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과 관상기도 2
녹취자: 김경애
Chapter 1. 관상기도의 의미와 배경
Ⅰ. 관상기도란 무엇인가?
관상기도라는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평촌에 묻혀 사니까 잘 모르시겠지만 저기 서울에서는 이런 기도들이 상당히 유행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관상기도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여태까지는 기도라 하면 우리의 지성을 사용해서 구체적인 언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아뢰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의 위로와 감화를 받고 또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도 깨달으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기도생활이라고 생각했는데 관상기도라는 것은 그렇지 않고 이제는 하나님을 깊이 마음으로 응시하는 직관 속에서 이루어지는 영성적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운동은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냐? 영상으로 한번 보시겠습니다. 이런 형태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Ⅱ. 관상기도의 의미와 배경
그런데 이런 기도들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는 오늘 다루게 될 내용이고 그리고 지난시간에 그러면 도대체 이런 관상기도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속에서 늘 고대로부터 계속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늘 교회를 괴롭히던 전통이었습니다. 그런 곁가지로 나간 전통들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에 다시 재현되게 되는가 하는 사상적인 배경이 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첫째가 뉴에이지라는 사상이라는 것인데 뉴에이지라는 개념은 점성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사상에 따르면 12별자리가 있는데 그 12별자리는 시대와 관계가 있는데 오늘날의 시대는 물병자리라고 하는 시대인데 이 물병자리는 1960년대 시작되어서 약 2000년 동안 계속되는데 이 시대의 모든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가 곧 신과 동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예전에는 전혀 못 깨닫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뉴에이지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목표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가 신과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고 신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시대입니다. 이런 사상들에 젖어있기 때문에 관상기도가 이제 이런 아주 자기 자신을 고양시킨 자아로 나아가는 것, 하나님과 신접한 상태를 추구하는 그런 사상들이 배경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중세의 신비주의인데 이제 초기 중동지역의 광야에서 생활하던 사막교부들이 이러한 명상법과 생활의 규칙들을 발전 시켰는데 초기에 이런 수도사들의 명상법과 생활은 힌두교, 불교와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 안토니우스라고 불리는 사막의 교부, 이 사람이 4세기에 수도원운동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이러면서 고행과 이런 속에서 신비주의를 터득하게 되는데 이런 것들이 플라톤의 철학 같은데서 온 것입니다.
세 번째가 유대교에 있었던 까발리즘인데 이것은 중세에 있었던 유대교의 신비주의를 의미하는데 스페인과 프로방스 지방에서 시작된 것인데 이러한 유대인들이 신비사상을 발전시킵니다. 이러한 것들이 이런 신비주의 사상에 배경이 된다고 봅니다. 종교개혁시대로부터 근대이전의 신비주의에서도 이러한 것들은 계속 나타나고 13세기에 일어났던 가톨릭 안에서의 개혁운동들이 청빈, 복종, 고행, 헌신 이런 것들을 맹세하며 수덕의 삶을 추구하였는데 이때에 지적인 전통들이 약화되고 신비주의가 발달하게 되는데 이런 신비주의 운동들이 르네상스 이후에도 이그나티우스 로열라,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 로렌스 형제, 조지 폭스, 잔느 마리 귀용 이런 인물들에 의해서 계속되면서 18세기까지 오게 됩니다.
또 하나의 요소는 범신론과 내재신론의 확산인데 이 범신론과 내재신론이 르네상스 이후에 아주 확산됩니다. 그래서 이런 범신론과 내재신론은 범신론은 신을 비인격적인 것으로 보고 물질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보고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물질과 인간은 신의 본질의 변형일 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변형은 항상 잠재적인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하고 신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데 이는 마치 파도가 막 칠 때 그 파도는 높이 칠 수도 있고 낮게 칠 수도 있고 바위에 부딪히면 물방울이 될 수도 있지만 바다의 본질의 일부인 것처럼 그렇게 신의 본질이 시간 안에서 변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들에 반해서 내재신론은 그 비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인격적인 신이 세계 안에 내재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르나도 부르노, 여러분들이 잘 아는 17세기의 철학자 스피노자, 헨리 모어, 그리고 17세기의 영국의 신플라톤주의자들과 고트홀트 레싱, 헤르더, 그리고 18세기, 19세기를 살았던 슐라이어마허 같은 인물들이 기독교 안에서도 이런 운동에 기여하게 됩니다. 인간을 신학의 주체로 생각하면서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받아들이면서 자유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고전적인 유신론을 억압적인 설명이라고 보고 이것들을 배척하면서 그러면서 신플라톤주의나 혹은 이런 사상들을 따라서 이제 세계와 인간이 한 운명이 되어서 인간도 하나님에게 영향을 미치고 하나님도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운명공동체로 서로가 서로를 형성해간다고 하는 아주 해괴한 사상들을 만들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간접적인 원인이고 기독교 안에서 이러한 관상기도의 직접적인 사상적 배경은 레노바레 영성운동의 영향입니다. 우리나라에 기도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리처드 포스터에 의해서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운동인데 영성 훈련을 위한 운동입니다. 이 사람은 원래 퀘이커 교도였습니다. 퀘이커교도는 침례교에서 나온 하나의 이단적인 종파에 속하는 것인데 극단적인 신비 체험을 강조하고 기록된 계시의 말씀보다는 하나님이 우리 각자 각자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성령의 내적 광명을 주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인간 세계에 누구든지 내적광명이 있다고 보았고 이러한 자아의 체험을 통해서 진리의 영의 인도를 각자 각자가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기도라는 책이 1990년대에 출판되었을 때에 엄청나게 팔렸는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써의 기도에 대한 강조가 신비주의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리처드 포스터의 사상은 레노바레 운동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레노바레 운동은 신앙에 있어서 관상기도의 필요를 절대적으로 강조하고 있고 단순한 정적으로써의 침묵이 아니라 관조적 신비상태로써의 침묵을 통해서 기독교의 만트라의 실천 즉 짧은 주문처럼 외우는 그런 종류의 실천을 통해서 무념 상태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관상기도 확산에 이바지하고 있고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레노바레 운동은 쇄신하다, 바꾸다 는 뜻입니다.) 이런 잘못되어진 교회의 영적인 상태들을 고친다는 의미에서 이 레노바레 운동이 상당히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Ⅲ. 관상기도운동의 사회문화적 배경
