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예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함이라" (마 1:23)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한 후에 잉태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그렇게 잉태 했을때 두려움에 떨던 요셉에게 나타난 천사의 계시속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정혼은 실제의 결혼식 못지 않게 중요한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정혼하면 그것은 이미 결혼한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시집 오지않은 신부가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으니 신랑인 요셉의 마음은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겸손하고 죄를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마리아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고 또 자신이 이 일로 연루되어서 더럽혀지는 것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만히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그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셉아 네 아내 데려오기를 두려워 하지 말라 저가 잉태 되었으나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걸림이 되는 기독교의 교리는 처녀의 몸에서 예수님이 잉태 하셨다는 이 교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왜 예수님이 여자의 몸에서 잉태되어 이 땅에 오시게 되었는지를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여기에 등장하는 예언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한 이 말씀은 예수님 오시기전 약 칠백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미 예언된 말씀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메시아께서 사랑의 몸을 입으시고 이세상에 내려오신 이 사건을 예고하는것 이었습니다.
II. 사람이 되신 하나님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되어 이땅에 내려 오신것은 그 구세주가 참으로 하나님 이시지만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셔야 되었다는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메시아는 왜 사람이 되셔야 했을까요? 또 이 메시아는 왜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지만 자신의 일들을 수행하실 수 있었을까요?
A. 하나님이셔야 했음
첫 번째로 그 메시아가 참으로 하나님 이셔야 되었던 것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이것은 두가지로 설명 될 수 있는데 첫째는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 이셔야 되었던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중보자가 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고 죄인은 어떤식으로든지 그 분과 연합할 수 없는 비천한 피조물 이었습니다. 중보자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과 위로 연합하고 아래로는 더럽고 추한 인간과 연합하여 둘 사이에 다리를 이으시는 것이 바로 중보자의 직무 였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하나님과 연합시키기 위해서 죄인일수는 없었지만 사람이 되셔야 했고 예수님이 그 사람인 인간들을 참 신이신 하나님과 연합 시키시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이 사람이신것인 동시에 신 이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참 하나님이시지 않으면 우리의 중보자가 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셨지만 참 하나님 이셨기 때문에 그분 속에 있는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 이었고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주실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니시면 죄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에수님께서는 참 하나님 이셔야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 사회에서도 누군가가 두 사람 사이에서 중재를 한다고 하면 이쪽 형편도 잘 알고 저쪽 형편도 잘 이해하는 사람이어야지만 중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서는 양쪽 모두를 잘 아실 수 있어야 했는데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중보는 형편만 아는 것으로는 불가능하고 신이신 하나님과 사람인 그 인간을 맺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은 필연적으로 자기 안에 신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을 함께 가지신 분이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서 그 분은 참 하나님이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셔야 했던 두 번째 이유는 그분이 죄 없는 사람이 되셔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 이실 수 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에 이 세상을 창조 하셨을 때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인간이 있었지만 아직 죄가 들어오지 않은 때 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와 불순종으로 죄는 들어오게 되었고 들어온 죄는 모든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파괴하고 그리고 이땅에 가득한 물과 같이 범람하게 되었습니다. 그 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파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인간들과의 관계를 파괴하였으며 안으로는 인간안에 죄 자체가 가득한 존재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흑인에게서 검은 아이가 태어나고 백인에게서 하얀 아이가 태어 나듯이 죄로 물든 본성을 가진 인간들이 결합하여 육체의 교접을 통해서 태어나는 모든 후손들은 바로 죄된 본성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슬은 인간의 몸을 입고 여자에게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끊을 수 없는 사슬이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 이었다 할지라도 죄인은 여자의 몸에서 죄있는 남자와의 결합을 통해서 생산이 되었다면 예수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야 했고 그랬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참 중보자가 되실 수 없었습니다. 이런 필연적인 기회를 단절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당신이 직접 창조하시지 않으시면 안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예수님을 창조 하시되 만약에 사람의 몸 밖에서 창조하시면 그 분이 참 사람일수가 없었고 사람의 혈통으로 태어나게 하시면 죄 없는 사람이 되실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하시는 그 일을 여자의 몸속에 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행하심으로 성령으로 잉태되게 하셔서 육신의 혈통에 의한 죄의 영향은 차단하시고 여자의 몸에 빚으심을 사람의 본성과 사람의 신체는 입게 하셨으니 동정녀의 탄생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사람의 몸은 입으시되 죄를 없게 하시기 위함 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은 반드시 하나님 이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이 죄에서 제외될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 오셨을 때에 참 하나님으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셔야 했던 이유입니다. 