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그 빛’과 착한 행실
녹취자 : 김세나
질문1) 본 장을 통한 윤리에 관한 설명들은 ‘윤리의 원리’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신구약 성경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착한 행실(기독교적인 미덕)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1) 기독교의 포괄적인 질문이긴 한데, 기독교 윤리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비록 라틴어 원문은 아니지만, 한글로 읽어 드릴 테니 들어보십시오. 「De Trinitate」14권 14장 20절입니다. 「삼위일체론」의 한 구절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두 구절이 적합한 것이 있어서 읽겠습니다.
첫째, 「삼위일체론」14권 14장 20절입니다. “그리고 지성이 하나님의 본성에 행복하게 합치할 때, 지성에게 보이는 모든 것은 불변하듯이 보일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사물은 불변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물이 변하는데, 그 변하는 사물 속에서 그것들을 나게 하시고 변하고 흘러가게 하시고 그러면서도 그것들을 갖고 계시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쉽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예수 믿고 은혜 받기 전에는 등산 가면 삼겹살 구워 먹기 좋은 곳만 찾았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나면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나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는 사람이 삼겹살을 안 먹는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 깊은 감동과 감화를 느낍니다. 그것이 바로, “지성이 하나님의 본성이 행복하게 합치할 때 지성에게 보이는 모든 것은 불변하는 듯 보일 것이다. 그리하여 성경이 약속하듯 지성의 소망은 온갖 선으로 그것도 불변하는 선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를 안 믿어도 온갖 선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악을 행하며 살아야 하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 근거는 모릅니다. 그래서 그것은 불변하는 선이 아닙니다. “불변하는 선으로 채워질 것이다. 삼위일체로 자기 하나님으로 채워질 것이다. 지성은 바로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상이다.”
더 감동적인 것이 4권 21장 31절에 나오는데 들어보십시오. 설명을 안 하고 쭉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하나님 때문에 그분 전체가 하나님이라고 해야 하고, 사람 때문에 그분 전체가 사람이라고 해야 합니다. 만일 이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거든 점차적으로 죄를 삼가며 선을 행하고 거룩한 의욕을 품고 탄식하면서 기도함으로써 자기 신앙으로 지성을 깨끗하게 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정진하는 가운데 이 말을 이해하기에 이르고, 사랑하기에 이르게 될 것이다.”
앞의 말을 보자면, 결국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다른 곳에서 어거스틴이 뭘 이야기 했는가 하면, “그렇게 자기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자마자 그의 눈앞에는 이웃이 제시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거기에 형제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 안에 하나님 말고 누가 계시겠습니까? 이러한 말로 기독교 윤리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염려에 관하여>에서 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와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이다.” 의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풀은 바 있었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까, 어거스틴이 아주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굉장히 아름답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사람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구분된다. 정의에 관하여 말하자면 종종 사람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의가 하나님의 정의로 이해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ivstitia’라고 하는 ‘정의’가 뭐냐 하면, ‘의’입니다. 사람을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그 ‘의’도 ‘하나님의 ivstitia, 정의’ 속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이해 못 하면, 점차적으로 죄를 삼가면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한다면 이해하기에 이르게 될 뿐 아니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왜 반응이 없습니까?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Amare Deum.” 하나님을 사랑함뿐만 아니라 “Amare Deo.” 탈격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 이 두 가지가 같이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기독교 윤리’라고 이야기하면 굉장히 수비적입니다. 감옥에 안 가고, 술 안 먹고, 담배 안 피우고, 뭐도 안 하고, 뭐도 안 하고…. 윤리를 이렇게 생각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래서 하지 않는 것에서 윤리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하겠지만,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이 말씀을 가지고 이 책을 썼지 않습니까. 