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한 순, 예수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1-5).
성경에서 이사야 53장만큼 유명한 장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 53장을 읽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회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야는 바로 이 53장을 읽다가 은혜를 받아서 작곡한 대작입니다. 2시간 30분이 넘는 그 엄청난 대작을 헨델은 한 달 만에 완성을 했습니다. 그는 다락방에서 이 53장을 읽으며 생애적으로 우리 예수님을 만났고 그리고 거의 일주일 동안 식음을 잊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특별히 오라토리오 메시야 대곡 중 23번 “그는 멸시를 받으시고” 라는 노래를 작곡할 때는 감격과 눈물로 범벅이 된 가운데 그 곡을 지었다고 합니다. 연주가 모두 끝나는 마지막 대미인 할렐루야를 듣던 국왕은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일어나 이 마지막 할렐루야를 들었고 그래서 오늘날도 그 곡은 모두 기립하여 듣는 풍습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위대한 53장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의 전하는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라고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구약의 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특별히 이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갈망한 가운데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예언을 명백히 선포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의 나라를 영원한 나라라고 믿었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육적인 이스라엘의 껍질을 깨고 영적인 그리스도의 교회가 다윗의 위가 깨트려져서 영원히 멸하지 않는 그리스도 예수의 왕권이 이 세상에 확립될 것을 예고하였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이사야의 예언을 불신하였던 것은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 불신할 이 세상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라고 말합니다. 왜 갑자기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라고 묻고 있을까요? 우리는 이 진행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의 예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해서는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의 팔 사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팔은 손목 위의 부분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손은 손대로 의미가 있고 여호와의 팔은 팔대로 의미를 가지고 성경이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야드”라고 불리는 이 손은 구약성경에서 능력과 힘, 권세 이런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손으로 악한 자들을 치시기도 하고, 나라를 무너트리기도 하시며 또 그 손으로 무너진 나라를 세우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 팔은 손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성경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팔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보호, 그리고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하는 자비 등으로 묘사가 됩니다. 그래서 애굽의 종살이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원토록 자신들을 애굽에서의 구원은 하나님의 큰 편 팔로 이루어졌음을 노래하였습니다. 그 팔로 그 백성들을 안으시고 구원해내시고 인도하신 이스라엘 백성이 찬송 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팔은 능력과 권세를 아울러 가지신 하나님의 구원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 여호와의 팔이 사용되었습니다.
선지자는 “우리의 전하는 것을 누가 믿었느뇨”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가 이스라엘의 구원이 되리라”고 하는 이 메시야의 예언을 믿은 사람이 없었는데 그것은 앞으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도 사람들이 쉽게 믿지 못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뇨” 라는 질문과 관계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팔, 여호와의 구원하는 행동은 폭풍과 같이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애굽의 나라를 커다란 재앙으로 심판하기도 하셨으며 또 당신의 백성들을 독수리가 새끼를 업어 나름과 같이 그 고통 받는 땅 애굽에서 그들을 건져내시기도 하신 팔이었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그들을 건너게 하신 것도 여호와의 팔이었고 그 백성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팔 안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하나님과 단절된 가운데 멸망할 수밖에 없는 그 비참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구원 행동을 은총으로 펼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커다란 능력으로 나라를 세우시고 임금을 일으켜 세우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고 영적인 원수들을 쳐부수고 죄 가운데서 그 백성들을 구원해내셔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심으로 그 백성들을 향한 구원이 성취될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큰 능력을 이 땅에 베푸셨는데 그것은 바로 아기 예수님이 말구유에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도 그러했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말구유에 누이신 벌거벗은 어린 아이가 바로 이 모든 세계를 구원할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요, 구원행동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영광으로 말하자면 구유에 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임금들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고 강보에 쌓인 아기의 그 초라한 모습은 부귀에 비하자면 귀족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구유에서 강보에 쌓인 어린 아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목수의 자식에게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팔의 나타남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영광을 이 세상에서 구하고 능력을 이 세상의 권력에서 구하기 때문에 초라하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아기 예수께 인류의 구원이 달려있고 역사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 수많은 오해와 모욕에도 불구하고 그런 오해를 받으실만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성자께서 하나님이심에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첫째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 중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지 않았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만 만약에 피조물 중 어떤 형상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반드시 사람의 몸을 입으셔야 했으니 이는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 중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무엇이 그렇게 아름다운 존재일까요? 한쪽 눈을 수술하고 눈이 확 밝아졌습니다. 한쪽 눈은 아직 어둡지만 한쪽 눈이 밝아지고 나니까 온 세계의 사물이 눈이 부십니다. 한쪽 눈은 초등학교 때 미술시간에 노란 셀레판지를 얹어놓은 것 같고 한쪽 눈은 그 모든 것을 벗겨버린 또렷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시력을 회복했습니다. 그때 모든 것이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대를 벗고 나서 제일 먼저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는데 생전 본 적이 없는 어떤 늙은이가 거울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아! 내가 이렇게 추루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고 그 다음부터 거울을 보는 것이 싫어졌습니다.
