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죽음 안에 있는
영혼의 생명
(2016년 십자가사경회 새벽)
설교기간|2016년 3월 21일-25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 2016년 4월 14일
목 차
1. 영원한 생명을 주심(요 3:16) 2016.3.21 십자가사경회 새벽 1
2. 예수의 죽음과 생명(요 12:24) 2016.3.22 십자가사경회 새벽 8
3. 생명의 떡, 예수(요 6:53) 2016.3.23 십자가사경회 새벽 13
4. 생명의 물, 예수(요 6:55-56) 2016.3.24 십자가사경회 새벽 18
5. 예수의 죽음과 영적 생명(고후 4:10) 2016.3.25 십자가사경회 새벽 23
예수의 죽음 안에 있는 영혼의 생명 1 (2016.3.21 새벽 십자가사경회)
영원한 생명을 주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녹취자: 원수연
I. 본문해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지도자였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아마 낮 동안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들으며 마음이 많이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조용히 찾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르쳐주는 말씀 가운데 미처 이해가 되지 않던 것들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 대화 속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가 없느니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니고데모가 한 또 다른 말끝에 나온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극도로 칭찬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당신이 행하는 놀라운 표적들을 행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화가 뭔가 핀트가 안 맞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높였고, 그러면 당연히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높인 것에 대해서 반응을 보이셔야 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래서 니고데모 너는 하나님의 나라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사람이 이렇게 늙었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가 두 번째 다시 태어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여전히 사고방식이 육적이기 때문에 이 사람은 거듭남을 이야기를 해도 그냥 육체가 다시 한 번 태어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인데 내가 말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 영혼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런 뜻으로 풀어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다가 오늘 우리가 읽었고 또 우리에게 너무 널리 알려진 이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는 이 말씀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II.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은 먼저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되어있지만 믿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을 생명 얻는 수단으로 택하셨기 때문에 그 믿음이 영생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왜 그러면 신약시대에는 그렇게 믿음이 중요하게 취급되었느냐 하는 문제를 길게 설명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 우리는 영생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A. 영생을 주심
이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말로 짧게 번역한 것이고, 희랍어로 보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그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이 주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것이 단순한 육체의 생명과는 다르다는 이야기는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육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7-80년, 길어야 100년쯤 살다가 사라지는데 생명이 영원하다면 육체가 그렇게 일찍 죽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좀 다른 의미에서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부르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첫째는 그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나? 물론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육체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물질적 생명을 관할한다면 영적 생명은 오직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당신 자신이 누리는 생명입니다. 두 번째로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한 번 생명을 받으면 없어지지 않고 그것이 계속 지속된다는 면에서 영원한 생명입니다. 세 번째는 그 생명이 영원히 존재하는 인간의 영혼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 의미 때문에 영원한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냐면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는 모든 삶에 예외가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숨 쉬고 먹고 마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자연의 많은 사물들을 누리면서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어느 정도 자연의 질서에 맡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비가 항상 착한 사람들이 사는 땅에만 오는 것이 아니고, 햇빛이 선한 사람들의 땅에만 비치는 것도 아닙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 받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료의 혜택을 누리게 하시고, 새로운 약품들을 개발하여 사람들이 그 혜택을 입게 하시고, 이렇게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의 생명을 연장하는 방법들을 우리 인간에게 많이 가르쳐주십니다. 그래서 의학의 발견과 새로운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수명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인간이 육체의 생명이 아주 길어지고 건강을 어느 정도 연장시켜서 인간에게 스며들어오는 육체의 기운을 막아줄 수만 있으면 인간이 행복해지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 받는 그런 나라들에게서 삶에 대한 불행지수, 그리고 자살, 이런 것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살만한 나라에서 불행지수가 높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면 일단 우리의 삶이 육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몸부림칠 때에는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 마음을 쓸 새가 없습니다. 그래서 버팁니다. 그런데 먹고 살만하고 육체에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이 오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자기가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자기가 살아갈 인생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아침에 눈 뜨면 가서 미친 듯이 일을 해야지만 밥을 벌어먹고 새벽에 남의 집에 논밭 갈러 가서 저녁때까지 일해야지만 품삯을 받아서 기다리고 있는 자식들 밥을 먹이고 처자식을 먹여 살려서 겨우 육신의 생명을 지탱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대해서 갈등을 느낄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먹을 것이 됩니다. 매일매일 노동을 하지 않으면 밥을 못 먹을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게 될 때 자기가 외부의 환경에 의해 강요된 인생이 아니라 내가 뭔가를 결정을 하면서 내 인생을 끌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혼란과 어려움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모순을 이기지 못하는 일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 날 자살이나 정신병 같은 많은 것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비로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하늘의 자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영원한 생명. 인간의 육체는 지상에 있는 자원으로 해결을 합니다. 그래서 돈이 많으면 좀 더 육체가 건강할 수도 있고, 좀 더 잘 먹고 피로를 풀 수도 있고, 먼 곳을 여행와도 편안한 교통수단을 타서 체력의 소모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까지입니다. 그 이상, 열다섯 살 된 어린 아이가 논둑에 엎드려서 울며 묻던 질문, “나는 누구인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이런 것들에 대한 답, 격려, 힘, 이런 것들을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는 줄 수 없습니다. 하늘자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자원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관계에서 이것들을 이길 수 있는 자원들이 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현실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자원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하게 여기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어떤 영적인 자원들을 공급받지 못하고 고갈과 기갈 속에서 삽니다. 그런 결핍한 삶이 매일매일 되풀이되면서도 돼지의 쥐엄열매를 먹으며, “아, 우리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넉넉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하고 탄식했던 그 탕자의 마음으로 돌아가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회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하나님은 자기 안에 이러한 하늘자원을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것, 매우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은혜를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B. 독생자를 주심
