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그 빛의 불변성과 가변성
녹취자 : 김세나
질문1) 본 회퍼의 미친 운전수 비유와 같이 사회적 판단을 내리고 선한 양심의 빛을 따라 항거하는 것과 어거스틴이 악을 통해서도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선은 이루어진다고 말한 것 사이에 충돌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답변1) 맥락이 조금 다릅니다. 우선 본 회퍼의 시대는 나치 독재가 이루어지고 있던 시대이고, 어거스틴의 시대는 이미 기독교 사회라고 할 수 있으니까, 문맥 자체가 조금 다릅니다. 본 회퍼의 사상을 조금 공부해야 이러한 말들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본 회퍼의 사상에서 굉장히 중요한 개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숙한 사회’라는 개념입니다. ‘성숙한 사회’라는 것은 우리가 잘 해서 성숙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맨 처음에 하나님이 인류를 교육하실 때 마치 우리가 유아기적 교육이 다르고 청소년 때 다르고 성인 때에 다른 것처럼 하나님이 인류를 교육하시며 다루심에 있어서 미성숙한 시대가 있었고 성숙한 시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미성숙한 시대는 하나님이 구약에서처럼 불 가운데 나타나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교육하셨다면 지금 신약의 시대는 성숙한 사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모든 사회와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이 커다란 도덕의 원칙을 정하시고는 “너희 스스로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좋은 사회를 건설해 가거라.” 맡기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이 과거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교육하셔서 성숙해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숙한 사회를 다루신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결국 르네상스 때 피렌체에 있었던 피코 델라 미란돌라 군주의 「인간존엄성에 관한 연설」이라고 있습니다. 「Oratio de Hominis Dignitate-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매우 유명한 자료입니다. 두껍지 않으니까 한번 읽어보십시오. 거기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를 살펴보면 이것입니다. “나는 너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아무것도 미리 정해 놓은 것은 없다. 이제 선을 행하든지 악을 행하든지,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가든지 그것은 너 자신에게 달렸노라.”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귀족 출신으로 돈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혼자 살았는데, 각국 모든 철학자를 다 불러들여서 철학에 대해서 자신과 토론하자고 할 정도로, “모든 비용은 내가 다 대마.” 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고 동양과 서양과 철학과 모든 학문에 대해서 탁월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나름대로 자기 세계를 건축한 사람이었습니다. 르네상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인간존엄성에 관한 연설」입니다. 아주 유명한 문헌입니다.
그러한 개념과 비슷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제 저러한 말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이 악을 통해서도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선은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거스틴이 악을 용납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내재적 세계관과 초월적 세계관이 있다고 하면, 우리가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투쟁하고 변화시켜 살아가는 삶과, 이것을 초월해서 우주 위에서 초월적인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사를 내려다보는 세계관이 모두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주에 리처드 니버의 <5가지 세계관의 유형>을 이야기하다가 대체적으로 우리는 ‘문화 변혁’의 사명이 있다고 보지만, 이제 칼빈이나 마르틴 루터가 보여준 것처럼 하나의 세계관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고, 그래서 마르틴 루터과 칼빈과 보는 바와 같이 소위 이야기하는 “Christ above Culture”,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 초월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인생을 관조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똑같이 어거스틴이 “악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선은 이루어진다.”고 했을 때 악을 용인하고 용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초월적인 견지에서 인생을 바라볼 때, 우리의 눈에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 당신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통로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충돌’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이해되십니까? 다음 넘어가겠습니다.
질문2) 현대에는 다양한 성경해석으로 인해 이단이 나타나기도 하고 교단이 나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올바른 성경해석의 기준과 방법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답변2) 저것은 ‘성경 해석학’을 보시면 됩니다. 그다음 3번 하겠습니다.
