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셔야 했던 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이 우리의 구원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예언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실과를 따먹고 범죄 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실과를 따먹은 것에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이 창조세계의 질서를 대적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인간의 그 불순종의 죄를 타고 온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에 죄가 물밀 듯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인간을 통로로 해서 들어온 죄는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과 피조물, 그리고 인간과 인간, 인간의 자기 자신 이 모든 관계를 모두 파괴시켜버렸고 일시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한 그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그 죄는 정말 큰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창조한 인간들이 그 죄를 끝으로 영원히 허무하게 죽는 것을 보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셨는데 여자의 후손이 와서 우리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구원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아담과 하와, 이래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여자의 몸에서 아이가 태어나기만 하면 그 아이가 혹시 우리를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죄에서 구원해줄 그 구원자일 것이라고 기대를 하였습니다. 바로 그런 희망을 가진 사람 중 원조가 바로 아담과 하와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생명을 누리고 주님의 임재 안에서 사는 기쁨이 뭔지를 맛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산산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서지고 감당할 수 없는 죄의 결과가 자신 안에 온 세상 안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죄로 인한 고통이 무엇인지를 가장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들이 바로 아담과 하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고 아이를 낳았을 때 이름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가인이라고 했는데 이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아이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이미 그 가인이라는 이름 속에 그 아이가 여자의 후손으로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존재이기를 바라는 소망이 녹아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노아가 태어났을 때 왜 그 이름을 노아라고 지었습니까? 그 이름 자체는 바로 “쉰다.” 라는 의미였습니다. 어쩌면 이 아이를 통해서 우리에게 쉼을 줄 것이라고 하는 그 기대 때문에 그가 혹시 여자의 후손일까 하여, 약속의 후손일까 하여 그 이름을 노아라고 지은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계속 여자의 후손에 대한 기대가 있어져왔지만 그러나 사실의 그 장엄한 약속은 이 마태복음 1장에 와서 실현이 됩니다.
앞에 나온 모든 여자의 후손들은 창세기 3장에서 이야기한 그 여자의 후손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죄 가운데서 건져내기 위해서는 죄를 대신해서 죽어야 할 제물로 이 세상에 여자의 후손이 오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죄 가운데 태어난 사람들이 되었고 죄 가운데 태어난 사람은 죄를 위해서 대신 죽는 제물의 역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흠 없는 제물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방법이 바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하사 이 세상에 아기 예수를 오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셨다는 점에서는 여자의 후손이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그 여자가 동정녀였다는 사실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아이를 낳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에도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이게 동양사상입니다. 그러니까 남자의 자손이 정상적인데 여자의 후손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남자의 후손이 태어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원자가 이 땅에 올 것을 이미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오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남자를 알지도 못하는 경건한 여자, 이 마리아에게 천사가 와서 지극히 큰 하늘의 능력이 너를 덮을 것이고 그리하면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텐데 그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왜냐하면 그가 저희 백성들을 자기의 죄에서 구원해낼 자다.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절은 바로 이런 유서 깊은 약속을 배경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33년 동안 사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여자의 후손으로 이처럼 사람의 생육의 방법이 아닌 성령으로 잉태되는 기적적인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은 먼저 흠 없는 죄 없는 제물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 인간으로서는 죄 없는 인간을 낳을 수 없었으니 또한 죄 없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분은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구원받지 못하고 죄와 어둠 속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비롯해서 또한 구원받은 우리들에게도 아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준다고 하는 보증이 되었으니까 우리들에게 말할 수 없이 기쁜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의미를 알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이었고 그 일이 누구를 위한 일이었는지를 깊이 깨닫고 나면 이 성탄절은 눈물이 없이는 맞이할 수 없는 그런 감회의 깊은 명절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셔서 구원하시려고 했던 사람들이 정말 구원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더러운 죄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주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려오셨을 때 사람들은 빛나는 별, 목동들의 노래 소리, 천사들의 합창을 기억하고 평화로운 마구간과 그리고 낭만적인 동방박사들을 생각하지만 사실 그 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평화로운 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서 군사를 풀었던 헤롯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급히 죽음을 피하려 애굽으로 도망가던 황망한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피난길을 생각해보십시오. 