두 번째는 그 영생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원래 이 ‘독생자’라고 하는 말은 외아들인데, 그냥 외아들이라기보다는 하나님에게 속한 독특한 외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이제 예수님은 외아들이 아닌 여러 아들 중에 하나가 되신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이 독생자는 ‘독종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씨로서 그 하나님의 생명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분,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도 우리와 어떤 인간관계를 맺는다고 그 생명이 저절로 흘러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독생자를 하나님이 주십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더욱이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아 인간 예수,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완전히 사멸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게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언제나 끊임없이 당신에게 속한 좋은 것을 우리 인간에게 주고 싶어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살아갈만한 여건을 만드시고 공기를 주시고 아름다운 자연, 이 모든 것들을 주셔서 그 안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경험하는 자연의 재해와 많은 현상들은 사실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온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인간이 이 지구를 올바르지 못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그 결과물들이 자연의 재앙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의 낭비, 환경의 파괴, 이런 것들이 끔찍한 재앙이 되어서 인류에게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은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자기 아들 안에서 해결을 하시기 위한 것인데 이는 바로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목표는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영원한 생명, 영생을 주시기로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던 사람들이 예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진심으로 회개할 때 놀랍게도 그 사람들이 예수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 자녀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정말 사회적으로 그 사람보다 훨씬 반듯하고 도덕적인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에게는 안 주신 생명을 이런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복음의 놀라운 비밀입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의 공로를 쌓고 하나님께 받아 들여질만한 훌륭한 장점들을 만들어내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모든 것을 예비해놓으시고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죽이심으로 당신의 생명이 우리에게 흘러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못 간다고 울지 말고, 자기 같은 이 더러운 인간의 끔찍한 죄들을 예수님이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깊이 기억하고, 그 십자가 아래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독생자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주신 것에 대해서 그렇게 감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예수를 이 세상에 주신 것이 하나님 사랑의 위대한 표현이었다고 말합니다.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C. 믿는 자에게 주심
마지막 세 번째는 이렇게 독생자를 보내어 우리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셨고 또 그렇게 죽게 하신 사람이 영생을 얻게 하신 것처럼 또한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어떤 사람은 자기가 믿었기 때문에 예수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믿은 게 아니라, 예수를 죽여서 우리의 죄를 모두 도말하고 당신의 생명을 주시려고 그 생명을 품에 안고 죄인들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예화) 지금도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이 납니다. 미국 사람들이 구호물자를 많이 보냈습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학교에서 밀가루, 혹은 옥수수가루로 빵을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매일 주었습니다. 매일 주다가 좀 모자라는지 돌아가면서 먹으라고 그러고, 빵도 한 개가 아니라 항상 칼로 잘라서 절반씩 나누어주고, 어린이날은 한 개 다 주고 그랬습니다. 빵을 나누어주면 당번들이 시커먼 자루를 가지고 가서 빵을 받아옵니다. 그러고 그 빵을 들고 와서 교탁 앞에 펼쳐놓으면 선생님이 설명을 하고 아이들이 새카만 손으로 조금이라도 큰 거 먹겠다고 막 싸우면서 하나씩 받아갑니다. 그러곤 그것을 앞에다 놓고 감사기도는 아니지만 나라에 대해서 감사하는 그런 연설을 일단 듣고 먹었습니다. 북한하고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참 맛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가난한 나라에서 외국의 도움으로 옥수수가루나 밀가루를 들여다가 빵을 만들어서 학교에 보급을 했습니다. 그래서 빵 자루를 들고 옵니다. 떠들다 걸리고 이런 애들은 안 줍니다. 그리고 빵을 한 개씩 줍니다. 선생님이 줄 때도 있습니다. 빵을 주시면 손을 내밀어서 빵을 받습니다. 그 때 아무도 자기가 손을 내밀은 공로 때문에 빵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이미 밀가루의 기원부터 시작을 해서 마지막에 빵 포대가 배달되어서 교실에 도착할 때까지 모든 것이 진짜 은혜입니다. 국가가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아서 무상으로 주는 겁니다. 손을 내밀면서 받을 때 손의 공로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참 이렇게 가난한 나라에 많은 나라들이 도움을 주어서 내가 그래도 이 빵을 먹는구나.’ 우리는 이렇게 교육을 받은 것입니다. 그 빵을 받을 때 내가 손을 내밀어 빵을 받았지만 손의 공로로 빵을 얻게 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계속 손 내밀면 계속 빵이 저절로 주어지느냐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 참 훌륭한 것이기는 하지만 믿음이, 믿음이 바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이미 그렇게 해 주기로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것을 먼저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비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이 세상, 어떤 세상?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당신의 형상을 따른 인간이 살게 하신 세상인데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욕심대로 방황하고, 마음대로 살아서 죄짓고, 악의 길로 가기 때문에 불행해지고 있는 이 사람들을 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들처럼 살았지만 하나님의 그 인간들을 향한 그 사랑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무슨 뜻입니까? ‘이것보다도 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냐?’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아들을 주셨으니, 빌려주시고 잠깐 얼굴 보이게 하신 것, 외출하고 출장 갔다 오게 하신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주셨다’고 하는 의미는 이 세상 사람들의 죽어있는 영혼, 잃어버린 영생을 다시 되찾아주기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을 제물로 넘겨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주셨다’라는 이 말은 아예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기 위해서 넘겨주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십니다. 그리고 생명을 그 대가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이 있습니다. 생겨났습니다. 어떻게? 예전엔 하늘에 있었던 생명이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 안에 충만히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나의 죄 때문이고, 누구든지 전심으로 주님 앞에 죄를 회개하며 그 분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그 분을 전심으로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이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빈부나 귀천에 상관없이 아낌없이 그것을 주셔서 주님 앞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받는 믿음은 심리적인 믿음이 아니라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예전에 ‘아, 이것이 인생의 구원이구나!’라고 생각했던 모든 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에 대한 생각을 안 했을 수도 있습니다. 더 확실하게 설명하자면 이렇게 살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모든 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돈 많이 벌어서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집에 시집을 가서 아이들을 낳고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림처럼 예쁜 여자에게 장가를 가면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하겠죠? 삼일. 삼일 행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면 행복해질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구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의 행복을 취득할 수 있다고 하는 기대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래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믿음 안에는 무너짐이 있습니다. ‘우르르르’ 하고 무너지는 그것이 뭐냐면 세계관에 대한 믿음, 가치에 대한 믿음, 이제까지 자신의 삶을 지탱해왔던 인생에 대한 견해와 사고, 가치관, 이런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주 겸손하게 우리의 삶의 방식이, 걸어갈 인생의 길이 우리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 있습니다.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순간 주님이 내게 무어라고 말씀하셨는지, 내게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지, 이미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약속된 그 위대한 생명의 비밀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면서 우리 영적인 삶이 더욱더 풍성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얼마나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영적으로 누리면서 사는 것을 원하셨으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부끄러운 죽음으로 생명을 바치게까지 하시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게 하셨을까요? 신자의 의무는 한번 주어진 이 영적인 생명을 우리 안에서 풍성하게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다양한지 보십시오. 어제 제가 응급실에 잠깐 갔다 왔습니다. 가보니까 별로 안 아픈데 그래도 불편해서 온 사람부터 시작을 해서 정말 위중해서 팔다리를 천장에 매달고 호흡기를 끼고 숨을 깔딱깔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살아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조용히 누워서 아무 활동도 못하고 숨을 쉴 정도의 생명은, 적극적으로 우리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생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더 넘치는 생명이 필요합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에는 고난과 시련이 올 텐데 이것들까지 다 극복하고 진정한 의미 있는 인생을 개척해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얻기 위해 우리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우리 안의 죄를 죽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사경회를, 고난주간을 통하여서 여러분 안에 있는 영원의 생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풍성해진 삶을 살아서 늘 이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예수의 죽음 안에 있는 영혼의 생명 2 (2016.03.22 새벽 십자가사경회)
예수 죽음과 생명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녹취자: 김세나
Ⅰ. 본문해설
유월절인데 예배하러 올라온 헬라인들이 있었습니다. 헬라인 태생이지만 사실은 유대인이거나 혹은 유대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이었을 거라 추측됩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뵈옵고자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이 사실을 예수님께 전하였고 예수님은 그러한 소식에 상관없이 당신이 영광을 얻을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이어지는 부활, 승천을 바라본 말씀이었습니다.
