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기쁨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 20:20).
오늘 이 구절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맨 처음에 보았던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 이후에 일어난 사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아주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 이렇게 전했습니다. 또 주님께서 자기에게 보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말씀도 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예수님과 대화했다는 이야기까지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실을 한편으로는 믿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불신했던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예수님이 부활하신 모습을 여자에게는 보이셨지만 자신들에게는 아직 직접 보이시지 않았기 때문에 이 여자의 증언을 쉽게 믿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또 어떻게 보면 자존심은 또 얼마나 상했겠습니까? 주님이 부활하셨으면 제일 먼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보여주시니 왜 하필이면 하챦은 여자일까 하는 생각은 안 했을까요? 어쨎든 이 일이 있고나서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시는 때가 있었는데 안식후 첫날 저녁때 였습니다. 제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깊은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 두려움에 대해서 성경은 유대인으로 인한 두려움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 때문에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는데 시체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제 남아 있는 예수의 패거리들을 찾아 다녔던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예수를 죽인 혈기등등한 유대인들의 세력이 있었고 또 예수 자신을 헤롯과 빌라도의 심문을 통해서 빌라도가 권위있게 사형에 해당한다고 어쨎든 언도를 하였으니 이제 유대인들은 훨씬 더 좋은 정권의 배경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합법적으로 핍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큰 영적인 권세가 있었을 텐데 예수님이 사라지자 주님이 이들에게 주신 것을 도로 가져가신 것도 아닌데 그렇게 힘차게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던 이 태도들은 다 사라지고 두려움에 휩싸인체 모인곳에 문까지 닫고 숨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닫혀진 문이었는데도 주님은 들어 오셨고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첫번째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이 평강은 이스라엘 백성의 일상적인 인사이기도 하지만 에수님의 이 말씀속에는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우리의 죄값을 모두 치루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화목을 암시하는 평강의 기원이었습니다. 예전에 이 평강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토대로 하는 사람들과의 샬롬을 가르켰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몸과 마음이 모두 행복한 것이 이스라엘 백성에 있어 평강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이제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에 이 말씀을 훨씬 의미심장하게 제자들에게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나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너희의 죄값을 치루었으니 이제 너희는 하나님과 평화하고 나와 평화를 누리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평화를 누리자 너희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냐 하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는 인사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손과 옆구리를 굳이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때문일까요? 그들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살아 나셨을 때에 이것이 환상이나 혹은 몽환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사실은 아니다 하는 것을 당신 자신의 손바닥과 그리고 옆구리를 보여 주시면서 당신 자신의 살아 나심이 진짜 육체를 가지고 살아나심을 보여주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부활하셨을때에 그 손에 못자국과 옆구리를 가지고 부활하셨으니 아마도 우리의 부활은 우리의 육체의 흔적이나 결함을 그대로 가지고 부활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부활할 때에도 다시 장애의 상태에서 부활하게 되고 저같이 눈이 나쁜 사람은 그날에도 눈이 나쁘게 부활하고 나처럼 허리가 신통치 않은 사람은 그때에도 계속해서 꾸부정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모습으로 부활한다면 그 부활이 그렇게 영광스러울까? 