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영광 그리스도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한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눅 2: 29-32).
성탄절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이미 성탄절이 기독교의 중요한 절기 라기 보다는 세속의 명절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정신 차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 뜻이 무엇이고, 그 계획이 어떤 것인지 알아서 올바로 신앙을 갖는 기회로 삼는다면 그나마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아기 예수가 성전에 올라가서 어머니인 마리아와 함께 결례에 참여하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여자나 남자 아이를 해산하면 칠일 동안 부정하고 그 부정한 상태에서 다시 삼십 삼일동안 그 상태가 계속되어 사십일 만에 깨끗케 되는데, 그 때에는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며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갖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도 이 율법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낳고 사십일이 되는 날에 예루살렘 성전을 찾게 되었던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여자로서 불결하고 더러울 것이 전혀 없는 영광스러운 일을 수종 들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아래 태어나셔서 온 생애에 율법아래 복종하신 정신을 따르려는 듯이 마리아와 요셉은 이 아기 예수와 함께 결례의 날에 성전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기의 몸으로 결례를 드리러 온 마리아와 함께 성전을 찾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오늘 기록된바 ‘첫 해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기 위하여 여기에 온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출애굽 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기 전에 애굽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들이 죽는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리하여 바로의 장자로부터 시작해서 짐승의 처음 난 새끼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는 전대미문의 징벌이 있었고,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름으로써 처음 난 자식들의 죽음을 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살아있는 처음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 바쳐 구속된 것이라 보고 이후로도 처음에 태어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어 바쳤으니 곡식의 처음 난 것까지도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되었던 것이죠. 이것은 최상의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려는 경건한 사상의 발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요셉의 집안에서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처음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 율법의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께 바쳐진 독자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에 올라가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님에 의해 구속받은 존재임을 하나님 앞에 성별의식 속에서 바치게 되었는데, 이것은 율법 속에 강제사항 이었다기 보다는 마리아와 요셉의 이 아이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미 이 예수를 출산하기 전에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임마누엘이라 하라. 이는 이 모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 낼 자 예수라.”는 계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마리아와 요셉은 이 아이가 자신의 개인적인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바쳐진 소중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이 결례와 함께 성별의 의식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한나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사무엘을 낳았을 때 그 어린 아이를 가지고 성막에 올라와 하나님 앞에 바쳤던 그 성별의식을 생각나게 해 주는 아름다운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 우리들의 눈길을 끄는 사람은 바로 이 아기 예수를 만나고 있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기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 그분을 직접 뵌 것은 이 시므온이 첫 번째는 아니었습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이 아기 예수께 와서 절하고 그분을 경배하였고, 또 들판에서 양떼를 치던 목자들도 기쁜 소식을 듣고 아기 예수께 경배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뵈온 첫 번째 인물은 단연 이 시므온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성전은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는 그림자였습니다. 그림자인 이 성전과 그 그림자의 표상하는 바의 실체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절묘하게 만나는 이 장면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뵈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가슴에 품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할 수 있는 이 영광은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지정된 사람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특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시므온이라는 사람에게 주어서 그 성전에서 성전의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뵈옵는 영광을 누리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특별한 지시를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즉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가 있었고, 이 지시를 받은 시므온은 개인적으로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위로를 갈망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이제 이 사람이 29절에서 32절 사이에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 찬송을 바칩니다. 이 찬송 속에 담겨져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오심의 의미를 살피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제일 먼저 그는 빛이요 영광이신 그리스도를 노래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 이니이다.”라고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이방의 빛으로 오셨다고 이 시므온은 노래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즉시 두 가지를 그들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는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약속이었고, 또 하나는 제사를 허락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둘 다 메시야를 통한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질지는 몰랐지만, 그들에게서 태어나는 한 아이가 하나님과 관계가 깨뜨려진 것을 복원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잃어버렸던 영광과 생명과 진리를 다시 찾도록 만들어주는 구속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우리처럼 명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메시야의 대망의 사상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을 해서 그 후에 모든 후손들에게까지 면면히 이어져갔습니다. 