야 했거늘 내가 살고 네가 죽었으니 나의 간담이 칼로 도려내는 것 같다.” 라고 하였습니다. 모두 자식을 잃은 슬픔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슬픔이 너무 크기 때문에 옛 사람들은 이 슬픔을 ‘참척’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비참하고 또 고통스럽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는 역시 자녀를 앞서 보내고 난 후에 자신은 빛을 잃었다고 말하면서 그 고사가 계기가 되어 중국에서는 자녀를 잃은 슬픔을 ‘잃을 상(喪)’ 자, ‘밝을 명(明)’ 자를 써서 ‘상명(喪明)’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모두 자식이 먼저 죽은 부모의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II. 참척을 당한 어미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나인성이라고 하는 곳에 이러한 참척 혹은 상명의 슬픔을 겪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오늘 등장하는 과부인 이 여인입니다. 참척을 당한 어미였습니다. 아들을 잃은 상실감과 절망감에 무너져 버린 이 여자의 슬픔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하신 짧은 명령어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보시고 울지 말라 하셨는데 울지 말라는 이 명령어가 희랍어로 ‘클라이에’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클라이오’의 명령형입니다. 이 단어는 흐느끼거나 훌쩍 거리며 우는 것이 아니라 큰 소리를 내어서 우는 영어의 ‘cry’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여인을 향해 그렇게 ‘클라이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이 여자는 방성대곡함으로 아들의 주검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성 안에서는 밖으로 젊은 청년의 주검을 앞세운 많은 사람의 장례 행렬이 나오고 있었고, 성 밖에서는 성 쪽으로 예수님을 앞세우고 사도들을 비롯해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줄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는 죽음의 행렬이었고 또 하나는 생명의 행렬이었습니다. 이 두 행렬이 만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여자가 신앙을 가졌는지의 여부는 성경이 침묵하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 여자가 남편을 여의고 이 아들 하나를 키우며 살고 있는 여자였습니다. 어린 아이가 아니라 청년이라고 했으니 이 여인의 나이도 꽤 든 연세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남편도 없이 늙어가고 있는 처지에 청년으로 자란 외아들 하나가 있었다고 치면 그 외아들은 이 여인에게 희망이었고, 삶의 보람이었고, 인생 전부였을 것입니다. 무슨 일로 이 청년이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 청년은 죽었습니다. 아마도 질병에 걸리지 않았을까요? 어쨌든 죽었습니다. 이 여자는 참척의 슬픔에 겨워 울부짖으며 이 장례행렬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고 이 여인은 아들을 따라서 함께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오늘 날은 이혼할 때에 서로의 행복을 찾기 위해 자녀를 고아원에 보내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는 세상이니 이 세태에 비하면 이 여자는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III. 살리시는 예수님
A. 죽은 자를 살림
이렇게 참척의 슬픔으로, 상명의 아픔으로 죽어가고 있는 이 여자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죽은 외아들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 죽은 자를 살리셨으니 이는 묘지를 향하는 관의 행렬을 막아서시며 죽은 청년이 누워있는 그 관에 손을 대신 것입니다. 그러고는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마치 병든 자를 일으켜 세우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명령하셨고 그러자 청년이 살아났습니다. 매고 가던 관은 내려졌을 것이고, 뚜껑은 열리고 그리고 죽었던 자는 일어나 앉고 말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육신이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오늘날은 이러한 육체로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보다도 더 놀라운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 이는 바로 지금도 하나님은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부모들은 자신이 자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또한 자녀를 위해 필요한 많은 것들을 공급해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도처에서 자녀들에게 스며들어오는 죽음의 기운을 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자녀를 자살로 떠난 보낸 사람들을 여럿 알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목회자의 집안의 자녀인데도 이렇게 자살을 선택함으로 부모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불렀고, 유감스럽게도 이때는 중학교부터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입시 선발을 하였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과외에 갈라치면 선생님이 하얀 칠판에다 ‘삼당사락’이라고 쓰셨습니다. 세 시간만 자면서 공부하면 중학교 입시에 붙고 네 시간 이상 잠자면 입시에 떨어진다고 하였으니 그야말로 비인간적인 교육이 성행했습니다. 초등학교 1년 선배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는 우수한 학생이었고 원하던 중학교에 원서를 냈으나 입시에서 낙방하였습니다. 떨어지던 그날 13살짜리 어린 아이는 동네에서 제일 높은 돌산으로 올라가 투신자살하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생각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해 주는 부모의 자식 사랑, 나를 위해 목숨도 기꺼이 버리게 되는 나의 연인의 애정, 어디로 가든지 함께 있어주겠다는 친구의 우정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우리만의 고독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러한 자아에 눈을 뜨는 순간 우리는 캄캄한 우주 공간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고립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의 ‘실존의 진실’입니다. 누구도 소외를 경험해 보지 않고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아무리 깊고 지극하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인생에서 이런 소외감을 완전히 극복하게 만들어 줄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것을 극복하는데 때로는 티끌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신이 자녀들을 진심으로 사랑해도 자녀들에게는 그것이 충분하지 않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우주 안에서의 고립감은 자신의 인생의 기원에 대해 점점 미궁에 빠져들게 만들고, 자신의 인생의 목적에 대해 알 수 없는 무지 속에 걸어 들어가게 합니다.