책을 쓰다가 멈춘 것이 있는데,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이라고 책을 썼는데, 사실은 그 앞에 ‘소금’에 대해서 먼저 나옵니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요”라는 게 나오고, 그다음에 “빛”에 대하여 나옵니다. 그래서 ‘소금’에 대하여 우리는 그냥 당연히 ‘썩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배워 왔습니다. 그래서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실제로 조사를 해 보니까, 교부들 속에서는 그것을 방부제라고 본 사람보다 다른 방식으로 본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성경에 ‘소금’이 나오는데, 부패 방지용으로는 안 나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그 이야기를 제가 웨스트민스터 갔을 때 학자들과 이야기 하는데 굉장히 놀라워하였습니다. 우선 성경에서 소금을 방부제로 이해하는 것은 나오지 않습니다. 소금이 구약에서는 “소금 언약이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결국 뭐냐 하면, 변하지 않는 ‘불변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이 되고, 신약에서는 소금이 뭘로 나오는가 하면, “소금을 치듯 고르게 하라.”고 나오는데, ‘고르게 하다’는 뜻은 영어로 ‘season’ 입니다. 음식의 맛을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부들이, 교부들의 해석이 중요합니다. 쭉 들어보니까, 결국 뭐냐 하면 ‘맛을 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침에 이렇게 모였습니다. 아침에 밤늦게까지 기도회를 하고 피곤에 쩔어서 다 왔습니다. 다 패잔병처럼 ‘오늘은 담임 목사님에게 무슨 꾸지람을 들을까?’ 우울하게 있는데, 한 사람이, 지연 전도사가 바구니에 파리바게뜨 맛있고 따끈따끈한 방금 막 구운 빵을 뒤에 전요셉 강도사가 우유 한 통까지 들고 따라 들어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서 이제 “제가 너무 늦게 들어왔는데 귀엽게 봐주시고 감사해서 제가 기도하다가 사왔습니다.” 하나씩 나눠주는 순간 기분이 막 업됩니다. 그게 바로 ‘시즈닝’입니다.
“소금으로 맛을 고르게 하듯이 하라” 그것은 음식에, 주기도문에서 ‘미식학’을 이야기하면서 책에서 이야기 한 것이 있습니다. 소금이 여태껏 우리가 쓴, 신, 짠, 단, 이라고 배웠고 혓바닥을 만들어 놓고, 위에부터 ‘쓴’, 양쪽에 ‘신’, 그다음에 중간에 ‘짠’, 앞에 ‘단’이라 생물 시간에 배웠습니다. 지금은 그 학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부위별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보고, 그다음에 쓴, 신, 짠, 단 이외에 맛을 결정하는 중요한 제5의 맛을 발견하였는데, 그게 바로 ‘기름 맛’이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다섯 가지가 조화를 이루면서 형언할 수 없는 맛들을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쓴맛, 신맛, 단맛, 기름 맛, 이렇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진짜 쓴 맛을 더 쓰게, 신맛을 진짜 시게, 단맛을 진짜 달게, 기름 맛을 진짜 고소하게 만들어주는 factor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게 바로 딱 맞는 간입니다. 소금기입니다. 어디에서 발견하였는가 하면, 지금은 제가 안 먹는데 예전에는 전지우유를 잘 먹었습니다. fresh 우유, 가공하지 않고 짠 우유, 그것을 그냥 먹어보고, 그다음에 티스푼 한 1/2정도 소금을 넣어서 먹어 보십시오. 전 자의 것은 맛이 없는데, 후자는 너무 고소해서 입에 착착 붙습니다. 그래서 항상 소금을 타서 먹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안에 있는 기름 맛을 상승시켜 주는 효과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윤리는 무엇을 안 하는 것을 이야기하기보다, 그것보다 더 쉽게 이야기해서 세속적인 표현을 쓰면, 기독교 윤리의 궁극적인 것은 “사람들을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살 맛’이 나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윤리입니다. 무엇을 안 하는 것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과 함께 그 위에 더 보태어서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소망과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러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에게도 똑같은 윤리가 해당된다고 봅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말씀합니다. “애쓰고 수고하고 자칭 사도라고 하는데 아닌 자들을 분별하는 것과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긴 것을 아노라.”라고 말씀하면서, “그러나 너희들을 책망할 것이 있는데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결국 아무리 삶이 윤리적이더라도, 윤리는 어떤 면에서 사실은 그 자체가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다음에 하나님 때문에 모든 사람을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그렇게 무한하게 사랑하는 것이 윤리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면 무엇을 안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내들이 제일 짜증내는 것이 그것 아니겠습니까. “돈을 가져다 썼어? 아니면 술을 마셨어? 바람을 피웠어?” 짜증내 합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기에게 잘해줘야 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착한 행실”을 기독교적인 미덕은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하나님 사랑 안에서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답이 됩니까?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질문2) 동굴의 비유에서는 동굴 안에 있던 사람이 동굴 밖에서 참된 세계를 경험하습니다. 그러나 동굴 밖에서 경험되었다고 하는 참된 세계가 또 다른 동굴의 세계일 수도 있고, 여전히 동굴 안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동굴 밖의 세계가 참된 세계라는 것은 동굴 안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성적으로 변증해 낼 수 있을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2) “동굴 밖에서 경험되었다고 하는 세계가 또 다른 동굴의 세계일 수도 있다.” 