그리하여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고 낳은 후에 첫 아들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었으니, 이는 ‘구속받음’이라고 하는 뜻이었습니다. 무드셀라는 아이를 낳고 그 요란하고 소란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는 안식과 쉼을 꿈꾸었기에 그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지었으니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쉼’ 혹은 ‘안식’입니다. 이러한 간절한 메시야에 대한 염원들은 경건한 족장과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대를 이어가며 이어져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사제도 속에서는 짐승이 자기의 죄를 위해 죽어가고 그 짐승의 죽음과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과 잠시 대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거기로부터 영적인 생명과 은혜를 잠시 공급받는 특권을 누리면서 이 잠시적인 제사가 아니라 영원히 단번에 하나님과 자신의 막힌 담을 헐고 이 생명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의 방식으로 도입할 메시야의 출현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메시야에 대한 전망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서 완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이 땅에 있는 모든 나라와 온 백성들 전부 다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자기를 지으신 개별적인 목적에 부합하도록 인생을 살며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원하셨기에 사람의 몸을 입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오늘 이것에 관해서 이 시므온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중의 찬송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방의 빛이고 하나는 이스라엘의 영광이라는 찬송의 제목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빛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 전체의 사상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진리의 빛을 가리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 눈길을 끄는 것은 이스라엘의 영광이 먼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방의 빛이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시편 67편에 보면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 빛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춤으로 열방의 그 도를 알리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과 함께 이것을 순서를 바꾸어서 이방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장황하게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빛은 곧 진리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멀리 떠나 있는 이 땅의 많은 백성들은 엄청난 인류 문명과 문화를 자랑하고 기술의 발전을 이룩했지만, 하나님을 알고 창조의 목적을 이해하고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해야 할 인간 자신의 본분의 일에 대해서는 밤중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전에 주님을 모를 때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우리가 이 어둠속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어둠속에 이중의 속박아래 살았습니다. 하나는 신분의 속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완전한 흑암과 어둠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더듬어 알만한 그 무엇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섬겨야할 율법이 우리의 양심에 새겨져 있었지만, 우리가 참답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을 존숭하며 살기에 합당한 지식은 우리 안에도, 자연 속에도 충분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캄캄한 흑암과 어둠속에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분에 있어서 하나님께 진노를 사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거스르며 사는 막된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설혹 어떤 진리의 일부분을 발견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막상 그 진리를 따라 살고자 하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얽어매고 있는 죄의 법들이 우리를 자유 하도록 내버려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음과 영혼 안에서 종이 되었습니다. 율법과 모든 죄의 사슬에 매여서 우리에게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치 개가 밖을 향해 뛰쳐나가려고 하면 개 줄에 목이 끼이면서 울부짖듯이, 우리는 혹시 어떤 진리의 희미한 빛을 발견해도 우리의 영혼을 얽어매고 있고 우리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죄의 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속박 받는 상태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가 주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전에 진노의 자녀이던 신분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하나님의 어린 자녀들이 되었고,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얽어매고 있던 죄와 사망의 사슬들은 벗겨져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의 자유케 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해방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을 때 이것은 진리의 빛이 우리에게 한 일이었고, 우리는 사람의 혈통으로 따르면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이 자유케 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때 우리가 어마어마한 진리의 엄청난 것들을 우리들이 붙들고 이해하고 공부하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예수를 만났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의 이 사건이 우리에게 어떻게 놀라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주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진리에 대해 가르쳐 주시러 오신 분이 아니라, 진리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오신 교사가 아니라 진리 자체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것은 곧 진리의 화육이었고, 그래서 그분이 가르치신 것만이 진리가 아니라 그분이 사신 삶도 진리의 빛을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그분의 모든 언행을 통해 나타난 그분의 성품에 대한 지식도 빛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람들은 그분께로 비쳐오는 그 찬란한 지혜의 빛, 그 진리의 빛 때문에 결국은 이 신분으로부터 속박을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 영혼과 정신에 얽매였던 이 사슬에서도 해방 받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자유를 누리게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들이 한때는 이방인이었지만,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 그리스도 예수의 빛을 전해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를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놀라운 사실을 상기하면서 우리는 선교의 소명으로 이 성탄절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이죠. 