이러한 모든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신앙입니다. 하나님만이 내가 어디로부터 왔고 그리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지금도 고뇌하고 있는 나의 인생의 주체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녀들이 진심으로 중생하고 회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라고 말입니다. 성경은 또한 어떻게 해야지만 한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지, 구원 받을 수 있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10장 9절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부모 된 사람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깊이 사랑하되 그 자녀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정말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며 역경과 모든 시련을 극복할 준비를 갖추어 가고 있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이렇게 전심으로 간구하는 영혼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가족의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자, 자녀들의 영혼을 위해 슬픔 속에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이렇게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B. 불쌍히 여기심
주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울부짖는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하였는데 예수님이 죽은 아들보다 슬피 우는 이 어미의 모습에 가슴이 아파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사’라고 한 단어는 ‘에스프랑크니스테’라는 하나의 단어인데 수동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직역을 하자면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 라는 뜻인데 우리말로 번역할 대치어가 없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 당시 영혼의 자리가 창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리라.’ 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이러한 문화적인 맥락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정확하게 번역할 수 있는 단어가 없지만 그러나 문화의 차이를 고려하여 등가번역을 한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가슴이 찢어지기까지 아파하시며 울지 말라 하시고” 입니다. 가슴이 찢어지기까지 아파하시는 것은 비참에 처한 인간에 대한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왜 그 분이 죄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간절한 소원은 바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면서 사람답게 사는 그것이 예수가 죽으신 이유였습니다. 요한1서 4장 9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 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없으신 분인데도 우리의 죄를 모두 짊어지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정죄당하고 죽어야 했거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왜 죄 없이는 그 분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리셨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바로 우리에게 이렇게 하나님 안에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그 생명을 다시 누리기 위해 생명이신 그 분은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과부로서 독자를 잃고 가슴 아파하며 슬피 우는 이 여자를 보며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파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최고의 의무는 그 자식을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육체 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모두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식들 마음속에 오늘도 파고 들어오고 있는 곤궁함을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겠으며 그에게 스며들어오는 이 영혼의 죽음의 경험들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시간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게 만들지 않고 영혼의 관점에서도 사물을 보게 만들어 줍니다. 다음 세 가지 사랑은 세 가지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가지 사랑입니다. 자기 영혼에 대한 사랑, 타인의 영혼에 대한 사랑,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 모두는 하나이니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위해 울 수 없고 자기의 영혼을 위해 울지 않는 자는 결코 남의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이미 부모가 되어 자녀를 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교회는 한때 계절마다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회심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던 부모의 울음소리가 가득 찼던 예배당입니다. 자녀를 위해 한없는 슬픔과 눈물로 기도했고, 그 중에 많은 부모들은 기도의 열매를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육신의 자식에 불과하였으나 이제 자녀의 진실한 회심을 통하여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한 생명을 나누어 가진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자녀를 둔 부모들 중 대부분은 아이에게 유아세례를 받게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이에게 유아세례를 줄 때에 하나님과 많은 사람 앞에 맹세한 분들입니다. 이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이 아이와 함께 기도하며 이 아이에게 우리의 경건한 신앙의 도리를 가르치며 이 아이의 구원을 나 자신의 구원처럼 여기며 기도하겠노라고 맹세한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회심하지 못한 자녀를 위한 눈물로 여러분들의 눈물이 적셔지고 있습니까? 자녀를 위해 가족을 위해 마지막으로 흠뻑 울며 기도한 곳이 언제였고 어디서 그런 기도를 드리셨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그때 갓 난 아기였던 자녀들은 초등학생이 되었고 이제 중학생이 되었고, 고등학생이 되었고 우리의 품을 떠나는 대학생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언제까지 그들의 회심이 지체되어야 하겠습니까?