유대인의 왕으로 난 예수를 두려워해서 2살 미만의 아기를 모두 죽여 버리고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사랑하는 어린아이를 품에서 빼앗겨 찔려 죽임을 당한 그 어머니들의 피 끓는 통곡소리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바로 그런 치열한 전쟁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굶주리고 고난으로 가득 찬 고단한 일대기를 모두 거론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는 사실, 그 가치 앞에서 황망함과 그리고 죄송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성도들과 천사들의 경배를 영원히 받으시면서 영광을 홀로 받으시기를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비천한 여인의 몸에서 핏덩어리가 되어서 그것도 마구간에 태어나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는 비참하게 오셨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사신 생애가 왕다운 생애를 사셨더라면 우리는 이 성탄절에 그렇게 황망하고 죄송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헤롯의 핍박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으시고 30년 동안 개인적인 생애에서 예수님은 생애 어느 한부분에도 하늘의 하나님의 아들다운 영광을 누리시거나 고귀한 보좌에 앉으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살아서 30년 동안 성장하신 동안 가난은 그분의 친구였고 병들고 고통 하는 이웃들이 늘 그분 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결핍과 가난 속에서 병든 자들과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섞여서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이 세상에 계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모든 것을 가지신 그분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이 세상의 인간들 중에도 가장 낮고 천한 가난한 집안의 한 아들로 이 세상에 30년 동안을 가난과 결핍 속에서 사셨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30년의 개인적인 생애를 마치시고 그 이후에 이어진 3년의 예수님의 생애는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고난과 그리고 시련이 뒤범벅이 된 연대기였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걸어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죄인들과 하나 되고 또 그 죄인들을 위한 메시야로 취임하시기 위해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불과 같은 고난으로 세례를 받으신 생애였습니다. 광야의 40일 동안에 금식기도를 기억하십니까? 마귀에 이끌려 받으셨던 그 혹독한 시험을 기억하십니까? 성령으로 충만하여 갈릴리로 돌아왔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환영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디에 가든지 박해가 있었고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의 아들을 기뻐하지 않는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병든 자를 고치고 무지한 자를 깨우치고 그리고 굶주린 자를 먹이시고 헐벗은 자를 입히시기 위해서 자신을 돌보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소진한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셨던 생애를 묵상하는 것이 성도의 가장 큰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난을 보시고 그리고 십자가에 박혀 돌아가신 일을 더듬으면서 우리는 그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가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하고, 그리고 예수 때문에 생명을 얻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죽어야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그렇게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고난당한 자들과 함께 아파하시고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신 그런 생애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두 포기하고 버린 사람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친구가 되어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없는 소외된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는 친구였고 그래서 그분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3년 동안을 이 세상에 사시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시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경배를 받았지만 그분의 소유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잘못한 것이라고는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때까지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양떼들을 사랑한 죄밖에 없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진리를 전하는 그 예수를 미워했습니다. 그들이 어둠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했고 그들이 하나님 편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이 뭘 잘못하셨습니까?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임마누엘 하도록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죄 때문에 그 특권을 누릴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지 않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오셔서 그분이 부귀와 영광을 누리셨습니까? 금마차를 타고 다니셨습니까? 한 나라의 왕이 되어서 온갖 부귀를 누리셨습니까? 일평생 가난하고 병든 자들 곁에서 죄를 지었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소문난 죄인들이었지만 참회하는 자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들 옆에 아버지처럼 목자처럼 그리고 형제처럼 친구처럼 함께 해주셨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 세상이 그분을 어떻게 대했는지 결정적인 광경은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나타났습니다. 33년의 짧지 않은 생애를 가시고기처럼 자기의 모든 소유를 내어주고 사셨습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 우리는 너무나 부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우리 이외에 사랑하는 것이 없으셨는데 우리는 주님 말고도 사랑하는 것들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생동안 섬기시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까? 죄 있는 더러운 인간들을 위해서 죄 없는 그분이 천하에 죄인이 되시고 죄인 된 우리들이 용서받기 위해서 그분이 형벌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그러셨습니까? 그 대답이 오늘 성경에 예수님의 별명으로 나옵니다.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분의 별명은 임마누엘이었으니 이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입니다.