빌립소서 2장에서 사도바울은 위대한 기독론을 씁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됨을 취할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주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오해되어 오던 구절 가운데 하나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자기를 비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는 하나님과 본체 이시나 즉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 이었지만 스스로 그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인 인성을 퍼 내셔서 스스로 반납하시고 사람의 본성만 가지셨다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들은 모두 이단적인 교리들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셨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그런 하나님의 성품, 신성의 흔적들이 예수님의 생애기간 내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죽은자를 살리신 그 일, 파도를 잔잔케 하시고 자연을 주관하시는 그일, 특별히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는 그 위대한 사죄의 대권 같은 것들은 인간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 자신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성품을 통해 역사한 일들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우리가 예수님처럼 병을 고치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고 “사도들도 죽은자들을 살리지 않았습니까?” 라고 반문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질이 틀립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사도들이 그렇게 한 것이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직접 그 일을 행하셨다는 점에서 비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진실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진실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옷을 입고 오셨지만 하나님 자신 이셨고 그래서 하나님의 본성이 있었지만 스스로 이것을 깊이 감추시고 그 위에 인성으로 덮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온갖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셨지만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서는 떡과 물고기로 기적을 베풀어 그들에게 먹이셨지만 당신 자신이 시장끼를 면하기 위해서 기적의 식탁을 베푸신 경우는 없습니다. 더 크고 놀라운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큰 이적을 보여 주셨지만 당신 자신을 위해 그런 이적을 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이적, 당신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 보여 주시는 이 일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내신 아들을 믿어 구원 얻게 하기 위한 목적하에서만 그렇게 하셨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따라서 예수님이 비참한 죄인 인것처럼 그렇게 섬기시고 종처럼 사셨지만 예수님 속에 언뜻언뜻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 되신 그 성품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참으로 죄 없는 사람으로 이세상에 내려 오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되셔야 되었던 이유입니다.
B. 사람이셔야 했음
두 번째로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셔야 했습니다. 이 이유는 세가지로 지적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죄있는 인간들과 하나되기 위해서는 사람의 옷을 입고 이세상에 내려 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인과 하나 된다고 하는 것은 죄인들과 똑같이 죄를 짓는 인간이 됨으로서 하나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을 열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서 나오셨습니다. 이때에는 예수님이 성숙한 인간이 되셨을 때입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사람으로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성숙한 인간이 되신 그 후에 참 메시아로서 하실 그 일을 하셨습니다. 30세 이전까지 예수님의 생애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 공생의 첫 시작을 세례를 받으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 세례는 물로 씻는 예식입니다. 다시말해서 구약에 나오는 바와 같이 정결의식입니다. 정결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불결하다는 것을 의미하시는 것입니다. 씻어야 할 죄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씻어야 할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나오셨습니다. 세례요한이 내가 당신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나한테 세례를 받다니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거절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받으신 이 세례의 의미는 다른 모든 인간들이 받는 모든 세례의 의미와는 다른 것이다 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씻어야 할 죄가 없는데도 죄인들이 받는 세례에 함께 참여하심으로 말미암아 죄는 없으시지만 우리 모든 인간들과 똑같이 예수님의 그 몸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몸이며 당신 자신은 우리 모두와 인간적인 면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 앞에 한 아들들로서 우리 모두와 형제된다 하는 것을 예수님이 보여 주시기 위해서 죄는 없으셨지만 그 하나됨을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죄는 없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 분이, 우리 모든 죄인들과 한 형제요, 한 동아리의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세례를 받으셨지만 하나님은 이 세례의 의미가 죄인들이 받는 죄 씻음의 세례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입증하시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시는 그 자리에, 그 순간에 하늘에서는 성부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고, 성령 하나님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심으로서 삼위가 세례 받으시는 그 자리에 임재하는 광경을 연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고 우리 인간들과 하나되는 그 자리가 메시아의 공적인 취임식장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와 하나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보냄을 받으셨지만 동시에 모든 인간들속에 함께 있는 한 형제로서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이 되셨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대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대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하나님 앞에 죄인 이었기 때문에 제사를 드릴때는 먼저 자기를 위한 제사를 드려 죄 없음을 받은후 죄 없는 사람으로서 잠깐동안 이스라엘을 위한 화목의 제사를, 속죄의 제물을 하나님께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드릴 때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자기도 한 형제중에 한 사람이 주님께 기름 부음 받아서 대제사장이 된 사람 이었습니다. 