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운 성탄선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마2:11)
동방박사 세 사람의 간절한 소원은 그 아기 예수께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그분께 경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별빛이 사라진 어두운 밤하늘 아래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자기의 갈 길을 물어야 하는 난관이 있었지만 진심으로 그분을 경배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문득 다시 그 아름다운 별을 나타내게 하셔서 그들의 갈 길을 인도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어디서 태어날지 모두 알고 있는 유대 사람들조차도 찾지 못한 아기 예수 나신 곳을 찾을 수 있었으니 하나님께서는 언약으로 치면 약속의 백성이오, 혈통으로 치면 예수께서 태어나실 히브리 민족들에게 메시아의 탄생을 먼저 알리시지 않으시고 이방에서 온 동방의 박사들에게 알리셨으니 이 자체가 이미 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의 혈통이나 가문에 매이지 아니하고 주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미치며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자기의 친 백성으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들은 하늘 위에 멎은 그 별빛이 찬란하게 내리비치는 한 곳을 향해 찾아가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은 마구간이었습니다. 아마 이 사실이 이 동방 박사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하늘의 징조조차도 그분의 탄생을 알려야 할 만큼 중요한 인물이 태어나셨는데 그래서 그 태어나신 곳을 찾아왔는데 그곳이 마구간이었다니 그들은 어쩌면 충격과 함께 약간은 실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유대인의 왕이신 그분이 그렇게 비참한 마구간에 태어나셔야 했는지 아마 그들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비천한 마구간에서 그분이 태어나셨다는 것, 그분이 거친 강보에 쌓여서 말구유에 누이셨다. 라고 하는 그 사실이 이들 속에 있었던 경배하고자 하는 욕구를 소멸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마구간이나 말구유, 지저분한 환경이 아니라 거기에 계신 그분이 유대인의 왕이오, 만왕의 왕이시라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아기 예수를 보자마자 고귀한 동방의 박사들이 그 마구간 지저분한 곳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아기 예수께 절하며 경배를 올렸습니다. 이때에 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산 넘고 물 건너 먼 길을 오로지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자 하는 한 소망을 품고 걸어왔기 때문에 이 아기 예수를 만나고 그분께 절하는 그 순간에 그들의 마음에는 큰 기쁨이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들은 약속으로 치면 외인이고 혈통으로 치면 이방인이었는데도 정말 만왕의 왕으로 태어나신 예수그리스도를 진심으로 경배할 마음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들에게 먼저 아기 예수를 뵐 수 있는 영광과 특권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지위에 높고 낮음, 재산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지식의 많고 적음에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사는 사람인가. 그 사람의 인생에 진실한 목표가 무엇인가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황금으로 만든 면류관을 쓰고 짐승처럼 살다가 죽어간 통치자들과 주권자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지금 누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겠으며 그들의 아름다운 영화와 영광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셔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두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이고 스치고 사라져 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된다. 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교회를 다닐 뿐 아니라 진실한 신자가 되고 정말 리얼 크리스천이 될 때 그때 비로소 그가 참 하나님이 이 세상에 두시고 싶은 그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사람의 위치와 본분을 자각하고 자기 때문에 하나님께 티끌만큼이라도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가장 커다란 목적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렇게 참 사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 앞에 한사람의 진실한 경배 자로서 그래서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고 구원받아서 여기에 살아있는 동안에 어떻게 하든지 내가 어떤 신분에 있고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든지 자신의 삶에 놓인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경배자가 되어서 그분께 절하고 예배하고 그분을 높이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 때문에 행복해하면서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사는 그것이 바로 인생에 참된 본분입니다.
바로 이 동방 박사들이 그런 기쁨을 잠시 맛보았습니다. 아기 예수께 절하며 그들이 알고 있는 복음적인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 복음적인 지식은 지극히 작은 것이었지만 그들은 이 아기 예수가 유대인의 왕일 뿐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 태어나심이 온 세상의 역사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본분은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며 그분을 경배하는 것은 자신의 가장 커다란 특권이라고 생각하며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첫 번째 경배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이렇게 진실하고 좋은 경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말미암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기 예수를 이 세상에 주신 이유입니다.
