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가운데 인사를 하기도 전에 제일먼저 복음과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이 본문의 위치는 우리에게 신앙에 있어서 중심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이며 그 복음의 중심은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전에 많은 철학, 많은 사상, 그리고 그 수많은 종교들이 진리를 찾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 애매한 진리 대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복음의 핵심으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시고, 또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인류가 수많은 사상과 철학 속에서 그리고 종교 속에서 인간은 누구이고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떻게 살아야하고 마지막으로 어디로 돌아가는지에 대한 가장 선명하고 그리고 가장 분명한 대답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끝을 알 수 없는 그 무한하고 광대한 진리라고 하는 바다를 찾아서 헤매는 어리석은 일들을 이제는 그만두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핵심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그렇게 뛰어난 지성을 갖지 못해도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고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고 어떻게 살아야하고 마지막에 무엇을 위해 죽어야하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 인사도 하기 전에 제일 먼저 복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기 이전에 경험했던 커다란 문제 중의 하나인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성격에 대해서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서는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그렇게 정리를 했습니다. 그는 예전에는 예수하면 그는 나사렛의 가난한 촌 동네의 가난한 목수의 자식이라는 것밖에는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깊이 깨닫고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가난하여 목수의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육신의 혈통으로는 다윗의 집안의 혈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이 바울에게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영적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즉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이라는 것이죠. 여기서 ‘성결의 영으로’라고 하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순결하고 거룩한 영이시라는 사실과 또 하나는 이 예수를 힘입어 구원을 얻는 모든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그러한 분이시라는 의미를 이중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분이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회심을 하기 직전까지 또 회심을 하고 난 직후까지 아마도 그랬을 바울의 신학적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럼 이 신학적인 혼란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라는 것이죠. 우선 예수님의 십자가의 처형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알다시피 이 십자가는 나무입니다. 나무에 못 박혀 매달려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저주받아서 죽은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들이 이해해야 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법정 적으로만 보면 로마제국에 대해서 죄를 지은 사람을 사형시키는 도구였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예수님은 비록 유대인들의 종교법정에서도 재판을 받으셨지만 유대인들은 사람을 사형시킬 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이미 국권을 로마에 빼앗겼기 때문에) 로마의 법정인 빌라도에게서 사형언도를 받으신 것이죠. 그러니까 빌라도가 그것을 원했든 원하지 않던 법적 절차로 보자면 예수님이 로마제국에 대해서 나쁜 일을 했기 때문에 사형언도를 받았고 그래서 십자가는 다만 그 죄지은 인간의 목숨을 끊기 위한 형 집행의 도구였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놀라운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여러 방법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이 십자가에 못박아야한다는 형벌의 방법을 지정해준 사람들이 누구였어요? 유대인들이었어요. 빌라도가 직접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무렇게나 예수를 죽여만 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예수를 죽이되 꼭 십자가에서 죽게 해달라고 소리친 것이에요. 이상하지 않아요? 아니 예수가 그렇게 싫으면 ‘예수를 죽이소서! 죽이소서! 사형언도를 내리소서!’ 그러면 되는데 왜 하필이면 당시에도 많은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 있었는데 교수형도 있고 참수형도 있고 별의별 방법도 다 있는데 짐승에게 던져서 찢어 먹히는 방법도 있었잖아요. 그런데 아니 아무렇게나 그렇게 예수님이 싫으면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죽이면 되는데 왜 그 수많은 방법 중에서 십자가의 형벌은 당시에 흔한 형벌의 방법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왜 유대인들이 그렇게 정확하게 많은 사형집행 방법 가운데 딱 하나인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고 그렇게 소리를 지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것은 별로 생각 안 해보셨지요?
그런데 이것은 잠시 후에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굉장히 중요한 주문이에요. 이것은 명백히 백성들이 소리를 쳤지만 뒤에서 이것을 사주한 사람들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었어요. 그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왜 하필이면 짐승에 물어 찢어죽일 수도 있고, 화살을 쏴서 죽일 수도 있고, 참수할 수도 있고, 목매달아 죽이는 교수형에도 처할 수가 있는데 왜 하필이면 십자가에 못 박는 당시에 흔하지 않는 형벌을 구했을까? 하는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많은 형 집행의 방법 가운데서 아마도 이 십자가의 형벌이 가장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극도의 미움이 사형방법 가운데서 가장 사형수에게 고통을 주는 방법을 선택하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지요. 그러나 그것도 사소한 것이에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요. 그것은 커다란 음모였어요.
