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빛으로 부르신 사람들
녹취자 : 김세나
별이 돌아가는 정도로 수많은 선인들의 세계들을 오가면서, 이런 것입니다. 나는 강영안 교수님과도 대화를 굉장히 많이 나눴는데 아마 내 책을 가장 정확하게 읽은 독자 가운데 한 사람이 강 교수님이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윤리적이려고 굉장히 애를 씁니다. 그렇게 해서 도달하는 윤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윤리와 항상 거리감이 있기 마련입니다.
결국 저책을 요약하면 이것입니다. 기독교가 기독교 되게 하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그것이 지성과 관련해서는 사상, 그다음에 의지와 관련해서는 윤리이다. 그런데 그것이 사랑이다. 기독교 윤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사랑이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의 일체로서의 사랑입니다. 그 두 개까지는 여태껏 우리들이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점은 진리를 계속 이야기하고 성경을 계속 이야기하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러한 것과 다른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한 본문에 대한 충성, 그것만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전체적인 사상의 체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하나의 명제적인 진리들이 사상의 체계를 이룰 때 그 체계 안에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납니다. 당연히 그렇기 때문에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통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통합적인 지식이 아니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살게 하는 지식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세계를 모두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시니까, 생각하신 것과 창조하신 행위가 무슨 시간의 차이가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아퀴나스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행위 이전에 먼저 하나님 자신 안에 창조세계에 대한 관념이 먼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지성에서부터 모든 사물들에 대한 지식이 생겨났고, 그 사물과 사물의 연관에 관한 지식이 생겨나고 그것을 통솔하는 법칙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그러한 당신의 지성 안에 있는 생각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모든 만물을 더듬어, 더듬어, 더듬어 올라가면 그 사물의 기원이신 하나님께 도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들이 개혁신학에서 자연신학이라 이야기하는데, 자연신학으로서는 원리는 그런데 실제로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을 추적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나는 하나님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그 하나님이 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이 타락하였고 지성이 고장 났기 때문에, 병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을 찾아가기 어려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흔적도 남겨놓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누가 전해주어도 하나님을 알 수 없었을 텐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관념들을 인간들에게 남겨두셔서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 여전히 성경 계시의 도움을 받지 않고 만물을 유추해서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에게로 도달할 수 없지만 - 그러나 신앙의 빛을 가지고 이성의 빛을 사용하면서 하나님께로 도달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간 것이 사상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국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이 책과 함께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책을 함께 주의 깊게 읽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사상적인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어떠한 세계와 자신의 삶을 전체적으로 통일적으로 보게끔 만들어주는 시야, 안목, 이러한 것들을 갖추는 것이 기독교적인 지성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상이 없습니다. 결국 기독교의 진리를 말하지만, 사상은 다른 것에 의해 좌우됩니다. 좌파, 우파 문제가 대표적입니다. 성경을 하나하나 믿긴 하지만 전체적인 사상은 다른 사상에 의해 움직여갑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골대가 없는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이고, 여기에서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예전에 보지 못하였던 독특한 세계관의 틀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역사와 자연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이제 오늘날 이야기하는 세계관에 대한 필요성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어거스틴도 이야기하였듯이 사물을 아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유비를 다른 사물에게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과의 관계도 사물에서 유비로 발견할 수 없습니다. 유가 있으면 종이 있고 그런데, 그렇게 발견할 수 없는 독특성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에 대해서조차도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찢어질 수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다른 사물들에 대해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내가 리모컨을 정확하게 알고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 속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다 안다 하더라도 내가 이것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에 대해서 안다,’ 라고 이야기하여도 그다음에 내가 내 마음속에서 사람에 대해서 호불호를 갖게 됩니다. 저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을 많이 발견하고,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고, 추한 것을 발견하고 싫어하게 되면 내가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과 또 다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이시니까 말입니다. 