크게 두 번째로는 이제 이 사람들이 이렇게 경배할 때 그냥 경배한 것이 아니라 예물을 드렸습니다. 이 사실 자체는 이미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진실한 경배의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그분께 드리고 싶어 하고 그분을 섬기고 싶어 한다. 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부를 누리고 높은 지위에 있어도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 지배되어서 참된 경배 자로 변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많은 물질의 소유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없고 자기의 높은 사회적 신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빛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동방 박사들은 마음 깊이 경배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일념 하나로 먼 길을 왔고 산 넘고 물을 건너서 별빛의 인도를 따라 아기 예수 오신 곳, 거기까지 다다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온 것을 아기 예수께 바쳤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었습니다.
교부들 이래로 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이렇게 해석이 되었습니다. 즉 이것은 가장 진귀한 것들이었지만 이것을 동방 박사들이 예물로 선택한 데에도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황금은 불멸의 상징으로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유향은 영어로 frankincense(?)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저도 이 유향과 몰약이 뭔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쪽에 선교사로 가있는 분이 저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편지 속에 뭘 집어넣었습니다. 그래서 뒤져보니까 유향과 몰약을 거기에다가 조금 샘플로 담아서 보냈습니다.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생각하던 유향과 몰약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유향이라고 해서 줄줄 흐르는 액체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보니까 꼭 무엇과 같은가 하면 설탕 녹였다가 굳힌 것 같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게 유향도 그렇고 몰약도 그렇고 팔레스타인에서 자라나는 특별한 나무의 송진과 같은 진액이 흘러나온 것을 모아서 굳힌 것입니다. 그게 유향하고 몰약하고 비슷한데 용도는 전혀 다릅니다. 유향과 몰약이 있는데 자체는 다릅니다. 유향은 향 재료 향유 이런 것들로 쓰이는데 나무에서 진이 흘러나와서 형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값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부들 이래로 이 유향을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그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몰약은 유향과 비슷하기는 한데 색깔이 틀립니다. 그런데 이 몰약은 어디에 쓰는가 하면 시체에 넣어주는 향품입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 예수님 무덤으로 달려갈 때 가지고 갔던 그 향품도 아마 몰약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시체에 넣어주어서 부패를 방지하고 시신을 수습하는데 쓰는 그런 약제입니다. 그래서 교부들 이래로 이 몰약은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아무튼 동방 박사 세 사람이 황금과 유향과 그리고 몰약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왕권과 그의 신성과 그리고 그의 고난을 가리키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동방 박사 세 사람이 그 사실을 깊이 이해하고 골라서 선물을 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 자신들의 집에 있는 가장 귀한 보물을 가지고 와서 아기 예수께 드렸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서 그 예물 하나 하나는 의미를 가진 예물이 되어서 아기 예수께 바쳐졌습니다. 모두 고귀하고 값비싼 것이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최선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주님께 드려야 할 예물은 무엇일까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드린 예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드려야 할까요? 지금 아기 예수께서는 이 박사들로부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받으셨지만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예수님은 더 이상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도 아니시고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비참하게 고통을 당하시는 그런 형상을 하신 분도 아니십니다. 고난은 모두 지나고 십자가의 죽으신 그리스도를 아버지께서 지극히 높여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무릎 꿇어 복종케 함으로 그분을 ‘주’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비천한 사람의 몸이 아니라 찬란한 영광 가운데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그분입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이제 그분에게는 더 이상 적합한 선물일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아버지의 집, 교회를 위해서 물질로 많이 헌신하고 그리고 그 물질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고 교회와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물질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잠시 맡겨주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열심히 일해서 돈벌어서 남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베들레헴 마구간에 누이셨을 때에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으로 그분을 경배하기에 충분했지만 이제 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라는 예물은 모든 죽음을 이기시고 고난을 극복하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신 채 모든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시키심으로 만 군의 주가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는 적합한 예물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예물이 필요합니다. 무엇일까요? 어떤 것일까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을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께 동행하는 것이라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감동적인 선물은 이제는 황금이나 유향과 몰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정말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제사, 최고의 선물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냥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그런 정도 가지고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한번 예를 들어보십시다. 예수님 시대 때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나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은 특히 대제사장과 같은 사람들은 자기의 전업을 모두 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서기관 같은 사람들은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의 전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풀고 베끼고 가르치는 것이었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잘 믿을지를 궁리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나요? 오히려 그들이 연구하고 있는 성경의 증거를 따라서 그 약속을 따라서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이 하나님이 자기들을 위해 보내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을 사랑하기보다는 그분을 박해하고 핍박하고 원수처럼 여기고 혹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스스로 믿던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생이 무엇을 하며 사는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어서 그래서 정말 주님이 보실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을 때 그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어떤 사람 만드시려고 하는 기준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으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 없이는 우리가 교회 열심히 나오고 이렇게 기독교 적인 분위기 속에 살아가는 것 가지고는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로 변화되면 그러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드릴 정말 아름다운 선물이 될 수 있을까?