이러한 관상기도에 대해서 지원을 해주는 사상들이 아무리 뒤에 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에 와서 갑자기 이것들이 누룩처럼 한국교회에 번져가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국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배경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현대사회의 자아 상실감입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 하면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재화가 대량으로 생산되고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극단적인 물질주의 속에서 현대인들은 과학과 이성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을 다 받아들이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만족되지 않는 내적인 공허감을 느끼면서 그렇게 고통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치열한 경쟁과 물질주의 속에서 현대인들은 발달한 문명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자신은 정작 아주 외롭고 고독한 존재가 되어가고 잇는 것입니다. 자, 이러한 것들 속에서 이제 현대인들은 원인을 모를 고통과 불면증, 위장장애, 공해의 질병, 우울증, 정신병 같은 질환들로 말미암아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아주 현실적으로 고민하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 이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서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고자하는 욕구를 누구든지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대인의 사회심리적인 욕구가 이런 관상기도를 붙들게 되는 아주 매력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여기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명상집회 같은 것들이 일어납니다. 정체성을 잃고 있는데 그런 고립감에서 벗어나고 종교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이런 수련 같은 것들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신비주의에 대한 동경인데 이렇게 인간은 이제 예전에는 모르는 것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제는 정보가 엄청나게 많아지고 그리고 ‘저 산 너머에는 누가 살까? 바다 건너 저 나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상상하고 꿈을 꾸었는데 이제는 실시간으로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모두 알 수 있도록 그렇게 교통과 통신이 발달되어서 이제는 내가 어느 지역사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렇게 모든 것이 개방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 다음에 이것이 한편으로는 편리하면서도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인간은 많은 관계를 맺고 있고 자기를 개방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사회적이고 정신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하는 이러한 형태의 인간관계들은 점점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호와 아이디로만 알려지고 자기가 누구인지는 알릴 길도 없고 사람들이 잘 알지도 않는 그런 관계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요새 무슨 모임이 있다고 그래서 모임장소에 나가보면 밥 먹고 난 다음에 전부다 식탁 밑에 핸드폰을 들고 그것을 두드리고 있어서 같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회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자기혼자 잘 놉니다. 그렇게 하니까 생활이 점점 자기 속으로 몰입되면서 무엇인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그런 어떤 신비한 욕구들이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이비드 웨일즈라는 신학자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데이비드 웨일즈의 이야기를 좀 하고 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내면에서 신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심령술에 대한 몰두, 수정구슬과 여러 가지 뉴에이지 물품사용 등, 급격히 확산된 뉴에이지 운동은 인간의 경험에 여전히 남겨진 공허함을 말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보면 오늘날의 영화에서 미드라고 그러는데 미국의 드라마들은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철저한 과학, 살인, 미스터리, 수사 뭐 이런 것은 현대인들에게 별로 재미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시크릿가든 같은 것이 너무 재미있는 것입니다. 뽕하고 남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고 그리고 아바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바타 좀 보여주십시오. 아바타! 잘 보십시오. 강의보다 더 재미있으십니까? 여기서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에와 She is real.’ 그럽니다. ‘에와’ 그게 이브입니다. 이브라는 그것이 ‘생명, 살다’ 에서 나온 것입니다. ‘She is real.’ 전설로만 들었는데 그분이 정말 있다. 그래서 보면 신인 '에와' 에서 나오는 생명이 자연세계를 휘감고 인간 속으로 들어가고 아까 거기에 나오는 여자의 골수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신의 본질, 자연의 본질, 인간의 본질 이것이 모두 하나로 유통하여 흐른다는 사상입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의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이고 해석이기 때문에 저런 것들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확 끌리는 것은 저 사람이 영화를 잘 만들어서 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 표현은 못해도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는 이러한 신비주의에 대한 동경을 끌어내서 작가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것을 표현했기 때문에 자기도 그런 것이 있는 줄 모르는 그 속으로 사람들을 확 빨려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런 관상기도를 확산해나가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진리의 빛으로 비춰보지 않으면 시대 속에 살면서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여러분 요즘에 ‘개념 없음’ 을 가지고 성경공부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분이 그럽니다. 예습을 안 해와도 할 말이 많은 공과라고 말입니다. 예습을 안 해오면 대개 할 말이 없는데 이 공과는 예습을 안 해와도 할 이야기가 많은 그래서 구역식구들의 참여가 가장 활발한 공과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개념 없는 사람은 한 번도 자기가 개념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을 안 합니다. 개념 없음으로 숨 쉬고 먹고 그 안에서 살기 때문에 개념 있는 인간을 만나서 지성의 벼락을 치기까지는 자기가 개념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안 합니다. 