아기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이런 위대한 선교의 소명으로 우리를 불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빛에 소외된 채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들에게 누군가가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과 이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진리를 전해주기만 하면 우리보다 더 헌신적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더 뜨겁게 주님을 믿으며 이 땅에 있는 모든 열방을 위하여 신명을 바칠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잠자고 있는 교회들이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지 아니함으로 이 땅에는 아직까지도 이 어둠 가운데서 살고 있는 많은 족속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 빛을 얻은 모든 사람들이 이 빛의 참다운 가치를 안다면 모두 이 선교에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의 그칠 수 없는 소명이고 모든 성도들이 코끝에 호흡이 살아있고 입술에 혀가 움직이는 한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예수가 바로 우리의 선교의 모든 주제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상 문명의 빛을 받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에 비참한 삶을 살았던 수많은 인종들을 알고 있습니다. 파퓨아뉴기니아에 있는 어느 원주민들은 지금도 아이들이 열병에 걸리고 죽음을 오가는 혼수상태에 빠지면 호숫가에 데려가서 입을 벌리고 모래를 막 쳐 넣어서 먹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 아이를 괴롭히고 있는 정령을 쫒아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죠. 문명의 빛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이렇게 불쌍하다면, 이 영적인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영혼의 운명은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아직까지도 이방의 어둠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종족과 미전도 종족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그 복음, 그 진리의 빛을 알고 그것이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우리는 이방의 빛이 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를 정직하고 진실하게 뜨거운 사랑으로 전해야할 선교적인 소명에 불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엄숙한 선교의 소명이 성탄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는 진지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화육의 소명을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교회를 추슬러 이 선교의 소명에 헌신하고 충성스럽게 세상 끝날 까지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내년부터 새롭게 우리의 선교의 의지를 다지고 더 많은 여러분들을 이방의 땅에 보낼 것입니다. 이 가치 있는 일들을 위해서 지금부터 선교비를 마련하십시오. 올 여름에 더 많은 사람들을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방의 땅에 보내고 또 보내고 또 보내어 단 일주일만이라도 우리가 만난 그리스도 예수, 우리를 죄의 어두움과 암흑의 사슬에서 건져주신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 그분이 그들에게 최종적인 행복이라고 우리들이 온 맘을 다해 외치고 전할 수 있는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오신 성탄절에 새롭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이런 위대한 선교적인 전망을 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기 예수 이분을 통해서 온 땅과 온 만민들에게 전해질 하나님의 진리의 빛, 그것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나타날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이 훨씬 큰 것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영광보다는 이방의 빛을 먼저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이어서 이런 이방의 빛이 이스라엘의 영광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성육신의 맥락에서 시므온은 노래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 이니이다.”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제가 고등부를 지도할 때에 어떤 학생이 저한테 와서 물었어요. “전도사님, 세계사 교과서에 보니까 이스라엘 역사가 두 줄밖에 안 나오는데, 왜 교회 오면 계속해서 이스라엘만 가르칩니까?”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스라엘보다 위대한 나라가 많이 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에 우리 인류를 구속하실 계시를 담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의 해석 속에 묻어있는 그 지식들이다. 그 지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 인류의 구원을 알려주는 가장 유일한 지식들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수단으로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목하는 것이다.”하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실제로 이 세상의 역사를 보면 중국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역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대륙의 역사였습니다. 로마는 그 영토와 권력에 있어서 이스라엘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그런 장대한 나라였습니다. 애굽의 영광은 또한 어떻게 이스라엘의 영광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코딱지만 한 나라였습니다. 겨우 경상도 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땅덩어리였습니다. 거기에서 일어난 그 일이 의미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가문의 사건들을 통해서, 인물들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실 위대한 계시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기서 우리들이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숙고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는 신학적인 혼란에 대한 선명한 판단과 빛을 던져주는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가문을 확장시켜서 만드신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에는 한 사람 한 사람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담으셨고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한 믿음의 조상을 택하시고 그의 가정을 통하여 진리의 계시를 보존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하나님이 민족을 삼으셔서 이제 그 나라를 친히 통치하심으로 하나님의 교회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구속의 전망의 지식들을 거기에 담으셨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모든 지식들을 하나님이 담으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기록으로 남아서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죠. 