우선 첫째는 황금으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왕권에 복종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왕도 두 종류입니다. 입헌군주국에서는 왕의 실권이 없습니다. 외국 원수들이 오면 양복입고 나가서 악수나 하고 행사가 있을 때는 흰 장갑 끼고 나가서 축사나 하는 왕이 있습니다. 귀한 손님들이 오면 왕궁에서 밥이나 한 숟가락 먹는 그런 왕이 있고 그 왕은 형식적인 왕입니다.
그런 입헌군주국의 왕 말고 진짜 왕이 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는 위엄과 권위를 가진 왕, 그리고 자기의 나라 산하 모든 것들이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그런 왕권을 가진 진짜 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진짜 왕을 모신 나라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는 육적 나라가 아니라 영적 왕국이기 때문에 땅에 있는 구획을 그어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영토 화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그 죄인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깊이 이해하고 자기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게 죽게 하심으로 자기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사람,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난 사람, 그래서 마음속에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사랑 때문에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즐거워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 전부라고 생각된 그런 사람들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는 정말 진실로 다시 태어난 그런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그 나라의 백성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교회 열심히 다닌 사람 중에서도 천국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은 아주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적이 없으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예수님이 잘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인 그 왕권을 널리 알려서 그래서 각자 각자 그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시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기서 다시 거듭나서 그래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는 것, 그것이 복음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에 깊이 순종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보십시오. 주님을 믿고 거듭났다고 해서 우리들이 항상 그 왕권에 순종하며 살아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날이 갈수록 신자는 점점 더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에 복종하고 순종하는 착한 백성들이 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한사람의 신자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고 그 주님의 은혜 속에서 성령 충만하게 살아가면 세월이 흐를수록 그 사람이 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세월이 흘러갈수록 주님의 왕권에 더 잘 복종하는 착한 백성이 됩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지 아니하면 그는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뼈아픈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죄를 참회하고 극적으로 용서받은 사죄의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왕권에 복종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래 예수 믿은 사람들의 불순종은 더 교활하고 야비합니다. 그리고 아주 위선적입니다. 처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노골적으로 짓지만 오래 믿은 사람들은 아주 야비하게 위선적으로 아주 교묘하게 그렇게 범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금년 성탄의 최고의 선물은 왕이신 그분을 깊이 인정하고 그분께 깊이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왕권에 깊이 복종하는 일이 없이는 그가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된다. 라는 이 간절한 갈망 그것이 사실은 첫 번째 가장 우월한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 세기도가 모두 같은 기도의 반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연관된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를 마음 깊은 곳에서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군가 하면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왕권에 착하게 복종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 아니면 그렇게 사무치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과거를 돌아보면 때때로 정말 특별하게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기도의 제목을 주셔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세상을 보며 마음 아파하고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지 않는 냉담한 세상을 향해서 가슴이 무너지는 것처럼 고통을 느끼게 하시면서 온 세상을 통해서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언제였는가 하면 우리가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 때, 혹은 그렇게 살려고 많이 애를 쓰던 때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원리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확장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 안에 이루어진 나라에 그 콜리티. 그 질을 능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자기가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왕권에 복종하고 그 통치에 굴복하는 그 순종의 삶을 살면 그가 자신의 존재와 전파를 통해서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자기 주위를,