이 모양을 그대로 이어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보내신 하나님인 동시에 우리에게로부터 보내어진 우리의 형제 이셔야 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셔야 됐습니다. 죄는 없으시고 결점은 없으셨지만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 되셔야 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야 했던 이유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기 위해서 예수님은 참 사람이셔야 했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어떤분 이신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해 주었고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친아버지 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교육의 방법은 대부분 역사속에 개입하시는 하나의 사건이나 혹은 섭리속에서 그들의 환경속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런 성품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 하실 때 그것을 우리처럼 생생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에 대해서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자비하신 분이고 너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할때에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전쟁에 지고 있을 때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셔서 그 민족을 승리하게 하신것 굶주린 광야에서 먹을것을 공급해 주신것 이런 등등의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 자비, 용서 그리고 그 아름다운 성품에 대해서 유추할 수 있을 뿐 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중에도 이런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아주 고매한 영적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는 가슴에 크게 다가오지 안았으며 어떤 사건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곧 잊혀지기 쉬운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로만 들려주시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실제로 당신 자신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한 형제로서 그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모두 보여주고 만지게하고 느끼게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세상에 오셨을 때에 예수님을 잘 들여다 보는 모든 사람들은 그분을 보는것을 통해서 삼위 하나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계시 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세상을 창조 하셨을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창조 하셨고 이 세상속의 삼라만상속에 찍혀있는 하나님의 신성을 증거하는 그 모든 영광도 성자의 중보를 통해서 거기에 새겨진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면서 그것을 전달해 준 성자를 유추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 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 자신을 아는 지식을 전달해 주었던 중보자를 사람의 몸을 입혀 직접 이세상에 내려 보내셔서 그래서 그분으로 하여금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게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를 친히 만질 수 있게 그리고 냄새 맡을 수 없는 하나님의 그 크신 용서를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체취를 통해서 느낄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참 사람으로 만드셔서 이 세상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더욱 인격적인 신앙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무엇인가에 대한 종교가들의 이론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무엇인지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소견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길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잘 들여다 보면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가 무엇인지 생생하게 알 수 있도록 본바요, 만진바요, 들음바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 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있던 사람들이야 예수님을 직접 봤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본적도 없고, 만진적도 없는데 예수님이 사람의 옷을 입고 이세상에 내려오신 혜택을 우리가 어떻게 누릴수가 있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논박되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옷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지만 영원히 사람의 옷을 입고 사신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땅에 살아 계실 때 생생한 인간으로서의 그 삶과 말과 섬김의 광경을 생생하게 성경이 기록으로 남겨 주셨습니다. 