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의 날에 비는 소원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위에 높으시기를 원하나이다”(시 108:5)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두 번에 걸쳐서 시편 108편을 설교를 했었는데, 5절을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시인이 아마도 108편의 뒤에 나와 있는 내용을 미루어 보아서 시련을 당하고 있고, 전쟁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암시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의 군대들과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이까? 대적을 치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보아서 다윗의 생애에 전쟁이나 혹은 국가적인 위기에서 이 시를 썼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위기와 어려움을 만나면 사람의 마음은 요동치게 되고, 불안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 때 시인이 믿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확정하였더니, 그랬더니 감사가 깃들게 되었고 그래서 비파와 수금을 깨우며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찬송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련의 날에 시인이 하나님께 빈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 소원들 중 두 가지를 시편 108편에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II. 시련의 날에 비는 소원
첫째는 이 시인이 말합니다.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제일 먼저 시련의 날에 시인이 빈 소원은 하나님이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는 것이었습니다.
A. 하늘위에 들리심
하나님은 안 계신 곳 없으신 분이시니 그 하나님이 어떻게 이 땅위에 하늘 높이 들리워질 수 있겠으며, 들리워진다 하더라도 이 땅에는 어찌 그 하나님이 안 계시겠습니까? 그러한 점에서 하나님이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기를 원한다고 하는 묘사는 문학적인 상징과 비유의 묘사이지, 문자 그대로 땅에 있던 하나님이 하늘로 높이 들리워지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원래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늘’은 신적인 초월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성경에 있어서 ‘하늘’은 이 땅에 있는 자연적인 것과는 대비되는 이상적인 것, 이 땅에서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이해되는 그러한 모든 사물들과는 대조적인 초월적이고, 신비한 것,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하고 신적인 초월가운데 있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어로서 하늘이 사용되었고, 그래서 하늘은 종종 하나님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문자 그대로 이 땅에서 하늘 높이 들림을 받으신다든지, 내려오신다든지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표현을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우리들이 흔히 일상 속에서 만나는 눈에 보이는 자연적인 모든 사물들은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공간 속에서 특정한 모양과 색깔, 크기, 무게 등등을 가지고 존재합니다. 거기에만 그것이 있고 그것 아닌 어떤 장소에도 그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위로 높이 들면 들려 올려질 수 있고, 들려 올라가고 난 거기에는 이제 더 이상 아까 보았던 그 사물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식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의 방식 중 하나는 편재하심입니다. 광대하고, 끝없으신 무한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하나님은 모든 세계에 어디에도 안 계신 곳이 없이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분을 하늘 위로 높이 올려드린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에 관한 말이라기보다는 그 하나님을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과 태도, 여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이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적인 구별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어떤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 모든 만물을 돌보고 계시지만,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뛰어나고 높으셔서 초월해 계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이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돌보고 계시지만, 그 모든 만물 중 어느 하나와 같지 않고 온 땅과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서 지극히 초월적이고 높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 땅에 있는 모든 만물과 인간의 운명이 그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하나님께 엎드려 부복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인 것입니다. 이렇게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뛰어나고 높아서 거기 엎드린 이 인간들, 이 인간들 마음속에 그 하나님은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신 분이 되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이 추운 밤에 예배를 드리러 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오늘 이 예배 시간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과 성령의 거룩한 감동으로 말미암아 은혜 받기 전에는 없었던 선한 의지가 생겨나고, 은혜 받기 전에는 부족하였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생겨나서 그래서 우리에게 부여된 의무를 기쁜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 이 예배 시간에 나온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일 예배 시간에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우리의 의무를 달콤하게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주님을 진심으로 높이고자 하는 경외심이 우러나오게 되고, 이렇게 주님을 향한 진실한 경외심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생겨나게 될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을 높여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눈물이 흐르고 십자가에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희생해 주신 예수님의 은총이 너무 감사해서 마음 깊이 그 사랑이 밀려와서 기쁨이 충만하다고 할 때, 그 은혜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입니까? 그냥 좋습니다. 그것은 자기만족적 영성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들에 핀 백합화나, 공중에 있는 새 하나도 목적과 의도가 있으셔서 창조하셨는데, 하물며 인간은 어떻겠습니까? 