그 음모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사람들이 다 볼 것 아닙니까? 소식도 전해지겠지요. 그러면 당시에 교통도 그렇게 편하지 않던 때에 이방인들에게는 그 소식이 전해질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했겠어요? 팔레스타인의 저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 로마의 대로를 따라 나중에는 세계 방방곡곡으로 전해졌지만 그것은 복음으로 화하고 난 다음의 일이지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렇게 전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일차적으로 누가 쳐다보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보는 것이죠. 그러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이 이방인들이었어요? 유대인들이었어요? 유대인이었죠. 그랬기 때문에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종교적인 기반들이 무어지니까 문제로 삼았던 것이죠.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부터 이 사람들에게 있었던 불안감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부터 계속해서 자기는 살아난다는 이야기를 계속 하시는 것이에요. 그 소문을 이들도 들었을 것 아니에요. 그래서 마지막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서 무덤에 가두고 인봉을 해버리잖아요. 그리고 하는 말이 ‘저 제자 녀석들 중에 누군가가 예수의 시체를 훔쳐 가버린 다음에 소문을 낼지도 모르니까 이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철저히 지키도록…….’ 그렇게 명령을 내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무슨 이 사람들에게 있는 불안은 무엇이에요? 사람들이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도 혹시 이 사람들이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지도 모른다고 하는 불안감이 있는 것이죠. 그것을 완전히 불식시키고 도저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게끔 쐐기를 박기위해서 많은 형벌의 방법 중에 십자가의 형벌을 구하도록 백성들을 사주한 것이에요.
그러면 그들은 왜 그렇게 했을까요? 이것은 구약의 예언과 관련이 있어요. 구약에는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우연히 죽거나 사람들이 잘못 죽인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였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무에 매달려 죽게 할 때에 유대인들의 눈에는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의 형벌이라는 것이 원래 없었어요. 이것은 로마가 변방의 야만족이었던 시절에 만들었던 고유한 사형방법이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의 사형방법 중에서 구약의 예언과 맞아떨어지는 사형방법이 있었는데 이것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십자가가 쇠 십자가나 돌 십자가가 아니라 나무십자가에요. 그러니까 그 나무에 매달려 죽은 것을 딱 보는 유대인들은 로마가 변방의 야만족이었을 때에 십자가의 역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죠. 여호와의 말씀에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고 했으니 예수가 저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는 틀렸다고 해도 믿을 사람이 있지만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을 따를 유대인들은 없을 것 아니에요? 그 유대인들의 마음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예수에 대한 종교적인 기대의 싹을 자르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필이면 나무에 매달려 못 박아 죽였던 것이에요.
많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듯이 사도 바울도 그 음모에 완전히 설득된 사람이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진리를 잘못 가르치고 감히 자기가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렇게 오만불손하게 신성모독적인 가르침을 퍼뜨리더니 결국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매달려 죽었구나. 나무에 매달려 죽은 그 자체가 결국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구나. 아멘.’ 이렇게 생각하며 살았던 것이죠. 그것을 너무나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명백하게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었는데도 부활했다고 소문을 퍼뜨리면서 예수를 추종하는 무리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에 치를 부르르 떨면서 그들을 잡아가두기 위해서 다메섹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죠. 예수님이 시간을 절묘하게 맞추시는 것이죠. 다른 때가 아니라 그렇게 부르르 떨면서 다메섹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요.
그 때에 그의 가슴속에 있는 한 가지 확신과 한 가지 결단이 있었어요. 먼저 결단은 뭐냐 하면 ‘예수 믿는 놈들을 모두 잡아넣으리라.’ 는 결단과 확신은 뭐냐 하면 ‘저놈들이 잘못알고 있구나!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은 그가 어떻게 다시 살아난단 말인가!’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달려갔던 것이에요. 바로 가장 많은 확신에 가득 찼을 때 그것을 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메섹으로 달려가는 길에서 바울에게 나타나셨어요. 놀랍죠? 대개 기도하다가 주님을 만나는데 독한 마음을 품고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서 달려가던 그 인간에게 주님께서 가장 확신에 찼을 때에 예수는 부활했을 리가 없다고 확신에 차있을 그 때에 주님께서 빛으로 나타나셔서 거꾸러뜨리셨어요. 물었어요. ‘주여 뉘시나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를 기도하던 아나니아에게 인도하셨지요.