죄와 불순종 때문에 원래 임마누엘을 누리고 있던 인간들이 그 모든 임마누엘의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무엇을 하고 살든지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었고 무슨 일을 꾸미든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없는 동안에 그들은 허무한데 굴복하고 죄악을 행하며 창조의 목적으로 더 멀어진 삶을 숙명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에 그 수많은 몸부림에도 그리고 철학자들과 사상자들의 큰 골똘한 연구,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습니까?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한 나라가 많은 철학자를 거느리고 있던 나라가 그리스였습니다. 기원전 3-4세기 그때 철학이 엄청나게 발달했습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통계를 보면 인류역사에 가장 자살을 많이 한 사람들이 바로 그 철학자였습니다. 임마누엘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나자 마치 태양을 잃어버린 하늘아래 사는 식물과 그리고 모든 인간들처럼 무엇으로도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잃어버린 임마누엘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신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의 이름이 임마누엘이었습니다. 죄 때문에 임마누엘을 잃어버린 백성들을 그 죄를 모두 짊어지고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물려받은 우리 인간들에게 그 임마누엘에게 돌아가게 하시려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오. 그의 상함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하나님 앞에 한없이 사랑스러우신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주님의 눈앞에 미운 물건이 되어 쏟아지는 하나님의 분노의 잔을 함께 감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우리를 임마누엘 하시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리 떠나 그 임마누엘에 참된 축복을 잃어버린 채 마셔도 마셔도 갈함이 끊임이 없는 이 세상의 물로 스스로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하고 먹어도 먹어도 배부를 수 없는 양식을 위해서 사는 이 세상에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임마누엘의 축복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해서 고통 하는 이 세상에 궁극적인 원인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야지 됩니다. 그리고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는 사람들에게 바로 그 임마누엘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기 위해 평화의 한 아이로 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알려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우리의 인생은 숨질 때까지 예수사랑 전하고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들이 되어야 합니다. 만입이 있어도 그 입을 가지고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오신 아기 예수의 그 깊은 소식을 증거 하는 그런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불신자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적용되어야하거니와 신자들인 우리를 위해서는 바로 우리가 실제적인 임마누엘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죽고 그리고 다시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로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보다는 죄를 사랑해서 실제의 삶에 있어서 임마누엘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실제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 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쪼개어 그 핏 길을 열어서 우리를 보좌 앞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 하나님을 친근히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한사람 한사람을 위해서 피 흘리고 죽으셨던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얻은 화목이고 어떻게 얻은 친교입니까? 어떻게 얻은 임마누엘의 축복이고 어떻게 얻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까! 그것을 한줌의 지푸라기만도 못한 이 세상에 물질과 썩어 없어질 명예나 세속적인 기회들, 심지어는 육신의 정욕을 주고 예수를 파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그날에 아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이 날에 지금도 보좌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여러분들을 향해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내가 내 몸을 버려 내 살을 찢고 내 피를 흘려 죄인 된 너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여 임마누엘의 축복을 누리게 하였으니 내가 너희에게 이루어놓은 그 임마누엘을 지키고 누리는 사람들이 되라고 부탁하는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주님 오신 이 성탄절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회복의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멀리 떠나서 소원해졌던 집 떠난 탕자와 같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예수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그 임마누엘을 내가 소중히 생각하지 않고 실제적으로는 그 임마누엘을 일어버린 채 다시 하나님과 낯선 관계가 되었고 다시 하나님을 대적하는 관계가 되었고 아기 예수오심을 마음껏 기뻐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성탄 찬송과 함께 탕자의 귀향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추운 겨울 눈보라가 몰아치고 국풍한설에 입이 얼고 발가락과 손가락에는 동상이 걸렸고 여름에 입고 나간 옷은 때에 절고 그리고 빌어먹을 때도 없어서 굶주려 금방 얼어 죽을 것 같은 비참한 처지가 된 그 탕자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탕자의 몸으로 각고의 결단 끝에 아버지의 집을 찾았을 때 그 추운 겨울밤 눈보라치는 깊은 밤에 멀리 비추는 아버지의 집에 불빛이 집으로 돌아오는 이 탕자에게는 얼마나 사랑스러운 불빛이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앞에서 진실한 신자가 되기까지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은혜 안에 사는 일이 어렵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그 일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임마누엘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거기는 더 어렵습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저는 성탄절에 벌써 선물을 몇 개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기도 했고 줄려고 또 몇 개 포장도 해났습니다. 그리고 아빠가 돌아가셨거나 외로운 아이들에 위한 선물에도 제가 모두 사인을 해서 교육자들을 통해서 제가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아침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게 선물하고 나도 선물하는데 성탄헌금이 주님께 드리는 선물이 되기는 좀 힘들 것 같습니다. 그것 말고 그것은 당연하고 그것 말고 주님께 무슨 선물을 드리면 좋을까? 그때 제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정말 원하시는 선물은 우리 자신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만약에 내가 내 심장을 꺼내어서 예쁜 리본을 매달아서 우리 주님께 드리면 그것이 최상의 선물이 아닐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한번 이 성탄절에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지난날에는 주님의 사랑을 모르고 예수님이 피 흘려 값 주고 사신 이 임마누엘을 잃어버렸지만 이 성탄절에 주님께 돌아와서 진실로 방종했던 우리의 옛 삶을 회개하고 정말 우리 머리 위에 리본을 달면 우리 자신 존재 그 자체가 주님께 선물이 되는 그런 성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