구약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림자로 남겨주셨던 그 수많은 메시야에 대한 대망, 그리고 제사 속에서 표상되고 있는 그런 전망, 그리고 성전을 통해서 바라보고 있는 그 성전의 완성으로서의 구속, 그리고 하나님이 택하신 가나안 땅을 안식처로 삼으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안식과 교회 안에서의 하나님과의 평화, 마지막에는 천상의 나라에서의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안식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그림자들은 하나의 실체를 향해 줄달음쳐 달려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시므온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 예수였던 것입니다. 이것으로서 이스라엘은 충분히 자기의 소임을 다한 것입니다. 오늘날 선교를 부르짖는 어떤 사름들은 “Back to Jerusalem”이라는 구호를 사용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구호는 개혁주의 정통파 신학과는 거리가 먼 세대주의적인 성경 해석에서 나온 그러한 catchphrase인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죠.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이 되어서 유럽을 지나 미국을 통해 아시아로 들어왔기 때문에 중국대륙을 가로지르고 이스라엘 땅을 지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전해지면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날 데 이것이 마지막에 있을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라고 보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세대주의적인 성경 해석인 것입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이 길거리에서 가끔 받는 ‘깨어라, 파수 대’ 같은 데서 이야기하는 그런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이단사상 속에서 발견되는 세대주의적인 성경 해석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함으로서 달려왔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셔서 그 모든 것을 성취하심으로 이스라엘은 자기의 소임을 다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이쪽에는 수많은 역사들이 줄달음쳐오게 됩니다. 이것이 육적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육적 이스라엘의 이 수많은 역사가 한결같이 하나의 지점을 향하여 달려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 도착한 지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고 이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이스라엘은 삼킨바 되어서 이제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영적인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이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씨앗으로 해서 다시 새로운 이스라엘이 확대되어서 뻗쳐 나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약 그리스도의 교회이고 이 백성들이 영적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그만 땅덩어리, 지독히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든지 말든지 그거하고는 인류의 미래의 종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이슬람의 정부가 들어서든지, 이스라엘 정부가 들어서든지, 둘이서 쌈질을 하든지 그것과 세계의 종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날은 그리스도의 정해진 날에 올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위해서는 복음이 중국에도 전파되어야 하고, 인도에도 전파되어야 하고, 이슬람 사회에도 전파되어야 하고, 소련에도 전파되어야 하고, 아주 미개한 아마존의 땅까지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 그런 획일적인 문제가 아니라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이 복음을 편만하게 하여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믿을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선교적인 계획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요. 반드시 그것이 “Back to Jerusalem"의 구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시므온이 바라보았던 이 이방을 비추는 빛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인 이스라엘의 영광은 바로 신약 그리스도의 교회를 전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교회의 영광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것이 교회의 영광입니까? 중세의 교황주의자들은 왕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그 나라를 교황에게 바치고 교황은 그 모든 제왕들 위에 군림하는 그것을 교회의 영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하여 수많은 세속적인 권력이 교회 안에서 행사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서 수많은 세상적인 권력과 교회가 가지는 영적인 권세가 혼돈되는 이런 비참한 결과들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자본주의에서 생각하는 교회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교회의 큰 빌딩, 어마어마하게 소유하고 있는 교회의 재산들, 그리고 교회의 구조와 틀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수많은 회중들, 이것이 교회의 영광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이래로 자기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내건 구호는 ‘더 많이, 더 넓게, 더 높이, 더 크게’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흉내 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왕들마다 나라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지혜로운 지혜자도 자기의 잠언 속에서 이 세상의 임금의 영광이 백성이 많은 것이라고 노래할 정도였으니 이 죄의 속임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약의 이스라엘인 이 그리스도 교회의 영광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영광은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 계심으로 모든 하나님을 모르던 백성들이 교회 앞에 나아와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그리스도가 이 모든 우주의 통치자임을 알고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어주는 그 힘이 바로 교회가 가진 영광의 힘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영광이 그리스도 때문에 교회 안에 깃들게 되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교회의 영광은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소유한 교회마다 영광을 가진 것입니다. 