이제 혼란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죠. 틀림없이 그 순간 즉시 깨닫지는 못한 것 같아요. 왜냐하면 ‘주여 뉘시나이까?’ 두 번째 질문 ‘내가 어찌하오리이까?’ 이 질문을 보아서도 즉시 깨닫지 못했던 것이죠. 예수님이 사도바울을 그런 식으로 다루실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즉시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무려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서 간신히 다메섹으로 들어갔고 무려 삼일동안을 보지 못하고 음식도 못 먹었어요. 그리고 결국 아나니아라고 하는 제자에게 이끌려갑니다. 본문은 명백하지 않은데 가만히 본문을 보면 즉시 아나니아에게 끌려간 것이 아니라 삼일동안 하나님이 내버려두셨던 것 같아요.
자! 이제 한번 상상의 날개를 펴봅시다. 자! 이 충격적인 사건을 의심할 수가 없잖아요. 직접 예수님을 보았고 음성도 들었으니까. 그리고 대화까지 나누었으니까 이제 부인할 수가 없는데 이제 놀라운 영광의 주님을 뵈웠는데 이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는데 눈은 뜰 수가 없어요. 혼자 걸을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겨우 이끌렸고 밥을 먹을 수도 없었어요. 이것은 간절한 하나님을 향한 금식기도였다고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 충격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고 삼일을 지나는 것이에요. 자! 상상의 날개를 펴봅시다. 자! 이제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이 사도바울은 무슨 생각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이 눈을 어떻게 고치나? 그랬겠어요? 라오디게아 안약이 참 좋다던데……. 그런 것이었어요? 무엇이었을까요? 무슨 생각에 집중했겠어요? 기회를 주었으니까 편안하게 얘기 해봐요. 많이 졸던 사람이 큰 소리로 대답해보세요. 뭐지요? 충분히 조시던 분 대답해보세요. 뭐에요? 쾅하고 빛으로 나타나서 예수님을 만났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두 눈을 의심할 수 없게 보게 되었는데 그 본 게 마지막으로 본거였어요. 그리고 완전히 어두움이 내린 것이에요. 먹을 수도 없고 이제 혼자 걸어 다닐 수도 없는 지경이 된 것이에요. 그는 혼자 있었겠지요? 그 속에서 무슨 생각에 집중하게 되었느냐는 이야기에요. 도대체 나에게 일어난 이 일이 무슨 의미인가? 그것 아니겠어요? 당연하지 않겠어요?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런데 그 무슨 일의 핵심은 도대체 무엇이에요? 부활사건이에요. ‘오, 예수가 살았네. 진짜 있네. 오, 분명히 죽였는데 살아났네!’ 하는 것이었어요.
자, 이제 여기에서 무슨 혼란이 생겨나겠어요? 죽음과 부활사이에 해명할 수 없는 혼란이 생겨난 것이에요. 두 가지는 양립할 수가 없는 사건이었어요. 왜냐하면 나무에 매달려 죽은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것도 뒤집힐 수 없는 명제였어요. 그러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누구에요?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이 삼일 전에 저주해서 죽인 그를 그것은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이제 숨길 수 없고 부인하려고 해야 부인할 수 없는 사건이잖아요. 그렇게 하나님이 저주해서 나무에 매달려 죽인 그를 다시 살아나게 하셔서 삼일 만에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살아나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으니까 이것도 자기의 눈으로 아주 의심할 수 없이 너무나 명료하게 확인을 했고 대화까지 나누었기 때문에 이것도 부인할 수 없는 명제에요. 이 명제가 성립하려면 하나님이 그를 살리셔야 되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아직 신약시대가 아니었으니까, 아니 신약은 쓰이기도 전이니까 천생 구약 속에서 자료를 막 찾았을 것 아니에요. 그 구약의 사건에서 자료를 막 찾아보는 것이에요. 그런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에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사건은 안 나오지만 암시하는 사건은 나오잖아요. 우선 대표적인 사건이 뭐지요? 모세의 사건이에요. 그래서 구약의 외경가운데는 모세의 승천기라고하는 성경형식을 빌린 글들이 당시에 널리 읽혔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모세가 부활했다고 믿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렇게 해서 부활해서 살아난 사람이 모세정도라는 얘기에요. 모세……. 그리고 더듬어서 올라가니까 누가 나오느냐하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에녹, 그리고 또 더듬어서 밑으로 내려오면 그 유명한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가 그것도 죽음을 보지 않고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깊이 인정해주신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것이에요. 평범한 사람들하고는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이 아주 특별히 인정해준 그러한 친밀한 능력의 종들이었단 말이에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만약에 예수님이 죽어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한다면 사도 바울과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평균적인 신앙으로 볼 때에는 이것은 엘리야하고 에녹하고는 비할 수 없고 자신들이 부활했다고 믿고 있는 모세하고 비견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렇게 나무에 매달려 죽은 것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고 그것도 틀림없는 명제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려내신 이 명제도 뒤집을 수 없는 명제라면 이것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 메시야 생각을 가지고는 이 두 개가 양립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새로운 해설이 필요했던 것이죠. 그것을 찾아서 삼일동안 어두움 속에 있으면서 거기에 그의 생각은 집중될 수밖에 없었어요. 뭐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너무 당연하지 않아요? 