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 없는 양 같은 우리를 위하여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고 방황함이라.” (마9:35~36)
예수님께서 세상을 향해서 가지고 계셨던 그 마음을 교회가 동일하게 갖는 것이 없다면 그가 무엇을 하든지 또 어떤 뛰어난 생각을 가지고 있든지 그것은 하나님 앞에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교회를 이 세상에 세워 놓으신 것은 당신이 이 세상에서 하시던 그 일을 그대로 계승하게 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워 놓으신 것이에요. 더 쉽게 말하면 교회는 사람 좋으라고 세워놓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좋으라고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교회의 시작이 언제냐? 다시 말하면 신약교회의 시작이 언제냐? 그것을 어떤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의 지상생애 속에서 이미 교회가 세워졌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진정한 신약교회는 오순절에서 성령이 강림하신 후에 진정한 신약시대의 교회가 세워졌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쪽을 취하든지 간에 분명한 사실 하나는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신 그 목적 자체가 자기가 이 세상에서 하시던 그 일을 교회에 위탁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워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성공 했느냐? 실패했느냐를 묻는 것은 무모한 일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이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주님 앞에서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교회가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이루시고 싶으셨던 그 일들, 그 사역, 그리고 그 마음을 얼마나 잘 계승하고 있는지가 교회가 얼마나 살아있는가 하는 증거들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행하셨던 가장 중요한 섬김이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가르치시는 일이었고 둘째는 선포하시는 일이었고 세 번째는 고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르침, 선포함, 치유함 이 세 가지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하셨던 가장 중요한 일이었고 교회는 바로 그것을 계승하여 이어가기 위해서 서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가르치시는 일은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보다는 소수의 무리들을 놓고 많이 사용하시는 방법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천국의 복음에 대해서 강력하게 선포하시고 나서는 어리둥절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고 나면 끝까지 남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이에요.
교회는 무엇보다도 배우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생활 속에서 무엇인가를 하나님 앞에 배우려고 하는 학생의 자세가 없는 사람들은 영원히 표류하는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고 세상을 향해서 거의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은혜를 받을 수도 있고 또 영적인 체험을 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삶을 견고하게 붙잡아주는 것은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자녀들을 가지고 있는 부모들의 경우에는 자신이 그렇게 기독교 신앙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사명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그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일을 하셨고 교회가 이 일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가르치는 교회로 소문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잘 가르치는 교회 ‘다른 곳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곳에 가면 이해가 되더라.’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었었는데 거기에 가니까 명쾌하게 가르쳐 주더라’ 그래서 온 교회가 부지런히 배우려고 애를 쓰고 또 교회는 열심히 가르치는 사람들을 길러내어서 진리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그 일이 예수님께로부터 계승받은 일이다. 그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외치는 예수님의 설교사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수의 사람이 아니라 다수의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외치는 그 일이었습니다. 그때도 틀림없이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이 일은 제자들이 열심히 도왔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이었고 열두 명의 제자들만이 아니라 그 예수님 주위에는 전적으로 예수님만을 따라다니면서 그 복음을 듣고 그 사역을 수종드는 칠십 인의 전도대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열심히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서 이제 어느 동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신다 할 때에 그들은 열심히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칠 수 있도록 도왔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도울 수 있는 가장 큰 일 가운데 하나는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 일이 예수그리스도께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중요한 임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 뼈아픈 가책을 한국교회가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 아주 신실한 학생 하나가 있었습니다. 대학생이었는데 열심히 뛰어다니니까 늘 전철에서도 전도하고 그리고 버스 안에서도 전도하고 경찰서도 많이 끌려갔었어요. 그렇게 열심히 전도를 해요. 그런데 그 형제가 한번은 그런 이야기를 해요. 그때 제가 전도사였죠. 전도사님! 제가 전도를 열심히 하거든요. 그래 내가 알지! 그런데요 전도사님 저는 전도하면서 결국은 내가 열심히 전도하면 저 사람들이 동네 가까운 교회에 나갈 텐데 내가 전도한 저 사람들이 교회에 나갈 거라고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대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아니 왜 저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면 좋지! 가슴이 미어지냐고 그랬더니 그 형제의 이야기가 우리의 가슴을 찔러요. 전도사님 당신은 내가 복음을 전한 저 사람들이 아무교회나 나가면 참된 기독교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직한 증언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그 질문이 잊혀지지 않아요.