결국 어떤 결론에 이르는가 하면 하나님을 알기만 할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물건이나 자연적인 사물의 단계로 아니면 최소한 사람의 단계로 끓어 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클레르보 베르나르두스가 자기의 책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notitia ipsa amor est 노티티아 이스 에 아모르 에스트-지식 그 자체가 사랑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알면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게 되었다고 할 때, 하나님을 전적으로 탐구하였는데 거기에서 추한 것을 발견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었다고 한다면 자신이 발견을 잘못한 것이지 하나님 안에 추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추한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추하게 느꼈을 뿐이지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안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식으로 해서 지식과 사랑이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어제 금요기도회 말씀에도 이야기했지만, 신앙과 이성이라는 두 바퀴가 굴러가게끔 내 마음에 마차를 달려가라고 몰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내 마음에 불붙었기 때문입니다. 지식과 사랑. 믿음이 초월적인 지식으로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불붙여지면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사랑하면 알고 싶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혹은 교인들을 사람 앞에 법 앞에 이 세상의 평가 앞에 끊임없이 세우면서 윤리적인 삶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옛날에 제가 한 표현이지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윤리주의의 머슴이 됩니다. 이념의 머슴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정도의 삶을 살아야지만 욕먹지 않겠다고 하는데, 그러한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 정말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못 산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한 수치심이 있고, 살아낸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마음이 있어서 결국 살든지 못 살든지 하나님으로부터 그 마음이 멀어지게 하는 효과를 받습니다. 그러한 것들에 극단에 빠졌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심지어 도저히 그러한 윤리적인 삶을 지탱할 수 없으니까 사람들에게 보일 때만 윤리적인 삶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성경의 관심은 이것입니다. 윤리가 아니라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기쁜 상태가 되는 것.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추천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태입니다. 저도 설교에서 여러 번 이야기 하였지만, 교회는 세상이 주는 도덕적인 평가에 대해서 초연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신경 쓰지 말고 막 살아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초연해야 합니다. 어느 언론기관에서 교회를 칭찬하였다고 하면, 교회가 그렇게 들뜰 이유도 없고, 욕을 바가지로 했다고 해서 성경을 보고는 그렇게 예민하지 않던 사람이 세상의 언론기관을 보면서 분노하면서 예민하게 반응을 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말하자면 복음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그 답을 두 개의 기둥을 항상 이야기하였습니다. 늘 듣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불완전한 방식으로 들었지만, 똑바로 잘 살아야 한다는 것과 진리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 진리도 강조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심리학에 두 기둥이 있지 않습니까. 원래는 내가 이 책의 독특성이 뭐냐 하면 두 개의 아치를 이어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두 개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는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마지막에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입니다. 그 은혜를 받음으로써 이 지식과 나누어질 수 없는 사랑, 사랑과 분리될 수 없는 지식. 어거스틴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난 후에 당신을 알고 난 후에 제 마음은 기갈이 들렸나이다.” 당신을 사랑할수록 더 사랑하고 당신을 알수록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는데 그 자체가 자신의 인생을 휘몰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끝나는 순간 결국 하나님에 대한 싫증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가지고 있는 신학의 위대함은 그 사랑과 지식을 하나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서울대 출신 학생 하나가 있었는데 자기 교수가 비기독교인이었는데, 강의 시간에 “여러분 내가 어거스틴의 Confession을 읽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깊은 감동을 받았는데, 아 철학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그게 철학입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부여하게 하기 위해서 힘을 쏟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신국론」에서 “진정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그 하나님 사랑 안에 모든 철학들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많은 이야기는 이 세 가지 사실을 입증하는 것에 지원사격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동원된 철학, 자연과학, 모든 것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이야기하는 모든 언급한 모든 학문에 대해서 내가 각기 어머 어마한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물론 내가 모르고 한 것은 없고 내가 읽지 않은 것도 없고 내가 생각하지 않은 것을 글로 쓰지도 않았습니다. 지금도 나는 사상은 통합적이고 김남준 목사가 누구인가하면 자꾸 「십자가를 경험하라」이야기하는데, 나는 이 책을 중심에 놓고 퍼져가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습니다.