구원받지 못한 자녀들을 위해 눈물 흘리지 않는 부모는 요즘 자신의 곤고한 영혼을 위해서도 울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어찌 기도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겠으며 하나님이 그렇게 자녀들의 구원의 문제로 슬피 흐르는 눈의 눈물을 씻겨주는 위로를 경험할 수가 있겠습니까? 애통한 적이 없는 사람은 위로를 받아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주리지 않은 사람은 배불러 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육신의 자녀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기를 다시 시작하여야 합니다. 육신의 자녀만이 우리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주어야할 자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그렇게 자녀들을 주셨고, 영적으로 어리고 구원 받지 못한 교회 안에 있는 많은 비회심자들은 한 사람의 자녀이기도 하지만 또 한 부모의 자식이기도 하지만 온 교회의 자녀이기도 한 것이니 우리는 그 기도의 부담을 지고 함께 교회 안에 있는 비회심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더욱이 회심한 자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요즘 은혜 안에 살아가고 있는지 한번 물어보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은혜 안에서 살아가지 않는 자녀들을 위해 부모인 여러분들이 울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예수 믿지 않는 집안에서 자랐고, 혹독하게 고통스러운 인생의 시련을 겪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이미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서 혼자일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나는 살기 위해서 나는 누구이고, 세계는 무엇이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절박한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일 부러운 것은 예수님을 잘 믿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흠뻑 사랑을 받으며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신론자가 된 뒤에는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지 아니하였으나 회심한 후에도 역시 그런 부모를 가진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의식이 생긴 후 ‘내가 흘렸던 그 많은 핏빛 눈물들은 우리 엄마 아빠가 대신 흘려주었어야 했던 눈물이 아닌가?’ 까지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먼저 하나님을 믿고 자녀가 되었고, 그 자녀를 여러분의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지 못한 부모들은 인생의 길에 대하여 알지 못하여 다만 양심과 상식의 빛으로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구속의 이유까지 마지막에 영혼의 결국에 이르기까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 여러분들에게 태어난 자녀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문제는 여러분의 많은 자녀들이 그렇게 예수를 믿는 사람을 부모로 둔 혜택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 그 회심과 그리고 구원을 위해 눈물로 비는 부모의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녀들을 위한 가슴 저미는 눈물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불쌍히 여길 만큼 충분히 비참합니까?
물론 부모는 자식의 행복에 이바지해야 할 마지막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이 모두 내 자식을 버려도 나는 그 자식을 버릴 수도 없고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깊이 사랑합니다. 어느 정도 여러분들이 자녀를 위해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자녀의 인생을 너무 힘들게 하지 않는 훌륭한 보호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를 훌륭하게 교육시켜서 경쟁력 있는 사람으로 기르는 것은 미래의 그의 삶에 성공의 확률을 높여줍니다. 좋은 인성을 갖게 하는 것은 그 두 가지보다 훨씬 훌륭한 유산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이미 질풍과 노도의 시기를 겪고 많은 시련의 인생길을 지났기 때문에 우리는 이해합니다. 부모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고 경쟁력 있는 교육을 받아서 이 세상에서 이긴 사람이 되었고 또 어느 정도 권력을 갖게 되었다 할지라도 우리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들이 해결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보험은 그 자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거듭나고 회심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니 그는 본성상 하나님과 원수 되고 그 분을 등지고 살고 싶어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의 자녀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분의 사랑을 받는다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더 큰 보험이 없습니다. 그는 우리가 없어도 우리가 하늘나라에 간 뒤에도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일생을 살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인생의 고난의 길을 신앙으로 극복하고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난과 시련은 쓰라리고 아팠지만 하나님의 찬란한 무지개 빛깔의 사랑을 드러내 보여주는 기회가 되었고 밤하늘처럼 어두운 인생의 날들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신 별빛을 우리에게 보여준 배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 신앙의 달음질을 끝내고 천국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우리의 자녀들이 여전히 회심하지 못한 채 죄악의 어두움을 해매고 그 죽음의 어두운 그늘 아래 살아가고 있다면 거기가 어떻게 우리에게 천국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간절한 소원은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가 죽은 후에도 거룩한 성도들로 고난과 시련을 굳세게 이기고 형통하는 날에 교만하지 아니하며 모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찬양)
또 우리 자손들 다 주를 기리고
저 성전 돌같이 긴하게 하소서
주 구원하신 능력을