정말 정말 어느 교회든지 나가면 참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이고 인간은 누구이며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시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그분을 찾아가야 되는지를 아주 명쾌하고 아주 명지하게 마치 깊은 물이지만 티 하나 없어서 아주 맑게 그 개울속이 들여다보이는 그 물처럼 그렇게 명징하게 우리들은 참된 신앙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포는 항상 애매모호하거나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거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선포는 어렵거나 유식한 사람들만이 겨우 들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설교에 동원된 예화들은 맷돌을 가는 이야기, 그리고 공중의 나는 새들 이야기, 들에 피는 풀의 이야기, 꽃의 이야기, 농부들의 이야기, 밭가는 이야기, 종들이 상전을 섬기는 이야기, 그런 아주 흔하고 일상적인 일들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아주 명지하게 드러내보여 주셨습니다. 언제 어느 때든지 마음이 강퍅해서 그렇지 주님의 그 명쾌한 선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과 그러므로 회개하여야 한다는 것과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나라를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모두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심심하다 교회를 들른 사람이든지, 갈망하다 교회를 들른 사람이든지 그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언제나 명쾌하게 인간은 이러한 존재이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며, 어떻게 그 인간이 하나님을 뵈올 수 있으며, 하나님이 어떤 사랑으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인간에게 찾아오셨는지 명징한 증언을 들을 수 있는 그런 선포사역을 위해서 교회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들이 그 교회당에 들어섰을 때에 참된 진리가 무엇이고 진정으로 참 하나님을 믿는 도가 무엇인지를 들을 수가 없다면 그 교회는 빨리 이 지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사역을 하나님의 교회가 물려받았기 때문에 이 일을 위해서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여러분들은 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아주 심각한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여러분들이 저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마지막 날에 여러분들은 크게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아직도 여러분들이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있다면 그 죄를 깊이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설교자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은 채 그 교회에 참된 복음이 울려 퍼지기를 기대하며 교회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를 통해 요행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이 지상의 생애에 사시면서 하셨던 일은 병든 자를 고치시는 사역이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는 이 사역은 그 예수님의 생애의 사역에 있어서 아주 놀라운 특징을 이루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병을 고치는 사역 그 자체는 하늘로부터 임하는 신비한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가셨어도 보혜사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지금도 이러한 사역들은 계속될 수 있고 지금도 또 일어나고 있는 사역이고 우리들이 보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병 고치는 사역의 이 중요성은 지금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선 그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첫 번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냐 하면 이 병 고치는 놀라운 역사를 통해서 그 새로운 메시야 예수그리스도의 시대가 도래 하였다는 표징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했습니다. 예수님이 단지 선지자나 혹은 제사장이나 혹은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적인 교사가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의 시대를 몰고 온 구약성경이 그토록 오래 기다리던 구세주 예수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표징중의 하나가 질병을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세였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이분이 평범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리고 이분과 함께 새로운 은혜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신유의 역사와는 의미를 좀 달리한다고 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이 신유의 역사의 놀라운 배경은 그 당시에 처참할 정도로 소외되었던 의료혜택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옛날에 우리 한 삼십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시골에서 오줌을 못 누워서 배가 점점 불러오다 죽는 그런 병들이 있었습니다. 방광이 문제가 생겨가지고 오줌을 배출을 못해서 죽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병은 병도 아닙니다. 