아마도 성경에 명백하게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저는 그런 종류의 부활체가 될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때에는 이렇게 모두 육체적인 결함이 있는 상태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겪은 우리의 본래의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혼과는 상관이 없는 육체의 문제였기 때문에 이 영혼이 순결하고 완전한 상태로 회복되는 것처럼 육체도 이 질병과 시련과 사고가 없었더라면 이루어졌을 온전하고 아름다운 육체로 다시 태어남으로 창조의 완성에 이르는 것이 영광스러운 부활일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또 저와 같은 의견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좋게 해석을 합니다. 물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날에 그렇게 결함있게 부활을 해도 그것이 본인들이 지극히 불평이 없고 감사하고 만족하기 때문에 그렇게 추측해도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다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그 부활을 그렇게 영광스럽게 해석을 하는 것이 훨씬 좋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영혼에는 구김이나 질병 혹은 장애상태가 없을까요? 아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혼이 그런 상태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사실은 정상적이고 온전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 입니다. 그래서 정신병에서 수없이 분류를 해서 정신병 가운데 특히한 분류 방법을 보았는데 정상 증후군이 있습니다. 모든것에 이상이 너무 없으면 그것이 비정상이라는 것입니다. 조금은 이상이 있어야 하는데... 수백가지를 분류해서 정상증후군이라고 너무 모든것이 정상이어서 수상하다 라고 하는 그런 증세까지 있다고 하니까 인간이 그렇게 굽고 망가진 영혼을 가지고 태어났고 살면서 게속 망가지는데 망가진 영혼의 상태를 가지고 그대로 부활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영광스러운 영혼의 부활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제 해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뭐냐면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이 완전한 몸의 부활이라고 하는 것을 제자들에게 입증하시기 위해서 그 상처 그대로를 보여 주신 것이지 예수님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그 상처를 가지고 부활하셨다고 우리들이 이렇게 보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어쨎든 저는 그렇게 해석을 하고 나면 훨씬 이 성경의 부활의 교리가 영광스럽고 기대가 됩니다. 배 나온 사람들은 날씬한 날을 고대하고 아무리 화장품을 발라도 변화가 없는 분들은 본판이 바뀔날을 기대하고 이렇게 하면서 부활에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육체의 때를 보면서 우리들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날에 우리의 육체도 모든 사람이 똑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얼마나 흉하겠습니까? 판에 찍어 놓은것처럼 모두 그렇게 생기면 얼마나 보기 싫겠습니까? 강남에 가면 하루에도 몇사람씩 조금전에 만난 사람들을 만난다고 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같은 날 같은 병원에서 수술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사진 가지고 가서 모델이 여러명 있는데 그 중에서 이것으로 택해 똑같은 것으로 하면 수술하는 의사도 똑같고 사람도 비슷하고 본판만 닮았으면 유사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해서 온 시민들이 그렇게 하고 다닌다면 섬찍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식으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저는 그런 모형을 오늘날 지상세게에서도 봅니다. 여러분들은 전부 다 총천연색으로 생기셨지만 은혜를 받으면 할머니도 그렇게 예쁠수가 없습니다. 은헤를 받으면 그 주름 사이사이에 은혜가 들어가서 그렇게 예쁠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은혜를 못받으면 중년 남자들 볼이 이렇게 튀어 나온 사람들이 그것이 사실은 심술이 두룩두룩한 볼입니다. 개기름은 또 왜 흐르는 것입니까? 그런데 은헤를 받으면 그 볼이 그렇게 사랑스럽고 애교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바뀌듯이 하늘나라에서도 우리의 영광스러운 부활도 그럴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자기의 부활이 진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신 것처럼 사람의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 당신 자신이 부활하셨지만 얼마 전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고 요한과 같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못박히고 죽으신 광경이 정확히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부활하신 자신이 그분과 동일인이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평강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 손과 옆구리의 상처, 우리를 위한 고난 때문에 주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오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아주 기뻐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럼 이것이 무슨 종류의 기쁨일까요? 