Ⅱ. 인류 구속의 밀알의 비유
그러면서 예수님은 유명하고 의미심장한 한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인류 구속과 밀알의 비유였습니다.
A. 한 알의 밀의 죽음
제일 먼저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좀더 정확히 생각해 보면 한 알의 밀이 모두 그냥 죽는 것이 아닙니다. 밀에는 그냥 밀을 심으면 밀이 나는 것이 아니라 눈이 있어야 합니다. 밀에는 밀의 씨눈이 있고 쌀에는 쌀의 씨눈이 있습니다. 감자에도 물론 씨눈이 있습니다. 그래서 감자를 손에 들고 돌려보면 씨눈이 곳곳에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감자를 심을 때에는 감자를 잘라서 재에 잘 버무려서 그렇게 해서 온도와 습도에 맞게 잘 준비된 땅에 심는 것인데, 씨눈이 없게 잘못 감자를 자르면 감자를 심어도 그 곳에서 싹이 나오지 않습니다. 씨눈이 떨어진 밀을 심으면 결코 거기에서 밀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생명은 밀의 눈에 있고 그 밀의 눈이 습기를 먹으며 온도에 맞게 조건이 갖추어 질 때 그 눈에서 싹이 나옵니다. 그리고 싹이 나와서 자라는 동안 그 밀이 썩으면서 거기에서 물기가 나오고 양분이 나와서 그 씨눈에서 나온 싹이 완전히 발아하여 자기 힘으로 뿌리를 내려서 습기와 양분을 빨아 먹을 수 있을 때까지 희생하여 양분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원리를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가 씨눈이고 당신의 육신은 그 씨눈을 담고 있는 밀알이 됩니다. 그래서 당신이 죽어서 그 모든 진액을 우리를 위해 쏟아 부으심으로 예수님 때문에 죽을 우리를 살리시는 것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생명의 원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해 내신 것은 이후에 우리들이 그러한 구원의 원리를 이해하고 우리 자신도 그러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방식의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으셨고 당신이 육체로 우리를 위해 죽으실 때 당신은 밀알로 우리의 구원은 밀알의 씨눈으로 여기셔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당신의 육체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 알의 밀알로써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B. 죽지 않음과 싸우심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죽지 않음과 싸우신 생애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죽으신 것을 가까워 온 것을 아시고 당신이 이제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때 지상에 길이 남을만한 위대한 신앙고백을 베드로가 남깁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냐 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곧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남깁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예레미야다, 선지자다, 여러 가지 발언을 하였지만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이 고백을 최상의 고백으로 여기시고 그 고백을 기뻐하시고 그를 칭찬하십니다.
그 고백이 울려 퍼지고 난 후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 말씀하십니다. 그때 “예수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예고할 때 항변하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구나.”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 하는도다.”라고 준엄하게 책망하시고 당신은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고난의 길로 들어서십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구속을 위한 한 알의 밀알로써 당하시는 예수님의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는 것은 모든 제자들이 아는 당연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이 땅에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죽지 않으면 그 이미 죽어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전달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종교가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안에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은 오히려 악을, 불의를 이 세상에 전파하는 중심인물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 가운데 없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생명이 없기 때문에 그 생명을 얻기 위하여 몸부림 쳤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생명을 얻어야 할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어라 하고 율법을 지키며 거기에 생명이 있는가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대의 독립을 위하여 극렬한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꿈을 성취할 수 있는 것처럼 믿으며 그것을 생명 삼았습니다. 그러나 아무 데도 생명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종교를 떠나서 세상의 물질을 탐하여 많은 재물을 가진 부자가 되고 나면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이 생명은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구해 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이 생명은 오직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되시고 그의 죽음이 하나님의 생명을 전달하는 단 한 가지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믿고 전심으로 그 분을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예수의 죽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의 비밀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너무도 사랑하는 제자였고 훌륭한 신앙고백을 남긴 탁월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죽지 않게끔 인도할 때 그를 준엄하게 책망하시고 심지어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사단적인 생각이라고 책망하시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준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죽지 않으려는 자신과의 싸움이었으며 죽지 않으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죽지 마시도록 예수님을 격려하는 사람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도 죽지 않는 것이 좋지만 그래서 마지막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 앞에 간절히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아버지께 간구하였지만 마지막 예수님의 기도는 “그러나 나의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고 당신의 죽음을 아버지의 손에 위탁하셨으니 이는 기도 속에서 우리 모든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린 인간들에게 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죽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보다 위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충만한 생명이셨기 때문에 그 생명이 끊임없이 뻗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확산하고 자신이 살아있는 그 생명을 보이고 다른 것들과 관계를 맺고 자신과 똑같은 자신의 종자를 끊임없이 전사해 나가는 것이 생명의 특성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생명을 전사하고 그 생명을 확산해 나아가는 그 놀라운 역사를 예수님이 감당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그러기 위해서 당신은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죄 없고 흠 없으신 당신은 희생해야 할 한 알의 밀로 여기시고 가치 없는 우리는 그 밀의 눈인 것처럼 여기셔서 당신을 죽여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당신을 한 알의 밀알로 여기시고 우리를 씨눈으로 여기셔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이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구원을 얻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의 생명이 예수의 죽음 때문에 왔다는 것은 압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그들에게 찬송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넘치게 받았을 때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벙어리가 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할 말을 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잘 들어 보십시오. 예수님이 한 알의 밀이 되고 우리가 씨눈이 되어 예수님은 죽고 우리는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았을 때 그렇게 우리를 살아나게 한 영적인 생명은 원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생명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었던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우리에게 부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나게 되면 그 다음에 우리는 자신을 한 알의 밀알로 여기고 자기 안에 있는 이 예수를 씨눈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 씨눈을 위해 기꺼이 썩고 죽기를 원하고 그렇게 자기 안에 있는 예수 씨눈이 충만히 살아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를 위해 죽고 그 사랑을 안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예수를 위해 죽음으로 결국 예수는 죽었고 그 사랑 때문에 우리도 죽었지만 마지막에 사시는 것은 예수만 사시게끔 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를 향해서는 죽으시고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죽음으로 우리 안에 있는 예수는 충만히 사시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한 알의 밀알이 되신 방법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예수님은 처음부터 죽으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죽으심으로써만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하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명 없이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인류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여러분 종종 마음이 깊이 가라앉고 낙심이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아침에 밥을 뜨다가 혹은 구두 끈을 매다가 혹은 출근하고 회사 문을 들어서며 혹은 조용히 앉아서 음악을 들으면서 혹은 전철에 앉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고 그리고 살아있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어떠한 기쁨도 느낄 수가 없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그리운 사람도 없고 보고 싶은 사람도 없고 그리고 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어렵고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 절대적인 가치에 대한 인식도 없이 그렇게 서러운 마음이 왈칵 쏟아질 때가 있습니다. 인간의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과 정동을 하나의 법칙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만 저의 경험에 의하면 그때마다 생명이 부족한 때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눈물을 확 쏟고 그 설움을 사람의 설움으로 끝내지 않고 주님을 찾을 때 그래서 이렇게 아무도 의지할 데 없이 고아처럼 버려진 채 살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주님 앞에 아뢰며 단 한번 자기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을 한 알의 밀알로 여겨 우리를 씨눈 삼아 당신을 다 버리셨던 예수께 매달리면 주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아주 은밀한 방법으로 당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채우십니다. 그래서 곤고해진 우리의 마음에 희망을 주시고 이 세상에 속한 안목에 속한 것들을 바라보며 낙심하고 좌절하던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생명이 솟아나게끔 만드십니다.