그러면 무슨 ‘다중 우주론’처럼 발견된 진리는 또 밖에 있고, 밖에 있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플라톤이 저 이야기를 하였을 때 맥락은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사물들이 우리 눈앞에 현전하고 있는 사물들과 씨름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어떠한 질서를 가지고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알 수 없으니, 먼저 정신이 상승해서 일자를 알고, 일자 안에서 모든 세계가 결국 일자 안에서 질서정연하게 태어났고, 배열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 질문을 이야기하자면, 일자 밖에 또 일자가 있고, 그 일자가 혹시 최종적인 일자가 아니라 최종적인 것에 종속되어 있는 일자일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알고 보면 그 위에 있는 큰 하나님의 꼬봉이 아닐까요?” 그렇게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것은 끝이 안 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알고 보니까,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더 큰 신에 의해서 창조된 작은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면, 그 개념 자체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중간에 있는 것은 말장난이고, ‘동굴 밖에 있는 세계’는 저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모상의 세계’와 ‘실제의 세계’를 대비하는 것인데, 우리가 현실과 이상을 이야기할 때, 이상도 또 다른 의미에서 또 다른 이상에서 보면 현실이지 않는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말장난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동굴 밖의 세계가 어떻게 참된 세계라고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변증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그리고 있는 그 사람의 운명이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결국 그 사람이 가서 보고 와서 ‘아나바시스’라고 하는데 아나바인에서 나오는 희랍어, 그래서 올라가서 봅니다. 그 실제의 세계를 보고 거기에서 살면 너무 좋을 텐데 절대 거기에서 살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형의 세계 속에서 어리석게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아픔을 느끼면서 카타바시스, 동굴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보고 온 것을 증언합니다. 거기에서 그의 증언이 싫어서 사람들이 그를 죽이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뭘 보여주는가 하면, 사람의 이성으로 설득을 해서 초월적인 세계를 보여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복음을 열심히 전하고 설교하지만,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되는 것은 결국 사람의 재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성령의 큰 능력으로 초월적인 세계에 대해서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눈을 뜨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 3번 하겠습니다.
질문3) 현대의 사람들 안에 스며든 ‘사상적인 무신론’과 근대의 두 가지 무신론(‘증거론적 무신론’, ‘협의론적 무신론’)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3) 책에 나오는 내용이 아닌 것 같은데, 설명을 한번 해 보십시오. ‘증거론적 무신론’이 무엇입니까?
(이성도 목사님 - 자신이 경험적으로 증거할 수 있는 부분을 가지고 설명을 함으로써 자신이 경험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심적으로 신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고, 협의론적 무신론은 오숙녀 전도사님이 이야기해 주겠습니다.)
(오숙녀 전도사님 - 협의론적 무신론은 하나님은 참이시고 하나님은 살아계신다고 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또한 그것이 참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하는 협의론에 근거한 무신론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모순된 증거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저는 ‘협의론적 무신론’이라는 이야기를 잘 못들어 보았습니다. ‘협의’가 좁은 의미의 무신론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서로 의논을 한 무신론이라는 것인지, 한자로 어떻게 됩니까?
(오숙녀 전도사님 –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무신론은 지난 번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리처드 도킨슨이, 영국에 성공회에 학식이 아주 높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코킨 목사가 이야기하였습니다. 모여서 열렬하게 토론을 하였습니다. 마지막에 도킨슨이 결국 졌다고 하면 이상하지만, 인정하였습니다. 주교의 총 공격이 무엇인가 하면, “너의 사상은 신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아니다. 너의 사상은 결국 불가지론, agnosticism이다.” 그리고 이제 논쟁을 한참 하고 나서 마지막에 이제 도킨슨이 인정한 것이, “그렇게 설명한다면 나는 무신론자라기보다는 불가지론자가 맞다.” 그렇게 양보를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무신론은 크게 불가지론, 신이 증명이 안 되는데 어떻게 우리가 신을 믿을 수 있는가 하는 불가지론이 있고, 두 번째는 무신론입니다. 실제로 신이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신론이 있습니다. antitheism입니다. 반신론은 신은 없다, 그러나 신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 신에게 반대한다는 입장입니다. 이와 같이 크게 나누어집니다.