그래서 참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개념 없는 인간들이 구제불능 상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니까 그래도 자기는 개념 있는 줄 알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개념이 없구나!’ 깨달으면 나의 개념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자아 중심의 실용적 사고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현대인에게 있어서 이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기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한 몸 조국을 위해서’ 이런 사람 별로 없습니다.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이 한 몸 학생들을 위하여 열심히 가르치다가 피를 토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런 선생님들이 옛날에는 가끔 있었는데 지금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각자 최고의 가치가 남을 위해서 자신을 무엇인가 바치는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는 모든 가능성을 최대한대로 발현해서 그것들을 쏟아놓는 것 이런 것들이 인간의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핸드폰 광고를 하는데 ‘생각대로 어쩌고저쩌고’ 이런 것은 현대인들에게 가슴이 자지러지도록 어필하는 문구입니다. ‘생각대로…….’ ‘네가 마음먹은 대로 된다.’ ‘네가 마음먹은 대로 해봐.’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야.’ ‘너는 할 수 있어.’ ‘너 자신의 가능성을 믿어라.’ 어떤 자동차 선전으로 나오는 ‘Think Possibility.’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보라.’ 이런 것들은 모두 자지러지도록 현대인들의 가슴속에 어필하는 촌철살인의 문구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의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영화나 소설을 만들어도 항상 자기를 희생하고 온갖 시련을 극복하며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서 이바지를 했다거나 누나가 식모살이를 하고 신문팔이를 하고 접시닦이를 하고 심지어는 술집에서 일을 해서 동생을 검사로 만들었다. 이런 것들이 감동을 주었지만 이제는 그런 것을 만들면 맞아죽습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접시를 닦아서 동생을 고시 공부시켜서 검사를 만들겠으며 또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동생은 그렇게 누나를 기억해주나? 이런 것들이 이마 다 깨어졌습니다. 그 다음에 예를 들자면 부모가 죽도록 희생해서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서 그래서 했더니 그 자식들이 훌륭한 인물이 되고 엄마는 고스란히 늙어서 백발이 성성해진 그 속에서 자기의 자녀들이 잘된 것을 바라보며 흐뭇해하며 눈물을 짓던 것들은 1960년대 70년대에 유행하던 영화이지 지금은 그런 것을 만들면 아무도 안갑니다. 의심이 되면 한번 만들어보십시오. 망합니다. 그런 영화들은 별로 의미가 없고 오히려 아까 본 것과 같은 아바타 같은 영화, 블랙스완 같은 영화, 이런 영화들이 자기 자신을 철저히 실현하는 것이 누구의 행복에 얼마큼 이바지하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한없이 실현해서 완성해놓은 그것 때문에 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들은 ‘꼭 그럴까요?’ 그러는데 여러분 오체불만족이라고 그래서 허리까지 밖에 없는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볼 때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사람들인데 그렇게 하면서 사람들이 강연을 하고 그럴 때 열광을 하고 그럽니다. 옛날에는 그런 것을 보는 관점자체가 달랐습니다. 옛날에는 그런 것들을 역경을 이긴 하나의 표상으로써 그것을 보았는데 지금은 그런 것이 아니라 자아를 실현한 한 본보기로써 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굉장히 커다란 우상과 같이 떠오르는데 그런 것들이 하나의 자아중심의 실용적 사고이고 이런 것들을 타고 이런 인간에 대한 모든 관점이 바뀌는 관상기도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게 대충 지난 9월 달에 광림수도원에서 추운 날에 두 시간 반 동안 에베소광장에서 들었던 이야기인데 그러나 사실 그때 그곳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지금의 이 짧은 설명보다 훨씬 더 감동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아멘을 해야 다음에 따라갑니다. 가지 않더라도 여기 따뜻한 곳에서 설명을 요약해서 들을 수 있겠구나! 하면 안 됩니다. 두 시간 반 동안의 내용을 지금 20분정도로 요약한 것입니다.
Chapter 2. 관상기도운동의 신학적 문제점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이것들을 비판하면서 관상기도운동이 무슨 신학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는가? 이제까지 관상기도를 둘러싸고 이단연구가 그 다음에 목회자 그리고 신학자 이런 분들이 비판적인 근거들을 굉장히 많이 쏟아냈습니다. 그런데 쏟아져 나온 많은 글들이 깊이가 있는 것도 있고 감정적인 것도 있고 깊이가 별로 없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지 종류들이 나왔지만 대부분 이 비난들이 산발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들을 그런 방식으로 하지 말고 그러면 한번 이것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기독교의 표준적인 교리, 조직적인 틀 안에서 이것들을 비판해보자는 이야기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들이 이런 비판에 앞서서 우리들이 기억해야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제일 먼저 우리들이 참된 경건, 그래서 참되고 경건한 실천은 올바른 지식에서 나오고 이 올바른 지식과 참다운 실천을 엮어주는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건전한 영적 생활입니다. 건전한 영적 생활이 있을 때 참된 지식은 견실한 삶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견실하여야할 영적 생활이 건전한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이 건강한 영적 생활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식 중 올바른 것이 있어도 삶의 경건한 열매를 맺는 데는 실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Ⅰ. 인간론
관상기도에 있어서 우선 제일 먼저 살펴보는 것은 인간론의 문제입니다. 관상기도가 지지하는 인간론은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믿어온 인간론과는 많이 다릅니다. 더욱이 개혁신학에서 가르치는 인간론과는 많이 다릅니다. 고유한 의미의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연합되어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의 죄와 타락에 관한 불분명한 견해입니다. 관상기도에서는 그래서 원죄와 부패성 같은 개념들이 인간론에서 실종되고 맙니다. 성경은 인간을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그런 필연적으로 죄와 부패로 물든 존재로 보는 반면에 관상기도에서는 그런 죄와 허물을 그런 숙명적인 차원에서 보지 않고 우리로 보자면 그런 것들이 이렇게 어떤 과일이 썩듯이 속까지 부패가 깊이 침투해있어서 이것의 어떤 신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원래의 그 과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보는데 반면에 관상기도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마치 아주 좋은 유리구슬에 때가 묻은 것입니다. 흙이 묻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끗이 씻어내기만 하면 그 자체는 아주 순수하고 전혀 물들지 않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씻겨 지고 나면 하나님과 일체가 될 수 있는 존재라고 보는 것입니다.
