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세상을 비추게 하신 사람들
녹취자 : 김세나
질문1) 체스터턴의 말이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의 저자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고 한 것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욕망하는 대로 다 행하고 표현한 것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함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함은 곧 하나님을 향한 반역일진데 이를 하나님을 향한 대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볼 수 있을까요?
답변1) 박철웅 강도사가 한번 답변을 해 보십시오. 나를 옹호하던지 강성경 전도사를 옹호하든지 해서 말해 보십시오. (박철웅 강도사 – 목사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문제는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방향인 것 같습니다. 이 여인도 하나님을 향한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방향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그 사랑을 행사하는 것이 우리가 볼 때는 죄이지만, 목사님께서는 그것이 방향만 제대로 잡혀서 하나님께 간다면 그 열망, 갈망의 본질은 똑같은 것이 아닐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무지로 인하여 잘못 설정된 사랑의 방향만 잘 설정되었다면 그 갈망이 하나님을 향하여 표현될 수 있었는데 그 방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성적인 작용, 사창가에 가는 그러한 일탈로 벌어진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물론 이제 저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체스터턴이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그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고 하였고,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의 저자도 역시 그러한 것인데 (비서실에 내려가면 삼위일체라는 책 위에 내가 쓰던 가죽으로 쓰던 노트가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오십시오.) 그런데 이제 당연히 지금 사창가의 문을 두드리거나 아니면 배우였던 여자가 혼자 하던 정사도 아니고 친구와 둘이 들어가 한 남자와 정사의 경험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러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을 찾는다는 의식이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신학적으로 해석을 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구원에 관한 교리를 배울 때 우리가 이러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구원의 가장 중요한 믿음은 이제까지 구원이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길을 포기하는 것, 그것이 믿음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러면 역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도 몰랐고, 예수도 모르고, 천국과 지옥도 모르는데 내가 무슨 구원받을 게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인간으로서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길, 그것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부자가 되면 행복할거야.’ 아니면 ‘예쁘게 성형수술을 하고 수많은 남자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으면 나는 행복에 이를 수 있을거야.’ 라고 생각하였다면 앞의 사람은 그 돈이 자기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 possibility, 가능성이 구원의 상태였던 것이고, 후자의 사람은 수많은 남자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그러한 것이 구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쪽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밑에 보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함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라고 하였는데, 저 말도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정욕이 콸콸 넘쳐서 사창가에서 눈을 두들기는 그 사람이 ‘아, 내가 이렇게 유흥을 즐기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을거야.’ 라는 생각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그러지는 않지 않겠습니까? 그 표현도 역시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는 것입니다. 다음 밑을 보면 거두절미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함은”이라고 물어보면, 저 사람은 그러한 것까지 진리의 빛이 너무 없어서 그 결국 그 사람이 그러한 생각 자체가 없기 때문에 자기가 그 길을 걸어가는 의미를 모릅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반역이 아니겠습니까?” 하는 것인데, 이는 당연히 대적입니다. 대적인데, 결국 이것은 인간의 심리 깊은 곳으로 모자라는 것입니다. 자, 명문을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제12권 8장 13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라틴어는 생략하고 한글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 내적 인간이 저 이성을 시간적 사물들의 관리 감독이 맡겨진 이성을 구사하되 절도 없는 진출로 외적인 사물들을 향해 지나치게 뻗어 나간다면 결국 내적인 인간은 적들의 틈에 묶여 버리고 말 것이다.” 그다음에, “여기에서 말하는 적이란, 덕성을 질투하는 마귀들과 그 우두머리인 악마를 가리킨다. 그렇게 되면 저 머리는 자기 배필과 더불어 금지된 과인을 먹어 영원한 사물을 관조하는 시력을 빼앗기고 그의 눈빛이 더이상 그와 함께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이것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하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성을 주셨습니다. 인간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데, 이렇게 이성을 내적인간이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서 내적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어거스틴의 책 바로 앞에서 보면 내적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동물과 인간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동물과 인간을 끊임없이 비교하다 보면, 어느 한 시점에서 ‘아, 이것은 도저히 동물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라고 구별하여 부를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있구나.’ 그 지점이 바로 내적인간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내적인간이 있는데, 내적인간의 가장 중심에 이성이 있습니다. 이 이성은 당연히 영혼 안에 있습니다. 영혼 안에 있어서 영혼이 있는 한 이성은 계속 건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서도 이 이성은 사용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에서도, 이성의 주된 기능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추론해내는 기능입니다. 하늘나라에서도 모든 인과관계가 모두 밝혀서 우리에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현시되지도 않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앎의 기쁨이 없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면 말입니다. 지연 전도사가 공부를 좋아해도 초등학교 1학년 클래스에 데려다 놓으면 재미있겠습니까? 애들이 와서 아줌마로 하고, 그다음에 1학년 교과서 가지고 배우면 뭐가 재미있겠습니까. 