‘증거론적 무신론’이라고 하였는데,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신이 있다고 하는 증거라는 것은 무신론자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처럼, 신이 없다고 하는 증거도 유신론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증거입니다. 그래서 개혁신학에서는 소위 이야기하는 ‘유신논쟁’을 중세시대 때부터 많이 하였습니다. 개혁신학에서는 대단한 것으로 치지 않습니다. 대신 이제 개혁신학자들은 너무 토론의 상황이 말도 안 되게 전개될 때, 급한 불을 끈다는 점에서는 소용이 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유신논쟁’으로 사람들에게 믿음을 갖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비밀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그 정도로 봅니다. 크게 불가지론, 무신론, 반신론.
그런데 그 무신론도, 여러분 안토니 플루 기억합니까? 안토니 플루(Antony Flew). 영국의 무신론자로서 2014년 도인가 죽었는데, 대부였습니다. 무신론에 관한 책을 30여권 남겼습니다. 「나는 왜 무신론자인가?」그것부터 시작해서, 리딩 그룹이었습니다. 책 「주기도문」에 다 썼습니다. 영국의 학자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무신론자들의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그가 죽기 2년 전에 자기의 의견을 폐기하였습니다. “내가 수십 년간 철학자로서 무신론을 지지해 왔는데 엄밀하게 논리가 따라가는 대로 사고하고 사고한 결과, 신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신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나니까 딸이 “아빠, 우리 이제 밥 먹을 때 기도해야 하는 거야?” 물어보더랍니다. “아니다.”고 하였는데, 결국 그 사람이 발견하였다고 한 신이 플라토니즘에서 이야기하는 1차 정도 되는 그런 절대자의 개념이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이 엄청나게 열광하였습니다. 안토니 플루(Antony Flew). 「주기도문」에 상세히 설명하였으니까 나중에 한번 읽어 보십시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질문 4번 하겠습니다.
질문4) 문화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지만, 문화를 형성하는 시대정신의 본질이 죄의 본질이기 때문에 문화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에 의해 정화되어야 할 영역이라고 말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Desiring the Kingdom』의 저자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는 이 시대 기독교 교육의 대안으로 예전훈련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이런 대안이 목사님이 말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의 문화 정화"의 한 방향이 될 수 있을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4)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에 대해서는 평가가 여러 가지 엇갈리고 있는데 저 사람이 쓴 신선한 책 중 하나가 「칼빈주의와 사랑에 빠진 젊은이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는데, 그 책을 읽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공감이 안 되고 그랬습니다. 어쨌든 그것도 한 방법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크기만큼만 밖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욕망할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통치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인데,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를 받으면서 내가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기 때문에 그렇게 못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너무 가슴 아프고 그들이 어찌하든지 참된 행복에 이르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갈망하는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마치 인적이 없는 산에서 피어난 꽃 한 송이가 보는 사람은 없어도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에 그 깊은 산골에 피어있는 의미를 갖게 되는 것처럼, 또한 이 세상도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세상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속에서 이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보여주고, 하나님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복한 사회생활을 해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갈망하는 크기는 결국 자기 안에 하나님을 더 누리려는 갈망의 크기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는 갈망에 있어서, 전투로 말하자면 맨 선봉장에 서 있는 것이 결국 선교입니다. 복음전파. 왜냐하면 복음이 전파되지 않고는 결국 그 사람이 진정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두 가지에 치우치기 쉬운 염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 뒤에 거의 돌보지 않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근본적인 영혼의 변화가 없이도 하나님의 나라를 가꾸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19세기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갖게 되거나, 그것은 양쪽의 위험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낭만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실제로 영적인 전투 속에서 사람들이 영적으로 거듭나 회심하고 변화되고 그들이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끊임없이 옛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변해가면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형성되어 가는” 그 속에서 결국 자신 주변에 있는 사회를 하나님의 뜻대로 펼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욕망은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크기에 비례하게 됩니다.
