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정을 토하는 기도 1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시 5:1)
녹취자: 백지영
지난 시간에는 기도에 있어서 말의 중요성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설교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라는 구절을 가지고 기도에 대해서 전 시간에 이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언어가 기도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항상 기도할 때에는 말로 기도하는 것을 여러분들의 철칙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아주 높은 분과 대화를 한다고 칩시다. 임금께 부름을 받아서 임금이 이야기를 하면 듣고 또 임금에게 말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임금에게 말할 때 딴전을 부리면서 말하면 참수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존한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참수시키지 않겠지만 기도에 있어서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언제나 언어로 기도해야 합니다. 혼자 조용히 묵상으로 기도할 때에도 당연히 명료하게 언어의 활동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기도는 마음에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방언을 칭찬하면서도 사도 바울이 방언의 한계를 지적했던 것이 그것입니다. 방언은 마음에 열매를 맺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방언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 할 이야기가 많지만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갑니다.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옛날 번역이 훨씬 낫지 않습니까? “내 심사를 통촉하소서.” 왕에게 어울리는 번역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나옵니다. 여기에 번역된 ‘심사’, ‘심정’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를 원래 히브리어에서 ‘하기그’()라는 단어로 적고 있습니다. ‘하기그’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무엇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 한숨, 한탄, 근심이나 걱정, 혹은 후회에서 오는 한탄이 그런 것입니다. ‘심정’이라는 이 번역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묵상, 명상, 숙고 이런 의미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권위 있는 킹 제임스 버전에서는 이 ‘하기그’라는 단어를 ‘매디테이션(meditation)’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NIV 제 1판에서는 (이 단어를) ‘사잉(sighing)’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한숨을 쉬는 것’이라고 번역을 했고, 2011년 뉴 에디션에서는 ‘라멘테이션(lamentation)’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확실히 이것은 심정이라는 말 하나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원어의 의미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매디테이션’이라는 번역도 그리 썩 좋은 번역은 아닙니다. 그래서 중국어성경을 보니까 이것을 ‘워더씬스’(我的心思)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결국은 (이 번역도) ‘마음속에서 하는 생각’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 종합을 해서 정리를 하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심정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기쁘고 즐거운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이 아니라, 뭔가 염려와 근심 혹은 고통 속에서 내 마음에 어떤 정동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생각이 일어나고 어떤 판단력 같은 것들이 막 혼란이 생기고 있는 그러한 정신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태를. 그것을 헤아려 주소서 하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모르실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것을 모르시면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기도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우리 스스로 헤아리게 만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이 시인이 내 심사를 헤아려주옵소서 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간구해야지만 당신이 관심을 가지고 이 시인의 마음을 통촉하는 것처럼 이해하게 만드셔서 그 기도를 계속함으로서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이 혼란과 어지러움이 깨끗이 정돈되고 질서 있는 마음으로 튜닝이 되게 하시는 것이 더 넓은 의미에서 바라보는 기도의 경륜입니다.
그러면 지난주에 설교한 내용하고 아주 훌륭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즉, 언어화되지 않은 기도는 마음을 그렇게 튜닝할 수 없습니다. 혹시 뭔지도 모르면서 어떤 평화와 그런 것이 올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언어의 활동 없이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평화는 감정에 의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금방 감정에 의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속적으로 마음의 평강을 누리는 모든 신자는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언어로 하나님이 말씀하셔서 당신의 심정을 우리에게 전해주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이미 알고계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언어를 길어 올리며 기도를 할 때 우리의 마음의 혼란들이 모두 잠재워지고 어지러웠던 것들이 질서를 갖추면서 마음에 튜닝이 됩니다. 튜닝이 안 된 상태에서 (악기를) 치면 듣는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기타리스트들은 다 튜닝을 하고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가지고 올라온 그 사이에 현이 움직였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연주하기 직전에 튜닝을 하고 그 다음에 연주를 하기 시작합니다. 튜닝이 잘 되고 (악기를) 치면 ‘다다다당’하고 칠 때에 아주 감미로운 느낌이 듭니다. 더군다나 아주 질이 좋은 기타일 경우에. 이처럼 (우리 마음의) 튜닝이 중요합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좋은 악보를 가지고 연주를 한다고 해도 튜닝을 하지 않은 악기로 음악을 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튜닝이 잘 된 악기를 연주하면 그 음이 아주 아름다운 음악이 됩니다. 때로는 아주 값비싸고 훌륭한 악기라도 튜닝이 안 된 상태보다는 오히려 싸구려 악기라도 튜닝이 잘 된 악기가 훌륭할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능하고 탁월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못해도 마음의 튜닝이 잘 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언어로 기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신조 그 이상의 의미가 기도의 경륜 속에 담겨 있습니다.
