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으로 기도하게 하라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빌 1:4-5)
녹취자: 조은경
로마에 갔을 때 사도바울이 갇혔었다고 전해지는 감옥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 위에는 그 후에 교회가 세워졌고 지하였는데 내려가 보니까 정말 작은 방. 한 세평정도 되는 아주 작은 방이 잘 지은 그런 방이 아니라 굴같이 생긴 곳이 있었고 커다란 창살이 있고 그 개구멍으로 지하에서 바깥으로 나는 햇빛이 들어오는 구멍이 있었습니다. 누구는 옛날 일이니까 거기가 거기였다고 믿고 싶지만 워낙 신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이제 뭐 70% 믿어지고 30%는 안 믿어졌는데 어쨌든 거기에서 사도바울이 아마도 빌립보서를 썼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는 대개 대부분의 교회들이 문제가 있어서 편지를 썼는데 이 빌립보 교회는 교회에 문제가 있어서 이 편지를 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는 목회자로서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3절에서 말하는 것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
(예화) 우리들이 어떤 사람들에게 머리를 깊이 숙여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하는 적이 언제입니까? 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인가 커다란 도움을 주어서 그것이 물질적으로든지 아니면 정신적으로든지 뭔가 나에게 도움을 주어서 내 인생 살아가는데 큰 보탬이 되었거나 지금도 그렇게 되고 있을 때에 우리는 그런 표현을 합니다.
이 사람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는 나중에 따지고 빌립보 교회 교인들의 목회자인 사도바울이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목회사역의 복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감사할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사역을 해 나가면서 교인들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 목회자의 마음에 감사가 생겨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40년 전 전기 서신을 읽어보게 되면, 두 권이나 두꺼운 책을 썼는데 거기에 보면 첫 목회지에서 웨스트민스터 채플로 옮겨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렇게 냉랭한 가운데 1년이 넘도록 목회를 하십니다. 그때 로이드 존슨 목사님이 어느 성도에게 보낸 편지 하나를 공개를 했습니다. 이제 목사님한테 편지를 받은 교인들을 다 수소문해서 사본들을 입수해서 썼을 것입니다. 그때 이제 그 내용 중에 감동이 되었던 것은 그렇게 냉랭한 가운데 1년을 목회를 하는데 와서 갈등도 있었지만 스포츠 모임 다 없애고 그러니까 그런 와중에서 한 가정이 목사님 설교를 듣고 깊이 회심하고 한 가정만 회심했다기보다는 어쨌든 그중에 한 사람이 깊이 회심하고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열렬히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로이드 목사님을 경외하는 편지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외롭고 힘든 날에 그 가정을 통해서 얼마나 위로를 받았는지를 고백하는 내용을 읽으면서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목회자가 여러분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근심거리와 짐이 되지 말고 정말 감사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마 하나님께도 사랑을 받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는 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를 했는데 기쁨으로 간구를 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제 목회자니까 기도를 합니다.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하면 근심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없고 기쁨으로 기도할 수 있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혼이 위험한 상태에 있고 마음이 부패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동기가 올바르지 않고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는 하는데 늘 마음에 근심이 ‘어떻게 할까?’ 그것도 우리가 해야 될 일입니다.
(예화) 왜냐하면 교회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몸과 같아서 우리는 늘 건강하고 활기차기를 원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지금 이렇게 보면 눈이 새빨갛게 충혈 돼 있습니다. 밤늦게까지 논문을 썼더니... 이렇게 자기의 몸에서 사지백체 중에 어느 한곳이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약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속 지속적으로 그런 것을 가르쳐주면 우린 고질병이라고 그럽니다. 온몸의 지체가 돌아가면서 손이 아팠다가 발이 아팠다 무릎이 쑤셨다 옆구리가 저렸다 그러면서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돌아가면서 당번처럼 아픕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 몸을 사랑합니다.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는 목회자가 여러분을 생각할 때 기쁨으로 기도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이 이렇게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기도할 때마다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간구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할 수 있었던 이유가 5절에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랬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얼핏 보면 복음의 사역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뒤편을 보면 그렇게 사도바울이 궁핍하고 어려웠을 때 물질적으로 끝까지 도왔던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그것도 물론 사실이지만 그것과 함께 사도바울이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복음을 위한 일에 이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해주었던 그들 안에 있는 복음 신앙. 무슨 뜻이냐면 고린도교회 같은 경우 그 복음의 감격이 식으면서 은사는 있으나 사랑이 사라지고 지식은 있으나 그 지식 때문에 서로 다투고 하는 문제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사랑 가운데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복음사역을 위해 헌신하는 동기가 자기 안에 있는 복음의 기쁨 때문에 그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름다운 성품이었을지 한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일을 하면 일을 합니다. 누군들 안 그렇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복음에 대한 감격이 그 사람 안에 있을 때 그 사람의 복음을 위한 헌신이 진정한 헌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다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지고 비 복음적으로 싸웁니다. 그러면 그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화) 옛날에 피종진 목사님이 우리교회 와서 무슨 일 때문에 우리교회에서 설교를 하셨는데 어느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서 자기가 중재를 했는데 그래도 계속 싸운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것이냐 말 것이냐 한 주간 동안 회의를 하다가 두 시간 넘게 회의를 하다가 돕기로 결정을 하고 자세한 사항은 다음 주에 의논하기로 하고 도와주러 갈 때 떡을 해주자라고 했는데 송편으로 할지 팥떡으로 할지를 가지고 두 시간동안 논쟁을 했다고 합니다. 기이한 겁니다.
복음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셔서 죽으시고 우리가 구속함을 받은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감화를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를 낮추고 자기는 낮아지고 죽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사는 적용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그런 정신으로 복음 사역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도바울의 마음에 항상 이 사람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했고 간구할 때마다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정말 하나님 앞에 복 받은 교회는 일꾼들이 은혜를 받은 교회입니다.
(예화) 지금은 그 정도 까진 아니지 않을까? 한 십여 년 전에 청년들이 이 말을 들으면 말 같지도 않다고 그럴지도 모르지만 제가 이렇게 여러 경로를 통해서 들은 거로는 전문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거나 아주 일류대학교를 나와서 안정된 직장이 확보된 사람들이 아니면 한때 대학을 졸업한 자매들의 로망이 열린 교회에서 간사 한 번 해보는 것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게 여기도 그때 들어온 사람들이 아직도 있지만 진짜 직원들한테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사례비도 적었고. 지금도 물론 많지 않지만 그때는 정말 그랬습니다. 그때는 뭐 그래도 제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들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나도 그랬으니까 생활비를 받아도 집에 생활이 안됐습니다. 제가 항상 집에다가 돈을 보태줬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로망이었냐면 그때의 몇 명의 간사들 때문이었습니다. 자매가 간사로 임명이 되서 그렇게 얼굴이 활짝 피면서 그러니까 굳이 걔가 뭘 이야기를 안 해도 이렇게 보면서 “정말 그렇게 기쁘니?” 사실 어떻게 보면 그게 존재의 울림입니다. 말은 안합니다. “진짜 그렇게 좋으냐?” 은혜로운 이야기만 하니까 “나도 좀 한번 가보고 싶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섬김의 진정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사진의 존재가 울려야 합니다. 기쁨으로 울려야 합니다. 그래서 나처럼 살고 나처럼 웃는 것이 복되다고 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울려 퍼질 수 있을 때 그때 그게 진정한 신앙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