낙심되고 힘들 때마다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합니다. ‘아, 우리가 예수님이 보시기에 생명을 주어야 할 밀알의 씨눈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되어 씨눈인 우리를 위해 기꺼이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아나게 하셨구나. 그분이 한 알의 밀알로 우리를 씨눈 삼아 생명주셨으니 그 생명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살게 된 우리들이 이번에는 예수를 씨눈으로 삼고 우리를 한 알의 밀로 삼아 잘 썩고 잘 죽고 그래서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우리 안에 충만히 사시는 예수 때문에 기뻐하고 예수 때문에 행복해 하며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예수의 죽음 안에 있는 영혼의 생명 3 (2016.03.23 새벽 십자가사경회)
생명의 떡, 예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녹취자: 김세나
Ⅰ. 본문해설
6장에는 갈릴리에서 있었던 기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이었습니다. 특히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순히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기 위한 기적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생명을 가르치기 위한 영적인 교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설명하시면서 저 멀리 이스라엘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의 사건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베푼 만나를 ‘모세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실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를 통해서 누리게 될 영적인 생명의 떡을 바라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만나의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본 것처럼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기적을 보게 하셔서 하나님이 만나를 주신 목적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육신의 떡을 주신 것은 우리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신 만나를 주신 본래의 의도를 상기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광야의 떡은 단지 육체의 생명만을 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나를 먹는 자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부모로서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죽어가는 자식을 본다면 부모로서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더욱이 그 부모로서 죽어가는 자식을 바라볼 때 더욱이 그 자식이 양식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볼 때 부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사람들은 육체의 양식에 있어서 배부르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굶어죽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정신의 양식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이 있습니다. 정신의 양식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덜 비참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영위해 갈 수 있는 영혼과 정신의 양식이 모자라는 대도 여전히 살아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남기는 영향력은 스스로 생명을 거두는 자살자들보다 더 나쁜 영향력을 이 세상에 미칩니다. 모두 하늘의 떡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준 사람들에게 그 사건을 소재로 영원한 양식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소개합니다.
Ⅱ. 영원한 양식이신 그리스도
A. 두 가지 떡의 비교
그러면서 예수님은 두 가지 떡을 비교하십니다. 모세의 떡, 만나는 결국 육체의 죽음을 이기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기적의 떡을 매일 매일 먹으면서 또한 매일 매일 죽어갔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또 하나의 떡을 소개하는데 예수의 떡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생명입니다. 그 떡을 먹는 사람은 죽음을 이깁니다. 육체로서는 모세의 떡을 먹은 사람들과 똑같이 죽는 것 같지만 그러나 부활의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의 떡을 먹고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그 진노아래 죽어간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예수의 떡, 곧 생명을 먹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거나 하나님의 용서가 모자라서 하나님께 징벌의 상태에 놓이지는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서로 다투며 논쟁하기를 예수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서 먹게 하겠는가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유대인들의 생명의 떡에 대한 오해와 혼란을 이야기 하는데 이것은 영적인 사고가 없고 완전히 육적인 사고 때문에만 일어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떡’이라는 단어는 희랍어로 ‘알토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냥 좋게 번역을 한 것이지 빵입니다. 사실 이 번역은 문제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빵’이 그 사람들에게는 주식입니다. 우리에게 떡은 간식입니다. 그래서 일 년 내내 떡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번역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만약 등가번역을 하면 ‘밥’이라고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알토스’라고 해서 ‘빵’이라고 할 때 이것은 양식을 가리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밥’입니다. 밥. 우리는 밥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밥을 주식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이 빵은 곧 밥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예수님이 제시하신 성찬에 있어서 포도주도 사실은 술이 아닙니다. 우리는 포도주 한 모금 안마시고도 평생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이 그들에게는 물입니다. 일종의 음료입니다. 생명을 지탱하기 위한 음료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물입니다. 우리가 물과 밥이 없이 살 수 없고 그 물과 밥이 우리의 생명을 지탱시켜 준다고 하는 그림을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문맥에서 포도주와 떡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면 똑같이 여기에서도 “내가 곧 생명의 밥이니라. 이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밥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않게 하는 것이라. 내가 줄 밥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떡’이라고 하는 주식인 이 밥은 결국 우리 육체를 가진 인간이 결코 밥 없이 살 수 없듯이 예수는 우리의 영혼의 생명을 위한 없어서는 안 될 양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먹는다’라는 이야기를 가지고 유대인들이 논쟁하지만 그것은 어떻게 보면 문학적인 사고력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말씀을 먹으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이 과연 밥을 퍼 먹는 것, 빵을 베어 먹는 것과 똑같은 동작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이빨로 씹고 혀를 이용하여 침을 섞어서 목구멍으로 넘기고 쓰고 시고 달고 짠 맛을 느끼게 하면 우리 위 속으로 들어가 물리적인 분해의 과정을 거쳐 육체적인 핏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우리 중 누가 있겠습니까? 육체의 떡이 그렇게 우리 속에 들어가서 소화되어 우리 몸속에 퍼진 후에는 우리의 몸과 그 양식에서 추출된 영양분이 혼연 일체가 되어서 우리의 몸에 힘을 내도록 육체의 에너지를 주는 것과 같이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의 정신과 영혼 속에 스며들어 그렇게 우리의 삶에 생명을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며칠 금식을 하면 기운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근심이 많고 마음이 상해서 곡기를 끊게 되면 온 몸이 나른해 지고 아무 것도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을 돌이켜 한 끼 식사를 즐겁게 하고 온기를 얻으면 몇 시간 후, 몇 시간도 걸리지 않습니다. 불과 몇 분 후부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의 온 몸에 온기가 솟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도저히 인생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상하고 절망이 엄습하여 더 이상 자신의 삶에 주체가 될 수 없을 때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 스며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우리 인생을 어떻게 바꾸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주 오래된 일인데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캐나다에 갔을 때 그 교회 목사님이 자기네 교회에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그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집사님 한분이 있는데 살다 살다가 이민 생활에 지치고 사업도 안 되고 빚도 지고 도저히 살래야 살 수 없는 때가 되어서 강에 떨어져 죽으려고 유서를 써서 강 다리를 건너가고 있었답니다. 중간에 가서 떨어져 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가는데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신 것입니다. ‘죽는 것은 죽는 거지만 그래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죽기 전에 목사님에게 기도라도 받고 죽어야겠다.’ 마침 목사님 사택이 다리를 건너가면 바로 있었답니다. 가서 문을 두드렸는데 시간이 10시 반이 되었는데, 그 나라는 밤늦게 남의 집을 가는 예는 흔치 않습니다. 목사님이 큰 일이 일어난 줄 알고 파자마 바람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웬일이세요?” “그냥, 이 근처 지나가다가 목사님에게 기도를 받고 싶었습니다.” 목사님이 얼른 들어오라고, 영문은 모르지만 차를 끓여주면서 물어보았더니 대답은 안 하고 “그냥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그래서 거실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목사님께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기도를 해주고 기도도 받았으니 죽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걸어 나오는데 갈 때 마음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주머니를 뒤져 보니까 한쪽에는 유서가 있는데 한쪽에 뭐가 손에 잡히더랍니다. 그래서 보았더니 복권이었습니다. 펴보니까 발표가 그 다음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거나 맞춰보고 죽어야겠다. 죽는 게 뭐 그렇게 급하랴.’ 기도를 받고 엄청난 은혜가 쏟아졌다기보다는 비유를 하자면 굶어서 거의 죽어가다가 미음 한 그릇을 먹은 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는 돌아가서 내일 죽기로 하고 잠이 들었답니다. 그 다음날 기적이 일어났는데 우리나라 돈으로 12억 정도 복권에 그 주머니에 있던 종잇조각 복권이 당첨이 되었습니다. 그 기적이 일어나서 제일 먼저 목사님에게 달려와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새로운 생명을 찾았는데 그 이후로 교인들이 기도를 자꾸 받고 싶어 해서 그 목사님이 그것을 거절하느라고 혼났다고 합니다. 한 번의 신화처럼 끝나야지 그 다음에 여러 사람이 다리를 건너가서 기도를 받았는데 아무도 당첨이 안 되었더라 하면 되겠냐고 이야기 하면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힘이 없다가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원기를 얻으면 간절한 기도로 은혜를 받으면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떡이고 예수님은 바로 이 떡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B. 살을 먹고 피를 마심