주 구원하신 능력을
만백성 듣게 하소서
물려준 유산은 잃어버릴 수 있고, 전해준 지식은 잊어버릴 수 있으나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용솟음치고 있다면 그들은 이 성전을 우뚝 세운 기둥과 같이 될 것입니다. 세속주의에 거친 태풍에도 교회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우리 자손들이 그렇게 교회를 그리스도와 더불어 든든하게 세우며 그들의 또 다른 자녀들이 어린 새싹처럼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믿음의 나무로 자랄 상상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온 누리가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의 아름다운 성품으로 마치 우거진 숲처럼 가득한 군락을 이루고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하늘을 찌르는 거목 같은 사람들이 되어 그 산을 움켜쥐고 있고, 그 아래 자라는 어린 나무들이 서로 키 재기를 하며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자라갑니다. 그 사이에 낙엽에 떨어진 작은 씨앗들이 자라 새싹으로 자라고, 미래에 거목이 될 묘목들이 숲을 가득 채웁니다. 그 숲 한복판으로 커다란 냇물이 흐르고 새들이 이 나무 저 가지로 날아다니며 아름다운 노래도 그 숲을 채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나물들이 고사하고 그리고 생기를 잃은 관목들이 뒤덮고 있는 그러한 황량한 풀밭을 보는 것보다는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우리 자손들을 통하여 온 세상의 만백성들이 그때에도 주 구원하신 능력을 찬송하게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일은 한 자녀의 회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 된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눈물의 부모가 되기를 다짐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끼는 눈물이 후에는 여러분들의 자녀들의 등 위에 떨어지는 비수가 될 것이며 그의 마음을 찌르는 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고 어거스틴의 스승인 암브로시우스 감독이 말하였습니다. 눈물로 매달리고 급기야는 자신의 목회자를 찾아가 울며 자기 아들을 위해 무언가 해달라고 매달리는 부모를 두었기 때문에 방탕한 사람은 위대한 기독교의 사상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는 교회의 위대한 박사가 되었습니다.
부모들은 오늘 이 설교를 하나님의 경종으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껏 까지 자녀를 위해 울어주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을 인하여 울고 자녀를 위하여 울고, 울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인하여 울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자녀들을 두지 아니한 성도인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눈을 교회의 자녀들에게 돌려야 합니다. 바로 그 자녀들은 교회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가 되어 돌보도록 그렇게 우리에게 보내주신 아들, 딸들입니다. 굶주린 자녀를 위해 자신의 옷고름을 풀어 황급히 젖을 물리는 엄마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때에 해마다 가을이면 혹은 겨울이면 그 어린 아이들을 가르칠 교사가 없다는 이야기는 우리를 매우 슬프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 받은 사람은 딴 일을 하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은 영혼을 위해 섬기지 아니하면 저주가 있을 것 같은 강제력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렇게 영혼들을 위해서 섬기고 그들의 발을 씻겨주는 종의 봉사가 아니면 자신의 인생의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허무하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나의 간절한 소원은 여러분 모두가 가슴에 불을 가진 전도자가 되는 것이고, 그리고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며 입술의 혀가 굳어지고, 혈관의 피가 멈추기 전까지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교회 안에서 밖을 향해 보면 핍절한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영혼의 굶주림과 배고픔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죽어갑니다. 그런 일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 인간의 실존의 고독한 소외감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온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그 소외와 외로움에서 벗어나 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인류와 함께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매일 누군가를 위해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큰데 그 사랑이 자신으로 하여금 모든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느끼게 하시니 그는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자식을 잃어버리고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파하는 이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주셨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교회 안에 이렇게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가득하다면 우리 주님의 마음은 우리가 기도하는 그 영혼들을 보며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셨을까요? 다시 이렇게 참척의 슬픔으로 구원 받지 못한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가 되기 바랍니다. 다시 이 상명의 아픔으로 구원 받지 못한 교회의 자녀들을 위해 봉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었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이로써 모든 사람은 주님께 영광을 돌렸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돌보셨다고 말입니다. 자녀들에게 복된 회심의 날이 이르도록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자녀들을 위해 영혼 사랑에 자신을 내어주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눈물로 자녀의 구원을 위해 기도함으로 그 감격적인 회심의 날들을 속히 누리게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