2번과 관련하여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우리들이 무엇인가에 세뇌되거나 이러지 않고, 성경을 그대로 읽을 때 도달하게 되는 신학적인 견해가 ‘칼빈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재미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박윤선 목사님이 계셨고, 그리고 나중에 백파라고 해서 백영희 목사가 계셨습니다. 이 양반이 원래 ‘술독아’였습니다. ‘술독아’라는 것은 양조장에서 술맛을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말로 표현하면 ‘막걸리 소믈리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막. 소’도 있습니다. 물 소믈리에도 있고 다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맛을 보면 양조장의 술의 질을 판정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서 더 좋은 양조장이 되게끔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성경 이외에는 기독교에서 읽을 것이 없었던 때였습니다. 성경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주위에서 권하여서 전도자로만 살지 말고 신학을 공부하라고 권유해서 그분이 고려신학교를 가게 됩니다. 거기에서 박윤선 박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박윤선 목사에게 성경을 배우고, 무릎을 치면서 말한 것이 뭐냐 하면, “내가 기독교가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을 듣지 못한 채 성경을 읽었을 때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생각했을 그것이, 와서 공부해보니 ‘칼빈주의’더라.” 고 하였습니다. 완전히 일치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존 오웬도 같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몇 권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무엇을 이야기하였는가 하면 “좋은 신앙을 갖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것이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확실하게 입증되지 않는 한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떤 견해들을, 이단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신앙적인 견해가 들어올 때 그것을 면밀히 성경으로 검증해서 성경이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 한 쉽게 덜컥하고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천지에 가는 사람들은 이러한 충고를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는 기독교 사회였지만 수많은 이단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존 오웬이 싸우던 커다란 용 세 마리가 있었는데, 가톨릭과 알미니안주의, 소키누스주의, 이것이었습니다. ‘소키누스주의’는 이미 마르틴 루터 시대 때 나타났던 완전 이성주의적 이단입니다. 이성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은 전부 다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이제 「라코 교리 문답」을 영국에서 전파하고 있었느니, 솔직히 이야기해서 아르미니우스주의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나쁜 형태입니다. 그러한 이단들과 끊임없이 싸우던 사람의 충고이니까 진지하게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그 자체로서, 예수를 처음 믿고 잘 몰라도 성경을 쭉 읽으면 그 성경 안에 통일성과 명료성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커다란 결론들이 결국 ‘칼빈주의’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수많은 말하자면 예리한 가르침을 가지고 이성을 설득하고 들어오면서, 어떤 것들은 올바른 교리들의 경우 성경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는데 그릇된 교리들이 오염되어 들어올 때 성경을 보는 눈들을 비틀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러한 어려움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저 질문은 평범한 질문입니다. 성경해석학 뒤져 보면 문법적, 역사적,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이 쭉 나옵니다. 3번 하겠습니다.
질문3) 현대 미술이라고 무조건 해체주의를 강조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현대 미술 안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 미술을 통해서 느끼는 아름다움이 과거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무작정 받아들이기도 무섭습니다.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현대 미술들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답변3) 현대미술이라고 할 때, “현대미술을 어디에서부터 정할 것인가?” 이것에 대해 합의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고 그렇습니다. 원래 ‘contemporary’라고 하는 것이 ‘동시대의’라는 뜻입니다. ‘con’ ‘tempora’, 시간. ‘같은 시간 안에 있는’ 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보면 결국 자기 살아생전에 있었던 그 시대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현대미술을 가장 좁게 보는 사람들은 이제 20세기 이후에 태동된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그다음에 이제 조금 더 멀리 보는 사람들은 19세기 이후에 미술을 가지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본격적으로 ‘현대미술’이라고 할 때 1900년대로부터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1900년대 일어나는 사조는 핵심적인 것은 ‘아방가르드적’ 사고입니다. ‘전위적’ 사고입니다. ‘전위적’이라는 말은 ‘아방가르드’인데, ‘예전에 있었던 전통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실험적인 예술’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이미 벌써 1900년대 초에 시작됩니다. 그리고 소위 ‘다다이즘’이라고 하는 것이 일어나는데, ‘다다이즘’이 그때 태동되어서 1900년대 초에 1차 세계대전을 겪고, 그 후 2차 세계대전 겪으면서 1, 2차 세계대전이 인간의 생각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술에서 일어난 ‘다다이즘’이 문학, 역사연구, 심지어 복식, 이러한 데까지 나타나게 되고 소위 ‘허무주의’로 나타나게 되고, 한국문학에도 영향을 주는 등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원래 ‘다다이즘’에서 ‘다다’라고 하는 것은 프랑스어로 아이들이 타는 목마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야기해주는 것이 뭐냐 하면, ‘의미 없음의 의미.’ 감이 옵니까? ‘의미 없음의 의미.’ 그런데서 실존주의적인 사고들이 이미 그 이전에 있었고, 그러한 것들도 어느 날 갑자기 태동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쇼펜하우어나 니체나 키에르케고르, 이러한 사람들의 앞선 노력들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아마 책에 나올 것입니다. 프랑스 빵뗀 지역의 ‘라 빌레트 공원’이야기가 나옵니다. 굉장히 충격 아닙니까? 실제로 라 빌레트 공원에 가서 조형물들을 봤는데, 그게 결국 들뢰즈의 작품입니다. 그래서 폴리라고 불리 우는데, ‘폴리’가 ‘어리석은’이라는 뜻입니다. ‘쓸데없는 집’ 이러한 것인데, 38개인가 조형물들을 만들었는데, 크기가 이방 크기 하나만 하기도 하고, 절반만 하기도 하고, 그런데 빨간색입니다. 그것을 38개를 세워놨는데 사람들이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여러 개가 있으니까 어떻게 연결이 될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connection of non-connections’ ‘비연결의 연결.’ 아까 이야기한 것과 같습니다. ‘의미 없음의 연결.’ 서로 무엇인가 찾으려 하는데, 그리고 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가다가 길이 없어집니다. 길이 있는데 길 따라가면 길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도전하는 것입니다. “왜 길로만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왜 길이 있으면 그 길은 어디로 데려간다고 생각하는가?” “이 자체를 누가 규정하는가?” 하나의 항거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해체주의적 사상들이 녹아져 있는 것입니다.