인간의 육체가 아름다운가, 들에 핀 백합화가 아름다운가? 하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는 새의 모양이어서 예쁘고, 들에 핀 하얀 백합화는 백합화의 모양이어서 예쁜 것처럼 인간은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어서 아름다우니 이 사물들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임으로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존재인 이유는 육체의 형상과 모습에 있지 않고 인간 자신의 존재를 이루며 살아가는 그 양상에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들은 영혼이 없이 단지 육체로 존재하고 식물과 동물이라야 생존을 위한 약간의 기능이 존재하지만 인간은 움직이고 행동하고 사랑하고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영원과 함께 작용을 함으로서 그런 움직임들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 중에 참 아름다운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기왕에 피조물의 형상을 입고 오실 바에야 사람의 몸을 입으셔야 했던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그분은 2천 년 전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똑같이 육체의 생육의 방식에 의하여 태어나시지 아니하셨으나 사람과 마찬가지로 키와 지혜가 자라며 인간의 육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연약한 것들을 그대로 지니신 채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첫 번째 이유가 인간이 가장 아름다웠던 존재였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으셨으니 우리도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하여 창조하신 그 인간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영혼은 죽어있고 육체만으로 살아가는 것은 동물의 존재의 양식이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사람의 존재의 양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영혼이 살림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날마다 그분의 진리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있음으로서 영혼과 육체의 아름다움의 결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예수님을 닮은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두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살아가야지 되는지를 모본으로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만 하였다면 인간과는 관계가 없을 것이고 만약에 사람이기만 하였다면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실 수 없으실 수 없기 때문에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으로 내려오셨으니 사람이시라도 죄가 있으셨더라면 인간과 한편은 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인간의 죄는 대속할 수 없으셨기에 사람을 대속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모양을 가지셨지만 사람을 위해 대신 죽으시기 위하여 죄는 없으신 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니” 라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이신 그분이 자신의 신성을 버리고 인성으로 채우셨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신성을 인성 저 밑에 감추시고 오히려 그 하나님이 아니신 것처럼 겸손히 낮아지셔서 연약한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며 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의 모든 연약한 것을 함께 짊어지셨습니다. 추우면 그분도 추우시고, 주리면 그분도 배고프시고, 슬프면 그분도 눈물을 흘리며 우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멸시와 욕을 한 몸에 다 당하시며 일생을 사셨던 것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서 우리처럼 똑같이 연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순종을 배워 하나님께 온전케 되실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 구유에 뉘이신 초라한 아기 예수를 보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하여 33해 동안 인간이 당하는 그 모든 고초와 괴로움, 그리고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그 모든 핍박과 고난을 한 몸에 다 당하시면서 생애를 이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고난당할 때 그분의 고난을 받으며 위로를 받게 하시고 우리도 시련과 고통이 가득 찬 세상에서 그분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서 33해 동안 믿고 사랑하고 섬기며 사셨기 때문에 그분의 생애를 본 사람들의 증언이 남을 수 있었고 그래서 우리 앞에 있는 이 복음서는 우리에게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어떻게 사셨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그림이 됩니다. 그분의 전해준 말씀만이 복음이 아니라 그분이 보여주셨던 삶과 인격 그 자체가 복음이 되어서 오늘도 그 말씀을 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흉내 내는 삶이어야 됩니다. 그분을 본받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간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그 목적을 가장 잘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강생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두 가지 것보다 더 뛰어난 것이니 그것은 바로 죽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단지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에게 진리를 소개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 진리를 따라 살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그 진리가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세상의 진리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 합니다만 사람들은 진리를 알아도 고통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몰랐을 때는 몰라서 그 진리대로 살지 못했지만 진리를 안후에는 진리대로 살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 진리를 따라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 말미암아 친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하는 우리 모든 죄를 한 몸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친히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죽음 안에서 우리로 죄를 향해 죽게 하시고 당신의 부활 안에서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살게 