이 책은 2012년도에 나왔고, 2008년도에 철학적 신학 시리즈인 「도덕적 통치」가 나왔고 2007년도에 「자기깨어짐」이 나왔습니다. 저라는 사람이 총신 출신의 많은 학생에게 의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왜 우리에게 알려진 김남준 목사는 「십자가를 경험하라」「깊은 기도를 경험하라」「목자와 양」「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목회자 아내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그리고 청교도, 이러한 식으로 알려졌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툭 하고 나오기 시작하더니 막 자기 세계를 펼치면서 가더라. 글도 매우 불친절해지기 시작하고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이것은 진지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총신에서 학생들 사이에 토론이 이루어지면서 김남준 목사가 드디어 개혁신학을 떠나서 변절하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2008년도에 개강 수련회를 갔습니다. 그때 가서 3일 동안 집회를 하였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특히 셋째 날에 공부에 대해 설교할 때 어마어마한 은혜를 주었습니다. 학생들이 모두 내린 결론이 무엇인가 하면, ‘아, 김남준 목사님이 변하지 않았고 퍼져 나간 모든 것들은 결국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의 씨앗으로 퍼져 나간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때 강의하였던 내용이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했다」그 골격을 가지고 가서 강의한 게 그것이 모태가 되어 책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2년에 다시 한번 가서 두 번째 수련회를 하였습니다. 이제는 나를 그러한 식으로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저기 별이 보이지 않습니까. 이 세계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때문에 존재하고 유지되는 것이 하나님 때문에 유지하고 소멸되는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한번 깊이 만지시면서 새로운 학문의 세계를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질문1) 본 책이 집필될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보다 오늘날의 시대적인 상황이 더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 할 시대적인 정신들도 더 다양해지고 복잡해졌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싸워야 할 시대정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또 가장 경계해야 할 시대정신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1) 저 책이 나온 것이 2012년이니까 어마어마하게 변한 것은 아닙니다. 사상이라고 하는 것이 유행가 가요처럼 몇 달 반짝하다가 사라지고 새로 나오고 하는 것이 아니니까 지금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가 그대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나타나는 사상들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해 아래 새로운 것 없이 저 뒤쪽에 어디엔가 토대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뿌리들이 사실은 현대에 지금 폭죽처럼 터지면서 나오는 이러한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라 하는 그것이 굵직한 한 커다란 둥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입니다. 니체는 사실은 철학과에서 읽지는 않습니다. 니체의 문헌 자체를 철학적 텍스트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텍스트로 보기 때문에, 그러나 이제 엄밀하게 말하면 대단한 철학자들은 그렇게 텍스트를 문학적으로 썼습니다. 그래서 알 듯 모를 듯한 언어로 써 내려갔던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제가 20대 때 회심하기 전이었습니다. 니체에 깊이 빠졌었습니다. 니체 전집을 지금도 가지고 있는데, 그 전집이 26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2-3년 전에 나왔는데 당시에는 약간 조잡한 책이기는 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나오기 시작하였고, 빠져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실은 구체적으로 읽었던 내용은 없지만 어쨌든 그 나이에 니체에 흠뻑 젖어서 사고하고 하였던 것들이 알게 모르게 나의 오늘날 현대정신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놀라운 것은 니체가 있었고, 그 전으로 넘어가면 자유주의가 솟아나는 시대였고, 뒤로 넘어가면 계몽주의가 나오고 계몽주의로 들어가면 르네상스가 나오고 르네상스에서 갈레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인문주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인문주의, 온건하게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이성 중심으로 파고드는 인문주의, 그다음에 극단적으로 무신론적인 인문주의 등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나타납니다. 그 뒤로 더 넘어가면 통일적인 사상이, 기독교 사상의 붕괴들이 중세말에 13세기에 이미 벌써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에게 익숙한 사람이 니콜라스 쿠자라든지 아니면 윌리엄 오캄이라든지, 오캄의 면도날이든지 등등. 그렇다고 해서 오캄의 면도날을 마르틴 루터과 칼빈 같은 사람이 많이 사용하였다고 해서 오캄의 사상을 전적으로 따랐다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오캄, 쿠자는 모두 카톨릭에서 파문당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전혀 다른 세계를 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나옵니다.
8년 만에 새로운 사상이 생겼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있어봐야 있는 것들의 아류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시대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시대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한 시대를 꿰뚫고 있는 가치관들을 제공해주는 하나의 기준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호이에르 바하나 이러한 사람은 이러한 식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이렇게 ‘정’이 나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반’이 나옵니다. 이렇게 되면 ‘합’이 나옵니다. 밑으로 내려가면 ‘정’되기 전에 한때 ‘합’이었을 것이고, 여기 밑에 다시 정, 반이 있습니다. 이게 합쳐 지면서 정이 된 것 아닙니까. 이러한 식으로 해서 합, 그다음에 밑에 다시 정, 반 이렇게 나옵니다. 이것 전체를 이어가는 것이 바로 시대정신입니다. 그게 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오늘날 기본적으로 시대정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기존에 있던 가치관들에 대한 부정입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는 것, 인간은 결국 그러한 진리를 의존하며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인간의 주체성을 기독교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할 때 인간이 가장 주체적인 인간이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러한 모든 고리를 끊고 스스로 주체적인 인간이 되는 것, 그래서 사르트르 같은 경우에도 유명한 「존재와 허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책 열자마자 나옵니다. “인간은 일종의 저주를 받아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에 세계의 무게를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가혹하리만치 외롭게 우주 공간에 던져져서 있어야 할 필연성도 없고 이유도 없이 잉여의 존재로 태어나 비 의지적으로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가 어디에서부터 왔는가, 그가 무엇을 향하여 살아야 하는가, 이러한 것을 묻는 것 자체가 인간에 대한 폭력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결정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자유다. 이렇게 살아갑니다. 사르트르도 결국 그렇게 자유를 주장했지만 계약결혼을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는 외도 속에서 살다가 죽습니다. 행복한 실존주의자를 과연 볼 수 있는가?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1번은 두루뭉술한 질문이었기 때문에 두루뭉술하게 답하였습니다. 2번 하겠습니다.