현대미술이 무조건 해체주의를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솔직히 이야기해서, 우리가 현대인이기는 하지만 해체주의를 따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미셸 푸코의 후손은 아니지 않습니까. 해체주의를 따라가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우리는 어떤 사람은 유교적인 가치를 따라 살고, 불교적인 가치를 지니기도 하고, 기독교적인 가치를 지니고 살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박정희 대통령 시대 때의 가치를 붙들고 살기도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오만 사람들이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대미술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무엇을 아름답다고 객관적인 규칙을 정하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사물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폭력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개개인이 어떠한 것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가하는 제재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는 볼 기회도 없지만 상류층들이 보는 여성잡지나 그러한 것들, 상류층 아니더라도 잡지 같은 것을 보면 여성이 모델로 나옵니다. 전혀 예쁘지 않고 무섭습니다. 야수같이 시뻘건 것을 바르고 나오고 그러한 것들이 광고 나오는 것을 보면서, ‘아니, 이러한 것들이 선전이 될까?’ 생각합니다. 예쁘장하게 한다든지 그래야 하는데 왜 그럴까 생각해 보면, 저러한 것에 그러한 정신들이 많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이제까지 생각했던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모델 같은 사람을 보면 약간 무서운 인상 나지 않습니까? 외국 모델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한 것들도 저러한 면들이 많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칸딘스키 이야기도 나오고, 야수파 이야기도 나오고, 야수파에서 큐비즘으로 넘어가고 큐비즘으로 넘어가는 가운데 나오는 중요한 인물이 바로 여러분들이 잘 아는 피카소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현대미술이 그러한 것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까지 가지고 왔었던 ‘미’의 기준이라든지, 전통적인 가치기준에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똑같은 정신이 도덕에도 적용이 되어서, 그러면 우리가 어떤 사물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자연적인 아름다움이고, 자연적인 아름다움이 도덕적 아름다움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이 책 전체에서 이야기 하고있는 것입니다.
저러한 정신에 대해 왜 우리가 심각하게 보는가 하면, 저러한 정신이 결국 윤리나 도덕이나 철학에 적용될 때, 생각해 보면 이러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무엇이 도덕이다.’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이 왜 우리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지도록 강요받아야 되는가?” “윤리는 무엇인가? 도덕은 무엇인가? 그것은 누가 규정을 하는가?” 그리고 “우리의 좋음과 도덕 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때, 왜 우리는 도덕법칙을 따라야 하는가?”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전반적인 회의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굉장히 많은 분야에 걸쳐 기준들이 무너진 것들이 막 나왔습니다. 철학뿐만 아니라 심지어 도시미학에서 나오고, 그래서 건물 같은 것들을 보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건물이고, 반듯하게 서야 하는데 삼각형 모양으로 서 있고, 이러한 것들입니다. 그러한 것은 구조 때문에 건축하는데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갑니다. 그러한 실험적인 건물들이 수없이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러한 건물들이 굉장히 많이 들어서 있는 곳이 네덜란드입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가보면 이해할 수 없는 건물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다음에 베이징에도 그러한 건물들이 많습니다. 도시미학 뿐만 아니라 역사이해라든지 모든 것에서 말하자면,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절대적인 규범들을 부인하는 운동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고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 중 하나가 ‘상대성 이론’입니다. 상대성이론이 발달하게 되면서 이제 쉽게 이야기하면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이 있습니다. 특수상대성이론은 빛보다 빠르게 지나가는 물체에 있어서는 시간이 늦게 흐른다. 그래서 실제 아주 시간에 대한 정교한 측정기를 가지고 그 시간을 2천 미터 산꼭대기에 측정기를 올려놓고 땅에다 놓으면 측정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시계 자체도 비행기를 타고 초음속으로 날아갈 때와 땅에서 걸어갈 때와의 시계가 다른 것입니다. 그것 실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주 미세한 차이이지만, 장소에 따라서 차이가 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특수상대성이론입니다. 다음 일반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이 이제 서로 따로따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뉴턴도 몰랐던 것입니다. 뉴턴은 자신이 「프린키피아」에서 설명한 그것이 어느 시간과 공간에서 다 통용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였던 사람이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천재였습니다. 그 사람이 학교를 졸업하고 보험회사에 취직하였는데, 보험회사에 들어가서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세계과학계를 뒤흔들어 놓는 5편의 논문을 1년에 완성합니다. 그리고 노벨상을 탔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사역하기 때문에 공부를 못 한다고 그런 소리 하면 안 됩니다. 관양동도 못 흔들어 놓는 논문도 못 쓰는데 우리가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하면서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이 묶여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이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는 엄청난 결과들을 가져옵니다. 