어떤 종류의 기쁨이었을까요? 아니 뭐 그렇게 복잡하게 물으세요? 죽었는지 알았던 주님이 살아 나셨으니까 그것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사실 주님이 살아 나셨다고 할 때에는 기쁠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인도에서 그런일이 있었습니다.사람이 죽어서 묻었는데 그날 밤에 집으로 찿아 왔다고 합니다. 묻었는데 우리는 동여 메니까 사실은 그런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서 질식해서 죽어 버리니까... 그런데 깊게 안 묻고 관에 넣어 묻었는데 밤에 땅 속에서 나오는 한기를 느끼면서 이 사람이 깨어 난 것입니다. 그리고 캄캄하고 두드리니까 관이 열리고 그 다음에 흙을 파헤치고 나온 것입니다. 실화입니다. 그리고 와서 문을 두르리는 것입니다. 문을 열어 보니까 자가기 방금전에 묻은 가족입니다. 그러면 네가 살아 왔구나 하고 목을 끌어 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상태에서 여러분들을 그렇게 죽은자로 장사 지냈던 마귀에게 있어서 여러분들의 회심은 무섭고 두렵고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여러분 온 가족이 회심 안하고 날라리처럼 신앙생활하는데 그 중에 한 가족이 깊이 회심해서 그들에게 예수는 살아 계셔 내가 만났어 라고만 해도 사람들에게 소름이 쫙 돋는다고 합니다. 누가 이야기를 합니다. 아들이 회심해서 장난 삼아서 오늘 식사기도는 네가 해라 했더니 한참 기도하다가 국이 다 식도록 기도를 하는데 우리 아버지 회심하지 못한 이 불쌍한 영혼을 굽어 살피세요 하면서 우는데 소름이 돋우면서 무섭더랍니다. 아! 살아계시구나! 하나님도 살아 있고 그리고 내게 영혼도 있고 영혼의 삶과 죽음도 있구나 하는 두려움이 확 밀려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 최고의 선포는 잘 믿는 사람으로 그 사람 보이는 곳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훌륭한 전파가 없는 것입니다. 존재 그 자체가 선포입니다. 그런데 기쁠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예수님이 필요는 했지만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런데 확실하게 예수 믿는 것이 검증이 되었습니다. 기쁨이 확 솟았습니다. 무슨 종류의 기쁨인지 제가 묻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님이 살아 나셨으니까 그것이 기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기쁨이 어떻게 보면 예수님과의 인간적인 관계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이 살아 나셨기 때문에 기뻐하게 되었는데 그 기쁨은 사실은 성령이 강림하신 다음에 진짜 기쁨이 오게 됩니다. 그 기쁨이 무엇인가 하면 여기서는 신학적인 의미를 아는 기쁨일 가능성이 적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연결을 못 시킨 것입니다. 만약에 연결을 시켰으면 사도들이 다시 물고기 잡으로 갔겠습니까? 자기 할 일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물고기 잡으러 간 것이 나쁘다는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칼빈도 그래서 이해를 합니다. 어차피 사명을 못 받았고 자기가 무엇을 해야 될지를 모르니까 예수님 살아 나신 것을 보았지만 자기들이 무엇을 해야 되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한 것은 기적이었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 기뻐한 것은 인간적인 기쁨이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의 의미가 성령의 강림을 통해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지난 수요일날 설교한 것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러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다. 우리가 다 보았다. 똑똑히 보았고 장사 지내는 것까지 보았기 때문에 누구도 이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난 것도 보았습니다. 그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 오셨구나 아 기쁘다 예수님 정말 반갑습니다 그럴수 있고 또 물고기 먹고 떡도 같이 먹었지만 그러나 진정한 예수가 살아 나셨기 때문에 하늘의 신령한 기쁨이 밀려온 것은 성령강림 후에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리셨다 그러면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하나님이 죽이신 것인데 그러면 하나님이 죽이셨으면 하나님이 미워하고 정죄한 사람인데 살아 났으면 하나님 아니면 살릴자가 없는데 하나님이 정죄하고 죽인 사람을 하나님이 옳다고 살리실리가 있는가? 그런데 죽은 것도 사실이고 살아난 것도 우리가 직접 보았다. 그 두가지 연결을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사람들의 지평을 열어 주시면서 예수의 이 두 사건에 대한 의미를 연결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죽으신 것도 사실이요 살아나신 것도 사실이었는데 그렇다면 둘중에 하나가 거짓말 아니냐? 그런데 이 둘다 사실이다. 그러면 뭐냐? 죽음의 이유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자기 잘못으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으신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냐?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것이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그분을 살리셨구나! 그때 기쁨이 확 밀려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기쁨에 가깝고 지금 이야기는 신학적인 기쁨입니다. 신앙적인 기쁨입니다. 