도대체 이것이 무엇일까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 때에 성령의 놀라운 도움으로 그가 눈을 뜨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내린 신학적인 그것이 바울의 깨달음인데 그게 십자가의 신학적인 의무를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이에요. 그럼 무엇을 깨닫게 된 것이에요? 자, 결론이 어떻게 났어요? 둘 다 맞는다는 결론이었어요. 둘 다 맞는다는 것……. 그럼 이제 둘 다 맞을 수는 없는데 둘 다 맞는다면 이것은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 한 문제였죠. 왜? 성결 전체의 역사를 뒤져보아도 삼일 전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 삼일 후에는 하나님께 놀라운 인정을 받아서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하는……. 그것은 바보라도 그렇게 얘기할 수 없는 모순된 명제잖아요. 그러면 이제 사도바울의 생각은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은 자기가 개인적으로 생생하게 경험했잖아요. 부인할 수 없잖아요. 그러면 뭐냐 하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도 자기가 부인할 수 없는데 그렇다면 마지막에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그러면 도대체 부활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고 십자가의 죽음도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면 흔들어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이 있는데 예수님의 죽으심이 누구를 위한 죽으심이었을까하는 것이죠. 그러면 만약에 하나님이 저주한 사람을 삼일 만에 인정하실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그러면 하나님이 인정해주신 사람이라면 죽을 때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죠. 그러면 인정받는 그 분이 왜 그렇게 비참하게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못 박히셔야 했을까? 그 때에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 ‘우리를 위하여…….’ 이런 결론이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의 서신에 보면 우리를 위하여 라는 말이 수없이 많이 나와요.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우리를 위하여’ 라는 말이 수없이 나오는…….
그러면 여기에서 이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이 죽으셨다. 결국은 크게 세 가지의 의미를 갖는 것이에요. 첫째는 뭐냐 하면 ‘우리를 대신해서…….’ 그런 뜻이에요. 두 번째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세 번째는 ‘우리를 대표해서…….’ 이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제자들과 사도바울이 성령의 은혜를 받고나서 담대하게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선포하기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고 외치잖아요. 그런데 무엇을 믿으라는 것이에요? 가장 짧게 말하면 ‘Jesus died for us.’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에요. 얼마나 짧아요? ‘Jesus died for us’ 딱 4글자에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그것을 믿으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위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죽어야 할 텐데 예수님이 대신 형벌을 당하고 죽으셨다.’ 두 번째로 ‘우리 모두가 죽어야 할 텐데 예수님이 우리를 끌어안으시고 혼자서 대신 죽으셨다.’ 세 번째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그 죽음의 유익은 우리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하여 라는 뜻이에요.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에서 십자가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매달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신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서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도 사실이었는데 결국 그 분의 저주가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었고 형벌 받아야 할 주님이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모든 백성들을 위한 그들의 죄를 위한 형벌이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가히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하게 됩니다. 제일 먼저 받은 놀라운 것은 막 쏟아지는 은혜가 아니라 이 엄청난 지성적인 큰 충격이었어요. 그 진정한 은혜는 그런 지성적인 충격과 함께 오는 것이에요. 지성적인 충격이었고 그래서 결국은 이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과 종교관 이 모든 것들이 송두리째 뿌리가 뽑히고 예수 중심의 우주, 예수 중심의 역사, 예수 중심의 교회, 이 세 가지 지평에 대해서 눈이 열리게 되는 것이에요. 다시 한 번 예수 중심의 우주, 예수 중심의 이스라엘 역사, 예수 중심의 교회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 모든 일의 중심에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이전의 종교와 헛된 철학을 통해서 진리가 무엇인지 마치 바닷가 모래 속을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서 바늘을 찾는 것같이 허황되게 살던 모든 인류에 대한 답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쾅’하는 충격과 함께 다가오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육신의 눈은 감겼으나 영혼의 눈은 띄어지면서…….
(찬양)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 되시며, 그 다음에 역사의 주인공이시며, 그리고 우주의 통치 주라는 사실이 영광가운데 확 나타나게 되는 것이에요. 거기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에요.