왜냐하면 모두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의 기쁨은 역시 지성의 기쁨인데, 거기에서도 이성적으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초자연적인 빛을 통해서 들어오는 사물에 대한 인식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어쨌든 천국에서도 이 이성의 기능이 계속될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이러한 이성을 주신 이유는, 여기에 이렇게 많은 시간 속에 사라져가는 수많은 사물이 있습니다. 당연히 여기에는 자기의 육체를 포함해서, 그다음에 사람들과의 인연, 그다음에 문화, 즐거움 등등 갖고 싶은 화장품부터 시작해서 신상품으로 나온 쫄쫄이 치마까지 아니면 파커 만년필까지 다양하게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성적인 영혼은 이것이 말하자면 이러한 것들을 주신 이유는 이렇게 시간 안에 있으나 시간에 매이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시작은 있지만 끝은 불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혼은 종종 시간을 초월해서 기억하기도 하고, 시간 너머에서 시간 세계를 바라보기도 하고 하나님과 유사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없다면 반성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성을 주신 이유는 잘 들어 보십시오. 이것들이 이렇게, 이렇게 관련을 짓고 자, 이성 말고 여기에 감각이 있습니다. sense입니다. 감각은 감각의 정보를 영혼에 전달해 주기 때문에 인간이 사물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것은 영혼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여기 새 한 마리가 날아다니면 우리 안에 이미 ‘새’라는 사물의 기억이 없으면 새임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새와 곤충 사이의 애매한 존재라면 곤충과 새의 유와 종에 대해서 기억을 하고 있을 때, 둘 중 어느 것에도 속하기 애매한 존재라는 것을 파악해 냅니다. 그렇게 될 때, 감각적인 것들이 들어오면 이것이 이렇게 들어오면서 인간의 마음에 있는 욕망과 결탁해서 육체를 보면서 이 육체를 잘못된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됩니다. 육욕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념이 있는데 아주 비정상적으로 집착을 하게 되고, 그다음에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를 만들고, 등등 물질에 대한 사랑을 갖게 되고, 일어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이성이 절도 없는 진출로 바깥으로 쏟아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제하도록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 이성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지성적으로 진리에 대한 참된 통찰을 잃어버리고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아까 그 문제와 어떻게 연관이 되는가? 결국 보면 인간이 행복해지려고 몸부림치는 그 자체가 사실은 어거스틴의 설명을 따르면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져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영혼은 여전히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진리에 의해 올바르게 질서가 잡힌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육욕을 향하여 가게 됩니다. 이미 「영혼 안에서 나를 찾다」거기에서도 하나님의 모상을 이야기하면서 길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면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불순종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뿐이지,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심지어 인간이 사치스러운 것도 결국 하나님을 흉내 내기 위한 것이고, 방탕한 것도 하나님을 흉내 내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렇게 저러한 일을 하는 사람은 전혀 그렇게 자기 마음이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사창가에 문을 두드린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신학자인 우리들의 입장에서 볼 때 결국 저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참된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더라면 절대 안 할 일들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미친 듯이 쾌락을 추구하고 허무한 일에 굴복하니까 결국 넓은 의미에서 보면 그것도 하나님을 찾는 심리가 반영된 것이라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동의하십니까? 재질문 있습니까? 됐습니까? 다음 하겠습니다.
질문2) 교회가 무분별하게 세상문화에 동화되는 것도 나쁜 것이지만 문화에 대한 몰이해 혹은 무관심도 나쁜 것으로 보입니다. 리처드 니버(H. Richard Niebuhr)의 저서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에 보면,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다섯 가지 유형을 제시해 놓았습니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한 가지 부류에 완벽하게 일치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 안에서 취할 수 있는 유형과 거절해야 할 유형은 어느 것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를 토대로 교회가 세상 문화의 것들을 어느 정도까지 활용할 수 있는지 그 적정선을 알고 싶습니다.
답변2) 저것은 아직까지도 논란이 끝나지 않은 문제이고, 아마 주님 오시는 날까지 정돈된 견해를 갖는 것은 힘들 거라 생각됩니다.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 라인홀드 니버(Reinhodl Niebuhr)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리처드 니버가 형인데, 라인홀드 니버는 저도 사실은 읽은 지가 하도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만났던 대 신학자들만큼 추종하면서 학습을 받아야 될 정도로 못 느꼈습니다. 저쪽의 담론들은 대게 문화에 관한 담론들이었기 때문에, 어쨌든 그렇습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교회 밖의 세상과의 문화 쪽에 많이 치중했고, 리처드 니버는 교회 안에서의 문화, 이것을 어떻게 새롭게 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참 어렵습니다. 결국 문화라고 표현하였지만,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저 책이 굉장히 중요한 책으로 꼽히는 이유는 문화의 유형을 아주 분명하게 제시하고, 그것을 잣대로 어느 한 시대의 교회가 어느 쪽을 따르면서 어느 유형에 속하면서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를 찾아 갔는가 판단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널리 알려진 책입니다. 저쪽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유형이 뭐냐 하면, 다 외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Christ against Culture”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반문화적 태도’입니다.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따르면 이 세상의 문화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세워진 가치 자체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싸워서 투쟁하고 파괴해야 할, 혹은 완전히 거기로부터 접촉을 접고 철수해야 할 그러한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따랐던 초대교회 영지주의자들이 대표적인 케이스였고, 메노나이트, 퀘이커교도들, 이러한 사람들이 반문화주의자들이었습니다. 초기 한국교회에도 보면 그러한 정서가 녹아져 있습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또 오늘 아침 구름만 이상하게 떠도 “오늘 주님 오시려나.” 그러한 것. 성경에서도 “너희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거기에 넣고 싶은 부사가 있습니다. “도무지 사랑하지 말라.” 티끌만큼이라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거기에 없으니 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한 태도들이 모두 ‘Christ against Culture’에 해당됩니다.