확 밀려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박수치고 찬송을 부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기도하고 체험을 하는 것도 한두번이지 불만 계속 때면 다 타고 무엇이 남겠습니까? 이 기쁨과 영혼의 참다운 변화는 이렇게 신학적인 의미를 성경을 통해 깨닫게 될때 기쁨의 차원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아이고 예수님 반갑습니다. 어떻게 살아나셨는지 그것은 나중문제이고 살아 계신 것은 틀림 없으니까 다시 오셔서 정말 반갑습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일해 보십시다. 이 기쁨이 얼마나 갔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같이 어차피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얼마나 큰 소망입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금방 또 가버리시 않습니까? 얼마 계시지도 않고... 어디 가신다고 보고 하고 가신것도 아니고... 언제 또 올게 약속하시지도 않고 휙 가버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의미를 깨닫게 되어 예수의 그 죽음이 당신 자신 때문에 고난당한 죽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때 제자들의 마음속에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한 내용이 사도들의 가슴속에 한꺼번에 다 들어간 것입니다. 하늘의 왕국이 부서지고 교회의 지평에서 개인의 지평에서 회심과 함께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마음안에 오시는 이것까지 완벽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숨을 안 거는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담대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교인들이 왜 그렇게 열심히 전도를 하지 않을까? 솔직히 우리 10년전, 8년전에는 지금처럼 이렇게 철저한 전도 프로그램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도 굉장히 많이 전도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가호호 누비는 사람은 그때 20명, 30명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120명이 나와서 화요일날 누비는데 그것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는 교회 없습니다. 정말 전도국에 있는 지체들이 온 마음을 다해서 그렇게 전도사, 지역전도 위원장, 부위원장 할것 없이 해서 열심히 합니다. 120명 가지고도 모자랍니다. 200명, 300명이 되어야 합니다. 전도 받아야 할 부류는 두 부류입니다. 전도를 받을 준비가 완벽하게 된 사람들, 끌기만 하면 당겨올 사람들이 있고 거의 믿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전도하지 않으면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전도하다 보면 진짜로 준비된 사람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보면 그런 조직적인 활동이 부족해도 어떤것이 있었는가 하면 은헤를 받은 사람들이 가서 열심히 전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테잎을 자기돈으로 많이 샀습니다. 나중에 요령이 생겨서 교회 돈으로 사서 하나씩 나누어 주고 했지만 많이 샀습니다. 책도 많이 사서 나누어 주고... 그것이 그 영혼에 대한 구제라고 생각을 하고 열심히 한 것입니다. 그래서 5,6년전에 한번 통계를 냈더니 1년 등록한 사람들 중에서 66%가 새가족반이 전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기쁨이 충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안 소망과 기쁨이 넘쳐날때 그때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대게 그런것이 사라진 사람들이 왜 전도하지 않느냐고 하면 목사님 설교가 너무 길어서 데리고 와봐야 소용 없어요 언제 데리고 와 봤어요? 데려와 보지도 않고 그런 소리를 합니다. 3부예배까지 설교를 했더니 기력이 진했습니다. 도저히 말을 못하겠고 설교를 해도 3부처럼 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권을 하고 여기에 앉아서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제가 저의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김은 이라는 소설가가 자기가 원고를 써 놓으면 책이 나오는데 그러면 이런다고 합니다. 밀어 놓은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기가 쓴것을 보기 싫어 합니다. 저도 제가 설교한 것 거의 안 듣습니다. 오늘 전편을 들었습니다. 별고 안 길던데 뭘 그럽니까? 제가 직접 들어 보니까... 다시 또 이번에는 들으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데려와 보지도 않고 왜 그럽니까? 마음속에 이 기쁨이 솟아나면 이 세상으로 말미암아 기쁨이 솟아나면 사람들 손잡고 세상으로 데려 갑니다. 교회에서도 사람들 데리고 세상으로 데려 갑니다. 그런데 마음에 기쁨이 솟아나면 세상에 가서 사람들을 데리고 교회로 데려오고 그리스도인을 데려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참된 부활의 기쁨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던 예수님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시는 분이었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살려 주셨구나 그러니까 누구든지 우리가 이렇게 복음을 전해서 믿는 사람들은 우리처럼 변하겠지 아멘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부활절에 이 예수의 기쁨을 체험하고 열렬하게 전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