“예전훈련”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이지연 전도사님 – 예전훈련이 제임스 스미스가 책에서 말하는 시간 맞춰 기도하는 것, 예배에 나와 훈련하는 것 같은 예전적인 훈련을 말합니다.)
그냥 쉽게 이야기해서 경건훈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우진 목사님 – 반복해서 행동하면 그 행동이 이제 영혼과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는 그런 식의 주장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크게 동의는 안 되지만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오우진 목사님 – 저는 카톨릭과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 사람이 좀 오락가락하는 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랴?」그 책을 보면 철학자들이 비판을 많이 합니다. 해체주의와 기독교가 매우 가깝고, 조금만 바꾸면 기독교가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니, 제가 저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저 주장도 일리가 있겠습니다. 계속해서 반복해서 하고, 예를 들어서, 예수 믿는 집안에서 모태신앙으로 자라서 몇 시 되면 항상 기도하고, 몇 시 되면 항상 성경을 읽고 하는 것들이 왜 나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되면 그런 모든 훈련들이 빛을 발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긍정적으로도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화정화’라기 보다는 ‘문화를 변혁’시켜 나가는 것인데 변혁시켜 나가는 것에 한 경건으로서, 한 훈련으로서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 되었습니까? 기타 질문 있으면 하십시오. 이번 과는 대게 쉬웠을 것입니다. 별로 특별히 어려운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번외 추가 질문) (김기훈 목사님 - 동굴의 비유에서 사람이 상승으로 나가게 한 충동하게 만든 그런 …)
번외 질문 답변) 그것을 가지고 철학자들이 논쟁을 많이 합니다. 그것을 교육의 힘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신학자로서 생각이 이제 진리 자체 혹은 진실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는 어거스틴에 의하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자기 안에 있는 것도 아닌데, 신기하게 인간에게는 한 번도 진리를 경험한 적이 없는데 진리가 딱 제시되면, ‘아, 이게 진리이구나!’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하면, 한 번도 연애를 해 본 경험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 엄마 손에서 자라다가 사랑에 빠지는데 그것이 어떻게 사랑인지 알겠습니까.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이 경험에 의해서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닌, 어떤 선험적인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논리적으로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에 빠졌는데 첫 사랑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랑은 첫 사랑에 비춰보면 추측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아니, 그게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그게 사랑인 줄 알겠습니까?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결국 그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경험을 통해서만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인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철학자들은 다양하게 해석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해석합니다. 그렇게 끌었던 이유는 진리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을 그렇게 잡아끌지 않고 왜 한 사람만 뒤로 돌아보게 만들었는가. 뒤로 돌아보았을 뿐 아니라 뒤를 돌아보고, 그다음에는 동굴에서 바깥으로 나가도록 만드는데 그것들이 모두 진리, 혹은 진실이 사람을 잡아당기는 힘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힘으로 나타나지 않고, 특별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가. 그것을 이제 플라톤은 ‘레떼 강의 비유’로 푸는 것입니다. 망각의 강물을 전생에서 이승으로 넘어올 때, 영혼이 레떼의 강을 건너는데 그 물이 망각의 강물입니다. 그 물을 별로 안 먹은 사람들은 옛날의 기억들이 살아있고, 조폭같이 거의 뇌 자체가 그러한 것에 대해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은 벌컥벌컥 들이키는 사람들이라 보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 믿기 전에도 끊임없이 영원과. 허무에 대해서 느낀다고 하는 것은 결국 가치를 염두해둔다고 하는 것이고, 순간을 느낀다는 것은 영원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순간을 순간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계속 그러한 생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죽을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저는 기독교인이 될 수밖에 없는, 그리고 기독교인이 아니면 어떤 종교를 가질 수밖에 없는 성격을 타고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였었습니다. 나는 레떼의 강물을 덜 마신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완강하게, 전혀 영혼에 대한 사유 자체가 촉발되지 않는 사람들은 벌컥벌컥 들이켜 마신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디에 속하는가 잘 생각해 보십시오.
