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악자와 못박히신 그리스도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눅 23:33).
예수님이 사형언도를 받으시고 그리고 끌려가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어차피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으니까 악한 자들의 의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악한 자들의 그 악한 행동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사건은 인간적으로는 안타까운 것이었지만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꼭 이루어져야 할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 십자가를 지시지 말라고 간청하던 베드로의 생각을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소리치셨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을 당신의 생애의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제자들에게 명백히 풍부하게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다는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귀결이고 또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환경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하필이면 예수님 혼자 십자가에 못박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람들이 떨거지들입니다. 여기에 보니까 강도짓을 하고 왠만하면 그 당시에 십자가 형벌에 처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강도도 평범한 강도가 아니라 아주 말하자면 질이 나쁜 그런 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도 사람들이 많이 보는 앞에서 날을 잡아서 처형하기로 작정을 했는데 그러한 죄인들과 함께 예수님이 나란히 못박히셨다는 자체가 얼마나 수치스러운 사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이 홀로 십자가에 고고히 못박히셔야지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이야기할 때 도전도 되지 그 인생 떨거지들하고 같이 똑같은 십자가 아닙니까? 무슨 예수님 십자가는 황금칠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유대인들에 의해서 제가 보기에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교묘하게 계획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격하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렇게 일을 꾸민 것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밖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렇게 함으로서 그 사람들이 노렸던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가 별게 아니라 죄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이다 좌우에 악한자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이유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린 이유가 차이가 없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렇게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고하다 순교하는 사람들하고 예수님하고 같이 못박혔다고 해도 격이 다른데 이 인생 떨거지들하고 같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간다고 할때 그 인간 말종들 아닙니까? 그런사람들하고 죽어간다고 할때 사람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얼마나 하챦게 여겼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들이 예수의 죽음을 모독하고 헐뜯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이런식으로 악인과 함께 매달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사용하셔서 나름대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십자가에 있는 한 강도의 회심사건입니다. 우리는 흔히 오른쪽에 있는 강도를 이야기 하는데 사실 그것은 우리의 추측이고 성경에는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회개했는지 왼쪽에 있는 사람이 회개했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오른쪽은 선택이니까 오른쪽 강도가 아닐까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꼭 맞으라는 법이 있겠습니까? 어쨎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강도가 예수님을 오른쪽을 보고 이야기했는지 왼쪽을 보고 이야기했는지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린 이 강도는 두사람이 무엇인가 관계가 있는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우리는 우리는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까... 그래서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교회의 역사에 보면 야사에 보면 이름까지 나옵니다. 그래서 이름으로 볼때 이 사람들이 형제가 아닐까 형제가 아니더라도 아주 굉장히 긴밀한 그런 동업관계에 있는 사람들일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어쨎든 두 사람 마음은 하나 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앞부분에 보면 복음서를 전체적으로 조합해 보면 스토리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맨 처음에 예수님이 이 두사람과 함께 셋이서 못박힙니다. 그런데 둘이서 한마음이 되어서 예수님을 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른 다음에 그중에 하나가 예수님의 죽음을 보면서 새로운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우리는 우리가 행한대로 벌을 받지만 이 사람은 잘못하신 것이 없다 없는것 같다 라는 것이 아니라 없다 의로운 분이다 그러면서 마지막 당신의 나라를 이루실때 나를 생각해 주십시요 구원해 달라고는 감히 말을 못하고 나같은 죄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요 이러면서 복음의 의미에 대한 아주 놀라운 깨달음, 하나님, 죄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 천국 이런것에 대한 놀라운것들을 깨닫게 되면서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결국은 구원의 첫번째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그렇게 예수님이 닦아 놓은 첫번째 길을 이 떨거지 같은 인간이 가냐는 것입니다. 길 닦아 놓으면 문둥이가 지나 간다고 그렇게 닦아 놓은 길을 평생 고고하게 주님만을 위해서 순교의 정신으로 살다가 죽은 그런 사람이 첫번째 발자욱으로 걸어가야 하는데 성경을 보면 참 재미있는 것이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에 예루살렘 교회에 지도자를 세울때에도 그때에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인하고 배신했던 베드로를 삼으십니다. 내 마음 같아서는 그래도 가롯유다는 이미 틀린 인간이고 11명 중에 그래도 예루살렘 교회의 목회자를 세우신다면 그래도 근사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 나중에 회개하고 가장 먼저 오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해서 세워야 하는데 예수님이 베드로를 세우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보면 길 닦아 놓고 첫번째 대려가는 사람이 이 떨거지 같은 인간을 데려 갑니다. 무슨 선한일을 했겠습니까? 일평생 강도짓하고 나쁜짓만 했는데...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고 했을텐데 그 인간을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이 한 인간이 악인이요 희망이 없는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잘 보여줄 수 있는 밑그림이 되는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저는 별로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 보석들 좋아 하시죠? 