그래서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그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48절에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50절에서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을 믿고 그 분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구속의 효과를 입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구속의 효과 때문에 정죄함이 없이 영원히 하나님 앞에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는 사람은 생명의 교제를 누려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주님께서는 부지런히 구속의 도리를 배우고 묵상하는 사람, 성령 안에서 그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 자신의 마음과 심령을 드려 아버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생명의 힘을 주십니다.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살아갈 수 없는 길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힘을 주십니다. 절대적인 외로움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과 사귀며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깨닫게 하시고 사람 때문에 실망하고 낙심한 지점에서 우리를 어떤 때에도 버리지 않는 그리고 우리와 늘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찬양)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그렇게 고난과 시련 속에서 혹은 극한의 외로움 속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묵상합니다. 거기에서 놀라운 영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이전에 알지 못하였던 영혼의 생명이 우리 속에서 샘솟듯 솟아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바로 예수를 다시 살린 부활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예수와 함께 죽은 그곳에서 예수와 함께 사는 경험을 합니다. 매일 매일 우리에게는 양식과 음료가 필요하듯이 그렇게 매일 매일 우리의 정신에도 이러한 양식과 음료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음료와 양식을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려고 그분을 교회의 머리 삼으셨습니다. 그 머리를 커다란 창고 삼아 그분의 피에 잇대어 그분의 살에 접붙여져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극복할 수 없는 환경을 그 분의 사랑 때문에 극복하게 만들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실망시키고 혹은 자기를 버려도 언제나 자기 곁에 계셔서 아기가 배고플 때 가슴을 풀어 헤쳐 먹이시는 엄마처럼 그리고 연약할 때 머리에 물수건을 올려놓고 기도하는 엄마처럼, 그렇게 삶의 온기를 주십니다. 그 분의 가장 큰 소원은 우리가 그 충만한 생명을 덧입어 잘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를 위한 생명의 떡이 되셨습니다.
Ⅲ.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예수 죽음의 의미를 알고 그 죽음을 마음에 잘 재연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행동입니다. 바로 그 안에서 우리는 충만한 은혜와 사랑을 받게 되고 그 때 우리는 추루한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성품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나니 예수 죽음을 통해 이루신 이 생명의 교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위한 생명의 떡이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수의 죽음 안에 있는 영혼의 생명 4 (2016.03.24 새벽 십자가사경회)
생명의 물, 예수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5-56)
녹취자: 김세나
Ⅰ. 본문해설
계속해서 예수님은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을 설명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 얻는 수단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영생’은 영원한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 영원한 생명이 크게 세 가지를 의미하는데, 첫째는 하나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육체의 부활을 통해서 불멸의 몸이 되는 것을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쓰이는 용례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 속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현실적인 비참의 뿌리는 죄입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세상이 악하게 됩니다. 이 악은 질병적인 증상입니다. 이것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결국 죄의 문제를 제거해야 하고 죄 때문에 비참해진 상황에 대해서는 치료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모든 죄와 비참이 하나님과의 생명의 단절로 봅니다. 그래서 이 죄와 비참을 해결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지만 그것은 단지 용서를 위한 것이지만 더 큰 것을 우리에게 도입하고자 하심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과 구속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자 하십니다.
Ⅱ. 생명의 물, 예수
그러면서 예수님은 어제 먹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오늘 이제 마시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데 생명의 물, 예수 이 주제로 말씀하십니다.
A. 참된 음료를 마심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래서 영생은 참된 음료를 마시는 것입니다. ‘음료’라고 하는 것은 ‘포시스’라는 것인데 ‘피노’라는 동사, ‘마시다’에서 옵니다. 무슨 특별한 뜻이 있다기보다 우리가 아는 말로 번역하면 ‘drink’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액체로 되어서 우리의 몸에 들어가 물이나 술, 유사한 주스, 전부 총칭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양식과 음료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주된 음료는 물입니다. 물. 재밌는 것은 여기에서 ‘마시는 자’라는 말이 ‘피논’인데 현재 분사형입니다. ‘먹는 자’도 ‘트로곤’인데 마찬가지로 현재 분사형입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과거에 한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동작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한번 마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고 참된 물인 예수를 마시고 또 양식인 예수를 끊임없이 먹음으로써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심오합니다. 이것은 결국 끊임없이 피를 마시고 예수의 살을 먹는 행위를 묘사함으로써 살아가는 힘 자체를 예수를 통해서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든지 살을 먹는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너희가 매일 마시는 물 없이 매일 먹는 빵 없이 살 수 없지 않냐.” 우리로 등가 번역을 하면 “너희들이 매일 먹는 밥, 매일 마시는 물 없이 살 수 없지 않냐.” 그렇듯이, “영생을 누리려면 끊임없이 나를 먹고 마시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과 생명적인 관계에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고난의 결과를 누리면서 살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너에게 지정하신 신자의 삶을 사는 원동력이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음료’라고 하지만 오늘 여기에서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참으로 꼭 필요한 그 마실 것, 혹은 물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양식 같지만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들이 많이 있듯이 우리의 몸에 꼭 필요할 것 같은 음료지만 사실은 마시면 안 되는 음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의 어려움은 바로 그러한 것들로서 양식을 삼고 그러한 것들로서 음료를 삼으며 살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육신의 물과 음료는 끊임없이 우리를 다시 목마르게 하는 것처럼 참되지 않은 양식, 참되지 않은 음료는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이었습니다. 늘 물을 길러 오는 것이 너무 번거롭고 고통스럽다고 느꼈을 때에 예수님이 “이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말을 마시면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나온 이야기가 “네 남편을 불러 오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삶 전체를 재편하도록 요구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이렇게 자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이 바로 영생을 누리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자기 자신이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갖고 그것을 통해서 삼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사랑을 끊임없이 공급받으면서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 인생이 곤고해지는 모든 문제들이 해결이 됩니다. 죄 있는 사람은 용서를 받게 해 주시고 하늘의 자원이 부족해서 어떤 상황이 견딜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 삶을 이겨 나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인생을 다시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 주십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조금만 형통하면 헤헤 거리고 교만하던 사람이 조그마한 시련이 오면 좌절하고 죽음을 생각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세상의 상황과 환경이 자신의 인생을 뒤집어 놓을 수 없도록 그렇게 변화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였던 참된 영생입니다. 죽은 다음에 하늘나라에 가서 누리는 것, 그것만이 영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예수 믿어서 생명 얻게 하신 것은 어떤 의미에서 죽게 하시려고 생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살게 하시려고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살기 위한 생명입니다.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행복 못지않게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삶의 상황을 헤쳐 나가면서 자신을 향해 도전하고 있는 이 모든 세상과 때로는 교회의 악에 항거하며 참다운 인간의 모습을 이루어가는 몸부림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결국 현재적인 믿음의 행사로 말미암아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는 한 방편을 참된 음료를 마시는 것으로 묘사를 하신 것입니다.