A. 인간 존재에 대한 비성경적 개념
그래서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면 이것입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비성경적 개념입니다. 오늘날 이런 관상기도를 활발하게 보급하는데 기초를 세운 토마스 머튼 이라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가톨릭의 수도사인데 이 사람은 인간존재를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은 이미 연합된 존재이며 관상기도는 이미 그렇게 있는 존재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새로운 일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는 하나님과 우리의 일치를 회복하는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거의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가톨릭의 사제인 윌리엄 쉐논이라는 사람의 유명한 책이 있는데 ‘평화의 씨앗’이라는 책에서 인간이 처한 딜레마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가 신과 하나임을 잊어버리는 이 망각은 개인적인 경험만이 아니라 인류 집단의 경험이다. 이것은 원죄를 이해하는 한 방법이다. 원죄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신안에 있으나 이 사실을 아는 것 같지 않다. 우리는 낙원에 있으나 이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원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지는데 인간의 영혼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 가운데 하나님을 가장 닮은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도 피조물이고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컴퓨터를 만들었는데 컴퓨터 하드웨어도 만들고 소프트웨어도 만들었지만 그래서 소프트웨어는 컴퓨터를 만든 사람이 하드웨어보다 더 많이 반영한다고 하더라도 소프트웨어가 그 사람 자신의 일부일 수 없는 것처럼 영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이렇게 물이 잉크에 섞이듯이 아니면 흙과 물이 만나듯이 이런 식으로 섞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상에 창조하신 모든 사물들 중 인간의 영혼은 두 가지 점에서 영혼이 아닌 다른 사물들과 구별됩니다. 우선 첫째는 무엇이냐 하면 존재의 양식에 있어서 모든 물질적 사물들과 구별됩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꽃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정확하게 이런 꽃들은 크기, 부피, 높이, 넓이, 길이를 가지고 어떤 시간 속에서 어떤 공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평화, 사랑 이런 개념들은 사실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안에 있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영혼은 사실 그런 것과는 다릅니다. 평화의 크기와 넓이 부피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지식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이라는 것은 한정되어있습니다. 내 영혼이 내 안에 있지 밖으로 출장을 가거나 나들이를 가지 않습니다. 아니면 주체할 수 없이 내 몸이 불어나도 내 영혼이 미치지 않는 내 신체의 부위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내 영혼이 주책없이 커져서 내 몸 밖으로 삐져나와서 내 옆에 함께 앉아있는 사람에게 침투해서 내 영혼이 그 사람의 육체를 주장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까? 영혼이 비록 크기와 넓이 부피를 가지고 시간 속에서 어떤 장소를 점하며 이런 꽃잎처럼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그것은 한정된 자기의 크기를 가지고 그리고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영혼도 함께 우리가 있던 장소에서 떠나는 것이지 우리는 죽어서 천국을 갔는데 영혼은 안방에서 계속해서 궁시랑 거리면서 ‘내 육체는 어디로 갔을까?’ 그렇게 하면서 집안 식구들을 괴롭히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혼의 존재는 물질적 사물들과 구별되고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각기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고 그 관계 속에 있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물이 어떠한 사물인가에 따라서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측차도 달라질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교통도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도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그런 교통도에 있어서 이것도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이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공중의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관계를 맺고 돌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과는 좀 다를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만들어져서 놓여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것은 자라고 색깔이 변하고 시들고 자랍니다. 동물의 경우에는 또 틀릴 것입니다. 인간의 경우에는 또 더 틀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는 이 창조세계에 있는 다른 사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와는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교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성과 생각이 인간에게 전달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의지를 인간에게 영향을 미쳐 그래서 인간의 의지에 호소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관계가 맺어지는데 그것을 가리켜 우리들이 인격적인 관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꽃과 하나님 사이에는 사랑이 성립할 수 없지만 영혼을 가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사랑이 성립할 수 있어서 때로는 하나님이 그리워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기뻐서 감격하기도 하는 것이 이것이 영혼이 하나님과 갖는 관계의 특수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영혼 사이에 이런 뚜렷한 구분 점들을 인정하지 않고 성령 안에서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적인 교통을 본질적인 침투와 빈번하게 혼동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관상기도는 범신론적인 사고를 가진 신비주의자들에게서 환영을 받는데 16세기의 신비주의자인 아빌라의 테레사 같은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는 마치 하늘로부터 내리는 비가 강이나 샘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물만 있을 뿐이며 하늘로부터 떨어진 물과 강에 속한 물을 나누거나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이 연합은 마치 두 양초의 끝이 결합된 것과 같아서 거기서 나오는 빛은 하나가 되며 심지와 초와 빛은 모두 하나가 된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인간이라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또 다른 변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자, 강에 바람이 막 불면 강물이 출렁거립니다. 물결이 일어납니다. 간밤에 무서운 추위가 밀어닥칩니다. 그러면 그 물이 다 얼어버립니다. 더 세게 얼면 얼음들이 양쪽에서 서로 밀어버려서 가운데가 솟아납니다. 칼로 짼 것처럼 울퉁불퉁한 날카로운 얼음들이 드러나지만 사실은 그것은 날이 추울 동안만 그렇게 있는 것이고 날이 따뜻해져서 햇빛이 나고 봄이 와서 녹기 시작하면 그것은 모두 하나의 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신과 인간 사이를 창조주와 인간의 존재 사이를 구분하지 않고 유통해서 흐른 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인간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 자체도 절대적으로 연약하고 미천하고 죄악 된 존재가 그리스도의 구속을 의지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는 그런 종류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인 존재가 되지못하도록 내 안에 묻어있는 각양의 때들을 명상 속에서 털어냄으로써 신과 일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신적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굉장히 각광을 받는 것입니다.
B. 죄와 타락에 대한 불분명한 개념
그 다음에 죄와 타락에 대한 아주 불분명한 개념입니다. 관상기도를 지지하는 신비주의자들은 성경이 말하는 인간관 즉 인간은 철저하게 타락해서 자신이 아닌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는 절망적이고 부패한 존재라는 인식이 없습니다. 토마스 머튼이라는 신비주의자는 인간의 자아를 참 자아와 거짓 자아로 나누는데 거짓 자아를 버리고 참 자아를 발견해야 되는데 이것이 관상기도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불교에서 진아를 찾아가는 과정과 아주 유사한 것입니다. 진아는 자매이름이 아니라 참 자아라는 뜻입니다. 진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관상기도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고 이것은 정통기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옛사람과 새사람 즉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중생한 인간의 본성과 중생하기 전에 부패한 본성이 신자 안에 내재합니다. 공존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의 옛사람과 새사람, 옛 본성과 새 본성의 대조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중생과 회심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니라 관상을 통해 자기도 잊고 있었던 방치되었던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윌리엄 쉐논이라는 사람은 타락의 의미를 이렇게 제시함으로써 이제 전통적인 인간론으로부터 신학적인 이탈을 분명히 합니다. 타락이란 우리가 우주의 춤, 여기서의 춤은 기뻐서 막 추는 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에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사람과 이 모든 세계를 당신 자신과 일체로 삼아서 그들 속에 당신의 본질을 나누어 주셨는데 그것들이 한없는 기쁨이 되어서 모든 만물들이 역동적으로 기쁨 속에서 춤을 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부터 소외되게 되었다. 