그러니까 진실한 신자가 전도를 하면 자기가 전도한 사람이 진실한 신자가 될 때까지는 만족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덜렁덜렁 나오는 사람이 전도를 하면 교회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아주 자부심을 느낍니다. 저 인간을 끌고 내가 교회에 왔다. 매주 예배에 참석한다. 물론 자지만, 거기에 대해서 자기가 전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전도가 아닙니다. 짐승이 잠시 장소 이동을 했을 뿐이지 그게 어떻게 전도입니까? 전도가 되려면 그 사람 속에 예수님이 들어가서 새사람이 되어야지 그게 전도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그분의 왕권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참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이번 성탄절은 여러분들이 한번 주님께 이 성탄절을 통해서 주님께 드릴 수 있는 모든 선물 가운데 최선의 것, 이제껏 까지 그분의 왕권에 죽어도 굴복하지 않으려고 했던 그 억센 자아, 그리고 완고한 고집, 하나님의 율법도 꺾고 싶어 하고 주님의 명령도 짓밟고 싶어 했던 자기중심적인 그 포악한 성품들을 정말 하나님이 변화시켜주셔서 그래서 힘과 마음과 뜻을 다해서 왕이신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고 그렇게 복종하는 그런 삶을 살아서 여러분의 존재 자체가 주님께 아름다운 성탄 예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유향으로 표현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단지 그분이 우리를 너무나 많이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너무나 위해주시기 때문에 그분과 친근하다는 느낌은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요즘에 우리들의 신앙이 너무 버릇없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아이들도 이렇게 너무 예뻐하고 사랑하면서 기르다가보면 어느 선을 그어주지 않으면 애들이 도가 지나게 까불고 옛말에도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자들을 귀엽다, 귀엽다 하니까 수염 잡아당기고 머리 꼭대기로 올라간다 고 수염이 무슨 등산용 밧줄이나 되는 것처럼 붙들고 올라갑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느 목사님이 계십니다. 지금 팔순이 넘으셨는데 정말 영적이시고 아주 훌륭한 분이십니다. 기품이 있으시고 위엄이 있으신 분입니다. 항상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느끼게 하는 그런 분이었는데 한번 그분 교회에 제가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이제 담임 목사실로 안내를 받았습니다. 차를 한잔 마시고 이제 그 할아버지 목사님은 응접세트 상석에 앉아 계시는데 손자 놈들이 둘인가 셋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야! 진짜 너무했습니다. 근엄하신 할아버지를 발로 밟고 머리를 잡아당기고 한 놈은 목에 올라타고 한 놈은 무릎에 앉고 한 놈은 땅바닥에서 기어 다니고 하는데 도대체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아이들에게는 그 할아버지가 그렇게 근엄하고 거룩하고 무서운 할아버지가 아닙니다. 왜 너무나 친밀했기 때문에,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을 주님께 대한 생각이 균형이 잡혀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그분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그리고 심지어 사람들에게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이유 때문에 죄인처럼 취급을 받고 천사보다도 조금 못하신 분이라고 하는 평가를 받으시면서 치욕을 당할 때조차도 우리는 그 성경을 보면서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니 단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일 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가슴에 항상 새겨야 합니다. 더욱이 지금은 그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멸시와 욕을 당하시는 대신에 이제 하늘의 영광 가운데 드높이 올림을 받아서 거기서 하나님 아버지를 대신해서 온 땅과 만물을 다스리시는 통치자로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들으시고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아버지 앞에 기도하시는 하늘 보좌 우편에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은 나와 비교될 수 없는 높은 분이시고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그분의 손에 의해서 빚어진 티끌과 같은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깊이 가슴에 새기는 겸비함, 이것이 우리가 주님께 드려야 할 두 번째 예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하여 흐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실 은혜는 창세 이래로 고갈된 적이 없지만 교만한 사람들은 그 은혜를 조금도 힘입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위엄에 가득 찬 왕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신 그분 앞에서 우리 자신이 깊이 낮아져서 그래서 그분과 나 사이에는 도저히 높일 수 없는 질적인 차이가 있으며 그래서 그분은 나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전적으로 타자이실 수밖에 없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내 안에 계신 것은 내가 그분처럼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이 내게 사랑을 베푸시기 위해서 낮아지시기까지 우리에게 오신 것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그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어린아이요, 일생을 가난과 고통 속에 살다가 자기의 신명을 따라 죽어간 한 평화주의자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보면 그분이 비록 