봄이나 여름이 되어서 종종 산속에 들어가 보게 됩니다. 그러면 많은 풀들이 피어 있고 풀끝에는 풀꽃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종종 그러한 생각을 해 봅니다. 일년 365일이 되어도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이 산 계곡에 눈에 띄지도 않게 피었다 지는 풀들은 왜 창조된 것일까? 참 어려서부터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높은 산을 오르고 험한 계곡을 지나 그 아름다운 풍광을 보러 여행을 간다고 하지만, 실제로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러한 여행에 참여하는 사람은 소수이고, 간 사람이라고 해서 그 모든 풀꽃들을 모두 보고 온 것도 아니고 보았다고 해서 그것을 보며 모두 감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던 어느 해인가 제 마음의 눈이 열리면서 그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하, 이제껏 까지 나의 모든 관점이 너무나 사람 중심의 관점이었구나. 사람에게 눈에 띄어서 감동을 주지 않으면 그 까짓 것이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한 것이 얼마나 교만이었는가. 왜냐하면 인간 아무도 보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 들에 핀 풀꽃 하나도, 그리고 저 깊은 수천 미터 바다 속에 사는 형형색색의 물고기도 우리 하나님은 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을 다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어떤 기쁨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혼을 부여받은 유일한 존재인 이 인간을 하나님이 바라보실 때, 아무런 감동도 없이 인간을 바라보실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수많은 영혼들을 바라보시면서 마음에 진정으로 기쁘시고 마음속에 큰 만족이 있으실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한 인간이 자신이 티끌일 뿐인 줄 알고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 분 앞에 진실로 부복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엎드려질 때, 그 때 우리는 이 땅에 부복하여 엎드려지고, 우리 주님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늘 위에 높이 들리우신 분이 되신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영광과 위엄이 만물위에 모두 뛰어나서 자신같이 비참한 인간은 그 하나님 앞에 다만 티끌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부복함으로써 우리 인간은 우리 하나님, 그분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늘 위에 높이 들리워 올리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올라 가신다기보다는 교만하였던 우리들이 내려가서 우리에게 합당한 자리에서 부복하여 하나님의 모든 생각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모든 뜻에 기꺼이 순종할 마음이 되는 그것이 바로 이 시인이 시련의 날에 하나님께 빌었던 소원이었습니다. 자, 이 시련의 날에 이 시인이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지극히 높아지고, 자신은 하나님 앞에 티끌같이 낮아져서 주님만을 의지하고 부복해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을 때 주님은 그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높아지셨을 것이며, 얼마나 그 이름을 인하여 영광을 받으셨겠습니까? 우리들은 시련과 어려움이 오면 비상하리만치 자기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 집중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돌보고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스스로 건져낼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의 사태가 흘러가는 것을 보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 일어나는 모든 시련과 고통, 심지어는 형통함과 행복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담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아들조차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자녀를 고통 받게 할 때 어찌 거기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시련과 어려움을 주실 때,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분수를 모르고 하나님 앞에 날 뛰었던 짐승 같은 교만한 마음을 낮추어 그분 앞에 부복해야 할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자기의 자리로 돌아갈 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시고, 자기같은 인간이 모든 삶이 온 땅과 만물위에 높으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늘 위에 높이 들리우시게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시련을 당할 때 자신의 불행한 처지나 자신의 고통에 집중하는 대신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뛰어나신 하나님 아버지께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온 땅과 모든 만물 위에 초월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마음을 갖게 되었고, 그 낮고 낮은 땅에 엎드려 부복함으로써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였을 때, 오히려 하나님은 이 시련의 날에 시인의 마음을 굳게 붙들어 주셔서 눈물 흘리고 괴로워하고 불안하여야 할 날에 오히려 비파와 수금을 깨우며 주의 인자와 신실하심을 찬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찬양)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시련과 고통의 날에 한번 여러분 자신의 불행한 처지에 집중하다가 절망하는 대신 오히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삶 굽이굽이 함께 해 오신 하나님, 안 계신 곳이 없어서 나를 붙드신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충심으로 섬길 그 때에도 나와 함께 하셨을 뿐 아니라 어두운 가시밭길에서 떨고 있을 그 조차도 나를 붙들어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생각할 때 그 때 우리의 인생이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의 손아래에서 티끌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부복할 때 주님은 여러분의 마음 안에서 하늘 위에 높이 들리우시게 되는 것입니다. 시련의 날에 이렇게 소원을 빌었던 시인처럼 여러분도 시련의 날에 높이 하늘위에 들리우신 우리 주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얻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영광이 높이 받으심
마지막 두 번째는 영광이 높임을 받으심입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주의 영광이 주의 온 땅에서 높임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나오는 영광에 대한 사상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성경에서는 이 ‘하나님의 영광’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자신이 곧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볼 수 없고,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인 존재로서 모든 피조물과 구분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찬란한 영광이십니다.