질문2) 실용주의자들과 도덕적 상대주의자들은 절대적 가치와 도덕적 기준을 거부하며 측정된 사회적 욕구들에 의해 가치와 기준의 질서를 세우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사회적 욕구가 항상 선하지도 않고, 바르지도 않으며, 일관되지도 않다는 것에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하나님 없는 세상이 보일 수 있는 최선의 한계가 인간 보편의 이성과 양심에 따르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 없는 세상이 말해왔던 도덕적 가치들의 종류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그것들의 한계는 무엇이었는지, 또 그것들과 그리스도인의 윤리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들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또한 현대에는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나 니콜라스 토마스 라이트(Nicholas Thomas Wright) 같은 학자들이 복음의 공공성(公共性)에 관한 저술들을 출간하고 있는데, 이들의 견해에 관한 목사님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답변2) 책 한 권의 분량의 질문을 하였는데, 맨 위에 첫 번째 문장을 보겠습니다. “실용주의자들과 도덕적 상대주의자들은 절대적 가치와 도덕적 기준을 거부하며 측정된 사회적 욕구들에 의해 가치와 기준의 질서를 세우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볼 때 결국 기본적, 전통적으로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는 사실은 가치를 낮게 두고, 인간의 이성에 대해서 가치를 높게 두고, 이성 위에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가치를 더욱 높게 두고, 결국 소위 이야기하는 프란시스 쉐퍼가 쓴 「이성에서의 도피」라고 하는 책은 못 읽어본 분은 꼭 읽어보십시오. 「Escape From Reason」 인데 우리에게 한 바가지의 물을 확 끼얹은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책의 논제는 전통적으로 서구 문명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절대적인 기준 아래 인간이 존재함으로써 인간이 참되고 선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뒤집어 버리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한 일들이 아주 구체적으로 노골적으로 현대적으로 일어난 것은 유럽을 기준으로 하면 1960년도에 있었던 학생혁명으로 시작이 되고, 미국을 기준으로 하면 1960년대에 있었던 월남전 반대에 대한 대목, 이것을 중심으로 사회적인 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기존에 미국 사회를 지탱하고 있던 질서 자체는 그나마 뭐였는가 하면, 기독교 가치관이 아니라 사실은 놀랍게도 공명사상입니다. 미국 대법원 건물에 보면 지붕이 있고 위인들의 동상이 쭉 있는데 한쪽에 모세가 서 있고, 그 바로 옆에 공자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잘 아는 토마스 제퍼슨이나 그 당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념이 대동사상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이성적으로 서로 생각하고 커다란 도덕의 원리들을 찾아가면서 인간 스스로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행복한 사회라고 하는 것을 내면으로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그 껍질을 기독교로 씌운 것입니다. 그러한 질서들이 있었는데, 그 질서까지 무너지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때 히피 운동, 올더스 헉슬리의 LSD 복용운동, 그다음에 말콤 엑스 등등의 사상들이 분수처럼 폭발하면서 사실은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상들을 만들어간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것은 모더니즘은 근대인데 근대는 무엇으로 대표되는가 하면 기본적으로 도덕의 원리가 있다. 그다음에 동양식으로 이야기하면 도가 있다. 객관적인 도덕의 법칙이 있고 근원은 우리가 하나님이라고까지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런 게 있고, 인간은 거기에 어느 정도 순종하면서 따라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어느 정도 행복한 삶이라고 하는 합의가 무너지는 시점이 1960년대입니다. 와르르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그게 무너진 것이 1980년대라고 저는 봅니다. 1980년대 민주화의 봄이 일어나고 정권투쟁이 일어나면서 무너지고 지금은 선거를 통해서 보수 그 자체가 소수로 밀려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회를 꿈꾸면서 제도와 입법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체제로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더니즘에서는 그래도 이성을 위에 놓았는데,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이성까지 끌어 내립니다. 그 위에 등극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누가 등극할 수 있겠습니까. 등극을 하는 것이 아주 극단적인 사람들은 거기에 욕망을 등극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도덕과 윤리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 이미 기득권자들이 그것을 이용해서 연약한 자들을 수탈하도록 만들어낸 아주 정교한 고안물들입니다. 고혈을 짜내면서 만들어낸 것이 도덕이고 윤리라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상들이 생겨나면서 성의 자유 같은 것들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도덕적 가치, 이것은 여러 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은 결국 내가 전부인 세상입니다. 세상이라고 하는 것도 이미 자기 안에 들어와 있는 세상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존 오웬 목사님도 이야기하였습니다. 인간을 conform-형성하다 이렇게 형성하는 것은 딱 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형성하든지 그리스도가 형성하든지. 세상이 형성한다고 할 때 결국 내가 그 세상을 좋아하기 때문에 세상에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내가 나를 형성하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가 나를 형성하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받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수스케마티조’라는 단어인데 본받지 말라. 