그게 뭐냐 하면 너무나 이 세상의 세속적인 것들에 생각이 쏠려있고 그래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잃어버렸고 관상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하나님을 바라지도 않는 자기 자신을 체험한다는 것, 그것을 잊고 있다는 것을 바로 타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거기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아까 언급한 토마스 키딩 같은 사람도 ‘원죄라는 것은 개인적인 잘못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의 참된 자아는 하나님과 하나이며 그 참된 자아가 지니고 있는 선, 그것이 바로 우리 존재의 기본적인 핵심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테이야르 드 샤르댕 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 샤르댕이라는 사람은 역시 사제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러한 사상들을 훨씬 더 정교하고 신비스럽게 만들어서 철학화해서 이 사람의 주장이 이제 1900년대 중반기 이후 특히 190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에 뉴에이지 사상을 발전시키는데 아주 놀라운 사상적인 토대가 되는데 아까 본 영화 여러분들이 본 영화 아바타의 장면에 지금 설명을 들으면서 연상을 하면 아주 잘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 사람 같은 경우에는 거기에서의 에와를 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설명하느냐하면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는 2000년 전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성으로는 제한된 공간과 시간 안에 계셨고, 다만 신성으로서 편재하신 분으로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사람은 어떻게 보느냐하면 이 그리스도가 바로 물질로 이루어진 이 모든 세계와 하나님을 하나로 만드는 연결점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그리스도가 오메가 포인트라는 특성을 가집니다. 이 오메가 포인트가 무엇이냐 하면 오메가는 희랍의 알파벳에서 맨 끝입니다. 그게 말하자면 완성, 종점, 종착 이런 뜻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제 신의 본질이 이 세계의 본질에 그리스도를 통해 끊임없이 침투해서 영향을 미치게 되어서 동질화가 이루어지는데 그 동질화가 완전히 완성되어서 피조물과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사이의 구별이 없어지고 일체의 신적 본질로 완성되는 그 지점이 오메가 포인트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통적인 기독교에서는 거기를 완성의 시점이라고 보는데 창조, 타락, 구속, 완성 그래서 모든 죄가 제거되고 하나님과 이 창조하신 세계가 타락하기 이전으로 돌아가서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잠시 정지되었던 창조의 목적을 향해 발전해가는 그러한 세계가 다시 시작되는 시점을 우리들은 오메가 포인트라고 부릅니다. 극치, 혹은 consummation, 완성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을 이 사람은 오메가 포인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메가 포인트는 단순한 수렴점이 아니라 초월하며 현존하시는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계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의 실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신적 본질로써 이 모든 세계와 통하는데 이것이 바로 당신 자신의 본질로써 하시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에와로부터 신적인 어떤 설탕가닥 같은 것들이 이렇게 내려옵니다. 그게 땅으로 퍼지고 땅에서 일어나서 골수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을 테이야르 드 샤르댕은 그리스도라고 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질이 그렇게 침투해서 그래서 신과 인간 사이의 벽을 허물고 일체가 신으로 하나가 되어서 완성이 되는 그것이 바로 오메가 포인트라고 보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설명한 것처럼 아쿠아리우스 물병자리 시대에 신과 인간의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지는 천문학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시대라고 하는 그 설명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가톨릭 신자에게 환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뉴에이지 사람들에게 교부처럼 떠받듦을 당하고 그리고 책을 저도 몇 권 읽어보았는데 상당히 철학적입니다. 이런 것들을 만약에 쉽게 썼으면 사람들이 ‘에이 씨’ 그러면서 만화책 같다고 버릴 텐데 굉장히 어렵게 썼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굉장한 것이 들어있는 것같이 쓴 것입니다.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책을 보고 그랬습니다. 그 사람은 별로 유명한 사람이 아닌데 책을 읽고 그 사람에 대한 비판의 글을 짧게 썼습니다.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아주 간단합니다. 그 사람은 가톨릭 신자인데 순 사기꾼이라고 그랬습니다. ‘순 사기꾼이고 거짓선지자다. 말도 안 된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 하나님의 본질과 이 세상 참 피조물의 본질이 결코 섞일 수 없다는 가장 단순한 사실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다.’ 그렇게 해놓은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딱 깨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매혹되어서 막 그러고 있는데 깨는 것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지나가는데 아이들이 ‘벌거벗었잖아!’ 그때에서야 깨고 진실을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거짓말이다. 말도 안 된다. 거짓 선지자다.’ 딱 깨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어서 이제 우주가 진화하는 것입니다. 진화론이 문제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언젠가 우리가 이것을 지성적으로 극복을 해야 되는 문제입니다. 도와줄 마음이 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진화론을 거기다가 대입시켜서 그래서 완전자인 신이 이 세계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이 세계를 완전하게 되어가게 함으로써 당신 자신도 그 완전함의 일부를 누려 당신 자신도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계가 완전하게 되어 가면 하나님도 예전과는 다른 그런 새로운 하나님으로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여자만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매일 아침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완전하신 분으로서 말입니다. 옛날에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손해입니다. 그때는 좀 불완전한 하나님이셨는데 요즘은 훨씬 더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진화의 과정을 통해 성숙해져 가는데 그러한 우주 모두를 움직이는 골수에까지 침투해서 그래서 초인간적인 다시 말해서 신적인 본질이 이 모든 우주와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리스도가 하시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어떻게 보면 신앙이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침투해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든 지간에 말입니다. 날이 갈수록 더 심하게 침투하셔서 나를 더 예수를 많이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과정이 힘듭니다. 회개하고, 깨지고, 개념 없다고 뉘우치고, 그래야지만 조금씩 예수님을 닮아 가는데 말입니다. 여기서는 단번에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인간의 영혼을 신적본질의 일부분으로 보는 사상에서는 죄와 타락의 개념들이 완전히 실종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과 회심 같은 교리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신일합일을 이루는 존재인데 누가 누구보고 회개하고 누가 누구보고 변화를 받으라고 하겠습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사악한 욕망과 헛된 생각, 세속으로부터 들어온 각종 표상 때문에 혼란스럽게 되었으니까 그것들만 씻겨 나가기만 하면 참된 인간으로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합일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관은 우리로 하여금 불교나 마니교의 인간관을 생각나게 하고 동양의 사상을 많이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인간과 신을 마주 서있는 절대자와 상대자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인간 안에서 신을 시련해야하는 존재라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말입니다. 그래서 논어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열다섯 살에 학문의 뜻을 세우며’ 그러면서 주저리주저리 나옵니다. 그래서 오십에는 하늘의 뜻을 알고 육십에는 귀가 순하여지고 마지막에 칠십이 나오는데 그 칠십에는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 라고 나옵니다. 유는 넘어간다는 뜻이고 그 다음에 구는 법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칠십 살이 되었더니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했는데 그것이 법도를 넘어서지 않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제 밖에 어떤 신을 찾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명경지수의 마음으로 살게 되면 자기 안에 신이 실현되어서 신은 자기 자신에게 모순된 행동을 안 합니다. 인간은 모순된 행동을 합니다. ‘나는 절대로 고기 안 먹어.’ 그래놓고 그날 저녁에 먹는 것입니다. 아니면 ‘나는 어쩌고저쩌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것에 반하는 행동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은 그런 법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모순되게 안합니다. 그래서 동양철학에서는 이 신과 인간을 마주 서있는 절대와 상대의 존재로 보지 않고 그것을 자기 속에 실현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막 실현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인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가진 사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런 사상을 갖기 시작하면 불교, 힌두교, 기독교 사이의 구분이 문제가 안 될 정도로 아주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근거가 마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교 다원주의는 관상기도에 대해서 깊이 빠진 사람은 대부분이 종교다원주의자입니다. ‘우리는 종교 다원주의와 상관이 없는데요.’ 