그다음에 이제 영국의 과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가 발견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블랙홀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블랙홀 속에 빨려 들어가는 어마어마한 힘과 이러한 것들, 그것이 중국에서 이야기하는 장 윈거가 이야기하는 ‘무무사상’아십니까? ‘무무.’(메이요 메이요)이것은 ‘무는 무가 아니다.’ 이것을 영어로 표현한다면, ‘Nothing is not nothing.’ 이것이 결국 무엇인가 하면, ‘ex nihilo’입니다. ‘없는 것으로부터’ ‘무로부터’ ‘Creatio ex nihilo’하면 ‘무로부터의 창조’입니다. 이것은 이제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은 있었지만, 저는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재밌는 것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무’는 ‘유’를 낳을 수 없습니다. 없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nihilo’라고 적혀 있지만, 기준 자체가 사람이 서서 이쪽 A라는 기준을 B를 판단하니까 ‘nihilo’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까? 여기에서 세계, 달, 지구, 별 등 오만 잡동사니가 태어납니다. 이러한 것을 ‘유’라고 보고 이 개념을 가지고 그 전을 보니까 ‘nihilo’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숨메에스’입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있음 자체’이신 최고의, 그래서 하나님을 ‘최고유’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있음’으로부터 있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있음은 완전한 있음이고, 이 있음은 불완전한 있음이기 때문에 오히려 완전하게 있는 것으로부터 덜 있는 것이 나오는 것이지, 무로부터 무가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점에서 장 윈거의 ‘무무사상’은 우리에게 시사를 하는 바가 많습니다. 그래서 동북아철학에서도 ‘무’라고 하는 것은 끝없는 potentiality입니다. 잠재적 가능성, possibility. 그래서 ‘무’라고 할 때 뭐든지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것이 ‘무’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들이 마음을 다 비우고 마음이 ‘무’로 돌아간다고 할 때, 그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가능성을 가진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비움으로써 그 마음은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을 갖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성경과 많이 통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렇게 되는 이야기들이 3장에 쭉 썼습니다. 제가 3장을 제일 신나게 썼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면 더 다양한 분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더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것만 해도 사실은 머리가 뻑뻑할 정도로 어렵습니다. 수학에서도 이제 소위 이야기하는 전통적인 수학에 대해서 도전하는 이론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수학직관주의’라고 하는 것이 나오는데 부라우워라고 하는 사람에 의해서 제기가 되었는데, 전통적인 수학의 규칙들 중 상당히 깨질 수 없었던 것들을 부인하면서 수학직관주의에 대해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박사논문을 썼을 때 교수가 집어던지면서 이것을 논문이라고 썼냐는 소리를 들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브라우워의 직관주의를 굉장히 많이 받아들입니다. 그런 식으로 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현대주의를 해체주의로 바라보아야 하는가?”라고 하였는데 우리 이러한 것 같습니다. 뭐냐 하면 오히려 우리들이 이러한 시도들을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우는데, 하나는 ‘아, 이런 식으로도 생각할 수 있구나.’를 배웁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오히려 전통적으로 붙들고 있었던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가치들이 훨씬 더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때 우리는 폭넓고 더욱 확고한 자신이 지지해온 가치에 대한 신념을 갖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을 남이 보고, 남이 본 그것을 우리가 보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을 다시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우리가 설득되어서 관점만 잃어버리지 않고 우리 관점을 유지한다면 우리의 관점을 훨씬 깊이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오히려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들도 결국 보면 저런 해체주의에 대해서 보면서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을 우리들이 읽어내고, 그리고 그 속에서 저런 시도들이 우리에게 없었더라면 우리들이 차마 보지 못하였을, 우리가 미처 못 본 아름다움까지도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그런 훌륭한 도구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해체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들은 훨씬 더 통합주의적인 사고들을 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라는 것들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들이 있을 때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만을 가지고 인생 전체를 살 수 없습니다. 아니라고 한다면, 그다음에 자기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만들어 가야 하는데, 그러한 점에서 한편으로는 통합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해체’는 통합을 위한 작용이 되는 것이고, 해체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해체’는 해체의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 하겠습니다.