끊임없이 기계 같은 것에 사람을 찍어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입니다. 한계라고 하는 것은 사고나 모든 것들이 파편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 같지만 그 자유에 한계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다음을 살펴보겠습니다.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나 니콜라스 토마스 라이트(Nicholas Thomas Wright) 같은 학자들이 복음의 공공성(公共性)에 관한 저술들을 출간하고 있는데, 나는 ‘복음의 공공성’이라는 말 자체가 이상한 용어라 생각됩니다. 복음 그 자체는 공공성이라기보다는 사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의 시작 그 자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고, 복음을 받아들일 때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그 자체도 사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소위 이야기하는 ‘아모르 소피아리즈’ ‘아모르 프리바투스’ 이것(‘아모르 소피아리즈)은 사적인 사랑이고, 이것(’아모르 프리바투스)은 사회적인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공공성’이라는 말을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들이 복음이라고 끌어안고 있는 것이 사실은 진정한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공공성’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복음을 제대로 된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들 이것은 어디에서 증명이 되는가 하면, 여러분들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회심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나처럼 살던 사람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 세 가지 전부 다 사회입니다. 나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놀라운 게 뭐냐 하면 사람으로부터 받는 사랑은 내가 아무리 저 사람에게 사랑을 많이 받는다 하여도 저 사람이 나와 똑같이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샘이 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나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해 주신다고 생각할 때 그게 오히려 내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유한한 사랑의 차이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유한합니다. 그래서 누가 가져가면 가져간 만큼 비게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 아무리 형제가 자기에게 잘해줘도 똑같이 잘해주는 자매가 한 사람 더 있다고 하면 집어 던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복음의 공공성이라는 말 자체에 대해 저항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공적이지 않으면 진정한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의 사용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저렇게 된다면 진정한 복음일 수 없습니다. 결국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제대로 안 들어가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이론이 매우 복잡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너무 알고 싶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성경을 중심에 놓고 한 책의 사람이 된 후, 그 한 책의 사람으로부터 뻗어나가서 많은 책을 읽으면서도 결국 한 책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이 바로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에서 <성경과 학문>에서 제가 한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성경에서 출발해서 다른 학문으로 가서 다시 성경으로 돌아올수록 하나님이 아름답고 성경이 위대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잘못해서 여기에서 출발했다가 안 돌아오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불행한 것입니다. 이상을 앞세우면서. 그러한 점에서 복음의 공공성에 관한 저술들은 가치 있는 단면들이 있기도 합니다. 미로슬로브 볼프 같은 경우는 가볍지도 않고 진지하게 철학적인 깊이를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결국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나면 복음은 사용성만을 지닌 복음일 수 없게 됩니다. 공공성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깊이 만나고 나면 저러한 오류와 한계들을 틀림없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질문3) 기독교 안에서도 진리의 빛 없는 도덕주의와 도덕적 감화 없는 신학주의를 종종 보게 됩니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 있는 목회자가 되고 또 목양하는 성도들을 그러한 성도로 세우기 위한 조금 더 구체적인 지침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오랜 세월 신학과 목회를 해오시며 체득하신 목사님만의 구체적인 지침과 노하우가 있으시다면 알고 싶습니다.
답변3) 문제가 뭐냐 하면, 자신은 도덕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도덕적으로 살게 하고 싶을 때. 자신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사랑하게 하고 싶을 때. 그런데 사실은 나는 그러한 것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외관으로 볼 때 그러한 것이지, 진짜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진리를 알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감정은 자신의 영혼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감정과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울지 않는 사람은 결코 남을 위해서 울 수 없습니다. 그 대신 자신의 신령한 가치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입니다.