그다음은 “Christ of Culture”입니다. 그리스도와 문화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 가는 문화는 결국 그리스도 예수가 당신 자신을 이 세계 역사 속에서 나타내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문화에 대한 헌신이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라고 극단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은 완전자유주의, 해방신학, 퀴어신학, 동성애를 지지하는 신학, 극단적인 자유주의 계열에 서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보고, 그 안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분이 그저 슈바이처이듯이 모범적인 교사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문화를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정신으로 가꾸어 가는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다음은 “Christ above Culture”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문화 위에 계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여기에서 세상과 세상에 있는 문화, 그 문화 안에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문화와 인정하지 않는 문화가 갈등을 일으키고 있지만, 그리스도는 이 문화, 저 문화 위에 초월하여 계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위에서 모든 것들을 내려다보신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러한 문화관은 어떻게 보면 세속적인 것과 신령한 것 사이의 구분을 아주 흐리게 하는 위험성을 가집니다.
다음에 이제 “Christ and Culture in Paradox”입니다. 갈등, 역설적 관계 속에 있는 것인데 마르틴 루터에 의해 제기되는 두 왕국론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이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결국 Two Kingdom, 두 왕국이 싸우는 곳이고, 그 두 왕국이 싸우는 그 속에서 그리스도와 문화가 갈등을 일으킨다는 입장을 갖는 것입니다. 초기 루터파의 입장이기도 하고, 여러분들 최근 몇 년 전에 데이비드 반드루넨 책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The living in the two kingdoms”라고 하는 책인데, 반드루넨 아마 인사는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매우 실망하였습니다. 카이퍼나 이러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비판하는데 조금 걱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의도 안 되었습니다. 그 후에 자연법에 대하여 책을 썼는데 첫 책의 인상이 별로 안 좋아서 읽지 않았습니다.
그다음에 니버가 유일하게 소개하면서도 비판하지 않는 것이 “Christ Transformer of Culture”입니다. 문화변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문화변혁이 결국 개혁주의가 나아가야 할 길이 아니겠는가 보기도 합니다. 제가 니버 전공자가 아니니까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일반적인 우리 표준적인 개혁주의자들에게 알려진 바로는 리처드 니버의 문화변혁론은 개혁주의보다 훨씬 조금 더 과격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중에서 어떤 유형을 취해야 되겠는가, 할 때 저는 이 다섯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능한 것은 대체적인 입각점을 다섯 개 중 하나에 두고 그다음에 수정적이고 전향적인 자세로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면서 그리스도와 문화와의 관계를 시대의 변화에 맞춰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해 가는 형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가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정도이고, 그것을 썼을 때와는 8년 정도가 지났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서 많이 잊혀지기는 하였는데 그 정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저것도 만만하게 보지 마십시오. 리처드 니버의 문화변혁론을 아주 강력하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더 위로 올라가보면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있을 때 카이퍼를 지긋지긋할 정도로 물고 늘어지면서 비판하였던 사람이 클라스 스킬더(Klaas Schilder)라는 인물입니다. 저도 대학원 박사과정 다닐 때 그 사람 책 가지고 공부를 했었는데, 클라스 스킬더입니다. 이 사람은 1930년대 이후로 떠올랐던 화란의 구속사적 설교, 구속사 중심 설교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한때 한국에서 뒤늦게 들어와서 구속사적 설교 아니면 설교가 아닌 것처럼 했었는데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구속사적 설교 학파에 주장, 모든 설교가 구속사적 이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구속사적 설교학파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은 극단적인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많은 논쟁이 이미 있었습니다. 스킬더 같은 학자는 이제, 저것도 일반은총과 관련된 것입니다. 일반은총의 범위를 아브라함 카이퍼가 너무 넓게 잡았다고 보고 그것을 개혁권에 있는 사람들이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스킬더는 오히려 반대로 일반은총이 아니라 거꾸로 뒤집어서 인간이 일반 저주 아래 있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그래서 일반은총의 개념을 아주 깡그리 없애 버립니다. 그런데 나중에 저분도 나이가 많이 들면서 자기 생각이 너무 치우쳤다는 것을 알고 카이퍼와 상당 부분 화해를 하면서 의견의 접근을 이룹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견해를 이야기할 때에는 연대기를 모두 다 보고 최종적인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한번 읽어 보십시오. 제가 읽었던 책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은 「Christ in his Suffering」입니다. 고난 받는 그리스도였습니다. 설교를 읽으면 진짜 웅장한 느낌이 듭니다.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 그러한 생각을 하게도 하는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똑같은 소리를 들으니까 좀 그랬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 위대한 일이다, 우주적인 일이다, 우리는 단지 그냥 찬송하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할 때 그분은 그것이 쉬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 참 어려웠습니다.