양식을 먹고 음료를 마시는 일이 우리 인체와 마음에 미치는 큰 영향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육체의 기력이 많이 떨어졌을 때 한 끼의 맛있는 식사는 놀라운 원기를 우리에게 회복시켜 줍니다. 외롭고 삶이 깊은 좌절에 빠졌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며 나누는 한 끼의 행복한 식사는 이 세상에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 아직은 살아갈만하다는 희망을 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하셨던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또 죄인들과 함께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종교지도자들이 아주 심하게 비난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먹고 마시는 것은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과 한 부류가 된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선지자로 보았으니까, 선지자는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개의치 않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잡혀가시기 전날까지 똑같은 방식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것이 사실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3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라 그러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가 더불어 먹고 그는 나는 더불어 먹으리라.” 그러면서 먹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게 가족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B. 예수 안에 거함
그러면서 ‘예수 안에 거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상호내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거한다’고 하는 것은 희랍어로 ‘메네이’라는 단어입니다. 머무르는 것입니다. 잠깐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거처하면서 오랫동안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잠깐 만났다가 흩어지는 교제의 관계가 아니라 가족 관계로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그 가족관계 안에서 산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잠시 머물다가 거처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계속 머물면서 운명을 함께 공유한 공동체로서 삶을 영위해 가고 내 삶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가족입니다. 가족으로 함께 살면서 삶과 죽음을 공유하고 슬픔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그렇게 살아가는 가운데 예수 안에 있는 충만한 생명도 함께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요새 우리 집에 아들 내외와 손녀가 같이 들어와 삽니다. 공부하러 가기 위해 집을 내놓고 같이 들어와 삽니다. 며칠 동안 같이 살면서 손녀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낍니다. 똑같은 아이인데 자기 집에 있다가 하루에 한 번씩 올 때 만나는 것과 잘 때도 인사하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 인사하고 제가 세 끼를 다 집에서 먹지 못하지만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린 아이인데도 그 속에서 엄마, 아빠와만 있다가 많은 식구들의 시선을 받는 것을 그렇게 행복해 합니다.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원래 이렇게 어렸을 때 사랑을 받으면서 그리고 어떤 삶의 모든 문제들을 공유하면서 이렇게 하면서 인간이 살게 되어 있고 그렇게 살 때 인간이 인간다운 인간으로 빚어지는 것이라고 새삼스럽게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가족으로 함께 살아가면서 삶과 죽음, 인생의 희로애락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생명을 발견합니다. 내게는 없는 생명이 신앙을 통해서 부모를 통해 내게 부어지고 내게는 없는 생명이 신앙을 통해서 자녀를 통해서 부어지고 이러한 것들을 그 생명을 공유하면서 함께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이고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고난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면서 그 새 지평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성취해 나갑니다. 그것이 개인적으로 예수와 함께 연합되면서 내 안에 여전히 예수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려고 하는 죄와 많은 불결들을 봅니다. 이것들은 끊임없는 은혜의 싸움으로써 우리 자신이 성화되어 가고 극복되어 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결국 교회가 얼마나 교회다워지는가 하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았는가 하는 것의 총량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들이 가족들 속에서 어떻게 가족들과의 관계를 다루면서 살아가는가, 그것을 교회에도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어떠한 결점이나 혹은 잘못이 있어도 가족들의 경우에는 그 결점이나 잘못을 제 3자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가족들이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가족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 가족관계 속에서 살아가면서 서로를 사랑하면서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돕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가족 하나가 범죄를 하여 감옥에 들어갔다고 칩시다. 그러면 세상 단체에서는 이 회원이 감옥에 들어갔으니 우리는 오늘로 제명한다고 끝냅니다. 그런데 가족들을 옥바라지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출옥하기를 기다리고, 새 사람이 되기를 기다립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똑같습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회개하는 마음이 없을 때,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끊임없이 그렇게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회개를 통해서 온전하게 되려고 애쓰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들은 그 죄가 너무나도 크다는 이유 때문에 정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교회적인 지평 속에서 예수의 고난을 내 것으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 마지막이 사회적인 지평입니다.