비천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지만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은 껍질뿐이고 그 속에는 눈부시리 만치 찬란한 신성이 깃들여 있으니 그분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차마 당신의 그 찬란한 영광스러운 신적인 광채를 우리 인간들이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는 그 찬란한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신 자기의 아들에게 부끄럽게도 사람의 몸을 입히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우리도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갈 때에는 예수가 단지 사람일뿐이었고 단지 좋은 신념을 위해서 인류를 위해 죽어간 평화주의자로서 인류의 한 스승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우리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어느 순간 성령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 그 순간에 우리들이 보아왔던 멸시와 욕을 당하고 죽어갔던 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사람이 아니라 참 하나님이셨으며 참 하나님으로서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참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높이고 경배하는 그분, 우리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분은 경외하는 그분은 이제 더 이상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삼위일체이신 그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 우리는 경배하고 그분께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선물은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리 우리의 삶에 깊이 찾아와서 우리의 크고 작은 일에 개입하시고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에게 친구처럼 느껴지고 이웃처럼 느껴지고 그리고 내 아버지처럼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가슴에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이전에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래서 나 같은 존재는 그 하나님의 거룩과 위엄 앞에서 정말 하찮은 것이며 그래서 그분 앞에서 한없이 겸비한 존재로 그분의 은총에 목마른 채 살아가는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본분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겸비함이 우리가 주님께 드릴 두 번째 선물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몰약으로 표현되는 바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리고 그리스도의 수치스러운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도 마리아도 그리고 그 예물을 드린 동방 박사들 중 한 사람도 자기가 지금 바쳐지고 있는 이 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예물을 통해서 지금은 마리아의 품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그 아기 예수의 앞날이 어떠할까 하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필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저는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이 사실이 참 이해가 되지 않고 걸림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기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생아라고 말하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처녀가 잉태했는데 남자는 몰랐다. 그리고 그 몸에서 아기가 태어났다. 제가 그때 젊은 청년이었을 때 하나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오해받으실 소지가 많은 방법으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그런데 그때에는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적절하게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복음의 의미를 깊이 깨닫는 가운데 하나님이라도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 너무 소중한 일이라고 하는 깨달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가공적인 방법으로 그렇게 신적인 방법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대신에 신적으로 잉태하셨지만 사람의 몸을 빌려 사람의 형체를 가지고 아기 예수로 이 세상에 태어나셔야 했던 이유는 크게 네 가지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사람들과 하나 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서 우리는 형제 중에 한사람이 우리의 처지에 서서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고하고 우리의 연약함과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우리와 일체를 이루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조금 이해되지 않지만 신앙을 갖고 나면 예수님이 너무나 잘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의 발자취는 역사 속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났지만 암시적으로 나타났지만 그리스도의 발자취는 지금도 그분이 걸어가신 길이 있고 그분이 말씀 가르치시던 장소가 보전되어 있습니다. 피땀 흘리고 기도하시던 곳도 아직 남아 있고 성지에 가면 그분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는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는 예수님 자신이 대제사장인 동시에 영원히 완전한 제물이 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려야 했으니 참 사람이 되지 아니하고는 죽으실 수가 없었고 또 참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죽어도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참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그래서 하나님이셨지만 스스로 그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의 성품 밑에 감추시고 인간의 성품을 입으셨습니다. 