그러한 역사들이 뒤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뭐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아닌데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칼빈을 중심으로 하는 칼빈주의적 문화관과 이것은 다섯 가지 중에서 문화변혁론과 가장 가깝기는 한데, 저것보다는 훨씬 더 유연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에 대해서는 아직도 평가가 갈립니다. 저는 굉장히 참 좋습니다. 좋고 우리나라에서도 변종길 교수를 비롯해서 몇몇 사람들은 카이퍼가 개신교 신학을 망쳐 놓은 것처럼 그렇게 비판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또 한쪽에서는 칼빈주의를 더 넓고 웅장하게 확장한 것이라 평가합니다. 신학자들의 아주 지루하고 긴 논쟁에까지 저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내가 읽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책을 보면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필지가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역사 속의 한 아이러니 아니겠습니까. 강력한 두 왕국론을 거의 갈등구조 속에서 보던 루터파 사람들은 독일에서 히틀러가 독재를 할 때,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거의 다 변절합니다. 본 회퍼 같은 사람은 아주 예외적인 사람입니다. 대부분 변절하였습니다. 그러한 것을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정답은 다섯 가지가 있는데, 나머지 네 개를 모두 버리고 한 가지만 따라간다고 하는 것은 아마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것, 그리고 어느 하나에 입각점을 두고 나머지에서 보충하는 관점을 가지고서 살아갑니다. 저는 솔직히 말하면 반문화적 관점은 아닙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제가 항상 욕심을 느끼고 욕망을 느낄 때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 제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구절입니다. 답이 되었습니까? 답을 열심히 찾으십시오.
질문3)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상실은 교회가 신적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과 접한 관계가 있고, 그러므로 현실적인 목회현장에서 일어나는 탈신학적인 목회의 상황이나 교회의 세속화는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하셨는데, 어떠한 부분에서 교회가 탈신학적 목회상황과 교회 세속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또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3) 성경은 우리에게 윤리적인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 주는 교과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은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게 쓰여진 책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탈 신학화가 일어나는가.” 보겠습니다. 성경 구절을 읽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30분, 혹은 40분 정도 설교를 하는데 전달하고자 하는 뚜렷한 사상이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사상 아닙니다. “착하게 삽시다.” 아니면 “누구누구는 불신자이지만, 이렇게 착한 일을 하더니 결국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신학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서 전달하는 신학에 큰 흐름에 그 성경 구절이 놓여 있고 그것은 인생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아주 심각하고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설교한다는 것이, 또 성경을 많이 설교한다는 것이 신학적인 목회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미 다 알려준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인가」책에서 이미 이야기하였듯이, 초대교회에 전도하는 것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하거나 혹은 우리 파에 민중의 사람들을 많게 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창문으로 너를 인도하마.”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만 들여다보다가 이 창문이 여기 있는데, 여기에서 위에 올라가서 옥탑에 가서 창문을 보니까 창문이 전부 다 하나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로 되어 있어서 360도 돌면서 온 서울을 내려다볼 수 있는 남산타워처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을 보는 시야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의 설교를 듣고 났을 때, ‘아, 이 성경 구절이 이런 의미였구나.’라는 뜻과 함께 ‘아, 내가 이렇게 믿어야 하겠구나. 이렇게 살아야 되겠구나.’와 함께 ‘아, 이게 결국 내가 생각하던 세상이 성경이 그리고 있는 세상과는 많이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구나.’ 그러한 것을 느끼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외국에 가면 많이 당황하는 것이 뭐냐 하면 사고방식의 현저한 차이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모든 방면에서 그렇습니다. 외국에서 웬만큼 친한 사이 아니면 누구네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가도 밥이 늦게 나온다고 재촉하는 법 없습니다. 매우 실례입니다. 