거기가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런 외양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모이느냐, 세속의 권력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느냐, 이 세상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느냐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의 권세는 영적인 권세이고 그 권세는 그리스도를 통해 시행되는 권세인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에 있을 때 교회는 이 땅에, 이방에 찬란한 빛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저에게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영광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떤 교회에 그리스도가 없겠으며, 교회마다 그리스도가 모두 있다면 영광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지 않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질문을 하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우선 첫째로는 그리스도의 머리되심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되심은 우주적이고 보편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교회의 머리십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모든 신실한 신자의 영적인 연합의 머리가 되십니다. 이 머리가 되심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의 머리되심을 두 가지로 실현하십니다. 첫째는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생명이시기 때문에 생명과 은혜를 그 모든 자기의 지체들에게 흘려보내심으로써 영적인 통일체를 이루게 하시는 것이죠. 교파는 좀 달라도, 예수 믿게 된 동기는 달라도 그리스도 앞에 진심으로 참회하고 그 복음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신실하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 앞에 늘 깨뜨려지며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그리하여 그 안에서 몸의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또한 그리스도는 그 머리되심을 통하여 당신의 교회들을 친히 통치하심으로써 하나의 질서를 구현하심으로, 은혜의 통치를 실현하심으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 삼으신 것을 드러내십니다. 그리하여 모든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그분의 통치에 복종하고 순종함으로써 믿는 사람들의 모양은 달라도 그들이 모두 통일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이상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교회가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되심을 통하여 온갖 은사를 교회에 내려 보내심으로 그 은사들 안에서 교회는 각각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게 되는 것이지요.
둘째로는 이러한 사실들은 다음과 같이 답변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머리가 되신다면 그 보편교회의 머리되시는 그 이상을 이렇게 작은 공간 안에 있는 교회를 통해 보이는 교회 안에서 친히 보일 수 있도록 하나님이 드러내십니다. 왜냐하면 보일 수 있도록 드러내는 그 통치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는 입증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은혜를 입증하시고, 보이는 교회를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보여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요, 의도였던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합니다. 어느 교회도 그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에서 소외되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에도 그리스도의 머리에 붙어있는 지체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 사람 안에 내주 하십니다. 심지어는 그가 불순종하고 심지어는 그가 배교에 가까운 죄를 지을 때조차도 예수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그는 예수를 버려도 예수는 그를 버리시지 않는 언약에 충실하신 그리스도이기 때문이죠.
이 문제와 관련해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사실들을 오늘 가르쳐 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와 신자의 불순종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은혜의 부패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한때는 많이 받았는데 내가 게으르고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죄를 지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죄에 의해서 오염되고 부패해서 결국은 은혜가 사라진 사람으로 발견되는 영혼의 침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관념들은 대개 이런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마치 음식물과 같아서 순결하게 여러분들이 분여 받았는데, 여러분들의 불순종과 죄는 곰팡이와 같아서 그것들을 집고 마음에 품게 되면 그 순결한 음식물과 같은 은혜에 부착되어 그 순결한 은혜를 계속 썩게 만들면서 결국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그러한 상태가 은혜의 부패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러한 여러분들의 기존의 생각은 성경의 진리를 심각하게 오해한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은혜의 힘은 매우 미약하고 죄의 힘은 매우 위대하게 되어서 그 죄는 끊임없이 은혜를 쫒아내는 데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공정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죄의 힘이 더 크고 강합니까? 은혜의 힘이 더 크고 강합니까? 죄가 파멸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죄의 힘이 강력하게 느껴지지만, 그러나 구원을 얻고 은혜 안에 들어가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은혜의 놀라운 능력은 죄의 능력과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사망의 능력은 생명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부활의 능력을 노래하는 가운데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냐? 사망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리라.”고 노래하였던 것이지요. 이것은 말일에 우리의 영화 속에서만 일어날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신자인 우리의 삶속에서 경험되는 것들임을 우리가 가슴에 깊이 새길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자! 죄가 아무리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은혜의 힘은 그것보다 위대합니다. 죄의 힘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하고 주님께 모독하는 삶을 살던 그 사람을 바꾸어서 생명과 은혜가 그를 고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리고 심지어는 순교도 마지않는 헌신의 길을 걷게 할 때에 은혜가 이긴 것입니까? 죄가 이긴 것입니까? 어느 힘이 더 위대합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우리의 죄와 불순종이 곰팡이처럼 그것을 잠식해서 들어가서 파괴한다는 이런 식의 생각은 신학적으로 바르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에 대한 성경적인 설명은 무엇일까요? 잘 들으십시오. 죄와 불순종이 은혜에 곰팡이처럼 붙어서 은혜를 썩고 부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혹시 그런 표현을 쓴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은유적인 표현일 뿐이고 실제에 있어서는 이러한 이치입니다. 즉 죄가 은혜에 붙어서 은혜를 소멸하거나 파멸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마음으로 죄를 짓고 그 마음이 발현되어 행동으로 나타나면 그만큼 하나님이 신자 안에 있는 은혜를 철수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철수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마음으로 죄를 짓거나 불순종하면 우리의 죄가 은혜를 쫒아내는 게 아니라 그런 죄를 보시면 하나님이 공정한 판단으로 그 분량만큼 은혜를 거두시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그런 결론을 성경적인 결론이라고 생각하는지 여러분에게 입증까지 해 드리겠습니다. 