인간의 성품을 입으셨지만 죄는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으셨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성품을 입으셨고 사람의 몸을 가지셨기 때문에 죄는 없었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연약함에 그분은 복종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번의 기도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는 엄청난 떡과 물고기를 만드실 수 있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주리시면 시장하실 수밖에 없고 오래 길을 걸으시면 피곤하셔서 길거리에 앉으셔서라도 잠시 휴식을 취하셔야 했고 오래도록 행로에 곤하시면 냉수라도 한 그릇 마셔야지 만 갈증을 면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연약함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야 했던 이유는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들 속에 계시는 동안에 인간들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교리적인 반론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실 때는 예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사랑이 불안전했었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단지 하나님으로서 인간을 사랑하던 그것과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을 사랑하는 그것은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완전과 불안전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하늘에서 우리들을 사랑하던 것과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와서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참 사람으로서 사람을 깊이 사랑하신 것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께 대신 제사를 드려주시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은 대제사장을 택하셨을 때 사람을 택하셨을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대제사장은 제사장하고는 다릅니다. 일년에 딱 한차례만 지성소에 들어가서 거기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경배하는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모든 제사장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직분이었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해서 한사람으로서 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중보자였습니다. 그 지엄하고 중요한 자리에 천사를 보내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실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완벽하게 하나님을 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인간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인간에 대해서 아는 것이 더 뛰어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 대제사장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에게 사람의 몸을 입히셔서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세 번째 이유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이유는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본분을 생생하게 눈에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동시에 참 성도의 영원한 모델이시고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와 말씀의 은혜에 힘입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거룩해져가고 성화 될 때 마지막에 도달해야 할 그러나 결코 도달할 수는 없겠지만 목표를 삼고 끊임없이 변화되어야 할 보이는 모본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말씀, 추상적이던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도리들이 예수님이 오셔서 존재와 삶과 말씀 행동으로서 전부 보여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보다 더 쉽게 그렇게 주님 앞에 살아가야 할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빽빽한 글씨로 되어 있어서 도대체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던 그 내용들을 어린이들을 위해서 만화로 그려주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것보다 더 생생합니다. 그래서 진짜로 예수님이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믿고 어떻게 기도하고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의 몸을 입으신 성육신을 통해 이런 놀라운 혜택을 입었지만 그분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커다란 고통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순간부터 태어나실 자리도 없이 여관집에서도 괄시를 받는 처지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 세상을 창조하신 그분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처음 받으신 대접은 짐승들과 같이 기거하며 그 구유 안에 태어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뼈저린 수난만이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 자체가 말로 다할 수 없는 수치와 고난이었습니다. 결핍과 가난, 핍박과 고통 속에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아파하셨고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었는데도 우리에게 이 같은 네 가지 사실의 혜택을 주시기 위해서 스스로 가난해지신 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생애를 살아가셨습니다.