결국 예수는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 생명을 누리게 하심으로써 이렇게 개인적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더욱 온전하게 하고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에 근접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과 생명적인 관계 속에서 가족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오늘 “당신의 피를 마시는 것, 당신의 살을 먹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죽음의 의미를 알고 마음에 매순간 재현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밥과 물 없이 살 수 없듯이 우리의 영적인 생명도 마찬가지로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것 없이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언젠가 밥을 먹고 물을 마신 기억 하나로 일평생 육체의 힘을 발휘하며 살 수 없는 것처럼 매순간 그러한 양식과 물이 필요한 것처럼 영적인 생명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분을 통해서 모든 영적인, 그리고 육적인 좋은 것들이 주어집니다. 이 세계가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된 것처럼 구속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고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지탱된 것처럼 구속을 통해서 주어지는 모든 좋은 것들이 그를 통해서 오고 그를 통해서 유지됩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받을 때만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끊임없이 유지하며 그 생명을 누리고 살아가는 삶 역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필요합니다. 그 분을 의지하고 그 분의 도움을 구하며 그 분을 의존하며 살 때 영적인 충만한 교통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살아가려고 할 때 경건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생명을 충만히 누리도록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은혜인 그 분의 피를 마시며 그렇게 경건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생명을 물처럼 마시며 그 충만한 생명으로 모든 삶의 사태들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복된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영적 생명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녹취자: 오희열
I. 본문해설
고린도후서는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입니다. 아마도 에베소 에서 고린도전서를 보낸 것으로 여겨지고 드로아를 거쳐서 마게도냐로 왔는데 거기서 이 고린도후서를 썼습니다. 아마도 55년에서 56년경의 일입니다. 고린도후서는 신약의 예레미야서라고 불립니다. 그만큼 여기에는 복음사역자로서 당한 말할 수 없는 많은 고난을 기록하고 있는데, 아시아에서 당한 고생이 바로 그것이고, 그 고생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사도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세를 이 책에서 말하는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II. 예수 죽음의 현재화
여기서 다루고 있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예수의 죽음과 신자의 영적생명이 어떤 관계에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예수 죽음의 현재화입니다. 오늘 이 사도에 의하면 우리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은 하나님께서 구원과 함께 그들의 마음속에 주신 복음 영광의 빛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영광의 빛은 재창조를 위한 빛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 “빛이 있으라” 하심으로 세계의 모든 창조를 시작하신 것처럼 또한 하나님 앞에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을 다시 살려내실 때에도 그 어두운 영혼에 먼저 빛을 주셔서 재창조 하시는 것입니다. 전자의 빛이 물리적인 빛이라면 후자의 빛은 영적인 빛이고, 전자의 빛이 하나님의 창조의 빛이라면 후자의 빛은 재창조의 빛입니다. 전자의 빛이 이 세상의 물질세계를 위한 빛이라면 후자의 빛은 영적 세계를 위한 빛입니다. 전자의 빛이 그냥 빛이라면 후자의 빛은 진리의 빛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영적인 빛과 함께 영혼의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적인 깊은 빛을 받고 나면 결국 그 사람이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며 시련과 고난의 삶을 이어가게 됩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때문인데 이 세계와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는 불안정성 때문에 그런 시련과 고난을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는 그가 이런 복음영광의 빛을 주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그는 복음에 의해서 재편된 인생의 구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거기에서 오는 세상과의 갈등, 이것이 끊임없는 시련과 고난을 가져옵니다. 예전에는 자기의 생각과 신념을 따라 살았지만, 그러나 뚜렷이 이 세상을 향하여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신념을 가지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인간이 자신의 행복이 침해당하고 자신에게 커다란 어떤 손해가 일어날 때 그런 일을 당하는 때에는 그렇게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경우에 자신이 당한 어떤 사상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 빛을 따라 살고 그 빛을 전하기 위해서 시련을 당하였던 사도바울의 이 경험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는, 그렇게 죽을 것처럼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예수의 생명을 충만히 나타내는 기회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A. 예수 죽음을 짊어짐
그 방법은 제일 먼저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죽은 예수의 죽음을 어떻게 짊어지겠습니까? 예수의 죽음은 크게 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육체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매달려 못 박혀 형벌을 당하심으로 예수님의 육체로서 죽으셨습니다. 또 하나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몸소 당하신 육체적인 죽음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 죽음을 대신 짊어지거나 반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적 죽음은, 예수님이 영적으로 죽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 죽음은 영적으로 그분을 믿고 사랑하는 모든 신자들 속에 스며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영적으로 우리가 죽는 것으로 재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죽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죽음은 2천 년 전 어느 날 어느 시에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난 객관적인 사건이고, 영적죽음은 그의 죽음의 의미가 우리 신자 안에서 주관적으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육체의 죽음으로써 죽으셨고,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에게 적용함으로써 그 영적 죽음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죽음은 예수 죽음의 현재화 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 안에서 주관화 하시는 것입니다. 아주 더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냥 죽으신 것입니다. 나와는 특별한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성령을 받음으로써 2천 년 전에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죽음이 내 안에서 주관화하고 현재화 되는 것입니다.
제가 평신도로써 교회를 섬길 때의 일이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는데, 아이 하나가 교회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심방을 갔더니, 이 아이가 꽤 은혜를 받았었는데 고개를 뚝 떨구고 “선생님 이제 저 교회 못 나갑니다.” “왜 교회에 못 나오니?” “엄마, 아빠 몰래 교회를 다녔는데요. 엄마, 아빠가 제가 교회 가는 걸 알아버렸어요.” “그런데?” “우리 집은 원래 모두 절에 다니는 불교 집안이에요. 그런데 그걸 알고 엄마, 아빠가 야단을 치면서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하셨어요.” 부모가 아이를 교회에 안 보내준다는데 거기서 선생님이 할 얘기가 없었습니다. 좀 더 나중에 성장하고 사회적인 경험이 있었으면 부모가 불교라고 해도 만나보자고 했을 텐데, 총각 때 저는 그런 정도의 담력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왔는데 견딜 수 없이 괴롭고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은혜를 받았던 모습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너무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님에게 그런 사정을 말씀드리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했더니 목사님께서도 별다른 답이 없이, “부모가 불교신자라서 예수를 못 믿게 하는데 김 선생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시며 남의 이야기 하듯 하시며 넘어갔습니다. 저는 견딜 수 없이 아팠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것이, 신학적으로는 그런 것을 잘 몰랐지만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때 우리를 바라보시며 느끼셨던 고통이었겠구나!’ 했습니다. 나중에 신학적으로 이것들을 깨닫고 나니까 그런 것들이 예수 죽음의 현재화였습니다. ‘내가 더 많이 기도했더라면 저 아이의 부모의 마음이 바뀌어서 저렇게 아이를 교회 나가지 못하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신자로서 많은 고생을 겪습니다. 그 고생,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원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돌아보면 어떤 사람이 나에게 악하게 해서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있고, 부모를 잘못 만나서 생고생을 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시집, 장가를 잘못 가서 미처 몰랐던 인간의 또 다른 면을 보면서 죽어라 고생하는 남편도 있고 아내도 있습니다. 그렇게 원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고생이 예수의 죽음을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고생을 하고 고통을 받는 것은 모든 인간이 다 느끼는 것입니다. 강아지 새끼도 맛있게 밥 먹을 때, 발길로 한 번 차버리면 아프다고 하며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감기에 걸리면 콧물을 흘리거나 눈물까지 흘리기도 합니다. 개인데도 말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그런 고통을 다 느끼고 심지어 식물도 그런 것을 다 느낍니다. 그런 것들을 깊이 느끼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는 마찬가지이지만 그 모든 고통이 다 십자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십자가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조건이 필요한데, 믿음과 성령입니다. 믿음과 성령으로써 내게 일어난 어떤 사건이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칼빈은 ‘십자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칼빈에 의하면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당하게 하시는 모든 시련과 고통을 말합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당하는 모든 고생이 다 십자가가 됩니까? 