이때에 이 사람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두 가지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에요. 이 두 가지 편견이 뭐냐 하면 하나는 신학적인 편견이고 하나는 거기서 비롯된 심리적인 편견이에요. 신학적인 편견은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로 메시야일수가 없다는 신학적인 편견으로부터 해방이 되고 두 번째는 유대인이 최고이고 이방인은 지옥의 땔감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던 유대인들의 당시의 평균적인 그 심리적 편견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진 것을 깨달으며 그들을 향한 불같은 사랑에 붙잡히게 되는데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안에 있었던 모든 인류를 향한 지극한 사랑이었던 것이에요.
지금도 말이죠.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지금은 여러분 그런 것을 별로 잘 안하잖아요. 요새는 슈퍼에 가면 씻지 않는 쌀도 나온다고 하대요. 갖다가 물 쑥 집어넣고……. 요새는 불도 안 때잖아요. 딱 누르면 자기가 휘이익 하면서 ‘주인님 밥이 다되었습니다.’ 그러잖아요? 그러면 뚜껑을 열어서 밥만 퍼먹으면 되잖아요. 옛날에는 그렇게 안하고 쌀을 가지고 오면 다 조리질을 하고 더 안 좋은 쌀은 항상 키질을 했어요. 다 쌀 같지만 키질을 하면 높이 던지면 바람이 일어나면서 겨와 껍질들은 다 날아가고 쌀알만 떨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한번 걸러내요. 그 다음에는 물속에 집어넣고 조리질을 해서 이번에는 돌을 걸러내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는 가벼운 것을 걸러내고 물에다 넣어서 조리질을 해서는 무거운 것을 걸러내어서 쌀만 갖다가 밥을 했잖아요. 똑같아요. 섞여서 예수를 믿는다고 그러면서 자기의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있고, 교회에 호의적이고, 대대로 믿는 집안이고, 주저리주저리 섬겨도 결국은 이렇게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성경이 전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아요. 그래서 심각하게 생각을 해야 돼요. 구원의 문은 바겐세일이 아니에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는지 올바로 알고 영혼이 거듭나고 회개하고 믿음을 가져야지만 거기에 참된 구원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런 것을 교회에서 제대로 안 가르쳐주니까 맨 이쪽저쪽 뛰어다니면서 그 쓸데없는 허망한 이단에 빠져서 인생을 그렇게 허송세월을 하는 것이에요. 바보들이죠. 바보들…….
자! 이제 더 중요한 문제가 대두 되요. 이전까지 사도 바울은 거듭났을 리가 없겠죠? 그렇죠? 그러니까 비록 헌신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자기의 신념에 헌신된 것이지 하나님께 헌신된 것이 아니죠.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열심히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자기 자신의 견해와 다른 인간들에 대한 극도의 미움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하려고 했는데 이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세 지평인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역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마지막으로 우주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뵙게 되면서 그러면서 새로운 자원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에요. 이 새로운 자원에 눈을 뜨는 사건이 바로 이 부활에 대한 경험이에요.
이 새로운 자원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성령의 놀라운 은혜에 대한 경험이에요. 예전에는 지상의 자원으로만 살아가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나니까 자신의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했는데 이것이 마치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 같은 그러한 경험이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자기의 속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그리고 하늘이 열리며 죄와 사망의 법에 얽매이던 자신의 마음과 영혼은 철저히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그 생명과 성령의 법을 주님께서 부어주셔서 예전 같으면 도저히 자기가 살 수 없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시는 놀라운 하늘의 자원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죠. 영적인 은사에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이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영적인 은혜에 있어서 비밀을 터득한 것이에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신 그 능력으로 죽은 자신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도와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통해 공급해 주시는 완전히 새로운 자원을 가지고 새로운 질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래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죠. 이게 바로 바울이 경험한 바이고 이 경험을 뼈대로 해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해석되어서 성경 전체에 깔림으로써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의미와 부활하신 그 뜻을 터득하게 된 것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결론은 유일한 희망이 그리스도뿐이시라는 것이죠. 이게 사도바울이 경험한 결론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결론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경험한 바요. 그러니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중심 되는 뼈대에요. 그런데 이것은 팽개쳐버리고 예수나 믿고 복이나 받아야 되겠다고 하고 하나님께 종교생활을 가지고 흥정하려고 덤벼들면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이죠. 그리고 핵심으로 들어가지 않게 되면 그 다음에는 많은 혼란과 어려움이 일어나게 되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산자와 죽은 자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들이 이 고난주간을 통해서 주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십자가의 도를 올바로 깨닫는 것, 이 도에 깊이 젖는 것, 그리고 이 도를 따라서 믿는 것, 사는 것, 이것이 고난주간에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에요. 십자가 앞에 흘리는 감상적인 눈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깨닫고, 그리고 친숙해지고, 깊이 젖어들고,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