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정을 토하는 기도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시 5:1)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시인은 고통 속에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신자는 회심을 통해서 진정한 기도의 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신자의 전 삶의 과정은 기도를 배워가는 과정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이고 이것은 반드시 언어의 활동으로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언어가 없는 기도는 진정한 의미의 기도일 수 없고 그 언어를 통해서 빚어지는 간구의 행위를 통해서 기도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경륜이 성취됩니다.
저는 지난 수요일에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시편 5편 1절 상반절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 뒤에 나오는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라는 구절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이것은 심정을 통하는 기도입니다.
Ⅱ. 심정을 토하는 기도
우리말 성경에서 ‘심정’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기그’()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대체로 한숨이라는, 뭔가 깊은 절망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어서 토해내는 한숨이라는 의미가 있고, 또한 탄식이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탄, 혹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숙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전 성경에서는 이것을 ‘심정’이라 번역하지 않고 “내 심사를 통촉하소서.”라고 번역하였는데 제가 아주 좋아하는 번역이었습니다. 중국어 성경에는 여전히 ‘하기그’라는 단어를 ‘신스’(心思)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게 바로 ‘심사’입니다. 인간의 마음과 정신 안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을 통찰해 주옵소서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A.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결국 기도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즉, 마음으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면, “내 심정을 헤아려 주옵소서. 나의 심사를 통촉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못합니다. (첫 번째로) 기도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드려져야 합니다. 마음에 없는 아주 아름다운 기도보다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거친 기도가 오히려 그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어는 마음에서 우러나오지만 그 언어가 우리의 마음에서 빚어질 때 그 언어는 다시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떤 말을 하면서 사느냐,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면서 사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마음과 생각이 말을 빚어내지만, 빚어내진 그 말은 또한 그의 생각과 마음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말을 거칠고 험악하게 할 때 첫 번째로 그 사람 마음이 그렇게 험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렇게 험한 말을 토해 놓으면서 그의 말에 의해서 그 사람의 마음은 거칠어집니다. 마음에 없는 좋은 말 보다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언어를 요청합니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는 행위는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경외심을 표현하는 최고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토해내는, 그러한 깊은 언어의 토해놓는 행위는 너무 너무 중요한 경배의 행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를 할 때나 안 할 때나 은혜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가 넘치면 경외심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 흘러넘칩니다. 그렇지만 은혜가 떨어지면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가 떨어졌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의 그 형식과 모양, 태도를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기도 속에서 그것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얕보고 막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대한 깊은 경외심을 가지고 진심을 말해야 합니다. 그 진심은 반드시 언어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반복을 통해 우리는 그 언어의 힘을 얻으며 성령 안에서 주님의 마음에 일치하게 됩니다. 성도의 건강한 기도생활은 열렬함과 지속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첫 번째는) 뜨겁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두 번째는 그 기도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을 때는 하고 안 하고 싶을 때는 집어 치우는 기도생활이어서는 죄를 이기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너무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열렬한 기도생활과 하나님 앞에 좋은 때나 어려운 때나 항상 기도에 힘쓰는 것입니다. 이 열렬함과 지속적인 것이 항상 하나의 그릇에 담기는 두 개의 구슬과 같아야 하는데 그 하나의 그릇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깊은 경외심입니다. 그 속에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언어로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기도 속에서 바로 그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면서 우리는 변화되어 갑니다.
예수님 시대 때에 바리새인의 기도는 그들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명목상의 기도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깊은 경외심도 그렇게 되게 해달라는 뜨거운 마음도 그리고 꾸준한 실천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단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잘 될 때나 되지 않을 때나 항상 저 마음 깊은 곳에 두레박을 던지는 마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을 담아 올려 그것을 언어화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야 합니다.