맨 처음 인간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를 생각해 보십시오. 온 세계는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큰 천체로부터 미생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아주 아름다운 연결을 이루고 있었고, 그 연결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로 통일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만물의 충만함이라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충만한 것들이 인간 안에도 있었기 때문에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질서의 연결 안에서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진리와 의와 거룩함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온전히 담지하고 충만한 가운데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였습니다. 그때에 범죄가 이 모든 창조의 영광을 파괴한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맺은 아담이 범죄 하는 것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창조 세계에 있는 모든 영광과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신 의와 거룩함과 진리를 한 번에 거두어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자신의 기독교강요에서 인간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주권적인 의지로서 이 세계 안에 펼쳐보이셨던 당신의 영광을 당신 자신에게로 회수하셨다고 기록한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떠한 병든 교회도 그리스도가 머리이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여러분들이 가장 극악하게 범죄 하는 그 순간에도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그것은 불변합니다. 그러나 그 그리스도는 충만히 여러분들 안에 계셔서 온전히 실제적인 여러분들의 마음과 삶 안에서 머리되실 수도 있고 명목상으로만 머리되실 수도 있습니다. 교회의 영광은 모인 그 성도들이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하게 다스림을 받아 실제적인 마음과 삶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머리이시고, 주인이시고, 통치주이시고, 전능하신 창조주이심을, 구속 주이심을 온전히 드러내는 그것이 바로 교회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로 자기 자신을 충만하게 옷 입고,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가 자기의 형식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삶 안에서 완전한 방식으로 온전한 머리되심을 자신이 충만히 누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될 때에 그 교인들 하나하나가 모인 교회는 영적인 이스라엘인 신약 그리스도 교회의 영광이 되는 것이죠. 이 영광은 이방에 그리스도를 빛으로 나타나게 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중요한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과 그리스도 교회의 참된 번영이에요. 그리스도 교회의 참된 번영은 곧 교회가 이런 그리스도의 영광을 충만하게 지닌 것이고 이렇게 그리스도 영광을 충만하게 지닐수록 그리스도의 왕국이 확장되게 되는 것이죠.
자! 보십시오. 이방의 어둠 가운데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선교의 손길을 뻗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골에서 복음의 빛도 없이 하나님을 모른 채 서서히 죽어가는 수많은 노인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도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들은 외롭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복음화 되었다고 하는 이 땅에 살면서도 그들은 철저하리만치 복음에 소외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구원할 강력한 소망에 불타야할 시골 교회들은 자신을 지탱하기도 힘겨운 현실을 버겁게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우리 동포들이 있는 그 땅에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역사회는 또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고 하지만, 인구 4800만 중에서 매 주일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480만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요. 그러면 이 사람들도 우리에게 이방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기를 간절히 기대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과 그들의 섬김을 통해 이방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게 하는 것은 연과 연줄의 밀접한 관계인 것입니다. 바람이 잘 부는 날에 강변에 나아가 광활한 고수부지 위에서 연을 띄운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전선줄 하나 없는 광활한 하늘 창공에 연이 차고 오릅니다. 커다란 연이 꼬리를 펄럭거리면서 하늘 높이 솟아오릅니다. 그때 연을 더 높이 솟아오르게 하기 위해서는 줄을 풀기 전에 먼저 팽팽하게 잡아당겨야 합니다. 마치 날아오르는 연을 못 날아오르게 잡아당기듯이 그렇게 팽팽하게 줄을 잡아당기면 바람의 저항은 점점 강해지고 위로 솟구치려는 연의 힘은 실 줄을 팽팽하게 만듭니다. 그때 서서히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람을 맞으면서 연은 높이 치솟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긴장이 없이 연줄을 마냥 풀어놔 준다면 그러면 결국 연은 연 자체의 무게에 비해서 잡아당기는 실에 의해서 바람의 저항을 받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땅에 떨어져 버리는 것이죠.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이 진실한 은혜의 경험 없이 선교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도대체 거기에 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가장 염려되는 사람들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진리를 전하겠다고 까부는 사람들, 자신도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영광을 이방인에게 가르쳐 주겠다고 나서는 자만심에 가득 찬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팽팽하게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편으로는 끊임없는 부르심과 소명을 향하여 하늘을 치솟아 올라 만방에까지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께 수종 들고자 하는 이 철저한 헌신의 소명과, 그리고 그것을 잡아당겨 하늘 높이 솟아오르게 하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의 하나님의 위대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이 은혜의 경험들, 예배 속에 임재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로 하여금 이 영광을 알지 못하는 이방의 백성들을 향해 눈물 흘리게 만듭니다. 제가 말씀사역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는 일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정말 제대로 만나게 되면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영혼에 대한 깊은 염려와 영혼에 대한 깊은 애정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간절히 빌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더 많은 선교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교회는 더 높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 속에서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친히 아기 예수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을 표상하는 성전과 그 표상의 실체인 완성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만나는 이 절묘한 순간에 아기 예수를 뵈올 뿐 아니라 그를 품에 안고 하나님을 향해 찬송하게 되는 특권을 누린 이 시므온은 도대체 누구 길래 하나님이 그런 놀라운 영광의 기회를 이 사람에게 주셨을까? 