신자안에 오신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바로 그 기록을 읽을때에 숨을 불어 넣으시고 감화를 주셔서 다시 이 성경 속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생생하게 재현하여 영적으로 그분의 생애를 경험하게 하는 일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경험이 있는 모든사람들의 공통점은 뭐냐면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그 순간에 예수님이 바로 자기 앞에서 자기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천년전의 골고다 언덕에서가 아니라 지금 나의 삶의 현장에서 바로 지금 나의 모든 죄를 위해 못박히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불쌍한 영혼들에 대해 복음을 전할 때 우리들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바로 그들에게 그런 사랑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때 바로 그 앞에서 그를 위하여 지금 못 박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도자의 마음속에 경험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령님은 이미 이천년전에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의 생애와 십자가의 사건을 이천년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서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십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실제로 사람의 몸을 입고 참 사람으로 이세상에 내려 오시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성령이 역사하셔도 그것을 느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참 사랑으로 이세상에 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33년 동안 이땅에 사시면서 고난과 결핍으로 이 세상을 살게 하시고 특별히 삼년동안에는 예수님의 그 생애가 그분의 언행이, 그분의 섬김과 표정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들어나게 하심으로서 참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그리고 죄인을 향해 얼마나 자비로우시며 또한 하나님과 화목하기 원해서 뉘우치는 죄인들을 얼마나 기쁘게 용서해 주시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와 한 형제인 동시에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계시자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성경이 우리에게 값지고 소중하지만 특별히 이 복음서는 성경에서 보석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지상에 사시는 동안에 어떻게 사셨습니까? 천한 이세상에 오셔서 굶주린 자를 위해 물고기와 떡을 먹이셨고, 죄가운데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찿아 오셔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죄를 짓고 모든 사람에게 정죄를 당할 죽음의 위협앞에 있는 여인을 용서해 주심으로서 말로만 듣던 하나님의 용서해 주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의 생애를 본 사람, 그 기록을 읽어 예수님의 그 모습을 연상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보여 주셨습니다. 주린자들을 위해 보리떡과 물고기를 먹이시는 광경은 바로 하나님이 어떤 마음으로 이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지 보여 주시는 장면 이었습니다. 문둥병 걸리고 소경된자 그리고 앉은뱅이가 된 자들을 찿으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며 헌대를 만지시며 치료를 해주시는 광경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이땅에 있는 인간들을 향해 얼마나 넘치는 긍휼을 갖고 계신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말로만 들을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보고 믿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신 원수를 용서하시는 사랑과 자기를 헤치고자 하는 무리들을 향한 일체의 온유함과 겸손함 그리고 오래 참으신 그 인내는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 하나님이 갖고계신 그 인내와 성품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말로만 들려주고 선지자들의 외침만을 통해 들려 주니까 사람들이 충분히 믿을 수가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이세상에 보내어서 이 하나님의 마음을 그 모든 행위와 언어, 인간의 삶의 실존으로서 가르치기를 원하셨고 그 일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참 사람이셔야 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따로 연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가 이야기 했던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했던 그 모든 사랑의 찬가는 바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직접 보고 배운것들이 아니라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배운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만난적이 없었지만 그러나 성령을 통해서 이 지상에 계셨된 많은 지식들을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생생하게 영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도 은혜를 받으면 똑같이 예수님이 내 옆에 살아계신 것처럼 그 예수님을 본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그 예수님의 본이 생각나고 목회자와 주위에 있는 신실한 형제들을 보면 졀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부분은 예수님 닮은 부분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에 또 그들의 형상속에서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이 모든 효과는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이세상에 내려 오셨기 때문에 일어 날 수 있는 효과 였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참사람으로 오셔야 했던 이유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함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가 생명이시기 때문에 죽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속죄의 제물로 죽어야 했습니다. 구약의 제사를 생각해 보십시요. 죄를 지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용서 받기 위해서는 짐승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짐승이 대신 죽어서 피를 흘리면 그 피를 보시고 그 죄인을 향한 진노를 잠시 푸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의 길이 잠깐 열렸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자원이 공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곧 다시 막히게 되어있고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자원은 끊어지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영원한 방편이 아니었다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방편이 되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열고 하나님께로부터 끝없는 자원이 공급되게 하기 위해서는 영원히 죄의 용서를 가져다 주는 방식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했는데 짐승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처음 인류에게 죄를 들어오게 한 장본인이 사람이었고 그 사람이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모든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죄 없는 사람이 그 죄를 위해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지만 영원한 죄의 용서의 효력을 불러 일으킬수가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 없는 사람이 제물로 필요했는데 죄가 들어온 이후로는 인간의 상식에 의해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죄를 지니고 태어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제물로 자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죽음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도 역시 죄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속죄의 제물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 없는 인간을 이세상에 창조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세상에 오셔서 하신 감동적인 많은 일을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시면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33년 동안 사시면서 고난과 결핍으로 가득찬 인생길을 걸으셨고 그리고 특별히 삼년동안은 신명을 다 바쳐서 우리 인간들을 위한 아버지처럼 형님처럼 사셨습니다. 