그것은 아직 종교다원주의를 안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그냥 관성적으로 전통적 신앙을 가져가면서 관상기도를 한다고 보는 것이지 그러나 사실은 그 속에서 사상의 맥이 함께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토마스 머튼이라는 사람도 결국은 불교에 틱낫한 이라는 베트남의 유명한 고승과 만나고 종교 간의 일치를 도모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무엇을 추구하느냐하면 이 사람들에게는 최대의 화두가 평화입니다. 보십시오.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도 있고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사회주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리스에 가면 아테나가 있습니다. 아테네에 사람들이 와서 정착을 하는데 신이 둘이 와서 자기를 섬겨주면 도와주겠다고 말합니다. 한 신이 와서 이야기합니다. 포세이돈이라는 사람이 와서 이야기합니다. ‘나를 섬겨주면 전쟁에서 늘 이기게 해주마.’ 이야기합니다. 아테네가 와서 하는 말이 ‘나를 섬기면 전쟁이 안 일어나게 해주마.’ 전자를 믿었겠습니까? 후자를 믿었겠습니까? 전쟁에서 이기는 것보다야 전쟁이 안 일어나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평화입니다. 평화. 그러니까 사상에 불구하고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종교다원주의자들의 화두가 무엇이냐 하면 평화입니다. 그러니까 종교가 ‘네가 옳네.’ ‘내가 옳네.’ 하고 그렇게 다투고 누가 더 질긴지 재어보자 하는 것은 아주 유치한 시대의 유산들이고 지금은 새로운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신앙의 선입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절절하게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학의 노선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오직 은혜를 통해서만!’ 오직이라는 말을 붙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은혜로도’, ‘예수로도’, 이렇게 상대화 시켜서 이야기해야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부처를 통해서 참된 행복에 이르지만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도 가는 길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논쟁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평화를 이어가니까 말입니다.
C.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왜곡된 해석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왜곡된 해석입니다. 그래서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왜곡된 해석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전통적인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닮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성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엇에 대해서 창조적으로 생각하시는 것처럼 인간도 창조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무엇에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이 당신 스스로 어떤 의지를 가지고 계신 것처럼 인간도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고 또 이런 것들을 이런 지식과 그 다음에 이런 의지 이런 것들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선과 악을 판단하여 하나님 앞에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이런 모든 정신과 기능의 작용들을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형상이 의와 거룩과 진리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과 교통하기에 가장 좋은 특성들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형상을 그렇게 보지를 않고 어떻게 보느냐하면 토마스 키틴 같은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진아, 참된 자아는 분리되어있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참된 자아는 같은 것이다.’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은 아니지만’ 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의 참된 자아는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우리 내면에 있는 나는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이기 때문에 잠자고 있는 나가 깨어나고 나면 나 안에 있는 그분의 임재를 발견한다. 문제는 이런 나가 계속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워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우기 위해서는 이제 많이 보던 것들을 안보고 생각 안하던 것들을 생각해서 내 자신을 스스로 일깨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깨움의 방법이 말하자면 다름이 아니라 그게 바로 관상기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신비주의자들이 신의 형상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일치된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이렇게 깊고 정확한 신학적인 입장을 가지지 못한 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명백하지는 않습니다. 대충 주장을 보면 어떤 사람은 아까 테야르 드샤르댕 같이 그게 그리스도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해석을 취하든 지간에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본질, 인간의 본질 이 세 가지가 일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치를 이루는 것을 직관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자아의 발견입니다. 나를 발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정통적인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입니다. 튜레틴이라는 17세기의 제네바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네 가지로 요약하여 제시하는데 첫째는 뭐냐 하면 성자와 관련된 형상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는 성자와 관련된 형상, 두 번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아담의 형상, 세 번째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중생자와 관련된 형상, 마지막에 독특한 방식으로 여자에 대해 남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 이 네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 아담이 소유한 하나님의 형상은 튜레틴에 의하면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성과 은사의 상태에 있어서 불완전하고 불충분하게 하나님을 닮은 우연적이고 유비적인 하나님의 형상이고 중생자들이 소유한 하나님의 형상은 초자연적인 선물로써의 영적인 형상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경우를 보든 지간에 하나님의 본질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음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과 인간의 형상은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이것들을 혼재해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Ⅱ. 구원론
두 번째 구원론에 대해서 하나만 더하고 마치겠습니다. 관상기도에서 신학적인 문제점은 구원론에서도 나타나는데 제일 먼저 구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통적으로 이야기하던 구원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면 전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구원의 개념은 어떤 것입니까? 이런 것입니다. 인간 존재는 철저히 타락하고 부패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들을 창조하고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과 영적으로 관계를 맺으시고 그의 영혼에 영향을 행사하시고 신적 본질을 침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우리 둘이 친구입니다. 그런데 한사람이 아주 깊은 시련과 고통을 당했습니다. 너무너무 괴롭습니다. 둘이 만났습니다. 그래서 손 한번 잡지 못했지만 이 사람이 진심으로 위로를 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진정으로 그 사람을 위로했습니다. 이 사람의 진심이 저 사람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헤어졌습니다. 그게 이상하게 자살하고 싶었던 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놓고 큰 위로와 힘을 주는 것입니다. 본질이 서로 교통하지 않았는데도 충분히 그런 영향이 오고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영혼이 본질적으로 서로 합류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렇게 인격적으로 교통하는 방식에 의해서인간의 영혼에 당신 자신의 생명을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하나님이 제시하신 표준을 따라서 율법의 요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하나님을 향하여 은혜 안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던 비참함이 결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죄 자체로부터의 구원임과 동시에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입게 된 비참함으로부터의 구출을 동시에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는 하루아침에 형성될지 몰라도 이것들이 죄와 죄의 비참으로 완전히 벗어나는 이 과정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칭의는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구원이 완성되어져가는 과정이 바로 성화라는 과정을 거치고 우리의 힘으로 완성이 되지 않아서 마지막에 우리들이 죽을 때에는 우리의 성화를 직접 완성시키시고 그리고 우리가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날 때에 그때에 이 모든 죄로부터의 완전한 구출, 죄의 결과로부터의 모든 구출도 이제 이 세상, 우리의 삶, 도덕적인 생활, 모든 것 속에서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구원의 완성입니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보는 구원의 개념입니다.