저기도 보면 그냥 이렇게 질문 그 자체가 무엇인가 깊은 마음을 담은 그러한 질문이라 느껴지지 않습니다. 진리의 빛 없는 도덕주의. 우리 진짜 도덕주의라는 것이 있습니까? 도덕에 목숨을 건 교회가 실제로 본 적 있으십니까? 두 번째, 도덕적인 감화가 없는 신학주의. 어느 교회가 그렇게 신학을 열심히 위험할 정도로 가르칩니까. 그냥 우리의 마음속에서 상상의 날개를 펴고 꾸며내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교회에서는 목사님 설교가 지적으로 많이 깊이가 있는데 그러다가 교인들이 머리만 커지는 것 아닙니까?” 그 질문에 대해서 어느 교인이 머리가 커졌는지 묻고 싶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소두증 환자들인 것 같습니다. 어느 교회가 그렇게 지식만 가르쳐서 염려스러울 정도로 지식주의에 빠진 교회를 본 적이 있냐고 물으면 아무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몇 교회는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무슨 풍천교회, 아니면 영산강 교회. 모두 장어집 이름입니다만. 영산강 교회, 풍천교회, 뭐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또한 목회자 중에서는 너무 위험할 정도로 지식으로만 철저하게 무장한 사람을 봐서 혀를 내두를 정도의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있지도 않은 데 가상해서 내놓고 비판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목회자가 되고” 하였는데, 나는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도덕과 지식 사이에 균형을 이루면 지식을 위해서는 도덕을 덜 추구하자는 것입니까? 아니면 도덕을 위해서 지식을 조금 절제하자는 것입니까?
지연 전도사, 그대가 연애를 한다고 칩시다. 형제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형제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당신이 그 형제를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알고 싶어 합니다. 취미가 무엇인지, 태어난 곳은 어디인지, 학교 다닐 때 무슨 과목을 좋아하였는지 등등 알고 싶은 것이 많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형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거 내가 너무 가르쳐 주면 지식에 치우쳐서 사랑이 식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너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무 많은 정보를 주면 나를 향한 사랑이 식으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 지금은 지식을 줄 때가 아니고 사랑의 불을 땔 때이지.’ 동의합니까? 동의 안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면 너무너무 알고 싶어집니다. 모든 것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알면 예를 들어서 그 남자가 트라우마가 있어서 절대 배를 못 타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부모님이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모두 익사해서 죽으셨습니다. 사랑하면, 그 지식을 알게 되었을 때 존재 자체가 너무 불쌍하게 생각됩니다. 어린아이가 배를 타고 가다가 자기 하나만 구조가 되고 부모가 익사한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것들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것이 어떤 지식이든지 간에 사랑을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균형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균형을 잡으려면 양쪽에 무게가 있어야 합니다. 깃털은 무게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먼지는 균형을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지식이든지 사랑이든지 무엇인가 묵직해야지만 균형을 잡을 것 아닙니까. 깃털처럼 가벼운 데 자꾸만 균형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무 과격한 답변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 총량이 있어야 균형을 잡을 것 아닙니까. 지식도 깃털 같고 사랑도 깃털 같은데, 아니 여기에서 빠진 덕다운 하나를 꺼내어 무슨 균형을 잡습니까, 자꾸 날아가는데. 심하였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성도들을 세우기 위한 구체적인 지침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본 바, 들은 바, 만진 바입니다. 온 힘을 다해서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을 설교하고, 그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학문을 탐구하고 일체를 이루어내고 결국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번외 질문) 여러분들 가운데 의미 있는 질문이 있는데, 가치관에 대하여 물어본 것이 있습니다. 채택은 안 된 것 같습니다. 내재적 가치관, 외재적 가치관, 중용적 가치관에 대하여 물어 보았는데 이것 하나만 더 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번외 답변) 내재적 가치관은 거기에 인용된 문장에서도 나오지만, 맹자, 공자, 모두 다 내재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긍휼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늘의 천품인데 그것이 우리에게 나오는 것은 내게 없던 것들이 하늘로부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있었는데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맹자, 공자 모두 성선설입니다. 순자 빼놓고 말입니다. 순자는 성악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인간 안에 있는. 그러한 소위 이야기하는 ‘천품’이라 말할 수 있는 좋은 인의예지의 성품들이 왜 그렇게 사라지고 사람들이 포악해지게 되었는가. 그만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 해석합니다. 거기에서 인용구절도 나옵니다. “인의예지 비유외삭아야 아고유지야 불사이의(仁義禮智 非由外鑠我也 我固有之也 不思耳矣)”라고 나옵니다. 결국 내가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만, 인의예지가 나에게 박혀서 녹아들어온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만 내가 깨우치지 못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굉장히 커다랗고 무한한 인의예지의 가능성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내재적 가치관이라 본다면 이것의 극단으로 간 종교가 불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모든 만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 해석합니다.