병원에 가면 금방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그보다도 더 심각할 정도로 의료의 혜택이 없는 그런 상황에서 그 고통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건지시는, 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그리스도의 그 불붙는 자비의 마음이 그런 병 고침을 통해서 놀랍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병이 들면 기도할 것인가? 병원에 갈 것인가? 를 가지고 고민을 많이 하는데 고민할 필요 전혀 없습니다. 병이 나면 병원에 갈 수 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병원에서 모두 포기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도록 하나님이 경륜하시는 그런 병들이 있습니다. 그런 병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기도와 믿음으로 해결해야 되겠죠! 그러나 감기 걸렸으면 금식기도하면서 감기가 떨어지기를 매달리기 보다는 빨리 가서 주사한대 맞고 나아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예수그리스도의 병 고치시는 사역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만 그러나 오늘날은 이 병 고치는 사역이 문자적으로 우리들에게 계승되어야 한다. 라고 말하기보다는 그 의미와 중요성이 새롭게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있는 보다 더 커다란 질병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시대 때에 기적이 아니면 고칠 수 없었던 질병들 중에 많은 질병들을 이제 주님이 주신 인간의 지혜로 말미암아 고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것보다도 더 심각한 질병들이 우리인생 가운데는 그 시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더 많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깊은 내면 속에 있는 질병들입니다. 무엇으로도 웬만해서는 고쳐지지 않는 인생의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 끔직한 질병과 같은 그 패역과 그리고 보다 더 깊이깊이 파고들어가고 마지막 시대가 다가올수록 점점 더 강력해지는 이 패역한 마음 그리고 이 사람들 사이에서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랑이 식어지고 불법이 성행해서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식어지면서 서로가 생채기를 내는 깊고 골 깊은 그런 그 패역과 그리고 끔찍한 상처 이런 것들은 정말 이제는 이전의 육신의 질병이 가지고 있는 심각함 못지않게 너무 깊은 어려움들을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셨던 그 치료의 사역이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된다면 우리는 육신의 병을 고치는 사역보다도 오히려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중요성은 오늘 이처럼 인간의 이 망가진 영혼과 내면의 세계를 고치는 이 일이 우리에게는 예수그리스도의 치유사역 중에서 계승되어야할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의 기독교는 매우 영적인 종교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복음을 전해주시고 가르쳐주신 이후로 우리는 성경의 보다 깊은 관심이 인간이 불행한 그 궁극적인 원인을 고치는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이러한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영혼들 속에 맺혀있는 그 깊은 상처와 병든 골 깊은 그런 하나님과의 파괴된 관계 그리고 정말 버림받은 자처럼 버려져서 이 세상의 물질이나 인간관계 이 세상의 향락이나 이 세상의 좋은 여건, 어떤 것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처절하게 병든 인간의 내면의 세계를 고치도록 교회는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 교회가 이러한 사명을 회복하면 그런 놀라운 도구로 하나님 앞에 남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교회의 섬김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바라보시는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그 수많은 영혼들을 향한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니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함이라.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제가 1993년 11월 15일로 기억됩니다. 교회를 세우기 직전이었지요. 밤에 자는데 저희 집사람은 옆에서 자는데 도저히 잠이 안와요. 그래서 일어나서 침대머리맡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전혀 생각한 적이 거의 없던 기도한 적도 없고 생각한 적도 없는 기도의 제목을 하나님이 특이하게 쏟아놓으셨어요. 그게 뭐냐 하면 교회를 개척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이 무슨 자다가 뚱딴지같은 소리에요? 그런데 사실 제가 신약대학 두 학교를 섬겼는데 한 학교를 섬길 때 너무 갈등하고 괴로워서 한 백 명만 되는 교회에서라도 오라 그러면 교수 집어치우고 가려고 했어요. 그런 적은 있었지만 아직 개척이라는 것은 사실 꿈도 꾸지 않았고 그것은 특수한 인간들이나 하는 것이지 나같이 평범한 인간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기도를 시키시는 것이에요. 그게 내가 한 게 아니라 기도를 시키시는 것이에요 밤새도록……. 너무나 피곤해서 이제는 가서 자야지 하면서 엉금엉금 기어 올라가서 드러누우면 다시 또 말똥말똥해지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내려오고 또 기도하고……. 밤에 자다가 저희 집사람이 여보 왜 그러느냐고 하면 하나님이 기도 시키시는 것 같다고……. 둘이 번갈아가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그날 밤을 새웠어요. 그날 그때 새벽녘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 뼈저리게 주신 말씀이 이 말씀이었어요. 내가 이 땅을 보니 수많은 무리들이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구나! (찬양: 내게 오는 많은 양떼 네게 맡겨 줄 터이니 사랑하는 내 친구야 많은 양떼를 부탁한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