라고 말이죠.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라고 말입니다. 그는 의롭고 경건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고, 성령이 그 위에 계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사람의 특징은 주님의 구원을 갈망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공부를 하고 가르쳐보면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의 현저한 차이가 있어요. 물론 지능에도 차이가 있겠지만, 공부하는 태도의 차이에요.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안할 때도 하는 것 같고 할 때도 안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고등학교 아이들 집에서 맨 날 책가방 들고 어디 가니? 도서관 가요. 하고 나서면 자기 아들딸들이 어마어마한 공부벌레들 인줄 아는데 나중에 시험 봐 보면 알아요. 그런데 공부를 정말 하는 아이들은 절대적인 시간에 있어서도 많이 하겠지만, 그것보다도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무서운 집중력이에요. 놀라운 집중력이에요. 그래서 공부할 때와 안할 때의 구별이 아주 분명해요. 할 때는 하는 것처럼 보이고 안할 때는 안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못하는 애들은 할 때도 안하는 것 같고 안할 때도 하는 것 같아요. 그게 차이에요. 그러면 우리들의 공부의 대상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사물의 이치 아니에요? 그런 사물의 이치, 드러난 사물의 이치를 공부하는데도 이런 비상한 정신의 집중이 필요하다면 우리의 신앙의 세계에 있어서는 얼마나 많은 집중이 필요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보입니까? 예수님을 만질 수 있습니까? 성령님이 무슨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물건과 같은 것입니까? 은혜의 세계, 은혜의 세계 하는데 누가 은혜의 세계를 본 사람이 있습니까? 죄, 죄 하는데 누가 죄를 만져본 적이 있습니까? 그 인과 관계를 우리들이 알기나 압니까? 이 모두 정신과 영혼에 속한 세계에요. 그러니까 더욱더 비상한 집중이 필요하다고 하는 거죠. 하나님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은혜를 베푸시지만,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거죠. 그리고 그 집중이야말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거룩함과 경건의 최상의 표현이에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를 하는데 마음은 딴 데 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 놀리는 것이에요. 예배는 드리는데 정신은 저당 잡혔다. 이건 하나님이 싫어하는 거죠. 봉사하는데 몸은 거기 있지만 마음은 딴 데 가 있다. 그건 삯꾼이죠. 삯꾼이 별거 아니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화를 보면 어떤 집은 양을 수 천 마리를 쳐요. 그럼 그게 본업이 되잖아요. 그럼 그걸 쳐서 온 식구가 거기 매달려서 젖 짜고 그 고기 팔고 털 팔아서 먹고 살면 충분히 본업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에요. 한 이십 마리 정도밖에 안되면 이게 전업을 할 수가 없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이백 마리, 이천 마리로 마음대로 키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양은 돌봐야 되잖아요. 양은 자꾸 새끼를 낳으니까. 그러면 그런 사람들끼리 모이는 거예요. 한 열가정이 모여서 삯꾼을 하나 사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삯꾼한테 이 양들을 돌봐달라고 부탁을 하고 월급을 거두어서 그 사람에게 주는 거예요. 삯꾼이 뭐가 나빠요? 삯꾼이 월급을 받았으니까 일을 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삯꾼이라고 해서 양 먹이도 안주고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잡아서 불고기나 해먹는다고 생각하면 안 되죠. 시간되면 가서 먹인다는 거예요. 그런 일 할 때는 선한 목자나 삯꾼 목자나 똑같아요. 그런데 삯꾼의 마음은 품삯에 있어요. 품삯을 받기 위해 풀을 베고 그 양떼들에게 꼴을 먹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품삯을 받아야 되겠다고 하는 것보다 더 큰 희생을 양치는 일이 요구할 때, 즉 맹수가 밤에 나타났다든지 이럴 때에는 도망가는 거죠. 그 사람들이 직업이 잘릴지언정 도망가는 게 낫지, 안도망가고 맹수하고 붙으면 생명이 잘리는데, 직업이 떨어지는 게 낫지 목이 떨어지는 게 낫냐는 거예요. 그게 삯꾼이에요. 삯꾼이 흔히 있을 수 있는 거라는 거죠. 그러면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순장이라고 칩시다. 구역장이든 순장이든 여러분들이 영혼을 돌보는 사람이라고 칩시다. 그런데 몸은 영혼들을 돌보고 전화도 하고 좋은 얘기도 하고 밥도 사주고 성경공부도 가르치고 하는데, 마음으로 그 지체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삯꾼 순장이에요. 삯꾼이라는 거죠. 차이가 뭐예요? 마음이 거기에 없는 거죠. 여러분이 교사라고 해봐요. 새 가족 위원이라고 생각해봐요. 전도 위원이라고 생각해봐요. 그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마음이 거기에 집중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의 섬김 속에서 갈망하지 않으면 그게 삯꾼이에요. 삯꾼이 거기만 있는 게 아니에요. 부모도 자식을 낳아 놨는데 사랑하지도 않고 위해서 기도해 주지도 않고 돌보지도 않고 그냥 내버려 두고 애정이 없으면 그게 삯꾼 엄마에요. 그리고 남자들은 직장에 가서 일하면서 가족을 위해 뼈 빠지게 희생한다고 하는데 그게 거짓말이에요. 무슨 가족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해? 자기 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 그럼 직장에서 일할 때 가족을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일해? 거짓말을 해도 침이나 바르고 이야기해야지. 무슨 가족을 위한 희생이야? 그럼 다 큰 남자가 가서 직업 활동 안하면 뭐 할 건데? 그럼 혼자 살면 그거 안할 거야? 직장 안 다닐 거야? 그러니까 결국은 다 쓸데없는 이야기고 자기가 살아야 하는 인생이기 때문에 살아가는 거라는 거죠. 그리고 돈은 아내 통장으로 들어가. 그렇게 먹고 살아. 그렇게만 하고 그게 가족에 대한 모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하면 그건 삯꾼 애비라는 거죠. 삯꾼 자식도 있어요. 자기네 아버지를 자기 돈 대주는 물주로나 알고 자기 엄마를 자기 밥 해주는 식모 정도로 알면 그 자식이 삯꾼 자식이지, 그게 진짜 제대로 된 참된 자식이냐는 얘기죠. 그 차이가 뭐가 만들어 내는 거요? 결국 마음이 만들어 내는 거예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집중된 마음, 그것이 삯꾼과 참된 사람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몸이 여기에 나와도 마음은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고 주님의 구원을 보기를 바랐던 경건한 사람 시므온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겠다는 진실한 마음의 사모함이 없다면 제가 왜 이렇게 목이 쉬도록 여러분들에게 외쳐요?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성도가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아요. 그게 주님을 뵈옵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에요. 하나님은 당신에게 집중된 심령을 가장 고상하게 생각하세요. 그리고 당신을 향해 온전히 집중된 그 마음이 당신이 오르실 보좌라고 생각하세요. 그래서 큰 죄 안 짓고 잘 살아왔지만 마음이 나누어진 사람보다는, 죄 가운데 살아왔지만 하나님께 집중된 마음으로 뉘우치는 사람들이 주님을 더 잘 만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 마음이 우리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꾸어 놓는 놀라운 원인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 자체 안에 그런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보실 때 주권적으로 철수시킨 은혜를 다시 보내시는 거예요. 