B. 마음을 헤아리는 주님
두 번째는 이렇게 심정을 토하는 기도 안에서 시인이 하나님을 어떠한 분으로 이해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히브리 성경에 ‘빈아’라고 되어 있는데 ‘빈’이라는 동사에 간절한 소망이 담겨진 어미를 덧붙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빈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빈’이라고 하는 단어는 넓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판단, 이해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없었던 그 마음에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각성을 줍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신령한 것, 은혜, 진리의 말씀,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무감각해져 있었던 모든 감각들이 깨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말씀드린바와 같이 아무렇게나 드리는 형식적인 기도를 통해서는 그러한 감각들이 깨어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기도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이 담긴 언어로 이루어진 기도이며, 이 기도를 간절히 지속적으로 드림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히 우리에게 사랑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 사랑, 은혜, 자비, 용서, 긍휼, 심판,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한 감각에서 일시에 깨어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비로소 객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자기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외모는 유리로 된 거울에 비춰 봅니다. 그러면 거울은 정확하게 좌, 우, 위치는 다르지만 정확하게 우리의 용모 중 어느 곳이 흐트러졌는지 어디에 오물이 묻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진리는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함께 보여 줍니다. 진리의 빛은 거울이 되어서 우리를 비추어 우리의 어떤 행동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해 주고 잘못된 행동 저 깊은 곳에 있는 그의 마음을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는 유리 거울로 비추지만 우리가 정말 선한지 악한지 옳은지 그른지 하는 도덕적인 판단들은 진리의 말씀을 거울로 비추어 봄으로써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많은 진리 중 어떤 것들은 내가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진리를 생각할 때는 신이 납니다. 그 진리가 다른 사람들은 다 못 살고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자기에게는 그렇게 살고 있다는 위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쪼가리, 쪼가리 찢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그 자체가 하나입니다. 하나가 되어서 우리를 비춥니다. 그러면 분명히 거기에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나쁘지는 않겠지만 진리는 잘 하고 있는 것을 칭찬해서 우리를 격려하기도하지만, 잘못하는 그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진리 앞에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줍니다. 또한 우리가 굉장히 잘 하고 있다고 생각되던 것들도 진리의 말씀에 빛이 비추면 껍데기는 잘 하고 있었지만 내 깊은 속은 이 참된 가르침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여 예전에 자신이 의롭다고 여겼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는 모든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지 않고 진리는 모든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기가 아무리 경건하게 살아도 죄인일 뿐임을 깨닫게 되고 그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앞에서 자기가 추한 자임을 알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찬란한 영광 앞에서 자기는 전혀 그러한 영광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용서와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가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시인이 “하나님, 나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에는 최소한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는 의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의 빛 앞에서 내가 잘못된 사람이라고 드러나도, 나는 그 진리 없이 어두움 속에서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는 것보다 그 진리에 의해 책망을 받고 잘못되었다고 견책을 듣는 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더욱 희망이라고, 마귀에게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칭찬을 받는 것보다 하나님께 종아리를 맞는 것이 훨씬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내 심사를 통촉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인은 지금 ‘아, 나는 내 마음에 추어의 티끌도 없고 순결하고 깨끗하기가 하나님과 맞먹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 이 시를 짓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많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있습니다.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중 어떤 것들은 시인 자신이 오래전에 지은 죄 때문에 받는 징계의 결과도 그 속에 함께 섞여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 내 심사를 통촉해 주옵소서.” 적어도 하나님 앞에 숨김이 없다는 것을 시인이 기도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열렬하고 뜨거운 기도를 드리기에 앞서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짓과 속임의 모든 옷을 벗고 하나님 앞에 한 사람의 하나님의 자녀요, 용서받은 자녀로서 그 분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중심을 모두 토해 놓으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열렬함과 그 모든 뜨거움 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그러한 적 없으십니까? 뜨겁게 기도하라고 해서 입이 아프도록 떠들고 목이 터져라 기도했는데 왜 그런지 기도가 끝나고 나서 가슴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적어도 마음 깊은 곳에서 드리는 기도는 우리를 그렇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한 기도를 드리면서 심정을 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분이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아뢰든, 아뢰지 않았든지 우리의 모든 것은 그 분 앞에 드러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이 기도를 통해 주님의 마음에 깊이 민감해지게 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게 됩니다. 신자의 마음의 문제는 처음 회심할 때 가졌던 신전 의식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회심과 함께 신자는 아주 풍부한 신전 의식,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 하나님은 매우 가까이 계시고 그리고 내가 어디에 있든지 그 하나님 앞에 내가 있다고 하는 의식을 최초로 갖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회심과 함께 깊은 하나님의 신전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다고 하는 의식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풍부한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불순종과 죄가 거기에서 나옵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합니다. “이 방에 너와 나 밖에 없다.” 