사실 이 성경본문을 그 이전에도 많이 읽고 그리고 설교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몇 년 동안 잊어먹고 살았어요. 그런데 그 세밀하게 진짜 가슴에 심으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때 그 새벽에 즉시로 밀려왔던 게 무엇이냐 하면 그 교회에 대한 비전이라든지, 교회를 이렇게 만들어서 이렇게 이끌고 가야겠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 귓가에 들리는 듯한 버림받은 그리고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수많은 영혼들의 그 울부짖음이었어요.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렇게 갈등도 있고, 때로는 괴로움도 있고, 남들한테 말하기 어려운 고민도 있지만 이렇게 주님 앞에 나아와서 괴로우면 주님께 호소하고 아프면 주님께 매달리고 갈 길을 모르면 주님께서 우리의 갈 길을 지도해 주시도록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버려진 자처럼 복음의 혜택을 못 받고 한편으로는 누군가가 참된 사랑으로 찾아가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참된 복음을 들려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마음속에 있는 그 끔찍한 부패함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구원의 은혜로부터 멀어져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봅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의 마음을 나누어 가진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의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이 슬퍼하시는 자리에서 온 교회도 함께 슬퍼하고 주님이 고통하시는 그 자리에서 온 교회가 함께 고통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자리에서 온 교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런 통일체의 마음 그것이 없다면 어떻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 교회가 하고 있는 그 모든 일 들이 주님의 관심을 끄느냐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손이요 주님의 발이 되어서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찬양: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우리의 고민과 슬픔가운데는 사치한 슬픔과 고민이 너무나 많습니다. 맹수와 같이 울부짖는 악한 원수들이 오늘 이 시간에도 삼킬 자들을 찾기 위해서 두루 다니며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유린하는 광경을 보면서 우리들이 정말 주님의 마음으로 합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의 고민 중 많은 것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사치한 염려와 근심중의 많은 것들은 잊혀 질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왜 살려 두셨을까요? 주님이 왜 그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셔서 우리 같은 사람에게 이 복음이 믿어지게 하시고 은혜위에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이 거룩한 사역을 수종드는 사람들로 그 복음의 빚진 자들로 세워두셨을까요? 일평생 사는 날 동안 주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부어지지 아니하고는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예수님이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이 무리들을 보실 때에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되셨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be troubled'라고 되어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심히 괴롭게 되었다는 뜻인데 희랍어 성경에 보면 창자까지 흔들리도록 감동을 받았다고 되어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말로 표현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이런 교회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런 사람들 모두들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드는 이때에 주님의 마음-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수많은 영혼들의 울부짖는 탄식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하시는 그 예수님의 마음을 물려받은 자로서 그분의 뒤를 따라 그분의 손과 발이 되어 그분이 보듬고 쓰다듬으셨던 수많은 영혼들을 상처까지 사랑하며 그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그런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바로 우리들이 얼마나 안일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한번 돌아보십시다. 정해진 시간에 교회에 나아오고 정해진 자리에서 하나님 예배하는 것 이상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의 마음속에 이렇게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고 유리하던 그러한 영혼들에 대한 연민과 아픔이 우리들에게도 있습니까? 주님이 그 영혼들을 사랑하셨던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모르고 살아가고 믿어도 전혀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는 막돼먹은 그리스도인을 볼 적마다 가슴 아파하셨던 주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수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그들을 위해서 나를 죽여서 무언가를 해야 되겠다는 거룩한 마음과 결심이 우리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한마음으로 우리 같이 이러한 교회 이러한 마음을 나누어 가지는 그러한 성도들이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