아기 예수께 동방 박사 세 사람이 경배했지만 그러나 이후 아이가 당하게 될 그 멸시와 고난, 자기 땅에 와서 핍박과 시련을 당하신 그 가슴 아픈 생애를 필름으로 이 동방 박사들에게 보여주었더라면 그들은 아마 눈물을 흘리며 가슴아파하느라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분의 생애에 안식이 있었습니까? 그분의 생애에 부귀가 있었습니까? 그분의 생애에 영화가 있었습니까?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결국은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목마르다 외치시며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하나님이신 그분이 이렇게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 오신 이 날은 한편으로 보면 기쁜 날이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그분에게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죄송한 날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그 생명으로부터 멀어져 죽음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는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시는 것 이외에는 대안이 없지만 그래서 오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거친 보자기에 싸여 말구유에 누이신 모습을 보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럴 가치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 될 정도로 그렇게 우리가 가치 있는 존재들이었습니까? 우리는 모두 양 같아서 제 길로 갔고 우리 스스로의 죄와 악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스스로 버림받은 길을 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이유나 근거가 있었습니까? 우리는 모두 스스로 죄를 택했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생을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의 형상을 가진 우리를 차마 죽어 가는 것을 보실 수가 없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분의 생애는 멸시와 고초를 당하신 생애였습니다. 그럴 가치도 없는 불결하고 냄새나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위해서 순결하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것입니다.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 하셨네
주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정말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세 번째 예물은 그래서 좋으신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그 분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가슴에 간직하며 주님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지셨을 그 십자가, 주님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가슴아파하며 섬기셨을 그 사람들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예물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교회는 언제나 견고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는 이 세상의 세속주의에 도전을 받고 영적인 악한 세력들에게 도전을 받으며 세상의 욕심과 풍조를 따라 살려고 하는 인본주의적인 세상의 흐름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까지 드리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온전케 하고 버림받은 이 세상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수고하는 일들이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은혜의 분량만큼 하나님께 자기를 다 드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들을 어떻게 죄 많은 세상에서 건져내셨으며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서 어떻게 예수님이 낮아지셨고 어떻게 자기의 몸까지 찢어서 그 살점을 우리의 입에 넣어주심으로 우리를 그분을 양식 삼아 살아가게 하셨는지를 깊이 따르면서 우리의 것이라고는 없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자기의 것이 아무 것도 없이 모두 드리신 생애를 사셨던 것처럼 그 사랑을 깨달은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삶의 모습을 흉내 내면서 그분처럼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힘닿는 대로 자신의 사명을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눈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땀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목숨을 내놓지 않으면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는 그런 일들도 하나님이 우리 앞에 두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간의 본성은 고난이 싫고 안락한 삶이 좋습니다. 시련보다는 평화가 좋고 전쟁보다는 쉼이 더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다른 본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흠 없으신 그분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신 그 놀라운 사랑을 아는 그 지식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나를 부인하고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보다는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일보다는 꼭 이루어져야 할 일을, 나의 육신의 소욕 보다는 주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생명처럼 생각하며 살아가서 우리의 인생 전체가 내가 주인인 인생이 아니라 왕이신 그분이 왕권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스리실 때 하나님이신 그분의 신성 앞에 어린아이처럼 겸비하게 엎드린 가운데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 몇 십 년에 한번 태어난 세계의 교회의 역사를 움직인 위대한 사람 중에 한사람이 될 수는 없어도 그냥 착하게 정말 착하게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에 감지덕지 하면서 그러면서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주님을 섬기지 않고 살면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고 그래서 비록 교회 역사에 남을 위대한 일들을 이루는 도구는 못된다고 할지라도 항상 나의 생활 중에서 주님을 인정하고 그리고 신앙의 고난과 불신앙의 안일함이 앞에 놓였을 때 믿음을 택하는 삶, 날마다 날마다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나는 낮아지고, 나는 손해를 보면서 주님은 서고 주님의 교회도 서고 영혼들도 세워 가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해달라고 우리는 기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다 산 후에 생각해보십시오. 주님 앞에 갔을 때 우리가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할지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높은 사회적인 지위와 자기가 거머쥐고 있는 물질적인 부의 크기가 자랑거리가 될지 모르지만 주님 앞에 섰을 때에는 그런 모든 것들이 필요 없고 오직 얼마나 내가 그 하나님께 고난을 받으며 그분을 섬기면서 살려고 애썼는가 하는 그 예수의 흔적, 그것이 우리 주님 앞에 가장 소중한 우리의 유산이 될 것입니다. 그날에 자기만을 위해서 살면서 주님을 위한 고난과 수고가 무엇인지 모르며 살아서 아무런 예수의 흔적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온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피 묻은 전투복을 입고 이 세상에서의 싸움을 끝낸 후 영광스러운 주님의 면류관 주시는 그 분 앞에 서있을 때에 그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부러워할까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힘닿는 대로 충성스럽게 주님의 사람 되심을 가슴에 새기면서 내가 아무리 낮아져도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만큼 낮아질 수 없어도 내가 아무리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아도 십자가의 형벌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하는 자각을 가지고 주께 받은 것을 주께 드리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