목회자가 이제 너무 벌컥벌컥 많이 들이켜 마신 사람이 목회자가 된 경우에는 상황이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진리의 힘이라고 봅니다. 많은 플라톤 연구가들은 교육의 힘이라고도 해석하기도 하고, 직관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저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어떤 힘이 끌어당긴다 라기 보다는 진리와 진실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강하게 끄는 위대한 힘이라 생각합니다.
번외 추가 질문 이어서) (김기훈 목사님 – 중요했던 이유는 실상 이 사람이, 목사님께서 ‘진리의 힘’이라고 하셨지만 저는 아까 전에 말씀하신 성육신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 사람을 충동하게 했다고 기독교적으로 해석을 하였는데, 이것이 왜 중요했는가 하면 성도 분들이 상승으로 왔다가 하강으로 와서 사람들 사이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도록 윤리의 힘을 줘야 하는데, 설교 안에서 집중해야 할 영역이 하나님의 사랑에 집중을 하고, 이것을 성경의 계시 안에서 보여주는 일들을 할 것인가, 아니면 오늘 현재를 살지 못하고 있는-하강에서 살지 못하고 있는-삶에 대한 대안들을 제시하고, 때로는 이끌고 가기도 해야 하는 목회자가 되어야 할 것인가. 그러한 고민이 생겨서 말씀을 드립니다.)
번외 질문 답변) 쉽게 이야기하면 하강을 하였는데 길을 잃었다고 하였을 때 플라톤과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그것은 제대로 상승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 같은 경우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을 상승이라고 말한다면,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지니라.”하면서 자기를 복음 선교에 내던지는 것을 하강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강에서 길을 잃는다.’ 그리고 ‘왜 사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상승한 적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그러한 문제들을 풀어간 것이 바로 「죄와 은혜의 지배」에서 구체적으로 짚어 보았었습니다. 인간이 결국, 거기에서는 인간의 죄나 이러한 것들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으니까, 영혼에 대한 직관, 일자와의 만남, 거기에서 말미암는 해석, 이런 것들을 다루니까 우리와는 세계관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데 실제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죄는 끊임없이 세상에 대해서 기억하게 만들고, 하나님에 대해서 끊임없이 망각하게 만들고, 은혜는 끊임없이 세상을 알되 탐욕에 눈이 어두워지지 않게끔 만들어주고, 동시에 하나님을 기억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평생 기도가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소서. 이해하게 하소서. 사랑하게 하소서. 이것이 마지막 순간까지 내 안에서 점점 더 자라게 해 주시옵소서.” 이것이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뭐냐 하면, 그게 나중에 이제 「삼위일체론」에서 1부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고, 2부가 자기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인데 거기에서 삼위일체의 대표적인 모형으로 제시하는 것이 기억, 이해, 사랑, 이 세 가지가 삼위일체의 삼각형이 되는 것입니다. 기억은 영혼이고, 그에게 영혼은 지성입니다. 그래서 지성, 그다음에 이해, 혹은 인식이라고 하는데, cognitio인데, 그것이 notitia가 되는데, 그래서 결국 지성이 있고, 성부이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 인식이 지성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것이 이제 인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지성과 인식의 관계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와 같다고 보고, 인식을 욕구하게 만든 것은 결국 기억에서 나오는 것이고, 기억이 없으면 욕구할 수도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욕구하는 것은 역시 지성에서 나오고 인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언젠가 인식한 적이 있으니까 기억이 되었고 욕구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성부와 성자로부터의 성령의 발출이라고 보고 그 삼위일체의 삼각형의 모형이 인간의 지성 안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지성과 인식, 그리고 욕구, 알고자 하는 의지,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삼위일체가 떨어지지 않듯이 지성과 지식, 사랑 이 세 가지는 떨어질 수 없이 삼위일체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사랑할수록 지식을 욕구하게 되고, 지식을 욕구할수록 결국 사랑하게 되고, 지성은 점점 더 말하자면 성장하게 되고, 그 모든 작용들이 지성 안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사랑에 대한 생각은 동굴의 비유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확실히 초월적인 것에 대해서 눈 뜨는, 영적인 개안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 속에서 흐르고 있는 경건의 신비라고 하는 것은 그 눈을 뜬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반응입니다. 결국 인간이 죄라는 연약한 점이 있기 때문에 계속 무지할 수 있으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열심히 보여주는, 그리고 그 설교자를 볼 적마다 자신은 행복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질문 있습니까? 없으면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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