하시려고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낮고 천한 땅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외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니 죽으실 수 없는 분이셨고 만약에 예수님이 죽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죄로 망가트린 인간의 무한한 죄를 속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생명으로는 영원히 죽으실 수 없으시지만 죽을 수 있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몸으로 지은 모든 죄를 스스로 짊어지시고 하나님께 형벌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육체는 죽으시고 우리의 육체와 영혼은 영원한 죽음에서 살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33해밖에 안된 짧은 생애를 사셨지만 그분의 외모는 50이 넘은 사람처럼 늙어 보이셨고 특히 3년 동안에 공적인 생애 동안 그분이 받으신 멸시와 박해, 그리고 수고와 그 고단한 노력의 생애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죄를 위해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요하신 그분이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당신은 가난해지시기를 택하셨고 형벌 받아야 할 우리를 구원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스스로 죄인의 모습으로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기 예수 오신 것을 그렇게 기뻐하는 이유는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으셨다면 아무 희망이 없이 이 비참한 인간들을 위하여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그분에게 행복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그렇게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인간의 헝체를 입어 종의 모양으로 나타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그것이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말미암아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말구유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뻐하고 그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해서 창조된 존재이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 다시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꽃으로 꾸미신 임금의 면류관에서 영광을 구하였고 이 세상에 큰 권력과 힘에서 여호와의 능력을 보고자 하였습니다만 하나님의 진정한 영광과 그리고 위엄과 능력은 이렇게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인간을 구원하실 수밖에 없던 하나님 아버지의 그 사랑과 생명 안에 그 영광과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인간의 의무는 창조 목적에 따라 사는 것이고 신자의 존재의 목적은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자는 창조 목적을 추구합니다. 그분을 경배하는 자는 자기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며 그분을 찬송하는 자마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슴깊이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낮고 천한 말구유에 뉘이시기까지 낮아지면서까지 이루고 싶으셨던 그 일, 곧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사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시고 하셨던 그 일을 이루면서 사는 사람들만이 아기 예수 오신 이 날에 가장 기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맨 처음 우리의 어둡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나 같은 죄인을 살리고자 하신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을 경험했던 그 회심의 순간을 기억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오늘도 우리의 마음속에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 사랑이 있는 사람들은 잠시 창조의 목적을 벗어나도 회개하고 다시 돌아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예수님을 뵈올 때마다 그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주님께 불순종했던 날들을 후회합니다. 그 사랑 안에서 다시 자기를 향한 그 큰 사랑을 발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천년 전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아기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그분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멀리 떠났는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기 예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성탄의 주간 예수 그리스도의 그 강림 안에서 우리를 향한 그 하나님의 눈부신 사랑, 그리고 우리의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꺼지지 않는 하나님 사랑의 불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참된 인간으로 돌아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눈물겨운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세상에서 방황할 동안에는 어떤 안식과 기쁨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잠시 즐거움이 있었다면 그것은 풀잎 끝에 붙은 이슬방울이요, 잠시 우리에게 즐거움이 있었다면 그것은 잠시 후에 눈물로 바뀌게 될 허무한 기쁨이었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 진리를 보여주시고 진리를 알았지만 그 죄의 능력 아래 하나님을 향해 살수 없었던 얽매인 자들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자유하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이토록 못 박으시기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 우리로 다시는 죄에 대해서 살지 않고 오히려 죽고 의에 대해서 살게 하시기 위함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 기쁜 소식은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인생 모든 날이 성탄절이 되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을 기억하며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이 이렇게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혀 보내시기까지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우리들이 은혜 안에서 살고 그분의 생명과 사랑을 충만하게 누리며 예수의 생명도 우리의 몸에 나타나도록 그렇게 이 세상에 존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예수께서 여러분 마음 안에 살아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