A. 종교다원주의적 구원개념
그러나 이제 이 사람들이 보는 개념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인간은 어차피 철저히 타락하고 부패하고 중생과 회심, 칭의, 성화, 영화 이런 것이 필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순수하고 신적이며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인간을 그렇게 보기 때문에 구원의 개념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분이 바로 이러한 죄로부터 우리를 구출하게 하는 모든 결정적인 중보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분 때문에 용서받고, 그분 때문에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지고, 그분 때문에 우리가 성화되고, 그분 때문에 우리가 그 모든 죄와 비참한 결과에서 그 공로를 의지하여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 자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그렇게 완전한 완성을 이룬 어떤 한 존재로서의 모본을 보여주는 그것으로 그치는 것입니다.
B. 영지주의적 구원관
여기에서 들어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영지주의적인 구원관입니다. 구원관에 있어서 이 사람들이 가진 것이 영지주의적인 구원관과 상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지주의라는 것은 신비하고 비밀한 영적인 지식 영지라고 그러는데 영지버섯이 아닙니다. 그 영지를 통해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보는데 이는 이제 이런 것입니다. 빛의 사자들을 통해 그노시스를 깨달은 한 사람이 신적 존재와 물질세상을 가르고 있는 심연으로부터 벗어나서 천상의 세계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왼쪽 하단에 엎드려있는 사람이 머리가 기어 나옵니다. 보이십니까? 그리고 여기에 별이 있는 장막이 쳐져있습니다. 이게 바로 여기에서 이렇게 물질세상을 가르고 있는 심연입니다. 그 심연에 이르는 이 베일을 뚫고 천상의 세계로 머리를 확 내미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별들이 있는 천막처럼 되어있는 이쪽에서는 깨달을 수 없는 어떤 것을 저쪽의 빛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이 그노시스입니다. 그 그노시스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이제 뚫고 저리고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동그라미들이 많이 있는 이것들은 뭐냐 하면 이러한 영지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만물들과 관계가 유기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Diagram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것은 뭐냐 하면 여러 가지 동양종교, 희랍철학, 기독교 이런 모든 것들이 합쳐진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번에 김용옥 씨가 해설했던 도마복음서 같은 것들이 바로 영지주의의 소산입니다. 이제 그런 것들이 그 사람들의 주장으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는 이미 각색된 것이고 때 묻지 않은 원래의 예수의 모습이 나와 있다고 주장하는데 우리는 오히려 반대로 봅니다.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모습들이 영지주의라는 사상에 의해서 각색되어서 개칠되어서 자기들이 원하는 예수를 만들어 놓은 상이라고 봅니다.
그러면서 이런 그노시스라는 개념을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이 그노시스라는 것은 신약성경에도 나오는데 지식이라고 번역됩니다. ‘그노시스 크리스트’ 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리스도의 지식’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밀교이고 이단 속에서는 비전으로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래서 이런 교리들이 철학적인 인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영지주의자들의 궁극적인 인식의 대상은 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와 일체를 이룬다는 것을 의미하는 아주 신비주의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신과 일체가 되고 싶어 하는 신화적인 욕구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 바로 그노시스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러한 신비주의는 결국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있는 존재로 보고 이로써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온전히 발현하는 것을 인간 존재의 가장 고상한 이상으로 보고 이것이 곧 구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왜곡된 구원에 대한 개념은 인간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회개가 필요한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모든 사유의 중심이 인간존재라고 보는 이런 사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세계관과 상당한 일치점을 가지고 잇는데 기독교적인 구원론을 훼손하지 않고는 이 정통적인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는 이단적인 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이머징처치 같은데서 신비사상으로써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로저 오클랜드라 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머튼에게 힌두교 스승이 있었는데 그는 브라마카리라는 사람입니다. 이 브라마카리는 힌두교의 대표적인 스승이고 이 힌두교는 사실은 인류역사상 가장 심오한 인간 이성에 입각한 철학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신비와 결합시킨 그런 종교입니다. 그래서 이 힌두교의 대표적인 수도승이 이제 종교다원주의자인데 여러분들이 아마 몇 권씩 읽으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헨리 나우엔이라는 인물입니다. 그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리고 토마스 머튼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엔의 책들이 많이 읽혔고 이제 굉장히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그 사람은 정통적인 기독교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예일대학의 교수직도 뿌리치고 장애인들과 함께 살았다는 삶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만 신학적으로는 아주 굉장히 이단적인 사상을 전파하던 사람이었고 일설에 의하면 동성애주의자로 살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에 이런 신비주의에 대한 상당한 원천들을 사실은 가톨릭이 제공을 하고 가톨릭이 이교와의 접촉을 통해서 신비주의적인 것들을 기독교 속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튼은 불교, 힌두교, 여러 위대한 아시아의 신비주의적 전통을 향해 마음을 열게 되었고 이런 전통들을 기독교에 도입하게 될 수 있었다. 문제는 신비주의를 통해 도달하는 상태가 어떤 상태인가 하는 것이다. 만약에 서로 다른 종교의 사람들이 관상을 통해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면 복음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관상기도 저변에 깔린 전제는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피조물 안에 실제로 있다는 믿음이다. 이렇게 하면서 이제 예수 그리스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 없다고 하는 이러한 기독교의 외침들은 포기를 해야지만 이런 관상기도로써의 접근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관상기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이런 것을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다가보니까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들어오라고 그래 해가지고 교회에서 막 가르치고 그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시간이 흘러가면서 여기저기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굉장히 잘못된 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돌이키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끝까지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도 잇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좀 잘 선택해야합니다. 그래서 내가 늘 말씀드리지만 판단력이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매일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공부해야한다고 여러분들에게 애달프게 이야기하는 것이 뭐 괜히 취미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받아들이는 목회자들이 진지하게 이런 강의를 두 시간만 들으면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런데 무엇에 씌었는지 씌어서 그것을 막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이미 도입을 해서 막 1기, 2기, 3기, 4기 훈련을 시켜서 보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것이 아니라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내가 우리교회 교리반 이십 몇 기까지 나갔는데 지금 와서 ‘내가 17,8년 해봤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미안하다. 