그런데 그 보석을 대게 어디에다 놓는가 하면 까만 비로도 위에 다이아몬드 알을 뿌렸을때 위에는 밝은 조명이 있고 그렇게 전시를 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까맣게 그리고 빛이 환하게 비칠때 까만것은 빛을 흡수하는데 다이아몬드는 빛을 반사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거기에서 각도, 면 그 다음에 크기, 색깔, 빛깔 이런것들이 아주 찬란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항상 까만 비로도를 깔고 그 다음에 거기에 귀금속을 펼쳐 놓는 것입니다. 똑같이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운 행동이지 않습니까?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덜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조금만 필요하고 더 나쁘게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좀 더 많은 은혜가 필요하고 그런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어차피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타락하고 술먹고 나쁜짓 하다가 50세가 다 되어서 회심을 했든지 예수 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모태신앙으로 살다가 예수 믿게되었든지간에 우리가 받은 은혜는 다 말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래서 50세에 그렇게 정신 못차리고 살다가 회개한 사람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이야기하고 예수 믿는 집안에서 잘 자라서 순조롭게 예수 믿은 사람은 말할 수 있는 은혜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 말로 할 수 없는 그 놀라운 은혜를 입어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는 모두 밝게 빛나지만 그러나 문제는 배경입니다. 배경이 보석은 어디서나 그렇게 환하게 빛나지만 그 보석이 하얀 빛깔의 천, 얼룩덜룩한 천 위에 놓이게 되면 별로 빛깔이 안 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까만것 위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정말 막다른 골목에 가 있는 것 같은 실패하고 망가진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이끄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심으로서 모든 죄인들에게 희망을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이 사건도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속에 있었고 예수님의 죽음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인간 말종 같은 인간들하고 같이 매단것도 허락하신것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고 그것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한없이 빛나게 하신것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이 사건을 보면서 누구도 이렇게 말할 수 없도록 예수님이 입을 막아버리신 것입니다. 나는 용서 받기에 너무 큰 죄인이야! 하나님이 나같은 인간 돌아보시지 않을거야! 살아온 모든 삶이 죄로 가득찼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같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시지는 않을셨을꺼야! 이렇게 말하는 모든 사람들의 입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도 중간에 그런 사람들은 별로 빛나지 않습니다. 첫번째 맨 처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닦아 놓으신 첫길을 그 인간 말종과 같은 강도를 데리고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 아무도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이른 사람은 없습니다. 이 인간을 데리고 예수님이 낙원에 이르시기를 부끄러워 하시지 않은 그러한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동기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하나님은 이런 인간 말종과 같은 사람을 예수님 옆에 매달게 하셔서 그래서 예수님이 그 한편에 있는 강도를 예수님이 닦아 놓으신 구원의 첫번째 발자욱을 들여 놓는 사람으로 만드신 동기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말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때에 나를 생각하옵소서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내가 이르노니 오늘 내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럼 종종 이런 상황에 처할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실때 인간 말종과 같은 사람과 함께 매달리신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의 마음은 내가 그 사람 옆에 있어서 내가 영광을 받고 빛나는 그런 사람들을 붙여 주셨으면 참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권력을 향하는 영광을 향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정승집에 개가 죽으면 사람들이 미어지게 오고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안 온다. 그렇죠? 개가 죽는것을 기회로 삼아서 정승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사람들이 막 몰려가는 것입니다. 책도 그렇습니다. 훌륭한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살아 계셨을 때는 책이 잘 팔렸는데 돌아가시고 나니까 책이 안 팔립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런 심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그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받을 수 있는 그런 훌륭한 사람들이 자신들 곁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실 선교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선교지는 정반대 입니다. 선교적인 삶은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그 사람 옆에 있어서 내가 빛날 그런 사람에게 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섬기는 자가 되어서 나보다 훨씬 비천한 사람 때로는 그 사람 옆에 내가 있다는 것 자체가 나의 수치가 될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들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이 여인에게 물을 구하실때에 여인이 예수님께 반문했습니다. 유대인인 당신이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인인 나에게 물을 구하십니까? 라고 말입니다. 다른 유대인들은 그런사람하고 같이 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그 일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보며 헐뜯었습니다. 너희 선생님은 어떻게 해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새리와 함께 마시며 창기들과 함께 있느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것은 건강한 사람을 위하여 온것이 아니라 병든자를 위해서 온 것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의원이 필요하다. 나는 병든자를 위해서 왔다 하며 게의치 않고 그들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셨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예수님의 영광이 가리워진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도 항상 그렇습니다. 나보다 훨씬 낳고 훌륭한 사람하고 함께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그런데 때때로 하나님은 그렇지 않은 상황에 우리를 두십니다. 그런데 보십시요? 사실은 우리 옆에 있는 다듬어지지 않은 사람,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한 사람 때로는 우리를 알아주지 못하고 우리와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 심하면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인지 생각해 보십시요? 