주린자를 먹이고 소외된 자를 위로 하시며, 병든자를 고치고, 진리를 알지 못해 어두워진 사람의 마음에 진리의 빛을 비춰 주셨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어 죄인들의 발까지 씻기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아름다운 일이었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한가지 일을 예수님이 하실 수 없었더라면 이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허사가 될 뻔 하였습니다. 그 마지막 한가지 일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 대신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으시는 것 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형벌과 죄책을 담당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쏟아 부어지는 모든 진노를 담당하고 우리를 위해 죽지 않으셨다면 인간의 불순종과 죄에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풀리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는 용서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다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 흘리시는 동안에도 일어나지 않던 일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그 순간에 일어 났습니다. 성전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구분을 지어주는 휘장이 찢어진 사건 이었습니다. 성소는 12평 정도되는 방이었고 거기에 휘장이 쳐져있고 바로 그 옆에는 6평되는 지성소라는 방이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일년에 한 차례씩 오직 대제사장만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곳 이었습니다. 성소는 제사장은 누구든지 차례가 되면 들어갈 수 있는 곳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운명하시는 그 순간에 그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 휘장은 아주 탄탄하게 짜여진 직물 이었습니다. 양쪽에 황소를 매달아서 반대편으로 잡아 당기게 해도 찢어질 수 없는 아주 질긴 천으로 된 것이었는데 이것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은 하나님이 직접하신 기적이었습니다. 이제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구분이 필요 없고 하나의 방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사실은 제사장은 이제 누구든지 지성소와 성소의 구분없이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하는 신학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요” 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인간의 중보자가 필요없이 직접 누구든지 그 피로 용서 받은 모든 사람들이 찢어진 휘장을 지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 길을 걸어 하나님이 살아계신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모본을 보이시고 형제들과 하나되는것 가지고는 이 일을 하실수가 없었고 반드시 예수님은 죽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죽임 당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반드시 사람이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은 죽으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참 사람이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계획을 가지고 아기 예수를 이땅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 오신 이날이 어떤 면에서는 기쁨이 짝이 없는 날이지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아기로 이세상에 오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우리를 위해 참으로 죽으시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우리는 이 성탄절에 또 한편으로는 주님의 고난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III.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이렇게 하심으로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 임마누엘’이라고 말합니다. ‘임마누’는 우리가 함께 한다 우리와 함께 한다, ‘엘’은 하나님이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별명 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시는 신비하고 위대한 교리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우리 위에 계신 하나님 이셨습니다.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멀고 죄인들이 다가가기에는 너무나 거룩하신 초월해서 우리 위에 계신 하나님 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땅에 내려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구약의 시대가 ‘God upon us’ 우리 위에 계신 하나님의 시대라면 예수님이 내려오신 이 시대는 ‘God with us'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과 함께 먹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 대화하시며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람들의 삶속으로 친히 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의 몸을 입고 영원히 이 세상에 계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친히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당신의 분신과 같은 존재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는데 그분이 바로 성령님 이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는 시대 ’God in us'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하나님이 우리 위에 계셨지만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와 함께 계셨고 이제는 우리 안에 계셔서 그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아루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하시고 싶어하시는 일은 바로 예수님이 이땅에 계셨을 때에 제자들에게 하시고 싶으셨던 그 일을 위해서 우리안에 계십니다. 