다음 외재적 가치로는 바깥에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소위 이야기하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사상입니다. 논쟁이 굉장히 많습니다. 다산 정약용이 소위 이야기하는 주희의 성리학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조선시대에 받아들이는데, 사실은 정통 유교가 아니라 주희를 통해서 이루어진 성리학입니다. 성리학은 유교에 대한 독창적인 새로운 해석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내려온 것을 다산 정약용이 다시 해석합니다. 그러면서 정통 유교를 어떻게 주자학에서 굳게 해석 하였는가라는 것을 비판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대학자로서 학문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비판도 많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 정약용이 이야기하는 것은 가치라고 하는 것이 인간 안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신적인 ‘인’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자기 밖에 있는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이 옳다고 하는 사실을 알면서 끊임없이 ‘인’에 합치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과 신적이고 천적인 ‘인’이 구별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재적 가치로 그 두 가지가 융합되어서 인간 안에 하나가 되어서, 바깥에 있는 천품과 인간 안에 있는 것이 하나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해석이 옳은 해석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논쟁의 세계들이 펼쳐집니다. 다산 정약용을 비판하기 좋아하기 좋아하고, 깎아내리고 조선의 성리학적인 전통을 지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결국 다산 정약용의 유교에 대한 해석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에게서 배운 해석이라고 봅니다. 마테오 리치 같은 사람에 의해서 소위 이야기하는 중국의 유교를 토착화된 기독교에 대한 해석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그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라 비평하기도 하고, 다산 정약용을 지지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맞다, 그리고 정통 유교는 사실은 주희에 의해서 굽었고 우리나라를 지배하였던 그것은 정통 유교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 드넓은 세계에 대해서 전문적인 학자들의 논의하는 어마어마한 장에서는 우리 같은 사람은 아마추어에 불과할 것입니다. 어쨌든 그러한 점에서 다산 정약용은 같은 유학자이면서 그러면서도 그는 외재적 가치관을 주장한 사람이었습니다.
‘중용’이라고 하는 것은. 모영보 전도사, 이게 ‘용’이 무슨 뜻입니까. 이 ‘용’자를 이렇게 씁니다. 용-庸. 이것이 원래 「대학」, 「논어」, 「맹자」, 「예기」가 사서입니다. 사서삼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경, 역경, 춘추를 삼경이라 부릅니다. 원래 이것이 「대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번에 내가 쓴 책에 「대학」에 대해서 상세하게 해설을 하였는데, 「대학」이 원래 큰 학문(大學)입니다. 큰 학문은 다른 소소한 학문들을 모두 통괄해서 그것이 왜 있는지 설명해 주어서 결국 학문의 근본을 깨우치는 것인데 「대학」은 두껍지 않습니다. 아주 짧습니다. 「대학」은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국가의 근본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설명합니다. 한 사람이 왕이 될 때 그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어떤 학문을 공부해야 하는가, 그리고 한 사람이 진정한 사람이 되는 것과 한 나라의 왕이 되는 것이 서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일치한 하나의 길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상당히 시사하는 점이 큽니다. 한 사람이 거룩한 성도가 되는 것과 목회자가 되는 것 사이, 그 두 개가 일치하듯이 그렇게 어떻게 성군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는데 그것을 아주 정치학에, 퇴계가 죽기 2년 전에 16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선조 임금에게 적어서 유언처럼 남긴 글이 바로 「성학십도」입니다. 그것이 결국 「대학」의 가르침을 상세하게 해석하고 그것을 열 개의 도표를 그려서 인간이 어떻게 공부하고,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그것을 보면 이런 도표를 그리면서 성경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기독교적인 경건이구나 생각이 듭니다. 설명하면 굉장히 깁니다. 어쨌든 이러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기」속에서 여기에서 일부분을 뺀 것이 「대학」이 되고, 일부분을 뺀 것이 「중용」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중용」하면, 중립주의를 이야기합니다. ‘나는 중용을 지킨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지나치지 않고 모자라지 않은 뜻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의 ‘중용’은 그러한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중용’은 무슨 뜻인가에 대해 설명을 하면 ‘중용적 가치관’은 해결이 되겠습니다.