자, 우리들이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는데 도저히 우리에게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자기의 그런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온 힘을 다해서 그를 찾지 않겠습니까? 마치 소경이 예수 지나실 때 ‘보기를 원하나이다’하고 부르짖었던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간절히 찾지 않겠습니까? 기도가 언어인 것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한 데 그게 바로 간절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경륜 속에서 당신이 모든 것을 아시는데도 기도를 해야만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것 같은 그런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당신 자신을 감추십니다.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감질나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이 쇄신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깊은 은혜 속에서 우리의 어지러웠던 마음이 조율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예화) 7년 전에 총신에서 저에게 석좌교수로 와 달라고 해서 갔는데 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이 코흘리개들하고 뭘 하나?” 신대원이라면 또 몰라도 그런데 신대원은 또 가기가 멉니다. 지난 학기에도 신대원에서 강의를 해 달라고 했는데 정중하게 거절을 했습니다. 더 이상 갈 시간이 없습니다. 아무튼 그 학생들을 만났는데 처음에는 별 큰 재미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강의를 하기 시작했는데 요즘에 와서는 너무 재미있습니다. 화요일 날 가서 두 시간 강의 하는 게 나 자신에게 은혜의 시간입니다. 지난주에도 학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들으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강의를 하면서 기뻤습니다. 옛날에 우리 맨 처음 교수생활 할 때는 그냥 강의만 하고 오면 끝이었습니다. 요즘은 교수들도 진짜 고달픕니다. 한 시간 결강하면 보강계획서에다가 결과까지 다 적어내야 되고, 강의 끝날 때쯤 되면 학생들 수십 명이 그 강의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이름 적지 않고 강의 평가한 내용을 학교에서 다 보고 그것을 그대로 교수에게 전해줍니다. 얼마나 부담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저와) 학생들이 그 시간을 지내면서 많은 학생들이 기도의 회복을 경험했습니다. (어느 학생이) 2학기가 시작하기 전에는 늘 근심과 염려로 가득 찼는데 자신은 지금 기쁨 속에서 산다고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인생을 그렇게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하나님에 관한 일을 해도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에 튜닝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실제의 삶 속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머릿속에 있는 생각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그래서 생각 속에 염려하고 걱정되는 일들이 굉장히 많이 있어도 마음이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이상하게 즐겁고 행복하면 굉장히 심각한 일들이 눈앞에 전개되어 있는데도 오늘은 내가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주는 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여러분들 아마 그런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눈으로 보면 너무 너무 상황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울부짖고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때 놀랍게 마음에 평화가 주어집니다. 자신에게 묻습니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이 눈앞에 전개됐는데 왜 마음이 이렇게 편하냐?” 자기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평화가 옵니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는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조율해 줍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마음의 조율을 따라서 살도록 만들어줍니다. (기타) 조율이 잘 되면 ‘딩딩딩딩’ 하고 기타 줄을 뜯든지 아니면 확 때려서 ‘촹’ 하고 스트록크를 치던지 종류는 다르지만 똑같이 화음이 이루어진 소리가 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의 현이 정돈되었을 때 기쁘고 감사한 일이 옵니다. (그러나) 그 현이 정돈되지 않았을 때에는 기쁘고 감사한 일이 일어났는데도 이 사람 속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찬양이 안 나옵니다. ‘잘됐네.’ 아니면 ‘땡잡았다.’ 그것은 찬양이 아닙니다. ‘아, 진짜 재수 대개 좋네.’ 그건 찬양이 아닙니다. 현이 (정돈) 되었을 때 찬양이 (흘러) 나오게 됩니다. 고난과 시련이 옵니다. 그래서 좋은 일은 하나씩 아르페지오로 기타를 치는 거라면 고난이 오면 스트록크로 탁 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간에 소리는 달라도 그 안에 하모니가 이루어집니다. 오늘 아침에도 새벽기도 나와서 기도를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아온 인생이 참 쉽지 않은 길이었는데 하나님은 그 인생 굽이굽이를 사용해서 당신의 노래를 나에게 들려주셨구나. 물론 다시 한 번 이런 인생이 주어져도 다시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러나 참 하나님은 그렇게 만드셨구나.”
계속 고난과 시련이 닥쳐도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튜닝 하셔서 우리의 마음의 울림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시인 이산 김광섭 씨의 표현처럼 “때로는 울기도 하려니와 때로는 웃기도 하려니와 하지만 젊은 새의 꿈은 항상 날으는 데 있나니”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어루만져서 우리의 모든 환경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우리의 마음에 부딪쳐 울리는 그 소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마음의 현이 잘 조율된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나도 소리가 좀 커서 그렇지 아름다운 화음이 나옵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좋은 음악이 나옵니다. 이 현이 조율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나면 나쁘고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 좋은 일도 나쁜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헤아리면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