그때 요셉은 말합니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여자는 ‘여기 우리 둘 밖에 없다.’라고 생각하였지만 요셉은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고 하는 신전의식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기도는 바로 이러한 잃어버린 신전의식을 회복하기 위한 우리의 영혼의 아주 치열한 활동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간절한 부르짖음이고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는 분이시라고 생각을 하고 굳센 믿음 속에서 일체의 거짓과 위선을 벗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연약하면 힘을 주실 것이고 오류에 빠졌으면 바른 길을 보여주실 것이며 바른 길을 아는데도 내 힘으로 온전히 돌이킬 수 없으면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서 돌이킬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주십니다. 죄가 있으면 용서해 주시겠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욕을 해도 하나님은 그를 품어 주십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에 있어서 이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사실, 하나님이 기도는 마음으로 드리는 간구라는 사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모두 헤아리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잊으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기도로써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이 헤아린바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고 기도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나 같은 죄인의 행위에 대해서 주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두 드러나지 않았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 감출 것이 없이 이미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신문을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검찰에서 10초의 음성을 공개하면 촛불이 횃불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을 가지고 있길래 그렇게 엄청난 폭탄선언을 하는지 한편으로는 기대도 되고,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습니다. 굉장히 많은 부분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검찰이 그 정도로 이야기 하면 그것은 충격적인 대화의 내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죄를 지은 사람도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법정 앞에서는 솔직해 지는 것만이 가장 최소한의 희생으로 사태를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 중 일부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을 때 그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이 되어야 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또 하나 우리들이 여기에서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최소한 이 기도를 드릴 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정말 비천한 자요, 혹은 이미 불순종하고 죄를 지은 자요, 이러한 의식이 모두 있었겠지만 최소한 (그가) 이 기도를 드리는 동안에 양심의 구김이 없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감추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주님께 드러내 보여 드리며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중심을 토해 놓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완전한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맑게 산다는 것, 깨끗하고 순결하고 백합화처럼 산다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산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은 신화입니다. 들여다보면 모두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절대적으로 순결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맑다는 것은 다릅니다. 과오가 있을 수도 있고 그리고 실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자신이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맑다는 것은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살려하는 마음이 맑은 마음입니다. 합리화 시키거나 정당화 시키거나 다른 사람을 짓밟고 모욕을 줘서 자신을 올바르게 보이게 한다거나 이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러한 모든 연약함과 부족, 흠에도 불구하고 결국 마지막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정을 토하는 기도는 제일 먼저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Ⅲ. 적용과 결론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기도가 막히는 것을 경험합니다. 어떤 때는 죄 때문에, 어떤 때는 극심한 고통, 그리고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일들, 그 일들이 일어나게 하는 나 자신에 대한 깊은 무지에서 우리는 기도의 막힘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에 가장 뛰어난 신자들도 모두 경험한 일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여전히 헤어 나와 거룩하신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경외심으로 돌아가십시오. 거룩하고 높으신 하나님 앞에 떨리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자신이 그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을 감당할 수 없을 때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과 사랑을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바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없는 비천한 죄인을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찢으신 살과 흘리신 피로 나를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게 하신 것을 감사하십시오.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를 드리십시오. 그리고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은 나의 마음에 감춰진 모든 것을 헤아리시는 주님이시기에 나는 다만 정직하게 내 내면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 호소할 뿐이다, 그 마음의 깊은 울림을 언어로 길어내고 그 언어를 다시 마음 깊은 곳에 영향을 주도록 그렇게 만들어서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기도함으로써 기도하지 못하던 핍절한 상태에서 헤어 나와 영혼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자신의 중심을 깊이 토하며 그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간구를 기뻐하십니다. 단 한순간이라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진실해져서 우리 주님 그 은혜와 사랑을 기도 속에서 발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