전에는 우리들이 눈물을 흘리고 슬퍼할 때에 예수님이 친히 갈릴리로 그리고 유다로, 사마리아로, 우리 있는 곳에 오셔서 우리 뺨에 흘리는 눈물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안에 있는 성령님이 그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친히 계셨을 때 하던 것과 똑같이 우리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이 씻어 주십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무지할 때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을 보라 가르쳐 주심으로서 우리의 영혼의 눈을 뜨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은 그 예수님이 성령님으로 우리안에 계셔서 그래서 그 성령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셔서 그래서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낙심하고 희망이 없어 좌절할 것 같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너희는 담대하라. 예수님이 그렇게 격려 하셨지만 이제는 성령님이 우리안에 계셔서 바로 그 일을 하십니다. 환경이 막막하고 아무 희망이 없을것 같을 때 성령님께서 내안에 말씀 하십니다. 이 세상에 온갖 체험이 내 마음을 흔들고 악한 원수들이 나를 겹겹이 에워싼것 같은때에도 성령님이 나에게 말씀 하십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를 붙들어 주리라. 그때 우리는 마치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친히 우리를 어루만지시며 그리고 우리를 도와 주시는것 같은 그런 놀라운 예수님의 인격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옷을 입고 이세상에 내려오신것은 바로 이렇게 참 하나님이시면서도 참사람이어야 했기 때문에 사람의 옷을 입고 이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이 구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이 화목을 생각해 보십시요. 거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찬송)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하셨네 주 치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예수님이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세상에 내려 오셔서 온갖 멸시와 욕을 당하셨습니다. 당신은 고난을 당하시지만 우리가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가 있다면 느낄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우리들이 체험할 수 있다면 받아들여지지 않는 하나님의 그 용서의 은혜를 죄인들을 섬기시는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서 친히 알수만 있게 된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비워 사람의 몸을 입고 이세상에 내려오시는 이 비천한 일도 기꺼이 하실 수 있었습니다. 성탄은 바로 예수님이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기 위해서 그래서 친히 아기로 태어나신 그 날입니다. 이날이 그날인지 아닌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많이 지나도 우리의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사실은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이렇게 비천하도록 인간의 몸을 입고 이세상에 내려 오신것이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으면 우리는 이 성탄절이 의미있는 성탄절입니다. 그럼으로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주님이 오신 이 성탄의 날에 우리가 여느 세상처럼 그렇게 가볍고 경박한 즐거움으로 이 소중한 절기를 보내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자신을 타이릅시다. 나같이 쓸모없는 한 인간을 하나님과 원수 맺었던 나를 하나님과 화목시키시기 위해서 무지하기 짝이 없는 짐승과 같은 나의 눈을 뜨게해서 나의 귀를 열게해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보고 듣게 하시기 위해서 친히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옷을 입고 이세상에 내려오셨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은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 죽으셨던 예수님을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이 화목의 사역을 잘 기억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에 이룬 이 평화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잘 지켜야 합니다. 매일매일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과 나 사이의 평화를 위해서 예수님이 비천한 사람의 옷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고 대신 죽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이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고 여기까지 걸어오게 하셨는지를 회상하면서 다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찬송) 내 평생 사는 동안 주에 살리라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그리고 눈을 들어서 아직까지도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과의 화목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이 지구상 곳곳에 그리고 우리의 주위에, 먼 섬에, 시골 오지에 그리고 번잡한 도시 한 구석에 그리고 우리의 가족속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면서 그들에게 이 화해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많은 헌신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복음이 전해지게 하고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도 누군가에 의해서 이 복음이 또 전해지게 하고 주님이 마음에 품으셨던 그 사랑과 열심을 가지고 우리들이 아기 예수가 왜 사람의 옷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 되었는지를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 길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때마다 예수님도 그 고난의 길을 걸으셨던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아니 하나님 자신이셨지만 그래서 성도들의 찬송과 천사들의 경배가 있는 하늘에만 머무르셔야 했지만 우리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낮고 천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더러운 세상에 오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를 비워 우리의 안락한 삶과 그 모든 풍요로움을 비워 스스로 사람들과 같이 계신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저 낮은 곳으로 더 비천한 곳으로 더 더러운 곳으로 내려가고 또 내려가고 내려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고난이 올때마다 예수님이 하신일을 생각하며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해서 결국은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과의 평화가 아기 예수와 함께 이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그날이 올때까지 우리들이 이 일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여러분들에게 주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