내가 여태까지 교리반 가르친 것을 취소한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신학적인 판단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인데 너무 안타깝습니다. 레노바레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내가 추천서를 안 쓰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왜 그렇게 추천서를 써달라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원칙이 있습니다. 모두 읽지 않고는 추천서를 안 쓰겠다고 그랬습니다. 이 레노바레성경도 막 교계의 유명한 분들, 한국에 있는 모든 신학대학 총장들이 모두 이름을 썼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몰랐습니다. 성경 이만큼의 뭉치를 갖다 주는데 그것을 보려면 한 달을 읽어야하는데 한 달 더 읽어야합니다. 성경을 다 읽어야하니까 말입니다. 그 밑에 해설을 달아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순 엉터리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신문에 도배를 하면서 선전을 하니까 사람들이 이름도 좋아합니다. 레노바레 무슨 운동화의 이름 같습니다. 왠지 그것을 신으면 펄쩍 뛸 것 같습니다. 나도 몇 권 샀습니다. 사서 자기도 모르게 읽다가 밑에 읽어보고, 밑에 읽어보고, 몇 년을 가지고 다니면 이상하게 그 생각에 젖는 것입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을 모르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추천한 것을 보고 유명한 사람들이 다 있으니까 막 사는 것입니다. 그게 그렇게 되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사를 가든지 해서 교회를 바꾸게 되면 우선 좋은 교회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다니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교회부터 찾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조금 덜 가르쳐주어도 잘못 가르치지 않으면 나은데 많이 가르쳐도 잘못 가르치면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C. 성경적 성화관의 왜곡
그 다음에 성경적 성화관의 왜곡입니다. 빨리 끝내야하는데 큰일 났습니다. 하다가 안 되면 다음에 또 하겠습니다. 성화관의 왜곡인데 개혁신학은 성화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칼빈 같은 경우는 오늘 우리처럼 이렇게 이신칭의 즉 칭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성화를 하찮게 생각하는 이런 전통은 기독교의 전통이 아닙니다. 전부다 후대의 잘못된 해석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맨 처음에 사람들이 칭의와 성화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발전시킨 그것도 우리가 이렇게 하라고 발전시킨 것이 아닙니다. 논쟁적인 관점에서 발전시킨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루터의 전통에 따라 이신칭의를 말하면서도 좁은 의미의 중생관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중생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회개라는 용어를 중생과 회심과 바꾸어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회개 자체가 일회적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고 예수를 닮아가는 점진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칼빈은 중생의 개념을 성화까지 아우르는 모든 포괄적인, 전 포괄적인 신생의 개념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오.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이 회개가 곧 중생이라고 이해한다. 중생의 유일한 목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지고 사라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생에 있어서 구원을 하나의 구원서정으로 보는 좁은 의미의 구원관은 도르트회의 이후 알미니우스주의자들과의 논쟁을 수행하면서 방어적으로 이루어진 견해입니다. 오히려 초기 종교개혁자들은 도르트회의가 나오는데 1618년에서 1619년 사이에 열리고 네덜란드에서 열린 총회였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알미니우스주의에 반대하는 정통칼빈주의의 입장이 확정된 도르트회의였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이런 총회 이후에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신자는 자기의 전 본성이 거룩해져가는 성화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어떻게 됩니까? 끊임없이 내가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는 내 의지대로 나의 고집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려는 죄 된 성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죽이는 주체는 오직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이 성경이 진리를 통해 우리의 죄를 보이면 우리가 이것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끊임없이 깨닫게 하고 우리의 의지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우리의 죄를 성령으로 죽이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기뻐하며 즐겨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조금씩, 조금씩 성화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화란 성령께서 구원받은 죄인을 이 경향성으로써의 죄의 부패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그의 전 본성을 하나님 형상에 이르도록 갱신해서 죄인으로 하여금 성향적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성령님의 은혜롭고 지속적인 작용을 우리들이 성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성화를 이루면 이룰수록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인격과 삶으로써 이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신비주의적인 성화관은 너무 간단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면을 향하고 정진하여 신을 관상한다면 예수와 상관없이 성령의 도움이 필요 없이 신과 합일되기까지 순수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인간 자신도 무엇인가 자기 안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어떤 피해자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죄와 싸워야할 하나님께 의존된 존재가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길 수 있는 힘을 넉넉히 공급해주시지만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매일 매일 죄와 더불어 싸워야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이 신비주의에서는 생래적으로 영혼은 신과 합일을 이루고 있는데 잡스러운 생각과 세속적인 욕망 때문에 신적인 합일에 방해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 침묵 속에서 걷어내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삿된 것들을 정리하기만 하면 신과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존재라고 보는데 이게 얼마나 획기적인 일입니까? 여기에는 하나님이 주신 성경에 대한 진지한 탐구 그런 것 필요 없습니다. 눈을 감고 깊은 명상 속으로 들어가서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일입니다. 죄에 대한 통절한 뉘우침, 성령의 은혜에 대한 절실한 도움, 이런 것도 필요 없습니다. 말씀이건 성령이건 이렇게 깨끗해지는 자아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나쁠 것은 없지만 인간은 누구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원래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이니 진리의 말씀, 성령의 은혜, 이런 것들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철저히 회개하여야할 존재도 아니고 회개할 정도로 죄를 많이 지은 존재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신과의 합일의 가능성을 깨닫고 이를 위해서 신을 관상함으로써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상기도의 실천을 강조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사상을 알고도 행할 수도 있고 모르면서도 그 일을 따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이러한 배경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관상기도의 사상적인 뿌리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관상기도가 주는 단기적인 유익을 뒤로 하고 참된 기도가 주는 경건과 유익으로 돌아가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