(예화) 자,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축구경기를 하는데 11명씩 편을 짜서 축구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하는 것이 그만그만 할 때에는 22명을 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워낙 탁월합니다. 그래서 볼을 탁 발에 탁 채이면 그러면 3명, 4명, 5명을 재치며 반드시 볼을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21명은 거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만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것이지, 만약 믿음과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올바르게 알고 그 분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깨닫게 된다면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비취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 자신의 효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자신을 ‘하나님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그런가 하면 때때로 성경은 하나님이 어느 한 장소에 당신이 거기에 계신 것처럼 효과를 드러내시는데, 무엇인가 인간에게 심오한 기적적인 음성과 빛을 발하여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장소가 하나님께 구별된 장소라는 사실을 인간에게 강력하게 계시해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모세가 가시나무 떨기 속에서 보았던 타지 않는 불꽃, 그것은 하나님이 어디든지 계시지만 그 장소에서 모세와 매우 특별한 관계를 맺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 예를 들겠습니다. 모세가 기도하기 위해서 시내산으로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움 속에서 떨었습니다. 그 때도 하나님이 하늘에서 출장 오셔서 거기에만 계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하늘 위에도 안 계신 곳은 없었지만, 어떠한 장소에서 당신이 계시는 중요한 증표를 발산하면서 보여주시는 때가 있는데, 이것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한가 하면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우리 인간들이 그 하나님의 올바르게 알고 잘 섬김으로써 그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사랑하고 삶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세 번째를 의미합니다. 즉, 사람들이 하나님을 직접 보고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경배의 삶, 그리고 주님께 온전한 순종의 삶, 도덕적으로 온전한 삶을 보면서 저 사람이 하나님과 저런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이 ‘아,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 아니겠습니까? 다들 이렇게 쳐다 보고 있다가 어떤 사람들이 저 허공을 일시에 주목하면서 손가락을 가리키면 우리도 그곳을 보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것이 아무 것도 없는 속임수였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영광’은 피조물과 맺는 관계를 통해서 들어납니다. 그리고 구속과 신적인 성품의 영광스럽게 드러냄으로써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당신과 관계를 맺으며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주적으로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이 모든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시는데, 이 자연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은 당신 자신이 홀로 이 모든 피조물을 다 사용하여 그들이 의식하지 못한 채 드러나게 하시지만, 인간에게 끼치는 이 영광의 효과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써, 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함으로써 그리고 그 삶을 행복하게 여김으로써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크고 작은 사건들은 이렇게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허락하시는 사건들입니다. 우리는 항상 건강하고 맑고, 행복하고, 기쁘고, 신나는 일들만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항상 그러한 일들을 통해서만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이 시인은 전쟁의 상황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평화로울 때는 오히려 그렇게 못 하였는데 전쟁의 상황 속에 놓이고 시련을 만나게 되자 그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확정하였고 그러자 그는 하나님의 자비와 진실하심을 묵상하게 되었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송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에게 항상 우리가 원하는 좋은 것들을 통해서만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나쁘고 불행한 일들도 오히려 그 나쁜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통로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시련과 고통이나 어려움이 이렇게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일어난 좋은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시지만, 또한 나쁜 것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주시는데 왜 인간은 종종 주님이 주신 좋은 것 때문에 나쁜 것을 겪게 되고, 주님이 주신 나쁜 것을 통해 결국 궁극적으로 그것도 나쁜 것이 되고 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태의 좋고 나쁨이 그것이 직선적으로 이어져서 같은 이유를 만들어 낸다면 우리는 기복신앙을 갖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것은 저절로 좋은 것이 되고 나쁜 것은 저절로 나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 있는 신앙이 비밀입니다. 신앙이 있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다면 오늘 이 시인처럼 우리에게 일어난 나쁜 그 어떤 일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좋은 일로 바뀌고, 나쁘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일인데도 그것을 통해 이 믿음은 이것을 좋은 것으로 훌륭한 것으로 바꿔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 시인을 통해서 곤고한 날에 건지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시인에게 일어난 일은 나쁜 일이었고 시련이었으나 신앙으로 그 시련과 어려움에 반응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하심을 찬송하게 되었고 그리고는 마음의 모든 사사로운 욕심과 거짓된 허위를 벗어버리고 오직 우리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이 들리워져 온 땅과 만물위에 높아지기를 그리고 그 속에서 높임을 받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자신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가 시련과 고난으로 얼룩진 삶을 살아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곤고하고 괴로운 일을 많이 당하면서도 우리의 행복과 안락함 보다는 자신이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만을 높여 드리기 원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득 찼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는 그 일이 너무나 절실한 기도의 제목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당한 시련과 핍박이나 어려움쯤은 하찮게 생각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과 은혜의 비밀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사랑의 속성을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깊이 체험하면서 그의 생애를 묵상하는 가운데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은 내가 처하고 있는 시련과 전쟁에서의 고통보다는 그 많은 날 동안 내게 베풀어주셨던 하나님의 변함없는 인자와 신실하심에 대해 감격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단 한 번도 우리를 위해 거짓말하신 적이 없고, 우리를 속이신 적이 없고,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신 적이 없으신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우리에게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보더라도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인자하고 신실하게 대해주셔야 할 이유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신실하신 사랑으로 자비와 은혜로 우리를 대해 주셨고 그리고 사랑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시련을 당하고 있는 사랑하는 지체들, 은혜에서 잠시 미끄러져 있는 지체들에게 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시련과 고통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 세상에서 진행되지만, 그러나 그 모든 해결은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뛰어나신 우리 하나님 한분께 있음을 믿으시고 우리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