자기가 그 은혜를 빼앗고 일으킨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그런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당신의 은혜를 주권적으로 직접 영혼들에게 보내어 주시는 거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철수시킨 은혜를 다시 복구시킴으로써 다시 은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의 은혜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가 순종할 때도 드러나고 우리가 불순종할 때도 이 은혜에 대한 주권을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이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열방의 구원을 바라던 사람이었어요. 그런 간절한 열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칼빈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이 시므온이 겨우 어린 아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고 이렇게 기뻐하고 감격할 수 있었다면, 그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질 그 구원을 보고 감격할 수 있었다면, 이미 그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본 우리들은 얼마나 더 감격하고 기뻐해야 합니까?” 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자의 모든 마음의 미끄러짐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이 구원, 우리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이 성육신의 사건을 의미 없게 생각하는 데서 모든 마음의 미끄러짐은 시작이 되는 것이죠. 주님의 구원을 간절히 갈망하던 시므온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유독 그 성전에서 성전의 실체이신 그리스도 예수와 만나는 이 놀라운 순간의 특권을 누리게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당신을 앙망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특권인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긍휼에 풍성한 하나님이시고, 사도가 노래했던 것과 같이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갈라지고 나누어진 마음으로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 앞에 집중하지 못하는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이 은혜에 있어서 매우 인색하시고, 하나님은 은혜 베푸시는데 있어서 매우 엄격한 분이시고, 절대로 후한 분이 아니시라고 하는 인상을 갖게 됩니다. 사실은 잘못된 인상이 가져다주는 편견인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인색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시므온은 그래서 예수께 매인 사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노래했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십니다.”놓아주신다는 이 말은 노예를 해방시키는 동작을 가리킬 때 쓰던 히랍어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지시하심을 받아 주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너는 반드시 살아서 그리스도를 뵈옵게 될 것이라고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이후로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이것 하나에 매여서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뵈옵고 그분의 영광을 알게 될 그날을 대망하며 자신의 먹고 마시는 모든 이유가 그리스도가 되도록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줄에 매인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시므온에게 무엇을 해 주었습니까? 다만 그는 바라보면서도 즐거워하고 기꺼이 아직 오지도 않은, 오실 예수, 그것도 아기 예수께 매여서 일평생을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사람으로 살았다면 이미 오셔서 우리를 위해 충분히 당신의 사랑을 보이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신 그리스도 예수 그분의 사랑을 이미 증거 받았던 우리는 얼마나 더 예수에 매여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누구께 매여 있습니까? 정말 누구에게 매여 있기는 매여 있는 것입니까?
성찬의 표상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진리를 매우 잘 보여 줍니다. 성찬에서 우리에게 상징으로 제공되는 것은 포도주와 떡입니다. 이 떡은 우리 몸 바깥에 있을 때는 떡과 우리의 살이 구분됩니다. 포도주도 우리 몸 밖에 있을 때는 포도주는 포도주고, 우리의 피는 피 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먹고 우리 안에서 소화될 때에 이미 그것들은 우리의 몸 전체에 퍼져서 포도주와 떡의 구별이 불가능해집니다. 우리의 모든 살 안에 그 떡이 있고, 우리의 모든 피 안에 그 포도주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몸에서 혼연 일체를 이루는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영혼 안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고 나는 나지만, 그분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안에 계실 때에 우리 중 어느 영혼과 정신, 우리 몸의 한 부분도 그리스도 예수를 피할 수 없고,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일체를 이룬 연합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끊임없이 떡과 포도주를 먹어야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육체의 원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그리스도를 양식과 음료 삼아서 끊임없이 먹음으로써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은 그분의 몸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몸 안에서 주님과 혼연 일치를 이루며 그리스도 예수의 보이지 않는 몸의 한 부분으로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연합,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지요. 시므온은 단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았을 뿐이지만, 우리는 이 예수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고 죽으시고,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져 내시고, 우리를 그 생명 안에서 하나로 연합하여 우리를 주님의 한 몸을 이루게 만드신 것이죠. 그 안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바로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한 몸으로 만드신 것이죠. 그러면 우리의 본분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를 이렇게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고 그 영적인 연합 안에서 살므로 사망에 의해서도 삼켜질 수 없는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일부가 되도록 만들어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며 그분을 생각하고 그분을 위해서 섬기고 그분께 봉사하며 사는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앞에 살아야 할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 매이는 것 말고 또 달리 매어야 할 그 무엇이 우리에게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이 성탄의 계절에 다시 한 번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 예수께 매인 사람인지를 돌아보고, 다시 한 번 복음 진리의 줄로, 성령의 은혜의 끈으로, 우리를 그분이 없으면 우리의 인생이 아무것도 아닌, 우리의 보화요, 우리의 모든 자원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우리를 붙들어 매어, 예수께 매인 사람들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