질문4) 사상의 도전은 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성도는 문화 속에 스며들어 있는 사상을 분별하고 통합적인 사고로 바라보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있는데, 목사님께서는 이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대안이 될 수 없다면 어떻게 분별해야 좋을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4) 우리들이 생각을 깊이 해야 하는데 무슨 세계관을 운동한다고 세계관이 형성되겠습니까. 실제적으로 강영안 박사와 나누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결국 세계관 운동이라고 하는 것을 하지만, 누가 세계관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겠으며, 학회를 한다고 해도 그저 한 40-50명 모여 앉아서 자기네들끼리 하는 것이지,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또 예를 들어서 저러한 세계관 운동을 통해서 누군가의 세계관을 배웠다고 칩시다. 그것이 자기 것입니까? 말한 사람의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강연안 교수도 똑같이 이야기한 것이, 본인도 저러한 운동에 대해서 한계를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은 제일 먼저 부모를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 자연, 역사,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보는지 어려서부터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훌륭한 세계관 아니겠습니까. 태어났는데 예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먹을 것을 가져다주면서, “이거 누가 주셨지?” “하나님이 주셨어요.” “아빠가 돈 벌어 왔지만, 엄마가 만들었고, 그 모든 것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알려주는 것입니다. 훌륭한 세계관입니다. 이 아이는 자라면서 계속해서 무엇이 주어질 때, ‘아, 이것은 인간이 노력해서 주어진 것이지만 결국 하나님이 그것을 주셨기 때문에 인간인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 바로 훌륭한 세계관인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으면서 세계관을 배우게 되고, 부분적으로 친구들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 받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세계관이라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을 가르쳐 주는 것 자체가 관점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여러분들에게 강조한 그것이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라고 하는 책입니다. 사람들은 그 책을 가볍게 볼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저런 이야기들이 그 속에 다 들어가 있다고 봅니다.
통합적인 사고를 바라보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제일 큰 문제가 바로 부모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그렇게 길렀기 때문이고, 두 번째 문제는 학교입니다. 또 한 문제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에 와서라도 목사가 하는 설교를 쭉 들으면 저 설교가 하나의 통일된 사상과 관점 속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라고 하는 것은 결국 관점의 수정입니다. 그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자신의 잘못과 비극적인 결과에 대해서 후회하고, 다시 그리스도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결국 ‘메타노이아(metanoia)’에서도 설명하였지만 ‘회개’는 우리의 탐욕과 더러움을 씻어내면서 올바른 관점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결국 회개한 사람의 지성은 명료합니다. 그래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통일적으로 설교를 꾸준히 한 관점으로 해야 하는데 목사가 그것이 형성이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굉장히 설교가 파편적이고 윤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파편적이고, 윤리적이거나 아니면 현실 적응적이거나 인본주의적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어떤 일정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본인이 정리가 안 된 것 입니다. 우리는 설교문을 한번 탁 보면 압니다. 여러 개 볼 필요도 없습니다. 몇 편만 보면 이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정리가 되어 있어서 통일된 생각으로 이것을 쏟아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세계관 운동이 대안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가서 기독교세계관을 ‘아, 이렇게 세계를 보는구나.’하고 배워왔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동일한 관점으로. 그래서 세계관이라는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알았습니까? 그런데도 제가 지난번에도 이야기하였지만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를 한번 보십시오. 그러면 오늘 내가 이렇게 내 방에 좌정하고 앉아서 「사서삼경」을 읽고 공부하는데, 그게 이제 우주, 국가, 가정, 자기 자신, 모든 것이 다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지성과 어떠한 감정, 어떠한 의지를 가지고 공부해야 하는가. 결국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 결국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인 그러한 형태의 공부를 하는 것인데, 신학이 꼭 그런 공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 공부, 나는 이렇게 해왔다」에서 그것 가지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조선시대의 선비와 비교했던 이유가 조선시대의 선비가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간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신학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통합적인 자신의 삶 전체를 얹어놓는 공부의 방식이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공부하였던 모범과 상당히 유사점이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선비와의 연관되는 학문들이 대게 개혁주의적 권내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자유주의적 권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오해를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4번 문제에 대해서 결론을 내면, 여러분 자신이 통일적인 사상을 가지고, 그다음에 설교하고 살아가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습니다. 