마음(心이) 있습니다. 자, 이렇게 있으면 여기에 어떠한 사물들을 보게 되는데, 사물들을 보면 이렇게 일단 인식이 됩니다. 이것이 감각이고 어거스틴의 인식론을 이용하자면 이렇습니다. 감각이 있고, 그다음에 들어와서 지각이 형성이 됩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인상의 덩어리들입니다. 이것을 여기에서 가지고 있는 지성으로서 이미 알고 있는 이데아일 수도 있고, 칸트가 이야기하는 카테고리, 범주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해서 이것이 이 지각들이 지성을 빚어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인식입니다. cognition. 이 지각은 perception. 그다음에 이것(감각)은 sense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cognition 된 것이 마지막 도달하는 인식의 결과입니다. 인식의 결과는 많은 인식들이 있겠습니다. 이것들끼리 서로 연관을 지으면서 이 사람 지식 안에 있는 이데아에 대한 인식이나 카테고리에 대한 인식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카테고리’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차가움’, ‘따뜻함’, ‘딱딱함’, ‘물렁물렁함’ 아니면 ‘네모남’ ‘둥글함’ 이러한 기준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한 카테고리를 가지고 이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것들이 다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억에 집적이 되어서 더 풍부한 기억을 가지고 다음에 작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다 더 정확한 판단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용」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사물을 감각합니다. 그러면 들어오게 됩니다. 여기에 딱 들어오게 되었을 때 이것이, 여기에서는 복잡하게 설명 안 하지만, 여기에 들어와서 마음속에 포착이 됩니다. 포착이 된 다음에 이게 잠시 후에 폭발하면서 분노, 사랑, 불쌍히 여기는 마음 등등으로 폭발합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오욕칠정이 나옵니다. 그러면 ‘중용’은 뭐냐 하면 아직 이 안에 사물을 인식한 어떤 이해가 있는데 이것이 아직 감정으로 표출되지 않은 상태를 ‘중용’의 상태라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용’이라고 하는 것은 ‘떳떳하다’는 뜻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결국 인간의 불행이 여기에서 이렇게 확 쏟아져 나온 것까지 기다렸다가 이것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오류에 자꾸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감정에 동요가 없는 자기 안에 어떤 객관적인 인식의 상태에서 그것이 중립을 지키는 것이고, 아직 분노하지 않았고 애착하지 않았고, 이러한 오욕칠정들이 쏟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은 떳떳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속에서 무엇인가를 판단하라, 그리고 자신의 갈 길을 정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범인에게는 여기 A에서 B, C, D에 이르는 순간이 거의 동시적으로 일어납니다. 범인, 보통 사람에게는 말입니다. 딱 보면 금방 열을 받습니다. 30분쯤 기다렸다가 아, 이제 열을 받아야 되겠다, 하면서 열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말하자면 중용적인 가치관입니다. 노장사상에서 이것을 굉장히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항상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을 남의 일처럼 보면서 객관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다 동북아의 철학사도 결국 진리라고 하는 커다란 구 전체를 어느 쪽으로 돌려서 보느냐에 대한 변천입니다. 어느 것도 우리에게 완전한 설명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 어느 것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두를 받아들여서 기독교를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러나 기독교에서 그와 일치하는 어느 일정 부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공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많은 진리의 쪼가리들이 그러한 철학사와 모든 사상사 속에 녹아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실존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철저한 고독한 자아에 대한 문제들도 이번 책에서 조금 다루었습니다. 그러한 것들도 결국 기독교적으로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한 사고를 하게 되는가에 대하여 말입니다. 열심을 내기를 바랍니다. 최선을 다해서 답을 하였습니다.
질문4) 오늘날의 세상은 과거에 비해 보다 더 정의롭고 자비로운 사회를 요구하고, 시민들의 윤리의식 또한 이전보다 더 고양된 것 같습니다. 현상적으로 볼 때, 윤리적인 시민과 윤리적인 그리스도인은 비슷해 보이기까지 하여 윤리적인 빛을 비추며 살아도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그리스도인들만의 독특한 윤리의 빛이 드러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번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교회보다 사회의 역할이 더 부각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어떻게 윤리적인 빛을 드러내며 존재해야 할까요?
답변4) 질문 4번은 첫 번째 스터디 시간에서 다루지 않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