배고파도 쫄쫄 굶으면서 주인의 처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어떤 사람들이 모여 사느냐에 따라서 문화가 엄청나게 다릅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사실은 그러한 문화의 일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보는 관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결국 설교를 많이 듣고 나면 성경의 의미를 알게 되어야 하는데, 신학이 생겨남으로써 성경구절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탈 신학적인 목회상황이 일어나게 되니까 어떤 식으로 교회에 되갚아지는가 하면 교회가 진리에 대한 신념을 잃게 됩니다. ‘탈 신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학을 탈각하고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엄밀히 말하면, 목회를 하는 이유는 저 사람을 신학을 가진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서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수없이 나오는 내용입니다. “분별하고 흠이 없는”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목양을 하는 것입니다. 목양을 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에게 신학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세계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탈 신학적인 목회현장이 일어나는 이유는 세상이 탈 진리를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미국에서도 그렇고 노장사상이 굉장히 넓게 환영을 받습니다. 그 매력이 뭐냐 하면 진리를 고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진리가 내일은 진리가 아닌 것이 될 수 있고, 그러나 오늘 진리인 것은 또 오늘 붙들고 살아가고, 그것은 하나님이 만들어서 우리에게 수여하신 것이 아니라 그냥 인간들이 공동체로 살아가면서 가장 유익이 되는 것들을 그때그때 선택하면서, 진리라고 하는 것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진리 상대주의’라고 이야기합니다. 상대주의적인 개념이 유행하니까 어떤 진리가 나와도 그 진리는 절대적으로 충성할만한 가치가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언제든지 또 도태되고 새로운 진리를 맞아들일 수 있다는 면에서 오늘 볼 때 이상한 행동을 하고 비윤리적으로 보이는 사람도 어떻게 보면 새롭게 도래할 진리를 미리 맛보고 전파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대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회심입니다. 회심.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깊이 회심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높고 위대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하나님 안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사실, 세계 모든 운명이 그분의 뜻에 달렸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성화가 결국 그렇게 거룩한 본성으로 변화되어 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면서 사는 것이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할 것이라 굳게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한 형제가 있었는데, 불신자였습니다.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다가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학교를 다니는데 아주 개판인 애들도 많더랍니다. 미국 애들도 그렇습니다. 마약부터 시작해서 섹스, 젊은이들을 지배하고 있는 문화입니다. 자신이 공정히 보았을 때, 예수 믿는 학생들은 다르더랍니다. 뭐가 제일 달랐는지 물으니까, 평화롭다는 것입니다. 막 환락에 빠지고 미치고 그러지 않아도 평화로운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해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자기도 예수를 믿게 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진리는 이것이라고 싸우는 것도 우리들이 해야 하지만, 그것과 함께 강조되어야 할 것은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이렇게 평안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삶 전체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인의 아우라라고 하는 것, 그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안타까운 마음으로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세상이 진리로 돌아오기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야 하지만, 그 안타까움이 뭔가 방향이 잘못되어서 한없이 불행하기만 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한때는 그러한 마틴 로이드 존스가 이야기하였던 “지나친 젊음이여”라고 칭할 수 있는 시기를 지났는데, 그렇게 우울하게 살도록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참된 회심이 필요하고, 그럼으로써 그 회심과 함께 성경의 맛을 알고, 그리고 진리를 확신하면서 살아가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읽고 있는 이 책을 회심하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지적인 능력인 있는 사람들이 읽을 때는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박수를 치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몰랐는데 결국 알고 보니까 하나님의 은총을 떠난 인간의 학문이라고 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하는 세계가 결국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여전히 진리는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질문 읽겠습니다.
질문4) ‘학문’을 통해 진리가 세계와 인간 안에 확장되어 존재하는지 힘써 알아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목사님의 설교와 저서를 통해 보여주시는 다방면의 지식들을 보게 되면 ‘학문’에 대한 도전을 받게 됩니다. 목사님께서 공부하신 학문의 순서들과 그것을 통해 얻게 되신 확장된 지식에 대하여 알고 싶고, 후배 교역자들에게 추천하고 특별히 추천하고 싶으신 학문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지 듣고 싶습니다.