어쨌든 여러분들이 그 책을 읽을 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것을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내 관점에서 해석하면서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내 책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겠습니다. 그런 사람 중 하나가 프란시스 쉐퍼입니다. 프란시스 쉐퍼의 책을 읽을 때, 여러분들이 제일 충격 받았던 장면 중 하나가 문화를 겹겹이 수많은 것들을 해석해 내면서 개혁주의적인 관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이제 쉐퍼가 언급하는 미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많은 구멍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많은 구멍이 보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비평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나 그것을 종합하면서 비평하면서 어느 관점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역할과 철학 하나, 미술 하나를 공부하면서 가지고 있는 관점 사이에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각기 역할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제가 조금 전에 칸딘스키를 이야기하였는데 칸딘스키가 어떤 사람인지 보면서 해석을 해서 문화사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나옵니다. 칸딘스키 하나를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공부하는 사람과 정보의 양에 있어서 겨룰 수도 없겠지만, 그러나 그것을 가리켜서 우열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뭐냐 하면 칸딘스키 하나만 공부한 사람은 칸딘스키만을 알 뿐입니다. 칸딘스키 밖에 있는 그러한 엄청난 예술서적의 조류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학과 어떻게 엮여졌는지, 철학과 어떻게 엮여졌는지, 그것을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짜 문명을 비평하고, 통합적인 학문이 몸에 베인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가지고 기죽을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무시할 이유도 없고, 각기 다른 영역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를 전공한다고 해서 그 안에서 다른 모든 것들을 엮어낼 수 있는 사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야수파의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다고 할 때 그 그림을 그리면서 철학적인 깊은 의미를 알면서 하였겠습니까? 한때 히피들이 유행하였지만 히피들이 그 생활이 좋은 것이지, 무슨 철학사적으로 의미가 있었는지에 대해 그러한 것들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즘에는 무슨 바지가 유행하는지 모르겠는데, 예를 들어 나팔바지가 유행한다고 할 때 그 속에 무슨 철학이 담겨 있는지 생각합니까? 아니면 머리를 노란색으로 염색하고 다닌다고 할 때 자기가 그것을 좋아서 하는 것이지, 무슨 어떤 철학이 있는지까지 생각하면서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우리들이 어떤 한 분야를 전공하는 것과 전체적인 것을 통합하는 것 사이에는 그러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 모든 지식들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보아야 합니다. 아까 이야기하였듯이 내가 이 책의 3장을 쓴 것은 이 책을 써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처음 이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돌아다니고 있던 수많은 생각을 자료를 다시 찾았을 뿐입니다. 사고의 훈련이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것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보면서 그러한 것들을 비평하고, 그다음에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을 비평하고, 결국 자기 사상으로 만들어 가면서 항거할 것은 항거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시대를 본받지 않는 삶입니다. 자기 주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많은 사람이 팔아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많이 팔아주지도 않았지만, 아주 안 팔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제 엄청난 이해에서. 모르겠습니다. 모든 책을 다 읽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기독교권 내에서 이런 식으로 다양한 문화와 모든 것들을 통합하면서 진짜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준 책은 최근에 나온 책 중에서 그렇게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읽다가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은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가고, 그리고 이제 호불호가 갈립니다. 정신이 정글 속에 들어간 것처럼 정신이 없다고 하면서 이 책을 내려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 책을 세 번을 던졌다고 하였습니다. 어려워서. 마지막 끝까지 읽고 변화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그렇습니다. 한번 여러분들에게 그런 눈을 열어주는, 이러한 식으로 사유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저는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내려 주시고 저희들이 이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 수 있을지 이해할 수 있도록 저희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