이런 사람들을 보내 달라고 기도할 용기는 부족하지만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그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으면 우리가 은혜 받은 것이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대단히 못났기 때문에 잘난 사람 옆에 가면 찌그러지는데 어떤 사람은 못났는데도 자기 보다 훨씬 잘난 사람 옆에 서 있어서 오히려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고 새로워지고 주님 만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심에 아주 요긴한 쓸모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하게 하시고 싶은 일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이렇게 부끄러운 사람들과 함께 못박히셔서 부끄러운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배경이 되어서 차별없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복음의 의미를 아주 아름답게 드러낸 것처럼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그렇게 우리가 좋아하는 환경이 아닌곳에 세우셔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시게 하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하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많이 있을때는 다른 사람들이 나 때문에 신세를 지고 나에게 기대고 나에게 도움을 받고 나에게 있는 것을 무엇인가 혜택을 입고 하는 모든 것들이 감사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신다는 보람과 행복을 느끼게 되지만 우리가 은혜가 고갈되면 하나님이 높이 들어서 쓰실때도 그 모든것들이 귀챦고 짜증이 나고 약탈 당하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우리 마음의 상태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목회의 상황, 이런 선교의 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그것을 극복하는 비결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을 생각할때 그것은 곧 자기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희생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자기가 십자가를 지어야할 환경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러면 다른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인생 말종과 같은 사람들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을때 자존심이 상해 하셨습니까? 사람들은 예수가 죽는 것은 저 흉악한 강도들이 죽는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 라고 하는 조롱의 기회로 삼았지만 오히려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인간들을 사랑하시니까 자기의 죽음을 욕되게 하기 위해서 옆에 매달아 놓은 강도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가장 영광을 돌리는 방법으로 그 기회를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죽음, 보혈과 함께 닦아 놓은 낙원에 이르는 그 첫번째 발자욱을 이 흉악한 강도와 함께 떼어 놓기를 조금도 마다하지 않으셨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섬김의 환경도 이렇게 보면 우리에게 매우 힘들고 수치스러운 환경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인자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훌륭한 무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신앙심을 가지고 높은 덕성을 가지고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덕성의 종류는 사람마다 조금씩은 차이가 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남자답게 강건하게 살아 온 분투하는 일에 있어서 큰 덕을 이룬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만약에 환란과 시련, 역경과 고난을 끊임없이 만나지 않았다면 분투하면서 이긴 사람이라고 기록될 수 있었을까요? 한사람이 너그럽고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기록되었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게 가시와 같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있어서 그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변화무쌍한 환경이 없었다면 그는 그의 자비심 있음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렇게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원하지 않는 환경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우리안에 있는 은혜를 확증하시고 드러나게 하셔서 우리는 아파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러한 십자가의 계획을 깊이 이해하고 기쁘게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쁘게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남들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욕할때 오히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고 사람들을 세울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여기에서 이 흉악한 죄를 지은 인간에게 예수님께서 한마디의 충고도 안하셨다는 것입니다. 네가 무슨짓을 했는지 천국가서도 잊지 말거라! 아니면 네가 이 길을 가는데 사실 이것 닦아 놓기만하고 아무도 안 데려간 길인데 네가 그렇게 인간 말종 같지만 내가 사랑이 많아서 너를 데려가는 것이다 라고 생색내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이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 또 건너편에 있는 자기 자신의 동료의 죽음을 보면서 똑같은 십자가에 매달렸지만 죽음의 의미는 현저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그 모습을 지켜 보았습니다. 자기 친구는 예수님을 욕하고 저주하고 자신도 고통속에서 한때는 예수님께 원망했지만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영혼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시며 저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간구하면서 십자가를 지시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저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놀라운 구속에 대한 사실에 눈을 뜬 것입니다. 사도바울과 같은 학자가 오랜 후에야 깨닫게 된 것을 이 사람이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어가면서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예수님이 그에게 너의 인간됨을 알라 너는 인간 말종이다 네가 무슨짓을 했는지 기억하라 언감생심 네가 이 낙원에 들어가는 것은 내 덕분인지 알아라 이런 말씀을 하실 필요가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기에서 오는 달콤한 유익때문에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유익을 끼치기 위해서 당하셨던 그 고난까지도 사랑함으로서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지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도 변해가는 것입니다. 가정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것이 십자가의 강도가 되어서 여러분이 예수 안에서 받은 이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줄 수 있는 훌륭한 기회입니다. 이제 까만 비로도는 깔렸고 말씀의 찬란한 빛도 있으니 이제 그대들이 다이야몬드처럼 빛나기만 하면 됩니다. 아! 목사님! 정말 부담 많이 주시네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서 주님이 우리를 바꾸어 놓으시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비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