답변4) 공부를 많이 하면 박사가 됩니다. 박사, ‘박(博)’은 ‘깊다, 넓다’는 뜻이고, 이 ‘박(薄)’자는 ‘엷다’의 뜻입니다. 그래서 한 쪽을 깊이 파게 되면 그 방면에 있어서는 왼쪽의 ‘박사(博士)’가 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나머지에 대해서는 오른쪽의 ‘박사(薄紗)’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통합적으로 어떤 사람이 학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통합적인 방식이 아닌 한 줄기만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비판을 받습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 프란시스 쉐퍼를 읽어 보았을 것입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한번 전체를 읽어 볼 가치가 있는 사상가입니다. 프란시스 쉐퍼의 책이 나오고 나서 상당한 전집이 출간될 때였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사람의 책 세계로 들어가 보면 정말 웨스트민스터 출신이 아닌 것처럼 역사, 정치, 사회, 경제, 문화, 화학, 물리, 수학, 식물학, 심지어 미술, 음악, 이러한 것까지 광범위하게 논의를 합니다. 그러면 항상 음악에 대해서 한 이야기를 들고 평생 음악을 한 사람이 나와서 그것 틀렸다고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그다음에 그림에 대해서 막 파고듭니다. 그리고 물리학을 막 파고 들어갑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처럼 종합적이고 통합적인 사고를 가지고 글을 쓰는 사람은 언제나 그러한 비판하는 사람들의 밥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한 번도 수많은 사람이 프란시스 쉐퍼를 비판하였지만, 그러나 아무에게서도 프란시스 쉐퍼에게 대안을 내놓은 사람은 못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작은 한 부분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그 작은 한 부분을 물고 늘어지면서 비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통합적으로 하는 사람에게는 지면과 시간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칼 세이건의 ‘양자 역학’을 이야기하였는데, 지금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은 ‘양자 역학’을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상대적이라 생각하던 사람들이 왜 그러한 사고를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상대성 너머에 사실은 더 커다란 통합적인 통일성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양자 역학’을 쓴 것입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양자 역학’을 말하기 위해서 ‘양자 역학’을 쓴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내가 저 사람들이 만족할만한 이야기를 다 담으려면 책이 기형이 될 것입니다. 아니면 읽어줄 리 없는 한 3천 페이지 책을 쓴다든지, 아니면 ‘양자 역학’을 이야기하다가 끝내야 하든지, 이렇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학문의 깊이 면에 있어서 그분들과 비교될 수 없겠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자신들은 내가 알고 있는 신학적인 것에 대해서 자신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말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다 연약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강하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시간과 공간 안에 나타나기 전에 하나님의 머릿속에 있었습니다. 논리적으로 당연합니다. 그러한 전 단계가 없다면 하나님이 생각 없이 만드시는 것입니다. 가지고 계시고 당연히 그것은 사물과 사물뿐만 아니라 사물과 사물들의 관계까지 알고 계실 것 아니겠습니까? 무슨 작용이 일어날 것인가 까지 다 알고 계실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세계를 만드신 것입니다. 결국 그 하나님의 정신 속에서 쏟아져 나온 피조물이기 때문에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 하지 않는 것들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만, 이 증거를 너무 과신하고 성경의 필요성을 적게 계산할 때 이것이 자연신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진짜 만나기를 원하는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렇게 물질의 계단을 밟아서 도달할 수 있는 그러한 정도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을 반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언젠가 제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사라졌습니다. 갑자기 그랬단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내가 가고 나서 설교를 많이 들었을 텐데, 그럴 때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내 생각이 많이 날 것입니다. ‘교회가 전부 다 왜 직선 디자인일까? 아, 목사님이 원래 교회 건물을 아주 공교하게 곡선으로 하는 것을 싫어하셔서.’ 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 벽의 색깔을 김남준 목사님이 아주 좋아하셨는데…’ 이 색깔, 저 위의 색깔 전부 다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색깔입니다. 내가 이 교회를 매 만져 놓았으니까 나의 흔적이 남았을 것 아닙니까. ‘얼마나 어거스틴을 좋아하셨으면 저기에다가 우리를 무릎 꿇고 풀까지 뽑으라 하셨을까?’ 하는 생각들이 날 것입니다. 세계도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학문의 순서”를 이야기하는데, 무엇부터 공부할 수 있겠는가 말할 때 저는 ‘탁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탁’치고 아무거나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상을 갖게 하는데 제가 느낀 것으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철학적 사색’이었습니다. 저의 책의 깊이를 더하게 된 것은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생명의말씀사에서 알고 있었습니다. 2006년도에 「자기깨어짐」이라는 책을 냈는데, 그 책이 나오면서 그분들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의 책이 크게 철학이라는 방향을 틀면서 책이 깊어지기 시작했다.”고 하였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기독교에서 흔히 쓰는 개념용어에 대해서 의심을 많이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 이성, 신학, 종말, 말씀, 하나님, 성자, 그리스도, 구속, 속죄, 제사, 은혜, 은총, 사랑, 육욕, 지순애, 이러한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저는 감사한 것은 굉장히 많은 시간을 사색하게 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언젠가 책에 나올 것입니다. ‘도대체 욕망이란 무엇인가?’ 너무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6개월 동안 ‘욕망’에 관해 묵상하였습니다. ‘욕망’에 관한 책을 펼쳐놓고 ‘욕망’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지식을 가지고 ‘도대체 욕망이란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혼자서 서울대공원 산책을 자주 나갔었습니다. 