그 십자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을 통과해야합니다. 삶의 상황이 해석되어서, 그것이 자신이 짊어지는 그 무엇이 될 때에 우리가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신자들이 많은 고생을 당하지만 그것이 모두 십자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이미 믿음을 통해서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해석이 되고, 그 의미에 자기를 적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 전에는 어떤 나쁜 일을 당하면 그 일을 만든 인간을 찾아서 아작을 내고 싶어 해서 살인도 일어나고 폭행도 일어나고 보복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생기고 나면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면서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우 나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도, 그 의미에 자신을 적용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신앙의 성화에 도움이 되는 도구로 쓰이도록 활용하면서 사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믿음과 성령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성령이 있는 사람은 그런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면서도 오래 참고 견딥니다. 그래서 예수 죽음의 의미에 자신을 적용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욕하고, 결국은 그 모든 것들을 원망과 미움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설명을 한다고 했는데, 여러분에게 잘 전달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이해가 잘 안 된다고 하면, 설명이 모자라서라기보다는 경험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함으로써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고난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듯이, 여기에도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고 했는데, 여기의 ‘몸’은 희랍어로 ‘쏘마’라고 하는데, 성경에서 이 ‘쏘마’의 용례는 우리의 이렇게 만져지는 살덩어리인 육체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영적인 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몸’이라고 표현할 때, 영적인 교회는 만져지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쏘마’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의 ‘몸에 짊어졌다’라고 할 때의 이 ‘몸’은 손에 만져지는 키 170cm에 몸무게 얼마인 육체의 몸뚱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로서, 우리의 영적인 몸에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 몸에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면, 결국 그 죽음이 우리 안에서 내면화되고 현실화되는데 그렇게 죽음이 내면화되고 현실화 될 때, 그 죽음은 또 다른 죽음을 불러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인가를 예수의 죽음이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이는 것은 우리 안의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표현에 의하면, 어거스틴만이 아니라 성경도 그렇게 묘사를 하고 있는데, 우리에게는 옛사람과 새사람이 공존합니다. 우리 안에 두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 새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거듭나기 전의 자기를 중심으로 살려고 하는 옛 자아의 본성, 이것을 옛 사람이라고 하고, 거듭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려고 하는 새로운 본성을 새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사람의 본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음과 성령으로써 받아들일 때, 이 죽음을 우리의 몸, 우리의 영적인 사람이 짊어지지만 그 죽음은 우리의 거듭난 새 본성으로서의 새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기 전에, 그리고 우리 몸에 남아있는 옛 본성인 옛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진심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성령이 역사해서 그 의미가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면 하나님을 거슬러 살고자 하는 성품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았던 것이 마음 아프고, 그렇게 살지 않고자 하는 탁월하고 뜨거운 결심이 이 속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죄가 실제로 죽어갈 때, 그때 가장 효과적으로 옛 본성, 죄의 성향을 죽이는 일들이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믿고 성령이 역사할 때, 열렬한 기도의 참음으로써 가장 그 죽음이 현실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사실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살아있는 신자의 핵심이고, 이것이 개신교 영성의, 거슬러 올라가면 청교도의 영적인 삶의 심장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 얼마나 이러한 교리를 이해하고 거기에 자기를 드려서 끊임없이 죽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예수의 죽음을 짊어질 때, 가장 놀라운 일은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그냥 응답이냐, 응답이 아니냐 라고만 생각하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은 나쁜 일 일 뿐이라고만 생각을 하고, 기도로 이것을 쓸어내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이런 나빠 보이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적용시키게 하시고, 우리 영혼의 건강을 회복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자신이 살면서 당하는 많은 고난을 그렇게 예수의 죽음으로 해석해서 그렇게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살아나게 하는 데에 그렇게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아주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생명적인 교리입니다.
B. 예수 생명이 나타남
그러면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시련을 극복하고 예수의 생명이 드러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예수와 함께 옛 성품이 죽을 때, 새 성품은 가장 활발하게 살아납니다. 그래서 이 두 성품, 우리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옛 사람의 성품, 불신자들에게는 언제나 옛 사람의 성품만 남아있을 것입니다. 신자 안에서는 새 사람의 성품과 옛 사람의 성품이 다툽니다. 그래서 옛 사람의 성품이 죽는 것만큼 새 사람의 성품은 강해집니다. 바꾸어 말하면, 새 사람의 성품이 강해지는 것은 옛 사람의 죽음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의 죽음을 현재화 시켜서 믿음과 성령으로 그 죽음에 참여하고 옛 사람이 죽는 것만큼, 우리의 새 사람이 살아나는데 이것을 ‘은혜 살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선교는, 자기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의 커다란 충격이 되고 울림이 되는 것입니다. 저 정도의 시점에서는 저 사람을 용서 할 수 없는데 용서합니다. 저 정도의 시점에서 고통을 받으면 불의와 타협할 것이 분명한데 타협하지 않고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그 사람 속에 사실은 생명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나라의 역사를 보면 나라가 어떤 큰 위기를 만날 때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을 모두 불태워서 그 나라를 건지기 위해서 장렬하게 죽습니다. 그런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안일한 삶들을 다 버립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정신 속에 자신들과는 다른 어떤 생명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이 나라 사랑이든지 인류애든지 간에 말입니다. 이와 똑같이 그렇게 예수와 함께 죽고 사는 일을 통해서 옛 성품이 죽고 새 성품이 치열하게 살아남으로써 그 사람이 자신들에게는 없는 어떤 생명을 가지고, 그래서 자신들이 지향할 수 없는 또 다른 어떤 인생의 목표를 위해 산다는 것이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신자의 최고의 선교입니다. 이것은 바로 생명이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삼위일체의 충만한 생명과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사랑의 관계를 누리면서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주는데 이 생명을 충만히 누리면서 사는 것이 신자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신자의 삶은 이 세상의 불행을 향해서 두 눈을 질끈 감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견디다가 죽을 때까지 참는 것이 신자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을 즐거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애써야 합니다. 이 즐거움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자신이 죽는 죽음의 고통을 모두 추방하고 없애버리는데서 오는 즐거움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으로 그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래서 믿음과 성령으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끊임없이 죽는 고통을 통해서 일어나는, 이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영적인 기쁨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자면 이 생명은 중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미 주셨지만 성화를 통해서 계속 누려야할 생명입니다. 이런 생명을 충만히 누리기 위해서는 시련 속에서 간절히 주님을 찾고 예수 죽음의 의미를 자신 속에 적용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깨달음과 성령의 은혜, 열렬한 기도로써 그 의미를 자신 속에 타오르게 하는 은혜의 활동 없이는 이 죽음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과 성령으로써 예수의 죽음을 자신 안에 현재화할 때, 그가 당하는 많은 고난과 시련은 그를 내적으로 점점 더 순전하게 만들어서 예수의 성품을 닮아가게 만들고, 더 충만한 영적인 생명이 자신 속에 역사하도록 만들어주어 결국은 이 모든 시련을 은혜로서 이기게 만드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우리 안에 산다는 것은 생각 속에서 그냥 살아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생명이고 사랑입니다. 그 생명과 사랑이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짊어지고 우리의 옛 성품이 죽는 것과 그 죽음 때문에 우리의 거듭난 새 성품의 새 사람이 끊임없이 살아서 우리를 창조하고 구속하신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그 죽음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 하는 일입니다. 모든 문제는 이 생명이 우리 안에 충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울하고 슬픈 기색으로 인생을 사는 것은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만물의 찌끼같이 여김을 받았고 마음에 사망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는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이 그 속에 역사했으니 이것이 예수의 생명입니다. 여러분이 이 비밀을 터득하고 날마다 예수의 죽음을 짊어져 날마다 예수와 함께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십자가사경회 새벽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