밤에 호숫가 걷는 것이 나의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한 한 시간 이상 쭉 걷는데 호수 위를 걸어가는데 갑자기 ‘욕망’에 대한 단상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이 전화기를 딱 펼쳤습니다. 서서 ‘욕망’에 대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미친 듯이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장을 쓴 것이 아니라 목차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욕망이 무엇이고, 욕망의 정체는 무엇이고, 욕망은 어디에서 오고, 욕망은 우리의 지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는데 다리에 쥐가 났습니다.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정도로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딱 쓰고 시계를 보니까 1시간 40분이 흘렀습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많이 하고 많은 독서를 해도 사색을 안 하는 것은 오늘 잔뜩 먹고서 내일 아침에 설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몸에 유익을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공부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문법학’ 하나 끝내고, ‘수사학’ 하나 끝내고 그다음에 ‘논리학’,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뭐냐 하면 기회 있는 대로 손에 들어오는 책 중에서 기본서들을 먼저 정해서 읽고, 틈틈이 독서하는 즐거움에서 책들을 두루 읽으면서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고 누가 독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누가 책에 대해서 평하는 것들은 절대적으로 신봉하지 말고 비판적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자기가 직접 본 후에 결정하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서 책을 다방면의 책들을 읽어가되,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항상 한 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지식이 성경으로 돌아오고, 성경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성경, 독서, 묵상, 기도. 그러면서 이것을 깊이 체화시켜서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고 해야 합니다.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준 한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을 읽어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나옵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저 삼위일체를 상기하고 발견하고 사랑하려면 살아있는 그가 삼위일체를 상기해 내고, 삼위일체를 관조하고, 사랑하는데 자기 전체를 연관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쉽게 이야기 하면, 머리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여행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고 하나님을 찾아가는 여행입니다. 그 여행길을 바로 「고백록」으로 남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고백록」은 자기 인생을 통해서, 초월하는 하나님과 자기 자신의 성찰을 통해서 「신국론」은 역사를 통해서 매개체는 다르지만, 모두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거스틴의 3부작입니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읽으십시오. 꾸준히. 그리고 제가 이야기를 늘 하듯이, 제가 여러분이라면 단연코 자랑을 위해서 공부하지 않겠습니다. 나 자신이 살기 위하여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사람을 파십시오. 조나단 에드워즈든지, 어거스틴이든지, 칼빈이든지. 칼빈만 해도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책을 보니까, 칼빈의 저서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부터 설교집과 주석을 합하면 100권이 훨씬 넘습니다. 그것을 읽으려면 부지런히 읽어도 3년은 걸릴 것입니다. 수많은 보석 같은 것들이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완전히 세계가 달라질 것입니다. 어떻게 단어장 같이 정리된 것만 보려고 하지 말고, 그러한 것이 원래 가치가 낮습니다. 그러니까 숲속에서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세상의 무슨 일이 있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칼빈 주석집을 읽겠다고 마음을 가지고 읽는다든지, 「기독교 강요」를 다 안 읽은 학생들도 대게 많습니다. 그것을 읽는다든지. 2차 자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1차 자료가 중요합니다. 빨리 1차 자료로 넘어가야 합니다. 칼빈이 원래 했던 1차 자료 말입니다. 더 좋은 것은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해서 그것을 오리지널로 읽을 때 느낌이 최고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글로 된 것이라도 좋으니까 읽으십시오.
찰스 스펄전, 마틴 로이드존스에서부터 시작해서 마르틴 루터도 읽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책들을 읽으면서 한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그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동지가 된 마음으로 파고 들어갈 때, 그때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을 조나단 에드워즈로 했다면 여러분들이 작은 에드워즈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처럼 생각하고, 에드워즈처럼 느끼고, 에드워즈처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을 그렇게 하면 할수록, 보다 온전한 판단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2차, 3차 학자들이 뭘 이야기하고, 뭘 이야기하고 떠들었는가 하는 것은 이해의 문제입니다. 나중에 원전에 익숙해진 다음에 뭐라고 자꾸 이야기하는 사람 있으면 데려다 놓고 한번 읽어 보면, “쓸데없는 소리!”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용기도 생기고, “어, 내가 못 봤던 것을 봤네!” 이것도 생겨납니다. 그런데 오리지널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없습니다. 말발 센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저를 아무도 못 봤는데, 여러분들은 모두 중립적입니다. “김남준이라는 사람이 누구인가?” 두 사람이 나를 직접 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증언을 하는데, 한쪽 사람은 나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는 말발이 약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나에 대해서 악의적으로 이야기하는데, 매우 논리적이고 상당히 많은 증거를 제시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대부분 순식간에 ‘김남준이라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겠구나.’ 딱 판단이 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일 믿지 못할 것이 칼빈을 읽지도 않고 칼빈에 관해서 쓴 것을 가지고 와서 그것이 칼빈이 이야기한 것처럼 말하는 게, 그것은 칼빈이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칼빈을 해석한 것입니다. 2차 저자는 따옴표를 해다 사용했어도 그 따옴표를 칼빈이 의도한 대로 사용했다고 하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것이 맞는지 결국 결정해 주는 것은 원본으로 돌아와서 결정을 봐야 합니다. 그런데 텍스트를 안 읽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대원 때부터 칼빈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몇 페이지? 몇 페이지를 읽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양심에 손을 얹고. 칼빈 신대원에 가서 칼빈을 「기독교 강요」를 커버해서 커버까지 읽은 사람 손들어 보라고 했더니 한 클래스에서 2명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칼빈’하면서 얼마나 읽었는가. 에드워즈에 대해서 막 많이 이야기합니다. 글도 쓰라고 하면 잘 씁니다. 얼마나 읽었는가. 요만큼 읽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서도 수없이 만났습니다. 박사학위 받고 와서 솔직히 고백합니다. “한 권 읽고 썼습니다. 제가 원래 처음부터 에드워즈에 대해서 쓸 생각이 아니었는데 내가 논문 쓰고 싶은 교수님이 다른 데로 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쓰게 되었습니다.” 많이 읽은 사람이 최고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거스틴에 대하여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어거스틴 「고백록」이라도 페이지에서 페이지까지 읽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그 유명한 책을 한 번이라도 읽어봤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테의 「실낙원」을 이야기하는데, 껍질은 어디에서 봤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읽어 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읽고 이야기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급함을 버려야 합니다. 이 책을 읽고 어디에 가서 자랑하고 써먹을까 하는 이 생각하지 말고 그냥 나를 완성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면서 천천히 섭취해 가고 거기에서 행복감을 줄 수 있는 저자들을 만나야 합니다. 이상한 사람을 만나면 인생 완전히 꼬이는 것입니다. ‘이만희’ 그런 사람 만나서 빠져들면 인생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 위대한 사상가들을 보면서 읽어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가 10년 전부터 이야기하였습니다. “한 사람”을 파라. 그렇게 말을 하다가 하도 안 하니까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정 팔 사람이 없으면 한글로 된 내 책이라도 파라고 하였습니다. 100권 된다고 하니까 다 읽어라. 다 안 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자기 속에 수렴해서, 가장 좋은 학습 방법을 이번에 누가 소개해 주셨는데 아이들을 데려다가 수학 문제를 풀게 한 다음에 칠판 앞으로 인도해서 어떻게 그 문제를 풀었는지 설명하라고 할 때, 아주 똑 떨어지게 설명을 하면 그 아이는 그 문제에서 뭘 변형시켜도 결국 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 인가하면, 가르쳐 보는 것이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지금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이 책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번 강의를 해 보십시오. 물론 품질을 보증할 수는 없겠지만, 주위에 후배들을 모아놓고 한번 강의해 보십시오. 그때 여러분들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읽고 스치고 지나가면 그다음에는 여러분들이 칸딘스키라는 사람을 만나거나, 아니면 저니 음악을 듣거나, 아니면 닐스 보어의 건축 작품들을 보거나, 라고 할 때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 들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자기 세계를 구축해 가는 것입니다. “원전으로 들어가라.” 한글로 된 원서로, 원 저자의 글을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저자를 깊이 파라. 그때 내가 10년 전에 이야기하였을 때 누구 한 사람이라도 따라 해서 에드워즈를 10년 동안 읽었으면 지금은 나머지 이 동료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위치에 있었을 것입니다. 보통 지루한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퇴계 이황이 마지막으로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서신 속에 있는 글입니다. “학문의 정진하며 도리를 깨우치는 이 기쁨은 돼지고기가 우리에게 좋은 그 맛있음과 비교도 할 수 없다네.” 얼마나 가난한 시절이었으면 돼지고기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였겠습니까. 드문 일이니까, 아주 특별한 날에나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을 자신이 느껴야 합니다. 그러므로 즐겁지 않은 사람은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즐거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기도 많이 하면서 자신이 터득한 학문과 지식이 묵상을 통해서, 사색을 통해서 용해되고 자기의 일부가 되어서 설교 속으로 흘러나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까지는 이 안에서 진리와 함께 죽고 사는 ‘메디타치오(meditatio)’ ‘텐타치오(tentatio)’ ‘오라치오(oratio)’ 그 모든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이렇게 온 힘을 다해 말해도 따라 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아마 20년 후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음 세대에 제가 떠나고 나서 20년 후의 목회는 오늘날의 코로나 사태로 인한 구조조정 같은 상황이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없어질 것이라 봅니다. 굉장히 많은 수의 교회가 말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탄탄하게 살아남을 두 종류의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인들의 현실적이고 심리적이고 치유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 그 교회가 복음적인 교회가 될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필요, 수요가 있기 때문에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어떤 교회가 살아남는가 하면 웅장한 사상을 설교하는 교회가 살아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 파편주의로 찢어지고 나면 마지막에는 너무너무 불안해서 다시 통합하고 싶어 하는 것이 역사의 순리입니다. 그래서 너무 재미있는 것이 미셀 푸코, 자크 데리다 같은 해체주의자들이 즐겨 읽었던 책, 그리고 저서 속에 해체주의를 말하면서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는 저자가 통합주의자 어거스틴입니다. 나중에 확인해 보십시오. 너무 재미있습니다. 미셀 푸코에게도 어거스틴은 대단한 서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공부를 하십시오. 자꾸 묻지만 말고 하십시오. 10년 전에 하고 있던 질문 계속 반복되고 있지 않습니까. 자,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